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s and Writings/on everything

[타이타닉]과 낙원극장의 황당한 기억(1)

그림자세상 2010. 8. 8. 23:34

은지와 [인셉션]을 보고 왔다. 영화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인셉션]은 은지에게 쉽지 않은 영화였다. 마지막 장면에 끝없이 돌아갈 것 같기도 하고, 곧 쓰러질 것 같기도 한 추가 잠깐 비틀거린다 싶을 때 암전과 엔딩을 가져온 놀란 감독의 의도는 다분히 계산된 것이고, 여러 이야기들이 각각 가능하겠으나, 어쨌든 지금은 영화 내용을 얘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은지와 그 영화를 보면서--물론 영화를 고른 것은 은지였다. 첫 선택은 [스텝 업]이었지만 유감스럽게도 시간이 맞지 않았고, 은지는 이 영화를 선택했다--문득 오래 전 아주 곤란한 상황에서 영화를 보던 한 순간이 떠올랐다.

 

[타이타닉]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던 해였다. 책과는 달리 어떤 영화건 그렇게 화제가 되는 영화들은 이상하게 더 늦게 보는 묘한 습관 혹은 징크스같은 게 있다. 그때도 그랬다. 개봉하기 전부터 화제의 중심에 있던 [타이타닉]은 개봉 하자마자 놀라운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사람들의 발길을 극장으로 끌고 갔다. 당시 박사과정을 마치고 강의와 연구소 일과 단체 일로 정신이 없었던 때였지만 상근을 하던 연구소가 낙원상가 바로 옆에 있었던 터라 종로와 충무로 방향으로 자주 움직였던 나는 짬짬이 비는 시간을 이용하여 관심있는 개봉 영화들을 제법 잘 따라가며 보곤 했다. 종로나 충무로 보다는 혜화동에 생긴 예술영화 상영관쪽이 훨씬 자주 들락거리던 곳이긴 했지만 어쨌건 당시 대학원 세미나 팀 주위의 담론의 중심 또한 영화쪽이어서 자연스레 이런저런 영화들을 보게 되었다. 그런 중에 화제를 몰고 개봉한 [타이타닉]이었지만 워낙 화제의 중심에 있다 보니 그닥 급히 볼 것은 아니라 생각했던지 미루고 있었을 것이다.

 

선배 형이 한 명 있었다. 석사과정에 입학하면서 만나게 된 어학 전공의 선배였다. 첫 인상부터 내 과는 아니었다. 늘 머릿기름 같은 무스를 바르고, 이야기와 태도에는 바람이 많이 들어가 있었던, 들리는 평판도 썩 좋지는 않았던 형은 처음 볼 때는 내가 썩 가까이 할 스타일은 아니었다. 석사과정 때야 그저 스치면서 지나는 것이 전부였지만, 박사과정에서 강의를 하기 시작하면서 굥고롭게도 강의 시간이 언제나 같았다, 금요일 오전, 오후. 자연히 자주 만나게 되고 점심을 늘 같이 하는 횟수가 늘었다. 늘 같은 집에 가서 밥을 같이 먹게 되었다. 주인 아주머니께서는 아들보다 더 스스럼 없이 형을 대했다. 몇 학기를 그렇게 금요일 오전, 오후 같은 강의 시간에, 점심을 같이 먹으면서 이야기를 듣고 하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선배 형이 변한 것도 있겠지만, 나나 다른 사람들의 형에 대한 다소간의 편견이 얼마나 크고 잘못되었는가 하는 점도 알게 되었다. 어떤 점은 여전히 동의할 수 없었고 어떤 점은 여전히 익숙하지 않았으나 나는 그 형에 대해 갖고 있던 선입견을 버리게 되었다. 그렇게 형과는 몇 학기, 같은 강의 시간에 점심을 같이 먹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던 어떤 학기 강의 시간이 바뀌어 점심을 같이 먹을 수 없게 되고, 학교에서도 자주 부딪힐 수 없게 되었다. 나도 한창 바쁠 무렵이라 일 때문이 아니면 일부러 시간을 내서 누군가를 만날 시간을 내기란 쉽지 않은 때였고 형 또한 그랬을 시간이었다. 그저 학교에서 스쳐 지나다 "점심 같이 해야 되는데..." 그러고 서로 말만하고 지나기 일쑤였다. 그러던 어느날, 쉬는 시간에 휴게실에서 만난 형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내가 영화며 콘서트를 자주다닌다고--짬을 내어 다니기는 했지만 사실 형이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많이 다닌 것은 아니었고 그럴 시간도 많지 않았다--생각했던 형은 언제 비는 시간에 가는 길 있으면 같이 가자고 했다. 나는 뭐 그럴 시간이 될까 싶었지만 건성으로 그러자고 하고는 헤어졌다. 그게 [타이타닉]이 개봉하기 전이었다.

 

[타이타닉]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다가 조금 수그러들기 시작하던 어느 오후, 점심을 먹고 오다가 캠퍼스에서 그 형을 만났다. 형도 점심을 먹고오다가 나를 봤다.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쓸 데 없는 잡담을 나누다 어찌어찌 내가 야간 강의까지 시간이 비었고 형도 그렇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러자 문득 형이 물었다. "야, 너 [타이타닉] 봤냐?" "아니, 아직." "야, 그럼 우리 그거나 보러 갈래?" 순간 망설였다. 이 시츄에이션이 그려지는 시츄에이션인가. 아니 아무리 그래도 와이프하고도 못 본 [타이타닉]을 남자와 보러 가게 되다니. 그러나 그전에 뱉은 말이 있는 터라, 잠깐의 생각 끝에 "뭐, 그럴까요?" 해버렸다. 비극은 거기서 싹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