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s and Writings/꽃 피는 삶에 홀리다-손철주

입 다문 모란, 말하는 모란

그림자세상 2010. 8. 1. 22:02

한번 떠나간 잠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하릴없이 문득 서가를 본다. 서가에 꽂힌 책들은 앵돌아앉았다. 집게손가락으로 책등을 죽 훑어나간다. 잠시 손이 멈춘 곳, 몸피 튼실한 책이 눈에 들어온다. 먼지 낀 종이상자를 벗기자 푸른 장옷을 걸친 옥골이 드러난다. 손가락 점고고 간택한 이 책이 오늘 내 무료한 밤의 심심풀이가 될까. 제목을 읽다가 뜨끔해진다. 하필이면 [격재집]이다. 모시 고르려다 삼베 얻은 격은 아니지만, 야밤의 환정을 도모하기에 버거운 상대다. 도리 없이 어른을 모시는 긴 밤이 될 판국이다.

 

격재 손조서는 세종 때 집현전 학사였다. 사육신의 옥사에 격분해 낙향했고, 한훤당 김굉필과 일두 정여창의 문하에 출입했다. 안동 일직 손문인데, [격재집]은 딱 하나 남은 그의 문집이다. 1898년 후손들이 영인본으로 꾸몄고, 나는 지금 그 책을 들고 있다. 기록에 보면, 격재는 송나라의 [심경]을 강해한 [김경연의]를 남겼다 하나 전하지 않는다. 퇴계보다 앞서 토를 달고 주를 매겼으니 가장 이른 시기에 [심경]의 중요성을 인지한 분이다. [격재집]에는 송시 계열의 고답한 깨우침을 담은 시가 여러 편 실려 있다. 나는 자나 깨나 당시가 좋다. 그중에서도 아련한 기운이 서린 시들을 즐려 음송한다. 마침 내가 밑줄을 쳐둔 격재의 시 한 편이 있어 읊조려본다. 제목은 <붉은 모란>이다.

 

素艶雖甚愛 바탕이 어여쁘니 누구든 사랑하겠지만

那知紅色深 저 붉은색의 깊이를 어찌 알까

滿枝蜂蝶亂 가지 가득 벌 나비 날아들어도

未識合花心 꽃의 마음 얻었는지 알 수 없어라

 

당시의 운을 빌린 갱운시인데, 흥취가 제법 살아 있다. 이 시는 꽃과 벌나비의 관계를 주제로 삼았다. 속된 말로 '퀸카'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작업남'의 낭패감이 느껴진다. 모색과 자태가 고운 모란 같은 여인을 두고 벌나비 꾀듯 남정네가 몰려든다. 아리따운 모습은 쉬 사랑할 법하지만 모란의 깊고 붉은 마음까지 속속들이 간취하는 사람은 드물다. 사랑을 주기는 쉬워도 사랑을 얻기는 예나 지금이나 녹록치 않다는 말씀. 웅숭깊은 격재의 성리학적 사변을 떠올려보면 그가 이런 염시를 남긴 사실이 그저 놀랍다. 하기야 가을 서릿발 같은 선비라도 내밀한 연정이 없기야 하겠는가. 예나 지금이나 인지상정이다.

 

청춘은 실연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모란이 토라지면 장미가 반기니 말이다. 하지만 모란 하나에 죽어라 공들이는 노익장도 있으니, 애달프다. 세상사의 불공평함이여. 당나라에 나긋나긋한 시인, 유우석이 있다. 유우석이 모란에 바치는 상사곡은 비감하다. 눈물치레로 '합화심'이라도 하면 좋으련만, 그의 종장은 끝내 한탄이다. 그가 지은 <술을 마시고 모란을 보다>는 이렇다.

 

今日花前飮      오늘 꽃을 앞에 두고 마셨지

甘心醉數杯      마음이 달콤해 취토록 잔 기울였네

但愁花有語      서러울손 꽃이 말을 하더군

不爲老人開      늙은 그대 위해 핀 게 아니랍니다

 

 

어머니를 나는 늘 '행 궂다'고 나무랐다. 행실이 궂다는 뜻이다. 유우석이 아니라 행 궂은 나라면 닭 모가지 비틀 듯이 모란을 비틀어버렸을 것이다. 유우석은 다르다. 소갈머리 없는 모란의 투정을, 그 박절함을, 듣고만 있을 따름이다. 하지만 그의 한숨은 통곡보다 진하다. 늙으면 만사가 서럽다. 늙은이의 연정은 음심으로 치부하는 세상이다. 한갓 꽃마저 늙은이의 속정을 몰라주면 마침내 기댈 곳은 고향선산밖에 없다. 유우석의 낭패가 남의 일 같지 않다. 조선시대 시인 이행은 '늙어가매 이별은 더욱 어려워라. 정이 끓어도 말은 더디 나오는구려'라고 탄식했다. 그러니 노인들은 짝사랑에나 노닐 것이다. 이별수는 만들지 말란 이야기다. 냉혹한 안분지족이다. 세상에 겉절이들이 판치니 묵은 김치는 어딜 가도 외톨이다.

 

격재의 나머지 글들은 다 읽지 못했다. 늘 이 모양이다. 깨우치는 글은 어렵고, 속삭이는 글은 홀린다. 양약은 입에 쓰지만 졸음을 부르는 데 안성맞춤이다. 시 몇 편과 더불어 혼감해 한 것도 잠시, 난해한 전고들이 줄을 잇는 대목에서 곧 눈꺼풀이 무거워진다. 격재 어른의 원손인 나는 슬며시 부끄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