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s and Writings/문학작품

[스크랩] 성채(城砦) - 쌩 떽쥐뻬리

그림자세상 2009. 12. 5. 13:46
[프롤로그]

* 나의 이야기

나는 베르베르의 왕이다. 나는 사랑의 왕이며 제국이고 천형과도 같은 고독을 친구로 삼는 자이다.

남부사막. 그 황량한 대지를 떠돌던 제국의 삶은 오로지 투쟁뿐이었다.

제국의 백성들은 야영지의 안락 속에서 평화를 누릴 수 있길 소망했다. 그들은 아버지 아들, 어머니와 딸의 두터운 피의 나눔으로 부족을 이루고, 그들만의 피의 빛깔을 지키고자 했다. 그리하여 그들에게는 어떠한 핍박, 어떠한 패배에도 굴하지 않는 강인한 생명력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그러나 나는 완전을 믿지 않았다.

영속하는 삶 속에서 도대체 완전이란 어떤 경우를 말함인가? 이러한 제왕으로서의 번뇌 끝에, 나는 나의 사랑하는 백성들의 가슴 가슴에다 굳센 성채를 지어주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은 시들지 않는 창조의 마음이었다.

야영지의 북쪽 아득한 사막의 저편에서 그대들의 입에서 입으로 오랫동안 전해오는 비옥한 오아시스가 있었다. 그곳에는 신비스러운 성곽 안에 안주한 미개한 종족들이 나름의 닫힌 문화를 누리며 살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정복하기로 마음먹었다. 백성들을 위한 나의 뜨거운 사랑과 욕구가 끝없는 지평선을 향하여 발을 내딛은 것이다.

나는 알고 있다. 내 앞에 놓인 이 기나긴 여정이 끝없이 이어지는 힘겨운 투쟁과 만남과 대화로 나를 지치게 만드리라는 것을. 그 수많은 사람들. 논리학자, 대수학자, 장군, 경찰, 간수, 문둥병자, 창녀, 여왕의 병사^5,5,5^ 하지만 멈출 수는 없다. 이 여정이 나와 나의 제국에 빛나는 창조의 꿈을 싹틔울 것임을 또한 알기 때문에.

그리고 여기 나의 유언과도 같은 이야기를 남긴다. 나는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려 한다.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는 창조의 힘, 그것은 이제 나의 몫이 아니다. 나는 이루었으므로, 너희는 다시 땅을 일구라.


[1] 연민

나는 연민의 정이 인간의 정도를 그르치는 꼴을 너무나 많이 보아왔다.

더군다나 지배자로서의 나는 동정을 받을 만한 대상에게만 어떤 관심을 베풀어야 하는 까닭에, 인간의 마음을 탐색하는 방법을 익혀야만 했다. 그렇지만 나는 대개의 여자들이 겪는 그런 가슴앓이에는 결코 연민의 정을 갖지 않는다. 빈사 지경에 빠졌거나 이미 죽은 사람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한때 부스럼투성이 거지들에게 관심을 기울인 적이 있었다.

젊음의 혈기로 나는 그들에게 자선을 베푸는 이들을 격려하고, 일부러 살갗을 재생시키는 향유와 약을 대상들에게서 구해주곤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나의 동정이 무가치한 것이었다는 것을 알고나서부터는 그 일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거지들은 자신들의 몸을 인내심 없이 긁어대고는, 진흙이나 짐승의 똥으로 축여대곤 했다. 그들은 부자들이 사치에 매달리듯 자신들의 악취와 부스럼에 어떤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더러운 자신들의 상처를 내보이면서, 거지들은 동냥받은 돈을 서로에게 자랑하는 것이었다.

그 중에서 가장 많이 적선받은 거지는 그들 세계에서 성당의 대사제와도 같은 존재로 군림하는 듯했다.

그러다가 누군가가 그에 대한 연민으로 몸을 씻어주고 약을 발라 줄 양이면, 스스로가 매우 중요한 존재라도 되는 것처럼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러나, 약의 효험이 나타나 부스럼이 없어지고 악취마저 희미해지기라도 할라치면 스스로 소외되어 애당초 자신의 가장 중요한 무기인 부스럼이 다시 돋아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무슨 짓이든 서슴지 않았다. 그래서 그 험한 육체에 자줏빛 꽃이 찬란하게 피어나면, 마치 잃어버렸던 자신의 소중한 명예를 회복한 듯한 몸짓으로 거만하게 쪽박을 들고는, 너절한 신의 이름을 들먹이면서 구걸 행각에 나서는 것이었다.

나는 여인들이 전사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광경을 본 적이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그녀들을 더욱 실망시켰던 것은 우리들 자신이었다.

당신은 살아 돌아온 자들이 거들먹거리면서 자신들의 무훈을 뽐내느라 소란 떠는 꼴을 보았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에게도 그 무시무시한 종말이 왔을 수도 있었다고 외치면서 동료들의 죽음을 자신들의 훈장인 양 과시하곤 했다.

나 또한 그들처럼 젊은 시절, 적과의 싸움으로 생긴 이마 주위의 상처를 자랑처럼 내보이면서 다닌 적이 있었다. 죽은 전우의 시체와 그들의 절망을 마치 내 것인 양 떠벌리면서, 고향으로 금의 환향했던 것이다.

그러나 피를 토하거나 내장을 움켜쥐고 안간힘을 쓰면서 죽음에 직면한 사람들이 발견하는 진리란 단 한 가지뿐이다. 그것은 죽음이란 결코 두려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육체는 순간에 무용지물이 되고 이젠 더 사용할 수 없이 고장난 도구처럼 보인다.

의식은 밀물과 썰물처럼 오락가락하기 시작한다. 그 기억의 조수는 마음의 해초를 끌어올렸다가 다시 물에 잠기게 하며, 정적으로 죽음을 예비하므로, 마음은 평정을 되찾고 결국 신의 흔적을 찾아가게 마련이다. 그들은 결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기꺼이 맞이했던 것이다.

내가 왜 그들에게 연민을 가져야 했을까? 왜 내가 그들이 인생을 마감하는 것을 보고 눈물을 짜면서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했을까?

나는 죽음의 극치를 너무나도 자세히 목격한 적이 있다. 열일곱 살 때의 일이었다. 사람들이 어떤 소녀를 내게 데려다주었는데, 그녀는 그 순간 이미 어둠의 세계로 나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는 영양처럼 달리고 난 뒤였는지 매우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참으려고 해도 참을 수 없는 기침을 옷에다 쏟아내기 시작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애써 넘어오는 기침을 참으며 내게 미소를 지어보였던 것이다.

아아, 그때 그녀의 미소는 강변의 산들바람이었다. 그 미소는 꿈의 나래였으며, 물가를 가늘게 날아가는 백조의 순결하고 고아한 흔적이었고, 그 백조의 깃에서 뿌려진 투명한 물방울이었다.

내 아버지의 죽음 또한 그러하였다.

찬란한 인생을 마감하고 돌이 되어버린 나의 아버지. 암살자의 날카로운 단검은 아버지의 육체에 덧없는 종말을 안겨주지 못하고, 오히려 그를 위엄으로 충만케 하였다. 암살자는 머리칼이 순간 하얗게 되어버렸다고 한다.

자기로 인한 희생자가 아니라, 아버지가 스스로 만들어 놓은 침묵의 덫, 거대한 대리석 관과 마주하는 살인자는, 죽은 자가 꼼짝하지 않고 있다는 단지 그 사실 때문에 새벽까지 그 관 앞에 고개 숙여 엎드려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단숨에 영원의 시간 속으로 떠난 나의 아버지는 숨을 거두었으면서도 다른 사람의 마음을 사흘 동안이나 멈추게 해놓았다. 그를 땅에 묻고 나서야 우리들은 혀가 비로소 풀렸다. 그는 우리를 통치하지 않으면서도 우리에게 크나큰 영향력을 과시할 수 있었던 인물이었다.

우리는 그를 매장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하나의 신처럼 이 제국의 뿌리가 되어 땅 속에 봉인되었을 뿐이었다. 내게 죽음을 가르쳐주고, 어린 시절 나로 하여금 죽음을 직시할 수 있게 해주었던 이는 바로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결코 눈길을 흐트린 적이 없었다. 어쩜 독수리의 피를 가진 인간이었는지도 모른다.


[2] 아버지와의 대화

시간 속에 용해되고 모래로 화해버린 세월이 삼켜버린 유령들을 내가 발견한 것은, 아버지가 나에게 죽음을 가르쳐주기 위해 나를 말에 태워 어떤 장소로 데리고 간 때였다.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그 곳에는 샘이 있었단다."

그 샘은 굉장히 깊었기 때문에 단지 하나의 별밖에는 비치지 않았다. 그 밑바닥은 진흙까지 굳어버렸기 때문에 거기에 비치던 별은 빛을 잃어버렸다. 샘은 별빛이 사라지면 마치 복병처럼 길가는 대상들을 충분히 함몰시킬 수 있을 정도였다.

좁다란 샘의 통로로 사람들과 가축들이 살아있는 채로 스러져 가는 순간의 전율이 나에게까지 다가왔다. 터진 짐꾸러미와 다이아몬드와 금덩이들과 함께 죽음의 영역으로 침몰해가는 영혼들의 영상이 뚜렷하게 그려졌던 것이다.

"너는 초대받은 사람들과 연인들이 모두 떠난 뒤의 잔칫집이 어떤 꼴인지 알고 있을 것이다. 새벽이 되면 그들이 남겨놓고 떠난 무질서한 모습을. 술병들은 깨어지고 어지러진 식탁과 지저분하게 꺼진 모닥불의 흔적. 그러나 이런 모든 것들의 흔적을 읽는 것만으로 너는 인간의 사랑을 판단하지는 못할 것이다."

아버지는 계속 말씀하셨다.

"네가 예언서의 책장을 넘기다가 인물 소묘나 황금빛 삽화에서만 신경을 쓴다면 성스러운 예지, 즉 본질적인 진리를 놓쳐버리게 될 것이다. 양초의 생명은 자취를 남겨놓는 밀랍덩어리가 아니다. 그것은 빛 그 자체에 있다."

이윽고 황량한 넓은 고원에 다다랐을 때, 그곳에는 고대의 신전과 그 제물들의 참혹한 자취가 널려져 있었다. 내가 두려움에 몸을 움츠리자 아버지는 다시 다시 입을 열었다.

"잿더미 속에는 아무것도 없다. 이 시체들에 지나친 관심을 기울이지 마라. 여기에는 인도하는 사람이 없어 진창 속에 영원히 빠져버린 수레들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면 누가 제게 생명의 진실을 가르쳐 주나요?"

"대상의 본질을 그들이 다 없어지고 나서야 발견되는 법. 네 귀에 들려오는 온갖 풍문은 흘려버려라. 절벽이 있다면 돌아갈 것이고, 바위가 있다면 피해갈 것이며, 모래가 지나치게 가느다랗다면 다른 단단한 모래땅을 찾아서 가되 늘 같은 방향을 따라갈 것이다. 나귀가 지쳐 쓰러져 집이 땅에 떨어지면, 그들은 걸음을 멈추고 부서진 상자를 주워 모아 다른 짐승의 등에 싣고는 계속 발걸음을 옮길 것이다. 안내자가 도중에 죽는 일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즉시 다른 사람을 지도자로 세울 것이다. 그리하여 필연적으로 더 높은 곳을 향하여 움직이게 되면, 대상은 보이지 않는 언덕 위에 선 육중한 돌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면서 아버지는 나의 엉덩이를 두드리셨다.

"아들아, 인간은 나무와도 같다. 그것은 씨앗도 아니고, 가지도 아니며, 바람에 흔들리는 줄기도 아니고, 또한 죽어버린 땔감도 아니다. 그것을 알려고 나누고 쪼개보아도 아무것도 알 수 없을 것이다. 너 또한 마찬가지니라. 신은 너를 태어나게 하셨고, 자라나게 하셨으며, 희망과 후회, 기쁨과 고통, 분노와 용서로 끊임없이 너를 채워주실 것이고, 결국에는 너를 신의 품안으로 데리고 가실 것이다. 너는 학생도 아니고 남편도 아니고 아이도 아니며 노인도 아니다. 너는 이루어지고 있는 인간이다. 네 자신이 올리브나무의 흔들리는 가지임을 알게 된다면 너는 영원을 맛보게 되리라. 네 주위의 모든 것들이 영원하다는 것을 알게 되리라. 네 조상들, 네 곁의 샘물, 너를 향한 사랑하는 여인의 눈빛이나 밤의 신선함 이 모두가 영원함을 알리라."


[3] 인간의 성채를 지으리라

이제 내가 성채의 가장 높은 탑 꼭대기에 올라보니 신의 품안에서는 고통도 죽음도 또 장례까지도 서러워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만약 살아있는 자에 대한 추억이 살아 있다면, 그것은 그 사람 자체보다도 실존적이고 또 위대한 그 무엇이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런 까닭에 나는 인간들의 고뇌를 이해하게 되었고 그런 인간들의 존재를 불쌍하게 여기게 되었다. 침묵하는 시간 가운데 홀로 깨어나 신의 별 아래 자신이 보호되고 있다고 믿다가는 불현듯 먼 여행길에 서있는 그런 인간들을 말이다.

도둑들의 마음과 그들의 절망적인 상태를 이해하면서도, 그들의 죄 많은 영혼까지 구해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나로서는, 그들을 죄악으로 인도하는 불안감까지는 어쩌지 못하겠다. 왜냐하면 그들이 무턱대고 다른 사람의 황금을 노리고 있지 않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모르는 사랑은 그들이 절대로 포착하지 못할 어떠한 빛을 위한 사랑인 것이다. 그들은 마치 샘물에 비친 달을 꺼내려고 샘물을 퍼내는 사람과도 같다.

그들의 초조와 공포에 대해선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노리는 어떤 장소에 자신들을 만족시켜 줄 만한 무엇이 있으리라. 그래서 꿈꾸며 밤의 행각을 계속하는 것이다. 내 충실한 부하들은, 가슴을 두근거리며 행운이 자기를 돌봐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그 도둑들을 계속 체포하게 될 것이다.

나는 그들을 내 사랑으로 감싸주리라.

나는 그들이 자신이 좁다란 일터에서 무엇을 추구합네 하는 사람들보다 더욱 열정적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나는 이 도시의 주인이다.

사랑은 그 대상을 찾아내야만 한다. 나는 지금 이 시간에 존재하는 것을 사랑하는 사랑, 또 만족할 줄 아는 사람들을 구해주리라.

내가 결혼이란 계약으로 여자들을 제약하고, 또 간통한 여인에게 돌을 던지도록 한 것도 다 이런 이유에서다. 나는 그 여자의 욕망을 이해하고 있으며, 또 그녀가 자신을 위하여 어라나 그 모험이 필요한지도 잘 알고 있다.

나는 그녀의 마음 속에 있다. 따라서, 그녀는 아득한 초원 속에 갇힌 채 사형 집행인을 기다리는 신세가 될 뿐이다. 모래 위에 잡혀 올려진 송어처럼 그녀의 심장이 뛰는 소리를 나는 듣는다. 그녀는 밤을 향하여 소리친다. 그러나 아무 보람도 없이 메아리만이 공허하게 울리리라.

도대체 그 순간 그녀를 만족시켜줄 만한 사람이 누구란 말인가. 아무리 자유롭게 남자를 바꾸도록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사랑에 빠진 사람은 그 만남의 미래를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나는 평화에 대하여 오랫동안 명상한 적이 있다.

방금 태어난 아기나 가을의 수확, 그리고 정돈된 가정의 행복은 위대하다.

그것들은 평화롭다. 가득 찬 곳간, 잠들어 있는 양들과, 방 안의 잘 개어 정돈된 옷가지는 완전한 평화이다. 일단 완성된 후 신에게 봉헌되는 것들의 평화.

인간은 성채와 아주 흡사하다. 성채는 누군가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서 무너뜨려지고, 또 천장에 별이 보이는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때의 어떤 상실감이 고뇌를 부르게 된다.

불타고 있는 포도넝쿨의 향기나 털을 몽땅 깎아주어야 하는 양으로부터 자신의 진리를 찾아내는 일, 진리는 우물처럼 깊이 파는 것이다. 시선이 산만해지면 신의 영상을 잃게 된다.

마음이 한 곳에 모여 양털의 무게만치밖에 모르는 현인들도, 밤의 죄악 속에서만 마음이 열린 간부보다 신에 대하여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성채여, 나는 인간의 마음 속에 그대를 건설하리라.

현실의 평화를 더욱 다듬어야 한다. 나는 땅의 틈바구니를 메워서 인간에게 화산의 자취를 숨기는 자이다. 나는 심연 위에 펼쳐져 있는 잔디밭이다. 나는 신에게서 한 시대를 위임받아 강을 건네주는 사공이다.

신은 내게 맡길 때보다 훨씬 현명하고 성숙된 그들을 되돌려 받게 될 것이다.

나는 내 백성들을 내 사랑 안에 머물게 할 것이다. 따라서, 나는 이전 세대의 상처를 치료하는 이를 옹호한다. 이름 없이 읊어 내려온 조상들의 시에 자신의 호흡과 영혼을 집어넣는 이를 나는 사랑한다. 나는 임신한 여인이나 젖먹이는 여인을 사랑하며, 대를 이어 번창하는 짐승들을 사랑하고, 언제나 다시 돌아오는 계절을 사랑한다. 나는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오! 성채여, 나의 고향이여. 나는 사막의 폭풍으로부터 이들을 지키리라. 침노하는 적의 위협에 대비하여 성채, 네 주위에 나팔수들을 세우리라.


[4] 진실, 사람들은 집에서 살고 있다.

나는 크나큰 진리를 발견하였다. 인간들은 집에서 살고 있다는 것, 그들에게는 사물의 의미가 집의 의미에 따라서 변한다는 것 말이다. 마찬가지로 길이나 보리밭, 언덕의 능선들 역시 그것들이 한 영지를 이루고 있는가 아닌가에 따라서 의미가 달라진다. 왜냐 하면 이 잡다한 것들이 모여서 인간의 마음에 하나의 무게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신의 왕국에 사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전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을 비웃으며, 재물이 없는데도 누군가가 확실히 재물을 추구한다고 믿는 이들은 크나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만일 그들이 그 가축떼를 무턱대고 탐낸다면 그건 자만심이 그의 심중에 살아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거기에 양, 염소, 보리, 밀 그리고 산이 있습니까? 그 외에 다른 무엇이 또 있나요?"

나는 그들이 도살자나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생명이란 그들 같은 부류로서는 도저히 발견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다. 내 영토 안에 존재하고 있는 어떤 것들, 하다못해 미물조차도 그들의 썩은 머릿속에 있는 그 무엇과도 다르다는 것과, 내가 안주하고 있는 이 영토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라는 것을 알 때, 행복을 알리라. 그들은 각자의 집에서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모든 거주 장소는 공간 속에 존재할 뿐이다. 그 때문에 흘러가는 시간이 한 줌의 모래처럼 우리를 기진맥진하게 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더욱 안온하게 해준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진정 좋은 일이다.

시간은 하나의 건축이다. 따라서 나는 이 축제에서 저 축제로, 이 기념일에서 저 기념일로, 이쪽 포도밭에서 저쪽 포도밭으로 돌아다닌다. 그것은 마치 내 어릴 적에 그 발자국 하나하나가 어떤 의미로 남아있는 내 아버지의 궁전회의실에서 휴게실로 뛰어다니던 것과 같다.

나는 진실만을 이야기한다. 그 진실로부터 태어나는 것은 인간이다. 내 제국의 풍습과 법률과 언어, 나는 거기에서 의미를 찾지는 않는다. 사람들이 돌을 모으면서 창조하는 것은 바로 침묵이다. 그 침묵은 돌 틈에서 이해되는 것이 아니다. 무거운 짐과 가면을 통하여 인간은 생기를 얻는다. 시체를 해부하여 그 뼈와 내장의 무게를 재는 사람은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따라서 나는 소위 유식한 자들과의 토의를 감연히 거절한다. 그것을 통하여 증명될 수 있는 것은 단 한 가지도 없기 때문이다.

내 백성의 언어여. 나는 썩지 않도록 그대를 구하리라.


[5] 지배자의 논리, 인간들의 배(1)

나는 우두머리다. 나는 지배자다. 나는 책임자다.

우두머리란 타인들을 구원해 주는 사람이 아니라, 그를 구원하도록 타인들에게 촉구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왜냐하면 나의 양, 염소, 집, 산 들 사이에 어떤 조화가 이루어지는 것은 나의 힘이며 나의 능력이며 나의 의자에 의한 것임을 내 스스로 잘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백성들은 나의 모든 것에 애정을 느끼고 있다. 저들이 처음에는 전혀 알아보지도 못했던 어느 여신이 부드럽고도 강렬한 햇빛을 배경으로 그들에게 실바람 같은 가슴을 열 때, 그 여신에게 자신도 모르게 도취되듯이, 마침내 그들은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룩해놓은 이 모든 현상들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들은 내가 창조한 집에 애정을 가지고 있다. 동상을 사랑하는 사람과 찰흙과 벽돌, 그리고 청동의 질감에는 아무런 감정이 없으면서도 어떤 조각가의 작품에 대해서는 무한정 몰입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나는 백성들이 자신들의 집을 잘 알아볼 수 있도록 그들의 사물들을 넣어둔다.

그러면 그들은 피와 땀으로 그 집을 살찌우리라. 그 집은 그들에게서 그들의 피와 어쩌면 육신까지도 요구하리라. 그 집은 아버지와 아들의 의미를 일깨워 줄 것이며, 어머니와 딸의 정을 돈독히 해주는 공간이 될 것이다. 그 집에서 사랑은 피어나리라.

만일 내가 별들에게까지 하나의 의미를 줄 수 있을 정도의 커다란 집을 지을 줄 안다면, 그리고 밤에 그들이 집 문턱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찬란한 빛을 밝힌다면, 사람들은 이 별의 항해를 그처럼 잘 인도해주신 신에게 감사할 것이다.

또 내가 그 집을 오랫동안 생명을 보전할 수 있도록 튼튼하게 짓는다면, 그때에 이르러 그들은 자신들의 미래를 예지할 것이며 다양한 삶을 통하여 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성채여! 그래서 나는 그대를 배처럼 만들었노라. 나는 바람 같은 시간 속에다 그대를 못박고, 돛을 올렸으며, 밧줄을 늦추었노라.

인간들이여! 그대들은 나의 배가 없으면 영원조차 없으리라.

나는 나의 배를 위협하는 무엇인가를 잘 알고 있다. 나의 배는 언제나 어두운 바다의 풍랑에 가이없이 흔들리곤 한다. 그리고 수많은 외부적인 조건들에 의해 파괴될 요인을 갖고 있다. 왜 그런가? 예로부터 하나의 위대한 성전이 그 가치를 잃게 되면, 또 다른 위대한 성전을 건축하기 위해 본래의 성전을 부수고 벽돌을 빼내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러나 그렇게 지은 성전이 본래의 성전보다 낫다거나 부족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무너진 돌무더기 위에는 어떠한 역사도 씌어 있지 않다는 말이다. 거기에는 오로지 침묵만이 흐르고 있을 뿐이다.

그리하여 나는 숙련된 뱃사람들이 배에 오른 주인을 잘 도와주기를 원하는 것이다. 대대손손 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그 성전에 만족하지 못하고 자꾸 새로이 지으려 한다면, 나는 결코 나의 성전을 아름답게 완성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6] 지배자의 논리, 인간들의 배(2)

숙련된 뱃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에게 도움을 주도록 하는 것은, 인간들의 건축물 자제를 위한 나의 배려이다. 그 배의 주위에는 맹목적이며 완전하게 자유토록 거대한 힘, 즉 자연이 살아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변덕스러운 자연을 사람들은 가끔 지나칠 정도로 잊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배가 절대적인 안전과 미래를 보장하고 있으리라는 착각에 빠져있곤 한다. 그들은 바다에 있으면서도 바다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하나의 장식물 정도로 치부해버리곤 하는 것이다. 바다는 신의 선물이며, 언제나 자신들을 감싸안는 어머니와도 같은 존재로 언제까지나 남아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한 그들의 생각은 완전한 착각일 뿐이다.

어떤 조각가는 돌을 통해서 그들에게 자신의 내면을 보여주었다. 다른 조각가는 또 다른 형태의 영혼을 각인하였으리라. 하늘을 바라보라. 우리의 상상 속에서 태어난 백조좌를, 이제와서 어떤 아리따운 여인의 자태로 상상할 수 있겠는가? 결국 우리가 만든 어떤 상은 그 스스로의 생명력으로 되레 우리를 사로잡아 버린다.

이런 일은 우리 삶의 도처에서 발견된다.

나는 악당들이 어떻게 나의 백성들을 속이고 희롱하여 우리의 본성을 위협하는지를 잘 알고 있다. 곡예사라든지, 손가락을 잘 놀려 얼굴 모습을 만드는 자 등등, 그 광대들이 노는 꼴을 넋이 빠져 보는 자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잊어버리게 마련이다.

내가 그들을 붙잡아 목을 베도록 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기억하라. 나의 율법사들이 그 곡예사의 잘못을 증언해서가 아니다. 곡예사는 엄밀하게 추적한다면 사실 잘못한 것이 없다. 그러나 그가 옳은 일을 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단지 내 마음을 흔들리게 하는 현명함과 정당함이 그 현실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게 목숨의 안개가 걷힐 지경에 이른 자들이여. 너희들이 나보다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미련한 짓이다. 너희 손에서 태어난 참신하고 덧없으며 찬란한 시간들, 그리고 오랜 신앙으로 쌓인 오만을 결코 내게 제시하려 들지 말라.

너희들의 구조물은 아직 이루어지지도 않았다. 그러나 나의 구조물은 이미 존재하고 있지 않느냐. 내가 곡예사를 비난하고 목배어 내 백성들을 타락에서 구하고자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인간들이여, 내 이 말을 명심하라.

자신들의 배에 더 이상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자, 그 안에 살아있는 자신을 되돌아 보지 못하는 자, 이미 요새의 담장이 허물어졌도다. 마침내 잔잔한 바다에 솟아 올라 그 어리석음을 잠재워 주리라.


[7] 삶과 시간

나는 무엇인가 안정된 것이 세대를 통해 지속되지 못할 때에는 흘러가는 시간이란 모래 시계와 같이 아무런 의미도 없이 날아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내 백성들과 함께 견고하고 영원한 무엇인가를 완성해야 한다는 자각에 도달했던 것이다.

나의 거소는 비좁다. 과거를 살다 사라진 파라오들의 자취를 보라. 가이없는 세월을 굳건하게 버티고 선 저 거대한 피라미드를 지어 소멸하는 시간을 정복한 이들을 향기를 맡아보라.

나는 가끔 대상들이 찾아가는 광막한 사막의 한 곳에서 모래바람이 불고 난 후 거대한 성전이 솟아오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 성전은 보이지 않는 푸른 파도가 그 마스트를 파괴하여 이젠 서서히 침몰하면서도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배와 같다. 결국 침몰을 면할 수는 없으리라.

그러나 그 성전에는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인간의 생명을 다 바쳐 이루어진 금은 보화가 있으며, 세대를 거쳐 전해내려 온 늙은 장인들의 혼이 서린 작품이 있고, 또 할머니들이 성직자들을 위하여 눈을 부비며 만들어낸 화려한 제단보가 있다. 그 수놓은 제단보들을 할머니들이 굳어져가는 몸을 이끌고 잔기침을 하며, 죽음에 흔들리면서, 남겨놓은 긴 옷자락 같은 것들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간직한 성전도 영원히 지속되지는 못하리라.

광활한 이 초원, 이 오래된 과거의 유물을 보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어쩜, 이렇게 아름다운 자수를 놓을 수 있을까?"

그렇다. 할머니들은 이미 이 땅의 대지가 되고 바람이 되었다. 자신들이 그처럼 놀라운 재주를 가졌다는 것을 알지도 못한 채...

나는 이처럼 우리가 발견한 소중한 것들을 위하여 커다랗고 튼튼한 궤짝을 만들어야겠다. 그것을 운반하기 위한 마차도.

그것은 내가 인간들의 생명보다도 더 오래 지속되는 모든 것들을 더욱 존경하기 때문이다. 이제 그들은 교환의 의미를 보전하게 될 것이고, 그들의 모든 것을 내맡기는 거대한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나는 저녁 때마다 나의 백성들과 함께 내가 품고 있는 고요한 사랑을 나눈다.

나는 허망한 빛으로 자신을 불태우는 사람들에 대해서만 불안을 느낀다. 그들은 마치 시에 대한 사랑이 가득하나 진정 시를 쓰지 못하는 시인과 같고 사랑을 품고 있으면서도 선택할 줄 모르므로 변화할 수 없는 여인과 같다.

삶이란 그런 것이다. 그 노파에게 자수를 잘못 놓았다고 탓하는 몰상식한 인간이 있다면, 그는 노파가 다른 더 아름다운 무엇을 짤 수 있으리라는 구실로, 창조보다는 허무의 편에 서게 되는 것이다.

나는 인식한다. 조용한 가운데 천천히, 또 거의 생각지 않아도 무르익는 야영지의 여러 가지 냄새를 맡으며 나의 기도가 하늘에 닿는 것을 느낀다. 자수나 꽃은 과일이 되기 위해서 우선 시간 속에 몸을 담그는 것이다.

오랫동안 산책을 하며 나는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내가 다스리고 있는 이 제국은 먹을 것에 대한 욕구보다는 의무의 성격과 작업의 열정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것. 그것은 소유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헌납에 의하여 이루어 진다는 것.

사물 속에서 그 자신을 재창조 하며, 반면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영원 불멸의 장인은 문명인이다. 또한 싸우면서 그 자신과 제국을 맞바꾸는 자 역시 문명인이다.

그러나 어떤 이는 아무런 창조의 노력도 없이 자신의 몸을 사치품으로 휘감으며 남이 써놓은 시를 읽곤 한다. 스스로 땅을 일구지 못하고 노예의 힘에만 의존하는 타락한 인간들도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남부 사막이 태고적의 빈곤 가운데서도 언제나 활기찬 종족을 탄생시킬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러한 인간들과의 투쟁을 위해서이다. 이 종족들은 힘들이지 않고 구할 수 있는 식량을 따라 북으로 전진할 것이다.

나는 마음이 늘 한 궤도에서 움직이지 않는 사람은 좋아하지 않는다. 개선 없이는 완성도 없다. 인생은 그런 사람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할 것이다. 시간은 그런 사람들에게는 한 줌의 모래처럼 흘러가버려 그들을 파멸로 이끌 뿐이고.

나는 그들의 이름으로는 신에게 아무것도 바칠 것이 없다.

골목을 따라 걷는다. 어떤 집의 문 틈으로 하녀를 야단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에게는 그 야단치는 분노가 옳은지 그른지에 대해서는 별 느낌이 없다. 다만 그 열성만이 느껴질 뿐이다.

샘가에 어린 소녀가 웅크리고 앉아 얼굴을 파묻고 울고 있었다. 나는 가만히 다가가 그녀의 머리에 내 손을 얹고 그녀의 얼굴을 내게로 돌렸다. 그러나 그녀의 슬픔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 역시 돼 자신이 어째서 우는지 모르리라고 나는 단정하였기 때문이다.

슬픔은 늘 흘러가게 마련이다. 그것은 황급히 흘러가는 슬픔이며, 그르쳐진 시간으로 이루어진 채 잃어버린 고리의 슬픔, 또는 이제 더 이상 아무 도움도 안 되는 시간에 속하는 그녀 동생의 죽음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녀에게 있어 슬픔의 본질은 무엇일까?

그녀가 늙으면 연인과의 이별이, 그녀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현실과 주전자와 울타리에 둘러싸여진 집, 그리고 젖 먹이는 아이들을 향한 잃어버린 길의 집. 시간은 갑작스레, 마치 모래가 모래 시계의 좁은 틈을 따라 거침없이 떨어지듯이, 그녀의 인생을 가로질러 무심하게 흘러갈 뿐이다.


[8] 오아시스를 향하여

나는 깨달았다. 한 장소에서 영원히 편안한 삶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은 아리따운 환상이라는 것을, 모든 인간들의 거주지는 본질적인 위험에 직면하고 있다.

그대가 산 위에 세운 성전을 보라. 그 성전은 북풍에 굴복하여 오래된 이물처럼 차츰차츰 마멸되어서 이미 무너지기 시작한다. 모래가 쌓여가는 그 건축물은 점차 모래로 변해갈 것이다. 그대는 성전이 서 있던 자리에 바다처럼 펼쳐져 있는 황금빛 사막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모든 건축물과, 양과 염소, 그대의 집, 나의 왕궁 역시 마찬가지다 그것들은 내 사랑의 우선적인 양식이다. 그것들은 왕의 얼굴에 집약되고 있어서, 만약 왕이 죽게 되면 모두 분해되고 말 것이다. 그리하여 왕은 새로운 조각가들에게 제공된 뒤죽박죽의 조각 재료가 될 것이다.

사막의 조각가들은 이 재료를 가지고 하나의 새로운 모습을 창조 해낸다.

그들이 마음 속에 품고 있던 어떤 영상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그 재료의 흐트러진 성격을 정돈해 주기 위해 올 것이다.

그와 같이 나는 나의 법칙에 맞게 행동하였다. 내가 원정갔던 시절의 휘황하던 바, 나는 그 찬란하던 기억을 아무리 뛰어난 언어로 표현한다 해도 다하지 못할 것 같다.

처음으로 가보는 사막 위에 삼각형의 캠프를 치고 밤이 되기를 기다려 언덕에 올라갔다. 그러고는 나의 전사들과 말과 무기들을 집결 시켜놓은 마을의 광장보다 조금 큰 검은 진용을 바라보면서, 우선 그것들의 취약점을 생각해 보았다.

사실, 하늘색 장막 아래 거의 발가벗은 채 이미 별들도 잡혀 있는 밤의 추위를 견디면서, 가죽부대의 한 모금도 안 되는 물로 지독한 갈증을 견뎌야 하고, 한 번 일어나면 그 거대한 힘을 과시하는 사막의 폭풍을 피하면서, 마침내는 사람의 육신을 익어버리게 하는 뜨거운 태양에도 위협받는 저들보다 더 비참한 지경을 당한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

그래서 사람은 검불에 지나지 않는 모양이다. 무기를 들고 훈련받아 겨우 단단해진 육체로 금역의 땅 위에 벌거벗고 누워서는 푸른 천을 두르고 있는 저들보다 더 비참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렇지만 이러한 취약성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나는 그들을 뭉치게 하여 멸망해 버리지 않게 구원해주었다. 밤 동안에 단지 삼각형의 형태를 정돈하면서, 나는 그것과 사막을 구별할 수 있도록 하였다.

나의 야영지는 주먹처럼 꽉 닫혀져 있었다. 나는 조약돌 사이에 서있는 삼나무가 파괴로부터 자신의 무성한 가지를 구원해내는 걸 보았다. 삼나무는 매순간 스스로 자신을 만들어가고 있다. 그는 밤낮으로 자신의 둔중한 내부 속에서 투쟁을 하여야 했고, 적진 속에서 영양분을 탈취해야 했다.

나는 야영지가 잠들어 버리거나 망각 속에서 해체돼 버리지나 않을까 두려워, 사막의 소음을 정탐하는 보초병들을 그 옆에다 배치해 두었다. 삼나무가 자신의 영역을 넓히려고 자갈밭을 흡수해 삼나무 밭으로 변화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의 야영지는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생명력을 얻어야 한다.

밤의 교환.

아무도 그가 오는 소리를 듣지 못하였는데 모닥불가에 불쑥 나타나 웅크리고 앉은 조용한 사자들에게 축복이 있기를!

이들은 북부로 전진하고 있는 사람들의 행로라든가, 약탈당한 낙타를 추적하러 남부로 간 족속들의 행로, 살인죄 때문에 다른 사람들 집에 일어났던 소동, 그리고 특히 베일에 숨겨져 침묵을 지키고 밤이 오는 것을 관조하는 사람들의 계획을 이야기해 해준다.

당신은 자기 침묵을 이야기하러 오는 전령들의 이야기를 들은 일이 있을 것이다.

우리들의 모닥불가에 그처럼 느닷없이 그처럼 음침한 말을 가지고 나타나면, 불이 곧 모래 속으로 묻혀버리고, 사람들이 화약으로 야영지를 장식하면서, 자기들의 총기에 배를 깔고 누워버리게 한 사람들에게 꼭 축복이 있기를! 밤은 기적을 잉태하는 법이다.

나는 정복해야 할 오아시스를 향해 나의 군대를 이끌고 갔다.

인간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라면, 그 자는 오아시스에 가서도 오아시스에 대한 찬미를 늘어놓았을 것이다. 오아시스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주거지를 모르고 있다. 오아시스를 발견해야 하는 것은 사막에서 괴로움을 당하는 사막의 비적의 가슴 속에서이다. 왜냐하면, 내가 그 사람들에게 사랑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내가 병사들에게 말하기를,

"그대들이 오아시스에 가면 향기나는 풀과 샘물의 노래에, 날렵한 암사슴처럼 두려워 도망치지만, 결국에는 사로잡히기를 원하는 부드럽고 길다란 베일을 쓴 여인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또 나는 이렇게 말하였다.

"그 여자들은 그대들을 증오한다고 생각하며, 그대들을 쫓아내려고 이빨과 손톱으로 저항하리라. 그렇지만 그녀들의 푸른 머리카락을 그대들의 굵은 주먹 안에 꽉 쥐면, 그녀들은 곧 양순해질 것이다. 그럴 때면 힘을 부드럽게 사용하라. 그녀들은 그대들을 잊으려고 다시 눈을 감을 것이고, 비로소 그대들의 침묵은 독수리 그림자처럼 그녀들을 누르리라. 그때에 이르면 그녀들은 눈을 들어 그대들을 볼 것이고, 그녀들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이는 것을 보게 되리라. 그대들은 그녀들의 무한한 공간이 될 것이다. 이럴진대 그녀들이 어찌 그대들을 일을 수 있겠는가?"

나는 결론적으로 이 천국에 대하여 병사들을 열광시킬 작정으로 이렇게 이야기 하였다.

"그대들이 그 곳에 가면 종려나무 숲과 온갖 색깔의 새들을 보리라. 오아시스는 그대들의 것이다. 왜냐 하면, 그대들이 추적하는 자들은 그것을 가질 만한 자격이 없으며, 오직 그대들만이 마음속에 오아시스에 대한 찬미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여인들은 동그랗고 흰 조그마한 자갈들 위로 흘러가는 시냇물에 빨래를 하면서, 어느 축제를 축하할 때에는 언제나 그렇게 어떤 서글픈 의무를 수행해야 하는 것이라고 알고 행동한다. 모래 속에서 잔뼈가 굵어지고 햇볕 속에서 수척해지며, 염전이 타는 듯한 껍질로 절여진 그대들이여. 그대들은 여자들과 결혼하여 양 허리에 주먹을 대고는 그녀들의 푸른 물 속에서 속옷을 빠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승리자의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

이제 오아시스는 더 이상 피신처가 아니라 사막 위에서의 낙원이리라. 그대들은 이미 그들을 정복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비축해놓은 식량에 만족하여 그만 이기주의의 늪 속에 빠져버렸다. 그들은 그 오아시스의 입구에서 잠든 보초를 교대시키고 그들을 선동하려고 애쓰는 성가시고 귀찮은 사람들을 비웃으면서, 그들은 둘러싸고 있는 사막의 영예 속에서 단지 오아시스를 위한 장식만을 보는 것이다.

그들은 재물로 인한 행복의 환각 속에 빠져 있다. 그러나 행복이란 행위의 열기와 창조의 만족에 불과한 것이 아니던가? 이제 그들은 스스로 노예의 나락에 빠질 준비가 완벽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마지막으로 강조하였다.

"오아시스가 일단 정복된 후라 할지라도, 사실상 변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명심하라. 우리에게 있어 그것은 사막에서의 또 다른 형태의 야영일 뿐이다.

나의 제국은 언제나 위협받고 있다. 염소며 양, 거처, 저 산들이 이 제국의 바탕이요, 우리를 동여매는 끈이라는 사실을 알라. 이것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줄이 끊어진다면, 난잡한 물질만이 남아 적들의 약탈을 피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을."


[9] 자비

나는 인간을 통한 신의 권리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기지와 종양이라든지, 그들의 세계에서는 우상처럼 존경받는 추태에 관한 권리를 나는 미처 생각지 못하였다.

바다까지 흘러가는 하수도처럼, 나는 언덕 중턱의 더러운 마을의 언덕배기를 지나가고 있었다. 골목길로 통하는 통로에서 역한 냄새가 풍겨 나왔다.

거기에는 어떤 문둥병자가 웃음을 지으며 더러운 수건으로 눈을 부비고 있었다.

그는 말할 수 없이 비참한 지경이었지만 그 지경을 즐기고 있는 듯 보였다.

아버지는 이 마을을 불태우기로 작정하였다. 그러자 그 곰팡내 나는 빈민굴에 사는 천민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면서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아버지는 이들의 권리를 당연하게 생각하였다.

"그들의 말에 의하며, 정의란 현재 존재하고 있는 것을 영구 보존하는 것이니까."

아버지의 그 말씀은 그들의 부패에 대한, 그들의 권리에 대한 인정이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부패의 산물인 그들은 부패를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아들아, 네가 만일 위선자들이 늘어나도록 방관한다면 그때에는 위선자들의 권리가 생겨나게 마련이다. 그들을 네게 잘 보이기 위해서 찬양의 노래를 부르게 될 것이다. 그 노래는 소멸의 위협을 받고 있다는 위선자들의 비장함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네게 들려 줄 것이다.

의롭다는 것을. 너는 선택해야만 한다. 천사장을 위해서 의로울 것인가, 아니면 인간을 위해 의로울 것인가? 고통을 위해 의로울 것인가, 건전한 육체를 위해서 의로울 것인가? 사교의 이름으로 내게 이야기 하러 온 자의 말에 왜 내가 귀기울일 것인가?

나는 그들을 돌보아 줄 것이다. 그러나 그 이유는 신에게 있지 결코 종양으로 인한 그들의 욕망에 의한 것이 아니다.

내가 그를 깨끗이 씻어주고 가르쳐주면 그때에 가서 그의 소망은 달라질 것이고, 그 자신이 과거의 자신을 부정하게 되리라.

정의란 예금 때문에 고객들을 존중하는 데 있다. 내가 나 자신을 존중하는 만큼 고객을 존중하는 것이다. 그는 나에게 똑같은 빛을 반사시켜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 빛이 그 고객 속에서 아무리 잘 보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교통수단으로, 도로로 간주하는 것이 바로 정의이다. 자비, 그것은 정의가 스스로 분만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아버지에게 물었다.

"그렇지만 아버지, 저는 아무런 대가 없이 빵을 나누어주고, 무거운 짐을 지는 이들을 거들어주며, 병든 아이를 보살펴주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공동의 것이라 생각하는 이들이다. 그들은 보리죽을 가지고서도 자비를 베푼다. 그들이 자비라 이르는 것은 사실상 자신들의 행위를 통하여 어떤 위대한 감정을 찬미하고 있는 것이다. 일종의 하늘의 선물이라 믿는 것이지. 허나, 하늘의 선물이란 받는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법이다. 마치 주정뱅이에게 술이 주어지듯이, 거지들에게 질병이란 하늘의 선물인 셈이지. 그들에게 내가 건강을 주고자 하면 나는 그 육체를 도려낼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 그렇게 되면 그 육체는 나를 증오할 뿐이다."

아버지는 이야기의 기준을 나에게로 돌렸다.

"아들아, 네 인생이 누군가에게 구원을 받았다 할지라도 결코 감사하지 말라. 너를 구해준 이가 네게 감사의 말을 기대한다면 그가 그만큼 친하기 때문이다. 그가 기대하는 감사의 말은 곧 무엇이겠느냐? 네가 어떤 가치가 있다면, 그는 너를 구원하면서 어떤 신을 섬겼으리라. 따라서 그는 너를 구원해주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감사를 받을 것이다. 어느 한 사람을 통한 타인의 훌륭한 협력만이 의미가 있다. 나는 너의 협력이나 돌의 협력을 받는다. 성전의 기단으로 사용된 돌에게 누가 감사하더냐?"

그리하여 나는 알게 되었다.
자비란, 나의 제국의 의미에 따른다면 협력이라는 것을.


[10] 지배자의 논리, 공주의 일화

아버지의 말씀은 계속되었다.

"위대한 역할을 맡고 있던 사람은, 또 존경을 받았던 사람은 누구나 전락할 수 없는 운명을 지니고 있다. 한 번 통치하였던 사람은 그 누구라도 제국에서 쫓겨날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되는 것이다. 너는 거지들에게 동냥을 주었던 사람을 거지로 만들 수가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너는 네가 이끄는 배의 어떤 부분을 망가뜨리게 된다. 내가 죄인에 따라 벌을 주는 것도 그 때문이다. 내가 고귀하게 만들어 놓겠다고 작정한 사람이 만일 시시한 자들이었다면 나는 그들을 호되게 다루겠지만, 결코 노예 상태로 만들어 놓지는 않는다. 나는 언젠가 빨래하는 하녀로 전락한 어느 공주를 만난 적이 있다. 그녀의 동료들은 그녀를 비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이 천한 것아. 네 공주의 고귀한 기품은 다 어디로 갔니? 너는 남의 목을 벨 만큼 위풍당당했지만 지금은 우리 손아귀에 있단 말이다. 정의란 바로 이런 거야.'

그들 식이라면 정의란 보상이였으니까.

그들 말에 공주였던 그 하녀는 침묵할 뿐이었다. 그리곤 수치감 때문에 창백해진 얼굴로 빨래터 쪽으로 몸을 수그렸다. 그러나 아무리 보아도 그녀에게 욕할 만한 구실은 하나도 없었다. 그녀는 아름다운 얼굴에, 얌전한 행동거지와 인자한 풍모가 있었다. 나는 그녀의 동료들이 그녀 자체를 조롱한 것이 아니라, 그녀의 지위가 추락되었음을 조롱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누구나 그럴 것이다. 탐냈던 것이 바로 자기의 발 밑에 떨어진다면 그는 그걸 삼켜버렸을 것이다.

나는 그녀를 불러내었다.

'그대가 통치를 하였다는 것 외에는 내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오늘부터 그대는 빨래터에 있는 그대 동료들의 생사 여탈권을 갖게 되리라. 나는 그대를 다시 권좌에 앉히겠다.'

그녀는 예전의 권한을 다시 찾았지만, 전에 당했던 그 심한 모욕들을 하찮게 보고 기억조차 하려 하지 않았다. 빨래터의 여자들은 다시 그녀의 고귀함을 찬양하고 숭배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옛 동료가 권좌에 복귀한 것을 축하하기 위한 축제를 열어주었고, 그녀의 손을 잡아보려 안달이었다. 내가 정복한 왕자들을 뭇 사람들의 모욕이나 간수의 무례함에 내 맡기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보다는 오히려 커다란 원형 경기장에서 금나팔에 맞추어 그들을 참수시키는 편이 훨씬 낫다.

"사람을 깎아내리는 자는 누가나 비천하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이렇게 강조하셨다.

"지배자는 절대로 자기가 거느리는 부하들에 의하여 심판받지는 않을 것이다."


[11] 장교들과의 대화

나의 군대는 무거운 짐을 운반하는 노새들처럼 지쳐 있다.
장교들이 나를 찾아왔다.

"우리는 언제나 집에 돌아가는 겁니까? 정복된 오아시스의 여인들에 대한 욕망도 집에 있는 아내만은 못할 것입니다."

그 중 한 사람이 내게 애원했다.

"왕이시여, 저는 젊었을 때 말다툼을 하다가 사귄 여자를 꿈속에서도 봅니다. 이젠 집에 돌아가 안정하고 싶습니다. 어떤 진리에 더 이상 깊이 파고들려 해도 이젠 되지 않습니다. 고향의 고요함 속에서 지내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나의 인생, 저는 내 인생에 대해 조용히 명상하고픈 마음입니다."

나는 그들이 고요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침묵은 그 자체로 진실의 열매를 맺고, 또 뿌리를 내리기 때문이다. 시간이란 우리가 어머니의 젖을 먹어야 자라나는 것처럼 중요하다. 아기가 순간적으로 커가는 것을 본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아유, 많이도 컸구나."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멀리서 온 사람들이다.

아이의 부모도 아이가 자라나는 것을 본 적은 없다. 아이는 시간 속에서 그렇게 되어야 할 존재로서 매 순간순간 자라난 것이다.

이처럼 나의 부하들도 갑자기 시간이 필요하게 되었고, 하나의 나무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시간이란 것이 중요하게 인식되었던 것이다.

"언제 전쟁이 끝나게 되는 겁니까? 우리는 변화하고 싶습니다."

나의 군대는 제국의 부를 위해서 오아시슬 진격하고 있었다. 멀리 있는 그의 집을, 나의 궁전을 아름답게 하기 위하여, 또 이렇게 누군가에게 이야기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다.

"이 종려나무 숲, 상아를 조각하는 마을들은 남부를 향한 나의 궁전에 대해 어떤 풍취를 줄 것인가!"
그럼에도 우리는 그걸 이해하지도 못하고 싸웠으며, 또 각자는 고향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제국의 이미지는 그들 내부에서 더 이상 찾아볼 수도 없게 되었고, 또 세계의 혼잡 속에 자취를 감춘 채 파괴되어 갔다.

그들은 이렇게 강변했다.

"미지의 이 오아시스와 함께 다소 부자가 된다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합니까?

우리가 집에 돌아갈 살게 되는 경우, 이 오아시스가 어떻게 우리를 부자로 만들어준다는 겁니까? 그 오아시스는 거기에 살거나, 종려나무 열매를 거두어들이거나, 혹은 힘차게 흐르는 가물에서 빨래하는 사람들에게나 도움이 될 터인데 말입니다."


[12] 인간의 조건

그들은 심각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러나 어쩔 것인가?

믿음이 꺼지면 신은 죽고, 이후에는 아무런 희망이 없는 무용한 존재가 되고 마는 것을. 그들의 열정이 식어버리면 제국은 해체되고 만다. 제국이란 백성들의 열정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므로.

그렇다고 해서 제국 자체가 허구라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내가 만약 올리브나무의 행렬과 같은 사람들이 비를 피하는 통나무집을 '영지'라고 부르기로 하자. 그것들은 조용히 바라보는 가운데 애착이 생기는 사람이나, 그 풍경을 마음에 담아두는 사람이 다른데 애착이 생기는 사람이나, 그 풍경을 마음에 담아두는 사람이 다른 여러 가지 중에서 올리브 나무와 비를 피하는 것 외에 아무런 쓸모없는 이 외톨이 통나무집만을 가지려 한다면, 그 영지가 팔려 풍비박산이 나려고 할 때 그 영지를 대체 누가 구할 것인가. 영지를 파는 것은 올리브나무나 통나무집에는 직접적으로 아무런 변화를 주지 않는다.

어떤 사람의 행위를 통해서만 그 사람을 알아보고, 서로 접해본 경험이나 어떤 이점을 발견해내곤 그것을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에 몰두해서 그 사람이 과연 어떤 인물인가 평가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는 매우 미련한 자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가 당장 손에 쥐고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영지의 주인이 새벽 이슬이 맺힌 길을 걸어가고 있다. 그의 손 안에 있는 것은 오로지 한 줌의 이삭들, 그가 딸 수 있는 약간의 과일에 지나지 않는다.

전쟁 중에 나를 따른 어떤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자기가 볼 수 없고 만질 수도 없으며, 그의 팔에 안아볼 수도 없는, 그리고 그를 생각조차 하지 않을 애인에 대한 추억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가 새벽 공기를 호흡하며 그를 잡아 다니는 육중한 무게를 느끼는 이 시간에, 그처럼 멀리 애인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과 똑같다. 그녀는 잠들어 있는 사람일 뿐이다. 아니, 그런 존재이다.

남자는 그 여자가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 책임을 지고 있다. 자기로서는 아무런 혜택도 받지 못하고 잠들어 있는 애정, 저장되어 있는 곡식처럼 그 스스로 잊어버린 애정을 책임지고 있다. 어쩜 자신조차 맡지 못하는 향기에 대해 책임지고 있다. 그는 고향에 있는 집 앞의 분수에 대하여 책임을 지고 있으며, 그를 다른 사람들로부터 분리시켜 주는 하나의 제국의 존엄성에 대한 책임도 함께 지고 있는 것이다.

그대는 자신의 마음속에 병든 아이를 가진 친구를 기억할 것이다. 그 아이는 멀리 있어서 아이의 열을 느끼지 못하고 아이의 칭얼거리는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 당장 아이의 생명에 아무런 행동을 취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그대는 마음속에 있는 한 아이에 대한 부담 때문에 짓눌린 적이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제국에 오면서도 제국을 한눈에 보아 감싸지도 못하고, 최소한의 특권도 받아볼 수 없는 사람. 그러나 그는 영지의 주인처럼, 병든 아이의 아버지처럼, 멀리 떨어져 있는 애인을 생각해내고는 그녀가 잠들어 있을 때에 사랑을 풍요롭게 하는 사람처럼, 제국과 더불어 도량이 넓어지는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사물의 본래의 의미뿐이다.


[13] 반역의 조짐

나는 술렁이기 시작하는 군대를 안정시키기 위하여 시인들을 동원하였다.

그러나 아무런 효험이 없었다. 병사들은 오히려 시인들을 희롱하기까지 했다.

"우리에게 우리의 진실을 노래하게 하라. 고향의 분수와 단란한 저녁 식사를 달라. 그 외에 나머지 허튼 것들이 지금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그때야 비로소 나는 잃어버린 권력은 다시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제국은 이미 풍요에 대한 이미지를 잃어버렸다. 그것이 진실이었다. 이젠 아무것도 진실하지도 덜 진실하지도 않았다. 나의 해결 방법이 효율적인 것이냐 아니냐만이 문제였을 뿐.

이제는 그들의 선택의 다양성을 기대하기는 글러버렸다. 그것은 나의 손을 이미 벗어나 버려 제국은 스스로에 의한 상처를 입었다.

어리석은 장군들이 찾아와 여전히 어리석게 내게 물었다.

"왜 우리 병사들은 싸우기를 원치 않는 겁니까?"

여전히 우둔한 그들의 질문을 나는 나의 다정한 침묵 속에 밀어넣었다.

그러고는 스스로 다시 물었다.

'왜 그들은 이제 죽기를 원치 않는가?'

나는 하나의 대답을 찾아내었다. 이건 순전히 나의 지혜였다.

사람들은 양들을 위해서나, 염소의 저택을 위해서나, 산들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시키려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산들은 아무런 대가 없이도 영원히 존속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연결시키고, 그들을 영지로 제국으로 알아볼 수 있고, 다정한 얼굴로 바꿔주는 보이지 않는 매듭을 구하기 위해서 죽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을 이러한 단순성과 교환한다.

사람들이 죽을 때에도 역시 그것을 구하고자 한다. 죽음은 사랑 때문에 보상을 치른다. 자기 생애보다 더 오래 지속되는 훌륭한 작품, 또는 몇 세기 후에도 의연한 성전과 자신의 생명을 교환한 사람은, 그의 눈이 물질의 부조화에서 궁전을 구제한 것을 예감하고, 그가 찬란함에 매료되어 그 속에 침잠되기를 원하면서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인다.

그는 자기보다 더 위대한 것에 의해 받아들여졌고, 그에 대한 사랑에 자신을 헌신한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떻게 그들이 생명을 세속적인 이해 관계와 바꾸겠는가? 이해 관계란 우선 살기 위한 것이다.

나는 그들을 사로잡아둘 수 있는 새로운 교훈이 없을까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조각가처럼 창조적인 방법이 내게서 나올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 후, 결국 신에게 깨우쳐 달라고 기도하였다.

여기저기서 가짜 예언자들이 창궐하기 시작하였다. 신자들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고, 그들은 자신의 신앙을 위하여 죽을 준비가 되었다. 비록 드물긴 했지만.

그러나 그들의 신앙은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런 가치가 없었다. 조그마한 교회들은 이와 같은 상황에서 지어졌다. 그들은 서로 미워하였고, 모든 것을 거짓과 진실 두 개의 잣대만으로 구분하는 습관을 갖게 되었다. 조금도 진실이 아닌 것은 거짓이었고, 조금도 거짓이 아닌 것은 진실이었다. 그러나 거짓은 철저하게 진실의 반대가 아니었다. 똑같은 돌을 다른 방법으로 배열한 것이고, 똑같은 재료로 만들어진 또다른 성전에 불과할 뿐, 더 진실하지도 덜 거짓되지도 않다는 걸 아는 나는 허망한 진실을 위하여 죽을 준비가 된 그들 때문에 피눈물을 흘렸다.

내가 신에게 기도하기를

"그들 자신만의 진리들을 지배하면서, 그 속에서 그 고유한 진리들을 모두 받아들일 수 있는 하나의 진리를 가르쳐주십시오."

서로 투쟁하는 풀들을 가지고 내가 유일한 영혼을 가진 생명 나무를 만든다면, 그때에 이르러 이 나뭇가지는 다른 나무의 번성과 함께 성장할 것이며, 나무 전체는 햇빛을 받고서 신비스럽게 협조할 것이고 개화를 준비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가? 지금 나의 풀들은 스스로 사멸하려 하고 있다. 나 자신에게 반문해본다.

"나는 그들을 포용할 만한 가슴이 없는 사람인가?"


[14] 권력

나는 말없는 사랑으로 그들 중 상당수를 사형에 처했다.

이러한 나의 결정은 잠재되어 있던 반역의 불씨를 일으키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들은 현실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어떤 문명한 진리의 이름으로 새로운 진리가 멸망한다는 사실을 직시하지 못했다. 내가 신의 예지로부터 권력에 관한 교훈을 얻은 것은 바로 그때였다.

권력이란 엄격한 그 무엇에 의해서는 설명될 수 없다. 단지 언어의 단순성에 의하여 설명되는 것이다. 물론 새로운 언어를 피지배자들에게 강요하기 위해서는 엄격함이란 절대로 필요하게 마련이다. 왜냐하면 그 새로운 그 무엇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그것은 더 이상 이제 진실이나 허위 같은 것으로 설명될 수 없는 까닭이다.

그러나 인간들 서로를 부정하게 내버려두고 그들 서로를 분리시킬 하나의 언어를 어떻게 강요할 것인가? 그게 엄격함이라 할 수 있을까? 그러한 언어를 강제한다는 것은 분할을 강요하는 것이고, 또 한편으로 엄격함을 부수는 일이다.

내가 사물을 단순하게 만들려 한다면, 물론 나의 독단만으로 가능 할 수도 있다.

나는 어떤 사람에게 자신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도록 긴장을 풀고 명확하고 더 너그럽고 더 열정적이 되며, 그의 갈망 속에서 그 자신과 합일될 것을 강조하였다. 그 효과는 즉시 나타났다. 병사들은 개구리가 올챙이 적 생각을 못 하는 것과 같이, 이전보다 훨씬 강인해진 자신들의 광채와 오만 속에 도취되어 있었다. 그들은 과거보다 더욱 강력한 무력을 갖게 되었다.

내가 추구하는 권력이란 이런 것이다. 매질을 통해서 가축으로 하여금 털갈이를 하게 하고, 그 가축들이 변모하도록 억지로 떠밀어뜨리는 기념비적인 문. 그렇다고 해서 그들 모두가 억지로 움직이는 것만은 아니다. 그들은 개종된 자들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대다수는 자신들의 날개를 가졌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단지 손발이 잘려나갔다는 슬픔에 젖어 절망 속에 빠져 들어간다. 그리하여 안타깝게도 쓸데없는 인간들의 피가 강물을 빨갛게 물들이게 되었다. 사형을 당한 사람들은 나로 하여금 나의 오류를 일깨워주려 했다. 그런 그들에 대해 나는 다음과 같은 기도를 지어냈다.

"주님, 저는 모든 갈망이 아름답다는 것을 압니다. 자유의 갈망과 규율의 갈망도 그러합니다. 명상을 허용하는 시간에 대한 갈망과, 욕신을 벌하고 인간을 위대하게 만들어주는 정신적 사랑에의 갈망, 건설해야 할 미래에 대한 갈망, 구원해야 할 과거에 대한 갈망, 씨앗을 심는 전쟁에 대한 갈망, 추수하는 평화에 대한 갈망.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은 논쟁에 따른 결과물이란 것 또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논쟁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요.

주님, 나는 전사들의 고귀함과 성전의 아름다움을 완성하고 싶습니다. 인간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성전의 신성함과 바꾸며, 성전은 그들에게 생의 의미를 부여하는 일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주님, 우리들의 세계는 슬픔 속에서도 어떤 황홀함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소녀의 눈물과 같이 커다란 목표를 향하여 가는 이 와중, 나에게는 위안이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또 그것이 이 세계를 지탱해 가는 힘일 것입니다."


[15] 장군들과의 대화

전쟁이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을 때만큼 견디기 힘든 일도 없다. 나의 장군들은 교묘한 계책을 세우는 데 골몰해 있었고, 그 계책의 성공을 위하여 무진 애쓰고 있었다. 신이 그들을 곁에서 감싸주지 않아도, 그들은 너무나 정직하고 부지런하게 병사들을 이끌었다. 그러나 그들은 실패만을 거듭하고 있었다. 또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그들을 집합시켰다.

"그대들은 결코 이길 수 없는 전쟁을 하고 있다. 왜 박물관에나 가 있을 완벽을 추구하는가? 왜 실패를 두려워 하나? 미래가 사전에 증명되리라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여러분들은 화가와 조각가, 상상력이 풍부한 발명가가 새로운 의식을 깨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과 똑같이 여러분 자신들의 승리조차 방해하고 있다고 생각지는 않는가?

제국은 나무처럼 자란다. 이 나무들이 태어나고 자라나기 위해서는 인간을 필요로 한다. 그런 까닭에 그 현상 자체를 생명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당신들은 이 생명력에 대하여 물 주고 가꾸어줄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있는 그 모습을 계산하고 미루며, 단지 누구에겐가 보여주기 위해서만 노력할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눈먼 장님의 행동에 불과하다. 만일 당신들이 그런 집념을 제1선에 두고 한 도시를 얻기를 원한다면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임은 자명하다. 그들은 도시가 어떻게 창조되었는지는 알겠지만, 왜 그 도시가 존재하는지에 대해서는 까막눈이기 때문이다.

그대 장군들이여. 어떠한 무지한 정복자를 그의 백성들과 함께 그 누구도 어찌할 수 없는 황폐한 사막에 던져보라. 그대들이 다시 되돌아 올 때쯤이면 30개의 둥근 지붕을 가진 도시가 햇빛 속에서 반짝이는 것을 보게 되리라.

정복자의 소망만이 둥근 지붕을 가진 도시를 만들게 한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도시를 건설하기 위하여 필요한 모든 것을 찾아내고 이루는 것이다.

그러나 그대들이 원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기회는 원치 않는 곳에 등을 돌리는 것이 아니던가?

그대들이 이끄는 군대는 누룩 없는 밀가루 반죽이며, 곡식 없는 땅과 같다.

그것은 소망 없는 군중 일 뿐이다. 그대들은 이끌고 가려하지 않고 관리하려고만 한다. 그대들은 어리석은 목격자일 뿐이다.

제국을 분열시키고자 하는 어둠의 힘들은 그들의 물결 속에서 당신들을 인식시키고자 하기 때문에 많은 관리자를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훗날 당신들보다 더 어리석은 역사가들은 당신들이 당한 재난을 증거할 것이며, 적들이 성공하는 데 사용한 수단들을 지혜, 또는 과학이라고 부를 것이다. 그러나 나는 끌로 쪼아서 바위돌을 대리석 조각으로 만들 것이다. 신의 얼굴을 감추고 있는 딱딱한 비늘들이 한꺼풀씩 벗겨져 나가면 사람들은 말할 것이다.

'이 대리석은 신의 형상을 내재하고 있었다. 그것을 쪼은 이는 수단에 불과하다.'

그러나 신은 조금도 계산하지 않고 돌을 빚어내었다. 이 조각의 얼굴과 미소와 광채는 땀과 끌의 타격과 대리석의 내재된 힘으로 이루어진 작품이 아니다. 미소는 돌에서 솟아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창조자의 피조물일 뿐이다."


[16] 미덕

장군들이 다시 내게 찾아와 말했다.

"제국의 좋은 풍습들이 타락해가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제국은 위협받고 있습니다.

부디 법률을 강화시키고 더욱 가혹한 형벌을 시행해야 합니다. 범법자들을 참수하도록 하여 주십시오."

그러나 나의 견해는 달랐다.

실제 다스림에 있어서 범법자들을 참수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미덕은 더 중요하다. 나의 백성들의 부패는 무엇보다도 그 바탕이 되는 제국의 부패일 터이니까.

제국이 살아 있고 건강하다면 제국은 그들의 고귀함을 끌어올릴 것이니까 말이다.

아버지의 말씀이 떠올랐다.

"미덕은 인간 상태 속에서의 완성이다. 부패 또한 완전한 결점은 아니다. 내가 하나의 도시를 건설할 때에는 도둑의 집단과 천민들을 고용하고, 권력으로 그들을 귀족화시킨다. 나는 그들에게 약탈이나 파괴, 또는 모멸이 주는 초라한 도취와는 전혀 다른 환락을 준다. 그러면 그들은 강건한 두 팔로 도시를 건설한다. 그들이 가진 오만함은 탑과 성전이 된다.

이들의 잔인성은 그대로 위대하고 엄격한 규율이 되고, 도시를 지키는 질서가 된다. 그들은 도시를 구하기 위해서 성벽 위에서 죽어갈 것이다.

어떠냐? 내가 하는 말에서 진정한 미덕을 발견할 수 있겠느냐? 범법자들의 힘을 경멸하며 비난한 적은 없었느냐? 만일 그렇다면 너는 제국의 정상에 힘없는 무용지물들을 앉혀놓게 된다. 쓸모없는 권력이 지배하는 세상은 악덕이 판치게 되고, 박물관의 미라가 되어 결국 하나의 죽은 제국으로 전락하고 만다."

나는 범법자들을 참수함으로써 만사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타락한 인간이 다른 사람들을 타락의 구렁텅이로 몰아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그를 제재하는 일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은 마치 무르익은 과일을 창고 밖으로 내던지는 것과 병든 짐승을 외양간 밖으로 내모는 것과 같다.

이런 경우에, 왜 사람들은 외양간을 새로이 마련하는 방법을 모색하지 않는가?

어찌하여 변화가 가능한 이들을 벌 주는 것으로 모든 일이 해결될 것이라 생각하는가?

"주님, 모든 인간들의 커다란 소망을 보호해줄 수 있는 당신의 외투자락을 제게 빌려주십시오. 나의 제국을 파괴하는 자들을 벌 주는 일에도 저는 이미 지쳐 있습니다. 나는 그들이 타인들을 위협하는 존재이며 저의 선행을 비판하고 다닌다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 또한 하나의 진리를 전하는 사람임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17] 미래는 현재 안에 있다

나의 어리석은 장군들은 능수 능란한 언변으로 나의 정신을 점령하려 했다. 그들은 틈만 나면 회의란 구실로 미래를 논하곤 했다.

그들은 나의 정복의 역사와 패배의 기록들을 정연하게 정리하고 있었으며, 제국 탄생의 날짜와 죽음의 시간들을 모두 깨우치고 있었다. 이러한 사건들은 분명히 어떠한 결과를 도출한다는 것을 그들은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명상의 결과를 지나친 비약 안에 버무린 다음, 나를 괴롭히기 위한 자료를 어깨에 가득 짊어지고 와서는 말했다.

"당신은 인간의 행복과 평화, 제국의 번영을 위해 행동하여야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학자입니다. 우리는 제국의 역사를 연구하였습니다."

그러나 학문이란 언제나 반복되는 것이 아니던가?

그들은 그들이 요구하는 결과로부터 원인을 발견하고 추적하기 위하여 논리를 사용한다. 모든 결과는 하나의 원인을 가지며, 모든 원인은 하나의 결과를 도출할 뿐이라고 그들은 내게 말한다. 그리고 원인에서 결과까지 가는 도중에 자꾸 한 말을 반복하면서 장황하게 오류 속에 빠져들고 마는 것이었다. 왜냐 하면, 결과에서 원인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과, 원인에서 결과로 내려가는 것은 확연히 다른 것임을 그들은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나 또한 광활한 사막의 한가운데서 적들의 역사를 다시 읽었다. 한 걸음 앞서 한 걸음을 떼었기 때문에 그 다음 역시 한 걸음 뗄 수 있다는 것, 사슬은 고리가 파손되지 않아야만 고리에서 고리로 이어진다는 것. 나는 이러한 엄연한 역사의 진실을 잘 알고 있었다.

바람이 불지 않았다면 나는 모래 위에 쓴 글씨를 통해서 흔적을 주구하고 사물의 근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며, 대상들을 추적하면서 그들이 머물고 있는 협곡을 찾아낼 수도 있다. 그러나 흔적에 대한 지식은 빈약하기 그지없다. 그것은 사람들이 품고 있는 증오라든가 사랑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쓰거나 말하지 않았다.

"그렇기는 해도 모든 것은 증명되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증오, 사랑 따위에 대해 설령 기록이 빈약하다 할지라도 그것들의 본질을 지배하는 것을 공포라고 이해한다면 그것들의 움직임도 예측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래는 현재 속에 분명히 포함되는 것입니다."

나의 장군들은 말할 것이다.

나는 예측할 줄은 모르나 건설할 줄은 안다. 미래란 건설하는 것이지 파괴하고 회상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예측할 줄 안다고 말하는 순간 나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나는 창조하는 지배자이기 때문이다. 주위가 부조화한 속에서 나는 나의 분명한 얼굴을 제시하였을 것이며, 그것을 강제로 부과했을 것이고, 인간들을 통치할 것이다. 가끔 피까지도 강요하는 영지와 마찬가지로.

미래를 다룬다는 것은 헛되고 덧없는 일이다. 유일한 가치는 현재의 세계를 표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표현한다는 것은 현재의 부조화와 더불어 그의 지배자를 찬미하는 일이며, 돌을 가지고 침묵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 외의 나머지 주장은 헛소리에 불과하다.


[18] 교육자들에게 고함

나는 교육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들은 하찮은 인간들을 죽일 책임이 없습니다. 또한 그들이 개미떼와 같이 일사 불란하게 변화시킬 책임을 내가 주지도 않겠소. 이간들이 만족하느냐 아니냐는 사실상 내게는 별 의미가 없소. 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그가 더 인간적이냐, 덜 인간적이냐 하는 점이오. 나는 먼저 인간에게 행복을 물어보는 존재이지 가축떼처럼 포만감에 젖어 있는지, 부유한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소."

나는 무의미한 말투보다는 확실한 구조를 가진 영상을 가르쳐줄 것을 원한다. 또 죽은 지식보다는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 형상이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외양을 보고 그들의 능력을 평가하지 마시오. 그들은 자기 자신과 싸워온 사람들이라오. 무엇보다도 먼저 그들의 사랑을 참작하시오. 관습을 지나치게 강조하지 마시오. 다만 그 사람이 충성과 명예를 생각하며 자신의 나무에 대패질을 할 수 있도록 인간의 창조에 대하여 가르치시오. 존경을 가르치시오. 빈정거림은 게으름뱅이의 몫으로 스스로를 망각케 할 뿐입니다.

당신들은 물질에 집착한 인간의 유대를 회복하기 위해 투쟁해야만 합니다. 인간에게 있어 주고받음의 미덕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당신들이 오히려 잘 알 것입니다. 그게 없다면 인간 사회의 모든 것은 삭막하기 이를 데 없게 됩니다.

명상과 기도를 통해 영혼은 자랄 것입니다. 사랑의 훈련을 해주시오. 그 누가 인간의 사랑을 대신해 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리고 거짓말과 밀고를 벌하도록 하시오. 강인한 인간을 창조하는 것은 오로지 충실함뿐이라오. 충실한 자는 언제고 충실한 법이니까. 그리고 충실하지 않은 자는 언제고 동료들을 배신하게 마련입니다.

나는 강력한 도시가 필요합니다. 나는 인간들의 부패를 나의 힘으로 이용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완성에 대한 취미를 가르쳐 주시오. 모든 작품은 신을 향한 행진이고, 결국에는 죽음 속에서만 성취될 수 있는 까닭입니다.

용서나 자비를 일찍 깨우쳐주진 마시오. 그것들은 잘못 이해되면 욕설이나 훼손에 대한 존경으로 변하기 쉽상이라오. 또 모두 함께 할 수 있는 대중들의 신비로운 협력을 가르쳐주시오. 그리하여 별 것 아닌 환자의 상처를 고쳐주기 위하여 사막의 모래 바람을 뚫고 지나가는 의사가 되게 해주시오.

제국은 그런 이들로 번창할 것입니다.


[19] 문둥병자의 거처에서

내 도시에 한 문둥병자가 살고 있었다. 아버지는 나를 문둥병자가 살고 있는 더러운 변두리 지역으로 데리고 갔다.

"여기에 한 심연이 있느니라."

아버지는 야영지의 인간들과는 다른 그 문둥병자를 가리키면서 내게 말씀하셨다.

"너는 그가 절망하고 있다고 믿느냐? 자, 이제 그를 잘 관찰해 보아라.

지금보다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닌 저 인간은 자기만의 왕국을 다스리는 왕이다. 저 문둥병자에게는 궁핍, 그것이 바로 구원이다.

너의 의미 없는 주사위들을 가지고 놀아서는 안된다. 너는 너의 꿈이 조금도 저항하지 않는다는 단 한가지의 이유 때문에 너의 꿈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

그것들은 실망이며 허망이며 절망이다. 유용한 것들이 네게 저항하는 것이다. 이 문둥병자의 불행은 그의 살갗이 썩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는 저항하는 거라곤 아무것도 없다는 데 있다. 그 사람은 자기의 틀 속에 틀어 박혀 있을 뿐이다."

도시의 사람들은 가끔 그 문둥병자를 관찰하러 오곤 했다. 그들은 산을 오르다가 화산의 분화구를 관심있게 들여다보듯 문둥병자가 사는 야영지의 주위에 몰려들었다. 어떤 신비한 것을 구경이라도 하듯 이 문둥병자가 머물고 있는 한 뙈기 땅으로 몰려왔다. 그러나 거기에는 불가사의한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러한 현상들을 내게 보여주면서 말씀하셨다.

"너는 결코 착각하지 말아라. 저 문둥병자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불면증에 걸려 있다든가, 신이나 인간에 대하여 분노를 삭이고 있다고 오해해서는 안된다.

그에게는 그런 의식조차 존재하고 있지 않다. 그는 야영지 내의 인간들과 어떤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가? 그의 눈에서는 진물이 흐르고, 그의 팔들은 힘없이 밑으로 처져 있지만 그러한 현상 자체가 그에게 무의미한 것이다.

이 사람이 갑자기 어떤 마음의 변화로 말미암아 마차를 몰거나, 돌을 날라 성전의 구석에 쌓아 놓는다면 그는 어떤 삶의 의미를 찾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현실은 이미 규정되어 있다."

풍습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게 마련이다. 주민들은 매일 그의 비참한 모습에 감동되어서, 그를 둘러싼 말뚝 사이로 돈을 던져주곤 하였다. 그는 하나의 우상처럼 사육되었고, 축제일에는 그를 위하여 음악을 연주해주기도 하였다.

그것은 자비였다. 사람들은 아무도 그를 필요로 하지 않았지만, 그에게는 모두가 필요한 존재였다. 그는 사람들이 던져준 많은 재물로 뒤덮여 있었으나, 그의 것을 받으려 하는 이는 하나도 없었다.

그는 지극히 호사스러웠으나 지극히 가난한 존재였다.

아버지의 말씀은 이렇게 끝을 맺고 있었다.

"보라! 그는 이제 하품할 기력조차 없다. 그는 인간들의 기다림인 권태마저 포기해버렸으니 말이다."


[20] 사람들

인간이란 희생과 유혹에 저항한다거나 죽음을 거부할 수 없다. 특히 허상에 지배되어 행동하는 인간은 조그만 관심조차 가질 값어치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한 꼴은 산 속의 멧돼지나 코끼리도 같은 지경일 터이니까.

그래서 대중은 각자에게 자신의 침묵을 허용하여야 하고, 삼나무가 산을 지배한다고 해서 그 삼나무를 증오하듯이, 자신을 내세워서는 안된다.

누군가 논리를 앞세운 보고서를 가지고 내게 인간을 이해시키고자 설명하려 든다면, 나는 그를 물통과 삽을 가지고 아틀라스 산맥을 파서 다른 장소로 옮기려 하는 어린아이로 취급할밖에.

인간은 존재하는 것이지 말로써 표현되는 것이 아니다. 물론 모든 의식의 목표는 존재를 표상한다. 그러나 그 표현이란 어렵고 느리고 꼬불꼬불한 작업이다.

표현이 어렵다고 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치부해서는 안 된다. 표현과 이해 사이의 거리는 참으로 멀기 때문이다. 내가 전에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 지금에서야 이해하게 되었다고 해서, 그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혹 내가 인간에 대하여 조금도 숙고할 만한 값어치가 없다고 상상한다면 나는 크게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산은 저기에 있는데 산을 바르게 설명할 도리가 없다. 그럼에도 산은 그곳에 있다. 나는 이미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의사를 분명히 표시한다. 그러나 그가 모른다면, 나는 굴러가는 돌들의 균열, 라벤더나 무의 늘어진 자락, 톱니 모양으로 솟은 그 산의 산꼭대기^5,5,5^. 어떻게 그 많은 것과 함께 이 산을 그에게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 것인가?

나를 위하여 복종하는 인간을 찬미할 것인가, 아니면 존재하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완강한 인간을 받아들일 것인가. 이것은 내게 매우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한쪽에는 나의 손짓 하나만으로 죽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고, 나의 신앙 때문에 내게 어린애들처럼 복종하나, 그 맞은편에는 그와 반대로 강철같이 단단하고 숭고한 분노와 죽음 속에서의 용기를 보여주는 사람들이 자리잡고 있다. 동일한 인간에게서 이처럼 상반된 두 가지의 얼굴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나는 수긍하고 있다.

불굴의 낟알처럼 나를 감탄시키는 남자, 나의 품안에서도 무릎꿇리기가 불가능한 바다와 같은 넓이를 가진 여인, 내가 남자다운 남자라고 말하는 남자, 그런 인간들은 절대 양보하지도 타협하지도 화해하지도 않는다.

능란함이나 선망, 또는 기교나 권태에 의하여 분해되지 않는 사람들. 그 군중이나 폭군이 그 사람들을 강제로 구속하는 것, 나는 결코 용납할 수 없다. 가슴의 다이아몬드가 되어 그에게서 다른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사람. 복종하고 규율에 순종하며 공손하고, 신앙과 신뢰로 가득찬 정신적인 혈통을 물려받은 현명한 이들, 그리고 그러한 미덕을 가진 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자기 자신에 의해서만 결정하며 냉혹할 정도로 혼자인 그 사람들은 누구에게든 조금도 지배받으려 하지 않으며, 그들의 돛대 안에는 바람조차 불지 않는다. 내가 '자유인'이라 칭하는 그들의 저항은 낱낱이 흩어진 변덕에 불과할 뿐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제국의 지도자로서 나의 규제에 의하여 국민들이 활기를 띠고, 내적인 조국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이들에게서 한편으로만 비치는 반항적인 면만으로 그들을 규정하는 것이 명백한 잘못이라는 것을 내 스스로 잘 알고 있다.

그들의 굳건한 힘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가? 물론 종교의 힘이다. 그들에게는 부드러운 또 하나의 모습이 있다. 그의 또 다른 영상은 순박한 미소 속에 기도하는 한 인간의 모습이다. 그리고 그에게는 풍요한 안식을 주는 젖가슴이 있다.

그러나 타인의 움직임에 의해서 살고, 카멜레온처럼 그 물이 들며, 선물이 들어오는 곳을 사랑하며, 환호성을 즐기고, 다수의 거울 속에서 스스로 판단하는 사람들. 그 모두를 나는 천민이라고 규정할 것이다. 그들은 자신을 되돌아보지 못하며 마치 하나의 성채처럼 화려한 보물에 둘러싸여 존재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는 가훈도 없이, 자식들의 성격을 들판의 승냥이처럼 놓아 기르며, 독버섯처럼 세계를 향하여 불쑥 일어난다.


[21] 안락



사람들이 나에게 안락함에 대하여 물었다.

나는 나의 군대를 생각한다. 균형 속에는 생명력이 죽어버린다.

그러나 그 자체는 생명의 유지를 위하여 무한히 노력하게 된다. 나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평화를 지향하는 전쟁을 시작하였다. 미지근하고 안온한 모래, 독사들로 가득

찬 순결한 모래, 침범되지 않은 그 피난처, 그리고 놀면서 흰 조약돌을 변모시키는

어린아이들^5,5,5^.

사람들은 말한다.

"여기에 어느 군대가 행진하고 있다. 거기에는 가축떼들이 걸어가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진정으로 본 것은 무엇인가?

마음의 부란 이런 것이다. 공기 서늘한 새벽의 아침 햇살 속에 목욕하는 사람, 목이

마르면 우물가로 가 두레박을 끌어올려 목을 축이는 사람, 그 물의 노래와 자신의

소란스런 곡조를 구별할 수 있는 사람, 그의 목마름은 이러한 행위로 어떤 충만한

의미를 싣게 되었다.

반면, 노예에게 손짓하여 입술을 적시는 사람들은 샘물의 노래를 듣지 못한다.

그들의 안락함은 단지 결핍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고통을 믿지 않기에 기쁨도 알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이와 같은 인간들을 주목한다. 그들은 음악을 원치 않으며, 껍질이 없다면

과실도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특유의 부재와 행복을 혼동하고 있다. 돈을 쓰지 않는

부자는 진정으로 가난할 수밖에 없다. 아무든 산비탈을 오르지 않고는 산의 정상에서

세상을 내려다 볼 수 없다. 어찌 가마 위에서 세상의 아름다운 경관을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병보다 더 심한 목마름에 허덕이는 사람들을 보았다. 물에 대한 질투로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있다. 약의 효능을 알고 있는 육체처럼, 또 여인을 필요로 하는

육체처럼, 그들은 갈증 때문에 물을 요구하고 있고, 꿈속에서 샘물을 긷는 사람들의

모습을^5,5,5^.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미소짓는 여인들의 모습이다. 내가 그녀들과 몸과 정신을

섞지 않는다면 아무 의미도 없다. 내가 거기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모험이란 아무 데도

없다.

점성술사들은 그들의 연구를 위하여 밤을 새운다. 그리고 위대한 천체의 운행에

관한 진리를 발견하게 된다. 그 다음엔 폭발하는 듯한 감동으로 신을 경배하게 된다.



나는 당신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노력하는 것을 도피하고자 한다면 또 다른 노력을 기울여야만 그것을 면할 권리를

가지게 된다고. 당신들은 성장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 22. 존경



내 제국의 동편을 통치하던 사람이 죽었다. 그는 과거에 나와 처절하게 싸웠던

사람이었다.

언젠가 우리는 사막 한 가운데서 만났었다. 고요한 자주색 천막 안에서 우리는

서로의 힘은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는 못했지만, 서로의 고독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때에 우리는 가축들의 생존에 관하여 심각하게 토론했었다.

그가 말했다.

"나에겐 죽어가는 2만 5천 마리의 가축이 있다. 우리에게는 물이 절실한 상태이다.

네 나라에는 비가 내렸다는 것을 안다. 어찌할 텐가?"

그러나 나는 나의 영지 안에 다른 세계의 목자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생소한

이방의 습관과 그로 인하여 파생되는 부패를 허용한다는 것은 나로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에게는 자신들의 신앙을 지켜나가야 할 2만 5천 명의 인간들이 있다. 그들에게는

나름대로의 소중한 삶이 있다. 그러므로 내 땅의 어느 부분도 너희에게 양보할 수

없다."

협상은 결렬되었다. 우리는 정복을 목적으로 한 힘의 과시와는 전혀 다른 전쟁을

끊임없이 치러야 했다. 서로의 위대함을 과시하기 위한 겨룸이 아니라, 무기를 가진

백성들의 생존 경쟁이었던 셈이다. 그리하여 한 도시의 정원이나 시장이나 유물들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애써 파놓았던 관개 수로도 무사하지 못했다.



열등한 인간은 모멸을 생각해 낸다. 다른 사람의 진리를 배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리란 공존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우리로서는, 상대방의 진실을

인정함으로써 내 자신이 깎인다고 조금도 생각지 않았다.

내가 아는 사과나무는 조금도 포도나무를 경멸하지 않았으며, 종려나무도 삼나무를

추호도 경멸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나무들은 각자 강하게 굳어지며 자신들의 뿌리를

다른 나무 뿌리와 조금도 섞지 않고도 본질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가 말했다.

"진정한 교환은 작은 향수병, 씨앗, 또는 나의 향수로써 너의 집을 가득 채우는

이 노란 삼나무의 선물이다."

"인간은 그의 증오 너머에서, 자신을 존경하는 바로 거기에서, 서로를 만나게

된다. 가치 있고 유일한 존경이란 적에 대한 존경이다. 친구들의 존경이란 그들이

자신들의 사은과 감사와, 온갖 저속한 행동을 지배할 때에만 가치가 있다. 네가

친구를 위해 죽는 일에 대해 스스로 감동하는 것은 금물이다^5,5,5^."

이리하여 그는 내 마음 속의 한 친구가 되었다. 모진 사막의 폭풍우 속에서

날카로운 칼을 부딪히면서로도 우리는 깊은 환희를 가지고 서로 만나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언어는 너무나 제한적이라 이 깊은 마음이 제대로 표현되지 않곤 한다.

결국 기쁨이란 신의 영역 속에서 제대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인가? 그가 죽었을

때 눈물을 흘린 나를 신께서는 용서하시리라. 완성되지 않은 나의 불행, 나는

그것을 잘 알고 있다.

나의 눈물은 아직도 미숙함에 기인한 탓일까? 그는 나에게 죽음을 가르쳐주었다.

나는 캄캄한 밤중에 귀환하는 말처럼 세계의 이 커다란 동요를 응시하였다.

"주여, 지금은 밤입니다. 당신의 의지에 의하여 또 낮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만들어진 세월 속에서, 이 지나가버린 시대에서 잃은 것은 무엇입니까? 나는 지금

번민하며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의 죽음은 나로 하여금 형언할 수 없는 고요 속에 빠져들게 하였다.

순수하지도, 그렇다고 영원에 대한 성찰조차 미흡한 나, 활기찬 장미 화원에

차갑고 목쉰 바람이 엄습해오면, 나는 덧없이 시들어가고 있음을 깨닫는다.

아아, 나는 장미꽃 속에 죽어가고 있다고.

[ 23. 노쇠를 겪는 슬픔



지금 나는 허리 통증으로 괴로워한다. 의사들은 도대체 아픔의 원인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때문에, 나는 꼭 나무꾼이 내리치는 도끼를 맞아들이는 숲 속의 나무와도

같은 신세이다.

눈을 뜬다. 스무 살의 단잠을 기억해본다. 나의 육신은 고성과도 같이

퇴락해가고 있다. 그래서 나는 웬만한 일은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보잘것

없고 개인적인 일은 너무도 쉽게 심신을 마멸시키기 때문이다.

제국의 역사가들은 나의 이러한 고통에 대해서는 단 석 줄도 기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의 이가 흔들리는 것이나, 그 이를 뽑아 내는 것은 그들에겐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조금이라도 남의 동정을 기대한다면 아주 비참한 꼴이 될 것이다. 아니

언뜻 그런 생각이 떠올라도 화가 난다. 꽃병에 금이 갔다고 해서 화사하게 핀 꽃에

금이 간 것은 아니지 않은가?

사람들은 나에 대해 말하길, 어떤 경우를 다하더라도 품위를 잃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나의 정신력에 대하여 온갖 미사여구를 늘어 놓길래, 그런 입에 발린

말은 구멍가게 주인들에게나 하라고 호통치며 조소한 적이 있다.

통치자는 건강해야 한다. 그가 만일 자신의 육체를 지배하지 못한다면 권좌만을

지키고 앉아있는 가여운 한 인간에 불과하게 된다.

나에게 실권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내게는 오늘 저녁보다 더 자유로워질

내일의 기쁨만이 있는 것이다.



인간의 노쇠. 아마도 나는 산 저편에 있는 것은 아무것도 알아보지 못하게 되리라.

마음은 죽은 친구들로 가득차 있다. 그리하여 젖은 눈길로 어두워지는 마을을

바라보았다. 바닷물처럼 밀려 들어오는 마음 속의 사랑이 나의 정신을 감싸오기

시작하였다.

[ 24. 모든 변혁은 고통스럽다



나의 도시를 활기차게 만들어야겠다. 모든 나뭇가지를 영양의 원천인 줄기와

뿌리에 맞대어야 한다. 침묵의 양식으로 창고와 물탱크를 가득 채워야겠다.

그러지 않으면 인간들이 어찌 사랑을 간직할 수 있겠는가?

내가 듣는 음악도 이와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내가 듣고 있는 음악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어쩔 수 없이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음악을 연주해 주든지,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과학을 가르쳐주어야 한다.

새로움을 주지 못한다면 그들은 1천년 전부터 얽매어오던 습관에서 탈출하기란

정말 요원한 일이다. 새로운 꽃과 나무를 보지 못하는 삶이란 허구일 뿐이다.

모든 변화는 고통을 수반한다. 내가 하나의 음악과 더불어 괴로워하지 않았다면 그

음악의 깊이를 절대로 깨닫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것은 고통의 결실이었다.

인간에게는 사랑도 있지만 고통도 있다. 권태가 있으며 비오는 하늘처럼

무뚝뚝한 사람의 언짢음도 있다. 시를 음미할 줄 아는 사람들에게는 시 외에는

다른 기쁨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이란 그렇게 태어난 것이다. 인간이 시의 참맛을 즐기기 위해서는 상승을

도모해야 한다.

그러나 정상에서 보았던 경치가 금방 시야에서 지워지듯이, 한 번 휴식을

취하고 나서 행진을 열망할 때에 보는 똑같은 풍경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노력 없이 잉태되는 시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하나의 사랑에 조금도 집착하지 않는다. 그것은 내 마음의 훈련일 뿐이다.

내가 통치하는 영지나 성전, 나의 시나 음악을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다소 부유한 점을 제한다면 나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 나를 통치할 자격이 있는

자는 아무도 없어."

라고 강변하는 인간들이 많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것

때문에 내가 놀라거나 하지는 않는다.

보통의 인간들은 너무나 합리적이고 회의적이며, 아이러니로 가득차 있다. 평온이란

변혁하고자 하는 자의 상승에 따른 결과물이듯이, 사랑은 선물로 그대에게 안겨준

것이 아니라 정복된 산이 주는 선물이며, 높이 솟은 너의 기반의 승리인 것이다.

사랑을 배울 때야만 사랑을 만난다는 말은 완전히 착각이다.

짧은 나날의 열병으로 마음이 흔들리고 그로 인하여 왜소한 언덕배기에서

나약한 승리 하나를 건져올렸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마치 평생 동안 자신을

불태워줄 위대한 사랑을 만난 것처럼 기뻐하며, 스스로를 정복당하기 위해 인생을

방황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참으로 가련한 인간이다.

상승, 또는 통과가 아닌 것은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발걸음을

멈춘다면 풍경은 가르쳐줄 게 아무것도 없으므로, 그대는 오로지 권태만을 쌓여가게

될 것이다.

그래서 맨 먼저 버려야 할 것이 자기 자신임을 인식하게 된다면, 그대는 아내라도

버릴 것이다.

[ 25. 허영



나는 그동안 도시의 무용수, 가수, 그리고 창녀들을 관찰해 왔다. 그들은 온통

허영으로 똘똘 뭉친 사람들이다. 어쩌다 산책이라도 하려고 나가보면 허풍선이들을

미리 거리로 내보내, 군중들이 모여들게끔 꾸미곤 하는데, 그렇게 해서 사람들이

박수 갈채라도 보내면 마음 속으로는 기고만장하지만, 겉으로는 수줍은 듯이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미소를 보내곤 한다.

그녀들은 아주 피곤에 지쳐 기진맥진해졌을 때에나 그들 몸을 휘감고 있는

베일을 벗고 잠을 청하는 여자들이다. 그녀들이 순금으로 만든 목욕통에서 목욕을

하면, 군중들은 목욕용 우유를 준비하는 광경을 보려고 모여든다. 수많은

암당나귀들의 젖을 짜고 감미로운 향료를 섞는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상황에 별로 개의치 않는다. 한 마디로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가 분노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값비싼 물건을 좋아하는 것을 나쁘다고 할 순 없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떻게

쓰느냐가 아니라, 쓰고자 하는 열정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값비싼 것이 존재하고 있는

한 그것들이 여인들을 향기롭게 치장하거나 어찌거나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나는 논리학자들과 토론할 경우, 일단 내 영지 안에 속한 모든 것들의 열정부터

찬양한다. 그리고 치장보다 빵을 무시하는 그런 부류에 대한 대처 방안을 항상

준비해두고 있다.

여자도 아름다우면 하나의 기념물이 된다. 어떤 기념물이 껍데기만 화려한, 신을

모시는 성전의 역할만을 수행한다면, 고작해야 사람들의 눈에 금박을 부어넣는 꼴이

될 뿐이다. 그러나 여자가 아름다운 얼굴과 몸매로 유혹하게 되면, 사람들의 타고난

재능과 희생을 끌어들이게 마련이다.

그래서 그녀들은 향료가 섞인 우유로 목욕을 하는 것이다. 적어도 미의 화신이 되는

것이다. 그러고는 먹기에는 다소 지루하지만 보기 드문 진귀한 식사로 살아간다.

그러다가 혹 생선뼈가 목에 걸려 세상을 하직하기라도 한다면, 그녀들은 애지중지하던

진주목걸이와 사파이어를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그녀들은 어쭙잖은 삐에로의

재담에도 정신없이 웃으며 배꼽을 움켜잡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포복 절도하여

방바닥을 뒹굴기 전에 자신들의 빛깔에 알맞는 화사한 방석을 골라 꼭 그 위에

쓰러지는 것을 잊지 않는다.

그녀들은 사랑이라는 사치를 즐긴다. 그래서 어느 젊은 군인을 위해 자신들의

진주를 팔아서 애정의 도피를 즐기기도 한다. 그 군인이야말로 그녀들이 만났던

사람들 중에 가장 잘생기고 가장 영리하며 가장 멋지며 가장 씩씩한 사람이라는 것을

과시하면서.

그 순진한 군인은 그 자신이 사실상 그녀들의 허영을 휘한 들러리로 이용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들에게 무엇인가 소중한 것을 선물받았다고 착각하면서 감사하고

도취하게 된다.

[ 26. 침묵



협박에 대해 두려워 말라. 이런 하찮은 일에 모든 것을 건다면, 결국 그것을 또 다른

세세한 일에까지 연관짓게 되어 커다란 실패를 맛보게 될 것이다.

제국의 경우도 예외일 수 없다.



남을 이해하기 위해선 남의 입장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 믿는 사람의

자존심까지 지켜주게 된다. 다른 사람의 마음 속까지 의심하는 것은 쓸데없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결코 이해했다고 할 수 없다.



사랑과 인내를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노래를 부르는 사람과 그 노래를 짓는 사람은 서로 별개인 것이다. 그런데

창조에 있어서는 누가 함께 하는가?

이 문제는 딜레마를 제거하는 일이다. 모두가 협력하고 갈구하지 않는 한 창조란

없다. 나무 그루터기가 사랑으로 묶여 있을 때에만 창조가 가능하다. 전체에 대한

개인의 복종은 문제가 될 수 없다. 반면 수액이 흐르는 방향이 문제이다. 왜냐 하면

나무는 하늘로 신의 성전과도 같은 가지를 펼치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에서 침묵의 찬가를 쓰겠노라. 침묵! 그대는 결실의 음악가이다. 그대는

어둠침침한 곳에 있지만 부지런한 꿀벌들이 모아놓은 꿀단지이다. 충만한 바다의

안식이다.

침묵! 그대는 산꼭대기에 있기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도시를 감싼다. 조용한

움직임, 그 외침, 그리고 저녁 꽃병 속에 든 모든 것의 움직임을 정지시킨다.

익어가는 과일의 속살과도 같은 여인들의 침묵, 묵직한 유방과도 같은 여인들의

침묵, 여인의 침묵은 그날그날 하루의 다발로서 일생의 허영을 이루기도 한다.

나는 내일을 향해 가고 있는 여인의 뱃속에서 어린아이의 맑은 내일을 발견한다.

침묵은 나의 모든 명예와 피를 책임진 수탁자이다.

턱을 괴고 사색하며, 그 다음엔 지체없이 응락하고 열매를 맺는 남자의 침묵. 그

침묵은 그를 인식하기도 하고 잊어버리기도 한다. 망각은 좋은 것이다. 침묵은

벌레와 기생충, 그리고 해로운 모든 식물들을 거부한다. 침묵은 그대가 어떤 사상을

전개하는데 있어서도 아주 유능한 동반자다.

침묵은 사상 그 자체이다. 꿀벌들의 휴식이다. 성숙해가는 침묵, 날개를 준비하는

사색의 침묵. 그것들은 당신의 내부가 흔들리지 않도록 지탱해 줄 것이다.

마음의 침묵, 감각의 침묵, 내적 언어의 침묵, 영원 속에서의 침묵인 신을 찾는

것은 좋은 일이다. 모든 것은 모두 말해졌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다.

신의 침묵은 양 치는 목자의 단잠과도 같다. 새끼 양이 위협받고 있는 듯이

보일지라도, 그 안에 목자도 숫양도 없는 깊은 정오의 오수, 그것보다 더 달콤한 것은

없으리라. 이윽고 모든 것이 양털처럼 보드라운 잠에 묻히고 나면, 마침내 별빛 아래서

누가 그들을 알아보리오?

주여 언젠가는 당신의 창조물들을 곳간에 밀어넣으시고, 우리들에게 당신의 양쪽

문을 열어주소서. 그리하여 무사의 기쁨으로 충만한 그곳으로 끌어올려 주소서.

그러면 사람들은 바다보다 더 넓고 부드러운 물을 발견하게 되리라. 그가 억지로

달리게 하는 어린 영양 위에 앉아 다리를 늘어뜨린 채, 영양의 가슴에 목을 기대고

숨을 몰아쉴 때, 그는 샘의 노래와 더불어 그 세상을 예견하였으리라.

침묵은 항구이다. 신의 품 안에 있는 침묵은 오고 가는 모든 배들의 안식처이다.



[ 27. 논쟁



논쟁이란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것이다.

그대가 정확한 명증이라는 이름으로 누군가에 대항하여 논쟁을 벌인다면, 그대는

한편으로 상대의 진실을 거부하는 것이 된다. 상대를 받아들여라. 그들의 손을 꼭

쥐고서 그들을 안내하라.

"당신이 옳습니다. 그래도 나와 함께 산에 오릅시다."

그리하면 그대는 세상에 든든한 규칙을 세우게 되고, 그들은 나름대로 정복한 평원

위에서 큰 숨을 쉬게 되리라.

사람에 대해서 토론하지 말라. 그대는 언제나 원인과 결과를 혼돈하는 사람이다.

포착할 수 있는 언어가 없을 경우 어찌 자신들의 견해를 상대방으로 하여금 이해시킬

수 있겠는가? 하천과 마찬가지로 물방울이 어떻게 자신을 알아볼 수 있을까?

그래도 하천은 흐른다.

어떻게 나무의 세포들이 자기를 나무라고 알아볼 수 있을까? 그래도 그 나무는 잘

자란다.

어떻게 돌 하나하나가 성전을 의식할 수 있을까? 그래도 그 성전은 다락방처럼

고고한 침묵 속에 서 있다.

침묵을 포용하기 위해서 애써 산에 오르지 않는다면 어떻게 사람들을 침묵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으랴. 오로지 신만이 아실 일이다.

그대는 각자의 언어가 인생을 죄다 파악할 수 있다고 믿는가?

그대에게 전쟁은 일어날 수 없다고 말하는 선동가들이 해마다 출몰할 것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자기의 처자식과 헤어져서, 자신에게는 추호의 가치가 없다고 믿는

땅을 빼앗으러 간다거나, 혹은 상처 입으면서 적의 손에 자신의 목숨을 내맡기기를

거부한다. 그러므로 진정 각각의 개인에게 선택할 것을 요구한다면 아무도 함께 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그렇지만 이듬해가 되면 제국은 또 전쟁을 시작할 것이다. 그러면 각자의 빈약한

계산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그 전쟁 속에, 그렇게도 거부했던 그들은

이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윤리관으로 뭉쳐 무기를 들게 된다.

논리 이외의 다른 방법, 그것으로 그대는 창조의 빛을 보리라.

[ 28. 다수의 판단



결국 문제는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달려 있다. 한 여행자가 산등성이를 오를 때

자신의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녔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의 환상일

뿐, 그의 목적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현재를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진보란 있을

수가 없다. 그런 까닭에 나는 끊임없이 새출발을 할 것이다.

나는 휴식을 믿지 않는다. 그에 대한 논쟁이 파생된다면 어느 한편의

희생으로써 일시적이고도 해로운 평화를 추구하게 된다. 그대는 무엇을 보고

삼나무가 바람을 맞이함으로 해서 얻는 것이 있다고 하겠는가? 바람은 나무를

갈기갈기 찢어놓으면서도 그것을 제 자리에 있게 해준다.

그대의 인생은 논쟁의 망각이 지불하는 비참한 화합을 얻는 데 있지 않다.

인생의 의미는 자기 본연의 모습에 달려 잇는 것이다.

설사 어떤 의견이 그대와는 대치된다 할지라도 가만히 내버려두는 게 상책이다.

그 인내로부터 그대의 뿌리가 솟아나오고 허물을 벗게 된다. 스스로의 내부에서

자신을 탄생하게 하는 고통은 지극히 괴롭지만 행복을 가져다준다. 때문에, 나는

평화를 빙자하여 자신을 단순함 속에 몰아넣고, 마음을 갈망을 억제하는 인간들을

경멸한다. 그러므로 그대 자신이 성장하려거든 논쟁과 맞서 자신을 소진시키라.

그것이 세상을 대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고통이란 거름과 같은 것이다.

여기 모래 바람이 일으켜 세워줄 수 없는 연약한 나무들이 있다. 그와 같은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자신의 장점을 사멸시키고 어쭙잖은 단점을 모아

행복이라고 치부한다. 실로 초라하기 그지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무숙자이다. 한

마디로 실패한 인생들이다. 그들은 적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신의 음성은

필연이며 탐구이며 가이없는 갈증인데도, 그것을 맹목적으로 거부하는 그런

자들이다. 그들은 빽빽한 숲 속에서도 햇살을 그리워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들은

어떤 경우에도 태양을 얻지 못할 것이다.

빽빽하게 둘러싸여 있는 나뭇가지는 설령 숨은 막힐지언정, 그 본체인 나무는

땅에서 솟아나 신이 있으리라 믿는 하늘을 향하여 상승하기 시작한다. 신이란

결코 도달될 수 없는 경지이지만 그 방법은 이렇듯 쉽게 제시된다. 인간도 역시

나뭇가지처럼 신의 공간 속에서 지어지는 것이다.

그대여, 다수의 판단을 경멸하라. 다수의 판단이라는 것은 그대의 창조적인

판단과 성장을 방해한다. 그대의 적들은 진실의 반대말이 오류라는 것밖에 없다고

믿는 부류들이다. 그들 때문에 논쟁이라고 하는 박제화된 문제만이 남게 되었다.

그대여, 그대가 누군가의 잠을 깨워야 할 것이냐 말 것이냐의 문제를 갖고서 내게

제기하려 한다면 나는 고개를 돌릴 것이다. 나는 그런 질문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노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불현듯 창밖에 취하여 쓰러진 한 친구를 그냥

잠자게 내버려둘 것인가? 사실 그런 형편에서 제대로 잠을 잘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가 정말로 한데 잠을 좋아해서 일부러 그 속에다 몸을 내던진다 해도.

[ 29. 내가 여자를 경계하는 이유



그 여자는 자기 집을 위해 그대의 재산을 털고 있다.

가정이란 소중한 것이다. 맑은 눈을 하고서 집으로 돌아오는 아이들, 분수의 노래와

향기로운 물병의 음악으로 아이들을 축복해 주는 사랑이란 정말로 소중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쉽사리 규정짓지 말라. 명성에 이끌린다든지 해서 사랑의 마음이 아닌

계약이나 유혹에 빠지지 말라. 언어는 많은 것들을 분열시킬 뿐이다.

우물가에 숨어서 사랑할 줄 아는 연인의 마음 안에서만 생명이 존재한다. 맹목적인

육체의 향연이란 사랑의 희생도, 선물도 아니다. 여자를 애무하는 사람이 만약 침대

위의 비천한 금수 같은 마음으로 가득 차 있다면 대체 사랑의 위대함을 어떻게 찾아볼

수 있을 것인가.

무기를 내려놓고 어린애를 달래는 병사보다 더 위대한 존재, 혹은 남편으로서

전장에 출정하는 사람보다 더 위대한 존재는 이 세상엔 없다.

하나의 진실에서 또 다른 하나의 진실로 이행하면서 생기는 균형이나, 어니

시대에서 다른 시대에 이르기까지 얻어지는 유효함은 문제가 아니다. 결합되어야만이

하나의 의미를 지니는 두 개의 진실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대가 연애하는 것은

군인으로서이며, 그대는 연인으로서만 전쟁을 치르는 것이다. 그러나 하룻밤의

잠자리에 도취한 다음, 밤마다 그대를 찾는 여자는 그대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제 키스가 달콤하지 않은가요? 저는 행복해요."

분명 그대는 말없는 미소로 대답할 것이다. 그러면 그녀는 이렇게 대꾸하겠지.

"제 곁에 있어 주세요. 저를 위한다면요. 욕망이 일어나면 당신은 팔만 뻗으면

되는 것예요. 저는 열매가 주렁주렁 달린 오렌지 나무예요. 손을 내밀면 열매를

드리지요. 우리들의 샘물에선 신선한 물줄기가 퐁퐁 솟아나올 거예요."

그대는 그 동안 외로운 방안에 홀로 누워 숱한 열정을 꿈꾸었을 것이다. 그대가

상상한 여인들은 모두 아름답고 정열적이니까. 그리하여 그대는 전쟁이 안겨주는

고독의 시간 때문에, 이렇게 연애할 수 있는 좋은 시기를 놓쳐버렸다고 섣부른 짜증을

부릴 수도 있다.

그러나 차가운 얼음장 같은 눈으로 직시하라. 사랑은 사랑이 없는 곳에서만

출현한다는 것을^5,5,5^.

혹시 그대는 산의 우아한 자태를 산등성이에 있는 바위 위에서만 느끼지 않았는지?

마찬가지이다. 신에 대한 경험은 응답 없는 기도의 반복 속에서만 모든 걸 깨닫게

된다. 그것만이 소모에 대한 걱정을 떨쳐버리고 그대를 만족시켜줄 것이다.

이와 같이 예정된 시간이 다 지나서만이, 사랑은 완성되고 존재할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마침내 시간의 흐름에 관계없이 사랑은 그대의 것이 된다.

공허한 밤에 자기의 호소를 내세우며 시간이 자기의 보물을 앗아가고 있다고 믿는

한 인간에 대하여, 그대는 오해도 동정도 할 수 있다. 사랑이란 본질적으로 사랑에

대한 갈증이라는 것을 잊는다면, 스스로를 멸망의 나락에 빠트릴 수도 있음을

명심하라.

그대에게 말하노라. 잃어버린 기회란 중요한 것이라고. 감옥의 창살을 향한

침묵과도 같은 사랑이야말로 큰 사랑이다. 신의 응답이 없는 기도가 사실상 풍요로운

것이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사랑을 키워주는 율법이며, 동시에 가시덤불이다.

열정과 식욕을 혼동하지 말라. 자신을 위해 갈구하는 열정은 진실한 열정이

아니다. 나무는 자기에게 아무런 대가도 돌아오지 않는 과일에다 스스로를 부어

넣는다. 나의 경우도 그러하다. 백성들에 대한 나의 태도, 그것은 나의 열정이

아무런 대가도 없는 과수원을 향하기 때문이다.

더 이상 여인들에게 빠져들지 말라. 그대가 거기서 이미 맛본 것을 또 다시

구하려 한다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산에 사는 사람이 때때로 바다에 내려오듯

그대는 간혹 그녀를 찾아주기만 하면 된다.

[ 30. 사랑



사랑과 소유에 대하여 혼동하지 말라.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과 소유한다는 것은

엄청난 차이를 가지고 있다.

소유의 본질은 고통이다. 내가 신을 사랑하려면, 먼저 다른 사람들을 신의 품

안에 던져주기 위해 스스로 엄청난 고통과 시련을 겪어야만 하는 것처럼 말이다.

사랑의 본질은 증오이다. 그대와 함께 식사를 한 남자, 혹은 여자에게 마음을

준다면 그대는 곧 그를 미워하게 될 것이다. 이는 애완견들이 그대의 식탁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음식을 탐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대는 이와 같은 것을 사랑이라 부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사랑이 당신을

포옹하는 즉시, 굴종과 노예의 굴레에 깊숙이 빠져들게 된다. 더 이상 혼자가 아닌

그대에게 자유란 이미 저만치 물 건너가 버렸다.

그렇게 되면 그대는 사슬에 묶이기라도 한 듯 괴로움에 떨지도 모른다.

내가 불쾌하게 생각하는 점이 바로 이런 경우이다. 그대는 내가 어떤 사랑에 빠지길

원하는가?

물론 나도 젊었을 때 나에게서 떠나버린 어떤 여자 때문에 테라스 위를 무거운

마음으로 배회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반짝이는 별빛 아래서 많은 시간을 숙고한

끝에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 여자를 되찾기 위해 무력을 동원할 수도 있었다.

그녀의 마음을 다시 사로잡기 위해 내 영지의 일부를 던져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신은 알고 계시리라. 나는 결코 진실을 혼동하지 않았다. 나는 목숨처럼

그 여인을 원하였지만, 한 번도 내 마음의 갈등을 사랑이라고 규정한 적은 없었다.

실망하지 않는 우정에서 진정한 우정을 본다. 결코 침해받지 않은 사랑에서 참된

사랑을 본다.



누군가 그대에게 다가와 "그녀가 너를 해롭게 하므로 이젠 쫓아버려라."라고 한다면

그 말을 너그럽게 받아들여라. 그러나 행동의 방향을 바꾸진 마라. 누구도 그대의

의지에 대해 간섭할 권리를 갖고 있진 않다.

또, 누군가 그대에게 다가와 "이젠 그녀를 포기해야 하지 않을까? 너의 정성은

헛되고 말았으니까."라고 말할지라도, 그대의 처신을 바꾸진 마라. 그 누구도

그대의 소중한 것을 훔쳐갈 수는 있을지라도 빼앗아갈 권리는 역시 갖고 있진

않으니까 말이다. 또 다른 어떤 사람이 추악한 계산을 강요한다면 귀를 막고 그

사람을 쫓아버려라. 그것이 현명한 방법이다.

사랑에 대해 누가 그대에게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하라.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우선 나를 이해하고 도와주는 것이다."

진실한 친구 한 사람은 쓸모없는 백 명의 바보들보다 적어도 백 배는 낫다는 사실.

이 사실을 명심하라.

[ 31. 현재



그대가 지내온 날들의 열쇠는 오늘날까지 이 제국의 사건들과 함께 숨쉬고 있다.

그러므로 그대가 무엇에 대하여 후회한다는 것은 마치 자신이 다른 시대에 태어나기를

원하거나, 순간적인 절망을 얼토당토 않은 공상으로 해체하는 사람만큼이나 부조리한

거이다.

과거는 화강암 덩어리와도 같다. 돌이킬 수 없는 현실과 충돌하는 대신 주어진

하루의 운명을 받아들여라.

'과거'란 낱말은 목적도 이상도 순환도 완성도 없다. 그리하여 그대의 시선은

미래의 변형과 열정과 희망을 향하게 된다.

그대는 이런 질문을 던질 수도 있다.

"무엇을 지향해야 합니까? 나의 목적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데 말입니다."

여기에서 나는 하나의 비밀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미래를 준비한다는 것은 현재를 바로 세우는 일이다."

머언 명상에 빠진 인간들은 유토피아의 공상 때문에 제각기 힘을 잃고 만다. 유일한

창작의 지리는 모든 부조리한 양상과 모순적인 언어 속에 묻힌 현재를 해석해주는

것이다. 만약 그대가 미래에 관하여 헛된 미망에 사로잡혀 있다면, 그대야말로 홀로

회랑과 성전을 건축 할 수 있다고 믿는 바보이다. 그렇다면 그대에게는 적이 없을

것이며, 적이 없다면 그 성전과 회랑은 누구의 손으로 우뚝 세울 수 있을 것인가.

회랑이란 여러 세대를 거쳐 이룩되는 것이다. 하나의 형태만을 가진 회랑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것들은 관습에 대항하기 위해, 적들과 투쟁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깎고 다듬어진다.

위대한 작품들은 이렇게 생겨나는 것이다.



정리해야 할 것은 오로지 현재뿐이다. 그 속에 펼쳐진 미래를 바라보라.

나는 양들과 염소떼, 그리고 보리밭과 가옥들, 산과 들판을 아울러 제국이라

이름한다. 나는 이런 나의 제국에서 현재를 다듬고 즐긴다. 산등성이에 올라

도시들의 아련한 흔적들을 참관하노라면, 나의 도시들이 커다란 배나 그윽한

성전처럼 보일 때가 있다. 그것은 마음으로 보는 눈이다.

그러므로 그대여, 명심하라. 창조란 미래에 대한 편견이거나 공상이 아니라 현재

속에서 읽는 새로운 경관이다. 현재란 유산으로 받은 뒤죽박죽된 자료이다. 이를

정리하여 스스로의 유용한 자산으로 변형시키는 것은 그대의 몫이다.

보라. 나의 정원사들은 봄의 향연을 위하여 부지런하게 정원으로 달려간다. 그들은

꽃나무의 세밀한 각 부분에 대해서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 다만 씨를 뿌리 뿐이다.

용기를 잃은 자, 불행한 자, 패배자인 그대들에게 말한다. 그대들은 승리의

군병이다. 왜? 그대들은 이 순간 다시 시작하고 있으며, 젊다는 것은 언제나

아름답기 때문에^5,5,5^.

[ 32. 친구(1)



친구란 비판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는 낯선 나그네에게 대문을 열어주고

뛰어나와서는, 밝은 웃음으로 나그네의 지팡이와 외투를 받아드는 사람이다.

이 나그네가 세상에 봄이 왔음을 이야기하면 진심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봄을

찬미하는 이가 바로 친구이며, 나그네가 지나온 마을의 얻던 참화에 대하여

말하면, 눈물 흘리며 불행을 당한 그 마을 사람들을 위해 기도드리는 이가 바로

친구인 것이다.

인간에게서 친구란 신이 내리신 선물이다. 그는 그대를 위하여 준비된 아름다운

꽃이다. 그 향기로운 내음은 당신의 체취 속에서만 풍겨나온다. 그러므로 그대를

향한 친구의 모든 언동은 진실이라고 믿으라.

친구 사이에는 어떠한 신분의 구별이나 부의 많고 적음이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오로지 평등한 마음의 교감만이 있을 뿐. 내가 육군 대위이고 그대가 하잘것없는

가게의 점원일지라도 마찬가지이다. 서로는 그 처지에 관계 없이 내면의 아름다운

무엇인가를 발견했고, 그리하여 서로가 마주하면서도 침묵을 용인할 수 있게 된다.

친구여, 그대와 나의 우정은 내가 그대를 일국의 대사로서 인정하는 것이다. 내가

그들을 접대할 때, 아주 머언 그들 나라의 음식이 내 입맛에 다소 맞지 않았다거나,

아주 머언 그들 나라의 음식이 내 입맛에 다소 맞지 않았다거나, 그들 나라의 풍습이

내 제국의 관습과 다르다는 이유로 그들을 무시하며 쉽게 대하진 않는다. 우정이란

무엇보다도 화해를 기반으로 하며, 하찮은 일상사를 넘어선 정신의 위대한 교류인

것이다.

환대와 예절과 우정은 인간의 내면적인 만남이 원천이다. 키와 건강에 대하여

왈가왈부하는 교회에 누가 발걸음을 옮길 것인가?

나의 말은 하나도 들어주지 않고 나를 평가하기 위해 눈을 게슴츠레 뜨고 있는

사람의 집에서는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다.

그대여, 세상을 변방을 헤쳐 나가노라면 그대는 스스로 판단하고자 하는 인간들을

숱하게 접할 것이다. 만약 변화하고자 한다거나 스스로를 단련시킬 목적이라면 우선

적들에게 그 일을 맡겨야 할 것이다. 그들은 삼나무를 다듬는 폭풍우처럼 그대를

강인하게 훈련시킬 것이다.

그러나 기억하라. 친구는 어떠한 지경에 이를 지라도 오직 친구일뿐이라는 것을.

그대가 성전에 들어갈 때 신은 너의 어떤 부분에 대해서도 심판하지 않는다. 다만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맞이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 33. 친구(2)



우정을 간직하고자 한다면 우선 인간에 대한 존경심을 품고 있어야 한다. 비평이

없는 세상에서만 어떤 종족이 숨을 쉬기 마련이다.

만일 친구에 대한 어떤 부적절한 판단을 내리게 되었다면, 그 이유는 분명히 서로의

만남이 적었던 탓이리라. 그러한 문제는 관용도 나약함도 무기력함도 아니다.

관념의 엄격함도 별문제가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대는 스스로에 대한

재판관이라고 생각하라. 그대의 언도로 인하여 사형을 선고 받은 이가 있을 경우,

그 사형수가 몸이 아프다면 그대는 그를 우선적으로 치료하려 들지 않겠는가?

자신의 서투른 말투로 인한 분쟁을 겁내지 말라. 본래 말이란 그런 허점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대는 심판할 권한을 가진 동시에 신뢰할 수 있는 이성을 가지고 있다. 하나의

대상에 대하여 이처럼 상반된 판단이 양립한다는 자체가 사실 내 제국의 신비이다.

물론 이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것 역시 언어의 편협성에서 근거하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제국의 논리학자들과 빚어지는 허다한 논쟁에 별 무게를 두지 않는다.

사막의 황량함을 딛고, 우리는 서로 싸우고 증오하며 지금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하찮은 말싸움으로 인한 시비에 서로의 소중한 관계를 걸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각자의 영혼 속에서 진리의 뿌리를 발견하고는 서로를 외경의 눈으로

바라보며, 사랑으로 굳게 손을 잡는다.

[ 34. 어떤 창녀의 이야기



그대는 창녀에게서 무엇을 기대하느냐? 그녀는 그대에게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그녀에게 무엇을 강요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조차도 없는 일이다. 그러나

애인인 경우, 그대가 그녀를 도와주기 위하여 달려가고 싶다면, 그것은 그녀의

내면에 실린 어떤 고귀함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사랑이란 본래 그런 것이니까.

그렇다면 창녀와 애인은 어떻게 다를까? 애인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두 팔을

벌리기만 하면 된다. 아니, 매춘과 사랑의 구별은 이런 것들보다는 선물로 가름하면

쉬울 수도 있겠다. 창녀에게 적당한 선물을 준다는 건 우스운 일이다. 만일 일을

치르기 전에 곱게 포장된 선물을 준다면, 그녀는 화대를 미리 받는 것이라고 쉽게

판단할 테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선의의 선물이 모독이 되고, 그대는 세금을 내듯이 허망한 기분에

사로잡힐 것은 불을 보듯이 뻔한 일이다.

저녁 나절, 도시의 홍등가에는 군인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나다니기 시작한다.

쥐꼬리만한 봉급을 만지작거리면서 그들은 사막에서의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사랑을

흥정하기 시작한다. 이리하여 꼬깃꼬깃한 돈으로 산 거리의 사랑은 한 여자의 육체를

혹사시킨다. 이는 돈의 유희일 뿐이지, 어떤 열정의 결과물은 아닌 것이다.

창녀란 본래 황금충과 같아서, 손님이 지불하는 지폐의 두께에 자신의 값어치를

매긴다. 자신의 능란한 기교와 아리따운 미모가 손님들을 유혹하였다고 믿는

창녀들은, 찾아온 고객들이 정신없이 뿌려대는 돈을 거두어들이며 끊임없이

자기 도취에 빠져든다.

밑도 끝도 없는 우물 속에 그들은 밤만 되면 수천 수만의 땀방울로 얼룩진

황금을 쏟아붓는다. 그리하여 나의 충성스러운 군인들은 모래알같이 모여지지

않는 헛된 애무와 열정 속에 흐트러지곤 한다. 그들은 자신의 품속에서

꿈틀거리는 작은 동물에게서 황홀한 향연과 스스로의 사랑에 가슴을 떤다. 그러나

사랑으로 남자의 가슴에 파고드는 창녀를 그대는 본 적이 있느냐?

결국 나의 군인은 꼬깃꼬깃 모은 돈을 죄다 창녀에게 던져 버린다. 그러고는

진흙탕 속에서 진주를 발견했노라고 큰소리를 친다. 물론 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인 데다가, 그 안의 인물들을 굴비처럼 한 두름으로 엮어놓아 그 성격이

어떻다고 딱히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분명히 말하건대 준다는 것과 받는다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이러한

평범한 진리를 잊을 때, 그대에게 다가오는 것은 재앙뿐이다.

술 취한 군인과 창녀는 간혹 아름다운 사랑을 맺을 수도 있다.

[ 35. 도자기에 얽힌 단상



나는 잠깐 사소한 부분에 관하여 궁리한 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도자기에 관한

것이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이곳 야영지에서 빚어내는 도자기들은 매우 아름답고

단단한데 비해, 다른 야영지에서 나온 도자기들은 질이 아주 형편 없었다.

그렇다면 이 상반된 결과물을 빚어낸 장인들은 아주 다른 방법으로 흙을 반죽하고

가마에 굽는가? 내가 관찰해본 바에 의하면 전혀 그렇지 않았다. 도자기를 만드는

방법은 두 곳이 한 치도 틀리지 않았던 것이다. 무엇이 이러한 극단적인 결과를

도출하는가?

내가 깨달은 것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그것은 재료도 기술도 아닌 바로

헌신적인 정신의 산물이라는 것, 바로 그것을^5,5,5^.

헛된 야심에 사로잡혀 사물의 질을 무시한 채 일하는 사람들은, 설령 어떤 완성을

위해 밤을 지새운다 해도 결국엔 선멋만이 비치는 조잡한 결과 외에는 그 무엇도

만들어낼 수 없다는 것이다. 이해타산 속에는 신의 성질이 들어갈 틈바구니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기도 속에서 헌신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잘 파악하고 있다. 그것은 마치 둥지를

트는 하얀 새털 마냥 따스하기 그지없다. 그것은 달콤한 꿀을 모으는 꿀벌과도 같다.

그것은 오로지 도자기에 대한 열정으로 온 정신을 던지는 사람이다.

너는 팔기 위하여 쓴 시를 읽느냐? 그것은 실로 아무것도 아닌, 보잘것없는

욕망이 비곗덩어리에 불과할 뿐이다.

[ 36. 여가



노동과 여가를 구분한다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대개 사람들은 자기 생애 중

하잘것없는 부분에 대해서는 혐오감을 갖는다.

여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굴린 주사위가 아무런 행운을 가져다주지

못하고, 원하는 바에 별 도움이 안 된다면 당연히 중단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양떼와 소중한 목장을 걸고 하는 노름인 경우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그런 행위는 모래로 집을 짓는 어린애 같은 짓이다. 모래는 단순한 한 줌의

돌가루가 아니다. 하나의 성채이며 산이며 배인 것이다.

나는 즐겁게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을 보았다.

종려나무 아래서 낮잠을 즐기는 시인이 그랬고, 창녀촌에서 평안하게 차를

마시는 굵은 주금이 패인 늙은 군인이 그랬다. 또 자기가 짠 평상에 누워

해바라기를 하는 목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모두들 어떤 안식을 즐기고 있는 듯이 보였다.

사람들은 바른 궤도를 벗어나 있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하나의

인간이 진실로 안식할 수 있는 것은 피로를 풀기 위한 주사위 놀이가 아니라,

자신이 건축한 성전의 마지막 기왓장을 올리는 순간의 환희, 바로 그것이다.

노동에서 얻는 여가란 그것이 단순한 시간의 공백이든지, 땀 흘려 일하는

와중의 휴식이든지, 혹은 창조적인 발명 이후의 정신적인 회복 상태 등을

제외하고는 모두 죽은 시간이다.

그래서 하찮은 인생은 두 가지 상반된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사역에 불과한

작업과, 노동을 거부하는 여가가 바로 그것이다.



조각가들에게 존재하는 것은 문화의 한 형태이며, 그들이 완수하는 일의 결과는

고통과 기쁨과 온갖 신고의 표현이다. 모름지기 참다운 예술의 힘은 열정과

굶주림과 갈등, 자식들을 위한 먹을거리의 장만, 어떤 현상에 대한 세상의 정의

등을 모조리 포용할 수 있는 우스꽝스러운 삐에로의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

창조란 저항에 대하여 맞서는 데서 이루어진다.

그대가 여가를 아무런 부담 없이 잠자는 데 투자할 수 있다면, 그래서 그대를

괴롭히는 온갖 부당함이나 협박에서 자유롭다면, 분명해지는 진실은 그 시간 그대

자신을 재창조하는 일 외에 더 가치 있는 일은 없다. 이것은 분명한 진실이다.



그렇다고 혼동하지 말라. 유희란 무가치한 것이다. 유희에는 그에 대한 형벌이

예비되어 있지 않다. 나는 자신의 근시를 고치기 위해 안대를 한 사람과, 죽는 날

까지 캄캄한 독방에 갇혀 있어야 하는 사형수를 구별할 줄 안다. 그 둘 다

평온하게 침대 위에 누워 있고, 빈 공간에서 따사로운 햇볕을 즐기고 있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동이 틀 즈음 그들에게 물어보라. 전자는 밝은 모습으로 그대를

맞이하겠지만, 후자의 머리카락은 하얗게 세어 있을 것이다.



어린이들이 모래 위에다 막대기를 꼽고 있다. 아이들은 그 막대기를 여왕이라

부르며 순진무구한 마음을 바친다. 그러나 내가 그 아이들의 방법을 따른다면, 그

막대기를 대중의 우상으로 승화시킬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손때 묻은

헌금을 내도록 강요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유희는 더 이상 유희일 수가 없게

된다. 인간들은 두려움의 송가, 혹은 사랑의 찬가를 부를 것이다. 결국 생명 없는

그 막대기는 차츰차츰 인간의 생명을 갉아먹게 된다.



노동은 사람들에게 현실에 만족하도록 강요한다. 노동은 돌을 만지게 하고, 비를

간절히 기다리게 하며, 홍수를 경계하게 만든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노동을 통해

서로 마음을 통하고 넓은 시야를 갖게 된다.

노동은 사람의 발길을 인도하고 강요하며, 어느 영역에 소속되기를 요구한다. 이것이

사람의 길이다. 나의 제국에서도 이 원칙이 통용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 37. 광고



나는 상인들에게 상품 광고를 하지 못하도록 규제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슨

교육자라도 되기나 한 듯, 고매한 표정으로 단지 삶의 수단에 불과한 자기네 상품들을

목적으로 착각하도록 만들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거리나 시장에서 헛소리를 늘어놓으며 군중들을 오도하려 한다. 그들은

오로지 파는 데만 열중하여, 저속한 음악으로 당신의 영혼을 꾀어내고 있다.

사람들에게 봉사하기 위해 물건을 광고하는 게 나쁘다는 건 아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쓸데없는 물건의 홍수 속에서 방황하게 된다며 실로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다.

[ 38. 창조



창조하라. 그대에게 그런 의지가 꿈틀거린다면 말이다. 날파리들이 푸줏간에 걸려

있는 고기한테 달려들 듯, 봉사할 사람들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나타나 너의 창조에

동참할 것이다.

만약 그대가 어떤 종교를 이룩하고자 한다면, 교회를 세울 사람들은 밤하늘의

모래알처럼 많이 나타날 것이다.

창조한다는 것, 그것은 존재의 신화이다. 바다로 통하는 도시에서 하수도를 만들고

도로를 만드는 것은 내가 아니다. 나는 단지 그런 일에 애착만을 가졌을 뿐이다.

이러한 나의 애착으로 인하여 경찰관이며 건축가며 환경 미화원이나 전기공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창조란 사물의 부조화 속에서 하나의 영역을 돌출시키고자 하는 것으로 사람들

눈에는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애정처럼 말이다. 강한 인상을 억지로 만들거나

수학 공식처럼 무엇을 증명하는 따위는 할 일없는 짓이다. 그대는 새로운 경이에 맞서

머리를 곤두세우며, 논증에 대한 더욱 훌륭한 논증을 찾아내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성전의 그림자와 침묵을 설명하기 위하여, 그대가 그 성전을 해체하고 그 벽돌

하나하나를 들어내 보인다면 얼마나 헛된 일이겠는가? 그렇게 해서 남는 것은

침묵이 아니라 지저분하게 널린 성전의 유해일 뿐이다.

나는 그대의 손을 잡고 갈 것이다. 발걸음이 닿는 대로 걷다가 작은 언덕배기에

오르면, 내가 창조한 질서의 언덕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그대를 집안에만

가두어둔다면, 그대는 편협하고 일방적인 사고 방식을 가진 인간으로 사육 될

것이다. 내가 세상을 만들어 주고 그곳에 머물게 한다면, 그대는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된다. 하나의 관점에서 느낄 수 있는 찬란함도 다른 시각에서는 보면 전혀

가치없는 폐물로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대는 나를 찬양하는가? 그러나 나는 창조하고 있지 않다. 나는 요술쟁이이며

어릿광대이며 사이비 시인일 뿐이다. 그러나 이 언덕에서 바라보는 저 광활한

평원은, 그대의 한계를 벗겨주어 넓은 가슴을 열리게 하리라.



나는 지배하지만 흔적을 남기진 않는다. 이런 경우에만 나는 왕이며 창조자이다.

그렇다. 창조자나 시인은 무엇을 만들어 내거나 보여주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사람으로 하여금 무엇인가를 추구할 수 있도록 자극하는 존재이다.

[ 39. 죽음에 이를 때까지



"주여, 제게 평화를 주소서. 제 마음은 지쳐 있습니다. 친구들은 하나 둘 사망의

골짜기를 헤매고 있고, 내 걸어가는 계곡에는 지루한 한가로움만이 있을 뿐입니다."

어린아이들조차 제겐 너무나 생소하게 여겨집니다. 황금의 유혹도 지금의 저를

어쩌진 못합니다. 주여, 저는 몹시 지쳐 있습니다. 제게 안식을 주소서. 제게

나타나 응답하소서."



나는 군중들의 열광과 꽃비 속에 승리자로서 도시에 들어서고 있었다. 제국의

영광이 찬란하게 거리를 메우고 있었다. 그러나 가혹한 신은 나로 하여금 군중

속에 포위된 가련한 존재로 인식하도록 만들었다. 진정 승리의 환호 속에

배태되는 것은 무엇일까?

일시적인 칭송의 세례 속에서, 나의 영혼은 군중들의 시야에는 보이지도 않을 머언

변방으로 날아가버린 것이다. 나는 다른 사람들의 판단이나 평판에 거의 귀기울이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고독감과 깊은 슬픔에 빠져버린 것이다. 목이 말라 허겁지겁 물을

마시려 할 때 어렵사리 발견된 우물이 텅 비어 있을 때처럼 말이다.

그래서 이 열광하는 군중들로부터 해방되어 더 이상 허영으로 들떠 있을 필요조차

없는, 이미 죽은자들은 얼마나 편안할까? 이제는 나에게 더 이상 가르쳐줄 것이 없는

헛소문처럼 갈채가 나를 피곤의 극에 달하게 했을 즈음, 꿈이 나를 찾아왔다.



깎아지른 듯이 가파르고 매끄러운 길의 바다 위에 불쑥 나타났다. 천둥치는

밤이 물로 가득 찬 가죽 부대처럼 무겁게 내려앉았다. 고집센 나는 사물의 이치를

물어보고 생의 목적지를 물어보기 위해 신에게로 올라갔다.

산꼭대기에 올라서니 검은 화강암이 쌓여 있었다. 그것은 움직이지도 썩지도 않는

신이었다.

"주여, 제게 축복을 내리소서. 왜 사랑이 저를 두렵게 하는 겁니까? 저의

친구들 동료들 신하들은 모두 저의 꼭두각시에 불과합니다. 저는 그들을 가르치고

복종시켰습니다. 그런데 문둥병자들보다도 더 저를 고독에 찌들게 합니다. 아아!

그러나 제게 돌아오는 것은 얼어붙은 메아리, 저의 목소리일 뿐입니다. 주여, 저는

이 같은 사랑에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빗물이 번들거리며 흐르는 화강암 더미는 아무 응답이 없었다.

"주여, 당신 곁에 까마귀가 있다는 것, 저는 그것이 당신의 침묵으로 인한

위엄이라는 걸 압니다. 그러나 제게 하나의 징표를 보여주소서. 저 까마귀를

날리소서. 그리하면 저는 세상에 혼자가 아님을 알겠습니다. 주여, 응답하소서."

그러나 까마귀는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주여, 당신의 판단은 언제나 옳습니다. 당신은 제게 복종하지 않는 존재입니다.

저는 주님의 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저 까마귀가 날아올랐을 때 저는 더욱

슬퍼집니다. 이와 같은 징표는 바로 제 자신에게서 받았던 것이고, 이 모든 것은

제 욕망에 지나지 않은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아아, 저는 다시 고독과

대면하게 되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물러서는 순간, 나의 절망은 처음 느끼는 생소한 침묵으로 돌변해

있었다.

나의 길은 진흙탕에 빠져 있었고, 가시덤불에 찢기우고 돌풍과 싸워야 할 것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나는 신이 내리는 빛줄기가 내 마음 속에 간직하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신은 기도에 응하지 않는 존재다. 기도의 위대함은 무엇보다도 교환이 내재되어

있지 않다는 데 있다. 기도의 수련은 침묵의 수련이다. 사랑은 받을 것을 전혀

기대하지 않는 곳에서만 싹을 틔운다. 사랑이란 기도의 행위이며, 기도는 침묵을

행하는 것이다.



나는 백성들이 있는 곳으로 되돌아왔다. 생전 처음으로 나는 사랑이 깃든

침묵으로 그들을 감싸안으며 죽음에 이를 때까지 그들은 헌신을 일깨우리라고

다짐하였다. 영광의 백성들은 꼭 다문 나의 입술에 도취되었다. 나는 목자요,

그들이 찬양하고 숭배한 대상이었다. 나는 그들의 운명을 지배하는 제왕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들보다 훨씬 가난하였으며, 결코 굽힐 수 없는 나의 자존심에

있어서도 더욱 겸손한 존재일 뿐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들은 내 안에서 존재한다. 그들의 찬송은 나의 침묵 속에 울려퍼졌다.

그리하여 우리는 신의 묵언 속에 빨려들어가 버릴 기도가 되었다.

[ 40. 기하학자와의 대화



제국의 기하학자들이 내게 어떤 권고를 하기 위해 찾아왔다. 사실 그들은

기하학자가 아니다. 제국의 기하학자들은 이미 모두 죽었다. 이들은 마지막 한

사람, 나의 친구였던 그러나 이제는 세상을 떠나버린 기하학자의 후계자들이었다.

그 기하학자는 한 척의 배를 만들기 위하여 연장이나 재료 따위를 걱정하지 않았다.

다만 배 만드는 곳에 만 명의 노예와 몇 명의 헌병을 집어넣으면 그뿐이었다. 그러면

배는 금세 만들어져 바다의 물결 위를 미끄러져 가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기하학을 실천하면서 연역적인 것에는 극히 무관심했다. 다만

정리하고 탐색하여 자기가 선택한 '기하'라는 나무의 열매를 거두어들일 만 명의

무리, 즉 자신의 후계자들을 움직이게 했다.

기하학자의 후계자들은 그 기하학자를 이해하고 자신들의 작품을 풍부하게 하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그들이 얼마나 유능하고 소중한 존재인가를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정신의 곡식을 거두어 들인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결실이 창조적인 일이라고

하기엔 뭔가 미심쩍었다.

창조란 무상의 자유이며 예측 불가능한 인간의 행동이다. 나는 그들이 행여

자신들을 나와 동격으로 착각할 것을 우려하여, 접견하는 자리를 아래쪽으로

준비하도록 하였다.

그들은 이러한 나의 우려를 알아채고는 자기들끼리 웅성거리다가, 대표격인

인물 한 사람이 나와서는 내게 말했다.

"이성의 이름으로 우리는 당신께 항의합니다. 우리는 진실의 사도입니다. 당신의

법칙은 우리가 추구하는 진실보다는 덜 확실한 것입니다. 당신은 군대의 힘으로

우리들의 육신을 가둘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우리의 정신을 제압하려 한다면,

우리는 캄캄한 감옥에서라도 당신께 저항할 것입니다."

그러고는 자신들의 용기에 매우 만족이라도 한 듯 어깨를 으쓱거리는 것이었다.



나는 내 친구였던 진정한 그 기하학자를 회상하였다. 잠 못 이루는 밤이면 나는

그의 거처를 방문하곤 하였다. 함께 차를 마시면서 나는 그를 통하여 깊은 예지의

꿀을 맛보았다.

"기하학자여! 내게 진리를 가르쳐주시오.

"왕이시여, 저는 처음부터 기하학자는 아니었습니다. 남들과 똑같은 인간일

뿐이랍니다. 저는 이따금 잠이 오지 않거나 배고프지 않을 때, 또 사랑의 열정이 더

이상 내 마음을 뒤흔들지 못할 때, 공부를 조금 더 했던 그런 인간입니다. 그러나 이젠

몸이 다 늙어빠진, 지금에 와서는 확실히 당신의 표현대로 저는 기하학자입니다."

"그댄 진리를 가르쳐주는 사람입니다."

"저는 어린아이처럼 애써 상황에 알맞는 말을 찾아낼 뿐입니다. 진리는 좀처럼 눈에

뜨이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나의 수윈 말 한 마디에도 진리가 배어있다고

믿는답니다. 결국 그들 스스로가 찾아내는 것인데도 말입니다."

"기하학자여, 그댄 스스로를 비하하고 있소."

"왕이시여, 저는 우주에서 신의 흔적들을 찾아 헤맨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나 자신 이외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는 것이 없다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내게 우상의 번개불을 뿌려댔습니다."

그는 격정에 불타서 소리쳤다.

"작은 소리로 말해 주시겠소? 나는 이해는 느리나 귀는 밝답니다."

그래서 그는 작은 목소리로 내게 진리를 속삭여주었다.



헛된 자만심으로 내게 고개를 쳐들었던 기하학자의 후계자 중 한 명이 다시 입을

열었다. 좀전의 허세에 대하여 그들 모두는 적잖은 불안과 후회가 엄습해온

모양이었다. 나는 왕이었으므로.

"어떻게 당신은 임의의 창조와, 당신에게 증정되는 기념물 속에 조각가의 고매한

정신과 시인의 시가 스며 있음을 압니까? 우리들의 명제는 엄밀히 따진다면 하나가

다른 하나에서 연이어 나오는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은 그 어느 것도 지휘한다거나

규제하는 게 아니잖습니까?"

이렇게 그는 절대적인 진리를 규정짓고자 하였다. (마치 미개인들이 어떤 우상에

대하여 벼락을 내리는 능력이 있다고 맹목적으로 믿는 것처럼) 그리하여, 그들은 내

친구였던 진정한 기하학자와 동등한 반열에 서기를 원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당신 앞에서 한 도형의 선들 사이의 관계를 증명하고 확립하고자 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가 설령 당신의 법칙을 위반한다 해도, 당신은 우리의 법칙을

용인하고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당신에게 우리를 합당한 처우로 대해 달라는

것입니다."

나는 오랜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그대들은 창조가 무엇인지 모르므로 행복한 사람들이다. 만일에 그대들이 어떤

왕국을 건설한다면 그 결과는 자명하다. 갇혀버린 역사, 죽어버린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 또 쓸데없는 논리에 대한 존경심을 강요하기 위해, 그대들은 야만적으로 칼을

휘둘러잴 것이기 때문이다.

벼랑에서 실족하여 죽은 사람이 있었다. 이러한 사건에 대하여 논리학자들은

그가 죽은 원인을 면밀히 추적하였다. 결국 그 사자를 끌고 언덕과 사막과 벼랑을

오르내리며 어떤 결론에 도달할 수는 있었지만, 죽은 사람은 몇 번이나 다시

죽음을 맛보아야 했다. 그대들은 이런 이야기에 내포된 진리를 알아 듣겠는가?"

기하학자의 후계자들은 겉으로는 "이해하였습니다." 라고 이구동성으로

지껄여댔다. 그러나 나는 그에 아랑곳않고 다른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옛날에 한 사람의 연금술사가 있었다. 그는 증류기와 약품 등을 이용하여 어떤

작은 금속 조각을 추출해내곤 하였다. 이러한 결과를 분석해내기 위해 논리학자가

달려오자, 그는 증류기 밑의 불길에 물을 뿌린 다음, 생명의 신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하면서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창조는 창조가 지배하는 사물과는 완전히 본질이 다르다. 그 자취는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창조자는 초월자이다. 그는 순수한 논리 그 자체이다.

나의 친구였던 진정한 기하학자는 내게 이렇게 물은 적이 있다.

"생명이 또 다른 생명을 싹트게 한다. 이외에 또 어떤 진리가 있을손가?"

[ 41. 믿음



만약 그대가 자발적인 마음에 의해서가 아니라, 어떤 동기에 의해서 사물의

개념을 규정해버린다면 나는 결코 그대를 믿지 않으리라.

너는 아내의 이름과 아내의 본질이 어떤 관련이 있다고 보느냐? 예컨대 이러한

말이 성립된다고 보는가?

'그녀의 이름은 그녀의 미모를 증명한다.'

그대의 언어가 어떤 진리를 내포하고 있지 않고 모호하게 책임을 회피한다면,

분명히 그대를 거부하리라.

그대의 무모한 행동이 메마르고 형편 없는 논리를 근거로 한다면, 결국

나에게서 추방당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어떤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죽음도

불사하는 사람들을 익히 보아왔다. 그들의 정신적 깊이를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으랴. 지사의 모든 책들을 읽어보라. 그 안에 씌어진 언어로 가당키나 하겠는가

말이다.

나는 전쟁에서 적을 생포할 때의 기묘한 심리 상태조차 그대에게 제대로 설명할

수가 없다. 가령, 한번도 바닷가를 벗어나 본 적이 없는 그대의 가슴 안에 산을

심어주고 싶을 경우, 나는 얼마나 많은 말을 해야 그것을 그대 마음 속에

뿌리내리게 할 수 있겠는가? 거친 땀방울을 흘리며 갈증에 시달리고 있는

그대에게 맑은 샘물의 시원함을 말로써 전해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신은 다르다. 내 말이 진실로 그대에게 파고들려면 신의 침묵이 함께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법이다. 내가 그대에게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은하수가

영롱한 빛을 발하는 산등성이에 그대를 올려보내는 일, 샘물에 매혹되게끔 그대를

사막으로 보내 그 열풍 속에 여행하게 하는 일, 그 다음 정오의 태양이 바윗돌을

달구는 채석장에 6개월 정도 가두어 그대를 기진맥진하도록 만들어놓은 다음,

비로소 그대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을 뿐이다.

"힘없는 인간이여. 별빛이 반짝이는 산꼭대기에 올라 성스러운 신의 침묵 속에

샘물을 움켜 마시라. 이것은 제국의 어둠 속에 감추어진 비밀이니라."

내가 우수를 조각하면 그대의 얼굴에 우수가 깃들 듯이, 신은 그저 존재하기

때문에, 아무도 신을 부인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42] 우상

새롭게 영혼을 일깨우고자 하는 강렬한 욕망이 내 가슴에 꿈틀거리고 있다. 평범 속에서 안주하고 있는 자들에겐 일용할 양식 이외에는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는다.

그대는 한 세계의 주인이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가 나로 인하여 주어진 것이다.

그대는 제국의 명암에 따라 좌우되는 운명이다. 그대의 허영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단지 나의 제국의 힘에 의하여서만 보여지는 현란한 빛깔이 아니던가?

그 여자는 15 년 여를 향기로운 눈화장 속에 잠겨 있다. 그녀는 시와 미혹과 어둠을 배웠다. 그러나 침묵만이 가장 소중한 샘물을 품고 있으리라.

어떤 육체가 다른 하나의 육체와 닮았다고 해서, 또 일시적인 쾌락을 위한 창녀와 같은 음료를 만들어 준다고 해서, 그 여자를 일러 청정한 샘물의 원천이라고 이름하겠느냐?

그대는 정복과 풍요를 위해서 그 여자들을 제자리에 놓아둘 것이다. 공주를 봉양하는 것보다 곁에 창녀를 두는 편이 훨씬 낫다. 그 편이 돈도 훨씬 덜 들 테니까. 공주가 곁에 있다면 그대는 참담해지리라. 그대는 그녀의 기품과 우아함을 이해할 수 없으며,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그대의 능력 탓이므로.

나는 인간들의 논쟁 속에서 칼날이 번득이는 꼴을 많이 보아다. 얼마나 더럽고 불결한 현실인가? 마찬가지로 그대는 그 여자를 위하여 살인이라도 저지를 것이다. 그대에게 그녀의 육체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 그녀의 육체를 소유하지 못하면 그대는 국외자로서의 노여움을 가진다.

그렇다. 차를 끓이는 주전자가 없어지면 차에 담긴 작은 의미조차도 잃어버리는 것이 된다.

그러나 그 의미에 매달려 주전자를 극진하게 모시고 자랑하고 경배해야 하는가?

그리된다면 애당초 여자에 대한 그대의 사랑이나 집착은 간 데 없이 사라지고, 모두가 파멸의 구렁텅이로 빠져버리게 된다. 나는 인간의 영혼을 일깨우고 안온한 정원을 꾸미리라. 그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돌보면서 그 아이들이 어떤 의미를 마음에 담을 수 있도록 하여라.

나는 논리를 믿지 않는다. 다만 사랑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을 믿을 뿐이다.

만약 그대가 나무 한 그루를 키우고 있고 나 또한 한 그루 나무를 가꾸고 있다면 우리들의 공통된 이야기꺼리는 나무를 배태한 씨앗이 아닐까?

그러나 인식하라. 제국이 추구하고 발전시키려 하는 모든 것은 나의 의도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나는 무엇에 몰두하지 않는 사람이다.

나는 존재를 넘어서 존재한다.


[43] 신성(1)

그대는 어떠한 것도 신의 계시로 받아들이지 말라. 신성의 표적은 오로지 침묵일 뿐이다.

돌멩이는 성전에 대하여, 나뭇잎은 나무에 대하여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전혀 알 수가 없다. 나무나 성전도 다른 여러 사물들로 어우러진 나의 제국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한다.

이와 같은 원리로 그대는 신에 대하여 알지 못한다. 만일 그게 진실이 아니라면 성전은 돌멩이에게 자신을 보여주어야 하고, 나무는 나뭇잎에게 무엇인가를 드러내야 한다.

그것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돌멩이와 나무사이에는 각기 교감하는 언어가 없다. 이는 나의 새로운 깨달음이다.

나는 밀폐된 방에 갇혀 있다. 나의 고독은 희망조차 거부하고 있다. 돌멩이로서 돌멩이 외의 다른 것이 되는 게 아니다. 그러나 우리 돌멩이는 서로 협력함으로써 서로 모여 성전으로 탈바꿈할 수 있다.

나는 백성들과 하나가 됨으로써 비로소 변화하고자 하는 열정에 불꽃을 피우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신의 표적이다.

그렇다. 공동체에서 벗어난 개인은 실로 하찮은 존재이고 만다. 스스로에 만족하지 못하는 바람 같은 존재이다. 그러므로 자신을 있는 그대로 있게 하라. 곳간 속에서 겨울을 보내는 씨앗과도 같이, 그는 봄이 오면 파아란 새싹으로 돋아나올 것이다.


[44] 신성(2)

초월에 대한 거부, 그들은 그게 '나'라고들 한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배를 두드린다. 마치 그 속에 어떤 존재가 있는 듯이. 그렇다면 성전에 속한 돌멩이 들고 말할 것이다.

'나, 나, 나이다.'라고..

내가 다이아몬드 광산에서 일하도록 엄명한 죄수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땀과 노동, 강건한 근육과 열망이 어우러져서 다이아몬드가 된다. 그 신비한 빛이 된다. 그러나 그들도 마침내 부르짖는 날이 올 것이다.

'나, 나, 나이다.'라고.

이제 그들은 더 이상 다이아몬드에 매혹되지 않는다. 이제 자신들이 다이아몬드처럼 우러러보이고 싶어한다. 그들은 심각한 착각 속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들의 화려함은 순전히 그들이 완성하고 경배하였던 다이아몬드의 광채 때문이었다. 그들이 광산을 뛰쳐나와 반기를 드는 그 순간, 그들은 본래의 흉악한 죄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성전을 구성하는 돌멩이들이 제 위치를 찬고, 나무는 대지의 물과 양분을 흡수하면서 푸른 바람을 일으킨다. 강물은 제국의 찬연한 영토가 있음으로 유연한 몸매로 흐르게 마련이다.

그런데 그들은 이런 법칙을 몰랐다. 그들은 스스로를 목적이고자 했고 결과이고자 했다. 이 때문에 왕자들은 학살되었고, 반짝이는 다이아몬드는 산산이 부수어져 사라져갔다. 언젠가는 지도자의 반열에서 있어야 할 현자들은 차가운 지하 감옥 속에 갇히었다.

그리하여 이젠 성전이 돌멩이에게 경배하는 시대가 되고 말았다. 반역자들은 성전에서 뜯어낸 돌멩이의 부스러기들 때문에 모두가 부자가 될 것이라고 믿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어찌될 것인가? 결국 반역자들은 신의 선물을 파괴하여 쓰레기만을 움켜쥔 꼴이 되고 말 것이다.

누군가 내게 이렇게 물으리라.

"그러한 변혁이 없다면 노예들은 언제나 해방될 수 있으며, 죄수들은 언제나 감옥에서 밝은 빛을 볼 수 있단 말입니까? 대체 사람의 권리는 어떻게 찾을 수 있나요? 물로 신들의 권리는 있다고 할지라도 성전에 맞서 일어난 돌멩이와, 시에 맞서 일어난 단어와, 제국에 맞서 일어난 인간의 권리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 질문에 나는 이렇게 대답하리라.

"너희는 단지 그러한 이기주의를 위하여 파멸을 선택하려는가? 단지 '나, 나, 나'라고 외치면서 죽어가는 사람에게는 자신의 왕국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성전에서 벗어난 돌멩이며 시에서 어긋난 단어, 그리고 육체에 반기를 드는 살조각을 직시하라. 결국 이들은 빗자루에 쓸려 쓰레기장에 묻히고 말 것이다."

본질적으로 계층이란 없는 것이다. 나는 처음에 몇 가지의 이름을 지어내었다. 그 길을 따라 다른 이름을 가진 소위 계층이란 것이 생겨난 것이다. 그대는 본질이 없는 것을 본질로 돌리려느냐?


[45] 법

법이란 사물에 대한 무용한 의식이 아니라, 곧 사물의 의미하는 그 자체이다. 만약 그대가 사랑에 관한 법률을 제정한다면, 나는 그에 알맞은 사랑을 할 수 있다.

나의 사랑은 내가 원하는 범위의 구속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법은 헌병도 될 수 있고 좋은 관습도 될 수 있는 것이다.


[46] 제국의 의미

밤이다.

나는 높은 성벽에 서 있다.

제국의 병사들은 이 산에서 저 산으로 봉화를 올리면서 서로 연락을 취하고 있다.

성벽을 순찰하는 파수병들은 각기 긴밀하게 신호를 보내면서 어떤 위험에 대비하고 있다.

그러나 이 밤, 제국에는 균열이 생기고 있다. 몇몇의 봉화대에 불이 꺼져가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권태로운가? 어둠은 제국을 붕괴시킬 수 있다.

그 붕괴는 단란한 가족을 무너뜨리고, 저녁 만찬과 자녀들과의 다정한 입맞춤을 무너뜨릴 수 있는 위험이다. 제국이 무너지면 그와 함께 모든 삶도 무너진다.

사람들은 더 이상 어린 아이들의 맑은 눈을 통해 신을 바라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

사라져가는 세대여, 내가 그대를 화형대 위에 올려놓았다한들, 그것이 무에 중요할 것이냐, 사물의 의미로부터 성전을 구출해야만 한다.

생명은 내게 가르쳐주었다. 팔다리가 잘린 육체에는 진정한 고통이 없다고.

죽음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 반항은 인간의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는 성전의 규모에 비례하여 확대된다. 만약 제국에 충성하도록 교육받은 사람을 유형지의 감옥에 가두어 제국에서 몰아낸다면, 그는 감옥 창살에 자해를 하면서 먹고 마시길 거부할 것이다. 그의 언어가 더 이상 쓸모없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급류에 빠진 아들을 구출하기 위하여 강물 속에 뛰어드는 아버지를 보라.

그대가 만일 그 아버지를 염려하여 팔을 끌어당긴다면, 그 아버지는 그대의 손을 강하게 뿌리치고 큰 소리를 지르며 강물 속에 몸을 던질 것이다. 그러하지 않으면 그의 언어는 더 이상의 의미를 상실하기 때문이다.

그대에게 있어 내가 부여한 가장 뜨거운 고통은 인연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나는 사람들을 구출하여 억지로라도 그들을 살아있게끔 하고 싶다. 감옥에 보낸다거나 먼 곳으로 유배를 보내서라도 말이다.

이러한 결과로 그대가 가족이나 제국을 못 잊어 하며, 참을 수 없는 괴로움 때문에 나를 비난한다면, 나는 그릇된 그대의 행동 방식을 바로잡아 어떤 존재의 의미를 부여케 하려는 것이라고 감히 대답하리라.

지나가버리는 세대여, 그대들은 객관성의 결여로 인하여 내가 성전의 위탁자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보라, 성전은 그대의 마음을 키우고 그대의 언어를 살리며 그대의 기쁨을 내부로부터 활활 타오르게 한다. 이러한 믿음이 없을 때, 군인들로 이루어진 강력한 포진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나는 백성들을 개인의 영광을 위해 이용하지 않았다. 나는 신 앞에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나의 영광만을 받는 신은 나와 더불어 모두를 포용한다.

나는 제국을 섬기기 위해 백성들을 이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인간들의 존재 의의를 부여하는 데 제국을 이용했다. 이것이 내가 한 일이다. 그러므로 백성들의 작업의 결실을 내가 먼저 취했다면 이는 신에게 바치기 위해서이다. 은혜에 대한 보답으로써, 신이 다시 그 결실을 백성들에게 뿌려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나의 창고에서 흘러나오는 곡식이 바로 그것이다. 양식은 빛이 되고 찬송이 되며 마음의 평화가 된다. 인간에 관계되는 모든 것이 이와 같다. 다이아몬드는 영원한 결혼의 의미를, 이 야영지는 우리 종족의 생존의 의미를, 이 성전은 신의 은총을, 저 강물은 제국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47] 자유

자유.

돌아가신 나의 아버지가 허물어뜨릴 수 없는 큰 산이 되어 인간의 지평선을 가로막을 때, 논리학자와 역사가와 비평가들은 분노로 일어섰다. 그들은 이렇게 부르짖었다.

"인간이란 아름다운 존재다. 그러므로 인간을 해방시켜야 하다. 그들은 마음껏 자유를 누리면서 활짝 웃음 지을 것이다. 저항이란 왕의 광채를 흐리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저녁 나절이 되어 사람들이 나무 줄기를 바로 세우고 가지를 쳐준 오렌지 나무 숲에 가서 나는 이렇게 말하였다.

"오렌지 나무는 아름답다. 맛있는 오렌지가 주렁주렁 달려있는 게 보이지 않은가? 그런데 열매를 열게 하는 나무가지를 왜 자르는가? 나무를 그냥 내버려두라. 그리하면 나무는 자유로이 꽃을 피울 수 있다."

마침내 인간은 해방되었다. 사람들은 신에게서 재단받은 대로 획일적인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대치될 수 없는 모래에 대한 존경심은 간 데 없고, 오로지 남을 지배하고자 하는 천박한 욕망은 인간을 구속하고자 하는 헌병들이 나타나자 폭동으로 비화되었다. 자유의 욕구는 거리에서 거리로 들불처럼 번졌고, 자유를 위해서 죽어가는 사람들은 아름다웠다. 거칠 것 없는 자유의 종소리!!

아버지는 이런 말씀을 하셨다.

"그들의 자유란 바로 존재하지 않고자 하는 자유이다."

그들은 점점 광장의 잡상인처럼 변해갔다. 여러 인간들이 각자 자의대로

행동하기 시작하더니 종국에는 모두의 행동 양식이 파괴되어 버렸다.

만일 자신의 취향에 따라 어떤 물건을 붉은 색깔로 칠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파란 색으로 칠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또 다른 사람은 노란 색으로 칠한다.

이렇게 뒤죽박죽이 되면, 그 물건에는 고유한 색깔이란 아예 존재하지 않게 된다.

만약 행군을 할 때 각자가 자기 방향만을 고집하여 걷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만일 그대가 권력을 가지고 있다면 그대가 가진 권력을 주위에 공평하게 분배해

보아라. 그리하면 너의 권력은 강인해지지 못하고, 각자의 쪼개진 권력으로 결국

분열만을 조장한 꼴이 될 것이다.

창조란 단 하나이다. 그대의 나무는 단 한 그루의 나무에서만 싹트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나무는 죄악을 갖고 있다. 다른 씨앗으로 싹튼 것이 아니기 때문에.

권력이 지배욕이라면 나는 그것을 버릴 수밖에. 그러나 창조자의 행위와 창조의

수련으로 만들어졌고, 그로 인한 자연스러운 결과라면 나는 권력을 찬양할 것이다.

자연스러움이란 여러 가지 재료들이 섞이고, 늪에서 얼음이 녹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성전이 풍화되는 것이다. 태양의 열기가 미적지근하게 분산되고, 책을 오래

만지다보면 책장이 닳아 없어지는 것이다. 언어가 분열되고 퇴화하며, 힘이 관계가

동등해지고, 모든 노력이 평준화되어 사물을 맺어주는 신의 매듭에서 생긴 모든

인류의 구성이 부조리하게 부서지는 것, 이것이 바로 자연스러움이다.

결국 자연스러움의 본체는 생명이란 구조이고 힘의 연결선이며, 불공평한 것이다.

만약 그것에 권태를 느끼는 어린이가 있다면, 그대는 어찌할 것인가? 구속이란 놀이의

규칙과도 같다. 구속을 경험하고 나서야 그들이 힘차게 달리는 것을 보게 된다.



해방시킬 무엇을 찾을 수 없게 되면 자유란 한갖 증오를 품은 평등 속에서

양식을 공평한 분배를 요구하는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닌 시기가 도래한다.

자유로운 너는 자유로운 이웃과 충돌하고, 이웃은 너와 충돌한다. 바로 구슬들이

섞이다가 멈춘 상태와 같다. 그리하여 자유는 평등에 이르게 되고 평등은 균형에

이르게 되며, 그 균형은 곧 죽음에 이르게 된다.

너를 골탕먹이고 네가 증오해야 하는 유일한 구속은 너의 이웃과의 마찰,

동료와의 질투, 금수와의 평등 속에 나타난다.

그것들은 너를 메마른 광산의 굴 속으로 처넣을 것이다.

그러나 자유가 집단의 표현으로 나타나게 되고 인간이 어쩔 수 없이 그 속에 용해될

시기가 도래하였다. 사람들은 그 부패하는 냄새를 자유라고 부르고 정의로 알고 있다.

여전히 나팔소리를 흉내내고 있는 자유라는 이 단어는, 감동적인 의미를 상실하고

말았고, 사람들은 그들을 깨워줄 수 있는 새로운 나팔 소리를 막연하게 꿈꾸는 시대가

왔다.



가치 있는 속박이란 존재의 의미에 따라 그대를 성전으로 안내하는 그런

것이다. 참다운 구속이란 나팔수가 네 마음 속에서 승화되어 무엇인가를

불러일으키려 할 때, 그 나팔수를 받아들이는 데 있는 것이다.

자유가 그들보다 더 큰 자신들의 모습이고 또 그들 자신의 아름다움을 위한 행동일

때, 자유를 위해 죽어가는 사람들은 구속을 받아들이고 나팔수의 부름에 한밤중에도

일어난다.

그들은 마음대로 잠을 이루거나 자기 아내를 애무할 수도 없다. 그대가 복종해야

하는 이상 헌병이 안에 있건 밖에 있건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다. 헌병이 안에

있을지라도 나는 처음부터 그가 밖에 있었다는 사실을 안다. 명예도 이와 마찬가지다.

속박이란 어떤 놀이의 규칙과도 같다. 어린이들은 놀이의 규칙에 따르며 열중한다.

그 아이들은 규칙에 맞지 않게 행동한다거나 속이는 것에 대하여 매우 부끄럽게

여긴다. 그들의 열성과 문제의 해결에서 느끼는 행복, 대담성과 조화, 신은 아마

놀이에서 탄생하였으리라.

모든 놀이는 그대를 동일하게 형성해주지 않는다. 그래서 그대는 스스로를

변화시키기 위해 놀이를 바꾼다. 그러나 그대가 선택한 놀이에서 자신이 크고

고귀함을 느꼈다면 그대는 속임수를 쓴 것이다. 다시 말해 놀이의 목적을 파괴한

것이다. 이는 위대함과 고귀함을 파괴한 것이므로, 너는 어떤 큰 사랑의 힘에 의해

구속받게 된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나의 구속은 사랑이라고.

[ 48. 기도



그대 마음 속의 사랑이 상대로부터 받아들여질 일말이 조짐이라도 보이지

않는다면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좋다. 그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이다.

어떤 신도 그대를 위해 문제를 해결해줄 수는 없다. 그대가 사랑도 침묵도

포기할 만한 정신력을 갖기 어렵다면, 하루빨리 의사를 찾아가보는 것이 좋겠다.

사랑과 굴종을 혼동해서는 안된다.

애원하는 사랑은 아름답다. 그러나 애원하는 사람은 노예이다.

그러므로 어떤 여자가 그대를 사랑한다면 그대는 신에게 감사하라. 그녀가

귀머거리요 장님이라 할지라도, 그녀는 그대를 위해서 꺼지지 않는 등불이 되었다.

그대는 일단 부유해졌기 때문이다.

내가 위대한 정신들을 세상에 내보내고 그중 가장 완전한 것을 선택하여 침묵

안에 가두어둔다면, 누가 보아도 그 정신은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그러나 그

정신은 제국을 고귀하게 한다. 멀리서 지나가는 사람조차도 그 정신을 경배하며

무릎을 꿇는다. 그리하여 표적과 이적이 생긴다.

설사 그녀의 사랑에 관심이 없어도 만약 그대가 그녀를 선택한다면 그대는 빛

속을 걸어가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녀의 신에 대한 기도는 위대하기 때문이다.

만일 마음 속의 사랑이 받아들여진다면 그 사랑이 부패하지 않도록 신께 경건히

기도하라. 행복에 겨운 사람은 마음을 의심하는 까닭이다.

[ 49. 표절



문체란 글의 맛이다.

인간은 문체로서 자기 내면의 율동을 표현한다. 표절이란 남의 글에서

무엇인가를 끄집어내 자신의 훌륭한 효과를 거두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마치

당나귀가 지탱할 수 없는 짐을 짊어지게 함으로써 당나귀를 죽이는 일과

마찬가지고, 무엇을 운반한다는 핑계로 남의 수레를 부수는 일이다. 그럴 때 짐의

크기를 잘 계산함으로써 그대는 그 당나귀로 하여금 일하게 할 수 있고, 그가

이미 일하고 있다면 도와주게 될 것이다.

나는 규칙을 위반하는 사람에 대해 매우 엄격하다. 왜 자신의 규칙을 똑바로 세우지

못하는가?



자유의 수련이 아름다움 그 자체일 때는 창고를 약탈하는 것과 같을 수가 있다.

아름다움이란 원형의 성질에서 나온다. 그러나 그것을 노출시키기 위해 사용되지

않는 것을 내보일 수는 없다.

곳간을 짓는 일은 좋은 일이다. 그대가 겨울에 그것을 나누기 위해 그

곳간에서 곡식을 퍼낼 경우에만 그것들은 의미를 갖는다. 그때 곳간의 의미는

처음 곡식을 넣을 때의 곳간의 의미와는 정반대가 된다.

결국 서투른 언어 때문에 모순이 발생한다. '나가고 들어온다.'는 말은 부정이

문제가 될 때 끄집어내는 말이다.

"이 곳간은 내가 들여놓은 장소이다."

이 말에 다른 논리학자는 당연히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그곳은 내가 밖으로 꺼내는 장소이다."

이러한 분란을 어떻게 해결하는가? 우선 그들의 입을 다물게 하라. 그러고는

곳간은 씨앗의 정착지라고 말하면서 곳간의 의미를 확정하면 된다.

나의 자유는 나의 속박의 결과를 이용한 것이다. 속박만이 해방될 만한 가치가 있는

그 무엇을 해방시켜줄 권한이 있다. 그래서 마음 속에 폭군이나 집행자의 명령에

거역하고 개종하길 거부한다면 그는 고통 속에서도 자신은 자유롭다고 말한다.

나는 저속한 사랑에 저항하는 사람도 역시 자유롭다고 말한다. 그들이 설사

노예가 되는 자유도 역시 자유라고 부를 수는 있겠지만, 모든 요구에 순종하는

그를 자유인이라고 볼 수는 있을까? 없다.

[ 50. 의사 소통의 경계



하나의 관점으로만 사물을 판단하려는 사람을 멀리하라. 어떤 절대적인 진리를

전달하는 신의 대리인처럼 행동하면서, 스스로를 눈뜬 장님으로 만드는 그런 사람

말이다.

나는 인간으로서의 본질을 끊임없이 깨우쳐주려고 시도하지만, 경계를 늦추지는

않는다. 그는 나에게 온갖 감언이설을 늘어놓으며 나의 진리를 훔쳐가서는 자신의

제국에 끌어들여 쓰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언어를 이해하고 어디까지나 동등한 자격으로 맞서기 위해, 그는 나의

진리를 채 소화하지도 않고 이용하는 수완을 가져왔다.

행동하지도 싸우지도 어떤 문제를 해결하지도 않으면서, 자신의 사치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그는, 제국에서 가장 섬세한 순수를 잃어버린 가련한 꽃이다.

그에게는 오로지 현상만이 의사 소통의 수단이 된다.

제국은 나의 병사에게 있어서 의미, 바로 그 자체이다. 나는 제국이라는 관념을

통해서만 병사들과 의사 소통을 시도한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잠들어 있거나, 설령 집에 없을지라도 오직 한 여인하고만

의사 소통이 될 뿐이다. 그가 만일 일방적인 관점을 전하는 사람으로 인하여 의사

소통에 변화를 갖게 된다면, 그것은 곧 그와 내가 어떤 고차원적인 게임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라. 그와 나는 힘겨루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숱한 전쟁을 통하여 상대편의 목을 위협한다 할지라도, 제국과 제국을

경영하는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는 적으로 그를 인식하고 있음을 부정하지는 않겠다.

나는 언제나 새로운 모습으로 그에게 접근하며, 그 시도는 우리 공동의 가치가 된다.

그도 나처럼 신의 존재를 믿는다면, 지금 사막의 천막 안에서 신께 기도드리고

있는 나의 병사들처럼, 그의 군대도 어딘가 무릎 꿇고 신에게 기도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만일 나와는 반대로 아직 절대자를 찾지 못하였다면, 우리는

의사 전달의 통로가 없다는 것을 단언할 수 있다.



말로써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 내면에 숨어있는 믿음이나 책임감이

그 말을 보증하게 된다. 일상적인 영혼의 충동, 즉 '누군가의 네 주전자를

빌려다오.'란 말에 흥분하면, 과거에 받은 상처에 기인한 것이다. 그 주전자는 단순히

물을 담은 도구일 수도 있고, 풍요와 영광을 나타내는 상징일 수도 있는 까닭이다.

나는 우리 베르베르의 망명자들이 아무리 좋은 재료를 가지고도 신전을 짓지

못하는 이유를 이제서야 깨달았다.

그들이 신전을 지었다면 모두가 신전의 돌과 같은 대접을 받았을 것이다.

[ 51. 간수들의 예지



간수들은 기하학자보다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나는 곧잘 장군과

간수의 입장에서 무엇을 취할 것인가 망설인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과 기하학자의

입장 사이에서 어느 편에 설 것인가에 대해서는 추호의 망설임도 없다.



어떤 입장과, 그 입장의 방법이나 예지를 혼동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리 문제삼을

일이 아니다. 간수들은 자신들의 인식만을 예지로 알고 있다. 그렇다. 어떤 입장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자신들만의 진리를 믿어야 한다. 물론 이와 같은 사고

방식은 서투른 지배자의 칼로써도 사용될 수도 있다. 죄수들은 어린애들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 52. 기하학자의 진리



죽은 기하학자의 추종자들은 아버지를 귀찮게 들볶았다.

"인간을 지배하는 것은 바로 우리들이어야 합니다. 바로 우리들만이 안간 세계의

진리를 알고 있단 말입니다."

아버지의 대답은 단호했다.

"너희들은 죽은 기하학자의 진리만을 알고 있을 뿐이다."

"뭐라구요? 그럼 우리가 알고 있는 행하는 것이 참 진리가 아니란 말입니까?"

"물론."



아버지는 내게 말씀하셨다.

"그네들은 자신들이 여미고 있는 삼각형의 공식만을 알고 있을 뿐이다. 내 말을

명심하거라. 빵 만드는 사람들은 빵 만드는 법을 잘 알고 있다. 밀가루를 잘못

반죽한다든가, 화덕이 너무 뜨겁다거나 하면 결코 좋은 빵을 만들 수 없다. 그들의

숙련된 손을 거쳐야만 우리는 맛있는 빵을 먹을 수 있는 거이다. 그러나 어디 그들이

제국을 통치하겠다고 조르더냐?

저들은 어찌 자기들만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고 고집하는지 모르겠다.

역사가와 비평가들은 다 무엇이냐?"

아버지는 잠시 한숨을 쉰 다음 말씀을 계속 이으셨다.

"그들에게 제국을 맡기느니, 나는 차라리 악마에게 던져버리겠다. 악마는 사람들의

난잡한 것을 아주 잘 찾아내는 능력이라도 있지. 저들의 진리라는 건 악마의 입장에선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지. 그들의 삼각형의 공식은 인간 삶을 영위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말씀이 어렵습니다. 정말로 어떤 진리를 알고 계신 건가요?"

"아니다. 믿음이란 무엇이냐? 여름을 보리가 익는 계절이라고 믿는다면, 거기에

풍요나 행복 같은 이름을 부여할 까닭이 있겠느냐? 그러나 보리가 귀리보다 먼저 읽는

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듯이, 우리는 성립된 어떤 관계를 믿어야만 하는 것이다.

야만인들은 소리가 북 속에 있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북에 기대고

애정을 바친다.

누구나 그러하다. 막대기와 손바닥에 소리가 숨어 있다고 믿는 이들이 있다.

물론 너는 그렇지 않으므로 북이나 막대기나 손바닥을 진리라고 부르진 않는다.

다만 소리가 나게 하는 어떤 행위의 주체를 진리라고 알고 있다.

이러한 까닭으로 나는 그들 기하학자의 추종자들을 경계하는 것이다. 그들은

성전의 재료와 기술 따위를 우상으로 섬기고, 성전의 돌멩이들을 존경하는

눈초리로 경배한다. 그들은 오로지 자신들이 쌓은 삼각형의 공식만을 가지고

사람들을 지배하려 하는 것이다."

나는 그만 울적한 기분이 되어버렸다.

"그러니깐 진리란 없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러자 아버지는 웃으면서 대답하셨다.

"네가 만약 나에게 어떤 정식을 가지고, 어떤 경우의 인식에는 대답조차

거부된다는 사실을 증명해 준다면 나는 눈물이 날 정도로 감격할 것이다. 그러나

너는 여태 스스로 아무것도 포착한 것이 없지 않으냐?

연애 편지를 받아 본 사람은 그 편지만 보고도 가슴이 벅차 오른다. 그렇지만 그

종이나 먹물에서 사랑을 찾진 않는 법이란다."

[ 53. 속박



나는 그대를 가르치면서도 속박한다. 그대는 보이지 않게 내게 속박되어 비난도

한탄도 하지 못하리라.

어린아이들이 하는 놀이를 보라. 그들의 규칙이란 본래 부자연스럽다. 그러나

아이들은 그런 문제에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

사람들은 가끔 책략으로써 자신들의 책임과 의무를 부여받기를 원한다. 그것은

스스로의 속박에 대한 집착이다.

우리들의 언어도 이와 같다. 어떤 돌멩이들의 배열을 내가 '집'으로 명명하였을 때,

만일 그대가 내 말에 따르지 않는다면 그대는 제국의 외톨이가 되고 말 것이다. 내가

나의 양들과 염소들, 그리고 거처들을 배열하여 '영지'라 이름하면, 그대는 홀로

반대하여 일어설 것인가? 그렇다면 그대는 공동체의 틀을 벗어나서 홀몸으로 살아가야

할 뿐이다.

만일 이러한 속박의 자유를 용인하지 못하는 너와 같은 이들이 있다면, 그들은 결국

자신들만의 언어를 만들어 사용하는 수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 저마다 자신들의

축제일을 정하여 춤을 추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마침내 제국과는 절연되어 하늘의

고독한 별보다도 더 외로워질 것이다.

[ 54. 잠든 보초를 바라보며



잠든 보초여, 그대에게는 사형만이 있을 뿐이다.

꿈꾸고 있는 너의 목숨은 경각에 달려 있다.

이제 그대는 꿀처럼 모은 성직자들의 재산과 금박 입힌 의상들, 지혜의

창고에서 안식을 취하는 고서들, 그리고 그대 자신의 가족들에게 둘러싸여

평화로운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

알려지지 않은 작은 만에서 푸른 바닷물이 헐떡이듯이, 생명의 달디단 호흡

속에서 편안하게 보초여! 그대는 제국의 성곽이었다. 그것은 육신을 감싸고

있는 살결과 같아서, 조그만 구멍이 뚫려도 피흘리며 죽기 마련이다.

그대는 우리를 노리는 적들의 뜻대로 되었다. 이 성곽의 내부에서 깊이 잠들어

버리도록, 바다가 배를 삼키기 위해 잔잔한 물결로 배를 맞이하듯이, 그대는 지금

도시를 완전히 발가벗겨 버린 것이다.

이제 도시는 위기에 빠져 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대는 아직도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잠들어 있다. 무거운 총을

감싸쥐고 찬란할지도 모를 깊은 꿈길을 여행하고 있는 것이다.

사막의 밤에 의해 정복된 보초들은, 도시의 기력이 쇠진하여 야만인들이 이

도시를 필요로 할 때 기름바른 돌쩌귀 위에서 문들이 스르르 열릴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는 것이다.

잠들어 있는 보초. 적들의 척후. 이제 제국은 이미 함락된 것이나 다름없이

되었다. 보초여, 그대의 잠은 이 완전한 도시를 무너뜨리고 허물을 벗고

자손들에게 생명의 끈을 넘겨줄 것이다.



잠들어 있는 보초를 쳐다보면서 나는 도시의 일그러진 형상을 떠 올렸다.

아아, 모든 것이 그대로부터 말미암았다. 도시의 귀와 눈초리인 그대가 밤을

새운다면 어찌할 것인가!

그대는 새로운 관계를 맺어가는 것이다. 별빛에 감싸인 이 집, 저 궁전과 병원들,

죽어가는 이들의 한숨이 가슴에 아로새겨지기도 전에 해산하는 여인의 비명을

들을 것이며, 어떤 이들의 잠과 철야하는 내밀한 관계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보초여, 이들의 가슴에 귀를 대고 심장의 고동 소리를 들어보라. 이들은 분명히

살아 있지 않은가? 밤을 새우는 보초여! 그대는 나의 동료이며 제국 그 자체가

아니던가? 그렇다면 나는 허락하리라. 그대가 내게 무릎 꿇을 수 있는 권리를^5,5,5^.

잠든 보초여, 죽은 보초여! 나는 두려움으로 그대를 본다. 그대 잠속에서 제국이

병들고 죽어간다(사형 집행자는 당연히 그의 직무를 성실하게 수행할 것이다).

그런데 왜 나에게 동정심이 싹틀까? 이것은 새로운 문제가 나의 뇌리를 스쳤기

때문이다.

강력한 제국의 힘만이 잠든 보초의 목을 벤다. 그러나 잠을 자고 말 이런

보초들에게 도시의 밤을 맡긴 저 제국에게 무슨 힘이 있단 말인가? 기강 없는

제국의 가혹한 진리를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잠든 보초를 죽임으로써 제국이 깨어나는 것은 아니다. 깨어 있는 제국의 권능만이

그를 목벨 수 있다. 주위의 다른 강력한 제국들은 지켜보고 있다. 그대는 그를

죽임으로써 그대의 힘이 창조되기를 바라고, 그대는 어느덧 핏빛 광대가 될 것이다.

사랑으로 그대의 결심을 이루라. 그리하면 그대는 보초들의 경계와 잠든 보초에

대한 유죄 판결의 기초를 확립하리라. 그들은 제국의 문을 열어 놓았기 때문이다.



보초여, 보초여. 내가 그대에게 보초들만이 가진 영혼의 충만함과 그대가 지켜야

할 구역에 대한 권능을 줄 때, 제국의 경계는 안온하며 평안하리라.

물론 그대가 어느 때에는 일을 하면서 투덜거리기도 하고, 맛있는 저녁 식사를

기다리는 보통의 인간이라는 건, 이 순간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대가 잠자는 것은

좋은 일이고 잊어버린다는 것 역시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대로 인하여 제국이

무너진다는 사실은 더할 수없이 나쁜 일이다.

나는 그대뿐만 아니라 다른 동료들도 구원하여야 한다. 그런 까닭에 그대는

체포되어 결국 사형 언도를 받을 수밖에. 남은 일이 있다면 다시 정신차리는

일뿐이다. 예를 들어 그대 자신의 고통이 다른 보초들의 경계심으로 승화되기를

희망하는 따위 말이다.

[ 55. 잠든 보초를 위하여



나는 행복한 꿈 속에 잠긴 어린아이를 사망의 바다로 끌어내기 위해 결국 어떤

명령을 내려 한다. 그런데 이러한 나의 판단 때문에 울적한 기분이 되었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보초는 내가 보는 앞에서 문득 잠이 깨었다. 손을 이마 위로 끌어올리면서 그는

가냘픈 한숨을 쉬었다. 내가 있음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한 채, 묵직한 총을 들고 그는

밤하늘의 별을 응시한다. 이 영혼을 정복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무겁게 스쳐갔다.

그의 옆에 있는 나, 즉 왕인 나는 그와 외면적으로는 같지만 전혀 다른 입장이다.

나는 도시를 바라보면서 몸을 돌렸다. 내가 그대에게 말해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대도 나와 마찬가지로 숨쉬고 소유하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대개 정복한다는 것은 개종시킨다는 것이다. 구속이라는 것은 감옥에 집어넣는

것이다. 그러나 기억하라. 정복한다는 것은 한 인간을 석방하는 것이며, 내가

그대를 구속한다는 것은 한 인간을 짓밟는다는 것. 이것이 나의 말이다.

정복은 그대 속에서, 그리고 그대를 통한 개인의 건설이다. 구속은 나란히 엮인

돌더미일 뿐, 그 안에서 창조란 없다.

나는 인간을 정복해야만 한다.

밤새우는 사람과 잠자는 사람, 순찰하는 사람과 그들을 보호하는 사람, 갓난아이

때문에 기뻐하는 사람, 죽은 사람 때문에 슬퍼하는 사람, 예배 드리는 사람과 신을

믿지 않는 사람, 그 사람들을 나는 정복해야만 한다.

정복이란 뼈대를 잇는 것이며, 충만한 양식을 위해 정신을 영광의 문 안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길을 보여준다면, 그 안에 있는 목마른 이들을 위한

호수를 볼 수 있으리라. 그리하여 신들이 그대를 개안시킬 수 있도록 하리라.



무엇보다도 먼저 어린 그대를 정복해야겠다. 나이든 사람들은 모든 뼈대가 굳어

제대로 진리를 배울 수가 없기 때문에^5,5,5^.

[ 56. 도시의 사람들



나의 도시는 이권을 가진 사람의 입장에서 본다면 비판의 여지가 없는 건 아니다.

아니, 오히려 많다고 보아야 옳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나로 인하여 파생된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수익자들이 도시에서 이익을 내면서도 타락하지 않고 발전하기를

진심으로 원했다. 나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오로지 도시의 현상이었다.

나는 한 중위와 함께 사람들의 틈새를 비집고 거닐었다. 그러다가 중위가

지나가는 어떤 사람에게 물었다.

"당신은 무슨 일을 하고 있습니까?"

"나는 목수라오."

"나는 농부입니다."

"나는 대장장이입니다."

"나는 목동입니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 보았다. 우물을 판다든가, 병자들을 치료한다든가, 편지 쓸

줄 모르는 사람을 위해서 편지를 쓴다든가, 푸줏간 주인과 미장이들, 옷감을 짜는

사람, 옷을 꿰매는 사람 등등^5,5,5^.

이들은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일하고 있었으며, 스스로를 위해서 지나친 소비

생활을 하지도 않았다. 이들은 한 번 먹고, 한 번 치료하고, 한 번 옷을 입고, 한

번 차를 마시고, 한 번 편지를 쓰고, 한 집의 한 침대에서 잠자고 있었다.

그러나 그 중에서는 궁전을 건설하는 사람과 다이아몬드를 세공하는 사람,

석상을 조각하는 사람 등도 있었다. 이들은 아주 소수의 인간을 위해서 일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산물을 조금도 나눌 수 없는 사람들이다.

사람들은 여러 사람들을 위해 일해야 한다. 여인들이나 병자들, 불구자들,

어린애들이나 노인들, 그리고 오늘을 휴식하는 이들을 위해서 이다.

도시에는 전혀 물건을 만들지 않고도 제국을 위해 봉사하는 이들이 있다.

헌병과 군인들, 시인들, 무용수들, 각 지역의 총독들이다. 그런데 이들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먹고 마시고 소비하며 편안한 침대에서 잠을 잔다. 그들은

자신들이 소비하는 물건들을 만들지도 교환하지도 않기 때문에, 어디론가 가서

그것을 만드는 이들에게 훔쳐와야 한다.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만들어낸 생산품을 그들을 위하여 쓰겠다는 주장을 펴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대가 어떤 사람들에게 모두 제공하겠다고 큰 소리칠 수 없는 어떤

물건들이 있다. 그것을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들이 아주 드문 것들, 어떤 문명을

대변할 수 있는 가치 있고 소중한 것들이다. 가령 다이아몬드와 같은 물건이다.

다이아몬드는 구슬방울 같은 눈물을 바친 1 년 동안의 노동이다. 꽃무덤에서 짜낸

향수의 방울이다. 이런 것들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분배될 수 없다.

하나의 문명이란 어떤 물건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물건의 출생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던가? 그러기에 나에게는 눈물과 향수 방울의 운명이 어찌 중요하지

않겠는가?

제국의 왕인 나는 병사들에게, 여인들에게, 그리고 노인들에게 방과 옷을 주기 위해

그것들을 훔친다. 내가 훔친 빵과 옷을 조각가들과 보석 세공사들과 시인들에게

준다고 해서 부끄러울 까닭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들도 먹고 살아야만 하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다이아몬드도, 궁궐도, 그밖에 어떤 바람직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이것은 백성들을 궁핍하게 할지도 모른다. 백성들이 부유하게 되는 것은 문명

활동이 아닌 분야에 힘씀으로써이다. 그러나 도시에서는 극소수의 장인들만을 고용할

뿐이다. 이찌됐든 이 문명에 관한 부분은 많은 조심을 필요로 한다. 도덕적인 문제가

개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 57. 예언자와의 대화(1)



냉혹한 시선을 가진 사팔뜨기 예언자가 생각난다. 어느날 나를 찾아온 그를 보자

어떤 침울한 노여움이 가슴 깊은 곳에서 솟구쳐 올라왔다. 나의 이러한 기분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가 말을 꺼냈다.

"죄 지은 자들을 모두 죽여야 합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장검처럼 날카롭게 재단된 이 영혼은 악에

반대하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악이 있으므로 존재한다. 만약 악이 없다면

그는 존재는 어찌되는가? 내가 그에게 물었다.

"행복해지기 위해서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선의 승리입니다."

그는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이 예언자는 자기의 칼을 뽑지 않고 녹이 스는

것을 행복이라고 이름 붙였기 때문이다.

하나의 진리가 굳어지고 있었다. 바로 선을 사랑하는 사람은 악엣 대해서

관대하고, 힘을 사랑하는 사람은 나약함에 관대하다는 점이었다.

언어란 서로간의 모순점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선과 악은 뒤섞여 있는 것이다.

때문에 무능한 조각가들은 유능한 조각가들의 비옥한 땅이 되고, 기근은 공평한 빵을

분배를 촉진한다. 또한 헌병들에 의해 괴로움을 겪고 지하 감옥에 갇혀 머지않아

죽음에 이를 사람들, 즉 자신보다는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되어 반역을 획책했던 저

사람들은, 자유와 정의에 대한 사랑 때문에 위험과 빈곤과 불의를 받아들인

사람들이다.

그들은 눈부신 매력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 매력은 내가 그들을 심문을 할

때 불길처럼 타올랐다. 나는 결코 그들을 죽게 할 수 없었다. 다이아몬드의 원석이

없다면 어찌 영롱한 빛을 발하는 다이아몬드가 태어날 수 있단 말인가? 적이 없다면

칼이 어디에 쓰일 것인가? 부재가 없다면 귀환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유혹이

없다면 정조란 또 무엇이겠는가? 선의 승리, 이것은 모이통 앞에서 배회하는 얌전한

가금의 승리일 뿐이다.

내가 다시 그 사팔뜨기 예언자에게 물었다.

"그대는 악에 대하여 투쟁하고 있구나. 모든 투쟁은 춤과 같다. 그대는 춤을

추고 있구나. 악에서 그대만의 행복을 끌어내는 그런 춤 말이다. 나는 그대가

사랑에 의해 춤추기를 원한다.

이 세상에는 어떤 사물에 대한 정반대의 무엇이 존재한다. 만일 내가 시를 위한

제국을 그대에게 세워준다면, 이 땅의 논리학자들은 노리나 궤변으로써 시에

반대하고 어떤 위험을 그대에게 알려줄 때가 올 것이다. 그러고는 시에 대한

사랑과 그 반대되는 것을 혼동하여,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증오하는 것에 전념할

탐정들이 그대에게서 태어날 것이다. 마치 올리브나무를 베어내는 것이 삼나무에

대한 사랑과 대등하다고 믿듯이 말이다. 그리고 그들은 음악가나 조각가, 천문학자

등을 마침내 지하 감옥으로 보낼 것이다.

나의 제국은 이제 쇠퇴할 것이다. 삼나무, 그대에게 생명을 주는 것, 그것은

올리브나무를 베어 내는 것도 장미의 향기를 거부하는 것도 아니다.

돛 단 배에 대한 사랑을 백성들에게 심어주라. 백성들의 열성은 돛으로

되돌아올 것이다. 그러나 그대는 이교도들을 추적하고 고발하고 몰살시키면서 돛 단

배들이 탄생하는 것을 감독하려 한다. 결국 돛 단 배가 아닌 것은 모조리 돛 단

배의 반대라고 단정하게 된다. 그것이 그대의 논리니까. 이렇게 되면 그대의

백성들은 다양한 사랑의 방법이 있다는 죄만으로 몰살을 당하게 된다. 그뿐

아니라 그대는 돛 단 배 자체도 무로 규정짓게 되리라.

무능한 조각가를 일소하여야 유능한 조각가를 우대하는 것이라고 믿는 사람도

그대와 마찬가지다. 그는 자신의 어리석은 말로써 무능한 조각가들을 몇몇 유능한

조각가의 적이라고 규정지어 버린다. 나는 그대 아들에게 그대와 같은 직업은

절대 선택하지 말라고 권하고 싶다."

내가 말을 마치자 사팔뜨기 예언자가 발끈 성을 내면서 대꾸했다.

"만약 내가 당신의 말을 받아들인다면 악덕도 너그러이 봐주어야겠군요?"

"암, 반드시 그래야지^5,5,5^. 내가 쇠귀에 경을 읽은 꼴이군."

[ 58. 배반



* 후일을 위한 노트

잘못된 대수학 때문에 이 바보들은 반의어가 존재한다고 생각하였다. 민중

선동의 반대는 바로 잔인성이다. 인생은 상반된다고 보는 두 가지 사항 중에서

어느 한 쪽을 없애기로 한다면 바로 멸망하게끔 짜여져 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이건 그것의 반대는 죽음, 오직 죽음일 뿐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대수학자들은 완전의 반대를 추구한다. 원고에 삭제에 삭제를

거듭함으로써 그는 그대의 모든 원고를 불태운다. 완전한 것이 어디에 있는가?

완전을 사랑하는 사람은 항상 무엇을 미화하는 사람이다.

이처럼 이들을 고결함의 반대를 추구한다. 따라서 그대의 모든 부하를

화형시키고 말 것이다. 아무도 완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바보들은 자기의 적을 사멸시킴으로써 그들 자신의 존재를 느끼지만

그럼으로써 그들 역시 사멸당할 것이다.



그 무엇과 싸운다면, 그 대상이 되는 세계는 의심투성이가 된다. 매복과 피난처와

군수 물자를 저장하는 비밀 창고와 양식이 그 안에 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

무엇과 싸운다면, 그대 자신을 없애야 한다. 어느 한 부분 그대의 마음 속에 적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대가 어떤 나무가 된다면, 그대는 결코 다른 무엇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본래 그대 아닌 다른 것들에 대하여 부당했으므로.

그대의 열성이 사라질 경우 그대는 헌병들만이 제국을 구할 수 있는 처지가

되었다면 이미 제국은 죽은 것이다. 나의 속박은 그의 매듭 속에 수액과 땅을

맺어주는 삼나무의 힘의 속박이지, 가시덤불에 제공되긴 했으나, 또한

삼나무에게도 제공되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무엇에 반대하여 전쟁을 하는 경우를 본 적이 있는가?

가시덤불을 말살하는 삼나무는 그 가시덤불을 업신여긴다. 삼나무는 가시덤불의

존재를 알지 못하고 있다. 삼나무는 자신을 위하여 전쟁을 하고 가시덤불을 삼나무로

변화시킨다.

그대는 적들을 죽이고 싶으냐? 그 누가 죽음을 원할 것인가? 그런데 전쟁은 죽음의

수락이다. 죽음의 수락이다. 죽음의 수락이란 그대가 그 무엇과 그대를 바꿀 때만이

가능한 것이다.



대 수학자들은 미워한다. 감옥에는 포로들로 가득해진다. 따라서 적들을 존재하게

해준다. 감옥들은 수도원보다 더 큰 힘으로 제국에 영향을 미치지 때문이다.

이들이 투옥하고 고문하고 사형을 집행하는 것은 우선 자신을 의심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증인과 판사들을 말살해버린다. 그러나 자각하라. 적들을 모두

죽인다고 해서 위대해지지는 않는다.

이들은 투옥하고 고문하고 사형을 집행한다. 왜 자신의 잘못을 타인에게

전가하는가, 정말 나약하기 그지없는 존재들이다. 강하면 강할수록 스스로

의무에 대한 잘못을 자각할 수 있다. 이 자각은 승리할수록 스스로 의무에 대한

잘못을 자각할 수 있다. 이 자각은 승리를 위한 교훈이 된다.

나의 아버지는 장군들 중의 하나가 스스로 매를 맞게 만들고는 사과를 하자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스스로의 잘못을 인식했다고 해서 잘난 체하지 마라. 내가 당나귀를 타고

가다가 길을 잃었을 경우, 길을 잃은 것이 당나귀란 말이냐? 그것은 바로 나다."

그러고는 이렇게 끝맺으셨다.

"배반자들이 변명하는 것, 그것은 그들이 가장 먼저 배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 59. 홀로 있는 그대에게



홀로 있는 그대여.

침묵의 바다에서 유영하는가? 나의 욕망으로 그대는 빛을 받으리라. 양식을

받으리라. 고독 속에서 그대는 부유해지리라. 그대는 어린 아이처럼 두 손을

모으고 내가 주는 선물을 받으리라.

세 개의 조약돌로 전투 함대를 구하고 폭풍우로 그것을 위협할 줄 아는 사람,

내가 그대에게 나무 인형을 주리니 그것으로 군대와 선장을 만들고, 제국의

충성과, 준엄한 규율과, 사막에서의 목마름에 의한 죽음을 만들어 보라. 그대는

헌신하는 이상으로 받으리라. 무의 존재에서 유의 존재가 되리라.



홀로 있는 그대여.

나는 그대 안에서 살아 있기를 원하므로, 말하리라. 어깨가 빠지고 눈이 불구인

남편을 받아들이기 힘들지라도, 승리의 아침이 되면 초라한 침대 위에 누운 궤양

환자는 단지 어제의 남편이 아니라 충만된 기쁨의 상징이 된다.

사물들의 매듭, 그것은 곧 승리이다. 그보다 더 열정적인 신은 어디에 있을까?

그 때문에 내가 그대를 방문한 것이다. 그대는 나를 전혀 몰라도 관계없다. 나는

제국의 매듭이고 그대에게 기도문을 지어주는 사람이다. 나는 삶의 동반자로서 기쁨의

열쇠를 갖고 있다. 그대가 나를 따름으로써 고독은 종말을 고하리라.

이제 그대는 과거의 그 사람이 아니다. 음악도 마찬가지다. 진실도 거짓도 아닌

음악은 그대를 불태운다. 방금 그대가 이루어졌도다. 나는 그대가 완성 속에서

고독해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다만 고독과 슬픔으로 그대를 각성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열성은 약탈하지 않는다. 소유나 현존을 요구하지 않는 까닭이다.

그러나 시는 논리 이전의 이유 때문에 아름답다. 시가 그대의 공간 속에 더욱

잘 어울릴수록 감동은 그대 앞에 다가서리라.

[ 60. 고독의 기도



* 고독으로 당신을 부릅니다.

주님,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고독이 저를 괴롭힙니다. 이 외로운 방 안에서 저는

군중 속에 있을 때보다 더 고립된 자신을 발견합니다.

저와 비슷한 처지의 어떤 여인은 방안에 홀로 있을지라도 기쁨에 충만되어

있더이다. 귀머거리에 소경인 그녀는, 누군가 자신과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의

미소를 짓습니다.

주님, 저 또한 그녀처럼 무엇을 보거나 들으려 애쓰지는 않습니다. 나의 처소에

은총을 베푸소서.

대상들은 사람들이 사는 집이 보이면, 설령 내일 세상에 종말이 온다 해도 기쁨의

노래를 부릅니다. 그 누구도 그 순간의 환희를 빼앗지는 못합니다. 그들은 사랑

속에서 죽을 수 있습니다. 주님, 저는 그러한 집이 가까이 있기를 바라지도 않습니다.

한 남자가 여왕을 보고 나서 첫눈에 반했습니다. 여왕의 미모는 물론 그 남자를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남자는 그 순간 변모합니다. 그리하여

그는 여와의 병사로서 몸을 바칩니다. 저도 이 남자와 같습니다. 주님께서 제게

무엇을 약속하여 주실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주님, 고독이란 정신이 온전치 못한 가운데 야기되는 미묘한 현상입니다. 정신의

조국은 하나이며, 조국은 곧 사물을 의미합니다. 성전이 돌에게 어떤 의미가 될

때, 돌도 성전의 의미가 됩니다. 성전은 사람들의 공간을 위해서만 날개를 폅니다.

제가 이러한 진실을 배우고 실천하게 하여 주십시오.

제 고독의 해법은 오직 이 소망뿐입니다.

[ 61. 제국의 희망



저속한 행위들은 저속한 영혼을 불러일으킨다.

고상한 행위들은 고상한 영혼을 불러일으킨다.

저속한 행위들은 저속한 동기에서 비롯된다.

고상한 행위들은 고상한 동기에서 비롯된다.

내가 배반하려면 적들로 하여금 배반하게 할 것이다.

내가 건축하려면 석공들로 하여금 돌을 깎게 할 것이다.

내가 평화를 바란다면 겁쟁이들에게 조약의 서명을 맞길 것이다.

내가 죽음을 원한다면 가련한 영혼들로 하여금 선전 포고를 하도록 할 것이다.



명백하게 다양한 경향 속에서 어느 하나가 우세하다면, 그 방향에서 가장 크게

소리친 사람에게 책임이 있다. 겁쟁이들에게 희생을 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웅적인 사람들에게 항복을 선택하게 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어떤 행위가 어떤 관점에서는 모욕적이고 단순한 것이 하나도 없을 지라도,

필요하다면 가장 덜 까다로운 인간을 내세우는 편이 낫다. 나는 콧구멍이 예민한

사람을 쓰지는 않는다. 넝마주이 같은 사람들 말이다.

나의 적이 정복자라면, 그와의 협상을 통하여 내가 무엇인가를 얻고자 한다면, 나는

그들을 인도하기 위해서 적의 벗들을 선택하리라. 그러나 한쪽을 존중하고, 내가

자진하여 그에게 굴복한다고 비난하지는 말라. 그대가 나의 넝마주이들에게

항의한다면, 그들은 고약한 냄새를 본래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응답하는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또, 나의 망나니는 피냄새를 좋아하기 때문에 죄수들의 목을 자른다고

대답하리라.

그러므로 그대가 그들의 행동거지에 따라 나를 판단하지는 말라. 내가 넝마주이를

용인하고 망나니에게 어떠한 일을 맡기는 이유는, 쓰레기에 대한 혐오감과 사형수의

피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그대가 그들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뭇 인간들의 언론에 귀를 막아라. 내가

제국의 평원을 지키기 위해 전쟁을 선택할 경우, 영웅적인 군인들을 앞세운다면

그들은 군인의 명에와 승리의 영광에 대해서만 노래하게 된다. 제국의 평온을

위해 목숨 바친다고 여길 군인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

포화가 모든 것을 파괴해 버리고, 전쟁이냐 평화냐 하는 것보다 죽음의 잠이

문제가 된다. 약탈로부터 평원에 있는 무엇을 구하기 위해. 그리하여 적들과의

전쟁을 중단하고자 한다면, 나는 그들에 대한 증오심이 덜한 사람들에게 문서의

조인을 맡길 것이다. 그들은 이조인서의 구절구절에 대한 정당성과 의미에 대하여

변론할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말과 행동의 정당성을 믿어 의심치 않을 것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거부하도록 한다면 그 행동의 모든 책임은 거부한 자의 몫이며,

내가 누군가에게 수락하라고 한다면 그 행동의 책임 역시 수락한 당사자의 몫이 된다.

제국은 입씨름으로 오르내리지 않는다. 그만큼 제국은 강력한 무게와 힘을 내포하고

있다.

이 밤, 나는 왕국의 꼭대기에서 저 어두운 대지를 바라보고 잇다. 불행하거나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 자신감에 차 있거나 절망하고 있는 사람들.

제국은 언어가 없는 거인이다. 그런데 저 사람들은 서로가 다르게 제국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이 거인을 외침을 가진 살아있는 제국으로 탈바꿈시켰다.

그렇다. 아름다운 송가는 보잘것없는 송가들로부터 파생된다. 아무도 송가를

연습하지 않는다면 어찌 그 안에서 아름다운 송가가 태어날 것인가?

사람들은 아직도 서로가 모순되는 언어를 갖고 있다. 제국을 말하기 위한

완전한 언어가 확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냥 그대로 내버려두어라. 다만 귀를 기울여라.

모두가 옳다. 다만 상대편이 옳다는 것을 이해할 만큼 저들은 높은 산꼭대기에

오르지 못한 것뿐이다. 저들이 만일 서로 욕하고 싸우며 서로 죽이기 시작한다면 모두

이룰 수 없는 언어에 대한 욕망 탓이다. 그러다가도 저들이 서로 더듬거리며 대화를

나눈다면 나는 용서를 해주리라.

[ 62. 영예



어떤 사람이 내게 묻기를,

"어찌하여 이 국민들은 노예 상태를 용인하고 끝까지 투쟁을 하지 않습니까?"

고귀한 사랑에 의한 희생은, 비천하고 저속한 절망에 의한 자살과는 구별된다.

고귀한 희생을 위해서는 우선 영지와 공동체, 또는 하나의 신이 필요하다. 신은 그대의

뜻을 받아들이고 신의 뜻을 준다.

몇몇의 사람들은 다수를 위하여 죽음을 택한다. 설령, 그 죽음이 자신에게

있어서는 아무런 가치 없는 개죽음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제국은 그로 인하여 더욱

굳건해지고, 더욱 밝은 눈과 폭넓은 정신을 갖게 된다.

영예란 자살이 아니라 거룩한 희생의 광채로부터 나온다.

[ 63. 삶



"제가 시를 썼습니다. 이제 그 시를 다듬으려 합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노여운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너는 퇴고가 끝난 다음에야 시를 완성하였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퇴고하는

행위를 빼면 쓴다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돌조각을 다듬고 쪼으는 일을

제외하면 조각한다는 것은 대체 무엇이냐?

너는 진흙을 반죽해 보았느냐? 주무르고 또 주물러야만 하나의 형상이

만들어진다.

나는 도시를 건설할 때 모래를 우선 섬세하게 고른다. 그런 다음에야 도시를

지어나간다.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는 일만이 신에 좀더 가까이 가는 방법이다.

[ 64. 신중함



그대는 누군가와의 관계 속에서만 스스로를 표현할 수 있다. 따라서 그대의

의미는 사람들에게 어떤 메아리를 남기게 된다. 어쩌면 이것은 개인에게 있어

하나의 함정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그들과의 어떤 연결 고리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춤이나 음악은 시간 속에서 뛰논다. 그 흐름을 오해하거나 왜곡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대는 음악 속에서 스스로에게 어떤 감흥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그대가 나에게 자신을 내보이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우리끼리는 하나의 약속이

필요하니까. 그대의 얼굴에 눈과 코와 귀와 입이 없다면, 어떻게 서로의 휘고 패이고

볼록하고 오목한 부분들을 느낄 수 있겠느냐? 무엇으로 그대의 목소리를 기억하고

메시지를 감지하겠는가? 눈에 띄는 이러한 형상들로 인하여 나는 하나의 얼굴을

기억하게 된다.

그대의 얼굴은 단순히 그대의 형체나 표본으로서만 이해되며, 그대에 대한

이식의 도구로써 내게 파악될 것이다.

기실 나는 그대에게서 아무것도 받은 것이 없다. 그대는 생기 발랄하고 재치

있으며, 역설적인 인간일 수도 있으나, 시장바닥의 인생임에 분명하다. 그대는

단지 허수아비처럼 물질을 경멸하고 본질을 주장하며, 어떤 야망이 섞인 메시지를

내게 던지기만 하였기 때문이다.

그대는 창조의 목적을 오판한 것이다.



신중함이란 그대가 나에게 보이고자 원하는 것을 고집하지 않는 데 있다. 나는

예민한 눈을 가지고 있기에 그대가 내 코를 없애려 한다는 사실도 단번에 알아챌 수

있다.

어떤 물건을 남몰래 컴컴한 방 안에 들여놓는다고 해서, 누가 그대더러

신중하다고는 하지 않는다.

[ 65. 신기루에서



나는 사막의 신기루에서 그대의 눈을 열어주고 싶다. 나무와 초원과 가축떼들의

자유 속에서, 커다란 공간의 고독한 흥분 속에서, 겉잡을 수 없는 사랑의 열정 속에서,

나는 그대가 나무처럼 곧게 하늘로 치솟으리라는 것을 믿는 까닭이다.

애당초 곧게 뻗어오르는 나무들은 자유롭지 못하였다. 자유를 누리는 나무들은 삶을

서두르지 않았으므로, 빈둥거리면서 비틀리고, 처져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평화로운

나태를 즐기던 나무들은, 적들의 모진 공격에 시달리게 된다. 따분하게 태양을 좇던

나무들은 어느덧 생명에 대한 위기 의식으로 하늘로 곧장 수직 상승한다.



그대는 자유나 흥분, 사랑조차 찾아내지 못하리라.

그대가 사막에 들어가 그곳에다 생기를 불어넣어 주고 거기에 남아 있고자 한다면,

그대의 열정은 사막을 옥토로 만들 수 있다. 그대는 이르는 곳마다 수로를 건설하고

예비해 놓았던 모든 역량을 집중시켜야 한다. 더욱 의미있는 승리를 위해 그대의

사막을 가치 있는 것으로 창조해야 한다.

모래 속에서 번쩍이는 대상들의 백골이 그대의 영광을 증명해줄 것이다. 백골들이

누워 있는 사막은 그대로 인하여 태양 아래 풍요한 자신을 과시하게 된다. 그대는

사막의 예식에서 춤추며 정복해야 할 적이 있으므로 찬연히 존재할 것이다.



그대는 길을 떠난다. 한 우물에서 다른 우물로 기어오르며 물이 축복하는 나라를

향하여, 나는 그대에게 강인한 근육과 위대한 영혼을 불어넣어 주겠다. 그대가 다다를

사막마다 적들로 들끓게 하리라. 때문에 그대는 심신의 정력을 다해야 할 것이고,

그럼으로써 더욱 풍요롭게 변모할 것이다. 적들은 그대가 개척한 우물을 장악하려

하고, 그대는 그들과 싸워 이겨야만 한다. 이제 온 신경을 기울여 적들의 동태를

파악해야 하리라. 이 사막에서는 어떤 종족들이 잔인하고 덜 잔인한가, 무장의 정도는

어떠한가, 등등

사막은 모든 점에서 불변인 듯 하다. 허나, 행군을 하며 바라보는 풍경은 그렇지도

않다. 무한한 공간이 누르스름하고 단조로우나, 그대 심신을 위로하는 계곡과 푸른 산,

맑은 물을 담은 호수와 초원들이 있는 평화스런 고장들이 그 사막 때문에 눈에 뜨이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그 정경에 이끌려 각자 다양한 걸음걸이와 색채를 띠게 된다. 이

사람은 사형수의 걸음이며, 저 사람은 해방자의 걸음이고, 놀라움의 걸음, 안도의

걸음 등등. 여기서는 누군가를 추격하는 듯하고 저기서는 그대가 사랑하는 여인의

방 안에서처럼 주의 깊고 신중하게 움직인다.

여행 도중에 큰 변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대에게 있어 그러한 인간들의

삶이 다양하고 필수적이라는 사실과, 거기서 창조될 숨의 질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이라는 그 사실만으로도 마음은 안정되기 때문이다.



이기적이며 자존심이 강하고 침울한 그대를 선택하여, 이 오물이 넘쳐 흐르는

오아시스에서 저 사막으로 보낸다. 그대는 단 한 번의 사막 횡단으로 인하여,

씨앗이 깍지 밖으로 튀어나오듯이, 그대 안에 숨어있던 한 남자가 드러나

잠들었던 지성과 감성을 깨어나게 할 것이다.

강자의 삶, 너는 탈바꿈한다. 튼튼한 골격과 강인한 몸매로 무장되어 내게

돌아오리라. 사막은 그대를 작렬하는 태양으로 달구며, 선인장처럼 무럭무럭 자라게

한다.

그대는 해내고야 말 것이다. 그대가 만면에 미소를 띠고 돌아올 때, 그대를

꿈꾸던 여인들조차 놀라 몸을 기댈 것이다.



길을 걷는 사람들은 무슨 생각에 싸여 있을까?

인간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목표에 다다르는 것이라고, 행복은 욕망의

충족이라고 믿는 저 사람들. 실로 아리송한 부류가 아닌가?

인간에게는 무엇보다도 자기 내면의 밀도와, 발걸음의 무게와, 우물의 베품과,

기어 올라가야 할 산비탈의 준엄함이 있어야 한다.

저 사람, 손목의 힘이 빠지고 무릎에는 피를 흘리면서도 뾰족한 바위산 꼭대기에

오르는 기쁨, 어느 휴일, 부드러운 언덕의 풀밭에 누워 연인과 즐기는 어느 병사의

보잘것 없는 기쁨과는 질적으로 다르지 않겠는가?

[ 66. 여왕과 병사



그대가 늙음과 죽음의 길을 인도하는 세월에 대하여 표현하고 싶다면, '10월의

태양'이라고 말하라. 그리하여 11월이나 12월의 태양이 뜨면 어떤 인생의 신호가

깜박인다고 생각하라.

낱말이 문장 속에서 머리를 쳐들거든 그 머리를 후려치라. 그대의 문장은 포획을

위한 함정이기 때문이다. 나는 결코 함정에 빠지고 싶지 않다.

그대는 읽는 대상에 대해 오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대가 우울하다고 말하면

나는 우울해 진다. 내가 '파도 속의 분노'라고 말하면 그대는 막연한 불안감에 휩싸일

것이고, '죽음을 위협받는 병사'라고 말하면 그대는 나의 병사들을 걱정하게 된다.

버릇 때문이다. 그 작용은 표면적이어서 내가 원하는 대로 그대가 가는 곳을 인도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달빛'을 말한다고 해서 달빛 속에 있는 그대를 지적한다고 생각하지는

말라. 그것이 태양이거나 집이거나 간에, 그대는 언제나 그대이다. 그리고 나는

달빛을 선택했을 뿐이다. 나 자신에게 이해시킬 하나의 낱말이 필요했던 것이다.

나의 행동은 애초에는 단순한 나무였는데 차츰 다양화되는 기적이 일어났다.

씨앗이란 축소된 한 그루의 나무가 아니라, 시간의 카펫 위에서 나뭇가지와

뿌리를 발전시키는 것이다. 인간도 이와 같다.

내가 거기서 어떤 말을 덧붙인다면, 한 구절로 표현할 수 있는 간단한 무엇을

첨가한다면, 나의 힘은 곧 다양해진다. 그래서 나는 인간의 본질부터 변화시키려

하고, 달빛 아래서 집안에서 또는 사랑에 관해서도 그의 행동을 변화시키려 한다.

내가 '여왕의 병사'라고 말한다면, 문제가 되는 것은 물론 군대의 힘이 아니라

사랑이다. 중요한 점은 그 사랑이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위대한 그 무엇을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린다는 점이다. 이 사랑은 품위를 심어주고 유지시켜 준다.

이 병사는 여왕을 위해 자신을 존중한다. 마음 안에 여왕의 사랑을 담고 그는

으쓱한 기분으로 마을로 돌아온다. 그러나 사람들이 여왕에 대해서 물으면, 그는

곧 여왕에 대한 수줍음으로 얼굴이 빨개져 버린다.

그러다가 전쟁에 동원되기라도 하면 어떻게 되는가? 그는 여왕의 적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으로 몸을 떤다. 결코 자신의 왕을 존경하는 병사의 감정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똑같은 전쟁의 결과로 인해 그는 곧 마음을 바꾸어 다시

사랑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명백한 것은 눈에 비치는 영상은 언제나 일부이고, 그대는 깜박이는 연약한

램프 불빛에 다름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는 하나의 씨앗이다. 씨앗은

인간을 옥토 위해서 자라게 하며, 무수한 부하들을 만들어 낸다.

그대가 어느 인간들 틈에 여왕의 병사를 옮겨 놓을 수 있다면, 거기에서 그대의

문명이 싹튼다. 그리하여 여왕을 잊게 된다.

[ 67. 문장



나의 문장은 하나의 행위이다. 그대가 나의 마음을 움직이고자 어떤 이론을

앞세우진 말라. 나는 거기에 대항하는 최신의 이론을 찾아낼 것이다.

그대는 버림받은 여자가 소송을 걸어 바람난 남편을 되찾았다고 해서, 그의

사랑까지 되찾은 경우를 보았느냐? 사랑이 떠난 다음에는 구슬픈 노래밖에는 남은

것이 없다.

그 곡조로 누군가의 마음을 일깨울 수 있을까? 그 사람은 이미 화가 난 상태로

결별을 꿈꾸었으리라.

여기에서 창조적인 재능이 개입된다. 인간에게는 무엇인가를 추구하도록 해야 한다.

이는 누구에게 바다를 보여줌으로써 배를 만들도록 하는 이치이다. 이로 인하여 그는

재능의 여러 갈래를 발휘하게 된다.

사랑이란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태어난다. 그 틈에 고통이나 비난을 섞지 말라.

그는 곧 싫증을 느끼고 돌아설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원하는 대로 처신하진

말라. 사랑이 사랑으로써 남기를 원한다면 말이다.

나는 도시의 산꼭대기를 오르내리면서 사람들을 관찰하였다.

한 아버지가 아들에게 '샘에 가서 이 항아리에 물을 가득 담아오렴.'이라고 하든지,

어떤 군인이 부하병사에게 '네 보초 근무는 자정부터야.'라고 하는 언어의 신비.

나는 수송이나 건축, 간호와 도시의 상공업을 돌아보면서, 누구보다도 대담하고

창의력이 풍부한 곤충, 개미를 눈여겨 보게 되었다.

인간의 관찰, 개미의 규칙, 나의 여행자는 명확해 보이는 개미의 습성만큼도 언어와

습관 따위를 긴밀하게 연결시켜내지 못하고 있었다.

인간들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나는 한 예언자의 선동에 평화로운 군중들이 들고 일어나, 진흙탕과도 같은 싸움의

도가니 속에 빠져드는 광경을 자주 목격하였다. 그들은 개미와 같은 행동 양식을

멸시하면서도 그보다 못한 죽음의 향연 속에 뛰어들고 있다.



언어 속에는 마술이 있다. 변화하는 사람들은 집이나 일터에서 풍습에서 말을

나누며, 그 낱말 조립의 마술 탓에 죽음에 유혹되기도 한다. 이러한 까닭에 나는

사람들의 말에서 조심스레 그 목적을 탐색한다.

언어의 내용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것을 중시하는 부류는 시인들로서,

'공격하라. 불타버린 향수 내음을 맡고자 하는 사람들이여, 나를 따르라.' 따위의

선동적인 언변으로 지도자가 되려 한다. 그러나 이러한 언변을 섣불리 흉내낸다면

사람들의 웃음거리만 될 뿐이다.

선행을 권장하는 사람들의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다.

[ 68. 행복으로 가는 길



행복을 무슨 필수품처럼 인간에게 분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베르베르의 난민들에게 위대한 영웅인 나의 아버지조차 해줄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거친 사막의 혹심한 헐벗음 속에 살면서도 기쁨의 노래를

부르며 사는 사람들이었다.

잠시라도 고독과 허무와 헐벗음으로부터 행복이 나온다고 착각하진 말라.

그들은 필수품의 질과 인간의 행복을 구분할 줄 알았던 것이다.

나는 사람들이 행복하리라 생각하는 오아시스의 주둔병보다는, 사막과 수도원의

희생 속에 행복한 사람들이 더 많이 있다는 사실을 경험하였다.

그러나 음식의 질이 행복의 질과 반대가 된다고는 결코 말하지 않겠다. 단지 부유한

사람들은 행복에 대하여 잘못 규정하며 살아가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을 강조해야겠다.

본시 기쁨이나 행복은 제국의 영지에서 파생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행복이란

자신들의 부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더욱 더 헛된 부만

추구하게 된다. 사막이나 수도원의 사람들은 가진 것이 별로 없으나 기쁨의 원천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열정의 샘물과 절망의 폐수를 결코 혼동하지 않는다.

여기에도 적은 존재한다. 그대에게 죽음과 성장의 조력자인 적, 그리하여 그대가

진정한 생을 찾고 오아시스에서 자신의 열정을 살릴 줄 안다면 거기에서 태어날

인간은 보다 위대해지리라. 그는 여러 개의 현을 가진 악기처럼 풍성한 음량을 펴게

될 것이다.

내 아버지의 궁전은 나무 천 음료수 음식 등의 품격을 고상하게 하고, 발걸음

하나하나에도 의미를 갖게 한다. 그러나 아무런 가치가 없어 보이다가도, 어떤

사람들에게 나누었을 때만 빛을 발하는 새로운 금박들도 분명히 있다.

[ 69. 예언자와의 대화(2)



언제나 성스러운 분노로 가득차 있는 예언자가 또 다시 나를 찾아 왔다. 그는

부자들에 대한 징벌을 간청하기 위하여 말을 꺼냈다.

"그들은 마땅히 희생을 치러야 합니다."

나는 편안한 마음으로 대꾸했다.

""물론이지요. 그들에게는 생활 필수품으로 세금을 물릴 작정입니다. 그네들에게는

재산이 조금 축날 정도겠지요. 부유하게 사는 데는 별 지장이 없도록 말입니다.

부자에게 재산이 없다면 그네들은 아무런 가치도 없는 인간이 되어 버리니까요."

예언자는 의혹에 가득 찬 눈초리로 나를 재촉하였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고행을 명령하십시오. 그들은 가난을 겪어야만 합니다."

"당연합니다. 단식을 좀 하도록 한다면, 그들은 가난의 기쁨을 느끼게 되겠지요. 또

강제로 굶는 이들과는 연대 의식을 갖게 되거나, 결국 자신들의 의지를 시험하면서

신과 결합할 것입니다. 이도저도 아니라면 살은 좀 빠지겠지요."

그러자 그는 흥분하여 큰소리로 외쳤다.

"그들은 좀더 강력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나는 이 예언자가 감옥에 갇혀 빵과 햇빛을 차단당함으로써, 초라하고 나약한

꼴로 생명을 애걸하는 사람에게만 너그럽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악은

뿌리뽑아야 한다고 굳게 믿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당신은 참으로 위험한 생각을 갖고 있소. 자칫하면 모든 것을 멸망 속으로

이끌 그런 생각 말입니다. 왜 악을 근절시키는 것 보다 선을 권장하고 확산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입니까? 인간을 덜 너절하게 보이기

위해서는 옷을 입히는 편이 낫지 않겠소? 또 그들의 자식이 굶지 않고, 기도의 큰

가르침으로 잘 키우는 편이 제국을 위해서 이롭지 않는가 말입니다. 결국 문제는

인간의 선에 가해지는 한계보다는 그들의 마음에 호소하는 품격이 문제일 것이오.

나는 나에게 작은 배를 만들어줄 수 있는 사람에게는 그 배를 만들어 타고

고기를 잡게 하고, 좀더 커다란 배를 건조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큰 배를

이용하여 세계를 정복하게 할 것입니다."

"당신은 부를 가지고 저를 부패시킬 작정이십니까?"

"왜 내 말을 바르게 알아듣지 못하는 거요? 나는 눈에 보이는 껍데기를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오."

결국 예언자는 자신의 흥분을 이해하지도 못한 채 되돌아갔다.

[ 70. 헌병(1)



내가 헌병들에게 하나의 세계를 건설할 것을 명한다면 과연 가능할 것인가? 아니다.

그 세계는 결코 태어나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그들에게 합당한 임무와 자격이 있는

까닭이다.

헌병의 본질은 인간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명령을 집행하는 것이다. 그것은 세금을

지불토록 하는 것, 어떠한 규칙에 복종케 하는 것, 이웃의 물건을 훔치지 않도록 하는

것 따위로써, 어디까지나 명확한 법규에 의한 행동이다.

헌병은 결코 눈에 띄지 않는다. 그저 벽의 창틀과 건물의 뼈대처럼 그냥 있는

존재이다. 그들이 아무리 무자비하게 행동할지라도 그대가 그들을 만날 필요는 없다.

밤에 햇빛을 쬘 수 없거나, 바다를 건너기 위해 여객선을 기다리거나, 왼쪽에 문이

없을 때 오른쪽으로 나가라는 강요를 받는 일 등은 똑같이 무자비한 경우이다.

그대가 헌병의 임무를 강화하고 이 세상에서는 누구도 하지 못할 인간 평가의

책임을 떠맡긴다면, 자기 관할에 속하는 임무 외에 자의 적으로 악을 추적할

권한을 준다면 그는 당혹해할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일부의 사람들만이 자유롭게 존속하는 세상이 될 것이며, 그대는

권력의 본질에 더 가까이 이르게 된다. 왜냐하면 질서는 원인이 아니라 결과이며,

그것은 도시의 힘의 기원이 아니라 강력한 도시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생명과

열정과 지향은 질서를 창조하지만, 질서는 생명과 열정과 지향을 창조하지 않는다.

헌병의 말투에서 나오는 잡다한 상념들은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 인간에

대한 그대의 영상이 높고 거창하다거나 고상한 무엇이라 할지라도, 헌병이 그대처럼

그것을 표현하게 되면 저속하고 바보스럽게 된다는 사실을 직시하라. 하나의 문명을

지고 가는 것은 헌병이 아니다. 헌병의 의무는 명령에 따른 행위의 구속뿐이다.

사람은 절대적인 힘의 영역 안에서 완전히 자유로우며, 보이지 않는 헌병들인

절대적인 구속으로부터도 완전히 자유롭다. 이것이 제국의 정의이다.



나는 헌병들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들은 행위만을 판단하시오. 그 행위들은 법규에 잘 나와 있소. 나는

여러분들의 불의를 받아들이겠소. 왜냐하면 도구가 없이는 하나의 벽을 제거할 수

없다는 슬픔 때문이오.

과거에는 공격받은 여인이 건너편에서 소리치면, 이 벽은 도둑으로부터 그녀를

보호해주었소. 그런데 이제는 그 벽은 벽일 뿐이고, 법률은 법률이 되었소.

여러분들은 그러나 인간을 심판하지는 마시오.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 인간의 말에

귀기울여서는 안된다는 말이오. 선악을 판단하는 것이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고,

악을 근절하다 보면 진짜 선까지 용광로의 불길 속에서 타버릴 수도 있는 까닭이오.

또한, 여러분들에게 벽과 같은 장님이 되라고 요구하는 내가 어떻게 악을

근절시킨다고 할 수 있겠소?"

[ 71. 헌병(2)



감옥을 순시하는 도중, 나는 헌병들의 확고 부동한 믿음으로 자신들의 진실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을 모조리 체포하여 지하 감옥 속에 던져버렸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곳에서 육신이 자유로운 사람들은 거짓 증언을 했다거나 속임수를 쓴

부류들이었다.

내 말을 기억하라. 헌병의 교양이나 너의 교양이 어떻든간에, 심판 할 권한을 쥐고

있는 천박한 사람들만이 헌병 앞에서 굽히지 않을 따름이다.

헌병에게 있어서 모든 진실은 논리학자의 범주에 속해 있다. 그 외의 인간 나름의

진실은 위법이요, 오류가 된다. 어리석은 논리학자는 단 한 권의 책, 단 하나의 말투를

지향하는 까닭이다. 그는 또, 바다를 없애려고 노력하면서 선박을 건조하는 헌병이기

때문이다.

[ 72. 공동체



나는 서로 상반되는 사람들의 언사들로 인하여 지쳐버렸다. 이 공동체 안에서,

이 속박의 틈바구니에서 한 자유의 특질을 찾는다는 것이 왜 부조리하단 말인가?

전장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용기 가운데 사랑을 찾는 것처럼.

결핍의 와중에서 사치를 찾는 것처럼.

죽음에 대한 긍정적 해석 이후에 쾌락을 찾는 것처럼.

계급 제도의 와중에서 결연과 같은 평등을 찾는 것처럼.

재산에 대한 거부 속에서 그 재산을 이용하는 방법을 찾는 것처럼.

제국에 대한 전적인 순종 아래 인간 각자의 품위를 찾는 것처럼.

그대가 그를 도와주겠다고 주장할 경우, 인간이 혼자일 때는 어떠한 모습인가를

말해 달라. 나는 문둥병자에게서 그것을 잘 보았다.

그리하여 그대가 풍요롭고 자유로운 공동체를 도와주겠다고 간청할 경우, 하나의

풍요롭고 자유로운 공동체란 무엇인지 나에게 말해 보라.

나는 그것이 무엇인가를 이미 나의 종족인 베르베르의 사람들에게서 잘 보았다.

[ 73. 속박



사람들은 세상을 어떤 항아리의 형태로밖에 보지 못하므로, 그런 것만을

절대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다른 형태의 모습을 발견할 경우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하는 어린애와도 같다.

이웃 제국에서 그대를 닮지 않은 한 인간을 만들어내는 것을 보고, 그대는

자신과 그가 다르기 때문에 사랑하고 불평하고 또한 증오하면서, 왜 저들은 나와

같은 완전한 인간의 전형을 변형시켰는가 자문하게 된다.

그대의 무력함은 거기에서부터 비롯된다. 따라서 무엇을 만든다는 것이 자연에

대한 인간의 승리라는 점을 그대가 깨닫지 못한다면, 그대는 나의 성전을 결코

보존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어딘가에는 소중한 심장과 기둥들, 궁륭과 그것을

지탱하는 버팀목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면 말이다.

그대를 억누르는 위협에 대해서 그대는 조금도 알아채지 못하고 있다. 왜 그런가?

타인의 작품 속에서 일시적인 방랑의 결과만을 보기 때문이다. 그대는 이제 한 인간을

삼켜버리려 하는 영원한 위협을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그대는 내가 자유롭다고

생각하면서, 내가 속박에 관하여 이야기할 때면 분개하곤 한다. 사실 나의 속박은

헌병의 속박과 같이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벽 너머의 문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에 더욱 절박하다는 사실을 그대는 전혀 알아채지 못하고 있다.

그 문이 얼마만큼의 모욕인지조차 그대는 느끼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결국

그대가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고, 단지 실재하는 현상으로만 살아가려 한다면,

그대를 움직이고 일깨워주는 힘은 내가 줄 것이다.

그대는 그대 자신을 움직이는 원천이다. 그러나 그 인식은 그대가 저항할

때뿐이다. 그래서 바람에 몸을 맡긴 나뭇잎에게는 바람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해방된 돌에게도 중력이 작용하지 않는 것이다.

그대는 그대 자신을 짓누르는 무거운 속박을 조금도 느끼지 못한다. 그러한

구속은 그대가 한 도시를 불사르고 싶다는 생각이 떠오를 때 비로소 알게 된다.

단순한 그대의 언어로써의 속박은 결코 그대에게 등장하지 않을 것이다.

"모든 법전의 본질은 속박이다. 그러나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 74. 그리고 우둔한 시대가 왔다.



정신적인 차원의 인간들을 지배하고 발전시키기 위하여, 이미 공포된 법률과의

공통분모를 연결지을 수는 없는가?

나는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하였다.

역대 군주들의 책과 제국 내에 공포된 각종 법령들, 각종 종교적 전례 장례

결혼 출생에 관한 의식, 과거의 의식까지도, 결과는 실패였다.

그러나 제사의 의식을 중요시하는 이웃 제국에서 온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면, 그들

나름의 방식과 더불어 사랑하고 증오하는 모습들과 우리 제국의 유사성을 발견하곤

하였다.

사랑과 증오는 별개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적극적으로 그 상관 관계를 그들에게

물었다.

"사랑과 전혀 관계없는 어떤 의식이 어떻게 사랑을 확립시켜 주는가? 누군가의

특유한 미소가 그의 품위를 자아내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나는 인간이 서로 분명히 다르다는 것과, 인간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통역관 노릇을

부여받고 있다는 점을 일찍부터 깨달았다. 통역의 임무란 다른 사람의 말을 일일이

설명하는 것이다. 즉 다른 언어로 표현된 것을, 그대의 언어와 가장 유사한 언어 속에

찾아내는 것이다.

사랑이나 정의, 질투가 어떤 경우엔 너를 위해서는 질투와 사랑, 정의로 해석되는

경우가 있다. 내용은 전혀 다른 데도 불구하고 그대는 그 유사함에 빠져 황홀지경에

빠져들기도 한다. 그대가 번역에 번역을 더하여 계속적으로 언어를 분석해간다면,

유사점만을 찾아낼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포착했다고 주장하는 것이 막상 분석에서는

빠져 있는 경우가 많다.

그대가 인간들을 이해하려 한다면 그들의 말을 듣지 말라.

인간들간의 상이성은 절대적인 것이다. 사랑도, 정의도, 질투도, 죽음도, 성가도,

어린아이들과의 나눔도, 왕자와의 교제도, 창조 안에서의 고통도, 행복한 모습도,

이해관계의 형태도 비슷한 것은 하나도 없다.

자기의 손톱이 길게 자라면 만족해하며 입술을 다물거나 눈을 찡긋하면서 겸손을

떠는 사람들, 자기 손바닥에 박힌 못을 바라보면서 상대편에게도 똑같은 유희를

요구하거나, 지하실에 숨겨둔 금괴의 양에 따라 서로를 평가하는 사람들 등등, 그들이

산 위에 있는 쓸모없는 돌멩이들을 굴리면서 똑같은 자만심을 느끼고, 자신을

비관하는 사람들을 찾아내지 못하는 한 그들은 그대에게 비열한 탐욕주의자들로 비칠

것이다.

나의 시도에 있어서도 잘못된 부분이 있었다. 나의 행동 양식이 한 계층에서 다른

계층으로 가기 위한 추론은 전혀 없고, 그대와 함께 하나의 조각품을 감상하면서,

축제날의 기분을 그대의 코나 귀의 크기로 설명하겠다고 말할 만큼 부조리하기

때문이다.

나무를 광물질의 정수로, 침묵을 돌로, 우울증을 선으로, 영혼의 품격을

의식으로 설명하려고 노력한 것이 나의 잘못이었다.

광물의 상승을 나무의 발생으로, 돌들의 배열을 침묵에 대한 취향으로, 선들의

구조를 선들에 대한 우울증의 지배로, 의식을 영혼의 품격으로 해명하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영혼의 품격은 단일성인데, 그대는 나에게 그것을 포착하고 영속시키기 위하여

하나의 계교, 특정한 의식을 제공하였다. 영혼의 품격은 말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대는 창조적이고 자연적인 질서를 흔들어 놓았다.



내가 젊었을 때 표범 사냥에 나간 적이 있었다. 어린 양을 미끼로 삼아 말뚝을

많이 박고 풀로 덮인 함정을 이용하였다. 새벽녘에 함정에 나가보면, 거기에서

죽은 한 마리의 표범을 발견하게 된다.

그대가 표범의 습관을 잘 알고 있다면, 그대는 어린 양들과 풀을 가지고 표범을

포획할 함정을 만들어냈을 것이다. 하지만 그대가 내게 표범잡이 함정을

연구해달라고 청한다 해도, 내가 표범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다면 헛일이 된다.

나는 유일한 친구였던 진실한 기하학자에 대해서 말하겠다.

그는 단지 표범 냄새만 맡고도 함정을 만들어냈던 사람이다. 그는 함정을 한

번도 못 보았는데도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 사실에 대해서 의심을 가졌으나, 곧

알게 되었다. 번번이 표범은 기하학자에게 사로잡혔던 것이다.

사람들은 말뚝들, 어린 양, 풀, 그리고 함정을 만드는 여러 가지 요소들과 더불어 이

세상을 관찰하게 되었고, 그들의 논리에 따라서 어떤 진리를 끌어내고 싶어했다.

그러나 진리란 쉽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기하학자는 그대를

자신에게로 인도하기 위하여, 귀로와 흡사한 길을 신비스럽게도 이용하였다.

나의 아버지는 인간을 사로잡기 위해 자기의 의식을 만들어낸 또다른

기하학자였다. 그런데 저 사람들은 옛날처럼 다른 고장에서 다른 의식을

확립하고서 자신들과 다른 인간들은 모두 체포하였다.



그러다가 논리학자들, 역사학자들, 비평가들이 지배하는 우둔한 시대가 도래하였다.

그들은 그대의 의식을 똑바로 쳐다보고도 거기에서 인간의 영상은 조금도 끌어내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그러한 능력이 없다. 그들은 '이성'이라고 부르는 떠도는

이름으로, 제멋대로 그대에게 함정의 미끼를 던져주고는 그대의 의식을 파괴하며,

포로들을 방면한다.

[ 75. 무엇이 세상을 이끄는가?



대장장이와 목수들은 배라는 것이 못과 판자로 만들어진 것을 기화로 바다

위에서 자신들의 권력을 행사하려 하였다.

그들의 왜 착각하는가?

철공소와 목공소에서 배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바다를 향한 인간의 욕망과

배 만드는 기술의 발달로 인하여, 철공소에서 만든 못과 목공소에서 켠 판자의

수요가 증대되었을 뿐이다. 즉 수요와 공급의 원칙이 적용되었다는 이야기이다.

대장장이와 목수는 그들이 잘 알고 있는 못과 판자에 대해서만 언급할 수 있다.

누가 그들에게 배 전체에 관해서 물어보기나 하겠는가?

제국의 세무서원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에게 인류의 문명 발달 과정에 대해서는

아무도 물어보지 않는다. 다만 슬기롭고 국고를 살찌우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래서

내가 제정에 관하 법규와 세금 징수에 관한 조항을 어쩌다 변경하려 하면,

그들은 투덜거리면서 저항하려 한다. 그들은 어떤 관계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배는 나의 욕망에 근거한다. 나는 대장장이나 목수를 격려할 뿐, 그들이 하는

일에는 참견하지 않는다. 규율과 관계없이 규율을 따르게 하는 것, 때가 되면 못과

판자의 시대가 올 것이다. 그것들은 인생의 현실과 맞서 마멸에서 벗어난

자신들을 보여줄 것이다.



나는 항상 그대에게 말해 왔다. 미래를 세운다는 것은 우선 현재를 깨우치는

일이라고, 배를 만드는 것도 이와 같다. 그것은 우선 바다를 향한 욕망을 바로

불사르는 데 있는 것이다.

이 부분을 주목해주기 바란다.

재료를 지배하는 크고 논리적인 언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대는 제국을 나무,

강 도시, 산 그리고 사람들로 각각 쪼개서 설명하려느냐? 또, 대리석상에 비친

그대의 우수를 선과, 코, 턱, 귀 등의 개념만으로 설명하려느냐? 그대는 신전의

명상을, 그것을 구성하는 돌멩이를 내세워 설명할 수 있느냐?

'강압은 불가능을 실현시키려다가 그 실패에 대한 비난과 흥분으로 난폭하게

변하는 데서 출발한다.'

논리적인 언어란 없는 것이다. 나무는 광물질의 수액에서 창조되는 것이

아니다. 나무는 씨앗에서 자란다. 다만 나무는 그 수액을 흡수하여 빛 속에

자신을 일으키고자 한다.

이처럼 새로 일으킬 나의 제국에 대하여 몰두하는 두 종류의 인간이 있다.

그 중 한 부류는, 지성으로써 유토피아를 구축하고자 하는 논리학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의 논리는 자칫하면 속빈 강정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창조란

창조자가 아무리 지성적이라 해도 지성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까닭이다.

십중팔구 이 논리학자는 폭군이 된다.

또 한 부류는 무지한 족속들이다. 그들은 목동이거나 혹은 목수일 수도 있다.

본래 창조란 지성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은 그대로 하여금

결과를 알 수 없는 점토를 반죽하게 한다. 그러고는 불만족스런 표정으로

이리저리 쿡쿡 찔러보다가는, 자기가 만족을 느끼고서야 비로소 그 동작을 멈추게

된다. 그리하여 어떤 교감이 이루어진 그 형상은 곧 조각가를 움직이고, 그대에게

무엇인가를 전달하기 시작한다.

이젠 그대도 그 형상에 매어 있게 되었다. 그 이유는 그 형상이 지성일 아니라

정신에 의해 만들어진 까닭이다. 즉, 세상을 이끄는 것은 정신이다.

[ 76. 사랑의 조건



노예 상태가 아닌 사람들에게는 저마다의 의견이 있다. 이는 변덕이 아니라

내면의 진실을 표현하는 방법이 서투른 까닭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여기저기서

자기 입맛에 맞는 언어를 취사 선택하게 된다.

진실이란 어느 한켠에 몰려 있는 것이 아니다. 그대의 내면을 간단한 한 마디

말로 모두 담아둘 수 있을까? 만일에 가능하다면 그것은 변변찮은 말이 아닐까?

그대가 만일 제국의 가수로서 악사들의 구태 의연한 연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면, 우선 손가락 훈련을 한 다음 악기를 들고서 가수로서의 능력을 발휘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은 전쟁이고 속박이고 인내심이다.

그대가 만일 촌부의 자유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면 근육을 단련시켜야 하고,

시인의 자유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면 스스로의 두뇌를 훈련시키고 주어진

문제들을 직접 해결해나가야 한다.

행복으로 가려면 행복이란 집착을 버려야 한다. 행복이란 창조의 보상물이기에

행보의 조건들은 창조를 향한 전쟁이며 속박이고, 인내심에 다름아니라는 것이다.

아름다움이나 자유에 관한 조건들도 이와 같다. 그것들은 그대에게서 하나의

인간이 형성되었을 때 그 인간에 대한 보상을, 하나의 제국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대에게 있어 우애의 조건들은 그대의 평등이 아니다. 평등이란 보상이며 신

안에서만 이루어진다. 위계질서를 이루는 나무도 성전도 마찬가지다. 부분이

전체를 지배하는 것을 본적이 있느냐?

군대 없는 장군? 장군 없는 군대?

평등이란 제국의 평등이고, 권리는 아닌 까닭이다. 우애는 계급의 보상이며,

그대가 건축한 성전의 보답이다.

아버지가 존경받고 맏아들이 어린 동생을 돌보는 가정에서, 그 가족들이 함께 하는

만찬은 매우 흐뭇한 시간이다. 만약 그들이 아무렇게나 부려놓은 건축 자재들처럼,

서로 의존하지도 않고 돕지도 않는다면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대를 사랑하기 위하여 그대가 어디에 있고 그대가 누구인가를 안다는 것,

그리하여 바다물결 속에서 그대를 구원하였다면 그대의 생명에 대한 책임만큼

사랑을 주리라.

나는 목동이 되리라. 그대를 등불처럼 여기며 염소젖을 마시러 그대를

찾으리라. 이렇듯 우리는 서로 대접하는 관계가 되리라.

역정을 내면서 나와 동등해지길 원하거나 억누르려 하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할 말이

없다. 나는 절대로 그런 사람에게 소속되고 싶지 않다. 그 자도 그대의 마음과 같으리.

나는 누군가의 죽음으로 이하여 비통에 빠진, 바로 그런 사람만을 사랑한다.

[ 77. 다음 세대를 위하여



시골의 외양간에는 순한 가축들이 살고 있다.

식물에게는 언어가 없다.

인간은 어느 정도 침묵을 깨우치게 되었으므로, 이 가축들만이 대상들 속에서

생명을 증언해주고 있다.

그대는 암에 걸린 사람을 보았느냐? 입술을 깨물고 겪어내는 그의 고통은 이미

육체의 소란을 초월하였다. 그러므로 사람의 정신은 나무로 변하여 제국 안에

싱싱한 가지를 뻗고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는 제국의 사물이 아니라 의미된다.

말없는 고통이 비명보다 강렬하다. 도시는 고통 속에 충만해진다. 마치 그대가

사랑하는 여인이 입술을 깨물고 고통을 참으면, 그 아픔은 그대의 몫이 되듯이 말이다.

나는 인생의 신음 소리를 듣고 있다. 외양간에서, 들판에서, 물가에서 영속하고

있는 나지막한 삶의 신음 소리를.

어린 송아지가 외양간에서 "메^36,36^" 하고 울고 있다. 늪에는 개구리들이 사랑의

대화를 나누고 있다. 히이드 나무 우거진 숲에서는 수탉이 여우에게 사로잡혀

"꺼억꺼억" 비명을 지르고, 오늘 저녁 그대의 식탁에 오를 염소가 자신의 처지를 알고

있기나 한 듯이 처량맞게 울어댄다.

야수들이 포효한다. 고통의 시큼한 내음을 따라 그의 모든 제물들이 얼어붙고,

정오의 군중들처럼 어떤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땅과 하늘과 물가의 짐승들은 해산과 사랑, 죽음으로 윤회를 계속하는

것이다.

'아, 거기엔 마차소리가 있다. 세대에서 세대로 삐걱거리며 굴러가는^5,5,5^.'

순간 나는 사람들이 살면서 느껴야 하는 고통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들도 세대에서 세대로 삐걱거리면서 자신들의 권리를 옮겨간다. 밤이든 낮이든

도시건 시골이건 간에 몸이 세포가 찢어졌다가 다시 아물 듯이 분열은 냉혹하게

지속된다. 새삼 느끼는 상처의 통증처럼 나는 내 마음의 변화를 인식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사물의 의미가 함께 하고 있다. 여기에 숨겨진 비밀을 찾아야 한다.

사람들이 각기 자신의 암호를 사용하듯이 아이들에게 언어를 가르친다. 그 보물

상자의 열쇠, 그들은 마음에 쌓인 경이와 신성을 아이들에게 전수한다. 물질은 썩기

때문이다.

확실히 이 마을은 빛나고 있으며 감동적이다.

그들이 이토록 다음 세대를 예비하지 않는다면 새로운 세대는 이 도시를 야만의

정글로 만들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그 자손들이 인간의 피가 도는 세상에 살기

위해서는 잡다한 사물 속에 들어 있는 집, 영토, 제국의 참모습을 읽을 수 있도록

가르치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나는 그대들의 자식들이 너를 닳도록 직접으로 교육시킬 것을 요구한다.

이것은 강제로 교과서 따위를 외워서 되는 것이 아니다. 정이 없는 타인들은 그대가

가진 내면의 지식들을 전수하려 들지 않는다. 언어로는 표현할 수도, 포착되지도 않는

그대의 영혼을 이 따위 것으로 혼탁시켜버린다면, 다음 세대의 여린 영혼들은 텅빈

야영지를 떠돌며 이리저리 방황하는 승냥이와 하등 다름없게 될 것이다.

[ 78. 제국의 공무원들



제국의 공무원들은 낙천주의자들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낙천주의란 좋은 것이고, 완전이란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있는 법이라고.

물론 완전이란 사람들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있지만, 그것은 캄캄한

밤바다의 북극성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 별이 없다면 폭풍우 속의 항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바다 속에는 안주할 식량조차 없으므로, 그대는 그곳에서 송장과 다름없는 꼴이

된다.

어떠한 장소가 그대를 열광시키는 것은 그 장소가 승리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대가 새로운 승리를 갈구하는 전쟁은 다른 것이다.

그대는 자신의 만족을 위하여, 제 작품과 남의 작품을 비교하는 데 몰두할 것인가?



[ 79. 엘크수르의 기적



사막의 바람은 우리가 목표로 하는 오아시스의 풍요로움을 실어다 준다.

야영지에는 새들이 날아와 천막마다 기어들었다. 그러나 그 새들은 먹이가 없으므로

한낮의 뜨거운 태양 아래 무수히 죽어갔다. 새들은 순식간에 말라붙어 나무껍질처럼

우지직 소리를 내면서 죽어갔다. 병사들은 새들의 사체를 바구니에 모아 바닷물에

던져버렸다.

뜨거운 사막의 태양.

우리가 처음으로 갈증을 느낄 즈음, 몇몇 병사들은 신기루를 보기 시작하였다.

고요한 물 속에 질서 정연하고 웅대한 도시가 나타났다. 한 병사가 미친 듯이

소리지르면서 그 신기루를 향해 달려갔다. 이동해가는 오리들이 다른 오리들에게

영향을 주듯, 그의 절규는 다른 병사들의 마음을 격동시켰다. 나는 재빨리 총을

들어 그를 쏘아 쓰러뜨렸다. 순식간에 상황은 진정되었다.

병사 하나가 갑자기 눈물을 흘리면서 울었다. 나는 그가 동료의 죽음을

슬퍼하는 줄로 알았다.

"무슨 일인가?"

내가 다가가서 묻자 그는 발 밑에서 바스락거리는 새의 잔해를 들어 보였다.

그는 새들이 사라진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하늘의 솜털이 사라지게 되면, 인간에 대한 신의 징벌이 가까워졌다는

징조랍니다."



우리는 우물 속에 들어간 사람을 꺼냈다. 그는 정신을 잃고 있었다. 우물 속이

말라버린 것이었다. 우리에겐 피의 샘인 우물, 그러나 지금 우물은 우리들의

절박한 꿈일 뿐, 모두가 절망으로 가득 찼다.

이튿날 저녁, 우리는 다시 우물을 파보았다. 그러나 여전히 물은 나오지 않았다.

처량하고도 화려한 별들이 밤하늘을 가득 메웠다. 이제 우리들의 양식은 별빛같이

반짝이는 다이아몬드뿐이었다.

태양이 삼각의 포진으로 사막의 안개를 헤치면서 솟아올랐다. 마치 우리

백성들의 심장을 궤뚫는 송곳처럼.

직사 광선의 화살에 병사들이 쓰러져갔다. 머리가 이상해진 사람들은 혼잣말을

지껄이면서 일어서고 있다.

사막에는 더 이상 신기루도 깨끗한 지평선도 없었다. 단지 그곳은 탁탁 튀기는

벽돌가루처럼 모래 먼지로 뒤덮이고 있는 중이었다.



내가 고개를 들어 천막 받침대 틈으로 밖을 응시하였다. 멀리서 깜부기불빛

같은 것이 반짝였다.

"아아, 저 빛은 신이 우리를 멸망시키려는 신호인가?"

탄식이 저절로 나왔다.

나는 마지막으로 남은 세 마리의 낙타 중, 두 마리의 배를 잘라 내장의 수액을 마신

다음,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러고는 실낱같은 희망으로 몇 사람을

엘크수르의 샘에 파견하였다. 몇몇 사람들은 나의 명령을 쓸데없는 짓이라고

비웃었다.

"만약 엘크수르에 희망이 없다면, 우리는 거기를 가나 여기에 있으나 결과는

마찬가지 아닌가? 우리에게 예비되어 있는 것은 죽음뿐이다."

이틀이 지났다. 남은 부하들 중 3분의 1이 죽었다.

드디어 엘크수르에 파견했던 사람들이 돌아왔다. 산 채로.

"엘크수르의 샘물은 생명의 창입니다."



사막의 폭풍이 가라앉은 틈을 타서 우리는 생명의 샘물이 일렁이는 엘크수르에

다다랐다.

샘물 주위에는 빼빼 마른 막대기 위에 꽂힌 먹물빛 형상들이 가득 도사리고 있었다.

우리가 가까이 다가가자 그 형상들은 어떤 분노의 음향을 지르면서 폭발하였다.

까마귀였다.

뼈대를 모조리 파괴하고 달아나는 살점과도 같이, 달빛 가득한 하늘을 까맣게

덮으며 비상하는 까마귀떼. 우리는 어둠 속에서 우리들의 머리 위를 뒤덮는 신의

선물에 감사하였다.

우리들은 허공에서 배회하는 까마귀들을 잡아 배를 채웠다. 까마귀 고기의 향기,

엘크수르의 샘물은 사람들에게 생명의 기적을 안겨 주었다.

주님, 저는 오늘 당신을 보았습니다. 우리 군대의 나무껍질과도 같았던 육신이,

이제 오렌지처럼 피와 살로 충만해졌습니다. 기운을 차린 병사들의 근육은 우리가

원하는 성채를 향해 나아가도록 할 것입니다.

아아, 작렬하는 태양볕이 한 시간만 더 지속되었더라면 우리는 지상에서 멸망하였을

것입니다. 우리와 우리들의 자취는 흔적도 없이 말입니다. 저는 오늘 웃음소리와

노랫소리를 들으며, 나의 추억의 창고이며 아득한 존재에 대한 열쇠인 병사들을

바라봅니다.

모든 희망과 절망과 기쁨이 그 위에 있습니다. 그 한시간의 태양, 우리들의

엘크수르^5,5,5^.

저는 우리들의 목표인 오아시스를 향해 진군하려 합니다. 알지 못하는

족속들에게 우리들의 관습을 전해주기 위해서 말입니다. 미개한 그들에게 제국의

등장은 크나큰 변화의 씨앗이 될 것입니다.

그들은 엘크수르의 기적을 알지 못합니다. 다만 배를 채울 뿐입니다. 기적의 샘물은

시와 도시와 큰 정원을 창조해냅니다. 그것은 나의 뜻이며, 주님의 은총에 다름아닐

것입니다.

마른 씨앗에 물을 뿌리니 씨앗은 물 마시는 즐거움 외에는 무관심해졌습니다.

마치 지금의 나의 병사들 같이 말입니다. 물은 도시와 성전과 성벽, 거기에 딸린

정원들의 잊혀진 힘을 일깨워줍니다.

나는 당신이 궁륭의 열쇠인지, 공동의 척도인지, 상호간의 의미인지 알지

못합니다. 다만 보리밭과 엘크수르의 샘물과, 저의 군대에서 아무렇게나 쌓아둔

건축 재료들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별 아래 어떤 도시를 비춰주는 당신의 존재가 없다면 말입니다.

[ 80. 신비의 오아시스, 성채



우리는 도시를 관망할 수 있는 곳까지 전진하였다. 그렇지만 우리의 눈에는 굉장히

높고 붉은 성벽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장식이나 어떤 돌출물, 총안도 없었다. 외부

세계의 어떠한 시선도 용납하지 않는 저 성벽은 일종의 거만스런 풍채를 과시하고

있었다.

다가갈수록 우뚝 솟아보이는 성벽, 마치 도시 밖에는 아무것도 없는 듯한

침묵뿐이었다.



첫날은 그 둘레를 배회하며 돌파구나 어떤 약점, 아니면 최소한의 막힌 출구를

찾아 헤맸으나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우리는 그들의 사정거리에 이르는 지점까지

걸어갔다. 몇몇 병사가 불안감에 사로잡혀 위협 사격을 했지만, 역시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성벽 뒤에는 몽상을 벗어날 가망이 없어 보이는 딱딱한 등껍질

속의 악어 같은 도시가 갇혀 있었다.

멀리 솟아 있는 높은 고지에서 성벽 안을 다시 자세히 관찰하였다. 그 안에는

물냉이처럼 빽빽한 초원들이 있었다. 이상하게도 성벽의 밖에는 메마른 모래와

자갈, 작렬하는 태양 외에는 한 포기의 풀잎도 자라나지 않고 있었다.

오아시스의 샘물은 오로지 그 도시만을 위해 쓰여졌던 것이다. 빼곡하게 자란

나무와 여러 종류의 새들, 꽃들이 만개한 저 낙원의 몇 발자욱 건너 삭막한 사막

위를 우리들은 그저 멍청하게 배회하고 있을 뿐이었다.



성벽에서 전혀 아무런 허점을 찾아내지 못한 병사들은 조금씩 겁을 집어먹기

시작하였다.

이 도시는 결코 외부에 대상을 파견한 적도 없었고, 어떤 여행자의 관습을 배운

적도 없는, 멀리서 포로로 잡은 어떤 소녀에게도 자신들의 핏줄을 남기지 않은

신비로운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듯했다. 그런 점이 나의 부하들에게 다른 지상의 어떤

민족들과는 전혀 다른, 무형의 괴물과 조우한 듯한 두려움을 안겨주었던 것이다. 이

괴물의 껍데기는 눈에 보이지만 그 이빨은 전혀 발견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 자신이 일단 사막을 건너고 나면, 헤아릴 수 없는

무엇들과 만나곤 한다. 반대하면서 마음의 길은 열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정복하거나 사랑할 수도, 그로 인해 죽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경우가 있다.

그렇지만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에 대해 무슨 일을 도모할 수 있겠는가?

그러한 내면의 고통 속에서 우리는 성벽 밑에 허연 모래 지대를 찾아냈다.

해골들이었다.

먼 고장에서 이 오아시스를 찾아 온 사람들의 마지막 흔적이 바로 거기 있었다.

마치 절벽에 다다른 파도가 뿜어대는 하얀 포말과도 같이 이 도시는 우리가

정복하고자 하는 도시라기보다는, 거꾸로 우리를 공략하고 있는 듯한 분위기를

자아내게 했다.

만약 이 비옥한 땅에 딱딱하고 잘 여문 씨앗을 심는다면, 그 씨앗을 둘러싸고

포위하고 있는 것은 땅이 아니다. 그 씨앗이 싹을 틔운다는 것은 곧 땅 위에

자신의 제국을 퍼뜨리는 셈이기 때문이다.

정복자가 될 것인가, 패배자가 될 것인가? 군중들은 그대를 에워싸고 밀친다.

만일 그대가 속빈 강정 같은 인물이라면 곧 짓밟히고 억눌릴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내부에 어떤 심오한 정신으로 무장되어 있고, 그 바탕이 튼튼한

사람이라면 그대는 군중들에게 어떤 깊은 이상을 심어주게 되고 이내 힘을 발휘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대가 걷기 시작하면, 군중들은 너의 뒤를 힘차게 따를 것이다.

저들의 저의도 이와 같다. 우리는 그를 빙 둘러싸면, 그는 일부러 눈을 감고,

우리의 위험한 놀이를 감지하고 있다.

이런 생각이 들자 나는 즉시 장군들을 불러모았다.

"나는 이 오아시스의 도시를 격동시켜서 점령하는 방법을 생각해 냈소. 그들은

우리의 해로움에 눈 뜰 것이 분명하므로 말입니다."

장군들은 내 말을 이해하진 못했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었으므로 대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들 내심으로는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이 있는

것이라고 자조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장군들이 내게 물었다.

"도시의 사람들이 당신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 다면 어찌할 것인가요?"

"그대들은 사람들이 새로운 소리를 거부할 수 있다고 믿고 있소?"

"사람의 마음이 확고 부동하다면, 유혹에 둔감한 경우도 있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자기가 열중한 문제에 대한 해답을 누군가가 제시하는 경우,

받아들이게 마련이오. 이 도시의 사람들이라고 예외라 생각지 않소. 그렇지

않다면 저 굳건한 성벽은 대체 누가 세울 수 있었겠소? 만약 그대들이 메마른

우물 주변에 성벽을 쌓고, 내가 그 외부에 호수를 만든다면 그대들의 성벽은

저절로 무너지고 말 것이오. 물 없는 도시라는 게 우스꽝스럽지 않소?

만약 비밀을 지키기 위해 그대가 두터운 성벽을 쌓았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

외부에서 나의 병사들이 그보다 더한 비밀을 목이 터져라 외쳐댄다면, 그대가

굳게 지키던 비밀의 성벽은 금세 무너져 내리지 않겠소? 또 그대들이 극에 달한

아름다운 춤을 간직하기 위해 튼튼한 성벽을 구축하였다고 합시다. 내가 그대의

성벽 밖에서 그것보다 화려한 공연을 펼친다면, 그대들은 나의 춤을 배우기 위해

그 성벽을 부수고 뛰쳐나오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겠소? 만일 그 재경에서도

이르러서도 성벽을 고수한다면 해답은 한 가지뿐이겠지요. 그대들이 완전히

미쳐버린 것이라는^5,5,5^."

악어 가죽도 그 악어가 죽고 나면 아무것도 보호하지 못한다. 나는 콘크리트 철근

속에 박혀 있는 적의 도시를 바라보면서, 그 힘의 원천과 약점들을 예리하게

주시하였다.

"춤을 이끌어가는 것은 도시인가, 나인가? 밀밭에 독보리 씨앗을 뿌리는 것은

위험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독보리는 밀의 존재를 지배하려 들기 때문이다. 외모나

숫자는 문제가 아니다. 힘은 씨앗 속에 들어 있으므로, 그 수를 세기 위해서는 단지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 81. 거인은 가고



나는 성채에 관하여 오랫동안 명상하였다.

참된 성벽은 그대 자신 안에 있다. 칼을 휘두르는 병사들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제 그대는 무사통과할 수가 없게 되었다. 사자가 힘차게 발톱을 휘두르면

커다란 황소조차도 둘로 찢어 놓는다. 마치 전신주에 아무렇게나 나붙은 벽보를

떼어내듯이 말이다.

물론 그대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어린 꼬마는 아무래도 어리다. 세상의 내노라 하는 영웅들도 어릴 땐 훅 하면 금방

꺼져버릴 양초와 같이 허약하지 않았겠는가?"

나는 주위의 노인들과 어린이들을 바라보았다.

"허약한 어린이? 허약하다는 말을 하려면 군대를 이끄는 장군처럼 허약하다고나

해야 옳다."

여왕벌 주위에 모인 벌떼, 금광에 모인 광부들, 지휘관 휘하의 병사들을 보면서,

그들이 일심동체를 이루고 하나의 힘을 지니는 것은 씨앗이 양분을 흡수하여 나무로

커가듯이, 탑과 성벽과 영혼이 스민 은밀한 미소가 그들을 포용하였기 때문이다.

그 미소는 투쟁을 위해 지어진다. 어린아이의 살 속에는 취약점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도시 전체는 어린아이의 하인이 된다.

그대는 이 거인의 외모와 주먹과 그의 외침을 믿느냐? 그대는 시간 속에 그걸

잊는다.

시간은 흘러흘러 뿌리를 내리고, 거인은 이미 자유를 박탈당한 존재로 남는다.

그대가 허약하다고 믿는 그 어린이가 군대의 선봉에 서 있다.

거인은 결코 아이를 짓밟지 못한다. 거인에게 아이는 결코 위협적인 존재가 아닌

까닭이다. 그렇지만, 분명코 말하건대 그대는 목격할 것이다. 어린아이가 거인의 머리

위를 타고 올라 발길질로 거인의 머리를 부수어버리는 것을.

[ 82. 성벽을 허무는 법



언제나 강자가 약자에게 짓밟히는 광경을 보게 된다. 그 순간은 물론 허위일지도

모르지만. 그렇기 때문에 언어를 착각하게 된다. 시간을 잊어버린 까닭이다.

허약한 어린이라도 거인에게 분노를 불러일으킨다면, 그 거인은 아이를 짓밟아버릴

것이다. 거인의 분노를 자극하는 것은 어린아이의 놀이도, 의미도 아니다. 그러나

아이가 자라 성년이 되면 거인을 도울 정동의 힘을 갖게 될 것이다.

드디어 그 아이가 연설을 할 수 있게 되어, 천여 명의 병사들을 끌어모아 그 거인을

포위한다면, 거인은 갑옷에 둘러싸인 꼴이 될 수도 있다. 그대여, 가서 그 갑옷을

헤치고 거인을 만져 볼 수 있는지 알아보라.

아이는 자라나서 세상을 철로 된 갑옷처럼 정돈시킬 것이고 단 한 개의 씨앗만이

성공한 성전들처럼, 폭군들과 병사들과 헌병들은 멸망을 맛보게 되리라.

그 씨앗은 거목에서 나왔고, 그 거목은 잠깨어 기지개를 펴면서 그 팔의 근육을

팽창시키며 뿌리를 뻗어내린다. 그 뿌리가 저 성벽의 벽과 기둥과 천장을 부수게

되고^5,5,5^. 그러면 나무는 이 먼지구덩이 속의 폐허가 된 재료 위에서 군림하기

시작한다.

이제 나는 거목을 무너뜨릴 수 있다. 이 나무가 성전이 된 까닭이다. 나는

바람이 부는 대로 날아다니는 씨앗만을 준비하면 된다.

시간에게 그대는 무엇을 보여주려느냐? 이 도시는 자신의 두꺼운 갑옷 속에

갇혀 있다. 나는 안다. 자신의 저장품 속에 갇혀 있다는 것은 죽음을

받아들이겠다는 무언의 메시지이다.

나의 군대는 엘크수르 샘의 깊은 물에서 솟아나왔다. 우리는 신의 군대이다.

누가 우리를 거역할 수 있으랴.

이 성전을 부수기 위해서는 씨앗 속에 갇혀 있는 나무를 단 한 번만

깨움으로써, 갑옷 속에 있는 균열을 찾아내면 그만이다. 이제 이 도시는 길든

도시가 되기 위해 추어야 할 춤만을 알게 되리라. 그대는 이제 꿀사탕 같은 나의

여인, 자신만을 믿는 도시에 불과하다.

[ 83. 밤



밤이다.

야영하는 부대의 모닥불빛이 하나 둘 꺼져가고 있다.

나의 군대는 전진하는 힘이다. 도시는 화약통처럼 폐쇄된 힘이다.

나의 군대는 성벽 안에 점점 뿌리를 뻗어내리고 있는 중이다. 어둠 속에서 내가

지배하려는 도시의 영상을 응시해본다. 시간이라는 한 척의 배처럼, 뜨거운 태양이

지나가면 차가운 밤의 어둠이 도래하고^5,5,5^.

꿈을 위한 기름진 밤. 밤은 낮의 과오를 바로잡기 위해 있다. 결과는 낮에

이루어졌던 까닭이다. 그래서 밤에 내가 승리했을 경우, 축배는 낮으로 미루게 된다.

어둠 속에 영근 포도송이의 수확을 기다리는 밤. 추수가 유예된 밤. 해가

떠야만 인도받을 수 있는 포위된 적들의 밤. 노름이 끝난 밤에 노름꾼들은 잠자러

가고, 상인들도 잠을 잔다. 그러나 그들은 파수꾼에게 명령권을 위임했다. 장군도

잠자리에 들었다. 그도 역시 파수꾼에게 명령권을 위임했다. 선장도 잠을 잔다.

그는 1등기관사에게 모든 명령권을 위임했다. 그리하여 1등기관사는 돛대 근처의

오리온좌를 그의 시선이 미치는 곳까지 데려다 놓는다.

명령이 잘 전달되는 밤. 창조가 휴식을 취하는 밤. 그러나 사람들이 속임수를 쓰는

밤. 도둑들이 움직이는 밤. 반역자가 성채를 공격하는 밤. 울부짖음이 크게 울리는 밤.

기적의 밤. 사잇잠을 깨는 밤. 그대는 사랑하는 여자를 위하여 그 밤을 지키는

등불이다.

씨앗을 받는 밤. 신이 인내하시는 밤.

[ 84. 불의



불의에 관하여 증오하지 말라. 불의는 변화하는 한 순간이어서, 결국 정의가 되기도

한다. 불평등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보이거나 안 보이는 하나의 계급일 따름이다.

인생을 경멸하거나 증오하지 말라. 만약 그대가 커다란 무엇에 복종한다면, 그대

인생은 그 커다란 힘 안에서 안주하는 머저리가 될 뿐이다.

증오는 영원한 독단의 사생이다. 그 독단은 인생의 의미를 파괴하고, 힘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 85. 죽음



본능은 죽음을 회피하는 경향이 있다. 동물들도 역시 살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생존하고자 하는 성향은 다른 모든 성향들을 지배한다. 생명이란 신의 소중한

산물이다. 나는 그 빛을 잘 보존할 책임을 부여받았다.

그 누구나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 영웅적으로 투쟁한다. 요새를 포위하거나 공격할

때의 용기를 유지하라. 그리고 도취하라. 그리하여, 비밀한 선물을 몰래 받으라. 침묵

속에서 죽어나가지 않도록 조심하라.

[ 86. 문명



부자들의 풍요를 내가 왜 묵인하는가? 바로 그들의 풍요를 이용하여 좀더 고상한

무엇인가를 유지할 수 있는 까닭이다. 도시의 환경을 위하여 청소부들이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인 것이다. 나쁜 취미가 있기에 그 중에서 좋은 취미를 구별할 수

있는 것이다.

가령 무엇이 자유의 조건이 되는 경우, 내면의 속박을 일부 용인하기도 하고,

부자들의 경우 다수의 정신적인 고양에 이바지하도록 하는 조건으로 묵인되는 것이다.

부자들은 농부들에게서 곡식을 약탈하는 대가로, 이 돌대가리들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시 몇 편이나, 아니면 한 번쯤이나 제대로 감상할까 궁금한 조각

작품들에게 자신의 재산을 헌납하게 된다.

이 부자와 같은 우둔한 약탈자가 없었더라면, 시인이나 조각가들이 어찌

제국에서 살아 남을 수 있었겠는가?

문명에 있어서 그 창고 주인의 문패는 별로 문제시되지 않는다. 그것은 전달의

수단이며, 길이며, 오직 시간의 통로일 따름이다.

만약 그대가 곡식 창고를 시와 조각과 궁전의 창고로 개조하고, 백성들의 귀와

눈을 속인다고 해서 나를 비난한다면, 나는 부자의 허영심이 그의 보물들을

진열했을 뿐이 아니냐고 말하리라.

궁전도 이와 마찬가지다. 문명은 창조한 물건의 효용에 가치를 두는 것이

아니라, 창조를 향한 열정에 더욱 큰 의미를 부여하는 까닭이다. 제국의 진열장

속에 부자나 무용을 전시하진 않는다.

만약 그대가 부자에게 열 번이면 아홉 번의 저질적인 취미를 보여주고,

감상적인 시인들과 조각가들을 옹호하는 것이냐고 비난을 듣는다면 그냥 들으라!

나무에서 꽃을 바라는 경우, 어떤 상황에서는 나무 전체를 받아들여야 한다.

나쁜 조각가들 틈에서 좋은 조각가가 나오는 것이다. 저질의 창고 중에서도 분별

있는 창고가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다. 바탕은 넓을수록 좋은 것이다.

그대는 지금 나의 논리에 따라 멸망에서 벗어날 수 있는 체제를 요구한다.

그러나 그런 방법은 없다.

그대는 성전을 짓기 위해 돌을 다스리는 법을 내게 묻지 않았다. 성전은

건축가의 힘으로 이루어진다.

그렇다. 내가 존재하고, 나의 시를 가지고, 시를 향한 비탈길을 이룬다면, 그

길은 신의 영광을 위해 백성들의 열정과, 창고의 곡식과 부자들의 행동 양식을

죄다 흡수한 것이다.

창고에 주인이 있다 해서 흥미를 갖는다든지, 고약한 냄새에 매료되어 악취는

그냥 둔다든지 하지 않는다. 나는 재료가 아닌 것에는 아무런 흥미가 없다.

아침을 대하듯 음악을 무시하고, 증오를 대하듯 박수를 무시하며, 모든 것을

통해 신을 섬기는 동굴 속의 멧돼지보다 더 고독한 나, 산비탈에서 시간이 흐르는

동안 조약돌을 단지 한 줌의 꽃씨로 바꾸어 날려보내면서, 나무보다 더 굳게

뿌리내린 나. 돌이킬 수 없는 유배의 몸짓으로 어느 한켠에 기울어짐이 없이

오로지 한 그루의 나무를 위해 나는 존재한다.

나무를 위해 나무의 요소를 옹호하는 나에게 그 누가 항거할 것인가?

[ 87. 눈을 뜨고 사물을 다시 보라.



나는 그대가 사물의 의미에 눈멀기를 바란다. 그러나 대개는 문간에서 내게

넋두리를 늘어놓는다.

"인생은 무의미하기만 합니다. 아내는 잠만 자고, 노새는 마구간에서 쉬고

있으며, 밀은 밭에서 익어갑니다. 나는 어리석게도 끝없이 기다리는 신세랍니다.

아아, 참으로 권태롭기만 합니다."

진리의 구슬을 꿰지 못하고, 읽을 줄도 놀 줄도 모르는 어린 아이 같은

사람이여, 잃어버린 시간 속에서 그대는 아무 목적도 없이 유영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실망하지 마라. 그대의 유영은 아름답다. 그것은 해안으로 밀려들어 온

바닷물과 함께 하기 때문이다. 삐걱거리는 도르래는 그대에게 물을 제공하며, 해안의

검은 흙에서 자라나는 황금빛 밀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그대가 다만 도르래의 소리를

내기 위해 줄을 당기고, 옷감의 질감을 위해 바느질을 하고, 육체의 향연만을 위해

정욕을 불태운다면 그대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은 대체 무엇이겠는가?

그 행위들은 그대에게 아무것도 제공할 수 없다. 창조가 없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그대는 밀을 수확하기 위해 밭을 갈고, 축제를 위해 바느질을 한다. 다이아몬드를

세공하기 위해 원석을 자른다. 이제는 하나의 의미를 가진 창조가 개입되었다.

그대가 보기에 행복해보이는 사람들, 그대보다 많이 가진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신이 맺어주는 인식을 빼고 말이다.

그대가 스스로의 방식을 찾아 변화하지 않는다면, 겨로 평화를 찾지 못하리라.

그대가 하나의 전달 수단으로써 길과 수레를 만들지 않는다면, 제국 안에는

단순한 피의 유전만이 이루어지리라.

나는 그대가 존경받고 존중받는 인물이기를 바란다. 그러면 나는 세상의

무엇이라도 억지로 탈취하여 그대에게 주고자 한다. 하지만 그대는 자신의 물건을

쓰레기통에 집어던지는 인물이 아니더냐?

막연히 어떤 구원자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니냐? 그가 홀연히 나타나 남들이

그대에게 해주니 못하는 어떤 것을 모조리 해결해줄 것이라는 망상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니냐?

길 가는 사람들의 걸음걸이를 지켜보라.

병원으로 문병가는 사람의 걸음걸이와, 빈 집을 향해 아무런 희망없이 가는 사람의

걸음걸이, 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하여 딛는 즐거운 걸음걸이. 분명히 다르지

않느냐? 결국 나 자신, 있는 그대로 사물을 꿰뚫는 만남이 되고, 해안이 되는 것이다.

그리하면 모든 것이 변화하게 된다.

나는 언덕 너머에 있는 밀이요, 어린아이 너머에 있는 인간이요. 사막 너머에

있는 샘물이요, 굵은 땀방울 너머에 있는 다이아몬드가 된다.

나는 그대로 하여금 마음 속에 한 채의 집을 짓게 하리라. 그 집이 완성되면 그대

마음을 불태워 줄 주인이 찾아올 것이다.

[ 88. 사랑을 위하여



세상이 기회를 주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자는 세상을 소홀히 살아가는 사람이다.

자기에겐 사랑이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등의 넋두리를 늘어놓는 자는 사랑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다. 사랑이란 저절로 다가오는 누군가의 선물이 아닌 까닭이다.

사랑의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그대는 사모하는 여왕을 섬기는 근위병이 될 수도

있다.

나는 별들을 사랑하는 기하학자를 알고 있다. 그는 한 줄기 별빛을 가지고 어떤

규칙과 형태들을 변형시킬 줄 아는 행복한 사람이었다.

개량한 장미를 자랑하는 정원사도 마찬가지였다. 기하학자는 별 때문에

아쉬워하고, 정원사는 때때로 정원 때문에 슬퍼한다. 그러나 그대에겐 기하학자의

별도, 정원사의 정원도, 아이들이 갖고 노는 해변의 둥근 자갈도 전혀 부족하지

않다. 이럴진대 그대가 가난한 까닭이 무엇인가?



나의 보초병들을 보라. 그들은 농담과 폭언을 일삼으며, 순찰이나 야경을 돌 때 같은

동료들끼리도 적대시한다. 그러나 막상 일이 끝나면 그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정답게 대화를 나누며 즐긴다. 일이란 자체가 그들의 적이었으며, 생존의 한

조건이었던 것이다.

전쟁이나 사랑도 이와 마찬가지다.

보초병들은 그들끼리만의 식사를 한다. 그들이 나누는 빵 한 조각 한 조각에는

따스한 정이 있으며, 나름의 의미가 있다. 그들의 식도를 통해 들어간 빵이,

보초병들의 살이 되고 피가 되어 도시를 지키는 것이다.

그들이 일이 끝난 후 도시의 홍등가로 몰려가서 여자를 유혹할 때 무슨 말을

하겠는가?

"난 성벽 위에서 총알이 귓밥을 스쳐가도, 그냥 꼿꼿하게 버티면서 총을

쏘아댔지." 하면서 거만스럽게 빵을 한 입 크게 베어문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라.

나의 보초병은 결코 거짓을 말한 것이 아니다. 그는 헛된 자만심이 아니라, 여자에

대하여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을 표현한 것이다.

다만 고백이 서투르고, 단순할 뿐이다. 그리하여 그녀가 애잔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민다면, 보초병은 자신의 귀한 사랑을 가슴 속에 구겨넣고는 소중하게

간직할 것이다. 물론 그가 이름도 모르는 신을 위하여 죽을 때까지만이겠지만.

그는 결국 죽음으로써 이 도시를 구출할 것이다. 그리곤 그대의 허영 앞에

빛나는 승리를 뼈다귀처럼 던져주며 이렇게 말하리라.

"나를 이용하는 자여, 사랑이 있었다구? 내게도 사랑이 있었으므로 그대들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사랑을 노래하는 그대들을 나는 비웃고 있다고."

[ 89. 거짓말쟁이 세상



도시를 지키고 있는 보초병은 거짓말쟁이다.

그는 만찬에 나오는 양고기 수프에만 관심을 기울인다.

밤낮으로 시를 읊조리는 시인은 거짓말쟁이다.

어느 저녁, 복통이 그를 엄습하면 그의 입에서는 온갖 상스러운 신음소리가

터져 나올 것이다.

사랑에 빠졌다고 고백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다.

모기 한 마리가 그를 습격하면 그는 금방 사랑의 늪에서 뛰쳐나와 권태로움에

하품을 한다.

언제나 신과 함께 하고 있다고 떠벌이는 성자는 거짓말쟁이다.

신도 가끔은 바다처럼 그의 뒤켠으로 물러선다. 그러면 그는 메마른 해파리와

같은 꼴이 된다.

사람들은 모두 거짓말을 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무감각에 대하여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오직 권태뿐이다. 권태는 정신의 병약함에서 나온다.

그대는 알고 있지 않느냐? 사팔뜨기 예언자의 성스러운 노기를. 그대가 어떤

인간의 외양만을 보고 징벌하려 한다면 그것은 커다란 잘못이다.

의식은 일상 생활의 권태와 인습으로 인하여 타락한다. 정의의 고고한 규칙이

비열한 놀이의 칸막이로 이용되는 꼴을 너는 보고 있지 않느냐?

그때에 그대는 누구의 무기력을 탓하겠는가?

나는 꽃이 없어도 꽃을 피우기 위해 애쓰는 나무를 알고 있다.

[ 90. 나무는 과일을 영글게 하고



계층에 따라서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

"인간에게서 기대할 것이라곤 하나도 없습니다. 그들은 무례하며, 타산적이고,

이기적이며, 비겁하고 또한 추잡한 족속들입니다."

이와 같이 말하는 그대는, 딱딱한 돌멩이를 가리키면서는 왜 '거칠고, 육중하며,

두텁다.'는 식으로 표현하는가? 그 돌멩이로 이루어진 성전에 대해서는 또 어떻게

말할 참인가?

인간이란 본래 예측 불가능한 존재이다.

이웃 종족들의 사회를 살펴보라. 그들 하나하나는 가정을 사랑하며, 강아지를

키우고, 가구와 집을 고치거나 정원을 꽃향기로 가득 채우곤 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전쟁이나 약탈을 좋아할래야 할 수가 없다. 그에 대해 그대는 "그들은 평화를

사랑하는 종족입니다."라고 말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그대의 오만이다. 그들은 오랫동안 전쟁 준비에 힘을 기울인

커다란 수프 그릇에 불과하다. 선량함과 다정함, 동물에 대한 연민의 정, 꽃에

대한 사랑은 다가올 피의 제전을 예비하는 마법의 식단일 뿐이다.

그대는 나무를 건축 재료로서의 가치로만 평가하진 않았느냐? 오렌지 나무에

관해 말하면서, 그대는 그 뿌리와 살의 맛, 껍질의 끈적임이나 까칠한 감촉, 그

자기의 조직을 비판하려느냐? 오렌지를 보고서야 오렌지 나무를 평가하라.

그대가 징벌하고자 하는 이들도 마찬가지다. 각각의 개인은 별다른 사람이

아니다. 그들의 나무는 많은 사람들의 비겁과 욕망에 항변하며, 괴로움 속에 빠진

육신을 희생시킬 준비가 되어 있는 영혼을 자아낸다. 그들은 다락방의 창문을

보이는 한 줄기 별빛만으로 숨을 쉰다.

그 모습을 보면 내 마음이 흡족해진다. 그대가 논쟁을 볼 때 나는 조건을 보기

때문이다.

나무는 과일의 조건이 되고, 돌은 성전의 조건이 되고, 사람들은 종족의 조건이

된다.

이젠 사람들의 감미로운 꿈이나, 집에 대한 사랑에 박차를 가하리라. 수프

그릇을 채우기 위한 흑사병, 범죄, 기아가 문제인 까닭이다.

다른 사람들이 선량하지 않다거나 꿈을 거부한다거나 집에 대한 집착이

엷다거나 해도, 그러한 조건들이 몇몇 사람들의 고귀함을 이루는 요소가 된다면

나는 그들을 용서하리라.

이 부분에서는 논리적인 바탕이 내겐 분명히 없다.

[ 91. 통치



제국의 순경들이 나를 찾아와, 부패의 원천이 비밀조직을 찾아냈다고 보고하였다.

그들은 그 비밀 조직에 소속되어 있음직한 인물들의 행위의 일치점과 상호

관계, 회합 장소 등을 열심히 설명하였다

내가 그들이 왜 제국에 해악을 미치는가에 대하여 묻자, 순경들은 그 조직원들의

비리와 횡령, 그리고 그들이 일으킨 각종 추태에 대한 기록들을 늘어놓았다.

"그래? 나는 그보다 더 위험스런 조직을 알고 있네. 그들과는 싸울 엄두조차

못낼 정도의 그런 조직을 말일세."

순경들은 놀라서 물었다.

"그건 어떤 조직인데요?"

"왼쪽 관자놀이에 점이 있는 사람들의 모임일세."

그러자 순경들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전직이 목수였던 순경 한 사람이

헛기침을 하면서 입을 열었다.

"그자들은 조직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우선 회합 장소조차 없지 않습니까?"

"그게 훨씬 더 위험하다고 생각지 않나? 전혀 발각되지도 의식하지도 못하는

사이여, 그들은 나의 법령에 대하여 암암리에 반대하고, 똘똘 뭉쳐 나의 정의를

무너뜨리려 하고 있네. 그리하여 그들은 꿋꿋하게 자신들의 계급과 이권을 지키려

하고 있다네."

그러자 그 순경이 다시 반론을 제기하였다.

"저는 그들 중의 한 사람을 잘 알고 있습니다. 마음씨 좋고 너그러우며

정직하시지요. 그는 제국을 지키다가 세 군데 상처를 입은 영웅이랍니다."

"정말 자네는 그렇게 믿고 있나? 여자들이 지각이 없다고들 하지만, 그중에

이성적인 여성이 한 사람도 없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장군들의 목청이 우렁차다고

해서 내성적인 장군이 그중에 한 사람도 없다고 자신할 수 있겠는가 말이네.

어떤 예외에 대해서는 재론하지 말게. 일단 징조가 나타난 사람을 골라 뒤를

캐보도록 하란 말일세. 그들은 유괴, 폭력, 횡령, 사기, 탐욕, 파렴치 등 온상일

것이야. 자네는 정말 그들이 이런 범죄와 무관하다고 생각하는가?"

다른 순경들이 즉각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아닙니다. 욕망이 그자들의 주먹 속에서 눈을 떴을 테니까요."

나는 다시 물었다.

"어떤 나무가 썩은 열매를 맺는다면 그 잘못은 대체 나무인가, 열매인가?"

"당연히 나무입니다."

"그렇다면 몇 개의 성한 열매 때문에 나무의 죄를 사해줄 수 있겠는가?"

"아닙니다. 그럴 수는 없는 일입니다."

다행히도 제국의 순경들은 죄를 용서하지 않는 투철한 직업관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왼쪽 관자놀이에 점이 있는 사람들의 조직을 나의 제국에서

소멸시키는 것은 정당한 일이 되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선언하자, 전직이 목수였던 그 순경은 여전히 개운찮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자 순경들은 그를 주시하면서 웅성거리기 시작하였다. 그 중의

한 순경이 전직 목수를 위 아래로 훑어보면서 말했다.

"이 자가 알고 있다는 그 사람은 혹시 자기의 동생이 아닌가? 아니면 아버지^5,5,5^.

아니면 가족 중의 한 사람일지도^5,5,5^."

나는 그때 치밀어오르는 분노로 소리질렀다.

"왼쪽 관자놀이에 점을 가진 집단은 위험하다. 우리가 전혀 고려해본 적이 없는

부류이니까. 그렇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어떠한가? 우리 눈에는 뜨이지 않도록

가면을 쓴 인간들은 다 위험한 존재란 말일세. 결국 나는 모든 인간들의 집단에

철퇴를 내려야 한다.

순경들이여. 자네들은 순경이라는 직업 외에, 또 인간이라는 사실을 인식한

까닭에, 나는 자네들을 통하여 세상을 정화하려는 걸세. 무슨 말인지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군.

나는 자네들의 내면에 살아있는 순경이라는 인식에게, 또 다른 자네들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인간이라는 인식을 지하 감옥 속으로 던져버리라는 말을 하고 있단

말이야!"

그러자 순경들은 당황한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그들은 제국 안에서는

오로지 주먹으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나는 즉시 겸손을 떠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전직 목수였던 그 순경을

체포하였다.

"너는 순경의 자격을 상실하였다. 너는 목수에게 저항하는 나무와도 같이 내게

저항하였기 때문이다. 너희들은 순경이므로 내가 흉악한 부류로 지정한 인간에 대해서

관할하는 것만이 바른 행동이다. 그런데 너는 그러한 자신의 임무를 망각하였다.

너는 어느 범죄자에 대하여 그 이웃이 경건한 인간이라고 하여 방면할 것이며,

그에 대한 자비의 본보기로서 그 이웃의 이웃까지도 용서하게 될 것이다.

정의는 비뚤어지고 죄악이 그로 인하여 창궐하게 된다. 나의 병사들조차 혼란

속에서 피흘리게 되겠지. 살육을 저질러도 상관에 대한 존경심이 있으므로 너에게서

풀려날 것 아닌가?

정의에 대한 어쭙잖은 너의 사랑은 결국 제국의 근본을 무너뜨리는 쥐새끼와도 같은

결과를 낳고야 말 것이다. 너는 순경으로서의 자격이 없는 인간이다."

[ 92. 해방의 아침



드디어 날이 밝았다.

나는 언덕 위에 올라 맑은 바람을 들여 마시며 신에게 기도 드렸다.

"주님, 해방의 아침이 왔습니다."

저는 여기서 하프 연주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이제 도시와, 종려나무와

옥토와 오렌지 나무 등이 하나의 운명으로 합쳐졌습니다.

이 도시는 오른편에는 넓다란 항구가 있으며, 왼편에는 사막의 한켠으로 푸른

산맥들이 축복의 빛깔로 도열해 있습니다. 이제 제국은 새로운 성채를 건설하고

사막을 옥토로 만들 것입니다. 시간 속에 씨앗은 삼나무 뿌리로 굳건해질 것입니다.

이제 저의 성채를 세울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이 상태에서, 사랑을 가지고

일구어 나가렵니다. 저는 당신에게서 나왔습니다. 이 찬란한 해방의 아침, 제 자신

나무들을 향해 발길을 옮기는 정원사가 된 기분입니다."



노여움과 쓰라림, 혐오와 복수의 욕망 속에서 나는 성난 인간의 유혹을

경험하였다. 반란과도 같이 뒤죽박죽이었던 나의 군대에게서 명령이 지켜지지

않았던 패배한 전투의 치욕 속에서, 신도들을 폭력으로 가두어놓던 미치광이

예언자들에게 미치지 못하던 내 권력의 무력감 속에서.



제국은 살아있다. 내가 그 타락의 와중에서 공범자들을 탓하여 죄다

목베었더라면, 내가 그들의 게으름이나 무능함, 어리석음까지 심판해야 했다면,

나는 그 때문에 제국의 가장 훌륭한 사람들까지 잃는 우를 범했을 것이었다.

인간에게서 병들기 쉬운 것들을 소멸시키기는 쉽다. 그러나 그 파장은 비옥한

토양을 지독하게 오염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나의 고통과 고독과 슬픔은 하나의 씨앗을 깨우기 위한 재료였던 것이다. 오류를

범하는 자를 처단하는 것이 창조를 돕는 길은 아니다. 창조는 실패의 지식인

까닭이다.



나의 진리는 나무이다. 이것은 제국의 유산이다. 그러므로 나는 정원사이다.



나는 증오를 멸시하는 사람이다. 그것은 너그러움 때문이 아니다. 만물 속에

현존하는 신, 당신에게서 나온 제국이 매 순간 내 안에 살아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는 언제나 새롭다.

나는 내 아버지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있다.

"대지가 씨앗을 가지고 삼나무가 아닌 채소를 빚어낸다 하여 불평을 늘어놓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그 씨앗은 채소의 씨앗일 테니까."

"어느 사팔뜨기가 소녀에게 미소를 보냈다. 그러자 소녀는 그를 외면하고는

눈길이 바른 사람에게로 돌아섰다. 그러자 그 사팔뜨기는 눈길이 바른 사람들이

소녀를 타락시키고 있다고 소리소리 지르면서 가버렸다."



자신을 초월하려는 모색, 부정, 실수, 그리고 수치에 대해 아무런 책임을 느끼지

못하는 인간은 너무나 치사한 부류이다. 열매가 나무를 멸시한다는 것, 참으로 우습지

않은가?

[ 93. 초월에 다다라서



나는 그대의 마음 안에 우애를 심어놓았다. 더불어 이별의 슬픔까지도, 아내와의

이별, 친구와의 이별까지도. 그대가 이별의 고통으로 마음 아파할 때마다 나는 또

생존에 대하여 알려주고 싶었다. 샘물이 없는 세계보다는 그래도 갈증 때문에

죽어가는 사람이 좀더 인간적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시장에 갈 때, 아내를 포옹하면서 느낀 사랑의 감정을 기억하라. 아내는

미소지으며 그대를 배웅하고는 콧노래를 부르며 집안일을 하리라. 그리곤 이렇게

중얼거리기도 할 것이다.

"너무 일찍 돌아오시면 안 되는데^5,5,5^. 지금 나를 사로잡고 있는 기쁨이, 당신을

기다리는 이 행복이 조금만 더 오래 지속되었으면 좋을텐데."

그대는 한가로울 때보다도 훨씬 더 아내와 결합되어 있다. 아내에게 집을

온전하게 맡기고, 그대는 가고자 하는 먼 곳의 결혼식이라든지, 그동안 소원했던

친구에 대해서도 열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깨어있는 지금, 그대는 당나귀의 방울 소리를 들으며 마음 안에 넘치는

기쁨으로 미소지으리라. 태양도 우러러 보리라.



"주님, 저는 최선을 다하여 백성들을 가르쳤습니다.

이제 제 자신을 위해 기도드립니다.

그동안 당신께서는 사람들의 고뇌를 죄다 제게 맡기셨습니다. 그리고 온갖

풍문들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도록 제게 침묵의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렇지만

주님, 저는 주기만 하였지 받은 것은 없었습니다.

저는 왕이고 사람들의 피로 이루어진 제국이 제 안에 있으며, 그것이 피의

대가를 제가 치러야 하는 까닭이었습니다. 주님, 저의 미소가 어느 보초병을

도취시킬 수 있었을 때, 저는 그 보초병의 미소 안에서 무엇을 얻었겠습니까?

저는 저를 위한 사랑을 간청하지는 않겠습니다. 저의 모든 행동은 당신을 향한

길인 까닭에 그들이 저를 무시하든, 증오하든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아아! 이제 홀로 있다는 피로감이 저를 엄습합니다. 순수란 이토록 멀리 있는

걸까요? 그러나 주님, 저는 초월함으로써 이루었습니다. 완성 안에서 백성들의

영혼을 아름답게 가꾸었습니다. 저와 끊임없이 투쟁하던 사랑하는 적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저는 그를 위하여, 도시의 늙은 정원사가 친구에게 대하듯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아침 내 정원에는 장미꽃이 활짝 피었다네.'

사랑하는 주님, 당신은 우리들의 척도이십니다. 당신은 모든 행위의 본질이십니다.

그리고 매듭이십니다."
출처 : 어둠 속에 갇힌 불꽃
글쓴이 : 정중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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