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s and Writings/My poems

말놀이 - 비상구

그림자세상 2010. 10. 3. 18:57

말놀이 1 - 비상구

 

            여 국 현

 

 

그러니까 그날의 주제가 낯설게 하기였다

그렇게 졸리운 오후 한 나절 남자가

그 출입구 위에 선명한 글자를 호명하는 우연을 불러온

그 하나의 이유

 

비상구

 

그때 비상벨이 울리고

그 소리에 맞춰 푸르고 하얀 불빛 반짝인다

그 누구든 언제든 막다른 길에 접하게 되었을 때

그리로 비켜나 푹 꺼져 숨을 수 있는 곳으로 난 문이 보인다 

그 문은 언제나 구할 수 있는 문은 아니다

그렇지만 지금 그 문이 열리지 않는다고 비 상식적인 원망은 하면 안 된다

그저 우리는 모두 자기만의 그 문이 있기를 요행처럼 바랄 뿐이다

그때 비상구라고 쓰인 그 글자 아래 닫힌 문을 열고

그가 들어온다

그 글자 옆 그림 속 그와 같은 모습으로

그러나 그는 상구가 아니다

그는 언제나 비상 상황으로 대기 중이며

그는 언제나 무엇인가 구한다

그는 어쩌면 항상 구하는 것은 아닌지 모른다

그는 어쩌면 날고싶어 하는지도 모른다

그는 어쩌면 자신의 상을 구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리고 또 그는 어쩌면 자신의 상대방을 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먼저 비범한 상처로부터 자신을 구해야 할 지 모른다

그 자신의 크고 깊은 상처

그 자신이 너무도 잘 알고 있거나 혹은 전혀 모르고 있는 그 상처

그러니까 그는 그 상처의 비상구를 찾을 수 있을까

그가 결코 날아가서는 피할 수 없는 문

그가 스스로 비상한 방법으로 구해야만 찾을 수 있는 문

그 자신은 상구가 아닌 그가 항상 상구처럼 구해야만 하는 그 문 

 

비상구

 

그날 문득 낯설게 하기라는 주제가 던져진 후

그 자리의 모두는 남자가 가리키는 대로

그 문 위의 비상구라는 글자를 보았고

그리하여 이 모든 말놀이가 나른한 오후의 위기에서 

그 시간을 구해주었다 

 

비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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