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s and Writings/문학작품

[스크랩] 어느 볼모에게 보내는 글 - 쌩 떽쥐뻬리

그림자세상 2009. 12. 5. 13:33
(1)

1940년 12월, 내가 미국에 가려고 포르투갈을 횡단했을 때, 리스본은 내게 마치 밝고도 쓸쓸한 일종의 낙원처럼 보였다. 그때 거기서는 침공이 임박했다는 이야기들이 퍼져 있었는데, 포르투칼은 자기의 행복에 대한 환상에 매달려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매혹적인 전시장을 꾸며 놓은 리스본은 약간 창백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전생에 나간 아들의 소식을 전혀 모르고 있으면서도 '내가 웃고 있는 이상 내 아들은 살아 있어'라는 확신으로써 아들을 구하려고 애쓰는 그런 어머니들의 미소와도 같았다.

'보세요, 내가 얼마나 행복하고 평화스러우며 구김살 없이 밝은가를....'하고 리스본은 말하고 있었다.

대륙 전체가 사나운 족속들로 그득한 원시적인 산악처럼 포르투칼을 짓누르고 있는데, 화려하게 장식한 리스본은 유럽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내가 숨으려고 전혀 애쓰지 않는데 누가 나를 공격할 수 있겠는가! 내가 이렇게 무방비 상태인데.' 하고...

내 조국의 도시들은 밤이 오면 잿빛으로 변한다. 그곳에서 나는 모든 불빛에 대한 습관을 잃었었다. 그래서 이 휘황한 도시는 내게 막연한 불쾌감을 불러일으켰다. 주위의 변두리 거리가 어두우면 너무나 휘황한 진열장의 다이아몬드들은 부랑자들을 유인한다. 지금 그들이 돌아다니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마치 멀리서 이 보물 냄새를 맡기라도 한 것처럼, 떠돌아다니는 폭격기들의 무리로 가득 찬 유럽의 밤이 리스본을 짓누르는 것 같이 내겐 생각된다.

그러나 포르투칼은 이 괴물의 욕망을 모르고 있었다. 그는 불길한 조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는 절망적인 확신을 가지고 예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처럼 예술을 숭배하고 있는 포르투칼을 누가 감히 짓밟겠는가? 그는 경탄할 만한 모든 예술품들을 끄집어냈다. 이처럼 놀라운 예술품 속에 있는 포르투칼을 누가 감히 짓밟겠는가?

포르투칼은 그들의 수많은 위인들을 내보였다. 군대가 없고, 대포가 없기 때문에 그는 시인, 탐험가, 모험가, 등의 석상으로 된 보초들을 침략자의 쇳덩이 앞에 세워 놓았다. 군대와 대포가 없기 때문에 그의 모든 과거를 내세워 길을 막아섰다. 이렇게 웅장한 과거의 유산을 지니고 있는 포르투칼을 누가 감히 짓밟을 수 있단 말인가?

이리하여 나는 매일 저녁, 지극히 고상한 취미로써 가다듬어진 이 훌륭한 전시품들 사이를 우울한 기분으로 돌아다녔다. 거기에서는 너무도 사려 깊고 솜씨 있게 골라진 음악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완벽에 가까웠다. 음악은 정원 위를 부드럽게, 마치 샘물의 소박한 속삭임처럼 격렬한 음을 내지 않고 흐르고 있었다.

이 세상에서 이렇게 절도 있는 놀라운 취미를 누가 파괴하겠단 말인가?

그런데 내게는 이렇게 미소짓고 있는 리스본이 내 조국의 불꺼진 도시들보다 더 침울하게 생각되었다.

아마 당신도 알고 있겠지만, 죽은 사람의 자리를 그들의 식탁에 그대로 남겨 넣는 좀 이상한 집안들을 나는 알고 있다. 그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회복할 수 없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도전이 위안이 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의 역을 맡아야 한다. 그때 비로소 그들은 죽음의 역할에서 하나의 다른 존재의 형태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가족들은 죽은 이들의 귀환을 중단시키고 있다. 그 가족들은 죽은 이를 영원한 부재자, 영원히 지각하는 손님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들은 사별의 슬픔을 내용 없는 기다림과 맞바꾸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게는 이 집안들의 슬픔과는 다른 끊임없이 숨막히는 어떤 불안 속에 잠겨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잃은 마지막 친구, 항공 우편 업무 공사 중에 순직한 조종사 기요메, 나는 죽음을 받아들이기를 서슴지 않았다! 기요메는 더이상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이제 더이상 우리 앞에 현존하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영영 부재하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쓸데없는 올가미인 그의 식기들을 내 식탁에서 치워 버렸다.

그럼으로써 그를 정말로 죽은 친구로 만들었다.

그러나 포르투칼은 그의 식기와 램프와 음악을 남겨둠으로써 행복을 믿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리스본에서는 신이 행복을 믿도록 하기 위해 모두들 행복을 가장하고 있었다.

리스본의 우울한 분위기는 어떤 피난만들이 와있는 탓이기도 했다. 나는 피난처를 찾아온 추방당한 사람들을 말하고 있는 게 아니다. 자기들의 노력으로써 비옥하게 만들 땅을 찾으러 온 이주민들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자기들의 재산을 안전한 곳에 갖다 두기 위해 동족들의 비참함을 멀리하고 망명한 자들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나는 시내에 거처를 정할 수 없어서 에스또릴의 도박장 근처에서 기거했다. 나는 치열한 전쟁에서 빠져 나온 참이었다. 아홉 달 동안 독일 상공 비행을 중단한 적이 없었던 우리 비행대대는 독일군의 단 한번의 공격에 승무원의 4분의 3을 잃었었다.

고향으로 돌아갔을 때 나는 노예 상태와 같은 음울한 분위기와 기아의 위협을 체험했다. 나는 내 나라 도시들에 내린 그 답답한 밤들을 체험했다.

그런데 여기 내 숙소에서 두어 걸음밖에 안되는 에스또릴의 카지노에는 밤마다 유령들로 들끓고 있었다. 어딘 가로 달려가는 것같이 보이는 소리 없는 캐딜락 승용차가 현관 입구에 깔린 보드라운 가는 모래 위에 그들을 내려놓았다. 그들은 예전처럼 만찬회 때의 정장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가슴 장식과 진주 목걸이들을 자랑스럽게 드러내고 있었다. 그들은 아무런 화제도 없는 겉치레 식사를 하기 위해 서로를 초대하는 것이었다.

그런 다음 그들은 재산 정도에 따라 '루울렛'이나 '바카라(트럼프의 일종)' 놀림을 한다. 나는 가끔 그들은 구경하러 갔었다. 나는 분개하거나 빈정거릴 감정은 들지 않았으나 어떤 막연한 불안감을 느꼈었다. 그것은 동물원에서 멸종되어 가는 종족 중의 남아 있는 동물들을 바라볼 때 느끼는 가슴 답답한 불안감이었다. 그들은 놀음탁자 주위에 자리잡는다. 그들은 무뚝뚝한 도박대 감시인에게 바싹 다가앉아, 희망과 실망과 두려움과 선망과 환희를 맛보기 위해 전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마치 생존자처럼, 그들은 어쩌면 바로 그 순간에 이미 모든 의미를 상실했을지도 모를 재산을 걸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어쩌면 무효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화폐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들의 위협을 받고 이미 파괴되어 가고 있는 공장들의 그것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시리우스좌를 지불 인으로 하고 어음을 끊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 몇 달 전부터 시상에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고거에 매달려 오직 그들의 흥분의 정당성과, 수표의 예치금과, 약속의 불변성을 믿으려고 애쓰는 것이었다. 그것은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인형들의 발레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슬픈 광경이었다.

아마도 그들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그들을 버리고 바닷가로 바람을 쐬러 나갔다. 그러나 이 에스또릴의 바다, 물의 도시의 바다, 길들여진 바다도 놀음에 한몫을 끼고 있는 것 같았다. 바다는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부드럽고 단조로운 물결을 철 지난 긴 옷자락처럼만 속으로 밀어붙이고 있었다.

나는 항구 안의 여객선에서도 그 피난민들이 타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이 여객선도 역시 가벼운 불안을 퍼뜨리고 있었다. 그 배는 뿌리 없는 식물들을 이 대륙에서 저 대륙으로 실어가고 있었다. 나는 생각했다.

'나는 한 사람의 여행자는 되고 싶지만, 이주민이 되고 싶진 않구나. 나는 내 조국에서 많은 것을 배웠지만, 그것은 다른 곳에서는 소용없는 것들이다.'

그러나 저 이주민들은 주머니에서 조그만 주소록과 신분증 등등을 꺼내는 것이었다. 그들은 어떤 사람인 체하는 것이었다. 어떤 의미 있는 것에 필사적으로 매달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아시겠소? 나는 이런 사람이오. 이러이러한 도시 출신이오. 아무개의 친구요. 당신은 이러이러한 사람을 아시오?"

그리고 그들은 어떤 친구 이야기나, 어떤 책임 이야기나, 어떤 실패 이야기나, 록은 그들을 아무것 하고라도 관련지어줄 수 있을 듯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조국을 등지고 떠나온 만큼 이미 그런 과거는 아무것도 소용없게 될 것이다. 마치 사랑의 추억이 처음에는 그렇듯이, 그것은 아직도 아주 따뜻하고 아주 신선하고 아주 생생했다. 그들은 연애 편지들을 모아 놓는다. 거기에는 어떤 추억들이 깃들이어 있다. 그것들을 모두 소중하게 묶어 놓는다. 그러면 이 유물들은 처음에는 우수에 찬 매력을 풍긴다. 그러다가 파란 눈의 금발머리 아가씨라도 지나가면 그 유물들은 죽어버린다. 왜냐하면, 친구도, 책임도, 고향읍내도, 자기 집의 추억도 더이상 사용되지 않게 되면 퇴색하기 때문이다.

그들도 그것을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리스본이 행복을 가장하고 있듯이 그들도 머지않아 돌아갈 줄 믿고 있는 체하고 있었다. 탕아가 집을 나간 것은 얼마나 아늑한 느낌인가! 그의 뒤에는 고향 집이 있는 만큼 그것은 외양만의 부재다.

누가 옆방에 가있다든가, 지구 반대편에 가있다든가 하는 차이는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보기에는 멀리 떨어져 있는 친구의 존재가 어떤 눈앞의 실재보다도 더욱 가깝게 생각될 수도 있다. 그것은 기도에 의한 현존이다.

나는 사하라에 있을 때보다 더 내 집을 사랑한 적이 없었다. 16세기의 브르따뉴 뱃사람들은 호른 곶(남아메리카의 남단. 칠레령 호른 섬에 있다)을 돌아가며 역풍의 장벽과 대항하면서 늙어갔지만 그들보다 약혼녀와 더 가까이 시작하고 있었다. 그들은 출발의 돛을 감아 올리면서 그 투박한 손으로 귀항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브르따뉴 항구에서 약혼녀의 집으로 가는 지름길은 호른 곶을 거쳐 지나간다.

그런데 저 피난민들이 내게는 약혼녀를 빼앗긴 브르따뉴의 뱃사람처럼 생각된다. 이미 그들을 위해 그 창가에 가물거리는 램프를 밝히는 브르따뉴의 약혼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결코 탕아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돌아갈 집이 없는 탕아들이다. 그래서 진짜 여행은 자기 자신 밖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자기 자신을 다시 일으킬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자기 자신 속에 묵직한 추억의 실타래를 다시 감을 수 있을까? 이 유령선은 고성소(구약시대에 구세주의 탄생을 기다리던 의인들의 영혼이 머물던 곳)처럼, 태어날 영혼을 싣고 있었다. 배와 하나가 되고, 진정한 직무로써 자신을 향상시키면서 쟁반을 나르고 놋그릇을 닦고 구두에 약칠을 하는 이들이, 은연중에 경멸감으로 죽은 이들의 시중을 드는 이 사람들이 실로 현실적으로 보였으며, 손가락으로 만져보고 싶으리 만치 현실적이었다. 피난민들이 그런 가벼운 모멸을 받는 것은 가난 때문이 아니다.

그들에게 부족한 것은 돈이 아니라 비중이다. 그들은 이미 어떤 일정한 짐과 어떤 친구와 어떤 책임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런 역할을 하는 체했지만, 그것에는 이미 진실성이 없었다. 어느 누구도 그들을 필요로 하지 않았고, 아무도 그들에게 호소하려 하지 않았다. 한밤중에 그대들을 떠밀어 일어나게 해서 역으로 달려가게 하는 그 전보, '빨리 오라! 네가 필요하다'라는 전보는 얼마나 경이로운 것인가!

우리는 우리를 도와주는 친구를 이내 알아본다. 그러나 우리에게 도움 받기를 처하는 자들은 천천히 얻게 된다. 물론 내 눈앞의 저 유령들을 아무도 증오하지 않았고, 아무도 시기하지 않았고, 아무도 괴롭히지 않았다.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그들은 목적지에 도착하자마자 환영 칵테일 파티나 위로 만찬회에 휩쓸려 들 것이다. 그러나 어느 누가 그들의 문을 흔들며 '문 좀 열게! 날세!' 하며 들여주기를 요구하겠는가? 아이가 무엇을 요구하기까지에는 오랫동안의 사귐이 필요하다. 낡은 성관을 사랑할 줄 알려면 여러 세대 동안 수리비를 탕진해야 한다.



(2)

그래서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중요한 것은 살아 왔다는 것을 어딘가에 남기는 일이다. 관습이 그렇고, 집안의 잔치가 그렇고, 추억이 깃들인 집이 그렇다. 중요한 것은 되돌아오기 위해 사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지향하고 있는 그 먼 목표가 덧없는 것이기에 나는 내 본질에 위협을 느끼는 것이다. 나는 진짜 사막을 체험하는데 위험을 무릅썼고, 그리하여 오랫동안 내 호기심을 끌었던 어떤 신비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나는 3년 동안 사하라에서 살아왔다. 아 역시 다른 많은 사람들이 뒤를 따라 사막의 마력에 대해 생각했다. 거기에서는 모든 것이 외견상 고독하고 헐벗어 있지만, 사하라의 생활을 맛본 사람은 누구나 거기서의 몇 해를 자신이 살아온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절인 듯 그리워한다. '사막에의 향수, 고독에의 향수, 공간에의 향수'라는 말들을 문학적인 관용어에 불과하며,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한다. 그런데 지금, 선객들이 빼곡이 들어차 우글대는 뱃전에서 나는 비로소 사막을 이해하게 되는 것 같았다.

확실히 사하라 사막은 끝없이 단조로운 모래밭,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거기에는 모래 언덕이 드물기 때문에 끝없는 자갈 투성이의 모래밭 뿐이다.

사람들은 그런 곳에서는 항상 권태감에 잠기게 된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신성이 그 사막에 갖가지 방향과 경사와 표지의 그물을, 은밀하고 살아있는 조직을 만들어 놓고 있다. 그리하여 단조로움은 없어지고, 모든 것은 위치가 잡혀져 있다. 거기서는 침묵조차도 다른 침묵과 같지 않다.

부족들이 화해하고, 저녁이 서늘함을 몰고 오고, 사람들이 조용한 항구에서 돛을 내리고 휴식을 취할 때는 평화의 침묵이 감돈다. 태양이 사고와 움직임을 중단시킬 때는 정오의 침묵이 흐른다. 북풍이 수그러지고 사막 한가운데의 오아시스에서 꽃가루처럼 쫓겨난 곤충들이 나타나 모래가 불어오는 동쪽의 폭풍을 예고할 때는 그것을 거짓 침묵이다. 멀리서 어떤 부족이 술렁거리고 있음을 알게 될 때는 그것은 음모의 침묵이다. 아랍인들 사이에서 알지 못할 집회가 시작되면 그것은 신비의 침묵이다. 전령의 귀환이 늦어질 때는 간정된 침묵이 흐른다. 밤에 무슨 소리를 들으려고 숨을 죽일 때면 예민한 침묵이 있다. 누가 사랑하는 사람을 회상할 때는 우수의 침묵이 있다.

모든 것은 자극을 가지고 있고, 별들은 저마다 진짜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별들은 모두 동방박사의 별들이다. 별들은 모두 자신의 신을 섬긴다. 이 별은 도달하기 힘든 먼 곳에 있는 우물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그리고 당신과 그 우물 사이에 놓여 있는 공간은 성벽과 같은 무게를 지니고 있다. 저 별은 물이 마른 우물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그래서 그 별조차도 메말라 보인다. 그리고 당신과 그 마른 우물 사이에 놓인 공간에는 아무 경사도 없다. 또다른 별은 유목민들이 당신에게 찬양한, 그러나 불귀순민들이 그 길을 막아선 미지의 오아시스를 가리켜 주는 안내자이다. 그리고 당신과 오아시스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사막은 동화 속의 잔디밭과도 같다. 또다른 별은 입 안에 든 과일처럼 풍미로운 남쪽의 하얀 도시가 있는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도 저 별은 바다로 가는 방향을 가리키고 있고...

마침내 거의 비현실적인 것 같은 목표물들이 아주 멀리에서 이 사막에 자기를 띠게 한다. 추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 어린 시절의 집이라든지, 그가 어딘가에 살고 있다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친구라든지 하는 것들이...

이렇게 당신을 끌어당기거나 떠다밀거나 하고, 또 당신에게 간청하거나 항거하거나 하는 자께의 힘에 의해서 당신은 긴장되고 생기가 나는 것을 느낀다. 당신은 이제 동서남북 한가운데 단단한 기초를 잡고 정확히 방향을 정하고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막은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어떠한 재물도 주지 않고, 사막에는 보거나 들을 것도 없으므로, 거기서는 내적 생활이 마비되기는커녕 오히려 강화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우선 눈에 보이지 않는 갖가지 작용에 오히려 의해 움직인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인간은 '정신'에 의해 지배받는다. 사막에서 내가 숭상하는 것은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내가 저 구슬픈 여객선 뱃전에서 아직도 많은 목표가 있음을 느낀 것은, 내가 아직도 생기에 넘치는 한 유성에 살고 있다는 것은, 내가 뒤에서 프랑스의 밤 속에 사라진, 그리고 내게 있어 가장 중요한 존재가 되기 시작한 몇몇 친구들 덕분이다.

프랑스는 확실히 내게 있어서 추상적인 여신도 아니고, 역사학자의 개념도 아니며, 그것은 내가 속해 있는 하나의 육체이며, 나를 지배하는 인연의 그물이며, 내 마음 속의 경사를 만드는 목표의 총체이다. 나는 나 자신의 방향을 결정하는데 필요한 그들이 나 자신보다 더 튼튼하고 더 영속적인 존재라고 느낄 필요가 있었다. 내가 어디로 돌아와야 할지를 알기 위해서, 현실에 존재하기 위해서.

내 조국 전체가 그들 속에 깃들이고 있었고, 그들을 통해 내 속에 살아 있었다.

바다를 향해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대륙이란 이렇게 몇 개의 등대의 단순한 광채로 요약된다. 등대란 원근을 측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 불빛은 그저 단순히 눈 속에 비쳐질 뿐이다. 그리하여 대륙의 모든 경이로움은 그 별 속에 들어 있게 된다.

그런데 지금 프랑스는 전면적인 점령으로 인해 마치 등불이 모두 꺼져 침묵 속에 송두리째 빠져들어가 있다. 그래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하나하나의 운명은 내 몸 속에 깃들은 질병보다도 더 아프게 나를 괴롭힌다. 그들의 덧없는 운명으로 해서 내 본질이 위협 당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오늘 밤, 내 머리를 떠나지 않는 사람은 지금 쉰 살이다(앞에 나온 기요메와 함께 생떽쥐뻬리의 가장 친한 친구가 레옹 베뜨르를 말함).그는 병이 들었다.

그리고 유태인이다. 어떻게 그가 독일 의 공포 치하에서 살아남을 것인가? 그가 아직 숨을 쉬고 있다고 상상하기 위해서는, 그가 그의 마을 농부의 아름다운 침묵의 성채 속에 숨어서 침략자에게 발각되지 않았다고 믿을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아직 그가 살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래야만 아득히 먼 그의 우정의 나라, 국경이 없는 그 나라를 거닐면서 내가 망명자가 아니라 여행자라는 느낌을 가질 수 있다. 왜냐하면 사막은 사람이 생각하는 그곳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하라는 어떤 수도보다도 더 활기에 차 있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들끓는 도시라도 생의 가장 중요한 목표가 자력을 상실하면 텅 빈 것이 된다.



(3)

그런데 생명은 어떻게 우리가 살아가는 이런 자력선들을 이룩해 놓는가? 그 친구의 집으로 나를 끌어당기는 중력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러한 존재를 내가 필요로 하는 목표의 하나로 만든 중요한 순간들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 도대체 어떤 은밀한 사건들로 해서 개개인의 애정이 생기며, 또 그 애정을 통해서 조국에의 사랑이 생기는 것일까?

진정한 기적들은 그렇게 떠들썩한 것인가! 중요한 사건들은 그렇게도 단순한 것인가! 내가 이야기하려 하는 이 순간에 대해서도 하도 내세울만한 말이 없어서 나는 꿈속에 살아 있는 그 친구를 되살려서 말을 해야 한다.

그것은 전쟁 전의 어느 날, 쏘온느 강변에 있는 뚜르뉘 도시 쪽에서의 일이었지. 우리는 점심을 먹 위해 널빤지로 만든 발코니가 강 위로 튀어나온 어느 식당을 찾아들었네. 손님들이 칼자국을 낸 아주 소박한 식탁에 팔을 괴고 앉아 우리는 '뻬르노'술 두 잔을 주문했네. 자네의 주치의는 술을 금했지만, 자네는 특별한 경우에 슬쩍 하곤 했네. 바로 그때도 그런 경우 중의 하나였네. 이유는 잘 몰랐지만 어쨌거나 그런 경우였네.

우리를 즐겁게 한 것은 그 불빛의 질보다도 더 느껴지지 않는 그럼 것이었네.

그래서 자네는 그 특별한 경우에 그 '뻬르노'를 마시기로 결심했던 거네. 그리고 마침 우리 근처에서 두 사람의 사공이 거룻배에서 짐을 부리고 있었기에 우리는 그들을 초청했네. 우리는 발코니 위에서 소리쳐 불렀었지. 그러자 그들은 왔네.

그들은 아무 꺼리낌없이 왔네. 우리가 그 친구들을 초대하는 것이 아주 자연스럽게 생각됐는데, 그것은 아마도 우리 마음 속의 그 보이지 않는 축제 기분 때문이었을 거네. 그들이 부르는 신호에 응하리라는 것은 너무나 명백했네. 그래서 우리는 축배를 들었던 것이네!

햇빛은 좋았네. 따뜻하고 달콤한 햇살이 건너편 강둑의 포플러들과 지평선까지 펼쳐진 평야를 비추고 있었지. 우리는 여전히 그 이유는 알지 못했지만 점점 더 유쾌해졌네. 태양이 밝게 비치고, 강물이 흐르고, 식사가 준비되고, 사공들이 부름에 응했고, 하녀가 마치 영원한 축제를 주관하듯이 즐거운 친절로써 시중 드는 것이 모두 우리를 마음 놓이게 했네.

우리는 한껏 평화로움을 느꼈고, 혼란에서 벗어나서 최후의 문명 속에 들어가 있었네. 우리는 일체의 소원이 이루어지고, 더이상 아무것도 부탁할 것이 없는 것같은 일조의 완벽한 상태를 맛보고 있었네. 우리는 자신이 순수하고 올바르고 총명하며, 관대한 것같이 느껴졌네. 그 명증 속에 어떤 진실이 우리에게 나타났는지 분명히 말할 수는 없었으리라. 드러나 우리를 지배하는 감정은 틀림없이 확실성 그것이었네. 거의 오만스러울 정도의 확실성이었네.

이와 같이해서 우주는 우리를 통해서 그의 선의를 증명했다. 성운의 응결, 유성의 굳어짐, 첫 아메바들의 형성, 아메바를 인간으로까지 이끌어온 생명의 거대한 작업, 이 모든 것이 희한하게도 한곳으로 모여 우리를 통해 그 독특한 즐거움에까지 이른 것이다. 그것은 성공치고는 그리 나쁘지 않은 것이었다.

이리하여 우리는 이 무언의 일치와 거의 종교적이랄 수 있는 이 의식을 음미하고 있었다. 성직자와도 같이 오가는 하녀들의 걸음걸이에 진정되어, 사공과 우리들은 꼭 어떤 교회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같은 교회의 신자들처럼 건배를 했다. 사공 중의 한 사람은 네덜란드 사람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독일 사람이었다. 이 독일사람은 고향에서 공산당인지 트로츠키파인지 카톨릭인지 유대인인지 그런 걸로 몰렸기 때문에 오래 전에 나치즘을 피해 왔다는 것이었다(그가 어떤 명목으로 추방당했는지 지금은 생각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때, 그 사공에게는 명목 이상의 다른 것이 분명히 있었다. 중요한 것은 내용이었다. 인간적인 됨됨이였다. 그는 단순히 한 사람의 친구였다. 그리고 우리는 친구들로서 마음이 맞았다. 자네도 동감이었고 나도 그랬다. 사공들과 하녀도 동감이었다. 무엇에 대해 동감이었단 말인가? '뻬르노'에 대해서였던가?

생의 의미에 대해서였던가? 그 하루의 즐거움에 대해서였던가?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도 역시 대답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동감은 너무나 완벽한 것이었고, 깊숙이 단단히 뿌리박은 것이었고, 말로써는 표현할 수 없지만 그 본질에 있어서는 너무나 분명한 일종의 성서에 의거한 것이어서, 우리는 그 실체를 구하기 위해서는 기꺼이 그 정자에 방벽을 치고 거기에서 공격을 방어하고, 기관총 뒤에서 죽을 것을 수락했을 것이다.

그런데 어떤 실체란 말인가? 이 점이 바로 설명하기가 어렵다! 나는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다만 그 반영만을 포착할 위험성이 있다. 불충분한 말은 진실을 놓치게 한다.

뱃사공의 미소와, 자네와 나의 미소, 그 하녀의 미소의 그 어떤 성질을 구하기 위해서, 또 수천만 년 전부터 그토록 애써 왔고, 마침내 우리를 통해서 꽤 성공했던 미소의 성질에까지 도달한 그 태양의 어떤 기적을 구하기 위해서 우리가 흔쾌히 투쟁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내 말을 분명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본질적인 것은 대개 조금도 무게가 없다. 여기서 본질적인 것이란 겉보기에는 어떤 미소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미소는 흔히 본질적인 것이다. 사람들은 미소로써 대가를 치르기도 한다. 미소로써 보상을 받기도 한다. 미소로써 생기가 나는 일도 있다. 그리고 어떤 특성을 지닌 미소는 사람을 죽게 하는 수도 있다. 그러나 그 특성이 현시대의 고민에서 우리들을 그렇게도 잘 구출해 주었고, 우리에게 확신과 평화를 주었으나, 나는 지금 내 생각을 좀더 분명히 설명하기 위해 또 다른 미소 이야기를 할 필요를 느낀다.



(4)

그것은 에스파니아의 내란에 관한 현지 탐방을 하던 중의 일이었다. 나는 무모하게도 새벽 3시경에 어떤 화물 역에서 비밀 물자를 싣고 있는 광경을 몰래 구경했었다. 인부들의 소란스러움과 어둠이 내 무분별한 행동을 용이하게 해주는 것 같았다. 그러나 무정부주의자인 민병들에게 내가 사상한 자로 보였다.

그것은 매우 간단했다. 나는 그들이 유연하고도 소리없이 다가오는 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손가락을 오므리듯이 벌써 나를 조용히 포위하고 있었다. 그들의 카빈 총대는 가볍게 내 배에 들이대어졌고, 그 침묵은 내게 아주 엄숙하게 느껴졌다. 나는 마침내 손을 쳐들었다.

그들은 내 얼굴을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내 넥타이를 (무정부주의자들 지구의 유행은 이 예술품의 사용을 금지했었다) 응시하고 있음을 알았다. 내 몸이 굳어졌다. 나는 발포를 기다렸다. 그때는 즉결 재판의 시대였던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 발포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역 작업반들이 딴 세상에서 환상의 발레를 추고 있는 것 같은 절대적 고적감에 싸인 몇 초가 흐른 뒤에 무정부주의자들은 가벼운 머리 짓으로 내게 앞장서라는 신호를 했다. 그래서 우리는 입환선을 가로질러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체포는 완전한 침묵 속에서, 또 놀랄 정도로 절제된 동작 속에서 이루어졌다. 마치 바다 밑 동물들이 노는 것처럼.

마침내 나는 감시 초소로 바뀌어진 어느 지하실에 처넣어졌다. 싸구려 석유 램프의 희미한 불빛 속에서 다른 민병들이 카빈총을 다리 사이에 낀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들은 나를 체포한 순찰병들과 감정 없는 목소리로 몇 마디 말을 주고 받았다. 그들 중의 하나가 내 몸을 수색했다.

나는 에스파니아 말을 할 줄 알지만 카탈로니아 말은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신분증을 내보이라는 것을 이해했다. 그런데 나는 깜박 잊고 신분증을 호텔에 두고 나왔었다. 그래서 나는 내 말이 어떻게 전달 될는지 모르면서 '호텔 ... 신문 기자....'라고 대답했다. 민병들은 내 카메라를 무슨 증거물이나 되는 것처럼 모두들 돌려가며 보았다. 건들거리는 의자에 앉아 하품을 하고 있던 자들 중의 몇 명이 권태롭게 일어나서 벽에 등을 기댔다.

그 자리의 지배적인 인상은 권태롭다는 느낌이었다. 권태롭고 졸립다는 인상, 그 사람들의 주의력은 바닥이 나 있는 듯이 보였다. 나는 인간적인 접촉이라면 적의의 표시라도 보여주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떤 분노의 표시도, 어떤 비난의 표시조차도 내게 보이지 않았다. 나는 여러 번 되풀이해서 에스파니야 말로 항의를 해보았다. 내 항의는 허공 속으로 사라졌다. 그들은 마치 어항 속의 중국 물고기라도 바라보듯이 아무 반응도 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기다리고 있었다. 무엇을 기다리는 것일까? 누가 돌아오기를? 새벽이 오기를?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아마 배가 고파지기를 기다리는 모양이다.'

나는 또 이렇게도 생각했다.

'이자들이 바보 같은 짓을 하려는 것이다! 그건 아주 어처구니없는 짓이다!'

내가 느낀 감정은 불안감보다도 더 절실한 부조리에 대한 혐오감이었다. 나는 생각했다.

'이들이 몸이 녹으면, 움직이고 싶어지면 총을 쏠 것이다.!'

내가 정말 위험에 처해 있는 걸까, 아닐까? 그들은 여전히 내가 태업자나 밀정이 아니고 신문기자라는 걸 모르고 있는 걸까? 내 신분증이 호텔에 있다는 것을 모르는 걸까? 그들은 판정을 내린 걸까? 그건 어떤 판정일까?

나는 그들이 별다른 양심의 가책도 느낌이 없이 사람을 총살한다는 것 외에는 그들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혁명 전위대들이란 그들이 어떤 당파에 속해 있는 사람 그 자체가 아니라(그들은 사람을 그 실체로써 평가하지 않는다) 그 사람이 보여주는 전조를 사냥한다. 그들은 그들에게 반대되는 사실을 전염병처럼 여긴다.

의심스러운 조짐만 보여도 그들은 전염병 환자를 격리수용소로 보낸다. 공동묘지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드문드문, 알아들을 수 없는 모호한 짧은 말로 내게 던지는 그 신문이 어쩐지 불길하게 느껴졌다. 분별없는 룰렛 놀음이 내 생명을 걸고 있다. 그런 때문에 나는 또 내 진정한 운명에 내 의견을 개입시키고, 내 실재의 무게를 측정하게 하기 위해 그들에게 소리지르고 싶은 야릇한 욕망을 느꼈다. 이를테면 나이 같은 것!

사람의 나이란 깊은 인상을 주는 법이다! 그 인간의 전 생애가 그 속에 요약되어 있다. 그 사람의 원숙함이란 서서히 이루어진 것이다. 그것은 수많은 장애물을 겨뤄 이기고, 수많은 중병을 치르고, 많은 고통을 가라앉히고, 많은 절망을 극복하고, 대부분은 의식하지 못했던 많은 위험을 겪고 나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그렇게도 많은 욕망과 희망과 후회와 망각과 사랑을 거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사람의 나이란 수많은 경험과 추억의 훌륭한 축적을 나타내는 것이다! 수많은 함정과 곡절과 진창에 박히긴 했지만 성능 좋은 덤프차처럼 간신히 이긴 해도 전진을 계속해왔다. 그리고 지금은 다행한 호운의 집요한 집중 덕분으로 여기까지 이른 것이다. 서른 일곱 살이다. 그리고 만약 신이 원하신다면 이 덤프차는 그 추억의 짐짝들을 아직 더 멀리 싣고 갈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여기까지 내가 이르렀다. 나는 서른 일곱 살이다.'

나는 가능하다면 이런 고백으로써 내 재판관들을 무겁게 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들은 더 이상 나를 신문하지 않았다.

그때 기적이 일어났다. 아! 그것은 아주 하찮은 기적이었다. 나는 담배가 없었다. 내 감시자 중의 하나가 담배를 피우고 있기에 나는 몸짓으로 한 개비 달라고 청하면서 애매한 미소를 싱긋해 보였다. 그는 우선 기지개를 켜고 천천히 손으로 이마를 만지며 내 넥타이가 아니라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매우 놀랍게도 그 역시 빙그레 미소짓는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태양이 떠오르는 것 같았다.

이 기적은 비극을 결말지어준 것이 아니라 빛이 어둠을 지우듯이 그 비극을 간단히 지워버렸다. 이제는 어떤 비극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 기적은 눈에 보이는 것을 아무것도 변화시키지는 않았다. 싸구려 석유 램프도, 어수선하게 서류가 흩어진 테이블도, 벽에 기대선 사람들도, 물건들의 빛깔도 냄새도 모두 그대로였다. 그러나 모든 것은 그 본질 자체가 변화되었다. 그 미소가 나를 구원해준 것이다. 그것은 태양이 뜨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음에 일어날 결과에 있어서 결정적이고도 명백하며 다시 역진 할 수 없는 표시였다. 그것은 어수선한 서류들이 널린 테이블이 살아났다.

석유 램프가 살아났다. 벽들도 살아났다. 이 지하실의 음울한 물건들에서 스며 나오고 있던 권태감이 마술에 걸린 것처럼 가벼워졌다. 그것은 마치 보이지 않는 피가 다시 순환을 시작하여 같은 육체 속에서 모든 것이 연결되면서 그것들에게 새로운 의미를 회복시켜주는 것과 같았다.

민병들도 역시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한 순간 전에는 노아의 대홍수 이전의 어느 종족만큼이나 멀리 내게서 떨어져 있는 것 같았던 그들이 지금은 나와 아주 가까운 생명에서 태어나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놀라운 실재를 느끼고 있었다!

그렇다. 실재의 느낌! 그리고 나는 그들이 같은 혈족임을 느꼈다.

내게 미소를 지어 보인 그 젊은이, 한 순간 전까지만 해도 어떤 한 역할, 한 도구, 일종의 흉측한 벌레에 지나지 않았던 그가 지금은 약간 어색해하며 거의 신기하리 만치 수줍어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 테러리스트가 다른 패들보다 덜 거칠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그의 마음 속에 나타난 한 인간이 그의 연약한 부분을 그렇게 잘 드러내어 준 것이다! 우리 인간들은 잘난 체하고 있지만, 마음 속으로는 은밀히 주저와 회의와 슬픔을 느끼고 있다.

아직 아무 말도 건네지 않았다. 그런데도 모든 것은 해결되어 있었다. 그 민병이 내게 담배를 내밀었을 때, 나는 고맙다는 뜻으로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일단 그 얼음이 녹자 다른 민병들도 다시 인간성을 되찾았고, 나는 자유로운 새 나라로 들어가듯이 그들 모두의 미소 속으로 들어갔다.

나는 전에 사하라에서 우리 구조대원들의 웃음 속으로 들어갔던 것처럼 그들의 웃음 속으로 들어갔다. 그때 동료들은 여러 날 동안의 수색 끝에 우리를 발견하고는 가능한 멀지 않은 곳에 착륙하여 가죽 물주머니를 높이 쳐들어 잘 보이도록 흔들면서 성큼성큼 우리에게로 걸어왔었다. 내가 조난했을 때의 구조대원들의 웃음을, 내가 구조대원이었을 때의 조난자의 웃음을 나는 내가 그토록 행복하게 느꼈던 고향을 기억하듯이 지금 기억한다. 진정한 기쁨이란 함께 음식을 나누는 기쁨이다. 구조는 이러한 기쁨을 맛보는 계기에 지나지 않는다. 물은 우선 인간의 선의의 선물이 아니고서는 결코 사람을 매혹하는 힘을 갖지 못한다.

병자를 돌봐주는 간호나, 추방당한 자에게 베푸는 환대나 용서조차도 그 잔치를 밝혀주는 웃음이 있어야만 가치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언어와 계급과 당파를 초월하여 웃음 속에서 서로 결합하게 된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의 관습이 있고, 내게는 나의 관습이 있지만, 우리는 그런 채로 같은 '교회'의 신자들이다.



(5)

이러한 성질의 기쁨이야말로 우리 문명이 낳아준 가장 귀중한 결실이 아닐까?

절대적인 전제군주제라도 물질적인 욕구에 대해서는 우리에게 만족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목장의 가축이 아니다. 어떠한 번영과 안락함도 우리를 만족시키는데 충분하지 못하다. 인간의 존엄성을 찬양하게끔 길러진 우리에게는 극히 단순한 만남이 소중히 여겨지고, 그것은 때때로 신기한 축제로 변한다.

인간의 존엄성! 그렇다. 인간의 존엄성! 여기에 시금석이 있다! 나치주의자가 오로지 자기와 비슷한 사람들만 존중한다면 그는 자기 자신 이외에는 아무것도 존중하지 않는 것이다. 그는 창조적인 반대를 거부하고, 상승하는 모든 희망을 무너뜨리고, 인간 대신 개미집에 사는 로봇을 천년 동안 세워 놓는다. 질서를 위한 질서는 인간으로부터 세계와 자기 자신을 변혁시킬 수 있는 본질적인 힘을 앗아간다. 인생이 질서를 창조하지, 질서가 인생을 창조하지 못한다.

그와 반대로 우리에게는 우리의 상승이 완성되지 못했고, 내일의 진리는 어제의 오류를 양식으로 하고, 극복해야 할 반대들은 우리의 성장을 위한 부식토라고 생각된다. 우리는 우리들과 다른 사람들도 동족으로 인정한다. 그런데 그것은 얼마나 기묘한 동일성인가! 이 동일성은 과거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라 미래에 근거를 둔다. 우리는 서로가 다른 길을 거쳐서 같은 회합 장소로 가기 위해 고행을 계속하는 순례자들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상승 조건인 인간의 존엄성이 위기에 빠져 있다. 현대 세계의 붕괴가 우리를 암흑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문제는 조리에 맞지 않고 해결책을 서로 모순되어 있다. 어제의 진리는 죽었고, 내일의 진리는 아직 건설하고 있는 단계다.

누구에게나 가치 있는 종합책은 아직 조금도 내다보이지 않고, 우리들은 저마다 진리의 일부분만 지니고 있을 뿐이다. 국민들을 위협할 만한 명증이 없으므로 정치적 교의는 폭력에 호소한다. 그리고 우리들은 서로 방법을 달리함으로써 우리가 같은 목표를 지향하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망각할 위험이 있다.

어떤 별에 인도 받아 산을 넘고 있는 길손이 올라가는 데에만 너무 정신이 빠지면 어떤 별을 따라가고 있었는지를 잊어버릴 위험이 있다. 만약 그가 행동을 위해서만 행동한다면 그는 아무 데에도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대성당의 의자를 관리하는 여인이 의자를 빌려주는 데에만 너무 탐욕하게 골몰하면 자기가 신을 섬기고 있음을 잊어버릴 위험이 있다. 이와 마찬가지도 내가 어떤 당파적인 정열에 빠져들면 정치가 어떤 정신적 확증을 위해서만 의의가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릴 위험이 있다. 우리는 그 기적이 일어나던 시간에 인간 관계의 어떤 특질을 맛보았다. 우리에게 있어서는 그곳에 진리가 있었다.

아무리 다급하게 행동할 때에도 그 행동을 주관하는 사명감을 잊어서는 안된다.

사명이야말로 행동을 지배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그 행동은 아무 보람도 없다.

우리는 인간의 존엄성을 구축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왜 같은 진영 안에서 서로 증오하고 있는가? 우리들 중의 누구도 순수한 뜻의 특권을 가진 사람은 없다. 나는 내 길을 내세워 다른 사람이 선택한 어떤 길을 공격할 수도 있다. 나는 내 길을 내세워 다른 사람이 선택한 어떤 길을 공격할 수도 있다. 나는 그의 이성의 발걸음을 비관할 수도 있다. 이성의 발걸음은 불확실한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가 같은 별을 향해 어려운 걸음을 계속하고 있다면 나는 '정신'적인 면에서 그 사람을 존중해야 한다.

인간의 존엄성! 인간의 존엄성! 만약 인간의 존엄성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다면, 사람들은 당연히 이 존엄성을 확립할만한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체제를 이룩하게 될 것이다. 문명이란 우선 본질 속에서 이룩되는 것이다. 그것은 먼저 어떤 정열에 대한 맹목적인 욕망으로서 인간 속에 자리잡는다. 그런 다음 인간은 오류를 거듭하면서 등불로 인도하는 길을 발견하는 것이다.



(6)

벗이여, 그러기에 나는 아마 자네의 우정이 이토록 필요한가 보다. 나는 이성의 논쟁을 초월하여 내 마음 속의 그 등불을 찾아가는 순례자를 존중해줄 길동무를 갈망하고 있다. 나는 가끔 그 약속 받은 정열을 미리 맛볼 필요성을 느끼며, 얼마쯤은 나 자신을 벗어나 언젠가는 우리의 것이 될 그 약속 장소에서 쉬고 싶어진다.

나는 논쟁과 배타주의와, 광신주의에는 너무나 진저리가 난다! 나는 자네의 집에라면 군복도 입지 않고, 코란 구절을 외워야 할 구속을 받지 않고, 내 마음의 고향을 아무것도 단념하지 않고도 들어갈 수 있다. 자네 곁에서라면 자기 변명을 할 필요도 없고, 항변할 필요도 없고, 증명할 필요도 없다. 나는 뚜르뉘에서처럼 평화를 찾을 수 있다. 내가 서투른 말을 하더라도, 착각을 일으킬 수도 있는 추론을 하더라도 자네는 그런 것을 넘어서 내 안에서 오직 '인간'만을 발견할 것이다. 자네는 내 마음 속에서 신념과 습관과 개인적인 사랑의 전달자를 존중해 줄 것이다. 내가 자네와 다른 점이 있더라도 그것이 자네를 해치기는커녕 자네를 향상시킬 것이다. 자네는 사람들이 길손에게 물어보듯이 내게 물어본다.

누구나 그렇듯이 나도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느끼지만 자네 안에서는 순수함을 느끼고 자네에게로 간다. 나를 순수하게 만들어줄 그곳으로 가야 할 필요를 나는 느낀다. 내가 어떤 인간이라는 것을 자네에게 알려준 것은 나의 상투적인 말투와 행동이 아니다. 내게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여 주었기 때문에 자네는 필요에 따라 내 말투와 태도에 대해 관대하게 보아준다. 나는 자네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여준 데 대해 고맙게 생각한다. 나를 비판하는 친구에 대해 내가 무엇을 하겠는가? 내가 어떤 친구를 내 식탁에 맞아들였을 때, 그가 다리를 절룩거린다면 그에게 앉으라고 권하지, 춤을 추라고 청하지는 않는다.

나의 벗이여, 나는 숨을 흠뻑 쉴 수 있는 산마루처럼 자네가 필요하다! 나는 다시 한 번 쏘온느 강가에서 갈라진 널빤지로 만든 작은 주막의 식탁에 자네 곁에 팔을 괴고 앉아, 두 사공을 초대하여 태양과도 같은 미소의 평화 속에서 그들과 함께 축배를 들고 싶다.

내가 아직도 투쟁을 한다면, 자네를 위해서도 조금은 투쟁하는 것이리라. 나는 그 미소가 찾아오리라는 것을 더욱 확실히 믿기 위해 자네가 필요하다. 나는 자네가 살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다. 그렇게도 나약하고 위협받고 있는 자네의 모습이, 다시 하루의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어떤 초라한 식료품점 앞길을 다 헤진 외투차림으로 추위를 막지 못해 벌벌 떨면서, 쉰 살의 몸을 이끌고 걸어가고 있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자네는 진정한 프랑스 사람이면서도 이중으로 죽음의 위험에 빠져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왜냐하면 프랑스 사람이면서 또한 유태인이기 때문이다.

나는 논쟁을 더 이상 허용치 않는 어떤 공동체의 가치를 더욱 통감한다. 우리는 모두 한 나무에서 생겨난 것처럼 나도 자네의 진리를 위해서 힘쓸 것이다.

우리들, 국외에 와 있는 프랑스 사람들에게는 이 전쟁에서 독일군의 점령이라는 눈으로 얼어붙은 씨앗 무더기를 다시 녹여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 조국에 남아 있는 당신들을 구출하는 일이 중요하다. 당신들이 뿌리를 뻗어 내릴 근본적인 권리를 갖고 있는 그 대지에서 당신들을 자유롭게 해주는 것이 문제이다.

당신들은 4천만 명의 볼모들이다. 그러나 항상 새로운 진리가 준비되는 곳은 압박 받는 지하실 속이다. 4천만 명의 볼모들이 지금 고국에서 그들의 새로운 진리를 물상하고 있다. 우리는 미리부터 그 진리에 복종한다.

왜냐하면 당신들이야말로 우리들을 가르쳐 줄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들에게 정신적인 불꽃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이미 밀초처럼 자기 자신의 존재를 희생시켜 그 불꽃을 피우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쓴 책을 아마도 당신들은 읽기 않을지도 모른다. 우리들의 연설을 듣지 않을지도 모른다.

당신들은 아마 우리의 사상을 배척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프랑스를 건설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를 위해 봉사하는 일밖에 할 수 없다. 우리가 어떤 일을 했던지 조금도 감시 받을 권리가 없다. 자유로운 곳에서 투쟁하는 것과 암흑 속에서 압박 받는 것을 동시에 측정할 수 있는 공통된 척도는 없다. 군인 신분과 불모의 처지를 동시에 측정할 수 있는 공통된 척도는 없다. 당신은 성자들이다.
출처 : 어둠 속에 갇힌 불꽃
글쓴이 : 정중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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