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s and Writings/문학작품

[스크랩] 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그림자세상 2009. 12. 5. 13:53

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지은이 : 맹란자
        출판사 : 도서출판 세훈
 

  제1장 죽기가 힘들었던 사람들
 


서투르게 죽은 세네카
  영화  쿼바디스 에서 보았듯이 네로 황제는 로마 시가지에 불을 지른 다음, 그
것을 보고 시를 짓고 자신의 눈물을 유리관에 담는 등 온갖 해프닝을 벌인다.
그런 네로에게 용감히 일침을 가하기도 하고 때로는 미숙함을 조소하던 사람이
바로 황제의 사부 세네카였다.
  세네카는 네로가 자기의 어머니 아그릿빠나를 죽인 후 차츰 난행에 빠져들자
그런 네로의 부도덕한 성행을 억제시키는 일에 공헌하였으며 또한 자신의 지위
를 이용하여 막대한 재산을 쌓기도 했다.
  네로의 측근들은 그를 공공연히 비난하고 배척하였다. 이것을 얼른 알아차린
세네카는 은퇴를 결심했다.
  네로에게 전 재산까지도 헌납하려 하였으나 황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네로는 과거의 은사임을 잊지않고 애호와 존경으로써 그를 은퇴시켰다.
  세네카는 이후 간소한 생활을 하였으며 병을 핑계삼아 로마에는 거의 나가지
않고 학문연구에만 전념하였다.
  그의 교육사상은 <도덕 서간집> 124편에 압축되어 있다.
   인생은 악에 가까우므로 교육이 필요하다. 교육은 이성에 의하여 정욕을 극복
하고 지배하며, 도덕생활을 할 수 있는 데서만 가치있는 것이다. 또 교육자는 의
사처럼 좋은 말로 환자의 심정을 치료하고 충고로써 덕을 행하게 해야 하며 부
도덕으로부터 분리시켜야 한다. 훈련에 있어서는 엄격주의를 주장해야 하며 특
히 교사의 방은을 강하게 경계한다. 고 했다.
  즉, 교사의 노동에는 보수를 지불할 수 있으나, 공헌에 대하여는 지불할 수 없
다. 그러므로 교사를 존경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자신이 바로
자신의 문화에서 가르침을 받던 네로에게 사형을 당하게 될 줄이야.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 가 남긴 세네카의 죽음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황제의 명령을 따라 마지막 일을 치르고자 결심한 그는 먼저 팔목 동맥에 단
검을 꽂았다. 숨통이 끊어질 만큼 피가 솟구치지 않자 다리와 무릎을 차례로 찔
렀으나 그것으로도 목숨이 끊어지지 않아 마지막으로 독약을 마셔야 했다. 그러
나 독약도 그의 목숨을 단번에 앗아가지를 못했다. 그래서 결국은 뜨거운 욕탕
에 들어가 수증기에 질식사한 것이다.
  사실 그는 몇 십 년 동안  죽음과 자살 이라는 주제로 숙고하면서 죽음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힌 적도 있었다.
   건강을, 내 최상의 모습을 유지할 수만 있다면, 나는 결코 노령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노령이 내 정신을 혼돈시키고 육체를 조금씩 갉아먹어
 살아 있음 이 아닌  호흡 만을 남겨 놓게 된다면, 나는 미련 없이 떠날 생각이다.
(중략) 고통스럽다는 이유로 내 몸을 스스로 해치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 희망도 없이 고통만 겪어야 한다면 나는 스스로 떠날 생각이다. 그것은 고
통 자체에 대한 두려움이라기보다는, 그 동안 살아온 인생을 더럽힐지도 모른다
는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그는 은최하면서까지 삶을 연장하고 싶어했으나 결국 타의에 의해서 스스로
세상을 떠나야 했다. 즉,  고통스러운 삶에서 미련 없이 떠나는 것 이 아니라 미
련이 남아있는 삶쪽에서 고통스럽게 떠났던 것이다.
  예일대학교 의과대학 교수인 셔윈 비 누랜드는 자신의 저서 <어떻게 죽을 것
인가>에서 세테카의 죽음에 대해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죽음에 대해 철학적 인식과 발표된 그의  글로 미루어 보아 전문가(?)처럼
목숨을 끊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으나 사실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로마의
저명한 철학가였을지는 모르나 그는 인간의 육체에 관한한 무지했다.
  자기가 자기를 죽여야 하는 실천적 결행은 70세에 가까운 노철학자에게 있어
서도 결코 쉬은 문제는 아니었던가 보다.

  무서운 전염병처럼 사라진 네로
  인류역사상 최악의 폭군으로 기록되는 네로는 황제이기보다는 시인이고 싶어
했다. 그는 팔리티네궁에서 자신이 지운 노래를 직접 시연해 보이며 곧잘 도취
에 빠지곤 했는데, 죽음이 임박해 왔을때도 무엇인가 괜찮은 시구를 생각해 내
어 오래오래 후세에까지 남기고 싶어했다. 그가 지은 <키프로스의 사람> <헤쿠
바의 슬픔>은 그런대로 괸찮다는 평판이었다.
  그는 어린아이처럼 소견머리 없고 때론 즉흥적이며 충동적이었다. 기분 나는
대로 정책을 바꾸고, 그 자리에서 신하를 처결하였으며 로마를 불태우고 생모
아그릿빠나를 피살시켰다. 신망 높은 이복형 부리탠니커스를 독살시키고, 심지어
는 자기의 처 옥타비아까지 동맥을 끊게 한 다음 더운 물김으로 질식시켜 죽였
다.
  폭정에 견디다 못한 로마군대가 반기를 들고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이 파죽
지세로 몰려왔다. 갈바를 황제로 추대했다는 급보가 왕궁으로 전해졌다.
  네로는 자기가 죽어야 할 때가 왔다는 것을 알고 자기를 묻을 무덤을 파라고
명령한다. 그는 자기의 몸에 꼭 알맞게 파라고 흙 위에 드러눕기까지 하였다. 곡
괭이질로 흙이 튈 때마다 그는 무서운 공포에 사로잡혔다. 구슬같은 땀을 흘리
며 떨리는 목소리로 비극 배우처럼 음조를 띄우면서  아! 위대한 예술가의 죽음
이란 이런것인가!  하고 부르짓기도 했다. 불태워 달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 때 로마에서 사자가 달려왔다. 원로원이 네로를 살친자로 판정하고 고식에
따라 처벌하기로 했음을 알린다.
   고식이라니 나를 어떻게 한다는 것이냐?
  네로는 새파래진 입술을 벌벌떨면서 물었다.
   당신의 몸을 세가닥으로 된 창에 올려놓고 죽을 때까지 매질을 한다는 것입
니다. 그리고 죽고나면 그 시체를 티베르 강에다 집어넣는 것입니다.
   이젠 나도 죽어야 하나 보다. 아. 아! 위대한 예술가의 죽음이란 이런 것인
가?
  그는 하늘을 쳐다보며 또 한번 되풀이했다. 그때 밖에서 말굽 소리가 났다. 백
인 대장이 네로의 목을 가지러 온 것이었다.
   자 빨리빨리 하시죠.
  옆에 있던 시종이 서둘렀다.
  네로는 단도를 꺼내 떨리는 손으로 자기의 목을 찔렀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손으로 자기의 목을 찌를만한 용기가 없었다.
   폐하. 사시는 동안은 그렇지 못했으나 돌아가실 때만이라고 제왕답게 죽으십
시오.
  영화  쿼바디스 에서는 네로를 도와 단도를 눌러준 사람이 액태였지만 사실은
에파프로디테라는 종이었다. 단도는 깊숙이 그 자루까지 목으로 들어갔다. 앞으
로 튀어나온 네로의 두 눈은 커다랗고 원망과 공포로 가득찬 눈알맹이였다고
<쿼바디스>에 적혀 있다.
  엄지손가락을 위에서 아래로 엎어, 쉽게 살인을 결정하던 그도 자신의 죽음
앞에서는 유약한 비겁자였다.
   다음날 끝까지 남편에게 충실한 액태는 네로의 시체를 값진 보자기에 싸가지
고 향유에 적신 장작으로 화장을 했다. 이리하여 네로는 폭풍처럼, 선풍처럼, 화
재처럼, 전쟁처럼, 그리고 무서운 전염병처럼 사라져 없어졌다.
  센키비쯔가 쓴 소설 <쿼바디스>의 결미이다.

  


혼자만 살아남은 광해군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조선조 제15대 왕으로, 15년 1개월이나 지존의 자
리에 있었다. 그런 그가 왕비와 세자, 세자빈 등 가족이 모두 자결한 뒤에 혼자
만 살아남아서 18년 동안 섬에 갇혀 자연사할 때까지 목숨을 연명했다.
  선조는 임진왜란을 맞아 북쪽으로 파천하는 몸이 되었다. 조정을 나누어 만약
의 비상사태를 대비해야 하므로 임금은 후사를 서둘러 결정하지 않을 수 없었
다. 선조는 40년을 재위에 있으면서 8명의 부인에게 25명의 자녀를 두었다. 아들
은 14명인데 적출이 없어 나이 마흔이 되도록 건저(세자를 세우는 일)을 미루고
있었다. 선조가 총애하던 신성군은 피난 중 병사하고 광해의 동복 형 임해군은
성격이 포악하므로 장자임에도 세자책봉에서 제외되었다. 1594년 광해를 세자로
결정하고 명나라에 세자책봉을 주청했지만 장자 임해군이 있다는 핑계로 거절당
한다. 임해군은  왕위를 도적맞았다 고 떠들면서 돌아다녔다. 이것을 대북파는 묵
과하지 않았다. 그 후 1602년 인목왕후가 선조의 계비가 되어 영창대군을 낳았
다.  영창대군을 잘 부탁한다 는 선조의 명을 받은 유영경 등 몇몇의 소북파 신
하들은 영창군의 지지파가 된다. 바로 이 소북파가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파와
맞서 싸우게 된 것이다.
  1608년 선조가 사경에 이르러 광해군에게 선위교서를 내렸다. 이때 영의정 유
영경은 이를 공포하지 않고 자기 집에 감춰 버렸다. 이 일이 대북파 정인홍, 이
이첨 등에게 발각되었고, 선조가 붕어하자 왕위 계승권은 인목대비에게로 넘어
갔다. 영창은 그때 세살이었다. 유영경은 인목대비에게 영창대군을 즉위시킬 것
과 수렴청정을 권했다. 그러나 인목대비는 언문교지를 내려 광해군을 즉위시켰
다. 우여곡절과 14년의 긴 여정끝에 광해군은 34세의 나이로 드디어 제위에 올
랐다.
  왕으로 등극한 광해군은 임진난으로 파탄지경에 이른 국가재정을 회복하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타버린 궁궐을 중건 개수하며, 선혜청을 설치하고 대동법을 실
시하여 민생을 구제했다. 밖으로는 철저한 실리주의 노선을 걸었고, 안으로는 강
력한 왕권체제하에서 부국강병의 길을 모색했다. 병화로 소실된 서적도 다시 간
행 편찬하였다. 이 무렵 동북아의 국제정세도 급변하고 있었다. 만주에서는 여진
족이 후금을 건국했다. 명나라가 후금과 싸워 패하자 광해는 강홍립을 시켜 적
당히 싸우는 체 하다가 후금에 투항하게 했다. 누루하치와 화의를 맺도록 하고
그곳에 억류된 강홍립으로 하여금 후금의 동정을 낱낱이 조정에 보고토록 했다.
명나라에 대해서는 협력하는 체 하면서 안으로는 후금과의 우의를 다져나갔다.
그리고 임진왜란 후 중단되었던 대일관계를 회복하여 전쟁의 위협으로부터 벗어
나게 하였다. 이러한 치적으로 보아 광해군은 분명 암군은 아니었다.
  광해군은 인목대비를 죽여야 한다는 강한 주장을 물리치고, 자신의 판단으로
인목대비를 살려놓았고 영창대군을 죽이는 것도 실상은 반대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가 재위한 15년 동안, 대북파들은 자신들의 정권유지를 위해 참으로
많은 정적을 제거했다. 결국 이귀, 김자점 등 서인들이 능양군을 앞세워 반정을
일으키니 성공을 거두게 된다. 반정의 명분은 광해군이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저버리고 대명사대를 하지 않았다는 것과 영창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유폐시켜
인륜을 저버렸다는 등의 이유였다. 중종반정을 불러온 연산군이 철저한 폭군이
었던 것에 반해 광해군은 왕권 도전세력에 칼을 썼으나, 백성을 학대한 일은 없
었다. 오히려 민생경제를 일으키는데 전력을 쏟은 임금이었다.
  인조반정이 순수한 구국의지에서였다기 보다는 사대주의자들과 광해군에게 개
인적인 원한이 있던 자들에 의한 발란이라고 보는 견해에 필자도 공감이 간다.
  그러나 붕당에만 치우쳐 명분론만 앞세우던 그들 인조반정 세력은 시대적 대
세의 흐름은 읽지 못하고 있었으니 명은 이미 기울어진 나라였고, 청(후금)은 일
어서는 나라였다. 명나라를 섬기던 인조는 정묘와 병자, 두 번의 호란을 면할 수
없었다. 삼전도에서 인조는 무릎을 꿇고 청나라와 군신의 의를 맺는 한편, 소현
세자와 봉림대군을 볼모로 보내야 하는 쓰라림도 겪는다.
  인조가 등극한 뒤 49세로 폐위된 광해군은 강화도 동문쪽에 부인 유씨와 함께
위리 안치된다. 폐세자와 세자빈은 서문쪽에 안치시켰다. 그 후 두 달쯤 지나 세
자 내외는 자살을 하고 만다. 한창 혈기왕성한 20대의 세자는 담 밑에 구멍을
파고 탈출을 시도하다가 붙잡히고 말았다. 세자빈은 나무에 올라가 세자가 잡히
는 것을 보다가 그만 땅에 떨어졌고, 그 후 3일 동안 식음을 전폐하더니  욕된
삶을 길게 끌고 갈 것이 없느니라 하고 결국은 목매달아 죽었다. 폐세자도 스스
로 목숨을 끊었다.
  그 해 늦가을 폐비 유씨마져 병사하고 만다. 자주 격정에 휩싸이며  미칠 것
같다 고 말하던 폐비. 그는 친정오라버니들(유희분, 유희발)이 참살당한 일과 목
에 밧줄이 걸려있는 아들, 며느리의 환영으로 몹시 괴로워하였다. 홧병을 얻은
폐비는 괴성을 지르며 가시덩굴 속에서 숨져갔다. 48세였다.
  인조반정이 일어난 그 해에 세 식구가 모두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광해는 그
들을 따라가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국내외의 정세에 따라 태안으로 또 강화도,
교동으로 몇 번 이배되었다가 인조 15년 멀리 제주로 옮겨져 거기서 67세가 될
때까지 살았다. 처음 섬에 올 적에 배의 사면을 휘장으로 가리고 목적지를 비밀
로 하였으므로 어딘지 모르다가 땅을 딛고 내리자
   내가 어찌 여기 왔느냐.
  낭패해 하며 크게 울었다고 한다.
  그러나 차차 단념하며 묵묵히 지내게 되었다.
  따라간 계집종이 패악하게 말을 함부로 하고 윽박질러도, 자신을 데리고 다니
는 별장이 윗방을 차지하고 아랫방을 거처하게 하여도 그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잠자코 견디었다.
  채근담에  소 라 하거나  말 이라고 하거나 고개만 끄덕인다(지시점두)는 말이
있다. 뭐라고 하면 어떤가? 이미 그런 심경이 아니었을까? 온몸에 바닷바람을
맞으며 파도 소리에 귀먹은 그의 내면은 이미 풍화될대로 풍화된 상태가 아니었
을까 짐작해 본다.
  그가 지은 시, 한 편이 여기에 있다.
  몰아치는 비바람 속 성머리 지나니 (풍취비우과성두)
  장기 훈음속에 높은 다락이어라. (장기훈음백척누)
  창해의 성낸 파도 어둑어둑해 오는데 (창해노도래박막)
  푸른 산에 근심한 빛 청추에 어렸더라. (벽산수색대청추)
  마음이 가고파 왕손초도 보기 싫어 (귀심염견왕손초)
  나그네 꿈 가끔 제자주에 놀래네. (객몽빈경제자주)
  나라의 존망조차 소식 끊어지고 (고국존망소식단)
  연파낀 강상 외로운 배에 누워 있노라. (연파강상와고주)
  여름이 거의 끝나갈 무렵, 여늬 때와 같이 그는 툇마루에 걸터앉아 바닷소리
를 듣고 있었다. 영욕의 67년을 이끌어온 몸이 그만 눕고 싶어진다. 옆으로 눕자
물살이 떠밀려와 자신을 데려가는 것만 같았다.
   이대로 좋다 고 생각하자 무거워진 눈꺼풀을 다시 뜰 수 없었다. 그날은 화담
선생이 떠나시던 날처럼 견우 직녀성이 만나는 칠석이었다.
  그는 어머니 무덤의 발치 아래 묻어달라고 유언하였다. 그래서 그의 무덤은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공빈 김씨의 묘 아래에 있다. 제법 많은 나이이건만,  어
머니의 아들, 나는 왕이로소이다 의 시 한구절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5원짜리 관에 묻힌 마지막 황제 부의
  중국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부의의 이름을 기억하게 된것은 그의 자서전을 소
재로 한 영화  마지막 황제 푸이  덕분이다. 그래서 귀뚜라미와 놀던 어린아이가
친근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1908년, 큰아버지인 광서제가 죽자 부의는 세 살의 어린나이로 제위에 올랐다.
아버지 순친왕의 섭정을 받으며 3년간을 황제로 있었다. 1911년 신해혁명이 일
어나면서 그 이듬해에 제위헤서 물러나야만 했다.
  부의가 퇴위함으로서 268년에 걸친 만주국의 중국지배와 2000년간에 걸친 황
제 지배체제가 막을 내리게 된 것이다. 그는 인민공화국으로부터 북경에 있는
궁전에서 살도록 허용이 되었으나 1924년, 몰래 빠져나와 천진으로 갔다. 거기서
일본인 조계로 거주지를 옮기고 그들의 비호를 받으며 만주국의 집정관이 되고
28세 되던 1934년에는 만주국의 황제로 추대된다. 그는 일본 천조대신을 신봉하
도록 강요받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나 울분을 삼키며 굴욕적인 황제 자리를 감
수할 수 밖에 없었다.
  일본의 계략임을 처음부터 그는 알지 못했다. 부의는 실권없는 허수아비 왕이
되어 불우한 11년간을 그곳에서 보냈다.
  1945년 일본이 망하자 그는 통화로 도망치는 길에서 제3차  퇴위조서 를 반포
하게 되며 그 후 소련군의 포로가 되어 적탑과 백리라는 곳에 억류되었다. 부의
그는 5년 뒤 중국으로 송환되어 전범재판을 받게 된다. 1950년부터 시작하여 특
사로 풀려 나오기까지 10년간을 그는 중국 포로수용소에 갇혀 지냈다.
  중국의 황제이던 그가 자유의 몸이 된 것은 쉰세 살이 되어서였다. 그것도 평
민으로서였다. 이른바 교육개조를 거쳐 정부의 특사를 받고 중화인민공화국의
공민이 된 것은 1959년 12월 4일이었다. 그립던 북경으로 그가 돌아온 것은 자
금성을 떠난 지 꼭 34년 만의 일이었다.
  북경에 돌아온 부의는 평범한 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다. 자신의 말대로  옴
짝달싹 못하던 왕위  그 어의를 벗어 버리고 평민으로서의 자유를 마음껏 누린
다.
  1962년, 56세 되던 해에 부의는 아내를 새로 맞아들인다. 그리고 식물원의 기
계수리 상점에서 일을 하면서 나머지 후반생을 조용히 마쳤다.
  부의에게는 황후와 비, 그리고 2명의 귀인이 있었는데, 모두 비극적인 관계로
끝났다. 나중에 만난 간호사 이숙현과 비로소 참다운 부부애를 느끼며 범부로서
의 즐거운 나날을 보냈다.
  그는 죽기 직전에 명나라 마지막 황제가 목매어 죽은 현장을 찾아보았는데 그
때 동행한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숭정은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데 숭정은 포위 당해 도망갈 길이 막혔다. 황후
와 후궁들이 잇달아 자결하자 그는 이 나무에 목을 맨 것이다. 자칫 세상이 잘
못 풀렸던들 나도 이 나무에 목을 매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1962년 피섞인 오줌을 누기 시작하던 부위는 그것이 신장암의 징조인지 몰랐
다. 인민병원과 협화병원에 아홉 번이나 입원을 한 적이 있었다. 그 후 병세는
날로 심해져 병원에 다니는 일마저 어렵게 되었다. 시내 버스를 타자니 사람이
많아서 오를 수 없고, 세 바퀴차를 불러타고 싶었으나 홍위병들이  남을 압박한
다 고 할 것 같아 그만 두었으며, 정협의 협조를 받자고 하여도 문을 닫아걸고
업무를 담당한 사람조차 없었다. 그래서 그의 아내는 매일 부의를 부축하여 한
걸음 한 걸음씩 걸어서 병원으로 가야만 했다고 술회했다.
  그는 특히 혼자 있기를 싫어해서 항상 병원침대 머리맡에는 그의 아내가 지키
고 있었는데 세상을 떠날 때도 그의 곁에는  나 혼자밖에 없는 외로운 처지였습
니다. 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죽음의 병상에서 부의는 아내 이숙현의 손을 꼭 쥐고 이렇게 말했다.
   내병은 고칠 수 없소,        나는 한 평생 황제 노릇도 했고, 평민도 되었으며,
늘그막엔 당신 곁에서 인간생활의 단맛을 보았소. 당신과 생활하는 이 몇 해 동
안 나는 진정한 생의 즐거움과 사람을 알게 되었소      .
  당시 수상이던 주은래는 그들의 뒤를 잘 돌보아 주었다. 부의가 위독할 때도
수상이  특별대우 라는 네 글자를 써 주었기에 입원이 되었다. 그래서 마지막 며
칠간을 병원에서 지낼 수 있었다.
  1967년 10월 17일 새벽 2시 30분.  소매여! 숨이 막힐 것 같다 는 말을 남기며
마지막 황제 부의는 숨을 거두었다. 목숨이란 것은  목에 숨이 붙어 있는 것 이
라고 한다.
   나를 외롭게 남겨두고 가는 것이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지 그 분은 한쪽 눈을
뜨고 있었고, 입도 벌리고 있었다.  안심하세요. 내 걱정 말고 고이 잠드세요.  그
의 눈을 감겨주던 지금 이 손에는 그때의 슬품이 흐르고 있는 듯하다 고 이숙현
은 당시를 회고했다. 그의 아내는 5원을 들여 산 값싼 관에 시신을 넣어 지게
송장으로 장례를 지냈다.
  그가 황제 복권으로 청나라 황제들의 능이 있는 하북성, 서릉에 다시 안장된
것은 불과 얼마전의 일이었다.
  부의는 세 살에 황제가 되고, 39세에 포로가 되었다.
  광해군은 49세에 폐위되어 죄인이 되었다.
  부의는 14년간을 제위에 있었고 15년간을 포로로 지냈다.
  광해군은 15년간을 왕위에 있었고 18년간을 죄인으로서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61세와 67세의 나이로 자연사할 때까지 그들의 파란만장한 삶을 생각해 본다.
그러나 본인의 의지와는 전혀 관계없이 진행되던 시대적인 상황, 그래서 때를
만나든지 못 만나든지 하는 우, 불우는 하늘의 탓이라고 했던가.
  역사에는 명에 사로잡혀 자신의 명을 가볍게 버린 사람도 많다. 그러나 기를
쓰고 살고 싶어하는 쪽이 오히려 더욱 인간적이랄수도 있다. 무릇 생명이란 살
려고 하는 의지이며 살고 싶어하는 것이 본능이기 때문이다. 목숨이란 것에 대
하여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한 죽음이었다.

  


소금에 절인 생선과 함께 실린 진시황의 시신
  진지황은 장양왕의 아들로 태어났다.
  조나라에 인질로 있을때 장양왕은 계획적으로 접근한 대상인 여불위에 집에서
그의 나이 어린 첩을 보자 자기에게 달라고 간청한다. 그녀는 이미 여불위의 아
이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가 자초(장양왕)에게로 가서 12개월 만에 아들을 낳으
니 그가 정, 장양왕의 뒤를 이어 13세에 진왕이 된 진시왕이다.
  그의 길게 찢어진 눈, 높은 코, 넓다란 가슴, 거기다 산개의 울음소리보다 더
우렁찬 목소리는 주위를 압도했다고 한다.
  그는 삼황오제의 존칭을 줄여 스스로 시황제라 칭하였으며 성격은 포악하고
사치를 즐겼다. 분서갱유를 일으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는 한종, 후공, 석생을 시켜 불사약을 구해오도록 명령하였다. 방사, 서시 등
이 동해로 나가 신약을 찾았으나 수 년이 지나도 성공하지 못하자 견책을 받을
까 두려워 거짓말을 꾸며대었다.
   봉래섬의 신약은 얻을 수 있으나, 항상 큰 고래같은 물고기가 방해하여 그곳
에 접근할 수가 없었습니다. 활을 잘 쏘는 사람과 같이 가서 그것이 나타나면
활로 쏘게 해주십시요.
  마침 시황은 해신과 싸우는 꿈을 꾸었는데 해신의 형상이 마치 사람과 같았다
고 한다.
  점몽 박사는 이런 해석을 내렸다.
   수신이란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대어나 교룡이 나타나면 그것이 바
로 수신이 나타나는 징후입니다. 이 악신이 나타났다면 당연히 몰아내야 합니다.
그러면 선신이 나타날 것입니다.
  시황은 선약을 구하러 동해로 나가는 사람들에게 대어를 잡는 도구를 휴대하
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자신도 직접 활을 갖고 나가 지부에 이르러 대어를 한
마리 사살하였다. 그 후 해안을 끼고 서쪽을 순행하는 도중 평원진에 이르자 진
시황은 병환이 났다. 갑자기 위중해져서 황제는 아들 부소에게  발상하면 함양에
돌아와 장례에 참여하라 는 친서를 보내도록 하였다.
  무더운 7월 병인일, 그렇게 살고 싶어하던 시황은 불사의 꿈을 끝내 버리지
못한 채, 사구평대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으니 그의 나이는 쉰 살 밖에 되지
않았다.
  승상 이사는 황제가 외지에서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공자의 변란이 일어날까
두려워 이 사실을 숨기고 진시황의 관을 온량고(온도가 조절되는 수레) 안에 안
치하고 밥때가 되면 환관으로 하여금 음식을 갖다 바치게 하며 황제가 사망한
사실을 숨겼다.
  한편 조고는 공자 호해와 승상 이사와 음모하여 공자 부소에게 보내는 친서를
파기하고 승상 이사가 사구에서 시황의 유조를 받은 것으로 꾸며 호해를 태자로
세웠다. 그 후 다시 공자 부소와 몽념의 죄를 꾸짖으며 자살하라는 위조친서를
보낸다. 더위가 한창인지라 온량고 안에서는 사람 썩는 악취가 새어나왔다. 당황
한 그들은 소금에 절인 생선을 같이 싣게 해서 냄새를 위장하였다. 일행이 함양
에 도착하자 비로소 발상을 하고 태자 호혜가 제위에 오른 그로부터 두 달 뒤인
9월에야 시황은 여산에 매장되었다.
  시황은 즉위 초부터 여산을 조영하기 시작하였다. 궁형을 받은 죄인 등 70여
만 명을 투입하여 궁정 백관의 모형과 각종 진귀한 기물로 그 안을 가득 채웠
다. 수은으로 황하, 양자강 등 수많은 강과 대해를 본떠서 만들고 천상과 지상
세계를 갖추어 축소 재현하였다. 진시황릉에 부장된 병마용갱의 병사와 말은 실
물의 크기로 7000여 체가 매장되어 그 규모와 위용은 실로 대단하였다.
  94년 여름, 그것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다행이 필자에게도 주어졌다. 돔형 은회
색 지붕으로 된 제1호 갱 안에 들어서니 발 아래의 호 속에 병사들이 마치 살아
있는 사람처럼 군모와 군장을 갖춘채 도열해 있었다. 한 마디로 충격적이었다.
  진시황의 아들 호해는 후궁들은 순사케 했을 뿐만 아니라 매장에 관여한 장인
들까지도 모두 산 채로 가두어 버렸다. 그리고 무덤 위에 나무를 심어 산처럼
보이도록 위장을 하였다. 그러나 1974년 3월 농업용수를 구하기 위해 우물을 파
던 한 노동자에 의해 2200년간이나 잠들어 있던 진시황의 지하군단이 세상에 밝
혀지게 된 것이다.
  4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인 이 진시황릉과 만리장성, 그것이 중국을 먹여 살리
는 관광수입의 한 몫을 톡톡히 한다지만 무모한 집착과 그 어이없는 큰 규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36년간 유랑하던 파가니니의 시체
  바이올린으로부터 가능한 온갖 비밀을 이끌어 내어  신의 하모니를 연주한다.
는 유례없는 천재 니콜로 파가니니. 그는 1782년 10월 27일 이탈리아의 제노아
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가 죽은 곳은 프랑스 니스였다. 사후에 그의 유체가 안
식을 얻지 못하고 36년간을 떠돌다가 겨우 조국에 돌아와서 파르마 공동묘지에
묻히기까지의 기구한 사연은 소설 한권의 분량이 되고도 남으리라 생전에 그를
따라다니던 고약한 평판. 난봉꾼, 수전노, 도박꾼, 그리고 심지어 살인자라는 소
문까지 나돌았다. 그래서인지 프랑스 니스에서 매장의 허가를 얻어내지 못해 파
가니니의 친구들은 그의 고향 제노아로 옮겨오고자 했으나 이것마저 거절당한
다. 교회의 승인 없이는 왕도 어쩔 수가 없었다.
  제노아 교회는 파가니니가 사악한 생애를 보냈으며 자신이 기독교도라는 것을
망각하고 회개하지 않은 채 죽었으므로 허가할 수 없다고 했다. 프랑스에서는
니스의 주교가  성화된 땅에 그를 묻을 수 없다. 고 선고했다. 파가니니는 부활절
성사와 임종의 고백도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막대한 유산을 교회에 조금도 자선
하지 않았으며 게다가 나쁜 평판까지 무성하여 매장의 허가는 떨어지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그의 아들, 아킬레스가 아버지의 시체를 방부처리하여 두 달 동안
이나 죽음의 침상 위에 그대로 두었다. 그런 다음 그 집의 지하실로 옮겨 1년
이상을 그곳에 두었다. 아들은 주교의 판결을 번복시키려고 교회재판소에 탄원
을 해보았으나 무효, 고향으로 시체를 옮겨가고자 했으나 그 또한 거절당한다.
파가니니의 유해는 갈 곳이 없었다. 로마교황에게 호소하러 간 사이, 프랑시 니
스의 보건당국은 시체를 다른 곳으로 옮기라고 명령한다. 그래서 어느 해안에
있는 음습한  문둥이의 집 으로 우선 그를 옮겨갔다. 그러나 괴기스런 이상한 
소문이 나돌아 이번에도 옮겨야만 했다. 올리브 기름공장의 시멘트 통속에 넣어
뒀다가 한밤중 캡페라는 포구 위에 있는 어떤 개인집의 정원으로 옮겨갔다.
  1844년 4월 죽은 지 거의 4년이 되는 해, 파가니니의 시체는 세 개를 겹친 관
속에 넣어져 고향인 제노아 라마로네의 어느 저택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그러나
교회는 또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로부터 일년 후, 파가니니의 후원자였던
오스트리아의 통치자 마리루이제 대공비로부터의 허락이 떨어지니 파가니니의
유해는 드디어 자신의 별장 정원 속에 묻히게 된다. 집에는 돌아왔으나 그의 유
해는 과연 어떤 상태였을까?
  1876년 드디어 니스 주교의 간악한 판결이 무효화되니 그제야 파가니니의 시
신은 파르마 공동묘지에 와서 제대로 묻히게 되었다.
  죽은 지 꼭 36년 뒤의 일이었다. 파란만장했던 전설적인 생애를 살다간 파가
니니의 모습을 하이네는 이렇게 말했다.
   그의 인상엔 고뇌와 천재와 지옥의 징조가 역력히 나타나 있었다. 일부러 자
신의 태도를 신비적으로 만들어 청중의 흥미를 끌려고 하였는데 실지의 풍채도
그러했다. 장발장신으로 몸이 가늘고 뭔가 이상한 느낌을 갖게 하였다. 그래서
당시의 사람들은 그를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  혹은  바이올린의 귀신 이라 불렀
다.
  그러나 대음악가들의 질병을 연구한 독일의 케르너 박사는 파가니니를 다음과
같이 이해하고 있었다.
   그가 네살도 되기 전에 홍역을 앓았다. 홍역 중 파가니니는  강직경련 의 증상
이 나타나 이틀 동안 송장처럼 빳빳하게 누워 있었는데, 이때 그의 모친은 이미
시체를 쌀 수의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같은 상태에서  홍역 병원체에 의한 만기
성 뇌염 이 유발되었다. 이 사실로부터 거장이 지닌 여러가지 특이성, 즉 그의
비사회적 태도, 자극 과잉, 언어동작의 경직성, 성적 탈선, 비뚤어진 성격, 그리고
그 외 그의 사생활에서 볼 수 있는 여러 이상성 같은 것이 충분히 설명될 수 있
다. 또한 기술이란 말로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어 결국 정신적, 형이상학적인
문제로 돌릴 수 밖에 없는 전무후무의 저 완벽한 예술적 명기도 필경은 이 병에
서 생긴 것이 아닌가 한다.
  누구보다도 그는 많는 병을 몸에 지니고 있었다. 33세에 조로현상을 보였으며
폐결핵, 매독, 류머티즘, 후두염, 신경장애 등에 시달리면서 죽은 순간까지 삶에
집착했다. 그는 결코 죽고 싶어하지 않았다. 프라하에서 연주를 하는 동안에는
매독 3기 증상으로 보이는 하악골 농양으로 인해 아랫니를 몽땅 뽑아야 하는 곤
욕도 치뤄냈다. 그는 만성 인후염으로 인해 만년의 2년 반 동안은 실제로 무성
에 가까운 상태로 지냈다. 임종의 고해를 거부한 것도 실은 말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의사의 처방과 그 많은 약을 매달리는 간절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목은 이제
말을 할 수도 먹을 수도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손은 떨리고 다리는 부어서
걸을 수도 없게 되었다. 마침내 그는 절망해서 소리쳤다.  위대한 신이시여, 내겐
더 이상 힘이 없나이다.  그리고  나의 몸은 문자 그대로 조각조각 분해되어가고
있다. 이제 나에겐 아무런 힘도 남아있지 않다. 고 그는 말하였다.
  계속되는 출혈 속에서 그의 육신은 서서히 꺼져갔던 것이다.
  1840년 5월 27일, 햇빛도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방에서 유일하게 애정을 쏟았
던 아들 아킬레스의 손을 꼭 잡은 채 58세의 나이로 파가니니은 영욕의 생애를
마감하였다.
  그의 이름 파가니니는  작은 이교도 라는 뜻인데 그는 과연 이름 그대로 한 세
상을 이교도로서 살다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후의 신에 대해 일고
를 해보게 되는 사건이었다.

  


제2장 사라진 사람들


  빗속으로 사라진 황제의 유해 - 카이사르
  기원전 44년 카이사르는 파르티아 원정을 공식 발표했다. 그리스를 지나 오리
엔트로 가서 파르티아를 무찌른 뒤 흑해를 빠져나가 도나우강을 제패하면서 그
곳을 방어선으로 확정하려는 의도였다. 이즈음 카이사르가 왕위를 노리고 있다
는 소문이 나돌았다.  시빌라의 신탁  가운데 오직 왕만이 파르티아 원정에 성공
할 수 있다는 예언이 있었는데, 이것이 그 소문의 출처가 된 것이다. 그 해 2월,
로마에서 열린 루페르칼리아 축제의 연회장에서 안토니우스는 왕관을 본뜬 관을
카이사르에게 바쳤다. 물론 카이사르는 거절하였다.
  그로부터 한 달도 되지 않은 3월 15일. 생일을 넉달 앞둔 56세에 그는 원로원
회의장에서 살해되고 만다.
   원정을 승리로 이끌고 개선가를 부르며 귀국한 카이사르가 왕위를 바란다면
그때는 어떤 수단을 써도 그의 야심을 막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를
죽이려면 파르티아 원정을 떠나기 전 마지막 원로회의의 장소가 절호의 기회다.
  암살자들은 회의가 열리기 직전, 어수선한 분위기를 틈타 단검을 들고 카이사
르를 마구 찔러댔다. 카이사르는 스물 세 군데의 상처를 입었는데 그 중에서도
가슴에 받은 두번째 상처가 치명적이었다. 죽음을 깨달은 카이사르는 꼴사납게
넘어지지 않도록 토가자락을 몸에 감으면서 쓰러졌고, 잠시 후에 숨을 거두었다.
하필 정적이었던 폼페이우스 입상 아래서였다. 원로원 의사당은 폼페이우스가
지은 것으로 거기에 그의 입상을 세웠는데 카이사르가 집권후 부하들이 그 입상
을 들어내었던 바 카이사르는 관용을 베풀어 다시 그 자리에 세워 두었다. 폼페
이우스가 내려다보는 듯한 대리석 입상아래에서 카이사르는 피를 흘리며 죽어갔
던 것이다.
  암살자들은 부르터스를 앞세워 밖으로 나왔다.
   자유는 회복되었다. 폭군은 죽었다.
  그러나 의원들은 모두 달아났고, 로마 시민들은 집안으로 숨어 버렸다. 시민의
환호를 받을 줄 알았던 암살자들도 뜻밖의 상황에 겁이 나서 카피폴리노 신전에
숨어 버렸다.
   폼페이우스 회랑  한쪽에 쓰러진 카이사르의 유해는 노예들에 의해 수부라에
있는 사저로 운반되었다.
  카피톨리노 신전 안에서는 카이사르의 시체를 테베레강에 던져야 한다는 의논
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3월 16일, 가게를 여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학교도 휴교상태가 되어 버렸
다. 부르터스가 연설한다는 소문이 나돌자 연설장으로 시민들이 모여들었다.
   우리가 카이사르를 죽인 것은 그를 미워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보다 로마를
더 사랑했기 때문이다. 카이사르를 그대로 두면 카이사르를 제외한 로마인은 모
두 노예가 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로마인의 자유를 빼앗으려 한 카이사르를 쓰
러뜨렸다.
  군중들은 말없이 듣고 있었다. 그러나 뒤이어 킨나가 등장하여 카이사르를 비
난하자 군중들은 연단을 향해 고함을 치며 몰려들었다. 그들은 전날과 마찬가지
로 신전 안으로 도망칠 수 밖에 없었다.
  3월 18일 안토니우스가 혼자서 추도 연설을 하였다. 그리고  로마 시민에게
300세스테르티우스씩을 주고 테베레강 서안의 정원을 기증한다. 는 카이사르의
유언장을 낭독하고 고인의 업적을 찬양한 뒤 추도사를 끝냈다.
  카이사르의 유해를 태우는 불길은 그것은 바라보고 있던 군중들의 가슴에 옮
겨붙어 카이사르를 암살한 자들에 대한 분노와 증오로 변해, 유해를 태우던 불
에 저마다 횃불을 붙여들고 암살자들의 집으로 쳐들어갔다. 유해를 태우는 불길
이 꺼져갈 무렵, 세찬 비가 쏟아졌다. 유해를 태운 재를 줍기도 전에 빗줄기가
그것을 모두 쓸어가 버렸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카이사르는 사람의 손을 거부하
는 양, 그러나 로마땅 어디거나 강줄기에 로마와 함께 그는 존재할 것이었다.
  후계자인 옥타비아누스가 내전을 평정한 뒤 황제묘를 만들었으나 카이사르의
무덤은 그곳에 있을 수 없었다.
  시오노 나나미는  평범한 무덤 따위는 없는 편이 카이사르에게 더 어울리는 
것 같다 고 <로마인 이야기>에서 말하고 있다.
   아비를 죽인 놈(파리키다) 이라고 부르터스는 저주를 받았지만 진짜 암살의
주모자는 부르터스가 아니라 매제인 카시우스였던 것이다.
  로마 원로원과 민회는 카이사르가 죽기 1년전  조국의 아버지 라는 칭호를 그
에게 내렸고  종신 독재관 에 임명하였다. 그리고 개선장군이 개선 당일에만 착
용할 수 있는 자줏빛 망토를 평소에도 입을 수 있는 권리와 월계관도 늘 쓸 수
있는 권리를 그에게 부여하였다. 화폐에다 자신의 옆 얼굴을 새길 수 있는 권리
등 수없이 많은 특권과 영예가 카이사르에게 주어졌다. 한 몸에다 그렇게 무거
운 영예를 받은 것은 그의 나이 55세.
  그러나 불과 1년만에 살해되고 말았다.



  찬란한 햇빛속으로 사라진 겨울 나그네 - 슈베르트
  서른 한 살의 나이로 이 지상에서 겨울 나그네가 된 슈베르트는 임종의 병상
에서 조차  겨울 나그네 의 악보 손질에 매달리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친구 소
버는 이  겨울 나그네  때문에 그의 생명이 단축되었다고 말했지만 사실 그의 무
덤의 문은 이미 열려져 있었던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1년 전, 베토벤의 장례식에 참석하여 묵묵히 관 옆을 따
라 걸었는 데, 장례행렬 속에서 내내 머리가 아팠다고 했다.
   나는 이제는 건강한 몸이 될 수 없을 거다.
  이렇게 말한 그는 자신의 병에 대해 알고 있었다. 슈베르트의 사인에 대해 사
람들은  장티프스에 걸려서 라든가  원인은 독신자의 불양생에 있었다 는 정도
로 덮어두어 필자 역시 이면의 깊은 고통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음악가의 만년과 죽음 이란 이덕희님의 글을 읽다가 깜짝 놀
라지 않을 수 없었다. 19세기의 유럽음악을 낭만주의의 가곡으로 휩쓸었던 슈베
르트. 감미롭고도 정감어린 그 가곡의 작곡자가  매독 이라니 정말 믿기지 않았
다. 겨우 그는 스물다섯 살이었다.
  매독 발병 제2단계의 고통속에서 슈베르트는 이런 시를 썼다.
  나의 생명, 나의 육신, 나의 피.
  그 모두를 레테의 강물 속에 던져넣어
  보다 순결하고 보다 강력한 경지로
  나를 놓아 주소서
  -<나의 기도>중 일부
  고통 속에서 차 오르는 샘물, 죽기 전 마지막 6년 동안, 그는 균열된 영혼의
지각 속에서 보석보다 더 아름다운 곡들을 쏟아내었다.
   교향곡 제9번  연가곡  겨울 나그네  그리고 유명한  현악 5중주 C장조 는 죽음
을 앞둔 2년 동안에 만들어진 것이다. 끔찍한 매독의 최종 단계가 오기 전에 죽
음이 그를 데려간 것 역시, 신의 자비인양 여겨진다고 그를 아끼는 사람들은 말
했다.
  1828년 10월의 마지막 날, 식당에서 식사를 하던 도중 그는 갑자기 손에 들고
있던 나이프와 포크를 떨어뜨렸다. 생선요리에 중독이 되었던 모양으로 병세는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악성 티프스였다. 11월 18일, 고열로 정신을 잃은 그는 때
때로 침대에서 나오려고 몸부림을 쳤다. 숨이 끊어진 것은 그 이튿날 오후 3시
경,
  11월 21일, 그의 친구들은 그가 작곡한 노래  평화여 그대와 함께 있으라 를
눈물을 흘리면서 불렀다. 성 요제프 교회에서 장례식이 끝나자 그의 유해는 그
가 그렇게도 경배하여 마지 않던 베토벤의 무덤 가까이에 묻혔다.
  그 묘비에  그릴파처 는 이렇게 적어 넣었다.
  음악은 이곳에 소중한 보물을 묻었다.
  그보다 더 아름다운 희망도 꿈과 함께     
  라스트는 그를  가장 시적인 작곡가 라고 평하였다.
  뫼리케는  눈물을 통헤 찬란한 햇빛을 보는 사람 이라고 하였다.
   웬 아이가 보았네 들어 핀 장미화.
   들장미 와 함께 슈베르트는 우리의 가슴속에 영원한 소년으로 남아 있을 것이
다.



  무덤도 모르는 지상의 손님 - 모차르트
  그는 갈 길이 바쁜 줄 알고 그렇게 서둘렀던 것일까?
  다섯 살 때 곡을 쓰고, 여섯 살 때부터 유럽 등지로 여행을 다니며 각종 음악
을 섭렵하더니       파리에서 크리스천 바흐를 만난 것이 여덟 살 때의 일이다.
  로마에 도착해서는  미제레제 를 듣기 위해 시스티나 성당으로 들어갔다. 이
아름다운 합창곡을 듣고 집에 돌아와 오선지에 옮겨놓았는데 조금도 오차가 없
었다고 한다. 모차르트를 신동으로 부상케 한 사건이다. 그는 바티칸 미술관도
구경하였다. 유독 라파엘로의 그림 앞에서 발길이 멎었다.
   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신들의 노래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아요. 이렇게 훌륭
한 그림을 본 적이 없어요.
  그의 말에 안내를 해주던 알바니경은  너는 음악세계에서의 라파엘로이다 라
고 하였다.
  또한 아인슈타인은
   다른 사람들은 라파엘로의 작품에 의해 천상에 도달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차르트는 바로 천상으로부터 온 것이다. 라고 말했다.
  이처럼 신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할 만한 이 두 천재는 우연한 일이겠지만 지
상에서 35년간을 머물다가 약속이나 한 듯 서른 다섯 살에 죽었다.
  모차르트의 곡을 지휘하며  아름답게, 눈물이 날만큼 아름답게 라고 강조하여
말한 사람은 부르노발터였다. 모차르트는 물질의 고통이 가장 혹심했던 때인
1788년에 가장 아름답고 위대한 세 개의 교향곡을 내놓았다. 그것도 불과 두 달
만이라고 하는데 Eb장조와 G장조, 그리고  쥬피터 라고 불리우는 C장조가 그것
이다.
  20여 년 전 어느 날 영화  엘비라 마디간 을 보고 나올 때였다. 나는 씁쓸한
느낌에 젖어 쏟아지는 햇빛 속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놓고 있었다. 그 아름
다운 음악이 귀에서 떠나지 았았다. 트럼프에서  죽음 의 카드를 뽑아든 막다른
골목에 선 두 남녀, 그런데도 피크닉처럼 보이기만 하던 동반 자살의 장면, 아무
렇지도 않게 쏙다지는 일상의 햇빛처럼, 그 자살의 장면 위에 피아노 협주곡 제
21번의 둘째 악장이 능청스레 화면 가득히 흐르고 있었다.
   눈물을 통해 찬란한 햇빛을 보는 사람 이라고 슈베르트에게 말한 뫼리케의
찬사를 나는 그대로 모차르트에게도 바치고 싶었다. 그 아름다운 선율은 그들의
절망과도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냈다. 일생이 불운하기만 했던 모차르트, 그 특유
의 신랄한 풍자와 독설 속에 감추어둔 어쩌면 그 고통까지도 보는 듯했다. 볼프
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그는 웃기만 좋아한 어린애가 결코 아니었다.
  그는 병상에 계신 아버지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죽음이란 우리가 아주 가깝게 생각한다면 우리 존재의 참다운 목표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저는 최근 몇 해 동안 인류의 가장 좋은 그리고 가장 진실한 이
죽음과 대단히 가까운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죽음이 참다운 행복으
로 통하는 문의 열쇠라는 것을 터득할 기회를 갖게 해 주신 하나님의 자비에 감
사합니다. 밤마다 저는 이렇게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언젠가는 제가 살아있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하며 자리에 들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제가 슬퍼
보였다고 말하지는 않을 겁니다.
  죽기 바로 2년 전, 과중한 그의 정신 소모는 비정상적인 행동으로 발전, 악화
되어 사람들이 거의 참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운명하기 몇 달 전, 그는 무질서한 생활속에 빠져 알 수 없는 어떤 실체와 뒹
굴고 있었다. 충족될 수 없는 영원한 공허감이라고나 할까? 그는 사창가에서 파
멸의 쾌락을 탐하고 있었다. 눈은 갈수록 튀어나오고, 마마자국이 있는 얼굴은
노랗게 부풀어 보였으며, 볼품없는 작은 키에 몸은 점점 비대해져 갔다.
  죽기 몇 달 전, 그는 몇 푼의 돈 때문에 신원이 알 수 없는 어떤 남자의 제안
을 받아들여 진혼곡을 쓰고 있었다. 이때는 이미 요독증이 뇌를 침범한 뒤였다.
그는 신경쇠약과 환각증세 때문인지 작곡을 의뢰한 손님을 저승사자처럼 느꼈다
고 한다. 죽음과 싸우듯 그는 하루에 14시간씩  진혼곡 에 매달려 있었다.
  얼굴은 투명할 정도로 창백했고 손발은 심하게 부어 있었다. 휴식을 취하라고
말하는 친구들에게  시간이 없다 고 서둘렀지만 그는  진혼곡 을 완성하지도 못한
채 1791년 12월 5일 새벽, 숨을 거두고 만다. 그가 세상을 떠나던 날은 아침부터
밤까지 심한 눈보라가 휘몰아쳤다. 장례식에 참석했던 몇몇 사람들은 하는 수
없이 옛 성문이 있는 데서 되돌아가 버렸고, 관은 그 다음날이 되어서야 겨우
공동묘지에 매장되었다. 그런데 그날도 날씨가 얼마나 춥던지 무덤을 파고 관을
묻은 인부들은 묘표 세우는 일을 그만 소홀히 해버렸다. 누구 하나 나무로 만든
십자가조차 관심을 두고 세우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모차르트의 무덤은
알 수가 없다고 전한다.
  아인슈타인의 말대로 무덤도 없는 그는 이 지상에서 단지 손님에 불과했던 것
일까?
  나는 그의  피아노 협주곡 제21번 의 선율을 듣게 될 때마다 영화  엘비라 마
디간 의 절망과 아마데우스의 천진한 웃음이 절묘하게, 그리고 가슴 아프게 겹쳐
오는 것을 어쩌지 못한다.
  모차르트와 슈베르트는 오스트리아가 낳은 위대한 음악가로 둘은 다 같이 단
명하였고 불운하였다. 음악적 재능이 부모에게 일찍 발견되어 부친으로부터 조
기교육의 혜택을 받은 것까지 똑같다. 둘은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여읜다. 그리
고 죽기 두 해 전, 극심한 고통 속에서 두 사람 모두 불후의 걸작품을 쏟아내었
다.
  모차르트가 세 개의 교향곡을 내어놓을 때, 슈베르트는  교향곡 제9번 과  현악
5중주 를 내놓았다.
  죽음의 병상에서  겨울 나그네 의 작곡에 매달리던 슈베르트는 과연 겨울 나그
네가 되어 버렸고,  진혼곡 에 몰두했던 모차르트는 그 자신의 진혼곡을 쓰고 있
었던 셈이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항시 있는 것이지만 이토록 아쉬운 것은 그
들의 천재성과 아름다운 음악때문일 것이다.



  성군일 수 밖에 없었던 임금 - 세종
  중국의 강희황제, 러시아의 피터대제를 프랑스의 루이 14세와 함께  대제  혹
은  성군 으로 꼽고 있으나 어찌 우리나라 세종대왕에 비할 수 있으랴.
  세종은 1397년 5월 15일, 태종의 세 번째 왕자로 출생하였다. 충녕대군에 봉해
진 그가 폐위된 양녕대군의 세자 자리를 이어 왕위에 오른 것은 22살, 그리고
32년간을 재위에 있으면서 여러 방면으로 이룩해낸 그의 업적은 실로 뛰어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세종은 보국안민에 최선을 다하였다.
  할아버지 태조가 터를 닦고, 아버지 태종이 기둥을 세우고 대들보를 올렸다면
자신이 해야할 일은 지붕을 덮어 집을 완성하는 일임을 그는 알았다. 더구나 자
신의 왕권강화를 위해 치러진 많은 희생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하루라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아버지(태종)은 양녕대군과 가까운 외삼촌들을 사전에 모두 제거해 버렸다. 이
때문에 어머니 원경왕후는 아버지와 원수같이 지냈다.
  태종은 외척견제를 위해 또 한번의 옥사를 벌여 세종의 장인이던 심온마저 역
모죄로 몰아 죽였다. 이 때문에 세종은 아내 심씨, 소헌왕후에 대하여도 늘 죄책
감을 가지고 살아야 했다. 세종은 이러한 아버지의 엄호를 받으면서, 가족들의
피눈물을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해서도 반드시 훌륭한 임금이 되어야 한다고 다짐
했다. 이런 부담과 여러가지의 콤플렉스가 그의 마음 밑바닥에 자리가고 있었다.
  세종은 어릴때부터 학문을 좋아했을 뿐만 아니라 어질고 총명하여 국내의 정
치는 물론 외교, 문화, 국방 등 여러방면으로 노력하여 조선왕조의 기틀을 확고
히 다져갔다. 즉위 초 정음청을 설치하여 마침내 훈민정음(한글) 28자를 창제하
고, 1445년 이를 전국에 반포하였으며 젊고 유망한 학자들로 하여금 집현전에서
학문을 연구하게 하고 활자를 개량하여 많은 책을 펴냈는데 이 방대한 문화사업
이 문화발전의 원동력이 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왕은 친히 <월인천강지곡>을
짓고 <용비어천가><농사직설><고려사><삼강행실도><석보상절> 등의 책을 
펴냈으며, 불서 번역도 활발히 하였다. 천문학의 연구를 위해서 서운관을 설치하
고 혼천의, 해시계, 물시계, 측우기 등을 만들었으며, 박연을 시켜 아악을 정리케
하고 군사에 있어서도 김종서를 시켜 6진을 개척케 하였으며 압록강 방면으로 4
군을 설치하여 국토의 확장을 꾀하였다.
  어느 것 한가지에도 소홀함이 없는 정말 대내외의 눈부신 치적을 쌓았던 것이
다.
  그는 몸을 돌보지 않고 정사에 워낙 무리하였기에 몸에 병이 많았다. 30대 중
반에 풍병을 앓으면서 <삼강행실도>와 <팔도지리지>를 만들었고, 40대 초반에
당뇨병을 앓으면서 해시계와 자격루를 제작했다. 훈민정음은 안질이 심하여 반
실명한 상태에서 창제되었다.
  그 밖에도 수전증, 허손병에 대한 언급과 한쪽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는 내
용이 <실록>에 나와 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세자에게 섭정을 시켰다. 당시 세종의 나이는 마흔 일곱,
한창 나이인데 몸에는 여러 가지의 병의 뿌리가 깊었다. 54세로 생을 마감하기
까지 그는 여섯 부인에게서 18명의 왕자와 4명의 딸을 두었는데 자손때문에도
고초가 많았다.
  열세 살 난 맏딸, 정소공주를 잃고 세종이 친히 지었다는 제문을 보면 가슴이
저리다. 그는 48세 되던 해, 두 아들을 또 잃고, 이듬해에 소헌왕후마저 잃었다.
더욱이 세자빈 즉 며느리들이 일으킨 문제는 왕실을 어둡게 했다. 첫 번째 세자
빈은 휘빈 김씨였는데 세자가 방에 들지 않자 신발을 태우는  압승술  등의 민간
비방책을 쓰다가 발각되어 폐빈이 되었고, 두 번째 세자빈은 계집종과 동성연애
를 벌여 폐빈이 된다. 세 번째 세자빈은 성품이 온화한 후궁 권씨였는데 후일
원손 아기씨 단종을 낳고 이틀만에 죽는다.
  세자(문종)는 부왕 세종을 닮은 데가 많았다. 어려서부터 호학했으며 단정했고
아버지처럼 등창까지 심하게 앓고 있었다.  등에 난 종기의 길이가 약 한 자. 엄
지 손가락만한 뿌리가 여섯 개나 나와 있었다. 고 기록되어 있다. 몸이 약한 세
자를 보면서 세종은 늘 후사가 걱정되었다. 둘째인 수양대군은 할아버지(태종)을
닮아 기세가 등등한데 원손은 아직 9살 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종은 원
손을 무릎에 안고, 신하들에게 뒷일을 부탁해 두었다. 이것이 후일 단종 애사와
사육신의 참사로 이어진다.
  그 무렵 세종은 눈이 깔깔하여 더 이상 독서도 할 수 없었다. 시난고난하던
몸이 아주 병석에 눕게 되더니 추위가 채 가시지 않은 2월, 막내아들인 영응대
군의 집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1450년, 세수는 54세였다.
  오직 그에게 소임만이 있을 뿐이었다. 마음속 깊게 드리워진 그늘, 신병 그리
고 복잡한 가정사 등으로 세종은 결코 행복하지 못한 임금이었다고 할 수 있다.
뛰어난 업적에도 불구하고, 성군이라는 찬탄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 뿐인 그의
인생은 오직 성실과 근면, 그리고 피로함 뿐이었다고 하면 과장일까?


 차라리 남자이기를 포기한 간디
  간디의 이름앞에는 언제나 마하트마<위대한영혼>란 수식어가 붙는다. 하얀
법복을 입고 맨발로 순례자와 같은 행렬을 이끌고 그는 인도 동해안의 단찌히로
가고 있었다. 제자들을 이끌고 소금을 만들러 가는 도중이었다. 1930년 3월 12일
영국 정부가 소금에 고액의 세금을 붙여 인도사람의 제염을 금지케 했으므로 이
에 저항하는 사챠그라하 운동을 벌인 것이다. 즉 무저항, 불복종이야말로 인도인
의 유일한 무기였던 것이다. 이 일로 간디는 푸나의 형무소에 투옥된다. 영국에
대한 항쟁으로 탄압과 투옥이 반복되는 생애였다.
  영국에서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여 돌아온 것은 스물한살때였는데 그때부터 그
는 인도인의 자유를 위해 수없는 단식에 들어갔다.
  민중과 고락을 같이한 그의 사생활은 간소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조그만 집
에서 살며 언제나 엷은 베옷으로 항상 반나체였다. 고기는 멀리했고 마시는 것
은 물뿐이었다. 그는 79세의 노인으로 힌구교도와 회교도의 알력때문에 21일 간
의 단식에 또 들어갔다. 14번째의 단식으로 이것은 이 두 교도들의 화해를 위한
기도였다. 죽을 때까지 단식을 결심하며 그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지역 사람들의 마음이 화합할때 나는 단식을 끝낼 것이다.
  단식한지 3일째 되던 날, 인도정부는 간디의 요구대로 파키스탄에 상당한 액
수의 돈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많은 인도사람들은 이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간디가 인도와 싸우고 있는 이슬람교도를 돕기 위해서 단식한다고 생
각했다. 그래서 힌두교도와 시크교도들은 간디 집 앞에서 이렇게 외치며 시위했
다.
   피에는 피.
   간디를 죽게 내버려 두자.
  간디는 델리에 있는 모든 종교지도자들이 그들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평화를
회복하겠다는 약속을 받고나서 6일째 되던 날 단식을 그만 두었다. 간디는 자신
만을 위해서는 짧은 시간도 쓰지 않았다. 단식이 끝나고 건강이 회복되기도 전
그는 또 일을 시작했다. 국민들에게 힘을 불어 넣고 고향에 가서 살게 하는 일
에 온 힘을 쏟았다. 간디가 단식을 끝낸 지 얼마 안되어 기도회를 하는 곳에 폭
탄이 떨어졌다. 다행히 아무도 다치지는 않았다. 간디의 집안 일을 보던 파텔은
간디의 몸을 보호하기 위하여 기도 모임에 참석하는 사람을 모두 검사해야 한다
고 말했다. 그러나 간디는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거절했다.
   내가 죽어야 한다면 기도회에서 죽고 싶다. 네가 나를 죽음에서 구할 수 있다
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오직 신만이 나를 지킬 수 있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삶의 끝은 죽음이다. 병이 나서 죽는 것 보다는 형제들의 손에 죽는 것이 더
낫다. 내가 다른 사람에 대한 미움과 노여움을 버릴 수 있다면 다른 사람도 나
에 대한 미움과 노여움을 버릴 것이다.
  이렇게 말하던 간디는 40년 뒤에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죽음에 대한 간디의 생각은 힌두교의 교리를 따른 것이다. 인간은 신을 만날
수 없으면 그저 사라지는 것이라 믿었다. 죽음이란 강과 개울이 만나서 바다로
흐르는 것처럼 당연한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1월 30일, 간디는 새벽 3시에 일어났다. 그리고 하루 종일 일하고 기도했다.
저녁 5시에 열리는 기도회에 늦었기 때문에, 간디는 파텔과 함께 서둘러 집을
나왔다.
  영국인 기자 로버트스팀슨의 육성을 들어보자.
   간디는 보통 때처럼 허리에 흰 천을 두르고 샌들을 신었으며 조금 추운 날씨
라서 어깨에 옷을 걸치고 있었다. 그는 친구들의 어깨에 팔을 가볍게 올려놓고
웃고 있었다.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에 가기 위해서 계단을 올라가고 있을 때, 이
300명의 사람들이 간디에게로 몰려오고 있었다. 간디는 마지막 계단을 오른 뒤
에 사람들을 향해 손을 가볍게 흔들어 인사했다. 언제나처럼 간디는 웃고 있었
다. 그때 카키색 군복을 입은 30대의 땅딸막한 남자가 사람들의 첫 줄에 서 있
었는데 그가 간디에게 다가서서는 총을 꺼내 몇 발을 쐈다. 간디는  오 신이시
여! 하고 중얼거렸다. 몇 초가 지났다. 그는 쓰러졌고, 그리고 죽었다. 피가 그의
흰옷을 온통 물들였다.
  범인은 힌두교인이었다. 힌두교 광신자 나투람고두제가 간디를 쏘았던 것이다.
그는 공범자와 함께 처형되었고, 살인을 도와준 5명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간디의 장례식은 백만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신성한 줌나강 둑에서 행해졌다.
간디의 아들 람다스가 장작에 불을 붙였고, 그 장작은 14시간 동안 탔다. 간디의
남은 뼈는 봄베이 앞바다와 인도의 신성한 갠지스강에 뿌려졌다. 인도인들은 이
뼈를 띄운 성수를 앞다투어 마셨다.
  네루 수상은 라디오로 간디의 죽음을 인도 국민에게 알리며 다음과 같이 말했
다.
   빛은 사라졌고 어디에나 어둠만이 남았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무엇을 어떻
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지도자이며 아버지인 간디가 죽
었습니다.
  전 국민이 간디의 죽음을 애도했으나, 그 부인의 거룩한 욕구봉헌의 기도는
알지 못했으리라. 미국의 라이프잡지 기자가  간디는 정말 위대하십니다. 재산을
다 바쳐 인도 국민을 먹여 살리고, 위로하고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하고 찬탄 어
린 인사를 건넸을 때, 그의 부인은 머리를 가로 저으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 남편의 위대함은 재산을 바쳐 가난한 동족을 먹인 일에 있는 것이 아닙
니다. 하늘이 우리 부부에게 내려 주신 성생활의 쾌락을 그분은 조국과 민족을
위해 기도로 바치고자 나에게 금욕을 말씀하신 후, 오늘까지 한 번도 어기지 않
고 그것을 지켜오신 일입니다. 그것이 남자 간디의 위대함이었습니다.
  부인의 나직한 이 말을 들으면서 나도 모르게 무언가가 내 목안에 뜨겁게 넘
어갔다. 간디는 말할 것도 없지만 이 거룩한 욕구봉헌의 약속을 함께 지킨 간디
부인에게도 머리가 숙여졌다. 간디가 죽었을 때 그가 남긴 것은 샌들, 지팡이,
안경, 니켈로 도금한 시계, 중국산 물병이 전부였다고 한다. 영혼이 가난하기 때
문에 소유라도 많아야 직성이 풀리는 것인지, 물질에 더욱 집착하는 부끄러운
우리네의 삶을 조용히 돌아다보게 한다.



  얄타의 세 주역 - 루즈벨트/처칠/스탈린
 


알바레스병과 루즈벨트
  1945년 4월 세계 제2차대전이 거의 승리로 끝나갈 무렵, 루즈벨트의 죽음이
공식 발표되었다. 사인은 심장마비였다.
  그는 러시아의 얄타회담에서 돌아온 지 60여 일도 채 되지 않아서 죽었다. 루
즈벨트의 알바레스병은 거의 말기증상에 이르고 있었다.
  주치의 머킨타이어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이토록 심한 환자로 하여금 얄타에의 무서운 여행을 계획하게 했다는 것은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1945년 2월 11일 일요일 12시 50분.
  처칠, 루즈벨트와 스탈린. 세 사람은 최종회의를 마무리하고 나서 점심 식탁에
둘러앉았다. 식사 후 각자 준비해 온 선물을 교환하고 난 뒤, 소련군의 영웅들에
게 미군 훈장이 몇 개 증정되었다.
  이로써 얄타회담은 끝나고 스탈린은 철도편으로 크리미아를 향해 떠났다. 처
칠은 8일 동안의 회의기간 중 루즈벨트를 지켜보면서 실망스러웠다. 루즈벨트는
자신이 스탈린에게 주거나 맡긴 것들이 얼마나 중대한 것인가를 알지 못하는 것
같다고 처칠은 말했다. 루즈벨트가 백악관의 주인으로 들어앉은 것은 1933년 3
월 4일이다. 수백만의 실업자들로 미국은 최대의 경제위기에 직면해 있을 때였
다.
   우리들은 두려워 하지 않으면 안될 유일한 것은 두려워한다는 그 자체이다.
라고 그는 역설하며 특별회의 소집하였고 뉴딜의 입법을 서둘렀다. 루즈벨트는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기습을 계기로 세계대전에 참전한다. 이 대전을 수
행해 달라고 미국 국민들은 그를 네 번이나 연이어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그는
39세에 바이러스가 척추를 침범해와 평생을 소아마비로 지내게 되었는데, 휠체
어를 타고 세계를 다니며 12년이 넘도록 백악관의 생활을 수행해 왔던 것이다.
   얄타회담이 열리기 훨씬 전부터 이미 그의 필적은 엉망이었다. 이 중대한 회
담이 시작되기 전에 대통령은 은퇴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처칠과 스탈린
은 루즈벨트의 병으로 인한 허점을 이용했던 것이 아닐까?
  에리아스바그 박사는  신경질환 지에서 말하고 있다. 그에게 찾아온 알바레스
병이란 혈과 발작인데 뇌의 소동맥류가 터지면 그곳에 괴사가 일어나고 운동기
능이 마비되며 무감각과 언어장애, 심한 피로감, 글씨조차 알아보기 힘들게 된
다. 성미는 까다로워지고 현기증과 착오, 정신이 몽롱해지는 특징들을 수반한다
는 것이다.
  머나먼 러시아 땅 얄타로부터 돌아온 루즈벨트는 미국 동해안의 조지아주 윔
스프링에서 정양을 하고 있었다.
  4월 12일 그가 입에 물고 있던 담배가 땅바닥에 떨어졌다. 사촌 누이 삭크레
가 급히 달려갔다. 그는 괴로운 듯  머리가 몹시 아프다 고 말했다. 그것이 그의
최후였다. 나이는 63세, 정확한 사인은 고혈압의 발작에 의한 뇌의 대출혈이라고
공식 발표되었다.



  처칠
  우연의 일치인지 1945년 얄타회담에 참가했던 세 거두는 모두 알바레스병으로
죽었다.
  윈스턴 처칠은 얄타회담이 있기 4년 전 몬테카를로에서 휴가를 즐기며 바다그
림을 그리고 있었다. 거기서 최초의 뇌졸중 겪었다. 혈전이 혈관을 막았으나 처
치가 빨라 최소한으로 피해를 막을 수 있었다. 1941년 심장발작, 그리고 고혈압,
동맥경화인 것이 분명해졌다. 그 후 두 번째의 뇌졸중은 1952년에 일어났다. 처
칠은 업무를 포기하고 6월 26일 자취를 감췄다. 머리는 멍해지고 혀는 꼬부라져
발음이 분명치 못했으며, 그는 날짜며 세기를 혼동했다. 기억력도 감퇴되어 그의
주치의 모런 경은 사직을 권고했다. 1945년 4월  뉴욕타임즈 는 하원에 모습을
나타낸 처칠을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윈스턴 경은 몹시도 지쳐 버린 듯 자신이 없는 것 같은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것은 이미 1940년의 위대한 형해일 뿐이었다. 답변을 할 때 윈스턴 경은 앞뒤
가 뒤틀린 말을 하고 있었다.
  1955년 4월 6일, 80세가 넘은 윈스턴 처칠은 수상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1956년 10월 발작을 일으켜 언어기능과 기억을 상실했으나 곧 회복했다. 그러나
59년 10월 다섯 번째로 일어난 발작은 아주 가혹했다. 그로부터 6년 동안 처칠
은 서서히 시들어 갔다. 사람들의 관심과 시야에서 자연히 멀어지게 되었다. 불
가지론자였던 윈스턴 처칠은 내세를 절대로 믿지 않았다.
  그는 다만 사후의 세계를 일종의 어둠 같은 것, 차갑고 미끄러운 무한한 어둠
같은 것으로 상상하고 있었다. 그것을 직접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그는 영면에
들고 말았다. 때는 1965년, 91세였다.


 스탈린
  스탈린이 뇌졸중으로 쓰러진 것은 1953년 2월 28일 밤, 그는 거의 절망적이었
다. 뇌 좌반구의 동맥이 끊어져서 왼쪽 전체에 출혈된 피가 넘쳐 있었다. 오른쪽
반신이 완전 마비되고 언어기능은 상실되었다. 곁에서 스베트라나가 아버지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그가 눈썹만 한번 움직여도 온 나라를 떨게 했던 그의 얼
굴이 굳어진 것은 1953년 3월 5일 21시 50분이었다.
   누군가가 아버지를 죽였다. 아버지는 누군가에 의해 살해됐다. 고 술에 취한
아들 바실리가 옆방에서 떠들어대고 있었다.
   무쇠와 같은 사내 라는 뜻의  스탈린 은 1929년 수령의 지위에 올라 74세의 나
이로 죽음을 맞을 때가지 24년 동안 스탈린주의라는 이름 아래  끊임없는 피의
숙청 과 공포정치를 감행해왔다.
  그는 자기의 권력의지 이외에는 아무것도 믿지 않았다. 충복도 이용한 다음
곧바로 제거해야 마음이 놓았으며, 심지어 죽음의 사자가 곁에 다가온 마지막
순간에도 사후 자기의 이미지에 흠집을 낼 우려가 있는 인물들은 가차없이 제거
했다. 통치기간 동안 그는 2천 2백만 명을 학살한 것으로 나타났다.
  막상 뇌졸중으로 쓰러져 그가 차가운 방바닥에서 뒹굴고 있을 때, 측근들이
보인 것은 거짓 눈물과 보이지 않는 권력쟁탈전 뿐이었다고 전한다. 권력 무상
이 아닐 수 없다.

  


케네디의 숨겨진 목발
  존 F 케네디는 미국 제35대 최연소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재위 34개월 만에 죽
었다. 달라스 시에서 오스왈드에 의한 암살이었다.
  아이젠하워 스타일의 무감각 속에 위축되어 있던 미국 국민들은 젊고 미남인
청년이 내세운  뉴프런티어  슬로건이 마음에 들었다.  이 나라를 다시 한 번 활
기와 움직임에 넘친 국가로 만들어야 한다. 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1961년 1
월 21일. 마흔세 살의 젊은 대통령 케네디의 취임연설이 있었다.  건강에 빛나는
스포츠맨 이라는 케네디의 이미지는 그러나 속임수였던 것이다. 측근의 한 사람
인 케니 오돈넬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케네디는 자동차 앞쪽에 항상 목발을 숨겨두고 있었습니다. 청중이 기다리는
장소로 갈때엔 절대로 그 목발을 사용하지 않는 거예요. 그는 단상에 우뚝 서서
밝은 미소를 짓고 있었지요, 그러나 연설이 끝나면 너무나 고통스러워 두 손을
틀어 쥐고 눈을 감곤 했습니다. 그리고 곧 침실어 들어가서 자기 전, 한 시간 동
안 뜨거운 욕탕에 몸을 담그고 고통을 달래곤 하였지요.
  그의 어머니 로즈가 쓴 가족의 보건기록을 보면 그의 병력은 이러하다.  3살
전에는 백일해, 홍역, 수두, 성홍열, 청소년기에는 충수염, 임파절염, 재발성 황달,
만성천식        그러나 문제는 19살 때의 사고였다.
  하버드 대학에서 그는 미식축구팀 선수였는데 시합 중에 넘어지면서 운 나쁘
게 척추의 추간판이 하나 골절되고 말았다. 그것이 그를 평생 괴롭혔다. 게다가
1943년 해군으로 참전하여 태평양으로 나갔는데 솔로몬 군도 앞바다에서 어뢰
공격을 받아 침몰하게 된다. 이때 등의 장해가 더욱 심해져서 7개월 동안의 치
료를 받고 귀국했는데 목발에 의지한 그의 혈액 속에는 말라리아 균이 헤엄치고
있었다. 재클린과 결혼하여서도 줄곧 고통에 시다리며 누워지냈고 두 차례의 수
술 후 간신히 회복되긴 하였다. 그는 또 아디슨병 혹은 브론즈병이라고 하는 호
르몬이 분비되지 않는 병에 걸려 있었다. 혈압을 조정하고 심장의 작용을 자극
하며 혈관을 수축시키고 모든 영양소의 대사를 관장하며, 감염, 외상 등 스트레
스에 대한 저항력을 길러내는 이 호르몬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날마
다 아침과 점심때 코티죤 환약을 복용야 했다. 낮에도 자동차를 세우고 어딘가
의 호텔로 급히 들어가야 했다. 코르셋을 벗고 천천히 욕탕에 잠겨서 쉬지 않고
서는 견딜 수 없었다. 전문가들은 만성이 된 아디슨병은 어김없이 정신장애를
일으킨다고 말했다.
  그는 대통령 재직시에 대외적으론 미국 위신의 회복과 국내적으로는 뉴프런티
어 정책을 내세워 신망이 높였으며, 62년의 쿠바 위기에서는 강한 태도속에서
유연성을 보여 이를 해결하기도 하였다.
  그의 정치적 관심과 중점은 외교문제와 노동문제였다. 그는 미국의 입법에 있
어 중추적 역할을 해왔고 또 가장 많은 영향력을 가져온 사람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케네디는 재임기간 중 두 가지의 정책 과오를 지적 받았다. 그 중 하나
는 핏그스만 안에 쿠바 망명자들을 상륙시켜버린 일과 두 번째로는 베트남 전쟁
때의 확대 가담이다. 그는 승전의 가망없음을 알고도 미군의 퇴각이라는 사태에
부딪치자 전쟁 확대의 결정을 내려 버린 일이다. 이때 그는 가엽게도 코티죤약
을 복용하고 있었다.
  스위스 정신과 의사인 워너 스톨 교수는 말한다.
  아디슨병에 걸린 환자는 근육이 극도로 약해지고 많은 기능 부전이 발생하며
기억의 혼탁과 수면장애에 시달리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디슨병은 환각
적 정신분열증적인 두뇌장애를 일으킨다.
  1963년 11월 22일.
  그는 텍사스의 달라스에 접어들었다. 자동차에 탄 그의 옆자리에는 아내 재키
가 정면에는 존B 코넬리 지사가 앉아 있었다.
  케네디의 병을 벌써부터 알고 있던 코넬리는 그가 권력의 책무를 짊어지지엔
체력적으로 무리란 것을 예감하고 선거운동을 어떻게든 그만 두게 하려고 했던
사람이다. 케네디가 지나가는 것을 보려고 군중들은 환호하면서 몰려들었다.
  그때, 창고의 위층 창가에서 젊은 광신자 리하베이 오스왈드가 탄환을 이탈리
아제 칼빈 소총에 장전했다. 아직 45세 밖에 안된 존F 케네디의 길은 거기까지
였다. 젊고 아름다운 미망인 재클린의 절규  오! 노우 가 아직도 우리에겐 잊혀지
지 않는다.



  5척 단구의 거인 - 등소평
  150센티미터의 단구로 지구상에서 제일 큰 땅 덩어리를 가진 중국을 지배하며
12억 중국인의 식량문제를 해결한 사람 등소평, 그는 97년 2월 19일 영면에 들
었다.
  등소평은 중국 사천성에 있는 작은 마을 패방촌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 일
찍 어머니을 여의고 계모 밑에서 자라났다. 아버지는 법정학교를 나온 청말의
인텔리였다. 등소평은 16세에 파리로 유학하여 23세에 공산주의자가 되어 귀국
한다.
  당 중앙비서장, 팔로군 129사단의 정치위원, 52세 때는 모택동, 주은래, 유소기
와 함께 중앙 정치국 상무위원이 된다. 1978년 모택동이 지목한 후계자 화국봉
을 제치고 중국의 최고 지도자가 되기까지에는 세 번의 커다란 정치적 좌절을
겪는다.
  첫 번째는 모택동의 노선을 추종한다는 이유로 당에서 추방을 당하고 두 번째
로 66년 문화혁명 때 주자파로 낙인이 찍혀 실각된다. 이때 홍위병이 그의 큰아
들 박방을 북경대학 건물에서 창 밖으로 내던지는 바람에 하반신 불구자가 되는
불행을 겪었다. 세 번째는 모택동 사망 뒤 그의 부인 강청 등 4인방에 밀려 모
든 직위가 박탈되는 일을 당했다. 그러면서도 이를 극복하고 일어났다 하여  오
뚝이 란 별명이 붙여졌다.
  1978년 권력을 잡은 뒤, 개혁과 개방으로 사회주의 실험에 성공을 거두자  개
혁의 설계사 로 불리워진다.
  그의 좌우명  처변불경(어떤 변화에도 경솔하지 않게) 을 실천에 옮겨 전투에
공을 세웠어도 그는 자신을 내세우지 않았으며 몇 번씩이나 실각을 당했어도 조
용히 때를 기다려 다시 일어서곤 하였다.
  또한 그는  모주석은 말년에 문화혁명이라는 과오를 범하기는 했지만 그의 생
애의 대부분은 옳은 것이다. 모주석이 말년에 저지른 잘못만 바라볼 것이 아니
라 중국의 공산혁명을 승리로 이끌고 중화인민공화국 수립후 남긴 수많은 업적
들을 인정해야 한다 라며 남을 인정하고 높이 평가할 줄 아는 겸손한 사람이기
도 했다.
  89년 천안문 광장 시위때 유혈강경 진압으로 국민들에게 인기를 잃기 시작했
으며 자신의 이름  소평 과 같은 발음인  소병 으로 낚시대에 매달리는 수모를 겪
기도 했다. 그는 1990년 일체의 공직에서 물러났다. 그로부터 7년을 더 살면서
이미 깊어진 파킨슨씨병과 호흡, 순환기능의 쇠퇴로 병마에 시달리다가 향년 93
세인 1997년 2월에 죽음을 맞이했다.
  그는 장례는 간단하게, 유해 고별의식은 거행하지 말 것, 집에 반소를 설치하
지 말며 각막을 기증하고 유체를 해부해 의학연구에 제공할 것, 그리고 유골은
바다에 뿌려줄 것등을 가족에게 당부하였다.
  장례위원회는  소평  동지가 마지막 당부한 바대로 가장 소박하고 가장 장엄한
방식으로 애도의 뜻을 표하려 한다고 발표했다.
  1997년 2월 24일 밤, 나는 텔레비젼에서 북경의 혁명묘지로 운구되고 있는 그
의 마지막을 지켜보며 왠지 모르게 편안하고도 경건한 마음이 되었다.  소평 이
아닌  대평 의 마음으로 영면한 등소평 한편 부질없는 불로초만을 갈구하던 진시
황의 용마갱이 그 위에 겹쳐졌다.
  사람이 다르면 죽음도 이렇게 다른 것인가?



  제3장 죽음과의 악수
  인간의 삶과 수명
  우리가 믿어왔던 정명의 개념은 이제 흔들리고 있다. 유전공학의 발전으로 생
명복제까지 가능하게 된 지금 수명의 길이를 논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의미없
는 일이 될런지도 모르겠으나 나로서는 사실 그렇지만도 않다는 생각이다. 왜냐
하면 역사를 주도하며 자기분야에서 무언가를 이룩해 낸 사람들의 업적을 보면
그 자신의 수명과도 깊은 관계가 있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우선 소크라테스와 칸트는 오래 살았다. 괴테와 톨스토이는 같은 해에 태어나
나란히 83세까지 살았다. 이들의 학문과 작품은 80년이란 그들의 인생을 담보로
하여 가능하였던 것이 아닐까 싶다. 방종했던 젊은 시절을 극복하고 거룩한 톨
스토이적 휴머니즘을 완성한 것도 그가 오래 살았기 때문이며, 괴테는 파우스트
를 쓰기위해 생명을 연장시켜 달라고 신에게 빌기까지 한 실화를 우리는 기억하
고 있다.
  사고력을 필요로 하는 정신적인 업적은 우선 폭넓은 경험을 바탕으로 한 외길
인생을 끊임없이 요구한다. 그래서 대기는 만성으로 이어진다.
  동양의 철학자, 석가, 노자, 맹자는 80년을 넘게 살았고 공자, 주자, 장자는 70
년을 넘게 살았다. 그런가하면 서양의 홉스, 죤 듀이, 슈바이처, 러셀, 버나드쇼는
90을 넘겨 살았고 야스퍼스, 칼 융은 86세, 하이데거, 마틴부버, 에리히 프롬은
87세를 살았다. 비교적 오성을 중요시하는 철학에 관련된 사람들은 위와 같이
오래 살았다. 고승들의 경우도 매 한가지이다. 그들 모두는 장수하였다.
  반면 감성적 유형 예술가들은 천수를 온전히 누리지 못했다. 희랍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시나 미술에 뛰어난 예술가들은 왜 항상 우울한가. 라는 문제
를 제기한 이후, 수많은 심리학자나 신경학자들은  창조성과 광기 에 대한 상관
관계를 연구하기 시작했는데 미국 켄터키의대 심리학 교수인 아놀드 루드웍박사
는 조울증이 가장 심했던 집단은 예술가 집단이었으며 알코올 중독은 조사대상
의 60%가 배우, 41%가 작가들이었으며 과학자들은 3% 뿐이라고 말했다. 또한
심리상태가 불안한 환자는 배우가 17%, 시인들인 13%, 과학자들은 1% 미만이
었다고 한다. 그리고 조울증의 정도에 따라 작가들의 창작성에도 차이를 보였는
데, 세계의 뛰어난 창작자들은 조울증에 걸린 사람들이 많았다는 게 홉킨스대학
의 케이레드필드 제미슨 박사의 주장이다.
  예술가들의 심리상태를 연구한 제미슨 박사는 자신의 저서 <우울증과 예술
성>에서 시인 바이런과 셀리, 음악가 슈만, 소설가 허먼멜빌과 버지니아 울프
등을 예로 들고 있다.
  그들은 제 명대로 살 수가 없었다. 노벨 문학상을 받고 자살한 헤밍웨이와 가
와바다야스나리. 한 사람은 사냥총으로 또 한 사람은 가스관을 입에 물고 죽어
있었다. 반 고흐와 클라이스트의 권총자살, 우리 나라의 시인 이장희, 김소월, 일
본의 아꾸다가와류노스께는 약을 먹었고, 미시마유끼오는 할복자살을 하였다. 디
자이오사무, 버지니아 울프, 셀리 그리고 이백과 굴원,  등왕각  서문을 쓴 왕발은
물에 빠져 죽었다. 셀리, 에밀리브론테, 김소월, 이상, 왕발, 이시카와타보쿠는 20
대에 죽었고 손상기, 모딜리아니, 로트렉, 라파엘, 슈베르트, 모차르트, 쇼팽, 바이
런, 랭보, 비용, 이효석, 나운규, 아꾸다가와류노스께는 30대에 죽었다. 모파상, 보
드레르, 훨덜린, 모파상, 로트렉과 고흐는 정신병원에 감금되어야 했다.
  상아탑에서 학문을 연찬하고 학생을 가르치는 학자들의 삶이 잔잔하고 안온했
다면, 온몸으로 분출하듯 작품을 쏟아내어야 하는 예술가들의 삶은 난파된 배처
럼 되어 종래에는 만신창이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특히 예술분야에 있어서 일차
생산에 직접 관련된 예술가들의 생애가 좀 더 비참하고 또한 단명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차이를 더욱 느낄 수 있게 되었던 것은 음악가들의 삶을 재
조명해 보면서이다. 지휘자나 연주가들은 자신이 연주하고 있는 음악을 작곡한
작곡가보다 훨씬 건강하게 오래 산 것으로 나타났다. 개중에는 시벨리우스나 생
상스, 베르디같은 장수자도 혹간 있긴 했으나 슈베르트, 모차르트, 멘델스존, 쇼
팽, 비제, 거슈인 같은 사람은 아까운 나이 30대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베버
는 40세에, 무쏘르스키는 42세에, 슈만은 46세에, 차이코프스키와 베토벤, 드비시,
파가니니는 50대에 죽고 말았다.
  반면 첼로의 거장 카잘스는 96세까지 살았고, 피아니스트 호로비츠는 85세, 호
르쇼브스키는 100살까지 살았다. 바이올리니스트 야샤하이휏츠는 85세, 요세프시
게티는 81세, 오르가니스트인 라인캔은 99세, 샤를마리비도른는 93세까지 살았
다. 장수한 음악가들은 지휘자들 쪽에 더 많았다. 런던 필하모니를 창설한 영국
의 지휘자 조지스마트는 90세, 알렉산드르디코노비치는 91세, 부르노발터는 86
세, 피에르몽테는 89세, 러시아의 지휘자 예프게니므라빈스키는 86세, 로베르트
슈톨츠는 94세, 프랑수아조세포고세크는 95세, 미국의 유명한 지휘자 레오폴드스
토코프스키는 95세, 베를린필하모니의 지휘자였던 카라얀은 89세, 뉴욕필의 상임
지휘자였던 레너드번스타인은 72세의 나이로 우리의 곁을 떠났다.
  반세기 동안 영국의  데카 사와 전속계약을 맺고 있는 헝가리 태생의 지휘자
게오르그솔티경(주 : 게오르그솔티는 이 책이 탈고 될 무렵 1997년에 세상을 떠
났기에 바로잡음.)은 84세의 나이로 여전히 건강하게 활동하고 있다. 그에게 건
강비결을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일은 하는 것이다. 일하는 인생은 아름답다. 무엇보다 지휘란 심폐기능을 단
련시키는 스포츠와 다름없다.
  그리고 지휘자의 가장 중요한 덕목을 묻는 말에 그는  음악을 통해서 사람들
에게 기쁨을 주는 것. 이라고 하였다. 지휘자의 장수에 대한 단서를 솔티는 여기
에서 제공하고 있다. 아름다운 리듬을 타고 남과 나에게 다같이 기쁨을 주는 일,
그리고 턱시도 밑으로 흘러내리는 땀, 그 정열의 발산,  심폐기능이 단련되는 스
포츠 란 말에 다시 한번 주목해야 될 것 같다.
  첼로의 거장 카잘스는 또 이렇게 말했다.
   가능한 한 몸의 힘을 빼고, 손발을 자유롭게 움직여 손발 자체가 지닌 무게와
그 낙하력을 이용함으로써 최소의 노력으로 최대의 효과를 얻었다. 나에게 있어
서 연주라는 일은 즐거움이 되었던 것이다.
  우리에게는 그렇게 어렵게만 보였던 일이 즐거움이었다고 고백한 말에는 다시
한번 주목해야 될 것같다. 즐거움과 운동, 이것이 그들의 장수의 비결이었다면
밀폐된 공간에서의 영양실조와 운동부족 그리고 창작의 고통으로 인한 노심초
사.
  문자 그대로 마음을 괴롭히고 애를 태우며 생각을 끓이니 어찌 수명을 온전히
누릴 수 있었겠는가?
  그러니 우리가 마음을 쓰는 일과 수명은 정직한 결과로 나타났던 것이다.
  어떤 일에 관련되어져 있는가? 그것이 우리의 수명과도 깊은 상관관계를 이루
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죽음을 독촉한 철학자 - 소크라테스/송시열


  죽음을 소화한 사람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기원전 469-399)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이다. 그는 철학의 대상을
자연에서 인간으로 바꾸어 놓는 데 기여하였으며 변론술로도 유명하다. 또한 지
행일치를 강조하며, 평생을 아테네 민중을 개혁시키는 데 바쳤다.
  아테네의 도덕적 부패는 시민이 자기(영혼)를 자기의 것(명예, 재산, 육체 등)
에 족속시킨 주객이 전도된 데에 원인이 있다고 지적하면서 부패한 구렁텅이에
서 아테네를 구하는 길은 오직 새로운 도덕을 세우는 것과 진리에 대해 눈을 뜨
게 하는 일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우중정치를 하던 국가는 그에게 죄를 씌어 사형을 언도했다.
   국가가 믿는 신을 믿지 않고, 이상한 종교를 선포하고 다니며 청년들을 타락
시켰다. 는 것이 그의 죄목이었다. 그는 변호인을 거절하고 자신이 직접 배심원
앞에 나가 자신을 고발한 이유가 잘못되었음을 지적하고 자신의 소신을 거침없
이 피력한다. 유명한  소크라테스의 변명 은 이렇게 해서 시작된다.
   저는 죽는 쪽을 단호히 택합니다. 왜냐하면 법정에서건 또는 싸움터에서건 적
이든 또는 다른 누구이든간에, 죽음을 피하기 위해서 온갖 수단을 다 쓰는 이런
따위의 짓을 꾀하려 해서는 안되겠기 때문입니다.(생략) 온갖 위험에 처하여서
죽음만을 피하기 위해, 무슨 짓거리건 무슨 말이건 하려들면야 방도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여러분! 진정 어려운 것은 이것, 즉 죽음을 피하는 것이 아닐 겁니다.
비열함을 피하는 것이야말로 훨씬 더 어려운 것일 겁니다.(생략) 그리하여 지금
저는 여러분들에 의해 죽음의 판결을 받고 떠납니다만, 저들은 진리에 의하여
사악과 부당함의 심판을 받았습니다.(생략)
  아테네의 재판에서는 유죄판결을 받은 피고가 형량을 신청할 수 있었다. 소크
라테스의 경우도 국외 추방 정도로 낙찰될 수 있었는 데 쓸데없이 배심원을 노
하게 하는 말을 해서 사형판결을 이끌어내고 말았다. 어떻게 보면 완곡한 방법
에 의한 자살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는 자기의 입장을 변명하고 대중 앞에
서 사과함으로써 살아날 수도 있었건만 이를 거절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제자들이 마련한 탈출의 기회마저 외면하였다. 사형판결 후 소크라테스는 30일
동안 옥중에 있었는데 그때 찾아오는 제자나 친구들에게 영혼의 불멸과 사후 세
계의 존재에 대해서 말하고 켤코 죽음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고 가르친다.
   육체는 혼의 묘지다. 그러니 우리의 혼을 육체로부터 해방시키는 일이니 오히
려  죽음 은 경사스런 일이 아닌가?
  소크라테스의 사형과정은 플라톤이 쓴 <파이돈>에 자세히 적혀있다.
  에케크라테스가 묻고 파이돈이 답한다.
   그분께선 몸가짐에 있어서나 하시는 말씀을 통해서나 행복하게만 보였고, 또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얼마나 고결하게 최후를 맞으시는지 제겐 그분께서 신들
의 보살핌 없이 저승으로 가시지는 않을 것이고, 그곳에 가셔도 정말 잘 지내실
것 같이 여겨졌어요(생략).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자네는 상심하지 말고
나의 육체를 묻을 뿐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네. 따라서 자네 좋을대로 그리고
가장 관습에 맞는다고 생각되는대로 묻어 주면 되네.
  말씀을 마치고 나서 목욕을 하기 위해 다른 방으로 가셨어요. 목욕하고 나와
가족을 잠시 만난 뒤, 집으로 돌아갈 것을 이르시고 우리들한테 오셨어요. 해질
녘이 가까워왔어요. 간수가 들어왔어요(생략).
   아직 안 되어었나? 독을 준비하는데 왜 이렇게 시간이 걸리는가?
  소크라테스가 재촉하자 제자들이 울며 말했다.
   아니 왜 그러십니까. 우리는 조금이라도 더 오래 같이 있고 싶어요. 그래서
독을 만드는 이를 매수했습니다. 천천히 만들라고 설득했지요.
  독을 만드는 이가 말했다.
   내 평생 독을 만들어왔지만 당신 같은 미치광이는 처음 봤소. 왜 그렇게 서두
는 거요. 내가 천천히 하면 당신도 그만큼 더 살아있을 수 있는데, 조금이라도
더 살 수 있고 조금이라도 더 세상에 머물 수 있지 않소? 당신은 미치광이처럼
늦는다고 탓했지만 무얼 그렇게 서두르는 거요.
  소크라테스가 말했다.
   죽음을 보고 싶어 서두르네. 난 죽음이 어떤 것인지 보고 싶네. 죽음이 일어
났을 때 내가 살아남는지 어떤지를 보고 싶은 거야. 만약 내가 살아남지 못한다
면 모든 것은 끝이야. 하지만 내가 살아남는다면 죽음이 끝이지. 요컨대 죽음에
의해 누가 죽는지 보고 싶어. 죽음이 죽는지 내가 죽는지, 죽음이 남는지 내가
남는지 보고 싶다니까. 그러나 내가 살아 있는 한 도저히 그것을 볼 수 없어.
  소크라테스는 독약이 든 잔을 받았다. 잔을 입으로 가져가더니 선뜻 그리고
침착하게 잔을 비웠다. 옆에 있던 사람들이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모를 사람들이로군! 이게 무슨 짓들이람.
  그는 제자들을 나무랐다.
   임종은 숙연한 분위기에서 맞아야 된다고 들었네. 그러니 조용히들 그리고 의
연히들 하게나.
  그때서야 제자들이 겨우 울음을 진정했다.
  소크라테스는 간수가 시키는대로 이리저리 걷다가 다리가 무겁다고 말하고는
등을 뒤로 하고 누웠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독이 무릎까지 올라왔다. 무릎까지 완전히 죽었다. 잘라낸다 해도 모를  것이
다. 그러나 친구여, 내 말을 들어보라. 내 다리는 죽었지만 나는 아직 살아있다.
이제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나는 내 다리가 아니었다. 나는 아직 여기에 있다.
나는 완벽하게 여기에 있다. 내부의 어떤 것도 사라지지 않았다.
  소크라테스는 계속했다.
   지금 두 다리가 죽었다. 넓적다리부터 잘라낸다 해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아직 나는 여기에 있다. 그리고 울고 있는 너희들이 있다. 울일
이 아니다. 아주 좋은 기회다. 한 인간이 죽어가고 있고, 자신은 아직 살아있다
고 전하고 있다. 내 두 다리를 완전히 잘라낸다 해도, 그래도 나는 죽지 않을 것
이다. 그래도 나는 아직 있다. 두 팔이 뒤틀린다. 내 팔도 죽어간다. 아! 얼마나
자주 이 팔을 자신과 동일시해 왔던가. 그 두 팔이 지금 내게서 분리되어간다.
그러나 아직 나는 여기에 있다.
  소크라테스는 죽어가는 동안 말을 계속했다.
   천천히 모든 것이 온화해져 간다. 모든 것이 가라앉는다. 그러나 아직 나는
건재하다. 좀 더 있으면 너희들에게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내가 없어졌다고 생각하지 마라. 육체의 이렇게 많은 부분을 잃고도 난 아직 건
재한데 조금 더 육체를 잃는다고 해서 어떻게 그것이 끝이라고 할 것인가? 너희
들에게 말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그것은 내 육체를 통해서만 가능하니까. 그
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아직 나는 계속 있을 것이다.
  이윽고 마지막 순간에 소크라테스는 말했다.
   자 이제 마지막인가 보다. 혀가 말을 듣지 않는다. 이제 더 이상 한 마디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고 나는 말한다. 나는 존재한다. 나는 아직 살아있다.
  그는 크리톤을 향해 한 마디 당부의 말을 더 하였다.
   아스클레피오스신께 닭 한 마리를 바쳐야 할 빚이 있는데 잊지 말고 꼭 바쳐
주게.
  크리톤이 약속을 지키겠다고 말하며 다른 것이 더 있느냐고 묻자, 아무런 대
꾸도 하지 못하더니, 조금 지나서 몸을 떨 뿐이었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제자들을 옆에 두고  죽음 을 가르쳤다. 그리고  나보다 즐
겁고 착한 생애를 지낸 인간이 있다고는 보지 않는다 면서 자신에 대해 만족함
을 가지고 인생을 끝냈던 것이다.
  그래서 몽테뉴는 말했다.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소화하였다 고.

  


장엄한 낙조같던 송시열 선생의 죽음
  우암 송시열은 선조 40년(1607) 충북 옥천군 구룡리에서 탄생하였다. 부친 수
옹공이 청산아사에 있을 때, 종가 제삿날 공자가 여러 제자를 데리고 집에 온
꿈을 꾸고서 아들의 출생을 맞았다고 한다. 선생은 광해군 1년인 세 살 때에 이
미 스스로 글자를 깨쳤으며, 어려서부터 늘 글읽기를 좋아하였다.
   나는 와서 배우는 사람에게 남의 신하가 되어서는 불충에 빠지지 않게 하였
으며, 남의 아들이 되어서는 불효에 빠지지 않게 하였으며, 윗사람과 사귐에 아
첨하지 않고, 아랫사람과 사귐에 더럽지 않게 하였다. 라고 <송자대전>은 기록
하고 있다. 또  나는 가례와 소학을 읽고 몸을 검속하였으며 심경과 근사록을 읽
고는 의리를 알았으며, 사서오경은 평생 동안 짊어지고 다니면서 읽어서 남겨둔
대목이 없었다. 고 말했다.
  팔십 평생이 오로지 독서로 일관된 생애였다. 인품은 강직하고 말씀이 적었으
며 학문의 목적은 의를 구명하는데 두고, 한번 의라는 판명을 하였으면 비록 생
명을 바치는 한이 있더라도 행하여야 한다고 믿으며, 의롭게 순국한 분들을 일
일이 추모하고 저술로 남겨둘 것을 잊지 않았다.
  삼학사의 전기를 저술하고, 충신과 공신의 자손을 모두 찾아내어 보살피게 함
으로써 그 영혼을 위로하고 절의정신을 고취하였다. 숙종의 비 민중전을 위해서
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직간을 하였다. 낳은 지 겨우 몇 달밖에 안되는 장
희빈의 아들을 숙종이 원자로 봉하려 하자 선생은  민비 아직 젊으시니 뒷날을
기다려 봐야 한다 는 상소를 올렸다. 이것이 임금의 노여움을 사게 되어 제주도
에 위리 안치된다.
  민비가 폐출되자, 선생을 불러다가 국문하라는 어명이 떨어졌다. 제주도를 출
발하여 정읍에 이른 것은 6월 8일, 진시에 현재의 위치에서 사약을 받으라는 명
령이 내려온다. 고령의 나이로 선생의 병세가 이미 깊어지자 국문하기 전에 운
명할 것을 염려한 일당들이 속히 사사할 것을 숙종에게 주청했기 때문이다.
  선생은 글을 지어 여주에 있는 효종의 능을 향해 4배를 드리고 하세의 인사를
하였다. 자손에게 훈계하는 글을 짓고 자신을 따르던 문인들을 행해  마지막 말
을 남긴다.
   나는 항상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신념으로 살았으며 올
해 내 나이 80을 넘었는데도, 마침내 도를 들은 바 없이 죽으니 이것이 나의 유
한이다. 이러한 시대는 사는 것이 죽는 것만도 못한 세상이니 나는 곧 웃음을
머금고 땅 속으로 들어갈 터이니 이 뒤로는 오직 그대들이 도를 이루기를 바라
노라.  그리고  학문은 마땅히 주자를 주체로 하고 사업은 효종이 하고자 한 뜻
을 주장해야 한다.
  청나라에 대한 분통함을 참고 원통한 마음을 항상 간직하고 어떠한 곤궁한 일
이 있더라도 잊어서는 안된다는  인통함원박부득기 의 여덟글자를 가슴속에 간직
하여 동지들에게 전수해서 복수하고 설치할 날 까지 잊어버리지 말라고 당부한
다.
  기력이 엄엄하여 눈을 감고 있다고 겨우 뜨면서  지금 시각이 어떻게 되었느
냐? 하더니  시각이 다 되었으니 약을 들이도록 하여라. 약이 늦으면 그 전에 죽
을지 모른다. 고 하면서 약을 재촉하였다. 약이 들어오자 옷을 몸에 걸쳐 달라는
시늉을 하였다. 최소한의 예모를 갖추고 수명하려는 것이었다. 어명을 받들어 약
을 든다. 때의 춘추 83세요, 휘일은 6월 3일, 기록에 보면 전야에는 큰 별이 떨
어지고 흰 무지개가 청사의 지붕에 걸쳐졌다고 한다.
  자신의 과오가 없었음에도 이들은 부당하게 내려진 사약의 잔을 받아야 했다.
그럼에도 태연히 재촉해서 받아 마셨다. 대인의 풍모답게 죽음에 있어 모면하려
들지 않았던 점이 존경스럽다.
  태연자약하게 독배의 잔을 기울이는 장엄한 모습을 누군가  서산에 넘어가는
붉은 해 같다 고 말하였다.

  깨달음과 죽음이 남달랐던 제논/벽송


  92세의 자살, 삶이 너무 지루했을까 - 제논
  제논은 그리스의 철학자로 스토아학파의 창시자이다. 엄숙하고 금욕적인 생활
을 통하여 그는 아파테이아의 최고의 선을 살고 간 한 사람의 현자였다.
  그는 지중해 해안의 키프로스 섬에서 자랐다. 상업을 하는 아버지를 따라 아
테네로 간 것은 17세의 때의 일이다. 물감을 싣고 가던 배가 난파를 당하자 제
논은 아테네의 어느 서적상 집에 머물게 되었는데 거기서 우연히 철학책을 보게
된다. 크세노폰이 쓴 <소크라테스의 회상기>를 읽고는 소크라테스에게 매혹된
다. 제논은 책방 주인에게 소크라테스의 후계자를 소개받고 싶어했다. 마침 그때
크라테스가 그의 집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나무통 속에서 살던 디오케네스처럼
그도 거처할 집도 없이 오직 철학에만 몰두하는 견유학파 중의 한 사람이었다.
  제논이 크라테스의 교단에 들어갔을 때 그는 머슴에 불과했다. 밥짓고 빨래하
고 크라테스가 하라는대로 일하는 것 뿐이었다. 한 해가 지나도 가르쳐 주는 것
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느 날 제논이 죽을 담은 큰 항아리를 이고 돌아오는데
크라테스가 거기에 돌을 던졌다. 항아리는 깨지고 죽이 흘러내렸다. 제논은 크라
테스의 욕이 무서워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 페니키아의 얼빠진 녀석아! 뭐가 무서워 도망을 치는 거냐?
  뒤에서 고함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도망치던 제논은 발길을 멈추고 다시 자기
자신으로 돌아왔다.
  그는 생각했다.  내가 왜 도망치고 있는 것일까. 무었 때문에? 무엇이 무서워
서  그때 제논의 가슴에는 한 줄기의 빛이 비치기 시작했다. 그는 달아나던 발걸
음을 멈추고 스승을 향해 큰절을 올린다.
  스토아의 시조, 제논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스토아주의는 에피쿠로스처럼 삶의 의미를 쾌락과 향유에서 찾는게 아니고 자
기 자신의 일치에서 찾는다. 어떻게 해야 인간이 자기 자신과의 합일에 도달하
는가? 그것은 인간이 자연과 합치되어 살게 됨으로써 가능하다고 제논은 말한
다. 즉 자기 자신과 합일하여 행동하고, 자신의 내부에서 그 본성을 실현하는 사
람이 동시에 우주의 포괄적 법칙과도 합치되어 행동한다는 것이다.
  그는 유난히 수줍음을 많이 탔다. 먹고사는 생활은 간단했으며 그의 남루한
외투는 혐오감을 줄 정도였다. 그래서 아무 욕심없는 사람을  철학자 제논 이라
고들 한다. 우스꽝스러운 그의 행동에도 불구하고 그의 정신은 높게 평가되었다.
  마케도니아왕조차도 아테네에 체류할때마다 제논의 강의를 놓치지 않았다. 존
경의 표시로 아테네인들은 그에게 황금관을 수여하고, 입상과 기념비를 건립했
다. 그는 강의를 계속하는 한편 저술에 정열을 기울였다.
  그의 사상은 논리학, 자연학, 윤리학의 세 부분으로 형성되는데 이 세 부분의
저서가 23가지나 된다. 그는 극진한 존경을 받으면서 교사생활로 생애를 마감한
92세의 죽음 또한 남다른 것이기에 소개한다.
  강의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이었다. 제논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면
서 손가락을 다쳤다. 그때 그는 땅을 치면서 이렇게 말했다.
   곧 갈 건데 왜 이렇게 야단이냐.
  죽음의 시간을 알리는 신들의 예고라고 그는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그 자리에서 세상을 뜨고 말았다. 스스로 목을 맨 것이다. 서둘러 돌아가
야만 하는 것처럼 지체없이 떠났다.
  기원전 246년의 일이다. 그의 학통은 세네카, 절름발이 노예 에픽테토스, 마르
쿠스 아우렐리우스 등으로 이어졌다.


 자신의 죽음으로써 적멸상을 가르친 벽송선사
  조선조 1464년(세조 9년)에 태어난 벽송의 본명은 송지엄. 그는 무인이로서 많
은 전공을 세웠으나 전쟁 뒤에 찾아오는 비감을 어쩔 수 없었다. 죽음에 대한
회의가 깊어졌다.
   대장부가 세상에 나서 마음을 한 번 깨달아 밝혀보지 못하고 남의 막하 군사
를 쫓아다니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았으니 비록 여기에 한마의 공이 있다 할지라
고 그까짓 허명이 생사해탈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하고 본연히 출가를 결심
하니 그때의 나이 28세였다.
  그는 출가하여 직지사의 벽계정심 선사를 모셨다.
  석 달이 되어도 법은 한 마디도 일러주지 않고 매일 땔감나무만 져오게 하였
다. 이에 불만을 품고 하산을 결심한다.
   내가 안 가르쳐 주었나, 제놈이 알아듣지 못했지.
  정심의 말이다. 정심은 산 아래로 떠나고 있는 벽송을 행해 크게 불렀다.
   지엄아! 지엄아, 나좀 보고 가거라!
  메아리가 계속을 울렸다. 화가 잔뜩 난 지엄은 떠나온 산마루 쪽을 바라보았
다.
   도가 여기있다. 옛다 받아라!
  정심이 무엇을 집어던지는 시늉을 해보았다. 순간 지엄은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무엇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감격의 눈물을 철철 흘렸다.
다시 스승께 나아가 큰절을 올리고 용맹정진을 거듭했다.
  그는 말년에 지리산에 은거하고 있었다.
  어느 날 <법화경>을 강의하다가 문득  방편품 에 이르러 길게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중생이 이리석어 스스로 제게 있는 광명을 발견하지 못하고 오래도록 윤회를
받아오므로, 세존께서 이것을 불쌍이 여겨 입이 아프시도록 말씀하신 것이 바로
<법화경 방편품>이다. 그러나 모두 중생을 깨우치기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는
것이요, 정법은 아니다. 정법이란 적멸허확하여 말로써 그 형상을 그릴 수 없는
것이니, 이제 너희들이 정말 부처님의 실상을 믿으려면 당장에 자기 마음속부터
들춰내야 한다. 그래야만 부처님의 은혜를 갚는 것이다. 오늘 나도 너희들을 위
하여 또 하나의 적멸상을 보일테니 너희들은 절대로 밖에서 찾으려 하지 말고
한 마음으로 마음속을 더듬어 보아라.
  지엄은 시자를 불러 차를 달여 오라고 하였다. 문답을 나눈 후 시자가 끓여
온 차를 마시고 방장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그 후로 오래도록 아무 기척이
없어 문을 열어보니, 벌써 앉은 채로 입적에 든 뒤였다.
  1534년 11월 초하루 아침이었다.
  제자로는 서산의 스승인 숭인을 비롯하여 설은, 원오, 일선 등이 있다.



  경험하고 싶은 마지막 고통 - 우스펜스키
  임종할 때 자신의 생각을 올바르게 통제하고 분명한 의식을 지닌 채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고 <티베트 사자의 서>는 가르치고 있다. 생각하는 것에 따라 다
음의 삶이 결정되고 다음의 삶을 얻게 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고 했다. 그래서
죽는 순간, 부디 무의식에 빠지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는데 그것을 실천한 사람
이 있다. 바로 우스펜스키이다.
  P.D. 우스펜스키는 러시아의 수학자이다.
  그는 죽기 석 달 전, 건강이 지독히 악화되어 있었다. 의사가 안정을 취하라고
그에게 충고했다. 그럼에도 우스펜스키는 상상을 초월한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
기 시작했다. 밤이 되어도 그는 자지 않았다. 여행을 하고, 걷고, 달리며 늘 움직
였다. 의사들은 깜짝놀라 절대 안정이 필요하다고 충고했다.
   나는 모든 고통을 경험하고 싶다. 죽음의 고통이 너무도 격렬해서 무의식이
되어 버리지 않았으면 한다. 나는 죽기 전까지 모든 고통에서 견디고 싶다. 그것
이 내 속에 충분한 정력을 배양해 줄 수 있도록 그리고 죽음이 왔을 때 완벽한
의식을 가질 수 있도록.
  이리하여 석 달 동안 모든 종류의 고통을 다 경험하고자 우스펜스키는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죽음을 맞이하게 된 우스켄스키는 그날, 밤새도록 방안을 돌아다녔다. 의사들
이 만류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걷다 죽고 싶다. 앉아 죽어 무의식이 되어 버리는 일이 없게. 잠든 채
죽어, 무의식이 되어 버리는 일이 없게.
  우스펜스키가 걸으면서 친구들에게 말했다.
   이제 조금 남았다.       앞으로 열 발자국이면 다 끝난다. 나는 약해져 있다.
그러나 마지막 한 걸음을 디딜 때까지 계속 걸어야 한다. 마지막까지 뭔가 하고
있고 싶다. 그렇지 않으면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죽음이 날 사로잡을지 모른다.
긴장을 풀면 잠에 떨어질  것이다.       죽음의 순간에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나는 결코 원치 않는다.
  마지막 한 발을 내딛으면서 우스펜스키는 죽어갔다. 걸으면서 우스펜스키는
푹 주저앉았다. 즉, 죽음이 덮쳐와 마침내 우스펜스키가 쓰러진 것이다. 마지막
한 발을 내딛으며 그는 말했다.
   여기까지야, 이것이 내 마지막 한 발이다. 지금 나는 쓰러지려 하고 있다. 떠
나가기 전에 말하게 해달라. 나는 저 옛날의 육체를 떨어뜨리고 있다. 당신들은
지금 내 육체가 해방되는 것을 볼 것이다. 그러나 나는 훨씬 전부터 육체가 떨
어진 것을, 그래도 아직 내가 존재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다. 육체와의 결합은
전부 무너지고 있다. 그런데 아직 내부에선 난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지금 육체
만이 쓰러져 간다.         나 에게는 쓰러질 방법도 없다.
  그는 안간힘을 다해 자기의 존재와 이렇게 대결하고 있었다.

  


김대건의 치명
  한국 천주교회는 네 번에 걸쳐 큰 박해를 받았다. 이때 1만명의 선량한 신도
들이 목이 잘리었다. 신의 이름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이 순교행위를 카톨릭에
서는  치명 이라고 명명하는데  최상으로 축복된 순간 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왜냐
하면 그 신앙적 죽음을 통해서만이 가장 영예로운 신앙의 증거가 즉각에 이루어
지고, 신의 무한한 축복과 영원불멸한 낙토천국이 현실화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많은 순교자들이 의연하게 그리고 기쁘게 죽어갔던 것이다.
  1846년 9월 16일.
  3개월의 옥중 생활을 마친 김대건 신부의 순교장면을 보자.
  한강 새남터(노량진 시장) 형장에 끌려나온 김대건 신부에게 마지막 군령이
내려졌다.
   사학악인 김대건의 목을 베어 달아, 모두 이를 경계할 것을 명하노라.
  군졸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관습에 따라 두 귀에 화살을 꿰고, 얼굴에는 물을
뿜고 흰 회를 발랐다. 그리고 두 명의 군졸이 김대건 신부의 양쪽 겨드랑 밑에
두 개의 몽둥이를 끼워 앞뒤로 걸머메고 군졸의 둥근 진의 바깥쪽을 세 차례나
돌린 후, 신부를 꿇어앉히고 한 가닥의 밧줄로써 김대건 신부의 머리칼을 동여
매어 그 한 끝을 사형대의 말뚝 구명에 끼워 잡아당기니 신부의 얼굴은 하늘을
쳐다보게 되었다. 그래도 신부는 태연하게 눈썹조차 움직이지 않으면서 말했다.
   한 번 나고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이 면하지 못하는 것이어늘, 이제 천주를 위
해 죽는 것이 도리어 나의 소원이니 오늘 묻고, 내일 물어도 이 같을 뿐이요, 때
리고 죽여도 이 같을 뿐이니 빨리 죽여 달라.
  그리고 군졸들에게
   몸가짐이 이러하면 좋으냐? 쉽게 자르겠느냐?
   좀 더 똑바로 하여라. 아 그만하면 됐다.
   자 나의 목을 잘라라. 준비는 다 되었다.
  이리하여 12명의 희자수가 시퍼런 칼을 휘두르며 자르는 흉내를 내면서 신부
의 주위를 빙빙 돌아 달리다가 각각 한 칼씩 내려치니 여덟 번째의 칼날에 신부
의 머리는 앞쪽으로 떨어지게 되었다. 형리는 곧 그 목을 주워서 목판에 얹어
관장 앞으로 가서 검사를 받았다. 관장은 검사를 마친 후, 궁중으로 돌아가서 사
형집행을 끝마쳤음을 보고하였다.
  이리하여 최초의 한국인 신부 김대건은 그의 영광된 치명으로 말미암아 1857
년 9월 23일 교황 비오 9세에 의하여 가경자의 칭호를 받았고, 1925년 7월 5일
에는 복자의 위에 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기독교의 죽음관과 성 이그니티우스
  이그니티우스는 크리스티교의 사도 교부의 한 사람으로, 안티오키아의 사제였
다.
  로마제국 공인의 신들을 승인할 것을 그는 거부했기 때문에 박해를 박고 체포
당하였다. 로마의 원형극장에서 사자에게 죽임을 당하는 사형이 내려졌다. 이 장
면은 영화  쿼바디스 나  스팔타카스 에서 우리가 흔히 보았던 장면이다.
  그는 스스로 순교를 택했으며 다가오는 사자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이 짐승을 환대해 주기로 하자, 더욱 사나워졌으면 좋겠는데, 만일 나에게 덤
벼들 의사가 없는 듯하면, 이쪽에서 먼저 도전하여 힘껏 끌어낼 것이다. 나는 신
의 밀알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위한 잡물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빵이 되기
위해서는 맹수의 이빨로 빻아져야 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바 생명 이니 하나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은 오히려 그
들에겐 영광된 일이었다. 그리고  언제 죽는가 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죽음으로 부르는 때가 오면 기쁘게 응한다는
자세를 취한다. 왜냐하면 고통이 없는 나라, 하나님이 몸소 계시는 나라, 천국으
로 가는 것이기에 기쁨과 희망을 가지고 죽음에 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깨달음
의 죽음이 아니라, 어차피 그들의 죽음은 구원과 연결된 죽음이며, 부활과 영생
이 약속된 죽음이기 때문이다.

 예수, 죽음의 의미
  예수의 죽음은 죄없는 죽음이었다. 아담과 하와가 범한 원죄를 속죄하기 위한
죽음이었으므로 대속의 의미를 갖고 있다. 중국의 오주혜박사는 그의 죽음으로
사의 본질이 죄라는 것을 알게 되며 이로써 창조주에게 다가가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예수가 자란 갈릴리는 헤롯안테파스왕의 지배하에 있었다. 로마황제는 식민지
분봉왕들을 감시하기 위해 시리아에는 총독을 보내고, 유태에는 지사를 파견했
다. 그래서 유태지사 빌라도는 유월절을 감시하기 위해 가이사랴시에서 예루살
렘으로 옮겨와 머물고 있었고, 갈릴리의 영주 헤롯안테파스 또한 성주에 머물고
있었다.
  이때 제사장 가야바를 의장으로 한 중의회가 예수를 고발하고 나섰다. 죄목은
신성모독죄였다. 예루살렘의 웅장한 성전을 보고 그의 제자가 찬탄하자 예수는
이런 말을 했다.
   마침내 이 성전이 무너지는 날이 오리니, 그때는 돌 위에 하나의 돌도 남지
않을 것이다. 사람이 지은 성전 대신에 나는 사흘 만에 다른 성전을 세우리라.
  예수의 이 말은 이튿날, 재판에서 성전모독의 발언으로 규탄되기에 이른다. 유
월절을 앞두고 예수의 그룹은 당시 둘로 갈라져 있었다. 유다그룹이 떠나고 베
드로와 얼마 안되는 제자들만이 남아 있었지만, 예수는 그들마저 자기를 저버릴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제사장 가야바는 성전 경비대를 올리브산 기슭, 착유소로 보냈다. 예수 일행이
거기에 있다고 일러준 것은 유다였다. 경비대원들은 손에 횃불을 들고 막대기와
칼로 무장하고 켓세마네로 향했다. 예수는 죽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겟세마네에서 지극히 번민하면서 그는  죽음의 잔일랑 제발 거두어 주십사 고
하느님에게 간구하였다(마가 14, 34-36).
   죽기를 싫어하고 살고 싶어하는 예수는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누가복음>에 기록된 것처럼 예수는 죽음의 불안 때문에 괴로워 하였다.
  그러나 아무런 손도 쓰지 못하고 경비대원에게 순순히 끌려가야 했다. 제사장
가야바는 약속한대로 그들의 제자들을 체포하지 않았다.
  베드로가 가야바의 관저에서 예수를 부인하고 난 뒤 자책감과 굴욕감 때문에
몹시 울었다는 얘기는 무엇을 뜻함인가? 가야바에게 매수된 유다도 30냥의 은화
를 그의 관저 뜰에 내동댕이친 뒤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그의 제자들은 이렇듯 가야바에게 관련되어 있었던 것이다.
  중의회는 예수를 계속 추궁하였다. 그는 대꾸하지 않았다. 중의회는 판결에 필
요한 수만큼의 증언을 성립시키지 못하자 하는 수 없이  고발 을 무효화시켜 버
렸다. 그러나 제사장 가야바는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를 고발하고자 혈안이 되었
다. 그는 교묘한 유도 심문을 생각해 냈다.
   그대가 그리스도인가?
  예수에게 물었다.
  그리스도란  메시아 를 의미한다. 그 속에는  유대인의 제왕 과  구세주 라는 의
미가 포함되어 있다. 정치적 메시아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로마 점령하에 시달리
는 유태인의 독립과 예전의 영광을 회복코자 하는 구세주이니 정치범으로 제소
할 수가 있겠고, 정신적인 메시아를 지칭하는 것이라면 신성모독으로 처벌할 수
있는 아주 교묘한 함정이었던 셈이다. 예수는 가야바의 유도심문의 진의를 간파
하고 있었다.
   내가 말할지라고 너희가 믿지 아니할 것이요, 내가 물어도 너희가 대답하지
않을 것이니라.
  어차피 자신의 처형을 전제로 한 것임을 안 예수는 자신을  구세주 라고 말하
였다. 예수의 대답에 가야바는 옷을 찢으며 의원들에게  이제 증인을 댈 필요도
없다. 며 유죄를 선언했고 의원들도 이를 인정하여 사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사
형을 집행하기 위해서는 지사 빌라도의 승인이 필요했다. 가야바는 빌라도에게
예수의 사형을 요구했다. 죄목은 로마에 대한 정치적 반역이었다. 그와 같은 명
목을 취하면 군중이 석방을 바라고 있는 제로테의 지도자인 바라바와 교환할 수
도 있고, 중의회의 면목을 세우는 것도 가능했기 때문에 가야바는 속으로 쾌재
를 불렀다.
  빌라도는 관저 앞에 모인 군중들에게 물었다.
   둘중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는가?
  군중들은 현실적인 혁명가 바라바를 원했다.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군중은 예수에게 십자가형을 요구했다. 이 십자가형의 요구는 종교 이단자로
서가 아니라 반로마 운동의 정치범으로 말살하려는데 그 의도가 있었다. 빌라도
는 바라바를 감옥에서 석방하고, 예수를 매질하게 한 후 군병들에게 넘겨 주었
다. 군병들은 예수를 병영에 끌고 가서 옷을 벗기고 붉은 겉옷을 입힌 다음, 병
영 뜰에 자라고 있는 에다브라는 가시를 머리에 씌우고 오른손에 갈대를 잡게
하였다. 그에게 침을 뱉으며 조롱했다. 빌라도는 로마법의 관례에 따라 부하에게
죄표를 만들게 했다. 히브리오, 그리스어, 라틴어의 세 나라말로 쓰여진  유태인
의 왕 나사렛 예수 라는 죄표를 목에 걸고 십자가를 짊어진 채 예수는 골고다
언덕을 향하고 있었다. 때는 한 낮이었다. 예수는 두 사람의 죄수와 더불어 어께
에 기둥을 매고 걸어 갔다. 약 70킬로그램의 무게인 십자가를 메고 비틀거리면
서 언덕으로 올라갔다. 처형자들은 자가가 운반해 온 십자가 횡목 위에 반듯이
뉘워졌다. 손에 못이 박혔다. 못 박히는 일이 끝난 다음 끈으로 매달려 졌다. 그
리고 마지막 두 개의 못을 마저 쳤다. 십자가에 매달리기 전에 의식을 마취시키
기 위해 신맛을 넣은 포도주를 먹이는게 당시의 습관이었는데, 예수는 이 포도
주를 거절했다. 그리고는 고통을 감수했다. 그의 십자가 양쪽에는 두 정치범의
십자가가 더 세워졌다. 이 죽음의 목격자 속에는 중의원 의원, 제사장 가야바,
로마병과 백부장, 예수를 따라온 부인들, 구경꾼등이 있었다. 그러나 진짜 제자
들은 사방에 흩어져 예루살렘 주변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하나이다.
  예수의 마른 입술에서 새어나온 말이었다.
  대낮부터 오후 세 시까지 무더운 하늘의 해는 숨고 주위는 어두워졌으나(마태
복음 27장 45절) 아무런 기적도 일어나지 않았다.
   주여, 주여, 어찌 나를 버리시나이까?
  오후 세시, 예수는 마침내 십자가에서 목을 늘어뜨렸다.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다 이루었다.
  예수가 숨을 거두기 직전에 외친 두 마디였다.
  그의 나이 서른세 살로 때는 서기 30년 4월 7일이었다.
  <마가복음>은 3일 뒤에 부활한 예수의 일을 적고 있다. 그의 죽음은  부활 을
보여 주기 위함이었고, 그러한 부활과 승천을 근거로 창조주를 믿게 함으로써
죽음에 대한 해답의 열쇠를 제시하려 했던 것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산다(요한복음 11장 25절).
  예수의 이 한 마디 말이 모든 것을 다 포함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족을 멸문당한 충절 - 성삼문
  성삼문은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자는 근보, 호는 매죽헌이다.
  도총관이던 승의 아들로 홍주 노은동 외가에서 태어났는데 막 낳으려고 할
때, 하늘에서  낳았느냐? 하고 세 번 묻는 소리가 나서 삼문이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1438년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경연관이 되어 세종을 항상 가까이 모시면서 집
현전 학사 정인지, 박팽년, 신숙주 등과 훈민정음 반포에 기여하였다.
  문종이 죽고 단종이 즉위하자 수양대군(세조)은 어린 단종을 내쫓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예방승지였던 성삼문은 국새를 안고 크게 통곡을 하였다. 그는
동지들과 함께 뜻을 규합하여 이듬 해에 단종의 복위를 꾀하였다.
  명나라 사신의 송별 연회장에서 운검을 쥐게 된 아버지(승)와 무인 유응부가
세조를 죽이기로 하고, 한명회, 정인지 등의 일파를 제거하자는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연회날, 세조가 갑자기  자리가 협소하니 운검을 그만두라 는 지시를
내린다(운검이란 임금곁에서 큰칼을 들고 경호하는 사람을 지칭한다).
  그때 유응부를 계획대로 실행하자고 우겼고 삼문은 훗날을 기다리자고 말하였
다. 그러는 사이, 모의에 가담했던 김질이 겁을 먹고 밀고하는 바람에 계획은 수
포로 돌아가고 그들은 모두 체포되기에 이른다.
  노기 등등한 세조의 심문이 이어졌다. 형틀에 매어진 그에게 갖은 극형이 가
해졌다.
   쇠가 식었구나, 다시 달구어 오너라. 나으리의 형벌이 과연 참혹하구나.
  성삼문은 세조 옆에 앉아 있는 신숙주를 보며 또 호령했다.
   전에 너와 함께 집현전에 있을 때 영릉(세종)께서 원손(단종)을 안으시고 뜰
을 거니시며  과인이 죽은 후에 너희들은 모름지기 이 아이를 생각하라 하신 말
씀이 아직도 귀에 생생한데 너는 어찌 잊었느냐. 너의 의리를 저버리는 악함이
이 지경에 이를 줄이야 정녕 내 몰랐구나!
  무색해진 신숙주를 세조는 전각 뒤로 피하게 하였다. 세조는 유응부를 문초하
기 시작했다. 그러나 유응부도  연회날 내가 창으로써 나으리를 물리치고 옛 임
금을 복원케 하려 했는데,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제 간사한 무리의 밀고로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다만 나으리는 나를 빨리 죽이시오.  하고 말하였다.
  극도로 노한 세조는 무사를 시켜 유응부의 살을 깎으며 고문을 가하였다.
   광연전에서 나으리를 죽이지 못한 것이 못내 한이다 라고 하면서 같이 잡혀
간 성삼문 등 문신을 복 크게 꾸짖는다.
   옛부터 서생들과는 도모하지 말랬더니, 내 말만 듣고 그때 칼을 썼더라면 이
지경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오!
  유응부는 분개하였다. 이개, 하위지도 단근질로 거의 다 죽게 될 무렵 마침내
처형을 당했고 이개의 두 아들도 죽었다. 경회루에 빠져 죽으려 했던 박팽년도
노량진에서 형을 받아 죽었다. 성균관에서 귀가한 유성원은 사당에 나가 절한
뒤 자결하고 말았다.
  성삼문은 단근질로 거의 다 탄 몸을 이끌고 형장 새남터로 끌러나가면서 다음
과 같은 시를 지었다.
  북소리 이 목숨을 재촉하는데
  돌아보니 지는 해 서산을 넘네.
  황천길 주막집도 없을 것이니
  오늘 밤 뉘 집 찾아 쉬어 볼까나.
  대여섯 살밖에 안된 딸이 울부짖으며 행렬의 뒤를 따라오니 아버지 삼문은 뒤
를 돌아다보며 말한다.
   사내아이는 다 죽어도 너만은 죽지 않으리라.
  그의 부친도 주모자의 한 사람으로 극형을 당했고,  삼빙, 삼고, 삼성  등 세 아
우와 그의 네 아들  맹첨, 맹년, 맹종과 갓난아기 까지도 모두 죽음을 당했다. 당
시 성삼문의 나의 불과 37세였다.
  가족들도 참사를 면하지 못했으므로 누구 하나 그들의 흐트러진 시신을 거둘
수 없었다. 또 관의 눈이 무섭고 법이 지엄하여 일반 사람들은 감히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그런데 한밤중에 사람의 눈을 피해가며 그들의 시체를 몸소 거둬
가지고 한강 너머의 노량진에 묻은 사람이 있다. 그는 생육신의 한 사람인 김시
습이었다. 오늘의  사육신 묘 란 표지가 나붙은 자리가 바로 그 장소이다.

  


안중근과 이등박문의 죽음
  1909년 10월, 안중근은 노보케에프스크에 체재하고 있었다. 그는 갑자기 친구
들에게 블라디보스톡으로 갈 것이라고 말했다. 친구들은 왜 갑자기 떠나려하는
가 물었지만, 안중근은  그 이유를 모르겠다. 머리가 갑자기 복잡해져서 여기 머
물러 있을 수 없다. 고 말했다.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한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가 이 곳으로 온다는 소문을
듣고, 사실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대동공보와 원동보등의 각 신문을 살폈다. 과연
이토 히로부미가 며칠 안으로 하얼빈에 도착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그가 오랫동안 바라고 바라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기회가 마침내 온 것이다.
친지 김성백의 집에서 유하다 일찍 일어난 다음날 아침, 1909년 10월 26일, 그는
입고 있던 옷을 벗어버리고 멋있는 양복으로 갈아입었다. 권총을 품안에 넣고
역을 향해 나간 것은 오전 7시 경이었다. 역에는 많은 러시아 경찰과 헌병들이
이토를 마중할 채비를 갖추고 있었다. 안중근은 찻집으로 들어가 두세 잔 차를
마시고 이토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토가 탄 특별열차가 도착하였다. 이토
는 특별객실안에서 러시아 제국 재무대신 코코흐초프의 영접을 받으며 플랫폼으
로 나와 러시아군 수비대의 열병을 받았다. 군악대의 음악이 우렁차게 울려퍼졌
다. 영접나온 각국 대사들과 악수를 나누고 일본인 환영객들이 서 있는 쪽으로
몸을 돌려 나아가는 키 작은 백발 노인이 눈에 들어왔다. 안중근은 그가 이토일
것이라 확신하고 권총을 꺼내 그의 우측에서 세 발을 발사하였다. 그는 이토의
얼굴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이 자가 과연 이토인가 의구심이 일어났다. 그래
서  혹시 다른 사람을 쏜 것이 아닐까? 하고 망설이면서 후방에서 걸어오는 일본
인을 향하여 다시 네 발을 발사하였다. 이때 러시아 장교가 그를 덮쳐 쓰러뜨렸
다. 안중근은 넘어지면서 하늘을 향하여  코리아 우라(한국 만세) 를 세 번 외쳤
다. 그리고는 큰소리로 말했다.  내가 도망칠 줄 아느냐? 도망칠 생각을 했다면
죽음터에 들어서지도 않았을 것이다.  총격을 받은 이토 히로부미는 만주철도 총
재 나카무라 제코, 무로다 요시부미, 후루야 히사즈나 등의 부축을 받으며 열차
안으로 옮겨졌다. 수행의사 고야마 젠과 거류민단에서 파견된 의사 모리 다카시
의 응급조치를 받았지만 고야마가 권하는 블랜디를 입에 머금은 채 가해자가 한
국인이란 말을 듣고는  바보 자식 이란 말을 했고, 다시 블랜디를 요구하여 마셨
지만, 세 모금째부터는 이미 마실 기력조차 없었으며, 이윽고 얼굴이 창백해지더
니 9시 30분 피탄 후 30분이 지난 오전 10시에 숨을 거두었다. 일본인들은 그의
시체를 기차로 대련에 실어갔다.
  사건 후 러시아 병사들에게 체포된 안중근은 한국인 통역을 통해 러시아 재판
소 검사의 심문을 받았다. 안중근은 러시아 재판관의 물음에 이렇게 항변하였다.
   나는 대한 국민이다. 이토 그놈이 우리의 독립을 강제로 빼앗고, 우리의 민족
을 살육하였으나 나의 이 행동은 우리의 독립을 회복하고, 우리의 민족을 보호
하며, 하늘에 사무치는 원한을 풀기 위한 것이었다.
  이 일이 널리 알려지자 세상 사람들은 모두 감동되어 혀를 차며  한국에도 인
재가 있다. 한국에도 인재가 있다. 라고 하였다. 그러나 러시아 측에서는 한국인
의 재판권을 행사할 수 없기에 안중근을 곧 일본 영사관으로 이송하였다. 일본
정부는 안중근과 연루자들을 넘겨달라고 러시아와 교섭하여 러시아의 승낙을 었
었다. 그리하여 하얼빈에 있는 한국사람 9명을 체포하여 4일간 심문하고 여순으
로 압송하였다. 안중근의 처와 아이들도 하얼빈에서 잡혔고, 두 동생도 진남포에
서 체포당한 뒤 공모한 일이 있는가 하여 엄한 심문을 당하며 혹심한 학대를 받
았다. 나중에는 여러 친척 집도 모두 수색당하였다. 안중근의 어머니 조씨는 평
양의 천주교 성당에 있었는데 경찰이 찾아와서  당신의 아들이 이토 공작을 살
해하여 두 나라에 크나 큰 사변을 빚어냈소. 이것은 당신이 잘 가르치지 못한
탓이므로 당신도 죄가 없다 할 수 없소. 라고 을러대니 어머니는,
   아들이 밖에서 한 일을 내가 알 리 없지만 나라 위해 죽는 것은 국민의 사명
이다. 내 아들이 나라 위해 죽는다면 나도 아들을 따라 죽을 것이고 또 죽음을
달갑게 여기겠다.  고 하였다.
  안중근은 심문이 시작되자 이름은 안응칠, 나이 31세, 직업은 사냥꾼, 출신은
한국 평안도 평양 교외라고 답하며 자신이 한국인임을 명확히 하였지만, 부모와
처자가 있다는 사실은 숨겼다. 종교에 대해서는 천주교라 답했다.
   이토 히로부미를 왜 살해했는가. 라는 미조부치 검찰관의 질문에 그는 당당하
게 이토의 죄상을 열거했다. 이토의 열 다섯 가지의 죄상을 그는 미리 마음속으
로 정리해 두고 있었던 것이다.
  1. 10여년 전 이토가 지휘하여 한국의 왕비를 암살하였다.
  2. 5년 전에 이토는 한국에 매우 불리한 5개조의 조약을 체결하게 하였다.
  3. 3년 전에 이토가 체결한 12개조의 조약은 한국의 군대에 불이익을 초래하
였다.
  4. 이토는 한국황제를 강제로 폐위시켰다.
  5. 이토는 한국 군대를 해산하였다.   
  등의 것이었다.
  11월 14일의 안중근에 대한 제2회 심문에 앞서 검찰측에서는 독자적인 수사를
벌인 결과, 그의 본명이 안중근이고 그의 조부는 진해군수를 역임했으며, 아버지
안태훈은 천주교도이며 대대로 사대부 명문 집안임을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는 동생이 둘 있어서, 정근은 경성에서 공부를 하고 있고, 공근은 진남포
에서 선생을 하고 있다는 사실과, 안중근에게는 아내가 있고 다섯 살과 두 살박
이 아들이 있으며, 지금 하얼빈에 와 있다는 사실을 모두 포착하였다. 이러한 사
실들을 말하자 안중근은 단지 모르는 것은 모를 뿐이라고 하면서  난 절대로 거
짓말은 하지 않는다. 고 단언했다. 마지막 공판에서  나는 이토를 개인자격으로
죽인 것이 아니라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죽였다. 가장 정당한 일을 했
을 뿐이다. 라고 말했다. 심문에 임하여 태연자약한 태도로 당당하게 진술했던
것이다. 공판에서 사형이 선고된 후에도 그는 수십 일이나 감옥에 갇혀 있었다.
  여순감옥에 있을 때에는 그는 마치 생사를 잊은 듯,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
럼 태연자약하게 보였다고 한다. 그가 5개월간이나 기거했던 여순감옥소의 2평
마루 감방은 제2동 2층 왼쪽에 있었다. 음산한 감방복도, 좌우양측 감방에서 협
소한 철창을 통해  들어오는 희미한 광선 아래에서 그는 80여 점의 유묵을 남겼
다. 그리고  2천만 동포에게 고함 이라는 글도 지었다.
  사형 집행일인 1910년 3월 26일 오전 9시. 그는 새로 지은 한복으로 갈아입고
얼굴에 희색을 띠며 형장으로 나섰다.
   나는 대한독립을 위해 죽는 것이며, 동양의 평화를 위해 죽는 것이니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 그러나 유감이라면 국권회복의 날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여러분
들은 우리 대한이 독립하여야만 동양의 평화가 보장될 수 있고 따라서 일본도
역시 장래의 위기를 모면할 수 있다는 것을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오전 10시. 교수대의 대상에 오른  도마 (세례명) 안중근은 3분동안 기도하였
다. 이때 그는 32세였고, 그날은 흐린 날씨에 비가 내렸다.
   살아서 나라와 민족의 욕이 될 때는 오히려 죽음을 택하라. 던 안중근의 어머
니, 조 마리아 여사는 아들의 사형선고가 있은 뒤 안중근을 면회하러 가는 그의
두 동생들에게 이런 말을 전하게 했다.  상고를 거부하고 깨끗이 교수대에 오르
라 고, 그리고 그의 어머니는 독립운동에 몸바치려고 끊었던 안중근의 손가락을
평생 간직한 채, 아들에 대한 자부심과  하늘에서 다시 만날 것 을 믿는 천주신
앙 속에서 지내다가 48세를 일기로 아들의 뒤를 따랐다.
  사람들은  시모시자  즉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라 일컫기에 주저함이 없었다.



  이등박문의 죽음
  요절한 일본의 민요시인 이시가와다꾸보쿠는 이등박문의 사망소식을 전해 듣
고 추도가 9수를 지었다. 그리고 그의 암살사건의 경위와 영향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오늘 아침 동경의 각 신문은 대부분이 모든 지면을 할애하여, 공이 조난당한
보도를 만재했다. 따라서 지금은 조금의 의심이 여지도 없다. 이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공은 6일 오전 9시 하얼빈에 도착해, 객차에서 내려 환영나온 사람들과
악수를 나누고 있던 중, 갑자기 한국 혁명당 청년이 공격을 하여, 복부에 2발의
권총 탄환을 맞아 30분 뒤에 차안의 한 구석에서 잠들게 되었다. 위대한 정치가,
위대한 심장-69년간, 조금의 쉴 틈도 없이 신일본의 경영과 동양의 평화를 위해
활기찬 고동을 계속해 온 위대한 심장은 지금 홀연히 첫눈이 내리는 이역의 아
침에 그 활동을 영원히 멈추었다.
  이렇게 해서, 오늘은 우리들 국민이 마지막 슬픔을 고 공작의 영전에 고해야
하는 날이다. (중략) 하늘도 흐리고 낮아졌다. 우리들은 오늘 더 이상 아무런 할
말이 없다.  공의 흉사가 세계에 미친 감동은 지대하다. 그렇다. 의외로 지대하
다. (중략) 우리들의 슬픔은 길다. 그리고  또 이토공으로서는 죽음의 장소를 잘
얻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최후의 순간까지 국사에 몸을 바친, 고인도 은근히 만
족했을 것이다. 그리고 한인의 심사를 가련하다고 해야할까. 공이여 고이 잠드소
서.  (이하생략)
  위에서 다꾸보꾸가 지적한대로 이토는 죽음의 장소를 잘 얻은 것이었다. 왜냐
하면 그는 국사를 위해 타국을 방문하던 공무집행중에 죽었기 때문이다. 뼈밖에
남지 않은 이 백발의 노인은 평소 동경에 있는 요시하라 술집에 파묻혀 살았는
데  취하면 미인의 무릎을 벤 채 잠이 들었고, 깨어나면 천하 권세를 잡았노라.
고 외치던 자신의 말대로 만약, 기생의 무릎을 베고 거기에서 죽었다면 그러한
찬사와 대접을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안중근의 손에 의해 죽음을
당함으로써 이름을 빛내게 되었던 것이다.
  이토는 만주 출행을 앞두고 잠시 망설였다고 한다.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것
은 아니지만, 무언가 썩 내키지 않는 구석이 있었던 것 같아했다. 야심이 대단하
던 그는  이번 만주 여행은 정치적 성격을 띠지 않은 한가한 여행 이라고 선언
했지만 속셈은 따로 있었다. 그의 목적은 관동도독부를 철폐하고 한국통감이 된
것만으로는 부족해서 중국에 통감을 두어 중국의 재정사무를 감독하여야 한다고
주장해 왔던 것이다. 만주문제를 상론하기 위해 러시아대신과 하얼빈에서 만나
기로 약속을 한 것. 이것이 바로 안중근 의사가 말한  천재일우의 좋은 기회 였
던 것이다.
  이토는 중국 시찰을 앞두고 주역의 대가인 다카시마라는 사람이 이등박문의
출행점을 쳤다. 득괘는 간위산의 3효동으로 중산간이다.  간은 산 이니 간지간은
 산넘어 산 이란 뜻이다. 간은 또한  멈추라 는 뜻이니  원행을 중지하지 않으면
위태롭다 고 그는 말했다. 그를 사살한 안의사의 이름은  중근 (간간은 중간). 다
카시마가 풀이한 역의 예시는 이와 같았다.



  제4장 죽음 또한 자연 아닌가


  육신, 그 하찮은 것들 - 프로티누스 / 데모낙스 / 함허득통

  


프로티누스
  프로티누스(서기 205-270)는  일체가 죽어도 죽지 않는 부분이 있다. 인간에게
는 신적인 것이 있다 는 것을 처음으로 주장한 사람이다.
   나는 가끔 육체로 부터 나 자신으로 깨어나 다른 모든 것 밖으로 나가고, 나
자신의 내부로 들어와 경탄할만한 아름다음을 거기에서 발견한다.
  이렇게 황홀경의 체험을 말한 그는 신비주의의 개조가 되어 시인 키츠, 예이
츠, 엘리어트, 릴케 등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그의 사상은 폴피리우스,
디오니소스, 에크하르트, 스피노자, 헤겔 등으로 계승되었다.
   프로티누스는 자기가 육체를 쓰고 있는 것을 몹시 부끄러워하였다. 그래서 그
는 조상이나 부모나 고향에 대하여 일체 말하지 않았다. 고 폴피리우스는 그의
전기에 적고 있다.
  어느 날 제자들이 초상화를 그리려고 했을 때, 그는 노발대발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아니 자연이 우리에게 뒤집어씌운 그림자(모상)를 쓰고 있는 것도 부족해서
좀더 오래 가기 위해서 그림자의 그림자를 그려서 그것을 바라보자는 것이 대체
무슨 가치가 있느냐?
  그는 만년에 폐결핵과 후두염을 앓았다. 문둥병에 걸린 것처럼 손발에 종기가
흉했으나 끝까지 강의실에서 최선을 다했다. 흐려진 목소리로 프로티누스는 임
종때 이런 말을 남겼다.
   우리들의 속에 있는 신적인 것을 만유 속에 있는 신적인 것 밑으로 돌이켜
올려보내기 위해서 나는 지금 애쓰고 있다.
  한 마리의 뱀이 그가 누워 있는 침대 및을 지나서 담 사이의 틈 바구니로 서
서히 그 모습을 감추었을 때, 바로 그는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66세였다.



  데모낙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데모낙스는 107세가 되어 러시아의 작가 고골리처럼 식
음을 전폐하여 굶어 죽고 말았다.
   당신 같은 분의 유해가 개나 새 따위의 먹이가 된다는 것은 부당합니다.
  제자들은 그의 유언을 따를 수 없다고 우겼다. 데모낙스는 말하였다.
   죽어서도 아직 살아 있는 것에게 도움을 죽 수 있다면 그것은 좋은 일이 아
니겠는가?
  데모낙스도 몸(시신)을 가벼이 여겼다.


 함허득통 스님
  무학 대사의 제자이던 함허득통 스님은 더 쉬운 말로 이것을 설명했다.
   원래 죽음이란 없는 것이요, 영원히 존재하는 영혼의 불멸성을 인정한다면 부
스럼딱지와도 같은 시신은 아무렇게 해도 무방하지 않은가. 죽음은 부스럼이 딱
지져 딱지를 없애는 것과 같고, 묶은 것을 풀어서 칼틀에서 벗어나는 것과 같고,
새가 초롱을 나오는 것과 같고      . 즉 생사를 초월하는 것이요. 그런데도 육신을
잊지 못해 어찌 미련을 두는지, 이런 사람의 시체는 물에 띄어도 옳고 길가에
팽개쳐도 옳은 것이다. 라고 하였다.



  특이한 유언 - 황진이 / 조조 부자

  길가에 시체를 버려주오 - 황진이
  재색을 겸비한 명기 황진이는 한창 므르익은 나이 사십을 전후해서 죽었다.
  송악산 옛 터전의 번화했던 그 시절
  어쩌다 이 봄이 가을인양 쓸쓸한가.
  인생의 덧없음과 무상의 도리를 그녀는 알고 있었다. 한 때는 서화담의 문화
를 기웃거리기도 했다. 만년에는 이런 유언을 남겼다.
  내가 죽거든 관을 쓰지 말고
  그 시체를 동문 밖 길가에 버려서
  개미와 까마귀와 솔개의 밥이 되게 하여
  천하의 여인들로 하여금 경계하게 해달라.
  그러나 사람들은 그녀의 유언대로 하지 않고 그녀를 황해도 장단 근교에 고이
묻었다.


  조조, 그에게도 죽음이
  난세의 영웅 조조 앞에도 죽음은 찾아왔다.
  건안 25년(220년), 일세를 풍미하던 지략가 조조도 66세를 일기로 유명을 달리
했다.
   천하는 아직 불안정한 상태에 있는 만큼 굳이 옛날 법도에 따라 거창한 장례
를 지낼 필요는 없다. 장례가 끝나거든 곧 상복을 벗고록 하며, 주둔지에 있는
장병들은 부서를 떠나지 말라. 또한 관리들도 평소대로 근무에 힘써라. 나의 시
체에는 평복을 입혀야 하며 절대로 왕후 귀족의 옷을 입혀서는 안된다. 또한 관
속에 금은보화나 진귀한 물건을 넣어서도 안된다.  (위지 무제기)
  실제 조조는 왕후 귀족의 분묘를 파헤쳐 그 속에 있던 보화를 꺼낸 사람이다.
꺼낸 물건으로 무기를 제작했다고 한다. 왕릉을 치장한 진시황과는 정반대로 현
실감각이 뛰어난 위정자였다.
  이런 유언장 덕분에 갑작스런 죽음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런 혼란없이 황태
자인 조비가 왕위를 계승하여 정치의 공백을 메울 수가 있었다.
  조조는 임종에 즈음하여 평소에 소장하고 있던 명기와 재화를 시녀와 애첩에
게 나누어 주었다. 자신이 죽은 후 각각 고향에 돌아가 삯바느질이라도 하면서
여생을 조용히 살도록 해주기 위해서였다. 최후의 모습이 퍽 인간적으로 느껴진다.
  조조의 아들 조비 역시 현실주의자였다. 그도 유조에서  죽으면 뼈에 통양의
지각은 없다. 그러니 볼모의 땅(경작할 수 없는 땅)에 묘를 쓰고, 금은 등을 넣
어서는 안된다. 모두 기왓장으로 만들라 고 지시했던 것이니 그 아버지에 그 아
들이라고 할 만하다.

  


아내의 주검 앞에서 노래 부른 장자
  장자의 이름은 주이고 자는 자휴이다.
  전국시대 중기인 기원전 369년경 송나라에서 태어나 기원전 289년 경에 죽었
다. 그의 생애는 자세치 않으나 <사기>에 의하면 하남성 부근 지역인 몽현에서
옻나무 동산을 관리하는 하급관리를 지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생활에 곧 싫증
을 내고 청산으로 들어갔다. 짚신을 엮어 호구를 해결하면서 유유자적하게 살았
다. 그런데 어느날 그의 아내가 죽자, 장자는 땅바닥에 두 다리를 뻗고 앉아 항
아리를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의 둘도 없는 친구 혜시가 조문을 왔
다가 이 광경을 보고 친구를 나무랐다. 장자는 혜시에게 이렇게 답했다.
   아내가 죽자 나도 놀라고 슬펐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삶과 죽음이란 봄, 여
름, 가을, 겨울이 왔다가 가고, 갔다가 다시 오듯이 무한히 순환하는 것과 같다.
내 아내는 지금 거대한 방에서 편히 잠자는데 내가 곡을 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너무나 천명을 모르는 소행처럼 생각되었다. 그래서 곡을 하는 것을 그만 두었
다.
  그는 한 하늘 아래, 흐린 날과 맑은 날이 있는 것처럼 삶과 죽음을 그렇게 해
석했다.
  오직 나와 저(해골)만이 알고 있다.
  일찍이 삶도 없고 죽음도 없다는 것을.
  삶과 죽음을 걱정하랴
  삶과 죽음을 즐거워하랴
  오직 너와 나만이, 네가 일찍이 죽지 않았고
  일찍이 산 적도 없다는 것을 안다.
  너는 과연 해골이 된 것을 괴로워하는가
  나는 이 세상에 있는 것을 기뻐하고 있겠는가
  그는 죽음이 임박하여 제자들에게 말했다.
  땅으로 관을삼고, 하늘로 관뚜껑 삼겠다.
  해와 달과 별이 내 장식품이 되리라.
  내 장례는 이미 준비가 되었으니 무엇을 더 준비하랴.



  생사의 이치를 탐구한 사람들 - 서화담 / 소강절
 


생사는 기의 뭉침과 흩어짐일 뿐 - 서화담
  서경덕은 조선조 성종 20년 송도의 화정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개성의 동문
밖 화담 위에 서사정이란 초막을 짓고 단좌묵상하면서 오직 진리 탐구에만 전념
하니 사람들이 그를 화담 선생이라 불렀다.
  어머니 한씨는 공자의 묘에 들어가는 태몽을 꾸고 그를 낳았다고 한다. 타고
난 총명으로 어릴 때부터 그는 탐구하는 모습이 남달랐다.
  그가 어릴 때 나물을 뜯으러 가서 매일 빈바구니로 늦게 돌아오자 어머니가
그 까닭을 물었다.
   나물을 뜯다가 새 새끼가 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제는 두 치쯤 날아올랐고
오늘은 세 치쯤 날아오랐습니다. 새의 나는 모양을 보고 그 이치를 생각하느라
늦었습니다.
  그는 하늘의 이치를 알고 싶으면  하늘 천 자를 벽에 붙여놓고 문을 잠그고 한
없이 글자를 바라보며 그 이치를 생각하였다. 14세때 향촌 서당에서  기삼백 편
을 수학하다가 막혀 버리자 집에 돌아와 보름 동안을 밤낮으로 궁리한 끝에 스
스로 해득하였다고 한다.
  <대학>을 읽다가  격물치지 (앎을 얻게 되는 것은 사물의 이치를 구명함에 
있다) 장에 이르자 기쁨의 눈물을 철철 흘리며 운 것은 열여덟 살 때의 일이다.
   아! 사람이 되어서 우주의 진리, 그를 깨닫지 못하고서야 어찌 사람이며 선비
가 되어서 그를 격구치 못하고야 글을 읽어 무엇하랴?
  분발하면서 며칠씩 잠을 자지 않기로 하고 조금 눈을 붙이면 꿈속에서 풀지
못한 이치를 알아내었다고 한다. 나중에는 문지방을 넘지 못할 정도로 쇠약해
졌으며 나이 40에 벌써 60노인처럼 보였다.
   당년에 그를 만나보았으면 10년 동안 읽은 글보다 나을 것을!
  퇴계는 그를 만나보지 못한 것을 한탄하였다.
   서화담은 자질이 상지에 가까워서 시골에서 일어나 스스로 공부할 줄 알았고
소옹(소강절)의 역학에 더욱 깊어서 황극경세의 수를 산출한 것이 하나도 틀림
이 없으니 기특하도다.       복희의 역학방법을 아는 이는 아조의 이 한사람뿐이
었다.
  상촌 신흠이 그의 문집에서 이렇게 그를 평가해 놓았다.
  화담은 공자가 주공을 사무치게 그리듯, 소강절을 몹시도 사모하였다.
  화담은 <귀신생사론>에서 생사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정이천은 사와 생, 사람(생)과 귀신(사)은 하나면서 둘이요, 둘이면서 하나라
했으니 이것으로써 다 말한 것이다. 나도 사와 생, 인과 귀란 다만  기의 뭉침과
흩어짐일 뿐 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이 죽어 흩어짐은 형체만 흩어질 뿐이요, 담일 청허한 기운의 뭉침은 끝
까지 흩어지지 아니 하느니 흩어진다 해도 태허담일한 안에 있어 그와 동일한
기이다.       (생략)       눈앞에 사라져 버림을 보지만 그 나머지 기운이야 마침내
흩어지지 아니하는 것이니 어찌 이것을 다 없어진다고 하겠는가?
  이렇게 화담은 생사를 촛불에 비유하여 촛불이 타서 없어지는 것 같지만 그
기는 우주 안에 그대로 있는 것과 같이, 사람도 죽으면 보이지 않는 우주 속에
그대로 있다고 하였다.
  화담이 떠나던 날은 늦더위가 한창인 7월이었다.
  화담은 제자들에게 자신을 화담 못가로 옮겨 달라고 하여, 그 물로 몸을 깨끗
하게 씻고 돌아온 후 임종에 이르렀다. 명종 원년. 세수는 58세였다.
  그날은 마침 천계에서 견우성과 직녀성이 만나는 칠석 날이었다.


 소강절
  소강절은 중국 송대의 유학자로 이름은 옹, 자는 요부 강절은 그의 시호이다.
이정지에게 도가의 도서선천성수의 학을 배워 신비적인 수이학설을 세우고 이에
의해 우주관과 자연철학을 설파하였다.
  소강절은 <황극경세서>에서 우주의 생성과정을 숫자로 파악해 놓았다.
  이에 화담은 소옹의 도서나 상수에 관한 이론들을 해설하였고, 이러한 화담의
기수학은 토정에게로 이어졌다.
  살펴보면 소강절과 서화담, 이 두 사람의 생애는 물론, 죽을 때의 모습까지도
서로 비슷하였다, 도학자답게 안심입명의 태도를 취하면서 마지막 한 말까지도
그들은 비슷하였다. 집안의 처지 또한 비슷했다.
  그들의 선대는 비록 덕망은 높았으나 모두 벼슬없이 가난한 살림을 살았으므
로 둘은 어려서부터 집안일을 도와야만 했다. 비바람이나 겨우 가리는 초당에서
근근히 끼니를 이어가면서도 두 사람 모두 진리 탐구에 몰두했으며, 세상의 명
리나 벼슬따위에는 둘 다 초연했던 것이다.
  조정에서 높은 벼슬을 내리려 해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자신의 견문을 넓히기
위해 그들은 여행을 하였는데 소강절은 황하 유역, 한수 유역에 이르는 넓은 지
역을 둘러보았고, 화담은 속리산, 지리산, 금강산 등 명산을 두루 찾아다녔다.
  특히 그들의 학문은 궁리를 통해 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자득해 들어가
는 공부의 방법까지도 서로 비슷하였던 것이다. 우주의 원리를 궁리하는 것에
그들은 다같이 일생을 바쳤다.
  향년 66세, 소강절은 죽음에 임하여  삶과 죽음이란 모두 보통있는 일이다. 라
는 말을 남겼다. 임종을 앞둔 화담 또한 제자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삶과 죽음의 이치를 안 지 이미 오래니 심경은 평안하기만 하다.



  심학의 철학가 - 육상산 / 왕수인

  죽음 또한 자연이 아닌가 - 육상산
  왕수인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중국의 철학가 육상신은 54세에 죽었다.
  주자의  성즉리 에 그는  심즉리 라는 학설을 듣고 나와 주자와 쌍벽을 이루었
다. 주자는 아홉 살 아래이던 그의 논적 육상산의 부음을 듣고 대성통곡을 했다
고 한다.
  육상산의 부임지이던 형문(호북성)에서 생애를 마쳤는데, 죽기 수일 전, 가족
에게  나는 머지 않아 죽을 것이다. 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가족들이  왜 그런 불길한 말씀을 하십니까? 라고 했더니 육상
산은 조그만 목소리로 나직하게 말했다.
   죽음 또한 자연 아닌가?
  숙환인 폐결핵이 재발하여 그는 자신이 오래 못살 것을 알았다. 정무를 정리
하고 가사를 정돈했다. 그는 약물까지도 거절해왔다. 목욕한 뒤 새옷으로 갈아
입었다. 의관을 정제한 뒤 반듯하게 앉아서 죽었다. 12월 14일 눈 내리는 겨울날
이었다.

 마음이 곧  천리 라고 한 왕수인
  왕수인의 호는 양명이다. 그는 명나라 사람으로 절강성 여요에서 태어났다. 뛰
어난 철학자로 정치에 참여하여 농민봉기를 진압하고  신호의 난 을 평정하여 벼
슬이 병부상서에 이르렀다. 그도 폐질환으로 57세의 아까운 나이에 죽고 말았다.
  왕수인은 육상산의  심즉리 를 중심으로 하여 마음이 곧 천리라는 학설을 내세
웠다.
   모든 일과 모든 존재의 리는 내 마음을 벗어나지 않는다.  고로 마음 밖에 따
로 이치나 사물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는 부정하였다. 우주는 곧 나의 마음이며
나의 마음이 곧 우주라는 육상산의 학설을 계승한 왕수인은 만물이 모두 사람의
마움에 의지해서 존재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친구에게 꽃을 예로 들어 만물이
사람의 마음에 의지해서 존재한다는 것을 설명하였다.
  친구가 낭떠러지에 있는 꽃을 보고 먼저 물었다.
   이 세상에는 마음 밖에 어떤 사물도 없다고 하였는데 이 꽃나무는 저절로 피
었다가 저절로 떨어지곤 하지 않는가? 그것이 나의 마음과 무슨 상관이 있는
가?
   자네가 이 꽃을 보지 않았을 때에는 이 꽃과 자네의 마음은 다 고요했었다.
그런데 자네가 여기에 와서 이 꽃을 보았을 때는 이 꽃의 빛깔이 일시에 또렸해
졌다. 이것으로 이 꽃이 자네의 마음 밖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왕수인의 대답이었다. 네가 꽃을 보았을 때 그것이 네 마음 가운데 나타난다
는 것은 꽃의 존재가 너에게 감지된다는 뜻이며, 꽃의 존재는 곧 너의 마음속에
있다는 것이다. 그는 사람의 몸도 사람의 마음으로 말미암아 주재되며 모든 행
동은 마음속의 의지와 생각에 의해 지배된다고 하였다.  몸을 주재하는 것은 곧
마음이다.
  그러니 모든게 어떻게 마음밖의 일이겠는가?
  그의 제자들이 임종을 앞두고 스승께 물었다.
   선생님 지금 심경이 어떠하십니까?
   이 마음이 광명한데 또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느냐.
  이렇게 도학자들은 모두 죽음앞에서 지극히 담담하였다.
  서화담과 소강절, 주자와 퇴계, 육상산과 왕수인, 그리고 토정선생.
       마음이 이미 평안하다. 의 서화담.
   삶과 죽음은 보통있는 일이다. 의 소강절.
   죽음 또한 자연 아닌가? 의 육상산.
   조화를 따라 사라짐이여, 다시 무엇을 구하리요. 의 퇴계선생.
   인명은 하늘에 있는 법, 서러워 말아라. 의 토정선생.
  퇴계와 토정, 육상산은 정좌한채 영면에 들었다. 이들은 모두 목욕을 마친 뒤
새 옷으로 갈아 입고 의관을 정제한 뒤 자리를 정돈하였다. 그의 제자들이 왜
그렇게 하느냐고 묻자 화담은  성인들은 모두 이렇게 하셨다. 라고 답할 뿐이었
다.



  제5장 죽음보다는 철저한 삶을
  서양 철학자의 적극적인 삶
  동양의 철학가들은 안심입명을 한 탓인지 모두 죽음 앞에서 담담하였다. 그들
은 대부분은 정좌한 채 영면에 들었다. 우연의 일치인지 공자와 맹자는 세 살
때 아버지를 잃었으며, 송대의 공자라고 칭했던 주렴계와 장횡거도 어린 시절에
고아가 되었다. 퇴계와 우암까지도 전부 과부의 손에 양육되었다.
  주렴계는 56세, 장횡거는 50세, 정명도는 53세, 서화담은 58세로 모두 아까운
50대에 죽고 말았다. 육상산은 54세, 그의 심학을 전수 받은 왕수인은 57세에 폐
질환으로 죽었다.
  최소한 70은 넘겨 살아야 학문이 원숙하고 자기의 무엇이 나올 수 있지 않겠
느냐고 김충렬 교수는 말했지만 그러나 어찌하랴. 토정 선생의 말씀대로  인명은
하늘에 있는 법 인 것을.
  그러나 동양의 철학자와는 달리 서양 철학자들은 오래 살았다. 대부분의 철학
자들은 소식을 생활화하였고 엄격한 섭생법을 잘 지켰기 때문에 볼테르는 84세
를 살았다. 실제로 볼테르는 워낙 약골이어서 모두들 오래 못살 것이라고 했었
다. 30년도 살기 어렵다고 한 칸트는 80세의 장수를 누렸다. 야스퍼스는 어릴 때
부터 협심증과 천식의 불치병을 갖고도 스피노자의  조심 을 좌우명으로 삼았기
때문인지 86세까지 살았다. 조산아로 태어난 홉스나 뉴턴 같은 이도 규칙적인
생활로 자기절제를 잘한 탓에 각각 91세, 84를 넘겼다.
  1년도 넘기기 어렵다고 한 데카르트는 허약 체질로 54세까지 살았다. 서양 철
학자들의 경우 동양 철학자들에 비해 독신자가 많았으며 훨씬 장수하는 경향을
나타냈다. 이들이 대부분 80-90세까지 살았다.
  탈레스, 헤라클레이토스, 플라톤, 뉴턴, 존로크, 아담스미스, 벤담, 키에르케고
르, 칸트, 니체, 라이프니츠, 데카르트, 쇼펜하우어, 스피노자 등은 독신이었으며,
 결혼한 철학자는 희극에 속한다 고 말한 이는 니체였다.
  철학자답게 마음의 평정을 중시한 것은 모두 동서양이 같았다. 제자를 위해
마지막까지 수업을 계속한 점도 공통된 모습들이었다. 그러나 고요하게 앉아 죽
음을 초탈하는 동양의 도학자나 선사들의 마지막 모습이 정적이라고 한다면 서
양 철학자들의 경우는 동적이며, 훨씬 적극적임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생을 긍
정적으로 표현하였으며 생에 대한 찬사 또한 아끼지 않았다.
  에피쿠로스는 72세가 되자 자신의 종말을 예감하였다. 그는 재산을 모두 처분
하고 노예들을 풀어주며 친구 미도메데스에게는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나는 생에 있어서 행복한 나날을 체험하고 동시에 그것을 마칠 때에 즈음하
여 당신에게 이 편지를 써둔다. 오줌이 나오지 않는 괴로움이 자주 엄습하고, 이
고통보다 더 지독한 것은 없을 정도의 설사로 고통받고 있다. 그러나 나의 정신
속에는 내가 쟁취할 수 있는 모든 인식을 상기시키는 기쁨으로 가득 차 있
다      .
  그는 지병인 요도염 때문에 욕탕 속에 들어 앉아 온수욕을 하며 포도주를 마
시다가 그대로 숨을 거뒀다. 그러나 이렇긋 정신은 기쁨으로 충만되어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나보다 즐겁고 착한 생애를 지낸 인간이 있다고는 보지 않는
다 고 자신에 대해 만족해 하며 죽었다.
  20대에 일찍 부모를 잃고 떠돌이로 살면서 나중에는 귀까지 먹었건만 존 로크
는 자신의 비문에 이렇게 썼다.
   길가는 나그네여, 잠시 그대들의 발을 멈추어라. 여기 존 로크가 누워 있다.
그가 어떤 사람이었든지 묻는 이가 있으면 그는 자기 운명에 만족하고 산 사람
이라고 대답해 주어라.
  노예로 태어난 현자 에픽테토스는 그의 주인에게 고문을 받다가 다리가 부러
졌을 때에도  주인님 그렇게 비틀면 부러진다고 내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하고
마치 뜰 안의 나뭇가지가 부러진 일 이상으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는 영 외
에는 아무 것도 사랑하지 않았다. 가진 것은 없고 절름발이였지만 그는 자기를
가진 것으로 행복할 수 있었다. 소유는 인간을 노예화하고, 존재는 인간을 자유
화한다고 믿었다. 비록 노예였으나 그의 80여생은 이러한 평정속에서 생을 즐겁
게 보낼 수가 있었다.
  파스칼은 병의 고통을 통해서 오관의 쾌락을 끊을 수 있으며, 정욕도 끊을 수
있으나 병은 오히려 환영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언제나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고 있던 칸트는 기쁨에 넘치는 얼굴로 죽는 순간  야! 참 좋다 는 말을 남겼다.
  독일의 플라톤이라고 지칭한 슈라이에르마허는 70세가 되어 임종이 가까워지
자 부인에게 말했다.
   지금 의식과 무의식 사이를 방황하고 있지만 내 속에서는 천국을 즐기고 있
소.
  이처럼 생을 적극적으로 살고 죽음을 긍정적으로 수용하였던 것이다.
  네 살 때 시를 짓고, 작곡을 즐긴 천재 소년 니체. 그는 어려서부터 두통에 시
달리고 눈병과 매독으로 고통을 겪으면서도 자신의 삶과 운명을 끝까지 사랑한
놀라운 사람이었다. 그를 실존철학자라 부르며  생의 철학자 라고 부르는 이유도
아마 여기에 있으리라, 비참한 경우를 당하더라도 굴하지 않고  현재의 삶 을 대
단히 소중하게 생각하였다.
  니체의 후계자로 실존주의 작가인 카뮈는 인간의 운명을 시지프시적 비극에
비유하였다. 시지프스는 산꼭대기에 올려놓은 바위가 아래로 굴러 떨어지면 다
시 올려놓아야 하는 벌을 받은 신이다. 영원토록 반복되는 이 고통 속에서도 그
는 그런 노력이 허사라는 사실에 대해 아무런 불만조차도 갖지 않았다. 카뮈는
오히려 그러한 순간이 바로  행복하다 고 선언했다. 인생의 행복이란 결과에 있
는 것이 아니라 과정 그 자체이듯이 살아 있음의  생 을 강조하려고 했던 것이리
라.
   참된 철학자는 결코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다. 철학자의 지혜는 죽음에 대한
명상이 아니라, 삶에 대한 명상이다 라고 말한 이는 스피노자였다.
  그들의 사고방식은 보다 현실적이며 긍정적이었다. 그래서 행동 반경의 보폭
도 크고, 사회에 참여의식도 높았다. 임금이 벼슬자리를 내주며 불러도 쉽사리
응하지 않았던 동양의 도학자들에 비해 서양 철학자들의 사회진출은 매우 진취
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결혼을 네 번씩이나 하고 영국 최고 문화 훈장과 노벨 문학상을 탄 러셀은 싸
움이 터질 때마다 케네디, 흐루시초프, 주은래 등에게 전쟁방지를 촉구하는 편지
를 부지런히 보냈다. 98세까지 살면서 그는  러셀국제전범법정 을 창설하여 명예
회장이 되기도 했다.
  에딘버러대학의 총장이 된 카알라일, 프라이브르쿠대학의 총장이 된 하이데거,
하이델베르그대학 총장이 된 야스퍼스, 미국교육연맹 총재가 된 존 듀이, 베를린
대학의 총장이 된 헤겔, 프라하대학의 총장인 슈라이에르마허, 칸트는 두 번씩이
나 모교의 총장직을 맡았다.
  노벨 문학상을 거절한 사르트르,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베르그송, 노벨 평화상
을 수상한 슈바이처, 모교의 총장이 된 아담스미스 등.
  존 로크, 야스퍼스, 프로이드, 슈바이처, 칼 융 등은 의사였다.



  왜 그들은 의자에 앉은 채 죽음을 맞았을까

- 쇼펜하우어 / 플라톤
  쇼펜하우어는 칸트가 <실천이성비판>을 출판하던 해인 1788년에 자유의 도시
단찌히에서 태어났다.
  그는  칸트의 저술과 인도의 성전, 그리고 플라톤에 얻은 바가 많다. 고 밝혔
다. 그래서 자신의 철학에는 칸트의 잎과 플라톤의 꽃, 우파니샤드의 열매가 아
름답게 맺었다고 말했다. 이 열매가 바로 그의 저서 <의지와 표상의 세계>로
나타났다.
  그는 한 때 헤겔을 미워하고 또 여성들을 이렇게 비난한 적이 있다.
  여성들이란 음악이나 시뿐 아니라 회화에서도 참되고 진정한 의미나 감정을
갖지 못하며, 그들이 뽐내거나 둘러댈 때 교태를 빙자해 꾸며대는 소견머리 없
는 견해만 있을 뿐이다. 여성들이란  정신병에 가까운 낭비벽   본능적인 교활함 
등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이러한 인간 경멸은 그의 전 사상을 관통하고 있는 염세주의에서 기인된다.
인간의 삶을  다층적 고뇌이며 철저하게 불행한 상태 라고 생각한 그는 모든 인
간사를 고난의 역사라고 말했다.
  쇼펜하우어는 자기의 어머니조차 혐오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단찌히의 한 의
원의 딸로 태어나 문학적 재능이 뛰어난 작가였으나 아버지가 죽은 후 정부와
놀아났기 때문에 어머니와도 24년간이나 소식을 끊고 지냈다. 할아버지는 호상
으로서 대단한 재산가였고, 할머니는 네델란드의 귀족집 딸이었다. 그러나 불행
하게도 할머니는 정신병이 있어서 금치산 선고를 받았고, 아들 네 명 중 첫째는
자살을 했고, 둘째는 결핵으로 죽고, 셋째는 백치였고, 넷째는 탕아로 유곽에 미
쳐 돌아다니다가 결핵으로 길가에서 쓰러졌다. 자살한 첫째 아들이 바로 쇼펜하
우어의 아버지였다. 그가 열여덟 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는 자기 집 곡창 곁의
물 속에서 익사체로 발견되었다. 그때 그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인생이란 본래가 불안한 것이다. 이 불안의 해명이야말로 내가 평생을 걸어도
아깝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철학이 아니고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현
재의 나로서는 철학으로 가는 길 이외에는 살길이 없다.
  그리하여 그는 철학의 길을 택했다.
  베를린을 떠나 프랑크푸르트로 옮겨왔다. 거기에서 <의지와 표상의 세계>를
보완하여 출판해 보았으나 눈여겨 보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실의와 은거
로 40여 년을 보내야 했다. 그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처자는 물론 부모도 없
었고 가정도 없었다. 나이 칠십 세가 되어서야 그에게 겨우 봄이 찾아왔으니 베
를린 학술원이 그를 회원으로 추대한다고 통지해 온 것이 그것이다. 그는 복잡
한 마음으로 거절해 버렸다. 그의 저서는 삼판이 거듭되었고, 프랑스어로도 번역
이 되었다. 70회의 생일에는 정중하게 씌어진 승복하는 편지들이 책상에 수북히
쌓였지만 그러나 때늦은 감이 없지 않았다.
  1860년 8월, 쇼펜하우어는 졸도하였고 9월 6일에 다시 한번 쓰러졌다. 그를 병
석에 눕게 하였던 폐렴이 조금 나은 듯 했으나 병은 더욱 악화되었다. 9월 18일
저녁, 유언장 집행인 빌헬름그비너와 마지막 면담이 있었다. 그는 이태리 여행을
다시 한번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21일 아침 쇼펜하우어는 밥상을 받았다. 하녀
는 가만히 창문을 열어주고 물러갔다. 잠시 후 의사가 들어왔을 때 이미 그는
죽어 있었다. 의자에 앉아 등을 기댄 채, 얼굴에는 아무런 고통의 흔적도 없어
보였다. 72세였다.
  그는 왜 플라톤처럼 죽었을까?
  80세의 플라톤은 제자의 피로연에 참석했다가 의자에서 혼자 죽어 있었던 것
이다. 물론 얼굴에는 아무 고통의 흔적도 없이.
  표펜하우어는 머리에 월계관을 쓰고 1860년 9월 26일 매장되었다.
  검은 화강암의 묘석에는 아더 쇼펜아우어라고만 쓰여졌다. 고인의 뜻에 따른
것이다.

 니체의 운명애
  니체는 1844년 10월 5일 독일 라이프치히 근교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본 대학에서 신학과 고전문학을 전공했으며, 24살에 이미 스위스 바젤대
학의 고전문헌학 교수가 되었다. 10년간을 재직하다가 병고로 사직한 것이 그의
경력의 전부이다.
  그럼에도 니체가 죽은 1900년을 현대 철학사의 시점으로 잡고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현대인이 생각하고 고민하고 있는 문제는 이미 니체에 의해서 모든 검토를
끝낸 것 이라고 말한 독일의 시인 벤에게는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
다.
  니체는 생전에 인정받지 못한 불행한 철학자였다. 그러나 분명 20세기의 문학
과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람 중의 하나이다. 그를 가리켜 우리는  생의
철학자  혹은  실존철학의 선구자 라고 말한다.
  그는 전통적인 이성철학에 대립하여  의지 철학 을 정립한 것으로 평가되며,
삶 그 자체를 절학적 탐구의 대상으로 하여 그것의 배후에 어떤 원리도 인정하
지 않으려는 태도를 취해 왔었다.
  그가 열세 살 때, 쓴 <자전>에는 이런 것이 언급되고 있다.
  긴간의 생애는 하나의 거울.
  그속에서 자신을 끝까지 지켜본다는 것.
  이것이야 말로 첫째의 일.
  우리들은 애써 이 일을 하리라.
  여기에 그의 모든 관심사와 사상이 이미 요약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끔찍한 병고를 치르면서도 실제로 있는 그대로의 자신에 만족한다고 말
했다.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을 신뢰하는 일은 무엇인가?
  여기에 존재하는 자기 자신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필연적인 일을 참고 견
딜 뿐만 아니라 그것을 숨겨서도 안된다고 말한다. 필연적인 것을 사랑하는  자
기애 와  운명애 를 강조하면서 그는  영겁회귀 라는 사상의 실타래에서 그것을 풀
어내고 있다.
  인간은 그저 막연히 생사의 세계를 순환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똑같은
모습, 그대로 영원히 몇 번이고 회귀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제 정신과 육체를 지닌 인간이 아니라, 제3의 무엇이다. 나는 완전히
온몸 전체로 병을 앓고 있다.
  니체는 그의 말대로 평생을 병고에 시달리고 있었다. 10대부터 심한 두통으로
고생을 하였다. 두통과 발작이 되풀이 되었다.
   1년에 200일이나 두통으로 괴롭힘을 당할 때도 있었고, 쓰는 일, 읽는 일을
할 수 없어 방에 틀어박혀 고통을 견딜 뿐 이라고 말했다. 그외에 각혈을 동반한
위경련, 편두통, 신열, 식욕부진 등 니체의 몸은 그야말로 고통의 둥지였다. 뇌매
독을 앓기 전 열두 살 때부터 두통으로 괴로움을 겪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유전
적인 요소로 보는 견해도 있다. 왜냐하면 그의 아버지가 정신병(뇌경화증)으로
층계에서 굴러 떨어져 한 1년간을 앓다가 36세에 죽고 말았기 때문이다. 니체의
나이 다섯 살 때의 일이었다.
  1865년 니체에게 류마티즘과 같은 통증을 동반한 최초의 격한 두통 발작이 일
어났다. 그가 취임했던 바젤대학의 한 진료소에서 2도에 해당하는 뇌매독에 감
염되어 있다는 사실이 발견된다. 평소  작은 목사 라고 불리워질 정도로 엄격했
던 니체에게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단 한번의 실수로 해서이다.
  니체가 스무살 때 홀로 여행을 떠난 적이 있었다. 어느 날 저녁, 긴 여행에 지
친 몸을 이끌고 낯선 땅에 도착한 그는 안내인에게 허기를 달랠 레스토랑을 하
나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니체가 도착한 곳은 음식을 파는 레스토랑
이 아니라 어떻게 된 영문인지 그곳은 사창가였다. 집안에 들어선 니체를 둘러
싼 여인은 무려 여섯 명이나 되었고,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그는 여섯명의 여자
에 둘러싸여 하룻밤을 보내야 했다.
  1822년 말, 니체가 발작한 뒤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 급하게 달려온 친구 오
하헨스크는 그가 긴 의자의 한쪽에 웅크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니체는
큰 소리로 노래하고 날뛰며 춤을 추는 등 소란을 피워댔다.
   다른 말은 없이 음울한 어조로  죽은 신의 후계자 가 자신이라고 자기를 지칭
하며 정신이 맑은 상태에서는 차마 설명할 수 없는 두려운 일들을 마구 지껄여
댔다. 고 오하헨스크는 회고했다.
  1865년 니체는 매독에 감염되어 조기 매독성 골수막염을 앓고 있었다. 강단에
설 기력조차 없어 그는 학교를 사직하고 바닷가로 요양을 떠났다. 도리노 광장
에서 니체는 죽은 사람처럼 쓰러져 있었다. 마흔세 살 때였다. 혼수상태에서 병
원으로 옮겨져 이틀 만에 깨어난 그는 알 수 없는 소리를 마구 지껄여대기 시작
했다. 그 후 길가는 사람을 붙잡고  내가 신이다. 이렇게 변장하고 온 것이다 라
면서 야단법석을 떨었다.  신은 죽었다 라고 과감히 외치던 니체,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모두 목사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정신적 광증은 나날이 심해져
만 갔다. 어머니와 누나의 간호를 받으며 쓸쓸하게 세상을 떠난 것은 그의 나이
56세 때였다.
  니체는 가족묘지에 안장되었다. 장례식에는 친구들의 고별사가 몇 마디 있었
을 뿐, 목사의 말씀은 허용되지 않았다. 그것은 니체의 유언 때문이다.
  그가 미쳐 버린 마흔네 살 무렵, 꺼져가는 촛불이 반짝하듯 자기 도취의 황홀
한 작품들이 쏟아져 나오긴 했으나 가장 체계적이고 니체의 본질을 잘 드러내
보인 것은 역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라고 할 수 있다.
  병고에 시달리며 사람에게 버림받아 그야말로 허무와 고뇌의 심연 속에 있으
면서도 생의 비약과 환희, 이런 것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그는 애썼다. 고통을 껴
안고 운명을 필연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고통을 통해서 그는 비로소 초인이
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짜라트스트라>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무릇 뭔가를 믿는다는 사실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대들은 아직 자신을 탐
구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연히 나<짜라투스트라>를 발견했다. 신도란 언제나 그
러한 것이다. 그러니까 믿는다는 것은 하찮은 것이다. 이제 나는 명령한다. 나
<짜라투스트라>를 버리고 그대들 자신을 발견할 것을.
  그의 실존은 여기서부터가 아닐까 한다.



  파스칼과 병의 선용
  블레즈 파스칼은 프랑스의 수학자이며, 물리학자, 철학자, 종교사상가, 그리고
발명가이기도 하다. 39년이란 짧은 생애를 살면서 그것도 만년의 4년간은 병상
에 누워지냈는데 그토록 여러 가지 일을 그는 해냈다.
  10대에 벌써 그는 <음양론>과 <원뿔곡선론>을 써서 당시 최고의 과학자가
되었다. 컴퓨터 역사의 첫페이지를 장식하는 계산기를 발명한 것은 18세때의 일
이다.
   인간은 하나의 갈대이며, 자연에서 가장 약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것은 생각하는 갈대이다 로 유명한 <팡세>의 저자로서 우리는 그를 기억하고
있다.
  파스칼은 크리스트교가 얼마나 훌륭하고 참된 종교인가를 증명하기 위해 <팡
세>를 썼다고 말했다.
  그는 신앙심이 두터운 아버지 밑에서 경건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했다. 그러
나 정작 그가 회심을 결행한 것은 31세 때였다. 파스칼은 신의 계시와도 비슷한
종교적인 체험을 하게 되고 몹시 고양되어 그 날짜를 1654년 11월 23일 밤이라
고 밝히고 감격한 내용을 적어 평생토록 옷속에 넣고 다녔다고 한다. 그는 회심
한 뒤 수도원에 들어가 철저한 금욕생활과 수도생활을 하였다. 모든 시간을 성
경을 읽는 데에 바치고 일체의 쾌락을 포기하며 음식까지도 생존의 기본으로 제
한하였다. 누군가  맛있다 는 이야기를 꺼내면 화를 내면서 관능에 빠지는 일이
라고 경고했다. 오직 금욕과 신앙을 높이는 것만이 그의 목표처럼 보였다.
  파스칼은 그의 유언장에 이렇게 적어두었다.
   죽음보다 확실한 것은 없고, 죽음의 시기보다 불확실한 것은 없다.
  그리고 인간의 위대함은 인간의 비참함을 자각하는 데에 있다는 점을 특히 강
조했다. 파스칼은  하나님 없는 인간의 비참함 을 자주 서술하며, 인간이 행복해
지기 위해서는 불사(영생)가 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라고 말했다.
  파스칼은 계산기 발명에 너무 골몰해서 18세부터는 몸에 고통 없는 날이 없을
정도였다. 심한 두통, 소화불량, 위의 통증, 다리 저림, 변비 등 그래서 의사는 아
무 일에도 열중하지 말고 특히 머리 쓰는 일을 삼가라고 권했다.
  그러나 파스칼은 죽음의 병석에 누워서도 머리속에 떠오르는 사상과 생각을
손수 종이에 쓰기도 하고 또 조카나 하인에게 그것을 기록하도록 했다.
  그는  병의 선용 을 구하는 기도를 하나님께 바쳤다.
   당신께서는 당신을 섬기게 하려고 제게 건강을 주셨습니다만 저는 그것을 세
속적으로 썼습니다. 당신께서는 지금 저를 바로 잡으시기 위해서 병을 보내 주
셨습니다. 부디 제가 성급하게 이 병을 사용해서 당신을 노하게 하는 일이 없도
록 하여 주소서.
  파스칼에 있어서 죽음이란  영원한 삶의 입구 이므로 그에게는 무서워 할 것이
못되었고 오히려  병은 환영해야 할 것 이라고 그는 말했다. 견디기 어려운 통증,
그는 이 통증조차도  선용  했음을 간과해서는 안되겠다.
  죽기 4년 전, 심한 치통 때문에 그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파스칼은 전부터
마음에 걸려 있던 수학문제를 생각하기로 했다. 그것은 룰렛 이론 혹은 상크로
이드 이론으로 불리는 것으로서 원이 직선 위를 구를 때 그 원주 위의 한 점이
그리는 궤적을 구하는 문제였다. 밤을 지새워가며 그가 이것을 풀었을 때 치통
은 완전히 기시었다고 말했다.
  그의 사인은 장결핵이라고도 하고 혹은 전신에 퍼진 암이었다고도 하는데 확
실치는 않다. 고통이 절정에 달했을 때 그것을 참는 파스칼의 모습을 지켜본 사
람들은 마음 아파했다.
  그때 파스칼은  제발 나를 동정하지 마시오. 병은 그리스도안에게 아무 문제도
안됩니다. 병은 도리어 사람에게 고통을 견디고 모든 안락과 오관의 즐거움을
끊게 하며 죽음을 기다리면서 야심도 욕심도 없이 인간에게 일생동안 따르던 모
든 정욕을 끊을 수 있게 한답니다. 신이 나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도록 여러분은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이것만이 나의 소원입니다 라고 말했다.
  심한 두통과 복통 끝에 그는 세상을 떠났다.
   주여 나를 버리지 마옵소서.
  이것이 그의 최후의 말이었다. 1662년이었다.



  죽건 살건 나에게는 마찬가지다. - 토마스 카알라일
   숭고한 정신은 표면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요, 나타난 것은 일체의 의복이며
표상에 불과하다. 표상을 본체인 것처럼 망상할 때 인류는 수렁으로 빠지게 된
다. 고 역설하며 영국사회에 브레이크를 걸었던 사람이 바로 토마스 카알라일이
다.
  그는 서른 여섯 살이 되는 어느 여름날, 특별한 체험을 하게 되며 그것을 후
일 이렇게 털어놓았다.
   나는 나에게 물었다. 도대체 네가 무서워하는 것이 무엇이냐, 너는 왜 비겁하
게 줄곧 울고 콧물을 흘리고 벌벌 떨면서 걷고 있느냐. 덜된 인생아, 네 앞에 놓
여진 최악의 경우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죽음이냐? 그래 그렇다고 하자. 그
리고 지옥의 고통이나 악마의 고문이 너에게 할 수 있는 전부이겠지, 그런데 너
는 그것이 무엇이기에 그것을 이겨내지 못하고 비겁하게 쫓기고 있단 말인가.
생각해 보라. 네가 비록 쫓겨났다고는 하지만 너는 그래고 자유의 아들이 아니
냐. 지옥불이 너를 태워 버리기 전에 너는 네 발을 들어 지옥불을 짓밟아 버릴
수는 없단 말이냐? 무엇이나 올 테면 오너라. 부딪쳐 보자구나. 그것이 지옥이건
악마건 맞서 보자꾸나.
  옷의 노예였던 인간이, 옷을 지배하는 인간으로 바뀌는 과정을 적어 놓은 것
이 그의 <의복철학>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자유의 지칭이었다.
  카알라일은 몸과 마음을 훌훌 벗어 버린 자기를 보고서야 비로소 생사와 유무
에 끌려다니지 않는 자기를 붙잡게 되었다고 했다.
   꺼져라, 거짓 희망의 그림자여, 나는 더 이상 너를 쫓을 생각은 없다. 나는 너
를 이제는 믿지 않겠다. 그리고 너희들 굶주린 공포의 유령들이여, 나는 너희와
도 인연을 끊겠다. 너희들도 모두 그림자의 거짓이다. 자, 나는 이제부터 좀 쉬
어야겠다. 여행에 지치고 삶에 지쳤다. 이대로 죽어 버려도 좋다. 나는 이제는
자야겠다. 죽건 살건 나에게는 마찬가지다. 모두 아무 뜻도 없는 것이다.
  카알라일을 읽다가 나는 소동파가 문득 생각났다.
  왜냐하면 그의  이대로 죽어 버려도 좋다. 죽건 살건 나에게는 마찬가지다. 아
무 뜻도 없는 것 이라고 한 것이 소통파가 죽음 앞에서 한 이야기와 같았기 때
문이다.



  최후에 우리 모두는 죽는다 - 소동파
  소동파는 북송때 사람으로, 왕안석과 불합하고 그의 신법에 반대한 탓으로 여
러차례의 귀향을 가게 되었다.
  십여 년에 걸친 그의 유배생활이 겨우 죽기 두 달 전에야 해금된다.
  1100년, 철종이 죽고 신종황후가 섭정을 하면서 그해 4월 원우대신들의 사면
이 있었다. 동파에게 마음대로 거주해도 좋다는 허가가 내려졌다.
  그는 1101년 1월에 대유령을 넘었다. 태후가 서거하였다는 소식을 듣는다. 또
한 차례의 정풍이 예상되었다. 다시 불안해지기 시작한 동파는 아들들과 함께
호반지역의 농장에 가서 살 참이었다. 의진에서 아들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동파는 강위의 배안에서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갑작스레 여름이 닥쳤고 그
의 몸은 극도로 쇠잔해갔다. 아메바성 이질에 걸린 것이다. 근 한 달 동안이나
병상에 누워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감지하고 있었다.
  7월 15일 병세가 극도로 악화되었다. 고열이 심하고 잇몸에서는 피가 났다. 자
신의 증상을 분석해 본 결과 열독으로 발병된 것, 즉 전염병으로 진단되었다. 내
버려두는 수밖에 별다른 방법이 없다고 여기면서 동파는 전세웅에게 이런 편지
를 보낸다.
   장자에 의할 것 같으면 나라를 통치하는 데에는 별 도리가 따로 없고, 그저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 최상책이라 했습니다. 보내 주신 인삼, 맥문동과 복령을
함께 달여 목을 축이고 있는데 만약 이것을 복용하고도 별 효염을 못보면, 이는
하늘의 뜻이지 내 탓이 아닙니다.
  그러나 동파는 약을 복용하지 않고 있었다.
  7월 18일 세 아들을 모아놓고 몇 가지 유언을 한다.
   악한 짓을 하지 않았으니 지옥으로 가지 않을 게다. 너무 걱정하지 말고 묘지
명은 아우인 자유가 쓰도록 하고 웅산 기슭에 아내와 합장하라.
  항주의 옛친구 유림장로가 줄곧 그의 곁에 있었다. 26일, 그는 마지막 시 한
수를 짓고 장로와 더불어 이승과 저승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가 불가의
염불을 좀 외워보라고 권했다. 동파는 빙긋이 웃더니  <고승전>을 읽어 보았는
데 그들도 최후에는 모두 죽었다 고 말했다.
  7월 28일, 그는 급격하고 몸이 쇠잔해졌고 호흡도 차츰 가빠졌다. 관습대로 가
족들은 코 끝에 솜을 올려놔 그의 호흡을 살폈다. 온 가족이 방안에 모여 있었
다. 장로는 그의 곁에 가까이 다가가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이 순간 내세에 대해 생각해 보시오.
  동파도 천천히 속삭였다.  서천이 있다 하더라도 애써 그곳에 간들 무슨 소용
이 있겠소?
  장로가 다시 말했다.
   특히 이 순간엔 시도해 봐야 합니다.
   억지로 애쓰는 것은 오히려 잘못입니다.
  그의 마지막 대답이었다.
   도달해 보아야 별 것 아닐세
  여산은 여전히 안개로 덥이고
  절강은 여전히 파도가 치네.
  그의 오도시대로 도달해 보아야 달라진 것은 없고 여산은 여산, 절강은 절강
일 뿐, 세계는 여전히 현상계 그대로였다.
   <고승전>을 읽었는데 그들도 결국엔 다들 죽었다는군!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우리가 모두 죽는다는 사실을 나직하게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운명과 화해한 사람 - 베에토벤
  길을 가다가 급격한 영감의 발작이 일어났을 때, 혹은 피아노 앞에서 무슨 착
상을 얻었을 때.
  그의 얼굴은 변모하는 것이었다. 얼굴의 근육은 불끈 솟고, 핏대는 부풀어 올
랐으며, 거풀진 눈은 갑절이나 무섭게 되고 입은 부들부들 떨렸다. 마치 제 스스
로 불러낸 마신들에게 제가 잡혀 버린 마술사처럼.
  악성 베에토벤을 이처럼 셰익스피어의 <리어왕> 같다고 말한 이는 율리우스
베네딕트였다.
  베에토벤은 1770년 12월 16일, 본 시의 어느 가난한 집 다락방에서 태어났다.
술주정뱅이던 그의 아버지 요한은 예배당 가수의 자리에서마저 쫓겨나게 되어
장남이던 그는 가계를 지탱하기 위해서 열세 살부터 궁정 오르가니스트로 일을
하게 된다. 17세에 어머니를 여의자 그는 두 동생의 교육까지도 책임져야 했다.
   죽을 줄 모르는 사람은 가엾어라! 나는 열다섯 살 때, 벌써 그것을 알고 있었
다.
  어린 시절의 암울한 심경을 그는 이렇게 털어놓았다. 애초부터 그의 인생은
슬프고 가혹한 싸움으로 드러났다.
  1769년, 26세가 되던 그 무렵부터 서서히 청각장애의 징후가 나타났다. 원인은
급성 중이염의 악화였다.
  스물다섯 살 때 매독을 선고받은 슈베르트의 절망이나 진배가 없었으리라. 화
가에게 눈을 빼앗듯 그에게서 귀를 빼앗다니      . 마치 눈을 흘기는 듯한 이 두
음악가의 표정은 모두 심한 근시탓이라고 하는데 둘 다 독신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어쪄면 난데없이 돌출한 이십대 중반의 이러한 장애 때문이었을지도 모
르겠다. 아무튼 귓병은 그의 성격을 거칠게 만들었고, 남을 의심하는 증세까지
불러일으켰다.
   가끔 하늘을 향하여 우울한 시선을 돌리기도 하고 가다가 늘 짧게 끊어져 버
리는 웃음-그것은 기쁨을 자주 가져보지 못하는 사람의 웃음이었다.
  그의 생애를 쓴 로망 롤랑의 말이다.
  자살을 각오한 어느 날, 베에토벤은 두 아우들에게 유서를 썼다.
   곁에 서 있는 사람이 멀리서 들여오는 피리 소리를 듣는데 나의 귀에는 들려
오지 않을 때나, 목동이 노래 부르고 있는 것을 누군가가 듣고 나에게는 들리지
않느냐고 물을 때, 거의 절망해서 자칫 자살하려고도 생각했다. 다만 예술만이
나를 다시 일깨우곤 했다. 아아, 나에게 맡겨진 창조를 모두 다 해낼 때까지는
이 세상을 버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중략) 나의 예술의 전 재능이 아직 열릴
기회가 있는 동안은 아무리 불운이 찾아오더라도, 결코 죽으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분연히 다시 일어났다. 그리고 한때 그가 사랑했던 쥬리에타가 어느 백
작과 결혼을 할 무렵, 그는 더욱 분발심을 일으켜 창작에 열중하니 그때 제3교
향곡  영웅 이 탄생하고, 잇달아  운명 ,  전원  교향곡이 발표되었다.
   내가 비참한 지경에 뼈져 있을 때, 나를 받들어 준 것은 도덕이었다. 자살로
써 인생을 끝내 버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예술의 덕택이기도 하지만, 도덕의
덕택이기도 하다.
  그렇게 술회하였다.
  1810년 그는 말 대신 필기구로 해야 하는 필담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가극  피델리오 를 지휘하고 있을 때였다.
  제1막의 이중창에서부터 벌써 무대는 흔들렸다. 오케스트라는 그의 지휘봉을
따르고 있었으나, 가수들은 제멋대로였다. 혼란이 일어났다. 잠시 휴식을 선언하
고 다시 연주가 시작되자 혼란은 거듭되었다. 베에코벤의 지휘로는 연주가 불가
능함이 분명해졌다.  퇴장하게, 가엾은 베에토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이렇게 말
하지 못했다. 쉰들러는 수첩에다 이렇게 썼다고 한다.
   연주를 계속하지 마세요. 이유는 집에 돌아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그는 후다닥 관중석으로 뛰어내려 줄달음을 쳐서 단숨에 집안으로 들어와 두
손으로 얼굴을 파묻은 채 식사시간 되기까지 그대로 있었다.
  그 날의 일을 쉰들러는 이렇게 회상했다.
  그는 그 날 마음속 깊이 타격을 받아 죽는 날까지 그 무서운 장면의 인상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난청과 고립으로 완전한 내적 자아에 몰입을 하게 된 그는 고통속에서 교향곡
제9번  환희 를 이끌어냈다.
  그리고 에르되디 백작부인에게  괴로움을 돌파하여 기쁨으로! 라는 편지를 써
보냈다. 죽음을 넉 달 앞둔 1826년 12월.  신의 영역에 속한다 는 걸작, 그 아름다
운  현악 4중주곡 을 완성하였다. 그의 건강은 사십 중반을 넘어서면서 나빠지기
시작했는데 황달이 간경변증으로 변해 있었다. 사실 베에토벤은 앉기만 하면 술
을 마셨다.
  1827년 네 차례의 수술 뒤, 고통 속에서 넉 달이상이나 누워 있었는데 <베에
토벤 최후의 병과 죽음>이란 논문을 쓴 포레스트 박사의 글을 보면,
   폐충혈의 발작이 일어난 뒤에, 간장의 위축경화로 복수병과 발 다리의 종기가
생기게 된 것 이라고 하였다.
   죽음이 너무나 일찍오는 것이라면 할 수 없고, 좀 더 늦게 와 주었으면 하고
바랄 뿐이다. 허나 그래도 나는 만족하리라. 죽음은 나를 끝없는 고뇌로부터 해
방시켜 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오고 싶을 때에 언제든지 오라. 나는 너(죽음)를
용감히 맞으리라.
  베에토벤, 그는 과연 죽음과 두 번 대결한 셈이었다.
  첫 번의 경우에는 혼자서 죽음의 높은 문턱을 스스로 넘어섰고, 두 번째는 그
자신이 관대하게 그것을 수용하였던 것이다.
  여기에 그의 위대함이 있지 않을까 싶다. 세상을 떠나기 하루 전, 그는 사람들
을 향해서 라틴말로 이렇게 외쳤다.
   여러분, 박수를 쳐라. 이제 희극은 끝났다.
  그가 떠나던날 비엔나엔 눈이 내리고 때아닌 천둥이 사람을 놀라게 하였는데,
베에토벤은 갑자기 몸을 일으켜 두 주먹을 불끈 쥔 다음, 그대로 숨이 끊어졌다
고 한다.
  그의 유해는 웨링의 묘지에 매장이 되었는데, 묘비에는 다만,  루드비히 반 베
에토벤 이라고만 씌어져 있다. 그가 죽고난 뒤 그의 모든 물건은 경매에 부쳐졌
다. 고통스럽게 필담을 적었던 회화수첩과 그 일기들은 1풀로티너 20크로이쩌에
팔렸다는 후문이다.
  고뇌에 찬 57년, 마침내 그는  환희 로 마침표를 찍었던 것이다.



  제6장 예술, 그 광기와 죽음


  예술가와 정신병 - 광기, 과연 예술의 근원인가
  모파상 / 슈만 / 휠덜린 / 뭉크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몰아 넣었는가?
  예술은 그들 생의 전부이며, 생의 절대적 가치를 지닌다. 예술가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영혼에 불을 지피고 자신의 감성에서 뽑아낼 수 있는 한 선율을 뽑아
내고는, 애처롭게 지상에 엎어지고 마는 것이다.
  악마에게 영혼을 판 파우스트처럼 그들은 잠든 영혼을 고양시키기 위해, 때로
는 깊게 내재된 자신의 영성을 고무시키기 위해 악마와도 기꺼이 손을 잡는 일
에 주저하지 않았다. 그래서 마약과 알코올 중독, 매독과 정신착란은 순서대로
오면서 치뤄내지 않으면 안되는 대가였던 것이다.
  로트렉가 에드가 알란 포우, 보드레르는 전형적인 이 코스를 전부 밟았다.
   이 세상에서 어떤 병을 알코올 중독과 비교할 수 있으리.
  에드가 알란 포우의 말이다. 무소르크스기, 로트렉, 유티릴로도 알코올 중독으
로 쓰러졌다. 모파상, 니체, 스메타나는 매독으로 인한 환청과 환시에 시달리며
정신병원으로 가야 했고, 니체는 그로 인해 실명의 고통을 감수해야 했고 스메
타나는  나의 조국 을 완성한 뒤 양쪽 귀가 들리지 않았다.  나부 마야 를 그린 스
페인 화가 고야도 매독으로 청각을 잃었다.
  화가가 눈을 잃고 시인이 말을 잃고 음악가가 귀가 멀다니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끝없는 자살 시도 - 모파상
  모파상은 프랑스 노르망디의 해안, 미로메닐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그런지 그
의 작품들은 노르망디의 풍경을 배경으  하고 있는게 많았다. 인간의 애욕을 주
로 다룬 그의 작품은 심리묘사가 뛰어나다는 게 정평인데 그 역시 절륜의 정력
가로 상당한 여성편력자였다.  한 여자와는 한번 만을 고수한 그는 독신이었다.
팔난봉꾼이었던 아버지의 기질을 이어 받았는지 어려서부터 놀기 좋아하고 자유
분방한 탓으로 13세 때 신학교에서 퇴학을 당했다. 그의 문학 수업은 어머니 로
올이 플로베르와 친분이 있어 연결된 플로베르의 엄격한 가르침에 힘입은 바 크
다. 그는 플로베르에게서 배운 냉엄한 객관적인 태도와 세밀한 관찰로, 온갖 계
층의 소시민들을 그려 나갔다. 딱딱한 사상을 세우거나, 지나친 기교를 부리거나
하지 않고 순수하게 사실성을 지켜나갔다. 단편 <떼리에 관> <달빛> 장편으로
는 <여자의 일생> <베라미> <죽음처럼 강하게>등이 있다.
  모파상은 1883년에 쇼펜하우어의 학설에 끌려 살아가는 두려움을 호소하고 심
한 정신적 고독에 사로잡혔다. 특히 35세 때부터 신경장애를 나타내는 한편, 편
두통, 현기증에 시달려 눈동자가 퍼지기도 하였다. 그는 코카인, 몰핀, 대마초 등
마약을 닥치는 대로 복용하였다.
  40세부터는 증상이 심해져 불면증에 시달렸다. 잠이 안 오자 집 주인에게 빵
공장에서 야간작업을 하는 소리가 시끄러워 잠이 안 온다고 일을 못하도록 말려
달라고 애원하였다. 그러나 그 빵 공장은 몇 십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런가 하면 집안에 개가 요란하게 짖자 자기 원고 소리가 시끄러워 개가 잠을
이루지 못한다며 부드러운 종이를 일부러 구해서 펜 소리가 안 나게 글을 써 나
갔다. 어떤 때는 거미가 습격한다고 여름철인데도 창문을 꼭 닫았으며 자기 몸
속에 보석이 들어있다 하여 화장실 출입을 며칠 동안이나 하지 않은 때도 있었
다.
  이러한 신경 계통의 비정상적 증상은 난잡한 여성관계로 인한 성병에서 기인
한다는 기록이 있다.
  1893년, 모파상은 니스에서 새해를 맞이하였다. 그리고 그 이튿날, 권총을 머
리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하인이 총알을 빼두었기에 무사할 수 있었
다. 그는 다시 면도칼을 들어 자신의 목을 긋고는 거울 앞에서 무표정하게 웃어
보였다. 하인이 달려오고 의사가 붕대를 감아 목에서 흐르는 피를 멈추게 하였
다. 혹시 그가 좋아하는 요트를 보면 좀 나을까 해서 의사는 바다로 내려가게
허락해 주었다. 그러나 그는 바다와 요트  밸아미호 를 보고도 입술만 움직일 뿐,
말을 하지 못했다. 결국 정신병원으로 옮겨져 1893년, 43세의 나이로 영면할 때
까지그의 정신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홀로 맞은 임종 - 슈만
  독일의 작곡가 로베르트 슈만은 라이프찌히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으나 작곡
에 전념하여 낭만적인 곡을 많이 발표했다.
  슈만은 다섯 남매 중의 막내인데 그의 부친은 그가 태어나던 해에 신경질환을
앓게 되어 평생 지병으로 고생하다가 53세에 사망하였다. 모친은 우울증에 걸려
있었고, 슈만의 누이 에밀리는 19세에 자살, 나머지 세 형제들도 모두 병사하고
만다. 슈만의 일곱 자녀들도 대부분 폐결핵이나 류머티스성 질환으로 사망했다.
이러한 슈만가의 정신이상은 그의 부친에게서 소질이 유전된 것이 아닐까 하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그는 15세 때, 부친과 누이를 잃고 잇달아 형수와 형의 죽음을 당한 후 폐쇄
적인 성격으로 변한다. 17세 때 슈만은 자신이 정신이상이 될 지도 모른다는 강
박관념을 일기 속에 이렇게 토로하고 있다.
   격렬한 충혈, 형용하기 어려운 불안감, 숨막힘, 순간적인 의식상실 등의 쉴세
없이 번갈아 일어났다.
  그의 과도한 자기분석과 지나치게 복잡한 정신, 높은 교양, 심오한 사상 등이
오히려 창작에 방해가 되었다는 시각도 있다. 왜냐하면 그의 음악은 갈수록 질
이 저하되어 1850년 이후의 작품은 아예 창작목록에서 빼는 게 낫다는 비평의
소리가 들릴 정도였으니까.
  그는 1953년 7월 결국 신경졸도로 쓰러지고 말았다.
   이 사람은 불치의 뇌질환에 걸려 이미 절망적 상태입니다.
  음악가의 질병을 연구한 케르너 박사는  슈만의 증세를 정신분열증의 유형을
지니고 있는 전형적인 동맥경화성 정신병 이라고 주장하였다.
  그의 아내는 그때, 슈만이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일기에 써 놓았다.
   밤중에 우리가 잠자리에 든 지 얼마 안되어 남편은 자리에서 일어나 천사들
이 자기에게 들려 주는 노래라고 하면서 오선지에 멜로디를 써 내려갔다. 그런
다음 다시 자리에 눕더니 밤새도록 줄곧 천장만 노려보면서 헛소리를 해댔다.
  아침이 되자, 그는 천사들이 악마로 변하여 자신을 지옥으로 던져 버리겠다고
한다며 몸서리쳐지는 노래를 불렀다. 그는 신경발작을 일으켜, 악마들이 마치 호
랑이와 하이에나처럼 자기에게 덤벼들어 날카로운 발톱으로 움켜쥔다면서 고통
스런 비명을 질러냈다. 두 명의 의사가 와서 가까스로 그를 진정시켰다.
  1854년, 병상에 누워 있던 슈만은 비가 내리는 날, 홀연히 집을 뛰쳐나가 라인
강가로 나왔다. 다리지기가 통행료를 요구하자 목에 감았던 머플러를 풀어주고
는 다리 중간쯤에서 강물에 몸을 던졌다. 강을 오르내리던 증기선이 마침 이를
목격하고 목숨을 건져 주었다. 슈만은 그 후 엔데니히 정신병원으로 가게 된다.
우울증이 너무 심해서 가족의 면회도 금지된 상태였다.
  1856년 7월 23일, 엔데니히로부터 슈만의 죽음이 임박했다는 통지가 있었다.
  클라라가 영국 연주에서 돌아온 지 보름쯤 되었을 때이다. 클라라는 브람스와
함께 갔다. 거의 2년 만에 남편을 만났다. 클라라를 겨우 알아보는 것 같았으나
 나의 -나는 알고 있어 라고만 했을 뿐, 슈만은 죽기 전 몇 달 동안은 발음이 분
명치 못했다. 7월 28일엔 심한 정신경련이 종일토록 계속되었다. 클라라와 브람
스는 벽의 작은 창문을 통해 그를 들여다볼 수밖에 없었다. 슈만은 수주일 동안
음식을 거부해왔으나 클라라가 주는 포도주와 약간의 젤리만은 받아들였다.
  7월 29일, 화요일 오후 4시, 그토록 힘든 인고의 굴레에서 슈만은 벗어날 수
있었다. 엔데니히 정신병원에 들어온 지 2년 만이었다. 최후의 시간은 아주 조용
했다고 한다. 46세. 그는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잠이 들었다. 물론 임종의 순간
에는 곁에 아무도 없었다. 30분 가량 지나서 클라라가 달려왔을 뿐이었다. 미망
인의 나이는 그때 37세였다.

  


하늘의 포로가 된 휠덜린
  독일의 서정시인 휠덜린은 네카르 강변의 목가적인 작은 마을 라우펜에서 태
어났다. 그의 부친은 수도원의 교사였다. 두 살 때 사별하고, 모친의 재혼에 따
른 의부와도 9세 때 사별하는 비운 속에서 성장하였다. 14세의 이 다정다감한
소년은 그 후 10년 동안이나 수도원에 갇혀 엄격한 규칙생활을 체험하게 된다.
  열한 살 때 보드레르가 기숙사에서  내 넋은 벌써 금이 갔네 라고 썼듯이 휠
덜린은  종은 바람만 불어도 제 몸을 울려 소리를 낸다 고 하였다.
  후리후리한 키에 반듯한 이마를 가진 준수한 용모의 휠덜린은 30세가 되어도
여전히 초라한 신학자에다 남의 집에서 기식하며 어머니가 부쳐준 조끼, 손수건,
양말 등에 고마워해야 했다. 그는 자기가 하고 싶은 시를 쓰려면 사제의 임무직
을 겸해서는 안된다는 게 평소 그의 신념이었다. 한편 예술을 희생한다면 또 신
이 부여한 본래의 임무에 대해 죄를 짓는 일이라며 그는 괴로워하였다.
  얼마 살지도 않았는데, 나의 황혼은 벌써
  차가운 숨을 내쉬는 구나(하략).
  휠델린은 목사를 그만두고 궁핍함 속에서 글을 쓰며, 가정교사로 스위스와 프
랑스 등지를 전전했다. 그러나 이것도 짧은 기간에 불과했다. 육신을 지탱하는
내적인 힘이 약해지면 약해질수록 광기는 점점 그의 신경으로부터 전광처럼 분
출했다.
  언제인가 그가 시인 마티존의 집을 방문했는데 얼굴은 시체마냥 창백하고 피
골이 상접했으며, 마치 거지와 같았다. 귀신같은 몰골에 놀라 뒤로 물러나니 희
미한 소리로  휠덜린 입니다 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그는 튀빙겐의 어느 정신병원으로 끌려갔다. 1년 후, 망령의 몰골로 다시 나타
나 튀빙겐의 거리를 쏘다녔다. 어느 목수가 자기 집에 데려가 기거하게 하였다.
그가 뱀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소식이 나돌았다.
  정신착란을 일으켜  하늘의 포로 가 된 이 시인은 36년간이란 세월을 어둠 속
에서 음울하게 살아야 했다. 머리는 백발이 다되었고 우아함도 이미 찾아볼 수
가 없게 되었다. 이 시인을 알아보는 사람은 이미 오래 전부터 아무도 없었다.
  그가 73세로 몸을 뉘이고 숨을 거두었을 때, 누더기를 입은 수공업자들이 죽
은 시인을 묘지로 운반해 갔다. 그의 수 많은 원고는 물론 아무렇게나 취급되어
졌다.
   독일어는 그의 시에 있어서 가장 아름다운 정점에 도달해 있다.
  그런 찬사는 그가 가고 난 뒤의 일로, 그와는 이미 상관이 없었다.



  여성 공포증, 그리고 독신남 - 뭉크
   나의 가정은 병과 죽음의 가정이었다. 확실히 나는 이 불행을 이겨낼 수가 없
었다.
   질병, 발광 그리고 죽음은 나의 요람을 지키는 천사들이었다. 그들은 내 일생
동안 줄곧 따라다녔다. 나는 일찍부터 삶이 가지는 비참하고 위험스러운 점을
알게 되었으며, 또 지옥에 죄의 자식들을 기다리고 있는 영원한 벌에 대해서도
배웠던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군의였으며 오슬로에서 병원을 개업하고 있었다. 그가 5세때
어머니는 폐결핵을 세상을 떠났고, 한 살 위이던 누나 소피에도 폐병으로 14세
에 요절, 여기다 어린 시절, 그런 일을 여러 번 겪었기 때문에 뭉크의 죽음을 응
시하는 눈은 점점 내향적으로 되었다.
  그는 죽음을 자기 자신 속에 숨어었는 것으로 의식하였으며, 그래서인지 작품
에서는 유난히 죽음에 관한 소재가 많았다.  죽은 사람을 누인 베드  여러 장 그
린  병든 아이 ,  병실에서의 죽음 ,  저승에서 자화상  등 죽음을 응시하는 눈이
밑바닥에 깊게 깔려 있음을 느끼게 한다. 유채화나 판화에서 자주 글지던  병든
아이 는 그의 마음속에 들어 있는 누이의 영상이었던 것 같다.
  뭉크의 아버지는 원래 성격이 편벽되고 이상성이 그 기질에 숨어 있었다. 스
무 살 아래이던 아내를 잃게 되자 그는 때로는 미친 사람처럼 아이들을 때리기
도 하고 이상하게 굴었다.
  끝내 독신이던 뭉크도 여자들이 부드럽게 대하면 대할수록, 어떤 일종의 공포
감을 느끼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여인들이란 영원히 남자를 잡아먹으며 살고
있는 일종의  흡혈귀 로 생각했다. 한 여인과 살고 있는 남자는 어딘가 모르게
죽어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뭉크는 80세의 긴 인생을 혼자서 보냈
다. 이러한 삶에 대한 내향적인 태도에서도 뭉크의 노이로제적인 성격을 엿볼
수가 있는 것이다.
  내가 뭉크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1960년, 꺄뮤의 <시지프스의 신화>라는 책
표지에서였다. 그것은 뭉크의  절규 였는데 오슬로의 국립미술관에서 그 원화를
대할 기회가 내게도 주어졌었다. 그림 앞에 서니 어떤 괴기감이 정말 나를 향해
달려오는 것만 같았다. 두 손으로 귀를 막고 무엇에 놀란 듯 몸을 뒤틀면서 큰
소리를 지르며 사람 같지 않은 형체가 불쑥 다가오는데 그때  유혼 이란 낱말이
떠올랐다.
  뭉크는  절규 를 그리고 나서 이렇게 일기에 썼다.
   어느 날 저녁 때 나는 길을 걷고 있었다. 한쪽에 도시가 퍼져있고, 피요르드
가 내 앞에 있었다. 나는 지칠대로 지쳐 기분이 좋지 않았다. 멈추어 서서 피요
르드를 둘러보았다. 해는 서산에 지고-구름이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피처럼, 나
는 자연을 뚫고 들려오는 절규 같은 것을 느겼다. 나는 절규를 들은 것 같은 기
분이 들었던 것이다. 나는 이 그림을 그렸다. 구름을 진짜 피처럼 그렸다. 색채
가 절규했다.
  뭉크는 정신장애를 일으켜 자주 피해망상증에 시달렸다. 45세 무렵이었다.
  여성으로부터 쫓기며 시달림 당하는 느낌을 가졌고, 친구 누군가가 자신을 해
칠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의심에 빠지곤 했다. 어디에 있어도 안주할 수 없고,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술을 마셔야 하는 생활이 되풀이 되었다.
  1907년, 독일에서 아홉 달 가까이 정신과 치료를 받고 발트해 연안의 한 마을
에서 휴양을 취해야 했다. 이듬해에는 코펜하겐에 있는 정신병원에 입원하였다.
그 후 오슬로의 피요르드 호숫가에 집을 마련하여 그곳에서 풍경화를 많이 그렸
다. 그의 그림의 모티브는 역시 삶과 죽음, 그리고 사랑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예술가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광기에 시달리면서도 오히려 그것으로부
터 때로는 창작의 원동력을 얻어내고 예술을 위해서는 또한 기꺼이 소진되었던
것이다.
  그 중에는 제일 긴 망각의 늪에 갇혔던 사람도 있었다. 까미유끌로델과 휠덜
린 그리고 러시아의 춤꾼 니진스카가 그들이다. 30년이 넘는 세월 뒤에야 그들
은 비로소 철창에서 부터 해방될 수 있었으니까.
  핏빛으로 그려 낸 뭉크의  절규!
  이러한 것들이 그들의 생존이었으며, 한편 예술이 아니었던가 싶다. 죽음 직전
에 뿜어내는 마지막 광휘를, 그들의 선혈을 보는 듯하다.



  검은 그림자의 예감 - 에드가 알란 포우 / 보드레르
 

 우울한 생애, 괴기스러운 영혼 - 에드가 알란 포우
  내가 포우를 알게 된 것은 고등학교  때, 그의 단편소설인 <검은 고양이>를
통해서였다. 그 괴기스러우면서도 짜릿했던 전율, 소설을 읽고 난 뒤의 느낌이
바로 그대로 에드가 알란 포우의 인상과 일치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9세기
문단의 귀재 에드가 알란 포우는 미국 보스턴에서 순회 극단의 가난한 배우이던
양친에게서 태어났다. 그래서 그의 풍부한 상상적 기질도 그런 붐한테 물려받은
게 아닐까 하는 추측들도 하고 있다.
  몸은 가냘프기 짝이 없었고 성격은 호방불손하며, 사람들과 잘 사귀지 못했다
고 한다. 두어살 때 어버이를 잃고 어린 나이에 그는 천애고아가 되었다. 담배장
사를 하는 숙부의 집에서 자라기도 했으며, 양부모를 따라 영국에 갔다가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버지니아대학에 입학을 하였다. 그러나 학업에는 열의가 없었
고 노름에 빠져 많은 빚만 지고 귀향을 하게 된다. 사관학교에 들어가서도 심한
도박과 음주때문에 학교를 쫓겨나게 된다. 그 이후 웨스트 포인트에 들어갔으나
역시 퇴교당하고 방랑과 무질서한 생활, 술과 도박으로 밤을 지샜는데 이러한
방종한 생활이 오히려 그의 시에 어떤 독톡한 침통함마저 자아내게 한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19세에 <티므르 및 그 밖의 시>란 처녀시집을 내었을 때 비범함을 인정받았
으며 21세 때 제2시집을 출간하였다.
  1833년 발티모어의 잡지에 단편소설이 당선되어 이것을 계기로 잡지 편집자가
되었고 계속 단편을 발표하여 문명을 날렸다. 1836년 포우가 스물일곱 살 때였
다. 열네 살 난 소녀, 버지니아 크램을 사랑하여 그와 결혼하였다. 그러나 둘은
사람하면서도 행복한 날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포우의 음주벽은 갈수록 심해
지고 잡지사를 그만 두게 되니 생계가 말이 아니었다. 거기다 불손하고 방종한
그의 성격이 가세하여 일정한 직업, 일정한 주거를 갖지 못하고 이곳 저곳으로
떠돌아 다니기만 했다. 그래도 작품만은 꾸준히 쓰고 있었다. 35세 때 그의 시
중 가장 걸작이라 일컫는 <까마귀>를 발표하여 명성을 얻었고, <브로드웨이 저
널>의 편집 및 발행인이 되어 오랜 소망을 이루었으나 재정난으로 곧 문을 닫
아야 했다.
  1847년에는 헌신적이었던 그의 아내 버지니아가 극심한 가난 속에서 병을 얻
어 죽고 만다. 아내에 대한 추억은 그의 작품 <유래카>속에 잘 나타나 있다. 그
는 아내를 잃은 뒤 술과 마약 때문에 뇌 손상을 입기도 했으나 문학적 재질은
오히려 빛을 발하고 창작 의욕은 꺼지지 않았다. 이때 <애너벨 리>를 발표하였
다.
  그때 포우는 자신의 견딜 수 없는 병적상태를 이렇게 쓴 바 있다.
   내가 네게 작별을 고할 때 가졌던 슬픔의 고뇌를 너는 봤고, 너는 느꼈다. 그
때의 그 우울한 내 표정을 너는 기억할 것이다. 재앙을 예견하는 그 무섭고 끔
찍한 표정, 그때 나는 진정으로, 진정으로 느꼈다. 심지어 그때에도 이미 죽음이
다가오고 있음을, 그를 앞서간 그림자에 내가 연류되어 있음을, 아무것도 확실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나는 침대로 가서 길고 긴 끔찍한 절망의 밤 내내 울었
다. 날이 새자 일어나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쌀쌀하고 맑은 공기를 쐬며 빠른
걸음으로 주변을 산책했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악마가 나를 여전히 괴
롭혔다. 마침내 나는 아편팅크 7그램 정도를 입수했다       나는 너무 심한 병에
걸려있다. 몸과 마음이 너무 지독하게 병들어 있어 내가 이 무시무시한 흥분을
가라앉히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다       이 상태가 계속된다면 
내 목숨이 끊어지거나 아니면 어쩔 수 없이 미쳐 버리고 말 것이다.
  그는 죽기 1년 전에도 많은 작품을 발표하여 세인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러
다가 아내가 죽은 지 2년째가 되는 1849년 어느 가을 날, 심한 음주 탓인가 정
신착란을 일으켰다. 정치 브로커들에게 공술을 얻어먹고 술에 취해 볼티모어의
거리에서 쓰러졌다. 행인들에 의해 그는 인근 병원으로 옮겨 졌다. 3일만에야 겨
우 정신이 들었다. 머리에 총 한방을 쏘아주면 좋겠다고 그는 말했다.
   오, 하느님!       우리가 보는 것이 한낱 꿈속의 꿈입니까? 꿈속의 꿈처럼 보이
는 것입니까?  귀찮은 듯 그는 다시 눈을 뜨지 않았다.
  에드가 알란 포우의 가문은 불행하고 단명하였다. 문학적 자질이 있었던 그의
형인 윌리엄도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 선원생활 중 동료와 싸워 26세에 사망하였
고, 누이동생 로자리는 비정상인이어서 워싱톤의 보호소에서 불우한 일생을 마
쳤다.
  포우는 2살에 어버이를 잃고 양모는 20세에, 양부는 25세에 잃고 만다. 그의
아내 버지니아크램은 38세에, 그리고 포우 자신은 이 세상을 40세에 총총히 떠
났다. 그는 바쁘게 떠나면서 작품 쓰는 일 또한 바쁘게 하였으니 <까마귀>나
<종소리>등 주옥 같은 시 이외에도 60여 편의 단편을 더 남겼다. <어셔가의 몰
락> <황금충> <검은 고양이> <붉은 죽음의 탈> 등의 작품이 있다.
  그는 미를 창조하는 데에다 문학의 목적을 두었고, 시에 있어서는 음악성을
대단히 중시하였다. 그의 시가 갖는 암울한 분위기와 우수 그리고 소설에서는
우울한 분위기와 괴기스런 이야기들을 즐겨 다루었다. 아마도 그것은 작가 자신
의 취향과 심적나상을 반영한 것이리라.



  내 넋을 금이 갔네 - 보드레르
  보드레르는 질병, 가난, 고독 속에서 불행하였으나 그는 위대한 시인이었다.
  1821년 파리에서 태어난 그는 여섯 살에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35세)마저 다
음 해에 서둘러 재혼을 해버리니 어린 마음에는 상처가 깊었다. 열한 살 밖에
안된 그를 의부는 리옹의 기숙사에 집어넣었다.
  16세에 벌써 보드레르는 라틴시 콩쿨에서 2등을 하는 재능을 보였으나 18세에
는 퇴학처분을 받았고 이미 매독에 걸려 있었다. 사팔뜨기 창녀 사라와 어울리
며 방종한 생활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가족회의를 거쳐 식구들은 그에게 여
행을 권했는데 이번에는  보르도 섬에서 쟌느 뒤발과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된
다. 14년 간을 동거와 별거를 되풀이 하며 그녀를 애증과 저주의 대상으로 혹은
사디즘과 매저키즘의 대상으로 하여 그는 이  검은 비너스 를 자신의 시집<악
꽃>에 자주 등장시키곤 했다.
  그는 오직 쟌느에게서만 휴식을 얻을 수 있었다고 고백하였는데 아마 흑백 혼
혈녀한테서만 마음놓고 상대할 수 있는 어떤 편안함이 그녀에게 있었던 것인지
도 모르겠다.
   나는 남들에게 무익하니까 그리고 나 자신에게 위험하니까 자살한다. 는 유서
를 쓰고 쟌느와 함께 카바레에서 자살소동을 벌이기도 했다.
  이 무렵 보드레르는 미술 평론가로 에세이스트로 시인으로 문단에 화려하게
데뷔한다.
  34세에 <악의 꽃>을 발표하였고 매독이 재발되던 40세에는 <악의 꽃>의 재
판과 43세에 산문시집<파리의 우울>을 발표했다. 그리고 44세에 에드가 알란
포우의 시집 제4권을 간행하였다. 이때부터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지기 시작했다.
  나이 45세이던 2월 10일
   어제 데생전시회를 보러 갔어요. 그러나 몇 분이 지나자 제가 무엇인가에 주
의를 집중하게 될 때에 그렇듯이 어떤 나쁜 징조가 닥쳐올 듯이 느껴졌어요. 침
대에 누워서 이런 생각을 자주 했답니다. 이러다가 졸도나 중풍이 닥쳐오면 난
어떡하지?
  그로부터 한 달 뒤 성당안에서 내부 장식을 감상하다가 실제로 그는 졸도하였
고 중풍이 일어났던 것이다. 우측 팔다리의 반신불수 증세가 나타났다. 보드레르
는 어머니에게 최후의 구술 편지를 보냈다.
   아! 어머니, 아직 행복해질 시간이 있을까요?
  4월 9일 그는 완전히 실어증에 빠졌다. 보드레르의 어머니는 자신의 마비된
다리를 이끌고 아들의 간호를 위해 부뤼셀에 달려왔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인도
되어 그렇게도 오고싶어 했던 파리로 돌아왔으나 그곳은 정신과 요양원이었다.
입원을 한 7월 4일부터 그가 죽는 8월 31일까지 그의 어머니는 아들의 침대곁을
잠시도 떠나지 않았다.
       마지막 얼마동안은 너무 오래 침대에 누워 있었기 때문에 생긴 상처로 혹
독하게 고통을 겪었지요. 그래서 그를 움직여야 할 때는 가끔 아파서 고함을 지
르곤 했어요. 그렇지만 임종이 가까워 지면서부터 체념을 하고 무척 온화했었지
요. 임종 전의 이틀 낮과 밤은 아주 조용했어요. 그는 두 눈을 뜬 채 잠자는 듯
했지요. 임종의 고통도 없이 아주 조용히 숨을 거두었어요.(생략)
  임종을 지켜본 그의 어머니가 아들의 친구 말라시스에게 적어보낸 글월이다.
  보드레르는 오전 11시. 어머니의 팔에 안겨 숨을 거두었다.
  시우 고티에의 말대로  섬세하고, 예리하며, 독특하고 다정스런 금이 간 영혼
보드레르는 졸도, 중풍, 실어증으로 비참한 46세의 생애를 마감하였다.
   너무나도 짧은 우리들의 여름, 그 발랄한 광명이여!  그의 시구를 떠오르게
하는 짧은 생애였다. 그가 몽파르나스 묘지에 묻히던 날은 생드뵈브, 아슬리노,
마네, 뽀올베르렌느 등 60여명의 친구들이 자리를 함께 하였다.
  보드레르는 에드가 알란 포우에게 매우 심취해 있었다. 그의 작품들을 번역하
면서 어머니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무척 이상한 일, 제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일, 그것은       저 자신의 시와
그 사람(포우)의 시 사이의 내밀한 유사성, 그 불가사의한 일치에 얼마나 충격이
컸던지요.
  스물 다섯 살때부터 그는 포우의  모르그가의 살인 ,  검은 고양이 를 번역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52년 3월 4일에는  포우의 생애와 작품 이란 글을 써서 발표
하였다. 보드레르는 자기의 성격과 반사회적인 생활조건, 취향, 그리고 미학에
대한 견해에 있어서까지 포우와의 일치를 발견하고는 몹시 흥분했다고 전한다.
그의 친구 아슬리노도  보드레르의 생애 란 글에서 그가 포우의 작품을 접할 때
부터 열중과 찬탄을 금치 못했으며 포우의 예술과 사상, 미학에 절대적인 영향
을 받았다고 밝혀 두었다.
  두 사람의 작품 제목을 비교해 보아도 재미있다.
   검은 고양이와 검은 비너스. 어셔가의 몰락과 모르그가의 살인, 죽음의 항해
와 파리의 우울.  하나 같이 검고 어둡고 우울한 악의 요소, 살인과 죽음과 몰락
뿐이다.
  그러나 이 두 사람 모두 방종한 생활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시작에 있어서만은
특이하게 구두점 하나까지도 완벽함을 추구하는 까다로움을 보였다. 인생을 사
십대(40세, 46세)에서 불행하게 끝낸 점도 비슷하지만 시인으로서의 사명감과 자
부심, 거기에 상응하는 노력과 긍지도 실로 대단하였으니 그들은 진짜 시인이었
다.
  지금쯤 지하의 어느 밀실에서 어쩌면 그들은 검은 잔으로 대작을 할지도 모르
겠다는 어이없는 생각에 괜스레 나는 혼자 즐거워지는 것이다.



  불행한 가계의 화가 - 로트렉 / 반고호
  137센티미터의 단구 로트렉
  로트렉은 남프랑스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혈족혼인으로 인하여 로트렉은 약한 체질을 유전받게 된다. 너무나 병약하여 학
교를 퇴학하고, 열 살부터 어머니의 지도로 공부를 하게 된다.
  14세에 자택 응접실 마루에 넘어져 왼쪽다리가 골절되고, 그 이듬해는 산보하
다가 도랑에 빠져 또 오른쪽 다리의 대퇴골이 부러졌다. 두 다리의 골절에도 상
체는 정상이었으나 하체는 발육이 정지되어 기형적 불구자가 되고 말았다. 137
센티미터의 난쟁이였다. 육체적 핸디캡을 잊으려고 그는 술을 마셨고 마침내 알
코올 중독으로 요절하게 된다.
  그는 모델들이나 창녀들과 자주 어울렸는데 그 중에서도 최초의 모델이었던
쉬잔느 발라동은 그의 애인이었다. 미인이던 발라동은 뒷날 화가가 되었으며, 유
트릴로를 낳은 어머니이기도 하다. 발라동이외에도 여러 창부들과 관계를 맺었
는데 이 무렵 얻은 성병은 그의 단명의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몽마르트의 카페 물랭루즈, 꽁세르나 카페 샹땅 등은 그의 예술의 고향이며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이 술집의 분위기, 거기에 펼쳐지는 풍속들, 춤추는 무희,
흥청거리는 카페 한 구석에 앉아, 그는 빠르게 움직이는 것들을 화판에 담고 있
었다. 그 자신이 불구자였기 때문에 더욱 관심을 가졌던 게 아니었을까?
  그는 레슬링하는 그림과 말을 많이 그렸다. 프로 레슬러들이 가진 튼튼한 육
체에 대한 열망과 말들이 가진 튼튼하고 긴 다리에 대한 동경을 그림에 담았다.
그는 특히 드가를 좋아했는데 두 사람은 공통점이 많다. 우선 소재가 같았다. 카
페, 서커스, 경마장, 극장무대, 무희      . 약동하는 인물의 포즈나 생생한 생동감
을 스냅쇼트적으로 정착시키고 있었다. 그들 둘은 자연과 태양의 세계를 떠나
인공적인 빛의 세계를 택했다. 그들의 관심은 동적, 유기적, 인간적인 것에 있었
다. 그러나 드가는  욕실 속의 나부 를 다양한 각도에서 관찰하여  정확한 관찰자
로서 그린 데 반해 로트렉은 애정을 가지고 대상을 지켜보면서 느껴지는대로 그
리는 인간미 넘치는 화가라는 차이가 있다.
  인상파 화가는  색의 화가 라고도 한다.
  로트렉은  선의 화가 였다. 그만큼 소묘에 뛰어난 화가였던 것이다.
  그는 앙보와즈가와 물랭가의 매음가를 드나들며 50여 점이나 되는 작품에 창
녀들을 그렸다.  창가에 있을 때가 제일 마음 편하다 던 로트렉에게 창가는 그의
집이자 아뜨리에였던 것이다.
  1899년 2월, 그는 물랭가의 한 창가에서 의식을 잃고 만다. 서른 다섯 살 때였
다. 그 해 겨울 로트렉은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나는 갇혀 있습니다. 이렇게 갇혀 있을 바엔 죽어 버리고 말겁니다.
  그가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였다. 열두 살 때 아버지로부터 받은 편지에  자유
를 빼앗긴 자는 금방 죽어 버리게 되는 것 이라는 말과 우연히 일치되고 있었다.
  파리의 매스컴들은 로트렉의 입원을  방탕, 주벽, 광기 로 풀어 보도했다. 그는
그것이 아니라는 자신의 정당함을 증명해 보이려는 듯 병실에서 기억을 더듬어
 서커스에서 라는 39점의 색연필 소묘연작을 그려나갔다.
  몇 개월 뒤, 안정을 되찾아 퇴원했으나 그의 음주벽은 더욱 심해졌고 따라서
건강도 더욱 악화되었다. 나중에는 술로 인해 다리마저 움직이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마비된 다리는 헌신적인 어머니의 극진한 간호로 회복이 되었으나 이번
에는 화가의 생명이나 다름없는 손에 경련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로트렉은 어머
니가 계신 말로메로 가서 요양을 받았다.
  다음 해 4월, 죽음을 가까이 자각하게 된 로트렉은 그야말로 남은 시간을 아
껴가며 그림에만 몰두한다.
  8월 20일, 다시 발작이 일어났다. 보드레르가 그랬던 것처럼 그도 어머니 곁에
서 죽기를 바랬다. 1901년 9월 9일, 새벽 2시에 어머니와 친지가 지켜보는 가운
데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의 나이 37세였다. 고흐가 죽은 나이와 똑같았다.
  그는 이렇게 자주 말했다고 한다.
   내가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은 우연에 지나지 않아      . 내 다리가 조금만 길었
더라도 난 결코 그림따윈 그리지 않았을 거야.

  


죽음에서 조차 정다웠던 반 고흐 형제
  동시대를 살면서 똑같이 3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 로트렉과 반 고흐. 이 두
화가는 정신질환에 시달리면서도 많은 걸작품을 세상에 남겼다. 네덜란드 태생
의 반 고흐는 약 840점의 유화와 수많은 데생을 남겼는데, 이것은 모두 그가 죽
기 전 10년 동안에 제작된다.
  고흐는 16세 때부터 백부의 화랑에 근무하면서 그림에 눈을 뜨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그림에 뜻을 두게 된 것은 그가 보리나쥬 탄광지대에서 노동자들
의 처참한 생활을 목격하고 나서이다. 이것을 그대로 묘사해서 전 인류앞에 고
발하려는 의욕에서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데생공부를 시작한 것은 27
세 때였다. 33세가 되자 그의 신경과민증세가 더해졌다. 동생 테오의 보살핌으로
몽마르트로 옮겨왔다. 그러나 그는 로트렉 등 인상파 화가들과 어룰리면서 음주
와 퇴폐적인 생활로 점차 건강을 해치게 된다.
  35세, 파리를 떠나 아르르역 근처, 마르티느 광장에 있는 노란 색을 칠한 이층
집을 빌린다. 방안을 온통 해바리기 작품으로 장식해 놓고 그가 존경해 마지 않
는 폴 고갱을 초대하였다. 두 사람의 공동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고갱과 반
고흐의 화품은 서로 조화될 수 없었다. 고갱을 찌르려고 했던 칼로 고흐는 자기
의 귀를 싹둑 잘랐다. 광적인 이 사건을 계기로 두 달 만에 파국을 맞아 고갱은
유럽으로 떠났고 고흐는 정신병원으로 끌려갔다.
  그는 자신의 발작이 석 달 만에 한 번씩 찾아오는 주기성 발작이라는 것을 알
았다. 그래서 그는 발작 주기인 3개월이 다 되기 48시간 전부터 침대 주위에 커
튼을 내리고 건강한 상태로 침대에 누워 그것을 기다렸다. 그런데 발작 주기가
가까워도 아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
   이제부터는 걱정할 필요가 없군, 페리롱 의사가 틀렸어. 이렇게 누워 시간을
허비하다니       원, 내일 아침엔 일어나서 작업을 해야겠군.
  그러나 그날 밤이었다. 모든 사람이 잠들어 있는 시각, 그는 맨발로 석탄이 저
장된 지하실로 내려갔다. 어둠 속에서 석탄가루를 한움큼 퍼내어 자신의 얼굴에
문지르며 중얼거린다.
   드니 부인, 사람들이 이제 나를 받아들이고 있어요. 나도 자기들과 똑같은 사
람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그들이 전에는 날 불신했지만 이젠, 나도  시커먼
아가리 예요. 이번에는 광부들도 내가 신의 말씀을 전하도록 허락해 줄 겁니다.
  사람들은 동이 튼 직후에야 지하실에서 빈센트를 찾아냈다.
  1890년 고흐는 자살하기 직전까지 2년 동안 모두 네 차례의 발작을 일으켰다.
그는 생 레미병원을 떠나 파리에 있는 동생 테오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 그
가 돌아온 것을 환영하기 위해 많은 친구들이 테오의 집으로 모여들었다. 로트
렉이 들이닥쳤다. 6층까지 올라온 탓에 숨을 헐떡거리면서도 그는 여전히 쾌활
하였고 여전히 험구였다.
   빈센트
  악수를 하면서 로트렉이 외쳤다.
   지금 층계를 올라오다 장의사를 지나쳤는데, 그 장의사가 당신을 찾고 있던
것이겠소? 아니면 나를 찾고 있던 것이겠소?
   그야 로트렉 자넬 찾고 있었던 거지! 장의사가 나한테 별 볼일이 있을리 없
거든.
  고흐의 대답이었다.
   당신한테 자그만한 내기를 걸지요. 장의사의 장부에 당신 이름이 내 이름보다
앞에 나온다는 것에 말이오.
   좋아 그런데 뭘 걸지?
   카페 아텐에서의 저녁식사와 오페라 관람.
   둘이 좀, 섬뜩한 농담을 주고 받지 않았으면 좋겠군.
  테오가 보일락말락 미소지으며 말했다.
  열한 살이 더 많았던 고흐는 자살함으로써 그날 로트렉의 말이 맞았음을 입증
해 보인 셈이 되었다.
  테오는 형을 오베르에 있는 의사 가쉐에게 부탁했다. 가쉐는 의사인 동시에
아마추어 화가여서 고흐를 진심으로 환대하였다.
   형을 잘 지켜봐 주십시오. 병이 닥칠 징후가 조금이라도 보이면 즉시 저한테
전보를 쳐 주세요, 내가 형과 함께 있어야만이      .
   물론 자네 형이 미치긴 미쳤지. 하지만 자네가 어떻게 하겠어. 예술가들이란
모두 미친 사람들인 걸. 그게 그들이 갖고 있는 가장 좋은 점이거든. 난 그런 그
들을 사랑하고 있다네. 가끔씩 나도 미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하
지.  뛰어난 영혼에는 예외 없이 광기가 섞여 있다  이게 누구의 말인줄 아나?
아리스토텔레스지. 그 사람이 그렇게 말했다네.
  가쉐와 함께 있는 석달 동안에 고흐는 80여점 이나 되는 그림을 그렸다. 그러
나 그의 생전에 그림은 다만 한 점이 팔렸을 뿐이다.
  어젯밤 텔레비젼에서 나는 그의 작품  프로방스의 농부 가 영국의 어느 경매장
에서 126억원에 팔렸다는 보도를 보았다. 이런 기회가 단 한 번만이라도 그의
생전에 주어졌던들 얼마나 좋았을까하고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그 무렵, 결혼하여 아들까지 둔 테오의 경제 사정은 말이 아니게 나빴다. 생존
의 위협을 느끼고 있던 고흐는 자신의 병 때문에 더욱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칠월에 발작이 닥치면 자신이 뭔가 미친 짓을 저질러 불쌍한 테오로 하여금
더 많은 근심과 더 많은 돈을 치르게 할지도 모른다.        간신히 보내 준 50프
랑으로 거의 7월 말까지는 지낼 수 있으련만, 그러나 그 뒤엔       어떡한다?  10
년이나 형의 뒷바라지를 해온 테오에게서 돈을 더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고흐
는 잘 알고 있었다.
  7월 하순 야외 스케치를 할 때였다. 불붙는 듯한 태양이 머리위를 내려쬐고
있을 때, 돌연 검은 새 떼가 하늘에서 쏟아져 내려왔다. 어둡게 스쳐 지나가는
그림자에서 그는 죽음을 예감했다. 고흐는 제작을 계속하였다. 노란 밀밭 위를
날으는 검은 새떼를 그렸다.
  1890년 7월 27일. 머리 위엔 태양이 빛나고 있었고 그는 외톨이인 자신의 입
장이 그날따라 그렇게 마음 편할 수가 없었다.
   그럴 수는 없지. 그럴 수는 없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그는 권총을 옆구리에
갖다 대었다. 그리고는 방아쇠를 당겼다. 피를 흘리며 몇 시간을 땅 위에 누워
있었다. 주머니엔 동생 테오에게 부쳐질 그러나 채 끝맺지 못한 652번째의 편지
가 들어 있었다.
  의사 가쉐가 달려오고 전보를 받은 동생 테오가 마차를 타고 오베르로 질주해
왔다. 고흐는 아직 죽지 못한 채, 침대 위에 눕혀져 있었다.
   아, 테오야.
  빈센트가 말했다. 테오는 침대 곁에 무릎을 꿇고서, 어린아이 안듯 양팔로 형
을 껴안았다. 그는 말할 수가 없었다.
  가쉐 의사가 오자 테오는 그를 바깥 복도로 데리고 나갔다. 가쉐는 서글프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가망이 없네. 총알을 제거하는 수술을 할 수가 없어, 너무 쇠약한 상태야.
  그 기나긴 낮 동안 테오는 빈센트의 손을 꼭 쥔 채, 줄곧 그의 침대가에 앉아
있었다. 밤이 내리고 방안에 단 둘만 남게 되자, 형제는 브라반트에서의 어린시
절 이야기를 조용히 나누기 시작했다. 새벽 한 시가 조금 자났을 때, 빈센트가
약간 고개를 돌리고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테오, 난 지금 죽었으면 좋겠구나.
  그리고 몇 분 뒤 그는 두 눈을 아주 감아 버렸다. 7월 29일이었다.
  테오는 형이 자기에게서 영원히 떠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불과 반 년 후,
오베르의 태양이 뜨겁게 내리쬐는 작은 공동묘지, 빈센트 반 고흐의 무덤 옆에
테오도 와서 나란히 묻혔다. 묘지 주위가 온통 해바라기로 둘러 싸였는데 그것
은 고흐를 숭배하던 의사 가쉐가 심어놓은 것이라고 한다. 그들은 무덤에서조차
도 정다웠다.
   오의 삶이 그의 형보다 더 우울하였을 것 라고 말한 것은 그도 재발성 우울증
으로 정신병을 앓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누이 빌헬르미나는 거의 40년간을 정신
병원에서 지냈고 동생 코넬리우스도 자살을 하였다. 빈센트가 말한대로 그의 이
모는 간질병 환자였고, 그 외에도 문중에는 환자가 많았다고 한다. 불행한 가계
였다.



  잊혀진 여자 - 까미유 끌로델 / 나혜석
 

죽어서야 나올 수 있었던 몽드베르그의 문 - 까미유 끌로델
  천부적 재능과 눈부시게 빛나는 외모를 겸비한 여자. 황금분할로 표현되는 몸
매, 대담함, 꾸밈없는 솔직함, 오만함, 예술에 대한 광기에 가까운 정열, 흙에 대
한 본능, 이 모두를 소유한 까미유 끌로델은 로댕을 한때 미치도록 사랑했다.
  로댕과의 사랑과 고뇌, 스캔들로 인해 그녀는 서서히 그러나 아주 쉽게 죽음
의 병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녀가 로댕을 잃었을 때, 사실 그녀는 모든 것을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까미유 끌로델은 1864년 프랑스의 동부, 빌르뇌부에서 태어났다. 19살 때 파리
오 이사를 와 보자르 미술학교의 조각반에 입학하여 로댕과 만나게 된다. 로댕
은 최초의 이 여제자에게 사랑을 느꼈다. 24살의 나이 차이 따위는 문제가 되질
않았다.
  그들은 끌로빠이엥에 집을 얻어 거기에서 사랑을 나누고 작업을 같이 하였다.
  그러나 폭풍이 몰아치던 추운 겨울 밤, 로댕의 부인이 찾아와 난장판이 벌어
졌다.
  그날 이후, 까미유의 신경은 위태로워졌고, 로댕은 일주일이 넘도록 그녀를 찾
아오지 않았다. 한편 까미유는 집에서도 쫓겨났다. 가족에게 버림받고 어머니한
테도 쫓겨난 까미유. 두 번째 충격은 로댕의 아이를 유산한 일이다.
  로댕은 차츰 그녀를 멀리하기 시작했고 다른 여인들과 관계를 가지기 시작했
다. 스물여덟 살의 한창 나이에 견디기 어려운 고통 속에서 까미유는 한때 끌로
드 드뷔시와도 어울렸다.
  로댕의 아이를 잃고 난 까미유는 사람이 달라져 있었다. 매일 밤, 환락가를 찾
아 파리 시내를 전전했다. 스스로 파멸의 늪으로 빠져 들어간 것이다. 한밤중 까
미유는 자신의 작품,  끌로또 를 바닥에 내던지며 소란을 피웠다. 이웃에서는  미
친여자  취급을 해 버렸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녀는 작품 제작을 꾸준히 하였다.
 수다스런 여인들   화가   잔느의 초상  등은 그녀의 명성을 빛내 주기에 손색이
없었다. 그러나 자료 구입과 생계에 한없는 절망을 느껴야만 했다.
  1905년 11월 14일, 모델을 서려고 찾아온 아슬렝은 공포에 질려있는 까미유를
발견하게 된다.
   간밤에 두 사람이 나의 집 덧문을 부수려고 했어요. 난 그들의 얼굴을 보았어
요, 그들은 로댕의 이탈리아인 모델들이예요. 그는 그들에게 나를 죽이라고 지시
했어요. 내가 그에게 문제가 되기 때문이죠. 그는 나를 없애 버리려 해요.
  그리고 까미유는 기절해 버렸다.
  까미유의 정신착란 증세가 점점 심해지자 가족들은 그를 정신병원에 보내기로
결심한다.
          그것은 너무 지나치다!       내가 항의하지 못하도록 종신형을 언도하다
니! 이 모든 게 악마 같은 로댕의 머리에서 나온 거야. 그는 한 가지 생각밖에
가지고 있지 않아. 내가 예술가로서 크게 명성을 떨쳐 자기보다 더 위대하게 되
지나 않을까 하는 거지. 자기가 죽은 후에라도 나는 불행해야 한다는 것이지. 그
는 완전히 성공했어. 내가 불행해졌으니까. 나는 이 노예생활이       지겨워.
  정신병원에서 까미유가 동생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이다.
  까미유는 병원에서도 로댕과 그 주변 사람들이 자기를 독살하지 않을까 하는
피해망상증에 시달렸다. 심지어 병원 음식까지 거부한 그녀는 껍질을 벗기지 않
은 계란과 감자만을 특히 많이 먹었다. 거기에는 쉽게 독을 넣을 수 없을 것이
라는 생각에서였다. 병명은  추적망상 . 항간에서는  로댕이 까미유의 주제를 훔쳤
다 는 평가와 함께 무수한 소문이 나돌았다.
  1913년 3월 10일, 밖에는 구급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두 마리의 말이 채찍 및에서 울고 있었다. 철책 그리고 마차의 요동, 흔들리는
마차를 타고 그녀는 몽드베르그 정신병원으로 끌려갔다.  철컥  문밖으로 자물쇠
가 채워졌다. 49세에 들어간 것이 79세에 죽어서야 그 문을 빠져 나올 수 있었
으니, 한번 들어간 것이 30년, 로댕과 만나 공동작업을 하던  지옥의 문  또한 왠
지 우연한 것이 아닐거라는 생각조차 들었다.
  문. 그 안팎의 금은 누가 그었던 것일까.
  썰렁한 병실에서 그녀가 임종하던 1943년 10월 19일.
  까미유는 물론 철저히 혼자였다.
  마침 1933년 10월은 까미유의 서거 50주년이 되는 해여서 그것을 기념하는
 까미유 끌로델과 로댕전 이 서울에서 있었다. 도록에서만 보던 것을 직접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는데, 과연 두 사람의 작품은 너무 많이 닮아 있었다. 아무리
같은 수원지에서 퍼올린 물이라곤 하지만 오른손을 어깨에 대고 있는 까미유의
 밀단을 진 소녀 와 로댕의 작품  가라테아 는 소녀들의 모습이 너무나 똑같았다.
  그 외에도 로댕의  영원한 우상 과 까미유의  소외된 사람 ,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과 까미유의  생각하는 남자  등은 작품의 내용이나 분위기가 지나치게 유
사한 구석이 많았다. 까미유 끌로델이 그럴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댕의 그늘
에 가리워져 있던 끌로델 작품의 재평가와 함께 그의 해석도 달라져야 한다는
가슴 두근거림이 일어났다. 로댕의 제자로서, 조수로서, 작품의 모델로서, 연인으
로 지냈던 까미유 말고, 조각가 까미유에 대한 진정한 재평가가 다시 이루어지
길 바란다. 사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온통  로댕 밖에는 들어있지 않았다. 애증이
빚어낸 무서운 파국이었다.


 나혜석 부러진 날개
   펄 펄 날던 저 제비.
  참혹한 사람의 손에
  두 죽지, 두 날개 모두 상하였네.
  다시 살아나려고
  발버둥치고 허덕이다
  끝끝내 못 이기고 그만 축 늘어졌네. (하략)
  그의 자작시처럼 나혜석은 제비가 비상하듯 창공을 마음껏 날아 올랐던 때가
있었다. 총명과 미모와 재능을 겸비한 권문세가의 맏딸로서 그녀는 많은 사람들
의 선망을 받기도 했다.
  진명여고를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동경미술학교로 유학을 떠날 만큼 집안은 유
복하였다. 나혜석은 일본에서 그림 재주가 출중한 연하의 미소년, 최승구를 사랑
하였는데 그가 요절하자 비통과 허무에 싸여있었다. 스물 두 살 때의 일이다. 정
신여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다가 거기서 김마리아, 박인덕과 어울려 독립운동에
가담, 3 1운동 시위 때 체포되었으나 젊은 변호사 김우영의 자진 변론으로 구출
된다. 본인의 말대로 김우영은  생명의 은인 이기도 했다. 10년 연상이고 전실의
애들도 있었으나 두 사람은 곧 결합하여 안정된 가정을 꾸렸다. 나혜석은 창작
에 몰두하여, 결혼 일 년만에 개인전을 갖게 된다. 1921년 당시 서양화 개인전은
처음이었던 만큼 대성황을 이루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남편의 재정적 뒷받침이
컸다. 풍경화 70점은 모두 매진되었다.
  선전 1회에서 6회까지, 9회에서 11회까지 출품하여 특선과 입선을 거듭하였으
며 27년 6회때는  봄의 오후 가 무감사 입선, 2회 때는 관전평을 신문에 쓰기도
했다. 문필로 이름을 얻기도 했으며 이당 김은호 등과 어울려 <고려 미술회>에
서 중진 멤버로 활약을 하였다. 조선인으로 최초의 외교관이 된 남편을 따라 나
혜석은 만주로 가게된다. 넓은 견문과 이국적 풍경은 모두 그의 그림에 보탬이
되었다. 나혜석은 만주에 거류하는 한국 사람들을 보호하고 협조하는 데도 빠지
지 않았다. 안동부인회를 조직하여 독립 투사들을 돕고 무기를 반입하는데 외교
관 부인이라는 신분의 특권을 이용하여 거들어주다가 남편의 관직이 위태로울뻔
한 적도 있었다. 무사히 귀국하였으며 그녀의 꿈이라던 구라파 여행이 이루어졌
다.
  파리여행은 사실상 그들 부부의 행복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
혜석은 거기서 자유연애의 개방된 생활 풍속을 목도하게 된다. 더구나 그녀는
활달하고 대범한 성품인지라 남편의 질투도 개의치 않고 잠시 나그네끼리의 연
정을 엮기도 했다. 상대방은 최린이었다. 남편은 보수적인 기독교인이었다. 기쁜
여행의 끝은 싸늘한 가정불화로 바뀌어 귀국하자마자 김우영은 이혼을 선언했
다. 어린 4남매를 집에 남겨놓고 나혜석은 떨어지지 않는 발길로 집을 나와야만
되었다. 신문은 나혜석의 간통사건을 대서특필하였다.  최고의 세도가 최린, 최초
의 여류화가 나혜석. 일류지식인 김우영.  신문은 특종기사에 피치를 올렸다. 천
도교 교령이며 중추원 참의이던 최린은 동아일보에 압력을 가하는 한편, 신문을
압수하는 권력을 행사하였고 김우영은 씁쓸한 고배를 마시고 낙향해버렸다. 남
편과의 이혼, 최린의 배신. 나혜석은 최린과 불꽃튀는 설전을 벌였으나 상처만
받고 소득은 없었다. 스캔들과 이혼의 파문은 그녀의 인기를 급속히 저하시켜버
렸다. 사회는 그를 냉대하고 친지들조차도 냉담하게 굴었다. 사면초가의 고립감
속에서 고군분투하였으나 사회의 비정을 감당해내기는 어려웠다. 왕성한 의욕과
재기는 꺾이고, 경제적 궁핍은 날이 갈수록 목을 조여왔다. 생계가 막막했다. 그
의 <자작시>처럼 다시 살아나려고 발버둥치고 허덕여 보았으나  끝끝내 못 이
기고 그만 축 늘어지고 만 셈 이었다. 그는 <내가 걸어온 길>에서 자신의 처지
를 이렇게 밝혔다.
   전당포 출입을 하게 되고, 그 건강은 쾌활 씩씩하던 것이 거의 마비까지 이르
렀고, 그 정신은 총명하고 천재라던 것이 천치바보가 되고 말았다.
  너무나 순식간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 한때는 중이 되려고 수덕사 길일엽 스
님을 찾아간 적도 있었다. 만년에는 정신착란 증세까지 나타났고 사지가 뒤틀리
며 경련이 일어났다. 절과 무료 요양원을 전전하면서 비참한 13년을 이어 나갔
다.
  흡사 산송장처럼 넋을 놓고 다녔다고 하는데 일설에 의하면 눈 내리는 길가에
서 최북이 그랬던 것처럼 12월 한파에 얼어 죽었다는 말도 있다. 그러나 당시
관보에 실린 사망자 광고를 보면 본적, 주소 미상인 바, 시립 자제원에서 병사한
것으로 취보자인 용산구청장이 밝혀놓고 있었다.
  유언도 알 수 없고 기일도 물론 알 수 없고, 무덤까지도 없다고 한다. 그때의
나이는 54세였다.
  죽음은 자신의 행업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까미유 끌로델과 나혜석.
  재능과 미모를 겸비한 그리고도 정열적이며 담대한 성격, 오만함. 그럼에도 남
자에게 버림받은 상처와 사회의 조소, 냉대 그 스캔들 때문에 그들의 아까운 재
능과 운명은 잠식되어 들어갔다. 연상의 남자와 행복한 20대를 보내고, 똑같이
불우한 40대를 보내다가 1940년대를 맞이하여 둘은 죽고 말았다.
  환호의 갈채는 여름날의 무지개보다 짧고, 아름다운 이 여류 화가들은 망각의
늪에 빠진 채 사람들로부터 서서히 잊혀져 갔던 것이다.
  죽은 여자보다 더 불쌍한 것은  잊혀진 여자 라던 마리 로랑상의 시구가 하필
이 대목에서 생각났다.



  투신자살한 작가들 - 버지니아 울프 / 굴원 / 셀리 / 태재치


  우즈강에 몸을 던지 - 버지니아 울프
  3월이라지만 아직은 춥고 쌀쌀한 영국의 봄날, 1941년 3월 28일. 버지니아 울
프는 모자와 지팡이를 나란히 우즈강 언덕에 남겨놓고 코트 주머니에 돌멩이를
가득 집어넣고서 찬 강물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이번에는 다시 살아나오지 못했다.
  3층 창문에서 뛰어 내리기도 하고, 다량의 수면제를 먹기도 했지만 자살은 번
번이 실패였다. 그래서 이번에는 주머니가 터지도록 돌멩이를 넣었던 것이다.
  59세를 살다 간 버지니아 울프는 1882년 런던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저명한 작가였고 어머니도 교양 있는 여성이었다. 우수한 머리와 문학
적 재질을 물려받은 버지니아 울프. 그는 자신이 그렇게도 들어가고 싶어했던
옥스퍼드나 캠프리지 등의 명문대학교에 여성 입학이 금지된 것에 충격을 받아
후일 여권운동가로 변신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녀가 몇 차례의 자살을 기도하게 된 것은  어머니의 죽음은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재앙이었다 고 말하듯 13세에 어머니를 잃어버린 충격과 연이은 아버지
와 오빠의 죽음,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사촌이던 조지에게 당한 성적 충격이 그
를 정신질환으로 몰아넣게 된 것이다.
  성적 불감증이 된 그녀와 원만하기 어려운 상황임에도, 남편 레오나드는 울프
의 영혼을 따뜻이 감싸 주고 후원해 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남편에게 남김 울프
의 유서는 다음과 같다.
   다시 정신이 이상해져감을 느낍니다. 또 한번, 그 참혹했던 시절을 반복할 수
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아마 회복이 안될 거예요. 이상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정신을 집중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제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을
택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저에게 최대의 행복을 주신 분입니다.       저는 더 이상
싸울 수가 없습니다(생략).
  울프의 익사체가 발견된 것은 그로부터 3주가 지나서였다.
  그녀의 남편 레오나드는 시체를 거두어 화장한 뒤, 멍크스하우스 정원밖에 있
는 커다란 느릅나무 밑에 그녀의 재를 묻었다. 그리고 묘비명에는 울프의 소설
<파도>의 마지막 구절을 새겨 넣었다.
  너에게 대항하여 굽히지 않고
  단호히 나 자신을 내던지리라.
  죽음이여!
  자의식이 선택한, 실로 단호한 죽음이었다.
  때로는 심하게 덮치는 우울증과 정신발작의 광기를 억누르고 그녀는 저항운동
가로, 여권운동가로, 훌륭한 작가로 59년을 열심히 살았다. 그래서 그런지 그에
게 있어 자살은 잘못된 선택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멱라강에 투신한 - 굴원
  초나라 굴원의 죽음을 기억하기 위해 하나의 절이 탄생되었으니 단오절이 바
로 굴원이 죽은 날이다.
  버지니아 울프와 똑같은 나이 59세에 굴원도 주머니에 돌을 가득 넣고 멱라수
에 몸을 던졌다. 5월 5일이었다.
  그는 초나라 왕족으로서, 견문이 넓고 치란에 밝아 26세의 젊은 나이에 이미
벼슬이 높았다. 굴원은 회왕으 명으로 헌령을 작성하고 있었는데 마침 다 되기
도 전에 상관대부가 이것을 빼앗으려 하자 굴원은 거절하고 주지 않았다. 이 때
문에 그는 상관대부의 참소를 입고 끝내는 회왕의 노여움을 사게 되어 파직되었
고 왕은 점차 그를 멀리하기에 이른다.
  이 무렵 진, 제, 초 세 나라가 힘의 균형을 이루고 팽팽히 맞서고 있었는데 굴
원은 친제공진의 정책을 펴고 있었다. 마침 굴원이 쫓겨나게 된 것을 안 진나라
임금이 장의를 시켜 제나라와 국교를 끊도록 만들어놓고 초나라로 쳐들어갔다.
위나라까지 기습해 왔다. 속은 것을 안 회왕이 잘못을 뉘우치고 철저한 친제파
이던 굴원을 다시 불러 제나라에 사신으로 보낸다. 그는 다시 중용이 되어 초나
라의 삼려대부가 되었다.
  그러나 초나라 회왕은 진의 계략에 빠져 친진파들의 참언으로 충간하던 굴원
을 내쫓고 만다. 결국 회왕은 어리석은 아들 자란의 말을 듣고 진나라에 갔다가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불귀의 객이 되었다. 회왕의 장자, 경양왕이 그의 뒤를 잇
고 아우 자란이 영윤이 되었다. 굴원은 자란을 미워하다 비록 방축되었지만 초
나라를 걱정하고 회왕을 그리워하며 다시 조정에 돌아가고 싶어했으나 그의 직
언을 꺼리던 경양왕은 진나라와의 국교가 재개되자, 그를 강남으로 방축해 버렸
다.
  수 년간 울분으로 비분 강개하다가 <어부사>를 쓰고 경양왕 14년(기원전
285), 굴원은 59세를 일기로 멱라수에 몸을 던졌다.
  그가 주은 5월 5일에는 쭝즈(종자)라는 떡을 만들어 먹고 뱃놀이를 하는 풍습
이 있다. 너무나도 억울하고 비통한 굴원의 죽음에 그를 애도하는 초나라 사람
들이 죽통에 쌀을 담아 강물에 던지는 것은 교룡에게 그걸 먹고 굴원의 시체를
다치게 하지 말아 달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고 한다.
  대만에서는 단오날을 시인절로 정하여 갖가지 문학행사를 하면서 굴원의 시정
신을 문학적 지표로 삼고 있다고 한다.
  <회사>  돌을 품에 안다 라는 시 끝 구절에
         세상 혼탁하여 날 알아 주는 이 없고
  사람의 마음 일깨울 수 없어라.
  죽음 피할 수 없음을 알고, 애석히 여기고 싶지 않아라.
  분명 세상 군자들에 고하노니 나는 그대들 본보기 되리라.
  이것이 그가 죽고자 한 뜻이었다.
  이 시를 절필로, 그는 불의에 굽히지 않는 본보기가 되려고 스스로 죽는다고
했다.
  다 같은 익사이지만 각기 처해진 입장과 심경은 모두 이렇게 달랐다. 특히 굴
원의 문학은 망국을 슬퍼하는 여말의 목은, 야은, 포은 등 우국충정한 신하들에
게 사랑을 받았다. 동병상련의 감회를 그들은 시로써 나눈 것이리라.



  폭풍우가 데려간 - 셀리
  셀리는 이백이나 굴원, 태재치나 울프처럼 스스로 물에 빠져 죽은 것은 아니
었다. 우연한 사고사였다.
  친구와 보트를 타고 스페치아만을 항해하는데 폭풍우가 덮쳐 순식간에 그를
데려간 것이었다. 그때의 나이 29세였다.
  그도 버지니아 울프처럼 영국의 명뭔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티모디 셀리는
국회의원이었고 셀리도 준남작의 지위를 계승하게 되어 있었다.
  그는 엉뚱하고 반항적이며 자유분방한 기질을 나타내어 고등학교 시절부터 많
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교실에서 접시에 담은 알코올에 불을 붙여 파아란
불꽃을 보며 그는 주문을 외운다.
   공기와 물과 불의 악마들이여! 내가 너희들을 불러내노라      .
  선생이나 학생들은 미치광이 셀리라 불렀다. 옥스퍼드 대학에 입학한 그는 친
구와 <무신론의 필요성>이란 책을 출간하여 퇴학처분을 당하게 된다. 19세 때
였다. 집에서 배척을 받고 가출한 그는 여관집 딸 헤리어트와 아일랜드로 도망
을 갔다. 그들은 2년 뒤에 애기를 안고 돌아왔다. 셀리는 급진주의자인 윌리엄
고드원을 만나 곧 의기투합하게 되는데 그의 딸 메리와도 사랑에 빠지게 된다.
두 남녀가 이번에는 스위스로 도망을 쳤다. 그 소식을 안 헤리어트는 자살을 해
버렸다. 급진주의자다운 빠른 템포로 셀리는 여러 가지의 일을 저질렀다. 장인의
소송에 의해 그는 1818년 이탈리아로 쫓겨간 후 다시는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말았다.
  궁핍과 가정적인 불행 속에서도 그는 쉬지 않고 시 쓰는 일에 몰두하였다. 셀
리는 영국의 낭만파 시인들 바이런, 키츠 등과 어울렸다. 키츠는 이태리를 여행
하다 3개월만에 로마에서 각혈을 하며 쓰러졌고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셀리는
추모시  아도네스 를 썼다.
  그런데 우연인가 키츠가 누워 있는 로마교외의 묘지에 셀리도 와서 묻히게 된
다. 불과 4개월 뒤였다. 키츠는 26세, 셀리는 29세였다.
  셀리의 시체가 지중해의 해변가로 떠올랐을 때, 바이런이 다리를 절며 단숨에
달려왔다. 둘은 평소에도 통하는 데가 있었으며 공통점이 많았다. 바이런은 남쪽
해안에 장작을 쌓아놓고 그 위에 셀리의 시신을 올려놓고 불을 지폈다.
  셀리는 한 줌의 연기가 되어 이탈리아의 하늘로 피어올랐다. 그러나 불과 2년
후, 바이런마저 그리스 독립전쟁에 참가, 격전지인 미서롱지에서 열병으로 죽자
그도 한 줌의 재가 되고 만다.
  영국의 낭만파 시인들 셋은 약속이나 한 듯 로마와 그리스에 와서 객사하였
다.
  셀리가 죽기 전에 쓴  서풍에 부치는 노래 는 언필칭 그의 대명사가 되고 있
다.
   무덤 속의 송장들처럼 차가운 곳에 누워 있게 하는
  오! 너 서풍!



  자살할 수밖에 업슨 사람 - 태재치
  태재치에 대해 쓰려고 그의 이름을 뇌어보니 37년 전, 예전 그대로의 그리운
정감이 솟아난다. 내가 대학 초년새이던 1960년 무렵, 전후문제 작품집이 쏟아져
나오고 일본의 작가 하라다 야스꼬의 <만가>, 미우라 아야꼬의 <빙점>, 가와바
다 야스나리의 <설국> 등 일본소설이 우리 나라에 소개되기 시작했다. 그 중에
서도 나는 태재치의 <사양>에 매료되어 있었다. 특히 시인이던 신동문씨의 문
장은 너무도 아름다워 숨막히는 순간의 절망의 미를 그대로 우리에게 옮겨 주었
다.
  1964년으로 기억되는 가을, 무교동의 어느 대폿집에서 우연히 다자이(태재치)
를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모이게 되었다. 고은씨가 나를 신동문씨에게 소개해 주
었다.
   다자이를 몇 번이나 읽었습니까?
  그의 첫 마디였다. 그리고 이어령씨와 동창인 그의 아내 진여사는 다섯 번인
가를 읽었다고 말했다. 그날 밤 우리는 다자이의 혼이 씌인 듯 우에하라 선생의
 키로칭 을 흉내내며 실컷 떠들고 웃고 마셨다. 함께라고 하지만 사실 우리는 자
신의 몫을 저마다 괴로워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삶이 힘들고 괴로웠던 때였으
니까.
  힘에 닿지도 않는 실력이나, 욕심으로 나는 다자이의 소설을 모두 일어본으로
구했다. 특히 그의 유서나 다름없는 <사양>이나 <인간실격>은 마치 죽은 동생
의 일기장이라도 되는 것처럼 지금도 나는 소중히 지니고 있다. 육십을 바라보
는 지금, 그때의 감정을 어떻게든 다 옮겨올 수가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뭉크
의 그림같이 유혼이 되어 떠다니던 때의 모습. 몰락한 전후 고아 가즈꼬(사양의
여주인공)처럼 나도 그때 허허벌판에 서 있었던 것이다. 나는 나오지의 유서를
그때 읽고 또 읽었다.
  <인간실격>의 요오조오나 <사양>의 나오지는 바로 태재치 자신의 모습이었
고 다른 한편으로는 어떤 내 내면의 모습이기도 하여서 때로는 거울을 보는 듯
한 전율마저 느끼며 그 유서르 거듭 읽어 내려갔던 것이다.
  누님. 안되겠어요. 먼저 가요.(생략)
  나는, 나라는 풀은 이 세상의 공기와 태양 속에서는 살기 어렵습니다.
  살아가기에는 어딘지 한 군데 모자라는 점이 있습니다. 부족한 것입니다.
  오늘까지 살아온 것도 큰 노력이었습니다.(생략)       강한 세력에 밀려서 지지
않으려고 마약을 쓰며 미치광이가 되어가지고 저항했습니다.(생략)
  나는 집을 잊지 않으면 안된다. 아버지의 피에 반항하지 않으면 안된다.
  어머님의 착하심을 거부하지 않으면 안된다. 누님에게 냉정하지 않으면 안된
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저 민중의 방에 들어갈 입장권을 얻을 수가 없다고 생
각하였던 것입니다.(생략)
  누님. 믿어 주십시오.
  나는 놀기만 하였지만 조금도 즐겁지가 않았습니다.
  쾌락의 임포텐츠인지도 모르지요. 나는 오직 귀족이라는 자신의 헛도깨비에서
이탈하고 싶어서 놀고 미치고, 거칠어진 것입니다.(생략)
  누님. 나에게는 희망의 지반이 없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결국 나의 죽음은 자연사입니다.(생략)
  어젯밤의 술도 말짱히 깨었습니다. 나는 맨정신으로 죽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안녕하십시오.
  누님. 나는 귀족입니다.
  다자이 오사무(태재치), 그는 일본 본토 북쪽 끝에 있는 아오모리껭에서 출생
하였다. 동경대 불문과에 다녔으며, 집안은 귀족의 명문가로 세금을 제일 많이
내는 대단한 부자였다. 1909년에 태어나서 1948년에 죽었으니 내가 일곱 살 되
던 해였다.
  그는 41세의 나이로 자살을 했는데 정말 자살을 할 수밖에 없게 생겨먹은 사
람이었다. 그가 문단에 나온 시대는 제2차 세계대전을 목전에 둔 암담과 혼돈의
시대였다. 형식적으로는 틀의 개혁을 시도하고 내면적으로는 현실부정의 반속정
신을 표방했지만 그가 지닌 주체의 연약성과 그의 시도를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나 이질적인 사회정세로 말미암아 그의 의도는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패
배는 창작에 그친 것이 아니라 인간생활까지 뿌리채 뒤흔들어 놓았다. 말하자면
인간에 실격한 셈이었다. 순수한 그에게 문학과 인생이란 이겨낼 수 없는 거대
한 벽이었던 것이다.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지는 일종의 자학적인 도전, 그러한 그의 행위는 마치
불나방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자학이 생활에 옮겨와 그는 마약에 손을 대었
고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와 정사를 시도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벽이
창작에서는 야릇한 결과를 빚어냈다. 퇴폐적인 미를 형성해 놓았던 것이다. 그래
서 몰락한 귀족의 고귀한 패배의 미를 탐구한 <사양>, 자존보다도 비굴, 진실보
다도 허구를 통해서 오히려 실존과 진실을 탐구한 <인간실격>은 그의 대표작일
뿐 아니라 전후 일본문학의 금자탑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세 번이나 자살을 기도하였다. 긴자의 여급과 투신자살을 기도했으나 혼
자만 살아 남았고, 두 번째는 초대라는 여자와 수상온천에서의 자살미수. 세 번
째는 산기부영과 손을 잡고 옥천상수에서 뛰어내렸다. 세 번째 가서야 그는 정
말로 죽을 수 있었다.
   태재치의 정사는 마음 아프다든지 슬프다고 말하기보다는 더 한층 견딜 수
없이 암연한 생각을 문학에 종사하는 우리들에게 느끼게 한다. 그것은 생전의
그의 소설이 나타내고 있던 세계의 해명을 몸으로써 증명한 것 같다. 다시 말하
면 정사, 그 자체가 태재치가 원했던 최후의 무도이었던 것만 같다. 이러한 감개
를 실감한 사람은 나 한 사람만이 아닐 것이다.
  이것은 그를 좋아하던 촌송정효의 소감이다.
   태재는 아꾸다가와(개천)가 생애의 끝판에 도달한 지점에서부터 출발하고 있
다 라고 말한 사람은 복전이란 작가였다.
  10여 년 전, 태재에 관해 메모해 두었던 공책은 이랬다.
  태재치와 개천 = 자살 직전 둘다 신경쇠약, 태재치 정신병원 입원
  태재치와 보드레르 = 마약, 광기, 자살기도.
  태재치와 김소월 = 아편, 자살실행.
  그리고 41세, 폐결핵, 마약, 정신병원, 객혈.
   태어나서 미안해요.
  어디선가 그의 길다랗고 하얀 얼굴이 나타나 히죽이 웃으며, 이 말을 거네올
듯하다.

  


이중섭의 망우리 무덤
   이렇게 유명한 분인데 어떻게 아무도 몰랐을까요?
  그의 임종 후, 주인을 몰라 시체실에 나흘이나 방치되었던 데 비하여 비교적
성대하게 치뤄진 장례식을 보고 병원측에서 한 말이다.
  이중섭, 그는 평안남도에서 태어났다. 오산중학교를 마치고 일본 유학 중, 야
마모또 마사꼬를 만났다. 마사꼬는 미쓰이(삼정)물산 중역의 막내딸이었다. 미인
은 아니지만 조용하고 성실한 아내였다. 이중섭과 함께 한국, 원산으로 돌아와
이름을 이남덕이라 고쳐 부르고 아이들도 낳고 그들은 단란한 가정을 이루었다.
  이중섭은 고향에서 미술교사로 재직하며 한때는 그곳 국전미술심사위원에 추
대된 적도 있고, 소련 미술가로부터 절찬을 받기도 했다. 6.25의 발발로 그는 1.4
후퇴 때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월남을 감행하게 된다.
  엘에스티편으로 부산항에 당도한 것은 1950년 12월 10일. 극심한 생활고를 견
디지 못한 그의 아내는 두 아들을 데리고 도일을 결행한다.
  이때부터 중섭의 동가식 서가숙의 비참한 생활이 시작되었다. 불안하던 당시
의 사회상과 영양실조는 그의 정신을 서서히 병들게 했다. 대구 피난시절이었다.
이중섭은 느닷없이 파출소로 쫓아 들어가서
   순경 선생, 저는 빨갱이가 아닙니다. 저는 미술가가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입
니다.
  수사관의 심문과 취조 도중 구상씨의 이름이 나오면 구상 선생은 자다말고 파
출소로 불려가야만 했다고 한다. 중섭은 음식도 거절하였다. 처자를 먹여살리지
못하는 자신을 자책하면서 음식거부 소동을 벌였고  그림 이 아닌  일 을 하겠다
고 나서며, 여관 마당을 쓸기도 하고 동네 아이들을 데려다가 씻기는 등, 그때부
터 중섭은 이미 정상이 아니었다.
   나는 세상을 속였어! 미술을 한답시고 공밥을 얻어먹고 놀고 다니며 후일 무
엇이 될 것처럼 말이야. 남들은 저렇게 세상과 자기를 위해 바쁘게 봉사하는데,
난 그림만 신주처럼 모시고 다니며 이게 대체 뭐란 말인가.
  병의 초기 증상은 자학으로 나타났다. 열등의식에 사로잡힌 완전한 자포자기
였다.
  어떤 날은  남덕일 죽인다 고 외치면서 자기 손등을 비벼 피를 냈다. 분열증세
의 시작이었다. 중섭이 쓰러지자 종군화가란 명목으로 친구들은 서둘러 수도육
군병원에 입원을 시켰다. 그리고 모금운동을 벌여 그를 유석진 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받게 했다. 두 달 만에 병세는 호전되는 듯 했다. 어느 날 자유 외출을
한 그는 병원에 돌아가지 않고 화우 한묵과 어울려 자취방에서 그림을 그렸다.
반고흐처럼 정신착란증세가 재발된 것이다. 채 겨울도 못 나고 그는 청량리 뇌
병원으로 옮겨가야 했다.
  무료병실 한 구석에 쳐박히게 된다. 이제 황달까지 겹쳐 누렇게 뜬 얼굴에 아
무것도 기억해내지 못하는 기억상실증 환자가 되어 버렸다. 적십자병원으로 이
송되었을 때는 이미 돌이키기 어려운 가사 상태에 빠져 있었다.
  평소에 자기 의사를 잘 표현할 줄 모르던 그는 현실과 점점 유리되면서 공상
과 그림에만 빠져들게 되었다. 가족 이별의 처절한 은박지 그림은 이 시기에 해
당된다.
  아직 노염이 남아 있는 9월 6일. 무료병실에서 정오가 다 될 무렵에 그는 혼
자서 숨을 거두었다. 나이는 마흔 살, 직접 사인은 간질환이었다.
  죽은 지 나흘 만에 달려온 친구 김병기는 이렇게 오열했다.
   굶어 죽었다 해도 좋고 미쳐 죽었다 해도 좋고, 자살했다고 해도 좋다.
  친구들은 그가 가는 길을 성대한 장례로 배웅하였다.
  1956년 9월 10일. 근심을 잊는다는  망우리  공동묘지에 그를 갖다 묻었다. 기
억상실증에 걸려 버린 그에게 아직 잊어야 할 게 더 남아 있었을까?



  제7장 떠도는 자의 노래


  끝없는 표랑 - 김삿갓 / 두보
 


떠도는 자의 노래 김삿갓
   죽장에 삿갓 쓰고 방랑 삼천리.
  그 삿갓의 주인공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술을 잘 마시고 우스갯소리를 좋아하며 시를 잘 짓고 취하면 왕왕 대성통곡
을 한다. 평생에 과거를 보지 않았다니 괴상한 사람이다(생략).
  이것은 황오라는 사람의 말이고 또 어떤 사람은
   요즘 바보 같기도 하고, 미친 것 같기도 한 시인이 한 사람 있다. 허름한 옷
에 떨어진 신발, 세수조차 않는다. 서울과 영동 사이를 가끔 내왕하는데 기발한
시를 짓고, 특히 과체 시는 더욱 정묘하여 사람들은 그가 오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다. 오면 음식을 대접하고, 잠을 재우며 어려운 운과 제목으로 시를 짓게 하
니, 그는 서슴없이 지어 이름을 날리고 있다. 성만 말하고 이름은 말하지 않아,
삿갓을 쓰고 있기 때문에 김삿갓이라 부른다(생략).
  그의 이름은 김병연이며 호는 난고이다.
  1807년(순조 7년) 3월 13일 안동 김씨 김안근의 둘째로 태어났다.
  남달리 총명하고 재주가 많았던 소년 김병연은 어느 날 관아에서 주최하는 백
일장에 나가 장원의 영예를 차지한다.
  그러나 그가 백일장에서 매도하던 김익순은 바로 자신의 조부였다.
  병여의 다섯 살 나던 해,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는데 그들은 가산, 박천, 곽산,
정주를 휩쓸고 선천으로 육박해 왔다. 그때 선천부사이던 김익순은 술에 만취한
채 그들에게 결박을 당하고 순순히 항복까지 하고 말았다. 역적에게 항복하고
협력했다는 죄목으로 김익순은 이듬 해 사형이 된다. 그리고 그의 일족에게는
폐가 처분이 내려졌다. 언제 멸문지화를 당하게 될지 모르는 불안한 운명이었다.
김익순의 종복이 병하와 병연 형제를 몰래 황해도 곡산땅에 데리고 들어가 숨어
서 공부를 시켰다.
  이러한 내용을 그가 알 리 없었다. 그의 어머니는 조상의 일을 아들에게 모르
게 하려고 멀리 강원도 영월땅으로 이사를 했던 것이다.
   김익순의 죄상을 낱낱이 탄핵하고 그 비겁함을 얼마나 통쾌하게 매도했던가.
그런데 그 사람이 자신의 할아버지라니      .
  그는 불효를 스스로 단죄하면서 하늘을 볼 수 없다는 죄의식으로 삿갓을 눌러
쓴 채 집을 떠났다. 스물 두 살 때의 일이었다.
  그렇게 집을 나간 것이 전 생애로 이어지게 된다. 36년간을 행운 유수같이 떠
돌았다. 정처없이 떠돌면서 후하고 박한 세상의 인심을 골고루 맛보았다.
  괘씸한 사람을 만나면 해괴망측한 시를 지어서 야유와 조소를 보내기도 했다.
  해마다 섣달 보름 밤은 (연연납월십오야)
  그대의 집, 제삿날임을 잘 알고 있노라 (군자제사내자지)
  젯상에 올린 것은 칼을 잘 쓴 음식이요 (제존등물용도질)
  헌관과 집사들은 모두 엎드려 아뢰네 (헌관집사개고알)
  무심코 읽어보면 제사 지내는 광경에 불과한, 칠자사행으로 되어 있는 이 시
의 마지막 석 자씩을 떼어보면 괴상망측한 욕설이 된다.
  읽어보면 한시로서 손색없고 발음으론 욕이 되니 대단한 실력의 소유자가 아
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하긴 가슴에 맺힌 울분을 이렇게라도 풀어내야 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아들 익균이가 집으로 모셔 가려고 찾아올 적마다 그는 아들을 따돌렸다. 세
번째 전라도 익산군 여산까지 찾아왔다. 함께 길을 가다가 뒤를 보겠다면서 삿
갓을 벗어놓고 수수밭으로 들어갔다. 익균은 길가에 서서 기다렸으나 그는 안개
처럼 사라져 버렸으니 그게 부자의 마지막 상봉인 셈이다.
  병든 몸을 이끌고 강진에 도착한 것은 그가 55세 되는 해의 섣달 그름 무렵이
었다. 우국지사의 소개로 안복경진사 댁에서 그해 겨울을 나고 나무에 봄이 온
것을 느끼자 다시 방랑길에 올랐다.
   나는 워낙 방랑생활을 끝없이 계속하다가 언젠가는 길가에 쓰러져 죽을 운명
을 타고 난 사람이오. 그러니 붙잡지 말아 주시오. 봄을 따라 북상하면서 가지산
에 있는 보림사와 용천사도 구경하고 마음이 내키면 화순, 동복에 있다는 적벽
강도 한번 둘러볼 생각이라오.
  안진사가 써 준 편지를 들고는 길을 떠났다. 걸어보니 몸이 많이 쇠약해 있었
다. 보름이 걸려 가까스로 보림사에 도착하였다.
  술잔을 비로 삼아, 시름을 쓸어내고
  달을 낚시로 삼아, 시를 낚아오면서
  보림사, 용천사 두루 구경하고 나니
  내 마음 욕심없어 스님과 다름없네.
  동복에 도착해서 찾아간 신석우도 물론 그를 환대해 주었다.
  김삿갓은 소동파의  적벽부 를 떠올리며 적벽강에 가보고 싶다고 말했다. 신석
우도 동행을 자청하였지만 그는 혼자서 조그만 배에 올랐다.
   청풍은 서래하고 수파는 불흥 이라는 적벽부의 시구를 읊조려 본다.
  시원한 강바람에 상쾌함을 느끼며 배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 본다. 저 멀리에
하얀 구름, 저기가 바로 선경이 아니런가.
  일엽편주로 망망대해에 떠 잇고 보니 그는 이것으로 다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밥을 위해 남의 문전을 기웃거릴 필요도, 잠자리를 구해 헤맬 필요가 더
이상 있을 것 같지를 않았다. 마침내 그는 눈꺼풀조차 뜰 기력마저 없어졌다.
  전국을 편답하며 시를 짓고 때론 대성통곡했다는 천재시인 김삿갓은 이렇게
하여 전라도땅 동복 적벽강 배안에서 혼자 귀천했다. 시인다운 죽음이었다. 향년
56세, 철종 14년(1863년) 3월 29일의 일이었다.
  남다른 지혜와 문재가 있음에도 질곡된 운명으로 인해 겪어야 했던 그 비색한
통한이 어떠하였으랴.
  돌아가기도 머물기도 어려운 나그네여. (귀혜적역난저역난)
  얼마나 길가에서 외롭게 방황했던고. (기일방황중로방)
  그 형벌 같은 세월을 용케도 자살하지 않고, 형기를 잘 마친 자의 성실함같은
인고의 아픔이 느껴지는  논고평생시 의 그 끝 구절을 나는 지금도 아끼고 있다.



  추운겨울 선상에서의 죽음 - 두보
  두보는 당 현종 선천원년(712년) 하남성 공현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그를 낳
은 지 얼마 안되어 죽었다. 배다른 형제들과 함께 고모 밑에서 자랐다.
  그는 가문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시는 우리 가문의 일, 시로서 으뜸이었다 고 자랑할 정도로 그이 조상인 유학
자 두예와 두심언은 탁월한 시인이었다.
  그는  남을 감탄시키지 못하면 죽어도 편치 못하겠다.  (인불경사불휴)라고 말
하면서 시의 한 자 한 구절에 최선을 다했다.
  그가 살았던 시기는 당나라 최전성기에서 안사의 난을 계기로 전환기를 맞는,
모순과 부조리와 전란과 기아가 들끓는 시대였다. 이러한 시대에서 곤궁과 기아
에 시달리는 백성들의 아픔과 현실을 그는 가장 절실하게 시로써 대변하였다.
한마디로 그는 민중 시인이었다. 그의 작품 <자경부봉선현영양>이나 <북정>이
란 시에도 그것이 잘 나타나 있다.
  귀족들의 대문 안에는 술과 고기가 넘치고 썩어 냄새가 날 지경인데 길에는
굶주려 얼어 죽은 시체가 널려 있다(67행-68행).
  오래 전부터 늙은 아내를 타향에 살게 했고,
  또 열 식구들과도 풍설을 격하여 지냈다(81행-82행).
  내 집의 문을 들어서니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온다.
  어린 자식이 굶어서 죽었다는 것이다(85-86).
  생업이 없는 사람들의 처지를 나는 묵묵히 생각해 왔고,
  한편으로는 멀리 변경에 나가 있는 병졸들의 입장도 염려했다(96행-98행).
  그러나 두보는 젊어서부터 과거에 낙방만 했다. 40세에 겨우 집현전대제라는
변변찮은 말직이 그에게 주어졌다. 그러나 그 또한 극심한 가난과 폐병 때문에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44세에 하서현위에 임명되나 부임하지 않았고, 정처없는
유랑의 길을 떠난다. 젊어서부터 시작된 그의 여행벽은 김삿갓처럼 죽는 순간까
지도 계속되었다.
  그는 20세부터 30세까지 오, 월, 제, 조 지방을 두루 돌아다녔다. 30세에 낙양
으로 돌아와 양이의 딸과 결혼하고서 잠시 안정하였다. 46세이던 그에게 좌습유
라는 간관 종8품의 극히 낮은 직위가 주어졌다. 이때에도 재상인 방관을 변호하
다가 곤욕만 치르게 되고  안사의 난  때는 반란군에게 잡혀 심한 고초를 겪기도
했다.
  48세에 화주로 쫓겨난 두보는 그 후 10년 동안 각지로 떠돌며 심한 궁핍과 병
고에 시달렸다. 학질과 폐환의 지병 이외에도 그는 중풍 때문에 오른손이 마비
되었고 당뇨의 합병증으로 귀가 먹고 눈이 잘 보이지 않았다. 엄부라는 사람의
추천으로 절도참모 검교공부원 외낭이 되었으나 폐병과 중풍으로 공무를 감당할
수가 없게 되자 그는 사퇴하였고, 배를 타고 양자강을 따라 내려가 보았다. 가
주, 융주, 유주, 충주를 지나 운안까지 왔다. 이곳에서 신병이 더욱 나빠졌다. 늦
봄에는 기주로 향했다. 기주는 사천성 삼협의 하나인 구당협 부근에 있다. 약 2
년 간을 이곳에 있으면서  추흥 8수  외에 빛나는 430수의 시를 더 지었다.
  두보 전 생애의 작품 중 삼분의 일에 해당하는 시가 2년 동안 이곳에서 씌어
졌다.
  가족들고 함께 방랑의 길에 또 나선다.
  두보는 호북 공안을 출발하여 악양으로 향했다. 낡아빠진 배 안에서의 추위는
실로 감당키 어려웠다. 긴 뱃길 끝에 그들은 동정호 나루에 도착하였다. 아들 종
무의 부축을 받으며 두보는 악양루에 올랐다. 눈이 펄펄 쏟아지는 동정호를 바
라보며  악양루에 올라 라는 명시를 이때에 탄생시킨 것이다.
        늙고 병든 나에게는
  단지 배 한 척밖에 의지할 곳 없다.
  관문 북쪽에서는 아직도 전쟁이 끝나지 않았는데,
  난간에 기대니 눈물만 쏟아지는구나.
  천지는 온통 새하얀데 두보는 차가운 배 바닥으로 돌아와 다시 몸을 뉘었다.
1년 반의 세월을 이렇게 떠돌았던 것이다. 악양을 떠나 장사를 거쳐 형양에 이
르렀으나 친구이던 형양자사는 이미 죽고 없으니 다시 뱃머리를 돌려야 했다.
이렇게 안주할 곳이 없어 두보는 가솔을 이끌고 형양으로 가다가 중도에서는 큰
비를 만난다. 상강을 벗어나지 못하고 오르락 내리락하는 배에서 그는 덜덜 떨
고 있었다. 누더기 옷을 걸친 채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거기에서 눈을 감았다.
  대력 5년(770), 그의 나이는 59세였다.
  <신당서> 두보전에 보면 뇌양에서 현령이 보낸 술과 고기를 먹고 그날 밤에
죽었다고 하니, 그것은 이승에서의 마지막 양식을 대접 받았던 것이다. 장자는
이미 죽었고, 차남이던 종무는 당시 열여덟 살 안팎이었다. 장사도 못 지낸 그의
관은 악양 산 속에 방치되었다가 그가 죽은 지 43년이 지나 손자 사업에 의해
고향 수양산 기슭으로 옮겨져 본장을 치르게 되었으니 두보가 죽은 지 43년 만
의 일이었다.



  고월과 소월의 자살 - 이장희 / 김소월
 


왜 금붕어만 그리다 극약을 마셨을까 -이장희
  고월 이장희는 1900년 11월 9일, 대구의 부호이며 중추원 참의를 지낸 바 있
는 이병학의 세 부인 중 첫 번째 부인한테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신동이란 소릴 들었으며 다섯 살에 어머니와 사별하고 계모 슬하
에서 자랐다. 대구보통학교를 거쳐 일본의 경도중학교를 졸업. 두 계모와 배다른
형제와의 갈등(12남 9녀), 일제 식민지 정책에 동조하여 항상 일본인과의 통역을
종용하던 아버지와의 사상적 대립과 갈등, 버린 자식 취급받기와 냉대로 인해
자존심 강하고 섬세하던 그는 죽기 직전 심한 신경쇠약에 시달렸다.
  그는 고향에 돌아와 어두운 방에 갇혀 하릴없이  금붕어 만을 그리다가 29세를
일기로 극약을 먹고 자살하였다.
  고월은 죽기 2, 3년 전부터 심한 신경쇠약에 시달렸다.
  자살하기 몇 달 전, 서울에서 고향인 대구집으로 돌아왔는데 그는 외출도 않
고 거의 두문불출이었다. 다만 죽기 3, 4일 전 평소 친하게 지내던 공초(오상순)
의 거처를 찾아갔다. 공초가 머물던 여관집 주인이 한 달 전에 동래에 가고 없
다고 말하니, 안색이 돌연 창백해지며 어깨를 툭 떨어뜨리고 멍하니 한참 동안
말도 없이 서서 있다간 눈에 눈물이 글썽해 가지곤 힘없이 발길을 돌리더란 것
이다. 주인은 하도 이상하기에 문 밖에 서서 황혼 가운데 사라져가는 그의 뒷모
양을 멀리 바라본즉 곧 쓰러질 듯하여 마음이 몹시 안됐더라고 했다는 것이다
(공초의 술회).
  그 후 그는 2, 3일간 방에서 나오지도 않고 배를 깔고 엎드려 수없이 금붕어
를 방바닥에 그려놓고 1929년 11월 3일 오후에 극약을 마셨다.
  왜 하필 금붕어를 그렇게 많이 그렸을까? 어쩌면 그것은 어항처럼 밀폐된 공
간에 갇혀 있는 무기력한 자기 자신을 그린 것인지도 모른다.
   마치 자방이 커지면 화판이 떨어지듯, 가을이 깊어지면 잎사귀가 흩어지듯이
이렇듯 그의 죽음은 자연스러운 죽음이다. 아니다, 그는 죽지 않았다. 그와 그의
고독과 그의 시가 완전히 합체되었을 뿐이다. 아아 그는 마침내 그 돌아갈 바에
돌아갔을 뿐이다. 나는 다시 무엇을 슬퍼하랴. 그러면 그의 죽음은 무엇이냐? 그
것은 그의 최후의 시였다. 그 최대의 걸작이었다.
  김영진은 친구 고월을 추억하며 이런 글을 썼다(1929. 11. 11. 중외일보 기재).
  초췌한 얼굴에 초라한 옷차림, 언제나 문학서적을 한 권쯤 옆구리에 끼고 처
마 밑으로만 다녔다고 하는 고월. 그는 스스로 닫힌 공간에 유폐되어 시 말고는
달리 구원이 없었을 것이다. 뼈를 깎듯 시의 일구일자에 매달렸다고 한다. 날카
로운 통찰력과 시적 직관, 탐미와 우울이 어우러진 그의 시는 우수의 색조를 짙
게 드리우고 있었다. 자살하기 4년 전에 그는  달밤 모래 위에서 라는 시를 썼다.
  자빠진 청개구리의 불룩하고 하이얀 배를 보고
  야릇하고 은은한 죽음의 비린내를 맡는다.
  그가 죽기 몇 해 전, 일본의 아꾸다가와(개천)가 자살했을 때 고월은
   유서란 것은 이미 현세에 대한 미련을 표시함이 아니냐? 그렇다면 현세에 미
련을 가진 자가 무슨 자살의 필요가 있는가? 비록 자살의 용기는 가하나, 그가
남기고 간 일편의 유서는 유감이다. 라고 험절하였다. 그러나 아리시마다께오의
자살에 대해서는  무사기한 천진스러움 이라고 칭찬했다.
  평소 그의 생각이 이와 같았기에 고월은 사진 한 장은 물론이요, 자살에 대한
한 마디 유언도, 반구의 유서도 없이 떠났음은 물론이다.

  


아내도 모르던 소월의 아편자살
   민요시인 김소월 별세, 33세를 일기로 귀성군 서산면 평지동에서 한가히 향촌
생활을 하던 소월 김정식씨는 지난 12월 24일 오전 8시경, 33세를 마지막으로
별세하였다. 소월은 일찍 배재고보를 졸업하였으며 영문을 전수하였고 민요의
창작과 연구에 힘을 들였다. 최근까지 무슨 저술에 착수 중이었다 한다.
  이것은  동아일보 (34. 12. 28일자)에 보도된 그의 죽음을 알리는 관련기사이다.
  소월은 1927년, 유일한 지기이던 나도향의 부고를 받고 충격이 컸으며, 또 2년
뒤, 고월 이장희의 자살소식을 들은 뒤 장취하는 날이 많았다고 한다. 5년 뒤 그
도 다량의 아편을 먹고 그들의 뒤를 따랐으니, 요절한 우리나라 천재 시인들의
나이가 너무나도 아깝다.
  나도향 24세, 이상 28세, 김유정 29세, 이들은 폐병으로 희생되었고 윤동주 28
세, 음독자살한 고월과 소월은 각기 29세와 33세였다.
  소월은 옛 스승 김안서에게 마지막 편지를 보냈다.
   생은 기야요, 사는 귀야라고도 하였고.
  사랑은 희망이요,  예술은 영원 이라 한 것도 역시 할 수 없어서
  나중에 한 말이지요. 그것도 죄다 참말 쓸데없는 말이지요.
  사람은 결국 없어지고 마는 것이니까요. 이 말에는 반대한 사람이 없을 것입
니다.
  1922년 21세이던 소월은 고향 정주 곽산에 돌아와 마치 시주머니의 끈을 푼
듯  진달래꽃   먼 후일  등 한 해 에 30여 편의 시를 발표하여 시단의 주목을 받
기도 했다. 그러나 경제적 실패와 실생활의 파탄은 그를 타락지경으로 몰아넣었
다.
  6.25 때 어머니와 3형제를 북에 남겨두고 인민군으로 미군에 귀순, 월남에 성
공한 소월의 셋째 아들 김정호씨는 미당 서정주에게 이런 말을 털어놓았다.
   우리 아버지는 왜놈들 세상에 하나두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그게 한이 되어
그걸루 가셨습네다. 우리 어머니 보구두 같이 가 버리자고 제가 생겨나기 전에
조르신 일이 있대요. 어머님은 그래도 살아서 아이들을 길러내야 하지 않겠느냐
말리셨답니다. 그래서 혼자 가 버리신 게지요. 시인이니 그렇기도 했던 게라고
철나멘서 겨우 알게 되긴 했지만 자라면서 속으로 많이 원망도 했댔쉬다.
  홍익회에 다니면서 관악구 봉천동 언덕빼기 단칸 셋방에서 살던 김정호씨의
술회였다.
  소월의 어머니는 첫 아기를 친정에 가서 해산하였다. 소월의 부친은 부농답게
많은 물자와 음식을 나귀에 싣고 처가를 향해 가던 중 왜인에게 물건을 빼앗기
고 구타까지 당하여 정신이상을 일으켰다.
  실성한 아버지, 식민지배하의 암울한 세상, 그가 경영하던 동아지국의 탄압과
운영난, 사업 실패, 이 외에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심정적 사인은 더 있으리라.
그는 두 딸에 이어 세 아들을 둔 아버지였고, 공주 김씨 문중의 장송이었다.
  죽기 석 달 전, 곽산의 선영을 찾은 것은 10년 만이었다. 무덤에 성묘하고 돌
아왔다. 여느 때처럼 그는 아내를 붙들고 앉아 술을 마셨다. 둘은 술에 취한 채
함께 곯아 떨어졌는데 이튿날 깨어보니 옆에 누워 있던 남편이 싸늘히 식어 있
더라는 것이다.
   나야 무식해서 아나요. 또 이야기도 안해 주고요. 마음이 상하고, 아프다면서
술만 마셨답니다. 술만 들면 울기만 했어요.
  소월 아내의 증언이었다.



  자신의 죽음을 죽을 수 있게 하소서 - 라이나 마리아 릴케
  침묵을 동반한 어둠이 점점 에워싸면 나는 그 속에 가라앉고 말아서 끝내는
겁먹은 새처럼 되고 만다. 어딘가에 나를 겨냥하는 시선이 있는 것만 같아 긴장
으로 숨이 조여올 때, 릴케의 시 한 구절을 나는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세상 어디에선가, 까닭도 없이 누군가
  이 밤에 죽어가고 있는데
  그것은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 <마음 무거울 때>의 일절
  하나의 섬뜩한 경종이 아닐 수 없다.
  라이나 마리아 릴케만큼 죽음을 깊이 천착한 시인도 드물 것 같다. 그는 31세
에 비가를 썼고, 47세에 죽음을 감지하면서 <말테의 수기>를 썼다.
   사람들은 살기 위해 모두 이곳으로 오는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여기에
서 모두 죽어가는 것으로 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말테의 수기>는 이렇게 시작되고 있다. 그는 거기에서  임신한 여인의 태 속
에 이미 죽음이 싹트고 있다 는 무서운 경고를 내린다.
  <드노의 비가>에서는  성숙한 인간은 무르익은 과일이 나무에서 덜어지듯 죽
음에 대한 원한은 없다. 그러니 완전한 죽음을 끌어안고, 깊은 잠에 드는 것뿐이
다 라고 말한다.
  인간 존재의 중심에는 죽음이 본질적으로 자리잡고 있다. 죽음은 인간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안에 있으며, 인간 삶의 핵심이며 진주처럼 인생을 빛나
게 하는 것 역시 죽음이라는 설명이다.
  <비가>의 핵심은 역시 죽음이었던 것이다. 47세에 릴케는 <비가>를 완성하고
<비가>에 와서 비로소 죽음을 긍정하게 된다. 하이데거는 <드노의 비가>를 읽
고  자기와 같은 사상을 릴케는 시로 표현했다 고 말했다.
  그는 한때 발레리의 시 <바닷가의 무덤>을 읽고 심취하여 그의 작품을 번역
하기 시작했다. 불어로 시를 짓는 등, 한창 그의 의욕이 고조되었을 때 하필 지
병이던 폐병이 악화되고 만다. 그래서 발몽요양소를 떠나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죽었다. 장미 가시에 찔려.
  시인이란 다른 일로 죽지 않는 것.
  이것은 프랑스의 여류시인 알리에뜨 오드라가 쓴 <릴케의 죽음>이란 시의 마
지막 부분이다. 릴케는 여자친구를 위해 장미를 꺾다가 가시에 찔린 것이 화농
되어 목숨을 잃고 말았다. 51세였다. 그는 폐결핵의 치료를 위해 3년 전(48세)부
터 스위스의 발몽 요양소에 와 있었던 것이다.
  그가 죽은 것은 1926년 12월 29일이었다.
  장례식을 하던 날은 각처에서 달려온 친구들로 자리가 가득 메워졌으며, 바흐
의 바이올린 독주가 그의 마지막 가는 길을 장식하였다. 묘지는 바닷바람이 불
어오는 비탈진 언덕에 있었다.
  릴케는 죽기 보름 전에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나는 지금 끝없는 고통에 걸려 있다. 잘 알려지지도 않은 혈액병(백혈병)이
전신에 퍼지고 잇다. 고통이 무엇인지 잘 모르던 나는 고통에의 순종을 배우고
있다. 백 번 저항을 하면서 억지로 순종을 배우면서 나도 모르게 깜짝깜짝 놀라
고 있다.
  릴케는 자신이 그렇게 빨리 죽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한다.
  죽기 하루 전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는데 새벽에 눈을 한번 크게 뜨고 머리를
조금 드는 듯하더니 이내 푹 쓰러지고 말았다. 새벽 5시, 밖에는 흰눈으로 덮인
알프스의 산령이 사방을 에워싸고 있었다.
  그의 죽음은  죽음과 위대가 하나의 말인 것처럼 혼연일치한 엄숙한 죽음이었
다 고 기록되어지고 있다.
   주여. 저마다 자신의 죽음을 죽을 수 있게 하소서.
  그의 <시도 시집>에 들어 있는 시 한 구절이 화두로 남는다.
  자신의 죽음을 죽을 수 있게 하소서!



  다른 또 하나의 방에서 존재한 영혼 - 이상 / 카프카
  이상은 1910년, 서울 통의동에 있는 할아버지댁에서 태어났다.
  사랑채와 행랑채가 달린 건평 150평 정도의 커다란 기와집이었다. 그는 두 살
때 벌써 정신적 충격인 유년기의 정서불안을 겪게 된다. 큰아버지댁에 아들이
없었으므로 양자로 입적된 그는 분가하는 부모를 따라 나설 수 없었다.
  핏기 없이 얼굴이 하얀 이 소년은 옷을 버리는 일도 없이 방안에서 그림 장난
이나 하며 혼자 놀았다. 이러한 성향이 후일 작품에 영향을 미친다.
  두 살 때부터 벌써 <천자문>을 놓고  지 자를 외며 가리켰고, 하루 동안에 한
글을 깨쳤다고 한다. 너무나도 조숙한 그리고 자신의 말대로 박제된 천재였던
것이다.
  1929년 경성공고를 졸업하고 큰아버지의 알선으로 조선 총독부 내무국 건축과
기수로 취직이 되었다. 본격적인 문학활동을 하게 된 것은 1930년 조선지에 첫
장편소설  12월 12일 이 연재되면서부터였다.
  몸이 좋지 않아 직장 생활을 그만 두고 황해도 배천으로 요양을 떠났는데 거
기서 생애에 결정적 영향을 준 금홍이란 기생을 만나게 된다.
  요양 생활은 폐결핵을 더욱 심화시키는 자학의 상태로까지 몰고 갔다. 건강만
더 나빠져서 그는 서울로 돌아오게 된다. 그는  10대조의 고성 이었던 통인동 집
을 처분하여 종로에 다방  제비 를 차렸다. 금홍을 마담으로 앉혀놓고 다방 뒷방
에서 아예 그녀와 살림을 차렸다. 이태준, 김기림, 박태원 등의 문인들이 출입했
다. 1934년 조선중앙일보에  오감도 를 발표하여 문단과 독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기도 했다. 두 번째 각혈을 하게 되면서 가정을 꾸려야겠다는 자의식이 발동
해 1936년 여름, 친구의 여동생 변동림과 돈암동 흥천사에서 혼인을 하게 된다.
  비록 가정을 꾸렸지만 궁핍한 생활은 여전했고, 몸은 극도로 허약해지고 있었
다. 답답한 현실에서 그는 도약을 위한 탈출을 시도할 수밖에 다른 길이 없었다.
차가운 궃은 비가 축축히 내리는 플랫폼에서 결혼한지 반 년도 못된 신부와 동
생, 그리고 몇 사람의 친구가 쓸쓸히 지켜보는 가운데 헙수룩한 가방을 들고 그
는 기차에 오른다. 그렇게 고국을 떠난 것이 그에게는 마지막이 되었다.
  그로부터 정확히 6개월 뒤, 화장된 그의 몸은 유해로 돌아오게 된다. 고국땅
미아리 공동묘지에 와서 묻혔다. 일본에서의 생활은 비참하기 그지 없었다고 한
다. 괴이한 사람으로 몰려 낯선 땅 니시간다 유치장 안에 갇혀 추운 겨울을 보
내야 했을 때 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1937년 3월 중순,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는 바람에 보석으로 풀려 나오게 되었
다. 그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폐병 3기의 상태였다. 도쿄에 있는 친지들이 대
학부속 병원에 서둘러 입원을 시켰는데 의사는  어쩌면 젊은 사람을 이렇게까지
되도록 버려 두었을가? 폐가 형체도 없다니        하면서 혀를 차더라는 것이다.
  그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아내가 달려갔다. 평소에 그를 알고 지내던 학
생들이 모여들었다. 이상은 레몬을 사달라고 하였다. 몇몇 친구가 주머니를 털어
레몬을 사가지고 왔다. 그는 새옷으로 갈아입고 손에 쥔 레몬의 향기를 맡으며
주위를 둘러본 후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듯 그는  종생
기 에 이렇게 자신의 묘비명을 썼다.
   묘지명이다. 일세의 귀재 이상은 그 통생의 대장  종생기  일편을 남기고 서력
기원 후 1937년 정축 3월 3일 미시 여기 백일 아래서 그 파란만장(?)의 생애를
끝막고 문득 졸하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 졸한 날은 한 달이 조금 지난 그해 4
월 17일 새벽 4시였다. 그의 대표시  오감도 에 나오는  막다른 골목  그리고 죽기
1년 전에 쓴  날개 에서 보여지는 자폐된 공간, 장짓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아내
와 완전하게 격리된 하나의  다른 방 에서 혼자 생명의 소진을 겪고 있는 한 남
자에게 우리는 자연히 주목하게 된다.
  카프카의 작품 <변신>의 주인공, 그레고리 샴사도 철저하게 격리된 방에 갇
혀 혼자 죽어가지 않았던가. 세상과의 단절, 홀로 있음에 힘든 존재였음을 각각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잇는 것이다.



  소외된 한 마리의 벌레 - 카프카
  카프카의 대표작 <변신>의 주인공은 단조로운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
각을 간절히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깨어보니 자신이 흉
칙한 벌레로(발이 많이 달린 돈벌레 비슷한 것) 변신해 있었다. 의식은 완전히
인간 그대로인데 자신의 말은 이미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수치심에 방문을 안
으로 잠그고 그는 숨어 버렸다. 흉측한 그의 모습을 본 가족들도 그를 나오지
못하도록 가두어 버렸다. 그래도 밥만은 제때 누이 동생이 날라다 주었다. 어느
날 손님들 앞에서 누이가 바이올린을 연주했을 때 그 소리에 이끌려 그레고리
샴사는 응접실로 나갔다. 가족들에게 호되게 나무람을 듣고 자기 방을 쫓겨 돌
아온 그는 낙심에 빠져 어두운 방에서 까딱도 않고 앉아 있더니, 새벽녘에 혼자
숨이 끊어졌다. <변신>의 줄거리다.
  주인공은 그 동안 가족들을 충실히 부양해 왔다. 그럼에도 가족들에게 버림
받아 밀폐된 세계에 혼자 갇히고 만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밀려난 국외자,
가족관계나 부부의 연대의식을 그들은 오히려 부정하고 일탈함으로써 자유롭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절망 앞에서 스스로 눈을 감아 버리고마는 그레고리 샴사.
날고싶다고 외치는 이상의 절규, 오히려 자유롭지 못한 현실 앞에서 자유롭고
싶어하는 두 작가의 자의식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폐병이 무거워졌을 때  모든 것에서 해방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고 카
프카는 말했다. 두 사람은 부유한 가문에 태어났으나 생활력이 없어 빈한한 삶
을 살았고, 심한 폐병과 싸워가며 우울하고 심각한 작품들을 써낸 특이한 작가
들이었다. 그리고 신경과민한 폐결핵환자들이었다.
  카프카도 잠시 정부기관(노동자 재해보험국에 봉직한 일이 있었는데 폐병 때
문에 그만 두고 요양 생활을 하다가 결국 요양소에서 죽고 말았다. 증세가 너무
도 악화되어 아편으로 고통을 줄여가고 있을 뿐이라고 했다.
  1924년 6월 3일, 빈에 있는 한 요양소였다. 엄격한 아버지와의 사이가 좋지 않
았던 점이 그를 달팽이처럼 내면 지향적인 인간으로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41세
로 생을 마감하면서 미친 듯이 자신의 원고를 찢고 불태우려하면서 이렇게 외쳤
다.  내가 한 사람의 작가였다는 흔적을 모조리 없애 버려야지.
  그는 체코의 프라하에서 유태인으로 태어났다. <변신> <심판> <성> <아메
리카> 등 주로 인간 존재의 부조리에 대한 작품들을 남겼다.
   프로스트처럼 혁혁한 심리학자이며 조이스처럼 무의식의 영역에 깊이 파고
들어간 탐험가 라는 에드읜 뮤어의 평도 있었다. 작가들의 생애를 들추어 보면
서, 그들의 적지않은 죽음이 폐병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죽을 때, 얼굴에 닿는 비의 감촉을 다시 한번 느끼고 싶다고 한 미국의 캐더
린맨스필드. 젊은 나이에 로마에서 객사한 시인 존 키츠, 이상, 김소월, 가난하지
만 멋쟁이였던 채만식. 눈을 뜨고 죽은 나운규, 결핵의 악화로 연희전문을 중퇴
하고 29살에 죽은 김유정. 죽음과 싸우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라고 하면서 더블
린 요양소에서 죽은 존 엠 싱그. 에밀리 브론테, 조지 오웰, 두보, 카프카, 릴케,
막심 고리끼, 도스토예프스키, 안톤 체호프, 비용, 까뮤, 유진오닐, 일본의 이시가
와다꾸보구, 아꾸다가와류노쓰께, 호리다쓰오, 다자이오사무 등이 모두 폐병을
앓았다.
  폐병환자에게 있어 성 행위는 흔히들 자살 행위와도 같다고 말해진다. 그럼에
도 이 병에 걸리면 오히려 성적 욕구가 더욱 배가 된다고 한다.
  고사 직전의 소나무가 솔방울을 많이 매다는 것처럼 생명의 위기감이 조여올
때 더욱 안타깝게 매달리고 싶어지는 성에 대한 욕구, 보존본능 때문에 그렇게
되고 마는 것일까? 정신적인 자신의 눈높이를 향하여 고양되어 있는 정신, 이런
것 때문에 작가들은  죽어도 좋아  하는 식으로 소진되어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극도의 체력소모와 영양실조, 무절제한 사생활로 이어지는 음주와 흡연, 불건강
한 생활습관, 산고로 인한 노심초사.
  그들의 육신은 매미 날개처럼 바싹 마른 껍데기로 남게 되는 경우가 많다.
  어떤 때에는 이 병에 안주해 버림으로써 세상을 외면하려고 한 그들의 도피의
식까지도 포함된 경우가 있다. 무엇보다도  폐는 가슴에 슬픔이 많은 사람이 걸
리는 병 이라는 말을 나는 주목하고 싶었다. 이 폐병이야말로 예술 지상주의적인
작가에게 있어  예술적 충동 을 주는 아주 어울리는 것이라고 누군가가 말하기도
했다.
  나른한 권태와 미열, 그리고 퇴폐와 우수를 동반한, 마치 바다에 떨어지는 저
녁 노을과도 같이 핏빛으로 잦아드는 죽음이었던 것이다.




  녹색 지팡이와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가 죽은 지 15년이 지난 후, 톨스토이는 이렇게 말했다.
   이 세계에 있는 모든 서적, 특히 문학서적은 내 자신의 것을 포함해서 모두
불살라버려도 무방하다.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만은 예외다. 그의 작품은
남겨 두어야 한다.
  그러나 어찌 러시아 문학사에 그만이 홀로 존재한단 말인가.
  중국의 이백과 두보처럼 러시아에서는 톨스토이가 도스토예프스키와 쌍벽으로
꼽힌다.
  톨스토이는 도스토예프스키보다 4년 먼저 태어났고 19년이나 더 오래 살았다.
  1910년 10월 28일 새벽 3시, 가을 밤의 어둠을 틈타 톨스토이는 야스나야 폴
리야나의 집을 나섰다. 자기가 태어나고, 또 평생의 대부분을 보낸 집이었다. 이
가출의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톨스토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아내, 괴로운 생활을
강요하는 아내로부터 도망해 나왔다고 말하면 간단할 것이다. 아니면 가족의 비
교적 사치스런 생활을 견디지 못하여, 세상을 떠나 농부와 노동자들 틈에서 소
박한 생활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고 해도 될 것이다.
  이것은 그의 딸 타티야나가 쓴 <딸이 본 톨스토이>라는 책에 기록된 내용이
다.
  톨스토이는 83세가 되던 해, 그러니까 죽기 열흘 전인 10월 28일, 미명에 집을
나섰다.
   내가 생활해 온 사치한 환경 속에서 더 이상 살아갈 수는 없는 일이오. 그래
서 나는 나이 많은 늙은이들이 잘하는 식으로 떠나가려오.
  아내에게 이런 편지를 남기고 그는 작업복 차림에 망토를 걸치고 집을 나섰
다. 가진 것이라곤 평생 써온 펜과 종이가 전부였다. 정부로부터 받은 백작작위,
세계적인 명성, 훌륭한 저택, 막대한 재산, 이런 것들은 그와 상관이 없었다.
  그의 아내 소냐는 28일 아침, 남편의 쪽지를 보자 밖으로 뛰어나가 연못에 몸
을 던졌다. 즉시 구출되기는 했으나, 전에도 몇 번 자살소동을 벌인 일이 있으므
로 가족들이 감시하자 이번에는 굶어서 죽어버리겠다고 소란을 피웠다.
  톨스토이는 우선 오프타 수도원으로 가서 하룻밤을 묵었다.
  다음날 쌰마루디노 수도원으로 갔다. 거기서 수녀가 된 여동생 마리아를 만났
다.
  그는 마지막이 될 것임을 말하고 동생의 간곡한 만류를 뿌리친 채, 우랄산맥
을 넘어가는 3등 객차에 몸을 실었다. 목적지도 없는 여행길이었다. 10월 하순의
날씨는 음울하고도 몹시 찼다. 추운 객차 안에서 톨스토이의 몸은 감기로 불덩
어리가 되었다. 기차가 멈추어 선 곳은 아스타포브의 작은 역이었다. 이 빈사 상
태에 빠진 노인은 조그마한 역사 안으로 옮겨졌다. 역장의 침대에 누워 떨리는
손으로 그는 또 마지막 일기를 쓴다.
   바로 이것이 내가 바라던 것이다. 이것은 선을 위한 전부이고 타인을 위해서
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을 위한 것이다.
  며칠 동안 그는 깊은 혼수상태에 빠졌다. 처음부터 동행한 막내딸 알렉산드라
와 의사인 친구 듀산이 서둘러 집에 연락을 취하고 강심제를 놓는 등 많은 애를
써서 응급한 상황을 돌려놓았다. 전보를 받고 가족들은 그곳으로 달려왔다. 톨스
토이는 그것도 모르고 야스나야에 전보를 쳐서 아내가 이곳에 오지 못하도록 막
아 달라고 하였다.
   너희들은 생각해야 할 일이 있다. 이 세상에는 레프 톨스토이말고도 많은 사
람이 있다. 그런데 지금 너희들은 레프 한 사람만을 돌보고 있어.
  마지막 말이 아주 작아지더니 톨스토이는 다시 자리에 누웠다.
  11월 6일, 숨지기 전날 밤 그는 곁에 있던 세료자를 불렀다.
   나는 진리를 사랑한다       대단히       진리를 사랑한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리고 다시 혼수에 빠져들었다.
  1910년 11월 7일, 새벽이 되자 약하던 그의 맥박이 갑자기 거칠게 뛰었다. 그
리고는 숨을 한번 크게 몰아 쉬더니 그게 끝이었다. 오전 6시 5분의 일이었다.
  톨스토이는 전 생애를 통하여 자기와의 싸움을 계속한 사람이었다. 본질적으
로 불안정하고 변덕스러우며 극단적인 그의 내부에서는 예술가, 사상가, 도덕가,
향락가 그리고 귀족과 무정부주의자가 항상 공존, 대립하고 있었다. 마치 서로
싸우는 야곱과 타락한 천사가 한몸에 들어 있는 듯, 그는 어떤 때는 지킬 박사
이기도 하고 또 파우스트 교수이기도 하였다. 육체와 정신이 똑같이 과격한 요
구를 내세워 비장한 싸움을 계속하였다. 유행의 첨단을 걷는 귀공자로서 사치와
도박과 타락한 생활을 일삼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어느 날 자기의 지나온 삶을
부끄럽게 여기고 새사람으로 거듭 태어나게 된다. 귀족생활을 버리고, 그는 농부
가 되었다. 땅을 갈고 학교를 세우며 농노 해방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가난한 사
람들의 편에 서서 비폭력 무저항주의를 실천했다. 그리고 자신의 재산은 하나도
빠짐없이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유언장을 작성한다.
  추운 겨울, 비록 초라한 시골역 관사에서 쓸쓸한 최후를 맞았으나 그는 행복
의 땅에 묻혔다.  초록색 지팡이 가 있는 참피나무 숲 속, 그의 형 니콜라이가 잠
들고 있는 그 옆에 가서 묻혔다.
  그는 나이 여든이 되던 어느 날, 일기에 이렇게 쓴 일이 있었다.
   나는 얼마 더 오래 살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죽기 전에 나의 소원을 여기에
적어 둔다. (생략) 내 시체를 땅에 묻을 때에는 의식(장례식)을 하지 말라. 다만
바라고 싶은 것은, 나무로 만든 관에 내 시체를 넣어 야스나야 풀리야나 숲 속
의  녹색 지팡이 가 있는 곳에 묻어 주었으면 좋겠다.
  모스코바 근처 뚜라시의 야스나야 풀리야나에서 태어난 톨스토이는 어린 형제
들, 니콜라이, 세르게이, 드미트리와 함께 숲 속에서 신나게 놀고 있었다. 그때
큰 형 니콜라이가 물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싸우지 않고 행복하게 지내려면 어떻게 하면 되겠
니?
  셋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고개만 갸우뚱거렸다.
   이건 비밀인데 말이야. 사실은 녹색의 지팡이에다 주문을 써서 숲 속에 파 묻
었거든. 누구든지 그 녹색 지팡이를 찾아내면 돼. 그 지팡이를 발견한 사람은 그
소유자가 되고 모든 사람들을 행복하게 할 수 있단다.
  아이들은 녹색 지팡이를 찾으려고 날이 저물 때까지 숲속을 뛰어 다니면서 정
신없이 뒤졌다. 톨스토이는 죽을 때까지 이 날의 일을 잊지 않고 살았다.
  그가 <부활>을 탈고했을 때는 일흔두 살이었다. 러시아 아카데미의 명예회원
이 되고, 노벨상 수상이 결정되었지만 대중과 함께 받을 수 없는 상을 혼자만
받을 수 없다고 하며 그 상마저 그는 거절해 버렸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추종
하며 때론 성자처럼 떠받들기도 했다.
   나는 성인이 아닙니다. 성인인 척한 일도 없습니다. 나는 질질 끌려가기가 일
쑤요(생략). 나는 정말 약한 한 인간으로서 악덕의 습관을 가지고 있으며 진리의
신을 섬기려 하면서 언제나 비틀거리고 있습니다. 만일 나를 잘못한 일이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한다면 내가 저지른 과실은 모두 거짓이나 위선으로 보인 것에
틀림이 없습니다. 나를 약한 인간이라고 생각해 준다면 그것이 사실 나의 본 모
습입니다.
  막심고리키는 그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은 하느님을 닮았구나 라고.
  그의 마음속에는 정말 미움도, 전쟁도, 슬픔도, 질병도 이 세상에서 모두 사라
지게 한다는 바로 그  녹색 지팡이 가 꽂혀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녹색 지팡이 는 그에게 있어 고양된 영혼, 아니 하나의 양심, 아니 말로는 설
명할 수 없는 그 이상의 무엇이었던 것이다.



  신성한 영혼의 병 - 도스토예프스키
  어떤 특수한 천재성은 본인의 지병과도 깊숙이 상관되어 있음을 언급한 것에
우리는 주목하지 않을 수가 없다.
  파가니니의 비사회적 여러 이상성 및 완벽한 예술적 명기를 그가 앓았던 홍역
병원체에 의한 만기성 뇌염이라는 병명에 케르너박사는 그 근거를 두었지만 여
기에 또 다른 학설이 우리의 주목을 끌고 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문학과 그를 괴롭혀 온 간질과의 상관관계이다.
  입에 거품을 물고 온몸을 파르르 떨며 사지를 축 늘어뜨린 채 죽음의 상태를
수없이 반복하게 하였던 그 간질이  한계상황에서의 직관력을 배양해 주었다 는
것이다. 이  신성한 영혼의 병  간질이 발작되면서 겪게 되는 심묘경의 체험. 발
작 직전의 육체적 심리적 한계상황으로부터 야기되는 직관력과 예언적 통찰력이
그의 작품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고 하는 바로 그 점이다. 그의 대표작의 작중
인물, <백치>에서의 뮈슈킨,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스케치코프, <악령>의
키킬로프의 언행을 통해서 그러한 심묘경이 그대로 반영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백치>의 주인공, 뮈쉬킨공작은 날 때부터 간질을 앓고 있었으나 남다른 직
관력과 투시력을 지닌 선량한 인물로 설정되어 있다. 작가 자신임은 두 말할 나
위도 없다. 그는 자신의 간질 체험을 이렇게 밝힌 적도 있었다.
   이승과의 단절, 그것은 저승의 시작인 듯하다.
  발작 직전, 바로 그 찰나에 더할 나위 없는 황홀감이 간질병 환자를 어떻게
사로잡는지 여러분들은 모를거요.
  마호메트가 짧은 기간 동안 천국에 있었다고 말했듯이 나도 그처럼 발작이 일
어나는 동안 천국에 있었소.
  이쪽에서 보면 한없이 무서운 고통이, 저쪽에서 보면 한없는 기쁨으로 넘치
오.
  그는 생의 한가운데서 무수한 죽음을 체험하며 그때마다 고통과 기쁨을, 죽음
의 양면으로 보았던 것이다.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는 1821년 빈민구제원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귀족 출신의 군의관이었으며 7남매의 둘째였다. 그는 18세가
되던 해, 농노에 의해 살해되는 아버지를 지켜보아야 했다.
  1849년 스스로 반정부운동(페트라셉스키 사건)에 가담하였다가 사형언도를 받
고 그는 처형 직전까지 가는 특수한 경험을 체험하게 된다. 12월 22일 오전 9시,
영하 22도의 추위속에서 셔츠바람으로 그는 세묘노프광장에 마련된 처형대 앞에
다른 사형수들과 두 줄로 나란히 세워졌다. 그때의 체험이 <백치>에 이렇게 나
타난다.
   이제 이 세상에서 숨쉴 수 잇는 시간은 5분 뿐이다. 2분은 동지들과의 결별
에, 다음 2분은 세상을 하직하는 순간의 자신의 일을 위해, 그리고 최후의 1분은
이 세상을 마지막으로 봐 두기 위해 주위를 돌아보는데 쓰기로 했다.
  그러나 처형 직전(5분전)에 황제의 특사로 감형이 되어 극적으로 사형을 면하
게 된다. 그해 12월 25일 시베리아의 오스크감옥에 와서 유형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그것은 생이 아니라 죽음이었다 고 형에게 써 보낼 정도의 고통스런 생활이었
다.
  그러나 그의 만년은 명성과 부로 안정이 되어갔다.
  죽기 3개월 전만하여도 의기양양하게  다음 20년 동안 살아가며 써야 할 것들
에 대해 적어두었다고 그는 말했다. 간질의 빈도도 점차 줄어들고, 지병이던 폐
병도 악화되지 않아 모처럼 의욕에 찬 만년이었다고 하는데   .
  그러나 누이동생들과 유산문제를 놓고 다투던 날 밤, 폐의 동맥이 터졌고 각
혈이 시작되었다고 그의 딸이 <전기>에서 밝혀 놓았다. 도스토예프스키으 어머
니도 폐병으로 쓰러졌고, 첫 번째 아내 마리아도 폐병으로 죽었다. 안나와의 사
이에서 태어난 아들 알로샤는 세살 때 간질발작으로 죽었다. 가계의 병력은 이
러하였다.
  그는 펜을 들어 카트코프에게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의 나머지 원고료를 요
청하였다. 그리고 신부를 불러 고해를 하고 종부성사를 받았다. 다음날 아침 7시
에 그는 젊은 아내인 안나를 불렀다. 오늘 자신이 죽을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
고 말하며, 안나에게 촛불과 성경을 가져오게 하였다. 시베리아 감옥에서부터 늘
갖고다니던 성경책이었다. 안나가 아무렇게나 편 곳은 마태복음 3장 15절이었다.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그는  잠시 동안 허락하라. 그 말은 내 죽음을 말하는 거야. 됐어.  그 이상 읽
을 필요가 없다고 손으로 제지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아이들을 불러 작별인사
를 하고 아들에게 손때 묻은 성경책을 건네주었다.
  1881년 1월 31일 밤 8시 30분. 입에서 피를 흘리며 그는 숨을 거두고 말았다.
61세였다.
  1996년 여름, 나는 알렉산드르네프스키 수도원에 있는 그의 묘지를 찾아 무덤
앞에 서 보았다. 늠름한 그이 흉상이 반기는 듯 하였다. 장례날 약 3만명의 조객
이 이곳에 와서 추도를 했으며 추도사가 낭송될 때마다 무덤 위에 꽃다발이 하
나씩 놓여졌는데 그 숫자는 무려 74개나 되었다는 말을 상기하면서. 또 아침 10
시에 시작한 영결식은 오후 4시가 되어서야 끝이 났다는 걸 기억하며 주위를 둘
러 보았다. 몇사람의 여행객이 조용히 지나갈뿐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러시아는 그를 최상으로 대접하였다. 그는 궁핍과 신병의 고통 속에서
<가난한 사람들> <죽움의 집의 기록> <학대받은 사람들> <도박자> <죄와
벌> 등을 써 냈다.  신성한 영혼의 병 을 몸에 지닌 사람들은 도스토예프스키 외
에도 카이사르와 나폴레온, 마호메트, 반고흐, 몽테뉴 등이 더 있었던 것으로 기
억된다.



  실명의 화가 - 박수근 / 도미에
  프랑스의 화가 도미에와 1960년대를 살고 간 우리의 토속적 민중화가 박수근
은 가난의 어려움을 딛고 독학으로 그림공부를 하여 최상의 예술경지를 이룩해
낸 입지론적 인물들이다. 만년에는 불행하게도 두 사람 다 시력장애를 일으켜
실명하는 고통을 당하였다.
  강원도 양구에서 태어난 박수근은 아버지의 광산사업 실패로 양구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진학을 일찌감치 포기해야만 하였다. 그대신 혼자서 산과 들로
쏘다니며 연필 스케치와 수채화 훈련을 쌓았다.
  열세 살이되던 해  밀레의 만족 을 원색 도판으로 처음 본 박수근은 이렇게 기
도했다고 한다.  하느님 저도 이 다음에 커서 밀레와 같은 화가가 되게 해 주옵
소서.
  반 고흐도 밀레로부터 자신의 그림을 출발하였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박수근
도 밀레로부터 출발하였던 것이다. 그의 예술은 가난한 서민들의 성실한 삶을
일관되게 주제로 삼고 있다.
  그의 작품 <골목> <풍경> <절구> <판자짐> <노상> 등은 쓸쓸한 여운을
끌며 토속적인 분위기를 전해 준다. 절구를 찧거나 맷돌질을 하거나 어린 아이
를 업고있는 시골 아낙네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다. 인물의 무표정한 단
순화와 대담한 생략, 그리고 직선의 기하학적 비율로 구성되는 평면의 특질, 거
기에 얽은 마마자국처럼 모래흙이 뒤범벅이 된 것 같은 한국적 질감의 마띠에
르. 놀라운 그의 이러한 미술세계는 누구에게도 배운 바 없이 혼자서 독창적으
로 발전시켰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평자들은 말하고 있다.
  그는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 슬하에서 자랐다. 틈만 있으면 그는 땅 위
에 담벽 위에 그림을 그렸으며, 그림 연필 대신 뽕나무를 잘라 태워서 목탄을
만들어 썼다. 가난 속에서 밥짓기, 나무하기 그리고 동생들을 돌보면서 신문과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미술관계 자료를 꼼꼼히 읽고 기사를 나름대로 스크랩하
며 전시회, 미술평론 등 미술정보를 통해 자신의 예술에 대한 안목을 혼자 키워
나갔다. 열아홉 살이 된 이 시골 독학생의 그림 <봄이 오다>가 놀랍게도 조선
미술전 서양화부에 입선되었다. 어린애를 업고 절구질하는 <일하는 여인>이 두
번째 입선. 제16회에서 22회까지 해마다 입선되었고 1953년에는 <집>이 특선,
59년에는 추천작가가 되었다.
  프랑스의 도미에는 마르세이유에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루소의 사상을 신봉하는 무명의 혁명적 시인이었다. 아버지의 실패로 그는 학업
대신에 변호사 사무실에서 급사생활로 가족의 생계를 떠맡아야 했다. 소년시절
을 그는 법률사무소에서 지낸 탓인지 그의 그림에는 법정, 변호사 등의 체험을
작품화한 것이 많았다. 시민의 권리를 옹호한다는 미명하에 온갖 죄악을 저지르
는 법률가들을 그는 사악한 위선자로 표현했으며 돈키호테와 산쵸판사, 노래하
는 삐에로, 천대받으며 굶주리고 있는 어릿광대, 곡예사들을 즐겨 다루었다.
  박수근이 생계를 위해 미 8군 피엑스에서 초상화를 그렸듯이 그는 발자크의
소설에 삽화와 만화그림을 그려 넣었다. 가난 속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오
직 그림 그리는 일이 전부인 것처럼 보였다. 그림에 몰두, 스승 없이 독학으로
혼자 수련을 쌓아 나갔다. 도미에는 드라크르와에게서  내가 당신 이상으로 존경
하고 칭찬한 화가는 없었습니다. 라는 편지를 받았다. 가끔 미술 평론을 쓰던 보
드레르에게도 그의 유화는 일찍이 인정을 받은 바 있었다. 예리한 필치로 풍자
화를 많이 그렸다. 64세 무렵부터는 시력 장애로 점차 눈이 보이지 않았다. 친구
코로(풍경화가)의 도움에도 그이 만년 생활은 극도의 궁핍과 실명속에서 비참하
기 이를 데 없었다. 71세로 사망하기까지의 7년 동안은 암울 그 자체였다고 한
다.
  박수근도 가난과 여러 가지 내면적 고독을 이기려고 거듭된 과음을 하여 신장
과 간을 다치고 그로 인해 왼쪽 눈의 백내장을 앓으면서도 진작 치료하지 못했
다.  사물의 대상을 마치 촛종이를 통해서 보는 것 같다 고 했다. 눈의 안압이 높
아 심한 고통을 겪다가 악화된 후에야 수술을 받았다. 재수술 과정에서 시신경
이 끊어져 눈을 아주 못보게 되고 말았다. 49세였다. 그 후 오른쪽 한 눈으로만
그림을 그렸다. 게다가 간을 몹시 앓으면서도 제작생활을 감행하여 제13회 국전
에 <할아버지와 손자>라는 작품을 출품하게 된다.
  1965년 간경화와 응혈증을 일으켜 청량리 위생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한 달 뒤 퇴원하여 집에 돌아 온 5월 6일의 새벽 1시였다.  천당이 가까운 줄
알았는데 멀어, 멀어    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며 그는 51세를 일기로 우리들 곁
을 떠나고 말았다. 그의 아내 김복순은 이렇게 회고했다.
   하루는 저녁에 들어오더니  내가 오늘 버스 안에서 보니까 광주리장수 아주머
니들도 다 털속치마를 입었던데 당신만 안입었어.  하며 마음에 걸려 하셨다. 마
지막 운명하는 날도 내 걱정을 하며  당신 속치마 라고 하였다.
   외출했다가 돌아올 대 먼 발치에서 우리집 용마루만 보아도 어떻게 사랑스러
운지 모르겠다. 고 한 박수근의 말을 그의 딸 인숙은 회고했다. 항상 많은 사람
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는 예술을 위해 가정이나 생활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
러면서도 꾸준히 창작에 몰두하여 해마다 거르지 않고 작품을 제출하는 성실성
을 보였다. 통 말이 없어 누가 물으면  아! 그래 그렇게 하지. 라고 대답할 뿐이
었다. 한쪽 눈만으로 그림을 그린 화가가 박수근 말고 또 있다.
  호생관 최북, 그림을 얻지 못한 어느 귀인이 그를 협박하자 최북은 대노하여
 남이 나를 손대기 전에 내가 나를 손대야 하겠다. 고 하며 제 눈 하나를 찔러서
외눈이 되어버렸다. 조선조 말기 오원 장승업은 고종 임금의 설득에 하룻밤에
꼬박 새워 말 떼를 그렸다. 그러나 그 달리는 말에 생동하는 기운이 없다고 하
면서 그도 스스로 제 눈 하나를 찌르고는 방랑의 길에 올랐다. 화가의 눈은 혹
사가 아니면 이렇게 수난을 당했다. 고갱도 만년에 시력을 잃었으며, <수련>의
연작으로 유명한 모네도 시력을 잃게 되어 늘 검은 안경을 쓰고 다녔다. 양쪽
눈이 백내장으로 거의 실명하다시피 되었다.
  드가에 관하여 뽀올발레리는 이렇게 썼다.
   눈을 너무 많이 써서 시력을 잃자, 그의 정신은 방심상태와 절망상태 사이를
왔다갔다 했고 광태의 되풀이가 늘었다.  난 죽음만 생각하고 있어 라는 그의 말.
나이가 들어 그토록 재능있는 사람이 황폐해 가는 것보다 더 슬픈 것은 없다.
  여성 혐오자로서 발레리나를 즐겨 다룬 드가는 70세에 거의 장님에 가까운 눈
으로 파스텔을 칠한 <발레장면>을 마지막으로 그렸다.
  이 그림을 그린 지 13년이 지나 83세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는데 시력의 악화
로 유화제작을 진작 포기했으니 그때의 나이는 56세였다. 화가가 눈이 멀다니  



  시인의 통음사 - 권필 / 딜런토마스 / 박정만
  권필은 조선 중기의 문인으로 동료 문인들의 추천으로 제술관이 되고 동몽교
관에 임명되었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그는 송강 정철의 문인이었다. 성격이
호방하고 자유분방하여 구속을 싫어했으며 벼슬하지 않은 채 야인으로 일새을
마쳤다. 광해군 4년, 그는 왕비 유씨의 외척들이 세력을 쥐고 날뛰자 궁유시를
지어 풍자 비방하였다.
  대궐 안 버들이 푸르르니 꽃이 흩날리고 (궁유청청화난비)
  만조백관으로 하여 봄빛이 더욱 빛나는구나. (만관개미성춘휘)
  조정이 모두 태평세월을 구가하는데 (조가공하승평락)
  누가 위태로운 소리를 지껄여 벼슬을 물러나랴. (수유위언출포의)
  이같은 사실이 알려져 광해에게 엄한 심문을 받고 해남으로 귀양을 가던 중
동대문 밖에서 행인들이 따라주는 술을 그는 전부 받았다. 말술을 청해 단숨에
마시고는 바로 이튿날 죽어버렸다. 44세였다.

  


영국의 시인 딜런 토마스.
  그는 우울증에 시달리며 만년에는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다.
   맥박, 그것은 제 무덤을 파는 삽질소리.
   태 속의 애기가 어머니 두 다리를 가위삼아
  장차 자신이 입을 수의를 마름질 하는 재단사.
  그는 죽음을 아주 가까이에서 느끼고 있었다.
  1953년, 딜런은 빈번하게 의식을 잃었다. 의사로부터 목숨을 건지려면 절대로
술을 끊어야 한다는 경고를 받은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딜런은 탈진하고 무
언가에 몰두하고 병적으로 우울해 보였다. 그가 혼자서 외출했다가 1시간 반 후
에 돌아와 말했다.
   난 위스키를 열여덟 잔이나 마셨지. 신기록일 거야.
  그리고 그는 그 직후에 죽었다. 40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우리의 박정만 시인은 왜 통음사를 하였을까?
   나는 사라진다.
  저 광활한 우주 속으로,
  단 2행의 시를 남기고 사라진 박정만, 그는 정말 시인이었다. 40번의 퇴고를
거쳐야 한다던 그래서 20년 동안에 단 두권의 시집밖에 낼 수 없었던 이 과작의
시인은 어느 날  헐크 처럼 표변해 있었다. 1987년 8월 20일부터 9월 10일까지의
약 20일 동안 끼니를 거른 채, 하루에 소주를 여섯 병씩 마셔가며 무려 300여
편의 시를 토해내고 있었다.
   아니 어떻게 20일 동안 여섯권 분량의 시를 쓸 수 있단 말인가?
  동료들이 믿으려 하지 않자 그는 대답한다.
   아무도 그 얘길 믿으려 하지 않아요. 혹 기형도란 친구는 믿어줄랑가     하긴
그때의 일이 지금에 와선 저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지요.
  몇 달 동안 밥은 한 끼도 안 먹고 끼니마다 소주 두 병씩 마시던 때였어요.
앉아서 쓰고 누워서 쓰고 서서 쓰고 자다가 깨어나 쓰고     하여튼 시가 물밀
듯 꾸역꾸역 쏟아져 나오더라니까요. 하루에 보통 열다섯 편씩 썼어요.
  무엇이 그로 하여금 최악의 건강상태에서 곡기조차 끊고 시작에 몰두하게 하
였을까? 300여 편의 시를 토해내고 얼마 안 된 그는 탈진상태가 되어 기어코 병
원으로 실려가고 말았다. 1987년 5월 29일은 악운의 날이었다. 영문도 모른 채
그는 낯선 사람에게 연행되어 갔다. 발가벗긴 채 두 시간 남짓 온갖 고문을 당
하고 초죽음이 되어 풀려 나왔다. 박정만은 그 무렵 출판사  고려원 의 편집장으
로 있었다. 한수산과의 소설 출판 계약건으로 제주도로 가서 한수산을 만났다.
나이도 동갑이고 학교도 동문이어서 이내 어울려 친해졌다. 물론 출판계약도 성
사되었다.
  후에 알게 되었지만, 가장 먼저 연행돼 간 한수산이 심한 곤욕을 당한 뒤 심
문과정에서 가까운 문인의 이름을 대라는 협박에 마지못해 서명한 몇몇 사람의
이름가운데 박정만이란 이름이 들어 있었다는 것이다. 정규웅도 박정만과 똑같
은 고문을 받았는데 나중에 두 사람은 광화문 뒷골목의 어느 맥주집에서 만나
얘기할 기회를 가졌다.
   형님, 도대체 워쩐 일이다요. 도대체 이유나 알았으면 좋겄소. 형님 아시다시
피 내가 그 흔한 서명이란 걸 한 번 해 봤소? 아니면 참여시란 걸 써 보길 했
소. 왜 내가 이 지경이 되도록 당해야 했는지 아는 대로 좀 가르쳐 주소.
  호남 사투리로 그는 낮게 부르짖었다. 걷어올린 바지자락 속엔 피멍든 다리가
앙상했다.
   한수산이가 자넬 가장 친한 문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았다더군.
   말도 안 되는 소리, 난 그를 딱 한 번 만난 일밖에 없거든요.
  그 사건 직후에 박정만은 이런 시를 썼다.
  (앞부분 생략)
  펄펄 끓는 물솥에 수건을 적셔
  내 몸의 어혈 위에 찜질도 하고  
  탕기에선 한밤내 부글부글
  죽음이 들끓는 소리.
  절명하라, 절명하라, 절명하라,
  이를 갈다 이를 갈다
  가슴도 부글부글 소리를 내고  
  분노도 피딱지도 약에 녹아
  하나가 되고  
  어혈은 풀어져서 내몸의 피와 살과 뼈에 스미고  
  분노에 분노. 그는 20일 동안 끼니를 거른 채 빈속에 소주 여섯 병씩을 매일
같이 흘려 넣으며 자신의 내부에 깃든 무엇인가를 파괴해 나갔다. 씻어내렸다.
  마흔 살, 그이 생애는 시 300편과 바꾼 통음사였다. 딜란 토마스가 폭음하여
죽은 나이와 똑 같았다.
   88 서울올림픽 이 폐막식이 막 시작되던 무렵이었다.



  제8장 화려한 명성, 처참한 최후
  권력자의 종말
  통계에 의하면 장수를 누리는 직업으로는 정치가를 꼽는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 고 하는 확고한 신념 때문일까? 아니면 권력에 대한 불
사신과도 같은 끝없는 집념 때문일까? 그들은 비교적 오래 살았다. 나이 일흔
살 먹기가 예로부터 드문 일이라고 말하며, 평균 수명이 고작 마흔 살 정도에
지나지 않았던 당시, 황희 정승은 90을 살았고, 윤선도는 85세, 송시열은 83세.
허목, 허적도 여든을 넘겼다.
  독일의 아데나워는 91세, 이승만 대통령도 91세에 사망하였으며 이들은 재임
시에 87세, 86세의 나이로 모두 권좌에서 쫓겨났다. 읜스턴 처칠도 91세로 죽었
는데 그 역시도 권고사직으로 80세에 은퇴를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스페인의 프랑코는 83세, 드골 80세, 아이젠하워 79세, 후르시쵸프 77세, 모택
동 80세, 등소평 93세, 사라잘은 81세로 생을 마감했다. 장수자들 중에는 장기
집권자가 또 많았다. 이에 비하면 세습 왕들의 수명은 단명한 편이었다. 쟁취를
위한 신념을 가질 필요가 없어서였을까?
  기원전 247년, 한고조로부터 시작되어 청나라 광서제에 이르는 중국왕조 2000
여년 사이에는 208명의 황제가 있었는데 그들의 평균 수명은 38세로 나타났다.
  그들 중 권력쟁탈자인 정적에 의해 목숨을 잃은 황제가 삼분의 일이나 되었으
며 그것도 대부분 남이 아닌 아버지와 아들, 형제들과의 골육상쟁에 의한 죽음
이었다.
  왕건이 개국한지 474년에 망한 고려조의 왕가를 살펴보아도 피비린내나는 다
툼은 마찬가지였다.
  목종과 의종의 시해. 28대 충혜왕 30세 독살, 30대 충정왕 15세 독살.
  31대 공민왕 45세 시해. 32대 우왕 25세 시해. 33대 창왕 10세 시해.
  34대 마지막 임금 공양왕마저 시해.
  조선왕조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통계에 의하면 조선왕조 임금들의 평균수명은 44세로 기록되고 있는데 단명한
이유는 이렇게 설명되고 있다. 그들은 지엄한 왕손으로 태어나 죽을 때까지 손
발을 거의 쓰지 않았다. 심지어 세수까지 손수 할 필요가 없었다.
  극귀의 신분으로 몸을 쓸 일이 적었다. 이러한 절대 운동부족과 과다한 영양
섭취. 게다가 후궁 처첩을 거느리고 자행되던 마구잡이식 보신과 무절제한 성생
활. 그것으로 기갈이 소진되었으니 어찌 단명을 면할 수 있었겠는가?
  조선조 제24대 헌종은 여색을 너무도 가까이 하여 피와 가래를 토하다가 보령
스물 셋의 나이로 승하하고 말았다. 튼튼한 몸을 가진 더꺼머리 총각, 강화도령
도 철종으로 즉위하자 술과 여색으로 인해 서른 셋의 젊은 나이로 승하했다.
  그런가하면 장수를 누리던 권력 쟁탈자들의 말로는 또 어떠하였을까?
  그들의 대부분은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채, 알바레스병이나 파킨슨병, 신경매
독 등으로 인해 전부 정신병자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얄타회담에 참가했던 루주벨트, 처칠, 스탈린은 차례로 알바레스병을 앓아 뇌
가 이미 온전치 못했다.
  파킨슨병을 앓던 프랑코, 무솔리니, 히틀러도 정신이상자였고 가믈랑과 무솔리
니는 신경매독까지 겸하고 있었다.
  아디슨병을 앓던 케네디나 혈액병을 앓던 프랑스의 퐁피두 역시 코티죤 복용
으로 정신치매의 장해를 겪고 있었다.
  레닌과 모택동, 사라잘은 식물인간으로 살다가 생을 마쳤다. 편집병적인 정신
질환으로 파면권고 사직을 당한 닉슨.  딱정벌레 라는 별명이 붙었던 후르시쵸프
와 영국의 조지3세는 조울증 정신병으로 권좌에서 쫓겨남을 당해야만 했다.
  절대권력을 쟁취한 다음 그들의 말로는 더 이상 좋을 게 없었다. 권력의 정점
에서 비참하게 사라진 독재자의 예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소련의 요시프 스탈린, 루마니아의 니콜라에 차우세스쿠, 이란의 무하마드 팔
레비,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 우간다의 이디아민, 포르투갈의 안토니우스 살라자
르, 필리핀의 페르디나드 마르코스, 스페인의 프란시스코 프랑코 등. 암살 위협
에 쫓겨 정처없는 망명길에 오른 이란의 팔레비왕. 집권 8년만에 조국 우간다를
철저하게 피폐화시킨 이디아민, 그도 1979년 4월,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20년간
필리핀을 독재해 왔던 마르코스도 국민들의 반정부 시위에 밀려 국외탈출을 시
도할 수밖에 없었다. 마르코스는 자신이 희망하던 망명지 싱가포르, 스페인에서
도 입국을 거절 당했다. 미국에서도 그가 기네스북에 오른  세계 최대의 도둑 이
란 사실을 알고는 더 이상 보호해 주지 않았다. 권좌에서 쫓겨난지 4년이 되던
1989년 5월, 하와이의 어느 조그만 병원에서 그는 오욕의 물든 생애를 마감하고
말았다.
  루마니아의 독재자 차우세스쿠는 국민경제 파탄혐의와 대학살의 죄목으로 특
별재판 끝에 곧바로 사형되었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제화공에서 일약 독재자
로 변신한 그는 세큐리타테라고 하는 국가안전부를 동원해 반체제 인사에 대한
고문과 살인 및 공포정치를 자행해 왔었다. 작가들은 살아남기 위해 그를  거인
중의 거인 이라 찬미했으며 화가들은 그를 하늘에서 내려오는 신의 모습으로 형
상화하였지만, 24년간 루마니아의 절대 권력을 휘둘렀던 그가 하루아침에 사형
수로 전락해 부부가 함께 총살을 당하고 마는 비운을 겪었다.
  살인마라 할지라도 생사기로의 벼랑 끝에 서서, 애인이던 에바브라운과 함께
동반자살을 한 히틀러라든지 우미인과 항우의 죽음은 때로 묘한 정서를 불러 일
으키곤 한다.
  그리고 나치스정권 탄생과 함께 그 정책 수행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요세
버 괴벨스. 그는 베를린 함락직전 총통관저에서 가족과 함께 권총으로 자살을
결행하였는데 한 때 이승만 정권에 편승하여 세도를 부린 이기붕 일가족의 떠들
썩한 권총자살 장면이 거기에 겹쳐지는 것이다.
  대개의 경우, 자살이 아니면 타살. 그래서 달리는 호랑이 등에서 결코 뛰어 내
릴 수 없었던 그들은 권력의 가혹함 때문에 언제까지고 호랑이 등위에 있지 않
으면 안되는 형벌을 감수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인가.
  먹느냐, 먹히느냐로 그들의 운명은 참으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권력의 줄다리기 - 클레오파트라 / 명성황후 민비
 


독사에게 맡긴 육체 - 클레오파트라
  고대 이집트의 아름다운 여왕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를 다스리고 있던 포토레
미 오레테스의 둘째 딸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딸고 아들의 2인 정치를 유언하였
고, 당시 궁정 풍습에 따라 오누이를 결혼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중신들의 음모로 클레오파트라는 시리아로 추방당하여 그곳의 여왕이
되었다. 클레오파트라는 포토레미의 군대와 대결하여 장기전에 들어갔고, 로마를
대표한 카이사르가 이를 중재하러 왔다. 그녀의 미모에 사로잡힌 카이사르는 알
렉산드린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클레오파트라를 왕위에 앉힌다. 카이사르는 이
집트를 로마의 속국으로 만들 수도 있었건만, 여왕의 포로가 된 채 자신의 임무
를 소홀히 하였다. 카이사르는 그녀와의 결혼을 허락해 줄 것과 둘 사이에서 태
어난 아들로 하여금 이집트의 왕위를 계승하도록 해달라는 법률통과 요청서를
원로원에 제출한다.
  그러나 로마 원로원은 그를 배척하였다. 카이사르가 죽자 클레오파트라는 아
들 싸시리온과 함께 이집트로 되돌아온다.
  카이사르가 죽은 로마에서는 안토니우스와 카이사르의 양아들인 옥타비아누스
가 심한 세력다툼을 하게 되었다. 이때 안토니우스는 황금의 나라 이집트를 손
에 넣어보려는 야심을 갖고 클레오파트라를 타르소스로 불러낸다.
  기쁜 마음으로 아름답게 치장하고 달려간 여왕에게도 다른 속셈이 있었다. 그
이 힘을 빌어 불안한 이집트 왕위를 지켜보겠다는 야심이었다.
  아름다운 용모, 뛰어난 말솜씨에 매혹된 안토니우스 역시 그녀의 포로가 되어
즐거운 나날만을 보낸다. 그들 둘 사이에는 쌍둥이가 태어났다. 이들에게 시리아
와 알메니아, 메디아와 팔시안스 왕국 등을 지배하게 하였다.
  로마 사람들은 로마땅을 이집트 사람에게 맡기는 것에 불만을 품게 되었다.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하고, 로마에 있는 부인(옥타비아누스의 여
동생)과는 이혼한 상태였다. 옥타비아누스가 드디어 안토니우스를 원로원에 반역
자로 고발하고 클레오파트라에게 도전한다.
  클레오파트라는 스스로 함대를 이끌고 그리스의 북쪽 바다인 악티움에서 로마
군과 맞섰으나 이집트 군대는 싸워보지도 않고 모두 달아나 버렸다. 대패였다.
사기 충천한 옥타비아누스의 로마 군대가 알렉산드리아를 공격해오자 궁지에 몰
린 안토니우스는 독약을 마실 수밖에 없었다.
  클레오파트라는 미리 만들어 놓았던 자신의 무덤 속에 들어가 숨어 버렸다.
약 기운이 전신에 퍼져 죽어가는 안토니우스는 이 무덤의 창문을 열고 뛰어 들
어와 클레오파트라의 품에서 숨을 거두었다.
  클레오파트라는 무덤 안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음식도 거절하고 약도
거절한 채. 그러나 그녀가 죽으면 아들도 몰살시키겠다는 옥타비아누스의 협박
에 잠시 죽음을 단념하려고도 하였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의 전리품으로 로마
에 끌려간다는 정보를 입수하고는 다시 자살을 결심하게 된다.
  클레오파트라는 시종들에게 독사가 든 상자를 가져오게 한다. 여왕은 눈을 지
긋이 감고 상자의 뚜껑 밑으로 팔을 집어 넣었다. 혈관 속에 독이 퍼지자 여왕
은 그대로 엎어졌다. 기원전 30년 8월 그믐날이었다. 그녀는 안토니우스의 무덤
옆에 나란히 묻혔다. 39세의 나이였다.
  안토니우스는 유언장에  내가 죽으면 클레오파트라의 곁에 묻어 달라 고 밀 써
두었다고 한다.

  


명성황후의 두 토막난 시신
  민비는 여흥부원군 민치록의 딸로 어린 나이에(8세) 부모를 잃고 일찍이 혈혈
단신이 되었다. 외척 세도정치에 질린 흥선대원군은 민씨의 배경이 미흡하다는
점을 장점으로 꼽아 그녀를 왕비로 간택하니, 그가 조선왕조 제26대 고종의 비
명성황후이다.
  열두 살이던 아들 명복을 왕위에 등극시키고, 어린 고종을 대신하여 흥선대원
군은 섭정의 대권을 휘두른다. 여러 가지의 개혁정책으로 사회는 점차 제모습을
찾아가는 듯했지만 경복궁의 무리한 중건과 쇄국정책으로 인한 천주교의 박해
등 그는 많은 문제를 야기시켰다.
  이에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수완이 능란한 왕비 민씨는 정치에 관여하기 시
작, 대원군을 축출하는 작업을 추진한다.
  민씨와 대원군의 사이가 벌어진 직접적인 원인은, 궁녀 이씨의 소생인 완화군
을 대원군이 편애하여 세자로 책립하려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최익현의  대원군
탄핵 상소 를 민비가 교묘히 이끌어 내며 창덕궁의 대원군 전용 출입문을 폐쇄
해 버렸다. 대원군은 양주에 물러앉아 정계복귀의 꿈과 증오심을 함께 키운다.
이때부터 시아버지 흥선대원군과 며느리 민비와의 정적 관계는 팽팽한 권력의
줄다리기로 치닿는다. 대원군이 실각하자 민씨척족을 앞세워 정권을 장악한 민
비는 고종을 움직여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맺는 등 일련의 개화시책을 추진한
다. 이 개화정책에 불만을 품고 있던 위 정척사파와 대원군의 세력이 임오군란
을 일으켜 그녀를 죽이려 하였다.
  그러나 재빨리 궁중을 탈출한 민비는 충주목사 민응식의 집에 피신하면서 비
밀리에 고종과 접촉하여 청나라에 군사를 요청했다. 그녀의 요청으로 출동한 청
국군은 대원군을 납치하여 청나라로 끌고 가 버렸다.
  그 후 민비는 친청정책을 실시하였는데 이 때문에 개화파의 불만이 높아져 갑
신정변이 일어나게 되고 일시적으로 개화당이 정권(김옥균의 3일 천하)을 장악
했지만 청국군의 도움으로 민비는 다시 정권을 되찾는다.
  동학교도 등 농민의 봉기로 정국이 어수선하던 무렵, 일본은 갑오경장에 관여
하면서 흥선대원군을 내세워 그녀의 세력을 제거하려고 하였다.
  일본의 야심을 간파한 민비는 친러시아 정책을 쓰면서 일본에 노골적으로 대
항했다. 이에 일본 공사 미우라는 대원군에게 민비 암살에 대한 밀서를 보낸다.
대원군은 반대하지 않았다. 민비를 진작부터 죽여 없애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측은 대원군을 다시 섭정으로 옹립하고 향후 3년이 지나면 대원군의
손자인 준용을 군주로 삼겠다는 약조까지 해왔기 때문이다.
  미우라가 잡은 거사 날짜는 1895년 8월 21일이었다.
  그날 새벽 3시, 일본 군대와 다른 구경꾼들까지 합세한 폭도들은 대원군을 옹
립하고 대궐로 쳐들어갔다. 밤중에 급습을 당한 군졸들은 싸움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무참하게 죽어갔다. 폭도들은 고종 임금과 민비가 자고 있는 건청궁으로
몰려갔다. 죽음을 각오하고 맞선 궁내대신 이경직은 결국 일본의 총탄에 쓰러지
고 말았다. 민비는 사태의 위급함을 보고받고 즉시 복장부터 갈아입었다. 평범한
궁녀의 차림을 하고 도망칠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민비를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던 폭도들 앞에 누군가  이 분이 중전마마예요 라고 소리쳤다. 그 여자는 궁중
출입이 잦은 일본 여자였다.
  폭도들이 일제히 고함을 지르며 민비에게로 달려들었다. 총탄이 튀고 칼날이
번쩍였다. 총탄이 날아 심장을 꿰뚫고 칼이 번쩍이며 몸둥이를 동강내고 말았다.
30여 년 동안 국모로서 또 한때는 조선의 전권을 쥐고 호령하던 중전의 어체였
다.
   그년의 옷을 벗겨라.
  누군가 소리치자 중전은 알몸이 되었다(일설에 의하면 고종의 육체를 사로잡
은 요부라하여 민비의 하문에 칼날을 꽂아 차마 볼 수 없도록 찢어놓았다고 함).
  일본인드은 죽은 민비의 시신을 이불에 둘둘 말아 석유를 뿌리고 불을 질러
버렸다.
  이 만행을 우리는  을미사변 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44세에 죽은 민비는 24년
이 지나서야 겨우 남편인 고종의 곁에 묻힐 수 있었다.
  클로오파트라와 민비는 39세와 44세의 한창 나이로 비명에 갔다. 이 여인들은
자신의 왕좌를 굳건히 지키기 위해 외부의 세력을 끊임없이 끌어들였다. 동생과
대결한 클레오파트라, 시아버지와 맞선 며느리 민비는 집안 싸움에 외부의 세력
을 개입시켜 결국은 대세를 그르치고만 권력지향적인 여인들이었다.



  애첩의 자살 - 양귀비 / 우미인
 


장한가의 주인공 양귀비
  치세를 잘하던 당나라 현종은 원헌왕후와 무혜비가 차례로 죽자 깊은 슬픔에
빠져 정사도 등한시하게 된다. 이에 환관 고력사는 여산에 있는 온천궁으로 임
금이 행차할 적에 양귀비를 수행토록 하게 했다. 계획한대로 양귀비의 미색은
현종의 눈에 띄게 되었고, 현종은 그녀를 가까이 불러들이게 된다. 그러나 그녀
는 현종의 18번째 태자인 수왕의 비가 아니던가.
  자신의 며느리를 함부로 할 수는 없는 일. 그래서 수왕과 이혼을 시켜 며느리
와의 인연부터 먼저 끊게 했다. 수왕궁을 나와 도관(도교의 사원)으로 들어가 양
옥환은 여도사가 되었고(법호는 태진이었다) 절에 맡겨져 있다가 후에 궁으로
들어오니 옥환의 나이 22세, 당시 현종의 나이는 58세였다.
   천하의 부모들이 아들보다 딸 낳기를 원하노라.
  이런 풍자가 나올 만큼 당현종의 총애는 극진하였고 양씨 가문의 영광은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오라버니 국충은 재상까지 되었고, 천하의 땅은 모두 양귀비
일가에 점령이 되었다. 양국충은 제1의 실권자가 되어 재물을 탐하며 나라를 어
지럽히니 이에 안록산이 반기를 들어 안사의 난을 일으킨다.
  서쪽으로 장안 도성문을 빠져나간 현종 일행은 한밤중에 마외파에 도착하게
된다. 그러나 평소 양씨 일문에 불만이 많았던 근위병들은 행진을 멈추고 더는
나아가려고 하지 않았다. 군사들은 우선 말 위에 있는 양국충을 활로 쏘아 떨어
뜨렸고 잇달아 양귀비의 언니인 한국 부인과 진국 부인을 차례로 죽였다. 그리
고 현종의 거처를 에워싸고 양귀비의 처단을 요구하였다. 밖에서는 고함치는 병
사들의 성난 목소리가 드높았다. 분위기를 간파한 환관 고력사는 현종에게 귀비
를 떼어놓을 수밖에 없음을 아뢰고 처단의 결심을 촉구한다.
   귀비에게 무슨 죄가 있겠는가. 있다면 내가 귀비를 총애한 것이 죄이지.
  현종은 뇌까리면서 하는 수없이 고력사에게  귀비에게 죽음을 내렸다는 뜻을
병사에게 전하라 고 말한다. 왕의 음성은 떨리고 있었다. 귀비와의 마음 아픈 작
별의 순간이 왔다. 그러나 그 순간도 길지는 못했다.
  고력사는 양귀비를 작은 불당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거기에서 흰 명주천으
로 목을 매어 자결케 했으니 그녀의 나이 38세. 당 현종을 모신 지 16년째가 되
는 해였다고 한다.
  시인 백낙천은 이들의 비극을 <장한가>에 담았다.
  끝 구절은 이러하다.
  칠월 칠일 장생전에서
  깊은 밤 아무도 모르게 주고 받은 맹서.
  하늘에선 비익조가 되고
  땅에는 연리지가 되고자
  높은 하늘, 넓은 땅도 다할 때가 있을지언정
  두 사람의 서러운 한은 끝없이 면면하리라.

  


항우와 우미인의 죽음
  장기판의 한왕과 초왕처럼, 한나라 유방과 초나라 항우는 2년을 넘게 전쟁을
하고 있었다. 서로들 지친 끝에 정전협정을 맺고 천하를 양분하여 동은 항우. 서
는 유방이 영유한다고 정했다. 항우는 즉시 귀국길에 올랐다. 이때 장량과 진평
의 계략으로 유방은 협정을 위반하고 즉시 항우를 추격했다.
  항우의 군대는 해하에 머물고 있었으나 식량도 이미 떨어지고 전력은 저하되
어 있었다. 무범자 유방에게 항우는 포위 당해 버렸다. 날이 어두워지자 사방에
서 들리는 초나라의 노래소리에 항우는 크게 놀란다.
   한은 이미 초를 점령 하였단 말인가? 한군에 초인이 많기도 하구나!
  그날 밤 항왕은 일어나 장막 안에서 술을 마셨다. 항우는 우라는 미인을 언제
나 곁에 두었으며 추라는 준마를 타고 다녔다. 처연한 심정으로 그는 시를 지어
읊었다.
  산도 뽑던 그 힘! 세상을 뒤덮던 그 기세 (역발산혜 기개세)
  때가 불리하니 추도 달리지 않는구나 (시불리혜 추불거)
  추야, 너도 달리지 않으니 내 무엇을 하겠는가? (추불서혜 가내하)
  우야 우야! 너는 어찌 될것인가? (우혜우혜 내약하)
  항왕은 노래를 되풀이하여 불렀고, 우미인은 이에 화답을 하였다.
  한나라가 이미 초 땅을 덮었고
  사면은 온통 초나라 노래인데
  대왕은 의기조차 이미 다하니
  내 구차히 살아서 더 무엇하리이까.
  눈물이 그녀의 뺨을 흘러내렸고, 곁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흐느끼며 얼굴을
들지 못하였다고 <사기>는 전하고 있다.
  우희는 어렵게 노래를 마치고 항우의 옆구리에 찼던 칼을 뽑아 자신의 목을
찔러 자진하고 말았다. 그 후 우미인의 무덤 위에서는 예쁘고 가녀린 꽃이 피어
났다.
  우희가 자살할 때 흘린 피에서 빨간 꽃이 피었다고 하는데 이것을 우미인초라
하기도 하고 혹은 개양귀비라 부르기도 한다.
  항우는 사태가 틀린 것을 알고 죽기를 결심하고 나가 싸웠다. 그가 혼자서 죽
은 한군만도 수백 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그 역시 여러 군데에 상처를 입었다.
한나라의 여마동이 눈에 띄었다.
   너는 나의 옛 부하가 아닌가? 내 머리에 현상금이 걸렸다는 말을 들었다. 내
가 너에게 덕을 베풀겠다.
  항우는 스스로 자기의 목을 쳐 죽고 말았다. 한군의 병사들이 항우의 시체를
놓고 서로 다투니 손과 발이 떨어져나갔다. 그의 나이 서른한 살. 사면초가는 장
량의 계략이었던 것이다. 한나라의 참모 장량이 초나라 노래를 알고 있는 군인
들을 시켜 초가를 부르게 했던 것. 그래서 중국천하는 한왕 유방의 손으로 들어
갔다. 그러나 양귀비의 자진은 우희의 죽음과는 달랐다. 우희는 스스로 선택한
결단이었다. 여기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장군의 죽음 - 군웅신이 된 최영 / 남이 / 장보고/ 임경업
  모든 사람들은 잘 죽고 싶어한다. 천수를 누린다음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원없이 눈을 감는 고종명의 그런 죽음을 원한다. 그런데 역사는 출중한 사람, 비
범한 사람에게는 그런 죽음을 허용하지 않고 비범한 죽음을 잇따르게 하였다.
그래서 걸출한 영웅들이 비명에 희생되는 예를 찾아보기는 힘들지 않다. 이순신
과 계백은 훌륭히 전사했다. 그들은 이미 죽을 장소를 스스로 택해 남이 하기
어려운 자신만의 죽음을 이룩했던 것이다.
  황산벌 싸움터에 나가기 전 날, 계백은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을 직접 칼로
목을 베었다. 패배는 자명한 일, 따라서 적군의 노예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가
족의 목을 베고 자신도 죽기를 다해 싸웠다. 나당 연합군 10만 명과 백제의 5천
결사대와의 싸움이었다.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서 신라군을 네 차례나 무찔렀지
만 중과부족이었다.  내 여기서 죽기를 한하고 싸우리라.  다짐하던 충무공도 노
량해전에서 가슴에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장군다운 죽음이었다. 그러나 여기에
그렇지 못한 죽음이 있다. 영예로운 전사가 아닌, 모함으로 비명에 간 장군들의
죽음. 더구나 그들은 죽어서 무녀들의 섬김을 받는, 무속 신앙의 대상이 되었던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
  고려의 명장 최영은 어릴때부터 얼굴에 위엄이 있고 기골이 장대했으며 용맹
또한 뛰어났다. 고려는 원나라를 90여 년 동안이나 섬겨오고 있었다. 최영은 원
나라에 속해 있던 압록강 서쪽의 8참을 수복하고, 오예포에 침입한 왜구의 배 4
백여척을 격파하였다. 왜구토벌에 큰 공을 세우고 여러 난을 평정하였다. 그래서
재상직인 영삼사사가 되고 곧 문하시중에 올랐다.
  1376년 우왕 2년, 홍산(부여군) 대첩에 참가한 그는 입술에 화살이 꽂혔건만
얼굴빛 하나 바꾸지 않고 적장을 쏜 뒤에 피가 흐르는 그 화살을 뽑았다고 한
다. 이때부터 왜구는 머리가 하얀 백수 최만호를 제일 두려워하였다. 그 뒤 명나
라가 철령 이북의 땅을 차지하겠다고 나서자 최영은 요동정벌을 주장하였다. 그
는 8도 도통사가 되고 19세 아래이던 이성계와 조민수를 좌우군 도통사로 삼아
평양까지 출정하였다. 위화도에서 그 좌우군이 회군한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우
왕은 곧 최영에게 진압하라고 명령했다. 뿐만아니라 붙잡아오는 사람에게는 상
과 작위를 주겠다는 포고문도 발표했다. 우왕의 뜻을 안 이성계와 조민수는 사
생결단으로 대항했다. 대세는 회군병력엠 기울어져 있었다. 게다가 궁성병력은
약세였고 병사들은 이성계의 위세에 눌려 전의는 상실되었다. 최영 역시 그와같
은 대세를 읽고 있었으므로 병사들을 우왕이 있는 화원을 철수시켰다. 그러나
회군병력은 곧 화원을 둘러싸고 항복을 요구해오며 안으로 쳐들어왔다. 최영은
곽총보 등 몇 장수에 의해 포박되었다. 그는 유배길에 오르게 되며 우왕은 폐위
되고 요동정벌은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귀양길에 오른 최영은 고향인 고봉현(고
양)에 머물러 있다가 다시 합포(마산)로 이배되었다. 그 뒤 충주로 이배되었다가
1388년이 다 저물어가는 12월 어느 날, 73세의 고령에 이른 최영은 형장으로 끌
려나갔다. 그의 얼굴은 조금도 흐트러진 기색이 없었고, 말과 태도도 평소와 다
름이 없었다.
   내 한 몸 죽는 건 두렵지 않다. 오직 고려 사직의 존망이 염려 될 뿐이다.
  과연 그는 기울어가는 고려왕조의 마지막 기둥이었다.
  남이 장군은 태종 방원의 외손답게 기걸이 호협하여 벌써 17세의 나이에 무과
에 장원급제하였다. 당시 좌의정이던 권람의 사위가 되었고, 27세에 병조판서를
역임하여 이조 역사상 최연소 장관이 되었다. 그는 뛰어난 용맹으로 이시애의
난을 토벌하고 서쪽으로 건주위를 칠 적에 선봉으로 나가 큰 공을 세웠다. 이때
승리를 거두고 회군할 때 그가 지은 시는 널리 알려진 바 그대로이다.
  백두산 높은 봉을 칼을 갈아 다 없애고 (백두산석마도진)
  두만강 깊은 물은 말을 먹여 다 없애니 (두만강수음마무)
  남아 20세에 나라 평정 못하면 (남아이십말평국)
  그 누가 대장부라 일컬으리오. (후세수칭대장부)
  1468년 예종이 즉위한 지 얼마 안되어 그는 대궐 안에서 숙직을 하였다. 그날
밤 혜성이 나타났다. 이를 보고 남이가 동료와 더불어 이야기하기를  이것은 묵
은 것을 없애고 새 것을 펴려는 형상이다. 라고 하였다. 이에 평소 그의 승진을
질투하고 있던 유자광이 엿듣고 있다가  남이가 모반한다. 는 무고를 꾸며 옥사
가 일어난다.  남아이십말평국 이  말득국 으로 둔갑되어 고해졌다. 간신 유자광의
모함으로 아깝게 그가 주살되니 나이 겨우 28세였다.
  남이가 귀신을 내쫓음으로써 다 죽어가던 낭자가 살아났다는 등 남이와 관련
된 설화들이 많이 남아 있는데 그의 위용은 귀신을 내쫓을 수 있다고 하는 믿음
에서 지금도 남이는 장군신으로 무속인의 추앙을 받고 있다.
  서울 용문동과 사근동에 그의 사당이 있어 지금도 주기적으로 제가 올려지고
있다. 용문동의 경우는 4, 7, 10월의 초하룻날에 치제하고, 매 3년마다 4월 1일에
는 대규모의 제를 거행하고 있다.
  신라 어부의 아들로 태어난 장보고는 어려서부터 활을 잘 쏘아 궁복이라고 불
리웠다. 그는 장군이 되고 싶어했으나 신분이 미천하여 뜻을 이룰 수 없자 당나
라 서주로 건너갔다. 그곳 무술대회에서 장원으로 뽑혔고, 당나라 황제의 군관벼
슬을 받는다. 무령군 소장의 벼슬에 올랐으나 어느 날 등주에서 신라인이 해적
에게 붙잡혀 노예로 팔리는 사실을 목격하고는 벼슬도 버리고 고국으로 돌아온
다. 왕께 이러한 사실을 아뢰고 군사 1만명을 허락을 받아 해상 교통의 중심지
인 완도에 진을 쳤다. 항만시설을 갖추자 왕은 청해진(완도) 대사로 그를 임명하
였다. 해적과 왜구를 일시에 소탕하고 해상권을 손에 쥐니 그의 이름이 높아졌
다. 그 후 장보고는 김우징과 반란을 일으켜 민애왕을 죽이고 김우징을 왕위에
오르게 하니 그가 바로 신무왕이다. 신무왕은 청해진에서 군사를 얻을 때, 장보
고에게 이런 약속을 했다.
   이 일이 성공하기만 하면 장군의 딸을 내 며느리로 삼겠다  그러나 즉위한
그해에 신무왕은 바로 죽고 말았다. 그의 아들이 대를 이어 문성왕이 되었다. 장
보고는 문성왕에 의해 장군이 되었다. 문성왕에게는 이미 왕비 박씨가 있었다.
이 문제를 놓고 의논할 때, 장보고의 권력을 시기하던 대신들은 반대하며 이렇
게 말했다.  근본도 모르는 천한 섬놈의 딸 이라고. 이것을 전해들은 장보고는 화
가 머리끝까지 났다.
   급할 때는 쫓아와서 통사정을 하고 원하지도 않은 약속까지 먼저 해놓고 이
제와서 딴소리를 하다니    썩어빠진 놈들!  홧김에 내뱉은 그의 욕설이 그대로
궁안으로 들어갔다. 조정에서는 더럭 겁을 냈다. 막강한 군력을 쥔 그가  홧김에
쳐들어오지나 않을까 해서.
  그의 옛부하이던 염장이 자청해서 나섰다. 왕은 염장에게 일이 성사되면 청해
진의 자치권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장보고의 휘하로 달려가 거짓말로 비위
를 맞추었다. 장군의 은혜를 배신하고 이제 와서 욕이나 하는 왕족이니 귀족이
니 하는 족속들이 역겨워 도망쳐 왔는데, 이제부터는 장군의 수족이 되어 죽을
때까지 한마음으로 모시겠다고 하며 거짓 충성을 그에게 맹세했다. 그날밤 그들
은 어울려 술을 마셨다. 장보고가 술에 대취하여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게
되자 염장은 칼을 뽑아 그의 가슴을 힘껏 내리찔렀다. 841년 11월이었다. 애통한
것은 한 개인의 손실만이 아니라, 해상제패의 꿈이 꺽여, 그 후 잦은 외침을 면
치 못하게 되었다고 하는 점이다.
  임경업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2년 뒤, 신립장군이 저사한 충주 탄금대가 있
는 달천 강가에서 태어났다. 스물 다섯 살이 되던 광해군 10년, 그는 무과에 합
격하였고,  이괄의 난 을 평정했다. 인조는 친명정책을 펴다가 청나라의 무력에
굴복하고 형제의 의를 맺어야 하는 수모를 겪는다. 좌영장으로 있던 임경업은
급히 강화도로 달려갔으나 이미 조선이 화의를 제의하여 전쟁이 끝난 뒤였다.
그는 분해하였다.  나에게 정병 4만명만 준다면 내 반드시 오랑캐를 섬멸하고 압
록강 물에 칼을 씻고 돌아올 것인데.
  그 뒤 정승 김육에게 신임받아 청천강 북쪽 변경을 지키는 방어사에 임명되었
다. 청나라에 투항한 장수들을 명나라가 토벌할 때, 구원병으로 보내 많은 공을
세우자 명나라는 그에게 총병관이라는 직책을 주었으며 그의이름은 명나라에 널
리 알려지게 된다. 청태종은 트집을 잡아 2차 조선공격에 나섰다. 백마성을 지키
던 임경업은 수천 개의 허수아비 인형을 성 주위에 세워 청군을 따 돌렸다. 또
청나라가 명군을 치기 위해 조선군사를 동원하라고 강요하자 차출된 임경업이
꾀를 내어 유언비어를 퍼뜨리자 조선군사는 전쟁을 하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이번에는 청나라가 명나라의 금주를 공격하기 위해 또 구원병을 요청해왔다. 임
경업이 그 임무를 맡아서, 파도가 높다는 핑계로 출전을 지연시켰고 명나라 군
대와 싸울 때도 화살촉을 빼고 쏘도록 했으며, 대포에는 흙포를 넣어 발사하도
록 하였다. 명나라 군대도 먼 거리에서만 화살을 쏘아 닿지 않게 하였다. 이러한
진의가 탄로나자 임경업은 청나라로 붙잡혀가게 된다. 이때 정승 심기원이 돈과
중옷과 칼을 주었는데 압송되어 가던 중 그는 금교역에서 달아나 머리를 깎고
승복으로 갈아 입고 화암사로 가서 숨었다. 거리에 화상이 나붙고 포졸들이 추
격하자 그는 명나라로 피신할 것을 결심한다. 조정은 청나라의 등상에 못이겨
임경업의 부인을 대신 청나라로 보냈다. 심양의 감옥에 갇힌 그녀는 끝내 스스
로 자결하고 만다. 임경업은 우여곡절 끝에 명나라 북경에 도착했다. 몇 달 뒤
청나라의 공격으로 명나라는 멸망하고 말았다. 임경업은 그때 장군 마등홍 휘하
에 있었는데 그자는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였다.
   내가 그냥 청나라에 항복한다면 자칫 죽을지도 모르지. 지금 청나라에 큰 죄
를 짓고 도망친 임경업이란 작자를 잡아 바치면 아마 크게 환영을 받을 거야.
  결국 임경업은 청나라의 손에 넘겨져 북경의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이때 조
선에서는 임경업을 도망가도록 도와 주었던 심기원이 역적으로 몰리고 있었다.
그의 정적은 김자점. 임경업도 서울로 압송되었다. 김자점 일당에게 극심한 문초
를 받고 끝내는 처형되었다. 임경업은 최후의 순간까지 눈을 부릅뜨고 이렇게
외쳤다.
   천하의 일이 아직 정해지지 않았는데 어찌 나를 죽이려 하는가? 오늘 나를
죽이면 내일 반드시 후회할 것이다.  그의 나이 53살이었다.
  임경업 장군이 억울하게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슬펏하지 않는 백성이 없
을 정도였다. 왕도 이 소식을 듣고 몹시 슬퍼하였다.
   임경업이 죽었구나, 그러나 내가 너를 죽이려 한 것은 아니었다.
  숙종은 그의 고향 충주에 충렬사를 지어 그를 기리도록 하였다.
  최영 장군은 산신으로 모셔지게 되었는데, 장군사당은 임진강 건너 개성 덕물
산에 잇다. 특히 <산신거리> <산마누라거리>에서 최영 장군의 신을 모신다. 덕
물산 기슭은 서울 이북 경기도, 황해도 뭇고의 본거지이다. 산꼭대기에 최영 장
군을 신장으로 모신 장군당이 있어 이태 걸러 음력 3월이면 도당굿이 열렸다.
그의 말대로 무덤에는 풀이 나지 않았는데 덕물산 신당에서도 사나운 비바람을
일으키며 때때로 괴이한 일들이 일어났다고 한다. 굿판이 끝나면 잔치가 벌어지
곤 했는데 진미로 꼽는 돼지비계를 뜯는다.  성계육 이라 부르며 이성계의 살점
을 씹듯이 콱콱 씹었다고 한다.
  무속의 신은 한을 품은 존재로서, 그들의 한이 살아있는 사람에게 재앙을 갖
다주기 때문에 우선 그 한을 풀어 재앙을 물리치려고 한 것이다. 그리고 복을
빌었으니 즉 해원과 기복적 의례가 굿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큰
힘을 행사하던 권능을 지닌 원령이라야 살아있는 사람에게 화복을 줄 수 있는
존재라고 믿는 것이다. 원혼이 된 혼련들만이 카리스마적인 강력한 힘을 행사할
수 있기에 그 원혼을 위무해주고, 안주시켜 줌으로써 그쪽에서도 보답으로 이쪽
을 수호해 준다고 믿는 공감대 의식의 착상이라고나 할까.
  장군령은 무녀의 수호신으로, 무장의 영은 군웅이라고 해서 그 소속과 기능에
따라 상산별군웅, 사살군웅, 사신군웅 등 군웅대신으로 호칭된다. 영웅숭배주의
는 무속에서 특히 강조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어차피 무속의례의 본질은 영웅숭
배에 있었던 것으로 보아진다. 특이한 것은 계백이나 이순신 같은 훌륭한 장군
은 다만 존경의 대상이 될 뿐이지, 신앙화되기는 어렵다고 한 점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공포감을 수반하지 않기 때문이니 무속의 대상이 되려면 공포감을 극대
화시킨 원혼이라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나라 뿐만 아니고 일본에서도 원혼이 큰 인물에 대하여 공포감을
갖고 이를 신으로 떠받들며, 중국에서는 아들 관평과 함께 손권에 의해 참살된
관우도 장군신으로 모시고 있다. 낙양에서 조조가 죽기 직전에 관우의 잘린 목
이 당도했는데 사람들은  관우의 원령이 내린 재앙 이라고 말했다. 조조가 병사
한 나이는 66세였고, 관우의 목이 떨어진 것은 그의 나이 58세였다.
  산천초목, 어디에라도 대고 비손을 해야 마음을 놓던 우리네의 정서 탓인가.
인천에서 생활하는 무속인들은 맥아더장군까지도 마을신으로 떠받들고 있다는
훌문이다.



  부왕에게 살해 당한 슬픈 영혼 - 소현세자 / 사도세자


  소현세자
  왕위가 보장되고 있던 소현세자와 사도세자는 피우지 못하고 저 버린 꽃망울
처럼 그렇게 세상을 떠나야 했다. 다름아닌 부왕의 손에 의해서.
  그들은 왜 아버지에게 죽임을 당해야 했으며 조선의 임금, 인조와 영조는 왜
아들을 죽여야 했던가? 당시의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납득하
기 어려운 죽음이다.
  소현이 인조의 맏아들로 세자에 책봉된 것은 열세 살.
  당시 조선은 대명 사대주의의 길을 걸으며 공공연히 명나라를 후원하였고 후
금과의 전쟁에서 패퇴한 명나라 장수와 군사들을 보호함으로써 후금을 자극하였
다. 후금은 여진족 누루하치를 추장으로 하여 1610년에 일어난 나라이다.
  광해군 때는 중립 외교노선을 취하므로 위험한 전란에서 벗어날 수 있었는데
그가 폐출되고 인조가 집권하자 그는 대북파 인사들의 숙청을 단행하고 곧바로
친명배금 정책을 실시하였다. 3년 뒤 후금은 3만의 군사를 이끌고 조선을 침략
해 정묘호란을 일으켰다. 국호를 청으로 바꾼 뒤 또 그들은 군사 12만을 이끌고
쳐들어와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인조는 남한산성에 갇힌 지 45일 만에 항복하고
나와 청태종에게 무릎을 꿇었다. 삼전도에서 치욕적인 청나라와의 군신관계를
맺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가게 된다. 인조는 이처럼 굴
욕과 고통으로 24년간을 왕위에 있었다.
  한편 인질로 잡혀온 소현세자는 8년 동안 심양에 머무르면서 단순한 인질이
아닌 외교관의 소임을 도맡아 청이 조선에 무리한 요구를 하면 담판을 짓거나
막기도 했다. 때문에 청은 조선과의 문제를 소현세자와 해결하려 들었고, 이는
결과적으로 조선의 왕권이 둘로 나누어지는 양상을 가져오게 했다. 게다가 인조
의 총비 조소용은 세자빈과 사이가 좋지 않아 세자를 백방으로 모함하였으며,
김자점은 사돈간인 조소용과 결탁하여 그가 잠도역위(왕위쟁탈)을 꾀한다는 모
함으로 부자간을 이간시켰다.
  소현세자는 그곳에서 왕족들과 친교를 맺으면서 양국간의 관계를 정상화하는
데 노력하며 청군을 따라 북경에 들어가 70여 일을 머물면서 천문대를 찾아보는
등 역법에 관심을 가졌다. 특히 독일인 신부 아담 샬과 사귀면서 서양문물에 대
해 눈을 뜨고 천문 수학 천주교 서적과 여지구 천주상 등을 선물로 받아들고
1645년 그는 귀국하게 된다. 그러나 인조는 소현세자가 철저한 친청주의자가 되
어 돌아왔다고 박대하면서 그가 가져온 서양문물조차 쳐다보지 않았다. 이는 국
가의 문화적 전기를 마련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실기한 것으로 역사는 평가하
고 있다.
  세자는 부왕 앞에서 서양의 책과 기계를 보여드렸다. 인조는 심하게 분개하면
서 별안간 벼루를 들어 아들의 얼굴을 내리쳤다.
   에잇 못난 놈! 군부가 차마 못 당할 치욕을 보고 천추에 씻지 못할 국치를
입었거늘, 그따위 벼루를 소청하였으며 되놈의 간특한 수단에 속아 은덕까지 느
꼈다니, 그따위 썩어빠진 기상으로 장차 어찌 일국의 왕이 되며 애비의 사무치
는 원수를 갚겠느냐. 에잇, 쓸게 빠진 자식!
  외마디 소리와 함께 세자는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이마에서 선혈이 흘
렀다. 이 일이 있은 뒤 소현세자는 가슴앓이를 하다가 그만 드러눕게 되었고 어
의는 학질이라는 진단을 내려 세 차례 침을 놓았다는데 그는 갑자기 시체로 변
했다. 귀국 후 두 달 만의 일이었고 병석에 누운 지는 사흘 만이었다. 나이는 서
른세 살이었다.
  세자의 염습에 참여한 그의 이모부 이세완은 말한다.
   시체는 온몸이 새까맣고 뱃속에서는 피가 쏟아졌다. 검은 천으로 죽은 세자의
얼굴 반을 덮어서 옆에서 모시던 사람도 알아보지 못했다. 낯빛은 중독된 사람
과 같았다.
  대사헌 김광현이 의관 이형익의 실책을 국문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인조는
도리어 그를 좌천시켜 버리고 이형익을 옹호했다. 이형익은 조소용의 외가와 관
련된 인물로 3개월 전에 특채된 의관이었다. 인조는 세자의 사인을 규명하려 하
지 않고 관례적인 책임도 지우지 않은 가운데 입회인을 제한하여 입관을 서둘렀
다. 뿐만 아니라 장례식도 평민의 장례에 준하도록 하고 기일을 단축시켜 초상
을 치루게 했다. 홍제동에 묘지를 쓰자는 신하들의 중론도 무시한 채 멀리 고양
의 효릉 뒤쪽으로 쓰게 했다. 인조는 며느리 세자빈마저 후원 별장으로 유폐시
켰다가 결국 사약을 내려 죽이고 소현세자의 두 아들은 제주도로 멀리 귀약을
보내 죽게 하였다. 소현세자의 가족과 주변세력의 완전제거로 보아 인조의 이같
은 일련의 행동은 독살설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봉림대군의 반청주의는 인조를 흡족하게 하였다. 때문에 큰 아들은 죽고
차남인 봉림대군에게 왕위가 돌아가니 그가 조선 제17대 왕 효종이다. 반청이냐
친청이냐 그것이 문제였다.

  


당쟁에 희생된 사도세자
  사도란 부왕 영조가 세자를 죽인 것을 후회하며 아들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뜻
의 시호이다. 아무튼 사도세자는 아버지 손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1726년 세자는 휘령전에 나가 엎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즉시 스스로 자진하여라.
  영조의 추상 같은 명령과 한쪽에서는 이것을 만류하는 신하들의 제지가 있었
다. 이마를 마루에 부딪쳐 절하는 고두 끝에 세자의 이마에서는 선혈이 흘렀다.
그때 열한 살이던 세손(정조)이 들어와 통곡하며 아뢰었다.
   신에게 죄를 주십시오.
  영조는 세손에게 나가라고 소리쳤다. 세자에게 칼을 내주며 어서 자결하라고
재촉했다. 만류하던 동궁전 신하들도 모조리 쫓겨났다. 세자는 다시 용서를 빌었
으나 영조는 큰 뒤주를 세자 앞에 내놓고 즉시 들어가라고 명령했다. 한참 지난
후 할 수 없이 뒤주 속으로 들어가자 영조는 친히 뒤주문을 닫고 자물쇠를 채웠
다. 그리고 다시 큰 널판을 대고 새끼줄로 꽁꽁 묶었다. 푹푹 찌는 여름날이었
다. 숨이 막혔다. 뒤주 안은 풀로 가득차 있었다. 5월 21일, 세자는 갇힌지 일주
일 만에 그 안에서 굶어죽고 말았다. 그의 나이 28세였다.
  정조는 즉위 하자마자  사도세자의 참변사건 을 재조사하기에 이른다. 이때 다
시 기록된 <사도세자행장>의 기록을 보면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과 내용
이 일치하지 않은 점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정조는 즉위한 지 6개월 만에 외
조부 홍봉한을 이 사건에 관련된 죄인으로 탄핵하고, 유배하였다. 이로써 홍씨
가문은 풍지박산을 당한다. 세자가 갇혀 죽게 된 뒤주를 영조에게 권한 사람이
바로 홍봉한 즉 외조부라는 것이다.
  이에 혜경궁 홍씨는  뒤주를 처음 생각해 내신 분은 어디까지나 영조폐하시
다 라고 하면서 영조에게 죄를 돌리고 친정의 가문을 위해 변호하는 내용으로
일관되게 쓰고 있다. <한중록>은 사도세자가 죽은 지 40여 년이나 지나 칠십
넘은 혜경궁 홍씨에 의해 쓰여진 글이다.
  홍씨는 외도하는 남편을 미워하며 일일이 친정에 고자질을 했다고 한다. 세자
가 억울하게 죽은 뒤 조정은 두 파로 나뉘어졌는데 사도세자의 편을 드는 쪽은
시파였고, 반대하는 쪽은 벽파였다. 벽파의 수령은 바로 홍봉한이었고 이들은 어
떻게 해서든 세자를 왕위에 오르게 해서는 절대로 안되겠다는 생각을 하며 그를
정신병자로 까지 몰아붙였던 것이다. 당시 사도세자는 심한 화증을 앓고 있다고
알려졌는데 그것도 벽파, 즉 노론파들이 몰래 약을 먹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영조의 어머니는 궁녀의 하인이던 최씨로 단 한번 숙종의 은총을 입어 아들을
낳았다. 하므로 영조는 언제나 자신의 출신 배경에 대해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
었는데, 이점을 가지고 소론이던 이인좌가 반란을 일으켜 영조를 불편하게 만들
었다. 또 영조는 왕세자 시절 소론에게 핍박을 많이 당했다. 즉위하여 탕평책을
쓰긴 했지만 소론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다. 자연히 노론이 권력을 좌지우지
하게 되었다.
  사도세자는 이러한 노론의 독점 현상에 극히 비판적이었고 나아가 부당하게
여기고 있었다. 소론을 위시하여 반대세력들은 이미 사도세자를 중심으로 결집
하고 있었다. 세자가 그대로 왕위에 오를 경우 노론의 지위는 크게 흔들릴 게
틀림없었다. 그러므로 노론의 입장에서는 사도세자를 반드시 제거해야 했던 것
이다. 형조판서이자 노론의 두령급인 윤급이 청지기이던 나경언을 시켜 세자의
난행과 비행을 과장하여 상소문을 올리게 했다. 홍봉한은 차마 자기 손으로 사
위를 고발할 수 없어 수하에 있던 이해중을 시켜 고발하도록 하였다. 영의정이
었던 김상로는 또 이렇게 말했다.
   왕세자는 창덕궁에서 늙은 개만 보아도 때려 죽인다고 합니다. 또  나라가 바
로 되려면 늙은이부터 죽여야 한다 고 하고 있다 하옵니다.
  한편 그는 영조의 총애를 받던 총희 문숙원을 시켜 영조에게 세자의 악담을
하게끔 부추겼다. 문숙원의 동생으로서 출세의 길에 올라 있던 문성원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어전에서 세자를 헐뜯었다.
  사도세자는 세 살 때 <효경>을 외웠고, 일곱 살 때 <동몽선습>을 독파했으며
서예를 좋아해서 수시로 문자를 쓰고 시를 지어 대신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10
세 때 이미 소론측이 주도한 바 있는 신임사옥을 비판했다. 1749년 영조가 병이
들자 세자가 서정을 대리하였는데 이때 그를 싫어하던 노론들과 영조의 계비 정
순왕후 김씨, 숙의 문씨 등이 세자를 무고했다. 그럴 때마다 성격이 과격하고 조
급하던 영조는 수시로 세자를 불러 꾸짖었다. 이로 인해 정신질환 증세를 보였
는데 이것을 이유로 세자를 죽일 것까지는 없었다.
  그는 부자지간의 이간과 불신. 그것을 부추긴 노론과 소론의 사이에서 정권을
독점하기 위한 당쟁의 희생양이 되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불운한 시대의 사람이
었다.



  운명이 바뀐  피의 일요일  - 니콜라이 2세 / 레닌
 


로마노프왕조의 최후와 니콜라이 2세
  니콜라이 로마노프는 아버지 니콜라이 1세가 죽자 스물 여섯 살의 나이로 황
제에 즉위하였다. 1894년 11월 1일 오후 2시 30분. 그는 러시아 제국의 황제이자
절대군주가 되었다. 그러나 기뻐하기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요? 내게 어떤 일이 닥쳐올까요. 러시아는 장차 어떻
게 될까요. 나는 황제가 될 준비를 하지 못했어요. 나는 황제가 되길 원하지 않
았어요. 나는 통치하는 일을 전혀 몰라요.
  그는 국장을 치른 뒤 일 주일이 지나서 알릭스 공주와 결혼식을 올렸다. 알릭
스는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손녀이며, 독일의 공주였다. 결혼식에 앞서 루터파
신자인 공주는 러시아 정교로 개종하였고 러시아의 세례명도 받았다. 공주도 어
떤 불행을 예감한 듯 이날의 일을 일기에 이렇게 써 두었다.
   내게는 우리의 결혼식이 마치 장례미사의 연속처럼 느껴졌다. 한 가지 다른
것이 있다면, 검은 드레스가 아니라 흰 드레스를 입었다는 것 뿐이었다.
  황제의 대관식 축하행사는 굉장하였다. 모스크바 호딘카 연병장에 모여든 많
은 사람들에게 음식과 맥주가 배급되었다. 약 50만 명 정도가 새벽까지 흥겹게
놀았다. 그러다가 이른 아침 음식이 부족하다는 소문이 퍼지자 군중들의 분위기
가 바뀌었다. 줄을 쳐놓고 음식을 나누어 주는 가건물을 습격하는 불상사가 발
생했다. 그 바람에 많은 사람들이 밟혀 죽었다. 불길한 예고였다.
  그의 아버지 니콜라이 1세는 영토확장을 위해 페르시아, 터키 등과 전쟁을 치
뤄 기존의 거대한 국토에다 새로운 영토를 더했다. 1980년대에는 러시아의 국토
가 지구면적의 6분의 1을 차지하였고 러시아 제국의 인구는 1억 2천5백만 명이
넘었다. 이렇게 방대한 나라를 통치한다는 것은 니콜라이에게 벅찬 일이었다. 그
는 결단력이 부족한 통치자였다.
  니콜라이는 러시아가 겉보기와는 달리 그 기반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는 사실
도 모른 채, 산업이 꾸준히 발전되고 있다는 관리들의 거짓 보고에 그저 만족하
고 있었다. 러일전쟁이 일어나기 2년 전에 톨스토이로부터 그는 편지를 받는다.
러시아 사람들은 가혹한 학정에 신음하고 있다는 것과 황제의 대신들은 위기를
맞은 통치자를 돕는데 자질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지적했다. 그리고  만약 황
제가 백성들의 바램을 계속 외면하고 부호들에 의해 독점된 토지를 재분배하지
않으면 혁명이 불가피하게 될 것 이라는 것도 경고했다.
  1905년 1월 22일 아침 3만 명의 군중들이 동궁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페테
스부르크의 노동자들은 공정한 대우를 위해 황제에게 탄원하려고 무기도 들지
않고 일요일이라 좋은 옷을 입고 성상과 황제와 황후의 초상화를 들고 동궁으로
향하는데, 군인들은 즉각 발포를 시작했다. 거리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200명의 노동자가 죽었으며 800명이 부상 당하는 이 참사를 역사는  피의 일
요일 이라 부른다. 니콜라이의 동궁은 바로 3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다.
  계속되는 파업, 농민들의 봉기, 군인들의 반란에 직면해서도 니콜라이는 별다
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으며 그나마 일부는 때늦은 대책이었을 뿐이라고 한다.
철도 노동자들의 파업을 시작으로 하여 일어난 대규모의 총파업이 온 나라를 마
비시키고 있었다.
  마르크스주의 혁명가인 레온 트로츠키가  소비에트(노동자 농민평의회) 를 구
성했다.
  트로츠키는 황제를  의지도 없고, 목적도 없고, 상상력도 없는 이 마법사는 고
대와 현대 역사의 어느 폭군보다 더 지독하다 고 혹평했다. 트로츠키는 볼셰비키
혁명에서 지도적 역할을 했다.
   볼셰비키 는 러시아말로  다수 를 뜻하는데 이 정당의 명칭은 레닌이 득표에서
많은 표를 획득했을 때 붙여졌다. 레닌은 이 정당을 통해서 황제의 전제정치를
타도하고 마르크스의 정치 경제사상을 실천하려고 하였다.
  1905년 정치적 위기에 놓인 니콜라이는 할 수 없이 입헌군주제를 채택한다는
내용의  10월 선언 을 발표했다.
  1914년 6월 28일,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두 달 뒤 독일이 러시아에 선전
포고를 해왔다. 독일이 프랑스를 공격하자 영국이 분노했고, 독일이 중립국 선박
을 공격하자 미국도 영국, 프랑스, 러시아편을 들기 위해 참전했다. 이로써 유럽
국가간의 전쟁이 제1차 세계대전으로 확대되기에 이른다. 독일군은 수송과 통신
면에서 모두 우수했다. 러시아는 25만 명의 병사를 전사 또는 부상으로 잃었다.
  한편 왕실에서는 알렉산드라가 네 명의 딸을 낳은 뒤 아들 알렉세이를 낳았
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황태자는 혈우병을 갖고 태어났다. 알렉산드라는 황제가
될 아들을 돌보는 일에만 전념했다.
  그녀는 가짜 성자인 라스푸틴에게도 매달렸다. 그는 왕실을 믿고 권력을 남용
했다. 러시아가 전쟁에서 계속 실패하고 있는 동안 라스푸틴은 1년에 국방대신,
농무대신을 7명이나 갈아치우는 등 국가의 내정을 주무르고 있었다. 이에 분노
한 보수파 당원이 그를 암살해 버렸다.
  황제는 혁명세력의 수중에 놓여지게 되었다. 니콜라이는 동생 미하일 알렉산
드로비치에게 양위하기로 했다. 3월 15일, 그는 담담하게 사무적으로 퇴위성명에
서명했다. 이로써 304년간의 로마노프 왕조는 갑작스럽게 끝장이 나버렸다.
  그의 가족들은 극비리에 어느 조용한 곳으로 옮겨졌다. 1918년 4월, 예카테린
부르크의 한 저택으로 이송된다. 우랄지역 소비에트의 감시하에 놓여 있는 그들
황족에게는 사생활이 허용되지 않았다.
  볼셰비키의 공산당은 적러시아, 황제 지지파는 백러시아라 불렸는데, 백러시아
군대가 황족을 구출하려고 한다는 보고를 받은 레닌은 비밀경찰 지역 책임자인
유로프스키에게 황족과 하인을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유로프스키는 7월 18일 새벽 2시에 황족을 깨웠다. 전진해 오는 백러시아 군
대를 피해 철수해야 하니 어서 옷을 입으라고 서둘렀다. 황족과 하인은 차가 오
기를 기다리며 1층의 작은 방안에 모여 있었다. 유로프스키는 트럭 엔진소리를
효과음으로 틀어놓고 병사들을 데리고 그 방으로 들어가서, 겁먹은 니콜라이에
게 다가가 지역 소비에트이 명령으로 그와 가족은 총살한다고 선언했다.
  니콜라이가 벌떡 일어나  뭐냐?  하고 채 말을 끝맺기도 전에 유로프스키는
권총으로 황제의 머리를 쏘았다. 그의 부하들은 나머지 가족과 하인들에게 발포
했다. 약 20분 동안 총탄을 난사하였다. 어찌나 빈틈없이 총을 발사했는지 공주
들이 입고 있던 코르셋에 박힌 보석들이 산산조각이 날 정도였다고 한다. 몇몇
사람들은 십자가를 그리며 죽어갔다.
  병사들은 시체를 트럭에 싣고 광산으로 가져갔다. 시체를 토막낸 뒤 거기에
휘발유를 붓고 불을 질렀다. 그런 다음 타고 남은 유골 위에 다시 황산을 부었
다. 로마노프 황족과 하인들의 유해라고도 할 수 없는 나머지를 광산 갱 아래로
쳐넣어 버렸다. 일주일 뒤, 황족을 구출하려는 군대가 에카테린부르크에 도착했
을 때, 거기에는 굶어서 죽어가는 알렉세이의 개 한 마리만 발견되었을 뿐.
  이것이 로마노프 왕조의 최후였다.

  


 불꽃 같이 산 혁명가 레닌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가 죽은 날은 1918년 7월 18일이었고, 레
닌이 권좌에 앉은 날은 1918년 7월 10일이었다. 그는 원수가 되어 소비에트 사
회주의 공화국 연방이 초대 헌법을 공포하였다. 여기까지 오기에는 28년이란 세
월의 노고가 뒤따랐다. 이제 정점에 막 도달했는데 레닌의 몸은 비틀거리기 시
작했다. 창백한 안색과 움푹패인 눈 둘레, 뇌 전체가 동맥경화에 침범되어 있었
던 것이다.
  레닌은 1870년 4월 22일 심비리스크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 형 알렉산드르가 러시아 전제군주를 암살하려다가 들켜서 처형
당한 일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형이 읽던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그도 읽기
시작했다.
  1891년에는 페테스브르크대학 법학과에서 전과목 우등생으로 졸업한다. 이 시
기에 레닌은 노동자를 중심으로 혁명을 주도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체포
되어 1897년 시베리아로 유배된다. 유배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그는 <이스크라
(불꽃이라는 뜻)>라는 지하 신문을 만들었다. 그 뒤 1905년 러시아혁명은 실패
로 끝나고, 레닌은 숨어서 글만 쓰고 있었다. 10월 중순 당이 무장봉기하여 카렌
스키 정부를 무너뜨리자 드디어 레닌이 새 정부의 의장이 된다.
  1921년 말부터 레닌은 뇌동맥경화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미 1918년 카플
란이 쏜 총에 맞아 부상당한 후유증도 있었다.
  1922년 4월 외과의들은 레닌의 몸 속에 박혀 있는 두 개의 탄환중 하나밖에
뽑아내지 못했다. 그 이상의 수술은 레닌의 용태로 보아 무리였기 때문이다.
  1917년 모스크바 근교의 미켈손 공장에서 모임이 끝났을 때 레닌은 판야카플
란이라는 사회혁명당의 여자 투사가 쏜 두 발의 탄환을 어깨와 가슴에 맞았는
데, 5년을 끈 것은 그가 수술을 받을 수 없을 정도로 몸이 쇠약해 있었기 때문
이다. 두통이 심해져 잠을 이룰 수가 없었고, 구토와 복부의 통증, 가끔 생기는
언어장애의 증세를 보고 독일 전문의 폴터 교수는 심상치 않은 때가 온 것임을
예감했다.
  1922년 5월 26일, 레닌은 뇌졸중을 일으켜 혼수상태에 빠졌다. 혈괴가 동맥을
막은 혈전증이다. 세 번째의 뇌졸중, 이번에야말로 언어기능을 완전히 상실했다.
날카로운 눈매와 강인한 이마를 가진 레닌은 식물인간으로 8개월을 살다가 네
번째의 뇌졸중으로 1921년 1월 21일 모스크바 근처 고르키에서 사망했다. 권좌
에 앉은 지 겨우 5년, 그의 나이는 54세였다.
   그들은 우리보다 훨씬 행복하게 살 것이다.       그들의 삶에는 그토록 잔인한
일은 많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부럽지 않다. 우리 세대는 놀
랄만한 역사적 의의가 있는 일을 성취했으니까. 우리가 처한 조건에서 불가피했
던 모든 잔혹한 일은 결국 이해되고 변호될 것이다. 모든 것이.
  이것은 레닌이 마지막 투병기간에 절친한 친구 막심 고리키와 혁명의 의미에
대해 토론하면서 남긴 말인데, 그대로 그의 묘비명이 되고 말았다.



  뇌가 온전치 못했던 전범자 - 무솔리니 / 히틀러


  히틀러의 영웅인 무솔리니
  이탈리아의 무솔리니와 독일의 히틀러는 파시즘적 독재자의 대표적 인물이며,
전범으로서의 콤비였다.
  어려서부터 고집이 세고 영웅주의적 기질이 강한 무솔리니는 초등학교 때 아
이들을 칼로 찔로 두 번이나 퇴학을 당했다.
  고향에서 교사생활을 하다가 문란한 사생활이 들통나는 바람에 스위스로 건너
간 뒤에는 10여 년간 방랑생활을 했다. 그곳에서 사회주의자로 변신하여 파업을
선동하는 등 사회활동을 벌이다가 추방당하자 프랑스로 도망가서 혁명적 쌍디카
리스트들과 어울렸다. 그러나 프랑스 생활도 오래 가지 못했다. 마르세이유 파업
을 선동했다는 죄로 추방되어 이탈리아로 다시 돌아와야만 했던 것이다.
  그 뒤, 오스트리아에 입국해서 사회주의 신문의 편집인이 되었는데, 필화 사건
을 세 차례나 일으켜 추방당해 또 다시 이탈리아로 되돌아왔다.
  고향에 돌아온 그는 주간신문  계급투쟁 을 창간하는 한편, 이탈리아 사회당의
선전활동에 종사하여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마침내 사회당 집행위원 및 당
기관지  아반티 의 편집장이 되었다.  아반티 란 전위라는 뜻이다. 그 동안 옛 제
자 리체라와 동거하다가 이를 반대한 그녀의 부모를 권총으로 위협하는 해프닝
을 벌이면서 결혼하여 딸 하나를 두었다. 그리고 몇 차례의 투옥을 당하기도 했
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그는 처음에는 참전을 반대했다가 몇 달 뒤 열렬
한 참전론자로 변신했으나, 사회당에서 제명되고 만다. 이탈리아가 연합군에 가
맹하자 그는 또 의용병으로 참전했다가 부상을 당한다.
  대전 후, 제대 군인과 반사회주의적 분자를 규합하여 1백 50명의 단원으로 파
시스트 단체를 조직하고 1921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40여 의석을 확보하여 의회
주도권을 잡는다. 서른아홉 살 때였다. 그해 10월, 50만 당원과 30만 의용병을
이끌고  로마진군 이라는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탈취한 뒤, 수상을 비롯하여
국무, 국방장관 등 요직을 독차지하면서 파시스트 독재 체제를 구축했다.
   명령하는 자는 오직 나뿐이다 라고 할 만큼의 권력을 독점했다.
  무솔리니의  로마 진군 이 있기까지 히틀러는 무솔리니를 몰랐다. 로마 진군
사건 후 그는 무솔리니에게 반했고 일방적인 친근감을 갖게 되었다.
  히틀러의 <나의 투쟁>의 일부를 옮겨 본다.
   요즈음 나는 알프스 남쪽의 위대한 인물에게 매료되어 있다. 민족에 대한 그
의 뜨거운 열정은 내부의 적을 용인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모든 수단과 방법
을 동원하여 그들을 절멸시키고자 하는 단호함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히틀러의 이러한  초기의 감동 은 그의 일생 내내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히틀러는 뮌헨에 있었던 자신의 집무실에 무솔리니의 흉상을 모셔놓고 있었
다. 나치스 돌격대의 갈색 셔츠는 검은 셔츠의 모방이었으며, 팔을 뻗어 치켜드
는  나치스 인사법  역시 원산지는 이탈리아였다. 그 후 나치스의 국호에는 이런
것이 추가되었다.
   독일을 무솔리니는 히틀러다!
  그만큼 그가 닮고 싶어한 사람이 무솔리니였다.
  1934년 6월, 히틀러는 독일정부 수반의 자격으로 이탈리아를 방문했다. 그러나
그를 맞은 무솔리니의 손길은 차가웠다. 중립국 오스트리아를 둘러싼 정치적 현
안이 문제가 된 탓이기도 했으나 근본적인 것은 무솔리니에게 히틀러는 하잘 것
없는 존재로 여겨졌던 탓이다. 사실 독일은 패전국으로서 항복시에 약속한 전쟁
배상금조차 제때에 지불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수상이라는 작자는 자신에
게 홀딱 반한 오스트리아 변방 출신의 촌놈이라고 하니, 무솔리니가 히틀러를
융숭하게 대접할 이유는 당시로서는 없었다. 그러나 히틀러는 이탈리아가 고립
되고 경제가 어려워지자 무솔리니에게 물자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히틀러는 그를 아주 요령 있게 다룰 줄 알았다. 히틀러는 무솔리니에게 독일
의 잠재력을 은근히 과시했다. 그리고 은연중에 유럽을 둘이서 갈라 먹자고 꼬
드겼다. 그 당시 무솔리니의 심경을 묘사한 좋은 자료가 있다. 무솔리니 밑에서
외무장관을 지냈던 그의 사위 치아노라는 사람이 일기에 적은 내용이다.
   무솔리니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히틀러가 전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아니
라, 히틀러가 혼자서 전쟁을 이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그것은 그가 도저히
용인 못할 상황이었다.
  아마도 무솔리니의 머릿속에서 히틀러는 여전히 촌놈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연이은 이탈리아군의 패전은 독일에게 부담만 안겨주는 꼴이 되었다. 북아프리
카에서의 참패 이후 무솔리니는 가진게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 히
틀러의 지원 없이는 단 하루도 버티지 못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알려진대로
소련이 연합군측에 가담하면서 전쟁은 보다 가파르게 진행되었고, 스탈린그라드
에서의 참패 이후 동맹군의 패배는 기정사실이 되었다.
  두 독재자의 관계에도 많은 변화가 왔다. 둘이 만나면 히틀러 혼자 떠들었다.
자신의 약화된 위치를 잘 아는 무솔리니는 듣고만 있었다. 당시 목격자들의 기
록에 따르면 때로 무솔리니는 눈물을 흘리기도 했던 모양이다.
  그 무렵부터 무솔리니의 고질이었던 위장병이 도졌다. 그는 바짝 말라갔고 걷
기조차 힘든 상태에까지 이르렀다. 1943년 7월 10일, 연합군은 이탈리아 남부의
시칠리아 섬에 상륙했다. 이탈리아군은 거의 저항하지 않았다. 1943년 7월 25일,
무솔리니는 실각했고, 왕을 알현한 직후 그는 체포되었다. 무솔리니는 저항하지
않았다. 그 후 어디론가 실려갔다.
  그 소식을 들은 히틀러의 반응은  나는 무솔리니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그
러나 위치가 확인되는 즉시 낙하산 부대를 보내야겠다.
  히틀러는 그 약속을 지켰다.
  1943년 9월 12일, 무솔리니는 크랜 사쏘에서 극적으로 구출되었다. 구출된 다
음 그는 살로 공화국의 수반이 되었다. 무솔리니는 히틀러에게 치사했다. 그에게
힘을 주고 있는 것은 오직 히틀러 한 사람뿐이었다. 그러나 히틀러는 겉으로만
우정을 가장하고 속으로는 그를 신뢰하고 있지 않았다. 1945년 4월 초에 이르자
소련, 영국, 미국 등의 연합국 군대가 북부 이탈리아에 최후 공격을 전개했다.
무솔리니도 최후 반격을 개시했다. 그리고 그는 파시즘이 탄생한 밀라노로 향했
다.
  추종자들은 벌써 몇 명 남지 않았고 끝까지 함께 한 사람은 정부 클라라 페치
타뿐이었다. 독일군 복장으로 위장하고 스위스로 망명하려다가 이들은 돈고에서
빨치산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들이 총살당한 것은 1945년 4월 28일, 오후였다. 무솔리니와 클라라 페치타
의 시체는 그 다음 날 밀라노 광장 한복판에 거꾸러 매달려졌다. 이틀 뒤 히틀
러도 자살해 버림으로써 마침내 유럽에서의 전쟁은 종결되었다.
  1939년 당시 56세로 기력이 최고조에 오른 무솔리니는 노출광적인 히스테리의
특징을 거침없이 발휘하고 있었다. 카니발의 시저같이 베니스의 광장과 로마를
행진했다. 군복을 입고, 머리를 빡빡깎고, 턱을 내밀고 노기를 띤 눈을 굴리면서
도전적인 자세를 취한 채, 후세에 남기기 위해 사진을 찍게 했다. 스위스와 네덜
란드의 의사들은 알고 있었다. 그의 병명은 신경매독이었다. 매독은 으뜸가는 환
각성 뇌병이라고 한다. 무솔리니와 히틀러, 두 사람의 정신은 이미 온전하지 못
했다.

출처 : 어둠 속에 갇힌 불꽃
글쓴이 : 정중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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