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s and Writings/My poems

가을 창가에서

그림자세상 2010. 9. 21. 15:58

가을 창가에서

 

             여 국 현 

 

 

죽을 줄 알았던

벤자민과 고무나무가 살아났다

 

한 달 전 

시들어가는 벤자민과 고무나무를 잘랐다

고무나무는 굵은 손톱만큼의 밑둥까지 

벤자민은 큰 가지만 남기고

전지가지로 뚝뚝 잘라냈다

손길 제대로 안 주는

주인 만난 탓이었다

 

집들이 선물로 온 고무나무는

손 안 가도 잘 자라는 얌전한 나무였지만

제 때 분갈이를 안 하고

자를 때 자르고 세울 때 세워주지 못해

제 멋대로 뻗은 큰 가지가 양 옆으로 누웠다

나뭇잎은 푸르고 탱탱했으나

감당할 공간도 사람도 없었다

 

밑둥과 줄기가 제법

올곧게 자라던 벤자민은

어느 순간 윗가지가

시들시들 말라가는가 싶더니

비틀리고 마른 잎들이

후두둑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침이면 화분 아래 떨어진 잎들과

가지와 잎에서 나온 우윳빛 진액들이

끈적하게 바닥에 달라붙고

듬성듬성 떨어지던 잎들이 늘어나더니

부쩍 가지들이 가늘어졌다

말라가는 벤자민과 고무나무를

화분 째 버려야하나 망설이기를 몇 번

결국 벤자민과 고무나무의 가지들을

한 달 전 뭉텅 잘라냈다

차마 화분 째 버리지는 못했지만

기어이 죽을 줄 알았다

 

6년이었다

게으르고 무정한 주인에게서

6년을 버티며 목숨을 이어온 나무들

어느 해 봄에는 제법 멋진 모습으로

어스름 새벽 불면의 밤을 보낸

내 마음을 위로하기도 했다  

날짜를 세가며 규칙적으로 물을 주기도 하고

친구인듯 말을 붙이며 마음을 쏟던 때도 있었다

 

어스름 내리던 저녁 창가에서

맞은 편 산 구름을 바라보다가

훤칠하게 큰 벤자민의 가지와 잎들을 어루만지며

나란히 선 친구 같아 흐뭇해하기도 했다

늦은 밤이나 새벽녘

유리창에 그림자 번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마음속 이야기를 넌지시 풀어놓기도 했다

 

어느 때 부터인가

언제 물을 주었는지도 기억하지 못하고

이따금 생각나듯 물을 주고

오랜 만에 만난 서먹한 친구 대하듯

한 마디씩 선심 쓰듯 던지는 것이 전부였다

 

잎은 제멋대로 자라다 떨어지고

떨어진 잎들이 다시

화분 위 제 살의 거름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나무들은

봄 여름에는 제 기운으로 살고

가을에는 말라 여위고

겨울에는 죽은 듯 생기 없다가도

다시 봄이 오고 여름이 오면

어느덧 파란 잎들을 살려냈다

 

그렇게 6년을 지낸 

벤자민과 고무나무를 한 달 전

밑둥과 큰 가지만 남기고 잘랐다

 

감당할 수 없게 크는 고무나무를

그냥 둘 수 없었고

마음속 미안함과 죄책감처럼

시들어 비틀어지고 떨어지는

벤자민의 마른 가지와 잎들을

볼 면목이 없었다

 

고무나무 큰 가지를 자르자

짙고 끈적한 우윳빛 액체가 뚝뚝 떨어졌다

벤자민은 꼿꼿한 자세로

잎과 잔가지를 내 전지가위에 맡겼다

단 몇 초 만에

6년의 시간이 뭉텅 잘려나갔다

 

한 달이 지났다 

엄지손가락 크기로 잘린

고무나무 밑둥에서 곁가지가 솟고

짙푸른 잎이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을 향해 반짝이며 자라났다

벤자민은 쭉 뻗은 몸통에서

다시 잔가지들을 키워내고

잎은 생기를 띠며

더 짙은 녹색의 잎을 키워냈다

 

잊을 수 없는 이별의 연인 생각하듯

때 늦은 후회로 남은 가지에 물을 주고

오고가며 마음을 쏟았다

미안한 마음에 더 눈길이 가고

오가며 고무나무 잎을 닦아주네 물을 주네

전에 없던 요란도 피웠다 

 

그래서인 줄 알았다

한 번 씩 더 손길이 갈 때마다

벤자민과 고무나무의 잎과 가지들은

더 짙고 푸르러가더니

어느새

밑둥 하나로 애처롭던 고무나무는

양쪽으로 싱싱한 잎 넉넉하게 틔우는

가지들이 솟아오르고

벤자민은 잘린 큰 가지 곁으로

잔가지들이 옆으로 위로 솟으며

싱싱한 잎들을 피워 올린다 

 

내 힘인 줄 알았다

고무나무와 벤자민 살려낸 것이

마음 주고 물주고 한

내 힘인 줄 알았다 

 

아니었다

벤자민과 고무나무는

처음부터 죽지 않았고

죽지 않았으니 살린 것도 아니었다

 

그 나무들은

내가 죽이고

내가 살린 것이 아니라

그들의 힘으로 살아

그들의 힘으로 잎 틔우고

그들의 힘으로 가지 올리고 있었다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과 바람과

내음으로만 맡았을 여름의 빗줄기와

제 몸의 마지막 뿌리까지 남아 있던

생명의 힘이

꺾이고 잘린 그들을

살리고 키우고 있었던 것이다

 

햇살과 바람 비껴드는

가을 창가에

벤자민과 고무나무를

살리고 키워낸

생명의 힘이 가득하다 

 

그 햇살

그 바람 곁에서

가만히 눈을 감고

나는  

벤자민이 된다

고무나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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