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s and Writings/꽃 피는 삶에 홀리다-손철주

연꽃 있는 사랑이야기(1)

그림자세상 2010. 7. 21. 02:16

  고려 충선왕의 연애담은 애틋하다. 그는 원나라에 머물면서 한 여인과 정을 나누었다. 환국을 앞둔 날, 여인이 그의 소매를 잡고 놓지 않았다. 그는 연꽃을 꺾어주며 몌별袂別했다. 몸은 오고 마음은 둔 탓일까. 그리움이 사무쳐 근황이나마 듣고자 하였다. 밀명을 받고 원나라에 간 사람은 심복인 이제현이었다. 그는 탐문 끝에 여인을 만났다. 여인의 꼴은 초라했고, 먹지도 말하지도 못했다. 여인이 겨우 붓을 들어 이제현에게 시 하나를 적어주었다.

 

떠나시며 준 연꽃 한 송이            贈送蓮花片

처음에는 참으로 붉었답니다        初來的的紅

줄기를 떠난 지 며칠이 못 되어      辭枝今幾日

초췌한 모습 저를 닮았답니다        憔悴與人同

 

충선황은 이별의 정표로 연꽃을 주었다.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꽃은 시들었고 홀로 된 여인은 수척해졌다. 돌아오지 않는 왕을 그리는 여인의 잔영이 시의 행간에서 바스락거린다. 사뭇 애처로운 시정이다. 이제현은 귀국하여 충선왕에게 거짓을 고했다. 여인이 술집에서 젊은 남자와 놀아나고 있는데 불러도 오지 않더라고 했다. 왕은 땅에 침을 뱉었다. 한 해가 지나고 그제야 이제현은 왕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털어놓았다. 여인의 행색을 들려주고 전해 받은 시를 올렸다. 왕은 하염없이 눈물을 떨구었다. 주군의 처신을 헤아려 일부러 거짓말을 한 신하의 충성심 때문은 아니었다. 시들어버린 그 연꽃조차 더는 찾을 길이 없으리란 걸 안 까닭이다. 성현의 [용재총화]에 나오는 이야기다.

 

가엾기는 원나라의 여인이다. 말라버린 꽃에는 향기가 없고 박제된 사랑에는 훈기가 없다. 시든 연꽃 걸어주고 이제나저제나 기다려도 떠난 사랑은 꿈에서나 만날까. 꽃은 자태라도 있지만 몽중의 연인은 깨고 나면 그림자보다 못하다. 하여 청나라 시인 원매는 이렇게 읊조린다.

 

저는 빈방에 꿈을 꿉니다            妾自夢香閨

임이 먼 곳에 계신 걸 잊었고       忘郞在遠道

이별한 마음마저 익숙지 않아       不慣別離情

몸 돌려 껴안는데 허공이더이다   回身向空抱

 

그리워 그리다가 꿈에 만난 임 얼싸안았더니 웬걸 임이 누웠던 빈자리에 팔을 들렀다는 하소연이다. 빈방은 썰렁해서 외롭고 외롭고 시든 꽃은 되살아나지 않아 서럽다. 애잔한 이별의 이미지가 대저 이와 같다.

 

원나라 여인을 떠올리며 맞춤한 도자기 하나를 고른다. 충선왕이 재위하던 시기와 겹치는 14세기 원나라의 작품이다. 이 청자는 신안 해저 유물선에서 인양한 것으로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도자기는 빼다 박은 듯 중국 여인의 형용이다. 얼굴에 전형적인 후육미가 소담하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여인의 어깨에 있는 꽃이다. 활짝 핀 연꽃이다. 꽃잎 속에 마치 수술처럼 불쑥 올라온 곳은 초를 꽂는 자리다. 그래서 이름 붙이기를 <청자 여인상 촛대>다. 높이는 이십 센티 미터가 채 안 된다. 여인의 몸통에 바른 유약은 투명한데 유려한 빛깔을 내비치고 있다. 치마에는 매듭으로 장식한 리본이 달려 있다. 한껏 멋을 부린 모습이다.어깨에서 미끌어지지 않게 하려고 연꽃 아래에 줄을 매어 두 손으로 다잡았다.

 

도자기 모양은 귀엽다 못해 안차다. 여느 도자기에서 보기 어려운 형태다. 더욱 놀라운 것은 여인의 얼굴과 손을 처리한 기법이다. 청자빛 몸통과는 별스런 갈색을 띠고 있다. 어찌하여 이색지게 되었을까. 도공은 얼굴과 손 부분에 유악을 바르지 않고 가마에 넣었다. 노태, 즉 도자기용 태토가 그대로 드러나게 작업한 것이다. 그 결과 얼굴과 손은 살갗의 질감을 고스란히 지니게 되었다. 한갓 도자기에 불과하지만, 숨을 쉬고 피가 통하는 듯한 생취는 여간내기의 솜씨가 아니다. 이런 상쾌한 아이디어를 동원한 도공을 과연 14세기, 저 까마득한 고래의 인물이라고 여길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