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s and Writings/자전거 여행-김훈

땅에 묻히는 일에 대하여 - 여수의 무덤들(2)

그림자세상 2010. 7. 24. 01:08

봄의 무덤들은 평화롭다. 푸른 보리밭 속의 무덤들은 죽음이 갖는 단절과 차단의 슬픔을 넘어선 지 오래다. 그 무덤들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죽음은 바람이 불고 날이 저물고 달이 뜨고 밀물이 들어오고 썰물이 빠져나가는 것처럼 편안한 순리로 느껴진다.

 

30년쯤 전 아버지를 묻을 때, 내 어린 여동생들은 데굴데굴 구르며 울었다. 나는 내 동생들한테 울지 말라고 소리지르면서 울었다. 지금은 한식 때 아버지 묘지에 성묘 가도 울지 않는다. 내 동생들도 이제는 안 운다. 죽음이, 날이 저물면 밤이 되는 것 같은 순리임을 아는 데도 세월이 필요한 모양이다.

 

전남 여수의 어떤 무덤들은 보리밭 한가운데 들어앉아 있다. 봉분이 두 개다. 마을 사람들한테 물어보니까 그 무덤은, 살아서 한편생 그 밭을 갈아먹던 부부의 무덤이라고 한다. 살아서 갈아먹던 밭 속으로 들어가 눕는 죽음은 편안해 보였다. 어떠한 삶도 하찮은 삶은 아닐 것이었다. 살아 있는 동안의 기쁨과 눈물이, 살아서 갈아먹던 밭 속에서 따스한 젖가슴 같은 봉분을 이루는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삶의 중요한 부분인 것처럼 보인다.

 

땅이 없는 가난한 어부들은 죽어서 바닷가의 버려진 땅에 묻힌다. 포항이나 울진의 바닷가를 자전거를 타고 천천히 저어가면 이런 무덤들을 흔히 볼 수 있다. 무덤들은 바닷가 잡초 속에서 봉분이 허물어져 있고, 풀들이 언제나 해풍에 쓸리고 있다. 이런 무덤들은 물에서 먼 쪽이 명당이다. 바다가 사나운 날에 물가에 가까운 봉분들은 파도에 씻겨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농부가 밭에 묻히듯이, 가난한 어부들은 백골을 바다에 준다. 그 아들들이 다시 고기를 잡고, 슬려나간 봉분의 흔적조차도 이제는 편안해 보인다. 바다가 춥고 땅이 따뜻한 것도 아닐 것이다.

 

돌산도에는 고인돌 옆에 요즘의 무덤들이 들어서 있다. 구석기 이래로 죽음의 수만 년이 봄볕 속에서 나란히 포개져 있다. 사람들이 죽어서, 수만 년 지층의 켜처럼 가지런히 누워 있다. 놀라운 평등의 풍경이 거기 펼쳐져 있다. 

 

영동 민주지산 아래 동네에는 한 집안의 다섯 어른 무덤을 대문 앞에 모신 집도 있다. 성묘가 따로 없고 후손들이 들고나며 무덤에 절한다. 그 무덤들은 죽어서 떠났지만 결국 떠나지 않은 사람들의 무덤이었다. 그 무덤들은 삶의 지속성 속에서 평화로워 보였다. 그래서 모든 무덤들은 강물이 흐르고 달이 뜨는 것처럼 편안하다. 비가 개면 바람이 불듯이, 그 편안함이 순리로 다가올 때까지, 이승에 남아서 밥벌이나 하자. 벗들아, 그대들을 경멸했던 내 꿈속의 적막을 용서해다고. 봄볕 쪼이는 흙 속의 유혹은 아마도 이 순리의 유혹이었을 것이다. 

 

지상의 무덤들 자꾸만 늘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