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s and Writings/문학작품

[스크랩] 잠들면서 참으로 잠들지 못하면서 - 강은교

그림자세상 2009. 12. 5. 13:35

잠들면서 참으로 잠들지 못하면서 - 강은교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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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차 례 -----

            작가 소개
            작가의 말

            I.
            1. 거기 너의 집은 있을 것이다
            2. 파도
            3. 누가 세상을 건너가네
            4. 잠들면서, 참으로 잠들지 못하면서
            5. 그대의 속이 텅 빌 때까지
            6. 별, 지구 위에서의 행복 자기가 보는 만큼만
          보는 그대
            7. 너무 작으므로 너무 큰 눈물 한 방울
            8. 그노래
            9. 마음 속에 한 마리 새가 있다네
            10. 보이지 않는 별을 찾아서

            II.
            11. 그대는 거기 있게, 나는 여기 있겠네
            12. 길 떠나는 이는 언제나 아름답습니다
            13. 별
            14. 세속 도시에서의 잠
            15. 지상의 밧줄
            16. 가방
            17. 버림의 시대를 위하여
            18. 공포가 누워 있는 고독한 섬
            19. 이리로
            20. 그 여자

            III.
            21. 몇 개의 삽화들
            22. 뒤로 걷는 사람
            23. 그날
            24. 그물 사이로
            25. 혼(魂)들의 추억제
            26. 세 개의 그림
            27. 소리없는 소멸의 장면들
            28. 꿈
            29. '사람살이'의 더듬음 그리고 상처
            30. 그 팥죽
            31. 어디로 가는가, 이카로스여


            작가 소개

            - 1946년 함남 홍원에서 태어났다.
            - 경기여중고 및 연세대 영문과를 졸업 동대학원
              국문과에서 <1930년대 김기림의 모더니즘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 1968년 사상계 신인문학상에 <순례자의 잠>이
              당선되어 등단한 이후, <허무집>(1971),
              <빈자일기>(1977), <소리집>(1982),
              <바람노래>(1987),<오늘도 너를 기다린다>(1989),
              <벽속의 편지>(1992) 등의 시집과
            - <풀잎>(1974), <붉은 강>(1984), <우리가 물이
              되어>(1986) 등의 시선집,
            - <그물 사이로>(1975), <추억제>(1975) 외 다수의
              산문집을 냈다.
            - 문학 선집으로 <순례자의 꿈>(1988)과
              <한국근대문학비평사>(1989,공저)가 있다.
            - 한국문학작가상을 수상
            - 현재 동아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작가의 말

            -꽃이 있는 곳으로

            거기 그 집이 있는지를 처음엔 전혀 몰랐습니다.
          가끔 그 길을 가다 보면 화장품 가게와 빵집 사이 길
          위에 잘 자란 꽃들이 나와 앉아 있어서, 그 꽃들을
          보며 그저 지나가곤 하였을 뿐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화분을 살 일이 생겨서 꽃집을 찾다가 그 집을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화장품 가게와 빵집의
          간판에 가려 그 집은 잘 보이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낯익은 길 위를 한참이나 기웃거리다가 겨우 그
          가게를 발견하고는 안으로 들어갔던 것입니다.
            아주 좁고 긴, 마치 기찻간의 복도 같은
          가게였습니다. 그 길고 좁은 속에 또 꽃들이 가득
          들어 차 있었으므로 그 가게의 구석 안쪽에 있는 작은
          책상 위에서 무엇인가 골똘히 들여다보고 있는 주인을
          부르는 데는 또 한참이나 걸렸습니다.
            나는 꽃들의 잎을 건드리지 않으려고 최대 한도로
          몸을 얇게 하면서 주인 남자에게로 갔습니다.
            "난(蘭) 화분을 하나 사려고 하는데요..... 글쎄,
          .....화분이 잘 넘어지곤 하더니..... 이번엔 그만
          깨어지고 말았어요."
            주인 남자는 천장 밑의 한구석에서 난 화분을 꺼내
          오고, 또 쇠로 만든 난대(蘭臺)를 어느 구석에선가
          꺼내 왔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 좁고 긴 가게 안에는 난이 피어
          있는 화분들이 아주 많았습니다. 난들은 자신들의 그
          푸른 손들을, 잠시의 손님인 나를 향해 출렁거리고
          있었습니다.
            "난을 어떻게 키우면 꽃이 잘 필까요? 도대체 언제
          물을 주어야 하는지..... 난이 말이라도 하면 좋을
          텐데 그렇지도 않구요....."
            나의 농담 비슷한 말에 주인 남자는 난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난의 종류부터 시작해서.....
            "이 이는 난 키우는 게 취미예요."
            어느 결에 나타났는지, 그의 아내로 보이는 한 젊은
          여인이 내 옆으로 다가서며 좀 겸연쩍은 듯, 웃음
          섞어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뭐 .....책 좀 보면 금방 아실
          텐데.....심을 줄은 아세요? 굵은 하이드로볼을 맨
          밑에, 요것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넣고, 그
          다음에..... 중간 크기의 하이드로볼을 넣고, 그
          다음에 제일 작은 하이드로볼을 넣으세요. 물기가
          마르는 속도가 서로 틀리니까요. 작은 것이 마르면
          물을 주어도 됩니다..... 난의 마늘 같은 부분이
          나오도록 심고....."
            흙주머니랑 화분을 들고 나오는데 그 좁고 긴
          가게의 문턱에는, 아마 주인의 딸인 듯싶은 꼬마
          계집아이가 턱을 괴고 앉아 검푸르게 저물어 있는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가게에 들어설 때와 똑같이 몸을 최대 한도로
          오그리고 지나가는 나의 살에 대고 꽃들이
          중얼거렸습니다.
            "이 집은 참 좁지요? 길에서는 잘 보이지도 않지요?
          그래도 우리는 여기 우리의 자리에 서 있어요..... 이
          거리를 주욱 내다보면서..... 살아 있지요....."
            꽃들은 모두 그 아름다운 목을 길게 빼고 뒤꿈치를
          든 채 나의 걸음을 살피는 듯했습니다.
            밤하늘에서 바람이 달려왔습니다. 바람은 아마도
          꽃이 있는 곳을 찾기라도 하는 듯 두리번두리번 길을
          살폈습니다.

            고맙습니다. 나의 이 작은 글을 읽어 주는
          이들에게. 그리고 이 작은 글에 형상을 씌워 준
          이들에게, 다시 고맙습니다.

            1993년 12월
            송도에서   강  은  교


            I.

            1. 거기 너의 집은 있을 것이다

            그 집은 꿈 속에 있네
            그리로 가는 길을 잊어버렸네
            붉은 파초 잎에 떨어지는 빗방울
            흰구름 무성하던 작은 뜰
            너무 어려서 비를 뿌릴 줄도 모르던 작은 구름
            길고 흰 부리에 주홍 바람을 물고 있던
            살찐 거위 두 마리

            그대가 꿈에 젖어 떨고 있는 사이
            무성한 흰 구름은 가버리고,
            .....

            그 집은 꿈 속에 있네
            그리고 가는 길을 잊어버렸네
            길고 흰 부리에 주홍 바람을 물고 있던
            날 줄 모르는 새, 살찐 거위 두 마리

            그대 이제 집으로 가려는가.....

            ---<꿈 속에> 중에서

            날씨가 무척 흐립니다. 마치 하늘 전체가 화라도 난
          것 같습니다. 잔뜩 찌푸린 것이 당장 빗방울이라도 몇
          개 떨어뜨릴 듯합니다.
            길은 오늘도 막연히 펼쳐져 있습니다. 누군가,
          언젠가, 길은 '욕망'이라고 말했습니다만, 흐린 하늘
          아래 기도서처럼 접은 우산을 안아 들고 있는 저에게
          저 길은 '욕망의 명령'을 하고 있습니다.
            "가라, 가라, 거기 네가 나온 너의 집은 있을
          것이다. 집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꽃이 피어 있는
          뜰도 너의 귀가를 기다리고 있다."
            저는 버릇처럼 학교로 올라가는 길을 걸어갑니다.
          길의 명령을 들으며, '욕망'의 가지에 매달려, '거기
          집은 있을 것이다.....'
            학교로 올라가는 길 한구석에는 네모진, 좀 큰 함석
          상자 같은 구두 수선 가게가 있습니다. 언제나
          지나가면서 들여다보면 한 젊은이가 구두 수선대에
          구부려 앉아 부지런히 구두를 만지고 있습니다. 그의
          앞에는 콧등에 먼지가 뿌옇게 앉아 있는 구두라든가,
          흐린 때에 절어 있는 채 누군가의 발을 떠나 지금은
          잠시 의미가 없어져 버린 구두들이 갈색 슬리퍼와
          함께 잔뜩 늘어놓여져 있습니다.
            벌써 몇 년째 저는 거기서 구두를 고치거나 닦거나
          하는데 그것은 그 좁은 함석 상자 가게가 뭐랄까,
          편안함 같은 것을 주기 때문이며, 또 하나의 이유는
          그 젊은이가 거의 자리를 비우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방학중에도 구두를 손볼 일이 있으면 다소
          멀기는 하지만 저는 거기로 가곤 합니다.
            그러면 당신께 그 가게를 좀더 자세히 소개할까요?
            우선 그 길에 들어서면 당신에게는 제일 먼저 그
          함석 상자 같은 구두 수선 가게에 붙여진 간판이 눈에
          뜨일 것입니다. 흰 바탕에 검은 고딕체의 글씨로
          '구두 병원'이라고 쓴 아래에
          '수선.염색.짜깁기.닦음.여자 굽 전문'의 좀 작은
          글씨들이 세로로 씌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세로
          글씨들 양 옆에는 빨간 색과 검은 색의 두 줄을 그어
          놓았습니다. 또 한 개의 간판은 함석 상자 가게 옆에
          붙어 있는데, 그것도 앞에 말씀 드린 것과
          마찬가지로, 빨간 색과 검은 색의 두 색을 사용하고
          있지만 그 내용은 '구두 병원 --- 닦음.염색'이라고만
          씌어 있고, 그 두 개의 항목 옆에 보다 큰 빨간 색의
          글씨로 '수선 전문'이라고 가로 글씨를 써
          놓았습니다. 그 함석 상자 가게의 또 한 옆에는
          포스터들이 붙어 있곤 하는데 오늘의 것은 무슨 연극
          광고인 듯합니다. '천사의 시'라는 제목이 보입니다.
            힘없이 널브러져 있는 구두들 위로 허리를 굽혀
          함석 상자 가게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면 그 젊은이가
          촘촘히 박힌 옥수수 알맹이 같은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어서 오세요'합니다. 마치 '집에 온
          사람에게라도 말하듯이, 그러나 들어갈 곳이 마땅치
          않아 머뭇거릴라치면, 그는 구두를 닦고 있던 한 손을
          빼어, 공손하게 '상자'속의 한 켠을 가리킵니다. 그
          곳에는 의자 두 개가 놓여져 있습니다. 길에 그냥 서
          있기가 멋쩍어 그 의자로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 앉아
          구두를 벗습니다. 차츰 '상자'속의 풍경들이 아는
          체를 하며 눈에 익어집니다. 발 밑에는 기운 없이
          누워 있는 헌 구두들이 마치 젊은이의 손길을 기다려
          헤프게 웃기라도 하는 것같이 저를 올려다봅니다.
            그러고 보면 그 좁은 공간 속에 있는 것은 헌
          구두들뿐이 아닙니다. 우선 벽에 쳐 있는 못에는 누런
          가죽 조각들이 '깁스.피부 질환.내장
          파열.합병증.정형 수술'이라는 서툰 글씨들을 안은 채
          플래 카드처럼 걸려 있습니다('깁스'에는 괄호 속에
          남자 굽이라고 씌어 있습니다. 피부 질환은
          약칠이라는 괄호를 달고 있습니다. 내장 파열은
          수선이라고 괄호 속에 씌어 있고, 합병증은 염색,
          정형 수술은 짜깁기라고 덧씌어 있습니다).
            물론 이들 글씨들 앞에는 '진료 과목'이라는 글씨가
          빨갛고 크게 아주 당당히 씌어 있습니다. 큰 가죽
          조각은 따로 '구두 병원'이라고 씌어져 좁은 벽
          한켠에 늘어져 있구요. 그 밖의 벽은 구두 수선
          도구들로 빼꼭히 차 있는데, 천장 밑의 선반에는 꼬마
          텔레비전도 얹혀 있습니다. 고물인 것 같지만
          라디오도 있으며, 꼬마 선풍기까지 한 대 있습니다.
          갑자기 소인국에 들어온 것도 같습니다. 그 속에서
          저는 무척 거인인 듯한..... 글쎄 걸리버도
          그랬을는지, 제가 좀 위대해진 듯한, 묘한 느낌과
          함께 무언가 제가 무척 너그러워진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젊은이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합니다. 기다리고 있는
          다른 구두들을 젖혀 놓고 제 구두부터 만지기
          시작합니다. 저는 기분이 아주 좋아집니다.
          으쓱거려진다고나 할까요?
            "참 좋은 구두를 사셨습니다. 가죽이 아주
          좋습니다."
            젊은이는 쉴새없이 손을 놀리면서도 저에게
          인사하는 것을 잊지 않습니다. 저는 또 한 번
          으쓱해집니다. 그러나 그 작은 함석 상자 가게 안의
          때묻은 물건들을 보고 있으려니 슬며시 저는 저의
          '좋은' 구두가 부끄러워지기도 합니다. 제가 너무
          고급 구두로 이 함석 상자 가게를 놀리고 있는 것도
          같아서 말입니다. 그래서 짐짓 즐거운 체 대꾸합니다.
            "그래요? 괜찮아요?"
            "한 십만 원은 주셨겠는데요?"
            "....."
            그런데 얼마 전에 가니까 그 함석 상자 가게의
          진열대 부분---여자 구두 굽들이 가득 올려져
          있다---의 유리창에 '그림' 한 장이 붙어 있었습니다.
          한 구두 수선쟁이 할아버지가 긴 앞치마를 두른 채
          구두 수선대에 허리를 구부리고 구두를 깁고 있는
          장면이 연필로 그려져 있었습니다. 안데르센
          동화집이라든가 그런 데서 많이 본 것 같은, 그런
          그림이었습니다.
            "저 그림 누가 그렸죠?"
            저의 물음에 젊은이는 예의 그 사람 좋은, 이를
          드러내고 웃는, 옥수수 튀는 것 같은, 웃음을
          '허허.....' 하고 웃으며 저의 물음에 대한 대답
          대신,
            "저하고 꼭 닮았죠? 제 얼굴에 안경만 얹어
          놓으면..... 똑같겠죠?"
            하고 말했습니다. '누가 그렸느냐'는 저의 집요한
          물음에 젊은이는 마지못한 듯, 그러나 소리를 좀 높여
          대답했습니다. 부끄러운 듯하기도, 즐거운 듯하기도
          한 묘한 목소리였습니다.
            "제가 그렸습니다. 어떤 광고 책에서 보고, 본을
          떠서 그렸죠. 저하고 꼭 같죠?"
            "아뇨, 젊은이하고 하나도 안 닮았어요, 그냥
          궁금해서....., 혹 미술대에 다니는 친구가 그려 준
          것은 아닌가 해서....."
            하긴 저는 정말 그렇게 생각했었습니다. 언젠가 그
          젊은이는 저에게, 우리 과의 한 나이 많은 학생이
          친구라고 하면서 함께 찍은 사진까지 보여
          주었거든요. 그러나 그렇게 말을 하고 나니, 저는 좀
          부끄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그림 속의
          할아버지가 그의 말을 듣고 난 후부터 그와 무척 닮아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연필의 터치라든가 그런
          것이 새삼 너무 서투르게 보였고 말입니다. 나는
          '미술대 친구.....'라고 한 나의 말이, 입에 발린
          냄새가 짙게 나는 바람에 영 부끄러워지고 말았다고나
          할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젊은이에게 그림 속의
          구두 수선쟁이 할아버지와 그가 꼭 닮았다고 할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그 젊은이의 꿈이 겨우 이 함석
          가게라든가, 또는 이런 곳을 맴도는 것으로 말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하긴 그의 일이 어떻다는 것은
          아니지만.....)
            '허 허 허허.....' 젊은이는 그 옥수수 튀는 것
          같은 구수한 웃음 소리를 내는 것이 저의 말을 전혀
          믿지 않는 눈치였습니다.
            젊은이와의 대화를 마치고 저는 거리를 내다보기
          시작했습니다. 제 앞에 힘없이 널브러져 있는
          구두들과는 달리, 한 인간의 발에 신겨져서 힘차게
          거리를 걷고 있는 구두들이 가까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젊은이는 제 구두에 광을 내며 콧노래를
          불렀습니다. 이제 얼굴을 내민 길 속의 햇빛 사이로는
          여러 행인들의 여러 모습의 구두가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애인들인지 바싹 붙어 걸어가는 남자
          구두와 끝이 닳아 보이는 굽 높은 여자 구두도
          있었고, 원래의 흰빛이 거의 잿빛이 되어 버린
          고무신을 신은 노인의 흐린 걸음 걸이도 있었습니다.
            모두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욕망'인 길 위에서
          '욕망'인 길을 향하여..... 저는 가만히 진열대의
          그림을 쳐다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자기의 얼굴을 확실히 그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 부끄러움 없이 자기의 미래의 '구두
          수선쟁이의 얼굴'을 그리며, 새로 닦은 반짝거리는
          구두에 의미를 줄 수 있는 사람은 집으로 갈
          것이다,라고 그림은 말하고 있었습니다.
            '가라, 가라, 거기 네가 나온 너의 집은 있을
          것이다.'
            젊은이는 저에게 반짝반짝하는 저의 구두를
          내밀었습니다. 허허허허 옥수수 튀는 것같이 구수하게
          웃으며, 그리고는 곧 또 다른 하나의 헌 구두를 집어
          들었습니다.

            그 집은 꿈 속에 있네
            그리고 가는 길을 잊어버렸네
            .....
            길고 흰 부리에 주홍 바람을 물고 있던
            날 줄 모르는 새, 살찐 거위 두 마리
            .....

            언제나 헌 구두를 집어 드는 당신께.....
          감사합니다.

            2. 파도

            떠도는구나 오늘도
            동편에서 서편으로
            서편에서 동편으로
            물이 되어 물로 눕지 못하는구나.
            꿈꿀 건
            온몸에 솟아나는 허연 거품뿐
            거품되어 시시때때 모래땅 물어뜯으며
            입맞추며 길길이
            수평선 되러 가는구나.
            떠돌며 한 바다
            막으로 가는구나.

            누가 알리
            엎드려야만 기껏 품에 안아 보는 세상
            날선 바람떼 굽은 잔등 훑고 가면
            쓰러져 내리는 길, 길 따라
            사랑이 얼마만하더냐, 묻는 먼지알 신음소리
            목숨의 길이 얼마만하더냐, 묻는 먼지알 신음소리
            등덜미에 철썩철썩 부서져

            떠도는구나 오늘도
            동편에서 서편으로
            서편에서 동편으로
            물이 되어 물로 눕지 못하는구나.
            아, 이 벽에서 저 벽
            저 벽에서 이 벽

            끝내 거품 되어 피 넘쳐 넘쳐
            수평선이 흐느끼는구나.
            흐느끼며 한 세상
            거품 속에 세우는구나.

            ---<파도>

            새벽에 바닷가를 달리고 와서 이 글을 씁니다.
          바닷가의 그 날카롭게 서 있는 바위에 파도가 흰
          머리칼을 온통 내휘두르며 부딪는 모습이 어찌 그리
          인상적이던지요? 파도는 마치 자기가 있는 곳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또는 이 오만하고 딱딱한 바위
          천지인 세상을 제 앞에 머리 숙이게 하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온몸의 힘을 다 내어 바위에 부딪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위에 부딪는 순간 그것은 아주 작은 흰
          거품으로 부서져 자기가 온 곳으로 다시 돌아가곤
          하였습니다.
            그 돌아가는 모습이 오늘 아침 나의 눈에 뭐랄까,
          아주 정처없이 보였습니다. 한없이 떠도는 자의
          그것처럼 가망 없이 보였습니다. 바위들이 둘러선
          바닷가의 벼랑이 너무도 굳건한 위엄 속에서 꿋꿋하고
          깊이 침묵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바다는
          쉬임 없이 흰 파도를 쳐 올리고 있었지만 --- 그래서
          바위들에게 보내고 있었지만 그것들은 보내지자마자
          부서지고..... 그렇게 바다는 파도들의 부서져 떠돎을
          보여 주고 있었습니다.
            그걸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순간 슬픔이
          몰려오기도 하면서, 또 황홀이 몰려오기도 합니다.
          갈가리 찢겨지면서 떠도는 자의 매혹,.....
          허무(虛無) 의 활력(活力) 같은 것, 그 허무의 짙은
          질서..... 한 파도의 찢김이 끝난 다음에야 다음 것의
          찢김이 밀려오는 그 명징한 질서, 그 찢김이 다시 올
          때는 또다시 하나의 물로 뭉쳐서 오는 그 정연한
          논리.....
            바닷가의 벼랑 밑에서는 여인들 몇몇이 서성이면서
          징을 울리고 있었습니다. 거무스레한 새벽 하늘과
          파도 소리 사이로 징 소리는 끊일 듯 끊일 듯
          이어지며 들려 왔습니다. 아직 검은 하늘의 가슴에
          대고 무엇인가 큰 소원을 울려 대고 있는 여인들.....
            바닷가의 한쪽 끝에 마련된 휴게소에 잠시 앉아
          있으려니 두 마리의 쥐가 풀숲 덤불 밑 어디에선가
          튀어 나와 눈을 반짝거리고 있었습니다.
            그것들은 금세라도 튀어 나가겠다는 듯 긴장된
          자세로, 귀를 쫑긋 쫑긋 움질거리며 내가 앉아 있는
          쪽을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그것들의 눈에 나는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습니다. 그것들이 보기엔 나는
          너무나 커다란 존재인지? 글쎄, 그것들이 눈에 담기엔
          '저'라는 생물의 길이가 너무 길다라므로, 그것들의
          시계(視界)엔 잡히지 않는 것인지? 또는 인간의
          그림자엔 너무 익숙하므로 별 위험을 느끼지 않은
          것인지.
            그것들은 나의 시선은 상관하지 않고 살금살금 풀숲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런 다음 잽싸게 길을 핥아 보고는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마치 극도의 긴장에 찬 현대 무용을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조금 더..... 조금
          더..... 이제 그것들은 자동차 길까지 나아갔습니다.
          넓은 자동차 길 위에서 두 마리 쥐는 잠시 멈춰
          서서는 앞과 옆을 재빨리 훑어 보고 있었습니다. 마치
          새벽의 검은 공기가 두 마리 쥐의 다리를 잠시 매어
          놓은 것 같았습니다. 그러다 무엇에 놀랐는지
          풀숲으로 놀랍게 빨리 다시 돌아오더니 잠시 검은
          공중을 바라보고는 수풀 더미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수풀은 고요해지고
          거무스레한 새벽의 공기가 고요한 수풀 위를 무심하게
          맴돌았습니다. 멀리서 자동차의 엔진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그러나 잠시 뒤 풀숲 더미 속으로 들어갔던 두
          마리의 쥐는 다시 그 까만 머리를 내밀었고, 다시 그
          반짝이는, 겁에 질려 있는 듯한, 두 눈을 반짝이며
          희끄무레한 새벽의 세상을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새벽의 검은 공기는 그러나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풀숲도 별일 없는 듯이 가만히 몸을 웅크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두 마리의 쥐를 보면서 어느 날의 저의 모습을
          떠올렸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모두 저렇게 자기만의
          창(窓)으로 세상을 내다보다가, 한 번도 밟아 보지
          않은 길을 핥으며 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보이지 않는 냄새에 코를 흥흥거리며, 어떤 방해물이
          거기 있는지도 모르는 채, 모르는 그것이 어찌 보면
          즐거움인 채로.
            그것의 반짝이는 까만 두 눈은 아직 거뭇거뭇한
          지상에서 어떤 '공포'에 떨고 있는 것처럼도
          보입니다. 그 '공포'에 찬 두 눈이 길거리의 무엇을
          발견했는지, 잠시 기쁨의 불 같은 것이 타오르는
          듯하더니, 그것들은 튀어 나갑니다. 마치 용수철에서
          튕겨 오르기라도 하듯이, 힘차게, 그것들이 달려간 길
          위엔 비닐 봉지 하나가 떨어져 있었습니다.
          재빠르면서도 진지하게 그것들은 비닐 봉지를
          이리저리 핥아 봅니다. 순간 그것들의 몸은
          '욕망'으로 터질 듯, 새벽길 한구석에서 까맣게
          빛납니다. '공포'와 '욕망' 이 삶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의 긴장, 그러니까 그것들의 까만 두 눈의
          반짝임은 '공포'와 더불어 그것들의 진한 삶에의
          욕망이 뭉쳐져 오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욕망'과 '공포'는 문명이 이렇게 세련되어 그 두
          개의 감정이 사회적으로 분화되기 이전에는
          '하나'였을 것입니다. 동전의 양면 같은 것.....
          말하자면 우리는 그 두 개의 표정들을 번갈아 지니며
          사는 것일 것입니다.
            공포---, 그것이 실은 삶의 참 모습이 아닐까, 또는
          적어도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이 아닐까, 말입니다.
          무엇이 다가오는지 모르는 이 세상에 대한 가장
          원시적인, 순수한 감정, 그리스의 고전 비극들이
          우리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주는 것 중의 큰 이유는
          그것들이 도대체 예측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공포의 사건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겠지요. 우리의
          옛 서사물(敍事物)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것들은 자기의 뒤도 앞도 바라볼 재주가 없는 우리
          인간에게 운명의 이름으로 막막한 눈물을 주는
          것입니다. 눈물밖에는 우리가 진실로 가진 것이
          없음을 깨우쳐 주는 것입니다.
            저는 '그때' 짙은 공포에 물들어 있었습니다.
          온몸이 매일 그 불안한 공포에 젖어 있었다고나
          할까요? 물론 밤에는 잠도 자지 못했습니다. 잠이
          겨우 들면 또 이번에는 눈뜨는 것이 무서워 억지로
          잠을 계속 이어 나가곤 했습니다.
            세상이 무서워서 도대체 집 밖엘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집안에 앉아 있어도 온갖 소리에
          신경이 곤두섰습니다. 그래서 튼튼한 열쇠를 몇 개나
          현관문에 달아 놓았지만 공포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를테면, 택시를 타면 기사가, 버스를 타면
          뒷사람이, 시장엘 가면 호박을 파는 아주머니가.....
          심지어는 천장에 걸려 있는 전등도 무섭고
          걱정이었습니다. 의자에 앉아 있으면 샹들리에가
          무너져 내리는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르곤 했습니다.
            누가 벨을 누르기라도 하면, 나의 공포는 극에
          달하곤 해서 대답을 하지 않은 채 숨죽이곤 했습니다.
            전화 벨 소리도 나의 공포를 부추기기에는 아주
          안성맞춤이었습니다. 그래서 혹시 잘못 걸려 온
          전화를 받기라도 하면 전화기에 대고 화를 냈을 뿐
          아니라, 그 전화가 나에게 온 경위를 생각하느라고 몇
          시간씩 끙끙대곤 하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쨌든 사회 생활을 해야 하는 나로선
          매일 매일이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웠습니다. 실제로
          가슴에 통증 같은 것이 오곤 했습니다. 운동 부족으로
          다리는 매일 쑤시고, ..... 어느 날엔가는 그
          해결책을 생각한 끝에 수면제를 먹고 잠이 들기를
          기다리는 게 낫겠다는 결론이 나기도 했습니다. 물론
          여러 가지 여건 때문에 한 번도 실천은 못
          했습니다만, 사실은 잠도 무서웠다는 게 저의 솔직한
          마음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잠은 꿈을 가져오기
          때문이었죠. 아침이면 버릇처럼 어젯밤의 꿈을
          분석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곤 했습니다.
          '공포'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대신 나의 겉 껍질을
          이루고 있는 모든 것들을 의심에 차서, 말하자면
          지나치게 사회화하여 바라보았다고나 할까요? 그때의
          공포들이 실은 제 '삶에의 욕망'의 또 한 얼굴임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고나 할까요?
            바닷가의 파도가 무슨 꿈 소리처럼 웅얼거리며
          달려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이제는 사라져 버린 두 마리의
          쥐의 모습을 다시 찾아보며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렇게 반짝이는 공포와 탐욕의 시선(視線)을 찾으며,
          삶의 신선한 빛을 찾으며.
            돌아오는 길에 바다를 쳐다보니 둥그런 해가
          떠오르고 있습니다. 오늘 그것은 진한 주홍빛입니다.
          산들이라든가 먼 수평선은 마치 그것을 받쳐 안고
          있는 듯한 형국입니다. 그 곁에서 하늘은 몸살을 앓듯
          자줏빛으로 변했다가 보랏빛으로 변했다가
          야단입니다. 다행히 구름이 가리지 않아 해는 오늘
          아침 완전히 둥근 모습으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세상의 아무것과도 상관없는 듯한 깨끗한 주홍빛,
          무(無) 그것인 둥ㄱ, 거기엔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그 앞에서 나는 한 없이 작고, 미천한, 공포의 눈물을
          흘리는 존재일 뿐.
            밝아 오는 저쪽 길에서 한 여인이 정신없이
          합장하고 있습니다. 합장했다가는 두 팔을 둥글게
          원을 그리며 펴서는 다시 가슴 앞에 모으고, 제가
          다가가도 아무런 몸짓의 변화가 없습니다. 여인은
          둥글게 팔을 돌려서는 가슴 앞에 단정히 모으는
          기도의 몸짓에 몰입하고 있었습니다. 떠오르는 붉은
          햇빛에 비쳐 여인의 옆 얼굴은 붉게 물들어 있습니다.
          어떤 욕망의 빛이 거기 한데 모인 것 같습니다. 또는
          공포에 넘실거리는 세상의 모든 기원을 한데 모아
          기도하고 있는 것도 같습니다. 붉은 빛 아래서 여인의
          모습은 간절하게, 순간 너무 작게 보입니다.
            크나큰 슬픔을 간직한 듯, 지금 그대로 서 있는
          것만이 의미가 있는 듯한 그 모습. 감사하라,
          감사하라. 그대가 공포와 욕망의 존재임에
          감사하라.....
            그대여, 떠도는 이들이여, 그대가 떠돌 수 있음에
          감사하라.....
            감사하면서 여인의 옆을 지나옵니다. 집으로
          옵니다.

            감사합니다. 당신에게.

            3. 누가 세상을 건너가네

            ---- 나에게 아무 욕망이 없다면 세상은 훨씬
          다정해지리라.
            ---- 나에게 그리움이 없다면 세상은 훨씬 행복의
          살[肉]을 지니리라.
            ---- 그리하여..... 우리에게 마음이라는 게
          없다면, 우리는 한없이 가벼워져 해방되리라, 세상
          고통의 무게에서.

            ---(()()월 ()()일)

            그날 네거리 횡단 보도에는 행인들이 꽤 많이
          모여들고 있었습니다. 청바지를 입고 윗도리의 단추를
          일부러 다 채우지 않은 채 안에 입은 옷을 길게
          드러나게 하고 있는 젊은이들, 요란한 무늬가 펼쳐져
          있는 주름 치마에 아무렇게나 블라우스 같은 것을
          걸치고 한 손에는 비닐 보따리를 든 오십대의 여인,
          반바지에 하얀 타이츠를 신은 다리가 몽톡하게 일어서
          있는 국민학교 학생, 목의 주름이 뒤에서도 잘 보이는
          앞의 허공을 열렬히 들여다보고 있는 노인, 힘겨운
          듯한 다리를 좀 구부러뜨린 채 옆 사람이며 길 건너의
          건물들을 주의 깊게 바라보고 있는 삼십대의 여인,
          대머리를 바람에 씻고 있기라도 하는 듯 바람 속에서
          잠시 머리를 흔들고 있는 중년의 남자..... 횡단
          보도에는 시간이 갈수록 행인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렇게 한 무더기의 사람들이 마치 바닷가의 지친
          새들처럼 양 길 가장자리에 목을 늘이고 서 있었으나
          빨간 불의 신호는 영 파란 불로 바뀌지 않고
          있었습니다.
            여기저기서 한숨 같은 것들이 솟아 나오고,
          조급증을 못 이긴 행인들이 괜히 주머니를 뒤지거나,
          들고 있는 가방이며 보따리들을 들여다보는 일이
          생겨났습니다. 유난히 긴 신호는 횡단 보도에 모인
          사람들을 영 못 참게 하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신호등의 불빛이 파란 불빛으로
          바뀌었습니다. 사람들은 기다렸던 만큼 빠른 속도를
          내며 길을 건너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젊은이는
          후닥닥 뛰어서 길을 건너가기도 하였습니다. 가방을
          괜히 뒤적이던 어떤 사람들은 열린 가방을 미처
          닫지도 못한 채로 가슴에 그것을 안고, 주머니를
          뒤지던 어떤 사람들은 미처 주머니의 헤 벌어진
          지퍼를 채우지도 않은 채로..... 저마다 바삐바삐
          걸음을 떼어 놓았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자그만 트럭 한 대가 행인들이
          건너고 있는 횡단 보도 위로 슬슬 미끄러져 오기
          시작했습니다. 뒤의 짐칸은 텅 비어 있는 흰색 덤프
          트럭이었습니다. 마침 그 앞을 지나던 행인들이
          놀라서 트럭을 미는 시늉을 하며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어떤 행인들은 움직이는 그 트럭 앞에서
          발걸음이 차마 떨어지지 않는지 머뭇머뭇거리고
          있었습니다. 행인들 사이에 자그만 동요가
          일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보도 끝에 멈춰 선 채로 좀
          어안이벙벙한 시선으로 신호등을 다시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신호등의 불빛은 분명 파란색이었습니다.
            그러는 중에도 그 트럭은 조금씩 더 행인들 사이로
          미끄러져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네거리가 약간 경사진
          길이었기에 처음엔 신통치 않은 트럭이 미끄러지는
          것인가 보다고 생각했던 나도 문득 긴장하였습니다.
          그래서 같이 가고 있던 딸의 손을 잡고 길 끝에 멈춰
          섰습니다. 나는 어느 새 딸의 허리를 힘껏 감싸안고
          있었습니다. 트럭 안을 들여다보니 한 삼십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마른 얼굴의 한 남자가
          허둥거리고 있는 길 위의 행인들을 보며 빙그레 웃고
          있었습니다. 아주 재미있다는 듯이 --- 소름 끼치는
          웃음이었습니다.
            몇 사람이 트럭 속을 들여다보며 뭐라고 소리
          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팔을 공중에 휘두르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어떤 중년 남자는 트럭 문을 금방
          열기라도 할 기세로 트럭의 몸체에 달려들었지만 곧
          미끄러져 내려오는 트럭에 떠밀려 기우뚱하며 횡단
          보도에 나동그라졌습니다. 겨우 일어서서 건너편
          인도까지 간 그는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손에 들고
          있던 검은 비닐 봉지를 허공에 마구 흔들어 댔습니다.
          멈칫 멈칫 다른 행인들도 좀 휘청거리며 길을
          건너서는 그 조그만, 아직도 슬슬 미끄러지며
          움직이고 있는 트럭을 향하여 눈을 흘겨대고
          있었습니다. 트럭 속의 그 남자는 계속 기분 나쁘게
          웃으며 길 위의 허둥대는 사람들을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 웃음 속으로 액셀러레이터를
          계속 슬쩍슬쩍 밟으며.....
            드디어 신호가 붉은 색으로 바뀌었습니다. 그
          자그만 트럭은 쏜살같이 앞으로 나와서는 어딘가로,
          밀려오는 다른 수많은 차들의 행렬속으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길 위에는 아무 흔적도 남지 않았습니다.
          횡단 보도 끝에 웅성거리며 몰려 있던 행인들도
          빠르게 흩어져 버렸습니다. 마치 거품들처럼, 물 위에
          한때 보글거리며 떠올랐다가는 잠시 뒤 사라져
          버리는....., 그러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채 물은
          다시 제 갈 길로 흐르고 마는 것처럼.

            송기원의 소설 <아름다운 얼굴>에는 마지막
          문장으로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만약에 나한테 조금이라도 아름다운 게 있다면,
          그건 내께 아니야. 그건 내가 상처 입힌 모든 이들
          것이지."
            거기에는 저 작고 날카로운 눈매의 사내도
          포함될까, 하고 문득 나는 자문했다. 그리고 별로
          오래지 않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사내야말로 나에게 가장 크게 상처를 입었는지도
          몰랐다.

            위의 이 문장에서 '그 사내'는 물론 사생아인
          화자의 생부를 암시하고 있습니다만, 소설의 내용과
          관계없이 이 구절은, 우리는 모두 끊임없이 상처를
          받으면서,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그 무엇인가에
          상처를 주면서 이 삶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그래서 꺼내 본 것입니다.
            더구나 갖가지의 보이지 않는 제도의 그물들이 얽혀
          있는 이 현대 사회에서 어쩔 수 없이 함께 모여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말입니다. 사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어느 순간 '우리 한 사람'에 그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 흰색의 소형 트럭 속의 그 남자 --- 순간 싸늘한
          비웃음의 묘한 웃음을 입가에 흘리고 있던 그 남자도
          무엇인가에 받은 상처를 그 순간 불특정의 우리,
          행인들에게 슬며시 붓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 도대체 왜 그랬을까,
          도대체 왜 그 남자는 그 순간 싸늘한 미소마저 띠고
          있었을까..... 세상을 건너는 모든 걸음들에 대한,
          오랫동안 고인 분노였을까..... 나의 머릿속으로는 그
          남자의 악마의 미소 같은 '냉소'가 사라지지 않고
          맴을 돌았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많은 기다림들, 해도 해도 되지 않는
          살림살이, 더욱이 현대의 도시라는 구조의 막막한
          층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그러한 조급증과 절망을
          심어 주게 되어 있는 것일까, .....그러나 아무튼 그
          남자의, 그 미소는 어떤 좌절된 욕망이 입술 밖으로
          흘러나와 고인 것이라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
          욕망이란 그 무엇인가의 끝없는 그리움으로 채워져
          있는 것일 테고..... 그 '욕망과 그리움이 꼭꼭 들어
          차 있을' 그 남자의 마음 앞에서 세상은 부수고 싶은
          벽이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람 소리가 유난합니다. 누가 세상을 건너가나
          봅니다.
            아닙니다. 세상이, 버둥거리며 반항하는 누구인가를
          억지로 건네주고 있나 봅니다. 그러기에 저렇게
          가슴을 쥐어뜯는 소리가 바람 뒤켠에 묻어서 창을
          울리고 있는 것이겠지요..... 그래도 허공에는 피 한
          방울 남아 흐르지 않을 텐데..... 그저 한 사람은 좀
          낮게 울고, 또 한 사람은 좀 높게 우는 소리가 흐를
          뿐.....
            드디어 비가 내리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빗방울들이
          창틀에 방울져 걸려 있다가 미끄러져 내립니다. 그
          모양이 마치 누구인가 조심조심 길을 건너려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또는, 한 빗방울이 다른 빗방울에
          밀려 떨어지는 모습이, 꼭 갈까 말까 하다가 결국은
          어느 먹구름 속으로 나아가는 어느 날의 우유 부단한
          모습 같기도 합니다.
            '누가 세상을 건너가네 --- 마음 하나가 세상을
          건너가네.'
            시 한 구절을 써서 중얼거려 봅니다. 그러나 영 그
          다음이 이어지질 않습니다. 아직 간절한 내, 시에의
          마음 --- 덜 익었나 봅니다.
            그러나, 세상은 건너야 합니다. 비록 우리가 만드는
          삶이 우리를 황폐하게 하고 있을지라도, 건너서 저쪽
          편, 보도에 닿아야 하는 것입니다.

            4. 잠들면서, 참으로 잠들지 못하면서

            가벼운 한숨 같은 등불들이 저녁 바다 위에 켜지기
          시작했습니다.
            등불들은 어떤 것은 아주 하얗게 저녁 하늘에
          부서지는 것이 누군가에게 신호라도 보내는 것같이
          보입니다. 하긴 그것들은 고단한 항해길에서 돌아와
          정박한 원양 어선이라든가 뭐, 그런 배에 켜진 대형
          전구들일 것입니다만, 여기서 보기에는 꼭 누군가를
          기다려 일어서는 등불같이만 보이는 것입니다.
            바람이 불어옵니다. 나는 한껏 심호흡을 해 봅니다.
          바람을 온몸 가득 들이마십니다.
            점점 바다가 어두워 오고, 등불들이 더 강렬하게
          빛을 내어 갑니다.
            조금 있으니 아주 어두워져 버린 바다에 등불들만이
          외로운 자들의, 가장자리가 조금씩 젖어 버린
          눈들처럼 떠 있습니다.
            등불들이 가볍게 떠 있는 검푸른 공중 --- 마치
          존재의 껍질처럼 떠 있으나 지상을 떠나지는 않고
          있는 그것들, 삶이 그런 것이듯이, 우리 모두 삶에
          매여 순간 순간 절망하고 있으나, 결코 지상에서
          떠나지는 못하는 것처럼, 떠 있으면서 떠나지는 않는,
          떠나 있으면서 아주 떠나지는 않는 --- 그 붉은, 밤의
          신호들은 오늘 밤 지상을 결코 버리지는 못하겠다는
          결연한 표정마저 어둠을 한 입 깨물고 있습니다.

            잠들면서
            참으로
            잠들지는 못하면서
            쓰던 뼈는 다시
            不朽의 살로 덮고
            제 아이는
            등 뒤에
            이슬 묻혀 남겨놓지
            그래도 흐린 날은
            귀신이 되어 울지
            잊지도 않고
            잊을 수도 없이

            ---<黃昏曲調 2番>

            저렇게 공중에 떠서, 이 지상에 끝없는 신호를 던질
          수 있다면..... 그래서 내 신호에 어떤 '생명'인가가
          순간 순간 일어설 수 있다면..... 그럴 때 '뜬다'는
          것은, '가볍게' 젖어서 뜬다'는 것은 실로 존재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지상의 그 어떤 크나큰 힘보다도
          지상에 힘을 보내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찮은, 탐욕에 늘 가슴 헐떡이는
          우리 인간들에게는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요? 저렇게
          한밤중, 검은 공중에 뜨려면, '자기'를 완전히 놓아야
          할 텐데..... 그러면서 저 자그맣고 부질없는 모든
          것들, 허공의 구름이라든가 발 밑의 형편없이 작은
          씨앗 같은 것까지도 사랑해야 할 텐데.....
            그러므로 아침저녁으로 가슴 짓찧으며 기친 숨소리
          풀풀거리는데 익숙한 우리들은 그렇게 쉽사리 뜰 수는
          없는 일일 것입니다. 등불들이 떠 있는 검은 공중 ---
          '뜬다'는 일의 어려움을 알고 있는 저에게 그것들은
          자꾸 뭐라고 중얼대며 깊이 모를 신호를 보내 오고
          있습니다.
            부끄러운 고백 한 가지를 해야겠습니다.
            언젠가 저는 수영을 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항상
          운동 부족으로 몸이 찌뿌드드하다는 실제적인 이유가
          있기도 했지만 그보다 제가 어느 날 갑자기 수영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나는 수영을 할 줄 안다'고
          속 깊이 자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수영장에 한 번 가 보자. 가기만 하면 될
          것이니까.....'
            그러나 막상 그 결심을 실행에 옮기는 데는 몇 달이
          걸렸습니다. 그런데다가 겨우 찾아간 수영장에서의
          첫날 저는 아주 심한 창피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도대체 수영을 할 줄 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저의
          몸이 제 말을 영 듣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있는 힘을
          다해 팔 다리를 마구 흔들면 물 위에서 어찌어찌
          앞으로 나아가기는 하는데, 몸은 영 잘 뜨지를 않는
          것이었습니다. '물로 짠 솜이불'을 둘러쓰고 수영하는
          셈이라고나 할까요? 아무튼 그런 상태에서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거의 '악'에 가까웠습니다. 젊은
          수영 선생은 "그렇게 하시면 안된다니까요.
          나아가려고 하시지 마세요. 이쪽에서 발차기부터 다시
          시작하세요!" 하면서 저를 면박 주는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한때 뇌수술 후유증으로 마비된 적이 있는
          저의 왼쪽 다리는 영 움직일 줄을 몰랐으므로 아무리
          젊은 수영 선생의 말대로 해도 제 몸은 옆으로
          기울거나, 비뚤어지곤 하였습니다. 젊고, 아픈 경험이
          없었을 때와는 전혀 이야기가 다른 것이었습니다.
            답답해진 젊은 수영 선생은 큰 소리로 당황한
          저에게 소리쳤습니다.
            "자, 힘을 빼세요, 힘을 빼세요....."
            저는 결국 혼자서 연습을 하는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눈치 채고, 그날 이후로 시간 나는 대로 혼자
          수영장엘 갔습니다. 발차기부터 다시 연습하고, 병든
          물고기처럼 자꾸 뒤집어지려는 몸을 바로 하고,
          수영에 관한 비디오를 사서 보는 등 --- 딴은 무척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떠야겠다'고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제 몸은
          더욱 가라ㅇ는 것이었습니다. 똑바로 가려고 하면
          할수록 제 몸의 방향은 더욱 비뚤어지고, 심지어는
          다시 뒤집어지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는 제 몸이 물 위에 가볍게 뜨는
          순간을 경험했습니다. 어떤 겨울날이었습니다.
          한참이나 물 속에서 버둥거리며 나아가고 있는데,
          갑자기 제 몸에서 '펑'하는 소리가 났습니다.
          그리고는 수면 위로 올라가는 것이었습니다. 조금
          있으니, 한쪽 팔에서 굵은 쇠사슬이 벗겨지는 것 같은
          느낌이 전해 왔습니다. '아, 이렇게 가볍다니.....
          이렇게 자유스럽다니.....' 조금 뒤, 나머지 한쪽
          팔에서도 굵은 쇠사슬이 벗겨졌습니다. 이어 오른쪽
          발목에서도 그 동안 발목을 묶고 있던 무거운 철의
          고리가 벗겨졌습니다. 이어 왼쪽 발목에서도 마찬가지
          느낌이 전해 왔습니다. 저는 마구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아, 이렇게 자유롭다니! 물은
          마치 부드럽고 가벼운 헝겊이 몸에 감기는 것처럼
          감미롭게 느껴졌습니다. 물은 다정하고 다정했습니다.
          거의 달콤했습니다. 그러면서 마치 태평양
          한가운데라도 가고 있는 것 같은 광활한 느낌이
          달려왔습니다. 수영장의 천장에는 작은 불빛밖에
          없었으나, 그 넓은 태평양 바다에서 따뜻하게 태양을
          쬐고 있는 듯한, 그리고 그 태양 밑으론 바람이
          산들거리며 지나가는 듯한 그런 느낌이.....
            물론 그날 이후는 그런 느낌이 아직 다시 찾아오지
          않고 있습니다만, 다시 제 몸은 뒤집어지지 않으려고
          헐떡거리며 물과 싸우고 있습니다만, 저는 '그 순간
          그러하였던 상태'가 제 몸이 완전히 힘을 뺀, 존재의
          가벼운 상태가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눈치 채고
          있습니다. 그러던 것이 이러저러한 일로 오랫동안
          수영을 안 한 탓에 제 속에는 다시 굵은 이 세상의
          쇠사슬들이 모여들어 다시 힘이 들어갔고, 그 힘은
          물에 순간 순간 저항함으로써 다시 잘 뜨지 못하게
          되어 버린 것입니다. '순수했던 겨울날의 그 순간'을
          잃어버린 것이라고나 할는지..... 더구나 '마비'라는
          끔찍한 경험을 간직하고 있는 저의 왼쪽 다리는 더욱
          물을 겁내어 물과 싸워 이기려 하고 있었고.....
            그러니까, 저는 표면상으로는 물을 좋아하며
          사랑하여 받아들이고 있었으나, 보다 속 깊은
          내면으로는 물을 거부하며 혹은 이겨야 할 대상으로
          물에게 늘 싸움을 걸고 있었던 것이라고나 할는지요?
            그렇습니다. 그 동안 저는 전혀 물을 사랑하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므로 저의 온몸을
          결코 주려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제가 주려 하지
          않은 온몸을 물이 받아 주지 않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물을 온몸으로 사랑하지 않는 한 저의
          몸에서는 결코 힘이 빠지지 않을 것이며, 그러므로
          뜨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 잘 알고는 있지만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세상에 대해서도, 세상일에 대해서도
          저는 늘 필요 이상의 힘을 주고 있었습니다.
          속에서부터 거부하고, 또는 불신하고 있었습니다.
            사랑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항상 쟁취하려는
          대상으로, 무엇인가를 얻어야 할 대상으로 여기고
          있었다고나 할는지요?
            타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언제나 이익을
          취하려고 하였습니다. 세상에 순종하는 듯이 보였지만
          결코 사랑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세상과 저 사이,
          타인과 저 사이에는 항상 그 수영장에서와 같은
          불신의 굵은 쇠사슬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을
          중얼거렸지만 진실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은 제 몸의 힘을 전부 빼는 일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주 아주 가벼워져서, 그
          무엇인가로 늘 무거운 자기를 놓아 버리고, 그런 다음
          깊이 깊이 받아들이는 일인 것입니다. 사랑에게 아무
          보상의 요구 없이 자기를 던지는 일인 것입니다.

            오늘 밤 바다와 건너편 섬의 검은 공중에 떠 있는,
          신호 같은, 붉은 불빛들은 저에게 '힘을 빼야 한다네,
          그래서 그대는 가벼워져야 한다네'라고 중얼거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해야 한다네'라고.
            어떤 시인은 사랑할 일밖에 남지 않았다고
          노래했지만, 그렇습니다.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대여, 힘을 빼게, 그래서 가벼워지게. 그래서
          온몸으로 사랑하게, 그러면 그대는 자유롭게 뜰
          것이네, 그대는 존재할 것이네'라고.

            언제나 존재하는 당신께..... 감사합니다.

            5. 그대의 속이 텅 빌 때까지

            이제 내려 놓아라
            어둠은 어둠과 놀게 하여라
            한 물결이 또 한 물결을 내려 놓듯이
            한 슬픔은 어느 날
            또 한 슬픔을 내려 놓듯이

            그대는 추억의 낡은 집
            흩어지는 눈썹들
            지평선에는 가득하구나
            어느 날의 내 젊은 눈썹도 흩어지는구나
            그대, 지금 들고 있는 것 너무 많으니
            길이 길 위에 얹혀 자꾸 펄럭이니
            내려 놓고, 그대여
            텅 비어라
            길이 길과 껴안게 하여라

            저 꽃망울 드디어 꽃으로 피었다

            ---<아침>

            오늘 아침 가만히 바람 속에 서 있으려니 무슨
          말인가가 들려 오는 것 같습니다. 내려 놓아라, 내려
          놓아라.
            바람이 내게 하는 말인지, 내 속에 있는 그 무엇이
          바람에게 하는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한참을 귀 기울여도 그 소리는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점점 더 명확하게 들려 옵니다.
            내려 놓아라, 내려 놓아라.
            ---- 그대의 모든 욕망을
            ---- 그대의 모든 환상을
            내려 놓아라, 내려 놓아라.
            ---- 그대의 이기를
            ---- 그대의 집착을
            그리고 '그대의 속'을 들여다보아라. 그것이 텅 빌
          때까지.
            '그대의 속'이라고 하니까, 지난 겨울에 있었던 일
          하나가 생각납니다. 무슨 일이었냐구요?
            하긴 별난 무슨 '사건' 같은 것은 아니고, 그저
          거울에 관한 이야기 입니다.
            지난 겨울의 끝, 2월도 다 가던 무렵 나는
          거울에의, 아주 강한 갈증 같은 것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렇습니다. 갈증이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또는 우리는 '서로에 대해 너무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불현듯 생각하고 난 후에 이어
          온 갈증, 나는 나를, 우리를 들여다보고 싶어졌던
          것이라고나 할는지요?
            그 갈증의 시초는 바로 당신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서 너무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서로에 대해서 모를 뿐 아니라 내가 나에 대해서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아, 나는 도대체 어떻게
          생겼는가? 이제 이만큼 늙었으니, 늙음의 나는 과연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가. 가령 버스를 탔을 때, 혹은
          지하철을 탔을 때 문득 백 미러라든가 맞은편 창에
          비쳐 오는 '내'가 아닌 '나'의 모습에 부딪칠 때의
          이질감과 당혹감.....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참 무참한 노릇이었습니다. 특히 가장 가까이에
          있다고 생각한 한 사람에 대해서 전혀 모른다는
          생각에 부딪칠 때의 그 무참함을 지난 황당함.
            그런데 나에겐 도대체 거울다운 거울이 없었습니다.
          하나 있다는 것이 어떤 가게에서 물건을 살 때 끼워
          준, 좀 꺼떡거리는 조그만 탁상용 거울이 있었을
          뿐입니다.
            그래서 어떤 인테리어를 하는 분이 벽 한 면을 전부
          거울로 장식하면 집이 넓어 보일 거라고 충고하는
          말에 귀가 번쩍 뜨이기도 하였습니다. 물론 여러 가지
          여건상의 문제 때문에 실천하지는 않았습니다만, 그
          순간에 그것이야말로 내가 나를 볼 수 있는 최대의
          기회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이규보의 옛 글에는 거울에 대한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거사(居士)가 흐린 구린 거울을 매일
          열심히 닦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지나가다가,
          거울이란 원래 사물을 비춰 보는 것인데, 거사께서는
          거울을 보실 생각은 도대체 않으십니까?
            거사는 그저 웃기만 하면서 흐린 거울을 닦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말합니다. "누군가 이 거울을
          깨끗이 닦아 놓은 다음에 비춰 볼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때를 위하여 나는 우선 깨끗이 닦아
          놓아야지요."
            그러고 보니 나는 그 동안 거울을 전혀 닦을 생각을
          하지 않았군요. 그래서 당신을 모를 뿐만 아니라 나에
          대해서도 나 스스로 전혀 모르는군요. 뿐 아니라 나는
          당신을 아주 잘 안다고까지 생각했었군요.
            말하자면 당신의 얼굴이라든가 옷차림의 습관에
          대해서 밥을 먹는 버릇에 대해서, 또는 걸음걸이의
          특징이라든가, 좋아하는 반찬이라든가, 바둑에 관한
          텔레비전 화면이 나오면 나는 다른 채널은 다
          포기해야 한다든가 하는, 아주 사소한, 무수한 생활의
          버릇들 --- 그런 것들에 익숙해 있으므로 별 의심도
          없이 당신을 아주 잘 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의 어느 날의 골목길에 대해서는.....
          나는 도저히 그 골목길로 들어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당신의 꿈의 갈피에 대해서 내가 도대체 무엇을
          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규보식으로 말하자면 전혀 닦지도 않은, 그래서
          일상의 무수한 그림자들만이 얼른 얼른 비춰질 뿐인
          그 거울로 말입니다.

            달은 우리에게 늘 똑같은 한쪽밖에는 보이는 법이
          없다고 한다. 흔히들 짐작하는 것보다는 수가 많은
          어떤 사람들의 삶 또한 그러하다. 우리는 그들 삶의
          가려진 쪽에 대해서는 다만 추리적으로밖에 알지
          못하는 데 정작 중요한 것은 그쪽이다.
            ---쟝 그르니에

            외국에서 오랫동안 공부하고 온 한 친구의
          경험담입니다. 상당히 친했던 서양인 친구가 한 사람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저녁, 한참 서로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갑자기
          그녀의 파란 눈이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지 알 수가
          없어졌다고 했습니다.
            그 순간 그 눈은 그저 파란 유리알로 보여지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연히 그녀는 절망적인 기분에
          빠졌다는 것입니다. 마치 절벽에 마주 선 그런 느낌
          --- 그리고 그 절벽을 향하여 지껄이는 자기의
          목소리를 듣지 않을 수 없었다구요.
            그렇습니까? 당신은 '절벽'입니까? 당신의 옆
          얼굴은 도저히 알 수 없는 것입니까? 우리는 모두
          절벽을 향하여 서로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까?
          진정한 소통이란 불가능한 채. 메아리만을 거두어들여
          메아리의 주고받음만을 실행하면서 살고 있는
          것입니까?
            거기에다 나는 정작 나에 대해서도 모르고
          있으니..... 나에 대해서도, 실은 내가 쳐 놓은
          '환상의 나'만을 알고 있으니..... 그래서 그 환상의
          사슬로써 세상을 재어 보며 자기의 문고리를 달고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진정한 '나'는 누구인지요?
            주민등록증의 번호가 제시하는 '나'와 진정한
          '나'가 일치되지 않을 거라는 사실만은 분명한 '나',
          무엇인가로 가득 가득 채워져 있는 '나', 그 채워진
          것들로 늘 왜곡되고 있는 '나' --- 다 내려 놓아야
          합니다. '나'를 찾아야 합니다. 무엇인가 무겁게
          들고, 무엇엔가에 힘들게 매달려 있는 '나'가
          아니면서 '나'인 '나'를.
            당신에게 편지를 씁니다.
            '나'를 찾아서 '나'에게 편지를 씁니다. '모름'에
          대해서 '모름'의 편지를 씁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있습니다. 그대의 속이 텅 빌 때, 내려
          놓을 수 있는 것들을 전부 내려 놓을 때 그 맑아진
          거울에는 당신과 내가 비치리라는 것을.
            아, 달려가는 길들아, 헤매는 꽃망울들아, 정처
          없는 눈썹들아, 나를 나에게 내려다오, 우리를
          우리에게 내려다오.

            6. 별, 지구 위에서의 행복 자기가 보는 만큼만 보는 그
          대

            ---- 멀리서 바라본 지구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평생토록 잊지 못할 것입니다. 지구는 내 눈앞에
          조용히 떠올랐는데, 새까만 우주 공간을 배경으로,
          마치 푸르고 흰 무늬가 박힌 대리석
          같았어요.(우주인) ----

            그는 숲 속의 호숫가에 생 소나무를 이용한
          아름다운 통나무 집을 짓습니다. 자연을 최고로 맛볼
          수 있도록 생 소나무를 잘라 그대로 집을 지었으므로,
          집안에 들어서면 소나무 향기가 가득합니다. 벽난로를
          만든 돌도 산에서 실어 온 바위를 그대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는 도시에서의 피로를
          이 숲 속의 별장에서 풀도록 한 것이었습니다. 집들이
          파티를 하기 전에 새집을 정돈하려고, 그는 부인보다
          먼저 와서 집을 치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소위
          성공한 베스트셀러 작가입니다. 소나무 향기를 맡으며
          하루종일 글을 쓸 생각을 하니 그는 너무 기분이 좋아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새로 사 온 술병을
          놓으려고 찬장을 여니 소나무 향기와 함께 곰팡이가
          와락 쏟아지는 것이었습니다. 곰팡이들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생 소나무 선반 위를 슬금슬금 기어가고
          있었습니다. 테라스에서 자신이 산의 소나무를 잘라
          만든 선착장을 바라보니, 그것도 곰팡이로 기괴한
          벽들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제 보이는 것은 전부
          곰팡이투성이였습니다. 거실 바닥도, 부엌의 벽도,
          냉장고의 뒤쪽도, 소나무의 까실한 감촉이 즐겁기만
          했던 계단도. ..... 그는 그 축축하게 미끌거리는,
          기어가듯 퍼져 가고 있는 곰팡이들을 떼내다 못해
          불을 지르고 맙니다. 오만 달러나 들인 아름다운
          통나무집에. 곰팡이들의 젖은 살 타는 냄새를 뒤로
          하며 그는 도시의 아내에게로 돌아옵니다. "살아
          있는, 젖은 소나무를 그대로 쓰자고 한 건 당신의
          아이디어 아냐?" 그는 거의 미쳐 아내에게
          키스합니다. 그런데 아내의 하얀 가슴에는 등유빛의
          곰팡이가 마치 브래지어처럼 자라고 있었습니다.

            <히치콕 서스펜스 걸작선> 중의 <숲 속의
          오두막>이라는 단편의 줄거리입니다.
            당신이 이미 읽었을지도 모를 이 소설의 줄거리를
          다소 길다 싶게 이야기하는 것은 그 설정이 꽤
          재미있기 때문입니다.
            숲 속의 오두막 --- 그것도 살아 있는, 젖은
          소나무로 지은, 그래서 소나무의 향기가 그대로 묻어
          있는 통나무집....., 통속 베스트셀러 작가인 덕에,
          돈 걱정은 전혀 없이 건축가에게 "열쇠만 돌리면 모든
          게 해결되도록 해 주세요!" 하고 말하는 주인공의
          대사도 인상적입니다. 도시에서의 탈출을 꿈꾸는
          대목도 그러하고, 그러나 징그러운 곰팡이가 한 번
          눈에 보이기 시작하자, 온갖 곳에 그 곰팡이가
          자라나는 것도 그러하고, 그래서 환상과 현실이
          구분되지 않는 장면들 --- 결국 불을 질러 버리는
          결말(소설 끝 부분의 표현은 주인공이 아내의
          가슴에도 불을 질렀으리라는 추측을 하게 합니다.)
          --- 은 추리 소설의 맛을 더해 줍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추리 소설의 재미는,
          앞에서도 잠깐 언급하였지만, 환상과 현실의 구분이
          없어지는, 이야기의 그 전개에 있을 것입니다. 물론
          그런 전개를 이루어 주는 것은 주인공의 '눈'입니다.
          그 눈은 '환상과 현실'을 구분 못 하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인간은 자기가 보는 만큼만
          본다' --- 나아가서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
          명제를 아주 잘 실천하는 주인공을 보여 준다고나
          할까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자기가 보는 만큼만
          보는' 것입니다. 그 범위 속에 만약 곰팡이가 있다면
          곰팡이만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환상은 현실이 되어 버리고, 어느 날의
          우리의 슬픔, 또는 절망은 최고 최대의 것으로
          확장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슬픔은 최상의 슬픔입니다(다만 그곳은
          자기의 창이 있는 곳이라는 생각은 못 한 채).
            자기의 절망은 최상의 절망입니다(절망이어야
          합니다. --- 결론은 죽음밖에 있을 수 없는).
            그래서 결국은 '자기가 서 있는 곳이 가장 높은 곳
          또는 가장 밑바닥'이라는 감정의 늪에 빠져 버리는
          것입니다.
            한때, 저는 자살을 실천한 적이 있었습니다. 숨을
          멈춰도 보았습니다. 내가 얼마나 숨을 오래 멈출 수
          있는가를 보기도 할 겸, 이 지긋지긋한 세상과의
          연결을 단절하려면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한가도
          실험할 겸, 물론 얼마 참지 못하고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말긴 했었습니다만, --- 말하자면 '늪'에 빠진
          순간 내게 일어난 일들이었다고 할까요? 나의 오만이
          '늪'을 가리키고 있었다고나 할까요? 내 '눈'은 그 늪
          속에서 늪의 끝만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 후에도 가끔
          그런 유혹을 받았습니다만, 저는 제 '눈'이 얼마나
          작은 것밖에 못보는가를 알고 있기에 돌아서 버리곤
          했습니다.
            아, 당신과 저의 창을 조금만 다른 쪽으로 연다면?
            아, 당신과 저의 창을 조금만 더 넓게 연다면?

            저는 가끔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면, 그전에 살던
          높은 언덕 위에 있는 아파트를 지나오게 되곤 하는데,
          차가 그곳에 이르면 버릇처럼 내가 살던 집의 베란다
          창을 찾곤 합니다. 내가 몇 년 동안 살았던 그곳은
          산꼭대기에 겨우 붙어서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멀리 길 위에서 보니 그렇게 작을 수가
          없습니다. 창틀은 흰색으로 칠해져 있어서 늘 그것을
          청소해야지, 하고 벼르곤 했었는데, 길 위에서 보니
          그것은 벽 속에 파묻혀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유리창이 잘 닦였는지, 안 닦였는지도 물론 분간되지
          않았습니다. 그보다 그 순간 나를 놀라게 하는 것은
          내 창 옆에는 무수한 다른 창들이 또 보인다는
          것입니다. 무수한 다른 창들도 나의 창과 똑같이
          흰색의 창틀도 보이지 않은 채 누르스름한 벽에
          안겨서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저는 늘
          아파트로 올라가는 언덕을 허덕이며 오르면서, 그
          아파트야말로 굉장히 높으며 그래서 바람도 거기서는
          창들에 부딪쳐 '귀신 우는 소리'를 내며 심하게
          분다고 불평하곤 했었는데, 그건 그저 다른 집들보다
          좀 큰 키로 서 있을 뿐인 것입니다.
            "지금은 누구인가 다른 이가 거기서 이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겠지. 아랫동네의 집집마다 옥상에 얹혀
          있는 물통들과 햇빛에 하얗게 펄럭이는 빨래가
          인상적인 그 창에서..... 도시에 어둠이 오면 마치
          꽃들처럼, 나른히, 허공에 창백한 웃음기마저 날리며
          점점이 켜지는 불빛들도 보겠지..... 안녕, 그대여."
            나는 차 속에서 그 아파트의 베란다 창에게
          인사합니다. 그러니까 그 아파트는 내가 몇 년간
          세상을 내다본 나의 눈인 셈입니다. 내가 보고 싶은
          것만을 보게 했던, 자그만 나의 눈, 말하자면 새
          구두를 산 날은 거리에 나서면 온통 사람들이 신고
          가는 구두만 보이는 나의 창, 내가 본 세상은 사실
          세상의 반쯤도 못 되는, '그' 지점에서 내다보는 반경
          몇 킬로미터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멀리서 바라본 지구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평생토록 잊지 못할 것입니다. 지구는 내 눈앞에
          조용히 떠올랐는데 새까만 우주 공간을 배경으로,
          마치 푸르고 흰 무늬가 박힌 대리석 같았어요."
            우주인의 회상을 다시 한 번 중얼거려 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터를 하나의 별로서 바라볼 수
          있었던 사람, 수많은 강과 산들과 삼 십 몇 억의
          인간들이 생략된 거리에서, 다만 '푸르고 흰 무늬가
          박힌 대리석'으로 우리의 '잠자리'들을 향해 자기의
          창을 열어 본 사람..... 우리도 이 아름다운 별인
          지구에서 자기가 보는 만큼만 보는 것이 우리의
          '눈'임을 잊지 않으며 해 뜨는 매일을 향해 창들을
          정성스레 연다면, 글쎄, 좀더 행복하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7. 너무 작으므로 너무 큰 눈물 한 방울

            밤길을 헤치며
            누가 이리로 오고 있습니다.
            허덕허덕 그이
            언덕을 오르고 있습니다.

            바람 속에서 바람의 범벅이 되어
            어둠 속에서 어둠의 범벅이 되어

            길이 없어졌습니다.
            지쳐 누운 언덕이
            보이지 않는 별들을 잡아당깁니다.

            풀잎들이 몸부림칩니다.
            그림자들이 흐리게 울부짖습니다.

            나, 그이를 기다립니다.
            바람 속에서 바람이 범벅이 되며
            어둠 속에서 어둠의 범벅이 되며
            .....

            ---<벽속의 편지 -- 언덕>

            새벽부터 빗방울이 떨어지더니, 하루종일을 흐르고
          지금은 바람까지 몹시 붑니다. 바람 부는 소리가 마치
          어떤 사람의 낮은 흐느낌처럼 우웅우웅 담벼락에,
          길에, 혹은 어느 집 창틀에 부딪치고 있습니다.
            하긴 그렇게 차갑게 느껴지는 바람은 아닙니다만,
          오늘따라 저 바람은 어느 곳을 거쳐 왔을까, 새삼
          가슴 흔들어 생각케 합니다.
            아픈 허리를 끌고 언덕 위에 나가 서 봅니다.
          눈앞에 펼쳐진 길이 오늘따라 무척 우울해 보입니다.
            ---- 누가 이리로 오고 있습니다.
            바람 속에서 바람의 범벅이 되어 ----
            날이 잔뜩 흐린 탓인지, 길 위로 걸어가는 몇
          사람의 좀 웅숭그린 모습이 눈에 들어옵니다. 한
          사람은 여기서 보기에 할머니 같고, 또 한 사람은
          아주 젊은 아가씨인 것 같습니다. 바람에 자꾸
          날리려는 긴 머리카락을 꼭 붙잡고 있습니다. 가슴을
          숙인 한 남자도 걸어가는 것이 보입니다.
            ---- 누가 이리로.....
            바람 속에서 바람의 범벅이 되어 ----
            그런데 그 사람들의 모습은 지금 무척 추워
          보입니다. 제가끔 무엇인가 긴 상처를 안고 가는
          모습들입니다.
            그 사람들이 웅크리고 걸어가는 길이 뭐랄까, 마치
          발발 떨기라도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 사람들이
          제각기 안고 있는 상처의 무게를 지탱하느라 잔뜩
          용을 쓰고 있는 모습이라고나 할는지요. 항상
          어디인가로, 마치 결론을 향하여 달리려는 자세로
          거기 펼쳐져 있는 길, 그러나 오늘 길은 자기를
          내리누르는 상처들의 무게 밑에서 퍼덕이고 있는
          것같이 보입니다.
            ----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한숨이 저 길 위에
          얹혔으랴..... 그래서 군데 군데가 움푹 들어가기도
          하고, 혹은 검은 그림자를 덧기운 듯 늘어뜨리고
          있기도 한 길.
            그런 생각들을 돌리고 있으려니 바람이 휙 불어오며
          무슨 말인가를 내게 하는 것 같습니다. 그 들리지
          않는 말꼬리를 잡아 봅니다.
            ---- 내려 놓아라, 내려 놓아라.
            ---- 내려 놓아라.
            ---- 그대의 상처도 내려 놓고....., 부질 없는
          꿈들도 내려 놓고....., 가능하면 텅 비어라.....,
          그리고 감사, 감사하라.....
            참 그렇습니다. 우리의 상처들이란 따지고 따져
          보면 우리의 환상이 만든 것이기 쉽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환상이란 실은 우리의 욕망들이 보이지 않게
          고여 만들어진 것들, 꿈이란 것도 그 속을 깊이
          들여다보면 우리 스스로 만든 환상이기 쉬운 것
          아닌지요?
            꽤 오랫동안 ㅇ혀지지 않는 한 영화의 끝 장면에
          이런 것이 있었습니다. 고문에 지친 주인공이,
          모르핀을 맞고 빠져 들어간 환상 속에서 한 아름다운
          남국의 섬으로 갑니다. 거기에는 지극히 아름다운,
          전설의 한 여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름다운 여인은 제 몸에서 뽑은 거미줄로 스스로를
          칭칭 묶고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모래밭에 밀려와
          쓰러져 누운 주인공에게 키스하면서 눈물 한 방울을
          떨어뜨립니다. 마치 우리가 스스로 엮은 환상의 은빛
          거미줄에 묶여 가끔씩 남몰래 혼자 우는 것처럼. ----
          그런 모든 눈물을 대표하기라도 하듯이.

            누군가..... 울고 있네
            그 눈물이 현관을 두드려
            문을 열어 주네
            눈물은 마루로 올라와
            이윽고 방으로
            내 이불 속에 들어와 눕네

            가만가만 물어 보네
            눈물 한 방울은 너무 큰 것인가
            아니면 너무 작은
            것인가, 고.

            그런데 오늘 저는 어느 순간엔가부터 허리를
          꼼짝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허리를 구부릴 수도, 펼
          수도 없는 것은 물론 옆으로 돌릴수도, 의자에 앉을
          수도, 겨우 어찌 어찌 해서 앉았다 싶으면 일어설
          수가 없어 허둥대게 되었습니다.
            할 수 없이 학생들의 충고를 받아들여 남은 한
          시간의 강의를 휴강하고 집으로 왔습니다. 겨우 겨우
          현관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왔으나 컵에 물을 따를
          수도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무엇을 먹어야겠다고
          생각했으나 허리를 구부릴 수도 없으니 냉장고를 열어
          무엇인가를 끄집어내는 일도 불가능해져 버려, 할 수
          없이 멍하니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된 사태와
          나에게 미움의 스트레스를 준 사람들을 떠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하나의 미움은 또 하나의 더한
          미움을 끌어들이고, 이윽고는 분노까지 몰고 와
          부엌에 멍하니 선 채 나는 혼자 마구 화를
          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나에게 분노를 준 사람들이
          그렇게 많을 줄이야..... 어떤 이는 넓적한 얼굴에
          부릅뜬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고, 어떤 이는
          흐트러진 머리칼을 한 채 입가에 비웃음을 한껏
          흘리면서 나를 흘겨보고 있었고, 어떤 이는
          누르스름한 옷자락을 날리며 나에게서 마아악 등을
          돌리고 있었고..... 그 딱딱한 등뒤에서 회오리 바람
          같은 것이 일고 있었고.....
            허리는 점점 더 아파 왔습니다. 서 있을 수도, 앉아
          있을 수도, 누울 수도 없는 묘한 상태가
          지속되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하긴 꼭 그때라고
          말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 왜냐하면 너무
          아팠으므로 나는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고
          있었으니까요 ---- 레인지 위에 올려 놓은 어떤
          크리넥스 통의 선전 문구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거기에는 굵은, 장식도 없는, 검은 색 활자로 '대단히
          감사합니다. ()()()주유소'라고 씌어 있었습니다.
          거기 올려 놓은 지 한 달도 넘은 것이었습니다.
            나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것을 보는 순간 나는 그
          동안 내가 나의 몸에 대해, 그러니까 나의 몸이
          그래도 똑바로, 그리고 별탈 없이 잘 움직여 주는
          것에 대해 별로 감사하지 않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 유치할 정도의 노란 색
          크리넥스 통은 흐린 불빛 속에서 나를 하염없이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나는 아프기 이전의 내 허리를
          생각하면서 '그땐 참 고마웠구나'하고 나도 모르게
          입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 그러자 많은 소소한 것들에의 감사가 나의
          입에서 새어 나왔습니다. 조금 아까까지 분노와
          미움에 가슴 떨었던 사람들에 대해 좀 쑥스러운
          일이었지만, 감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동안의
          일들을 중얼거리기까지 하며 말입니다. 한 사람에게
          감사하니 또 한 사람이 내 감사의 지평 위에
          떠올랐습니다. 흐린 불빛 아래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떠다니며 나를 보고 웃고 있었습니다. 한참
          그렇게 중얼거리다 허리를 펴 보니 좀 나아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아니 분명히 나아졌습니다.
            ---- 내려 놓아라, 내려 놓아라, 그대여.
            창 밖의 어둠이 나를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 감사하고 감사하라, 그리고 비워라.
            나는 이제 좀 구부러지는 나의 왼쪽 허벅지에
          감사했습니다. 왼쪽 팔에 감사했습니다. 허리에
          감사했습니다. ㄱ씨에게 감사했습니다. ㄴ양에게
          감사했습니다. 허리의 아픔을 마룻바닥에 내려
          놓았습니다. 다리의 아픔도 거기 내려 놓았습니다.
          나의 머리에 감사했습니다. 가끔씩 작은 경련을
          일으키긴 하지만 그래도 내가 사는 데 큰 지장을
          주지는 않는 그것, 아니 오히려 나의 처지를 깨닫게
          하고 고통의 힘을 얻게 하는 그것, 그것에게
          감사했습니다. 가슴 속의 많은 것들도 거기 내려
          놓았습니다. ---- 고통스러우므로 아름다운,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여 ---- 바람 속에서 바람의 범벅이
          되는 모든 이들이여 ---- 너무 작으므로 너무 큰 이
          세상의 모든 눈물 한 방울들이여 ----.
            어둠 속을 이리저리 둘러보니 '난'화분의 꽃이 그
          동안 더 활짝 열려서 나를 맞아 줍니다. 스프레이를
          해 주며 꽃을 들여다봅니다. 그런데 꽃 속을
          들여다보다가 나는 그 속이 그렇게 텅 비어 있음에
          깜짝 놀랐습니다. 엷은 미색의 꽃잎으로 가리워진 그
          작은 공간 속에는 꽃 수술 이외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나는 늘 꽃 속에는 무언가 가득하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세상의 아무것도 따를 수 없는
          화려함, 어떤 비밀의 기술, 환상, 뭐 그런 것들로,
          .....그런 꽃 속이 이렇게 텅비어 있다니. 그러자 또
          꽃의 말이 들리는 것 같습니다.
            ---- 내려 놓아라, 내려 놓아라.
            ---- 그대여 감사하라, 텅 비어라.
            그렇습니다. 꽃 속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무엇인가 있다고 생각한 것은 나의 꿈이었을, 아니
          희망이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 텅 비어
          있길래 세상을 안으려면 안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挻 稙以爲器 當基無 有器之用(아름답게 조각을
          새기며 진흙으로 그릇을 빚으나, 정작 그 쓰이는 곳은
          그릇 속의 텅 빈 공간이라는 뜻)
            텅 비어 있길래 꽃, 그것은 햇빛을 안아들이고,
          물을 안아들이며, 그런 다음 세상에 자기를 완전히
          내려 놓는 것입니다. 생명 지속에의 약속을 말없이
          지키는 그릇이 되어, 그리고 감사히 땅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누가 이리로 자꾸 오고 있습니다. ---- 바람 속에서
          바람의 범벅이 되어 ---- 너무나 작아서 너무나 큰
          눈물 한 방울을 이 세상에 덧입히며.....
            감사합니다. 당신에게.

            8. 그노래

            어떤 노래 속에는 실밥 같은 것이 들어 있습니다.
          어디서 문득 들려 오는 노랫소리, 잠시 걸음을
          멈추고,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나는 그 노랫소리를
          듣습니다. .....아아, 그 노래가 들려 옵니다. 그
          노래가 나를 끌고 갑니다. 그때의 장소로, 그때의
          온기로, 그때의 햇빛으로..... 차이코프스키의 서곡일
          때도 있고, 송창식의 구수하게 흐늘거리는 가요일
          때도 있고, 테너 박인수의 깔끔한 가곡일 때도 있고,
          브람스, 드보르자크일 때도 있습니다. 마치 실밥들이
          가만히 옷 솔기 밑에 숨어 있다가 슬슬 풀려지며 옷
          솔기를 헤집어 나오듯이, 그 실에 딸려 시간들이 걸어
          나옵니다. 시간들은 노래 밑에 숨죽이고 엎드려
          있다가 마지못한 듯 움짓움짓 기어 나옵니다.....
          그때의 그 일을 만납니다. 그때의 그 사람을
          만납니다. 그때의 그 삶에 빠집니다. 그때의 그
          분노에 빠집니다. 거기 빠져 잠시 허우적댑니다.
          시간들이 그렇게 실처럼 보이다니요!..... 실의
          한끝에는 어떤 거리의 모습이 얹혀져 있습니다. 아니
          어떤 의자의 때에 전 모습이 얹혀져 있습니다. 그
          한구석에서 아, 내가 웃고 있습니다. 또는 눈물을
          떨구고 있습니다. 또는 고개를 숙이고 있습니다. 나는
          안타까운 심정이 되어 그 실을 잡아당겨 봅니다. 나의
          얼굴이 우수수 흩어집니다. 내 옆에 있는 어떤 모습도
          술술 흩어집니다. 아침에 잠이 깨어 지난밤 꿈을
          잡으려고 애쓸 때처럼. 애쓸수록 달아나 버리는 꿈,
          잡으려 할수록 멀리 자꾸 가 버리는 그것처럼.
            노래가 끝났습니다. 노래의 살[肉]에 묻어 끌려
          나오던 실이 그만 멈춰 버렸습니다. 그 노래, 그것은
          아마도 나의 비밀입니다. 어느 순간엔가 나를 살게
          하는 이유가 되는 그것, 우리에게 비밀이 있다는 것은
          고마운 일입니다. 누군가 비밀이 있다는 것은 재산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했습니까? 어쩌면 인생의
          저금통과 같은 것, 아마 그 저금들 중에 가장
          값나가는, 그러면서도 감쪽같이 아무도 모를 수 있는
          보석은 '어떤 노래'일 것입니다. 비밀이 있는 나는
          그러기에 가끔씩 즐겁습니다.
            나는 그 비밀을 만지작거립니다. 허공에서 허공으로
          달아나는 형체 없는 그것의 순간의 반짝거림,
          은수저처럼 아마도 꿈이 되어 내 밥상의 한켠에
          언제나 있을 그것.....
            노래가 끝났습니다. 어두워지는 저녁 무렵의 재빨리
          넘어가 버리는 그 저녁빛을 우리가 어쩔 수
          없듯이..... 그러나 노을은 세상의 어느 곳에선가
          오래오래 산 너머를 붉혀 주고 있을 것처럼.....
          노래는 사라지면서 잔음(殘音)을 남겨 줍니다. 잔음이
          허공 중에서 소리없이 떠돌고 있습니다. 아마 다음의
          노래가 들려 올 때까지 그것은 마음의 허공을 떠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 사실 한 소절 이상은 필요없습니다. 두
          소절의 노래가 필요치 않은 것입니다. 한 소절이면
          충분합니다.
            그때 나는 한 소절의 음악만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아침이나 저녁이나 브람스의 바이올린
          콘체르토를 듣고 있었던 때, 그 저음과 고음의 두
          바이올린 선율을 바람 소리 속에 섞어 들으면서
          얼마나 깊은 위안에 빠졌었던지..... 내 살이
          부드럽게 쓰다듬어지는 듯한 느낌에 빠지곤
          했었습니다. 그 위안의 대답은 언제나 한줄기의
          눈물로 끝나곤 했었지만. '별표 천일전축'이 내
          유일한 재산일 때의 이야기니까, 참 옛날 일입니다.
            그러다 그 전축을 도둑맞았습니다. 그 뒤로 아직껏
          전축을 사지 않고 있습니다만, 그 대신 라디오를 사서
          카세트 테이프를 열심히 듣곤 했습니다. 언젠가 ----
          그러니까 낯선 도시에서 하숙을 하고 있던 시절 ----
          거의 매일 틀어 놓고 있었던 테이프는 드보르자크의
          <신세계 교향곡> 중 2악장이었습니다. 살던 곳을 떠나
          온 나로서는 그것의 선율이 그렇게 위안이 될 수가
          없었습니다. 위안의 마지막 대답은 언제나 한줄기의
          눈물이었구요. 잘 때도 그 부분을 결코 끄지 않았던
          생각이 납니다.
            그러다 보니 그 후 레코드를 무슨 선물로 받을 때가
          여러 번 있었으나 턴테이블이 없으므로 친구에게 주어
          버리곤 했습니다. 그러면서 '꿈을 꾸는 게' 더
          아름답다는 생각을 버릇처럼 했습니다. '저 레코드
          속에는 미지의 아름다운 노래가 있으리라.....'는 꿈.
          언젠가는 내 시를 가곡으로 만들었다고 레코드가
          부쳐져 왔으나 듣지 못한 채 연구실 책꽃이 위에 세워
          놓았었는데 어떤 방송국에서 와서 가져가 버렸습니다.
          언제나 아름다우리라는 희망만 남긴 채. 그래서
          고마웠습니다. 노래가 된 그 나의 시에 실망하지
          않아도 되었으니까요.
            우리 집 벽에 세워져 있는 레코드 중에는 어떤 예쁜
          여학생들이 가져온 외국 가수의 것도 있습니다.
          누구인가 "참 좋은 가수의 것을 가지고 계십니다"라고
          말하며, 노래의 내용 등을 설명할 때까지 저는 그
          가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설명 덕분에 그 레코드는 이제 더욱 풍부해진 소리를,
          벽에 세워져 있는 채 나에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그
          '노래'는 꿈입니다. 그저 한 소절의 '꿈'입니다. ----
          추억과 희망이 술술 풀어져 나오는.

            나는 한때 합창단원이었지
            노을 지는 저녁 창가에서
            마티니의 '사랑의 기쁨'을 배웠지
            실은 사랑의 슬픔을 표현해야 한다는
            그 가락의 기쁨을 힘써 외우며
            노을 속에 내 목소리가 떨어져
            검은 피아노를 울리는 것을
            가슴 흔들어 들었지
            내 꿈이 노을의 붉은 눈을 지나
            지붕 너머로 달리는 것을
            보았지, 아, 캄캄한 눈썹으로도 보았지

            그러나 한 30년 간
            나는 노래를 부르지 않았어
            그 동안 나는
            내 목소리를 잠재웠지

            지금 내 목소리는
            비명밖에 지르지 못하네
            혹은 혼자 중얼거릴 뿐
            혹은 네, 네, 낮게 낮게 복종할 뿐
            사랑의 슬픔에 젖어 흘러
            짧은 저녁 노을 붉은 속에.

            ---<사랑의 기쁨>

            그 찻집에 들어섰을 때 찻집엔 한 사람의 손님도
          없었습니다. 찻집 주인으로 보이는 한 여인이
          테이블에 앉아 있다가 우리가 들어서자 반색을 하며
          일어섰습니다. 우리는 창가 자리로 갔습니다. 햇빛이
          조용히 흘러 들고 있었습니다.
            반색을 하며 일어선 주인 여자는 틀어올린 머리를
          하고 있었는데 귀밑 머리칼이 몇 올 흘러내리고 있는
          것이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긴 검은 스커트에 붉은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는데 그 블라우스의 색깔이
          햇빛과 함께 그 방에 무척 환하게 어울리고
          있었습니다. 한적한 소도시의 찻집으로 장식도 별로
          없이 삐걱거리는 계단이 인상적이었던 그 집, 차를 한
          잔씩 시키고 앉아 있으려니 노래 하나가 햇빛을
          헤치며 흘러나왔습니다. 무심히 듣고 있으려니 그
          노래의 한 소절이 나의 핏줄 속으로 슬슬 스며들어
          왔습니다. "..... 나는 너를 알고 있어. 그때 너와
          나는 만났었잖아....." 노래는 몇 올의 햇빛이
          서성이고 있는 나의 앞에 와서 머뭇거리며
          속삭였습니다. "아, 그렇군, 나는 너를 알고 있어,
          그렇고 말고, 분명히 알고 있지....." <I who have
          nothing>, 그렇습니다. 나는 그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언젠가 내 속을 건드렸던 그것입니다.
          시간의 실이 슬슬 풀어졌습니다. '그때'의 찻집으로
          나는 미끄러져 들어갔습니다. 앞에서 서성거리던
          햇빛이 슬며시 어두워지면서, 몇 사람의 얼굴이
          허공에 둥둥 뜨듯이 나타났습니다.

            아주 흐린 어떤 날이었죠. 하늘은 적당하게
          가라앉아 있었고, 금방 비라도 올 것처럼 공기는
          희뿌옇어요. 뭐랄까, 인상파 화가의 그림에 나오는
          것처럼 적당히 낮은 그림들, 그 속에서 사람들은 꼭
          유영한다거나, 아무튼 슬로 비디오처럼 천천히
          움직이는 것 같았어요. 어떤 미국 가수의 절규하는
          듯한 노래가 흐르고 있었죠. 서글픈 바깥에서
          들어섰기 때문인지 찻집 안은 무척 따스하고 안온해
          보였습니다. 우리는 실내 장식으로 놓아 둔 커다란
          나무 화분 옆에 앉았었습니다. 차를 시켰어요. 나는
          약속 장소에서 한참이나 기다렸던 탓에 좀 지쳐
          있었고 그래서 그때 찻집에 울려 퍼지는 절규하는
          듯한 노래에 상당히 공감을 느끼고 있었어요. 아마
          그때 당신은 열심히 무슨 변명인가를 늘어놓았던 것
          같아요. 그런 이야기들을 들으며 기분을 풀고 있는데,
          차가 날라져 왔고 나는 아주 기분이 많이 풀려서 차를
          마시고 있었어요. 화분의 나뭇잎은 검고 큰 그림자를
          우리의 탁자 위에 던지고 있었어요. 나뭇잎의
          그림자를 보면서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다가 나는
          맞은편에서 나를 열심히 쳐다보는 한 눈과
          부딪혔어요. 외국인이었어요. 아주 젊은, 이마가
          인상적인 젊은이였어요. 그는 내가 쳐자보자 시선을
          돌렸죠. 그러나 다시 내 쪽을 쳐다보았어요. 나는
          시선을 돌렸어요. 상당히 뜨거운 목소리의 노래가
          흐르고 있었어요. 뜨겁다는 것은 아주 격렬한,
          그러니까 아주 호소력이 강한 노래라는 뜻이죠. <I
          who have nothing>이라는 팝송이었어요. 나는 그
          노래가 나를 위하여 작곡된 노래인 듯한 착각마저 그
          순간 느꼈어요. 그 노래의 주인공처럼 나도 말하자면
          한 푼도 없는 가난뱅이였으니까요. 굵은 저음의 그
          목소리는 바로 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고나
          할까요. 더구나 그 찻집의 따뜻하지만 좀 스산한
          분위기(손님이 그렇게 없었습니다)와 검은 나뭇잎의
          그림자는 나를 좀 감상적으로 만들고 있었죠.
            그런데 어느 순간 나는 옆에서 아무 이야기도 들려
          오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나는 옆을 얼른
          보았죠. 그런데 옆을 보았을 때 당신은 잠이 들어
          있었어요. 놀라서 고개를 휙 돌려 앞을 보려니 그
          미국인 젊은이가 다시 나를 빤히 보고 있는 게
          아닙니까. 나는 그제야 그 이유를 알았습니다. 그
          미국인 젊은이는 나에게 이야기해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옆의 사람이 잠들었다구요. 나는 뭐랄까,
          심한 모욕감을 느꼈습니다. 시간을 어겨 놓고, 이제
          와서는 잠까지 들어 버리다니..... 나는 살짝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찻집 문을 나와
          버렸죠. 그 미국 가수의 흐느끼는 듯한 노래가 마악
          끝나고 있었어요. 나는 더욱 쓸쓸한 기분이 되었어요.
            바깥은 여전히 흐린 하늘이 가득 날개를 펴고
          있었습니다. 바람은 낮게 불고 있었고..... 나는
          집까지 걷기로 했었죠. 빨리 가야 할 이유가 없기도
          했지만, 순간 너무 속이 상했기 때문이었죠. '사람을
          옆에 놓고 잠을 자다니.....!' 나는 종로에서 우리
          집이 있는 혜화동까지 걸었어요. 마악 서울 의대를
          빠져 나오려는데 당신이 그 의대 뒷문에 서 있었죠.
          숨을 헐떡거리면서.
            "깨어 보니까 아무도 없잖아..... 그냥 가 버리면
          어떻게 해,..... 벌써 집에 들어갔으면 어쩌나 하고
          뒤쫓아 왔지..... 너무 기분이 좋아서 잠이 들어
          버렸어....."
            나는 화를 낼 수도 없었죠. 헐레벌떡하는 곁에서
          말이죠..... 할 수 없이 마음을 푸는 척하였지만
          그날의 일은 영 잊을 수 없습니다. 그날의 흐린
          하늘도, 흐린 거리도, 흐린 나무들도, 낮게 불던
          바람도.....

            노래는 또 끝났습니다. '그때'의 젊음으로 나를 못
          견디게 하면서, 쓰잘 데 없는 일에 벌컥벌컥 화를
          내곤 하던..... 그 젊음의 피.....
            그렇습니다. 한 사람에게 꿈은 그렇게 여러 개일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면 됩니다. 추억들은 시간의 저
          밑 하나의 층계를 걷고 있을 것이므로. 우리의 비밀도
          그것들을 따라 시간의 저 반짝이는 살 밑 한켠에 살고
          있을 것이므로.
            그리고 아마..... 그 비밀의 저금통에서 희망들도
          ..... 하나 둘 셋 ..... 걸어오지 않겠습니까. 들을
          수 없는 레코드에서 들려 오는 노랫 소리처럼, 소리
          없이.

            9. 마음 속에 한 마리 새가 있다네

            복쪽 바다에 물고기가 있으니 그 이름을 곤(鯤)이라
          하는데 크기가 몇 천 리인지 모른다. 그것이 변해서
          새가 되는데 그 이름을 붕(鵬)이라 한다. 그 붕의
          등덜미는 몇 천 리가 되는지 모르는데, 그 놈이 한번
          기운을 떨쳐 날면 날개가 마치 하늘에 드리는 구름과
          같다. 붕새는 바다 기운이 한번 크게 움직일 때에
          남쪽 바다로 옮겨 가려고 하는데 남쪽 바다는 곧
          천지(天地)다.....

            <장자(莊子)>의 <소요유(逍遙遊)>편 첫머리에
          나오는 글입니다. 중국 사람의 상상력, 대단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크기가 몇 천 리가 되는 물고기,
          그것이 변해서 되는 새, 그것이 날아가는 천지.....
          그런데 그 새의 날아감에 대하여, 장자는 또 한 번의
          대륙적 상상력을 날립니다.

            .....바람이 쌓인 부피가 두텁지 못하면 저 큰
          붕새의 날개를 날리기에 힘이 없을 것이다. 구만 리쯤
          올라가면 바람이 그 밑에 쌓일 것이니, 그런 뒤에야
          바람을 타고 푸른 하늘을 등에 지고 나는데 아무것도
          그것을 막거나 꺾지 못할 것이다.....

            바람결의 매무새가 어딘가 달라졌습니다. 좀
          으스스한 것 같아서 소매가 긴 블라우스를 꺼내 입고
          하루종일 열어 두었던 뒷베란다 창문을 닫으려다가
          나는 그만 아 ---- 하는 짧은 탄성을 지르고
          말았습니다. 어느 새 둥그렇게 제 얼굴을 만들어 가는
          달이, 어두워져서 거의 검고 깊은 청색으로 보이는
          초저녁 하늘에 떠 있었습니다. 달의 얼굴은 점점 짙어
          오는 어둡고 깊은, 푸른 빛의 밤하늘에 비쳐 더욱
          창백해 보이는 은빛이었습니다. 그 창백한 은빛으로
          달은 가만히 웃고 있었습니다. 어느 시인이 '입술을
          깨물고 있는 달'이라는 표현을 쓴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만, 그런 얼굴로 달은 웃음의 입술을 열고
          있었습니다. 멍하니 달을 쳐다보고 있으려니, 그 달의
          얼굴에서 역시 은빛의 바람 한결이 불어 옵니다.
            뒷산의 나무들은 어둠 속에서 더욱 낮게 엎드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나무들은 저희끼리 엎드려
          무어라고 수군거리고 있습니다. 나는 은빛 달이 우리
          집 창으로 내려 주는 바람의 팔을 만지기라도 하듯 창
          앞에 붙어 서서 서성거립니다.
            '내 이 팔 속에도 붕새가 있다네, 날개가 구만 리
          같은.....'
            나는 달에서 내려온 바람에게 떠들어 주고라도 싶은
          심정에 빠집니다.
            '정말이지, 정말이고말고, 내 이 가슴속에도 크기가
          몇 천 리도 넘는 새 한 마리가 있다네, 아마 날개
          빛깔은 붉은 빛깔일 거야, 너무 커서, 하긴 내 가슴이
          그것을 잘 안을 수도 없지, 그런데 나는 그 새 이름이
          무언지 몰라, ---- 다만 그대 같은 바람결이 아직
          없어, 아직 내 새의 날개를 날리기에는 바람의 키가
          너무 작다고나 해야 할는지..... 날개를 날릴 힘이
          없어. 아, 나도 구만 리쯤 저 놓은 곳으로 올라가면
          내 살 밑에 쌓인 바람의 키로 내 새를 날릴 수
          있을까.....'

            언젠가 신문 한구석에서 월급날이면 새를 사서는
          그것을 날려 보내는 한 중국 노인의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 노인은 정년 퇴직한
          공무원이었는데, 마흔 살 때부터인가 거의 월급
          전부를 새를 사는 데 썼다는 이야기였습니다. ----
          날려 보내려고.
            그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는 그때 특별한 동류 의식
          같은 것을 느끼고 내심 놀랐습니다.
            '우리는 가슴속에 다 한 마리씩 새를 가지고 있다.
          그 노인은 중국 먼 하늘에 그것을 날려 보냈을
          것이다. 나는 여기....., 그러나 나는 아직 날리지
          못하고 있다.....' 나는 그 노인의 실천력과 용기에
          잠깐이나마 감탄했었습니다.
            당신의 가슴속에도 새가 있겠지요. 아직 날리지
          못한 새도 있겠지요. 날린 새도 있겠지만..... 날리지
          못한 새는 아마 적당한 바람을 아직 당신이 마련하지
          못해서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그 새는 바람을 못
          찾았다기보다 어떤 열매를 두 발 사이에 쥐고 있는
          새여서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작은 씨앗 하나에서
          시작된, 그러나 여러 해의 봄과 여름, 가을, 겨울을
          거쳐, 그 바람들이 하나로 꽁꽁 뭉친, 우리의 삶의,
          '결론'인 것들.....

            가을이면 어김없이 내게 전화를 거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런 뒤 나타나는 그녀의 손에는 언제나
          그 무엇인가가 들려 있었습니다. 작은 사내 아이를
          하나 데리고, 저의 대학 동창생입니다. 어느 해 그
          손엔 그림 같은 것도 들려 있었고, 어느 해엔 떡 같은
          것도 들려 있었습니다. 그녀는 도시를 떠나 시골로
          이사 갔었습니다. 거기서 아이도 기르고, 시골의 작은
          아이들에게 영어라든가 뭐 그런 것을 가르쳐도 주고,
          그러면서 산다고 했습니다.
            어느 가을날엔가는, 무슨 귀중한 나무의 열매에서
          나온 것이라며 붉은 씨앗 같은 것을 내 손에 쥐어
          주었습니다. 열매를 쥐고 있는 그녀의 곁으로, 이제는
          뛰어다니게 된 아이가 좋아라고 소리를 지르며, 빙빙
          돌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열매였습니다. 하늘을 높이
          나는 붕새처럼 '날기'를 기다리고 있는 그런 열매
          ----. 우리는 모두 열매가 되러 가고 있다는 생각을
          절로 하게 하는 하나의 붉은, 작은 생명덩이.
            삶의 이 길 위에서, 어떻게 걸어가건 그 삶의
          자취는 어떤 '열매'에선가 끝이 날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삶은 어떤 '열매'인가를 향한
          행진들인지도 모릅니다. 살아간다는 동사는 그 열매를
          띄울 바람을 향해 간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살고자 한 것이 아니었는데.....'
            어느 날 문득 창 밖을 바라보며 당신이나 저는 이런
          말을 할 수도 있습니다. 마치 다른, 어떤 길로 간다면
          열매가 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는 듯이, 제가끔
          가슴속에 숨긴 '새'를 잠깐씩 꺼내 보며, 그러나 그
          새가 '트로이의 목마'처럼, 아직은 나무 껍질로 된,
          딱딱한 날개를 지니고 있음을 다시 확인하며
          말입니다.
            그 새를 띄울 바람을 당신이나 저는 이제 마련해야
          합니다. 그 큰 날개를 날릴 만한 바람을 우리의
          삶에서 꺼내야 하는 것입니다. 밤하늘에서 또는 아침
          하늘에서 불러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각자 지난 해들을 바쳐 마련한 아름다운
          열매를 저 새의 붉은 날개 밑에 달아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바람을 기다리며, 또는 그 바람을 만들며.....
            대개 물이 괸 것이 깊지 못하면 큰 배를 띄울 만한
          힘이 없을 것이다. 한 그릇 물을 웅덩이에 부어 놓고
          지푸라기 하나를 띄우면 배처럼 뜨지만 그곳에 잔을
          띄우면 가라앉고 말 것이니, 물은 얕고 배는 크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바람이 쌓인 부피가 두텁지
          못하면 저 큰 붕새의 날개를 날리기에 힘이 없을
          것이다.....
            장자의 <소요유>를 다시 꺼내 듭니다.

            당신께 감사합니다.

            10. 보이지 않는 별을 찾아서

            다람쥐 한 마리가 살았습니다. 그 다람쥐는
          어떻게나 욕심이 많았던지, 가을에 알밤과 도토리를
          주워야 할 때가 되자 수많은 암 다람쥐들을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알밤과 도토리를 조금이라도 더 많이
          모으기 위해서였지요. 그리하여 그 아내 다람쥐들이
          집 가득 알밤과 도토리를 쌓아 놓고 나자 추워지는
          겨울임에도 그 다람쥐는 아내 다람쥐들을 전부
          내쫓았습니다. 그리고 그 아내 다람쥐들 중에서 장님
          다람쥐 한 마리만을 남겨 놓았습니다. 외로울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있어서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장님
          다람쥐는 아무것도 못 볼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 맛있는 알밤을 축낼 걱정이 전혀 없었던
          겁니다. 장님인 아내 다람쥐 앞에서 자기는 혼자
          알밤을 맛있게 먹고 아내 다람쥐에겐 떫고 맛없는
          도토리만 줄 요량으로.
            우리 나라 옛날 얘기의 한 토막입니다. 물론 옛날
          얘기가 다 그렇듯이 그 욕심 많은 남편 다람쥐가
          알밤을 먹으려 하면 알밤들이 모두 벌레 먹은 알밤이
          되어, 할 수 없이 착한 아내 다람쥐의 도움을 받게
          되고, 그래서 개과 천선한다는 얘기입니다. 욕심이
          우리를 얼마나 처참하게 만드는가를 보여 주기도
          하고, 또 어찌 보면 그것은 '분배'에 관한 문제만은
          동물의 세계나 인간의 세계나 비슷한 게 아니냐는
          씁쓸한 의문 아닌 의문을 던져 주기도 합니다.
            드디어 금융실명제가 시작되었습니다. 이제 명실
          상부한 개혁의 바람이 부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금융실명제 때문에 생길 문제가 별로 없는
          저에게도 슬며시 의심 하나가 들먹거려집니다. 도대체
          그 수많은 법의 그물 속에서도 '몇 백억씩'
          움켜쥐었던 '재주 좋은' 사람들이 그 움켜쥐었던 것을
          그리 순순히 실명화하려 할까, 그렇다면 여기에도
          '어떤 방법'이 있지 않을까 하는 점이 그것입니다.
          과연 '어떤 방법'이 있을까..... 집에 지하실을 파고
          돈을 쌓아 놓는 방법? 특수 금고가 그래서 잘
          팔렸구나. 그러나 그런 유치하고 원시적인 방법밖에
          없을까? 그런 것이 아닌 다른 무슨 '신기한 방법'이
          분명히 있을 텐데.
            그러고 보니 우리는 그 동안 너무 속아만 온
          모양입니다. 그리고 재산 공개 때마다 보여지는 그
          많은 돈의 액수들 때문에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능력을 읽어버린 모양입니다.
            금융실명제를 발표하는 텔레비전 뉴스를 보다가
          괜히 나는 뒤통수가 아파지는 것 같습니다.
            별이나 생각하자. 저 구름 뒤에서 쏟아지고 있을
          별의 비(雨)나.
            윤동주는 그의 유명한 시 <별 헤는 밤>에서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佩, 鏡, 玉 이런 異國少女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쓰 짬,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詩人의
          이름을 불러봅니다"라고 노래했습니다만, 어젯밤은
          정말 별을 보고 싶었습니다. '유성우(流星雨)'가 내릴
          것이라는 소식에 흥분해서 창에 매달렸다가 옥상으로
          올라갔다가 하면서 잠을 설쳤지만 끝내 그
          쏟아지리라던 별들은 볼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 나라
          하늘에 구름이 낀 탓이라고 나중에 뉴스는 전해
          주었습니다만, 아마, 그보다 도시의 하늘이 이제는
          별을 잘 보여 주지 않게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페르세우스좌에서 쏟아지는 별이라고 했을 때 사실
          그것은 얼마나 신선하게 느껴졌는지요?
            페르세우스는 그리스 신화에서도 아주 행복한
          영웅의 별자리가 아닙니까. 그는 실패한 일이 별로
          없는 영웅이었습니다. 아르고스 왕국에서 태어난
          페르세우스는, 하긴 신탁 때문에 상자에 넣어져서
          버려지지만, 무사히 세리포스라는 섬에 도착하지요.
          거기서 그는 아주 늠름한 청년으로 자랍니다. 더구나
          그를 사랑하는 신으로부터 두 개의 선물마저
          받습니다. 빛나는 방패와 날개 달린 신발을. 그
          신발을 신고 방패를 들어 그는, 쳐다보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돌로 변하게 하는 위력을 가진 괴물
          메두사의 목을 잘라 악한 그곳 왕의 시험에 이기고
          섬을 빠져 나옵니다. 또 그 메두사의 위력으로 죽음
          직전에 놓인 에티오피아의 아름다운 왕녀
          안드로메다를 구하며, 그 영웅적인 행위의 보상으로
          그녀와 결혼까지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행운의 별자리에서 쏟아지는 별의 비를 한
          시간에 몇백 개나 볼 수 있다니! 제가 어찌 잠 따위로
          백이십 년 만에 한 번 온다는 그 장관을 놓칠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어젯밤엔 한숨도 자지 않았던,
          아니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끝내 하늘에서는 아무
          소식도 없었던 것입니다. 날개 달린 신발을 신었다는
          그 페르세우스는 아무 신호를 보내 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영영 별을 보기 힘들게 된 것인지.....
          지금부터 금융 실명제를 한다는데 그렇게 해서 맑은
          사회가 되면 별이 보일 것인지..... 어떤 이는 사정
          바람에 지상의 별들이 너무 많이 떨어져서 그렇다고
          우스갯소리도 했다지만, 어둠이 더 짙어야 별은 보일
          것인지. 지하실에 '그 무엇인가'를 쌓아 들이는
          이들에게, 블랙 박스가 아닌 한 그 특수 금고가 언제
          부서질지 몰라 떨고 있을 이들에게, '별 하나의
          아름다운.....' 하늘이 덮이길 기대해 봅니다. 그
          맑은 하늘의 기대를 위하여 고 천상병 시인의 시 한
          편을 보냅니다.

            점심을 얻어먹고 배부는 내가
            배고팠던 나에게 편지를 쓴다.

            옛날에도 더러 있었던 일,
            그다지 섭섭하진 않겠지?
            때론 호사로운 적도 없지 않았다.
            그걸 잊지 말아 주기 바란다.

            내일을 믿다가
            이십년!
            배부른 내가
            그걸 잊을까 걱정이 되어서

            나는
            자네한테 편지를 쓴다네.

            ---<편지> 전문

            II.

            11. 그대는 거기 있게, 나는 여기 있겠네

            나무 하나가 흔들린다
            나무 하나가 흔들리면
            나무 둘도 흔들린다
            나무 둘이 흔들리면
            나무 셋도 흔들린다

            이렇게 이렇게

            나무 하나의 꿈은
            나무 둘의 꿈
            나무 둘의 꿈은
            나무 셋의 꿈

            나무 하나가 고개를 젓는다
            옆에서
            나무 둘도 고개를 젓는다
            옆에서
            나무 셋도 고개를 젓는다

            아무도 없다
            아무도 없다
            나무들이 흔들리고
            고개를 젓는다

            이렇게 이렇게
            함께
            ---<숲>

            그것은 유난히 빨간 저의 속살을 내밀고
          있었습니다. 마치 불어오는 바람에게, 그림자를
          던지고 있는 산에게, 옆에 서서 바람에게 자기의 팔을
          흔들며 잎들을 떨구고 있는 다른 모든 가을
          나무들에게 자기의 슬픈 밴 가슴을 과시하고 있는
          것처럼. 눈이 빨갛게 충혈된 어떤 이의 눈매를 볼
          때처럼 그렇게, 또는 무엇이 그렇게 그것의 속살을
          저리 빨갛도록 충혈되게 했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할 정도로 그렇게.
            하늘을 보고 있는 나뭇가지들에서 잎들이 우수수
          하고 떨어집니다. 아주 힘 없이, 누렇게 물든 잎들이
          떨어질 때는 그렇게 맥없이 가지를 놓아 버리는 것을
          이해할 수 없을 지경입니다.
            다 놓아 버리고 있습니다. 가지들은 떨어지는
          잎들을 붙잡으려고도 하지 않고, 떨어지는 잎들도
          가지를 붙들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떨어지고
          떨어뜨림의 운동이 그렇게 자유스럽게 이루어질까
          싶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그 무엇인가를 떨어뜨리려고
          하지 않는데, 지상에 살아 있는 우리는 그 누구도 제
          팔 위에 있는 것을 놓으려고 하지 않는데..... 우리는
          흐린 구름 조각 하나라도 저의 주머니에 들어온 것은
          내버리려고 하지 않는데..... 가을 깊은 산의
          저것들은 제 속의 빛깔을 전부 내밀어 자유롭게
          추락하고 있습니다.
            저것들에게 추락은 지금 자유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저것들에게 허공은 자유의 집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울긋불긋 물든 산의 살빛들은 그러므로 노쇠의
          빛깔이 아니라 자유의 빛깔입니다. 자기를 자유롭게
          내어 놓는 자들의 빛깔입니다.
            나는 그, 유난히 눈매가 충혈된 빨간 단풍에게 나의
          가슴을 주는 시늉을 하였습니다. 산을 내려오면서
          내내 나는 두 팔과 두 손을 가슴께에 넣었다가 허공에
          내놓는 시늉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것이 내게 말해
          왔습니다. '그대는 거기 있게, 나는 여기 있겠네.'
            나는 단풍에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대는 거기 있게, 나는 여기 있으리니.....'
            '세상이여, 세상 사람들이여, 거기 있게, 나는 여기
          있겠네.....'
            그러면서 나와 낙엽은 저무는 산 그림자로 같이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마음이 한결 편해졌습니다.
            계곡에는 미끄러운 돌들이 하얗게 바람에 끄슬려
          가는 저의 육체를 내어 놓은 채 바람에 자기를 말려
          가고 있었습니다. 낙엽 몇 개가 그 위에, 그 하얗게
          바랜 돌의 육체 위에, 흐르는 물 위에 떨어졌습니다.
          물 위에 떨어진 낙엽은 제 갈대로 가고, 그러나 하얀
          바위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습니다. 내가 건너뛸
          때마다, 나는 그것이 흐름에 꿈쩍할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만, 그래서 잠시 현기증마저 느꼈습니다만,
          그것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거기 흐르는
          물 사이에 있었습니다. 눈 뜬 채 눈 감고, 바람과
          물에 자기의 육체를 내어 맡긴 채, 아니, 눈 감은 채
          눈 뜨고.....
            나는 단풍에게 나의 가슴을 전부 주는 시늉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것이 말해 왔습니다. "너는 거기 있게,
          나는 여기 있겠네." 나는 단풍에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다시,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대는 거기 있게, 나는 여기
          있으리니.....' 나는 앞서가는 사람들의 등뒤에 대고
          그렇게 중얼거렸습니다. 마음이 한결 편해졌습니다.

            그 산 이야기를 해야겠습니다. 그 산은 꽤 높은
          산이었습니다. 허덕거리며 돌들이 깔린 길을
          올라갔습니다. 저기가 정상이구나 싶은 바위가 보여
          있는 힘을 다해 그리로 올라갔을 때 그 바위는 정상이
          아니었습니다. 그 바위를 돌아가 있는 더 높은 곳에
          그 산의 끝 바위가 또 하나 있었습니다. 그 산은
          말하자면 정상을 숨겨 놓고 있는 산이었다고나
          할는지요?
            다리를 질질 끌다시피 걸어 올라갔습니다. 실은
          그쯤에서 주저앉고 싶었지만 그 꼭대기의 바위는
          저에게 마치 '뭘 그리 머뭇거리는가'라고 꾸짖기라도
          하는 듯 높은 눈을 흘기며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전혀 운동하지 않으면서.
            그 꼭대기의 바위로 가는 길은 무척 험했습니다.
          이제까지의 길처럼 돌들이 깔린 정도가 아니라 작은
          바위들이 삐죽삐죽 가파른 모서리를 드러내고 있는
          길이었습니다.
            발바닥이 아팠습니다. 온몸에서 땀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닿은 바위의 보드라운
          살, 거기 이르렀을 때 바위는 드넓은 산의 풍경
          전부를 저의 눈에게 안겨 주었습니다. 운동하지
          않으며 운동하는 바위, 나를 소리 없이 꾸짖고 있는
          듯 나는 바위에 머리를 한 번 세게 부딪치고는, 아하,
          거기가 정상이구나 하고 깨달았습니다. 좀 거무스레한
          그 바위는 자기를 드러내지도, 그렇다고 비하하지도
          않으면서, 거기 바람에 맨 살을 내어 놓은 채 그냥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부터 문제 하나가 일어났습니다. 바위에
          앉으려고 하였을 때 저는 오른쪽 허벅다리가 너무
          아파서 도저히 다리를 구부릴 수가 없음을
          알았습니다. 할 수 없이 바위 끝에 비스듬히 기대어
          거기 정상의 바람을 맞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려올 때는 그 부분의 아픔이 너무 심해서 왼쪽
          다리만으로 걷다시피 절뚝절뚝 내려왔습니다.
            그렇게 내려오면서 생각하니 왜 두 다리로 걸었는데
          오른쪽 다리만이 아픈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를 어리석은 저는 한참 후에야
          깨달았습니다. 그건 제 왼쪽 다리의 마비
          때문이었습니다.
            이십 년 전 뇌수술의 후유증으로 저는 왼쪽 다리가
          아직 좀 불편합니다. 이제 거의 완전히 회복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직 완전해진 것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제 왼쪽 다리의 신경은 죽어
          있었으므로, 그렇게 심하게 걸었는데도 아픈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저는 저의 왼쪽 다리에
          감사했습니다. 밤새도록 아픔으로 괴로워하면서,
          허벅지가 콕콕 쑤실 때마다 '감사'의 웃음을
          던졌습니다. ---- 살아 있는 것만이 아픈 것입니다.
          아픔은 ---- 고통은 우리를 살아있게 하는 것입니다.
            고통은 그럴 때 향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삶의
          향기, 삶은 그렇게 고통하고, 후회하고, 괴롭고, 그런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그 향기에 실은 우리를
          쐬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고통의 향기는
          괴롭지만, 우리는 그것으로 우리의 살을 매일 깨끗이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오만이라는 나라에서 나는 유향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 보셨습니까? 유향이라고 하면 굉장히 화려한 그
          어떤 것 같지만, 실제로 그것이 생겨나는 나무는
          형편없는 몰골을 하고 있답니다. 유향 나무가 심어져
          있는 땅도 아주 메마를 뿐 아니라 주변은 전부
          사막이라죠. 뱀같이 가지가 구불구불 누워 있는 유향
          나무의 줄기를 칼로 엷게 벗기면 송진 같은 진이
          흘러나오는데 진이 흘러나오는 대로 한달 이상 두면
          그것은 뜨거운 햇볕에 마르면서 유향 열매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갈증에 타는 나무의
          살[肉]이 남긴, 아니 어둠이 갈앉아 있는 나무의
          생채기가 이 세상을 향해 흘린 눈물 같은 것입니다.
            아라비아 사람들은 외출할 때면 이 유향을 피워
          놓고 그 위로 옷자락을 벌려 온몸을 그 연기에 적신
          다음 문을 나선다고 합니다. 어둠이 갈앉아 있는 빛의
          길에 나서는 이들의 의식일 것입니다.
            의식은 그것만으로도 어떤 것의 이데올로기가 되어
          버리는 그런 일이 많습니다. 연기에 몸을 적시는 이들
          ---- 그들은 아마도 이 세상의 가파른 냄새들에게
          유향의 향기를 조금이라도 주려는 이들일 것입니다.
            저 바위들처럼, 바위들이 지상의 흔들림에 자기를
          내어 맡기면서도, 자신들은 결코 움직이지 않듯이,
          그러면서 낙엽의 추락도, 흐르는 물의 슬픔도,
          몰려가는 바람들의 가파른 운동도 받아들이듯이,
          일체를 받아들이듯이.
            숲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떨어질 것은 떨어집니다.
            아플 것은 아픕니다. 아픔으로 아름다운 것의
          향기들 ---- 이제 어쩌겠습니까?
            버릴 것은 버리는 수밖에. 그리하여 아름다운 전
          생애의 빛깔로 물드는 수밖에. 우리, 물들기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라도 잃어버릴까 봐 떨고
          있는 이들에게 저 단풍은, 낙엽은, 창백하게 앉아
          있는 돌들은, 아마 다시 말하고 있습니다.
            그대는 거기 있게, 나는 여기 있겠네, 라고.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중국의 강 황하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누렇게
          물결치는 거대한 강, 황하. 그 황하는 주변에 사람
          사는 곳을 거느리기도 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심술을
          부릴 땐 도시 하나쯤 순식간에 덮쳐 홍수를 낸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큐멘터리의 첫머리는 놀라운
          광경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런 거대한 황하의 근원을
          찾아가는 것이 그것입니다. 강줄기를 거슬러올라갈
          때마다 물은 점점 맑고 차가워졌습니다. 상류에 있는
          호수에 이르렀을때는 황하의 누런 물 빛깔은 찾아볼
          수가 없이 푸르고 맑았습니다. 그 호수는 너무나 차고
          맑아서 거기 살고 있는 물고기에는 비늘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호수도 황하의 근원지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조사팀들은 더 상류로
          올라갔습니다. 점점 땅은 축축해지고 그 축축한 땅의
          끝에는 아주 조그만 샘물이 하나 있었습니다. 물은
          거기서 흐르기 시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조사팀은 그곳에 황하의 근원지라는 팻말을 세우고,
          모두 한 컵씩 그 샘물을 마셔 봅니다. 그 샘물의
          어디에 황하의 그 누런 얼굴이 숨어 있는지 새삼
          감탄하며. 샘물의 주위에는 작은 들꽃들이 무리 지어
          피어 있었고 작은 풀들, 나무들이 소리 없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정숙과 빛, 그리고 바람만이 가득한
          그곳.
            그 샘물, 역사를 일으켜 오는 싯누런 황하의 근원이
          그렇게 맑게 들꽃 사이에 숨어 있듯 고이는 한 초롱의
          샘물에 불과했다니..... 그러나 그 맑은 비늘 없는
          고기가 살 정도의 맑은 물은 그것 자체로서는
          역사에도 인간의 삶에도 따라서 자연 전체에도
          기여하는 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수많은
          계곡을 흘러 내려오면서 고비 사막에서 날아온 모래와
          섞이면서 진흙 얼굴이 되어 싸우고 있기에 황하는
          황하로서의 역사적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일 것입니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홀로 완결될 수 있는 것이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다시 듭니다. 의미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다시 듭니다. 물은 바위와, 바람은
          또 그 바위와 물과, 흙은 또 거기 내리는 뿌리들과
          거기 깃드는 벌레들이 있어서, 나는 네가 있어서,
          아니 나는 여기, 너는 거기 있어서 .....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나는 너의 이데올로기들이 되고 있을
          것입니다.

            나무 하나가 흔들린다
            나무 하나가 흔들리면
            나무 둘도 흔들린다
            .....

            이렇게 이렇게
            함께.

            12. 길 떠나는 이들은 언제나 아름답습니다

            한 젊은 아낙네가 사립문을 열고 있었습니다.
          아낙네의 행색은 초라했습니다. 게다가 머리에는
          보퉁이 하나를 이고 등에는 갓난아기 마저 업고
          있었기에 더욱 초라하고 무거워 보였습니다. 마을은
          그날 따라 유난히 조용했습니다. 멀리 바닷가에서
          파도 소리가 들려 올 지경이었습니다. 집 앞 은행
          나무에서 나뭇잎 하나가 떨어져 깨끗한 황톳길 위에
          뒹구는 것을 보면서 젊은 아낙네는 발길을 살그머니
          옮겼습니다.
            혹시 아기가 깨서 울기라도 할까 봐 허리에 맨
          포대기를 소리 없이 추스르면서, 오른손에 꼭 쥔 차표
          한 장을 다시 한 번 들여다보았습니다.....

            옛날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젊은 아낙네는 저의
          어머니였고 갓난 아기는 바로 저였습니다. 저의
          어머니가 고향을 떠나던 날의 '그림'을 한번 그려 본
          것입니다. 하도 많이 들은, 그러나 언제나 새로운
          그날의 '그림'을.
            그런데 그날의 '그림'은 왜 저에게 아직도
          신선할까요?
            '젊은 아낙네' 때문이고 그녀가 '길 떠나는
          그림'이기 때문입니다.
            길 떠나는 이들은 언제나 아름답습니다. 그러기에
          지금 당신은 물론 아름답습니다.
            지금 당신은, 말하자면, 네거리에 서 있습니다.
            당신의 몸매에선 오전의 그 흰 냄새가 납니다.
            당신의 풀이 빳빳한 새 옷은 바람을 한껏 받은
          돛폭처럼 부풀어 있습니다.
            당신의 튼튼한 두 다리는, 지금 돌아가고 있는
          지구의 움직임이라도 감지하고 있는 것처럼 미묘하게
          떨며, 그러나 굳건히 땅을 딛고 있습니다.
            당신의 윤기 나는, 두꺼운 검은 머리칼 위에선 봄의
          바람도 문득 멈추어 버립니다. 너무 신선한 대상
          위에서 그만 당장 가야 할 곳을 잊어버린 것같이.
            그 봄의 바람은 사실 지구 어느 곳의 피비린내 나는
          들판에서 온 것일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소말리아의
          어느 난민 수용소라든가 뭐 그런 곳에서 온 것일
          수도. 아무튼 먼 길을, 이 세상 무수한 대상을 지나고
          또는 가슴에 품어 온 것일 텐데 말입니다.
            당신의 젊은 눈은 마치 사막 한가운데서도 어디로
          가야 할지를 알고 길을 접어 가는 낙타의 두 눈을
          생각케 합니다.
            저는 가끔 그 낙타의 눈은 초록빛을 띠고 있거나,
          뭐 그런 색깔일거라고 상상하고 있습니다. 뭐라고
          이름 붙일 수 없는 그런 눈, 막막한 모래 언덕을 보며
          그러나 흔들림 없이 걸어가는, 그것의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보폭, 당신은 지금 그런 샘물 같은
          눈을 하고 네거리에 서 있습니다.
            당신은 지금 어느 방향으로도 길을 건널 수
          있습니다. 황야 같은 도시의, 황야 같은 어떤 곳,
          그러나 당신은 지금 봄의 바람이 흔들어주는 머리칼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무수한 가능성들이 당신 앞에서
          숨쉬고 있습니다.
            당신은 지금 자유롭습니다.
            당신은 지금 시작합니다.
            무수한 후회 위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사람들과는
          다릅니다.
            붉은 신호등이 켜져 있거나, 또는 그것이 푸른
          신호등으로 바뀌거나, 또는 그것이 노란 신호등으로
          바뀌거나, 당신은 아직 그 거부의 색깔들에, 또는
          지시의 색깔들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붉은 금지의 색깔이 지금 당신의 시선이 닿는
          허공에 솟아오른다면, 당신은 돌아설 수도 있습니다.
            양자강 가에 사는 어부들은 아주 독톡한 방법으로
          물고기를 잡는다고 합니다. 즉 가마우지라는 물새를,
          물고기를 잡고 싶은 강의 한 곳에 띄워 놓습니다.
            가마우지는 본능적으로 물고기를 잡으므로 강물에
          띄우는 순간 강물 속으로 곤두박질쳐 물고기를
          잡습니다. 가마우지에게 잡힌 물고기는 이미 그것의
          부리에 반 이상 들어가 있습니다. 그러나 가마우지는
          자기가 잡은 물고기를 아무리 삼키려고 하여도 삼킬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인 어부가 가마우지의
          목에 맨 끈을 그 순간 잡아당겨 그것의 긴 목을
          조르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물고기를 입에 문 채로 가마우지는 배로 끌려
          옵니다. 어부는 퍼덕대는 가마우지의 목을 잡고, 아직
          숨쉬고 있는 물고기를 잡아 뺍니다. 그리고는 자기가
          잡은 물고기를 잃어버린 가마우지를 강물에 휙 ----
          하니 던져 버립니다.
            가마우지는 결코 뱃전을 떠나려 하지 않지만,
          어부는 긴 막대기로 강물을 두드리며 '절망에 찬'
          가마우지들을 강물 가운데로 쫓아 버립니다.
            그 동안 어부는 구수한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커다란 물고기가 가마우지의 목에서 끌려 나올 때마다
          어부의 노랫소리는 흥이 나서 즐겁게 커집니다.
          그렇게 한 마리의 가마우지가 잡는 물고기의 양은
          하루 평균 오 킬로그램이라고 합니다. 긴 막대기를 든
          채 가마우지를 강물 위에 되던지는 어부의 모습은
          마치 느린 템포의 음악에 맞춰 무용을 하고 있는
          것같이 보입니다.
            양자강 물은 소리 없이 출렁이며 흐릅니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강물 위의 그 풍경은 어부의
          노랫소리와 어울려 목가적이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강물 위로 쫓겨 가는 가마우지들을 보면서
          저는 그 중의 한 마리가 목에 매어 있는 어부 주인의
          줄을 끊고 양자강 저 멀리로 튀어 나가는 그림을 그려
          봅니다.
            그 가마우지의 몸은 마치 튕겨 나가는 공처럼, 보다
          잔인한 표현을 빌리면, 로켓 탄처럼 탄력 있게 허공에
          포물선을 그릴 것입니다. 그리고 어부가 결코 갈 수
          없는, 양자강의 숨겨진 물을 마실 것입니다.
            그 위에 초록의 햇빛이 떠돌 것입니다.
            저는 한 마리, 두 마리..... 그리하여 그 신나는
          가마우지들의 팽팽한 초록 눈들이 넘실넘실 강을 덮는
          꿈마저 꿉니다.
            젊은 당신은 지금 그 끈이 없는, 원래의
          가마우지입니다. 또는 그 끈을 끊고 달아날 수 있는
          초록의 눈을 한, 가마우지입니다.
            이 도시는 아니 어쩌면, 이 삶은 가마우지의 목에
          든든한, 또는 오래 된 끈을 매어 두고 있는 것인지
          모릅니다.
            사방에서 끈들은 잡아당겨지고, 물오리들은 강물에
          던져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에게 아직 그 끈은 가까이 가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다가 당신은 그 끈을 끊을 힘도 가지고
          있습니다.
            당신은 네거리에 서 있습니다. 어디로도 갈 수 있는
          그 네거리에.
            마치 제게 겨울이면 반드시 날아오는 아름다운 그림
          엽서처럼.
            거기엔 늘 어느 이국의, 어떤 도시의 낯선 길들이
          아름다운 색깔의 사진으로 찍혀져 있습니다.
            나는 그 그림 엽서를 벽에 기대어 놓고, '그리로'
          갑니다. 그리고 '그리로 가기 위해서' 문을 나서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습니다. 저의 목에는, 가슴에는
          지금 너무 많은 끈들이 달려 있습니다.
            누구인가가, 아, 무엇인가가 그 끈을 소리 없이
          당기고 있습니다.
            끈들은 소리 없이 저의 팔의 살에, 발의 티눈에,
          손목의 핏줄에 엉겨 들고 있습니다.
            끈은 점점 깊은 자국을 남기며 죄어 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아직 신선합니다. 자유입니다.
            어디로든 갈 수 있습니다.
            네거리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일어서라 풀아
            얼어서라 풀아
            땅 위 거름이란 거름 다 모아
            구름송이 하늘 구름송이들 다 끌어들여
            끈질긴 뿌리로 긁힌 얼굴로
            빛나라 너희 터지는
            목청 어영차
            천지에 뿌려라

            이제 부는 바람들
            전부 너희 숨소리 지나온 것
            이제 꾸는 꿈들
            전부 너희 몸에 맺혀 있던 것
            저 바다 집채 파도도
            너희 이파리 스쳐왔다
            너희 그림자 만지며 왔다

            일어서라 풀아
            일어서라 풀아
            이 세상 숨소리 빗물로 쏟아지면
            빗물 마시고
            흰 눈으로 펑펑 퍼부으면
            가슴 한아름
            쓰러지는 풀아
            영차 어영차
            빛나라 너희
            죽은 듯 엎드려
            실눈 뜨고 있는 것들
            ---<일어서라 풀아>

            머리카락은 검은 윤기로 출렁이며, 새 옷은
          돛폭처럼 부풀어 있습니다.
            아직 당신은, 겨울이면 저에게 날아오는 어딘가의
          그림 엽서를 '바라보는 당신'이 아니라, '그림 엽서
          그것'인 것입니다. 아직 젊은 당신은.

            13. 별

            새벽 하늘에 혼자 빛나는 별
            혼자 뭍을 물고 있는 별
            너의 가지들을 잘라 버려라
            너의 잎을 잘라 버려라
            저 섬의 등불들, 오늘도 검은 구름의 허리에 꼬옥
          매달려 있구나
            별 하나 지상에 내려서서 자기의 뿌리를 걷지
          않는다.
            ---<별>

            여러 번 편지를 받고도 그때마다 이러저러한 일이
          생기는 바람에 답장을 하지 못했습니다.
            창 밖 뒤산을 보니 어느 새 누우렇게 혹은 뻘겋게
          된 잎새들이 가지를 떠나고 있습니다.
            '지는 잎'들은 얼마나 아름다운지오? '지는 잎'들이
          품고 있는 마치 황혼과 같은 그 빛깔, 혹은 짙은 벽돌
          빛, 그것들은 이제 자기의 집이었던 나무를 떠나 다른
          땅으로 밀려가 다른 나무의 뿌리에 덮일 것입니다. 그
          새로운 나무의 뿌리를 자기의 집처럼 덮어 주고
          새로운 나무의 뿌리에 자기의 썩어 가는 살을 섞어
          어느 날의 구름의 씨를 받아 내리고, 그 새 뿌리에
          빗물을 스며들게 하고, 그래서 어느 날 새 잎으로
          환생할 것입니다. 무엇인가 끊임없이 세상에 주는
          그것, 그래서 그것들은 자기들의 눈물의 빛깔로
          물드는 것인지 모릅니다. 그 눈물의 빛깔로 땅에 밥과
          덮을 것을 주는 것인지 모릅니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는 짧은 이야기를
          기억하시는지요?
            소년이 어렸을 때 그것은 어린 소년에게 놀이터를
          제공했습니다. 소년이 어른이 되었을 때 그것은
          소년에게 아름 가득 열매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소년이 늙자, 그것은 풍성한 그늘로써 소년의
          희끗희끗한 머리칼을 덮어 주었습니다. 그 소년이
          더욱 늙어 오히려 따뜻한 햇살이 그리워졌을 때
          그것은 그루터기만 남아 소년에게 앉을 자리를
          제공했습니다. 앉아서 뒤를 돌아보며 쉴 자리를.
            아낌없이 주는 것입니다. 사는 일은 어쩌면 주는
          일인 것입니다. 아마도 우리가 모두 모르고 있는
          사이에.
            언젠가 저는 ".....사라지는 것들을 사랑하라/
          그것도 말없이 사라지는 것, 저 하늘의 새 같은 것,
          황혼의 붉은 구름 조각, 여름풀, 나비, 새벽별, 안개
          같은 것, 안개 속에 보이다 말다 끝내는 보이지 않는
          사람의 뒷모습 같은 것, 영구차의 타이어 자국,
          단두대의 피, 그런 것들의 빠른 사라짐을 이해하라,
          사라지는 것들은 아름답다./ 마지막 울음을 남기는
          것은 백조만이 아니다. 지상의 어떤 것도 사라질 때는
          그것의 권력, 명예, 명령, 빛나는 젊음의 美, 그런
          것들은 사라짐으로써 기억 속에 영원의 자리를
          획득한다....."고 썼습니다만, 오늘 그것들의
          아름다움과 눈물겨움은 또 다른 뜻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 다른 뜻이란 '때를 안다'는, 어찌 보면 참
          지독히 평범한 말입니다만, '때를 아는' 저 산의
          나무들은 얼마나 지혜롭고 지혜로움으로써 또다시
          아름다운지요? 언제 제 몸의 색깔을 전부 내어
          물들어야 할지와 언제 그 물든 잎을 버려야 하는지와
          언제 빈 가지로 서 있어야 하는지를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잘 아는 그것들, 떠나가야 함과 돌아와야 함을
          스스로 아는 그것들.
            하긴 나무뿐이 아니지요. 아침에 창 밖 하늘을 보니
          수십 마리의 철새들이 육안으로도 뚜렷이 구별되는
          대형을 그리며 하늘 저쪽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것들이 자기들이 가야 할 때를 알고 있는 그것,
          우리도 모르는 어떤 곳으로 가고 있는 그것들 ----
          아름다웠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그때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거절하며
          맑게 빛나셨습니다. 마치 하나의 커다란 날개가
          되시려는 듯이. 당신의 껍질은 이 땅에 다 주시고
          다만 하나의 맑은 그릇이 되어 우리를 세상에 담아
          내었던 것입니다. 저의 아버지가 맑게 빛나시며
          마지막으로 세상을 거절하시던 날, 그날 저는 먼
          거리에 있었지만 아버지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가야겠다'고 하시는 이의 음성을. 그 뒤에서 나는
          공연히 허둥대었지만, 세상은 당신의 들리지 않았던
          예언처럼, 당신 뒤에서도 계속 빛났습니다.
            아마 삶은 모든 지상의 산 것들이 그렇게 사라지며,
          지상에 한 푼의 에너지를 보태는 일을 하는 것일
          것입니다. 피를 흘리면 흘릴수록 어쩌면 더 좋은 이
          세상의 땅 ---- 때를 알고 가는 이들이 있기에 가능한
          것인지 모릅니다. 세계는 끝없이 계속될 것입니다. 저
          별이 지상을 물고 있는 한.
            그렇습니다. 때를 알기 위해선 버려야 합니다.
          버림의 아름다움을, 그 빠른 아름다움을 이해해야
          합니다.
            제 머릿속에 들어 있는 이 지푸라기 같은 모든 것,
          이 칡 넝쿨처럼 얽혀 있는 제 집안의 잡동사니들,
          이윽고는 자기의 피까지도 버릴 수 있어야
          하는데..... '버림'이 곧 '더함'이 될 수 있어야
          하는데..... 그 '버림의 더함'을 실천한 이가
          그리스도가 아닌지요? 때를 가장 잘 파악한 이,
          그래서 그때를 지상의 인간들에게 돌려 준 이 ----
          그런데 그것이 잘 안 되는군요?
            아무래도 잘 버리지 못하겠습니다. 정작 버리자고
          보면, 귀중한 것 같아서 말입니다. 또는 언젠가
          소용이 될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러나 사는 일이
          실로 버리는 일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늙어
          간다는 것이, 실은 저 나무처럼 하나씩 잎사귀를 버려
          가는 것임을.
            저 초겨울 하늘의 철새들처럼 낯익은 지상과 낯익은
          하늘을 훌훌 떠나가는 것임을.
            동양의 한 성인이 '무위(無爲)'라고 한 말의 뜻도
          그런 데에 있겠지요.
            천하에 지극한 즐거움이 있는가? 혹은 없는가?
          그것으로써 내 몸을 살릴 만한 것이 있는가? 혹은
          없는가? 이제 무엇을 하고, 무엇에 의지하며, 무엇을
          피하고, 무엇을 편안해 하며, 무엇에 나아가고,
          무엇을 버리며, 무엇을 즐겨 하고 무엇을 미워해야 할
          것인가
            ..... 대저 저 부자들은 몸을 괴롭혀 허덕이고 많은
          재물을 쌓아두고도 다 쓰지 못하는 것이니, 그
          몸뚱이를 위하는 것은 도리어 몸뚱이를 버리는
          것이다. 또 저 귀한 사람은 밤낮을 쉬지 않고 일의 잘
          되고 못 됨을 괴로이 생각하는 것이니, 그 몸뚱이를
          위하는 것은 도리어 몸뚱이를 등한히 하는
          것이다..... 하늘은 무위다. 그것으로써 맑고 땅은
          무위다. 그것으로써 편안한 것이니, 이 두 무위가
          서로 합해서 만물이 모두 생겨나는 것이다.
            ---<장자(莊子)>

            인용이 좀 길어졌습니다만, 아무튼 이제 일 년이 또
          지나갑니다. 우리의 아름다움은 어디서 구할까요?
          아니, 진정 사는 일의 아름다움은 말입니다. 저
          나무들이 잎사귀를 하나씩 버려 가듯 그래서 다른
          '붉은 잎'들을 자기의 뿌리에 덮어 가며 세상과
          화해해 가듯 그렇게 자신을 둘러싼 '허위의 것들을
          하나씩 버리면서, 아름다운 백조의 울음을 울어야
          하는 시절', 그러나 새벽 하늘에 지고 있는 저 별이
          오늘도 아름다운 것은, 저 별이 우리가 사는 세상을
          하염없이 내려다보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제
          눈에는 그것이 꼭 땅을 힘겹게 물고 있는 것
          같습니다. 땅 전체에 봉사하면서, 그러나 그러기
          위해선 나뭇잎들이 가지를 떠나듯, 우리는 우리의
          작은 서랍들에서 떠나야 할 것입니다. 그러려면
          우리의 그 작은 서랍들을 순간 순간 비워 내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빈 서랍에 세상의 흙을 순간
          순간 다시 채워야 할 것입니다.
            사라지는 것들이 아름다운 때입니다. 지금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14. 세속 도시에서의 잠

            이제 당신의 고개를 낮추십시오.
            당신의 어깨를 낮추십시오.
            지금 불어오는 바람의 한 겹
            당신의 살에 두르십시오.

            거리엔 싸움뿐입니다.
            먹구름 내뿜는 물질과 물질
            포크레인이 당신의 윤기 나는 머리칼을 밟아대고
          있습니다.
            거짓말들의 춤 실은 덤프트럭이
            당신의 등을 밀고 있습니다.

            당신의 혀를 감추십시오.
            내 가장 가까운 당신이시여.
            버리십시오.
            이 모든 거품의 꽃을
            버리십시오.

            은빛 달의 차표를 기다립시다.
            이 시끄러운 말들을 떠날 차표를
            거짓의 문화를 떠날 차표를
            탐욕의 뜰을 떠날 차표를

            자, 이제 고개를 낮추고
            떠나십시다.
            은빛 달과 별의 뿌리 내리고 있는 곳
            생명의 떡잎들 일어서 있는 곳으로.
            ---<이제 당신의>

            2월입니다. 곳곳에서 문 닫는 소리가 들리는 듯한
          달입니다. 아직 이 겨울 추위는 풀리지 않은 채,
          그래서 더욱 겨울이 깊어지는 듯한 느낌마저 주는 달,
          실로 우리는 지금 너무 많은 것, 또는 너무 높은 것,
          또는 강하고 화려한 물질 같은 것, 그런 것만을
          향하여 치달려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그런 탓에
          늘 화를 내며, 원래는 따뜻한 자기의 문들을 닫아
          버린 채 이 겨울을 더욱 춥게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벌써 십 년이 지나 버린 일이 되었습니다. 그때
          저는 일체의 것을 버리리라 마음 먹고, 살던 도시를
          떠났었습니다. 그래서 이불 한 채와 라디오와 커피
          포트만을 짐으로 싸서 낯선 '작은 도시'로
          향하였습니다.
            처음엔 모든 일상의 자질구레한 일들에서
          해방되겠다는 일념으로 새 도시에서 하숙을 했습니다.
          매일 저녁 학교에서 돌아오면, 드보르 자크의
          <신세계>를 라디오의 카세트로 들으며..... 저는 작은
          하숙집 방에 숨어서 처음 만나는 도시의 하늘을
          바라보곤 하였지요. 그때 듣던 드보르자크는 얼마나
          고독하던지요? 그러나 고독은 곧 자기의 친구인
          자유를 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저는 어떻게든 세상의
          삶 속으로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고, 매일은 힘들게
          저의 앞에 다가왔습니다. 그 속에서 저의 고독의 방은
          자꾸 좁아졌습니다. 하숙집의 뜻하지 않은 방해꾼들도
          많았구요. 그래서 조금 더 넓은 고독의 공간으로
          옮겼지요.
            그런데 한 두어 달밖에 살지 않았는데 두 번째
          하숙집으로 옮기려니 어느 새 짐이 잔뜩 늘어
          있었습니다. 리어카 한 대를 불렀습니다. 비슷한
          동네로 옮기는 것이기에 리어카에 그 동안 늘어 버린
          책 같은 것을 싣고 어느 초여름날 그 뒤를 따라
          이사했습니다. 물론 새 하숙방도 고독과 함께 자유를
          주기에는 부족한 것이었습니다. 주인집 아가씨의
          눈치를 살펴야 했고, 전화를 마음대로 쓸 수 없으므로
          한밤중에도 공중 전화를 찾아 헤매야 했습니다.
          식사를 반드시 그 시간에 해야 한다는 것이 그렇게
          저를 속박할 수 있는지 그때 알았습니다. 인간은
          얼마나 사소한 것에서 자유의 박탈을 경험할 수
          있는지.
            결국 전셋집으로 옮겼습니다. 낙동강 가의 아름다운
          이층방이었습니다. 거기서는 낙동강의 낙조가 아주 잘
          보였습니다. 거의 완벽한 고독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저녁 무렵이면 저는 현관에 앉아 낙동강의 벌겋게
          지는 해를 한참씩 바라보곤 했습니다. 그것은 마치
          힘들게 돌고 있는 지구를 위로하기라도 하는 듯이
          서편 하늘을 쓰다듬으며 강 저쪽으로 넘어가곤
          하였습니다. 하늘 전체가 한참씩 붉게 물들었습니다.
          저는 태양이 넘어가는 순간의 그 큰 고독과 마주하며,
          낙동강 가에 작은 불빛들이 일어서는 것을 몇 시간씩
          바라보곤 하였습니다.
            그리고 태양은 사라진 뒤에도 저의 눈 속에 그 둥근
          그림자를 오랫 동안 남기고 있음을 문득 깨닫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집에서 혼자 사는 바람에, 작은 냉장고를
          사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식구들이 제가 있는 곳으로
          오게 되고, 그런 저런 까닭으로 텔레비전도 다시 사게
          되고 신문도 몇 개나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만, 그래서
          단 몇 년을 못 넘기고 다시 짐이 늘어 버렸습니다만,
          꽤 많은 것을 버리고 있었던 그때의 그 가벼움을 저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서 '버린다'는 것의
          어려움을 새삼 깨닫고 있습니다.
            뿐 아니라 '세속 도시'에 살면서 진실로 버린다는
          것은 아무것도 지니지 않음이 아니라 ---- 그것은
          위선과 오만이 될 수 있는 것이니까요 ---- 우리의
          욕망을 보다 줄여 가는 것임을 눈치 채고 있습니다.
          물질 속에서 살고 있음에도 그것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정신 ---- 마치 나무의 열매가 지난 여름에
          있었던 그 나무의 모든 화려함을 버린 다음 가지에
          매달려 열리듯이(적절한 비유가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말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열매들이 숨어 있는 채 운동하는
          2월은 추억의 달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일 년 중 가장
          짧은 자기의 날짜로서 3월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3월과 4월, 5월과 6월을..... 마치 속살이 아름다운
          처녀의 짧은 그리움처럼.
            그러고 보니 제게도 지난 어느 5월의 희미한 한
          추억이 있습니다.
            이십 년 전인가 봅니다. 봄치고는 흐린 어떤
          날이었습니다. 사방에서 문 닫히는 소리 같은 것을
          저는 제 방에서 가만히 듣고 있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전화 벨이 울리는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 이윽고 문이 열리는 소리, 나를
          부르는 소리.
            이윽고 다가간 전화선 안에서 한 목소리가, 안개
          속에서 그 무엇인가를 흔들어 주는 바람의 낮은
          소리처럼 건너 왔습니다.
            "잠깐 만날 수 없을까요?"
            안개 속의 바람 같은 그 목소리는 말했습니다.
            "()()제과가 어떨까요?"
            "좋아요....."
            길을 나서자 5월의 바람이 나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핥으며 자나갔습니다. '()()제과'에 이르렀을 때,
          손님도 별로 없이 한가로운 동네 빵집 한귀퉁이에 한
          사람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가 내게 무엇인가를 내밀었습니다. 도시락 같은
          것이었습니다. 좀 더듬거리면서, 묶은 리본 같은 것을
          풀자 그 안에는 예쁜 산딸기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
          산딸기를 절벽 위에 올라가 따느라고 그는 시계를
          잃어버렸다고 말했습니다.
            도시락통을 다시 들여다보았을 때 나는 거기 산이
          하나 들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정말 아름다운
          산이었습니다. 그 산의 빨간 그림자들처럼 말없이
          앉아 있는 산딸기들. 그것들은 그 순간 산의
          모든것이었습니다. 산의 화려하던 모든 것,
          고통스럽던 모든 것,..... 또는 오는 여름의 빛나는
          모든 것.....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도 그런 것들 위에서
          단단하게 맺힌 하나의 열매처럼 맺혀 흘러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이십 년도 넘은 옛날의 그 산딸기를 그런 의미에서
          저는 잘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들이 ---- 작고
          단단한 그것들이 실은 큰 산 하나를 품고 있음을
          말입니다.
            2월은 그러므로 다시 추억의 달인 것입니다. 많은
          욕망을 줄이고, 우리의 키를 낮추고 낮춰, 그런
          추억들과 하나가 되는 달, 그래서 2월은 짧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작고 작은 것들, 낮고 낮은 것들, 가난하고 가난한
          것들이 이 세상을 돌리는 끊임없는 힘이 됨을 보면서
          이제 이 편지도 마감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한밤중에 일어나 앉으니 먼 바다의 불빛이 물들의
          무수히 작은 주름들을 내 앞으로 끝없이 밀어 오고
          있습니다. 그 끝없이 움직이는 물 주름들 위에서 꽤
          큰 배의 환한 불빛이 작은 배의 힘 없는 불빛들을
          껴안고 있습니다. 어둠이 안고 있는 밝음의 크기를
          봅니다.
            '나를 줄이고, 당신을 줄이고, 그러면서 하늘을
          크게 하고.....'
            작고 작아지십시오. 당신의 어깨를 낮추십시오.
          그러면서 세상을 당신의 뿌리 위에 돌리십시오. '부질
          없음'들의 '부질 있음'들이여.

            당신께 감사합니다.

            15. 지상의 밧줄

            그대를 기다리네
            시간을 수제비처럼 떠
            어둠의 막대기 위에서 돌리네

            .....

            수십 개의 유리접시를
            수십 개의 막대기 위에서 돌리는 마술사

            .....

            이것이 그대를 기다리는 기술
            기다림이 기다림을 살찌워
            지구를 돌리는 기술
            ---<벽 속의 편지 ---- 그대를> 중에서

            한밤중 바라보는 배들의 불빛이 어디서 그대가
          걸어오고 있음을 슬며시 말해 주고 있습니다.
          불빛들은 밤의 물 위에 비쳐져서, 마치 바다가
          군데군데 울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주기도 합니다.
          눈물 기둥들 ---- 땅에 퍼지는 커다란 눈물의 지붕들
          ---- 어떤 것은 길고 넓게, 어떤 것은 짧게, 또 어떤
          것은 그저 깜박이는 것으로 자기의 가슴 속을 말하고
          있는 것들 ---- 그 지붕의 그림자가 오늘도 밤바다를
          덮고 있습니다.
            지금 오고 있는 그대는 아마도 두 손 가득 열매를
          가져오고 있을 것입니다. 곳곳에서 아마도 그
          열매들이 익은 살을 터뜨리는 소리가 이제 오는
          바람의 땅을 물들일 것입니다. 익어서, 그리고 그
          익은 살로써 저 그림자들을 좀 더 두껍게, 길게 할
          것입니다. 땅은 그 눈물의 기둥들이 두껍게, 더
          두껍게 펼치는 그림자가 될 것입니다. 삶의 법칙이
          그런 것처럼, 산 것들은 그 기둥 속으로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빨려 들어갈 것입니다. 그 기둥들은
          우리의 머리를 삶의 순간 순간 숙여지게 할 것입니다.
            우리의 머리를 숙여지게 하는 것은 아주 작은
          것들이 될 것입니다. 아주 작은 한 알의 사과가, 아주
          작은 한 알의 포도 씨앗이, 아주 작은 한 알의
          홀씨가, 아주 작은 새 한 마리가, 보잘것없는 한 줌의
          흙이, 복권 당첨이라든가 그런 커다란 일이 아닌
          하찮은 어느 날의 '행운'이, 어느 날의 약간 두꺼운
          지갑이.....
            (合拘之木 生於毫末 九層之臺 起於累土, ..... ----
          老子)
            우리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큰 '행운'이
          항상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열매들이 작고 작듯이,
          그러나 그것들은 어느 날 한 큰 나무를 키워 내듯이,
          작고 작은 먼 하늘의 별 하나가 어느 날 문득 희망이
          되듯이..... 우리는 순간 순간 조금씩 감동하며
          그래서 낮게 고개를 수그리며 살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 그렇게 세상은 이어져 온 것일
          것입니다.
            실로 행복이란 무엇일까?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이란 활동적인 삶이 주는 보상이라는 말을
          하였다지만, 또 어떤 철학자는 따스한 강아지 한
          마리라고 주장했다고도 하는 그것, 하긴 수치를
          좋아하는 요즘 세상은 '행복'도 몇 개의 만족도로
          나눠 수치로 표현하기도 한다지만 (옥스퍼드대에는
          행복 연구소가 있다고 합니다) 사실 그런 몇 개의
          수치로 표현된 만족도 속에 행복이란 것이 있을
          것인지, '행복'이란 것을 연구 분석하는 일이 과연
          가능할 것인지.
            그러나 아무튼 돈이라든가, 그런 물질적 재화에
          속하는 것이 전부가 아닌 것만은 분명합니다.
          언제인가, <뉴스위크>지에서는 그 행복 차트를
          발표하면서, "행복 차트의 챔피언은 인간 관계 즉
          가까운 관계들, 그 다음은 행복한 결혼 생활 그리고
          종파를 막론한 종교적 신앙 생활로 이어진다"고
          했습니다만, 그러나 이러한 삶의 부분들이 결코
          '차트'같은 것으로 인지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보다 그것들은 마음의 상태, 또는 마음
          자리에 따라 여러 모양으로 변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나는 어느 날 버스를 타고 가다가 의자에 앉아
          있거나, 또는 창 밖을 내다보는 무수한 얼굴들 속에서
          섬광과 같이 무엇인가가 지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섬광은 "우리는 모두 저마다 자기가 어떤 '정상'에
          서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 섬광은
          "나는 지금 속상하다, 속상하다.....(나는 지금
          고뇌와 슬픔의 정상에서 있다.)"혹은 "나는 지금
          바쁘다, 아, 바쁘다.....(나는 지금 바쁨의 정상에 서
          있다.)"혹은 "거기 가면 돼, 그 사람이면
          돼.....(나는 지금 희망의 정상에 서 있다.)"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지금 슬픈 사람은 자기의 슬픔만이 최고의
          것이라고 생각하며, 오늘 고뇌에 차 있는 사람은
          자기는 오늘 고뇌의 끝에 서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
          것이었습니다.

            버스가 지나가는 그 좁은 길에는 흐린 허공으로
          솟대들이 높이 솟아 있는 점집들이 늘어서 있습니다.
          '()()천상선녀''()()동자''()()보살''()()도인' .....
          허술한 담벽에 붙어 있는 간판들도 가지가지입니다.
            높이 솟은 솟대에는 어김없이 빨간색 또는 파란색의
          헝겊이 바람에 날리고 있고 먼지를 뒤집어쓴 채 그
          점집들의 창들은 굳게 닫혀 있습니다.
            마치 '지상의 모든 섬광들이여, 내게로 오라'고
          하는 듯이 은밀하게 눈짓을 하며, 그 창들은 굳게
          닫혀 있기에 더욱 그런 은밀한 욕망을 일으키면서 서
          있습니다.

            실로 행복이란 무엇일까.
            우리의 행복한 마음 자리란 어디일까.

            한 소년이 유머처럼 생각 나 혼자 피식 웃습니다.
            그는 어느 날의 지하철에서 만난 맑은 목소리의
          주인공입니다. 그는 깡마른 체구에 반짝이는 눈동자를
          굴리면서, 지하철의 사람들을 헤집고 나가며 소리치고
          있었습니다.
            "국민 여러분, 싱싱한 오늘의 신문이 나왔습니다!"
            지하철 안에는 잠시 낮은 웃음 소리들이
          맴돌았습니다. 어떤 이는 손잡이를 잡은 채로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소년을 돌아보았고, 어떤
          이는 얼굴을 씰룩거리며 앉은 자리에서 엉덩이를
          들썩들썩 바로 잡기도 하였습니다.
            "동포 여러분, 싱싱합니다. 방금 나왔습니다."
            마치 바다에서 갓 잡아 온 생선이라도 팔고 있는
          듯이 소년은 지하철 바닥을 튀어 올랐습니다. 그리고
          생선이 지금 펄떡펄떡 뛰고 있는 것과 같이 두 팔로
          신문을 쓸어 안고 있었습니다. 반으로 얌전하게 접힌
          신문들이 소년의 팔 안에서 갑갑하다는 듯이 바깥을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소년의 옷은 남루했습니다.
          어른의 점퍼를 얻어 입은 듯 그것은 소년의 마른
          몸에는 너무 컸습니다. 그러나 그 남루한 잿빛의 옷에
          매달린 소년의 그 뛰는 걸음은 힘차고 희망에 넘쳐
          있었습니다. 나는 그 숨찬 희망에 머리를 수그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몇 사람이 소년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습니다. 그 싱싱한 희망에.
            (우리의 '섬광'들은 실은 '희망'이 아닐까요?
          그러니까 행복한 마음 자리는 '희망'의 마음 자리가
          아닐까요?)
            소년의 남루한 희망은 또 한 남자를 생각나게
          합니다. 자갈치 시장에서였습니다.
            그는 햇빛에 얼굴이 금세 타기라도 하고 있는
          것처럼 검붉은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손에는 줄에 길게 꿴, 생선을
          들고.
            "지금 배가 떠나요, 지금 배가 떠난다니까요....."
            의아해서 걸음을 멈춘 나를 보자 그는 얼른 줄에 꿴
          생선을 흔들며 내 앞으로 달려 왔습니다.
            "배가 금세 떠납니다요..... 이걸 팔고 가려고
          하는데..... 바다에서 조금 전에 잡은 거요..... 염려
          마십쇼, 정말입니다."
            나는 생선을 자세히 살필 겨를도 없었습니다. 내가
          돈을 꺼내는 시늉을 하자 그는 줄에 꿴 생선을 내
          팔에 걸쳐 놓고, 돈을 꺼내자마자 잽싸게 돈을
          잡아채서는 뛰어가 버립니다.
            죽 줄에 꿰어져서 나를 바라보는 생선들의 눈앞에서
          나는 잠시 멍하게 서 있었습니다. 그런 얼마 뒤 나는
          그 남자가 다른 사람을 붙들고 있는 광경과
          마주쳤습니다.
            "배가 곧 떠납니다. 배가 떠난다니까요....."
            그렇게 외치는 남자는 그 순간 정말로 '배가
          떠난다'고 믿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불현듯 우리의
          삶이 '배'임을 깨우쳐 주는 그 목소리, 나는 내가 산
          생선이 바다에서 갓 잡은 것이 아님을 알았지만 그는
          소리치고 있었습니다. '배가 떠납니다.' 따가운 햇살
          아래서 그 목소리는 다급하게 나의 가슴을 울리고
          들어왔습니다. 우리의 '배---- 삶'을.
            나는 시장 한가운데서 나를 속인 그 사람에게
          아무도 몰래 고개를 숙였습니다. 그는 거기 시장 속에
          잘못 '떨어진' 성자(聖子)인지도 모릅니다. 그는
          잃어버린 우리의 '그 무엇인가'를 지금 그 바다
          냄새에 절어 버린 바지와 바닷바람에 찢어진 윗도리로
          소리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탄 지하철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집이,
          지금 내가 다니고 있는 길이..... 배처럼 느껴짐이나,
          우리가 함께 보는 저 많은, 물위의 빛의 기둥들, 저
          바다에 눈물의 기둥을 드리우고 있는 진짜 배들처럼
          나의 이 배도 땅에 짙은 그늘 하나를 보태고 있을
          것입니다.
            실로 행복이란 무엇일까.
            우리의 행복한 마음 자리란 어디일까.
            그것은 나의 '섬광'을 버리고, 우리의 삶을 가끔은
          큰 배로 느끼면서, 그러나 희망을 가지는 일이
          아닐까. 그것도 큰 배들 속에서의 작은 배라는, 관계
          속에서의 희망을 가지는 일이 아닐까?
            나는 가끔 혼자 치르는 의식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 심장에 풀무질을 하는 그런 것입니다. 가령
          인공 호흡 같은 것을 시키는 광경을 상상하면서 나는
          내 심장에 풀무질을 합니다.....
            이 작은 집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하찮은
          나의 가방을 쓰다듬을 수밖에 없습니다..... 실은 그
          속에 여러 뿌리들이 살고 있는, 그저 한 작은
          매듭으로서의 집이며 가방인 나의 것들, 이것들이
          그러한 관계 속이 아니라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 작은 눈물의 기둥들 속에서 나는 심장에 가끔
          풀무질을 하는 수밖에..... 그리고 기다리는
          수밖에.....
            그 어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는 할 수 없데이. 할 만큼은 했으니."
            지난번에 텔레비전의 어느 채널에선가 방영한 독도
          다큐멘터리에서 태풍에 대비하는 일을 하고 난 어부
          노인의 말입니다. 높이 쳐 오는 파도, 거세지는 바람,
          그 앞에서 할일을 다 마친 노 어부는 그런 말을 하고
          담담히 태풍을 기다립니다.
            그렇습니다. 할 만큼 하고 기다리는 수밖에, 그
          기다림 뒤에서 작은 한 알의 열매라든가 한 알의
          홀씨가 지상에 소리 없이 스며들 것입니다.
            오늘 어디서인가 저 밤바다 위로 오고 있는 그대는
          우리가 얼마나 작은가를, 그 눈물의 기둥들을 더 길게
          하면서 속삭여 주고 있습니다. 세상에 태어난 지 일
          년도 못 돼서 죽은 나의 아이, 영수처럼. 그러나 작은
          것들은 또한 얼마나 큰 것인가라고 눈물의 줄기
          속에서 힘들게 속삭여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희망
          때문이다'라고 속 깊이 외치고 있습니다. 나의 작은
          '영수'도 그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기다림은 우리의 남은 희망입니다. '관계 속에서의
          희망'입니다.
            눈부신 여름의 노래를 부르는 매미는 겨우 이삼 주
          그 노래를 부를 수 있을 뿐입니다. 매미의 애벌레가
          거의 사 년간 땅 속에 있는 것을 우리는 너무 잘
          압니다. 그것은 겨우 며칠을 햇볕 아래 있을 뿐이며,
          그런 다음엔 껍질로써 지상에 봉사할 뿐입니다.
            기다림은 우리를 살찌게 하고 있을 것입니다.
          기다림이 지상에 소록소록 퍼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세상의 모든 나무들이 뿌리의 소식을 기다리듯이,
          세상의 모든 어머니가 아들을 기다리듯이, 율리시스가
          이타카의 고향을 기다리듯이, 우리는 우리의 배가
          어디로인가 보이지 않는 곳의 희망을 찾아가고 있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 어머니는 전쟁 때 집을 나간 아들을 기다려
          오두막집을 전혀 고치지 않고 수십 년을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아들이 떠날 때처럼
          굴뚝에선 밥 짓는 연기가 나야 했으니까요.
            기다림은 우리를 두껍게 지상의 밧줄에 연결시킬
          것입니다. 우리는 그 밧줄을 들고 지상에 닻을 내릴
          것입니다. 우리는 사소하게, 하찮게 살아가지만
          기다림이라는 보석이 있어 우리의 사소함을 세상에
          붙들어 매는 것입니다.
            어디서 그대가 자꾸 오고 있습니다. 이제 배가
          떠납니다. 삶의 슬픔들을 어느 뿌리엔가로 스며들게
          하러, 우리의 배인 집으로 우리도 떠나야 합니다.
          거기 열매들이 보이지 않는 뜰로 퍼지며 새로운 꽃을
          키우고 있는 곳, 사소하게 사소하게 슬픔들이 자라고
          있는 곳으로..... 우리는 사소하고 사소합니다.
          그렇게 우리의 눈물 기둥들은 지상에 우리의 그림자가
          되어 던져지고 있습니다.

            .....
            하찮은 것들의 피비린내여
            하찮은 것들의 위대함이여 평화여

            밥알을 흘리곤
            밥알을 하나씩 줍듯이

            먼지를 흘리곤
            먼지를 하나씩 줍듯이

            핏방울 하나 하나
            그대의 들에선 조심히 주워야 하네

            .....
            ---<그대의 들> 중에서

            그대인 당신께 감사합니다.

            16. 가방

            그것은 연록색의 가죽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앞면에는 연한 초록빛의 섀미 가죽의
          덮개가 덮여져 있고, 뒷면은 그것보다 좀 짙은
          초록색을 띠고 있는 보통 가죽으로 되어 있어 그 두
          색깔이 아주 잘 어우러지고 있을 뿐 아니라, 섀미
          가죽의 덮개에는 금색의 장식이 붙어 있어서 가방의
          우아함을 더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가방의 특징은 그러한 우아한 색깔의
          배합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주머니가 아주 많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금장식의 앞 뚜껑을
          들추면 우선 한 개의 주머니로 된 부분이 나옵니다.
          뒷면의 가죽도 물론 이중으로 되어 있어서 넓은
          주머니 부분을 쓸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정작
          가방을 열면 그 안도 여러 개의 칸으로 나뉘어져
          있고, 속의 한쪽에는 지퍼가 달린 작은 주머니 부분이
          또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가방은 앞면의 섀미
          가죽(무척 고급스러워 보입니다)과 거기 붙어 있는
          금색 장식 때문에 귀부인의 정장 차림에 어울리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으나, 속을 보면 여러 개의
          칸으로 나뉘어져 있어 '일하는 사람'의 실용적인
          가방으로 아주 안성맞춤인 것입니다.
            저는 이 가방을 몇 년 전 어떤 유명한 가방
          가게에서 상품권을 두 장이나 주고 거기에 또 현금을
          덧붙이는 '출혈'을 하면서 샀습니다.
            가방 가게의 가방들을 거의 전부 한 번씩 들었다
          놓아 보고, 들고 있던 책을 넣어 보고 꺼내 보고
          하면서, 그러니까 몇 시간이 걸려 겨우 고른
          것이었습니다. 저 나름대로는 '가방 같은 것에' 아주
          큰 투자를 한 셈이었습니다. 물론 가방 가게의 키가
          크고 말쑥한 점원의 한 마디가 저의 선택을
          '결정적으로'부추겼지만 말입니다.
            "아주 점잖죠? 그러면서도 세련되었구요? 웬만한
          파티 같은 데 들고 나가셔도 무난하구요. 그러면서도
          실용적이죠. 값이 좀 비싼 게 흠이지만."
            점원의 그 말에 저는 아주 여왕 같은 기분이
          되어서, 그러니까 당장 나가야 할 파티가 있는
          귀부인의 심정으로 그 가방을 집어들었습니다.
            "이거 하나면 학교에도 가고, 모임에도 가고,
          여행도 하리라....."
            회심의 미소마저 지으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그날 오후, 친한 친구가 집에 온 길에 그
          가방을 자랑스레 내놨더니, 글쎄 친구가 '깔깔'
          웃기까지 하면서,
            "할머니가 들면 꼭 좋겠네, 아직 참아, 참아 ----"
          하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친구에게 그 가방을 또 내밀어 보았습니다.
          뭐랄까, 저로서는 너무 거금을 투자한 것이었으므로
          좀 울상이 되어서 말입니다. 그러나 대답은 역시
          비슷한 것이었습니다.
            "편리하긴 하겠는데, 좀 나이가 든 다음에 들면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우아하다는 평은
          아무도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또 그것을 미술을 하는 딸에게 보여
          보았습니다. 그녀의 안목과 감각은 평소 내가
          신뢰하고 있기에.
            "글쎄, 엄마..... 빛깔은 괜찮은데, 요술 할머니
          가방 같애. 나중에 나이 더 드시면 드세요."
            딸은 '요술 할머니 가방'이라는 구절에 목소리를 좀
          높이기까지 하였습니다.
            나는 그만 실망하여 그것을 옷장 깊숙이 넣어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될 수 있는 대로 눈에 안
          띄도록..... 긴 겨울 옷 뒤켠에. '저것을 들 때까지
          나는 결코 늙지 않으리라.....' 투덜거리며. 거기에
          투자한 현금을 생각하니 배가 아파 올
          지경이었습니다. 물론 나의 '안목'에도 실망하며,
          아니 화를 내며, '다시는 상품권 따위로 물건을 살
          생각은 없다'고 혼자 선언하며. 하긴 상품권으로
          물건을 사는 경우, 그것에 값을 맞추다 보면 마음에도
          없는 물건을 억지로 사게 되는 일이 많으니까.....
          이번도 그런 경우라고 애써 자신을 설득하며.
            그러다 며칠 전 여행을 떠나는 친구의 가방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가방도 주머니가 옆에 붙어 있는 등
          아주 실용적으로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참, 가방이 편하게 생겼네, 옆에 주머니가 있어서
          차표 넣기에 아주 좋겠군."
            저의 말에 친구는 그것이 '외제'임을
          강조하였습니다. 우리는 '국산품'의 한심함에 대해서
          한창 중얼거렸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에게도 '주머니
          많은' 국산품 가방이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습니다. 집에 오자마자 저는 옷장 속에 보이지
          않게 감추어 둔 그것을 끄집어냈습니다. 가방 뚜껑을
          여니 속에 잔뜩 넣어 둔 신문지 뭉치들이 좋아라고
          뛰어나왔습니다.
            아마 몇 년 만에 햇빛을 보는 것일 것입니다.
          신문지의 날짜를 보니 1986년 5월이었습니다. 빛깔은
          역시 그대로였습니다. '아, 그래, 이걸 여행 가방으로
          해야지.' 일박 이일쯤의 코스에는 아주 적당하게
          보였습니다.
            '왜 그 생각을 미처 못 했을까, 그런 짧은 여행들이
          그 동안 꽤 있었는데.....'
            이리저리 가방을 쓰다듬으니 가방도 이제 제 할
          일을 찾아 즐거운 듯이 보였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옷장 깊이 넣어 두기에는 아까운,
          '우아한'가방이었습니다.
            '왜 그 생각을 미처 못 했을까.'
            책상 위에 그것을 올려 놓으니, 금색의 장식이
          따스한 햇살 속에서 마치 기지개라도 켜는 듯이
          눈부시게 빛나 왔습니다. 이 모든 햇살을 자기의 지금
          비어 있는 주머니에 넣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그렇구나, 나는 가방 하나에 모든 걸 다 넣으려
          하였구나.'
            말하자면, 정장 차림에도 어울리는 가방,
          그러면서도 학교에 갈 때는 책을 넣고 갈 수 있는
          가방, 쇼핑 갈 때도 가져 갈 수 있는 가방, 나는 그
          모든 것을 저 하나의 가방이 다 이루어 주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자주 모든 것을 자기의 그릇 안에
          다 집어넣으려고 하는 것처럼.
            그랬으므로 그 중 어느 한 가지도 담지 못한 채
          옷장 어두운 곳에 감춰지는 형편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보면 저는 단순히 하나의 가방을 감추어
          둔 것이 아니라, '저'를 감추어 두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 음습한 곳에, 모든 걸 담고 싶은 두꺼운
          욕망에 가득 차서.
            '..... 그 속에 건강도 집어넣고, 성공도 집어넣고,
          지성도 집어넣고, 평화도 집어넣고, 행운도 집어넣고,
          꿈도 집어넣고.....'
            그 가방 하나를 잃어버리면, 전부를 잃는 것이 될,
          얇은 욕망에 가득 차서.
            '미스터 빈'이라는 코미디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여행을 떠나려는 '미스터 빈'이 가방을 찾습니다.
          그런데 찾고 보니 가방이 너무 조그맣습니다. 넣을
          것은 많고..... 그래서 생각다가 '미스터 빈'은 할 수
          없이 물건들을 모두 작게 자릅니다. 예를 들면 바지도
          반으로 자르고, 치약도 반으로 자르고..... 가능한 한
          크기들을 줄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 작은 가방에
          필요한 것들을 다 넣습니다. 그러나 방을 나가려는
          순간 침대 밑에 큰 가방이 있는 것이 눈에 띕니다.
          기가 막혔지만 일은 이미 끝나 버린 후였고, 그래서
          '미스터 빈'은 우스꽝스럽게도 큰 가방에 작은 가방을
          넣고 간다는 내용입니다.

            우리 모두 너무 무겁게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보다
          많은 것을, 보다 빨리, 보다 크게 자기의 가방에
          담으려고 야단들이라고나 할까요.....
            어떤 한 종류의 가방에는 그 종류에 맞는 것만을,
          그 크기 안에 들어가는 것만을 넣어야 하는데도.....
          아니 넣지 않을수록 좋은 것입니다. 되도록 가볍게
          들고 가야 길을 잘 갈 수 있을 것을.....

            보다 가벼운 당신에게 .....감사합니다.

            17. 버림의 시대를 위하여

            장님 거미를 아십니까.
            그 작은 거미의 몸뚱이엔 수십 개의 발이 마치
          춤이라도 추는 것처럼 쉬임 없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거미 전문가의 설명에 의하면 그발 ---- 정확히
          말하면 다리라고 해야겠지요 ---- 에는 거미 특유의
          촉수가 달려 있어서, 앞의 사물들을 감지하기 위하여
          번갈아 흔드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번갈아
          가며 그 발을 흔드는 모습을 카메라로 확대해 놓으니
          그렇게 즐거운 모습으로 보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치 이 세상에 발 딛고 있는 것이 너무 즐겁고
          기뻐서, 온몸으로 춤추고 있는 것 같은 것입니다.
            거미의 그 즐거운 몸짓을 떠올리면서 당신에게
          편지를 씁니다. 당신에게서는 오늘도 답장이 없지만,
          그러기에 저는 또다시 쓰는 것입니다. 거미의 춤은
          사실 자기를 버리는 자의 그것이 아닐까 싶어서
          말입니다. 말하자면 한 다리를 들 때 다른 다리는
          앞의 사물을 더듬습니다. 앞의 사물을 더듬기
          위해서는 다른 다리는 땅을 버리고 공중에 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순간 순간의 버림의 동작이 그
          아름다운 생명의 춤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곳의 계곡은 어떤 모양을 하고
          있을까요?
            언젠가 그곳에 갔을 때 거기 계곡을 흐르는 물은
          특별한 초록빛이었습니다. 안내자의 설명은 블루
          사파이어의 가루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곳의 물
          빛깔이 초록인 것을 보고 이상하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알아낸 것이었던 모양입니다. 그곳 산에는 원체
          옥돌들이 많으므로, 거기 흐르는 모든 물에, 그
          가루가 조금씩 섞이다 보니 그런 빛깔을 띤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직 나의 이름을 부르지 말아 주십시오.
            무섭게 겨웁도록 날이 차서
            소리하며 당신이 일어설 때까지
            당신의 가장 눈부신 어둠 속에
            나의 이름을 감추어 두십시오.

            릴케의 <돌>이라는 제목의 시의 한 구절입니다만,
          거기 깔려 있는 무수한 돌 속에는 옥빛의 블루
          사파이어들이 숨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들이 지금쯤
          어떤 모양으로 길 위에 나앉아 있을지 보고 싶습니다.
          그것들은 지금도 순간 순간 자기를 덮고 흐르는
          물들을 흘려 보내면서 ---- 버리면서 자기의 얼굴을
          닦고 있겠지요.
            저도 순간 순간 '버려야겠다'고 생각은 합니다만,
          그것이 잘 안 됩니다. 제가 끊임없이 불안하고,
          공포스럽고, 골치 아프고 하는 이런 것들이 실은
          '버림'을 실천하지 못해서 그러는 것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말입니다.
            거대한 물질의 숲이 우리 앞에 벌어지고 있습니다.
          물질들 앞에서 개인은 한없이 사소해지고,
          왜소해지며, 하찮아집니다. 생명마저도 이 물질의 숲
          앞에선 별 의미가 없어지고 있습니다. 이 지상의 어느
          구석에선가, 어떤 생명인가가 사라진다 해도 거대한
          이 물질의 숲은 꼼짝하지 않을 것입니다.
            물질이 생명마저도 제압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긴
          이런 것들은 모든 생명들이 물질의 체계에 속하려고
          했던, 근대 이후의 정신적 습관에서 기인했다고
          봐야겠지만, 아무튼 그렇게 해서 생명은 ---- 아니
          개인은 물질의 노예화, 나아가 물질화의 길을
          걸어왔으며, 그러다 보니 이제 각 개인은 지상의
          주인이 아닌 손님의 자리로 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잘 버리는 일 ---- 현대의 숙제인 것이 분명합니다.
            잘 버리는 일이 잘 얻는 길임 ---- 분명합니다.
          저의 구석 구석에 스며 있는 이 물질화의 습성들 ----
          당신이 버렸듯이 버리게 하십시오.
            완전한 버림 위에서만 하나의 큰 창조가 일어설 수
          있음을 알게 하십시오.
            모든 꽃은 열매를 버린 위에 일어서고 있음을
          깊이깊이 꿈꾸게 하십시오.
            그 초록빛의 블루 사파이어가 숨어 있을 돌들, 실은
          물을 버리고 바람을 버린 뒤에 앉아 있는 것임을
          꿈꾸게 하십시오.

            18. 공포가 누워 있는 고독한 섬

            치대국 약팽소선(治大國 若烹小鮮)

            멈칫 높아진 하늘을 바라봅니다. 신동엽 시인이
          자신의 수필 속에 써 놓은 노자의 글귀가 생각납니다.
          치대국 약팽소선(治大國 若烹小鮮), 나라를 다스림을
          작은 생선을 지짐과 같이 하라는 말입니다. 작은
          새선을 지지는데 괜히 요란하게 뒤집고 젓가락으로
          쑤셔 대고 한다면 생선살이 다 해어져 먹을 것이
          아무것도 남게 되지 않을 테니 조심스레 다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동엽 시인은 이 글귀를 인용하면서 자기도 자신의
          인생을 조심스럽게 다루고 싶다는 유의 소원을
          토로하고 있는데, 그 소원을 오늘은 나도 나누어 갖고
          싶습니다. 조용히 자기 인생을 다스리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도시는 마냥 정겨울 것이란
          생각을 해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 이 사회는
          높아진 하늘 아래라고 하여 그런 생각을 받아들이지는
          않겠지요.
            모두들 어디론가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거리는
          달리는 사람들로, 달리는 차들로 메어질 듯합니다.
          이마는 성취에의 땀으로 번들거리며 앞을 바라보는
          눈들은 모두 조금씩 충혈되어, 시장으로 시장으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시대가 우리를 부르는 곳은 한 커다란
          시장입니다. 노동을 팔든, 옷가지를 팔든, 기술을
          팔든.....
            이 시대는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약삭빠르게 팔아야
          한다고 소리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또 약삭빠르게
          사야 한다고 소리칩니다.
            덕분에 주식 청약을 하는 지방 은행이 그 외침에
          터져 나갈 듯합니다.
            아파트를 사든지, '철거민 딱지'를 사든지..... 이
          시대는 끊임없이 사라고 외치고, 아니 명령하고, 그
          외침에----명령에 사람들은 또 정신없이 뛰어들
          갑니다. 재빨리 사고 재빨리 파는 사람이 힘센 사람이
          된다고 소리칩니다.
            인도의 성자 이야기 중에는 참 재미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말랑 사히브라는 성자에 관한
          이야기인데, 그 성자는 실은 밀수꾼이며 알코올
          중독자인 모띠라는 사람이라는 것이 이야기의
          줄거리입니다. 모띠가 성자로 대접받게 된 것은
          순전히 회색의 긴 머리칼과 수염, 그리고 벌거벗고
          앉아 있는 자세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그런 모양새를
          하게 된 것은 물론 술 때문이었습니다. 어느 날
          동업자가 경찰에 잡혀간 이후로 그는 그들이 아지트로
          사용하던 빈 절간에 술에 취한 채 그렇게 앉아 있게
          되었는데, 그런 그의 앞에 몇 사람이 와서 절을 하고
          간 이후로 그는 유명한 성자가 되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를 초월의 경지에서 가부좌하고 있는
          '도사'로 안 것이었죠.
            사람들은 말 한마디 없이 벌거벗고 앉아 있는
          그에게 술과 온갖 향내 나는 차와 음식들을 갖다
          바칩니다. 그러면 그는 말 한마디 없이 술병만을 들고
          병째로 마셔 버립니다. 결국 어떤 상인이 그 벌거벗은
          성자의 모습을 버터 선전 상표로 사용하여 큰 돈을
          벌게 되고, 성자는 그 버터가 팔리는 곳이면
          어디서든지 유명해지게 됩니다. 그러다 어느 날
          그에게 새 절을 지어 주는 축제의 꽃가마 위에서 그는
          술을 마시다 그대로 죽어 버렸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겐 공중을 날고 물 위를 걷는 성자의 신화를
          남기고.
            그렇습니다. 거리를 달려가는 오늘의 많은 우리들은
          이 '술취한 성자'에게 경배하는 무리들과 비슷한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달려가고 있는 곳이
          어디이며 무엇을 향한 곳인지를 모른다는 뜻에서
          말입니다.
            '사고 팖'만이 최대의 관심사가 되고 있는
          이곳,'사고 팖'에서 오는 이익만이 '자유'라고 믿는
          이곳, 어찌 보면 '물질의 한 큰 왕국'인 이곳에서.
          그러므로 우리들은 모두 한 곳을 향하여 좀좀 좁아
          터지는 길을 달릴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텔레비전에서 이리 가라고 하면 모두 이리로
          갑니다. 조간 신문에서 저리 가라고 하면 모두 저리로
          갑니다. 텔레비전 ---- 신문은 말하자면 '술취한
          성자'의 조수쯤 되어 있습니다. 그것들은 우리에게
          필요한 만큼의 정보와 정서, 보다 없어도 좋은 또는
          없었으면 더 좋을 정보와 정서들을 팔며, 사상들을
          팔며, 동시에 명령도 팝니다. '한 가지 생각'들을
          팝니다. 그리고 다양한 상품의 그림과 함께 '자유'의
          그림을 팝니다.

            우리 동네 약수터 이야기를 하지요. 하긴 어느 동네
          약수터도 대개 비슷한 모양새를 하고 있겠습니다만
          우리 동네 약수터는 좀 특수합니다. 우선 약수터
          주변이면 으레 있는 나무라든가 풀이라든가 공터
          따위가 없습니다. 그것은 택지를 만들기 위해
          벌거벗겨진 산꼭대기에 급히 만들어진 약수터이기
          때문이지요. 만들어졌다기보다 땅을 그저 '팠다'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돌투성이의 언덕을 올라가다
          보면 그것은 마치 벌거벗은 듯이 부끄럽게 얼굴을
          내밀고 있습니다. 아니 눈물을 내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인가 그 약수터에는 삼사십
          명도 넘는 사람들이 모여 웅성이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고함 소리도 들리게 되었고, 물을 한 번
          받으려면 두서너 시간은 족히 걸리게 되었습니다.
          국민학교 아이들의 방학이 끝난 날에도 물을 받는
          사람의 줄은 한참씩 이어지곤 했습니다.
            수돗물에 관한 보도가 텔레비전으로 신문으로 터져
          나온 이후의 일이었습니다. 하긴 막연히 수돗물은
          엉망이리라는, 외국인은 수돗물을 안 마신다는 생각이
          퍼져 왔었지만, 그것이 막상 수치로 공식 보도되고
          보니 엄청난 '달림'의 행렬을 이 벌거숭이 약수터에도
          가져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한 달쯤 지난 약수터는 그리
          붐비지 않습니다. 얼마 기다리지 않고도 물을 떠
          옵니다.
            텔레비전이 물 이야기를 그만둔 이후부터의
          일이지요. 신문이 다른 '중요한 일'들에 신경을
          집중시킨 이후의 이야기지요.
            외침 소리에 익숙해 있는 사람들, 외침 소리라든가
          명령이 들리지 않으면 또 금방 잊어버리는 사람들
          ---- 우리들.
            그 거국적인 법석 속에 수도 요금은 소리 없이,
          또는 아주 당연하게 인상되었습니다.
            아무튼 한 방향으로 달리는 사람들 ---- 그들은 또
          수많은 달리는 사람들의 다른 행렬을 끌고 와 사람
          사는 마을의 몸무게를 자주 비대하게 합니다.
            많은 사람들 속을 비비며 달리다 보니, 서로가
          걸리적거려지고, 결국은 서로가 무서워집니다. 더구나
          서로의 관계 속에서 '사고 팖'의 이익의 문제가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이익은
          본질적으로 지킬 것이 있기에 생기게 되는 것이니
          '관계'는 더욱 무거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무서워진 도시 속에서 함께 한 방향으로 밀려
          가면서도 함께 고독한 섬이 됩니다. 공포가 누워 있는
          고독한 섬이.
            좀 바보스럽게 들리겠지만 '나와 열쇠'의 이야기를
          해야겠습니다.
            그때 나의 집은 길가에 있는 아파트의
          일층이었습니다. 아파트가 길가에 있다 보니 소위
          '잡상인'이 많이 왔습니다. 느닷없이 눌러 대는 벨
          소리가 날이 갈수록 가슴을 철렁이며 들려 왔습니다.
            게다가 텔레비전, 신문의 뉴스에는 매일 강도
          살인이니 하는 사건들이 들락거렸습니다. 현관문에
          튼튼한 열쇠를 하나 달았습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자 하나만으로 아무래도 참을 수가 없어서 컴퓨터
          열쇠라는 것을 거금을 주고 해 달았습니다. 창문에도
          알루미늄 섀시라는 걸 하고.
            문을 다 잠그고 앉아 있자니 내 꼴은 영락없이 감옥
          속에 앉아 있는 죄수 꼴이었습니다.
            그래도 무엇인지 자꾸 무서웠습니다. 텔레비전,
          신문은 여전히 사건들의 소식을 떠들고..... 그런데다
          무서움도 관성의 법칙을 가진 것인지 한 번 무서움을
          타기 시작하니 자꾸 무서워졌습니다. 또 하나의
          열쇠를 달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제서야 나는 깨달았습니다.
          열쇠는 달면 달수록 더 무서워질 것이라는 것을
          움켜쥐려고 하지 않는다면 손바닥은 경직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아파트 보다 더 높은 산꼭대기에 있는
          아파트는 아직은 이 근처에는 없으니까요.
            앞산이 꺼멓게 웅크린 아래로 수많은 집들의 불빛이
          마치 무슨 이야기들이라도 나누듯 다정하게 깜박이고
          있습니다. 파란 불빛도 있고 ---- 아마도
          형광등이겠지요 ---- 오렌지색의 불빛도 있으며 ----
          아마도 수은등 ---- 네온의 불빛인지 빨갛게 또는
          초록으로 반짝이는 십자등도 있고, 부챗살처럼 퍼졌다
          오므라졌다 하기를 끝없이 반복하고 있는 그런 불빛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체로 멀리서 보는 불빛들은
          따뜻하기만 합니다. 은밀한 이야기들을 가지고 있을
          듯합니다. 나는 그 하나하나의 불빛 아래서 엮어지고
          있을 이야기의 그림들을 생각합니다.
            저 푸른 불빛은 아마도 아직 밖에 나간 남정네가
          돌아오지 않은 여인의 한숨이 켜 놓은 불빛일
          것입니다.
            또는 아들의 늦은 귀가를 가슴 졸이며 기다리는
          늙은 어머니의 걱정이 묻어 있는 불빛..... 또는 작은
          딸아이에게 죽음의 극약을 내리려 하고 있는 고뇌에
          떠는 어느 젊은 어머니의 불빛..... 또는 내일의
          시험에 눈과 잠을 연신 부딪게 하고 있을 아이들의
          불빛.....
            아마도 저 부챗살처럼 퍼졌다 오므라졌다 하는 초록
          불빛은 네거리의 나이트 클럽의 네온일 것입니다. 그
          네온도 지금 많은 이야기를 펼치고 있는 중일
          것입니다.
            달리는 불빛들도 있습니다. 아마도 늦은 밤 집으로
          돌아가는 차들이겠지요. 그런데 저 불빛들 위 꺼멓게
          뚫린 하늘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원래 별이
          있어야 할 자리지요.
            그런데 오늘 별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
          아파트로 와서 별을 본 일이 별로 없다는 생각이
          납니다. 도시의 불빛이 너무 밝아져 그렇겠지요.
          별들이 자기의 빛을 던지기에는 땅의 빛들이 너무
          진한 것일 것입니다.
            지난 여름 남해의 한 마을에서의 밤을 기억합니다.
          한 국민학교 운동장에서 학생들과 밤하늘을
          쳐다보았는데, 마치 하늘의 천장이 휘어진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휘어진 하늘의 허리에 가득
          별들이 매달려 있었습니다. 별 옆에서 밤하늘은
          얼마나 새까맣게 물들고 있었는지요. 그 별의 강물
          아래서 나는 온몸이 씻겨지는 듯한 착각에
          빠졌습니다. 그 까만 하늘에 내 머리의 녹슨 한겹
          한겹이 깨끗이 닦여지는 듯한 충격도 받았습니다.
            하긴 순간 가만히 서 있는 별들이 이상하게
          보이기도 했습니다만, 쉴새없이 변하는 화면만 보다가
          갑자기 정지된 화면에 부딪친 것 같았다고나 할까.
            달리는 사람들, 달리는 차들 ---- 온통 달리는 것에
          익숙한 도시에서 온 나였기 때문입니다.
            아닙니다. 우리가 만든 것들에 의해 우리의 본래의
          것들이 깨어졌음을 그 순간 다시 느꼈기 때문입니다.
          공해가 그렇고, 우리의 물질 문명이 그렇고, 우리의
          상업주의가 그렇고, 물질이 되고 있는 우리의
          자유주의가 그렇습니다. 그것들은 우리를 쉼 없이
          깨뜨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는 사이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상품이 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명령 계통이
          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온갖 곳에서 싸움은 일어나고
          계속됩니다. 물질이 된 인간들의 전쟁이.
            '치대국 약팽소선'을 다시 한 번 중얼거립니다.
          그리고 작은 생선을 지지듯이 조심스레, 우리는 한
          번뿐인 이 지구 위에서의 삶을 살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술취한 성자'를 향하여 무작정 달려가는, 이 좁은
          길의 행진들은 이젠 그만 멈추었으면 좋겠습니다.
          문득 넓어진 길에 별처럼 확고히 서서 빛났으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별을 찾고, 우리의 등불을 그 별 밑에
          겸손히 켜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이 인간이 되는
          ---- 우리가 우리가 되는 길일 것입니다.

            19. 이리로

            가을엔 사람들아
            이리로 오라
            와서 너희들이 씨앗을
            거두어라

            길은 멀다
            옥수수 넘어진 밭그늘까진
            아직 한참 가야 한다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드디어 창이 흔들린다
            무서워 말라
            제 그림자를 결코
            무서워 잊지 말라

            또다시 아침을 맞고 싶거든
            태양을 영영 보내지 않으려거든
            이 깊은 뿌리 보아 두려거든

            이리로
            가을엔 사람들아
            ---<이리로>

            한밤중에 창문 앞에 서서 골목길을 내다보신 일이
          있으신지요? 흐린 가로등 밑에서 집으로 오는 길이
          마치 꿈속처럼 희미하게, 무더기 무더기 모여 서 있는
          집들이 어둠 속에서 조금씩 몸을 흔드는 듯한 착각을
          주며 고개 숙인 채 서 있는 것을 내다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그 길 위에 잡풀이라도 혹 돋아 있다면
          어둠 속에서 그것들은 다만 한 그림자로서만 앉아
          있는 것을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그런데 오늘 밤 창 밖을 내다보고 서 있는 나의
          귀에는 어젯밤까지도 전혀 들리지 않던 소리들이 가득
          몰려들어 왔습니다. 어둠 속, 어느 구석에선가
          쉿쉿거리는 끊임없는 소리들. 어떤 것은 코 고는 소리
          같기도 하고, 잠자리에서 뒤척이는 소리 같기도
          하고.....
            소리는 계속 들려 왔습니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가만히 몸을 움직여 보았습니다. 아하 그렇구나,
          감각이 좀 느린 나는 그제서야 그것이 가을 벌레의
          소리인 줄을 깨달았습니다. 어둠 속 어느 구석에선가
          벌레들이 울고 있었습니다.
            아, 그러니까 이제 생각이 납니다. 언젠가 살던
          아파트에서는 ---- 그 아파트는 길가에 있는 이층짜리
          아파트였고, 나의 집은 길가에 면한 일층에 있었다
          ---- 어느 날 갑자기 밤이 되자 현관문 밖에서 코
          고는 소리 같은 것이 들려 왔습니다. 처음엔 나는
          그것이 누구인가 코 고는 소리인 줄로 착각했습니다.
          그래서 방음벽을 제대로 설치하지 않은 아파트 시공
          업체를 욕했습니다. 그러나 며칠 후에도, 옆집 사람이
          꽤 오래 전부터 출타중이라는 사실을 알고 난 그 며칠
          후에도 그 소리는 계속 들려 왔습니다. 나는 분명
          누구인가가 길에 면해 있는 아파트 복도에 들어와
          자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더러 그런 일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터였기 에 신경이 날카로워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밤을 꼬박 앉은 채 새우고
          새벽이 되어 문을 살짝 열어 보면 코 고는 소리의
          주인공은 이미 나가 버렸는지 없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나는 그때 열쇠를 하나 더 현관문에 달았을 뿐
          아니라, 그때 생긴 공연한 무섬증 때문에 한참
          고생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저 소리였던 것입니다. 코 고는 소리,
          어떤 때는 하품하는 것 같기도 하고, 뒤척이는 소리
          같기도 한 저 소리.....
            벌레들은 아마도 어느 고개 숙인 잡풀 밑에서, 또는
          어느 그림자의 담 밑에서 울고 있는 것이겠지요. 그
          작은 몸집으로, 아마도 더듬이로써만 그림자와 흙과
          풀잎의 연약한 몸을 감지하며, 하루나 이틀 또는
          일주일을 넘기지 못할 그들의 삶을 뱉어 내고 있는
          것이겠지요.
            그렇습니다. 살아 있는 것들이란 크기의 차이가 좀
          있을망정 얼마나들 작고 힘 없는 것인지요? 그
          살아가는 날들이란 개체 하나하나로 보면 얼마나
          형편없는 것인지요?
            그러나 오늘 밤 시작된 하나의 저 벌레 울음 소리는
          내일 더 많은 벌레 울음 소리들을 데리고 오겠지요.
          그렇게 하여 저 가냘픈 소리의 선(線)은 수십 년
          수세기로 이어지겠지요. 저 가난한 잡풀들도 이제
          오는 가을볕에 여물고 여물면서 더 많은 가난한
          뿌리들을 이 세상에 던지겠지요.
            작고 가는 그것, 그러나 작고 가늘기에 오늘 밤
          가을 앞에 앉은 나를 더욱 감동시킵니다. 저렇게 가는
          소리들이 모여 결국은 밤을 움직이고, 계절을
          돌리고..... 저렇게 작은 것들이 모여 결국은
          지구라는, 이 큰 별을 돌리는 게 아니겠는가 하고
          말입니다.
            때는 이제 작은 것들에 귀 기울일 시간인 것입니다.
          지난 여름엔 결코 듣지 못하던 것들에의 경도(傾倒).
            어떤 시인이 '지난 여름은 위대했습니다'로
          시작되는 시를 썼던가요?

            주여, 마침내 때가 되었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당신의 그림자를 해시계 위에 얹어 주시고,
            들판에는 바람을 풀어 놓아 주소서.

            마지막 열매들이 탐스럽게 살찌도록 분부해 주시고
            그들에게 이틀만 더 남국의 날들을 베풀어 주소서.
            열매들이 익도록 재촉해 주시고
            무거운 포도 송이에는 마지막 단맛이 들도록 하여
          주소서.

            지금 집 없는 사람은 앞으로도 집을 짓지 못할
          것입니다.
            .....
            ---릴케, <가을날> 중에서

            지난 여름은 진정 위대했습니다. 크고 힘세고
          빛나는 것들만이 세상을 뒤덮었습니다.
            태양은 강렬할 대로 강렬했습니다.
            한번 비가 내렸다 하면 큰물이 져 내리는 폭우가
          되었습니다.
            바람도 곧잘 태풍이 되어 땅을 할퀴었습니다.
            사방에서 작은 것들은 커지기 위하여
          몸부림쳤습니다.
            그러다 보니 여기 살고 있는 인간의 삶들도 크고
          빛나는 것들만 찾아 헤매는 한여름이 되었던
          것입니다.
            신문 사회면의 사건 기사들의 예만 들어 보더라도,
          그것들은 하나같이 어마어마했습니다. 웬만한 액수의
          도둑질 기사에는 모두 '애걔'하는 냉소를 보낼
          정도로. 거의 매일 매일 몇 억, 몇 십억의 부정을
          다룬 기사가 사람들에게 전해졌지요.....
            이제 지난 여름의, '위대함'들은 끝나야 합니다.
            작은 것들이 가을날 아래에서 위대해져야 하는
          때입니다. 작은 것들이 돌아와 햇볕에 꼭꼭 여물어 제
          몫의 피를 지구에 덧입히는 그런 시간입니다.
            '너희들의 씨앗'을 거둘 시간입니다. '제 그림자를
          무서워하지 않을' 시간입니다. 그런 세상에는
          소리들의 열매이듯이 주렁주렁 열매들이 열려 걸릴
          것입니다. 씨앗들이 몸담고 있던 나무들, 꽃들은 결국
          자기의 몸 크기만큼의 거름을 불러들이고, 흙과
          바람과 햇빛을 불러들여 제 몸에 숨어 있던 빛깔들을
          키워 낼 것입니다.
            그 빛깔들은 그러나 시끄럽게 번쩍이지 않을
          것입니다. 제 밖의 것을 저와 같이 물들이려는 헛된
          수고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 전부를 제 빛깔로
          칠하려고도 않을 것입니다. 그저 그것들은 깃발들처럼
          가을 하늘에 펄럭일 것입니다. 없던 살[肉]들로
          지상의 곳곳을 저의 크기만큼 물들일 것입니다.
            나비 중에는 긴 여행을 하는 나비가 있다고 합니다.
          자기 대에 그 여행을 끝내지 못하면 그 다음 대의
          나비가 그 여행을 계속하고, 또 그 다음 대의 나비가
          여행을 계속하고.....
            그렇게 해서 몇 대에 걸쳐 그 여행은 완성되겠지요.
          아름다운 나비입니다. 작으므로 위대한 나비입니다.
            그러면서 가을의 땅, 곳곳에서는 소리 없는
          혁명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작은 것들이 큰 것들이
          되는 혁명, 짧은 것들이 긴 것들이 되는 혁명, 가는
          것들이 굵은 것들이 되는 혁명..... 온갖 수확의
          기쁨들이 출렁일 것입니다. 만남의 춤들이 일어설
          것입니다.
            모든 뿌리의 열매들과의 만남, 모든 여린 것들과
          확고한 힘들과의 만남, 그리하여 이 지상은 언제나
          작은 것들, 힘 없는 것들, 중심에서 소외된 것들, 말
          없는 것들이 밀고 왔음을 다시 선언할 것입니다.
            가을밤, 짙은 어둠 가운데 앉아서 이제 나는 머리를
          낮게 낮게 숙일 수밖에 없습니다. 가난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당신은 얼마나 허약한지요? 감히 당신이라고
          썼습니다만, 당신은 또 얼마나 흔적도 없이 이 땅에서
          사라질 수 있는지요? 누군가 손을 흔든다 해도
          세상이란 신호등이 그 '누군가의 손 하나' 때문에
          멈추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작은 것들, 한 마리 벌레의 울음을 감지하는
          세상은 그 '누군가의 손흔듦'도 결코 놓치지 않는
          그런 사회가 될 것입니다.
            작은 벌레 소리가 나를 깨우는 계절, 작은 벌레
          소리들 앞에서 가을을 기다립니다. 그런 사회의
          가을을 기다립니다.

            감사합니다. 가을을 돌리는 당신께.

            20. 그여자

            건너편 섬에
            등불 하나가 켜졌습니다.
            서 있는 몇 척의 배에도
            배고픈 자의 눈처럼
            등불이 반짝이기 시작했습니다.

            가까운 어둠이
            먼 어둠을 지우기 시작했습니다.
            가까운 슬픔이
            먼 슬픔을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세상은 훌쩍이는 소리로
            가득한데

            또 하나 켜진
            건너편 섬의 등불
            혼자 빛납니다.
            서 있는 몇 척의 배
            혼자 등불이 됩니다.

            나도 천천히
            등불의 잔을 듭니다.
            가까운 먹구름이
            먼 먹구름을 마시기 시작할 때.
            ---<벽 속의 편지 ---- 건너편 섬에>

            오늘 하루도 저물었습니다.
            이제 저녁 바다에서는 긴 바람이 불어오고
          있습니다.
            아마도 온갖 산의 허리들과 모래들과 젖은 흙들과
          땀에 밴 지붕들을 지나온 바람입니다.
            아마도 슬픈 사람의 눈물들과 지난 낮 노동한
          사람들의 시간들과 어느 벽 밑에선가 죽어 가는
          사람들과 또는 죽은 사람들의 헐벗은 이마를 지나온
          바람입니다.
            아마도 온갖 음습한 골목길을 지나, 골목길의 낮은
          중얼거림들과, 헤어짐의 인사들과, 흐려져 가는
          꿈들을 핥고 온 바람입니다.
            아마도 수많은 새벽의 기도들과 또는 싸움들과
          일어서는 생명들과 또는 굶주린 아이의 울부짖음을
          지나온 바람입니다.
            아마도 또 수많은 이 세상의 계단들의 논리적인
          말들과 혹은 비논리적인 말들을, 혹은 깊디깊은
          신념들과 하루에도 몇 번씩 번쩍이는 옷을 갈아입는
          배신들을, 불멸의 잠들과 혹은 악몽에 눌린 잠들을
          지나온 바람입니다.
            그리하여 이 세상의 모든 살아 있는 것들에게
          하루치의 밥을 주러 끝없이 오고 있는 바람일
          것입니다.
            이제 오는 바람은 기다리라고 속삭입니다.
            기다림이 우리를 가장 완성시키리라고 중얼대면서.
            기다림이야말로 이 세상을 출렁여 온 동력이며
          신념의 돛이라고 속삭이면서.

            '그날 그 여자'는 장사(長沙) 모래펄에 서
          있었습니다.
            아침에 남편이 집을 나설 때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지만, 남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말
          없는 남편의 뒤를 밟아 그 모래펄에까지 이르렀던
          것입니다. 남편은 그러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배를
          타고 떠나 버렸습니다. 그 여자는 모래펄 위에서
          허둥거렸지만, 시퍼런 바다를 바라보며 그 자리에
          멈춰 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밤이 되어도 그 여자는 그 자리를 결코 떠날
          수 없었습니다. 기다려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 여자는
          배가 돌아올 것을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꼭
          돌아올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배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몇 날이
          흘러갔지만 바다 위에 떠오는 것은 모르는 물새들의
          날개라든가, 모르는 낯선 배들의 흐린
          돛대뿐이었습니다.
            그 여자는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면서 그 모래들
          위에 선 채로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그러다,
          결국 그 여자는 그 자리에 돌이 되어 버렸습니다.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돌이.

            왜국에 가서 고통스럽게 죽은 신라의 충신
          박제상(朴堤上)의 이야기를 옛 역사서가 전해 주고
          있는 광경입니다.
            오늘의 세상 모습에 비추어 보면 '순진 무구'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입니다만, 이 이야기에서는 한 가닥
          진실 같은 것의 뼈가 만져진다고 여겨집니다. 그것은
          '기다림'에 관한 것입니다. '그렇게 기다릴 수 있다면
          .....''그렇게 말 없이 기다림으로 사랑을 포옹할 수
          있다면.....'
            우리는 한순간도 말 없이 기다리지 못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기다리기 위해선 '이유'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설득할 수 있는 어떤
          '이득의 약속'이라든가 또는 그 '이득'의 모습,
          아무튼, 어떤 '예정된 결과'가 필요합니다. 그 어떤
          '약속'도 없이 어찌 '모래펄'가운데서 한정 없이
          기다릴 수가 있겠습니까. '사랑'도 현대의 것은
          보여야 하는 것일 것입니다. 그렇게 말 없이 뒷모습도
          보여 주지 않고 떠나 버리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확신을 주어야 하는 것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여자'는 거기 그냥 서 있었습니다. 돌이
          될 때까지.
            그 여자의 눈에는 무엇이 보인 것인지.
            그 여자의 가슴에는 어떤 바람이 스며든 것인지.
            외로움의 뒷모습이 던진 안개 때문인지.
            그렇습니다. 결국 기다림은 사랑입니다. 그것은
          신념을 품고 있습니다. 위대한 신념이 아니라 사소한,
          그러나 무수한 신념들을. 어떤 한 '큰' 사랑이 아니라
          '사소한''무수한'사랑들을. 사소함들이 이 세상을
          밀어 올려 가는 것입니다.
            그 여자는 얼마나 사소했는지요? 당신은 또 얼마나
          사소한지요? 저는 또?
            그 여자는 말하자면 사소한 기다림들이 지구라는,
          이 우주의 작은 별을 끊임없이 회전시키는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장사 모래펄에 핏빛을 감춘 파도가 오늘도
          치고 있듯이 지금 오는 바람의 밑바닥엔 또 다른 그
          무엇이 있을 듯합니다. 기다림으로 하여금 이 세상을
          받치고 있게 하는 것, 사소한 모든 기다림들을 서
          있게 하는 것, 그러니까 저녁 바람의 가장 밑
          깊디깊은 가슴의 가장 중심점 같은 것 ----.
            아마 그것은 슬픔일 것입니다. 순간의 기쁨마저도
          실은 그것의 다른 얼굴들 뿐인 슬픔.
            갑자기 이 세상의 뼈마디가 환히 보여지는 것
          같습니다. 바다 저쪽에 켜진 스물일곱 개의 주황색의
          불빛과 서른세 개의 백색의 불빛 때문만은 아닙니다.
            극도의 슬픔의 표현을 저는 오늘 하나 보았습니다.
            그것은 플라멩코 춤이었습니다. 유럽 최고의 댄서가
          추는 춤이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여자는 도대체 못생겼습니다. 늙었습니다.
          언뜻언뜻 보이는 다리도 뭉툭하고, 발목동 굵어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건 슬픔의, 보이는 움직임이었습니다.
          느리고 사치스럽게 공기를 휘젓는 그런 분위기적인
          슬픔이 아니라, 가슴을 쥐어뜯고 사지를 다 던져
          버리고 있는 듯한 그런 슬픔, 우리는 슬픔을 위하여
          산다는 명제를 언뜻 생각나게 해 주는 그런
          몸짓이었습니다. 말로도 할 수 없고, 물론 소리로도
          지를 수 없는, 가슴에 품고 품은 슬픔, 넓적한
          구두발로 땅을 두드리고, 팔을 뒤틀어 휘젓고, 가슴을
          활처럼 비틀며 내밀었다 오므렸다 하고, 스커트를
          들썩거리고, 엉덩이를 마구 흔들어 제끼고, 눈을 있는
          힘껏 내리뜨고, 이마를 있는 힘껏 찡그리고.....,
          저녁 바다의 바람은 지금 그런 극도의 슬픔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마도 기다려야 합니다.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기다림일지라도, 슬픔의 힘으로 기다림을
          끊임없이 충전하면서 긍정해야 합니다. 이 바람처럼,
          이 물결처럼, 저 길들처럼.
            당신에게 오늘 하루치의 편지를 씁니다. 기다리기
          위하여, 살아 남기 위하여, 감사하기 위하여.

            III.

            21. 몇 개의 삽화들

            ()첫번째 삽화
            한 여학생이 걷고 있다. 여학생이 걷고 있는 길에는
          '삼십 년 만'의 안개가 내려 앞 사람의 모습은 물론,
          집도 나무도 길도 보이지 않는다. 모든 것들이 안개
          속에 잠시 잠시 나타나며 떠다니고, 있다. 여학생은
          그날 처음 '하이힐'을 신었다. 어깨에는 검은 비닐
          가낭 ---- 비닐 위에 광택을 낸 ---- 을 메고, 색깔이
          좀 유치하지만 특별하다고 생각된 분홍색 코트를 안개
          속에 휘날리며 그 보이지 않는 길을 올라간다. 한참을
          그렇게 안개 속에 둥둥 뜨듯 걸어간 끝에 이윽고 어떤
          집이 나타난다.

            나의 대학 시절. 대학에 처음 올라가던 날의
          풍경이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안개', 모든 것이
          밑둥만 남아 둥둥 떠다니던 안개 ---- 그건 어쩌면
          대학 시절과 그 다음에 나에게 벌어질 삶의 길을 미리
          보여 주었던 것이라고도 생각된다.
            안개 속에서 헤매던 나는 어떤 계기로 문과 대학의
          한 문학 서클에 '가입' 아닌 '가입'을 하게 되었다.
          '시화전'을 한다고 하면서 한 남학생이 내 시에
          그림을 그려 주었기 때문이다. 검은 색지에 노란
          무늬가 아무렇게나 들어 있는 그림이었다. 그 색지의
          한귀퉁이에 그 남학생은 내가 쓴 시 <모나리자>라는
          것을 써 넣었다.
            그 뒤에는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과연
          '시화전'을 했는지, 어떤지도. 그러나 그렇게 해서
          나는 '시를 쓰는 여학생'이 되었다.
            송기원의 소설 <아름다운 얼굴>에는, 주인공이 시를
          쓰기 시작하는 시절에 대해, ".....나는 소설보다도
          시를 쓰기로 작정을 하였다..... 자신의 치부는 전혀
          건드리지 않으면서 무엇인가 있는 듯 없는 듯 잘도
          꼬리를 감추는 시 쪽이 훨씬 매력적이었다....."고
          하고 있다. 나의 이유와는 물론 다르지만 어느 한켠의
          진실은 보여 준다고 생각된다. 있는 듯 없는 듯,
          그러나 무엇인가 있는 시 ---- 나는 막연히 시를
          쓰고는 있었지만, 내가 시 쓰는 모습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그 시절, 심한 '자기
          혐오'(물론 송기원과는 다른)에 눈뜨고 있었다고나
          할까, 하긴 '눈뜨고 있었다'는 표현은 좀 어폐가
          있다. 고등학교 시절에 그것은 아주 심했었으니까.
          그러나 아무튼 그 '혐오'속으로 영문과였던 탓으로
          엘리어트(T.S. Eliot)가 끼여들었고..... 나는 '그'에
          대한 경험에서 '나와 비슷한' 이국(異國)의 한 사람을
          보았다고 그 당시 생각했으며, 그것이 시를 쓰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시 작업이 최초로 세상에
          공표된 것은 그 시화전부터였다고 생각된다.
            그러다 대학을 졸업했고, 어느 새 나는 세상의 거리
          위에 던져져 있었다.

            ()두 번째 삽화
            한 젊은 여자가 바람 부는, 황량한 도시의 길
          속으로 가고 있었다. 그 여자의 어깨에는 검은 가방이
          메여 있었고, 손에는 책 한 권이 들려 있었다. 책은
          빨간 표지의 펭귄판 <영시선집(Golden Treasury)>이기
          쉬웠고, 검은 가방 속에는 원고지 같은 것이 들어
          있기 쉬웠다. 검고, 좀 큰 눈밖에는 별로 볼 것이
          없는 여자, 흔히 말하는 행복이라든가 하는 것에는
          희망이 별로 없는, 우울하고 답답한 여자.....

            그럴 때 시는 말하자면 나의 '자존심'이 되어
          있었다. 더구나 그 길 위에서는 전혀 시를 이해해
          주지 않던 시절, 그것은 그저 보이지 않는 '자존심'일
          뿐이었다. 이 세상에 던져져서도 그 세상의 길 위에
          매달려 서 있을 이유 같은 것을 주는 시.....
            그때 몇 사람이 '시 동인'을 하게 되었다. 나도
          슬며시 한 남학생을 따라 그 음습한 찻집으로 갔다.
          시를 자존심의 이유로 삼고 있는 몇 사람들이 모였다.
          우리는 열심히 동인지의 제목을 정하느라고
          설왕설래했다. 가장 지성적이며, 모더니티를 갖고
          있으며, 상징적이며, 앞으로의 한국 문학사에서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그런 이름을 찾아서.
            그날 저녁, 그런 강한 문학적 인상을 위해서
          '고래'라는 제목까지 나왔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그 어휘의 비지성적이며, 비감각적인 어감 때문에
          '고래'는 우리들의 탁자 위에서 금방 사라졌다. 결국,
          가장 보편적이며, 미래 지향적인 '칠십년대'라는
          제목이 결정되었다. '팔십년대가 되면 물론 바뀌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미래로 간다.....아직 현재는
          유보하자.....' 이런 심정들로 그러나 아마 나는 내가
          팔십년대까지 이 세상의 줄거리에 속해 있지 않을
          거라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던 듯하다. 그래서 사실
          그 동인지의 '영원한'제목 따위엔 그리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우리는 첫 동인지를 그때 숭문 서관이니, 종로
          서적이니 하는 곳들에 갖다 주었다. 그 책을 물론 한
          달 뒤에는 그대로 다시 걷어 왔지만. 하긴 어느
          책방에선가 한 권 값을 받았던가? .....그 동인지를
          샀던 사람에게 행운이 있었을진저.....
            그래도 동인지를 몇 번 더 냈었다. 그 동안 동인도
          몇 명 늘어났고, 처음부터 함께 모였던
          윤상규(윤후명), 김형영, 임정남, 박건한 외에
          석지현, 정희성이 들어왔고..... 그때 나는 시 몇
          편을 묶어서 당시 한창 출범의 돛을 올리고 있던
          '창작과 비평'사에 갖다 주었고.....(나중 들으니 그
          잡지사에서는 읽지도 못했던 모양이다. 그 잡지사
          발행인의 부인이 나의 고등학교 선배라는 것을 듣고
          그녀에게 갖다 주었었다) 그러고 있을 때 대답 하나가
          달려 왔다. '사상계 신인 문학상에'당선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 당시 <사상계>는 정치적 탄압으로
          사운(社運)이 기울고 있던 때였다(그때 상금을
          받았던가? 부상으로 받은 <사상계> 한 질이 지금도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그걸 들고 다니느라고 얼마나
          고생했던가).
            그러나 덕분에 시인 신석정 선생을 알게 되었고,
          세상에 할 말 하나쯤 있게 되었다. 내 '시'가
          말하자면 공인을 받게 된 셈이라고나 할까. 내 자존심
          ---- 그 저주할 엘리트 의식을 이후로도 가지고 있을
          수 있었던 셈이었다.

            ()세 번째 삽화
            조금 늙은 여자가 길을 걸어간다. 그녀의 어깨에는
          여전히 검은 가방이 메여 있고, 손에는 책 몇 권이
          들려 있다. 검고, 꽤 크던 눈은 이제 그리 크지 않다.
          길은 넓고 평평하다. 햇빛이 내리고 있다. 오늘은
          날씨가 좋을 모양인가.

            이제 나는 엘리트 의식에도, 고통스러운 자기
          혐오에도 매달려 살지 않는다. 나는 그저 '살'뿐이다.
          나의 아이가 대학을 나올 때를 힘주어 기다리며,
          '위로'의 시 한 줄, 즐거이 이 세상에 보태며, 가능한
          한 고요히, 비어서.

            22. 뒤로 걷는 사람

            I

            이 동네에서 나는 가끔 만나는 사람이 있다.
          한여름에도 윗옷을 두서너 개나 겹쳐 입고 손에는
          커다랗고 네모난, 낡은 갈색 가방을 들고, 뒷걸음으로
          떠듬떠듬 길을 재며 걷고 있는 사람, 그 사람은 키가
          크다. 커다란 갈색의 눈은 언제나 무슨 골똘한 생각에
          잠겨 있다.
            처음에, 그러니까 몇 년 전 햇빛 찬란히 쏟아지는
          봄날 언덕길에서 뒤로 걷고 있는 그 사람을 보았을
          때, 나는 그 사람의 눈빛하며 윗옷의 차림새로 보아
          어떤 학자이거나..... 아무튼 깊은 어떤 연구에 빠져
          있는 사람이거니 생각했다. 그러나 비가 오는 날,
          온통 비를 맞으면서 그러고 있는 그를 언덕길에서
          다시 만났을 때, 그리고 그 눈이 분명히 나와
          마주쳤음에도 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내 뒤편의
          어딘가를 깊숙이 쳐다보고 있음을 느꼈을 때,
          그제서야 나는 그가 보통의 정상적인 사람이 아님을
          알아챘다.
            그때였다. 어떤 허름한 집의 쪽문이 열리며 젊은
          여자가 뛰어나왔다.
            "아배여, 여기서 이러구 있으면 어떻게 합니꺼.....
          자 들어가입시더....."
            그 젊은 여자는 마치 화가 잔뜩 나서 뿌루퉁한
          어린애를 달래듯 그 사람의 키 큰 가슴을 밀며 쪽문
          사이로 들어갔다. 그 사람은 마치 자기 뒤편의 무슨
          그림자라도 찾는 듯이 뒤쪽을 흘끔흘끔 보며, 그러나
          한마디 항의의 말도 없이 젊은 여자에게 밀려 문
          안으로 사라졌다. 역시 뒷걸음으로, 그 불룩한 가방을
          꼭 움켜쥔 채.
            하긴 누가 옳을까. 뒷걸음으로 길을 재며 떠듬떠듬
          걷고 있는 그 사람? 혹은 앞으로만 걷고 있는 나?
          길은 그 깊은 가슴속에서 실은 누구를 받아들이고
          있는 것일까? 따지고 보면 뒤로 걷는 게 더 옳을 듯한
          생각이 드는 이 세상의 길 위에서.


            2

            그런데 그 동네를 떠난 지 십 년도 넘은 어느 날,
          우연히 그 동네에 갔다가 나는 그 사람을 또 만났다.
            그는 여전히 커다란, 낡은 갈색 가방을 들고,
          윗옷을 몇 개나 겹쳐 입은 채, 마치 평균대 위라도
          걷고 있는 사람처럼 조심히 뒤로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걷고 있었다.
            그를 처음 본 때로부터 적잖은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그렇게 조심 조심, 세상이 무척 부끄러운 듯
          뒤로 한 발자국 한 발자국씩 걷고 있는 그 사람.
            .....아, 아직도.....
            나의 입에서는 그런 소리가 그를 보는 순간 새어
          나왔다.
            아, 아직도..... 그렇다. 이 세상에 한 번 던져진
          우리는 그렇게 쉽사리 떠날 수는 없는 것이다. 던져진
          존재로서의 우리,.....
            그 사람의 앞에는 언제나처럼 몇 개쯤의 골목이
          펼쳐져 있었다. 그 사람은 그 골목길들 앞에서 잠시
          두리번거렸다. 그러더니 다시 오던 길로 돌아서서는
          마치 난해한 현대 무용이라도 추듯 허공을 뜨겁게
          쳐다보며 뒤로 떠듬떠듬 걷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누가 이 길을 바로 갈 수 있으랴, 우리는 저 앞에
          무엇이 있는지, 아무도,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다.
          뒤로 걷는 탓에 그 사람이 그 어떤 장애물을 못 보는
          것이나, 앞으로 건강하게 걸으면서도 내가 그 삶의
          장애물을 못 보는 것이나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
            우리는 모두 아무것도 못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조심조심, 기우뚱 기우뚱 걷고 있는 저 사람이 더
          정직한 것이 아닐까..... 아닐까.

            23. 그날

            지금 살아 계시면 백 세가 넘으셨을 나의 아버지,
          평생을 독립 운동 하신다고 집 밖을 떠도신 나의
          아버지, 우리 가족이 한데 모여 살게 된 때는 늦게 둔
          딸인 내가 이미 국민학교에 들어가던 때였던 나의
          아버지, 그래서 학교에서 돌아올라치면 골목 어귀에
          서 계시는 나의 아버지를 보고 친구들이 "너의
          할아버지 나오셨다!"고 말하던 나의 아버지, 어머니
          몰래 동네 로터리 부근에서 만나 극장에 함께 가셨던
          나의 아버지.
            오랜만에, 아, 참으로 오랜만에 아버지를 입 속에서
          불러 본다. 그때 아버지와 함께 본 영화는 '김승호'가
          주연한 <돈>이라는 영화 외에 몇 편 되었는데, 그때
          가슴 떨며 들어가던 '우미관'이라는 삼류 영화관(고등
          학생은 극장에 못 가던 실절이었으니까)은 지금도 영
          잊히지 않는다. 나중에 근대 문학사를 읽으면서
          식민지 시대 연극 운동의 본거지였던 그 극장의
          이름을 다시 만났다. 얼마나 가슴이 답답하셨을까.
          그때 조그만 삼류 극장이었던 '우미관'을 보는
          아버지의 가슴은.
            그리고 11월의 그날에 만난 나의 아버지, 11월의
          얇은 햇빛 속에서 투명하게 뼛속이 비치시는 것 같던,
          유난히 하얗게 뇌리에 박혀 버린 나의 아버지.
            그날 나는 커다란 사진 한 장을 자랑스레 옆구리에
          끼고 있었다. 나는 그때 교내 사진반에 들어
          있었는데, 여름 방학 동해안 촬영 기행에서 찍은 사진
          한 장이 발탁되어 전시회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생각도 못한 영예였다. 글 잘 쓰던 친구가
          '연년세세(年年歲歲)'라는 멋진 제목을 사진에 붙여
          주었다. 굵은 뿌리들이 검게 세상을 향해 삐어져 나온
          그런 고목 사진이었는데, 그 고목의 뿌리에 초점을
          맞춘 예술 작품(?)이었다. 그 뿌리는 세월을 얘기해
          주며 자기의 굵은 핏줄을 세상에 보여 주고 있었다.
            사진이 인화되어 나오던 날, 그리고 표구를 하던 날
          나는 좀 흥분하여 그것을 아버지에게 제일 먼저 보여
          드리기로 작정하였다. 아버지는 그때 병원에 계셨다.
          물론 노환이었다.
            나는 겨울 입구에 서 있던 11월의 거리를 자랑스레
          걸어갔다. 바람이 스산하게 살을 파고들었지만 그런
          것도 느끼지 못한 채. 삐걱거리는 목조 건물의 그
          병원 문을 열고, 나는 한 손에는 가방, 한 손에는
          표구한 사진을 들고 달음박질치듯 계단을 뛰어올라
          갔다.
            아버지는 침대에 하얗게 누워 계셨다. 나를 보시자
          아버지는 몸을 일으키시는 시늉을 하셨다.
            "사진이에요. 제가 찍은 거예요."
            나는 자랑스레 사진을 아버지께 내밀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사진을 조금 보시더니 침대 밑바닥에 그냥
          내려 놓으시는 것이었다. 나는 가슴이 쿵쾅쿵쾅했다.
          아버지의 음성이 은빛 같은 하얀 햇빛을 건너왔다.
            "왜 이런 걸 찍었어?"
            하얀 햇빛 속에서 아버지의 얼굴은 더욱 하얗게
          바래시는 것 같았다.
            "빨리 가져가거라."
            아버지는 얼른 가져가라고, 나에게 손짓하시는
          시늉까지 하셨다.
            나는 머쓱해졌다. 전시회에 걸 건데요..... 하는
          말이 입술까지 적시는 것 같았지만 나는 그저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사진을 들고 병실을 나왔다. 병실을
          다시 한 번 돌아보는 순간 나는 아버지의 하얀 얼굴에
          무엇인가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11월의 낮은 바람이 떠돌고 있는 집까지 나는
          사진을 옆구리에 끼고 걸었다.
            아버지의 임종 소식을 들은 것은 그 며칠 뒤의 어느
          날 오전 열한 시쯤, 머릿속에 쿵하는 느낌을 받고
          엎드려 있던 교실에서였다. 나는 허겁지겁 집으로
          달렸다. 그때 도대체 왜 달렸는지 모르겠다. 택시를
          탔으면 됐을 텐데..... 그러나 그 순간 가장 빠른
          방법은 '달리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달리는
          것.....
            그 후 나는 시인이 되었다. <11월>이라는 시를
          썼다.

            담 너머 한 사람이 웃고 있다.
            지붕 끝에서 펄럭이던
            畢生의 바람도 그치고

            수레 밖에는
            아직 시작되지 않는 싸움
            冬柏 서너 송이가
            먼저 시냇물을 건너간다.

            너무 늦게 왔는가.
            그 사람 눈썹에는
            마른 풀잎이 가득하고

            .....

            아,
            사방 一千里의 하늘을
            나보다 큰 人類가 걸어가고 있다.
            ---<11월>

            얼마 전 나는 앞바다에서 펄럭이는 아버지의 하얀
          날개 같은 것을 보았다. 그래서 이런 시를 써서 내가
          매일 보는 거울에 붙여 놓았다.

            젖는 파도 위로
            떠오르시네 아버지
            떠오르시며 아버지
            빛을 쓰다듬으시고
            서 있는 배들의 돛
            모래 위의 우리 집
            짧은 벽을 쓰다듬으시네
            바다에 빛이 내리니
            그림자들 속속
            파도 위에 일어서네
            아버지의 흰 날개
            파도 위에 펄럭이시네
            아버지의 거대한 날개
            젖은 세상에 펄럭이시네

            (아버지는 언제나 하얀 모시 한복을 입고
          계셨으므로.)

            24. 그물 사이로

            언젠가 나는 젊은 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 하나는 필리핀 원숭이에 관한
          이야기다.
            필리핀 원주민들은 원숭이를 아주 쉽게 잡는다고
          한다.
            원숭이를 잡고자 하는 원주민은 우선 원숭이가 잘
          나타날 만한 야자 나무를 고른다. 왜냐하면 원숭이는
          야자 열매를 아주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그
          야자 나무의 열매에 보이지 않게 구멍을 살짝 뚫어
          놓는다. 그런데 그 구멍은 원숭이의 손이 꼭 들어갈
          만큼한 크기의 구멍이라야 한다. 그보다 커서도 안
          되고 물론 작아서도 안 된다. 그렇게 해 놓고 나서
          원주민들은 원숭이가 나타나기 전에 얼른 나무 뒤로
          숨는다. 이윽고 원숭이들이 나타난다. 원숭이들은
          야자 열매에 달려든다. 열매에 구멍이 살짝 뚫려져
          있으므로 원숭이들은 고생하지 않고 야자 열매의 속을
          꺼낼 수 있게 된다 ---- 이게 웬 떡이냐! ----
          원숭이들은 야자 열매 속에 손을 집어넣고 맛있는
          열매의 속을 잔뜩 움켜쥐게 된다. 그때 사냥꾼
          원주민들이 나타난다. 원숭이들은 도망가려고 한다.
          그러나 그 맛있는 야자 열매의 속을 버리기는
          싫으므로 열매의 속을 움켜쥔 채 도망가려고 한다.
          당연히 손이 구멍에서 빠지지 않는다. 다급한
          원숭이는 그냥 열매를 손에 매단 채 도망간다. 그러니
          원숭이의 걸음은 그리 잽쌀 수가 없다(원래 원숭이는
          얼마나 잽싸게 달려 가는 동물인가). 그럴 때 원주민
          사냥꾼들은 숨어 있던 나무 뒤에서 달려나와
          뒤뚱거리며 도망가는 원숭이를 잡는 다는 것이다.
            참으로 지혜로운 원주민들이다. 어떤 '과학적인'
          폭력도 쓰지 않고 다만 원숭이의 심리를 이용해 그
          재빠른 원숭이를 쉽사리 잡는 필리핀 원주민들 ----이
          이야기를 하면서 그때 나는 '달콤하고 쉬운 것'을
          너무 좋아하는 현대인들은 어쩌면 '어떤 파멸적인
          상황'에 쉽게 이를지도 모른다는, 유의 첨언을
          했었다. 즉 현대인들은, 어떻게 말하면, 그 필리핀
          원숭이들처럼 '달콤한 것'에 깊이 길들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이야기였다. ---- 실로 우리는 달콤하고
          쉬운 것을 얼마나 좋아하는가? 어려운 것은 될수록
          하지 않으려고 한다. .....여기에다 또 '달콤한
          것'들은 얼마나 우리 앞에 많이 널려 있는가, 문명이
          발달한다는 것은 '달콤한 것들의 늘어남' ----
          그것인지도 모를 지경이다. 먹는 것들은 물론이고,
          사회.문화의 각 부분에까지 '달콤함'의 재료와
          방법들은 풍요롭게 차 있는 것이다. 그것들은 언제
          어디서나 우리를 유혹하여, 마치 '달콤함'이 행복의
          실체인 듯한 환상과 착각으로 우리를 유도한다.
          그러면서 실은 우리는, 우리의 많은 것들을 잃어버려
          가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지금 만약 다시 한다면 좀
          수정해야 하리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 아무 폭력도
          쓰지 않는 듯이 보이는 그 필리핀 원주민들이 과연
          착하고, 지혜롭기만 한 것인가에 대해서. 그보다
          지혜롭게 평화롭기만 한 것인가에 대해서. 따지고
          보면, 그들 원주민들은 실제로 어떤 눈에 보이는
          폭력을 쓰는 것보다도 더 폭력적이지 않은가. 그들
          원주민들의 비폭력 속에는 얼마나 무서운 폭력이
          잠재하고 있는가.....
            또 이런 이야기도 했었다.
            가마우지(물새의 일종 ---- 오리같이 생겼음)가
          물고기를 아주 잘 잡는다는 점에 착안하여 그
          가마우지를 이용, 양자강에서 물고기를 잡는 중국
          어부의 지혜에 관한 것이다.
            양자강의 그 노련한 어부들은 물고기를 잡는 데에
          낚싯대도, 그물도, 또한 고기잡이 창도 사용하지
          않는다. 그 대신 가마우지를 잘 키운다. 물고기를
          잡으러 가는 날은 그 가마우지를 적당히 굶긴 다음
          함께 강 가운데로 나간다. 그리고는 적당한 곳을
          택하여 배를 멈추고, 목에 줄을 단 가마우지들을
          강물에 풀어 놓는다. 그러면 배가 고픈 가마우지들은
          물고기를 잡는다. 그때 배 위에 가만히 앉아 있던
          어부는 가마우지의 목에 매어 있는 줄을 재빨리
          잡아당겨 배 위로 끌어올린다. 그리고는 가마우지가
          마악 삼키려고 하는 물고기를 뺏는 것이다. 그런 다음
          가마우지는 다시 강물 가운데로 던져진다. 목에 잘
          보이지 않는 줄을 매단 채, ..... 그 작업을 하는
          어부는 마치 배 위에서 춤이라도 추는 것 같다.
          왜냐하면 강물 가운데 풀어 놓은 수십 마리의
          가마우지들이 연신 물고기를 삼키려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가마우지 한 마리가 하루에
          잡는 물고기의 양은 오킬로그램, 하루가 끝날
          즈음이면 뱃전에는 흠집 하나 없는 싱싱한 물고기들이
          가득 쌓여 펄떡거린다. 어부는 그 중에서 몇 마리를
          '수고한' 가마우지에게 던져 준다. 가마우지는 고개를
          숙여 어부가 주는 그 물고기를 받아 먹는다.
          양자강에는 날이 저문다. 주홍빛의 아름다운 석양이
          어부와 가마우지들을 붉게 물들인다. 평화롭게.
            이 이야기도 필리핀 원주민들의 원숭이잡이
          이야기처럼, 만약 지금 다시 한다면 나는 좀 수정해야
          하리라. '보이지 않는 폭력'또는 우리의 환상과 그
          환상의 조작에 대해서.....
            양자강의 어부들도 전혀 폭력을 쓰지 않는다.
          낚싯대 같은 것도 쓰지 않는다. 가마우지들은 그
          평화로운 강물 위에서 열심히 물고기를 물어 올
          뿐이다. 단지 자기들이 먹을 물고기를, 한 번에 한
          마리씩. 그 '수확'들이 '지혜로운 주인'에게 빼앗길
          것임은 모르는 채, 주인의 '부(富)'를 조금 더
          축적시켜 줄 것임은 모르는 채.....

            포스트모더니즘 문학 이론가인 어빙 하우는 후기
          산업 사회의 특징으로 열 가지를 들고 있는데 그 중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 가정과 같은 전통적인 권위의 중심지들이
          인간에 대한 구속력을 상실해 간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율적으로 향유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다른 사회
          집단 혹은 종교 집단에게 합법적으로 그 권리를
          양도할 수도 없는, 자유라는 짐을 진 채, 떠돌게
          된다.
            . ..... 전통적 의식들이 이제는 무시되거나 그저
          공개적인 전시용의 단순한 행사로 평가 절하된다.
            . 수동성이 널리 만연된 사회적 태도가 된다.
          삶이란 인간이 거의 통제할 수 없는, 그리고 설사
          어떤 자발적인 의견을 공유하였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공동으로 실현해 내지는 못하는 표류물이라는 생각이
          만연된다.
            . 아마 사상 최초로 어떤 의견이 체계적이고
          '과학적으로'만들어진다.
            . .....사회를 선도하는 의견이 마치 구매할 수
          있는 상품처럼 된다.
            . 옳건 그르건 '원인'을 규명하던 시대는 종말에
          이른다. 강한 신념은 시대 착오적인 것으로 취급되고,
          그 결과 논쟁을 좋아하는 것은 어떤 엄격한 신념에
          대한 향수를 지닌 것으로 여겨지게 된다.
            . 분주함의 정도가 심히 증가되고, 사건들의 수효가
          당황할 정도의 속도로 증폭되어 감에도 불구하고,
          직접적으로 일차적인 체험이 인간을 회피하는 것처럼
          보인다.
            . 물질적 필요의 압박이 눈에 띄게 감소하지만,
          그렇다고 사회적 해방감이나 개인적인 즐거움의
          감정이 이를 대신하지 못한다. 그 대신 인간은 더욱
          자기의 사회적 의존성과 무기력함을 인식하게 된다.
            물론 우리 사회가 서구에서 말하는 바 '후기 산업
          사회'에 진입하고 있는지 어떤지는 내가 말할 입장이
          아니리라. 그리고 또 서양학자의 진단을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하는 것도 무리는 있으리라. 그러나 위의
          것들 중 어떤 것들은 오늘의 우리의 '어떤 면'들의
          징후를 보여 준다고 생각된다. 예컨대 우리는
          수동적이 되어 간다든가, 어떤 의견이 항상
          '과학적'이라는 이름을 들고 나온다든가, 기존의
          의식들이 무너지고 있다든가, 신념이라는 것이 한없이
          허약한 일종의 향수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질
          뿐이라든가, 물질은 풍요해지고 있으나 인간은 그
          물질의 풍요만큼의 즐거움을 누리지는 못한다든가,
          직접적인 체험의 상실로 인한 인간의
          소외감이라든가..... 아무튼 우리는 무엇인가 무척
          변해 가고 있는 가치들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내가 너무 지나치게 생각하는 것인지는 모르나,
          우리는 물질과 제도들 속에서 우리를 회복하기 어려운
          국면들에 저도 모르게 빠지고 있는 것이다. '폭력'은
          사실 평화의 이름으로 삶의 곳곳에서, 세계의
          곳곳에서 수행된다. 우리는 평화의 환상 속에서 그날
          그날 살아가게 된다. 인간이 만든 인간의
          '물질들'속에 우리는 갇힌다. 인간이 만든 제도의
          그물 속에 우리는 스스로 갇힌다. 우리는 고독해진다.
          문제는 고독한지도 모르는 채 고독해지는 것이다.
          노인들이 가끔 고독 속에서 죽어 가는 기사를 우리는
          신문 한구석에서 발견하지만 그것이 우리 자신의
          이야기라는 것은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대학생들의 '어떤 절규'의 소식이 가끔 전해지지만,
          그것은 남의 이야기일 뿐이다. 사회가, 정부가, 또는
          제도가 해결해 주리라고 막연히 믿는다. 우리의 이
          철저하게 되어 버린 고독, 제도 속에서의 보이지 않는
          폭력들, 평화에의 환상.....
            어떤 텔레비전 광고는 그런 의미에서 상당히
          시사적이다. 아름다운 두 남녀가 화면에 등장한다.
          어느 순간 그 젊고 아름다운 두 남녀는 사라지면서,
          대신 잔뜩 쭈그러진 회색의 물체가 화면에 등장한다.
          잠시 후 그 회색의 찌그러진 물체는 두 대의 빛나는
          전화기로 변해서 화면에 제시된다. 앞의 그 남녀가
          다시 등장하면서 전화기를 선전한다. '아하, 그
          남녀가 저 전화기 속에 들어갔다는 것이로구나.' 나는
          한참 뒤에 깨닫는다. 그리고 뒤늦게 몸이 으스스
          떨리는 것을 느낀다. 전화기가 되어 버린 남녀 ----
          한마디로 말해 그 광고의 영상은 물질이 되는 순간의
          인간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하긴 새삼 질문할
          필요도 없으리라. 우리는 보다 행복해지고 싶은
          욕망으로, 보다 풍요해지는 사회 속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무수한 제도가 우리를 위해 만들어진다.
          인간을 위해 인간이 만든 것들로서, 교육도 우리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해 행해진다. 그런데 그 인간이
          만든 인간의 가치들 속에서 정작 인간인 우리가 점점
          더 외로워지고, 의미 없어지고, 그래서 비인간화되어
          간다면 이 모든 것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앞으로의 사회에서 젊은이들은 이러한
          '인간의 실종'과 싸워야 하리라. 점점 거대해지는
          물질의 늪에서 보이지 않는 물질의 폭력, 제도의
          폭력과 싸워야 하리라. 그래서 삶은 진실로 풍요한
          과육이 되어야 하리라. 그 가마우지처럼, 원숭이처럼
          말없이 희생될 수는 없으리라.

            25. 혼(魂)들의 추억제

            그때가 되면 어린 마음에도 무척 바빴다. 넓은 대청
          마루엔 희디흰 달빛이 쏟아지곤 했다. 하긴 그 대청
          마루는 그렇게 널찍하지 않았으리라. 그럼에도 어린
          나에게 그것은 넓게만 보였다. 그 윤이 자르르 나는
          대청 마루에 떨어지던 달빛, 아주 아스름한
          '풍경'으로 눈에 살아 온다.
            그 대청 마루에 우리들은 모여 앉았었다.
          어머니께서 '다라이'에 송편 반죽을 해 오셨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모두 열심히 그것을 빚었다. 속을
          넣고, 그리고 속을 넣은 그것을 될수록 예쁘게 입을
          다물리게 하느라고 말이다. 그때는 한복을 입으시고
          잘 웃으시지도 않던, 지금은 돌아가신 아버지도
          웃음을 띠우시고 한데 앉으셔서 몇 개쯤 송편을
          빚으시곤 하셨다.
            우리가 빚은 송편들은 그러나 이북식 송편이어서,
          한입으로는 먹기 힘든, 큼직한 반달 모양의 것이었다.
          나중에 민속 음식 가게 같은데서 송편을 보았을 때,
          그것은 아주 앙증맞게 작아서 놀랐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꽤 오랫동안 송편의 크기에 대한 콤플렉스에
          젖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식 송편은 컸던 탓에 속이
          많이 들어가 얼마나 맛이 있었는지..... 특히 그 속에
          깨를 넣은 것은 나중에 내가 꼭 골라 먹으려고 좀
          보기 싫게 만들곤 했던 기억도 난다. 하긴
          이러나저러나 내가 만든 송편은 '너무 못생겼다.
          찌다가 터지기 쉽겠다'고 어머니에게 핀잔을 듣곤
          했지만, 그러나 보기 싫지만 맛있었던, 그 반달을
          닮으려고 했던 송편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밤이 더 깊어 새벽이 오는 기척이 보일 때쯤이면,
          대청 마루에는 넓은 교자상이 나오고 아버지는 먹을
          가셨다. 달빛에 비쳐 더욱 까맣게 빛나던 먹, 달빛과
          함께 대청 마루에 떠돌던 묵향, 졸린 눈을 비비며
          차례를 지내고 나면, 아버지는 댓돌 위에 조심히
          서셔서 지방을 태우셨다. 나는 툇마루 한켠에 앉아
          그것들이 파란 불꽃을 내면서 타올랐다가는 하얀
          연기를 무슨 옷자락처럼 흔들면서 달빛이 떠돌고 있는
          허공으로 올라가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곤 하였다.
            그것들이 올라갈 때는 무슨 소리인가가 잠시 들리는
          것도 같았다. 깊은 푸른빛의 휘장을 드리운 듯한
          밤하늘 속에서 나는 괜히 귀를 세우곤 하였다.
          '어쩌면 우리 집에 왔다 가시는 조상님들의 혼들이
          돌아가는 발자국 소리인지도 몰라.'
            그것은 가을밤의 벌레 울음 소리에 섞여 눈앞을
          맴돌고 있었다. 나는 그 보이지 않는 이들의 발자국
          소리를 찾아 달빛이 떠돌고 있는 깊고 푸른 허공을
          열심히 들여다보곤 하였다.
            이제 그런 것은 없어졌다. 자정에서 새벽 사이에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송편을 올려 놓고 지내던 차례,
          추석의 그러한 추억을 가지고 있는 세대도 이제는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들이 되었으리라.
            오히려 급속도로 물질화되어 가고 있는 오늘의 추석
          명절은 짜증부터 나는 날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또는
          공휴일의 의미밖에 없는지도..... 또는 '선물'을 잊지
          말아야 하는 날이 되었는지도.
            하긴 나에게도 추석은 오늘, '귀성객'이라든가,
          혼잡한 귀성 열차 매표소, 한없이 자동차들이 이어져
          정체되어 있는 고속도로..... 뭐 이런 것들의 의미로
          먼저 떠오른다. 어떻게 산소엘 갈 것인가, 얼마나 길
          위에서 헤맬 것인가, 손님맞이를 하려면 돈이 너무
          많이 들 텐데.....
            어빙 하우가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의 특징으로 들고
          있는 것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가정과 같은 전통적인 권위의 중심지들이 인간에
          대한 구속력을 상실해 간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율적으로 향유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다른 사회
          집단 혹은 종교 집단에게 양도할 수도 없는 자유라는
          짐을 진 채 떠돌게 된다."
            "예전에는 인간의 삶에 있어서 위기 혹은 변화의
          순간을 특징하는 것으로 인정되고, 그 위기와 변화를
          수용하는 데 일익을 담당했던 전통적 의식들이 이제는
          무시되거나 그저 공개적인 전시용의 단순한 행사로
          평가 절하된다."
            하긴 굳이 어빙 하우를 들지 않더라도 우리는
          이러한 사회의 변화를 쉽게 감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전통적인 우리의 '가정'이 우리의 삶의
          중심에서 떠나 있는 것은 오늘의 우리들도 충분히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먹을 갈고 계시는'
          아버지의 이미지는 사라져 버렸다고 해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텔레비전 없던 시절에 아버지와 그 아버지의
          붓은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과거와의 교류를 주는
          것이었을 것이다.
            어머니도 이제 더 이상 송편을 빚지 않으신다는 점,
          크기가 서로 다른 '못 생긴' 송편을 모여 앉아서
          빚기보다는 '떡집'에서 예쁘게 만들어진 송편을 사
          오는 게 시간적으로도 물질적으로도 훨씬 경제적인 이
          시대, 그러므로 모든 송편은 김이 오르는 대신
          규격화되어 반들반들한 윤이 나는 게 더 정상으로
          보이는 이 시대, 조상님들의 혼이 계시다면, 어디로
          오실 것인가, ---- 하고 결코 걱정하지는 않는 이
          시대, 전통으로서의 우리의 차례상도 어빙 하우의
          말처럼 '무시되거나' 또는 텔레비전의 요리 시간에
          '전시적, 공개적'으로 과시되는 경우가 아마 더 많을
          것이다.
            우리는 혼 없는 시대 그러므로 신(神) 없는 시대에
          살고 있는지 모른다. 따라서 그 신과 혼이 주시게
          마련인 '추억'이 없는 시대에 살고 있는지 모른다.
          우리의 존재라는 것이 실은 추억이 되고 있는 것임을
          모르면서 살고 있다고나 할까.
            그러나 이제 이렇게 현대화한 시대가 우리를
          상실시켜 갈수록 우리는 '우리를 상실시키지 않는 그
          무엇'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실로 우리를 가장 우리답게 하는 그것은
          '혼들의 추억제' ---- 그것인지도 모른다.

            26. 세 개의 그림

            나에게는 잠들기 전이라든가, 알지 못할 골목길을
          가고 있을 때라든가, 아주 피곤하고 괴로울 때, 또는
          아주 답답한 지경에 처해 있을 때, 한숨밖에 나오는
          것이 없을 때..... 어느 순간엔가 떠오르곤 하는 그림
          세 개가 있다.
            그 첫번째 그림은 어떤 백사장의 그림이다.
            하얀 모래가 드넓게 퍼져 있고, 한켠에는 송림이
          우거진 그런 곳, 파도가 끊임없이 일고 있는 그런 곳,
          그 백사장 한가운데에 한 어린 여자 아이가 서 있다.
          어린 아이는 거의 벌거벗고 있으며 배가 불쑥
          튀어나와 있다. 텔레비전에 가끔 방영되곤 하는
          소말리아의 영양 실조에 걸린 어린 아이를 상상하면
          된다. 그 아이는 모래를 밟으며 마악 뛰어 나가려는
          자세로 서 있다. 어찌 보면 전혀 계집아이로 보이지
          않는다. 짧게 상고머리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아이는 하늘을 바라보며 뭐라고 소리 지른다. 소리
          지르는 장면과 파도가 쳐 오는 모습이 꽤 선명하다.
          그 아이는 무슨 주전자를 들고 있다. 그것을
          뛰어가려는 자세를 한 채 정신없이 입에 붓고 있다.
            또 한 그림은 젊은 여인이 갓난아이를 업고
          임진강을 마악 건너려 하고 있는 그림이다. 그곳은
          임진강의 좁은 물목이었지만 여인은 키가 너무
          작았으므로 걸어서 건널 수가 없었다. 마침 지게꾼
          할아버지가 다가와 그녀에게 등을 내민다. 젊은
          여인은 업은 아기를 돌려 안고서는 지게 위에
          올라앉는다. 새벽의 임진강 물, 푸르고 찬 그 강물의
          물결 위를 소리 안 나게 살금살금, 두 사람과 여인의
          품에 안긴 아기가 건너간다. 젊은 여인은 아기가 혹시
          울세라, 가슴에 꼭 품어 입을 막고 있다. 저쪽
          강가에는 러시아 병사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도강자(渡江者)가 눈에 띄기만 하면 총질을
          해댔으므로 소리 안 나게 해야 한다. 드디어 다
          건넜다. 지게는 소리 없이 젊은 여인과 아기를 임진강
          건너편 숲에 내려놓았다.
            첫번째 그림은 내가 다섯 살이던 무렵 부산 송도의
          피난민 수용소에서 살고 있었던 모습이다. 나는 그때
          영양 실조로 배가 불룩 튀어 나오고, 형편없는
          몰골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미군들이 나누어 주는
          분유를 주전자에 끓인 것을 한 주전자나 혼자 다
          마시더니 '배가 쑥 들어갔다'고 한다.
            그때의 그 '전설적인'주전자와 함께 은모래가
          지금도 약간은 눈에 보이는 듯하다. 그래서 나는 가끔
          이 그림을 꿈에 보기도 하고 막다른 길 같은 데서
          떠올리기도 하는 것이다.
            (나는 지금 그 송도에 살고 있는데, 전혀 옛 모습을
          떠올릴 수 없이 송도는 변해 버렸지만, 희미한
          갯내음은 그때의 은모래와 넓은 백사장을 생각나게
          한다. 그리고 고마워진다. 나를 살려 준 이 모래
          벌판으로 내가 다시 돌아온 것이..... 어쩌면 나는
          갯내음 같은 운명이 나를 불러서 여기로 다시
          돌아왔는지 모른다. 아마 나도 모르게, 다섯 살 때
          잠깐 살던 곳이지만, 그것은 나도 모르게 고향이 되어
          나를 끌어당긴 모양이다.)
            두 번째 그림은 사실 전혀 생각이 나지 않는
          그림이다. 하도 이야기를 많이 듣다 보니까 그런
          그림을 나의 뇌가 나도 모르게 재생해 낸 것이다.
            나는 원래 함경 남도 홍원에서 출생했으나,
          서울에서 독립 운동을 하시느라 혼자 떠돌아 다니시던
          아버지를 만나시려고 어머니가 고향을 떠나시는
          바람에 그때 젖을 먹어야 하는, 백 일밖에 안 된
          갓난아기였던 나는 그 어머니의 등에 업혀 서울로 온
          것이다. 어머니가 고향을 떠나시던 무렵 휴전선은
          막힐락 말락 할 때였고, 어머니가 나오신 다음엔 그
          임진강 물마저 철저히 막혀 버린 것이었다. 덕분에
          우리 가족은 이산 가족이 되었으나 나는 행복하게도
          아버지와 살게 되었으며, 지금도 여기서 삶의 터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이 그림을 ----
          재구성된 그림이긴 하지만 ---- 잊을 수 있을 것인가.
          사는 것이 아주 힘들 때면 나는 임진강 물을
          생각한다. 그때 내가 '영특하게도' 울지 않았음을
          생각한다. 어머니의 젊음과 아버지의 젊으셨던 모습을
          생각한다. 내 입가엔 웃음이 떠오른다. 얼마나
          다행인가. 지금의 삶은 다 여분의 삶인지도 모른다는
          고마움도 떠오른다. 그때 러시아 병사가 총이라도 한
          방 쐈더라면 ..... 지금의 나는 없을 것이니까.
            그러나 아무래도 나를 가장 살게 하는, 가장
          가까우며 명확하게 그려지는 그림은 세 번째의 그림일
          것이다.
            한 여학생이 거리를 걸어간다. 교복을 깨끗이 입고
          손에는 무척 무거워 보이는 가방을 들고 있다.
          여학생의 한쪽 손에는 가방에 미처 들어가지 못한 책
          몇 권이 들려 있다. 사르트르, 니체, 도스토예프스키,
          릴케..... 의 작품집들이다. 여학생은 빨리빨리
          걷는다. 집에 도착하기 전에 나타나는 로터리의 헌
          책방으로 들어간다. 헌 책방 주인은 웃음을 띠고 그
          여학생을 맞는다. 여학생은 가져온 책을 부지런히
          다른 책과 바꿔 들고 책방을 나선다. 여학생의 얼굴엔
          평소에는 그리 잘 볼 수 없는 만족감 같은 것이 넘쳐
          흐른다. 어둑어둑해지는 하늘 아래서 여학생의
          걸음걸이는 그렇게 가볍고 힘찰 수가 없다. 여학생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같은 것을 쓰리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또는 릴케의 <말테의 수기>
          같은 것은 아마 자기도 꼭 쓸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아, 그녀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었다! 능력의
          부족이라든가, 운명 따위라든가..... 그런 것들은
          생각하지도 않은 채. 그 그림의 뒤켠에는 또 하나의
          작은 그림이 딸려 나온다. 어느 날 그 여학생은
          고무신을 신은 채로 밤에 집을 나선다. 걸어서 종로에
          있는 큰 책방까지 간다. 파스테르나크라는 작가가
          노벨상를 탔는데, 그의 소설이 번역되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그림의 배경에는 음악이
          흐르고 있다. 차이코프스키라든가 베토벤의 음악의
          선율들이.
            그곳은 서울의 혜화동이다. 그 여학생은 여학생
          시절의 '나'다. 국민학교 시절부터, 중.고등학교 육
          년을 혜화동에서 살았으므로 나는 예전에는 혜화동을
          가장 친근한 나의 옛 동네로 생각하였다. 한때는
          그곳이 나의 '우주'의 거의 전부였다고나 할 수
          있을는지.
            거기에는 그러므로 눈에 잘 그려지는 '향수'가
          있다. 내가 몇 시간씩이나 꼼짝 않고 쳐다본 하늘이
          있으며, 양털 구름이 있으며, 혜화동집 (한옥이었다)
          사랑채의 잡초 무성한 작은 뜰이 있다. 동생들을
          데리고 무조건 걸어가다 보니, 그만 해질 무렵이 되어
          자하문 밖 청운동에 닿아 버렸던 혜화동 뒷산이
          있다(지금은 그곳에 큰 길이 뚫려 있지만, 그때는
          숲과 나무만 무성한 산길이었다).
            아, 그때의 기억들을 이제 어찌 할 것인가. 이젠
          나이가 너무 많이 먹어 버렸다. 산길로 치자면 올라온
          길이 너무 많아져 버린 것이다. 다시 내려가기에는
          그러므로 저 아래, 그림이 있는 곳은 향수일 수밖에
          없다. 가고 싶지만 갈 수 없는 곳 ---- 세상은 아니
          진정한 삶은 '추억'속에만 있는 것인가. 우리의 삶은,
          언제나, '향수'인가.

            27. 소리 없는 소멸의 장면들

            찾는 사람 : 조미령 ---- 삼십삼 세. 속히 귀가
          바람. 모든 일 다 해결 되었음.(754 - ()()()())
            서순덕 ---- 모든 것을 용서함. 연락 주시는 분
          후사함.
            (783 - ()()()())
            朴玄柱 ---- 어머니가 위독하니 급히 연락 바람.
            윤찬섭 ---- 사십오 세. 고향 = 충북 중원군 신니면
          ()()리
            장도숙 ---- 오십 구 세. 백오십칠 센티미터. 삼베
          저고리, 자주색 바지, 황토색 단화. 연락 주시는 분
          후사.
            제명진 ---- 아버지 위독. 급히 귀가 바람. 연락
          후사.
            성진우 ---- 십오 세(고1). 백육십 센티미터. 부모
          애타게 기다림.
            우리가 찾고 있는 그 누군가 ---- 소리 없이
          소멸할지라도, 또는 역사 속에서 개인은 별로 의미가
          없을지라도 ---- 가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우리가 아직
          살아 있음일 것입니다. '누구인가'가 '누구인가'를
          찾고 있을 때, 그래도 우리네 작은 삶들은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2

            그 장면은 무척 충격적이었습니다. 날씨가 몹시
          변덕을 부리는 장마철이고 요즈음이기에 그 장면은
          더욱 가슴을 서늘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두 장년의
          남자가 사람들 ---- 특히 구조 대원을 포함해서 ----
          이 빤히 바라보고 있는 앞에서 마치 거품처럼, 소리도
          없이 물결 속으로 사라지던 모습.....
            아마 텔레비전 뉴스를 보았던 이들은 그 소리 없는
          소멸의 장면을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전라 북도 완주군의 한 저수지, 쏟아지는 비에
          갑자기 물이 불어나, 저수지 한가운데 고립된 채 갇혀
          버린, 익사 직전에 놓여 있던 두 남자, 신고를 받고
          출동한 구조 대원들이 튜브 하나를 던졌습니다. 두
          남자 중 한 남자가 던져진 튜브를 있는 힘을 다해
          잡았습니다. 그러나 소용돌이치며 밀려 내려오는 물의
          압력과 급한 속도에 남자는 곧 밀려 넘어지면서
          튜브를 놓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튜브를 놓친 그
          남자는 아앗 ---- 하는 비명도 지를 새 없이 삼켜지듯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어 구조 대원은 소용돌이치는 물 속에 남은 한
          남자에게 밧줄을 던졌습니다. 그 남자도 급류에
          밀리면서 있는 힘을 다해 밧줄을 잡았습니다만, 잠시
          물 밖으로 올라오는가 싶던 그 남자도 물의 급한
          속도와 압력에 떠밀려 곧 밧줄을 놓치고 소용돌이치는
          물살 위에 내동댕이쳐졌습니다. 힘이 빠진 그 남자는
          떠내려가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쳤습니다. ---- 그
          모양이 순간적으로 내게는 꼭 물 위에 앉아 있는 것
          같았습니다. ---- 처절한 잠깐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곧 급류가 밀려 내려와 발버둥을 치는 그
          남자를 삼켜 버리고 말았습니다. 두 남자의 모습은
          물결 사이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다만 급류의
          아래편에 검은 튜브만이 맴돌고 있었습니다. .....둑
          주변에는 몰려 서 있던 사람들이 소리도 못 지르고
          허탈하게들 서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두
          남자가 몇 초 사이에 물살에 떠밀려 지상에서
          사라지는 장면을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상 저온의
          스산한 장마철 바람 소리를 들으면서.....
            다음날 텔레비전 뉴스는 그 사건에 대해서 분노에
          찬 해석 보도를 또 했습니다. 언론으로서 문제 제기를
          한 것이었습니다. 앵커가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습니다. "튜브가 하나만 더 있었더라도 한
          사람은 구할 수 있었습니다.""튜브에 묶을 수 있도록
          밧줄 하나만 더 던졌더라도 그 사람들은 구할 수
          있었습니다.""구조대가 조금만 더 일찍 왔더라도 그
          사람들은 구할 수 있었습니다.""도대체 튜브 하나,
          밧줄 하나 던지는 식의, 그렇게 원시적인 구조가 어디
          있습니까""그 사람들은 한 시간 이상을 물살과 싸우고
          있었습니다. 한 시간 이상이나....."
            앵커의 목소리는 분노에 떨고 있었습니다.
            선진국으로 진입하는 대한 민국의 인명 구조 수준이
          정말 그럴 수가.....
            그런데 정말 그랬던 것입니다. 더구나 그곳, 즉
          사건의 발생 지역이 지방이었기에 그 '수준'은 더욱
          참혹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리고
          그랬기에 그 사건에 대한 반응도 그저 '그 정도'로
          그쳤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 말고도 그 '소멸의 화면'은
          저에게 또 다른 ---- 이 시대의 어떤 모습을
          상징적으로까지 보여 줬다고 할까 ---- 새삼스런
          충격을 주었습니다. 소리도 없이 군중 속에서, 또는
          제도 앞에서 사라지는 한 개인의 거품 같은 모습!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운명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F.제임슨 등이 말하는 식의 선진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의 '개인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도
          아닙니다.
            우리 사회 속에서 그 동안 개인은 '제도화된
          익명성'에 너무 익숙하게 되어, 소리도 없이 사라지는
          것에 어찌 보면 길들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이야기입니다.
            사회학자들은 흔히 '익명의 개인'이라는 어휘를
          씁니다만, 우리의 익명성은 오랜 군사 정권하에서
          아주 심화되었고, 그러다 보니 이제는 습관적이 되어
          버린 측면까지도 강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사회의 익명성은 오랫동안
          합리적으로 제도화되어 이루어져 온 익명성인
          것입니다. 저수지의 그 남자들처럼, 말하자면, 저도
          당신도 언제 어디서 부당하게 소리도 없이, 흔적도
          없이 소멸당할지 모르는 것입니다.
            진정한 복지 사회는 이 개인의, 제도화되어 버리는
          익명성을 최소화하여 구출할 수 있는 사회일
          것입니다.
            에리식톤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인물입니다. 그는
          신의 정원의 나무를 베어 버린 '오만함'의 죄로
          기아의 형벌을 받습니다. 그 형벌이 내린 후로 그는
          끊임없는 배고픔에 시달립니다. 있는 재산을 다 팔아
          먹을 것을 사서 먹습니다. 나중에는 더 이상 팔
          재산이 없게 되자 외동딸까지 팔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딸도 더 이상 팔 수 없게 되자 그는 드디어 자기의
          팔 다리를 먹기 시작합니다.
            마치 우리 사회에 퍼져 있는, 제도화되어 버린
          개인의 경시, 인명의 경시, 나아가 개인의 익명성의
          부추김은 자기의 사지를 먹어 버리는 에리식톤과도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우리의 '존재'를 실은
          스스로를 이 사회에서 추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열리는 사회는 우리의 그러한
          익명성을 실명성으로 바꿔 주는 사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익명성을 구출하는 정책들. 목소리들이
          기다려집니다. 그래서 어느 누구도, 이 사회의
          구성원이라면 그 어느 개인도 제도 앞에서 소리 없이
          사라지는 일은 없도록 해 주는 정부가 있을 때 우리는
          다 함께 복지 사회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누구인가'를 '누구인가'가 찾고 있을 때,
          '누구인가'의 존재는 눈물겨운 실명의 존재일
          것입니다.

            28. 꿈

            나에게는 좀 말하기 꺼려지는 버릇이 하나 있다.
          아침에 눈이 뜨이면 부지런히 지난밤 꿈을 되새기는
          버릇이다. 하긴 그렇게 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으리라. 우선 그 하나는 시를 쓰면서 생긴
          버릇이라는 점이고 ---- 한때는 실제로 꿈이 시가
          되는 일이 많던 시절이 있었다, ---- 또 하나는
          막연히나마 점을 치는 버릇 ---- 실제로 여러 번의
          꿈이 현실의 일과 들어맞았다 ----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너무 피곤한 탓인지, 나의 예언적 기능이
          많이 소실되어 버린 탓인지 꿈을 꾸어도 별로 기억이
          나지 않았는데, 어젯밤 꿈은 그렇지 않았다. 생생할
          뿐 아니라 꿈속의 장면이 그리워 죽을 지경이었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나타나셨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생시처럼 한복을 입으신 채 생전에는 좀처럼 보여
          주지 않으시던 미소마저 띠시고 나에게 뭐라고
          말씀하셨다. 아마도 무슨 약을 주시겠다는 말씀이였던
          것 같았다. 아무튼 잠에서 깨자 나는 버릇처럼 지난밤
          꿈을 뒤졌고, 아버지의 모습 하나하나를 되새기며
          하루를 시작했다.
            그런데 저녁 무렵이었다. 전화 하나가 왔다. 전혀
          모르는 목소리였다. 한 오십대 아주머니의
          목소리..... 으아해 하는 나에게 그 목소리는 자기
          소개를 하였다. .....나는 강 교수 아버지의 친척
          되는 사람이야..... 해방 때 부산으로 왔지.....
          우연히 신문에서 은교 이름을 보았어. 그래서 과연
          맞는지 한번 물어 보려고.....
            "부산에 친척이 계신 줄은 몰랐어요....."
            그러니까 이야기의 내용은 대충 이런 것이었다.
          그녀의 죽은 남동생이 아버지를 자주 찾아뵈었다는
          것, 아버지가 부산에 계실 당시 그녀의 집엘 가신
          적이 있다는 것, 자기의 남편은 가게를 하고 있어서
          생활은 꽤 괜찮은 편이라는 것, 딸이 대학에 다닌다는
          것, 조카가 동아대를 나왔다는 것...., 나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하다가 주소를 묻고 전화를 끊었다.
            그러나 지난밤 꿈을 생각하니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 아버지가 나에게 신호를 보내셨군. 이
          불효 막심한 나에게..... 나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런데 그날 밤 또 하나의 생각지도 않은 전화가
          왔다. 대학 때 헤어지고 난 후 전혀 소식을 모르던
          친구였다. 그림을 그리던 친구였는데 지금 그림
          활동은 하지 않는다고 했다. 우리는 정신없이
          떠들었다. 그녀는 역시 잘 웃었다. 고등학교 다니는
          아들과 딸이 있다고 했다. 다음날 만나기로 했다.
            그녀를 만나기로 한 날은 아침부터 몹시 안개가
          끼어 있었다. 아파트에서 바라다보이는 건너편 섬이
          안개에 가려 마치 온몸뚱이가 퉁퉁 부은 사람의
          형상으로 흐릿하게 보이고 있었다. 앞바다에 정박하고
          있는 배들은 안개 속에서 간혹 불을 켠 채 빠끔히
          세상을 내다보고 있었다. 안개들은 수평선마저
          가렸다가는 또 물러나 어딘가로 부지런히 몰려가고들
          있었다. 창에 부딪는 바람 소리가 마치 한 사람은
          높게 울고 한 사람은 낮게 우는 것같이 우웅우웅 들려
          오고 있었다.
            친구는 정확히 약속한 시간에 벨을 눌렀다. 문을
          열기 전에 나는 잠시 숨을 가다듬었다. 우리는 서로
          얼마나 변했을까. 나는 그 친구에게 어떻게 보일까.
          나는 갑자기 내가 마구 부끄러워지는 기분이었다.
          이십대에 헤어져 이제 만나는 것이 아닌가. 순간 나는
          대학교 동창 남학생을 만난 일을 떠올렸다. 어떤
          회합에서였다.
            그 회합은 나의 강연이 주가 되는 것이었는데 어떤
          대학교에서 주최하는 것이었다. 강연이 끝난 후
          학생들과 모임의 자리가 마련되었는데, 그 학교의
          지도 교수 되는 분이 명함을 내밀었다. 처음 보는
          이름이었다. 한참 이 이야기, 저 이야기가 오가며
          화기애애하게 식사까지 하였는데 한 학생이 "우리
          교수님을 모르세요?" 하는 것이었다. "오늘 처음
          뵈었는데....." 하는 나의 말에
          "동창이시라는데요?"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주의
          깊게 그 교수님을 살펴보았으나 전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그러다 나는 '아 --아 --'하고 소리 지를
          뻔하였다. 햇빛 사이로 그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언제나 창 앞에 책가방을 들고 서 있던 한 학생이
          생각난 것이었다. 그랬다. 그 학생은 별 특징이 없이
          언제나 무거운 책가방을 들고 구석진 창 앞에 있었다.
          우리 과의 강의실은 주로 지하실이었으므로,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은 언제나 유달리 따뜻하고 빛나 보이곤
          했었다. 그 학생이 저 교수라니! 그런데 왜 나는 몰라
          보았을까. 조금 있다가 나는 그 이유를 알았다. 하긴
          내가 원체 사람을 잘 기억하지 않는 탓도 있지만,
          그의 경우 나를 철저히 망각 속으로 몬 것은 그 교수
          동창의 머리카락 때문이었다. 완전히 대머리였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인상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을 뿐
          아니라, 언제나 스스로를 젊다고 생각하는 나와 같은
          연배의 나이로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도 그렇게 늙었겠지..... 몰라보게 말야.....
            문을 열었다. 친구가 들어섰다. 우리는 얼른 손을
          잡고, 그리고 서로를 꼼꼼히 바라보았다. 친구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친구는 살이 좀 쪄 있었다. 살이 찐 탓에 학생
          때보다 얼굴이 환해 보였으나 좀 처져 버린 눈이며
          눈가의 주름살이 중년의 나이를 잘 말해 주고 있었다.
          위풍당당해 보인다고 할까, 아무튼 많이 변해 있었다.
          입을 열면 무척 수다스러울 듯한 얼굴.
            "하나도 안 변했네, 어쩜 그대로니?"
            우리는 호들갑을 떨었다.
            "왜 많이 늙었지?"
            "아니, 그대로야..... 어머 집이 좋구나....."
            우리는 차를 마시며 옛날 이야기를 했다. 학교 다닐
          때의 이야기며, 누구는 이혼을 했느니, 누구는 벌써
          죽었느니 등등, 과연 그 친구는 수다스러웠다. 물론
          대학 시절엔 그렇게 조용할 수가 없었던 친구였다.
            "그런데 말야, 나 요새 참 고민이다?"
            "무엇 때문에?"
            친구는 딸기를 집어 붉게 칠한 입술 사이로 넣으며
          말했다.
            "우리 시아버님 때문에....."
            "왜, 어디 편찮으시니?"
            "아니, 그런 것은 아닌데, 글쎄 뭐랄까, 행동이
          이상하셔서..... 글쎄, 길에서 뭘 집어 오셔서
          큰일이란다."
            "뭘?"
            "왜 그 일회용 라이터도 좋고 칫솔도 좋고, 핀 같은
          것, 담배 꽁초 같은 것, 조그만 병 조각 같은 것,
          연필 깎는 칼 부러진 것도 좋고, 뭐 그런 식이야.
          그래서 아예 다락을 치워 드렸는데, 거기서
          바퀴벌레가 나오지 뭐니? 거기서 사셔. 길거리에 그런
          걸 주우러 나가시지 않으시면, 다락에 들어가셔서 안
          나오신단다. 하루종일 아무것도 안 잡수시고 그
          물건들을 닦고 가지런히 정리하고 고치고
          하시느라고."
            "거기서 꿈을 꾸시는 게로구나. 그런 얘기 많이
          들었어."
            친구는 입술을 다시 붉게 칠하고 갔다. 한껏
          웃으면서..... 그렇다. 꿈이다. 너는 웃으며, 혹은
          울며, 나는 여기서, 그는 거기서..... 스스로 만든
          방에 갇혀서, 혹은 금빛 줄에 묶여서..... 그 무엇에
          둘러싸여서, 그 무엇을 바라보며.

            29. '사람살이'의 더듬음 그리고 상처

            가끔 우리는, 우리가 역사 속의 개인이라는 사실을,
          어찌 보면 퍽 심각하면서도 거대한 사실을 잊고 사는
          것 같다. 역사 속의 개인이라는 사실에의 의식은
          우리가 실은 수없이 상처를 입고 있는 존재이며,
          역사는 그 무수한 개인의 상처 자국들이 만들고 있는
          것이라는 자각에서부터 나오는 것일 것이다. 역사를
          만드는 수없는 상처들..... 우리 개인들이 만드는
          수없는 작은 상처들..... 우리 개인들이 상처 입힌
          것이며 동시에 우리 개인들이 상처 입은 것들,
          그것들의 집합인 역사 ---- 그런 것들에 대해 쓰는
          이야기들은 그러므로 개인인 나를 역사 속으로 떠밀어
          올려 주며 또 개인으로서의 나를 감동시킨다.
            그런데 그것들이 실은 '아름다움'이라는 자각은
          상당히 늦게 오는 것 같다.
            어떤 작가들은 그런 '거대하며 사소한, 원인이며
          결과인' 아름다움에의 탐색을 '하찮은 개인인 나의
          역사'를 더듬어 봄으로써 시작한다.
            작가 송기원이 금년도 동인문학상 수상작인 중편
          소설 <아름다운 얼굴>에서 자신의 출생의 비밀부터
          털어 놓고 있는 것도 그런 '더듬음'이 시키는 일일
          것이다.
            <아름다운 얼굴>은 작가 송기원이 자전적이라고
          암시하고 있는 소설인데, 주인공의 사생아 시절의
          이야기부터 탐색해 나가고 있다. 주인공은
          시골장터에서 '장돌뱅이 아이'로 자라난다. 그는
          자기를 버린 생부를 생부인 줄도 모르는 채로 장터
          어느 술집 골목 앞에서 만난다. 생부는 그에게 명절
          선물로 양말 한 켤레를 준다. 그 '빨갛고, 노랗고,
          파란 갖가지 색깔이 층층이 겹친 색동 양말'을 받고
          좋아하는 그에게 그러나 돌아온 것은 어머니의,
          '증오에 찬'매였다.

            "깅가밍가 했드만..... 급살 맞을 인사....."
            아이에게 매가 쏟아진 것은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넋이 나간 듯 허공을 쳐다보던 시선이 아이에게
          내려오기가 무섭게,
            "이 동냥치 새끼야, 나가 니한테 믹일 걸 안
          믹ㅇ냐, 입힐 걸 안 입ㅎ냐, 머이 부족해서
          동냥질이냐?"
            어머니는 욕설과 함께 부지깽이를 휘두르는
          것이었다. 그까짓 양말로 인해 매질을 당하리라고는
          눈곱만큼도 상상하지 못했던 아이로서는, 처음에는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오메, 엄니. 동냥질한 것이 아녀라우. 그 아자씨가
          맬갑시 줬단 말이요."
            "몰르는 사람이 주는 것을 기냥 받어 오먼 그것이
          동냥치제, 동냥치가 따로 있다냐?"
            "아, 안 받을랑께, 얼근이 주먼 공손허게
          받어란디요?"
            "아나, 나껏도 받아라, 아나, 아나."
            어머니의 매질은, 아이의 몸뚱이에 부지깽이가
          떨어질 때마다 숨이 헉헉 막힐 만큼 거센 것이었다.

            주인공은 자라나면서 장터 출신의 비천한 자기를
          혐오하게 되고, 그 혐오의 절정에서 국민학교 졸업
          앨범 속의 자신의 얼굴을 칼로 도려 내는 섬뜩한
          행위를 하게 된다. 그리고 어느 날 장터 술집
          골목에서 그에게 양말을 주었던 '사내'를
          전심(全心)을 다하여 혐오하는 것이다.

            삼십촉짜리 흐린 전등 아래서 손을 떨며 소년이
          면도날로 지운 것은 어쩌면 자신의 얼굴이 아니라
          바로 사내의 얼굴이었는지 모른다. 아니,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 어쩌면 소년은 자신의 삶 속에서
          돌이킬 수 없는 조건이 된 채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사내의 얼굴을 지웠을 것이다. 막연하지만
          소년은 자신의 얼굴에서 사내의 얼굴이 지워지지 않는
          한, 자신의 얼굴은 영원히 사내의 얼굴에 가려지고 말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소년은 면도날로 자신의 얼굴을 지우는 식의 자기
          혐오 이외에는 사내의 얼굴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돌이켜 보면, 사방의 모든 것이 춥고
          암담한 사춘기의 소년에게는 유일한 방법이었을 터다.

            그러나 결국 그는 그 상처를 준, 비천하고 사소한
          이들이야말로 실은 상처를 받은 이들이라는 결론에
          도달하며 그것을 아름다움으로 파악하게 된다. 내가
          상처 입힌 모든 것..... 우리가 상처 입힌 모든
          것..... 우리가 살아 내고 있는 이 세상의 이
          거리..... 결국 아름다움..... 우리가 매달리고 있는
          이 모든 것..... 사소한 상처인 것의..... 결국
          아름다움.
            소설의 끝 부분에 나오는 친구와의 대화도 그런
          의미에서 무척 시사적이다.

            "옛날에 사회주의자가 한 명 있었는데요."
            "그래서?"
            "아직도 사회주의를 안 버렸대요."
            "....."
            "당연하지. 그 캄캄한 나이에 그거라도 없으면
          어떻게 살아남겠나?"

            <아름다운 얼굴>의 결구는 상당히 아름답다. 우리
          문학이 팔십년대 민중 문학의 시대를 거치면서 이만큼
          두꺼워졌구나 하는 감동을 받게 한다.
            "만약에 나한테 조금이라도 아름다운 게 있다면
          그건 내께 아니야. 그건 내가 상처 입힌 모든 이들
          것이지."
            거기에는 저 작고 날카로운 눈매의 사내도
          포함될까, 하고 문득 나는 자문했다. 그리고 별로
          오래지 않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사내야말로 나에게 가장 크게 상처를 입었는지도
          몰랐다.
            이렇듯 개인의 상처가 실은 역사 속의 상처이며, 그
          상처를 작가는 치유해야 한다는 자각은 젊은 여성
          작가 신경숙의 소설에서도 드러난다.
            그녀는 단편 <풍금이 있던 자리>에서 그러한,
          범상치 않은, 아주 내밀한 고백을 하고 있다. <풍금이
          있던 자리>는 주인공이 연인에게 편지 쓰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말하자면 아버지의 옛날 여인과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서, 그 여인에 의해서 자기의
          어머니가 상처 받았듯이 자신은 그러한 상처를 또 한
          여자에게 주지 않겠다는, 고통스러운 자각의 편지다.
            아주 잔잔한 문체로 소설이 이루어져 있으므로,
          읽는 이들은 그런 '역사의'깊이에 있는 흔적들을
          놓치기 쉽다. 그러나 그녀의 문체 속엔 진한 상처의
          자국들이 숨어 있다. 아버지의 그 옛 여인의 상처, 그
          여인으로 인한 어머니의 상처, 형제들의 상처, 그리고
          자신과 소설에서는 결코 잘 드러나지 않는 연인의
          상처, 연인의 아내의 상처..... 그 상처를 주인공은
          스스로 품어 안으려고 하는 것이다.

            지금..... 막, 당신과의 약속 시간이 지났습니다.
          순간, 숯불이 얹혀지는 듯한 뜨거움이 가슴에
          치받쳤습니다. 이 치받침은 매우 익숙한 것입니다.
          당신을 사랑하는 동안 나의 하루는 이 치받침으로
          시작해서 이 치받침으로 끝나곤 했으니, 나에겐
          오히려 동무 같은 감정이에요. 당신을 만날 때의
          반가움, 당신의 얼굴을 만져 보고 싶은 수줍음,
          당신이 없는 동안의 그리움, 누구에게도 당신을
          자랑할 수 없어서 곧잘 얼굴이 발그레해졌던
          무안함까지 그 치받침 속에는 섞여 있습니다. 그렇게
          익숙한 것이지만, 방금 것의 치받침은 한 세계를
          무너뜨리느라고 쉬이 가라앉지 않을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세상에는 가까이 가선 안 될 게 얼마나
          많은지요. 그 안 된다는 것 때문에 또 얼마나 애가
          타는지요.

            팔십년대라는 특수한 시대, 소위 민중의 시대를
          거쳤기에 그것들 ---- 아름다움에의 추구는 그리
          간단히 읽히지 않는다. 이른바 '순수 문학
          시대(이러한 어휘의 쓰임이 가능하다면)'의 그것들
          속에는 개인과 합치됨과 동시에 그것을 넘어서는
          역사의 무늬 같은 것이 없었다고 한다면, 오늘의
          우수한 그것들에는 역사 속의 개인, 개인 속의 역사를
          부르는 '합일성 역사'의 깊은 무늬가 있다고 할는지.
            역사는 '사람살이'다. 이데올로기도 상처로서
          역사의 살[肉] 속에 새겨지는..... 그런 자각의
          문학이 오늘은 귀하게 얽혀진다.

            30. 그 팥죽

            이규보의 글 중에 이런 것이 있다.

            어떤 나그네가 '나'에게 말한다.
            "어제 저녁에는 아주 처참한 광경을 보았습니다.
          어떤 불량한 사람이 큰 몽둥이로 개를 쳐서 죽이는데
          너무 참혹하여 마음이 아파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맹세코 개나 돼지의 고기를 먹지 않기로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나'는 대답한다.
            "어떤 사람이 화로를 끼고 앉아 이를 잡아 그 불
          속에 태워 버리는 것을 보고 나는 마음이 아파 다시는
          이를 잡지 않기로 맹세했습니다."
            나그네가 한갖 미물에 불과한 이와 짐승인 개를
          비교하는 것을 듣고 놀리는 게 아니냐고 불평하자
          '나'는 다시 말한다.
            "무릇 피와 기운이 있는 것은 사람으로부터
          소.말.돼지.양.벌레.개미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한결같이 살기를 원하고 죽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어찌 큰 놈만 죽이기를 싫어하고 작은 놈만 죽이기를
          좋아하겠습니까? 그러니까 개와 이의 죽음은 같은
          것입니다. 당신의 열 손가락을 깨물어 보십시오. 엄지
          손가락만이 아프고 그 나머지는 아프지 않습니까?
          한몸에 붙어 있는 큰 지절과 작은 부분이 골고루 피와
          고기가 있느니 그 아픔은 같은 것이 아닙니까? 하물며
          각기 기운과 숨을 받은 자로 어찌 저놈은 죽음을
          싫어하고 이놈은 좋아할 턱이 있겠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하여 달팽이의 뿔을 쇠뿔과 같이 보고
          메추리를 대붕(大鵬)과 동일시하도록 해 보십시오.
          연후에 나는 당신과 도(道)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연후에?'
            그런데 이규보의 이야기는 옳은가?
            글쎄.....
            그러나 이 지상에는 작은 것들이 큰 것들보다 훨씬
          많은 것만은 분명하다.
            너와 나는 사실 너무 작다. 그러나 '어느
          날인가부터' 우리는 큰 것을 향해, 높은 것을 향해,
          보다 힘센 것을 향해 달리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작은 존재'이었음을 잊어버린다. 얼마든지
          커질 수 있다고 착각한다. 그것이 역사이며
          영웅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작은 것과 큰 것을 나누는 이성은 과연
          합리적인 것인가? 역사가 '사소한 것들의 역사'임을
          이해하는 것은 비합리적인 일인가?
            한 작은 계집아이를 기억한다. 그 계집아이가 속해
          있었던 작은 것들의 사회 앞에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팥죽 한 그릇이 놓여 있다. 아니, 그 작은 계집아이가
          가고 있는 보다 큰 것들의 사회의 길목에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팥죽 한 그릇이 고요히 앉아 있다.
          그 '김'을 넘어 '개와 이의 죽음'을 구분하는 세상은
          마구 달리고 있다. 정신없이 커지며 달리고 있다.
          이윽고 '배 터진 개구리처럼' 스스로 혼절할
          때까지.....
            오늘은 그 따뜻한 '김'을 만나고 싶다. 작은 것들의
          사회 속으로 나를 들어가게 하는 그 '김'을, 무릇
          생명 있는 것들이 살고 있는 세상의 훈기를, 그
          '김'을 내 앞에 놓아 준 김 선생님에게 그래서 편지
          하나를 쓴다.

            김 선생님, 한 작은 계집아이를 기억하십니까?
            육이오 피난 시절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엉망으로
          찌그러져 있던 시절, 눈만 커다란 갈래 머리의 한
          작은 계집아이, 게다가 그날은 추적추적 비까지
          내렸습니다. 피난민들의 움막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던
          초량(부산)의 그 언덕길, 기억하십니까?
            그 길은 물론 포장이 전혀 안 되어 있어서 늘
          진흙탕이었고, 사방에서 별의별 오물 냄새가 진동하는
          바람에 저는 늘 코를 막고 다녔습니다. 그 언덕
          꼭대기에 초량 국민학교가 있었죠. 비가 오면
          곳곳에서 비가 새던 교실, 판자로 겨우 꿰어 맞춘
          책상, 삐걱이는 불안한 의자, 교실 바닥은 물론
          흙바닥 그대로였던 학교. 그러나 하늘이 맑은 날이면
          바람 소리가 은은한 종소리처럼 불어 가던 곳, 제가
          만났던 맨 처음의 사회..... 그날 선생님은 저를
          부르셨습니다. 문자 그대로 뛰는 가슴을 안고 저는
          선생님 앞에 섰습니다. 선생님은 얼굴이 빨개진 저를
          데리고 그 지저분한 언덕길을 내려가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러다 어느쯤에선가 선생님은 저를
          길 한켠 구석에 있는 움막 가게로 데리고
          들어가셨습니다. 기억하십니까?
            그 가게 문간에 있던 커다란 솥에선 김이 모락모락
          오르고 있었습니다. 저는 영문을 모르는 채로 검은 그
          솥 옆에 주춤거리며 서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그러는
          저에게 식탁 하나를 가리키셨습니다. 판자로 만든
          엉성한 식탁과 역시 길다란 판자를 이어 만든 못
          자국이 거뭇거뭇한 의자, 저는 주춤주춤 그 길다란,
          시소 같은 의자에 앉았습니다. "팥죽 좋아해?"
          선생님의 굵은 목소리가 그때까지도 멈칫거리고 있던
          저의 귓가에 울렸습니다. ---- 아아, 저 솥이 팥죽을
          끓이는 솥이었구나 ---- 저는 물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우산을 접으며 선생님께서는 제자리
          맞은편에 앉으셨습니다. 감히 선생님과 마주 앉다니!
          저는 가슴이 더욱 뛰었습니다. 더구나 선생님은
          평소에 말씀이 없으셔서 제가 어렵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점이 있으셨습니다. 그런 선생님이 그렇게
          다정하게 말씀하시다니, 마치 친한 친구나 딸에게라도
          말씀하시는 것처럼.
            이윽고 팥죽 한 그릇이 저의 앞에 놓였습니다. 정말
          맛있었습니다. 어찌 그리 달콤하던지요? 그렇게
          맛있는 팥죽을 그 이후 저는 먹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시장엘 가면 한구석에 있는 팥죽
          가게에 들어가곤 합니다만, 그때의 그 맛을 능가하는,
          아니 그때의 그 맛을 생각케 하는 팥죽마저도
          발견하지 못하곤 합니다.
            선생님은 끝까지 별 말씀을 안 하셨습니다. 제가
          팥죽 한 그릇을 다 비운 다음에 그 가게 밖으로
          나오자 우산을 펴 주셨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저 '잘
          가라'고 말씀하셨을 뿐입니다. 저도 무엇인가
          얘기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가슴의 말을 입술 밖으로
          내보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을
          뿐입니다. 그 중요한, 마지막 순간에 말입니다.
            그랬습니다. 그건 마지막 순간이었습니다. 저는
          그날 이후로 다른 동네의 학교에 전학을 가게 되어
          있었으니까요.
            혼자 내려오는 언덕길은 더욱 길고
          진흙탕이었습니다. 꼬불꼬불한 골목을 몇 개나 지나
          집에 도착했을 때에야, 저는 선생님께 꼭 했어야 하는
          말이 생각났습니다. ---- "선생님, 팥죽 잊지
          않을게요."라는.

            그렇다. '그 팥죽''그 팥죽에서 모락모락 오르던
          김'은 이제 잃어버린 어떤 것들의 '김'이 되었다. 그
          '김' 저쪽에는 작은 것들 ---- 작은 생명 있는 것들이
          꼬물거리며 지구를 지탱하고 있다. 이규보의 말대로
          메추리와 대붕의 생명의 크기가 다르지 않듯이, 작은
          것들과 큰 것들의 따뜻함이 아직 분화되지 않은 채,
          모락모락 생명의 '김'을 퍼올리고 있는 것이다.
            아아 ----, 그리고 가고 싶다.

            31. 어디로 가는가, 이카로스여


            1

            이카로스는 희랍 신화에 나오는 솜씨 좋은
          장인(匠人) 다이달로스의 아들이다. 다이달로스는
          어느 날 미노스 왕의 총애를 잃고 탑 속에 감금된다.
          탑의 주위는 사면이 바다였으므로 도저히 탈출할
          도리가 없었다. 생각턴 다이달로스는 '하늘의 길'을
          통해 탈출하기로 결심한다. 왜냐하면 아무리 철통같이
          바다를 봉쇄한 왕도 하늘은 막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다이달로스는 아들 이카로스와
          함께 자기의 몸에 붙일 날개를 만들기 시작한다. 새의
          깃털들을 모아 실로 꿰매 붙여 큰 날개를 만든 다음,
          작은 깃털들을 거기에 밀초로 고정시킨다. 그리고는
          그것을 몸에 붙이고는, 새처럼 그것을 흔들어 하늘에
          떠올랐다. 이카로스도 아버지를 따라 하늘 높이 날아
          올랐다.
            아버지는 물론 소년 이카로스에게 날기 전에 주의
          사항을 간곡히 일러 준다.
            "이카로스야, 나는 네가 적당한 높이를 유지하기를
          부탁한다. 왜냐하면 너무 저공을 날면 습기가 날개를
          무겁게 할 것이고, 너무 상공을 날면 태양의 열이
          날개를 용해할 것이니까, 내 곁으로만 따라오면
          안전할 것이다."
            그러나 이카로스 소년은 하늘에 날아 오르자 너무
          기쁜 나머지 아버지의 주의와 충고를 무릅쓰고 날개를
          흔들어 하늘 높이 하늘 높이 날아 올랐다. 그러자
          태양에 너무 가까워진 이카로스의 날개는 슬슬 녹기
          시작했다. 불타는 태양이 날개를 고정시키고 있던
          초를 녹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카로스는 팔을
          흔들었으나 그의 몸은 점점 밑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이윽고 모든 날개들이 흩어져 버리고 그의 몸은
          지중해 푸른 바다에 가라앉고 말았다. 아버지는
          "이카로스야, 어디 있느냐?"라고 울부짖었으나 아들의
          몸은 이미 흔적도 없었다. 비상(飛翔)을 잃어버린
          날개만이 파도 위에 떠돌고 있을 뿐이었다.
            어디로 가는가, 이카로스여, 그대의 날개는 밀초로
          붙여져 있는 것을..... 누군가 시간 속에서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2

            고속 전철 사업의 전동차종이 결정되었다는
          소식이다. 보도를 보니, 프랑스의 TGV사가
          선정되었다고 한다. 그것에 관한 기사들을 읽어 보니,
          그 철도가 개통되면 엄청난 변화가 일겠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내가 아주 시대에 뒤떨어진 원시인
          같은 기분이 들 지경이다.
            무려 시속 삼백 킬로미터의 기차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백 분, 어떤 신문의 해설에 의하면 좀
          부지런한 주부라면 남편의 생일상 차림을 부산에서
          생선을 직접 사다가 그날로 차릴 수 있다고 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것의 파급 효과도 굉장하다. 우선 수도권
          탈출 인구가 늘어나게 됨에 따라 수도권 인구 분산이
          자연스럽게 일어날 것이며, 그러한 변화는 지방
          도시의 발전을 가져올 것이 뻔하며, 따라서 지방과
          서울 간의 문화적 격차도 줄어들게 되어 '온 국민의
          문화의 향수(享受) 시대'가 열릴 것이며, 전자 통신
          등 관련 산업의 세계적 수준에의 발달은 물론 그
          사업들에 필요한 신규 고용 인구만도 구십만 명 선이
          될 것이라는 등 엄청난 파급 효과가 예고되고 있었다.
          그 외에도 기업 경쟁력의 강화, 수송력의 증대, 그에
          따른 에너지 소비의 획기적 감소 등도 들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 보도들을 보고 듣자니,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너무 낭비하며 살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이런 긍정적인 파급 효과들이
          부정적으로 작용하면 어쩔 것인가 하는 '걱정'이
          들기도 한다.
            예를 들어, '수도권 인구 분산'의 꿈은 역(逆)으로
          나타날 소지도 있지 않겠는가 말이다. 서울 가기가
          쉬워지니 전부 서울로 몰릴 것이 아닌가, 그렇게 되면
          지방 도시는 베드 타운 이상의 기능을 과연 할 수
          있을 것인가. 베드 타운 기능이 있는 지방 도시도 몇
          개의, '역(驛)'이 생기는 도시 외에는 없을 것이
          아닌가. '역(驛)'이 되지 못하고 그냥 지나치게 되는
          도시는 실로 어떤 혜택을 받을 수 있을 것인가. 어떤
          젊은 시인이 '새마을 기차'에 대해서 쓴 시를 읽고,
          그 젊은 시인의 '날카로운 눈'에 대하여 깊이
          미안함을 느낀 적이 있다. 그 시는 아마도 이런 뜻의
          내용이었다. 새마을 기차가 휙휙 지나가는데, 그 역은
          새마을 기차가 서지도 않는 역이라는 그런 노래였다.
          그래서 주눅이 들고, 기가 죽고, 이끼만이 앉은
          우리의 작은 도시에 대한 노래였다.
            '보다 빠르게, 보다 크게, 보다 멀리, 보다 높이'는
          오늘의 우리의 구호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보다 빠르게' 어디로 가려고 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오히려 그 '빠름'만큼
          시간은 더 많이 남을 것이며, 그 '시간'의 소비를
          위하여 '더 많이 노동해야 하는' 그래서 '더
          많이'피곤해야 하는 악순환이 벌어질 것이다.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행복하지 못한, 아니 행복할
          수 없는' 삶의 순환이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는 너무 시대에 뒤떨어지는
          이야기일 것이므로 그만두자. 그보다 앞에 잠시
          언급한 것처럼 긍정적 효과보다 부정적 효과가 나타날
          때를 우리는 대비해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고속철도로 인한 혜택의 분배가 진정으로
          균형 잡혀야 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우리는 누구나 그
          기차의 어느 구석의 나사 한 개의 돈을 냈을 것이다.
          그 비싼 나사 한 개의 값을 우리 모두 골고루 돌려
          받을 수 있을 때 우리는 보다 행복할 것이며, 그
          기막힌 '빠름'도 우리의 행복을 어쩌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는 그 나사 한 개의 값 이상으로 서로를
          사랑하고 있을 것이므로.
            그 사랑에게 나의 시를 보낸다.

            그렇게 크지 않아도
            돼.
            그렇게 뜨겁지 않아도
            돼.
            겨자씨만하면
            돼.
            겨자씨에 부는 바람이면
            돼.

            들을 귀 있는 사람이면 알아 들어라.

            가장 작은 것에
            가장 큰 것이 눕는다.
            ---<겨자씨의 노래>

            ---- 이카로스여, 그대 오늘 어디로 가고 있는가?

 

        

출처 : 어둠 속에 갇힌 불꽃
글쓴이 : 정중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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