Texts and Writings/자전거 여행-김훈

그곳에 가면 퇴계의 마음빛이 있다 - 안동 하회마을(5)

그림자세상 2010. 12. 6. 01:30

옛집과 아파트

 

일상생활 속에서 공간의 의미를 성찰하는 논의는 늘 무성하다. 개항 이래 이 나라에 건설된 주택과 빌딩과 마을과 도시들은 모두 자연과 인간을 배반했고, 전통적 가치의 고귀함을 굴착기로 퍼다 버렸으며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의 편이 아닌 공간에 강제수용되어 있다는 탄식이 그 무성한 논의의 요점인 듯하다. 비바람 피할 아파트 한 칸을 겨우 마련하고 나서, 한평생의 월급을 쪼개서 은행 빚과 이자를 갚아야 하는 사람이 그런 말을 들으면 마음속에 찬바람이 분다. 마소처럼, 톱니처럼 일해서 겨우 살아가는 앙상한 생애가 이토록 밋밋하고 볼품없는 공간 속에서 흘러간다. 그리고 거기에 갇힌 사람의 마음도 결국 빛깔과 습기를 잃어버려서 얇고 납작해지는 것이리라.

 

아파트에는 지붕이 없다. 남의 방바닥이 나의 천장이고 나의 방바닥이 남의 천장이다. 아무리 고층이라고 하더라도 아파트는 기복을 포함한 입체가 아니다. 아파트는 평면의 누적일 뿐이다. 천장이고 방바닥이고 부엌 바닥이고 현관이고 간에 그저 동일한 평면을 연장한 민짜일 뿐이다. 얇고 납작하다. 그 민짜 평면은 공간에 대한 인간의 꿈이나 생활의 두께와 깊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한 생애의 수고를 다 바치지 않으면 이런 집에서조차 살 수 없다. 공간의 의미를 모두 박탈당한 이 밋밋한 평면 위에 누워서 안동 하회 마을이나 예안면 낮은 산 자락 아래의 오래된 살림집들을 생각하는 일은 즐겁고 또 서글프다.

 

추사는 대청마루 위에 '신안구가(新安舊家)'라는 편액을 걸었다. '늙음'이 스며들어 있는 집이 좋은 집이다. 집은 새것을 민망하게 여기고, 새로워서 번쩍거리는 것들을 부끄럽게 여긴다. 추사의 '구가' 속에는 그가 누렸던 삶의 두께와 깊이가 녹아들어 있다. 오래된 살림집은 깊은 공간을 갖는다. 우물과 아궁이는 깊고 어둡고 서늘하다. 불을 때지 않을 때 아궁이 앞에 앉으면 굴뚝과 고래가 공기를 빨아들여서 늘 서늘한 바람기가 있다.

 

물과 불은 삶의 영속성을 지탱해주는 두 원소이다. 이 두 원소는 가장 깊고 어두운 곳에서 태어난다. 두레박으로 길어올린 물은 그 물을 퍼올린 사람의 생애 속으로 흘러들어온다. 그가 깊은 곳에 줄을 내려서 거기에 거기에 고여 있는, 갓 태어난 원소를 지상으로 끌어올렸기 때문이다.

 

이 물은 아파트 싱크대 수도꼭지에서 쏟아지는 익명성의 물과는 수질이 다르다. 아궁이는 땅속과 하늘을 연결하는 바람의 통로이다. 그 통로의 입구이다. 불길은 고래를 따라서 흐르다가 연기가 되어 굴뚝으로 빠져나가 하늘로 오른다.

 

불길은 흩어져서 없어지고 방바닥에는 온도가 남는다. 그 온도 위에서 사람들은 자식을 낳고 기른다. 사람이 눕는 방바닥 밑으로 하늘과 땅이 소통하고, 그 통로를 따라 불길이 흐른다. 우물 속의 물과 아궁이 속의 불은 언제나 새롭게 빚어지는 원소들이다. 이 새로움은 우물과 아궁이라는 늙음의 형식 속에서 빚어진다. 새로움의 내용은 늙음의 형식 안에 편안하게 담긴다. 이것은 몽상이 아니다. 이것은 사람이 누워 있는 방바닥 밑 땅속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과학 현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