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dailylife

기억할 만한 저녁

그림자세상 2011. 12. 17. 17:00

2011년 12월 13일 화요일 저녁 8시 25분. 을지로 영락골뱅이. 중년의 사내가 딸 쯤 되어보이는 여학생과 들어선다. 꽤 차가운 바람에 여학생의 얼굴은 조금 상기되어 있고 중년의 사내는 목도리를 둘렀다. 좁은 홀 안에는 젊은 사내 둘과 한쌍의 남녀, 대여섯의 중년 사내들 그리고 또 한 무리의 회사 직원인 듯한 팀들이 골뱅이와 계란말이를 앞에 두고 소주와 맥주를 마시고 있다. 이런 곳에서 흔한 풍경이다. 사내는 목도리를 풀고 여학생은 자리에 앉자 마자 벽의 낙서들을 보고 있다. 메뉴는 따로이 정할 필요도 없는 곳이었다. 사내는 언젠가 빈 속에 먹었던 충무로 대학병원 뒷골목의 골뱅이를 떠올리고 여학생은 낯선 풍경이 익숙하지는 않지만 불안해보이지는 않는다.

 

사내는 여학생에게 묻는다. 둘은 소주와 맥주를 놓고 잠깐 고민하다가 소주 맛이 어떤가 궁금하다는 소녀의 주장에 따라 골뱅이와 소주를 주문하고 먼저 나온 오이와 땅콩과자를 먹는다. 생각보다 좁은 실내에는 이층으로 통하는 낮은 계단이 있어서 사람들은 거기서도 내려왔다. 맞은 편 젊은 사내 둘이 이미 얼굴이 불콰해진 채 새로 들어온 두 사람을 연신 쳐다본다. 옆 테이블의 한쌍의 남녀는 이야기가 한창이다. 여자를 앞에 둔 사내가 팔을 걷어부치고 무엇인가를 열심히 설명하고 여자는 계란말이를 들었다 놨다 하고 있다. 뒷 자리의 늙수그레한 중년의 사내들은 골뱅이가 맵다는 둥 아무개는 왜 못왔냐는 둥 두서없는 이야기들을 하면서 연신 술을 들이켠다.

 

사내는 여학생의 표정이 밝은 것에 다소 안심을 한 것인지 조금 들뜬 표정이다. 골뱅이보다 소주가 먼저 나오자 사내는 먼저 여학생에게 소주를 따라준다. 학생은 소주가 어떤 맛일까 궁금했다며 소줏잔을 들어 냄새를 맡는다. 그런 소녀를 보며 사내가 말한다. "아빠가 술 마실 때 가능하면 지켜려고 하는 것, 두 가지. 하나는 빈 속에 마시지 않는다는 것, 다른 하나는 술은 기분나쁠 때는 마시지 않는다는 것. 술은 기분좋은 사람들하고 기분좋게 마시는 것이라고 생각해." "기분나쁠 때 사람들이 술마시고 잊는 것으로 많이 나오는데?" "그렇긴 하지만 아빠는 생각이 달라. 아빠는 술은 기분나쁠 때 마시면 독이 된다고 생각해. 술 마시고 잊거나 해결될 일은 없는 것 같아. 잠시 벗어둘 뿐이지. 하지만 그게 때로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 것은 아니야. 그래도 아빠는 술은 좋은 사람들 하고 좋은 기분으로 마시는 것이라고 생각해." 그리고 사내는 자신이 기분나빴을 마셨던 처음이자 마지막 일을 이야기 한다. 

 

둘은 부녀다. 아이는 얼마 전 수능을 보고 실수를 한 것 때문에 시험 이후 한참 낙담한 모습으로 지냈고 사내는 그런 아이를 가만히 지켜볼 뿐이었다. 이날은 학교에 가 담임을 만나 상담을 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상담 과정에서 아이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는 덜 비관적인 상황에 다소 위안을 받은 눈치였다. 실수가 커보여서 자꾸 가라앉던 마음도 조금을 추스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아이를 지켜본 사내 또한 그런 아이의 모습에 마음이 조금 놓였던 모양이다. 골뱅이가 나오기 전 한 잔의 소주를 비운 둘은 두 잔째의 소주를 마주했다. 사내가 자꾸 건배를 하자 딸아이는 술을 마실 때마다 건배하는거야?고 묻고 사내는 아니라고 그냥 좋아서 그런다고 답한다. 이윽고 골뱅이가 나오고 둘은 골뱅이를 앞에 두고 다시 한잔 씩을 따른다. 둘은 담임 선생님과의 상담을 두고 학교 이야기와 전공 이야기를 한다. 사내는 딸의 조금은 밝아진 표정에 덩달아 마음이 가볍다. 지켜보면서 말을 할 수 없는 때도 있는 법이다. 그런 시간이었다, 지난 며칠은.

 

아이는 소주를 마시며 사람들은 이게 뭐가 좋아 마시냐고, 무슨 맛으로 마시냐고 궁금해한다. 일본에 갔을 때 친구들과 과일주를 마시고 기분이 몽롱했던 이이기며, 홍대 앞에 친구와 둘이 가서 맥주를 마셨다는 이야기를 한다. 사내는 그런 딸아이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사내는 딸아이 엄마와 연애시절 술 마시던 이야기, 고등학교 3학년 때 처음 맥주를 마셨을 때의 느낌 등을 두서없이 이야기 한다. 술은 못마시는 경우라면 안 마시는 게 좋고, 마실 줄 안다면 자기 주량은 알고 있는 게 좋고, 가능하면 주량의 80% 이상은 마시지 않는 게 좋고, 그 이상을 마실 경우는 평생 몇번 되지 않아야 한다는 둥 또한 두서없이 이야기 한다. 둘은 딸아이가 초등학교 6학년때 처음 맥주를 시켜달라던 때를 기억하며 웃는다. 인라인스케이트를 타고 돌아와 가족들 모두 호프집에 갔을 때 여느 때와 다름 없이 어른은 맥주, 아이들은 사이다를 시켰을 때 딸아이가 말했다. 나, 맥주 마셔보면 안돼? 그때 딸아이는 500cc를 마시고 사내의 맥주잔에 담긴 맥주를 반쯤 더 마셨다. 발그레해진 볼을 한 모습을 사내는 폰에 담았었다. 그리고 6년이 지난 것이다.

 

아이에게 골뱅이는 매웠다. 둘은 계란탕을 주문했다. 새우젓이 들어간 계란탕은 짜지 않아 좋았다. 아이는 계란탕을 좋아한다. 함께 저녁을 먹으면서 고기를 먹을 때 아이는 함께 나온 계란탕을 좋아했다. 아이는 계란탕을 잘 먹는다. 이야기는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사내는 아이가 조금 밝아져서 기쁘다고 말한다. 무엇을 선택하건 장단점을 있는 법이라고 중요한 것은 그 선택 다음의 태도라고도 이야기한다. 무엇을 선택하고 어떤 결과이건 아이는 언제나 자랑스럽고 고마운 딸이라고, 언제나 그래왔다고 사내는 말한다. 말은 실재를 다 담아내지 못한다는 것이야 사내도 익히 알고 있는 바이지만 이런 경우는 더욱 그렇다고 사내는 생각한다. 아이가 그 마음을 알아주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또 적잖은 이야기들이 있었다. 그 사이 사람들은 들어오고 또 나갔다. 두 부녀는 소주 한병을 사이좋게 나누어 마셨다. 골뱅이도 계란말이도 계란탕도 나란히 비웠다. 또 무슨 이야기들을 더 나눈 뒤 둘은 자리를 일어섰다. 거리엔 찬 바람이 제법 세차게 불었지만 나란히 종로3가 까지 걸어가는 길은 행복했다. 사내는 목도리를 딸의 목에 감싸준다. 종로3가에서 262번 버스에 앉은 둘은 어둠 가득 내린 서울의 거리를 한참 동안 바라보며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사내의 마음속에서는 내내 행복한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사내에게는 아주 오래전 결혼이라는 것이 현실이 아니었던 때부터 결혼이라는 단어가 떠오를 때마다 그의 마음속에 그려지던 가장 또렷했던 스케취 하나가 있었다. 그 스케취가 오늘 비로소 처음으로 완성된 그림이 되었다. 2011년 12월 20일 화요일 저녁 여덟 시 이십오 분, 일지로 영락 골뱅이에서 나는 처음으로 다솜이와 단둘이 소주를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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