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의 개념은 너무나 아름답고도 슬펐다. 지구상에서 생명체가 처음 생겨나 이후 약 50억에서 500억의 종이 있었는데 그중 500만에서 5000만 정도만이 현존한다. 지구상에 살았던 종의 99퍼센트가 멸종한 셈이다. (75)
누군가가 나뭇가지 두 개를 문질러서 처음으로 불을 피웠던 순간이 있듯이, 처음 기쁨을 느낀 순간과 처음 슬픔을 느낀 순간도 있었다. 얼마 동안 새로운 감정이 계속 만들어졌다. 욕망과 후회는 일찍 태어났다. 고집스러움을 처음 느꼈을 때 그것은 연쇄반응을 일으켜서 한편으로는 분노를, 또 한편으로는 소외와 고독을 만들어냈다. 환희의 탄생은 엉덩이를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리는 움직임으로 시작되었다. 번갯불은 처음으로 경외의 감정을 만들었다. 아니면 알마라는 소녀의 몸일지도 모른다. 논리적이지는 않지만, 놀라움의 감정은 즉각적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있는 그대로의 사물에 익숙해진 후에 생겨났다. 시간이 충분히 지나고 누군가가 처음으로 놀라움의 감정을 느꼈을 때 어딘가에서 또 다른 누군가는 처음으로 향수의 고통을 느꼈다.
때로 사람들은 어떤 기분을 느끼지만 그것을 나타내는 단어가 없기 때문에 말하지 않고 그냥 지나친다. 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감정은 감동받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을 묘사하고 이름 을 붙여주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잡으려는 시도나 마찬가지였으리라. (다시 한 번,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감정은 혼란일 수도 있다.)
느끼기 시작한 후 사람들의 욕망은 커져갔다. 그들은 더 많이, 더 깊이 느끼고 싶어했다. 때로 상처가 되더라도 상관없었다. 사람들은 감정에 중독되기 시작했다. 그들은 새로운 감정을 들춰내려고 애썼다. 여기에서 예술이 태어났을 수도 있겠다. 새로운 종류의 즐거움이 만들어지고 또 새로운 종류의 슬픔도 만들어졌다. 있는 그대로의 삶에 대한 영원한 실망과 예기치 않았던 유예의 안도감, 그리고 죽음의 공포.
지금까지도 모든 감정들이 존재한다고는 할 수 없다. 아직도 우리의 능력과 상상력을 넘어서는 감정들이 있다. 아직 아무도 작곡하지 않은 음악이나 아무도 그리지 않은 그림, 또는 예상하거나 측량하거나 묘사하기도 불가능한 무언가가 일어나고, 전혀 새로운 감정이 이 세계에 들어올 때도 있다. 그리고 그때 감정의 역사에서 수백만 번째로, 그의 가슴이 요동쳤고, 그 충격을 온전히 받아들였다. (151~152).
한때 한 가닥 줄을 이용해서 단어들을 인도하던 때도 있었다. 그러지 않으면 그 단어들은 목적지를 향해 가다 말고 비틀거릴 것이다. 수줍어하는 사람들은 주머니에 작은 줄 뭉치를 넣고 다녔다. 큰 소리로 지껄여대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그런 줄이 필요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남들이 자기 말을 귓결에 듣는 데 익숙한 사람들도 타인에게 어떻게 자기를 이해시켜야 할지 모를 때가 있기 때문이다. 줄을 이용하는 두 사람 간의 물리적인 거리는 얼마되지 않았다. 거리가 좁을수록 줄이 더욱 필요하기도 했다.
줄의 끄트머리에 컵을 붙이는 관행은 훨씬 뒤에 통용되었다. 이것은 귀에 조가비를 갖대 대고 이 세상의 최초의 표현 가운데 아직도 남아 있는 메아리를 들어보겠다는 누를 수 없는 욕망과 관련이 있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또 말한다. 미국으로 떠난 한 소녀가 대양을 가로질러 풀어놓은 줄의 끄트머리를 움켜 쥔 한 남자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이 세계가 커지고, 말하고 싶어하는 것들을 사라지지 않게 해 줄 정도의 줄이 부족해지자 전화가 발명되었다. 어떤 줄로도 말해야 할 것을 하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런 경우에 어떤 모양의 줄이라도 한 사람을 침묵하게 만든다. (156~157).
사람들이 침묵의 죄를 저질렀다고 비난한 후에야 바벨은 침묵의 종류가 얼마나 다양한지 깨달았다. 음악을 들을 때 그는 더 이상 음표를 듣지 않고 그 사이의 침묵을 들었다. 책을 읽을 때 오로지 쉼표와 세미콜론, 마침표와 뒷문장의 대문자 사이의 여백에 집중했다. 방 안에서 침묵이 모이는 곳도 발견했다. 커튼 주름이 접힌 곳, 움풀 파인 은식기. 사람들이 그에게 말할 때 그는 그들이 말하는 것보다 말하지 않는 것을 들었다. 어떤 침묵의 경우는 그 의미를 해독하게 되었다. 단서는 없고 직관만 있는 어려운 사건을 해결하는 것과 비슷했다. 따라서 그가 자신의 선택된 직업에서 다작을 하지 않았다고 아무도 비난할 수 없었다. 그는 매일 침묵의 완전한 서사시를 만들어냈다. 처음에는 어려웠다. 당신의 아이가 하느님이 존재하느냐고 묻거나 사랑하는 여인이 당신에게 자기를 사랑하느냐고 물을 때 침묵을 지키기란 어려웠다. 처음에 바벨은 '예'와 '아니오'라는 두 단어만 사용하고 싶었다. 하지만 한 단어만 말하더라도 침묵에 담긴 그 미묘한 유창함을 잃어버리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들이 그를 체포하고 빈 여백뿐인 그의 원고를 모조리 불태운 후에도 그는 말하기를 거부했다. 그들이 머리를 한 대 치거나 군홧발로 사타구니를 걷어차도 신음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마침내 총살대가 눈앞에 다가오자 작가 바벨은 자신이 실수했을 가능성을 감지했다. 총들이 그의 가슴을 겨냥할 때 침묵의 풍요로움이 실은 말하지 않은 빈곤함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의 침묵이 무한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총에서 총탄이 터져 나올 때 그의 몸은 온통 진실로 가득했다. 그리고 그의 일부는 통렬히 웃었다. 늘 알고 있었는데 어떻게 잊을 수 있단 말인가! 그 어떤 것도 하느님의 침묵에는 대적할 수 없다는 것을. (161~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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