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s and Writings/문학작품

[스크랩] 세상에 홀로 서는 너를 위하여 - 켄트 너번

그림자세상 2009. 12. 5. 13:57
세상에 홀로 서는 너를 위하여
    켄트 너번 지음/정승현 옮김
    발행처: 한마음사

    저자 소개: 켄트 너번 은 1946년 출생하여 종교와 예술분야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으며 국제적인 조각가로서 히로시마의 평화박물관 등에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그는 뉴월드 라이브러리에서 간행된 '토착 아메리카의 지혜'의
편집자이기도 한다.
    역자 소개: 옮긴이 정승현은 1966년 강원도 삼척에서 출생하여 '92년
경희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수학중이다.


    서문

  이것은 내가 쓰려고 의도했던 책은 아니다.
  세상에는 도덕적 가르침과 개인적 통찰을 담은 수많은 글들로 가득 차있다.
이책에서 나는, 도덕적 가르침과 개인적 통찰로 더 나은 삶을 가르치려는
시도를 해왔던 수많은 사람들의 명단에다 내 이름을 또다시 덧붙이는 위험을
무릅쓰려고는 결코 의도하지 않았다.
  그런데 삶의 도정에서 모든 것이 바뀌었다. 내 아들의 탄생에 적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내 삶의 경로에서 부딪치고 싸워왔던 문제들과
오랫동안 품어왔던 의문들이 갑자기 내 아이의 눈앞에 그대로 되살아났다.
나는 전부터 내 자신이, 그 아이가 발견할 수 있는 만큼의 지혜로 삶의
거친 파도를 헤쳐나가는 방법을 제시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아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내가
짊어져야 할 임무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그것이 손쉬운 시기이다. 그 아이의
삶이 아직까지는 자신의 손이 닿을 수 있는 한계라는 영역이상으로 넓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아들 곁에 가까이 있을 수 있고, 또한 그 아이를
올바르게 인도할 수 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그 아이는 자기 자신의 힘으로
홀로 서게 될 것이다. 혼자서 모든 일을 결정해야 하고 온전히 자신의 가족들을
돌봐야 할 책임이 생기게 될 그때가 오면 그 아이는 과연 어디에서 자신의
안내자를 발견하게 될까?
  주위를 둘러보면 우선 걱정부터 앞선다. 세상은
온통 모순된 전망과 관점, 그리고 끊이지 않은 논쟁의 불협화음으로 얼룩져
있다. 위대한 시인 예이츠가 경고했던 불길한 경고, 즉 "최고의 악이 격렬한
여세로 세상을 뒤덮는 동안에도 최고의 선은 모든 신념에서 결여되어 있다"는
말을 사람들은 쉽게 간과하여 흘려들은 것만 같다.
  선한 사람은 어디에서나
우리가 만들었던 세상이 곧 우리가 실패한 세상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 우리의
찬란한 꿈과 우리의 커다란 근심이 뒤섞여 하나의 지평에서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눈을 감고 조용히 서서, 세상에서 우리의 희망에 의해
움직여지는 것은 무엇이고 의심으로 묵살되는 것은 무엇인지를 깊이있게
깨달아야 한다.
  나는 우리의 의심으로 인해 세상의 진실이 묵살되는 것을
참을 수가 없다.
  나는 내 아들이 열린 마음과 고상한 태도로 자신의 주위에
펼쳐진 세상과 기쁘게 접촉할 수 있는 착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원한다.
  나는 내 아들이 단지 사려를 분별할 줄 아는 사람만이 아니라
신념을 가진 사람이 되길 원한다.
  나는 내 아들이 자신의 양심적인 목표를
지속적으로 추구하고 자기성찰의 방법을 항상 계발함으로써, 의식적으로는
물론 무의식적으로도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사람이
되길 원한다.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서 내 아들은 남자가 되는 문제에 대한
감정적이고 온정적이며 현실적인 목소리들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그래서 나는 위험을 무릅쓰고 그런 목소리를 제공하고자 하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 되기로 결심했다.
  나는 대단한 삶을 살아오지는 않았지만
내가 살아오면서 경험했던 일들을 머리 속에 떠올렸다. 언어에 대한 사랑,
인류의 더 높은 전망에 대한 확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한 분노와
놀라움과 실망에 따른 난해한 고민들, 배움의 나날들, 수많은 마을과 거리의
여행들, 모든 종교적인 전통의 지혜들에 대한 사랑, 우리 주변에 벌어지는
모든 삶의 경험이 드러내는 무진장한 경이로움에 대한 믿음들.
  그러나 나는 무엇보다도 이러한 일을 떠올린다.
  어느 주말에 예전에 나의 학생이었던 아이
한명이 도로가 차단되는 곳에서 차를 질주하고 있었다. 그는 가속페달을
힘껏 밟았고, 결국 호수 아래의 절벽을 향해 자신을 자동차와 함께 날렸다.
같은 날 나는 한 남자가 인도를 어행하며, 머리에 양손을 얹고 눈을 주시
함으로써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고 하는 여인에 대해 연구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날 저녁에는 구멍가게의 벤치에서 낚시의 즐거움에 대해 이야기하는
어느 술취한 늙은 남자와 나는 밤늦도록 함께 앉아 있었다.
  이러한 여러
사람들과 그들의 모든 진실을 시간과 장소에 전혀 구애받지 않고 포용할 수
있었던 것은 나에게 내려진 크나큰 축복이었다. 나는 그들의 생각 속에
들어갈 수 있었고, 그들 각각의 의견에 동의할 수 있었고, 그들 각각으로부터
배울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의 진실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그다지 중요하게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삷에서
겪는 그러한 경험들이 세상의 다른 무엇보다도 더 큰 가치가 있다고 본다.
  서른여섯 마리의 고양이를 기르며 혼자서 쓸쓸한 노후를 보내는 이웃집
할머니, 종교서적을 들고 문앞에 서서 진리의 전파에 열중하고 있는 훤칠한
키의 젊은이, 마음씨 좋은 선생님, 정직한 전도사, 마약 중독자, 어머니,
그리고 나에게 와이셔츠의 맨 윗단추를 채우는 부자유스러운 직업을 갖지 말고
그가 살아온 지난날처럼 방황으로 나의 삶을 망치지 말라고 충고하는 공원의
부랑자 - 나는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모든 진실들을 귀담아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진심으로 축복할 수 있었다.
  만약 내가 이 간단한 진실들을
이해하고 삶에서 자주 부딪히는 하찮은 일화 이상으로 그것들을 끌어올릴 수
있다면, 나는 내 아들과 다른 아버지의 아들에게 진정으로 가치있는 무엇인가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 모순된 세상에서 우리 인간이 처한 상황을
제대로 깨닫고 인간의 무한한 잠재적 능력을 살리는 두가지 일 모두에서
성년에 관한 희망있는 전망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꿈꾸는 사람과 의심하는 사람, 보통 사람과 특별한 사람에 대한
증류된 시각들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아마 나는 과거에 우리 앞에 놓였던 광대하고
혼란스러웠던 관점들을 비판적으로 조사함으로써 삶의 올바른 입지를
찾으려는 모든 남녀 독자들에게 성년에 대하여 그 무엇인가를 분명히 밝혀줄
수 있을 것이다.
  - 켄트 너번 -

 

    프롤로그
    아버지의 바램
  나는 아버지로서 이 책을 쓴다. 단지 네 아버지로서만이 아니라 그 누군가의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네 자신의 아들이 태어나기 이전까지 너는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을 게다. 너는 일상의 즐거움을 넘어선
아버지의 즐거움, 자기의 아들을 지켜보는 아버지의 마음속에서 공명하는
느낌을 초월하는 사랑에 대해 지금은 결코 이해할 수 없단다. 현재의 자신
보다는 더 나은 사람이 되게 하고자, 그리고 자기 아들의 손에 선함과 희망을
쥐어 주고자 간절히 소망하는 아버지의 영광을 너는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
  또한 자신이 아들에게 어떤 사람으로 비춰지길 원하는가에 따라 자기의 모습을
그와같이 만들어야 하는 어려움 때문에 종종 발생하게 되는 아버지들의 커다란
슬픔을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너는 아버지라는 존재를 단지 항상 네
앞에 있었던 사람, 혹은 너의 삶에서 이미 떠난 사람, 선의로든 악의로든
너보다는 힘이 훨씬 강했던 사람으로서만 볼 수 있다. 네 자신이 아버지가
되고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기 전까지는 그런 생각에서 결코 벗어날
수가 없을 것이다.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개인에게 내려지는 커다란 특권이고
동시에 커다란 짐이란다. 그곳엔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여러가지 삶의 교훈들이 있다. 그렇지만 그것들은 결코 몇마디 말로써
명확하게 전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꼭 전해야만 하는 그것은,
우리들 주위 세계에 대한 성인으로서의 감각, 자신의 가치, 책임감 등이란다.
  그런 것들을 어떻게 말로써 다할 수 있겠느냐? 우리는 마음속에 간직한 말을
쉽게 털어놓기가 힘든 시대에 살고 있다. 수많은 아주 사소한 일들이 우리의
삶을 숨막히게 하고, 끊임없이 벌어지는 일상적 사건들에 대한 관심과 고민이
우리의 자유로운 시심을 침묵하게 만든다.
  우리 마음속에 살아 있는 노래,
우리가 함께 부르길 원하는 노래, 사람이 되기 위한 노래, 바로 그것이
침묵한단다. 우리는 신념이라곤 전혀 들어있지 않은 말뿐인 충고로만 가득 찬
우리 자신을 새삼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말뿐인 충고를 또한번 반복하지 않기 위해 너에게 솔직하게
고백하고자 한다.
  나 역시 이 세상의 문제에 대한 명확한 해답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
나 최소한 드러난 문제만큼은 이해하고 있단다. 네가 삶의 보다 나은 상태를
위해 투쟁하고 노력하는 것을 보고 싶구나. 그리고 나는 너의 눈과 너의
시대에 반영된 나 자신을 보고자 한다. 나는 깊이있고 근본적인 방법으로
그곳에서 너와 함께 고민하고 싶은 것이다.
  나 역시 지금의 너처럼 걸음마를 배웠고, 달리기와 넘어지는
법을 배워왔다. 간절한 마음으로 가슴을 온통 태워버린 첫사랑도 해 보았다.
또한 두려움, 분노, 슬픔이 어떤 것인지도 역시 알고 있다. 내 마음은
한 때 절망에 빠졌던 적이 있었고, 신의 손이 내 어깨에 놓여 있다는 걸
느끼며 안도하기도 했었다. 나는 삶이 빚어내는 슬픔의 눈물과 기쁨의
눈물을 모두 흘려왔다.
  네겐 다시는 빛을 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절망의
시기가 있었고, 춤추고 노래하며 만나는 모든 사람과 포옹하기를 원했던
희망의 시기도 있었다. 우주의 신비 속에서 작은 점조차도 되지 못하는 나
자신이 공허하다고 느꼈던 적과, 아무것도 아닌 작은 경멸을 받고는 크게
분노했던 순간들도 있었다.
  나 자신이 걸을 힘이 거의 없을 때조차 다리가
불편한 다른 사람을 도왔던 적이 있는가 하면, 길가에서 도움의 손길을
뻗치고 있는 사람을 못본 체하며 그냥 지나치기도 했었다.
  어떤 때는 다른 누구보다도 더 많은 일을 성취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을
느꼈고, 또 어떤 때는 말만 앞세우는 허풍장이 실패자일 뿐이라는 절망감을
느끼기도 했다. 나는 위대한 인물이 되기 위해 나자신을 채찍질하기도 했고,
매몰찬 범죄의 수렁에 자신을 빠뜨리기도 했다.
  요컨대 나 역시 너와 전혀 다를 바 없는 평범한 하나의 인간이란다.
  비록 네가 너의 땅을 걷고 너의 시대를
통해 움직인다 하더라도 나의 시대에 떴던 태양이 똑같이 너의 시대에도
뜰 것이고, 나를 스쳐 지나갔던 계절이 똑같이 너를 스쳐서 흘러갈 것이다.
우리는 항상 다른 시대를 호흡하며 존재하지만 항상 인간이라는 의미에서
동일한 존재란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이 책에서 내가 너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의 요점이다. 그것은 나의 삶에서 배운 교훈을 네가 살아가는 삶의 교훈으로
활용할 수 있게 만들고자 하는 아버지의 미천한 노력이란다.
  그 노력은 아버지의 정신적 영역 내에 한정된 아들을 만든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네가 네 스스로를 형성해 가는 것을 지켜 보는 게 이
아버지의 가장 큰 임무다. 그러나 어찌됐든 시간은 이 모든 작업에 대한
진실을 드러낼 것이고, 그 진실이 무엇보다도 위대한 것이다.
  만약 네가 살아가는 시대를 항상
네곁에 머무르면서, 그런 이야기들을 직접 들려 줄 수만 있다면, 그러면
너의 인생은 한결 잘 풀릴 수 있을 텐데.
  너의 아버지가 된다는 건 지금까지
내가 한번도 받아 본 적이 없는 커다란 영광이란다. 그것은 예전에는 알 수
없었던 순간 순간의 신비들과의 접촉이며, 나로 하여금 인간에 대한 사랑을
더욱 신선하게 만드는 걸 허락한다.
  만약 아버지로서 꼭 하나의 바램이
있다면, 그건 이 책이 너에게 사랑하는 방법을 제시해 주었으면 하는 거란다.
결국에 삶에 있어서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아무것도 없을 것이기에.

 

    1 아버지의 그림자

  내가 성년에 대한 생각들을 형성하고자 시도할 때는 항상 아버지의 모습이
나의 눈 앞에 유령처럼 떠오른다. 나는 지금 그분의 모습 - 그분의
외모, 자신이 과거에 겪었던 일들에 대한 기억들을 거의 잃어버린 모습,
시간을 죽이기 위해 텔레비젼의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시며 한가하게 시간을
소비하는 모습 -을 바라보고 있다.
  나는 그분의 현재 모습을 보고 있지만
내 머리에서는 과거 그분의 모습이 어떠했는가를 기억하고 있다.
  온몸이 흥건하도록 많은 땀을 흘리시며 밤늦게까지 풀을 뽑거나 갈퀴질,
혹은 페인트 칠을 하시던 그분의 뒷모습.
   상자마다 가지런히 붙어 있던
목록표들과 각종 도구들을 걸어두는 걸이못이 박힌, 항상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던 지하실의 작업대.
  그분이 화내던 모습과 이성문제에 대해 머뭇거리며
내게 무언가를 말씀하시려 하던 시도들.
  그분이 보여준 침묵과 근면성,
그리고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의식을 당신의 관습들을 통해 네게 보여주시려
했던 애매모호한 노력들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리고 또한 나는 기억한단다.
  당신의 아이들이 자라고, 대학을 졸업하고, 짝을 찾아 독립했을
때의,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얼굴 가득히 뿌듯해 하시던 그 자부심을.
  그분 자신은 이제 그런 일들을 거의 기억하지 못하신다. 그분의 기억력은
이미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내 앞에서 링컨의 게티스버그 연설을 줄줄
외우시던 바로 그 분이 이젠 더이상 그날이 언제였던가를 기억조차 하지
못하신다.
  그분의 작업대는 버려져 수라장이 되었고 오랫동안 잊혀진 계획의
파편들만이 먼지가 수북이 쌓인 채 지하실 한쪽 구석의 상자 속에서 한
무더기로 처박혀 있다. 내 기억 속에서 언제나 나를 훨씬 능가했던 - 어깨,
근육, 힘 모두 - 바로 그분이 이제는 골 깊은 주름이 지고, 쪼그라들고,
허약해진 몸으로 조심스레 움직이고, 걸을때도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신다.
  난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깊은 슬픔을 느껴야만
했다. 그러나 그 슬픔에는 두려움과 착잡한 마음의 갈등이 혼합되어 있었다.
지나간 날들, 그 많은 하루하루의 나날들을 지나오면서 나는 얼마나 많은
세월을 그분과 함께 살아왔는지를 느끼고 있고, 내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분이 얼마나 커다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지를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그 크기에 있어서는 사람마다 다를 수도 있겠지만 아버지라는 존재가
자신의 삶에 분명한 영향력을 미친다는 사실은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느끼고
있을 것이다. 누구라도 그러한 아버지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다.
  비록 그 그림자가 우리를 공포스럽게 하더라도, 비록 그 그림자가 이름도
얼굴도 없다 하더라도, 우리 삶의 모든 구석구석으로부터 그 사람의
가치와 그 사람이 존재했었다는 사실과 그 사람의 남겨진 기억을 전부
몰아낸다 해도, 그 그림자는 우리에게 어떻게든 영향을 미친다. 그 사람의
그림자는 결코 부인할 수가 없는 거란다.
  내 경우는 무척 다행스러웠다.
비록 당신이 화가 나 있고 외로움이 가슴을 저밀 때에도, 아버지는 자신의
내적인 문제를 겉으로 드러내 내가 주눅이 들게 하거나 나쁜 영향이
미치게 하지 않으셨다. 그분의 손은 내가 필요로 할 때 항상 내 어깨위에
있었고, 당신의 아들에게 자신이 짊어지고 살았던 가난의 고통스런 업보를
물려주지 않으시려고 평생을 열심히 일하셨다.
  그렇게 행운이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는 않을 게다.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어린 시절의 아버지에 대한
기억 속에는, 폭력과 무자비함과 술냄새와 물건들이 깨지는 소리를 들으며
한쪽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두려움에 떨던 순간들이 가득 차 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아버지의 기억이 있어야 할 자리에 가슴저린 슬픈
상처들만이 남아 있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들 모두는 역시 아버지의 그늘
아래서 살아간다. 그것이 현재의 우리를 만들었고, 우리가 되고자 하는
사람의 모습을 형성시키는 거란다.
  아버지가 된다는 건 또다른 측면에서는
그 그림자가 가지는 힘을 이해하는 것이다. 너도 장차 성장하여 결혼하고
자식을 낳게 되겠지. 그때에 너와 제 자식간에 갖는 접촉들이 그 아이의 삶의
나날들을 더 좋게도, 혹은 더 나쁘게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렇다면 어떠한 접촉들이 아이에게 의미가 있으며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 까? 어떤말, 어떤 모습, 함께 하는 어떤 시간, 떨어져 있는 어떤 시간들-
과연 무엇이 네가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일에 대해 판단력 없이 그저
바라보고만 있는 아이의 기억 속에서 되살아나 그 아이의 미래를 형성시키게
되는 걸까?
  나는 하나의 장면을 떠올리게 된다. 그건 어스름한 불빛에 싸여
있는 어떤 아파트의 현관이었단다. 나의 아버지가 그곳에 서 계셨고,
수줍음을 잘타는 열살박이 소년이었던 나는 그 현관문을 쳐다보며 아버지
뒤에 숨듯이 서 있었다.
  우리는 자전거를 한대 가지고 서 있었지. 그건
핸드브레이크와 기어변속기가 달려 있는 보라색 경주용 자전거였다.
그 자전거는 내가 그때까지 보았던 자전거 중에서도 가장 멋지고 근사한
최신형 자전거였지. 우리는 그때 그 자전거를 주인에게 돌려주고 있는
중이었단다.
  아버지는 어느 날 이른 아침에, 도시의 해변을 따라 산책하시다가
우연히 그 자전거를 발견하셨다. 아버지는 그 자전거를 가져와 우리집 차고에
집어넣고 담요로 잘 덮어서 보관하셨다. 그리고는 내게 남의 자전거니까
절대로 타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셨다. 몇주일 동안 그 자전거는 우리집 차고에
틀어박혀 있었고 아버지는 지방신문에다 주인을 찾는 광고를 게재하셨다.
난 그 자전거의 주인이 나타나지 않길 은근히 고대했고, 그러면 그 자전거가
내 소유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내 기대를 무참히 저버리고
결국 주인이 나타나고 말았다. 우린 바로 그 주인에게 자전거를 돌려주기
위해서 그 집 문 앞에 서 있었던 거란다.
  아버지가 문을 가볍게 두드리셨다.
그리고 잠시후 문이 열렸지. 안쪽에서 한남자가 밖을 내다 보았고, 그의
시선은 우리를 지나쳐 자전거가 있는 곳에 머물렀다. 이윽고 그는 우리에
대해서는 안중에 두지도 않았고, 그래서 아버지와 나는 계속 문밖에서
선 채로 기다리고 있어야 했다.
  "자전거에 긁힌 자국이 많군요"라고
그 남자가 말했지만, 아버지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으셨다. 그 남자는
자전거의 바퀴를 돌려보고 손잡이를 시험해 보았다.그리고는 비난하는 듯한
눈초리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 자전거를 발견한 즉시 끌어다가
우리집 차고 안에 넣고 담요로 덮어 보관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런 고장도
없을 거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러나 난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다.
자전거는 반짝거리며 음산한 현관 안쪽에서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윽고 그 남자는 자전거를 집 안으로 더 깊숙이 들여 놓고는, "그러나
저러나 당신에게 보상을 해야겠지요"라고 투덜거리듯이 말했다. 그는
주머니에서 구겨진 지폐를 몇장 꺼내더니 아버지에게 내던지듯이 불쑥
내밀었다. 아버지는 그 돈을 받지 않고 다시 돌려주셨다.
  그 남자는 우리를
잠깐동안 노려보고는 자전거를 살피러 들어가 버렸다.
  아버지와 나는
돌아서서 현관 아래로 걸어 내려왔다. 나는 아버지의 소매에 매달려 울먹이며
말했었다.
  "아버지, 왜 저런 사람에게 그렇게 너그럽게 대하세요? 그 사람은
정말로 예의도 없고 비열하잖아요."
  아버지는 계속 걸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마도 그 사람은 어느날 갑자기 그 일을 다시 떠올릴지도 모른단다."
  나는 아버지를 따라 묵묵히 옅은 황혼속을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 그 뒤론 결코 다시는 그 자전거에 대해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어른이 되어 기억이 희미해진 먼 옛날의 그 장면이 다른 사람에
의해 또다시 떠오르게 되었단다.
  그것은 자전거 사건이 있은지 이미 오랜
세월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나는 약간의 사소한 행정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근처의 교도소를 방문한적이 있었다. 교도소의 대기실에 않아
기다리는 동안에 죄수들의 명단에서 예전에 내가 가르쳤던 제자 한명을
발견했다. 그 아이는 술이 취해 심한 난동을 부리고 기물을 파괴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감옥에 들어가 있었다. 그때 그 아이는 이미 초범이 아니었다.
  나는 평소에 그 아이를 좋아했었단다. 그 아이는 항상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환하고 매력적인 미소를 지녔었고, 그 미소에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듯한
친절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삶에 대한 사랑이 언제나 그 눈가에 숨어 있는
듯이 느껴졌었지.
  그 아이에게는 애초부터 가족이 없었다. 보육원에서
성장하여 떠돌이 여관생활에 이르기까지 항상 소외된 존재로 인생을 보냈었지.
그 아이는 자신의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른다고 했고, 자신을 불쌍히 여기고
동정하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필요없다고 말하곤 했다.
  나는 교도관에게 그 아이를 잠시 면회할 수 있는지 물어보았다. 교도관은
나를 데리고 연속적으로 이어진 단단한 철문들을 통과했다. 그 철문들이
내 등 뒤에서 꽝하고 닫힐 때마다 약간의 공허한 울림이 여운으로 귓가를
맴돌았다. 나는 형광등이 활기없이 빛나고 있는 어떤 비좁은 방으로
안내되었다.
  "여기서 기다리십시요" 하고 교도관이 말했다.
  잠시 후 교도관은 그 방에 나의 제자를 데리고 들어왔다. "안녕, 크리스."
내가 먼저 인사를 했지만 크리스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의 눈은
무엇엔가 놀란 듯이 깜박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이 녀석은 좀 거칠기 때문에
깜깜한 독방에 들어가 있습니다. 빛에 적응하려면 시간이 악간 필요할 겁니다."
나를 안내한 교도관이 말했다.
  교도관이 밖으로 나가자 크리스가 나를
쳐다보더구나. 그때, 그 아이의 입술은 두려움으로 떨리고 있었지.
"제발 부탁이예요, 선생님. 날 그 방으로 다시 돌려보내지 못하게 해 주세요.
이곳에서 나갈 수 있도록 힘좀 써주세요. 크리스가 말했다.
  그 아이의 눈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 순수한 어린아이의 눈이었다.
  "제발!" 그 아이는 다시
한번 말했다. 나는 이전에 그 애가 다른 어떤 사람에게도 '제발'이라고
말하는 걸 단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나는 잠시동안 그 아이를 주시했다.
내가 볼 수 있는 건 오직 두려움에 떨고 있는 그 아이의 눈동자뿐이었다.
"그래," 내가 말했다. "할 수 있는 데까지 한번 힘써 보마."
  그 아이의 입술이 다시 한번 부르르 떨리고는, 내게 씩 웃어 보였다.
  나는 교도관들과 접촉하여
크리스의 보석을 신청했다. 그들은 필요한 절차를 끝내고는 크리스의 옷을
돌려주었다. 나는 몇장의 서류에 서명을 한 후에 그 아이를 내 차로 데려갔다.
그 아이한테 햄버거도 사주었지. 그런후에 그 아이가 머물고 있다는 숙소까지
차를 태워주었다. 우리가 그곳에 도착할 때쯤에 그아이는 다시 예전의 으시대는
태도와 허세로 가득차 재잘거리고 있었다.
  내가 차를 멈추었을 때 그 아이는
차 밖으로 훌쩍 뛰어내렸다. "또 봐요."그는 건방지게 한마디 툭 던지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가버렸다.
  다음날 나는 크리스에 관한 이야기를
어떤 친구에게 말하게 되었다. 그 친구는 화가 나서 나에게 한바탕 훈계를
시작했다.
  "난 자네가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 그는 계속해서
말했다. "자넨 그 녀석이 다른 사람들에게 거칠게 행패를 부렸던 것처럼
자네에게도 거칠게 대하도록 그냥 내버려뒀단 말인가. 그 감옥 안에서 단단히
썩도록 그 녀석을 그냥 내버려뒀어야만 했어. 도대체 왜 그런 어리석은 짓을
했나?"
  나는 고개를 숙이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이렇게 대답했지.
  "아마도 그 아인 어느날 갑자기 그 일을 다시 떠올릴지도 모른다네."
나의 친구는 포기했다는 듯 머리를 가로 저었고 자기 일을 보기위해 집으로
돌아갔다.
  지금도 몇마일 떨어진 집에서는 나의 아버지가 텔레비젼 화면을 멍하니
주시하고 계실테지.


    2. 사내와 남자

  나의 아버지는 결코 나보다 특출한 남자이거나 사람들 사이에서 유명한 남자가
아니셨다. 그분의 업적에 대하여 쓰여진 글같은건 세상에 한번도 소개된 적이
없다. 그렇지만 그분은 매우 훌륭한 남자란다.
  그분은 의도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거나 남을 속여 잇속을 챙기거나 한일이 결코 없었고, 또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는 항상 친절하게 대할 준비를 하고 계셨단다.
  나는 지난 십 년 동안 삶에 흥미를 점차 잃어가는 그분을 지켜봐 왔다.
  그러나 나의 아버지는 결코 불행하지는 않으셨다. 불행이란 말은 그분과는
거리가 먼 단어였다. 지금 그분은 자기 자신의 가치에 대한 느낌을 상실하였고
그 때문에 삶에서 흥미를 잃고 쇠잔해지셨다. 그분에게 맨 처음 찾아온
상실감은 직업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리고나서 그분의 강인한 육체와 땅위의
모든 존재에 대해 나름의 가치를 부여하시던 유용한 감각에서도 그런 일이
발생하게 되었다.
  그 과정을 지켜보는 건 핏줄로 이어진 가족들에게는 매우
슬픈 일이란다. 우리 모두는 아직도 그분을 사랑하고 있고 존경하고 있으며
아버지로서 여전히 진심을 다해 받들고 있다. 그렇지만 당신 자신은 더이상
스스로를 사랑하거나, 높이거나, 존경하지 않으신다. 그것은 그분이 살아온
세계와 그분의 육체가 세월의 흐름과 함께 그분을 배신했기 때문이란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갑자기 일어날 수 있는지? 어떻게 그토록 강인했던 한
남자가 어느날 한순간에 나약해질 수 있는지? 삶의 지평이 그분 앞에서 여전히
무한하게 펼쳐져 있는데도 왜 살려는 노력을 포기해야만 했는지? 난 그분이
다른 것보다도 자기 자신을 더이상 하나의 남자로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삶을 포기했다는 것이 두렵기만 하단다.
  내 아버지께선 당신이 이루어야만
한다고 말씀해 오셨던 남자의 상을 - 가장 빛나고, 가장 강하고, 가장 많이
벌고, 가장 적게 쓰는 - 이루기 위해 최선의 노럭을 다하셨다. 그리고 지금껏
그것을 무척 잘 해내셨다.
  아마도 그분이 희망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열여섯 살이
될 때까지 세상을 혼자 살아가야만 했던 외톨박이 소년이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희망했던 것 이상으로 성공했다고 할 수 있을 게다. 그분은 자수성가하여
세상에서 자기 자신의 굳건한 지위를 찾았고, 명예와 존엄과 보살핌으로써
가족들의 보금자리를 정성을 다해 가꾸셨다.
  그렇게 작은 일의 성취들조차도
매우 가치있는 것이라고 나를 일깨워주시던 그분의 마음속에서, 도대체
어떤 것이 지금의 무기력에 빠지게 했을까? 가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이
무에서 시작해서 그렇게 많은 것을 성취한 그분이, 왜 자신의 성년이 이미
지나갔다고 느껴야만 하는가?
  그 대답은 듣기 싫지만 명백한 것이다. 그건
그분이 사내와 남자사이의 의미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고 혼동하셨기
때문이란다.
  사내라는 존재는 우리를 신체적인 특징으로 표현하는 측면이
있다. 그건 강인함, 통제력, 자기영역, 경제력, 그리고 지배와 경쟁이
인간 생존의 열쇠였던 시대에 필수적인 많은 관습들과 관계가 있다.
  그러나 남자라는 존재는 이와는 구별되는 다른 특징을 표현하는 것이다.
남자라는 것은 너를 둘러싼 세상의 요구들과 마주하는 삶 속에서 신체적으로
사내의 몸을 형성해 나가는 과정임과 동시에 한편에서는 다른 사람들의
기대와 필요에 부응하는 모습을 형성시켜 가는 것이다.그건 사람들에게 꿈을
전하는 활동이다. 그건 믿음의 땅에 기초하는 한편, 별들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란다.
  나의 아버지가 태어났던 세계는 사내라는 자연적 본성으로부터 분리된 자신의
남자다움을 찾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던 시대였다. 단지 생존의 과제로 인해
남자들에게는 오직 공격과 경쟁의 힘과 육체적 강함만이 요구되었다.
  그분은 지독히 가난한 환경 속에서 태어나셨다. 그분의 아버지는 일찌기
세상을 떠나셨고 어머니도 어린시절에 돌아가셨다. 어른이 되기도 전에
그분은 대공황의 파도 속으로 홀홀단신 내던져졌다.
  먹고 살기 위해선
일해야만 했고, 일하기 위해선 강해야만 했고, 남들보다 더 열심히 일해야만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후에는 나치즘과 파시즘이 세계무대에
등장했고, 그분은 다른 사람들에게 대항해 무기를 들 것을 강요당해야 했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완전히 빈털털이로 돌아왔고, 전혀 새로와진 사회적,
경제적 여건 속에서 가족들을 보살피기 위한 보금자리를 다시 개척해야만
하셨다.
  아주 어린시절부터 그분은 신체적으로 약한 사람들이 경시당하는
풍조 속에서 승리자가 되어야만 자신을 지켜낼 수 있는 세계를 살아왔단다.
그러므로 성년에 대한 그분의 생각이 그토록 남성 우월주의와 지배의 감성에
젖어 있었다는 사실은 그리 놀라운 일이 못된다.
  이제는 그분의 신체가 그분을
쇠퇴시킴으로써 남성우월주의와 지배의 감성은 의존의 감성으로 바뀌었다.
그분은 삶의 덧없음과 무의미함만을 느낄뿐이다. 직업의 상실과 육체적 힘의
상실, 성적 능력의 상실, 그리고 주변 세계를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의 상실은
그분의 성년의 상실을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아무런 희망도 없이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그분의 모습이 된 것이다.
  그러나 그분의 이런
모습은 몇가지 중요한 점들을 망각하고 계신 거란다. 나는 그분의 아들로서
그분의 사실적인 남자다움을 보았었다.
  화재와 홍수로 하루아침에 보금자리를
잃어버린 불쌍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여러 날동안 밤을 꼬박 새우며 보내시던
그분의 모습.
  당신의 아이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주기 위해 평소보다
두배 세배씩 일하시던 모습.
  아들의 생일을 축하해 주려고 먼길을 새벽부터
걸어 차비를 아끼시며 용돈을 절약하시던 눈물겨운 내핍생활.
  그리고 자신이
필요한 것은 별로 없다 하시면서 허름한 옷을 입고 식탁에서는 수저도 들지
않고 밖에서 먹었노라며 우리가 먹는 모습을 지켜보시던 그분을 보았다.
  나는, 남자다운 힘을 가지고 그 힘을 남들을 돌보는 일과 서로 나누는 일에
쏟아붓던 그분을 보았다. 그 무엇도 나의 눈에 비친 그분의 남자다움을
손상시킬 수는 없을 게다. 그분은 좋은 사람이셨다. 작은 일에서도 그분은
매우 큰사람이셨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당신 스스로는 그러한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하신다. 그분은 남자답다는 것이 단지 사내답다는 것을 의미했던
시대를 살아오셨고, 그런 기준으로 당신 스스로를 판단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시대가 많이 변했다.
  너는 다른 세계, 다른 재능과 다른
도전들을 제공하는 세계에서 태어났다. 남자다움의 새로운 전망은, 우리
사내들의 특징인 공격적이고 경쟁적인 잔여물들에 그리 얽매이지 않을것을
요구한다.
  너는 강인함을 포현하는 데서, 지배럭을 보이는 데서, 용기를
나타내는 데서, 과거와는 전혀 새로운 방식을 개발하기 위해 모색할 필요가
있다.
  너는 세계를, 네 앞에 싸우고 지배해야 할 적으로 서게 하지 않고도
남자다움을 나타내는 것이 가능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넓은 범위에서
다른 사람이 아닌 네 스스로가 그런 방식들을 발견해야만 한단다. 과거에는
성년으로 소년을 이끌어가는 통과의 의식이 있었다. 사람들은 나눔이 필요한
지혜와 책임감을 갖고 그곳을 통과했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그런 의식행위를 갖고 있지 않다. 우리는 누군가에
의해 성년으로 인도되지 않는다.다만 어느날 갑자기 그곳에 도달해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뿐이다. 우리 신체가 우리에게 그곳에 도달했음을 알릴
때, 거기엔 욕망과 갈망, 그리고 아무리 채우려 해도 결코 채워지지 않는
욕구들이 함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욕망으로 얼룩진 그런 성년은 단지 우리의 사내가 만개 하는 것
이상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사내로서의 욕망에 이끌린 활동이 인간
사회의 도덕적 가치들과 보조를 맞추지 않을 때, 그런 행위는 세상에 해를
끼치기만 할 뿐이다.
  나는 네가 삶을 살아가는 동안에 이점에 대해 명확히
구별하길 바란단다. 사내가 된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남자가 되어야
한다. 남자라는 존재는 반드시 획득되어야만 하는 권리이며 소중하게 길러지는
명예란다.
  나는 너에게 그 권리를 어떻게 획득할 것인가와 과연 그 명예는
누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를 이 자리에서 이야기할 수는 없다. 단지
남자답게 되는 것은 반드시, 네가 되고 싶어하는 남자의 상에 뒤따르는
양심적 활동을 통해 이룩되어야 한다는 정도를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네가 스스로 그려낸 그러한 남자의 전망에 도달하려 노력하는 동안에도,
사내로서의 본성적인 메아리가 항상 너를 유혹할 것이다. 경쟁, 지배, 커다란
성적 자극, 그리고 채워질 수 없는 한계를 넘어서는 욕망이 항상 너에게
본능에 따라 행동하라고 속삭일 것이다.
  그러나 만약 네가 그런 욕구들을
극복하여 건전하고 올바르게 변화시킬 수만 있다면, 사내의 자연적 속성들은
남자의 진실한 척도, 즉 강인함과 명예와 도덕적 힘, 용기, 희생, 그리고
자신감으로 전환될 것이 분명하다.
  그런 식으로 너의 사내로서의 특징들을
인식하거라. 그것들을 축복하거라. 그것들을 영광스럽게 생각하거라. 그리고
너의 주변 세계의 기대와 요청에 응답하는 진실한 남자다움으로 전화시키거라.
  그러나 그것들이 결코 너를 압도하도록 그냥 내버려 두지는 말 것이며,
사내다움과 남자다움을 절대로 혼동하지 말고 네 자신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너 자신만의 고유한 남성다움을 성취하도록 하거라.
  무엇보다도, 지배와 파괴가 남자다움과 동의어라는 거짓된 믿음에
현혹되어서는 안된다.
  나의 아버지처럼 되거라. 자신이 태어난 세대의 집사로서 세상에 봉사하는
그런 남자가 되거라. 그리고 결코 다른 사람을 해치는데 자신의 손을 기꺼이
쓰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된다.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하지 말고 오직 네가
도달할 수 있는 거리, 그리고 네가 도달할 수 있는 지위로써 너의 위대함의
척도를 삼거라.
  오늘날의 세계는 지배하는 손이 아니라 사랑하는 손을 필요로
한단다. 네 손을 항상 그 사랑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 속에 있도록 하거라.


    3. 강인함이란

  어느날 나는 구멍가게 밖의 좁은 거리에서 서로 밀치며 다투는 한 무리의
소년들을 보았다. 많은 소년들에게 에워싸여 있는 혼자뿐인 소년은 몸짓으로
주위를 위협하고 있었지. 마치 자신의 공격자들에게 주먹을 휘두르기라도
할 것처럼.
  그러나 그 소년이 상대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었다. 그 소년의 주위를 둘러싼 다른 아이들은 그를 조롱하면서, 그에게
덤빌테면 한번 덤벼보라고 손짓했다. 그들은 그 소년을 덮쳐서 사정없이
때리려 하고 있었다. 그들은 단지 마음대로 주먹을 휘두르고 날뛰기 위한
첫번째의 구실을 필요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때마침 나이가 지긋한 중년
남자 한명이 그들의 곁을 지나가다가 그 광경을 보고 싸움을 말렸다.
소년을 조롱하던 아이들은 그 사람을 보더니 슬그머니 달아났다. 혼자
남은 소년은 비록 그의 공격자들로부터 풀려나긴 했지만 아직 완전히
안전하지는 못하다고 느끼는 듯 했다. 왜냐하면 그의 공격자들은 아마도
다른 날 다른 장소에서 그를 기다릴테니까.
  나는 그 싸움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단다. 그리고 난 그 원인이란게 그리 중요하지는
않을 거라고 확신한단다. 그들이 싸움의 과정에서 보여준 욕지거리와 잘못된
행동들에 비해서 말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오랜 세월의 - 아이들은 그들이
가진 신체적 힘의 크고 작음에 의해서 스스로의 가치를 측정한다 -
관행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런 것은 그다지 좋지 않은 관행이며 우리를
자랑스럽게 하기보다는 슬프게 만드는 통념이란다.
  그러나 어찌됐든,
육체적 강함을 그런 식으로 강조하는 것은 우리의 생물학적 표현에서 아주
중요한 것으로 지금껏 잔존해왔고, 심지어 우리는 내부에서 그러한 신체적
힘이 용솟음치는 걸 느끼길 무엇보다도 제일 좋아했었다.
  지금까지 그것이
우리 남자들에게 요구되는 모습의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러
세대동안 우리는 생물학적으로 감지되는 강인함 - 다른 사람을 지배하기
위한 강인함, 우리의 감정을 지배하는 강인함, 우리의 주변 세계를 지배하는
강인함으로 정의된 남자라는 통념과 함께 살아왔다.
  다른 사람보다 더
높이 오를 수 있는가, 더 많이 운반할 수 있는가, 더 빨리 달릴 수 있는가,
더 오래 일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보다 나은 남자일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을 신체적으로 제압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보다 강한
남자일 수 있었다.
  기쁜 일이나 슬픈 일을 경험할 때, 눈물을 얼마나
참아낼 수 있는가?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정말로 강한 남자로
보일 수 있었다.
  그러나 요즘의 세상에서는 강인함의 이러한 형식이
더이상 필요치 않다. 우리는 누가 승리할 것인가를 보기 위한 원초적
전쟁에서, 반대 세력에게 힘으로써 대적해야만 했던 생존의 물리적 현상에
더이상 얽매이지 않는다. 우리는 이제 육체적 강인함의 위대함보다는 정신적
강인함의 위대함을 더욱 필요로 한단다.
  내가 여기서 두 가지의 간단한 예를
들어보마. 너는 아마 내가 무얼 말하고자 하는지 금방 알게 될 것이다.
  지난 주에 나는 집에 혼자 있었단다. 나는 금요일 밤에 잡혀진 실내악단
연주회의
입장권을 두장 갖고 있었다. 나는 친구들에게 전화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연주회를 좋아할 만한 사람들은 다들 선약이 있거나 다른 일로
바빴고 시간이 있는 사람들은 클래식 음악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음악회의
  입장권이 그리 비싼 편은 아니었다. 나는 그것을 그냥 버릴수도
있었고, 아니면 혼자서 음악을 들으러 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어떤 것을
선택하건 나에겐 가책으로 남을 것이 분명했다. 나는
  그날 아침나절
대부분의 시간을 그 문제를 회피하면서 보냈다. 지갑 안에서 아무런 죄없이
쳐박혀 있는 입장권을 잊어버리려고 무던히 노력했다. 그러나 정오가
다가오자 그 입장권은 수천 파운드의 무게로 내 가슴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마침내 나는 차에 올라탔고 근처의 요양원으로 달려갔다. 나는 2층의 간호사
대기실에 가서 수간호사를 찾아냈다.
  "여기에 잠깐동안 외출할 수 있고,
음악을 좋아하고, 또 낯선 사람과 함께 연주회에 갈 마음이 있는 요양자가
있을까요?" 하고 내가 물었다.
  근처에 있던 간호사들은 서로 얼굴을 바라보고는
내말에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다양한 요양자들을 거론하기 시작했다. 에드너?,
프로랜스? 죠? 몇분후에 그들은 에드너가 제일 적합하다고 결정했다.
우리는 식당으로 가서 에드너에게 연주회에 갈 의향이 있는지를 물었다.
  "아니요, 난 원치 않아요."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낯선 사람과 함께
외출하는 것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그래서 다음으로 우리는 프로랜스를
선택했다. 우리는 그녀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두 손을 무릎위에
올려놓은 채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열여덟 살 정도였고, 거의 완전한
장님이었으며, 4인치 정도되는 밑창을 가죽끈으로 묶은 무거운 정형외과용
구두를 신고 있었다.
  "프로랜스, 이 젊은 청년이 오늘밤에 있을 음악회의
입장권을 가지고 있다는군요. 간호사가 말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는
당신이 함께 갈 수 있는지 알고 싶어해요.
  나는 간호사의 말에 웃으면서
말했다.
  "요양원이, 내가 젊은 청년이라는 소리를 듣길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유일한 장솝니다.
  프로랜스는 나를 향해 그녀의 무거운 안경을
돌렸다. "정말요?" 그녀가 말했다. "좋아요, 가겠어요. 나는 한동안 데이트를
한 적이 없었어요."
  우리는 잠시 음악회에 대해 서로의 의견을 나누었고,
그녀가 내차에 타고 내릴 때 겪게 될 어려움에 대해 얘기했다. 그리고 나서는
그녀를 데리러 올 시간약속을 정했고 남겨진 그날의 업무를 마감하기 위하여
그곳을 떠났다.
  약속했던 7시30분에 나는 다시 요양원으로 왔다. 프로랜스는
예쁜 드레스를 입고 어둠 속에서 휠체어에 앉아서 내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녹색 면장갑을 낀 손으로 지갑을 꼭 쥐고 있었다. 우리는
간호사에게 가볍게 인사를 하고 연주회 장소를 향해 그곳을 떠났다.
  모든 일이 부드럽고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프로랜스는 나의 차에 무사히
탈 수 있었고 휠체어는 트렁크에 그럭저럭 집어넣을 수 있었다. 연주회의
안내자 한사람이 나를 도와 음악관 안으로 프로랜스를 데리고 갔고, 내가
앉을 만한 장소를 찾는 동안 그녀의 곁에 계속 있어 주었다.
  프로랜스는
음악이 연주되는 동안 그녀의 휠체어에 앉아있기로 결정했다. 나는
통로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 그녀의 곁에 있을 수 있었다. 불이 꺼질
때까지 우리는 공통의 화제거리를 꺼내어 각자가 경험한 사람들과 장소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연주가 시작될 동안 나는 음악회의 프로그램을
그녀에게 찬찬히 읽어주었다 - 비발디, 바흐, 드보르작, 베토벤...
  그런 다음 음악이 시작되었다.
  한시간 반 동안 프로랜스는 보이지 않는
눈으로 무대를 응시하며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녀는 볼 수는 없었지만
몇해동안 들을 수 없었던 음악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녀의 입술에는 엷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녀는 음악에 몰두하여 결코 장갑을 벗거나 지갑을
내려놓지 않았다. 연주회가 끝나고 박수갈채가 잠잠해진 이후에, 그녀는
그 연주회의 프로그램 한장을 자기에게 줄 수 있는지를 물었다.
  "나는
물론 그것을 읽을 수가 없어요. 그녀가 말했다. "그렇지만 나는 그것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그 이야기는 더이상의 에피소드가 없다. 나는 그녀를
다시 요양원에 데려다 주었고, 그녀는 내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간호사들은 휠체어를 밀며 그녀와 농담을 주고받았고 그녀를 다시 그 어두운
방으로  데리고 갔다. 그녀의 녹색장갑은 이제 그녀의 지갑위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지갑 아래, 즉 그녀의 무릎 위에는 얄팍한 연주회의 프로그램이
놓여 있었다.
  이야기는 이것이 전부란다. 더이상은 아무것도 없다.
이제 두번째 이야기를 시작하마. 어느 여름날, 그러니까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단다. 나는 하애네스라는 이름을 가진
흑인 남자와 그의 아들 갈버트와 함께 어느 컨트리클럽에서 일했던 적이
있었다. 하이네스는 약 60세 가량이었고 얼굴에는 항상 점잖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갈버트는 20대 중반의 남자로서 머리를 매끄럽게 쓸어올리고
엷게 착색한 안경을 쓰고 있었다.
  그때만해도 인종차별이 공공연한 일이었고,
그들은 흑인이었기 때문에 식사를 할 때는 항상 부엌 근처의 계단위에 있는
식당에서 멀리 떨어진 계단 아래의 보일러실까지 가서 식사를 해야만 했다.
나는 음식을 들고 그들과 함께 하기위해 보일러실로 통하는 계단을 내려갔다.
  "당신은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하이네스가 말했다. "당신은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습니다.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저들의 사고방식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렇게 대꾸했다.
  "당신 마음대로 하십시요. 하이네스가 귀찮다는 듯이 말했다.
"그것이 당신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을 테니까요.
  갈버트는 웃으며 머리를 가로저었다. "당신은
스스로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면서 괜한 애만 쓰고 있어요." 그는 트럼프
놀이용 탁자를 끌어당기며 나에게 말했다. "그런 문제에 대해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후로 나는 경영자와 다른 종업원들을
설득하러 다니며 매일 매일 하이네스와 갈버트를 지켜보았다. 그렇지만 나는
하이네스와 갈버트가 그런 차별대우에 약간의 증오심이나 원한을 드러내
보이는 것을 결코 발견하지 못했다. 그들은 언제나 묵묵히 점심식사를
했고, 잠깐동안 트럼프 놀이를 즐겼고, 사람들이 외출하면 방을 청소했고,
밖에서 돌아온 사람들의 구두를 닦는 일을 했다.
  날마다 그들은 마지막까지
남아서 일을 했고 닦아놓은 구두의 목록을 주인에게 건네주고는 다음날
아침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때때로 내가 늦게 집으로 돌아갈 때에도
하이네스와 갈버트는, 골퍼와 그의 가족들의 웃음소리가 식사중인 방,
또는 위층의 라운지에서 흘러나오는 동안까지 그들의 구두에 열심히 광을
내고 있었다.
  여름이 끝나갈 무렵 나는 대학에 진학했고 그곳을 떠나게
되었다. 그러나 여행할 때에 그 컨트리클럽을 통과할 기회가 닿으면
언제나 하이네스와 갈버트를 만나러 찾아가곤 했다.
  하루는 우연히 우리
지역신문의 기사를 읽게 되었다. 그 기사는 어떤 컨트리클럽에 강도가
들었다고 씌여 있었다. 그 클럽은 하이네스와 갈버트, 그리고 내가
어렸을 때 종업원으로 일했던 곳은 아니었다. 기사는 한 흑인이 그곳에서
일하는 친구를 돕기 위해 로커룸에 뛰어들다가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죽었다고 했다.
  그 흑인은 다름아닌 갈버트였다. 그를 쏜 경찰관은 나의
고등학교 선배였다. 그 자는 학생시절부터 불량배였다. 그는 체인과
쇠파이프로 사람을 때리고 다녔기 때문에 모두가 두려워하는 존재였다.
그 기사에 의하면, 총알은 갈버트의 등을 뚫고 들어갔고 그가 총을 들고
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경찰관은 자신이 정당방위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목격자가 아무도 나서지 않았기 때문에 경찰관의 주장을 반박하는
의견은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그 기사를 읽는 순간 분노와 슬픔으로
피가 끓었다. 곧장 차를 타고 하이네스를 만나러 갔다. 여전히 컨트리클럽의
벤치에서 구두를 닦고 있는 그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갈버트는 아무도
해치지 않았어요. 나는 따지듯이 말했다.
  "나도 그걸 알아요." 하이네스는
닦은 가죽구두에 다시 끈을 묶으며 내게 대답했다.
  "전 그 경찰이란 작자와
같은 고등학교에 다녔었어요. 그자는 당시에 불량배였고, 지금도 역시
불량배예요. 그자가 등뒤에서 갈버트를 쏜거예요. 내가 단숨에 말했다.
  "그건 나도 알아요." 하이네스는 계속 무미건조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런데 왜 당신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거죠?" 나는 그만 화가 나서 고함을
질렀다.
  하이네스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맑았다. 그러나
그눈에는 슬픔이 가득 차 있었다. "갈버트는 거기에 가지 말았어야 했어요."
  그가 말했고, 그것이 전부였다. 인생을 통하여 겪었던 가장 커다란 고통에도
불구하고, 아들이 숨을 거둘 때까지도 그를 둘러싸고 있었던 커다란 불법과
불공평에도 불구하고, 하이네스는 세상의 모순에 대해 결코 불만을 표출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갈버트가 거기 가지 말아야 했다고 말할 뿐이었다.
  나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와 슬픔을 억제하기 힘들었다. 눈물이 나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내가 무슨 말을 듣고 있는지를 도대체 믿을 수가 없었다.
경찰제복을 입은 불한당의 손에 그의 아들이 불법적으로 총질을 당했다.
그런데 법치국가를 자칭하고 있는 이 사회가 그걸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부당성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있겠는가? 하이네스는
곧 얼굴에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가로 저었다.
  "당신이 화가 나리란
건 알아요. 나는 당신보다 훨씬 더 화가 나요. 그자가 우리 아들을 죽였죠.
나는 그 자를 감옥에 처넣고 싶어요. 그리고 그러기 위해 노력할 거예요.
그렇지만 갈버트가 당한 일을 다시 되돌리진 못해요. 갈버트는 흑인이면서도
자기가 속해있지 않은 곳에 갔기 때문에 억울하게 총에 맞았어요. 그러나
내가 갈버트의 정당성을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은 사실 이 사회선 아무것도
없어요. 그앤 거기 가지 말았어야 했어요.
  나는 아들을 잃어버린 사람
앞에서 망연자실한 채 서 있었다. 그는 분명 아들의 죽음을 고통스러워했지만,
그의 감정은 매우 심오하여 지극히 평온하기까지 했다. 그는 분노와 복수심을
정당화하기 위한 논리를 하나도 전개하지 않았다. 그는 고통을 증가시킬
격한 행동은 전혀 취하지 않았다. 그는 강인하게 버티고 서 있었다. 그는
치미는 분노와 슬픔을 가슴으로 억제할 수 있었기에 자신의 떳떳한 기질을
지킬 수 있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가 자포자기하고 무능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이네스의 눈에서 지혜를 찾을 수 있는 사람은 그가
숙명론자나 비겁자가 아니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도덕적 중심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를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산처럼 강인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처럼 강인한 사람이 되지는 못했다.
나는 분노로 피가 끓었고, 갈버트의 살인자에게 무서운 복수를 꿈꿨다.
모르는 사람들은 나를 정의파, 혹은 강인한 사람으로 볼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하이네스만큼 강할 수는 없었다.
  다른 면에서 본다면 그는 결코 강하지
못했다. 그는 되든 안되든 자기 아들을 죽인 한 낯선 남자를 고소하기 위해
고향에 갈만큼 강인하지 못했다. 그는 삶의 가혹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뿐이었다. 자기 자신의 만족감을 위해 타인에게 손을 내미는 것은 그의
방법이 아니었다. 그는 내가 사준 차표를 쓰지 않았다. 내가 그 앞에서 보인
행동에 대한 격려도 없었다. 그건 결코 그의 강한면이 아니었다.
  프로랜스와
하이네스, 두 사람이 지닌 두 가지의 강인함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두 사람은 매우 다른 방식으로 강인했다.
  너는 그것을 알아야
한다. 모든 사람은 각자가 서로 상이한 강인함을 지니고 있다. 바이올린을
배우기 위해, 혹은 양자역학의 신비를 풀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는
사람들은 늙은 부모를 모시고 묵묵히 고향을 지키는 사람의 강인함에 대해
제대로 알 수 없다. 독립하고 싶은 감정을 억누르고 부모님을 모시고 친지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자기 자신을 포기해야 하는 사람은 누구도
미칠 수 없는 강함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강인함은 결코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란다.
  너는 네 자신의 고유한 강인함을 찾아야 한다.
보통 사람들은 무력으로 강인함을 가장하고 커다란 가식으로 둘러싼 치장으로
강인함을 측정하는 경향이 있다.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 높은 산을 정복하거나
집에 침입한 강도를 물리칠 때, 그 사람에게서 강인함을 쉽게 느낀다.
사람들은 두려움을 극복한 사람을 주목한다. 그리고 두려움의 극복은
사람들이 쉽게 알 수 있는 강인함이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더 강한 것이
존재한단다. 모든 사람은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싸움에서 상처를 입는 것을
두려워하고, 결혼하는 걸 두려워하고, 곤경에 빠지는 걸 두려워하고, 혼자
있는 걸 두려워한다.
  그러나 남자답고 강하다는 것이 단지 그런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이라고 규정한다면, 그것은 결코 너를 강하게 만들지 않는다.
그런 규정은 너를 오히려 더 나약하게 만들뿐이다. 진정한 강인함은
두려움을 억지로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신념이기 때문에 두려움이
자리잡을 수 없는 것이란다.
  마틴 루터는 하나님이 자기 자신의 환상일
뿐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 자신의 강인함을 가장 간명하게 표현할 수
있었단다. "나는 여기에 서 있다. 다른 데에 있을 수는 없다."라고 그는
말한다. 네가 어떤 일에서 이 표현을 제대로 쓸 수 있다면, 다른 모든
거짓된 강인함은 사라질 것이다. 너는 두려움이 신념으로 극복되어지고,
분노가 확신으로 극복되는 걸 발견할 것이다. 너는 하이네스처럼 동요하지
않는 평화를 찾을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너는 남을 속이지 않고, 남에게
강변하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 의문을 갖지 않는 진정한 강인함을
소유할 것이다.
  네 자신의 내부에서 그러한 강인함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하거라. 그런 강인함은 물리적인 지배력을 추구하는 분노나 의협심,
그리고 추진력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건 네 마음속의 평화로움에 있다.
  너는 네 주위의 사람들이 조롱하고 겁장이라고 비난할 때도 싸우지 않고
돌아서서 떳떳하게 걸어갈 수 있겠느냐? 비록 네 자신이 사람들의 손가락
질을 받게 되더라도, 누구나 싫어하는 사람을 너의 친구로 기꺼이 맞아
들일 수 있겠느냐? 자기 조직에 가입시키기 위해 사람들을 괴롭히는 거대한
조직에 대항해 싸울 수 있겠느냐? 이러한 것은 특히 젊은이들이 겪는
강인함에 관련된 문제들이다.
  너는 네 친구의 여자를 좋아하더라도, 친구를
위해 그녀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을 수 있느냐? 네가 원하지 않는 만남이나
술자리를 단호히 거절할 수 있느냐? 만약
  네가 그럴 수만 있다면, 너는
강인한 사람이고, 너를 단지 육체적으로 이길 수 있는 사람보다 훨씬 더
강인한 사람이다. 기억하거라, 강인함은 육체적 힘이 아니다. 강인함은
마음의 속성이다. 강인함의 반대는 나약함이나 두려움이 아니라 의심이고,
자신감의 결여이고, 건전한 긴장감의 결핍이다.
  네가 분별력이 있다면,
그리고 너의 길이 순간적인 판단에서 잘못되었다고 느껴질지라도 그 길을 계속
따를 수 있는 신념있는 사람이라면, 너는 결국 강인한 사람이 된다.
  중국의 성인 노자의 말을 기억하거라. "가장 진실된 강인함은 결코 사람들이
두려워하지 않는 힘이다.
  육체적 무력에 기초한 강인함은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강인함이다.
  사랑에 기초한 강인함이야말로 바로 사람들이
진정으로 열망하는 그런 강인함이란다.

 

    4. 직업

  나는 주위에서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발견해야 한다."고 말하는 걸 자주
듣게 된다. 이 말에서 그 사람들이 사실상 전하고자 하는 의미는 "나 자신이
나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일 게다. 삶이란 것은 무한히 창조되는 경험이고,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만들고자 하는 것을 매번 선택함으써 자신의 모습을
형성해 간다는 말이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할 것인가'를 결정할 때 반드시
자기 자신을 위해 선택해야만 하는 이유는, 그것이 자신의 가치에 대한
믿음과 안녕을 위해서 무척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란다. 비록 네가 네 자신의
일을 단지 돈을 벌기 위한 목적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고 믿는다 해도,
너의 일이 너를, 즉 현재의 네 존재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곳이
네 자신의 시간을 투여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내가 조각가로서 명성을
얻는데 전념하기 몇 해 전의 일이 기억나는구나. 그때 나는 택시를 운전하고
있었단다. 나는 사람들에게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하곤 했었다.
  "나는 결코
일에 있어서의 전문성으로 인해 삶에서 혼란을 겪지 않을 직업을 원한다. 라고.
  그러나 그 일을 시작한지 6개월이 채 지나기도 전에 나는 택시운전사답게
말하고 있었고, 택시운전사답게 생각하고 있었고, 택시운전사의 눈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의 일상적인 화제들이 그 직업에서 나오는 삶에
대한 관측의 결과로부터 비롯되었던 거란다. 단지 그 일을 하고 있고, 그
일에 습관이 들었기 때문에, 나는 그곳 사람들과 기업의 정치판에 자연히
휩쓸렸고, 밤샘 운전으로 생활의 리듬까지 바꿔졌었다. 운전대신 조각을
하고 있을 때조차도 내 머리속에는 아직 택시운전사의 의식이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그일을 좋아하든 말든 어쨌든지 나는 택시운전사였단다.
이런일은 직업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쉽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심지어 만약 네가 그 직업이 싫어져서 그 일로부터 멀리 떨어지려고 한다 해도,
네가 그렇게 하는 행위 자체에 의해서 그 직업을 반대하는 사람이라는 것으로서
네 자신을 정의하게 되는 거란다.
  너는 너의 시간을 어떤 직업에 투여함으로써
너의 의식까지도 그일에 쏟아넣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그 직업은 사실상
현존하는 너의 삶 전체를 모두 채우는 것이란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사실에
대해 지나치게 무지한 것 같다. 그런 사람들은 어떤 직업이 열정과 흥분을
자아내기 때문에, 혹은 돈을 많이 벌 수 있기 때문에, 혹은 그들에게 명성을
가져다주기 때문에 그 직업을 선택한다. 그들은 그 일에 자기 자신의 시간과
졍열을 모두 쏟아부었지만, 그러나 서서히 무관심과 공허함을 느끼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때에는 오히려 그일이 그들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름으로써 시간을 낭비하게 되고, 곧이어 옥죄임과 덫에 걸려있는 자신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써로라는 사람이 말한 것처럼 지나치게
절망적인 삶을 - 불충분하고, 불행하며, 뭘하고 있는지 불확실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군단에 합류하게 된단다. 그러나 재정적 안전에 대한
유혹과 앞길을 알 수 없다는 두려움이 그들의 절망적인 삶을 변화시키지
못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이 현재 머무르는 곳을 정당화시키는
데나 혹은 그들에게 의미성을 부여할거라고 생각되는 업무 이외의 활동을
찾는데 모든 정력을 소비한다.
  그러나 그런 노력은 결코 전체적인 성공을
거둘 수는 없단다. 우리는 바로 우리가 하고 있는 일 그 자체이다. 그리고
그일을 하면 할수록 점점 더많이 그일의 한부분이 되어가는 것이다. 그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우리의 삶 자체를 바꾸거나 우리 삶의 기대치를 바꾸는것
뿐이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우리의 기대치를 낮추게 되면 그땐 스스로 꿈을
죽이는 게 된다. 그리고 꿈과 함께 그 사람은 이미 반쯤 죽은 거나 다를 바
없다.
  그러므로 네가 직업을 선택할 때는 무척 조심스럽게 대처할 필요가
있단다. 너는 체면과 돈, 시시각각 변하는 매력이라는 척도를 초월하여 네가
할일을 선택하는 것이 필요하다. 만약 너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 것인지
스스로 원하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에 기초하거라. 시간은 네일의 가치를
측정하는 방법이 아니라 네가 그 일을 경험하는 방법인 거란다.
  너에게
필요한 것은 직업(Vocation)이란 것으로써의 일에 대한 생각이다. 아마 이
단어의 어감이 딱딱하게 들릴지도 모르겠구나. 그러나 이 단어는 그 의미에
깊은 지혜가 포함되어 있다. 이 단어는 '부른다(calling)'를 의미하는
라틴어로부터 유래했고, 또 '목소리(voice)'라는 단어에서 나왔다. 이 말은
어떤 일이 사실적으로 되어야만 하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은 네가
하고 싶어하는 어떤 일이 너를 부르는 것이어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 그리고
또한 그 일은 현재의 너 자신과 네가 세계를 향해 말하고 싶어하는 것에
뚜렷한 목소리를 주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
  그래서 사실상
직업은 그 일을 행하기 위해 너를 부를 것이고, 또한 너에게 목소리를 주어
네 삶에 대해 말할 것을 허락한단다. 이는 일의 형태가 단지 돈을 벌기 위한
노동이라는 것과는 매우 다른 의미다. 또한 심지어 네가 그 일을 대표한다고까지
인정받게 되는 숙련이라는 영역에서의 전문성과도 다른 의미다. 직업은 네가
불가항력적으로 꼭 해야한다고 느끼는 무엇이거나, 적어도 최소한 네가 의미
있다고 느끼게 만드는 무엇이다.
  직업은 네게 네삶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권리를 너에게 허락하기 때문에 선택되는 것이지. 돈벌이나 혹은 다른 사람에
대한 체면 때문에 선택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건 결국 네가 어쩔 수 없이
사랑할 수밖에 없는 어떤 것이 되어야 한다.
  너는 네 직업을 발견했을 때,
온 마음을 다해 그것을 축복하거라. 그런 행운은 쉽게 찾아오는게 아니란다.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목표물을 향한 눈으로 직업을 구하고, 그래서 그들은
그일에서 가차없이 승리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돈이나 위신을
얻을 수는 있지만, 그들의 마음을 잃게 될 것이다. 결국 그런 사람들의
하루하루는 자신을 돈으로 바꾸는 상품밖에는 아무것도 아닌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곧 시들어 죽어가기 시작한다.
  나는 종종 클리브랜드의 거리에서
만났던 한 남자를 생각하게 된다. 그 남자는 자동차공장의 조립라인에서
노동자로 일하고 있었다. 그는 자기의 노동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종일
서서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너무 지겹다고 말했다. 나는 그렇게 지겨워
하면서도 왜 그 일을 그만두지 않는지를 그에게 물었다.
  "저는 은퇴하려면
아직도 13년이나 남아 있습니다." 그는 짧게 대답했고, 그렇게 할 계획이었다.
  그 남자가 돈벌이를 포기하기보다는 13년간의 죽음이라는 문장을 더 쉽게
받아들임으로써 그의 삶은 그렇게 자기 자신으로부터 더 멀어져 갔던 것이다.
  그 남자와 그런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의 나는 약 20세정도였다. 나는 젊고
자유로왔었지. 그래서 난 그가 말하는 걸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단다.
한 남자가 그것도 자기 손으로 그일을 꼭 쥐고 있음으로 인해 자신의 삶을
기꺼이 죽어가게 내버려 둠으로써 결국 삶에서 패배한다는 것은 당시의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이젠 너무나 잘 이해하게
되었다. 직업을 찾을 때에, 사람들은 주변의 혼란스러운 관점들에 유혹되어
자기 자신에게는 아무런 내적 만족감도 제공하지 못하는 직업을 선택하곤
했었다. 그런 사람은 봉급날에서 다음 봉급날까지 자신의 육신을 굴리고,
항상 꿈꾸어온 근사한 자동차나 보트를 타는 풍요로운 삶을 꿈꾸며 살았겠지.
그는 해가 갈수록 승진했을 거다. 왜냐하면 사업주가 그 사람의 인내를
보상했을 것이기 때문에.
  그의 봉급은 당연히 오르게 되고, 다른 형태의
일을 찾기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선택의 폭은 점점 좁아진다. 그리고 그는
이제 유일한 낙인 돈벌이와 판에 박힌 일에만 안주하며 살아간다.
  그는
결혼하고, 집을 사고, 아이를 갖고, 중년에 들어서겠지. 그와 함께 그가
젊었을 때에는 무척이나 자유롭게 보였던 그 직업은 점점 더 무미건조하고
무감각한 것이 되어갈 것이다. 해가 갈수록 그는 일에서 점점 더 싫중을 낸다.
일이 결국 그를 질식시킬 것이지만, 그에게는 마땅한 탈출구가 없다. 그는
살기 위해 돈이 필요하다.
  최소한 지금 벌고 있는 만큼의 보수를 받지
못한다면 직업을 바꾸는 일은 아마 고려할 수 없을 것이다. 가족의 건강과
안전에 대한 두려움이, 뭐든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가능한 세계로,
하지만 그에 대한 아무런 대가나 보수가 없는 세계로 달아나지 못하도록
막는다. 그래서 마침내 그는 현실에 굴복하고 만다.
  "은퇴할 때까지 아직도
13년이나 남아 있다"는 것에서 드러나는 그의 삶은 직업이 그를 석방시켜
줄때까지, 그를 자유롭게 놔둘때까지, 그 자유를 위해 연금을 지불할 때까지,
만기 출소일을 향해 하루하루 달력을 지워나가는 애타는 죄수의 삶이란다.
  사람들의 삶의 양태는 무척 다양하다. 그렇지만 젊었을 때 자신이 선택할
직업의 사실적 의미를 탐구하는 사람은 적단다. 어떤 직업에 자신의 삶을
허락하는 데 있어서, 그 직업의 함축적인 의미를 고려하거나 사색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다. 돈도 없고,
훈련도 없는 그들은 생존의 압력으로 둘려싸여 있는 세계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자아를 실현하기 위해 투쟁하기보다는 오직 자기 자신을 일방적으로 제공
하기만 하면 되는 안전한 삶의 방편들 중에서 최선의 교환방식을 선택한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명백히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이 뒤쫓은 꿈은
거짓이란 사실이 드러난다. 그리고 만약 직업을 선택할 때 자기 자신의 생각과
관심에 더 근접해서 걱정했더라면 피할 수도 있었던 덫에 걸려든다.
  그렇지만 네가 네 자신의 생각과 관심에 더 근접해서 결정한다고 해도 옳은
선택을 내리기란 쉽지 않다는 것을 항상 명심해야 한다. 사실, 어떤 일에
대한 생각만 가지고는 네가 하고 싶어하는게 정말로 무엇인지를 알기가 어렵다.
너는 그 일을 직접 경험해 봐야만 한다. 그리고 그 일이 너에게 얼마나
적합한가를 확인해야만 한다. 그 일이 네 자신이 되고, 또 네 자신이 그 일이
될때까지 경험을 통한 깊은 이해가 있어야 한다. 그런 뒤에 너는 그 일을
직업으로 삼을 것인지 아니면 버릴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물론 자신의
안녕과 재산을 보장하는 어떤 일을 그냥 포기해버릴만한 용기를 가진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러나 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경로에서 한두 번, 혹은 더 많은
이직의 경력을 갖지 못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누구든지 자기 적성에
맞지 않은 직업을 과감히 포기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그리고 마음에 와닿는
어떤 일을 위해, 혹은 알지 못하는 어떤 일에 다가가지 못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이다. 비록 그것에 위험이 있고, 손실이 있고, 빈곤이 있다 하더라도.
  만약 네가 네 자신의 가치에 입각해서 직업을 구한다면, 그로인해 사회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위기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점을 각오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안전하다는 것이 꼭 가치있는 건 아니며, 안전하지 못해도 의미있는
삶을 살아가는 고통이 주는 가치가 오히려 네 꿈을 죽이는 안주와 대별되는
거란다.
  너를 고용한 사람들의 눈에 너는 단지 노동력이라는 상품에
불과하다는 것을 결코 잊지 말거라. 너는 유용한 노동력을 제공하기 때문에
봉급이 주어지는 것이다. 만약 네가 제공한 용역이 더이상 쓸모가 없는
것이라면 어떻게 그 일이 너에게 명예로울 수 있고, 어떻게 그 일을 부지런히
할수 있고, 어떻게 그 일을 위임받을 수 있겠니?
  만약 너에게서 더이상
공헌할만한 무엇이 요구되지 않는다면, 그 일에서 너는 더이상 필요치 않은
존재가 되고, 마음대로 떠날 수 있도록 내버려두어지게 된다. 비록 네가
마음속으로 그 직업을 좋아하고 네 삶의 대부분을 그 일에 바치고 있다고
하더라도, 너는 단지 상업적 교환의 한 부분일 뿐이고 그러한 상업적 교환에서
중요한 공헌을 할 수 있을 때까지만 가치가 인정되는 사람인 것이다. 그것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이 사외의 경제적 거래의 본성이란다.
  그렇기 때문에
삶에 대한 사랑을 희생하는 것에 따르는 보수는 너를 얽어매는 직업에선
결코 지불되지 않는다. 그런 직업은 아마 너를 버려야 한다면 그렇게 할게다.
너도 필요하다면 그런 직업을 버릴 수 있어야 한다. 클리브랜드에서 만났던
남자는 아마 은퇴를 1년쯤 냠겨두고 해고당할지도 모른다. 아마 연금의 권리를
빼앗길 수도 있겠지. 그가 알지 못하는 법조문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는 완충기계에 볼트가 조여지기를 기다리다가 성급하게 행동한 나머지
조립라인에 몸이 끼어들어가 죽게 될지도 모른다.
  언제가 한번은 콘서트의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어하는 꿈을 가진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실패의
가능성을 두려워했던 그는, 안정적인 생활이 보장되고 보수도 든든한 예술
학교에 갔다. 하루는 내가 학위논문을 쓰면서 겪은 애로사항을 이야기하고
있을 때, 그는 갑자기 피아노 앞에 앉았다. 그는 건반위를 미끄러지듯이
아름다운 음악을 빠르게 연주하더니, 갑자기 손가락의 동작을 뚝 멈추는
것이었다.
  "당신은 진심으로 하고싶은 일이 무엇입니까?" 그는 말했다.
"난 사실 콘서트의 피아니스트가 되길 간절히 원했어요. 지금은 나 자신이
되고 싶어하는 사람이 된다는 게 얼마나 좋은 일일까를 생각하며 매일 시간을
낭비하고 있어요."
  이런 말로 네 삶의 마지막 묘비명을 장식하지 말거라.
네 마음을 불붙게 하는 것이 뭔지를 찾아내고 그 일을 하거라. 단지 먹고
살기 위한 일이 아니라 천직으로서의 직업을 선택하거라. 그러면 너의
마음에 평화가 깃들 것이다. 천직을 발견하는 대신 돈을 벌기 위한 직업만을
갖는다면, 결국엔 "저는 은퇴할 때까지 아직도 13년이나 남아 있습니다."라거나
"내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이 된다는 게 얼마나 좋은 것일까를 생각하며 매일
시간을 낭비하고 있어요." 라고 말하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최소한 그런 직업들보다는 나은 우리 자신을 소유하고 있단다.

 

   5. 소유물

  이런 일은 종종 일어난단다. 그렇지만 내가 확실히 기억하고 있는 일은
오레곤에 머물고 있을 때였다.
  당시에 난 마음에서 약 40킬로미터나 떨어진
작은 오두막집에서 살고 있었다. 그때는 내가 가진 소유물이라고 해봐야
내 차의 트렁크에 모두 쑤셔넣을 수 있을 정도의 것들이 전부였지. 그렇지만
거기엔 아무리 비싼 것이라도 비길 수 없는 나만의 소중함이 깃들어 있었단다.
-삶의 행로와 선택과 결정들, 그리고 또한 그것들은 내가 그때까지 살아온
역사였고 앞으로 살아가는데 힘을 주는 희망이었단다. - 과거의 추억이 깃든
골동품들과 앞을 향해 나아가게 만드는 것들.
  편지들과 책들, 친구가 만들어준
인형, 타자기, 카메라, 스테레오, 사진 몇장과 원고들과 일기장과 시들, 마음에
꼭드는 커다란 그릇과 냄비와 프라이팬...
  그것밖에, 아니 그렇게나 많이 소유했단다.
  그러나 어느 크리스마스날 내가 2주동안 자리를 비웠다가 오두막에
다시 돌아왔을 땐, 그 모든 것이 매캐한 연기만 남기고 불타버린 잿더미처럼
허무하게 사라져버렸다. 종이들은 갈갈이 찢겨졌고 타자기는 바닥에
내동댕이쳐져 조각나 있었다. 카메라와 스테레오는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심지어 사진들까지도 모두 망가져 있었다.
  내 삶의 파편들과 덩어리들만이
쓰레기처럼 그 오두막집 주위에 산산히 흩어져 있었던 것이다.
  인형은 찢기고
헤쳐져 난로에 쳐박혀 있었다. 누군가 그곳에 방뇨까지 했더구나.
  나는 그만
주저앉아 얼굴을 가리고 엉엉 울어댔다.
  그건 정만 슬픈 사건이었지. 그러나
때로는 삶이 추악한 형태를 띠고 우리에게 배달되기도 한단다. 누군가가
저지른 그 만행은 그때까지 나에게 발생했던 여러가지 일들 중에서 오히려
가장 좋은 일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 사건이 나를 그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시켰던 것이다. 그 일이 발생하지 않았다면, 나 스스로는 결코 그 소유물을
절반도 버리지 못했을 것이다. 나의 소유물은 곧 나였고, 나는 곧 그들이었다.
그것들 없이는 내 삶은 행로가 없는 삶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루하루가 지나면서 나는 그때까지 생각해왔던 것과는 전혀 다른 사실을
발견했단다. 잃어버린 편지 속의 추억들은 여전히 나의 기억속에 남아 있었고,
인형을 만들어준 친구의 손길은 여전히 내 마음속에 살아 있었다. 찢겨진
원고들은 나의 머리 속에서 더 높이 질적으로 성장했다.
  그렇지만 그런 것들은
시간의 흐름에 의해 자연스럽게 치유된 상처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새로운
창조적인 노력을 통해 나에게 열려졌단다. 책들은 도서관에 가서 빌려보았고,
결국 새로운 스테레오와 카메라도 얻게 되었다.
  삶은 게속되었고, 이제
잃어버릴 것이라곤 조금도 없었단다. 심지어는 전엔 결코 느껴보지 못했던
어떤 존재에 대한 고마움조차 느꼈지.
  그 도둑은 잔인한 선생이었지만 나에게
재산에 대한 어떤 생각을 일깨워 주었다. 그 순간부터 나는 앞으로는 물건들이
나를 결코 소유하지 못하게 할 것을 맹세했다. 반드시 내가 그것들을 소유
해야겠다고 말이다.
  그것은 어렵게 익힌 교훈이었지만, 모든 사람이 배울
필요가 있는 교훈이기도 하다. 지난주에 너는 얼마나 많은 물건들을 샀느냐?
네 삶은 얼마나 많이 소유하는가와 어떻게 구별되고 있느냐? 순간의 쾌락을
넘어서는 지속적인 행복을 만들어 내는 데는 얼마나 많은 물품들을 사용하고
있느냐?
  아마 그리 많지는 않을 게다.
  그러나 한걸음 더 나아가 고심해 보거라.
너는 네가 가진 것 중에서 얼마나 많은 소유물을 기꺼이 버릴 수 있겠니?
  아마 거의 없을 게다.
  우리의 소유물은 대부분이 우연한 사고로 없어질 뿐이다.
지갑에서, 선물꾸러미에서, 점차로 눈이 쌓이듯 늘어나기만 하는 소유물은
우리를 그들의 한 부분이 되게끔 만들 때까지 우리의 주위에 계속 축적된다.
우리는 소유물이 되고 소유물은 우리가 된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소유물일
뿐이다.
  우리의 내적 가치는 우리가 가진 소유물의 가치로 측정된다. 우리가
자신의 소유뮬과 동격이 되어가는 동안에도 우리는 왜 그 물건을 버릴 수
없는가 하는 이유를 찾기에 급급해한다.
  "그건 누군가로부터 받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나는 몇년동안 그것을 계속 사용해 왔다."
  "아마 그게 필요할 날이 언젠가 있을지도 모른다."
  "나만큼 그걸 가치있게
평가하는 삶은 아무도 없다.
  감당하기 힘들만큼 소유물이 쌓이는 동안에도
우리는 왜 그 물건을 팔아치울 수 없는가 하는 이유를 댄다.
  "나는 그것이 제값을 받을 만한 곳에 가지 못했다.
  "아무도 사길 원치 않는다."
  그에 대한 모든 반론에 대해, 결국에 가서 우리는 "나 자신을 위해 그것을
갖고 있고 싶다. 는 궁색한 말로써 변명한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소유물이
사실 모충에서 자라난 나비에 불과하다는 것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우리가
소유의 욕망에 눈이 멀 때, 바로 그 나비가 환상의 날개짓을 시작한다. 우리는
그것들을 자유로서, 그리고 행복으로서 바라본다. 우리는 그것들이 판에
박힌 듯 지루한 우리의 삶을 변화시킬 힘을 가졌다고 믿는다.
  우리는 정력과
열정을 투자해 소유를 추구한다. - 소유는 우리에게 일시적인 지향점과
의미를 제공한다. 우리는 그 뒤를 뒤쫒는 스릴을 만끽한다.
  우리가 마침내
그것을 얻었을 때, 그것은 정상에 다다른 것 겉은 순간적인 충족감을 주지만,
그러나 곧이어 산중에 흩어지는 메아리처럼 공허한 감정이 엄습해 온다.
소유욕에서 비롯된 스릴은 손에 들어오자마자 눈이 녹듯이 차갑게 식기
시작한다.
  그래서 우리는 또다시 뒤쫒기를 시작하게 된다. 새로운 목표물에
대한 환상을 가짐으로써, 그리고 그 반복되는 싸이클은 생각을 바꾸지 않는
한 언제까지고 계속된다.
  점차적으로 우리 삶은 우리가 갈구해왔던 물건들의
형상으로 가득 찬다. 우리는 소유물이 많아지는 데에 따라 그에 비해 자기
자신의 삶의 비중이 그만큼 줄어들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는다. 우리는
그 소유물들을 보관하기 위해, 그것들을 유지하고 도둑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강구해야 할 것이 요구된다. 우리는 그것들을 나누어 줄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결코 고민하지 않는다. 그것들이 낡고 쓸모없어질
때는 버리고 새로운 것으로 바꾸어야겠다는 생각을 마음속에 품기 시작한다.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소유물들은 우리의 정신을 온통 자신들을 향해 쏟도록
만든다.
  그런데 우리가 한동안 어떤 물건을 소유한 뒤에는, 그것들이 우리
삶에서 없어서는 곤란한 부분을 이루게 된다. 우리는 어느날 아침 눈을
뜨고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그렇지만 던져버릴 수도 없는 것이 온통 우리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들은 우리의 보금자리
주변에 굴러와 박힌 돌처럼 삶에서 습관화된다. 우리의 자유는 사라졌다.
그것들이 사라져버린 곳엔 책임과 소유감만이 남는다. 사실상 우리는
흩뜨려진 자기 재산의 관장자가 될뿐이다.
  우리는 자유를 간절히 바랐지만
그것들은 자유가 아니었다. 우리의 환상의 날개는 무기력으로 변해버린다.
우리의 삶은 육체적인 감각만을 개발해왔기에 돌처럼 땅에 속박된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만약 하루하루의 생존을 위해서만 살아가는
삶을 원치 않는다면, 혹은 지고한 금욕주의 사상에 삶을 헌신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다는 것이 소유의 환상에 사로잡힌
것보다 더 깨끗하거나 현명한 삶을 만들어 주지 못하리란 것은 분명하다. 그런
식으로 사는 것은 단지 우리가 빈곤에 대한 강박관념을 갖도록 만들뿐이며,
그것이 결코 소유욕에 대한 강박관념보다 더 낫다고는 할 수 없다. 자기
연민에 찬 빈곤함도 혹은 부유함도 모두 갖지 않는 것이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길이다.
  어떻든, 우리는 소유물의 가치에 대한
올바른 척도를 발견할 필요가 있단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그것들의
올바른 가치를 부인하지 않고도, 우리 자신을 그것들의 무게로부터 해방
시킬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쉽게 활용할 수 있는 시험법이 있다. 그
소유물이 나로 하여금 다른 사람에게 더 많이 베풀 수 있게 하는가? 그
물건의 아름다움과 실용성이 현재 내 삶의 전망과 일의 전망을 더 높이
끌어올리게 하는가?
  그러나 이 시험법은 그렇게 간단명료하지는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개인의 양심에 크게 좌우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절대적인
척도를 만들어 세상에 도입하려는 노력은 그 의도가 비록 고귀하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실패할 것이기에 간단명료하지 않다는 것이 절대적인
흠이 되지는 않는다.
  가령 젊은 피부를 유지하도록 해주는 어느 성형외과
의사가 조용하고 안락한 메르세데츠 승용차를 몰기 때문에 그의 직무를
보다 더 잘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다른 사람을 위해선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복잡한 거리의 한쪽
귀퉁이에서 굶주린 위장을 채우기 위해 손을 벌리고 앉아 있는 사람보다
더 나을게 무엇인가? 단지 지구상의 자원을 너무 낭비하는 의사의 과소비에
초점을 맞추어 좀 덜 비싼 차를 탈 것을 요구하면서도 왜 그의 기술과 능력을
사용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초점을 맞추지 않는가?
  물론 메르세데츠를 타는
의사는 자신이 생각하는 선을 행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가 결코 베푸는
사람이 아닐 것이라는 나의 막연한 느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내가 판단할
일이 아니다. 어린아이들이 쓰레기통을 뒤지고 거리에는 굶주린 사람들이
늘어서 있는 세계에서는 지금의 나의 삶의 방식에도 역시 똑같은 의문을
제기한 사람들이 수없이 많을 수 있기 때문이다.
  완전한 세계라면, 아마도
우리는 더 명백하게 모든 것을 볼 수 있을 테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셰계는
그만큼 완전하지는 않다. 따라서 우리 각각은 우리의 재능과 삶의 번영을
함께 나누고자 하는 희망, 그리고 주변 세상에 도움을 주는 것을 허락할
자애와 자신의 안락을 위한 탐욕 사이에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한다.
  메르세데츠를 타는 그 의사의 동기는 아마도 순수하지
않거나 이타주의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는 아마 사람들의 눈에 띄는
차를 타고 싶어했을 터인데, 왜냐하면 그것이 성공의 상징이고 심지어 그를
직무에 전념하도록 만드는 동기를 부여한다고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가 주위에 이익을 주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자기 자신을 위한
배려와 다른 사람을 위한 배려가 적절한 균형을 이루도록 처신해야 한다.
그리고 또한 다른 사람이 성장할 수 있도록 삶의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나는 나의 안녕을 위한 내집을 가졌다. 그리고 나는
그 의사의 양심에 판단을 맡겨두었고, 그 의사도 나의 양심에 맡겨 둔다.
  너 역시도 이런 문제에 대해서 자주 양심과 부딪쳐야 할게다. 너는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를 차지하기 위한 투쟁이 벌어지는 시기를 반드시 겪게 될 것이고,
그때는 다른 사람의 눈에 비친 너의 모습이 제대로 반영되었는가를 보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가치있는 사람이 되도록 도와주는 최후의,
최신의, 혹은 최선의 방법은 무엇이더냐? 어떤 자동차를 타는가, 혹은
어떤 옷을 입는가이냐? 아니면 사회적 지위를 높일 수 있는 두드러진 어떤 것,
결국엔 현재 네 자신의 욕망보다 훨씬 큰 재물들이더냐?
  나 역시 그런 것이
지금의 젊은이들에게는 중요할 것이라고 이해한다. 그리고 자기 존중은
삶에 있어서 더 중요하고 지속적인 공헌을 하기 위한 토대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너는 상품의 이미지 창조자나 메이커들에 의해 조종당해선 안된다.
네가 더 새로운 물건들을 더 많이 갖고 싫어하도록 만드는 것이 그들의
임무이다.
  그 사람들은 네가 소유물에 대해 잘못 이해하도록 유도하는
그럴듯한 목소리를 만들어 내고, 미래에 얻게 될 행복에 대한 근거없는
믿음의 덫에 걸려들게 하며, 삶의 의미와 가치를 고민하는 너의 살아있는
감각을 다음번에 구입할 소유물에 대한 생각으로 꽉 차게 만든다.
  네가 좀
덜 가졌을 때 그 소유물들이 더 가치가 있다고 속삭이는 조용한 지혜와
인간에게는 재물의 축적보다는 나눔의 의미가 더 깊다는 것을 발견해야 한다고
말하는 지혜가 담긴 과거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너는, 재물이 너를 보다
나은 사람으로 만들 수 있는가? 더 나눌 수 있게 하는가? 더 줄 수 있게
하는가? 더 기꺼이 절망에 찬 사람들에게 선을 행할 수 있게 하는가? 라는
질문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만약 값비싼 청바지 한 벌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렇게 하거라. 그렇지만 그것이 있으면 선을 행할 수
있을 거라고 말할 때의 그 다짐이 단지 값비싼 청바지(매번 새로운 스타일로
출현하는)한벌을 새로 마련하기 위해서라면, 너는 네 욕망이 비롯되는
실제적 의도를 숨기고 단지 현재의 상태에서 부족해 보이는 청바지따위에
너의 삶이 조종당하도록 너 자신을 허락하는 것이 된다.
  너는 나나 혹은
메르세데츠를 모는 의사처럼, 네 스스로의 동기를 직시하여 보는 것이
필요하다. 너는 네 주위 세상에 공헌하기 위해 필수적인 것과 네 자신의
이미지의 가치를 증가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 사이의 구별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나는 네가 자신을 탐구하고 조사함으로써 스스로를 더욱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아들이 되기를 바란단다. 그리고 순전한 욕망의
수준을 넘어 네 시야를 끌어올리거라. 소유물의 가치에 대해 고려할 때에는
항상 네 주변에 대한 생각과 함께 하거라.
  나는 네가 최대한의 소유를
추구하는 것이, 단지 '추구'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깨닫기를 바란다.
그리고 너는 찾고자 하는 목적에 대한 실제적인 통찰력을 가져야만 한다.
그따위 하찮은 것들을 취득하는 활동에 아까운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기 전에.
  재산이 사람을 행복으로보다는 불행으로 이끈다는 사실을 깨닫기 바란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네 삶의 한계를 임의로 제한하기 때문이다. 나는 네가
그런 제한에서 벗어나 이 땅에 비추어진 순례의 행렬과 함께 오는 선택의
자유를 마음껏 만끽하길 원한단다.
  소유물이란 일단 네 손으로 그것을
잡는 순간에 환상에서 책임으로 변해버리는 카멜레온이라는 것을 알길 바란다.
그리고 그것들은 천상을 향한 네 눈을 땅아래로 끌어내려 붙박을 것이다.
그리고 또한 나는 소유물의 가치가 증가한다는 것이 주위 삶들의 가치의
증가와 대조됨으로써 공허하다는 사실을 네가 깨닫길 바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명심해야 할 것은, 네가 소유하고 있는 제물들이 너를
만드는 게 아니라 네가 그것들을 만드는 것이란 것 알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만약 그것들이 네가 꿈꾸고 있는 것을 실현하기 위한 역량을 증가시킨다면,
그것들은 선한 것으로 된다. 반면에 그것들 자체에 관심을 집중케 하거나
다른 사람들이 너를 측정하는 기준이 된다면, 그것들은 악한 것으로 된다.
그것들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가는 바로 너의 손에 달린 문제이다.
  일정한
시기마다 자신을 깨끗이 정화하거라. 쓰지 않는 물건들은 과감하게 내다
버려라. 가방 하나와 함께 오랜 여행을 떠나거라. 스스로를 돌아보거라.
자기 성찰을 통해 네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소유물의 대부분이 사실상 현재
별로 중요치 않은 장식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거라.
  그런 것은 네 삶을
조금도 도와주지 못하는, 미세한 조각조차도 아님을 인식하거라. 어떤
물건이 가치있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도와줄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네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재물을 쌓는다면, 너는 마음대로 날 수 있는
날개를 잃게 된다는 걸 잊지 말거라.
  그렇게 되면 너를 얽어맨 소유물들에게서
너를 다시 해방시킬 수 있는 것은, 단지 어느날 밤의 우연한 도둑의 침입에
의해서 뿐이다. 나는 결코 그렇게 되기를 원하지 않는단다.

 

   6. 베푸는 일의 경이로움

  내가 이 글을 쓸 때는 크리스마스 시즌이었다. 이 때는 일년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기란다. 이 짧은 시즌 때문에 사람들은 돈을 헤아린다. 단지 자기
자신의 안녕을 위한 척도로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베풀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되는지를 측정하기 위해서. 이 시즌 때문에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것들을 찾고, 다른 사람들이 받는 행복에서 자신의
즐거움을 발견한다.
  이렇게 간단한 교훈을, 우리는 얼마나 쉽게 잊어버리는지.
그날이 끝남과 동시에 사람들은 다시 자기 자신을 위해 얻을 수 있는 가치로써
행복을 측정하는, 주는 사람이 아닌 가지는 사람이 되어버린다. 불과 며칠전만
해도 그들은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즐거움에 의해 자신의 삶을 의미있게
했었다. 그러나 갑자기 사람들은, 그것이 자신에게 이득을 줄 것인가 아닌가에
의해 모든 활동을 평가하는 실용적인 관점으로 복귀한다.
  그건 슬픈 변화란다.
어떻게 사람들은 그렇게 빨리 베푸는 즐거움을 잊을 수 있을까? 베푸는 일은
우리의 가장 놀랍고도 자애로운 활동이다. 온정과 즐거움이 마음의 커다란
무게를 가볍게 변형시킬 수 있다는 것은 무척 경이로운 일이다. 진실한 자선은
그것이 돈이든 시간이든 관계든, 또는 그밖의 어떤 것이든간에 우리의 마음을
활짝 열리게 한다. 그것은 베푸는 사람을 기쁨으로 채워주고 베품을 받는
사람을 온정으로 따뜻하게 한다. 전엔 아무것도 아닌 것이 작은 실천으로 인해
새롭게 의미를 갖는다.
  이것은 우리가 어려웠을 때를 기억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주위로부터 우리의 삶을 다른 사람의 삶과 구분되도록 벽을 만들어
왔다. 우리는 지위와 돈과 인정받기에 몰두하는 자신을 본다. 우리 자신과
가족을 보호하는 방편으로써 혹은 사회적 구성원으로서 열심히 일하는 것이
당연한 의무라고 여김으로써 더욱더 그것에 몰두한다. 차근차근 우리 자신의
주변에 안전이라는 보호막을 세우고 우리 삶을 마치 잃어버릴 수 있는
물건인 것처럼 이해하기 시작한다.
  베푸는 일은 경제적 거래가 - 현재의
자신에게서 필요없는 것을 줌으로써 생색을 내는 - 되어버리고, 그래서
어떤 때는 가장 작은 선물조차도 자신의 관심의 크기에서는 무거운 부담으로
느껴지게 된다. 심지어 자의적으로 손을 뻗치고 베풀 때조차도 우리는 주위의
관심과 칭찬이 되돌아오길 바라게 된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에는 사실상
다른 사람의 요구에 응답하는 순수한 즐거움에서가 아니라 이후에 받게 될
칭찬에 의해서 동기가 부여된다. 우리는 소유에 대한 지나친 자기 관심이라는
감옥에 갇힌 채, 우리의 실제적인 성장과 행복이 우리 스스로 방해하고 있는
베푸는 활동들에 의해 더 많이 주어진다는 사실에 그만 눈을 감아버린다.
  이 감옥을 부수는 단 하나의 방법은 오로지 베푸는 것뿐이다. 매년
크리스마스가
되면, 나는 산타클로스 장비를 빌려입고서 거리에 나선단다. 단지 그런 교훈을
나 자신에게 새롭게 일깨우기 위해서 말이다. 산타의 위치에서 축하나 은혜를
나누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아무도 내가 어디 사는 누구인지 모른다.
나는 쉽게 산타가 되고 쉽게 베푸는 사람이 된다.
  나는 가까운 요양원을
찾아가고, 국민학교를 방문하고, 병원으로 향한다. 가는 길에 잠시 멈추어 서서
모여든 아이들과 이야기를 주고받고, 작은 선물을 나누어준다. 양친들은 그런
모습을 옆에서 구경하거나 이런저런 질문을 하고, 어떤 사람은 자기 아이들에게
나를 틀림없는 산타라고 믿도록 말해줄 것을 요청하기도 한다. 또 어떤 사람은
단지 자기 아이들에게 관심을 보여줄 것을 요청한다.
  한번은 어느 유태인 가족이
내 옆에 다가와 그들의 어린 소년을 방문해 줄 것을 요청해 왔었다. 그 소년은
자기가 다니던 유치원에서 단 한명뿐인 유태인이었단다. 그 아이는 자기가
유태인이기 때문에 산타가 자신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산타가 자기 방에 나타났을 때에도 앞에 나서서 맞이하길 두려워했다.
나는 그 소년과 그의 양친과 함께 둘러앉았다. 그리고 우리는 하누카(유태교의
성전 헌당 기념일)와 베푸는 일에 대해 얘기했다. 마지막엔 그 소년이 나를 꼭
껴안았고, 더이상 아무런 두려움도 없다고 말했다. 그 일은 내게 신비스러운
무엇인가를 느끼게 했다. 그건 단지 인간의 착한 본성만이 아니었다.
  산타는
내게 금전적 시간적 비용이 들게 하는 것이고, 또한 여러번의 실패를 안겨주는
일이었다.
  한번은 두 명의 젊은이가 차를 몰다가 우선멈춤 표지판을 넘어와서
나를 들이받은 적이 있었단다. 그래도 나는 그들의 과격한 행위에 소송을 걸
수 없었다. 왜냐하면 어떻게 크리스마스 이브날에 산타가 다른 사람을 고소할
수 있겠느냐? 그러나 그 일을 비롯한 모든  문제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유 때문에

나는 산타가 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 일로 인해 내가 너무나
많은 것을 얻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 얻는 것에만 관심을 두는 사람들은
베품을 통하여 많은 것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을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아마 내가 남들에게 칭찬받기 위해 그런 일을 한다고 생각할게다.
그들은 심지어 이렇게 말할런지도 모른다. 그일이 당신으로 하여금 선을 느끼게
만든다.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그 일이 선을 느끼게 만드는 것을
넘어서는 일이라는 점이다. 그 일은 선을 창조한다. 그리고 또한 그일은
아무것도 없었던 세계에 선을 가져온다.
  베푸는 일은 평상적인 활동이다.
네가 너 스스로를 베풀 때, 어떤 것이 새롭게 존재하게 된다. 바로 조금전까지
사적인 이해의 세계로 분리되어 있던 두 사람이 갑자기 나눔이라는 간단한
활동으로 서로 만나게 되고, 그곳에서 따뜻함과 즐거움이 창조된다.
세계는 더욱 확장되고, 물질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작은 경이로움이 생긴다.
  너는 결코 이 경이로움을 과소평가해선 안된다. 세상엔 자신이 반드시 머더
테레사나 알버트 아인쉬타인, 혹은 슈바이쳐, 심지어는 산타클로스처럼
인류애를 가진 위대한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하는 선량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그리고 만약 그런 사람들 모두가 조금씩만 베푸는 사람이 된다면, 아마
커다란 일을 수행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사람들의 대다수는
어떤 장소 어떤 위치에서든 쉽게 행할 수 있는 마음의 문을 여는 간단한
실천을 발견하지 못한다.
  너는 네 자신을 위해 그러한 시도를 해보거라.
네가 좋아서 하는 일이라면 방법은 간단하다. 누구든 모르는 사람에게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나눠보아라. 이웃집에 가서 잔디를 깎아주거라.
힘들고 지친 사람을 잠시 멈추어 쉬게 하고 도와주거라.
  또는 너보다 약한
사람에게 손을 뻗어보거라. 향기로운 꽃을 사들고 근처의 요양원을 방문하거라.
네 호주머니에서 10달러를 꺼내 거리의 부랑자에게 나눠주고 미소를 지으며
경쾌한 발걸음으로 걸어가보렴. 그것은 동정도, 대단한 아량을 베푸는 듯한
태도로 행하는 자선이어서도 안된다. 단지 네가 가진 것을 그냥 주고
웃으면서 걸어가보려므나.
  그렇게 함으로써 조금씩 조금씩, 너는 그 경이로움을
이해하기 시작하게 될 것이다. 너는 벽 속에 갇혀 있지 않은 인간의 진실한
마음을 보게 될 것이다. 행복해하는 사람의 정직한 웃음을 보게되고, 이전에
보지 못했던 인간애를 느끼게 될것이다. 천천히, 눈에 보이게 너는 우리
사람들 사이의 보편이 무엇인지를 느끼게 될것이다. 그것은 사람들 사이의
분리와 차이점이 아니라 합치와 공통점이란다.
  오래지 않아 너는 즐거움과
행복함을 창조할 수 있는 힘이 다른 사람을 돌보고 동정하는 단순한 행위를
통하여 창조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이다. 너는 선을 나누어줌으로써
다른 사람의 마음에 선을 심어줄 수 있는 경이로운 힘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네가 너 이외의 다른 베푸는 사람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네가 지금 살고 있는 곳이나 여행하고 있는 곳이나
어디서든, 네가 그들의 언어를 말하든 못하든, 그들의 이름을 알든 모르든,
너는 그들을 알게 될 것이며 그들과 하나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너는 이미
다른 각각의 사람을 이해하고 승인한 것이기 때문이란다.
  너는 그들의 작은
활동에서 쉽게 그들을 발견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활동들은 네가 이미
알고 있고 실천하고 있기 때문이란다. 그리고 그들도 역시 너의 작은
활동속에서 너를 발견할 것이다. 그럼으로써 각각 서로를 알게 되고 포용하게
된다. 너는 진실과 나눔과 친근함이 마음속에서 부드럽게 우러나오는
인간공동체의 한 부분이 되는 것이다.
  네가 일단 베푸는 사람이 되고 나면,
너는 이미 혼자가 아니란다.


   7. 돈과 부유함

  삶은 돈에 의해 지배된다. 너는 물론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
돈에 대해 맹렬한 비난을 퍼부을 수도 있다. 너는 또한 돈에 초연하다거나
무관심하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렇게 너는 돈의 몹쓸 병폐에 대해 가능한
한 모든 도덕적이고 인간적인 지적들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말이나
행동을 할 때, 돈은 항상 생존을 위해 우리가 요구하는 것들의 중심에 있게
된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이 삶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이라고 말하는 건
아니다. 너는,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네 생활의 가운데에 꼭 필요한
것으로 존재하는 이것을 다른 것들과 어떻게 조화시켜야 하겠느냐?
  나는
지금까지 돈을 취급하는 방법에 있어서 여러가지 측면의 사람들을 보아왔다.
예전에 나는 기름때로 찌든 바지주머니안에 얼마 안되는 돈을 쑤셔넣은
뜨내기 노동자들과 함께 싸구려 술집에서 술을 마시곤 했었다. 그리고 엄청난
부를 다루면서도 자선은 단 1페니의 현찰이나 동전을 만질 수 없는 증권
중개인과 밤늦게까지 이야기하기도 했었다.
  나는 가난해질 수도 있다는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몇푼의 돈조차도 쉽게 포기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부자들과 비록 가진 것이 없어도 항상 다른 이들과 나눔으로써 충분히 부유해
보이는 현명한 가난한 사람들을 보아왔다. 그런가 하면 자비로운 부자와
범죄를 저지르는 가난뱅이, 그리고 사기꾼과 성자를 보아왔단다.
  그들은
모두가 공통적으로 한 가지를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돈을
다루는 방법은, 얼마나 많은 돈을 소유했는가의 결과가 아니라 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의 결과였단다.
  이 결과는 매우 중요하다. 가장 기본적인
단계에서 돈은 항상 현실이다. 즉 너는 돈이란 물건을 소유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거란다. 그러나 경제적, 철학적 단계에서의 돈은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의미가 된다. 여기서 돈의 가치와 역할은 네가
만들기 나름의 어떤 것이 된단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을 생각해보자꾸나.
첫번째 사람은 텔레비젼 광고에서 우연히 봤거나, 혹은 자기의 행복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느끼는 욕망을 중심으로 삶을 꾸려나간다. 그 사람은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필요한 돈이 얼마나 되는 가를 계산하고 모으는
방법을 추구한다. 그리고는 자기 계획보다 더 많은 돈을 갖지 않는 한,
자신이 항상 가난하다고 느낀다.
  그 사람은 살아가면서 느끼는 그런 욕망들이
채워진다면 확실히 예전보다 행복해질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은
않다. 이 사람은, 현재의 삶의 객관적인 위치와 그가 가진 욕망이라는
환상 사이에서 돈이 그 거리를 충분히 메꾸어주지 않는 이상, 항상 자신이
가난하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가령, 그는 현재 백만장자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의 환상이 억만장자에 가있다면, 그의 마음은 항상 가난하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돈을 단지 생활을 꾸려나가는 간단한 도구로써 바라보는
두번째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자신의 주머니 속에 실제로 필요로 하는
것보다 단지 1달러만 더 가지고 있어도 편안함을 느끼고, 만약 필요로하는
양보다 10달러를 더 가졌다면, 사실상 자신이 부유하다고까지 느낄 것이다.
그런 사람은 삶에서 욕망을 중심에 놓고 행복을 만들어가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돈을 헤아리거나 모으지 않는다. 그는 단지 자기가
필요로 할때 쓸 수 있는 여분의 돈을 조금 소유할 뿐이다. 비록 작지만 그가
가진 여분의 돈은 친근한 사람들을 위한 선물을 사는데 쓰여질 수도 있고,
혹은 생활에 아무런 의미도 없는 전혀 쓸데없는 곳에 써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소유한 약간의 돈만으로도 항상 만족감을 느끼기 때문에,
자신을 감동시킬 수 있는 그 무엇에든지 여유있게 남는 돈을 쓸 수 있는 거란다.
  너도 알겠지만 이들 두 사람의 차이는 그들이 소유한 현실적인 부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그들이 가진 돈에 대한 철학과 관계된 문제란다. 그들은
정확하게 똑같은 양의 돈을 지닐 수 있다. 그러나 생활상의 욕망에 이끌려서
자신이 지닌 돈의 가치를 측정하는 사람은, 그를 유혹하는 또다른 욕망들이
끊임없이 계속 나타나고 존재하기 때문에 일시적인 행복을 느낄 수는 있겠지만
결코 완전히 행복해 질 수은 없다. 그렇지만 필요에 따라 자신이 지닌 돈의
가치를 측정하는 사람은 언제나 필요한 것들을 통제함으로써 자신의 생활을
전반적으로 규제할 수 있게 된다. 물론 그렇게 해서 남은 돈은 미래를 위하여
저축을 할 수도 있고.
  그러나 이런 간단한 공식에도 어두운 측면이 있단다.
그것은 우리가 반드시 갖추어야만 하는 필수품들이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의식주, 그리고 더 말한다면, 이따금씩 생활에서의 약간의 즐거움과 기쁨의
순간들을 추구하기 위한 것들 말이다. 만약 너에게 꼭 있어야만 하는 이
생활의 필요들을 채우기 위한 돈을 넉넉히 얻을 수 없다면, 너는 결국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가 없을 게다. 더욱이 절대적인 최소한의 재정적 요구를
무시해온 사람들은 자기가 먹을 것조차도 소유하지 못했다는 혹은 그의
가족을 부양할 능력이 없다는 무능력에 대한 주위로부터의 학대의 무게를
견딜 수 없을 것이다.
  결국 네가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것들을 마련하기 위한
적당한 돈을 소유하지 못했을 때는, 그로 인해 실망과 분노가 급속히 발생하기
때문에 오히려 돈에 대한 관심이 네 생활의 중심부를 장악하게 되는 거란다.
  네가 그렇게 되길 바라지는 않지만 만약 그런 사태가 발생한다면, 너는
가능한대로 빨리 좌절과 분노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왜냐하면 소수의
사람만이 그런 실망과 분노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고, 더 적은 수의 사람만이
실망과 분노를 지혜롭게 삭일 수 있기 때문이다.
  가진 사람들은 아무것도 갖지
못한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현재 많은 돈을 가진
사람이라도 한때 그들이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했었다면, 그들은 어려웠던
순간들을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예전의 그런 암울한 절망과 격분의 느낌을 또다시 겪지는 않으려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경험이 한번도 없었던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
속에서 소용돌이치고
있는 힘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가장 하찮은 생각조차도 가질 수 없다. 그들이
보는 건 가난에 빠진 사람들이 분노하고 절망하는 한 인간이라는 게 전부일
뿐이다. 그리고 분노하고 좌절하는 사람에 대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도우려고 생각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런 사람과는 부딪치지 않고 피해가려고
한다.
  네가 숨막힐 듯한 가난으로 인해 실망과 분노로 채워진 자신을 발견
한다면, 너의 희망과 대화함으로써 하루빨리 실망과 분노에서 자리를 털고
일어나야만 한다. 스스로를 통찰해야 하고 자기 가치에 대한 네 스스로의
긍정적인 감정을 발견해야 하며, 네가 할 수 있고, 아마 전보다 더 잘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믿음을 발견해야 한다. 그리고나서 밖으로 나가
기쁘게 너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을 찾아 그 믿음을 전해야만 한다.
  세계는
실망한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거라. 또한 세상에는 수직으로는
적으나 도움을 주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들은 자신들에게 보여지는
것 이상으로는 반응하지 않는다. 만약 그들이 배고픈 사람을 본다면 그들은
단지 그를 먹이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만약 그들이 좌절을 딛고 일어설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만난다면, 그들은 그의 가능성에 따라 그를 적극적으로
돕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파산하여 생존을 위해 다른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할 때, 너는 분노하거나 배고픈 사람이 아니라 실의를 극복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단지 실망하고 배를 채울 필요를 구하는
사람이 되는 것은 너를 도울 수 있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뿐이다.
그리고 그때 네가 얻을 수 있는 도움이란 단지 그들이 너무 많이 가졌다는
죄의식을 벗기에 충분한 정도뿐일 것이다.
  그러나 만약 네가 자신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확고하게 보여준다면, 사람들이 너를 돕는 일을 훨씬 더 좋아하게
될거란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허약하거나 좌절하는 사람을 돕기보다는
현재의 어려움을 극복할 자신감에 찬 강인한 사람을 돕는 것을 더 좋아하기
때문이다.
  가난에 대한 실망을 물리치기 위해서 누군가로부터 도움의 손길이
찾아올 때, 너의 유일한 친구는 일이라는 걸 명심하거라. 거지에게 주는 식의
기부는 단지 순간적인 육신의 감각을 위해 돕는 것이다. 그런 기부로는 네가
느끼는 분노와 무기력을 다스릴 수 없다. 일은 - 어떤 일이든 - 실망이
몰아냈던 내적 가치의 감각을 다시 살려준다. 대단치는 않을지라도 일은
성장을 위한 골격을 세우며, 네가 어떤 더 나은 목표를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만큼의 설 수 있는 자리를 제공한다.
  그러므로 어떤 가난의 짐이 너에게
지워진다면, 돈을 찾지 말거라. 일을 찾거라. 돈이란 일을 함으로써 자연히
따라오는 것이고, 너를 질식시키던 분노와 좌절은 일을 통해 점차 지배력을
잃어갈 것이다. 그때 너는 다시금 네 생활의 중심부 밖에서 돈을 다루기
시작할 수 있다. 그리고 너는 네가 의미있는 삶을 살도록 돕는 도구로써,
돈을 올바른 위치로 되돌려놓을 수 있는 것이다.
  단지 압도적인 가난과 결핍만이
돈을 네 생활의 중심에서 밀어 낼 수 있는 방법이라고 믿는 실수를 저지르지
말거라.
  가난의 학대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돈을 헤아리는 사람들은, 돈이
가난한 사람의 목을 조르는 만큼 부자들의 목도 조른다는 사실을 곧 알게
될 것이다.
  네가 돈에 대해 관심이 없다면 - 네가 단순히 돈 그 자체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다면 - 어떤 면에서 돈은 추상적 원칙들에 의해 조절되는
추상적 개념이 된다.
  돈은 이익과 이자를 계산한다. 너는 어디에 어떻게 돈을
투자할 것인가를 아는 것이 필요하다. 너는 얼마나 많이 벌었는가 하는 양에
따라 세금을 내야한다. 그러한 돈은 주인의 생활과 함께 하는 소유물이 된다.
돈은, 보통사람은 결코 언제 닥칠지 알 수 없는 경제적 폭력의 비바람에 맞서
싸우는 가지들과 뿌리들과 씨앗들을 성장시킨다. 너는 마치 정원사처럼
돈을 돌보아야 한다. 그리고 비록 네가 돈이 있기 때문에 돈에 대한 걱정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더라도, 돈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하는 일은 네
마음에서 항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면 너는 돈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가난의 폭력을 극복하는 것과 부의 폭력을 극복하는 것
사이의 균형을 과연 어떻게 맞출 것인가?
  이에 대한 확고하고 고정된 원리들은
없단다. 그러나 네가 기억해야만 하는 약간의 기본적인 지침은 몇 가지 있다.
  첫째는 부자가 되는 게 어떤 것인가를 배우는 만큼 가난하게 된다는 게
어떤 것인가를 배워야 한다는 점이다.
  넓은 의미에서, 재정적으로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변화되는 환경의 영향에 따라 그때그때 균형잡힌 행동을
취하고 있는 사람이다. 너는 언제든지 몰락할 수 있다. 몰락했을 때 너는
필시 가난에 봉착하게 된다. 만약 네가 가난하게 되는게 어떤 것인지를 미리
알고 있다면, 너는 예전과 다름없는 품위와 너그러움을 유지할 수 있게 되고,
어떤 큰 재정적 재난이라도 흔들리지 않는 네 마음의 평안을 깨뜨리지는
못할 것이다.
  가난하게 되는 게 어떤 것인지를 아는 것은, 생활에서 필수적인
것은 무엇이고, 단지 욕망에 지나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를 구별하는 정확한
직관을 개발한다는 걸 의미한다.
  가난하게 되는게 어떤 것인가를 아는 것은
네 생활을 어떻게 조절할 것인가를 안다는 걸 의미한다. 예를 들면 네 주위의
물건들을 어떻게 수리하고 유지시킬 것인가? 어떻게 현명한 구입을 할 것인가?
구입할 수단이 없다면 전혀 구입하지 않을 것인가? 어떻게 생활 속에서 돈이
없어도 간단한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 것인가? 등등....
  가난하게 되는 게
어떤 것인지를 안다는 것은, 소유물 속에서 부족한 걸 더 채운다는 것이 아니라
네가 현재 소유한 것의 정확한 용도와 의미가 무엇인가를 발견하는 것이다.
그것은 네 생활을 돈에 근거하지 않고도 어떻게 독창적이고 창조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가를 안다는 걸 의미한다.
  이러한 것들은 언제든지 배워둘 가치가
있는 교훈이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가난이 왔을 때 네가 생존하기 위해 반드시
배워야만 하는 교훈이다. 가난이 어떤 것인지를 배우지 않았던 사람들은
마치 그들이 여전히 가난하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길 계속 고집한다. 그들을
부자인 것처럼 가장하고, 가장하기 위해 돈을 빌리고, 잘못된 허영심으로
삶을 살아간다.
  그들은 가난을 결핍으로 본다. 그들은 가난의 미덕들과 지혜를
결코 볼 수 없다. 그들은 나눔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배우는 일이나, 혹은 자기
삶에서 의미있는 것과 필요없는 것을 가려내기 위한 기회로써 가난을 이용하지
못한다. 그들의 삶에 가난이 찾아왔을 때 그들은 가난으로부터 숨기 위한
작업을 시작한다. 그리고 그들 주위의 사람들에게 자신의 가난을 숨기기 위한
일을 행한다. 그들에게는 돈이 곧 자존심이다. 그래서 돈을 잃는다는 것은
곧바로 그들의 인격을 잃어버린다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만약에 가난이
찾아왔들 때 가난을 받아들이는 방법을 배운다면, 가난은 너를 더 현명하게,
더 강하게, 그리고 네 자신을 더 믿을 수 있게 만들 것이다. 가난은 너의
단순한 생활상의 재능들에 대해 더 많이 감사할 수 있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가난은 이 감사들을 네 가슴속에 잘 새겨둘 것이다. 만약 아직 그렇지 않다면,
너는 가난의 규율에 따라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 너는 가난이 네게
강요하는 삶의 제약과 구속들을 포용하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만약 이러한
것들을 언제든지 배워두지 않는다면, 네가 아무리 많은 돈을 소유한다 하더라도
영원히 가난의 범주 내에서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네가 가난하게 사는 게
어떤 것인지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돈의 결핍이 결코 너의 삶을 파멸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돈에 대한 두번째 지침은, 재정적 행복의 가장 큰 적은
가난이 아니라 빚이라는 점이다. 세상에는 빚이 가져다주는 많은 이점들에
대해 말하는 그럴듯하게 치장된 큰 폭력이 있다. 너로 하여금 돈을 빌리도록
하기 위해서, 돈을 빌려주는 사람은 그런 행위를 합리화시키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들은 매력있고 신빙성있는 논거와 권유들을 제시할 것이다. 그들은
오늘의 대가가 내일의 만족을 가져올 수 있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모든
잘못은 거기서 유래한다. 즉 네가 현재를 변상하기 위해 미래를 저당잡히는
것에서 커다란 오류가 발생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런 일은 네 스스로도 결코
원치 않았던 일일 것이다.
  너로부터 이동의 자유와 선택의 창조성을 빼앗아
가기 때문에 빚은 너의 적이 된다. 그렇다, 빚은 너를 투자할 것을 허락한
것이기 때문에 너를 돈으로 바꿔줄 수 있다. 그렇다, 빚이 현재의 너를
도울 수는 있다. 그리고 빚은 네가 더 나은 미래가 있을 거라고 희망하는
것 때문에 현재 네 문제를 해결하게 하는 수단일 수도 있다.
  그러나 빚은
분명히 너의 미래를 구속할 것이다. 그리고 네 미래가 제한되었을 때, 그때부터
너의 희망은 죽어가기 시작한다. 너는 네 과거를 지불하기 위해, 네 생활을
돈을 버는 일에 위탁했다. 그리고 비약적으로 성장할 수도 있는 네 정신은
그로 인해 멈춰버리게 된다. 네 삶을 빚으로부터 멀리 물러나게 하거라.
끝없는 지평선을 향하여 빚이라는 무거운 바퀴를 밀며 살아가는 꿈과 가능성을
상실한 사람보다 더 슬픈 모습은 없다.
  빚이 없어진다는 것, 그래서 주머니
안에 필요로 하는 것보다 단지 1 달러를 더 가졌기 때문에 발걸음이 가벼워지는
사람이 된다는 건 얼마나 좋은 일이냐? 네가 빚이 없을 때, 그리고 네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환상들에 의해 이끌려 살지 않을 때, 돈은 너를 지배할
수 없게 된다. 의미있는 삶을 살아가기 위한 탐색에 있어서, 너는 돈에서
자유롭게 된다.
  돈에 대한 세번째 지침은, 돈은 돈을 축재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로부터는 멀어지고 돈을 나누는 사람들에는 다가가는 성질이 있다는
것이다.
  만약 네가 축재자 중의 한사람이라면, 너는 마음속에 잠겨진 금고를
가지고 살고 있는 것이다. 이 금고에서는 아무것도 나갈 수 없듯이 아무것도
들어올 수 없다. 너는 돈을 빼내거나 집어넣어야 할 때, 금고를 빠르게 열고
닫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내 주위 사람들도 역시 그렇게 할 것이다.
  사람들 사이에 자유롭게 소통되는 신선한 공기는 기회와 필요, 그리고 우리
인간의 모든 복잡한 상호작용의 요소들이 혼합된 곳에서는 점차 숨막히는
태도로 변화된다. 부유해질 수 있는 가능성은 전혀 의미없는 통제로 대체되게
된다. 너는 네가 갖고자 희망하는 것을 소유할 수는 있지만, 그로 인해 네
생활은 끊임없이 돈을 헤아리는 계산의 과정이 될 것이다. 그리고 너의 힘으로는
통제할 수 없는, 보이지 않고 뜻하지 않은 일들이 네가 보호하고자 그렇게
열심히 노력했던 돈을 서서히 빼내가기 시작할 것이다.
  만약 네가 나누는
사람이라면, 돈은 자유롭게 움직일 것이다. 나누는 것이 낭비하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 낭비는 단지 돈이 밖으로 유출되는 것을 보는 흥미 이외의
다른 의미를 갖지 못하고 돈을 아무 거리낌없이 마구 쓰는 것일 뿐이다.
나눈다는 건 너에게 돌아오는 것이 있을 건가에 대한 기대없이도 다른 사람이
의미있는 일을 할 수 있게 너의 돈을 사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네가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너는 무한한 변화의 가능성과 서로 돕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상호작용에 자신을 개방하는 것일 게다. 그리고 사람들은 네가 보여준 친절에
대해 자신들의 친절을 되돌려 주기를 원할 것이다.
  나눈다는 것은 사람들이
그것을 매개로 하여 서로 교감을 소통하는 또다른 언어와도 같다. 같은 말을
하는 사람은 서로를 발견하기에 이른다. 만약 네가 돈의 보호와 축재를
말하는 사람이라면, 돈이 보호와 축재의 언어라고 말하는 사람들속에 포함된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색안경을 낀 눈으로, 그리고 주먹 쥔
손을 가지고 서로를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 의심이 그들의 일반적인 가치가
될 것이다.
  그러나 네가 돈은 나누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라면, 너는
자신들의 돈이 나눔의 언어라고 말하는 사람들 속에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서는 나눔의 언어가 소통될 것이고, 세계는
가능성으로 충만하게 된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으로, 네가 축재자라면,
행복한 사람이 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축재자들은 상실의 고통을
결코 참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돈은 돌고 도는 것이며, 사람들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것이다. 그것이 교환을 위한 기본적 수단으로서의 돈의
본질이다. 축재자들은 돈이 다른 사람에게 가는 것을 참아내지 못한다. 반면에
나누는 사람들은 가난할 때조차 돈이 다른 사람에게 건너가는 것에서 선을
보기 때문에 마음으로부터 항상 부자이다. 모두는 아니지만 대개 나눔의 친절은
나눔의 정신이 된다. 그리고 돈의 자유로운 통행은 모든 관계를 풍요롭게 하는
상호간의 선물이 된다. 자신들의 주머니로부터 돈이 빠져나가는 것을 기꺼이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돈이 멀리 가는 것을 이해하는 다른 사람들을 기꺼이
도울 수 있는데, 이것이 돈에 대한 또 하나의 지침이다.
  어떤 거래에서든
단 한푼의 손해도 보지 않으려고 기를 쓰고 달려드는 사람들은 그들의 승리에
대한 필요 때문에 폭력적이게 된다. 어떤 거래에서든 그들은 자기가 판단한
가치보다 물건을 너무 비싸게 구입했다고 생각할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물건을 팔 때 똑같은 함정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현재의 이익만을 생각하기 때문에 미래를 위해 돈을 쓸 수 없다. 때로는
미래를 위해 돈을 쓸 필요가 마지막 한푼을 남길 필요보다 훨씬 중요한
데도 말이다.
  나는 옛날에 우리집 근처에 살고 있던 한 노인을 기억한다.
그는 거의 가난 속에서 살고 있었다. 그리고 매우 인색한 사람이었다. 그의
생계수단은 개집을 만들어 파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때 사람집을
위해서도 거의 돈을 쓸 수 없는 형편이었고, 개집을 위해서는 더더욱 돈을
쓸 수 없는 매우 가난한 지역에 살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 사람은 개집을
85달러는 받아야 한다고 고집하고 있었고, 85달러는 근처에 살던 사람들이
개집을 사기 위해 지불하기에는 너무나 큰 액수였다. 한 때 나는 개집이
필요했었고 그래서 개집의 가격을 알아보기 위해 노인을 찾아갔다. 나는
70달러를 지불할 수 있다고 노인에게 말했다. 그러나 그 노인은 퉁명스럽게
"85달러가 내 가격이요"라고 말하고는 신경질적으로 문을 꽝 닫아버렸다.
  그집에서 쫓겨나듯이 나온 나는 개집이 잔뜩 쌓여있는 그집의 마당을 보았다.
그집은 낡아서 거의 쓰러져가고 있었다. 나는 그가 점점 더 가난하게 살게
될거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그는 개집의 가격을 내리지 않았다. 노인의 삶은
자신의 마음속에 정한 가치에 대한 확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전까지는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가 없었다. 그는 자기 개집의 노예였고, 자신의 주위에
가난이라는 단단한 벽을 세우고 있었다. 결국 그는 개집에 둘러싸여 죽었고,
개집들은 경매에 붙여져 노인이 불렀던 가격과는 엄청난 차이가 나는 한개당
5달러에 팔리게 되었다.
  그 노인의 삶에서 교훈을 얻거라. 개집들이 그에게
강요한 것이 아니라 그가 스스로 개집에 자신을 묶어 둔 것이다. 그 노인은
본래의 가치에 대한 자신의 원칙을 관철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그 노인은 자신의 개집이 사람들이 매긴 가치보다 더 높은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잊고 지내왔다. 너의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사람들이 너에게 부여해 주는 가치보다 더 중요한 가치는 없다. 만약 네가
과거로부터, 특히 손해본 과거에서 기꺼이 벗어날 수만 있다면, 너는
자유로와지고 너의 세계는 성장을 계속할 것이다. 만약 네가 어떤 방해되는
가치를 붙잡을 것을 고집한다면, 너는 그 물건의 소유에 의해 포박될 것이다.
  선의 실행은 노인이 믿는 가치대로 지불함으로써 그가 개집을 사간 사람에게
고맙다는 생각을 갖게 만드는 것일 게다. 그때 그 노인은 개집의 진정한
가치가 얼마인가를 새삼 발견하고 개집에 대한 그의 가격이 얼마나 독단적
이었는가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네가 돈에 대한 명확성을
갖는 것에 대해 크게 염려하지는 않는다. 나는 단순히 돈이 공기처럼
유동적으로 왔다갔다한다는 걸 알게 되기를 원할 뿐이다. 네가 만약 돈은
항상 위로 올라갈 뿐이며 결코 내려오지 않는다고 주장한다면, 너는 지상에서
우리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특징짓는 들여마시고 내쉬는, 그리고 왔다갔다하는
자연의 리듬에 대항하여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일게다. 너의 손을 통하여
빠져나가고 있는 돈은 너에게 다시 돌아올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네 삶의 진행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인간성의 성장과 주위 세상에
대한 관심이 돈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네가
항상 가장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노력할 것을 주장한다면, 돈을 얻는 방법에
대해 알아야만 하는 마지막 원리가 한가지 남아있다.
  나는 돈이 '인지의 속성'을
가진다고 표현하고자 한다. 그것은 돈이 주인을 알아본다는 말이다. 1센트짜리
동전들 사이에서 일하는 사람은 1센트짜리 동전을 얻거나 잃거나 한다.
지폐들 사이에서 일하는 사람은 지폐를 얻거나 잃는다. 백만달러 사이에서
일하는 사람은 백만달러를 얻거나 잃는다.
  만약 정말로 돈을 벌기를 원한다면,
너는 네가 원하는 등급에서 돈이 교환되는 사람들 사이에 있어야 한다. 1센트
짜리나 10센트짜리 동전을 모아 백만장자가 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그 옛날 끼니를 때우는 생존조차 힘겨웠던 시절의
'티끌모아 태산'이라는 강박관념 속에서 먹지도 쓰지도 않고 오직 모으는
일로만 삶을 지내왔던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런 삶은 지금에 있어서는 전혀
살만한 가치가 없는 삶이다.
  만약 네가 백만장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너는
백만장자들과 함께 교제하기 위해 필수적인 규율들과 기술들을 더 잘 배워야
한다. 그리고, 너의 재능을 백만장자들 사이에서 발휘하기 위해 사용하거라.
몇달러를 위해 일하고 있는 사람들보다 백만달러를 벌고 있는 사람들이 재능이
더 많은 사람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백만장자들은 돈이 큰 규모로 움직이는
곳에서 살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재능은 그들이 받아들인 교환의 등급에서
보상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네가 돈을 벌기를 원한다면, 너는
돈 근처에 있어야 한다. 돈은 돈이 모이는 곳으로 간다. 돈이 너에게 이르게
하기 위해서는 돈이 모이는 장소로 찾아가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비록 네가
돈과 친숙할 것을 선택했을지라도, 너는 언제든지 빛나는 진실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 중요한 것은, 돈이 얼마나 많은가가 아니라 돈이 너를 통과하여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잘 건너가게 하는가이다. 돈은 단지 일용품이며 교환을
인정하는 추상적 개념일 뿐이다. 돈에게 생명을 주고 의미를 주는 것은 바로
교환의 정신이다. 위대한 자선가는 - 부자든 가난뱅이는 - 세계에 빛을 가져오기
위해 돈을 사용한다. 위대한 축재자는 - 부자든 가난뱅이든 - 우리들 사이에
존재하는 문을 닫기 위해서 돈을 사용한다. 주는 사람, 그리고 나누는 사람이
되거라. 전혀 기대하지 않았고 예기치 않았던 어떤 방식으로 그밖의 다른
일들은 모두 저절로 해결될 것이다.

 

   8. 술과 마약

  나는 혼자서 작은 카페에 앉아 있었다. 나의 맞은 편 테이블에는 한 남자가
앉아 있었고 그는 혼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의 눈거풀은 무거워 보였다.
그는 잠시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몸을 흐느적거렸고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가는
머리를 홱 들어올렸다. 그렇게 잠이 몰려오는데도 계속 마시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착한 사람처럼 보였고 얼굴은 비교적 깔끔했다. 아마 고독을 느끼는지도
모른다. 어떤 개인적인 상처를 달래고 있을 수도 있겠지. 아니면 아마
상습적으로 술을 마시는 알콜중독자일까....
  술을 입에 대고 마실때, 그의
턱은 술에 가득 차 부풀어올랐다. 뺨은 긴장이 풀려 늘어졌고, 눈동자는
초점을 잃고 있었다.
  그는 주인 여자에게 비틀거리며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또 한잔의 맥주를 건네주었다. 그는 그녀에게 지나치도록 감사해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가 더 말을 꺼내기 전에 귀찮다는 듯이 재빨리 돌아섰다.
그 모습이 얼마나 측은했던지. 비록 이 남자가 현재 얼마나 행복해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고독이 수의를 입듯이 그를 엄습하고 있었다. 그는 혼자였고
술병으로부터 자신의 진실을 들여마시고 있었다.
  나는 그 남자를 자세히
관찰했다. 그는 나와 그다지 다르게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가 될 수도 있다.
너 역시 그가 될 수도 있다. 그는 단지 커다란 마수 중의 하나인 알콜의
덫에 걸린 사람일뿐이었다.
  나는 술과 마약을 커다란 마수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우리 앞에서 자신들의 진실을 철저하게 감추고 있기
때문이란다. 우리가 자칫 마수에 걸려들 때 그것들은 우리의 일상적인 삶을
과장하는 것에서 시작해서 결국 삶을 어둠으로 종결짓도록 만든다.
  이런
지적이 가공의 허구처럼 들리고 과장된 경종으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슬프게도 그것은 너무 늦게 너무나 많은 교훈을 가져다주는 분명한 진실이란다.
사실 네가 처음 마약을 사용하고 거기서 깨어나 정신이 맑아짐을 느끼게
될 때, 혹은 약간의 술로부터 부드러운 온기가 자신을 감싸는 걸 발견할 때는
그것들이 숨기고 있는 문제들을 아직 의식할 수 없다. 아마 너의 첫번째
반응은 이럴 것이다.
  "이건 두려워할 게 못된다. 내가 올바르게만 사용한다면
오히려 필요한 약이 될 수도 있다. 언제나 문제가 되는 것은 과용이다.
나는 결코 과용하진 않는다.
  그러나 술과 마약은 벗어나기 힘든 커다란
유혹이고 사기꾼이란다. 그것들은 너에게 새로운 방법으로 새로운 세계를
제공하지만, 그것들을 흡입하는 첫 번째 순간부터 그들은 네 몸에서 화학
작용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그리고 네 몸에서 일어나는 화학작용은 너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그 자체의 논리를 가지게 된다.
  서서히 그것들은 너를
소유하기 시작하고, 네가 자신들의 의지를 받아들일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나면 그것들이 네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을 해치는 원인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은 단지 시간문제일 뿐이다.
  그리고 너는 결코 그 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술을 보렴. 약간의 술과 취기는 얼굴에 혈색이
돌게 한단다. 너의 의식과 무관하게 긴장이 풀린 네 혀가 속마음을 말하기
시작한다. 세계는 영광스러운 것이 되고 서서히 열기가 올라온다. 너는
점차 평온함을 느끼게 된다.
  도대체 술로 인해 그런 진실성과 정직성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 어디가 어떻게 잘못된 것인가?
  너는 결코 그것들이 널
속이는 날이 될 때까지는 잘못된 점이 무엇인지를 알 수가 없다. 그리고
그때가 온다. 알콜이 너에게 무언가를 하라고 말하는 순간에 그것이 온다.
그리고 너는 그 명령에 따를 것이다.
  아마 너는 운이 좋을 수도 있다.
아마 그것들이 너에게 단지 욕지거리나 혹은 바보스러운 행동을 하게 하는
것으로서 만족할 수도 있다.
  그러나 너는 무척 운이 나쁠 수도 있고, 그로 인해
커다란 손상을 입을 수도 있다. 너의 사랑이 너무 강력하고 현실적이라고 느껴
취중에 처음 만난 한 소녀를 임신시킬 수도 있다. 너는 보다 빨리, 혹은
주의하지 않고도 운전을 잘할 수 있다고 느끼게 하는 술기운의 부축임에
현혹되어 사고로 네 친구의 생명을 잃게 할런지도 모른다.
  어느날 알콜
중독자들의 무리 속에 있는 네 자신을 발견하면서 잠에서 깰 수도 있고,
매일매일을 술로 시작하거나 또는 구할 수 있는 최후의 한 병까지 몽땅
마시고야 하루를 마감할 수도 있고, 단지 술이 있어야만 심신의 편안함을
느끼는 네 자신을 발견할 지도 모른다.
  너는 결코 이런 것들이 너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중의 한가지는 반드시
찾아온다. 음주는 악마의 거래다. 너는 현재 특별한 어떤 것을 얻겠지만
그로인해 네 미래를 지불해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너는 결코 그것이
지불되어야 할 때까지 지불해야 할 사실상의 가격이 얼마나 되는지를 알 수
없다.
  마약은 술보다도 훨씬 더 매력적인 유혹이다. 마약은 네가 그것들을
통제하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만들지만, 사실을 일부러 통제권을 너에게
줌으로써 너를 속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육체로는 도저히 대항할
수 없는 화학적 작용을 일으킴으로써 결국 너를 자신들의 끄나풀로 만들어
버린다.
  심지어 그것들은 알콜보다 훨씬 반역적이기까지 하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알콜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을 제공할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어느
누가 코카인의 스릴을 부정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페이요티(환각제)와
메스칼린의 신비함, 메테드린(각성제)이 제공하는 세상의 지배자가 된듯한
느낌, 혹은 그런 마약들이 만들어 내는 일상을 훨씬 넘어서도록 삶을 끌어
올릴 듯이 보이는 환상적 경험의 많은 것들을 어찌 부정할 수 있겠는가.
  나도 젊었을 때, 한 때는 마약에 빠져 있었고, 그것들이 내 삶을 단조로운
흑백에서 다양한 색상의 칼라풀한 삶으로 바꿔 놓았다고 말하곤 했었단다.
마약이 나 자신을 새롭게 변화시킬 수 있는 통찰력을 주었다고 느꼈다. 나는
나 자신으로부터 벗어나서 그게 마치 사실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어떤 삶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새로운 삶의 방향으로 난 길로
접어들었다. 바로 그 첫 경험이, 나로 하여금 맛있는 음식을 맛보고 있는 듯이
만들었고, 주저감이 없어졌다고 느끼게 하였고, 진실한 사랑을 할 수 있다고
믿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 당시에는 모든 것이 새롭게만 느껴졌고 마음속에는
환희와 즐거움이 가들 찼었다.
  그런데 서서히 그 모든 것이 반전되는 것을
보았다. 나는 언어 감각을 상실하기 시작했다. 기억력이 떨어지고, 머리가
빨리 회전되지 않았다. 신체적으로도 알 수 없는 고통을 느꼈고, 알 수
없는 공포감이 엄습해왔다. 그 자유의 시간이 서서히 죽음의 시간으로
바뀌어갔다. 이것들조차 나는 마약으로 치유하려 했는데, 왜냐하면 마약이
없이는 현실이 지겹고 삶이 헛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나는 마약을
두려운 존재로 봄으로써 사용하지 않으려는 친구들을 알고 있었고 그들의
생활은 몹시 따분해 보였다. 그들은 내가 맛보았던 만큼의 환희를 느낄 수
없으므로 그들에게 즐거움의 세계가 있으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결국
나는 단지 마약이라는 공통점 이외에는 공유할 것이 전혀 없는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이윽고 내가 거주하던 곳에서 한 친구가
약물과용으로 사망했다. 또다른 친구는 피를 토하며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또 한명을 무척 아름다웠던 기억을 완전히 상실했다. 마약에 대한 대가로써
지불된 것이었다. 지금 그는 부모의 집에 돌아가 발작과 무서운 환상에
사로잡힌 채 아직까지 목숨만은 부지하고 있단다.
  확실히, 건강을 계속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어떤 사람은 아직도 약간의 마약을 계속할
정도로 건강하다. 그렇지만 우리 모두는 분명히 오염되었다. 마약은 그 무엇을
우리에게 주었던 것처럼 그 무엇을 우리로부터 앗아갔다. 우리가 그것으로부터
얻은 교훈은 우리로부터 빼앗아간 그만한 대가없이는 결코 얻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 교훈은 분명 다른 방법으로 얻어졌어야만 했는데....
  이 교훈을 네 가슴에 와 닿도록 하려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세상은 번지르한 슬로건들로 가들 차 있다.
  "단지, 아니오라고 말하라." 이런
슬로건은 간단하고, 위협적이고, 절제할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마약의
구렁텅이에 떨어져본 사람이라면 누구든 네게 멈출 것을 경고하는 공포스러운
이야기를 들려 줄 것이다. 그렇지만 사실, 문제는 그보다 훨씬 더 복잡한
것이다.
  술과 마약은 그것 자체로서 어둠이거나 지옥같은 공포를 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들은 어둠과 지옥같은 공포의 씨앗을 실어 나르고, 네
기억력 속에서, 마음속에서, 그리고 너의 모든 생리적 작용 속에서 그 씨앗을
경작한다. 비록 그것들이 매우 온화하게 보이더라도, 그것들로 인해 일시적으로
기억력이 좋아지게 될지라도, 그것들이 너에게 부여한 만큼 너는 다른 것들로
대가를 지불해야만 한다. 그것은 악마와의 계약이며 - 아직 호명되지 않은
무언가를 교환조건으로 한다 - 그리고 네가 원하기만 하면 곧장 네게로 와서
계약서를 내밀 것이다.
  네가 도대체 어떤 대가를 지불하는지 아직은 알 수
없기 때문에 그런 계약을 하는 것이 더더욱 두려운 거란다. 나와 몇몇 사람이
아직 건강하다는 사실이, 우리가 지불해야만 할 대가가 완전히 없어졌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비록 우리가 그런 대가의 지불에서 완전히
자유로와진다해도, 너도 역시 그러리라는 보장은 전혀 없다. 네가 그들과
계약을 맺게 되면, 너는 반드시 대가를 지불해야 할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고, 현재의 환희를 위해 미래를 파는 것이 될 것이다.
  나는 "또다른"
진실을 말함으로써 이것을 알려주고 싶다. 어떤 사람에게 마약은 신성한
것일 수도 있다. 마약은 어떤 때는 약으로 쓰이기도 한다. 마약은 진실로
통하는 또다른 창문일 수도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술이 문화적이고 신사적인
방식으로 마셔지는 일상적인 삶의 한 부분이거나, 혹은 종교에 있어서 정신적
자유의 보다 광범위한 제식의 행위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곳엔 항상 계약이
뒤따른다. 비록 그것이 말해지지 않았고 스스로 인정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내가 너에게 굳이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구나. 과거에 내가 봄이 땅속에서
성큼성큼 다가오는 소리를 듣고, 바람과 나무가 아름다운 교향악을 연주하는
소리를 듣게 될 때는 항상 페이요티를 맞고 있는 순간이었다. 내가 아름답게
변모될 수 있을 것 같이 느끼는 순간은 마약의 환희에 빠져서 사랑을 하고
있었을 때였다. 그러나 이런 느낌의 마지막엔 아무것도 없고 단지 씁쓸한
그림자만이 남게 된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솔직히 말해서, 아무리
시도해 봐도 마약이 없이는 나는 진실로 그 순간의 느낌으로 되돌아갈 수가
없다. 비록 그 순간들이 내 머리 속에서 실제로 존재했었다 하더라도
말이다.
  나는 마음과 기억만으로 알래스카의 부룩크산맥위의 얼어붙은 땅에
서 있을 수 있다. 그리고 내가 본 것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경에 감탄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페이요티를 맞은 그날 밤의 통찰과 진실의
순간, 그리고 땅 아래로부터 봄이 노래하던 광경을 도저히 발견할 수가 없다.
마약에 의해 야기되는 그 진실을 마약이 없이는 영원히 나타나지 않는다.
  세상엔 우리를 가득 채우고도 남을 만한 충분한 시간이 존재한다. 그렇지만
나는 모든 마약(내가 경험해0보지 못했던 것까지 포함해서)이 주는 아름다움과
황홀감 때문에 너와 함께 할 단 5분의 시간을 바꾸지 않겠다. 나는 술,
마리화나, 코카인, 페이요티 혹은 LSD가 주는 스릴과 행복감으로 가득 찬
그 시간을 위해 네 어머니와 함께 하는 사랑의 순간들을 교환하지 않으련다.
마약들은 그것들만의 고유한 유혹과 진실을 갖지만 정신의 강인함에는 결코
당해내지 못한단다.
  그리고 바로 이곳이 내가 생각하는 진실이 놓여 있는
장소란다. 나는 아직도 마약을 이용해서 진실의 순간을 경험할 수 있는
용기가 있지만, 그런 용기는 단지 현실을 부인하려는 병약함에 토대한
용기일 뿐이다. 새로운 경험을 위한 허기와 더 깊고 더 높은 곳에 도달하기
위한 갈망이 마약의 복용으로 나타나는 것은 단지 세상이 자신에게 고통스럽고
불충분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자포자기하는 것 이상이 아니다. 그리고 그렇게
인정하는 것은 삶에 대한 무지로부터 비롯되며, 인생의 실패인 것이다.
  일식을 보거라. 세상은 어두워지고, 새들은 날개 밑에 머리를 파묻고
잠이 든다.
네가 사랑하는 여자의 몸에서 아이가 태어나는 것을 보아라. 바람에 노출된
산길에 서서 영원의 침묵의 소리를 들어라 - 그것이면 충분하다.
  술과 마약이
이런 느낌을 더 크게 하지는 못한다. 그것들은 이러한 느낌에서 삶을 더
멀어지게 만들뿐이고 더 큰 몽상에 사로잡히게 할뿐이다. 그것들은 너에게
순간의 쾌락을 주지만 너로부터 네 기억에서 다른 것들을 빼앗아간다. 그것들은
뿌리를 가질 수 없고, 네 정신은 확장시킬 수도 없다.
  마수의 손길에 유혹당하지
말거라. 그것들이 제시하는 온갖 거짓된 약속에 현혹되지 말아라. 건강은 네게
주어진 것이다. 기억의 상쾌함과 신체의 건강함은 너의 것이다. 만약 네가
술과 마약을 선택한다면, 너는 이름없는 어둠의 문뒤에 서게 될 것이다. 나나
너보다도 훨씬 나은 사람을 파괴할 수도 있는 그 마수의 손길에 너는 결코
다가가지 말거라.

 

   9. 재난과 고통

  재난과 고통이 언젠가는 너에게 닥쳐올 것이다.
  너는 그것들로부터 네 자신을
완전히 격리시킬 수는 없단다. 너는 그것들을 회피할 수도 없다. 그것들은,
그것들 자신의 계절에 찾아오고 그것들 자신의 시간에 닥쳐온다.
  재난과
고통이 너에게 찾아올 때, 그것들은 순식간에 너를 덮치고 꼼짝 못하게 만들
것이다. 너는 마치 더이상 견딜 수 없을 것처럼 그 시간을 느낄 것이다.
만약 네가 하나의 보통 인간일 뿐이라면, 네가 지금 경험하는 고통의 크기를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느낄 것이다.
  만약 네가 다른 종류의
특별한 사람이라면, 너의 고통이 스스로 하찮다고 느낄만큼, 다른 사람의
커다란 고통에 비해 매우 작고 보잘것없는 고통이라고 느낄 것이다.
  그러나
너는 이 양극단 모두에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 성냥불에 그을린 사람이
불에 탄 사람보다 결코 더 작은 고통을 느끼는 건 아니다. 너의 아픔과 고통은
그것들이 네가 직접 겪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현실적이다. 너는 반드시
그것들을 축복하고, 그것들이 너의 삶에 어떤 선물을 안겨준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너 자신만을 위해서 살아가던 삶의 바깥에서
또다른 너의 삶을 갖도록 만들고, 한순간이나마, 너로하여금 손실과 아픔과
고통을 알고 있는 다른 사람과 함께 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란다.
  그 커다란
교훈은 우리가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경계 내에 있을 때보다는 큰 사건의
발생에 의해서 훨씬 더 많이 찾아온다.
  모든 일이 잘 풀릴때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범위는 작아지고, 삶은 우리가 매일 필수적으로 반복하는 일상적인
일에서 경험하는 것들의 범위에 의해 통제된다. 대화를 나누는 것, 원고를
끝마치는 것, 자동차에 타이어를 갈아끼우는 것, 어제 나에게 웃어준 소녀가
나를 좋아하는지 어떤지에 대해 생각하는 것 - 이 모든 일들은 우리의
일상적인 삶에서 발생하는 삶의 모습과 관계된 수준의 삶이란다.
  재난과
고통은 원하지 않았을 때, 예견치 않았을 때, 준비하지 않았을 때, 우리를
급작스럽게 덮쳐온다. 그것들은 우리의 허약한 방어선을 덮치고 평화스러운
우리의 세계를 무참히 부순다. 그때에 우리는 사방이 가로막혀 탈출할 길이
없을 것만 같아 보이는 비명 속에서 살아간다(비명은 단지 메아리만 남는다).
이러한 근심들과 그렇게도 소중한 내일이 전혀 희망이 없어 보인다는 미래에
대한 막연한 근심들이 우리의 일상적 생활을 하루하루 연민으로 흘려보내게
만든다.
  우리가 마침내 자신을 되찾을 때, 그 결과로써 우리는 그때까지
가졌던 생각들을 하나둘 변화시킨다. 우리는 혼란의 나락으로 떨어졌었고,
과거의 것은 이제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 그래도 우리는 삶을 보다 장기적으로
바라보고 그것에 익숙해짐으로써 다시 한번 좌절을 극복하고 행복을 추구할
기회를 갖길 원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로인해
삶은 더욱 불편하게 변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결코 다시 과거의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으로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정말로 중요하게
보이는 보다 큰 영역으로 옮겨지게 되고, 그리고 그것은 보다 이상적인 삶으로
전환하기 위한 지식을 쌓는 것으로 재난에 응답하는 것이다. 그때의 재난은
삶의 새로운 출발을 생각할 기회로서 주어진다.
  우리가 어떻게 재난과 고통에
응답하는가는 우리가 가진 강인함의 척도이다.
  나는 어린시절에 침대에 묶인
채 심하게 매를 맞으며 자랐던 어떤 사람을 알고 있다. 그는 지금 독방에서
혼자 산다(그의 구두는 완벽하게 정돈되어 있고 모든 물건들은 항상 정해진
위치에 정확하게 놓여있다). 그는 그의 질서에 대한 감각 이외에는 다른 친구가
하나도 없다. 그리고 그것은 어린아이처럼 그의 주위를 선회하는 무질서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을 보호하는 것 이상의 아무런 의미도 없다.
  나는 또한
어린시절을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보냈고, 그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나치에게 총살당하는 현장을 직접 보았던 또 다른 사람을 알고 있다. 그는
지금 돈벌이에 열중하고 있고 그 자신이 "좋은 삶"이라고 생각하는 삶을
살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충분히 고통을 당했어요. 이제는
행복을 주장하고 누릴만한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나는 또한 열여덟 살에
멀리 떨어진 작은 도시의 지저분한 호텔방에서 눈이 가리워지고 피를 흘리며
옷이 벗겨진 채 부엌의 테이블 위에서 낙태한 여자를 알고 있다. 그녀는
그후에 자신의 삶을 암환자를 돕는 일에 헌신하였는데, 아마도 그것은 자신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서, 그리고 어떤 것보다도 큰 고통의 무게가 어떤 것인가를
이해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이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 어떠한
판단도 내릴 수 없다. 그들은 각기 깊고 커다란 고통, 나나 너보다는 훨씬
더많은 고통을 맛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공통적으로 한가지 사실을 공유하고
있다. 그들은 그들이 고통에 대응함으로써 그들의 삶을 변화시켰던 것이다.
  어떤 사람은, 그 구두와 함께 하는 나의 친구 혹은 돈과 함께하는 친구처럼,
그들의 재난과 고통에 대한 응답으로써 그들 스스로의 미래를 사람들로부터
고립시키는 삶의 방식을 선택할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뼈아픈 고통을
당해야만 했을 것이고, 아마도 그 상처는 그들이 기억하고 있는 그런 고통에
또다시 접근하게 만들지도 모르는 어떠한 일도 영원히 거절할 만큼 그렇게
클 것이다.
  그러나 암환자를 돕는 나의 친구는 무엇인가? 그녀는 그녀가 당했던
고통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녀는 그 고통의 기억으로부터 도망치지도 않는다.
그녀는 그것을 받아들였고, 축복했고, 그리고 그것이 아픔과 괴로움을 알고있는
다른 사람과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으로 그녀를 만들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그녀의 내부에서 죽음을 느꼈었기 때문에 삶의 내부에서 죽음을 느끼고 있는
다른 사람들과 그녀 스스로를 공유할 것을 선택한 것이다.
  우리는 성장의
순간으로써 이러한 순간들을 볼 필요가 있다. 미래의 고통으로부터 스스로를
격리시키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커다란 기회를 놓친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의 영역 밖에서 성장하는 것을 위해 그들의 고통을 사용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보다 큰 것을 승인하는 기회와 자신의 경험을 인류와 공유하는
기회를 놓친다.
  아마도 너의 아픔은 여자친구의 상실, 또는 애완동물의
죽음등일게다. 아마도 더 큰 재난은 양친의 죽음이나 사고로 불구자가 되거나
결코 회복될 수 없는 병에 걸리거나 하는 것일 게다. 그 고통이 무엇이든,
그것은 너의 척도, 그리고 너의 삶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되찾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선물로써 바라볼 필요가 있단다.
  명심하거라, 비록 상처가
견딜 수 없을 만큼 크게 보이고 처음에는 매우 비탄스러울지라도, 시간이라는
위안과 함께 그것은 차츰차츰 기억에서 멀어지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인간이라는
존재는 놀랍도록 탄력성이 있는 조직이다. 인간의 신체는 병이 아니라 건강을
향해 움직인다. 너의 정신력도 너의 신체와 같이 건강해지려는 시도를 할
것이다.
  네가 스스로에게 반드시 대답해야만 할 질문은 네가 건강할 수 있다면이
아니라 어떻게 건강할 것인가이다. 비탄과 고통은 그것들 자체의 지속기간을
갖지만, 그것들이 지나기 시작할 때, 너는 반드시 네가 되어야만 하는 새로운
존재로서의 삶의 형태를 안내하는 속삭임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고통스러운
재난들은 혼란으로 우리의 삶을 감퇴시킬 것이지만, 역으로 우리에게 그때까지
무시되어왔던 가치와 의미에 대한 감각을 재건할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반드시 재난과 고통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그것에서 너의
가장 위대한 창조성이 나올 수 있다. 아무도 그것들을 애써 찾지는 않지만,
아무도 재난과 고통을 피할 수는 없다. 사랑처럼, 그러한 재난과 고통들은
너를 더욱 더 많이 인간 가족의 한부분이 되게 할 것이다. 현실의 고통으로써
그것들을 경험하지만, 그것들을 최대한 이용하거라.
  그것들은 너의 낡은
껍질을 태우는 신성한 불이란다.

 

   10. 싸움

  나는 한때 싸우기를 좋아하는 개를 길렀었다. 그 개는 자기에게 달려들건
말건 다른 개를 공격하곤 했다. 나는 욕설과 비난을 퍼부으며 상대방 개로부터
떼어놓기 위해 애쓰곤 했지만, 그 개는 나를 뿌리칠 정도로 힘이 강했다.
마침내 싸움이 끝나며, 나는 그 개를 앉혀놓고 노려본다. 싸움에 이기든 지든
그 개는 사납게 으르렁거리며 비뚤어진 이빨 사이로 화를 가득 담고 있었다.
그 개는 싸움을 한바탕 하고나면 다시 혈기가 돌았고 눈은 거의 행복으로
미칠 지경이 되었다. 그 개는 심지어 물어뜯기고 할켜진 심한 상처를 입기까지
하면서도 평화롭던 자신을 그렇게 깊고 어두운 싸움에 얽매이게 만든다.
  인간도 역시 그와 비슷한 방법으로 싸우는 존재란다.
  싸움은 상처와 손실에
관계없이 우리에게 지극히 원시적인 종류의 도취감을 유발시킨다. 싸우고
있을 때 우리의 모든 감각은 거의 무의식적인 것이 된다. 우리는 인류의 가장
깊은 부분에서 발생하는 어떤 본능적인 부분에 얽매이게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싸우기를 간절히 갈망한다. 그들은 싸울 때보다 더 풍부한 인간
본성을 결코 느끼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이 상처를 입든 말든,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든 말든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 그들은 공포와 분노의 혼합을
좋아하고 싸움을 남자다움의 고결한 시험대로서 바라본다.
  너도 아마 싸움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알고 있을 게다. 확실히 너는 그들을 알아야 한다. 그들은
보다 폭넓은 삶의 전망이나 자기 자신에 대한 목적성이 결여된 채, 싸움이
주는 육체적 자극만을 축복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싸움이 남자다움을
가름하는 척도라고 생각하고, 싸우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을 오히려 멸시하고
남자답지 못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다.
  너는 반드시 그런 종류의 사람을
경계해야 한다. 그들은 자신의 시각에서 드러나는 남자다움의 척도를 네게
확신시키고 너와 동지가 되려고 할 것이다. 만약 네가 그 요청을 거절한다면,
그들은 너의 감정을 자극하고 계집애라고 조롱하며 들쑤시고 덤벼들 것이다.
그들은 네 자존심과 가족을 마구 모욕할 것이다. 다양한 방법으로 위협을
가하기도 할 것이다.
  어떻게든 자기들의 싸움의 장소로 너를 유인하기 위해
온갖 술책을 다 부릴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행동하는 까닭은 상대할 적이
없다면 그들 사이의 동질성이 결코 생겨날 수 없기 때문이란다. 즉 그들은
자신들의 존재를 인정받기 위해서 너의 대항을 필요로 하는 것이란다.
  너는 그런 사람들에게 동조할 필요가 전혀 없다. 너의 남자다움은 거기에
있는 게 아니다. 너는 싸움보다 도망을 선택하면 자기들보다 못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그들의 논리에 말려들어서는 안된다. 단지 공포를 느꼈다고 해서
그들보다 못한 남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도 역시 공포를 느끼는
족속들이다. 그들은 신사다움을 나타내는 능력이나 약한 사람을 친절하게
돌보는 능력과 같이, 선에 의해서가 아니라 단지 싸움에 의해 발생하는 공포를
극복하는 능력으로써 남자다움을 과시하는 방식을 선택했을 뿐이다.
  가령
네가 그들과 싸워서 이겼다고 치자. 그러면 너는 싸우기 전보다 더 나은
남자가 되느냐? 물론 아니다. 네가 남자답다는 말의 의미를 상대보다 더
커다란 폭력으로 가해를 입히는 재능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이상. 그래서
상대방과 싸울 것을 선택하지 않거나 승리할 것을 도모하지 않는다며, 너는
못난 남자가 된다는 말인가? 역시 아니다.
  너는 그들의 생각이 네 삶의
방식을 규정하도록 허락해선 결코 안된다. 너는 그들이 결코 정복자가 아니며,
그런 사람이 남자를 대표하는 선상에 서있지 않다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반드시 선이라는 더 높은 인간적 가치로서 남자다움을 평가하는 방법을 배워야
하고, 공포는 약한 것이고 정복자는 강하다는 생각을 올바르게 식별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 생각들은 네 마음의 내부로부터 싸워내야만 하는 치열한
전생이다. 그리고 이 전쟁은 육체적 대치를 통해선 결코 해결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반드시 싸워야만 할 때가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불합리한 폭력과 주위를 장악하고 통제하는
방법으로 싸움을 바라보는 형편없는 인간들로 가득 차 있다. 어떤 시점에서
그들 중 하나는 반드시 너와 대면하게 될 것이고, 너로 하여금 싸움을 피하지
못하게끔 만들 것이다.
  그들은 아마 네가 몸집이 크거나 작기 때문에, 혹은
네가 싸움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싸우고 싶어할 것이다. 그들은 아마 자기들의
분노와 비열함, 혹은 불만을 드러내며 싸우길 원하거나 아니면 간단히 네가
우연히 그 자리에 있기 때문에 싸우길 원할 것이다.
  그들은 네가 달아나도록
그냥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고, 이성적인 대화로는 도저히 그들을 설득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럴 때, 너는 어떻게 행동해야만 할까?
  나는, 그런 사람은
병이든 사람이라고 보아야 한다고 믿는다. 인간정신의 타락이라는 병,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존재를 가장 밑바닥 수준으로 끌어내려 퇴락시키고,
선과 돌봄을 향한 우리의 추진력을 깨뜨리기 때문이다. 그들이 너와 싸우길
원하는 때는 세상에 몹쓸 병을 퍼트리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하거라. 그것을
멈추는 것이 네 책임인 것이다.
  만약 네가 싸우지 않고도 그 병을 멈출 수
있다면, 네가 그병을 중화시킬수 있고, 사랑으로, 이성과 논리로, 혹은
연민으로 그 사람을 건강하게 되돌릴 수 있다면, 그렇게 해야 한다. 만약 네가
그 병을 멈추지는 못하더라도 정신적 육체적 손상을 입거나 입히는 일 없이
싸움을 피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라도 하거라.
  그러나 만약 그런 사람이 네게
혹은 네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혹은 어린아이나 노인들처럼 도와줄 사람이 없는
연약한 사람에게 해를 입히려고 위협하거나 하면, 그땐 기꺼이 싸워야만 한다.
만약 싸우지 않는다면, 너는 병이 퍼지는 것을 사실상 허락하는 것인데,
이는 싸우지 않음으로 인해 사람들이 상처를 입도록 그대로 방관했기 때문이다.
  네가 싸워야 할 때는 결코 흥분하거나 화를 내지 말고 싸워야 한다. 반드시
병을 치료하는 내과 의사의 냉정함을 유지하며 싸움에 임해야 한다.
  의사는
병을 미워하지만 그것에 화를 내지는 않는다. 의사는 냉정하고 불필요한
악의없이 최선의 판단을 이용해서 병을 치료할 줄 안다.
  너는 내과의사처럼
단호하고 분명해야 한다. 반드시 거리를 유지하고, 냉정함을 유지하고, 싸움의
승부를 결정짓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힘만을 사용해야 한다. 승리나 패배에
연연해하지 말아라. 너는 싸운다는 그 자체로서 이미 패한 거란다. 싸움의
순간까지도 싸움을 멈추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냉정하게 살피고,
그렇게 하거라.
  만약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끼치기 위해 싸우고 있는 너 자신을
발견한다면, 그 싸움은 분명 잘못된 것이다. 네 싸움이 다른 사람이 당하는
손상에 대항한 싸움일 때에만 너는 싸울 수 있고, 적극적으로 싸워야 한다.
싸움이 닥치면 항상 해결의 실마리를 먼저 찾아야 하고, 그렇다고 병의 확대를
방관해선 안된다.
  명심하거라. 비록 싸움에는 수많은 선량한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이미 선한 싸움이란 없는 법이다. 어떤 이는 항상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친다. 그리고 한 사람이 해를 입을 때, 우리 모두가 해를 입는 것이다.
네 열정과 공포를 극복하고 싸움을 피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라. 그러나 싸움이
너를 발견할 때는, 결코 그것을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로 바라보지 말거라.
정신과 육체, 모든 측면에서 싸움을 피하거나 벗어나는 방법을 선택하거라.
  노자의 말처럼 행동하거라. "최고의 싸움꾼은 화를 내지 않는다. 최고의
정복자는 원한을 만들지 않는다. 만약 네가 싸워야만 한다면 이와같은
방법으로 하거라. 결코 두 얼굴을 가진 개가 되지는 말거라.

 

  11. 전쟁

  나는 우리나라가 전쟁터로 너를 부르지 않기를 바란다. 전쟁의 발발은 세계가
균형과 조화를 잃었다는 것과 극단주의가 이 땅에 등장했다는 것을 의미한단다.
  그러나 아무리 피하려고 해도 다양화된 이 세계에서는 전쟁이 너를 부르는
때가 있을 것이다. 그때는 반드시 어떻게 할 것인가를 선택해야 하는데 그건
결코 손쉬운 선택이 아니다.
  사회는 우리곁에서 우리와 함께하는 매우 좋은
것이다. 우리는 사회의 은혜를 입고 있으며, 일반적으로 그것의 요구에 따른다.
우리는 우리 사회의 공공정책을 결정할 대표를 선출하고, 그렇게 선출된 사람은
일반적으로 신중하고 나나 너보다도 더 전쟁을 싫어하는 사람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지도자들이 싸워야만 한다는 의사를 결정할 때, 그러한 결정의
배경에는 항상 논리적인 이유가 뒤따른다. 그들은 아마 우리 사회의 존립에
대한 위협이 외부로부터 차츰차츰 증가하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을 수도 있다.
그들은 아마 우리 생존에 필수적이라고 믿는 어떤 정책을 추진하는 유일한
방법으로서 전쟁을 해야 한다고 보았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들은 아마 우리
삶의 필수적인 방식들을 보존하기 위해 전쟁이 꼭 필요하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한 개인으로서 너는 그들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들의
정책이 필수적이라고 하는 말을 믿지 않을 수도 있다. 너는 그들이 지키고자
하는 가치들의 핵심을 믿지 않을 수도 있다. 아마 네가 죽는다면 아버지를
잃게 되는 너의 자식들을 남겨두고 전쟁터로 떠나는 것보다는 더 중요한
나름의 삶의 방식이 있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정부는 네가 그런 결정을 하길
원치 않을 것이다. 그들은 네가 "단순히" 전쟁일 뿐이라고 느끼는 그러한
결정이 옳다는 것을 부인한다. 그들은 네가 단지 지고한 평화주의자일때만
그것을 허락할 것이다. 평화주의자에게는 어떠한 이유이건 싸움의 정당성은
없다. 비록 너의 가족이 위협당하고 있더라도.
  그러나, 만약 네가 지고한
평화주의자가 아니면서도 전쟁을 회피한다면 - 너의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서만
싸우고, 예컨대 어떤 자원의 풍부한 공급에 대한 국가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싸우지 않는다면, 정부는 이것을 설득력이 없는 자세라고 간주할
것이다. 논리적으로 보면 넓은 의미에서 자원의 위협은 너의 삶의 방편을
위협하는 것이고 결국은 너의 가족을 죽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때에
전쟁터에 네가 부름을 받으면 나가 싸워야 할 것이다. 만약 네가 소집을
거절한다면, 너는 국외로 추방당하거나 기피자로서 투옥될 것이다.
  네 나라가
너에게 국가의 이름으로 싸울 것을 요청할 때 너는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를
결정해야만 한다. 어떤 사람은 종국에 살인은 죄악이라고 믿고, 어떤 일이
있어도 관여해선 안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은 우리가 사회의
일부분이고 그렇기 때문에 사회의 지도자들이 보다 현명한 판단으로 어쩔 수
없이 싸울 것을 결정했을 때는 그들의 결정을 지지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 두사람 사이에는 그와는 다른 길을 모색하길 원하는 사람들에
의한 광범위한
도덕적, 철학적, 종교적, 정치적 그리고 전술적 찬반론이 있다.
  선량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어느 길이든 자신의 양심에 따라 선택할 수 있다.
  나는 앞서
말했던 너의 개인적 삶에서의 싸움을 다루듯 전쟁을 다룰 것을 너에게 충고한다.
우리의 혹성에 병든 곳이 어딘가를 보아라. 그것이 우리에게 싸울 것을 요구하는
우리나라의 적에게 있는가? 그것이 우리나라의 정책과 생활양식에 있는가?
그것이 두 나라 모두, 가령 다른 나라를 점령하여 커질 수 있는 길이라고
전쟁을 생각하는 일반적인 사고 방식에 있는가? 이와같이 병과 관련하여
네가 서 있는 곳이 바로 전쟁에 관련하여 네가 서 있어야하는 곳이다.
  그러나
너무 빨리 행동하거나 쉽게 판단하지는 말거라. 높은 가치를 갖는 길을
평가하는 것과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기 시작하는 것은, 말하기는 쉽다. 그러나
전쟁은 항상 인간이 살아온 역사의 한 부분이었고, 폭력은 아직도 인간적
특징의 커다란 부분이다. 폭력의 회오리가 그 분을 휩쓸 동안, 그것은
평화주의의 높은 도덕적 원리에 대한 여러가지 합당한 주장들에 싱겁게
승리해 버린다.
  아직도 우리 본성의 보다 나은 부분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심지어
인간의 선한 본성을 일깨우기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선이 종국에는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선은 결코
형제끼리 대항해 군대를 일으키는 형제로부터는 오지 않는다고 믿고, 그들이
일으킨 폭력의 회오리가 우리를 덮치도록 그냥 놔둔다. 이 사람들은 장기적
관점에서 봄으로써, 짧은 시각에서 선택한 우리의 결정이 잘못이라는 것을
자각하게 만든다. 그들은 기꺼이 희생하고, 심지어 지상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분쟁을 해결하고자 그들의 삶과 그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삶까지 기꺼이
희생한다.
  만약 네가 사람들에게 그러한 전망을 갖고 있다고 분명하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다면, 너의 선택은 명확하다. 너는 평화주의자이고 그것이 죽음의
위협과 짧은 시각에서 선택한 선을 모두 파괴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인간 사회의
더 높은 질서를 주장할 것이다. 위대한 사람들은 - 마틴 루터 킹, 마하트마
가디, 테레사 수녀등 - 그런 삶을 살았다.
  그러나 그런 위치를 너의 삶에
맞이하기 전에, 먼저 스스로에게 질문해보거라. 나는 그건 삶을 살 것이고
무자비한 폭력에 의해 나의 가족들이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볼지라도 그렇게
행동할 것인가? 그러한 나의 원칙은 깊이가 있는 것인가?
  만약 다른 한편에서
네가 너의 나라에 의해 공포된 어떤 전쟁이 완전하지는 않더라도 싸워야할
마땅한 이유가 있다면 너는 평화주의보다 더 높은 명령을 따를 수 있고,
나라가 요청할 때 언제든 싸울 수 있다. 위대한 사람은 그렇게 한다. 심지어
고독한 전쟁터에서 이름없는 묘지로 그들 자신의 삶을 희생한다 할지라도.
  그러나 그때 스스로에게 질문해보거라. 나는 나의 나라가 값싼 석유를 얻을 수
있고 여러가지 다른 자원을 공급받을 수 있다면 아버지를 잃게 될 나의 아이들을
버리고 기꺼이 죽을 수 있는가? 내 나라의 안녕에 대한 나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수용은 과연 얼마나 강한가? 나는 기꺼이 전쟁에 열광한 나라의 의지를 따를
것인가 심지어 복수 이외의 다른 동기가 전혀 없을 때에도? 나는 나의 정부가
주장하는 추상적인 원칙을 진척시키기 위해 다른 사람의 아이들을 기꺼이
죽일 수 있는가?
  만약 아니라면, 그 전쟁이 단지 전쟁일 뿐이라면, 너는 어떻게
결정해야 할까?
  나는 너에게 몇가지 가능한 조언을 하려한다.
  선과 악에 대해
논의하며 둘러앉아 있는 학생들에 대한 중국의 이야기가 하나 있다. 그들이
이야기할 때 한 늙은 남자가 그 곁을 지나갔다. "우리 저 사람에게 한번
물어보도록 하자." 그들중 한명이 그렇게 말하자, 다른 학생들도 모두 동의했다.
그래서 그들은 지나가는 사람을 멈춰세우고 선과 악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하는 질문을 던졌다. 그 노인은 잠시 생각한 후에 절벽을 가리켰다.
"만약 어떤 사람이 저 절벽 아래로 아이를 던지려 한다면," 그는 말했다.
"너희는 그것이 잘못됐다는 것을 안다."
  이것은 간단하게 보이지만 세상의
복잡한 환경에서도 이 간단한 법칙은 꼭 필요한 것이다. 사회나 정부가 아이들을
죽일 때, 너는 그게 잘못이란 사실을 안다. 만약 아이들을 어떤 추상적인
목적을 얻기 위해 죽이고 있는 쪽이 우리의 정부라면 그때 우리의 정부는
잘못이고 그 정책에 반대해야 마땅하다. 만약 다른 정부가 아이들을 죽이고 있고
우리의 정부가 전쟁으로 그것을 멈추는 일을 시도하는 게 적합하다고 판단하면,
그때 너는 그 전쟁이 정당한 것임을 느낄 것이다.
  이와 다른 전쟁들은 많게든
적게든 불합리한 전제에 토대한다. 전쟁이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시스템을
넘어서는 논의를 해결하기 위해 벌어지는 것은, 과시하기 위한 아이들의 싸움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전쟁이 나라와 자원과 같은 소유의 지배를 넘어서는
싸움이라면 비참과 공포를 결과하는 것이상이 아니다. 전쟁이 억압의 종식이나
빈곤의 완화를 넘어서 상대국의 멸망이나 재산의 파괴를 위한 싸움일 땐
문제가 더욱 심각하다. 그러나 쉽게, 그리고 눈에 띄게 잘못된 전쟁임을
드러내는 것은 아무 잘못도 없는 순진한 사람들이 죽음을 당하기 때문이며,
비록 특정한 전쟁의 추상적 목적이 아무리 고귀하다 할지라도 그것은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그런 전쟁에 대항해서 우리는 아이들의 죽음을 되돌려야
한다. 싸움이라는 것이 순수한 아이들을 죽일 가치가 있는 것일까? 너의 손에
그 아이들의 삶이 달려 있다. 너는 목적을 성취하는 것이나 정치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람들을 희생시켜야만 할 것인가?
  만약 그 목적이 수백수천의
사람을 죽이는 미치광이를 제거하는 것이라면 너는 "그렇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런 미치광이는 자주 우리를 놀라게 만들고, 그들의 백성을 폭력과 기근으로
말살한다. 때때로 미치광이는 우리 모두를 위협한다. 때로는 온전한 민족이
한명의 미치광이 때문에 폭력의 광란에 젖어 들고, 지구의 한 부분을 삼키기
위해 평화를 위협하는 큰 불길을 일으킨다. 아마도 그런 경우에 너는 약간의
죽음으로 많은 사람을 구하는 것이 더 가치가 있다고 결정할 것이다.
  그러나
항상 주의깊게 보아라. 너의 정부가 그 전쟁의 위상을 올바르게 정의하기
어렵게 만들 것이다. 너의 정부가 너를 위협할 것이고 회유하고 어리둥절하게
할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선택한 결정에 따라 너를 전쟁에 소집하고자 하는
것을 유일한 목적으로하여 만들어진 메세지와 이미지를 제시할 것이다. 진실은
시체들이 땅위에 즐비해지기 전까지 오래도록 감춰지고 희생될 것이다. 이것이
일어날 때, 너는 반드시 너의 진실한 마음을 찾아야만 한다. 네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현명한 상담자를 찾아야 하고, 가장 현명한 상담은 항상 모든 관점의
논의를 가장 주의깊게 듣는 것에서 발견된다.
  만약 그것이 싸울 것을 명한다면
명예롭게 싸우거라. 만약 저항할 것을 명한다면 용감하게 저항하거라. 네가
무엇을 선택하든 네겐 가혹한 결과가 닥칠 것이며 전쟁 때문이든 정부 때문이든
심지어 모두가 전쟁에 미쳐 있을지도 모른다. 책임의 일반성을 요청하는 것은
선택할 수도, 피할 수도 없는 커다란 짐이다. 너는 단지 마음의 중심으로만
견고하게 서 있을 수 있고, 다른 사람이 자신의 중심으로 견고히 설 것을
선택한 것에 대해 존중할 수 있을 뿐이다. 싸움이 끝났을 때 그것의 비극은
끝날 것이고, 모두가 형제, 자매가 되고 그것에 뒤따르는 일반성으로 세계를
관통하는 책임을 공유하게 될 것이다.
  꼭 기억하거라. 모든 전쟁을 종결하는
전쟁은 없다는 것을! 전쟁은 항상 가장 비천한 방법이며, 항상 죽음을 이끄는
방법이다. 단지 인류의 가장 큰재난이 이땅에 닥쳤을 때에만 전쟁이 가능하고,
너를 부르는 것에 응답할 수 있는 것이다.
  악이 아이들의 죽음을 기꺼이
볼 수 있을 만큼 커졌을 때, 너는 기꺼이 싸울 수 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너는 반드시 평화적인 방법을 강구해야만 한다.

 

   12. 정신적 여정

  우리는 모두 신의 은총과 함께 세상에 태어난다. 신은 아마 이름이나 얼굴을
갖지는 않을 게다. 너는 신을 볼 수는 없지만, 그러나 신은 거기에 있다.
  그것은, 별이 빛나는 하늘을 응시할 때 갑자기 그곳에 무엇인가가 있다고
느껴져 놀랄 때처럼 너를 엄습해오는 것이다. 그것은 상쾌한 날 아침에 풍족한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시며 기지개를 켤 때 느끼는 개운함과도 같은 것이다.
그것은 네가 시간의 시작 이전에 무엇이 존재했는가에, 혹은 공간의 저편에는
무엇이 존재하는가에 의아해하며 묻게 되는 질문 뒤에 숨겨져 있는 신비이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느껴지는 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어떤 사람은 네게
신은 없다고 말할 것이다. 그들에게 신이란 현실을 직시할 수 없는 나약한
사람의 버팀목이고, 삶에서 미신을 필요로 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의 고의적인
거짓일 뿐이다.
  그들은 우주의 기원에 대한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설명이나
완전한 자연운동의 과학적인 설명을 논의할 게다. 그들에게 있어서 신은
나약함이고 세상에 대한 불평불만이다. 그리고 그들은 전쟁의 발발에 이용된
종교나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해친 종교들의 예를 인용할 게다.
  너는
그런 사람들과는 진지하게 논의할 수 없고, 또 논쟁해서도 안된다. 장자라는
중국의 철학자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우물안 개구리는 바다를 이야기할
수 없다."
  만약 네가 세계의 신비에 대한 어떤 의식을 갖고자 한다면,
바다의 속삭임을 듣거라. 네가 해야 할 일은 우물을 떠나는 것이고, 태양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고, 바다에 뛰어드는 것이다. 코앞의 벽만을 보고 전체의
규모와 모양을 논하려고 하는 사람과 논쟁하는 일에서 벗어나거라.
  그러나
우물에서 떠나기를 선택하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란다. 신이라고 부르는
커다란 의문을 설명하고자 할 때, 사람들은 각기 다른 이야기들, 다른 모습들,
그리고 다른 진실들을 드러낸다. 자주 그들은 순진하거나, 기괴하거나, 혹은
다른 종교들과 전쟁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의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바다에 이르는 그 길들이 흰 수염을 기른 신의 이야기로 끝날 때, 또는 여자를
예속시키고 아이들을 겁먹게 하고 우리에게 다른 믿음을 가진 사람을 적대시해야
한다고 말할 때, 우리가 그 중 하나의 길로 어찌 나아갈 수 있겠느냐? 신화에
둘러싸인 그 길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고, 어떻게 사랑보다는
판단으로써 우리가 충만해질 수 있단 말인가?
  만약 네가 먼 바다의 속삭임을
들은 사람이라면, 네 믿음들을 부인하는 행위와 언동에 현혹되지 말거라.
믿음은 그것을 믿는 사람들을 위한 자기들만의 장소를 갖는다. 바다에 이르는
길은 많이 있을 수 있고, 바다는 그들 각자에게 다르게 보일 수도 있다. 너의
임무는 바다에 이르는 다른 길들에 대해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네가 갈길을
발견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너는 하나의 길을 어떻게 선택할 수 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의 길을 엄격하게 규정한 전통속에서 태어나거나, 혹은
단일한 길을 힘있게 제시하기에는 좀 불확실한 양친들 밑에서 스스로 자기
자신의 길을 찾아나설 수도 있다.
  첫번째 방법으로 자란 사람들은 최소한
믿는다는 게 어떤 것인지를 안다. 그렇지만 그들은 찾는다는 게 어떤 것인지는
모른다. 아마 바다가 거기에 있다는 것은 알고 있겠지만 그것으로 통하는 바깥
기점의 길을 믿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아직 멈추어 서서 움직일
줄을 모른다. 두번째 방법을 취하는 사람은 찾는 것에서는 자유롭지만 아직
믿는다는 것이 어떤 건지를 모른다. 그는 그것에 도달하는 많은 길들을
다양한 시각으로 응시할 수는 있지만 형상화시키는 단계의 능력은 사실상 없다.
  찾는 사람에 대해서는, 찾지 않는 사람들이 그들 둘러싸고 움직일 수 없게
만들거나, 쉽고 빠르게 길을 찾은 것 같아 보이는 사람이 자기 길을 강요하거나,
미스테리의 끝없는 속삭임이 괴롭히는 등, 모두가 그를 그냥두지 않는다.
  우리는 반드시 현재 서 있는 곳을 객관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출발해야만 한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독특한 재능을 지니고 있다. 어떤 이는 연민을, 다른 이는
웃음을, 또다른 이는 인내력을 축복받았다. 어떤 이는 인간미로 채워졌고,
다른 이는 자연미로 채워졌다. 약간의 사람은 예리한 정의감을 가졌고, 다른
사람은 선행으로 주위의 칭찬을 받는다. 이 모든 것이 각자의 출발점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신에게서 부여된 각자의 믿음의 장소이기 때문이다. 너는
반드시 네가 가지고 있는 재능을 발견해야만 하고 - 그것이 네 믿음의
원천이다 - 그 재능을 풍성하게 경작할 방법을 발견해야만 한다.
  나는 때때로
신을 위대한 교향악으로 생각하고, 신에 이르는 다양한 정신적 길을
오케스트라의 구성악기로써 생각하는 것을 좋아한다. 너의 재능은 연주되기를
기다리는 악보와 같다. 너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그 음악을 가장 잘 연주할 수
있는 악기를 찾아내는 일이다. 너는 결코 모든 악기를 혼자서 연주할 수 없고,
그렇게 되면 네 음악은 아마 모든 악기들 속게 묻혀 자기만의 고유한 소리를
찾지 못할 게다. 너에게 가장 적합한 악기를 찾고, 위대한 심포니의 신성한
창조성에 네 음악을 더하는 일이 네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다.
  나는 한 때
영국령 콜롬비아의 베네딕트 수도원에서 몇 달을 보낸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수도사들을 위한 조각을 만들고 있었고, 그래서 그들의 정신적 전망을 공유할
수 있었다.
  그것은 노동의 정신적 리듬에 자신을 몰두함으로써 이를 실행하는
사람을 신이 데려간다는 엄격히 계산되어진 전망이었고, 오랜 세대 동안에
믿음의 운율이 만들어낸 외피같은 메네딕트회의 영성에서 기도자들은 자신이
산화해버릴 때까지 기도를 드렸다. 그곳은 마치 위대한 신들과 직면하는 데는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멀리 떨어져 더이상 들리지 않게
될 때까지 한없이 울 것처럼 만드는 곳이었다.
  나는 베네딕트회의 영성을
좋아하지 않았었다. 그 영성의 재료들은 너무 어두웠다. 그러나 엄격한
수도원장이 한번은 내게 다가와서 이렇게 말했다. "이 조직에 머물러 보십시요.
당신을 깨끗하게 할겁니다."
  그의 말은 옳았다. 비록 외국 땅을 지나쳐 가는
여행자처럼 단지 그런 믿음의 표면에 접근했을 뿐이었지만, 나는 그들의
진실속에 살아있는 위대한 신에 대해 차츰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캠프의
불빛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거대한, 단지 거대하지만은 않은
평안한 어둠이 드리워져 있는 정신적 연대의 광활함에 닫혔던 마음이 열려졌다.
내 귀에는 베네딕트회 영성의 악기들이 만들어내는 완전한 화음이 깃든 천상의
음악이 들리기 시작했다. 그곳에 계속 머문다면, 나는 곧 그 음악의 일부가
될 것이 확실했다.
  그러나 베네딕트회의 기독교 신앙은 나의 악기가 아니었다.
나는 곧 수도원에서 보낸 추억들과 함께 그곳에서 돌아왔다. 나의 정신적
음악은 그것과는 달랐고, 나에겐 연주해야 할 다른 악기를 발견하는 게
무엇보다 필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들의 진실을 엿보았고, 그
진실은 정신을 위해 아름답게 공예된 악기였다. 내가 그 악기의 연주를 배우지
않았다고 해서 그 악기의 아름다움이 덜하거나 현실성이 적어지는 건 아니다.
그 악기는 신의 교향악에서 자기 자신의 부분을 가진다. 만약 오케스트라에서
베네딕트회의 높은 악기음이 흘러나오지 않는다면, 그 곡은 좋지 못한 음악일
것이다.
  만약 너의 정신적 악보에 소리를 줄것 같아 보이는 전통을 만난다면,
너는 그것을 따르기를 결코 두려워하지 말거라. 종교적 전통이 존재할 수
있는 건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는 기본적인 정신적 진실의 목소리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앞서 말한 바다로 통하는 길을 제공하고,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위해 길 위에다 이정표까지 만들어 두었다. 만약
너의 정신을 확장할 수 있는 전통을 발견한다면, 그것에 네 마음과 함께
너의 전부를 주거라. 그 전통의 성서를 읽어라. 그들의 예배에 참가하거라.
그것이 정신을 형성하는 방법에 네 자신을 맡기거라.
  그러나 신에 대한 믿음이
단지 마음의 고독에 기초한 조용하고 개인적인 종교일 뿐이라고 하더라도, 역시
그 길로 들어서는 걸 두려워하지 말아라. 자신의 신을 직접 만나는 예언가들과
환상가들과 신비주의자들의 지혜를 구하고, 매일 신의 경험에 더욱 접근하도록
허락하는 마음의 습성을 기르거라.
  그러나 항상 다음을 기억하거라. 정신적
성장은 단지 실행을 통해서만 연마되고 완성된다는 것을. 도구처럼, 그것은
사용해야만 녹슬지 않는다. 길처럼, 그것은 걸어야만 하는 것이란다.
기도를 통해서든, 묵상을 통해서든, 예배를 통해서든, 선행을 통해서든, 반드시
자신을 정신적으로 성장시키는 방향으로 움직여야 한다. 정신적 통찰력은
너의 믿음을 실행하는 훈련이 충분히 쌓일 때까지는 더이상 깊어지지 않는다.
  심지어는 네가 길을 잃었다고 느끼게 될 때도 있을 것이다. 너는 그 길을
계속 가기에 너무 지쳤거나, 혹은 다른 일이 그보다 더 중요하게 보일 수도
있다. 아마 네 믿음이 단지 순간적 감상이었다고 믿기 시작할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저 그 길을 가고 싶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 일이 발생할 때,
네 자신을 너무 힘들게 하지는 말거라. 너의 삶 전체가 정신적 여정이고, 너는
지금 가능성이 풍부한 땅과 마찬가지로 불모의 땅에 와있을 뿐이다. 네가
시작한 길을 되돌아가려고 하지 마라. 단지 앞을 향해 나아간다는 신념과
확신이 필요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너의 길에 충실해야 한다. 네가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다해 그 길을 가거라. 그리고 반드시 방향을 바꾸어야만 할 때가
오면 그때 발길을 돌리거라. 그러나 바다를 찾는 것만은 결코 포기해선 안된다.
네가 신에게 더 가까이 갈 때, 바다의 속삭임은 더 커지고 그 존재에 대한
확신이 더욱 자라날 것이다. 네 자신이 기대했던 만큼을 발견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그 길에 있게 될 것이다.
  아마 너는
자각함으로써 혹은 원리를 받아들임으로써 신을 믿게 될지도 모른다. 아마 너는
인간적 존재로서 혹은 많은 사람의 동질적 경험의 통일체로써 신에게 이끌릴
수도 있다. 그러나 어디로 이끌리든 간에, 중요한 건 네가 어디론가
이끌린다는 점이다.
  불교인들은 장님들이 자기들이 각각의 부분에 대해 만지고
느낀 바에 의해 하나의 코끼리를 묘사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한다.
각각은 자신이 만져본 부분에 따라 코끼리를 묘사한다. 바로 이것이 신에
대해 알기를 원할 수 있는 방법이다.
  오직 하나의 진실만을 발견할 수 없다고
해서 신을 찾는 것을 거부하지는 말거라. 우리는 다원적인 세계에서 살고 있고,
진실들은 - 정신적, 문화적, 정치적, 그리고 그밖의 진실들은 - 다른 사람에겐
다른 방식으로 주어진다는 것을 냉정하게 받아들여야만 한다. 낯익은 냄새와
희망으로 풍족한, 태양이 비추는 날들처럼 자라나는 길을 발견하거라. 그길을
따라가거라.
  오직 바보만이, 눈이 따갑다는 이유로 태양이 비추는 길을
걸어가지 않는 거란다.

 

   13. 고독과 외로움

  너는 혼자있는 시간을 가져야만 한다. 내가 말하는 혼자있는 시간이란 몇분,
또는 몇 시간 동안이 아니라 며칠, 그리고 기회가 주어진다면 수주일간 혼자있는
시간을 가지라는 거란다. 혼자있는 시간은 정신의 수련장이기 때문에 너에게
몇백 배의 가치있는 시간을 돌려 줄 것이다.
  너는 스스로가 평화를 유지하고
있는지, 혹은 생활의 의미가 단지 일상의 표면적 일들에서만 찾아지고 있는지를
시급히 살펴야만 한다. 그리고 만약 생활의 의미가 단지 일상의 일들에만
머물러 있다면, 혼자있는 시간을 가지는 일은 스스로를 돌아다 볼 기회를
제공하여 너로 하여금 지혜를 성숙시키고 내적인 힘을 성숙시킬 수 있게 할
것이다.
  이것을 결코 쉽게 간과해버릴 만큼 작은 발견이 아니다 사람들은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이거나, 한가롭고 여유있게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사람들은
사고팔고, 이리저리 분주하게 움직인다. 그들에겐 언제나 해놓은 일보다 해야
할 일들이 더 많이 남아있다. 그래서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은, 항상 마음을
생활의 사소한 문제들로 채우는 끝없는 늪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만약 곰곰히 생각하고 주의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바쁘게 움직이는 것이
오히려 의미있는 것이라고 잘못 이해하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자기 생활의
모든 시간을 일에서 일의 연속으로 몰아 넣는다. 그리고 잠깐동안의 고요함은
아직도 할 일이 남아 있다고 인식하는 사람을 자극하여 그들을 숨막히게 한다.
  그리고 항상 못다한 일이 남아 있을 것이기에, 그런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도
해야 할 일을 남기고 죽게 될 것이다. 바쁘게 사는 생활 속에서는 일을 물리치기
위한 노력이 없다. 세상일에는 끝이라는 게 없다. 비록 큰일이 앞에 놓여
있더라도, 생활의 리듬을 찾아 한숨 돌리기 위해 과감히 일을 멈추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는 걸 네가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우주에는 사람들 개개인의
탄생이나 죽음과는 무관하게 불러지는 무한한 노래가 있다. 너에겐 이 말이
낯선 말이거나, 또는 추상적인 말로 여겨질는지도 모른다. 우주의 소리는
일상 생활과 밀접한 크고 작은 소리를 통해서는 듣기 어려운 작은 콧노래이다.
우주의 소리는 우리 모두를 초월해서 존재하는 통일성의 표현이다. 그리고
우주의 소리는 사람들을 죽음과 필연에 조화되도록 만든다. 우주는 사람들을
큰 물체의 한 부분으로 만든다.
  그러한 우주에 대한 지식은 단지 고독속에서만
충분히 경험되어질 수 있다.
  많은 사람들에게 고독은 혼자라는 시적 단어로
인식될 뿐이다. 그러나 혼자있는 것 그 자체는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
혼자있다는 것은 고독의 실험장이 되기 쉬운 만큼 외로움의 실험장이 되기도
쉽다. 그러나 고독은 외로움과는 정반대에 있는 평화를 위한 조건인 것이다.
  외로움은 텅빈 방에 혼자 앉아 아무도 방해하는 이 없는 주위의 공간을
인식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것은 분리의 조건이다. 고독은 네 주위에 혼자만의
사색의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외로움이 분리의 조건인데 반해, 고독은 화합의
조건이다.
  외로움은 편협하다. 그러나 고독은 관대하다. 외로움은 네 주위를
차단하지만, 고독은 무한을 향하여 네 주위를 확장한다. 외로움은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 내적 대화에 뿌리를 두지만, 고독은 끝없는 영원의 침묵에 뿌리를
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단지 외로움을 경험할 뿐이기에 혼자있는 시간을
두려워한다. 그들은 그들에게 응답하는 다른 사람의 형상을 비추는 거울을
세상이 제시하지 않으면 외로움을 느낀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잊혀지고
무시되는 걸 두려워한다.
  자신에 대한 반영이 없다면 그들은 두려워하고 심지어
미쳐버리기까지 한다. 자신들이 가깝게 느끼고 이해하는 일 속에 있을 때에만,
세상은 그들을 편안하게 한다. 그들이 혼자있을 땐, 아무도 그들의 말이나
행동에 대해 반응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존재를 확증해 줄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고독은 처음부터 평안한 가운데에 존재의 바탕을 두기
시작한다. 그리고나서 고독은 네 사상의 중심으로부터 삶의 다른 부분들을
풍족하게 경험할 수 있도록 하는 '자아'를 찾아내기 시작한다. 이 모든 과정은
사람들로 하여금 말과 희망과 기억을 생각하게 하지 않는, 그리고 우리의
자유로운 생각들을 제한하지 않는, 조용하고 깨끗한 공간에서 발생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 공간에 이미 친숙하다.
  어떤 사람들은 어린 시절에 했던
일들에 대한 상상을 통해 이 공간을 발견한다. 다른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세속적인 활동으로 그들의 삶을 보내왔기 때문에 그 공간이 존재한다는 것조차
알지 못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누구나 그 공간에 온전히 이를 수 있다.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를 위해, 아무도 다가올 수 없고 무궁무진한 상상력의 발동을 아무도
방해할 수 없는 혼자만의 시간과 공간을 과감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 네가
어른이 되어 가족과 생활의 의무감에 얽매여 있게 되면, 그런 시간을 갖는다는게
아주 불가능하지는 않더라도 점점더 어려워질 것이다. 그러나 너는 아직 젊기
때문에 그 자체로써 의의를 가지는 혼자있는 시간을 요구하고, 공허만이
되돌아오고 침묵만이 노래하는 장소로 과감하게 떠나는게 필요하단다.
  그런
장소는 어디에서든 발견할 수 있지만, 무엇보다도 자연은 가장 친숙한 고독의
제공자이다. 심지어 그곳에서 혼자가 아니라 다른 친구들과 함께 있더라도,
자연의 위대함은 우리의 일상에서 들려오는 대부분의 무의미한 소음들음
충분히 능가할 수 있다. 만약 네가 혼자 자연으로 돌아갈 용기와 지혜를
가진다면, 보다 큰 율동과 무한한 콧노래의 실체를 금방 깨닫게 될게다. 그리고
네가 자연을 발견할 때, 자연은 항상 거기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고,
너는 언제든 자연속에 있을 수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거란다. 외부의
평화는 내부의 평화를 만든다. 그리고 너는 마음의 평화를 어디에서 찾아야
할지를 알기 때문에 평화가 필요할 때면 언제든지 평화로 돌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런 고독에의 탐구는 그들에게
존재하는 장애로 인해 조바심, 조용함, 평온함, 그리고 평화로움에 이르기까지
천천히 진행된다. 사람들은 그들 앞에서 시간이 무거운 짐처럼 매달려 있게
되는 외로움의 한 시기를 통과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를 구속하는 일상의
제한된 울타리에 대항하여 격렬하게 투쟁해야만 한다. 그런 투쟁은 매우
가치있는 일이다. 천천히 단호하게 고독의 완전한 정적속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그것은 꽃과 향기가 있는 거대한 정원으로 발을 내딛는 것과도 같다. 사람들은
삶을 거칠게 할퀴는 일상적인 일들과 생활이라는 날카로운 울타리들에서 잠시
멀어지게 된다. 그리고 삶은 새롭게 호홉한다. 사람들은 다양하고 자유로운
생각들로 채워지는 장소에 있게 된다. 그들은 갖가지의 소리를 듣고, 갖가지의
숨결을 느끼는 장소, 그리고 땅에 내리쬐는 태양빛이 갖가지로 변화하는 장소에
서있다. 그래서 그들은 현재 생활의 진행과정을 한발짝 떨어진 곳에서
객관적으로 인식하면서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인식에 의해 세계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해서 변화된다. 나무는 하나의 물체가 아니라 살아있는 생명이다.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며 끝없는 춤을 출 때, 우리는 나무의 풍요로운 냄새를
맡고, 바스락거림을 듣고, 율동을 감지할 수 있다. 투쟁하는 순간들의
연속이었던 시간이라는 개념은 별의 리듬을 따르는 상처없는 몸짓으로 변화된다.
외로움은 시들고, 사색하는 고독이 만개한다. 그리고 현재 생활의 진행과정을
올바르게 인식하는 사람은 생명의 맥박과 시간의 윤택함을 가지는 사람이 된다.
  그런 인식은 평화를 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세상의 돈으로는 값을
매길 수가
없다. 그것은 또한 우리의 관계들을 진실한 사랑으로 만들기 위한 열쇠이기도
하다. 현재 생활의 진행과정에 대한 인식이 사람들 사이의 일부가 될 때 모든
관계는 더욱 견고하고 확실하게 된다. 그리고 혼자있을 때에도 자신을
만족시키기 위해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된다. 사람들은 선과 자기
가치로 채워지는 은밀한 공간들을 갖는 방법을 깨닫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과 동일한 삶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인정하게 된다. 사람들은 더이상 타인의
삶 구석구석을 캐려고 하지 않는다. 또한 다른 사람의 존재로서 자신의 내적
공허함을 채우려고 하지도 않는다.
  고독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결코 이러한
모든 것을 알 수 없다. 그들은 삶의 내부에서 언제나 채워지지 않는 외로움에
사로잡혀 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이 자신의 외로움을 채워줄 거라고 보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비현실적인 요구들을 한다. 그들은 사랑이라는
명목으로, 자신들의 필요와 기대로 주위 사람들을 숨막히게 만든다. 고독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모든 관계에서 자신과 같이 있는 사람이 다른 모든
관심을 버리고 자신에게 완전히 전념할 것을 요구한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자유를 오히려 두려워하는 것이다.
  사실 그들이 원하는 건
사랑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공허한 형상에 이르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들의 삶의 공간들은 풍족할 수 있고, 각별히 존중될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쓸데없는 기대들로 가득 채워질 뿐이다. 그들이 주는 사랑은 자유가 아니라
속박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순수한 의도가 자신의 최고로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의 생활을 침체시킨다는 사실을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
  만약 진실로
행복한 생활을 원한다면, 너는 고독의 교훈을 배워야만 한다. 그 교훈을
배우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배움을 지속시키는게 더 중요한 일이다.
시간을 계산하지 않고 갈망이 존재하지 않는 공간으로 자유롭게 될때까지,
너는 배회함과 쓸데없는 잡담과 혼란스러움을 물리쳐야만 한다. 인내하거라.
받아들이거라. 고독은 네가 결정해야 할 일이 아니라 네가 도달해야할 장소란다.
  항상 네 주위의 세계를 바라보거라. 산은 쓸쓸하다고 해서 움직이진 않는다.
하늘을 선회하는 매는 태양과 합칠 것을 갈망하지 않는다. 그들은 끝없는 현재의
평화 속에서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을 사람이 고독 속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평화이다. 네 자신 안에서 그 평화를 찾거라. 고독이 지배하는 장소로 가거라.
큰 침묵의 교훈을 마시거라. 그러면 생활에서 외로움을 느끼는 순간은 결코
있을 수 없을 것이다.

 

   14. 여행

  나는 지금껏 길이 유혹하는 소리와 먼 곳이 부르는 소리를 전혀 느껴보지
못했다는 사람을 만나 본 적이 한번도 없다. 반더루스트는 저 언덕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고 싶어하는 모험심과 욕망은 전혀 들리지 않고 전혀 볼 수
없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울리는 메아리와 같다고 말했단다.
  이 메아리들의
대부분은 멀리서 희미하게 울린다. 그래서 사람들은 생활과 가정과 가족을
돌보아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인해 이 메아리들을 쉽게 제쳐놓는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이 메아리가 결코 사라지지 않는 바다의 철썩거림과도
같기 때문에, 그곳을 향하려는 욕망이 마음속에 강하게 자리잡고 점점 커져간다.
나는 네가 젊을 때 이 메아리들을 들어야만 한다고 믿는다. 기회를 잡거라.
그리고 먼 곳이 너를 부르는 소리를 따르거라. 그것은 네가 항상 소중히 하고
영원히 잊지 않아야 할 삶의 한 부분이다. 나는 나의 삶 가운데 있었던 어떤
순간을 너에게 말하고자 한다. 아마도 이 이야기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게다.
  그날은 아침부터 계속 눈이 내렸다.
우리가 마지막 산장에 도착했을 때, 주위는 폭설로 인해 한치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워지고 있었다.
  우리 전방에는 거대한 검은 벽처럼 희미하게
보이는 므루크 산맥이 안개와 연무, 그리고 눈으로 온통 뒤덮여 있었다.
  "저기 산꼭대기는 지옥을 방불케 할 정도로 많은 눈이 내리고 있다"고 산장
지기가 말했다. 그 사람은 손이 시려워서인지 팔로 엽총을 감싸고 있었다.
그의 말을 들으며 산꼭대기를 쳐다본 나는 혼자서 중얼거렸다. "우리가 과연
오늘같이 추운 겨울날 저 산을 정복할 수 있을까?"
  나는 그 산장에서부터
안개 속으로 나있는 좁은 자갈길을 바라다보았다. 어쩌면 가능할지도 몰라.
그렇지 않을 수도 있고, 그 길은 페어뱅크와 프루드호 베이 사이에 알래스카
송유관을 건설하는 인부들을 위해서 급조된 길이었다. 그길은 톱니모양의
알래스카 황무지를 가로지르는 산등성이를 따라 낸 자갈길로, 버려진 길을
복구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유조차 운전수들이 차를 제어하지 못하고 죽음으로
빠져든 길 안쪽으로는 임시로 세워진 하얀 십자가들이 즐비하게 서 있었다.
우리는 브루크 산맥 전방의 마지막 기점인 디재스터 크리크에 서있었다.
그곳을 얼어붙은 땅이었다. 브루크가 험한 바위산이기 때문에, 데드호스와
프루드호 제이에 산재된 이동가옥들과 반추형 오두막까지의 150마일 이내에는
거주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나는 그 길을 막 통과하여 산장에 도착한
탱크트럭 운전수에게 걸어갔다. 그의 트럭은 온통 얼음으로 뒤덮여 있었다.
  "우리가 저 길을 무사히 지나갈 수 있을까요?"
  "당신 체인은 가지고 있소?"
  "아니요."
  "나같으면 가지 않겠소."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운전수와의
대화 내용을 말했다. 그러자 그들은 나에게 소리쳤다. "우리는 이 먼 곳까지
왔어. 결코 되돌아가진 않을 거야."
  마지못해 나는 차에 올라탔고 우리는
죽음의 동정을 시작했다. 우리가 자갈길을 올라가기 시작했을 때, 갑자기
차가 미끄러지며 속력이 떨어졌다. 우리는 곧 폭설 속으로 밀려들어갔다.
앞을 전혀 볼 수 없었다. 좁은 자갈길에는 오른쪽 난간이 아예 없었다.
만약 뒷바퀴가 미끄러진다면, 혹은 하얀세계를 뚫고 우리를 향해 돌진해 오는
다른 트럭이 있다면 우리는 결코 살아남을 수 없는 절벽으로 미끄러져 떨어지게
될 것이다. 여섯명의 죽음, 여섯개의 하얀 십자가. 그것으로 끝장이다.
  운전자는 다시 속력을 내었고 헤드라이트의 희미한 불빛을 뚫고
앞으로 달렸다.
그는 차가 멈춰버린다면 이 얼어붙은 자갈 위에서 다시 출발하는 게 불가능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빙판 위에서도 속력을 늦출 수 없었다.
만약 우리 차가 멈추었다면, 길이 너무 좁고 차가 불안전했기 때문에 후진시킬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우리는 회색곰들이 바위로 된 비탈길을
돌아다니는, 그리고 150마일 내에서는 사람의 목소리를 전혀 들을 수 없는
산길에서 꼼짝도 못했을 것이다. 운전자는 커브길에서 여러번 실수할 뻔했고,
차가 잠시 멈추듯하다가 다시 출발할때는 바퀴들이 눈덮인 어둠속으로 삐져나온
자갈들을 툭툭 튕겨냈다.
  누구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 모두는
숨소리조차 죽이고 좌석 모퉁이를 꼭잡고 조용히 앉아 있었다. 나는 우리가
죽음으로 가고 있다는 공포심으로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때 나는 내가
실수한 거라고 자신에게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되돌리기에는 너무
멀리까지 가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우리 차가 폭설을 뚫고 나왔다. 산들이
우리의 양편으로 뻗어있고 멀리 전방에는 내 생전에 결코 보지 못했던 광대한
평원이 펼쳐져 있었다. 마치 하얀 천상의 광경처럼 지구의 만곡을 볼 수 있을
정도로 광활했다. 우리는 그 길을 벗어나 이 끝없는 광활한 공간을 달렸다.
공포는 어느새 흥분으로 바뀌어 있었다.
  우리는 이 끝없는 땅을 달려 휴게소까지
다다랐다.
  세찬 산바람은 어느새 멈추어 있었다. 우리는 전율을 느끼게 하는
침묵 속으로 발을 내딛었다. 땅은 눈으로 덮여진 거대한 파도처럼 물결이 일고
굽이쳤다. 하늘은 때맞추어 새빨간 황혼으로 뒤덮여 마치 땅이 꽁꽁 얼어붙은
듯이 보이게 했다.
  그 장관의 규모나 율동이 우리를 현기증나게 하고 있었다.
나는 분명 현기증을 느꼈다. 다음에 펼쳐지고 있는 계곡은 100피트 혹은
10마일가량 멀리 펼쳐져 있었다.
  나의 오른쪽 멀리, 시야의 한쪽 끝에서 다른쪽
끝까지 아치형으로 된 기다란 산의 행렬이 서 있었다. 그 산은 눈으로 덮힌
봉우리들이 우유빛 하늘 속으로 모습을 감추고 있는 왕관처럼 지평선위에
씌워져 있었다.
  나는 내가 어디에 와있는지를 알 수 없었다. 침묵이 천국처럼
보일 만큼 고요했다. 그 광경은 바위들이 조약돌로 보일 만큼 광대했다.
옅은 자주색으로 물든 구름들의 물결은 북극의 땅거미지는 하늘 속에서 우뚝
솟은 산들처럼 떠다니고 있었다. 땅의 끝이 어디며, 하늘이 어디서 시작하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내가 상상할 수조차 없는 무척이나 커다란 꿈의 세계에
서 있었다.
  나는 그곳의 모든 것과 대화하길 원했기 때문에 여기저기를 돌아
다녔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그 광경이 너무나 장대했다. 나는 여행을 시작할 때,
아름다운 광경을 보리라고는 기대했지만, 이처럼 아름다우리라곤 상상조차
못했었다. 나는 이 경험을 말로써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다. 오히려 그 경험이
나를 설명할 수 있을 뿐이다.
  나는 더이상 나 자신이 아니었다. 새로운 진실들이
세찬 바람처럼 나에게 돌진해 왔다. 내가 결코 볼 수 없었던 색조들과 결코
느낄 수 없었던 공간들이 나의 모든 것을 씻어냈고, 이전에는 알 수 없었던
정신의 세계로 나를 데려갔다. 나는 흥분했고 어리둥절했다. 나의 옛 자아는
인공의 피부처럼 허물을 벗었고, 그 자리엔 내가 알 수 없는 새롭고 더욱
커다란 누군가가 서 있었다.
  나는 또다시 그와같은 경험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여행의 신비이다. 어떤 여행이든 신비스러움이 있다. 너는 네 자신의
지식과 자신의 범주에서 안주하게 하는 가정에서 떠난다. 그러나 여행을 할때,
너는 여행의 모든 풍부함 속에 있는 세계와 만나고 대화하게 된다. 너는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들을 만난다. 네가 상상할 수 없었던 세계를 본다.
전 생애를 투자할 수 있을 만큼 크게 느껴지던 네 자신의 세계가 시간과 공간
속에서 하나의 작은 점이 될 때까지 점점 더 작아진다.
  너는 다른 사람이 된다.
  너는 그저 알 수 없는 세계에 너를 맡겨두면 된다. 그 세계가 반드시 꿈같이
느껴지는 북극의 평야처럼 광대할 필요는 없다. 그 세계는 위스콘시크 숲을
거니는 차분한 산책일 수 도 있고, 나이로비의 구석진 거리일 수도 있다. 네가
익숙한 것에서 받는 위안을 떠났다는 것, 그리고 네 자신의 세계와 전혀
동떨어진 세계에 자신을 개방했다는 것이 무슨 문제가 될 것인가!
  천천히
일상에서 친근한 것들에 대한 기억이 네 마음속에서 멀어져간다. 그리고 너는
네 주위의 낯선 세계의 경험에 빨려들어가는 자신을 발견한다. 너의 생각들과
관심이 변한다. 너의 감정들은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사건에 집중된다.
세상의 요구가 네 머리와 가슴에 새겨지고, 적어도 순간적으로나마 너는 일상의
관계들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와진다.
  많은 사람들이 여행자가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삶의 표면은 대충 훑어보는 관광자이길 원한다.
그들은 결코 자신을 떠나길 원치 않는다. 그들은 어디를 가든 자신들의 세계를
고스란히 가져가려고 생각하거나, 혹은 그들이 떠나온 세계를 그곳에서
재창조하려고 노력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해하는 안전한 세계를 위태롭게
만들기를 원치 않는다. 그리고 그들의 경험들이 실제로 얼마나 보잘 것 없고
제한된 것인가를 알려고 하지 않는다. 관광자들은 호텔에서 호텔로 움직인다.
돈과 신용카드로 보호받는다. 그래서 그들은 결코 자신들이 여행하는 세계를
진정으로 만날 수 없다.
  진짜 여행자가 되려면, 기꺼이 순간에 네 자신을
맡길 수 있어야 한단다. 스스로를 네 세계의 중심으로부터 끄집어 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네가 뒤에 남기고 떠난 생활에 대한 믿음을 잃게되는 근원이
될지라도, 네 스스로를 발견하게 되는 장소와 사람들의 생활을 전적으로
신뢰해야 한다.
  너는 그들과 함께 만나 서로 나누는 것이 필요하다. 그들의
식탁에 앉거라. 그들의 거리로 가거라. 그 나라 말을 알기 위해 노력하거라.
그들에게 네 삶을 이야기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귀기울여 들어라. 어떻게 그들이
서로 사랑하며 어떻게 서로 싸우는가를 지켜보거라. 그들이 무엇을 가치있게
보고 있으며 무엇을 두려워하는지를 알아라. 그들이 삶을 유지하는 공간을
몸으로 직접느껴 보거라.
  그들의 일상생활의 구성에 한 부분이 되거라. 그러면
너는 그들의 세계에서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감각을 얻게
될 것이다. 그들에게 네 자신을 맡기거라. 그들을 판단하기보다는 그들을
받아들여라. 그러면 너는 그들의 삶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될 것이고,
그들의 세계가 네 세계의 일부가 된다는 걸 발견하게 될 것이다.
  움직일 때마다
너는 성장을 계속할 것이다. 너는 이 세상에서 삶의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는
걸 인식하게 될 것이고, 언어와 문화의 차이 속에서도 모든 사람이 사랑하고
사랑받는 꿈, 그리고 삶 속에서 슬픔보다는 기쁨을 누리고자 하는 희망찬 꿈들을
나누며 산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여행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만큼
로맨틱하고 흥미롭지만은 않단다. 친근한 사람들이 항상 머리속에 떠오르고
불안정한 감정이 너를 마음 편히 쉬지 못하게 만들 수도 있다. 네감정들은
때론 보금자리를 잃었다고 느낄 정도로 불안해질 것이다. 만약 네가 혼자
여행한다면 남겨두고 온 가족과 연인들의 따뜻함이 네 마음을 아프게 할 것이다.
그리고 그로 인해 겪게  될 외로움은 네가 사전에 생각할 수  없었던 깊은 수렁으

너를 빠뜨린다.
  그런데 여행에는 이보다 더 큰 위험성들이 존재한다. 너는
생활에 관계된 풀기 어려운 문제들과 복잡성들로부터 도망치기 위한 수단으로
여행을 이용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도 있다. 그리고 네가 어떤 곳에서도
어떤 사람에게서도 더이상의 아무런 관심의 대상도 된지 않는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발견할 수도 있다. 너는 길의 유혹에 사로잡혀 있었노라고 후회하게
될 수도 있고, 자신이 한 장소에 너를 묶어둔 생활에 불만이 쌓인 사람일
뿐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도 있다.
  이러한 일들은 종종 발생한다. 그러나
판에 박힌 생활의 틀속에 꿈을 묻어버린 사람이 된다는 건, 그리고 더이상
지평선 너머의 광경에 대해 아무런 관심을 갖지않는 무감각한 사람이 된다는
건 얼마나 더 슬픈 일이냐?
  나는 모험이 가치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외에 어떤 방법으로 고대시대에 서 있다는 느낌과 텅빈 공간 속에서
들리는 침묵의 함성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단 말인가? 또 어떤
방법으로 교육받지 못했고 결코 그 마을을 한번도 떠난 적이 없는, 너와는
전혀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세계를 연구할 수 있으며, 너와 그
사람이 어떤 공통점을 갖고 있는지를 알 수 있겠는가? 세상의 모든 것에는
제각기 가치가 있고 모든 사람과 모든 장소가 각기 자신만이 제공할 수 있는
독특한 특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겠는가?
  삶에서 큰 변화와 재난을 만났을 때, 살아가는 데데 수많은 다양한 방법이
있다는 사실과 삶이 새로운 방식으로 계속되리라는 것과 삶의 모든 단편들이
네가 뒤에 남겨두고 온 삶만큼이나 가치가 있다는 것을, 달리 어떻게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러한 교훈들, 그리고 더 많은 교훈들이 너의 인격에 새로운
요소를 불어넣을 것이다. 여행을 통해 너는 두려움이 모험과 만나고 외로움이
흥분과 만나는 삶의 교차점들을 알게 될 것이다. 너는 그것이 정지하는 듯한
느낌이 아니라 거의 달리는 듯한 느낌이라는 걸 알게 될 것이다. 너는 벼랑끝에
서게 될 것이고 거기서 건너뛰게 될 것이다. 그로인해서 너는 다른 어떤
건너뜀이 삶의 기복 가운데서 네 앞에 놓이게 될 때, '그래' 혹은 '아니야'라고
말한다는 것이 무얼 의미하는지를 알게 될 거란다.
  이러한 수많은 교훈과
기억들이 항상 너에게 남게 되고 삶을 살아가는 동안의 위로자나 안내자로서
봉사할 것이다.
  비록 나는 지금 여기에 앉아있지만 북알래스카에 있는 꿈같은
평원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 나는 이탈리아의 대리석 석공들과 함께 식탁에
앉아 태양빛처럼 느껴지는 와인을 마실 수 있다. 나는 브루클린의 거리에서
자주빛으로 된 유모차를 끌고 있는 부인들이 대화하는 걸 볼 수 있다. 나는
몬태나 사막고지에서 9월의 어느날 밤에 땅으로부터 솟아올라가는 불빛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나는 여행을 했기 때문에 외부인의 눈에
비친 다른 세계를 볼 수 있단다. 여행을 했기 때문에 나는 내가 판단하고
부정해야할 부분과 단순히 선택해야만 하는 부분이 무엇인지를 안다. 나는
내 식탁의 축복과 내 침대의 따스함을 안다. 나는 삶의 많은 부분들이 완전한
기회라는 것을 안다. 단순히 현재의 나를 있게 하기 위해 얼마나 큰 선물이
주어졌는가를 안다.
  내가 늙었을 때, 그래서 나의 몸이 서서히 나를 무너뜨리기
시작할 때, 나의 기억들이 나를 위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 기억들은 나를
들뜨게 하고, 나를 산과 바다로 데려갈 것이다. 나는 영화를 보듯 그 기억들을
더듬을 거란다. 기억들은 나의 상상속에서 생생하게 펼쳐지고, 나는 아마도
부유하고 평화롭게 될 것이다.
  나는 너도 역시 그런 평화를 갖기를 원한다.
하루하루의 삶을 공허한 노력으로 보내는 사람과 내가 이제껏 무엇을 했는가라고
묻는 사람, 그런 식으로 아까운 나날을 허비하는 사람보다 더 슬픈 사람은 없다.
  그것이 우리가 여행을 필요로 하는 이유이다. 만약 미지의 세계로 여행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그런 사람들의 시각은 점점 더 우둔하게 되어 갈 것이다.
그들이 활동하는 세계는 보잘것없이 작아질 것이고 새로운 사람들과 사물들과의
만남속에서 발생하는 경이로움이라는 감각을 잃어버릴 것이다. 그들의 눈은
광활한 초원위에 펼쳐진 지평선을 보지 못할 것이고 그들의 귀는 자기 삶의
영역밖에 있는 주위의 소리들을 들을 수 없을 거란다. 그러나 그들은 어느날
갑자기 깨닫게 되겠지. 그리고 그들은 일상의 나날을 보호하기 위하여 꿈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이다.
  네 스스로 이런 사람들 중의 한 명이
되지 않도록 경계하거라.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과 편안함에 대한 유혹은
여행자만이 잡을 수 있는 기회를 잡지 못하도록 너를 방해할 것이다. 그러나
네가 만약 그 기회를 잡는다면, 너의 선택을 결코 후회하지는 않을 것이다.
확신을 가지거라. 차가운 비가 내리는 텅빈 거리에서 우산도 없이 홀로 서
있을 때, 혹은 빌린 침대에서 간호해 주는 이 하나 없이 열병으로 앓아 누워
있을 때, 의심의 순간들이 찾아온다. 그러나 그 순간의 고통들은 빨리 온
것처럼 그렇게 빠르게 지나갈 거란다.
  결국 너는, 모든 모험과 어려움이 네가
이전에 획득했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지식이라고 여길 수 있는 훨씬 더
성숙한 사람, 훨씬 더 강한 사람, 훨씬 더 현명한 사람, 훨씬 더 행복한 사람,
훨씬 더 나은 사람이 될거란다.
  나는 한 때 여행자의 축복이라는 글을 썼었다.
거기서 이런 말을 했던 기억이 난다. "포근한 신발들, 부드러운 베개 하나,
그리고 마른 옷가지들을 챙겨라." 그것이 전부다. 이 간단한 물건들에 친숙함을
가진 사람은 별들의 꿈을 꿀 수 있단다.

 

   15. 푸른 순간

  나는 25살때, 독일 중세대학도시인 마르부르크에 있는 건물의 작은 다락방에서
무일푼에, 혼자서 두려움에 떠는 병약한 나날들을 보냈던 적이 있었다. 그곳에는
친구 하나도 없었고 가족과도 멀리 떨어져 있었단다. 낮에는 심한 알콜중독자가
경영하는 골동품가게에서 일하며 생계를 꾸려나갔고, 밤에는 우리나라 말을
알아듣지도 못하고 나에게 관심도 보여주지 않는 그곳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거리를 배회하면서 지냈다.
  그러나 나는 결코 혼자인 것만은
아니었다. 내가 일해주던 가게 주인의 어머니는 매우 현명한 여자였다. 12살의
어린시절에 그녀는 나치가 그녀의 학급에서 유태인 아이들을 잡아가는 것을
보았다. 아무도 그것에 대해 말하지 않았고, 교실에서는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수업을 계속했다. 그러나 매일매일, 밤에서 밤으로, 그녀는 단짝
친구들과 반아이들이 사라지는 걸 보았다.
  그녀는 목격자임과 동시에
생존자였다.
  여러달 동안 그녀는 내부의 혼란과 싸우고 있는 나를 자세히
관찰했다. 그녀는 카툰을 그리며 집의 창문을 통해 이웃집 아이들과 함께
앉아 있는 나를 가만히 지켜보았었다. 그녀는 내가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고 멍하니 먼 곳을 바라보는 것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하루는 그녀가
내곁에 다가왔다.
  "나는 그동안 당신을 쭉 지켜봤어요." 그녀가 말했다.
  "나는
당신의 눈에서  고독함을 봤어요. 당신은  많은 사람들과 똑같아요. 삶이  어려울

사람들은 장래에 그 어려움을 극복한 장면을 그려보려고 시도하죠. 혹은 그들은
과거의 행복했던 시절을 떠올려 현실을 위로하려고 생각해요. 시간은 그들의
적이죠. 그들이 살고 있는 현실의 하루하루는 그들의 적이에요. 그들은 그
순간엔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하고 원해요. 그들은 단지 미래나 과거를 위해
살아갈 뿐이에요. 그러나 그건 잘못이죠."
  "나는 간단한 룰을 가졌어요."
그녀가 말을 계속했다. "항상 푸른 순간을 찾아요."
  그녀는 이제 내곁에 앉아
있었다.
  "푸른 순간은 어떤 시간, 어떤 장소에서도 일어날 수 있어요. 그건
당신이 진실로 당신 주위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바로 그 순간이에요. 그건
공포의 순간일 수도, 사랑의 순간일 수도 있죠. 당신은 단지 기억 속에서만
그걸 알 수 있어요. 나의 어린시절에 학급 친구들이 하나둘씩 죽어갔지만,
우리가 서로의 눈을 바라볼때면 나는 푸른 순간을 가졌어요."
  나는 고개를 돌려
그녀의 윤곽과 친절한 얼굴을 응시했다. "내말을 주의깊게 들어요." 그녀가 계속
말을 이었다.
  "이건 순간이에요. 우리는 결코 그것을 잊지 못할 거예요.
이순간에 당신 그리고 나는 어떤 다른 사람의 존재보다 더 가까이 있어요.
이 순간을 잡으세요. 그걸 유지해봐요. 그것으로부터 등을 돌리지 말아요.
이 순간은 금방 지나가게 되고 우리가 나누었던 대화는 과거로써 존재할 거예요.
그러나 그게 푸른 순간이에요. 그리고 푸른 순간은 당신이 만들어 나가는 삶을
진주처럼 한 알씩 연결할 거예요. 그건 당신이 그것들을 발견하는 것이고 당신이
그것들을 만드는 거예요. 그건 당신이 다른 이들 속에서 살아있는 그것들을
가져오는 거예요."
  그녀는 손으로 내머리를 쓰다듬고는 가볍게 토닥거려 주었다.
  "항상 푸른 순간을 찾아요." 그녀가 말하고는 자신의 일을 보러 돌아갔다.
  몇년이 지난 지금, 나의 친구 프라우 듀폰트는 죽었다. 암이 그녀의 몸에
퍼진 후에 우리는 각기 다른 삶의 길을 통과했다. 그러나 나는 결코 그녀의
말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더이상 그 순간이 포함하는 즐거움이나 고통에
의해서 한순간을 판단하지 않는다. 대신에 나는 마음과 정신을 가득 채우는
방법으로 그 순간들을 극복한다.
  내가 만약 나 자신의 비현실적인 요구와
지나친 기대를 포기해 버린다면, 그 푸른 순간이 찾아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마음의 상처를 입었을 동안에 푸른 순간을 경험했다. 창밖에서 새들의
지저귐을 들으며 느긋하게 커피를 한잔 마시고 있을 때, 그 순간을 느낀다.
나는 낯선 사람과 골치아픈 이야기를 할 때에 그순간을 갖는다. 그 순간들은
나의 기억속에서 영원히 살아있을 온정과 진실과 함께 오고, 고통스러운 삶에
예기치 않았고 기대치 못했던 은총이 쏟아지듯 다가온다. 그 순간들은 영혼의
선물이다.
  너는 반드시 삶에서 푸른 순간을 찾는 방법을 배워야 한단다.
그것들은 정말로 큰 가치가 있는 진주들이다. 너는 그 순간을 강제로 얻을
수는 없다. 그것들을 제조할 수도 없다. 그러나 네 마음이 고요하고 현재의
순간에 자신을 전체로서 맡긴다면 그것들을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네가 너에게 얼마나 큰 이득을 줄 것인가 혹은 네행복에 어떻게 공헌할 것인가에
따라 벌어진 사건을 판단하거나 측정하기를 원한다면, 그 푸른 순간을 결코
이해하려고 할 것이고, 그 자체는 네 경험과 지식의 한계 내에 가두어지게 된다.
단지 보편의 풍부함에 네 자신을 맡긴다면, 그 자체가 향상되고 거룩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그리고 단지 그래야만, 그 푸른 순간이 찾아올 수 있는 거란다.
  프라우 듀폰트의 충고에 따르거라. 네가 혼자일 때, 집에서 나와 있을 때,
그 푸른 순간을 보거라. 네가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만지기 위해 다가갈때,
푸른 순간을 찾아라. 네가 거리에서 눈빛이 난폭함으로 미쳐있는 사람에 의해
앞이 가로막히고 그의 제정신이 아닌 말을 듣게 될때, 푸른 순간을 찾아라.
그 순간이 거기에 있단다. 그 순간이 널 위해 그곳에 머문단다.
  나는 선에
대해서는 조금밖에 모른다. 그러나 나는 선에 대한 모든 것이 푸른 순간이라고
믿는다. 그건 순간의 충만과 아름다움에 자신을 맡기는 이들에게, 그리고
세계가 얼마나 그들을 위협하는가에 의해서나 혹은 행복과 수입의 척도에 의해서
삶을 판단하거나 구하지 않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보편의 선물이다.
  프라우
듀폰트는 나의 삶을 통해 지나간 선의 순간과도 같다. 그녀는 내게 내 주위의
세계를 밝히는 간단한 교훈을 남겨 주었다.
  "항상 푸른 순간을 찾아라."
  내가 너에게 이것을 전해 줄 수만 있다면, 나는 삶이 제공하는 행복의 가장
순수하고 가장 간단한 열쇠 가운데 하나를 전하는게 될텐데.

 

   16. 크레이그의 교훈

  내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 그리고 많은 나이든 사람들은 -
세상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립하는 것에 대한 사회적 동질성의 심각한 위기속에서
살아간다.
  약간의 사람들, 특히 젊은 여자들은 사회적 동질성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희미해질 때까지 곁에 있는 다른 사람의 흥미 속에 자신의 흥미를
감추고 산다.
  다른 사람들, 자주 젊은 남자들은 그럭저럭 전반적이고 완성되어
보이는 자신을 만드는 일을 시도하는 것에서, 자기중요성과 성취를 과시함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깊은 인상을 주기 위한 절망적인 시도들을 한다. 더욱이 몇몇
남녀들은 자기들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혹은 다른 사람의 기대치에 부응하여
자신의 사회적 동질성을 수립하려는 시도를 하고, 그러한 경쟁에서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을 덧없이 비판하면서 시간을 허비한다.
  그들 각자의 마음에는
누군가 그밖의 다른 사람이 그들의 현재 위치에 대해 판단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불확실성 때문에 가면이 벗겨지거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들어 있다.
  내가 좀더 젊었을 때, 나는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처럼 이런 풍토와 함께 열병을 앓았을 정도였다. 자주 나는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판단할까라는 걱정 때문에 감히 행동하지 못했었다.
어떤 때에는, 내가 생각하고 행하는 모든 것을 확실히 승인받기 위한 눈물나는
시도로서 논쟁의 중심에 내 자신을 강제로 내몰곤 했었다. 나는 다른 사람의
의견을 옳든 그르든 무조건 배제했다. 나는 그들을 비난하고 힐책했다. 나를
둘러싼 다른 이들을 보다 낮추어봄으로써 나를 높일 심산으로 그들의 약점과
모순에 공격의 초점을 맞추었다. 어떤 때는 그걸 깨닫기도 하지만 다른 때는
깨닫지조차 못했다.
  그건 내가 성년에 도달한 이후에도 오랫동안 습관적으로
남아있었고, 그런 행위는 내 주위를 둘러싼 불확실성에서 나 스스로를 끌어내기
이전까지 나의 친구들에 의해 비판당하고 책망될 기회를 가졌었다.
  크레이그는
나의 가까운 친구였다. 그는 그가 들어간 어떤 방이든 그곳에 있는 사람의 삶에
활력을 불어넣는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그는 다른 사람이 말하는 동안, 말하는
사람에게 완전히 집중시키게 하는 신비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말하는
사람은 갑자기 그가 이야기를 듣기 시작하기 전도다 더 중요하고 책임있게
얘기해야 한다고 느끼게 된다. 그는 다른 사람을 더 나은 사람으로 대우해준다.
사람들은 그를 사랑했다.
  그와 나는 함께 대학원에 진학했다. 우리는 서로
비슷한 점을 많이 지니고 있었지. 우리는 같이 여자와 함께 여행도 했었단다.
우리는 함께 진리를 찾고 진실을 구했었다. 우리는 서로의 좋은 점을 잘 알고
있는 만큼 서로의 결점에 대해서도 잘 알았다. 그러나 우리에겐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가 정신의 햇빛아래에서 살았던 반면 나는 달빛
아래에서 살고 있었다. 우리는 그 이외의 다른 방법으로는 결코 비쳐질 수 없는
우리 존재의 치수를 드러내는 거울과 같이 서로를 좋아했다.
  햇빛이 비추는
가을의 어느날, 우리는 테이블을 사이에 놓고 마주앉아 우리의 연구영역에 대해
이야기하며,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 어떤 프로젝트에 대한 작업을 하고 있었다.
내가 무심코 창문밖을 응시했을 때, 무리를 지어 주차장으로 걸어가는 나의
교수들중 한 명을 주목하게 되었다. 그는 여름내내 그곳을 떠나 있었고, 나와는
좋게 헤어지지 못했었다. 나는 그가 제기한 어떤 견해에 대해 크게 반발했고,
나의 질문에 대해 그는 모욕적인 반발로 되받아 쳤었다. 우리는 그날 이래로
서로를 보지 않았다.
  "담이 있어." 나는 크레이그에게 말했다.
  "나는 그를 보고 싶지가 않아."
  "왜 그래?" 크레이그가 물었다.
  나는 지난 봄에 있었던
사건을 간단하게 설명해 주었다. "우리는 좋지 않게 헤어졌어." 나는 말했다.
"게다가 저 자식이 날 좋아하지 않아."
  크레이그는 창가로 걸어와서 그가
지나가는 모습을 내려다 보았다. "나는 자네가 잘못하고 있다고 생각해."
그는 내게 타이르듯 이렇게 말했다.
  "등을 돌리고 떠난 사람은 그가 아니라 바로
자네야. 그리고 자넨 단지 공포심 때문에 그랬던 걸 거야. 그는 아마 자네가
자기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거고, 그래서 그는 자네에게 따뜻하게 대하지
못했을 거야. 사람들은 누구나 그렇게 생각해. 사람들은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만약 지금이라도 자네가 그에게 관심을 보인다면 그도 자네에게
관심을 가질거야. 내려가서 그와 얘기해보렴."
  크레이그는 간결하게 말했고,
나는 시험삼아 교수들이 가고 있는 주차장을 향해 계단을 내려갔다. 나는 따스한
느낌이 드는 미소를 지으려고 애쓰면서 그 교수에게 인사했다. 그리고 지난
여름동안 뭘했는지 물어보았다. 나의 따스한 태도에 그는 놀란듯이 나를
바라보았고, 나의 어깨에 친근하게 팔을 얹었다. 우리는 지난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공원을 거닐었다. 나의 한쪽 눈 모퉁이로 창가에 서서 환하게 웃고 있는
크게이그를 볼 수 있었다.
  그것은 내가 아직 이해하지 못했던 매우 단순한
것이었다. 나는 다른 사람이 나에게 평가되어지는 것을 두려워한다고 생각할 때,
사실은 그 사람이 나를 판단할까봐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됨과 함께
모든 관계들 속에서 잃었던 용기를 되찾게 되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판단되는 존재라는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우리들 사이에 비어있는
공간은 정직한 척하는 가식적 행동들로 가득 차게 된다.
  "사람들은 그를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한다."
  이말은 나에게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을 허락했다. 다른 사람의 눈에 비쳐진 나에 대한 판단을 보는 대신, 나는
나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만을 보게 되었다.
  사람들이 주목하고 관심을 가질
정도의 커다란 하품을 대로에서 마음놓고 하라고 말하는 건 아니다.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내 행동의 적합성을 판단하기 위해 애써 머물지 않는다는 걸
깨닫기 시작했다. 또한 그들은 그들 자신에 대한 어떤 것을 나눌 기회를 위해
일부러 기다리지도 않는다.
  크레이그는 이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햇빛을 쬐듯
사람들을 따스하게 한다.  사람들의 삶이 그를 따뜻하게 하고, 사람들은  그와 함

자신을 나누는 걸 좋아한다. 그에겐 그를 그렇게 특별한 존재로 만드는
무엇인가가 있다.
  그날부터 나는 내 삶의 주변을 하나둘씩 전환하기 시작했다.
그건 쉽지가 않았다. 나는 아직도 너무 많은 시간을 다른 사람의 판단을
두려워하며 헛되이 소비한다. 그리고 아직도, 건방진 사람들이 나의 열려진
모습을 들여다보고는 그것을 비웃거나 내 가면을 벗기는 데데 이용할 때면,
상처를 입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사람들 사이에서 열린 모습을 보여줄 기회를
가짐으로써 그리고 사람들을 좋아함으로써 세상이 내 앞에 활짝 열리는 걸
발견한다.
  내가 단지 나 자신만의 관심과 흥미속에 있는 동안에는 결코 알 수
없었던 다른 사람들의 세계를 발견한다. 자동차 수리공, 출납계원, 미친 사람,
도둑들 - 모두가 할 이야기를 갖고 있다. 부자, 빈자, 강자, 고독한 사람 -
모두가 과거의 나만큼 꿈과 의혹으로 가득 차 있다.
  농부는 나에게 트랙터에
대해 말하고, 과학자는 나에게 원자에 대해 이야기한다. 나는 마치 호주의
연단에서 자란 것처럼 그곳을 알게 되고, 오랜동안의 모든 나날들을 하나씩
상자에 포장한다는게 어떤 느낌인지를 배운다.
  열차를 타고 캐나다를 여행할 때,
술취한 사람처럼 혀가 꼬부라져 말을 짜내듯이 지껄이고 있기 때문에 모두가
피해버린 한 남자와 이야기를 했던 적이 있다. 그는 한차례의 발작에서 막
깨어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나와 같은 칸에 탄 엔지니어였고,
우리는 밤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동안 그는 나에게 기차레일에 얽힌
역사를 가르쳐 주었고 우리가 지나쳐온 작은 마을들의 불빛에 감춰진 이야기를
해주었다. 헤어질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와 이야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방해받기를 싫어하죠." 그는 내가 감사하다고 말하는
사양했다. 네겐 마음이 뿌듯해지는 즐거움이 밀려들었다.
  얼마나 자주
기다렸다는 듯이 어떤 일들이 발생하는가. 얼마나 자주 사람들은 그들의
이야기를 말할 기회를 간절히 기다리며 침묵속에서 앉아 있는가. 모두가
못생겼다고 생각하는 소녀, 괴상한 차림을 한 버릇없는 소년 - 사람들은 가장
대중적이고 가장 성공적이고 가장 매력적일 만큼 확실한 줄거리를 갖고 있다.
확실히 내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너도 그러하듯이, 그들은 누군가가 자기
이야기를 기꺼이 들어주기를 꿈꾼다.
  만약 네가 다가선다면, 만약 네가 다른
사람을 대단히 좋아한다면, 네 주위에 쳐진 벽들은 쉽게 무너져 내릴 것이다.
네가 그토록 갈망하는 사람들의 주의와 집중이 자연히 너를 향해 돌아서는 것을
네가 네 주의와 집중을 그들에게 돌렸기 때문이란다. 혼자이거나 정신이
불안정한 이들은 네가 자기들의 이야기를 들어줄 기회를 가졌기 때문에 삶이
가치있어질 것이다.
  너는 다른 사람의 삶에 가치를 느끼게 해 줄 수 있기에
스스로가 더욱 가치있는 사람임을 발견하고, 또한 다른 사람앞에 드러내 보이는
자신의 중요성이나 성취를 과시함에 의해서 얻는 것보다도 더욱 존경받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그건 단지 네가 다른 사람에게 빛을 낼 기회를 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그림자 밑에서 너의 가치가 손실되는 것 이상으로
너는 그들이 느끼는 행복의 빛에 반영됨으로써 가치가 더욱 증가하는 것이다.
  그것이 크레이그가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그가 모든 방을 온기와 활기로
가득 채울 수 있었던 이유다. 그는 사람을 살아있게 만드는데, 그가 자기
의견에 대해 다른 사람이 주의를 집중하도록 강요하기보다는 스스로 다른
사람에게 주의를 집중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이 그를 좋아하거나, 그가 그들을
좋아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그는 한마디 질문도 없이
사람들을 좋아하고 대화할 기회를 가진다. 그는 분리된 사람들의 비어있는
공간을 선한 느낌으로 가득 채우는 사람이다.
  크레이그가 가졌던 용기를 갖춘
사람이 되거라. 사람들은 나쁜 동기와 잔재주를 가진 너를 책망할 것이다.
그들은 너의 협력을 요청하고 네가 열릴 기회를 갖게 하고자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할 수 있는 게 있다고 해도,
단지 주위의 삶과 사람들 속에 네 흥미거리를 확대하고 자기 영향력을
증가시키려는 이기적인 행동에서 탈피하라고 충고하는 게 고작일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말하는 건, 네 삶이 만나는 사람 모두에 의해 보다 풍요롭게
된다는 것을 깨닫는 데서 오는 안녕에서 달아나라고 힐책하는 게 아니다.
기회를 가져라. 사람들을 먼저 좋아하고, 질문은 나중에 하거라. 그것이
새로운 방법으로 너의 세계를 여는지를 한번 시험해 보아라. 네가 다른 사람에게
비춘 빛이 백배로 너에게 돌아와 비추지 않는지를 알아보거라. 때때로 가장
간단한 행동이 가장 커다란 결과를 낳는 법이란다.

 

   17. 예술의 힘

  지난 밤은 새해의 전날밤이었다. 1989년의 새해 전날밤에 베를린
스필하우스에서 베토벤 9번 교향곡을 지휘했던 레오나드 번스타인의 연주가
텔레비전에서 재방영되었다.
  나는 당시에 그 연주를 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건 특별한 때를 기념하기 위해 준비된 특별한 연주였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경이다. 동유럽 사람들은 우리로선 단지 상상으로만 느낄 수 있을뿐인
환희와 즐거움을 느끼고 있었다. 분위기는 매우 들뜨고 흥분되어 있었으며,
자유의 전율로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음악가는 소련과 미국, 그리고 모든
유럽에서 연주를 위해 모였다.
  합창단은 주변 세계로부터 모여졌다. 레오나드
번스타인이 지휘자로 지명되었다. 그가 서있는 곳, 대학살의 어둠의 날들을
통해 살아왔던 유태인이 나치정권과 동서세계의 분리로 상징되는 도시의
한복판에서 회복과 축복의 노래를 위해 세계의 민족들로부터 모여든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을 이끌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 역시 죽어가고
있었다.
  인생을 음악의 즐거움과 음악의 위력에 바친 사람을 위한 고별의
순간이기도 한 것이다.
  오케스트라 성원들의 얼굴들, 성가대 속의 어린이들의
미소, 고요, 청중들 속에서 빛나는 조명의 격렬함, 모두가 한 가지의 사건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모두가 하나가 되었다. 독일인의 자질에 대한 커다란 전망과
명예, 정치의 힘을 극복하는 인간정신의 숭고한 승리. 베토벤의 장엄함. 쉴러의
강력한 자유시. 죽음의 수용소에 대한 기억. 너무 오래 분단되어 있던 사람들의
통일. 낡은 해 - 낡은 시대 - 는 마치 분단의 벽이 무너지듯, 그리고 오랫동안
억눌렸던 인간 감정의 거대한 파도가 지구를 휩쓸듯 새로운 해에 자리를
넘겨주고 떠났다.
  번스타인이 그의 지휘봉을 들어올렸고, 즐거움과 슬픔, 힘과
장엄함을 모두 쏟아붓는 몸짓을 시작했다. 그것은 6백만의 죽은 영혼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고 인간정신을 유배시킨 날들의 고뇌를 떠오르게 했다.
  악기들의
노래는 마치 하나의 목소리 같았다. 음악이 잔잔히 흘러나와 퍼져갔고 감정을
쏟아부었다.
  내 눈에선 눈물이 쏟아졌다. 나는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건 평소보다 훨씬 더했고, 내가 흘릴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눈물이었다. 그건 우리의 선과 악에 대한 성서의 회복이었다.
  그것은 고백이었고
축복이었다. 그것은 우리가 가장 인간다울수 있는 때였다.
  콘서트가 끝날 무렵에
나는 변해 있었다. 일상의 삶에 순전한 아름다움의 순간들이 찾아온 것이다.
비록 공연의 조명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우리 인간이 무에서 유를 창조할때
그리고 그것을 신에 버금가는 장엄함과 아름다움으로 나타낼때, 나는 오직
예술이 제공할 수 있는 한 순간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예술의 힘이며, 이를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삶을 단지 절반밖에 못 산 것이다.
  그 힘은 음악속에
살아있고, 연극 속에 살아있고, 미술 속에 살아있고, 건축과 조각 속에도
살아있다.
  그것은 시나 소설속의 단어가 될 수도 있다. 나는 예술이 나를
변화시키는 순간들에 의해 삶을 측정할 수 있다. 미켈란젤로의 대성당
피에타앞에 설 때, 딜런 토머스의 시를 낭송하는 걸 들을 때, 바흐의 첼로곡조를
들을 때, 바로 그런 때이다.
  그러나 거기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연기 자욱한
클럽의 테이블에 앉아 악단의 성원들이 뒤에서 서로의 악기에 대한 생각을
표현하며 이야기하는 걸 들을 때.
  작은 일본소녀가 소규모의 심포니 콘서트에서
바이올린 소나타를 연주하는 걸 들을 때.
  허드슨 베이의 선물가게 앞에
서있으면서 사람들 속에 자연스럽게 연출되는 천연의 조각 아뉴잇(북미
그린란드의 에스키모족에 대한 공식 명칭)을 응시할 때.
  그것은 어떤 장소,
어떤 시간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너는 위대함에 의해 신성하게 된 어떤 것에
의해서도 그것을 결코 얻을 수 없거니와 세계의 명성있는 예술가의 존재로부터도
그것을 얻지 못한다. 예술은 스스로 자신이 창조하는 것으로 전화되어지는
창조적 활동속에 서있게 되는 때에, 그것의 신비함을 온전히 드러낸다. 예술의
신비가 드러날 때는 순간적으로 시간이 정지하고, 그때 만약 우리 마음이 그러한
경험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우리의 정신이 고양하고 우리의 상상력이
자유롭게 날아다닌다.
  네가 만약 매일의 단조로운 순간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나은 삶을 살고자 한다면 이 순간이 꼭 필요하다. 만약 네가 이 순간을
창조하고자 한다면 - 만약 네가 화가나 시인이나 음악가나 배우가 된다면 -
너는 높은 명성을 수반하도록 노력하거라. 그러나 만약 네가 그것들을 창조할
수 없다면, 너는 반드시 다른 사람의 창조의 힘이 네게서 살아있도록 하는
방법으로 예술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한번 사랑할 때, 네 자신을 그
속에 푹 빠지도록 충분히 사랑하거라. 너는 신비롭게 우리 삶에 부여되는
위대한 창조적 활동의 메아리를 경험할 것이다. 그건 아마도 우리가 신에게
얻을 수 있는 것에 가장 근접한 경험일 것이다.

 

   18. 남자와 여자

  무더운 여름이었다. 나는 젊은 미국인이었고 이탈리아에서 살고 있었다.
나의 룸메이트는 이란 사람이었다. 그는 규모가 큰 개인사업을 하고있던 조용한
사람이었다. 그는 심지어 자신을 까밀로라고 불렀는데, 그건 그가 이란인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게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서서히
가까워졌고 함께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이른 저녁에 아직
땅에서 올라오는 열기가 남아있는 마을 주변을 산책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가장 좋은 옷을 입고 지역광장이나 샘물가에 가서 친구들과 함께
음료수를 마시거나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닌다. 그것은 대화와 우정의 시간이며,
잡담과 구애의 시간임을 말할 필요도 없다.
  어느날 저녁 까밀로는 나에게 그의
친구 레자가 저녁 산책을 함께 하기 위해 우리에게 올 예정이라고 말했다.
레자는 떠들썩하고 환상적이며, 항상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큰 특징은
커다란 웃음이었지만, 진지한 문제를 논의할 때면 지나치게 바보스러웠다.
  우리는 달이 투스칸 언덕을 넘어 떠오를때, 산책을 시작했다. 전기불이 켜지기
시작하자 주위의 윤곽들이 선명해졌고 심지어 작은 거리들까지 축제 분위기가
되었다.
  우리 앞에 세명의 여자가 유럽풍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며 팔짱을 끼고
걸어가고 있었다. 레자가 내 팔목을 잡고는 조용하게 속삭였다. "이걸 봐!"
그는 여자들에게 달려갔고 재빨리 그녀들의 앞에서 땅을 짚고 오른쪽으로 재주를
넘었다. 그는 마치 동물원에서 재주를 부리는 원숭이처럼 보였다.
  그 여자들은
발길을 멈추고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는 커다랗게 웃고는 이탈리아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돌아왔다. 까밀로는 땅을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놀라서 물었다. "네가 하는 짓이 도대체 뭐니, 레자?"
  "오! 여자들," 그는
말했다. "그들은 그런걸 좋아해."
  레자의 생각은 틀렸다. 여자들은 그런 걸
좋아하지 않는다. 밝은 분위기에서라면 여자들이 그런 행위에 기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여자들이 일반적으로 그런 걸 좋아하지는 않는다. 그건 여자들을
성적 추구의 대상으로 만드는 것이고, 그들과 우리와의 관계를 고양이와 쥐의
성행위 광경이라는 곤혹스러움으로 만드는 것으로 우리는 우스꽝스러운
고양이로 연출될 뿐이다.
  레자처럼 터무니없이 행동하는 남자는 물론 드물다.
그러나 우리는 자주 여자라는 존재를 남자에 종속된 존재로 낮추기에 열중한다.
너는 그런 모습을 어디서나 볼 수 있다. 픽업트럭의 남자, 엘리베이터 안의
사업가, 거리의 구석에 서있는 젊은 녀석들은 - 여자에게 휘파람을 불고,
고함을 지르기도 하며, 몸 구석구석을 훔쳐보고, 팔꿈치로 쿡쿡 찌르며 말을
건다 - 일반적으로 단지 그들이 여자이기 때문에 뻔뻔스럽게 대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건 슬프고 난처한 일이다. 이런 유치하고 역겨운 짓들은 모두
여자에 대한 우리의 필사적인 눈독들임을 나타내는 것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이 눈독은 본성이다. 여자는 태초로부터 우리 삶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그들은
우리의 마음에 붙어다니고, 우리를 흥분시키고, 우리를 격노케 한다. 우리는
그들을 사랑하고, 미워하고, 원하고, 원하지 않게 되길 원한다.
  우리는 그들을
평등하게 다루려고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 그러나 남녀관계들의 어떤 부분에는
우리가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성적 차이의 메아리가 남아있다.
  이러한 메아리는
아마도 현실일 것이지만, 그 차이들이 우리 남자와 여자사이의 관계에서 기본적
토대를 형성할 수는 없다. 여러 세기동안 - 아마 영원히 - 여자는 우리의
성적 차이에 의해 결정된 기대치 이하에서 노동할 것이다.
  이제 그들의 불만은
공통적인 목소리로 터져 나온다. 여자들은 그들의 문제를 주장할 힘을 가졌고,
우리 남자들은 모두 그들이 제기하는 문제를 반드시 돌아보아야만 한다.
  우리
남자의 문제는 더이상 의제가 될 수 없다. 우리가 여자라는 존재의 생리적
기능들을 이해하는 것, 그리고 남자의 스치는 눈길에 비춰질 자신을 보기위해
평생의 삶을 소비하는 그들의 심리적 현실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태어난 순간부터 그어진 제한에 구속된 삶을 살아온 사람에게, 그리고
세상에서 그녀의 역할이 여자라는 성적 동질성에 의해 색깔지워짐으로써 삶이
시작되는 사람에게 가득 찬 욕구불만이 어느 정도인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남자들이 자신만을 위해 여자의 삶의 한계를 마음대로 한정할 수
있다고 뻔뻔스럽게 생각하는 것, 혹은 심지어 남자들의 눈독과 욕망의 그늘
아래에다 그들과의 관계를 교활하게 한정하는 것, 그것은 그렇게 오랫동안
쌓인 분노의 불속에 기름을 붓는 격이다.
  우리는 남자로서, 여자들이 그렇게
오랫동안 부정당해 온 삶의 영역을 탐구할 동안에 그들이 그렇게 하도록
그냥 놔둘 필요가 있다. 동시에 만약 분노와 욕구불만의 지점으로 여자들을
몰고가는 태도와 몰지각의 선상에 우리가 서있다면, 우리 자신의 잘못된
관점을 발견하기 위해 노럭하는 게 필요하다. 우리 남자들은 각자의 마음속에
내재해 있는 레자를 찾아내 없애는 게 필요하고, 무의식적으로 여자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행동을 저지르는 자신을 돌이켜 보아야 한다. 우리는 여자임을
먼저 보고 인간임을 나중에 보는 남성우월주의의 낡은 습성을 찾아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우리가 파트너가 될 필요가 있을 때, 파트너가
되는 방법을 발견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게 필요할 때는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 함께 일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인간의 공통적 문제에 있어서의 동질성,
그리고 각각의 성적특질에 있어서의 차이점이 드러내는 중요성에 동의할 수
있는 공통적 바탕을 발견할 필요가 있다.
  이는 쉽게 발생하지 않는다. 무슨
공통점을 가지고 있고, 어디에서 차이점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 그리고 이
모두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아직 아무도 알 수 없다.
  우리는
모두 - 남녀 똑같이 - 두쌍의 눈을 통해서 서로 반대편을 본다. 한쌍은 단지
인간이라는 존재를 본다. 다른 쌍은 욕망과 사랑과 성적 긴박감에 활기를 띠게
하는 신비스러운 "다른 성"을 본다.
  우리는 이 두가지 시각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를 배운다. 오랫동안 실현이 지연된 남녀간의 평등을 향한 현재의 논의는
남녀간의 동질성을 공표하는 노력이라는 미묘한 측면을 갖는다. 그리고 분명
남자와 여자는 똑같지 않다. 우리가 각각의 본성과 남녀간의 차이가 가지는
중요성을 아직 깨닫지 못했다고 해서,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인간이라는 존재로서는 평등하지만, 육체적, 정신적
정서적 (인간 경험의 전체를 함께 형성하는) 방정식에서는 서로 반대항이다.
이 그 본적인 차이를 부인하는 것은 우리의 근본적인 유사성을 부인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유해하다.
  우리는 남녀간의 공통점을 주장하는 것에서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 싸우게 될지라도 이 미스테리를 똑바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남자는 여자가 아니다. 여자는 남자가 아니다. 남녀간의 역동성은 항상
이 점에 있을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도전은 그러한 역동성이 남자의 기대치
아래에 종속됨이 없이도 여자의 포현방식이 충분히 발휘될 수 있는, 그리고
여자에 대한 기대치를 한정하는 것에 대한 책임을 남자 자신에게 묻는 일이
없는 생활의 환경을 발견하는 시도이다.
  너는 이것을 해결할 기회를 가진
세대에 속해 있다. 너는 새로운 종류의 남자다움을 정의할 기회를 가졌다.
만약 네가 이 일을 잘해낸다면, 그것은 남자가 스스로 자기 자신을 값싸게
만드는 일없이, 그리고 여자는 성적 유희의 대상으로 전환되는 식의 자유라는
말로 자신을 덧없이 둘러싸는 일없이 이룩되는 남자다움이 될 것이다.
  그것은
남자가 그들의 몸짓과 말, 그리고 가장 잘 계획된 행동으로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남자다움이 될 것이다. 그것은 어떤 종류의 여자들이 좋아하는
원숭이 춤을 연상케 하는 레자같은 남자를 이끌지 않는 남자다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우리 남자가 누구인가 하는 생리적 정서적 복잡함을
변명하지 않아도 되는 세계이고, 우리 남자의 성적 동질성에 토대하는 행동에
대한 어색한 표준들에 얽매이지 않아도 되는 세계이다.
  다른 말로, 그것은
함께 사랑할 수 있고, 함께 웃을 수 있고, 두려움 없이 그리고 판단없이도
함께 일할 수 있는 세계이다. 그것은 축복받은 세계, 비난과 변명 그리고
차별의 근거가 되는 성적차이의 증명되지 않은 가정이 없는 세계이다.
  이런
이야기는 마치 주문을 외는 것처럼 들릴 것이고, 사실 기적이 일어나길
비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그건 언제 어디서도 시작될 수 있는 거란다.
픽업트럭에서도,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거리의 모퉁이에서도, 그것은 너와
네친구들의 정신과 마음속에 있다.
  여자는 일찍이 평등을 위해 자신들이
해야할 부분을 행해왔고, 그 길이 거칠고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남자는
이제야 시작했고, 그 길이 여자보다 남자에게 더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누구의 시대가 되는가를 다투는 일이다. 역사적 교훈중의 하나는
우리가  우리의 문제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문제가 우리를 선택한다는
것이다.
  이 문제가 너를 선택했다.
  네 도전은 남자답게 그 문제에 부딪치는
것이다. 원숭이처럼이 아니라.

 

   19. 사랑에 빠짐

  우리가 왜 사랑에 빠지는지는 아직까지도 의문이다. 그것이 어떻게
일어나는가는 굉장히 신비스럽단다. 우리는 그것이 언제 오는지도 알지 못한다.
왜 어떤 사랑은 깊어지고, 어떤 사랑은 실패하는지도 알지 못한다.
  너는 이
신비를 분석하여 이유와 원인을 찾을 수도 있겠지만, 경험보다 어 좋은 것은
결코 없을 거다. 마치 삶이 뼈와 근육과 몸에서 나오는 전기적 자극들의
합계보다 더 많은 어떤 것이듯, 사랑은 관심과 매력과 두 사람이 공유하는
공통점들의 합계보다 더 많은 어떤 거란다. 그리고 마치 삶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이 살아가면서 주고받는 선물이듯, 사랑도 역시 자신의 고유한 방법을
갖기에 의심을 품거나 질문을 할 수 없는, 이해할 수 없는 선물로써
받아들여져야만 한다.
  때때로 - 바라건대 네 삶에서 최소한 한번은 - 사랑의
선물이 활짝 핀 꽃으로 네게 다가올 것이고, 너는 그것을 붙잡고 그것의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축하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바라고
공유하는 꿈이다. 더 자주 사랑은 네게 다가와 너를 붙잡을 것이고, 짧은
순간동안 너를 축복하고, 그런 후엔 떠나갈 것이다.
  이것이 젊은 사람에게
발생할 때, 그들은 자주 사랑을 잡으려고, 그리고 그들에게 잡히려고 시도하고,
사랑은 자유롭게 주어졌듯이 자유롭게 떠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길 거절한다.
그들이 더이상 사랑하지 않게 되거나 떠나간 사랑의 영혼을 느낄 때, 그들은
떠나가버린 과거의 선물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기보다는 잃어버린 사랑을
되살려보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그들은 아무 곳에도 없는 대답은 원한다.
그들은 다른 사람이 그들을 더이상 사랑하지 않게 만드는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하거나, 몇 가지 사소한 변화가 있어준다면 사랑은 다시
활짝 피어날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들의 연인을 변화시키기 위해 애쓴다.
그들은 자신들의 환경을 탓하고, 멀리 떠나 새로운 삶을 함께 시작한다면
그들의 사랑이 무럭무럭 자라날 거라고 말한다.
  그들은 과거의 추억들에 의미를
부여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사랑 그 자체 이상의 의미는 없다. 그래서 사랑
그 자체의 신비를 조건없이 받아들일 때까지 그들은 고통의 바다에서 살아간다.
  너는 그러한 사랑에 대해서 알아야 하고,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너는 그것이 네게 친절함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만일 네가 너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한다면, 자신에게 관대하게 대해야만 한다. 네겐
아무 잘못이 없단다. 단지 사랑이 그 사람의 마음에 머물기를 선택하지
않았을 뿐이다. 만일 네가 너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경우를
발견하게 된다면, 너는 사랑이 다가와 네 문을 두드린다는 자부심을 느끼겠지만
네가 돌려줄 수 없는 선물에 대해 정중하게 거절해야 한다. 우월감을 가지지
말거라. 고통을 야기시키지 말거라. 비록 우리의 삶과 길이 매우 다르다
할지라도 우리는 모두 똑같은 기쁨과 고통을 느낀단다.
  만일 네가 어떤 여인과
사랑에 빠진다면, 그리고 나서 시간이 흐른 뒤에 사랑이 너희들 곁을 떠날
것을 선택한다면, 사랑을 억지로 재생시키려 하거나 사랑이 아니었다고
비난하려 하지 말거라. 그냥 그대로 떠나가게 두거라. 사랑이 떠나는 데에는
마땅한 이유와 의미가 있다. 너는 그것을 조만간에 깨닫게 될테지만, 그러나
시간은 그 순간을 선택하는 것이다.
  네가 사랑을 선택하지 않았다는 걸
기억하거라. 사랑이 너를 선택한 것이다.
  네가 사랑의 신비를 정말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가 사랑이 네 삶에 찾아온 때다. 너에게 온 사랑이 너의
삶을 풍부하게 가득 채우는 걸 느껴라. 그리고 손을 뻗어 사랑을 선물로
주어라. 네게 생생하게 사랑을 가져오는 사람에게 너의 사랑을 돌려주어라.
정신적으로 목마른 사람들에게 사랑을 주어라. 네가 할 수 있는 어떤
방법으로든 너를 둘러싼 세계에 사랑을 주어라.
  매우 많은 연인들이 잘못을
저지르는 지점이 바로 이곳이다. 아주 오랫동안 사랑하지 못한 사람들은
사랑을 단지 필요로써 이해한다. 그들은 자신의 마음을 사랑으로 가득
채워질 빈 공간으로 여기고, 사랑을 자기로부터 나오는 것이라고 보기보다는
오히려 자기에게 들어와야 하는 것으로 보기 시작한다.
  처음엔 새로운 사랑의
신선한 설레임이 그들의 마음을 가득 채울 것이지만, 사랑이 식어감에 따라
그들은 또다시 사랑을 필요로써 바라보고 또다른 사랑을 찾아 헤맨다.
그들은 사랑을 만드는 사람이 되려고 하지 않고 그 대신 사랑을 찾는 사람이
된다. 사랑이란 선물이며 오직 줌으로써만 성숙하게 될 수 있다는 비밀을
그들은 잊어버린다.
  이것을 기억하거라. 그리고 네 마음에 항상 간직해야
한다. 사랑은 그 자신만의 시간, 때, 그리고 오고가는 이유를 가지고 있다.
너는 그것을 매수하거나 마음대로 하거나 머무르도록 설득할 수 없다.
너는 단지 사랑이 찾아올 때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고, 또한 줄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사랑이 네 마음으로부터 혹은 네 연인의 마음으로부터 떠날 것을
선택한다면, 네가 할 수 있는 일, 그리고 해야만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사랑은 항상 신비스러웠고, 앞으로도 항상 신비스러울 것이다. 너의 삶에
한순간 사랑이 다가오는 것을 기뻐하거라. 만일 네가 마음을 계속 열고
있다면, 사랑은 언제든 다시 찾아 올 것이다.

 

   20. 성의 신비

  지금까지 너는 아마 이미 한 여인을 사랑했을지도 모른다. 아니라면 너는
네몸이 거의 참을 수 없는 갈망으로 울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너는,
비록 너의 삶에서 그것이 가장 작은 부분으로 보인다고 하더라도, 깨어있는
너의 모든 생각과 마음가짐을 규제할 여인을 갈망할 연령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그런 갈망을 느끼는  너는 다른 젊은이들과 전혀 다르지 않다.  그건 나도 그랬

너의 아들도 그럴 것이다. 그건 항상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 힘은
무엇인가? 무엇이 널 그렇게 갈망하도록 만들고, 너는 어떻게 해야만 그 갈망을
평화롭게 만들 수 있는가?
  간단한 답은 없다.
  성은 우리의 모든 것보다 더욱
신비스럽다. 그것은 우리의 개성보다 더 깊이, 심지어 우리의 종족보다 더 깊이
자리한 우리라는 존재의 기본적 본능들 중의 하나이다. 그것은 우리 인간의
세계를 이끄는 발생상의 힘이고, 아마도 전 우주를 이끌지도 모른다.
  그래서
사고와 이성의 합으로도 네가 한 여인의 몸속에 들어가는 그 첫 순간을 대신할
수는 없다. 그 한번의 행동으로 너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릴 것이다.
갑자기 그리고 돌이킬 수 없이 너의 모든 삶이 새로이 시작된다. 너의 경계선은
변화된다. 삶에 대한 너의 지식은 변화된다. 너는 네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크고 더 깊은 어떤 것의 한 부분이 된다.
  한번쯤 너는 결코 돌아올 수
없는 이 입구를 지난다. 네가 경험한 그 느낌을 계속 원하게 되고, 그 열망을
채우기 위해 한 여인을 영원히 찾게 된다.
  이것이 성이 혼란스러워지는 때이다.
왜냐하면 성은 실제이고, 결코 충족될 수 없는 육체적 열망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순간적으로 그 열망을 가라앉힐 수 있지만, 그것은 곧 예전처럼 강하게
되살아난다.
  많은 사람들이 이 열망에 의해 자신이 이끌려 사는 것을 허락한다.
그들은 그 열망이 충족될 때까지 한 여인에 대한 욕망에 사로잡힌다. 그리고나서
그들은 또다른 여인에게로 그들의 관심을 돌린다. 왜냐하면 새로운 여인에
대한 열망이 더 강하다는 이유로.
  성에 대한 육체적 흥분과 새로운 연인의
몸속에 들어갈 때 오게 되는 환희의 발견에 대한 신비한 느낌은 여자의 몸에
존재하는 신비로운 언덕과 성적인 공유의 첫순간에 오는 기쁨을 계속 유지하기
위한 끊임없는 추구로서, 그들을 한 여인에서 다른 여인에게로 이끈다.
  이러한
사랑을 하는 몇몇 사람은 단지 성적 약탈자일 뿐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선한 의도에서 그런 식의 사랑을 한다. 그들은 성적인 첫 발견의 황홀한 순간을
배우기 시작할 때, 뿌듯함을 느끼는 성적 경험의 완전성과 아름다움을 매우
확실히 믿어버린다. 그들은 진정한 사랑을 전체와 완전한 정열의 소비에 의해
알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보다 적은 느낌에는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그들은 매우 큰  위험을 감수하려 한다. 비록 그들이 그  여인을 깊이 사랑할지

모르지만, 그들은 첫번째의 경험에 대한 지식을 알고 난 후에는 반드시
식어버리는, 완전히 황홀하게 만드는 육체적 흥분이 없이는 그들의 사랑을
유지할 수 없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변화한다. 그들은 육체적 결합의 신비를
맛보며 완전한 열광의 첫순간을 무익하게 추구하는 데에 그들의 삶의 대부분을
소비한다.
  비록 많이 다르지는 않지만, 다른 사람들은 또다른 위험을 감수하려고
한다. 그들은 육체보다는 정신적인 것에 대한 신비를 맛보게 된다. 그들은 성에
대해 정신적 영원성과 신성함을 느끼고, 이러한 플라토닉한 감성들이 그들의
성적 경험에서 중심이 되길 요구한다. 그들에게 있어 여인은 신비의 창고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성적 상대자가 욕구를 채우기를 희망하고, 삶의 문제를
고민하고, 개인적 특성을 가진 하나의 사람이 되어가는 동안에 그녀에게서
점차 흥미를 잃어 간다. 왜냐하면 그녀는 더이상 순수한 정신적 경험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두 부류의 남자들의 성적 특질(성행위에의 몰두, 혹은
정신적 사랑의 강조)은 여성들에게도 그들 자신에게도 해가 된다. 첫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여성이 그들에게 정열적인 한 순간에 몰두하여 모든 것을 전부
소모해버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다. 두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여성이 그들에게 영원한 진실에다 자기 존재를 전부 소비해버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에 사랑한다. 두 유형의 남자들에 있어서 그들이
육체적 혹은 정신적인 성적 특질을 건강하고 신성하며 삶의 신비에 대해
칭송하는 위대한 사랑으로 보는 것은 매우 쉽다.
  그러나 두 유형의 사람들은
궁극적으로 그들이 사랑하는 여인의 인간성과 개성을 부인한다. 그들이 각기
추구하고 있었던 것은 그들의 자의식을 제거하는 일에 모든 것을 소비하는
것이다. 여자는 궁극적으로 이 자의식 제거의 대리인이 된다.
  비록 이러한
남자들이 그들이 사랑하는 여인에게 깊이 감사하고 있다고 해도 그 감사는
그 여인 자체에게가 아니라 일반적인 여자의 미와 신비에 보내는 것이다.
그들의 실질적인 감사는, 그들에게 희노애락의 지속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여자의 존재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잠깐동안 추구해온 환희의 감정을
찾을 수 있는 여자의 품속에 대해서이다. 그들이 사랑하고 있는 여자는 실제로
그런 감정을 일으키기 위한 매개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고 그녀가 그런 감정을
유발시키는데 실패하는 경우에는 그녀는 부족한 상대로 간주되고 버림받는다.
  그러한 남자들은 희망없는 상상의 고통 속에서, 그리고 그들이 이러한 상상을
가지게 하는 여자들을 비인간화시키며 살고 있다. 그들은 날개없는 천사처럼
맹목적으로 영원한 환희의 순간에 대한 열정적인 추구를 계속하며 배회한다.
그들은 자신의 인생항로에 깨어진 마음과 꿈을 남긴다. 그러나 그들은 계속해서
고집한다. 자신이 삶의 더높은 상태를 추구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나는 네가 이런 남자들 중의 한 명이 되는 것을 피할 수 있길 원한다. 그건
쉽지 않다. 네 성적인 첫 번째 접촉은 그것의 강력한 힘으로 너의 이성을
압도할 것이고, 그 본능의 힘에 직면했을 때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나는 네가 옛 속담을 기억하길 바란다. 그것은 우리
인간이 땅위에 발을 딛고 머리를 하늘로 향하고 살도록 운명지워졌다는 것이다.
우리는 정신과 육체의 만족이라는 두가지 모두에 이끌리기 때문에 결코
평화스러울 순 없다.
  이제 그 진실은 우리의 성적 특성에서 보다 명백하게
드러난다. 그것은 우리 존재의 가운데에 위치하여 두가지 방향으로 우리를
이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성적 특성을 세속화시키고 단지 육체적인 면에서만
기쁨을 얻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다른 동물보다 더 나을 것이 없고, 곧 우리의
삶은 공허하고 불충분하게 보일 것이다. 만일 우리가 성적 특성을 육체의
감각으로부터 제거하고 그것을 영혼에서 분리시켜 정신적인 것만을 칭송하려
한다면, 우리가 날개를 얻으려고 하는 매 순간마다 철저히 땅으로 곤두박질칠
운명에 처해질 것이다.
  우리는 동물도 아니고 천사도 아니다. 우리는 정신적
부분과 육체적 부분을 함께 가진 인간이고, 그 두 부분은 하나로 결합되어있다.
진정한 성의 이해는 이 두 범위를 인식하고 사랑으로 그것을 감싸안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너는 이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성행위는 동물들이 하는
것이다. 신화적인 결합을 성취하는 건 천사들이 하는 것이다. 우리는 육체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을 하나로 혼합하는 지점에서만 오로지 즐거운 행위인 사랑을
만들 수 있다.
  이 행위를 알거라. 이 행위를 칭송하거라. 그러나 특히 이 행위에
대해 존중해야 한다. 네가 한 여인과 사랑을 나눌 때, 너는 인간 존재의 가장
신비스러운 것 중의 하나를 나누는 것이다. 어떤 개인적인 열광을 추구하기
위해 그것을 사용함으로써 네 자신과 그녀의 품위를 떨어뜨리지 말거라.
  육체적인 면, 정신적인 면 모두를 서로에게 완전한 선물로 주는 것에 의해서만
성의 진정한 신비는 스스로를 드러낸단다.

 

   21. 사랑만들기

  나는 네게 사랑하는 행위의 지침서에 대해 이야기해 주려하는게 아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너 스스로가 네 방법을 충분히 잘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랑만들기를 설명하는 데는 세상의 모든 책을 전부 합한 페이지의
분량으로도 충분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건 우리의 이해를 넘어선 신비의 형태로
항상 존재하기 때문이며, 또 부분적으로는 각각의 사람에게 있어서의 차이,
그리고 모든 연인들 사이의 차이 때문이란다.
  이것은 젊은이들이 가끔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그들은 좋은 연인을 찾는다. 그들은 책에서 본 성행위의
기교와 자세를 통달함에 의해서 상대를 만족시키는 좋은 연인이 되려고
노력한다. 상대는 그들의 그런 행동에 경솔하게 평가를 내리고, 성적인 만족을
기준으로 자기의 연인을 측정한다. 그들은 불만족스런 성행위의 책임을
상대에게 전가하고, 그(혹은 그녀)가 불쾌한 연인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중요한 점을 간과하고 있는데, 그건 성행위가 한번의 경험으로써 평가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각 사람에 따라, 각각의 상대에 따라
다르다. 그것은 두 명의 고립된 개인 사이에서가 아닌,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경이로운 경험이다.
  너는 한 여인에 대해 동물적인 열정으로 격렬하게
돌진하며 날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도 있다. 다른 한 여인에 대해서는
부드럽게 서로를 애무하며 정신적 합일에 다가서는 행복한 황홀경에 빠지는
자신을 발견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다른 여성에게는 거리감을
느끼며 심지어 혐오감으로 네 마음이 백마일쯤 떨어져 있는 걸 발견할 수도
있다. 그리고 어떤 여성에 대해서는 따뜻함으로 둘러싸여 있으나, 네가
상상으로 느끼는 세계인 다른 왕국으로 옮겨 줄 수 없는 그런 완만한 공유감을
발견할 수도 있다.
  너는 한 여인에게는 훌륭한 연인이 될 수 있고, 다른
여인에게는 형편없는 연인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네가
형편없는 연인이라고 여겼던 한 여인이 다른 남성에게는 여태껏 있어본
연인중에서 최고의 연인이 될 수도 있다. 너는 사랑의 행위에서 어떤 것이
드러나 보일지, 실제로 몸을 섞지 않는 한 알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건 진실을
드러내는 둘에 의해서만 창조되는 경험속에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비스러운
발견은 많은 성적 즐거움뿐만 아니라 많은 성적 혼란과 비탄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네가 좋아하건 말건, 성의 불가사의라는 것이 있다. 일상생활에서 아무런
공통점이 없어도 성적인 욕구가 너무 강해 그 통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연인들이 있다. 그리고 서로를 정신적으로 깊이 사랑하지만 성적으로는 일치를
찾을 수 없는 연인들도 있다. 그들이 육체적으로 함께 하려는 충심어린 노력은
결국 의도적이고 무미건조한 행위처럼 느껴지는 서투른 애무가 될 뿐이다.
그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서로 리듬이 맞지 않고 시간이 맞지 않는다.
  이 말은
그들 중의 하나가 나쁜 연인이라는 말은 아니다. 그건 단지 성적 욕구가 다소
빗나가 있다는 의미이고, 그들의 좋은 의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할 수 있는
어떤 방법으로도 그 욕구를 바로잡을 수 없다는 말이다.
  대부분의 연인들은
결국은 중간에 어디론가 떨어진다. 그들은 상대와 함께 황홀경의 절멸상태에
계속 휩쓸리지는 않는다. 그들은 가끔 일치되기도 하고, 가끔은 서로 소외를
느끼는 가운데 함께 길을 만들어 나간다. 싸우고 공유하며, 그들 자신과
상대방의 정열의 조류를 느낀다. 그들이 성의 절멸상태인 무아경의 황홀감을
상상 느끼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들은 어느 누구도 서로를 위해주는
두사람 사이와는 비교될 수 없다는 친밀감을 알고 있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때가 되면 어느 다른 누구보다도 서로에게 더 친밀해지게 된다. 그들은
연인들만이 서로를 볼 수 있는 방법으로 서로를 본다. 그리고 사상과 지성보다
더 깊이 서로를 이해한다. 이것은 신비로운 무아경에 있는 절멸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하다.
  중요한 점은 친밀감 속에서 느끼는 이러한
따스한 기쁨이 좋은 성관계가 끝나는 곳에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너는
황홀경으로 시작할 수 있다. 너는 거의 정신적인 무아경의 순간들을 항상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관계에서 그렇듯이, 정열은 식기 마련이다.
그것은 성적 친밀성의 불가피한 결과이다. 시간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는
절대적이고 안주할 줄 모르는 욕망 때문에 성적으로 뜻밖의 만남을 시작하는데,
그로 인해 친밀성의 맛을 잃게 된다. 외형적인 친근함과 일상적인 일들이
너희들의 성경험을 넘어서 형성되기 시작하고 성행위 속에 완전히 빨려들어가는
힘은 서서히 감소된다.
  너는 이렇게 강렬함을 잃어버린 상대로부터 빠져나와,
네게 고결하게 다가와 강렬함을 제공할 다른 상대자를 추구할 수도 있다.
혹은 그러한 강렬함을 계속 유지하고자 네 성행위를 별난쪽으로 몰아갈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다른 것들과 똑같은 운명이다. 인생의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네 성적 경험은 단계들을 통과하게 된다. 그리고 성의 정열이
식는 것은 그러한 단계의 일부분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자극적인 연인들을 찾고 싶어할 것이다. 강한 성적 자극을 주는
사람은 심지어 넓은 범위의 인간적인 사랑을 느끼게 해주는 상대조차 못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단지 일반적인 육체적 황홀경만을 공유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정열이 식는 것과 마찬가지로 유감스럽게 끝을 내게 된다. 결국 상대방의
모든 것을 위한 헌신성이 부족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너와 네 상대자가
서로를 깊이 사랑한다면, 네 사랑은 육체적 열정으로부터 자라나기 시작해서
정열이 서서히 식기 시작하는 공간을 애정으로 모두 채우게 될 것이다. 너는
서로를 위해 네 사랑에 서로의 지식과 서로의 행복을 비는 정직한 소망을
섞는다. 그럼으로써 성적인 표현을 공유하는 강한 열정이 없는 어떤 것에서도
친밀성을 갖게 된다. 친밀감은 연인이 되는 진정한 보답이고 인간적인
만족으로서 성적 욕구의 강렬함을 결국엔 뛰어넘게 된다. 그리하여 서로를
갈망함으로써 새롭고 더 깊은 단계에 다다를 수 있는 것이다.
  남자로서 네가
해야 할 일은 네 연인과 함께 이러한 친밀감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 말은
너의 성적 욕구 이전에 그녀의 성적 욕구를 돌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녀가
성적으로 수동적이면, 그녀를 부드럽게 만족시키거라. 만약 그녀가 성적으로
주도하고 통제하기를 원한다면, 그녀의 요구를 존중해 주어라. 그녀가 육체적인
접촉에 겁먹은 여인이라면, 그러한 두려움을 진정시키려고 하거라. 만약 그녀가
거칠어서 깨물고 할퀸다면, 너의 배로 그녀의 배를 닿게 하거라.
  그녀 쪽으로
손을 뻗어라. 그녀의 성적 본능의 방법과 리듬을 발견하거라. 그리고 그녀가
그녀 자신을 표현하도록 하고 너와의 공유된 사랑의 행위를 통해 그녀를
완전히 발휘하도록 하여라. 너의 사랑법을 그녀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하지
않도록 하거라. 완전한 공유감과 신뢰성을 기초로 한 친밀감을 구축하거라.
그리고 그녀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으로 그녀의 사랑이 날개를 펴도록
하거라. 그녀의 독특한 행위를 창조해 가거라.
  이 말이 너무 수동적으로
들린다면 - 마치 네 자신의 성적 욕구를 너무 많이 포기하는 듯이 - 다시 한번
확실히 말하마, 그것은 그렇지 않단다. 우리 남자들은 여자들보다 훨씬 단순한
성적 기구를 가지고 있다. 한번 발기하고 나면, 일단 그 행위는 실질적으로
끝난거나 마찬가지다. 즉 그것은 단지 시간과 마찰의 문제일 뿐이다.
  그러나
여성에게 있어서 성은 더 복잡하다. 우리는 그녀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을 우리에게 열어주는 것이다. 거기에는 좀더 높은 질의 승락이
포함되어 있다. 결과적으로, 그녀의 성적인 응답에는 더 많은 복잡함과 미묘한
느낌이 있는 것이다. 우리가 육체적으로 거기에 있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녀는 우리가 정서적으로 그곳에 있다는 걸 느낄 필요가 있다.
  단지 그 자신의
단순한 성적 반응에만 신경을 쓰는 남자는 여인의 몸속에 육체적으로만 있을
뿐이다. 설사 그가 상대를 성적으로 만족시키는 것에서 아주 훌륭히 사명을
완수했다고 하더라도 그는 가장 최고라는 의미가 있는 남자는 아닌 것이다.
그가 되고 싶어하는 최고는, 단지 성교에 있어서의 선수인 것이다. 그가 자신의
단순한 성기구를 돌아다보지 않는다면, 그리고 완전히 그 여인의 감정적이고
육체적인 욕구와 함께하지 않는다면, 그는 결코 진정한 연인이 되길 바랄 수
없다. 그는, 사랑만들기가 받기보다는 주는 행위라는 것을 알 필요가 있고,
그가 줄 수 있는 최대의 선물은 그녀가 사랑속에서 확신을 갖도록 해주는
것이다.
  이 말은 때로 우리 육체의 본능을 거스르는 걸 의미하기도 한다.
여자와 남자가 다른 성적 궤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뜻밖의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우리 남자는 들끊는 정열로 급속히 발기해서 사정의 순간이 다가올
때는, 마치 누군가가 갑자기 불을 켤때와 마찬가지로, 어둠 속에 내던져져
있다가 급히 잃었던 방향을 되찾아 제자리로 돌아오는듯이 느낀다. 여자는
천천히 흥분하기 시작하고 파도가 점점 거세지듯 절정의 꼭대기에 다다랐다가
점차로 식어간다.
  그녀들은 절정을 향해 오를 때 우리가 곁에 있다는 걸 느끼고
싶어한다. 그리고 절정에 다다른 후에는, 급격히 떨어지기보다는 천천히
내려오면서 사랑받기를 원한다. 그녀들은 우리가 사정할때 경험하는 충격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녀들은 갑자기 돌아눕는 남자에게 쉽게
상처를 받는다. 설사 그러한 갑작스러움이 단지 우리가 절정이 급히 식어버리는
현상을 보여주는 것뿐이라 하더라도.
  그녀들은 우리가 그 행위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녀들을 사랑했다고 느끼고 싶어한다. 그래서 우리는 성적 본능을
넘어서서, 우리의 무아경의 상태를 넘어서서 그녀들에게 우리가 마음속에서
느낀 사랑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 설사 감정이 순간적으로 육체를 떠났다
하더라도.
  이것이 진정한 연인이 될 수 있는지 없는지를 측정할 수 있는 행위의
종류이다. 만약 네가 네 상대자의 만족을 육체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성행위를
하고 있는 동안 마음에 두지 않는다면, 너는 연인으로서 항상 부족할 것이다.
  너는 네 마음속에서  훌륭한 연인일 수도 있다. 그리고 심지어  몇 명의 여자들

극도의 육체적 흥분 속에 몰아넣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랑만들기의 궁극적인
비법, 즉 두 사람이 함께 함으로써 새롭게 공유할 수 있는 어떤 것을 만들어내지
않는 이상, 너는 항상 진정한 연인의 사랑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단지 여기에 나 자신의 욕구를 위해서 머물고 있다"고 말하는 너희들
둘 사이에는 미묘한 그늘이 있을 것인데, 그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너의 성욕은 거짓말을 할 수 없다는 걸 기억하거라. 네가 단지 많은 여자를
탐하려고 한다면, 그렇게 보여질 것이다. 네가 단지 여자에게 육체적인 정념만을
방축함으로써 네 자신의 이기심을 채운다면, 그렇게 보여질 것이다. 너의 진정한
동기가 무엇이든간에, 네 자신이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드러나 보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네 연인들은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은 그것을
말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느낀다.
  이것이 바로
사랑만들기가 내보이는 신비스러운 인식이다. 그것은 마음의 진실에게 말한다.
너는 그 진실을 숨기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곧 그 거짓은 더 커지게 된다.
  나는 네가 그런 거짓 속에 살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네가 두 사람간의 진실을
알기 바란다. 서로 가깝게 느끼고 관심을 가짐으로써 거리감이 전혀 없는 것
같은 그런 두 사람간의 진실을.
  나는 네가 알기를 바란다. 너희들이 서로
공유하는 아름다움으로 인해 네 볼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의 기쁨을.
  그러나
무엇보다도 네 팔로 안고 있는 여인의 눈을 바라보고, 순수한 마음으로
"널 사랑해"라고 말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럴 수 있다면 너는 진정한
사랑만들기를 하고 있는 거란다. 네가 그렇게 할 수 없다면 너는 단지 성행위를
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 둘 사이의 거리는 하늘과 땅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다.

 

   22. 환영에 사로잡힌 마음

  여기 대부분의 남자들이 알고는 있지만 거의 말하지 않는 이야기가 있다.
그건 과거의 연인의 환영에 관한 것이며, 그것이 얼마나 남자들의 마음에
붙어 다니는지에 관한 이야기란다.
  그 이야기는 사춘기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때는 한 소년이 완전한 연인에 대한 환상을 가질 때이다. 그녀는 신비와
아름다움으로 덮여있다. 희망과 두려움을 가지고 일상사를 근심하는 현실의
여인이 결코 아니다. 사실 그녀가 구체적인 형상을 가지고 있는 건 결코
아니다. 그녀는 꿈이고, 정신의 향수다.
  이러한 신비스러운 여인은 그의
환상 속 깊이 어딘가에 살고 있다. 그가 꿈꾸던 여인을 찾았다고 믿게 되는
날까지.
  그녀는 그가 여태껏 바라왔던 모든 것이다. 그는 그녀를 쫒는다.
그녀는 응답한다. 그리고 그는 예전에는 결코 그래본 적이 없는듯한 활기에
넘친다. 깨어있는 모든 순간을 그녀를 꿈꾸며 보낸다. 그녀로부터 떨어져 있는
매 순간순간이 고뇌다. 그녀와 함께할때, 그는 그녀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기쁨에 들떠 소리지르고 싶어한다 - 그의 생애에 이같은 아름다움을 보내준
믿기 힘든 행운에 들떠서.
  그는 그녀를 만지고 싶어한다. 결국 그렇게 한다.
그의 몸은 그녀로 인해 몸살을 앓는다. 그는 그녀에게 자신을 주고 싶어하고,
그녀를 붙잡고 싶어하고, 그녀를 알고 싶어하고, 그녀를 사랑하고 싶어한다.
  그들은 고민스러운 토론과 격렬한 애무의 긴 밤을 보내며 그러한 확신과
싸운다. 마침내 그들은 사랑을 한다.
  그들은 몇시간, 며칠동안 사랑의 행위에
몰입하여 스스로를 상실한다. 그들은 순수하고, 아랑곳없는 정열의 바다 위에
떠 있다. 천천히 이 정열은 식는다. 그들은 평상적인 시간을 함께 보내기
시작한다.
  점차 그녀는 평범한 사람들중의 하나가 되고, 꿈을 잃어간다.
그녀는 일상적인 욕구를 가진다. 그녀는 화를 내고 습관적인 삶을 산다.
그들은 사소한 일로도 서로에게 짜증을 낸다. 그들의 성욕은 평형을 잃는다.
그는 그의 마음이 표류하고 있음을 느낀다. 혹은 그녀의 몸이 그와 하나가
될 때조차도 그녀의 마음이 다른 곳을 향하고 있음을 느낀다.
  그의 눈은 그녀를
벗어나 다른 여자들을 발견하기 시작한다. 다른 여자들이 더 매력적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그녀들의 웃음이 더 많은 환희의 노래를 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지금의 연인보다 그녀들이 꿈에 생각했던 여인에 더 가깝다고 생각된다.
  그가 한 때 자신의 삶을 가득 채워 줄 거라고 생각했던 여자는 정신이 텅
비어있고 평범하다고 느낀다.
  곧 성적인 매력 이외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게 된다. 그들의 정열은 식어버린다. 몸은 같이 있지만 정신은 함께 있지
않는다.
  눈물과 다툼과 이별의 인사가 있게 된다. "아마도 언젠가는"하는
약속이 있게 되고, "함께 사는 게 의미가 있다면, 그렇게 될테지"라고 하는
신사적인 표현이 있게 된다.
  결국 그들은 헤어진다. 그들의 마음은 상처입고
그들의 감정은 격분한다. 슬픔이 떠나보낸 사람을 위로한다. 죄의식, 안도감,
화, 그리고 자책감이 소용돌이치며 떠나는 사람을 휩쓴다.
  시간은 흐른다.
점차 그 상처도 아물어간다.
  이윽고 다른 여자가 다가온다. 그리고 그 춤은
다시 시작된다. 그들은 곧 팔장을 낀다. 이번의 성행위는 더 어렵기도 하고,
더 쉬울 수도 있다. 그는 그녀의 눈을 들여다본다. 그녀는 아름답다.
그러나 그의 마음만이 볼 수 있는 저 밑바닥 멀리에는 또 하나의 여자의 영상이
자리잡고 있다.
  그건 그가 처음에 사랑했던 여인이다. 전에 그에게 다가왔던
바로 그 여자다. 그는 다시 새로운 정열 속에 몰두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상실한다. 그들은 사랑만들기의 선물인 신비한 방법으로 하나가 된다. 그러나
남겨져 있는 영상은 그래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메아리처럼 항상 그를
따라다닌다. 그녀는 아직도 거기에 있다. 지나간 연인의 환영으로.
  그 춤은
계속된다. 한 여자를 지나 다른 여자, 다른 여자를 지나 또다른 여자, 그녀들은
각각 다르다. 각각은 마치 새로운 봄처럼 느껴진다.
  그는 자신에게서 예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생각되는 면들을 발견한다. 그는 그의 몸과 마음이 상상도
못했던 방법으로 사랑을 느끼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러나 그는 매 순간마다
남겨진 메아리들을 듣는다. 아무리 그가 그 자신을 다 주어도, 그의 사랑이
아무리 강해도, 그의 침대는 옛 연인들의 환영으로 가득 찬다.
  그리고 각각의
여자에게서 더 많은 환영이 남아있게 된다. 그는 그것을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다.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조차도. 그러나 그의 마음은 과거보다  덜 아파한다.
상처들은 흉터가 되고, 지나간 열정의 기쁨들은 그의 숨겨진 기억의 한쪽 구석에
뿌리박혀 있다. 지금 그의 사랑이 아무리 순수하다 하더라도 지나간 사랑의
메아리로 가득 차 있다.
  그는 끔찍하면서 동시에 아름다운 하나의 진실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그가 사랑했던 여자들은 단지 기억 속에서가 아니라
현존한다는 걸 깨닫기 시작한다. 그를 사랑했던 여인은 영원히 그의 가슴에
실재로서 살아 있는 것이다. 그는 모든 형태의 사랑들에 대해 이해하기
시작한다. 모두가 - 하룻밤의 발기였건, 깊이 열망하는 정열이었건 간에 -
작은 결혼이었고, 영원한 합일이었고, 부정할 수 없는 언약이었다는 사실을.
  그는 그가 받았던 사랑에 대한 대가를 치루어 왔다는 걸 깨닫는다. 그의
사랑은 더이상 순수할 수 없다. 모든 여인에 대한 각각의 기억이 그의 침대를
공유하고 영원히 그러할 것이다.
  그러니, 너는 너의 사랑에 신중하거라.
사랑을 일상적으로 주지 말아라. 네가 해야만 할 사랑을 찾기 위해서는 위험한
모험을 걸어야 한다. 그러나 기억하거라, 각각의 사랑은 하나의 결혼이고,
너의 일부로 영원히 남게 되리라는 것을. 그들 각각은 너의 전부를 다른
여인에게 주는 것에서 네가 줄 수 있는 전체의 용량을 감소시킨다. 왜냐하면
그들이 네 가슴속의 공간을 조금씩 차지하고 있어서, 결코 마음의 전부가
다른 사람에게 점유될 수 없도록 만들기 때문이란다.
  신중하고 부드럽게
선택하거라. 감촉은 그 자체로 하나의 기억이 된단다.

 

   23. 배우자와 결혼

  나는 사랑받기를 원하지 않는 남자를 한번도 만나본 적이 없단다. 그러나 나는
결혼을 두려워하지 않는 남자도 좀처럼 만나본적이 없다. 결혼에 있어서의
무언가가 그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저해하는 요소로
죄어오는 것 같다. 결혼이란 것이 우리의 삶에서 무엇인가를 가능하게 만드는
것으로 이해되어지기보다는 그 때문에 우리 삶이 분절되는 것으로 이해되는
경향이 있다.
  내가 어렸을 적에 이러한 두려움이 나를 망설이게 했다. 나는
실수를 하고 싶지 않았단다. 나는 친구들이 사회적인 통념이나 성욕, 혹은
단지 그렇게 하는 것이 합리적이라 여겨 결혼하는 걸 보았다. 그리고나서
그들과 그들의 배우자들이 상처를 입고 입히며 서로를 대하는 걸 보았다.
나는 늙은 부부들을 관찰했는데 그들은 기껏해야 서로를 잘 참아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평생동안에 사랑이 없는 밤과 사소한 일로 다툼을 벌이는
나날들을 보내는 것을 상상해 보았다. 나 자신과  다른 누군가를 그런
운명에 굴복시킨다는 건 나로선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우 드문 경우이긴 하지만 서로의 존재에 대해 여전히 강한 열정을
품고 있는 듯이 보이는 나이든 부부들을 보기도 했다. 그들은 단지 서로에게
기대거나 서로의 결점을 참아내고 있는 관계가 아니라 진실로 사랑에
빠져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놀랄만한 광경이었고, 보통사람에겐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나는 나 자신에게 묻곤 했는데, 어떻게 그들은 그 많은 날들의
단조로움을 버텨낼 수 있었는지, 혹은 상대방의 습관에 대해 그렇게 많은
짜증을 참아내면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었을까?
  중요한 비밀은 선택을 잘하는데
있는 것 같다. 근본적으로 서로 양립할 수 없다고 주장되는 것이 있다. 선량한
사람들이 둘 다 절실하게 좋은 관계를 성공시키려고 해도, 나쁜 관계가
만들어질 수 있다. 너는 처음부터 좋은 관계를 함께 창조해 낼 수 있는 누군가를
찾아내는 게 중요하단다.
  불행히도, 처음 단계에서는 서로를 명확하게 보기가
어렵고 성욕에 서로가 이끌려서 함께 살게 되는 방식으로 채색되기가 쉽다.
그건 너로 하여금 수많은 사소한 일들에 대해 눈을 감게 하는데, 그 사소한
것들이 결국은 결혼생활의 계속이냐 실패냐를 판가름하게 되는 것이다.
  너는
압도적인 성적 매력을 넘어선 진실한 사랑을 볼 수 있는 방법을 찾을 필요가
있단다.
  어떤 사람들은 성행위에 열중하다가 그들 사이에 그 이상의 무엇이
있을지를 알아보기 위해, 가장 뜨거울 때 성적 매력을 물리치는 방법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다. 이것은 효과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역시
마음에 상처받은 흔적을 남기게 될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성욕으로부터
떨어진 서로를 알기 위한 시도로서, 성적인 행위들을 전적으로 부인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떤 것도 명확하게 볼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아직
성취되지 못한 성욕이 그대로 남아있게 되기 때문에 그밖의 함께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진정한 인식을 가질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정말 운이 좋은
사람들은 그들이 서로에게 매력적이라고 인식하기 이전에 오랫동안 친구관계를
유지해온 사람들이다. 그들은 서로의 웃음, 열정, 슬픔, 그리고 공포를 안다.
그들은 서로를 가장 좋을 때도, 가장 나쁠 때도 보았었다. 그들은 성욕으로
뒤얽힌 친밀감에 휩쓸리기 이전부터 함께 시간을 보내왔다.
  이상적이긴 하지만,
이런 사람들은 흔하지 않다. 만약 네가 곧장 성적 매력의 신비에 사로잡히게
된다면, 너는 그것을 초월하여 함께 할 수 있는 다른 열쇠를 찾을 필요가 있다.
  그 열쇠들 중의  하나는 웃음이다. 웃음은 서로가 오랜 기간을  함께 한다는 것

대해 얼마나 즐겁게 여길 수 있는지를 가르쳐 준다. 네가 함께하는 웃음이 밝고
건강하다면, 그리고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지 않는 거라면, 너는 주위에서
건강한 관계를 맺고 있는 거란다. 웃음은 경이의 자식이다. 네가 서로를 웃게
할 수 있다면, 너는 항상 서로를 경이롭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를 경이롭게 만들 수 있다면, 너는 네 주위의 세상을 항상 새롭게
할 수 있단다.
  웃음이 없는 관계를 주의하거라. 가장 친밀한 관계라 하더라도
단지 심각성 위에서만 구축된 것이라면 침울해지는 경향이 있다. 오랫동안
세상에 대해 전반적으로 심각한 견해들만을 공유하게 된다면, 너는 같은
관점을 갖지 않는 사람을 반대하게 되고 서로에 대한 비판을 관계의 토대로
삼게 된다.
  웃음 다음에는, 네가 존중할 수 있는 방법으로 세상을 다루는
배우자를 찾거라. 처음에 두 사람이 함께 할 때, 그들은 관계를 단지 둘 사이의
공간에서만 존재하는 것처럼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서로에 대해 끝없이
황홀해하지만, 둘 사이에 공유하는 압도적인 감정의 힘으로 인해 바깥 세상에는
어두워진다. 그리고 그 관계는 세월이 지나고 자라남에 따라서 다시 바깥 세상을
중요하게 여기게 된다. 만약 배우자가 네가 받아들일 수 없는 방법으로 다른
사람들이나 환경을 다룬다면, 너는 피할 수 없는 비탄에 이르게 된단다.
  그녀가 사람들을 돌보는 방법과 일상적인 일들을 다루는 방법을 보아라.
만약 그로 인해 네가 그녀를 더 많이 사랑하게 된다면, 네 사랑은 계속 자랄 수
있을 게다.
  그리고 또한 너의 배우자가 삶의 신비에 대해 어떻게 대면하는지를
보아라. 우리는 시적인 삶과 함께 일상적인 실용성의 꼭지점위에서 산다.
가슴속의 진정한 삶은 시적인 것과 함께 산다. 만약 너희들 중의 하나가
인생의 보이지 않는 신비에 깊이 감명을 받는 반면 다른 하나는 단지 단편적이고
실용적인 것들에만 끌려 다닌다면, 너희들은 유념하거라. 그것이 각자가
소외되고 잘못 이해되는 상태에 놓여지는 연결될 수 없는 다리가 되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을.
  그밖에 다른 많은 열쇠들도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네 스스로
찾아야 한다. 우리는 자신의 마음속에 배반할 수 없고 변할 수 없는 부분과,
거부할 수 없는 앞날의 삶에다 스스로 약속하게 되는 공약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다. 네가 만약 너의 신성한 부분에다 영양분을 제공해 줄 수 없는 상대와
사랑에 빠진다면, 또는 그녀의 내부에 있는 신성한 부분에 영양분을 제공해
줄 수 없다면, 너는 서로가 점점더 분리되어진다는 걸 느낄 것이다. 그것은
일상적인 일만을 공유하는 분리된 세계에서 살때까지 계속된다. 그러나 각자의
마음이 살아가고 꿈꾸는 곳을 건드리지는 말거라. 그런 것에서 사소한 상처와
일상적인 잘못들의 목록이 만들어져 너무나 많은 연인들이 아파하며 상대에
대해 불만족스럽게 느끼게 된단다.
  시간이 지나면 결혼이라는 진짜 기적이
네 삶에 일어날 것이다. 기적이란 말을 할 때, 나는 그 단어를 조심스럽게
사용한다. 그러나 그게 너무 강한 단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결혼에 있어서도
기적이란 것이 있단다. 그것은 변화라고 불리워진다.
  변화는 자연계의 가장
일반적인 사건들 가운데 하나다. 씨는 꽃이 된다. 누에는 나비가 된다.
겨울은 봄이 된다. 그리고 사랑은 아이가 된다.
  우리는 이러한 것들에 의문을
갖지 않는다. 그것이 기적으로 보이지 않는 건, 우리가 날마다 주위에서
그것들을 보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것을 전혀 모른다면 믿기 어려운 것이겠지만.
  결혼은 우리 스스로가 선택하는 변화이다. 우리의 사랑은 한알의 씨앗처럼
뿌려진다. 그리고 때가 되면, 꽃이 피기 시작한다. 어떤 꽃이 필지는 아직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꽃이 피리라는 것은 확신할 수 있다. 만약 네가
조심스럽게 그리고 현명하게 선택했다면, 그 꽃은 아마도 아름다운 꽃일 게다.
만약 네가 순간적인 감정에 휩쓸려 잘못 선택했다면, 혹은 어떤 나쁜 원인이
개입함으로 인해, 그 꽃은 결점 투성이가 될 수도 있다.
  우리는 결혼에 있어서
부정적인 변화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바로 그러한 부정적인
변화로 인해 나는 쓰디쓴 결혼에 치를 떨었고, 그런 것을 두려워했었다.
나는 사랑을 거칠고 쓰라린 것으로 변화시켰던 어두운 기적에 대해 의문을
갖지 않았었다. 나는 최초의 사랑이 뜨거운 열정보다는 더 깊고 더 의미있는
긍정적인 어떤 것으로 변화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내가 믿을 수 있었던 것은 단지 열정의 힘이었고, 그런 사랑이 식었을 때
나는 미미하고 쓰라린 상태로 남겨질 거라고 두려워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긍정적인 변화라는 것도 있다. 부정적인 변화와 마찬가지로, 그것은 사소한
일들이 하나하나 늘어남으로써 자라난다. 수많은 타격에 의한 죽음이 아니라,
수많은 사랑의 감촉에 의한 성장이다. 두개의 역사가 뒤섞이는 것이다. 두개의
분리된 존재, 두개의 분리된 감정, 두개의 분리된 의식이 함께하여, 그들이
지나온 삶에 대한 견해를 공유하게 된다. 그들은 분리된 채로 있지만 또한
하나가 된다. 내가 한때 두려워했던 것처럼, 끝장이나 옥죄임이 아니라
인식이 확장되는 거란다.
  이것이 그곳에는 긴장이나 덫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긴장과 덫은 삶의 모든 선택중의 일부분이다. 독신자에서부터 수많은 애인을
갖는 일부일처주의자에 이르기까지 각자의 선택은 가보지 않은 길에서 더
낯설고 더 자극적일지도 모른다는, 머뭇거리는 회의를 그들의 사랑 속에 갖고
있다. 그리고 각자는 사랑만이 가지는 풍부함에는 무감각해진다.
  결혼만이
삶을 깊이있게 확장시킬 수 있단다. 그리고 둘은 서로의 모든 상이함에
반대하여 하나가 될 것을 선택했다는 걸 깨닫고는 감화받는다. 결혼하지 않고
함께 사는 사람들은 서로 친구가 되는 기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결혼
서약속에는 그런 경험을 더욱 풍부하고 더욱 복잡한 것으로 깊이있게 만드는
특별한 무게가 있는 거란다.
  그러므로 비록 잘못된 이유들 때문에 결혼으로
나아가진 않더라도, 결혼을 두려워하지는 말거라. 그것은 서약이고, 그속엔
변화의 동력을 포함한다. 만약 네가 성장시킬 수 있는 누군가를 발견하는
것을 마음에 두고 있다면, 만약 네가 그 길에 들어서지 않거나 혹은 배우자를
선택하지 않는다는 끊임없는 유혹에 맞설 수 있다고 충분히 맹세할 수 있다면,
만약 너의 사랑이 경험하게 될 세월과 계절들을 포옹할 마음의 힘이 네게
있다면, 그러면 너는 아마 결혼이 제공하는 환희를 찾을 준비가 되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기다리거라. 잘된 결혼의 영광은
네 인내가 만드는 가치란다. 그 시기가 올 때, 수많은 꽃들이 만발할 것이다.


   24. 충실하게 머문다는 것

  어떻게 하면 한 여인에게 충실하게 머물 수 있을까? 모든 여성은 상이한 향기,
상이한 느낌, 상이한 정신을 가지고 있는 상이한 나라와 같다. 너는 그것이 거기
있다는 것을 안 이상, 이러한 풍부함을 탐험하기를 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네가 일단 한 명 이상의 여자를 접해본다면, 너는 각각의 여자가 각기
다른 방식으로 너를 활기차게 한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네가 또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마다, 새로운 세계가 나타날 때마다, 어떻게 너는 그러한 생각을
무시할 수 있겠는가?
  이는 쉽지 않은 일이다. 유혹은 언제나 그곳에 있다.
  네가 얼마나 너의 아내를 사랑하건, 네가 얼마나 너의 배우자를 중요하게
여기건간에, 다른 여자가 나타나서 네가 생각하기에 죽어 있거나 혹은 결코
존재한다고 생각지도 못했던 네 속에 있는 어떤 것이 살아나게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다. 그녀는 너를 매혹시키고 사로잡아서 욕망으로 가득 채우려고
할 것이다.  너는 그녀를 원하게 될  것이고, 그것이 당연하다고 느끼게  될 것이
다.
  이런 일이 벌어졌을 때 너는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본능에
따른다. 그들을 끄는 힘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자신은 그것을 거부할 어떠한
자유도 없다고 믿는다. 다른 사람들은 그 유혹에 맞서 싸우고 그것을 견디려고
노력한다.
  나는 운이 좋았다. 나의 왼쪽다리가 한가지 기억을 떠오르게 한다.
그건 때로는 나의 마음보다 현명하다.
  이런 일이 있었다.
  몇년 전에 주차장을
가로질러 걸어가고 있을 때, 나는 빙판위에서 미끌어졌고 내 다리가 번쩍
들어돌려졌다. 땅으로 미끄러졌을때, 나는 왼쪽다리에서 총소리 같이 꽝하고
깨지는 소리를 들었다.
  처음에 나는 무엇이 잘못되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게 넘어진다는 건 일상적인 일이고, 별게 아닐 것으로 보였었다.
  며칠동안 나는 X-ray조차도 찍지 않고 시간이 흐르면 통증은 없어지겠지하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다리의 통증은 가시지 않았고 마침내 내가
X-ray 사진을 찍었을 때, 의사들은 뼈가 두동강이 났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그들은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알고 있었다. - 나에게 깁스를 하고 목발을 짚게
하여 내보냈다. 그들은 내가 운이 좋았다고 말했다. 뼈가 어긋나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고. 그리고 뼈가 치료되면 그것은 원래만큼, 어쩌면 더 강하게
될 수도 있을 거라고 말했다.
  그들의 말에서 절반은 옳았다. 뼈는 치료됐다.
그것은 원래의 것만큼,. 어쩌면 더 강하게 됐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히 치유되지 않았다. 그것은 나의 마음 뒷켠에서 생생한 기억으로
살아남아 있단다. 그리고 내가 미끌어지거나 균형을 잃어버리려고 할때마다
그 총소리가 나의 의식을 관통한다. 그리고 나는 생각지도 못할 짧은 순간에,
내 앞에서 그 사건이 다시 재연되는 걸 보게 된다.
  나의 다리는 치유되었을지
모르지만, 내가 치료된건 아니다. 나에게는 상처자국이 남아 있다. 그 뼈가
얼마나 강하게 되었건 여전히 다리에 대한 걱정이 남는다. 그 걱정은 영원히
남게 될 것이고 나는 결코 다시는 내 발 밑의 땅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을
것이다.
  한 여자에 대한 유혹의 파도를 느낄 때마다, 나는 그 다리를 생각한다.
나는 왜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으며, 언제나 거기에는 튼튼한 다리가
있다고 가정했는가에 대해서 생각한다. 나는 어떻게 한 순간에 그것이
부러졌으며, 내 생애의 나머지 동안 내 다리를 불안해하고, 내가 그 다리는
더 강해졌다고, 다른 어느때보다도 안전하다고 수십 번 다짐하더라도 왜
그 다리를 불신하게 되는가에 대해서 생각한다.
  불성실을 나의 뼈를 부러뜨린
것만큼이나 확실하게 사람 사이의 관계를 부러뜨린다. 처음에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시간이 지나면서 너는 그 부러진
곳을 치료해서 관계를 이전보다 더 강하게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완전히 치유되지는 않는다. 상처가 남게 되고 그것이
너를 영원히 괴롭힐 것이다.
  어떤 일이 그럴 만큼 가치가 있을까?
  그것은
네가 결정해야 할 문제다.
  너의 마음이 너의 배우자를 떠났거나 둘 모두가
끝낼 수 없는 무의미한 관계에 묶여 있다면, 혹은 너희 둘이 너무 연약하거나,
너무 어리거나 서로가 누구인지를 너무 모를 때 서로를 선택한다면, 혹은
네가 중단시킬 수 없는 분노와 모욕의 소용돌이 속에서 서로를 악화시키고
있다면, 너는 그럴 만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네가 단지
새로운 것의 미끼에 의해 유혹당하고 있는 경우라면? 네가 성욕을 사랑으로
오해하고 있는 경우라면? 너는 애정을 가지고 진실로 사랑에 빠져 있다고
믿지만, 어떤 여자도 너의 환상을 충족시키지 못할 것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렇다면, 너는 새로운 애인의 유혹에 따라 무엇을 얻으려고 생각하느냐?
  이것들이 네가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할 물음들이다. 사랑이 없는 침대에서
한 여자와 함께 밤을 보내는 모든 남자들에 대해서, 그 신비함이 벗겨지고
일상생활의 하찮은 일들이 끼어들기 시작하자마자 깨어져버릴 환상을 쫓아
좋은 관계의 사랑을 떠나는 남자들에 대해서 말이다.
  네가 얻은 사랑의 전부를
위험에 내맡기기 이전에 조심스럽게 생각하거라. 우리들 중 그 누구도 쾌활한
웃음과 애교있는 미소의 유혹에 면역되어 있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누구도
우리의 배우자에게 완전히 만족함으로써 새로운 희망과 요원한 꿈들을
불러일으키는 누군가에 매혹당하지 않을 수는 없다.
  인간의 마음과 생활은
뼈보다는 훨씬 복잡하고 귀중하다. 만약 부러진 다리가 나로하여금 내 발밑의
땅을 의심하도록 만들었다면, 사랑처럼 깨지기 쉬운 어떤 것에 마음의 균열이
생긴다면?

 

   25. 부성애

  우리의 삶에서 완전한 것이란 거의 없단다. 우리는 완전한 사랑을 꿈꾸고,
완전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고, 우주를 완전한 창조물로서 바라보고, 자신의
완전성에 도전한다. 그러나 우리의 노력과 투쟁들은 실망으로 귀착될 운명에
처해있다. 우리는 완전하지 않다. 우리는 이기심과 메꿀 수 없는 욕망으로
가득 차 있다. 욕망을 메꾸기에 충분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완전함이
그 전체로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유일한 곳이 하나 있다.
  부성애.
  너의 자식을
바라볼 때, 거기에는 어떠한 한계나 열망이 있을 수 없다. 너는 완전한
사랑으로 아이를 바라본다.
  그것은 오직 남자의 본성일 뿐이다. 자식은 완전한
사랑과 부모에 대한 의존 속에서 태어난다. 그것은 존재의 완전한 통일성
속에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충분히 제공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어떠한 조건이나
동기가 있을 수 없다.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완전한 선물로서 제공한다.
  자기
사랑의 완전함 속에서, 자식은 우리들의 완전한 사랑을 요구한다.
  혈육이
만들어지는 빛나는 순간 동안, 네가 원하는 것이 단지 새로운 생명을 준다는
것의 이상도 이하도 아닌 데서 비롯되는 완전성을 경험하게 된다.
  나는 결코
아버지가 되지 않겠다고 결심했었다. 자식은 보상도 없이 구속과 책임을
지속적으로 요구하는 존재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부성애의 완전함을 경험했을 때
그밖의 세상이 나에게 새롭게 비추어졌다. 나는 결코 속박되지 않았다. 나는
구속의 공포로부터 해방되었다. 책임을 떠맡지도 않았다. 책임이 더이상 짐이
될 수 없었던 거란다.
  본성은 자기 자신에게 동조한다. 부성은 나로 하여금
내 부모를 이해하게 하였고, 그들이 내게 주었던 사랑 이상으로 그들을 존경하게
만들었다. 나의 어린시절은 그 자체의 고유한 완전성으로 비춰졌고, 왜
중국인들이 효도와 부모를 공경하는 자식의 책임을 그렇게 중시하는가를 알게
되었다. 나도 올바른 일을 얼마나 하고 싶어했는가에 의해 나 자신의 불완전함이
많이 제거된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세대간의 통일성이 태초부터 세대들
속으로 흘러든다는걸 느꼈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시작일 뿐이다.
  나는 다른
시각을 가진 다른 사람들을 알게 되었다.
  나에게 전쟁을 격렬히 증오하는
마음이 새롭게 생겨났고, 내가 무엇을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하는지를 진정으로
깨달았다.
  나는 여자들을 겉으로 풍기는 아름다움에서만이 아니라, 그녀의
몸 속에서 생겨나는 선물 때문에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
  나는 이기심과 욕망이
없는 새로운 종류의 사랑에 대해 알게 되었다.
  나는 자식에게 속박됨으로 인해
오히려 참된 자유를 발견한다. 그러한 경험이 주는 위력을 전부 설명하는건
불가능하다. 그것은 지식보다 훨씬 낮은 차원에서 나오는 즐거운 암초 중의
하나이다. 그것이 일단 경험되기만 한다면, 너를 인정과 조화가 넘치는
가운데에서 다른 사람과 결합하도록 만들 것이다.
  그러나 네가 아버지가
된다는 것이 저절로 좋은 아버지가 된다는 걸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부성은
결혼과 같이 네 속박과 이기심과의 계속적인 싸움이란다. 이 싸움의 과정에서
결점이 없는 완전한 아버지가 되기 위한 채찍질이 끊임없이 있게 되는데,
그것은 너의 아들이 너에게 주어진 완전한 선물이기 때문이란다. 너의
마음속으로부터 너는 아버지로서 보다 완전하게 되는 방법을 깨닫게 되고,
그것이 너의 매일매일의 삶을 향상시켜 가는 기준이 되어진다.
  그러므로
주의깊게 부성을 향해 가거라. 아버지가 되는 것은 인간이란 존재가 만들어지는
것보다는 훨씬 쉽단다. 그리고 네가 아버지가 될 때, 너의 삶 전체는 갑자기
좋은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는 전망에 기준점이 놓여지고 그에 따라 하루하루
삶의 가치가 측정되어지게 된다.
  그리고 만약 너의 삶이 순조롭지 않다면 -
너의 결혼생활이 순탄하지 않다면, 너의 생활을 좀먹는 개인적인 악마의
환영에 사로잡혀 있다면, 네가 부성이 요구하는 규범들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면 - 너는 개인적으로 부끄럽게 살 것이며, 그것이 너의 삶을 바닥으로
끌어내리고 마음속에서부터 아버지가 되는 것을 가로막을 것이다.
어떤 것으로도 - 술로도, 다른 여자로도, 혹은 그것에서 달아나는 방법으로도-
너의 삶이 실패했다는 가혹한 그 진실을 감추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너는
아버지가 된다는 것을 선물이라고 생각하거라. 그것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고, 우리 모두에게 자유롭게 주어지는 인생의 일상적인 경이로움이란다.
건강하든지 혹은 허약하든지, 예쁘든지 혹은 보기 흉하든지, 너의 아이는
새로운 햇살이 비추는 세계를 열 것이다. 그것은 꿈보다 더욱 위대한 경험이다.
  만약 신은 아버지처럼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말이 진실이라면, 우리는  그 속에

평화롭게 휴식할 수 있을 게다. 그처럼 아버지의 사랑은 우리를 완전한 사랑으로
사랑받게 한단다.

 

    26. 세월의 무게

  너의 인간에 대한 애정은 연장자들을 대하는 방식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단다.
  아이들처럼, 연장자들도 일종의 부담이다. 그러나 아이들과는 다르게 그들은
어떠한 희망이나 약속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은 무거운 짐이자 걸림돌이요,
우리 자신의 운명의 거울이기도 하다. 과거의 사실을 알아내고 연장자들이
제공했던 지혜를 아는 것, 그리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걸어온 그들의 삶에
경의를 표하는 것에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커다란 애정이 필요하다.
  나는 네가
그러한 사람이 되었으면 한단다.
  이런 문화 속에서는 그것이 결코 쉽지 않을
게다. 우리는 연장자들에 대한 느낌을 잃어가고 있다. 지긋하게 나이든 노인들,
은퇴한 사람들처럼 그들은 삶의 무대 뒤에서 뿌옇게 가리워져 있으며 슬프고
회색빛이 감도는 존재이다. 그들은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자신들에게 대해
두려워하거나, 혹은 부당하게 소외당하는 것을 묵묵히 참아낸다. 그들은 세월이
그들에게 가르쳐 주었던 지혜를 더이상 사랑하거나 존졍하거나 추구하지 않는다.
  연장자들로부터 너는 두가지 마음을 발견할 기회를 얻을 것이다. 어떤 이는
너에게 매료될 것이고, 너의 젊음이 자신의 노년으로 옮아 간 것처럼 느낄
것이다. 다른 이들은 자신이 볼품없고 죽음이 가까이 다가왔다는 것 때문에
너에게 위축당할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너를 기쁘게 해주기를 간절히
원하며 너에게 아주 작은 것만을 요구하기 때문에, 너는 그들과의 만남을
대단히 즐겁게 느끼게 될 것이다.
  설령 그들이 너에게 어떤 부담을 주던간에
너는 늘 조심스럽게 그들을 보살펴야 한다. 너는 그들의 과거의 모습이며,
그들은 너의 미래의 모습이다. 바로 이 순간에도 너는 네 자신의 내부에
네 나이만큼의 씨앗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은 너를 보는 매순간마다 자신의
어린시절의 메아리를 들을 것이다.
  너는 많은 노인들이 쾌적하고 즐거운
상태에 처해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바로 젊은이들이
그러하듯이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너와는 아무 관련도 없는 자신들과 자신들의 감정들을 생각해 보라고
요구할 것이다.
  네가 그러한 연장자를 만날 때, 그들에게 무례한 태도로
대하면 안된다. 어린이들처럼 연장자들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에
의존하고 있으며, 사회적 지위의 상실을 매우 두려워한다. 그들은 죽음을 앞에
둔 불확실한 미래에 살고 있으며, 그들이 열심히 일해서 창조했던 세계가
힘있는 다음 세대에 의해 무너져내리고 있는 것을 괴로워하고 있다.
  그들의
육체는 망가지고 있다. 그들은 끊임없이 동년배의 사람들 속에서만 자신을
찾으려 한다. 젊은이들은 그들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들은 추억 속에서 살아간다.
  연장자들을 만날 때 너는 그들의 불쾌한 태도에
상심하지 말아라. 네가 지쳤을 때, 혹은 아프고 화가 나고 고통스러울 때
유쾌하지 못하듯이, 많은 노인들이 그런 상태에서 살고 있단다. 그러나 그들의
그런 행동의 표면은 꿰뚫어 보는 지혜는 쉽게 얻어질 수 없는 것이란다.
  그들이 비록 매우 단순하고 제약된 평범한 생애를 보냈다 하더라도, 그들은
세상이 어떤 것인가를 알고 있다. 다른 어떠한 과거 세대도 너의 세대와는
거리가 있을 것이고, 그들의 어떠한 삶도 지금 시대와는 유사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이야기 속에는 그들을 지나쳐서 앞으로 질주해가는 너희들의 생명수가
담겨 있다. 네가 그들에게 말을 걸때에 너는 너를 배출한 이 세상에 좀더
가까와질 것이다. 그 점, 단지 그것만을 보더라도, 너는 그들을 존졍하고,
공경하며,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연장자들을 대할때 동정심으로
치닫는 것은 반드시 피해야 한다. 보호한답시고 나서는 많은 이들이 연장자들을
어린애 취급하고, 후원이랍시고 그들의 인격을 얕잡아본다. 연장자들에게
큰소리로 말을 걸거나, 마치 얼간이를 대하듯 하는 경우도 있다. 연장자들이
일상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걱정하는 것을 유치한 행위로 치부하고 그들의
행동과 태도에서 그들이 주었다고 주장하는 연장자에 대한 존경은 형편없는
것으로 드러난다.
  그런 사람들은 연장자들을 무시하는 만큼 그들 스스로도
손해를 입게 될 것이다. 그들의 행동을 보면서 연장자들은 그들의 자애심을
비춰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무기력만을 비춰주는 거울을 손에 쥔다.
  진실한
걱정과 존경은 약함에게 봉사하지만 진정한 인간성과 강인함을 비춰준다.
돌보거라, 경청하거라, 웃거라, 심지어 도전하기도 해보거라. 연장자들은
항상 말과 행동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단다.
  이것을 기억해야 한다.
연장자들은 결점에서조차도 위엄을 추구하고 중요시한다는 것을. 그들이 원하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다른 젊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삶이 매우
귀중하다는 것을 느끼는 것이며, 여생을 헛되이 보내지 않는 것이다. 네가
진정한 마음으로, 즉 가식적인 존졍으로 그들을 무시하지 않고 동정심으로
그들을 마음 상하게 하는 일없이 다가갈 수 있다면, 또한 그들의 경험의
결과들에 가치를 부여하고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 비록 그 결실이 매우
단순하다 할지라도 - 너는 애정을 최대한으로 발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너는 그들을 돌보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사랑하게 될 것이다.

 

   27. 세월이 남기는 지혜

  지난 주에 나는 단 니담을 묻고 왔다. 단은 95살에 죽었다. 그는 레드 레이크
(오지브웨이족)의 가장 연로한 세습족장이었다. 몇년전 구술역사연구를 하고
있었을때, 나는 그와 알게 되었다.
  나는 그와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그의
집으로 젊은이들을 데려가곤 했다. 그들은 거실에서, 수우족에 대항해 싸웠던
선조들의 이야기를 듣고, 또 대공황의 흉년동안 인디언들이 삶을 꾸려가던 것에
대한 그의 회상들을 들으면서 참을성있게 앉아있곤 했다.
  젊은이들은 언제나
주의해서 듣지는 않았는데, 단은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젊은이들에게 과거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이 귀기울여
듣지 않더라도 듣고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었다.
  단은 항상 우리를 환영했다.
우리가 방문할 때면 항상 전통적인 복장을 차려입고 문까지 나와서 맞아주었다.
그는 결코 일찍 돌아가 달라고 부탁한 적이 없다. 그의 표정에 피곤한 기색이
완연할 때조차도, 그는 최선을 다해 젊은이들의 질문에 대답하고, 그들의 말에
열중했으며, 딴 생각에 빠지지 않으려 노력했다.
  때때로 그는 지루하게
반복하거나 한 주제에 대해 너무 길게 얘기하기도 했는데, 그럴 때 학생들은
서로를 쿡쿡 찌르거나 눈동자를 굴려대며 장난질을 하였다. 단은 그들이
흘깃거리는 것을 보았으나 전혀 모르는 체 했다. 그는 세월이 안겨준 통찰력과
너그럽고 애정어린 유머로 젊은이들의 경솔한 태도를 못본 체 하였다.
  지난
몇년동안 단은 눈에 띄게 쇠약해져갔다. 여기저기로 진료소를 옮겨다녔으며,
침대 밖으로 나오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런 중에도 그는 항상 기꺼이 우리를
맞아 주었으며,  언제나  친절했다. 그의  몸이 망가져 간다는   사실을 받아들였
고,
결국 더이상 살 가망이 없어졌을 때 기꺼이 그 자신을 미지의 세계에 맡겼다.
나는 꺼져가는 생애를 그처럼 평온하고 침착하게 받아들이는 이를 한번도 보지
못했었다.
  어느 누구도 그가 죽었을 때 금방 알아차리지 못했다. 단은 장수했으며
그의 살아 생전에는 추억될 만한 것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그가 죽고나니,
그와 함께 보냈던 많은 추억들이 밀려온다. 그의 용맹한 할아버지가 말이
끄는 수레를 타고 싸웠던 전투에서 돌아오던 당시의 일들을 얘기할 때, 그의
눈빛은 불타올랐다. 그가 처음으로 Model-T(1908-28년 포드사가 개발한
자동차)를 타러 갔을 때를 얘기할 때는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한 페이지의 글 또는 어린아이에게 해주는 동화보다 훨씬 더 생생한
이야기들로
그는 삶을 꾸려온 것이다.
  그는 95년이라는 세월동안에 순수하고 자연스러운
태도와 숭고한 감각을 익혀온 것이다. 그는 세월이 지혜를 깨달았으며, 항상
과거와 접촉하고 있었다. 어떠한 것도 그것들을 대신할 수는 없었다.
  그를
방문하던 젊은이들이 그를 잃은 상실감을 느끼고 있을지는 의문이다.
나빠진 시력과 점으로 얼룩덜룩해진 피부를 가진 노인이 거니는 시린 장면들을
그들이 보았는지도 의문스럽다. 그의 얘기를 듣기나 했는지, 주의를 조금이라도
기울였는지도 의문이다. 그들은 살아갈 미래가 있지만, 단은 과거 속에서만
살아 있었는데.....
  젊은이들 중 어느 누구도 그의 장례식에 오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다른 갈데가 있을 수 있고 또한 살아갈 수 있는 생명이 있다.
단이 착한 사람이었다고 말해진다면 다행일 것이다. 사람들은 모든 인간의
삶의 지속을 위해 명예롭게 죽고, 곧바로 땅에 묻힌다.
  그러나 죽은 이들이
그렇게 쉽사리 묻혀버리지만은 않는다. 그들의 생명은 우리들 생활의 주변에
닿아 있으며, 우리들이 지금의 우리이게끔 만들어 주었다. 우리는 그들이
세운 세계 속에 살고 있으며 그들의 존재 속에서 미래를 예견할 수 있다.
  단을 방문했던 젊은이들도 곧 이 사실을 뼈저리게 느낄 것이다. 그들은 그의
이야기를 살아있게 할 것이며, 스스로 그 이야기들중의 하나로 되어갈 것이다.
  그들이 Model-T를 자식들에게 보여줄 때 친구와 함께 타러 가곤 하던
한 노인의
얘기를 들려줄 것이다.
  그들의 아이들이 협정이 조인될 당시에 대해 물어올때,
한 노인이 그 시기에 살았으며 그는 기병대가 대포를 오지브웨이족 캠프를
향해 조준하고 있을 동안에도 카드놀이를 즐기던 장면을 직접 보았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말해줄 것이다.
  그들이 점점 나이가 들어가고 인생의 지혜를 쌓아감에
따라, 그들이 서로 속삭이고 낄낄대고 쿡쿡거리며 장난질할 때 은근히 미소만
지어주던 노인의 지혜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들에게 죽음이 닥쳐옴에 따라,
죽음에 근접해가던 그 노인의 평화로움과 침착함을 기억해 낼 것이며, 아마도
그 기억은 그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줄 것이다.
  그들이 늙을 즈음에, 그는
어느새 그들의 친구가 되어있을 것이며, 그의 발언저리에 둘러앉아 얘기를
들을때보다도 한층더 그를 가깝게 느낄 것이다. 그들은 지혜를 성숙시키고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 것이다.
  그것은 연장자들의 태도이다. 우리가
젊을 때는 그것이 다소 무기력하게 보였을지도 모르지만.
  일정한 때가 되기
전에는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만남은 우리를 더욱 현명하게
만들어 주었다. 젊은이들이 단을 알지 못했어도, 아마 세월이 그들을 더욱
현명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단 니담의 죽음으로 우리는 좋은 사람을 잃게 된
셈이다. 그러나 모든 죽음들이 우리 가운데 계속 남아있는 것처럼, 그는 우리
가운데 계속 살아있으며, 우리의 추억속에 남아 삶의 잊혀진 관심속에서
축적되어 있을 게다. 그의 죽음은 비통한 사실이지만, 그의 생애는 축복스러운
것이었다. 그를 알고 있는 누구에게나 그는 과거에 대한 더 많은 지식을 가르쳐
주었다. 그는 미래를 내다보는 지혜를 우리에게 준거란다.

 

    28. 죽음
  죽음은 누구에게나 의문이다. 잉태나 사랑처럼 우리를 모든 것과 연관지우는
기반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들 중에 누구도 그게 어떤 것인지, 무엇을
예고하는지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죽음의 문턱을 넘어섰다가 자기들이 본걸
말해주기 위해 죽음에서 되돌아온 사람들로부터, 그리고 죽음에 관한 티벳인들의
책과 이집트인들의 책같은 종교적인 기록에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우리는
모든 믿음과 종교로부터 내세를 약속받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도대체 어떤 것이
진실인지를 완벽하게 알 수는 없다. 모든 이들이 혼자서 죽음에 이를 것이고,
우리들 개인을 위한 개인적인 준비들만이 남아있다. 네가 알고 있는 죽음은
무엇이냐?
  아주 오래전에 일식을 직접 본적이 있었다. 높은 언덕의 꼭대기에
올라앉아 때를 기다렸다. 짧은 해돋이가 지난 이른 아침이었다. 새들이
나무 위에서 지저귀고 있었고, 멀리 산허리에서는 젖소들이 풀을 뜯고
있었으며, 말들은 잡초들 속에서 부스럭대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 태양이
빛을 잃기 시작했단다. 말들이 잠잠해지고 소들 역시 조용히 있었다. 새들도
더이상 지저귀지 않았다. 태양이 달 뒤로 숨자 대지가 온통 고요해졌다. 소들은
주저앉았고, 새들은 날개죽지 사이로 고개를 파묻었다.
  감추어진 태양의 희뿌연
해무라기만이 적막한 어둠을 비추고 있었다. 바람 한 점 없었다. 적막했다.
태양의 빛을 잃은 세상은 칠흑같았다.
  그 순간, 중대한 일이 벌어졌다. 내가
더이상 죽음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게 된 것이다. 나는 절멸을 감지했지만,
절멸은 어떤 것속에 있었다. 수천 마일이나 떨어져 있는 곳에서 돌아가신
삼촌이 문득 떠올랐다. 나는 그의 공포와 외로움을 생각했고, 태양이 빛을
잃은 지금 순간에 잠시만이라도 같이 있을 수 있다면 하고 간절히 바랬다.
  나는 내가 깨달은 게 뭔지 모른다. 내게 그것은 인간의 한계를 훨씬 초월해서
존재하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죽음과 관련된 어떤
것이란 건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죽음은 우리 모두가 가야만 할 거대한
암흑과도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거기에는 평화가 있고, 그것은 모든 이해관계를
초월할 것이다. 죽음의 공포가 나를 엄습해 올 때, 아픔과 커다란 위험에
처할 때, 나는 새들이 날개죽지에 고개를 파묻던 그 언덕을 떠올린다. 우리들
모두는 - 나, 새들, 소들, 말들 - 삶 그 자체보다 훨씬 심오한 것을 경험한
것이다.
  우리들 자신은 자취를 감추었고, 우리의 개성은 제거되었다. 그 절멸에
대항할 어떠한 추진력도 우리는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는 매우 거대한 것속에
함몰되었고, 지긋이 껴안듯 긴 숙면을 받아들였다. 산허리에서의 그 순간이
진실이라면 -내생각에 그랬지만- 우리는 자신에 대해 헤아리는 아무런 가치의
평가없이 죽는 것이다.
  우리는 너무 미세한데 반해, 죽음은 너무 거대하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건 단지 자아의 상실이지만, 그 자아는 그림자가 태양이
있음을 알게 하듯이 영원한 것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어쩌면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죽음은 우리가 인식하는 삶을 사라지게 하는 것이고, 비통해할만한
가치의 상실이다. 그러나 죽음을 두려워하지는 말거라. 그것은 너무 커서
환영할 만한 것은 아니지만, 위대한 일이기에 두려워할 일도 아니다. 우리는
그 둘 모두를 판단할 수 있다. 그래서 그것은 살아있는 우리 삶의 유형들을
통제하기 위한 우리의 수단이기도 하거니와 자연의 광대한 영속성 속으로
우리를 절멸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전체를 포괄하는 영속적인 평화에
참여하는 거란다.
  이 두가지 경우에 있어서, 진실은 우리 것이란 걸 믿게 된다.
태양이 빛을 잃는 동안, 산허리에 서있던 그 짧은 순간동안에, 나는 삶의
상실에 대한 좋지 않은 느낌을 아무것도 받지 않았다. 그 대신에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획득의 느낌을 감지했고, 내게 있던 모든 경계들을 광대한
평화 속에다 던져버렸다.
  만약 그게 죽음의 순간이었다면, 죽음은 전혀
공포스러울 게 없으며, 우리가 영원한 조화음 속을 통과하는 순간으로써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 게다. 우리가 당장 그 하모니를 듣지는 못하더라도.
  아마
우리는 커다란 공허와 침묵으로 그것을 이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현혹당해선 안된다. 그 광대함은 텅빈 것이 아니라 존재들로 가득
채워져 있는 거란다. 침묵조차 소리를 지닌 것이듯이.

 

   에필로그

  아버지의 성찰
  내가 이 책의 집필을 마칠 무렵에 태양은 8월의 하늘에 숨막힐듯이 내리쬐고
있었다. 지금은 늦여름 - 휴식의 시기이고 결실의 시기이며, 점차 그림자가
땅위에 길게 늘어지기 시작하는 시기이다.
  나는 8월이 거의 끝나가는 날들을
경외하곤 했다. 그 날들은 마치 정지해 있는 시간처럼 보였다. 그러나 여름은
그 기약을 포기했고 바람이 날카롭게 밤하늘을 가르는 겨울의 어두운 속삭임에
자리를 넘겨준다.
  이제 나는 그러한 나날들을 사랑한다. 그들의 침묵에 지혜가
있다. 땅에서 봄의 기약이 그들의 소리를 들려준다. 그러나 아직 그 빛은 얇고
미미하고 동물들은 멀리서 조심스레 보고 있다. 끝마치기에 좋은 때다.
  계절의
중년은 역시 나의 시간이다. 땅과 같이, 나는 나의 삶의 변화를 조심스럽게
바라보고 있다.
  여기서 나는 나의 뒤에 따라 올 너의 청춘의 기약을 볼 수
있다. 너의 희망의 파도가 밀려오는 것을 느낄 수 있고 날카롭고 신선한 너의
꿈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또한 삶의 더 냉혹한 경계심과 더 어두운 메아리와
함께 또다시 한 세대의 지식이 오리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 짧은 순간 동안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고, 아들의 아버지인 한 세대에 존재한다.
  이 위치는
좋은 곳이고, 그리고 그것이 나를 변화시켰다.
  나는 이제 더욱 인내할 수 있다.
땅에서 자라나는 농작물처럼, 나는 기다림의 시간과 활동의 시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었다. 내가 경작하는 씨앗은 단지 그것들이 성숙하는 때에 꽃이
필 것이다. 내가 그것을 재촉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더 깨끗해졌다. 나의 젊은 시절의 욕망과 꿈은 보다 간단한 진실들에 안주했고,
일상의 친절이 때로는 충분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나는 더욱 기쁜 마음으로
무거운 짐을 견딘다. 가족의 즐거운 무게와 부성애가 나의 마음을 부드럽게
만들었고, 나는 더욱 기꺼이 장애물들과 삶의 한계들을 맞아들이겠다.
  그리고
나는 사랑에 대한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나의 삶에서 많은
사랑이 오갔고 나는 더욱 조심스럽게 사랑하는 사람들을 다루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는 나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더 상냥해졌다. 그것은 내가
우리의 삶에서 얼마나 많은 접촉과 눈짓, 결코 보내거나 받지 않는 편지들이
얼마나 많이 쓰여지는가 하는 것에 대한 은총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어떤 한 순간에 어떤 한 장소에 존재하지 않았다면, 한 손이 꺼려할 때 다른
손이 나에게 다가오지 않았다면, 내가 공포에 빠졌을 때 용기를 가졌거나
혹은 용기를 낼 때 공포를 가졌다면, 내가 "예"라고 말할 때 "아니요"라고
말했다면, 내가 돈을 더 많이 혹은 더 적게 가졌다면, 또는 새벽에서 1,2마일
더 가까이 태어났다면, 내 삶의 역사와 꿈은 그 거리만큼 달라졌을 것이다.
  그런 것들에 나는 고맙게 생각한다. 그 기회를 나는 의무보다는 선물로써
받아들였다. 그러나 또한 어떤 날에는 타락에 빠지거나, 쓸데없는 일을 벌이거나
사랑이 텅비어 있었던 적도 있다. 그럼에도 이 중년은 좋은 시절이다.
나의 젊은 시절보다도 이곳이.
  너는 너 자신의 때에 이 시절을 배우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신선한 열정의 시절이다. 그것을 포옹하거라. 그것을 축복하거라.
그러나 너 자신에게나 다른 사람에게 항상 상냥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거라.
우리는 모두 우연의 산물이고, 어떤 땅이 8월의 태양 아래 갈색으로 놓여있는
동안에 왜 어떤 땅은 꽃들이 만발하는지를 아무도 말할 수 없다.
  주위를
돌아보거라. 너와의 차이를 떠나서 바라보거라. 그들의 꿈이 너의 꿈보다
작은 것은 아니며, 삶에서 그들이 선택한 것이 더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베풀어라. 네가 할 수 있는 한, 네가 가진 것은 무엇이든 베풀어라.
주는 것이 곧 사랑하는 거란다. 주지 않는 것은 시들어 버린다. 다른 사람과
공유하기 보다 네 삶의 수확물을 돌보는 일에 열중하는 것을 그만두고, 너의
삶을 의미있고 마음이 평화롭게 되도록 만들거라.
  밖에서는 지금 산들바람이
일고 있다. 나뭇잎은 춤추고 꽃들은 바람에서 얼굴을 돌린다. 멀리서 한 청년이
고독하게 일어나고 있다. 유령을 부른 듯. 살아있다는 것은 좋은 것이란다,
나의 아들아. 살아 있다는 것은 좋은 것이란다.

출처 : 어둠 속에 갇힌 불꽃
글쓴이 : 정중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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