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s and Writings/자전거 여행-김훈

그곳에 가면 퇴계의 마음빛이 있다 - 안동 하회마을(2)

그림자세상 2010. 8. 13. 02:04

나라에 세금을 낼 때는 언제나 평민들보다 먼저 냈으며, 진실로 예와 의가 아니면 남으로부터 조그마한 물건도 받지 않았으며, 예로써 받은 물건이라 할지라도 이웃이나 친척이나 또는 배우러 오는 제자들에게 모두 나누어주고 한 점도 집에 쌓아두지 않았다. 제자들을 '너'라고 부르지 않았으며, 제자가 자리에 앉으면 반드시 그 부모의 안부를 물었다. 아무리 춥고 어두운 밤이라도 방안에서 요강을 쓰지 않고 반드시 밖에 나가서 소변을 보았다. 제사 때는 상을 거둔 후에도 오랫동안 신위를 향해 정좌해 있었고, 제삿날에는 술이나 고기를 들지 않았다.

 

퇴계는 70세에 이르러 병이 깊어지자 머무르던 제자들을 돌려보냈다. 아들을 불러 장례를 검소히 치를 것과 장례에 대한 국가의 배려와 의전을 사양하라고 엄히 당부하였다. 남에게서 빌려온 책들을 모두 돌려보냈고 가족에세 명하여 염습에 필요한 물건을 미리 준비케 하였다.

 

그가 세상을 떠나던 날 저녁에 눈이 내렸다. 제자들을 시켜 당신이 아끼던 매화나무에 물을 주게 하고 임종의 자리를 지킨 다음 몸을 일으켜달라고 제자들에게 명하여 한평생을 지켜온 정좌의 자세로 앉아서 세상을 떠났다(퇴계의 삶의 구체적 모습은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여려 제자들이 함께 편찬한 언행록과 연보에서 옮겨온 것이다).

 

낙동강 상류의 물가에 배움의 공간을 건설하려는 퇴계의 노력은 40대 이후 계속되었다. 퇴계는 46세 때 이 물가에 양진암이라는 작은 암자를 지었고, 50세 때 한서암을 지었으며, 60세에 도산서당을 지었다. 그는 흐르는 물가에 배움의 터를 마련하고 나서 시를 한 수 지었다.

 

시냇가에 비로소 살 곳을 마련하니

흐르는 물가에서 날로 새럽게 반성함이 있으리.

 

이 물가의 배움터에서 그는 무려 40여 차례나 사직서를 써서 한양의 임긍에게 보내야 했다. 그의 연보는 한 해에도 몇 번씩 거듭되는 임명과 불취로 점철되어 있다. 그는 70세로 세상을 떠나던 마지막 해까지도 벼슬을 거두어주기를 요구하는 사직서를 임금에게 보냈다. 그의 사직은 거의 필사적이라는 느낌을 준다. 임금의 명을 거듭 물리치기 민망하여 서울로 올라가는 길목의 주막에서조차 그는 사직서를 써서 인편에 보냈다.

 

사직서만이 이미 인의를 저버린 정치 현실의 공세로부터 자신의 초야를 방어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그의 뜻은 자연에 있었으나 그는 자연의 맹목적인 아름다움에 함몰하지는 않았다, 그가 생각했던 아름다움은 인격의 내면성에 바탕을 둔 것이고, 자연은 탐닉이나 열광, 음풍놀월의 대상이기보다는 인간을 고양시키고 정화시키는 인격적 기능으로써 아름다운 것이고 인간의 편이었다.

 

도산서당의 그 염결하고도 단순한 구도는 퇴계의 삶의 모습과 삶의 태도를 집약하고 있고, 모든 아름다움을 인간과의 관계 위에서만 긍정한 그의 미의식을 공간적으로 표현한 구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공간 구조는 맞배지붕에 홑처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