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s and Writings/etc.

서평 - 에드워드 사이드의 <권력과 지성인>

그림자세상 2010. 6. 22. 01:13

에드워드 사이드의 <권력과 지성인>(Representations of the Intellectual)

 

지성인, 권력의 해바라기인가? 비판적 재현의 주체인가? 

                      

저자 뒤를 그림자처럼 따르며 전설로 기억되는 텍스트가 있다, 맑스의 <자본론>,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처럼. 사이드(Edward W. Said)의 그림자는 <오리엔탈리즘>(1978)이다.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을 통해 서양인들의 시각과 담론을 통해 ‘동양(인)’을 구성해 온 과정을 밝혀내면서 타자에 대한 ‘담론 재현’이 갖는 폭력성과 허구성을 폭로했다.

<오리엔탈리즘>의 강렬한 그림자는 이후 사이드가 <팔레스타인 문제>, <이슬람 다루기>에 이어 <세계, 텍스트, 그리고 비평가>, <문화와 제국주의> 등을 통해 중동의 현실 정치에 대한 개입과 본격적인 문학, 문화 텍스트에 대한 실천적인 분석을 행하는 데도 고스란히 드리워 있다. 사이드의 이론과 실천이 목표하는 바를 몇 마디로 요약하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서구 세계가 자기중심적 ‘권력’의 보편성을 확보, 유지할 수 있도록 서구의 ‘지식’이 ‘담론’이라는 ‘재현’ 형식을 통해 ‘타자’에게 가한 폭력의 부당함과 허구성을 비판하는 것이 그 중핵을 구성하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권력의 그물 벗어나기: 전문직업주의 vs. 아마추어리즘

<권력과 지성인>(Representations of the Intellectual)에서 사이드는 권력과 이에 비판적인 ‘재현의 주체’로서 지성인의 역할을 특히 강조하고 있다. 사이드가 1993년 영국의 BBC에서 실시했던 리스강좌의 내용을 옮겨놓은 이 책의 주제는 “보편적이며 단일한 지성인의 표준을 설정”하고 “지성인의 소명”을 제시하는 것이다. 사이드에게 유의미한 지성인은 ‘비판적 감각’을 바탕으로 자신의 주장과 이념을 표명하는 다양한 형식의 ‘재현의 재능’을 통해 인간의 자유와 지식을 발전시키는 존재이다. 정치와 권력의 그물망이 편재하는 현재의 조건 속에서 지식인은 ‘약하고 대변되지 못한 자의 편’에서 대중매체에 의해 유포되는 ‘권력의 이미지’를 논박하면서 절반의 진실이나 통념이 완전한 것으로 유포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특히 지성인은 가장 강력한 집단적 권력의 주체인 국가, 종교, 민족의 ‘집단적 사고’로부터 벗어나도록 끊임없이 스스로를 채찍질하여야만 한다. 팔레스타인 계 미국인인 사이드 자신의 경우처럼 지성인은 자신이 속한 집단의 고통을 재현할 의무를 질 경우도 있다. 그럴 때라도 그 고통의 재현이 자신들만의 것으로 그치지 않고 “타자들의 고통과 연계시키는 것” 또한 지성인의 과업이다.

 

사이드는 현재 많은 지성인들이 ‘비판적 자세’를 버리고 현실에 안주하며 스스로를 ‘상품가치’가 있는, 비논쟁적이고, 비정치적이며 ‘객관적’으로 만드는 ‘전문직업주의’(professionalism)적 태도에 물들어 있다고 비판한다. 전문영역의 관습을 수용하고 권력자들의 규칙에 길들여진 채 권력에 고용되기를 갈망하는 지성인들의 전문가적 태도는 특히 더 위험할 뿐 아니라 우스운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베트남 전쟁에 대한 기술에서 촘스키의 저술이 국무성에 자문했던 지식인들의 그것보다 훨씬 정확했던 것은 촘스키가 권력 및 미국적 애국주의에서 초연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사이드는 오늘날 지성인은 이기적인 태도로 이윤과 권력을 향한 해바라기 속에서 편협한 전문화를 꿈꾸며 “해야할 것으로 간주되는 것을 행”하는 주체가 아니라 “왜 그것을 해야하는가, 그것으로부터 누가 혜택을 받는가, 그것이 어떻게 개인적인 과제인 동시에 근원적 사고들과 다시 연결될 수 있는가”를 고민하는 아마추어가 돼야한다고 역설한다. “전문성에 구속되지 않고 사상과 가치에 관심을 두며 이윤과 보상의 기제가 아니라 터 큰 사랑와 관심에 기반한 욕망에 따라 행동”하는 아마추어리즘을 가짐으로써 지성인은 지적 독립성을 확보하고 자신의 가치와 원칙들에 따라 재현할 수 있는 토대를 형성할 수 있으며 비로소 권력을 향해 진실을 ‘말할 수 있는’ 대안적이고 원칙적 입장을 지닌 존재가 될 수 있다.

 

담론적 재현의 주체를 넘어

의문 하나. ‘말하기’, ‘재현’ 외에 편재하는 권력에 대한 지성인의 또 다른 개입 가능성은 없는가. 비판적 재현을 통한 담론적 참여 또한 분명 ‘행동’이며,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독립적 입장에서 ‘세속적 비평’--사이드의 ‘세속적’이라는 말은 ‘맥락적, 상황적’이란 말의 동의어로 이해할 수 있다--을 통해 저항하는 방식이 그의 고백대로 필연적으로 팔레스타인 사람이 될 수 없었던 ‘추방된 지성인’으로서 자신의 한계 상황에 대한 숙고의 결과라는 점도 이해할 수 있다. ‘재현’을 통한 담론적 비판의 주체와 현장의 행동의 주체가 다른 장에서 동일한 투쟁을 행하는 주체들일 수 있다는 점도 분명하다. 하지만 “글쓰기를 삶의 장소”로 주장하는 사이드의 논의가 자칫 지성인의 역할을 담론을 통한 재현의 주체로서만 한정짓는다고 오해받을 소지는 없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성인에게 회피를 야기하는 습성보다 더 비난받아야 될 것은 없다”며, “옳다고 알고는 있으나 행동을 취하지 않음”으로써 힘든 원칙을 회피하고, “논쟁적으로 보이기를, 정치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며 “권위 있는 인물의 승인을 원”한다면 지성인이라 할 수 없다는 사이드의 충고는 광기어린 권력이 사방에 재갈을 물리는 지금, 여기, 모두의 가슴에 화살이 되어 박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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