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s and Writings/문학작품

[스크랩] 서양철학사 100장면 - 김형석

그림자세상 2009. 12. 5. 13:40
서양철학사 100장면
      김형석 지음
      가람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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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명: 서양철학사 100장면
  저자명: 김형석
  출판사명: 가람기획
  출판년도: 1994년
  출판사 주소: 서울시 동작구 대방동 348-4
  출판사 전화: 815-1253
  출판사 FAX: 823-9106
  묵자책의 페이지: 392


@ff
  차례
  1. 철학 이전 이야기: 철학의 탄생(기원전9-7세기)
  2. 비극작가들과 이상주의적 철학자들: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 왕'(기원전5
세기)
  3. '만물의 원질은 물': 철학의 아버지, 탈레스와 그 후계자들(기원전6세기-)
  4. 최초의 유물, 원자론자: 데모크리토스(기원전 460년경--370년경)
  5. '우주는 아름다운 조화가 있는 전체': 피타고라스(기원전 572--492년)
  6. 풀리지 않는 논쟁의 시작: 파르케니데스, 헤라클레이토스(기원전 6--5세기)
  7. 말싸움의 시대: 소피스트의 제일일자, 프로타고라스(기원전482-411년)
  8. 허무주의를 마감하다: 소크라테스의 등장(기원전469-399년)
  9. '너 자신을 알라': 소크라테스와 그 방법론(기원전 5세기)
  10. '악법도 법': 소크라테스의 사형선고(기원전399년)
  11. '행복의 원천은 덕에 따른 행위': 안티스테네스, 키니코스 학파 창설(기원전 4
세기 초)
  12. 세계 최대의 철학자: 플라톤의 등장(기원전428-347년경)
  13. 현실세계와 이념세계: 플라톤의 이데아 론(기원전 4세기)
  14. '이상국'으로 가는 길: 플라톤의 (국가)(기원전 4세기)
  15. 만학의 아버지: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322년)
  16. '참다운 행복이 진정한 선':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사상(기원전 4세기 후반)
  17. 달라지는 세계와 철학자들: 헬레니즘 시대(기원전334-30년)
  18 자연의 질서에 따르라: 스토아 철학(기원전 4-2세기)
  19 처세술로서의 철학: 스토아 말기 사상(1-2세기)
  20 "최고의 선은 정신적 쾌락이다.": 에피쿠로스 학파(기원전 4-3세기)
  21 회의주의는 회의 그 자체가 목적?: 회의학파 (기원전 1-3세기)
  22 이상주의 철학의 마지막 불꽃: 신플라톤 학파 창시자, 플로티노스 (204-270)
  23 로마 최후의 비운의 철학자-보에티누스(480--525)
  24 신과 인간의 시대로: 중세철학 시작(5세기경)
  25 철학 위에 올라선 종교: 교부철학과 스콜라 철학(2--8세기)
  26 구원은 '그노시스'에 도달하는 것: 그로시스의 사상(1--2세기)
  27 불합리하므로 나는 믿는다: 유스티누스, 테르툴리나누스, 락탄타우스(150--325
년)
  28 기독교와 그리스 철학의 통일: 오리게네스(185--254년?)
  29 중세기 최대의 사상가: 아우구스티누스(354--430년)
  30 회의, 인식, 의지의 철학: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론"
  31 신은 우리영혼에 내재하는 진리의 근원: 아우구스티누스의 윤리, 역사관
  32 아리스토텔레스의 재등장: 스콜라 철학의 등장(9세기)
  33 신은 실재이며 완전한 보편자: 안셀무스와 보편논쟁(11--12세기)
  34 불행했던 사랑의 이야기: 아벨라르두스(1079--1142)
  35 신에게 이르는 정신의 여행: 4대 스콜라 철학자 13--14세기
  36 중세사상의 완성자: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년)
  37 철학과 신학의 조화: 토마스 철학의 근본문제들
  38 이성의 영역, 신앙의 영역: 요한네스 둔스 스코투스(1270-1308년)
  39 중세철학의 종말: 로저 베이컨(1214-1294년)
  40 철학 제2막이 내리다: 근대철학의 시작(14세기경)
  41 인간성 회복운동: 르네상스와 종교개혁(14-16세기)
  42 천재들의 시대: 레오나르도 다 빈치(1452-1519년)
  43 자유로운 학문과 사상의 탄생: 인문주의자들의 등장(16세기경)
  44 자연철학과 자연과학: 브루노(1548-1600년) 등
  45 고맙지 않은 사회철학자:N. 마키아벨리(1469-1527년)
  46 진실에의 길, 경험과 귀납:F. 베이컨(1561-1626년)
  47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있다':R. 데카르트의 방법론 "방법론 서설" "163
7년"
  48 대륙철학과 영미철학: 연역법과 귀납법의 특성
  49 '존재는 곧 자연이며 신' 스피노자(1632-1677)
  50 범신론과 이신론:스피노자의 신관
  51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블레주 파스칼(1623--1662년)
  52 '그리스도의 변증론':파스칼의 "팡세" 출간(1670년)
  53 모나드...'우주의 살아 있는 거울': 라이프니츠(1646--1716년)
  54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토머스 홉스 (1588-1679)
  55 가장 영국적인 철학자: 존 로크(1632-1704)
  56 경험론의 마지막 완성자: 데이비드 흄(1711-1776)
  57 경험주의 철학의 마감: 흄과 그 이후의 문제
  58 자유와 평등 추구: 몽테스키외 등(1689-1755)
  59 혁명의 불길을 당긴 '계몽주의': 프랑스 혁명
  60 새로운 철학의 문을 열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1781년)
  61 비판주의 이성 철학자: 칸트의 비판철학(1724-1804)
  62 '독일국민에게 고함': 피히테(1762-1814)
  63 수재는 일찍 끝난다: 셸링(1775-1854년)
  64 '...세계는 정신이다. 그리고 변증적으로 발전한다': 헤겔(1770-1831년)
  65 '역사는 자유의 전개과정이다': 헤겔의 역사철학
  66 모순, 대립, 통일: 헤겔의 변증법
  67 독일관념론의 종언: 헤겔의 사망(1831년)
  68 가장 재미있는 철학책: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1819년)
  69 '세계는 나의 표상': 쇼펜하우어(1788-1860년)
  70 초인의 등장: 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년)
  71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니체의 초인사상(19세기말)
  72 '불안'과 '절망'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1813-1855년)
  73 '하느님 앞에 선 단독자': 키에르케고르의 사상
  74 '절망...죽음에 이르는 병': 키에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1849년)
  75 삶과 세계관의 철학: W. 딜타이(1833-1911)
  76 '창조적 진화'의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1859-1914)
  77 독일실존철학의 대표자: 하이데거(1889-1976년)
  78 철학자의 국적: 언어권과 방법론에 의한 철학
  79 '삶은 죽음에 대한 선택과 결단':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1927년)
  80 실존철학의 두 거장: 하이데거와 야스퍼스의 주변이야기
  81 '인격...최고의 목적가치': 야스퍼스의 "철학"(1920년대 말)
  82 실존적 초월로 나아가는 길: 실존철학의 후반기(1920년-40년대)
  83 그리스 철학과 기독교 사상: 서구사상의 두 뿌리
  84 마르크스주의의 탄생: 카를 마르크스(1818--1883)
  85 "공상"에서 "과학"으로: 마르크스의"자본론"(1867년)
  86 가치철학을 체계화한 책: W. 빈델반트의 "철학개론"(1914년)
  87 철학적 인간학의 선구자: 막스 셸러의 "인간과 역사"(1929년)
  88 사회철학의 아버지: 콩트의 "실증철학 강의"(1830--1842)
  89 세 사람의 사회학자: 콩트와 밀 부자(1806--1873)
  90 '최대다수의 최대행복': J.S.밀의 "공리주의"(1863년)
  91 사회학의 방법론 정립: M.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의 정신" (1
905년)
  92 '도전과 응전'의 세계사관: A.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1934--1961년)
  93 현대철학의 두 거봉: B. 러셀과 N. 화이트헤드
  94 분석철학의 탄생: G.E.무어와 L. 비트겐슈타인(1873--1958년)
  95 유럽 철학과 미국 철학: R. W. 에머슨(1803--1882)
  96 미국의 대표적인 철학: W. 제임스의 (프래그머티즘)(1907)
  97 '인간의 본질은 행위에 있다': 프래그머티즘의 대성자 J.듀이(1858--1952)
  98 다양한 철학유파의 용광로: 오늘의 미국철학
  99 앞으로의 철학은 어떻게 될 것인가?: 현대의 철학적 과제들
  100 철학은 권하고 싶은 학문인가?: 철학의 위상
  부록:서양문화사 연표
@ff
    책머리에
  나는 오랫동안 한 가지 소망을 갖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좀 더 많은 사람, 특히 젊은 세대들이 철학과 가까워질 수 있을까 함이
었다.
  그 뜻을 위해 60년대 초반에 <철학입문>을 내놓은 바가 있었다. 지금까지 가장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은 입문서가 되어온 책이다. 감사한 일이다. 그 뒤 <철학 이야기>
라는 서양철학의 역사 이야기를 펴낸 일도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외면당하기 쉬운 철학을 쉽고 재미있게 읽도록 하자는 염원에서 씌
어진 책들이었다.
  이번에 가람기획에서 <한 권으로 보는 서양철학사 100장면>을 집필해달라는 청탁을
받았다. 철학을 이해하며 가까이하고 싶은 독자들을 위해 마지막 봉사를 해보겠다는
생각으로 집필을 착수하였다. 다행히 지난 여름은 해외로 나가는 일도 없어졌고 지리
한 더위도 잊고 싶어, 땀을 흘려가면서 노력한 결과로 여기에 그 결실을 보게 되었다.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서양철학의 대표적인 인물과 그 철학적 배경 그리고 그들의 중
심사상을 역사적으로 서술해보기로 뜻을 모았다.
  이 책을 읽는 사람은 철학의 문제들을 인물과 더불어 역사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이라고 생각한다.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을 순서에 따라 서술해나간 것이다.
  말하자면 철학개론과 철학사를 인물 중심으로 재편성한 셈이다. 어떤 한 시대나 국
가에 편중되지 않았기 때문에 비교적 공정하게 비중있는 철학자들이 거의 빠짐없이 소
개되도록 노력했다.
  만일 독자들이 <재미있게 읽었고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다>고 말하게 된다면 저자
의 기쁨과 만족은 더할 바 없을 것이다.
  여러 가지로 협조해 준 가람기획 식구들에게도 고마운 뜻을 전하고 싶다.

  1994년 11월 말
  저자 쓰다.
@ff
    1. 철학 이전 이야기: 철학의 탄생(기원전9--7세기)
  그때 세계에서는
  BC 1000--600년경: 중국에서 시경'원형 성립
  BC 850년경: 그리스, 호메로스 활동
  BC 700--500년경: 고조선, 철기문화 시작. 8조 금법 시행

  1930년대의 일이다. 내가 평양에서 중학교에 다닐 때의 사회적 풍토를 회상해본다.
  그 당시 평양에는 생각있는 교양인들은 기독교 신앙을 많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기
독교가 두 가지 책임을 감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는 민족정신이며, 다른 하나는
교육을 받아야 된다는 교육적 열성이었다.
  나도 그런 풍토 속에서 자랐다.
  그뒤 얼마 동안 우리는 한국문학에 접촉하는 기회도 가졌다. 이광수를 비롯한 많은
작가의 작품들이 우리의 정신적 각성과 성장을 일깨워주었다.
  학교에서는 초보단계이기는 했으나 화학, 물리학 공부를 했고, 화학실험실에서 배우
는 것들이 신기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고도 얼마의 세월이 지난 뒤부터야 철학에 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한글로 씌
어진 한치진씨의 '철학개론'이 그 즈음에야 나왔던 것이다. 책방에 가보면 종교책이
많았고 문학책이 적은 부분을 차지했는가 하면, 우리말로 된 철학책은 거의 보이지 않
았을 정도이다.
  어려서 내가 체험한 이런 과정을 서양철학을 공부하게 되면서도 느끼는 것 같은 인
상을 받았다.

  서양철학은 그리스를 둘러싼 지중해 연안에서 발생된다. 그리고 상당한 세월이 지난
뒤에 아테네를 중심으로 본격적인 철학운동이 전개된다. 그런데 그 초창기의 현상을
보면 철학이 먼저 탄생된 것은 아니었다. 일찍부터 보급되어 있었던 것은 종교문화다.
오르피즘 종교가 그 중심을 만들고 있었다. 그렇게 된 이유는 이집트와 중동지방에서
흘러들어온 종교가 그 당시 사람들의 정신계를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생활에 필요하고 현실에서 요청되는 단편적인 생활과학이 발달되어왔다.
세계어디서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자연과 더불어 생존하기 위해서는 물과 농토를 다
스려야 했고, 기후와 계절을 살피는 기상학적 지식이나 초보적인 천문학이 필요했다.
그런 것들을 위해서는 기하학 같은 초보적인 과학이 필수조건이었다.
  그 뒤에 탄생하는 것이 철학이 된다는 과정은 상식처럼 되어있었다.
  그리스도 같은 과정을 밟았던 것 같다. 오르피즘 종교의 신앙을 이어받은 예술가들
이 나타나 문학적 작품들을 쓰게 된다. 그러므로 그 표현에는 몇 가지 차이가 있다.
연극의 형태를 취하기도 하고 시민들의 시적 작품이 등장하기는 해도, 그 내용은 대부
분이 인간의 삶과 문제에 관한 신화적 형식과 성격을 밟게 되었다.
  이렇게 나타난 처음 대표적인 작품이 호메로스의 일리아스(Ilias)와 오디세이아(Ody
sseia)라는 서사시다. 그것이 기원전 9세기의 작품이었으며, BC 7세기에 이르러 완성
되었다는 것을 보면, 이것은 한 개인의 이름으로 전해져 내려오던 내용이 오랜 뒤 완
성을 보았다는 뜻이다. 이것은 당시의 상황으로 미루어 종교시인 또는 신앙적 시인이
그 시대의 종교관과 사상을 대신했던 것으로도 볼 수가 있다. 그것이 그리스 인들의
신앙을 이어받음과 동시에 또 그들의 사상을 만들어주었다고 볼 수도 있다.
  호메로스의 글들이 일반화된 뒤에 헤시오도스(Hesiodos)의 '신통기'라는 책이 나온
다. BC 7세기 때의 일이다.
  이 책은 종교적 신화와 철학의 중간쯤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수없이 많이 나오는 신
화의 주인공들인 신의 계보와 조직을 배후에서 정리하며, 거기에 나타난 정신과 사상
을 통해 어떤 공통된 세계관을 얻어보려고 한 노력의 산물이다. 또 신화의 주인공들은
인간에 비해 만능성을 갖고 있으나, 거기에 윤리성을 부여하여 신화를 윤리, 도덕적인
방향으로 유도해나간다.
  신화의 주인공인 신들에게는 윤리성이 없었다. 선악관념이 없는 무구함이 그 특성이
다. 그것이 윤리성을 갖춘다는 것은 에덴동산이 선악과가 나타나는 것 같은 새로운 발
전일 수가 있다. 이렇게 되면 그들의 종교사상이 철학으로 발전할 충분한 여건을 갖추
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이 대중화되며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사상형성의 길잡이가 되기
위해서는 철학보다 문학이 그 적절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문학은 일반성을 가지면
서도 이론적 체계를 갖추기 이전의 대중문화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리스 인들이 특출한 소질의 소유자가 아니었더라면 철학은 좀더 늦게 나타났
을지도 모른다.

  (그림설명: 올림포스 신들의 행렬. 왼쪽부터 페르세포네, 헤르메스, 아프로디테, 아
레스, 밀다발을 든 데메테르, 헤파이스토스, 홀을 든 헤라, 삼지창을 든 포세이돈, 창
을 든 아테나, 번개불을 든 주신 제우스, 활을 든 아르테미스, 아폴론의 어순이다. 대
리석제. 기원전 1세기경.)
@ff
    2. 비극작가들과 이상주의적 철학자들: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 왕'(기원
전5세기)
  그때 세계에서는
  BC 484년경: 그리스, 헤로도토스 태어남. '역사'저술
  BC 450년경: 중국, '논어'성립

  지금도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신전에 가면 언덕 밑에 디오니소스극장 자리가 있다.
  옛날 아테네 사람들이 모여 상연되는 연극을 즐거이 감상했던 곳이다. 그 당시 그들
이 눈물을 머금고 깊이 감동에 젖은 작품들 중에는 소포클레스(Sophokles, 496--406 B
C)의 작품들이 있었고, 그중에서도 오이디푸스 왕 이야기는 대표적인 것이었다. 지금
도 그 작품은 인류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을 정도다.

  오이디푸스의 부왕이 점을 쳐본다. 점쟁이 얘기는 장차 태어나는 아들은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같이 사는 패륜아가 될 것이라고 예언한다.
  부왕은 그 뜻이 이루어질 수 없게 하기 위해 아들이 탄생되는 대로 인적이 없는 깊
은 산 속에 내다버린다. 응당 죽었어야 할 아기는 그곳을 지나던 목동에 의해 구출된
다. 그래서 그 목동의 아들로 자라게 된다.
  건장한 젊은이로 자란 이 아들 오이디푸스는 어느 날 길을 가다가 어떤 귀인의 행차
에 부딪힌다. 길을 비키는 문제로 싸움이 벌어져 오이디푸스는 그 귀인 일행과 싸워
귀인을 죽이고 성안으로 들어간다.
  성안에서는 왕이 궐위가 되었기 때문에 후임자를 뽑는 일이 벌어진다. 오이디푸스는
그 시험을 치르고 통치자의 위치에 오른다. 그리고 홀로 있는 왕의 부인과 결혼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최선의 노력과 통치를 하는데도 불구하고 나라에는 불행한 일들
이 계속된다. 이상히 생각한 오이디푸스는 점쟁이를 찾아가 그 원인을 묻는다.
  점의 결과는 이 나라에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같이 사는 패륜아가 있기 때문
에 재난이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그가 누구냐고 물어도 점쟁이는 대
답을 하지 않는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그 패륜아를 찾으려고 노력하나 끝내 실패하고, 점쟁이에게 누
군지 알려주지 않으면 죽이겠노라고 위협한다. 국민을 위해서는 그 패륜아는 죽어 마
땅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점쟁이는 할 수 없이, 그 패륜아가 바로 당신이며 지금
의 부인이 어머니라고 말한다. 길에서 죽인 귀인이 오이디푸스의 아버지였다는 것이
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오이디푸스는 어머니의 품에서 바늘로 두눈을 찔러 맹인이 되고,
모친과 더불어 사막으로 떠나면서, 하늘이 사막바람과 모래로 이런 버림받은 모자가
사람들의 손을 더럽히지 않도록 사막에 묻어달라고 호소한다.
  사막의 폭풍이 모래를 휘몰아쳐와 이 두 사람을 장례 지내게 만든다.

  그렇게 지혜롭고 예술성이 풍부한 그리스 인들이 이 비극에 크게 공감했던 것이다.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그리스 인들에 따르면, 자연 및 자연의 질서가 모든
삶의 기본이 된다. 그들의 세계관에는 자연, 인간, 신은 같은 질서 속에서 관계가 이
루어지는 것이다. 인간과 신들은 질적인 차이가 있다기보다는 연속성 위에서 제각기의
기능을 담당하는 것이다. 멀리 구름에 가리어진 올림포스 산 위에는 신들이 살고 있으
며, 인간과 신들은 필요한 때는 서로 삶의 연관성을 갖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런데 이 자연, 인간, 신들을 좌우하는 절대적인 질서가 한가지 있었다. 그것은,
운명은 절대적이며, 그 운명의 종말은 비극이라는 관념이었다. 최고의 신이며 만능의
신으로 추앙 받고 있는 제우스 신이라도 운명이 그렇게 결정되어졌으면 그 앞에서는
무능의 쓴잔을 마셔야 한다.
  바로 오이디푸스 왕 이야기가 그것을 보여주는 내용인 것이다. 그러면 이런 운명은
어떻게 주어지는 것인가? 그것은 자연의 반복되는 질서와 그 자연질서의 법칙의 필연
성과 통하는 것이다. 인도사람들도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으며 노, 장자의 철학에도
같은 뜻이 있었다면, 그리스 인도 같은 생각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 인들이 이렇게 어두운 운명관에만 붙잡혀 있는 것은 아니다.
밝고 조화로운 세계질서도 지니고 있었다. 플라톤의 이상주의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이념의 세계로 우리를 이끌어주고 있지 않은가. 비극적 작가들에 비하면 철학자들은
비교적 긍정적이며 이상주의적 세계관을 택했던 것 같다. 물론 같은 자연질서에서 출
발한다고 하였어도...
  우리가 여기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그리스 정신의 위대성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는
것이다. 가장 깊은 비극정신에서 가장 높은 이상주의까지를 점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도 우리의 심금을 울려주기도 하며 이상의 꿈을 키워줄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로고스와 더불어 카오스를 알려주었으며, 아폴로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디오
니소스적인 양면성을 이끌어 오늘에 이르게 됐던 것이다.

  (그림설명: 아테네의 디오니소스 극장 유적. 극장의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이 노래하
고 춤추던 곳으로, 소포클레스 등의 비극작가 작품들이 공연되었다.)
  @ff
    3. '만물의 원질은 물': 철학의 아버지, 탈레스와 그 후계자들(기원전6세기-)
  그때세계에서는
  BC 700년경: 인도, 우파니샤드 철학 일어남
  BC 552년경: 공자, 노나라에서 태어남

  사림들은 탈레스(Thales, BC 6세기 전반기에 활약)를 서양철학의 아버지라고 부른
다.
  그는 밀레투스 출신으로 올리브 농원을 경영해 성공했고, 모든 면에서 풍요롭고 여
유가 있는 가문을 형성하고 있었다. 옛날에도 배가 곯는 사람은 철학을 할 정신적 여
유가 없었던 모양이다.
  탈레스가 철학의 아버지가 된 것은 그가 철학적인 질문을 던진 최초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물음은, "이 세계와 만물의 원질(arehe)은 무엇인가?"였다. 우리를 둘
러싸고 있는 우주의 만물과 인간을 인간되게 만든 원질은 무엇인가?
  이 물음은 신화에서 학문에의 물음이었고, 눈에 보이는 자연을 살피는 자연과학에
대한 철학적 질의였던 것이다. 그 자신이 재산과 시간의 여유를 갖고 과학과 물리학을
연구하던 결과, "그렇다면 만물은 무엇으로부터 이루어졌는가?"하고 물을 만도 하다.
그런데 역사상 이 처음 질의를 던진 사람이 철학의 시조가 된 것이다. 철학적 질문을
꺼렸기 때문이다.
  그 대답은 신통한 것이 못되었다. 그는 만물의 원질은 '물'이라고 보았다. 지중해에
는 물이 출렁이고 있으며 하늘에서는 적당히 비가 내린다. 물은 만물에게 생명을 제고
하며, 그로 인해서 모든 유기체들이 생명을 유지한다. 사람에게도 수분과 피가 흐르고
있으며, 식물을 비롯한 삶의 원동력은 물에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물이 어떻게 변화와 활동을 거듭하는가? 그는 최초의 물활론자가 되
었다. 물은 물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환경과 여건에 따라 자기자신을 변화시켜 세
계만물을 만들어 간다. 물활론(hylozoism)이란 물질이 유기적 변화와 작용을 일으켜
생명력을 갖고 만물로 변질, 발전한다는 소박한 생각이다.

  이런 학설이 나타나게 되면 반드시 그 이론을 추종하는 사람과 비판하는 학자들이
탄생되는 법이다.
  그의 후계자는 여럿 있었다. 여기에 그 비슷한 학자들의 이름을 일일이 열거할 필요
는 없으나, 특기할 철인으로서 아낙시만드로스(Anzximzndros, 610--546 BC) 같은 사람
은 수학, 천문학, 지리학과 별의 운행을 연구한 과학자였다. 그는 탈레스의 물이라는
약간 유치하고 소박해 보이는 생각을 떠나, 만물의 원질은 아페이론(apeiron, 무한불
멸의 성질을 갖는 것)으로 보았다. 그 아페이론에 차고 더운 온도작용이 가해져 어떤
유동체가 생기고, 그 유동체가 공기가 되고, 공기로부터 만물이 생성했다가는 제각기
의 운명에 따라 소멸된다고 주장했다.
  물보다는 깊은 관념성을 갖는 원질을 생각했고, 그것이 작용해 만물의 출발이 된다
고 보았던 것이다.

  그의 뒤를 따르는 아낙시메네스(Anaximenes, 588--524 BC)는 기상학의 업적을 남겼
고, 최초로 지구를 둥근 형상이라고 발표한 사람이었다.
  그는 만물의 원질을 프시케(Psyche)라고 생각했다. 물질적인 것보다는 어떤 작용의
주체를 생각했다. 프시케는 숨(호흡), 공기, 영혼, 생명에 해당하는 뜻이다. 그 작용
체가 가장 가벼운 위치를 점유할 때 불이 되고, 점차로 바람, 구름, 물, 땅 등으로 변
질되었다는 것이다. 그럴듯한 이야기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쉬 생각할 수 있는 학설
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되면 또 다른 학설도 나올 수 있다. 엠페도클레스(Empedocles, 49
0--430 BC)같은 사람은 좀더 소박하게 만물은 여러 원질의 덩어리 같은 것으로 이루어
졌다고 생각했다. 그 미세한 덩어리들이 분자와 같은 것으로 되어 서로 사랑하므로 합
치고 서로 미워하므로 헤어지는 작용을 해 삼라만상의 현실계를 만들었다고 설명한다.
  그러면 그 원질의 덩어리들은 어떤 것인가? 그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보아 기본적인
불, 그와 반대되는 물, 그것들과 연관되는 땅, 대지를 덮고 있는 공기라고 보았다. 그
것들을 없이하면 만물이 사라지며, 그것들이 여러 가지 모습으로 혼성체를 만든 것이
만물이라고 보았다.
  비로소 원질의 덩어리들은 성질을 갖는 것으로 설명되었다. 사람들은 최초의 성질적
원자론이 되었다고 말한다. 애증의 이론이 추가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혼합과 분리
의 원동력이 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는 시칠리아 사람이었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신인과 같은 대우를 받았다고 전해지
고 있다. 그리고 그는 윤회설을 믿기도 했다.
  그의 완성자인 아낙사코라스(Anaxagoras, 500--428 BC)는 그 이론을 더욱 발전시켜,
무한수의 종자가 만물의 실체이며 그 종자는 물질과 더불어 이성을 갖는다고 보았다.
성질적 원자론, 사유하는 물질, 이성물질이 최초의 기본적인 종자들이며, 그 종자들이
만물의 원질, 실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림설명: '만물의 근원은 물'이라고 생각한 탈레스. 밀레투스 출신인 그는 "이 세
계와 만물의 원질은 무엇인가?"라는 최초의 철학적인 질문을 던짐으로써 철학의 아버
지가 되었다.)
@ff
    4. 최초의 유물, 원자론자: 데모크리토스(기원전 460년경--370년경)
  그때 세계에는
  BC 484년경: 석가모니 죽음
  BC 427년경: 고르기아스 '비존재에 대하여, 또 자연에 대하여'

  지금까지 얘기해온 탈레스 이후의 몇 철학자들의 학설을 보고 나면, 역시 2천 5백
년 전의 그리스 인들이 아무리 지혜롭다고 하더라도 학문과 사상적으로는 유치했다는
생각을 금치 못하게 된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한 가지 흐름이 있었다. 철학의 과제는 자연을 연구함에 있었고,
자연세계를 있는 그대로 살펴보며 거기에서 어떤 실체 또는 실재로서의 물질세계를 밝
혀보려고 하는 뜻이었다. 후일의 철학자들이 소박한 실재론이라고 불러준 것은 그 성
격을 잘 설명해주는 내용이다.
  과학은 이미 찾아진 내용 위에 또 다른 내용이 추가되어가기 때문에 과거의 학설이
완전히 버림받는 일은 별로 없다. 그러나 철학은 과거의 철학이 무의미하거나 이어받
을 필요가 없다고 인정되면 버림을 받는 경우가 있다.
  지금까지의 철학이론들은 사실 버림받을 수도 있는 내용들이다. 그러나 여기에 그들
의 철학이 완전히 버림받지 않도록 만든 한 뜻있는 철학자가 나타났다.
  그가 소박한 실재론을 현대적인 성격으로까지 끌어올린 대표적인 철학자였던 데모크
리토스(Democritos, 460?--370? BC)다.
  이 당시에 그리스를 대표하는 세 철학자가 있었다. 데모크리토스, 플라톤, 아리스토
텔레스가 그들이었다. 세 사람 다 20여권씩의 저서를 남겼다. 그런데 플라톤과 아리스
토텔레스의 저서들은 대부분이 그대로 남아 오늘까지 전해지고 있으나, 테모크리토스
의 저서는 대부분이 사라지고 말았다. 심지어는 다른 사람에 의해 인용되었던 부분만
전해지는 경우도 있다.
  리셀 같은 철학자는 만일 데모크리토스의 저서가 완전히 남았더라면 철학의 과학적
발전과 근대적인 추이는 더 속히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생각하면 아쉬
운 일이다.
  확실히 데모크리토스는 탈레스의 물음에 대해 완전히 철학적 대답을 내려준 철학자
였다. 그리고 막연했던 철학적 고찰에 대해 과학성 있는 대답을 주었던 것이다.
  데모크리토스는 충분히 철학적 사고를 했다. 그는 철학의 근본 문제는 유와 비유와
공허의 문제를 취급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있음과 있지 않음과 공허가 있을 뿐인데,
유는 원자(Atom)의 분열과 이동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니까 철학의 과제인 유는 원자들의 운동에서 설명되어야한다. 그 원자는 만물의
원질인 동시에 실체라고 보아야 하겠다. 무게는 있으나 성질은 없는 실체인 것이다.
마치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원자론과 큰 차이가 없는 생각에 도달했던 것이다.
  따라서 원자들은 필연적인 법칙에 따라 운동할 뿐이다. 선택이나 성질 등은 개입할
수가 없다. 그런 존재로서의 세계는 기계론적이며 운명적인 법칙에 따를 뿐이다. 이처
럼 그는 철저한 유물론적인 세계관을 수립해주었다.
  신 같은 것은 존재할 수 없으며, 인간의 노력이나 선택이 세계의 법칙과 질서를 어
길 수도 없어지는 것이다. 그 주변적 사고나 사상들은 원인과 결과를 모르는 잘못된
관념들에 지나지 못한다.
  어떻게 본다면 데모크리토스는 최초의 원자론자가 된 셈이며, 종교와 신화시대를 종
결짓는 새로운 철학에의 가능성을 열어놓은 것이다. 이런 성격의 철학자였기 때문에
그는 윤리문제를 취급함에 있어서도 플라톤과 같은 이상주의나 관념적인 교훈을 멀리
했다. 230개가 넘는 윤리적 단편들이 전해지고 있으며, 어떻게 욕망과 본성을 조절하
며 선한 인간관계를 수립해나가는가 함을 가르쳤다. 그 자신이 무신론자였기 때문에
종교적 환상이나 내세에 대한 기대 같은 것은 문제삼지 않았다.
  그는 많은 재산이 있어 여행을 즐기고 해박한 교양을 쌓았으며, 백 살을 살면서도
지혜로운 처세를 지켜왔다. 말년에는 소크라테스를 멀리했다. 그는 소크라테스를, '반
박을 즐기며 말이 많은 사람은 필요한 것을 배울 수 없다'고 경계했다. 소크라테스는
자연을 철학의 과제에서 소외시켰고, 자연을 회피한 소크라테스를 데모크리토스도 피
했던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던 플라톤은 데모크리토스를 언급한 일이 없다. 그렇게 많은 저
작을 남기면서도, 그러나 플라톤의 제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는 78회나 데모크리토스를
인용하고 있다. 그만큼 아리스토텔레스는 공정성과 과학성을 수용할 수 있었다는 증거
가 될지도 모른다.
  플라톤은 모든 물체의 해결을 위에서부터 풀어 내려왔고, 테모크리토스는 아래로부
터 풀어 올라갔으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옆으로부터 풀어나간 것 같은 인상을 풍기고
있다.
  어쨌던 원자론으로 유물론의 문을 연 데모크리토스는 수학, 천문학, 생물학에도 공
헌을 남긴 당시의 대표적인 철학자의 한 사람이었다.

  (그림설명: 파르테논 신전에 모셔졌던 여신 아테나 상(복원). 오른손의 것은 승리의
여신 니케의 상이다. 파르테논 신전은 BC 447년에 기공. 10년 만에 완공했다. 데모크
리토스의 소년, 청년기와 일치한다.)
  @ff
    5. '우주는 아름다운 조화가 있는 전체': 피타고라스(기원전 572--492년)
  그때 세계에는
  BC 587년: 유대왕국 멸망(제2차 포로)
  BC 563년: 불타 태어남(--483)

  탈레스로부터 시작된 자연에 관한 소박한 연구과제는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으로 일
단락을 지었다.
  그러나 그 계통과는 다른 또 한 갈래의 철학이 있을 것 같은 생각이 온다. 그것은
철학에서 과학에의 방향이 아닌 철학에서 형이상학, 즉 관념적 사유로서의 철학이 있
어야 하며 또 필요했던 것이다.
  그 처음 개척자는 우리가 여러 면에서 자주 듣는 피타고라스(Pythagoras, 572--492
BC)와 그의 학파 사람들이다.
  피타고라스는 에게 해의 섬 사모스 지방의 철학자였다. 그 당시 사람들은 그를 신비
로운 인간으로 숭앙했다. 여러가지 분야의 학문에서 탁월하게 앞서 있었으며 종교적인
의식행사까지 주관하는 스승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같으면 스님이나 신부, 목사의 직
책까지 겸했다고 보아 좋을 것 같다.
  그는 음악에 있어서도 남다른 식견을 갖고 있었으며,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가장 일
찍 체계적인 수학이론을 정립시켜주었다. 또 기하학의 스승이기도 했다.
  또 그는 인생과 세계운명에 대해서는 윤회설을 믿고 있었다. 그것은 중동지방에서
그리스 쪽으로 전래된 종교 및 철학적 사고를 받아들인 것으로 반드시 업보와 보응설
이 뒤따르게 된다. 어떤 이들은 동방에서 전해진 인과응보설이라고 하나, 본래부터 그
리스 정신 속에는 운명론과 더불어 응보설이 내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
이다.
  그는 종교적 규율로 육식을 금했다. 그것은 위생적인 견지에서 보다는, 인간과 동물
은 같은 생명성을 갖고 있는데, 생명이 생명을 해치면서 육식을 하는 것은 종교적 신
앙에 타당치 않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상스럽게도 인도인들이 신들과 인간과 자연생명에는 연관성이 있다고 보았듯이,
그리스 인들도 피타고라스 같은 사상가를 통해 비슷한 뜻을 이어받았으나 오래 지속된
흔적은 나타나지 않는다.
  피타고라스도 세계와 만물의 아르케는 무엇인가고 물었다. 그러나 자연주의 철학자
들과는 다르게 무엇이 원질인가 하는 것 보다는 어떤 원리와 법칙에서 존재하는 세계
가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물었다. 그것 때문에 탈레스와 다른 피타고라스 계통의 철학
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피타고라스는 그 존재하는 세계의 원리와 질서는 수의 조화법칙에 의한 것으로 보았
다. 최초의 수학자다운 견해였다. 그는 그만큼 수의 신비로운 면을 인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수는 홀수와 짝수로 이루어지고 있다. 피타고라스는 그 두 종류의 수에 성격을 다음
과 같이 부여했다.
  홀수(1, 3, 5, 7, 9): 한계. 하나. 오른쪽. 남. 고정됨. 직선. 빛. 선. 정방형.
  짝수(2, 4, 6, 8, 0): 무한. 많음. 왼쪽. 여. 움직임. 곡선. 어둠. 악. 구형.
  이렇게 보면 우리는 세계의 만상을 수의 성질과 법칙에 따라 설명할 수 있을 것 같
다는 공감을 느끼기도 한다.
  이러한 피타고라스는 철학자이면서 종교적이며 윤리적인 스승이기도 했다. 그는 또
당대에 인정받는 의사이기도 했다. 오르피즘과 통하는 영혼론을 발전시켜 영혼이 육체
적 올무로부터 해탈해야 함을 강조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순결과 정화의 노력이 필요
하다고 본 것이다.
  그는 종교적인 단체를 통한 공동훈련을 강조해서 금기의 뜻을 펴나갔고, 음악과 철
학에서 정신적 순화를 강조했다. 인간은 누구나 가치관의 상승에 따르는 삶의 순화와
고난이 필요하며, 지식과 지혜는 계속 인간적 삶을 높여줄 수가 있다고 보았다.
  그는 수학자와 음악가답게 모든 가치의 표준은 조화에 있으며, 조화의 질서가 생활
과 세계의 바탕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건강과 더불어 윤리적인 덕도 조화의 원칙
에서 성취된다고 보았다.
  단체훈련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평등스러운 우정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피타고라스의 정신은 과학적이며 정신적 가치를 추구하는 소망스러운 방향으
로 전개되기도 했으나, 일부에서는 신비주의와 심지어는 미술적인 건전치 못한 방향으
로 흐르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철학적인 교훈과 학설은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 가장
큰 철학적 과제는 자연에 따라 자연을 연구하는 소박한 실재론이 아닌, 자연을 관념적
인 정신적 원리에 따라 설명하려는 철학의 방향을 열어준 것이다.

  그래서, 철학은 두 갈래 즉, '자연을 따라서'와 ' 자연을 넘어서'의 길로 나누어진
것이며, 피타고라스는 후자의 철학적 영역을 개척해준 셈이다.
  피타고라스의 철학사상은 한때 후계자들에 의해 커다란 논쟁의 과제로 인정되었다.
그리고 그 문제는 사실보다도 이론적인 문제로 오늘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림설명: 파르테논 신전의 프리즈 세부. 아테네 여신을 축하하는 행렬 중 물항아
리를 운반하는 사람들 모습.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미술관 소장. BC 5세기)
  @ff
    6. 풀리지 않는 논쟁의 시작: 파르케니데스, 헤라클레이토스(기원전 6--5세기)
  그때 세계에는
  BC 438년경: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 완성
  BC 420년경: 루키포스 '이성에 대하여', 디오게네스 '자연에 관하여'

  우리는 이런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면 좋을까?
  내가, "여기 흰 분필이 있는데 그 분필을 푸른 잉크에 담갔다가 꺼냈더니 푸른 분필
이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은 흼이 푸름이 되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흼은
언제나 흼으로 있고 푸름은 변함없이 푸름으로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면,
우리는 두 가지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주장은 옳다. 흰 분필은 푸른 분필로
바뀌었으나 흼이 푸른 것으로 변한 것은 아니다.
  이와 반대로, "그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흰 분필이 푸른 분필이 되었으면 흰 것이
푸른 것이 되었지, 무슨 흼이 따로 있고 푸름이 따로 있다는 말인가. 그것은 우리의
생각일 뿐이지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는 반론도 나온다.
  그러면 먼저 사람은, "그것은 더 큰 잘못이다. 흼과 푸름이 있다는 것이 중하지, 어
떤 물건의 색깔이 바뀌었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흼과 푸름이 없으면 흰 물건이나
푸른 물건들이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면 이 논쟁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흼과 푸름이라는 본질이 중요한 것이지 분필
이 달라졌다는 것은 그 속성의 변화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과, 물체가 있을 뿐이고
흼과 푸름은 존재하는 물질의 속성일 뿐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의 차이인 것이다.

  최근에도 E. 후설과 E. 마흐 사이에 있었던 논쟁이 이런 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본
질이라고 본 것이 후설의 견해였고, 물체를 떠나서는 본질 같은 것은 없다고 주장한
것이 에른스트 마흐의 학설이었다.
  따라서 본질을 택하는 사람은 관념론으로 기울게 되고, 물체를 택하는 사람은 실재
론을 계승하게 된다. 전자는 관념에서 지식과 진리의 길을 택하게 되고, 후자는 실재
에서 물질과 과학의 길을 따르게 된다.

  옛날 피타고라스의 뒤를 계승한 철학자들이 그와 비슷한 논쟁을 벌이게 되었던 것이
다.
  엘레아(이탈리아) 학파에 속하는 파르메니데스(Parmenides, BC 500년경)는, 감각에
나타나는 세계, 즉 변화, 유전하는 만물은 지식의 대상이 될 수도 없고 학문과 진리의
내용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보았다. 진정한 존재는 우리의 자유에 의한 존재의 동일성
이 있을 뿐이다. 그 동일성의 파악이 철학의 과제인 것이다. 진정한 존재는 그 본질로
서의 자기 동일성인 것이다고 주장했다.
  마침내 그는 그 본질의 불변의 실재성을 주장하게 되었고, 그것이 후에 플라톤의 이
데아로까지 발전하게 된 것이다.

  이에 반해서 에베소의 헤라클레이토스(Herakleitos, 535--475 BC)는, 그것은 사유의
조작일 뿐 만물은 쉴새없이 유전하고 있다. 같은 시간에 제자리에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조화보다는 상반됨이 존재의 본질이며, 동일성은 없어도 모순이 있어 만물의 변
화, 생성을 가능케 해 준다, 싸움은 만물을 탄생시킨 아버지로 보아야 하며 존재의 왕
자는 싸움이라고 현실을 설명했다.
  모든 진리는 상대적일 뿐 절대적인 진리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 물은 가뭄과 음료
수로서는 이로운 것이나, 홍수와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는 침수는 해로울 뿐이다. 절대
적인 선과 악은 헤아릴 수가 없다. 때와 장소에 따라 상대적인 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본다.
  인생도 그렇다. 삶의 가치는 바닷가에서 놀이를 하는 애들과 같은 것일 뿐이다. 영
원한 위치에서 본다면 상대적인 것은 더욱 무의미해지는 것이다. 이러한 회의적 가치
관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고대의 파우스트라고 전하기도 한다.
  그러나 파르메니데스의 뒤를 따르는 제논(Zenon, 490--430 BC) 같은 이는 운동 자체
를 부인하기까지 했다. 날아가는 화살은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아도, 그 자리에 있을 때
마다 보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고정된 자리에 있을 뿐이다.
  토끼와 거북이가 경주를 할 때 거북이가 조금이라도 앞서 있으면 토끼는 절대로 거
북을 앞지를 수가 없다. 토끼가 거북이가 있던 자리에 가면 거북이는 언제나 조금이라
도 앞으로 나가 있기 때문이다. 거북이는 조금씩이라도 계속해서 앞으로 가고 토끼는
언제나 그 떠난 자리로 들어서게 되었을 뿐이다. 토끼가 앞선듯이 보이는 것은 우리의
시각에 따랐을 뿐, 진정한 선주자는 언제나 거북이로 있을 뿐이라고 말해 운동 자체를
거부하는 이론을 내세웠다.
  그래서 사람들은 헤겔을 비롯한 변증론자의 아버지는 헤라클레이토스였고, 모든 관
념적 논리주의자들은 엘레아 학파의 후예들이라고 지금 말하고 있다.
  @ff
    7. 말싸움의 시대: -소피스트의 제일일자, 프로타고라스(기원전482-411년)
  그때 세계에서는-
  BC431년: 펠로폰네소스 전쟁 시작(-404)
  BC420년: (묵자)15권, (열자)8편

  프로타고라스 선생에게 한 제자가 찾아와서 말했다. "제가 많은 스승들 중에서 선생
님을 찾아온 것은 선생님의 가르침만 받으면 이 다음에 어디 가서 변론을 하든지, 법
정에서 재판을 할 때든지 언제나 이길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남들도 그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조건은 월사금을 선불하는 것이 아니고, 재판을
해서 이겼을 떼 지불하고 싶은데, 허락해주시겠습니까? 저 같은 제자를 오라고 하는
선생들이 많이 있는데, 저는 같은 조건이면 선생께 오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선생
은 쾌히 승락했다. 한 사람이라도 제자를 더 많이 확보해야 유명한 선생이 될 수 있다
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제자가 성공하고 돈도 벌었는데 약속했던 등록금을 내
지 않는 것이다. 선생은 법원에 고소를 했다. 그리고는 재판장에게, "저의 제자는 이
번에 꼭 등록금을 지불해야 할 겁니다. 만일 재판에서 이긴다면 이길 때에는 내겠다고
약속했으니까 지불해야 합니다. 만일 재판에서 지게 되면 재판에서 졌으니까 지불할
의무가 있습니다. 어쨌든 저는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라고 말했다. 그 얘기를 들은
재판관은 피고인 제자에게 재판할 필요조차 없으니까 등록금을 지불해야겠다고 말했
다. 그랬더니 제자가 "그런 부당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만일 내가 재판에서 지게 되
면 이겼을 때 지불한다고 했으니까 지불할 의무가 없습니다. 또 재판에서 승리한다면
재판에서 승리하고 부채를 갚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재판에서는 이기거나 지는 두
가지가 있는데, 어느 편이 되더라도 저는 돈을 지불할 수가 없습니다"고 대답했다. 재
판관은 할 말이 없어지고 말았다. 누가 보든지 무서운 말싸움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런 것을 형식논리를 앞세운 교묘한 말싸움이기 때문에 '궤변'이라고 한다. 그런데
철학사에도 이런 기간이 생겼던 것이다. 사람들은 그들을 소피스트들의 시대라고 불렀
다. 소피스트라는 말은 소피아(지혜)라는 어원에서 나왔다. 그렇다면 소피스트는 지혜
로운 사람, 지혜를 가르치는 스승이 되었어야 하는데, 기실은 말싸움과 논쟁에 치우쳤
다고 해서 소피스트들을 궤변론자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렇게 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여러 도시국가 중에서 아테네는 민주주의와 문화가 자유로이 꽃피고 자유가
충분히 누려지는 문화국가가 되었고, 심지어는 경제적 여유도 다른 곳보다 많이 누릴
수 있는 나라로 성장했다. 그래서 지중해 연안의 여러 곳으로부터 훌륭한 학자, 스승
들이 아테네로 모여들었다. 그렇게 되면 제자들도 스승을 따라 아테네로 좋은 스승을
찾아 몰려올 수밖에 없었다. 자연히 스승들은 제자들을 열심히 끌어모으게 되고 서로
경쟁적으로 좋은 강의를 해야 했다. 언변이 좋은 선생이 인기를 모으는 것은 자연스러
운 추세가 되었다. 사람들은 그 상황을 가리켜 "소피스트로 자처하는 스승들이 청년들
을 공사의 사건에 있어 바르게 사고, 변론, 행동하도록 교육하며, 거리 거리에서 사람
들에게 보수를 받고 웅변, 처세, 정치술의 스승이 되었다"고 평했다. 지식과 학문의
대중화, 시장화, 교양화가 아테네를 중심으로 벌어졌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시
대가 무의미하게 버림받은 것은 아니었다. 역사적 의미는 남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결과로 소크라테스 같은 위대한 스승이 나타나 새로운 학문적 개척이 가능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많은 사람 중의 프로타고라스(Protagoras, 482-411 BC)같은 사람은 소피스
트의 처음 대표자라고 불렸고 성공한 스승이기도 했다. 그는 유명한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 존재하는 것에 대해서는 존재한 것의,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의'라는 명제를 남겨주었다. 거기에는 확실히 인간 표준론과 진리의 상대주의
를 언급한 흔적이 뚜렷하다. 그 이전까지는 철학과 학문의 주체는 언제나 자연이었다.
소박한 실재성을 인정하든지 관념적인 해석을 거치면서는 모든 지식과 진리는 인간으
로부터 시작하여 인간에게로 돌아간다는 확고한 방향의 전환을 만들어준 것이다. 그것
은 주목할 만한 변화가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면 안된다는 온
갖 선입관념을 깨뜨리고, 지식과 진리는 언제나 상대적일 뿐이라는 학문과 진리에 대
한 생각을 바꾸어준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러한 변화는 새로운 철학을 탄생시키기 위
한 준비단계였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림설명: 소피스트들은 당시 그리스 전역을 돌아다니며 변론술과 출세를 위한 지식을
가르쳤다.그림은 교육받는 아테네의 젊은이들, 아테네의 붉은 접시에 그려진 것이다.
@ff
    8. 허무주의를 마감하다: -소크라테스의 등장(기원전469-399년)
  그때 세계에서는--
  BC451년: 로마 최초의 성문법 12동 판법 제정
  BC403년: 중국, 전국시대 시작

    소피스트 말기쯤에 가서는 자신들도 회의에 빠지게 되고 마침내는 허무주의에 이
르는 과정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 대표자 중의 한 사람은 고르기아스라고들 말한다.
고르기아스(Gorgias, ?-380 BC)는 백 세 이상까지 살았다고 전해진다.
  그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무엇인가가 존재한다고 해도 파악할 수 없을 것이
다. 파악할 수 있다고 해도 말로 표현하기나 전달할 수는 없을 것이다"고 가르쳤다는
것이다. 그 당시에는 이론적인 철학보다도 윤리적인 실천성이 더 비중있게 다루어지고
있었으나, 고르기아스는 보편적인 덕은 거부하고 개별적인 덕이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
다. 이렇게 한 사회가 학문과 사상의 병적인 상황에 이르게 되면 그것을 치유할 인물
이 나와야 한다. 그렇게 되지 못하면 사회는 정신적 혼란, 가치관의 붕괴, 짙은 회의
주의에 빠지게 된다. 소피스트 말기가 바로 그런 상황이 되었다. 여기에 새로운 치유
적 책임을 맡은 인물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가 우리 모두가 잘 아는 소크라테스(Socra
tes, 469-399 BC)였다. 그는 너무 유명한 인물이기 때문에 그에 관한 이야기는 많이
전해지고 있다. 심지어는 철학적 사색에만 잠겨 있는 남편에 대해 부인의 행패가 지나
쳤기 때문에 철학자의 부인은 모두 악처일것이다고 농담하는 경우가 있을 정도다. 우
리가 알 수 있는 몇 가지 특성은 그는 대단한 추남이었던 것 같다는 사실이다. 그 당
시에는 유명한 인물은 그에 해당하는 신화의 주인공 신으로 비유하는 일이 자주 있었
다. 플라톤을 아폴론으로 비유한 것도 그중의 하나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실레노스
(Silenos)신에 비유되고 있다. 그 신은 대단한 추남 신이어서 남들이 있는 곳에는 나
타나지 못하고 장마비가 그친 뒤 혼자서 논두렁을 돌보는 신으로 묘사되고 있다. 제자
들이 소크라테스에게 "비가 오면 불편하시겠습니다. 콧구멍이 우리와 같이 아래로 향
해 있지 않고 위로 되어서 빗물이 들어가지 않겠습니까?" 고 얘기했더니, "그야 그렇
지. 자네들은 땅에서 올라오는 냄새를 맡으며 살지만 나는 위에서 내려오는 신선한 것
을 받아가치고 살거든"이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과는 사회풍조가
달랐다는 점이다. 그 당시에는 여성미와 마찬가지로 남성미가 높이 평가받던 시대로
서, 추남은 어딘가 모자라는 인물로 평가받던 풍토였던 것이다. 지금식으로 말하자면
소크라테스는 용모 때문에 큰 핸디캡을 안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가 청
렴 정직했고, 순결성을 지니고 있었으며, 욕심이 없었고, 솔직한 성품의 소유자였다고
평했다. 항상 남이 따를 수 없는 기지와 유머를 잃지 않았다. 그의 표정은 고요하면서
도 명랑했다. 사랑과 존경을 받기에 마땅했고, 넘치는 인간애를 풍기고 있었다. 그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오해와 증오의 대상이 되어 죽음을 강요당했을 정도였으나, 제
자들의 지극한 사랑과 존경만은 잃지 않았다. 사제간의 사랑과 존경은 가장 모범적인
편이었다. 이런 소크라테스가 여러 소피스트들 중에 나타나 30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
쳤고, 그의 숭고한 죽음이 인류의 양심에 큰 빛을 남기게 되었던 것이다. 소크라테스
는 옷이나 외모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이 제자들에게 "너희들의 스
승은 옷도 제대로 갖추어 입지 못하느냐, 좀 새옷을 해드리지"라고 말하면, 제자들조
차도 "저 해진 옷자락 속에서 아테네의 빛이 나타나는 것은 보지 못하느냐"고 응수했
다고 한다. 젊어서 아테네에 나타난 소크라테스는 여러 스승들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스승들에게 질문을 한다. 그러면 스승들이 만족할만한 대답을 하지 못한다. 그때 소크
라테스는 그러면 거기서부터 문제를 전개시켜나가자고 제안한다. 그런 일이 거듭되다
보면 스승은 자신의 한계와 무지를 드러낼 수밖에 없고 자연 소크라테스를 기피하게
된다. 얼마 후부터는 소크라테스 자신이 스승의 위치로 올라가 가르치기 시작했다. 처
움에는 가르치보다는 대화와 토론을 일삼는 소크라테스를 반기지 않았으나, 소크라테
스가 확실한 개념까지 유도해주고 해답에까지 이끌어주면 모두가 만족스러움을 얻기에
이르렀다. 사심 없이 진리만을 추구하기 위하여 열성과 지혜를 쏟는 소크라테스의 자
세를 옳게 여기기 시작한 많은 제자들이 그를 따르고 진지한 대화와 토론에 의해 진리
탐구에 열중하게 되었다. 제자들의 수는 늘어나기 시작했고, 이윽고 소크라테스는 우
리를 '참지혜와 진리로 이끌어주는 스승'이라는 정평을 받기에 이르렀다.

  그림 설명: 소크라테스. 소피스트 말기에 나타난 소크라테스는 당시 병적인 상황에
이르렀던 사상과 학문의 허무주의, 회의주의의 막을 내리게 했다.
@ff
    9. '너 자신을 알라': -소크라테스와 그 방법론(기원전 5세기)
  그때 세계에서는-
  BC400년경: 중국, 제자백가 활동 시작: 한반도에 철기문화 들어옴.

  소크라테스의 철학적 과제는 자연연구에 몰두해 있던 당시의 철학적 방향을 인간성
찰의 방향으로 돌려주는 데서 비롯된다. 인간을 도외시한 자연은 진정한 철학이 될 수
가 없다. 이 인간애의 성찰은 자연히 자아에 대한 자기반성의 길을 따를 수밖에 없다.
그가 항상 '너 자신을 알라'고 가르친 것은 그 당시 한 신전에 씌어 있던 글이라고는
하나,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 학문의 기초라고 본 것이다. 그러면 인간과 자아의 핵심
이 되며 진리탐구의 구심점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 지금 우리들의 사고에서 가장 가까
운 개념을 찾는다면 이성인 것이다. 이 이성이 대외적으로 세계성을 띠게 되었을 때는
로고스가 된다. 로고스와 이성은 하나로 통한다. 질서로서의 로고스이며 사유로서의
이성인 것이다. 그러면 이성을 통한 지리에로의 길은 무엇인가? 대화와 토론인 것이
다. 넓게 말하면 사유의 변증법인 것이다. 토론은 묻고 대답하는 동안에 더 높은 지식
으로 향상되며, 이제는 더 물을 필요가 없이 확실한 개념에 도달하게 되면 그것이 곧
공통성과 보편성을 갖는 진리로 나타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일찍부터 그 방법을
택했고, 제자들의 공감은 물론, 학문연구의 한 방법을 확립시켜준 것이다. 데모크리토
스와 같이 자연을 연구하는 사람의 위치에서 본다면 불필요한 말장난 같아 보이기도
하나, 그의 제자 플라톤은 그 방법으로 수없이 많은 (대화편)을 서술했고, 지금 우리
들에게 주는 암시 또한 대단한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자기를 찾아오는 제자들에게, 내
가 다른 스승들보다 앞서 있는 것은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를 알고 있다는 점임을 지적
했다. '무지에 대한 지'라는 뜻이다.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도 모르는 사람은 아무것도
알아낼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스승으로서 할 일은 무엇인가? 내가 아는 것을
가르치는 데 있지 않고, 상대방으로 하여금 지리를 찾아내게 하는 산파역을 맡으면 되
는 것이다. 거기에는 자연히 두 가지 길이 열린다. 귀납적 변증과 보편개념의 도출과
확립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학문적 업적은 이해할 수가 있다. 그
실제적인 방법은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가 있다. 대화가 있기 때
문에 편견에 빠지지 않으며 선입관념의 노예가 되지도 않는다. 사람들은 데카르트의
회의가 근대 철학을 유도해왔고, 소크라테스의 회의가 고대철학의 길을 열었다고 말한
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회의보다도 물음을 통한 토론에서 철학의 길을 열었던 것이
다. 이렇게 본다면 소크라테스의 철학은 주지주의에 치우쳤다고 볼 수도 있다. 그는
윤리문제를 취급함에 있어서도 덕은 지라고 말한다. '아는 것이 힘'이라는 베이컨의
말이 있으나,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아는 것이 선의 출발'이라고 보아 좋을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고의로는 악을 행치 않는다. 모르기 때문에 악을 행하게 된다고 말한
다. 물론 그런 정도의 주지주의에는 문제가 있다. 소크라테스 연구로 학위논문을 제출
한 키에르케고르는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 나는 필요하다면 몇 번이라고 그대의 이
름을 부를 수가 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와 그리스의 지성은 아주 큰 과오를 범했다.
그들은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의 차이가 얼마나 크다는 것을 몰랐다"고 호소하고 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뒤를 계승하는 서양의 이성주의와 합리주의 철학의 대부분은 이
러한 주지주의를 따르고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가 없다. 그것이 서양철학의 주류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라톤에 의해 밝혀지고 있는 소크라테스적 사유와 이
성적 논증은 지금도 크게 환영받고 있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그는 덕이 무엇인가
고 묻는다. '현실 사물로 하여금 주어진 목적에 도달케 하며 완성시키는 유능성, 아름
다운 소질'이라고 정의를 내린다. 물론 다른 의견을 제시할 사람은 있을 것이다. 그러
나 그 설명과 추리가 잘못되었다고는 보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 뒤를 따르는 윤리
학자들이 부분적인 비본질적인 설명을 가하는 때가 더 많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많은
대중과 제자들의 존경을 받아온 소크라테스가 어째서 독약을 마시는 사형을 받아야 했
는가? 어떤 이들은 소크라테스의 위대함을 높이기 위해 반소크라테스 파에 속하는 인
물들을 지나치게 비판하기도 한다. 거기에도 일리는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인정할 수
있는 것은 소크라테스를 사형으로 이끌어간 많은 사람들은 학문이나 사상의 문제 때문
에 소크라테스를 반박, 처형으로 이끈 것은 아니었다. 인간적 감정과 이해관계가 더
크게 작용했던 것 같다.
그림 설명: 아테네의 아고라. 소크라테스 당시 아테네 시민의 정치, 경제의 중심이 되
었던 장소. 집회장, 재판소 등 공공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아고라'는 '사람들 앞에서
말한다'는 뜻.
@ff
    10. '악법도 법': -소크라테스의 사형선고(기원전399년)
  그때 세계에서는 -
  BC403-221년: 중국에서 춘추전국시대
  BC372년: 맹자 태어남

  소크라테스는 높은 존경과 평가를 받아온만큼 그를 마땅치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수도 적지 않았다. 우선 소크라테스가 스승으로 크게 성공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자와
명성을 잃게 된 많은 동료 소피스트들이 그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아테네 밖 여러
지역에서 찾아온 제자들이 모두 소크라테스의 슬하로 모여들었다. 설상가상으로 어떤
예언자는 당대의 유일한 스승은 소크라테스라고 예언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상당히 많
은 사회 지도층 인들은 소크라테스가 지나치게 대화를 통해 사회조직의 모든 권위를
추락시켰다고 비난하고 있었다. 아리스토파네스의 (구름)이라는 작품을 보면, 소크라
테스의 제자가 부모에게도 대들면서 대화를 감행했으며, 어른과 지도층 인사들은 소크
라테스적 대화 때문에 정신적 권위를 상실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구름)에 나오
는 이야기는 소크라테스의 제자가 아버지를 질책, 구타하면서도 그것이 정당하다고 변
명한다는 장면을 삽입시키고 있다. 그뿐만은 아니다. 그 당시의 모든 사람들은 신들을
믿고 있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신화의 주인공들은 논급하지 않은 채 도덕적 신관
을 강조했기 때문에 종교계의 피해도 없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국은 이러한 세력들이
힘을 모아 소크라테스를 법정에 서게 했고 사형을 인도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그
재판과 처형과정에서 벌어지는 소크라테스의 생사관, 종교관, 애국적인 법질서관, 자
신의 인생관과 철학은 프라톤의 대화 (소크라테스의 변명)과 (크리톤)에 잘 나타나 있
다. 우리는 그 책들을 통해 소크라테스의 최후의 면모를 엿볼 수가 있다. 사실 소크라
테스의 제자들은 그 당시에 흔히 있었던 관례대로 소크라테스를 국경 밖으로 탈출시키
고 거기에서 다시 스승으로서의 가르침을 계속할 수 있도록 계획을 세웠다. 도시국가
의 국경선은 가까운 데 있었고, 그 경계선만 넘으면 모든 법적 문제는 해소되는 것이
었다. 또 대부분의 시민들과 지성인들은 소크라테스가 사형을 받아야 하는 죄인으로는
인정치 않고 있었다. 다른 지역에 가서 가르치면 그것으로 잘되었다고 인정할 정도의
상황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제자들의 그런 계획을 책망했다. 아테네의 법에 충실하라고
가르친 내가 스스로 법을 어기는 일은 할 수가 없지 않느냐고 타일렀다. 그리고 조용
히 독약을 마시고, 사랑하는 몇 제자들에게 둘러싸여 고요하면서도 장렬한 죽음을 택
했다. 그의 이러한 죽음이 소크라테스를 세계적인 철인으로 만들었으며, 역사의 빛나
는 사건으로 그 여광을 만대에 남기게 된 것이다. 죽음이 그를 위대하게 만든 가장 대
표적인 선례가 된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죽은 뒤 그 당시로 말하면 지중해 전역에서
모여들었던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은 대부분 아테네를 떼났다. 소크라테스를 대신할 만
한 사표로서의 스승이 없었기 때문이며, 소크라테스의 처형과 더불어 아테네는 학자나
사상가가 머물 만한 곳으로 인정받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의 원로급 제
자들은 제각기의 고향으로 돌아가 새로운 학설들을 전개시켜 학문적 분권상태를 만들
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들을 가리켜 소크라테스 학파라고 부른다. 그 대표적인 한 사
람은 아리스티포스(Aristippos, 435-355 BC)와 그 뒤를 따르는 키레네 학파에 속하는
철학자들이다. 아리스티포스는 소크라테스의 이론적이며 토론 중심의 이성주의보다는
삶의 현실을 존중히 여기는 윤리성을 이어받았다. 삶의 목적은 즐겁게 사는 데 있으
며, 고통은 인생의 무대에서 배제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 자신이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 여행을 즐기며 정신적인 쾌락을 추구하면서 살았다. 그리고 스승 소크라테스에게
서도 그런 정신적 안정과 즐거움을 발견했고 이어받을 수 있을 것으로 여겼다. 윤리의
목표는 개념규정보다는 '마음의 편한 상태를 찾아 누리는 것이며, 그것은 감정과 정서
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참다운 즐거움은 자아 개인과 현재에 속하는 것이며.
생활현실에서 주어지는 것이며, 감성적인 것이다. 덕은 향락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
다. 과거, 미래, 개인을 떠나 사회적 의무 같은 것은 우리에게 참다운 즐거움을 주지
못한다. 즐거움이 곧 선이며, 고통은 악에 속한다. 더 많이 즐기면서 살 수 있으면 그
것이 곧 성공한 인생이 되는 것이다. 그 즐거움을 쾌락이라고 부르며, 그리스 어에서
는 헤돈(Hedone)이라고 한다. 그래서 아리스티포스는 최초의 쾌락주의자가 되었고, 그
때부터 헤도니즘(Hedonism)의 윤리가 발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금까지도 많은
후계자를 유지하고 있다.
그림 설명: 소크라테스의 죽음. 소크라테스는 한 청년의 고소로 재판에 회부되고, 한
달 남짓 감옥생활을 한 후 스스로 독배를 들었다. 1787년 다비드 그림.
@ff
    11. '행복의 원천은 덕에 따른 행위': -안티스테네스, 키니코스 학파 창설(기원전
4세기 초)
  그때 세계에서는-
  BC380년경: 이소크라테스(파네규리코스)

  아리스티포스의 이러한 쾌락주의 이론은 그 안에 어려운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그
하나는 어떻게 하면 연속적인 쾌락을 유지하며 보다 강렬한 즐거움을 누리되, 쾌락이
고통에 침해 되지 않도록 하느냐는 것이다. 그런 문제에 부딪치게 되면 자연히 그 방
법을 모색하게 된다. 방법을 찾기 위해서는 이성적인 사고와 식견(Pronesis), 즉 지혜
가 요청된다. 그러나 그들은 쾌락이 목적이고 식견은 수단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 이
성적 사고가 등단하지 않을 수가 없어진다(인간은 이성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방향을 추구하다 보면 학구적인 이론보다는 생활의 지혜가 요청되며, 그들은 그
것을 높은 의미의 교양이라고 보았다. '교양을 얻지 못할 바에는 거지가 되고 싶다'든
지, '교양의 상실은 인간성의 상실이다'고 주장하기에 이른 것이다. 교양은 수양과 통
하기 때문에 밝은 인생의 지혜가 중요하다. 질투, 격정, 미신에서 벗어나 자유자재로
즐길 수 있는 삶은 인격적 승화와 더불어 찾아온다고 가르친다. 그의 제자 가운데 헤
게시나스는 즐거움의 한계와 종말을 느끼면 자살로써 그 고를 벗어나야 한다고 가르
쳐, 역사상 최초의 '죽음을 권유하는 사람'이라는 아름답지 못한 칭호를 얻기도 했다.
소크라테스의 제자 중 BC 370년경에 죽은 안티스테네스(Antisthenes)는 키니코스(Cyni
cos)학파를 창설한 사람이다. 그도 소크라테스의 학문적 방법이나 이론적 학설보다는
소크라테스의 정신은 윤리적인 면에 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본다면 소크라테스의 제
자들은 스승의 윤리적인 삶과 인격의 고매함에 더 큰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 안티스
테네스도 소크라테스의 정신 중 윤리적 행위의 목적은 행복에 있다고 생각했으나, 그
것은 이론보다도 실천에 속하는 문제라고 보았다. 참행복은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세속
적인 관심들로부터 떠나 정신적인 단순성과 정직한 노동에서 얻어진다고 보았다. 행복
의 원천이 되는 덕에 따른 행위는 무욕과 자기억제를 전제로 하며, 바른 습관과 훈련
을 쌓아 인격을 높이는 일이라고 가르쳤다. 내면적인 자기만족과 정신적인 자유가 없
는 곳에는 행복이 머물 곳이 없다는 무욕의 소극성을 소중히 여긴 셈이다. 이러한 안
티스테네스의 교훈이 제자들에게 이르러서는 더욱 소극적인 방향으로 흘렀다. 마침내
는 무욕, 모든 현실과 가정 및 사회적인 책임으로부터의 소외성, 반문명, 현실회피,
기성사상과의 절연 등을 강조했고, 자연상태에의 복귀가 소망스러운 덕과 윤리적 귀착
점이라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세월이 지나는 사이에 키레네 학파와의 대립적 위치를
택하게되고, 심지어는 쾌락주의자들을 통렬히 비판하기에 이른다. 시노페의 디오게네
스(Diogenes, BC 323년경 죽음)의 사상이 그 뜻을 대신할 것 같다. 그들은 "쾌락에 속
하기보다는 차라리 광인이 되겠다" 든지, 쾌락에 굴복하거나 노예가 되지 않는 불사의
여왕인 '자유'만이 궁극적인 목표라고 믿기에 이르렀다. 디오게네스에게는 여러가지
이야기들이 뒤따르고 있다. 제자들 중의 크라테스와 그의 애인 히파르키아 같은 이들
은 부유한 재산을 다 포기하고 디오게네스의 제자가 되어 거지와 같은 생활을 즐겼다
고 전해지고 있다. 디오게네스는 소유라고는 없었다. 절구통 하나를 갖고 있어 낮에는
통 위에 앉아 가르치고 밤에는 그 속에 들어가 잠을 잤다는 얘기다. 알렉산더 대왕이
찾아왔을 때도 아침 햇볕이 쪼이는 것을 막지 말아달라는 요청을 하였을 뿐, 대화의
요청에 응하지 않았다는 얘기도 전해지고 있다. 극단의 청빈과 무욕에서 정신적 안정,
평화, 자유를 추구했다는 이야기의 반증일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아리스티포스
와 키레네 학파에서는 후에 에피쿠로스 학파가 계승되었는데, 안티스테네스와 키니코
스 학파를 계승한 것은 스토아 철학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소크라테스의 또 한 중요한
제자로 메가라의 에우클레이데스(Eukleides, BC 400년경)가 있다. 그는 아테네에 법에
따르면 잡혀서 사형을 받아야 하는 적국 출신이지만, 아테네에 몰래 들어와 소크라테
스의 오랜 제자가 되었고, 스승의 임종에도 참여했었다. 스승의 사후 귀국해서는 엘레
아 학파의 일과 소크라테스의 선(agaton)을 합치시켜 선은 유일한 실재라는 철학적 이
론을 전개시켰다. 먼저 얘기한 두 학파보다는 오히려 철학적 이론을 전개시켜준 셈이
다. 소크라테스의 개념을 선의 위치에서 실념화시켜주는 업적을 남겼다. '식견, 신,
정신, 덕과 같은 명목을 가지고 부른다고 하여도 유일한 존재자, 즉 불면이며 자기동
일인 것은 선이 있을 뿐이다'는 뜻을 남겨주어 플라톤을 연상케 하는 면도 엿볼 수 있
다.
@ff
    12. 세계 최대의 철학자: -플라톤의 등장(기원전428-347년경)
  그때 세계에서는-
  404년: 펠레폰네소스 전쟁 끝남
  400년경: 인도, (라마야나) (마하바라타)성립

  소크라테스가 살아 있을 때는 별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 젊은 제자가 한 사람 있었
다. 바로 플라톤(Platon,428-347년경 BC)이었다. 21세에 소크라테스의 제자로 들어와
28세 때 스승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플라톤은 젊은 제자 중의 한 사람으로 조용히 학
문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는 귀족출신이었고 높은 교양을 갖춘 인물이었다. 후인들은
그를 아폴로와 견주어 비유한 것을 보면 그의 풍모 또한 탁월했던 것 같다. 플라톤은
항상 네 가지 사실을 신들에게 감사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동물이 아닌 사람으로 태어
난 일, 여자가 아닌 남자로 태어난 일, 외국인이 아닌 그리스 인으로 태어난 일, 소크
라테스 시대에 아테네에 태어난 일이다. 네 가지 다 숨겨진 뜻이 있는 내용들이다. 또
그 만큼 소크라테스의 영향도 컸고 스승을 존경했던 것도 사실이다. 스승이 처형을 당
한 뒤 플라톤은 아테네를 떠났다.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자신이 갖고 있는 학문적 포
부와 이상정치를 펴낼 수 있을 도시국가가 있을까를 찾아다녔다. 그 당시는 통치자들
이 정신 및 학문적 교사와 지도자를 요청하는 것이 보통이었던 때였다. 알렉산더의 부
친인 필리포스 왕이 아리스토텔레스를 채용했듯이... 플라톤은 한 곳에서 뜻을 얻어
자신의 포부를 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결국은 정적에게 몰려 자칫하면 노예의
신분으로 전락할 뻔한 일이 생겼다. 그는 이윽고 마음을 가다듬고 아테네로 돌아와 가
르치는 일을 시작했다. 아카데메이아를 설립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서양 최초
의 자유대학이 탄생되었다고 보아도 좋을지 모른다. 그는 오랫동안 많은 제자와 후배
를 양성해왔다. 그리고 저술에 전념했다. 35편의 대화집인 저작을 완성시켰고, 적지
않은 서간문도 남겨주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그 대부분이 남아 전해지고 있다는 사실
이다. 만일 데모크리토스의 저서와 같이 그의 저서들이 상실되었다면 인류는 또 하나
의 큰 손실을 겪을 뻔했다. 그 책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것은 흔히 이상국이라고 부
리는 대작(폴리테이아)일 것이다. 인류의 고전이라고들 말한다. 수많은 저서들 중에서
젊은이들이 애독하는 (잔치sumposion)는 사랑의 대화라고 말한다. 우리가 대학에 다닐
때는 차원 높은 애정의 대화로 즐겨 읽었다. 우리말로도 몇 종류 번역된 책들이 있다.
소크라테스가 대화의 주인공이 되어 낮은 차원의 사랑에서부터 소크라테스적인 사랑으
로까지 승화시켜나간다. 플라톤의 저서는 대화형이며, 그 대화에서 다루는 주제의 주
인공들이 그 분야의 대표적 인물들이다. 그러나 그 내용은 물론 플라톤 자신의 철학사
상이다. 아마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읽힌 플라톤의 저서는 (아폴로기아)와 (크리톤)일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법정에서 한 연설과 그의 죽음에 관해 기록된 내용이다. 누구나
읽고 살며, 또 읽어야 할 책이다. 말년의 플라톤은 가장 존경받는 스승으로 철학자답
게 행복과 영광을 누렸다. 80의 고령으로 취침중에 조용히 운명했던 것이다. 사실 플
라톤은 그 당시 아테네의 유일한 철학 스승으로 존경을 받았고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전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데모크리토스의 철학이 현실과 자연 사물로부터
위로 올라가는 성격의 철학이었다면, 플라톤은 모든 문제의 해결을 위에서부터 풀어
내려오는 이상주의적 성격을 택한 대표적인 철학자였다. 우리는 서양철학 전반에 걸쳐
아이디얼리즘(Idealism)이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어떤 때는 관념론이라는 뜻으로 받
아들여지기도 하고, 윤리학에 있어서는 이상주의라는 의미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밖에
도 이성주의 철학도 여기에 속하며, 합리적 사유와 사고도 인식론의 중심을 만든다.
그것 역시 실질적으로는 아이디얼리즘과 통하는 것이다. 이런 모든 철학의 원천이 플
라톤의 이데아 론에서 비롯되고 있음이 사실이다. 따라서 그의 철학은 상당히 짙은 종
교성과 예술성을 지니고 있으며, 논리적인 사유와 더불어 예술적인 직관이나 초합리적
인 직각성을 많이 안고 있다. 어떤 면에서는 그 자신이 대표적인 이상주의자이기도 했
고 예술가로서의 자질을 풍부히 지닌 철학자였다. 쇼펜하우어는 플라톤을 신과 같은
철학자라고 평하면서, 그의 이데아는 예술의 핵심을 만들고 있다고 극찬했다. 이와 버
금가는 또 하나의 철학적 과제는 그가 이상의 구현을 위한 정치적 유토피아를 처음 구
상했던 위대한 철학자이기도 했다는 점이다. 지금도 플라톤의 (이상국)이 정치사상가
나 학자들에 의해 언급되고 있는 것은 그가 이 책 속에서 인류가 찾아 누리고 싶은 정
치적 꿈을 실현시킬 국가형태를 제시했기 때문이다.

  그림 설명: 인류의 영원한 이상의 구현을 위한 정치적 유토피아를 최초로 구상했던
위대한 철학자였던 플라톤, 대표적인 이상주의 철학자로 꼽힌다.
@ff
    13. 현실세계와 이념세계: -플라톤의 이데아 론(기원전 4세기)
  그때 세계에서는 -
  BC 411년: 투키디데스(역사)
  BC 365년: 장자태어남

  유구한 철학의 역사를 통해 플라톤의 이데아(Idea)만큼 영향력을 발휘한 철학사상은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플라톤의 정신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인류의 이성적 꿈의 산물
이며, 인간은 그 꿈을 버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우리들의 존재세계를 두
가지로 나누어 보았다. 그하나는 감각적 인식과 신체적 생존의 세계로 나타나고 이루
어지는 현실적 사물의 세계이며, 다른 하나는 정신, 즉 사유를 통한 이념의 세계라고
보았다. 그때 현실적 사물의 세계를 현실되게 하며 그 현실로 하여금 마침내 귀의케하
는 존재가 바로 이념적 원형의 세계라고 본 것이다. 플라톤이 아카데메이아 입구에 '
기하학을 모르는 사람은 들어오지 말라'고 써붙였다는 것은, 기하학은 모든 사물과 구
체적인 존재의 원형을 알려주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삼각형의 모습을 가진 형태는 수
없이 많다. 그러나 삼각형의 원형은 근본적으로 하나가 있다. 그것에 맞지 않는 삼각
형은 참다운 삼각형이 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정의의 상황과 모습은 어디서나 발견
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이상적인 정의의 원모습은 하나가 있다. 거기에 적합한 것이 참
다운 정의가 되는 것이다. 그러한 원형에 해당하는 것- 그것을 플라톤은 이데아라고
본 것이다. 이러한 이데아는 사유계와 경험계로 나누어진 현실 사물을 사유의 원형으
로 귀의시켜야 한다, 감성계에 속하는 모든 것들은 원형적인 실재로 환원되어야 한다
고 본 것이다. 이러한 원형은 자료로서의 물질계를 원형으로서의, 형상으로 바꾸어주
며 형상 중 최고의 형상은 원형인 이데아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이 현실을 이
상의 이데아로 상승하게 하며 깨닫게 해주는가? 근대 이후의 모든 철학자들은 이성과
이성적 사유를 그 중심기능으로 보았을 것이다. 우리들도 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 그
러나 플라톤은 그 핵심적 기능을 담당하는 것을 에로스(Eros)로 보았다. 그 당시에는
사랑이라는 말로 대표되는 에로스에 대한 생각이 일반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에로스는
미와 이상에 대한 사랑, 또는 정신적 가치의 창조적 활동의 주체로 여겨지고 있었다.
이 에로스의 지향성과 상승성이 우리들의 영을 현실세계로부터 이상적인 실재의 세계
로 이끌어준다고 가르친다. 따라서 이데아는 존재의 바탕이면서 질서의 원천과 목적이
되며, 최고인식의 내용이 된다. 이 이데아는 현실계를 초월한 성스러운 직관을 동반하
면서 우리의 삶을 이데아의 내용으로까지 상승, 승화시켜주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이
데아 중의 이데아, 최고의 이데아, 이데아 계의 태양과 같은 것은 선의 이데아라고 설
명한다. 철학적으로 본다면 참이라든지 진리라는 뜻이 더 귀하게 나타날 것 같은데,
그보다는 선을 더 높이 본 것은 선은 참, 진리를 포함하고 있으면서 그 참이 선과 더
불어 있어 삶의 세계와 역사의 완성을 가능케 해주었기 때문이다. 플라톤에 있어서는
참과 선은 별개의 것이 아니다. 오히려 참은 인식의 문제가 되나, 선은 존재의 이념으
로 보았기 때문이다. 플라톤 당시에는 진리보다도 지혜가, 진실보다는 선이 더 귀중하
게 여겨졌으며, 인간성의 조화로운 성숙도는 선으로 표현되어왔던 것이다. 미의 관념
도 그렇다. 미는 그 자체가 조화로움을 지니고 있으며, 조화는 선의 이데아에서 원만
히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그렇게 본다면 플라톤의 철학은 진리와 미의 조화가 선의 이
데아에서 채워진다고 볼 수 있는 동시에, 결국 플라톤의 철학은 윤리적이며 국가적인
이상주의와 연결되어 있다는 견해를 보여주기도 한다. 우리는 칸트의 이론철학과 인식
론에 해당하는 (순수이성비판)을 더 소중히 여긴다. 그러나 칸트 자신은 윤리적 가치
를 위한 전제로 인식의 문제가 취급되었다고 본다. 데카르트도 그렇다. 모든 이론적인
학문은, 무엇을 실천해야 하는가 하는 실천적 학문을 위한 전제라고 스스로 말하고 있
다. 그러나 우리가 중요시하는 것은 그의 인식론적 방법이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인식론적 대화법을 방법으로 받아들이고는 있으나, 그 목적과 방향은 이미 이데아라는
대전제로 제시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의 수많은 저작들을 묶어 집대
성한 (롤리테이아) 즉, 이상국에 관한 고찰이 플라톤 이해의 궁극적인 과제라고 보아
좋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플라톤 철학의 궁극적인 목표는 어떤 이상적인 국가를 건설
하는가 함이 젊었을 때부터의 꿈이었다. 다시 말하면, 이데아 연구의 과정은 이데아로
가는 인식의 길이고, 이데아를 실천하는 윤리학이 있고, 그리고 그 완성체인 이상국에
의 길이 그가 추구한 철학 도정이었던 것이다.
@ff
    14. '이상국'으로 가는 길: -플라톤의 (국가)(기원전 4세기)
  그때 세계에서는-
  BC 371년: 크세노폰(제1필리포스 탄핵연설)
  BC 359년: 진의 효공, 상양 등용(정치개혁)

  세계 최고의 고전 중의 고전인 (이상국)은 방대한 내용의 책이다. 그는 일찍 이 책
의 서술에 착수했다가 긴 기간을 거치면서 다른 여러 책들을 쓴 뒤 다시 늦게 완성시
킨 것이다. 그 점에 있어서는 괴테의 (파우스트)를 연상케 한다. 그만큼 플라톤의 철
학과 이상을 폭넓게 담은 저작인 것이다. 그는 '모든 인간의 의지와 행위는 선의 이데
아에 의하여 지배되는 참실재의 세계를 목적삼고 있다. 즉, 불완전하고 변화하는 감성
계의 경험적 존재를 목적삼지 않고, 세계 전체의 최고이상의 의미와 목적을 뜻한다''
현인은 영혼의 순화에 의하여 감성계를 벗어나 영혼의 실재화와 이데아 계를 바라는
철학적 진리를 직관코자 한다'라고 말을 남기고 있다. 이것은 선의 이데아를 추구하는
것은 철학의 과제이나, 그것을 구현하는 것은 이데아의 모방과 추종이라고 본 것이다.
이데아에로의 길과 이데아로부터의 길이 함께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플라톤
은 이상국의 모범은 개인의 인간성과 같은 뜻에서 성취되는 것으로 보았다. 인간의 영
혼은 정의를 통해 선으로 가며 이성이 모든 것을 지배해야 한다고 보는 플라톤은 인간
의 영혼 자체가 신적인 이성과 무이성의 단계로 나누어진다고 보았다. 이성은 합리적
인 사유를 통해 올바른 식견(Pronesis), 즉 사고를 동반하는 지혜를 산출시킬 수 있
다. 영혼의 무이성적인 본성은 비교적 선하고 고귀한 부분인 의지로 나타난다. 거기에
인간의 용기와 의지적인 노력이 나타난다. 인간 영혼의 무이성적인 부분에서도 비교적
저열한 부분이며 악에의 가능성을 안고 있는 욕망은 쾌락, 충동, 육체성을 동반한다.
이러한 욕망은 억제를 받아야 하며 우리는 그것을 절제의 과제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보면 인간적 존재와 삶에는 세 가지 요소가 기본적으로 주어진다. 올바른 지혜와 그에
따르는 식견, 의지에 따르는 용기, 욕망을 조절하는 절제가 바로 그것이다. 이런 세
가지 기본적인 덕목은 그것들을 사회적으로 종합한 정의를 구현시키는 데 필요하며 그
정의는 최고의 이상인 선을 위해 필요해지는 것이다. 이런 정의를 포함한 네 가지 덕
은 인간성의 기초가 될 뿐만 아니라, 국가를 형성하는 기본적인 4덕이 되어 성취되어
야 한다는 것이 플라톤의 국가 및 사회철학의 근간이 되는 것이다. 국가의 대중적 근
저를 만드는 것은 서민이다. 그들이 맡는 책임은 경제활동이다. 산업을 일으키며 수입
을 올리며 부를 이끌어 내야 한다. 그들은 영리성을 위해 분업을 필요로 하며, 기술을
개발하며 생산과 상업을 발달시켜야 한다. 교환가치로서의 화폐를 필요로 하며 활용하
게 된다. 그러나 그들의 경제적 욕구를 그대로 내버려두면 이기적인 소유욕 때문에 사
회는 싸움과 불행을 벗어나지 못한다. 근면과 더불어 절제의 미덕을 쌓아 국가경제의
부를 돕는 방향으로 이끌어가야 한다. 이러한 계급에 속하는 사람은 통치나 지배와는
무관하며 윗사람들의 보호와 지도를 받아야 한다. 농부, 수공업자, 상인들은 언제나
경제적 부를 위한 욕구적인 경제인이며, 그들의 절제가 개인의 행복과 국가의 부를 만
든다. 여기에 의지적 용기를 갖춘 사람은 경제적 공급을 국가로부터 받으면서 국방을
책임지며 대내적인 법을 집행하는 데 필요한 직무와 계급에 따른다. 그들에게 가장 필
요한 것은 사욕이 없는 헌신적인 정신을 갖추는 일이며 최고의 덕목은 용기인 것이다.
그러나 이들에 비하여 가장 높은 위치에서 국가를 통치하는 지도자는 국가에서 자질을
갖춘 인재들을 찾아 육성해야 한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이성적인 판단력과 지혜를 갖
춘 정치가로 자라야 한다. 입법과 법의 실현, 그리고 교육을 감시하는 책임을 지는 사
람이다. 관직을 따라 올라가다가 기회가 되면 최고 통치자로까지 올라갈 수가 있다.
이런 통치적 지도자에는 절대로 필요한 식견, 지혜, 이상이 있어야 하며, 그것은 철학
을 통해 이데아를 터득한 사람이어야 한다. 교육에 있어서도 그런 사람은 수학, 예술
등의 소양을 닦아 성숙한 인격을 갖추며 철학적 지혜를 쌓아올린 철학자가 되어야 한
다. 사람들은 그것을 철학적 통치자의 이상국이라고 부르고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꿈
같은 이야기이며, 더욱이 국가가 통제, 시행하는 교육은 전체주의적 사고를 강요하는
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이데올로기를 강요하며 고도의 정치적 이념과 이상을 요구하
는 이들이 없지 않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플라톤의 꿈을 구현시키려는 많은 정치가
가 오늘에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는 생각도 할 수 있다. 인간이 하는 일은 돌고 또 도
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림 설명:플라톤의 아카데메이아. 플라톤은 기원전 387년경 아테네의 북서쪽 교외
에 위치한 아카데모스의 신역에 학원을 설립하여 교육과 연구에 몰두했다. 폼메이 모
자이크 벽화.
@ff
    15. 만학의 아버지: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322년)
  그때 세계에서는-
  BC 377년: 아테네, 제2해상동맹 조직
  BC 367년: 주나라, 동서로 분열

  플라톤은 스승으로서 성공한 이였고, 따라서 많은 제자들을 이끌고 있었다. 그 제자
들 가운데 묵묵히 학문에 열중하고 있는 한 제자가 있었다. 플라톤이 때로는 '좀 쉬면
서 공부해도 될텐데...'라고 우려할 정도로 열심히 학문에 몰두한 제자 중의 하나가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384-322 BC)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부친은 의사였다.
말하자면 아리스토텔레스는 경험과학의 혈통을 이어받아 태어난 셈이다. 알렉산더 대
왕의 아버지인 피리포스 2세를 위한 의료책임을 맡고 있던 아버지는 일찍 세상을 떠났
으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고아로 자란 셈이다. 17살의 젊은 나이로 플라톤의 문하에
들어와 20년 동안 플라톤을 섬겼다. 가장 학문에 열중할 수 있는 기간을 청강, 사색,
독서로 보냈다. 말하자면 누구보다도 플라톤의 철학을 잘 이해했고, 스승의 학설을 분
과적으로 발전시켜 스승 못지않은 철학자로 역사에 남게 된 것이다. 플라톤이 죽은 뒤
아리스토텔레스는 마케도니아 왕가의 초청을 받아 14살 되는 알렉산더의 스승이 되었
다. 세계 최대의 철학자와 최대의 대왕이 사제관계로 맺어진 것이다. 알렉산더는 일찍
부터 대권의 야망을 품고 있는 천분을 지닌 정치, 군사 전문가였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치밀한 과학성을 지닌 철학자였다. 자연히 알렉산더는 학문의 존귀성, 사상의 필요성
등은 스승을 통해 깨달았으나,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학자로서의 관심은 일찍부터 없
었다. 결국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곳을 떠나 스승을 섬기던 아테네로와 제자들을 가르치
면서 사색과 저술에 열중했다. 체육장을 근거로 강의를 했고 가로수 밑에서 삼삼오오
짝을 지어 대화와 토론을 나누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들을 소요(Peripatos)학파라고
불렀다. 12년 동안 학구와 교수생활에 열중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더 대왕의 갑
작스러운 서거에 접하게 되었다. 게다가 아테네가 마케도니아의 통치권을 벗어나려는
정치적 움직임도 있어 대왕과의 관계를 우려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로 떠났다. 그
러나 얼마 안되어 그도 세상을 떠났다. 세계는 2년 사이에 가장 넓던 철학자를 한꺼번
에 잃게 된 셈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 플라톤이 가장 중요시하는 이데아의 실재
성에 관해 처음부터 그 타당성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플라톤의 종교적 성격이나 예술
적 직관에 비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선천적으로 경험 과학적이었고 비판적인 성격의 소
유자였다. 이데아의 실재는 실념성에 속하는 것이며, 그것은 생각과 관념으로 있는 것
이지, 철학이나 과학적 실재로는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존재하는 것은 현실세계일 뿐
이며, 이데아에 해당하는 것은 현실사물의 형상일 뿐이라고 보았다. 우리들의 학문적
대상이 되는 것은 현실계가 있을 뿐이며, 현실계는 감관적 개물과 이성적 보편자로 볼
수 있는 유개념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플라톤이 말하는 존재의 원형이 아닌 사물의
형상일 뿐이며, 오히려 사물로부터 주어질 수도 있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것을 과학적
으로 풀이하면 물건의 질료(Materie)와 형상(Form eidos)라고 보았다. 질료 속에는 가
능성과 잠재적인 세력이 있고, 그것이 구현되며 현실적으로 나타난 것이 형상이라고
설명한다. 건축을 위한 석재는 질료가 된다. 집의 개념은 형상이다. 건축사는 동력인
이 되고 현실의 집이 건축의 목적이 된다. 만일 그 차등을 찾는다면 완전질료에 속하
는 부분이 있고, 형상을 갖춘 질료가 있고, 질료가 없는 형상이 있을 뿐이다. 플라톤
은 질료가 없는 형상을 이데아로 보았을 뿐이라고 해명한다. 플라톤의 이데아 론을 관
념적인 철학으로 본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실재론적이며 본질적으로 과학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문제는 질료로 하여금 현상이 되게 하는 운동 또는 변화에는 어떤
동인력이 필요해진다는 점이다. 여기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물의 본질원인은 그 안에
있는 목적이 잠재되어 있다. 종자는 나무가 되려 하며, 운동은 건강을 위해 필요한 것
과 통하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동인력 가운데 최초의 동인력, 타로부터 원인을 받지
않으면서 스스로가 동인을 가지면서 목적이 되는 제일의 원인, 능동자, 그 자체는 부
동이면서 운동을 가능케 하는 절대적인 자인자, 그것은 신적 정신에 속하는 것이며,
최초의 원인인 동시에 창조적인 원인이 된다고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데모크리토
스의 기계론과 프라톤의 이데아를 합해 최초의 목적론자가 되었다는 점도 주목하면 좋
겠다. 먼후일에 H. 베르그송은 그 목적론을 부정하고 창조적 진화를 제창하기는 했지
만...

  그림 설명: 기시 작의 동판화.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 16세기. 그림 중아에 플라
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나란히 걸어나오고, 그 앞 계단에 디오게네스가 비스듬히 앉
고, 피타고라스가 글을 쓰고 있다.
@ff
    16. '참다운 행복이 진정한 선':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사상(기원전 4세기 후반)
  그때 세계에서는 -
  BC 350년: 마케도니아를 맹주로 하는 헬라스 연맹 성립
  BC 323년: 알렉산더 대왕 죽음

  철학의 역사를 말하는 사람들은 아리스토텔레스를 만학의 아버지라고 부른다. 아리
스토텔레스를 만학의 아버지라고 부른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현재까지 우리가 계승하고
있는 모든 학문을 독립된 학문으로 구별, 발전시켜주었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철학적
주제들을 대화형식을 통해 여러 분야에 걸쳐 설명해주었으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학문의 독립성을 갖춘 개척자가 되었다. 물리학, 기상학, 형이상학, 정치학, 논리학,
시학, 윤리학, 생명론 등 그가 취급해주지 않은 학문은 없을 정도였다. 지금 우리는
여기에서 그중의 윤리학의 문제를 알아보기로 한다.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비중 큰
과제이기도 했으나, 플라톤과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플라톤은 이데아로서의 선, 도덕적인 보편성 있는 가치를 추구했다. 그는 하나이면서
영원한 가치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도달할 수 있는
선'이 중요하며 현실적이면서도 실천성이 없는 선은 문제삼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
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나는 그들이 사물 자체에서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지 모른다.
선 자체의 존재를 인정한다고 해도 인간은 그것을 실현하지도, 거기에 도달하지도 못
한다. 구하기만 해도 인간은 그것을 실현하지도, 거기에 도달하지도 못한다. 구하기만
할 뿐이다. 직공들은 그들의 기술을 위하여 선 자체의 지식에서 이익을 얻고 있는가,
또 이데아를 직관한 사람은 더 좋은 의사, 더 좋은 장군이 될 수 있는가 이해할 수가
없다"고 말한다. 플라톤과 그 추종자들에 대한 반박인 것이다. 그러면 선은 무엇인가?
"어떤 기술이나 연구와 마찬가지로 어떤 실천과 선택도 모두가 어떤 좋은 것(선한 것)
을 추구한다고 생각된다. '선은 모든 것이 추구하는 바'라고 하는 훌륭한 해석이 내려
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고 진술한다. 의사에게 있어서는 건강이, 전술에 있어서는 승
리가, 경제에 있어서는 부가 소망스러운 목적이 되듯이, 선은 모든 것이 그것으로 향
해져 있는 것, 즉 해당사물들의 목적이다. 따라서 윤리에 있어서는 유효성이 문제가
된다. 무엇을 아는가 함보다는 어떻게 유효한 인물이 되는가 함이 문제인 것이다. 실
천인이 지식인보다 귀중한 뜻은 여기에 있다. 여기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윤리적 진리와
가치의 개연성을 인정하며, 경험적 성격과 구체적이며 현실적인 개념이 요청되고 등단
하게 된다. 경험은 또한 의지와 행위의 조화있는 결과를 요청하게 된다. 그렇다면 선
주의 선, 만인이 추구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것은 행복이다. 참다운 행복이 진정한 선
이 될 수 있다. 흔히 생각하는 주관적인 것, 감성적 향락, 부귀나 명예 등의 외적 조
건 등은 참다운 행복도 못되며 진정한 선으로 볼 수도 없다. 쾌락은 부차적이 것에 불
과하다. 가장 완전한 만족에서 오는 행복이어야 한다. 그러면 이러한 선으로 가는 과
정에는 무엇이 있는가?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을 덕이라고 생각했다. 영혼의 이성적이
며, 유덕한 활동은 불행이 될 수 없다는 것이 그 뜻이다. 그렇다고 이러한 덕이 추상
적이거나 관념적인 것에 치우쳐서는 안된다. 자기성숙에 이르기까지의 교육, 건강, 부
유함 그리고 아름다운 용모도 덕의 조건들이다. 사회생활에 있어서의 선한 사귐은 말
할 필요도 없다. 따라서 각자는 자신의 소질과 유능성을 계발해야 하며, 덕의 주체가
되는 인격의 함양과 행동인의 자질은 언제 어디서나 높이 평가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과 같이 정의, 식견, 용기, 절제 같은 4덕을 주장하지도 않으
며, 더욱이 강요하는 일은 없었다. 수많은 덕이 시대와 사회에 따라 요청될 수가 있
다. 사회질서를 위해서는 정의가 필요한 덕일 수 있으나, 대인관계에 있어서는 우정이
무엇보다도 소망스러워진다. 오직 모든 실천적 해위를 중심으로 보았을 때는 중용의
덕이 무엇보다도 귀중하다. 용기는 만용과 비겁의 중용이며, 절도는 방일과 둔감의 중
용이다. 향락과 자기 고민은 극기로 풀어질 수가 있다. 그러나 총괄적이며 신분과 사
회구성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필요한 보편적인 덕은 정의와 사랑이다. 정의 속에는
공정과 평등이 자리잡기 때문에 전체적인 행복의 조건을 갖추게 된다. 그리고 우정을
포함한 사랑, 즉 박에는 인간들의 공존과 협력을 가능케 하며 행복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사랑받을 만한 것은 쾌적한 것, 유용한 것이다. 그리고 사랑의 정신은 개인관계
에서 사회생활에는 물론, 인류 전체에까지 그 활동영역을 넓혀갈 수가 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도 그 당시의 일반적인 풍조와 같이 이러한 덕이 보편적으로 구현되는
위치는 국가이며, 국가적 정치가 덕스러운 삶을 높여주는 큰 역할을 담당한다고 보았
다. 윤리학이 정치적으로 전개되는 이유를 짐작할 수가 있다.
  그림 설명: 만학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사
상은 참다운 행복이 진정한 선이며, 선으로 가는 과정에 '덕'이 있다고 생각한다.
@ff
    17. 달라지는 세계와 철학자들: -헬레니즘 시대(기원전334-30년)
  그때 세계에서는 -
  BC 331년: 페르시아 제국 멸망
  BC 31년: 악티움 해진, 옥타비아누스 승리

  일찍부터 세계정복과 지배의 꿈을 안고 있던 알렉산더는 드디어 그 포부를 펼쳐나가
기 시작했다. 그는 지중해 연안의 유럽과 아시아는 물론, 아프리카까지 점령해 세계를
하나의 제국으로 만들고, 아프리카 동북부에 자기 이름을 딴 알렉산드리아 수도에서
세계를 지배하려는 뜻을 세웠다. 그리고 모든 야만적인 문명을 몰아내고 그리스 사상
과 예술과 철학을 모든 점령지에 보급시켜 하나의 관대한 정신세계를 형성하기를 원했
다. 그는 뜻대로 페프시아를 점령하고 군대를 인도에까지 진출시켰다(327년 BC). 인도
에 갔을 때였다. 모든 부하장병들이 전쟁에 지쳐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것을 보
고, 뜻을 바꾸어 회군하기로 했다. 그는 바다 끝까지 정복하고 싶었으나, 그 뜻을 포
기하고 돌아가 점령한 모든 지역을 통치하는 일에 착수하려고 생각을 바꾸었다. 회군
하던 도중에 알렉산더는 역병을 얻고 치료를 받았으나 객지에서 33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등지게 되었다. 그의 꿈은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었고, 장병들은 흩어져 귀가
하는가 하면, 점령당했던 국가들은 앞다투어 점령 이전의 국권 회복에 나섰다. 아테네
도 그중의 하나였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를 떠나 마케도니아로 돌아와야
했던 것이다. 다음해에 그는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전쟁의 소용돌이를 벗어난 세계는 모든 질서가 혼란과 파괴를 모면할 길이
없었다.
  철학을 중심삼는 학문에 세계에도 과거에 없었던 변화가 일어났다.
  그 때까지는 그리스의 아테네가 세계적인 학문과 예술의 중심지였으나, 이제는 세계
각지에서 제각기의 학문이 다시 출발하는 경향을 띠게 되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역시
그리스적이었으며 아테네의 철학이 영향을 줄 수 밖에 없었다. 아테네가 유일한 철학
의 본고장이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아테네의 철학이 세계적으로 보급, 보편화되었다
고 보아 좋을 것이다.
  따라서 철학의 체계성이 단편적인 내용으로 바뀌며, 이론적인 학설보다는 어떻게 살
아야 하는가를 묻는 윤리성이 강한 방향으로 전환되었다. 진리가 무엇인가 함보다는
어떻게 지혜롭게 사는가가 문제였고, 모든 것에 앞서는 것은 처세술로 환원되는 경향
이 되었다. 학문은 높은 교양으로 만족하는 풍조로 변해버렸다.

  이렇게 되면 과거와 같은 위대한 철학자가 냐타나는 것이 아니라, 몇몇 사상가들이
모여 한 학파를 형성하는 것이 자연적인 추세가 된다.
  이런 여건 밑에 태어난 몇 가지 철학사조 가운데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지속된 하나
는 스토아 철학의 계통이었다. 특별히 주목할 개인 철학자는 없었으나, 수 많은 철학
자들이 대중적 호응을 받으면서 BC 300년경부터 로마 말기까지 계승되는 철학유파의
하나가 되었다.
  초기, 중기, 말기에 걸친 시대적 특성을 갖고 있으나, 그들의 주장은 통일성을 갖고
있다.
  처음 창시저는 키티온(Kition)의 제논(Zenon, 366--264?BC)이라고 한다. 아테네서
가르친 소아시아의 학자였다. 스토아(Stoa)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벽화로 장식된
전당이라는 뜻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곳에서 강의를 했기 때문이다.
  스토아 철학의 전통은 소크라테스의 극기와 자족을 따르고 거기에 키니코스 학파의
사상을 가미한 것으로 보아 좋을 것이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학파가 아닌 소
크라테스의 제자들을 따른 윤리학파를 택한 편이다. 제논은 자신이 세운 학교의 초대
책임자였으나 고령에 자살한 것으로 되어 있다.
  2대와 3대의 책임자를 거친 뒤 바빌로니아의 이오게네스에 이르러서는 그 학교의 위
치를 로마로 옮긴 것으로 되어 있다. BC 155년경의 일이다. 이것은 철학의 중심지가
아테네에서 로마로 옮아갔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그리스의 사회적 위세가 아테네와
더불어 약화된 반면, 새로 등장한 로마가 이미 정치에 있어서는 세계적인 중심지가 되
었고, 학문도 정치적 배후를 필요로 했기 때문에 로마로 옮아가는 길을 택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 유럽의 학문적 위치가 상당히 미국으로 건너간 것과도 통하며, 일본의
도쿄가 아시아의 중심지로 전환한 것도 비슷한 사정일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로마는 아테네를 능가할 정신적 유산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우
리는 지금도 이 시대의 철학을 헬레니즘과 로마의 철학으로 부르고 있다. 그리스의 문
화가 지배한 세계를 헬레니즘 사회라고 보며, 로마는 그 연장에 불과하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ff
    18 자연의 질서에 따르라: 스토아 철학(기원전 4-2세기)
  그때 세계에서는-
  BC 342년: 에피쿠로스 출생
  BC 336년: 제논 출생
  BC 108년: 한 무제, 고조선을 멸하고 한 사군 설치

  동양인들 가운데 서양철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스토아 철학을 깊이 고찰하지 않는
다. 거기에는 세계적인 철학자도 나타나지 않으며 체계적인 대표적 저서도 없기 때문
이다.
  그러나 서양의 철학자들은 스토아 철학에 상당히 깊은 연구를 기울인다. 긴 세월에
걸친 철학이며, 누구에게나 공감을 주는 사상이 때문이다. 스토아 철학에 접하고 보면
왜 그런지 동양의 도학정신과 통하는 점을 많이 느끼게 된다. 특히 윤리적 인생관에
있어서는 더 그렇다. 스토아 철학의 기반이 되는 것은 오래 전부터 계승되어온 자연의
질서이다. 그들은 기독교와 같이 유일신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세계관의 근거가 되는
것은 자연일 수밖에 없었다. 그 자연은 로고스와 일치되는 어떤 질서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절대적이며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
  인간은 그 로고스적인 질서의 특수성을 부여받고 있다. 그 특수성의 내용이 이성인
것이다. 인간 이성은 자연의 로고스와 통하며 자연의 질서는 인간적 사유와 삶의 기반
을 만들고 있다. 그래서 인간적 삶의 궁극적인 의미와 방향은 자연적 로고스와 일치
되는 데 있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반이성적인 본능적 요소들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다. 육체적인
본능적 경향에 속하는 것이다. 욕망-격정을 포함한 자기보존의 본능들이 그것이다. 이
것들을 극복하지 못하면 인간은 자유와 행복을 누릴 수가 없다.
  그러면 그것들을 극복하는 길이 무엇인가? 이성에 따르는 올바른 식견과 지혜인 것
이다. 욕망을 이성으로 억제하며, 이성에서 보편적 질서에로 환원하는 것이 삶의 궁극
적인 방향과 목표다. 그것은 사유가 본능을 조절할 수 있다는 이성주의적 성격과도 통
한다. 이성만이 자기 결전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자유로운 자아와의 일치를 가능케 해
주며, 자신에 대한 충실에서 정신적 만족과 행복을 가능케 해준다. 그렇다고 해서 이
성의 절대성이나 전능성을 인정할 수는 없다.
  인간의 운명이 한계지어져 있듯이 이성에도 한계가 있다. 이때 그 한계를 극복하는
길은 인간적 이성을 포함하고 있는 자연의 로고스적 질서로 환원되는 길이 있을 뿐이
다. 자연과의 일치 및 조화를 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만일 어떤 스토아 철학자가 우리에게 "너희는 죽음의 원리를 자연에서 배우라. 가을
이 되고 열매가 익으면 그 열매는 조용히 땅으로 떨어진다. 마치 다른 나무와 열매들
에게 나는 할 바를 다했고 때가 왔기 때문에 먼저 땅으로 돌아가니까 너희들도 나와
같은 길을 운명적으로 택하게 될 것이 아니겠느냐."고 얘기한다면 그 얼마나 자연스러
운 삶과 죽음의 도리이겠는가.
  오히려 인간적 욕망과 반질서적인 의지가 죽음을 슬퍼하고 종말을 저주하며, 죽음을
저주하는 식의 어리석음을 저지르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런 뜻은, 참자유는 이성 질서의 동화에 있으며, 개인의 목적은 보편자로 돌아가는
데 있다고 가르친다. 만일 그들중의 일부가 이성 질서의 보편성을 범신론적인 종교로
돌린다면, 우리는 구태어 반대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스토아 철학은 유물론적인 세계관으로 출발했고 인식은 감각주의를 택하고 있다. 그
러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말년에 가서 범신론적인 종교관으로 기울어지게 된 것은 자
연스러운 추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철학을 키레네 학파나 에피쿠로
스 학파의 쾌락주의와는 엄격히 구별한다. 즐거움을 택하는 쾌락주의자들은 감성적이
며 순간적인 만족을 택하기 때문에 쾌락과 더불어 행복도 상실하게 된다. 스토아 철학
자들은 이성적인 가치와 거기에 따르는 기쁨을 추구하기 때문에, 그 목표는 정신적 행
복이며, 그 원천이 되는 것은 이성적 사유와 질서에의 순응인 것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있어 덕 중의 덕은 식견(제논의 주장)이며, 강한 영혼에서 오는 지
혜라고 본다. 이와 대립하는 무지-비겁-무규율-불의 등은 행복을 해치는 어리석음에서
오는 것이다. 무지와 어리석음은 모든 악의 근원이 된다고 가르친다. 이렇게 의무와
규율과 지성적인 교육을 요청하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은 윤리관을 행복주의 라고는
보지 않는다. 행복주의는 세속화된 쾌락주의로 전락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더 많은 사람의 참다운 행복을 위해서는 덕의 사회적 가치가 필요해지며, 그
목적을 위해서는 국가 및 세계시민적인 의식과 사고도 용납되어야 한다고 본다. 헬레
니즘 시대의 특성주의 하나는 좁은 의미의 (도시)국가적임 사고를 넘어, 개인이 그대
로 인류에 통하는 세계시민적 사고와 의미를 넓혀주자라는 점이다. 어떤 면에서는 플
라톤의 국가 전체주의를 배격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 시대의 많은 철학자들이
같은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ff
    19 처세술로서의 철학: 스토아 말기 사상(1-2세기)
  그때 세계에서는-
  32년: 예수 처형
  161년: 로마, 마르쿠스 아우랠리우스 즉위

  스토아 철학이 정치적 중심지인 로마로 유입되면서는 자연히 그 성격이 바뀌게 된
다. 로마에는 법과 제도, 큰 건물들, 사방으로 흩어진 도로등이 역사상 최고로 발달되
어 있었으나 정신적 문화는 빈곤했다.
  그래서 그리스, 특히 아테네의 철학-예술-사상이 그대로 전달될 수 밖에 없다. 그러
나 로마는 신흥국가였기 때문에 모든것이 긍정적이었고 건설적이었다. 그리스의 철학
도 그런 성격으로 수정되면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다. 고상한 철학보다는 생활에
필요한 지식이 필요했고, 체계적인 학문보다는 교양이 더욱 요청되는 사회였다.
  스토아 철학도 로마에 들어오면서는 그런 성격으로 변질되어야 했다. 우리는 그 로
마적인 특성이 있는 것을 말기 로마의 철학으로 치부하고 있다. 다만 스토아가 생각했
던 것보다는 종교적인 성격을 잩게 띠게 된 것은 그 당시는 벌써 기독교가 들어와 새
로운 정신계를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토아 정신속에도 종교적 요소가 가미되는
시대적 추세를 어떻게 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이 당시 스토아를 대표하는 철학자는 우리가 잘 아는 세네카(seneca, BC4-AD65) 였
다. 그는 세계적 폭군으로 알려져 있는 네로 왕의 스승이기도 하였고, 한때는 총리대
신의 직책을 맡은 일도 있었으나, 네로에 의하여 자살을 강요당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
다.
  그는 통속적이기는 하나 화려한 문필로 된 많은 저서를 남겨 주었다. 도덕적인 교훈
과 종교적인 견해들도 무리없이 전해주고 있다.
  그 당시에는 이미 절충학파라는 부류의 철학과 사조가 유입, 육성된 뒤여서 어떤 철
학이나 사상을 주장하기보다는 여러가지 철학과 사상에서 우리가 받아들  여 도움이
될 내용이면 좋게 여기는 풍조가 강하던 시대였다. 무신론 보다는    유신론이 유익하
며, 회의주의보다는 교양있는 지식을 갖는 편이 좋으며, 절망   이나 비극으로 이끄는
사상은 회피하는 쪽이 지혜롭다고 보았던 것이다.
  세네카에게서도 그런 종합적이며 긍적적인 면이 풍부히 엿보인다. 읽어서 손해가 될
내용들은 쓸 필요가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인간에게 주어져 있는 나약함, 죄악의 가
능성, 육체와 세속적인 비참의 가능성을 벗어나 구원을 받는 데   는 섭리의 신앙, 종
교적 귀의성, 신의 의지로 합일되는 일, 신의 자비에 대한   감사와 내세에 되한 희망
도 버려서는 안된다고 가르친다. 온화한 심정, 인간들  간의 동정심, 인간애와 박애정
신을 가장 귀한 것이라고 보았다. 로마 인이면서  도 세계를 통치하는 시기였기 때문
에 세계시민의 정신을 계몽시켜주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화려한 문치로 된 서간-수상록 등에 더 접근할 수가 있어
정신적 위안을 받곤한다. 철학보다는 삶의 지혜에 대한 교훈들이 필요했던 것   이다.
그러나 그의 조요한 글의 내용에 비하면 네로 시대에 산 그 자신은 교훈
과 어울리지 않는 비극에 말려들 수밖에 없었다.
  이 당시의 스토아 정신의 대표자 중 한 사람은 무소니우스 리푸스 같은 실천가도 있
었다. 그는 당시 로마 시민들의 관심을 모으는 투사 중의 한 사람이 였  다. 그러나
고매한 정신적 수양을 쌓은 대표자의 한 사람으로 존경을 받았다.
  그의 제자로 자처했던 에픽테토스(Epiktetos, 120년경 사망)는 그의 "어록"때  문에
우리와도 친분이 있는 철학자다. 그는 노예 신분이었고 다리를 저는 불구  자였다. 노
예생활의 학대에서 얻은 병신이었다고 한다. 그런 위치에 있으면서   도 정신적 균형
과 마음의 안식을 잃지 않고 살아간 위대한 영혼의 소유자로 알  려지고 있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영혼의 병을 치유해주는 의사였다고 평했다. 언제나 제자 들에
게 양심과 선한 길을 가르쳤고, 그 자신의 종교적 은총에 젖은 인물같이 살았다. 신에
대한 내면적 숭경심을 일깨워주었고, 신의 섭리와 일치되는 공손함, 신뢰성, 인내심,
영혼의 순수성과 절도를 가르쳤으며 또한 몸소 보여주었다.
  맹세와 간음을 금했고, 진실한 인간애, 유화스러움, 자비심, 경건한 심정등을
강조했다. 인간은 모두가 신의 자녀라는 공통된 공존의식을 일깨워주었다.
그렇다고 이성의 능력을 약화시키지 않도록 하고 정신적 강한 힘을 지니도록 가르쳤
다. 신으로부터 주어진 특전이기 때문이다. 계시보다는 이성을, 이성의 한계 안에서는
신의 의지에의 순응을 강조했다. 기독교와 같은 내세관은 갖고있지 않았던 편이다.
  또 하나의 대표적인 스토익, 마르쿠스 아우랠리우스(M. Aurelius, 121-180)는로마의
황제였다. 그의 남아 있는 "자성록"을 보면 에픽테토스와 큰 차이가 없는 세계관을 갖
고 있었다. 영혼의 순수성과 때로는 (기독교와 다른)종교적인 신비주의를 도입시키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정치가-투사-노예-황제등 다양한 계층에서 스토아 철학의 신봉자 들
이 나왔음을 짐작할 수가 있다.
@ff
    20 "최고의 선은 정신적 쾌락이다. ": 에피쿠로스 학파(기원전 4-3세기)
  그때 세계에서는
  BC 287년경: 로마, 호르텐시우스 법 제정
  BC 280년경: 아리스타르코스, 지구의 자전과 공전 설명

  스토아 철학만큼 장기간에 걸쳐 광범위한 영향은 남기지 못했으나 헬레니즘 시대에
큰 흐름을 형성한 또 하나의 철학사조로 에피쿠로스 학파가 있었다.
  에피쿠로스(Epicouros, 341-270 BC)는 데모크리토스의 철학과 키레네 학파의  윤리
학을 종합한 성격의 철학을 창안했다. 대단히 많은 저서를 남겼다고 하나, 전해지고
있는 것은 수편의 어록 정도다. 데모크리토스를 따랐기 때문에 유물   론적인 원자론
적 자연관을 철학의 기반으로 삼았고, 인식에 있어서는 감각론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두 가지 다 새로운 학설로 발전시킨 것 같지는 않다.
  에피쿠로스는 몇 권의 윤리학 책을 남긴 것 같다. 그러나 그 내용은 전해져 내려오
는 쾌락주의적 전통을 이어받고 있다. 쾌락주의는 자연히 사회성보다는 개인주의 윤리
관에 치중하게 되며 정서적 이기주의에 빠질 가능성을 안고 있다.
  즐거움은 나의 것이며 빼앗기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쾌락성의 출발은 인정되나 거기에는 두 가지 과제가 따르게 된다. 그
하나는 쾌락의 질의 문제이며, 다른 하나는 어떻게 즐거움이 사라지않고 오래 강하게
머물 수 있는가 함이다. 이 둘을 합친 것으로 그들은 아타락시아(ataraxia)의 상태를
추구했다. 말하자면 흩어지지 않고 동요가 없는 마음의 안정된 상태를 가르킨다.
  그러기 위해서는 육체적인 즐거움이 정신적인 즐거움으로 발전해야 하며, 육체의 현
재성이 영혼의 영구성으로 바뀌어야 한다. 이성적 식견이 현실적 생활을 이끌어가는
상태가 아니면 안된다.
  이렇게 되면 자연히 에피쿠로스의 사상은 스토아의 정신으로 흡수되거나 같은 방향
을 택하지 않을 수 없어진다. 쾌락은 질에있어 행복과 통하며, 높은 차원의 행복은 정
신적이며 이성적인 것과 합치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두 가지 탈출구를 고집한다. 하나는 이성과 식견은 행복을 위한 수단
은 될 수 있어도 그 목적은 될 수 없다는 본래의 주장을 편다. 그리고 안정부동의 쾌
락을 위해서는 숨어서 살라는 은둔생활의 의미를 강조하게 된다.    욕망을 지배하며,
외적 관심과 물욕에서 독립하며, 속세에서 신과 같이 사는 길을 택해야 한다고 강조한
다. 물과 빵만으로 살면서도 제우스 신을 부러워할 필요가 없다는 가르침을 앞세운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그 시대사조에 걸맞게 세계시민적 정신과 우정과 관용과 이웃에
대한 호의는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쾌락보다는 고통의 지배를 받아야 하며, 고통의 짐을 벗어  날
수 없다면 죽음을 택하는 것도 금지할 필요는 없다고 보았다.
  이러한 에피쿠로스의 철학이 스토아의 사상과 같이 오래 지속되지 못한 것은로마의
긍정적이며 건설적인 풍토와는 맞지않았던 때문이며, 긍정적이며 적극적인 가치관을
필요로 하는 시대와 사회에서 받아들여질 수가 없었기 때문이   다.
  다행스럽게 이 계통의 철학자들 가운데 루크레티우스 카루스(Lucretius Carus, 97-5
5 BC)라는 사람의 저서"자연의 본질에 관하여"6편이 완전히 전래되어 그들   의 철학
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그 시대의 정신적 상황을 잘 그려 보여주
는 내용이기도 하다.
  그는, ""미신인 종교를 떠나라. 무로부터 생기는 것도 없고 소멸되는 것도 없   다.
물질의 시원인 원자만이 공간에서 움직일뿐이다. 원자의 결합에서 감각이 생기고 세계
에는 무한수의 물건들이 있다. 죽음의 공포나 불사의 신앙을 배척   하라. 영혼은 죽
음과 더불어 육체를 떠나면 소멸될 뿐이다. 감정이나 성적 사   랑도 물질적인 성격의
발로다. 인류가 얻을 수 있고 만드는 것은 자연에서 문   화를 찾아내는 역사적 과정
일 뿐이다. 자연을 떠나서는 모든 것이 소멸한다.      자연에는 이상현상이 있고, 신
체에도 병적인 이상현상이 발생하며, 그것은 병리적 결과를 초래한다. ""는 등의 설명
을 가하고 있다.
  이런 점들을 감안한다면 에피쿠로스 학파의 철학자들은 유물론적인 철학사상을 계속
견지했고, 윤리학에서는 쾌락주의적 방향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으나, 스스로의 학설과
주장들 속에 적지않은 모순을 내포하기도 했다. 그 결과로 로마  시대로부터 그 이후
까지는 철학적 여맥을 이어가지 못했다. 오히려 어떤 면에   서는 스토아에 흡수되든
가, 또는 회의주의 방향으로 길을 열어주는 역할을 담   당하기도 했다.
  또 그런 결과가 역사적으로 나타나고도 있다. 스토아 학자들이 그들의 윤리관을 흡
수한 흔적도 없지 않으며, 에피쿠로스 학파때문에 회의주의 철학이 더 세력을 강화시
켰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시대와 사회의 산물이였다. 진리는 시대의 딸들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에피쿠로스와 회의학파는 바로 그런 성격의 유산이기도 했   다.
@ff
    21 회의주의는 회의 그 자체가 목적?: 회의학파 (기원전 1-3세기)
  그때 세계에서는-
  BC 280년경: 아리스타르코스, 지동설 제창
  BC 260년경: 알렉산드리아에서 "히포크라테스전집"편찬
  BC 241년경: 에라토스테네스, 지구 원주율 계산

  믿을 만한 종교가 없고 이상주의 사상이 자취를 감추게 되면 회의주의는 자연히 탄
생되는 법이다. 설상가상으로 사회적 혼란이 심해질수록 회의주의는 사회 전반에 걸쳐
보편화되기도 한다.
  알렉산더 대왕의 사후의 헬레니즘 시대는 여러가지 면에서 회의주의적 풍토가 조성
되어 있던 시기였다.
  자연히 그들은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의 뒤를 따르기보다는 소피스트들의 회의주의를
계승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시조는 초기-중기-말기에 걸쳐 철학무대에 등단했고, 기
독교의, 중세기가 정착될 때까지 이어지고 있다.
  지금 우리는 그들의 이름과 학설을 열거할 필요는 느끼지 않는다. 또 그렇게 될 정
도로 큰 학자들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필요한 것은 어떤 철학적 성격의 내용이 전해
졌는가 함을 찾아보는 것으로 족할 것이다.
  회의주의가 출발하는 초기단계에서는 학문이나 진리에 대한 독단론적인 판단과 주장
을 배척한다. 절대적인 진리라든지 영원한 진리 같은 것은 존재할 수가없는 것이 사실
이기 때문이다. 용납될 수 있는 것은 진리의 개연성뿐이다. 꼭 그렇다는 필연성은 불
가능하며, 그렇다는 긍정적인 대답도 지나친 판단이다.
  가능한 것은 그럴 것이나, 그럴지도 모른다는 명제가 가능할 뿐이다. 다시 말 하면
모든 지식과 진리는 상대적인 것이다.
  이렇게 불확실한 것이 지식의 본상이라면 우리는 차라리 모든 판단을 보류하며, 진
리라는 과신에서 오는 오류와 불행에서 벗어나기 위해 정신적 안정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것은 지적탐구에서 오는 혼란과 불안보다는 영혼의 안정이 윤리적 과제로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지적인 회의에서 정신적 안정을 얻자는 것이 그 출발점이었다.
그러나 회의가 좀더 적극성을 갖게 되면 회의 그 자체가 학문과 사상의 목적으로 바뀐
다. 회의에서 회의에의 길을 택하게 된다. 중기 회의학파 사람들은 "우리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는 명제 자체도 의심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정도였다. 그렇게 되면 증
명이라든가 확실성 깉은 것은 기대할 필요가 없어진다.
  차라리 개연성의 이론을 확립시켜 회의 그 자체가 머물러야 한다는 견해로 번 진다.
  모든 진리는 일기예보와 같아서 "내일은 꼭 비가 와야 한다. 올 수밖에는 도리가 다
른 도리가 없다. "는 식의 논리는 위험하며 오히려 허위가 된다. 그렇다고 "내일은 비
가 온다. "고 말할 수도 없다. 아직 실현되지 않은 사실인 것이   다. 할 수 있는 언
표는 "내일은 비가 올지도 모른다"든가 "내일은 올 것 같다.
  그러나 오지 않을 수도 있다. "는 표현을 넘어설 수는 없는 것이다.
  지식은 필연성을 갖지 못하며, 실연성은 확실하지는 못하다. 그러니까 개연성 인 진
리와 표현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개연성 자체가 진리의 표준이 될 수도 없고, 개인적 지식에 안 주할
수도 없는 것이 삶과 인식의 모습이다.
  여기에 나타나는 회의주의의 마지막 단계는 방법으로서의 회의철학이 되는 것 이다.
회의는 그 자체가 목적이 못된다. 회의를 통해 더 의심할 수 없는 지식   과 진리에
도달하자는 것이 더 중요하다. 만일 그 책임을 감당하지 못하고 회   의를 위한 회의
에 머물게 되면 우리는 자동적으로 허무주의에 빠지게 되며, 허무주의는 지금까지 전
해져내려오는 기성적인 것을 파괴하기 때문에 더 큰 불행 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초기의 회의주의자들은 독단성과 지나친 관념적 이상주의를 배격한다.
  중기 회의주의자들은 회의의 끝까지 가본다. 그리고 말기에 이르러서는 회의주의는
하나의 실증과학과 경험주의의 방법론을 찾도록 유도해준다.
  또 말기의 회의주의자들은 이미 로마 시대로 접어들었기 때문에 긍정과 건설의 풍조
와 융화할 수밖에 없었고, 주류를 이루는 회의주의자들은 학자들보다도 의사들이 그
책임을 담당하고 있었다. 의사들은 경험적 인식의 가능성을 갖고 있어 독단적 사고나
결정론적 주장은 회피하지만, 인식의 상대성을 수용하며 더확실한 지식으로 향하는 의
지와 노력 자체는 포기할 수가 없어진다.
  윤리학으로는 영혼의 안정을 추구하면서 회의는 더 타당성이 있는 지식과 실증과학
에의 길을 열어주는 길잡이가 될 것을 전제로 삼는 학문적 방향을 제시해  주는 것으
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시대의 회의주의를 계기로 회의주의 철학은 일단 그 자취를 약화시 킨 것
으로 보아야 하겠다. 역시 인간은 긍정하려는 의지를 갖고 있으며, 삶은 계속해서 자
기완성의 의무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ff
    22 이상주의 철학의 마지막 불꽃: 신플라톤 학파 창시자, 플로티노스 (204-270)
  그때 세계에서는-
  BC 250년: 인도 아소카왕, 왕자를 실론으로 보내 불교전파: (구약성서)그리스  어로
번역
  BC 241년: 에라토스테네스, 지구의 원주율 계산

  촛불은 다 타고 꺼지기 전에는 마지막 불꽃을 밝게 태우면서 사라진다. 인간은 죽음
을 맞이했을 때에 마지막으로 의식을 되찾는다. 의사들은 유언을 위한 최후의 기회라
고 말하기도 한다.
  사상과 철학의 역사도 그런지 모르겠다. 길게 보면 1천 7백년에 걸친 고대철학사상
이 마지막을 고하게 되면사 한 번 더 밝은 빛을 발휘하고 끝난 듯한 인상을 준다.
  그 마지막을 크게 장식한 사람이 바로 플로티노스(Plotinos, 204-270)였다. 그의 생
존연대는 벌써 AD로 접어들었으며, 로마에서는 기독교 사상과 철학이 큰
  비중을 차지하기 시작했을 때였다. 플로티노스도 기독교 철학의 영향을 측면적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전통적인 고대철학의 주류를 계승시켰다. 사람들은 그를 신플라톤주의
의 대표자라고 부른다.
  모든 철학은 상식과 교양으로 화하고, 처세를 위한 지혜가 곧 철학인 듯이 받 아들
여지고 있던 로마 시대에 있으면서 한번 더 이상주의적인 철학을 꽃피우고 싶은 것이
플로티노스의 꿈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스토아-에피쿠로스-회의학파 등을 떠나 플라
톤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철학의 정상적인 길이라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그 흐름이 앞
으로도 계속된다. 아우구스티누스도 신플라톤주의 철학을 택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여기에 또 한가지 주목할 점은, 플라톤주의는 로마의 현실주의와 물질 문명
적 흐름을 좀더 높은 차원의 철학으로 끌어올리고 싶은 욕망과 더불어, 신흥종교인 기
독교의 긍정적인 세계관과 초월적인 종교관이 플라톤의 철학과 통하는 바가 있었다는
점이다. 지금도 많은 학자들이 플라톤주의와 기독교의 관계를 계속 연구하고 있다. 서
로 깊은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상이 중세기에 와서는 기독교가 주인이 되고 플라톤 철학이 손님의 위 치를
차지하나, 플로티노스에 있어서는 플라톤 철학이 주가 되고 기독교 사상   이 객이 되
는 위상에 머물고 있었다.
  지금도 플로티노스를 읽는 사람은 바이블의 요한복음을 읽는것 같은 유사성을 발견
하게 된다. 그만큼 두 사상에는 공통성이 발견되고 있다. 적어도 그 당시  에는 그렇
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플로티노스는 자기 자신을 탁월한 철학자이면서 또 종교적 신념을 가진 인물로 자처
하고 있었다. 제자들은 그를 가리켜, 육신을 갖고 태어난 것을 부끄러워하는 것 같은
인상을 풍겼다고 말하고 있다.
  이집트 태생이면서 로마에서 교육을 폈고 학교를 주관했던 것으로 되어 있다.    50
살이 넘으면서부터 저작에 착수했다. 지금도 우리는 그의 "유일자에 관하여"하는 형이
상학적 저작에 접하고 있다.
  그는 모든 여타의 철학을 플라톤 철학에 접합시켜 새로운 학설을 꾸몄으며, 거기에
는 종교성이 짙은 이데아 론이 나타나고 있다. 사람들은 그를 최초의 신비주의 철학자
라고 부르며, 종교철학의 창시자라고도 평한다. 가장 예술적 직관 력을 갖고 철학적인
식을 개척해준 사상가라고도 본다.
  그는 모든 존재는 유일자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보았다. 그 유일자는 신 또는 절대자
라고 부를 수 있는 지선 또는 완전선의 암시자다. 초이성적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존재를 받아들일 수는 있어도 충분히 인식할 수는 없다. 만물은 그 유일자로부터
빛을 발하듯이 나타났으며, 유출되었으며, 생산된 것이다. 태양은 그 자체가 빛이듯이
유일자는 그 스스로가 자신을 밝혀주며 존재로 변하는 것이다. 유일자는 초절해 있는
실재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유출된 만물을 통해 유추해 볼 수 있을 뿐이다.
  그 최초의 직접적인 유출은 이성 또는 정신이다. 모든 사상과 이데아들은 이   이성
및 정신과 더불어 머문다. 이성의 가장 큰 능력은 사고다. 누스는 사고의 주체가 된
다. 이 일차적인 유출에서 제2의 유출로 나타나는 것이 영혼이다. 영  혼은 인간적기
능의 일부이기 때문에 순수한 이성이나 정신보다 하위에 머문다.  로고스는 바로 이
단계에 머문다.
  제3의 유출이 되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서는 육체이며 자연에 속하는 물질과 질료가
된다. 따라서 우리의 영혼이 위로 이성과 정신으로 향햐게 되면 선과 빛 으로 상승하
게 되나, 반대로 영혼이 육체나 물질을 택하게 되면 하강하는 운명 에 빠진다. 악과
암흑에의 퇴락을 가져올 수밖에 없어진다.
  이렇게 상승하는 길은 직관에 의하는 것이나, 하강하는 것은 감정이나 욕망의 길로
떨어지는 것이다. 이런 사고는 중세기의 기독교적 인간관과도 잘 통하는   내용이다.
  플로티노스는 오랫동안 물질주의와 유물론의 흐름에 젖어 있던 고대철학을 다 시 한
번 플라톤주의 철학으로 복원시키는 책임을 다했던 것이다.
@ff
    23 로마 최후의 비운의 철학자-보에티누스(480--525)
  그때 세계에서는
  511년: 클로비스 왕 죽음.프랑크 왕국 분열
  527년: 신라,이차돈 순교.불교 공인

  로마를 여행하는 사람들은 로마를 '영원한 도시'라고 부른다. 2천 년 전의 유적들이
있는가 하면, 중세기의 역사적 유산들이 거의 그대로 남아 있음을 본다. 근대 초기부
터의 역사적 자료들은 아주 젊게 느껴질 정도다.
  임마누엘 광장은 최근의 건물들이지만 2천 년 전 건축들과 잘 어울리고 있다. 세계
에 어디에 가든지 20세기 이상에 걸친 역사의 모습을 한눈으로 볼 수 있는곳은 로마
이외엔 없다. 최근에 있었던 올림픽 경기장을 보고 새로 지은 아파   트들도 격식을
갖추고 있다.
  거리를 지나가다가 우체국의 표시를 보고 낡은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 그 내부 구조
와 채색된 대리석 장식은 바로 엊그제 완성된 건물인 듯한 느낌을 풍긴다. 카이로나
아테네에 가면 옛날 것은 있으나 근대.현대 것들이 없다. 파리나 런던 에 가면 근대
이후의 문화재들은 볼 수 있어도 고대.중세기 유산들이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미국
은 2백 년의 역사이니까 유럽에 비하면 신대륙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게 본다면 로마는 '영원한 도시'이다.

  그러나 지금 보아도 로마가 세계를 지배한 당시에는 정말 영원한 도시국가였 다. 로
마의 마지막이 오리라고는 누구도 생각지 못했다. 태양이 서쪽에서 떠오른다면 믿을
수 있을지 모르나, 로마의 종말이 오리하고는 누구도 생각지 못했 다.
  그러나 그 로마에도 마지막은 온 것이다. 그리고 로마의 종말과 더불어 고대역사의
종말도 다가왔고, 고대철학의 종장도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이상스럽게도 스토아.에피쿠로스.회의학파의 철학이 모두 로마의 종말과 더불 어 끝
났고, 플로티노스를 정점으로 하는 신플라톤주의 철학도 로마와 더불어   자취를 감추
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로마가 끝났기 때문에 고대역사가 끝나고 중세기가 시작되었는가, 아니면
중세기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고대가 끝났는가고 묻는다.
  이유는 양편에 다 있었을 것이다. 고대는 더 지속될 생명력을 상실했고, 신흥 종교
인 기독교는 새로운 중세기를 만들 만한 충분한 영적인 힘을 갖추고 있었   던 것이
다.
  오직 주목할 바가 있다면, 아테네는 문화를 창조한 국가였기 때문에 물리적으로는
종말이 왔으나 정신적 유산은 더 크게 지금까지 역사를 이끌고 있어도, 로마는 문명을
만든 국가였기 때문에 그 종말과 더불어 모든 것이 끝나고 만    셈이라는 사실이다.
  어떻게 보면 아테네는 철학과 예술의 나라였기 때문에 망할 수가 없었어도, 로마는
제도와 권력의 나라였기 때문에 망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 역사의 법칙이었던 것
같다.

  이렇게 망하는 로마를 상징하는 한 철학자가 있었다. 누구보다도 로마의 종말을 잘
보여주는 마지막 로마 인이었다고 사람들은 곧잘 말하고 있다.
  그가 보에티누스(Boethius,480--525)였다. 그는 유능하고 훌륭한 로마의 상징적인
인물의 하나였다. 그 당시를 이끌어가는 철학사상에 접했고, 학문을 위한 철학자이기
보다는 고상한 지혜를 갖춘 철인다운 사상가였다. 수학.음악.논리학 등에도 조예가 깉
었다.
  그는 고매한 정신과 철학사상을 갖고 정계에 투신했다. 장래성을 인정받는 지 도자
로 활약하다가 결국은 반대파 정당의 계략에 몰려 정치적 몰락의 길을 강  요당한다.
마침내는 사랑하는 두 아들이 죽임을 당하는 것을 겪어야 했고, 자  기 자신도 투옥되
는 비운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사형을 집  행당하는 운명으로 그친
다.
  이런 상황에 있으면서 한창 일할 수 있는 장년기의 나이로 모든 삶을 단념하 고, '
나의 철학적 신념이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가'를 스스로에게 묻는다. 그   과정에 씌
어진 책이 "철학의 위안"이다. 세계적으로 널리 읽혔고 우리말로도 번역되어 있다.
  그가 처형된 뒤 공개된 상당히 큰 책이다. 거기에서 그는, 강인한 정신력과 이성을
갖춘 철학도가 두려움 없이 죽음을 이겨낼수 있으며 삶의 의미가 신체적 인 종말을 넘
어 존재할 수 있는가를 묻는다.
  거기에는 신플라톤적인 이상주의 정신은 짙지 않으나, 스토아적인 이성과 세계 질서
에 순응하려는 정신은 깊이 스며들어 있다.
  물론 그 당시에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순교를 당하고 있던 때였다. 그러나 철학자인
보에티우스에게는 그런 종교적 신앙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네로 왕에 의해 죽음을
강요당한 세네카와 통하는 정신적 흐름을 엿볼 수 있다.
  왜 그런지 우리는 이것이 로마의 종말을 대신하는 철학의 종말인 것 같은 인상을 씻
을 수가 없어진다.
@ff
    24 신과 인간의 시대로; 중세철학 시작(5세기경)
  그때 세계에서는
  399년: 중국법현, 인도로 출발. "불국가"
  450년: 네메시우스"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역사는 1천 8백 년에 걸친 고대의 박을 내리고 앞으로 1천 5백 년이나 계속되 는 중
세기의 무대로 전개된다.
  물론 역사의 종언과 출발이 두 부모를 자르는 것같이 단절과 출발이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한쪽으로는 서서히 고대가 끝나면서 다른 한쪽으로는 중세기가   시작되다가,
마침내는 고대가 사라지고 둥세기가 완전히 역사의 무대를 차지하  된다. 보에티우스
가 죽을 때만 해도 로마외 지중해 연안 일대에는 기독교의 정신적 영향력이 강하게 피
어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좀더 역사적인 무대와 시기를 정확히 따져보면, AD100--200년을 중심삼는 로
마의 변화가 가장 큰 의미를 가진다고 보아 좋을 것 같다. 그 당시의 로마는 세계도시
(국가)였고, 로마의 변화는 그것이 곧 세계의 전환이었던 것이다.
  기독교 역사에 따르면 사도 바울과 베드로가 로마로 가서 전도를 시작했고, 박해를
받아 처형당한다. 스많은 크리스천들이 동시에 처형을 당한다. 그 순교의 절정을 이루
는 것이 AD 100년경의 일이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로마에서 추방당하고 지하묘지에서
예배를 보는 비운에 처했으나, 그들의 희생이 결국은 로마를 새로운 정신세계로 바꾸
어놓은 것이다.
  내가 중학교에 다닐 때 솅키에비치의 "쿠오바디스"를 읽은 일이 있다. 가장 재미있
고 흥미롭게 읽은 책 중의 하나였다. 그 내용이 영화화되어 우리 나라 관객들에게도
크게 감동적인 인상을 주었다. "벤허"반큼이나 큰 감동을 안겨준영화였다고 생각한다.
  그 작품을 앍는 사람은 대로마가 무너지면서 기독교 정신의 중세기가 어떻게 태어나
는지를 인상 깊게 받아들일 수가 있었을 것이다.
  거기에는 로마의 종말을 상징하는 네로 황제가 나온다. 권좌에서 밀려나 종말이 다
가왔음을 예감한 총리대신 페트로니우스가 친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자살한다. 손목
동맥에서 선혈이 다 흘러나와 죽음이 임박한 때까지 권력과 허무한 로마 정신의 유산
을 비판한다. 마치 죽음은 자연의 현상인 양 받아들인다. 삶과 죽음은 때에 순응하는
것으로, 거역하거나 항거하지 않는다.
  친구의 죽음을 지켜본 철학자 세네카는 죽음의 의미를 설명한다. 마치 자신도 그런
종말에 임한 것을 예견이나 한 듯이...
  총리대신 페트로니우스는 누구보다도스토아 인답게 철학자다운 조용한 죽음을 택한
다. 그는 조카로부터 크리스천이 될 것을 권고받자 나같이 지헤로운 사람이 어떻게 어
리석은 크리스천이 될 수 있느냐고 반문한다.
  그런가 하면 그 소설의 주인공으로 배드로와 바울이 등장한다. 고대와 로마의 전통
에서 본다면 완전히 이단이며 '미신'을 증언하고 다닌다. 로마의 권력과 철학에서 본
다면 기독교의 정신은 보잘것없이 미미하며 그 교리는 미신적인 것 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의 식민지 중에서도 가장 작은 지중해 동쪽에서 태어난 기독
교가 전 세계를 지배하던 로마를 정신적으로 지배하기에 이른다. 예수는 가난하고 이
름없는 소시민 목수였고 그의 제자들은 볼품없는 천민들이었다. 아무리 살핀다고 해도
복수 예수의 교훈이 세게국가인 로마를 정복, 지배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 뜻이 이루어진 것이다. 만일 역사에도 기적이 있다면, 이 사건은 기적 중
의 기적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의 교훈이나 기독교의 정신과 철학을 여기에서 소개할 시간과 지
면의 여유는 없다. 있었던 사실을 사실대로 받아들이면 그만일 뿐이다. 오직 확실한
것은, 새로운 종교적 신앙이 고대의 철학적 전통을 끝내고 새로운 중세기를 개척했다
는 사실이다.
  고대는 자연과 철학의 시대였으나 중세기는 신과 인간의 시대로 바뀐 것이며, 고대
는 로고스와 이성이 지배하는 역사였으나 중세기는 섭리와 신앙이 좌우하는 세가로 전
환된 것이다. 고대는 인간의 본성과 육체가 버림받지 않았으나 중세기는 자연, 물질,
육체가 비중이 약화되는 세계로 바뀐 것이다.
  지금까지는 세상의 나라들이 실권을 차지했으나, 중세기에는 교리가 세상 위에 군림
하는 시대로 화한 것이다. 고대는 그리스의 문화와 언어가 지배했으나, 중세기는 라틴
어와 기독교 문화가 꽃피는 역사로 바뀐 것이다.

  그런 변화를 거치며서 우리는 중세기를 맞게 되며 중세철학에의 문을 열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중세기는 기독교의 종교적 전통이 주류를 만들었기 때문에 철학자도
고대나 근대화는 다른점이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는 없다. 중세기는 철학보다도 종
교의 세기였기 때문이다.
 @ff
    25 철학 위에 올라선 종교; 교부철학과 스콜라 철학(2--8세기)
  그때 세계에서는
  394년: 테오도시우스, 로마통일, 기독교를 국교로 하여 이교 금지
  400년: 중국에 불교, 도교 유행: 로마, 아우구스티누스"고백록"

  중세기가 150년경에서 1500년경까지 계속된다고 한다면 그 철학적 내용도 큰 비중을
차지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중세기는 기독교의 종교적 기간이었기 때문에 철학적으로는 약간
빈곤한 시대였다고 보아 좋을 것이다.
  사람들은 중세기의 전반부는 교부시대 철학이라고 말한다.교부란 기독교의 성직자들
을 가리킨다. 그들이 중심이 되어 사상계 및 철학계를 좌우해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기간에는 클라톤 철학이 널리 연구되었다. 그리고 그 뚜렷한 대표자는 아
우구스티누스였다. 그래서 거의 공식적으로 '기독교 + 플라톤=아우구스티누스'의 과정
이 교부철학을 대신한다고 보아 좋을 정도의 시기였다.
  이에 비하면 중세기 후반부는 기독교, 그것도 카톨릭을 축으로 하는 철학이 그 중심
을 만든다. 그것을 스콜라 철학이라고 부른다. 학교 교육과 연결되는 학문이라는 뜻이
다. 물론 그 대표자들은 여전히 교계의 지도자들이다. 그리고 이 시기에는 플라톤 대
신에 아리스토텔레스가 독점적으로 연구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시기를 '기독교 +
아리스토텔레스=토마스 아퀴나스'의 시대라고 불러 좋을 것 같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그 대표적인 철학자로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가지 추가할 것이 있다면, 아우구스티누스는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측 모
두가 중요하게 취급하고 있으나, 토마스 아퀴나스는 카톨릭의 대표적인 철학자로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토마스 이후에 종교개혁이 일어났기 때문에 프로테스탄트는 토마스
를 멀리하는 길을 택했다. 다시 말하면 아우구스티누슨는 종교개혁과 무관한 중세기
초창기의 철학자였고, 토마스는 카톨릭의 중심인물로 인정받고 있는 까닭이다.
  최근에 세계적으로 알려지고 있는 네오 토미즘은 우리 시대에 다시 한번 토마스의
철학을 부활시키자는 카톨릭계의 철학운동이었다. 그만큼 토마스는 중세기 후반부와
카톨릭을 대표하는 철학의 주인공이었다.
  이런 성격을 갖는 것이 중세기였기 때문에, 간 중세기를 통한 철학적 과제는 고대철
학 및 여타 종교와 기독교와의 관계, 기독교 철학의 확립, 스콜라의 전성기, 중세기에
서 근대에의 변천 등이 중심과제가 된다.
  그리고 자연히 그 내적 과제로서는 신앙과 이성, 종교와 철학, 교리화 논리의 문제
가 중심으로 떠오르지 않을 수가 없어진다.
  지역적으로 보았을 때 그리스의 문화는 아테네가 중심이었다. 그리고 로마의 정신은
물론 로마가 중심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중세기로 접어들면서는 알렉산드리아가 로마 못지않은 비중을 차지하게된다.
초기 기독교의 지도자들이 거기 머물러 활약했고, 최초의 신학교가 알렉산드리아에 설
립되어 지도자들을 양성했기 때문이다. 아프리카 지역이 적지 않은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는 기독교가 정착되는 모든 곳이 사상과 문화의 거점들이 되
었고, 마침내는 문화적 수준을 갖춘 여러지역에 대학들이 탄생되면서는 종교, 철학,
사상의 중심지가 학자들에 따라 달라지는 현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은 물론, 기독교의 교세가 강한 전 지역으로 철학의 무대로
바뀌는 현상이 되었고, 중세기 말에는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문화의 분포도와 큰 차
이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전 세계가 하나의 문화권으로 정착된 시기를 헬레니즘 시대, 동
일한 제도로 굳어진 시대를 로마제국 시대, 같은 신앙으로 세계가 통일된 때를 중세기
라고 부르고 있다.
  그만큼 중세기는 나름대로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중세기 초창기의 사상과 정신계는 완전히 중심을 잃은 혼란의 시대였다.
  고대철학의 여파는 지성인들의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다. 스토아 철학은 약화되었으
나 신플라톤 사상은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비교적 표면에 나타나지 않고
있던 그리스의 족교 사상들과 중동지방에서 전래된 의식을 갖춘 종교들이 유입되어 있
었다. 여기에 신흥종교인 기독교가 철학보다도 신앙적 위력을 갖고 새로운 세계 건설
을 선포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어떤 신념과 신앙을 갖고 현실에 대처해야 할지 알바가 없었다. 언제나 역
사적인 과도기가 찾아오면 있을 수 있는 일이나, 그 정도는 대단히 심각한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에 하나의 공통된 과제가 서서히 부각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종교와 철
학의 융합이었고, 이는 이성을 갖고 종교를 설명하려는 풍토와 일치되는 것이었다. 사
람들은 후일에 그것을 그노시스(Gnosis)주의라고 부르게 되었다.
@ff
    26 구원은 '그노시스'에 도달하는 것: 그로시스의 사상(1--2세기)
  그때 세계에서는
  144년: 인도, 간다라 미술 전성
  174년: 로마, 아우렐리우스 황제"자성록"

  지금도 역사가들은 그노시스 정신, 또는 신지학의 시대하는 말을 사용한다. 그러나
그 운동은 그 당시로 끝났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그후에는 같은 성격의 사상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그노시스란 인식이란 뜻과 통한다. 인식의 주체는 이성이어야 하며 이성은 합리적
사유를 근거로 한다. 그런데 이 당시의 인식은 종교적 인식이며 신앙을 수용해야 하는
요구를 안고 있었기 때문에 이성의 합리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자연히 정서적인 면은
물론, 신비주의적 성격을 포함하지 않을 수 없어진다. 신비주의는 사이비 신앙의 내용
도 배척하기 어려워진다.
  그러므로 이 당시의 그노시스는 후일의 기독교적인 면에서 본다면 미신적인 사상이
되고, 철학적 위치에서 본다면 황당무계한 속화된 세계관으로 퇴락한 것이었다. 인격
및 도덕성이 결핍된 잡동사니식의 유혹적인 삶을 이끌어내기도했다.
  사실 그 지도자들 중에는 사회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종교행사와 미신을 퍼뜨리는
사람도 없지 않았다.
  플로티노스의 철학을 여러 종교의 우주론과 합치시키려는 운동이 그 대표적인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130년경 알렉산드리아에서 가르친 바질에이데스(Basileides)는 우주를 365단계로 설
명하기 위해 공상적인 체계 속에 종교관을 삽입시키기도 했다. 누스(nous)는 구원의
힘이며, 그리스도는 그 대표자라는 설명도 가한다.
  그의 뒤를 따르다가 로마로 교육장소를 옮긴 발렌티누스(Valentinus)는 만물의 근원
은 영원 미완성의 통일, 이름지을 수 없는 심연, 완성된 아이온(aion: 영적 존재자)이
다. 그것이 아버지 또는 조부로서 사랑에 대한 욕망을 갖고 거기에서 태어난 것이 누
스(정신),즉 진리가 된다고 보았다. 누스에서 로고스(이성)가 산출되고 생명이 주어진
다. 그 생명을 갖춘 이가 이상적인 인간이며, 그것이 교회로 확장된다고 설명했다.
  인간에게도 물적인 요소, 심적인 요소, 영적인 요소, 지적(Gnosis)인 요소가 있어,
최고의 단계인 그노시스에 도달하는 것이 인식의 목표인 동시에 구원이 된다고 보았
다. 구원은 참된인식이며 존재 근원으로의 복귀인 것이다. 심지어는 물질은 지옥에 해
당하고, 마음은 연옥에 해당하나, 지는 천국의 단계라고 비유하기도 한다. 이런 식으
로 나가다가 마침내는 숫자를 가지고 세계를 설명하려는 비이성적인 설명을 제창하기
도 했다.
  결국 이러한 사상은 받아들일 수 없는 미신적 종교성을 띠고 나타났다가 이윽고 사
회에서 버림을 받게 되는가 하면, 전통적인 기독교 신앙으로 흡수되어 그 종적을 감추
기에 이른다. 대부분 공상이나 신화적인 내용을 따르던 그노시스파 사람들이 마법사,
예언자, 무술가, 거짓 성인, 심지어는 사기꾼으로 전락하게 되면서 그노시스는 명예롭
지 못한 종말을 고하게 된다. 기독교가 그들을 배척 하게 된 데는 이유가 있다. 이성
적인 건전한 사유를 앞세우는 철학적 영역에서도 버림을 받을 수밖에 없어졌다.
  그러면 누가 이 잡다했고 일반화되었던 그노시스 사상을 정리하고 새로운 정신계를
개척하기에 이르렀는가?
  그것이 기독교의 호교적 책임을 담당한 교부(신앙적 father)들이었다. 그 교부들의
뜻이 성취되었다는 것은 기독교 중심의 중세기가 정착되는 당계에 접어들었음을 뜻한
다.
  이러한 교부들의 노력은 처음에는 신앙적 이단이나 기독교와 반대되는 사상을 배척
하며 기독교의 정당성을 수립하는 일로 시작된다. 호교란 기독교의 교리와 정신을 지
킨다는 뜻이다.
  그 단계가 지나면 기독교의 교리와 주장이 정착되는 단계로 확대되어간다. 말하자면
기독교의 진리성이 교회 내외에 인정을 받게 된다는 뜻이다. 기독교 사상과 정신의 우
위성이 인정되는 과정이다.
  이렇게 되어 기독교의 교세가 강해지고 모두가 믿고 따를 수 있는 대표적인 신앙이
되면서는 점차로 기독교가 사회를 정신적으로 지배하게 되고, 나아가서는 기독교가 유
일한 신앙의 대명사로 진전한다. 명실 공히 중세기가 정착되며 마침내는 기독교가 국
교로 정해지는 결과에까지 이른다. 불과 1세기 반 동안에  기독교는 배척과 순교의 가
시밭 길을 걷다가 사회 국가적 공인을 받게 되고, 결국에는 국교의 위치를 차지한 것
이다.
  그리고 이런 과정에서 힘이 된 것은 기독교의 사상이나 철학보다도 생명력 있 는 신
앙과, 그리스도 인들의 윤리 도덕적인 활력이 새로운 힘이 되었기 때문이 다. 신앙이
사상을 좌우했으며 실천력이 철학을 뒷받침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교회 안에서
이성과 신앙의 갈등이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었다.
@ff
    27 불합리하므로 나는 믿는다: 유스티누스, 테르툴리나누스, 락탄타우스(150--325
년)
  교회의 수호자 콘스탄티누스 대제, 그는 기독교를 국교화한 후, 이교의 전통이 뿌리
깊은 로마를 떠나 330년 보스푸루스 해안에 새 서울 콘스탄티노플을 세웠다.

  그때세계에서는
  214년: 페르시아, 마니교 교조 마니 탄생
  227년경: 로마 페르시아와 전쟁

  중세기 처음에는 기독교는 박해를 받았고 이단으로 몰리고 있었다. 속죄, 구원, 부
활, 영생을 가르치는 기독교의 정신이 철학적 이해나 협력을 얻을 수 없음은 물론이었
다. 바울 사도가 예수의 부활을 증거했을 때 로마의 관리는 바울에게 "당신은 그 많은
학문과 지식때문에 미쳤다" 고 단정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기독교는 영과 자유와 도덕적인 신앙성을 강조하여 종교적 승리를 거두었고,
심지어는 기독교만이 이성적인 철학의 유일한 진리체계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거기에는 몇 사람의 기독교 사상가들의 학문적 역할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로마에서 166년경에 순교당한 유스티누스(Justnus) 같은 철학자는 기독교가 모든 시
대가 안고 있는 철학적 문제에 해결을 줄 수 있으며, 기독교의 계시적 요소는 인류를
악마, 다신교, 부도덕으로부터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라고 가르쳤다. 신의
로고스는 플라톤, 아라스토텔레스, 아브라함, 엘리아 등에 의해 부분적으로 나타날 수
있었으나, 그리스도에서 비로소 완성되었다는 이론을 전개시켰다. 이 세계는 신의 피
조물이며, 인간의 영혼은 육체와 달리, 이성, 불사, 자유의지의 본성을 갖는다고 주장
했다.
  우리는 그를 통해서 고대철학과 인류의 과제를 철학문제로 수용하면서 그 해결의 가
능성은 기독교에만 있다는 견해를 접하게 된다.
  카르타고의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150--222) 는 그 단계를 넘어 기독교 사상
의 탁월성을 주장했을 뿐 아나라, 기독교 신앙은 이성을 포함하고도 초월하는 신앙적
계시에 의하는 것이기 때문에, 때로는 초이성적이며 반이성적인 인식을 호소하기도 했
다. "불합리하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 는 그의 명제는 너무나 유명하다. 아테네와 예
루살렘은 이질적인 세계이며, 아카데미와 교회는 다른 차원에 속한다고 보아 신앙의
우월성을 주장했다. 심지어는 어떤 평신도도 플라톤보다 우위에 있다는 신앙의 위대성
을 강조했다. 여기서는 모든 철학을 배척하고 신앙으로 귀의해야 한다는 입장을 강요
한 것이다. 신앙은 철학을 포함하며, 계시는 이성을 포괄한다는 기독교적 견해를 공인
받고자 했던 것이다.
  마침내 락탄티우스(Lactantius, 250--325)에 이르러서는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인
정을 받는다. 그는 아프리카 인으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가정교사가 되었을 정도였
다. 국중에서 기독교의 승리가 확증된 셈이었다. 그는 불사는 최고의 선이며 유일한
희망이 된다고 믿고 있었다. 물론 그는 스토아 철학 등에 정통한 사상가였다. 그러면
서 기독교의 신앙을 절대적인 구원의 진리로 이끌어올린 결과가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기독교의 철학이 교리를 배경으로 활립되었고, 일반 철학은 주 에
서 객의 위치로 밀려났는가 하면, 기독교의 교리가 철학적 중심과제로 수용되었다. 비
로소 중세적인 문제와 체계가 정착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그러나 중세기를 이해함에 있어 한두 가지 일반적 과제를 제시 해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 하나는 인간관이다. 고대에는 인간이 자연의 한 부분과 같이 생각되었고 영과 육
의 구별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중세기에 와서는 인간의 영은 신에게 속하는
것이며 육체는 자연물질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육에의 길은 타락의 길이며 죄의 가
능성을 포함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 결과로 금욕주의가 제창되었고 육체적 향락을 죄악시하기도 했다. 이는 후에 수
도원과 수녀원이 생기는 원인이 되기도 했고, 신부들의 독신주의 사상도 수용되는 결
과가 되었다. 그리고 이 인간관과 세계질서는 오랫동안 초창기 기독교 철학의 중요한
과제로 등단하게 된다.
  또 하나의 과제는 기독교의 구원관이 신의 교육적 섭리와 함께 취급되었다는 점이
다. 교부 이레나이오스(140--202) 가 처음 발설자로 되어있으나, 많은 사람들이 신의
인류 전체에 대한 구원은 교회를 통한 신앙적 교훈과 연관성이 있다고 보았다. 신은
구원을 위해 인간을 교육 계획대로 완성시켜가는 것이며, 세계사는 그 과정이라고 생
각한 것이다. 교부들은 그 책임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에 철학자인 동시에 신앙적 교사
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
  스콜라 철학 시대로 접어들면서는 그 이론적 주장이 약화되고 있으나, 초창기 기독
교는 그 주장을 교회적인 과제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을 겨쳤기 때문에 학문세계에는 또 하나의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
다.
@ff
    28 기독교와 그리스 철학의 통일: 오리게네스(185--254년?)
  로마의 멸망은 노예와 자영농의 급속한 감소가 큰 원인이 되었다. 노예노동은 기술
개발을 등한시 했고, 경제가 무너지면서 사회가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그때 세계에서는
  269년: 플로티누스 사망 "에네아데스"
  285년: 박사 왕인이 "논어 " "천자문" 을 일본에 전함

  한때는 정치의 중심지가 로마였다면 기독교 철학의 중심지는 알렉산드리아로 되었던
시기가 있었다. 물론 기독교의 발생지는 팔레스타인이다. 그리고 신앙적 활동은 로마
가 큰 비중을 차지했다. 순교자들이 많았고 교회의 중심지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학과 학문의 중심지는 알렉산드리아가 되었고, 거기에 180년 경에 역사상
최초의 신학교가 설립되었다. 정확히 따지자면 교리학교인 셈이다. 신학자와 학자를
배출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처음 대표자는 클레멘스(Clemens, 150--211) 이었다. 그는 이교도로 태어나 그리
스 철학의 훈련을 쌓은 뒤 기독교도가 된 사람이었다. 기독교 세계관의 철학적 이해와
인식을 위해서는 플라톤이나 스토아의 철학적 방법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철학과 신학
의 융합적인 체계화가 학문의 목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신의 뜻은 유대인에게는 율법으로, 그리스 인에게는 철학의로 나타났으나, 이 모든
것이 완성된 것이 그리스도의 진리라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 기독교가 신학의 3대목표
는 인류의 창조, 교육, 완성이라고 제창했다.
  이 학교 및 학파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2대 학장으로 취임한 오리게네스(Origene
s, 185--254?) 였다.
  그는 부친이 순교당한, 나면서부터의 그리스 인이었다. 스승의 뒤를 이어 18세기 부
터 가르치기 시작한 것을 보면 대단히 조숙한 인물이었다. 강철 같은 성격의 소유자로
알려지고 있다. 근면한 인품은 물론, 토론에서는 양보하거나 지는 법이 없었다. 스스
로 거세해서 금욕주의자임을 본보여주었다. 그는 수없이 많은 저작을 남겼다. 1천 8백
권 정도는 되리라는 평들이다.
  그는 기독교는 지성에게는 신플라톤주의의 방법이 필요했고 대중과 어린이들을 위해
서는 그노시스의 길이 가능했으나, 전체적으로는 기독교와 철학의 통일이 중요하며 성
서의 신앙을 사변적으로 파악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성경은 영감에 의하여 씌여진 것이다. 그러나 "구약" 은 "신약" 을 위해 있으며, "
신약" 은 재림의 완전한 교훈으로 채워져 있다. 처음에는 문자그대로 받아들이나 다음
에는 그 도덕적인 면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는 정신적 해석까지 올라가야 한
다. 이적은 차원 높은 자연관이며, 예수의 죽음은 속죄성에서가 아니라 모범사로 뜻을
정리해야 한다. 이성적 해석이 맞지 않는 것은 거절할 수 밖에 없다는 견해였다.
  이러한 이성 우위성 때문에 교회로부터 배척을 받고 평생 동안 교리적 이단자라는
비판을 면치 못했다. 또 그것이 그 시대의 상황이기고 했다.
  오리게네스에 따르면, 세계는 신의 피조물이며 신은 만물의 영원한 근원이 된다. 영
원, 불변, 전능, 전지, 지인, 지의, 라고 불러야 할 존재다. 이 신의 충일성에서 로고
스가 산출되고, 그 로고스가 빛나는 본체와 같아 가깝고 먼 광명과 낮은 빛의 구별을
만든다. 로고스는 피조된 모든 것의 원형이며, 최고의 피조물은 성령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피조물들은 독립성이 없고 피동적 질서이기 때문에 완전자인 신에 대한 동경
을 갖는다. 그것이 신앙의 원천인 것이며, 구원에의 갈망인 것이다.
  중세기의 모든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오리게네스도 "" 인간은 신의 피조물이다. 그
지음을 받은 영들이 주어진 자유를 오용하여 태만, 과오, 타락의 세계로 떨어졌다. 인
간도 자유로운 선택 때문에 참실재에서 떠나고 비실재인 질량에 속박되어버렸다 "" 고
말한다.
  인간과 영들은 스스로의 선택이나 능력으로는 구원의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구원을
필수조건으로 삼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러한 문제의 해결은 철학이나 이성에 의해 이루
어지는 것은 못된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성령에 의한 전 피조물에 대한 신의 교육계획에 의해 이루
어진다. 그 구원에의 교육은 완성인 동시에 신에의 복귀인 것이다. 이때 오리게네스는
인간뿐 아니라 인간을 포함한 세계 전체가 구원에 참여한다고 본다. 그것은 만물이 신
으로 복귀하는 과정인 것이다. 그리고  그 완성자는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온 그리스도
에 의해 성취되는 것이다.
  따라서 신앙인들은 지상의 삶은 훈련과 징계의 연속이므로 세속적인 모든 욕망, 결
혼, 병역, 관직 등을 버리고 초연한 신과의 일치와 안정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이러한 오리게네스의 주장은 교회의 비판과 반대에 부딪히게 되나, 그래도 이성에
따르는 신앙의 필요성은 계속 오리게네스의 후계자들은 이어나가게 된다. 신앙의 사변
적 요소는 인간의 필수적인 요청이기 때문이다.
@ff
    29 중세기 최대의 사상가: 아우구스티누스(354--430년)
  아우구스티누스의 소년시절 독실한 기독교인인 어머니 모니카에게 큰 영향을 받아
마침내 회심, 중세 최대의 사상가가 되었다.

  그때 세계에서는
  350년: 로마 교회음악의 학교 스콜라 칸트룸 창설
  376년: 게르만족 대이동 시작 훈족 동고트족

  사람들은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430) 를 가리켜 모든 고대철학을 받아들
여 해소시키고 새로운 중세철학을 탄생시켜준 역사적 인물이라고 평가한다. 사실 세계
사에 있어 그만큼 위대한 전환점을 가능케 해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 이후에는 고
대철학이 자취를 감추게 되었고, 그로부터는 명실 공히 중세철학이 개막되었던 것이
다.
  그렇게 된 데는 시대적인 요청도 없지 않았다. 기독교 안에는 순수한 전통적 신앙을
표방하는 교회 중심 사람들이 있었고, 오리게네스와 같이 이성적인 비판을 가해야 한
다고 보는 이성주의 신학자들이 양립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 정통성을 위한 니케아 종교회의가 있었고, 그 회를 주도한 아타나시우스
의 승리가 정착되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아타나시우스의 신앙에 오리게네스적 학문
밑에 안식을 취할 수 있는가 함이 요청되고 있던 때였다. 그 해결을 준 사람이 곧 아
우구스티누스이기도 했던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부친은 이교도였다. 그러나 그의 모친은 드물게 보는 독실한 신자
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카르타고와 로마에서 교육을 받고 밀라노에서 수사학 교수로
활약했던 사람이다.
  다행스럽게도 그의 "고백록" 이 있어 그의 일생을 잘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시
대의 모습과 그의 학문적 성격은 물론, "고백록" 후편에 있는 신학 및 철 학적 내용들
을 충분히 찾아볼 수 있다.
  그의 고백록에 따르면 그는 동방에서 유임되어온 마니교의 교리에 빠져들어 10년간
종교적 방황을 했다고 말한다. 마니교는 지금의 조로아스터, 즉 배화교의 내용을 갖는
것이었고, 거기에 인간의 운명을 천문학적으로 해명하려는 뜻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
같다.
  그뒤 회의론에 빠져 인식론적 고민을 하다가 신플라톤주의 철학에 접하면서 비로소
긍정적이며 건설적인 철학에 접하게 된다. 철학적 안식을 얻었다고 보아 좋을 것 같
다.
  387년 33세 때 그의 내면적 기적이라고 볼 수 있는 큰 변화를 받으면서 기독교 신앙
에 들어온다. 4년 뒤에는 사제가 되고 다시 4년 후에는 히포의 주교가 된다. 430년 8
월 죽을 때까지 수많은 저작을 남겼다.
  아마 세계적인 셈이며, 한때는 "참회록" 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되기도 했다. 여러 편
의 번역이 있으나, 최근에는 원전 라틴어 번역도 있어 독자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
"자유의지에 관하여" "삼위일체에 관하여" 등, 철학과 신학적인 저서가 있으나, 서양
에서 최초의 역사철학이라고 볼 수 있는 방대한 저서 "신의 도시에 관하여" 는 그의
역사사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 별로 중요치 않아 보이는 한두 가지 이야기를 추가해서 좋을지 모르겠다. 그
것은 "고백록" 을 읽는 사람들은 아우구스티누스가 대단히 방탕한 생활을 하던 인물인
데, 어머니의 감화도 있고 해서 하루 이틀 동안에 크게 회개하고 성자의 반열에 올라
간 것 같은 애기를 하는 이들이 많이 있고, 또 그런 얘기를 자주 듣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과장된 일방적 설명이다. 그가 결혼 이전에 정식으로 혼인하지 않은
여인이 있어 아들을 얻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풍습은 그 당시의 젊은이들에게
는 흔한 일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와 친구들도 그에게, 너는 어떻게 한 여자로 만족
할 수 있느냐고 제안했을 정도였고, 그의 부모도 아들에게 남편이 있는 여인과는 가까
이하지 말라고 충고해주었을 정도였다. 그 충고는 아우구스티누스가 건강하게 자라는
청소년기의 모습을 보았을 때의 일이었다.
  이에 비하면 아우구스티누스는 학문과 정신적 진리탐구의 내적 갈등과 투쟁이 더 심
각했던 인물이다. 그리고 자신이 싱앙생활에 들어오게 되면서는 이런 정욕적인 사건들
에 대해 크게 죄의식을 느껴 뉘우치는 뜻에서 강조해 기록한 것들이다. 물론 그는 그
후부터 모든 세속적인 욕망을 단절하고 오로지 학문과 성직에만 열중했던 것이다.
  단 한가지 특기할 점은, 신앙에 들어온 후에도 많은 갈등을 겪다가 친구 알리피우스
가 읽다가 접어놓은 로마서 13장 뒷부분을 읽고는, 모든 탐욕과 인간적 욕망을 완전히
단절하고 은총의 생활로 들어가게 되었다는 돌발적인 계기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고백록" 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창조적 교훈이 담긴 기독교의 세계관의
해설이다. "고백록" 속의 시간에 관한 부분은 그의 비상한 관찰력과 투철한 논리적 추
구를 보여주는 명작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나 자신도 시간에 관한 글을 쓸 때마다 그 점을 항상 경이로운 뜻으로 대하곤 한다.
@ff
    30 회의, 인식, 의지의 철학: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400년경"
  아우구스티누스의 초상, 성서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모습
  프레스코화, 로마 라테라노 대성당 소장
  600년경 "신의 섭리에 따르는 것이 진정한 자유" 라고 그는 말한다

  그때 세계에서는
  500년: 그리스, 로마, 모자이크 전성기
  525년: 보에투우스, 옥중에서 "철학의 위안" 저술

  키에르케고르를 읽는 사람들은 "주체적인 것이 진리다" 는 명제에 수없이 맞닥뜨리
게 된다. 만일 그것이 진실이라면 아우구스티누스는 대표적인 주체성의 진리를 제창한
사람으로 보아야 하겠다. 그리고 그것은 종교적 진리의 가장 소중한 위치라고 보아 좋
을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소크라테스나 데카르트와 더불어 회의로부터 인식을 출발시킨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와 같은 개념의 돌출을 위한 것도 아니며, 방법론적 의의를 전제로
한 회의주의자도 아니었다. 그는 아는 것이 진리라는 지성 위주의 사고를 전개시킨 사
람이 아니라, 믿으며 따를 수 있는 진리란 무엇인가를 치열하게 물었던 사람이다.
  수학이나 기하학적 진리라면 그것은 이론적 탐구에서 얻어질 수 있다. "선이 무엇인
가" 고 물어서 어떤 대답을 얻었다면, 그 실천의 진리를 얻을 수 있는가 진리는 우리
의 삶과 인식과 희망을 걸 수 있는 확신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회의는 무엇을 필요로 하는가 깊은 경험의 비판이어야 한다. 그 결과로 얻어
지는 진리의 표준은 자증적인 원리에 도달해야 한다는 것이 그 주장이다.
  그는 철학적 인식론을 체계적으로 설명한 바는 없다. 우리가 여러 곳에서 그 중요한
뜻들을 포착 정리해 보는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은 내용들을 보여주고 있다.
  의심하라 의심은 생존과 자기 표상의 내적인 긍정이다. 깊은 의심은 진리로 향하는
의지다. 의심은 감관이나 지각에 주어지는 것보다 이성과 사유의 본질인 것이다. 그
의심이 내면적인 것이 될 때는 체험으로 향하게 된다. "밖으로 나가지 말라. 너 자신
에게로 돌아가라. 인간의 내부야말로 진리가 머무는 집이다" 고 그는 말한다. 자연은
물음의 대상이 될 수는 있으나 진정한 의심의 내용이 되지는 못한다.
  이성은 자신의 내부에서 비물체적인 진리를 직관할 수가 있다. 그 결과로 얻어지는
것이 내적 체험의 자증성이다. 이때 의심은 사라지며 이성은 공통된 내용을 가져다준
다.
  그러면 이 자증적인 것은 어디서 오는가 그 자체가 확실하며 영원한 진리는 신에게
속하기 때문에 신에게서 온다. 논리, 윤리, 미학, 수학적인 부분적 진리들은 우리의
정신을 비추는 신의 빛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다.
  인간은 표상, 판단, 의지의 세가지 인식요소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존재, 앎, 의욕의 기능을 통해 기억, 지성, 희망적 욕망을 갖는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지적 진리는 통일된 깊은 체험의 피상적인 일부에 지나지
못한다. 그가 "오류를  범하고 있다 해도 나는 존재한다" 는 말을 하는 것은 의심과
사고의 주체성을 반증해 주고 있다는 뜻이다.
  물론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진리로 가는 확증의 길은 신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다. 신의 뜻은 인간에 있어 주체적인 자명성을 전제로 삼는다는 신학적 이론을 거부하
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인식의 과제는 종교적 진리를 입증하는 주체적인 본질을 표방하고 있음
을 두말할 필요가 없다. 종교적 신앙과 진리는 전 인격적 갈망과 확증에서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본성이 지성이나 이성이 아니고 의지라고 본 처음 대표적
철학자였다. 긴 세월이 지난 다음에 쇼펜하우어나 니체가 의지론을 주장했으나, 이렇
게 옛날에 그런 사상을 가졌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그것은 쇼펜하우어와 마
찬가지로 강한 자기자신의 내면적 갈등을 느끼면서 살았기 때문이 아니겠느냐는 의견
을 갖는 사람들이 있다.
  의리가 인간성의 핵심을 만들고 있으며 의지작용은 영혼의 지향성이기 때문에 거기
에서 외적인 감관활동과 내적인 인식활동이 양분되어 나타난다고 보았다. 지는 의리의
부차적 작용이며, 영혼의 욕구에서 얻어진 믿음은 인식보다 우위에 속한다고 보았다.
믿음은 지식보다도 의지의 뜻이다. 그래서 중세기적인 "믿으라 그러면 인식하리라" "
믿기 위하여 인식하라" 는 명제가 등단하게 된다.
  그러나 인간의 의지가 긍적되면 자유의지가 인정된다. 자유의 절대성이 긍정되면서
예정이 부정되어 그 당시의 기독교의 중심교리가 회의에 빠진다. 바울의 예정론은 적
대적이었기 때문이다.
  비로소 아우구스티누스는 절대자유는 아담에게만 있었고, 그 후에는 선에의 의지보
다는 악에의 의지가 더 강해져 원죄의 가능성이 더 커졌다고 보았다.
  이러한 근원적인 악과 죄에서 구출받는 길은 신의 은총이 있을 뿐이라고 본다. 신은
높은 예정과 은총의 섭리에서 인간을 구원하며, 그 뜻에 따르는 것이 진정한 자유하고
설명하고 있다. 도덕적인 자유에는 관계가 있으나 구원의 선택은 영원한 자유라는 뜻
이다.
@ff
    31 신은 우리영혼에 내재하는 진리의 근원: 아우구스티누스의 윤리, 역사관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 ,  그의 종교관, 역사관을 보여주는 "신국론"은 기독교
역사관과 역사철학에 큰영향을 미쳤다. 그림은 "신국론" 제19권 "족장의 평화" 를 묘
사한 삽화

  그때 세계에서는
  414년: 고구려 광개토왕비 세움
  429년: 반달족, 북아메리카에 반달왕국 세움

  대개의 경우 고대 철학자들은 두 가지 과제를 취급하고 있다. 인식과 윤리의 문제였
다. 그러나 중세기에 이르게 되면 신앙의 위치가 강조되기 때문에 철학의 핵심이 달라
지게 된다. 인식보다는 진리(자체) 가 무엇인가를 물었고, 윤리보다는 신앙적 구원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이 회의주의에 머물렀기 때문에 인식론을 소중히 취급했으나,
윤리는 역시 신앙적인 것의 전제적 과제가 된다.
  물론 신플라톤 철학에 머물고 있을 때는 덕을 이성과의 합치에서 설명하며 처세적인
지혜로 인정하고 있으나, 기독교적 입장에서 본다면 윤리는 종교적인 것의 예비적 성
격을 넘어서지 못한다. 윤리의 궁극적인 의미는 현실세계를 어떻게 신의 뜻에 부합시
켜 구원에의 과정으로 이어가는가 함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도덕의 실천이 방편과 과
정이 되어 신앙과 구원의 길이 열려야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신의 뜻을 배제하거나
거역한 덕은 이방인의 덕이며 광채가 있는 악덕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많은 그의 후계자들이 플라톤의 4덕과 더불어 바울의 믿음, 소망, 사랑의 3
덕을 추가하며, 세상적인 덕과 신앙적인 덕을 구별, 합병시켜 7덕으로 삼은 것도 아우
구스티누스 이후의 습관이라고 보아 좋겠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의 정신을 가장 크게 살핀다면, 사랑에 의한 완성이 그의 모
든 철학의 근본이 된다고 보아 좋을 것 같다. 그 자신의 어록 몇 개를 소개키로 하자.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을 사랑할 수는 없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것을 사랑
할 때는 그 사랑의 힘에 의하여 그것을 일층 더 완전히 알게 된다"
  "인식한 것은 사랑 속에서 영존한다"
  "모든 것을 포함하는 하나의 작용이 있다. 그것은 사랑에 의여 움직이는 믿음이다"
  "사랑이란 의지 이외에 무엇이겠는가"
  "참되고 선한 사랑에서 선이 나온다"
  "자유의 율법은 사랑의 율법 이다"
  "사랑 그 자체가 사랑의 대상이다"
  "사랑의 출발은 의의 출발이고, 사랑의 육성은 의의 육성이고, 사랑의 위대함은 의
의 위대함이며, 사랑의 완성은 의의 완성이다"
  "시간적인 것, 영원한 것, 사랑"
  "선은 사랑에 의하여 증대된다"
  "평화를 사랑하는 것은 소유하는 것이다. 빵은 나누어주면 줄어도 평화는 나누어주
면 더 풍부해진다"
  "신애 없는 인간애 없고, 인간에 없는 신애 없다"
  "덕이란 사랑할 것을 사랑하는 사랑이다"
  "사랑은 구원의 원동력이다" 등의 말은 아우그스티누스의 모든 사상을 잘 표현해 주
고 있다.
  우리가 다 아는 대로 기독교는 역사종교다. "구약" 과 "신약" 이 역사적 기록들이
며, 바울은 "로마서" 에서 역사이론을 전개시키고 있다. 제2의 바울이라고 아우구스티
누스도 그 전통에 따라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내용은 역사적 기록이지만 거기에 깔려 있는 것은 기독교 교리적 역사관이다. 사람
들은 그것을 이원적 신정사관 이라고 부른다.
  우리들의 역사는 하늘나라로 향하는 교회 중심의 역사와, 지상의 나라에 머물 때는
임금들의 역사로 나누어진다. 하늘나라의 역사는 아벨로부터 신의 의도를 대행하는 인
물들로 이어지다가 그리스도와 그 교회가 중심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에 비하면 세상의 역사는 반역한 천사들, 카인, 아시아의 폭군들, 로마제국을 통
해 전래된 이기적인 목적의 악의 연속이다. 이 둘의 싸움은 우리를 고통과 갈등으로
몰아가고 있으나, 마침내는 신의 뜻과 구원의 의지가 성취되어 세상나라는 징계와 심
판을 받고 신의 은총의 왕국이 성립된다.
  그것이 구체성을 띠고 나타나는 때는 그리스도의 재림인 것이다. 그래서 악이 없고
세상의 권세가 모두 신에게 복종하는 영원한 나라가 신의 뜻에 따라 건설된다는 역사
관이다. 물론 이에 대한 해석은 구구하다. 그러나 기독교회의 정통성을 따라 그는 방
대한 역사이론을 전개시키고 있다.
@ff
    32 아리스토텔레스의 재등장: 스콜라 철학의 등장(9세기)
  프란체그코 수도회를 연성프란체스코, 13세기 이탈리아의 거장 치마부의 프레그코
화, 두 손에 그리스도가 못박혔던 자국이 보이는데, 그가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 환영
을 본 다음 생긴 자국이라 한다.

  그때 세계에서는
  802년: 아루키누스 "신앙 삼위 일체론" 완성
  850--1200년: 아라비아 과학의 발전기

  430년, 아우구스티누스는 히포의 주교로 재임중 반달족이 침입하는 함성을 들으면서
세상을 떠났다. 이로써 세계역사는 위대한 개인의 종말과 더불어 한 시대를 완전히 과
거로 돌린 셈이 되었다. 이제는 기독교를 옹호하거나 그 교리를 수정할 필요가 사라졌
다. 역사는 완전히 기독교의 무대로 확정되었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 이후에는
로마의 멸망, 이민족들의 침입, 회교의 번영 등 완전히 혼란의 시대와 사회로 변하고
말았다.
  그 혼란과 무질서와 정치, 사회적 혼돈상태는 여러 세기 계속되었다. 그러나 이상하
게도 기독교의 정신적 지도력과 여러 국민들에 대한 안식처를 제공하는 역할은 감퇴하
지 않았다. 로마적인 것은 모두가 폐허로 돌아갔으나, 기독교 정신은 그 폐허 속에서
도 계속 생명력을 유지했던 것이다.
  이러한 정신적 무정부 상태가 오래 계속되면서 정신계에는 서서히 몇 가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가장 중요한 것은 교회학교와 수도원 학교가 설립되면서 자유 7과라고 불리는 학
문활동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문법, 변증, 수사, 산수, 기하, 음악, 천문학 등의
세상 학문이 신학과 철학 외에 연구, 강의 되기 시작했다.
  그것이 후에는 교회신학과 별도로 일반대학으로 독립되면서는 학계에 커다란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파리, 옥스퍼드, 쾰른 등에서 출발했으나, 마침내는 우후죽
순격으로 전 유럽에 보급되는 추세가 되었다. 지금도 우리는 옥스퍼드나 게임브리지
대학은 물론, 하버드 대학에 가도, 대학이 처음에는 신학 및 신과대학을 중심으로 시
작되었으나 세월이 지나면서 자유로운 학문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고, 마침내는
오히려 신학들이 밀려나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볼 수가 있다.
  또 한가지 주목할 사실은, 그 당시까지는 그리스 어가 통용되었으나, 그 범위와 식
자층의 독서 폭이 넓지를 못했었다. 그러나 교회의 제도가 갖추어지고 세력이 팽창하
면서는 라틴어가 교회의 언어로 확대되며 새로운 학문적 기풍을 높이게 되었다. 비로
소 라틴어 문화권이 형성되어 근대 초까지 계속된다.
  여기에 또 한가지 중요한 변화는, 교부철학 시대에는 플라톤이 유일한 철학으로 수
용되어, 기독교와 플라톤 철학은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그 동안 이
리스토텔레스의 저서들은 보급되지 못하고 숨겨져 있었던 셈이다. 그런데 회교 문화권
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과학 및 철학적 이론을 받아들여 더 활발한 문화를 개척한 것
에 자극을 받아,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거꾸로 기독교 세계인 유럽에 역유입되는
변동이 생겼다.
  그후로부터는 너도 나도 새로이 발견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열중하여, 신학은
교회의 학문이지만 철학과 세상의 학문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유일한 철학자로 인정받으
면서 등단하게 되었다. 스콜라 전성기에는 "철학자" 하면 그대로 아리스토텔레스를 지
칭했을 정도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유일한 철학자로 대우를 받았다.
  이에 그치지 않고 교회 안에는 여러 교단들이 탄생되어, 그중에서는 경제적으로 학
문의 진작에 뜻을 둔 교단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프란체스코 교단과 도미니크 교단이
그 대표적인 것들이며, 후자는 학문에 열중하는 교단으로 공인을 받기에 이른다.
  물론 이런 일들이 하루 이틀에 완성된 것은 아니나, 그 정신적 변화가 결국은 스콜
라 철학의 전성기를 만드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그 처음 대표자로 요하네스 에리우게나(Johannes Eriugena 또는 Jonannes
Scotus, 810--877) 를 꼽는다. 그는 학문적 불모기간을 거친 845년에 샤를 대재의 초
청을 받아 파리 궁정학교의 책임자로 부임해 비로소 철학다운 철학에 손을 대기 시작
한다. 에리우게나 또는 스코투스라는 말을 쓰는 것은 영국의 아일랜드나 스코틀랜드에
서 왔다는 뜻이다. 그 지역이 전쟁과 정치적 혼란지역을 떠나 숨어서 학문을 할 수 있
는 적지로 되어 있었던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죽은지 꼭 400년 만에 일어났으니
학문적 공백기간이 너무 길었다. 학문을 위해서는 사회적 안정이 얼마나 중요한가는
재론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그는 자연철학의 문제들을 통해 세계관을 아리스토텔레적인 견지에서 설명하고 있
다. 신은 창조자이면서 만물의 원천이 된다. 피동이 없는 능동자다. 피동에서 능동으
로 가는 다음 차원의 존재가 있고 피동만의 존재가 있다. 따라서 인간은 신의 창조적
존재성에서 보면 피동적이며, 신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물체의 세계는 그보다 낮
은 피조물에 속한다. 보는 것은 보여지는 것보다 우위에 있으며, 듣는 것은 들려지는
것보다 우위를 차지한다. 이렇게 되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해명의 단계적 설명이
나타나게 되었다.
@ff
    33 신은 실재이며 완전한 보편자: 안셀무스와 보편논쟁(11--12세기)
  파리대학의 수업광경 교수는 높은 자리에 앉아 그리스도를 해설하고 학생들은 사본
을 보며 듣는다. 파리 국립도서관 소장.

  그때 세계에서는
  1066경: 노르만족, 일글랜드 정복
  1145년: 고려 김부식, "삼국사기" 편찬

  파리의 카롤링거 왕조의 몰락과 더불어 다시 학문계는 침체와 혼란에 빠진다. 10세
기는 물질과 질서적 건설에 열중하는 시기로 보냈고, 11세기 후반기 부터야 서서히 학
문적 풍조가 움트기 시작했으나 그 속도와 내용은 보잘것 없는 것이었다.
  아마 캔터베리의 안셀무스(Anselmus, 1033--1109)가 없었다면 새로운 학문의 전성기
는 더욱 늦어졌을지도 모른다.
  수도원장으로 있으면서 학문에 열중했고 교황의 권위를 높여주기도 했다. 그의 두
대표적인 저서 가운데 "프로슬로기움(Proslogium)"은 최초로 스콜라 철학의 본질과 위
상을 정착시켜준 저서로 평가받고 있다.
  사람들은 그의 크지 않은 저서의 내용을 가리켜 "신의 존재에 관한 본체론적 증명"
이라고 평한다. 신의 존재에 관한 대화내용으로 되어 있으며, 그 논증이 중세기 전반
에 걸친 철학적 과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 내용을 아주 간결하게 설명하면 "존재가 있는 이상 최고의 존재가 있어야 한다.
최고가 아닌 존재는 최고의 존재에 그 존재성을 의뢰한다. 최고의 존재는 스스로의 본
질에 의뢰한다. 그렇지 않으면 최고가 되지 못하는 때문이다. 즉, 최고의 존쟁인 신의
본질은 그 존재성을 포함한다" 는 논증이다.
  여기에 중요한 문제는 본질이 실제로 포함한다는 뜻이며, 유개념이 개물을 포유한다
는 입장이다. 다시 말하면, "가장 보편적인 것은 가장 실재적이며 완전한 것이다. 신
은 실재이며 완전한 보편자로 존재한다" 는 개념에서 실재에의 길인 것이다.
  그는 또 "신이 만일 형이상학적 존재를 가지지 않고 의식내용에 그친다면 형이상학
적 존재와 의식 내용을 아울러 가지는 자는 신보다도 완전한 것이 되며, 따라서 신의
최고 완전성과 모순된다. 그러므로 신은 형이상학적 존재도 가진다" 라고 논증한다.
  이 내용을 보는 사람들은 두 가지 전재를 느끼게 될 것이다. 그 배후에는 플라톤으
로부터 내려오는 관념으로서의 이데아가 현실 존재보다 우위에 처한다는 전통을 계승
하려는 뜻이며, 더 중요한 것은 신의 존재가 증명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실념론적인 증
명이 불가피했다는 시대적 요청이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개념
또는 이념은 명칭일 뿐, 즉 주어진 이름일 뿐, 실재하는 것은 사물로서의 개물이 존재
할 뿐이라는 철학적 견해가 대두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의 전통성을 대변하는 안셀무스는 플라톤적인 이데알리즘을 신의 존재는
전제로 리얼리즘(Realism), 즉 실재론으로 바꾸어놓았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의 리얼
리즘은 이름과 개념일뿐이라고 주장하는 노미널리즘(Nominalism) 에 대비되는 개념이
다. 전통적인 의미와는 일치되지 않는다. 그래서 안셀무스로부터의 리얼리즘은 우리들
이 실념론 이라는 번역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데알리즘과 리얼리즘은 관
념론과 실재론으로 구별되나, 노미널리즘과 리얼리즘은 유명론과 실념론으로 구별되는
셈이다.
  그러면 노미널리즘은 어떤 주장을 했는가?
  로스켈리누스(Roscelinus,1050--1123)가 그 대표자로 되어 있다. 그들은 ""색 자체
는 없다. 색이 있는 물체가 있을 뿐이다. 지혜 자체는 없다. 지혜있는 사람이 있을 뿐
이다"" 고 말해, 있는 것은 개물의 이름뿐이며 개물의 부분관념도 우리가 임의대로 분
할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다시 그들은 삼위일체는 실재하는 새 신이기 때문에 3신론
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교회로부터 박해를 받아 그 주장이 배척당했음은 쉬 짐작이
간다. 또 교회가 안셀무스를 지지한 이유도 이해할 수가 있다.
  이렇게 되면 자연히 이 두 학설을 융합시켜 조정을 가져오는 제3의 입장이 필요해진
다. 사람들은 그것은 조정론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실념론과 조정론은 교회에서 수용
되나, 유명론은 오래 자취를 감추었다가 중세기 말에 다시 등단하게 된다. 그리고 유
명론의 재등단은 상당히 근대적인 성격과 통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이 조정론의 대표자는 중세기에 여러가지로 널리 알려진 페트루스 아벨라르두스(Pet
rus Abaelardus, 1079--1142)였다.
  여기에 잠시 설명해두고 싶은 것은 이 시대의 사상가들은 때로는 두 가지 이름을 가
졌다는 점이다. 그것은 그 당시 공인되던 라틴어 이름과 자기가 소속되어 있는 나라의
이름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당시의 공통어였던 라틴어 이름을 쓰는 것이 좋겠다
고 본다. 아벨르두스는 아벨르로 불리기도 한다.
@ff
    34 불행했던 사랑의 이야기: 아벨라르두스(1079--1142)
  그때 세계에서는
  1109년: 스콜라 철학자 안셀무스 죽음
  1122년: 보름스 협약

  아벨라르두스는 재간과 생각은 앞서나, 의지와 신념은 약했던 인물 같다.
  처음에는 노미널리즘을 지지했다가 후에는 실념론을 따랐고, 마침내는 조정론을 주
장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 주장은 사실 더 의미가 없는 결과가 되었다. 노미널리즘을
따를 수가 없었기 때문에 만들어낸 이론이 된 인상이 짙기 때문이다. 그는,
  ""보편자는 개물에 있어서 개별적으로 나타난다. 보편자는 개물 안에 있다. 모든 물
건의 형상(Idea) 들은 이미 신의 정신 안에 개념으로 있다. 인간은 이 이데아들을 모
범으로 하여 창조된 여러 물건 속에 있어서만 그것들을 오성에 의하여 인식한다""
는 이론을 제시한다.
  그러나 후대 사람들은 아벨라르두스를 그 시대에 드물게 보는 계몽주의자였다고 평
가한다. 계몽주의의 특색은 인간의 능력과 이성의 가치를 일깨워주었다는데 그 의미가
있다.
  그는 권위는 불필요한 대용물이라고 보았다. 회의도 의미를 갖는다. 회의의 연구는
진리에의 길을 열어주었기 때문이다. 이성은 통일, 필연성, 확실성, 보편성의 능력이
며, 이성만이 논증을 할 수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크리스천은 논리주의자가 되는
것" 이라고 말했다.
  그는 중세기의 처음 나타난 돌립된 윤리학설을 주장한 인물이다. "윤리 또는 너 자
신을 알라" 는 저서에서, 선과 악은 마음의 작용에 속하며, 좌악은 양심에 반대되는
행위에서 온다고 보았다. 도덕 원리는 만인에게 공통된 것이며 스스로를 구원한다. 원
죄는 없으며 과오를 범할 가능성이 있을 뿐이다. 타락된 신도는 철학도에 비해 부끄러
운 존재다. 플라톤도 진리에 있어서는 크리스천이었다. 그리스도는 도덕에 의한 인간
의 신에의 복귀를 완성해 보여주었다. 그리스도의 공적 때문이 아니라, 그를 본받는
도덕성에 구원의 가능성이 생긴다. 그리스도의 속죄사보다는 모범사가 더 귀하다는 도
덕성을 견지했던 것이다.
  모든 계몽주의자가 그러하듯이 아벨라르두스도 그 때문에 교회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했다. 따라서 그의 후계자들은 플라톤을 비롯한 철학연구로 방향을 바꾸었고, 신비
주의 범학론자로 돌아가 많은 학설의 체계적인 소재를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아벨라르두스를 더 유명하게 만들었고 중세기의 특이한 인물로 알려지게 된
것은 그의 사생활, 특히 그의 애정문제 때문이었다.
  그는 높은 명성을 지닌 당대의 인정받는 스승이었다. 프랑스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
서 그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많은 제자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 제자들 중에 명문가
의 양녀인 엘로이즈라는 17세기 여성이 있었다. 아름다움과 학구적 재질을 갖춘 여성
이어서 장래성을 크게 인정한 부모가 그를 아벨라르두스의 제자로 넣어 공부시키기를
원했고, 마침내는 아벨라르두스를 가정교사로 맞아 남다른 학문적 성장을 이루게 되었
다.
  그러는 동안에 38세의 스승과 17세의 처녀는 남다른 존경과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그 사실이 널리 알려지게 되고 두 사람은 자신들의 사랑을 숨길 수 없는 처지가 되었
다. 평범한 사제관계가 아닌 수도사와 젊은 여성간의 애정문제였기 때문에 종교계의
파문은 더욱 심각해 졌다.
  결국 엘로이즈는 스승의 명성과 장래를 위해 스스의 강한 결혼 요구를 뿌리치고 수
녀원으로 들어가버린다. 한 여성 때문에 세계적인 석학이 버림을 받는 것을 원하지 않
았던 것이다. 아벨라르두스도 정신 및 신체적으로 큰 시련을 겪어야 했다.
  긴 세월을 수도원과 수녀원에서 보내고 있을때 아벨라르두스가 자기에게 도움을 청
해온 한 후배를 정신적으로 위로를 해주는 편지 내용이 여러 사람들에게 전해지다가
이윽고 엘로이즈가 그 서간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는 스승을 위해 수많은 시련과 고뇌
를 안고 있는 자신을 위해서는 왜 위로의 뜻이 없는 가 하는 항의의 글을 스승에게 보
내게 된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두 사람은 서로의 사랑을 회상하면서 사랑의 승화된
모습을 신 안에서 찾으려는 애정의 고백과 몸부림치는 호소가 내왕하게 된다.
  그 내용이 대단히 노골적이면서도 심각한 것들이어서, 당시의 많은 수도사들과 그
사실을 아는 신앙계의 지도자들까지 읽게 되는 것을 꺼려 금지시키려 했으나, 그것이
역효과를 내어 그 왕복 서간문의 내용이 한 시대의 에피소드로 발전하기에 이르렀다.
  현재 우리말로도 번역되어 읽히고 있다. 어떻게 보면 삭막했고 교리적 형식에 치우
쳤던 사회에 한 가식 없는 삶의 모습을 엿보게 해주는 느낌도 없지 않다. 이런 과정을
밟으면서 교회와 학문이 서서히 제길을 찾아온 느낌이 들기도 한다.
@ff
    35 신에게 이르는 정신의 여행: 4대 스콜라 철학자 13--14세기
  중세의 교황상. 왼손의 복음서와 오른손의 지팡이는 사람을 인도하는 사목자와 교의
를 통괄하는 자로서의 교황을 상징한다. 스콜라 철학은 교황의 권력확대와 함께 교단,
대학이 설립되면서, 기독교의 교의를 학문적으로 체계화하려는 움직임에서 비롯되었
다.

  그때 세계에서는
  1215년: 영국, 마그나 카르타 대헌장
  1347년: 유럽에 페스트 창권

  이렇게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기독교는 유일한 종교로 남게 되고, 교황의 세력은
제왕의 영역에까지 넘나들게 된다. 그 위에 먼저 말한 대로 교단이 생기고 대학이 설
립되며, 알려지지 못하고 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재유입되면서 사회적 분위기
는 학문을 위한 준비를 서서히 갖추게 된다.
  이때 소위4대 스콜라 철학자가 등단하게 된다.
  아마 그 처음 사람은 프란체스코 교단에 속하는 헤일즈(Hales)의 알렉산더 (Alexand
er, 1245년 파리에서 죽음) 라고 보아야 하였다. 물론 이름으로 보아 영국인이다. 그
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완전히 교회철학으로 도입시켰다. 이미 얼마전부터 플라
톤의 철학은 낡은 것으로 치부되기 시작하였고, 아우구스티누스만이 대표적인 철학자
로 인정받고 있는 때였다.
  알렉산더로부터 몇 가지 스콜라 철학의 성격이 자리잡히게 된다. 그 첫째는 소위 범
론이라고 해서 많은 저서를 써야 대표적인 학자로 인정받는 습관이었다. 사람들이 말
의 키보다 높은 저술을 남겼다든지, 말의 무게보다 더한 책을 남겼다고 말하기 시작했
을 정도였다.
  그리고 취급하지 않는 문제가 없이 신학과 철학의 모든 문제에 언급해야 한다는 조
건이 뒤따랐다. 또 서술의 방법에도 공통성이 주어졌다.
  1. 신학 및 철학적인 문제가 제시된다.
  2. 그에 대한 가능한 긍정 또는 부정적인 대답이 전승 즉 성서 또는 유명한 교부들
의 말 에서 제시된다. 아니면 이성 고대, 아라비아, 유대철학자들, 특히 아리스토텔레
스의 저서 에서 인용된다.
  3. 그리고는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는 결론을 내린다. 결론이 어려운 때는 해답을
보류하거나, 모순되는 두 명제에 사용되는 개념이 동일할 때는 그 의미를 정리, 구별
해둔다. 개념구별을 내리는 것이다.
  예를 들면,
  1. 성 교리는 가능한가
  2. 성경에 이런 말이 있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했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와
반대로 안셀무스는 이렇게 말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가르쳤기 때문에 불가능하
다.
  3. 그러나 나는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고 마테복음테에
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그러므로 가능하다는 식의 서술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스
콜라 학자들은 많이 알아야 하고 광범위하게 해답을 해 줄 수 있어야 한다.
  알렉산더는 4권의 저서 속에 440개 이상의 문제를 취급해 주었고, 그 속에는 창소
주,창조(창세기의), 구원주와 구원사업, 교회가 사용하는 구원수단 등을 포함시키고
있다. 가장 많이 인용되는 것은 성경 이외에는 아리스토탤레스와 아우구스티누스로 되
어 있다.
  이런 저작의 셩격은 스콜라의 정형적인 것이 되어 토마스 아퀴니스까지 이어 지게
된다.
  그러나 위대한 4대 스콜라 철학자중에서도 가장 개성이 강한 사람은 이탈리아의 신
비주의자인 보나벤투라(Bonaventura,1221--1274)라고 보아 좋을 것이다. 프란체스코
교단의 총재이기도 했던 그는 대표적인 저서로
  "신에게 이르는 정신의 여행" 을 남겼는데, 프란체스코 교단의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는 인식에는 4단계가 있다고 보았다. 1) 낮은 차원의 빛에 속하는 5관.
  2) 기계적인 여러 기술에 속하는 것, 외적인 빛에 따른다.
  3) 철학, 내적인 빛에 속하는 것.
  4) 신적인 조명, 위로부터의 빛에 따르는 것으로 구별해 계시와 신학의 위치로 보았
다.
  그는 신학의 정신의 신으로 가는 길을 찿는 것이며, 거기에는 세 단계의 신학이 있
다고 보았다.
  상징신학(Theologia Symbolica) - 신의 형상에 따라 만들어진 피조 자연에서 신을
보는것.
  고유신학(Theologia Mystica) - 신의 모습인 우리들의 영혼 안에서 신을 보는 것.
  신비신학(Theologia Mystica) - 신을 직접 체험, 인식하는 것.
  이상의 세 단계의 신학설이다. 그를 신비주의 철학자로 보는 것은 "참다운 신의 인
식은 신과 동화되는 단계" 라고까지 이끌어 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 자신이 천사과 같은 학자라는 평을 받고 있으면서도 자신은 세상 학문에 있어서
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유일한 최고의 철학자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는 그 시대의 신비
주의자이면서도 감관, 구상력, 오성과 이성, 지성, 예지, 최상의 정신 등을 얘기해 최
고의 인식은 신비로운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 두 사람은 프란체스코 교단의 대표적인 학자였다.
  이에 대조되는 도미니크 교단에 속하는 학자들이 더 인정을 받는 것은 그들은 신앙
생활보다도 학문연구에 더 뜻을 모았기 때문이었다.
@ff
    36 중세사상의 완성자: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년)
  그때 세계에서는-
  1234년: 몽고, 금을 멸함
  1265: 영국회의 성립

  네 철학자 중의 제3의 인물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스승이었기 때문에 더욱 유명해진
알베르투스(Bollstadt의 Albertus, 1206-1280)다.
  그는 철학.의학.화학.물리.식물학에도 조예가 있는 다방면의 학자였다. 도미니크 교
단에 속해 독일의 주단장직을 맡기도 했고, 쾰른에서 가르치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는 평생 40권에 달하는 저서를 남겼다. 그가 인용하지 않은 문헌은 없을 정도로 '
백과의 학자'라고 불리었다. 모든 것을 필요한 대로 종합한 철학자로 보아 좋을 것이
다. 그 자신도 자연에 있어서는 아리스토텔레스, 신앙은 아우구스티누스, 의학은 히포
크라테스에 의존하면 된다고 진술하고 있다.
  보편논쟁은 아비센나의 학설을 따랐다. 보편개념은 신의 오성에서는 개물보다 먼저
있고, 자연물에서는 개물 중에 있고, 추상개념으로서는 개물 후에 있다고 보았다.
  비판성보다는 수용성을, 분석보다는 종합을, 창의적이기보다는 체계적인 융합을 더
소중히 여겼다.

  그러나 우리는 알베르투스의 제자였고 스콜라 철학의 유일한 철학자로 숭앙을 받는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로 얘기를 전개시키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는 나폴리 산성의 백작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 때문인지는 모르나 그의 학문에는
귀족적인 요소가 상당히 풍긴다. 어려서 수학을 위해 수도원에 들어갔다가 그대로 수
도사가 되어 학문에 열중하게 된다. 18세 때 도미니크 교단에 들어갔으며, 토마스 때
문에 학문은 도미니크 교단의 전용물인 것 같은 인상을 남길 정도로 교단의 대표적인
학자가 되었다.
  파리의 쾰른에서 수학했다. 쾰른에서는 스승 알베르투스에 사사하였다. 27세 때부터
독립해서 가르치기 시작했고, 헤아릴 수없이 많은 저서를 남겼다.여러 지역에서 모두
성공하는 강의자가 되었다.
  비교적 이른 49세에 나폴리에서 리용으로 종교회의에 가다가 도중에 세상을 떠났다.
  사람들은 그를 탁월한 학자, 만인이 인정하는 학자, 천사와 같은 학자라고 불렀다.
1323년에는 성자의 반열에 올랐고, 1567년에는 제5차 대학자로 인정을 받았다. 피우스
5세 교황에 의해서였다. 제1차 학자는 아우구스티누스였다. 1882년에는 레오 8세교황
의 명에 의하여 전집을 출간해, 명실 공이 대표적인 스콜라
철학의 왕좌를 차지하기에 이른다.
  그의 집대성된 좋은 저서 중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대표적 대작으로 남은 것은, "
철학범론(Summa Philosophica)"과 "신학범론(Summa Theologica)"이다. 앞것은 4권 464
장에 걸친 대작이다. 주로 모든 철학적 이론을 기독교 신앙으로 이끄는 안내서이고,
뒤의 것은 신학적인 내용이 중심이다. 아직 미완성의 것이라
고 하나 그 방대함은 다른 데 비할 바가 없다.

  그러나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모든 종교는 권위의식을 바탕에 깔고
있어 때로는 공정한 비판을 받기 어려운 경우가 있다는 점이다. 결국은 토마스도 그런
학자 중의 하나였다. 천사와 같은 신학자로 불리게 되면 건전한 평가와 바른 비판보다
는 권위의 베일에 싸여 발전적 해석을 내리기 어렵다. 그래
서 아우구스티누스 이후에 아우구스티누스가 나오지 못했고, 토마스 이후에는 그와 버
금가는 학자가 나오기 힘들었다. 오직, 그와 반대되는 교단에 속하는 학자들이 토마스
를 논박하는 저서를 남겼을 정도였다. 최근에도 전세계적으로 성행했던 신 토마스주의
자들은 모든 문제의 해결을 토마스에게서 얻으려고 노력하고있다. 우리 나라에서도 서
강대학이나 성신대학을 비롯한 카톨릭대학에서는 그 열기와 전통이 대단하다. 그러나
개신교 계통의 학자들은 아우구스티누스는 열심히 연구해도 토마스에 대해서는 큰 비
중을 두지 않는다. 왜냐하면 토마스는 이미 카톨릭 철학자로 간주되어 있으며, 스콜라
철학은 전성기 카톨릭 철학을 대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토마스의 철학을 가벼이 보아서는 않된다. 지금도 그가 취급한 모든
문제의 해결은 공정하며 치우치지 않고 있을 뿐 아니라, 과학적 비판이 가해지기 이전
이었기 때문에 건전한 견해를 갖고 있다. 시대적인 잔해는 피할 수 없는데, 예를 들면
천사들이 천체를 운행하고 있다는 내용들은 현대적 비판이 가해져야 할 점이라 하겠
다.
  또 그의 전집 마지막에 들어가 있는 작은 논문들은 오히려 눈여겨볼 만한 내용을 안
고 있다. 그의 저서가 너무 방대하기 때문에 그 전집이 완역된다는 것은
어려운 과업이다. 영어판에는 "신학범론"의 내용을 발췌한 적당한 분량의 책이 있어
많이 읽히고 있다. 우리말로도 일부분은 번역되어 있을 줄 안다. 편안하게 부담감 없
이 읽을 수 있는 내용들이다.
@ff
    37 철학과 신학의 조화: 토마스 철학의 근본문제들
  그때 세계에서는-
  1271년: 이탈리아 마르코 폴로, 동방여행길에 오름

  아우구스티누스는 철학을 멀리하고 신학을 높이 받아들인 편이다. 그러나 토마스는
오히려 철학과 신학의 융화를 꾀했다. 다만 신학은 주격이 되고 철학은 시녀격으로 되
었으며, 신학은 내용이 되고 철학은 방법이 되는 위상으로 정착되었다.
  그것은 다시, 이성은 계시를 단절시키지 않고 계시는 이성을 포함하면서도 초월하는
것으로 보았다. 신앙은 비이상적이거나 반이성적이기보다는 초이성적인 것으로 설명한
다. 자연이성에서 계시의 관계로 상승하는 것이다. 인간의 이성은 어린이의 생각과 같
으나, 신의 계시는 철학자의 사유에 비할 정도로 높은 수준의 것이다. 따라서 이성은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는 있어도, 신의 본질은 계시를 통해서만 주어지는 것이다. 자
연은 은총의 선구이며, 은총은 자연이성을 완성시킨다고 설명한다.
  이 문제는 상당히 중요하다. 개신교에서 바울, 아우구스티누스, 루터, 칼뱅, 최근에
와서 키에르케고르와 카를 바르트를 잇는 신학이 계시의 절대성을 계승하는 데 비해,
카톨릭은 이성과 신학의 동질성을 인정하는 융화성을 갖는 신학을 택하는 이유가 여기
에 있다. 개신교는 위로부터의 구원을 강조하나, 카톨릭에서는 아래서 위로 올라가는
길과 위에서 내려오는 길의 합치를 말하는 차이가 여기서 생긴다. 그 배후에는 플라톤
이 아닌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에도 성격상 의의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성격은 그의 인식론과 형이상학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그 내용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것을 거의 그대로 수용하고 있는 셈이다. 오히려 아리스토텔레스의
복잡한 이론을 여과시켜 건전한 상식적 결론으로 유도한 인상을 준다.
  인식의 문제도 그렇다. 대상존재가 주어져 있고 우리는 그것을 감관을 통해 경험한
다. 그 경험한 내용을 오성이 사유한다. 사유란 지적 가공 작용인 것이다. 거기에서
보편개념을 얻으면 되는 것이다. 어떤때는 더 평이하게, 사물과 존재는 인식의 기본이
되며 그것을 정신적으로 묘사해서 사유의 내용으로 삼아 지식을 산출시킨다고 설며한
다. 칸트의 주관적 이성작용보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중심의 인식론이라고 보아야
하겠다. 따라서 진리는 이미 주어진 것이다. 그 주어진 것을 얼마나 정확하고 타당성
있게 받아들이는가 함이 문제인 것이다. 진리는 사유와 존재의 일치에서 주어지는 것
이다.
  그의 형이상적 존재론도 극히 상식적이며 아리스토텔레스적이다. 가장 핵심 되는 원
리가 있다면 존재의 유사성이다. 유사성은 단계성을 전제로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적인
해석을 내리면, 존재는 질료(materie)에서 형상(form)에의 길을 따른다. 그 질료와 형
상의 단계에 따라 다섯 가지의 구별이 생긴다. 가장 낮은
급에 속하는 질료뿐인 질료, 식물적 생명에 속하는 영양적 영혼, 동물적 생명인 감관
적 영혼, 이성적 영혼에 속하는 인간, 순수 영에 속하는 천사, 절대적 형상에 속하는
신의 등급이 그것이다. 그중에서 인간은 이존현상의 가장 낮은 급에 속하며, 질료의
입장에서는 최고의 질료적 형상의 위치에 속한다고 보았다. 중간존재가 되는 셈이다.
말하자면 질료 자체와 질료적 형상과 이존형상의 단계를 구별한 것이다. 그리고 이 질
료적 형상을 위해 시간과 공간의 기능 을 가미시켜 그 내용을 보충해준다. 어떤 때는
영혼은 소재가 없는 질료를 떠나 있기 때문에 영존성을 갖는다고 본다. 물론 신은 세
계의 원인, 작용인이면서 제1의 원인이 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적 해석을 내린다.
  그는 윤리에 있어서도 이성적인 보수성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존재는 하나이며, 참
이며, 선이다. 이미 그렇게 주어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윤리는 존재와 사유와 당위성
의 일치가 문제다. 아는것은 행하게 되어 있으며, 이성이 진리로 받아들인 것을 행하
면 되는 것이다.
  인간적이며 세상적인 덕은 플라톤의 4덕으로 되나, 신앙적 덕은 믿음.소망.사랑이
되어야 한다. 전자는 세상에, 후자는 교회에 속한다. 그것을 실천함에 있어서는 아리
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중용이 표준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 때부터 전래되는 이성주의.
주지주의를 윤리에 접목시킨다.
  정치 면에 있어서도 그의 귀족다운 보수성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오직 다른 점이
있다면 모든 선과 정치의 궁극적 표준은 신의 섭리에 일치되어야 하며, 신의 은총의
질서에 합치된다면 정치체제나 제도는 가릴 필요가 없다고 본다. 카톨릭이 세계정치와
잘어울릴 수 있는 성격은 여기에서 주어진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것이다.
@ff
    38 이성의 영역, 신앙의 영역: 요한네스 둔스 스코투스(1270-1308년)
  그때 세계에서는-
  1281년: 원나라, 잡극 성행
  1292년: 단테의 "신곡"
  1309년: 프랑스, 장 드 조앙빌 "성왕 루이 전"

  토마스의 철학을 읽고 있으면 그 구상과 방대한 체계 내용이 꼭 성베드로 교회나 밀
라노의 성 안을 보는 것 같은 인상이든다. 그 모든 것이 카톨릭과 스콜라 사상의 전성
기를 보여주는 공통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성당의 많은 벽화와 조각 그리고 구조
가 마침내는 신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상징되고
있듯이, 토마스의 거대한 철학도 마침내는 하느님에 대한 영광과 구원의 역사적 완성
에 맞추어져 있다. 어떤 사람들은 단테의 "신곡"을 읽으면서 또 한번 토마스를 대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고 말한다. 단테 자신도 토마스를 '지식있는 사람들의 종사' 라
고 불렀듯이, 중세적인 풍모를 잘 보여주고 있다. 전체 세계관이 신에의 영광과 찬양
으로 가득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한 시대와 사회를 대표하는 철학자의 뒤를 따르는 사람도 많이 있었
으나, 반대입장을 취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이 일어났다. 도미니크 교단을 따르는 사람
들은 토마스의 뒤를계승했으나, 이미 완성된 체계였기 때문에 새로운 학설은 나오지
못했다.
  이에 비하면 반토마스 운동은 대립적 위치에 있었던 프란체스코 교단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들에게는 몇 가지 공통된 특성이 있다. 무조건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르던 토마스와
는 다르게 플라톤 철학으로 되돌아가려는 운동이었고, 아우구스티누스를 근거로 토마
스를 비판했는가 하면, 토마스의 주지주의를 비판하는 길을 택했다. 그리고 후에는 자
연히 근대적인 사상을 받아들이는 학자들이 중세기의 대표자인 토마스를 뒤로 돌리게
된 것이었다. 어떤 이는 책 제목 자체가 "수사 토마스를 시정함"이라고 되어 있을 정
도였다.

  그 사람들 중에 토마스와 맞먹을 정도의 대표적인 한 철학자가 나타났다. 요한네스
둔스 스코투스(Johannes Duns Scotus, 1270-1308)였다.
  그는 아일랜드 출신으로 옥스퍼드에서 가르치다가 명성과 걸맞게 쾰른으로 초청을
받았으나, 부임하는 해에 38세의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만일 토마스만큼의 긴
세월을 학문에 바쳤다면 또 한 사람의 토마스가 태어났을지도 모를 인물이었다.
  그는 토마스와는 다르게철학과 신학, 이성과 신앙을 상호보완적으로 연결하는 것이
아니라, 질적으로 구분되어야 하는 것으로 보았다. 논리와 교리는 서로 자주적인 위치
에서 학문적 본질이 평가받아야 한다. 자기 의식은 유일한 확실성의 원칙이며, 다른
모든 것은 그 주변을 돌고 있는 진리의 움직일 수 없는 중심이라고 보았다. 그는 수학
을 연구했기 때문에 논증에 대한 엄격한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신학의 내용까지도 논증을 거쳐야 하는 것은 아니다. 철학자에게는
참이 될 수 있는 것이 신학에 있어서는 거짓이 될 수도 있다. 신앙과 신학의 차원은
아우구스티누스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논증을 초월한 은총과 신이 베푸는 내적 체험
의 유산이기 때문이다.
  그는 아우구스티누스의 후계자답게 인간성의 근본은 의지라고 본다. 의지가 지성보
다 우위를 차지한다는 주장이다. 인식도 그렇다. 의지가 주의력을 집중시키면 외부적
대상을 받아들이지만, 주의력을 해산시키면 지적 노력은 사라지고만다. 강하게 의지가
알기를 요구했을 때 그 대상은 지적 내용으로 부각될 수가 있다. 사유와 지적 활동은
그 의지의 부차적인 협조작용을 할 뿐이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꼭 쇼펜하우어나 니체를 읽는 것 같은 인상을 풍긴다. 모든 결
정력은 영혼의 욕구를 대신하는 의지가 내리는 것이다. 자유의지는 소중한 것이며 신
의 가호를 받는 것이다. 이 자유의지 때문에 윤리학은 가능해지며, 지적 활동은 그 의
지의 머슴에 지나지 못한다. 선은 참보다 우위에 있다.
  의지는 실천을 전제로 하기때문에, 논리적 지식보다 윤리적 실천은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한다. 그리고 신학은 지식을 주는 데있지 않고 신앙적 실현을 뒷받침 하는 것이
다. 즉, 토마스의 이론과 학설을 완전히 바꾸어놓는 결과가 되었다. 이 의지의 핵심은
사랑에 있기 때문에 신앙은 신의 사랑의 실현에서 이루어진다.

  그의 세계해석이나 보편논쟁의 문제에 관해서는 특이한 설명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많은 후계자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콜라 철학의 주류는 교회의 후원을 얻
는 토마스 학설로 되돌아간다. 교회는 언제나 전통적 권위를 지켜야 하며, 그것이 교
권과도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반토마스적인 학설이 일어났었다는 것은 그 자체가 중세기의 종말을
예고해주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ff
    39 중세철학의 종말: 로저 베이컨(1214-1294년)
  그때 세계에서는-
  1294년: 독일,뤼백을 맹주로 한지동맹 융성
  1298년: 이탈리아 마르코 폴로"동방견문록"
  1300년: 유럽에서 화약 발명

  모든 역사가 그러하듯이 철학사상도 어떤 전성기가 오면 그 안에 이미 새로운 사상
이 출발할 수 있기 위해 와해기, 즉 종말이 예고되게 마련이다.
  스콜라 철학도 비슷한 운명의 전철을 밟았던 것이다. 다음의 한 두 사람의 철학을
소개함으로 그 과정과 내용을 엿보기로 하자.
  영국의 로저 베이컨(Roger Bacon, 1214-1294)은 영국 근대철학의 선구자인 프렌시스
베이컨(F.Bacon)과 거의 차이가 없는 사상을 이미 가지고 있었다.
  그는 프란체스코 교단의 수도신부였다. 수학과 자연과학을 연구했고 자신의 재산을
들여가면서 물리학 실험에 열중했었다. 그는 모든 선입관념을 배제해야 한다면서, 희
랍어를 몰라 라틴어 번역만을 읽었고 수학이나 물리학을 모르는 토마스는 진정한 학자
가 못된다고 비판했다. 인문학을 위해서는 원어를 알아야 하
며, 자연과학을 위해서는 물리학.천문학을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모든 인식에
있어서는 과학적 방법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진정한 학문을 위해서는 모든 권위, 습관, 공허한 말 등을 떠나 자기비판이 있어야
한다. 유명한 인사의 가르침이라든지, 자기 완성감이 빠져서는 참다운 학문은 불가능
하다.
  토마스식으로 무조건 종합과 체계에 편중하게 되면 참다운 지식은 얻을 수가 없다.
신앙과 신학은 이성적인 사고의 유산도 아니며, 그 체험의 결과에서 개념적인 지식을
얻는 것이 교회와 신앙의 바른 길인 것이다.
  베이컨은 이러한 근대적인 주장 때문에 교회의 비난과 반박을 받고 있다가, 그를 비
호해주던 클레멘스 4세 교황이 서거한 후에는 10년간 수도원에 수감되는 박해를 받아
야 했다. 그의 과학적인 성격과 근대적인 사고는 아직 그 당시에는 용납될 수가 없었
던 것이다.

  베이컨과 더불어 중세기의 종말을 재촉한 또 한 사람의 철학자는 오컴의 윌리엄(Wil
liam of Occam, 1285?-1349)을 들어야 할것이다.
  그도 프란체스코 교단에 머물면서 둔스 스코투스를 따랐다. 파리에서 가르치고 있었
던 그는 교황권과 제왕권의 분리를 호소하면서, 정치는 제왕의 권력하에 있어야 한다
고 주장했다. 교황의 박해를 피해 바이에른의 루드비히 황제의 보호를 받아야 했다.
  '왕은 검으로 나를 지켜주고 나는 붓으로 왕을 지켜준다'는 말이 그에게서 나온 것
이다. 50세 전후의 나이로 뮌헨에서 변사했다.
  아마 그 당시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윌리엄의 학설은 보편논쟁에서 유명론(Nominalis
m)을 택했다는 점이다. 안젤무스 이후 유명론은 교회에서 배척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
것을 다시 복고시켰다는 것은 곧 모든 대표적인 철학자들을 반격한 과감한 반론이었던
것이다. 실재하는 것은 개물이고, 보편개념은 사유하
는 정신만 있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윌리엄은 개념은 사물의 모사가 아니고 기호라고
보았다. 최초의 기호론자가 된 셈이다.
  인식에 있어서도 직각적인 지각을 바탕으로 삼았다. 지각이 경험에서 내적인 작용을
할 때 심리적인 귀납성이 되고, 외적인 작용을 하는 것이 사물에 대한 작용이라고 보
았다.이성적 학문인 철학과 신학은 엄격히 구별되어야 하며 신학은 계시에 속하기 때
문에 학문이 아니라고 보았다.
  신의 존재와 본질의 문제는 이성의 논증에 속하는 것이 못되며, 오직 유사(analogi
a)성에 따른 개념적 이해가 가능할 뿐이라고 보았다. 신은 이런 것이라는 것이 아니
다. 신은 이런 것일지 모른다는 이해가 있을 뿐이다.

  그가 교회로부터 더 큰 비난을 받은 것은 교회와 국가의 완전분리를 주장한 때문이
며, 교회 안에 먼저 평등과 청빈이 있어야 한다고 기성교회를 비판했기 때문이다. 교
회의 부를 신랄히 비판했던 것이다. 그리고 정치는 제왕에게 속하며 민주주의가 실현
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의 이러한 주장 때문에 파리는 그 당시 자유로운 사상의 중심지로 여겨지고 있었
다. 종교적 비난과 박해로부터 보호를 받는 곳으로 생각되었다. 마틴 루터도 신앙적
핍박을 느끼면서 파리에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신앙의 자유는 양심의 자유와
일치되는 것으로 생각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윌리엄의 후계자인 요한 부리단(Johann B
uridan, 1327-48년 동안 파리의 총장)이 근대사상의 소유자이면서 존경받는 학문적 지
도자가 되었다면, 스콜라와 더불어 중세철학은 사양기에 접어들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
다.
@ff
    40 철학 제2막이 내리다: 근대철학의 시작(14세기경)
  그때 그세계에서는-
  1309년: 스위스 동맹
  1335년: 이탈리아, 인문주의 강성과 그리스 문예

  세계 철학사상의 역사는 3막으로 되어 있다.
  제1막은 고대철학이었다. 자연의 뜻이 배경되고 지중해 연안과 아테네.로마가 중심
무대가 되었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역이 되어 여러가지 내용의
철학이 연출되었다.
  그러나 그 제1막은 로마의 종말과 더불어 막을 내렸다. 제2막은 기독교의 탄생과 더
불어 시작되었다. 배경에는 큰 성인들과 신앙적 분위기가 짙게 깔려 있었다. 신의 섭
리와 영광이 그려져 있다. 무대는 로마와 알렉산드리아가 중심이었는데, 후기는 전 유
럽으로 확대되었다. 일부의 후진국가들은 전면에 지나지 않았다.
  중심 배역은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가 맡았으나, 오리게네스, 안셀무스,
둔스 스코투스등이 조역을 맡아 신성한 뜻과 인간의 이성적인 대화가 계속되었다.
  제1막은 기독교의 세력이 끝을 고하게 했으나, 제2막은 자연스레 끝나면서 제3막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제3막은 아직 진행되고 있는 셈이다. 현대철학은 근세철힉의 연장이라고 보아야 하
겠기 때문이다.
  누가 보든지 제3막의 배경은 인간, 그것도 집단적인 인간이 되고 있다. 이성인간을
상징하는 계몽사상, 로망성을 대표하는 예술과 정열의 인간, 산업혁명과 프랑스 혁명
을 일으킨 집단인간, 최근의 산업사회와 메커니즘을 개척한 인간상 등이 계속 무대의
중심을 만들어오고 있다.
  그러나 이 3막의 정리는 누가 할지 모르는 먼 훗날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역사의 제2막인 중세기를 끝내면서 우리는 몇 가지 문제를 정리했고, 근대를 위한
설명도 뒤따라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서 추가하고 싶은 내용은, 중세기는 기독교의 세기였는데, 그
종교성 자체에 큰 변질이 찾아와 이제는 더이상 중세기라고 부를 수 있는 전통성이 자
취를 감추게 되었다는점이다.

  그것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 1260-1327)같은 종교 사상가가 나타
나 기독교적 신학과 신앙의 전통성을 바꾸어놓았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는 기사의 가문에 태어나 1300년경 파리의 교수가 되고, 2년후기는 교황에 의해
박사학위를 받았을 정도로 대표적인 학자로 인정받았다. 1307-1311년 사이에는 도미니
크 교단의 총대표직을 맡았을 정도의 공인받는 학자였다. 그의 명성과 학문적 위엄은
당대에 비교할 인물이 없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만년에는 종교재판정에 서게 되었고,
유죄판결을 선언받기 전 세상을 떠났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은 중세기가 스스로 학문적 변질을 초래했다는 사실을 입증해주
는 것이었다.
  그는 최초로 독일어로 저술한 사람이었다. 세계 공통어인 라틴어를 버리고 모국어인
독일어로 글을 썼다는 것은, 그것이 이미시대적인 요청이었고, 에크하르트는 민족문화
의 선구자가 되었다고 보아 좋을 선도자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그를 신비주의 종교 사상가라고 부른다. 그가 취급한 과제는 기독교적 신
학이었다. 그러나 그 방향과 내용은 이미 전통적인 기독교 정신을 떠나 완전히 자기자
신의 종교철학적 내용으로 바꾸어놓았다.
  계시는 위로부터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이나, 에크하르트의 신앙적 인식은 안으로부
터 불꽃같이 피어오르는 것이었다. 교회는 인간은 죄인이므로 구원을 받아야 하는 존
재로 말하고 있으나, 에크하르트는 그 모든 것은 우리들 정신의 깊은 속에서 일어나고
해결되어야 하는 것이다.
  오히려 인간이 욕망과 인간적 기대와 관심을 무화시킴으로써 신을 인식하는 것은 신
과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계시를 통해 주어지는 신의 가르침보다는 우
리 영혼의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진리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 내용은 이미 신학이 아니라 인간의 철학적 사고의 유산이며, 신앙의 학이 아닌
종교철학의 과제로 변질되어 있었다.
  그의 정신이 그 당시에는 비판을 받았으나, 얼마 후에 야콥 뵈메에 이르러 더 전진
된 종교철학으로 나타났을 때에는 누구의 비난도 받지를 않았다. 뵈메의 "아우로라(새
벽)"라는 책은 지금도 에크하르트의 저서와 더불어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다.

  후에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어난 것도 이런 진보적 과정이 있었던 때문이며, 종
교 자체가 전통적인 신앙에서 변질, 이탈 되었다는 것은 중세기의 종말인 동시에 무신
론에의 길을 열어주는결과가 되기도 했던 것이다.
@ff
    41 인간성 회복운동: 르네상스와 종교개혁(14-16세기)
  그때 세계에서는-
  1337년: 영국.프랑스 백년전쟁
  1381년: 이탈리아 베네치아, 제노바를 누르고 해상 상업권 확립
  1425년: 거슨, "형이상학과 논리학의 일치에 대하여"

  인류는 세계역사를 통해 두 차례 큰 변혁을 겪는다. 그 하나는 고대사회에서 중세사
회로의 변화였으며, 또 하나는 중세기로부터 근대사회의 탄생기였던 것이다.
  이렇게 큰 역사, 그것도 세계사적인 변화는 두부모를 자르는 듯이 짧은 기간 동안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짧게는 1세기 정도의 기간이 필요하며, 길게는 2,3세기의 역
사적 변혁기가 필요한 것 같다.
  중세기에서 근대사회에의 변화도 그런 성격의 하나였다고 보아야 하겠다.
  사상 및 철학사를 취급하는 사람들은 근대화는 두 R로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하나는
르네상스(문예부흥, Renaissance)였고, 다른 하나는 종교개혁(Reformation)이라는 것
이다. 생각해보면 이 두 가지 큰 정신사적 변화는 역사적 필연성을 갖춘 사건이기는하
나, 인위적이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방대한 사건이었던 것 같다. 그 사건에 참여한
주역들도 이렇게 큰 변혁이 올 것이라고는 자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문예부흥의 핵심을 만든 것은 무엇인가? 한 마디로 말하면 인간성의 회
복이 그 중심과제였던 것이다. 기독교 특히 카톨릭의 위치에서 본다면, 중세기는 종교
의 시대였고 기독교 신앙이 모든 사상계를 좌우했기 때문에 은총과 조화의 질서가 가
장 충만하게 채워진 기간이었다고 보고 싶었을 것이다.
  모든 철학과 사상은 신학의 그늘 밑에서 성장했고, 학문과 예술은 종교적 목적에 이
바지하고 있었다. 인간은 신의 뜻과 질서에 순응하면 되었고, 자연은 인간을 위해 만
들어진 신의 선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인간의 영적 실재라고 볼 수 있는 정신은 신
에게 속하는 것이나, 육체는 물질과 통하는 부수적인 의미를 지닐 뿐이라고 믿고 살았
다. 이성은 신앙의 보조수단이고, 교회는 모든 사회제도의 모범이라고 믿어지고 있는
사회에 우리 인간은 태어나 살다가 죽음을 맞곤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의 진취적인 학자들이 고대역사와 사회를 연구해본 결과, 기독교 이
전의 고대와 로마 사회는 신이 존재치 않는 생생한 인간 본연의 사회였음을 발견케 된
것이다. 따라서 그 잃어버린 인간 본연의 모습을 되찾고 싶었고, 되찾아야 하는 책임
을 느끼게 되었다. 그 당시의 선각자들인 인문주의자들이 그 역할을 담당했다.
  그 활동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서서히 전개되기 시작한 것이다.
  단테에 있어 베아트리체는 성모 마리아에 해당하는 여성이었다. 중세기적인 여성상
이며 구원의 상징적인 여성으로 등단한다. 그러나 그 뒤를 잇는 페트라르카의 여성은
그와 다르다.
  완전히 인격을 갖춘 고전적인 인간적 이성을 배제하지 않은 여성으로 등단한다. 훨
씬 인간에게 가까워지고 있다. 그러나 그 뒤를 계승하는 보카치오의 여성은 육감적이
며 본능성을 숨기지 않는 성적 매력을 노출시키는 여성으로 자리잡는다. 짧은 기간 동
안에 작가들의 주제로 나타나는 여성관에 이렇게 큰 차이를 보이게 된다. 인간회복의
길이다. 그리스의 성적 매력을 풍기는 조각에서 볼 수 있는 여성상과 같은 것이었다.
  우리는 라파엘로의 그림을 볼 때마다 종교적인 신앙의 분위기를 풍만히 느낀다. 중
세적인 예술성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그림을 볼 때는
다른 인상을 받는다. 어디까지나 고전적이며 인간미 풍만한 그림들이다. 중세기적인
배경을 서서히 탈피하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시스티나교회의 벽화를 보는 사람들에게
는 성당임에도 불구하고 나체화들이 조금도 어색하게 느껴지지를 않는다. 근육과 힘의
상징이 유감없이 표출되고 있다.
  이런 과정을 밟아서 중세기적인 것으로부터 다시 고대를 거쳐 인간성 회복의 운동이
일어났고, 그런 변혁이 그대로 문예부흥의 정신을 이어받게 된 것이다. 이 재발견된
인간은 이성인간인 것이다.

  종교개혁도 그렇다. 오로지 믿음이면 되며,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는 중세기
적인 전통에서 사유하는 이성이 회복되며, 신앙은 인간 양심과 일치되는 진리에의 추
구와 합치되어야 한다는 새로운 운동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우리가 루터에게서 발견
하는 것은 신부나 수도사 같은 교역자가 아닌, 탐구하는 신학자
로서의 인간이었던 것이다. 신앙은 양심과의 일치에서 받아들여지며, 성서는 교리를
옹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적 삶의 진리로서의 의미를 갖추어야 하는 것이다. 신
학과 신앙 때문에 존재하는 인간과 이성이 아니라, 인간이 신학을 만들며 신앙을 개척
해나가려는 풍조로 바뀌게 된 것이다.
  이렇게 거대한 두 가지 사상적 흐름이란 시대와 사회를 풍미하고 난 뒤, 서구사회를
중심으로 새로운 근대화 작업이 시작되었고, 그 정신이 지금까지 우리들에게 계승되고
있다. 정신적으로는 그 근대화의 흐름이 현대사회에까지 미치고 있는 것이다.
@ff
    42 천재들의 시대: 레오나르도 다 빈치(1452-1519년)
  그때 세계에서는-
  1385년: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 창립
  1392년: 이성계, 조선 건국

  우리는 세계사에 있어서의 르네상스를 얘기했다. 그러나 발상지는 당시의 이탈리아
였고, 그것도 피린체(플로렌스)를 중심으로 일어났다는 사실을 주목하게 된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수많은 천재들이 같은 시대에 태어나 활동했기 때문이다. 그리
고 그와 비슷한 사태들은 다른 지역에서도 뒤따라 일어났다. 영국.프랑스.독일 등에서
였다.
  이탈리아 르네상스때 가장 그 시대를 대표하는 천재중의 천재는 누구였다고 보아 좋
을까?
  아마 우리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들어 좋을 것 같다.
  우리는 그의 유작으로 되어 있는 세계적인 명화들을 생각한다. 파리의 루브르 박물
관을 찾은 사람들은 그의 그림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낸다.
  그러나 알아보면 레오나르도의 그림은 그의 수많은 업적 중의 작은 한 부분을 차지
하고 있을 뿐이다. 러시아 작가이자 평론가인 메레즈코프스키는 레오나르도를 가리켜
'미완성의 천재'라는 말로 표현한다. 역시 가장 많은 분야에서 창조적 역할을 한 천재
였다.
  다음과 같은 상상을 해보자.
  레오나르도가 그림을 그린다. 그리다가 어깨에 관심을 가진다. 그리고는 미켈란젤로
가 조각을 하기위해 극육을 연구하는 모양인데, 극육의 구조를 과학적으로 조사해야겠
다고 생각한 레오나르도는 해부학을 연구해 그 결과를 설명한다.
  그리고 그는 새가 하늘을 날 때 어느 정도의 근육의 힘을 갖고 공기의 압력을 가하
는지 알아본다. 그것이 밝혀지면 사람도 인공날개를 갖고 하늘을 날 수 있을 것이라고
착상한다. 그래서 수학물리학적으로 그압력을 연구해 본다. 우리가 그를 최초의 비행
기 제작의 시도자로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 비행 가능성을 연구하던 레오나르도는 얼마 전에 청탁을 받았던 난공불락의 성곽
을 쌓는 구조와 방법을 회상해본다. 성을 구축하는 데 필요했던 물리적 운동의 계산이
필요했던 때문이다.
  그러다가 그는 큰 돌을 작은 기계로 손쉽게 들어올리는 기술을 찾아본다.
  가장 작은 힘으로 엄청 큰 물건을 옮기려면 아무래도 피스톤의 힘을 이용해야 할 것
이다. 그는 그 기계제작에 착수한다. 그리고는 기둥을 하나만 세우고 큰 강을 가로지
르는 다리를 건설하는 일은 불가능할 것인가를 계산해본다. 그 당시 사회가 모두 요청
하고 있는 과제들이었기 때문이다.
  저녁에 잠시 쉬는 시간에 당시 많이 읽히는 시집을 읽고는 일을 시작해본다. 이렇게
수많은 일을 거치다가 생각난 듯이 그때 그리던 그림을 마저 완성시켜야 할 텐데 하고
화폭으로 돌아와 그림을 계속한다. 그러나 그 그림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또 다른 일들
에 착수하게 된다.
  그래서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그림들은 완성품이지만 이탈리아에 있는 많은
그림들은 미완성의 상태로 남아 있다. 오래 레오나르도의 시간과 손질을 기다리다가
오늘까지 남게 된 것이다. 그 가장 대표적인 그림의 하나가 밀라노에 있는 '최후의 만
찬'이다. 완성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말할 바가 없다. 다른 작업들은 후대 사람들
이 계승할 수 있어도 그림은 그 작가에 의해 완성되어야 하는 것이다.

  사실 레오나르도는 빈치라고 하는 한 촌에서 태어나 자랐다. 부친이 누군지 모르는
사생아로 태어났다고 한다. 불행하게도 오른손을 쓸 수 없어 손으로 하는 모든 일들을
왼손으로 했다. 글씨도 그렇다. 거꾸로 놓고 보아야 정상적이 되는 것이다. 한때 이탈
리아에서 개최했던 레오나르도 박람회가 있었다. 거기에 보면 그림은 지극히 작은 부
분을 차지할 뿐, 가장 많은 부분은 과학과 기계 분야다. 그러면서도 시인이었고 음악
가였다. 철학자 책을 읽으면 레오나르도는 혼자서 13가지 영역에 걸친 창작적 역할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도 그러했듯이, 사랑.가정.결혼.재산 등은 전혀 소유한 바가 없었
다. 오로지 일에서 일로 연결된 일생을 살았을 뿐이다.
  지금도 이탈리아 인들은 로마의 비행장을 레오나르도 다 빈치공항이라고 명명하고
있다. 긍지와 함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고 싶어서일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이러한 천재들이 늘 뒤를 다투어 쏟아져나왔기 때문에 오늘에 이
르기까지 인류역사에 기여하는 위대한 문화적 혁신을 성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생각하면 부러울 뿐이다. 우리도 세종대왕 때 적지 않은 인재들이 배출되었으나 그
뒤를 계승하지 못해 암울한 역사를 남겼다. 3.1운동을 계기로 또 한번 많은 인재들이
배출되었으나 일제때문에 모든 것이 단절되어버렸다.
  지금쯤은 또 한번 한국적 르네상스가 찾아올 듯도 한데 그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기계와 기술에 매달려 있으나 과학적 사고가 빈곤하며, 젊은 대학생들까지도 학문에는
관심이 없고 정치운동에 빠지는 것을 보면 안타까운 생각이 들 뿐이다.
@ff
    43 자유로운 학문과 사상의 탄생: 인문주의자들의 등장(16세기경)
  그때 세계에서는-
  1405년: 투르크, 오스만 투르크의 재건, 마호메트 1세 즉위
  1543년: 코페르니쿠스 "천체의 운행에 대하여", 지동설 발표

  문예부흥 이후부터 시대적 변호를 가져온 또 하나의 철학 및 사상의 변화는 자유로
운 학문과 새로운 철학의 가능성이 전개되었다는 점이다.
  중세기는 종교적 분위기와 권위의식에 밀려 고대철학과 사상의 연구가 자유로이 이
루어지지 못했다. 교회가 인정하고 용납한 아리스토텔레스에 관한 스콜라적 연구가 허
용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문예부흥부터는 고대철학의 대부분이 숨겨짐 없이 연구의 대상이 되었다. 반
기독교적인 사상들까지 받아들여지게 된것이다. 물론 교회의 비판과 박해도 없지 않았
으나, 이미 자유로운 학문과 사상의 물결을 막을 수는 없었다. 둑은 무너지고 만 것이
다.
  종교계의 지도자들이 신학보다는 수사학과 논리학에 뜻을 모으기 시작했고, 새로운
학문의 방법이 탐구되는 길이 열렸다. 심지어는 고대철학 후반기에 성행했던 회의주의
사상까지 널리 공감을 받게 되었을 정도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일어난 또 하나의 운동은 고정에 대한 비판운동이다. 우리는 이 점
을 가벼이 보기 쉬우나, 종교적 권위주의 사회에서는 대단히 큰 변혁임을 깨달아야 한
다.
  동양의 경우를 생각해 보라. 노장철학을 도교로 받아들이고 있던 사람들은 "장자"의
내용을 의심없이 그대로 장자의 교훈으로 받아들였다. 그렇지 않으면 비난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근대사회로 접어들면서는 학자들이 비판을 가하기 시작해, 결
국은 장자의 '내편'7편만이 장자의 직접적인 교훈일 뿐, 나머지는 후인들이 추가해 놓
은 내용들이라는 비판을 가하게 된 것이다. 지금 우리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지극히 당
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 당시에 그 과정을 거쳤다는 것은 큰 혁명에 해당하는 것이다.
  하물며 근대의 학자들이 성경에 대한 내용에까지 비판을 시정을 가했다는 것은 큰변
혁이 아닐 수 없다. 사상의 권의주의가 소멸되고 새로운 학문의 탄생이 가능해졌다는
증좌이기도 한 것이다.

  우리는 그 시대의 자유로운 학문의 연구자들을 일관적으로 인문주의자들이라고 부른
다.
  많은 학자들이 등단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인문주의자들 중에는 종교계의 지도자
들이 상당수 들어가 있다. 그들은 자유로운 학문과 더불어 자유로운 신앙의 문을 열어
주었다고 버아서 좋을 사람들이다.
  에라무스(Erasmus, 1467-1536)는 16세기의 볼테르라고 불릴 절도로 자유로운 사상과
학문의 소유자였다. 그는 플라톤과 아리스토 텔레스를 연구했고 "자유의지론"을 쓰기
도 했다.
  멜렌히톤(Melanchton, 1497-1560)도 아리스토텔레스를 연구했고 종교와 철학적 사상
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이런 맥락을 따른다면 우리는 야콥 뵈메(Jacob Bohme, 1575--1624)의 이름도 놓쳐서
는 안될 것이다. 아마 그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야말로 독일이 낳
은 최고의 천재 중 한사람으로 인정해 좋을 것이다.
  그는 미천하게 자랐다. 구두 수선공의 일을 하고 있었다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침 햇빛이 쇠붙이에 부딪쳐 반짝이는 것을 보면서 사색의 줄거리를 풀어가기
시작해 마침내는 "새벽(Aurora)"이라는 저서를 남기게 되었다. 이 책은 온전히남아 지
금도 학자들의 연구재료로 제공되고 있다. 여러 해 전에는 우리 나라에도 그 책의 새
로운 판 몇 부가 광화문 서점에 나온일이 있었다.
  그는 한마디로 말하면 신비주의적 종교 철학자였다고 보아 좋을 것이다. 기독교의
전통과 탈을 벗어난, 완전히 독자적인 종교적 세계관을 개척해준 것이다.
  이제부터는 누구나 중세기적인 기독교의 전통과 신앙적 울타리를 벗어나 자유로운
종교관을 가질 수 있으며, 인간이 교회신학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뜻대로
종교와 신학을 논할 수 있다는 변혁을 일으켜준 것이다.
  이러한 자유로운 문학과 사상의 발달이 사회철학 및 자연과학과 더불어 형성되면서
기독교 세기였던 중세기에서 제각기의 국가.민족적 문화와 사상을 개척하는 기운이 트
이게 된 것이다.
  이때 일어난 또하나의 정신적 혁명은 중세기를 계승해온 교회의 언어인 라틴어를 떠
나 제각기의 모국어를 갖고 새로운 문화운동을 일으키게 되었다는 변화인 것이다. 어
떤 사람들은 신부들만이 라틴어로 읽게 되어 있던 성경을 루터가 독일어로 번역해서
누구나 읽게 만들었다는 사건을 두고 서구역사상 빠뜨릴 수 없는 중대사였다고 말하고
있다. 이미 라틴어는 사회언어가 되지 못하고 교회의 언어로 제약받기에 이른 것이다.
이런 과정들을 거치면서 문예부흥 운동은 완전히 새로운 근대 문화로 철학을 창조해내
는 계기를 만들게 되는 것이다.
  수많은 철학자들이 독창성 있는 철학을 체계적으로 펴낼 수 있는 충분한 준비가 갖
추어져갔다. 그래서 인간회복을 위한 문예부흥 운동은 여러가지 의미를 포괄하는 새로
운 휴머니즘으로 정착되며 그것이 근대사상과 철학의 모체가 된 것이다.
@ff
    44 자연철학과 자연과학: 브루노(1548-1600년) 등
  그때 세계에서는 _
  1412년: 로마교회, 면죄부 판매를 비난한 보헤미
  아의 종교개혁자 후스를 파문
  1581년: 갈릴레오 갈릴레이, 진자의 등시성 발견

  지금은 자연철학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되어 있다.그러나 옛날로 올라갈
수록 자연과학보다는 자연철학이 더 일반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러다가 19세기 후반부터 자연에 대한 과학적 연구가 본격화되면서 그 영역이 점차
확대되었고 자연철학은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된 것이다. 그 철학에서 과학에로의 과정
이 잘 나타난 제1차적 시기가 르네상스 직후인 것이다.

  옛날 사람들에게서 모든 생활이 인간과 자연의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오히려 자연은
방대하고 인간의 수는 적었기 때문에 자연의 위력이 인간의 능력을 지배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중국의 사상가들이 천이라든가 도라는 철학적 개념을 높이 여긴 것도 자
연에 대한 철학적 관념을 따서 얻은 것이다. 그리스 인들은 운명은 절대적인 것으로
여겼다. 그 운명관은 자연의 반복되는 필연관에서 추상해낸 뜻이다.
  이렇게 속을 모르는 자연을 대하면 자연은 우주와 통하며, 우주에 대한 생각은 철학
적 견해와 통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뒤 자연과학이 어느정도 발달되고 자연 속에 숨겨진 신비로운 사실들이 밝혀지면
서는 대자연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신비의 생명체 비슷이 여겨지기도 했다. 자연은
인간까지도 포함한 어떤 신비로운 세계로 존재하는 것 같은 생각이 일반적이었다.
  지금은 잊혀지고 있는 여러 학자들이 자연철학의 영역을 새로이 정립해나갔다. 아마
그중에서 지금도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브루노(G. Bruno,1548--1600) 같은 학
자일 것이다.
  그는 고대철학을 함께 연구한 도미니크 교단에 속하는 수도사였다. 그 당시까지의
자연과학의 이론을 묶어 자연철학을 연구, 발표했다. 그 사상이 당대에서 보았을 때는
너무 급진적이었기 때문에, 반종교적인 혐의를 받아 여러 곳으로 유랑생활을 하다가
체포되어 7년간 감옥생활을 강요당한 뒤, 한창 일할 나이인 52세로 사형을 당했다. 한
때 사람들은 소크라테스 이후의 사상적 처형이라고 해서 큰 충격을 받았다. 3백 년이
지난 1900년에야 그의 업적과 죽음을 애석히 여기는 기념비가 새워졌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 브루노의 학설을 배경으로 스피노자의 철학이 탄생되었고, 라이프니츠의
단자론 사상이 나온 것을 보면 그는 역시 새로운 역사의 개척자이도 했다. 사람들은
그의 자연철학을 범신론적인 보편주의 세계관이라고 보고 있다. 그 핵심을 만들고 있
는 것은 자연적 신비정신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연에 대한 철학적 사고는 자연과학의 급속한 진전에 따라 그 입지
가 약화되기 시작했다. 그의 위치를 뒤받은 과학자들로는, 수학적 과학의 존귀성을 강
조하면서 실험을 통한 경험의 정밀성을 추진시킨 레오나르도 다빈치,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라는 글로 천동설을 뒤엎고 지동설로 바꾸어 놓은 N. 코페르니쿠스(N. Coernik
us, 1473-1543), 천문학, 수학, 물리학, 유성운행의 법칙을 발견한 요한 케플러(J. Ke
pler, 1571-1630) 등이 있다. 특히 케플러는 가설과 귀납방법을 병행시켰고, 자연과학
은 질이 아닌 양적 연구의 정밀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물론 그 방법적 바탕이 되는 것
은 수학이었다.
  이밖에도 우리가 잘 아는 갈릴레오 갈릴레이(G. Galilei, 1564--1642)를 잊을 수가
없다. 그는 실험에 의하여 물체계를 수량으로 규정하는 분해적 방법을 제창했다. 약간
시대적으로는 뒤지나 아이작 뉴턴(I. Newton,1642--1727)도 이 시대에 활동한 사람들
이다. 그도 만유인력 학설을 정착시켰고 미적분은 발견했는가 하면, 자연과학의 방법
론적인 개척에 공헌했다.
  이러한 과학자들이 한 시대를 풍미하고 지나간 뒤부터는 과거와 같은 자연철학은 서
서히 그 성격과 방향을 바꾸어나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던 것이 19세기 후반기에
는 놀라울 정도로 자연과학이 발달하고, 오늘의 기계와 기술의 왕국시대를 만들면서는
자연철학은 거의 그 위상을 유지하기 어려운 상태로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아주 최근에 이르러 발달된 자연과학과 기계 및 기슬의 남용이 자연훼손과 환경오염
의 극치를 만들게 되면서는 다시 한번 인간의 어버이는 자연이며 자연을 파괴한 인류
는 인간 자체의 파멸을 초래한 것이라고 떠들게 되었다. 그러나 여기에 나타나는 자연
은 이미 고대인들이 주장했던 철학적 대상의 자연은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되살리는 일이며, 가능하다면 원시자연으로 환원시킬 수 있다면
그것이 소망스럽다는 방향으로 되돌아 가고 있다.
  인간은 자연과의 투쟁에서 더 많은 행복과 혜택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착각했다.
그러나 자연과의 조화, 자연의 밝혀지지 않은 혜택을 누릴 수 있음이 진정한 삶인 것
을 깨달아가는 것 같다. 이때 새로운 정신이 등단할 수 있다면, 그것은 자연과학을 통
한 자연의 육성, 인간의 지혜를 통한 자연에의 봉사가 인간적 삶의 정도임을 깨닫게
해주는 내용이 될 것 같다.

  (그림설명) 19세기 후반부터 자연과학이 발달하면서 자연철학은 거의 자취를 감추었
다. 그림은 시간과 공간의 바다 한가운데 바위 위에 앉은 뉴턴이 컴퍼스와 두루마리
종이만 가지고 우주를 정의하려는 모습. 시인 블레이크의 1795년 작품. 그는 뉴턴의
천재성은 인정하나, "신은 수학적 도형이 아니다."고 말했다.
@ff
    45 고맙지 않은 사회철학자:N. 마키아벨리(1469-1527년)
  그때 세계에서는
  1440년: 독일 구텐메르크, 활자를 개량함
  1582년: 그레고리 력의 채용

  중세기에는 기독교의 세계관이 모든 면에서 영향을 떨치고 있었다.
  따라서 사회문제보다는 교회제도가 더 큰 비중을 차지했다. 마치 사회가 교회를 위
해 존재하는 듯이 생각되었고, 교회는 사회의 모범인 것으로 모두가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르네상스를 거쳐 근대사뢰로 접어들면서는 교회를 떠난 사회, 사회의 한
부분으로서의 교회의 위치로 모든 것이 바뀌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면 자연히 교회와 무관한 사회철학이 연구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어진
다. 몇 사람의 대표자들이 나타나 법과 법철학, 자연법 사상을 보급시키기 시작했고,
그것은 자연히 국법의 영역으로까지 확대되어나갔다. 경제학은 아직 때가 일렀으나.
정치학에서 정치철학적인 연구는 자연히 비중 크게 나타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그런
사상은 갈등과 모순이 해소된 이상적인 사회에 대한 꿈도 키우게 되었다. 이미 플라톤
이 이상적인 국가에 대해 저술해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던 과거도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잘 아는"유토피아"의 저자 토머스 모어의 출현도 이 시대였다. 유토피아란
본래가 이 세상에는 없는 이상향을 뜻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항상 추구하는 이상향
으로서 사라지지 않는 꿈을 키우려고 했던 것이다.
  토머스 모어(Thomas More, 1478--1535)는 영국의 대법관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사상
때문에 헨리 8세에 의해 처형당했다. 그러나 이상적 사회에의 꿈은 사라질 수가 없는
것이었다.

  이 즈음에 나타난 이탈리아의 한 사회철학자, 좀더 솔직히 말하면 정치철학자가 있
었다. 그가 유명한 "군주론"의 저자 니콜로마키아벨리(N.Machiavelli, 1468--1527)였
다.
  그의 사상을 간추리면 대략 다음과 같다.
  그는 사회문제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은 정치권력이라고 보았다. 모든 것은 정치
를 통해 해결되며, 문제는 정치권력이 어떻게 행사되느냐에 따른다. 이때 문제가 되는
것은 정치적 가치와 도덕적 가치의 갈등이다. 모든 사람들은 도덕적 가치가 우위에 있
다고 생각하나, 정치가치도 결코 뒤져서는 안된다. 오히려 정치적 목적에 도달하기 위
해서는 도덕적 가치가 수단과 방편으로 이용되어도 무방하다. 결과가 좋으면 어떤 수
단을 쓰거나 과정을 밟았다고 해도 문재삼을 필요가 없다.
  약자보다는 강자가 정의를 집행하며 대신할 수 있다. 약자는 패자이기 때문에 아무
것도 남기지 못한다. 패자의 도덕관은 버림을 받을 수밖에 없어진다. 정권을 많이 수
행하는 군주는 절대적이며, 그것은 신의 가호를 받아 마땅하다. 따라서 주권자는 모든
행위의 표준이 될 수밖에 없어진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이러한 정치만능의 사회, 정치권력의 정당성이 인정되는
제도를 옹호했기 때문에 왕권과 정치지도층에서는 정당성이 인정되며, 오랫동안 종교
권 밑에 깔려 있던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근대사회로 발전하면서는 대단히 위엄시당하
는 학설이 되곤 했다.
  니체의 권력의지를 숭상한 히틀러가 바로 그런 과오를 범했고, 이데올로기를 앞세운
공사주의 집권자들이 현대판 마키아벨리 정신을 실천한 셈이 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6 25 당시 개헌론을 앞세웠을 때 일부 학자들이 마키아벨리의 망상에 사로잡힌 처사라
고 비난하기도 했다. 아직도 우리 정치계의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 낡은 옷을 버리지
못하고 있음은 답답한 일이다. 힌때 우리 나라의 국무총리를 지낸 이범석씨도 자기는
나폴레옹과 히틀러를 존경한다고 말해 지성인들을 실망시킨 일이 있었다.
  여기에 나타난 두 가지 위엄한 사상은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시쿄주며, 이상은 과정
을 무시해도 된다는 과오를 범할 뿐 아니라, 심지어는 인간을 정치의 도구와 수단으로
만드는 반민주적이며 비인도적 과오를 범할 잘못을 저질렀던 것이다.
  우리가 지금도 폭력과 독재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정치인들을 마키아벨리의 후계자로
보는 이유를 짐작할 수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근대초기에 정치 및 정치철학적 사고가 "군주론"에 의해 탄생되었다
는 점은 가볍게 볼 수가 없다. 어쨌든 "군주론"의 사상은 교회 일변도의 중세기를 탈
피하는 데 큰 힘을 제공해주었으며, 대부분의 왕권국가에서 이런 정치권력이 나올 수
있었던 배경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가 있다.
  그러나 정치만능의 사고방식이나, 정권에 앞선다는 워험스러운 사상과 정신은 바삐
시정되지 않으면 안된다. 정치인들이 이렇게 편협된 사고방식에 빠지는 것도 걱정스러
운 일이다. 운동권 대학생들까지 같은 사고방식에 빠지는 것도 걱정스러운 일이다. 운
동권 대학생들까지 같은 사상의 노예가 된다는 것은 우려스러운 바가 아닐 수 없다.
마키아벨리를 반박하면서 스스로 그 후계자들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림설명) 피렌체의 정치적 혼란기에 "군주론"을 지은 니콜로마키아벨리. 마키아벨
리즘을 탄생시킨 장본인이라는 비난과 함께 근재정치학의 아버지라고도 불린다.
@ff
    46 진실에의 길, 경험과 귀납:F. 베이컨(1561-1626년)
  그때 세계에서는
  1520년: 명나라, "대진회통" 완성(180권)
  1560년: 이어, "성학집요"

  만일 모든 중세기적인 철학의 성격을 끝내고 근대적인 철학을 정착시켜준 대표적인
철학자를 꼽는다면 우리는 베이컨(F. Bacon,1561-1626) 같은 이를 뽑아야 할 것이다.
  사람들은 프랑스의 데카르트와 영국의 베이컨을 가리켜 근대철학의 아버지라고 부른
다. 데카르트는 대륙을, 베이컨은 영국을 대표하는 새로운 철학의 개척자들이었다.
  베이컨은 영국의 대법관이었다. 대륙, 특히 독일의 전통을 따른다면 교수들이 학계
와 철학계를 좌우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영국에서는 법관, 의사, 회사원 등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철학계에 공헌하고 있다. 영국철학이 건전한 사회상
식의 선을 넘어서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지 모른다. 사회적 공감대가 없는 사상과
학문은 시민들의 호응을 받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대법관으로 있으면서 새로 발달해가는 자연과학과, 경험주의적 인식과 철학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임했다. 진정한 지식의 획득을 염원하면서 새로운 논리학 체
계를 시도했다. 그안에서 그는 전통과 인습적으로 주어진 철학과 학문의 대부분은 객
관적 타당성이 없는 편견과 독단적 사고의 결과라고 비판했다.
  베이컨의 4가지 우상론은 유명한 것으로 되어 있다. 중세기를 통해 비판 없이  받아
들여지고 있는 학문과 철학은 버림을 받아야 하는 우상적인 것이라고 질타했다. 유명
한 우상(idola)설이 바로 그것이다. 옛날의 스승들이 가르친 것이면 비판 없이 진리로
받아들이며, 종교적 권위의식 때문에 비판 없이 수용하는 대부분의 철학과 지식이 그
런 것들이다.
  사람들은 만인이 공동으로 인정할 수 있는 지식의 절대적인 척도가 있는 듯이 착각
하고 있으나, 그것은 하나의 우상적인 사고일 뿐이다. 절대적인 진리 같은 것을 믿어
서는 안된다.
  플라톤의 국가편에 나오는 비유와 같이 자연적인 광명을 배제하고 동굴 속에 들어가
서 얻은 개인적인 명상의 산물과 같은 주관적 관상 등은 버려야 한다. 언제나 자연적
법칙과 이성의 빛으로 평가받는 밝혀진 지식이여야 한다. 동굴에서 탄생되는 우상적
사고는 더이상 필요가 없다.
  학문과 진리는 '시장의 이돌라'에 빠져서도 안된다. 대중이 떠들고 많은 사람들이
상품화하면 그것이 곧 진리인 듯이 착각해서는 안된다. 그것들은 사회가 불필요하게
생산해놓은 언어의 옷을 입은 상품 같은 것에 지나지 못한다. 그런 사람들은 절대라든
지 운명이라든지 신비라는 말로 우리를 현혹할 뿐이다.
  베이컨의 네번째 우상은 극장의 우상이다. 극장에서는 연극물을 만들어내며 보는 사
람들의 관심을 끌어들인다. 그러나 극장 밖에 나오면 현실과는 일치되는 바도 없으며,
그 객관적 의미를 부여받지도 못한다. 대부분의 철학적 전통에 의한 학문과 지식들이
그런것이다. 때로는 무의미하고 불필요한 학설이 연출될 뿐이다.
  이렇게 과거의 선입관이나 편견들을 우상으로 돌린 베이컨에게 그러면 어떤 학문이
철학으로서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가?
  그는 두 가지 방향과 방법을 제시해준다. 그 첫째는 모든 학문은 경험적 영역에 국
한시켜야 하며, 귀납적 방법이 인정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고대의 철학설들과 중세기의 철학 등은 모두가 철학자들의 자의적 인 사상과 체계에
속할 뿐이다. 생활과는 동떨어져 있으며 경험세계와 무관한 내용들이 어떻게 학문으로
인정받을 수 있겠는가. 경험할 수 없는 것은 지식이 될 수 없으며, 경험의 영역을 벗
어난 것은 지식으로서의 가치와 의미를 상실한 것이다.
  그러면 그 경험의 내용이 어떻게 진리로서의 지식이 될 수 있는가?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느 여러가지 사태에서 귀납적으로 추려모은 것이 어떤 원리와 법칙이 되고, 그
원리와 법칙이 타당성을 가질 때 그것은 진리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자연과학이 우리
에게 주는 필수적인 방법이며, 철학도 그와 같은 성격의 과학성을 가져야 한다.
  자연과학은 가장 중요한 학문이다. 그것은 능력을 갖추며 모든 것을 정복할 수 있으
며 지배하는 힘을 갖춘다. 아는 것이 곧 힘이다. 그리고 철학도 같은 성격과 내용을
갖추어야 한다. 물론 수학이나 논리학 같은 성격과 내용을 갖추어야 한다. 물론 수학
이나 논리학 같은 연역적 성격을 가진 학문의 방법도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이
철학의 영역을 차지하게 되면 철학은 또 하나의 독선적 과오를 범하게 된다.
  이렇게 되어서 베이컨은 앞으로 오래 지속될 영국적 철학의 기초를 확립시켜준 것이
다. 경험과 귀납, 이 둘을 배제한다면 영국의 철학은 설 자리를 잃게 되는 것이다. 베
이컨의 후계자들은 그 뒤를 계승해 오늘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림설명) 근대철학의 시조로 불리는 베이컨. 그는 중세기를 통해 비판 없이 받아
들여진 학문과 철학은 버려야 할 우상적인 것이라고 비판했다.
@ff
    47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있다':R. 데카르트의 방법론 "방법론 서설" "1
637년"
  그때 세계에서는
  1628년: 영국의회, 권리청원 제출
  1636년: 조선, 병자화란 발발

  F 베이컨이 참신한 영국의 경험주의적 철학을 정착시키고 있을 때, 대륙을 대표하는
프랑스의 R. 데카르트는 그와 상반되는 대조적인 철학을  개척해갔다. 두 사회와 언어
와 민족성의 차이는 그만큼 상반되는  것이었는지 모른다.
  데카르트를 소개하기 이전에 하나의 가상적인 이야기를 먼저해보자.

  여기 한 경험주의 철학자가 있었다고 하자. 그는 내 눈으로, 본것, 내 손으로 만져
본 것, 내가 직접 듣고 접해보지 못한 것은 믿을 수 없다는 생각을 굳게 지니고 있었
다.
  어느날 그는 친구를 찾아 산길을 지나게 되었다. 가다가 보니까 길을 가로지르는 커
다란 구렁이를 한 마리 발견했다. 깜짝 놀란 그는 소나무들 뒤로 몸을 숨겼다. 하마터
면 구렁이에게 물려 죽을 뻔했다고 큰 숨을 내쉬었다. 얼마 후에 다시 바라보더니 그
구렁이느 그대로 그 자리에 있었다. 다시 몸을 숨긴 철학자느 혹시 저놈의 구렁이가
죽은 것이 아닌가 싶었다. 역시 움직이질 않는다. 돌을 던져보았더니 여전히 꼼짝 않
는 것이다.
  철학자는 안심하고 나와 구렁이가 있는 곳까지 가까이 가보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
었다. 그것은 구렁이가 아니고 썩은 밧줄이었던 것이다. 철학자는 고뇌에 빠졌다. 언
제나 믿을 수 있는것은 내 눈으로 본 것과 내 손으로 만져본 것이라고 믿어왔는데, 내
눈이 나를 속이면 어떻게 되는가. 무엇을 믿을 수 있겠는가.  찾아가는 사람이 내 친
구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머리를 숙인 철학자는 맥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대문 앞에 서서 썩은 밧줄을 구렁이
로 본 내가 이 집이 내 집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바로 알 수 있겠는가. 망설이고 있는
데 아내가 나오면서 '어떻게 이렇게 빨리 돌아왔느냐'고 물었다. 그느 저 여자가 내
아내인지 아니면 옆집 여자인지, 또는 다른 물건을  잘못 보고 있는지를 어떻게 알겠
느냐는 회의에 빠져든 것이다.
  의심은 계속해서 더 큰 의심으로 바뀌고, 진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에 빠져
들었다. 밤 깊도록 의심과 회의에 빠져 있던 철학자는 한 가지 사실만은 의심하지 않
아도 된다는 생각에 도달했다. 그것은 '의심하고 있다'는 원초적인 사건이었다. 의심
한다는 것은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무엇이 의심을 하고 있는가? 내가 의심하고 있
다. 그렇다면 의심하며 생각하는 내가 있다는 것은 틀림이 없다. 그렇다면 의심의 대
상이 되는 무엇도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을 확대해나가다 보니까 의심
의 베일은 조금씩 벗겨지고 점차로 새로운 지식을 확대새켜나갈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이것은 우리가 만들어낸 하나의 이야기다. 그러나 있을 법한 이야기다.

  데카르트(R. Descartes, 1596-1650)는 드물게 보는 천재였다.넉넉한 가정에 태어나
일찍부터 학문에 뜻을 두었다. 그 당시에는 세계적인 학자들이 대부분 프랑스에 있었
고 파리는 학문의 본고장과 같았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일찍부터 여러 스승들을 찾아
다녔다. 그리고 당시 모두가 연구에 몰두해 있던 수학, 기하학 등의 기초학문을 터득
했다. 자연과학 분야에서도 필요한 것은 거의 습득했다.
  그런데 두 가지 점에서 공허함을 느꼈다. 새롭고 모든 학문의 기초가 되는 방법론이
없다는 사실과, 모든 철학의 기초적인 연구가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고대 철학자
들의 학설은 주관적인 가상의 산물이었고, 중세기의 철학적 논쟁들은 근거도 확실성도
없는 말장난에 불과한 것임을 발견했다.
  실망한 데카르트는 내가 새로운 학문의 방법과 철학을 개척해야 하겠다는 자부심에
찬 학문적 탐구를 시작했다. 그 자신이 유명한 스승들에게서 실망해버렸다고 고백하고
있을 정도였다. 더 찾아서 학문적 지도를 받을 스승이 없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때 데카르트는 확실하고 그 자체가 명백한 지식을 찾아야 히며, 더 의심의 여지가
없는 지식을 진리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확신했다. 의심할 수 있는 것은 모두를, 의심
의 대상이 되는 온갖것을 회의로 돌리자. 회의에서 회의에의 과정을 끝까지 추구해나
갔다. 그래서 얻은 결론이 그의 유명한 "방법론 서설"이 된 것이다. 베이컨이 부정을
통한 긍정의 길이었다면 데카르트는 회의를 통한 진리의 길을 모색해 나갔다고 하겠
다.
  그러다가 전혀 의심할 수 없는 한 가지 사실로서의 명제를 얻게 된다. 그것은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있다"는 판단이었다. 이 말이 데카르트 철학의 출발점인 동
시에 대륙 이성론의 기초가 될 줄은 그 자신도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데카르트의 회의가 근대철학을 탄생시켰다고 밀한다.
  소크라테스의 회의가 그리스철학을 탄생시켰고, 아우구스티누스의 회의가 중세철학
의 발단이 되었다면, 데카르트의 회의는 근대철학의 출발점이 되었던 것이다.

  (그림설명) 데카르트. 17세기 프랑스 최대의 철학자로서 근대 합리주의 철학의 아버
지라 일컬어진다. 회의에서 출발한 그의 철학은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
한다'라는 명제에 도달했다.
@FF
    48 대륙철학과 영미철학: 연역법과 귀납법의 특성
  그때 세계에서는
  1600년: 영국, 동인도회사 창설
  1609년: 이탈리아 갈릴레이, 천체망원경 발명

  데가르트의 이야기를 이어가보자.
  '나는 의심한다'는 것은 '나는 생각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나는 생각한다. 그러
므로 나는 있다'는 명제가 나올 수 있는가? B. 러셀은 그것은 지나친 비약이라고 본
다. 생각이 진행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생각의 주체가 나라는 것은 논리
적 비약이라고 본다.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생각하는 것은 내 마음이다(영국인들이면 마음과 더불어 의식이
라는 개념을 썼을지 모른다). 그러면 생각의 대신과 자연계의 물질이다.    그렇게 되
는 것은 인간 자체가 서로 상반되는 두 가지 요소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에게는 정신과 신체가 있다. 그중, 정신은 신과 통하는 것이며, 신체는 물질과
연결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존재하는 것은 정신과 물체라고 나누어볼 수 있다.전통적
인 개념에 따른다면 2원론이 되는 셈이다.
  그러면 어떻게 인간은 이 이질적인 두 가지를 공유하게 되는가? 데카르트는 그 당시
에 새로운 학문으로 관심을 모으던 해부학을 배경으로 우리 목 뒷부분에 있는 송과선
이 바고 정신과 육체의 연결점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스운 이야기
이나 그 당시에는 통할 수도 있는 설명이었다. 천재들은 때때로 바보스러운 생각을 하
거나 지혜를 거꾸로 쓰는 경우가 있기도 하다. 뉴턴은 연구실과 거실 사이에 두 개의
구멍을 뚫었다는 것인데 그 이유가 걸작이다. 큰 구멍은 개가 다니고 작은 작은 것은
고양이를 위해서였다는 얘기다. 친구가 큰 구멍 하나면 고양이도 다닐 수 있지 않으냐
고 물었더니, "내가 그 생각은 못했구만..."라고 공감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사실인지
는 모르나, 뉴턴 같은 사람도 때로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현실판단을 한다는 뜻에서
나온 얘기일 것이다.
  그러면 정신의 본질은 무엇인가? 사고다. 물질의 특성은 어디 있는가? 연장에 있다
고 보았다. 공간적 자리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존재는 근원적으로 신,
정신, 물질로 된다. 그리고 이 셋은 철학적 존재의 기본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면 이러한 철학적 근거는 어디서 오는가? 데카르트는 철학의 방법론적 근거는
수학에 있으며, 수학의 방법론적 핵심은 연역성이라고 보았다. 그렇게 본다면 데카르
트 철학의 근원은 두 가지다. 그 첫째는 이성이다. 이 이성은 선천적으로 주어진 사유
의 주체다. 그리고 그 방법은 연역법이다. 베이컨과 그렇게 대조적일 수가 없다. 경험
과 귀납이 영미철학의 주류가 되었다면, 이성과 연역은 대륙철학의 기간이 되어 오늘
에 이르게 된 것이다. 베이컨은 뒷받침하는 것은 자연과학이고 데카르트의 배후를 담
당하는 것은 수학이었다. 데카르트 자신이 해석기하학의 창안자이기도 했었다.
  데카르트는 24살 때 군에 있으면서 학문의 뜻을 세운 뒤, 종교적으로 자유로운 학설
을 제창할 수 있으며 번거로움이 없는 화란으로 이주해간다. 귀족 출신으로 경제적 여
유를 갖고 있었기에 어려움 없이 학문적 연구와 저술에 전념하고 살았던 것이다.
  이상하게도 그 당시의 대표적인 철학자들은 선천적으로 허약한 체질의 소유자가 많
았다. 말브랑슈도 그러했고 스피노자와 파스칼도 그러했다. 그래서 결혼을 단념한 편
이 많았다. 데카르트도 결혼을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후에 알려진 바로
는 결혼을 했으나 부인이 첫 해산 때 아기와 더불어 죽었기 때문에 독신생활로 돌아갔
다는 것이다.
  데카르트의 학문은 많은 공명자와 반대파 학자들을 갖게 되었으나 그의 명성은 높아
녀갔다. 후에는 스웨덴의 왕실로부터 여왕을 비롯한 왕실의 학문과 교육을 위해 초청
을 받고 이에 응했으나, 북국의 음산한 기후에 적응하기 힘들었던 모양이다. 더 큰 뜻
은 얻지 못하고 객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세월이 한참 지난 후에야 프랑스는 이 위대
한 근대철학의 개척자를 받아들이게 된다.
  여기 한가지 추가해보고 싶은 것은 데카르트를 비롯한 대륙 철학자들은 이성론, 연
역법, 직각적인 진리의 판명성을 택했기 때문에 신을 거부하거나 무신론적 철학을 제
창하지는 않았으나, 경험론, 귀납법, 심리주의를 택한 영국의 철학자들은 무신론이나
신 또는 종교와 관계가 없는 철학의 길을 선택했다는 점이다. 대개의 경우 위로부터의
이성론은 종교의 영역을 인정하나, 아래로부터의 철학은 종교와 무관해지는 이유가 여
기에 있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화란이 종교적 자유와 함께 카톨릭의 정신적 제약이
적은 곳으로 알려져 있었고, 작은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세계문화의 중심적 역할도 하
고 있었다. 역시 정신적 자유가 제약받는 곳에는 철학이나 사상적 결실이 늦어지는 경
향이 있다.
  데카르트의 후계자 중의 말브랑슈는 좀더 종교적 비중을 크게 갖는 철학자로 프랑스
에 남게 된다.
@FF
    49 '존재는 곧 자연이며 신' 스피노자(1632-1677)
  그 때 세계에서는
  1636년: 아메리카, 하버드 대학 창립
  1651년: 영국 홉스, "리바이어던"

  지금도 이준 열사의 무덤이 있는 화란의 헤이그 시에 가면 스피노자 거리가 있고 스
피노자 하우스가 있다.
  내가 갔을 때는 그 집 아래층은 어떤 변호사의 집부실로 되어 있었고, 스피노자가
빌어 살던 2층과 3층은 젊은 화가 부부가 세들어 있었다. 집무실 서가에는 세계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된 스피노자의 저서들 이 꽂혀 있었다. 2,3층에는 스피노다와 인연이
있는 물건은 아무것도 없었다.
  스피노자 당시에는 한 노파가 집의 소유자였고, 스피노자는 혼자 세들어 살았던 비
교적 크고 좋은 집이다. 집 앞 스피노자 거리에는 스피노자의 좌상 동상이 있었으나
주변에는 병조각 등 물건들이 어지러이 버려져 있었다. 청소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
다.
  만일 스피노자가 유대인이 아니고 화란인이었다면, 그 집은 기념관으로 길이 남겨지
고 이름있는 유적지로 가꾸어졌을 것이다.세계 어디에 가든지 유대인들은 그 나라에서
대접을 받지 못하도 있다.
  스피노자도 본래 화란에 살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남부 유럽에 살던 상인이었으나
종교적 자유를 얻지 위해 화란으로 이주해왔다. 스피노자는 자신의 자유로운 종교적
신앙 때문에 유대교에서 파문을 당했다. 자유로운 기독교 신앙을 택해던 까닭이다.
  일찍부터 학문을 사랑한 그는 중세철학, 유대철학, 아리비아철학을 거쳐 데카르트를
연구한 뒤 자신의 철학을 체계화시켰다. 뿐만 아니라, 계속 수학, 자연과학, 스토아
철학에도 깊은 연구를 기울였다.
  그는 누구보다도 철학자다운 삶을 살았다고 존경의 대상이 되고 있다. B, 러셀도 스
피노자의 초상화를 간직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의 철학자다운 삶이 좋아서라고 하면
서...
  그는 일체의 재산을 소유하지 않았고 명예나 지위 같은 데는 관심이 없었다. 스스로
렌즈를 갈아 그 수입으로 청빈한 생계를 영위했으면 소유를 초월한 삶을 즐겼다. 결혼
은 하지 않았다. 학문을 제일의 과제로 삼았기 때문에, 학문에 지장이 되는 가정생활
에는 관심이 없었다. 스피노자의 라틴어 선생인 엠덴이 몸이 불편한 때는 그의 딸이
대신 강의를 했는데, 그 딸과의 사이에 서로 따뜻한 감정을 느꼈었다고 전해지고 있
다. 그러나 사랑에서 결혼에로의 길은 불가능한 여로였다.
  말년기에는 스웨덴 왕실에서 초청을 받았으나 거절하고 조용히 학문의 길을 택했다.
프랑스의 볼테르 같은 이는 투기까지 한 일이 있었음에 비하면 스피노자는 가난한 선
비의 모범이라 하겠다. 어린애같이 순박하고 만사에 감사하면서 사는 어린 도사와 같
은 생활을 했다고 집주인 노파가 전하고 있다. 렌즈 가는 일이 심한 노동이었는지 모
른다. 1677년 4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데카르트를 연구한 스피노자는 철학적 방법의 근거를 수학과 기하학에 두었다. 역시
대륙철학의 줄기를 계승한 셈이다.
  그의 고전적 의미를 가지는 대표적인 저서는 "에티가(윤리학)"다. 그 책에는 부제가
달려 있다. '기하학적 방법으로 증명한 5가지 문제'라는 내용이다. 이 책의 제목은 윤
리학이지만, 그것은 스피노자의 철학의 전체적인 체계를 만들고 있다. 모든 철학적 과
제가 논술되어 있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것은 그 방법이 기하학의 증명방법과 통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떤 문제를
명제로 제시해놓고는, 정리1에 의하여 무엇이 증명되고 계측 3에 의하여 무엇이 증명
되기 때문에 그 명제는 진리일 수 있는 정당성을 갖는다는 식으로 논증하고 있다. 그
만큼 그 당시의 학문들이 합리적인 연역적 방법을 택하고 있다는 좋은 본보기의 하나
인 셈이다.
  스피노자에 의하면 존재는 하나이면서 전체로 나타나야 한다. 수적으로 보면 하나일
수밖에 없고 양적으로는 전체인 것이다. 그 존재는 자연계이다. 자연존재를 떠나서는
있을 것이 없다. 신이 존재한다면 그 전체존재와 더불어 있어야 한다. 자연은 다양한
현상으로 나타나나, 그것은 하나의 존재의 다양한 모습인 것이다. 신은 그 전체와 더
불어 있으면서도 일자인 것이다. 신은 부분적으로 나타날 수도 있어 현상적인 것이 되
나, 일자로서의 실체성을 갖기도 한다. 즉, 신은 존재의 실체이면서 자인존재다. 모든
지적 내용은 신의 속성은 만상의 내용이 되나, 인간에게 있어서는 사유와 연장이 공존
되어 있다.
  이런 철학적 견해는 자연히 범신론의 성격을 띠게 된다. 판테이즘(Pantheism)의 결
론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지적 활동이나 삶의 가치는 어디에 있는가?
모든 것을 영원한 형상밑에서 바라보며 신에 대한 지적인 사랑이 최고의 인식과 통하
게 된다. 따라서 그의 범신론은 자연히 신비주의 사상과도 일맥 통하게 된다.

  (그림설명) 대표적인 범신론 철학자인 스피노자. 신은 죽 자연이라고 생각한 그는
삶의 가치를 '영원한 형상밑에서 사물을 보며 이에 따르는 자족감, 곧 신의 지적 사
랑'에 두었다.
@FF
    50 범신론과 이신론:스피노자의 신관
  그때 세계에서는
  1653년: 인도, 타지마할 묘 완성
  1679년: 영국 버넷, "영국 종교개혁사"(--1714년)

  지금은 스피노자가 주장하느 것 같은 범신론을 그대로 믿거나 따르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러나 일부 철학자들은 철학적으로 생각하다 보면 그런 사상에 빠지는 경우가
있다. 스피노자가 범신론을 내놓은 뒤 1세기가 지나 독일의 철학자 셸링이 그 사상을
물려받아 동일성의 철학을 수립한 것을 보면, 범신론적 사고는 어떤 면에서는 일반성
을 띠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지금도 파리에 가면 유명한 관광지의 하나인 판테온이 있다. 혁명적 기여를 한 위대
한 프랑스 지도자들의 묘소인 것이다. 데카르트도그 지하실에 안장되어 있고 J.J. 루
소도 잠들어 있다. 나폴레옹도 프랑스를 위해 일하고 판테온에 잠드는 일생을 살고 싶
다고 말했을 정도다. 물론 나폴레옹은 더 큰 무덤에 잠들어 있기는 하지만...
  로마에 가도 판테온이 있다. 더 오래 된 묘소건물이다.
  이 판테온(Pantheon)이라는 말은 여기 잠들어 있는 모든 사람은 신이라는 뜻과 통한
다. 'Pan'은 모두를 뜻하기 때문이다. 판테이즘(Pantheism)과 통하는 전통의 내용이
다. 일본인들은 신사를 짓기 좋아한다. 그 신사에는 여러 죽은 지도자들의 영을 모신
다. 야스쿠니 신사는 일본을 위해 죽은 모든 사람의 영을 모시는 곳이다. 역시  범신
론적인 생각과 통하는 바가 있다. 영적인 존재는 신적인 존재와 통한다고 보는 다신론
과도 맥을 같이하는 정신일 것 같다.

  이에 비하면 유일신을 믿으며 그 인격적 신관을 견지하는 기독교의 신은 Theism으로
통한다. 그래서 같은 유신론이지만 The-ism을 믿는 기독교에서는 Pantheism은 미신적
인 것이라고 비판한다.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유신론이기 때문이다. Pantheism은 철학
적 대상으로서의 신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스피노자는 신에 취해서 신을 잃어버렸
다'고 혹평하기도 했다. 믿음의 대상이 아닌 신이었기 때문이다. 범신론은 어떤 이는
만유신론이라고도 부른다. 모든 것은 신이며, 어디에나 신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또 하나의 신관, 유신론이 있을 수 있다. 이신론(Deism)이다. 주로
계몽주의 이후에 영국 철학자들이 택한 유신론이다.
  그들은 신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 신이 자연의 법칙과 세계의 질서를 제공해주
었다. 그래서 인간적 삶과 세계질서는 그 법칙과 질서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 예배를
드린다거나 기도를 하는 일 등은 의미가 없다. 그 법칙과 질서에 따라 살면 되는 것이
다. 그런 신은 인간과 어떤 인격적 관계도 갖고 있지 않다. 세계질서가 신앙의 기틀이
되는 것이다.
  영국의 철학자들 가운데 무신론을 택하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적지 않은 철학자들이
이신론을 주장했다. 그리고 지금도 과학을 따르는 사람들, 합리적인 이성론을 따르는
사람들 중에는 적지않은 이신론자들이 있다.
  어쨌든 스피노자는 대표적인 범신론자가 되었고, 그의 철학은 종교 및 신학과도 깊
은 관련을 맺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러한 신학적 관심은 언제나 유럽 사회에서 큰
문제거리다 되어왔다. 인격적인 유일신을 믿는 기독교가 들어오기 이전까지는 신에 관
한 연구는 대개가 철학적인 것이었다. 죽 자기자신이 모든 존재의 원인이 되는 것을
신으로 본다는 철학적 신관이 비판 없이 받아들여졌다.
  또 철학 이전의 신화시대에는 신화의 주인공들로서의 신들이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사회관념으로 무리없이 전달되었다. 그리스 인들이 연출한 연극의 내용들은 대부분이
그런 신화적인 것들이었다. 인간과 신, 자연과 신, 신들을 매개로 한 인간적 삶의 내
용이 비판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소크라테스가 다이모니온의 얘기를 했을 때 누
구도 그것을 과학적으로 비판하거나 분석해 본 바는 없었다.

  그런 철학적인 자연신관이 지배적이었을 때 기독교가 서구의 종교로 등단하면서 이
모호였던 신관에 큰 변혁이 일어났던 것이다. 심지어는 어떤 신관을 갖는가에 따라 참
신앙과 이단이 구별되기도 했고, 그 신관의 차이가 철학의 본질적인 문제가 되는 중세
기가 지속되기도 했던 것이다.
  그것을 구별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Theism으로서의 기독교적인 신관 Panthei
sm으로서의 철학적 자연신관, Deism으로서의 합리적인 과학적 신관을 가려본 것이다.
그리고 이 구별은 서양철학과 신학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신학이 고대로부터의 철학적 신관이라면, 기독교의 신학은 믿음의 학이라
는 뜻으로 보아야 한다는 구별을 내리고 있다.
  '신들'은 철학적이나, '신'은 신앙적인 의미를 갖기도 한다. 니체는 '신들은 이미
죽었다'고 말했던 것이다.
@ff
    51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블레주 파스칼(1623--1662년)
  그때 세계에서는
  1653년: 칭, 일조편법 실시: 인도, 타지마할 묘 완성
  1660년: 영국, 왕정복고, 찰스 2세 즉위

  천재는 단명하다든지, 천재는 요절한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모든 천재가 단명하거
나 요절한 것은 아니다.
  괴테는 천재 중의 천재였으나 오래 살았고, 영국의 J. S. 밀도 천재였으나 오래 활
동했다. 비범한 천재로 평가받았던 라이프니츠도 70살까지 계속 활동했다.
  그러나 데카르트, 스피노자. 말브랑슈,파스칼 등은 일찍 세상을 떠났다.
  이렇게 본다면 철학계에는 두 종류의 천분을 지닌 철학자들이 있었던 것 같다. 일찍
학문적 업적을 끝낸 사람과 늦도록 학문적 발전을 지속시켜나간 사람이다. 독일의 철
학자 셸링은 30사에 세상을 떠났다고 해도 철학적 업적에는 별로 지장이 없었을 것이
다.
  대개의 경우 천재는 지능이 높은 사람을 말한다. 그들은 일찍 학문과 사상을 개척해
나간다. 그 대신 장년기 후반이나 노년기에는 별로 발전적 성과를 남기지 못한다. 그
러나 지능은 일찍 높게 나타나지 않았으나 계속해서 학문적 연구에 정진하는 대기만성
파가 있다. 그런 사람은 같은 천분을 지니고 있었어도 천재라는 명칭에는 덜 해당되는
것 같다. 음악계에서는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경우가 그러했을 것 같다. 이상스럽게도
영국의 철학자들은 대개가 늦도록 철학을 발전시켜나간 편이다. 그러나 독일, 프랑스
의 철학자들은 일찍 철학적 천분을 발휘한 편이다. 물론 칸트와 헤겔 같은 사람은 예
외였고, 처음부터 끝까지 천재적 창조력을 발휘한 라이프니츠 같은 이가 없는 것은 아
니...

  우리가 이런 덜 필요한 얘기를 하는 것은 17,8세기까지의 철학자들의 기질을 비교해
보자는 것일 뿐이다. 19세기 이후의 대분분의 철학자들은 천재형보다는 노력형이며 장
년기 이후에 학문적 업적을 남긴 것이 보통이었다. 철학은 역시 문제의식과 연결되며,
큰 그릇이 많은 물건을 담을 수 있다는 것이 철학의 학문적 성격일 것 같기도 하다.

  이런 이야기를 삽입시킨 것은 데카르트 연구에 뜻을 가졌다가 개인의 체험과 신념
때문에 다른 방향의 업적을 남겨준 블레즈파스칼(B. Pascal, 1623--1662)을 소개하는
데 길잡이가 되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파스칼은 전통적 흐름을 탄 철학자는 아니었다. 그 당시의 대표적인 인물의 하나였
고 그의 천재성은 데카르트를 앞지르고 있었을 정도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수학, 기하
학을 비롯한 자연과학을 공부했고, 기계공학적 분야에서 이론과학의 영역을 깊이 이해
하고 있었다. 철학적 조예도 깊었던 편이었다.
  파스칼이 이런 학문들을 전개켜가는 동안에 기독교 신앙에 관한 신비로운 체험을 하
게 되고, 이성적 합리주의가 팽배한 시대에 신의 은총의 사실과 질서를 변증하는 신앙
적 책임을 통감하게 되었다. 그 목적을 위해 남겨놓았던 메모들이 사후에 정리되어 책
자가 되었고, 지금은 세계적으로 큰 의미를 갖는 "팡세"로 남게 된 것이다. 그가 남겨
놓은 메모들은 후일에 그가 한 권의 대표적인 저서로 완성시키고 싶었던 기초자료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허약한 체질로 일찍 병에 시달리게 되었고, 39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저작화는 실현되지 못하고 말았다.
  파스칼이 살아 있는 동안은 그 "팡세"가 알려지지도 못했다. 사후에 그의 측근들이
그 메모들을 모아 출간했을 때도 사상계의 관심을 모은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계몽철학자 볼테르는 아예 평가의 대상으로 삼지도 않았다. 그러
나 세월이 갈수록 "팡세"는 넓은 계층의 독자를 확보해나갔고, 프랑스를 넘어 세계적
인 걸작으로 지금도 읽히고 있다. 물론 기독교계가 그 배경을 만들기도 했다. 아우구
스티누스 이후에 가장 영향력이 큰 저작으로 손꼽히고 있을 정도다. 지금은 그 당시의
어떤 철학자의 사상과 학문보다도 광범위한 의의를 사상계에 남겨주고 있다. 오히려
이를 낮게평가했던 볼테르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의 비중을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우리가 문제삼고 싶은 것은 그의 기독교적 사상이나 종교철학적 의미가 아니
다. 그가 남겨준 철학적 사색과 업적이 컸다는 점인 것이다. 그리고 이성적인 합리주
의가 가장 절정에 이르고 있을 때 이러한 특이한 사상가가 있었다는 것은 가벼이 여겨
서는 안될 것이다.
  그런 점에 있어서느 아우그스티누스의 철학적 신학이 철학사에 큰 자취를 남겨주었
던 것과 19세기에 S. 키에르케고르의 사상이 철학계와 신학계에 미친 영향과 비슷한
점이 있었을 것이다. 어떤 이는 파스칼을, 17세기를 대표하는 가장 훌륭한 지성의 소
유자였고 가장 광범위하면서도 유구한 인간적 과제를 풀이해준 공로자라고 평하고 있
다. 심리학자 아니었음에도 오늘과 같이 인간학이 개척되지 않은 시대에 너무 괄목할
만한 업적을 남겨주었던 것이다.

  (그림설명) '신의 존재증명'을 위한 초고 "팡세"를 남긴 파스칼. 파스칼은 흔히 17
세기를 대표하는 지성으로서, 인간의 문제에 가장 깊이 천착한 철학자로 꼽힌다.
@FF
    52 '그리스도의 변증론':파스칼의 "팡세" 출간(1670년)
  그때 세계에서는
  1666년: 영국 뉴턴, 광학 및 우주중력에 관한 법칙과 적분법 발견
  1670년: 러시아, 스텐카 라진의 대반란(농민반란)

  파스칼은 누구 못지않은 합리주의자였고 수학과 기하학의 천재였다. 부친이 그에게
법률공부를 시켜 법관으로 만들고 싶었기 때문에 좋아하는 수학을 가르치지 않았는데,
어린 파스칼이 장난삼아 여러가지 형태의 도형들을 그리고 살피다가 유클리드 기하학
의 원리를 홀로 발견해내는 것을 보고 감탄한 나머지 친구들에게 내 아들은 천재라고
얘기했을 정도였다.
  그런 파스칼이 종교적 체험을 겪은 뒤부터는 기하학적인 합리적 사고는 자연연구와
수리적인 사고의 원칙일 뿐, 철학적인 사고와 종교적인 체험에서 얻는 사고는 합리적
인 사고를 앞지르며 초월하는 또 다른 섬세한 사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 우리들의
해설을 가한다면, 그런 사고는 직각적이며 직관적인 합리가 미치지 못하는 차원 높은
사유라고 보았다.
  거기에는 수리와 기하학적인 법칙의 사고에 비하면 내적인 깊은 진실과 진리 그 자
체에 적응할 수 있는 것이라고 본다. 좀더 그의 생각을 전체적으로 해석한다면, 인간
학적 깊이를 가진 직각적 사유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파스칼은 자연사물을 관찰함에 있어 주어진 법칙과 원칙을 찾아 따르도록 되어 있듯
이, 정신계에는 정신적 질서와 법칙이 있어 우리는 그것을 찾아 따라야 한다고 믿고
있다. 자연의 질서가 엄연히 자연세계를 좌우하듯이, 정신적 질서는 우리들의 정신적
삶을 지배하며 우리의 삶은 그에 순응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그 위에 종교적이며 신앙적인 질서가 있어 그것 또한 엄연히 우리들의 영적
생활의 의미를 채워주는 것이다. 이 은총의 질서는 기독교의 가르침에서 얻어진 것이
기보다는 그 자신이 조카에게 나타난 과학과 의술을 초월한 은총의 사건에 접하고 얻
은 것이었다. 따라서 신앙적 사실의 직접적인 체험에서 얻어진이 확신은 그의 "팡세"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그가 "기적이 없었다면 신앙을 가지지 않아도 죄가 되지 않으나 기적이 있었기 때문
에 불신은 죄가 될 수 있다"고 말한 것은 이미 그의 인식이 아래서부터 위로 올라가는
과학 및 철학적인 것을 넘어 위에서부터 아래로 주어지는 은총의 사실임을 잘 얘기 해
주는 내용이기도 하다.
  이렇게 되면 파스칼의 과제는 인식의 영역에서 인간이해와 인간학적 과제로 상승하
지 않을 수가 없어진다. 학자들이 파스칼은 연구하면서 그의 인간연구에 깊은 공감을
갖는 이유가 짐작된다. 대개의 경우 대륙의 합리주의자들은 이성적 사고를 존중히 여
기는 나며지, 감정과 의지는 감정과 의지의 기능을 약화시키며 배제해야 한다는 생각
을 갖고 있었다. 스피노자는 의지의 개입이 진리의 길을 좁게 하거나 막는다고까지 생
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파스칼은 감정과 의지를 포함한 전 인간적인 기능을 무시하지 않았다. 그는
어떤 메모에서 '인간의 본질...불안' 이라는 짤막한 구절을 남기고 있다. 후에 실존주
의자들이 그가 얼마나 자연스레 인간 본질의 정서적인 면을 깊이 통찰했는가에 감탄하
고 있다.
  그는 사회적인 정의를 설명하면서 "그는 강 이편에 살기 때문에 나를 죽여도 칭찬을
받는다"는 표현을 쓰고 있다. 사회여건과 정치적인 국경에 따라 사람을 죽이는 일 같
은 것이 살인행위가 되기도 하고, 또는 '공훈'이 되기도 한다는 얘기다.
  "나는 우주를 생각할 수 있어도 우주는 나를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우주보다
위대하다"고 말할 정도로 사유의 위대함을 지적하면서도, "지극히 작은 벌레 한 마리
가 위대한 철학자의 사유를 얼마든지 중단시킬 수 있다"고도 말한다.
  수많은 부장들이 청검을 갖고 두 줄로 정렬해 서 있는 저쪽 옥좌에 앉아 있는 터키
황제를 나와 꼭 같은 사람이라고 볼 수가 있겠느냐고 비유하면서, 그렇게 위대한 사유
가 그렇게 한계지어져있으면서 무력한 모순에 차 있음도 설명해준다.
  결국 파스칼의 철학적 과제는 인간적 과제와 통하는 것이며, 인간적 물음은 수학이
나 기하학적 사고의 방법으로 풀 수 없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인간과 삶의 의미와 가
치를 근본적으로 해결지을 수 있는 차원 높은 인식과 삶이 가능해질 때 근원적인 결론
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무신론자는 가장 어리석으면서도 사리에 맞지않으며, 신을 탐구해
가는 철학자는 지혜롭지 못하나, 신의 존재를 믿는 것은 가장 사리에 맞으면서도 지혜
로운 삶의 선택이라고 담담하게 이론을 전개시켜간다.
  우리는 그가 중세기의 사상가였던가 기독교 정신이 쉽게 받아 들여지고 있는 시대의
인물이었다면 그리 큰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가장 이성과 합리를 존중히
여긴 17세기에ㅓ서 인간적 삶의 본질과 인간 이성이 갖는 한계를 극명히 보여주었다는
점에 깊은 공감을 표하게 되는 것이다.

  (그림설명) 파스칼이 기독교로 결정적인 회심을 하게 된 데는 포르 르와얄 수도원에
들어간 여동생 자클린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그림은 환자를 보살피는 포르르와얄의
수녀들. 베르사유 박물관 소장.
@FF
    53 모나드...'우주의 살아 있는 거울': 라이프니츠(1646--1716년)
  그때 세계에서는
  1702년: 최초의 일간신문 "데일리 쿠란트" 발생
  1705년: 핼리, 주기적 혜성(헬리헤성) 발생

  우리는 데카르트 이후의 대륙철학을 이성론 또는 합리론 계통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합리주의 철학'이라는 말을 자주 쓰는 것은 이성론은 옛날부터 최근까지 계속되어왔
으나, 17세기 중심의 대륙철학은 특히 수학, 기하학을 배경으로 하는 합리적 연역법을
택했기 때문에 합리성을 강조한는 의미에서다.
  이 합리주의 철학의 마지막을 장식한 사람은 독일의 라이프니츠(G. W. Leibniz,1646
-1716)였다고 보아 좋을 것이다. 라잉프니츠는 드물게 보는 천재였다. 15살에 대학에
입학했고 20살에 박사학위를 얻었을 정도였다. 그의 전공은 법률이었다. 그러나 모든
분야의 학문에 업적을 남겼다. 너무 어려서 사법고시에 합격했기 때문에 법적연령 미
달로 얼마를 기다려야 했을 정도로 조숙했고 학문적 원숙성을 일찍부터 지니고 있었
다.
  그가 가장 관심을 가졌던 기초적인 학문은 수학이었다. 미적분을 창안해냈을 정도였
다. 미적분의 최초의 공로자는 누구인가 하는 논란이 있었다. 뉴턴으로 돌리는 영국인
들이 많이 있었으나 최근에는 거의 같은 시기에 두 사람이 따로따로 발견한 것으로 믿
어지고 있다.
  그는 철학적 학설과 체계를 형성하기 이전에 수학을 보편수학으로 발전시키며 그 방
법과 원리가 모든 학문의 원리가 될 것으로 생각했다.
  최근 그의 유고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전해지고 있다. "먼 후일에는 호텔 로비
에서 만난 두 사람이 이야기를 하다가 '지금 우리 대화의 초점이 흐려지고 있으니까
수학으로 풀어보고 그 초점을 찾은 뒤에 다시 토론을 하자'는 때가 올 것이다"는 내용
이다.
  물론 누구도 그 말을 그대로 믿을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오늘의 언어분석철학과 논
리적 실증주의가 발달하면서는 바로 그 작업이 철학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모
든 지식과 사상은 언어로 표현될 수밖에 없으며, 언어는 논리적 구조를 갖추어야 한
다. 그 논리는 마침내 수학적 구조에 기인하게 되는 것이다. 즉 수학논리학으로 전개
되지 않을 수가 없다. 수학에서 논리, 논리에서 언어가 규정된다면 수학적 정리는 벗
어날 수가 없다. 하버드의 철학자였던 콰인 교수 등이 바로 그런 방향의 첨단을 걸으
며 연구활동을 해왔다.
  이렇게 본다면 라이프니츠의 착상이 얼마나 참신했나를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다.
  그는 여러가지 면에서 독창적인 학설을 제창해주었다. 그러나 가장 근본이 되는 철
학적 이론은 단자론(모나드 론)이다.우주의 궁극적인 실체는 물질의 원자가 아니라 힘
또는 에너지의 단위일 것이라는 생각을 품게 되었고, 그 물질적 존재의 실체는 모나드
라고 보는 것이다.
  모나드(monad)란 원래 수학용어로 'I'또는 '단위'를 뜻하는 모나스(monas)에서 나온
말이다. 라이프니츠에 의하면, 모나드는 넓이나 형체를 가지지 않으며, 무엇으로도 나
눌 수 없는 궁극적인 실체로서 모든 존재의 기본이 되는 것이다.    또 모나드는 원자
와는 달리 비물질적인 실체로, 그 본질적인 작용은 표상이다. 표상이란 외부의 것이
내부에 포함되는 것으로, 모나드는 이 작용에 의해서 자신의 단순성에도 불구하고 외
부의 다양성에 관계를 가질 수 있으며, 그 표상되는 다양성이 곧 세계 전체다.
  '우주의 살아 있는 거울'이라고 하는 모나드는 '소우주'를 이루고 있으나, 각기 독
립되어 있어 서로 인과관계를 가지지 않는다. 이질적이며 무한의 다양성을 갖는 모나
드들은 신의 예정조화 작용에 의하여 만물을 형성, 유지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렇
게 표상을 가지는 모나드들은 지배를 받는 물질적 모나드가 되기도 하고 그것들을 지
배하는 정신적 표상의 모나드이기도 하다. 최초의 모나드는 신의 본질을 차지하게 된
다.
  이러한 모나드들의 운동기능이 공존과 이존의 위치에서 나타나는 것을 우리는 공간
으로 보고, 계속해서 일어나는 계기적 성격을 갖는 것을 시간의 위상에서 찾아보게 된
다. 모나드 현상의 공존의 순서와 계기의 순서가 공시간으로 나타난다는 뜻이다. 이렇
게 보면 뉴턴의 절대공간관이나 절대시간관에 비해 라이프니츠의 공시간은 상대적인
것으로 보아 좋을 것 같다.

  이렇게 존재의 배후에 신의 예정과 조화의 작용이 지배한다고 보게 되면 이 존재하
는 세계는 가장 완전하면서도 소망스러운 세계라고 보아야 하겠다. 거기에서 인출되는
것이 염세주의에 대립되는 낙천주의 사상이 된다. 이 이상의 좋은 세계는 존재할 수
없다는 이론에까지 도달하게 된다.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에 대한 낙천주의가 성립된
다.
  프랑스의 볼테르가 "캉디드"라는 작품을 발표해 이 낙천주의를 반박한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낙천주의를 맏고 있는 주인공이 그 망상에 빠져 비극적인 삶을 산다는 풍자
성이 짙은 작품이다. 신과 이성의 능력의 무제약성과 현실의 우연적인 갈등의 한 계성
의 차이는 해소되지를 못한다고 보아서 좋을 것 같다.
  라이프니츠는 그 자신이 법률가였으며 그 방면의 사회적 직책을 감당했기 때문에 사
회문제와 국제적 평화문제 등에 관한 노력에서도 주목할 만한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일단 우리는 대륙계통의 이성 합리주의 철학의 막을 내려야 좋을 것 같다.
라이프니츠를 능가하는 철학자도 나오지 못했고 그의 학설을 계승할 만한 인물도 배출
되지를 못했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가 라이프니츠의 충족이유율을 정리해 발전시켜준 것은 발전적인 해석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항상 계승되는 것은 형이상학적 과제보다는 방법론이며 철학 속에
깔려 있는 과학적 과제들이 의미를 갖는 것 같다. 염세주의 철학자가 라이프니츠의 충
족이유율은 계속 발전시켰고, 거기에는 많은 철학자들이 공감하고 있다.
  (그림 설명) 라이프니츠가 표트르 대제를 설득해 설립케 한 상페테르부르크의 과학
아카데미, 라이프니츠는 우주의 궁극적인 실체는 물질이 아닌 것이라고 생각했다.
@ff
    54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토머스 홉스 (1588-1679)
  그때 세계에서는-
  1667년: 존 밀턴 "실락원"저술
  1688년: 네덜란드, 하멜의 "조선표류기 조난기" 간행

  지금까지 대륙 중심의 합리주의 철학을 얘기했기 때문에 자연히 우리는 이야기의 순
서를 영국쪽으로 전개시켜야 할 것 같다. 모든 점에서 이 두 분야는 대조적인 발전을
오늘까지 지속시켜오고 있기 때문이다. 영국의 로저 베이컨은 성직자로 있으면서 자연
과학의 필요성을 강조했고, 그 자신이 실험실에서 새로운 연구활동을 전개했다. 그것
은 영국적 전통을 확립하는 데 도움이 되었고, 근대화 및 현대화 과정에 출발점을 만
들었다. 그 뒤를 계승한 프랜시스 베이컨은 다시 그 흐름을 경험주의 철학으로 발전시
키는 결실을 안겨주었다. 근대철학의 창시자의 한 사람이 된 것이다. 이런 사상적 후
계자로 나타난 한 자유로운 철학자 또는 광범위한 사상가가 우리가 잘 아는 토머스 홉
스(Thomas Hobbes, 1588-1679)였다. 그도 또 일찍 자신의 재질을 발휘한 학자였다. 15
살에 옥스퍼드 대학에 들어가 여러 분야의 학문을 연구했다.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목
사의 아들로 태어나 무신론자로서의 일생을 살았고, 자유로운 삶을 오래 즐긴 사람이
라고 평한다. 그가 무신론자가 된 것은 어머니의 모태에 있을 때부터 사회적 혼란기에
심한 역경을 헤맸기 때문이라고 하며, 그런 과거가 홀로 부담과 의무감 없이 명문가에
기식하는 학자 및 사상가를 만들었다고 전한다. 90세가 넘을 때까지 활동을 계속하면
서 정신적 향락에 머물렀다고 전해진다. 그는 철학적 학설을 물질주의적 유물론 사상
으로 이끌어갔고 사회정치 문제에 더 큰 관심을 모았다. 기식하고 있는 가문의 정치,
행정활동에 기여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성에 관한 문제와 종교문제에 대해서도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었다. 홉스는 국제적 무대에서 일했기 때문에 영국인으로서는
드물게 대륙철학을 연구했다.
  그리고 베이컨을 기점으로 하는 경험론적 학설을 받아들였으므로, 초창기에는 좁은
영국철학에 빠져 있지 않았다. 그러나 확고히 그의 철학을 뒷받침하는 것은 이성론이
나 신적 존재를 배경으로 삼는 대륙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가 택한 것은 물질주의적인
자연주의 철학이었고, 철학적 표현을 빌린다면 수리 및 기계관적인 자연주의자였다.
물체는 모든 정신 및 물적 존재의 근원이며, 그것은 필연적이며 기계적인 법칙에 의한
다고 보았다. 그래서 물체적 연구가 철학의 기초가 되며, 거기에는 연역적 방법과 귀
납적 방법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간을 주관하는 것도 독립된 이성적
존재나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다. 생리적 기능의 바탕이 되는 물리적 작용이 더 큰 비
중을 차지한다. 그가 인간행위의 필연성과 결정론을 주장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인간
행위에 있어서의 자유는 과장된 성격일 뿐이고, 원인이 없는 결과는 없듯이, 모든 행
동은 주어진 원인에 따라 이루어질 뿐이라고 본다. 자유가 있는 듯이 착각하는 것은
그 원인을 모르기 때문인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물리적인 힘이 대외적으로 작용하는
것이 국가 및 사회적 존재인 것이다 자연물체와 구별되는 인공물체라고 보아 좋을 본
성을 가지는 것이다 우리의 개인이나 사회적 삶을 좌우하는 것은 어떤 관념적 능력이
나 이성이 아니라, 인간적 물체의 본질인 본능, 욕망, 의욕 등이다. 그래서 사회를 원
초적으로 구성하는 것은 만인이 만인을 적으로 삼는 이기적 동물인 것이다 그 상쟁의
비극을 회피하고 제어하기 위해 우리는 계약을 만들고 질서를 보존하게 되며, 그것을
유지하는 데 국가의 권력이 동원되는 것이다. 지금 우리들이 상식적으로 표현하는 위
치에서 본다면 홉스는 인간의 성악설을 뒷받침하는 대표적인 철학자라고 보아 좋겠다.
법과 국가권력은 그 본래적인 악을 방지하고 서로의 삶을 돕는 데 의미가 있는 것이
다. 인식의 기초가 되는 것도 본구적인 이성기능이 아니라 감각을 통해 가능해지며,
감정과 의지는 필연적인 규범과 법칙에 따를 뿐이다. 그 배후에는 물질적 힘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홉스의 철학은 오히려 정치, 국가, 사회원리 등의 외향
적인 방향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어진다. 대륙의 합리주의와 완전히 상반되는 길을 선
택했고, 또 그 길을 개척해 나왔던 것이다 지금 우리는 그의 국가관과 사회철학에 더
주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회철학자로서의 위치를 굳혀주자고 그의 후계자들이
또 그 길을 따르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가 홉스에게서 느끼는 또 하나의 특색은 그의
인간성과 학문의 특수성이다. 남이 다 하는 주장을 했다든지 다른 철학자에게서도 볼
수 있는 내용의 철학이기보다는, 그의 인간됨과 학설의 특유성이 우리로 하여금 그의
철학사적 의미를 경시하지 못하도록 이끌어주고 있다. 또 그의 후계자들도 그의 개성
있는 학설을 찬반양면에서 뚜렷이 가려주고 있다.

  (그림설명)홉스의 "리바이어던"표지. 런던 대영박물관 소장. '리바이어던'이란 구약
성서 "욥기"에 나오는 거대한 영생 동물의 이름이다. 이 책에서는 교회권력에서 해방
된 국가를 가리킨다.
@ff
    55 가장 영국적인 철학자: 존 로크(1632-1704)
  그때 세계에서는
  1673년: 청, 삼번의 난 (-1681)
  1689년: 영국,프랑스간 식민지전쟁 시작(윌리엄 전쟁)

  만일 우리가 가장 영국적이면서도 대표적인 경험주의 철학자를 뽑는다면, 우리는 서
슴지 않고 홉스의 후계자인 존 로크를 들어야 할 것이다. 로크는 (J. Locke, 1632-170
4)는 스피노자와 같은 해에 태어나 27년이나 더 오래 활약한 가장 영국인다운 철학자
였다. 사람들은 그를 자유를 위해 싸운 가장 자유로운 사상가였다고 평한다. 역시 홉
의 후계자다운 면을 지니고 있었다. 데카르트와 홉스를 연구했고, 화학과 의학을 연구
하기도 했다. 철학적 심리학을 개척한 업적도 컸다고 보아야 하겠다. 홉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섀프츠베리가에 봉사한 학자였다. 홉스는 캐번디시가에 봉사했었다. 그의
철학의 기초는 인식론적 경험주의를 체계화시켰다는 점이다 그는 경험이 없으면 인식
도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인식은 경험의 내용과 과정에서 얻어지며 또 평가되어야 한
다. 인식의 산물인 모든 관념은 경험의 산물일 뿐이다. 이성이나 오성의 선천성같은
것은 인정될 수가 없다. 경험의 다소와 성질에서 인식은 그 의미를 갖는다. 우리의 이
성이나 오성은 백지와 같은 것이다 거기에 경험을 통해 어떤 내용이 그려지는가 함이
문제이다. 경험이 관념의 원체가 된다면 인식기능과 과정은 자연히 심리적 작용을 따
르게 되며 철학의 중요한 문제는 오성(Understanding)의 기원, 관계, 가치와 의미를
살피며 규정짓는 작업이 되어야 한다. 경험은 두 가지 요소를 갖는다. 하나는 외적 감
각이며, 그 뒤에는 내적 반성이 뒤따른다. 외적 감각은 단순한 관념을 제공해주나 내
적 반성은 복합관념을 만들어준다. 이렇게 생겨진 관념들을 서로 결합시키거나 분리시
키는 일이 인식의 임무이며 책임이다. 선천적 기능이나 생래적인 관념 같은 것은 존재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모든 관념은 대상에 의한 객관적인 성질과 반성에 따르는 주관
적 성질을 갖는다. 대상에 따른 객관적 성질과 반성에 따르는 주관적 성질을 갖는다.
대상에 따른 객관적 성질을 제 1차적인 관념으로 보면, 반성적인 성질은 제 2의 성질
이 된다. 이러한 관념들의 상호 관계에서 이루어진 복합관념이 모든 지식을 만들어간
다. 아리스토텔레스 때부터 존재의 실체를 논해오고 있으나, 그것은 인식의 한계를 벗
어난 것이며, 우리가 인식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인식의 한계를 벗어난 것이며, 우리
가 인식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그 실체에 의존하는 여러 가지 양태와 두 가지 사물이
상의 비교에서 태어나는 관계를 밝히는 것이다. 여기서 동일관계, 차별관계 또는 인과
관계가 나타나며, 또 우리는 그것을 밝혀보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로크는 자연과학
이나 수학, 기하학보다는 심리적 경험을 존중히 여길 수밖에 없어진다. 데카르트의 영
향이 있었기 때문에 원형관념에 대한 직각적 인식이나 논증성을 반대하지 않으나, 인
식의 기본은 역시 경험을 바탕으로 반성하며 전개되는 것이다 .다른 것들은 부수적인
의미를 가질 뿐이다. 이 밖의 문제들에 대해서도 로크는 지도적 역할과 사상적 개척을
소흘히 하지 않았다. 윤리에 있어서는 동기론보다는 결과론을 중시하면서, 많은 사람
이 더 많은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것이 선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성적 가치라든지
의무론 같은 대륙적인 가치관보다는 영국적인 전통을 계승시켰다. 도덕적 원칙이나 원
리 같은 것이 본래부터 주어져있는 것이 아니라, 경험과 노력의 확대에서 더 좋은 삶
과 사회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 종교문제는 그 당시에 있어서도 비중이 큰 문제였
다. 로크는 홉스와 같은 무신론을 택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전통적인 기독교 신
앙은 철학적으로 받아들일 타당성이 업는 것이었다. 그래서 결국은 이신론을 주장했
다.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신관이었고, 또 많은 사람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그의
이신론을 직접 계승한 학자들도 있었으나, 그의 영향을 받은 많은 철학자들이 있어 후
에 계몽주의 시대를 개척하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그는 교육에 있어서도 뚜렷한
식견을 전개시켰다. 쉽게 말하면 자연주의적 계발사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사람의 타고난 선한 능력과 지적 발달을 무리없이 계발, 성장시켜 나가면 된다는 주장
이었다. 지금도 영미 계통의 교육철학의 바탕을 만들어주고 있을 정도이다. 사람들은
J.J. 루소의 선구자였다고 평하고 있다. 로크는 그 당시의 대표적인 교육철학의 흐름
을 만들어 주었다. 정치론에 있어서는 홉스의 국가계약설을 발전시켜 입헌정체론으로
정착시켰다. 이는 오늘의 의회민주주의를 육성하는 뒷받침이 되었다. 이런 철학자들의
철학이론이 현실적이며 경험적 전통을 쌓아 올렸기 때문에, 영국사회에서는 예로부터
국민들의 지고자나 영도자는 국회의원, 장관일 수 있어도, 국회의원이나 장관들의 지
도자는 학자, 사상가, 교수들이라는 생각이 정착되게 되었던 것이다 정신적 지도자가
현실적 지도자보다 더 중한 책임을 맡으면 한 사회의 이념적 방향과 정신적 성장을 도
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ff
    56 경험론의 마지막 완성자: 데이비드 흄(1711-1776)
  그 때 세계에서는-
  1747년: 미국, 보스턴 폭동
  1749년: 미국,프랭클린 피뢰침 발명

  섀프츠베리 가문에서 교육적으로 봉사한 J. 로크의 영향을 받은 섀프츠베리 3세(Lor
d Shaftebury, 1671-1713)는 로크의 영향을 받아, 학문적 규모와 영역은 작았으나 도
덕철학과 미학분야에서 독특한 철학사상을 전개시켰다. 영국인들은 그 당시 그를 대표
적인 도덕철학자라고 인정하고 있다. 그는 철학, 윤리학, 미학 등에서 뚜렷한 견해를
갖고 있었다. 도덕적인 선과 예술적인 미는 일치되는 것이며, 선하기에 아름답고, 아
름다움은 선과 통하는 삶의 정서성이 중요하다고 본 것이다.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도
덕적인 선이 이성적인 가치판단에서 탄생되는 것으로 보고 있으나, 사실 선은 감정과
의지의 뿌리에서 자라는 것이다. 이러한 정서적이며 감정과 의지의 일면을 도외시하는
것은 인간성의 중요한 부분을 경시하는 결과가 된다고 보았다. 따라서 도덕판단은 취
미판단이며, 취미판단은 예술적인 미의 판단과도 합치되는 것이다. 비로소 인간에 있
어서의 감정적 요소를 소중히 여기는 길을 열어준 것이다. 그리고 도덕적인 판단은 합
리적인 사고나 지성적 추리가 아니라, 언제나 직각적인 것이다. 이 직각적 판단은 예
술계에 있어서는 언제나 상하게 작용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그를 도덕적 감성철학의
선구자였다고 평하는 이유를 짐작할 수가 있다. 그는 귀족적인 생활에서 고귀한 철학
이론을 전개시켜 주었다. 그의 인품과 학문의 일치성을 충분히 엿보게 해 주는 고아한
정신의 소유자였다. 고전의 인문적 교양을 높이 보며 예술적 식견을 갖추고 있었다.
모든 사람의 개성을 존중히 여겨 생의 질을 다양하게 계발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로크
의 철학을 새로이 발전시켜 경험주의의 마지막 주자에게 연결지어준 철학자로, 성직에
머물고 있으면서 새로운 철학을 개척해준 조지 버클리(G. Berkeley, 1685-1753)를 잠
시 엿보는 것이 영국철학의 정상적인 과정일 것 같다. 버클리는 전체적인 입장에서 토
머스 홉스의 유물론적 철학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성직자인 그로서 볼 때는 편중된
철학이며 거부반응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모든 지식과 인식이 감각을 통
해 외물, 즉 자연적 사물에서만 주어진다면, 그것은 자연과학과 통할 수는 있어도 진
정한 철학으로는 미흡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의 학문적 배경과 성장이 그러했던 것이
다. 진정한 철학은 밖에 있는 사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관념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래서 철학은 근본적으로 주관적 관념론의 성격을 갖는 것이라고
보았다. 철학적 지식의 대부분, 특히 성직자로서 문제삼을 수 있는 철학들은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다. 인식은 감각을 통하더라도 주관적 성격을 가지며, 결국은 물적 실체
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관념적 구성을 통해 철학적 사고가 수립된다고 보았다. 정신
은 지각내용으로서의 관념을 보존하며 능력을 갖춘다고 생각했다. 로크는 아직도 물적
실체의 실제성을 고려하고 있으나, 그것은 감각의 결합으로 돌리며 오히려 심리학의
과제로 삼는 것이 타당하다고 보았다. 우리는 흔히 존재라고 부르는 것은 지각에서 얻
어진 것이며, 그 지각표상은 우리의 의식기능, 즉 심리작용에서 밝혀져야 한다는 방향
전환을 시도했던 것이다.이러한 버클리의 철학이 로크에서 흄으로 안내하는 변화의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버클리는 잠시 미국 프로바던스에 와서 기거한
일이 있었다. 지금도 부라운 대학 부근에 가면 그가 묵었던 집이 남아 있다. 그리 오
래 전 인물이 아님을 알 수 있고, 더불어 영국인들이 자신의 전통을 소중히 보존하고
있음에 경의를 표하게도 된다. 사람들은 만일 버클리 같은 철학자가 가운데 끼지 않았
다면, 경험론의 마지막 완성자이면서 적지 않은 문제를 남겨준 D. 흄이 탄생되었을까
하고 묻는 이가 있다. 그만큼 흄은 로크의 뒤를 계승하면서 버클리의 영향을 상당히
받았던 것이 사실이다. 본질적으로는 로크의 계승자였으나 버클리의 방향시정이 적지
않은 보탬이 되었다. 그리고 몇십 년의 세월이지만 역사의 흐름과 더불어 철학적 사상
의 변천과 발전은 더욱 급속도로 진행되기도 하는 법이다. 버클리는 그 자신이 성직자
였던 만큼 그 배후에는 철학의 정신적이며 관념적인 면이 잠재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런 요소들은 그대로 계승되어갈 성질의 철학이 아니었다 .흄은 버클리를 거
쳐 다시 로크의 문제를 새로운 철학으로 발전시켜나간다. 그리고 버클리를 추종하는
사람들은 흄의 철학을 두고 다시 하늘을 날으려는 뜻을 버리고 땅에 내려앉은 성격의
철학이 되었다고 물만을 갖기도 했다.
@ff
    57 경험주의 철학의 마감: 흄과 그 이후의 문제
  그 때 세계에서는-
  1783년: 러시아, 크리미아를 병합
  1789년: 미국 워싱턴, 초대대통령에 취임

  영국 경험론의 마지막 완성자라고 볼 수 있는 D. 흄의 철학은 영국 근대철학의 결론
이라고 볼 수도 있겠고, 나아가서는 새로운 철학을 위한 준비를 끝낸 것으로 볼 수도
있다. 흄 이후에는 또 하나의 흄이 나타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먼저 얘기한 대로 흄은
존 로크와 그의 후계자인 버클리를 연구했다.로크의 경험론과 버클리의 주관적 인식론
을 받아들여 후자의 철학을 발전시켜나갔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흄의 철학은 경험을
바탕으로 한(인식과정을 위한) 심리학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어진다. 그렇다고
해서 심리학 자체에 깊숙이 빠져들게 되면 그것은 철학적 인식론이 될 수가 없다. 대
륙 계통의 수학이나 기하학을 바탕으로 하는 연역적 방법에 비하면 경험과 귀납을 중
심 삼는 심리적 경향을 택했다고 보는 편이 좋을 것이다. 흄은 인식은 크게 구별하여
두 가지 내용과 과정을 밟는다고 보았다. 그 하나는 외물과 연관되는 감각이며, 다음
은 지식을 구성해내는 반성이다. 기초적인 것은 감각적인 것이다.감각은 생기가 넘치
고 강렬한 것이다. 그 안에는 지적인 감각뿐 아니라, 증오, 원망, 의욕까지도 포함되
는 인상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감각기관을 통한 것은 지각으로 우리를 이끌어간다. 이
렇게 주어진 지각내용은 약하고 밝지 못한 인상의 기억 안에 생성되는 모상이 된다.
우리는 거기에서 좁은 의미의 관념 또는 사상 같은 것을 반성작용에 의해 일으킨다.
이렇게 본다면 기초적이면서도 중심이 되는 것은 감각에서 주어지는 인상이다. 그 인
상이 발단이 되어 지각의 내용을 인상으로 만들고, 인상이 재인되는 것, 다시 말하면
지적으로 정리된 것을 관념이라고 본다. 만일 이런 인식의 형성과 과정을 대륙의 이성
주의에 비교한다면 완전히 역방향을 택한다고 보아야 하겠다.대륙의 연역성에 비한 귀
납성의 의미도 짐작할 수가 있다. 만일 이런 철학적 인식의 한계성이 주어진다면 철학
의 전통적 과제라고 볼 수 있는 볼 수 있는 외물로서의 실재는 어떻게 되는가? 토머스
홉스는 그것을 중심으로 철학을 전개시켰고, 존 로크는 외물과 더불어의 철학을 인정
했었다. 버클리는 그것을 제외한 주관적 인식을 요청했다. 이에 비하면 흄은 그것을
철학적 인식의 대상으로서는 거부하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대륙철학이 비판 없이 택
해온 정신적 실체도 인정할 수가 없어진다. 후일에 칸트는 이성의 기능을 철학의 주체
로 삼아, 그 이성의 배후에 자아성을 인정한 바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생각한다.'는
명제를 남겼다. 이성적 인식의 주체로서의 자아를 인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흄은 자아
도 사물과 마찬가지로 지각들의 결합에 지나지 못한다고 보았다. 이런 견해는 흄의 철
학의 한계를 대단히 축소시키는 결과가 되었고 마침내는 깊은 회의로 몰아가는 경향으
로 이끌어갔다. 그래서 철학자들은 흄의 회의로부터 새로운 철학을 모색하려 했는가하
면, 칸트는 흄을 통해 독단의 꿈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다.과거의 철학
이 비판이나 반성이 없이 실체라든지 인과성 같은 것을 문제삼아왔으나, 그것은 우리
의 심리적 연상에 따른 주관적인 것이다. 우리의 생각밖에 어떤 실체라든지 인과성 같
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일부에서 이성에 의한 수학의 확실성을 인정하며 실증적인
확증이 용납되는 것 같아도 그것을 가지고 합리적인 형이상학이나 자연과학의 절대 확
실성이 성립되는 듯이 착각해서는 안된다고 본다. 윤리학이나 종교의 문제는 감정과
정서적인 기능에 따르는 것이다. 이성적 합리주의가 원리와 종교를 취급하는 것은 잘
못된 길이다. 이런 흄의 철학에 접하고 보면 우리는 철학적 사유의 한 한계성에 도달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사실 흄 이후에는 제 2의 흄이나 경험주의 철학자가 등단
하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 우리는 흄보다 연소한 친구, 세계적인 경제학자 한 사람의
이름을 남겨두어도 좋을 것 같다. 그가 "국부론"의 저자인 애덤 스미스(A. smith, 172
3-1790)다. 이상스럽게도 그 시대와 사회문제를 해결짓기 위한 윤리학에 있어서는 두
사람이 같은 견해를 갖고 있었고 그 영향 또한 대단한 것이었다. 윤리의 기본을 감정
적인데 두었다는 점과 개인윤리를 사회윤리로 발전시키는 데 큰 전환점을 만들었다는
업적은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이 다 잉글랜드의 대학보다도 스코틀
랜드의 에든버러에서 공부했고, 둘 다 큰 업적을 남겼다는 데 주목해도 좋을 것이다.
독일에서는 라이프니츠는 끝으로 철학적 발전이 그쳤듯이, 영국에서는 흄을 끝으로 경
험주의 철학의 큰 막이 내렸다고 보야 좋을 것이다. 그리고 이 두 갈래의 흐름을 통합
새로운 철학으로 발전시킨 사람이 독일의 칸트였다.

  (그림설명) 흄과 애덤 스미스는 철학과 견제라는 각기 다른 분야에 정진한 학자지
만, 에듬버리에서 같이 공부한 것 등 여러가지 면에서 공통점이 많았다. 사진은 에든
버러 성, 메리 스튜어트의 비극이 서린 성이다.
@ff
    58 자유와 평등 추구: 몽테스키외 등(1689-1755)
  그때 세계에서는-
  1725년: 덴마크 베링(러시아 국적), 제 1차 북태평양 탐험
  1755년: 러시아, 모스크바대학 창립

  영국의 존 로크의 철학은 학문으로서의 철학영역에서 뿐 아니라 국민사상에 큰 영향
을 미쳤다. 그의 인식론보다는 종교적 이신론, 정치사상, 교육이론 등이 직접 영국사
회의 변혁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 광범위한 성격을 그 당시의 지성 사회에서 평가한다
면 계몽사상 및 계몽주의라고 불러서 좋을 것이다. 계몽사상의 핵심이 되는 것은 이성
의 계발과 인간다운 삶을 육성, 확대시키는 일이라고 보아 좋겠다. 그리고 그것은 지
성인의 교양과도 통하는 것이다. 그 결과는 자연히 전통적이며 보수적인 종교적 신앙
을 탈피하는 일이며, 자유로운 인간의 이성적 사고와 판단에 모든 것을 맡기는 삶의
방향을 택하게 된다. 이성적 인간은 개인에게는 자유를, 사회에서는 평등을 추구하는
노력을 동반하지 않을 수 없어진다. 이러한 사상이 영국에 있어 급진적인 변혁을 일으
키는 것을 본 프랑스의 사상가들이 그 정신을 성급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정치와 문물
에서 모두 영국이 선진성을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잘 아는 몽테스키외(Montes
quieu, 1689-1755), 볼테르(Voltaire, 1694-1778), 라 메트리(La Mettrie, 1709-1751)
같은 사람들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몽테스키외는 영국의 법리론을 받아들여 발전적
인 국가관을 형성시키려 했고, 국민사상계발에 큰 도움을 주었다. 볼테르는 지금도 프
랑스 국민들의 관심을 끄는 그 시대의 대표적인 계몽사상가였다. 영국의 이신론을 받
아들여 발전시켰고, 뉴턴 연구로 자연과학에도 조예가 깊은 사회비판가였다고 보아 좋
겠다.어떤 사람은 프랑스 국민의 정신적 눈을 뜨게 해준 다방면의 계몽가였다고 말한
다. 그는 자연종교와 이성적 신앙을 주장해 모든 미신을 반대했고, 전통적 기독교를
크게 공박해 교회와 교리 중심의 전통을 뒤흔들어 놓았다. 철학의 현학성을 떠나 상식
적인 교양을 보급시켰다. 라 메트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영혼물체론을 주장했을 정도
의 유물론자가 되었다 결국은 반기독교 사상때문에 군의관과 공직을 잃고 화란으로 떠
나야 했을 정도였고, 지금도 우리는 그의 "인간기계론"에서 그 당시의 유물론적 성향
을 짐작케 된다.그는 인식의 주체는 감각이며, 인간의 행동은 밝혀지지 못한 기계적
운동이라고 보았다. 도덕의 기준도 신체적 의미에 맞추어져야 한다는 극단적 주장을
내세우고 있다. 이런 과정을 밟는 동안에 프랑스에서는 모든 지식과 학문은 집대성한
다는 의도 밑에 백과전서 학자들이 등단하게 된다. 모든 학문을 교양적인 수준에서 집
대성시키는 데 당시의 학자들이 대거 가담하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유물론적인 계몽
주의 사상의 흐름을 따르는 사람들이었다. 그 대신 모든 학문에 걸쳐 자유로운 사상을
도입하는 계몽정신의 보급을 돕기에 이른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유물론이 자리잡는 곳
에는 언제나 회의주의가 뒤따르는 법일까. 이 백과전서 시대에도 짙은 회의주의는 가
시지 않고 있었다. 이러한 계몽사상말기를 장식하는 한 특이한 사상가가 나타났다. 그
가 세계적으로 놀리 알려진 루소(J.J Rousseua, 1712-1778) 였다. 그는 볼테르 못지
않게 프랑스 국민들의 아낌과 존경을 받는 인물중의 한 사람이다. 지금도 루소의 무덤
은 혁명적으로 프랑스에 기여한 위인들이 잠들어 있는 판테온에 자리잡고 있을 정도
다. 루소는 참으로 평범하지 않은 특이한 일생을 살았고, 그의 사상 또한 독창성을 지
닌 것이었다. 말년의 그는 약간의 병적인 성격과 사생활을 보여주었다고 전기작가들은
말하고 있으나, 사실 루소는 유년기부터 천분을 지닌 병적 성격의 인물이기도 했다.
지금도 그의 "참회록", "에밀", "민약론"등이 번역되어 적지 않은 애독자들을 가지고
있다.모두가 독자들의 흥미를 끌 만한 저작들이다. "참회록"은 그의 생애를 소상히 각
색한 자서전이다 누구나 읽어서 흥미있는 내용이며, 읽고 나면 루소의 생애와 사상의
발전과 더불어, 그 시대의 사회상을 잘 엿볼 수가 있다. 전반부가 나왔을 때 상당히
공격적이며 착하지 않은 성격을 가진 볼테르가 그 허점과 거짓으로 각색된 점들을 신
랄히 지적했기 때문에 후반부는 상당히 신빙성 있는 내용으로 바뀌어졌다고 전한다.
볼테르는 본래가 안하무인의 성격이었다. 투기에 발을 들여놓았다가 부채 때문에 한동
안 고생했는데, 채권자의 뺨을 때렸다고 전해지고 있다. 항의를 하는 채권자에게 볼테
르의 측근이 "당신은 세계 제일 가는 천재에게 따귀를 맞은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라."
는 위로를 했다고 전해질 정도였다. 볼테르가 취급하지 않은 문제도 없었거니와, 유명
한 인사 중에 볼테르의 비판을 모면한 사람도 없었다고 할 정도였다. "에밀"은 아주
독창적인 자연주의 교육론을 작품화시켜 서술한 것이다. 필자가 대학에 다닐 때는 교
육학 및 교육철학자들의 연구논문으로도 많이 떠오르곤 했던 책이다.
@ff
    59 혁명의 불길을 당긴 '계몽주의': 프랑스 혁명
  그때 세계에서는-
  1787년: 미국, 연방헌법 초안이 이룩되고 각 주의 비준 시작
  1789년: 라부아지에"질량보존의 원리"

  1789년은 프랑스혁명이 일어난 해였다. 루소와 볼테르가 죽은 지 3년 후의 일이다.
사람들은 프랑스 혁명의 원인이 무엇인가를 물었을 때 모두가 몽테스키외, 볼테르, 루
소의 계몽주의 자유사상이 그 정신적 원인이 되었다고 말한다. 나 자신도 중고등학교
에 다닐 때 그렇게 배웠다. 사실 이 사상가들의 이성적인 힘과 자유의 정신이 프랑스
정신계를 일깨워줄 수 없었다면 혁명적인 민중봉기는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루소의 "
민약론"은 미래지향적인 정치방향과 국민적 권리의식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으며, 정치
체계의 기틀도 잘 깨달을 수 있도록 정리된 저서였고, 많은 사람들이 그 책을 읽었었
다. 이런 것은 선진국가가 되는 하나의 과정인 것 같기도 하다. 120년쯤 전에 "민약
론"이 일본어로 번역되었고, 정치지도자들이 그 책을 읽었기 때문에 일본 국회에서 프
랑스식 민주주의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한 정객들이 있었다. 그 책이 우리말로 번역된
것은 40년쯤 전의 일이며, 우리 정치가들에게는 관심 밖의 책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우리는 사상과 이념이 없는 사회에 살고 있는 거 같은 인상이 들기도 한다. 루소는 학
교교육은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자랐다. 여러 가정으로 떠돌아 다니면서 보고 느낀 것들
을 학문과 사상의 과제로 삼았다. 그는 자신의 "참회록"에서 "나는 생각하기 전에 느
끼기부터 했다."고 고백하고 있다. 학자들은 이러한 그의 어린 시절의 고백에서 그의
영국적인 계몽정신이 백과전서 시대로 발전했고, 그것이 다시 감정주의 철학으로 발전
했다고 말한다. 바로 루소가 그 중심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는 어렸을 때 국민학교 여
선생에게 사랑의 뜻을 느끼기도 했고, 자신이  관여한 음악이 연주될 때 귀부인들이
참석한 데 대해 감격의 정을 누를 수 없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교육을 받은 바 없는
하녀와 결혼을 했는데 그녀는 첫아기를 낳을 때까지 달력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고 기
록하고 있다. 루소는 말년에도 숲속을 산책하다가 누군가의 인사를 받으면 황급히 자
리를 피하곤 했다고 한다. 마치 누군가가 자신을 알아보는 것이 두려웠던 것같이 느껴
지곤 했다는 것이다. 만일 이러한 계몽주의 사상이 루소 같은 이를 통해 전달된 내용
이 무엇인가고 묻는다면, 모든 삶의 판단은 이성에 의해서였고, 개인에게는 자유가,
사회에서는 평등이 보장되는 삶과 국가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뜻이다. 당시에 왕권과
결탁되어 전통적인 신앙을 정치에 이용당하고 있던 종교계에 대해서는 이성적 판단은
큰 혁명의 하나가 아닐 수 없었다. 혁명 당시 제창된 박애정신도 기독교 전통의 사랑
의 정신이기보다는 휴머니즘의 결실로서의 박애정신이었던 것이다.이러한 계몽주의 사
상은 당시로서는 후진국에 속하던 독일로까지 번져갔다. 칸트도 대단한 루소의 애독자
였다고 전해진다. "민약론"에 도취된 나머지 그의 유명한 산책시간을 놓쳤다고 전해지
고 있었을 정도였다. 프랑스 혁명 이후에는 모든 정치와 자유로운 사상은 프랑스에서
전해지는 듯이 믿어졌고, 독일사상가들의 혁명에 대한 기회와 신뢰는 대단한 것이었
다. 라이프니츠 철학을 칸트에게로 계승시키는 역할을 담당한 크리스티안 볼프 같은
철학자도 그런 부류의 철학자에 속한다. 그리고 이렇게 영국, 프랑스, 독일을 휩쓴 계
몽주의 정신은 서구사회를 새로운 무대로 변질시키는 큰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그
후부터는 세계 여러 후진국들이 자시 나라의 계몽주의 시대를 찾아보는 습관이 생기게
되었다. 일본인들은 명치유신 기간을 일본이 새로이 태어나는 계몽주의 시대였다고 자
인하고 있다. 적지 않은 선구자들이 미국과 유럽을 다녀왔고 서구의 문물이 쏟아져 들
어왔는가하면, 그 사상들이 일본 변혁기의 큰 책임을 감당할 수 있었다. 대개의 경우
계몽주의는 새로운 문화의 창조를 유도해주며 정치사회의 변혁을 약속해주었다. 일본
도 그런 시기를 겪었던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우리는 우리 사회의 계몽기적 역
할을 언제, 누가 감당해왔는가를 묻고 싶어진다. 불행하게도 우리의 계몽기간은 퍽 늦
었던 것 같아보인다. 어떤 이들은 사상적 계몽기는 19세기말기보다는 20세기 초반기에
속하지 않는가하고 생각하기도 한다. 최남선, 이광수씨 같은 이의 역할을 얘기하기도
한다. 철학의 계몽기는 더 늦었을지 모른다. 내가 중학교에 다닐 때는 우리글로 된 철
학책이 단 두 권밖에 없었을 정도였다 한치진씨의 "철학개론"과 "인생과 우주"뿐이었
던 것 같다. 해방이 된 뒤에도 여러 해가 지나서야 몇 권의 철학책들이 출간되었을 정
도였다. 물론 일본어로 읽기는 했으나, 그것은 주로 번역서들이었다.

  (그림설명)혁명에 나선 민중들. 오른쪽 그림처럼 혁명에 참가한 사람들이 긴 바지를
입고 있다고 해서 이들은 '상퀼로트'라고 불렸다.
@ff
    60 새로운 철학의 문을 열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1781년)
  그때 세계에서는-
  1767년: 영국, 타운젠트 조례 제정
  1778년: 프랑스, 미국과 공수동맹 및 통상조약

  '1781년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하고 물으면 누구나 망설일 것이다. 특기할만한 사
건이 없었기 때문이다. 1789년을 잘못 얘기한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 것
이다. 그 해에는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1781년 일어난 아주 조용
한 일이 한 가지 있었다. "순수이성비판"이라는 책이 출간된 것이다. 물론 그 책의 저
자는 임마누엘 칸트였다. 서양사람들은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미친 키 작은 세 거인들
이 있었다고 말한다. 나폴레옹, 베토벤 그리고 칸트라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칸트는
가장 왜소한 체구에다 볼품없는 인상을 지니고 있었다. 칸트는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태
어나 그 곳에서 공부하고, 그 대학의 사강사로부터 시작해 교수로 있다가 세상을 떠났
다. 84세까지 살았으니까 다른 두 사람보다는 월등히 오래 산 셈이다. 그는 한평생 쾨
니스베르크 시밖에 나가본 일이 없었을 정도로 좁은 공간에서 일생동안 철학에 몰두했
었다. 그 칸트가 18년 동안 어떤 학문적 작업에 열중해 있다는 사실은 동료교수나 친
지들에 의해 알려져왔으나, 그 연구활동이 어떤 것인지는 누구도 알 바가 없었다. 다
아는 바대로 칸트는 결혼 같은 것을 생각해본 일도 없었고, 혼자 살면서 매일 같은 시
간에 같은 코스를 산책하곤 했는데, 단 한번 루소의 "민약론"을 읽다가 산책시간을 늦
추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후에 칸트가 계몽주의 사상에 뜻을 둔 것은 프랑스의
영향 때문이었다고 볼만도 한 이야기이다. 이렇게 학문적인 연구에만 몰두하고 있던
칸트가 자기 일생의 대표작이며 세계 철학사의 이정표가 될 정도의 저서를 내놓게 된
것이다. 그 책은 결코 쉬운 내용의 것이 아니다. 처음에는 서서히 철학계의 반응을 일
으키기 시작했으나, 세월이 지날수록 그 책의 영향력은 확대되어나갔다. 초판을 수정
한 재판이 나오고, 다시 그것을 수정한 제 3판이 나왔을 정도였고, 그 수정을 하게 된
원인도 사회적 물의에 의한 바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 책의 비중도 큰 것이나, 독일
사회의 문화 및 철학적 수준도 대단히 높았던 것으로 보아 좋겠다. 이 책이 갖는 몇
가지 큰 의미가 있다. 이 책이 나오기 이전의 대륙의 철학자들, 곧 데카르트, 스피노
자, 라이프니츠에 비롯한 이들은 철학적 지식과 학문의 기초와 방법을 수학, 기하학과
같은 확실하고 명백한 기반 위에 설립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스피노자의 대표적인
저서"윤리학"에는 '기하학적 방법에 의해 논증된 문제들'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을 정
도였다. 이에 비하면 영국의 철학자들은 경험론을 계승해왔기 때문에 철학적 사유의
근거와 방법은 심리학에 있다고 생각했다. 인식은 심리적 과제이며, 그 사유의 정확성
과 타당성이 진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칸트는 처음에 대륙적인 이성론을 따랐
다. 모든 진리는 이성적 사고와 일치되어야 하며 합리적 사고의 산물이어야 한다고 믿
고 있었다. 그러다가 영국의 D.훔을 읽고 난 뒤 '비로소 독단의 꿈에서 깨어나게 되었
다'고 고백했을 정도였다. 그러면 철학의 제 3의 완전한 기초와 방법은 무엇인가?칸트
는 그것을 논리학이라고 생각했다.모든 지식과 진리는 논리적 사유에 따라야 하며, 논
리의 원칙이 인식의 원칙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대륙적인 수학, 기하학적
연역방법이 논리적인 추리로 지양되고 영국적인 경험 심리주의가 보편타당성 있는 진
리로 승화되기 위해서는 논리적 철학의 체계가 먼저 형성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래
서 칸트 이후부터는 수학, 기하학은 물론 심리학이 유일한 철학의 과학적 근거가 되어
야 한다는 생각은 약화되고 논리학이 철학의 안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따라서 오늘
세계를 풍미하고 있는 논리실증주의나 언어분석의 철학이 그 원조를 칸트에게 두고 있
는 경향도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가 있다. 이렇게 본다면 프랑스 혁명이 정치사에 큰
거봉을 만들었듯이 독일철학은 독일 관념론이라는 철학계의 공인을 받게 되는 것이다.
적어도 반세기 동안은 그러했다. 우리나라 철학계의 선구자들도 대개는 직접 간접으로
칸트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그의 저서는 철학과 강의실에서
열심히 강독되었다.  연세대의 정석해 교수, 서울대의 최재희 교수와 박종홍 교수, 고
려대의 이종두교수 등이 모두 그러했다. 그들은 최근까지 필자와 같은 시기에 강의를
하고 있었던 분들이다.

  (그림설명)서유럽 근대철학의 전통을 집대성하여 그 이후의 철학발전에 새로운 기초
를 놓은 독일 관념론 철학의 선두주자 임마누엘 칸트
@ff
    61 비판주의 이성 철학자: 칸트의 비판철학(1724-1804)
  그때 세계에서는-
  1774년: 영국 와트, 증기기관을 실용화
  1782년: 중국에서 "사고전서"완성
  1785년: 조선 "대전통편"완성
  1792년: 프랑스 공화정 수립

  1793년 칸트는 자기 친구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나는 지금까지 철학의 세 가지 과
제의 연구를 끝냈다.  1.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2.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3. 우리는 무엇을 믿을 수 있는 가라는 것이었다. 이제 앞으로 남은 문제는 '인간이란
무엇인가'가 있을 뿐이다."는 내용이었다. 이 편지를 쓸 때는 칸트가 자신의 종교철학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를 끝냈을 때였다. 각고의 노력 끝에 제 4의 주저를 끝낸
후련함을 친구에게 전달했던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함은 그의 "순수이
성비판"에 해당하는 책이고,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는 "실천이성비판"을 가리킨
다. 그리고는 "판단력 비판"이라는 책을 계속 발표했다. 그것은 미와 예술철학에 관한
것이었다. 이 세 비판서를 끝낸 뒤 칸트는 오래 미루어두었던 종교철학을 집필했던 것
이다. 그 뒤부터 사람들은 정통적인 철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인식론과 이론철학, 실천
철학으로서의 윤리와 도덕철학, 예술철학, 그리고 종교철학 이 네 가지는 갖추어야 철
학자다운 철학자가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습관이 생겼다. 또 그런 문제는 빼놓을 수
없는 철학의 근본과제이기도 한 것이다. 이 네 가지 칸트의 저서는 그 나름대로 세계
적인 고전이 되었을 뿐 아니라, 모두가 칸트의 비판정신을 기초로 하는 칸트의 철학체
계를 형성한 것이다. 만일 누군가가 이중에서 어느 책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느냐고
물으면 대답하기 곤란해진다. 전공분야에 따라 달라지겠기 때문이다. 종교철학에 관심
이 있는 사람은 그 분야를 택할 것이며, 미학이나 예술철학을 전공하는 사람은 "판단
력 비판"을 택할 것이다. 그러나 칸트가 예상했던 "인간학"은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
한다. 탁월하거나 특성있는 과제와 해결이 제시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칸트의
철학을 대표하는 저서는 어느 것이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서슴지 않고 "순수이성비
판"을 추천할 것이다. 다른 저서들이 그로부터 인출되었고, 철학의 혁명적인 계기를
만든 책은 역시 '제1비판'서인 때문이다. 철학을 전공하지 않는 독자들은 그 책의 내
용이 무엇인가고 묻고 싶을 것이다. 여기에는 몇 가지 특색이 있다. 자연과학을 비롯
한 모든 과학자들은 지식과 진리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외부의 사물을 있는 그대로
고찰하며, 사물과 사실을 법칙과 원리에 따라 밝히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철학은
그렇지 않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사물들은 재료를 제공해줄 뿐이고, 그것을 지식과
진리로 만드는 것은 우리들의 주관이성이라는 것이다. 객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은 경험과학에 속하나, 철학적 인식은 그 주어진 것들을 의식과 경험을 통해 받아들
인다. 하지만 그것을 진리로 구성하는 것은 이성이라고 보는 것이다. 쇳물은 재료에
불과하다. 그 쇳물을 가지고 여러가지 형태의 물건을 만드는 것은 제철기능을 통해 이
루어지는 것이다.그 기능을 담당하는 것을 지식에 있어서는 이성이라고 본다. 이 이성
은 선천적으로 주어진 기능을 갖고 논리적인 판단과 추리를 하게 되며, 그 판단과 추
리가 정당하고 타당성있는 과정을 밟을 때 비로소 지식이 탄생된다고 본다. 이때 순수
이성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경험에 붙잡히거나 심리적 의식작용을 넘어선 선천적인 이
성기능을 가리키며, 그 이성의 인식기능은 다른 데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성이
자기자신을 비판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다. 칸트가 비판은 지식형성의 재판소라고 말한
데도 이유가 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칸트의 철학은 이성철학이며 그 방법은 비판에
있다고 보아야 하겠다. 그것을 실천이성에 해당시켰을 때 윤리와 도덕의 문제가 되며,
미적인 판단력에 적용했을 때 미술 철학이 전개되는 것이다. 종교문제도 이러한 이성
의 영역 안에서 취급되지 못하면, 그것은 미신과 잘못된 종교에의 가능성을 내포하게
된다. 모든 철학은 언제나 이성의 기능과 영역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
나 남들이 평생에 걸쳐 연구하는 칸트의 철학을 짧은 글로 해설한다는 것은 도에 넘치
는 모험이다. 그렇다고 해서 철학을 전공하지 않는 사람은 칸트를 몰라도 된다고는 말
할 수가 없다. 오히려 칸트의 철학 중, 미학이나 역사에 관한 책이나 윤리학을 먼저
공부한 뒤에 인식론인 "순수이성비판"을 대하는 것이 더 좋을지 모른다. 사실 철학은
어려운 학문은 아니다. 그러나 칸트나 헤겔을 비롯한 독일 철학자들때문에 철학은 난
해의 학문이라는 평을 받게 된 된 것도 사실이다.
@ff
    62 '독일국민에게 고함': 피히테(1762-1814)
  그때 세계에서는-
  1796년: 영국 제너, 종두법 발견
  1803년: 영국의 돌턴, 원자론을 설명

  삼성문화재단에서 삼성문고를 발간했을 때 그 첫째 권으로 나온 것이 피히테의 "독
일국민에게 고함"이었다. 이 책은 아직도 그만큼 우리의 관심을 끄는 책 중의 하나로
되어 있다. 그때 피히테는 유명한 철학자이면서 베를린 대학의 총장으로 있었다. 당시
의 독일 지성계와 사상계를 이끌어가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가 프랑스의 나폴레옹
이 이끄는 군대가 전 독일을 유린하고 수도인 베를린까지 점령당하게 되는 것을 보았
을 때, 조국의 운명과 장례를 위해 침묵을 지킬 수가 없어 '독일국민에게 고함'이라는
애국적인 강연을 하게 되었고, 학생들과 뜻있는 지식층 국민들이 그 강연을 경청했던
것이다.그 당시 유럽대륙에서는 프랑스가 모든 면에서 선진국이었다. 프랑스 문화가
물밀듯이 대륙을 휩쓸고 있었다. 특히 프랑스 혁명 이후부터는 프랑스 정신이 미래를
이끌어갈 횃불과 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러시아 귀족들은 앞을 다투어 프랑스에 유학
했고, 그들은 러시아어보다 프랑스어를 생활의 자랑스러운 언어로 자긍하고 있었을 정
도였다. 독일의 대표적인 인물들도 프랑스를 점령한 나폴레옹에 대한 존경심 비슷한
호의를 보이고 있었다. 괴테도 나폴레옹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애독자였기 때문
에 바이마르에 침입해 들어왔을 때 서로 기대감을 갖고 만난 일이 있었다. 베토벤도
나폴레옹에게 바치기 위해 '영웅 심포니'를 작곡했다가 그가 황제가 되는 것을 보고
실망해, 한 영웅을 회상하는 곡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헤겔은 예나 시를 무혈점령하고
군대사열을 하는 말 위의 나폴레옹을 보고, 후에 '말 위에 앉아 있는 세계정신'을 보
았다고 경의를 표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애국심이 강했고 프러시아 황제의 정권을 옹
호하고 있던 피히테는 앞으로의 독일을 위해 그대로 있을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
서 민족교육을 통해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고, 치욕스러운 프랑스의 점령같은 수치를
되풀이해서는 안된다는 조국건설의 의무를 호소했던 것이다. 피히테는 신학과 종교계
의 지도자가 되기를 꿈꾸는 정열과 야심을 지닌 대학생이었다. (후일에 그의 아들 소.
피히테가 그 뜻을 계승하는 신학자가 되었다.) 그가 뜻하지 않은 기회에 칸트의 "순수
이성비판"을 읽고 크게 감명을 받았다. 그리고는 머리를 아프게는 하나 마음을 후련하
게 해주는 쾌저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곧 서재에 틀어박혀 5-6주간 동안에
한 저작을 끝냈다. "계시의 철학"으로 알려진 글이다. 그 원고를 갖고 칸트를 찾아가
보였을 때 칸트는 뜻밖의 후계자를 얻은 기쁨으로 그 책의 출판을 종용했다. 사람들은
그 책이 이름을 바꾸어 내놓은 칸트 자신의 저서일 것으로 오인할 정도로 피히테를 긍
정적으로 받아들였다. 피히테는 일약 저명한 철학자가 된 셈이다. 그러나 칸트의 후광
을 업고 출발한 피히테가 "전 지식학의 체계"라는 자신의 철학으로 발전시켰을 때는
칸트의 강한 부정적인 노여움을 사게 되었다. 칸트는 나를 인용할 가치도 없는 철학이
라고 학문적 단절을 선언했고, 피히테는 칸트가 자기의 철학을 이해하기에는 모자라는
노인이라고 결별을 고했다. 칸트는 자기의 철학은 그것으로 완결되었기 때문에 수정이
나 발전은 있을 수 없다고 믿었으며 또 그렇게 공언했다. 그러나 피히테는 칸트의 철
학은 논리학으로 출발로 하나 하나의 시론일 뿐, 그것 은 좀 더 높은 철학에서 완성되
어야 하며 자신이 그 완성자라고 믿었던 것이다. 어느 편이 옳은가? 칸트를 따르는 사
람은 칸트로서 만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칸트의 위치에서 본다면 피히테는 지나치거
나 불필요한 체계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피히테의 입장을 따른  사람은 피히테의
체계는 칸트를 극복했고 완성시키려는 노력이었다고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
러나 철학사가들의 견해에 따르면 칸트의 철학은 피히테와 관계없이 훨씬 더 큰 비중
을 차지하는 것으로 본다. 그리고 그 평가는 올바른 것이다. 피히테를 역사적인 인물
로 만든 것은 한 부호가 어린 피히테의 영리함을 보고 신학자로 키우려는 배려에서 학
업을 뒷받침한데서 출발했다. 첫번째 운명의 손길이었다. 칸트를 만난 것이 그의 두번
째 운명이었다면, 그의 죽음 또한 마지막 운명의 결과였다. 피히테의 부인은 피히테보
다 5-6년이나 연장이었고 페스탈로치와 함께 교육학을 전공했다. 1814년 베를린에 콜
레라가 만연되고 있었다. 자선사업에 힘을 쏟고 있던 피히테의 부인이 그 병을 남편에
게 전염시키게 되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콜레라는 인구의 몇분의 1씩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최악의 전염병이었다. 피히테는 57세라는 아까운 나이로 그 뜻을 다 펴지 못
한 채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그림설명)칸트철학을 발전시켜 이상주의적 철학을 전개한 피히테. 그림은 프랑스의
나폴레옹 점령하의 베를린에서 '독일국민에게 고함'을 강연하는 피히테.
@ff
    63 수재는 일찍 끝난다: 셸링(1775-1854년)
  그 때 세계에서는-
  1796년: 청,백련교의 반란 발생
  1801년: 독일 리터, 자외선 발견

  피히테의 철학이 각광을 받고 있을 때 독일 튀빙겐 대학에는 흔히 삼총사라고 말하
는 세 젊은이가 함께 공부하고 있었다. 나이순으로 말하면 헤겔, 휠덜린 그리고 셸링
이었다. 이들은 함께 공부하고 있으면서 프랑스 혁명의 소식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
다. 혁명은 잘못된 세상을 바로잡고 전 유럽세계를 희망의 고지로 올려놓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고, 자신들은 그 정신적 주인공이 될 수 있다고 자부하기도 했다. 동료
들이 모여 자유를 선포하기도 했고, 독일 사상계에도 큰 변화가 찾아올 것으로 넘친
포부를 안고 학업에 열중했다. 그 중의 한 사람인 휠덜린은 철학적 시인의 길을 택했
다. 그의 시는 상당히 비중이 큰 철학적 과제를 안고 있었기 때문에 후에 M. 하이데거
가 그의 시를 철학적 존재 해명에 등단시키기도 했다. 그 당시의 관례대로 휠덜린은
대학을 끝내면서 프랑크푸르트의 한 은행가의 집에 가정교사로 들어가 은행가 아들의
교육 책임을 맡게 되었다. 명문가의 가정교사 기간에 학문적 업적을 쌓아 인정을 받게
되면 대학으로 진출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던 시기였다. 그런 관습은 유럽 어디에서
나 있는 일이었다. 영국 같은 데서는 학자들이 명문가의 보호 밑에서 일생동안 학문적
활동을 계속하는 일도 있었다. 그런데 불안하게도 휠덜린은 가르치고 있던 어린이의
어머니와 사랑에 빠지게 되고, 드디어는 그 가정을 떠나 실연의 쓰라림을 안고 헤매는
신세가 되었다. 남유럽 등지를 헤매던 훨덜린이 독일로 되돌아왔을 때는 완전히 육체
적, 정신적으로 초췌하고 황폐한 상태에 빠져 있었고, 마침내는 정신 이상자로 전락해
버렸다. 그의 말년의 시들은 그런 정신착란의 흔적을 보여주는 철학적인 것들이다. 세
사람이 다 대학에 있을 때 그리스 문화와 정신에 도취되어 있었으나, 그 영향을 제일
많이 받은 것은 휠덜린이었다. 하이데거가 그를 높이 평가한 것은 그리스적인 존재성
과 시적인 상징성이 함축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두 사람은 철학의 길을 택
했다. 헤겔은 먼저 신학적인 문제를 취급하다가 약간 늦게 철학으로 전환했고, 셸링은
처음부터 철학의 문을 두들겼다. 셸링은 헤겔보다 5년이나 낮은 나이였다. 그러나 천
재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일찍 16살에 대학에 들어왔고, 누구보다도 먼저 철학자
로서의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는 드물게 보는 천재였던 것이다. 셸링은 칸트와
피히테 연구에 착수했다. 그리고 피리테에 관한 글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피히테는 아
직 20살이 못되는 셸링이 자기의 철학을 해득하고 전개시켜주는 것을 보고 그를 높이
평가해주었다. 피히테의 추천을 받은 셸링은 20살이 갓 넘은 약관으로 예나 대학의 교
수로 부임하는 영광을 안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정평있는 교수의 추천이 무엇보다도
빠른 학계진출의 지름길이었다. 거의 해마다 한 권씩의 저서를 발표한 셸링의 인기와
장래성은 학계의 큰 주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는 칸트와 피히테의 주관적인 인식론
을 주관적 관념론으로 해석해 독일철학의 전통을 이어받으면서, 곧 네덜란드에서 활약
했던 유대인 철학자 스피노자를 연구하게 되었다. 스피노자는 자연적 존재를 철학에
받아들이는 범신론 철학의 창조자였다. 그래서 철학에는 두 갈래의 길이 있는데, 하나
는 칸트, 피히테를 따르는 주관적 철학이고, 다른 하나는 스피노자의 자연을 대상으로
하는 실재론적 철학이라고 분류했다.그 대립적인 분류가 끝나자마자 셸링은 이 둘을
합하여 새로운 철학을 만드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깨달았다. 둘을 합쳐 동일성의
철학을 제창하기에 이른다. 비로소 피히테의 철학은 발전적 해소가 될 것으로 믿었던
것이다. 그것을 본 피히테는 곧 셸링은 자신의 철학을 잘못 전개시킨 과오를 범한, 자
기와 무관한 철학이라고 선언해버린다. 물론 셸링은 이미 피히테의 철학을 강 건너 간
것으로 무시하고 있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셸링에게는 두 가지 과제가 뒤따랐다. 너무
일찍 자신의 철학을 완성시켰기 때문에 더 발전해나갈 여지와 길이 막히고 말았다는
점이 그 하나였다. 그는 오히려 30세 이전에 세상을 떠났다고 해도 자신의 학문적 업
적은 이미 채워졌을 것이다.  그리고 친구의 부인과의 사랑때문에 결국은 예나를 떠나
야 하는 개인적 불운도 어려움을 더해주었다. 먼 후일에 철학적 후배였던 헤겔이 베를
린 대학에서 강의를 끝내게 되었을 때 베를린대학에서 헤겔의 후광을 기대하면서 셸링
을 초빙했으나, 역사는 이미 셸링의 철학을 시대에 뒤떨어진 때늦은 학설로 취급해버
렸다. 그래서 헤겔보다 일찍 철학계에 등단해서 헤겔보다 늦게까지 철학계에 남았으
나, 그의 철학은 항성이 아닌 혜성의 운명과 비슷하게 일찍 나타났다가 일찍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그것이 천재의 운명이었을지 모른다.

  (그림설명)튀빙겐의 삼총사 헤겔, 휠덜린, 셸링은 프랑스혁명의 소식을 듣고, 혁명
이 잘못된 세상을 바로 잡을 거라는 희망을 품었다. 그림은 혁명의 도화선이 된 바스
티유 감옥 습격.
@ff
    64 '...세계는 정신이다. 그리고 변증적으로 발전한다': 헤겔(1770-1831년)
  그때 세계에서는-
  1804년: 무굴제국, 영국의 보호국이 됨
  1825년: 영국,세계 최초의 철도 개통(스톡턴-달링턴)

  튀빙겐의 대학의 세 사람 가운데 가장 늦게 등단한 사람은 나이가 많은 헤겔이었다.
그는 대학을 끝내면서 독일지역에 머물고 싶었으나 뜻대로 되지못해 스위스 베른에 있
는 법률가의 집 가정교사로 갔다. 그 곳에 머무는 동안 헤겔은 대학에 있을 때부터 관
심이 깊었던 종교문제에 열중했다. 칸트의 종교철학을 읽고 크게 느낀 바 있는 헤겔은
전통적인 신학사상을 이성적이며 도덕적인 방향으로 재정리함으로써 정신계의 어떤 변
화가 와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만일 우리 나라의 어떤 학자가 조선왕조 때 유교의 전
통을 바꾸어 새로운 정신계를 개척할 수 있었다면 그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큰 업적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헤겔은 그러면서 법 및 국제법에 관한 연구도 병행시키고 있었
다. 자기보다 연소한 셸링이 대학으로 진출했고 휠덜린이 프랑크푸르트에 정착했는데,
자신만이 독일 밖으로 밀려나온 것 같은 열등의식과 우울함을 느낀 헤겔은 휠덜린에게
독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이라도 열어주기를 부탁했다. 그래서 프랑크푸르트로 옮겨
가정교사 일을 보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에 7년의 세월이 흘렀다. 피히테도 연구해야
했고 동창이었던 셸링의 저서도 꾸준히 공부하면서 점차로 신학보다는 철학에의 길을
되찾기 시작했다. 부친이 세상을 떠나면서 약간의 유산도 상속받을 수 있게 되면서 헤
겔은 본격적으로 철학을 위한 정열을 불태울수 있게 되었다. 이 때 헤겔은 섬광과 같
은 철학의 한 주제를 깨닫게 되었다. 그가 남겨놓은 메모에는 '...세계는 정신이다.
그리고 변증적으로 발전한다'는 명제가 기록되어 있었다. 이 짤막한 문구는 무한히 크
고 많은 뜻을 내포하는 것이다. 칸트가 이성의 철학을 제창했고, 피히테는 그것을 자
아의 철학으로 발전시켰다. 셸링은 거기에 자연을 포함시켜 동일성의 철학을 성취시켜
놓았다. 동일성 안에는 이성과 자아는 물론, 자연까지도 포함된 동일성이다. 그러면
그 동일성은 무엇인가? 헤겔은 그것을 정신(Geist)라고 규정지은 것이다. 그러면 그
정신은 어떤 본질을 갖는가? 변증적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셸링이 동일성과 계시의 철
학으로 규정한 것을 정신의 변증법으로 대치해놓은 것이다.이렇게 큰 계기를 넘긴 헤
겔은 예나 대학에 가 있는 셸링에게 도움을 청했다. 당신의 철학을 뒤따라 공부하다가
어느 정도 자신을 얻어 철학으로 방향을 굳히기로 했으니까 후계자로서 좀 이끌어달라
는 청이다. 그 때 셸링은 예나에서 외로운 위치에 있었고, 지나치게 많은 철학교수들
이 모여 있는 데서 자신의 뒤를 따를 수 있는 헤겔이 온다는 것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래서 헤겔은 30세를 넘기면서 겨우 시간강사의 자리를 얻어 오래 그리던
대학강단에 서게 된 것이다. 처음의 얼마 동안은 셸링과 공동집필을 하는 연구지를 발
간하게 되었는데, 그 대부분은 셸링이 주제와 방향을 잡아주고 헤겔은 집필해서 완성
시키는 후배로서의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근면과 정열을 겸비한 헤겔은 꾸준
히 자신의 철학을 연찬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 체계화된 저서가 유명한 "정신현상학"
이다. 이 책은 세부분 3권으로 되어 있다. 첫권을 내놓았으나 반응이 없었다. 출판사
에서는 더 진행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헤겔은 서둘렀다. 나폴레옹의 군대가 진격
해오는데 인세를 받아야 재정적 곤궁을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원고를 끝내고 나
니 프랑스 군대가 사열을 받고 있었다. 헤겔이 후일에 말 위에 앉아 있는 세계정신을
보았다고 말한 것이 그 장면이었던 것이다. 헤겔이 "정신현상학"의 서문과 첫부분을
셸링에게 증정하고 격려의 뜻을 받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을 읽은 셸링은 참을 수 없
는 분노를 느꼈다. 거기에는 자시의 철학을 보잘것없는 낡은 것으로 밀쳐버리고 헤겔
자신이 새로운 결정적인 철학을 완결했다는 우월감과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음을 발견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셸링은 마침내 예냐 대학을 떠나게 되었고 그후부터는 헤겔을
라이벌이 아닌 적대심에 가까운 기분으로 대하기 시작했다. 셸링은 죽을 때까지 헤겔
에 대한 적대감정을 눅일 수가 없었다. 그러나 헤겔은 그런 셸링의 기분을 눈치채지
못하고 살았다. 그런 점에 있어서는 몹시도 둔감한 성품이었다. 얼마 후 헤겔도 예나
를 떠나게 되었다. 하숙집 주부와의 불륜의 사랑에 빠져 아들을 얻게 되고, 마침내는
전쟁 도중에 생활고까지 겪으면서 당분간은 교수직이 아닌 다른 직업을 택해야 했다.
17,8세기의 철학자들은 가정을 가지지 않은 이들이 많았으나, 이 삼총사는 모두가 여
성문제로 고난을 겪는 스스로의 운명을 만들었던 것이다. 헤겔도 그때 얻은 아들때문
에 오래 정신적 고통과 가정적 시련을 겪어야 하는 불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림설명)독일 관념론의 완성자로 불리는 헤겔. '세계는 신의 외화이며 역사는 신
의 자기실현과정'이라고 생각한 그는 그것을 관념의 변증법적 전개로서 파악하기 위해
장대한 철학체계를 세웠다.
@ff
    65 '역사는 자유의 전개과정이다': 헤겔의 역사철학
  그때 세계에서는-
  1806년: 프랑스 나폴레옹, 대륙봉쇄형 공포
  1808년: 유럽, 반도전쟁(포르투갈에서 영국군과 나폴레옹과의 싸움. ~1814)

  예나 대학을 떠난 헤겔은 신문편집도 하고 고등학교 책임도 맡아보는 몇 해 동안 쉬
지 않고 학문을 연마해나갔다. 그 덕택으로 "정신현상학"이 인정을 받게도 되고 다시
대학강단에 서게 된다. 독일인들은 철학은 어려운 학문이고, 그 어려운 것을 알아야
철학자다운 자부심을 갖는지 모른다. 어쨌든 헤겔의 철학은 난해한 철학으로 유명했
다. 계속해서 저서가 나올수록 그 난해의 도는 심해져가는 경향이었다. 그의 "철학백
과전서"는 헤겔의 철학 전체를 체계화한 것이다. 거기에는 취급되지 않은 학문과 세계
의 문제는 없을 것이다. "(큰)논리학"이라는 책이 있다. 그 큰 책은 누구도 전체를 기
억할 수는 없을 정도로 어려우면서 체계적인 것이다. 그 책이 너무 크고 어렵기 때문
에 "철학백과 전서"의 처음 3분의 1에 해당하는 논리학을 따로 떼내어 "작은 논리학"
이라고 구분할 정도이다. 그 뒤에도 "법철학"이 출간된다. 그 책은 요새 우리들이 얘
기하는 사회철학이 포함되어 있다. 헤겔이 사회문제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주목하는 책
이다. 말년에 헤겔은 다시 강의록으로 된 "예술철학", "역사철학", "종교철학"을 내놓
는다. 예술과 종교문제는 누구나 취급하고 있으나, "역사철학"은 헤겔의 특수한 과제
라고 보아 좋을 만한 책이다. 사람들은 옛날 아우구스티누스가 "신국론"을 저술한 이
후 처음 나온 역사철학이라고 평하고 있다. 사실 역사를 독립된 철학의 주제로 취급한
철학자는 거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헤겔 이후부터는 수많은 역사철학이 나오기 시
작했다. 헤겔이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초청을 받을 때 이야기다. 하이델베르크 대학에
서는 헤겔의 초청 여부를 놓고 교수들의 의견이 쉬 결정되지 못했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 헤겔의 강의를 직접 들어보고 그 보고에 따라 초빙여부를 결정짓기로 했다.그 보
고서에는 '대단히 난해하기는 하나 대가다운 장래성이 엿보이기 때문에 초청해보자'는
의견이 들어 있었다. 어떤 때는 헤겔이 강의를 끝내고 교수실로 돌아오면 학생들이 남
아서 우리 교수님의 철학이 어떤 것이냐고 서로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헤겔의 조교를
맡아보던 헤닝을 시켜 직접 가서 물어보게 하자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헤닝이
가서 선생님의 철학은 이런 것이 아니냐고 물었더니, 헤겔은 '그것이 아니네, 내 철학
은 나밖에 아는 이가 없다.' 라고 씁쓸해했다는 이야기다.어려울수록 매력을 느끼며
모르는 면이 있기 때문에 더 매달리게 되는 것이 헤겔의 철학일지도 모른다. 후에 헤
겔은 베를린 대학으로 초청을 받는다. 베를린 대학은 여러가지 면으로 보아 그 당시에
는 독일 대표하는 관립대학으로 명색을 갖춘 곳이었다. 그때부터 헤겔의 명성은 높아
지기 시작했다. 한때는 '철학은 독일에서, 독일철학은 베를린대학이, 베를린대학철학
의 주인은 헤겔로'라고 전해질 정도로 헤겔의 명성과 인기는 날로 높아져갔다. 한때
헤겔은 국립대학의 어용교수라고 불릴 정도로 친정부적이기도 했고, 그의 철학적 성향
이 그런 방향을 택하기도 했다. 어쨌든 헤겔은 철학계의 왕좌를 차지하게 된 셈이다.
그렇다면 헤겔의 철학이 난해하다는 것은 무엇때문인가? 그의 철학체계가 지나치게 방
대하다는 것도 하나의 원인이 되고 있다. 헤겔은 취급하지 않은 문제가 없었으며, 그
많은 문제를 하나의 체계로 취급했으니, 누구도 그 뒤를 따를 수 없을 정도였다.그러
나 그보다 더 난해의 원인이 되는 것은 그의 철학적 방법인 변증법이다. 어떤 사람들
은 변증법은 철학의 마법사라고까지 혹평하고 있다. 변증법으로 모든 문제를 조작해내
며 해결짓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프랑스나 영국 철학자들은 헤
겔의 변증법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럴 필요도 없거니와, 변증법은 비과학적이며 비
논리적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그런 면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적지 않
은 헤겔의 후계자들이 그의 변증법을 받아들이고 있다. 덴마크의 키에르케고르가 그
대표자 중의 하나이다. 키에르케고르의 책을 읽으면 변증법은 헤겔식이 아닐때 대단히
중요한 면을 갖는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헤겔의 변증법을 정신에서 물질로 바꾸어
철학과 사상사에 큰 영향을 준 것은 마르크스와 그 후계자들이다. 심지어는 모택동이
나 김일성까지도 모순과 혁명을 연결짓는 변증법적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오래 관심밖에 있었던 변증법적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오래 관심 밖에 있었
던 변증법이 마르크스주의자들을 통해 다시 세계무대에 등단했을 정도이다. 그러면 그
변증법은 어떤 방법론인가? 누구도 그 완결된 해답을 줄 수는 없다. 모두가 제각기 다
른 해석을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그러나 한 가지 가능한 것은 헤겔을 비롯한 변증론자
들이 이런 사고를 하고 있었다는 윤곽적인 설명을 할 수 있고 또 해야 할 것이다.

  (그림설명)헤겔이 잠시 교수로 머물렀단 하이델베르크 대학. 1816년 이 대학의 교수
로 취임한 그는 "철학백과전서"를 이듬해 내놓았다.
@ff
    66 모순, 대립, 통일: 헤겔의 변증법
  그 때 세계에서는-
  1809년: 라틴아메리카, 각국에서 독립운동활발
  1811년: 영국, 러다이트운동

  예로부터 동양인들은 변증법이라는 한자를 사용했다. 그러다가 서양철학의 영향을
받기 시작하면서는 변증법이라는 한자로 바뀌기 시작했다. 그것은 동양에서의 변증은
개념의 분석을 생각했던 것인데, 지금은 대화 또는 토론의 뜻을 더 많이 지니게 된 때
문이다. 서양에서는 변증법의 어원은 대화로 되어 있다. 대화 또는 토론의 경우를 생
각해보자. 갑은 A를 주장한다. 그 얘기를 듣고 있던 을은 A에 반대되거나 A가 아닌 B
를 주장한다. 그래서 A냐 B냐를 두고 토론을 하다가 결국은 A도 B도 아닌 C를 택하게
된다. C는 A와 B를 합친 것이면서도 A와 B를 초월한 것이다. 그런데 병이 나타나 C를
반대하는 주장을 내세운다. 그것은 D라고 말한다. 그러면 C와 D를 두고 토론하던 두
사람은 C도 D도 아니면서 그것을 합쳐 초월하는 E의 결론을 얻게 된다. 그래서 대화와
토론은 더 높은 차원의 결론으로 유도, 발전되는 것이다. 이렇게 반대와 대립에서 제
3의 것으로 발전하는 대화와 토론의 기능, 그것을 변증법이라고 부른다. 플라톤의 모
든 저서는 대화법으로 되어있다. 그것을 사람들은 소크라테스의 대화법이라고 말한다.
소크라테스는 계속되는 대화에서 명백하고 믿을 수 있는 개념을 얻어내는 것을 변증적
사고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런데 헤겔은 이러한 변증법을 철학의 모든 분야에 적용시
킨 것이다. 인식과 역사는 물론 철학적 존재론에까지 확대시켜나간 것이다. 그리고 그
변증법의 방법은 논리학에 근거를 두는 것으로 보았다. 그런 내용을 잘 모르는 사람들
은 헤겔의 "논리학"을 다른 철학자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논리학과 혼동하는 경우
가 많다. 헤겔에 있어서는 그것은 논리학이라기보다는 논리학을 포함하는 변증법이며
변증법 자체가 그의 철학인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해보자. 내가 셰익스피어를 읽었다.
그로부터 어떤 사상이나 예술관을 얻게 되었다. 그것을 지금 가지고 있는 정(Thesis)
의 위치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다가 괴테의 "파우스트"를 읽게 되었다. 괴테와 셰익
스피어 사이에는 서로 어긋나고 반대되는 점이 있었다. 괴테는 어떤 면에서 셰익스피
어에 대한 반(Anthesis)의 위상에 속하는 것이 있었다. 나는 셰익스피어와 괴테를 대
립시켜보면서 더 높은 제 3의 사상이나 예술관을 갖게 된다. 그것은 정과 반의 합의
위치로 올라가는 것이다. 만일 셰익스피어와 괴테가 같은 내용이었다면 즉 반이 없었
다면 양적으로 더 많은 지식은 얻을 수 있으나 질적으로 더 높은 것은 탄생되지 못한
다. 그 다음에는 다시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었다고 하자. 그 때는 합의 위치의 지식이
정이 되고 도스토예프스키가 반의 자리를 차지해 또 하나의 높은 차원의 사상과 예술
관을 얻을 수 있다. 이렇게 되어서 인식과 지식이 성장, 발전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
런 견해를 변증적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초대교회로부
터 시작해서 기독교는 오랫동안 카톨릭의 위치로 굳어져 왔다. 그 안에 갈등도 생기고
모순도 일어나고 있었다. 여기에 루터 같은 종교 개혁가가 나타나 반카톨릭 세력을 확
대시켜 나갔다. 처음에는 그 세력이 미미했기 때문에 카톨릭은 루터를 파문에 처하고
추방해버린다. 그러나 루터를 비롯한 프로테스탄트의 세력이 크게 성장해 마침내는 카
톨릭과 동등한 세력을 갖추게 된다. 그렇게 해서 기독교는 두 갈래의 대립상대를 만들
게 되나, 결국은 그 때문에 기독교는 더 성숙되고 원만한 제 3의 것으로 발전하기에
이른다. 이 때 카톨릭이 프로테스탄트라는 아들을 낳지 않으려고 그 자리에 머물러버
린다면 카톨릭이라는 어머니는 죽음을 스스로 초래하게 된다. 이러한 대립에서 발전에
의 과정을 역사에서는 언제나 찾아볼 수가 있다. 그런 작용을 변증적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적 변증법이 인정받는 것이다. 이 때 주의하게 되는 것은 동
질적인 내용은 변증적 발전을 가져오지 못한다는 점이다. 반대되는 내용들은 어느 정
도 대립과 변증을 가능케 한다. 그러나 모순관계는 반드시 변증적 발전을 일으킨다.
그래서 헤겔이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모순의 논리를 현실화시켜 나간다. 반대개념 사
이에는 중간이 있을 수 있다. 높은 산과 낮은 산은 중간 산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생과 사, 유와 무는 중간이 없는 모순관계이다 모순은 논리에서는 항상 비라는 개념을
동반한다. 유와 비유 같은 헤겔의 애용개념이 여기에 나타난다. 이런 의미를 전제로
한다면 헤겔의 변증법을 그대로 받아들일수는 없어도 변증법적 사고는 있을법하고 또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헤겔의 변증법을 수정, 발달시킨 대표
자가 마르크스였고 키에르케고르였다.
@ff
    67 독일관념론의 종언: 헤겔의 사망(1831년)
  그때 세계에서는-
  1830년: 스탕달, "적과 흑"발표: 영국 차티스트 운동
  1832년: 영국의회, 제1차 선거법 개정안 통과

  먼저 이야기로 되돌아가자.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하던 헤겔은 새로 창
간되면서 학문과 사상계의 중심지로 떠오른 베를린대학의 철학교수로 초청을 받게 된
다. 독일의 모든 대학은 국립대학인 셈이다. 지방자치제가 일찍 형성되었기 때문에 미
국식으로 말하면 주립대학인 동시에 국립대학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 당시의
베를린대학은 국립이나 왕립대학으로 볼 수도 있을 정도로 신흥학문의 본고장같이 받
아들여지고 있었다. 헤겔은 관운이 좋은 편이었던 것 같다. 베를린 대학의 초청을 받
은 헤겔은 철학과의 중심교수가 되었고, 철학과의 중심교수는 교수중의 교수로 군림하
는 상황이기도 했다. 철학은 학문중의 학문으로 인정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헤겔은 교
수로서의 존경과 명예를 함께 누리는 위치에 있었다. 그의 강의실에는 대학생은 물론,
왕족이나 귀족들도 앞을 다투어 참여하는 상황이 되었다. 독일대학의 제도에 따라 수
업도 좋아졌고 그의 명성은 세계적인 것이 되었다. 물론 일부 교수들로부터 어용교수
라는 비난도 없지 않았으나 그는 지나칠 정도의 높은 정신적 대우를 받고 있었다. 지
금 생각해보면, 그 난해하고 중복되는 지루한 강의에 열성적으로 모여드는 학생들이
많았다는 것은 당시의 한 풍습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어려운 체계를 만
드는 것이 훌륭하다는 독일적 사고풍토였을지 모른다. 헤겔이 프랑스나 영국에서 그런
강의를 했다면 결과는 달라졌음에 틀림이 없다. 헤겔의 인기가 절정에 이르고 있을 무
렵, 정확히 말하면 1831년 여름에 독일에는 콜레라가 창궐해 많은 사람이 생명을 잃었
다. 그 당시의 콜레라는 전체 인구의 몇분의 1씩을 희생시킬 정도의 무서운 전염병이
었다. 헤겔의 가족들은 콜레라를 피하기 위해 베를린을 떠나 있다가 병세도 자취를 감
추게 되고 새로운 가을 학기도 시작되었기 때문에 헤겔은 베를린으로 돌아왔다. 강의
준비를 갖추고 개강이 되었을 무렵 헤겔은 콜레라에 감염되었다. 의사들의 정성어린
도움을 받았다. 그 당시에는 겨자를 전신에 바르는 치료법도 있었던 모양이다. 병세가
회복될 것으로 기대되었는데 결국은 헤겔이 불행하게도 그 해 콜레라의 마지막 희생자
중의 하나가 되었다. 헤겔의 급작스러운 죽음은 베를린 대학과 철학계에 커다란 파문
은 몰고 왔다. 철학계의 최대의 거목이 사라진 것 같은 여파가 일어났던 것이다.헤겔
이 죽은 뒤 베를린 대학은 그 큰 공백을 채우기 위해 고심하다가 헤겔의 선배인 셸링
을 초청하였다. 셸링은 아직 50대 후반기의 한창 원숙된 학문적 활약기였기 때문에 초
청을 받았던 것이다. 셸링은 큰 기대에 부풀어 베를린대학으로 부임했다. 그러지 않아
도 후배인 헤겔에 대해 뒤떨어졌다는 생각때문에 불안을 안고 있을 때였다. 그러나 시
대는 이미 헤겔로 끝나 있었다. 셸링의 강의는 헤겔보다도 더 일찍 끝장난 과거의 철
학같은 인상을 씻을 수가 없었다. 학생들의 기대감은 좌절되었고, 모두가 셸링에게 등
을 돌리는 결과가 되었다. 때는 이미 새로운 철학을 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셸링이
강의를 하고 있을 때 덴마크의 키에르케고르는 레기네올센과의 사랑의 괴로움을 안은
채 베를린에 들러 셸링의 강좌에 참여한 일이 있었다. 처음에는 독일철학에 관심을 보
였으나, 곧 실망해 코펜하겐으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헤겔의 죽음은 독일 관념론의 종
언인 동시에 세계철학사의 커다란 종착역을 만들어놓았다. 플라톤부터 시작되었던 철
학의 큰 흐름이 이미 끝을 고하는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 어떤 이들은 헤겔과 더불어
근대철학은 끝났다고 평했을 정도였다. 이렇게 보면 세계철학사의 가장 높은 산맥이었
던 독일 관념론은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서 시작되어 1831년의 헤겔의 죽음과 더불
어 끝났다고 보아 좋을 것 같다. 꼭 반세기에 걸친 철학의 전성기였던 셈이다. 돌이켜
보면 칸트는 나귀와 같이 조용하고 겸손했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많은 철학의 짐을 지
고 출발했었다. 피히테는 호랑이와 같이 날쌔게 달리는 성격이었다. 셸링은 달리는 말
과 같이 빨리 질주해 주어진 시대를 장식했다. 그러나 헤겔은 소와 같이 느리게 시작
했으나 누구보다도 많은 짐을 지고 목적지에 도달한 격이었다. 그래서 후대의 철학자
들은 중간의 피히테나 셸링보다도 헤겔에 대한 관심을 더 많이 갖게 되었다. 칸트가
아니면 헤겔을 택하는 것이 철학도들의 공통된 선택과 같이 되어버렸다. 지금도 독일
에서는 물론, 일본의 철학원로들이 양자택일을 하는 추세가 되었고, 우리나라의 철학
도들도 둘 중의 어느 한사람에게 추종하는 일이 보통이었다. 그리고 헤겔 100주기와
최근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다시 헤겔연구에 뜻을 모으게 된 것
이 사실이다.
 (그림설명) 헤겔이 죽기전 까지 머물면서 강의했던 베를린대학, 베를린시절은 헤겔의
가장 화려한 시절로서 유력한 헤겔학파가 형성되었다. 동상은 대학의 설립자 훔볼트
@ff
    68 가장 재미있는 철학책: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1819년)
  그때 세계에서는-
  1817년: 영국 리카도, "경제학 및 과세의 원리"지음
  1823년: 미국 먼로 대통령, 먼로주의를 선언

  헤겔이 베를린 대학에서 인기절정의 강의를 하고 있을 때, 헤겔을 대단히 싫어하고
학문적으로도 대립적인 위치에 있던 한 철학자가 사강사로 강의를 한 일이 있었다. 그
는 자신의 철학강의를 들은 학생들은 헤겔을 떠나 자기의 강의실로 찾아들 것이라고
자부했었다. 그러나 헤겔의 인기와 명성에 눌려 전혀 빛을 보지 못하고 떠난 이가 쇼
펜하우어였다. 쇼펜하우어는 대단한 천재성을 지닌 젊은이였다. 괴테가 그의 모친에게
'당신은 천재 아들을 두었기 때문에 그 이름이 역사에 남을 것이다'라고 칭찬해주었을
정도였다. 쇼펜하우어의 가정은 본래가 실업가였다. 그것도 대단히 크게 성공한 무역
업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의 부친은 외아들인 쇼펜하우어의 가정은 본래가 실업가였
다. 그것도 대단히 크게 성공한 무역업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의 부친은 외아들인 쇼
펜하우어를 후계자로 키우려고 노력했다.그러나 불행하게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의
어머니는 작가였기 때문에 남편의 유산을 상속받아 작가로서 활약하기를 원했고, 아들
쇼펜하우어는 철학공부를 해 교수가 되려는 꿈을 실현하고 싶었다. 쇼펜하우어가 본격
적으로 철학공부를 시작한 것은 늦은 편이었다. 그도 칸트로부터 시작한 셈이다. 칸트
의 "순수이성비판"을 읽고, 자신도 독창성있는 철학자가 될 수 있다는 자부심을 불태
울 수 있었다. 칸트의 철학을 가장 바르게 이해한 사람은 피히테, 셸링, 헤겔이 아닌
자기자신이라고 자부했다. 그것은 칸트를 칸트대로 인정했다는 점에서는 정당한 판단
이었을지 모른다. 그의 지금도 많은 독자를 갖고 있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대표적 저서인 동시에 칸트의 영향으로부터 출발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 책 첫머
리의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는 말은 칸트의 주관적 관념론을 이어받은 적절한 표현이
다. 쇼펜하우어는 "내 책 첫마디만 읽어도 내 책의 위대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고 자
랑하기도 했다. 칸트에게서 인식론과 철학을 받아들인 쇼펜하우어는 플라톤을 연구했
다. 그리고 플라톤이 말하는 이념을 존재의 형상인 동시에 예술적 원상으로 해석해 예
술철학적 방향으로 발전시킨다. 그리고 헤겔이 정신철학을 제창한 데 대해 의지의 철
학을 주장하고, 삶과 세계와 우주의 근원은 맹목적인 의지로부터 발원한다고 보아 염
세주의 철학을 기초짓는다. 그리하여 그는 역사상 가장 강렬한 염세주의 철학을 정착
시켰다. 그러나 염세주의를 극복하는 길은 없는가를 모색한 그는 인도의 철학을 받아
들인다. 해탈의 철학만이 맹목적인 의지의 올무를 벗어날 수 있다고 설명해준다. 서양
철학자 가운데 최초로 인도철학을 자신의 체계속에 도입한 철학자는 쇼펜하우어로 보
아야 할 것 같다. 어쨌든 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예상을 뒤엎소 철학계에
적지 않은 파문을 던졌다. 독일의 전통은 영국과 다르다. 영국에서는 교수가 아닌 철
학자나 학자들도 교수와 동등하게 인정을 받는다. 그러나 독일에서는 대학강단을 차지
하지 못한 철학자는 야인에 머문다. 그리고 그들의 저서와 철학이 대학강단에서 강의
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쇼펜하우어의 저서와 철학은 대학보다도 사회 여러계층
의 호응을 받았고, 그 독자들은 오히려 쇼펜하우어에 심취해 그를 지지하고 따르는 결
과를 초래하기에 이르렀다. 확실히 그의 철학에는 피와 생명을 지닌 인생의 과제와 그
해결을 위한 내용이 들어있다. 그의 추종자들은 쇼펜하우어 이외에는 철학이 없으며
다른 책 열 권보다도 쇼펜하우어의 한 권의 책이면 족하다고 찬사를 보냈다. 지금 우
리가 읽어도 그의 저서는 약동하는 생명력이 있고 또 그렇게 흥미진진할 수가 없다.
일상생활의 대단치 않은 문제들도 그의 설명을 듣고 나면 진리에 접근케 해 주는 느낌
이 든다. 그는 여성을 대단히 천스러울 정도로 비판한다. 사람들은 평생동안 모친과
불화한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모친에 대한 혐오감이 여성에 대한 증오심으로 발전해
결혼도 하지 않았고 여성기피증에 빠졌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글을 읽고 나
면 상당히 수긍이 가기도 한다. 성의 본능성에 대해서도 그렇다. S. 프로이트를 읽기
전에 쇼펜하우어를 읽은 사람은 프로이트의 사상이 새롭게 느껴지지를 않는다. 쇼펜하
우어는 생의 근본의지를 만드는 것은 성적 욕망이며, 그것은 생명보전의 기본조건이라
고 본다. 인간 신체 중에 가장 대조적인 두 요소는 대뇌와 생식기라고 설명하고 있을
정도다. 성의 본능이 단절되면 인류는 더 이상 존속할 수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그의
예술철학도 이데(Idee)론에 따르면 확실히 높은 차원의 의미를 갖는다. 아름다운 나무
는 열매를 맺는 일이 없으며 좋은 과수들은 그렇게 못생겼을 수가 없다고 말해 독자들
을 웃긴다. 오히려 헤겔이나 셸링보다는 독창성이 있는 철학이론을 재미있게 전개시켜
준다. 추종자들이 그를 종교적인 스승으로까지 추앙했던 것도 이유없는 바 아니었다.
  (그림설명) 삶과 세계와 우주의 근원은 맹목적인 의지로부터 발원한다고 하며, 역사
상 가장 강렬한 염세주의 철학을 낳은 독일 관념론에 속하는 철학자 쇼펜하우어.
@ff
    69 '세계는 나의 표상': 쇼펜하우어(1788-1860년)
  그때 세계에서는-
  1837년: 미국, 최초의 공황발생
  1840년: 청, 아편전쟁시작

  쇼펜하우어는 자기자신을 천재라고 믿고 있었다. 그는 천재는 수학을 싫어한다는 말
도 했다. 니체도 천재였다. 니체는 수학을 제외한 모든 학과목에서 우수했다고 한다.
그 대신 쇼펜하우어는 광기도 심했던 사람이다.그의 부친의 가문에는 몇 사람의 정신
이상자가 있었고 죽기 전의 부친도 그런 요소가 있었다고 말한다. 그의 부친과 모친은
나이의 차이도 심했고 성격도 서로 크게 달랐다. 인생관에서도 일치점이 없었는가 하
면, 체구가 장대하고 우울한 성격의 부친에 비해 모친은 왜소했고, 언제나 명랑한 성
격을 지니고 있었다. 어쨌든 이런 점들이 쇼펜하우어의 성격적 불균형과 조화로운 정
상성을 상실한 생애를 갖게 했는지 모른다. 모친과의 심한 불화도 성격의 차이였던 것
같다.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철학에서 모든 소유와 명예같은 것은 무가치한 것으로 배
제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자기자신은 심한 명예욕에 빠져 있었다. 말년에는 자기
저서가 많은 독자를 가지며 대학 강단에서 자기 철학이 강의된다는 기사들을 보면서
그것들을 뽑아모아 자랑삼기도 했다. 자기 거실양쪽 벽에는 칸트와 괴테의 사진이 걸
려 있고 많은 개들의 사진도 있었다. 애견의 이름은 아트만이라는 인도철학의 용어를
붙여주기도 했다. 잉글랜드라는 한 식당에서 주로 식사를 했고 다른 곳에서 식사를 할
때는 음식물에 해로운 물질이 들어가 있는지 않은지 의심하는 습관도 있었다고 전해진
다. 그의 글을 읽으면 왜 개를 칭찬하고 있는지 족히 수긍이 간다. 물론 그의 철학적
업적은 여러면에서 주목할 만하다. 오직 대학강단에서 그의 철학을 달갑게 받아들여지
지 않은 것은 칸트를 제외한 당대의 철학자들을 경시하거나 비판한 장면들이 심하기
때문이며, 특히 헤겔에 대해서 그러했다. 헤겔의 명성에 대한 질투가 그를 적대시하는
지경에까지 이른 것이었다.그는 어떤 철학적 이론을 갖고 염세주의를 제창했는가? 그
당시의 철학자들은 세계와 존재를 어떤 절대적 실체로부터 해명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
하고 있었다. 헤겔이 정신을 말했고 포이어바흐나 마르크스가 유물론을 제창했듯이,
어떤 이들은 다원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쇼펜하우어는 존재세계의 실체는 의지라고 생
각했다. 물질세계를 좌우하는 힘 및 역학도 의지작용과 통하는 것으로 보았고, 생명체
를 유지하는 것은 생명의지로 보았다. 이 생명의지에 의해 식물들이 나비와 바람을 타
고 화분을 옮겨 번식하기도 하며, 심지어 어떤 식물은 동물을 잡아먹기도 한다. 동물
들은 자기번식의 강한 욕망으로 생을 유지해간다. 어떤 수놈은 단 한 번의 교미를 위
해 태어난다. 그래서 종족을 보존, 유지해간다. 인간의 본질이 되는 것도 살아남으려
는 본능의지의 발로라고 본다. 특히 성욕은 종족유지의 기본본능이며 여성들은 남성들
보다도 종족유지의 본능이 더 강하다고 본다. 사람들은 지성이나 이성이 인간의 본질
이 되는 듯이 착각하고 있으나, 지성은 본능의지의 심부름을 하는데 불과하다. 인간은
생명의 위기상태에 빠지면 지성의 힘이 아닌 본능의 직각을 얻어 생명을 보존한다. 이
러한 의지는 맹목적이며 살아남기 위한 의욕으로 지배된다. 사람이 후손이 없을 때 느
끼는 고독은 생명의 단절을 의미하는 존재단절의 고독감이다. 이렇게 맹목적인 의지를
그대로 방치해 두면 약자는 강자의 지배를 받으며 모든 생명체는 강자의 희생의 제물
이 될 뿐이다. 자연은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그 속을 살펴보면 살생과 살육이 계속되
는 싸움과 정복의 연속이다. 자비와 사랑 같은 것은 인간이성이 만들어 놓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광산의 굴 속에 갇혀 죽음을 앞둔 사람들은 배고픔을 이기고 살아남기
위해 동료들을 식량의 대상으로 삼는다. 어떤 조류는 어미새까지 다 잡아먹은 뒤에야
둥지에서 날아 나온다.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삼갈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존하고 있는 세계는 최악의 세계이며, 이보다 더 나쁘고 악한 세계
는 있을 수 없다고 본다. 선택의 여지가 있다면 태어나지 않는 것이 최상의 길이며,
이왕 태어난 바에는 이 저주스러운 비참한 현실을 깨닫고 자살하는 것도 무방하다고
본다. 우리에게뿐만 아니라 존재하는 세계에는 희망도 없으며, 암흑을 극복할 가능성
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인간의 진로는 악의 축적일 뿐이며, 사회적 삶은 역사악을 더해
갈 뿐이다. 이성과 진리, 예술 등을 논하는 것은 이러한 비극적 운명을 잠시 잊게 해
주는 마취제에 지나지 못한다. 고통과 비참은 어디에나 있으며 긍정적인 희망은 허망
한 꿈일뿐이다. 신의 존재는 헛된 환상에 불과하며 종교적 인식 같은 것은 자기기만일
뿐이다. 개인의 죽음은 이 세계악의 운명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작은 파도가 큰 조
류에 스며들 듯이 개인의 비참은 인류 전체의 비참에 스며들 뿐이다.모든 세계는 저주
받은 존재에 지나지 못한다.
@ff
    70 초인의 등장: 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년)
  그때 세계에서는-
  1847년: 영국 과잉생산으로 공황 발생: 마르크스 등, 런던에서 공산주의자동맹 결성
  1861년: 미국, 남북전쟁 발발

  이렇게 막다른 염세주의의 벼랑까지 몰고나온 쇼펜하우어는 그 해결의 길을 동양의 
배다와 우피니샤드 철학에서 발견한다. 인도인들은 일찍부터 그런 인간과 세계의 비극
성과 비참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그 해결의 방법을 해탈의 길에서
얻으려고 했다. 인도인들의 해탈의 정신은 근본의지, 삶과 세계의 존재의지 그 자체를
무화시키며 해탈로 벗어나는 길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사실 쇼펜하우어를 읽는 사람
은 이 의지의 염세적인 악의 존재는 인정하나 해탈의 방법과 같은 이론적 해명에 지나
지 못한다고 보기 쉬웠다. 그래서 적지 않은 추종자들이 염세 및 허무주의적 세계관에
공명하기에 이르렀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런 세상에서 열심히 즐거움을 찾아 산 사람
은 말년의 쇼펜하우어 그 자신이었다. 사람은 극단의 주장과 사상을 앞세우게 되면 자
신은 언제나 그와 일치되지 않는 삶을 살게되는 법이다. 만일 쇼펜하우어에게 니체와
같은 추종자가 없었다면 그의 철학은 몇가지 내용을 남겼을 뿐, 오늘과 같은 역사적
의미는 지니지 못했을지 모른다. F.니체는 쇼펜하우어 못지 않은 천재성과 기인적 생
애를 살았다. 아버지도 목사였고 조부도 목사였다. 할머니도 목사의 딸이었고 어머니
도 목사의 딸이었다. 니체는 태어날때부터 기독교에 대한 이해가 깊었다. 그러나 유례
를 보기드물 정도의 반기독교 정신을 갖고 싸운 혁명아가 되었다. 대학에서는 그리스
정신과 문화에 도취되어 리츨이라는 교수밑에서 문헌학에 뜻을 모았다. 그가 교수의
추천을 받아 바젤 대학에서 강의를 하게 되었을 때, 교수는 당신은 대학이 요구하는
모든 영역의 학문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라고 칭찬해주었다. 그러나
니체는 타고난 시이,예술가였다. 치밀한 과학성을 지닌 편도 아니었고, 체계적인 학설
을 제창한 철학자다운 인내력도 부족했다. 그의 특성은 철학적 과제를 시적으로 해명
하는 특이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시인보다도 철학자로 역사에 남게 된 것이
다. 니체가 철학적 사상에 접하게 된 것은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에 접한 때문이었다. 그 때까지는 R. 바그너의 음악을 사랑하는 예술평론가에 가까운
일에 열중해있었고 바젤 대학을 곧 떠났기 때문이 자유로운 문필가로서의 위상을 굳히
고 있었다. 그는 수많은 저서를 남겼고 다양한 독자층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그 철학
적 주제는 쇼펜하우어의 의지의 철학을 연장시킨 것이었다. 그 이론성을 갖춘 대표적
인 저서는 "권력에의 의지"이며, 그의 핵심사상이 여기에 잘 나타나있다. 그러나 그 "
권력에의 의지"도 철학적체계를 갖춘 저서는 아니다. 그는 학자이기보다는 시적 사상
가였음을 여기서도 엿보게 한다. 그는 드물게 보는 문필가였다. 자기자신이 최고의 독
일문장을 구사하는 사람이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A. 슈바이처도 프랑스어로 씌어진 최
고의 문장은 루소의 "민약론"이고, 독일어로 씌어진 가장 훌륭한 문장은 니체의 "선약
의 피안"이라고 인정하고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우리들의 대부분은 그의 "차라투스트
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즐겨 읽고 있다. 니체의 사상을 가장 잘 드러내 보여주는 주저
이기 때문이다. 니체도 그 짐을 인정하고 있으며, 가장 뛰어난 문장이라고 자평한다.
우리가 젊었을 대는 "차라투스트라..."를 읽지 않은 대학생이 없었을 정도였다. 차라
투스트라는 페르시아의 성자였다. 그를 주인공으로 해서 자기자신의 사상을 시적으로
표현한 철학적 시상이다. 그는 그 속에서 '신들은 이미 죽었고 나는 인간을 사랑한다'
고 절규하고 있다. 한때 '신은 죽었다'는 신학이 유행한 일이 있었으나, 그 처음 발언
자가 바로 니체였던 것이다.그는 인간의 신체가 죽으면 그것으로 삶은 끝난다고 보았
다. 영혼같은 것이 따로 존재하는 것 같은 망상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경고했다. 그는
차라투스트라를 통해 항상 주창해오던 초인의 사상을 선포한다. 찌꺼기 인간, 잡스럽
고 조심스럽기만 한 벼룩의 집단같은 소인들의 위치를 벗어나, 새 모럴을 창조하며 수
많은 평범한 인간들을 힘으로 지배할 수 있는 초인이 탄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때
이 초인의 사상은 젊은이들의 세계를 휩쓸었다. 영국의 버너드쇼의 "사람과 초인"이라
는 희곡이 영국 런던에서 상영되었는데, 100일간 언제나 초만원이었다고 한다 그 작품
때문에 런던의 히스테리환자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는 얘기가 전해질 정도였다. 쇼도
초인적 사고와 가치관을 가진 주인공을 통해 니체의 사상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
나 우리는 니체의 철학적인 과제로 돌아가야겠다.

  (그림설명)초인사상을 탄생시킨 니체. 인간은 권력에의 의지를 체현하는 초인의 이
상을 향해 끊임없는 자기극복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키에르케고르와 함께 실존주의
의 선구자로 꼽힌다.
@ff
    71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니체의 초인사상(19세기말)
  그때 세계에서는-
  1862년: 청.양무운동 발발
  1864년: 국제노동자협회(제1인터내서녈)결성

  니체는 태어날때부터 기독교적인 분위기에서 성장했다 그러나 그의 자유로운 정신은
기독교 이외의 어떤 정신적 세계속에서 새로운 활로를 찾고 싶었다. 대학에 있을 때
그이게 또 하나의 세계를 제공해 준 것은 그리스의 사상과 철학이었다 결국 니체의 일
생은 기독교에서 그리스 정신에로의 전환이었고,그리스의 정신속에는 고대 동양, 특히
중동의 페르시아의 배화교적인 요소가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 그리스의 오리피즘 종교
가 바로 그런 것이었다. 그러던 중 쇼펜하우어의 의지의 철학에 접하면서부터는 자기
자신의 철학적 과제를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니체는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존재의지
를 인간의지로 축소시켰고, 세계의지를 사회가 지배하는 권력의지로 집중시켰다. 생명
세계의 의지력을 인간의 의지조건으로 재해석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는 플라톤때부터
헤겔까지 사상가들이 비판없이 추종해온 이성중심의 인간관은 잘못된 것이라고 보았
다. 인간의 삶을 주관하는 것은 지성이 아닌 의지인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인식할 때
는 이성 또는 지성이 그 주체가 되는 듯이 착각해왔다. 그러나 지성은 의지가 원하고
명령하는 것을 도와주는 역할을 할뿐이다. 하늘의 북두칠성을 보면서 저 국자와 같이
생긴 일곱 개의 별이 북두칠성이라고 말하면서 그 한쪽에 떨어져 있는 것이 북극성이
라고 설명한다. 그것은 우리 지성의 사고 결과라고 누구나 생각한다. 그러나 그 숨겨
진 과정은 그렇지 않다. 우리의지는 모든 것을 쉽고 간단하게 알기를 원한다 그래서
수를 계산할 수 있게 만들고, 그 수에 어떤 모양을 맞추어 한 개념으로 바꾸도록 요청
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 인식기능에서 제일 많이 작용하는 것은 동일화작용과 합리화
작용이다. 무엇이든지 하나로 바꾸어놓으면 깨닫기 쉽고, 합리화시키면 빠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되어있다.지성이 수학, 기하학을 발견한 것이 아니다. 의지가 인식에 필요
한 공식을 만들도록 지시했기 때문에 수학, 기하학같은 합리적 원칙을 찾게 되는 것이
다. 지성의 기능이 곧 인식의 도구책임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 결과로 쇼펜하우어의
의지 우위론이 니체에게 있어서는 지성 방법론으로 발전했다. 사람들은 지성이 제일이
라는 생각을 너무 오래 지녀왔기 때문에 지성도구론에는 익숙해지지 못하곤 한다. 그
러나 미국의 존듀이 같은 철학자는 지성은 행동하기 위한 수단과 도구라고 말한다. 이
는 지성이 홀로 있다면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못하고 행동을 돕기 위해 생각이 뒤따라
작용한다는 철학이며, 또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주장에 공감하기도 한다. 더 중요한 것
은 니체는 인간의 삶은 사회속에서 이루어지며 사회적 삶을 지배하는 것은 권력의지라
고 규정짓는다. 권력의지는 지배자의 능력의 원천이며, 인간은 누구나 강해지며 지배
하려는 의욕과 의지를 지니고 있다 그 권력의지는 어디에서든지 발로되기 마련이며,
정치권력은 그 대표적인 것이다. 그래서 승리와 지배를 뜻하는 권력의지는 역사를 이
끄는 원동력이 된다. 약자의 윤리는 패배자의 윤리이며, 지배자는 힘을 동반함으로써
승리의 모럴을 대신하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마키아벨리 이후의 가장 대표적인 힘
의 철학, 정치권력의 정당성을 인정한 철학자로 니체를 꼽고 있다 .히틀러가 바그너의
음악을 좋아했고, 니체철학을 숭상한 것은 이유없는 바가 아니다.무솔리니가 실의에
빠져 있을 때 히틀러가 니체전집을 선물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러한 강자
를 정신적으로 대표하는 인간이 그의 초인이다. 찌꺼기같은 잡스러운 소인들 틈에 끼
어 있지 말고,뜻이 있는 사람은 초인이 되어 지배자의 도덕과 강자의 윤리를 찾아 살
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수많은 평범한 인간들은 한두 초인을 위해 존재하며 희
생당해 마땅하다고 주장한다. 초인은 강자의 가치관을 갖춘 사람이다. 그 초인의 가치
관이 도덕과 윤리의 기반이 되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초인도 운명앞에서는 어
떻게 할 수가 없었다. 오직 초인은 그 운명을 사랑하며, 세계운명은 영구히 회귀하는
섭리에 따라 움직일 뿐이다. 즉, 그리스의 세계운명의 정신이 초인이 돌아갈 마지막
길인 것이다. 니체도 운명의 인간이었다. 1900년에 죽는다. 그러나 11년동안은 정신병
자로 머물렀다. 모친이 작고한 후에는 누이동생의 보호를 받다가 죽었다. 50세가 못되
어 한창 일할 나이에 세상을 등진 것이다. 그것은 마치 지는 태양이 화려한 빛을 남기
면서 사라지는 것같은 운명의 조작인 것 같았다. 정신병을 앓고 있을 때의 니체는 어
린애와 같이 양순했고, 모친과 누이동생의 지시를 반항없이 고분고분 따르곤 했다. 오
빠의 운명을 슬퍼하는 누이에게 "내가 이렇게 행복한데 왜 우느냐"고 억지로 웃어 보
이기도 했다. 아직 완전히 폐인이 되기 이전의 일이었다. 그의 사상이 인정받기 시작
한 것은 19세기 말경부터였고, 20세기에 들어와서는 문학이나 사상에 넓고 깊게 영향
을 끼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오늘날에는 키에르케고르와 함께 실존주의의 선구자
로 일컬어지고 있다.
  (그림설명)니체의 주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원고 중 한 부분
@ff
    72 '불안'과 '절망'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1813-1855년)
  그때 세계에서는-
  1840년: 영국리빙스턴, 아프리카탐험 시작
  1851년: 청, 태평천국의 난

  옛날부터 덴마크는 독일문화의 영향을 받고 있으면서도 독립된 사상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은 오래 전부터 조용한 북국의 문화를 대표하고 있는
도시였다. 그곳 시청 부근의 한 부유한 가정에 쇠렌 키에르케고르라는 소년이 자라고
있었다.그는 특유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밖으로는 대단히 명랑해 보이면서도 속으로는
깊은 우수를 어려서부터 지니고 있었다. 생각은 어른같으면서도 느낌과 행동은 때로는
어린이 같은 면을 보이기도 했었다. 이처럼 비범한 재능을 가진 키에르케고르는 코펜
하겐 대학에 진학, "소크라테스의 아이러니"라는 제목의 논문을 제출하고 계속 철학적
사색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에게는 당시의 유럽사상계가 모두 그러했듯이 철학과 신학
은 같은 연구과제로 되어있었다. 특히 그의 가정은 열성적인 신앙을 이어오는 편이었
다. 신앙과 상반되는 것은 언제나 죄의식과 통하고 있었다. 키에르케고르의 아버지는
어려서 친척집에 머슴살이를 하면서 가난과 신세를 원망스레 여겼다. 그래서 한번은
양을 치기 위해 들에 나갔다가 자기의 신세를 한탄하며 하느님께 원망 돌리는 저주를
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그 뒤 부친은 많은 재산을 모으고 무역업에 종사하여 당대 드
물게 보는 부를 누리게 되었다. 그래서 신을  저주한 자신이 부를 지니게 된 것은 신
의 보복에 의한 두려운 은총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부친의 첫 아내는 소생이 없이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두번째 부인은 그 집에 가정부로 있던 인척여성이었는데, 결혼
하고 10개월이 지나기 전에 키에르케고르의 큰 형 피터를 낳게 된다. 후에 피터는 목
사가 된다. 그런데 키에르케고르에게는 어머니가 결혼 전에 임신을 했다는 사실이 씻
을 수 없는 종교적 죄책감과 우울함을 더해준다.전 부인이 죽고 최소한 1년 후에 해산
을 해야 하는 관례에서 온 죄의식이었다. 거기에다 더 큰 불행이 가정적으로 일어났
다. 키에르케고르는 모두 7남매였는데 큰 아들 피터와 키에르케고르를 제외한 5남매가
모두 요절하는 비극을 겪어야 했다. 이 사실은 줄곧 키에르케고르의 부친으로 하여금
신의 버림을 받은 때문이라고 생각케 한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은 죄인이라는 우
울함을 벗어날 길이 없었다. 키에르케고르도 자라면서 이 사실을 알게 되고 자기와 가
정은 신의 사랑에서 밀려난 죄인의 가정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릴수가 없었다. 부친과
아들 모두가 이 죄의식에 깊이 빠져 서로의 관계가 다정하게 이루어지지 못했다. 아들
은 부친이 용서받기 어려운 범죄에 연루되었다는 의식을 벗어나지 못해 심지어는 부친
과 불화하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된다.키에르케고르는 이러한 인간적 고뇌를 씻기 위해
사교생활에 나서기도 했고, 문화활동 등을 하다가 레기네 올센이라는 소녀를 만난다.
그때 소녀는 어렸기 때문에 3년이 지나야 결혼연령이 허락되는 14살이었다 물론 키에
르케고르는 30세가 넘어 있었다. 그러나 키에르케고르는 그 소녀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그녀가 법적 결혼연령이 되는 때를 맞추어 프로포즈를 하게 된다. 양가의 허락이 내리
고 약혼이 성사되었다 .그러나 불행은 이전부터 도사리고 있었다. 키에르케고르는 약
혼을 맺은 날 일기에, 나는 돌이킬 수 없는 큰 과오를 범한 것이 아닌가 하는 후회를
남기고 있다. 그것은 사랑하고 결혼하는 모든 사람의 길을 자기도 택하기는 했으나 내
가 어떻게 한 여인을 사랑하고 조용한 행복을 누릴 수 있겠는가 하는 번뇌의 시작이었
던 것이다. 부친이 걸어온 것 같은 죄의 길을 좇는 것이 아닌가 싶은 불안도 뒤따르게
된 것이다. 인간적으로는 애정의 욕구와 잠재적인 거부감으로 망설이던 키에르케고르
는 일년 후에 일방적으로 파혼을 선포해버렸다. 이른바 '레기네 사건'이다. 레기네는
제발 나를 떠나지 말아달라고 호소했고, 양가의 모두가 만류했는데도 불구하고 키에르
케고르는 자신의 결정을 돌이킬 수 없었고, 그 결과 극도의 절망감에 사로잡힌다. 결
국은 그 마음의 상처를 잊고 싶어 일생동안 단 한번 국외로 나가 베를린대학에서 셸링
의 강의에 참석해보기도 했다. 코펜하겐으로 되돌아온 키에르케고르는 자신의 심정을
스스로 풀어보면서 그 뜻을 레기네에게 전달하고 싶어 "이것이냐, 저것이냐"라는 큰
책을 저술해 내놓는다. 왜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야 했는가를 해명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 책은 다른 사람의 명의로 출간되었으나 레기네는 어렴풋이 그 뜻을 짐작했을 것 같
다. 후에 사람들은 그 책에서 심미적인 예술성에 머물 것인가, 아니면 윤리적인 의무
를 따를 것인가를 묻는 인간학 및 심리학적인 큰 암시를 받고 있다. 그리고 그 큰 저
서가 결국은 그의 철학적 사색의 출발점이 되었던 것이다. 얼마 후에 키에르케고르는
레기네와의 애정이 회복되고 남들이 다 걷는 결혼의 가능성을 모색해본다. 레기네는
아직도 자신을 원망하지 않고 기다리고 있다는 심증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의 심
리상태를 찾아낸 것이 "반복"이라는 저서가 되었다.
 (그림설명)케이르케고르가 태어난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 그는 이곳 시청 부근의
한 부유한 가정에서 성장하여, 실존사상의 선구자적인 철학자가 되었다.
@ff
    73 '하느님 앞에 선 단독자': 키에르케고르의 사상

  그때 세계에서는-
  1853년: 영국 나이팅게일, 크리미아 전쟁에서 활약.
  1856년: 유럽, 파리강화회의(크리미아전쟁 종결)개최

  결국 두 사람의 애정은 맺어지지 못하고 끝난다. 이미 키에르케고르는 한창 사회적
으로 활약할 장년기를 맞았다. 자기 자신도 이제는 정신적으로 지쳐 있다는 고백을 하
고 있다. 레기네는 20세를 넘기면서 가정교사와 결혼을 하게 된다. 그러나 키에르케고
르는 평생 레기네에 대한 사랑을 잊지 못한다. 생애의 모든 문제를 레기네와 연결지어
야 하는 운명을 피하지 못한다. 임종을 앞두었을 때도 자기는 레기네를 참으로 사랑했
었고 사랑했기 때문에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하곤 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어떤
심리적인 병을 동반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본다면 키에르케고르만큼 좁은 정신
적 생활을 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결국은 부친과 레기네와의 인간관계가 전부였고,
그의 사상도 이 두사람과 더불어 맺어진 것이다. 키에르케고르의 철학을 말하는 사람
은 그를 두고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명제를 일생동안 추구해나간 인물이었
다고 칭한다.모든 사상과 문제는 자기와의 싸움이었고, 자아해결이 곧 그의 세계관의
해결이었다. 그 해답을 그는 기독교에서 얻는다. 자아를 하느님 앞의 단독자로 세우며
그때 얻을 수 있는 결론은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니체는 기독교에서 출발했
으나, 그리스 정신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운명에 대한 사랑을 호소했고, 동양철학의
핵심인 영구회귀의 세계관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키에르케고르는 그리스철학으로 출발
했으나, 결국은 기독교 정신으로 귀착되는 반대의 길을 택했다. 그래서 철저한 유신론
자가 되었는가 하면 인간은 구원을 받아야 하는 존재라는 종착점으로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 두 사람은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질적으로는 완전히 대조적인
세계사의 방향을 택했던 것이다. 그렇다. 두 사람은 많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두
사람 다 드물게 보는 천재들이었다. 보통 사람들의 추종을 불허하는 사색력과 문장력
을 갖추고 있었다. 누가 더 훌륭한 문장력을 갖추고 있는가? 성격과 방향은 달랐으나,
같은 길에서는 누구의 추종도 허락지 않을 정도였다. 키에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은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나 "선악의 피안"에 못지 않은 간결하고도 힘찬 문장으로
된 저작이다. 두 사람은 모두가 단명했다. 키에르케고르는 40세가 넘었을 때 길가에서
쓰러져 병원에 옮겨진 후 세상을 떠났다. 니체도 정신병자로서 살았던 11년을 감하면
오래 활동한 편이 못된다. 두 사람은 당시의 환경속에서 정열과 생명을 걸고 투쟁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오래 살 여건을 갖추고 있지 못했다. 결국은 정신의 이상을 택하
지 않을 수 없었다. 니체도 결혼이나 가정 같은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자신을
초인의 위치까지 끌어올리고 싶었을 정도였다. 자기자신에게서 초인을 찾아야 했던 것
이다. 그 점에 있어서는 키에르케고르도 자신을 완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찾고 싶었던
것이다. 평범한 한 가정의 가장으로 머물 수가 없었다. 그 당시에는 사회주의 사상이
강하게 부각되던 때였다. 개인보다는 사회가 우위에 있고, 인간문제는 사회문제로부터
해결되어야 한다는 풍조가 강했다. 그 대표자는 마르크스였다. 그러나 이  두사람은
개인과 자아에 모든 문제와 관심을 집중시킨 사람이었다. 누구보다도 사회주의에 대해
개인주의를 확고히 지킨 사람들이었다. 후일에 이들을 계기로 실존주의가 발전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이다. 카를 야스퍼스도 그의 "이성과 실존" 첫
머리에서, 그들이 살아 있을 때는 관심과 기대를 모으지 않았으나 오늘에 이르러 세계
사상계에 가장 큰 영향을 남긴 두 사람이 있는데, 바로 니체와 키에르케고르였다고 지
적하고 있다. 두 사람은 다 세속적이며 범속적인 것을 배격했다. 예외자, 파괴자, 현
실계에서 버림받은 사람으로 취급을 받아야 했다. 지금도 사람들은 키에르케고르 연구
에 있어서는 그의 일기문이 크게 비중을 차지한다고 본다. 모든 사상과 학문의 열쇠가
일기 속에서 찾아지기 때문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역사상 가장 강인하게 자아의 문제를
연구한 사람이다. 자아를 통해 세계를 해명해보였다. 그렇다면 니체는 인간과 개인을
가장 심각하게 연구해 보여준 사상가라고 보아야 하겠다. 세계에서 기독교를 가장 강
렬하게 비판하고 반대한 사람은 니체이다. 그는 예수 이외에는 크리스찬은 없었다고
말한다. 이에 비하면 기독교를 가장 높이 평가하며 참다운 신앙을 호소해 준 사람은
키에르케고르였다. 지금은 누구나 19세기의 가장 위대한 기독교 사상가는 키에르케고
르였다고 인정하고 있다. 그의 인간관이 하이데거를 통해 실존철학이 되었고, 그의 신
관이 K. 바르트를 거쳐 오늘의 변증신학을 만들었다고 보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다.
@ff
    74 '절망...죽음에 이르는 병': 키에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1849년)

  그때 세계에서는-
  1852년: 김정희, "금석과안록"
  1857년: 유럽과 미국의 경제공황

  니체도 그러했으나 키에르케고르도 행복한 생애를 보낸 사람은 못되었다. 고독과 우
울의 세월을 살았다. 오히려 그 고독과 우울 때문에 많은 정신적 유산을 남겼을 것이
다. 그렇게 사는 것이 창조력을 갖춘 정신인들의 운명일지도 모른다. 후에는 부친과의
정신적 양해와 화합이 이루어졌다. 그 내용은 알 수 없으나, 키에르케고르가 신앙생활
과 세속적인 생활을 체험하는 동안 부친에 대한 죄의식적 거리감을 해소시킨 것 같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지라고 했을 때 여인을 힐난하던 군중들이 다 자리를 떠난
것 같이, 죄의 공감대를 느낀 아들은 아버지를 용납할 수 있었고, 두 사람은 하느님앞
에서 서로 용서하고 화해에 이를 수 있었다. 키에르케고르는 오히려 고마운 마음을 갖
고 아버지와 사별할 수가 있었다. 레기네와의 애정문제도 더 이상 정신적 고통이 되지
는 않았다. 정신적인 사랑과 그녀의 행복을 비는 마음이 자연스러운 안정기를 가져다
주었다. 이런 일들이 정리되면서 키에르케고르는 역사에 남을 두 저서를 내놓았다. "
불안의 개념"과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둘 다 인간학적인 신앙의 문제를 취급한 것
이다. 키에르케고르만큼 심리학과 인간학을 조화있게 처리해준 사람은 유례가 없을 것
이다. 그는 심리학을 전공했거나 인간학을 철학적으로 연구한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종교와 신앙문제를 취급하다 보니 그런 문제의 해결을 개척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신앙
에 대립되는, 즉 신앙의 결핍에 따르는 심리상태는 불안이며, 인간적인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과제를 예리하게 논리적으로 전개시켰다. 해결에는 하나의 방법이 있
을 뿐이다. 즉, 신앙인 것이다. 이런 작업을 끝낸 키에르케고르는 자기자신이 이미 늙
었다고 생각했다. 정신적 피로에 지칠 정도로 시달렸던 것이다. 조용한 여생을 시골에
서 목회일로 보내고 싶었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문제가 발생했다. "해적"이라는 풍자
잡지에 키에르케고르를 비난, 풍자하는 기사가 실려지기 시작했고, 이에 자극을 받은
키에르케고르는 계속 반박하는 글들을 쓰기 시작했다. 그 집필의 대상과 내용은 다양
한 분야에 걸친 것이었다. 그리고 생명력을 잃은 당시의 기독교계에 대해서도 신랄한
비판은 가하기 시작했다 .몇 권의 기독교 변증에 관한 저서도 나왔다 .그 일이 지나치
게 격렬했을지 모른다. 정신적 충격을 강하게 받은 키에르케고르는 그 일련의 작업과
더불어 자신의 정신활동의 많은 부분이 소모되었음을 깨닫고 있었다. 더 오래 살아남
는다는 것이 어려우며, 무의미한 것이라고 생각하기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어느날 산
책 도중에 졸도해 쓰러졌을 때 그는 아직 죽음이 오지는 않는다고 믿었고, 건강을 회
복할 수 있었다. 두번째 졸도했을 때는 자기 생명의 마지막을 예감했던 것 같다. 병원
에 가기를 원했고, 당분간 조용한 휴식을 취하면서 죽음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에게는 친구가 많을 수 없었다. 오히려 방관자와 비난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 그 한
사람은 그의 큰 형 목사 피터였다. 형은 마치 키에르케고르를 당시 전통적인 교회에
대한 이단자같이 취급했다. 일설에 의하면 키에르케고르의 무덤에는 키에르케고르의
시신이 없었다는 것이다 .형이 키에르케고르의 시신을 옮겨 없애버렸다고 전해지고 있
다. 그러나 키에르케고르의 임종을 앞둔 짧은 기간은 성자와 같이 조용하고 회혈까지
엿보게 하는 성스러운 모습이었다고 전해진다. 피터 목사의 아들인 조카는 아버지보다
도 삼촌을 더 따랐고 가까운 친구와 같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고 한다. 시골 목사 한
사람은 부담감 없이 키에르케고르 옆에 있었고, 키에르케고르는 때때로 자기가 레기네
를 얼마나 사랑했는가를 술회하곤 했다. 키에르케고르는 니체보다도 이른 시대에 활약
했다. 그러나 덴마크는 독일사회와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살아있는 동안에는 키에르
케고르는 독일을 통한 세계적인 사상가나 철학자로서는 알려질 수가 없었다. 오히려
독일과 유럽에서 니체의 전성기가 지나간 1905년을 계기로 키에르케고르의 저작들이
독일어로 번역되어 읽히기 시작했고, 그 영향력은 대단한 것이 되었다. 20세기 전반기
는 독일은 물론, 전 세계가 키에르케고르에 대한 관심을 모으게 되었고, 그 연구는 상
상을 넘는 단계로 번지기 시작했다. 라우리라는 덴마크 계통의 중국 선교사가 일본인
들이 키에르케고르 연구에 열중하고 있는 것을 보고 미국에 소개해 큰 센세이션을 일
으켰다. 전 세계의 기독교 사상계가 새로이 키에르케고르연구에 열중하게 되었다. 필
자도 대학에 다닐 때 키에르케고르를 접했고, 그 때 받았던 깊은 감명은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잇다. 일본에는 오래 전부터 키에르케고르 연구회가 결성되어 활약하고 있으
며, 우리나라에서도 키에르케고르 협회가 생겼을 정도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니체
보다도 더 사랑받는 사상가로 남게 되었다고 하겠다.
@ff
    75 삶과 세계관의 철학: W. 딜타이(1833-1911)

  그때 세계에서는-
  1858년: 청, 영국, 프랑스와 텐진조약 체결: 영국, 인도 직접 통치 시작
  1872년: 영국, 비밀투표 채택

  니체의 철학은 철학분야뿐 아니라 사상계전반에 큰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그 자
신은 어떤 고정된 체계를 형성하지는 못했으나, 그때까지 유행했던 관념적인 철학과
형이상학적 철학에 대한 반기를 들기에 충분했다. 칸트에서 헤겔에 이르는 관념철학이
무슨 필요가 있으며, 유심론이니 유물론이니 하는 형이상학은 우리 삶에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하며 우리의 현실과 무관한 공론이 아니냐는 비판은 면치 못하게 되었다. 그래
서 적지 않은 철학자들이 칸트의 철학을 과학 및 논리적 방향으로 재정리하던가 새로
운 철학이 탄생되어야 한다는 뜻을 갖게 되었고, 그것은 자연히 반 헤겔적 성격을 띠
게도 되었다. 여기에 니체가 던져준 하나의 철학적 과제는 '삶'의 등단이었다. 우리의
현실적 삶 자체로부터 모든 철학이 재출발해야 한다는 시대적 요청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철학적 전환점을 만들어준 사람이 니체였다. 니체는 칸트나 헤겔같
이 어떤 체계를 형성해준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철학적 흐름에 커다란 전환점을 만들
기에 충분했다. '삶의 철학'의 창시자라는 평을 받아 마땅한 임무를 수행한 것이다.
이 삶의 철학을 계승한 사람은 많이 있다. 어떤 이들은 다 합치면 20명은 넘을 것이라
고 말한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사람은 W. 딜타이와 G. 짐벨 같은 철학자였다. 필자
가 대학에 다닐 때만해도 이들과 그 후계자들의 저서는 광범위한 독자층을 가지고 있
었다. 그 중에서도 오늘까지 연구의 대상이 되어있는 사람은 빌헬름 딜타이라고 보아
좋은 것이다. 딜타이는 19세기 후반기에서 20세기초반에 걸쳐 크게 활약한 대표적인
철학자의 한 사람이다. 그는 플라톤에서 헤겔에 이르는 형이상학적인 관념론은 더 우
리의 관심을 끄는 철학의 과제가 될 수 없다고 보았다. 이성 중심의 인식론이나 합리
적인 사고가 철학의 전부인 듯이 생각하는 것은 뒤떨어진 부분적인 사고에 불과하며,
중요한 것은 모든 학문과 사상과 역사, 문화까지도 포함하는 포괄적인 이해가 중요하
며, 그것은 삶의 이해와 해석에서 가능해진다고 보았다. 그때까지의 철학은 그 한 부
분에 지나지 못한다. 그러면 그러한 새로운 철학은 어떻게 밝혀질 수 있는가 딜타이는
삶과 세계관의 철학이라고 정의를 내린다. 중요한 것은 우리들을 둘러싸고 있으며 우
리가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세계전체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함인 것이다. 즉, 세계관의
발견인 것이다. 세계속에 숨겨져 있는 수수께끼를 어떻게 풀어 해석하는가 함이 중요
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세계관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며 또 갖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
다. 우리는 지금도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다가 "네 철학은 무엇인가"고 묻는다 .그것은
너의 세계관은 어떤 것인가를 묻는 것이다. 과거에는 인생관이나 우주관이라는 개념을
많이 사용했다. 세계관은 이 둘을 종합하면서도 삶의 현실에 관한 물음인 것이다. 불
교를 믿는다는 것은 불교의 세계관을 갖는 것과 통한다. 셰익스피어의 세계관이라든지
베토벤의 세계관이란 말은 쓰는 것은 그들이 철학자는 아니더라도 세계관의 소유자였
기 때문에 자신들의 철학을 가지고 산 사람들인 것이다. 이러한 세계관은 철학적 이론
이나 논리적인 추리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삶의 현실과 체험에서 해득되는 것이
다. 우리의 삶은 계속해서 많은 것을 체험하며, 요해하며 표현하는 작용을 반복해간
다. 그러는 동안에 삶의 내용은 더욱 풍부해지며, 새로운 정신적 유산을 창조해간다.
그것을 우리는 문화라고 부른다. 그러면 이 삶의 기능과 활동을 주관하는 것은 무엇인
가?  그것은 남으로부터 영향을 받을 수는 있으나, 기본적으로 삶 자체의 자기 해석에
서 우러나올 뿐이다. 삶은 모든 것을 창조해내는 주체적인 것이다. 사람은 제각기 다
른 내용의 삶을 살게 되어 있으며, 각자는 자신의 삶과 세계관을 갖게 되어 있는 것이
다. 그것이 바로 새로운 의미의 철학인 것이다. 오직 철학자들은 그것을 이론적으로
체계화시켜 보며, 예술가들은 상징적으로 표현하게 되며, 종교가들은 교훈적인 내용으
로 밝혀줄 뿐이다. 이렇게 되어서 딜타이의 철학은 해석학이라는 하나의 정신과학으로
서의 철학의 방법론을 제시해준다. 지금도 많은 철학자들이 해석학이나 해석학적 방법
을 연구하면서 뒤따르는 것은 딜타이로부터 받은 영향때문인 것이다. 다른 철학자들도
삶의 철학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없는 설명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딜타이를
하나의 모범으로 보는 것은 그에 의하여 세계관으로서의 철학과 해석학이 전개되었고,
많은 후계자들이 그 뒤를 계승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니체나 딜타이 못지않게
영향력이 큰 또 한사람의 삶의 철학자를 얘기한다. 프랑스의 H. 베르그송이다. 그러나
베르그송은 니체나 딜타이와는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삶의 철학을 개척한 사람으로, 그
성격과 내용에는 적지 않은 차이점이 있어 따로 언급하기로 한다.
@ff
    76 '창조적 진화'의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1859-1914)

  그때 세계에서는-
  1859년: 다윈 "종의 기원"
  1907년: 조선,헤이그밀사사건

  20세기 전반기에 가장 위대했던 과학자가 누구였는가를 묻는다면 아인슈타인을 생각
할 것이다. 만일 훌륭한 철학자는 누구였는가를 물으면 프랑스의 앙리 베르그송은 떠
올리는 사람들이 적지않을 것이다. 이 두 사람은 다 유대인이었다. 아인슈타인은 히틀
러의 독재정치를 떠나 미국에서 여생을 보냈고, 베르그송은 프랑스 파리에 있는 콜레
지 드 프랑스에서 강의를 했다. 어떤 이들은 그 대학을 학사원 대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특수한 대학으로, 그 대학의 교수들은 세계적인 석학으로 인정받는 연구 중심의
대학이었다. 지금도 그 대학에 가면 베르그송이 강의하던 교실이 있고, 거기에는 작은
베르그송의 흉상이 벽 앞에 놓여져 잇다 .규모는 크지 않으나 당시에는 세계철학계의
기념비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던 강의실이다. 베르그송은 과학과 철학을 연결지은
철학자였다. 옛날에는 철학자들이 철학에서 철학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최근의 철학자
들은 어떤 과학적 근거를 가져야 객관성이 있는 철학자로 인정받는 것이 보통이다. 러
셀이나 화이트헤드 같은 철학자는 수학가로 출발하였고, 먼저 말한 딜타이는 심리학을
연구했다 .이에 비하면 베르그송은 생물학을 연구한 편이다. 그래서 그의 학설에는 생
물학적인 관점들이 적지 않게 삽입되어 있다. 한때 사람들이 그를 '삶의 철학자'로 불
러준 것은 그가 독일적인 삶의 철학을 계승한 것이 아니라, 생물학을 근거로 한 생명
의 현상과 의식구조와 삶의 현실을 취급했고, 그로부터 철학이론을 인출해낸 때문이
다. 대부분의 프랑스 철학자들이 그러했듯이 프랑스인들은 개성과 창조력이 뚜렷한 학
설을 창출해 발표하기 때문에, 영국인들과 같은 전통을 이어받는다든지 독일철학자들
과 같이 체계화하는 습관이 적은 편이다. 독일인들은 방대한 체계일수록 위대한 학설
로 여기며 어려운 개념을 써야 우수한 학자로 인정하려는 습관이 있다. 그러나 프랑스
인들은 독창성과 남의 흉내를 내지 않는 창조적 학설을 소중히 여긴다. 베르그송이 바
로 그런 철학자였다. 그래서 그의 이전에도 비슷한 학설이 없었고, 그의 후에도 뒤를
계승하는 철학자는 별로 없었다. 베르그송은 우리들에게 이미 고전에 해당하는 두 저
서를 남겨주었다. 그 하나는 "창조적 진화"(1907)이고 다른 하나는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이다. 둘 다 우리말로 번역되어 있으며, 후자는 두세 종류의 번역이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애독한 책이다. 이제 그 내용을 다 설명할 수는 없으
나, 창조적 진화는 모든 생명계와 인간의 삶은 진화와 변천, 발전을 거듭하고 있으며,
인간적 삶의 본질은 그 정신적 창조성에 있다고 본 것이다. 우리들의 철학사속에는 데
모크리토스 때부터 내려오는 기계론적인 세계관이 있다. 유물론자들은 물론, 과학자들
중의 대부분이 그런 견해를 지녀왔다. 그러나 베르그송은 그것은 생명의 본질도 아니
며, 인간의 의식이나 정신의 구조에도 맞지 않다고 주장한다. 세계의 본질은 생명의
창조적 진화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것
같은 목적론이 있는 것도 아니다. 목적은 주어질 수도 없고 만들어낼수도 없는 것이
다. 오직 그 중간에서 계속적으로 창조적인 진화를 거듭해가는 것이 삶의 본질이라고
본 것이다. 그의 세계적 고전이라고 평가받는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에서 베르그송
은 닫혀진 사회와 열려진 사회를 문제삼는다. 모든 침체와 반창조성과 악은 폐쇄적이
며 닫혀진 사회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열린 사회는 언제나 새로운 도덕과 가치를 창조
해나갈 수 있고, 그 사회적 진취성과 창조성이 긍정적이며 건설적인 삶을 추진시켜주
는 것이다. 우리가 갖고 있는 종교도 그렇다. 종교는 교리나 형식에 붙잡혀 정직인 것
이 될 때는 역사의 침체성을 초래하며 사회의 발전을 저해하게 된다. 그래서 종교가
진리로서의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다이내믹한 활력과 창조력을 갖추어야 한다고 주장
한다. 모든 종교가 동적인 힘을 가질 때 그 사회를 발전시키나, 정적인 침체성과 폐쇄
성에 빠질 때는 사회를 병들게 한다. 그런데 철학계에서는 이러한 그의 대작보다도 몇
가지 짧은 논문들에 더 큰 주목을 끈다. 그 논문들은 의식의 기능과 구조를 분석해주
며, 그 과학적 분석에서 시간의 문제와 삶의 본질을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
가 대학에 다니던 1941년에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우리는 색다른 보도를 접하고 적
지 않은 충격을 받은 일도 있었다. 그것은 그가 죽기 2년 전 영세를 받고 기독교 신자
로 귀의했다는 사실을 책임신부가 알려준 것 때문이었다. 베르그송은 자기가 생존해
있는 동안은 조용한 삶은 계속하고 싶어 그 업신의 사실을 죽은 후에 발표해주기를 신
부에게 부탁했던 것이다. 1차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그가 "인류의 살 길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서로 위하고 사랑하는 자세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한 바가 있기는 했었다.
  (그림설명) "모든 생명계, 인간의 삶은 진화한다.이 진화는 내적 충동력인 엘랑비
탈, 곧 생명의 비약에 의해 이루어지는 창조적 진화"라고 주장한 삶의 철학자 베르그
송.
@ff
    77 독일실존철학의 대표자: 하이데거(1889-1976년)
  그때 세계에서는-
  1893년: 퀴리부부, 라듐발견
  1928년: 영국의회, 평등선거법 의결

  독일에서 니체의 철학과 사상이 고비를 넘기게 되었을 때 키에르케고르의 저서들이
번역되어 널리 읽히기 시작했다. 독일철학계는 이 새로운 사상에 접하면서 새로운 활
력소를 열기에 이르렀다.철학계는 물론 신학계에서도 키에르케고르의 사상에 큰 영향
을 받게 되었다.독일의 대표적인 신학자 카를 바르트는 키에르케고르의 영향을 받아
그의 유명한 저작 "로마서"를 저술했다. 그 책이 신학계에 그렇게 큰 파문을 일으킬
줄은 저자 자신도 미처 몰랐을 정도였다 .새벽에 나가 종각 아래로 드리워져 있는 줄
을 잡아당긴 것뿐인데, 그 종소리에 온 신학계가 놀라 깨어날 줄은 자신도 몰랐다는
그의 표현은 참으로 적절한 것이라 하겠다. 바르트와 그의 신학이 얼마나 큰 영향을
남겼냐는 우리모두가 잘 알고 있다 .우리 신학계에서도 바르트의 후계자들이 지나치게
많을 정도로 배출되었다. 보수적이며 전통적인 신학의 주류를 형성해준 셈이다. 그 당
시에는 세 신학자가 포진하고 있었다. K. 바르트, P. 틸리히, R. 니부어 등을 말한다.
불트만까지 합치면 네 사람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바르트와 불트만은 유럽에서
활약하고 있었으며, 틸리히와 니부어는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바르트를 전통적인
신학자로 본다면 틸리히는 철학적 신학자로 구별해 좋을 것이며, 미부어는 실천적인
사회신학자로 분류될 수도 있을 것이다. 틸리히도 키에르케고르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독일에서 미국으로 망명한 신학자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당시, 즉 20
세기 중반기에는 철학계보다도 신학자들의 역할이 더 큰 비중을 차지했다고 말할 수
있다. 키에르케고르의 영향력 탓이었다. 그러나 다시 철학의 이야기로 되돌아가야 하
겠다. 제 1차 세계대전과 제 2차 세계대전이 유럽과 세계에 남겨준 영향은 대단히 큰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인류와 사상가들을 비참과 절망으로 몰아넣었다. 삶의 가치
가 무엇이며, 역사에는 과연 희망이 있는가를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 질문은 철
학계에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그래서 제 1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제 2차 세계대전 후
까지 서구철학계에 큰 파문이 일게 되었다. 우리는 그것을 실존주의 철학 또는 실존사
상과 문학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한 때는 그 여파가 서구사회는 물론 우리주변에까지
적지 않은 관심을 끌었다. 필자가 54년부터 연세대학교 철학과 강의를 시작할 무렵에
는 실존철학이 마치 철학의 주류이거나 전부인 것같이 여겨지기도 했다. 사람들은 그
처음 제창자를 니체와 키에르케고르라고 불렀다. 그들은 인간의 문제를 최대의 과제로
삼았고 자아의 세계내에서의 운명을 숨김없이 물었기 때문이다. 니체는 그 해결을 운
명에와 영구회귀의 그리스 정신에서 얻으려 했고, 키에르케고르는 기독교 신앙에서 해
결지으려고 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으로 그치고 말았다면 우리는 실존철학자들이라는
명칭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그들의 후계자들에게 있었고, 많은 작가와 예술가
들이 동조해주었기 때문에 그것이 하나의 시대적 조류를 만들게 된 것이다. 오히려 철
학자들보다는 작가들의 활약이 더 보편적 경향을 띠고 나타났다고 하겠다. 아마 그 처
음 철학자는 "존재와 시간"의 저자인 M. 하이데거라고 보아서 좋을 것이다. 1927년 그
의 저서가 발표되면서 그 영향력은 대단한 것임이 드러났다. 필자도 젊어서 그 책을
대하면서 어느 정도는 흥분에 가까운 기대를 갖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 친구 한 사람
은 "바로 이런 철학이 필요했었다"고 말했다. 거기에는 지금까지 나타나지 않고 있었
던 철학이라는 뜻도 있었으나, 이것이 우리 시대가 갈망하는 철학이었다는 뜻도 포함
되어 있었다. 오래 전에 한 서울대학 교수는 "아마 우리 졸업생들 중에 하이데거에 관
한 학위논문을 쓴 사람이 전체의 3분의 1 또는 그 이상을 될 것이다."라고 얘기한 적
이 있었다. 그것은 하이데거가 유행했다는 뜻도 되나, 그만큼 어려운 전문성도 갖추고
있다는 증거도 될 것이다. 서울대학의 박종홍교수는 유럽여행의 가장 큰 목적중의 하
나는 하이데거 방문에 있다고 얘기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철학은 대단히 난해한
내용이다. 충분히 이해하기에는 유럽의 철학사를 알아야 하고, 또 그 핵심적인 과제에
접할 수 있어야 한다 .하이데거를 앍으면 마치 신의 존재를 빼놓은 키에르케고르를 읽
는 것 같은 인상을 받기도 한다. 최근 작고한 서울대학의 김석목 교수도 하이데거는
신이 없는 신학 책을 읽는 것같은 인상을 풍긴다고 얘기하곤 했다. 아마 그의 철학은
그리스의 존재론에서 시작해서 기독교적인 인간관과 20세기에 사는 인간들이 안고 있
는 가장 근원적인 과제를 해명해준 철학이었다고 보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적어
도 내가 처음 그를 대할 때 느낀 인상이 일단은 그러했었다.
@ff
    78 철학자의 국적: 언어권과 방법론에 의한 철학

  그때 세계에서는-
  1935년: 중국 장개석,국민경제건설운동제창
  1937년: 중,일 전쟁 발발

  그렇다고 해서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이 쉽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값진 철학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주어진 내용을 어떤 방법론에 의해서 새로운 철학으로 구성하는
가에 따라 그 내용이 새로운 철학체계로 형성되는 것이다. 하이데거에게 그 방법론을
제시해준 두 사람이 있었다. 한 사람은 먼저 소개한 딜타이였다. 딜타이의 '해석학'이
새로운 철학의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그 또한 학설은 독일보다도 오스트리아학파에 속
하는 E. 후설의 현상학적 방법이었다. 우리는 어떤 사상가나 철학자의 국적을 따지는
경향이 있다. 또 그럴수 밖에 없다. 그러나 서구에 있어서는 국적보다도 어떤 언어권
에 속하는가 함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네덜란드 같은 나라에도 훌륭한 철학자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의 저서는 영어, 불어, 독일어 중 어느 한나라의 말로 번역되지 않
으며 세계무대로 등단하지 못한다. 키에르케고르와 같이 특출한 사상가의 저서는 독일
어를 통해 세계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으나, 네덜란드, 벨기에의 학자들은 직접 영
어, 불어등으로 저술을 한다. 그래서 자기나라사람들과 세계여러나라의 독자를 갖도록
한다 .이런 문제는 오래지 않아 우리의 문제로 번질 가능성이 없지 않다. 예전에 김은
국씨가 쓴 "순교자"라는 소설이 미국 및 영어권세계에서 큰 관심을 모았던 적이 있었
다. 후에 우리말로도 번역되어 읽히고 있다. 그 책이 한국어로 씌어진 뒤에 영어로 번
역되었을 대 그렇게 많은 국제적 독자를 가질 수 있었을까함은 의문스럽다. 따라서 그
작품은 영문학에 속하는 것이지, 국문학에 속하는 작품으로는 보려고 하지는 않는다.
철학에 있어서도 그렇다. 솔직히 말해서 서양철학은 독일어,불어, 영어문화권 어느 하
나에 속할 수 있을 때 세계적인 철학으로 인정을 받기 쉽다. 일본에도 몇 철학자들은
국제적 대우를 받을 만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 몇 권의 저서가 독일어로 씌어졌다면
우리도 그 분야의 연구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일본문화의 영역에 속하기 때
문에 우리는 깊은 관심을 갖지 않는다. 필자의 친구 교수 한 사람은 미국대학에서 연
구비를 받아가지고 일본의 니시다철학을 연구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미국철학계는 크
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오히려 일본의 한 철학자가 인도철학이나 중국철학에 관한 좋
은 저서를 남겼다면 미국에서도 관심을 갖고 번역하고 읽히게 될 것이다. 우리 한국철
학이 놓여진 위상에도 이와 비슷한 문제들이 제기될 수 있음을 미리 짐작해두는 편이
좋을 것 같다. 무엇때문에 이런 문제를 제기해보는가? E.후설은 오스트리아학파에 속
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의 선배로서는 볼차노, 브렌타노 등의 쟁쟁한 철학자들이 있
었다. 그러나 E.후설은 빈 대학에서 많은 독일제자들을 가르쳤고, 그 자신도 후에는
독일의 프라이부르크대학에서 강의를 했다. 오스트리아, 스위스 등은 독일어 문화권에
속하기 때문에 우리는 국적을 별로 가리지 않는다. 그러나 같은 스위스이지만 제네바
대학과 그 지역은 프랑스 언어권에 속하기 때문에 프랑스문화권에 속한다. 스위스의
바젤대학은 독일의 한 대학과 마찬가지로 대우받는다. 많은 독일의 철학자나 신학자들
이 바젤대학에서 강의를 했으나, 우리는 야스퍼스나 K.바르트 같은 교수를 스위스의
학자이기보다는 독일의 학자로 치부한다. 국적보다는 언어문화권을 중하게 보기 때문
이다. 먼저 얘기로 돌아가자. 하이데거에게 영향을 준 E.후설을 오스트리아 학파의 중
심인물이었으나, 많은 독일의 철학도들이 그의 강의실에 모여들었다 .하이데거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후설은 수학과 논리학을 연구했다. 수학에서 논리학에의 길을 택
했다. 그 위에 '현상학'이라는 새로운 철학적 인식론을 제창했다. 그의 학설은 대단히
어렵기 때문에 여기에 소개하기는 적당하지 못할 것 같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최근,
즉 현재에 이르러서는 후설에 관한 연구가 하이데거를 비롯한 어느 실존철학자들보다
도 더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그의 철학의 내용때문이 아니다. 그
의 특출한 철학의 방법론에 기인하는 것이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철학에는 두 흐름이
있었는데, 그 하나는 현상학이며 다른 하나의 언어분석의 철학이라고 생각되어지는 정
도다. 우리나라에도 철학회들 가운데 현상학 연구회가 꾸준히 계속되어오고 있다. 철
학의 내용보다도 방법론이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잘 보여주는 하나의 실
례라고 하겠다. 동양철학이나 한국의 철학에는(일본의 철학도 포함해서) 이런 방법론
이 결핍되어 있다는 것이 하나의 약점이다. 외국의 교수들은 방법론을 강의하나, 아직
은 우리는 내용을 설명하고 있을 정도에 지나지 않는 철학적 사고의 차이점을 보여주
고 있을 뿐이다.
@ff
    79 '삶은 죽음에 대한 선택과 결단':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1927년)
  그때 세계에서는-
  1926년: 나석주,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던짐
  1927년: 린드버그, 대서양무착륙비행에 성공

  옛날부터 철학의 주체는 존재였다. 그리고 오랫동안 존재는 자연세계를 가리켜왔다.
중세기에 와서는 신이 존재의 중심과제로 떠올라왔다. 신과 무관한 존재는 논의될수가
없었다. 그러는 동안에 근세가 되었고, 근세에 와서 자연은 자연과학의 대상으로 바뀌
었고 신은 철학적 과제밖으로 밀려나갔다 자연히 최근에 와서는 존재는 삶의 세계로
환원되기 시작했다. 그러면 그 삶의 세계의 중심과 열쇠가 되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
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철학의 주제는 인간적 삶의 현실로 자리를 바꿀 수밖에 없
어진 것이다. 그렇게 되어서 존재는 인간적 삶이 바탕이 되며 그것을 어떻게 밝혀주는
가 함이 중요해진다. 하이데거가 문제삼은 존재가 바로 그런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 및 삶의 현실은 사회적 공간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시간 및 역사적 차원도 불가
피해진다. 그 삶의 역사성-그것이 곧 시간인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새로운 철학을 포
함하는 하이데거의 주제는 "존재와 시간"으로 대표될 수밖에 없어진다. 이러한 철학을
전개시키기 위해서는 과거의 개념을 가지고서는 충분히 해명할 수가 없기 때문에 하이
데거는 자신의 개념을 만들어가지 않을 수가 없어졌다. 즉, 지금까지 사용되지 않았던
새로운 용어들이 등단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하이데거의 철학은 난해한 철학으로 통하
게 된 것이다. 그러면 지금까지의 철학과 실존철학 사이에는 어떤 구별이 있는가? 자
연은 알려지고 철학적 탐구의 대상은 되나 자체는 존재로서의 자각을 갖지 못한다. 식
물이나 동물도 그렇다. 자기자신은 깨닫거나 자각하지는 못한다. 단, 인간은 스스로
존재하면서 존재를 자각할 수가 있다. 그리고 인간 일반이 아닌 자아로서의 인간이 자
기자각을 하는 존재이다. 각존이라는 개념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철학은
스스로의 존재를 밝히는 자아의 실존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면 자아는
어떤 존재인가? 주어진 세계속에 내던져진 존재이다. 목적이나 뜻이 있어서 태어난 것
이 아니다. 그러면서도 나를 둘러싸고 있는 존재하는 세계에 항상 어떤 관심을 갖지
않을수가 없다. 그 관심의 하나가 불안이다. 그리스에 널리 알려진 신화가 하나 있다.
'근심, 불안'이라고 하는 신이 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들었다. 그 조각을 가지고 영혼
을 취급하는 신에게 기  생명의 기운을 좀 불어넣어달라고 부탁했다. 그 생명의 영혼
을 얻은 조각은 사람이 되었다.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된 것이다. 처음에 인간의 재료를
빌려준 신이 보니까 자기가 갖고 싶은 생각이 들어, 내가 재료를 주었으니까 그 인간
을 갖고 싶다고 말했다. 그 얘기를 들은 영혼을 빌려준 신이 그럴바에는 내가 생명을
주었으니까 가질 권리가 있다고 말했다. 근심, 불안이라는 신은 내가 노력해서 사람이
되었으니까 내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세 사람은 싸움을 하다가 제우스신에게 가
재판을 받기로 했다. 사정을 다 듣고 난 최고의 신은 이렇게 판결을 내렸다. "이 사람
이 다음에 죽거든 재료를 빌려준 흙의 신은 그 신체를 도로 찾아 가져라. 또 영혼을
빌려준 신 너는 그 영혼을 도로 찾아 가져라. 그러나 이 인간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근심,불안 신인 네가 데리고 살아라"는 판결이었다. 그 다음부터는 인간은 죽으면 육
체와 영혼은 각기 나뉘어져 각기 제자리를 찾아가나, 인간이 살아있는 동안은 불안이
라고 하는 신과 살게 되었다는 얘기다. 바로 하이데가가 지적하는 인간적 삶의 실상은
이러한 존재론적 불안한 것이다. 아무리 인간이 양심적 결단을 내리고 스스로의 존재
를 영원한 것으로 만들고 싶으나 그것은 헛된 노력이다. 죽음이 앞으로 다가올 때는
모든 존재에의 노력은 허무해지고 만다. 이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선택과 결단, 이런
노력을 끝없이 계속해가는 것이 인간적 삶의 모습이다. 이런 선택과 결단은 누구도 회
피하거나 무관할 수 없는 삶의 실상인 것이다. 그러한 물음과 선택에 임하면서 궁극적
인 결단을 내리는 것이 곧 철학적 과제이며, 그것은 자기 스스로가 해결지어야 할 단
독자의 책임인 것이다. 그리고 그 노력은 존재하는 것들이 참존재로 돌아가려고 하는
존재에의 의지와 용기에 속하는 것이다. 이 밖의 모든 문제들은 부수적인 것이며, 인
간적 존재의 본연적 실상을 외면한 문제들이다. 하이데거의 철학은 어떤 해결을 주기
보다도 문제를 제시해줌에 큰 뜻이 있으며, 그는 그 해명의 암시를 제공해주는 것이
철학의 과제라고 보았다. 이러한 존재에 대한 인간적 물음. 삶의 궁극적인 해명을 물
려받은 후계자들이 제각기의 해석과 철학적 모색을 거듭하게 되면서 실존철학은 그 비
중을 더하게 되었다.
 (그림설명) 흔히 '존재와 불안'의 철학으로 불리는 실존철학은 인류의 장래에 심각한
의문을 던져준 1차 세계대전후 불안과 절망의 세계상황과 맞물려 철학의 한 사조를 이
루었다. 그림은 1차 세계대전 때 독가스에 희생된 사람들. 싱어 서전트작.
@ff
    80 실존철학의 두 거장: 하이데거와 야스퍼스의 주변이야기
  그때 세계에서는-
  1939년: 영국,프랑스,독일에 선전포고
  1940년: 독일,파리에 무혈입성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을 출간했을 때 가장 충격을 받은 동료 철학자가 한 사람
있었다. K.야스퍼스라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교수였다. 그는 본래 대학에서 정신병리
학을 전공하면서 철학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 출전했다가
애석하게 일찍 세상을 떠난 E.라스크 철학교수가 자리를 비우게 되자 대학에서는 마땅
한 후임을 찾지 어려웠다. 그래서 야스퍼스에게 철학강의를 의뢰하게 된 것이 그로 하
여금 세계적인 철학자로 남게 된 계기가 된 것이다. 야스퍼스는 전공분야와의 관련도
있어 삶의 철학과 인간이해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의 니체연구는 대단히
큰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었다. 그리고 키에르케고르로부터도 큰 철학적 암시를 받았
다. 이런 철학 및 인간학적 배경을 갖고 과거에 없었던 새로운 철학을 집필하고 있었
는데, 자기보다 먼저 더 깊은 통찰력을 가진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이 나왔던 것이
다. 앞자리를 빼앗긴 야스퍼스는 서둘러 저작을 완결시켰다. "존재와 시간"도 상하 두
권으로 된 큰 책이지만, 야스퍼스의 "철학"은 더 큰 저서로 나타나게 되었다. 두사람
은 어느 정도 라이벌 의식을 갖게 되었으나, 철학계는 이 두 사람을 함께 소유하게 되
면서 실존적 철학의 영역을 크게 굳히게 된 셈이다. 물론 두 사람의 철학이 같은 방향
과 비슷한 과제를 취급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그것은
남이 볼 때는 형제가 비슷한 성격을 갖는 것 같아도 집 안에서 보면 형제간의 차이가
더 크게 느껴지는 것과 비슷한지 모른다. 하이데거와 야스퍼스를 비교해보면 대단한
차이가 잇다. 그러나 밖에서 보면 두 사람이 함께 새로운 철학의 영역을 개척한 공로
자로 보고 싶은 것이다. 야스퍼스보다 6년 연소한 하이데거의 철학적 인기는 대단한
것이었다. 그 인기와 세계적인 관심때문에 히틀러의 집권 당시 그는 대학의 총장자리
를 차지하게 되었다 .독일대학의 총장자리는 명예직에 불과하며 그렇게 대단한 것은
못된다. 그러나 히틀러정권자체가 독재권을 행사하던 때였기 때문에 하이데거는 자연
히 독재정권의 옹호자나 대행자같은 비판을 면치 못하게되어 그의 일생에 큰 오점을
남기게 되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하이데거는 히틀러의 정권을 옹호하는 교육적 입장
을 뒷받침하는 과오를 범하기도 했다. 그런 길을 택한 하이데거에 반해 야스퍼스는 부
인이 유대 계통이었기 때문에 히틀러정권에 쫓겨나 스위스의 바젤대학에 머물면서 강
의를 계속했다. 히틀러의 탄압정책에서 독일을 떠난 학자와 교수는 참으로 많았다. 그
많은 교수들이 자유로운 신대륙인 미국으로 망명했기 때문에 미국대학들은 뜻하지 않
게 교수풍년을 맞게 되어 철학계에서도 큰 행운을 누리게 된 셈이다. 세계적인 학자들
이 모두 미국에 정착해 있었다. 필자가 60년대 초에 미국에 머물때도 미국학생들이 영
어발음이 서툰 교수들이 최고의 교수라면서 웃고 있었다. 일본에 와 있던 K.리비드 교
수도 망명교수중의 한 사람이었다. 후에 바이델베르크에서 정년퇴직한 존경받는 유대
인 철학자였다. 그 때문에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는 하이데거보다도 야스퍼스의
철학이 더 많은 독자를 갖기도 했다. 우리나라에도 야스퍼스연구에 뜻을 모았던 철학
자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철학의 학문성이나 방법론들에 있어 지금은 하이데거의
업적이 더 높이 평가받고 있는 셈이다. 또 야스퍼스의 저서는 너무 많고 광범위하기
때문에 독창적인 알찬 맛이 적다고 보는 이들이 있다. 물론 실존철학의 대표자는 이
들로 끝나지는 않는다. 많은 유사한 철학자들이 있어 세계적인 영향을 남겼고, 그 여
파는 2차대전을 계기로 프랑스에까지 미치게 된다 하이데거와 야스퍼스가 1차대전을
계기로 태어난 철학자들이라면 프랑스의 G.마르셀과 J. P. 사르트르같은 이들은 2차대
전을 겪은 뒤의 철학자들이라고 보아 좋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실존철학이라고 불
리던 이 계통의 철학은 키에르케고르, 니체로부터 시작되어 하이데거와 야스퍼스를 거
쳐 G. 마르셀과 J. P. 사르트르에게 이르러 형성된 긴 과정에 걸친 것이라고 보아 좋
을 것이며, 그들에게 방법론적 영향을 준 사람은 딜타이의 해석학과 E. 후설의 현상학
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보아야 하겠다. 특히 현상학의 의미는 큰 것이었다.
@ff
    81 '인격...최고의 목적가치': 야스퍼스의 "철학"(1920년대 말)
  그때 세계에서는-
  1928년: 파리에서 무전조약(켈로그, 브리앙 조약조인)
  1929년: 예루살렘에서 아랍인의 대규모 유대인습격 일어남(통곡의 벽 사건)

  하이데거에 비하면 야스퍼스의 철학은 이해하기 쉬우며 유럽철학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기 때문에 상식적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그의 방대한 내용의 철학을 쉽게 표현한
다면 다음의 두 가지 면에서는 어렵지 않게 공감이 갈 내용들이다. 우리 주변에서 열
심히 뛰어다니고있는 사람들에게 무엇때문에 그렇게 사느냐고 물으면, 돈과 경제, 정
치와 권력, 기계와 기술을 얻기 위해서라고 대답한다. 절대다수의 삶의 목표는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것들이 소중하기는 해도 그 자체들은 수
단으로서의 가치, 예비적인 가치는 될 수 있어도 그 자체가 목적가치는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 자체가 목적가치일때는 우리들의 삶과 사회는 전도된 가치관때문에 불안
을 가져온다 그러면 목적이 될 수 있는 가치는 무엇인가? 오히려 학문과 참의 가치예
술과 미의 가치도덕과 선의 가치들은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있고 또 되어서 좋은 것
이다. 진리와 예술과 선은 그 자체가 우리들이 추구하는 것들이며,또 그렇게 되어서
잘못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정신적 가치는 삶의 궁극적 가치가 될 수
있는가? 그 자체는 수단과 방편으로서의 가치는 될 수 없는가?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한다. 그 자체는 수단이 될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거기에 문제가 있다.
어떤 예술가가 예술은 최고의 가치라고 말한다고 해도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게 생각
하며 그 뜻을 받아들일 수는 없는 것이다. 진리의 타당성과 가치는 중하지만 여전히
그것도 상대적이다. 상대적이라는 것은 목적가치일 수도 있으나 준비적 가치도 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언제 어디서나 목적일 수는 있어도 결코 수단과 예비적 가치
는 될 수 없는 최고의 가치도 있는가? 있어야 하며 또 있을 수 있다. 그것이 다름아닌
인간적 가치, 인격의 가치인 것이다. 그것은 결코 수단이나 방편으로서의 가치일수는
없는 것이다. 모든 것이 그 뜻과 가치를 위해 존재하기 때문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뜻은 야스퍼스의 개인적 주장이나 요청은 아니다. 기독교의 인간목적관이 바로 그것을
가리키며, 칸트가 인격은 언제 어디서나 최고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전통적 가치체
계를 따른 것이다. 지금 우리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 모든 이데올로기는 상대적인
것이며, 시대와 사회에 따라 변질, 변형될 수 있어도 휴머니즘은 영구한 목적이념일수
있다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것은 주의, 사상에 있어서 목적가치인 때문이
다. 그러면 현재의 비극과 모순은 어디 있는가? 이 가치체계가 거꾸로 되어 있는데 있
다. 인간과 인격의 존엄성과 가치가 정치, 권력의 수단과 방편이 되어버린 실례를 너
무 쉽게 발견하게 된다. 바로 20세기에서 그 사실을 너무 많이 보게 된다는 것은 큰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지금 우리는 선,후진국을 구별해보고 때마다 경제적인 평가에서
결정지어버린다. 그것이 개인적인 생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재산을 얼마나 많이
갖고 있는가, 수입이 어느 정도인가에 따라 인간의 가치가 평가받고 있다. 기계와 기
술은 현대사회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그 배후에는 과학적 사고와 가치가 인
정받아야 하며, 그 과학적 가치는 인간 및 사회에의 기여도에 평가되어야 함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훌륭한 과학자일수록 인간 목적가치에 순응하는 과학의 의미를 따른
다. 그러나 오늘의 과학은 기계와 기술개발에 목적을 두기 때문에 과학이 상품적 가치
의 시녀노릇을 하고 불행한 사회로 전락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현대철학이 당면하고
있는 책임과 의무는 무엇인가? 이 전도된 가치관을 바로잡는 일이다. 목적가치의 수단
으로서의 가치를 명백히 가지며 삶의 의미와 내용을 정상적인 체계로 바로 잡지 못하
면 오늘의 위기와 불행은 치유될 수가 없다. 그렇다면 과거와 같이 어떤 고정된 가치
관을 고집함으로써 사회를 잘못 유도하고 있는 모든 관념과 사상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안된다. 종교도 그렇다. 이러한 인간목적과 인간적 가치를 위하는 종교는 받아들여지
며 긍정적인 평가를 받아도 좋으나, 무조건 종교이기 때문에 옳다든지 도덕을 앞세우
면 된다는 식의 사고 방식은 위험하다. 야스퍼스가 삶의 핵심되는 요소는 성선설에 있
다고 보는 것은 이러한 가치체계를 구현하기 위해 꾸준한 자기혁신과 겸허한 정진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성실과 사랑은 인간적 삶과 가치의 새로운 창조와 건설적인 기
반이 되는 것이다.
@ff
    82 실존적 초월로 나아가는 길: 실존철학의 후반기(1920년-40년대)
  그때 세계에서는-
  1930년: 런던에서 해군군축회의 열림
  1933년: 독일국회, 바이마르헌법폐기, 히틀러독재권 확립.

  야스퍼스가 지적하는 삶의 내면적인 또 하나의 체계는 출발점이나 철학적 체계의 과
정은 달라도 하이데거와 통하는 바가 있다. 인간들의 삶은 평범한 다수의 것으로 자리
잡히게 된다. 그 평범한 다수는 그저 살고 있을 뿐이다. 일상적인 삶을 이어가고 있는
것뿐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식으로 먹고 마시며 생명을 이어가는 생활을 산다. 여
기에는 정신적 고뇌도 없고 어떤 가치를 추구하려는 노력도 없다. 주어진 삶을 습관적
으로 계속해간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적 삶이나 삶의 가치와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의
식 일반의 단계로 옮아간다. 삶이 먼저 있고 기초적인 행위가 뒤따르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앞서고 사고의 뒤를 행위가 따르는 생활을 하게 된다. 우리들이 쉽게 표현하는
일반적인 의식구조와 사고방식을 갖고 사회생활을 영위해가는 것이다. 내던져진 존재
가 아니라, 찾아서 살아가는 삶이다. 야스퍼스는 이 단계의 삶을 좌우하는 기초는 과
학적인 삶에 해당한다고 본다. 과학적 사고는 일반성을 갖고 있으며, 일반적 사고는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 의식주를 위해서 사는 생활이 아니라. 의식주를 이끌어가는 의
식적 삶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수의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니나, 제 3의 단계라
고 볼 수 있는 정신의 위치로 올라가는 정신적 영역의 삶이 있다. 문화를 창조하고 가
치를 추구하며, 삶의 영구한 궁극적인 의미를 찾는 삶이 이어진다. 사상, 진리, 예술
등이 있으나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적 존재와 삶의 본질적 의의를 추구해가는 삶이
요청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정신적 창조의 삶의 단계에 이르게 되면 우리의 삶은 반
드시 어떤 관계, 난파, 좌절, 회의, 때로는 허무에 직면하게 된다. 하이데거는 불안의
본질적 근원은 죽음에 뿌리를 드리우고 있다고 본다. 불안은 어디서 오는가? 우리의
삶은 충일하며 생명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아도 바로 그 속에 죽음에 대한 예감, 다
가올 죽음에의 소식을 얻는다. 죽음과 삶은 괴리관계에 있어 공간적 공통성은 있을 수
없으나, 삶의 한가운데 죽음이 둥지를 틀고 삶을 위협하며 죽음의 힘을 갖고 엄습해오
는 것이다. 그것을 느끼는 것이 곧 불안인 것이다. 그 불안은 삶의 본질이기  때문에
회피할 수도 거부하지도 못하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가 유한과 무한, 생과 사, 시간
적인 것과 영원한 것, 사라질 것과 영존할 것을 대립시키듯이, 정신적 단계에서는 이
러한 단계의식과 삶의 난파를 겪지 않을 수가 없다. 그 단계에 직면하는 단계, 제 4의
단계-그것을 야스퍼스는 실존의 단계라고 보는 것이다. 이 실존의 단계에서 자아를 좌
초와 파국으로 이끄는가, 아니면 그 단계를 초극하는 가함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실
존적인 초월이 삶의 궁극적인 과제가 되는 것이다. 과거의 철학들은 이 전단계인 정신
의 단계에 머물렀고 그것으로 자족해야 했으나, 하이데거나 야스퍼스는 이 실존적 단
계에 도전할 수 있었기 때문에 현대사회가 원하는 철학적 과제에 대응하게 되는 것이
다. 그러면 그 해결의 길은 무엇인가? 해결의 길은 제각기 달랐다. 키에르케고르, 야
스퍼스, 마르셀은 종교적인 신앙에서 그 암시를 주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방향을 유
신론적인 실존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렇다면 니체, 하이데거, 사르트르는 무신론적
실존철학을 제창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또 어떤 이들은 키에르케고르, 니체, 하
이데거는 자아중심의 고독한 실존을 추구했으나, 야스퍼스, 마르셀 사르트르는 고독한
자아를 사회적 자아로 확대시킴으로써 참여의 방향으로 실존사상을 발전시켰다고도 말
한다. 그렇다고 해서 앞선 세 철학자의 유신론이 다 같은 성격을 갖는 것은 아니다 키
에르케고르는 인간은 스스로를 초월할 수도 없으며 자신을 구원할 수는 없다. 오로지
전적으로 신의 은총에 의해서만 초월과 구원이 가능해지는 것이라고 한다 이에 비하여
야스퍼스는 인간의 이성이 한계와 난파를 겪으면서 포섭자인 신의 포괄성에 안기는 자
신의 선택과 결단이 필요하다. 자아의 초월적 노력과 자기부정에서 긍정의 길을 택하
면 된다고 본다. 이에 비하면 마르셀은 카톨릭 철학자답게 인간의 선택과 신의 사랑의
결합에서 실존적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고 본다. 키에르케고르를 아우구스티누스,루터
의 뒤를 계승하는 신학적 사상가로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게 보면 야스퍼스는
전통적인 이성주의 철학자의 신학이라고 보아 좋을 것이다. 사회참여의 실존도 그렇
다. 야스퍼스는 성실한 인간관계를 호소했고, 마르셀은 인격적인 사귐의 길을 열어주
었으나, 사르트르는 사회행동주의자인 마르크스의 뒤를 계승하는 방향을 택했다. 그러
나 많은 사람들은 이 대표적인 여섯 사람쯤으로 실존철학은 일단 시대적 사명을 다했
다고 보고 있다.
@ff
    83 그리스 철학과 기독교 사상: 서구사상의 두 뿌리
  그때 세계에서는-
  1933년: 독일, 아인슈타인, 토마스 만, 츠바이크 등 망명.
  1937년: 북경에 중화민국 임시정부 수립

  모든 사상이 다 그러하듯이 철학도 사상적 과제를 지니고 있는 한 시대성과 유행성
을 따르지 않을 수 없는 것 같다. 특히 실존철학이 그러했다. 지금은 4,50년 전에 비
해 크게 문제삼지 않아도 되는 그 시대의 유산으로 자취를 감추어가고 있다. 그런데
실존사상과 철학이 그렇게 큰 영향력을 행사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뒤따르고 있었다.
그 하나는 실존의 문제가 깊은 인간 및 인간학적 과제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며, 다
른 하나는 철학이외의 분야, 특히 문학에서 실존주의 작가들이 한 시대에 끼친 영향이
대단했다는 사실이다 고대정신속에도 인간실존의 뜻은 어디에나 나타나고 있다. 인도
의 옛날 사상인 우파니샤드 사상에도 항상 드러나고 있다. 종교는 언제나 인간적 실존
과 연결되어온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스의 대표적인 비극작가인 소포클
레스의 작품을 읽는 사람은 깊은 인간적 실존의 음성을 항상 듣게 된다. 어떤 이들은
셰익스피어의 비극속에서 같은 뜻을 얻기도 한다. 파스칼의 "팡세"를 읽는 사람은 여
러 곳에서 같은 고백을 발견한다. 아마 도스토예프스키를 애독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가 누구보다도 인간실존을 취급한 작가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평범한 주인공들을 통
해 인간의 내면적 절규를 듣게 하는 것이 그의 작품들이다. 우리는 사르트르가 철학자
이면서 대표적인 작가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사르트르와 논쟁을 벌였던 A.카뮈
의 작품세계가 같은 내용을 잘 알려주고 있다. 카뮈의 "이방인"을 읽은 사람이나 같은
노벨수상작인 라게르크비스트의 "바라바"를 읽은 사람은 그 주인공들을 통해 우리 자
신이 내뿜는 삶의 절규를 공감했을 것이다. 그 점에서는 김은국의 "순교자"고 깊은 암
시를 전해주는 작품이다. 이렇게 본다면 한때 세계적으로 파문을 일으켰던 실존사상은
많은 철학자와 더 많은 예술가들을 남겨주고 역사의 무대에서 자취를 감춘 것 같은 인
상을 준다. 인간의 문제였기에 연구한 것이 있으며, 격변하는 역사였기에 우리에게 같
은 물음을 안겨준 철학이었다. 그런데 여기에 주목하고 싶은 것은 이러한 철학이 주로
독일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났고, 그 영향이 일본을 비롯한 동양사회에 큰 의미를
남겨주었으나, 영국, 미국을 비롯한 영어문화권에서는 그렇게 큰 반응을 얻지 못했다
는 점이다.거기에는 전통의 차이도 있었으나, 독일과 프랑스가 같은 역사적인 비극을
영국과 미국은 가볍게 넘겼다는데도 의미는 있었을 것 같다. 그리고 모든 학문과 사상
을 상식과 교양으로 처리하는 영어문화권에서는 그렇게 심각한 생의 문제를 대중들이
외면해온 것 같기도 하다. 그러면 이러한 기간에 그들은 어떤 철학을 계승, 발전시켜
왔는가? 그것은 다른 장에서 새로이 취급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우리는 큰 구별을 하
지 않은 데로 서양철학 또는 서구사상을 포괄적으로 언급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같은 서양사상이라고 해도 전통적인 공통성이 있는가 하면 사회적인 차이점도 대단하
다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된다. 전통적인 공통성은 크게 보았을 때 두 가지이다. 그
리스의 철학과 기독교 정신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로 대표되는 그리스철학은
고대사상은 물론 중세기에도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으며, 어떤 면에서는 오늘에 이르
기까지 그 전통은 이어지고 있다. 플라톤을 얘기하지 않은 대표적인 철학자는 없으며
아리스토텔레스를 제쳐놓고 논리학, 예술론, 형이상학, 윤리학, 정치학 등을 강의하는
철학자는 없을 정도로 그들의 영향은 큰 것이다. 기독교 정신도 그렇다. 기독교가 일
찍 로마로 전파된 뒤부터 오늘까지 서양사상과 철학의 근거에는 언제나 기독교적인 유
산이 자리잡고 있다. 만일 인도사상을 연구하면서 불교의 정신을 배제한다든지, 동양
의 사상을 취급하면서 유교의 정신을 제외한다면 그것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일이
다. 그보다도 더 강하게 서양정신과 사상에 영향을 미친 것이 기독교정신이다. 불행하
게도 우리는 서양철학은 연구하면서 기독교를 모르는 경우가 자주 있다. 둘 다 연구한
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며 우리의 능력을 초월하는 부담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독교는 모르면서 서양철학을 연구하며, 서양철학은 이해하지 못하면서 기독교신학을
전공하는 학자들이 우리주변에 많이 있다는 사실은 어떻게 보면 무지스러운 일이다.
서양사람들이 본다면 그런 학문적 연구는 불가능하다고 평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우리
는 열심히 하이데거를 연구한다고 자부하지만, 그리스철학과 기독교를 연구한 바가 없
다면, 그것은 나무의 뿌리와 밑동은 남겨두고 가지와 잎사귀만을 취급하는 지엽적 학
문과 사상의 처지를 면키 어려워진다. 기독교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버리
기 위해서라도 기독교정신을 알아야 철학적 고찰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ff
    84 마르크스주의의 탄생: 카를 마르크스(1818--1883)
  그때 세계에서는
  1876년: 조선, 강화도조약 조인
  1881년: 런던에 화력발전소 건설
  1882년: 코흐, 결핵균 발견

  헤겔 철학의 추종자들은 많이 있었다. 오히려 헤겔의 인기가 절정에 달하고 친정부
적인 방향을 택하기 이전의 헤겔, 즉 자유로운 종교적 비판을 가하며, 변증법적인 철
학과 법철학을 통해 전개시켜온 사회철학에 관심을 쏟았던 때의 헤겔의 제자들이 더
강하게 헤겔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집결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말년의 헤겔에게는 새
로운 비판정신과 개혁적인 생명력을 잃고 현정부와 정권에 의도적으로 동조하려는 경
향이 너무 강하게 나타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독일 정신계에 있어서는 철학보다도 더 큰 영향력을 가진 것은 프로테스탄트
사상과 신학이었다. 어떤 교수라도 무신론적이거나 반교회적인 성향이 나타나면 정부
로부터 교수직을 박탈당하는 것은 예사로 되어 있었다. 칸트도 한때는 그런 오해를 받
았을 정도였고, 말년의 헤겔도 같은 문제로 고민한 일이 있다. 젊었을 때 헤겔의 종교
관에는 전통적인 교리와 어긋나는 점이 적지 않게 있었던 때문이다. 헤겔은 결국 자기
는 나면서부터 루터 교인이었고 지금도 같은 신앙을 따르고 있다는 신앙고백을 한 후
에야 교수자리에 안정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헤겔의 초창기의 종교관을 지지하며 개혁의지를 강하게 풍기는 헤겔의 추계
자들이 뭉쳐 한 세력을 만들고, 전통적 기독교를 비판하며 정치적 혁신세력을 표방하
고 나섬에 따라 정부와 교계는 그 세력과 집단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L. 포이어바흐같
은 철학자는 그 때문에 교수직에서 추방당하는 결과까지 빚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 난처해지는 사람은 노년기의 헤겔을 지지하는 후계자들의 입장이 된다.
그래서 그들은 정부와 교회에 충실한 헤겔의 뒤를 따르면서 노년기 헤겔을 지지하는
세력으로 모였다.
  그 당시 독일국회의 좌측은 야당이 차지했고, 우측은 여당의 좌석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젊은 헤겔 파는 헤겔 좌파로 자처하게 되었고, 헤겔 노인측은 스스로를 우파
로 여기게 된다. 그래서 지금까지 급진적이며 진보적인 정치세력을 좌익이라고 부르는
반면,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흐름을 우익이라는 명칭으로 대신 하는 계기가 된것이다.
  이렇게 되면 헤겔의 철학을 종교나 정치적 색깔 없이 추종하는 세력도 남게 된다.
그들은 스스로를 헤겔 중도파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 셋 중 제일 먼저 퇴색해버리는 것은 중도파가 된다. 특수성이 없어진것 때 문이
다. 철학사 연구가나 미학 등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뚜렷한 개성을 잃게 마련이다. 다
음에 서서히 자취를 감추게 되는 것은 헤겔 우파이다. 세월이 지나  면 새로운 철학으
로 남을 것이 없어지게 마련이다.
  오히려 남아서 강하게 세력을 확대시켜나간 것은 헤겔 좌파에 속하는 학자들이었다.
그 그룹의 대표적인 사람은 루드비히 포이어바흐다.
  그는 헤겔의 젊었을 때의 종교관을 받아들일 뿐 아니라, 훨씬 급진적인 방향으로 이
를 발전시켰다. 기독교는 휴머니즘적 의의를 갖출 때 존재 의미가 있으며, 전톤적인
교리나 교회는 존재의 가치가 없다고 극렬한 비판을 가했다. 그의 "종교의 본질"과 "
기독교의 본질"은 종교가 없는 사회, 기독교 교리가 인간주의적 방향으로 해소되어야
한다는 과감한 이론을 전개시켰다.
  그 뒤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 철학에 있어서는 유물론이고, 사상적 방향은 휴머니즘
이 되었고, 사회문제에 있어서는 가난한 계층을 위한 사회개혁을 호소하게 되었다. 많
은 소장학자와 사상가들이 포이어바흐의 가치 밑으로 모여들었다. 드디어 그 세력은
하나의 사회적 혁신세력으로 등단하기에 이르렀다. 때마침 세계적으로 발달을 거듭한
자연과학은 유신론이나 유심론보다는 유물론을 입증하는데 크게 기여하기도 했다. 그
래서 그 당시에는 사상 유례가 없는 유물론이 등단하게 된다.
  헤겔의 유심론도 지나친 성격을 띠고 있으나, 이때 등단한 유물론은 전무후무 한 것
이다. 몰례숄 같은 학자는 "광부의 이마에는 땀이 흐르고 그 땀에는 인   이 들어 있
다. 그 인을 비료로 삼으면 밀보리가 자란다. 밀보리를 먹으면 그 힘으로 인간은 사고
를 하게된다. 그래서 무엇을 먹게 하는가 함이 어떤 사상을 가지고 살게 되는가 함의
열쇠가 되는 것이다. '인은 사고한다' 는 결론이 나   온다" 고 얘기했을 정도다.
  이러한 헤겔 좌파의 철학적 결과로 뚜렷이 나타난 것이 k.마르크스였다.
마르크스는 그 모든 시대적 여건과 욕구를 정치적으로 해결지을 수 있는 하나   의 철
학적영역을 개척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이미 철학자이기보다는 사회사상가
이며, 레닌이 그 신앙을 실천하기 위해 정치철학으로 재해석한 때는 철학이 하나의 이
데올로기로 바뀌었고, 그것을 정권화하기 위해서는 공산당이라는 정당이 탄생하는 결
과를 초래했다.
  마르크스가 "공산당선언"을 발표했다는 것은 이 당시의 철학과 사회상황을 잘보여주
는 일이기도 하다.
@ff
    85 "공상"에서 "과학"으로: 마르크스의"자본론"(1867년)
  그때 세계에서는-
  1867년: 미국,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 매수
  1868년: 쿠바,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위한 10년 전쟁 시작

  사람들은 20세기 역사에서 가장 큰 사건으로 부상했다가 사라진 것은 마르크스 주
의, 특히 공산주의의 탄생과 그 소멸이라고 말한다. 70년 동안 세계역사에서가장 광대
한 지역에 걸친 변화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우리가 마르크스주의와 공산주의를 구별해서보는 것은, 마르크스는 철학과 정 치이
념을 제시했기 때문에 19세기 후반부터 시작되었고, 공산주의가 정치무대에 등단한 것
은 러시아 혁명 이후부터의 과제이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레닌-스탈린식의 공산주의도 다시는 태어나지 않을것이며, 레닌-모택동의
뒤를 계승하는 사회주의도 자취를 감출것이기 때문에, 누가 보든지 공산주의는 스스로
의 한계와 종말을 초래했다고 보아 좋을 것이다. 우리는 레닌-스탈린-김일성식의 사회
주의가 얼마 가지 못할 것임도 의심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마르크스주의는 어떤 모순과 단점을 안고 있었는가?
  우리는 그가 주장한 유물사관을 반성해보곤 한다. 마르크스는 세계역사, 즉 경제적
유물사관은 결정지어진 하나의 사회사 과정을 필연적으로 밟는 것이다고  주장한다.
최초에는 모든 사회가 원시공산사회로 발족한다. 공동생산에서 공동 소비를 하는 사회
체제가 처음 출발이다. 그러는 동안에 지주가 탄생하고 소작   인이 형성되면서 농업
사회에서는 자연히 지주와 소작인의 구별이 생기고, 양자 간에 갈등과 모순이 탄생한
다. 다시 사회가 산업사회 공업과 더불어 도시생활   로 변질되면서는 자본주의 사회
로 변질되지 않을 수 없다.
  이 자본주의는 소수의 자본주와 절대다수의 근로계층으로 나누어진다. 노사간의 분
규와 투쟁은 불가피해진다. 비로소 계급사회로 굳어져버린다. 이 자본주의 사회를 극
복하는 길은 농민과 근로자들이 사회와 역사를 이끌어가는 사회주의 사회로의 발전은
불가피해지며, 그 사회주의 이상은 공동생산과 공동소비를 실현시키는 공산사회로 완
성된다는 이론이다.
  사회구조도 마찬가지다. 우리들의 생활을 지배하는 절대조건은 경제이며, 경제를 좌
우하는 것은 생산수단이다. 모든사회의 밑바탕에는 어떤 생산수단인가 하는 기초, 즉
하층구조가 있고, 그 위에 경제제도가 정착되며, 그 경제제도에 따라 거기에 걸맞는
법률-사회제도가 생기고, 다시 그의에 문화-예술-도덕등이 윗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세월이 지나 생산수단이 바뀌게 되면 그 위에 자리잡고 있던 상층구조는 모두가 무
너지고, 새로운 생산방법에 따르는 새로운 사회 및 문화구조가 형성된다.
  생산구조가 기반이기 때문에 다른것들은 그 부수적인 것에 불과하다. 종교같은 것은
이 생산구조에 도움을 주지 못하며, 계급의식에 있어 정신적 약자를 만드는 역할밖에
할 수 없으므로, 종교는 배척을 받아야 한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촉진시키기 위해서는 현존하는 그리고 나타날 수 있는 모순을
극복해야 한다. 그 극복의 길은 혁명이다.
  그래서 공산주의는 계속된 혁명을 정당시하며 혁명은 역사의 필수조건이 된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이러한 과정을 실천함에 있어 스스로의 모순과 시행착오를 면치
못했다. 자본주의 사회를 극복하는 길은 사회주의라고 보았으나, 오히려 발전된 자본
주의는 복지정책을 통해 더 풍요로운 사회를 만들어 공산주의를 앞지르게 되었다. 생
산수단과 경제 일변도의 사회구조관은 경제-정치-문화-도덕-등의 다양한 차원에서 발
전했을 때 더 많은 자유와 보람을 느끼는 민주주의 사회를 창안해내는 데 성공했다.
  그들은 계급의 해소가 사회문제 해결의 열쇠라고 생각했으나, 또 다른 정치적계급을
만들었을 뿐, 진정한 계급해소는 찾지 못했다. 오히려 인간의 존엄성 과 인권의 평등
을 주장한 자유세계가 자유와 더불어 평등을 구가하고 있는 실정이 되었다.
  그들은 소외층의 인간 존엄성을 위한다는 인도주의적 목표를 내세웠으나, 공산주의
를 정치적으로 구현시키는 과정에서 역사상 유례가 없는 독재와 정치범들을 탄생시켰
고, 공산정권을 위한 인간 수단화의 죄악스러운 과오를 자행하고야말았다. 그리하여
세계에서 정권과 이데올로기를 위해 인간의 존엄성과 권리를 완전히 수단화해버린 대
표적인 사회로 전락해버렸다.
  그래서 지금은 공산주의는 경쟁세계에서 낙후되어버렸고, 경쟁의 패배는 차지해 두
고서라도 정치적 자유, 문화와 정신의 다원성을 완전히 상실해버린 사회로 퇴락해버린
것이다. 이론적인 공산주의의 모순보다도, 그 현실적인 낙후성과 한계성을 자타가 공
인하는 위상으로 역사적 퇴락상을 숨길 수가 없게 된 것 이다.
  결국 역사는 더 많은 사람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회로 나아가는 도정이라고 할
수 있다.
  공산주의는 그 측면적 역할을 맡았던 것으로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ff
    86 가치철학을 체계화한 책: W. 빈델반트의 "철학개론"(1914년)
  그때 세계에서는
  1914년: 오스트리아 황태자 암살 (사라예보 사건): 오스트리아, 세르비아에 선전포
고 (제1차 세계대전 시작)

  한때 신 칸트학파라는 말이 유행했었다. 19세기 후반기부터 20세기 초반까지 독일에
서 들을 수 있었던 철학의 한 흐름이었다.
  헤겔이 죽은 뒤 대부분의 철학자들이 헤겔의 철학에 붙잡혀 있을 때, 사상계의 한쪽
에서 헤겔보다는 칸트로 돌아가자는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헤겔의 형이
상학보다는 칸트의 인식론이 타당하며, 허망한 변증법적 이론보다는 이성적 비판이 발
전해야 하며, 철학의 정밀성과 보편타당을 되찾아야 한다는 철학게의 요청이자 운동이
었다. 그래서 그 당시에는 삶의 철학과 대조적인 신 칸트학파의 철학이 주목을 끌었
고, 그 대표적인 흐름의 하나가 독일 서남학파에 속하는 가치철학으로 이어졌다.
  우리가 대학에 다닐 때만 해도 삶의 철학이냐 가치철학이냐 하는 문제는 선택이 필
요한 것으로 느껴졌을 정도였다.
  이러한 신 칸트학파의 가치철학 계열의 대표자 중 한 사람이 W. 빈델반트(W. Windel
band. 1848--1915)다. 우리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그의 철학설이나 인식론보다는 세계
에서 가장 많이 읽힌 그의 "철학개론(Einleitung in die Philosophie)"에 관한 소개
다. 그것은 지금 우리에게 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평양에서 중학교 2학년에 다닐 때였다. 숭실대학의 총장을 지낸 바 있는 김성
락 박사가 우리에게 이야기를 하면서, 사람에게는 정, 의 의 기능이 있는데, 그 결과
로 나타나는 것이 진, 선, 미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그때 나는 그 얘기를 듣고 크게
감명을 받았다. 역시 박사가 되면 저런 것까지 다 아는구나하고 생각했었다. 중학교
상급반 때, 바로 그것이 가치관을 얘기하는 상식에 속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도 이화여자대학의 배지를 보면 학교설립 연대와 마크가 있고 진, 선 미라고 씌
어진 내용을 보게 된다. 역시 크게 세계적으로 유행되고 있던 세 가지 개념을 딴 것이
다.
  이런 가치철학의 상식적인 체계를 가장 먼저 철학체계로 정착 시켜준 사람이 빈델반
트였다.
  그의 철학개론은 네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이론철학에 속하는 부분은 인식과 진
리에 해당하는 것이고, 다음은 실천철학에 속하는 것으로 윤리학과 선의 가치를 취급
하는 것이다. 그 다음은 미의 가치를 추구하는 예술철학의 문제가 들어가 있다. 그리
고 끝으로 이 모든 가치를 종합하고 초월시킨 인격적 가치로서의 성의 가치, 즉 종교
철학의 문제로 완결되어 있다.
  우리는 이 제목들만 보더라도, 그가 칸트의 철학을 계승한 학자이며 그 철학적 순서
와 내용이 그대로 칸트의 것임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체계와 분류는 다분히
심리학적 방향과 일치되는 것 같아도, 가치철학자들은 어디까지나 칸트의 비판적 방법
과 가치의 규범적 타당성을 추구해나갔다. 그리고 이런 탐구는 자연히 문화전반에 걸
친 철학적 해석을 가능케 해주었다.
  빈델반트가 철학사와 역사철학적 연구에 뜻을 모았던 이유도 짐작이 간다. 그러나
그의 "철학개론"이 세계적으로 많이 읽혔다는 점에서 그를 소개했을 뿐, 체계적인 철
학적 업적은 다른 철학자들에게서 더 비중 있게 나타나고 있다.
  그중에서 우리 나라에 많이 소개된 철학자의 한 사람은 에른스트 카시러(E.Cassire
r, 1874--1945)라고 보아 좋겠다. 그는 신 칸트학파의 뒤를 계승하면서도 삶의 철학자
들의 학설에도 무관하지 않았다. 그래서 요해의 인식론적 의미를 도입했고, 상징주의
철학을 발전시켜 새로운 현대철학의 영역을 개척해주었다. 우리는 그의 저서 중에서 "
인간론"을 번역해 읽고 있으며, 거기서 많은 철학적 암시를 받고 있다.
  여담에 속하지만, 성경을 앍는 사람들은 유명한 바울의 글에서 믿음, 소망, 사랑 이
셋은 항상 있어야 하나, 그중의 제일은 사랑이라는 말을 알고 있다. 생각해보면 바울
도 위대한 철학자였다. 그는 아는 것, 즉 지가 진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믿게
될 때 진리가 되는 것이며, 의욕이 있으면 그 대샹이 선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희망했을 때 비로소 선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름다움은 사랑이 창조하는 것이
지, 감정이 그대로 미를 이끌어내는 것은 못된다. 그렇게 본다면 바울은 우리들보다도
더 깊은 철학적 사색을 전개시킨 것 같기도 하다. 아마 바울의 뜻을 연장시킨다면 성
스러운 것은 인간적 가치관으로 기대되는 바이기는 해도, 신과 그 신의 사랑에서만 가
능하다고 피력할지 모른다.
  어쨌든 필자는 이 가치철학이 얼마나 그 당시에 일반화되어 있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그 뜻을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는가를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은 빈델발트 이전에도 있었고, 오늘 우리 주변에서도 쉽게 전달
된 것이지만, 일단은 교양인으로서 이해해두는 것이 좋겠다는 뜻에서 언급해본 것이
다.
 @ff
    87 철학적 인간학의 선구자: 막스 셸러의 "인간과 역사"(1929년)
  그때 세계에서는
  1929년: 인도국민회의, 자치결성: 뉴욕, 주가 대폭락(세계공항 시작): 영국 플레밍,
페니실린 발견

  지금도 서점에 가면 '철학적 인간학'에 관한 저서들과 논문이 자주 눈에 뜨인다.
  오래 전에는 그런 제목들이 별로 없었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부터는 어디서나 인간
학의 문제가 비중있게 다루어지고 있다. 그런 문제의 선구자가 막스 셸러(M.Scheler,
1874--1924)였다.
  그는 한때 철학계에 비중 크게 등단했던 후설의 현상학을 따랐다. 그리고는 인간적
체험의 현상학적 분석방법에 의거, 윤리학, 종교철학, 사회철학 분야에 업적을 남겼
다. 그의 가치론적 인격주의의 윤리관은 지금도 많은 후계자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그는 카톨릭 개통의 철학자였다. 그래서 "인간에 있어서 영원한 것"은 그의 대표적인
종교철학 저서로 널리 읽히고 있다.
  그러나 그의 독창적인 업적은 말년에 펴낸 인간학에 관한 집중적인 연구였다.
  "우주에 있어서의 인간의 위상"은 그의 저명한 저작이었고, 사후에 발표된 "인간과
역사"는 참으로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끄는 책이 되었다. 이러한 셸러의 업적이 문화유
형학과 연계되면서 세계적으로 인간에 관한 연구, 특히 철학적 인간학의 연구가 보편
화되기에 이른 것이다.
  우리는 그의 널리 알려진 "인간과 역사"에서 그의 대표적인 인간관을 소개하기로 하
자.
  그는 역사적으로 살폈을 때 인간은 다섯 가지의 유형으로 나누어질 수 있다고 보았
다. 그러나 후반부의 두 가지 인간관은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지는 못한다. 셸러가 지
나치게 시대적인 사상에 비중을 두었던 것 같다.
  그 하나는 당시 크게 유행하던 초인으로서의 인간관이다. 니체의 초인정신이 널리
소개되면서 앞으로는 그 인간관이 계속 비중 크게 다루어질 것으로 보았던 것 같다.
그러나 일시적인 사상이 수세기에 걸친 인간관과 비교될 수는 없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생물학의 발달과 더불어 인간을 생물학적 견지에서 보았을 때, 덜 발달
된 동물의 일종일 수도 있고 기형적으로 대뇌만이 발달된 병적 인간으로 볼 수도 있다
는 것이다. 물론 생물학적으로 보았을 때 그런 판단과 비판을 내릴 수는 있으나, 그런
인간관은 오래 정설로 남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둘을 제외한 인간관은 긴 역사를 통해 타당성을 갖는 인간관이며,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그 주장과 학설에 공감하고 있다.
  그 첫째는 기독교 전통을 계승하는 종교적 인간관이다.
  이 종교적 인간관은 구약과 신약을 중심삼는 신과 인간의 관계에서 맺어지는 것이
다. 인간은 종교적으로 말하면 타락한 인간이며, 본성적으로 보면 죄와 악에의 경향성
과 퇴락성을 내포하고 있다. 비록 교회가 그 뜻을 강조하지 않더라도 인간은 구원을
받아야 할 존재이며, 인간의 본성은 자연과의 관계에서 해결지을 수 없는 역사성과 종
말론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다. 인간이 종교적인 타락과 죄악성을 안고 있는 한 계속될
수 있는 인간관이다.
  두번째 셸리가 지적하는 인간관은 사고하는 인간이다. 라틴어로 호모 사피엔스(Home
spiens)라는 말로 통용되고 있다. 그리스 인들의 전통에 따르는 인간관이다. 인간은
자연적 조건과 더불어 신적인 조건인 이성의 능력을 갖추고 있다. 그것이 곧 사고할
수 있는 인간이다. 이성은 자연에는 없는, 신적 동인을 갖는 인간의 주체다. 세계를
합리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이성은 동물적인 충동과 감성을 넘어
이상적인 내용들을 구현하는 정신의 위력과 이념의 창출력을 갖추고 있다. 이러한 이
성적인 가능성은 역사, 민족, 신분을 넘어 불변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하는 인간은 서양사상과 철학의 주류를 만들어왔고 종교적인 전통과 공
존해왔다.
  세번째 인간은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이다. 호모 파베르(Homofaber)라는 말로 통한
다. 이 인간은 과학과 기계, 기술에 연결되는 실증주의적이며 매커니즘을 동반하는 인
간관인 것이다. 이성보다는 육체적인 기능을 배척하지 않으며, 어떤 때 도구는 신체의
연장적 기능을 돕는다. 이때 말하는 도구는 물체적인 도구뿐 아니라 모든 기호까지도
포함하며, 우리가 개념과 사상을 전달하는 언어도 귀중한 도구의 하나가 된다.
  그리고 신체 및 인간적 충동이 그 맡바탕을 만들고 있다. 생식과 번영, 성장과 권
력, 생명유지와 영양(경제)적 충동은 인간적 삶의 큰 비중을 차지한다.
  아직도 M. 셸리의 이 세 가지 인간관은 우리 사상계의 대표적인 인간관으로 남아 전
해지고 있다. 그래서 인간학의 문제가 대두되는 곳에서는 언제나 셸러의 업적이 전해
지는 실정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한 철학자의 모든 철학 내용이 그대로 후세에 전달되
는 것은 아니나, 창의적이며 선도적인 역사적 업적은 남게 된다는 교훈을 배우게 된
다.
@ff
    88 사회철학의 아버지: 콩트의 "실증철학 강의"(1830--1842)
  그때 세계에서는
  1814: 청, 영국에 홍콩할양 등 약정
  1842: 오스트리아 도플리, 도플리 효과 발표

  서양역사에 가장 큰 변혁을 일으킨 두 가지 사건이 있었다. 그 하나는 영국을 중심
으로 전개된 산업혁명이었고, 다른 하나는 프랑스 혁명이었다. 이러한 경제사회와 정
치계의 커다란 변혁은 서구사상에 몇 가지 문제성의 변화를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그 하나는 도시화에 따른 변화다. 조용한 농경사회에 뿌리를 드리우고 있던 옛날 삶
들은 정신적인 삶 자체가 개인중심이었다. 문화, 예술, 학문, 도덕, 종교 등 모든 문
제가 개인에서 개인에로의 길을 지니고 있었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어떤 사상가나
예술가의 정신과 삶이 그대로 전달되었고, 또 그렇게 살면되었다.
  그러다가 도시화가 불가피하게 되고 정치적 집단과 경제의 산업사회로 변하면서 개
인이 합해진 사회가 아니라 사회 속의 개인이 되었고, 사회에 예속된 자아라는 생각이
점차로 굳어지게 되었다. 서구사회에서 일어났던 두 개의 혁명은 그 불가피성과 절대
성을 우리에게 여실히 보여준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사회철학과 사회과학이 발달되며 어떤 사회적 이념과 사상이 필
수적이 된다.
  서양에 있어서는 이러한 사회과학 및 사회철학이 19세기 중엽부터 대두되기 시작했
다. 영국에 있어서는 공리주의가 정착되었으며, 프랑스에서는 실증주의적 사회과학이
탄생했다. 때를 같이하여 독일에서는 마르크스주의가 등단하게 된다. 뒤늦게 나타난
미국의 실용주의 사상도 일조의 사회철학이라 보아 좋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이러한 사회과학적 과정을 밟지 못한 나라들이 오늘에 있어서는 후진
성을 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일본은 경제적으로는 선진국가 대열에 끼어
있으나, 어딘가 정신적 선진국가라고 인정받기 어려운 것은 일본다운 사회과학이 없었
기 때문이라고 보아 좋을 것 같다.
  우리 나라에서도 실학사상이 그대로 계승, 발전되었다면 우리나름대로의 사회과학적
사고가 정착되었을 것 같다. 그러나 정치적 퇴락과 일제의 침략이 모든 것을 수포로
돌려버리고 말았다.
  생각해보면 아쉽고 원망스러운 역사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살았기 때문에 지금까지 대학에서 사회과학 분야를 전공했다는 사람
들도 사회에 나오면 사회과학적 사고를 하는 이들이 없다. 그것은 서구의 학문을 피상
적으로 받아들였을뿐, 그것들이 우리의 삶의 내용과 근거가 되어 있지 못하기 때문이
다. 그래서 지성인들도 뿌리와 밑둥이 없는 가지와 잎과 꽃에 해당하는 지식의 지엽들
을 가지고 살아가는 형국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사회과학적 사고방식은 오늘의 기계와 기술을 앞세운 산업사회와 접선되어
흔히 말하는 메커니즘 사회로 변질된다.
  먼저 이야기로 돌아가자.
  이러한 사회철학 및 사회과학을 대표하는 한 철학자가 프랑스의 오귀스트 콩트(A.Co
mte, 1798--1857)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콩트를 지금도 사회과학의 창시자 및 사회과
학의 아버지라고 불러주고 있다.
  콩트는 비범한 천분을 갖고 태어나 제멋대로 살았던 사람이다. 그가 파리 공과대학
에 입학했으나, 너무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입학이 보류되었을 정도로 머리가 우수했
다. 콩트는 생계를 위해 요사이 우리 사회에서도 흔히 그렇듯이 학원의 선생 같은 직
업을 택하고 있었다. 대학에서 강의를 들었으나 교수들의 학문적 수준에 실망했었기
때문이다. 또 교수들도 그런 거만하고 앞선 질문과 주장을 내세우는 젊은이를 달가워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나름대로 개인적으로 학생을 가르치는 일로 생계를 꾸려
나가면서 학업을 계속했다.
  그는 한때 별로 인격을 갖추지 못한 여성과 사랑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허영심이
강한 그 여성은 변호사인 다른 남성으로부터도 생활비를 얻어오자는 제안을 했다. 이
에 절망과 젹분을 참지 못한 콩트는 자살을 하려고 강물에 뛰어든 일까지 있었다. 지
나가던 군인의 도움이 없었다면 그 훌륭한 저서와 사상은 세상에 나타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다시 학구생활로 뜻을 모은 콩트는 상하 두 권으로 되는 거작이면서 대표작인 "실증
철학 강의"에 전념하였고, 30대 전반기부터 그 학문적 업적이 성숙, 발전의 단계에 이
르러, 10여 년간의 노구 끝에 하나의 고전에 해당하는 저서를 남기게 되었다.
  그 앞 책에는 그 당시까지 있었던 모든 학문을 종합, 정리하여 새로운 영역으로 개
척하는 획기적 업적을 남겨주었고, 그 후반부는 그 당새까지 누구도 손대지 못했던 사
회과학의 과제들을 취급했던 것이다. 그의 철학적 업적은 이 창의성이 넘치는 사회과
학분야에서 결실을 얻게 된 것이다.
  물론 과거에도 같은 영역의 학문이 전무했던 것은 아니나. 그 창의적 업적은 역시
콩트에게 돌려 좋을 것이다.
 @ff
    89 세 사람의 사회학자: 콩트와 밀 부자(1806--1873)
  그때 세계에서는
  1856년: 청, 애로호사건 발생
  1857년: 인도, 세포이 반란 일어남
 
  콩트는 세계의 정신사적 발전단계를 셋으로 나누어 보았다. 그 처음 단계는 종교적
세계관의 시기다. 이성적으로 성장하지 못했고 과학적 사고가 없는 시기였기 때문에
인류는 종교적사고를 넘어설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교육이 보급되고 인간이성의 계발
되면서 인류는 종교보다는 철학의 단계로 진입하게 되었고, 사람들은 철학의 지붕 밑
에서 안주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본질과 관념의 형이상학적 철학의 허구성을 깨닫고 철학적 사고의 빈곤상을
발견하게 되면서 인류는 제3의 시대를 맞게 되었다. 그것이 다름아닌 실증과학의 시기
인 것이다. 막연히 단편적인 과학들의 종합이 아닌 과학적 본질과 바탕을 만드는 실증
성이 입증되는 과학이 필요해진 것이다. 그런 의미의 실증과학, 실증주의 사상을 창설
하려고 시도한 것이 콩트의 학문적 사명이었던 것이다.
  인간은 더이상 종교, 신화 등의 신비주의에 머물 필요가 없으며, 철학적 허구와 공
론에 붙잡혀서도 안된다. 역사는 통일된 과학적 세계관을 필요로 한다. 그러한 과학적
세계관의 기초가 되는 것은 실증과학이 되어야 하며, 그것이 사회과학의 새로운 영역
을 개척할 것으로 믿어졌다. 영국인들이 주장하는 경험보다는 사실의 학이 중요하며,
모든 경험의 내용은 실증적인 과학적 비판과 결론에 도달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렇게 주목할 만한 사상과 사회과학 이론이 제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주장은
오랫동안 프랑스 사회에서는 관심의 대상이 되질 못했다. 콩트는 알려지지 않는 재야
의 사상가였고, 대학에서는 그 사상을 받아들이는 데 주저하고 있었다. 지성사회의 전
통에서 그의 사상은 서자 취급을 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콩트의 학설이 영국에서는 수용되어 그 값을 인정받게 되었다. J.S.밀
같은 대표적인 철학자가 콩트의 중요성을 인정했고, 심지어는 심한 재정적 곤경에 처
해 있는 콩트를 도와주는 일까지 감당해주었다.
  그러던 중 서서히 킁트의 학설이 프랑스에서도 인정받게 되고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
하면서는 콩트의 사생활에도 약간의 여유가 생기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후반기 여생
은 오히려 실증정신보다는, 그의 인간적 성격의 본질 탓이었을까, 자가당착을 일으키
는 몇 가지 사상을 제안하기도 했다. 사회주의적 이상사회를 제시하기도 했고, 이성과
인류에 호소하는 종교관을 제창하며, 자신이 마치 그 교주격의 위치에 머무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역시 사생활에서는 병적인 미숙성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명실 공히 사회과학의 아버지로서의 위상을 차지해서 좋을 철학자였다.

  우리가 대학생활을 하고 있을 때에는 가장 많은 학생들의 애독서의 하나가 존 스튜
어트 밀(J.S.Mill, 1806--1873)의 "자서전"이었다. 학생들의 독서 및 정신적인 지도자
의 한 사람인 가와이라는 교수가 있었느데, 그느 밀의 자서전을 네 번이나 읽었다는
애기를 해주었다. 두 번쯤은 읽어서 좋은 책이다.
  밀은 어느 면에서 보았을 때 영국적인 성격과 분위기를 알려주는 철학저였다.
  그는 학교교육은 받은 바가 없이 아주 어려서부터 부친의 가정교육을 받으면서 자랐
다. 아버지 제임스 밀은 친구인 제레미 벤담과 더불어 영국의 대표적인 학자였다. 공
리주의 철학사상의 쌍벽을 이루고 있었다. 그 아버지는 자신을 갖고 아들 밀에게 조기
교육을 실시했다. 자신과 같은 철학가를 만들고 싶었다.
  미갤 자신도 드물게 보는 천재였다. 앞으로 학자적 활동을 하는데 필요한 고전어와
외국어는 다 터득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부친은 그에게 학자 및 철학자로서 필요한 저서와 논문을 소개해 읽게 하였
고, 그 토론에 참여케 해 일찍부터 철학적 사상의 정도를 걷도록 이끌어주었다. 어떤
심리학자는 그가 괴테에 버금가는 세계최고의 천재였다고 평가해주고 있다.
  그의 직업은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동인도회사의 중직을 맡고 있었다. 독일에서는 교
수가 되어야 학자로 인정받고, 프랑스에서는 교수가 아닌 학자가 간혹 있어도, 영국에
는 일반 사회직업을 가지는 학자들이 많이 있었다. 의사나 법률가는 말할 것도 없으
나, 일반직을 가진 사람들 중에도 영국의 대표적인 학자는 얼마든지 있었다. 밀이 바
로 그런 사람의 하나였다.
  말년의 밀은 저명한 사상가로 인정을 받았고, 그의 사회철학인 공리주의와 경제학의
영향으로 국회의원의 직책을 맡기도 했으나, 그 분야에서는 별로 성공을 거두지 못한
편이다. 옛날의 플라톤 때부터 철학자는 사상과 이상 및 사회이념을 제시해줄 수는 있
으나 정치일선에서 성공한 예는 별로 없었다. 밀도 그 전철을 밟았던 것 같다.
@ff
    90 '최대다수의 최대행복': J.S.밀의 "공리주의"(1863년)
  그때 세계에서는
  1863년: 미국 링컨, 전국에 노예해방 선언
  1864년: 스위스 뒤낭, 국제적십자사 창설

  밀에게는 두 사람의 은인이 있었다. 교육을 맡아 밀을 학자로 키워준 아버지 제임스
밀이 그 첫째 사람이었고, 또 한 사람은 테일러 부인이었다. 밀은 독신으로 있던 테일
러 부인과 사랑하게 되었고 후에 결혼하여 부부가 되었다.
  테일러 부인은 드물게 보는 지성적인 여인이었다. 교양과 모든 정신적 분야에서 밀
과 비교해 손색이 없는 귀부인이었다. 밀은 저작에 착수할 때 그 내용을 테일러 부인
에게 알려주면서 협조를 구했고, 저작이 끝났을 때는 같이 읽음으로써 수정과 비판을
얻었다고 자술하고 있다. 지적 소양이 높은 귀부인으로 그녀는 평생 밀의 친구이면서
아내의 역할을 잘 감당해주었다.

  밀은 당내에 요구되는 여러 분야의 학문에 손을 댔다. 그리고 그 결과는 모두가 주
목할 만한 저서로 고전적 의의를 남겨주었다. 그는 학분적 성숙기인 30대 후반기에 "
논리학 체계"를 저술해 내놓았다. 사람들은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의 대표적인 체계를
갖춘 논리학이라고 평했다. 경험주의적 귀납법을 체계화하여 논리적 방법으로 도입시
킨 명저다.
  다음에 그는 "경제학 원론"을 저술했다.
  "논리학"이 나온 지 5년 후의 일이다. 고전적 경제학의 원리를 체계 있게 저술해주
었다. 다음해에는 "자유론"을 완성시켰다. 많은 사람들이 애독한 책 중의 하나다. 사
회, 정치문제가 가미된 자유론이다.
  그리고 4년 뒤인 1863년에는 "공리주의"라는 사회철학의 대표적인 저서를 완성시켰
다. 영국의 공리주의 사상을 대표하는 저서가 되었다. 2년 후에는 "A. 콩트와 실증주
의"를 통해 콩트의 학설과 명성을 일깨워주었다. "종교론"이 마지막 대표적인 저서가
되었고, 그 2년 전에 유명한 "자서전"을 발표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취급하고 싶은 과제는 그의 사회사상으로서의 공리주의 철학
이다.
  최대댜수의 최대행복을 지표로 삼는 공리주의 사상은 제레미벤담 때부터 제창되었고
밀의 아버지 제임스 밀이 이에 동조했었다. 그 정신은 쉽게 말하면 '어떻게 가장 많은
사람이 가장 큰 행복을 누릴 수 있는가'를 찾아 사회의 변화방향과 이상을 제시해주는
사상이었다.
  지금 우리들의 위치에서 본다면 타당성 있는 사회이론으로 문제시될 수 없는 것 같
아 보인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위험성이 있는 급진사상으로, 기성사회의 가치관의 척
도로 보았을 때는 반대와 거부반응을 일으킬 수도 있을 만한 것이었다.
  우선 그들은 그 당시까지 영국사회를 이끌어온 전통적 종교관을 경시하는 풍조를 지
니고 있었다. 반기독교적이거나, 전통적 신앙과 대치한다는 것은 국민대중의 지지를
얻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공리주의 가치관은 합리적인 가치관을 강조하고
있어, 기성도덕과 윤리관에서 볼 때 적지 않은 비판의 대상이 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물론 밀도 대다수의 과제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으나 행복의 본질과 사회적 의미에
있어서는 많은 문제를 제기해야 했다. 행복의 양과 질은 어떻게 계산되어야 할 것이
며, 우리들의 삶을 규제하는 사회기능, 즉 종교, 도덕, 정치, 법률 등의 규제역할은
어떤 것들인가를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큰 역사적 흐름에서 보았을 때 공리주의는 영국사상의 정치, 사회, 윤리적
방향설정에 기여한 바가 컸다고 하겠다.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의 논리는 마침내 정치에
있어서는 의회 민주주의로 발전할 수 있었고, 경제면에서는 복지체제에로의 길을 열어
주는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영국이 북유럽의 복지국가들과 호주, 캐나다의 사회체
제에 큰 의미를 부여한 것은 이러한 정신적 선구성에서 가능했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오직 미국은 이러한 영국의 보수적인 제도와 체제를 좀더 개척적이며 창의성 있는
방향으로 발전시켜 오늘의 활성화된 아메리카 정신을 창안해내게 된 것이다. 거기에는
미국인들의 프래그머티즘이 뒷받침했음은 우리 모두가 인정하고 있다.
  우리는 영국의 공리주의 사상보다는 그 발전적 의의를 택한 미국의 프래그머티즘의
영향을 더 많이 받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우리 학자들이나 사상가들이 실용주의의 학
설 자체나 그들의 철학사상을 교단에서 수용하고 있는 것은 아니나, 그러한 정신적 풍
조를 직간접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만은 의심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이렇게 본다면 영국과 미국의 정신사적 전통은 경험주의와 공리주의 그리고 그 발전
적인 결과를 볼 수 있는 실용주의의 과정을 밟아 오늘에 이르렀다고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영미계통의 철학과 사상이 갖는 강점은 그들은 현실과 거리가 먼 이
론을 위한 이론으로서의 철학이 아니라, 현실과 윤리성을 동반한 경험과 현실의 철학
을 개척, 계승했다는 점이다.
 @ff
    91 사회학의 방법론 정립: M.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의 정신"
(1905년)
  그때 세계에서는-
  1901년: 제1회 노벨상(뢴트겐 등) 시상
  1903년: 미국, 라이트 형제 비행기 발명
  1904년: 러, 일 전쟁 발발

  영국의 J.S. 밀은 철학자였다.
  철학사를 서술하는 사람은 누구도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프랑스의
  오귀스트 콩트는 철학자이면서 사회학자였다. 철학사에서는 중심인물로 취급하지 않
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여기에 소개하는 막스 베버는 철학자이기 보다는 사회학자로 꼽히는 사람이
다.
  독일에서 대표적인 사회철학자를 찾는다면 K. 마르크스를 거론해야 하겠으나, 마르
크스는 다른 장에서 취급한 바 있다.
  그러나 베버의 위치는 상당히 중요하며 어떤 철학자들보다도 관심과 존경의 대상이
되어 있기 때문에 사회사상가의 한 사람으로 거론해보는 것이다.
  K. 야스퍼스도 베버가 작고했다는 소식에 접하고는 너무 큰 충격을 받았다고   술회
하고 있다. 더 큰 학문적 업적을 기대하고 있었던 까닭이다. 그리고 한 가지 얘기해두
고 싶은 것은, 우리 나라 학계와 사상계는 철학자가 따로 있고, 신학자가 별도로 있는
가 하면, 역사학자도 별개의 학문을 연구하는 사람으로 취급하기 좋아한다. 그것은 마
치 논과 밭을 구분지어놓고 여기는 내밭, 저기는 그 사람의 논으로 보는 것이 보통 이
나, 서구사회에서는 큰 농장을 만들어놓고 이쪽에는 밀과 보리를 심고 저쪽에는 콩과
옥수수를 재배한다는 식과 같이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좁은 의미의 철학자들만을
철학의 영역에서 취급하나, 저들은 영향력이 큰 "철학적인 분야"의 학자들을 더불어
연구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런 위상에서 본다면 M. 베버의 역할은 대단히 큰 것이었다.
  내가 잘 아는 선배친구 한우근 서울대 교수는 철학을 연구하려고 생각했다가 능력의
한계가 나타나지 않을까를 근심했다는 것이다. 그때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읽고 역사로 전공 방향을 바꾸었다는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 책을 읽는 사람은 사회, 역사, 철학의 모든 분야에서 깊은 의의를 깨닫게 될것이
다.
  50년대에 하버드의 탤컷 파슨스라는 사회학자가 이 책을 영어로 번역한 뒤부터 미국
에서는 본격적인 사회학의 시대가 열렸다고 학자들은 얘기하고 있다. 대단히 주목할
만한 저작이었다.
  서울대학 사학과의 중진 교수들이 대학원에 있을 때 제일 먼저 윤독한 책이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었다고 사학과 친구들로부터전해듣기도 했
다.
  베버는 사회학의 방법론을 정립시켜준 학자였고, 그 방법에 따라 저술한 것이 이 책
이었다. 콩트와 같이 철학자이며 주관적인 이론을 앞세운 것도 아니며, 밀과 같이 전
통적인 철학을 계승, 발전시킨 것도 아니다. 치밀하게 과학적인 재료와 분석력을 갖
고, 왜 프로테스탄트 사회가 카톨릭 사회보다 경제적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그것
이 성공적인 자본주의 정신을 탄생시켰는가를 다각도로 고찰해주고 있다.
  한때는 마르크스에 도취되어 베버를 멀리한 느낌이 있으나, 앞으로는 한 번쯤은 읽
어야 할 고전적인 책이라고 누구나 인정하고있다. 사회철학과 사회과학을 나누어 본다
면 베버는 그 둘을 포함한 중간의 사회학자였다고 보아 좋을 것 같다.
  우리는 여기에 그 방법과 내용을 소개할 필요는 느끼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연
구방향과 자세이며, 어떤 주장이나 방향을 강요하거나 제시함이 없이, 독자들의 사고
와 사색을 넓게 수용하면서 안내해주는 책이라는 점이다.
  특히 거기에는 프로테스탄트의 신앙과 근로정신의 문제, 재물과 재산에 대한 기독교
적 가치관, 삶의 다양성 속에서 평가되어야 할 경제관과 이념 등이 타당성 있게 함축
되어 있다.
  만일 동양의 학자들이 어째서 유교 전통사회가 불교 전통사회보다 경제적으로 우위
를 차지해왔으며, 같은 불교라고 해도 대승불교 사회가 소승불교 사회보다 경제적으로
앞서 있는가를 고찰 하려한다면 베버의 이 방법론은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런 연구는 부분적인 경제학보다 더깊은 배후의 과제로 떠오를 수도 있을 것이다.
  필자도 때떄로 경제학과는 문외한이면서 기업인들에게 "자본주의에 대한 새로운 이
해" 같은 강연을 할 때에는 베버로부터 얻은 암시가 중요했음을 느끼곤 한다. 만일 "
열심히 일해서 소득을 올리되, 그것은 나와 가정을 위한 소유가 아니라 이웃과 사회를
위해 기여하는 것이다."는 정신이 확립된다면, 자본주의는 가장 우수하고 앞선 경제체
제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해도 크게 잘못되지는  않을 것이다.
  베버는 그런 점에서 암시와 이상을 보여주는 사상가였다고 보아 좋을 것 같 다.
  여기에 또 하나의  사회사상가로 취급해보는 이유가 뜻있는 것이라고 생각되었던 것
이다.
@ff
    92 '도전과 응전'의 세계사관: A.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1934--1961년)
  그때 세계에서는
  1944년: 프랑스, 드골을 수반으로 임시정부 수립
  1948년: 국제 연합. "세계인권선언" 채택

  20세기 전반기에 세계적으로 가장 존경을 받았고, 또 지성인들의 관심을 모았던 사
람 중의 한 사람이 역사가 아널드 토인비(A. Toynbee, 1889--1975)였다고 보아 좋을
것이다.
  내가 47년에 38선을 넘어 서울에 왔을 때 몇 곳 안되는 서점에 들르면, 전쟁 뒤 그
렇게 어수선할 때인데도 토인비의 책은 나와 있었을 정도였다. 사람들은 토인비를 예
언적인 역사가로까지 존경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의 "역사의 한 연구"는 대단히 방대한 양의 책이다. 우리 나라에도 두세 종류의
번역이 나와 있으며 다른 책들도 열심히 읽히고 있다.

  그러나 지금 여기에서 언급하려고 하는 것은 토인비의 사상보다도 최근 상당히 철학
계에 깊은 관심을 모으고 있는 역사철학에 관한 이야기를 한 번쯤은 취급해 좋을 것
같기 때문이다.
  역사철학이 처음 우리 사상사에 등단한 것은 중세기의 대표적인 사상가, 신학자, 철
학자였던 아우구스티누스의 업적인 "신국론"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아우구
스티누스가 기독교 사상계의 대부였으며,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는 달리 역사종교이기
때문에 기독교 사상가는 투철한 역사의식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아우구스티누스가 그
책임을 감당했던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의 종말을 눈앞에 보고 있었으며, 기독교가 로마제국과 더불
어 어떤 관계에 처해 있는가를 친히 목도했다. 그러면서 기독교가 염원하고 있는 신의
나라와 세상 나라를 대표하는 로마의 역사적 관계를 직접 역사적으로 서술했던 것이
다. 거기에는 역사적 내용 자체가 들어가 있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역사의 의미와 내
용이었던 것이다.
  그뒤에는 역사의 철학적 서술에 관한 대표적인 저서는 나오지 못했다. 근대철학 말
기까지는 거의 없었던 셈이다. 어떤 이들은 비코의 역사관을 얘기하기도 하고, 헤르더
의 역사론을 거론하는 이도 있으나 역사철학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업적은 없었다.
  그러던 것이 헤겔이 베를린 대학에 있을 때 역사철학을 강의했고, 그 강의록이 방대
한 저서로 출간되면서 비로소 역사철학이 철학의 한 영역으로 부각되기 시작한 것이
다. 아우구스티누스 이후 거의 14세기가 지난 후의 일이다.
  칸트도 세계평화와 역사의 문제를 언급했고, 기독교 사상가들이 신학적인 면에서 역
사를 취급한 바는 있으나, 헤겔 이후부터야 본격화하게 된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도
헤겔 철학을 연구한 최재희 교수가 역사철학을 서울대학에서 강의했고, 내가 연세대에
서 역사철학을 강의했을 정도로 시작되었다. 두 사람 다 헤겔에 관심이 깊었기 때문에
그 길을 택했던 것이다.
  그러나 헤길의 역사철학은 역사가로서의 역사철학이 아니라 철학자로서의 역사철학
이기 때문에, 자기가 가지고 있는 철학, 즉 변증법에 역사를 적응시킨 결과가 되었다.
그래서 철학자들은 그의 역사철학을 높이 평가하지만, 역사가들은 헤겔의 역사관에 깊
은 관심을 갖고 있지 않는 실정이다.
  헤겔은 역사의 발전은 자유의 확산이라고 생각했다. 동야의 전제군주 시대에는 소수
의 지배자들이 자유를 누렸고, 그리스, 로마시대에는 귀족사회에까지 자유가 보장되었
으나, 게르만 사회에 들이오면서부터야 자유는 일반국민에게 보급되기 시작했다는 설
명하고 있다. 역시 변증적인 3단계식이라고 보아 좋겠다.
  헤겔 이후부터는 역사철학자들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한때는 유행과 같이
보급되기도 했다. 기독교 사상가들은 역사종교의 성격을 따라 더 활발한 저작활동을
전개시켰다. 미국의 라인홀트 니부어(R. Niebuhr) 같은 신학자는 그 대표적인 인물이
라고 보아 좋을 것이다. 그의 영향력도 대단히 큰 것이었다.
  그러나 토인비는 철학적 사상을 지닌 역사가였다. 그리고 그는 가장 광범위하게 세
계사를 취급한 사람이었다. 세계의 문명권을 20여 계보로 나누어 설명하면서, 문명권
의 흥망을 도전과 응전의 법칙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독교 사상가였고, 헤겔의 역
사철학도 신학적 요소를 배제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토인비의 역사관 속
에도 기독교적인 사관이 깊이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 자신은 경험주의적
사관에 입각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누가 보든지 기독교적인 역사의식이 잠재적으
로 깔려 있다.
  그것은 기독교가 특이하게 역사종교로 탄생했으며, 그 커다란 영향력을 역사문제가
논의되는 사회에서는 배제될 수가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 점이 인도, 동양, 그리
스 철학과 흐름을 달리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ff
    93 현대철학의 두 거봉: B. 러셀과 N. 화이트헤드
  그때 세계에서는
  1960년: 아프리카 각국 독립
  1967년: EC 발족

  내가 1962년 철학교수인 안병욱 선생 등과 함께 런던에 들러 서점에 들어갔을 때였
다. 버트런드 러셀의 책이 이렇게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가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것은 러셀이 영국을 대표하는 철학자이기도 할 뿐더러, 그의 지성게와 사회적 활동
또한 대단했기 때문이었다.
  B.러셀(Bertrabd Russell, 1872--1970)은 인문학의 전통을 이어온 옥스퍼드 댁학이
아닌 이과계통으로 앞서 있는 케임브리지 대학에 있었다. 댁학에서 라이프니츠 철학을
강의하고 있던 교수가 공무로 당분간 강좌시간을 비우게 되어 러셀에게 그 공석 강의
를 맡기게 된 것이 그로 하여금 세계적인 철학자로 우뚝 서게끔 한 계기가 되었다.
  러셀은 독일 및 독일어에 정통한 편인데다가 수학과 과학에 남다른 조예를 갖고 있
었기 때문에 충분히 그 뒤를 감당할 수 있었다.
  러셀은 원래 수학자였다. 그래서 N.화이트헤드와 같이 수리철학을 저술애 그 업적을
인정받았다. 화이트헤드는 후에 하버드의 초청을 받아 미국을 대표하는 철학자가 되었
다.
  러셀과 같이 새로운 철학에 협력했던 L. 비트겐슈타인도 후에는 언어철학의 선구자
가 되어 지금은 러셀보다도 더 널리 알려진 분석철학의 개척자의 한 사람이 되었다.
  러셀은 자기자신이 백 살까지는 살면서 활동할 것이라고 장담했는데, 과연 98세까지
더불어 런던에 나타나 핵반대 데모를 벌이기도 했었다. 개인적인 발언에서 토인비와
러셀만큼 당대에 영향력을 미친 사람은 별로 없었을 것 같다.
  그가 저술한 말년의 에세이집은 세계적으로 많은 독자를 모으기도 했다. 그가 핵을
반대한 것은 앞으로 재연되어야 할 세계적인 평화운동의 과제로 받아들여져 좋으리라
고 생각한다.
  그는 이런 경고를 하고 있다.
  동서 양진영이 수많은 핵폭탄을 만들어 갖고 있으면서 평화를 유지하자는 것은, 마
치 사람이 가득 모여 있는 큰 강당 한가운데 폭탄을 장치해놓고, 누군가가 이 폭탄에
돌이나 담뱃불을 던져 폭발하게 되면 우리 모두는 죽을 테니까 어떻게 하면 좋은가고
걱정을 한다. 그러다가 얻어낸 묘안이 큰 종이에 '누구든지 돌이나 담뱃불을 던지면
우리 모두는 죽을 테니까 돌이나 담뱃불을 던지지 말 것'라고 쓴 다음 UN이라는 도장
을 찍어 그 종이를 붙힌 뒤에 이제는 안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어리석은 일
이라는 것이다. 누군가가 핵에 손을 대고 연쇄적으로 폭발하게 되면 인류는 파멸로 이
어질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다. 그 자신이 과학자이기 때문에 핵은 지구의 종말과 인류
의 멸종을 가져오고도 남을 수 있을 정도의 위험성을 충분히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안
다.
  이런 자극적인 경고가 냉전 도중에 얼마나 필요했었나 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인정
하고도 남는 일이다.
  러셀의 철학 자체는 대단히 까다롭기 때문에 소개하지 못하나, 그는 물질세계에 원
자가 있어 물질계를 밝혀주듯이 지식의 세계에도 원자에 해당하는 지식의 핵심체가 있
어야 하며, 그것이 논리적으로 정리되고 수학적인 법칙을 거쳐 과학성을 띠게 되면 가
장 정확하고도 명백한 개념과 지식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뜻은 비트겐슈타인과 함께 연구할 근거를 주는 것이었으나, 비트겐슈타인은
그 과제를 언어 자체로 환원시켰고, 화이트헤드는 그런 과학성을 벗어나 다시 형이상
학적 철학 본래의 위상을 찾아야 한다는 방향으로 전환해 오늘의 철학계를 만들게 된
것이다. 러셀은 이렇게 독창적인 철학자였기 때문에 철학사를 서술함에 있어서도 독자
적 견해를 지니고 있었다. 모든 사상적 분야에 크게 기여하는 바가 컸었다.

  러셀과 헤어져 하버드로 온 화이트헤드(N. Whitehead, 1861--1947)는 같은 시기에
미국을 대표하는 철학자로 인정받고 있었다. 61년 미국 동부철학회에서는 화이트헤드
에 관한 부문을 따로 설정해 종합적인 발표회를 가졌을 정도였다.
  사람들은 철학사를 통해 가장 어려운 철학을 만들어준 두 철학자가 있는데, 하나는
헤겔이고 다룬 한 사람은 화이트헤드라고 말하고 있다. 그의 "과정과 실재"라는 대표
작이 우리말로도 번역된 것은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자신이 자연과학과 수학
의 대가였고, 늦게 철학으로 전환해 플라톤을 연구한 결과로 얻어진 것이기 때문에 현
대인들로서는 관심을 쏟아야 할 철학자인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러셀이나 화이트헤드 모두가 시대적 흐름을 탄 분석철학에 밀려
산맥이 아닌 홀로 서 있는 거봉 같은 인상을 남겨주고 있다는 점이다.
  독일에도 그런 철학자가 있었다. 사변적인 철학체계를 수립한 니콜라이 하르트만(Ni
colai Hartmann, 1882--1950)이 그런 철학자다. 그의 책도 우리말로 번역되어 있다.
@ff
    94 분석철학의 탄생: G.E.무어와 L. 비트겐슈타인(1873--1958년)
  그때 세계에서는-
  1939년: 제2차 세계대전 발발
  1943년: 모스크바에서 미, 영, 소 3국 외상회의 열림

  지금은 인문 계통의 철학이 영국에서는 옥스퍼드 대학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언어분석을 이끌어온 초창기의 철학자들은 자연과학의 선도역할을 해온 케임브
리지 대학에서 일어났다. 러셀이 그러했는가 하면, G. E. 무어와 비트겐슈타인도 케임
브리지의 교수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다 같이 과학적 지식의 뒷받침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확실성 있는 철학이론을 전개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무어(G.E. Moore, 1873--1958)는 과거부터 전통적으로 받아 들여온 철학을 배제하고
새로운 철학의 필요를 느꼈다.
  새로운 실제론을 택한 셈이나, 그의 중요한 업적은 철학의 새로운 영역을 지식을 형
성하고 있는 언어문제에서 취급하자는 관점이였다. 언어의 잘못과 불필요한 조작 때문
에 우리의 지식이 바른 길을 잃고 지적인 낭비에 빠지는 일이 너무 심했다. 경험의 영
역만큼의 지식이 있고, 그 지식은 언어적 점증을 거쳐 정확하고 새로운 관념을 창출해
낼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그 방법을 제시해주었다는 점보다는 (윤리학 원론(Principia Ethica))에서 실
제로 검증해 보여주었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상당히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도 문교부의 도움을 얻어 처음 번역해 내놓은 철학책이 바로 이 (윤리
학 원론)이었다. 연세대의 정석해 교수가 그 책임을 맡았었다. 그는  이 책에서 '선
이란 무었인가?'를 취급하면서 과거부터 통례적으로 취급해온 관념들을 구분, 분석,
정리하여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어 갔고, 그 방법으로는 언어적 분석을 적응시켰다. 그
래서 그런 방법이 점차 전 철학계로 번지면서 오늘의 영국적인 분석철학을 창출해 내
놓은 것이다 미국의 철학자들이 같은 언어를 분석함에 있어서도 논리적 실증주의를 택
해 언어의 과학화와 논리적 재구성을 강조했으나, 영국의 철학자 들은 일상언어의 정
리와 분석을 통해 명료성을 찿게 되었는데, 이는 무어와 갇은 철학자들의 영향이다.
  영국인들은 분석철학이란 언어의 교통정리를 하는 일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우리
의 관념과 지식이 사회를 이끌어가며 정당한 표현과 지적 위상을 갗추기 위해서는 생
각의 표상인 언어의 정리로 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상식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않으며, 철학을 목적삼기 보다는 철학
을 생활과의 일치에서 삶을 이끌어올리는 동반자로 취급하는 영국적 성격을 연 학문의
길이었다. 사실 무어가 그 책에서 지적해준 몇 가지 원리와 내용은 상당히 많은 학자
들이 그대로 수용해주고 있다. 한때 우리들이 영국에 가 철학강의에 참여하면 대 부분
의 철학자들이 언어분석을 중심으로 학술적 토론을 전개시켜가는 것을 볼 수가 있었
다.

  이에 비하면 비트겐슈타인은 좀더 다른 철학적 방향을 택했다. 그는 오스트리아 출
생으로 영국철학자가 된 사람이다. 러셀과 같은 철학 방향을 택했으나, 러셀이 자연
과학적 이론을 철학적 논리주의로 전개시킨 데 비해 비트겐슈타인은 언어 그 자체를
연구하는 것이 진정한 철학으로 가는 길이라고 믿었다.
  그는 처음에 미국에 있는 철학자들과 같이 논리실증주의를 택했으나, 마침내는 언어
의 분석이 철학의 과제라고 자신의 철학적 길을 정리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본다면 비트겐슈타인은 영국과 미국의 철학적 교량을 놓은 공로자라고 볼 수
도 있을 것이다. 최근에 와서는 영국학자들보다도 미국의 철학자 들이 더 큰 관심을
비트겐슈타인에게 쏟고 있는 까닭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이런 분석철학은 수많은 철학자들을 탄생시켰다. 지금 우리 나라에서 영미철학을 강
의하고 있는 대부분의 철학자들이 이들의 후계자들로부터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상당히 어려운 문제는 남아있다. 서양어의 철학적 정리나 분석은
그들에 의해 가능할 수 있으나, 그 방법을 어떻게 동양적이며 한국적인 언어분석에 적
용시키는가 함이다.
  또 언어분석 그 자체로 철학의 임무를 다 했다고는 볼수없다는 철학 본래의 요구와
기대는 여전히 남겨진 것이 아닌가 하는 문제들이다. 과학성을 가진 언어는 쉽게 정
리, 분석, 검증될수 있으나, 실천철학의 분야는 언어보다도 행위나 삶 자체가 앞서는
경우가 있으며, 종교적인 신비주의나 예술적인 영역의 문제들은 소외시켜도 되는가 함
이 문제로 남는다.
  언어의 실재, 언어와 형이상학의 문제는 새로운 과제로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
도 있다.
@ff
    95 유럽 철학과 미국 철학: R. W. 에머슨(1803--1882)
  그때 세계에서는-
  1959년: 이집트, 수에즈 운하 기공(--1869)
  1882년: 조선, 임오군란 발발

  본래 미국은 유럽에 비하면 자기 나라의 전통적인 철학은 없는 사회다. 만일 미국이
영어가 아닌 프랑스 어를 사용했다든지 독일어를 쓰는 나라가 되었다면, 오늘의 미국
은 프랑스 철학이나 독일 철학의 전통을 계승했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이 영어를 사용
하는 국민을 주축으로 하여 이루어졌기 때문에 오늘의 미국과 같은 성격의 나라로 발
전한 것이다.
  그러므로 미국의 철학과 정신적 전통은 유럽 문화의 지점이나 출장소와 같이 되었으
며, 특히 영국철학의 계보를 이어받는 결과 가 되었다.

  그 계보를 이어받는 실례로 한 가지 이야기를 소개하기로 하자.
  미국의 하버드 대학의 역사는 미국 건국의 역사보다 1세기 반 이나 앞선다. 하버드
대학의 철학관은 '에머슨 홀'로 명명돠어 있다. 그 홀 한 가운데는 대단히 큰 에머슨
동상이 기념으로 건립되어있다.
  그러나 에머슨의 철학이 어떤 것인지, 또 그의 철학을 누가 계승했는지 등에 관해서
는 미국인 자신들도 크게 문제삼지 않는다. 에머슨(R. W. Emerson, 1803--1882)은 미
국 사상과 철학계의 공로자로 되어 있으나, 영국적인 사상의 도입자로 보는 것이 보통
이다. 그는 광범위하게 초창기 미국 정신계에 영향을 끼쳤으나 독창적인 철학사상은
전해준 바가 없기 때문이다.
  당시의 대부분의 각자와 사상가가 그러했듯이 에머슨도 자주 영국에 건너가 영국 사
상을 얻어 갖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당시 영국에는 J. S. 밀이나 H.스펜서 같은
철학자가 활약하고 있었으나, (프랑스 혁명사)의 저자이며 (영웅 및 영웅숭배론)의 저
자인 칼라일(Thomas Calrlyle. 1795--1881)의 사상이 크게 보급돠고 있었다.
  에머슨 도 칼라일과 오랜 친교를 맺으면서 주로 칼라일의 철학설을 받아들였다. 에
머슨이 자연론을 철학적으로 취급했고, 자연과 더불어 그 초월주의를 택한 것은 칼라
일의 뒤를 따랐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 대신 에머슨은 초창기 미국 철학계의 대표적인 계몽주의 역할을 잘 담당해준 셈
이다.
  에머슨이 영국에 가게 되면 칼라일의 소개를 받아 영국의 여러학자들을 만나곤 했
다. 그런데 칼라일과 상반되는 위치에 있던 J. S. 밀은 소개해주지 않은 것 같다. 최
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주장하는 밀에 비해, 한 사람의 영웅을 위해서는 수많은 평민이
뒤따라 좋다는 칼라일은 서로 대립적인 위치에 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때 에머슨이 소개받은 영국 사상가 중위 한 사람이 스펜서(H. Spencer, 1820--190
3)였다. 스펜서는 대단히 앞서 있으면서도 새로운 사회이론을 갖고 있었다. 찰스 다윈
의 진화론을 사회진화의 원리로 받아들여 특색 있는 사회이론을 전개시켰던 것이다.
  에머슨은 스펜서에게 왜 그렇게 훌륭한 주장과 학설을 저술화해 내놓지 않느냐고 권
고해보았다. 스펜서는 그럴 필요는 느끼지 않는다고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세 사람 중에는 에머슨이 가장 생각이 현실적이면서도 앞서 있었기 때문에, 에머슨
이 만일 당신의 책이 출판된다면 영국에서는 물론 미국에서도 큰 호응을 얻게 되며 그
수입도 좋을 것이라는 권고를 했다.
 그 실리적인 권함에 응해서 생긴 것이 스펜서의 (제1원리)로 나타났다.
  오히려 칼라일이나 에머슨의 철학보다도 비중이 큰 저서가 된 셈이다. 영국인들에게
는 진보 및 진화론적 사회학의 정설로 되어 있으며, 사회변화와 발전이론의 좋은 본보
기가 되었다.
  우리들 가운데서도 영국계통의 철학을 연구하는 사회학자들은 관심을 갖는 책이다.
  스펜서는 A. 콩트와 비슷한 성격과 재질을 갗춘 학자였다. 누구의 책을 읽어도 서문
과 3분의 1 정도의 읽기로 끝냈다는 것이다. 그 정도를 읽었으면 나머지는 알아야 할
것이 아니냐는 식이었던 것 같다. "제1원리"도 그런 의미에서 보기 드문 독창성 있는
학설로 남아 있는 셈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 당시의 어떤 영국이나 유럽 학자들도 미국을 방문한일은 없
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지성인과 학자는 문화의 본고장인 유럽을 떠나 개척지 이며 문
화적으로는 후진사회인 미국을 방문할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던 듯하다.
  그러는 동안에 사태가 변했다. 지점이 본점보다 커지며 분가해나간 집이 본가보다도
엄청나게 부자가 되면, 지점의 세력이 커지고 분가한 집이 본가보다 더 큰 영향력을
갖게 되는 과정이 유럽과 미국의 상황이 된것이자.
  그만큼 미국은 성장했고 장점을 속히 살려갈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은 자연과학 분
야는 미국이 유럽을 앞지르고 있으며, 사회과학에서도 유럽의 관심과 주목을 환기 시
키고 있다.
  오직 인문분야에 있어서는 아직도 유럽이 자부심을 갖고 있는 정도다.
  그것은 역사 자체가 미국은 유럽을 통해 르네상스로 올라가게 되어 있으며, 중세기
와 고대철학까지 거슬러올라가지 않으면 안되는 역사의 과정을 무시할수가 없기 때문
이다.
  우리가 세계여행을 계획한다면 적어도 그리스 문화를 본뒤에 로마의 유적들을 살피
며, 중세기의 문물을 본 후에야 이탈리아, 스페인 등의 역사를 알게 되며, 다시 영국,
프랑스, 독일을 거쳐 미국에 도달하게 되는 과정은 어쩔 수 없는 역사의 길인 것이다.
@ff
    96 미국의 대표적인 철학: W. 제임스의 (프래그머티즘)(1907)
  그때 세계에서는-
  1906년: 인도국민회파대회, 보이코트, 스와데시, 스와라지, 민족교육4결 체택
  1907년: 뉴질랜드, 영제국내의 자치령이 됨

  이러한 과정을 밟는 동안에 미국적인 미국의 철학이 탄생되었다. 그것을 우리는 실
용주의 철학이라고 부른다.
 물론 미국은 영국과 영어권의 전통을 계승해왔다. 자연히 경험주의가 깔리게 되었고,
그 위에 공리주의 철학이 뒤따르게 된다. 그러나 미국 속의 영국인들, 이른바 엥글로
아메리칸 들은 미국의 사회적 변화와 발전에 걸맞은 철학을 창조해내었다. 그 실용주
의 정신이 오늘의 미국을 만들었고, 미국의 발전이 실용주를 탄생시켜준 것이다.
  오늘의 미국인들은 실용주의 찰학을 그렇게 떠들지 않는다. 1930년대에 등단해서 약
40년 동안 미국의 정신계를 지배한 것이 실용주의 철학이었으나, 최근에는 또 다른 분
석철학에 열을 올리고 있는 실정이다.

  사실 철학으로서의 프래그머티즘은 우연한 계기에 탄생되었다. 그러나 그 정신이 가
장 미국적이었고 미국의 발전과 변화를 가져왔기 때문에 지금은 문제삼지 않을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찰스 S. 퍼스(Charles Sanders Peirce, 1839--1914)라는 학자 가 있었다. 그는 생물
학 등을 연구한, 주목받지 못하던 학자였다. 그가 말년에 (기회, 사랑 그리고 논리)라
는 저서를 남겼다. 여러가지 논술을 모은 것이다.
  그중 논리 부분에 (어떻게 우리의 관념들을 명백하게 만들수 있는가?"How to make o
ur ideas clear?)" 라는 논문이 들어 있다.
  이 글에서 퍼스는 후에 실용주의적 인식론에 해당하는 연구와 원리를 제시해주었다.
실용성 내지 실용주의적 어원은 옛날로 소급해 올라간다. 그러나 그 의미가 미국적이
되기는 이때가 처음 이었다.
  퍼스는 현실에 입각한 논리를 추구해가다가, 그 개념의 경험성, 현실성, 실용적 가
치에로 발전시켜나간 것이다.
  이러한 퍼스의 제안에 대해 가장 미국적인 철학적 해답을 내린 사람이 대표적 하버
드 인으로 꼽히는 윌리암 제임스(W.James,1842--1910)였다.
  한때 사람들은 우리 세대에 세 위대한 철학자가 있었는데, 그 한 사람은 독일의딜타
이. 다른 사람은 프랑스의 베르그송 그리고 또 한사람은 미국의 W.네임스라고 말했다.
제임스는 그만큼 영향력이 큰, 세계적으로도 인정받은 철학자였다.
  제임스는 본래 화학, 해부학 등을 공부한 의학자로 출발했다. 일찍 그런 분야를 끝
낸 제임스는 후에 심리학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면서도 심리학 연구와 강의도 오래 계
속한 편이다. 47세 때 철학과의 정교수가 되면서 성숙된 실용주의 철학사상을 발표하
기 시작했다.
  그는 관념주의 철학이나 형이상학적 과제들은 무의미한 공론에 지나지 않는다고 베
척했다. 현실에 입각한 경험의 영역에서 철학의 과제를 찾아야 한다.
  주지주의적 합리적 사고는 학문의 지극히 제약된 부문에 그칠뿐, 우리는 삶을 바꿀
수도 없으며, 현실적 실재를 파악하는 데는 일원론이나 유심론, 유물론 같은 사고는
망상이며 불필요한 것이다.
  진정한 철학은 현실의 대지에 발을 붙이지 않은 전통적 형이상학을 배제하고, 우리
는 삶과 생활을 이끄며 개혁할수 있는 지식이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면 그 표준은 어디 있는가? 열매 많은 것이 곧 진리라는 현실적 가치판단을 내
려야 한다. 우리들의 현실은 다양하면서도 유동적인 실재에 속한다. 그것을 합리적인
사고나 논리적 명제로 해명한다는 실재에 속한다. 그것을 합리적인 사고나 논리적 명
제로 해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가 자신의 철학을 전통적인 경험주의에 비해 근
본적 경험론이라고 부른 것은, 인식이 경험주의보다는 개념적 파악의 부분성을 넘어선
구체적이며 어떻게 유용하며 현실과의 타당성이 있는 진리를 유도해내는가에 있었던
것이다.
  진리는 논리적인 이론체계가 아니다.
  무엇이 더 값있는 것이며 우리 삶에 도움을 주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다. 우리가 원
하는 것은 종이조각에 지나지 않는 공수표나 지폐가 아니다. 현금으로 바꿀수 있으며
금이 보장되어 있는 물건을 살 수 있는 태환권이어야 한다.
  그의 대표작의(실용주의)에는 '사고의 낡은 방법들을 위한 새로운 이름'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과거의 모든 철학을 새로운 위상에서 정립하고 싶었던 것이다. 생활에서
현금 구실을 할 수 있는 지식이 진리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밤에도 제임스의 업적은 많았다.
  그의 (종교적 경험의 여러 양상)도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보였고, (진리의 의미)에
있어서도 실용주의적 이론을 명백히 해주고 있다.
  지금은 하버드 대학에 가면 '제임스 기념관'이 건립되어 있다. 그의 업적이 하버드
와 더불어 빛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림설명) 미국의 대표적인 철학 실용주의 창시자인 제임스가 강의했던 하버드대
학. 그의 철학적 업적을 기리기 위해 '제임스 기념관'이 건립되어 있다.

@FF
    97 '인간의 본질은 행위에 있다': 프래그머티즘의 대성자 J.듀이(1858--1952)
  그때 세계에서는-
  1918년: 윌슨, 14개조 강령을 발표(민족자결주의포함): 제1차 세계대전 끝남
  1919년: 한국, 임시정부 발족: 독일노동당(나치)결성

  퍼스가 프레그머티즘의 논리적 과제를 제시한 사람이며, W.제임스가 그 기초를 놓아
준 철학자였다면, 실용주의 철학을 가장 미국적인 사상으로 발전시켜준 철학자는 존
듀이였다고 보아 좋겠다. 그는 90세까지 왕성하게 철학적 업적을 쌓아올렸다고 보아
좋겠고. 그의 학설은 그가 생존해 있는 동안 가장 광범위한 영향을 아메리카에 남겨주
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서구의 철학자 중에서 영향을 가장 크게 받아들인 사람은 듀이였다
고 보아 잘못이 아닐것이다. 그의 새로운 교육이론은 미국을 통해 한국 교육계까지 영
향을 남겨주었다.
  사실 최근까지 우리는 교육의 철학적 이론을 갖고 있지 못했다. 그래서 해방 후에도
일본의 사범학교 출신 인물들이 우리 교육계를 장악하고 있었을 정도였다. 그러다가
해방과 더불어 새 교육이라는 명목밑에 수용하게 된 교육이론이 듀이의 실용주위 교육
사상이었던 것이다. 서울대 총장을 지낸 장이욱, 이화여대 총장을 계속 맡아왔던 김활
란, 교육계의 원로인 오천석 등이 모두 직접 듀이의 강의에 참여했고, 그 영향을 전수
해준 사람들이다.
  물론 듀이의 철학 자체는 늦게 전달되었다고 해도 미국의 실용주의적 전통과 사상적
영향을 크게 우리 사회에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철학의 문제를 그 핵심에서 취급하는 사람들은 듀이의 철학을 도구주의라고 부른다.
많은 과거의 철학자들은 지식은 진리이기를 바라며 진리로서의 지식은 그 지체가 목적
인 듯이 생각했다. 그리고 그 찾아진 진리로서의 학문과 삶의 목표이거나 목적인 듯이
여겼다. 또 진리를 따라 행동하며 진리에 의거해서 삶을 이끌어가야 한다고 쉽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듀이는 그런 전통을 완전히 바꾸어놓은 것이다. 인간의 본질은 행위에 있다.
알기보다도 행하는 것이 숨김없는 삶의 본성이다. 행동에서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이때 우리는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묻는다. 그 물음은 과거의 행동
이 아니고, 미래를 개척해가기 위한 행동이며 앞을 열어가기 위한 행동인 것이다. 그
행동을 돕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묻는 사고하게 되는 것이다.
  그 사고가  정리되고 쌓여 지식이 되고, 그 지식은 행동의 필요성 여하에 의해 비중
이 달라진다.
  이렇게 본다면 지식에서 지식으로 이어지는 길을 택했던 것은 잘못이고, 행동에서
행동으로 이어지는 삶의 과정에서 행동을 돕기 위한 지식이 필요해지는 것이다.
  지식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닌 수단과 도구에 불과한 것이다. 행동을 통해 삶의 폭
을 넓히게 되면 지식은 능동적이고 효율적인 삶에 보탬이 되는 수단과 방편인 것이다.
  아마 이런 철학은 과거에 거의 찾아볼 수 없었던 이론이다. 로고스보다는 파토스를
앞세우며, 지식과 사고는 의지의 소산과 수단이라는 쇼펜하우어나 니체의 철학은 있었
어도, 지식이 행위의 도구라는 학설은 거의 나타난 적이 없었다.
  이렇게 행위를 위한 지식이라면, 그 지식은 의도하고 소망했던 목적에 접근할 있고
도움이 될때 그 가치를 인정받으며, 행위 를 돕지 못하면 행위의 목표와 어긋나는 지
식은 그 유효성과 타당성을 인장받지 못한다. 그가 "우리의 지식은 도구다. 모든 도구
가 그러하듯이 그 가치는 도구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작용의 능력, 즉 사용된 결
과에 있어서 나타나는 유효성이 있는 것이다" 고 말하는 뜻을 충분히 짐작할 수가 있
다.
  이러한 철학은 막연했던 경험주의를 과학적 실험주의로  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안
고 있는 것이며, 개인의 행위가 사회적인 행위 및 삶과 연결되면서 자연히 프래그머티
즘의 교육 및 사회적 성격을 띠게 되는 것이다.
  그의 (인간 본성과 행위) 는 우리 주변에서도 읽히고 있었다. 사회심리학적 면에서
인간의 사고외 행위의 관계를 분석한 내용의 책이다. (탐구의 이론) 도 실험주의적 논
리학의 정식화 를 성공시킨 내용이다. 가치론을 행동의 이론으로 과학적 해석을 시도
한 (평가의 이론)도 주목할 만한 저서들이다.
  이러한 성격의 철학이 유럽 철학의 전통성을 고수하는 철학에 비교한다면 얼마나 미
국적인 행동주의를 강화시켰을 것인가 짐작 할 수가 있다. 누구나 미국을 가리켜 변화
가 빠르면서 발전이 앞서는 사회라고 말하는 것도 이러한 철학의 원리에서 나온 것이
며, 미국의 정치, 경제, 심지어는 과학과 기술은 물론, 기계주의 분명을 앞당기는 데
도 이런 행동주의 원칙이 크게 작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듀이와 그의 후계자들을 끝으로 순수한 미국적 철학은 일단 끝난 것 같은 인
상을 준다. 이제부터의 미국철학은 미국적 것과 동시에 영미적인 것이며, 다시 나아가
세계적인 철학과의 관련이 깊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ff
    98 다양한 철학유파의 용광로: 오늘의 미국철학
  그때 세계에서는 -
  1975년: 전유럽 암보수뇌회의(헬싱키, 35개국)
  1979년: 미국, 중국 국교정상화

  존듀이와 프레그머티즘을 계기로 순수한 미국철학은 끝난 셈이다. 미국 자체가 세계
적인 국가로 성장했고, 지금은 미국철학이나 독일철학이 별도로 존재하지 않는 지구촌
의 시대로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구별을 한다면 영미철학과 대륙철학 으로 나
누어보는 것이 더 현실적일 것 같다. 문화의 유형이나 언어의 분포로 보아서도 그럴수
밖에 없어진 까닭이다. 미국 철학이 세계적인 철학으로 등단하는 데는 중요한 계기가
한 가지 생겼다. 그것은 히틀러의 나치 정권이 수립되면서 정치적 탄압과 사상적 통제
가 극심해지면서 많은 독일 및 독일어 문화권의 학자, 사상가, 철학자들이 자유가 보
장된 새로운 나라 미국으로 대기 망명한 데서 비롯된다. 유대인이나 유대인과 결혼을
한 사람, 유대인 족보와 관련이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히틀러의 정권 밑을 떠났다.
그들의 대부분이 미국으로 망명해왔다. 아인슈타인도 그중의 한 사람이었다.
  유대인이 아니더라도 자유를 갈망하는 사상가와 철학자들은 나치 독일을 떠날 수밖
에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소련의 공산주의 치하에서 망명하는 사람들도 프랑스 또는
미국으로 망명했다. 그 수는 엄청난 것이었다.
  1920년대에 오스트리아 빈에서 빈 학단이라는, 수학, 과학, 철학을 중심삼는 학자들
이 (인식) 이라는 학술지와 더불어 새로운 철학의 분야를 개척하고 있었다.
  그 학회에 속하는 철학교수들의 많은 수도 미국으로 망명했다.
  그래서 미국은 학자와 교수 풍년을 맞이하는 상태가 되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미국의 우수한 대학들은 경제적 보수를 앞세워 유럽 여러 나라에
서 명성 있는 학자들을 대거 초청 해왔다. 신학자 가운데 파울 틸리히도 그런 사람 중
의 하나이며, 시카고 대학의 유럽의 최고 종교사학자였던 엘리아데 같은 학자도 그중
의 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한떼는 미국 대학의 탁월한 교수들은 서툰 영어발음이 인기가 있었고 유행이
었다. 교회의 훌륭한 목사들은 영국식 영어로 설교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즈음에
미국으로 망명한 철학자들만 해도 적지 않은 수였다.
  이탈리아의 피렌체가 사상적 자유가 보장되어 있었기 때문에 르네상스를 가능케 했
으며, 학자들이 모여든 적이 있었다. 미국이 바로 그런 혜택을 받게 된것이다. 프랑스
에는 상당히 많은 소련 철학자들이 망명했다. 베르다예프 같은 사람도 그러했다. 솔제
니친 까지도 미국에 머물렀을 정도였다.
  이와 반대로 정신 및 사상적 자유를 억압한 히틀러 정권과 소련은 그 많은 지성인들
과 학자들을 잃어버리는 불행한 결과를 초래했다.
  50년대와 60년대 전반기까지는 미국식 영어가 아닌 교수들의 인기가 대단했다고 미
국 학생들이 예기 하고 있다. 하버드의 세계적인 사회학자 소로킨도 러시아에서온 학
자였다. 미국에서는 교수들의 봉급이 개인계약으로 되어 있고, 대학들의 예산이 그 당
시에는 풍부했기 때문에 유럽의 저명한 학자들은 미국행은 꺼리지 않았다. 프랑스의
학자들이 제일 이동이 적었던 것 같다.
  이런 상황이 되면서 프래그머티즘은 전통적인 미국 철학자들 의 과제로 남게 되고,
많은 미국대학에서는 과학적 논리주의가 성행하게 되어, 그것이 오늘의 언어분석의 철
학으오 언어분석의 철학으로 흐름을 같이 하게 된 것이다. 과학적 논리주의는 오스트
리아의 빈 학단의 철학자들이 계승, 발전시켰고, 언어분석 철학은 영국 학자들을 통해
미국으로 접목된 것이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들까지도 철학은 크게 두 가지 흐름을 타고있는 것으로 보고 있
다. 대륙의 현상학파와 영미계통의 분석철학이다. 아주 가까운 오늘에 이르러서는 이
두가지 흐름이 서로 연결되어 지식학 같은 영역에서 호흡을 같이하고 있으나, 미국에
서 철학을 전공하고 온 교수들은 역시 분석철학 계통을 이어받고 있으며, 독일이나 프
랑스에서 공부한 학자들은 현상학과의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앞으로는 또 어떤 철학으로 발전할지는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한국철학, 동양철학
과 더불어 서양철학을 연구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도 당분간은 서양철학을 배우며 들
여오는 과정을 밟아야 할것같다.
  우리 철학자들 가운데는 동서양 또는 한국철학과 서양철학을 접목해서 새로운 철학
을 시도해보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바람직하지 못한 위험성도 따
르고 있다. 한국철학과 동양 및 중국철학은 문제적 연결성이 있어 그 개척이 가능할지
모르나, 서양철학은 전통과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ff
    99 앞으로의 철학은 어떻게 될 것인가?: 현대의 철학적 과제들
  그때 세계에서는-
  1982년: 남북문제 타결을 위한 제1회 뉴델리 회의
  1990년: 독일통일

  옛날 그리스에는 두 갈래의 철학사상이 있었다.
그 하나는 자연세계에서 존재의 원리를 찾으려는 자연적 실제론에 속하는 것이었다.
그 마지막 사람이 기계론적 원자론을 제창한 데모크리토스였다.
  다른 하나는 관념론적인 이념을 추구해가는 정신적 이론을 탐구하는 방향이었다. 그
대표적인 철학자는 플라톤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훌륭한 철학자가 나타나 이 둘을 종합하여 새로
운 철학을 만들어주었다. 그래서 세계는 헬레니즘 정신을 이어받아 하나의 정신적 문
화권을 만들수 있었다. 2천3백년 전쯤의일이다.
  긴 셰월이 흐른 뒤 세계는 또 한번 분열과 대립의 두 철학사조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리스 전통을 이어받은 고대사상과 새로 탄생된 기독교의 정신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성을 따르며 철학적인 전통을 이어가려는 스토아 철학자들 같은 이가 그 전자를
택해왔다.
  이에 비하면 새로운 신앙과 철학을 가지고 등단한 기독교는 신과 신앙의 길을 개척
해나갔다. 오리게네스같은 성직자로 있으면서고 이성적 신앙을 강조해 교회로부터 배
척을 받는 처지에 몰리기도 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아우구스티우스 같은 위대한 철학자가 나타나 이 두 흐름을 종
합해서 새로운 총합과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철학체제를 만들어주었다. 역사가들은
온갖 고대적인 것을 묶어 새로운 중세기를 정신적으로 건설해주었다고 평하고 있다. 1
천5백년쯤 지난 때였다.
  이렇게 이어져온 철학은 르네상스를 계기로 다시 분열되어 근대사회로 무대를 바꾸
게 된다. 여러 가지 복합적인 문제들이 제기되다가 마침내는 대륙적인 합리주의와 영
국적인 경험주의 철학으로 이분되는 결과가 되었다.
  데카르트에서 라이프니츠로 이어지는 대륙철학과, 홉스에서 D.흄으로 계승되는 영국
철학으로 압축되어떤 것이다.
  그러나 칸트에서 헤겔에 이어지는 독일철학자들이 나타나 이 대립되었던 철학을 하
나의 방향으로 종합, 발전시킨 결과를 가져왔다. 다행스런운 일이었다. 약2백년쯤의
일이다.

  독일 관념론,특히 헤겔 이후에는 다시 철학게의 다양한 분열이 일어났다.
  우리가 소개한 헤겔 좌, 우파가 생겼고, 칸트에게로 되돌어가야 한다는 신 칸트학파
도 탄생되었다. 거기에 가치철학 그와 더불어 일어난 삶의 철학이 탄생되었고,현상학
과 실존철학, 그와 더불어 일어난 삶의 철학이 탄생되었고, 현상학과 실존철학의 단계
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대륙계통의 철학이 그런 과정을 밟아 오늘에 이른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영미계통에서는 공리주의, 실증주의를 거쳐 논리실증주의와 분석
철학으로 전개되어 오늘에 이른 셈이다.
  이 여러 갈래의 철학들이 마침내 두 가지 개통으로 정착되었다면,또 한번 둘을 통합
한 새로운 철학의 탄생이 가능해질 수 있을까 함이 오늘 우리들의 문제로 남는다.또
한번의 세계적인 철학이 기대되는 시기인 것 같은 생각이 든다.
  M. 하이데거는 자신이 그 책임을 감당했을 것으로 생각했을 것으로 생각했을지 모른
다. 그러나 역사적인 결과는 그렇게 나타나지 않는다. N.화이트헤드도 그런 기대를 했
을지 모른다. 그러나 현대는 그 뜻을 수용하지 않고 있다.
  앞으로는 어떤 개인이 종합적인 세계철학을 개척, 체계화해주는 일은 일어나기 어려
울것 같다. 헤겔 때에만 해도 그것은 가능 했었다. 학문의 성격도 통합되어 있었던 시
기였고, 개인의 능력이 철학계 전체를 감당할 수 있는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남은 문제는 무었인가? 어떻게 대륙적인 것과 영미적인 철학의 공통된 과
제와 통일된 문제를 바견, 처리 할 수 있는가 함에 초점이 모여지는 것 같다.
  인식론의 방향은 달라도 지식학의공통점은 있다든지 근본문제에는 공통성이 있을 것
이 아니냐는 식의 사고인 것이다. 최근에는 오히려 그런 방향을 기대하면서 모색해보
는 단계가 아닌가 싶은 생각도 하게 된다.
  그러나 여기에도 여전히 어려운 문제가 남아있다. 현대는 옛날과 같이 철학이 학문
중의 학문이라든지, 모든 학문의 방향을 제시해주는 지도력을 갖춘 학문이라든지, 모
든 학문의 방향을 제시해주는 지도력을 갖춘 학문이라고는 사회가 인정해주지 않는다.
과학의 분열만큼이나 철학의분열도 불가피한 시대적 상황이 된 것이다.
  심지어는 철학은 우리 사회에 어떤 도움을 주고 있는가, 아니면 덜 중요한 구시대의
유산을 전해주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을 받고 있는 현대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철학도들의 고민이 아닐수 없다.
@ff
    100 철학은 권하고 싶은 학문인가?: 철학의 위상
  그때 세계에서는-
  1991년: 러시아, 독립국가동동체 결성
  1993년: EC 12개국 통합조약 발표

  지금까지의 글을 읽은 이들은 철학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은 가질수 있는지 몰라도,
스스로 철학을 전공하겠다든지 앞으로도 철학을 계속하거나 새로이 공부를 시작하겠다
는 생각을 할수 있을지 궁금하다.
  옛날 같으면 철학은 학문중의 학문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다른 어떤 학문보다도 철학
적이라고 생각했었다.
  최근까지도 서구의 전통이 있는 대학에서는 교양과목에서 철학과 역사는 필수적인
것으로 인정되어왔다. 그들은 고전을 소중히 여겼고, 고전의 대부분은 철학과 역사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전통적인 철학보다는 논리적 사고를 필요성이 더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는가 하면, 미국 같은 나라에서는 사회학이나 사회에 대한 철학적 이해가 순수한
철학보다도 더 각광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 나라에서도 그렇다.
  차라리 세계적인 학자가 되려면 서양 학문보다는 한국학을 해야 된다. 그 문야에서
는 한국에서 제일이면 세계저인 우위를 쉽게 차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학이 아니리면 동양철학을 택하는 편이 더 보람이 생긴다. 우리는 정신사와 한
국철학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하면 서양철학은 항상 남의 것을 배우면서 뒤따라야 하며, 그 무대에서 업적
을 인정받으려면 한국무대가 아닌 서구무대에서 경쟁적으로 학문에 성공해야 한다. 그
렇게 되면 이미 그것은 우리의 한국철학이 아니고 한국인이 세계적인 화가가 되는 것
은 쉬우나, 한국인이 세계적인 철학자가 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되었을 때에는
이미 한국철학이 아닌 서양철학의 한 부분을 책임맡게 되는 것이다.
  일본 철학계는 우리보다 훨씬 앞선 역사를 가지고 있으나 주목 할 만한 동양, 인도
철학자들은 배출하고 있어도. 서양에서 인정 하는 세계적인 철학자는 나오지 못하고
있다.
  실제로 이것은 한국 철학자들의 고민이기도 하다.
  아직도 한국 철학이나 중국 및 동양철학을 전공하는 사람들보다는 서양철학을 공부
하는 학생 및 학자들이 더 많다. 그러나 한결같은 고민에 빠진다. 남의 것을 열심히
연구하는 동안에 세월은 다 지나가, 돌이켜보면 남는 것은 서양철학을 소개하는 데 그
치고 만다.
  일본 철학계에는 헤겔 연구가들이 많이 있었고 지금도 있다. 심지어는 번역 문구 하
나를 가지고 토론이 벌어지곤 한다.
  그러나 그 대부분은 헤겔이라는 독속에 빠져 헤어나오지를 못한다. 결국은 헤겔을
소개하는 것으로 그치는 셈이다.
  우수한 철학들은 현상학이나 해석학의 벙법론을 터득하며 분석철학에서 그 업적을
쌓아올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이 한국적 학문과 우리 현실에 어떤 적응력을 갖고 임
하며 학문적 결실을 맺게 해 주는가 함에는 의문이 생긴다. 그래서 학문적 자부심과
자긍심을 잃는 경우도 있다.
  가장 앞선 교수들은 서양철학의 방법론을 갖고 한국철학을 재조명하며 한국철학을
새로운 위상에서 밝혀보려는 노력에까지 나간다. 서울대학의 박종홍 교수같은 이가 그
길을 택했다. 그러나 너무 부담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에 그 실질적인 결과에는 이르지
못한 셈이다.
  또 서양철학에서 보낸 세월이 너무 길었던 것도 사실이다.
  또 어떤 이들은 한국적 현실과 우리의 문제를 서양철학적인 방법으로 해명해서 좀더
새로운 해석과 결론이 주어질까를 탐색해 보기도 한다. 윤리, 종교, 문화 같은 우리의
문제를 우리의 전통과 방법에서 해명해보는 길이 아니라, 서구적인 방법론에 의해 재
조명해보려는 의도이다. 주로 그런 사람들은 우리의 문제와 서구적인 논리를 접목시키
는 작업을 하게된다.
  그래서 대부분의 서양철학 전공자들은 애도 썼고 고생도 했으나, 남기는 바가 너무
적었다는 후회를 남긴다. 그래서 후배들에게는 한국철학이나 동양철학을 권고해보기도
한다.
  그러나 거기에도 문제가 있다. 처음부터 한국철학이나 동양철학에 들어가게 되면 아
는 것은 풍부해지고 재료는 많이 찾으나, 방법론의 빈곤을 느끼기 때문에 많이 읽고
알았다지만 학문다운 학문적 체계가 빈곤한 지식의 나열이나 시대적이 분류에 그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도 서양철학 공부는 필요한가?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 중요하면서 필요한 것이 아니겠는가. 아직 우리 철학계는
계몽기간이기 때문에 나타나지 않은 숨은 노력, 즉 씨를 뿌려 가꾸는 단계는 필수적이
며, 우리는 그 임무를 기꺼이 담당해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ff
    부록:서양문화사 연표
  연도  서양문화사
  BC 200만경  전기 구석기 문화 시작
  BC 7000경  신석기문화 시작 농경, 목축의 시작
  BC 4000경  청동기문화 시작
  BC 3300경  수메를 도시 문명의 성립 그림문자 출현
  BC 3100경  이집트에 통일국가 출현
  BC 1792  바빌로니아 왕조(함무라비 법전)
  BC 1100  그리스에 폴리스 형성
  BC 955경  솔로몬, 이스라엘왕이 됨
  BC 776  그리스, 제1차 올림피아 제전
  BC 700  헤시오도스,(신통기)(일과 나날)
  BC 624경  탈레스 태어남
  BC 572  피타고라스 태어남
  BC 544  파르메이데스 태어남
  BC 540경  헤라클레이도스 태어남
  BC 483  엠페도클레스 태어남
  BC 482  프로타고라스 태어남
  BC 469  소크라테스 태어남
  BC 460  데모크리토스 태어남, 역사가 투키디데스 태어남
  BC 451  로마 최초의 성문법 (12동판법)
  BC 450  아낙사고라스,(자연에 대하여)
  BC 444  엠페도 클레스, (자연에 대하여)
  BC 438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 거의 완성
  BC 428  플라톤 태어남
  BC 425  헤로도토스, (역사)
  BC 420  루키토스, (이성에 대하여)
  BC 400  플라톤,(소크라테스의 변명)
  BC 386  플라톤 아카데메니아 개원
  BC 384  아리스토텔레스 태어남
  BC 367  플라톤, (국가) (파르메니데스) (소피스트)
  BC 350  헬레니즘시대 개막 알랙산더 도방원정
  4세기  스토아 철학 시작
  BC 287  로마, 호르텐시우스법 제정
  BC 271  에피크로스, (자연론) (신에 대하여)
  BC 250  (구약성서) 그리스어로 번역
  BC 60  폼페이우스, 케사르, 크랏수스의 제1회 삼두정치 시작
  BC 46  로마, 율리시스력(태양력)사용
  BC 45  키케로, (최고의 선악에 대하여) (의무론)
  BC 4  예수 그리스도 태어남(일설 BC 8)
  AD 30  수그리스도 처형됨
  AD 50  (신약성서) 형성. 세제파, (생명의 짧음에 대하여) (혼의 평화에 대하여)
  AD 100  로마제국의 영토확장. 플로타크, (영웅전)
  AD 110  이단적 기독교사상인 그조시스주의 성행
  AD 116  타키투스, (연대기)간행
  AD 140  니코마토스, (신학적 산술)
  AD 150  프롤레마이오스, (알마게스트)
  AD 174  아우렐리우스 황제, (자성록)
  AD 200  디오게네스 (저명한 철학자들의 생활과 견해)
  AD 208  클레멘스, (교육자) (지지자를 위한 단편집)
  AD 250  엠푸리쿠스, (수학에 관하여)
  AD 312  로마,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개선문 건립
  AD 325  로마, 니케아 종교회의 개최
  AD 330  비잔틴제국 성립, 성피에트로 사원 건립
  AD 350  로마, 교회음악의 학교 스콜라 칸트 창설
  AD 354  아우구스티누스 태어남
  AD 375  게르만족, 대이동 시작
  AD 387  아우구스티누스, (독백론) (영혼불멸론)
  AD 392  로마,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승격
  AD 400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AD 416  카르타고 종교회의 개최
  AD 421  아우구스티누스 (삼위일체론) 아우구스티누스 (신국론)
  AD 440  네메시우스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AD 476  서로마제국 멸망
  AD 500  그리스, 로마 모자이크 전성
  AD 525  보에티누스, (철학의 위안)
  AD 600  앵글로색슨, 7왕국
  AD 736  동로마 황제, 전 제국의 우상을 파괴케 함
  AD 787  노르만족5,23데인족의 활동개시
  AD 797  엘퀸, (수사학과 덕론) (정신론)
  AD 802  아루키누스, (신앙 삼위 일체론) 완성
  AD 830  어랍문화의 극성기로 그리스 고전 번역
  AD 870  유럽에 봉건적 토지소유제 (장원재) 전개
  AD 877  이오어네스 스코투스, (신의 예정에 대하여)
  AD 882  러시아, 키예프공국 건립
  AD 890  시아파의 칼마트의 전성시대
  AD 938  프랑스, 농노제 성립
  AD 1033  안젤무스태어남
  AD 1056  이슬람의 지리학자에 의하여 정밀한 세계지도 완성
  AD 1059  셀주크 투르크의 전성
  AD 1072  안젤무스, (독백론)
  AD 1095  신성로마제국, 클레르몽종교회의에서 십자군원정을 결정
  AD 1096  제1차 십자군원정 시작
  AD 1163  프랑스, 파리 노틀담성당 건축 시작
  AD 1183  성 프란체스코 테어남
  AD 1125  토마스 아퀴나스, (존재와 본질)
  AD 1252  유럽에서 처음으로 금화 유통
  AD 1254  독일, 라인도시동맹 성립
  AD 1265  토마스 아퀴나스, (철학대전) (아리스토텔레스 주석)
  AD 1266  로저 베이컨, (대저작)
  AD 1267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진"
  AD 1271  이탈리아, 마르코폴로, 동방 여행길에 오름. 로저베이컨, "철학연구강요"
  AD 1272  십자군전쟁 끝남
  AD 1286  피렌체공화국의 농노해방령 내림
  AD 1289 스코틀렌드,영국 지배하에 들어감
  AD 1292  단테, "신곡"
  AD 1299  오스만왕조, 터키 건국. 마르코폴로, "동방견문록"
  AD 1300  유럽에서 외과의학 발전. 둔스 스코트, "제1원리론"
  AD 1309  스위스 동맹 결성
  AD 1335  이탈리아, 인문주의 강성
  AD 1348  유럽에서 외과의학 발전. 둔스 스코트, "제1원리론"
  AD 1440  구텐베르크, 활자 개량. 쿠자누스 "무지에 관한 지혜"
  AD 1441  포루투칼. 흑인노예 무역시작
  AD 1486  미랜도라, "철학적 추론"
  AD 1492  콜롬버스, 아메리카 발견
  AD 1497  사보나롤라, "진리에 대한 대화"
  AD 1500  로마교황청, 면죄부 발매
  AD 1503  알프스 이북에 르네상스 발흥
  AD 1509  에라스무스, "우신예찬" 편찬
  AD 1516  토머스 모어. "유토피아"
  AD 1517  루터, 면죄부 판매 공격,95개조 항의문 발표.
  AD 1519  포루투칼 마넬란 일행, 세계일주 항해
  AD 1524  에라스무스, "자유의지론"
  AD 1530  코페르니쿠스. 지동설 제창. 아그리파, "학문의 부정학과 공허에 대한 선
언"
  AD 1532  마키아벨리, "군주론"
  AD 1561  F.베이컨 태어남
  AD 1562  프랑스, 위그노 전쟁 발발
  AD 1579  무굴제국, 영국인이 최초로 인도에 옴
  AD 1580  몽테뉴, "수상록"
  AD 1596  R.데카르트 태어남
  AD 1598  프랑스, 낭트칙령 발표 (신앙의 자유 확립)
  AD 1600  영국, 동인도회사 창립
  AD 1601  포루투칼, 최초로 오스트레일리아 발견
  AD 1605  네델란드, 엔트워프에서 유럽 최초 신문 발행
  AD 1620  영국의 청교도들 메이플라워호로 아메리카에 상륙. F.베이칸, "신기관" 발

  AD 1625  F.베이컨, "논문집" "신논리학" 그로티우스, "전쟁과 평화의 법"
  AD 1629  양력 사용. 갈릴레이, "두 우주구조에 관한 대화"
  AD 1632  스피노자 태어남. 로크 태어남
  AD 1637  데카르트, "방법서설"
  AD 1641  휘스, "시민론"
  AD 1642  영국, 청교도 혁명
  AD 1644  데카르트, "철학원리"
  AD 1650  데카르트, "방법론 서설"
  AD 1651  홉스, "리바이어던"
  AD 1656  파스칼, "프로벵샬 서한"
  AD 1671  헨리모어, "형이상학제요"
  AD 1675  영국, 그리니치 천문대를 개설
  AD 1677  스피노자, "유고집" "윤리학" "정치론"
  AD 1684  라이프니츠, "인식, 진리 밑 관념에 대한 성찰"
  AD 1689  영국, 프랑스간의 식민지 전쟁 시작
  AD 1690  로크, "시민정부론" "인간오성론"
  AD 1695  프랑스, 출판의 자유 허용. 로크, "기독교의 합리성"
  AD 1698  라이프니츠, "자연자체에 대하여"
  AD 1710  버클리, "지식원리론"
  AD 1714  라이프니츠, "단자론"
  AD 1734  볼테르, "철학사신"
  AD 1736  프랑스, 계몽사상가들의 활약
  AD 1739  흄, "인성론"
  AD 1740  유럽, 오스트리나 계승전쟁
  AD 1748  몽테스키외, "법의 정신"
  AD 1749  미국, 프랭클린, 피뢰침 발명
  AD 1750  루소, "과학과 예술론"
  AD 1751  흄, "도덕원리 연구"
  AD 1755  러시아, 모스크바 대학 창립. 칸트, "일반 자연사와 천체의 이론" 루소, "
인간불평등 기원"
  AD 1758  헬베티우스, "정신론"
  AD 1759  볼테르, "캉디드"
  AD 1762  러시아 황후 캐서린, 피터3세를 폐함. 루소, "사회계약론" "애벌" "민약
론"
  AD 1763  칸트, "신의 존재의 논증에 대한 유일 가능한 논거"
  AD 1767  영국, 타운세트 조례(아메리카 식민지에서 수입되는 유리, 종이, 페인트,
차 등에 과세) 제정. 멘델슨, "파이돈, 혹은 양혼불멸성에 대하여"
  AD 1776  미국, 독립선언. 아담스미스 "국부론"
  AD 1781  칸트, "순수이성비판"
  AD 1786  칸트, "형이상학 시설"
  AD 1788  프랑스 대혁명 발발. 벤담,"도덕과 입법의 원리에 대한 서론"
  AD 1790  칸트, "판단력 비판"
  AD 1795  칸트, "영원한 평화"
  AD 1796  제너, 종두법을 발견. 피히테, "지식학의 원리에 의한 자연법의 기초"
  AD 1798  칸트, "도덕론의 형이상학적 기초"
  AD 1799  이탈리아 볼타, 전지를 발병. 헤더, "오성과 경험, 이성과 언어, 순수이성
비판의 재비판" 셸링, "자연 철학체계 초안"
  AD 1801  독일 리터, 자오선 발견. 헤겔, "피히테와 셀링의 체계의 차이"
  AD 1804  무굴재국, 영국의 보호국이 됨. 셀링, "철학과 종교"
  AD 1805  프랑스 나폴레옹, 이탈리아 국왕 겸함, 프라이스, "지식 신앙 및 예감"
  AD 1806  신성로마제국 소멸. 프랑스 나폴레옹, 대륙봉쇄령 공포. 헐버트, "일반교
육학" "형이상학 강요"
  AD 1807  독일, 농노해방령을 공포하고 슈타인이 행정을 개혁. 헤겔, "정신현상학"
피히테, "독일국민에게 고함"
  AD 1808  영국, 런던에서 최초의 증기기관차 달림
  AD 1809  라틴아메리카, 각국에서 독립운동 활발. 라마르크,"동물철학" 셀링, "인간
적 자유의 본질에 대한 철학적 연구"
  AD 1811  라틴아메리카, 파라과이 독립.프라이즈, "논리학 체계" 자코비, "신적 사
물과 계시에 대하여"
  AD 1813  프랑스, 나폴레옹, 라이프치히의 싸움에서 연합군에 패함. 쇼펜하우어, "
충족이유의 4가지 근거에 대하여"
  AD 1814  프랑스, 제1차 파리평화조약 체결. 유럽, 빈회의 개최. 라플라스, "개연성
의 철학"
  AD 1816  미국, 처음으로 보호관세실시. 쇼펜하우어,"시각과 색체에 대해서"
  AD 1819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AD 1820  싱가포르, 자유항을 선언. 베네케, "경험정신론"
  AD 1823  미국 먼로 대통령, 먼로주의 선언
  AD 1824  콩트, "사회재조직을 위해 필요한 과학자 사업의 계획"
  AD 1825  세계 최초의 철도 개통
  AD 1828  슐레겔, "생의 철학강의"
  AD 1829  밀, "인간정신현상의 분석"
  AD 1830  차티스트 운동. 콩트, "실증철학강의"
  AD 1834  벤담, "의므론, 또는 도덕학"
  AD 1837  미국, 최초의 공황 발생. 헤겔, "역사철학강의"
  AD 1840  스트라우스, "기독교적 신앙론"
  AD 1844  미국, 모스에 의한 전신, 워싱턴과 볼티모어간에 개통, 마르크스, "경제
학, 철학수고"
  AD 1845  영국 톰슨, 절대영도 (-273도) 측정. 마르크스, 엥겔스, "공산당선언"
  AD 1849  볼차노, "철학이란 무엇안가" 키에르케르고, "죽음에 이르는 병"
  AD 1852  피셔, "논리학과 형이상학"
  AD 1856  유럽, 파리강화회의 개최. 짐머만, "일반미학"
  AD 1857  뷔히너, "자연과 정신" 지오베르티, "제일철학에 대하여"
  AD 1859  밀, "자유론" 다윈, "종의 기원"
  AD 1861  독일 라이스. 전화기를 발명. 밀, "공리주의" 메인, "고대법"
  AD 1863  미국 링컨, 전국에 노예해방 선언
  AD 1866  노벨, 다이너마이트 발명
  AD 1867  파리만국박람회 개최. 마르크스, "자본론" 1권
  AD 1869  미국 최초의 대륙횡단철도 완성. 수에즈 운하 정식 개통, 하트만, "무의식
자의 철학"
  AD 1870  딜타이, "슐라이아마허의 생애"
  AD 1871  비스마르크, 독일통일 달성. 라셀리어, "3단논법의 본성에 대하여"
  AD 1872  엥겔스. "변증법과 자연". 니체, "본성에 대하여" 
  AD 1876  영의회, 빅토리아여왕의 인도 황제 겸임 결의. 니체, "인간적인 너무나 인
간적인"
  AD 1880  베른하임, "역사연구와 역사철학"
  AD 1881  영국, 런던에 화력발전소 건설
  AD 1883  니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딜타이, "정신과학입문"
  AD 1884  그리니치 자오선을 만국통용으로 함. 프레게, "산술 의 기초"
  AD 1885  벤츠, 가솔린 자도차 발명
  AD 1888  호주, 백호주의 시작
  AD 1890  베를린에서 국제노동자회의
  AD 1893  퀴리부부, 라듐 발견. 브래드리, "현상과 실재" 프레게, "산술의 원칙"
  AD 1895  륀트겐,X선 발견. 듈케임."사회학적 방법의 원칙"
  AD 1896  제1회 근대올림픽, 아테네 에서 개최, 플레히노프. "유물론사"
  AD 1898  베르그송, "물질과 기억"
  AD 1899  베르그송, "의식의 직접여건"
  AD 1900  프로이드, "꿈의 해석"
  AD 1901  제1회 노벨상 시상 (륀트겐 등). 바우흐, "행복과 인격"
  AD 1902  시베리아 철도 개통
  AD 1903  미국 라이트 형제, 비행기 발명. 베르그송, "형이상학 입문"
  AD 1905  듀이, "논리설 연구"
  AD 1907  베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AD 1909  레닌, "유물룬과 경험비판주의" 프로이트, "정신분석에 대하여"
  AD 1910  노르웨이 아문젠, 처음으로 남극 도착
  AD 1913  볼세비키의 신문 "프라우다" 창간. 후설, "순수현상학과 현상학적 철학 논
고"
  AD 1914  제1차 세계대전 시작. 러셀, "철학의 과학적 방법"
  AD 1915  발포어, "윤리학에 있어서의 형식주의와 실질적 가치 윤리학"
  AD 1917  러시아 2월 혁명
  AD 1921  하트만, "인식의 형이상학 강요"
  AD 1926  마이어, "실재의 철학" 듀란트,"철학 이야기"
  AD 1927  부루너, "메개자" 하이데기, "존재와 시간"
  AD 1929  뉴욕,주가 대폭락, 세계공항 시작됨. 후설, "형식논리학과 선험논리학" 만
하임,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
  AD 1931  듀이, "철학과  문명" 퍼어스, "철학논문집"
  AD 1932  베르그송, "철학과 종교의 두 원천" 야스퍼스, "철학"
  AD 1933  히틀러의 독재권 확립. 불트만, "신앙과이성"
  AD 1934  졸리오 퀴리 부처, 인공방사는 발견. 카르납, "언어의 논리적 통사런" 켈
잰, "순수법학"
  AD 1935  미국, 와그너 노동법 제정. 야스퍼스, "이성과 실존" 포퍼, "연구의 논리"
  AD 1936  후설, "유럽 학문의 위기와 선험적 현상학"
  AD 1939  제2차 세계대전 발발
  AD 1940  마르쿠제, "유토피아의 종언" 아이어, "경험적 지식의 기초"
  AD 1941  루즈벨트, 처칠, 대서양헌장발표. 메를리퐁티, "행동의구조" 마르쿠제. "
이성과 혁명"
  AD 1942  슈페터,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AD 1943  모스크바 3국 (미, 영, 소) 외상회의. 사르트르,"존재와 무"
  AD 1944  연합군, 노르망디 상륙작전. 하이에크, "예종에의길" 슈뢰딩거, "생명이란
무엇인가"
  AD 1945  미국, 네바다에서 최초의 원자핵 폭발 실험. 포스탐회담. 러셀, "서양철학
사" 메를리 퐃티, "지각현상학" 포퍼, "열린사회와 그 적들"
  AD 1947  파리평화조약, 마샬 플랜발표. 하이데거,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
  AD 1948  제1차 중동전쟁 발발. 국제 연합, "세계인권선언" 체택
  AD 1949  북대서양 조인,NATO 창설. 라일, "정신의 개념"
  AD 1950  미국, 맥카시선풍. 후설 "데카르트적 명상"
  AD 1952  미국, 수폭 실험
  AD 1953  바트겐슈타인, "철학적 탐구" 무어, "철학의 주요문제점들"
  AD 1955  바르샤바 조약기구 성립. 제1차 아시아, 아프리카 회의 개최. 마르쿠제, "
에로스와 문명" 하이젠베르크, "현대물리학의 자연상" 샤르뎅, "인간현상" 비트겐슈타
인, "수학의 기초에 관한 논평"
  AD 1957  소련, 인공위성 제1호 발사. 엘리아데, "성과 속"
  AD 1958  미국, 인공위성 제1호 발사. 레비스트로스, "구조적 인간학"
  AD 1959  소련의 우주로케트, 달 도착. 블로호, "희망의 원리"
  AD 1960  아프리카의 각국 독립. 사르트르, "변증법적 이성비판"
  AD 1962  미국, 통신위성 델스타 발사. 오스틴, "사물과 언어의 관계" 쿤, "과학혁
명의 구조"
  AD 1963  미국, 인종차별반대 대행진. 엘리아데, "신화의 양상" 하버마스, "자본론
독해"
  AD 1965  미국, 흑인에게 투표권 부여. 알튀세르, "자본론 독해"
  AD 1966  카르납. "물리학의 철학적 기초" 톰슨, "영국노동계급의 형성"
  AD 1967  EC발족. 야스퍼스, "철학의 세 가지 정초"
  AD 1968  핵 확산 방지조약. 하버마스, "인식과 관심" 촘 스키, "언어와 정신"
  AD  1969 미국의 우주선. 달 표면에 도착. 미트겐슈타인, "철학적 문법" 투코, "지
식의 고고학"
  AD 1970  카우폴트. "논설의 조리"
  AD 1971  롤스, "정의론" 레비스트 로스, "신화학서설"
  AD 1972  카르납, "귀납논리와 개연성"
  AD 1975  헬싱키 선언. 리쾨르, "살아 있는 은유" 그람시, "마르크시즘과 문학"
  AD 1977  샤프. "사회적 인간으로서의소외"
  AD 1979  브로텔,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AD 1980  샤프, "스테레오 타입과 인간 행위"
  AD 1981  하비마스, "의사소통 행위의 이론"
  AD 1984  영국, 중국 양국간 홍콩 반환 협정 조인
  AD 1986  고르바초프, 페레스트로이카 추진
  AD 1990  독일 통일
  AD 1991  제4차 세계 에이즈의 날

출처 : 어둠 속에 갇힌 불꽃
글쓴이 : 정중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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