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시위를 떠난 화살은 되돌릴 수 없는 법. 한번 어긋난 발걸음은 계속 꼬이는 법. 일단 그러자고, 말을 내뱉은 그 순간, 머릿속에서는 괜한 짓을 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뭐 그 형이 싫어서가 아니었다. 그냥 커피나 마시며 야간 강의 준비나 할 걸 하는 후회가 밀려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결정된 일. 일단 길을 나서는데, 그때부터 자꾸 꼬이기 시작했다. 관성과 습관의 무서움이 작용한 것도 있었을 터. 그냥 가까운 숙대 앞에도 극장이 있었는데, 왜 그때 영화는 종로에 나가야 한다는 생각만 했던지 버스를 타고는 나오면서 전화를 했다. 낮 시간인데도 모두 매진, 자리가 없었다. 단성사도 피카디리도, 서울극장도....결국 내 머릿속에 연구소 앞 낙원극장이 떠올랐다.
사실 연구소 바로 앞에 있는 극장이었지만 한번도 가 본 적은 없는 극장이었다. 전화를 했더니 좌석이 있단다. 결국 그리 가기로 했다. 좌석이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허름한 낙원시장 건물 윗층을 올라 갔더니 매표소에 표사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아니 전혀 없었다. 이럴 수가. 같은 프로를 상영하는 데 어떤 극장들은 매진이라는데 이 극장엔 어찌 관객이 한명도 없을까. 표를 사면서도 찜찜한 마음이 들었다. 표를 사서 들어간 극장 안은 정말 텅 비었다. 영화 시작이 조금 남았다고는 하지만 심했다. 하여간 좌석은 정해져있었지만 텅 빈 극장이라 중앙에서 조금 왼쪽 좌석을 잡고 앉았다. 어쨌건 영화는 편하게 보겠거니 했다.
그런데, 그런데....영화 시작 한 5분이나 남았을까, 갑자기 입구쪽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우르르 몰려드는 사람들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왁지지껄한 소란의 주인공들은 일단의 아주머니들이었다. 계모임이 있었나보다. 아파트 부녀회에서 왔는지도 몰랐다. 아주머니들이라고 했지만 정확히는 40대후반의 아주머니부터 70대 어르신들까지 다양한 분들이 한꺼번에 들어왔다. 다 빈 자리였으니 어디에나 앉아도 무방했던터라 애초에 자리문제야 없었겠지만 좌석을 확인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됐다, 아무데나 앉으면 되지, 사람도 없는데!" 하는 외침까지 하여간 한동안 시끌벅적하더니 모두 중앙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러다보니 선배와 나 둘의 오른편으로 서너 줄 뒤로 모두 앉게 되었다. 자리를 다 잡고난 그 분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먼저 자리를 잡고 앉았던 우리를 향했다. 상상해 보시길. 텅 비었던 극장에 남자 둘이 앉아 있었는데 그 뒤로 한 열댓 명쯤 되는 중년과 노년의 여성들이 함께 들어와 앉아 두 사람을 바라보는 모습을.
나와 선배, 두 사람의 모습도 대조적이었다. 선배 형은 언제나 처럼 무스로 두껍게 뒤로 넘긴 반짝이는 머리에 약간 짙은 곤색 줄무늬 정장에 하얀 셔츠에 원색의 넥타이, 반짝거리게 닦은 구두, 게다가 정장 앞 섶에 스카프까지! 반면 나는 늘 그렇듯이 지금도 가끔 입고 다니는 회색 반팔 셔츠에 면바지 차림에 잘 닦지도 않은 구두. 평일 대낮에 사내 둘이, 그것도 사람 없는 극장에 그러고 앉아서 [타이타닉]을 보겠다고 있었으니 뭔가 그림이 좀 이상했나보다.
조용하던 뒤에서 작은 쑥덕거림이 있었다. "남자 분 두 분이 오셨네." "뭐 하시는 분들이길래 이런 시간에 극장엘 다 올 수 있고..."부터 시작해서 하여간 들리는 소리 안 들리는 소리 대부분이 선배 형과 나를 두고 하는 소리였다. 참, 차라리 크게 들리게라도 하면 어찌 대꾸라도 할텐데, 이게 꼭 들리는 소리와 안 들리는 소리, 중간의 경계여서 안 들으려 하면 더 크게 들리고, 들으려 하면 또렷하지 않은 참 묘한 소리였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뒷 자리에 앉은 아주머니들은 선배와 나를 그냥 남자 둘이 아니라 다른 시선으로 보는 것 말이다. "요즘은 많다잖아요, 남자들끼리 저러고 다니는 거." 그래, 그곳은 낙원극장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쩌랴. 그냥 그러려니 하고 있었는데, 영화 시작이 조금 지연되면서 계속 그렇게 들릴 듯 안 들릴 듯 하는 소리에 신경이 안 쓰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뭐 그렇다고 일어나서, "저 우리, 그런 거 아니거든요!" 이렇게 말하는 것도 참 이상한 상황이고, 그냥 가만 있자니 신경은 쓰이고 뭐 그러면서 뒤통수에 쏟아지는 아주머니들의 따가운 시선을 고스란히 받으며 영화시작과 함께 극장 불이 꺼지기 만을 기다리는 대략 그런 난감한 상황이 되었다.
드디어 영화관의 불이 꺼지고 영화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그분들은 영화를 보러온 것인지 이야기를 하러온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장면 장면마다 쉬지 않고 탄성에 이야기에 추임새까지 넣어가며 쉴 새 없이 영화를 중계했다. 특히 그 가운데 한 분은 이미 영화를 본 모양이었다. 아예 장면이 나오면 바로 다음 장면을 중계까지 하고 있었다. 음, 영화를 보는 것인지 변사의 이야기를 듣는 것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였다. 그러는 와중에도 이따끔씩 선배 형과 내쪽으로 따갑게 내려꽂히는 시선을 느낀 것은 어쩌면 내 환상인지도 모를 일이나 뒷통수가 참 뜨겁긴 했다. 그 긴 영화를 보는 내내 우리는 그 아주머니의 중계를 들어야했고, 그에 맞춘 다른 아주머니들의 추임새와 탄식을 함께 듣는 것은 물론 이따끔씩 우리를 향해 날리는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뜨거운 시선도 고스란히 견뎌야 했다.
그렇다고 영 영화를 못 본 것은 물론 아니었다. 신경이 안 쓰이는 것은 아니었지만 애써 영화에 집중하면서 볼 건 보았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왜 이곳이 생각났을까, 왜 연구소는 이 앞이었을까, 하필 오늘 선배 형을 만났을까, 왜 가자할 때 다른 핑계를 대지 못했을까, 가까운 데를 놔두고 왜 이리 먼 데까지 왔을까? 돌이켜 하나하나 떠오르는 후회는 막을 길이 없었다. 그래서였던가, 영화관이 냉방이 되긴 했지만 시원하기보다는 후덥지근한 느낌이 더했다. 어쨌건 무사히(^^*~) 영화는 끝났다. 불이 켜지고, 일어나 나오려고 뒤돌아서는데, 흠! 아니 열댓 명의 아주머니들의 시선이 우리를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헐....!! 그때의 그 느낌이란! 애써 외면하며 태연하게 이야기를 하면서 극장을 빠져나와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그런데 엘리베티어 앞에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한 팀 서 있었다. 같은 건물에 콜라텍이 있었는데 거기서 나오는 분들인 모양이었다. 영화관에서 나오는 일단의 아주머니들과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선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포위된 형국이 된 선배와 나는 옆 계단으로 걸어 내려왔다. 그런데 그때 '츳츳'하며 혀차는 소리가 뒤에서 아주 합창처럼 들렸다!
선배 형과 나는 빈 공강시간을 이용해 영화를 보러 왔다가 접한 예기치 못한 황당한 상황에 씁쓸해하며 84번 버스를 타고 학교로 돌아와 저녁을 먹고 야간강의를 했다. 강의 시간에 그 이야기를 하며 덕분에 학생들과 한바탕 웃기는 했다. 그후 [타이타닉]을 몇 번은 더 보았다. DVD로도 나중에는 텔레비젼으로도. 볼 때마다 나는 그날 낙원극장과 그 아주머니들이 떠오른다. 선배 형도 그 경험이 씁쓸했던지 그후 빈 시간에 만났을 때도 다시는 영화보러 가자는 소리를 꺼내지 않았다. 아직까지도 나는 [타이타닉] 생각만 하면 그날 낙원극장에서의 그 황당해던 시간과 지금은 모교의 선생이 되어 있는 선배 형이 떠오른다. 내일은 그 선배에게 전화나 한번 돌려야겠다. "형, 영화보러 갈래요? 낙원극장에? ㅋㅋㅋ."
흠....^^;;
'Texts and Writings > on everything'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니콜 크라우스 - [사랑의 역사](2) (0) | 2010.08.22 |
---|---|
니콜 크라우스 - [사랑의 역사](1) (0) | 2010.08.16 |
[타이타닉]과 낙원극장의 황당한 기억(1) (0) | 2010.08.08 |
더글라스 케네디, [빅 픽쳐] 중에서 (0) | 2010.07.28 |
두 번은 없다 (0) | 2010.07.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