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s and Writings/etc.

서평 - 무지한 스승 (자크 랑시에르)

그림자세상 2010. 6. 22. 00:17

자크 랑시에르, [무지한 스승]

 

가르친다는 것, 배운다는 것?

근대 교육의 등장 이래 우리는 사회 주체들을 교육하는 방식과 내용에 관한 일정한 시스템을 마련하고 발전시켜 왔다. 핵심은 무엇인가를 먼저 습득한 ‘아는 자’인 스승이 자신의 선지식을 뒤따르는 주체들에게 전수하는 것이었다. 접근하는 이들의 입장에 따라 무엇을 가르치고 배울 것이며, 어떤 방식을 택할 것인가에 대한 이견은 많았지만 적어도 이 기본적 시스템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 적은 드물었다. 가르치는 자는 가르치기 위해 무엇인가를 ‘먼저 알고’ 있어야 하며, 배우는 자는 앎에 있어서 가르치는 자보다 ‘부족한 상태’에서 출발하여 그로부터 ‘앎을 배운다.’

랑시에르의 문제의식은 당연한 듯 보이는 이 전제에서 출발한다. 그는 가르치는 자는 자신이 가르치는 것을 ‘알지 못하는 무지한 자’이며, 배우는 자는 가르치는 자보다 부족한 자가 아니고, 둘 사이에는 가르침과 배움이 아니라 둘 사이의 ‘의지의 관계 맺음’이 발생한다고 본다. 랑시에르의 이러한 문제의식은 교육적 차원의 논의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풀어가는 과정을 통해 그는 배우고 가르치는 관계를 넘어 보편적 인간 주체와 사회적 관계에 대한 전반적 성찰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무지한’ 스승을 통한 지적 해방

이 지독한 역설이 랑시에르를 굳건하게 받치고 있는 주춧돌이다. 이 역설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가르치는 자의 무지는 무엇에 관한 무지인가를 질문해야 한다. 그는 무지한 스승이란 학생에게 가르칠 것을 모르는 스승, 어떤 앎도 전달하지 않으면서 다른 앎의 원인이 되는 스승, 그리고 불평등을 축소하는 수단들을 조정한다고 여겨지는 불평등에 대한 앎을 모르는 스승이라고 규정한다.

무지한 자가 어떻게 가르칠 수 있다는 말인가? 랑시에르는 19세기 인물인 자코토의 사례를 제시한다. 불어를 모르는 네덜란드 학생들에게 네덜란드어를 모르는 불어 강사인 자코토는 불문학 수업 시간에 네덜란드-불어 대역본 서적을 반복하여 읽고 습득하도록 한 다음 홀로 습득한 내용을 불어로 쓰도록 한다.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홀로 학습한 학생들의 불어는 놀라울 정도로 훌륭했다. 교사인 자코토는 설명을 거의 하지 않았으나 학생들 스스로 놀라운 학습의 결과를 보여준 것이다.

이 예기치 못했던 결과는 자코토가 피교육자에게 따라붙는 무능력과 열등한 지능은 사실이 아님을 간파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학생들이 무능한 것이 아니었다. 학생들은 무능하고, 열등한 지능의 소유자인 반면, 교사들은 우월한 지능의 주체들이라고 전제했을 때만 작동하는 교육계의 신화가 만들어낸 허구였던 것이다. 자코토가 한 일은 그들에게 어떤 ‘학식’을 전달하거나 가르친 것이 아니었다. 그가 가르치고 학생들이 배운 것은 학생들 스스로의 지능이 작동하는 방법을 깨우치는 것이었다.

 

랑시에르는 이 과정을 의지와 지능으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가르치고 배우는 행위에는 교수자와 학생의 의지와 지능이 작용하는데, 자코토가 가르치고자 하는 의지는 배우고자 하는 학생들의 의지와 관계를 맺는다. 하지만 자코토의 지능, 즉 앎은 학생의 지능, 즉 앎을 강제하거나 가르치지 않았다. 학생의 지능은 자코토의 지능과 관계 맺은 것이 아니라 그가 읽었던 책(저자)의 지능과 관계 맺었다. 자코토는 교사로서의 의지를 통해 이 관계 맺기를 매개하는 주체일 뿐 자신의 앎(지능)을 학생들에게 전달하지 않았다. 랑시에르는 이처럼 교사와 학생의 의지와 지능의 차이가 인정되고 유지되는 것, 학생이 교사의 의지에 복종하더라도 지능의 행위는 자신의 지능에 복종하는 것을 (지적) 해방이라고 본다. 반면, 이러한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둘 사이의 의지와 지능을 일치시키려 하는 것은 기존 교육의 ‘바보만들기’ 과정이다.

자코토는 자신의 앎에 학생들을 종속시키거나 전달하지 않으면서 학생 스스로 자신의 고유한 지능을 사용하여 학습하고 스스로 깨닫도록 했다. 이는 인간 정신의 진정한 역능에 대한 신뢰에 기반할 때, 그리고 스승 자신이 불평등을 조장하는 방법들에 무지할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무지한 가장조차도 스스로 해방되기만 하면 스승의 도움 없이도 자기 아이들을 교육할 수 있다. 무엇인가를 배우라, 단 모든 인간은 평등한 지능을 갖는다는 원리를 명심하라.” 자코토의 방법을 통해 랑시에르가 전달하는 핵심은 이것이었다.

 

랑시에르가 모든 지능이 동일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교사와 학생의 지적 능력의 발현에 차이가 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것을 지적 능력의 위계 차이로 환원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어떤 이의 능력이 열등하거나 우월한 것이 아니라 다만 그 능력이 똑같이 발휘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기에 지적 능력의 불평등 원리를 고수해서는 안 된다. 지적 능력의 불평등 원리는 교육 주체를 바보로 만드는 반면, 평등 원리는 모든 인간이 자신이 가진 지적 주체로서의 본성을 의식할 수 있게 해주는 해방을 가져온다는 점을 랑시에르는 반복하여 지적한다.

 

지적 해방을 넘어 평등 사회의 주체로

평등한 지능에 기초한 랑시에르의 성찰은 교육 영역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평등한 지능의 기반에 설 때 이미 우리는 우리 자신과 사회를 다른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소위 보수주의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진보적 비판 이론가와 지식인조차 자신의 지도적 역할을 강조하는 근거로 대중의 우매함을 전제하는 경우는 낯선 일이 아니었다. 교육이 불평등에 기반해 있듯 진보의 세기 또한 승리한 설명자들의 세기, 아이 취급된 인류의 세기였다. 진보론자들 또한 빈자들이 그들의 공유한 능력으로 스스로를 지도할 수 있다는 것, 그들이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도록 애써왔다. 빈자들을 지도하면서 그들에게 끊임없이 자신들의 무능력을 제시하는 척도를 포기하지 못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결국 보수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에게도 핵심은 똑똑한 소수가 어리석은 다중을 지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랑시에르는 그들에게 단언한다. “인민을 바보로 만드는 것은 지도 부족이 아니라 인민의 지능이 열등하다는 믿음이다.”

평등한 지능의 소유자들인 주체들은 자신의 고유한 움직임에 따라 행동하고자 하는 역량인 의지의 소유자들이다. 그러나 랑시에르는 이런 주체들이 모인 현실 사회는 평등이 작동하는 이상 사회가 아니라는 사실을 간과하지 않는다. 현실 사회는 타인의 억압을 욕망하는 협약이 작동하고, 불평등에 대한 정념에 사로잡힌 왜곡된 의지가 활동하며, 제도는 끊임없이 바보만들기의 재생산을 시도한다. 사회 내에는 평등도 합리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찌할 것인가. 평등한 인간들이 불평등한 사회를 구성할 것인가, 아니면 불평등한 인간들이 평등한 사회를 구성할 것인가. 랑시에르는 망설이지 않는다. 개인들을 실재하는 존재들인 반면, 사회는 허구이고, 평등이 가치 있는 것은 실재하는 존재들이다. 결국 주체들이 할 일은 불평등한 사회에서 평등한 인간들이 되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해방의 또 다른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덧글

랑시에르의 말--모든 사회 질서에서 모든 개인은 이성적일 수 있기 때문에 최악을 피할 길이 언제나 없는 것은 아니다. 사회는 결코 이성적이지 않겠지만 이성적 순간들의 기적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글을 쓰면서 개표 결과를 본다. 사회와 주체들의 이성적 기적의 순간이 가능할 수도 있다는 그의 말은 전적으로 옳지도 않았지만 틀리지도 않았다. 진실로 ‘무지한 이’가 자신의 무지를, 자신이 하는 일을 모르고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려 들지만 대중들이 평등한 지능의 의지적 발현을 통해 진실로 그의 무지에 답한다. 랑시에르의 말처럼 대중들이 “나는 몰라, 알 필요 없다”며 무시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사회 내 자기 존재를 확연하게 이해하고 행동하기 시작했으니, 진실로 무엇을 하는지 모르는 ‘무지한 이’가 역설적으로 ‘스승’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할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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