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s and Writings/문학작품

[스크랩] 西洋哲學史(history of western philosophy)

그림자세상 2009. 12. 5. 13:48
西洋哲學史(history  of  western philosophy)

 

 

  항 목  차 례

 

 1. 고대 그리스 시대

 

  그리스 신화(Greek mythology)

  그리스 철학(Greek philosophy)

  소피스트(Sophist)

  프로타고라스(Protagoras, BC 485?∼BC 414?)

  소크라테스(Socrates, BC 469∼BC 399)

  산파술(maieutike)

  아포리아(aporia)

  플라톤(Platon, BC 429?∼BC 347)

  哲人政治(rule of philosophers)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BC 322)

  中庸論

  論理學(logic)

  키레네 학파<Kyrenaioi>

  키니코스(Cynics/Kynikos) 학파

 

 2. 헬레니즘 및 로마 시대

 

  헬레니즘(Hellenism) 시대

  로마 제국(Roman Empire)

  에피쿠로스(Epikouros, BC 342?∼BC 271)

  에피쿠로스 학파(Epicurean school)

  쾌락주의(hedonism)

  스토아 학파(Stoicism)

  금욕주의(asceticism)

  懷疑學派(skeptikoi)

  신플라톤주의(Neo-Platonism)

  

 3. 중세

 

  기독교(Christianity)

  聖書(Bible)

  모세(Mose(s))

  예수(Jesus Christ, BC 4?∼AD 30)

  바울로(Paulus, 10?∼67?)

  베드로(Peter the Apostle, ?∼AD 64 ?)

  로마 가톨릭

  東方正敎會(Eastern Orthodoxy)

  아리우스파(Arianism)

  중세 철학(medieval philosophy)

  교부 철학(patristic philosophy)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 354.11.13∼430.8.28)

  스콜라 철학(Scholasticism)

  神學의 侍女(ancilla theologiae)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 3. 7)

  神學大典(Summa Theologiae)

  普遍論爭(controversy of universal)

  唯名論(nominalism)

  實在論(realism)

  中世社會

  封建制度(feudalism)

 

 4. 근대

 

  近代

  近代社會

  十字軍(crusades)

  르네상스(Renaissance)

  종교개혁(Reformation)

  프로테스탄티즘(Protestantism)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1.10∼1546.2.18)

  칼뱅(Jean Calvin, 1509.7.10∼1564.5.27)

  칼뱅이즘(Calvinism)

  近世自然法思想

  경험론(empiricism)

  베이컨(Francis Bacon, 1561.1.22∼1626.4.9)

  홉스(Thomas Hobbes, 1588.4.5∼1679.12.4)

  로크(John Locke, 1632.8.29∼1704.10.28)

  버클리(George Berkeley, 1685.3.12∼1753.1.14)

  흄(David Hume, 1711.4.26∼1776.8.25)

  대륙 합리론(continental rationalism)

  데카르트주의(cartAsianisme)

  스피노자(Baruch de Spinoza, 1632.11.24∼1677.2.21)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von  Leibniz, 1646.7.1∼1716.11.14)

  모나드론(Monadenlehre)

  계몽 사상(enlightenment)

  사회 계약설(theory of social contract)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6.28∼1778.7.2)

  관념론(idealism)

  독일 관념론(Deutscher Idealismus)

  칸트(Immanuel Kant, 1724.4.22∼1804.2.12)

  批判哲學(critical philosophy)

  피히테(Johann Gottlieb Fichte, 1762.5.19∼1814.1.27)

  셸링(Friedrich Wilhelm Joseph von Schelling, 1775.1.21∼1854.8.20)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8.27∼1831.11.14)

  변증법(dialectic)

  공리주의(utilitarianism)

  벤담(Jeremy Bentham, 1748. 2.15∼1832.6.6)

  밀(John Stuart Mill, 1806.5.20∼1873.5.7)

  실증주의(positivism)

  콩트(Isidore-Auguste-Marie-Franiois-XaviAr Comte, 1798.1.19∼1857.9.4)

  유물론(materialism)

  포이어바흐(Ludwig Andreas Feuerbach, 1804.7.28∼1872.9.13)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 1818.5.5∼1883.3.14)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11.28∼1895.8.5)

  마르크스주의(Marxism)

  변증법적 유물론(dialectical materialism)

  사적 유물론(historical materialism)

 

 5. 현대

 

  현대 철학(contemporary philosophy)

  신칸트학파(Neo-Kantians/Neukantianer)

  생의 철학(philosophy of life/Lebensphilosophie)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2.22∼1860.9.21)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0.15∼1900.8.25)

  실존주의(existentialism)

  키에르케고르(Soren Aabye Kierkegaard, 1813.5.5∼1855.11.11)

  야스퍼스(Karl Theodor Jaspers, 1883.2.23∼1969.2.26)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9.26∼1976.5.26)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6.21∼1980.4.15)

  프래그머티즘(pragmatism)

  듀이(John Dewey, 1859.10.20∼1952.6.1)

  논리 실증주의(logical positivism)

  분석철학(analytic philosophy)

  비트겐슈타인(Ludwig Josef Johann Wittgenstein, 1889.4.26∼1951.4.29)

  현상학(phenomenology)

  후설(Edmund Husserl, 1859.4.8∼1938.4.26)

  해석학(hermeneutics)

  레닌주의(Leninism)

  스탈린주의(Stalinism)

  毛澤東思想(Maoism)

  네오 마르크스주의(Neo-Marxism)

  그람시(Antonio Gramsci, 1891.1.22∼1937.4.27)

  루카치(Lukccs Gyrgy, 1885.4.13∼1971.6.4)

  프랑크푸르트 학파(Frankfurter Schule)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5.6∼1939.9.23)

  호르크하이머(Max Horkheimer, 1895∼1973)

  아도르노(Theodor Wiesengrund Adorno, 1903.9.11∼1969.8.6)

  마르쿠제(Herbert Marcuse, 1898.7.19∼1979.7.29)

  프롬(Erich Fromm, 1900.3.23∼80.3.18)

  구조주의(structuralisme, 構造主義)

  레비스트로스(Levi-Strauss, Claude, 1908.11.28∼1991)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7.15∼)

  푸코(Michel Paul Foucault, 1926.10.15∼1984.6.25)

  라캉(Jacques Lacan, 1901. 4. 13∼1981. 9. 9)     

  항목차례

 

 

  西洋哲學史(history of  western philosophy)

 

  철학은 인간이 처해 있는 세계 전체를 진실한 모습에서, 즉 세계 전체의 객관적 진실을 포착하고 이것을 개념적으로 일반화하려는 이론적 인식활동(세계관의 학문)을 말하며, 이것을 지침으로 인간의 개인적·사회적 생활을 보다 잘하려는 실천적 의도를 갖는 학문이다. 물론 여기에도 역사적 발전과정이 있다. 원시민족 간에 있던 여러가지 신화, 전(前)과학적인 해석까지 거슬러올라갈 수 있으나 적어도 과학적 사유(思惟)의 탄생을 볼 수 있는 시기를 그 시원(始源)으로 한다.

【고대】 철학은 기원전 600년경부터 그리스에서 시작된 것으로 본다. 이 시기에서 기원후 4,5세기, 즉 고대사가 끝날 때까지의 철학을 고대철학이라고 하고, 이 고대철학은 3기로 나눌 수 있다.

〈제1기〉 창시기(創始期)의 철학:BC 6∼5세기를 말하며 자연을 대상으로 그 속에 존재하는 변화하지 않는 원질(原質)을 탐구하였다. 원질을 물로 본 탈레스, 무한정한 것이라고 생각한 아낙시만드로스, 공기로 본 아낙시메네스, 또 불생불멸의 ‘있는 것’만이 존재한다고 생각한 파르메니데스, 불이라고 본 헤라클레이토스, 다수의 원질이 존재한다고 생각한 다원론자들이 이 시기에 속한다.

〈제2기〉 아테네기(期)의 철학:BC 5세기 후반이 되자 지금까지 자연을 대상으로 하던 철학은 인간문제를 대상으로 삼게 되었다. 프로타고라스와 고르기아스가 이런 전회(轉回)의 첫발을 내디딘 사람이었는데, 결코 객관주의적인 해답은 얻을 수 없다는 상대주의의 입장에 있었다. 이에 반해 인간의 영혼을 철학의 주제로 삼은 것은 소크라테스였다. 그 근본 사상은 ‘덕(德)은 지(知)’라는 것이었고, 제자인 플라톤은 이데아론 사상을, 또 그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의 사상을 이어 받으면서 독자적인 철학체계를 만들었다. 이 아테네기의 철학은 고대철학의 최성기였다.

〈제3기〉헬레니즘·로마시대의 철학:아리스토텔레스 사후에서 고대말까지의 철학을 말한다. 이 시기 초에는 키프로스의 제논이 창시한 금욕주의인 스토아학파, 에피쿠로스를 창시자로 하는 쾌락주의인 에피쿠로스학파, 퓨론이 창시한 회의학파가 있었으며, 이들은 인간 자신의 힘으로 안심입명(安心立命)을 구하려 하였는데, 후기에 이르러 점차 인간 이상의 초월적인 신을 찾고 구원을 얻으려 한다. 피론의 철학, 신플라톤학파의 철학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중세】 중세철학은 그리스도교를 바탕으로 한다. 395년 그리스도교가 국교로 자리를 굳히자 가톨릭교회의 교리를 확립할 필요가 생겨 교부(敎父)들이 이를 담당하였다. 최대의 교부 아우구스티누스는 신플라톤학파의 철학에서 많은 영향을 받으면서 진정한 기독교적인 철학을 세웠다. 그러나 중세 철학은 역시 스콜라 철학이 이를 대표한다. 본래 교회부속학교 교사들이 세운 철학인데 9세기에서 15세기 중반에 이르며 흔히 초기·중기·후기로 나뉜다.

〈초기〉 9∼13세기 초로 대표적인 사람은 안셀무스 등이다. 안셀무스는 “알기 위해 나는 믿는다”고 말하며 신앙내용을 지식에 의해 기초로 삼으려는 생각을 분명히 하였다.

〈중기〉 약 13세기이며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교회의 정통적인 견해와 잘 융합시켜 큰 체계를 세운 스콜라 철학의 제1인자이다. 여기서는 신앙과 지식의 일치라는 확신은 다소 흔들린다.

〈후기〉 14∼15세기 전반이며 스콜라 철학의 쇠퇴기이다. 대표자 W.오컴은 경험적인 지식을 중시하고 그리스도교의 교리는 결코 지식적으로 기초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이런 신앙과 지식의 완전한 분리라는 주장은 스콜라 철학의 붕괴를 의미한다.

【르네상스기】 신앙과 지식의 분리를 주장하게 되자 그리스도교의 교리에 구애됨없이 자유로 생각하려는 근대적 정신이 생긴다. 이런 중세적 속박에서 서서히 벗어나기 위한 과도적인 시기가 르네상스시대이다. 이 시기의 철학은 먼저 그리스 철학의 부흥으로 시작된다. 이른바 인문주의이다. 그 중심은 이탈리아였고 대표적인 사람은 플레톤이다. 이런 인문주의운동에서 J.뵈메는 우리들 내부에도 신의 생명이 활동한다는 신비적 범신론을 끌어내었다. 또 신은 자연 속에 내재하여 우주에는 전체적으로 완전한 조화와 미(美)가 성립되어 있다는 범신론적 자연철학을 말한 G.브루노 등이 있다. 종교개혁을 한 M.루터나 J.칼뱅, 국가를 강대하게 하기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된다는 N.마키아벨리, 근대자연법의 아버지로 불리는 H.그로티우스는 근대적 정신에 깊은 영향을 준 사람들이다.

【근대】 이런 과도기를 거친 후 17세기에 근대철학이 성립된다. 인간자신의 입장에 자신을 가지며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것만을 인정하려는 것을 그 근본성격으로 한다

〈합리론과 경험론〉 근대에 이르러 먼저 생긴 것은 유럽대륙을 중심으로 한 합리론적 철학과 영국에서 성행한 경험론적 철학이다. 이 두 입장은 대립적인 위치에 있었다. 합리론철학의 창시자는 R.데카르트이다. 그는 인간의 이성(理性)을 신뢰하고, 우리가 이성적으로 확실한 것에서 확실한 것으로 추리해 가면 진리를 인식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를 기치로 거기서 신의 존재, 물체의 존재라는 것도 추리에 의해 확실한 신뢰로서 연역된다고 생각하였다. 데카르트의 뒤를 이어 합리론 중에 꼽히는 사람은 A.괼링크스, N.말브랑슈 등의 우인론자(偶因論者), 기하학적 질서에 따라 자신의 저서 《에티카(倫理學)》를 논증하려던 B.스피노자, 기계론적 자연관과 종교적 목적관을 조화시켜려 한 G.W.F.라이프니츠, 독일계몽주의 철학자 C.볼프 등이 있다. 경험론 철학은 인간의 인식에서 경험이라는 것이 수행하는 역할을 중시한다. F.베이컨은 경험을 중히 여기며 자연연구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자연연구에서의 귀납법의 중요성을 역설하였으며, T.홉스도 기계론적 자연관을 절대라고 생각하고 정신적인 것도 똑같이 기계론적으로 설명하려 하였다. 둘 다 경험론적 입장에 섰으나 진정한 경험론 철학의 기초를 세운 것은 J.로크이다. 로크는 인간의 인식은 모두 감각과 반성이라는 두 가지 경험에서 생기며 이 경험으로 단순관념이 주어진다. 아무리 복잡한 관념이라도 그 기원은 단순관념으로 분해된다. 로크의 이런 개념은 G.버클리, D.흄 등에 의해 전개되고, 흄은 경험적으로 보증되지 않은 것을 모두 의심한다는 회의론적 경향을 보인다.

〈칸트의 비판철학〉 이런 합리론과 경험론의 대립을 넘어서려는 것이 I.칸트였다. 칸트는 인식은 경험없이 성립될 수 없다는 경험론의 주장을 인정했으나 경험론에 철저하기에는 너무 강한 형이상학적 요구를 가지고 있어 합리론철학에 대한 공감을 버릴 수 없었다. 칸트는 “우리의 인식은 결코 사물 그 자체의 모습, 물자체의 세계를 포착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인식의 대상은 현상계(現象界)에 한정되는 것이나 물자체 세계의 존재의 여지가 남는 것이며 여기에 형이상학이 성립되는 길이 열린다고 말하였다. 칸트는 도덕적 실천의 입장에서 이 형이상학을 세울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처럼 칸트는 우리의 인식능력 그 자체를 비판함으로써 철학의 새로운 길이 열린다”고 생각했으며, 스스로의 철학을 비판철학이라 불렀다.

〈독일관념론〉 칸트의 철학을 이어 독일에서 일련의 철학이 생겼다. J.G.피히테·F.W.J.셸링·G.W.F.헤겔의 철학, 즉 독일관념론이 그것이다. 피히테는 칸트 철학에서 출발하여 현상계와 물자체라는 이원론을 넘어 절대적 자아(自我)라는 것을 생각함으로써 통일적인 체계를 만들려고 하였다. 셸링은 피히테의 절대적 자아라는 개념을 넘어 모든 것의 근저에 존재하는 자기동일적(自己同一的)인 절대자라는 개념에 도달하고, 헤겔은 셰링 철학에서 출발하여 절대자를 자기동일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자기를 실현해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헤겔의 철학은 이성을 본질로 하는 절대자의 자기전개에 의해 모든 사상을 설명하려는 것이며 이성주의적 형이상학이라고 할만한 것이었다.

【현대】 헤겔의 철학은 헤겔 생존에는 큰 세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의 사후 비판을 받게 되었다. 즉 이성주의적 철학에 대한 비판에서 비이성주의 경향이 강하게 대두되어 현재에 이른다. 그러므로 헤겔 이후(1830년대 이후)의 철학을 흔히 현대철학이라고 한다. 헤겔철학의 비판은 실증주의적 입장과 비합리주의적 입장으로 나눈다. 실증주의적 입장으로부터의 비판은 헤겔학파 내부 즉 L.A.포이어바흐 및 K.마르크스·F.엥겔스이다. 포이어바흐는 철학은 육체를 가지며 공간적·시간적으로 존재하는 감성적(感性的) 인간을 존중하고 거기서 출발하는 인간학이 아니면 안된다고 주장하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변증법적 유물론을 주장하였다. A.쇼펜하우어와 S.A.키르케고르는 비합리주의적 입장으로부터 헤겔비판을 하였다. 쇼펜하우어는 세계의 본질은 이성이 아니며 오히려 비합리적 맹목적인 삶의 의지라 생각하고 염세적 철학을 내세워 생의 철학의 연원이 되었고, 키르케고르는 헤겔과는 달리 역사 속에서 살고 행위하는 실존으로서의 인간의 입장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른바 실존철학의 연원이 되었다. 헤겔비판으로 생긴 이런 비이성주의적 경향은 그 후 계속 이어져 현재에 이른다. 실증주의적 경향에서는 마르크스주의가 지금도 하나의 세력을 가지고 있으며, E.마흐 등의 실증주의, C.S.퍼스·W.제임스·J.듀이를 주로 한 미국 철학자가 주장하는 프래그머티즘, R.카르납 등의 분석 철학이 있다. 이 분석철학은 현재의 영미철학의 주류를 이룬다. 비합리주의적 경향으로는 철저히 생이라는 것을 긍정하려고 한 F.W.니체, 비약적·창조적인 생을 직감으로 포착하려는 H.베르그송, 생을 해석학적으로 잡으려 한 W.딜타이 등의 생의 철학이 있으며, 실존으로서의 인간을 포착하려는 M.하이데거·K.야스퍼스·J.P.사르트르 등의 실존철학이 있다. 이 밖에 후설의 현상학도 극히 유력하며 실존철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 최근 영미계(英美系) 언어분석철학에서는 마흐나 전기(前期)비트겐슈타인의 영향을 받고 일어난 논리실증주의 정신을 계승하면서, 한편으로는 비판적인 경향도 보인다. 즉 프래그머티즘의 입장을 발전시킨 W.O.콰인 등의 네오프래그머티즘과 또 하나는 후기비트겐슈타인·G.라일·P.F.스트로슨·J.오스틴 등의 영국일상언어학파이다. 1960년 이후 위와 같은 활동은 상호비판과 융합을 보이며 광범위한 영어권 철학으로 부상하였다. 영미 외에 캐나다·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를 포함, 공통 사색의 장을 이루고 활동한다. 독일과 프랑스에서는 사회정세의 변화로 실존철학이 급속히 약화되고 E.후설의 현상학이 재조명되어 여러 과학과 교류하는 현상학운동이 아메리카 대륙에까지 확대되었다. 해석학도 H.G.가다머 등이 새로이 생명을 불어넣었다.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구조주의는 정신분석·민족학과 관련을 가지며 크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흐름을 탄 비판적 사회이론은 영미계의 언어 행위론을 받아들이며 J.하버마스가 독일에서 추진하고 있다.

  항목차례

  1. 고대 그리스 시대

 

그리스 신화(Greek mythology)

 

  고대 그리스인(人)이 만들어낸 신화와 전설. 그리스 민족 고유의 신화를 중심으로 선주민족(先住民族)과 이웃 민족의 신화를 종합하여, 오랜 소장(消長)과 변천을 거쳐 발전시킨 것이다. 오늘날 그리스 신화로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것은 그리스 옛 전설의 발전과정에서 마지막 단계에 속하는 것으로서, 그 이전의 변천과정은 옛 시인이나 문인, 또는 고대미술 유품(단지나 돌에 새긴 그림)에서 단편적으로 엿볼 수 있다. 모든 민족의 신화와 마찬가지로 그리스 신화도 많은 초자연적 요소를 가지고 있으며, 그 내용도 매우 복잡하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신들의 이야기나 영웅전설, 그 밖의 내용이 담긴 이야기를 미토스(mythos)라고 하였다. 미토스는 ‘이야기’라는 뜻으로, 그 내용이 신들에 관한 것일 뿐만 아니라 인사(人事)·자연·문화 일반에 걸쳐 사람들이 이야기하고 또 믿고 있던 것들 모두를 포함하고 있다. 그 이야기 속에는 시사나 암시가 들어 있다. 신들이나 초자연적 요소가 일상적 사실은 아니지만, 그리스 신화에서는 이 모든 것들이 그리스인 특유의 미화(美化)과정을 거쳐 인간화된다. 이렇게 하여 이상한 기원(起源)을 가진 신들도 그리스 조각에서 볼 수 있듯이 아름다움으로 묘사된다.

【신화의 성립】 그리스 신화의 주요 부분은 이미 선사시대에 형성되었다. BC 3000년 이래 지중해에는 크레타섬을 중심으로 하는 크레타 문명이 있었는데, 이것이 마침내 커다란 세력이 되어 그리스 본토에까지 퍼져 여러 면에서 영향을 끼쳤다. 한편 BC 2000년경부터 아카이아인(人)이라고 하는 그리스 민족이 북방으로부터 펠로폰네소스반도로 남하(南下)하여, 문화적으로도 세력을 뻗쳐 미케네 문화를 구축하기에 이르렀다. 다시 BC 12세기에는 도리스인(人)이라고 하는 그리스민족이 침입하여 먼저 그리스에 들어온 민족은 새로 들어왔던 민족에게 정복당하기도 하고, 지중해로 도망쳐 소(小)아시아로 이동하기도 하였다. 이같은 이주민과 그리스 본토의 선주민들이 섞여 고대 그리스 문화와 신앙을 이루었기 때문에 신화·전설에서도 자연히 여러 가지 요소가 혼합되어 있다. 그래서 신화의 내용도 복잡해져서 여러 가지 불일치나 모순을 내포하고 있는 점이 그리스 신화의 커다란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를 비롯하여 신화와 전설을 전하는 문학작품의 작자들에 의해 그 내용이 여러 가지로 해석되고 변형되기도 하였다.

【천지의 생성】 다른 여러 민족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그리스인도 세계 창조에 관한 신화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신과 같은 절대자가 있어 이 세계를 창조한 것이 아니고, 만물은 자연히 이루어져 각기 제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신들도 인간처럼 나중에 생겨난 것이었다. 세계의 시초를 제일 먼저 질서정연하게 서술한 작품으로는 BC 8세기의 서사시인(敍事詩人) 헤시오도스가 쓴 《신통기(神統記)》이다. 이 《신통기》에 의하면, 최초로 ‘무한의 공간인’ 카오스가 이루어지고, 그 다음 ‘가슴이 넓은’ 대지(大地) 가이아와 ‘영혼을 부드럽게 하는’ 사랑 에로스가 나타났다. 카오스(혼돈)로부터 에레보스(어둠)와 닉스(밤)가 생겨나고, 닉스와 에레보스 사이에서 아이테르[上天]와 헤메라(낮)가 태어났다. 가이아는 우선 별이 빛나는 우라노스(하늘)와 폰토스(바다)를 낳은 다음, 우라노스와 교접하여 티탄이라고 하는 5명의 남신(男神)과 티타니스라고 하는 6명의 여신을 낳고, 마지막으로 크로노스를 낳았다. 이것이 티탄족(族)이라고 하는 신들인데, 그들은 신적(神的) 존재인 동시에 아득히 먼 인간의 조상으로 숭배받았다. 가이아는 또 3명의 키클로프스(외눈 혹은 둥근 눈의 거인)와 3명의 헤카톤케이르(손이 100개인 거인) 등 괴물을 낳았다. 이들 티탄·키클로프스·헤카톤케이르 등은 혼돈상태에 있는 대자연의 힘을 상징하는 신들이었다.

【올림포스의 신들】 티탄족 가운데 나이가 가장 적은 크로노스는 아버지의 생식기를 자르고 세계의 지배권을 차지한다. 그에게는 6명의 자식이 있었는데, 그 중 한 자식에게 왕좌를 빼앗길 것이라는 예언을 듣고 자식을 낳기만 하면 삼켜버렸다. 마지막 아들인 제우스(인도유럽 어원:하늘·낮·빛의 뜻)를 낳았을 때, 아내인 레아는 돌을 산의(産衣)에 싸서 아기라고 속여 남편에게 삼키게 하였다. 이렇게 해서 목숨을 구한 제우스는 예언대로 왕위를 차지한다. 제우스는 성장한 뒤 아버지 크로노스가 삼켜 버린 형들을 토해내게 한 후 형제력(兄弟力)을 키워서 세계를 통치한다. 형제끼리 제비를 뽑아 제우스는 하늘을, 포세이돈은 바다를, 하데스는 명부(冥府:지옥)를 각각 지배한다. 그러나 그리스의 최고봉인 올림포스산은 신들의 공유지(共有地)로서 함께 그곳에서 살며, 제우스가 올림포스의 주신(主神)으로 군림한다. “어떠한 신이나 여신도 나의 뜻을 어겨서는 안 된다. … 만약, 내 뜻을 어기는 자가 있다면 그 자를 붙잡아 캄캄한 타르타로스[奈落]에 던져버릴 것이다. 그 때 그 자는 내가 다른 어느 신들보다 얼마나 힘이 센가를 깨닫게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절대 권력을 장악한 제우스는 번갯불로 싸움에 이기고 우주를 지배하였다. 제우스의 지배하에 있는 올림포스의 주요 신들은 다음과 같다. 제우스의 아내이며 누이이고, 여신 가운데 최고인 헤라, 다음에는 전쟁과 지혜의 여신 아테나, 아름다움과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 사냥과 출산의 여신 아르테미스, 이 세 여신은 모두 제우스의 딸이었다. 곡물의 성장을 주관하는 여신 데메테르, 화로의 불을 주관하는 헤스티아, 이 두 여신은 제우스의 자매였다. 태양신이고 음악·의술·궁술(弓術)·예언의 신으로 위엄이 넘치는 아폴론, 전령(傳令)이며 나그네의 수호신인 헤르메스, 불과 대장간의 신 헤파이스토스, 군신(軍神) 아레스 등 이상의 네 남신은 제우스의 아들이었다. 이 밖에도 포도주의 신으로 주연(酒宴)의 상징이며 일명 바쿠스라고도 하는 디오니소스가 있는데, 이들이 올림포스 신들의 중심을 이루는 12신이다. 이 신들은 올림포스산에서 영생(永生)의 음식인 암브로시아를 먹고 신주(神酒)인 넥타를 마시면서 향연으로 나날을 보낸다고 생각하였다. 이처럼 신들의 생활은 외관상 인간의 생활과 비슷하지만,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점에서 죽어야 하는 운명인 인간과는 달랐다. 또, 신들은 형체를 마음대로 바꾸어 동물이 될 수도 있고 생명 없는 물체로도 될 수 있는 특권이 있었다. 신들은 인간과 마찬가지로 사랑·미움·노여움·선망 등의 감정에 움직이는 속성을 가지고 있어, 신들에게 적의(敵意)를 가진 인간에게는 적대하고 존경을 나타내는 인간에게는 무한한 호의(好意)를 보였다.

【인류의 시초】 그리스 신화는 인간의 출현에 관하여도 여러 가지 생각을 나타내고 있다. 가장 오래된 생각으로는 인간은 신들과 마찬가지로 가이아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신들과 동족이라는 생각이다. 즉 인류는 대지에서 자연히 생겨났다는 생각이다. 헤시오도스의 교훈시 《노동과 나날》을 보면 올림포스의 신들이 인간을 만든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시 속에 나오는 ‘인간의 5세대(世代)’에 따르면 신들은 먼저 황금의 종족을 만들었고, 이어 백은(白銀)의 종족, 청동(靑銅)의 종족, 영웅들, 철(鐵)의 종족 등을 차례로 만들었다. 지금은 철의 종족의 세대로, 노동과 괴로움으로 차 있어 마침내 화(禍)와 자멸(自滅)의 길을 가게 된다는 것이다. 또 헤시오도스의 《신통기》에 의하면 티탄 신족(神族) 출신인 프로메테우스(먼저 생각하는 사나이라는 뜻)가 인간의 은인으로서, 제우스를 속이고 인간의 이익을 꾀했다고 하여, 제우스가 노하여 인간을 벌하기 위해 인간에게 불을 주기를 거절했다. 제우스는 신들과 인간의 운명(모이라)을 구별하기 위하여 큰 소 한 마리를 잡아 두 몫으로 나눴다. 프로메테우스는 몰래 쇠고기와 내장을 가죽에 싸고 밥주머니 속에 넣어 감추었다. 그리고 먹을 수 없다고 판단한 뼈를 번쩍이는 흰 지방(脂肪)에 싸서 제우스가 뼈무더기를 선택하도록 만들었다. 그런데 뼈는 소의 썩지 않는 부분이기 때문에 불멸의 신의 운명을 나타내며, 고기와 내장은 썩어 없어지는 인간의 운명을 나타낸다는 사실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인간은 그로부터 소를 잡으면 고기와 내장은 먹되 신들을 위해서는 뼈와 지방을 제단 위에 올려놓고 태웠다. 뼈에서 나오는 구수한 냄새는 곧 그리스 신들을 상징하고 인간의 운명을 확인하는 의식이었다. 인간이 곤란해지자 프로메테우스가 하늘에서 불씨를 훔쳐 지상으로 가지고 와 인간에게 주었다. 제우스가 이 사실을 알고 쇠사슬로 그를 묶어 문책하는 한편, 인간에게도 그 보복으로 재앙을 주기 위해 대장간의 신 헤파이스토스에게 명하여 진흙으로 최초의 여자 판도라(모든 선물을 주는 여자라는 뜻)를 만들어, 신으로부터는 어떠한 선물도 받아서는 안 된다고 말한 형 프로메테우스의 충고를 잊은 에피메테우스(뒤에 생각하는 사나이라는 뜻)에게 주었다. 판도라는 온갖 재앙이 담긴 상자를 지상으로 가지고 돌아오기가 무섭게 여자 특유의 호기심에서 뚜껑을 열었다. 그러자 그 속에 담긴 온갖 재앙과 죄악들이 튀어나오는 것을 보고 그녀는 다시 뚜껑을 닫았다고 한다. 그 때 궤 안에는 ‘희망’만이 남았고, 때문에 인간에게는 그 ‘희망’만이 유일한 위안이 되었다. 제우스는 인간의 아버지가 아니라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거니와, 후세에 와서는 그가 인류를 만들었다고 하는 학자들도 있다. 이 외에도 만물의 어머니이자 대지의 뼈라고 할 수 있는 돌을 던졌더니 그 낱낱의 돌이 모두 인간으로 변했다는 설이 있으며, 용(龍)의 이빨을 뿌렸더니 인간이 싹터나왔다는 등의 여러 설(說)이 전해지고 있다. 이와 같이 그리스의 각 지방마다 인간의 기원(起源)을 설명하는 고유의 전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영웅들의 전설】 그리스 신화의 대부분은 신들의 자손인 영웅들의 이야기로, 매우 다채롭게 꾸며져 있다. 아르고나우타이 전설은 영웅 이아손이 중심인물로서, 헤라클레스, 오르페우스를 포함한 아르고나우타이라고 하는 영웅의 일군(一群)이 거선(巨船) 아르고호(號)를 타고 유명한 황금 양털을 찾아 원정을 떠나는 이야기이다. 테바이 전설은 카드모스에 의한 테바이(테베)시(市)의 건국과 그의 자손인 오이디푸스왕(王)의 기구한 일생, 그의 두 아들 에테오클레스와 폴리네이케스의 왕위쟁탈전, 테바이를 공격하는 7명의 장수(將帥), 에피고노이(후예들)라고 불리는 이 7장수의 아들들에 의한 테바이 원정 등, 일련의 이야기가 테바이 전설권(傳說圈)을 이루어,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등 많은 비극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트로이 전설은 올림포스의 3여신의 미인 선발대회를 발단으로 하여,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에 의한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의 아내 헬레네의 유괴, 그녀를 탈환하기 위하여 아가멤논을 총대장(總大將)으로 하는 그리스군(軍)에 의한 트로이 원정, 용장 아킬레우스, 지장(智將) 오디세우스 등의 활약, 유명한 목마(木馬)의 계략, 트로이 함락 후 오디세우스의 귀국 이야기 등으로 되어 있는데, 호메로스는 이 전설들을서사시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에서 읊었다. 헤라클레스의 전설은 그리스 신화 가운데 최대의 영웅 무용전(武勇傳)의 골자를 이루는데, 여기에 여러 가지 이야기가 덧붙어 또 하나의 전설권을 형성하고 있다. 여기서는 그들의 모험과 몇 가지 공적(功績)이 중심을 이루는데, 수많은 민간 전승(傳承)의 이야기로부터 종교적 유래를 가진 설화에 이르기까지 잡다한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그 밖에도 헤라클레스를 닮은 일련의 영웅 모험담을 이루고 있는 테세우스 이야기와 괴물 고르곤의 하나인 메두사를 퇴치한 페르세우스 이야기 등이 있다.

【신화의 구성】 신화·전설은 단순히 신들의 계보(系譜)나 영웅들의 공적만을 전하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변형(變形)이나 윤색(潤色) 또는 설명 등 끊임없이 수정을 가한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명부(冥府)의 왕 하데스가 페르세포네를 유괴하자, 그녀의 어머니인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가 비탄에 잠기는 동안은 작물이 자라지 않는다. 그래서 신들은 1년 중 어느 기간은 페르세포네를 어머니 품으로 돌려주도록 조처하였다. 이 이야기는 신이 4계절의 변화라는 자연현상을 지배하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인간을 다룬 신화로는 유명한 오이디푸스의 전설처럼 복잡한 인간의 심리나 행동을 설명하는 것도 있다. 또, 트로이의 전설처럼 어느 정도 사실(史實)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든지, 각 지방의 구전(口傳)이나 그것을 해석한 것, 여러 자료를 합쳐 창작된 것 등도 있다. 이같은 하나하나의 이야기가 차차 확장되고 발전하여 전설상 일련의 계보(系譜)나 그룹을 이룬 것으로 보인다. 그 가운데는 이야기의 원줄거리와는 직접 관계가 없는, 단순한 에피소드에 불과한 이야기도 있어 이야기를 윤색하는 작용을 계속하였는데, 2,500여 년 동안 인류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하나의 위대한 문학 유산이 되고 있다.

【신화의 전승】 그리스 신화를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공동재산으로서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는 것은 첫째로 호메로스의 서사시이다. 호메로스는 그리스 신화를 체계적으로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신들이나 영웅들의 생생한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줌으로써 그리스 신화에 생명을 불어넣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스 신화를 가장 뛰어난 형태로 전해 주는 것은 아이스킬로스·소포클레스·에우리피데스 등 3대(大)비극 시인이다. 비극은 신화 전설을 그대로 전해 줄 뿐만 아니라, 충분한 이성적(理性的) 고찰에 의하여 전승함으로써 후세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는 생명력을 부여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그리스 신화에 관하여 가지고 있는 지식은 보다 후세의 체계화된 작품에서 얻어낸 것으로서, 특히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가 쓴 《변신이야기》에서 얻는 바가 많다. 그리스 신화가 이같은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문학이나 미술 등 문화의 각 분야에서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그 속에 담겨져 있는 이야기가 단순히 재미있다는 이유에서만이 아니라, 시대와 인종을 초월한 인간 심리의 비밀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항목차례

그리스 철학(Greek philosophy)

 

  고대 그리스에서 이루어진 철학. BC 585년 밀레토스의 탈레스가 활동을 시작한 때부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명령으로 아카데미학원이 폐쇄된 529년까지 1000년 이상 지속된 고대의 철학을 말한다. 그리스 철학의 절정은 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가 속했던 시기, 즉 아테네가 ‘헬라스의 학원’이었던 고전기인데, 그리스 철학은 이 시기를 전후하여 3기로 나눌 수 있다. 제1기는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이라고 불리는 필로소피아(愛知學)의 형성기이다. 이 때의 관심은 인간을 둘러싼 자연의 근원이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데 있었는데, 이오니아 식민지의 그리스 사상가들이 동방에서 습득한 기술에서 ‘원리와 원인에 관한 지식’으로 전환하여 철학의 정초를 이루었다. 제2기는 아테네 철학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원래 아티카에는 독창적인  철학자들이  없었는데, 페르시아 전쟁(1차 BC 490, 2차 BC 480) 이후 아테네가 그리스 문화의 중심이 되면서 명성이 있는 사상가들이 대거 아테네에 몰려들어 여기에 그리스 철학이 꽃피우게 되었다. 이 때 대우주(자연)에 쏠렸던 관심이 소우주인 인간에게 돌려졌다. 제3기는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의 시기를 말한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재위:BC 336∼BC 323)에 의한 헬라스(Hellas, 고대(古代) 그리스인(人)이 그리스를 자칭하는 경우의 이름. 현대 그리스인도 마찬가지로 자국칭(自國稱)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엘라스’라 발음하고 있다. 그리스인은 그들의 나라는 전설적인 영웅 헬렌(Hellen)이 만든 것이며, 그들은 모두 헬렌의 자손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이렇게 일컫는다.) 통일과 동방원정이 있은 후 그리스 철학은 순수한 그리스인이 아닌 사람들에 의해 그리스의 특색을 상실함과 동시에 세계의 그리스화를 꾀하는 헬레니즘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이상의 3시기를 살펴보면 그리스 철학은 지역적으로도 지중해 전역에 걸쳐 있어 그리스 본토뿐만 아니라 아시아·남이탈리아·아프리카의 북동쪽에 이른다. 민족적으로도 그리스인뿐만 아니라 로마인·유대인·이집트인까지 포함되어 있다. 사용어도 그리스어 외에 라틴어가 사용되었다. 이렇게 광범위한 그리스의 철학을 한마디로 특징짓기는 힘들다. 《순수이성비판》 서문에서  I.칸트가 표현한 대로 그리스 철학은 ‘하나의 학문의 확실한 진로’를 보여주었다. 인류의 긴 암중모색 이후 그리스인은 인류가 더 이상 궤도에서 벗어날 수 없는 확실한 진로를 발견했다고 말할 수 있다. 특히 철학은 그리스를 제외하고는 성립할 수 없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 만물의 원리와 원인을 추구했던 최초의 철학자들이 탄생한 곳은 이오니아 식민지의 밀레토스이다. 식민지에 나온 사람들은 타향살이에서 전통적인 풍습에 사로잡히지 않고, 새로 닦은 생활지반에서 오는 여유로 모든 편견에서 벗어나 자연에 대해 활기 있는 질문을 하였다. 만물이 그것으로 이루어지고 최초로 그것에서 생성되고, 또 마침내 그것에서 소멸되는 것, 실체는 변하지 않고 모습만 변하는 것, 그런 근원이 무엇인지를 추구하였다. 이오니아학파에 속했던 탈레스·아낙시만드로스·아낙시메네스는 각각 그것을 ‘물’ ‘무한한 것’ ‘공기’라고 하였다. 이들의 탐구방식은 자연에 대한 최초의 과학적 설명이었다. 한편, 이오니아 지방에서 태어나 남이탈리아로 이민한 사상가들이 있다. 사모스섬에서 크로토네에 갔던 피타고라스와 콜로폰에서 남이탈리아의 엘레아로 갔던 크세노파네스가 바로 그런 사상가들이다. 영혼의 불멸을 믿고 하느님과의 합일을 희구하는 남이탈리아의 종교적 분위기에서, 그들은 이오니아 사람들의 경험적 태도와는 달리 추상적이고 종교적인 자세를 취하였다. 피타고라스는 만물의 근원을 ‘수(數)’라고 하면서도 철학하는 목적을 영혼의 정화에 두고 종교 교단을 창설하였으며, 크세노파네스는 그리스 대중이 신봉하는 의인적인 신화를 비판하면서도 전체로서 보고 듣고 생각하는 인격적인 유일신을 소개하였다. 이탈리아학파라고 불리는 이들의 철학적 유산에 의해, 그리스철학에서 감각에 의해 알 수 있는 것과 정신에 의해 알 수 있는 것 2개의 세계로 구분된다. 엘레아 출신인 파르메니데스는 정신의 활동이 감각의 활동보다 더 훌륭하다는 것을 말하여 플라톤의 사상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실재는 부동·불변의 ‘있음’이라고 보았던 파르메니데스에 맞서 ‘만물은 유전(流轉)한다’고 말한 헤라클레이토스는 에페소 출신으로 이오니아의 흐름을 받았다. 한편 파르메니데스가 존재의 생성과 소멸을 부정한 데서 초기의 자연철학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는데, 사물의 혼합과 분리라는 방향으로 추구하여 다원론(多元論)이 대두되었다. 여기에 엠페도클레스의 ‘4개의 뿌리’, 아낙사고라스의 ‘씨앗’, 그리고 데모크리토스의 ‘원자(原子)’가 나온다. 여기에도 이탈리아와 이오니아의 흐름의 특질이 있어, 엠페도클레스는 시칠리아 출신으로 이탈리아의 정열로써 혼의 정화를 외쳤고, 아낙사고라스는 클라조메나이 출신으로 이오니아의 과학정신을 이어받아 태양은 신이 아니고 불붙은 돌덩이라고 외쳐 화를 입었으며, 데모크리토스는 아브데라 출신으로 이오니아의 흐름을 따라 기하학적으로 분할할 수 있으나, 물질적으로 더 분할할 수 없는 원자를 말하였다.

【아테네의 철학】 페르시아 전쟁 이후, 아테네는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도 급속한 발전을 하여 봉건적 귀족제도가 붕괴되고 민주제도가 형성되었다. 페리클레스의 문화정책(BC 460∼BC 429)으로 학자들이 각지에서 아테네에 모여들어 젊은이들에게 삶의 교양을 가르쳤다. 이들이 궤변론자라고 일컫는 소피스트들이다. 그들의 대표적 인물은 아브데라 출신인 프로타고라스, 레온티노이 출신인 고르기아스, 엘리스 출신인 히피아스, 케오스 출신인 프로디코스 등이다. 이들은 넓은 분야에 걸쳐 스스로 지자(知者)라고 말했으나, 진리를 구하기보다는 진리에서 생기는 이득을 얻는 데 더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플라톤은 그들을 ‘정신양육의 무역상인이나 소매업자’라고 비난하였다. 그들은 진리의 상대성을 주장하여, 사람은 판단하는 기준에 따라, 또 장소와 시간에 따라 동일한 것도 다르게 판단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보편적인 참과 거짓, 선과 악이 없다는 것이다. 프로타고라스에 의하면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고, 각자의 감각에 의해 파악된 세계가 곧 그에게는 참된 세계이며, 각자가 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그대로 참이라는 것이다. 이런 진리의 상대론을 펴나가면 인간에게는 보편적인 진리가 없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 보편적인 진리를 수립하기 위해 악전고투한 사람이 소크라테스이다. 그는 소피스트의 주장이 참인지 아닌지를 검토하기 위해 물음과 답에 의한 대화방식을 택하였다. 이 방식으로 그는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여 수정을 통해서 하나의 진리에 도달하게 하였다. 가령 ‘덕이란 무엇인가?’라는 논제를 놓고 개개의 덕행을 검토하여 귀납적으로 덕의 본질에 알맞은 정의(定義)를 구한다. 이 보편적인 정의를 얻어야 비로소 덕에 대한 지식이 확립된다. 소크라테스는 지식과 행위의 일치를 주장하였다. 하여야 할 것을 알면서 그 반대의 행위를 하는 자는 지자일 수 없다고 보았다. 그의 철학적 순교 역시 지행일치(知行一致)의 세계관에서 유래된 것이다. 플라톤은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의 최후를 보고 자기 삶을 스승이 못다한 일을 완수하는 데 바치기로 결심하였다. 소크라테스가 추구했던 보편적인 것이란 인간의 감각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피타고라스학파가 사물을 ‘수의 모방’이라고 했던 것처럼, 감각적인 것은 그 본질과 떨어져 있는 것이라고 보았다. 사람이 정신적인 눈을 떠서 볼 수 있는 것만이 참된 존재라고 보고, 그는 이것을 ‘이데아(idea)’라고 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에게 20년 간 철학을 배웠는데, 나중에 독자적인 체계를 세웠다. 그는 이오니아의 흐름을 받아 경험의 세계를 중요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그의 철학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이데아론(論)에 대하여 그는 같은 종류의 여러 사물 속에는 하나의 공통개념(이데아)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공통개념을 사물에서 독립시킬 수는 없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물을 떠난 본질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이데아[形相]와 감각적 재질[質料]의 결합을 강조하여 ‘질료·형상설’을 내세웠다. 플라톤의 경우, 인간은 모름지기 이상적인 이데아의 세계를 갈망하여 감각의 세계를 떠나 위로 향하여 올라가는 충동, 즉 에로스(eros:사랑)를 목표로 하는 데 대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행복을 이성에 의한 영혼의 활동으로 규정짓고, 위로 향하여 올라가는 사랑이 아닌 시민의 상호협조로서의 필리아(philia:우정)를 강조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의 철학】 마케도니아의 왕 알렉산드로스의 출현은 그리스 철학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알렉산드로스가 건립한 대제국 밑에서 종래의 도시국가(폴리스) 중심의 정치철학이나 도덕철학이 그 의미를 잃고, 세계국가(코스모폴리스)의 성격을 띠게 되어 국가의 문제보다는 개인의 삶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또한, 로마의 J.카이사르의 세계 통일(BC 46)이 이루어진 후, 그리스 철학은 아테네에서 서쪽은 로마로, 동쪽은 알렉산드리아로 옮아갔다. 국운이 쇠잔해진 그리스인들로서는 이론적 추구의 여유가 없어지고 옛 철학이론을 현실에 적응시키는 실천철학으로 바꾸어 놓았다. BC 3세기에 아테네에서는 키프로스 출신인 제논이 붉은 주랑(柱廊)에서 창설한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가 그의 정원에서 가르친 에피쿠로스학파가 대립되었다. 스토아학파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철학과 ‘무욕의 생활’을 이상으로 했던 키니코스학파(소크라테스 추종학파)의 흐름을 받았고, 에피쿠로스학파는 데모크리토스의 철학과 ‘쾌락이 선이다’라는 키레네학파(역시 소크라테스 추종학파)의 흐름을 받았다. 이 두 학파는 모두 인간의 목적이 행복에 있고, 인생은 자연에 따르는 생활에서 그 행복이 획득된다고 믿었으나, 스토아학파는 그 행복이 자족생활(自足生活)에 있다고 보는 데 반하여, 에피쿠로스학파는 쾌락에 있다고 보고 대립하였다. 그러나 스토아학파의 ‘무감동(apatheia)’이나 에피쿠로스학파의 ‘혼의 평안(ataraxia)’은 다같이 인간의 정욕으로부터의 해방을 뜻하는 비슷한 입장이라 하겠다. 한편, 엘리스 출신인 피로가 체계화한 회의론은, 원래 인간이란 사물의 참된 본질을 알 수 없으므로 헛된 판단을 중지하는 것이 좋다는 ‘판단중지’를 내세워, 그것으로 혼의 평안을 얻는 것이 참된 행복이라는 입장이다. 스토아학파는 로마에 가서 네로 황제의 교사였던 세네카, 노예였던 에픽테토스, 로마의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등의 학자들로 이어졌고, 에피쿠로스학파는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어머니 플로티나 같은 신봉자를 로마에서 얻었다. 동쪽 알렉산드리아로 뻗어나간 그리스 철학은 동방의 헤브라이종교와 접촉하여 이른바 ‘구제(救濟)의 철학’으로 나타났다.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필론은 플라톤 철학과 헤브라이종교의 결합을 꾀하여 인간은 하나님 속에 머무는 행복을 위하여 자기 의식에서의 탈출(황홀)을 지향하였고, 세계와 하나님과의 중간자로서 ‘로고스신학’을 제창하였다. 신플라톤주의자라고 일컫는 플로티노스는 알렉산드리아에서 교육받은 이집트인으로 후에 로마에 가서 철학을 가르친 사람인데, 그는 플라톤에 따라 최고의 것은 존재를 초월하는 일자(一者)라고 보았다. 태양에서 광선이 비추어 나오듯, 이 일자에서 예지(nous)가 유출되고, 이 예지의 하부에서 영혼이 흘러나오고, 영혼 다음에 감각계가 뒤따라 유출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그는 완전한 것에서 불완전한 것으로 내려오는 길을 보여주었는데, 인간은 상고(上告)라는 기도와 주술의 작용에 의해 반대 방향으로 향할 수 있어 하느님과의 합일(合一)을 이상으로 생각하였다.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313년에 그리스도교 보호를 선포하고, 유스티니아누스황제가 플라톤의 학원을 폐쇄하자 고대의 그리스 철학은 그리스도교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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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스트(Sophist)

 

  BC 5세기 무렵부터 BC 4세기에 걸쳐 그리스에서 활약한 지식인들의 호칭. 아테네를 중심으로 당시의 그리스 전역을 편력하면서 변론술과 입신출세에 필요한 백과사전적 지식을 가르쳐, 많은 보수를 받았다. 아브데라의 프로타고라스, 레온티니의 고르기아스, 엘리스의 히피아스, 케오스의 프로디쿠스 등이 유명하다. 소피스트란 원래 ‘현인(賢人)’ 또는 ‘지자(知者)’를 의미하였다. 그들은 거의가 지방출신 학자들로, 각기 자부하는 지식과 기술을 갖고 있어 개인이나 국가에서 돈을 받고 그것을 제공하였다. 민주주의 사회의 시대적 요청에 따라 가장 중요한 과목은 변론술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일신(一身)을 위해서나 국가를 위해서 선(善)을 도모하고, 언론이나 행위에서도 유능한 사람이 되는 길’을 청년들에게 가르친다고 자부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실제로 가르친 것은, 개인이나 국가에 대해 선이란 이런 것이라는 지혜가 아니라, 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선한 자인 체하는 기술만을 가진 데 불과하였다. 이 같은 사실을 밝힌 것이 철학자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이다. 이후 ‘소피스트’란 말은 ‘궤변을 일삼는 무리’를 의미하게 되었고, 궤변학파라고도 불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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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타고라스(Protagoras, BC 485?∼BC 414?)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트라키아의 아브데라 출생. 소피스트로 자칭한 최초의 인물이다. 아테네를 여러 번 찾았고, 만년에는 시칠리아섬에 있으면서 명성을 떨쳤다. 아테네에서는 페리클레스와 친교를 맺었고, 새로이 건설된 남이탈리아의 식민지 투리오이(BC 441)의 헌법을 기초하였다. 그의 유명한 인간척도설(人間尺度說)은 플라톤에 의해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다. 존재하는 것에 대하여는 존재하는 것의,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의’라는 말로 전해진다. 이 말의 해석은 여러 갈래이나 일반적으로는 진리의 기준을 개개의 인간의 감각에서 찾으려는 것으로 보는 해석이 유력하며, 그 때문에 이 말은 절대적인 진리의 존재를 부인하고 상대주의를 표방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그는 우주의 이법(理法)에 관해서 과학이 주장하는 것에 회의를 품었고, 신의 존재에 대해서도 불가지론(不可知論)의 태도를 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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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크라테스(Socrates, BC 469∼BC 399)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테네 출생. 자기 자신의 ‘혼(魂:psyche)’을 소중히 여겨야 할 필요성을 역설하였으며, 자기 자신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를 물어, 거리의 사람들과 철학적 대화를 나누는 것을 일과로 삼았다. 그는 결국 고발되어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의 재판 모습과 옥중 및 임종장면은, 제자 플라톤이 쓴 철학적 희곡(플라톤의 대화편) 《에우추풀론》 《소크라테스의 변명》 《크리톤》 《파이돈》 등 여러 작품에 자세히 그려졌다. 죽음 앞의 평정청랑(平靜淸朗)한 그의 태도는 중대사에 직면한 철학자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소크라테스는 책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주변에 있던 몇몇 사람들이 그에 관하여 썼고, 우리들은 그 글을 통해서 그를 알 뿐이다. 그러나 그 가운데 누구를 얼마만큼 믿어야 할지는 문제이며, 이것을 철학사상 ‘소크라테스 문제’라고 일컫는다. 일반적으로 제자 가운데 가장 걸출한 철학자인 플라톤이 전하는 소크라테스상(像)을 골자로 하고, 여기에 다른 것을 보충하는 경우가 많다. 소크라테스의 젊었을 때의 일에 관하여 확실한 것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우리에게 낯익은 것은, 늙은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의 거리나 체육장에서 아름다운 청소년들을 상대로, 또는 마을의 유력한 사람들을 상대로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착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용기란 무엇인가에 관하여 묻고 있는 모습이다(이것을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이라 함). 이와 같은 문답의 주제는 대부분 실천에 관한 것들이었다. 그리고 그 문답은 항상 ‘아직도 그것은 모른다’라고 하는 무지(無知)의 고백을 문답자가 상호간에 인정하는 것으로 끝났다. 이 때 상대방은 소크라테스가 말은 그렇게 하지만 사실은 자기는 알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는 경우가 많아(소크라테스의 아이러니), 여기에서 자기의 무지를 폭로당한 사람들은 때로는 소크라테스의 음흉한 수법에 분노하였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참뜻은, 모든 사람이 자기의 존재 의미로 부여된 궁극의 근거에 대한 무지를 깨닫고, 그것을 묻는 것이 무엇보다도 귀중하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촉구하는 데 있다. 물론 소크라테스가 이 근거를 안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궁극적인 근거에 대한 무지를 깨닫고(무지의 지), 그것에 대한 물음을 통하여 이 ‘막다른 벽’ 속에 머무는 데 소크라테스의 애지(愛知:철학)가 있다. 그것은 내 자신을 근원부터 질문당하는 곳에 놓아 두는 것이며, 이러한 방법으로 내 자신이 온통 근원에서부터 조명(照明)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두 눈이 튀어나왔으며, 코는 짜부러진 사자코로 그 용모는 추하였다. 그러나 그와 이야기를 나눈 사람은 그의 말에 매료되고 그의 내면에 사로잡혔다. 이렇듯 외면과 내면의 이율배반에 그의 존재의 본질이 있다. 그 때까지의 그리스 철학자들은 우주의 원리를 묻곤 하였는데, 소크라테스에서 비로소 자신과 자기 근거에 대한 물음이 철학의 주제가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소크라테스는 내면(영혼의 차원) 철학의 시조라 할 수 있다. 또한 자신에 대한 물음은 자기를 지탱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것(초월)에 대한 물음이라는 의미에서 그는 형이상학의 시조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소크라테스에게 있어 내면은 근거에 의해 질문당하는 데서 생기는 막다른 벽 안에 끝까지 머무는 애지의 동반자로서만 제시되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소크라테스는 외부와 내면의 틈을 통해 개시(開示)되는 근원의 문제를 철학적 관심을 중심으로 그 생(生)과 사(死)의 증거를 가지고 정착시킴으로써 서양철학의 무게를 한몸에 짊어지는 사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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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파술(maieutike)

 

  소크라테스의 대화 방법. 여기에는 소극적 측면인 소크라테스적 반어(反語:eironeia)와 적극적 측면으로서의 산파술을 생각할 수 있다. 전자는 대화의 상대자로부터 로고스(論說)를 끌어내어 무지(無知)의 자각, 아포리아에로 유도하는 소크라테스의 독특한 무지를 가장(假裝)하는 태도이고, 후자는 상대방이 제출한 논설이나 질문을 거듭함으로써 개념규정을 음미하고 당사자가 의식하지 못했던 새로운 사상을 낳게 하는 문답법이다. 소크라테스는 자기 스스로 이제 새로운 지혜를 낳을 수 있는 능력은 없으나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낳는 것을 도와 그 지혜의 진위(眞僞)는 식별할 수 있다고 하면서, 자기의 활동을 어머니의 직업인 산파에 비유, 산파술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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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리아(aporia)

 

  그리스어로 ‘통로가 없는 것’ ‘길이 막힌 것’이라는 뜻. 철학용어. 사물에 관하여 해결의 방도를 찾을 수 없는 난관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는 해결이 곤란한 문제를 가리키는 말이다. 소크라테스는 대화의 상대를 아포리아에 빠뜨려 무지(無知)를 자각시켰으며,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포리아에 의한 놀라움에서 철학이 시작된다”고 하였다. 플라톤의 경우에는 대화에서 로고스의 전개로부터 필연적으로 생기는 난관을 아포리아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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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라톤(Platon, BC 429?∼BC 347)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이상학의 수립자. 아테네 출생. 명문(名門) 출신으로 젊었을 때는 정치를 지망하였으나, 소크라테스가 사형되는 것을 보고 정계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인간 존재의 참뜻이 될 수 있는 것을 추구, philosophia(愛知:철학)를 탐구하기 시작하였다. BC 385년경 아테네의 근교에, 영웅 아카데모스를 모신 신역(神域)에 학원 아카데메이아(Akademeia)를 개설하고 각지에서 청년들을 모아 연구와 교육생활에 전념하는 사이 80에 이르렀다. 그 동안 두 번이나 시칠리아섬을 방문하여 시라쿠사의 참주(僭主) 디오니시오스 2세를 교육, 이상정치를 실현시키고자 했으나 좌절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는 그의 철학의 방향을 잘 말해 준다. 생전에 간행된 거의 30편에 이르는 저서는 그대로 현재까지 보존되었는데, 1편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일종의 희곡작품으로서 여러 가지 논제(論題)를 둘러싸고 철학적인 논의가 오간 것이므로 《대화편(對話篇)》이라 불린다. 소크라테스가 주요 등장인물이다. 연대에 따라 ① 소크라테스를 중심으로 주로 ‘덕(德)이란 무엇인가?’를 논하고, 대체로 아포리아(aporia)에 빠진 채 끝나는 전기 대화편(前期對話篇:《소크라테스의 변명》 《크리톤》 《메논》 《프로타고라스》 《고르기아스》 《라케스》 《카르미데스》 등), ② 영혼의 불멸에 관한 장려(壯麗)한 미토스(mythos:神話)로 꾸며지고 소크라테스에 의해 이데아론(論)이 펼쳐지는, 문예작품으로서는 가장 원숙한 중기 대화편(《파이돈》 《파이드로스》 《향연》 《국가론》  등), ③ 철학의 논리적 방법에 대한 관심이 농후하고, 영혼과 이데아설이 소크라테스의 모습과 함께 점차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는 후기 대화편(《파르메니데스》 《테아이테토스》 《소피스테스》 《폴리티코스》 《필레보스》 《티마이오스》 《노모이》 등)으로 나눈다.  플라톤에게 필로소피아란 소크라테스의 필로소피아이며 소크라테스야말로 진정한 ‘철학자’였다. 전기에서 중기에 걸친 대화편의 대부분이 소크라테스의 추억을 간직하고, 소크라테스 속에 구현(具現)되는 ‘철학자’를 변호·찬양하려 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리고 소크라테스의 재판 장면을 적은 《소크라테스의 변명》, 죽음에 직면한 철학자의 태도를 묘사한 《파이돈》은 말할 나위도 없고, 《향연》이나 《국가론》도 또한 그와 같은 뜻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의 하나이다. 소크라테스에게 필로소피아란, 가장 중요한 것을 모른다는 자신의 무지(無知)를 깨닫는 데 있었다. 이 ‘무지를 깨닫는 일’ 속에 머물며 아포리아 속에 있으면서 근원으로부터의 물음에 스스로를 맡기는 일이 바로 필로소피아이다. 전기 대화론에서, 대화가 항시 아포리아에 수렴(收斂)되고 무지의 고백으로 끝나는 것은 이와 같은 사실을 말해 준다. 아포리아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포리아에 머물기 위한 필로소피아의 술책이 미토스와 디알렉티케(dialektike:問答法)이다. 시간과 더불어 변하는 일 없이 동일한 것으로서 머무는 영원불변한 것을 플라톤은 이데아(idea:形相)라 불렀다. 이데아는 생성(生成)에 대한 존재, 다(多)에 대한 하나, 타(他)에 대한 동(同)이며, 육체의 감각으로 파악할 수 없고, 영혼의 눈[目]인 이성에 의해서만 관찰할 수 있다. 생성의 세계 가시계(可視界)는 존재의 세계(불가시계)를 분유(分有)하며, 모방하는 데에서만 이에 입각하여 존재하고, 두 세계 사이에는 실물과 그림자, 실물과 모상(模像)의 비례가 있다(《국가론》의 선분(線分)·동굴·태양의 비유, 《티마이오스》의 우주창성론(宇宙創成論) 등). 인간이 탄생과 죽음에 의해서 한계지어진 ‘이 세상(여기)’과 ‘저 세상(저기)’의 구별을 플라톤은 이 두 세계를 따로 상대하는 것으로 구상하였고(《파이돈》 《파이드로스》 등), 이 양계(兩界)를 편력하는 불멸의 영혼에 관한 광채육리(光彩陸離)한 미토스로써 이를 장식하였다. 영혼은 원래 천상(天上)에 있으면서 참 실재(實在)의 관조(觀照)를 즐겼으나 사악한 생각 때문에 지상에 전락하고 땅(육체) 속에 매몰되어 생물이 되었다(‘육체=묘표(墓標)’설). 애지는 영혼이 지상의 사물 속에서 천상의 사물과의 유사점을 발견하고, 참 실재를 상기하여(‘상기설(想起說)’), 이를 간절히 소망하는 일이다(‘에로스설’)라고 설명할 수 있다(《파이드로스》 《향연》 《메논》). 그러나 미토스를 도그마로 하고 거기에서 고정된 철학설을 구성하는 일은 플라톤이 뜻하는 것이 아니다. 미토스는 오히려 아포리아에 있는 자가, 자기가 놓여 있는 위치를 확인하기 위하여 아포리아 밖에 내던진 자기 존재의 겨냥도이며, 아포리아로서 응축된 ‘근원에의 관련’을 형상으로 하여 우주론적인 규모 속에 틀을 만들고 투영하는 것이다. 아포리아에 있는 자가 미토스의 형상을 거부 배척하고, 아포리아에서 묻고 있는 존재 그 자체에 대해서 그 ‘무엇인가’를 ‘말’ 속에서 질문하는 데에 디알렉티케가 성립된다. 아포리아 속에 있는 자는 질문 속에 놓이게 된다. 질문은 사물이 ‘무엇(A)인가, 아닌가’를 질문하나, 그것은 그 무엇인가(A)를 그것과 다른 것(A가 아닌 것)으로부터 분리하게 됨으로써 가능하며, 이 질문에 대답함으로써 인간은 이 양자(A와 A가 아닌 것)를 포괄하는 전체와의 관계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 전체와 부분과의 뒤얽힘에서 다(多)를 꿰뚫는 하나를 보는 것이 애지자(愛知者)이다(《소피스테스》 《폴리티코스》). 플라톤은 지식을 고정된 체계로서 문자로 표시할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근원을 묻는 애지의 진행에서 이 물음을 묻게 하고, 이 진행을 배후에서 떠받치는 것이 이데아이다. 이데아는 애지의 진행(흐름) 속에 어느 때 갑자기 보이게 된다.

 

哲人政治(rule of philosophers)

 

  플라톤의 정치사상으로 대표되는 이상정치. 플라톤은 저서 《국가》에서, 이상국가의 실현을 위해서는, 진정한 학문이며 인생지도의 지침, 인간형성의 힘으로서의 철학으로 국가지배가 통일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플라톤의 이상국가의 실현방법은, 선(善)의 이데아의 인식과 올바른 인간의 개념을 말하고 있으면서도, 지배한다는 것 그 자체에 대한 반성이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에, 지배자에게 있어서의 ‘지배의 논리’로만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단지 ‘이상정치(理想政治)’만을 의미할 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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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BC 322)

 

  고대 그리스 최대의 철학자. 스타게이로스 출생. 17세 때 아테네에 진출, 플라톤의 학원(아카데미아)에 들어가, 스승이 죽을 때까지 거기에 머물렀다. 그 후 여러 곳에서 연구와 교수를 거쳐(이 동안에 알렉산드로스대왕도 교육), BC 335년에 다시 아테네로 돌아와, 리케이온에서 직접 학원을 열었다. 지금 남아 있는 저작의 대부분은 이 시대의 강의노트이다. 스승 플라톤이 초감각적인 이데아의 세계를 존중한 것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에게 가까운, 감각되는 자연물을 존중하고 이를 지배하는 원인들의 인식을 구하는 현실주의 입장을 취하였다. 그러나 이 두 철학자가 대립되었다는 생각은 피해야 한다. 왜냐 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의 철학에서 깊은 영향을 받아 출발하였고, 뒤에 독자적인 체계를 구축하는 데도 플라톤의 철학적 범주 안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의 사상적 특징은 소여(所與)에서 출발하는 경험주의와 궁극적인 근거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근원성, 지식의 전부분에 걸친 종합성에 있다.

【논리학】 학문적인 인식은 사물이 지닌 필연적인 관련을 그 원인에 따라 인식하는 것에 있다고 생각하고, 그 방법으로서 3단논법의 형식을 확립하여 형식논리학의 기초를 닦았다. 그리고 3단논법이 이러한 논리에서 출발해야 하는 제1전제를 말한 공리론(公理論)도 뛰어났다. 그의 논리학서는 《오르가논:Organon》이라는 이름으로 후대에 전하여졌다.

【자연학】 운동·변화하는 감각적 사물의 원인연구가 자연학이라고 불린다. 그는 여기서 네종류의 원인[四因論]을 들었다. ① 질료인(質料因:사물이 ‘그것’에서 되어 있는 소재), ② 형상인(形相因:사물이 ‘그것’으로 형상되는 것으로, 사물의 정의가 되는 것), ③ 동력인(動力因:‘그것’에 ‘의하여’ 사물이 형성되는 원인이 되는 힘), ④ 목적인(目的因:그 사물 형성의 운동이 ‘그것’을 지향하여 이루어지는 목적)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②, ③, ④는 자연물에서는 하나이므로, 결국 질료와 형상으로 자연물은 이루어지고, 질료 내에서 형상이 자기를 실현해 가는 생성 발전의 과정으로서 자연의 존재는 파악된다. 질료는 거기서 형상을 수용할 수 있는 능력 디나미스[可能態]로, 최종 목적에 따라 파악되므로, 최종목적(텔로스)인 엔텔레케이아[完成態], 에네르게이아[現實態]야말로 자연 존재의 우월하는 원인이라고 한다(목적론적 자연관).

【형이상학】 존재자의 일부를 대상으로 하는 특수학에 대하여, 존재하는 모든 사물에서 으뜸되는 원인들을 탐구하는 학문을 소피아(지혜) 또는 제1철학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동시에 보다 고귀한 존재자를 다루는 학문으로서 신학이기도 하다. 신(神)은 으뜸되는 존재자이기 때문에 모든 사물의 존재 원인이기도 하다. 신은 질료에서 떠나, 영원 불변한 관조(觀照) 안에 머무는 자기사유자(自己思惟者)로서 최고의 현실태이고, 그것 자신은 부동이면서 ‘사랑을 받는 것’으로서 일체의 것을 움직이는 ‘부동의 제1동자(動者)’이다. 그것은 자연계를 초월하는 자연계의 근거로서의 종극목적이다. 이 학문은  뒤에 형이상학(메타피직스)이라고 불렸는데, 그 이름은 이 학문이 뒤의 전집 편집에서 주어진 위치에서 유래된 것이다.

【윤리학】 행위의 종극 목표는, 신의 자기사유의 활동을 모방하는 이성적 관조에 놓여 있으나, 이것은 약간의 사람에게 일시적으로 허용되는 것에 지나지 않고, 일반적으로는 일상의 행동 속에서 이성적 질서를 실현하는 중용(中庸)으로서의 덕이 행위의 목적이다.

【정치학】 인간은 국가적 동물이다. 공공의 생활 가운데서 인간의 선(善)은 실현된다. 그런까닭에, 윤리학은 정치학의 일부를 이룬다고 생각되고 있다. 중산계급을 중심으로 하여 다스림을 받는 자가 교대로 다스리는 자가 되는 곳에서 실현될 수 있는 최선의 나라 제도가 있다고 한 정체론(政體論)은 온건한 민주주의의 뛰어난 이론적 뒷받침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시학】 창작의 본질은 모방(模倣)에 있다. 비극은 숭고한 행위의 모방이며, 숭고한 인물이 불행에 빠져가는 과정을 모방함으로써, 관객 가운데서 일어나는 연민과 공포의 정을 이용하여 이와 같은 정서를 정화(淨化)하는 것을 본질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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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庸論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의 중심적인 사상의 하나로서 덕(德)은 과잉과 과소의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간(mesotes)’에 존재한다는 설. 예를 들면, 쾌락에 관한 과잉과 과소는 방탕과 무감각이지만 그 중간에는 절제(節制)의 덕이 있다. 또한 금전의 수수(授受)에 관한 과잉과 과소는 낭비와 인색에 있지만 그 중간에는 대도(大度)의 덕이 있다. 여러 가지 덕목(德目) 중에서 그 중간이 어디에 있는가하는 것은 양 극단을 기준으로 하여 양적(量的)으로 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양 극단은 ‘적당한 정도(程度)’로서의 중간을 기준으로 하여 그 곳으로부터의 일탈(逸脫)로서 잴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적당한 정도는 행위자인 인간의 존재에 의거하여 규정되는 것이므로 중용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에 있어 한층 원리적인 존재론(存在論)에 의거하여 이해되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의 개념을 초과와 부족에 대한 균제(均齊)라 하고 또 산술적인 비례중항(比例中項)으로 대표되는 것과 같은 사항 그 자체에서의 중용과, ‘우리들(지식층)에게서의 중용’으로 구별하여 후자를 윤리적인 덕의 본질적 속성이라 하였다. 따라서 중용을 본성(本性)으로 하고 최선(最善)으로 하는 덕(진실)에 대하여는 초과(진실에 대한 虛飾)도 부족(卑下)도 악덕(惡德)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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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理學(logic)

 

  인간의 지식활동에 관련된 특정한 종류의 원리들을 분석하고 명제화하며 이들을 체계화하는 분야의 학문. 이 지식은 일반적으로 두 종류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김씨의 큰 아이는 아들이다’와 같은 지식이다. 또한 ‘김씨의 큰 아이는 아들이고 그의 둘째 아이도 아들이고 셋째도 아들이다. 그리고 김씨는 현재 세 아이밖에 없다. 고로 김씨의 아이들은 모두 아들이다’와 같은 지식이다. 이러한 지식을 사실적 지식(事實的知識)이라고도 하고 귀납적 지식(歸納的知識)이라고도 한다. 둘째는 ‘모든 남자는 사람이다. 그리고 에디슨은 남자이다. 그러므로 에디슨은 사람이다’에서와 같은 지식이다. 이를 관계적 지식(關係的知識) 또는 연역적 지식(演繹的知識)이라고 한다. 두 경우의 지식은 모두 간단히 명시될 수 있다. 귀납적인 경우 ‘김씨의 아이들은 모두 아들이다’라는 주장과 연역적인 경우 ‘에디슨은 사람이다’라는 주장이다. 여기에서 논리학은 이러한 주장들에 대한 근거로서 제시된, 첫째 경우의 사실들과 둘째 경우의 명제(命題)들이 각기의 주장들에 대해 어떤 종류의 원리에 입각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를 조사한다. 첫째의 근거와 주장의 추리관계를 귀납적이라 하고, 둘째의 근거와 주장의 추리관계를 연역적이라 한다. 논리학은 이러한 특수한 관계를 연구한다는 점에서 다른 차원의 지식의 원리를 취급하는 물리학이나 사회학과 구별된다. 따라서 논리학은 크게 귀납논리학(歸納論理學)과 연역논리학(演繹論理學)으로 구분된다. 양자는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의 긴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특히 후자는 19세기 말부터 크게 발전하였고 대부분의 논리학 교재는 이를 중점적으로 다룬다. 연역논리학은 연역적 추리에 관련된 많은 문제를 다룬다. 애매와 모호의 구조를 밝히고 오류의 유형을 나누며 추상·정의·분류의 개념을 명확히 한다. 의미의 표준을 제시하고 번역의 가능성을 논의한다. 사유(思惟)의 법칙과 추리(推理)의 개념, 그리고 체계에 대해서 간단히 서술하면 다음과 같다. 사유의 법칙으로 알려진 것들은 보통 3가지가 있다. 첫째는 ‘A는 A이다’라는 동일률(同一律)로서 참인 명제는 참이라는 것이다. 둘째는 모순율(矛盾律)로서 ‘어떠한 명제도 동시에 참이면서 또한 거짓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셋째는 ‘어떠한 명제도 참이거나 거짓일 뿐 그 중간치는 없다’라는 배중률(排中律)이다. 과거에는 이 세 명제들이 법칙으로 불렸고, 영원하며 절대적이라 믿었다. 그래서 논리적 법칙으로 불리기도 하면서 이에 근거한 논리학은 역사가 없다고도 하였다. 논리학은 수정할 수 없으므로 변할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치논리학(多値論理學)의 체계는 배중률을 거부하고, 시제논리나 직관주의 논리는 모순율을 수정한다. 그리고 양자논리는 동일률까지 재고하고 있다. 이 명제들을 받아들이는 체계에서는 법칙명제일 수 있지만 모든 체계에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체계에 따라서는 이 명제들이 추리의 원리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추리에는 타당한 추리와 부당한 추리가 있다. 추리란 전제들과 결론의 관계이며 타당성은 이 관계의 어떤 성질이다. 그리고 전제들과 결론으로 이루어진 명제들의 집합을 논의라 하므로 타당성은 논의의 성질이 된다. 타당이란 전제들이 참일 때 결론이 거짓일 수 없는 논의의 성질이다. 앞의 에디슨의 논의가 그 예이다. 또한 ‘한국의 모든 대학들은 시골에 있다. 그리고 이화여자대학은 한국의 대학이다. 그러므로 이화여자대학도 시골에 있다’라는 논의도 그 전제와 결론이 실제로 거짓이지만 타당하다. 왜냐하면 전제들이 참이라면 결론이 거짓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당이란 전제들이 참이라 할지라도 결론이 거짓일 수 있는 논의이다. 예를 들면, ‘모든 프랑스 사람은 프랑스를 사랑한다. 그리고 드골은 키가 크다. 그러므로 드골은 프랑스를 사랑한다’라는 논의는 전제들과 결론이 모두 참이라 하더라도 부당하다. 왜냐하면 전제들이 참이라 하더라도 결론이 거짓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추리의 기술 및 그 장치에 대해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삼단논법(三段論法)을 유형별로 논의한 데서 비롯되었고, 현대에 와서는 기호체계(記號體系)를 이루어 강력한 장치를 갖게 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명제논리학’과 ‘기호논리학’을 참조할 수 있다. 현대에 와서는 어떤 논리학도 하나의 체계 안에서 제안된다. 예를 들면 B.A.W.러셀의 논리체계는 앞의 3개의 사유법칙 명제들 중 어느 하나도 그의 4개의 공리(公理)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그 명제들은 러셀의 체계 안에서 정리(定理)로서 유도될 수 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어떤 체계 안에서는 그러한 어떤 명제가 유도될 수 없다. 그러면 어떤 명제는 이 체계에서 거짓이지만 러셀 체계에서는 참이 된다. 그러므로 이제 논리체계란 채택하는 공리들과 추리의 규칙에 따라 상대화한다. 그리고 어떤 비약에도 불구하고 이 점을 이용해 볼 수 있다. 논리체계란 어떠한 이론에도 스며들어 있으므로 어떤 인식(認識)은 체계에 따라 참일 수도 있고 거짓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 이론의 논리체계를 분명히 하는 경우 그 인식의 논리를 얻을 수 있게 된다. 이러한 근거로 ‘개념(槪念)의 논리’라는 표현이 가능하고 개념분석이 근본적으로 논리적 활동임을 알 수 있게 된다. 귀납논리학은 현재의 관찰된 사실로부터 어떤 보편적인 명제를 끌어내는 추리에 관한 연구를 한다. 이 보편적인 명제는 현재 아직 관찰되지 않은 경우도 포함하고, 아직 발생하지 않은 미래의 경우도 포함한다. 이것은 과거와 현재에 특정한 수의 황새가 빨간 다리를 가지고 있다는 관찰을 근거로 ‘모든 황새는 빨간 다리를 하고 있다’라는 보편적 명제를 주장하는 경우이다. 이때의 추리의 정당화에 대해 D.흄이 의문을 제기하였고, J.S.밀, 러셀, J.케인스, R.카르납이 확률이론(確率理論)을 통하여 여러 가지 설명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C.S.퍼스, J.듀이, 그리고 K.R.포퍼는 이러한 귀납논리학의 문제를 새로운 각도에서 조명하였다. 그것은 황새의 보편적 명제에 대하여 아직 반례(反例)가 나타나지 않았으므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입장이다. 퍼스는 그 보편명제가 참이므로 받아들인다고 생각하지 않고 아직 거짓이 아니므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그 보편명제는 ‘법칙’이라기보다 ‘가설(假說)’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그러므로 퍼스의 귀납성은 빨간 다리의 황새들을 열거하는 데서 찾지 않고 황새의 보편적 명제에 대한 있을 만한 반례의 경우들을 찾아보면서 아직 반례를 얻지 못하는 데서 설명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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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레네 학파<Kyrenaioi>

 

  고대 그리스 철학의 한 학파. 창시자는 북아프리카의 키레네에서 태어난 아리스티포스이다. 그가 소크라테스의 제자라고 하여 소(小)소크라테스학파의 하나로 꼽힌다. 이 학파의 특징은 쾌락주의로서, 쾌락을 선(善)으로 생각하고 따라서 쾌락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 데 있다. 이 학파에 속하는 사람들로는 아리스티포스의 딸 아레테, 손자인 아리스티포스와 테오도로스, 헤게시아스, 안니케리스 등이 있으나, 그들이 주장하는 쾌락설은 다양하다. 창시자인 아리스티포스는 현재의 육체적인 쾌감을 쾌락이라고 하면서도 쾌락의 대부분은 불쾌를 초래하기 때문에 사려(思慮)로써 쾌락을 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테오도로스는 쾌락이란 것은 사려에 의한 즐거운 기분이라 하였고, 안니케리스는 우애나 조상에 대한 사랑, 조국애 등에서도 기쁨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하였다. 한편 헤게시아스는 불쾌를 수반하지 않는 쾌락은 없다고 생각하여 생활에 무관심한 태도를 현명한 것이라고 하였으나, 생활에 무관심할 수 없을 바에는 자살하는 편이 낫다고 주장하여 자살 권유자(페이시타나토스)라는 별명을 얻었다. 쾌락주의가 이와 같이 염세관으로 귀착한 사실은 역설적이며, 이 학파는 나중에 에피쿠로스학파에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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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니코스(Cynics/Kynikos) 학파

 

  소크라테스의 제자 안티스테네스가 창설한 고대 그리스 철학의 학파. 견유학파(犬儒學派)·시니시즘이라고도 한다. 이 파 사람들은 소크라테스의 극기적인 철학의 일면을 계승하여 덕(德)만 있으면 족하다 하여 정신적·육체적인 단련을 중요시하였으며, 쾌락을 멀리하고 단순하고 간소한 생활을 추구하였다. 일반적으로 자족자제(自足自制), 개인의 도덕적 책임과 의지의 우월성을 존중하였으며, 권력이나 세속적인 일에 속박되지 않는 자유를 원하였고, 세계시민으로 자칭하여 헬레니즘 세계로 설교여행을 다니기도 하였다. 키니코스라고 부르게 된 것은 안티스테네스가 교편을 잡았던 학교가 아테네 교외의 키노사르게스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으나, 그보다는 시노페의 디오게네스(BC 412?∼BC 323)로 대표되는 ‘개와 같은 생활(kynicos bios)’에서 유래한 듯싶다. 가진 것이라곤 남루한 옷과 지팡이, 목에 거는 수도사의 주머니밖에 없으며, 나무통을 집으로 삼아 살아가는 거지 철학자는 스스로 ‘개와 같은 디오게네스’라고 이름하였다.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 신의 특징이며, 필요한 것이 적을수록 신에 가까운 자유로운 인간’이라는 것이 그들의 입버릇이었다. 그들은 사회적인 습관은 물론, 이론적 학문이나 예술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태도를 취한다. 옛 사람은 그들의 이러한 점을 평하여, 키니코스주의라는 것은 ‘덕에 이르는 지름길’이라고 하였다. 이 키니코스라는 말에 어원을 둔 cynical이라는 형용사는 ‘냉소적인’ ‘조롱적인’의 뜻을 가진다. 이것은 디오게네스의, 세상의 모든 질서에 대한 철저한 조소적 자세에서 유래한다. 대낮에 디오게네스는 등불을 켜 들고 ‘인간은 어디에 있는가’라고 외치면서 거리를 방황하였다고 한다. 이 학파의 생활방식은 나중에 스토아학파 등에도 영향을 주었다. 이 학파는 BC 3세기경에 융성하였고 그 이후에는 쇠퇴하였으나 로마제국이 도덕적으로 타락하였던 1세기경에 다시 융성하였다. 루키아누스(Lucianus)는 키니코스학파 사람들의 거지와 같은 생활 태도나 무교양을 비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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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헬레니즘 및 로마 시대

 

 헬레니즘(Hellenism) 시대

 

  고전(古典) 그리스의 뒤를 잇는, 세계사상 한 시대를 규정짓는 개념. 이같은 의미로 헬레니즘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것은 1863년 독일의 드로이젠이 그의 저서 《헬레니즘사(史)》에서 쓰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이 말은 그리스문화, 그리스정신을 가리키는 경우도 있다. 이 시대의 특징에 관해서도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그리스문화의 확대·발전으로 보는 견해, 반대로 오리엔트문화를 통한 그리스문화의 퇴폐로 보는 등의 견해도 있으나, 그리스문화와 오리엔트문화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아 질적 변화를 일으키면서 새로 태어난 문화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시대범위】 헬레니즘 시대의 범위에 관해서도 여러 설이 있다. 먼저 그 시작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아시아 원정 출발(BC 334)에 두는 설, 페르시아를 멸망시킨 해(BC 330)에 두는 설, 대왕의 죽음(BC 323)에 두는 설 등이 있다. 그 종말도 극단적인 경우는 마호메트의 출현까지로 보는 설이 있다. 그 밖에 로마 제정기(帝政期)를 문화적으로는 헬레니즘시대로 보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BC 330년 알렉산드로스의 페르시아제국 정복에서 BC 30년의 로마가 이집트를 병합하기까지의 300년간이 그 시대범위로 간주된다. 지역적 범위는 마케도니아·그리스에서부터 대왕의 정복지 전역(인더스 유역·박트리아·메소포타미아·소아시아·이집트)까지이며, 서방의 로마도 문화적으로는 헬레니즘 문화권에 든다고 생각하는 학자도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로마는 포함시키지 않는 것이 관례이다.

【역사】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페르시아 제국을 멸망시킨 뒤 다시 동방으로 진군하였으나, 인더스강 유역에서 군대를 돌려 바빌론으로 돌아왔다(BC 324). 그러나 그 다음해 대왕이 갑자기 병사하자, 디아도코이(遺將)들은 서로 싸운 끝에 대왕이 남긴 영토를 분할하였다. 입소스전투(BC 301), 쿠르페디온전투(BC 281) 등을 거쳐 디아도코이의 세력 범위는 대개 결정되었다. 카산드로스(훗날의 안티고노스)왕조가 지배하는 마케도니아, 셀레우코스왕조가 지배하는 시리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지배하는 이집트의 3헬레니즘 왕국으로 분열하였으나 결국 로마에 합병되었다. 그리스 본토는 아이톨리아동맹·아카이아동맹이라는 두 도시동맹을 만들어 독립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문화의 중심으로서 아테네가, 상업의 중심지로 코린토스가, 그리고 에게해(海)의 섬 가운데서는 델로스섬과 로도스섬이 노예매매의 중개 무역지로서 번영한 것 외에는 쇠퇴 일로를 걸었다. 그리고 최후에는 역시 로마령(領)이 되었다.

【사회·경제】 헬레니즘 제왕국(諸王國) 가운데 마케도니아는 국력이 가장 약하였으나, 시리아·이집트에는 오리엔트풍의 강력한 군주국가가 성립되었다. 이집트는 지리적 조건이 좋고 물산(物産)도 풍부하여 헬레니즘 왕국 중에서 가장 강력한 전제지배가 확립되었다. 전국토의 소유권은 원칙적으로 국왕에게만 소속되었다. 신하에게 주는 사여지(賜與地), 병사에게 주는 봉토(封土), 신전령(神殿領) 등이 있었으나 이것도 점유권이 주어져 있을 뿐, 왕은 언제라도 이를 회수할 수가 있었다. 왕의 부(富)를 늘리기 위해서는 개간(開墾)이 필요했는데, 유력한 신하에게 토지를 주어 개간시키고 개간이 되면 다시 몰수한 실례도 알려져 있다. 농경지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왕료지(王料地)는 ‘왕의 농민’이라고 불리는, 이동의 자유가 없는 농노적(農奴的) 소작인이 경작하였다. 상공업과 그 밖의 모든 산업경제는 왕 한 사람의 부를 위해 강력하게 통제되어 제유식물(製油植物)의 재배, 착유(搾油)와 맥주양조·제염(製鹽)·제지(製紙) 등 거의 모든 산업은 전매제였다. 광업·은행 등도 모두 왕이 독점하고 수입은 엄격하게 제한하였으며, 수출은 국내 소비를 채우고 남은 것만 사인(私人)이 행하였다. 이집트에는 알렉산드리아·나우크라티스·프톨레마이오스 등 그리스풍의 폴리스가 셋 있었다. 이 중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의 수도이기도 한 알렉산드리아는 상업항으로서 번영하였고, 또한 무세이온·대도서관 등이 있는 그리스적 학예의 중심지로, ‘없는 것은 눈[雪]뿐’이라고 할만큼 번영을 누렸다. 프톨레마이오스왕조는 수족이나 다름없는 관료군(官僚群)이 이집트를 강력하게 지배하였는데, 고래(古來)의 토착종교와 왕가의 극단적인 근친결혼과 같은 풍속·습관 등을 그대로 유지하고, 이집트 토착민과의 마찰을 피하여 현명하게 통치하였다. 신전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감독하였으나, 토착민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신관(神官)의 힘은 마침내 강력해져 프톨레마이오스왕조의 말기 왕권을 위협하였다. 그러나 헬레니즘 왕국 중에서는 가장 오랜 왕국으로, BC 30년 로마에 합병될 때까지 존속되었다. 셀레우코스왕조가 지배한 시리아에서도 오리엔트적인 전제군주국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그 지배영역은 헬레니즘 왕국 중 가장 광대하여 호족(豪族)과 어떤 종류의 자치권을 가진 민족(유대인 등), 영내(領內)에 많이 만들어져 있는 그리스풍의 폴리스 등 정치적으로 이질적인 요소가 많아 지극히 복잡하였다. 자료가 부족하여 상세한 점은 분명치 않으나, 이곳에서도 전국토가 원칙적으로 왕의 소유였다. 그리고 왕유지(王有地)는 ‘왕의 백성’이라고 불리는 농노적 농민이 경작하였다. 국토가 광대하고 정치적으로 복잡하였기 때문에 왕의 지배력이 고루 미치지 못하는 곳이 있어 멀리 파르티아·박트리아와 서쪽의 페르가몬 등이 독립하였고, BC 64년에는 로마에 합병되어 그 속주가 되었다. 마케도니아에 관해서는 자료가 없어 그 정치·경제 등의 상세한 내용이 알려져 있지 않으나, 로마와 싸워 패하여 BC 168년 로마령이 되고, BC 146년에는 그리스와 함께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문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정복한 각지에 만든 새로운 폴리스와, 그 뒤 셀레우코스왕들이 영내(領內)에 많이 만든 새로운 폴리스가 중심이 되어, 그리스문화는 오리엔트의 오지(奧地)에까지 침투하였다. 그리고 헬레니즘 세계에서는 간소화한 그리스어가 공통어(코이네)로서 사용되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오리엔트적인 전제군주풍의 의례를 채용하고, 페르시아 왕녀와의 결혼, 페르시아 귀족을 친위대로 채용하는 등 이민족 통치의 수단으로서 그리스문화와 오리엔트문화의 결합을 시도하였다. 그래서 전대(前代)와는 다른 새로운 헬레니즘문화가 탄생하였다. 이로써 그리스인이 이민족을 야만시한 관념이 희박해지고 세계시민주의가 역설되었다. 그러나 한편 폴리스의 강력한 지배가 사라져가고 있었기 때문에, 개인의 안심입명(安心立命)을 꾀하는 개인주의적인 철학의 제파(諸派)가 출현하였다. 제논이 시작한 스토아학파, 에피쿠로스의 에피쿠로스학파, 디오게네스의 키니코스학파, 아리스티포스의 키레네학파 등이 모두 이 시대의 철학파이다. 이 시대의 조각은 매우 훌륭하나, 전시대의 특징인 이상화는 약화되고 보다 사실적·육감적으로 되었으며, 육체의 운동과 정신의 격동 등을 나타내기를 좋아하였다. 《라오콘》 《밀로의 비너스》 《사모트라케의 니케》 등은 모두 이 시대를 대표하는 조각들이다. 이 시대의 학예 중심지는 알렉산드리아·아테네·페르가몬 등이었는데, 특히 문헌학·자연과학 등이 발달하고, 창조적인 문학 등은 오히려 쇠퇴하였다. 일반적으로 이 시대에는 그리스문화의 창조성이 점차 사라져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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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Roman Empire)

 

로마시(市)로부터 흥륭하여 이탈리아반도 및 지중해 전체를 지배하였던 고대 서양 최대의 제국(帝國). 로마는 BC 8세기 무렵부터 전설적 왕정기(王政期)에 속하며, BC 510년부터 공화정기(共和政期)로, 옥타비아누스 이후는 제정기(帝政期)로 들어간다. 그러나 395년 제국은 동서로 분열되어 서로마제국은 476년에 멸망하고 동로마(비잔틴)제국은 1453년까지 존속하였다. 로마가 이룩한 지중해 세계의 통일은 세계사상 불멸의 의의를 가지는 것이다.

【초기의 로마】 로마는 인도 유럽계의 고대 이탈리아인에 속하는 라틴인과 사비누스인의 일부에 의하여 BC 7세기 무렵 티베리스강(현재의 테베레강) 하류의 라티움 땅에 건설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건국자인 로물루스(BC 753 즉위) 이래 7대의 왕에 의해 지배되었고, 마지막 3대의 왕은 에트루리아인이었다고 하는데, 적어도 초기의 로마가 왕제(王制)를 채택하고, 그 말기에 에트루리아인이 지배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왕은 군사·정치·제사(祭祀)의 여러 권능을 집중시켜 절대적이며 무제한적인 강력한 임페리움[命令權]을 가졌으나, 사실은 원로원·민회(民會)가 이것을 제약하여 동방에서와 같은 왕권은 발달하지 못하였다. 시민은 세 개의 트리부스로 나뉘고, 각 트리부스는 다시 10 클리어로 나뉘었다. 이 체제는 정치적·군사적으로 초기 로마의 근본을 이루며, 민회도 클리어회(會)의 형태로 행하여졌다. 그러나 그 후 중장보병제(重裝步兵制)가 보급되자 재산의 다과를 기준으로 하여 종군권(從軍權)·참정권을 계급화한 재산정치적인 병원회(兵員會:켄투리아회)는 더욱 중요한 민회가 되었다. 시민에게는 파트리키[貴族]와 플레브스[平民]의 구별이 있어, 파트리키의 여러 씨족은 많은 클리엔테스[被保護民]를 소유하고 있었다. 파트리키와 플레브스를 구별한 유래는 분명하지 않으나 역사가 분명해진 시대에는 파트리키란 특정한 가계에 속하는 사람을 가리키게 되었고, 그 이외의 사람은 아무리 재산이 많고 아무리 영직(榮職)에 있더라도 파트리키가 될 수 없었다. BC 6세기 말 에트루리아인(人) 왕의 압박이 심해졌을 때, 왕을 국외로 축출하고 공화제를 수립한 주체도 바로 이들 파트리키였다. 왕제폐지 직후의 시대에 로마의 정치조직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전하는 바에 의하면, 왕제폐지에 이어 정원 2명, 임기 1년의 콘술이 선출되어 국가 최고의 지위에 오르고, 비상사태에는 임기 반 년, 정원 1명의 딕타토르[獨裁官]를 두었다고 하나, 실제로 그와 같은 상태는 BC 4세기 전반까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대체로 공화제의 초기는 로마의 정치제도가 앞으로 서서히 형성되어가려는, 태동기라고 할 수 있다. 객관적으로 말하면, 이 기간에 지금까지 왕이 지니고 있던 절대적이고도 무제한적인 ‘명령권’에 여러 가지 제한이 가해지게 된 것이다. 즉 명령권 보유자를 민회에서 뽑아 그 정원을 복수로 하여 서로 간섭·견제하도록 하고, 또 임기도 1년으로 한정하여 독재자의 출현을 막는 등 명령권의 운용에 대한 제한체계가 공화제의 조직으로서 완성되어 갔다.

【신분투쟁】 한편 공화제 초기에 갖가지 제도들이 어떻게 되었든 국가의 지배권을 쥐고 있었던 것은 파트리키였으며, 플레브스는 정권에서 제외되어 있었고, 경제적으로도 플레브스의 대다수는 파트리키의 억압하에 있었다. 즉 플레브스는 해마다 종군하게 되어 있어 생업인 농업에 전념할 수가 없었고, 또 외적의 침입으로 소유지는 황폐화되었으며, 더구나 무거운 세금 때문에 파트리키에게 빚을 지게 되고, 그 이자때문에 드디어는 채권자인 파트리키에 의하여 몸을 구속당하는 사람이 속출하였다. 이리하여 플레브스는 정치적·사회적 불평등을 타파하기 위하여 파트리키에 대하여 격렬한 신분투쟁을 전개하게 되었다. 이 투쟁과정에서 생겨나 그 주역으로 활약한 것이 호민관(護民官)이었다. 호민관은 BC 494년의 ‘성산사건(聖山事件)’ 때에 설치되었다고 하는데, 마침내 파트리키에게도 승인을 받아 그 ‘신성불가침’의 권력에 의하여 플레브스의 자위(自衛)와 투쟁을 지도하였다. 또 플레브스 자신들도 성산사건을 계기로 하여 평민단(平民團)으로서의 기구를 형성하고 ‘국가 속의 국가’로 불릴 만큼 독자성을 가지는 존재가 되었다. 호민관에게 통솔된 플레브스의 첫번째 뛰어난 투쟁성과는 ‘12표법(十二表法)’이라고 불리는 로마 최초의 성문법의 성립·공개이다(BC 450?). 이에 따라 종래 귀족에 의한 법률지식의 독점이 깨어져 일단 귀족과 평민에게 균등하게 법이 공개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법에는 귀족과 평민의 혼인을 금지하는 명문이 있어, 이것이 극단적이기 때문에 일찍부터 심한 반대에 부닥쳐 BC 445년에는 호민관 카누레이우스의 제안에 따라 이 금지는 해지(解止)되었다. 이에 따라 평민 가운데 유력한 자는 로마의 파트리키 명문과 혼인관계를 맺어 차차 자신의 지위를 높여가게 되었다.

【노빌리타스의 지배】 이 과정에서 결정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은 BC 367년의 리키니우스 섹스티우스법(法)에 의하여 플레브스가 파트리키와 동등하게 콘술에 취임할 수 있게 되어 플레브스의 정권참여가 확정된 일이다. 이후 수십년 사이에 다른 주요관직도 플레브스에게 개방되어갔다. 이 시대 이후 로마 지배층을 형성한 것은 에키테스[騎士]라고 불리는 부유한 신분이었다. 당시 고급관직은 명예직으로서 봉급이 없는 데다 많은 출비(出費)가 요구되었으므로 적어도 에키테스로 꼽힐 만큼 부유한 사람이 아니면 관도(官途)에 들어설 수가 없었다. 그러나 에키테스 가운데서도 정치가·장군이 되는 것은 특정가문에 속한 사람이었으며, 그들은 사실상 거의 세습적으로 관도에 오르고, 어느 정도 이상의 높은 관직을 지낸 뒤 원로원의 종신의원이 되었다. 원로원은 정치적 전문가를 망라하는 곳으로서 고대 ‘정치인’ 사이에서는 최고의 권위를 지니고 있었다. 이 권위에 의한 지배의 안정이 공화제의 전성기(全盛期)를 특징짓는다. 그러나 콘술·딕타도르라는 국가 최고의 관직은 그들 가운데서도 특히 한정된 노빌리타스라고 불리는 소수의 가문에 독점되었다. 이리하여 로마의 공화제는 노빌리타스를 정점으로 하는 원로원의 권위에 이끌려 민회를 결정기관으로 하고, 정무관직(政務官職)을 집행기관으로 하는 부유한 계층의 지배였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당시의 정쟁(政爭)은 주로 선거전과 입법의 두 가지 형태로 행하여져 그 어느것도 민회의 투표에 의하였으므로 정치가들은 유권자인 일반시민의 지지를 구하여 그들과 사적인 은고관계(恩顧關係)를 맺게 되었고, 이러한 은고관계로 이루어지는 피호민(被護民)을 새로운 의미에서 클리엔테스라 불렀다. 그 뒤 로마 정치사는 여러 당파 사이의 세력투쟁으로 충만되지만, 이들 여러 당파의 통솔자는 노빌리타스 중에서도 특히 다수의 군소 정치가를 수하에 두고 광대한 클리엔테스를 거느리는 실력자였으며, 이들은 국가의 ‘제1인자들’로 불렸다.

【이탈리아의 통일】 로마는 왕제시대에 인접국가를 제패하였고, 왕제폐지 직후의 시대에는 차차 쇠미해지는 듯했으나, 그 후에도 착실히 세력을 넓혀 BC 4세기 후반에는 라티움 통일에 성공하였다. 또한 BC 4세기 후반부터 BC 3세기 전반에 걸쳐 이탈리아 중·남부 산악지대의 삼니움족과 싸워 항복시키고, BC 3세기 전반에는 남이탈리아의 타렌툼과 싸웠다. 타렌툼은 에페이로스 왕 피로스의 도움을 얻어 로마군을 크게 괴롭혔으나, 로마는 고전 끝에 피로스를 이탈리아에서 퇴각시켰다. 이리하여 로마는 BC 3세기 중엽까지 이탈리아반도 전체를 세력하에 두었다. 그러나 로마는 이탈리아의 각 공동체에 대해 내정면에서 자치를 허용하고, 다만 군사·외교의 주권만을 쥐고 있었다. 이윽고 이탈리아반도는 전승국 로마를 맹주로 하는 일대 군사동맹체로 완성되었으나, 이 군대는 로마시민이 정규 군단을 편성하는 데 대하여 동맹국은 별도로 편성된 보조군이 되어 로마 시민의 지휘에 따르게 하였다. 로마가 이탈리아반도를 넘어 해외로 진출하였을 때에도 처음에는 그러한 형태의 군대였다.

【로마와 지중해 세계】 이탈리아를 통일한 로마는 시칠리아섬에서 카르타고와 충돌, 이로부터 로마의 지중해 지배에의 도전이 시작되었다. 카르타고는 페니키아인에 의하여 BC 9세기에 세워졌고, 특히 BC 6세기 이후는 서부 지중해 최대의 상업민족(商業民族)으로서 활약하고 있었으나, BC 264년부터 BC 201년에 걸친 제1·2차 포에니전쟁에 의하여 로마는 카르타고로부터 서부 지중해의 패권(覇權)을 완전히 탈취하였다. 또 당시 지중해 세계의 동부에서는 여러 헬레니즘 왕국, 여러 도시가 항쟁을 계속하고 있었는데, 로마는 여기에도 개입하여 마케도니아 왕국·시리아 왕국·아이톨리아 동맹 등과 싸워 이 방면에서도 우위를 확립하였다. 이로써 로마는 프로빈키아(屬州)라는 형태로 해외에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지중해 세계 전체의 국제정치도 로마를 축으로 하여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노빌리타스의 지배가 확립됨과 더불어 로마에서는 과두정치적(寡頭政治的)인 사고방식이 뿌리를 뻗어, 현 체제에 충실한 자는 ‘훌륭한 인사(人士)’라 하였고, 특히 현 체제의 정상에 선 보수파 족벌집단은 ‘최량의 일족’이라 불렸다. 또 긍지 높은 지배계층에서는 ‘위엄 있는 한가(閑暇)’가 존경을 받고, 위엄 없는 우민(愚民), 한가하지 않은 빈민에게는 절대로 정치를 맡기지 않게 되었다. 이와 같은 로마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는 로마의 지중해 진출에 의하여 지중해 세계에 널리 강요되었다. 즉 로마는 새로운 세계로 진출하여 거기에 세력을 펴면 원주민 사회의 토착 지배계급에 대해 가능한 한 지배적 지위를 유지시키고자 하였으며, 또 로마의 손으로 원주민 사회의 정치체제를 전면적으로 변혁하여야 할 기회가 있을 때에는, 부유한 자들을 중심으로 하는 체제를 부여하였다. 또한 각지의 지배계급도 지중해 세계에서의 로마의 압도적 우월 앞에 자진하여 로마와 손잡음으로써 자기 지위의 안정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이와 같은 지배층 중심 체제에 대하여 지중해 세계의 일반 민중은 반(反)로마적일 때가 많았다. 특히 각지에서 일반민중 사이에 용솟음치는 ‘변혁’에 대한 욕구(특히 借用金의 말소, 토지 재분배 등에 대한 요구)가 강력하여, 로마는 그들과 결탁된 정치세력과 자주 대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원주민 사회의 ‘제1인자들’에게는 세 가지 선택이 있었는데, 하나는 로마와 결탁하고, 둘은 로마 이외의 국가와 결탁하고, 셋은 자국의 민중과 결탁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여러 당파(黨派)가 형성되었다. 원주민 사회의 여러 당파의 대립·상극(相剋)은 부유한 계급으로 이루어진 친(親)로마파의 우세 속에 전개되어 로마가 해외 경영을 진척시킴에 따라 로마의 ‘제1인자들’의 여러 당파는 전(全)지중해적 스케일을 가지게 되었다. 그 뒤 카이사르는 지중해를 ‘우리의 바다’로 불렀으나, 이미 BC 2세기에 지중해는 거의 로마인의 바다가 되었고, 로마의 원로원이나 원로원의원은 지중해 세계의 주민에게는 신(神)과도 같은 존재였다.

【공화제 말기의 위기】 그러나 로마의 지배계층이 이와 같이 지중해 세계로 웅비할 때, 로마의 대외 발전이 이탈리아에 끼친 경제사적 반작용은 심각한 것이었다. 전쟁 포로의 형태로 밀려들어오는 수많은 노예를 사용하여 부유한 지배계급의 대토지 소유가 날로 발전하는 한편, 새로이 로마에 굴복한 해외 각지로부터 흘러들어오는 값싼 곡물은 이탈리아의 농업에 큰 타격을 주었다. 각지에서 끊임없이 계속되는 전쟁은 병사로 출전한 이탈리아 소농민의 생활을 파멸로 몰아넣어 수많은 농민이 토지를 잃고 무산계급으로 떨어져 도시로 밀려들었다. 그럼에도 로마의 과두정치가(寡頭政治家)는 진정한 위기를 통찰하지 못하고 자기와 자기 당파의 이익과 명예만을 탐하였다. 이리하여 표면적으로는 화려한 로마의 발전도 시민간의 빈부차(貧富差)를 심화시키고 중소농의 몰락에 의한 군사력의 위기를 불러 로마는 대내적으로 황폐하게 되었다. 그라쿠스 형제는 지배계층의 대토지 소유를 희생시켜 빈민에게 토지를 주어 중소농민을 재생시키고자 꾀하였으나 실패에 그치고 횡사하였다. 그들의 법안은 그 자체로는 별로 새로운 것이 없었으나 그들의 활동은 후세에 큰 영향을 끼쳤다. 즉 그들은 수세기에 걸쳐 공동화(空洞化)하였던 민중의 기관인 호민관 제도와 민회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음으로써 지배계급에 대한 반역을 시도하였던 것이다. 이때부터 정치가의 활동 패턴으로서, 정치적 결정은 원로원의 권위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는 자는 ‘최량의 일족’으로 불리고, 그것이 민회의 결의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는 자는 ‘포풀라레스(평민파)’정치가로 불렸다. 배타적인 족벌정치가 속에 포함되지 못한 혁신파 정치가는 ‘포풀라레스’의 길을 걷게 되었다. 공화제 말기의 ‘최량의 일족’으로는 술라·키케로 등이 있으며, ‘민중파’에는 마리우스·카이사르 등이 나타났다. 그라쿠스 형제가 활약한 10여 년 뒤, 포풀라레스의 마리우스가 나타나 로마의 국방 위기문제를 들고 나섰다. 로마 당국은 이전부터 부족한 병력을 보충하기 위하여 ‘프롤레타리아는 병사로 하지 않는다’고 하는 원칙을 고수하면서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프롤레타리아의 정의를 축소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마리우스는 BC 107년에 병제개혁(兵制改革)을 단행, 프롤레타리아를 지원병으로서 채용한다는 마지막 단안을 내려, 이후 이것이 종전의 징병보다도 중요성을 가지게 되었다. 게다가 이것은 장군과 사병을 특수한 신의관계(信義關係)로 결속시켰다. 즉 장군은 병사를 그 세력하에 보호함과 아울러, 무산자(無産者)인 그들이 퇴역한 뒤 노후 생활에 곤란을 겪지 않도록 부동산 분여를 위하여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았고, 병사는 무력으로써 장군을 지원하는 외에 민회의 투표권에 의하여 장군(정치가)의 정치행동의 큰 지지집단(支持集團)이 되었다. 이것이 로마공화제 말기의 ‘사병(私兵)’이라 불리는 집단이다. 이후 로마 내정에는 사병을 거느린 무력투쟁이 많아진다.

【지중해 세계의 통합】 그러나 광대한 영역에 걸친 로마의 방대하고 어려운 군사적 과제를 수행하는 데에는 마리우스의 병제개혁만으로는 부족하여, 마침내 외인부대가 보조군으로서 쓰이게 되었다(로마 판도 안에 사는 자라도 로마 시민권이 없는 자는 외인으로 불린다). 외인부대 역시 개인관계로 로마의 장군과 결탁하게 되었고, 장군으로서도 명장의 권위를 소중히 하면서 평소부터 원주민 전사 계급의 지도자층인 왕후귀족에 대한 보호자적(保護者的) 지위를 확립하고자 힘썼다. 이 무렵부터 로마의 ‘제1인자들’은 원주민 전사 계급의 리더로서 귀족층과 결탁함으로써 그들의 군사력을 로마의 국방조직 속에 편입시키는 방향으로 나가게 되어, 로마의 주도권에 의해 지중해 세계의 전사계급을 통합하려는 색채가 짙어 갔다. 동방 여러 도시의 ‘제1인자들’도 그와 같은 구실을 하였으나 그뿐만이 아니었다. 지중해 세계에서는 도시화되지 않은 지역이 넓고, 그런 지방의 왕후귀족은 여러 가지 형태로 종사(從士)를 거느리고 있었다. 로마인은 이것을 그들의 클리엔테스(피보호자)라고 불렀는데, 로마의 유력자들은 이 왕후귀족들을 자기의 클리엔테스로 끌어들임으로써 중층적(重層的) 클리엔테스 관계를 맺어 넓게는 원주민 전사층(戰士層)을 장악하였던 것이다. 즉 ‘로마의 원로원의원-외지의 제1인자들-그 사회의 일반민’이라는 3단계의 상하 결합을 기본적인 축으로 하여 로마는 지중해 세계를 장악하여 갔다(뒤에 로마 세계의 도시화가 진척되면서 이들 ‘제1인자들’은 도시 귀족이 된다). 더구나 원로원의 의원들은 저마다 이와 같이 지중해 세계를 좌우하는 클리엔테스를 가지는 한편, 그 자신들 사이에도 클리엔테스의 관계를 맺어, 유력한 의원 밑에 군소 의원이 따르도록 하였다. 그러므로 원로원 안에서 우월한 지위를 가진 자는 간접적으로 거의 모든 지중해 세계를 마음대로 조종할 수가 있었다.

【제정 성립의 진통】 그러나 이와 같은 형태로 지중해 세계의 지배층의 통합이 실현되기 전에 극복해야 할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그 중 하나는 로마의 낡은 도시국가적 제도였다. 이를테면, 도시국가시대의 직접민주정치의 전통을 물려받아 전시민의 참가를 전제로 한 민회가 로마 최고의 결정기관으로서 엄존하는 것은 광대한 영토 국가로 팽창한 로마의 현실에는 맞지 않았다. 또 이 무렵부터 정치적으로 큰 세력이 된 실업가로서의 기사(騎士) 신분을 가진 자는 징세청부인(徵稅請負人) 또는 고리대금업자로서 속주민(屬州民)을 착취하였다. 지중해 세계 전체에 눈을 돌리는 정치가는 로마의 시정(市政)에만 관심이 있는 정치가와 대립하여 보수적인 원로원에 반역하고 오히려 민회를 이용하려고 하였다. 이리하여 지중해 세계 전체의 ‘부유한 자’를 살리려는 정치가는 공교롭게도 로마의 ‘부유한 자’의 이해를 대표하는 그룹과 충돌하였고, 그 때문에 로마 시정(市政)에서는 민중파가 지향하는 방향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은 여러 세력이 뒤엉켜 격렬한 당파싸움이 일어났으며, 원로원이나 민회를 혼란 속으로 몰아넣고, 다시 사병(私兵)의 무력을 사용하여 지중해 세계의 동서에서 처참한 혈투를 전개한 것이 공화제 말기의 내란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BC 80년대의 마리우스파와 술라파의 싸움을 제1차 내란이라 부르고, BC 40년대 전반 카이사르파와 폼페이우스파의 싸움을 제2차 내란이라고 부른다. 아뭏든 제정(帝政) 성립 전(前) 1세기의 로마사는 크고 작은 격렬한 정쟁(政爭)으로 일관하였으며, 이것은 날이 갈수록 확대되어갔다. 이러한 가운데 제1차 3두정치(카이사르·폼페이우스·크라수스) 및 제2차 3두정치(옥타비아누스·안토니우스·레피두스) 시대를 지나 옥타비아누스의 당파가 마지막 승리자가 되어 세력을 확립함으로써 제정(帝政)이 확립된다.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및 지중해 세계의 ‘제1인자들’의 으뜸 가는 자로서 ‘제1인자[元首]’의 정치를 펼치는데, 이것을 보통 제정이라고 부른다.

【제정의 개막】 BC 44년 카이사르 암살 후 전개된 내전의 궁극적 승리자인 옥타비아누스는 BC 29년에 원로원의 제1인자가 되었고, BC 27년 공화제 재건을 제창하여 특별한 모든 권한을 포기하고 공화제국가를 회복시켰다. 이에 대하여 원로원은 그에게 아우구스투스(존엄한 자)라는 존칭을 주었고, 이렇게 하여 옥타비아누스는 형식적으로는 공화제를 재건하였으나 여러 가지 권한·권능은 아우구스투스 한 몸에 집중하게 되었다. 이 체제는 원수정치(元首政治)라 불리며, 그는 호민관 직권, 프로콘술 명령권, 콘술 명령권 등 공화제적 관직에 부수하는 권한을 종신토록 보유하고 전제국(全帝國)의 약 절반에 달하는 속주(屬州)의 통치권을 장악하였다. 여기에서 제국 최대의 부호인 동시에 사병(私兵)이나 다름없는 대규모 상비군을 거느린 원수 아우구스투스의 권한은 황제 이상의 것이 되었으며, 도시국가 이념과는 상반되는 개인숭배가 생겨나서 평화와 질서를 회복한 아우구스투스는 새로운 평화세대의 구세주로서 숭앙받게 되었다. 한편 체제의 영속화(永續化) 문제는 원수가 되는 기본적 원리와는 반대로 세습의 원리, 즉 왕조적인 것으로 변모하여 후계자 선택에 부심하던 아우구스투스도 결국 율리우스 클라우디우스가(家)의 한 사람인 티베리우스에게 뒤를 잇게 하였다. 음침하고 시의심(猜疑心)이 강한 티베리우스(재위 14∼37) 시대는 황제와 원로원의 관계는 원활하지 못하였으나, 속주 통치와 제국관료(帝國官僚)의 기구는 정비되었다. 9년 아우구스투스황제 시대에 토이토부르거발트전투에서 입었던 패전의 상처와 동요도 일소되고 변경의 군사정세도 호전되었다. 동쪽은 유프라테스, 북쪽은 다뉴브와 라인강이 자연적인 국경이 되었다. 제3대 칼리굴라(재위 37∼41)는 광적인 성격의 인물이었으며, 엄청난 낭비를 거듭하여 국고는 바닥이 나고 시민의 재산몰수가 계속되었으며, 또 자신의 신격화를 극단적으로 추진하였으므로 황제예배(皇帝禮拜)에의 길을 한 걸음 빠르게 하는 결과가 되었다. 그가 근위군 장교에게 암살된 뒤, 황제에 추대되어 즉위한 클라우디우스 1세(재위 41∼54)는 제국(帝國)의 도시화, 시민권 확대정책을 추진하는 한편, 측신제도(側臣制度)를 제도화하여 일종의 궁정관료제도를 완성하고, 제국의 행정·재정조직의 정비에도 힘을 기울여 황제의 권력을 굳건히 하였다. 클라우디우스의 뒤를 이은 네로(재위 54∼68)는 차차 포악한 성격을 드러내어 모친과 비(妃)와 처남을 죽이고, 로마시에 불을 질러 그 죄를 그리스도교인에게 씌워 많은 그리스도교도를 살해하여 일종의 공포정치를 폈다. 제국의 동쪽 변경 팔레스티나에서 성립한 그리스도교는 제국 내의 각지로 침투하여 들어오고, 베드로·바울로의 순교도 이 무렵으로 추정되고 있다. 네로의 폭정을 쓰러뜨리기 위하여 제국 각지에서 4명이 황제를 지칭하였으나, 유대 반란 진압의 총사령관으로 파견되었던 베스파시아누스가 마지막 승리자가 되어 평화와 안정의 시대를 되찾았다. 유대 진압은 그의 아들 티투스에게 계승되어 70년에는 예루살렘이 완전히 파괴되었다. 베스파시아누스(재위 69∼79)는 변경수비를 강화하고, 시민권 확대정책을 추진하는 한편, 원로원과의 협조 아래 거대한 관료조직을 정비하여갔다. 제위(帝位)는 티투스(재위 79∼81)·도미티아누스(재위 81∼96)로 계승되었으나, 전제군주적인 도미티아누스가 암살당하자 이 왕가의 지배도 끝이 났다.

【5현제시대】 원로원이 66세의 네르바를 제위(帝位)에 추대하면서부터 원로원과 황제의 현명한 타협의 정치체제가 확립되어, 영국의 역사가 E.기번이 ‘인류사상 가장 행복한 시대’라고 절찬한 5현제의 시대가 열렸다. 사회복지 정책의 네르바(재위 96∼98), 최초의 속주(屬州) 출신(에스파냐) 황제로서 적극적인 대외정책과 자선사업을 추진한 트라야누스(재위 98∼117), 반평생을 속주순행(屬州巡幸)에 바친 그리스 문화의 애호가 하드리아누스(재위 117∼138), 경건한 안토니누스 피우스(재위 138∼161), 동분서주하며 외적과 맞선 철인(哲人)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재위 161∼180)는 각각 전(前) 황제의 양자가 되어, 원로원의 승인을 얻어 제위에 올랐다. 이 시대의 특징은 제국의 영토가 확대되고 비교적 평화가 계속된 데에 있다. 특히 트라야누스는 동방 나바타이왕국을 합병한 데 이어 파르티아왕국의 수도 크테시폰을 공략하고, 다키아(현재의 루마니아)·아라비아(나바타이)·메소포타미아·아시리아 등의 속주를 추가하여 제국의 판도가 가장 넓은 시기를 이루었다. 북쪽은 라인·도나우 두 강을 자연적 국경으로 하고, 도나우강 하류에서는 다키아까지를 영역으로 하였으며, 동쪽은 유프라테스강과 아라비아사막, 남쪽은 사하라사막에까지 판도가 미쳤다. 다음의 하드리아누스 때에는 수세(守勢)로 바뀌어 제국 각지를 순수(巡狩)하면서 국경방위 강화에 힘쓰는 한편, 속주의 통치조직·제국행정제도·관료제도·군제(軍制) 등을 개선·정비하였다. 그러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때에 들어와 동부 국경에서는 파르티아군의 침입을 받고, 제국 각지에 전염병이 만연하여 인구는 현저하게 감소하였다. 황제는 동분서주하면서, 특히 북쪽 변경 수비에 몰두하였다. 더구나 다뉴브강 중류 유역에서 밀려온 게르만인의 침입을 끝내 저지하지 못하고 그들 일부에게 제국 내의 토지를 주어 소작농으로 만들고 그들에게 제국 방위를 맡길 수밖에 없었다.

【도시의 번영과 싹트는 위기】 5현제시대, 즉 로마의 평화시대는 ‘도시화’ 정책이 침투하고 있던 시대이기도 하였다. 제국 각지에 로마식 도시가 세워져, 속주민에게는 널리 로마 시민권이 주어졌고, 로마문화가 속주의 구석구석까지 스며들고 있었다. 이리하여 도시의 번영은 2세기에 이르러 그 절정에 다다랐다. 중앙에 광장을 두고, 신전·바실리카·극장·원형극장·공공목욕탕·수도를 구비한 로마식 도시가 세워지고, 도시문화의 주체를 이룬 것은 도시의 부유층이었다. 그들은 도시참사회(都市參事會)를 구성하고, 도시의 관리[政務官]에 취임, 무보수로 도시를 위하여 헌신하였다. 한편 제국정부는 도시 부유층의 경제활동에는 전혀 간섭하지 않는 자유방임정책을 취하여 제국은 경제적으로도 크게 번영하였다. 제국 각지의 특산품 거래가 자유로이 이루어지고 안정된 통화의 뒷받침으로 게르마니아·인도·중국과의 교역도 성행하였다. 그러나 위기는 이미 5현제시대의 제국 내부에서 싹트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먼저 제국의 번영을 노예제에 의존하여 온 데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생산품의 대부분을 수출하여오던 공화제 말기부터 제정 초기의 이탈리아 노예제 대농장 경영에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노예는 노동력인 동시에 자본투하의 대상이기도 하였으나 공급원의 감소, 투하자본으로서의 불안정, 상품판로의 정체(停滯) 등 노예제사회를 뿌리째 뒤흔드는 문제들이 앞을 가로막기 시작하였다. 게다가 노예제 자체가 지니는 비능률성이 분명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노예를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모순이 따라다녔다. 확대 정책에서 수세로 전환하던 제국의 정책과 더불어 이미 그 징후를 보이고 있던 노예제 농장경영에서 소작제로의 이행도 더욱 가속화되고 있었다. 다음에는 산업의 원심적(遠心的) 경향, 즉 중심(重心)의 이동과 경제권의 분립, 게다가 시장에도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우선 수송의 난점(難點)과 신용의 불확실성에 직결되는 문제였다. 또 ‘고대자본주의’를 지탱하고 있던 속주의 징세청부와 고리대금자본의 형성·발전이 두절되고, 확대재생산도 불가능하여 속주의 각 블록 경제권 번영에도 불구하고 차차 자유로운 사기업이 저지되어갔다. 더구나 시장이 한정되어 있었던 점, 즉 건전한 사회적 중산층이 형성되지 않아, 일반시민이 구매자가 되는 사회가 이룩되지 못했던 점은 번영의 저변이 매우 취약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 대토지소유제의 보급은 자급자족적인 경제체제로의 이행을 촉진시켜 경제의 중심이 도시에서 농촌 및 사유지로 옮아갔다. 여기에서 발생하는 것이 도시의 노화현상이며, 나아가서는 농촌 및 사유지에서의 계층의 분화였다. 이리하여 로마제국의 세포라 할 도시들이 그 기능을 잃어가는 한편 소작인에게 가하여지는 부담도 점차 무거워져갔다.

【세베루스왕조와 군인황제시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뒤를 이은 아들 코모두스(재위 180∼192)가 전제정치를 행하여, 그가 암살된 후 혼란을 수습한 것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재위 193∼211)였다. 동쪽에서는 강력한 사산왕조 페르시아와 맞서는 한편, 안으로는 수많은 모순을 지닌 제국의 위기에 대처한 것이 세베루스왕조의 여러 황제였다. 먼저 북아프리카 출신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군사력을 강화하는 한편, 재정의 재정비를 위하여 통제경제에의 제일보를 내디뎠다. 그의 뒤를 이은 카라칼라(재위 211∼217)는 공동통치자인 동생을 살해한 뒤 212년에 칙령을 공표하여 제국 내의 모든 자유민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한다고 선언하였다. 세수(稅收)의 증가를 노린 칙령이었다고도 보이나 이 칙령에 의하여 로마 시민권은 제국 전체에 확대되고, 화폐가치의 하락, 인플레이션의 격화는 멈출 줄을 몰라 안정은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세베루스왕조 시대는 황제를 중심으로 하여 군대와 관료가 지배하는 국가체제가 분명하게 형태를 갖추고, 통제경제와 인플레이션이 진전되어 제국의 구조가 변하여가는 시대였다. 이 새로운 지배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종교적 이데올로기 문제가 대두되었다. 그러나 엘라가발루스(재위 218∼222)에 의한 태양신의 국교화(國敎化)는 하나의 에피소드로 끝났다. 세베루스왕조 최후의 황제 세베루스알렉산더(재위 222∼235)가 살해당한 뒤 약 50년 동안은 26명의 황제가 난립하는 ‘군인황제’시대로 바뀐다. 페르시아군의 포로가 되었던 발레리아누스(재위 253∼260)의 아들 갈리에누스(재위 253∼268)는 황제 직속의 기동대와 독립기병대를 창설하여 군의 주력부대로 삼았고, 제국을 중흥시킨 아우렐리아누스(재위 270∼275)는 기병을 한층 강화하여 외세의 압력에 대처하고 대상도시(隊商都市) 팔미라를 지배하에 두는 한편 서쪽 갈리아의 지방정권 독립을 취소하고 제국을 재건하였다. 그러나 이 통제적 강제국가체제, 더구나 이민족까지 포함한 혼성국가에서는 제권(帝權)의 절대화가 필수적인 것이었으므로 신총제이념(神寵帝理念)을 주장하기에 이른다. 로마제국은 3세기에 대외적·대내적으로 동란시대를 겪게 됨으로써 사회·경제·정치이념의 모든 면에서 고전·고대적인 것과는 전혀 다른 형태로 변질되어갔다. 이 변질의 시대에 제위에 오른 황제가 디오클레티아누스와 콘스탄티누스였다. 한편 그리스도교 박멸을 목적으로 하는 최초의 조직적인 시도가 보이기 시작한 것도 3세기의 일이었다. 이미 네로는 로마시 대화재의 책임을 그리스도교도에게 씌우기도 하였고, 트라야누스황제 때에는 그리스도교도라고 고백하는 것만으로도 사형에 처하여졌다. 또 그리스도교도에 대한 박해는 민중의 선동에 의하여 자주 일어났으며, 본래는 외래 종교에 대하여 관용을 보여왔던 로마제국 정부도 분명한 태도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250년 데키우스황제의 포고, 즉 모든 주민은 로마의 신에게 희생을 바쳤다고 하는 증명서를 지녀야 한다는 포고령이 선포되자 그리스도교로부터 많은 이탈자를 낳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257년 및 258년에 발레리아누스에 의한 박해가 가해졌다. 그러나 그 아들 갈리에누스는 교회에 대하여 신교(信敎)의 자유를 인정하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와 콘스탄티누스의 제국 재건】 내란을 수습한 제국에 평화를 가져온 디오클레티아누스(재위 284∼305)는 변경 수비를 또다시 굳게 하고 통치기구를 정비, 로마를 중앙집권적인 관료국가로 바꾸었다. 286년 부제(副帝)인 막시미아누스를 정제(正帝)로 승진시켜 그에게 서방 통치를 맡기고 자신은 동방의 통치를 맡았으나 293년에는 다시 부제를 각각 새로 임명하여, 사분통치제(四分統治制)를 확립하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개혁은 군대의 재건, 재정의 재정비에도 힘을 기울여, 301년에는 최고가격령을 공포하였으나 인플레이션의 확대를 막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현물징발을 하나의 제도적인 장치로 하는 세제(稅制)의 근본적인 개혁을 단행하였다. 이 제도에 따라 모든 부과금(賦課金)은 공평하게 토지 단위(iugum)와 인두(人頭) 단위(caput)로 할당되었다. 또 행정상의 개혁으로는 속주 수를 배로 늘리고 제국 전체를 관구(管區)라고 이름 붙인 12개의 속주 그룹으로 재편성하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세운 전제군주정체를 한층 견고하게 한 것은 황제 퇴위 후 내란을 수습한 콘스탄티누스 1세(재위 306∼337)였다. 황제는 312년 하늘에서 십자가의 표지(標識)를 보고 대립자 막센티우스를 격파, 로마로 입성한 다음 313년 밀라노에서 리키니우스와 회담, 그리스도교 공인의 칙령(밀라노 칙령)을 발표하였다. 황제는 325년에 니케아에서 종교회의를 열고 교의논쟁(敎義論爭)의 해결을 꾀하였다. 이어서 330년 새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콘스탄티노플)를 개설하여 제국과 그리스도교의 결합을 더욱 더 굳건히 하였다. 황제는 라인·다뉴브의 국경선에서 게르만인을 격퇴하는 한편, 게르만인을 제국 영내에 정주하게 하여 국가 방위를 맡기기도 하였다. 전제군주 정치하에서 로마 시민의 직업 세습(世襲)과 강제화가 크게 진전되고, 또한 세제의 강화와 함께 징세의 임무를 맡는 도시참사회원 신분의 세습화도 촉진되었다. 더구나 농촌에서는 소작인의 이동이 금지되어 ‘콜로누스’로서 신분상 많은 구속을 받게 되었다. 이리하여 제국에서 자유로운 시민생활은 사라지고 군사국가체제는 더욱 강화되었다. 콘스탄티누스 1세가 죽은 뒤 그의 아들들과 일족(一族)의 내분으로 제국은 황폐화하였다. 콘스탄티누스가 이끌어 가던 역사의 흐름에 역행하여 F.C.율리아누스(재위 361∼363)는 전통적 제의(祭儀)와 이교(異敎)를 부흥시켜 그리스도교를 공격하고, 로마 고제(古制)의 회복을 꾀하였으나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전사하여 그의 치세는 단명으로 끝났다.

【게르만의 민족이동과 로마제국의 멸망】 율리아누스가 죽은 뒤, 동방에서나 라인·다뉴브 강 쪽에서 이민족의 침입이 되풀이되었다. 서부를 통치하던 발렌티니아누스 1세(재위 364∼375)와 그의 동생 동제(東帝) 발렌스(재위 364∼378)의 활약도 소용없이 서부에서는 알라만인(人)이 침입하고, 갈리아의 바가브타에란(亂)도 격화하였으며, 브리타니아·파노니아·북아프리카 등도 어지러웠다. 한편 동부에서는 365년 고트족(族)이 반란을 일으켰고, 376년 흉노(匈奴)에게 쫓긴 서(西)고트족이 제국 안에 정주할 땅을 찾아 남하하여 고트족들과 함께 트라키아 전토를 짓밟고 마침내 발렌스 군대를 괴멸시켰다. 내외의 위기를 헤쳐나가기 위하여 로마는 완전히 군사국가화하였으나 그 군대는 거의가 야만인으로 구성되었고, 한편 경제활동의 정체(停滯)는 극도에 달하였다. 고트족은 한때 테오도시우스 1세(재위 379∼395)에게 쫓겨났으나 결국 382년의 협정에 따라 제국 영내에 정주할 것을 허락받았다. 그 동안 테오도시우스 1세는 교리논쟁과 종교정책을 통하여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하고(380), 전통적인 제의를 금지, 이단을 억압하였다. 테오도시우스 1세는 로마제국 전토를 통치할 수 있었던 마지막 황제로서 그가 죽자(395), 제국은 최종적으로 동서로 분리되어 동반부는 아르카디우스, 서반부는 호노리우스가 영유하였다. 서로마 제국에서는 정치의 실권을 게르만인 무장(武將)인 스틸리코가 장악하였으나, 그가 처형된 뒤 각지에 황제가 난립하여 정정(政情)은 어지러웠다. 410년에는 알라리크왕이 거느리는 서고트족이 로마시를 점령하였다. 그 뒤 서고트족은 방향을 돌려 에스파냐로 이동하였으며, 역시 게르만인인 반달족은 아프리카로 진출하여 각각 왕국을 세웠다. 또 부르군트족과 프랑크족도 갈리아에 침입하고, 색슨족은 브리튼섬으로 건너갔다. 한편 로마의 장군 아에티우스가 서고트와 프랑크의 힘을 빌려 카탈라우눔 전투에서 아틸라가 이끄는 흉노족을 격퇴하였으나(451), 455년 로마시는 반달족에게 약탈당하였다. 그 후에는 게르만인 장군이 로마의 정치적 실권을 쥐었으며, 결국 게르만인 용병대장 오도아케르가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 황제를 폐하여 서로마제국은 멸망하였다(476). 한편 동로마제국은 서로마제국에 비하여 경제적·문화적으로 활력이 있었고, 통치기구도 정비되어 있었으므로 서쪽의 로마제국이 멸망한 뒤에도 명맥을 유지하여 동로마제국(비잔틴제국), 즉 로마제국의 정통으로서 1453년 오스만투르크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존속하였다. 그러나 서유럽에서는 로마제국의 이념과 전통이 결코 소멸되지 않았다. 800년 샤를마뉴의 대관(戴冠)은 로마제국의 부흥을 의미하였고, 또 ‘로마황제’라는 호칭은 오토 2세 이후 줄곧 사용되어, ‘신성로마제국’이라는 국호로 알 수 있듯이 황제들은 로마적·그리스도교적 전통의 보호자로서 그 권위를 지켜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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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쿠로스(Epikouros, BC 342?∼BC 271)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사모스섬[島] 출생. 35세 전후에 아테네에서 학원을 열었다. 그 학원은 ‘에피쿠로스 학원’이라 불렀고, 부녀자와 노예에게도 문호가 개방되었다고 한다. 제자들은 각자 형편에 맞는 기부금을 내고 학원에서 공부하고 함께 우정에 넘치는 공동생활을 영위하면서 문란하지 않은 생활(아타라쿠시아) 실현에 노력하였다. ‘에피쿠로스 철학’의 기초를 이루는 원자론(原子論)에 의하면 참된 실재(實在)는 원자(아토마)와 공허(케논)의 두 개뿐으로서, 원자는 불괴(不壞)의 궁극적 실체이고 공허는 원자가 운동하는 장소이다. 원자는 부정(不定)한 방향으로 방황운동을 하는데, 이것에 의해 원자 상호간에 충돌이 일어나서 이 세계가 생성(生成)한다. 그러므로 세계에 있는 모든 것, 즉 인간이나 신(神)들이나 모두 원자의 결합물에 지나지 않으며, 또한 인식(認識)이란 감각적 지각에 지나지 않고 물체가 방사(放射)하는 원자와 감각기관과의 접촉에 의해 성립한다.

이 자연학에 의하여 그는 죽음과 신들에 대한 공포를 인류로부터 제거하려 하였다. 죽음이란 인체를 구성하는 원자의 산일(散逸)이며, 죽음과 동시에 모든 인식(자기)도 소멸한다. 신들도 인간과 동질의 존재이며 인간에게 무관심하다. 인생의 목적은 쾌락의 추구에 있는데, 그것은 자연적인 욕망의 충족이며, 명예욕·금전욕·음욕(淫慾)의 노예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을 폈다. 그는 공공생활의 잡답(雜踏)을 피하여 숨어서 사는 것, 빵과 물만 마시는 질박한 식사에 만족하는 것, 헛된 미신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 우애(友愛)를 최고의 기쁨으로 삼는 것 등이 에피쿠로스가 주장하는 쾌락주의의 골자였다. 《자연에 대하여》 등 300여 권에 이르는 저서가 있었으나 그 대부분은 산일되고 단편만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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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쿠로스 학파(Epicurean school)

 

  에피쿠로스의 학설을 신봉한 파. 에피쿠로스가 죽은 뒤 이 학파는 약 600년간 계속되었으나, 그동안 스승의 학설을 변경하거나 발전시킨 사람은 없으며, 오직 한 사람 눈에 띄는 제자로는 루크레티우스(BC 94∼BC 55?)가 있을 뿐이다. 그는 《만물의 본성에 대하여:De rerum natura》라는 책을 써 에피쿠로스의 원자론 및 쾌락설을 상세히 논하였다. 에피쿠로스 자신의 저서는 대부분 산일(散逸)하여 겨우 단편적(斷片的)인 것밖에 남아 있지 않아 에피쿠로스의 사상은 이 책에 의해 후세에 전해진 셈이다. 그의 쾌락주의는 감각적인 쾌락을 물리치고 간소한 생활 속에서 영혼의 평화를 찾는 데 있었다. 따라서 원자론을 기초로 하는 그의 방대한 체계는 이 윤리적 생(生)의 실현을 초점으로 하였다. 그러나 이 학파는 쾌락주의라는 기치(旗幟) 때문에 많은 오해와 비난을 받아 오다가, 겨우 근세에 와서야 P.가생디가 에피쿠로스 철학을 부흥, 이것이 J.로크를 통해 영국 경험론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한편 오늘날 쾌락주의자라는 뜻으로 쓰이는 ‘에피큐리언’은 원래 ‘에피쿠로스의 무리’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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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락주의(hedonism)

 

  쾌락을 가장 가치 있는 인생의 목적이라 생각하고 모든 행동과 의무의 기준으로 보는 윤리학의 입장. 행복주의의 한 형태로 키레네학파, 특히 아리스티포스는 순간적 쾌락만이 선(善)이라 하고 가능한 한 많은 쾌락을 취하는 데 행복이 있다고 말하였다. 이에 반해 에피쿠로스는 그러한 감각적·순간적 쾌락을 부정하고, 지고선(至高善)인 쾌락은 지속적이고 정신적인 것이어야 한다면서 아타락시아를 역설하고 쾌락의 질적 구별을 인정하였다. 금욕적인 생활을 한 에피쿠로스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오해는 쾌락주의에 대한 편견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고대의 이 두 학파는 쾌락주의의 두 전형이며 근대에 와서 벤담은 여기에 사회적 관점을 도입하였다. 그는 공리주의의 입장에서 쾌락의 양적(量的) 차(差)에 바탕을 둔 쾌락계산(快樂計算)을 제창하여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주장하였다. 또한 물질적 쾌락의 추구는 많은 어려움에 부닥치게 되고 더 많은 고통을 가져다 준다. 그래서 쾌락을 버리는 일이야말로 쾌락으로 가는 지름길이라는 생각이 나오게 되는데, 이런 생각을 쾌락주의적 역설이라고 한다. 또한 미학(美學) 영역에서는 미적 쾌락을 미의 본질적 요소라고 하는 설을 미적 쾌락주의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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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아 학파(Stoicism)

 

  키프로스의 제논이 스토아 포이킬레에 창설한 철학의 한 유파. BC 3세기부터 로마 제정(帝政) 말에 이르는 후기 고대(古代)를 대표한다. 키프로스섬 태생의 개조(開祖) 제논과 그 제자로서 적빈(赤貧)과 노동으로 이름 높던 소아시아의 아소스인(人) 클레안테스, 그 제자로서 스토아파의 학설을 체계적으로 완성한 킬리키아의 항구 도시 솔로이(솔리)의 크리시포스, 스토아 학설을 로마 사람에게 받아들이기 쉬운 형태로 만든 로도스섬의 파나이티오스, 종교적 경향이 강한 오론테스강 하반(河畔)의 아파메아인 포세이도니오스, 로마황제 네로의 스승이었던 세네카, 노예였던 에픽테토스, 로마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이 파의 주요 인물들이다. 제논이 아테네의 광장에 있던 공회당 ‘채색주랑(彩色柱廊)’에서 제자들을 가르쳤기 때문에 그 제자들을 ‘스토아파’(柱廊의 사람들이라는 뜻)라고 불렀다. 스토아파 철학은 이를 대표하는 사람들이 그렇듯이 고전기(古典期) 그리스를 대표하는 여러 나라의 좋은 가문 출신 사람들의 철학이 아니라, 변경(邊境) 사람이나 이국인의 철학이었으며, 그리스 문물이 좁은 도시국가의 틀을 넘어서 널리 지중해(地中海) 연안의 여러 지방에 미친 헬레니즘 시대를 대표하는 철학이었다. 그러므로 전통적인 철학의 여러 파와 스토아파 사이의 대립은 격렬하였다. 고전기까지의 철학의 여러 학설을 수용하여 일반화·통속화한 점에서 절충주의라는 비난을 받지만, 그 기반에는 고전 철학과는 아주 이질적인 것이 있다고 생각된다. 단지 로마시대 사람들의 저작을 제외하고는 스토아파의 저작은 오늘날 거의 전해지지 않아서 연구상 어려움이 있다. 애지(愛知:철학)는 논리 부문과 윤리 부문, 자연 부문으로 나뉘나, 이들은 각각 독립된 분파가 아니라 서로 나누기 어렵게 결합되어 있어 하나의 지혜를 사랑하고 구하는 애지를 구성하는 3요소가 된다. 지혜는 ‘신의 일과 사람의 일에 관한 지식’이라고 정의되지만, 이것은 사물에 관한 관조적(觀照的) 지식이 아니라, 인간생활에서의 모든 것을 올바르게 처리하기 위한 실천적 지식이다. 지혜의 이러한 실천적 성격에 스토아파의 특징이 있으며, 이 원리에 바탕을 두어 스토아철학은 고대철학원리의 주체적인 반성철학이 되었다. 애지(愛知)는 이러한 지혜를 습득하기 위한 ‘삶의 기술(ars vivendi)’의 연습이며, 이러한 재주를 갖는 사람이 현자(賢者)인 것이다. 그리고 현자의 지혜란 ‘자연에 따라 사는 것’을 아는 지혜이다. 인간은 자연에 의하여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므로, 자기의 존재를 유지하기 위한 ‘자연의 충동’이 부여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지나칠 때 병으로서의 정념(情念)이 있다. 이 정념에 흔들리지 않고 자연 그대로 살아가는 데에 ‘활달한 삶의 흐름’이 있다. 스토아파의 현자의 이상은 바로 거기에 있다. 스토익이라고 불리는 비정한 금욕주의적 심정은 그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현자의 유덕한 삶이란 이성을 갖춘 유한한 개개의 자연물(인간)이 자연에 의하여 부여된 그대로의 자기의 ‘운명’을 알고, 운명대로 살아감으로써 본원(本源)인 자연과 일치하는 ‘동의(同意)’의 삶이다. 따라서 그것은 자연 그 자체가 이성적 존재자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자기귀환(自己歸還)에의 활동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현자는 모든 자연물의 근원인 자연 그 자체로서의 신과 일치한 자이며 신과 같은 자, 바로 신 그것인 것이다. 스토아 철학의 특징은, 이와 같은 자연존재에서의 개별성(個別性)과 전체성(全體性)의 두 계기의 강조와 양자의 긴장 관계에 있으며, 이것에 의하여 스토아 철학은 고대철학 원리의 집성인 동시에 다음 시대의 철학원리를 준비하는 것이 되었다. 언어연구·논리학·인식론에서도 구체성과 개별성을 중요시하는 스토아 철학은 전통철학에 없었던 새로운 요소를 많이 초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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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욕주의(asceticism)

 

  인간의 정신적·육체적인 욕구나 욕망을 이성(理性)이나 의지로 억제하고 금함으로써 도덕이나 종교상의 이상을 성취시키려는 사상이나 태도. 금욕을 뜻하는 금제(禁制)가 따르는 연습·수련을 말하는데, 이에서 유래되는 금욕주의에는 2가지 경우가 있다. ① 어떤 궁극적인 목적을 위하여 몸을 단련시킨다는 본래의 뜻과, ② 육체에 대한 불신(不信)에서 몸을 파괴하거나 그 중요성을 부정하는 것으로, 금욕주의의 역사에는 이 두 가지 전혀 다른 견해가 섞여 있다. 원래 금욕주의는 의지가 생활 앞에 내세우는 이성의 명령과, 생활 속에 있는 자연적인 여러 가지 욕구와의 모순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 모순은 당연히 고통이나 불쾌감을 수반하게 되므로, 이를 이겨내기 위해서 육체를 이성의 명령에 복종하도록 단련시키거나, 영혼의 발전을 방해하는 것이라고 보아 이를 제거하려고 한다. 영혼과 육체, 정신과 물질을 대립적인 것으로 보는 형이상학적 이원론(二元論)은 인생을 영혼과 육체, 정신과 물질의 싸움터로 보고 후자의 소멸에 의한 전자의 승리를 목표로 삼는다. 이러한 태도와 결부된 금욕주의가 이원론적 금욕주의이다. 여기서는 이성만이 선(善)의 근원이며, 감성(感性:충동·욕망)은 악의 인연(因緣)으로 보고, 후자의 억압이 도덕생활을 위하여 가장 중요하다고 여긴다. 감성 그 자체를 악으로 볼 때에는 금욕의 정도가 극단적으로 기울어 마침내 고행(苦行)을 적극적인 선(善)으로 생각하는 입장이 된다. 피타고라스파(派), 퀴닉파, 스토아파, 중세의 수도원 생활, 쇼펜하우어의 윤리설, 간디의 순결사상 등은 모두 이런 뜻의 금욕주의 계통에 속한다. 한편, I.칸트는 수도사의 금욕은 덕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광신적 속죄(狂信的贖罪)를 꾀하는 것으로 보아, 이에 대하여 본원적인 도덕적 금욕이 있다는 것을, 스토아파의 “인생의 우연한 화악(禍惡)에 견디고 쓸데없는 오락이 없어도 지낼 수 있도록 길들여라”라는 격언을 인용하여 설명하였다. 그에 의하면, 도덕적 금욕은 자기 자신을 도덕적으로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한 일종의 양생법(養生法)으로서, 자연충동에 대한 투쟁과 그 지배가 인간을 건전하게 만들고 재차 획득한 자유의식이 사람을 기쁘게 해준다고 강조하였다. 프로테스탄티즘의 금욕주의는 신의 은총에 의해서 일부 사람만이 영원한 구원으로 선택된다는 J.칼뱅 등 예정설(豫定說)과 결부시켜, 자기가 선택되었다는 확증을 일상생활에서 구하고 있다. 인간은 신의 은총에 의하여 주어진 재화(財貨)의 관리자, 영리추구의 기계로서의 의무를 지게 되며, 금욕은 목적으로서의 부(富)의 추구를 악(惡)이라고 배척하면서도 부의 추구를 직업노동의 성과로 생각하였다. 이러한 프로테스탄티즘의 금욕주의는 팽창되어가고 있는 시민사회의 윤리로서 반권위적 성격을 가지고, 쾌락을 추구하는 사람을 보호하는 절대주의적 봉건사회에 항의하는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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懷疑學派(skeptikoi)

 

  스토아학파·에피쿠로스학파와 마찬가지로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면서 사는 것을 이상으로 한 헬레니즘시대의 철학파. 그러기 위하여는 회의(skepsis)에 안주(安住)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인간의 인식은 모두 상대적이어서 진리를 알 수는 없고 어떤 주장에도 반드시 반대 주장이 성립된다고 논하고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는다”라는 표어를 내걸고 ‘판단중지(判斷中止:epoke)’를 권장하였다. 퓌론과 그의 제자 티몬(古懷疑學派)이 제창한 이 학설은 아르케실라오스, 카르네아데스 등의 신(新)아카데메이아를 통하여 키케로에게도 영향을 주었고, 또한 아이네시데모스, 아그리파, 섹스투스 엠페이리코스 등의 신(新)회의학파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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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플라톤주의(Neo-Platonism)

 

  플라톤의 전통에 입각하여 2∼6세기에 유럽에서 흥성하였던 그리스 철학의 일파를 가리키는 사상사상(思想史上)의 명칭. 창시자는 암모니오스 사카스(175?∼242)이고, 대성자(大成者)는 플로티노스(205?∼270)이며, 그 밖에 아멜리오스·포르피리오스·이암블리코스·테오드로스·프로클로스 등이 잘 알려졌다. 만물의 본원인 ‘일자(一者)’로부터 모든 실재가 계층적으로 ‘유출’하여, 보다 낮은 계층은 그 상위의 것을 모방하며, 보다 복잡·불완전하다. 또 만물은 ‘관조(觀照)’에 의해 일자에 계층적으로 되돌아가려고 애쓴다. 이 상하 두 방향에의 운동이 실재를 구성한다는 것이다. 인간도 이 운동에 의해 감각적인 것을 벗어나 일자로 향하며, 이것과의 직접적인 합일, 즉 ‘탈아(脫我)’의 경지에 도달하기를 희구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 사상은 형성기에 있던 그리스도교에 받아들여져 오리게네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 등 교부(敎父)뿐만 아니라, 후의 그리스도교 사상에 중대하고도 근본적인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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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중세

 

  기독교(Christianity)

 

  1세기에 태어난 나자렛 예수를 그리스도(메시아)로 믿는 종교. 불교·이슬람교와 더불어 세계 3대 종교를 이룬다. 원어(原語)는 크리스티아노스(Christianos)라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하는데, 그 뜻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의 기점과 근거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서,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이며 이 인류의 구원자로 믿는 것을 신앙의 근본교의로 삼는다. 그리스도교는 역사적으로 변천을 겪는 동안 크게 보아 로마가톨릭 교회·그리스 정교회(正敎會)·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세 갈래로 갈라졌으며, 이 밖에도 그리스 정교회 내의 몇몇 독립적인 교회들과 프로테스탄트 교회 내의 수많은 종파들이 세계 곳곳에 퍼져 있다.

【그리스도교의 본질】 그리스도교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은 그리스도교를 아는 데 있어 가장 핵심적인 요소이다. 이 물음에 대해서는 시대와 신학자들에 따라 여러 가지 견해를 보인다. 예를 들면 초대교회에서는 그리스도교를 영원하고 참된 진리를 내포한 종교이며, 보편적인 구원의 종교라는 두 가지 기본원리 아래서 이해하였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서는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순전히 역사주의적 입장에서 밝히려는 논의도 일어나고 있다.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은 우주의 창조주이며 모든 존재의 근원으로 자존(自存)하는 신으로서, 그의 본질은 한마디로 말하여 ‘사랑(agape)’이다. 이 사랑은 하느님의 존재와 떨어져 있는 별개의 것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의 존재 그 자체로서의 사랑이다. 하느님은 그 사랑으로써 세상의 창조와 구원 사업을 이룩하는데, 그 사업은 바로 인류의 역사 속에 구현된다. 구약성서에 의하면, 하느님은 자신의 창조와 구원 사업을 펼치기 위하여 역사 속의 한 민족인 이스라엘을 선택하여 계약을 맺었는데, 그것은 “나는 너희의 하느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된다”는 것이었다. 이 계약의 근거와 핵심이 바로 사랑이다. 그러므로 이 계약을 ‘사랑의 계약’이라고 한다. 본질이 선(善)이요 사랑인 하느님은 인간과의 계약에 절대적으로 충실하여, 이스라엘 민족이 우상을 섬겨 계약을 파기했을 때에도 하느님은 사랑의 계약을 지켰다. 하느님은 그 계약의 실현인 인간구원의 역사를 이루기 위하여 자신이 스스로 사람이 되었다. 《요한의 복음서》 1장 14절에서는 이것을 “말씀(Logos)이 사람이 되셨다”고 표현하였는데, 이때의 말씀은 바로 하느님의 본질인 사랑이 이 세상에 구현되는 원리로서, 이의 육화(肉化)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교를 알려면 가장 특징적인 신관(神觀)인 삼위일체(三位一體)의 하느님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은 인간과 인격적 관계를 맺은 신으로서, 그 자신이 3위의 인격을 가지고 있다. 곧 성부(聖父)·성자(聖子)·성령(聖靈)의 3위로서, 이 셋은 각기 독립적인 위격(位格)이면서도 별개의 존재가 아니고 3위로써 하나의 하느님을 이룬다고 하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 교리이다. 3위는 하나의 하느님이 인간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양식(樣式)의 차이로, 아버지로서의 하느님은 역사의 주인이요 심판자로서 구약성서를 통하여 자신을 드러내었다. 아들로서의 하느님은 사람이 되어 세상에 살았고, 또 죽었다가 부활하여 지금도 살아 있는 예수그리스도이며, 성령으로서의 하느님은 역사 속에서 항상 새로운 생명의 힘으로 작용하고 활동하는 영적 존재이다. 이같은 삼위일체의 신앙 위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종교가 곧 그리스도교이다.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의 구체적인 형상으로서, 그의 본질은 역시 사랑이다. 그리스도는 그의 아버지인 하느님의 구원사업에 함께 참여하여, 이 세상에서 자신을 낮추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사랑을 구현하였으며, 그의 사랑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 의하여 인간은 하느님의 구원을 약속받았다. 이것이 그리스도교 교의(敎義)의 핵심이며, 본질을 이루는 원리이다. 이와 같은 교의를 그리스도교에서는 하느님이 인간에게 계시(啓示)한 것으로 믿는다. 하느님에 대한 지식은 인간의 이성이나 양심 또는 자연을 통해서도 알 수 있으나, 자연계시에 의한 하느님에 관한 지식은 부분적인 것이며 불완전한 것으로서, 다만 그리스도를 통하여서만 올바로 하느님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에 의한 계시종교(啓示宗敎)라는 특수성을 가지지만, 그 계시는 인류역사 속에서 구현되기 때문에 또한 역사적인 종교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는 인류 역사와의 맥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교의 형성】 그리스도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전에, 그의 가르침을 통하여 그 정신적인 기반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것이 종교적 단체로 형성된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 정확히는 오순절(五旬節)의 성령 체험 이후 신앙심이 굳어진 사도들이 각지에서 전도를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 오늘날 세계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서력(西曆)은 예수의 탄생을 기점(起點)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는 기원 1년에 탄생한 것이 된다. 그러나 최근, 사학자들은 유다 나라 헤롯대왕(BC 37∼BC 4?) 통치 말기에 실시한 ‘호구조사령(戶口調査令)’을 근거로 BC 4년경 출생으로 추정하고 있다. 신약성서에 의하면, 예수는 성령에 의하여 처녀인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당시 이스라엘 민족 사이에는 종말신앙(終末信仰)이 널리 퍼져 있었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미 BC 6세기부터 바빌로니아·페르시아·그리스 등 외국의 지배를 받아 왔었다. 특히 BC 3세기 초부터는 그리스의 지배하에서 유대교가 박해를 받아, 예루살렘 성전까지 약탈당하였으며, 많은 이스라엘 민족이 학살되었다. BC 2세기 중반에는 반(反)그리스 전쟁으로 한때 이스라엘 민족이 독립을 하였지만, BC 63년에는 다시 로마의 지배를 받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유대교도들은 그들의 유일한 신으로 믿고 있는 야훼신(하느님)이 그들 민족을 구하여주기를 기다리고 있었고, 지금의 세상은 얼마안가 끝이 나고 새로운 세상이 오리라는 희망과 믿음 속에서 살았다. 그리고 새 세상을 다스릴 왕으로서 ‘메시아(Messiah)’가 나타나 주기를 기다렸다. ‘메시아’의 원어는 헤브라이어의 마샤(mashiah)로서, 이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인데, 이 말은 이스라엘 역사상 왕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 민족 사이에 종말사상이 팽배해 있고, 그에 따라 메시아를 기다리는 열망이 높아 있을 무렵에 예수가 태어나서 ‘하느님의 나라’의 복음(福音)을 사람들에게 전하였다. 예수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나라를 맞이할 마음의 준비를 하도록 하였다. 그 가르침의 중심사상은 바로 ‘사랑’이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라.…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이 두 계명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이다”(마태 22:37∼40). 예수의 이 말 속에 그의 모든 가르침이 요약되어 있다. 예수는 스스로 사랑을 실천하여, 병든 사람과 불구자들을 고쳐 주고, 가난하고 버림받은 자를 가까이 하며 죄인들에게도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였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메시아로 믿었으며, 예수의 제자들도 “선생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라고 고백하며 예수를 따랐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메시아’라는 말에 해당하는 그리스어이다. 그러나 사랑의 정신에 기초한 예수의 숭고한 가르침은, 율법주의에 묶여 있던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로부터는 배척을 받았고, 마침내 예수는 이스라엘의 왕을 자칭한다는 정치적인 반(反)로마 운동자로 몰려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사도들의 전도〉 하느님으로서 인성(人性)을 취한 예수는 신적(神的) 사랑의 극치를 보이는 죽음을 당하지만, 하느님 나라의 승리를 증거하고 구원 사업을 완수하기 위해 다시 살아나 제자들 앞에 그 모습을 나타내었다. 이 부활신앙은 예수의 탄생·죽음과 함께 그리스도교의 중요한 교의(敎義)가 되어 있다. 예수의 부활을 경험한 제자들은 예수가 그리스도로서 이 세상의 구원자임을 확실히 믿게 되었다. 그들은 지금까지의 근거지였던 예루살렘에서 추방되어, 사마리아에서 시리아·남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여러 지역으로 흩어져, 예수의 사도로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전파하였다. 12사도 중 요한은 에페소에 정착하여 초대 교회를 이끌었고, 마르코는 알렉산드리아에 교회를 세웠다. 마침내 사도 바울로가 그들에게 합세하면서부터는 지중해 연안 여러 지방에 그리스도교가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바울로의 이방인 선교〉 그리스도교를 유대교에서 결정적으로 분리시켜, 인종과 지역을 초월한 세계종교로 발전시킨 것은 사도 바울로의 선교활동이었다. 바울로는 로마 시민권을 가진 엄격한 유대교도로서, 처음에는 그리스도교 박해의 선두에서 활약하였으나, 마침내 결정적 계기에 의해 그리스도교 신앙에로 회심(回心)한 이후 열렬한 선교활동을 하였다. 그의 전도 대상은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여러 이방인도 포함하였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교는 유대민족의 범주를 벗어나 지중해 연안의 종교로, 세계종교로 확장되기에 이르렀다. 사도시대로부터 바울로의 이방인 선교시대를 ‘원시 그리스도교 시대’라 하는데, 이 시기에 초대교회가 형성되었다. 초대교회는 유대교와 로마정부 쌍방으로부터 많은 박해를 받는 가운데 형성되었지만, 개인의 집이나 카타콤 같은 데서 비밀집회를 가지면서 그 조직을 이끌어 나갔다. 바울로가 초대교회에 보낸 서신들에 의하면, 그 무렵에 이미 사제(司祭)로서의 감독(監督)·장로(長老), 부제(副祭)로서의 집사(執事) 등의 교직이 정해져 있었다. 이 시대는 또한 신약성서(新約聖書)가 쓰여진 시대로서, 그리스도교 신학의 기초가 확립된 때이기도 하다.

【고가톨릭교회】 원시 그리스도교 시대를 지나 2세기 이후에 교회의 조직이 정비되었다. 또 경전으로서 신약성서를 편찬하였고, 유대교에서 계승한 경전을 신약의 준비서로 보아 구약성서(舊約聖書)라 하여, 신·구약성서를 그리스도교의 경전으로 채택하였다. 이 때부터 중세의 교황청을 중심으로 하는 로마가톨릭교회가 형성되기까지의 초대교회를 고(古)가톨릭교회라고 한다. 이 시기의 교회에 명확한 개념을 부여하여 교회 확립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사람은 카르타고 교회의 감독 키프리아누스였다. 그는 《가톨릭교회의 통일에 대하여》라는 저서 속에서, 교회는 지상에 세워진 유일한 구원기관(救援機關)이며, 교회의 주교(主敎)들은 하느님과 인간을 매개하는 영적 권위를 부여받았음을 주장하였다. 또 그리스도가 하나요 진리가 하나인 것처럼 교회도 하나임을 주장하였다. 그가 사용한 ‘카톨릭’이라는 말은 그리스어의 카톨리코스(katholikos)에서 유래하는데, ‘전체적’ ‘보편적’ ‘공적(公的)’이라는 의미의 말이다. 이 말은 그리스도교 역사상 로마교회의 고유명사처럼 쓰이게 되어, 오늘날 ‘카톨릭’이라고 하면 곧 로마가톨릭교회를 가리키게 되었다. 고 가톨릭교회는 제도의 확립과 더불어 이단을 배척하면서 정통신학의 확립을 추구하였다. 키프리아누스 외에 유스티아누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오리게네스 등의 교부(敎父)들은 성서적인 증언을 철학적으로 체계화하여 그리스도교의 기본교리를 정립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역사성을 부인하는 그노시스파(派)와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부인하는 아리우스파(派)에 맞서서 그리스도의 신성과 역사성을 동시에 강조하였다. 그들에 의하여 하느님은 ‘성부’ ‘성자’ ‘성령’의 3위격(三位格)으로써 일체(一體)를 이룬다는 삼위일체 신학이 확립되었다. 그리고 325년의 니케아공의회(公議會)에서는,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아들이며 본질에 있어서 하느님과 같은 신격(神格)을 가진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한편 3세기 이후 교회에 대한 로마의 박해는 더욱 심하여졌다.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과 충돌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황제숭배 문제였다. 그 무렵 쇠퇴하고 있던 로마 제국은 황제숭배에 의하여 국세를 만회해 보려는 의도로, 황제숭배를 국민의례로 강요하고 있었다. 이에 대하여 그리스도교인들이 완강히 거부하자, 결국 전국적인 그리스도교 박해가 일어났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재위 253∼260)는 가톨릭교회 그 자체를 없애 버리려는 듯, 대규모의 박해를 감행하여 무수한 순교자를 내었다. 그러나 이러한 박해 가운데서도 그리스도교인들은 더욱 단결하여 믿음을 지켰고, 교회를 키워 나갔다. 이렇게 되자 로마 제국에서는 회유책으로 방향을 돌리게 되었는데, 콘스탄티누스 1세(재위 306∼337)는 313년에 밀라노칙령(勅令)을 발표하여 그리스도교를 승인하였고, 데오도시우스 1세(재위 379∼395)는 그리스도교를 로마제국의 국교(國敎)로 선포하였다.

【중세의 그리스도교】 〈그리스(동방)정교회의 분리〉 국교로서 정부의 보호를 받게 된 로마 교회는 교세를 확장하여 전체 교회를 로마·콘스탄티노플·알렉산드리아·안티오키아·예루살렘의 5대 교구로 나누어 관할하였다. 이 중 알렉산드리아·안티오키아·예루살렘의 세 교구는 7세기에 사라센 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갔고,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의 두 교구가 동서(東西) 양쪽에 세력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 두 교회는 각각 비잔틴제국과 게르만족 국가 사이의 상이한 정치상황 탓으로 서로 분리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동방의 콘스탄티노플 교회에서는 황제를 교회의 수장(首長)으로 하는 황제교황주의(皇帝敎皇主義)를 따르고 있었고, 서방의 로마교회는 황제권과는 독립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으며, 이에 따라 콘스탄티노플교회와의 협조체제는 무너져 갔다. 이 후 11세기에는 로마 교황 레오 9세와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 케룰라리우스와의 정면충돌로 결정적인 분열을 초래하게 되었다. 이로써 콘스탄티노플교회는 로마교회와 갈라져 그리스정교회(正敎會)로 독립하였다.

〈교황권의 전성기〉 게르만 민족 중에서 중세 유럽 사회에서 큰 세력을 형성한 프랑크족은 이미 5세기에 로마가톨릭교회로 개종하고, 교회와 제휴하여 그 지배력을 확보하고 있었다. 교황의 지지를 얻어 카롤링거 왕조를 창시한 피핀은 이탈리아의 랑고바르드 왕국을 정벌하고 중부 이탈리아를 교황에게 헌납하였다(756).이것이 교황령(敎皇領)의 시초인데, 이러한 경제적 거점을 얻게 된 교황은 세속적으로도 서유럽 사회에서 큰 세력을 지니게 되었다. 그리하여 교황은 황제와 대립하는 위치에 이르게 되었고, 신성로마제국의 오토 1세가 죽은 뒤,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는 성직서임권(聖職敍任權)을 둘러싸고 황제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하여 굴복시켰다. 그 후 독일과 이탈리아에서는 교황파와 황제파가 서로 다투었으나, 결국은 교황권이 황제권을 완전히 제압하였으며,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재위 1198∼1216) 때는 교황이 서유럽의 전 군주(君主) 위에 군림하였다. 이같이 교권(敎權)이 강대해짐에 따라, 한편으로 그리스도교의 부패와 세속화도 심화되어 갔다. 교황은 교황령의 지배자로서, 또 주교나 수도원장은 영주(領主)로서 세속적인 일에 관계하여, 권력과 부를 함께 누리게 되었다.

〈수도원의 개혁운동〉 교회가 부패되어 가던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교 본연의 영적(靈的) 생활로 되돌아가자는 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의 중심을 이룬 것은 수도원이었다. 수도원은 4세기경 이집트에서 비롯된 은둔생활에 그 기원을 두지만, 이것을 사회적 공동체로 성립시킨 사람은 이탈리아의 베네딕투스이다. 그는 6세기에 몬테카시노수도원을 세우고, 청빈(淸貧)·정결(淨潔)·순명(順命)의 생활로써 하느님을 찬미하고 세상에 봉사하는 수도생활을 창시하였다. 10세기에 이르러 부패한 교회를 개혁하자는 운동은 이 베네딕투스파의 클뤼니수도원을 중심으로 하여 일어났다. 그 후 11∼12세기에는 각지에 많은 수도원들이 세워졌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아시시의 프란체스코가 창설한 프란체스코회(會)와 도미니쿠스가 창설한 도미니크회(會)가 유명하다. 이들 수도회는 사유재산을 완전히 포기하고, 탁발생활을 하는 가운데 마음의 청결을 유지하는 생활을 하였다. 그래서 이들 수도회를 탁발수도회(托鉢修道會)라고 한다. 수도회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랑과 청빈생활의 모범으로서, 그리스도교 안에 신선한 영적 생명을 유지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여 왔으며, 학문연구와 사회봉사 등을 통하여 세계역사에도 기여한 바가 크다.

【교황권의 쇠퇴】 절정기에 이르른 교황권은 봉건영주의 호응을 얻어, 십자군 원정(1096∼1270)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 원정은 처음에는 이슬람 세력에 대항하는 종교적 열정에서 시작되었으나, 후에는 새로운 땅을 개척하려는 세속적인 목적으로 변질되어 결국은 실패로 끝났다. 십자군 원정의 실패로 교황권은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프랑스에서는 국왕 필리프 4세가 교황과 대립하여, 1309년에는 교황청을 아비뇽으로 옮기고 교황 클레멘스 5세를 유폐(幽閉)시켰다. 이를 ‘교황의 아비뇽 유폐’라고 하는데, 이 사건은 교황권 쇠퇴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중세 그리스도교 신학】 중세 그리스도교 신학은 스콜라 신학으로 대표된다. 이것은 초대교회 때부터 기초가 이루어진 그리스도교 신학을 집대성하여 완성한 것으로서, 그리스 철학의 힘을 빌려 그리스도교 교리를 이론적으로 설명하려고 하였다. 스콜라 신학자로는 안셀무스, 보나벤투라, 롬바르두스 등을 들 수 있는데 대표적인 사람은 토마스 아퀴나스이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받아들여, 신과 우주와 인간의 문제를 다같이 설명하는 이론적 체계를 세워 《신학대전(神學大全)》이라는 방대한 저서를 남겼다. 아퀴나스의 신학체계에 의하여, 가톨릭교회의 ‘성사(聖事)’는 신적(神的) 권위를 지니게 되었으며, 1439년의 종교회의에서 ‘세례(洗禮)’ ‘견진(堅振)’ ‘고백(告白)’ 등의 7가지 성사가 제정되고, 하느님의 은총은 이들 교회의 성사를 통하여 주어진다는 교의가 확립되었다. 스콜라 신학은 이 아퀴나스 때에 전성기를 이루었으나, 13세기 이후로는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둔스 스코투스, W.오캄 등 후기 스콜라 신학자들은 이성으로써는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설명할 수 없다고 주장하여 신앙과 이성을 분리시킴으로써 스콜라 신학의 토대를 흔들어 놓았다.

【종교개혁】 그리스도교 2,000년 역사상 가장 파고(波高) 높은 변화는 16세기의 종교개혁에 의하여 일어났다. 종교개혁은 마르틴 루터가 교황 레오 10세의 면죄부(免罪符) 판매에 반기를 들고 1517년에 ‘95개조의 반박문’을 발표함으로써 불붙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개혁운동은 몇 가지 시대적 흐름이 한 곳에서 만남으로써 가능했던 것이다. 그 흐름들은 중세 신비주의·회의주의·르네상스·민족주의 등이었다. 중세 신비주의운동은, 후기 스콜라 신학이 신앙과 이성의 분리를 주장하고 하느님 이해의 이성적 추구의 가능성을 부인하자, 이에 따라 하느님에 대한 이해와 지식을 순수체험적인 영적 차원에서 얻으려고 한 데서 일어난 것이었다. 에크하르트, J. 타울러, T.아 켐피스 등이 이 운동의 대표자인데, 이들에게 있어 공통적인 것은 신의 내적 체험이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사람 안에서 탄생하는 신(God being born within)’을 주장하였다. 이 신비주의운동은 주지주의적(主知主義的)인 스콜라 신학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신앙의 생동감과 역동감을 체험할 수 있게 하였다. 중세기 회의주의운동은 15세기 전반부를 특징짓는 종교운동으로서, 교황청의 분열과 부패 등을 개혁하려는 움직임이었다. 그 대표적인 사람들은 영국의 위클리프와 보헤미아의 후스였다. 이들은 중세 말기의 교회의 타락을 공박하고 교황의 절대성에 항거하여, 교황권이나 황제권의 근원은 모두 하느님이기 때문에 그 권한은 각기 자체의 한계 내에서 선용되어야 하며, 교회는 재산을 가져서는 아니되고, 교회진리의 유일한 근거는 성서뿐이라고 주장하였다. 두 사람 모두 처형되고 개혁운동은 실패로 끝났으나, 이들에 의하여 장차 16세기에 이루어질 종교개혁의 기틀이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15세기에 일어난 르네상스는 고전(古典)의 연구와 인문주의(人文主義:humanism)로 집약시킬 수 있는데, 이러한 근대정신이 종교의식에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 고전연구는 그리스도교에 있어서 성경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가능하게 하였으며, 인문주의는 인간을 교회의 제도적 권위 아래서 해방시키려는 운동을 싹트게 함으로써 종교개혁을 태동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종교개혁은 르네상스의 인간중심적인 사상에 근거하는 것은 아니며, 어디까지나 신중심주의(神中心主義)였다. 마지막으로 민족주의는 그 때까지 로마교황청에 예속되어 있던 각 민족의 독립의식의 발로에서 형성되었다. 독일은 교황청의 착취를 가장 심하게 당하고 있던 지역의 하나였는데, 정치적으로도 안정되지 않아 곤란을 겪고 있었다. 이러한 독일에서 민족적 자각을 하게 된 것이 종교개혁으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이같은 시대적 배경 속에서 루터의 종교개혁은 성공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루터의 종교개혁의 기본 입장은 다음의 3가지로 요약된다. 그는 첫째, 가톨릭교회의 전승주의(傳承主義)에 대항하여 그리스도교 진리의 유일한 근거는 성경에 있는 것이지, 교회의 전통적 가르침에 있지 않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둘째, 개인의 구원은 믿음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으로, 교회의 성사(聖事)와 같은 외적 행위는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셋째, 가톨릭의 사제제도(司祭制度)에 반대하여 모든 신자가 하느님의 사제임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 위에서, 루터는 종교개혁에 찬성하는 제후(諸侯)들의 보호를 받아 개혁운동을 성공시켰다. 그는 지방군주적 교회통치제를 확립하고, 1529년에는 제후들의 공동 커뮤니케 ‘프로테스타티오(Protestatio)’를 발표하여,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사회적 지위를 확립하였다. 루터와 거의 같은 시기에 스위스에서는 H.츠빙글리가 종교개혁을 일으켜 가톨릭측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그 뒤를 이어 프랑스 태생의 칼뱅은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을 성공시켰다. 칼뱅의 사상은 루터와 같은 흐름을 이루면서도 루터보다 더욱 철저하여 생활 전체의 성화(聖化)를 주장하였다. 그는 세속적인 직업도 하느님의 소명(召命)으로 보고, 세속생활 속에서 하느님의 섭리를 발견하려는 근세적인 종교관을 구체화하였다. 칼뱅의 개혁운동은 유럽 각지로 전파되어 ‘개혁파교회’를 형성하여 루터교회와 함께 프로테스탄트의 2대 주류를 이루었다. 한편 영국에서는 특이하게 종교개혁이 국왕 헨리 8세의 이혼문제에서 발단하여 교회를 교황으로부터 분리시키고 국왕이 곧 교회의 지배자가 되는 ‘수장령(首長令)’이 선포되었다. 그 후 엘리자베스 여왕 때에 이르러 ‘영국국교회’로 분립되었는데, 한국에서 성공회(聖公會)라 불리는 이 교회는 프로테스탄트 중에서 가톨릭에 가장 가까운 편이다. 유럽 각지에 프로테스탄트운동이 퍼져 나가자 가톨릭에서는 무력(武力)으로 반(反)종교개혁운동을 일으키면서 내부적으로는 교회의 혁신을 시도하였다. 1545년부터 63년에 걸쳐 여러 차례 열린 트리엔트공의회에서는 여러 가지 교의(敎義)가 재검토되고 가톨릭 신학이 재확인되었다. 또 I.로욜라가 창시한 수도회인 예수회는 가톨릭의 포교를 위해 세계 각지에 선교사를 파견하여 획기적인 전도사업을 폈다.

【근대의 그리스도교】 종교개혁운동은 제도적인 가톨릭교회에 묶이어 있는 신앙을 개인에게로 돌리려는 데서 일어난 운동으로, 신학적으로는 그 때까지 교회의 정통적인 흐름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근대에 이르러 자유주의·합리주의 사상이 발흥하고 과학이 진보하자, 그리스도교 신학사상은 그 자체에 커다란 변화를 일으키게 되었다. 이신론(理神論)은 17∼18세기 영국에서 일어난 신학사상 중에서도 가장 극단적인 합리주의 사상인데, 이것은 근세 영국의 경험론과 프랑스에서 건너온 유물론 사상의 영향을 받아 이루어졌다. 이신론은 우주창조자로서의 신의 존재는 인정하지만, 그리스도교적인 신의 계시는 인정하지 않는 입장이었다. 한편 독일의 합리주의는 성경을 하느님의 계시로 받아들이는 그리스도교의 입장에 반대하여, 성경을 사람의 손에 의하여 쓰여진 역사적인 저술로서 연구 비평하려는 운동이었다. 이같은 합리주의적인 흐름에 반대하여, 근대 조직신학(組織神學)으로의 새로운 길을 연 사람은 독일의 F.E.D.슐라이어마허였다. 그의 대표적 저서인 《종교론》(1799)과 《그리스도교 신앙》(1822)은 당시 궁지에 몰리게 된 그리스도교 신학에 새 활기를 불어넣었다. 그는 종교와 철학 및 윤리를 엄밀하게 구별하여, 직관과 감정에 의한 개인의 절대귀의(絶對歸依)의 체험을 종교의 영역으로 규정하고, 이러한 개인의 주체적 종교를 역사종교로 완성시킨 것이 그리스도교라고 주장했다. 또한 독일의 A.리츨은 칸트의 인식론 위에 그 가치판단설을 세워, 근대 그리스도교 신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즉 가장 근본적인 가치판단은 인간이 자연존재인 동시에 정신적인 인격이라는 판단으로서, 이러한 인간이 자연에 대하여 정신의 승리를 얻는 실천적 활동이 종교라고 정의하였다. 이 실천적 입장은 그리스도가 하느님 나라 건설의 기초라는 판단을 가져오게 하였고, 여기에서 비로소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사랑의 계시로 인정하는 그리스도교의 교의가 확인되었다. 영국에서는 18세기 중반에 J.웨슬리를 중심으로 하여 합리주의 신학에 대항하는 경건주의(敬虔主義) 운동이 일어났다. 웨슬리의 경건주의는 이성적·신학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개인적인 영감(靈感)에 의한 종교체험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이 운동은 개인의 금욕적인 생활방법을 요구하게 되어 메서디즘(Methodism)이라 불리었으며, 영국의 산업근로자들에게 사회사업을 추진하면서 널리 전파되어, 메서디스트 처치(감리교회)를 형성하였다. 감리교회는 그 뒤 미국으로 전파되어 침례교회(浸禮敎會:Baptist Church)와 함께 2대 복음주의 교회를 이룩하였다. 근대 교회, 특히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이 밖에 여러 교파를 파생시켰는데, 스코틀랜드에서는 장로파(Presby- terians)가, 영국에서는 청교도혁명에 의하여 조합교회(組合敎會:Congregational Church)가 파생하였다. 이 조합교회는 곧 미국으로 건너가 큰 교파를 형성하였는데, 조합교회는 당시 미국에서 작은 교파이면서도 사회적 영향력이 매우 컸던 퀘이커파(Quakers)와 유니테리언교회(Unitarian Church) 등과 함께 사회사업에 힘을 기울여, 근대사회에 휴머니즘 신상을 전파시키는 데 큰 몫을 하였다

【현대의 그리스도교회】 계시종교이며 또한 역사종교로서의 특징을 지니는 그리스도교는 지난 2,000년 동안 다른 어떤 요소보다 더 강하게 인류역사에 영향을 끼쳐 왔고, 인류역사상 그 어떤 세력보다도 깊은 변화를 초래한 영적 세력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그리스도교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중요한 주제들 중의 하나가 세속화(世俗化) 문제이다. 다시 말하면, 물질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현대사회 속에서 그리스도교는 더 이상 종교적 이해와 통찰력으로써는 파악될 수 없으며, 영적 신앙의 차원이 아닌 세속적인 지성의 이해와 통찰력으로써 파악되어야 한다는 논리이다. 이것은 종교가 신앙을 잃고 속화(俗化)된다는 뜻으로, 극단적으로는 그리스도교가 다시 회복될 수 없다는 비관적인 신앙의 종말론이다. 이러한 논의는 부분적으로 그리스도교 신학의 일부, 특히 변증신학(辨證神學)에 의하여 지지를 얻고 있다. 한편 그리스도교를 ‘비신화화(非神話化)’하려는 신학적인 시도 역시 그리스도교를 세속화시키는 데에 한몫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적 위기상황 속에서도 그리스도교회는 희망을 잃지 않는다. 그리스도교회는 2,000년의 긴 역사를 통하여 무수한 난관을 겪었으나 늘 새롭게 변모하면서 그 본질을 지켜 왔다. 그리스도교회는 본래의 영적 위치로 되돌아가는 힘을 자체 안에 지니고 있으며, 그 힘은 바로 성령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20세기의 위기 속에서도 그리스도교는 끊임없이 갱신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데, 이 갱신운동들은 20세기에 있어서 하나의 새로운 초월 체험을 겪음으로써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다. 현대에 와서 새로이 부상(浮上)하고 있는 전례(典禮)·종교음악·명상·기도·경건신앙 등은 이런 측면에서 이해된다. 그리고 현대 그리스도교회에서 괄목할 만한 움직임의 하나로, 교회일치 운동이 있다. 이것은 현대사회의 세속화와 유물론적 경향에 맞서서, 교파를 초월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단결하려는 움직임이다. 프로테스탄트 교회에서는 1910년 이래 루터교·장로교·성공회·감리교·침례교 등을 중심으로 하여, 교회일치를 위한 에큐메니컬(ecumenical) 운동이 일어났다. 교회일치운동으로도 번역되는 이 운동은 그리스정교회와 로마가톨릭교회의 호응을 얻어, 48년에는 세계교회협의회(WCC)가 창립되기에 이르렀다. 교회일치운동이 목적하는 바의 일치는, 특정한 교리나 의식(儀式) 등의 통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 사이에 한 분의 성령이 가져다 주는 신앙정신적 일치를 상호 대화 속에서 발견하자는 것이다. 또한 그 일치를, 다만 교회 안의 일치에 한정시키지 않고 전인류의 일치라고 하는 넓은 관점에서 파악하여, 특히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의 해방을 위해 교회 전체가 일치 협력하자는 데 있다. 이런 노력을 통하여 그리스도 교회는 세계 역사 속에서의 그 사명을 다할 수 있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그리스도교회】 한국에는 18세기에 가톨릭이 처음 전래되고, 프로테스탄트가 19세기에 들어온 이래 꾸준히 교세가 확장되었다. 한국에서는 가톨릭을 천주교(天主敎), 프로테스탄트를 개신교(改新敎) 또는 일반적으로 기독교라고 부른다. 가톨릭은 처음에 서학(西學:서양 학문이란 뜻)이라 하여, 일종의 학문으로 한국에 소개되었는데, 그것은 조선 중기의 학자 이수광(李光)이 베이징[北京]에서 마테오 리치의 저서인 《천주실의(天主實義)》를 가지고 돌아와 소개한 데서 비롯된다. 그 후 천주교로 개칭하게 되었다. 천주교는 종교로서보다는 서양 학문으로서 한국 학자들에 의하여 연구 대상이 되었다. 그 결과 공리공론(空理空論)에 빠진 형식적인 주자학(朱子學)에 반대하고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추구하는 실학운동(實學運動)의 발생에 크게 공헌하였다. 그 후 학자들은 점차 가톨릭의 종교적 진리를 깨닫게 되어, 이를 신앙으로 받아들이려는 움직임이 뚜렷하여졌다. 이 무렵 이승훈(李承薰)이 베이징에서 그라몽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최초의 한국인 가톨릭 신자가 되었는데, 이것이 한국에서의 가톨릭 선교활동의 첫 열매이었다. 가톨릭이 한국에 전래된 것은 당시 정치·경제 상황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임진왜란·병자호란 등을 겪으면서 약소민족으로서의 고난을 받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정치는 어지러웠고 사회는 극도로 불안하였다. 이러한 때였으니, 사회를 개혁할 수 있는 새 이념과 사상이 절실히 필요하였다. 역사의식이 강한 학자들은 당시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주자학을 배척하고 새 학문인 서학에 접근하게 되었던 것이다. 초기 한국 가톨릭교인 가운데 많은 지도자들이 실학자들이었음은 우연이 아니다. 1984년에 한국 천주교회는 200주년을 맞았는데, 이는 1784년 이승훈이 베이징에서 세례를 받은 것을 기점으로 한 것이다. 당시 조선천주교회는 선교사의 전도 없이 학자들에 의한 자발적인 연구로 성립되어, 세계 가톨릭 전교사상(傳敎史上) 커다란 특징을 이루었다. 당시 주자학에 지배되고 있던 조정(朝廷)과 충돌하게 되어 많은 박해사건을 초래하였다. 1791년(정조 15)의 신해사옥(辛亥邪獄), 1801년(순조 1)의 신유사옥(辛酉邪獄), 39년(헌종 5)의 기해사옥(己亥邪獄) 등이 일어나 외국인 선교사를 비롯하여 수많은 교인들이 순교하였다. 이러한 박해 가운데서도 교인들의 활동은 계속되어, 45년(헌종 11)에는 김대건(金大建)이 한국 사람으로는 최초의 신부가 되었다. 그러나 김대건 신부도 곧 순교하였고, 66년(고종 3)에는 대원군에 의한 병인대박해(丙寅大迫害)가 일어나 9명의 프랑스인 선교사를 비롯하여 많은 교인들이 죽임을 당하였다. 82년(고종 19) 미국과 수호조약을 맺게 되면서, 비로소 한국땅에서도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되었다. 그 후 조선천주교회는 일제강점기에서도 꾸준히 발전하여, 오늘날에는 주요 종교의 하나로 활동하고 있다. 한편 프로테스탄트가 한국에 전래된 것은 1885년(고종 22) H.G.언더우드 목사와 H.D.아펜젤러 목사가 정식으로 선교사업을 시작한 데서 비롯된다. 그 무렵, 한국은 주변 열강국과 서유럽 열강국에 의해 압력을 받고 있었으며, 특히 일본의 침략이 점차 현실화되어 가고 있었다. 나라안으로는 부정과 부패정치에 의해 정부는 약체였고 국민들은 도탄에 빠져 있었다. 1860년대 이후 전국 각지에서는 민란이 끊임없이 일어났는데, 이러한 혼란 속에서 프로테스탄트는 먼저 서민들에 의해 수용되었다. 프로테스탄트는 개혁의지를 담고 있었으므로, 우리 서민층에게 개혁의 에너지로서 수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프로테스탄트는 교육사업·의료사업·사회사업 등을 통하여 사회개선에 큰 몫을 담당하였으며, 특히 일본에 의한 국권피탈 때는 우리 국민의 자주정신을 고취하고 직접·간접으로 독립운동에 지대한 협조를 하였다. 그 후 6·25전쟁 등을 겪으면서 세계 그리스도교 사상 유례없는 발전을 보였으나, 반면 많은 교파의 분열 등을 초래, 난립상을 드러내기도 하여 현재 대한 예수교 장로회를 비롯하여 많은 교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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聖書(Bible)

 

  그리스도교의 정전(正典). 또는 유대교의 성전(聖典)을 말한다. 영어의 Bible은 ‘책들’이라는 그리스어 ‘비블리아(biblia)’에서 나왔다. ‘책들’이란 표현은 《다니엘》에서 예언자적 저술, 《집회서》의 ‘책들의 여분’이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구약을 가리킨다. 이 단어의 용법은 구약을 사용하는 그리스도교회로 넘어갔으며, 마침내 5세기경에 와서는 경전 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확대되었다. 그리스도교의 성전(聖典)으로서 성서는 구약성서(Old Testament)와 신약성서(New Testament)로 이루어진다. ‘구(舊)’는 그리스도 이전을 가리키고, ‘신(新)’은 그리스도 이후의 내용이며, ‘약(約)’은 인간에 대한 신의 구원의 계약을 의미한다. 라틴어 testamentum의 문자적 의미는 ‘의지’였지만 70인역과 신약에서 ‘언약’을 의미하는 헤브라이어 브리트(brit)의 역어로서 사용되었다. 그리하여 testament(의지)가 covenant(언약)로 변형된 것이다. 구약은 ‘옛 언약’이며, 신약은 ‘새 언약’을 뜻한다. 구약은 모세를 중심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신의 약속이며, 신약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하여 주어진 신의 약속이다. 구약과 신약을 함께 성서(biblos)라고 부른 것은 크리소스톰(345?∼407)이 최초이다.

【언어】 구약은 헤브라이어로, 신약은 그리스어로 쓰여졌다. 구약에서 헤브라이어로 쓰여지지 않은 부분(에즈라 4:8∼6:18, 7:12∼26, 예레미야 10:11, 다니엘 2:4∼7:28 등)은 아람어로 쓰여졌는데, 이 아람어는 유대인 포로기 이후에 점차로 유대인의 구어(口語)로써 헤브라이어를 대신하게 되었던 방언이었다. 신약의 그리스어는 1세기경 로마제국의 통속어인 코이네(Koine) 그리스어이다. 이 그리스어는 단순하고 강조적이고 모험적인 표현을 즐겨 쓰는 특성이 있다.

【내용과 구분】 성서의 내용은 구약이 39권, 신약이 27권으로 되어 있으나, 주로 역사·시가·예언·서간문 등으로 되어 있다.

⑴ 구약의 책들이 쓰여진 연대는 BC 1200년부터 BC 2세기에 이르기까지로, 그 기간이 1,000년 이상이나 되며, 다음과 같이 3부로 나누어진다. ① 율법(律法, Torah, 5권):《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② 예언서(豫言書, Nebiim, 21권):《여호수아》 《판관기》 《사무엘 상》 《사무엘 하》 《열왕기 상》 《열왕기 하》 《이사야》 《예레미야》 《에제키엘》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디야》 《요나》 《미가》 《나훔》 《하바꾹》 《스바니야》 《하깨》 《즈가리야》 《말라기》 ③ 성문서집(Kethubim,13권):《시편》 《잠언》 《전도서》 《욥기》 《에스델》 《룻기》 《아가》 《애가》 《다니엘》 《에즈라》 《느헤미야》 《역대기 상》 《역대기 하》 등이다. 예언서 가운데서 《이사야》 《예레미야》 《에제키엘》은 대예언서라고 하며, 그 이외의 예언서는 소예언서라고 한다. 율법에 속하는 5권의 책을 흔히 모세 5경(五經)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모세가 썼다는 근거에서 그렇게 부르는 듯하지만 실은 모세가 쓰지 않았다.

⑵ 신약은 다음과 같이 4부로 나뉜다. ① 복음서(4권):《마태오의 복음서》 《마르코의 복음서》 《루가의 복음서》 《요한의 복음서》, ② 역사서(1권):《사도행전》, ③ 서간문(21권):《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편지》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 《필립비인들에게 보낸 편지》 《골로사이인들에게 보낸 편지》 《데살로니카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데살로니카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 《디모테오에게 보낸 첫째 편지》 《디모테오에게 보낸 둘째 편지》 《디도에게 보낸 편지》 《필레몬에게 보낸 편지》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 《야고보의 편지》 《베드로의 첫째 편지》 《베드로의 둘째 편지》 《요한의 첫째 편지》 《요한의 둘째 편지》 《요한의 셋째 편지》 《유다의 편지》, ④ 묵시문학(1권):《요한의 묵시록》 등이다. 신약의 복음서 가운데 《마태오의 복음서》 《마르코의 복음서》 《루가의 복음서》를 공관복음(共觀福音)이라고 하고, 《요한의 복음서》를 제4복음서라고도 한다. 그것은 전자의 세 책이 자료상 공통적인 것이 많이 있기 때문이며, 후자인 《요한의 복음서》는 연대적으로나 내용적으로 차이가 있어 앞서의 세 복음서를 보충한 것으로,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교 사상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는 책이다. 구약의 역사는 비록 사실적인 역사는 아니지만 천지창조에서부터 이스라엘 민족의 발생과 성장, 애굽으로부터의 탈출, 모세에 의한 율법, 가나안의 정착, 왕국의 건설과 멸망, 민족의 포로,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BC 516)에 이르고 있고, 신약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길잡이인 세례 요한의 탄생으로부터 예수의 탄생과 일생, 교훈과 사업, 그리고 그의 뒤를 계승한 사도들의 활동으로 되어 있다. 구약의 성문서집에서 특히 《시편》 《잠언》 《욥기》 《전도서》 《아가》 등은 하느님의 구원의 역사에 대한 인간의 호소·찬양·감사를 문학적 표현을 빌어서 쓴 작품들이며, 예언서들은 왕국의 분열기로부터 멸망에 이르는 동안 역사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신의 감동을 받아 남긴 예언(豫言)들이다. 신약의 서간들은 사도 바울로를 비롯한 사도들이 개인 또는 교회들에 복음의 교훈, 그리스도에 관한 설명, 신앙생활의 교훈 등을 서신으로 보냈던 것을 추려서 모은 것들이며, 성서의 맨 마지막에 있는 《요한의 묵시록》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의한 세계의 종말에 관한 환상의 기록이다. 이 글은 카이로스적 역사철학에 근거한 것이며 박해 기간에 쓰여진 것이다. 성서는 편집된 내용으로 보아도 세계와 역사의 시작으로부터 역사의 종말, 그리고 그 사이에 하나님의 구원의 활동, 그리스도에 의한 인류의 구원의 역사가 포함된 책이라 할 수 있다. 구약으로부터 신약에 이르기까지 그 기간은 1,000년이 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성서는 1,000년이 넘는 시대적 배경이 있기 때문에 표현에 있어서 서로 모순이 있을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다. 저자나 편집자도 모세와 같은 한 민족의 지도자가 있었는가 하면, 아모스와 같은 목자, 루가 같은 의사, 바울로와 같은 학자 등 다양하였다. 그러나 어느 저자이든간에, 어느 시대에 쓰여졌든간에 신의 사랑의 뜻, 그의 세계 통치, 그리스도의 구원의 활동이 분명하게 계시되었다.

<정경(正經)과 외경(外經)> 정경을 의미하는 그리스어의 카논(Kanon:영어로는 canon)은 ‘곧은 막대기’라는 뜻인데, 그것은 카나(Kanna), 즉 ‘갈대’라는 말에서 파생된 낱말이다. 갈대는 인류가 제일 처음에 사용한 척도를 재는 도구였다. 카나는 헤브라이어 카네(Kaneh)에서 온 말인데, 그것은 ‘재는 막대기’의 뜻을 지니고 있어서 목수들이 사용하는 자(尺)를 가리킨다. 이 말은 라틴어의 규범이나 규칙(norma/regula)과 같은 뜻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그때 그리스 작가들은 가장 훌륭하고 규범이 될 만한 문학작품에 카논이라는 칭호를 붙여주었다. 그러므로 ‘정경’이라는 말은 다른 것과 비교해서 모범이 되고 표준이 된다는 의미이다. 정경이라는 말이 성서에 적용된 것은 신앙과 행실의 규범이 성서 가운데 기록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구약의 문서가 정경으로 집성되기까지에는 매우 오랜 기간이 걸렸다. 율법서는 BC 5세기에 정경으로 인정되었으며, 예언서는 BC 200년경에, 성문서는 AD 1세기에 대개 윤곽을 잡고 있었다. 그러나 구약의 정경 결정은 AD 100년경에 모였던 유대교 얌니아(Jamnia) 전체회의에서였다. 신약의 정경화 작업은 몬타니즘과 마르시온의 반동운동에 의해서 급속히 진행되었다. 그러나 동방교회에서는 4세기에 이르러 《요한의 묵시록》만이 아직 논의가 되고 다른 책들은 정경으로 인정되었으며, 서방교회에서는 로마 전체회의에서 비로소 정경을 문제삼았는데, 382년 로마 감독 다마수스 주재하에 히에로니무스의 협력을 얻어 정경의 목록을 작성하였다. 이때 작성된 신약의 순서는 《마태오의 복음서》 《마르코의 복음서》 《루가의 복음서》 《요한의 복음서》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 《데살로니카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데살로니카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편지》 《필립비인들에게 보낸 편지》 《골로사이인들에게 보낸 편지》 《디모테오에게 보낸 첫째 편지》 《디모테오에게 보낸 둘째 편지》 《디도에게 보낸 편지》 《필레몬에게 보낸 편지》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 《요한의 묵시록》 《사도행전》, 그리고 다음에 7공동서신이 오는데, 이 서신의 순서는 《베드로의 첫째 편지》 《베드로의 둘째 편지》 《야고보의 편지》 《요한의 첫째 편지》 《요한의 둘째 편지》 《요한의 셋째 편지》, 그리고 《유다의 편지》이다. 이 순서는 동방교회가 결정한 순서, 즉 4복음서 《사도행전》, 7공동서신, 14통의 바울로 서신, 《요한의 묵시록》과 비교할 때 차이가 많다. 서방교회에서의 정경의 확정은 397년 카르타고 회의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시사를 받으면서 만든 것이다. 정경의 형성은 고의적이거나 강제적·외부적 요인에 의한 것이 아니라, 문서 자체가 가지고 있는 설득력과 진리성에서 교회의 신앙생활을 통하여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이다. 정경의 범위가 한정되어간 것은 이단과 교리상의 이설(異說)이 교회 내에 침입한 때문이었다. 많은 단편들이 유포되어 있는 가운데서 신앙생활에 가장 표준이 될 만하다고 인정되는 책들을 교회회의가 정경으로 확정하자 여기에 포함되지 아니하는 그 이외의 책들을 외경이라고 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토비트》 《유딧》 《에스델》 《지혜서》 《집회서》 《바룩》 《다니엘》 《마카베오 상》 《마카베오 하》 등인데, 이 책들이 전혀 무가치한 것은 아니다. 다만, 교리상 불충분한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다고 인정된 것들로서, 이 경외서(經外書)들을 ‘아포크리파(Apocrypha)’라고 부른다. 여기에는 역사·교훈·예언·복음·서신·묵시 등이 있다. 신약 부분에서 정경으로 확정될 때 논쟁이 심했던 책들은 《야고보의 편지》 《유다의 편지》 《요한의 둘째 편지》 《요한의 셋째 편지》 《베드로의 둘째 편지》 등이었다. 현재 가지고 있는 신약의 모든 책들이 완전히 받아들여진 것은 라오디게아 회의(363?)와 카르타고 회의(397)에서였다.

【사본(寫本)과 번역본】 성서의 원본은 현재 없다. 따라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서는 여러 사본에서 비교하여 만들어진 성서를 번역한 것이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가장 오래 된 구약성서 사본은 1947년 이래 사해(死海) 근방에서 발견된 이른바 ‘사해 두루마리’에 포함된 ‘사해 사본’이다. 대영박물관에는 9세기 이후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5경의 사본이 있고, 레닌그라드 박물관에는 후예언서의 사본(916)이 있다. 그러나 사해 두루마리 가운데 포함되어 있는 《이사야서》의 두루마리는 어느 것보다도 1,000년이나 앞서는 BC 2세기경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헤브라이어로 된 성서가 처음으로 인쇄된 것은 1488년의 일이다. 헤브라이어 성서의 최초의 번역은 알렉산드리아에서 이루어진 70인역이다. 신약의 사본에는 대자사본(大字寫本)과 소자사본(小字寫本)이 있다. 전자는 그리스어의 대정자(大正字)를 단어와 단어 사이의 띄어쓰기도 없이 연속하여 쓴 것이고, 후자는 현재의 그리스어 성경체와 같은 초자체(草字體)로 단어와 단어 사이도 띄어서 썼고 구두점도 있는 사본이다. 전자에 속하는 사본으로 바티칸 사본(부호 B)·시내 사본(부호 S)·알렉산드리아 사본(부호 A)·에프레임 사본(부호 C)이 있고, 후자에 속하는 사본은 대개 8세기 이후의 것으로, 현재 2,300가지 이상이 있다. 사본을 읽는 데는 후자가 더 쉬우나, 연대가 후대의 것이고 정정·가필 등이 많아 원본을 회복해 보려는 본문비평에는 대자사본이 보다 유효하다. 사본의 자료로서는 무엇보다도 파피루스(papyrus)를 들 수 있다. 이것은 이집트의 나일강(江) 연안에 있는 갈대의 일종인 다년초이다. 이 자료가 BC 11세기부터 문서에 사용되었고, BC 2세기 말경부터는 점점 송아지가죽이나 양가죽이 이에 대용되게 되었다. 현존하는 신약의 사본 중에서 가장 일찍 성립되었고, 또 신약문서를 포괄적으로 포함하는 중요한 사대본의 부분은 양피지로 되어 있다. 이 자료가 15세기까지 사용되다가 종이가 출현하여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성서는 수많은 번역본이 있다. 번역본은 사본과 함께 성서연구에 귀중한 자료로서 취급되고 있다. 이런 번역은 2세기 초부터 시작되었는데, 그 중에는 현존하는 사본보다 일찍 성립된 것이 많이 있다. 신약성서의 고대 번역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라틴어역이다. 히에로니무스 시대에 교양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속어로 번역한 역본들이 많이 있었다. 히에로니무스가 불가타역(Vulgata 譯)을 내기 전의 모든 라틴어역을 고(古)라틴어역 또는 고(古)이탈리아어 역본이라 총칭하였는데, 이와 같은 번역본 중에서 현존하는 것만도 약 40여 종이나 된다. 또 하나의 중요한 라틴어역은 ‘불가타’인데, 고라틴어역이 잡다하기 때문에 그 의미에 혼동을 가져올 우려가 있어 그 통일의 필요성을 느껴 로마의 감독 다마수스(366∼384)가 히에로니무스에게 명하여 고(古)라틴어역을 개역하게 하였다. 다마수스는 가장 권위 있는 그리스어 본문으로부터 번역하여 전체를 근본적으로 수정하려고 했으나, 역자 히에로니무스는 반작용을 염려하여 급진적인 수정을 하지 않았다. 그는 33년에 복음서만을 완역하였고 나머지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얻어 405년에 신·구약의 번역을 완료하였다. 이것이 곧 불가타역으로서, 불가타는 ‘일반’이라는 뜻인데, 처음에는 고(古)라틴어역과 함께 쓰이다가 후에 가톨릭교회가 불가타를 공인성서로 지정하자 다른 역본을 배제하게 되었다. 그러나 1532년 종교개혁자 M.루터에 의한 독일어 번역과 1611년 영국의 제임스 1세에 의한 흠정역(欽定譯:King James Version)은 근세에 이르는 성서번역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고, 지금은 거의 세계 각국어로 번역되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개역본(改譯本)이 출판되고 있다. 모든 개역판의 특징은 가능한 한 원문의 뜻을 현대 용어로 바르고 쉽게 전달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점이다. 《새 영어 성서 New English Bible》가 그렇고 《현대인을 위한 성서 Today’s English Version》가 그와 같은 목적으로 번역되었다.

【한국에서의 성서번역】 한국에 성서가 처음으로 전해진 것은 1810년 알세스트호(號)의 함장 M.맥스웰이 첨사 조대복에게 건네준 한문성서가 그 효시이다. 그 후 R.모리슨, X.A.F.구츨라프, R.J.토머스 선교사 등에 의해 한문성서가 속속 전해졌다. 이후 성서의 한국어 번역은 만주와 일본에서 각각 진행되기 시작하였다. 만주에 와서 선교사업을 하고 있던 스코틀랜드의 선교사 J.로스와 J.매킨타이어가 만주 우장(牛莊)에서 한국인 이응찬·백홍준·서상륜 등의 협력을 얻어 1882년에 《루가의 복음서》 《요한의 복음서》, 84년에 《마르코의 복음서》 《마태오의 복음서》, 85년에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편지》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 등을 번역 출판하였고, 87년에 이르러 《예수교전서》라는 이름으로 신약성서가 완역되어 간행되었는데, 이것이 곧 ‘로스 번역(Ross Version)’이라는 것이다. 한편, 일본에서는 이 수정이 일본 성서공회의 총무인 H.루미스 목사의 도움을 얻어 한문에 토를 단 《현토한한신약성서(懸吐漢韓新約聖書)》를 1884년에 요코하마[橫濱]에 있는 대영 및 외국 성서공회를 통해 출간했는데, 이것은 복음서와 《사도행전》만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어서 그는 85년에 《신약 마가젼 복음셔 언》를 요코하마의 미국성서공회를 통해 1,000부를 간행하였는데, 이것이 H.G.언더우드가 한국에 들어올 때 가지고 온 우리말 성서였고, 언더우드는 그것을 94년에 서울에서 수정·출판한 바 있다. 한국 내에서의 성서 번역사업은 1893년에 공선 성서번역위원회가 조직되어 1900년에 신약이 완역되었으나, 미흡한 점이 많아 1904년에 개역이 완료되었고, 1906년에 다시 수정하여 공인역으로 출판하였다. 이것이 37년 개역성서가 출간될 때까지 사용되었던 성서였다.구약성서는 1910년에 완역되어 11년에 신약성서와 함께 《성경젼셔》로 합본, 간행되었다. 이것은 실로 한국에 그리스도교 선교사가 들어온 지 25년 만에 이루어진 기념할 만한 일이었다. 그리스도교가 구약성서를 번역 완료한 1910년 한국 가톨릭교회는 비로소 한기근 신부가 불가타역을 대본으로 신약성서 중 4복음서만을 번역 완료하여 《성경(四史聖經)》이라는 이름으로 출판하게 되었다. 한기근 신부는 22년에 《사도행전》 《종도행전(宗徒行傳)》을 번역 완료하여 4복음서와 합해서 간행하였다. 신약성서가 완역 출간된 것은 41년의 일이었고, 이 역본이 71년까지 한국 가톨릭교회의 공인역본으로 사용되었다. 한국의 성서번역의 역사에서 가장 뜻있는 일의 하나는 가톨릭교와 프로테스탄트가 합동으로 번역 출판한 《공동번역성서》이다. 68년 ‘신구교 구약성서번역위원회’가 조직됨으로써 번역이 시작된 이 공동번역은 71년 부활절을 기해 신약성서가 출판되었고, 77년 부활절에 때맞추어 구약성서 번역이 끝나 신약과 합본으로 출간되기에 이르렀다. 한국에서 성서의 사역(私譯)은 57년 8월 그리스도교 잡지인 《기독교계》 창간호에 실린 박창환의 《에베소서》 사역이 그 첫 시도였다. 그 후 《빌립보서》 《골로새서》가 사역되었다. 동지 제4호에 김정준의 《시편》 사역이 몇 편 실렸다. 61년에는 복음동지회에 의해 《마태복음》이 출판되었으며, 순수한 국내 성서학자들에 의한 성서번역이 마침내 본격화하였다.

【장과 절】 성서에 오늘날과 같이 장과 절이 구분된 것은 훨씬 후대에 이르러서부터였다. 물론 탈무드 시대 이전에도 유대인들은 회당에서 읽기 위하여 율법은 이른바 파라쇼트(paras퓍)라는 부분들로, 예언서들은 이른바 합타로트(haptar퓍)라는 부분들로 대략 구분한 일이 있다. 또한 그들은 오늘날 절이라고 하는 것과 유사한 프슈킴(p’s엚im)이라는 소규모의 구분도 하였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의 장·절 구분은 카로의 위고(Cardinal Hugo de Caro)에 의해 13세기에 와서야 이루어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장과 절의 구분이 불가타에 채택되었고, R.나탄에 의해 1440년경에 헤브라이어 성서에 채택되었다. 신약성서의 분절(分節) 깊이는 R.스티븐스의 1551년판 그리스어 성서에 처음으로 등장하였다. 이와 같이 성서의 장·절은 독자를 위한 편의제공에 그 목적이 있는 것이므로, 사본에 따라서 절이 다를 수도 있다.

【통일성과 영감】 신·구약 성서가 편집·기록된 기간은 1,000년이 넘는다. 그러므로 성서의 시대적 배경이란 대단히 다양하며, 성서의 66권은 그 쓰인 장소·사람·시대가 다르기 때문에 사상적·역사적·사회적인 배경이 다르고 문체도 다르다. 그러므로 성서의 각서는 따로 그 내용에서 모순되는 경우도 있고, 문화적 또는 윤리적으로 오늘날 우리가 그대로 따르기가 불가능한 것도 있다. 성서에는 근동의 종교의 영향을 받은 부분도 있고 신화적인 요소도 있다. 또 성서 본문은 여러 자료를 모아 편집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에 대한 비평을 하게 된다. 이것이 성서본문비평(Textual Criticism)이다. 구약의 율법서에는 J·E·D·P의 자료가 있고, 신약의 공관 복음서의 형성은 [표]와 같다. 그러나 이렇게 각각 다른 시대·역사·장소·사람·문화 등에 의해서 집성된 성서 66권은 《창세기》부터 《요한의 묵시록》까지 일관되는 통일성이 있다. 이것이 없으면 성서는 하나로 묶어질 수가 없었을 것이다. 성서를 읽을 때는 그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 통일성의 빛에서 읽어야 성서의 바른 뜻을 알 수가 있다. 성서를 통일케 하는 것은 신의 역사이다. 즉, 성서의 능력이요 역사이다. 성서가 인간들에 의해서 각 시대, 여러 장소에서 편집, 기록되었으나 그 인간에게 성령의 역사가 있어서 신은 그 인간을 통해 뜻을 계시한 것이다. 신은 역사의 현실에 현존하기 때문에 그의 계시는 역사로서 나타난다. 그러므로 정치·경제·사회·역사의 배경이 있다. 그러나 그 역사현실에서 신은 그의 의지, 구원의 계획을 나타낸다. 성서의 각 책은 그 시대에 있어서 신의 구원의 경륜·섭리를 계시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서의 다양한 역사적 배경에서 신의 존재, 신의 삶의 양태를 읽게 되면서 신과 인간과의 관계를 보게 되는 것이다. 성서가 신의 영감에 의해 쓰여졌다는 데서 영감설이 나오게 되었는데, 이 영감설에는 축자 영감설(verbal inspiration theory), 기계적 영감설(mechanical inspiration theory)이 있다. 이 영감설은 성서의 모든 글자 하나 하나가 모두 신에 의해 되었고, 인간은 다만 기계같이 받아 쓴 것뿐이라는 설이다. 이 설보다 약간 온건한 설로서 유기적 영감설(organic inspiration theory)이 있는데, 이것은 글자로 적은 부문에 인간의 작용을 인정하나 전체적으로는 신에 의해 쓰여졌다는 것이다. 이 세 학설에 모두 공통되는 것은 성서는 그 문자 하나하나에 오류가 없다는 문자무오설을 주장한다는 점이다. 문자가 무오해야 성서가 신의 말씀이 된다고 믿는 입장이나, 이 설들은 보수주의 신학 계열에서의 주장이고 진보주의 신학 계열에서는 성서 본문비평을 통해 성서의 참뜻을 찾고 본문 회복 작업을 하기 때문에 문자에 오류가 있음은 인정하면서도 성서를 신의 말씀으로 고백한다. 신의 말씀인 이유는 문자에 오류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 책에서 신이 성령을 통해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성서의 이해는 성령을 통해 가능하다.

  항목차례

모세(Mose(s))

 

  이스라엘의 종교적 지도자·민족적 영웅. 구약성서의 맨 앞에 있는 다섯 책인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는 그 내용이 모세와 관련되는 바가 많아 ‘모세 오경(五經:五書)’이라고 일컫는다. 그의 생애에 관해서는 《출애굽기》 《민수기》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며, 《레위기》 《신명기》의 율법(律法)은 ‘모세

출처 : 어둠 속에 갇힌 불꽃
글쓴이 : 정중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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