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s and Writings/자전거 여행-김훈

그곳에 가면 퇴계의 마음빛이 있다 - 안동 하회 마을

그림자세상 2010. 8. 8. 01:55

두레박으로 길어올린 물은

그 물을 퍼올린 사람의 생애 속으로 흘러 들어온다.

 

 

퇴계 이황(1501~1570)의 존영과 도산서원은 지금 천 원짜리 지폐에 인쇄되어 퇴계의 삶이나 체취와는 사소한 관련도 없어보이는 세상 속을 유통하고 있다. 경북 안동 지녁을 여행하는 일은 퇴계의 삶의 진실에 가까이 다가가서 그 편린이나마 더듬어내는 일이라야 옳을 터이다. 그 오래되고 자존에 가득 찬 유림의 고장은 두텁고도 다양한 문화의 층위를 축적해왔는데, 거기에는 자연과 인간,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 유(儒)와 무(巫), 강과 산, 학문과 생업이 아르답게 조화를 이루어낸 하회 마을과 또 안동 김, 안동 권, 진성 이, 의성 김, 풍산 유, 예천 권, 풍양 조 그리고 그 밖의 여러 유림 영남학파 명문의 오랜 세거지들이 위엄과 지존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퇴계는 그 절정이다.

 

도산서당의 심층구조를 들여다보는 즐거움

 

해마다 40~50만 명이 하회 마을에 몰리고 있거, 하회를 한바퀴 돌아본 이들의 발길은 어김없이 인근 도산서원과 병산서원으로 이어진다. 퇴계와 도산서원은 그 관광객들에게 도대체 어떤 내용의 충격을 주고 있는 것일까.

 

도산서원의 핵심부는 퇴계 재세시에 건립된 도산서당과 그 옆의 농운정사이다. 경내의 다른 건물들은 티계 몰후에 그의 덕을 흠모하는 후학들이 건립했다. 도산서당은 퇴계 자신의 공부와 강학의 공간이었고, 농운정사는 그 가르침을 받드는 후학들의 기숙사였다.

 

도산서당의 건축 구조적 특징은 그 염결한 단순성에 있다. 그 단순성의 심층구조를 들여다보는 일은 안동 여행의 가장 큰 기쁨이며 공부일 것이다.

 

도산서당은 맞배지붕에 홑처마 집이다. 그것이 그 건물의 전부이다. 그 서당은 한옥이 건출물로서 성립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들만을 가지런히 챙겨서 가장 단순하고도 겸허한 구도를 이룬다. 그 맞배지붕과 홑처마는, 삶의 장식적 요소들이 삶의 표면으로 떠오르는 부화를 용납치 않는 자의 넉넉함으로써 온화하다. 그 서당 안에서 퇴계의 공부방은 2평을 넘지 않는다. 인간이 지상에 세우는 물리적 구조물은, 그 안에서 삶을 영위하는 자의 절박한 내적 필연성의 산물이라야 한다는 것을 도산서당의 구조는 말해주고 있다.

 

아마도 도산서당의 구도의 단순성은 퇴계 자신의 마음 빛깔과 그것을 실천하는 삶의 태도를 물리적 공간에 응축해놓은 구도라고 말해도 무방할 터이다. 절제의 극에 닿은 그 구도 안에서 억압되어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그 작은 공부방과 마루는 서원의 언덕 아래로 커다랗게 굽이치는 낙동강과 그 언저리 인간의 마을을 향해 열려 있다.

 

도산서당의 위치는 인간세와 차단된 격절의 공간도 아니고 인간세에 매몰된 오탁의 공간도 아니다. 그 자리는 인간의 세상과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한 굽이를 돌아서 있는 위치이며, 인간의 세상과 아름다운 거리로 떨어져 있으면서도 인간의 세상과 쉴새없이 통로를 개설하는 위치이다.

 

도산서원의 입구 매표서에서부터 강을 끼고 걸어 올라가서 도산서당에 닿는 길은 책 읽기와 세상 읽기, 혼자 살기와 더불어 살기, 세상 속에서 살기와 세상 밖에서 살기의 관계, 그리고 세계와 자아의 관계를 인간의 물리적 공간 속에서 어떻게 설정하고 자리매김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도산서당은 폐쇄된 자앙의 밀실이 아니다. 그 서당의 물리적 위치는 인간의 세계와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거기에 함몰하지 않는 위치이다. 그렇게 해서 책과 세상은, 서로 적당히 떨어져 있음으로해서 역동적인 메시지를 상호 교환할 수 있었다. 도산서당의 심층 구조는 그 건물의 물리적 얼개에 있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는 퇴계의 마음 빛깔에 있을 것이다. 

 

퇴계는 자리에 앉을 때 벽에 기대는 일 없이 하루 종일 단정히 앉았고, 날마다 [소학]의 글대로 살았다. 짚신에 대나무 지팡이를 짚었으며, 세숫대야로는 도기를 썼고, 앉을 때는 부들자리 위에 앉았다. 음식을 먹을 때는 수저 부딪는 소리를 내지 않았으며, 반찬은 끼니마다 세 가지를 넘지 않았고 다만 가지와 무와 미역만으로 찬을 삼을 때도 있었다. 손님을 모실 때가 아니면 특별한 반찬을 놓지 않았고, 비록 어린이나 아랫사람에게 식사를 내릴 때도 반찬을 차별하지 않았다. 좋은 물건을 얻으면 반드시 종가로 보내 제상에 올리게 했다. 언제나 날이 밝기 전에 일어나 갓을 쓰고 서재로 나가 정좌하였고, 제자들과 마주앉아 이야기할 때는 마치 귀한 손님을 대하듯 했다. 그 가르침은 자상하고 다정하였으나 제자들은 감히 스승의 얼굴을 쳐다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