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서안(3) — “유민” 미술관 이야기.
3.1절에 쓰는 유민미술관 이야기.
유민미술관을 알게 된 것은 기억도 나지 않는 한참 전 어느 날 아침 텔레비젼을 켰다가 보게 된 한 여행 프로그램을 통해서였다. 성산일출봉이 보이는 뷰파인더와 물 흐르는 벽, 화산 석으로 쌓인 돌담 등 미술관의 외관을 소개하면서 강조하던 자연친화적 건축,이라는 소개가 조용히 화면을 통해 흘러나왔고 나갈 준비를 하던 나는 오가며 분주한 가운데 그 이름을 기억했다, 유민미술관. 제주도, 자연친화적, 그리고 미술관, 이 세 단어와 함께. 그리고 잊고 지냈다.
앞에서 언급한 일과 관련해 제주도를 올 기회가 생겼을 때 내가 제일 먼저 떠올린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버스 일주, 다른 하나는 유민미술관. 그랬다. 섭지코지 부근, 성산일출봉이 보이는 곳, 미술관이라는 게 내가 가진, 아니 보고들은 그곳에 관한 전부였다.
아무리 가까운 곳, 그리고 아무리 짧은 곳이라도 어디를 가는 것은 그 자체로 설레는 일이다. 계획을 세우지 않을 수 없다. 차편도 머물 곳도, 때로는 먹을 것도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거의 언제나 갈 곳과 머물 곳이 정해지면 그 사이 나머지는 언제든 바뀔 수 있는 것도 낯선 곳을 가는 흥미로움의 일부라 생각한다. 그래서 어디를 가건 꼭 살펴 준비해야 하는 것 말고 나머지는 크게 염두에 두지 않는다. 아니, 않았다. 게으름을 변명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나는 게으른 사람은 아니다. 여행에서는 더욱. 그러나 앞으로는 조금 바뀔 것 같아. 적어도 한 가지는. 어떤 곳이, 어떤 사람이 몹시 보고 싶거나 가고 싶을 때 먼저 그 사람과 그곳에 대한 사전 정보쯤은 좀 더 자세하게 챙겨두게 될 것 같다.
다시 처음으로 질문으로 돌아가자. 유민미술관에서 내가 느낀 불편함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왜 하늘을 가두어 봐야 했지? 성산일출봉이 시야의 방해 없이 가장 잘 보이는 지점에서 그 좁은 뷰파인더를 통해 봐야 했지? 그건 정말 자연친화적인가? 알 수 없는 그 불편함은 이런 의문들을 낳았다. 그리고 그 의문들은 다시 “왜 그 건물이 거기에 있어야 하지?” 그리고 다시 “누가 왜 거기에 그런 건물을 지은 걸까?”로, 그리고 “왜 그 미술관에는 그런 ‘미술품’들이 전시되어 있는 걸까?”로 이어졌다. 그 의문에 대한 답을 다 알 수는 없겠으나 몇 가지 객관적 사실들은 눈 깜빡할 사이에도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몇 안 되는 객관적 사실들이 몇 가지 내 의문들에 대한 나름의 답을 제시해 주었다. 주관적 느낌과 이해를 더해. 그 객관적 사실과 주관적 느낌과 해석에 대한 이야기.
첫 번째 객관적 사실—유민미술관의 역사.
https://en.wikipedia.org/wiki/Yumin_Art_Nouveau_Collection
이 미술관의 원래 이름은 <지니어스 로사이>(Genius Loci)였다. 2010년 제주 휘닉스 아일랜드가 섭지코지에 리조트 타운을 조성하면서 벨라테라스, 글라스하우스 등과 함께 일본의 건축가 안도 타다오에게 의뢰해 설계한 건축물이다. 건립한 후 오랫동안 “Diary” “어제의 하늘” “섭지의 하늘”로 명명된 전시실에서는 주로 제주의 자연 경관과 명상과 관련된 전시를 해 오다가 중앙일보 재단에서 매입한 후 2017년 6월에 인테리어를 다시 하면서 <유민 아르누보 컬렉션>이라는 현재의 모습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지니어스 로사이>(Genius Loci). 사전적인 의미로는 “고장/땅의 수호신” “터주” “서낭신”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설계자인 안도 타다오도 나중에서야 안 사실이지만 이 건물이 위치한 자리, 그 제일 아래쪽이 섭지코지의 중심이라는 사실에 더해 이 이름은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리조트의 일환으로 건축된 건물이긴 하지만 제주의 자연과 명상을 연계한 작품을 주로 전시해 온 이 건물은 그래서 “미디어 아트 전시 공간”이지만 동시에 “명상의 공간”이기도 했다.(“Originally built as a meditation hall and media art zone.”)
“공간 체험을 통해 개개인의 마음에 오랫동안 기억되는 공간이 되도록 하고자, 섭지코지의 자연과 더불어 실내외 공간에서 각기 다른 체험을 할 수 있는 지중(地中)의 사색과 명상이 공간”([한국 뮤지엄 건축 100년], 서상우, 기문당, 인터넷문서에서 재인용)이라는 설명은 이 공간의 애초 의도와 의미를 알 수 있게 해준다.
경사진 입구에서 양편의 물과 바로 맞은 편 두 개의 사각 문으로 된 입구, 그리고 정면의 성산일출봉이 보이는 사각의 좁은 뷰파인더에 이르고, 거기서 다시 왼편으로 굽이돌아가면서 높게 올려쳐진 왼편의 콘크리트와 오른편이 화산암 벽 위로 좁게 보이는 하늘, 다시 세 번을 꺾어내려가 어두운 입구 안으로 들어가는 과정은 결국 ‘땅 속’으로 천천히 들어가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하늘과 대기’의 공간에서 ‘땅 속 어둠의 공간’으로, ‘삶의 공간’에서 ‘죽음의 공간’으로 가는 여정이었던 것이다. 내가 느낀 불편함의 원인이 혹 그것 때문이 아니었을까.
나는 삶은 언제나 죽음과 함께 있다고 생각한다. 죽음의 경험은 내게 낯선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죽음이 두렵지 않기야 할까. 무엇이건 소멸한다는 것, 사라진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죽음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삶을 떠나는 그 아쉬움과 미련이 큰 것이 아닐까. 근래 들어 더욱 내게 삶은, 삶의 매 순간은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하늘도 바람도 땅도 구름도 지나치는 모든 소리 하나도, 그리고 내게 소중한 모든 사람도. 거침없는 바다가, 맑건 흐리건 가없는 하늘이 자주 보이고, 길가의 나무도 이유 없이 쓰다듬는 까닭, 그랬다.
미술관으로 들어가는 길에서 나는, 넓고 탁 트인 하늘을 이고 거세지만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거칠 것 없이 말갛게 드러난 성산일출봉을 마음껏 바라보며 땅을 밟던 내 몸과 마음은 좁고 막힌 어두운 공간으로 내려가는 것에 대한 본능적 두려움과 불편함을 느낀 것이었다. 새로운 시각에서 주변의 자연을 보라는 건축(가)이 던지는 너그러운 과제를 생각하기에는 비좁고 어두운 죽음의 세계에 대한 내 잠재된 무의식적 두려움이 컸던 것, 그 내면의 두려움이 감정적 불편함이라는 모양으로 표현된 것 아니었을까. 거기에 입장 마감시간 가까이 들어가 짧은 시간에 다녀와야 한다는 조급함까지 더해지며 공간 자체보다는 그 공간 내의 무언가를 봐야한다는 엇나간 강박도 작용한 듯하다.
그러나, 내가 걸어 들어간 그 공간은 죽음의 여행과 같은 편도 여행길이 아니었다. 나는 다시 그 길을 따라 걸어 처음에 좁아지고 내려갔던 길은 이번에는 조금씩 넓어지면서 위로 오르는 밝음을 보여주었다. 처음 걸음이 ‘땅 속’ 죽음으로 내려가는 길이었다면, 올라오는 길은 ‘땅 위’로, 삶으로 다시 돌아오는 길이었다. 내려가는 길이 불편하고 두려웠다면 올라오는 길은 그만큼 더 밝았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런데 왜 나는 더 불편했던 것일까. 다시는 그 길을 가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들만큼 강해졌던 것일까. 거기엔 그 공간 내의 경험이 작용하는 힘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내가 그 공간 내에서 경험한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글에서 언급한 전시된 유리공예 작품들이었다. 그 공간 내부의 주인은 그 공예작품들이었다. 아름답고 화려하고 많은 품이 들어간 ‘예술품’이라고 하지만 내게는 그 공간에 어울리는 것 같지 않다고, 그리고 나의 취향에도 공감되지 않는 그 작품들. 공간은 사라지고 그 유리작품들만 남아 있었다. 그 공간은 생명 없는 유리공예 작품들의 침실이었다. 올라오면서까지 내가 느꼈던 감정의 원인은 거기 있었던 것 같다.
오기 전 나는 거기서 무엇을 기대했던가. 아는 게 없었으니 딱히 기대한 것도 없다. 그러나 ‘자연친화적’, ‘제주의 자연’이라는 설명과 미술관 사이의 공약수는 무언가 다른 것일 것 같았다. 만약, 그 공간의 핵심, 땅의 중심부에 이르러 다른 경험을 할 수 있었다면 처음의 내 불편함은 좀 바뀔 수 있었을까. 돌아와 이 글을 쓰려고 인터넷을 서핑하다가 지금처럼 <유민미술관>에서 유리 공예를 영구전시 하기 전에는 무슨 전시를 했을까 찾아보았다. 글의 모두에서 언급한 세 가지 명칭의 전시실에서 전시된 미디어 아트들의 사진과 동영상 그림을 보았다. 이런 그림과 전시들. 전시된 작품의 질적 예술적 가치는 내가 모르겠으나 분명하게 보이는 것 두 가지. 하나는 이전 전시에서는 이 공간의 내부와 전시된 작품이 “자연”과 “명상”이라는 주제로 통일되어 있다는 것, 다른 하나는 이 공간을 찾는 사람들이 공간 안에서 예술품 감상만이 아니라 스스로와 자연에 대한 “명상”의 시간을 가질 기회를 주는 동시에 그 과정에서 건축 공간이 자신의 존재 이유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었다.
돌아들어온 긴 길, ‘땅 속’ 핵심 공간이라 할 수 있는 위치의 전시를 보여주는 다음 두 그림을 보자. 첫 번째 세 그림은 <지니어스 로사이> 시절의 모습, 맨 아래 그림은 현재 <유민예술관>의 같은 공간의 모습이다.
<지니어스 로사이> <지니어스 로사이><지니어스 로사이>
<유민미술관>
공간은 사라지고 어둔 공간에 포커싱 된 조명을 통해 온 시선을 끌어들이는 마지막 사진에서 저 공간은 유리공예를 안전하게 ‘보존하는’ 기능을 수행하면서 뒤로 물러앉은 반면, 두 번째, 세 번째 사진에서 저 공간은 들어온 사람과 하나 되어 그 사람이 공간 속에 자리한 자신의 의미를 ‘명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긴 죽음의 길을 걸어 들어와 마침내 찾은 땅의 핵심, 죽음의 중핵. 따라서 그 안에서 ‘명상’의 시간을 거친 뒤 그가 다시 걸어 나갈 때 그는 죽음에서 부활하듯 자신의 한 생명을 벗고, 다른 생명으로, 그리고 이전과는 다른 세계로 나가듯, 왔던 세상으로 돌아가는 경험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삶 속에서 자신의 상징적 죽음을 경험하고, 다시 새로운 삶으로 돌아가는 그런 경험을 할 수 있었더라면, 공간이 그렇게 사람과 하나되는 곳이었다면, 그랬더라면, 그럴 수 있었더라면 설혹 들어올 때 불편하고 좁고 어두워서 죽음으로 가듯 불편했던 그 내리막길의 의미를 되새겨 알 수 있지 않았을까. 다시 올라가며 걷는 그 길의 의미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가듯, 이전의 삶에서 통과의례를 거쳐 새 삶으로 나서듯, 그래서 아까와는 다른 시선과 의미로 눈앞에 다가오는 하늘과 바다와 바람을 그리고 땅을 느낄 수 있지 않았을까. 건물을 설계하고 건축한 안도 타다오의 의도도 그것이 아니었을까. 그럴까. 나는 안도 타다오를 찾아 보았다.
두 번째 객관적 사실—건축가 안도 타다오와 자연친화적 건축. 안도 타다오는 어떤 건축가인가.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63XX18800114
“노출 콘크리트를 특징적으로 사용”하며, “노출된 건축공간에 자연을 끌어들이는” 방식으로 “자연과 건축과 인간의 교감을 이끌어 내는 공간을 창출한다는 안도의 건축 철학”이라는 설명이 섭지코지의 <지니어스 로사이>에 그대로 다 투영되었는지 확인할 만큼의 앎은 내게 없다. 그러나 애초 그 건축물을 그렇게 구성한 그의 생각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고, 충분히 공감할 수도 있다. 그 자리에 그 건축은 없는 것이 ‘자연적’일 것이다. 그러나 꼭 있어야 한다면 그렇게 있어야 했던 이유도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그런 취지라면 건축물의 외형과 건축물 자체의 내용 못지않게 그 안에서 경험하게 되는 ‘내용’도 중요할 것이다. ‘Decorum’(형식과 내용의 일치 혹은 조화)가 어디 그림이나 문학만의 이야기일까. <지니어스 로사이> 시절의 전시 내용, 그 컨텐츠의 이유가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왜 그랬던 <지니어스 로사이>는 <유민아트뮤지엄>으로 바뀐 것일까.
마지막 세 번째 객관적 사실. 왜 “유민미술관”인가? “유민”은 ‘홍진기’란 인물의 호라고 한다. 홍진기라는 인물은 누구인가. 멀리 갈 것 없었다. 아래 글을 포함한 많은 곳에 그에 대한 소개가 나와 있었다.
http://m.blog.daum.net/_blog/_m/articleView.do?blogid=0HaoH&articleno=4781446
그랬다. “유민미술관”은 그를 기리는, 그리고 그가 수집한 ‘예술품’을 영구 전시(보관)하는 공간이었다. 내 무지가 부끄러웠다. 이를 위해 <지니어스 로사이>였던 건물을 매입하고, 이름을 <유민미술관>으로 바꾸고, 그의 콜렉션을 전시하기 위해 내부 디자인을 변경해 지금의 모습이 된 것이었다. 여기까지가 확인가능한 객관적 이야기.
이젠 그저 지극히 개인적인 내 무지에 대한 반성과 사적 해석.
가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섭지코지를 들어가면서 입장료를 내거나 따로 관람료를 내지는 않는다. 텔레비젼 드라마의 배경으로 등장한 이후 유명세를 타고 많은 사람들이 아름다운 경관을 찾는 관광지가 되었지만 누구나 무료로 밟을 수 있는 곳이 섭지코지다. 그런데 유독 사용료를 내지 않으면 들어가지 못하는 공간이 있다. 바로 그 <유민미술관>이다. 사유지건 공유지건—많은 토지소유자들이 공유한 땅이라는 인터넷 자료를 확인했으나— 누구도 사용료를 받지 않은 섭지코지에 유독 그 한 곳만 입장료를 내지 않으면 아예 들어가지도 못하는 공간이 되었다. 우리나라 제일의 재벌가 조상의 애장 공예품을 보관하는 사적 공간, 미술관이라는 명목으로.
재벌이 부를 축적하고 대물림하는 중요한 매개물 가운데 하나가 예술품이라는 것이 저잣거리의 공공연한 이야기가 된 지 오래. 물론 저 유리예술공예품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유민” 후손들의 사적 재산이며, 그 미술관은 그 개인의 사적 애장품을 영구 전시(혹은 보관)하는 공간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누구나 자유롭게 이용 가능한 공간에 땅을 소유한 무수한 개인들이 있는데, 그 중 누군가는 자기 조상 이름으로 된, 그의 개인 소장품을 보관하는 공간으로 전유한 뒤 미술관이라는 명목으로 입장료를 내지 않으면 그 땅을 밟지 못하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안도 타다오가 설계한 그 건축물이 ‘자연친화적’인 면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제주의 자연적 특성을 건물과 조화시키려는 시도는 분명하게 느껴지는 면도 있다. 거기에 그 건축물을 짓지 않았다면 더 좋았겠지만 지어야했다면 그의 말대로 그렇게 “자연친화적”으로, “명상의 공간”으로. 물론 “자연” 그대로가 더 좋은 곳에, 아니 어쩌면 마땅히 그래야 할 곳에 건물을 짓고 그걸 “자연친화적”이라고 칭찬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문은 여전히 있다.
또 나는 “유민” 홍진기의 후손들의 사유지일 그곳에 자신들의 사적 권리를 행사한 것을 탓할 까닭도 자격도 마음도 없다. 자본주의 자유경제 시장의 대한민국 아닌가. 또, 그 안에 무엇을 전시하건 그것을 뭐라 할 것도 아니다. 취향의 자유며, 사실 그 또한 소유자들의 자유 아닌가.
내가 여러 번 인터넷을 검색하고 찾아보며 두서도 없는 이 긴 글을 쓴 이유는 단 하나다. 평소 그렇게도 줄기차게 애용하는 인터넷 검색 한 번이면 다 나타날 너무도 명백하고 객관적인 사실조차 모르고 좋아라 거길 찾아갔던 내 뻔뻔한 무지가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객관적 사실 가운데 한 가지만 알았더라도 나는 거길 들어가지 않았을, 아니 가려는 마음조차 갖지 못했을 것이다. 그날, 그 찜찜한 마음을 안고 돌아오던 버스 안에서 주절거리던 이야기를 3.1절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일이 오늘에야 끝낸다.
p.s. 한 가지 확실한 교훈은 얻었다. 여전히 느낌은 믿되, 최소한의 ‘사실’ 혹은 ‘정보’는 챙기자는 아주 간단하면서도 당연한 교훈을.
p.p.s. 건축물 자체에 대해 안팎 충분히 볼만큼 볼 수 있는 시간이 없었다. 물리적 시간도, 정신적 여유도. 인터넷에 검색을 하면서 건축 자체에 관한 많은 글들과 논문들이 있었다. 우선. [나, 건축가 안도 타다오](이규원 역, 안그라픽스, 2009)를 보기로 한다.
p.p.s. 이 글을 쓰면서 <유민미술관>에 관한 인터넷 글들을 검색해봤다. 대부분 가벼운 여행기들에다 비슷한 칭찬일색이다. 궁금했다. 거길 다녀오고 그렇게 글을 쓴 그 많은 이들도 나처럼 아주 ‘간단한’ 사실 혹은 정보는 놓친 것은 아닐까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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