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s and Writings/works

제임스 설터 - [어젯밤](1)

그림자세상 2010. 8. 12. 01:34

월터 서치는 번역가였다. 그는 초록색 만년필로 글 쓰는 것을 좋아했는데, 한 문장이 끝날 때마다 펜 끝을 공기 중으로 들어올리는 버릇이 있었다. 손이 거의 자동장치처럼 움직였다. 그는 러시아로로 블로크를 암송했고, 릴케가 한 독일어 번역본까지 외웠다. 어디가 아름다운지 코멘트까지 할 수 있었다. 그는 사교적인 사람이었지만 때론 까탈스러웠다. 운을 뗄 때는 말을 더듬었고, 아내와 둘이서 그들 방식대로 사는 편이었다. 그런데 아네 마리트가 병에 걸렸다.

 

월터는 수잔나와 함께 있었다. 수잔나는 두 부부가 알고 지내는 친구였다. 나중에 미리트가 계단을 걸어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고, 거실로 들어왔다. 마리트는 빨간 실크 드레스를 입었다. 윤기 나는 짙은 갈색 머리칼에, 처진 젖가슴이 드러나는 그 드레스를 입으면 언제나 섹시했다. 옷장 안 흰 바구니에는 개어놓은 옷과 속옷, 운동복과 잠옷이 있었고 그 밑엔 구두 몇 컬레가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었다. 다시는 소용이 없을 물건들이었다. 또 칠기 함 안엔 팔찌, 목걸이, 반지 같은 장신구들이 들어 있었다. 그녀는 상자 안을 한참 뒤지더니 그중 몇 개를 골랐다. 지금은 뼈만 앙상한 손가락이 더 초라해보이는 것이 싫었다.

--당신 굉장히 예쁜데. 남편이 말했다.

--남자랑 처음 데이트라도 하러 가는 기분이에요. 술 마시는 거예요?

--응.

--나도 한 잔 주세요. 얼음 가득 채워서요.

마리트도 앉았다.

--기운이 없어요. 그녀가 말했다. 그게 가장 힘들어요. 완전히 사라졌어요. 다시 회복이 안 돼요. 일어나서 걸어 다니기도 싫어요.

--많이 힘드시겠어요. 수잔나가 말했다.

--상상도 못할 거예요.

월터가 술잔을 들고 와서 아내에게 건네주었다.

--그럼, 행복한 나날들을 위하여. 그녀가 말했다. 그러곤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무서운 미소였다. 미소에 반대되는 게 있다면 바로 그거였다.

 

그들이 일을 하기로 한 그 밤이었다. 냉장고 안에 주사기가 놓인 접시가 있었다. 주사기에 들어 있는 약물은 담당의사가 주었다. 하지만 마지막 저녁 식사가 먼저였다. 물론 마리트의 몸이 허락할 경우였다. 일을 치르는 건 둘만으론 안 된다고 마리트가 말했었다. 본능적인 결정이었다. 그들은 수잔나에게 부탁했다. 더 가까운 사람, 너무 슬퍼하는 사람보다 그 편이 나았다. 어차피 사이도 좋지 않은 마리트의 동생이나 옛 친구보다는. 수잔나는 그들보다 나이가 어렸다. 둥근 얼굴에 도드라진 이마가 매끄러웠다. 교수나 은행가의 딸처럼 생겼는데, 약간 바람기가 느껴졌다. 원처 부부의 친구 중 한 명은 수잔나를 두고 야한 여자라고 한 적이 있었다. 어느 정도 감탄하듯이.

 

짧은 치마를 입은 수잔나는 벌써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보통 저녁 식사인 척하긴 너무 힘들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면서 평소처럼 행동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녀가 그 집에 도착한 건 해가 질 무렵이었다. 창마자 불이 켜진 그 집은--방마 불을 켜놓은 것 같았다--다른 집들 사이에서 무슨 파티라도 하는 것처럼 눈에 띄었다.

 

마리트는 거실에 있는 물건들을 찬찬히 보기 시작했다. 은색 액자 속에 들어 있는 사진들과 램프, 언젠가 읽으려 했던 초현실주의 화집과 정원 디자인, 그리고 시골 별장에 관한 책과 의자들. 보기 좋게 색이 바랜 카펫까지 한참 바라보았다. 유심히 물건들을 보았지만 실제론 그녀에게 아무 의미가 없었다. 수잔나의 긴 머리카락과 싱그러운 모습도 무슨 의미가 있는 것 같았지만, 그게 뭔지 알 수 없었다.

 

어떤 기억은 갖고 가고 싶다고, 마리트는 생각했다. 월터를 만나기 전 어렸을 때의  기억, 집, 이 집이 아니고 그녀의 어린 시절, 침대가 있던 원래 집. 그 오래전 겨울 눈보라를 바라보던 층계참에 난 창문, 허리를 굽혀 굿나잇 키스를 하던 아버지, 램프의 불빛에 손목을 비추며 팔찌를 차던 엄마.

 

그 집뿐이었다. 나머지는 그리 강렬하지 않았다. 삶을 꼭 닮은 장황한 소설 같았다. 아무 생각 없이 지나가다 어느 날 아침 돌연 끝나버리는. 핏자국을 남기고.

--이거 참 많이도 마셨는데. 마리트가 돌이켜보며 말했다.

--술이요? 수잔나가 물었다.

--네.

--그동안 말씀이지요.

--맞아요. 오랜 세월 동안에요. 몇 시나 돼가나요?

--8시 15분 전. 그녀의 남편이 말했다.

--갈까요?

--당신이 준비되는 대로. 서두를 필요는 없어.

--나도 그러고 싶지는 않아요.

사실 그녀는 가고 싶지 않았다. 한 발 더 다가가는일이었으니까.

--예약이 몇 시지요? 그녀가 물었다.

--우리가 좋을 때 언제든지.

--가요, 그럼.

발단은 자궁이었고 거기서 폐로 올라갔다. 마리트는 결국 받아들였다. 네모나게 목이 파인 드레스 위로 드러난 피부는 핏기가 없었고 내부의 어둠이 배어나는 듯 했다. 그녀는 예전 같지 않았다. 예전의 마리트는 사라지고 없었다. 빼앗긴 것이다. 변할 걸 보면 무서울 정도였다. 특기 얼굴이 그랬다. 저승에서나 하고 있을, 그곳에서 그녀가 보게 될 그런 얼굴이었다. 월터는 아내의 예전 모습을 떠올리기 힘들었다. 때가 되면 돕겠노라고 단단히 약속했던 그 사람과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들이 앞에 타고 수잔나는 뒷좌석에 앉았다. 길엔 차가 없었다. 아래층에서 푸르스름한 빛이 흘러나오는 집들을 지나쳤다. 마리트는 말이 없었다. 슬펐지만 동시에 혼돈스럽기도 했다. 이 모든 일이 있고 난 다음 날인 내일을, 그녀가 보지 못할 내일을 상상하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세상이 그대로일거라고 생각하는 자체가 힘들었다.

 

호텔에서 그들은 시끄러운 바 근처에서 기다렸다. 남자들은 재킷을 안 입었고 여자들은 시끄럽게 웃고 떠들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들. 벽에는 커다란 프랑스 포스터와 오래된 판화가 검게 변한 액자에 걸려 있었다.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네요. 마리트가 말했다. 다행스럽게도.

 

월터는 좀 아까 애프톨 씨 부부를 봤다. 수다스러운 사람들이었다.

--보지 말라고. 그가 말했다. 우리를 못 봤어. 내가 다른 쪽에 테이블을 달라고 하지.

--우리를 봤어요? 마리트가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난 아무와도 얘기하고 싶지 않아요.

--이제 괜찮아. 그가 말했다.

 

흰  앞치마에 까만 나비 넥타이를 한 웨이터가 메뉴와 와인리스트를 건네주었다.

--마실 것을 주문하시겠어요?

--예, 물론이지요. 월터가 말했다.

그는 리스트를 보았다. 대충 가격순이었다. 슈발 블랑이 575딜러였다.

--이 슈발 블랑, 있어요?

--1989년산 말씀인가요? 웨이터가 물었다.

--그거 한 병 주세요.

--슈발 블랑이 뭐지요? 화이트인가요? 웨이터가 가고 나서 수잔나가 물었다.

--아니, 레드옝ㅅ.

--있죠, 오늘 와주셔서 너무 고마워요. 마리트가 수잔나에게 말했다. 아주 특별한 저녁이에요.

--네.

--매일 그런 와인을 주문하는 건 아니에요. 그녀가 설명했다.

 

두 사람은 이곳에서 자주 저녁을 먹긴 했다. 줄줄이 세워둔 병들이 빛을 발하는 바 근처에서. 하지만 35달러가 넘는 와인을 시켜본 적은 없었다.

 

몸이 어떤지, 기다리는 동안 월터가 물었다. 몸은 괜찮느냐고.

--어떻다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모르핀을 맞고 있거든요. 마리트가 수잔나에게 말했다. 약기운이 돌긴 하는데....그녀가 말을 멈췄다. 일어나서는 안 되는 그런 일들이 많이 있죠. 그녀가 말했다.

 

저녁 식사는 조용했다. 사소한 이야기를 나누는 건 힘들었다. 하지만 와인은 두 병이나 마셨다. 월터는 어쩔 수 없이, 다시는 이렇게 좋은 와인을 마실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두 번째 병에 남은 마지막 와인을 수잔나의 잔에 부었다.

--아녜요. 당신이 드세요. 그녀가 말했다. 정말로 당신이 드셔야 해요.

--그이는 충분히 했어요. 마리트가 말했다. 하지만 참 좋았죠, 그렇죠?

--기막히게 좋았어.

--이런 걸....느끼게 돼요. 아, 잘 모르겠지만, 여러 가지가 있어요. 이런 와인을 항상 마셨다면 좋았겠죠. 그녀는 무척 감동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모두들 기분이 나아졌다. 그렇게 한동안 앉아 있다가 그곳을 나섰다. 바는 여전히 시끄러웠다.

 

마리트는 차창 밖을 유심히 내다봤다. 피로함을 느꼈다. 이제 집으로 가고 있었다. 검게 변한 나무들의 꼭대기로 바람이 불었다. 밤하늘엔 푸른 구름이 대낮처럼 찬란하게 빛났다.

--오늘 밤 너무 아름답지 않은가요? 마리트가 말했다. 굉장히 감동적이에요. 내 착각인가요?

--아니. 춸터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정말 아름다워.

--당신도 그렇게 생각해요? 마리트가 수잔나에게 물었다. 물론 그럴 거라 생각해요. 당신이 몇 살이죠? 잊었어요.

--스물아홉이요.

--스물아홉. 마리트가 말했다. 그러곤 잠시 조용해졌다. 우린 애가 없었어요. 그녀가 말했다. 애를 가질 생각을 해본 적이 있어요?

--아, 가끔요. 하지만 깊게 생각해본 적은 없어요. 실제로 결혼을 해봐야 알게 될 그런 문제인 거 같아요.

--결혼하겠지요.

--네, 아마도.

--그러다 순식간에 할 수도 있어요. 마리트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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