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s and Writings/문학작품

[스크랩] 시간과 타자 - 레비나스

그림자세상 2009. 12. 5. 13:43

LE TEMPS ET L'AUTRE(시간과 타자)

 

- Emmanuel Levinas, 강영안 옮김, Fata Morgana, 1979


차 례

서문 / E. 레비나스

시간과 타자

제1강 강의 주제와 구도 / 존재의 고독
존재자가 없는 존재 / 홀로서기
고독과 홀러서기 / 고독과 물질성

제2강 일상적 삶과 구원 / 세계를 통한 구원 : 먹거리들 /
빛과 이성의 초월

제3강 노동 / 고통과 죽음 / 죽음과 미래 /
사건과 타자 / 타자와 타인 / 시간과 타인

제4강 할 수 있음과 타인과의 관계 / 에로스 /
생산성

해설 : 레비나스 철학 / 강영안
1. 레비나스 철학의 근본 물음
2. 존재 부조리의 경험과 주체의 출현
3. 향유, 거주 및 노동
4. 타인의 얼굴
5. 인간 존재와 죽음, 그리고 죽음 저편
6. 맺음말


서 문


30년 전에 출판한 글을 다시 발간하면서 서문을 쓴다는 것은 남이 쓴 책에 서문을 붙이는 것과 거의 다를 바 없다. 이 속에 담긴 결함들을 더 빨리 알아보고 그것을 더욱 곤혹스럽게 느끼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여러분들이 읽게 될 텍스트는 {시간과 타자(Le Temps et l'Autre)}라는 제목으로 네 번에 걸쳐 했던 강의를 속기로 정리한 내용이다. 이것은 카르티에 라탱[파리의 한 지명] 복판에 있던 장 발(Jean Wahl)의 '철학학교(Coll ge Philosophique)'에서 1946∼47년 사이에 했던 강의이다. 그때는 이 학교가 돌아가기 시작한 지 1년이 채 되지 않았을 때였다. 이 텍스트는 '철학학교' 총서 가운데 제1집(1948년)으로 나온 {선택, 세계, 실존(Le Choix, le Monde, l'Existence)}에서 처음으로 빛을 보게 되었는데 기쁘게도 잔느 헤르쉬(Jeanne Hersch), 알퐁스 드 발른스(Alphonse de Waelhens), 장 발의 글과 나란히 실릴 수 있었다. 이 글은 구어체로(또는 문체가 없이) 되어 있기 때문에 갑자기 화제가 바뀌거나 어색한 경우가 상당히 많다. 그 외에도 컨텍스트를 충분히 제시하지 못한 논제들, 끝까지 탐색해 보지 못한 단초(端初)들, 좀더 체계적으로 전개하지 못한 생각들이 이 글 속에 있다. 1948년의 서문에서도 벌써 이러한 결함을 지적하고 있는데 텍스트의 노화(老化)로 인해서 이 점이 아마도 더욱 분명히 드러나리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책으로 다시 편집해서 내자는 생각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텍스트를 새롭게 고쳐쓰는 일은 포기하였다. 그렇게 한 까닭은, 우리는 아직도 원래의 기본적 기획을 지지하고 있고 이 텍스트는 다양한 사상의 흐름 가운데서도 이러한 기획의 발생과 최초의 표현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처럼 지나치리만큼 서둘러 쓴 글에 들어갈수록 이와 같은 설명은 그만큼 굳어진다.

시간은 유한한 존재의 진정한 한계인가, 아니면 유한한 존재의 신(神)과의 관계인가? [시간은] 유한성과 반대로 무한성을, 결핍에 반대해서 자족성을 존재자에게 보장해 줄 수 없는 관계, 하지만 만족과 불만을 넘어서 덤으로서의 사회성을 뜻하는 관계이다. 시간에 관해서 어떻게 물음을 던져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은 오늘도 여전히 살아 있는 문제로 보인다. {시간과 타자}는 시간을 존재자의 존재(l' tre de l' tant)라는 존재론적 지평이 아니라 존재 저편(l'au del de l' tre)의 방식으로, 다시 말해 타자에 대한 <사유>의 관계로 예감한다. 시간은, 예컨대 에로티시즘, 아버지의 존재, 이웃에 대한 책임과 같은, 타인의 얼굴 앞에서의 사회성의 여러 형식들을 통해서 경험할 수 있는 관계요. 전적으로 다른 이, 초월자, 무한자와 가질 수 있는 관계이다. [이러한 관계는] 앎, 즉 지향성으로 구조화되지 않은 관계 또는 종교(relation ou religion)이다. 지향성은 표상, 즉 다시 현재화하는 행위(re-pr sentation)를 내포하기에 타자를 현존으로, 현존에 함께 귀속한 자로 환원시키고 만다. 하지만 시간은 이와는 정반대로 그 통-시성(通時性,dia-chronie) 가운데서 타자의 타자성을 해치지 않으면서 오히려 <사유>에 대해 무관심하지 않도록 보장해 준다.
유한한 존재자의 존재 양태로서의 시간은 결국 존재자의 존재를 각 순간으로 분산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 순간은 다른 순간을 배제하고, 더구나 불안정하거나 또는 자신에게 불충실한 것으로서 다른 순간들을 과거로, 즉 그것의 진정한 현존 밖으로 하나씩 밀어내어 버린다. 그렇지만 동시에 의미와 무의미, 삶과 죽음을 암시하는 그러한 현존에 대한 번쩍이는 이념을 제공해 주기로 한다. 하지만 지성이 지속을 체험해 보지 못하고서는 영원성에 대한 이념을, 즉 존재방식 ― 이 안에서 다(多)는 일(一)이 되고 현재에 완전한 의미가 부여된다 ― 에 대한 이념을 미리부터 소

유하고 있다고 자처한 결과, 영원성은, 시간을 초월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상상에 빠진 채, 어느 한순간의 불꽃임을, 반쪽 사실에 불과함을 드러내고 있으며, 항상 회집(會集)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다고 꿈꾸고 있다는 혐의를 받아 오지 않았는가? 이러한 영원성과 지성적 신(神)은 결국에는 추상적이고 불안정성, 시간적 분산의 반쪽 순간으로 짜인 것으로서 추상적 영원성이요, 죽은 신이 아닐까?
이와는 반대로 {시간과 타자}에서 소략하게나마 제시하고자 했던 주요 사상은, 시간을 사유하되 그것을 영원성의 타락[박탈]으로 사유할 것이 아니라 그 자체 동화(同化)할 수 없는 것, 절대로 다른 것, 경험에 의해서 동화할 수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것, 또는 그 자체 무한한 것, 개념적 이해에 스스로를 내맡기지 않는 것과의 관계로서 사유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이 '무한자' 또는 이 '타자'는 마치 손가락으로 하나의 단순한 객체를 가리키듯이 그렇게 지시 대명사 '이'로 가리키거나 또는 구체적인 모습을 갖도록 하기 위해 정관사나 부정관사를 붙일 수는 있어야 한다. 보이지 않는 것 또는 비가시성과의 관계는 절대 타자의 무한성에 대해서 인간 인식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인식 그 자체가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그것의 부적합성으로 인해서, 일치의 사건과 같은 그러한 사건이 여기서 가질 수 있는 부조리로 인해서 생긴 것이다. 일치의 불가능성, 부적합성, 이것은 단순히 부정적 개념이 아니라 시간의 통-시성 안에 주어진 불일치의 현상 가운데서 의미를 가지는 개념이다. 시간은 이 불일치가 언제나 있음을 뜻하고 또한 갈증과 기 다림의 관계가 언제나 있음을 뜻한다. 이것은 관념적인 실[絲]보다 더 가느다란 실, 통시성에 의해 끊어지지 않는 실이다. 통시성은 이 실을 관계의 역설 가운데서 보존한다. 그런데 이 관계는 최종적 공동체로서 그 관계항에 최소한 공시성을 제공하는 우리의 논리학과 심리학의 관계와는 전혀 다른 관계이다. 관계항이 없는 관계, 기대되는 것이 없

는 기대, 해갈할 수 없는 갈증이 여기에 있다. 거리가 있으면서 동시에 가까움, 하지만 어떤 실재한 연합이나 일치가 아니라 앞에서도 말했듯이 전적으로 덤으로 주어진 것 또는 전적으로 근원적 사회성의 선(善)을 뜻하는 것. 공시성보다 더한 통-시성, 주어진 사실보다 더 값진 가까움, 자기 의식보다 더 좋은, 동등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충성 이것이 바로 종교의 난점이며 동시에 숭고함이 아닌가? <거리-가까움>에 대한 이러한 묘사는 하나의 근사치나 또는 은유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시간의 통-시성은 비유적인 것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요, 모델이 되기 때문이다.
시간을 <전적 타자>의 무한한 것에 대한 초월로 이해할 때 시간의 <운동>은 직선적 방식으로 시간화되지 않으며 곧게 뻗어가는 지향적 광선을 닮지 않는다. 시간의 의미화 방식은 죽음의 신비라는 그 특징을 통해 다른 사람과의 관계의 윤리적 모험 안에 들어옴으로써 하나의 우회로를 만든다.

1948년의 이 글에서는 시간 안에서의 초월에 관해서 간단하게 묘사했을 뿐이었고 그것도 기껏해야 예비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여기서 지침이 되었던 것은 통-시성으로 지칭되는 초월과 타인의 타자성에 개입된 거리 사이에 존재하는 유사성이었으며 또한 초월의 사이 공간을 가로지르는(각 관계항의 연결과는 비교할 수 없는) 연결에 대한 강조였다.
우리는 이러한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서 이 책에서 따랐던 여정(旅程)을 다시 수정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이것은 해방 직후 몽타느 생트-주느비에브가 제공했던 다시 시작하는 분위기를 증언해 주는 것을 보인다. 장 발의 '철학학교'는 이러한 분위기를 반영하고 또한 이러한 분위기를 만들어 낸 중심지 가운데 하나였다. '철학학교' 강의실을 꽉 메우기에 이른 청중들에게 블라디미르 얀켈레비치(Vladimir Jank l vitch)가 베르크손적인 메시지의 전대미문성[새로움]에 관해서 말할 때, 말할 수 없는 것을 말로 표현할 때, 고상하고도 감동적으로 말하는 그의 모습은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것이었다. 장 발은 <살아 있는 철학> 안에서의 다양한 경향들을 환영하면서 철학과 다양한 예술 양식 사이의 특별한 유사성을 강조하였다. 그는 여기저기로 넘나들기를 좋아하였다. 그의 태도는 과감한 <지적 실험>으로, 위험한 탐험으로 사람들을 초대하는 것으로 보였다. 후설의 현상학, 사르트르(J. P. Satre)와 메를로-퐁티(M. Merlau-Ponty)로 인해 도입된 실존철학, 그리고 하이데거의 기초 존재론의 소개는 그 당시 새로운 철학적 가능성을 약속해 주었다. 사변적 담론으로 상상해 보려고 하지 않았던, 그럼에도 언제나 사람들의 관심사였던 문제를 지칭하는 어휘들이 범주의 위치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사람들은 단도직입적으로, 때로는 사전의 주의 없이 말할 수 있었고 아카데미즘의 규칙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사람들은 당시 유행하던 말들의 횡포에 말려들지 않고서도 스스로 생각을 <깊이 파 보고>, <검토해 보

고>, 또는 <탐사해 볼 수 있었고> 그것을 타인에게 제안할 수 있었다. 가브리엘 마르셀(Gabriel Marcel)은 그의 {형이상학적 일기}에서 이러한 낱말들을 자주 쓰고 있다.
{시간과 타자}안에서 등장하는 여러 주제들은 처음 시작했던 해의 정신을 배경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주제를 통로로 삼아(때로는 돌아가기도 했지만) 우리가 하고자 하는 것은 주요 주장을 다루었다. 주체성에 관해서는, 자아는 존재의 익명의 있음(il y a)을 지배한다는 것, 자기(Soi)는 자아(Moi)로 곧장 되돌아온다는 것, 자아는 자기 자신에 의해 방해받는 것, 그리하여 유물론자의 물질성과 내재의 고독에 사로잡힌다는 것, 노동과 아픔과 고통 가운데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의 짐을 짊어진다는 것 등을 말하였다. 이어서, 세계에 관해서는 먹거리[양식]와 양식을 통한 초월, 향유 가운데서의 경험, 자기 자신과 자기로의 복귀, 전 타자를 자신 안으로 흡수하는 인식의 빛 안에서의 고독, 본질적으로 하나(一)인 이성의 고독에 관해서 말하였다. 그 다음, 죽음에 관해서 말한 것은 죽음이란 단순한 무(無)가 아니라 소유할 수 없는 신비이며, 이러한 의미에서 내재의 동일자(le M me) 속을 침투하며, 고독화된 순간의 단조로움과 똑딱거리는 시계소리를 깨뜨릴 수 있는 사건의 발생 가능성이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전적으로 다른 것, 미래, 시간의 시간성의 발생 가능성이다. 여기서 통-시성은 바로 절대적으로 밖에 있는 것과의 관계를 지칭한다. 끝으로, 타인, 여성적인 것, 아이에 대한 관계에 관해서, 자아의 생산성(f condite), 통시성의 구체적 존재 양태, 시간 초월의 분절과 불가피한 탈선에 관해서는, 동일자가 타자 속에 흡수되는 무아경(無我境)이나 타자를 동일자로 귀속시키는 지식이 아니라 관계 없는 관계, 채울 수 없는 욕망, 또는 무한자의 가까움임을 말하였다. 이러한 주장들은 훗날 모두 원래 그대로의 모습으로 다시 논의된 것은 아니었다. 이것들은 매우

복잡하고 오래된 문제들과 뗄래야 뗄 수 없다는 사실과 좀 덜 즉흥적인 표현과 또 다른 사유를 요구한다는 사실이 뒤에 가서야 좀더 분명하게 밝혀졌다.
옛 강의의 마지막 부분과 관련해서 중요하게 생각되는 점을 두 자기만 강조하고자 한다. 이것들은 타자성과 그의 초월에 관한 현상학을 시도해 본 방식과 관련되 것들이다.
인간의 타자성은 순전히 형식적이고 논리적인 타자성을 출발점으로 해서 사유되지 않는다. 형식적이고 논리적인 의미에서는 수많은 것들을 각각 그것의 개념에 따라 이것과 저것을 구별한다. (또한 각각은 처음부터 다른 속성의 담지자로서 이미 타자이다. 혹은 같은 개념 안에 존재하는 다수성은 각각 그것의 개별화에 따라 타자의 타자이다.) 초월적 타자성, 즉 시간을 열어 주는 타자성의 개념은 무엇보다도 내용의 타자성(alt rit -contenu), 즉 여성성을 출발점으로 해서 추구되었다. 여성성은(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남성성 또는 남성적인 것에 관해서, 다시 말해 성의 차이에 관해서 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알아보아야 한다) 다른 모든 차이와 구별되는 차이(diff rence)로, 단지 다른 모든 성질과 구별되는 하나의 성질로서뿐만 아니라 차이, 이 자체의 성질로 인한 차이로 우리에게 나타났다. 이러한 이념은 단순히 수적으로 둘이라는 사실과 구별되는 것으로서의 한 쌍(couple)의 개념을, 예외적인 얼굴(추상적이고 순수한 벌거벗음)의 현현에 아마도 필수적일 '둘만의 사회성'의 개념을 가능케 해 주었다. 얼굴은 성의 차이를 벗어나 있지만 에로티시즘에는 본질적인 요소이며, 여기서 타자성은, 단지 논리적 구별로서가 아니라 성질로서, 얼굴의 침묵 자체가 말하는 <살인하지 말라>는 말을 통해서 지탱한다. 에로티시즘과 리비도는 윤리적으로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에로티시즘과 리비도는 인류에게 '둘만의 사회성'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해 줄 뿐만 아니라 현대의 범(汎)에로티시즘이 보여주는 지나친 단순화를 적어도 문제삼을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해준다.
끝으로 우리는 {시간과 타자}에서 아버지의 존재를 통해서 살펴 본 초월의 구조를 강조해 두고자 한다. 아들에게 주어진 가능성은 아버지가 소유할 수 있는 차원을 넘어선 자리에 있지만, 그럼에도 어떤 의미에서는 여전히 그의 것으로 남아 있다. 이것은 바로 부모로서 볼 때 그렇다. 그의 것 ― 타자를 소유할 수 있는 가능성 : 아들을 통해서 가능한 것 너머의 가능성이 열린다! 차이가 없지 않음, 이것을 통해서 자아는 가능한 것 너머로 넘어갈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비생물학적 개념인 자아의 생산성에서부터 출발할 때, 지향적 행위의 중심이요, 원천으로서의 초월적 주체성으로 구체화된 할 수 있음(pouvoir)의 이념 자체를 문제삼는다.

제1강

강의 주제와 구도

시간은 주체가 홀로 외롭게 경험하는 사실이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 자체임을 우리는 이 강의를 통해 보여 주고자 한다.
이것은 사회학과는 전혀 무관한 논제이다. 사회로부터 빌려 온 개념을 이용해서 시간을 어떻게 쪼개고 다듬는지, 사회가 우리에게 어떤 방식으로 시간 표상을 가능케 하는지 하는 것을 말하자는 것이 아니다. 시간에 대한 우리의 관념보다 시간 그 자체를 다루고자 한다.
이 논제는, 한편으로 고독의 개념을 깊이 이해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시간이 고독에 제공하는 기회를 살펴볼 때 그 근거를 확보할 수 있다.
우리가 하고자 하는 분석은 인간학적인 것이 아니라, 존재론적인 것이다. 우리는 실제로 존재론적 문제와 존재론적 구조가 있다고 믿는다. 이것은 실재론자들이 존재론에 부여한 뜻, 즉 주어진 존재를 순수하고 단순하게 묘사한다는 뜻이 아니다. 존재는 빈 개념이 아니라는 것, 그 고유의 변증법을 가지고 있다는 것, 고독이나 집단성과 같은 개념은 변증법적 과정 중의 어떤 순간에 출현한다는 것, 고독과 집단성은 심리학적 개념만은 아니라는 것, 즉 타인에 대한 욕구[필요]나 그 욕구에 내재한 타자에 대한 사전 지식, 예감, 기대와 같은 것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해 보자는 것이다. 우리는 고독을 존재의 한 범주로 제안하고자 한다. 존재의 변증법 속에서, 아니면 ― 변증법이라는 단어가 너무 특정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면 ― 존재의 일반 경제 속에서 고독이 차지하고 있는 자리를 드러내 보이고자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리 주어진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고독에 접근하고자 하는 하이데거의 입장을 처음부터 거부한다. 이러한 입장은 인간학적으로는 이론의 여지가 없겠지만 존재론적으로는 매우 불분명해 보인다. 하이데거는 타인과의 관계를 현존재(Dasein)의 존재론적 구조로 설정한다.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 관계가 존재 드라마나 실존 분석론에서 아무런 역할

을 하지 않는다. {존재와 시간}은 일상적 삶의 비개인성[비인격성]을 분석하거나 홀로 있게 현존재를 분석하는 데 정성을 쏟고 있다. 그런데 고독이 지닌 비극적 성격은 죽음이 강조하고 잇는 타인의 상실이나 또는 무(無)에서 기인하는 것인가? 아무래도 여기에 애매성이 개입해 있는 듯하다. 여기에는, 사회성을 통해 고독을 정의하거나 고독을 통해 사회성을 정의하는 데 머물지 않고 그것을 정의하거나 고독을 통해 사회성을 정의하는 데 머물지 않고 그것을 뛰어넘어 보자는 권유가 들어 있다. 결국 하이데거에게 있어서 타자는 서로 함께 있음(Miteinandersein)의 본질적인 상황 속에서 나타난다. 함께(mit)라는 전치사는 여기서 관계를 묘사한다. 어떤 것 주변에 공통의 관계항을 중심으로, 하이데거의 경우에는 특히 진리를 한 가운데 두고 그것을 중심으로 서로 관계하는 방식을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얼굴과 얼굴을 마주한(face face)'관계가 아니다. 사람들은 모두 제 자신의 개별적인 실존 사실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여기에 쏟아 붓는다. 그런데 타자와의 근원적인 관계는 함께(mit)라는 전치사를 통해 묘사될 수 없다는 것이 우리의 입장이다. 이 강의를 통해 그것을 보여 줄 수 있기를 희망한다.
우리가 택한 작업 방법으로 인해 논의의 전개가 조금 어려워질 수도 있다. 인간학 논문에서 볼 수 있는 빛나는 열정을 여기서는 기대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그와 반대로 고독에 대해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집단성이야말로 행복이고 고독은 그것과 대립된 것이라 생각하는 습관이 사람에겐 있다. 하지만 우리는 불행한 것 또는 집단성과 대립된 것과는 다른 측면에서 고독을 논의할 수 것이다.
우리는 고독의 존재론적 뿌리를 찾아봄으로써 고독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고자 한다. 고독을 벗어날 길이 될 수 없는 것을 먼저 확인해 두자. 지식은 그러한 길이 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지식의 대상은

주체에 의해 흡수되고 이원성은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무아경도 그와 같은 방법은 아니다. 왜냐하면 주체는 무아경 속에서 대상 속에 흡수되고 그 속에서 하나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관계는 타자의 소멸에 이르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고통과 죽음의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이것이 멋진 주제이기 때문이 아니다. 유행에 어울리는 화려한 논의를 할 수 있기 때문도 아니다. 고독은 죽음이라는 현상 속에서 거의 신비의 경계에 이르기 때문이다. 신비를 알려지지 않은 것, 모르는 것 등의 부정적인 의미를 보여 주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개념을 통해서 우리는 주체 속에서 그의 고독의 순수하고 단순한 회귀로 환원되지 않는 관계를 파악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신비롭기는 하지만 반드시 무(無)라고는 할 수 없는 죽음 앞에서 어느 한 항(恒)에 의한 다른 항의 흡수는 발생하지 않는다. 죽음 앞에서 나타나는 이원성이 어떻게 타자와 시간과의 관계가 되는가 하는 것을 우리는 마지막으로 보여 주게 될 것이다.
이러한 전개 과정이 변증법을 포함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헤겔적인 것은 아니다. 우리의 논의는 모순을 가로지르는 일에 대해서, 역사를 화해시키고 멈추게 하는 일에 대해서 전혀 다루게 않는다. 우리는 오히려 통일성 안에 용해할 수 없는 다원론을 지향한다. 이것은 무모할지 모르나 어쨌든 파르메니데스와 결별하자는 시도이다.


존재자의 고독

고독의 아픔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우리가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진부하는 것들, 사물들이 우리를 에워싸고 있으며 우리는 이것들과 관계를 유지한다. 시각, 촉각, 동정, 공동 작업 등을 통해 우리는 타자와 함께 존재한다. 모든 관계는 타동사적이다. 나는 대상을 만진다. 나는 타자를 본다. 하지만 나는 타자가 아니다. 나는 완전히 혼자이다. 그러므로 내 안에서의 존재,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 나의 존재함은 어떤 지향성도 어떤 관계도 없는 절대적으로 자동사적인 요소를 구성한다. '존재한다'는 사실 외에, 우리는 어떤 존재자라도 서로 교환할 수 있다. 존재( tre)는 이런 의미에서 존재함(exister)에 의해 스스로 고립하는 것이다. 내가 존재하는 한, 나는 단자(monade)이다. 문도 창문도 없이 내가 존재하는 것은 '존재함' 때문이지 타인에게 전달할 수 없는 어떤 내용이 내 안에 있기 때문이 아니다. 만일 어떤 내용을 타인에게 전달할 수 없다면, 그것은 더 내밀한 사적인 면이 있는 나의 존재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 인식의 확장이나 표현 수단의 확장은 나의 '존재함'의 관계, 가장 내밀한 관계에 대해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우리의 개념은 원시인의 사고 방식에 의해 그 토대가 흔들리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적어도 레비-브륄(L vy-Bruhl)이 하고 있는 해석에 따르면 타동사적인 존재가 원시 사고에서는 가능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체는 참여에 의해서 타자를 볼 뿐 아니라 그가 곧 타자라는 인상을 받는다. '논리 이전'이나 '신화'라는 개념보다는 '참여'라는 개념이 원시인들의 사고 양식을 이해하는 데 훨씬 중요한 개념이다. 하지만 이것은 고독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주지 않는다. 적어도 현대의 의식은 주체의 비밀과 주체의 고독을 값싸게 쉽게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참여의 경험이 현실적일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그것은 무아경의 혼융과 일치한다. 무아경의 혼융은 관계하의 이원성을 충분히

유지하지 못한다. 단자론을 떠나면 우리는 일원론에 이르게 된다.
'존재함'은 모든 관계, 모든 복수성을 거부한다. 그것은 존재자(existant) 외에 아무도 보지 않는다. 고독은 로빈슨 크루소의 경우처럼 격리되었기 때문에 생기는 것도 아니고 의식 내용물을 타인에게 전달할 수 없기 때문에 생기는 것도 아니다. 고독은 존재자와 그의 존재 작업 사이의 뗄수 없는 통합으로 나타난다. 존재자 속에서 존재에 접근하는 것은 그것을 통일성 속에 가두는 것이고 후손들이 범하고자 했던 부친 살해를 파르메니데스가 피할 실을 터 주는 것이다. 고독은 존재자들이 있다는 사실 자체에 있다. 고독이 초월[극복]되는 상황을 이해하는 것은 존재자와 그의 '존재함' 사이의 연결 원칙을 시험해 보는 것이다. 이것은 존재자가 존재를 자신의 것으로 떠맡는 사건으로 가는 것이다. 존재자가 '존재함'을 자신의 것으로 떠맡는 사건을 나는 홀로서기(hypostase)라고 부른다. 지각과 과학은 항상 그의 사적인 '존재함'을 갖춘 존재자로부터 출발한다. 존재자와 그의 '존재함' 사이의 연결은 떼어 놓을 수 없는가? 홀로서기로까지 다시 돌아갈 수 있는가?


존재자 없는 존재

하이데거로 되돌아가 보자. 하에데거의 존재(Sein, tre)와 존재자(Seiendes, tant)의 구별을 여러분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앞에서 이 구별을 사용하였다. 하지만 나는 어감 때문에 존재(exister)와 존재자(existant)란 말을 쓰고자 한다. 이 용어에는 실존주의적인 의미가 전혀 없다. 하이데거는 주체들과 대상들을 구별한다. 존재하는 존재들, 곧 존재자를 존재자의 존재 작업 자체와 구별한다. 앞의 것은 명사나 명사화된 분사로 번역되고 뒤의 것은 동사로 번역된다.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 첫머리에서부터 하고 있는 이 구별로 인해 철학사의 흐름 속에 남아 있던 애매성이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 그 철학사의 흐름 속에서는 완전한 존재를 소유한 존재자, 곧 신에 이르기 위해 사람들은 존재한다는 사실에서 출발했었다.
존재와 존재장의 구별은 {존재와 시간} 가운데서 가장 심오한 사상으로 보인다. 하지만 하이데거에게는 구별이 있을 뿐 분리가 없다. 존재는 언제나 존재자 속에 붙잡혀 있다. 존재자 중에서도 인간에 대해 하이데거가 사용했던 <각자성(Jemeinigkeit, 각자의 것임)>이란 용어도 존재는 언제나 누군가에 의해 소유된다는 사실을 정확히 표현한다. 하이데거는 존재자 없는 존재를 인정할 수 없었다고 나는 믿는다. 존재자 없는 존재는 그에겐 불합리한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얀켈레비치가 <하이데거란 사람의 표현>이라면서 소개한 적이 있었던 게보르펜하이트(Geworfenheit, 던져짐)란 개념이 있다. 이 말은 통상 <버림받음(d r liction)> 또는 <저버림(d laissement)>으로 번역된다. 이것은 던져짐의 결과를 강조한 번역이다. 게보르펜하이트는 존재 <속에 던져져 있는 사실(fait-d' tre-jet -dans)>로 번역해야 한다. 그래서 마치 존재자는 선행하는 존재에서만 나타나는 것처럼, 존재는 존재라로부터 독립적인 것처럼, 따라서 던져진 것으로 있는 존재자는 절대로 존재의 주인

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이해되어야 한다. 바로 이 때문에 버림받음과 포기가 있다. 우리가 없이, 주체가 없이 있는 존재, 존재자 없는 존재의 관념이 이렇게 생겨난다. 장 발은 틀림없이 존재자 없는 존재는 그저 말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 것이다. '말(mot)'이란 용어는 경멸의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에 거북하긴 하지만 대체로 나는 발에게 동의한다. 다만 존재의 일반 경제 속에서 말의 위치를 미리 결정해야 할 뿐이다. 나도 존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다. 존재하는 것은 존재자이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통해 존재하는 이해하자는 것은 결코 철학에서의 혁명일 수 없다. 관념론적 철학은 결국 존재에서 나오지 않은 어떤 것에 존재를 근거지우는 방법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존재자 없는 존재에 어떻게 접근할 수 있는가? 모든 사물, 존재, 사람들의 무(無)로 돌아갔다고 상상해 보자. 그러면 우리는 순수 무를 만나는가? 상상 가운데서 모든 사물을 파괴해 보자. 그러면 그 뒤에 무엇이 남는가? 남는 것은 어떤 것, 어떤 사물이 아니라 단순히 있다(il y a)라는 사실뿐이다. 모든 사물의 부재는 하나의 현존으로 돌아간다. 모든 것이 무너진 장소로, 대기의 밀도로, 텅 빔의 가득 참으로, 침묵의 중얼거림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모든 사물과 존재들이 파괴된 후 존재하는 것들의 비인칭적인 <힘의 장(場)>이 있을 뿐이다. 주어도 아니고 명사도 아닌 것. 존재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 때, 스스로 부과하는 존재함의 사실. 이제 그것은 익명적이다. 이 존재를 자신의 것으로 수용하는 사물이나 사람은 전혀 없다. 있다는 <비가 내린다(il pleut)>, <날씨가 덥다(il fait chaud)>고 말할 때처럼 그렇게 비인칭적이다. 부정을 통해 떼어 낸다고 해도 그와 같은 존재는 되돌아온다. 어쩔 수 없는 순수 존재로 그렇게 있을 뿐이다.
존재의 익명성이라고 한 것은 철학 교과성서 흔히 무규정적 배경이라고 하는 것, 즉 하나의 사물 지각을

가능케 하는 배경을 생각하고 하는 말이 아니다. 무규정적 배경은 이미 한 존재자, 이미 존재하는 것, 이미 어떤 사물이다. 이것은 이미 명사의 범주 안에 들어간다. 존재자의 특징인 인격성도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다. 우리가 접근하려는 존재는 명사로 표현할 수 없는, 그 자체가 동사인 존재 작업 자체이다. 이 존재는 그저 단순하게 긍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언저ㅔ나 존재자라야 긍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존재를 부인할 수도 없기 때문에 그것은 스스로 존재 주장을 하는 셈이다. 모든 부정 뒷면에서 이 존재의 환경, <힘의 장>으로서의 존재가 모든 긍정과 모든 부정의 장으로 다시 나타난다. 그것은 존재하는 대상에 결코 매여 있지 않다. 그러므로 그것을 익명적이라고 부른다.
다른 측면에서 이 상황을 접근해 보자. 불면증을 생각해 보라. 이번에는 상상을 통한 경험이 아니다. 불면은 상태가 끝나지 않으리라는 의식, 즉 우리를 붙잡고 있는 '깨어 있음'의 상태를 벗어날 도리가 없다는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아무 목적도 없이 깨어 지키고 있는 상태, 여기에 묶여 있는 순간, 시작점과 종착점을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과거에 용접된 현재는 모두 과거의 유산이다. 그것은 아무것도 새롭게 하지 못한다. 지속하는 것은 언제나 동일한 현재이거나 동일한 과거이다. 기억. 이것은 이미 과거에 대해 하나의 해방일 수 있다. 여기서 시간은 어디서도 시작하지 않는다. 멀어지는 것도 없고 흐릿해지는 것도 없다. 밖에서 들리는 소음만이 내가 잠들지 않고 있음을 알려 준다. 시작도 끝고 없는 이 상황 속에, 앞에서 얘기한 비인칭적[비인격적] 존재, 즉 있다(il y a)고 할 수 있는 것과 흡사한 상황 속에, 도무지 빠져 나올 수 없는 불사성(不死性) 속에, 새로운 시작을 끌어들이는 것은 밖에서 온 소음뿐이다.
잠으로 돌아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깨어 있음은 있음(il y a)의 전형적인 성격을 보여 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무화(

無化)를 통해 자신을 주장하는 존재의 모습을 보여 준다. 깨어 있음, 이것은 무의식의 도피처가 없는 상태요, 개인의 내밀한 영역인 잠으로 되돌아갈 수 없는 상태이다. 이러한 존재는 이미 그 자체가 평화라고 할 수 있는 자기에게 있는 존재(en-soi)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자기(soi)의 부재이며 자기 없는(sans-soi) 상황이다. 존재자 없는 존재는 출발점이 없기 때문에 이러한 존재 성격을 우리는 영원이란 개념으로 표시할 수 있다. '영원한 주체'는 하나의 형용사 모순이다. 왜냐하면 주체는 이미 하나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영원한 주체는 자기 밖에서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만일 주체라면 그 자신이 시작이어야 하고 영원성을 배제해야 하기 때문이다. 영원성은, 그 영원성을 떠맡을 주체가 없기 때문에 평안한 휴식을 취할 수 없다.
무(無)가 존재로 전화하는 것을 우리는 하이데거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다. 하이데거의 무(無)는 어떤 활동성과 존재 성격을 여전히 지니고 있다. 무는 무를 만든다(le n ant n antit). 무는 조용히 머물러 있지 않는다. 무는 이렇게 무를 생산하는 가운데 자신을 긍정한다.
하지만 있다라는 개념은, 만일 고전 철학의 큰 주제 가운데서 가장 가까운 예를 든다면 아마도 헤라클레이토스에게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목욕할 수 없다는 얘기보다 {크라틸로스}를 통해 전해 오는 것처럼 단 한번도 헤엄칠 수 없는 흐름에 관한 얘기를 생각해 보라. 흐름 속에서는 존재자의 형식인 개체의 지속성 개체가 불가능하다. 여기서는 생성[변화]을 이해할 수 있는 가장 기초적인 요소인 지속성이 사라진다.
있다라고 이름붙인 이 '존재자 없는 존재'는 홀로서기가 발생하는 자리이다.
이러한 입장이 가져올 결과를 좀더 부연해서 강조해 두자. 이것은 '무가 없는 존재( tre sans n a

nt)', 즉 '열어 줌도 없고 벗어날 수도 없는 존재'라는 개념을 가능케 해 준다. 무의 불가능성은, 우리가 마지막으로 존재에 대해 지배할 수 있는 가능성인 자살에서마저도 그 지배 기능을 앗아 간다. 우리는 더 이상 아무 것도 지배할 수 없다. 우리는 말하자면 부조리속에 있다. 자살은 부조리에 대항한 최후의 수단으로 보였다. 싸움의 무용성을 깨달은 순간에도, 절망적이면서도 눈을 부릅뜨고 싸운 맥베스의 행위도 넓은 의미로는 자살의 범주 안에 포함된다. 자살 가능성을 통해 존재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끊임없이 비극의 자료가 된다. {로미오와 줄리엣}3막에서 "모든 게 끝장나도 내겐 아직 죽을 힘이 있어!"라고 외친 줄리엣의 외침은 아직은 운명을 버텨 이겨내고 있다는 뜻이다. 비극은 단순히 자유에 대한 운명의 승리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운명이 이긴 것처럼 보이는 순간, 그 개인은 스스로 받아들인 죽음을 통해 운명을 벗어나 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이 점에서 햄릿은 비극보다 더 비극적이었다. 그것은 비극의 비극이었다. 그는 <존재하지 않음(not to be)>이 아마도 불가능하며 자살을 하더라도 부조리는 어쩔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어쩔 수 없는 존재', '탈출구 없는 존재'는 존재의 근본적인 부조리를 보여 준다. 존재는 악이다. 존재는, 유한하기 때문이 아니라 한계가 없기 때문에 악이다. 하이데거는 불안을 무의 경험으로 보았다. 하지만 만일 죽음이 무라면 죽을 수 없다는 사실 자체가 불안이 아닐까?
있다는 사실을 깨어 있음을 통해 그려내는 것은 단순히 존재한다는 사실에 의식을 부여하는 것처럼 역설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깨어 있음이 의식을 규정하지 않는지, 잠들지 않고 깨어 있음을 떨쳐 버릴 수 있는 가능성이 곧 의식이 아닌지 우리는 물어 보아야 한다. 의식의 고유한 의미는 숙면에 들 수 있는 가능성에 기대 있는 깨어 있음에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능력이 아닌지 물어 보아야 한다. 의식은 이미

깨어 있음에 참여한다. 하지만 의식을 의식으로서 규정하는 것은 잠자기 위해서 <뒤로> 물러날 수 있는 가능성을 늘 봉유하는 것이다. 의식은 잠잘 수 있는 능력이다. 충만 안으로의 도피는 의식의 역설과 같은 것이다.


홀로서기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의식이란 익명적인 있음(il y a)의 깨어 있음으로부터의 결별이고, '홀러서기'이며, 한 존재자가 그의 존재와 관련을 맺기 시작한 상황을 지칭하는 그러한 사실을 말해 준다. 의식이 왜 생겨나는가 하는 것은 우리로서는 뚜렷이 설명할 재간이 없다. 형이상학에는 물리학이 없다. 우리는 그저 홀로서기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 줄 수 있을 뿐이다.
<존재한는 어떤 것>[존재자]의 출현으로 익명적인 존재 사건의 중심부에 전혀 새로운 전환이 일어난다. 존재자는 존재는 속성으로 가지며 주어가 술어의 주인이듯이 존재의 주인이 된다. 존재는 존재자의 소유가 된다. 존재자는 존재 지배를 통해서 홀로 서게 된다. 하지만 홀로, 독점적으로 존재를 지배하는 데는 홀로 서게 된다. 하지만 홀로, 독점적으로 존재를 지배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이것에 관해서는 조금 뒤 곧 알게 될 것이다). 좀더 엄밀히 말하자면 존재자의 출현은, 원래 그것만으로는 익명적으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는 존재 안에서 지배와 자유가 성립되는 사건이다. 익명적 존재 속에 어떤 존재자가 들어서기 위해서는 자기를 떠났다가 다시 자리에게 복괴하는 일이 가능해야 한다. 즉 자기 동일성의 작업자체가 가능해야 한다. 존재자는 자기 동일성 확인을 통해서 다시 자신 속에 닫히게 된다. 이러한 존재자는 단자이며 고독이다.
홀로서기의 사건, 이것은 현재이다. 현재는 자기로부터 출발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가지로부터 출발이 곧 현재이다. 현재는 시작도 끝도 없는 무한한 존재의 씨줄에 생격난 하나의 균열[찢음]이다. 현재는 찢어내고 다시 맺는다. 현재는 시작한다. 그것은 시작 자체이다. 현재에는 과거가 있지만 기억의 형태로 간직하고, 역사가 있지만 그 자체는 역사가 아니다.
홀로서기를 현재로 설정하는 것은 존재 안에 시간을 끌어들이는 것은 아니다. 우리 자신에게 현재를 부여한다고 해서 연속적인 지속의 흐름 속에서 일정한

시간의 길이나 한 시점(時點)을 우리 자신이 갖는다는 뜻이 아니다. 언제나 이미 구성되어 있는 시간에서 절단해 낸 현재, 즉 시간의 한 요소를 말하자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비인칭적[비인격적]인 존재의 무한 속에 균역[찢음]을 일으키는 현재의 기능이다. 현재의 기능은 존재론적 도식과 같다. 그것은 하나의 사건이되 아직 무엇이라고 할 수 없고 존재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것은 어떤 것이 자기로부터 나오게 하는 존재 사건이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보면 이 사건은 동사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순수 사건이다. 하지만 허물벗기와 같은, 이미 어떤 무엇이고 이미 존재자인 어떤 것이 이 존재 안에 존재한다. 존재 기능으로서 이미 존재자로 변신한 장소인, 존재와 존재자의 경계선상에서 현재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현재는 <자기로부터 출발>을 실행하는 기능이다. 바로 이 때문에 현재는 항상 소멸한다. 만일 현재가 지속한다면 그것은 자신보다 선행하는 어떤 것에 의해 존재를 유지하는 것이 될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어떤 유산(遺産)의 덕을 보는 셈이다. 하지만 현재는 자기로부터 출발하는 어떤 것이다.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전혀 없어야 우리는 자신에서부터 비로서 출발할 수 있다. 소멸은 그러므로 시작의 근본적인 형식일 것이다.
하지만 이 소멸이 어떻게 어떤 사물에 이를 수 있는가? 이것은 이제 <나>라는 어쩔 수 없는 현상을 배제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려 내는 변증법적 상황이다.
철학자들은 언제나 <나>의 이중성을 인정하였다. <나>는 실체가 아니면서도 더할 나위 없는 존재자라는 것이다. <나>를 정신성으로 정의하는 것은, 만일 정신성을 속성과 동등하게 본다면, 사실 말해 주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이것은 <나>의 존재 양식에 대해서, 자아 안에서 전적인 혁신 능력을 배제하지 않는 절대자에 대해서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는다. 만일 이 능력에 절대적인 존재를 부여한다면 그 능력을 실체로

만드는 것이 될 것이다. 반대로, 자아를 홀로서기의 기능으로서, 존재와 존재자의 경계선상에서 포착한다면 변화 가능한 것과 불변하는 것 사이의 대립, 존재와 무라는 범주로 설정해 둔 경계를 자아는 이미 벗어나 있다. 이러한 역설은 자아란 애초 어떤 존재자가 아니라 존재 양식 자체이며, 엄밀히 말해서 자아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 곧장 사라지고 만다. 확실한 것은 현재와 <나>는 존재자로 전환되며, 우리는 이것으로부터 시간을 구성할 수 있고 시간을 존재자로서 소유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실체화된 시간(temps hypostasi )으로부터 칸트적이거나 베르크손적인 경험을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때 그것은 실체화된 시간, 이미 존재하는 시간에 대한 경험이다. 그것은 더 이상 존재와 존재자 사이의 도식적인 기능 속에서 '홀로서기'의 순수한 사건으로서의 시간이 아니다. 현재를 존재에 대한 존재자의 지배로 정립할 때, 그리고 존재에서 존재자로의 이행을 탐색할 때, 우리는 더 이상 경험이라 부를 수 없는 탐구의 차원에 있게 된다. 그리고 만일 현상학이 근본 근본경험에 대한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현상학조차 벗어나 있게 된다. 현재의 홀로서기는 홀로서기의 한 순간일 뿐이다. 시간은 존재와 존재자 사이의 다른 관계를 보여 줄 수 있다. 시간은 타인과 관계하는 사건 자체이며 현재의 일원론적 홀로서기를 넘어서서 다원론적 존재를 가능케 해 준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될 것이다.
현재, <나> ― 홀로서기는 자유이다. 존재자는 존재의 주인이다. 존재자는 그의 존재에 주체의 남성적 힘을 행사한다. 그는 자신의 힘으로 어떤 것을 소유한다.
최초의 자유, 그것은 아직 자유로운 선택의 자유가 아니라 시작의 자유이다. 이제 어떤 것으로부터 출발하는 존재가 있다. 모든 주체 속에 담긴 자유, 주체가 있고 존재자가 있다는 사실 속에 담긴 자유, 존재에 대한 존재자의 지배의 자유.


고독과 홀로서기

이 강의 서두에서 규정했듯이 존재자와 존재자의 존재 사이의 뗄 수 없는 일체성을 고독이라고 볼 때, 고독은 타인과의 모종의 관계를 전혀 전제할 필요가 없다. 고독은 타인과의 선행된 관계의 결핍으로 보이지 않는다. 고독은 홀로서기의 작업과 관련이 있다. 고독은 존재자의 일체성 자체이며, 존재 안에서 그 존재로부터 어떤 형식을 얻는 존재자가 있다는 사실이다. 주체는 하나이기 때문에 홀로 있다. 시작의 자유, 존재에 대한 존재자의 지배가 가능하려면, 요컨대 존재자가 존재하려면 고독이 있어야 한다. 고독은 절망이고 버림받음(放棄)일 뿐 아니라 남성적인 힘(virilit )이고 오만이며 주권이다. 오로지 절망을 통해 고독을 이해하고자 했던 실존주의적 해석이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에 낭만주의와 바이런 문학, 그리고 심리학에서 볼 수 있는 당당하고, 귀족적이며, 천재적인 고독에 대한 주제들은 모두 잊혀지고 말았다.


고독과 물질성

하지만 존재에 대한 주체의 이러한 지배, 존재자의 이러한 주권에는 변증법적 전환이 일어난다.
존재는 자신과 동일한 존재자, 즉 홀로 있는 존재자에 의해 지배된다. 하지만 동일성은 자기로부터의 출발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또한 자기로의 귀환이다. 현재란 자신에게 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존립한다. 자신을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은 존재자의 [존재자로서의] 자리잡기로 치른 대가이다. 존재자는 자신에게 몰두한다. 자신에게 이렇게 몰두하는 방식, 그것이 곧 주체의 물질성이다. 동일성은 자신과의 무해한 관계가 아니라 자신에게 얽매임(un encha nement soi)이다. 이것은 자신에게 몰두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시작은 자기 자신에 의해 짓눌린다. 이것은 꿈의 현재가 아니라 존재의 현재이다. 그가 진 책음은 곧장 자유를 제한한다. 여기에 커다란 역설이 있다. 자유로운 존재이면서도 자신에 대한 책임으로 인해 더 이상 자유롭지 못하다는 역설이다.
현재는 과거와 미래에 대해서 언제나 자유롭지만 자신과의 관계에서는 언제나 얽매임이다. 현재의 물질적 성격은 과거가 짓누른다거나 자신의 미래로 인해 불안해 한다거나 하는 사실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현재의 물질적 성격은 현재가 현재인 한, 현재와 결부된다. 현재는 존재의 무한한 흐름에 균열[찢음]을 만들었다. 그러므로 현재는 역사를 모른다. 현재는 지금에선 나온다. 그럼에도 또는 그 때문에, 현재는 자기 자신에 관여하며, 이를 통해 책임을 인식하고, 물질성으로 전환한다.
이와 같은 현상은 심리학이나 인간학에서는 나는 이미 자신에게 못박혀 있으며, 나의 자유는 은총처럼 가벼운 것이 아니라 이미 무거운 것이며, 자아는 어쩔 수 없이 자기라는 사실 등으로 표현된다. 나는 동어반복의 드라마를 만들어 내지 않는다. 자아의 자기로의 복귀는 정확하게 말해서 조용한 반조(返照)도 아니며 순전히 철학적인 반성의 결과도 아니다. 자기와의 관계는 블랑쇼(

Maurice Blanchot)의 소설 {아미나다브(Aminadab)}에서 보는 것처럼 자아에 사슬처럼 묶여 있는 분신(le double)과의 관계인데, 이 분신은 메스껍고 굼뜨며 어리석지만 자아는 그것과 함께 존재한다. 왜냐하면 그 분신이 곧 자아이기 때문이다. 함께 있음은 자기에게 관여해야 한다는 사실에 나타난다. [이를 벗어나려는] 모든 시도는 자신의 가구를 옮기느라고 야단법석을 떠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귀신처럼, 미소처럼, 불어오는 바람처럼 [그렇게 가볍게]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책임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 나의 존재( tre)는 소유(avoir)와 겹쳐진다. 즉 나는 내 자신에 의해 차단된다. 바로 이것이 물질적 존재이다. 그러므로 물질성은 신체의 무덤이나 감옥으로 영혼이 우연히 추락한 것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물질성은 필연적으로 존재자의 자유 안에서의 주체의 출현에 함께 수반되는 것이다. 신체를 이렇게 자아와 자기 사이의 관계가 생기는 구체적인 사건으로서의 물질성으로부터 이해한다는 것은 신체를 일종의 존재론적 사건으로 돌리는 것이다. 존재론적 관계는 신체를 벗어난 관계가 아니다. 자아와 자기 사이의 관계는 조용한 정신의 자기 반조가 아니다. 인간의 물질성 전체가 바로 이 자기와의 관계에서 존립한다.
자아의 자유와 그의 물질성은 이렇게 서로 조화를 이룬다. 익명적 존재 속에서 존재자가 출현한다는 사실과 결부되어 있는 최초의 자유는 자아가 자기 자신에게 결정적으로 매이게 되는 대가를 치른다. 고독의 비극을 구성하는 이러한 존재자의 결정적 매임이 바로 물질성이다. 고독이 비극적인 것은 타자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 동일성 안에 포로로 갇혀 있기 때문이고 고독이 곧 물질이기 때문이다. 물질에의 매임을 끊어 버리는 것은 홀로서기의 결정적 매임을 깨뜨리는 것이다. 이것은 시간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고독은 시간의 부재이다. 주어졌고, 그 자체로 실체화되고ㅡ 경험된 시간, 통과해야 할 시간, 주체가 그것을 통해 자신의 동일성을

유지하는 시간은 홀로서기와의 고리를 풀어줄 수 없는 시간이다.

제2강

물질은 홀로서기의 불행이다. 고독과 물질성은 서로 어울린다. 고독은, 모든 욕구가 충족될 때, 그때 한 존재에게 계시되는 고차원적 불안이 아니다. 죽음으로 향한 존재의 특권적인 경험도 아니다. 고독은 말하자면 물질로 가득 찬 일상적 삶의 동반자다. 물질에 대한 걱정이 홀로서기 자체에서 생기고 또한 이 걱정은 존재자로서의 우리의 자유 사건의 표현인 한에서는, 일상적 삶은 우리의 고독에서 나오며, 고독의 진정한 성취이며 속 깊은 불행에 대응하고자 하는, 무한히 진지한 시도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일상적 삶은 타락과는 거리가 멀 뿐 아니라 우리의 형이상학적 운명에 대한 배신과도 거리가 멀다. 일상적 삶은 구원에 몰두하는 것이다.


일상적 삶과 구원

따라서 이제 이와 같은 방식으로 현대철학이 모두 부딪히고 있는 모순을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좀더 나은 사회에 대한 희망과 고독의 절망. 이 둘은 너무나 자명한 경험에 기초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나 도무지 화해할 수 없는 적대 관계에 있는 것처럼 나타난다. 고독의 경험과 사회적 경험은 서로 반대 관계에 있을 뿐만 아니라 이율 배반의 관계에 있다. 각각 제 나름대로 보편적 경험임을 내세우고 그와 다른 경험은 진정한 경험의 타락으로 보는 생각에 마침내 이르게 된다.
사회학과 사회주의의 낙관적 구성주의의 핵심에는 고독의 감정이 하나의 위협적 요소로 남아 있다. 그것은 타인과의 대화와 집단적 작업에서 얻는 기쁨, 세계를 거주 가능한 공간으로 만들고자 하는 모든 노력을 파스칼적인 기분전화(diverissement)이나 고독을 단순히 망각하기 위한 노력이라고 고발하게 해 준다. 세계에 거주하고, 일에 관심을 두며, 그것들에 애착을 가진다는 사실, 또한 사물들을 지배하고자 하는 열망은 고독의 경험에서는 무가치한 것으로 평가될 뿐 아니라 고독의 철학에 의해 설명되어 버린다. 사물과 욕구에 대한 관심[걱정]은 하나의 추락(墜落)리며, 욕구 자체에 담긴 최종적 목적성 앞에서의 도피요, 자가당착이며, 숙명적인 것은 틀림없지만 열등하며 비난받을 수밖에 없는 것을 나타내는 비진리일 것이다.
하지만 그 반대로 똑같이 참이다. 파스칼적인, 키에르케고르적인, 니체적인, 하이데거적인 불안(Angst) 가운데에서 우리는 추악한 부르주아처럼 처신한다. 아니면 우리는 미쳐 있다. 아무도 광기를 구원의 길로 제안하지 않을 것이다. 셰익스피어 비극의 어릿광대, 바보는 세계의 변덕스러움과 상화의 부조리를 꿰뚫어 보고 그것을 분명하게 말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어릿광대는 비극의 주인공이 아니다. 극복해야 할 일이 그에게는아무 것도 없다. 그는 왕들, 왕자들, 영웅들의 세계 안에 터져있는 하나의 틈새이다. 이 틈을 통해 광기[어리석음]의 바람이 이 세계를 통과

한다. 그것은 빛을 꺼 버리고 휘장을 찢어 내는 폭풍이 아니다. 긴 하루를 채우는 일들, 우리와 동류(同類)인 인간들과의 관계를 위해 고독에서 우리를 떼어 내는 집착들의 총체를 사람들은 추락이니, 일상적 삶이니, 또는 동물성이니, 타락이니, 추잡한 물질주의니, 이렇게 쓸데없이 부르고 싶어했다. 하지만 이러한 일들은 결코 하찮은 일일 수 없다. 진정한 시간은 본질적으로 무아경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할 수 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시계를 산다. 실존은 벌거벗은 상태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가능한 범위 안에서 예의바르게 옷을 입어야 한다. 불안에 관해서 책을 쓸 때는 어떤 사람을 위해서 쓰게 되고, 집필에서 출판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과정을 거치며, 때로는 불안을 파는 장사꾼처럼 처신한다. 사형수는 형장으로 가기 전 옷매무시를 바로 잡고, 마지막 담배를 받으면서 탄알을 받기 전에 남길 웅변적인 말을 찾는다.
실재론자들이 관념론자들을 비난할 때 저들은 환상의 세계에서 먹고 숨쉬는 사람들이라 비난하는 것처럼 그렇게 손쉽게 할 수 있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 경우, 그겋게 쉽게 무시할 수 있는 반론들이 아니다. 이것들은 어떤 행동을 형이상학에 대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도독에 대립시키는 것이다. 서로 적대적인 경험은 각각 하나의 도덕이다. 이들은 상대방을 [인식론적으로 또는 형이상학적으로] 오류(l'erreur)라고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거짓(l'inauthenticit )이라고 비난한다. 대중들이 불안보다도 빵에 더 집착하면서 엘리트들에게 대항하는 데에는 소박성 이상의 그 무엇이 개입해 있다. 그 때문에 경제 문제에서 출발하는 휴머니즘에는 어떤 감동적인 위대함의 강조가 나타나며, 그 때문에 노동자 계급이 자신들의 권리를 요구할 때 휴머니즘에까지 이를 수 있는 힘이 그 속에 있다. 만일 여기서 문제되는 것이 거짓된 행위이거나 또는 하나의 일탈이거나, 아니면 우리의 동물성의 요구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면 이와 같은 도무지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건설저그 낙관적 사회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 고독과 고독에서 오는 불안은 연대 의식과 명민함을 요구하는 세계 안에서 그것을 외면하고 머리르 처박는 타조의 태도요, 사치와 퇴폐에서 비롯된, 사회 변혁기의 부수 현상이며 균형 잃은 개인의 몰상식한 꿈이고 공동체 안에서의 일탈이다. 그리고 사회주의적 휴머니즘도 고독의 철학과 똑같은 권리를 가지고서 죽음과 고독의 불안을 거짓말과 수다라고 주장하며, 심지어는 신화화와 기만적인 웅변이자, 본질적인 것 앞에서의 도피요, 퇴폐라고 주장할 수 있다.
구원의 욕구와 만족의 욕구 ― 야곱과 에서[에사오] 사이의 이율 배반. 하지만 구원과 만족의 진정한 관계는 고전적 관념론이 알아 차렸고 현대의 실존주의가 끝까지 유지하고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구원은, 그 기초의 단단함을 확보하기를 요구하는 좀더 고차원의 형식처럼 그렇게 욕구의 만족을 요구하지 않는다. 우리의 일상적 삶은 더구나 정신 활동을 통해 끊임없이 극복되는 단순한 동물성의 연속이 아니다. 하지만 마치 빈곤이나 무산계급의 조건이 천국 문을 엿볼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없는 것처럼, 구원에 대한 불안은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그것의 우발적 원인이 될 욕구의 고통 속에서도 나타나지 않는다. 우리의 노동자 계급을 짓누르는 억압이 경제적인 해방외에도 형이상학적 해방에 대한 향수를 그들 속에 일깨우기 위해서 하는 경험일 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혁명적 투쟁은 단순히 정신적 삶의 기초로 쓰이거나 또는 그러한 위기를 통해 소명감을 일깨우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본래 의미와 진정한 의도에서 벗어난 것이다. 경제적 투쟁은 이미 그 자체로 구원을 위한 투쟁이다. 왜냐하면 그 투쟁은 '홀로서기'의 변증법에 뿌리를 두고 있고 그 변증법에 의해서 최초의 자유가 정립되기 때문이다.
사르트르의 철학에는 거의 천상적인 현재가 존재한다. 존재의 무게는 모두 과거로 내팽개쳐지고 현재의 자유는 이미 물질을 초월해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와 반대로 현재 자체 속에, 그리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자유 속에서 물질이 지닌 무게가 있음을 충분히 인정하고자 한다. 물질적 삶이야말로 존재의 익명성에 대한 승리요, 동시에 그의 자유 자체에 의해, 스스로 매여 있는 비극적인 고정성(le d finitif)임을 우리는 인정하고자 한다.
고독을 주체의 물질성에 관련지을 때, 이때 물질성은 자기 자신에게 매이는 것이기 때문에, 세계와 세계 안에 있는 우리의 실존이 그 자신에게 속한 무게를 극복하기 위해서, 그의 물질성을 극복하기 위해서, 다시 말해 자기(le soi)와 자아(le moi)사이의 연결을 끊기 위해서, 어떤 의미에서 주체의 근본적인 발걸음을 구성하는가 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세계를 통한 구원 : 먹거리들

일상적 삶 속에서, 세계 안에서, 주체가 지닌 물질적 구조는 어느 정도 극복될 수 있는 것을 보인다. 자아(le moi)와 자기(le soi) 사이에 사이(intervalle)가 나타난다. 동일한 주체는 즉시 자신에게 돌아가지 않는다.
하이데거 이후, 우리는 세계를 도구들의 집합으로 보는 일에 익숙해 있다. 세계 안에 실존하는 것은 행위하는 것이다. 하지만 행위한다는 것은 결국 우리 자신의 실존을 행위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도구는 서로 다른 것을 지시하며 마침내 모두 우리의 실존적 관심을 지시한다. 그러므로 욕실의 버튼을 누를 때 우리는 전적으로 존재론적인 몬제를 여는 셈이 된다. 하지만 하이데거가 보지 못한 것, 적어도 지금 이 문제와 관련해서 하이데거가 보지 못한 것으로 보이는 것은, 세계는 도구들의 체계를 이루기 전에 먹거리(糧食)들의 집합이라는 사실이다. 세계 안에서 인간의 삶은 세계를 채우는 대상들을 넘어설 수 없다. 아마도 먹기 위해서 산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살기 위해서 먹는다고 말하는 것은 더욱 옳지 않다. 먹는 행위의 최후 목적은 음식 안에 담겨 있다. 꽃의 냄새를 맡을 때, 이 행위의 목적은 꽃의 향기에 제한된다. 산책하는 것은 바람을 쐬기 위한 것이고, 건강 때문이 아니라 공기 때문이다. 세계 안에서의 우리의 실존을 특징짓는 것은 먹거리들이다. 탈존적 실존, 곧 자기 밖에 존재하는 것은 하지만 대상에 의해 제한된다.
대상과의 관계, 이것을 우리는 향유(jouissance)로 특징지울 수 있다. 모든 향유는 존재의 방식일 뿐 아니라 동시에 감각작요, 다기 말해 빛과 인식이다. 대상을 흡수하지만 동시에 대상과 거리를 둔다. 앎, 곧 밝음(luminosit )은 본질적으로 즐김에 속한다. 그러므로 주체는 주어진 먹거리들에 직면해서 공간 속에, 그기 존재하기 위해 필요한 대상들과 거리를 둔 사운데 존재한다. 홀로서기의 순수하고 단순한 동일성 안에서 주체는 자기 자신에게 매여 있

지만, 세계 안에서는, 자기에게 돌아오는 대신 <존재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과의 관계>라는 것이 있다. 주체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분리된다. 빛은 그런 가능성의 조건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일상적 삶은 이미 최초의 물질성으로부터 해방되는 방식인데 이것에 의해 주체는 완성된다. 여기에는 이미 자기 망각이 개입되어 있다. {지상의 양식}의 모랄은 최초의 모랄이다. 최초의 포기. 이것으로 끝은 아니다. 이것을 거쳐 지나가야 한다.


빛과 이성의 초월

하지만 이 자기 망각, 향유의 밝음에 의해서도 자기와 자아의 뗄 수 없는 관계는 깨뜨려지지 않는다. 만일 이 빛을 주체가 그 안에 자리하고 있는 주체의 물질성의 존재론적 사건으로부터 분리한다면, 그리고 이성의 이름으로 이 빛을 절대적인 것으로 삼는다면 말이다. 빛을 통해 주어진 공간의 간격을 빛을 통해 순간적으로 자기 안에 수용된다. 빛을 통해 내가 아닌 다른 무엇이 존재하긴 하지만, 이미 이것들은 마치 나에게서 나온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빛이 비춰진 대상은 또한 우리가 만나는 대상이다. 하지만 그것이 그렇게 비추이기 때문에 바치 우리에게서 나온 것처럼 그렇게 만나게 된다. 낯설음이란 전혀 없다. 그것으로의 초월은 내재 안에 감싸여 있다. 인식과 향유 안에 있을 때 나는 내 자신이 된다. 거기에 사로잡힌 자아를 해방시키기에는 빛의 외재성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빛과 인식은 홀로서기와 그와 관련된 변증법 안에서 볼 때 제대로 그 가치가 평가될 수 있다. 이것은 존재의 익명성에서 해방된, 하지만 존재자의 자기 동일성에 의해 자신에게 매인(다사 말해 물질화된) 주체가 그의 물질성에 대해 거리를 두기 위한 방법이다. 하지만 인식은 존재론적 사간에서 분리되고, 해방의 다른 차원들이 약속된 물질성에서 분리되어 있으면서 고독을 극복하지 않는다. 이성과 빛은 그것들 자체로, 존재자인 한에서 존재자의 고독을 완성하며, 완전히 유일하고 독특한 지표(指標)가 되어야 할 그 목표를 수행한다.
이성은 모든 것을 자신의 보편성 안에서 포괄하면서 그 자처ㅔ로 고독 안에 머물러 있다. 유아론(唯我論)은 착오도 아니고 궤변도 아니다. 이성 자체가 유아론적 구조를 갖추고 있다. 그것은, 이성이 결합하는 감각이 <주관적> 특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이성의 보편성 때문에 그렇다. 다시 말해 [이성의] 빛에는 한계가 없으며 어떤 사물도 그것을 떠나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이서은 말을 건넬 또 다른 이성을 전혀 찾지

않는다. 의식의 지향성은 자아를 사물들과 구별하게 해 주지만 유아론을 사라지게 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의 요소인 빛은 우리를 외부 세계를 지배하게 해주지만 거기에서 우리에게 짝(un pair)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해 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성적 지식의 객관성은 이성의 고독한 성격에서 아무것도 빼앗아 가지 않는다. 객관성에서 주관성으로의 전회(轉回) 가능성은 이성의 철학인 관념론의 주에이다. 빛의 객관성, 그것은 주관성 자체이다. 모든 대상은 의식의 언어로 말해질 수 있다. 다시 말해 모든 것은 빛 속에 포착될 수 있다.
공간의 초월성은 만일 그것이 출발점으로 되돌아가지 않는 초월에 기초할 수 있다면 실재적인 것으로 확살될 수 있다. 삶은, 물질과의 투쟁 소에서 그의 일상적 초월이 늘 같은 지점으로 되돌아오는 것을 방해하는 사건을 만날 때, 그때만이 구원의 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초월, 즉 빛의 초월을 떠받치고 외부 세계에 현실적 외재성을 부여하는 이 초월을 파악하려면 구체적 상황, 향유 속에서 빛이 주어지는 상황, 즉 물질적 실존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제3강

우리는 홀로 있는 주체를 다루었다. 그가 존재자라는 사실, 오직 이 사실로 인해 주체는 홀로 있다. 주체의 고독은 그가 주인이 된 <존재한다>는 사실과의 관계에서 생겨난다. 존재에 대한 이러한 지배는 시작할 수 있는 능력, 곧 자신으로부터 출발할 수 있는 능력이다. 자기 자신에게서 출발한다는 것, 그것은 행위하기 위한 것도 사유하기 위한 것도 아니며 오직 존재하기 위한 것이다.
이어서 우리는 존재자 안에서 일어나는 익명적 존재로부터의 해방이 자기에게 매임, 다시 말해 자기 확인(identification)의 매임이 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자기 확인의 관계는 자기를 통해 자아가 짐을 짊어지는 것이며 자아가 자기를 위해 스스로 감수한 염려 또는 물질성이다. 미래와 과거에 대한 관계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서 보면, 주체는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짐을 지운다. 따라서 주체의 고독은 본래 아무런 도움이 없다는 사실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일종의 먹이로 내던져져 있으며, 자기 자신에게 걸려들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바로 물질성이다. 그러므로 물질성은 욕구를 초월하는 바로 그 순간, 주체를 먹거리에, 먹거리로서의 세계에 마주보게 하면서 주체에게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일종의 해방을 제공한다. 세계는 주체에게 향유의 형식으로 존재에 참여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 주체는 자신이 흡수하는 객체 속에 흡스된다. 그럼에도 주체는 객체와의 거리를 유지한다. 모든 향유는 또한 감각 활동으로서, 곧 인식이고 빛이다. 자기 소멸은 아니지만 자기 망각이며, 말하자면 최초의 체념과 같은 것이다.


노동

하지만 공간을 통한 이 순간적인 초월도 고독의 탈피를 가져오지 못한다. 자기 자신과 다른 사물을 만날 수 있도록 해주는 빛은 그 사물이 마치 나에게서 나온 것처럼 그렇게 만나도록 해 준다. 빛, 명료성, 그것은 이해 가능성 자체로서 모든 것을 나에게서 유래하도록 만들며 모든 경험을 기억의 요소로 환원시킨다. 이성(理性)은 홀로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인식은 세계 안에서 정말 다른 것을 만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관념론의 심오한 진리이다. 공간적 외재성과 순간과 순간들 상호간의 외재성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음이 이를 통해 드러난다.
욕구의 구체성 속에서는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서 떼어 놓은 공간이 언제나 정복되어야 한다. 이 공악을 뛰어넘고 객체를 장악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손으로 노동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일하지 않는 사람은 먹지도 말라>는 명제는 하나의 분석 명제이다. 도구들과 도구의 생산은 거리의 지양이라는 환상적 이상을 뒤쫓는다. 현대의 도구 즉 기계에 의해 열려진 관점에서 도구를 보게 되면 사람들은 하이데거가 그것밖에 보지 않았던 기구(器具)로서의 기능보다는 오히려 노동을 불필요하게 하는 아주 강렬한 인상을 받게 된다.
그렇지만 결국 노동에서, 즉 그의 노력, 아픔과 괴로움을 통해 주체는 한 존재자의 자유 속에 함축되어 있는 존재의 무게를 다시 발견한다. 아픔과 괴로움은 존재자의 고독이 끝내 이르는 현상으로서 이제 우리는 이를 살펴보고자 한다.





고통과 죽음

아픔과 괴로움은 고통 속에서 우리는 고독의 비극을 형성하는 결정적 요소를 가장 순수한 모습으로 다시 보게 된다. 이 결정적 요소는 향유의 무아경을 통해서도 끝내 극볼할 수 없는 것이었다. 두 가지 점이 강조되어야 한다. [첫째] 우리는 욕구와 노동의 괴로움에서 고독의 분석을 추구해야지 무에 대한 불안에서 고독을 분석해 내려고 해서는 안 된다. [둘째] 우리는 사람들이 신체적 괴로움이라고 이름짓는 괴로움을 강조할 것이다. 왜냐하면 신체적 괴로움에는 실존에의 참여에 대해서 어떤 오해도 일어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도덕적 괴로움에서는 일종의 품위와 점잖음의 태도를 보존할 수 있고 따라서 이미 해방되었다고 할 수 있으나 신체적 고통은 그 자체가 그것의 각 강도에 따라 존재의 순간으로부터 해방될 수 없는 불가능성이다. 그것은 존재의 면제 불가능성 자체이다. 고통의 내용은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수 없는 불가능성과 일치한다. 이것은 그렇다고 해서 고통을 그 자체를 통해 정의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의 본질을 구성하는 그 고유한 함축 자체를 강조하자는 것이다. 괴로움 속에는 어떠한 도피처도 없다. 그것은 다만 존재의 직접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도망갈 수도 없고 회피할 수도 없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고통이 그토록 뼈아픈 까닭은 그것을 회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고통은 삶과 존재의 긍지의 휘몰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고통은 무(無)의 불가능성이다.
하지만 고통 가운데는 불가능한 무(無)에 대한 호소와 더불어 죽음에의 가까움이 동시에 존재한다. 고통이 죽음으로 끝날 수 있다는 감정과 지식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괴로움은 자신의 내면 속에 일종의 극단적인 고양 작용을 안고 있다. 그래서 마치 고통보다 더욱 가슴을 찢는 일이 일어날 것처럼 한다든지, 고통 그 자체를 구성하는 피난처의 차원이 부재함에도 불구하고 또 하나의 시간에 대해 열린 영역이 아직도 있는 것처럼 한다든지, 고통을 통해 끝내 드러난 것 외에, 또 다른 사건의 전체에 완

전히 묶여 있음을 그 본질로 하는 이 고통의 구조는 미지의 것에까지 연장될 수 있지만, 이것은 빛의 용어[개념]로는 도무지 옮길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미지의 것은 우리의 모든 경험이 결국 되돌아오는 나와 자기의 친숙성에 대해서 지향적이다. 죽음의 미지성, 즉 처음부터 무(無)로서 자신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의 불가능성의 경험과 상관적인 이 죽음의 미지성은, 죽음이란 그것으로부터 돌아온 사람이 아무도 없고 그렇기 때문에 실제로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는 뜻이 아니다. 죽음의 미지성은 죽음과의 관계가 빛을 통해서 맺어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며 주체가 자신으로부터 유래하지 않는 것과 관계맺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주체가 신비와 관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죽음이 고통을 통해, 모든 빛의 영역 밖에서, 자신을 예고하는 방식은 주체의 수동성의 경험이다. 주체는 이제까지 능동적이었다. 자신의 고유한 본성에 의해 압도되는 곳에서, 자신의 사실적 상황을 수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존할 때도 주체는 여전히 능동적이었다. 나는 '수동성의 경험'이라고 말하낟. 말을 하자니까 이렇게 밖에 할 수 없달. 왜냐하면 경험은 항상 이미 인식, 빛, 주도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경험은 동시에 객체의 주체로의 회귀를 뜻한다. 그렇지만 신비로서의 죽음은 그렇게 이해된 경험과는 구별된다. 지식에서는 모든 수동성이 빛의 매개를 통해서 능동성이 된다. 내가 만나는 대상은 파악되고, 간단히 말해서 나를 통해 구성된다. 그런데 죽음은 주체가 그 주인이 될 수 없는 사건, 그것과 관련해서 더 이상 주체가 아닌 그런 사실을 알려 준다.
이렇게 고통 안에서의 죽음의 분석이 하이데거의 유명한 <죽음으로 향한 존재(Sein zum Tode)> 분석과 관련하여 특별히 제시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자. 죽음으로 향한 존재는 하이데거의 본래적 실존에 있어서 최고의 밝음이며 그렇기 때문에 또한 최고의 남성다운 힘(virilit )이

다. 그것은 현존재(Dasein)를 통해 실존의 극단적 가능성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 가능성이야말로 다른 모든 가능성을 가능하게 만들고 그렇기 때문에 가능성을 손에 쥔다는 사실 자체 즉 능동성과 자유를 가능하게 만든다. 죽음은 하이데거에게는 자유의 사건이다. 고통 속에서 주체는, 이와 반대로 가능한 것의 한계에 이른 것처럼 보인다. 주체는 자신이 묶여 있고, 압도되어 있고 어떤 방식에서는 수동적임을 발견한다. 죽음은 이러한 의미에서 관념론의 한계이다.
우리가 죽음과 맺고 있는 관계의 주요 특성이 어떻게 철학자들의 관심 밖에 있을 수 있었는지 나는 스스로 자문해 본다. 우리가 정확하게 알 수 없는 죽음의 무(無)에서 분석을 시작해서는 안 된다. 절대적으로 인식할 수 없는 것이 나타나는 상황에서 우리의 분석은 출발해야 한다. 절대적으로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은 어떠한 빛에 대해서도 낯선 것이어서 어떠한 가능성의 채택이 불가능하면서도 우리 자신이 그 안에 붙잡혀 있음을 뜻한다.


죽음과 미래

이것이 바로 죽음이 결코 현재일 수 없는 까닭이다. 이러한 사실은 자명한 이치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를 없애기 위해 만들어진 <네가 있으면 그[죽음]는 없고, 그가 있으면 너는 없다>는 고대 격언은 죽음이 안고 있는 역설을 잘못 인식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 격언은 미래와의 독특한 관계인 죽음에 대한 우리의 관계를 지워 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격언은 적어도 죽음이 영원한 미래임을 주장한다. 죽음이 어떠한 현재에도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은 죽음에 대한 우리의 도피에 기인하거나 용서받을 수 없는, 마지막 순간에 대한 건망증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은 손에 거머쥘 수 없으며(insaisissable) 남성다운 힘과 주체의 영웅주의의 종말을 표시한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지금, 이것은 내가 주인이고, 가능한 것의 주인이며, 가능성을 손에 거머쥘 수 있는 주인이라 사실이다. 하지만 죽음은 결코 지금일 수 없다. 죽음이 현재 여기 있다면 나는 더 이상 현존하지 않는다. 내가 무(無)이기 때문이 아니라 나는 죽음을 내 손으로 붙잡을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나의 지배, 나의 남성다운 나의 주체의 영웅주의는 죽음에 관해서는 힘일 수도, 영웅주의일 수도 없다. 우리가 그 현상의 차원에 있어서는, 주체의 능동성이 수동성으로 반전하는 일이 일어난다. 존재에 사로잡혀 있을 때, 하지만 내가 아직도 고통의 주체로서 존재를 파악하고 있을 때, 그러한 고통의 순간에서가 아니라 고통 자체가 울음과 흐느낌으로 바뀔 때, 그때 이러한 반전이 일어난다. 고통이 순수 형식에 도달하는 그곳에서, 우리와 고통 사이에 더 이상 아무 것도 개입하지 않는 그곳에서, 극단적 수용의 최고 책임성은 최대의 무책임성으로, 어린아이와 같은 존재로 전도된다. 이것이 흐느낌이고 바로 이 흐느낌을 통해서 죽음은 예고된다. 죽는다는 것, 이것은 이러한 무책임성의 상태로의 회귀이며 어린아이처럼 어깨를 들먹거리면서 흐느낌을 뜻한다.
여기서 또 한 번 셰익스피어로 돌아가 보자. 나는 이 강의

가 진행되는 가운데 그를 여러 번 써먹었다. 사실 철학은 온통 셰익스피어에 관한 명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나는 종종 하게 된다. 비극의 주인공은 결국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는가? 나는 {맥베스(Macbeth)}의 끝부분을 아주 간략하게 분석해 보고자 한다. 맥베스는 버남의 숲이 던시난의 성을 향하여 뻗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것은 패배의 징조이다.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 이러한 징조가 현실로 나타났을 때 맥베스는 말한다. "불어라, 바람아! 파괴하라!" 그러나 곧 이어서 말한다. "경종을 울려라 …… 갑옷을 등에 걸친 채 우리는 죽으리라." 죽음이 있기 전에 전투가 벌어질 것이다. 패배의 두 번째 징조는 아직 보이지 않았다. 한 여인에 의해 태어난 남자는 맥베스에 대항할 수 없다고 마녀가 예언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한 여인에 의해 태어나지 않은 맥더프가 저기 온다. 죽음은 지금 이 순간을 위한 것이다. "나에게 그렇게 말하는 혓바닥은 저주를 받아라. 왜냐하면 혓바닥은 나의 남성다움의 최상의 부분을 낙담시키기 때문이다.……너와는 내가 싸우지 않겠다." 하고 맥베스는 자신에 대한 그의 권력을 알려주는 맥더프에게 외친다.
이것은 더 이상 희망이 존재하지 않을 때, 그때의 수동성이다. 이것은 바로 내가 남성다운 힘의 종말이라고 이름지은 것이다. 하지만 그에 이어 곧 희망이 되돌아온다. 그래서 맥베스의 마지막 말은 다음과 같다.
"버남의 숲은 던시난으로 향한다 해도, 여자가 낳지 않은 너를 마주한다 해도, 나는 나의 마지막 기회를 포착할 것이다."
죽음 앞에서는, 영운이 붙잡는 마지막 기회가 있을 뿐 죽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영웅은 항상 마지막 기회를 볼 줄 아는 사람이다. 그는 완강하게 기회의 발전을 고집하는 인간이다. 따라서 죽음은 수용되지 않는다. 죽음은 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살은 모순적 개념이다. 죽음의 영원한 위협은 그의 본질의 일부이다. 주체의 지배가 보장되는 현

재에는 희망이 있다. 희망은 일종의 목숨을 건 모험, 일종의 모순을 통해 죽음에 덧붙여지는 것이 아니다. 희망은 죽음의 언저리에, 죽음의 순간에, 죽어가는 주체에게 주어진다. "나는 숨쉰다. 나는 희망한다(Spiro-spero)." 햄릿은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러한 불가능성에 대한 상세한 증언이다. 무(無)는 불가능하다. 죽음을 받아들일 가능성, 존재의 노예 상태로부터 최고의 지배권을 탈취해 낼 수 있는 가능성은 인간에게 맡겨져 있는 것 같다. "존재하느냐 아니면 존재하지 않느냐(to be or not to be)"라는 말은 자신을 없앨 수 없다는 사실의 지각이다.


사건과 타자

죽음에 관한 이러한 분석에서 우리는 어떠한 결론을 도출할 수 있는가? 죽음은 주체의 남성다운 힘의 한계가 된다. 즉 익명적 존재 한 가운데 서서 <홀로서기>를 통해 가능해지고 현재의 현상과 빛 속으로 나타나는 남성다운 힘의 한계가 된다. 주체에게 불가능한 일들이 있기 대문이 아니며 주체의 능력이 어떠한 방식으로건 제한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 죽음은 우리가 그에 대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현실, 즉 그에 대해 우리의 권력(pouvoirs)이 충분하지 못한 현실을 알려 주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힘(forces)을 넘어서는 현실들은 이미 빛의 세계 안에서 스스로 나타낸다. 죽음의 접근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특정한 순간부터 할 수 있음을 더 이상 할 수 없다(nous ne pouvons plus pouvoir)는 점이다. 바로 여기에서 주체는 주체로서 자신의 지배를 상실한다.
이러한 지배의 종말은 존재를 떠맡되, 우리가 더 이상 떠맡을 수 없는 방식으로 존재를 떠맡기 때문에, 심지어는 경험 세계를 통해 언제나 넘쳐흐르는, 시각을 통해 사물을 수용하는 것과는 전혀 같지 않는 방식으로 사건( v nement)이 우리를 덮칠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최소한 <미리(a priori)> 짐작해 볼 수 없이, 그리고 오늘날 사람들이 흔히 말하듯이 최소한의 계획도 세울 수 없이 하나의 사건이 우리에게 닥쳐오는 것이다. 죽음, 그것은 계획을 세울 수 없음이다. 이러한 죽음의 접근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절대적으로 다른 것(absolument autre)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다른 것(他者)이 짊어지고 있는 타자성(alt rit )은 향유를 통해 우리 자신의 것으로 동화(同化)시킬 수 있는 잠정적 규정으로서의 타자성이 아니라 그것의 존재 자체가 곧 타자성인 그런 의미의 타자성이다. 그러므로 나의 고독은 죽음을 통해 굳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음을 통해 깨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존재는 다원주의적

이다. 다원성[복수성](le pluriel)은 여기서 존재자의 다수성이 아니라 바로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에서 나타난다. 이제까지 홀로 존재하는 주체에 의해 그토록 조심스럽게 소유되고, 고통을 통해 표명되었던 존재자의 존재 속으로 다원성이 잠입해 들어온 것이다. 죽음을 통해 존재자의 존재는 자신으로부터 소외된다. 그러나 확실히, 자신을 알려 주는 타자(l'Autre)는 주체가 존재를 소유하는 방식으로 그렇게 존재를 소유하지 않는다. 나의 존재에 대한 타자의 영향력은 신비스럽다. 그것은 미지의 것이 아니라 인식될 수 없는 것이며, 어떠한 빛에 대해서도 저항적이다. 그런데 바로 이 점에서 암시되고 있는 바는, 타자는 나와 더불어 공동의 존재에 참여하고 있는 다른 자아 자체가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다. 타자와의 관계는 공동체와의 전원적이고 조화로운 관계도 아니며 우리가 타자의 입장에서 봄으로써 우리 자신이 그와 유사하다고 인식하도록 하는 공감(sympathie)도 아니다. 타자와의 관계는 우리에 대해 외재적이다. 타자와의 관계는 하나의 신비(Myst re)와의 관계이다. 그것은 그의 외재성이다. 아니면 그의 타자성이다. 왜냐하면 외재성은 공간의 특성으로서, 주체를 주체의 존재를 구성하는 빛을 통해 자기 자신에게로 환원시키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통을 통해 자신의 고독을 더욱 팽팽하게 지탱하고 죽음에 직면해서 설 수 있는 존재만이 타자와의 관계가 가능한 영역에 자신을 세울 수 있다. 타자와의 관계, 이것은 결코 하나의 가능성을 손에 거머쥔다는 사실이 될 수 없다. 타자와의 관계는, 빛을 서술하는 관계와는 뚜렷이 구별된 개념으로 특성을 그려야 한다.
하지만 주체가 어떠한 가능성도 거머쥘 수 없는 죽음의 상황으로부터 타자와의 존재의 또 다른 특성을 끌어낼 수 있다. 어떠한 방식으로도 손아귀에 쥘 수 없는 것은 미래이다. 미래의 외재성[초월성]은, 미래가 절대적으로 예기치 않게 닥쳐온다는 사실로 인해서 공간적 외재성과는 전혀

다르다. 미래에 대한 기대, 미래의 투사는 베르크손에서부터 사르트르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론들이 마치 시간의 본질적 특성인 것처럼 일반적으로 인식해 왔지만 사실 이것은 미래의 현재에 지나지 않을 뿐 진정한 미래라고 할 수 없다. 미래는 손에 거머쥘 수 없는 것이며, 우리를 엄습하여 우리를 사로잡는 것이다. 미래, 그것은 타자이다. 미래와의 관계, 그것은 타자와의 진정한 관계이다. 오로지 홀로 있는 주체에서 시간을 이야기한다는 것, 순수하게 개인저인 지속에 관해서 이야기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타자와 타인

우리는 지금까지 죽음 속에서 사간의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주체가 더 이상 사건의 주인이 아닌 그러한 사건의 가능성을, 주체가 여전히 주인이며 따라서 주체는 그와 함께 언제나 홀로 있는 그러한 대상의 가능성에 대립시켰다. 우리는 이러한 사건을 신비로 특징지었다. 왜냐하면 이 사건은 미리 예측할 수가 없으며, 다시 말해 손에 거머쥘 수가 없고, 현재 속으로 들어설 수 없으며, 또는 들어오지 않는 것처럼 현재 속에 들어서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른 것(他者)으로서, 나의 존재의 소외로서 알려진 죽음, 이것은 과연 아직도 나의 죽음이라 할 수 있는가? 죽음이 만일 고독에게 탈출구를 열어주는 것이라면 죽음은 오히려 고독을 소멸시키고 주체성 자체를 소멸시켜 버리지 않을까? 사실 죽음에는 죽음의 사건에 직면하는 주체와 사건 자체 사이에 일종의 심연이 놓여 있다. 그런데 거머쥘 수 없는 사건이 도대체 어떻게 나에게 닥쳐올 수 있는가? 존재자와 타자의 관계는 어떤 관계일 수 있는 것인가? 어떻게 존재자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서 존재하면서도 자신의 <인격성>을 유지하고, 익명적인 <있음(il y a)>에 대한 자신의 정복과 주체의 지배와 주체성의 정복을 보존할 수 있는가? 존재자는, 타자에 의해 자기 자신이 소멸되지 않도록 지키면서 타자와의 관계에 들어설 수 있는가?
다른 것에 앞서 이러한 물음을 먼저 물어 보아야 하는 까닭은, 이것이 바로 초월 가운데서의 자아의 자기 보존 문제이기 때문이다. 고독으로부터의 탈출이 자아가 자신을 기획 투사한 그 내용에 흡수되는 것이 아니라면,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주체가 객체를 수용하듯이 그렇게 죽음을 수용할 수 없다면 자아와 죽음 사이에는 도대체 어떠한 형식으로 화해가 가능할 것인가? 죽음을 자신의 고유한 가능성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서도 자아는 어떻게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죽음을 마주하여 <할 수 있다>고 더 이상 할 수 없다면 사람은 어떻게 죽음이 고지하는 사건 앞에서 여전히 자기 자신으로 남아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죽음의 현상 자체를 충실하게 기술해 놓은 가운데도 동일한 문제가 들어 있다. 고통이 그토록 비장한 까닭은 존재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는 사실, 존재 속에 걸려들었다는 사실 때문만이 아니라 죽음이 그것으로부터의 초월을 예고하는 빛과의 관계를 떠난다는 사실에 대하 두려움 때문이기도 하다. 햄릿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무지의 존재보다 이미 알고 있는 존재를 더 선호한다. 이것은 마치 존재자가 홀로서기를 통해 들어선 모험이 이러한 모험 속에 있는 견딜 수 없는 것들을 대항해서 유일하게 받을 수 있는 도움이고 유일한 도피처인 것과 같다. 죽음에는 무(無)에 대한 루크레티우스(Lucretius)의 유혹이 있고 영원에 대한 파스칼의 열망이 있다. 이들은 결코 전혀 다른 태도가 아니다. 우리는 죽고자 하며 동시에 존재하고자 한다.
문제는 사람이 어떻게 죽음으로부터 영원을 빼앗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건[죽음]이 자아에게 그의 존재 가운데에서 일어날 때, 홀로서기를 통해 획득한 자유를 보존하면서 죽음을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죽음을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이라 이름붙일 수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은 사건이 도래하면서도 동시에 주체는 마치 하나의 사물, 하나의 대상을 수용하듯이 그렇게 죽음을 수용하지 않으면서 사건에 얼굴을 맞대고 있는 그러한 상황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일종의 변증법적 상황을 서술하였다. 이제 이러한 변증법이 실제로 일어나는 구체적 상황을 살펴보자. 이 방법에 관해서는 여기에서 길게 논의할 수 없지만, 이것은 지속적으로 우리가 사용하는 방법이다. 어쨌든 이 방법이 끝까지 현상학적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알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주체가 그 사건을 받아들이지도 않고 그것에 대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런 상황이지만 그러면서도 어떤 방식으로든 그것과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은 타인(autru

i)과의 관계이며 타자와 얼굴과 얼굴을 마주 한 관계이며, 타인을 보여 주면서 동시에 빼앗는 얼굴(visage)과의 만남이다. <받아들인> 타자, 그것은 타인이다(L'autre assum ― c'est autrui).
이러한 만남의 의미를 나는 마지막 강의에서 이야기하겠다.


시간과 타인

우리는 이러한 관계가 실존주의 측과 마르크스주의 측에서 우리에게 제안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보여 줄 수 있기를 희망한다. 오늘은, 최소한 시간 자체가 타인과 얼굴과 얼굴을 맞댄 상황에 어떻게 관계하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만 말하고자 한다.
죽음을 통해 주어진 미래, 사건의 미래는 아직 시간이 아니다. 왜냐하면 아무에게도 속하지 않은 미래, 사람이 수용할 수 없는 미래는 시간의 한 요소가 되기 위해서는 어쨌거나 현재와 관계를 맺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두 순간 사이의 결합은 어떠한 것인가? 엄청난 간격과 현재와 죽음을 갈라놓는 엄청난 심연을 가지고 있는, 하찮으면서도 동시에 무한하기까지 한, 그래서 희망의 장소가 되기에 충분할 정도의 언저리를 가지고 있는 이 순간은 어떻게 결합할 수 있는가? 이는 분명 시간을 공간으로 변형시킬 수 있는 순수 인접의 관계는 아니다. 그것은 운동과 지속의 약동은 더더욱 아니다. 왜냐하면 현재에 대해서 자기 자신을 초월하고 미래를 침식할 수 있는 능력이 죽음의 신비를 통해 우리에게는 완전히 배제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미래와의 관계, 즉 현재 속에서의 미래의 현존은 타자와 얼굴과 얼굴을 마주한 상황에서 비로서 실현되는 것처럼 보인다. 얼굴과 얼굴을 마주한 상황은 진정한 시간의 실현이다. 미래로 향한 현재의 침식(浸蝕)은 홀로 있는 주체의 일이 아니라 상호 주관적인 관계이다. 시간의 조건은 인간들 사이의 관계 속에 그리고 역사 속에 있다.

제4강

지난 번 강의에서, 우리는 고통의 문제로부터 시작하였다. 고통은 준재자가 자신의 고독을 완전히 실현하는 그러한 사건이다. 자기 자신과의 관계가 어느 정도 강한지, 자신이 누구임을 결정해 주는 요소가 무엇인지 하는 것을 존재자는 고통을 통해 체험한다. 그러나 자신이 수용할 수 없는 사건, 그것에 대해서 단지 수동적일 수밖에 없는, 전적으로 다른,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러한 사건과 관계하고 있다는 사실을 존재자는 또한 고통을 통해서 인식한다. 죽음의 미래는 우리에게 미래를 규정해 준다. 미래는 그것이 현재가 아닌 한에서 미래이다. 이러한 미래 개념을 토대로 만일 시간을 이해한다면 시간을 <부동의 영원에 대한 유동적인 그림>으로 보는 일은 다시없을 것이다.
만일 현재에서 모든 기대를 제거해 버린다면 현재와의 어떠한 공통 본성도 미래는 가질 수 없을 것이다. 미래는, 미리부터 존재한 영원의 품속에 안겨 있는, 그래서 우리가 그곳에서 가져올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미래는 절대적으로 다르고, 절대적으로 새로운 것이다. 바로 이렇게 볼 때 참된 시간의 현실을 우리는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현재 안에서는 미래의 등가물을 절대 발견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미래를 거머쥘 수 있는 가능성이 전적으로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자유를 지속(dur e)을 통해 이해한 베르크손의 입장도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음은 틀림없다. 하지만 이 입장에 따르면 현재에게 미래를 쥘 수 있는 힘이 있다. 지속은 곧 창조 행위이다. 이렇게 죽음이 결여된 철학을 비판할 때 단지 이것을 현대 철학의 전체 흐름, 즉 창조 행위를 피조물의 본질적 속성으로 삼고 있는 현대 철학의 흐름 안에서 자리매김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창조 행위 자체가 벌써 신비에 대한 개방성을 전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 주체의 자기 동일성으로는 이 개방성을 제공할 수 없다. 이 논제를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로서 우리는, 말하자면 온 우주를 구성하는 익명적 존재, 떨쳐낼 수 없는 존재와, 존재에 대한 존재자의 지배를 가능하게 하되 그러면서도 바로 그 때문에 공간적 초월을 통해서도 폐기할 수 없는 동일성의 결정적 요소에 밀폐되어 버리는 홀로서기(hypostase)를 지목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미래에 대한] 기대의 사실성, 즉 베르크손의 시간 지속의 기술을 통해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그런 사실을 논란하자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것의 존재론적 조건을 보여 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러한 조건은 신비와 관계해서 주체의 작업이기 이전에 이미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은 말하자면 그 자신에게 갇혀 있는 주체에게 스스로 열리는 차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시간의 작업이 그토록 심오한 이유이다. 시간의 작업은 단순히 창조에 의한 혁신이 아니다. 창조는 현재에 고착되어 있고, 피그말리온(pygmalion)의 슬픔 외에 창조자에게 주는 것이 없다. 시간은 우리의 영혼 상태, 우리 속성의 혁신 이상이다. 시간은 본질적으로 새로운 탄생이다.








할 수 있음과 타인과의 관계

시간에 대해 좀더 기술해 보자. 죽음의 미래, 그것의 낯설음은 주체에게 어떠한 주도권도 허용하지 않는다. 현재와 죽음, 자아와 신비의 타자성 사이에는 메울 수 없는 심연이 가로 놓여 있다. 죽음은 존재에 종말을 가져온다는 사실, 죽음은 끝이고 무(無)라는 사실을 주장하고자 하지 않았다. 우리가 주장하고자 한 것은 자아는 죽음을 극복한다는 것은 영생(永生)의 문제가 아니다. 죽음을 극복한다는 것은 죽음이란 사건의 타자성과 더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격적이어야 할 관계를 유지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인격적 관계, 즉 세계에 대한 주체의 힘과는 전혀 다른 것이면서, 그럼에도 인격성을 유지하는 그런 관계는 어떤 것인가? 말하자면 어떤 방식으로건 수동성의 상태에 있는 주체를 어떻게 정의내릴 수 있을 것인가? 남성적 힘과 다른, 할 수 있음을 할 수 있음(pouvoir de pouvoir), 가능한 것의 장악과 전혀 다른, 그러한 지배가 사람에게 과연 있는 것인가? 이것을 만일 발견한다면 시간이 자리한 바로 그곳, 시간과의 관계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관계, 그것은 타인과의 관계라고 지난 번 강의에서 우리는 말하였다.
하지만 문제의 용어를 반복하는 데 해답이 있는 것이 아니다. 타인과의 관계가 어떤 관계인가 하는 것을 우리는 명확하게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런 반론을 나에게 제기하였다. 내가 타인과 관계할 때 나는 단지 그의 미래만을 만나는 것이 아니다. 존재자로서의 타자는 나에 대해서 이미 과거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타자만이 미래에 대한 특권을 가진 것이 아니다. 이러한 반론은 나의 논의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부분을 지금 이 자리에서 다룰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준다. 나는 타자를 미래를 통해 정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미래를 타자를 통해 정의한다. 왜냐하면 죽음의 미래 자체가 그것의 전적 타자성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의 주된 답변은 이것이다. 타자와의 관계는,

우리 문명이 도달한 수준에서 보면 우리의 원초적 관계의 복합화(complication)로 타나난 결과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복합화는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다. 이 자체는 타인과의 관계의 내적 변증법에 토대를 두고 있다. 이것을 오늘 자세하게 논의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말은, 지금까지 매우 도식적으로밖에 다루지 못한 '홀로서기'에 함축되어 있는 바를 좀더 밀고 나가보고 그리고 특히, 세계로 향한 초월 외에도 표현의 초월성이 문명의 동시대성과 전체 관계의 상호성에 토대를 제공해 준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면 이러한 변증법이 좀더 분명하게 나타날 것이라는 말밖에 없다. 하지만 이러한 표현의 초월성은 그 자체 타자성의 미래를 전제하고 있다. 여기서는 이것에 한정해서 논의를 좀더 펼쳐 보겠다.
타자와의 관계가 신비와의 관계보다 더 많은 것을 담고 있다면 그것은 일상 생활 가운데서 우리가 타자를 만날 때 그의 고독과 타자성을 예절이라는 너울을 통해 이미 은폣한 채로 만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다른 사람이 그 사람에게 관계하듯 그렇게 관계한다. 주체가 자리할 특별한 자리가 없다. 타자는 공감에 의해, 또 다른 내 자신으로, 다른 자아(l'alter ego)로서 인식된다. 블랑쇼의 소설 {아미나다브}에서는 이러한 상황을 부조리에 이르기까지 밀고나갔다. 소설의 장면이 펼쳐지고 있는 집에서, 아무 일도 없는 사람들이, 단지 거기서 머물기만 하는, 다시 말해, 단지 존재하기만 하는 그런 낯선 집안을 돌아다니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사회적 관계는 전적으로 상호성(r ciprocit )의 관계가 된다. 존재물은 서로 바꿀 수 없는 데도 상호적이다. 아니, 상호적이기 때문에 서로 바꿀 수 있게 된다 할 만하다. 그렇기 때문에 타자와의 관계는 전혀 불가능하다.
하지만 타자성은, 우리의 사회적 관계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타자와의 관계 한 복판에서 이미 비상호적 관계로, 즉 동시성과 정반대의 관계로

모습을 드러낸다. 타인으로서의 타인은 단지 나와 다른 자아가 아니다. 그는 내가 아닌 사람이다. 그가 그인 것은 성격이나, 외모나 그의 심리 상태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의 다름(他者性) 때문이다. 그는 예컨대 약한 사람, 가난한 사람, <과부와 고아>이다. 하지만 나는 부자이고 강자이다. 우리는 상호주관적 공간은 대칭적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타자의 외재성은 개념적으로 동일한 것을 분리하는 공간이 있기 때문도 아니고 공간적 외재성으로 표현된 개념적 차이가 있기 때문도 아니다. 타자성의 관계는 공간적인 것도 아니고 개념적인 것도 아니다. 도대체 어느 정도 타인이 나 자신보다 먼저 덕스러운 행동의 대상이 되는가 하는 질문을 던질 때, 뒤르켐(Durkheim)은 이 타자의 특수성을 오해하고 있었다. 정의의 관점에서 볼 때는 어떤 무엇을 더 선호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할지라도 정의보다는 사랑을 더 우선시하는 점에서 사랑과 정의 사이의 본질적 차이가 있지 않은가?


에로스

문명화된 삶 가운데는 이러한 타자와의 관계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우리는 이것인 원래 어떤 형식으로 주어졌는가 하는 것을 탐구해 보아야 한다. 타자성이 순수한 상태로 나타나는 그러한 상황이 존재하는가? 타자성이 타자에게 자신의 동일성의 다른 한 면 이상의 의미를 갖는 상황, 모든 항이 똑같은 내용을 갖는, 그래서 동일자가 타자를 내포하는 그와 같은 플라톤적 참여의 법칙만을 충족시키지 않는 상황이 과연 존재하는가? 어떤 존재가 타자성을 자신의 본질로서, 적극적인 자격으로 담보할 수 있는 그러한 상황은 없는 것일까? 동일한 유(類)안에서의 두 종(種)의 대립으로, 순전히 그리고 단순하게 포섭되지 않는 타자성은 어떤 것인가? 상반(相反)된 것에 대해 완벽하게 상반된 것, 그 상반성이 그 자신과 상관자의 관계를 통해서도 어떠한 영향도 받지 않는, 전적으로 다른 것으로 남아 있도록 허용하는 상반성, 그것은 여성적인 것(le f minin)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성(性)은 어떤 종차(種差)의 차이가 아니다. 성은 유(類)와 종(種)으로 나누는 논리적 구분을 벗어나 있다. 이러한 구분은 경험적 내용과 결코 결합될 수 없다. 하지만 이성은 성의 차이를 완전히 무시해도 좋다는 뜻이 아니다. 성의 차이는 하나의 형식적 구조이다. 하지만 이 형식적 구조는 현실을 파르메니데스가 선언한 존재 통일성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재단하고 다원성으로서의 현실이 가능할 수 있는 조건을 제공해 준다.
성의 차이는 또한 모순으로 관계가 아니다. 존재와 무의 모순은 하나를 다른 것으로 환원하므로 거리(距離)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무는 다시 존재로 전환된다. 이러한 상황은 <있음(il y a)>이란 개념으로 우리를 이끈다. 존재의 부정은 존재 일반의 익명적 존재 차원에서 일어난다.
성의 차이는 상보적인 두 개념의 이원성도 아니다. 왜냐하면 두 개의 상보적 개념은 그것에 앞서 존재하는 전체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의

이원성은 전체를 전제한다고 말하는 것은 사랑을 하나의 융합으로 미리 설정해 두는 것이다. 하지만 사랑이 감동스러운 것은 넘어설 수 없는 이원성이 존재자들 사이에 있기 때문이다. 이 이원성은 끝까지 지울 수 없는 관계이다. 이러한 관계는 그 사실 자체로 타자성을 마비시키기는커녕 오히려 타자성을 보존한다. 육체의 사랑이 그토록 감동스러운 까닭은 둘만이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타자로서의 타나는 여기서 우리 것이 되는, 또는 우리 자신이 되는 그러한 대상이 아니다. 타자는 오히려 이와는 반대로 신비 속으로 물러선다. 여성적인 것, 전적으로 다른 것으로서의 여성적인 것의 신비는 낭만주의적 개념인 신비란, 미지의 또는 오해의 여성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내가 주장하는 바의, 여성적인 것이 존재 경제 안에서 차지하고 있는 독특한 위치에 대한 논제를 지원하기 위해서, 만일 제대로만 이해된다면, 나는 단테와 괴테의 큰 주제였던 베아트리체나 '영원한 여성적인 것(das Ewig Weibliche)', 또는 중세 기사 시대와 현대 사회에서의 여성에 대한 찬양(이것은 아마도 연약한 여성에게 강한 손을 펼쳐 주어야 할 필요성만으로 설명될 수는 없을 것이다)을 생각하거나 또는 특별히 놀랍게도 대담하게 쓴 레옹 블로이(L on Bloy)의 {그의 약혼자에게 보낸 편지(Lettres sa Fianc e)}를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명의 경험을 모두 전제하고 있는 페미니즘의 정당한 주장을 나는 전혀 무시하고 싶지 않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여성적인 것의] 신비를 특정 문헌에서 찾아볼 수 있는 정신화된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여성적인 것의 외적 표현이 가장 거칠거나, 가장 뻔뻔하거나 또는 가장 무미건조한 물질성으로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지닌 신비, 그것의 수줍음은 결코 파괴되지 않는다. 아무리 모독한다고 해도 신비는 부정되지는 않는다. 모독은 차라리 신비와 관계하는 하나의 가능한 방식일 수 있다.
이러한 '여성적인

것'이란 개념에서 나에게 특히 중요한 것은 그것이 인식 불가능하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빛을 벗어난 존재 방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여성적인 것, 존재 안에서, 빛을 향해 지향하는 공간적 초월이나 표현의 초월성과는 다른 시간이다. 그것은 빛 앞에서의 도피이다. 여성적인 것이 존재하는 방식은 스스로 자신을 감추는 것이고, 이렇게 스스로 자신을 감춘다는 것이 바로 수줍음이다. 그러므로 여성적인 것의 타자성은 단순히 대상의 외재성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또한 의지의 대립을 통해 형성되지 않는다. 타자는 우리와 맞서 있는, 그래서 우리를 위협하거나 또는 우리를 차지하고자 하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의 힘에 대해 저항적이라는 사실은, 우리보다 더 큰 힘을 가졌다는 뜻이 아니다. 그의 힘이 되는 것은 오직 타자성뿐이다. 그의 타자성에 바로 그의 신비가 있다. 우리는 타인을 자유로서, 즉 의사 소통의 실패를 안고 있는 특성인 자유로서 타인을 애시당초 자리매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특별히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자유에는 복종과 예속의 관계 외에 또 다른 관계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는 어느 한 쪽의 자유는 반드시 없어진다. 주인과 노예의 관계는 투쟁의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지만, 그러나 이것은 상호적이 되는 그러한 관계이다. 헤겔(F. W. Hegel)은 어떻게 주인이 노예의 종이 되고, 노예가 상전에게 주인이 되는가 하는 것을 정확하게 보여 주었다. 타인의 타자성을 신비로서, 그리고 이 신비를 수줍음으로 정의할 때 나는 나의 자유와 동일한 자유로서, 그리고 나의 자유에 대항할 수 있는 자유로서 타인을 내세우지 않는다. 나는 타인을 나와 맞서 있는 존재로 내세우지 않는다. 나는 타자성을 내세운다. 죽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한 존재자와 상관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성의 사건, 낯설음의 사건에 관계한다. 타자성의 특징을 가장 잘 그려내고,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타자성을 추론할 수 있는 것은 자유가 아니다. 타자가 본질로서 달고 있는 것은 타자성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타자성

을 절대적으로 근원적인 관계인 에로스에서 찾았다. 에로스는 '할 수 있음'으로 번역할 수 없는 관계이며, 그 상황의 의미를 그르치고자 하지 않는다면 구태여 그렇게 번역할 필요도 전혀 없는 관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존재와 무의 대립, 또는 존재자의 개념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하나의 범주를 묘사하고 있는 셈이다. 그것은 존재 안에서의 일어나는 사건이면서, 존재자의 출현을 가능케 하는 '홀로서기'와는 전혀 다른 사건이다. 존재자는 <주체적으로>, <의식>안에서 자신을 실현하지만 타자성은 '여성적인 것'을 통해 자신을 실현한다. 의식과 같은 차원의 용어이지만 의식과는 대립되는 의미가 있다. 여성적인 것은 자신을 빛으로 향한 초월 속에서의 존재자로서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수줍음 안에서 자신을 실현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운동의 방향이 역전된다. 여성적인 것의 초월은 어디엔가 물러서는 데서 존립한다. 이것은 의식의 운동과는 정반대 방향의 운동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성적인 것의 무의식적이거나 전의식적인 것은 아니다. 나는 이것을 신비라고 부르는 것 외에는 어떻게 달리 표현할 수 있는 길을 알지 못한다.
타인을 만일 자유로서 자리매기고 빛의 개념을 통해 그를 생각했더라면 우리는 의사 소통이 막혔으리라는 것을 인정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자유를 거머쥐거나 또는 소유하고자 하는 운동이 실패했다는 것만을 인정하였다. 그러므로 무엇이 에로스를 점령과 지배와 구별짓는가 하는 것을 분명히 보여줄 수 있을 때 에로스 안에서의 의사 소통을 허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싸움도 아니고, 융합도 아니고, 인식도 아니다. 우리는 관계 가운데서도 에로스적 관계의 예외적인 위치를 인정해야 한다. 그것은 타자성과의 관계요, 신비와의 관계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미래와의 관계, 모든 것이 현존해 있는 세계안에서는 결코 현존해 있지 않는 것과의 관계요, 모든 것이 현존해 있을 때는 그곳에 있을 수 없는

것과의 관계이다. 이 관계는 현존하지 않는 존재와의 관계가 아니라 타자성{즉 다름]의 차원 자체와의 관계이다. 가능한 것이 모두 불가능해지고 할 수 있음을 더 이상 할 수 없는 곳, 그곳에서도 주체는 에로스에 의해 여전히 주체이다. 사랑은 하나의 가능성이 아니며 우리의 주도권에 의존하지 않는다. 사랑은 아무런 이유가 없이 존재하고 우리를 엄습하고 우리에게 상처를 준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자아는 보존된다.
성욕의 현상학(이것을 약간 언급하고 지나갈 수밖에 없지만)은 내가 주장한 여성적인 것의 역할과 그것의 예외적인 위치, 그리고 성행위에서 완벽하게 하나됨의 융합이 부재한다는 사실을 확증해 주는 듯하다. 성욕은, 먹고 마시는 것처럼 홀로 즐기는 쾌락이 아니기 때문에 여타 다른 쾌락과는 동일하지 않다.
애무(愛撫)는 주체의 존재 방식이다. 애무를 통해 주체는 타자와의 접촉에서 단지 접촉 이상의 차원으로 넘어간다. 감각활동으로서의 접촉은 빛의 세계의 일부를 형성한다. 하지만 올바르게 말하자면 애무를 받는 대상은 손에 닿지 않는다. 이러한 접촉에서 주어지는 손의 미지근함이나 부드러움, 이것이 애무에서 찾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애무의 추구는, 애무가 찾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그 본질로 구성한다. <모른다>는 것, 근본적으로 질서 잡혀 있지 않음, 이것이 애무에서 본질적인 것이다. 애무는 마치 도망가는 어떤 것과 하는 놀이, 어떤 목표나 계획이 전혀 없이 하는 놀이, 우리 것과 우리 자신이 될 수 있는 무엇과 하는 놀이가 아니라 다른 어떤 것, 언제나 다른 것, 언제나 접근할 수 없는 것, 언제나 미래에서 와야 할 것과 하는 놀이처럼 보인다. 애무는 아무 내용 없는, 순수한 미래를 기다리는 행위이다. 애무는 거머쥘 수 없는 것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열어 주는 이러한 배고픔의 증대, 점점 더 풍요해지는 약속으로 가득 차 있다. 애무는 헤아릴 수 없는 배고픔을 먹고산다. 미래 사실에 대한 기다림이 아닌, 이러

한 성욕의 지향성, 미래 자체의 독특한 지향성을 철학적 분석에서는 언제나 오해하였다. 프로이트(S. Freud) 자신도 리비도(libido)를 말하긴 하지만, 리비도는 쾌락을 추구한다는 것, 그리고 쾌락을 분석을 시작할 수 잇는 단순한 내용 정도로 본다는 것, 사람들은 이 자체를 분석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는 것 외에는 별로 해 주는 이야기가 없다. 프로이트는 존재의 일반 경제 안에서 이러한 쾌락이 가진 의미를 연구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성욕은 미래, 모든 내용에서 순수한 미래의 진정한 사건이요, 진정한 미래, 모든 내용에서 순수한 미래의 진정한 사건이요, 진정한 미래의 신비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욕이 지닌 예외적인 위치를 충분히 고려하고자 한다.
에로스를 통한 타자와의 관계를 실패라고 특징지을 수가 있는가? 현재 유행하는 서술들의 용어를 수용할 때, '장악', '소유', 또는 '인식'을 에로틱한 것의 특징으로 보고자 할 때, '그렇다'고 또 다시 답할 수박에 없다. 하지만 이와 같은 것들, 이와 같은 실패는 에로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타인을 소유하고, 장악하고 인식할 수 있다면 그는 더 이상 타인이 아니다. 소유, 인식, 장악은 '할 수 있음'과 같은 말이다.
그런데 타자와의 관계는 대개 하나의 융합[하나됨]으로 추구된다. 타자와의 관계를 하나의 융합으로 보는 관점은 바로 내가 싸우고자 하는 것이다. 타인과의 관계, 그것은 타자의 부재이다. 이것은 단순한 부재, 순수 무(無)의 부재가 아니라 미래 지평에서의 부재, 시간으로서의 부재이다. 이러한 지평은 우리가 앞에서 죽음에 대한 승리라고 부른, 그러한 초월적 사건 가운데서 인격적 삶을 형성하는 지평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이것에 관해 몇 마디 해야 하겠다.


생산성

죽음의 타자성에서 여성적인 것의 타자성으로 관심을 들리게 했던 그 문제로 되돌아가 보자. 순수 사건 앞에서, 죽음으로서 존재하는 순수 미래 앞에서, 자아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더 이상 자아일 수 없는 사건 앞에서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아가 자아로 남을 수 있는 상황을 찾아보았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을 일컬어 우리는 죽음에 대한 승리라고 불러 보았다. 다시 한번 강조하건대, 이러한 상황은 '할 수 있음'을 통해 그 성격을 그려 낼 수 없다. 어떻게 나는 너 안에 흡수되지 않고 나를 잃지 않으면서 너의 타자성 안에서 나로 남아 있을 수 있는가? 어떻게 자아는, 나의 현재 속에 있는 자아가 아니면서, 다시 말해 어쩔 수 없이 자신에게 돌아온 자아가 아니면서, 너 안에서 나로 남아 있을 수 있는가? 어떻게 자아는 자신에게 타자로 될 수 있는가? 아버지가 되는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아버지의 존재(paternit )는 전적으로 타인이면서 동시에 나인 '낯선 이'와 관계하는 것이다. 내 자신에 대한 나의 관계는 그럼에도 나에게 낯선 것이다. 왜냐하면 아들은 마치 내가 쓴 시나 내가 만든 물건처럼 그렇게 단순히 나의 작품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나의 소유물이 아니다. '할 수 있음'의 범주나 소유의 범주는 다같이 아이와의 관계를 그려 줄 수 없다. 원인의 개념이나 소유의 개념으로도 생산성(f condit )의 사실을 파악할 수 없다. 나는 나의 아이를 가지고 있지 않다.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나는 나의 아이이다. 단지 여기서 <나는 이다>라는 낱말을 엘레아 학파나 플라톤 학파의 의미와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존재한다[이다]'라는 동사에는 일종의 다수성과 초월성이 내포되어 있다. 심지어 가장 모험적인 실존철학적 해석조차도 이러한 초월성을 간과해 버렸다. 다른 한편으로, 아들은 예컨대 나의 슬픔, 나의 시련 또는 나의 고통처럼 그렇게 나와 함께 일어나는 그러한 사건이 아니다. 아이는 하나의 자아이며

, 인격이다. 끝으로, 아들의 타자성은 다른 자아(alter ego)의 타자성이 아니다. 아버지의 존재는 내가 내 자신을 나의 아들인 것은 옮길 수 있는 그러한 공감이 아니다. 내가 나의 아들인 것은 나의 존재를 통한 것일 뿐 공감 때문이 아니다. 그러므로 '홀로서기'와 더불어 시작하는 자기(soi)로의 나(moi)의 복귀는 에로스를 통해 열려진 미래의 전망으로 인해서 사면(赦免)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이러한 사면은 홀로서기의 해체를 통해서는(이러한 해체 자체가 불가능하지만) 얻어 낼 수 없고, 그 대신 아들을 통해서 실현된다. 그러므로 자유와 시간은 원인의 범주에 의해서가 아니라 아버지의 범주에 따라 실현된다.
베르크손의 '엘랑 비탈( lan vital)'이란 개념은 예술적 창조와 출산(이것을 우리는 생산성이라고 불렀다)을 동일한 운동으로 혼동하고 있는데 이 개념에는 죽음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탈인격주의적 범신론으로 빠지고 있다. 이러한 의미의 범신론은 우리의 변증법에서 불가피한 계기인 주체성의 고립과 수축(crispation)을 충분히 드러내지 않는다. 아버지의 존재(paternit )는 단순히 아들 안에서 아버지를 다시 새롭게 하고 아들과 하나됨이 아니다. 아버지의 존재는 아들과의 관계에서 아버지도 외재적 존재임을, 다원주의적 존재임을 말해 준다. 자아의 생산성은 그것의 존재론적 가치에 의해 평가되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러한 평가가 전혀 없었다. 생산성이 생물학적 범주로 이해되고 있다고 해도 이 개념이 지니고 있는 의미의 역설, 심지어는 심리학적 의미를 지워 버리지는 못한다.
나는 죽음의 개념에서 시작하였다. 그리고 여성적인 것의 개념을 통해 아들의 개념에 도달했다. 나는 현상학적인 방식을 따르지 않았다. 나의 논의는 오히려 변증법의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홀로서기의 동일성, 자아의 자기 자신에의 매임(l'encha nement du moi au soi)에서 시작하여 이

러한 동일성의 보존으로, 존재자의 보존으로, 그럼에도 자기로부터 해방되는 자아로 우리의 논의가 전개되었다. 우리가 분석한 구체적 상황들은 이러한 변증법의 실현을 보여 준다. 물론 그 사이에 있는 것들이 많이 생략되었다. 죽음, 성(性), 아버지의 존재 ― 이러한 상황은, 이 상황 속에서는 완전히 배제된 개념인 '할 수 있음'과 관계해 볼 때 그때 비로소 하나의 동일성을 확보할 수 있음이 지금까지의 우리의 논의를 통해서 드러났다.
이것이 나의 주목적이었다. 내가 특별히 하고자 했던 것은, 타자성이란 그저 나의 자유 외에도 다른 자유의 존재도 있다는 사실이 아님을 분명하게 보여 주는 것이었다. 이러한 자유에 대해서 나는 힘을 가진다. 여기서 타인은 완전히 낯선 이요, 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이다. 다수의 자유의 공존은 각자 하나하나의 존재는 건드리지 않는 다수성이다. 이와 같은 다수성은 하나의 일반 의지(volont g n rale)로 뭉칠 수도 있다. 성, 아버지의 존재, 그리고 죽음은 각 주체의 존재 자체와 관계된 이원성(二元性)을 존재 안에 도입한다. 존재 자체가 둘로 늘어난다. 이로써 엘레아적 존재 개념은 극복되었다. 시간은 존재가 타락한 형식이 아니라 존재 사건 자체이다. 엘레아적 존재 개념은 플라톤 철학을 지배하였다. 그리하여 다수는 하나(一)에 종속되고 여성적인 것의 역할은 수동성과 능동성의 범주로 사유되었으며, 그 결과 물질로 환원되고 말았다. 플라톤은 그의 특정한 에로스 개념 속에서도 여성적인 것을 넣지 않았다. 플라톤은 그의 사랑의 철학에서 오직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이데아에 보기를 제공해 주는 역할을 여성적인 것에 부여할 따름이다. 한 사람과 다른 사람의 관계에서 매우 특이한 점을 그는 전혀 보지 못하고 지나쳐 버렸다. 플라톤은 이데아 세계를 반영할 수 있는 공화국을 구상하였다. 그는 빛의 세계, 시간이 없는 세계의 철학을 하였다. 플라톤 이후부터 사람들은 사회적인 것의 이상을 융합[하나됨]의 이상에서 찾았다.

그래서 주체는 타자와의 관계에서 타자를 자신으로 동일사하는 경향이 있고 그리하여 집단적 표상이나 공동의 이상을 갖게 된다고 사람들은 생각하였다. 이것은 '우리'라고 말하는 집단성이고, 인식 가능한 태양이며, 진리로 향하면서 타자를 자신과 얼굴과 얼굴을 맞댄 존재로 보지 않고 단지 자신과 나란히 있는 자로서 인식하는 집단성이다. 이것은 매개자로서 역할하는 제3자를 중심으로 형성되는 집단성이다. [하이데거의] 서로 함께 있음(Miteinandersein)도 '함께(mit)'의 집단성에 머물러 있고 진리를 매개로 그것의 본래적 형식 안에서의 진리를 드러낸다. 이것은 어떤 공통적인 것을 중심으로 한 집단성이다. 여타의 공동체의 철학이 모두 그렇듯이 하이데거에게서도 마찬가지로 사회성은 홀로 있는 주체에게서 발견되며 고독이란 개념을 통해서 그 본래적 존재에 있어서의 현존재(Dasein) 분석이 수행된다.
어깨를 나란히 한(c te- -c te) 집단성과는 반대로 나는 <나-너(moi-toi)>의 집단성을 제시하고자 노력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부버(M. Buber)와는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부버에게서는 상호성이 두 개의 독립된 자유를 연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고립된 주체성의 불가피한 성격이 과소 평가되고 있다. 나는 미래의 신비로 향한 현재의 시간적 초월을 탐구해 보고자 하였다. 이것은 제3자에의, 그것이 인격이든, 진리이든, 어떤 일이든, 또는 어떤 직업이든 간에, 그러한 제3자에의 참여가 아니다. 이것은 공통성이 전혀 없는 집단성이다. 이러한 집단성은 매개자가 없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한 관계이며, 이러한 관계는 에로스를 통해 우리에게 제공된다. 여기서는 타자의 가까움 가운데서 전적으로 거리가 유지되며, 그러한 가까움과 이원성, 이 들로부터 에로스의 감동적인 측면이 형성된다.
사랑 안에서의 의사 소통의 실패로 제안된 것이야말로 이 관계가 안고 있는 긍정적인 측면을 구성한다. 그러한 타자의 부재는 정확하게 말해서 타

자로서의 그의 현존이다. 코스모스, 즉 플라톤의 세계와 맞서서 정신의 세계가 있다. 이 세계에서는 에로스가 함축하는 의미를 유(類)의 논리고 환원하지 않을뿐더러 자아(le moi)는 동일자(le m me)를, 타인(autrui)은 타자(l'autre)를 대치한다.
<해설>

레비나스의 철학
강 영 안 (서강대 교수, 철학)

1. 레비나스 철학의 근본 물음

엠마누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6-1995)는 유태계 출신 철학자로 현대 프랑스 철학자 가운데 가장 독창적인 철학자 중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24세가 되던 1930년에 [후설의 현상학에서의 직관 이론]이란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뒤 후설과 하이데거를 프랑스에 소개하는 일을 주로 하였다. 사르트르도 레비나스가 파이퍼와 함께 번역한 후설의 {데카르트적 성찰}과 레비나스의 논문을 통해 후설 철학에 입문할 수 있었다. 하지만 1940년 이후 레비나스는 후설과 하이데거와는 전혀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한다. 철학은 충격과 망설임에서 시작된다는 그의 말처럼 국가 사회주의의 비인간성과 참혹한 2차 대전의 경험은 그의 철학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 자신이 독일군 포로로 갇혀 있었을 뿐 아니라 무수한 유태인의 죽음을 경험하였다.
그는 이렇게 묻는다. "1,500년 동안이나 기독교 복음의 영향을 받아온 유럽이 그처럼 엄청난 살상과 파괴를 자행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인가? 전쟁의 폭력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인가?" 레비나스는 전쟁과 서양철학의 전통은 서로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전쟁은 사람을 전체에 복종시킨다. 전체에 복종하지 않는 사람은 무참하게 제거해 버리는 것이 전쟁의 속성이다. 이런 의미에서 전쟁은 전체주의적이다. 그런데 서양철학은 대체로 하나의 이념으로 모든 것을 통일하고 포괄하고자 하는 노력이었다고 레비나스는 본다. 예컨대 '자연', '역사', '물질', '신', '자아' 또는 '힘에의 의지'는 모든 것을 통일하고 설명하고자 한 전체성의 이념이다. 이렇게 보면 '존재의 진리'에 인간을 종속시키고자 했던 하이데거의 철학도 전체성의 이념에 의해 주도되는 철학이라는 혐의를 벗어날 수 없다. 레비나스는 전체성의 철학, 또는 전쟁의 철학에 대항해서 어떤 무엇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개인의 인격적 가치와 타자에 대한 책임을 보여 주는 평화의 철학을 구축하고자 한다.
레비나스는 {존

재에서 존재자로(De l'existence l'existant)}(1947), {시간과 타자(Le temp et l'autre}(1947)라는 책과 더불어 [존재론은 근본적인가?(L'ontologie est-elle fondamental?](1951), [철학과 무한자의 이념(La philosophie et l'id e de l'Infini)(1957)] 등의 일련의 논문을 거쳐 1961년에는 그의 대표작 {전체성과 무한, 외재성에 관한 연구(Totalit et Infini. Essai sur l'ext riorit )}(La Haye, 1961)라는 책을 내어놓았다. 레비나스는 이 책 서두에서 이 책의 목적이 "무한자의 이념에 근거한 주체성을 변호하는 데 있다"고 밝히고 있다. 이것은 주체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이 그의 철학의 중심 주제임을 말한다. 주체성을 새롭게 규정해 보는 일은 후기 저작에 속하는 {타인의 인간주의(Humanisme de l'autre homme)}(Montpellier, 1972), {존재와 다른 것 또는 존재 사건 저편(Autrement qu' tre ou audel de l'essence)}(La Haye, 1974)이라는 책에서 더욱더 철저하게 수행된다.

2. 존재 부조리의 경험과 주체의 출현

근대 이후 반성철학은 인간을 사유하는 존재로 규정해 왔다. 내 앞에 놓여 있는 책상은 그 자신을 스스로 의식할 수 없지만 나는 책상과 책상을 바라보는 내 자신을 의식한다. 사유를 통해 나는 나와 다른 것을 서로 구별할 수 있고, 나에 대해서 '나'라고 스스로 의식할 수 있기 때문에 사유야말로 나의 나됨을 가능케 하는 조건이요, 본질로 생각되었다. 나를 나로서 규정하는 데 있어서 사유를 제외한 다른 요소는 부수적이고 우연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따라서 신체성은 여기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다. 나의 존재를 떠받쳐 주는 것, 즉 나를 근거지어 주는 바탕은 신체성이 아니라 사유하는 것이 데카르트 이후 관념론 전통의 일반적인 생각이었다. 레비나스는 이러한 전통을 문제삼는다.
레비나스는 우리의 경험 가운데 가장 원초적인 경험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을 던진다. 실존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레비나스는 그것을 부조리에 대한 경험으로 이해한다. 부조리의 경험은 존재 자체에 관한 경험인데 이 경험을 우리는 단지 잊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대개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 이 사실 자체보다 삶의 내용과 주변 사물에 오히려 관심을 두고 있다. 하지만 삶이 그 내용을 상실할 때, 모든 것이 무의미할 때, 그러면서도 그것을 벗어날 수 없을 때, 그 순간에 우리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에 직면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단적인 존재를 레비나스는 '있다(il y a)'라고 부른다. 레비나스는 독일군 포로수용소에서 쓴 {존재에서 존재자로}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물의 외형이 어두운 밤 속에 감추어져 버릴 때, 그때는 아무 대상도 아니며, 대상의 성질도 아닌 밤의 암흑이 우리를 점령한다. 우리를 점령한 그 밤의 무(無)를 우리는 도무지 견뎌낼 수 없다. 그러나 무는 무 자체가 아니다. '이것' 혹은 '저것'이라 부를 수 있는 무엇이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것'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부재는 곧 현존이고, 그것은 절대로 피할 수 없는 현존이다. 이 현존은 부재에 대한 변증법적 대립항이 아니며 관념을 통해 파악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무는 아무런 매개 없이 현존한다. 그것에 대한 어떤 언술도 없고, 아무 것도 우리에게 답해 주지 않는다. 다만 침묵만이, 침묵의 음성만이 들릴 뿐이다. 파스칼이 말한 '무한한 공간의 침묵'이 우리를 불안하게 한다. 다만 '있을 뿐이다'. 어떤 의미도 없이, 어떤 명사도 덧붙일 수 없이 다만 '있을 뿐이다'. 마치 비가 오고 날씨가 덥듯이 그렇게 있을 뿐이다. 본질적 익명성, 정신도 외재성도 서로 맞서 있지 않다. 외재적인 것은 ― 만일 이 용어를 허용한다면 ― 내재성과 아무런 상관없이 머물러 있다. 주어진 것도 없다. 세계도 없다. '나'라는 것도 밤에 의해 침몰되고, 개별성을 상실한 채 숨막혀 있다. (……) 존재는 하나의 힘의 장(場)으로 억누르는 분위기로 존속한다."

단순히 '있다'는 사실은 불면을 통해 경험할 수 있다고 레비나스는 보고 있다. 불면은 구체적인 어떤 것과 관계하는 것도 아니고 무엇을 깊이 생각하는 태도도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이름 모를 무와 관계하는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어두운 밤에 내 자신을 맡기고 잠이 오길 기다리는 일뿐이다. 이와 같은 부조리와 무의미에 직면할 때 나는 나의 존재에 대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부조리에 대한 경험은 존재 자체에 대한 무력감의 경험이고, 주도권의 상실이며, 자율적인 의미 부여가 되지 않는다는 의식이다. 레비나스는 이와 같은 존재 경험을 익명적이고 무의미한 사건으로 보고 있다. 무의미하다는 것은 인간 존재가 부정적이란 뜻이 아니라 이름 붙일 수도 없고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는 너도 나도 아닌 상황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부조리의 경험은 목마름이나 배고픔과 같은 결핍의 감정을 자아내지 않는다. 오히려 과잉의 감정이 여기에 수반된다. 뭐라고 이름붙일 수도, 빠져 나올 통로를 발견할 수도 없이 단지 '있다'는 사실 자체는 너무 무겁게 나를 짓누른다는 감정을 일으킨다. 그것은 동시에 무력감의 순간이다. 부조리에 직면할 때 인간은 부단히 탈출하고자 노력하지만 뜻대로 할 수 없다. 감각적 쾌락을 탈출구로 삼아 보지만 그러한 시도는 순간일 뿐 잠에서 깨어날 때 또 다시 무의미에 직면한다. 탈출의 실패는 수치감을 자아내고 수치감은 자기 자신의 존재를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인간 존재에 대한 레비나스의 묘사는 일면적일 수가 있다. 레비나스 자신도 이 점을 의식하고 있다. 삶의 핵심은 그 자신도 부조리의 경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부조리로부터 탈출하는 데 있다고 본다. 사람은 누구나 무의미한 경험 속에 함몰해 있기 보다 의미 있는 삶을 바란다. 하지만 문제는 의미 있는 삶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것이다. 막연하게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 {존재에서 존재자

로}에서 레비나스는 익명적이고 무의미한 존재에서 의미 있는 삶으로의 이행, 즉 독립적인 존재자의 출현을 현상학적으로 기술한다.
독립적인 자아의 출현을 레비나스는 '잠'을 통해 보여 준다. 이것은 전통 철학에서 볼 때 엉뚱한 발상이다. 전통 철학은 잠에 대해서 생각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잠이 의식의 가능 조건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깨어 있는 의식과 지성만이 인간의 고유한 본질이라고 생각하였다. 레비나스도 다른 철학자와 마찬가지로 의식은 인간에게 매우 중요한 능력이란 사실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가 강조하고 싶어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의식은 무의식을 통해 규정된다>는 것이었다. 의식은 우리가 잠을 잘 수 있다는 사실을 통해서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이다. 만일 잠을 잘 수 없으면 인간의 의식은 영원히 깨어 있어야 하고, 쉴새없이 활동을 계속해야 한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생각을 중단할 수도, 끝낼 수도, 다시 시작할 수도 없기 때문에 결국 우리 자신의 의식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주도권도 가질 수 없게 된다. 우리의 의식도 '있다(il y a)'는 사실의 운명을 짊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가 잠을 잘 수 있다는 사실은 이러한 익명성으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다는 증거이다. 잠을 통해서 우리는 자기 의식으로 되돌아올 수 있고, 또 다시 의식 활동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잠은 이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레비나스는 본다. 잠은 우리를 의식의 강요에서 벗어나게 할 뿐만 아니라 의식에 하나의 상황, 하나의 위치를 부여한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우리의 의식은 시간과 공간 밖에서 출현하여 시공 세계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다. 의식은 현실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할 수 있고, 어떤 일정한 위치로부터 현실을 조직할 수 있는 능력을 뜻한다. 인간은 잠을 통해 다시 일어날 수 있고 다시 설 수 있는 기반을 얻을 수 있다. 잠은 우리 자신을 다시 수용하고 우리를 보호하는 기반을 제공한다. 잠은 우리 자신을 떠받치고 있는 기반에

자신을 내맡기는 것이다. 우리의 의식은 항상 위치가 있는 의식이다. 왜냐하면 의식은 늘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오고 자기 자신을 다시 세울 수 있는 장소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영원한 진리>로만 살 수 없기 때문에 자기에게 되돌아와 누워 쉴 수 있어야 한다. 잠은 우리의 의식이 구체적인 '여기'와 '지금'에 관계할 수 있는 '장소'이다.
의식의 상황성 혹은 어디엔가 쉴 수 있는 가능성은 다시 일어설 수 있음을 뜻한다.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은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음을 뜻한다. 그리고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은 새롭게 다시 의식 활동을 수행할 수 있음을 뜻한다. '여기'에서 또다시 일어나는 순간, '지금'이라는 순간을 통해 삶을 다시 시작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활동에 대해서 주도권을 가질 수 있다. 자리에 돌아가 다시 일어설 때, 우리 자신은 홀로 설 수 있다. 홀로서기와 더불어 비로소 무엇이라 이름부를 수 있는 주체가 등장한다.
대부분의 서양 철학자들은 '지금'이란 순간을 지나간 것과 아직 오지 않은 것 사이의 단순한 이행기로 이해한다. 하지만 레비나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 곧 현재는 과거와의 단절을 전제한다. 현재라는 순간에 사람은 홀로 선다. 현재는 언제나 지나가기 때문에 홀로서기를 우리는 언제나 확인해야 한다. 홀로서기는 과거를 통해 설명될 수 없다. 현재는 항상 새로운 시작이고, 그렇기 때문에 현재는 과거와 미래 사이의 한 순간이기 이전에 자기 자신을 새로운 시작으로 긍정하는 그 무엇, 곧 자아(自我)와 관계한다. 자아는 현재 이 순간에 <바로 여기에 내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지금 이 순간은 레비나스에 따르면 자아 자체이다. 여기서 자아는 자신의 존재를 과거로 수용하고, 미래를 위한 계획을 세울 수 있다. 현재라는 시간을 통해 자아는 익명적인 역사의 운명을 벗어나 자기의 존재를 스스로 확인하고 자기의 역사를 만들 수 있다. '지금, 여기'에서 자아는 잠자고, 일어남으로써 '

있음'의 숙명을 망각하고 자기 자신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 자아의 자기 정립을 레비나스는 초기 철학에서는 '홀로서기'(hypostase, 실체)라는 말로 표현한다.

3. 향유, 거주 및 노동

레비나스는 인간의 자기성, 자아의 독립성이 실현될 수 있는 가능성을 {전체성과 무한}에서 더욱더 치밀하게 추적해 나간다. 그런데 이제는 자기 실현 과정을 '홀로서기' 대신 '분리(la s paration)'라는 말로 표현한다. 자기 스스로 서는 것은 자기 자신을 타인과 사물로부터 분리하는 것이고 자기 자신이 설 자리를 '세계 속에서' 점유하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레비나스는 하이데거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인간 존재를 그린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사물들이 우리에게 의미를 갖는 것은 우리가 그것들을 생존을 위한 도구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임을 강조한다. 사물을 도구로 사용하는 인간의 존재는 근본적으로 염려하는 존재이다. 레비나스는 되묻는다. 염려가 세계 속에 살아가는 인간의 원초적인 존재 방식인가? 레비나스는 오히려 즐김과 누림, 곧 향유(jouissance)가 세계 내 존재의 가장 근원적인 존재 방식이라고 주장한다. 향유는 염려와는 다른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 세계는 염려하는 존재에게는 삶의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삶을 향유로 본다면 햇볕과 맑은 공기, 바람과 흙냄새는 향유의 대상이다. 우리는 먹고, 일하고, 놀고, 산책하기 위해 산다. 우리가 산책하는 이유는, 어떤 다른 목적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에게 만족을 주기 때문이다.
향유의 관점에서 볼 때 사물은 우리의 생존을 위한 수단이기보다 존재의 원천이고 만족으로 체험된다. 향유는 주변 세계를 삶의 요소 혹은 삶의 환경으로 체험하는 것이다. 세계는 활동을 가능케 하는 젖줄이고 생활 환경이다. 세계의 이러한 성격을 레비나스는 '요소적'이라고 부른다. 물은 물고기에게 삶의 '요소'이듯이 세계는 인간에게 삶의 '요소(l' l ment)'이다. 요소는 규정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요소는 사물들이 나타나고 사물들이 다시 돌아가는 포괄적인 환경이다. 공기, 바다, 흙, 바람 등은 '형식 없는 내용'이고, 이 포괄적인 환경 속에서 우리는 고향

을 맛본다. 내가 딛고 서 있는 땅은 내가 그것에 관해 생각하는 것과 상관없이 나를 떠받치고 있다. 나는 나를 에워싼 공기와 물과 햇볕을 홀로 즐길 수 있다. 바로 이 향유를 통해 주체성의 모습이 최초로 드러나는 것으로 레비나스는 묘사한다.
향유는 하지만 순간적인 것에 불과하다. 만족감을 맛보는 순간, 내일에 대한 불안이 고개를 내민다. 삶의 요소(생활 환경)속에 사는 동안 세계는 나에게 있어서 무규정성으로, 아무것도 아닌 그 무엇으로, 내가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체험된다. 물과 공기와 바람과 흙은 나의 자유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뜻과 상관없이 나에게 은택을 베풀기도 하고 나의 생활을 위협하기도 한다. 삶의 요소는 이런 의미에서 나를 떠받치고 있는 기반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익명성으로, 무규정성으로, 나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세력으로 남아 있다.
요소의 위협은 인간에게 두 가지 반응을 일으킨다. 하나는 신화적 반응이다. 요소의 무규정적인 불확실성은 신화적 신앙이 뿌리내릴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한다. <불확실성으로서의 요소의 미래는 신화적 요소의 신성으로 체험된다.> 요소의 어두운 심연은 <얼굴 없는 신들>이 출현하는 장소이다. 이 어두움은 인간을 다시 익명적인 '있음'의 영역에 빠뜨린다. 감추어진 힘에 대한 원시적 공포를 벗어나 인간이 자기 스스로의 독립성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무신론'의 위협을 감수해야 한다. 무신론, 즉 신적인 존재와의 '분리'를 통해서 요소가 지닌 마술적 힘이 상실된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관리하고 지배하고 요소(자연)를 정복하고 싶은 충동을 갖게 된다. 이제 즐김은 내일을 위한 걱정으로 바뀌고, 이 걱정 때문에 인간은 노동하고 집을 지음으로써 자기의 삶을 안전하게 설정한다. 이것이 요소의 위협에 대해서 인간이 보이는 두 번째 반응이다. 집을 짓고 거주하며, 노동을 하는 것은 인간이 자기 긍정, 자기 자신의 독립성을 실현하기 위한 조건이다.


삶의 요소(환경)는 우리 존재의 충족임과 동시에 위협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인간은 요소에 자기 자신을 무조건 내맡기기보다 그것으로부터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오고자 노력한다.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오는 것, 자기를 환경과 분리하여 자기성을 확립하는 일은 집을 짓는 가운데 구체화된다. {존재에서 존재자로}에서 레비나스는 잠과 휴식을 통해 자기에게로 돌아오는 과정을 그렸지만 {전체성과 무한}에서는 거주를 통해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는 과정을 그린다.
거주는 요소와의 직접적인 접촉을 단절하고 세계의 위협을 벗어날 수 있는 다른 영역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거주를 통해 인간은 자기의 독립성, 자기의 자립성을 되찾으며, 세계를 지배하고 다스릴 수 있는 자리를 얻게 된다. 거주는 그러나 돌아옴, 자기 자신에의 운둔만을 뜻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거주는 텅 빈 공간 안에 서는 것이 아니라 친밀한 공간을 얻는 일이기 때문이다. 집은 가까움과 따스함을 맛보는 곳이다. 이곳에서 인간은 타인을 만나고 타인과 친밀한 관계를 갖는다. 인간은 거주를 통해 위협적인 주변 세계로부터 자기 자신을 보호한다.
한편, 인간은 거주와는 달리 노동을 통해 주변 세계를 정복하고 지배한다. 레비나스는 노동을 '즐김'과 대비시킨다. 우리는 우리의 욕구와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땀을 흘리고 오늘의 즐거움을 유보한다. 현실은 노동을 통해 소유되고, 일정한 꼴이 획득되며, 우리에게 종속된다. 노동은 인간의 삶에 지배와 소유의 차원을 열어 준다. 환경 세계가 지닌 무규정성과 익명성은 노동을 통해 해제되고 사물은 이제 분명한 의미와 기능을 갖게 된다. 사물은 노동을 통해 인간의 생존 수단으로, 도구로서 취급되며 사회적 관계에서 교환 가능한 대상으로 전환된다.
레비나스는 인간의 지적 능력도 노동과 같은 차원에서 이해한다. 지적은 현실을 파악하고, 소유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지식은 현실을 파악하고, 소유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지식은 현실에

대한 힘으로 작용한다. 노동과 인식은 인간이 타자와 자기가 아닌 다른 사물을 자기에게로 환원시키는 방식이다. 인간은 노동과 인식을 통해 자기 자신을 주체로서 확립하고, 주변 세계를 인식과 노동의 대상으로 삼게 된다.
인식과 노동을 통해 사물들과 관계할 때 인간은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언제나 타인의 존재를 경험한다. 타인은 나와 함께 일하기도 하고, 갈등을 일으키기도 한다. 세계를 소유하고 나의 목적에 종속시키려고 할 때 타인의 욕구와 나의 욕구 사이에 갈등이 있음을 체험한다. 이러한 타인의 존재는 무엇을 뜻하는가? 타인의 출현은 나의 삶에 무엇을 뜻하는가? 나의 독립성의 한계인가? 나의 존재에 새로운 의미, 새로운 차원을 열어 주는 사건인가?


4. 타인의 얼굴

레비나스의 {전체성과 무한}은 타인의 존재에 관해서 전혀 다른 이념이 필요함을 역설하는 책이다. '전체성'과 '무한'이라는 두 개념의 병치는 레비나스의 의도를 보여 준다. 한편으로 이 두 개념은 대립되는 개념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무한의 이념은 전체성(또는 내재성)을 근거지어 주는 것이다. 전체성은 인간이 자기 실현을 추구하면서 만든 체계요, 타인들과 함께 구축하는 세계 질서이다. 여기서 존재 의미는 세계 지평의 한계 내에 제한된다. 그것은 죽음과 함께 끝나기 때문에 삶에 결코 절대적인 의미를 줄 수 없는 의미이다. 전체성은 동일자의 지평이고, 인간은 자기 실현의 원 속에서 무한히 자기를 확장해 가는 힘이다. 그러나 무한은 동일자의 원 안으로 포섭될 수 없는 이념이다. 무한은 우리의 존재 지평 밖에서 들어오는 것이다. 무한의 차원은 우리가 완전히 파악할 수 없다는 점에서 막연하게 '있다(il y a)'는 사실과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무한은 구체적인 현존과 고유한 이름을 가지고 우리에게 호소하는 타인과 관계한다는 점에서, 막연히 무의미하게 존재한다는 사실과 구별된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타인은 우리에게 얼굴로 나타난다. 타인이 얼굴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난다는 것은 각별한 의미가 있다. 얼굴은 사물과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특징이 있다. 사물은 전체의 한 부분으로, 또는 전체 속의 한 기능으로 의미가 있지만 얼굴은 이렇게 규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얼굴은 코와 입, 눈으로 이루어지지만, 이는 판자와 서랍, 책상 다리가 모여 책상이 이루어지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책상은 바라보지도 않고 호소하지도 않고 스스로 표현하지 않는다. 하지만 얼굴은 바라보고 호소하며 스스로 표현한다. 얼굴과의 만남은 사물과는 전혀 다른 차원을 우리에게 열어 준다. 레비나스는 [윤리와 정신]이란 글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얼굴을 통해서 존재는 더 이상 그것의 형식에 갇혀 있지 않고 우리 자신 앞에 나타난다. 얼굴은 열려 있고, 깊이를 얻으며, 열려 있음을 통해서 개인적으로 자신을 보여 준다. 얼굴은 존재가 그것의 동일성 속에서 스스로 나타내는, 다른 어떤 것으로 환원할 수 없는 방식이다."

얼굴이 자기 스스로 내보이는 방식을 레비나스는 '계시'라고 부른다. '계시'라는 종교적 언어를 굳이 사용하고 있는 까닭은, 얼굴과의 만남은 절대적 경험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얼굴의 현현은 역사적, 사회학적, 문화적, 또는 심리학적 지시체계로 환원할 수 없는 고유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얼굴의 자기 표현으로부터 <의미화는 의미 부여에 선행한다>는 명제가 도출된다. 이와 같은 가능성을 레비나스는 '맥락 없는 의미화의 가능성'이라고 부른다. 얼굴은 나의 입장과 위치와는 상관없이 스스로 자기를 표현하는 가능성이다. 얼굴의 나타남에서는 그러므로 내가 부여한 의미보다 타인의 존재 자체가 더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런데 만일 타인의 얼굴이 어떤 체계로도 환원될 수 없다면 그것이 가진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레비나스의 답은 또 다시 우리의 예상을 벗어난다. 타인의 얼굴에서 오는 힘은 상처받을 가능성, 무저항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상처받을 수 있고 외부적인 힘을 막아낼 수 없기 때문에, 바로 그 때문에 얼굴에서 도덕적 힘이 나온다고 레비나스는 생각한다. 궁핍 속에 있는 인간은 그의 궁핍을 통해 우리에게 호소한다. 이러한 호소는 하나의 명령으로 우리에게 주어진다. 하지만 그러한 호소에 대해 나는 무관심할 수 있고 거부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불의를 자행하는 것이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무저항은 나의 동정을 불러일으키는 연약성과는 다른 개념이다. 왜냐하면 만일 타인이 연약하기 때문에 나에게 동정을 불러일으킨다면 타인은 나의 선의와 자선에 종속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 내 자신이 나의 행위의 의미를 규정한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얼굴은 동정을 유발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정의로워야 한다는 것을 요구한다. 스스로 방어할 수 없는 눈길은 <너는 살인하지 말라>는 요구를 담고 있다. 무력함 자체가 곧 도움에 대한 명령이다. 그래서 레비나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얼굴은 직설법이 아니라 명령법으로, 한 존재가 우리와 접촉하는 방식이다. 그것을 통해 얼굴은 모든 범주를 벗어나 있다."

타인의 얼굴의 현현은 하나의 모순에 직면하게 만든다. 얼굴은 타인의 무력함과 주인됨을 동시에 계시한다. 가장 낮은 것은 가장 높은 것과 결합한다.

"타자는 타자로서 높음과 비천함의 차원에 스스로 처해 있다. 영광스런 비천함. 타자는 가난한 자와 나그네, 과부와 고아의 얼굴을 하고 있고, 동시에 나의 자유를 정당화하라고 요구하는 주인의 얼굴을 하고 있다."

타인의 얼굴이 지닌 비폭력적, 윤리적 저항은 강자의 힘보다 더 강하게 우리의 자유를 문제삼는다. 강자의 힘은 나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고 완전히 박탈할 수 있지만 나의 자유 자체를 문제시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힘없는 타인의 호소를 인정할 때 나의 자유, 나의 자기 실현을 그대로 무한정 추구할 수 없다. 얼굴의 현현을 통해 나의 자발성에 제동이 걸린다. 타인의 곤궁과 무력함에 부딪힐 때 나는 내 자신이 죄인임을, 부당하게 나의 소유와 부와 권리를 향유한 사람임을 인식한다. 타인의 경험은 내 자신의 불의와 죄책에 대한 경험과 분리할 수 없다. 이 죄책은 그러나 실패와 좌절을 초래하지 않는다. 실패와 좌절은 내가 나의 계획과 야망을 실현하지 못한 것 때문에 오는 것이지 타인이 당하는 곤궁에 대한 의식, 나의 무책임에 대한 의식에서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죄책의 경험은 나의 자유가 자의적이고 내 자신의 욕구에 기인한다는 의식에서 유래한다. 진정한 죄책 경험은, 즉 내 자신의 의로움에 대한 철저한 회의는 타자에 대한 '욕망'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타자에 대한 욕망(이것을 레비나스는 '형이상학적 욕망'이라 부른다)을 레비나스는 마치 죄책과 실패를 구별하듯 욕구와 구별한다. 욕구는 결핍된 것을 채우려는 동기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지만, 욕망은 전혀 다른 의도에서 생기는 것이다. 인간의 욕망은 잃어 버린 땅에 대한 그리움이 아니라 <우리가 태어나지 않은 땅에 대한 욕망>이요, <눈에 보이지 않는 자>에 대한 욕망이다. 욕망은 타인에 대한 관심과 책임 속에서 구체화된다. 타인에 대한 관심을 가질수록 책임과 의무에 대한 호소는 더욱 커진다. 자유는 이때 책임있는 관심과 헌신으로 전환된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타자는 부버가 말하는 '너'와 구별된다. 타자는 나와 너의 친밀한 관계 속에 용해될 수 있는 자가 아니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타자는 나에게 거리를 두고 있고, 나에게 낯선 이로, 나의 삶에 완전히 포섭될 수

없는 자로 남아 있다. 각자는 타인에게 <낯선 이>로 남아 있다. 타자의 얼굴의 출현은 그러므로 친밀성으로 환원할 수 없는 측면을 보여 준다. 타자는 나에 대해서 완전한 초월과 외재성이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타자는 내가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 무한성이다. 이 무한성은 익명성이 아니다. 얼굴 배후에 있는 어떤 낯선 힘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 아니다. 무한성은 내가 다른 모든 사람과, 지금 여기에 부재하는 제3자와 맺는 구체적인 결속을 뜻한다. 가까이 있는 타자는 다른 모든 사람과 결속되어 있기 때문에 타자는 나와 마주한 너가 아니라 제3자, 즉 '그'이다. '낯선 이'로서, '고아'와 '과부'로서의 타자의 얼굴은 보편적인 인간성을 열어 주는 길이다. 타자의 얼굴에 직면할 때 나는 그곳에서 모든 사람들을 만날 뿐만 아니라, 나의 재산과 기득권을 버림으로써 타자와 동등한 사람이 된다. 타자의 얼굴을 받아들임으로써 나는 인간의 보편적 결속과 평등의 차원에 들어간다.
레비나스의 이러한 견해는 매우 급진적이다. 보통 윤리적 요구란 동등한 관계를 전제로 가능하다. 그러나 레비나스는 진정한 윤리적 평등과 형제애는 인간 사이의 대칭적 관계를 통해 구축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타자는 나와 동등한 자가 아니다. 그는 그가 당하는 가난과 고통 속에서 나의 주인이라고 레비나스는 말한다. 나는 내 자신을 벗어나 그를 모실 때 비로소 그때 그와 동등할 수 있다. 타자를 처음부터 나와 동등한 자로 생각할 때 그는 나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나와 마찬가지로 자기 실현을 추구하는 사람으로 보게 된다. 이 경우, 나는 나의 풍요 가운데 남아 도는 것을 그에게 나누어 주거나 동정이나 반대 급부 때문에 그를 도우게 된다. 그러므로 레비나스는 타자와의 비대칭성, 불균등성이 인간들 사이의 진정한 평등을 이룰 수 있는 기초이고, 이런 의미의 평등만이 약자를 착취하는 강자의 법을 폐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5. 인간 존재와 죽음, 그리고 죽음 저편

타인의 얼굴은 나의 자발적인 존재 확립과 무한한 자기 보존의 욕구에 도덕적 한계를 설정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타인은 거주와 노동을 통해 이 세계에서 나와 내 가족의 안전을 추구하는 나의 이기심을 꾸짖고 윤리적 존재로서, 타인을 영접하고 환대하는 윤리적 주체로서 내 자신을 세우도록 요구한다. 이것은 타자 속에서 나를 상실해 버리는 소외 현상을 가져오지 않는가? 레비나스는 이 물음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대답한다. 타인은 나의 존재를 위협하는 침입자가 아니라 오히려 내면성의 닫힌 세계에서 밖으로의 초월을 가능케 해 주는 존재라고 보는 것이다. 이것은 레비나스가 '분리'를 주체성의 가능 조건으로 보는 데에서도 나타난다. 자아는 그를 에워싸고 있는 세계로부터 자신을 분리할 뿐만 아니라, 타자로부터도 자신을 분리함으로써 스스로 개별적인 자기성을 확립할 수 있다. 그러나 레비나스에 따르면 진정한 주체성은 타인의 존재를 자기 안으로 받아들이고 타인과 윤리적 관계를 형성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그러므로 레비나스는, 타인은 인간에게 새로운 존재 의미를 열어 주고 지배 관계를 벗어나 서로 섬기는 관계에서 다른 사람과의 의사 소통을 가능케 하는 조건으로 본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타자를 위한 존재'는 죽음 저편을 넘어설 수 있는가, 다시 말해 타자의 얼굴은 죽음조차 초월할 수 있는 전망을 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만일 죽음이 삶의 끝이라면 윤리적 관계도 죽음을 통해 끝나 버리고 삶도 의미를 잃는 것이 아닌가? 죽음은 인간 존재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레비나스는 죽음을 밖에서 오는 폭력으로 이해한다. 죽음은 우리의 자유를 제거한다. <죽음 속에서 나는 절대적 폭력, 밤의 살인에 내 자신을 내맡긴다.> 죽음을 우리에게 있어서 전적으로 낯선 존재로 보는 것은 하이데거와는 정반대되는 입장이다. 하이데거는, 죽음은 결코 사실로서 경험하지 못하고 다만 가능성으로만 경험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이것은 불가능의 가능성이요, 무의 가

능성이다. 불가능의 가능성을 경험하는 데 바로 자유의 핵심이 있다. 왜냐하면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가능성에 직면할 때 나는 죽음에 대항해서 나의 존재를 기획하고, 스스로 나의 존재에 대해서 책임져야 한다는 강요를 받는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불가능의 가능성, 즉 무의 가능성에 직면해서 스스로 자신의 자유를 주장할 수 있다.
레비나스는 죽음을 이렇게 보지 않는다. 그에 따르면 죽음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은 고통의 경험이다. 고통 속에서 우리는 우리와 다른 것, 우리 밖에서 침입하여 우리를 무력하게 하는 힘을 경험한다. 고통 속에서 직면하는 죽음은 불가능의 가능성이 아니라 모든 가능성의 불가능성이다. 그래서 레비나스는 {시간과 타자}에서 <죽음은 하이데거에게는 자유의 사건이지만, 우리에게는 고통 속의 주체가 가능한 것의 한계에 도달하는 사건이다>라고 말한다. 죽음은 자유의 기초가 아니라 인간의 무력과 부자유에 대한 경험이다. 죽음 앞에서 인간은 주도권을 완전히 상실한다. 죽음은 본질적으로 알 수 없는 신비요, 절대적 타자성으로부터 나를 지배하는 미래이다.
만일 죽음이 나의 존재 실현을 끝맺음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는가? 레비나스는 죽음이 타자의 현현과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강조한다. 죽음은 타자의 현현과 마찬가지로 우리와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일어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죽음과 타자는 자유에 대한 위협으로 보일 수 있다. 죽음은 일종의 살인이요, 가해이며, 폭력이다. 따라서 레비나스는 <죽음의 폭력은 마치 전제 군주의 폭력처럼 우리를 위협한다>고 말한다. 이 때문에 죽음에 대한 불안은 타자에 대한 불안으로 이어진다. 타자도 마치 죽음처럼 나의 세계로 뛰어들어와 내가 가진 것을 앗아가는 자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죽음의 위협은 항상 연기되어 있다. 우리는 지금 당장 죽음을 경험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우리는 죽음의 비극성을 잊고 살 수 있다. 그런데 죽음은

타자와의 관계의 연장선상에서 체험되기 때문에 그 의미가 변경될 수 있다고 레비나스는 생각한다. 타자는 그의 초월성(외재성) 때문에 마치 죽음처럼 나의 자유를 위협하는 존재이지만 동시에 그의 상처받을 수 있는 가능성과 무력성 때문에 나에게 죽임을 당할 수 있는 존재이다. 따라서 타자는 살기 위해서 나의 관심과 보살핌이 필요한 존재이다. 타자의 무력성과 상처받을 수 있는 가능성 때문에 나는 죽음의 한계를 넘어서서 그를 섬겨야 한다는 요청을 받는다.
내가 타자를 잘 대접하고 보살필 때, 타자에 대한 사랑과 함께 혹시나 내가 힘없는 타자를 죽이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마음이 생긴다. 이때 죽음에 대한 불안이 사라질 수 있다고 레비나스는 말한다. 죽음에 대한 불안은 이기적으로 생각할 때 일어나는 것이다. 타자를 선대(善待)할 때 나의 존재는 나에게서 타인의 미래로 무게 중심을 옮겨 놓게 된다. 죽음으로 향한 나의 존재는 '타자를 위한 존재'로 바뀌고 이것을 통해 죽음의 무의미성과 비극성은 상실된다. 죽음은 삶의 마지막 지평이 아니다. 왜냐하면 나의 존재 의미는 내 자신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타자와 그의 미래에 있기 때문이다. 자기 중심적인 의미 부여에서 필연적으로 야기되는 죽음에 대한 불안은 타자를 위한 선행을 통하여 사라지고 만다는 것이다.
나의 유한성의 문제를 타인에 대한 무한한 책임을 통해 해결하는 것은 과연 올바른 것인가? 타인은 나에게 죽음을 뛰어넘어 무한한 미래를 열어줄 수 있는가? 만일 타인이 죽는다면 나의 선행은 죽음으로 끝나고, 타인으로 향한 초월도 하나의 환상으로 끝나고 마는 것이 아닌가? 레비나스는 이러한 귀결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생산성 또는 비옥성(f condit )에서 찾아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생산성은 남자와 여자의 성관계를 통해 수태 가능한 것을 뜻한다. 생산성을 통해 시간은 무한성의 차원, 절대적 미래, 폭력과 죽음에 맞서는 무한한 잉여의 차원을 얻을 수 있다. 레비나스에게 있어서 사랑

은 언어와 더불어 타자와 관계할 수 있는 방식이다. 사랑은 욕망과 현실의 요구와 쾌락의 대상으로 소유하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랑하는 여인과의 관계를 통해 미래를 내다보는 것이다. 레비나스의 분석은 타자와의 관계가 사랑의 이중성을 통해 생산성으로 완성되며, 생산성을 통해 미래와 시간이 다시 새롭게 출현하는 과정을 보여 준다.
사랑, 즉 에로스는 여성적인 것의 출현과 더불어 시작된다. 여성적인 것은 신비와 매혹을 지니고 있다. 여성적인 것은 이론적인 인식을 통해 접근될 수 없는 타자성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레비나스는 이 타자성을 여성적인 것의 본질로 본다. 여성은 스스로 감추고, 어떤 지배로부터도 벗어난다. 바로 이 가운데서 여성적인 것이 지닌 상처입을 가능성, 이해 불가능성이 여성의 특징으로 드러난다. 하지만 여성은 동시에 성애를 통해 어떤 다른 것과도 비할 수 없는 매력을 발산한다. 성관계를 통하여 여성적인 것은 구체적인 형식과 의미를 가진 세계를 잊게 하고 스스로 자기 자신은 보이지 않으면서 무엇을 보게 하며, 감추어진 것, 전적으로 타자적인 것을 경험하게 만든다.
레비나스는 에로스를 감추어진 것을 찾으려는 몸짓이라고 본다. 여자는 남자에게 이 감추어진 것을 보여 준다. 감추어진 것을 찾는 몸짓은 애무로 나타난다. 레비나스는 애무를 무엇인지 모르면서 손에 잡으려고 하고, 그러면서도 계속 미끄러지는 어떤 것을 만지는 행위로 기술한다. <애무는 있지 않은 것, 무보다 못한 것, 미래에 감추어진 것을 찾는 것이다.> 이것은 성관계에서 한층 고조된다. 감추어진 것과 접촉하지만 아직 보지 못한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그 '감추어진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찾을 수 있는가?
놀랍게도 레비나스는 이 감추어진 것, 전적으로 타자적인 것의 발견은 아이의 출산을 통해서 실현된다고 본다. 감추어진 것은 이제 그 익명성에서 해방되어 이름이 주어지고 구체적인 얼굴을 가진다. 그리고 아

이의 출산으로 나와 타자 사이에 일어난 분리와 결합의 끊임없는 운동이 멈추게 된다. 아이는 <타자가 된 나(moi tranger soi)>이다. 나는 아버지가 됨으로써 나의 이기주의, 나에게로의 영원한 회귀로부터 해방된다. 자아는 이제 타자와 타자의 미래 속에서 자신의 한계를 초월한다. 레비나스는 이러한 미래와의 관계를 '생산성(비옥성)'이라고 부른다.
생산성을 통해 인간은 자기 자신의 유한성으로부터 구원받는다. 아이의 출산으로 완전히 새로운 미래,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게 된다. 나는 홀로 미래를 체험할 때 나 자신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마치 기나긴 여행 끝에 이타카로 돌아온 오디세이아처럼 나의 세계의 테두리 안으로 되돌아와 결국 늙어 죽고 만다. 하지만 나는 에로스의 관계를 통해 감추어진 미래를 찾아 나서고 이 미래를 아이와의 관계에서 구체적으로 체험한다. 아이를 통해서 과거는 절대성을 잃게 되고 절대적 미래의 차원이 열린다. 그러므로 레비나스는 진정한 시간이야말로 과거를 새롭게 할 수 있는 가능성이요, 과거에 대한 용서라고 말한다. 용서란 과거를 망각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출산으로 과거는 또 다시 현재와 미래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시간은 아이를 통해 다시 젊어지고 푸르름을 띠게 된다.


6. 맺음말

레비나스의 사상은 여기에 요약, 정리한 것보다 훨씬 더 풍부하고 복잡하다. 하지만 인간 존재를 해명하는 그의 태도는 어느 정도 분명하게 드러났다고 생각된다. 레비나스는 그 어떤 철학자보다도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사건에 대해서 우리의 관심을 보이고 있고 그러한 경험이 인간 존재 질서에서 지닌 의미를 밝혀 준다. 잠, 불면, 음식, 노동, 거주, 타인의 존재, 여자와 아이는 공간과 시간 속에 처해 있는 인간 존재를 규정하는 요소들이라는 것이다. 얼핏 보기에 레비나스는 매우 유물론적으로 보일 수 있으나 유물론과 유심론의 대립, 또는 정신과 물질의 대립은 레비나스에게는 이미 의미를 잃고 만다. 인간은 타인과 윤리적, 사회적 관계를 갖는 정신적 존재이다. 하지만 인간이 정신적 존재임은 신체를 통해 실현된다. 신체를 통해 체험하는 존재 무의미, 잠과 불면은 인간이 단순히 물질적 존재가 아니라 의미를 찾고 의미를 지향하는 정신적 존재임을 보여 준다. 마찬가지로 타인과의 윤리적 관계는 사회, 경제적 관련을 벗어나 따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레비나스는 누구보다 강조하고 있다.
인간의 주체성 문제와 관련해서 레비나스는 {전체성과 무한}에서 적어도 두 가지 의미로 주체성을 규정한다고 볼 수 있다. 가장 원초적인 의미의 주체성은 향유를 통해 형성되는 주체성이다. 삶의 '요소'(일반적인 용어로 '자연')로서 경험하는 세계를 향유하고 즐기는 가운데, 다시 말해 물을 마시고 숨을 들이키는 가운데 인간은 '자기성'의 영역을 확보한다. 물과 공기와 햇볕 등을 즐김으로써 인간은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전체로부터 자기를 분리하여 '내부성(내재성)'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레비나스는 향유 또는 행복을 개별화의 원리로 본다. 거주와 노동을 통해 삶의 지속성과 안전을 확보할 때 내재성으로서의 주체성은 세계를 소유하고 지배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무한히 확장하려는 욕망, 즉 전체화에 대한 욕망을 보여 준다. 이런 의미의 주체성은 본질적으로 '이기주의적'이고 자기 자신의

삶에만 관심을 갖는다. 여기에서는 초월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레비나스는 타자와의 윤리적 관계를 통해 얻어지는 주체성에 대해 말한다. 여기서 타자는 나와 똑같은 위치에 있지 않은 자로, 거주하며 노동하는 나에게 윤리적 요구로서 임하는 무한자로, 내가 어떠한 수단을 통해서도 지배할 수 없는, 즉 나로 환원할 수 없는 절대적 외재성으로 묘사된다. 타자의 출현과 더불어, 내가 타자를 영접하고 대접할 때 진정한 의미의 주체성, 즉 '환대(歡待)로서의 주체성'이 성립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레비나스는 타자의 출현으로 인해서 첫째 의미의 주체성, 즉 '자기성' 혹은 '내재성'이 상실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다. 타자를 받아들이는 나는 다른 주체가 아니라 세계를 즐기고 거주하며 노동하는 주체이다. 그러나 바로 이 주체가 타자의 출현을 통해서 이기적인 욕망을 포기하고 타자에 대한 책임적인 주체로 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인간이 어떻게 자기의 이기적인 욕구를 제한하고 타자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타행(利他行)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만일 내 자신 속에 있지 않다면, 어떻게 나는 나의 삶의 태도를 바꾸어 타자를 나의 존재의 무게 중심으로 삼을 수 있는가? 레비나스의 답은, 타자의 얼굴의 현현으로 나에게 '형이상학적 욕망'이 창조되고 이 욕망으로 인해 인간은 이성적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윤리적 요청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일 수 있다. 오직 들을 귀가 있는 자만이 들을 수 있고,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자만이 볼 수 있지 않는가? 무엇으로 인간에게 이타행을 실현케 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물음은 레비나스에게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던져야 할 물음이다. □

출처 : 어둠 속에 갇힌 불꽃
글쓴이 : 정중규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