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s and Writings/자전거 여행-김훈

가까운 숲이 신성하다(2)

그림자세상 2010. 2. 8. 15:53

  중국서 흘러온 한 알의 씨앗

 

  안면도에는 소나무숲만 있는 것이 아니다. 승언리 방초 해수욕장으로 내려가는 길가에는 모감주나무숲도 있다. 모감주나무는 백일홍 고목처럼 신기가 어린 듯 구불구불 뻗어나가고, 밑둥과 줄기는 발가벗은 듯이 매끄럽게 윤이 난다. 이 희귀한 나무는 천연기념물 대접을 받고 있다. 절에서는 이 나무를 귀하게 여겨서 그 열매로 염주를 만든다. 모감주나무는 원래 중국 산둥반도에서만 자라는 나무다. 그 씨앗 하나가 바닷물에 실려 안면도 바닷가로 흘러와 이 숲을 이루게 된 것으로 식물학자들은 보고 있다. 산둥반도의 모감주나무는 곧게 자라나는데, 안면도 해안가의 모감주나무는 구불구불하게 퍼진다. 키도 2미터 정도를 넘지 않는다. 안면도 모감주나무의 이 같은 생태는 해풍에 견디기 위한 변이일 것으로 학자들은 설명하고 있다. 씨앗 한 개의 해안 표착은 무서운 인연이다. 그 인연은 종교적인 느낌을 준다. 신라 진흥왕 20년(서기 569년) 인도를 떠난 배 한 척이 인연이 있는 땅을 찾아서 수많은 나라의 해안을 표류하다가 신라의 울주 앞바다에 표착했다.

  이 배에는 불탑과 불상을 세울 만한 금은보화가 가득 실려 있었다. 이 인연이 황룡사 장육존상이며 동축사이다([삼국유사]). 바닷물에 떠돌던 씨앗 한 개가 인연 있는 안면도 해안에서 거대한 숲을 이루었다. 그 씨앗은 서기 569년에 울주 앞바다로 밀려온 인도의 배를 생각나게 한다. [종의 기원]에 따르면 철새의 발바닥에 붙은 씨앗 한 개가 대륙을 건너가 새로운 숲은 이루기도 한다. 안면도 모감주나무숲은 지금 새의 붉은 혀와 같은 새싹을 내밀고 있다. 씨앗 한 개 속의 숲은 머지않아 푸른 잎으로 덮여서 어둡고 서늘할 것이다.

 

숲의 표정

 

  여름의 숲은 어둑신하고 서늘하다. 숲 속에서, 빛은 사람을 찌를 듯이 달려들지 않는다. 나뭇잎 사이로 걸러지는 빛은 세상을 온톤 드러내는 폭로의 힘을 버리고 유순하게도 대기 속으로 스민다. 숲 속에서, 빛은 밝음과 어둠의 구획을 쓰다듬어서 녹여버린다. 그래서 숲 속의 키 큰 나무들은 그림자도 없이 우뚝우뚝 홀로 서 있다. 스며서 쓰다듬는 빛이 나무와 나무 사이에 가득 내려쌓여 숲은 서늘한 음영에 잠긴다.

  숲 속으로 걸어 들어가면, 숲의 빛은 물러서듯이 멀어지고, 멀어지면서 또 깊어져서 사람들은 더 먼 빛 속으로 자꾸만 빨려 들어간다. 나무와 나무 사이의 거리는 멀지도 가깝지도 않다. 키 큰 나무들은 알맞은 거리로 뚝뚝 떨어져서 서 있다. 식물사회학을 보니까, 나무들도 살기 다툼의 결롸로써 개체간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쓰여 있는데, 키 큰 나무들 사이의 거리는 오히려 다툼이 아니라 평화의 모습으로 서늘하다. 키 큰 나무들은 저마다 개별적 존재의 존엄으로 우뚝하고 듬성듬성하다.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부는 날, 숲의 온갖 나무들은 함께 젖고 함께 흔들지만, 비가 멎고 바람이 잠든 아침에 숲을 찾으면 젖은 나무들은 저마다 비린 향기를 품어내고, 잎 사이로 흔들리는 아침 햇살 속에서 나무들은 다들 혼자서 높다. 나무들은 뚝뚝 떨어져서 자리잡고, 그렇게 떨어진 자리에서 높아지는데, 이 존엄하고 싱그러운 개별성을 다 합쳐가면서 숲은 저절로 이루어진다.

  숲을 문화의 테두리 안에서 해석하려는 말들이 점차 활기를 띠고 있다. 책도 여럿 나왔고 숲이 좋아서 숲으로 가는 사람들의 모임도 생겼다. 숲을 문화적으로 해석하는 사유는 결국 숲과 인간과의 관계를 성찰하는 일이 될 터인데, '숲의 문화론'은 숲이 문화가 아니라 자연이라는 전제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숲은 가까워야 한다. 숲은 가까운 숲을 으뜸으로 친다. 노르웨이의 숲이나 로키 산맥의 숲보다도 사람들의 마을 한복판에 들어선 정발산 (경기도 고양신 일산동)의 숲이 더 값지다. 숲은 가깝고 만만하지만, 숲이 사람을 위로할 수 있게 되는 까닭은 그곳이 여전히 문화의 영역이 아니라 자연이기 때문이다.

  숲은 시간은 헐겁고 느슨하다. 숲의 시간은 퇴적의 앙금을 남기지 않는다. 숲의 시간은 흐르고 쌓여서 역사를 이루지 않는다. 숲의 시간은 흘러가고 또 흘러오는 신생의 순환으로서 새롭고 싱싱하다. 숲의 시간은 언제나 갓 태어난 풋것의 시간이다.

  사진작가 강운구가 새로 펴낸 책 [사진과 함께 읽는 삼국유사]는 오래되어서 새로운 숲의 빛을 보여준다. 일연(1206-1289)의 옛 글에 강운구의 요즘 사진을 합친 책이다. 지나간 역사의 무덤 위에, 지금 살아 있는 숲의 빛이 내리쬐고 있다. 계림의 숲과 포석정의 숲이 다르지 않고 반월성의 숲과 남산의 숲이 다르지 않다. 그리고 김춘추 무덤가의 숲과 계백 무덤가의 숲이 다르지 않다. 옛 무덤들은 오늘의 빛으로 푸르게 빛난다.

  7세기 통일전쟁의 살육 들판은 백 년이 넘도록 피에 젖어 있어서, 김부식(1075-1152)의 기록에 따르면, 피가 강을 이루어 방패들이 피에 떠내려갔다. 이 살육의 산하에 뼈를 갈면서, 김춘추와 계백은 그들의 승패와 관련 없이 얼마나 상처받고 고단한 사내들이었으랴. 이 피에 젖은 사내들의 삶은 역사를 이루었고, 그들 무덤가의 숲은 역사를 이루지 않았지만, 지금 저 남쪽의 숲 속에서는 역사가 아닌 것이 역사인 것을 위로하고 있다. 무덤들은 성긴 숲 속에 안겨서 다만 숲의 일부로 귀순하고 있고, 숲은 무덤들의 정치적 갈등을 이미 다 사면해 주었다. 사람이 숲을 사람 쪽으로 끌어당기려 할 때 숲은 사람을 숲 쪽으로 끌어당기는 것인데, 이 밀고 당기기 속에 위안은 있다.

  1996년 봄의 고성 산불은 무서웠다. 산꼭대기에서 발화한 불은 산맥을 넘어가는 바람을 올라타고 바다 쪽으로 내려갔다. 그때 불에 타서 죽어버린 숲은 이제 겨우겨우, 그러나 기어이 다시 살아나고 있다. 사람들이 나무를 옮겨심지 않은 산비탈이 고지에도 땅속에  숨어서 죽지 않은 움이 솟아오르고, 바람이나 새똥에 실려온 풀씨들이 뿌리를 박고 싹을 튀웠다. 풀뿌리들이 자리를 잡자 빗물에 씻기는 모래가 덜 흘러내리게 되었고, 머지않아 키 큰 나무들이 저절로 들어서게 될 것이었다. 죽었던 숲은 자신을 치유하는 재활의 힘으로 새로운 살림을 예비하기 시작했다. 불에 타죽은 나무들은 바람 부는 방향으로 모조리 쓰러져 시커멓게 썩어가고 있다. 개미떼만 들끓는 이 과거의 숲 속에서도 미래의 키 큰 나무들은 듬성듬성하고 우뚝우뚝할 것이다. 숲은 의사도 없이 저절로 굴러가는 재활병원이고, 사람들은 이 병원의 영원한 환자인 셈이다.

  여름 휴가의 풍경은 피난 행렬과도 같다. 남부여대해서 어린아이 손을 잡고 젖병 물병 얼음통을 챙겨서 가고 또 간다. 생활을 좀 밀쳐내기란 이처럼 어렵다. 지금 오대산의 전나무숲이나 치악산의 소나무숲, 담양의 대나무숲은 얼마나 깊고 푸르고 그윽할 것인가. 너무 멀고 또 길이 막히니 갈 수 없기가 십상이다. 산다는 일의 상처는 개별성의 훼손에서 온다. 삶은 인간을 완벽하게도 장악해서 여백을 허용치 않는다. 멀고 깊은 숲에 갈 수 없다면, 우리 마을 정발산 숲 속으로 가자. 숲은 마을 숲이 가장 아름답다. 거기서 삶과 인간들을 멀리 밀쳐내고 키 큰 나무처럼 듬성듬성 우뚝우뚝 서서 숨을 좀 쉬어보자. 정발산에는 키 큰 나무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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