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s and Writings/My poems

지하철 정거장에서

그림자세상 2010. 10. 2. 21:54

지하철 정거장에서

 

            여 국 현

 

 

연착되는 마지막 지하철을 기다리다

정거장 저편 어두운 터널을 바라본다

검은 터널 속에서 엄습하는 침묵 

 

정지한 시간이 역류한다

 

강철 파이프들이 어둠 속으로

끝없이 이어진 지하 미로

검붉은 기름은 파이프 속에서 

거칠고 격한 소리를 내며 요동치고

파이프를 따라 계속 되는

어둠 속 미로를 더듬어 가면

기름때에 절어 흐릿한 전등불 아래

출구가 돌연 나타나곤 했다

흐릿한 출구는 이내

어둠 속으로 다시 이어지고

강철 파이프들은 인정사정 없이

그 어둠 속 미로로 핏빛 기름과

머뭇거리는 내 발걸음을 몰아갔다 

그 어둠에 몰리고 떠밀리며

멀디 먼 지상으로 난 환한 출구를 향해

나는 캄캄한 어둠과 침묵 속

미로를 걷고 또 걸었다

영혼이라도 태워버릴 듯 뜨겁던

내 젊은 혼의 버거운 불꽃은

이따끔씩 스스로 참을 수 없어

조용한 속울음 되어 터져나올 뿐

푸른 수의 속에 갖힌 채 

속으로 속으로만 활활 타고 있었다  

 

눈이 부시다

터널은 온통 환한 빛으로 가득해지고

침묵은 이제 감당할 수 없는 소음이 되어

빛과 함께 터널을 빠져나온다

이내 빛은 나를 삼키고 소음은 나를 몰아간다

빛과 소음에 하나 되어

강철 파이프 안의 그 핏빛 기름처럼

함께 밀리며 떠밀리며

어둠 속 미로를 걷고 또 걷던

푸른 수의 속 그 젊음처럼

빠른 속도로 어둠 속 땅 밑

미로를 빠져나온다

 

강철 파이프 길게 이어진 어둠 속 미로가

지하철 선로 위의 어둠과 빛 속으로 이어진다

그 어둠과 빛을 걸어

이 어둠과 빛 속으로 달려왔다 

 

세상 어디에도

끊어진 길은 없는 법이다

우리의 걸음 어디에도

단절의 시간은 없는 법이다

 

강철 파이프 가득하던 미로를 지나

선로를 따라 아득하게 이어진 길은

달빛 가득한 강으로 향한다

 

품 안 가득한 강의 달빛 만큼이나

짙은 터널 속 그림자 길게 드리운 채

그 길 위에 나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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