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dailylife

이야기가 더해진 사진 - 인사동 쌈지길

그림자세상 2009. 6. 14. 14:06

 

인사동 쌈지길을 다녀온 날,

조금 막혔던 벽이 뻥 뚫렸다....

길 때문이 아니라 함께 한 시간으로 인해.

 

사진은 시이며 수필이다.

 

  전부를 보여줄 수 없다는 면에서 또한 리듬을 타야 한다는 점에서 사진은 시에 가깝다.

  주어와 서술어를 몽땅 다 넣고 나면 사진이라 할 수 없다.

  한 장의 사진에 이야기의 기승전결을 모두 넣을 수 없다.

  정서적으로 호소하고 가슴으로 읽을 수 있는 것이 사진이다.

 

      (곽윤섭, [내 사진에 힘을 주는 101가지 이야기], 동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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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동으로 이 나들이를 하기 전 은지와 나는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일차적으로 지난 겨울 이후, 갑작스럽게 변화한 몇가지 환경이 그 원인이었다.

14년 동안 같은 방에서 생활하면서 한번도 떨어져 지낸 적이 없었던 언니가

기숙학교로 들어가게 되면서 은지는 방을 혼자 쓰게 되었다.

그 무렵 엄마도 일을 시작하면서 또 많은 낯선 시간이 은지에게 남겨졌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와 홀로 지내야만 하는 시간들은 은지에겐 낯설고 힘들었을 터.

눈에 띄게 짜증과 근심이 늘었다.

아침에 학교를 가기 전이면 언제나 우리가 언제 돌아오는지 시간까지 확인하곤 했다.

정이 많고 감성적인 아이여서 겉으로 드러나는 것보다 마음의 동요는 훨씬 컸으리라.

 

나와 서먹서먹하게 되었던 더 결정적인 이유는

어느날의 사소한--그러나 전혀 사소하지 않은--상황 때문이었다.

의기소침해 있던 은지에게 위로한다고 걱정스럽게 다가가 이야기를 시작한 내게

은지는 나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요구를 했다.

물론 받아들이기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었으나

적어도 현재의 나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물론 은지가 그런 정도로까지 생각하고 내게 말을 했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더러 지나친 내 진지함이 문제였을 것이다.

나는 은지에게 정색을 하며 말했다.

 

"은지의 요구는 아빠가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야.

 은지의 마음을 모르진 않지만 아빠로서도 그렇게 할 수는 없다.

 은지가 그런 이유로 아빠에게 섭섭해 하고 요즘처럼 말을 하지 않는 것이라면

 미안하지만 아빠도 지금은 어쩔 수 없다."

 

 따져보면 무슨 대단한 요구는 아니었다.

 은지가 그 다음까지 다 생각하고 그렇게 말했던 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은지가 그러했듯이 나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던 터라 그랬을 것이다.

 그리고 나와 은지의 대화는 끝났다.

 한참 그렇게 지냈다.

 일상적인 생활은 변함없는 것 같았으나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은지도 그랬을 것이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은지는 나처럼 그렇지는 않았단다^^*~ 

 뭐 나만 오버만 셈이지만, 하여간 그 말을 듣고 마음이 쑥 가벼워졌던 기억이 새롭다....-- 

 하여간 한달여 가까이 전과는 다른 냉랭한 관계가 우리 둘 사이에 흘렀다.

 은지도 힘들었겠지만 나 또한 힘들었다.

 미안하기도 했다.  

 무언가 돌파구가 필요했다.

 어찌해서건 자연스럽게 마음속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필요했다.

 

 문봉선 화백의 전시회에 다녀왔던 나는 은지에게 그 그림을 같이 보러가자 했다.

 그러면서 가는 길에 몇 군데 더 들러서 그림들 더 보고  사진도 찍자 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사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뜻밖에 은지는 승락했고

 나는 날았다. 

 이 인사동 행은 그렇게 나선 나들이였다.

그런 연유로 이 사진은 참 마음에 드는 사진이다.

어쩌면 바로 그 순간 은지와 나, 우리 둘의 관계를 잘 보여주고 있는 사진같기도 하다^^*~ 

 

사진 속 은지 표정은 자연스러움과 설정의 조화이다.

저 직전까지 우리는 파고다 공원을 들렀다가

문봉선 화백 전시회가 열리던 선화랑에서 긴 시간을 보내고

두어 군데의 화랑을 지났다.

인사동 입구에서 카메라를 넘겨받은 은지는

어귀의 카페 앞에 놓인 화분이며 인사동 거리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신나했다. 

아프리카로 간 샤갈전을 보다가 사람 없는 화랑 바닥에 앉아

그동안의 이야기와 또 앞으로의 이야기도 길게 나누었다. 

은지와의 서먹한 관계, 또 은지에게 무지 매정하게 말했던 것 같은 걱정 때문에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의 이야기를 듣던 은지는

자기는 그렇게 까지는 아니었다며 조금 놀라는 기색이었다.

아주 조금 미안해 하기도 한 것 같고^^*~

여기 이 쌈지길에 와서 은지는 내 사진을 비롯해 몇장의 사진을 재미있어 하며 찍었다.

 

그리고 들어간 이곳 갈피에서

비싸지만 얼음말고 든 것 없는 빙수를 먹었다^^*~

그 빙수, 어떤 빙수보다 맛있었다.

음식이 어디 맛으로만 먹는 것인가.

그 빙수를 맛있다고 기억하게 된 것,

갈피는 은지에게 고마워해야 한다.

 

나는 종이 한장에 은지와의 나들이를 적어 탁자 위 유리 밑에 밀어넣고

은지는 카페 안의 사진을 찍었다.

 

그렇게 이 길을 걸어나오면 한달여 넘게 이어졌던 은지와 나의 불편하고 어색했던 시간을 벗어버릴 수 있었다.  

이번 방학에는 은지와 함께 사진 찍으러 다닐 기회가 많아질 것 같다.

생각만으로도 행복하다.

 

엊그제 도덕숙제라며 부모들이 몇마디 하고싶은 말을 적어야 한다며 공책을 내밀었다. 

아침 일찍 다른 일로 분주하던 나는 후다닥 그 빈 칸에 주루룩 내 말을 쓰다가

왼편 아래에 깨알같이 쓰인 몇줄의 글을 봤다.

아마 도덕시간에 자기의 꿈, 이런 것에 대해 적는 시간이 있었나 보다.

자세히 다 보지는 못했으나 한 가지는 분명했다.

은지의 꿈은 사진작가가 되어 있었다.

요리사, 작가에서 사진작가가.

 

어제--나는 6월 25일 오후에 이 글을 쓰고 있다-- 그 이야기를 물어보았더니

은지는 이날 인사동 다녀온 뒤로 사진작가가 되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단다.

여행을 다니면서 기록하는 여행 사진작가.

"멋진 꿈"이라 했다.

("좋긴 한데, 꼭 좋은 꿈만은 아닌 것 같은데^^*~" 한 사람도 있다, 밝힐 순 없지만, ㅋㅋ^^*~)

 

그런들 어떤가.

나는 이날 은지에게 꿈을 하나 만들어 준 것, 이라며 우쭐댔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내 입은 귀에 걸렸다.

 

햇살은 따갑지만 열어둔 거실이며 뒷창으로

바람은 적당히 들어와 술술 통하고 있다.

 

내 입이 귀에 걸리게 한 은지는 지금 학교에서 돌아와 교복도 안 갈아입고

소파에 비스듬히 기댄 채 텔레비젼을 보고 있다.

 

내 책상에서 어렴풋이 은지의 다리가 보인다.

 

나는 살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