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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

그림자세상 2010. 6. 29. 10:51

164호 [환상, 그 퇴행과 전복 사이] 천상으로의 초대, 현실을 가로지르는 욕망의 향연

천상으로의 초대, 현실을 가로지르는 욕망의 향연

여국현/중앙대 영문학 강사

우리가 ‘환상(幻想)’이라 명명하는 것 속에는 ‘Fantasy’까지도 포함된 것으로 이해된다. 사전적인 의미로 환상은, “현실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을 있는 것처럼 상상하는 일”, “종잡을 수 없는 생각, 공상, 상상과 유의어” 등으로 규정된다. 한편, ‘Fantasy’는 공상, 환상, 상상 등의 의미를 지니는 동시에 <환상적인 문학작품>이나 <환상곡> 등의 특정 영역을 지칭하기도 한다. 특히, <환상문학>이라는 장르적 개념의 흔적이 강해서 환상에 관한 개념적 논의들이 대부분은 <환상문학>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Fantasy의 형용사형인 ‘fantastic’의 라틴어 어원은 ‘phantasticus’인데, 이 말은 ‘가시화 하다’, ‘명백하게 드러내다’라는 의미를 지닌 그리스어에서 파생되었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환상은 우선 “현실로는 존재할 수 없는/해서는 안되는 것을 가시화 하기”를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사전적 정의 외에 자연스러운 인간의 행위(톨킨)라는 일반적인 규정을 포함하여 환상을 둘러싼 정의는 논자들의 입장만큼이나 다양하다. 하지만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현실과의 연관성을 강조하면서 환상을 정의하는 시도들이다.

  “현실 세계에서는 견디기 힘든 어떤 기묘하고 돌발적인 것, 분열, 소요”(로제 카이유아), “현실 삶의 범주 속으로 신비가 갑작스럽게 침입하는 것”(조르쥬 카스텍스)이라는 기본적인 정의들과 환상물들은 주체의 만족을 향한 리비도적 충동을 표현한다고 보는 정신분석학적 관점이 우선 눈에 뜨인다. 시몬즈는 환상은 자연을 과장하거나 왜곡하는 것을 함축한다고 본다. “환상은 실재적인 것을 재결합하고 전도시키지만 그것으로부터 도피하지는 않고” “실재적인 것에 기생하거나 공생하는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베시에르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환상(적인 것)은 비합리성과 동일시되지 않는다. 오히려 반합리적인 것, 즉 이성이 지니는 정통성에 대한 전도로서 환상(적인 것)은 이성과 리얼리티가 자의적으로 전환가능한 구성물임을 보여준다. 환상 혹은 환상적 서사의 구조는 현실의 모순들 속에서 구성된 것이며, 환상(적인 것)은 폐쇄적이 아니다. 환상은 닫힌 체계 내부에 있으면서, 통일체라고 간주되어 왔던 공간에 침입하여 그 공간을 개방하는 한편, 단일하고 환원적인 진실들을 위반하면서 한 사회의 인식틀 내의 공간을 추적하여 다양하고 모순된 진실들을 이끌어낸다. 따라서 베시에르에게 환상은 다의적인 것이다. 욕망에 관해 말하기: 억압을 전복하는 놀이『환상과 미메시스』의 저자 캐서린 흄과 환상의 전복적 특성을 강조하는 로즈메리 잭슨의 논의는 토도로프 이후의 논의의 성과들을 받아 안고 보다 포괄적인 입장에서 환상을 다루고 있다. 흄은 환상을 문학의 기본적 충동 가운데 하나로 제시하면서, “권태로부터의 탈출, 놀이, 환영, 결핍된 것에 대한 갈망, 독자의 언어 습관을 깨뜨리는 은유적 심상 등을 통해 주어진 것을 변화시키고 리얼리티를 바꾸려는 욕구”라고 정의한다. 그는 환상을 “일치(consensus)의 리얼리티로부터의 일탈”이라고 규정한 뒤 미메시스와 동등한 문학적 본질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지나칠 정도로 문학영역에만 한정된 것으로 보인다. 마르크스주의와 프로이트적 관점에서 환상의 전복적 특성에 방점을 두는 로즈메리 잭슨의 논의는 특히 주목할 만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환상은 욕망에 관한 문학으로서 부재와 상실로 경험되는 것들을 추구하는 것이다. 환상은 욕망을 표현하는 데 두 가지 방식으로 작용할 수 있다. 환상은 욕망에 관해 말하거나 명시하거나 보여줄 수 있다(묘사, 재현, 명시, 언어적 발화, 언급, 기술한다는 의미에서의 표현). 또한 환상은 욕망이 문화적 질서와 연속성을 위협하는 하나의 장애요소일 경우 그 욕망을 추방할 수 있다(억압하고, 누르고, 배제하며, 힘으로 어떤 것을 제거한다는 의미에서의 표현)… 욕망은 ‘얘기되고’ 그리하여 작가나 독자의 대리 경험을 통해 ‘추방’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환상문학은 문화적 질서가 의존하고 있는 토대를 지적하거나 제시하게 된다. 환상적인 것은 문화의 말해지지 않는 부분, 보이지 않는 것, 즉, 지금까지 침묵 당하고 가려져 왔으며 은폐되고 부재하는 것으로 취급되어온 것들을 추적한다. 위 인용문에서 드러나듯이 잭슨은 환상을 일종의 전복으로, 억압당해 왔으며 그 때문에 표현되지 못했던 것들을 다루는 수단으로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환상에 내포된 이와 같은 전복적 특성이 사회의 변화를 실제로 이끌어낼 수 있다는 믿음을 천명한다. (엘렌 식수스가 ‘위반으로의 은밀한 초대’라 명명한 것도 이에 다름 아닐 것이다.) 현실적 억압에 대한 환상의 전복성에 대한 이 같은 믿음은 구원의 희구와도 닿아 있다.

환상은 공상, 때로는 광란을 통해, 그리고 거의 언제나 희망 위에서, 바로 구원의 희망 위에서 작동한다는 지적들이 적실성을 획득하는 대목도 이 지점이다. 구원을 갈구하는 방식은 다양할 수 있다. 환상은 사회질서가 의존하고 있는 통합구조와 의미작용을 해체함으로써 문화적 안정성을 전복하고 침식시키는 기능을 하는 한편, 현실 도피적인 특성을 보이면서 현실의 부조리함으로부터 벗어나는 유토피아적 구원을 꿈꾸는 기제가 되기도 한다. 한편, 슬라보예 지젝은 “정치적 범주로서의 환상: 라캉식 접근”이라는 논문에서 환상이 주체의 일관성과 집단의 확고한 결속력을 유지하는 데에서도 일정한 기능을 담당하지만 역설적으로 바로 그 과정 속에서 환상 자체가 숨기려고 하는 위반을 드러낸다는 점을 지적한다. “실재계의 추문(the scandal of the Real)을 억압하려는 환상의 시도는 오히려 억압된 것들의 회귀(the return of the repressed)를 물질적인 형태로 보여준다.” 지젝에 따르면, 이데올로기 속에서 환상이 작동하는 일반적인 방식은 ‘상황의 진정한 공포’를 모호하게 만드는 환상-시나리오의 형태를 통해서이다. 예컨대, 연대성과 상호협력의 힘에 의해 만들어지는 유기적 전체라는 사회개념은 일종의 환상으로서 사회를 관통하고 있는 적대감들을 은폐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지젝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환상이 실재계의 진정한 공포(“the true horror of the Real”)를 은폐함과 동시에, 은폐하려 한 것을 생산해낸다는 점을 지적한다.

실제계의 공포를 은폐하는 여러개의 시선으로서의 환상

지젝은 환상과 주체형성의 네 측면을 구분한다. 그는 먼저 주체가 환상의 담화 속으로 각인되는 방식은 한 지점에 고정된 것이 아니다라는 점을 강조한다. 환상은 다양한 주체-위치들을 생산해내며, 주체는 이 위치들 사이를 자유롭게 떠돈다. 또 환상은 항상 불가능한 시선(an impossible gaze)을 포함하고 있어서, 주체는 이 시선을 통해 환상을 만들고, 이 행위 속에서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환상이 어떤 시선을 위해서 봉사하는가. 환상은 어떤 담론을 지지하는가.” 하는 점이다. 그는 테레사 수녀를 둘러싼 담론의 경우를 예로 든다. 이 담론에서 캘커타는 타락, 부패, 가난과 폭력으로 가득 찬 지옥으로 묘사된다. 이 담론은 가난이 구원에 이르는 길이라고 강조하면서도 실상 사람들에게 가난의 원인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못하게 만들며, 서구의 재정적 지원에 의해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구성된다. 결과적으로 이 담론은 제3세계는 지옥이라는 ‘환상적 이미지’를 구성하면서, 가난을 극복하기 위한 어떤 정치적 행위보다 연민과 서구의 경제적 지원만이 고통을 누그러뜨릴 수 있다는 생각을 유포시키는 것이다. 지젝은 또 환상은 법에 의해 금지된 욕망이 환각적인 형태로 실현된 것이라는 일반적 견해와는 반대로 환상적 담론은 법의 위반-정지를 구현하기보다는 법의 실현, 다시 말하면 상징적 거세를 확립시킨다는 점을 지적한다. 지젝은 마지막으로 주체가 살아가는 매일의 상징적 우주와 그 환상적 지지대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이 환상의 효율성을 구성해 준다는 점을 언급한다. 그는 미국의 Old South에서 발생한 인종차별주의적인 의식을 예로 든다. 백인 갱들이 한 흑인에게 자신들을 모욕할 것을 강요하고, 흑인이 그 강요에 못 이겨 백인들을 향해 침을 뱉고 “you’re scum”이라고 말하는 순간 죽임을 당한다. 그 흑인은 자신의 진정한 욕망을 드러낸 것이며 바로 그로 인해 죽임을 당한 것이다. 실재적인 욕망을 침묵하고 있을 때 그는 무사했지만 적대적 욕망을 드러내는 그 순간 그 욕망 때문에 죽임을 당한 것이다. 이처럼 사회적 리얼리티 속에서 자신의 은밀한 환상이 실현되는 것은 곧 두려움으로 연결되는 것이기도 하다.

  이상의 논의들을 통해 살펴본 환상은 전혀 생소한 비인간적 세계를 창조하는 것만도, 초월적인 것도 아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환상이 이 세계의 현실적 요소들을 전도시키는 것, 낯설고 친숙하지 않으며 명백하게 새롭고 절대적으로 다른 어떤 것을 산출하기 위해 작동한다는 점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경험 세계와 어떤 형식으로든 관계를 맺지 않는 온전히 허구적인 세계를 상상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환상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우리는 잭슨의 말을 따라 환상(적인 것)은 실제적인 것과 대화하며 그 대화를 자신의 필수적인 구성의 일부로 통합하는 쓰기 양식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환상적 텍스트는 꺾이지 않는 욕망, 아직 존재하지 않거나 또는 존재하도록 허용된 적이 없는 것들에 대한 욕망을 언급한다는 점과, 환상은 이미 존재하거나 실제로 보일 수 있도록 허용된 것들과는 대립되는, 들어보지 못한 것, 보이지 않는 것, 상상적인 것 등에 대한 욕망에 대해 말한다는 점에 주목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가장 전복적인 환상물들은 상징계와 상상계 사이의 관계를 변형시키려 하며, 이 두 영역 사이의 관계를 유동적으로 만듦으로써 그리고 주체의 형성 과정에 대한 폭력적 전복이나 거부를 통해 상징계의 해체를 제안하거나 기획함으로써 급진적인 문화적 변형의 가능성을 확립하고자 한다.”(잭슨, 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