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s and Writings/문학작품

[스크랩] 많은 시간이 흐른 뒤 우리는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 남지심

그림자세상 2009. 12. 5. 13:19

  많은 시간이 흐른 뒤 우리는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글쓴이:남지심
  펴낸이:최홍순
  펴낸곳:도서출판 이목

    저자소개

  남지심
  1944년 태어남. 
  1967년 이화여대를 졸업함.그리고 1979년까지 교편생활을 함.
  1980년 '여성동아'에서 공모한 여류 장편소설에 "솔바람 물결소리"가 당선됨.
  1982년 장편소설 "연꽃을 피운 돌"을 펴냄.
  1985년 "우담바라" 1부를 발표함. 1992년 현재 4부까지 발간함.
  1992년 수필집 "욕심도 벗어 놓고 미움도 벗어 놓고"를 발간함. 꽁트집
"새벽 하늘에 향 하나를 사르고"를 발간함.

        

            차례

  

1. 고독한 나무                                                                                                   

  어머니와 아들

  고독한 가을은 공포로 다가오고
  그대 이름은 오빠
  고독한 엄마를 위하여
  사랑이여, 그대는 정녕 누구인고?
  이별 뒤에 오는 것
  우리는 밤새
  하찮은 일이 운명을 바꾼다
  엄청난 거인, 대학입시

 

2. 사랑에 눈 뜨는 사람들

  따뜻한 겨울 이야기
  이별 없는 만남을 위하여
  누나는 착각이 야무져요
  남세스러운 만남
  동문서답하는 아이들
  우리 함께 살게 된다면
  착각은 리허설이 없다는데
  네가 좋아지는 이유
  엉터리 한국인
  그대의 주소는 어디요?

 

 3.스승을 향한 우리들의 동경

  선생님의 아틀리에, 그리고 따끈한 커피
  선생님, 주민등록번호는요?
  무지개에 걸린 우리들의 풍선
  선생님은 아는가, 나의 마음을
  선생님, 쇼크 먹었어요
  밤을 사랑하는 나
  선생님, 한번만 더 윙크를
  음악시간을 청구합니다
  고개를 들어요, 그리고 날 봐요

   

4.생각하는 나날들

  학교로 가는 오솔길
  눈이 내리는데
  영원한 소녀의 새벽길
  누나를 기다리는 소년
  행복의 옹달샘
  시간을 먹고 사는 인생
  십대를 보내고 이십대를 맞이하던 날
  행복의 정체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고독하십니까?
  우정, 그것은 가장 승화된 사랑

   

5.캠퍼스의 꿈과 추억

  답안지에 핀 웃음꽃
  나의 고달픈 25시
  손바닥에서 별이 반짝이던 날
  신속, 정확, 시침 뚝!
  너희는 구제불능이야!
  내가 만난 '임신중'
  인연은 어디서부터 오는가?
  한숨 찬란한 개학날
  성적표를 기다리는 셰퍼드
  해피 맨이냐, 그레이트 맨이냐

   

6.타인을 통한 성장의 길목

  눈밭 위에 켜진 촛불
  철없는 예비 신부들
  비오는 날의 스케치
  한덩이의 눈, 그것을 선물로 받던 날
  아빠는 멋쟁이
  오이야, 누명을 벗겨다오
  누구를 위한 가을인가?
  절대로 결혼은 해야지요
  키 큰 남동생은 누나를 괴롭힌다
  "언니의 부탁인데, 염려마유"
  변덕쟁이 언니의 눈물
  가짜 편지 소동
  어떤 분노
  쌍동이여서 겪어야 하는 일들

   

7.옹달샘가의 밀어

  뜨거운 아이스크림
  실습생의 하루
  재수생에게 누가 돌을 던질 수 있나?
  르느와르가 탄생시킨 미인
  마지막 날, 마지막 사건
  웃음을 만드는 아이
  쓸데 없는 기록 갱신
  회수권과 단팥죽
  행복한 단식투쟁
  친구와 친구
  우정의 감격시대
  엄마의 방학
  남자가 강해지는 비결 모르시나요?
  빛을 모으는 당신이여

   

8.별이 내리는 뜨락

  아빠, 편히 가세요
  날으리 날으리
  입원실 풍경
  슬픈 아이에 대한 기억
  위대한 사랑을 가진 선생님
  우리는 공평하게 태어났어요
  감사하는 마음으로 삽시다


 
    

고독한 나무

어머니와 아들

  하얀 눈발이 날리는 시장 어귀에 조그만 손수레가 하나 초라하게 머물러 있다.
  수레 앞에는 소년과 어머니인 듯한 여인이 포장을 손질하고 연탄을 갈아 넣는다.

연탄 위에는 파란 불꽃이 구멍마다 솟아오르고, 그 위에는 넓은 철판이 놓인다.
  소년은 하얀 밀가루 반죽이 든 넓은 양은그릇을 철판 옆에 놓고, 손잡이가 달린 오목한
뚜껑들도 챙겨 놓는다. 그리고 작은 그릇에 기름을 붓고 흑설탕도 준비한다.
  소년은 아주 익숙한 동작으로 이런 것들을 챙기면서 흰 눈이 내리는 시장길로 시선을 던진다.
  "어머니, 오늘은 눈이 많이 올 것 같애요."
  "글쎄다. 금년엔 눈이 자주 오는구나!"
  "눈이 오면 사람들 마음도 푸근해지지."
  어머니는 아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철판에다가 기름을 두르고, 하얀 밀가루 반죽을
밤톨만큼씩 떼내어 속에다 까만 흑설탕을 한 숟갈 듬뿍 집어넣고는 두손으로 동그랗게
오무려서 철판 위에 올려놓는다. 밤톨만 하던 반죽을 널찍한 손잡이로 누르니, 동그스름하게
옆으로 퍼지며 하얀 호떡이 된다. 호떡은 앞뒤로 노릇노릇하게 구워지고, 까만 설탕이 꿀처럼
호떡 위로 녹아 흐른다.
  "배고플텐데 우선 하나 먹으렴."
  "네, 어머니도 하나 잡숫고 하세요."
  "나는 괜찮아. 너나 어서 먹어라."
  어머니는 구워진 호떡을 작은 종이에 싸서 아들 손에 쥐어준다. 아들은 그것을 받아 맛있게 먹는다.
  이마는 반듯하고 두상이 크며, 전체적인 느낌이 이지적이고 총명해 보인다.

그는 호떡을 먹으며 아까처럼 눈 오는 거리를 지켜보고 있다.
  식료품점, 약방, 정육점, 양품점, 시계방, 쌀가게... 온갖 생필품가게들이 저마다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어머니는 분주한 손놀림으로 호떡을 하나 둘 계속 만든다.

다 만들어진 호떡을 소년은 조그만 밥통 뚜껑을 열고 그 속에 차곡차곡 담는다. 하얀 김이 밥통 안에 서린다.
  조그만 계집아이가 호떡을 사러 온다. 오백 원짜리 동전을 놓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소년은 잽싸게 법통 뚜껑을 여고서 호떡 다섯 개를 봉지에 담아 그 꼬마에게 건네준다.
  눈은 점차 송이가 커지더니 마침내 함박눈이 된다. 시장길에 하얀눈이 목화송이처럼 내린다.
  소년은 어릴 때 살던 고향을 생각한다.
  아버지는 이렇게 눈이 오는 겨울에는 삼태기로 덫을 만들어 그 속에 보리쌀을 뿌려놓고는 먹이를 찾아오는 참새들을 잡곤 했다.
  "상길이 이거 먹어라. 참새다리는 황소 엉덩이살과 바꾸자 해도 안 바꾼단다.

그만큼 참새고기가 맛있다는 얘기지. 여자애들은 참새고기를 먹으면 그릇을 깬다지만,

너는 아들이니까 괜찮다. 어서 먹어라." 이러면서 구운 참새를 먹으라고 내밀었다.
  소년은 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리자 눈가가 붉어진다. 아버지는 이제 볼 수 없는 얼굴이 되어 버렸다.
  여학생, 아주머니, 신사, 개구장이들이 연달아 호떡을 사러 온다. 그들은 하얀 눈을 머리에 가득 이고 서서 호떡이 구워지기를 기다린다.

소년은 어머니와 함께 호떡을 굽는다. 훈훈한 역기가 포장 안에 차오른다.
  이렇게 눈 오는 날은 호떡을 사러 오는 사람이 더 많다. 언제나 그랬지만, 이런 날은 소년의 손도 더 바빠진다.
  "어머니, 오늘은 일찍 떨어지겠는데요."
  "그러면 빨리 들어가서 쉬자. 너도 이런 날은 집에서 좀 편히 자야지."
  모자는 분주하게 손을 놀려 호떡을 굽는다.
  "어머니! 이번 중간고사에서 제가 또 일등 했어요."
  "그러냐?"
  어머니의 입이 빙긋 열린다.
  "학기말 고사에서만 일등 하면 장학금을 받을 수 있어요."
  "지난번에도 받지 않았니? 장학금 받으려고 너무 공부에만 매달리지 마라. 그러다가 몸
상하면 어떻게 하니? 등록금이야 엄마가 마련할 수 있잖니."
  "제가 언제 몸 축가도록 공부했나요."
  "그러게 말이다. 너는 밤 열두 시가 되도록 이 고생을 하면서도 항상 일등만 하니 나는  그저..."
  아들이 대견하고 자랑스러워서 가슴이 벅차오는가 보다. 바쁜 손을 잠시 멈추고 흐뭇한 눈길로 쳐다본다.
  "호떡 오백 원어치만 주세요."
  신사는 주머니에서 천 원짜리 한 장을 꺼내놓으며 기다리고 섰다. 그의 머리에도 눈썹에도 눈이 하얗게 내려앉는다.
  "여기 있습니다."
  소년은 밥통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호떡을 꺼내 조금 큰 봉지에 담아서 건네 준다.
  "그래, 많이 팔아라."
  "아저씨, 거스름돈 가져 가세요."
  "그건 공책이나 사 쓰렴."
  "아니에요, 아저씨! 공책은 쓸 만큼 있어요."
  소년은 한사코 거스름돈을 돌려 준다.
  "그럼 이렇게 하자. 내가 내일 다시 들를 테니 그때 오백 원어치를 마저 싸다오."
  "네, 그렇게 하세요. 감사합니다. 아저씨, 내일 꼭 들르세요."
  신사는 눈 속으로 사라진다. 소년은 사라지는 신사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본다.
  "저 양반은 매일 오백 원어치씩 사 가는구나!"
  "우리 호떡을 팔아 주고 싶어서 그런가봐요."
  "그렇다면 너무 미안하잖니?"
  "네."
  소년은 다시 시장 골목으로 눈길을 보낸다. 내린 눈은 하얗게 길을 덮고 꽤 많이 쌓였다.
  "어머니! 저 아이들한테 잠깐 다녀오겠어요."
  "그 아이들? 오냐, 얼른 다녀오너라."
  어머니도 순순히 승낙한다. 소년은 눈길을 뛰다시피 빨리 걸어간다. 옆구리에 낀 호떡이 따뜻하게 느껴진다.

소년이 사는 곳의 이웃 언덕 밑에는 조그만 움집이 하나 있다. 정말 땅을 파서 가마니를 깔고 사는 그런 집이다.

요즘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그런 움집이었다.
  그 집엔 아이가 삼남매인데, 어머니는 무슨 이유인지 가출을 했고 병든 아버지가 그  삼남매를 데리고 살고 있다.
  처음 소년은 팔다 남은 호떡을 그 아이들에게 갖다 주다가, 그 다음부터는 다 팔리면
어떻게 하나 하는 조바심 때문에 몇 개씩 미리 남겼다가 갖다 주곤 했다.
  오늘은 눈이 와서인지 괜히 마음이 바빠진다. 그 아이들이, 아이들보다 그 아버지가 더 자기를 기다릴 것만 같다.
  이처럼 눈 오는 날이면 가난한 사람들은 더 심란해지게 마련이다. 그런 마음은 소년도 잘 알고 있다.
  달리는 소년의 온몸 위에 눈이 하얗게 쌓인다. 소년은 하얀 김을 뿜으며 눈 속을 달려가고 있다.

    

고독한 가을은 공포로 다가오고

  9월이 되자 하늘은 한결 파랗게 보였어요. 에머랄드를 펼쳐놓은 듯한 파란 하늘을 쳐다보니, 내 피부가 가슬가슬 죄어드는 것 같았어요.

마치 은회색의 물고기 비늘이 공기 중에서 말라가는 그런 통증 비슷한 것이었지요.
  나는 강의가 끝나자 체육관 밑으로 뻗은 긴 계단을 내려갔어요.

그곳에는 샐비어의 빨간 꽃잎이 예쁘게 피어 있었어요.

선홍빛 꽃잎을 단 수많은 샐비어가 가을 하늘 밑에서 피를 토하듯 어우러져 피어 있었죠.
  나는 가을이 주는 이 쓸쓸함에 공포 비슷한 감정을 느끼며, 학교 앞 찻집으로 갔어요.
찻집에는 또래들이 여기저기 모여 앉아 얘기를 나누고 있었어요.

나는 구석진 자리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비발디의 사계'를 청해 들었어요.
  사계 중 겨울, 나는 비가 촉촉히 내리는 날 장작불이 타오르는 페치카 앞에 앉아 창밖으로 내리는 빗소리를 듣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어요.

음악의 선율은 빗방울 소리를 내고 있었어요.
  나는 문득 혼자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떠올려 봤어요. 혼자라는 생각은 역시 공포였어요.
가을이 이리도 아픈 계절인 것을 나는 비로소 깨달았어요.
  욱은 8월초 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어느날, 흰 남방을 헐렁하게 입고서 우리집에 나타났어요.

입대하기 전 설악산을 한번 다녀오고 싶다고 했어요. 입대는 남자라면 누구나 당연히 밟는 한 과정인데도 매우 서운했어요.
  "졸업하고 가면 안 돼?"
  "남들 다 가는 거구, 어차피 가야 할 거라면 얼른 갔다 오는 게 나을 듯싶어."
  물론 내가 한 말은 무심코 지껄여 본 것에 불과했어요.

입대라는 걸 결정하기까지 욱은 상당히 많은 생각을 했겠지요.
  하지만 3년이라는 그 세월은 너무 아득하게 느껴졌어요.

그때 욱은 내 곁에서 영원히 떠나는 사람같이 느껴졌어요.

욱도 나도 착잡했죠. 무언가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그림자가 우리의 어깨를 붙들고 있는 그런 기분이었어요.
  "오늘 중앙선 타고 양평이나 갔다 오자."
  "아냐, 더운데 그냥 집에 있어."
  "아니야, 내일 설악산 갔다가 바로 입대할 거니까, 너하고의 시간은 오늘밖에 없어."
  "얘는, 마치 죽으러 가는 사람처럼 얘기하니?"
  그때 우리는 정말 영원한 이별이라도 하는 사람들처럼 묘한 불안에 잠겼어요.

우린 그 예감을 떨쳐 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나는 간편한 복장을 하고 그를 따라 나섰지요.
  8월의 폭양은 사정없이 우리의 머리 위로 쏟아졌고, 우리는 우울한 여행자가 되어 중앙선 기차에 몸을 실었어요.
  양평은 전에도 한 번 욱이랑 갔던 곳이었어요. 용문사에 가려다가 시간이 맞지 않아 그냥 양평에서 놀다 온 적이 있었지요.
  우리는 대개 기차를 타고 돌아다녔죠. 기차 타기를 좋아했고, 이름없는 역에서 내려 그곳의 강가나 산에서 놀다 돌아오곤 했어요.

가끔, 아주 가끔은 밤차를 타고 새벽녘에 내리는 곳에서 아침을 먹고, 잠시 낯선 고장의 여기저기를 쏘다니다가

다시 기차를 타고 깜깜한 밤에 서울로 돌아와 손을 흔들며 헤어지곤 했지요.
  안동, 영주까지도 이처럼 밤기차를 타고 다녀온 적이 있어요. 기차를 타면 마냥
편안해졌지요. 기차 안에서 우리는 항상 많은 이야기를 했어요.
  우리는 주로 3등 완행을 애용했는데, 그 완행열차가 어쩌다 연착이 라도 하면 신이 났지요.
얘기할 그만큼 길어지니까요.
  욱은 고지식하리만큼 진실했고, 또한 공부벌레였어요. 우리는 대학입시 준비를 하면서도 가끔씩 기차를 타고 여행을 하곤 했지요.

그건 신선한 활력소가 되었어요.양평은 도로를 중심으로 길게 뻗은 조그만 도시였으며, 시골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풍경을 갖추고 있었어요.

거의 크기가 비슷한 간판들, 버스 정류장, 학교, 상점들...그 날은 서울에서 늦게 출발했기 때문에, 양평에 도착하자 곧 어두워졌어요.

우린 강 쪽으로 나갔지요.
  강물은 느릿느릿 흐르고 있었어요.

8월의 뜨거운 태양은 모래를 달구어 놓았지만, 저녁 강바람은 역시 선선했어요.

우리는 모래 위에 나란히 앉아 두 다리를 뻗었어요. 큰 바위가 암벽처럼 보이는 강 언덕에는 잡풀이 우거져 있고,

그 사이로 약간 꼬부라진 소나무가 그럴듯한 운치를 풍기며 서 있었어요.
  모래벌 끝으로는 논밭이 보였고, 그 뒤로는 마을과 산이 보였어요

우리 둘은 먼 길을 다녀온 나그네처럼 아주 편안하게 두 다리를 뻗고 앉아서 일몰을 황홀하게 지켜보고 있었죠.
  노을은 서서히 어둠 속에 묻히고, 강물, 모랫벌, 들, 산, 모두가 그 커다란 한 덩이의 어둠 속으로 가라앉고 말았어요.

강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렸고, 하늘에는 별이 하나씩 나타났어요. 주위는 갑자기 고요해졌어요.
  우리는 이별을 생각했고, 곧 돌아갈 시간이 임박했다는 생각 때문에 약간은 초조해졌어요.
욱은 팔을 뻗어 내 허리를 껴안았어요. 그리곤 입술을, 가슴을 찾았어요.
  "삼 년 동안 우리는 변하지 않을까?"
  "글쎄, 세월은 모든 걸 변하게 하니까."
  "난 널 잃고 싶지 않아."
  그의 숨결은 점점 거칠어졌고, 나를 소유하고 싶다는 강한 욕망을 느끼는 것 같았어요.
나도 마찬가지였어요. 확실하게 나 자신을 그에게 속박시키고 싶었어요.
  우린 가끔 입술을 맞대거나 포옹을 하곤 했지요. 하지만 오늘은 그보다 더 강렬하게 우리를 묶는 큰 밧줄을 서로가 원했던 거예요.
  지금까지의 만남에서 미진했던 애정을 분명하게 확인하고 싶었지요.

아니 그보다 이별의 순간이 왔다는 절박감 때문에 서로를 더 강하게 원한 건지도 몰라요.
  강가에 떠 있는 별은 너무 많았고, 유난히 빛나 보였어요.

그 별이 빛나는 밤에 우리는 하나가 되었어요.

우리는 꼬옥 껴안고 울었어요. 그때의 우리 감정은 한마디로 아름다움이었어요.
  그 이튿날 설악산으로 떠나기 전, 욱은 우리집에 다시 들렀어요.

우리는 조금씩 부끄러워 얼굴을 붉혔지만, 이제 뗄 수 없는 튼튼한 밧줄이 우리를 묶어 주고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어요.
  욱은 맑은 눈으로 한동안 나를 쳐다보더니 다정한 미소를 남기고 떠났어요.

나는 골목으로 사라지는 그의 등을 보면서 한순간 아찔한 현기증 같은 것을 느꼈어요.
  한데 이것이 그와의 마지막 이별이었어요.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이별. 욱은 설악산에서 갑자기 쏟아진 폭우로 조난을 당했고, 끝내 시체로 변해 내 앞에 나타났어요.
  욱의 죽음은 나의 젊음을, 나의 인생을 송두리째 빼앗아 가버렸어요.

욱은 영원히 이 세상 사람이 될 수 없었어요. 난 도저히 믿을 수도 없고, 믿고 싶지도 않았어요.

욱이 없는 이 세상에 나 혼자 덩그라니 남아 있다는 사실이 너무 무서웠어요.

왜 나 혼자서 이 무서운 절망을 감당해야 하나요?

그것을 감당하기엔 나의 두 어깨가 너무 작아요. 내겐 그럴 만큼 큰 힘이 없어요.
  찻집에 앉아 있던 또래들은 어느새 모두 자리를 뜨고 없었어요. 역시 나만 혼자 남았어요.
파란 하늘, 빨간 샐비어, 투명한 공기가 흐르는 이 가을이 이리도 쓸쓸한 것임을 새삼 깨닫게
되었어요. 그것은 무서운 공포로 내게 다가올 뿐이었어요.

    

그대 이름은 오빠

  함박눈이 내린다. 내린 눈은 마당을 덮고, 지붕을 덮고, 논을 덮고, 언덕을 덮고, 산을 덮고...온 천지가 하얀 눈으로 뒤덮였다.
  나무는 온통 흰 눈으로 소생한다.

가지 가득 흰 눈을 안고 하얗게 서 있다. 하얀 꽃나무, 눈꽃이 핀 하얀 꽃나무, 전서의 나라에서나 피어 있을 신비한 꽃나무, 산을 가득 메운
전나무의 푸른 가지는 흰 눈을 담고 뭉게구름처럼 하얗게 피어 있다.

온 산은 한 송이의 설화. 흡사 하늘과 땅이 처음 창조된 태초의 순간처럼 순수, 완벽한 순수를 느끼게 한다.
  오대산 상원사에서 적멸보궁에 이르는 산길, 나무는 첩첩이 깊고 계곡은 아득하다. 영훈이 오빠와 나는 보궁에 이르는 산 언덕 소나무 등걸에 등을 기대고 섰다.바람 한점 없는데 나무 위에 눈송이들이 푸득푸득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오빠는 나를 쳐다본다. 그 눈길은 내 가슴에 와 꽂힌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그 눈길을 피했다. 침묵이 흐른다.
  오빠는 내 손을 끌어당긴다. 그리곤 가슴에 꼬옥 껴안아 준다. 내 가슴이 뛰는 소리를 오빠는 듣고 있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내 망막 속에는 현란하도록 아름다운 색깔들이 아지랭이처럼 춤췄다. 진주홍, 노랑, 남색, 보라... 그 화려한 색은 감은 내 눈 속에서 윤무한다.

오빠는 내 얼굴을 두 손으로 받쳐들고 내 얼굴 위에 자신의 얼굴을 포갠다.
  오빠의 뜨거운 입술이 내 입술 위에 닿았고 오빠의 손은 내 가슴에서 허리로 흘러내린다.
  우리는 한몸이 되어 흰눈 위에 누웠고 우리의 육신 위로 영겁의 세월이 흐른다.

하늘이 흘러가고, 땅이 흘러가고 그 물결에 실려 우리의 몸도 흘러간다.
  어디쯤 왔을까? 지금 우리가 멈춘 곳은 어디쯤일까?
  우리는 동정을, 순결을 그 강물에 실려 보냈고, 그 강물은 우리를 다시 실어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오빠와 나는 얼굴을 포개고 오래도록 그냥 누워 있었다. 우리의 얼굴 사이로 뜨거운 눈물이 흐른다.

그 뜨거운 눈물 속에 우리의 육신이 녹아서 사라질 수 있다면...이 무심한 세월은 전에도 흘렀을까?

우리는 어찌하다 이 세월의 강기슭에서 이렇게 만나야 했을까? 외사촌 오빠, 이것도 인연인가? 인연이라면? 무슨 색깔의 인연일까?
  오빠는 소나무 등걸에 기대고 앉아 담배에 불을 붙인다. 담배는 빨간 불꽃으로 타들어 간다.

빨간 불꽃으로 타던 담배는 재가 되었다. 만지기도 전에 사그라지는 재, 재는 형체가 없다. 나도 불꽃 속에서 타는 재가 되고 싶었다.

내 육신을 사라 허공 속으로 사라지게 하고 싶었다.
  오빠는 내 어깨를 꼬옥 껴안아 준다. 그의 얼굴 위에 이 세상 최대의 괴로움이 스쳐간다.
그리고 절망이 스쳐간다.
  이대로, 이대로 종말이 올 수 있다면...
  이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만나야 했던 인연의 줄. 이것은 무엇인가? 오빠는 방학을 하면 항상 강릉의 우리집을 찾았다.

강릉은 꼭 햇빛 받은 모래밭처럼 맑고 밝다고 했다. 그는 나를 찾아 온 것이다.

나를, 나를. 우린 만나는 순간마다 너무도 강렬한 불꽃을 보아야 했고, 그 불꽃은 아프도록 우리의 가슴 속에서 타들어 갔다.
  엄마는 오빠가 오면 자랑스러워 했다. 수재인 오빠는 엄마에겐 친정을 빛낼 자랑이기도 했다.

내 친구들은 오빠의 얼굴을 보면 햄릿 같다고 놀려댔다. 오빠는 정말 그들의 말처럼 굉장한 수재였고, 또 깊은 사색형의 햄릿이기도 했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 오빠는 꽃잎, 내 가슴을 타게 하는 너무도 황홀한 꽃잎이었다.
  세월은 우리를 어디로 실어갈까?
  어디쯤 실려가서 우리는 손을 흔들어야 할까?

    

고독한 엄마를 위하여

  엄마, 당신은 제 가슴 깊숙이 아픔을 주는 사람입니다. 제 가슴 속의 아픔은 짙은 애정으로, 연민으로 당신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저는 당신의 웃는 얼굴에서, 쾌활한 대화에서, 바쁜 일을 처리하는 몸놀림에서까지 왜 이토록 집요한 외로움의 그림자를 보아야만 합니까?
  제가 8개월 짜리 태아로 엄마 체내에 있을 때 당신은 남편을 잃었지요.

모 대학 조교수로 있었던 남자. 결혼 생활 동안 너무 뜨겁게 사랑하였던 사람.엄마는 아름다우니까,

정말 아름다운 여인이니까 한번쯤 그토록 행복한 사랑을 할 권리가 있어야 합니다.
  아빠가 돌아가신 날, 산에서 아빠의 시신을 묻을 때 엄마가 무덤 속에 들어가 까무라쳐서, 모였던 모든 사람들이 울음바다를 이루었다는 얘기,

엄마와 같은 학교에 계시는 양 선생님한테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그 후 당신은 오랜 세월을, 오로지 인고하기 위하여 버티셨을 오랜 세월을,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고독의 세월이었던가를 저는 압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언젠가는 헤어집니다. 잠시 헤어지는 이별도 있고, 영원히 헤어지는 이별도 있습니다.
  엄마와 저도 역시 그 이별의 순간을 맞을 것입니다. 저와 엄마 사이의 이별이 언제 올런지. 그 시간을 예측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것이 헤어져야만 된다고 생각하면 이렇게 만나서 어깨를 비비며 살 수 있다는 건 얼마나 신비로운 인연입니까?
  누구를 미워하며 저주해야 한다는 것, 정말 부질없는 일이지요. 미워하는 그 사람도 이제 곧 내 곁을 떠나야 하는 사람이니까요.
  정말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하는 마음입니다.
  엄마, 당신은 저를 위해서 많은 희생을 치르셨습니다.
  저는 지금 엄마를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과연 무엇을 해드릴 수 있을까요?

지금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제가 엄마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가을 하늘처럼 맑고 청청한 엄마. 엄마의 그 맑음은 제가 세상을 살아가는 데 분명 하나의 길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저는 엄마가 가르쳐준 그 길, 다시 말하면 어둠이 아니라 빛을 향하는 그 길을 앞으로 걸어갈 것입니다.
  엄마, 오늘밤 저는 한 자루의 촛불을 켜놓고 당신을 위해 기도하고 싶습니다. 밤이 새도록
오직 당신만을 위한 기도를 간절히 드리고 싶습니다.

    

사랑이여, 그대는 정녕 누구인고?

  사랑하는 사람을 갖지 말라.
  미워하는 사람도 갖지 말라.
  사랑하는 사람은 만나지 못해 괴롭고,
  미워하는 사람은 만나서 괴로우니라.

  나는 이 법문을 속으로 외우며 관음사로 이르는 산길을 걸었다.

'사랑하는 사람은 만나지 못해 괴롭고...' 너무도 인간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말은 내게 숱한 아픔을 준다.
  부처님도 이런 아픈 마음을 가져 보았을까? 출가하기 전에 태자를 얻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름을 '라후라'라고 지어 주셨다지.

'라후라'라는 말은 '장애'라는 뜻. 태자를 얻음이 자신의 출가를 막는 장애라고 생각하였음은, 이것이 바로 애정이 아닐까?

애정이란 항상 아픈 것임을...
  산사란 다 그렇지만, 겨울 산사는 더욱 적막하다. 산과 하늘, 그 속에서 무수히 생과 멸을 거듭했을 풀과 나무,

벌레와 산새들마저 한번도 생성의 율동을 맛보지 못한 듯 적막, 오로지 적막이 존재할 따름이다.
  하늘이 이토록 푸르지 않다면, 아니 저 밤나무 가지 위에 매달린 까치집이 투명하게 보이지만 않는다면, 지금 이 적막감이 이토록 사무치는 않을텐데.
  추녀에 매달린 풍경 소리나 댓돌 위에 가지런히 놓인 흰 고무신에서도 역시 적막강이 느껴진다.
  나는 묘한 긴장감을 느끼며 법당 뜰로 들어섰다. 어떻게 스님을 찾지? 그냥 돌아가고 말까?
  "어디서 오셨습니까?"
  공양주 보살이 물기 묻은 손을 닦으며 나를 쳐다본다.
  "저, 이 절에 지강 스님이라고 계신지요?"
  "네, 계십니다. 그런데 스님은 외부 손님을..."
  "저는 대학생인데요. 오랜 전부터 뵈어야 할 일이 있어서요."
  "그런가요? 그러시면 이쪽으로 돌아가시지요. 저 끝에 있는 독채가 스님이 거처하시는 곳입니다."
  "감사합니다."
  공양주 보살이 일러 준 별채에 이르자, 댓돌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한 켤레의 고무신과 석양을 받아 깨끗하게 빛나고 있는 창호지가 눈에 들어왔다.
  어떻게 할까? 그냥 돌아갈까? 문 앞에서 한참 망설이고 있는데 공양주 보살이 다가왔다.
  "스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들어오시지요."
  나는 공양주 보살에게 목례를 하고, 살며시 방문을 열었다.
  "스님, 죄송합니다. 예고도 없이 찾아와서요."
  "아니, 괜찮습니다."
  인사를 드리며 자리에 앉자, 나를 쳐다보는 스님의 시선이 한순간 가볍게 전율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스님은 나를 알아본 걸까?'
  화석처럼 호흡마저 정지된 모습인 채 조용히 염주를 굴리던 스님은 이윽고 나를 정면으로 쳐다본다.

그 순간, 나는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마치 깊은 심연에서 뿜어 나오는 듯한 강렬한 눈빛. 인간의 시선이 이렇게 빛날 수가 있을까?
  "학생은 어떤 일로 나를 찾았지요?"
  "제가 스님을 뵈러 온 것이 잘못 되었다면 용서해 주세요. 저는 다만 스님을 꼭 뵙고 싶다는 생각으로..."
  "잘못되긴..."
  마치 자신에게 말하듯 나직하게 말하곤 다시 염주를 굴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나는 스님 얼굴에서 가느다란 고뇌의 빛을 보았다.

화석처럼, 정말 화석처럼 정지되어 있는 스님의 가슴 어딘가에 아직도 인간의 고뇌가 숨쉬고 있는 걸까.
  나는 차츰 여유를 가지고 방안을 둘러 보았다. 벽면 가득히 책이 쌓여 있었고, 별로 크지 않은 앉은뱅이 책상 위엔 동양란이 심어진 화분 하나가 놓여 있었다.
  불이란 글자가 크게 씌어진 족자가 아랫목 벽에 걸려 있었고, 아름다운 관세음보살상이
그려진 액자가 책장 위에 얹혀 있었다. 그리고 반닫이 옛날 농 위엔 백자 항아리가 둥그런 달처럼 놓여 있었다.

방이 어두웠기 때문에 백자는 진짜 보름달처럼 두둥실 떠 있는 느낌이 들었다.
  한데 반닫이 농을 다시 한 번 보는 순간, 나는 가슴이 꽉 막혀 왔다. 백자 항아리 밑에 놓여 있는 한 개의 솔방울을 봤기 때문이다. 저 솔방울은...?
  그 순간 염주를 굴리고 있는 스님 가슴에 와락 안겨서 맘껏 울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스님은 아직도 아파하고 있다. 그 아픔은 애정이다. 그 애정이 없어 졌다면 스님은 해탈한 걸까.

해탈은 무엇일까. 해탈은 무정이다. 무정이 어떻게 해탈에 이르게 할까?

완벽한 인간. 완벽한 인생, 모순까지도 완벽하게 포용했을 때 거기에서의 도약이 해탈이 아닐까?'
  "이름은?"
  "지운입니다."
  "지운? 그래 뭘 하며 지내나?"
  많은 의미가 함축된 물음인 것 같았다.
  "여대 4학년입니다. 졸업하기 전에 스님을 꼭 한 번 뵈어야겠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래...?여기는 깊은 산중인데 오느라 고생이 많았겠구먼?"
  "스님은 이제 학교에 다시 나가시지 않을 건가요?"
  "학교는 무슨 학교인가? 이렇게 산 속에 있어도 번뇌는 구름인데..."
  "많은 사람들은 스님이 다시 강의를 하시길 원하고 있습니다."
  "누가 그런 소릴 하던가? 나 자신도 제도를 못하고 있는데, 어떻게 중생 제도를 하라는 건가?"
  이렇게 말하며 스님은 나를 쳐다보고 빙그레 웃는다.
  나는 빙그레 웃는 스님의 그 웃음 속에서 많은 것을 들을 수 있었고, 스님은 또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 빙그레 웃는 웃음. 나는 이 웃음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내가 스님을 만나면 하려고 했던 그 숱한 말들이 실은 하잘 것 없는 언어의 유희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내 가슴 속에 담아 온 숱한 이야기들을 스님은 이미 다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마치 자외선을 쏘이듯, 언어의 벽을 넘어서 가슴으로 받아들여지는 이 교감. 이것은 어디서도 경험해 보지 못한 환희였다.
  "스님, 그만 물러가겠습니다. 많은 이야기를 했고, 또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제 가슴 속은 터질 듯한 기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스님은 나를 쳐다보고 다시 한 번 빙그레 웃더니, 백자 항아리 밑에 놓인 솔방울을 집어서 내게 주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두 손으로 그것을 받았다.

역시 아무런 대화가 없었지만, 우리는 서로 대화 이상의 선물을 주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
  나는 스님에게 다시 한번 인사를 드리고, 산 언덕길을 내려오며 묘한 흥분에 젖었다.
  '스님과 나는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 알고 있었다.

내가 엄마의 딸이라는 사실과 스님 가슴 어딘가에 아직도 엄마에 대한 애정이 남아 있다는 것을...'
  임종한 엄마의 손바닥엔 한 개의 솔방울이 쥐어져 있었다.

그대는 아무도 그 솔방울의 의미를 몰랐다. 하지만, 그것에 무언가 깊은 사연이 있을 거라고 하면서 울던 이모가 내 손에다 그걸 꼭 쥐어 주었다.

네가 간직하라고 하면서 ...

나 역시 별다를 의미도 모르면서 오늘날까지 그 솔방울을 간직해 왔다. 간직해 왔다기보다 버리지 않고 그냥 묻어 뒀다고 하는 표현이 옳을지도 모른다.
  여학교 선생이던 엄마와 대학교 교수이던 스님. 이 두 분이 어떤 연유로 해서 사랑하게 되었는지, 그 사연은 나도 모른다.

다만 두 분은 지순한 애정으로 숙명적인 사랑을 하게 된 것은 사실이었다.
  엄마가 이 세상을 떠나간 우, 스님도 학교를 그만 두었고, 지금 이 사찰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스님의 가슴 속엔 지금 무엇이 남아 있을까?
  나는 엄마의 유품으로 남은 책의 갈피에서 스님에게로 가야 할 편지 한 통을 발견했었다.
그 후로부터 나는 언젠가 꼭 스님을 한 번 만나보리라는 결심을 하게 됐던 것이다.
  6년의 세월, 그 세월 동안 나는 늘 그 생각을 했었다.
  이제 두 개의 솔방울을 나란히 엄마 무덤 앞에 놓아 드려야지.  가장 아름답고 안타까운 사랑을 했던 엄마를 위해서.

    

이별 뒤에 오는 것

  "민아! 네가 좋아하는 가을이라 그런지 나두 좋다.

네가 좋아하는 거라면, 난 정말 아무거나 다 좋거든."
  가을날 이런 얘기를 하던 바보 같은 그 그 바보 같은 그가 오늘 이국땅 먼 나라로 떠났어요.
  플라타너스 낙엽 위로 늦가을 비가 질척질척 내리는 지금, 이렇게 가로수 밑을 걸으니 너무너무 허전하네요.
  "내 어디가 좋아서 그렇게 맨날 따라 다니니? 매일 바람만 맞으면서?"
  "괜찮아. 너 공부하느라고 그랬잖아. 다음부턴 바람맞게 하지 마."
  그는 결코 성인도 아니요, 군자도 아니건만, 이렇게 대답하면서 내 말에 한 번도 화를 낸 적이 없어요.
  내가 매번 '바보같이'라고 핀잔을 주어도 씨익 웃기만 하던 그. 그 바보 같던 그가 오늘 멀리멀리 날아가 버렸어요.

어떻게 보면 바보 같고, 어떻게 보면 오빠 같고, 또 어떻게 보면 동생 같던 그가 오늘 너무 멀리 가버린 거예요.
  그는 제과점 구석자리에 앉아 늘 나를 기다리곤 했지요. 가끔 바람을 맞힐 때도 있었고, 또 가끔은 약속시간보다 아주 늦게 나가곤 했지만,

언제나 그는 그 구석자리에 앉아 영어사전을 뒤적이며 나를 기다렸어요.
  그러다가 내가 나타나면,  "공부할 틈을 줘서 고마워." 하고는 전혀 화낼 줄을 모르던 그런 사람이였어요.
  "무슨 애가 그리 흐리멍텅하니? 좀 분명하게 굴어봐, 제발!"
  "이렇게 네가 나타났잖아. 내가 만일 기다리다 그냥 갔다면 나는 너를 못 만나고, 너도 나를 못 만나는 거 아니니?"
  "기가 막혀서!"
  그는 도무지 싸움을 할 수 없게 만드는 사람이었어요. 난 그가 항상 영어사전을 뒤적이고 있는 것이 보기 싫어서,
  "너 주제에 무슨 영문학자라도 되려는 거니? 맨날 영어사전이나 뒤적이게?"하고 퉁을 줄라치면,
  "야, 이래야 단어 하나라도 더 외우지. " 하고는 씽긋 웃는 것이었어요.
  나는 그 무렵 그가 영어 단어를 하나라도 더 외워야 하는 이유를 몰랐어요. 그가 나한테 그 이유를 말해 주지 않았으니까요.
  나는 영어사전이나 들추며 앉아 있는 그를 심술스럽게 빈정대곤 했지만, 그는 내 빈정거림 같은 것은 초월한 듯 막무가내로 사전을 들고 다녔어요.
  그렇게 얼마가 지났어요.
  그 날도 오늘처럼 비가 내리고, 조금은 멜랑콜리해진 채 나는 그와 제과점에 나란히 앉아 있었어요.

그날 따라 그는 어딘가 들뜬 것처럼 안정감이 없어 보였고, 무척 우울해 보였어요.
그대처럼 그의 확실한 표정을 본 적은 없었어요. 그토록 우울하고 심각한 표정을 그는 내게 한번도 보여 준 적이 없었거든요.
  나는 좀 의아했지만, 모른 척하고 앉아 있었어요.

거리는 빗물로 번들거렸고, 사람들은 목을 움츠린 채 가을비를 피해서 부산히 걷고 있었어요.
  나는 그 제과점이 통째로 기차가 되어 신나게 달렸으면 하고 생각했어요.

사실 나는 기차를 타고 비가 내리는 가을 들판을 맘껏 달리고 싶었거든요.
  그럴 때 그가 아주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어요.
  "민아! 나 미국 간다."
  "뭐?...네가 무슨 재주로 그런 델 가니?"
  나는 너무 뚱딴지 같은 그의 말을 작음 틈도 주지 앉고 묵살해 버렸지요.

내 말이 너무 심한 탓이었는지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어 버렸어요.

나도 역시 그 말에는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고 흘려 버렸죠.
  그런데 어저께 밤, 그는 나를 찾아왔어요.

마스코트라고 하면서 사기로 만들어진 백곰 한 마리를 내게 주었어요. 나는 어리둥절했죠.
  "내일 아침 일찍 떠나. 이젠 널 볼 수 없을 거야."
  그는 쓸쓸하게 웃었어요. 나는 가슴이 쓰려 왔어요. 그 순간, 그의 표정은 너무도 쓸쓸해 보였어요.

나도 금세 눈물이 흐르려고 하는 것을, 눈을 크게 떠서 삼켜 버렸어요.
  "편지하면 답장해 줄 거니?"
  그는 잠긴 목소리로 물었어요.
  "싫어. 내가 왜 답장을 하니?"
  이 말은 분명 내 입에서 나오긴 했지만, 내 마음 하고는 전혀 뜻이 같지 않은 말이었죠.
그렇게 지껄인 그 이유를 지금도 알 수가 없어요.
  "정말이니?"
  그는 힘없이 대답하고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돌아섰어요.

돌아서는 순간, 내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확 쏟아졌어요.

나는 그에게로 달려가,"꼭 편지해 줘. 답장 꼭 할께."라고 말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무엇 때문인지 나는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는 그의 뒷모습만 쳐다봤을 뿐, 그에게로 달려가지 못했어요.
  이것이 그와의 마지막 이별이었어요.

나는 밤새 그를 생각했고, 그 동안 단 한번도 그를 따뜻하게 대해 주지 못한 내가 미웠어요.

나는 그를 '바보'라고 놀려댔지만, 난 그의 진실을 알고 있었어요.
  그는 정말 편지를 하지 않을까요? 내 말을 그대로 믿었을까요?

우리의 이별이 이렇게 오리라곤 생각지 않았어요.

하지만 오늘 그는 먼 나라로 날아갔고, 나는 혼자 남아 버린 거예요.

비가 내리는 이 거리 위에.

    

우리는 밤새

  석양을 받은 갈대가 은발처럼 산등성이에서 물결치고, 들국화도 무더기 무더기 어우러져 피어 있다.
  나는 널찍한 바위 위에 낙엽을 모아 놓고 불을 지피고서, 타들어가는 낙엽의 불길을 보며 기억의 순례자가 된다.
  진홍색의 불길은 참 아름답다. 그 불길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내 영혼, 내 의식의 세계는 무한하게 넓어지는 것 같다.
  '데미안'에서 싱클레어가 배화교의 신봉자와 벽난로에 불을 지피고, 그 불길을 지켜보며 자신들의 영혼 속으로 몰입하던 장면을 떠올려 본다.
  낙엽은 매콤하고 고소한 냄새를 풍기며 자꾸 타들어간다.
  내 손끝. 내 머리카락 속으로 낙엽 타는 냄새가 배어든다. 나는 곧게 타올라가는 한 줄기
연기 속에서 창호의 모습을 보았다.
  "너 뜸북새 울음소리 들어본 적 있니?"
  "아니, 없어."
  "난 시골 할머니댁에 갔을 때 그 울음소리를 듣고 밤새 잠을 설쳤던 기억이 있어."
  "왜 잠을 설쳤는데?"
  "여름방학 때였어. 할머니댁은 산기슭에 있었어. 소나무들이 많이 우거진 산이었는데, 밤만 되면 솔바람 소리가 나를 들뜨게 했어.

솔바람은 조금은 무시무시하고, 조금은 신비롭고, 또 조금은 감미롭기도 해. 그런 어느날 밤 뜸북새가 우는 거야.

뭐라고 할까? 애기 울음소리 같다고 할까? 어쨌든 매우 묘한 전율이 느껴졌어.

그때 들은 뜸북새의 울음소리는 매우 오랫동안 내 기억 속에 살아 있었어.
  그 후, 서울에 와서 종로 2가를 걷다가 인파가 몰려 있는 길 옆에서 뜸북새를 보게 되었어.
짙은 쥐색인데, 짚으로 엮은 두렁 속에 갇혀 있었어. 몸매가 길고 고운, 너무도 여성적이고,
또 비극적인 느낌마저 주는 그런 새였어. 나는 이 새를 보는 순간 가슴이 철렁하더군.

그리고 강렬한 분노를 느꼈어.

밀짚모자를 삐딱하게 쓰고 새 옆에 쭈그리고 앉은 사나이를 노려봤지.

조용한 산기슭이나 논두렁 같은데서 날아다녀야 할 그 새를 인파가 득시글거리는 서울 한복판에다 잡아 가둬 놓고 앉아 있다니?

뭐, 사람 몸에 좋다나? 지나가는 사람들이 힐끔힐끔 쳐다보더군.
  그런데 나는 그 뜸북새의 눈을 봤어.

그 새는 가련하게도 잔뜩 겁에 질려 눈을 껌벅이고 있었어. 그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그 사나이의 턱을 갈긴 거야.

나는 그 새의 눈을 보는 순간 가엾은 어린애가 길 한편에 내팽개쳐진 것 같은 착각을 했거든.

그것도 사람들이 짓밟는 발길 밑에 말이야. 그 사나이와 나는 씨근거리며 한바탕 싸웠지. 지나가던 사람들은 구경을 하느라 몰려들었고,

그런데 그 사나이와 붙어서 치고 받고 하다 보니 갑자기 슬퍼지더군. 맥이 탁 풀리며 내 감정은 이상하게도 아주 맑고 순수해졌어.
  슬퍼진다. 좌우지간 목숨이 있다는 것은 슬프다. 저 새도 목숨이 있기 때문에 나를 슬프게 하는것이다. 이렇게 생각했지.
  나는 주머니를 털었지. 마침 학원 등록을 하러 가는 참이었기 때문에 내 주머니는 두둑했어.

나는 값을 치루고 뜸북새 두 마리를 들고 돌아섰어.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 사나이는 따라오지 않더군.
  나는 그 새를 안고 용산역으로 갔어. 용산역 앞 시외버스 정류장에서 안성 가는 차를 탔지.
내 팔 안에 안긴 이 작은 생명. 나는 그 새의 따뜻한 체온과 할딱이는 호흡을 손끝으로 느낄 수 있었어. 역시 슬프고, 또 울고 싶기도 했어.

나는 줄곧 울음을 삼키는 아이같이 나자신의 감정을 억제하면서 안성까지 갔어. 그리고는 한참 들길을 걸었어.

산기슭 아래로 옹기종기 엉덩이를 맞대고 있는 아늑한 마을에 이르렀어.

마을 앞으로 너른 들녘이 펼쳐진 그곳에서 나는 두 마리의 뜸북새를 놓아 주었지.

뜸북새를 마구 잡는 비정한 인간들을 생각하면 더 깊은 산 속으로 피신시키고도 싶었어.

하지만 이놈들이 너무 외로워질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이 마을쯤에서 놓아주기로 한 거야.
  '잘 있어. 잡히지 말라구. 뜸부기들아! 그리고 조심해. 또 다시 나쁜 인간들에게 잡히지 말구.'
  나는 이렇게 작별인사를 하고는 돌아섰어. 그랬는데도 나의 슬픈 감정은 여전하더군."

  창호는 그런 아이였다.
  어쩌면 우리는 한 쌍의 밤새였는지도 모른다. 볼 수도 만날 수도 없는 서럽도록 가까운 거리에서 등을 돌리고 진한 울음을 우는 밤새였는지도 모른다.

    

하찮은 일이 운명을 바꾼다

  지난 여름방학, 고향을 다녀오는 기차 안에서 한 여학생과 '섬씽'이 이루어져 내게도 여자친구가 생기게 되었다.

우리는 가끔 만났고, 가끔 편지도 주고 받으면서 상당히 가깝게 지냈다.
  친구녀석들은 각기 여자친구를 자랑할 때마다,
  "너희들이 아무리 그래 봐야 내 여자만이야 하겠냐?"
하며 자기도취에들 빠졌다. 어쨌거나 나도 여자친구가 있었기에 친구들과의 그런 입씨름에서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자기도취에 빠질 수 있었다.
  그런데 정말 우연찮은 일로 나는 그 여자친구와 이별을 하게 되었다. 그건 생각만 해도 울화통이 터지고 기가 차는 사연이 아닐 수 없다.
  어느날 오후, 지긋지긋한 수학 선생님이 무슨 선심이라도 쓰듯 우리에게 한 시간만 자습을
하라고 했다. 내 자리가 교실 맨 뒤인 탓도 있었지만, 내 주위에는 항상 친구들이 모여들었다. 마치 태양을 따르는 혹성처럼 말이다.
  그 날도 예외는 아니어서 친구녀석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우리는 대학에 대한 이야기로 시끌벅적 떠들어댔다. 그때 찬호녀석이 뚱딴지같이 여자친구 이야기를 꺼냈다.

사실 겉으로 드러내지 않을 따름이지, 뭐니뭐니 해도 우리에게 가장 흥미 있는 화제는 역시 여자 얘기일 수밖에 없다.
  "난 걔한테 절교편지를 보냈어."
  찬호는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그러자 근태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물었다.
  "야, 임마! 죽네 사네 하며 난리칠 때는 언제고, 절교편지는 또 뭐냐?"
  "한번 시험해 보는 거지 뭐. 야, 여자 마음, 그걸 어떻게 믿니? 알 듯하면서도 모를 게 여자 마음이야. 그래서 가끔 한번씩 시험해 보는 것도 괜찮아."
  우리는 그의 말에 솔깃해졌다.
  "그래, 절교편지를 보냈더니 반응이 어떻든?"
  "편지를 보낸 뒤 며칠간은 끙끙 앓았지. 어떻게 반응이 나타날까 정말 궁금하더군. 그런데 나중에 그 애의 진실을 알고 나니 더움 정이 두터워지더라.

비 온 후에 땅이 더 굳어진다는 얘기들 아냐? 틀림없는 얘기라구!"
  무슨 인생의 선배나 되는 척 은근히 으스대기까지 했다. 그때 동욱이 아니꼽다는 듯이 끼어들었다.
  "야, 임마! 그렇게 의기양양해 하지 마. 너 절교편지 보낸 지 이틀 안 돼 다시 사과편지 보냈잖아."
  우리는 그만 폭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그런데 무슨 영문인지 내 마음은 슬슬 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 '여자 마음을 어떻게 믿니?
그러니 가끔씩 시험을 해보는 거야' 하던 찬호의 말이 이브를 꾄 사탄의 말처럼 달콤하게 들렸던 것이다.
  "맞아. 혜영이 마음도 한번 시험해 보는 거야. 사릴 말이지만, 걔 마음은?"
  하지만 절교편지를 쓴다는 건 어쩐지 께림직했다. 장난이라도 절교라니?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어떻게 할까? 나는 호기심 반 망설임 반으로 주저하다가 절교편지를 써 보기로 했다.
  "에라 모르겠다. 한번 해보는 거다."
  이리하여 6교시, 7교시를 몽땅 절교 아닌 절교편지를 쓰느라 정신이 없었다.
  편지의 머리 부문은 의례적인 안부로 시작, 중간쯤에 이르러 본론을 밝혔다.
  "그런데 한 가지 미안한 일이 생겼어. 이렇게 되리라곤 생각지도 않았는데, 차마 네게 안녕이라는 말을 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어.

그러나 이제 우리는 안녕이라는 말을 나누어야 할 시간이 됐나봐. 인생은 워낙에 만남과 이별의 연속이라고 하지만..."
  이렇게 쓰다 보니 진짜 이별을 하는 것 같아서 슬퍼졌다. 한참 그런 투로 계속하다가,
  "너는 착한 아이니까 너만 원한다면 내 대신 친구를 소개시켜 줄 수도 있어.

나는 더 이상 너를 바라볼 기력이 없어. 그럼 잘 있어."라고 끝마무리를 했다. 난 그것을 읽어보며 망설였다. 이 편지를 과연 보내야 할까?

친구를 대신 소개해 줄 수도 있다는 부분을 읽을 땐 씁쓰름한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아무튼 대장부가 먹은 마음인데 일다 해보자는 생각으로 편지를 부쳤다.

그리고 반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사흘쯤 지나자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다.
  "일요일 오후 세 시 그곳에서 만나. 시간 없으면 지금 거절하고..."쌉쌀한 음성이었다.
  "아니야. 나갈께."
  어설픈 음성으로 허둥지둥 말했다. 하지만,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전화는 '찰그락'하고 끊겼다. 시커먼 먹구름이 우리 사이를 엄습해 왔다.
  우리는 세 시에 약속장소에서 만났다. 혜영이는 조용히 나를 노려봤다.
  "난 자존심도 없는 여잔 줄 아니?"
  "아아, 저번 편지? 그건 말이야. 사실..." 나는 자초지종을 조리 있게 하고 싶었는데, 어찌 된 셈인지 횡설수설할 뿐 도무지 이야기가 안 되는 거였다.
  "능청 떨지 마. 딱 잘라서 다시 한번 말해봐. 내게 보낸 편지, 진실이야? " 마음가짐을 단단하게 먹은 듯싶었다.

그렇다고 내 진짜 마음도 모르고 다짜고짜 따지려고만 들다니. 그녀가 나를 정말 좋아한다면 내 말을 안 듣고도 내 마음을 읽을 줄 알아야 하지 않을까?
  나는 슬그머니 오기가 발동했고, 가는 데까지 가 보자는 뱃심도 일었다.
  "그건 진실이었어."
  나는 이렇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 순간 그녀는 나를 금세라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는 거였다. 하 입에서는 왜 자꾸 본심과 동떨어진 말만 튀어나오는 걸까?
  "알았어. 이건 그동안 네가 준 편지들이야. 이젠 필요 없어. 그리고 내가 준 편지, 돌려 줘."
  "편지? 없어. 왜 그런 걸 모아 두냐?"
  나는 왜 이러는가? 나도 잘 모르겠다. '아니다. 안 그렇다.' 이 한마디만 해도 이 따위 쓸데 없는 감정낭비는 안 해도 되는 것 아닌가.
  "그래, 너 잘났다. 인물 났구나! 나 간다. 안녕!"
  그녀는 편지뭉치를 네게 건네 주며 한숨을 크게 내쉬더니, 내게 마지막 악수를 청하는 거였다.
  "잠깐!"
  나는 발악하듯 혜영이를 불렀다. 뒤늦게나마 의도된 스토리가 빗나간 사실을 깨달았다.
한데 날씨조차 나를 외면하는 것이었다. 날씨는 너무너무 차가웠고, 바람이 어찌나 세게 부는지 모든 게 귀찮고 시들해 졌다.

그래서 나도 그녀의 손을 잡으며,
  "안녕!"
하고 마지막 작별을 해버렸다. 이것이 그 애와의 이별이었다.

참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다. 그녀와 헤어지고 집으로 와서 곰곰히 생각해 봤다.

그 애의 손을 잡고 '안녕'이라고 말한 것은 순전히 차가운 날씨와 세찬 바람 때문이었다.
  까뮈의 '이방인'이 실감 나는 순간이었다. 뜨거운 여름 하늘의 태양 때문에 사름을 죽였다는 불가사의가 이해가 되었다.
  사람이란 하찮은 동기로도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엄청난 거인, 대학입시

  대학입시. 이것이 사람이라면 엄청난 거인일 게다.

한 인간의 이상이나 감정쯤은 무참히 작살을 내버리는 거인. 그놈 앞에서 나는 마냥 무기력하고 나약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그놈은 인정머리라곤 털끝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무지막지한 괴물임에 틀림없다.
  나는 지난해 그놈한테 다운 당한 뒤, 그 후유증으로 일년 내내 얼마나 끙끙거렸던가. 정말 생각만 해도 쓴웃음이 저절로 나오는 판정패였다.
  우리 동네에는 예쁜 여학생이 한 명 있다. 등교길에 가끔 마주치곤 한다.

그 여학생은 단정한 용모에, 보조개가 선명한 예쁜 소녀였다. 우리는 서로 눈길이 부딪칠 때마다, 얼른 외면하며 무관심한 척 지나쳤다.
  그녀는 나와 같은 고3이었다. 이럴 즈음 대학입시를 위해 체력장 검사가 있었다. 나는 우리 학교에서 무난히 체력장 검사를 받았다.

다음날은 그 여학생이 다니는 하교에서 우리 학교 운동장을 빌어 체력장 검사를 하게 되었다.
  그 덕분에 우리는 그 날 오전 수업만 했고, 당번만 남아서 청소를 하게 되었다.

나는 마침 그 날 당번이었기 때문에, 교실 청소를 끝내고 주전자와 컵을 들고 수돗가로 나갔다.
  그때 수돗가의 벤치에 앉아서 친구들이랑 얘기를 나누는 그 여학생을 만나게 되었다. 순간 나는 반가운 마음이 앞섰다.
  "체력장 오셨습니까? 제가 응원해 드릴 테니 잘 하십시요."
  나의 이 말에 벤치에 모여 앉았던 여학생들은 한바탕 깔깔 파티를 벌였다.
  "어머, 경아야! 너 대단하구나. 응원선수까지 데리고, 호화판이다, 얘!"
  "얘, 나도 좀 부탁하자. 나한테도 응원 좀 해달라고 해줘."
  나는 여학생들의 재잘거림을 뒤통수로 들으며 대충 컵을 씻은 후 교실로 들어왔다.
  그때 비로소 나는 그녀의 이름이 '경아'라는 걸 알았다. 그 후에 안일이지만, 그 순간부터 내 이름은 그녀들 사이에서 '응원선수'로 불리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부턴 길거리에서 눈이 마주치면 서로 웃게 되었고, 몇 마디 이야기도 나누게 되었다. 그것이 발전하여 햄버거집에도 같이 가게 되었다.

주말이나 공휴일엔 대개 햄버거집에서 만났고, 우리는 입시 이야기, 음악 이야기, 그림 이야기 등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이른바 가장 아름다운 첫사랑이 우리들 가슴 속에서 꽃 피기 시작했던 것이다.
  학력고사 날짜는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학력고사가 있기 전에 먼저 원서를 내야 했다.
학교에서는 원서를 쓰기 위한 배치고사가 실시됐다.

이 배치고사는 우리가 넘어야 할 필수 언덕이었고, 우리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그 언덕을 넘었다고 자신만만해 했다.
  배치고사가 끝나는 날 우리는 햄버거집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우리는 약속대로 시험이 끝나는 날 그곳에서 만났다. 그때 경아는 보조개가 팬 예쁜 얼굴로 생글생글 웃으며 나를 맞아 주었다.

그 순간, 나는 경아한테서 새색시 같은 황홀감과 어머니 같은 아늑함을 느꼈다.
경아는 정말 사랑스러운 여자였다.
  그런 속에서 시간은 흘렀다.

그 시간은 초조한 것이었다. 배치고사 결과가 발표되고 나면, 그 결과에 따라 원서를 쓰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의 점수는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낮게 나왔다. 나는 당혹스러웠다.
  그 무렵, 경아한테서 편지가 날아왔다.
  "장군의 이생을 여자에 의해서 그르친다면 그건 안 되겠지? 나는 장군의 인생을 나쁜 방향으로 끌고 가는 여자이고 싶지는 않아."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경아는 나의 시험 점수가 나쁘게 나온 것을 자신의 탓이라 생각하고, 절교를 선언한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이유로 그녀와의 교제를 끝낼 수는 없었다. 그래서 한번 더 만나 줄 것을 간곡히 부탁하는 글을 띄웠다.
  약속날 나는 강둑으로 나갔다. 나는 외로움 때면 발 밑으로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강둑길을 걸었다. 경아가 먼저 나와 있었다.

항상 약속시간보다 늦게 나오던 경아가 그날은 삼십 분이나 먼저 나와서 나를 기다렸다고 했다.
  그녀는 나를 보자 예쁜 보조개를 지으며 살짝 웃었다. 그 얼굴을 내 가슴 속에 너무도 깊게 각인 됐다.
  "경아! 우리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헤어지는 것만이 방법은 아니잖니?"
  "내가 생각한 것은 아직까지 틀린 게 없었어. 나는 시험 답안을 작성할 때,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고 고치면 언제나 틀렸어. 처음 생각한 것이 항상 옳았던 거야.

장군, 내 마음을 이해해 줘. 이것만이 널 위하는 가장 바른 길이라는 확신이 들었어."
  웃으면서 쳐다보는 경아의 눈은 가늘게 떨기고 있었다. 경아는 아무말도 못하고 서 있는 내 앞으로 다가왔다.
  "우리 어른들처럼 한번만 꼭 안아봐."
  나는 경아를 가슴속에 꼬옥 안았다.

고개를 들고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는 우리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경아는 나에게 손을 내밀어 작별의 악수를 청했다. 그리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혼자 서 있는 나의 몸을 찬 강바람이 마구 흔들어댔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이별을 했다.
  나는 배치고사 점수가 낮았지만 담임 선생님과 거의 싸우다시피 해서 내가 원하던 대학에 원서를 넣었다.

그러나 결과는 낙방이었다. 나는 학력고사에서 죽을 쑤었던 것이다.

경아도 떨어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경아는 후기대학을 가겠다는 얘기도 뒤이어 들었다. 나는 재수를 결심했다.
  결국 대학입시라는 거인은 우리의 가장 순수한 사랑을 무자비하게 짓밟았고, 나는 완전히 그 놈에게 다운됐다.
  이 양양한 괴물 앞에 나는 다시 도전한다. 이번에야말로 이 거인을 내 발 아래 무릎 꿇리고, 내가 놈의 몸뚱아리 위에 우뚝 서고 말 것이다.

    

사랑에 눈 뜨는 사람들

따뜻한 겨울 이야기

  고등학교 3학년 겨울, 나는 교회에서 한 소년을 만났다. 별로 말이 없고 깔끔해 보이는 그 소년은 늘 쓸쓸하고 슬픈 눈을 하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혼자 있었고, 별로 말이 없는 조용한 소년이었다.
  그러면서도 같은 또래의 친구들 위에 군림했고, 창백한 흰 얼굴은 오만함과 강한 자존심을
느끼게 했다. 그는 흰 눈이 쌓인 설원에 서 있는 한 마리 사슴처럼 고독해 보였고, 또 신비해 보였다.
  우리는 같은 성가대이기 때문에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성가 연습을 위해 늦도록 교회에
남아 있었고, 이야기도 조금씩 나누게 되었다.

그는 언제나처럼 조용한 음성으로 간단히 자기의 이야기를 끝내고 좀처럼 긴 대화 속에 말려 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성가 연습을 끝내고 우리는 같이 거리로 나왔다. 그것은 우연이었다기보다 어쩌면 나 자신이 그런 기회를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12월 중순의 밤거리는 매우 추웠다.

파란별이 반짝이는 하늘은 싸늘하게 얼어 있었고, 우리들의 뺨도 뻣뻣하게 굳어지는 것 같았다.
  우리는 넓은 거리로 나와서 조그만 분식센터에 들어갔다.

만두, 찐빵, 라면, 우동 등을 파는 조그만 가게 안은 뻘겋게 단 무쇠 난로로 훈훈했고, 한쪽 구석에 있는 솥과 찜통에서는 하얀 김이 피어올랐다.

우리는 딱딱한 나무 의자에 마주 앉았다.
  "이 집은 꼭 러시아 빈민가에 있는 조그만 술집 같지? 빨갛게 타오르는 난로가 있고,
빤질빤질하게 닳은 가죽옷을 입은 뚱뚱한 주인이 있고, 천장이나 벽이나 식탁도 검게 그슬렸고... 그런 느낌 안들어?"
  내가 이렇게 지껄여 대자 그는 나를 한참 쳐다보더니 입가에 아주 부드러운 미소를 띠었다.
자신도 그렇게 느끼고 있다는 뜻인지, 그런 말을 지껄이는 내가 의외라는 뜻인지는 분명치 않았으나 아무튼 상당히 호감을 나타내는 미소였다.
  "응, 그래. 정말 러시아의 빈민가에 있는 조그만 술집 같군. 러시아라는 나라는 참 매력적인 나라지.

우선 춥기 때문인지 몰라도 음울한 비애 같은 것을 느끼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그 숱한 세계적인 예술가들을 탄생시킨 저력이었을 거야."
  "..."
  나는 아무 말 안 하고 그의 얼굴을 쳐다보며 이야기를 계속하라는 눈짓을 했다.
  "비애란 아름다운 감정이야. 인간의 감정을 걸러주지, 체처럼. 쾌락은 인간을 사로잡지만 그 뒤엔 항상 앙금을 남겨. 그런 앙금이란 불쾌한 것이야."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비애란 감당하기가 너무 어렵잖아. 그것으로 해서 더 나빠지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더 나빠지는 사람도 있지. 하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영혼의 승화란 비애를 딛고 일어서야만 가능한 거야.

비애를 경험해 보지 않고 안락한 생활 속에 육신을 살아 온 사람들이 인생이니 영혼이니 하고 아무리 지껄여 봐야 그건 수박 겉핥기지.

그런 사람들이 인생을 알기에는 인무 오묘한 거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인류에게 무한한 감동을 주고 사랑을 받았던 예술품들은 모두 그것을 창조해 낸 예술가들이 가장 비참한 생애를 보냈을 때
창작된 것이지. 음악, 미술, 문학 다 마찬가지야. 그러고 보면 인생이란 참으로 불가사의한 것이 틀림없어."
  "불가사의?"
  "지상에 있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행복하기를 원하거든. 그런데 행복 속에서는 부패가 있을 뿐이야.

고인 물처럼 영혼을 썩게 할 뿐이라고. 여기에서 무엇을 기대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지.

그러고 보면 행복한 인생이란 것이 과연 축복인가 하고 반문하게 돼."
  "그렇다면 행복을 거부하고 생활 속에서 고통을 받아야 된다는 이야긴데 과연 그럴 필요가 있을까?"
  그는 한참 나를 쏘아봤다.
  "이런 문제에서는 거부고 필요고 하는 말은 있을 수 없어.

그것 자체가 하나의 숙명으로 오는 거니까. 자기에게 주어진 숙명을 자기 자신의 지혜로 깨닫는 것뿐이지.

그렇다고 온 인류가 다 행복을 버리고 비애 속에 살라는 얘기는 아니야.

그렇게 하지도 않겠지만, 이런 건 어디까지나 자신의 영혼을 완성시키려는 소수의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얘기지.

수도자들이 일신상의 행복을 버리고 고행의 길을 오르는 것도 그런 경우지."
  그날 밤 그는 많은 이야기를 했다.

평소의 그답지 않게 정말 많은 이야기를. 나도 수십 권의 소설을 읽었고, 또 다른 친구들보다 생각이 깊다는 이야기를 들어왔지만,

그 날 그와 나눈 이야기는 나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그는 우리들 하고는 달랐다. 그에 비하면 우리들은 아직 세포 분열을 끝내지 않은 표피동물 같았다.

그날 밤 이후 나는 그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 봤다. 그는 우선 살아 온 환경이 우리와 다른 것 같았고, 또 앞으로의 생애도 우리와 다를 것 같았다.
  너무 비극적인 그의 생명 안에서 밝게 타오르는 빛을 나는 보았던 것이다.
  나는 그의 생각으로 많은 시간을 보냈다. 내 의식 속에는 항상 그가 자리잡고 있었으며 알게 모르게 나는 그의 생각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런 중에 우리는 크리스마스를 맞았다.
성탄절 새벽 교우들 집을 방문하고서 주의 은혜가 내리기를 축복해 주는 성가를 부르며 나는 행복했다.

나는 흡사 쥐 형제들에게 행복의 메시지를 전해 주는 천사와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성탄절 아침 나는 그와 나란히 교회를 나왔다.

찬양대의 성가가 울려 퍼진 때문인지 온 거리 위에는 하느님의 성은이 가득 내린 것 같았다.

우리는 추워서 조금씩 떨며 처음 갔던 분식센터를 찾아갔다. 이른 아침이었지만 난로는 빨갛게 타오르고 있었다.
  "너는 하느님을 믿니?"
  그는 엉뚱하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무슨 소릴 하는 거니?"
  난 정말 어리둥절했다. 성탄절 아침, 새벽 내내 찬송가를 부르고 와서 하느님을 믿느냐고 묻다니?
  "아니, 신으로서의 하느님을 믿느냐고?"
  "신으로서의 하느님이 아니면?"
  "나에게 있어 신으로서의 하느님은 언제나 생소했어.

내가 이해하기에는 모순도 많았고, 그런데 예수님을 생각할 때는 가슴 속에서 무한한 사랑이 차오르는 걸 느껴.

그건 신으로서의 경애가 아니고 인간에 대한 경애야.

많은 고뇌와 갈등 속에 끊임없이 하느님께 기도 드리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을 떠올리면 나는 그분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어.

나는 하느님 아버지라는 말에서 하느님 대신에 항상 예수님을 생각하지. 예수님은 육친으로서의 내 아버지 같애."
  "얘는 이상한 소리하네. 육친으로서의 아버지라니? 너희 아버지가 들으셨다간 큰일 나겠다."
  "내 아버지가 어디에 있어."
  "아버지 없는 사람이 어디 있니?"
  "아버지뿐만 아니라 나에게는 엄마도 없지."
  "두분 다 돌아가셨니?"
  "아니 처음부터 없었던 거야."
  "기가 막혀서. 그럼 넌 어떻게 세상에 태어났니?"
  "글쎄 돌속에서 튀어나온 손오공인지도 모르지."
  그러고는 씨익 웃었다.
  나는 그때 비로소 그의 출생에는 많은 비밀이 있었고, 그로 인해서 그의 성장과정도 평탄하지 않았음을 알았다.

하지만 우리들은 그 문제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우리는 분식센터에서 나와 헤어져야 했다.
  "너희집까지 바래다 줄까?"
  "응, 그래."
  우리는 서로 헤어지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우리집 골목까지 왔을 때도 우리의 마음은 마찬가지였다.
  "이번에는 네가 나를 바래다 줘라."
  "응, 그래. 바래다 줄께."
  우리는 킬킬거리며 오던 길을 되돌아서 그의 집 골목까지 갔다. 그리고 헤어졌다.

많이 아쉬워하면서. 그때 우리는 왜 그렇게 헤어지는 것이 아쉬웠던지.
  어떤 예감 때문이었을까?

그 후 우리는 다시 만나지 못했다. 내가 고향에 다니러 간 사이 그는 진학관계 때문에 서울로 이사했고,

그가 남기고 간 편지는 교회에서 분실된 채 내 손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와 내가 서로의 가슴에서 잊혀지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꼭 만날 것 같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준 사람이었다.
  내 여고시절의 마지막 겨울, 그 겨울은 그와의 시간으로 해서 한결 따뜻했다. 언젠가
만나게 된다면, 그를 만나는 순간 나는 반가움에 그만 울어버릴 것 같다.

    

이별 없는 만남을 위하여

  치켜라 바지, 쫄라라 허리띠, 올리자 자크,
  흐흐흐... 이게 무슨 소리냐구?

응, 그건 다름 아니라 우리 담임 선생님의 별명이야. 내 보충 설명이 없어도 충분히 머릿속에 그릴 수 있겠지?

너무 웃긴다고? 하지만 자꾸 웃지 마. 난 지금 심각한 슬픔에 빠져 있다고. 나는 담임 선생님의 길고도 긴 종례 말씀을 듣고 있는 시간만 되면

심각한 슬픔에 빠지게 돼. 왜냐하면 종례가 끝나면 나는 버스를 타야 하고, 그러면 나는 어쩔 수 없이 그 아이 생각을 해야 되니까.

우리는 버스로 해서 만났고, 또 버스 때문에 헤어진 기막힌 사연을 갖고 있거든. 듣고 싶다고? 알았어. 나도 지금 들려주고 싶은 심정이댜.
  지난해 겨울, 학원에 다닐 때였어. 엄마의 믿음직한 딸이 되기 위해 새벽반에 나갔었지.
엄마는 대학입시를 앞두고 나보다 더 마음이 바쁘셨거든.
  등록 마감일을 일주일쯤 앞둔 어느 새벽이었어. 한겨울 새벽이란 생각만 해도 끔찍하잖니?
여덟 시가 돼야 훤해지는 판에, 나는 아직 깜깜한 여섯 시에 버스를 타야 했거든. 하지만, 마음 한구석은 기뻤어.

모두 잠든 시간에 까만 하늘의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길을 걷노라면 내가 대단한 공부벌레 같아서 말이야.
  사실 일어날 때가 힘들어서 그렇지, 두툼한 오버를 입고, 따스한 모자를 쓰고 새벽길을 나서면 낭만적인 가로등도 볼 수 있고,

또 서쪽 하늘에 걸린 그믐달도 볼 수가 있거든. 잠꾸러기들은 결코 맛볼 수 없는 기막힌 정경들이었지.
  그 날도 나는 이같은 즐거움을 만끽하면서 새벽 시내버스에 올랐어.

버스 안은 나 같은 학생들이나 새벽장을  보러 가는 상인들이 몇 명 있을 뿐 휑덩그렁 비어 있었어.

내가 탄 버스가 몇 정거장쯤 갔을 때였어. 몇 사람이 내리고, 또 몇 사람이 탔어. 한데 그곳에서 탄
남학생 한 명이 내 눈을 끌었어.
  그는 키가 굉장히 컸고, 또 덩치도 좋은 편이었어. 그가 차에 오르자 버스 안이 갑자기 환해지는 것 같았어.

특별히 미남형이라기보다는 주위 사람들을 압도하는 그런 타입이었어.
  내 감상은 그 정도에서 끝났지. 군계일학처럼 돋보이는 사람이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으로 말이야.
  목적지까지 온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내렸고,, 그리고 학원의 붐비는 계단을 올라서 강의실로 들어갔지.
  그런데 이게 대체 어찌된 일인지, 그 믿음직한 남학생이 내 앞에 와 앉아 있는 거야.
새벽부터 정말 정신 없더라.

내 옆에는 붕어라는 별명을 가진 친구가 앉아 있었어. 우리는 문제지를 펴놓고 열심히 공부했지.

얼마쯤 지났을까? 그 남학생이 고개를 돌리더니 나더러 볼펜을 빌려 달래.
  '공부하러 오면서 볼펜도 안 갖고 오니?'
  속으로 쫑알거리면서 손에 들고 있던 볼펜을 그에게 주었어.
  나는 가방 속에서 다른 볼펜을 꺼내 열심히 문제를 풀어 나갔지. 시간이 십 분쯤 남았는데,
그 남학생은 자리에서 일어나 바깥으로 나가는 거야. 그가 앉았던 책상 위에는 볼펜만 댕그라니 놓여 있고.
  '예의도 모르는 자식, 고맙다는 인사도 없이...'
  물론 이 말도 속으로 쫑알거린 거였어.
  강의가 끝나고 나는 바깥으로 나왔어. 날씨는 추웠지만 이제 거리는 환해 있었고
러시아워라 버스마다 만원이었어. 나는 버스를 세 대나 놓치고 네 번째 차에 간신히 올랐어.
몇 정거장 가다 보니 내가 탄 차에 아까 그 남학생이 또 타고 있는 거야. 우연치곤 정말 필연 같은 만남이었어.
  한편 이상한 생각이 들었어. 우선 그는 나보다 십 분이나 먼저 나왔고, 또 나는 버스를 세 대나 놓쳐 버렸는데, 어떻게 같은 차에 탈 수 있을까?

시차가 그렇게 의심을 만들어 주었어. 버스는 이런 내 궁금증까지 싣고서 계속 달렸어. 나는 드디어 내려야 할 곳에 이르렀지.
힐끔 날 쳐다보는 그 남학생의 시선을 무시한 채 차에서 내렸지. 나는 우리집을 향해서 곧장 걷고 있는데, 계속 그 남학생은 날 따라왔어.
  "말 좀 해도 됩니까?"
  그 남학생의 물음에 대꾸 없이 난 그냥 걸었어. 그랬더니 똑같은 말을 또 다시 하는 거야.
그래서 난 홱 돌아서며,
  "무슨 말을요?"
하고 쌀쌀맞게 대꾸했지.
  "아까 볼펜 고마웠습니다.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려고 세 정거장이나 더 왔습니다."
  "감사한 줄 알았으면 됐어요."
  이런 식으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걸어오는데, 저쪽 골목 어귀에서 아버지가 걸어오는 거였어. 출근길이었어.

아찔했지. 아침부터 남학생과 걷는 이 장면을 들켰다간 학원은 다 다니는 거지 뭐. 나는 잽싸게 길모퉁이의 작은 분식점으로 쑥 들어갔어.
  그 남학생도 따라 들어왔어. 이렇게 해서 우리는 각본에도 없는 첫 데이트를 분식집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하게 되었지.
  그날 아침 내가 그 남학생에 대해서 안 것은 학원에서 그는 볼펜을 갖고 있었다는 것과, 그는 현대고등학교 2학년이며, 대학은 물리학과를 가고 싶다는 것,

가능하다면 유학을 갔다 와서 연구소에 근무하고 싶으며, 아이스하키 선수라는 것...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는 서로의 이름을 물어보지 않았어.
  아무튼 아침에 이루어진 우리의 데이트는 그런 대로 즐겁게 끝이 났어.

그 다음부터야 계속 만났지.

매일같이 학원이 끝나면 거리를 걷기도 하고, 햄버거집에도 가고, 자판기에서 따뜻한 커피도 빼먹고, 또 같은 버스를 타고 돌아오곤 했어.
  그런데 그 남학생은 영어실력이 아주 뛰어났어. 고전문학 원서를 줄줄 읽으면서 해석까지 자상하게 해 주었어.

나는 학원에서 완전히 익히지 못한 영어문제를 별 부끄럼 없이 그에게 물어보곤 했어. 실력이 월등하게 차이 나니까 부끄러운 감정도 일지 않았었나봐.
  어쨌거나 그는 여러 면에서 상당히 믿음직스럽고 나를 안심시켜 주는 그런 남자였어.
  학원이 종강하던 날, 우리는 거리를 꽤 오래 쏘다녔어.

마침 그날은 새벽부터 눈이 펑펑 쏟아졌기 때문에 우리는 강아지처럼 더욱 거리를 싸돌아다녔어.

사람의 발길에 반질반질해진 길 위에서 넘어지려고 뒤뚱거리면 서로 팔을 붙들어 주기도 하면서 말이야.
  그러다가 버스 정류장에 이르렀어. 우리는 같은 방향이었기 때문에 같은 차를 기다리고 있었지. 마침 버스가 왔어. 사람들은 겹겹이 모여 들었어.

나는 앞에 섰기 때문에 먼저 버스에 올랐지.
  그런데 사람들이 다 타기도 전에 기사 아저씨는 "다음 차 타세요." 이 한마디만 툭 던지고
버스를 출발시키는 거야. 버스는 미끄러운 아스팔트 위를 엉금엉금 기어가기 시작했어. 정류장에다 그를 남겨 둔 채 말이야.
  어처구니 없게도 우리는 그렇게 해서 이별을 하고 말았어. 우리는 일주일 정도 만나는동안 약소이나 한 것처럼 서로 이름 같은 것은 물어보지도 않았거든.
  함박눈을 맞으며 떠나는 버스에 시선을 던진 채 맥이 탁 풀려서 있던 그의 모습이 아직도 내 기억 속에 또렷이 남아 있어.
  '치켜라 바지, 쫄라라 허리띠, 올려라 자크'인 우리 담임 선생님은 아직도 길고 긴 종례시간을 말씀으로 채우시기에 정신이 없었어.
  이 종례가 끝나면 사랑하는 우리 반 친구들에게 나도 한마디 해야지. 뭐냐구? 그

건 내 이야기를 들었으면 짐작할 수 있을 텐데. 음, 그건 뭔고 하니, 데이트를 할 때는 우선 이름과 주소와 전화번호는 알아두고 하시라 이거지, 뭐.
  나처럼 "다음 차 타세요"하는 기사 아저씨의 한마디에 끝장이 나지 않게 말이야.
  고맙다구? 응, 그래. 꼭 실천에 옮기도록 하세요.

    

누나는 착각이 야무져요.

  비 오는 날. 모처럼 음악회에 가려고 서둘러서 버스 정류장으로 나왔다. 거울에 비친 약간 다듬어진 내 모습은 예뻤다.
  까만 코트에 까만 머플러를 기리게 드리운 내 얼굴은 하얗고, 두 눈은 까맣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나르시스처럼 내 모습에 스스로 황홀해져 거울 속을 자꾸자꾸 들여다봤다.

버스 정류장 앞에는 마침 유리가게가 있었고, 그 가게 입구엔 내 키보다 더 큰 견본용 거울이 하나 걸려 있었다.
  그런데 오 분, 십 분이 지나도록 영 버스가 나타나질 않는다. 마음이 약간 초조해졌다.
이럴 땐 두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가 있으면 좋으련만. 나는 러시아 백작 딸이나 된 듯한 기분으로 비 오는 거리에서 그렇게 서성거렸다.
  그때 한 남학생이 불쑥 내 우산 속으로 뛰어들었다.
  "우산 좀 같이 써요."
  그 남학생은 키가 1백80센티는 족히 될 만큼 껑충했다.

1백 60센티인 나는 한참을 쳐다봐야 했다. 거기에다 오똑한 코, 선명한 입술, 그윽한 시선... 그 남학생의 옆모습은 한마디로 멋 덩어리였다.
  난 이 남학생이 갑자기 쌍두마차를 타고 나타난 왕자님처럼 느껴졌다. 동시에 내 가슴은 콩닥거리기 시작했다.
  "우산, 제가 들까요? 제가 키가 더 크니까요?"
  바짝 정신을 차리고 그 남학생을 다시 쳐다봤다. 그 남학생은 고개를 꼿꼿이 세우지 못한 채 엉거주춤 서 있었다.
  "네, 그렇게 하세요."
  나는 우산을 그에게 건네 주었다.
  사실 나는 이렇게 우산을 쓴 채 끝없이 걷고 싶었다. 긴 가로수길이나, 잡초가 우거진 들이나, 아득히 뻗은 강둑길 같은 데를 말이다.

끝없이, 끝없이 노래를 부르면서 그렇게 걷고 싶었다.
  아!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내 영혼은 강으로, 들로 마구 헤매 다니다가 그만 시간을 잊어버린 것이다.
  "아, 버스 왔어요. 저거 안 타십니까?"
  "아, 네!"
  약간 부끄러웠다. 내 마음을 그 남학생이 거울 보듯 환하게 들여다 보면 어쩌나 해서였다.
우리는 얼른 뛰어올랐다. 종점에서 가까운 정류장이어서 자리는 많이 비어 있었다. 그
남학생과 나란히 앉을 수 있는 행운도 얻게 되었다.
  난 슬그머니 호기심이 발동했다. 어느 학교 학생인가 슬쩍 교복의 가슴께를 쳐다봤다. 그
순간, 나는 하마터면 졸도할 뻔했다. 왜냐구? 그는 중학생이었던 것이다.
  "누나는 어디까지 가세요?"
  우산을 건네 주며 그 남학생은 다정하게 물어왔다.
  '누나? 누나?'
  "으응. 나 광화문까지."
  그 순간 내 입가에는 야릇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 미소는 어쩌면 나자신에게 보내는 조소였는지도 모른다.

    

남세스러운 만남

  "얘, 얘..."
  헐레벌떡 교시에 들어서자마자 숙희가 눈웃음을 치며 나를 불렀다.
  "왜 그러니? 아침부터 정신 헷갈리게..."
  "그래, 정신 헷갈릴 일 하나 생겼어?"
  "뭔데?"
  "공짜론 절대 안 되는 일이다."
  "필요없어. 공짜로 생기는 일도 골치 아파 죽겠는데, 돈 내고 네 말 들을 일 있니?"
  "그럼 관둬. 때론 첸징 파트너도 일미가 있으니까..."
  "뭐, 파트너? 파트너라면, 한 껀수 생긴 거니? 얘얘, 흥정은 뭐니?"
  "네가 이제서야 냄새를 맡은 모양인데...하지만 원체 큰 거라 시시한 거론 안 돼."
  "크다니? 키가 크니? 코가 크니?"
  "호호... 키도 크고, 코도 크지만, 그보다 더 큰 게 있지."
  "얘, 웃기지 마. 멀대같이 크기만 하면 뭘 하냐?"
  "애는 엉뚱하게 헷갈리고 있군. 사람이 거물이다 이 말씀이야."
  "뭐, 사람이 거물이라구? 얘얘, 난 그 거물이라는 말 들어가면 기분이 안 좋더라. 꼭 평양서 온 손님 같아서."
  "호호..."
  배를 잡고 깔깔거린다.
  "얘, 네게 차례 간 거 내 우정인 줄 알아라. 신청자는 두 줄로 늘어 섰어."
  "관둬. 여자가 줄로 늘어선 남자. 그걸 뭣에 쓰니?"
  "그래, 관두자. 나중에 가슴 쓸지 마."
  "가슴을 왜 쓰니?"
  "쓰리니까 쓸지!"
  "너, 나한테 요렇게 꼭 계산적으로 놀아야겠니?"
  이렇게 해서 두사람은 타협을 본다.
  숙희 그 계집애가 한 건 건진 그 주인공은 K고교 2년생이다.

그는 미남인데다가 K고교생들 간에서는 일종의 우상으로 통했다. 거기다 대대장 후보감이고, 전국웅변대회에서 일등, 전교에서 학업성적 일등, 테니스 선수...
  고만하자. 어지럽다. 그 정도만 들어도 교실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아 어지럽다.
  "얘, 네 실력 내가 제일 잘 알잖니. 한데 그 거물은 도대체 어디서 알았니?"
  "그야 다 길이 있지."
  "그래? 그럼 내게 줄 것 없이 네가 가지렴."
  "그랬으면 오죽 좋겠니? 한데 나는 그럴 수가 없으니 그것이 비극이로다."
  "그럼 좋아. 네 덕분에 거물급 한번 만나게 해주렴?"
  그러기 위해서 앞으로 일주일간 숙희가 요구하는 모든 것을 들어주기로 서약했다.
  그런데 이 계집애가 아주 끝장을 내려고 작정을 했는지, 오늘은 냉면, 내일은 모밀국수, 모레는 돈까스...

거기다 극장으로, 탁구장으로... 온갖 주문들이 한도 없고 끝도 없었다.
  참자. 참아야지. 내 그토록 만나고 싶어하던 거물급이 아니더냐?

이렇게 해서 일주일이 지나고 드디어 토요일이 돌아왔다.
  빗고, 바르고, 다리고, 거기에 오마 샤리프 향수까지 몰래 뿌리고 등교했다.

숙희는 하루종일 앞 보고, 옆 보고, 뒤 보며 온갖 잔소리에 참견을 다하더니,
  "얘, 가자. 성공을 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떨려서 어디 제대로 걷기나 하겠냐? 너 잠깐 기다려. 내 가서 진정제 하나 사먹고 올께.
  아유 시시해. 내가 그렇게 시시하다는 사실에 난 환멸을 느낀다, 아휴!
  혼자서 자문자답도 해보며, 왜 이렇게 촌스럽게 구는지 나 자신도 나를 알 길이 없었다.
  약속한 패스트 후드점에 들어서니, 저쪽 구석에서 남자애들이 손을 번쩍 들어 신호를 했다.
  "얘, 저기다. 저쪽이야!"
  난 입술을 꼭 깨물고 야무지게 접근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홍종만입니다."
  "홍종만?...홍...종...만?"
  늠름하고 깔끔했다. 정말 멋있는 남자였다. 한데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인데? 어디서 봤지?
  내 머리는 쏜살같이 세월을 이리저리 휘저으며 거슬러 올라갔다. 그리고 아스라한 기억의 꼬리를 겨우 더듬어 잡았다.
  맞다, 맞았어! 바로, 바로 걔구나! 그 순간이었다.
  "저...혹시 강남국민학교 나오지 않았습니까?"
  어휴, 이걸 어째. 이 창피. 이게 무슨 꼴이람.
  큰골의 명령도 없이, 나는 감성과 이성이 타협할 틈도 주지 않고 후다닥 일어서 유리문을 밀치고 뛰어나왔다. 하늘이 달라져 보였고, 땅도 달라져 보였다.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가깝게, 또 멀게 들려 왔다. 종만이는 정말 근사하게 변해 있었다.
  될 성싶은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했지. 자아식, 그때도 멋있었어. 우리 여자들이 서로서로 짝사랑할 만큼.
  나는 가로수 밑을 걸으면서 국민학교 6학년 때를 회상해 본다.
  남녀 합반이었던 우리 6학년 3반. 그 당시 종만이는 여러 면에서 걸출했다.

그러나 가끔 나와 눈이 마주칠 때면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던 수줍은 아이였다.
  그 어린 시절, 우리들의 가슴에도 봄바람이 분 탓일까?
  아무튼 오늘은 내가 그 종만이 앞에서 너무나 남세스러워 이렇게 혼자 거리를 걷고 있다.

    

동문서답하는 아이들

  학원 수업이 끝난 저녁 시간이면 거리는 언제나 사람의 파도가 일렁댄다.
  별로 춥지 않은 날씨인데도, 엄마의 극성에 못 이겨, 털 코트에 장갑까지 끼고 나온 이 몸.
북적거리는 종로 2가 버스 정류장에 서 있는데-- . 그때였다. 전봇대처럼 긴 남학생이 내 곁으로 슬그머니 다가서더니,
  "어저께 동대문 스케이트장에서 이 장갑 때문에..."
하고 말을 건다. 깜짝 놀라 쳐다본 순간. 아하! 어제 스케이트장에서 본 내 장갑과 꼭 닮은 장갑을 꼈던 바로 그 남학생이 아닌가.
  세상은 넓고 길은 좁다더니, 이런 거리에서 다시 만날 수도 있구나.

학교에서 새침데기로 소문난 이 몸. 갑자기 들이닥친 만남이기에 순간 맹구 눈방울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 맞군요! 영광입니다."
  어머, 별꼴이네. 왜 네가 나를 만났는데 영광이니?
  입술은 옴찔옴찔 움직였지만, 소리는 죽어 있었고, 얼굴 거죽만 발갛게 열을 받고 있었다.
  한데, 웬일이야, 이 전봇대 남학생? 아니 꽈배기 먹고 죽은 조상이라도 있나?

왜 몸은 그리 비비 틀지? 할 말 있으면 어서 해보라구.
  "저...사실 토큰이 떨어져서 삼십 분 동안 버스를 열 대나 그냥 보냈습니다. 이거 죄송합니다만..."
  맙소사! 주여, 저는 왜 이렇게도 비극적입니까? 고작 토큰이 떨어져 그 구호 요청이 용건이라니.
  잠시 마음을 가다듬고, 얄미운 그 전봇대에게 나의 본성은 공격을 개시했다.
  "좋아요. 대신 조건이 있어요. 책 한 권만 내게 보관해 두고 빌려 가요."
  그 전봇대는 잠시 망설이더니,

가방을 열고 "해법 수학"을 어렵게 꺼냈다. 그것을 건네 받는 내 가슴은 두근두근, 합쳐서 네 근이 되고, 드디어 다듬이 방망이질을 해댔다.
  으흐, 내게도 마침내 '섬씽(something)'이라는 사건이 이루어지려는가 보다. 이제야 나의 전성시대가 도래하였는가. 주여! 감사하옵니다.
  나는 그에게 토큰 두 개를 내주었다. 그리고 백 퍼센트 인상된 네 개의 토큰을 내일 이 자리에서 갚으라는 명령도 함께 해 줬다.
  이튿날 두근거리는 가슴을 손바닥 진정제로 쓸어 내리며 그 장소에서 그를 만났다. 한데 그 다음부터가 엉망이 진창된 거야.
  그 전봇대는 토큰 네 개를 꺼내 내게 주며 책을 달랬다. 그것도 숨을 헐떡이며, 시간이 늦었으니 얼른얼른 달라고 재촉까지 하면서 말야.
  그럴 수가 있는 거니? 고맙다는 인사에다 가까운 고려당에서 보리빵이라도 한쪽 사야 되는 거 아니니?

내 속셈은 산산히 부서져 허공 속으로 날아가고 말았지.

그 순간, 화가 머리끝까지 뻗친 나는 젖먹던 힘까지 다 꺼내 공중전화 부스 있는 곳으로 "해법 수학"을 홱 던져 버렸어.
  그러자 길 가던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에게로 모두 쏠리더군.

그 전봇대는 놀란 기린새끼마냥 작은 눈을 동전처럼 동그랗게 만들더니, 더듬더듬 책을 집어들고 어적어적 가버리잖어? 뒤도 안 돌아보고 말야.
  결국 뭇사람들의 시선은 남아 있는 네게로 쏟아지더군.

졸지에 슬프고도 창피스런 스타가 된 셈이지. 단번에 두 마리의 고기를 건지려던 계획은 여지없이 허물어졌지.
  멍충이, 바보 같은 멍충이. 내 진짜 마음도 몰라준 멍충이. 아무리 전봇대처럼 생겼기로서니, 그토록 센스가 발바닥일 수 있는 거니?
  '주여, 어리석고 속알머리 없는 제게 여자다운 마음을 되돌려 주시옵소서. 아멘.'

    

우리 함께 살게 된다면

  연!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당신은 이 세상에서 가장 완전한 자유인은 '거지'라고 늘상 말했지요. 당신 또한 자유인이길 원했지요.
  거지도 거지 나름이겠지만, 인간들이면 누구나 지니려고 발버둥치는 욕망의 부스러기들인
명예, 재산, 체면, 애정...을 팽개쳐 버리고 알몸으로 나설 수 있다면, 그 거지야말로 분명 '자유인'이겠지요.
  자유. 아무 것에도 매이지 않은 자유. 그 '매이지 않는 것'이란 외부가 아니라 우리
내면이겠지요. 푸른 하늘에 떠 있는 흰구름 같은 것. 하지만 '꼭 이 모양을 만들어야지'하는
'아집'이 그 구름에게 있다면, 그 구름은 푸른 하늘이 아니라 도솔천에 떠 있다 한들 자유롭지 못할 터이겠지요.
  아집에서 벗어난 가장 평화로운 상태, 이것이 분명 자유이겠지만, 그 자유는 너무 높게 떠 있어 우리에게는 늘 닿지 않는 곳에 있습니다.
  흰 블라우스에 주름이 갈까봐 신경을 쓰던 여고생 시절, 당신은 나의 그 하찮은 조심을 경멸했지요.
  "블라우스에 주름지는 거, 그게 그렇게 중요해? 중요한 건 눈을 크게 뜨고 하늘을 쳐다봤을 때 그 하늘 위에 있는 거야."
  열 아홉이던 당신은 분명 푸른 하늘을 좇는 높은 의식의 소유자였어요.
  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 동해의 해변에서 밤을 새우던 날 밤. 하늘에서 반짝이던 별은 파도를 따라 모래 위에서 구르고 있었고, 그때 당신은 나지막히 말했지요.
  "바다는 정말 싱싱하구나. 완전한 젊음이야. 어쩜 이토록 완전한 젊음일 수 있을까?

정말 싱그러운데..."
  나는 그때 당신의 그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젊음이라니? 바다가 젊음이라니?
  그날 밤, 우리는 맨발로 바닷가를 걸으며, 모래알 같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파도소리 닮은
노래도 나직히 불렀지요. 밤이 이슥해 내가 추워 바들바들 떨자, 당신은 큰 타올로 내 어깨를 감싸줬죠.
  "사랑해. 넌 말야, 너무너무 순수해. 지금 너를 내것으로 만들고 싶은 욕망이 끓고 있지만,
난 참는 거야. 욕망대로 하고 나면 난 자유로울 수가 없으니까."
  그날 밤, 우리는 자유에 대해서 무지무지 심각하게 얘기했어요. 바다는 정말 자유를 만끽하며 사는구나.

그래, 우리도 그렇게 살고 싶다... 밤새도록 그런 이야기를 주고 받았지요.
  "우리 이담에 함께 살게 되면 말야, 창문 없이 열두 겹 커튼을 치고 살까?"
  "그래요, 정말 멋있겠어요. 창문 없이 열두 겹 커튼을 치고 살아요. 근사할 거예요."

  

우리 이다음에 함께 살게 된다면-.
  그런데 그건 한낱 가정에 불과했지요. 세월이 흐르는 동안 우린 이렇게 서로의 소식조차 모르는 사이가 되었으니까요.
  정말 세월은 묘한 구석이 있어요. 형체도 느낌도 없는데 세상의 모든 것을 바꾸어 놓으니까요.
  연!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내가 당신을 기억하는 것처럼 당신도 분명 날 기억하리라 믿어요.
  창문 없이 열두 겹 커튼을 치고 살고 싶다던 그 말과 함께-.

    

착각은 리허설이 없다는데

  등교길은 항상 즐겁다. 가로수도 싱그럽고 바람도 상쾌하다. 모든 것이 기분 좋고 흥겹다.
  오늘도 나는 시내버스 가운데 자리에 앉아서 영어단어를 머리 속에 담고 있었다.

한데 사실은 단어를 외는 척할 뿐, 내 정신은 엉뚱한 곳에 쏠려 있다. '이제 한 정거장만 더 가면 그녀가 탄다.'
  그녀가 알아보기 쉽게 창가에 앉아서 고개를 쳐들고 바깥을 두리번거렸다. 아니나다를까,
그녀는 힐끔 나를 확인하더니 잽싸게 차에 기어 오른다.
  됐다, 됐어. 모든 일은 순리대로 흐르고 있다. 이제 잠깐 후면 사람들을 비집고 그녀는 내가 앉은 자리로 이 몸을 찾아 달려올 것이다.
  이게 어디 어제 오늘 생긴 일이냐?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자그마치 다섯 달이나 계속되는 행사인데.
  아, 벌써 왔구나! 사람 숲을 헤치고 들어오느라 그녀의 얼굴은 빨갛게 익어 있었다.
 나는 어김 없이 팔을 쭉 뻗어,
   "이리 주십시오."
하고 그녀의 가방을 나꿔챘다.
  그녀는 항상 같은 목소리로,
  "감사합니다."
하고 자기 가방을 내준다.
  시계추처럼 정확히 되풀이되는 하루의 시작이다. 나는 가끔 그녀의 마음을 떠보려고 다른 자리에 앉기도 한다.

그러나 그녀는 그 까만 눈을 두리번거리며 기어이 나를 찾아내고야 만다. 그리고 서슴없이 내 앞으로 달려온다.
  암, 그거야 당연한 얘기지. 진정 신나고 살맛 나는 얘기지. 아무튼 나도 상당히 매력 있는 남자야.

그렇지 않고서야 그녀가 그토록 따를 수는 없지. 이같은 자만심까지 가지며 나는 살맛 나는 시간을 보냈다.
  그렇다. 오늘을 D데이로 정하자. 사내자식이 주는 떡도 못 먹어서야 어디에 쓰겠냐?

오늘 오후에는 기필코 그녀를 추적해 보는 거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하느님도 역시 내 편이구나. 하학길 버스 속에 그녀가 타고 있었으니. 모든 것은 순풍에 돛단배처럼 술술 풀려가는구나.
  나는 잔뜩 신경을 들여 그녀가 내리는 낌새를 엿보았다. 드디어 그녀가 내릴 채비를 한다.
나도 부리나케 따라 내렸다.
  이윽고 사람들이 뜸한 후미진 길목까지 추적하여, 나는 바람처럼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저, 우리 서로 마음을 터놓고 얘기하죠."
  그러자 그 여학생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인 채 말똥말똥 나를 쳐다본다.
  "오해를 하셨나, 착각을 하셨나?"
  "네? 오해했다구요?"
  "난 말이죠, 내가 탄 곳에서 얼마 안 가 댁이 내리기 때문에 그 자릴 차지하려고 항상 댁 앞에 섰을 뿐예요."
  맙소사, 이럴 수가!
  어둠 저쪽으로 걸어가는 그녀를 바라보며, 쓸쓸한 내 어깨를 새삼 추수려 봤다.
  맞아. '허무'란 것이 바로 이런 게야.
  산산히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 중에 흩어진 이름이여!

    

네가 좋아지는 이유

  내게 항상 흰 편지 봉투를 던지던 M.
  난 사실 그한테 아무 관심이 없었다.

없는 정도가 아니라, 송충이가 꾸물거리는 것을 보듯, 먼발치에서도 그가 보이면, 순간 내 몸에는 소름이 쫙 끼쳤어.

어쨌든 반 년 동안 난 그의 얼굴만 생각해도 불쾌하고 견딜 수 없는 혐오감에 빠졌어.
  그런데 요즘 들어 아주 기막힌 변화가 생겼어. 진짜 말도 안 되는... 이건 정말 엄청난 변화야.
  그 M이 우리 반 혜정이 하고 뜨거운 사이가 됐다는 사실. 그 사실을 안 순간부터 내 가슴엔 알 수 없는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한 거야.
  그건 뭘까? 질투? 맞아, 그 질투라는 것이 내 전신에 쫙 퍼지면서 난 M을 좋아하게 된 거야.
  이럴 수가 있을까?

여자의 마음은 정말 알 수가 없어. 이런 것을 두고, 자기가 갖긴 싫어도 남 주긴 아깝다고들 하는가봐. 나도 별수 없는 여자란 말인가?
  한데 어처구니 없게도 난 M한테 배신감을 느끼고 있는 거야.
  배신감이라니? 내가 '양심'이 아니라 '단심'이어도 그렇지, 글쎄 어떻게 M에게 배신감을 느낄 수가 있겠니?
  그런데 배신감에 의한 분노까지 느끼는 내 심보는 어디에서 기인된 걸까?

송충이같이 징그럽게 느껴지던 M이 일편단심 나만을 사랑해 주길 바라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된 건 나야.

 M쪽이 아냐. 그런데, 그런데도 자꾸 분한 마음이 드는 건 왜지?
  글쎄, 혜정이가 노란 바지에 노란 티셔츠를 쪽 빠지게 입고 강가에서 M이랑 찍은 사진을 본 순간,

내 가슴은 방망이질하기 시작했고, 피가 거꾸로 흐르기 시작했어. 그는 이제 송충이가 아니야. 머저리도 아니구. 아주아주 멋있는, 어쩌면 이 세상에서 가장
멋있는 남자일 뿐이야.  정말 어떡하면 좋니? 이 얄궂은 마음을...?

    

엉터리 한국인

  이별이란 대체 뭘까?
  너희들 중에 이별이 뭔지 똑떨어지게 정의 내릴 사람 있니?

'헤어진 다는 것'쯤이야 뻔한 상식이고, 헤어진 그 다음에 오는 쓰리고 아픈 감정이 어떤 맛인지 말해 줄 사람 있느냐구?
  항상 한국사람은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살다가 한국에서 죽어야 한다고 철저하게 '한국인론'을 펴던 네가 캐나다로 이민을 간다구?
  이민, 이민, 역시 새우등 터질 때 김빠지는 소리 같애. 지금 슬프냐구? 웃기지 마라. 내가 슬퍼할 줄 알았다면 그건 엄청 높은 착각이라구.
  "야, 그렇다고 잘 가란 말두 안 하기냐?"
  "내가 잘못 가랜다구 네가 잘못 갈 애니?"
  "너 정말 그러기니?"
  "잘 가구 싶으면 잘 가구, 말구 싶으면 마라."
  "너두 언젠가는 그 높은 코 때문에 피 좀 볼 거다."
  흥, 머저리 같으니라구! 넌 아직도 날 이해 못하고 있어.
  "좋아, 그럼 잘 가. 나 공항엔 안 나간다. 미리 인사할께."
  "난 네가 쪼끔은 서운해 할 줄 알았어."
  "서운하긴 내가 왜 서운하니? 네가 죽으러 가니, 귀양을 가니? 파란 눈 색시 얻어 잘 먹고 잘 살아."
  안녕. 안녕. 안녕...
  그날 따라 겨울 바람이 유난히도 차가웠다. '카사블랑카'에 나오는 연인처럼 멋진 이별을 생각해 보며 가로수 길을 걸었다.
  오버 주머니에 구겨 놓은 손이 오늘따라 유난히 시려 온다.
  "잘 가, 잘 가라구. 엉터리 한국인 같으니라구. 쳇! 내가 슬퍼할 줄 알구? 어림없다. 어림없어."
  한데 약오르게도 나의 두 볼을 타고 반짝이는 물방울이 하나 둘 흘러내리고 있다.
  씨이... 엉터리... 넌 정말 엉터리 한국인이야!

    

그대의 주소는 어디요?

  여덟 시간 노동. 이건 우리 나라 노동법, 아니 국제노동법에 명시되어 있는 노동 제한시간이다. 그런데 난 지금 매우 피곤하다.
  노동법이 정한 범위 내에서 일을 했는데도 말이다. 팔, 다리, 허리...쑤시지 않는 곳이 없다.
  하루 여덟 시간 얌전히 앉아서 시력과 청각을 동원해 알쏭달쏭한 이야기들만 주워 모아 내 위대한 큰골에 전달해야 하는 고충.

내 눈, 귀, 그리고 대뇌는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나의 동료들도 지쳤는지 완전 파김치가 되어 있었다.
  오늘도 아침해는 떴다. 그것처럼 나의 하루 일도 뻔하다. 모든 의무를 정확하게 끝내고 나머지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 무거운 가방을 들고 버스에 올랐다.
  "아, 저건 분명 나를 위해..."
  나는 감격 비슷한 것을 느끼며 빈 자리에 냉큼 앉았다. 행복한 미소가 입가에 채 번지기도 전에 내 앞에는 아기를 업은 아줌마가 다가섰다.
  아 무정한 세상사. 나의 이 잠깐 안식마저 빼앗겨야 하는가? 모른 척하고 눈을 감아 버릴까? 피곤해서 자는 척할까? 그건 너무 비겁한 듯싶었다.

사실 나도 보호받아야 할 만큼 피곤한 몸이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아기를 업은 아줌마에게 그럴 수는 없었다.
  '양심'과 '단심'이 치열하게 투쟁을 벌인 끝에 마침내 양심이 승리했다. 아마 윤리 선생님이 보았다면 회심의 미소를 지었을 것이다.
  "아줌마, 여기 앉으세요."
  "아이, 고마워요. 학생!"
  역시 좋은 일을 하면 즐겁다.
  가방을 들고 일어나 창 밖으로 시선을 돌리는 순간, 내 왼쪽 귓볼 부분에는 묘한 신호가 와 닿았다.
  이건 무슨 낮도깨비 같은 신호인가?
  살며시 고개를 돌려봤다.

그랬더니 바로 내 옆에는 아주 핸섬한 남학생이 서서 나를 보고 있었다.

갑자기 가슴에서 '쾅'하는 소리가 들렸다.
  '물방아 같은 심장의 고동소리를 들어보라.'
  "청춘예찬" 한 구절이 퍼뜩 떠올랐다. 맞았다. 이건 분명 물방아 같은 심장의 고동소리였다.

그 다음부턴 뒤죽박죽이 되었다. 뭐가 뭔지 모르게 뒤엉켜서 돌아갔다.

다만 분명한 것은 내 심장이 물방아의 고동처럼 뛰고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버스 문이 몇번 열렸다 닫혔다 하는 사이에 나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내려야지. 암, 내려야지.'
  난 가방을 들고 단호하게 내렸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건가? 그 남학생이 내 뒤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순간 또 다시 한 번 내 가슴 속에서 '쾅'하는 소리가 들렸다.
  '음... 그래도 역시!'
  이 감동! 윤리 선생님의 말이 맞았다.
  '행운의 신은 도처에 존재합니다.'
  역시 윤리 선생님이 최고였다. 정말 명언이었다.
  난 아주 정숙한 여학생처럼 얌전하게 걸었다. 소영이나 정빈이는 나를 보고 '옥떨메'라고 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의 나를 본다면 그들도 나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가지게 될것이다.
  얌전한 걸음걸이로 한참을 왔다. 그런데 그 남학생은 도대체 어떻게 된 건가?

한참 나의 뒤를 따라왔으면 그 다음 스케줄로 넘어가야 할 것이 아닌가. 한데 도대체 소식이 없다.
  '시간 있으신가요? 잠깐 얘기나 좀 할까요?'
  얼굴을 붉히며 이런 말을 해야 할 순서가 아닌가? 그런데 만약 그 남학생이 내게 그렇게 말한다면 난 어떻게 할까? 단호하게 거절할까?

아니야, 아니야. 이런 기회는 내 일생 단 한번뿐일 수도 있어. 그래서 살짝 미소를 지어 줘야 한다. 한데 그것도 안 될 것 같다.
엄마는 늘 내 웃는 얼굴이 밉다고 했기 때문에. 그럼 후기인상파 모델처럼 고독한 표정을 지어 줄까?
  그런데 그 남학생이 지금껏 따라오기는 오는 거야?
  슬쩍 고개를 돌려 뒤를 봤다. 역시 따라오고 있었다. 그러면 그렇지 꽃을 본 나비가 틀림 없는데 안 따라 올 리가 없지. 새삼 흐뭇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너무 뜸들이지 말고 이 정도에서 말을 걸어와야 하는 거 아닌가?
  우리집 대문은 전방 10미터. 왜 여태껏 말을 안 걸어 오지? 그냥 우리집만 확인하려는 걸까?
  8미터, 6미터, 4미터, 2미터... 드디어 대문 앞에 이르러 벨을 누르며 살짝 뒤를 돌아봤다.
한데 그 남학생은 나에겐 시선조차도 주지 않은 채 앞으로 계속 행진했다.
  어머머! 이상한 사람 아닌가. 이게 어떻게 된 거지? 고개를 빼고 그 남학생 뒤를 좇는
나의 원망스러운 눈길.
  내 시선은 전봇대 밑에 있는 빨간 벽돌담 까만 대문에서 멎고 말았다. 그 남학생이 팔을
들어 벨을 누른 집이 바로 그 벽돌담 집이었기 때문이다.
  아유! 피곤해. 팔, 다리, 머리가 정말 무지하게 쑤셔 왔다.

    

스승을 향한 우리들의 동경

선생님의 아틀리에, 그리고 따끈한 커피

  나이 먹은 선생님이 외출했다.
  그 틈에 선생님처럼 나도 마법을 써보자.
  주문도 몰래 들어 두었으니 문제될 것이 없다. 언제나 선생님에게 혹사당해 왔지만, 지금이야말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
  '비'에 주문을 걸어 강에서 물을 길어 오게 해야겠다.
  '비'는 살짝 일어나 물통을 들고 달려간다.
  '비'는 눈 깜짝할 사이에 물을 길어 와서는 번갯불같이 빠르게 독에 붓는다.
  만세! 꼭 연못 같구나! 대성공...
  서라, 서라, 서라!
  앗, 큰일이다. 어떡하지, 마법을 푸는 주문을 잊었다.
  아무래도 비는 멈추지 않는다.
  나는 발끈해서 도끼로 '비'를 두 동강 내고 말았다. 마침내'비'는 쓰러졌다. 그런데
이번에는 '비'가 두 동강이 된 채 물을 길어 오기 시작했다. 방이고 현관이고, 그 어디에고 물이 넘쳤다. 온갖 수를 다 써봤지만 허탕이었다.
  아아, 어떻게 하나?
  그때 선생님이 돌아왔다. 이런 꼴을 보고 주문을 외웠다.
  '방구석으로,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라'
  겨우 물은 사라지고 나는 안심했다.

  뒤카의 교향시 '마법의 제자'가 울려퍼진다.
  아틀리에는 정말 마법사의 방 같다.

여기저기 널려 있는 화판, 이젤, 석고, 유화 물감이 묻어 있는 헝겊 조각, 와트만지, 붓을 씻는 물통, 갈대, 솔방울, 나무 뿌리, 돌 조각..

주문을 외면 모두 일어나서 저마다의 소리로 합창이라도 불러댈 것 같은 이 요란스러운 방 안. 녹색 커튼이 대자라도 된 듯 이 모든 것을 감싸안고 있다.
  나는 이 방을 좋아한다.

내가 휴식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 이 속에 묻혀 음악을 들으며 선생님과 함께 작품을 제작하는 시간이면 나는 구름을 날으는 선녀가 된다.
  "우리 좀 쉬었다 할까?"
  선생님은 유화 나이프를 던지고 의자에 앉는다.

그의 화판은 암울한 청록색 속에 엷은 보라색이 탈출을 하려는 처녀처럼 율동적으로 부각돼 있다. 나도 붓을 놓고 선생님과 마주 앉았다.
  음악은 계속 흐른다. 제자가 발끈하여 비를 죽이기로 작정하고 도끼질을 하는 장면인가 보다. 금관악기가 절규하듯이 울린다.
  "선생님! 시간은 어떤 걸까요? 시간은 순간일까요, 영원일까요.?"
  "글쎄, 순간과 영원은 같은 개념이 아닐까?"
  "순간과 영원이 어떻게 같아요?"
  "순간은 과거와 미래가 끊겨진 상태겠지. 그렇다면 과거와 미래가 없는데 순간이 있을 수 있나? 그러니 순간은 영원과 같은 거지."
  "그럴까요? 그럼 인간은 순간적으로 존재하지만, 그건 영원과 같은 것이니까 영원히 산다고 할 수 있겠네요."
  "그런데 시간이라는 개념으로 보면 순간과 영원은 동일한 것이겠지만, 인생이라는 하나의 물질을 그 속에 던지고 보면 그 의미가 확실히 달라지지."
  "어떻게요?"
  "인간은 참 다양해. 개인으로 봐도 우주를 느낄 수 있고, 전체로 봐도 우주를 느낄 수 있거든.

그런데 인간은 우주를 포함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표현시키는 것은 한 움큼의 흙으로밖에 못 나타내고 있거든."
  "한 움큼의 흙이요?"
  "그래, 사실은 영원을 살 수 있는 우주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실제로 경험해 사는 것은 한
움큼의 흙일 뿐이야."
  "그것은 죽음이군요?"
  "그렇지, 죽음이지. 한 움큼 흙으로 남는 죽음. 그런데 소수의 사람은, 아주 소수이긴 하지만 영원히 사는 사람도 있지.

그것은 자기 내면에 있는 우주를 완전히 깨달은 사람이지."
  "자기 내면에 있는 우주를 깨달은 사람...? 그 사람은 이를테면 가장 완벽하게 사는 사람이겠네요."
  "그렇지, 완전하게 사는 사람이지. 완전하게 사는 사람 하고, 열심히 사는 사람 하고는 같은 것 같으면서도 사실은 차이가 있어.

완전한 사람은 그야말로 우주를 표현시킨 거야. 우주의 비밀을 알았기 때문에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 거지.

그러나 열심히 사는 사람의 경우에는 우주의 비밀을 착각하고 있는 사람도 많다는 거지. 잘 못 알고 있는 거야.
아무리 열심히 살아보지만 그 삶은 한 움큼의 흙이 될 수밖에 없는 거지."
  "알 것 같아요. 그러나 우주를 표현시키고 사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성인들밖에 더 있겠어요?"
  "그 분들도 물론 그렇게 살아 온 사람들이지. 그렇지만 아주 소수의 사람도 그렇게 살고 있어. 아무도 몰라 주는 사람이긴 해도."
  "글쎄요. 그런 사람들도 있어야겠죠? 틀림없이 있을 거예요."
  "우리 재미 있는 이야기를 하지?"
  "네. 너무 추상적인 이야기를 한 것 같아요. 그렇지만 가끔은 그런 이야기도 나누고 싶어요. 선생님 하고는요."
  "하하...나 하고는? 내가 뭐 추상적인 사람인가?"
  "네 추상적인 사람이에요. 다른 사람 하고는 다르니까요."
  "하하하..."
  선생님의 유쾌한 웃음소리가 물결처럼 퍼진다.
  여기저기 널려 있던 온갖 물상들은 물결을 받아 반짝이기 시작한다. 주전자 위에 하얀 김이 폭폭 솟아오른다.

나는 커피 두 잔을 타서 책상 위에 놓았다. 냄새가 향기롭다.
커피잔을 입술에 대는 순간, 커피는 뜨겁고, 향기롭게 내 몸 속으로 스며든다.
  T선생님의 아틀리에. 그림이 있고, 음악이 있고, 커피가 있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선생님과의 대화가 있는 이 아틀리에.
  이곳은 항상 나에게 짙은 향기를 느끼게 해준다. 지금 이 시간도 영원이 아닐까?

나는 지금 이 순간을 가장 순수하게 가장 완벽하게 느끼고 있으니까.

    

선생님, 주민등록번호는요?

  "졸다 보니 1년, 자다 보니 1년, 깨다 보니 1년."
  졸업을 앞둔 어느 선배의 말이다.
  땡땡이도 치고 농땡이도 치다 보니, 세월은 정말 빠르게 굴러가, 나 역시 고등학교 3학년을 코앞에 맞게 됐다.
  3교시는 수학 시간.
  전에 가르치던 수학 선생님은 가정사정으로 학교를 떠나고, 그 후임으로 온 수학 선생님.
여고생들에게 가장 흥미 있고 즐거운 것은 새로 오는 선생님이 총각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이다. 그것만이 최대의 관심거리다.
  항상 찬바람이 쌩쌩 불던 유부녀 선생님이 물러가고, '대망의 총각 선생'이 온다니 우리 예비숙녀들은 아침부터 기대에 부풀어 가슴이 두근거릴 수밖에.
  드디어 수학 시간. 교실문을 열고 들어온 담임 선생님의 옆에는 새로 온 수학 선생님이 서 있다.
  "여러분, 새로 오신 수학 선생님을 소개하겠습니다.

성함은 박금동. H대학교에서 4년간 줄곧 장학금을 받고 공부하신 수재이십니다.

이렇게 훌륭하신 선생님을 모시고 공부할 수 있게 된 여러분은 정말 행운입니다.

앞으로 더 열심히 수업에 임하도록 하세요."
 소개를 끝내고 담임 선생님은 퇴장한다.

얼굴이 불그레해진 수학 선생님.
  "방금 소개받은 박금동입니다. 여러분들과 유익한 수업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어째 첫말이 선거공약 비슷했다. 방금 금동이랬니, 은동이랬니? 어머, 혹시 '전원일기'의 금동이 아니니? 별 이유도 없이 졸지에 터져버린 웃음들.
  그렇잖아도 수줍은 듯한 수학 선생님은 무엇부터 어찌할 줄 몰라 안절부절이었다.
  "선생님, 고향은요?"
  "경상남도 함안입니다."
  "선생님, 취미는요?"
  "취미요? 수학문제 푸는 겁니다."
  맙소사. 별난 취미도 다 있네. 등산, 낚시, 여행, 독서, 음악감상 같은 정서적인 항목은 많이 들었지만, 수학문제 푸는 것이 취미라는 사람은 처음이다.
  "선생님, 첫사랑 경험 있으세요?"
  "그런 건 없습니다."
  다섯 살 된 유치원생도 자기 짝꿍이 싫고 좋고를 가리는 터에, 그런 건 없다고 딱 잡아떼는 저 내숭을 어찌할꼬.
  "선생님, 주민등록번호가 어떻게 되는데요?"
  "내 주민등록번호요? 에, 650309__118226xx."
  선생님은 수학문제를 풀듯이 줄줄 숫자를 써내려갔다.
  어머, 너무 순진하다. 첫자리가 저 정도면 우리 하고도 어울릴 수 있겠네, 뭐.
  "선생님, 유치원은 실업계였나요, 인문계였나요?"
  "난 유치원 같은 덴 안 다녔습니다."
  "네에? 선생님 집안사정이 매우 어려우셨나봐요?"
  순간, '와아'하며 책상을 두드리고, 허리를 앞뒤로 흔들며 웃어대는 버르장머리 없는 계집애들.
  우리 수학 선생님 정신 없겠구나. 첫시간부터 넋을 완전히 잃은 상태구나.
  하기 싫은 공부. 얼렁뚱땅 한 시간 때우는 거지. '호호호', '까르르' 하다 보니 '따르릉' 하고 끝나는 벨 소리.
  "선생님! 너무 노여워하지 마세요. 저희들이 이렇게 버릇없이 구는 이유는 오직 선생님이 총각이기 때문이에요. 다음시간까지 안녕!"

    

무지개에 걸린 우리들의 풍선

  "난 있잖아, 그 선생님만 보면 슈베르트가 생각나 미치겠어. 달콤하고 아름다운 슈베르트의
피아노 선율처럼..."
  "얘얘, 분위기 띄우지 마. 가슴 터질라 한다."
  여름날 개구장이 먹구름 아래로 후두둑 떨어지는 굵은 소나기 방울에 연약한 꽃잎들이 무자비하게 시달리는 교정.
  알몸인 채 비를 흠뻑 맞은 빨간 장미를 바라보며 나는 그 선생님을 생각한다. 금방이라도 내 콧속으로 한 무더기 눅눅한 꽃향기를 흩뿌려 줄 것 같은 교정의 오후.
  지금 내 마음에는 6월의 장미처럼, 아무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은 싱그러운 향기가 있다.
  우리 학교에 새로 부임해 온 국어 선생님. 오자마자 우리들을 신비로운 환상의 세계로 몰고 간 국어 선생님.
  UPI나 AP통신, CNN보다 더 빨리 우리들에게 전해지는 그 국어 선생님에 대한 정보들...
  바로 그 국어 선생님의 첫 수업이 오늘 4교시다. 그 때문에 난 어젯밤을 하얗게 새워 버렸다.
  난 정말 한잠도 이루지 못했다. 왜 나는 그 국어 선생님의 첫 수업을 이토록 기다리는 걸까? 무엇이 날 이렇게 가슴 두근거리게 만드는 것일까?
  AP통신에 따르면, 그 국어 선생님은 장미꽃을 무척 좋아한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오늘따라 장미보다 더 예쁘고 아름다운 여자였으면 하고 바라는 것이다. 물론 그 국어 선생님을 위해서이다.
  3교시는 체육시간. 뛰고 딩굴었더니 배가 고프다. 규칙위반이지만, 도시락을 앞당겨 먹어치웠다.
  "야, 니네집 간장공장 하냐? 왜 이리 쨔냐?"
  영자가 정인이의 두부졸임을 얻어 먹으며 한마디 한다. 사실 우리 또래에게 있어서 먹는 일보다 더 즐겁고 신나는 일은 없다.
  짧은 휴식시간이 지나고, 드디어 운명의 시간, 4교시 국어시간이 돌아왔다. 문이 열리고,
반짝거리는 우리들의 시선 속으로 빨리듯 들어오는 국어 선생님의 환한 모습. 경탄과
설레임의 함성이 우리 모두의 가슴 속에서 물결치는 순간이다.
  하지만, 그같은 우리들의 마음과 그 국어 선생님의 마음은 전혀 핀트가 틀려 이었다.
'감정의 일치'라는 것은 결코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 가보다.
  갑자기 그 국어 선생님의 반듯한 이마에 주름살 세 개가 확 지나가더니, 코를 킁킁 벌름거리며 하는 말.
  "쉬는 시간에 도시락 먹은 사람 모두 일어서요!"
  세상에 이럴 수가? 그 순간 온몸에서 온힘이 쑥 빠져나갔다. 찔금찔금 울어볼까?

아냐, 그건 오히려 역효과일 수 있어. 여자의 눈물은 결코 무기가 될 수 없어.
  어쨌든 열두 명의 허기진 중생들은 빈 도시락을 들고 운동장으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이열 횡대로 서!"
  국어 선생님의 성난 구령 소리.
  비참하고 비참했다. 어젯밤을 하얗게 새우며 장미보다 더 예쁜 여자가 되어야 한다고 맹세하던 내가 지금 이 무슨 꼴인가.
  "도시락 뚜껑을 열어 양손에 하나씩 들고 팔을 위로 번쩍 쳐들어요."
  정인이의 도시락에 붙어 있던 밥알 하나가 똑 떨어지며 정인이의 머리 위에, 그것도
오늘을 위해서 고급 샴푸로 감았을 머리 위에 붙는다. 이 극한상황 속에서도 킥킥 웃음을 참지 못하는 나.
  곧이어 시작되는 국어 선생님의 설교.
  우리가 뭐 자기를 무시했다나? 도시락을 먹은 건 새로 온 선생님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나, 어쨌다나.
  점점 팔은 저려오고, 수치심과 낭패감으로 온몸은 배배 꼬여졌다.
  "우측 다섯번째 학생, 손 더 높이 들어!"
  화들짝 놀라 손을 높이 드는 나를 보고 정인이가 '걀걀걀' 목구멍 웃음을 참느라 가는 허리를 비비 튼다.
  "얘, 무슨 소리가 그러냐? 달걀귀신이 달 보고 하품하는 것 같다, 얘"   또 다시 걀걀걀...
  벌받는 우리들의 마음은 서켠 무지개 위에 걸린 풍선처럼 자꾸 둥둥 떠오르기만 했다.

    

선생님은 아는가, 나의 마음을

  우리 학교에서 가장 인기 있는 선생님은 영어 선생님이다. 그는 내 가슴을 온통 사로잡고
있다. 총각이고, 핸섬하고, 피아노, 성악, 스포츠에 만능인 영어 선생님.
  계집애들이 앙큼스러워 겉으로는 내색을 않지만,

마음 속으로 영어 선생님을 사모하지 않는 애가 있다면 그 애는 우리 학교 뱃지를 단 가짜 학생이라고 단정해도 좋다.

반마다 영어시간만, 닥치면, 거울 앞에 겹겹이 모여 서서 머리를 빗고, 핀을 고쳐 꽂고, 얼굴에 로션찍어 바르고... 그야말로 난리가 난다.
  그런데 그 멋진 영어 선생님이 내 가슴 속에도 돌부처처럼 버티고 앉아서 도무지 물러가지 않는다.

24시간 중 잠자는 시간만 빼놓고, 아니 잠자는 시간에도 내 머리는 그 영어 선생님 생각으로 꽉 차 있다.
  버스 안에서도, 길을 걸으면서도, 수업을 받으면서도, 심지어는 밥을 먹으면서도 내 가슴 속엔 그 선생님 얼굴이 가득 담겨 있다.

이른바 '상사병'이란 바로 이런 것인가 보다.   솜사탕처럼 달콤하고, 가을 낙엽처럼 쓸쓸하고...
  칠판에다 영문으로 된 하이네, 키츠, 릴케의 시를 쓰고는,

정확한 발음으로 그것을 읽어 내려가는 영어 선생님! 우수에 찬 시선을 창 밖으로 던진 채 한 구절 한 절씩 해석할 때면, 우리는 모두 숨마저 멈추고서 심취해 버린다.
  수업 중 어쩌다 한 학생에게로만 시선이 가거나, 두 번 계속 읽기나 해석을 시켜도,
  "얘얘, 영어 선생님이 OO을 좋아하시나봐."
  "그래, 걔만 쳐다보시지?"
  "야, 누구는 좋컸다. 그 영광 길이길이 누려라."
하고 쫑알대기가 십상이다.
  아무튼 아이들은 영어 선생님에게 조금이라도 잘 보이려고 심리에서 예습, 복습도 극성스럽게 해온다.

그런데 오십 분 수업 동안 한 번도 선택되지 않으면... 그땐 정말 죽고 싶은 심정이다. 허무하고, 보람없고, 의미없고...
  오늘은 아침부터 비가 내린다. 우울한 잿빛 하늘을 바라보노라니 왠지 울고 싶어진다.
  나는 가끔 내 마음을 '자연'으로 비유해 본다.

꽃, 구름, 미풍, 보슬비, 태풍, 소나기, 먹구름, 강물, 돌, 바다... 이런 모든 것이 내 마음속에 들어 있어 순간순간 그것들의 속성과 서로 감응하게 된다고 여겨진다.
  유난히 센티한 오늘, 행복하게도 4교시가 영어 시간이다. 예외없이 영어 선생님은 나를 사로잡았고, 나는 선생님을 쳐다보면서 엉뚱한 공상의 나라로 여행을 떠났다.
  공상의 나라. 무엇이든 가능한 공상의 나라. 피노키오도, 신데렐라도, 백설공주도, 선녀도 될 수 있는 공상의 나라.
  보슬비가 내린다.
  온몸이 축축히 젖었지만 기분은 상쾌하다.
  끝없이 펼쳐진 논.
  벼이삭들은 싱그러운 초록빛으로 자라고 있고, 옆으로는 둑길이 뻗어 있다.
  둑 밑엔 냇물도 흐른다.
  나는 버드나무가 서 있는 둑길을 천천히 걷고 있다.
  물고기가 가끔 비늘을 반짝이며 헤엄치고 논다.
  나와 같이 걷고 있는 영어 선생님.
  선생님은 솔베이지의 노래를 부르고, 나도 따라 부른다.
  호흡마저도 하나가 된 듯한 순간.
  나는 선생님을 쳐다본다. 선생님도 나를 보신다.
  내 전신이 선생님 시선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그 순간, 선생님은 어쩌면 내 두 손을 꼭 잡아 주실지도 모른다.
  "따르릉."
  울리는 벨소리.
  "차렷, 경례!"
하는 반장의 구령에 따라 인사를 하려는 순간이다. 선생님의 시선이 분명 내 얼굴 위에 와 닿았다. 그것도 아주 부드럽게 말이다.
  "선생님은 내 마음을 알고 계신 걸까?"
  얼굴이 활활 달아오른다. 부끄럽다. 가슴도 뛴다.
  착각이면 어떠냐, 내 마음이 지금 이렇게 행복하면 그만이지.

    

선생님, 쇼크 먹었어요.

  "아아, 오늘은 이 영옥이가 여러분에게 빅 뉴스를 한 가지 전하겠습니다."
  "얘, 본론부터 말해."
  "뜸 너무 들인 밤, 맛있는 법 없어."
  여기저기서 쏘아대는 독초의 소리들.
  "본인도 빨리빨리 말하고 싶지만, 여러분들 가슴에 피멍이 들까봐 이렇게 망설이는 겁니다."
  "어유, 저 계집애, 완전 신파하네. 가슴이 피멍이 들어도 좋으니, 어서 뱉기나 해, 이 계집애야!"
  "너희들 정말 각오 단단히 해. 자, 그럼 말하겠다."
  "아유, 아유, 고만 좀 뜸 들여라. 할 말 없으면 내려와."
  "우리의 호프 영어 선생님이 드디어 결혼을 한답니다."
  "어머, 어머! 그게 정말이니?"
  "어떻습니까? 지금 그대들의 가슴은 까맣게 멍들어가기 시작하지요?"
  '호호', '깔깔' 예서 제서 웃음이 터지고 있었지만, 그 웃음은 진짜 웃음이 아니라 매우 공허한 웃음들이었다.
  "상대는 누구래니?"
  "너였으면 오죽 좋겠냐? 한데 유감스럽게도 혜영이 언니가 그 행운의 주인공이랜다."
  "뭐라구? 혜영이 언니라고! 어머! 이게 왠 난리니?"
  탄성, 질투, 실망... 얼키고 설킨 복잡미묘한 감정들이 레이저 조명처럼 어지럽게 흔들린다.
  영어 선생님은 우리 학교에서 가장 인기 있는 총각 선생님이다. 항상 미소 띤 얼굴에 허밍 코러스를 즐겨 부르는 선생님,

오페라를 하고 싶었는데 전공이 바뀌었다며, 항상 음악에 대한 향수를 버리지 못하던 선생님.

언제나 따뜻한 말로 우리들의 가슴을 잔잔하게 어루만져 주던 선생님. 그는 감정의 굴레에 빠져 허우적대는 우리를 항상 구원해 주던 고고한 남자 천사였는데.
  어떤 때는 한 마리의 학처럼 순결하라고 권유했고, 어떤 때는 비둘기처럼 따뜻하게 이웃을 보듬으라고 하던 선생님이다.
  그 선생님이 결혼을 한다니, 왠지 안 된다는 강한 반발 같은 것이 생긴다.
  점심 시간은 온통 영어 선생님에 대한 얘기로 메꿔졌다. 여학교에서의 뉴스는 바람 탄 불길보다 더 빨리 퍼지는 법이다. 삽시간에 온 학교가 떠들썩해졌다.
  5교시는 영어 시간. 영어 선생님은 아무 표정의 변화도 없이 교과서를 들고 입실했다.
교실 안은 웅성웅성, 와글와글.
  "모두들 조용히 해요. 수업 준비가 왜 이 모양이죠? 교과서도 펴놓지 않고..."
  이때 뉴스를 물고 온 영옥이가 발딱 일어선다.
  "선생님, 우선 축하드립니다."
  "혜영이 언니, 예쁘지요?"
  "누가 먼저 프로포즈했나요?"
  "결혼식은 언제예요?"
  "어디에서 하실 거예요?"
  쏟아지는 질문 공세는 소낙비처럼 줄기찼다. 잠시 어리벙벙해 하던 영어 선생님. 그의 표정과 감정은 졸지에 노여움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수업시간에 쓸데 없는 질문을 하는 너희들, 모두 한방씩 맞아야겠어."
  앞줄부터 손바닥 위에 '딱딱' 떨어지는 회초리의 매운 소리가 오랫동안 교실 안을 맴돈다.
  이상하다. 결혼을 하면 기분이 좋을 텐데 왜 이렇게 화를 내는 걸까?
  이튿날 등교했을 때, 칠판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씌어 있었다.

  "공고"
  영어 선생님 결혼설은 완전 루머였음.
  '정확한 소식통'백

 그러면 그렇지! 내 가슴 속에서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밤을 사랑하는 나

  달빛을 따라 달빛을 따라
  고요히 표백하는
  나의 꿈
  마른 꽃잎의 외로움이
  향그럽습니다.

  올페우스의
  수금에서 흘러나오는 달빛이
  나의 거울 속에
  한 소절씩 쌓여서 빛나는 때

  빛의 새들은
  일제히 거울 속을 날고
  먼 풀밭에 내리는 순간
  어린 새들은
  그만 어둠이 되고 맙니다.
  사방에서
  유리의 풀잎들이 희디희게 자라서

  잎새마다 뾰족한 밤을 머금어도
  당신의 유리잔
  그 작은 공허 속에는
  투명한 목마름이 그냥 남아 있습니다.

  밤은 모든 물상을 가슴에 품고 있습니다.
  오로지 밤이라는 검은 빛깔로
  하기 때문에 밤에는 나를 내세울 필요가 없습니다.
  바보스러워도 조금은 이상한 눈으로 봐주는 사람이 없고,

 못나도 못난이라고 괴롭히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밤은 약한 자의 최대의 휴식입니다.

 

 언젠가 달동네 언덕길을 올라갈 때였습니다. 낮에는 그토록 지저분한 판자집들이 다닥다닥
붙은 초라한 구릉이었는데 밤에는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강물이었습니다. 물론 강물이 흐를
리야 없지만, 저는 그 구릉에서 아름답게 흐르는 강물을 보았습니다.

  이것이 밤의 신비입니다.
  햇빛은 너무 잔인해 아무것도 숨길 수 없지요.
  알몸을, 부끄러운 알몸을 그대로 드러내야 하는 고통이 있습니다.
  하지만 밤은 약한 자의 모든 것을 포용해 줍니다.
  저는 밤에 모든 생명의 가장 순수한 소리를 듣습니다.

  물, 바람, 꽃잎, 풀, 강물, 어쩌면 달콤한 공기의 흐름에서까지도 저는 그들만의 가장 순수하고 진실한 지저귐을 들을 수 있습니다.

낮에는 사람들이 너무 시끄럽게 떠들어대니까, 사람들에 의하여 만들어진 모든 것이 너무 염치 없이 시끄럽게 구니까, 이런 물상의 소리를 들을 수가 없지요.

그러나 밤이 되면 인간은 잠이 드니까 그때는 가장 아름다운 만상의 소리가 곳곳에서 감미롭게 속삭이고, 또한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거지요.
  만약 밤에도 인간이 잠들지 않고, 그대로 이 지상을 지배한다면, 아휴, 그건 정말 너무 끔찍한 비극입니다.
  저는 언제부터인가 밤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밤이 되면 저는 도깨비에 홀린 사람처럼 열심히 열심히 나무를 깎고, 흙을 빚고, 책을 읽고, 글을 씁니다.
  저를 에워싸고 있는 작은 공간. 온통 어둠뿐인데, 이 어둠은 눈을 뜨고 두리번거리지 않기 때문에 저에게도 관심을 가져 주지 않습니다.

하기에 저는 해방된 자유를 누리고 불이 밝혀진 작은 공간에서 미친 듯이 내 작업을 즐기고 있습니다.
 

밤. 어둠 속에서만 나는 진정한 휴식을 얻고,

그리고 창조의 즐거움과 내가 성장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건 어쩜 낮이 무서워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의기양양한 돼지들, 오로지 먹을 궁리만 하는 그 탐욕스런 눈빛들,

그들이 꾸며놓은 추악한 사건들...
  싫습니다. 이런 것은 정녕 내가 갖고 싶은 것들이 아닙니다.

나는 밤으로 도망해야 합니다.
밤은 나 혼자이니까요.

나래를 펴고 날아다니는 반짝이는 내 의식을 볼 수 있으니까요.
  밤을 사랑하는 나. 나는 가장 약한 바보인지도 모르지요.

    

 

선생님, 한번만 더 윙크를

  주름이 지고, 툭 튀어나온 눈.
  나는 한창 열강하는 국어 선생님의 눈길을 요리조리 피해가며 드디어 한쪽 눈을 완성시켰다. 아무리 봐도 꼭 닮은 그 눈을 앞으로 슬쩍 밀었다.
  "어떠냐?"
  "기막히다. 영락없는 두꺼비야!"
  "두꺼비가 웃고 있는 것 같지 않니?"
  "호호호... 그러고 보니 정말 두꺼비가 웃고 있는 것 같애."
  "오늘은 비가 많이 왔나봐. 두꺼비가 웃는 걸 보니!"
  "호호호..."
  '호호호'만 빼놓고 우리는 종이에다 글을 써가며 이야기했다.
  "얘, 그러지 말고 한쪽 눈은 윙크를 하게 그려. 네게 윙크하게 말이야."
  "알았어."
  나는 자신있게 대답했다. 두꺼비 국어 선생님의 윙크하는 한쪽 눈을 완성시키기 위하여
'레디 고' 사인을 받았다.
  그런데, 아무리 그려봐도 국어 선생님의 한쪽 눈은 나를 보고 윙크를 하지 않았다.
아까처럼 싱글벙글 웃는 눈은 되는데, 그 놈의 윙크는 죽어라 하고 안 되는 것이었다. 나는
이리저리 궁리를 해가며 그렸지만 그것만은, 그 윙크만은 정말 안 되는 것이었다.
  나는 깨끗한 종이를 한 장 다시 꺼냈다. 그리고는 얼굴을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
  이마 위의 굵은 주름, 눈가의 잔주름... 모두모두 제 모습을 찾아갔다.

한데 눈만은 영 내 뜻을 따라주지 않는다. 한숨만 푹 쏟아져 나왔다. 옆 짝궁이 킬킬거린다.
  "아직도 윙크를 안 하니?"
  "응, 그것만은 죽어도 안 하는데?"
  "그럼, 네가 두꺼비 얼굴을 들여다보며 자꾸 윙크를 해봐. 그러면 아마 두꺼비도 너에게 답례를 할 거야."
  "아, 그렇겠구나. 그런데 아직 두꺼비는 눈 하나밖에 없잖아."
  "얘, 적당히 한 눈 마저 그려. 그리고 자꾸 윙크를 해봐."
  "호호호... 킬킬킬."
  우리의 웃음소리가 너무 컸나? 나는 짝꿍하고 열심히 지껄여댄 종이를 밀어놓고,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담징의 생각이 떠올랐다. 금당벽화를 그리던 담징의 그 기막힌 괴로움을 생각한 거다.
  아무리 그려봐도 담징이 그리는 관세음보살은 속세의 여자 모습이었다.

담징은 몇 날 며칠을 기도 드린 후, 죽음을 각오하고 다시 관세음보살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때는 이미 마음의 번뇌가 사라진 순간이었다. 한 가지 생각으로 얼굴에 한 점을 찍었을 때, 기막히게도 관세음보살이 완성된 것이다.
  그때 주위에 모여 있던 사미승들이 모두 엎드려 절을 했다. 관세음보살을 부르면서,
  이렇게 해서 일본의 금당벽화는 완성된 거다. 그것은 지극히 높은 종교의 경지였다.
  나는 지금 두꺼비 국어 선생님의 얼굴을 그리고 있다. 그것도 다분히 장난기에 젖어서
말이다. 그러니 담징처럼 기도를 드리다가는 오히려 부처님께 벌을 받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할까?

그런데 내 짝궁 계집애는 하필이면 왜 윙크를 하라는 거야! 윙크라는 걸 아무한테나 하는 건가?

그거야말로 때와 장소를 가려서 하는 거 아닌가? 그런데 지금 같은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제자에게 윙크를 할 수 있겠니?

 할 수 없는 걸 시키면 안 되는 거다. 문제는 바로 그거였다.
  "너, 아직도 못 그렸니?"
  내 짝꿍은 이렇게 써서 슬그머니 내 앞으로 밀어 보인다.
  "응 절대로 윙크만은 안 하시겠대."
  "그럼, 글로 써놔. '선생님, 제게 윙크를'하고 말야."
  그러면서 또 킬킬거렸다. 그런데 소리가 너무 컸다. 두꺼비 선생님이 우리 쪽을 노려보더니 슬금슬금 다가왔다.
  '아, 이젠 들켰구나.'
  나는 정말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이게 뭐야?"
  내가 고심한 스케치를 홱 나꿔챈 두꺼비 선생님.
  "이게...?"
  비록 한쪽 눈만이었지만, 그것은 틀림없는 두꺼비 선생님의 모습이었다.
  "임마, 내 얼굴을 그리려면 두 눈을 다 그려야지. 내가 애꾸냐?"
  나는 얼굴을 책상에 파묻은 채 어쩔 줄을 모르고 있는데, 내 짝꿍 계집에가 한다는 소리.
  "얘가요, 선생님이 윙크를 안 해서 한쪽 눈을 마저 그리지 못하고 있어요."
  "뭐를 안 해? 윙크를?"
  "네, 한쪽 눈은 윙크를 하게 그릴려고 했거든요."
  그러자, 아이들은 발을 구르며 웃어댔다.
  "선생님, 영미한테 윙크 한번 꼭 해 주세요, 네? 그래야 선생님의 초상화가 완성되거든요."
  "어떻게? 이렇게?"
  그 순간, 선생님은 두꺼비처럼 툭 튀어나온 눈으로 윙크를 하시는 거였다. 나를 보고
말이다. 교실이 요절 나는 줄 알았다. 일생에 그처럼 배꼽 잡고 실컷 웃어본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할 정도로.
  "됐지? 윙크하는 눈 마저 그려 가지고 교무실로 갖고 와!"
  싱글벙글 웃으며 교단으로 돌아간 두꺼비 선생님. 그런데 문제는 남아 있었다. 분명히 내게
선생님은 초상화 완성을 주문했는데, 나는 아까 정신이 없어서 선생님의 윙크를 제대로
봐두질 못했던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그린다냐? 아, 고민에 고민이 겹치고 겹쳤다.
  나는 속으로 또 이렇게 종알거렸다.
  "선생님, 제게 윙크를 한 번만 더, 정말 한 번만 더 해주세요!"

    

음악시간을 청구합니다.

  "얘들아! 음악 선생님이 새로 오셨대."
  "오셨겠지. 음악 선생님이 나가셨으니까."
  "너 어째 대답이 그 모양이냐? 오신 게 문제가 아니라, 너무 멋있는 총각 선생님이 오셨다는 데 뉴스의 무게가 있다구!"
  "그러니? 지난번 선생님보다 더 멋있다니?"
  "실례지만 그 선생님 하고는 댈 것도 아니래."
  "그렇겠구나! 우선 유부남하고 총각 차인데, 안 그러냐?"
  "호호호... 웃기지 마. 총각이라고 해서 네 차례 가는 건 아니니까."
  "무례들 하구나! 선생님을 놓고..."
  음악 선생님은 태풍을 몰고 온 사나이처럼 삽시간에 우리 여학생들을 압도했다.
  전통 있는 여학교여서 교무실에는 은발의 노신사 선생들이 많고,

거기에다 처녀도 아닌 유부녀 선생들이 선배라는 명목으로 온 학교를 주름잡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런지도 모른다.
  이 재미없는 무풍지대에 홀연히 나타난 총각 선생님. 이쯤 돼면 우리 마음 알 만할 것이다.
우리들의 가슴은 점점 타기 시작했다. 시간이 빨리빨리 지나가서, 얼른얼른 금요일이 돌아오기를 학수고대했다.
  음악 수업을 해본 반에서는 음악 선생님에 대한뉴스가 연일 쏟아져 나왔다. 그건 너무너무 달콤한 것들이었다.
  음악 선생님은 음대 성악과를 금년에 졸업한 싱싱냉장고.

그래서 우리와 격의없이 어울릴 수 있는 터울이라는 데 매력이 더 있었다. 거기다가 얼마 안 있어 독일 유학을 떠난다는 거다.

이같이 간단한 신상에서 우리들은 이미 그에게 넋을 빼앗겼다.
  아무튼 음악 수업을 받은 다른 반 아이들의 감탄에 자지러진 우리들은 '시간이여 어서
가라. 금요일이여 어서 오라.'하며 며칠을 보냈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만남의 날, 금요일이 돌아왔다. 그런데 음악 시간은 7교시였다.
영어, 수학, 화학, 국어, 문법... 은발의 신사와 아줌마 선생님들이 즐비하게 들락거리며 하는 수업은 모두 끝났다. 그리고 일곱째 시간만 남아 있었다.
  '따르릉--, 따르릉--, 따르릉--.'
  시험 때 같으면 가슴이 철렁철렁 내려앉던 그 벨 수리가 오늘따라 그토록 반가울 수가 없었다.
  우리는 부리나케 음악실로 달려갔다. 물론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너도나도 음악 책을 들었다.

이런 일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현상이다. 음악 책이 다 뭔가?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땡땡이 치는 시간이 바로 음악 시간이 아니었던가.
  음악 선생님은 피아노 앞에 앉아서 가늘고 하얀 손으로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곱슬곱슬한 머리가 반듯한 이마 위에서 물결치고,

깊은 시선은 마치 호수처럼 그윽해 보였다.
  수업은 시작됐다. 그때 한 아이가 선생님에게 노래 한 곡을 들려 달라고 청을 했다. 우리는 모두 박수를 치며 찬성의 함성을 질렀다.
  선생님은 서슴없이 '물망초'를 불러다. 독일어로 말이다. 그건 천상에서 들려 오는 소리 같았다.

우리는 숨쉬는 것조차 자제했다. 그 순간 자기 감정을 참지 못한 윤희가 꽥 소리쳤다.
  "아아! 선생님, 너무 멋져요!"
  음악실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모두 '와'하고 웃었지만, 윤희는 바로 우리의 마음을 대변해 줬던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있는 음악 선생님. 그의 앞날에 수난은 없을까?
  하지만 너무 염려할 건 못 된다. 다소 짓궂긴 하지만, 우리들도 알고 보면 순진하고 착한 학생일 뿐이다.
  하온데, 우리가 지금 간절히 바라는 것은 우리에게 음악 시간을 일주일에 일곱 시간만 주십사 하는 것이다.

    

고개를 들어요, 그리고 날 봐요.

  늦가을이었다.
  교실 창으로 보이는 하늘은 너무나 맑고 푸르렀다. 저 푸른 하늘 위에서 지금도 대붕이
구만리 장천을 날고 있을까? 그 새는 어찌하여 그토록 푸른 하늘 위로만 날고 있을까?
천년을 하늘에서 날다 보면 날개도 부리도 푸른 하늘이 되었겠지?
  나도 그렇게 날고 싶었다. 저 푸른 하늘 속에 온몸을 잠그고 끝없이 날고 싶었다. 대붕은
못 된다 해도 한 마리의 학이라도 된다면, 구만리 장천은 아니라도 저 푸른 하늘
가장자리에 두 날개만이라도 살포시 담글 수 있을 텐데.

  나는 바라던 한 마리의 학이 되었다. 나는 날개를 저어 교실 창을 빠져나와, 학교 건물
위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언덕을 넘어 멀리멀리 날아올라 구름 속으로 잠겼다. 흰구름은
목화꽃처럼 내 날개 위에서 피어났고, 나는 다시 높이높이 날아올라 하늘가에 이르렀다.
  하늘은 푸른 강물이었다. 바람도 물결도 없는 강물은 눈이 시리도록 푸르렀다. 청정한
부드러움에 나래를 접고, 나는 비로소 편안한 휴식에 잠겼다.
  춘향전을 설명하는 '깜쁘씨' 깜찍하고 예쁜 여자 얼굴을 닮은 국어 선생님을 우리는 그렇게
불렀다. 한데 그의 목소리가 꿈결처럼 들려 왔다.
  이 도령이 월매집에 거지꼴을 하고 나타났다가 월매로부터 온갖 구박을 받으며 풋고추
저리김치에 찬밥 한 덩이를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얻어먹고 있는 장면이었다.
  깜쁘씨의 위트 있는 설명을 들으며, 우리들은 깔깔댔다. 나는 시집 속에 잠재워 둔 꽃잎들을
하나하나 책상 위에 펴 놓았다.
  개나리, 진달래, 철쭉, 목련, 라일락, 장미, 분꽃, 봉숭아, 엉겅퀴, 패랭이꽃, 제라늄, 싸리꽃,
안개꽃, 제비꽃... 수없이 많은 꽃잎들이 조금씩 변색된 얼굴로 은은한 향기를 피우며
가지런히 놓여 있다.  나는 그 꽃잎 하나하나와의 만남을 거의 기억하고 있다. 그 꽃잎들이
내 손에 의해 선택되어 내 작은 책갈피에 잠들기까지의 이야기를. 그것은 기억이 아니라,
어쩌면 애정이었다. 그 꽃잎들과 만나던 한순간 한순간이 모두 지극한 사랑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나는 그 꽃잎들은 작은 스케치북에 늘어놓고 꽃말을 찾기 시작했다.
  사랑해 주세요, 영원한 사랑, 첫사랑, 당신을 사랑해요. 사랑의 맹세...꽃말들은 모두가
'사랑'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처럼 사랑이란 꽃과 같은 운명인가? 가장 아름답고, 가장 향기로운... 나는 다시 꽃말의
유래를 읽기 시작했다. 한결같이 아름답고 슬픈 사랑 이야기로 씌어 있었다.
  물망초꽃의 꽃말은 '날 잊지 마세요'였다.
  나는 물망초꽃의 생김새조차 뚜렷하게 떠올리지 못하면서 그냥 '날 잊지 마세요' '날 잊지
마세요'하며 무심히 반복해서 그 꽃말만을 쓰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아이들이 '와아'하며 웃기 시작했다. 나는 어리둥절한 채 고개를 들었다.
한데 놀랍게도 반 아이들의 눈이 모두 내게로 쏠려 있었다.
  바로 그 순간, 깝쁘씨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고래를 들어요, 그리고 날 봐요. 이 안경 속에서 찬란히 빛나는 내 작은 눈을..."
  아니 이게 무슨 말씀인가? 아이들은 또 다시 '와아'하고 책상을 두드리며 웃음다발을
던졌다.
  그 순간 나의 머리를 스쳐가는 것이 있었다. 어쨌거나 조금 전까지 흰구름 속을 지나 나는
하늘가를 날고 있었다. 한데 지금은 뭔가? 하늘을 날기는커녕 내 몸 하나 숨길 데도 없지
않은가.
  그런데 이건 또 웬 날벼락. 깜쁘씨는 내가 쓴 것을 일어나 당장 읽어 보라는 것이다.
깜쁘씨의 명령을 어찌 거역할 수 있으리요. 결코 그냥 슬쩍 넘어갈 수 있는 그럴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내가 국어책을 펴놓치 않은 것을 깜쁘씨한테 들키고 말았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체념해 버리기로 했다. 그리고 낙서한 종이를 들고 읽기 시작했다.
  "날 잊지 마세요"
  그러자 교실 안은 또 다시 난리가 났다. 정말 난감했다. 완전히 동물원의 원숭이 꼴이 되고
만 셈이었다.
  "선생님! 절대로 순림이 잊으시면 안 돼요."
  "얘, 순림아! 너 깜쁘씨가 그토록 좋으니?"
  "이심전심이요, 천생연분이라. 정말 그런 게 있긴 있구나!"
  "얘, 끝내준다. 끝내줘!"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이거야말로 정말 기가 막힌 이야기가 아니고 뭐겠는가?

    

생각나는 나날들

학교로 가는 오솔길

  우리집 뒤에는 야트막한 산이 있다. 그 산에는 약수터가 있다. 서울 한귀퉁이에 약수를
마실 수 있는 산이 있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이 산에 오르기를
좋아하고, 산골짜기에서 솟아나는 맑은 약수를 사랑한다. 정말 청량한 한 모금의 냉수를
마시고 나면 속이 후련하게 씻겨진다.
  나는 이곳으로 이사 오면서부터 이 약수터 길을 걸어서 학교로 간다. 아침 일찍 이슬이
맺힌 언덕을 지나 산등성이에 이르면 성황당이 나오고, 돌무더기가 큼직하게 길 옆에 버티고
있다. 나는 발 밑에 떨어진 돌 하나를 집어 그 돌무더기 위에 가만히 놓는다. 하지만 그냥
던질 뿐 소원을 빌어본 일은 한번도 없다.
  어느 비오는 날, 달걀장수는 이 성황당 고개를 넘다가 여자 웃음소리를 들었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그래서 비가 오면 사람들은 이 길을 걷지 않으려고 한다.
  그런데 예부터 귀신은 비오는 날에 많이 나타난다. 왜일까? 귀신도 센티한 면이
많아서일까? 인간세상이 그리워져서일까?
  나는 오늘도 성황당을 지나 오솔길을 걷는다. 개암나무도 있고, 다람쥐도 있다. 이 길을
얼마쯤 지나면 솔밭이 나온다. 소나무 사이로 난 조그만 길, 이 길도 역시 오솔길이다.
소나무 가지는 햇빛을 받고 긴 그림자를 드리우며, 가지 사이로는 파란 하늘이 군데군데
보인다.
  여기를 지날 때면 괜히 노래가 하고 싶어진다. 그래서 나는 가끔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른다.
  이렇게 가면 약수터에 다다르게 된다. 부지런한 사람들은 이미 약수물을 마시고, 체조를
하고, 그리고 플라스틱 통에 약수를 가득 담아 들고 내려간다.
  약수터에 가면 먼저 온 사람이 물을 떠 나중 온 사람에게 준다. 플라스틱 바가지를 깨끗이
한번 가신 후, 새 물을 바가지가 넘치도록 가득 담아서 준다.
  이것은 그 약수터에서의 불문율이다. 그냥 빈 바가지를 쑥 내밀지 않는 마음들. 이것은
분명 이 약수터에서만 볼 수 있는 '여유'이다.
  여유. 사람은 항상 여우를 갈망한다. 그런데 하잘것 없는 일로 서로 얼굴을 붉히다 보면,
그만 여유란 놈이 사라져 버린다. 그래서 서로 각박한 가슴만 치는 것이다.
  약수물을 한 바가지 마시고, 다시 가방을 들고 걷기 시작한다. 갑자기 길 옆에서 개구리가
뛰어든다. 하마터면 그 개구리를 밟을 뻔했다. 그때부터 나는 조심조심 발자국을 떼게 된다.
또 다시 길섶의 개구리가 늦잠에서 깨어나 화들짝 놀라면 나도 따라 놀라게 되니까 말이다.
  논두렁 사이로 잘잘잘 흐르는 물소리가 들린다. 더운 날이면 이 물에 고개를 숙이고
세수를 한다. 손수건을 물에 적셔 머리에 얹기도 한다.
  뭐니뭐니해도 아카시아가 필 무렵이 제일 싱그럽다. 아카시아는 짙은 향기를 뿜으며
흰꽃을 피운다. 아카시아 꽃잎으로 온 산이 하얘진다. 나무마다 가득가득 꽃술을 늘어뜨린다.
나는 말할 수 없는 경이와 황홀감으로 꽃 사이에 서서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꽃잎은 눈송이처럼 바람에 날린다. 그 꽃잎보다 더 짚은 향기가 바람에 흩어진다. 이것은
아름다움의 최고 극치다. 나는 이 엄청난 자연의 선물에 혼자 황송해서 안절부절 못한다.
  이 길을 지나면 아랫마을이 보이기 시작한다. 양계장도 보이고, 오이밭도 보이고, 호박밭도
보인다. 호박꽃이 푸른 잎 사이로 노랗게 피어 있다. 사람들은 곧잘 호박꽃을 조롱하지만,
나는 이 호박꽃을 다른 어느 꽃보다 좋아한다. 나는 호박꽃을 보면 항상 외가의 돌담을
생각하게 된다. 그만큼 호박꽃은 정겨운 꽃이요, 정서를 불러일으킨다.
  어느 집 마당가에는 모란이 피어 있다. 진분홍 꽃잎이 동그랗게 피어 있는 모란. 아마
약초로 재배하고 있나 보다. 그 집에는 많은 꽃나무가 밭을 이루고 있다.
  이렇게 나의 등교길은 이어진다. 다시 산등성이에 오르면 목장이 보인다. 젖소가 풀을 뜯고
있는 축사 밑으로 조그만 오두막집이 하나 있다. 흙벽으로 이루어진 오두막집이다.
  그 오두막집에는 빨간 스웨터가 가끔 널린다. 누구의 것인지 작고 귀엽다. 그리고 하얀
기저귀가 깃발처럼 펄럭이기도 한다.
  그 작은 오두막집에는 언제나 사람이 있고, 사랑이 있다. 욕심없는 그 가난한 주인에게
하느님은 무심하지 않다. 심지 않은 난초꽃도 피어 나게 하고, 들장미 덩굴도 어우러지게
한다. 연분홍 꽃송이가 참 예쁘다. 그뿐인가. 찔레꽃, 엉겅퀴, 도라지, 그리고 이름 모를 많은
꽃과 많은 풀들이 무리를 지어 흙담을 따라 자라고 있다. 그 이름 모를 꽃이나 풀처럼 역시
이름 모를 많은 새들과 나비들이 그 오두막집 지붕 위에 나풀나풀 날아다니다.
  가끔 어디에선가 트럼펫 소리가 들릴 때도 있다. 그럴 땐 그 소리의 방향을 찾아
두리번거려 보지만,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아무도 없는 산등성이에서 듣는 트럼펫 소리, 이
소리는 나를 아주 매혹시킨다. 나는 누군지 모르는 그 사람에게 항상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다. 그는 아무것도 얻는 것 없이 나를 늘 즐겁게, 행복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언덕 아래로는 양계장도 보이고, 비닐 하우스도 보인다. 그 속에서도 많은 생명들이 자라고
있다. 어디 그 속에서 뿐인가. 내 발 밑에도, 그리고 내 신선이 닿는 모든 곳에서는 그렇게
생명들이 자라고 있다. 어쩌면 내 마음 속에서도 한 포기의 꽃이, 한 그루의 나무가 자라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매일매일 이 길을 지날 때마다 아주 싱싱하고 생명감 넘치게 그것은
요동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오리나무와 아카시아나무가 우거진 산등성이의 오솔길을 따라 내려가면,
조그만 우리 학교가 보인다. 국기 게양대도 보인다. 신선한 바람을 타고 펄럭이는 태극기도
보인다. 교문 아래로는 연못이 보인다. 여름 한철에도 연잎이 무성하게 떠 있고, 그 사이로
연꽃이 숨어 있다. 엷은 분홍색의 우아한 꽃잎, 연꽃은 분명 세속의 꽃은 아닌 듯싶다.
  이것이 나의 등교길 풍경이다. 서울 변두리에 있는 우리 학교. 그래서 얻을 수 있는 이
풍요로운 아침 풍광들. 많은 친구들은 부러워할까? 아니면 그깐 것이 뭐 그리 중요하냐고
시큰둥해 할까? 그 길을 다니는 버스가 없는 것도 아니지만, 나는 언제나 오솔길을 따라
걸어서 등교하고, 걸어서 하교한다.
  이 길은 나에게만 주어진 특권이기 때문이다.

    

눈이 내리는데

  오늘은 아침부터 눈이 내린다. 탐스러운 눈송이들이 소리도 없이 살그머니 내려앉아
지상을 하얗게 덮고 있다.
  눈은 참으로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다. 이 넓은 땅을 하나도 남김 없이 몽땅 덮어 주고
있지 않은가.
  창밖으로 내리는 눈을 보노라니, 갑자기 시골길을 걷고 싶어진다. 초가집이 한두 채 산기슭
따라 어깨를 맞댄 한적한 산골. 그 초가집 댓돌 위에는 고무신 세 켤레가 놓여 있고, 방
안에는 화로불을 가운데 놓고 엄마, 아빠, 아들이 오손도손 둘러앉아 있을 게다. 아주 긴요한
화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숭늉처럼 구수한 이웃들 얘기를 나눌 것이다. 유별나게
행복했던 기억도 불행했던 기억도 갖지 않은 그들. 풀처럼 파랗게 살아갈 뿐이다.
  눈은 그들마저도 포근하게 덮어줄 것이다. 눈이 내리는 오늘 같은 날이면 고소한
호박부침이라도 해먹자고 의견의 일치를 봤는지도 모른다. 당장 그들에게로 달려가고 싶다.
동그스름한 초가지붕 위로 피어오르는 하얀 연기도 보고, 계곡의 물소리와 밭고랑 사이에
잠든 자연의 소리도 듣고 싶다.
  자연의 소리. 그것은 한마디로 꼬집어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소리는 내가 듣고
싶어하는 모든 순수를 다 간직하고 있을 것 같다. 그것은 나의 내면의 소리일 수도 있고,
신의 소리일 수도 있다.
  그런데 나는 아직까지 한 번도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우리의
일상에서 생긴 소음만이 나를 짓누르고, 그 소음으로 인해 나는 이미 모든 기능이 마비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이제 새로운 생활의 소생은 가능할까? 소금에 절인 배추 같은 이 생활에서
신선한 소생이 정말 가능할까?
  나는 코트를 걸치고 거리로 나갔다. 눈은 내 머리 위에도 어깨 위에도 아낌없이 내려
주었고, 나는 그 눈에 서서히 빠져들기 시작했다.
  거리의 건물도, 자동차도, 사람도 내 의식 속에서 하나하나 지워지기 시작했고, 나는 오직
눈이 내리는 길을 혼자 걷고 있을 뿐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정말 시골길을 혼자 걷고 있다는 착각에 빠졌다.
나는 시골 산기슭을 따라 걷고 있는 환상에 젖어서 거리를 쏘아다녔다. 마냥 즐거워서
얼마간을 그렇게 헤맸다.
  그러다가 문득 뒤를 도랑보고 싶었다. 어쩌면 하얀 눈 위에 박힌 내 발자국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고개를 뒤로 돌린 순간, 나는 깜깜한 암흑을 느꼈다. 거기엔 거무튀튀하게 질퍽이는 보기
흉한 눈들이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아, 이것이로구나. 내가 지금 발을 딛고 서 있는 곳이 여기로구나. 갑자기 사람이 괴물처럼
느껴졌다.
  천지를 덮은 눈을 위대하다고 느꼈던 나의 생각이 무색해졌다. 그리고 내가 위대하다고
생각했던 그 눈을 무참히 깔아뭉갤 수 있는 인간의 위대함에 새삼 놀랐다. 그래, 오늘날
인간은 자연을 이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어쩐지 내가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더 이상 나는 인간의 구성원이 아니라, 자연을
뭉개고 있는 그 괴물 같은 인간에게 쫓기고 있는 하찮은 생명같이 느껴졌다.

    

영원한 소녀의 새벽길  

  멀리 종소리가 들린다. 소리는바람결에 날아온 향내음처럼 내 가슴에 와 내려앉는다.
  종소리를 들으면 모든 번뇌가 사라진다지. 그래서 새벽마다 종은 울리고, 울리는 소리는
넓게 넓게 퍼져 사람을 찾고, 짐승을 찾고, 벌레를 찾고, 물고기를 찾고, 꽃을 찾고, 나비를
찾고, 새를 찾고...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을 찾아 떠난다.
  생명은 고이니, 생명이 있는 것이라면 무엇인들 괴롭지 않으랴. 하지만, 새벽마다 울리는
종소리는 자신을 반기는 곳에만 머물러 준다. 꽃 광주리를 든 행복의 천사처럼 아무리
행복을 나누어 주고 싶어도 문을 잠그고 받지 않음에야 어이하리.
  나는 새벽 종소리를 들으며 여관문을 나왔다. 새벽 안개가 환상처럼 두러져 있고 그 안개
속으로 파도소리가 들린다. 흡사 처음 창조된 신세계에 온 것 같은 기분이다.
  아무도, 아무도 없는 새벽. 안개와 파도와 새벽 공기와 풀내음과 산의 호흡만이 있는 이
새벽, 종이 울리는 어느 분의 가슴과 내 가슴이 새벽의 정적을 타고 이어진 느낌이다.
  종을 치는 그 분은 누구일까? 누구를 위해 모두가 잠든 이 새벽 무거운 범종을 두드려야
하는가? 자신의 가슴을 위해서일까? 가슴 속에 파도치는 괴로운 물결을 범종의 맑은 울림에
실어 보내려는 것일까?
  나는 산등성이를 오르기 시작했다. 안개는 더욱 짙어지고 파도소리는 더 가깝게 들린다.
흡사 바다 벼랑에 서 있는 것 같고 한 발을 잘못 디디면 바다 속으로 빠질 것 같다.
  짙은 안개를 뚫고 멀리 어선의 불빛이 보인다. 어선의 불빛은 이 새벽 풍경의 일부일 뿐,
어부들의 고기 잡는 불빛이라는 현실감을 느끼지 않게 한다.
  싸늘한 새벽 공기, 아직 아무도 호흡해 보지 않는 듯한 너무도 신선한 공기가 내 몸을
감싼다. 아, 경이롭다. 이것은 너무도 경이로운 신선함이다.
  나는 고개를 넘어 소나무가 우거진 산등성이에 앉는다. 이슬이 내려 축축히 젖은 잡초들은
내 옷을 적신다. 나는 소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숨을 돌린다. 숨쉬고 있는 내가 하나의 돌처럼
아주 편안하다.
  아무도 없기 때문일까? 아무도 없기 때문에 이렇게 편안한 것일까?
  짙은 안개가 조금씩 걷히고 사물의 윤곽이 드러난다. 산은 능선을 나타내고, 나무는 줄기를
나타내고...모두모두 제 모습을 찾기 시작한다. 바다도 어두움 속에서 맑게 번득이기
시작한다. 산은 어찌해서 산이 되고 바다는 어찌해서 바다가 되었을까?
  산과 바다에도 영혼이 있을까? 생명이 있을까? 산과 바다가 무정물이라면 그 품 속에 어찌
그 많은 생명을 품을 수 있을까? 그 많은 생명이 생존할 수 있는 기막힌 질서, 이 비밀은
어디에 숨어 있는 것일까?
  안개가 걷히고 모든 사물은 제 휴식에서 이런 분주한 태동이 반복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모두가, 모두가 이대로 쉴 수만 있다면  이리도 편안한 것을.
  조금씩 움직인다. 산도, 바다도, 그 속에 있을 모든 것도. 검은 파도가 희뿌연 색으로, 다시
푸른 본래의 색으로 변화한다. 수평선에는 검은 구름이 드리워져 있고, 그 바다와 포개진
구름 속으로 어선의 불빛이 깜빡인다. 운 나쁜 놈들은 그물에 걸리고 어부들은 만선의
기쁨으로 닻을 내릴 것이다.
  산다는 것은 잃고 얻는 것이라 하지만, 생명을 빼앗는 것이 생존의 방법이라면 좀
이상하지 않을까?
  하기야 약육강식, 이 법칙에서 벗어난 것은 땅 위에 존재하지 않으니 이 땅에 살면서
자신에 웃음을 흘린다.
  검은 구름 위로 하늘도 차차 제 모습을 드러낸다. 조금 붉은 구름이 이는가 싶더니 이내
구름 속에 해가 떠 있다. 일출의 장관을 내 어찌 바라랴. 그냥 하루가 시작되는 이 신비한
시간을 지켜봤으면 족한 것이지.
  나는 젖은 옷을 털고 소나무 등걸에서 일어난다. 꽤 오랜 세월이 흐른 것 같다. 산을
내려와 언덕길을 걷는다. 이 언덕을 돌면 연못이 있다. 그 연못 속에서 뛰어놀 잉어놈에게
아침먹이를 줘야겠다.
  나는 매점에 들려서 건빵을 한 봉지 샀다. 연못에는 수련이 하얗게 피어 있다. 조그만
꽃송이, 하얀 꽃잎, 초연하다. 꽃이라면 인간을 즐겁게 해주는 것으로 생각하는 통념, 어쩐지
쑥스럽다. 이 수련은 이런 통념을 거부한다. 큰 나무들이 우거진 속에 담겨 있는 듯한 연못,
이 연못은 몇 송이의 수련을 피우기 위해서 있는 것인지.
  건빵을 던지자 잉어가 튀어 오른다. 내가 너희들에게 아침을 주는 이것도 인연이겠지. 이
세상에서 맺은 한순간의 인연. 이 한순간 너희들과의 인연은 나를 즐겁게 한다. 우리의
인연은 너무나 아름다운 순간이었으니까.
  나는 잉어들과 작별하고 여관으로 돌아왔다. 학생들은 나를 찾기 위해 소란을 피웠을
것이다. 수학여행, 수학여행 온 학생들을 통솔하고 있는 교사가 아니라 나도 그들과 같은
소녀인 것 같다.
  소녀란 좋은 것이니까 영원히 소녀이면 어떠랴.

    

누나를 기다리는 소년

  소년은 병약한 편이었다. 매년 봄, 가을 두 번씩 심하게 앓아야만 했으니까. 무던히도 속을
태우며 열두 살까지를 그렇게 보내야 했다.
  '물에 빠져 죽을 팔자'라는 어느 뜨내기 점장이의 예언 때문에, 한여름이면 개울에서
신나게 놀아대는 동네친구들을 물끄러미 구경만 해야 했다. 어쩌다 몰래 멱을 감고 집에
들어갈 때면, 머리카락에 남은 물방울이 화근이 되어 금기에 대한 들통이 나고, 그때마다
부모로부터 적지 않은 곤욕을 당해야 했다. 결국 소년은 개헤엄도 제대로 익히지 못한 채
여름을 넘기곤 했다.
  매섭게 춥던 겨울날.
  소년의 두 손을 꼭 잡아 보고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떠나버린 누나를 생각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소년을 슬프게 했다. 동구 밖 고개너머로 그렇게 떠나버린 누나는 그 뒤 한 번도
집에 온 적이 없었다. 소년이 제일 좋아하던 참깨엿을 몰래몰래 사다 주던 누나였는데.
소년은 누나의 모습을 꿈 속에서 보는 날이면 으례 동구 밖 마루턱까지 올라가 아무도
모르게 울곤 했다.
  이제 오랜 세월이 지나 소년은 동구 밖을 잊어버렸다. 하지만 몹시 추운 겨울날이면 한
번씩 누나의 얼굴이 떠오르곤 했다.
  모든 것을 미분해 버린다면 남는 것은 '나'밖에 없겠지.
  '나'란 대체 누구일까? 어디서 유래된 존재일까? 왜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걸까?
  모든 사람들은 제각기 '나'를 주장한다. '나'이외의 모든 것은 어렵지 않게 부정해 버린다.
그러면서도 항상 '나'하나를 제대로 정리하는 사람은 그리 흔하지 않다. 나도 마찬가지다.
그런 내가 싫어서 드세게 나를 뿌리쳐 보지만, 그럴수록 그 '나'는 집요하게 달라붙어 떨어질
줄 모른다.
  그래서 부정적인 존재로만 생각하던 무리 속으로 '나'를 내던져 보지만, 결국 '나'는 고독한
존재에 불과했다.
  이제는 정녕 내가 누구인지 알 길이 없다. 그것을 알아보려는 시도는 어리석은 것이다.
  그러나 그런 '나'에게도 한가닥 기다림이 있다.
  그것은 아련히 잊혀져가는 얘기지만, 어느 추운 겨울날 훌쩍 떠나버린 누나의 화사한
얼굴을 생각하며 동구 밖에서 눈물을 흘리던 소년의 순수한 기다림. 그런 순수한 기다림이
내 가슴에 지금도 흐르고 있다.
  그러나 그 기다림의 대상이 무엇인지 지금 설명할 수는 없다.

    

행복의 옹달샘

  엊그제 언니 친구가 결혼을 했다.
  모 재벌의 맏며느리가 됐다. 쇠뿔로 만든 함 상자에 담겨 온 예물은 다이아, 비취, 산호,
호박, 금 , 사파이어, 루비... 몽땅 세트였다. 그 세트는 귀걸이, 목걸이, 브로치, 반지, 팔지...
어디 이것뿐인가. 알래스카에서 온 밍크 목도리, 무스탕 모피, 홍콩 아가씨들이 손으로 붕어
2백 마리, 나비 2백 마리를 수놓은 이불 껍데기, 실크 거들, 실크 난제리...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섬길래도 몇 시간이 걸린다.
  들은 사람도 신이 나고, 본 사람도 신이 난다. 아니 그 품목을 옮기는 사람이 더 신난다.
  신문 컬럼을 보면, 이른바 팔자 좋은 유한부인들은 유명살롱에서 옷을 맞추는데, 원피스든
투피스든 열두 벌을 한꺼번에 색깔로 맞춘다고 꼬집고 있다. 무지개는 일곱 가지 색인데,
그렇다면 나머지 다섯 가지 색깔은 무엇들일까?
  그러고 보니, 대학시절 여성학 강좌를 하던 여교수가 '스웨터나 블라우스를 살 때는 한
가지 색보다 열두 가지 한 세트를 사면 훨씬 더 감각적으로 편리하게 입을 수 있다'고
말하던 것이 기억난다.
  하지만, 이같은 쇼핑을 예사로 할 수 있는 부류는 극히 제한된 사람들일 뿐, 아무나 할 수
있는 소비형태는 아니다.
  그러나 천만 원짜리 카핏 깔기를 예사로 하고, 백만 원짜리 속옷을 입고, 괴외선생용
자가용을 따로 구입하는 사람도 상당수 있다니, 세상은 역시 요지경 속이다.
  그런데 이것들이 과연 행복의 옹달샘일까? 왠지 비단구렁이를 볼 때 느꼈던 야릇한
저항감이 생긴다.
  문명이나 과학은 어떻게 설명되어야 올바른 것이 될 수 있을까? 과연 문명이나 과학이
인간에게 절대적인 행복을 줄 수 있는 것일까?
  신라의 처녀들이 한가윗날 '강강술래'를 출 때, 그녀들은 자가용이 없다는 사실 때문에
불행했을까?
  앎으로 해서, 봄으로 해서 필요함을 느끼게 된 것이지, 애당초부터 절대적 가치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사실 20면 전 나에게 있어 냉장고, 피아노, 텔레비전은 그리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좀더 편안하게 살고 싶다는 욕망을 가지게 되면서부터 그런 것들이 필요해진
것이다.
  옛날엔 달나라의 계수나무나 옥도끼가 분명히 마음의 고향이 될 수 있었다.
  금도끼로 찍어내고 옥도끼로 다듬어서
  초가삼간 집을 짓고 양친부모 모셔다가
  천년만년 살고지고 천년만년 살고지고
  얼마나 편안하고 행복한 휴식처냐. 언제나 도망칠 수 있는 마음의 고향. 그러나 암스트롱이
첫발을 디딘 후, 달나라는 더 이상 초가삼간을 짓고 살 수 있는 별천지가 아니다.
  고향은 이제 아무 곳에도 없다.
  어릴 때 건너던 외나무 다리는 콘크리트 다리로 바뀌었고, 찔레순을 꺾던 오솔길은 이제
아스팔트로 변했다. 고향에 가도 그 고향은 그 옛날 내 마음의 고향이 아니다. 복숭아꽃,
살구꽃이 피던 옛날의 꽃대궐이 아닌 것이다.
  어디로 가야 할까?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야 참다운 휴식을 얻을 수 있을까?
  냉장고, 세탁기, 피아노, 자가용이 있어도 몸과 마음은 항상 피곤하고 고달프다. 이런
세상이 아닌 그 옛날로 돌아갈 수는 없는 것일까? 비단구렁이 같은 여자들을 안 봐도 되고,
옛날 선비처럼 역겨운 이야기를 듣고 구리를 씻고 싶은 욕구를 느끼지 않아도 되는 그런
세상으로 도로 돌아갈 수는 없는 걸까?

    

시간을 먹고 사는 인생

  시간만 먹고 사는 인간. 이런 사람을 본 적이 있나요? 바로 제가 그런 부류의 인간이죠.
  차를 마시러 다방을 들락거리죠. 아니, 차를 마신다기보다 그냥 시간을 먹으려고 헤매는
거죠. 이 다방에서 저 다방으로, 이쪽 거리에서 저쪽 거리로...
  "무슨 차를 드시겠습니까?"
  "아무 거나 주세요."
  "그럼 커피를 드릴까요?"
  "아뇨, 커피는 신물나게 마셨습니다요."
  이렇게 나는 시간을 잡아먹으며 하루를 쏘다니죠.
  관상쟁이처럼 거리에서, 다방에서 사람 얼굴을 찾지만 모두가 아니더군요. 내가 찾는
얼굴을 그런 얼굴이 아니거든요. 가끔, 아주 가끔 부딪치는 신선한 시선도 더러 있기는 더러
있데요. 그러나 돌아서면 금세 공허해져요.
  디오게네스라는 영감님은 대낮에 횃불을 치켜들고 아테네 거리를 헤매었다죠?
  그 영감님의 심정이 지금의 내 마음과 같은가 봐요. 그 영감님이 나를 보았다면 횃불을
껐을까요? 아니, 내가 그 영감님을 보았다면 이 방황을 멈추었을까요?
  아녜요, 아닐 거예요. 서로가 아니었을 거예요.
  그럼 뭔가요? 이 방황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난 찾고 싶어요. 꼭 찾고 싶다구요.
  주제 파악을 하라구요? 내 꼴에 무슨 다른 얼굴을 찾느냐구요? 우선 내 얼굴부터 내가
찾는 얼굴로 만들라구요?
  옳은 말이군요. 옳은 말이고 말고요.
  그러나 나는, 또 땅을 보고 하늘을 보며 시간을 잡아먹고 거리를 헤매지요. 낮과 밤을
제멋대로 들락거리며 말입니다.
  미친 자식이라구요? 꼭 몇 바퀴 돈 놈 같다구요? 다른 놈들은 다 멀쩡한데, 나만 왜 그
꼴이냐구요?
  허허허..., 글쎄요.
  그래서 이젠 조금씩, 아주 조금씩 시간을 쪼개 먹고 살아야겠어요.
  내게서 젊음은 슬슬 도망을 치고 있거든요. 내가 그 놈을 먹어 치우기 전에 그 놈이 먼저
도망을 치고 있다구요.

    

십대를 보내고 이십대를 맞이하던 날

  아듀, 세월이여.
  세월이 흐른다. 나는 흐르는 세월 위에 손을 흔든다. 손을 흔들며 나도 흘러간다. 흘러가며
두리번거려 봐도 내가 흐르는 곳이 어딘지 모르겠다. 아무 것도 모르는 채 나는 그렇게
흘러가는 것이다.
  생명을 받고 생명을 주는 끝없는 반복, 이것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인지. 억겁의 세월
속에 생명이란 한 찰나의 불빛인가?
  나는 기차를 탔다. 오늘밤은 십대가 가는 마지막 밤, 그러니까 열 아홉 살 밤과 스무 사
새벽을 나는 혼자서 의미있게 맞고 또 보내고 싶었던 것이다.
  십대가 간다는 것은 나를 무척 슬프게 했다. 내 인생의 순수, 박꽃 같고, 강물 같던 순수가
혼돈 속으로 사라진다는 아쉬움에 얼마나 혼자 안타까워 했던가.
  기차는 어둠 속을 달렸다. 역이 바뀔 때마다 창을 밝힌 몇 개의 불빛이 빨간 꽃잎처럼 어둠
속에서 반짝였으나 그것도 이내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차창 밖은 오로지 칠흑 같은 어둠의
연속이었다.
  사람들은 의자에 몸을 묻고 잠들어 있었다. 잠든 얼굴 위에 전등불이 싸늘하게 비치고
이따금 기적소리가 그 얼굴을 덮는다.
  모두가 초라한 길손이었다. 화려한 옷을 입고 짙은 화장을 한 여인의 얼굴도 역시 초라한
길손이었다. 왜일까? 인생이라는 것은 결국 이렇게 초라한 길손들일 뿐인가?
  이따금 판매원들이 손수레에 식료품들을 싣고 통로를 오갔다. 중년 사나이가 소주 한병과
오징어포를 고른다. 근 초면인 듯한 옆의 사나이에게 한잔의 술을 권했다. 인사가 오갔다.
'허허'하는 공허한 웃음에 섞여 역시 공허한 잡담이 오갔다. 술을 나누어도 마음은
나누어지지 않는가 보다.
  기차는 신음소리 같은 기적을 뿜으며 달린다. 원주를 지나고 제천을 지나고... 기차 안은
흡사 인생살이 같았다. 갖가지 얼굴이 갖가지 목적을 달려가는...이곳은 바로 인생길,
그것이었다.
  기차가 역에 설 때마다 사람들은 내리고 그리고 다시 탔다. 아무리 멀리 가는 사람도
종착역에 닿으면 내려야 했다.
  시간이 바뀌었다. 하루가 바뀌었다. 아니 나의 십대가 가고 이십대가 온 것이었다. 어느
손님이 틀어놓은 트랜지스터에서 보신각 종소리가 들린다. 아나운서의 숨가쁜 해설도 들렸다.
  아듀 세월이여, 나의 십대여.
  새로운 시간이 시작되었다. 영원히 고인 물 같은 영겁 속에 시간이란 있을 리 없다.
하지만, 인생이란 유한한 것이고 보니 자기의 인생만큼 영원 속에서 시간이라는 것을 떼어
보는 것은 아닌지.
  어둠을 뚫고 기차는 달렸다. 헉헉 가쁜 숨소리가 들리는 듯도 했다.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사라지는 어둠 위에 새벽은 올 것이고 나는 아침이 되면 강릉에 닿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나는 무척 멀리 온 여행자였다.
  잠결에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눈을 떠보니 북평역, 꽤 긴 시간을 잤던 모양이다.
  잠을 잔 시간도 여행이라 할 수 있을지?
  잠을 잔 시간도 인생이라 할 수 있을지?
  기차가 움직인다. 사람들은 내릴 준비로 부산했다. 종착역에 닿으면 모두가 내려야 하니까,
나도 마음이 바빠졌다.
  인생의 황혼녘에 서면 이렇게 마음이 바빠지는 것일까?
  차창 밖으로 바다가 보였다. 싱싱한 너무도 싱싱한 바다. 이 바다 위에서만은 세월도
스치고 지나가지 못하는 것 같다. 세월의 자락이 닿지 않는 바다는 영원, 바다는 영원을 사는
것일까? 영원이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영원이란 실재한다는 말도 되고, 또 실재하지 않는다는 말도 된다. 그것은 정말 무한대의
것이니까. 내 머리로는 생각할 수 없었다. 나는 순간을 사는 한 인간,내가 알고 있는
시간이란 내 생만큼의 순간일 뿐이다.
  강릉역에 닿았다. 사람들은 내릴 차비에 바쁘다. 여긴 종착역이니까 누구든 내려야 한다.
나는 천천히 개찰구로 나왔다. 차가운 바람이 분다. 사람들은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
  죽은 다음에도 영혼들이 가는 길은 이렇게 다를까? 살아 온 빛깔이 다르니까 어쩌면 다른
길로 갈지도 모른다.
  나는 광장으로 나오다가 이상한 광경에 놀랐다. 어떤 남자, 그러니까 삼십 정도의 남자가
검게 염색한 군인 작업복을 헐렁하게 입고 발에는 다 떨어진 농구화를 신은 채 조경을
위해서 만들어 놓았을 화단가에 앉아서 무어라고 흥얼거리고 있었다. 그의 입가에는 뿜은
입김으로 인해서 하얀 물방울이 서리처럼 맺혀 있고, 때묻은 검은 얼굴은 너무 지쳐 보였다.
추운 거리를 떠돌아다니는 정신병자.
  그런데 그의 입에서 흥얼거리는 소리는 놀랍게도 '반야심경'이었다.
  "관자재 보살이 행심반야 바라밀다시..."
  그는 반야심경을 하나도 틀리지 않고 독송하고 있었다. 그 더러운 육신 속에서 반야심경이
흘러 나오다니... 경전 중에서도 가장 으뜸의 경전인 반야심경이.
  이 사나이는 어떤 인연으로 이 반야심경을 외우게 되었을까?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잃어
버리고, 자신의 의식까지도 잃어 버리고 오직 이 반야심경 한 편만 얻어 가진 듯 그는
계속해서 끝없이 이 반야심경을 독송하고 있었다.
  지성으로 염송하면 모든 죄업이 사라진다는 반야심경. 분별 식견을 잃어버린 이
사나이야말로 지금 지성으로 염송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나는 천 원짜리 한 장을 그의 손에 쥐어 주었다.
  그는 일언지하에 땅바닥에 팽개쳐 버렸다. 나는 다시 주워서 그의 손에 쥐어 주었다.
  "가서 따뜻한 국수라도 사 잡수세요."
  그는 나를 한번 힐끗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이곤 돈을 접어서 속주머니에 넣는다. 그의
작고 마른 몽뚱이가 찬바람 속에서 빨갛게 얼어 있었다.
  전생 죄업이 하도 커서 이생에서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하지만, 이생에서 반야심경을
독송할 수 있는 인연을 얻었으니 내생에서는 편안히 살았으면...그렇게 축복해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나는 오버 주머니에 손을 넣고 한참 걸었다. 아는 사람이 없는 이 거리. 이 거리에서 나는
20대의 처음 하루를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을 느끼며 무엇을 생각할 수 있을런지
그리고 나는 얼마나 지혜롭게 나의 생을 계획할 수 있을런지, 이제 어른스러운 나이가
되었으니까 그런 어른스러운 생각으로 오늘 하루를 보내보자.

    

행복의 정체

  행복이란? 참으로 흔한 이야기다, 진부할이만큼. 하지만 아무도 행복한 놈을 꼭 붙들고
있지 못하니 어쩌면 생소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행복은 '절대 선'이라고 했던가. 그래, 행복은 절대 선이다. 모든 사람을 위안할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으니까.
  모든 사람이 추구하고 갈망하는 행복이란 놈은 왜 그렇게 쉽게 자기 정체를 드러내려고
하지 않지? 항상 복병처럼 어딘가에 숨어서 슬슬 관망만 하고 있으니 아마 인간이
애걸복걸하는 꼬락서니를 보고 호탕하게 웃어대는 심술궂은 놈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사실은 인간이라는 자가 하도 어리석어서 도처에서 반짝이며 웃고 있는 행복이란
자를 알아보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인간은 하도 탐욕스러우니까. 탐욕으로 마음을, 눈을 가리고 있으니까. 탐욕, 탐욕이란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세상에 탐욕만큼 미련스럽고 한심한 놈이 또 있을까.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픈 아귀만큼이나 저주받은 놈이 바로 탐욕이리라. 사람들은 누구할 것 없이 이
탐욕이란 놈을 고약한 놈으로 인정하고 가능한 한 그 굴레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라도 한다면
조금은 구원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많은 사람은 아예 그런 의식조차도 갖고 있지 않다.
홀린 듯, 취한 듯 그 놈에게 매혹되어 사족을 못 쓰니 어느 천년에 행복이란 놈을 만날 수
있을까?
  결국 인간은 어리석게도 행복을 열망하지만 내면에 탐욕을 키우고 있으니 영원히 행복을
좇고 있는지도 모른다. 좇으며 잡으려는 피곤한 여행, 이것이 인생이 아닐까?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늘은 흐려 있었다. 하늘은 왜 흐려 있어야 했을까?
  하늘도 외로워서 눈물을 삼키고 있는 것일까?
  무엇인가 손에 잡히는 분명한 실체가 있어야겠는데 가슴만 허허할 뿐 그 무엇도 손에 와
닿는 것이 없다.
  누군가가 그리워진다. 그립다는 감정만 애절할 뿐 떠오르는 영상이 없다. 사실 미치도록
그리운 사람을 갖고 있다는 것은 예사로운 축복이 아니다. 다 그저 그렇고 그런 얼굴들
속에서 가끔 착각하고, 가끔 실망하며 사노라면 세월은 어느 새 저만치 흘러가 있다. 완벽한
그리움이라도 있다면 내 가슴은 지금 이토록 허허롭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움은 향기로운
꽃나무가 되어서 내 육신과 영혼을 숨겨 줄 수도 있을 테니까.
  어디라도 가고 싶고, 가서 누군가를 붙들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갈 곳도, 만나야 할
사람도 없다.
  지금까지 살아 오는 동안에 만났던 그 많은 사람들. 그 사람들은 왜 나에게 아무런 의미도
주지 못하는 걸까?
  가끔은 희희낙락하고 같이 거리를 싸돌아다녔던 얼굴도 있는데, 지금 그 얼굴들은 내게
아무 색깔도 느끼게 해주지 않는다. 무채색, 그저 꺼멓고 허연, 아니 거무튀튀한 회색으로만
느껴질 뿐, 나를 매혹시키는 아무 색깔도 지니고 있지 않다.
  이런 것일까? 산다는 것은 정말 이런 것일까? 그 많은 사람들과 이리저리 얽혔던 인연의
고리, 그것은 정말 이토록 아무 의미 없는 허무함 뿐이었던가?
  나의 삶도 그러했으리라. 아무에게도, 정말 아무에게도 향기도 빛도 되어 주지 못한 나의
생명. 나는 나의 삶을 가꾸기 위해 학교엘 다녔고, 책을 읽고, 사색도 했다.
  하지만 지금 나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나는 얼마나 영롱한 구슬을 손바닥에 쥐고 있는
것일까? 결국 나도 매력 없는 희뿌연 회색으로 다른 사람에게 비쳤을 뿐이다. 바로 여기에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를 생각하게 하는 열쇠가 담겨 있다.
  옛사람들은 완전한 친구 셋을 얻으면 천하를 얻은 것보다 귀하다고 말했다. 어찌 셋이기를
바라겠는가. 한 사람, 단 한 사람이라도 완벽한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다면 그건 분명 천하를
얻은 것보다 더 소중한 의미가 되리라.
  결국은 육친도 애인도 부부도 영원히 타인이라는 의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타인이라는 의식. 여기에 깊은 외로움의 늪이 있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등을 맞대고
기어다니는 벌레들처럼 서로서로가 외로운 것이다.
  인간은 이렇게 외로울 수밖에 없을까? 이 무서운 늪에서 구원될 수는 없을까? 정녕 구원될
수 있는 길은 영원히 없는 것일까?
  나는 이 절망적인 어둠을 생각해 보다가 가느다란 한 줄기의 빛을 보게 된다. 한 줄기의
빛, 그것은 사랑이다.
  개구리알은 하나하나가 물렁질에 싸여 있다. 인간의 자의식이라는 것도 개구리알과 같을
것일 게다. 서로서로가 자신의 몸을 싸고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가슴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이것이 벽, 바로 절망을 가져오는 무서운 벽인 것이다. 이 벽을 깨보자. 가능한, 가능한
말이다.
  벽을 깰 수 있는 힘은 물론 사랑이다. 가능한 사랑을 내 가슴 속에 품도록 해보자. 품은
사랑으로 자신을 승화시켜 보자. 요원하고 요원한 꽃구름이라도 그것을 잡도록 노력해 보자.
오늘은 음악을 듣고 싶다. 내 몸을 숨길 수 있는 작은 공간에서 아름다운 선율의 음악을
듣고 싶다. 그 선율이 천상의 소리라고 상상해 본다. 천상에는 항상 그런 선율로 가득 차
있을 것 같다.
  오늘 하루쯤 천상을 나는 선녀가 되고 싶다. 오대산의 상원사 종벽에 새겨져 있는
비천상처럼 구름을 타고 날고 싶다. 내 영혼만이라도.

    

고독하십니까?

  "고독하십니까?"
  "당신도 고독하십니까?"
  서로 눈빛을 반짝이며 마음으로 느끼는 대화.
  "네. 고독합니다. 조금씩은 다 고독하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고독하다는 이 공범의식이 사실은 참 눈물나도록 아름다운 거지요."
  "고독이 아름답다구요?"
  "그렇지요. 고독은 분명 아름답습니다. 군더더기가 없으니까 투명하지요. 너무 이성적이라
오히려 차갑습니다. 얼음의 결정 같은 것이 라고나 할까요."
  "네, 그래요. 고독이란 정말 얼음의 결정 같은 것이에요."
  "많은 사람들은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고독으로 착각하고 있어요. 하지만 외로움은
형이하학적인 감정이지요. 외로움엔 항상 본능 같은 감정이 따릅니다. 그러나 고독은 그렇지
않아요. 완전히 이성적이거든요."
  "네, 맞아요. 고독이란 것은 적어도 인생이라는 것의 베일을 벗겨보지 못한 사람이 함부로
말할 것이 못 되지요. 그런 사람들이 소유하기엔 고독이란 놈은 너무 오만하니까요."
  나는 가끔 고독이란 것에 대해 생각해 본다. 아니 외로움이라고 해도 좋다. 아무튼 다른
사람과 단절된 채 나만의 성곽을 쌓고 있을 때, 일어나는 감정을 그런 말로 표현하고 싶다.
  항상 완전한 것을 추구하기 때문에 그 완전에 도달하지 못할 때는 공백을 본다. 공백은
허공이다. 아무 것도 채워지지 않는 허공. 허공이 허공으로 존재할 때는 무이기 때문에
오히려 완전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관계에서 느껴지는 허공은 허무다. 허무는 텅빈 가슴이기 때문에 무섭다.
  나는 항상 인간관계에서 이 허무를 보고, 그리고 지레 겁을 먹는다. 만나서 관계를 맺고
어쩌고 하는 것 자체가 공포다. 적당히, 적당히 눈감을 수도 있는데, 이 훈련이 안 되어
있어서 항상 허기진 자신을 보아야 한다. 어느 거리를 헤매도 허기진 배는 채워지지 않는다.
이럴 때 나는 고독을, 아니 외로움이라고 해도 좋을 그런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고, 그런
자신에 몸서리를 친다.
  나는 사람을 만났다는 것이 싫다. 그러므로 사람을 별로 만나지 않는다. 무리를 지어서
어울려 다녀본 기억은 한번도 없다.
 나는 다방이나 음식점 한켠에서 히히덕거리는 패거리를 보면 오히려 신기해지기까지 한다.
그럴 수 있는 그들의 세계가 놀랍다. 하지만 나는 그들이고 싶지는 않다.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닌, 오히려 불쾌하도록 추한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내 성곽을 사랑한다. 어쩌면 차가운 얼음 성곽일지도 모른다. 이 성 안에는 사람들이
별로 들어오려고 하지 않는다. 물로 나도 함부로 사람을 들여놓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항상
혼자다. 혼자이기 때문에 아무도 방해하는 사람이 없다. 방해를 받지 않는다는 것, 내 세계를
아무도 넘보지 않고 간섭하려고 들지 않는다는 것, 얼마나 좋은 일이냐.
  나는 이 속에서 서서히 탄생하고 그리고 성장한다. 이럴 때면 나는 생명의 소리를 듣는다.
생성의 소리다. 풀이 자라듯, 나무가 자라듯 나는 신선하게 자라고 있다.
  "당신의 눈빛은 아름답군요."
  "당신도 역시 그런 것 같습니다."
  "당신의 성은 겨울입니까"
  "아니요, 제 성은 항상 봄입니다. 그 속엔 생명을 키워 주는 봄볕이 언제나 있지요."
  "당신은 외롭지 않습니까? 혼자 갇혀 있다는 생각은 가끔씩 하겠지요"
  "네, 하지요. 가끔은. 그럴 때는 자지 않고 긴 편지를 씁니다. 아무도 편지를 받는 사람은
없지요. 하지만 나는 긴긴 편지를 언제나 썼습니다. 그리고 또 읽었지요. 다른 사람들의
편지를 , 그들은 나에게 큰 위안을 주었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항상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도 역시 고독했던 사람들이지요."

    

우정, 그것은 가장 승화된 사랑

  사랑. 그것은 사람이 살아가는 가장 완전한 의미가 아닐까?
  사람은 누구나 이 사랑 때문에 존재한다.
  만약 인간들의 가슴 속에 흐르는 사랑의 강물을 말려 버린다면 그래도 사람은 지금처럼
이렇게 살아갈 수 있을까?
  우리가 일상에서 그토록 집요하게 생존을 붙들고 있는 것도 그 밑바닥에 역시 사랑하는
계율이 있기 때문이다.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라면 어떤 절망의 늪에 빠졌을 때 생을 포기할지도 모른다.
가족을 사랑하지 않는 가장이 어찌 그 많은 고난과 부딪치면서 자신의 사명을 다할 용기를
가질까?
  사랑은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할 수 있는 가장 깊은 원천이다.
  나는 가끔 과학만화를 보면서 로버트의 세계가 멀지 않아 도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따를 수 없는 초능력의 세계. 지금 지상에 펼쳐진 이
과학이라는 만상의 얼굴은 분명 신의 세계를 방불하게 한다. 하지만 로버트의 가슴에 사랑의
불길을 타오르게 할 수 없다면 역시 인간은 신의 세계를 침범할 수 없다.
  우리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동안 수없이 많은 사람의 줄로 엉켜 있다. 가끔은 그것은
연민일 수도 있고 고뇌일 수도 있다.
  사랑의 줄이 질기면 질길수록 우리는 더 큰 집착을 느낀다. 이 집착이라는 감정, 그것은
자기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감정이다. 자기를 포기할 수 없고 자기를 중심으로 해서 모든
사랑의 고리를 이어가려고 하면 괴로움이 따른다. 나를 중심으로 해서 나와 관계된 모든
사람이 나에게 사랑을 베풀기를 바라는, 갈망이 된다. 이것은 괴로운 일이다. 이 갈망이
강하면 강할수록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든다. 그리고 급기야는 가까운 주위 사람 하나하나에
원한과 저주를 퍼붓게 된다. 그것은 무서운 파멸이다.
  사랑은 우선 자유로워야 될 것 같다. 자유란 누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다. 내
마음이 사랑에 항상 자유로울 수 있다면 나는 그 사랑에 구속되지 않는다.
 인간관계의 사랑 중에서 가장 승화된 사랑은 우정이 아닐까? 우정 속엔 집착이 없다.
  성인들의 햇빛 같은 사랑이야 알 도리가 없지만 바람처럼, 구름처럼, 강물처럼 아집에게
벗어나 그냥 자유로이 베풀 수 있는 사랑쯤은 내 가슴 속에서도 한 번쯤 품고 싶다.


    

캠퍼스의 꿈과 추억

답안지에 핀 웃음꽃

  중간고사가 시작된 지도 이틀이 지났건만, 시험지를 받을 때마다 아는 거라곤 하얀 것은
종이요, 까만 것은 문제라는 사실뿐이었다.

  영어시험
  영어시간 옹헤야, 꼬부랑 글씨 옹헤야.
  대리대답 옹헤야, 빵집 가자 옹헤야.
  수학시험
  수학시간 옹헤야, 프러스 마이너스 옹헤야.
  곱하기 나누기 옹헤야, 헷갈린다 옹헤야.

  이렇게 답안지를 메꾸고 교실을 나서는데 내 등 뒤로 쏠리는 뭇시선들.
  "저 녀석, 지난 밤 꼬박 새운 모양이지?"
  밤은 왜 새냐? 아는 대로 쓰면 되지.
  이렇게 시험시간마다 장편소설, 아니면 알쏭달쏭한 노래를 적는 것은 어디까지나 내 착한
심성 탓이지. 아, 선생님이 무슨 죄를 졌다고, 그 골치 아픈 채점을 밤새워 하게 해야 하느냔
말이다?
  "허허허... 별녀석 다 보겠군."
  "여보, 왜 그러세요?"
  "글쎄, 이것 좀 읽어보구료."
  "어머어머, 정말 재미있는 아이군요. 그 뱃심 한번 알아 줘야겠네요."
  아, 이렇게 사모님과 얘기할지 누가 알아? 선생님도 좀 웃겨 드리고, 사모님도 웃겨 드리며
둥글둥글 사는 것도 좋은데 골치 아픈 게 하나 있거든. 뭐냐 하면 시험과목이 너무 많다는
사실이댜. 자그마치 스무 과목이나 되니, 그걸 그런 식으로 죄다 써 내려면 차라리 정답을
쓰는 편이 훨씬 쉬울 판이거든.
  옹헤야 옹헤야도 한도가 있지. 매시간마다 옹헤야만 부를 수도 없고, 이렇게 해서 오로지
노랫말 짓는 고민만 하다 보면 일주일이 후딱 가 버리고, 드디어 시험이 끝나는 날.
  "와! 해방이다."
  여기저기서 터지는 함성.
  "그러지 말고, 아예 독립만세를 불러라."
  나의 일갈이다.
  도깨비시장인지 수산시장인지 분간하기 어렵던 교실이 갑자기 조용해지더니, 이윽고
담임이 등장한다.
  "여러분들, 그동안 시험치느라 수고 많았다. 오늘은 길거리에서 어정거리지 말고 곧장
귀가하도록. 알겠나?"
  "네"
  우렁차게 '네' 했지만, 속셈들은 이미 정해져 있다. 오늘 같은 날 집에 일찍 들어가는
녀석은 쪼다지, 그게 어디 성한 녀석이냐?
  "아참, 장경일은 교무실로 잠깐 오도록. 알겠나?"
  "네."
  왜 교무실로 오라는 걸까? 난 수업료 밀린 것도 없는데... 좌우지간 가보자.
  교무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2학년 5반 장경일, 담임 선생님께 용무 있어 왔습니다."
  방문신고를 위해 구령과 동시에 경례를 붙이는 순가, 여기저기서 터지는 폭소.
  "아, 저 녀석이군. 하하하..."
  "허허허... 진짜 인물이야. 허허허!"
  "야 임마, 이쪽으로 고개 좀 돌려봐."
  선생님들이 왜 이러시지?
  그때다. 담임의 주먹이 내 머리를 꽝 하고 한방 내지른다.
  "야, 너 각설이 귀신이 붙었니? 옹헤야, 옹헤야가 뭐야?"
  허허허...너털웃음이 꼬리를 물고 너털거린다.
  "어디 거기 서서 맘껏 불러봐라."
  이리하여 교무실은 때아닌 웃음바다, 웃음물결이 넘쳐 흘렀다.

    

나의 고달픈 25시

  "인경아! 너 지금 몇 신데 아직까지 자니?"
  아, 고달픈 하루가 또 시작되는구나.
  "네, 일어났어요."
  "아침 거르지 말고, 어서 세수하고 밥 먹어라. 맑은 장국 끓여 놨다."
  "네, 엄마."
  세수하고, 머리 빗고, 가방 챙기고, 구두 닦고, 교복 입고...아유, 또 늦었구나.
  "엄마, 다녀오겠습니다."
  "아니 얘, 아침 먹고 가야지."
  "엄마, 괜찮아요."
  괜찮긴. 아치마다 굶고 다니다 보니, 위의 기능이 바뀌었나 보다. 오히려 뭘 먹기만 하면
위가 반기를 들고 데모를 벌이니, 할 수 없지. 차라리 굶는 행복을 택하겠다.
  이렇게 시작된 하루. 일 초에 가능한 한 두 발짝을 떼어야 지각을 면한다. 그래서 한
뼘이라도 멀리 보폭을 넓히고, 숨이 턱에 차도록 뛰어 시내버스에 매달려야 한다. 필사적으로
오르려는 나의 집념. 이 것은 내가 가야 할 목적지를 향한 끈질긴 도전이다.
  그런데 숨도 채 돌리 사이 없이 다음 하차 지점을 안내한다.
  "다음은 시장 앞입니다. 내리실 분은 미리..."
  "아이구! 이거 어떻게 나가? 꼼짝달싹도 하지 않는데..."
  "아야, 아야, 엄마!"
  여학생의 비명 소리가 째진다.
  "터져 죽으면 장례 치러 줄테야?"
  험상궂은 남자의 목소리도 간혹 섞인다.
  아, 어떡하지? 에라 모르겠다. 온힘을 히프에 집중시켜 휘휘 밀어붙이며 몇 발짝 안쪽으로
들어섰다.
  "아니, 이 아가씨 히프 성능 되게 좋네."
  사방에서 터지는 웃음소리.
  순간, 땅속으로든 하늘로든 그럴 수만 있다면 숨어들고 싶었다. 아유 창피해. 이게 무슨
꼴이람.
  이런저런 고통을 겪으며 버스에서 내리니, 지각 2분 전이다. 뛰어라, 달려라. 버스
정류장에서 교문까지는 마라톤, 아니 아니지, 칼 루이스와 벤 존슨보다 더 빨리
달렸다. 헐레벌떡 교문으로 들어서는 순간,
  "야, 너 복장이 그게 뭐니?"
  "이름표, 배지는 어떻게 했어?"
  "넌 아슬아슬하게 골인한 게 벌써 세 번째야!"
  고통과 역경을 딛고 온힘을 다해 뛰어온 내게 호통을 치는 학생과장과 선도부들...
  그러나 나의 아침 달리기는 아직 끝난 게 아니다. 또 뛰어야 했다. 담임이 조례하러
들어왔으면 모든 것은 도로아미타불이기 때문에.
  4층. 왜 하필이면 나의 교실은 4층인가? 지치고 지친 몸을 이끌고 층계를 기어오르는 나.
드르륵 문을 여는 순간, 담임의 싸늘한 눈초리가 내게로 따갑게 달려온다. 
  "강인경! 또 지각이니?"
  "..."
  "이유가 뭐야?"
  이유라니? 죽도록 달려와도 지각인데 이유는 무슨 이유?
  "반성문 써서 1교시 끝나거든 교무실로 가져와."
  "네."
  반성문. 뭐라고 쓰지? 젠장, 반성할 게 있어야 반성문을 쓰든지 완성문을 쓰든지 하는 건데.
  첫째시간은 수학이다.
  한데, 수학숙제를 안 해 왔으니, 이거 또 야단났다. 다른 숙제라면 몰라도, 수학숙제를 안
하고 어찌 살기를 바랄까?
  "숙진아! 수학 노트 5분만 빌려 줄래?"
  "얜, 또..."
  "이따 냉면, 어떠니?"
  "오케이!"
  아, 괴로운지고, 후딱후딱, 쓱싹쓱싹.
  드디어 수업 시작 종이 울렸다. 따르릉 소리와 동시에 들어서는 수학 선생님.
  수학 선생님은 화장실도 안 가시나? 쉬는 시간엔 쉬어야지, 꼭 교실 문 앞에 대기하고 서
있다가 칼처럼 들어선다. 그것도 수학적인 계산법인가?
  "수업 시작하겠어요. 진도 나가기 전에 숙제검사부터 할 테니까 모두 책상 위에
펴놓도록..."
  내게로 다가오는 수학 선생님의 구두 소리.
  "강인경! 왜 숙진이와 똑같지? 또 베꼈지? 내일까지 일 페이지부터 백 페이지까지 다시
풀어와."
  고달프다. 산다는 것이 모조리 고달프기만 하다.
  오늘은 몇 시에 자야 되나?
  아! 오늘 하루 24시간을 채우노라면 또 얼마를, 또 어떤 일로 시달려야 할까?

    

손바닥에서 별이 반짝이던 날

  Long since old time.
  6월 그날의 6교시. 이것이 내 비극의 시간이 될 줄이야.
  '불독(수학 선생님의 별칭)'의 공포도 아랑곳 없이 감미로운 졸음이 나를 비몽사몽 속으로
끌고 가려 한다.
  그래프를 그리기 위해 칠판을 뒤집던 불독 선생님. 순간, 불독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는 거였다. 칠판 옆에 걸어둔 지휘봉, 일명 사랑의 회초리를 잡는 불독. 그
순간 위기의식을 직감한 나의 전신은 파르르 공포로 휩싸인다. 말초신경이 곤두서면 오히려
정신은 말똥말똥해진다.
  "이거 누구 짓이지?"
  성난 목소리가 낮게 깔린다.
  "뭔데요? 선생님, 뭔데요?"
  요 맹추들아, 불난 집에 부채질 하냐? 가만히 있어, 가만히들 있으라구.
  "선생님, 뭐예요?"
  아유 답답하다. 모르는 척하구 좀 잠자코 있으라니까.
  "얘, 저 선생님 왜 저러시니?"
  왜는 뭐가 왜냐?
  "불독=수학 선생님, 미친개=영어 선생님, 불독과 미친개는 몽둥이가 약이로다."
  "어머..., 저거 명언이다. 누가 썼니?"
  "지금 이 판에 누가 썼는지 범인이 자수하게 됐니?"
  "알겠다. 알겠어."
  교실 안은 삽시간에 흥미가 진진해진다.
  불독 선생님의 얼굴에도 '아차! 실수로구나. 모르는 척하구 그냥 넘기는 건데'하는 후회의
기미가 한순간 머물다 지나가는 듯했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으리'였다. 칼은 뽑았고, 사내 대장부가 뽑은 칼을 휘두르지도 않고
그냥 칼집에 넣을 수는 없다.
  비장한 표정의 불독 선생님. 험상궂은 표정을 곱배기로 우그러뜨리며 사랑의 회초리를
들고 앞에서부터 차례차례 손바닥 타작을 시작한다.
  "누구 짓이야?"
  분노에 찬 저음.
  딱, 딱... 입술을 깨무는 아이, 울음을 참느라 끙끙거리는 아이, 증오의 시선을 던지는
아이...
  "야야! 누가 했니?"
  앙칼진 고음이 여기저기서 터져나온다.
  그러나 불독 선생님은 초지일관이다. 한번 먹은 결심을 포기할 수 없다는 듯 팔에
가속도를 붙여 사랑의 매를 계속 휘두르신다. 드디어 내 차례.
  잠시잠시 지나가는 얼굴들... 엄마, 아빠, 오빠, 동생... 설마 내가 죽는 건 아니겠지?
  "누구 짓이야?"
  "..."
  딱. 내리치는 순간, 내 손바닥에선 별이 반짝반짝 빛났다. 정신은 가물가물. 선생님이
내리친 사랑의 매가 지나간 자리엔 새빨알간 핏줄기가 선명하게 두 줄 그려져 있었다.
후끈거리고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윽고 종례시간. 화가 잔뜩 난 담임 선생님.
  "예전엔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았다는데, 너희들은..."
  끝없이 계속되는 훈계, 훈계.
  선생님, 내 귀엔 지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사오니, 제발 나를 집으로 보내 주십시오, 네?
  가까스로 훈계가 끝나는가 싶었는데, 이번엔 범인 색출작전이 시작됐다.
  Oh, my god!
  이 끝없는 고행. 더러는 그런 장난도 할 수 있는 게 우리 또래의 특권이 아닌가. 선생님은
지나간 학창시절에 그보다 더 진한 장난도 했을 터인데...
  아무리 관상을 뜯어봐도 범인처럼 생긴 제자는 한 사람도 없다. 짐작 가는 녀석은 있지만,
본인이 자수는커녕 시치미 뚝 떼고 있는 데야 도리가 있나.
  시간은 흘러흘러 황혼이 창가로 가득 몰려든다. 범인은 감감 무소식이고,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치민 담임 선생님 드디어 그 사랑의 매를 다시 든다. 차례차례 탁, 탁, 탁...
  아! 괴롭구나. 고통의 학창시절이여.

    

신속, 정확, 시침 뚝!

  2월 학년말 고사.
  그 긴긴 방학은 다 어디 가고, 시간이란 놈이 이렇게 금싸라기 같단 말이냐? 아침 먹고
딩굴, 점심 먹고 딩굴, 저녁 먹고 딩굴 하던 그 꿈같던 방학이여! 영상 필름처럼 거꾸로 돌려
놓을 수는 없을까?
  째깍, 째깍, 째깍...
  제발 일초라도 멈췄다가, 아니 쉬었다가 갈 수는 없는 건가. 아니 커닝 페이퍼 만들
시간만이라도 줘야 하지 않을까. 병아리 발톱 만한 시간만 있으면 된다. 시간아, 제발 좀
천천히 쉬어쉬어 가거라.
  한심하다, 한심해. 너 같은 딸을 위해 엄마, 아빠가 하루종일 뛰어야 하다니. 알고 있다,
알고 있어. 엄마, 아빠 불쌍한 건 나도 잘 알고 있다구!
  한데 그놈의 양심이란 것이 왜 자꾸 살금살금 바쁜 시간의 틈새로 끼어드는지...
  아무튼 벼락불에 쥐포 구워 먹듯 커닝 페이퍼를 작성, 돌돌 말아서 손바닥에 넣고
주먹손을 쥐었다. 투시안을 갖지 않은 한 누구인들 알 수가 있겠는가. 이제 커닝 페이퍼는
준비됐고, 다음은 커닝의 3대 원칙만 지키면 되는 거다.
  신속, 정확, 시침 뚝!
  커닝의 3대 원칙을 지키는 건 문제가 아닌데, 요는 누가 '시감(시험 감독)'으로 들어오느냐
이것이 문제다.
  첫교시, 따르릉--. 드디어 종이 울렸다. 시감은 누구냐?
  드르륵 문소리와 함께 나타난 시감 선생님.
  그는 미스터 연구멍청!
  됐다, 됐어. 살았구나.
  드디어 갈고 닦은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할 기회가 왔다.
  신속, 정확, 시침 뚝!
  신나게 커닝 페이퍼를 요리조리 굴리며 답안지를 작성. 중간중간에 멀쩡히 잘 보이는
문제지를 들고 질문을 던진다.
  "선생님, 질문 있어요. 큰 2번에 작은 3번이 잘 안 보여요."
  미스터 연구멍청께서 그 학생 쪽으로 가는 사이에 한쪽에선 불이 붙는 거지 뭐. 싹싹... 그
짧은 동안 커닝 페이퍼를 굴리며 재빨리 답안지를 메꾸는 거다.
  의리는 우리들의 생명. 의리를 안 지킬 수 있나? 나도 손을 번쩍 들고 질문 하나를
던진다.
  "선생님, 질문 있어요. 큰 7번에 보기가 하나도 안 보여요."
  미스터 연구멍청이 내게로 다가와 그 많은 보기를 하나하나 불러주는 동안, 저쪽에서
들리는 싹싹싹 연필 굴러가는 소리가 상큼하다.
  이렇게 해서 첫교시는 무사히, 아주 무사히 끝났다.
  쉬는 시간은 십 분. 그 십 분 동안에 두 달 배운 것을 잽싸게 커닝 페이퍼에 옮기는
작업은 분명히 고행이다. 아유, 팔 떨어진다. 속기사가 어디 나만 하랴. 중요한 것만 추리되,
가능한 한 부호로 표시한다.
  이렇게 해서 완성된 커닝 페이퍼. 2교시 준비완료.
  시감, 이번 시간의 시감은 누구냐?
  따르릉--. 드디어 2교시 종이 울리는구나.
  드르륵 문 소리와 함께 나타난 사람. 맙소사, 우리 담임인 언더할멈이 아닌가.
  틀렸구나. 망했구나. 하늘이 무너지는 절망감에 한숨 터지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새어나온다.
  시험지를 받고 보니, 문제 모두가 알쏭달쏭한 거야.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고. 아유,
미치겠네! 이럴 때는 커닝 페이퍼가 특효약이 아닌가.
  손바닥이 간질간질, 자꾸 내 시선을 유혹한다. 에라, 모르겠다. 삼수갑산에 가는 한이
있어도 커닝부터 하고 보자. 시베리아 벌판을 그대로 보일 수는 없지 않은가?
  나는 신속, 정확, 시침 뚝의 원칙을 지키며, 재빠르게 답안지를 쓰고 있는데, 누군가
목덜미를 확 나꿔채는 게 아닌가?
  이젠 죽었구나, 죽었어. 언더할멈의 독기 서린 눈. 앞을 보니 여섯 명의 동지들이 이미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닌가!
  그래도 혼자보다는 외롭지 않아 좋다. 한결 위안이 되는구나. 나는 교탁 앞으로 어정어정
걸어나갔다. 에라 모르겠다. 때리면 맞고, 벌칙을 주면 받아야지.
  언더할멈 왈.
  "너희들 담임인 나한테도 이 꼴들인데, 다른 시간엔 어떻겠니?"
  "..."
  "나한테 매를 맞을래, 지도과로 넘어갈래?"
  "선생님께 맞겠어요."
  "좋아."
  칠판 옆에 걸린 지휘봉을 들더니 손바닥을 맵게 타작하기 시작한다.
  하나, 둘 셋...열, 열 하나, 열 둘... 우린 새파랗게 질려서 일제히 신음을 터뜨렸다.
  "선생님! 너무 아파요."
  "이건 정도를 지나친 폭행이에요."
  끝내 울음의 합창소리가 교실을 가득 채운다.
  우리들은 역시 의리를 지키는 영원한 동지. 그래서 병사는 외롭지 않다.
  "앞으로 이런 일이 또 다시 있으면, 그때는 학칙에 따라 처리할 테니 그리 알아!"
  앙칼진 경고를 던지고 나가는 담임 선생님.
  "선생님은 뭐 커닝한 경험이 없는가?"
  우리들은 볼멘 소리를 똑같이 뱉았다.
  여고시절 커닝 재미도 모르고 교문을 나섰다면, 그건 이도령 없는 춘향이지 뭐.
  정말 그렇다면 동정, 동정합니다. 선생님.

     너희는 구제불능이야!

  우리 학교에는 눈두덩이 몹시 돌출 됐고, 시력이 아주 나빠, 두꺼운 돋보기 안경을 쓴 수학
선생님이 있었다.
  그 분은 빗질을 하지 않아 늘 헝클어진 머리에, 빛 바랜 회색 양복을 사계절 내내 입고
다닌다. 그러나 그 분은 항상 정의의 편에 섰고, 학생들을 위하는 일이라면 언제나 앞장섰다.
어쩌다 화가 날 때면, 주름이 푹 패인 마른 얼굴에 반쯤 덮인 돋보기 안경을 연신
치켜올리며,
 

"너희들은 구제불능아들이야! 구제불능..."
을 연발했으나, 어느 누구도 그 분을 무서워하거나 싫어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그 분이 나타날 때마다,
  "얘, 구제불능 오신다."라며 소리를 질러대곤 했다.
  한번은 사인(sine)공식을 설명하며, 칠판 전체가 하얗도록 필기를 했다. 한데 갑자기 교실
안이 웅성거리며 여기저기서 킬킬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뒤에 앉은 아이들은 아예 일어서서
그 분의 발뒤꿈치를 훔쳐보기도 했다. 색깔이 전혀 다른 짝짝이 양말을 신고 있는 그 분.
  필기에 여념이 없던 그 분은 갑자기 터진 웃음소리에 어리둥절하며 좌우를 돌아보더니
영문도 모른 채,
  "역시 너희들은 구제불능이야."
하면서 돋보기 안경을 또 치켜올리는 것이었다.
  그 분의 별명은 그때부터 '색맹'으로 바뀌었다. 어쨌든 그 분에 대해 이야기꽃을 피우는
것은 우리들의 낙이었고, 또한 어는 누구도 이 재미판에 참가하지 않는 아이가 없었다. 단지
내 짝 이외에는...
  내 짝은 반장이어서인지 항상 의젓하려 애썼고, 이해심이 많고, 예쁘고, 깨끗한
인상이었다. 내 짝은 정말 닭 무리들 속에 낀 한 마리의 학처럼 고고하기까지 했다. 내 짝은
붓글씨 시간에 손에 먹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써내려간 서예 작품이 전교에서 최고상을
받기도 했고, 백일장에서 장원한 그의 시가 청아하게 낭송될 때는 아름다운 음악을 들었을
때의 전율 같은 것을 느끼게 했다. 특히 깔끔한 성격과 우수한 성적은 늘 모든 학생들을
제압했지만, 그는 군림하지 않고 항상 겸손한 포용력으로 그 누구와도 어울리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수학시간마다 아이들이 짓궂은 질문을 하고 웃어댈 때도, 그는 다른 아이들과 같이 웃음을
잃지 않으면서도 정도가 지나친 일은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수학 선생님이 보이지 않았다. 그 분이 보이지 않는 것은
우리들에게 큰 관심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어디가 편찮으신 건 아닌가? 우리들이 너무 말썽을 부리니까 다른 학교로 가신 건가?
  이러저러한 생각들 속엔 모두 그 분이 없다는 데 대한 허전함과 아쉬움이 깃들어 있었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분에 대한 끈끈한 애정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후 며칠이 지난 뒤, 우리는 그 분이 오래 전부터 결핵으로 시달려 오다가 병원에
입원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우리들은 슬펐다. 그리고 짓궂게 그 분을 괴롭힌 자신들에 대해 깊은 자괴감을 가졌다.
  그날 오후 우리는 몇몇이 모여 꽃을 사 들고 그 분의 병실을 찾아갔다. 한데 반장인 내
짝이 그 분의 병석 앞에 단정히 앉아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로부터 얼마 후 그 분은 끝내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저 세상으로 가고 말았다. 우리들은
모두 눈물을 흘리며 슬퍼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우리들은 그 분에 대해 별로 애틋한
기억을 하려 들지 않았다. 세월은 모든 것을 잊게 하니까.
  그런데 내 짝만은 그 후에도 계속 그 분의 집을 찾아다녔다. 내 짝은 아무 힘도 없었지만,
반짝이는 눈, 상냥한 말, 그리고 정직한 마음으로 홀로 된 사모님을 위로해 주었던 것이다.
  나는 아마 오랜 세월이 흘러도,
  "너희들은 구제불능이야."
하시던 그 분의 말(그것은 결코 악의가 아니었다는 사실)과 반장의 그 총명했던 얼굴을
기억할 것이다.

    

내가 만난 '임신중'

  아침마다 콩나물 시루 속에 박힌 한 줄기 콩나물 신세가 될 수밖에 없는 나의 운명.
엑스자로 꼬인 나의 발, 이리 쏠리고 저리 밀리는 시내버스 속에서 그 놈의 고생보따리는
오늘따라 왜 그다지도 근수가 많이 나가는지.
  고생보따리. 내 나이 일곱 살부터 짊어진 그 놈의 고생보따리에서 해방되는 날은 도대체
언제쯤일까?
  한숨을 한 짐 쏟아 붓고 섰는데도, 내 앞에 앉은 남학생은 그 가방을 받아 줄 생각은 아예
하지 않는다.
  야! 가방 좀 받아 주면 손가락에 무좀 생기냐? 어쩜 그렇게 무정할 수가 있냐?
  한데... 에게게, 얘가 왜 이래? 졸지에 귀에 염증 생기나, 귀는 왜 빨개지는 거지? 내가 앞에
서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수줍다는 건가?
  어머나, 딱해라. 요즘도 이런 순진둥이가 있었다니! 사내자식이 그렇게 순진해 터지면 뭣에
쓰냐? 내가 만약 미소라도 살짝 보여 준다면 그 자리에서 까무라쳐 쇼크사 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게 무지무지 염려스럽다. 그래, 그래. 그런 약심장이라 내 가방을 받을 용기가
없단 말이지? 음, 좋아. 이해해 줄께.
  그런데, 이건 뭐야? 이 옆에 선 남학생, 연신 나를 보고 싱글벙글이잖아?
 어휴, 징그러워. 완전 무허가 건축에 무허가 꽃밭을 일군 주제에 -- 저게 여드름이냐,
고드름이냐? 어쩌다 타이밍이 맞아 눈길이 마주치는 순간이면, 연신 한쪽 눈을 찔끔거리며
윙크까지 한다.
  '눈으로만 말해요'인가.
  괴롭다. 정말 괴롭고 싶다. 너 같은 남자는 십원에 열 개에다 덤으로 한 개를 더 준다 해도
사양하겠어.
  그때다. 가슴이 철렁하도록 멋있게 생긴 남학생이 밀리고 밀려서 내 옆에까지 흘러왔다.
그리고 부드러운 시선으로 나를 살피는 눈치다. 나는 가슴이 쾅쾅 뛰었고, 그 심장의
고동소리가 옆에 선 못난 남학생이 들을까봐 안절부절되었다. 그런데 어머, 그 멋진 남학생이
슬그머니 내 미술가방을 들어 주려는 게 아닌가.
  나도 모르게 입술이 경련을 일으킨다.
  "어머, 괜찮은데..."
  나는 유리알 구르는 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장미희처럼 입술을 한데로 모아 말을 만들지는
않았다.
  "저, 댁의 가방이 내 다리에 너무 짓눌러서요."
  뭐라구? 겨우 그런 사연이었어?
  실망, 절망, 허망...
  "어머, 별꼴이야. 그럼 발을 치우면 되잖아요?"
하고 땡삐보다 더 따끔하게 톡 쏘아줬지.
  "아니 내 다리가 그 가방 밑에 깔려 짓이겨져도 되는 겁니까?"
  그는 완강하게 응수했다.
  나는 더 이상 인내를 잃고 허둥거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의 얼굴을 정면으로 쳐다보며
공격해야겠다고 고개를 든 순간, 나의 시선이 채 그의 얼굴로 올라가기 전에 우연히 머문
곳은 그의 이름표였다.
  엷은 하늘색 바탕 천에 검정 색깔로 오바로구된 이름은 '임신중'이었다.
  임신중, 임신중?
  세상에 숙녀가, 교양 있는 여학생이 이런 상황에서 어째야 하는 거지? 나는 웃음보를 풀지
않으려고 교양, 지성, 이성... 온갖 걸 다 들먹였지만, 그만 실패하고 말았어.
  "호호호호... 후후후후..."
  한번 터지기 시작한 내 웃음보는 괴롭게도 그칠 기미를 보이지 못했다.
  내 웃음의 알맹이를 알아버린 그 남학생은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채 버스에서 후다닥
내려버리는 거야.
  남자 이름이 임신중이래. 너무 가혹하구나. 여자도 몇 번이면 끝나는 고행을 평생을 두고
임신중이어야 하다니.
  오늘 아침 등교길에 나는 이 세 명의 남학생들을 관찰하느라 제 정신을 못차려 끝내 한
정거장 더 가서야 내렸지 뭐니.
  하지만 선생님에게 야단 좀 맞으면 어때? 이렇게 재미있는 우리의 세상이 있는데.

    

인연은 어디서부터 오는가?

   미란이는 내 짝꿍이다.
  담임 선생님이 번호대로 자리를 정해 주고 난 다음, 특별한 사정이 있는 아이, 즉 눈이
나쁘다든가, 수업시간에 '습관성 기도'의 경력을 갖고 있든가, 아니면 소곤소곤식 유세행각을
낙으로 삼는 아이는, 현명하고 고명하신 선생님의 판결에 따라 자리가 바뀐다.
  이 특례법이 내게도 적용되어(유세행각으로 낙인이 찍혀), 나는 우리 반에서 가장 모범생인
미란이 옆에 앉게 되었다. 나는 뽀로통해서 바람이 일도록 책가방을 내팽개치며 미란이 옆에
가 주저앉기는 했지만, 감정은 역시 편안해지지 않았다.
  '쳇, 사람을 뭘로 취급하는 거야.'
  담임 선생님은 내 얼굴에서 꼴사나운 감정을 읽었겠지만, 모르는 척 묵살해 버린다.
  이렇게 해서 미란이와 맺어진 인연.
  여학교에서 짝꿍이란 부부보다 더 짙은 인연이 아닐까?
  엄마, 아빠는 기껏해야 하루에 아침, 밤으로 나누어 두 시간 정도 쳐다보며 웃고,
이야기하고, 또 다투기도 하는데, 짝꿍과는 무려 여덟 시간을, 그것도 하루의 골든 타임을
몽땅 같이 보내야 하니, 이 숙명을 무엇으로 이름해 불러야 할까?
  담임 선생님의 판결이 현명해서인지, 나는 미란이와 짝꿍이 되면서 하루하루 착한
학생으로 탈바꿈해 가는 자신을 인식하게 되었다. 처음엔 내게 동정이나 베푸는 듯한
미란이의 너그러움이 아니꼬와서 깡그리 무시해 버리면, 부당하게 무시당한 미란은 화가 나
내게 쌀쌀맞게 군다. 그러면 내가 다시 상냥하게 사과하는 불협화음이 한동안 계속되기도
했다. 사실 모범생이라는 것에 왠지 저항하고 싶은 감정, 그래서 미란이를 당황하게 만들고
괴롭히는 행위에 일종의 쾌감 같은 것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날, 가사 선생님이 결근을 했다. 우리는 자습을 하다가 몰래 교실을 빠져나와
운동장 한 귀퉁이 앵두나무 밑에 쭈그리고 앉았다.
  벌들이 윙윙대며 앵두꽃 속을 분주히 드나들고, 뾰족한 난초잎 한가운데서 보랏빛 꽃잎이
우아하게 피어 오른 오후의 교정. 등으로는 따뜻한 햇볕을 받으며, 조금은 권태롭고 조금은
슬퍼지는 우리 또래 특유의 감정에 젖어 있을 때, 미란이는 느닷없이 시 한 편을 읊었다.

  저 산너머 아득한 하늘가에
  행복이 있다고 말들 하기에
  남을 믿고 나도야 따라왔건만
  눈물 글썽글썽 되돌아섰네.

  카알 부세의 시였다.
  "얘, 울고 싶지? 우리 울어 볼까?"
하고는 정말 눈물이 글썽글썽해져서 미란이는 흰구름에게로 아물아물 시선을 보냈다. 나도
괜히 울고 싶은 마음이 들어 무릎에 머리를 묻었고, 개미들이 분주히 기어다니는 땅바닥에다
꽃잎도 그리고 초가집도 그렸다. 그 그림 위로 내 눈물이 여러 방울 떨어졌다.
  무엇이 우리의 감정을 이토록 지순하게 했을까? 소녀이기 때문일까? 5월의 바람이 너무
향기로웠기 때문일까? 어깨 위로 스물스물 내려앉는 간지러운 햇볕 탓이었을까?
  나는 그 후 미란이를 볼 때마다 그 오후의 운동장 구석을 생각했고, 내 마음 속에 미란을
향한 신선한 애정이 고여 있음을 의식했다. 우리의 감정이 너무나 아름답게 부딪친 충격
때문이리라.
  미란이가 있음으로 해서 나의 학교생활은 즐거웠다. 미란이는 성적도 1, 2등이지만, 학급의
궂은일도 도맡아 했다. 쓰레기를 버리고, 복도를 쓸고, 커튼을 빨아 오고, 반 아이들이 다투면
화해를 시키고... 하지만 그 행동이 너무나 순수하기 때문에 아무도 가시 박힌 눈길로 보지
않는다.
  나 같은 덜렁이도 이제는 아침마다 책가방을 챙길 때 시간표를 확인하고, 준비물을
점검하고, 수업시간 중엔 열심히 필기를 하지 않는가.
  나의 짝꿍 미란이는 별로 요란스럽지 않게 나를 자신의 세계로 끌어들인 셈이다.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 인간관계도 아마 그런 것이 아닐까?
  미란이와 나 사이에도 인연의 긴 줄이 전생부터 있었던 게 아닐까? 많고 많은 우리들 중에
하필 우리들이 이렇게 한자리에 앉아서 공부할 수 있다는 게, 어찌 인연이 아니겠는가?
  미란이의 얼굴을 보며, 나도 누군가에게 좋은 인연을 베푸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새삼
생각해 본다.

    

한숨 찬란한 개학날

  따다거리는 엄마의 소프라노와 함께 개학날은 어김없이 개봉박두다.
  작아진 교복을 억지로 껴입고 시내버스를 탔더니, 돼지코에 여드름을 듬뿍 뒤집어쓴
남학생이 저쪽에서 힐끔, 이쪽에서도 힐끔.
  눈 딱 뜨고 마주 봐줬지 뭐.
  학교가 터잡고 있는 남산 중턱을 방학 동안에 더 커진 엉덩이를 좌우 사방으로 흔들며
헐레벌떡 올랐지.
  교문을 통과, 교실 문을 드르륵 열고 들어서는 순간, 아이구야! 이건 도깨비시장인가,
무당굿판인가? 멍하니 갈 곳을 잃고 서 있노라니까, 저켠에서 내 짝꿍의 명랑한 목소리가
들린다.
  "야! 여기야 여기. 날래날래 오라우야."
  "응, 그래. 날래 가겠시유."
  잽싸게 내 자리로 가 앉았지. 앉자마자 내 짝궁,
  "동무, 동무래 방학 동안에 밥만 먹구 살만 찌웠구만."
  이렇게 내 가슴에 상처를 낸다.
  "동무는 반동이야요. 날래날래 청소하구 물도 떠오라우야. 그래야디 아오지 탄광 면하디."
  역시 여자는 말이 많아서 턱에 수염이 안 나는가 보다. 그런데 내 앞 짝궁, 뒷 짝궁들이
나누는 소리는 어떤가.
  "어머머, 너 방학 동안에 너무 예뻐졌다. 얘."
  "정말이니?"
  "그럼, 정말이지. 그런데 비결이 뭐니? 나두 좀 예뻐보자 얘."
  "응, 그거... 자기, 내 자기, 도자기, 깍쟁이, 멋쟁이, 빚쟁이, 해삼, 멍게, 말미잘, 불가사리..."
  "아아, 알았어. 그만 그만."
  "이건 육백만 불이 아닌 육백 원짜리 비결이니, 너만 알고 있어야 돼."
  "응, 알았어."
  그렇게 손가락을 걸며 약속을 해댄다.
  "사랑을 해라, 사랑을. 그러면 호박꽃이라도 일 분만에 장미꽃이 되느니라."
  "정말, 정말이렸다? 히히히... 그러면 나한테도 한 개만 소개해 줘라. 으응?"
  미스 뻔순이들의 대화 속에 역시 남성 밝힘증이 속속 배어 있다.
  에그, 에그, 지긋지긋하게도 밝히는구나! 하하...호호...히히... 여기저기서 터지는 웃음소리.
  우리 얼마만인가? 50일 동안을 참고 수다를 못 떨었으니. 그 동안 엄청 수다 고프기도
했겠지. 그래. 알 만하다. 쪽박을 깨든 필통을 깨든 속 풀리는 대로 수다를 떨어라.
  딩동댕, 딩동댕...
  차임벨 소리와 함께 아담 사이즈에 안경을 걸친 똘만씨 담임 선생님 등장이다.
  "선생님 안녕?"
  "여러분 안녕?"
  이어 시작된 담임 선생님의 말씀.
  "방학 동안 아무 일없이 이렇게 모두 다시 만나니 기쁘다. 새로운 각오를 가지고
신학기엔 더 좋은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마음가짐을 가다듬기 바란다. 오늘은 개학이자
모의고사를 실시하는 날이니 부정행위는 절대 하지 말고, 방학 동안에 쌓은 자기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해서 좋은 성과 있기를 바란다."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여기저기서 소근소근.
  "너 시험공부 많이 했니?"
  "방학이 며칠이냐 된다고 공부냐?"
  "언제 우리가 공부하고 시험 봤니?"
  아유, 아유! 이 계집애들아, 한숨이 찬란하구나.

    

성적표를 기다리는 셰퍼드

  봄 방학.
  '봄'자가 붙긴 붙었지만, 봄이라기엔 너무 을씨년스럽고 매력 빠진 봄 방학이다. 이 매력
빠진 봄 방학은 나를 집 지키는 강아지로 만들뿐이다. 이유는 학년말 성적표 때문이다.
  그 성적표가 배달되어야 하는 건가? 나는 그걸 꼭 받아야만 하는 건가?
  인생이란 이렇게 째깍째깍 돌아가는 시계바늘처럼 정확하게 쪼개며 사는 걸까?
  회의에 회의를 거듭하며 앉아 있는 나. 아, 한심스런 내 인생.
  그러든저러든 내 신세는 우체부 아저씨 목소리만 기다릴 수밖에 없는 처지다.
  월요일.
  우체부 아저씨의 그림자도 안 보인다. 이 골목에는 바쁜 사람이 하나도 없는 모양이다.
연애 때문에 바쁜 사람도 하나 없는 모양이다.
  그렇지, 우체부 아저씨가 혹시 아픈지도 몰라. 그럼 어떡하지? 문병, 문병을 가볼까?
어허, 정말 내가 돌았나?
  화요일.
  "편지요!"
  저게 무슨 소린가? 편지, 편지가 왔다잖아. 한데 우리집이 아니고 옆집이었다. 오늘도
허탕이다.
  수요일.
  시간은 왜 이렇게 안 가는 건가? 꾸물꾸물, 아우 지루해. 내 신세가 처량하다. 비참하다.
사랑하는 사람의 편지도 아닌 성적표를 받기 위해 이토록 우체부 아저씨를 '모가지가 길어
슬픈 짐승'처럼 기다려야 하다니...
  목요일.
  아침부터 따르릉 전화벨이 울린다.
  "여보세요?"
  "희자구나. 뭐하니?"
  "나야 알다시피 셰퍼드지 뭐."
  "도둑을 기다리는 셰퍼드야 믿음직스럽지. 하지만 네 꼴은 그리 믿음직할 것 같지가
않은데?"
  "맞았어. 그게 나를 슬프게 하는 거야."
  "호호... 피차마차 역마차다 얘."
  아, 피곤하다 피곤하다. 신경전이란 정말 괴로운 것. 배트맨이나 플래쉬맨보다 더 빨리,
맥가이버보다 더 신속, 정확하게 달려나갈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는데, 무정한 우체부
아저씨는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감감 무소식이다.
  금요일
  운명의 금요일, 비록 13일의 금요일은 아니지만, 예감이 다소 떨떠름하다.
  똑딱, 똑딱... 10시, 11시... 오후 1시, 2시...
  아, 들린다. 틀림없이 들린다. 그래서 백 미터를 15초대로 달려 문을 박차고 나갔다. 한데
동생녀석이 먼저 골인해 있었다.
  그 녀석은 아예 대문 앞에 수시간 전부터 보초를 서 있었다. 그 녀석도 성적표 배달
아저씨를 영접하기 위해서일 거다. 가엾구나, 가엾어.
  "누나, 이거 뭔지 알지?"
  "얘얘, 주인이 누군데 네가 왜 갖고 설치냐?"
  "진짜 주인은 엄마 같은데."
  능글스럽게 녀석은 꽁무니를 빼려 한다.
  "어머머, 얘가 돌았나?"
  "돌아서서 가는 나를 왜 불러. 왜 불러...?"
  "아유, 쟤가 사람 죽이네."
  그 녀석의 소매자락을 나꿔채자, 씩 웃는 녀석의 얼굴에는 협상 카드가 그려져 있다.
  "그래, 좋다. 협상조건은 뭐니?"
  "..."
  "알았어. 영화구경시켜 줄테니, 이리 내놔."
  이제 됐다. 일주일 동안의 강아지 신세, 이제는 면하는구나.
  펴 볼 게 뭐 있어. 우선 서랍이란 창고에 보관하고 봐야지. 보는 거야 도장 찍을 때도
기회가 있으니까.

    

해피 맨이냐, 그레이트 맨이냐?

  "여러분들 이 다음에 크면 어떤 사람이 되고 싶지요?"
  "청춘예찬"을 배우는 국어시간에 선생님이 한 질문이다.
  "대통령 부인이요."
  "의사요."
  "교수요."
  "음악가요."
  끝없이 계속되는 그렇고 그런 대답. 모두가 일에 대한 사명감이 아니라 계산적인 대답이다.
얼마나 화려하고, 얼마나 부유할 수 있는가 하는 컴퓨터식 계산법에 의한 해답들이다.
  그런데 구석에 앉았던 희영이가 그 틈에 낀다.
  "전 제2의 하느님이 되고 싶어요."
  너무 뚱딴지 같은 발언 탓에 교실 안은 와르르 웃음바다가 된다.
  항상 괴짜 같은 말을 잘하고, 괴짜 같은 행동을 잘하는 아이라서 별명마저 '괴물'이다.
  여학생의 별명이 괴물이라면, 이건 분명 명예훼손감이다. 하지만 그의 행동이 너무
엉뚱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붙여진 닉네임인 걸 어떡하는가.
  "아니, 하느님이 되고 싶다니? 그게 무슨 뜻이지?"
  우리 학교에서 희영이의 가치를 인정해 주는 유일무이한 사람은 바로 국어 선생님이다.
  "전 사실은요, 화가가 되고 싶어요. 그리고 제 그림은 가장 순수를 표현하고 싶어요.
완벽한 순수죠. 저의 완벽한 순수를 본 순간, 사람들은 자살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거예요.
물론 소수의 사람이겠지만요. 순수를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역시 소수일 거예요."
  어머, 어머... 이 구석 저 구석에서 터지는 감탄사. 역시 우리들로는 상상도 해보지 않은
괴물 같은 소리다.
  "역시 희영이다운 발언인데. 여러분들 조용히 해요. 내가 한 가지 묻겠어요. 순수를 느낄
수 있는 소수의 사람은 자살을 한다고 했는데, 왜 자살을 해야 되지요?"
  "완벽한 순수를 느낀 순간, 인간은 존재할 수 없을 거예요. 인간은 너무 불순하니까요."
  여기저기서 다시 웅성웅성.
  "알겠어요. 그런데 희영이, 구태여 그러허게 완벽한 순수를 표현할 필요가 있을까?
인간다운 한계 안에서 그 인간을 표현시키는 게 예술이 아닐까?"
  엉뚱한 희영이의 발언으로 예술, 순수... 뭐 그런 단어들이 분주히 풀이되고, 정의가
내려지고 한다.
  그러다가 선생님은,
  "여러분들, 여러분들은 해피 맨(happy man)이 되고 싶어요? 그레이트 맨(great man)이
되고 싶어요?" 하고 다시 질문을 한다.
  "해피 맨이요."
  "그레이트 맨이요."
  역시 대답은 엇갈린다.
  "됐어요. 조용히 하세요. 내가 옛날 여학교 시절엔 모두가 그레이트 맨이 되기를 원했어요.
그런데 오늘 여러분들을 보니 거의가 다 해피 맨이 되기를 원하는데 아마 이것이 세대차인가
보죠."
  이렇게 해서 다시 와글와글. 해피 맨이 우선이다. 그레이트 맨이 우선이다. 저마다들
중구난방으로 떠들어댄다.
  행복한 삶이 우선일까? 위대한 삶이 우선일까? 나는 수업시간 내내 그 생각만 했다.
  행복한 삶엔 영혼이 없고, 위대한 삶은 너무 힘겹다.
  사람은 누구나 두 길 중에 한 길을 택해서 살고 있다. 많은 사람은 해피 맨이기를 원한다.
그 이상의 것은 그들에게 아무 관심거리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소수의 사람은 희영이 말처럼 순수를 느끼고 자살할 수 있는 아마 그레이트 맨
쪽을 택할 것이다. 인류가 존재해 오는 동안 어느 시대에서건 소수의 위대한 사람은
있었으니까. 그리고 인류의 역사는 그들에 의하여 하나의 길이 제시되었으니까. 이 길을 택한
사람은 숙명적인 사명감을 가진 사람들이다. 외롭고 고달프고 힘겨운 길. 하지만 이 고행의
길을 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그들의 숙명이다.
  나는 역시 해피 맨이기를 원하는 평범한 아이다. 하지만 내 머리 위에는 위대한 삶을 살고
있는 소수의 사람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삶을 나는 존경한다.
  나는 누가"나중에 무엇이 되고 싶어요?"라고 묻는다면 아주 조용히 대답해 주고 싶은 말이
있다.
  그러나 이 말은 아무에게나 하고 싶지 않다. 내가 가장 좋아할 수 있는 사람, 바로 그
사람에게만 작은 목소리로 들려 주고 싶은 말이다.
  "난 바닷가에 가서 살고 싶어요. 많은 배가 떠 있지만, 바다는 그 배에 점령당하지 않아요.
땅하곤 달라요. 인간에게 완전히 점령되고 만 땅하고는요. 바다는 너무 싱싱하고 너무
당당해요. 난 그 바다가 좋아요. 바닷가에 가서 살며 나는 거기에 있는 학교의 선생이 되고
싶어요. 교실에서 수업을 하면서도 바다를 볼 수 있어요. 소나무가 우거진 사이로 바다는
모습을 드러낼 거예요. 아! 가능하다면 동해바다가 좋겠군요. 동해바다는 해가 떠오르니까요.
그것도 역시 오염되지 않은 순수일 거예요. 나는 그 바닷가에서 아이들과 생활할 거예요.
그리고 아이들한테 꼭 한 가지는 가르쳐 주고 싶어요. 그건 자연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청각이예요. 자연은 정말 온갖 소리를 다 내거든요. 그러나 그 소리를 분별해서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아주 적어요. 그 소리를 들으려면 애정을 가지고, 깊은 애정을 가지고 항상 훈련을
쌓아야 해요.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는 훈련을요. 이렇게 된 사람은 행복해요. 나는 그 행복을
아이들한테 가르쳐 주고 싶어요. 이건 진짜 완전한 행복이거든요."

    

타인을 통한 성장의 길목

눈밭 위에 켜진 촛불

  비가 오고 있다. 바람도 분다.
  지금은 2월 하순. 아직 눈밭이 희끗희끗 나아 있는데, 벌써 봄이 오는가 보다.
  그 비, 바람은 아마 봄을 몰고 오는 소리인지도 모른다.
  봄은 지상에 오기 위해 이런 진통을 겪어야 하나? 시련을 겪지 않고 얻어지는 축복은
없는가? 자연은 무엇을 위해 이토록 힘든 변모를 계속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바람에 덜거덕거리는 창을 본다. 노을과 햇빛이 들어오고, 눈송이와 빗줄기를
맞이하는 창. 먼 교회당 종소리를 스케치할 수 있고 내 마음의 문이 끝없이 넓어지는 창.
나는 일상에서 내 방의 창을 가장 사랑한다. 이제 멀지 않아 내 창가엔 봄날의 아지랭이가
피어오를 거고, 그리고 황매화의 진노란 꽃송이가 내 방을 넘볼 것이다.
  아니, 무엇보다 나는 봄날 밤, 내 창으로 기어 들어오는 소쩍새 울음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 울음소리는 생각만 해도 너무 처절해서 나는 감당할 자신이 없다. 소쩍새란 놈은 무슨
숙명으로 그토록 몸 속의 피를 토해 내야만 할까? 피를 토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생리,
무엇이 그 작은 생명 속에 그토록 처절한 슬픔을 만들어 주었을까?
  나는 바람에 흩날리는 빗줄기를 보며 수경이를 생각해 본다. 그녀는 소쩍새처럼 내면의
불순물을 토해 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결벽증을 지닌 여자였다.
  푸른 하늘 밑에 뻗어 있는 미류나무의 줄기가 아름답다고 느끼며 나는 수경이와 걷고
있었다.
  잎이 떨어진 미류나무의 줄기는 언뜻 보기에는 갈색 같지만 자세히 보면 자주빛과
회백색의 은은한 빛을 지니고 있다. 채광에 따라 물체가 지닌 고유한 색이 변한다는 후기
인상파들의 이론이 그럴 듯하다는 생각이 든다.
  가끔 바람에 은가루처럼 잔설이 날리고, 날린 잔설가루는 볼에 상쾌하면서도 섬뜩한
감촉을 남겼다.
  "민호씨, 우리 저쪽 미류나무 밑에 가서 환생의식을 할래요?"
  "환생의식? 그게 뭔데?"
  "환생의식. 다시 태어나는 의식 말예요."
  "...?"
  "저는 이 의식을 꼭 치르고 싶었어요. 다시 태어나는 거죠. 몸과 마음, 기억까지도."
  "그런 의식을 어떻게 치르지?"
  "저는 환생의식을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 방법을 쭉 생각해 봤어요. 영세, 세례,
수계... 이런 모든 의식도 지금 저와 같은 갈망에서 생겼을 거예요. 하지만 저는 그런 방법은
싫어요. 너무 의례적이고 형식적인 방법 같아서요."
  "그럼 어떤 방법이 있지?"
  "민호씨는 그냥 가만히 있으세요. 의식을 치러야 할 사람은 저니까. 그냥 민호씨 앞에서 그
의식을 갖고 싶어요."
  햇빛을 받아 잔설가루는 은빛, 금빛으로 반짝였다. 가끔 까치가 푸드득 날아가고 그 날개의
작은 움직임에도 공간은 율동 했다. 사위가 너무 고요하기 때문이었나 보다.
  수경이는 미류나무 밑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그 나무 밑에 있는 바위에 나를 앉히고 내
무릎 앞에 꿇어 앉았다. 그리고 가방 속에서 세 개의 둥글고 큰 초를 꺼내서 눈 위에
세워놓고 불을 붙였다.
  초는 눈 위에서 반짝이는 불꽃을 일으키며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몸을 태워 빛을 뿜는
초의 영혼, 나는 불꽃 속에서 수경이의 경건한 얼굴을 보고 있었다.
  "민호씨 기도해 본 적 있어요?"
  "아니. 하지만 가끔 내 창으로 들려 오는 교회 종소리를 들으며 그 종소리를 마음으로
스케치해 봤지."
  "됐어요, 그때 그 마음을 가져주면 돼요. 제가 기도를 끝내는 동안 민호씨는 그 마음을
생각해 주세요."
  수경이는 촛불 앞에 꿇어 앉아 긴 기도를 드렸다. 햇빛은 눈 위에서 보석처럼 반짝이고 세
개의 촛불은 작은 미동도 없이 곧게 타들어갔다. 멀리서 아주 멀리서,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수경이는 무엇을 빌고 있는 걸까?
  나는 그녀의 부드러운 어깨 위에 늘어진 긴 머리카락을 보며 애절한 슬픔 같은 것을
느꼈다. 이윽고 수경이는 울고 난 아이처럼 상기된 얼굴로, 아니 정말 울고 난지도 모르는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민호씨, 저는 기억 속으로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을 가끔 해요. 하지만 그건 언제나
불가능이었어요. 오늘 저는 민호씨에게 꼭 고백하고 싶은 게 있어요. 이건 민호씨 하고는
상관 없는 일이에요. 저는 제 내면 깊은 곳에 있던 기억을 끄집어내서 누군가에게 털어놓는
순가, 그 기억에서 도망치고 싶은 거예요. 그것뿐이에요. 오늘 이 환생의식이 끝나면 저는
민호씨로부터 떠날 거예요. 그럴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제 기억을 간직하고 있을 사람, 그
사람 하고는 얼굴을 맞댈 수가 없어요."
  수경이는 흐느끼기 시작했다.
  "민호씨, 저는 아기를 밴 적이 있었어요. 대학 1학년 때였어요. 친구들과 바다에 갔다가
거기서 일어난 일이었어요. 저는 뱃속에서 자라는 아기를 죽였어요. 병원의 차가운 수술대
위에 누워 있을 때, 그 수술대보다 더 차가운 금속성을 내는 의사의 손에 의해 아기는 죽어
갔어요. 저는 그날 밤 아기가 '엄마 안녕'하며 새싹 같은 손을 흔드는 꿈을 꾸었어요. 저는
그 꿈을 꾼 다음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이었는가를 비로소 깨달았어요. '엄마 안녕' 새싹
같은 손을 흔들며 사라지는 작은 생명, 저는 이 무서운 기억에서 풀려날 수가 없었어요.
밤마다, 밤마다 꿈을 꾸며, 불면으로 나는 괴로워 했어요. 그림을 그리면 그 화폭 속엔 항상
아기가 있었어요. 그 주위엔 꽃밭이 있었구요."
  나는 비로소 수경이의 환생의식의 뜻을 알았다.
  나는 수경이를 껴안고 울고 싶도록 내 자신도 순수해짐을 느꼈다. 그러나 수경이는 자신의
고백을 끝낸 다음 묵주를 하나 내 손에 쥐어주고 홀연히 떠나 버렸다.
  나는 수경이를 잡을 힘이 없었다. 무엇이라 설명할 수 없는 상황 아래서 나는 꼼짝달싹할
수가 없었고, 눈 위에서 타들어 가는 촛불을 지켜보며 수경이의 얼굴을 떠올리고만 있었다.
  그 후 수경이는 정말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어딘가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을 수경이다.
  이즈음은 아기나, 꽃밭이 아닌 그림일지도 모른다.
  나는 수경이가 나타나 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녀는 틀림없이 내 앞에 나타날 것이다.
  내가 그녀의 고백 같은 것은 옛날 옛날에 잊어버리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말이다.
  수경이는 사랑스러운 여자다.
  내가 만난 단 한사람의.

    

철없는 예비신부들

  친구가 시집을 간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석달 만에.
  성미가 유난히 게으른 친구였는데, 시집은 무척 잽싸게 간다. 단발 머리티나 좀 벗어나거든
생각할 일이지. 뭐가 그리 바빠서 시집부터 가려는 것일까?
  아무튼 그 친구의 결혼 소식은 우리 친구들간에 큰 화제가 도지 않을 수 없었다.
  "얘, 경자가 글쎄 시집을 간댄다."
  "어머머, 소름 끼친다, 얘!"
  "아니, 벌써부터 무슨 고생이니? 아이스크림이나 좀더 먹다 갈 것이지."
  "그러나저러나 실감 나니? 시집이라는 게...?"
  "호호... 글쎄. 다음은 누구 차례일까? 혹시 네 차례가 아닐까?"
  온갖 수다를 떨던 친구들이 어찌 된 영문인지 내게로 화살을 집중한다.
  드디어 경자의 결혼식날.
  미장원으로, 드레스 살롱으로, 꽃집으로... 생쥐 솔방울더미 들락거리듯 부산을 떨며
우리들은 바쁘게 움직였다.
  "얘, 너 머리, 스페인 공주 같애."
  "아유, 눈부셔! 역시 신부는 한 송이 우아한 꽃이구나!"
  "히야신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그 전설의 꽃 같애."
  "어쨌거나 너무너무 멋있다, 얘!"
  떼지어 다니는 참새들처럼 우리는 온 예식장을 발칵 뒤집어 놓을 만큼 소란스럽게
입방아들을 찧었다
  "얘들아! 누가 신랑 소개 좀 해봐."
  "응, 내가 하지. 에, 신랑으로 말할 것 같으면, 방년 이십 팔 세, 키 1미터 75센티, 서울대
졸업에 군복무 마침. 현재 제일무역회사에 근무 중. 그리고 장래가 지극히 촉망되는 엘리트
대리. 거기에 부티나는 집안의 장남..."
  "와, 그만해, 그만해. 기죽는다 얘. 한데 그 멋진 싸나이를 어떻게 만나게 되었다니?"
  "어-- 그건 경자가 가정교사로서 가르치던 중3 여학생의 큰오빠라는 인연 때문에..."
  "어머! 그랬었구나!"
  "월척의 월척을 낚으셨구먼!"
  "월척을 낚다니? 낚싯대를 든 건 경자가 아니라, 남자 쪽이었대요!"
  "그거야 당연하지. 가정형편이 어렵다는 것 외에 경자 흠잡을 게 어딨니?"
  "아암, 그럼. 서울 하고도 명문 여자고등학교의 학생회장에, 6년 우등, 6년 개근...그것뿐이
아니다. 성실하고 리더십도 두드러져..."
  "그래 맞아. 그 남자가 똑똑한 거야. 그대로 놔두면 누가 먼저 낚아갈지도 모르니, 미리
붙들어 매두자 이거였군!"
  "바로 그거야!"
  "그 남자. 가정이 넉넉하다는데, 경자 대학 공부나 좀 시켜 주면 좋겠다. 그지?"
  "응, 그렇잖아도 이렇게 결혼을 서둘게 된 건 신랑이 가을에 미국으로 유학을 가기
때문이래. 그때 경자도 같이 가서 거기서 공부할 계획이래더라."
  "어머! 이거야말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구나!"
  "너무 멋있다.!"
  "역시 경자다운 결혼이구나!"
  "뭐든지 스타트가 좋아야 한다잖아. 경자 덕분에 우리도 미국나들이 하는 거 아니니?"
  "그래. 그랬으면 좋겠다!"
  어찌 되었든 경자의 결혼은 우리들의 축복이며, 선망이며, 경이로운 꿈이었다.
  식장을 꽉 메운 하객들, 붉고 흰 카핏, 아름다운 샹들리에, 화려한 꽃바구니, 우아한 양초...
드디어 예식이 진행되었다.
  "신랑 입장하겠습니다."
  식장을 울리는 사회자의 목소리.
  감색 싱글에 핸섬한 청년이 성큼성큼 들어선다. 정말 멋진 귀공자였다.
  은은하게 웨딩 마치가 울려 퍼지며 신부가 입장한다.
  "얘, 정말 공주 같애!"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우아한 차림의 경자가 천천히 걸어 온다. 모든 사람들은
가슴을 툭 터놓고 아름다운 그 한 쌍의 새로운 부부를 축복해 주고 있다.
  식순이 모두 끝나고 신랑, 신부 퇴장. 우아한 한 쌍의 학처럼 남녀가 이 지상에서 새
부부의 인연을 맺는 순간. 여기저기서 꽃사슬 축포를 터뜨렸고 꽃가루를 흩뿌려 댔다.
  결혼행진곡에 맞춰 살포시 팔에 팔을 걸고 천천히 걸어나오는 신부의 얼굴에는 행복의
미소가 가득 담겨 있었다.
  우리의 가슴에는 묘한 감회가 일었다. 하얀 면사포를 쓰고 행복한 미소를 짓는 경자를
보면서, 결혼은 정말 행복한 것인가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 내 왕자님은 지금 어디에서 나를 찾아 헤매고 있을까? 그가 서울대 졸업생이
아니어도, 그가 부유한 집안의 귀공자가 아니어도, 나만을 진실로 사랑하고, 행복한 가정을
꾸며 나갈 수 있는 사람이면 될 터인데...
  히히히... 이렇게 생각하다 보니 되게 쑥스럽다. 하지만 나는 아직 철없는 계집애일
뿐이라구!

    

비오는 날의 스케치

  아침부터 하늘은 잔뜩 찌푸려 있다. 이런 날을 두고 흔히 아침 굶은 시어머니
표정같다고들 한다. 하늘도 가끔은 심술을 부리고 싶은 때가 있는가 보다.
  그러고 보면, 하늘은 사람의 마음을 조정하는 마술사 같다. 5월의 하늘은 싱그럽고, 사람의
마음을 들뜨게 한다. 7월의 하늘은 죽고 싶도록 권태롭다. 긴 장마철로 접어들면 지겹고
짜증이 난다. 10월의 높푸른 가을 하늘은 인생을 투명하고 아름답게 꾸려나가도록 유혹한다.
그리고 차가운 겨울 하늘은...
  겨울 하늘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지? 아, 그거야. 차갑고 고독한 삶을 의미하지.
  이렇게 하늘을 쳐다보며 나는 여러 가지 상념에 빠질 때가 종종 있다. 아무튼 하늘을
사람의 마음에 빗대어 보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다.
  찌뿌둥한 하늘은 하루종일 잘 참는다 싶더니, 수업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무렵부터
그만 울음보를 터뜨리고 말았다. 주룩주룩 쏟아지는 빗줄기가 제법 굵다. 이 겨울에 오라는
눈은 안 오고 때아닌 비가 나를 음울하게 만든다.
  양복점 추녀 밑에 옹기종기 모여 선 사람들은 모두 몸을 움츠리고 있다. 나도 그 사람들
틈에 끼여 비가 멈추기를 기다렸다. 그때였다.
  "우싼이요, 우싼! 우싼 있어요."
  비닐 우산을 옆구리에 끼고 여남은 살쯤 먹은 소년이 추녀 밑 사람들에게 우산을 팔려고
쭈빗쭈빗거린다.
  '우산이나 쓰고 팔든지... 저러다 감기 들면 어쩔려고... 쯧쯧.'
  어느새 소년의 옆구리에 있던 우산은 새 주인을 만나 하나 둘 팔려 나가고, 마지막 한
개가 손에 들려 있다. 그러자 그 소년은 '우싼이요, 우싼'하던 소리를 멈추고, 이리저리
두리번거린다.
  그러다가 정말 우연하게도 나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 나는 무안 당한 소녀처럼 얼른 시선을
아래로 깔았다. 아스팔트 위에는 기세 좋게 뛰어내린 빗방울들이 사방으로 튕겨가고 있다.
  "누나! 이 우산 쓸래요?"
하고 발그스름하게 언 손에 들린 우산을 내게로 쑥 내민다.
  "나, 나 말이니? 응, 그래. 그거 얼만데?"
  "아녜요. 이건 여기가 조금 찢어졌거든요. 그냥 쓰세요."
  그러더니 잽싸게 우산을 내게 주고는 빗속으로 뛰어간다.
  "아니, 얘, 얘!"
  이같은 거래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 나는 다급하게 불렀지만, 빗속으로 사라진 그
소년의 모습은 다시 보이지 않았다. 옷이 흠뻑 젖은 채 우산을 팔던 소년의 모습이 강하게
내 마음 속을 파고들었다. 새삼 공평한 분배가 안 되는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적나라하게
본 것 같아 괜히 마음이 무거워졌다.
  "뭘 생각해요? 공짜로 생긴 건데 같이 쓰고 갑시다. 난 버스 타는 데까지만 가면
됩니다."
  바로 내 옆에 섰던 남자가 불쑥 이렇게 말했다.
  "안 쓸 겁니까? 그럼 내가 쓰고 갑니다."
  이 따위 경우가 어디 있는가? 어린 소년이 비에 흠뻑 젖어가며 팔다가 남은 것이라고
해서, 아니 흠집이 조금 난 것이라고 해서 아무렇게나 생각하는 그 남자가 정말 미웠다.
  내가 언짢은 표정으로 눈을 내리깔고 있는데, 그 남자는 우산을 쭉 펴더니 내 머리 위를
덮는다. 어쩔 수 없이 나는 그 남자와 함께 발걸음을 떼었다. 저만큼 버스 정류장이 보인다.
그 순간이었다.
  "어, 차가 왔네요. 나 먼저 갑니다."
  우산을 내게 급히 넘겨 주고 쏜살같이 달려가는 무례하고 이기적인 남자를 나는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지독히 이기적인 인간아!"
  짧은 머리의 그 남자는 어느새 버스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그 남자가 탄 버스가 빗줄기
속으로 미끄러지는 것을 보며, 우울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한 귀퉁이가 찢어진 비닐 우산. 그 찢어진 구멍 속으로 짙은 잿빛 하늘이 보였다. 비에
젖은 소년은 자신의 작은 여유를 우산 없는 사람에게 나누어 줄줄 아는 큰 마음을 갖고
있는 거다.
  그래, 그 마음이 바로 천국이다. 점점 큰 감동이 내 가슴으로 밀려다. 십자가 앞에서
설교하는 목사보다 더 큰 감동을 소년은 내게 준 것이다.

    

한 덩이의 눈, 그것을 선물로 받던 날

  나는 아침마다 똑같은 길을 걸어서 직장으로 간다. 그 시간은 내게 무한한 자유를 준다.
가로수가 날마다 변하는 모양이며, 옷깃을 스치고 지나가는 낯모르는 사람들의 옷차림새를
살피면서, 무한한 공상을 할 수 있어 항상 즐겁다.
  그런데 얼추 삼 개월 전부터 재미난 얘기거리가 생겼다. 거의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서 꼭
맞닥뜨리는 사람이 생겼다.
  그 사람도 아직은 공부를 해야 할 나이인데, 나처럼 대학 배지를 못 달고 직장을 다니는
사람 같았다. 처음은 우연히였고, 그 다음은 호기심으로, 요즘은 꼭 만나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나는 출근길에 그 사람의 모습을 찾게 되었다.
  그 사람 역시 나와 같은 기분인 것 같다. 나와 눈이 마주치면 왠지 당혹스러워 하고, 또
한편으로는 매우 반가워하는 기색이 뚜렷하다. 항상 감청색 작업복에, 겨드랑에 낀 한 권의
책, 그리고 도시락을 들고 다니는 그 사람. 부유한 집 자녀들이 지닌 풍요로움은 없어도,
진실한 생활인의 모습을 듬뿍 지닌 그 사람.
  오늘은 아침부터 눈이 내렸다. 아니, 아침부터 내린 것이 아니라 간밤부터 내렸고, 이
출근길에는 상당한 양의 눈이 쌓여, 서울은 온통 하얀 은세계로 변해 있었다. 사실 서울은
눈이 내리기엔 매력 없는 공간이지만, 그래도 눈은 서울을 버리지 않고 찾아와 주었다.
  그래서 이 아침의 출근길은 한결 색다른 맛이 난다. 가난한 소녀인 내게도 눈은 이렇게
풍요로움을 선사해 주었고, 나는 눈이 주는 풍요로움을 더 없이 만끽하면서 출근의 발길을
재촉했다.
  한데 아침마다 만나는 그 사람. 그 사람의 영상이 언뜻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오늘같이
즐겁고 상쾌한 날, 내 마음은 이미 그 사람을 찾고 있었다.
  늘 그 사람을 만나던 장소에 이르자, 한 사람이 가로수에 등을 대고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 사람 역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싶다. 갑자기 발갛게
얼굴이 달아올랐고 가슴도 마구 뛰었다. 그 순간 어떻게 할까 망설이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사람 앞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 그는 불쑥 내 앞을 가로막아 섰다.
  "매일 만날 수 있어 기쁩니다. 이걸 선물로 드리고 싶어서 기다렸습니다."
  그리고는 꼭꼭 뭉친 한 덩이 눈을 내게 불쑥 내미는 것이었다. 나는 얼떨결에 그 눈덩이를
받아 들며, 약간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그리고 도망치듯 그의 앞을 지나쳤다.
  그 사람이 건네 준 최고의 선물. 한 덩이의 눈.
  그 사람은 순수한 자연을 내게 주었다. 하얗게 채색된 자연을. 나는 한없이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 사람의 마음 씀씀이가 더 없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내일 아침, 그 사람을 만나면 나는 환한 웃음을 답례로 줄 것이다.

    

아빠는 멋쟁이

  성적!
  참말로 인간이 만들어낸 얄궂은 존재이다.
  '김난원'이란 절대적인 (세상의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존재인 나를 소숫점 두
자리까지 계산해서 '72.38'로 평가하다니, 이것은 과연 정당한 평가라고 믿어야 하는가?
  당일치기, 시간치기, 분치기, 초치기에 따라 오르락내리락하는 점수. 그런데 세상 모든
사람들은 이 놈의 점수를 뱃속에서 달고 나온 훈장처럼 온통 그대로 믿어주니, 나의 고민은
여기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얘, 높지도 않은 성적이 한참 미끄럼을 탔으니 어떡하니?"
  "할 수 없지 뭐. 적당한 시기에 아빠 도장을 꽝하는 수밖에."
  "얜 새삼스럽게 무슨 고민이니? 그럼 언젠 아빠한테 직접 도장 찍어 달라고 했니?"
  이런 수다를 쉴 새 없이 해대는 계집애들. 그 놈의 병만 안 걸렸으면 85점까지는 올리는
건데...
  호호... 병? 그래, 그것도 병은 병이지. 사람을 앓게 만드니까. 모범생인 내게 그
'인생무상'이란 시건방진 병이 찾아올건 또 뭐람.
  사는 것도 무상, 죽는 것도 무상. 이런 판에 그까짓 단어, 공식, 연대, 기호 외우게 됐어?
선생님도 시시, 친구들도 시시, 수업도 시시, 모든 것이 시시해지기를 석달. 그 '무상'과
'시시' 때문에 시달리고 시달리다 보니, 평균점수가 자그마치 10점이나 급강하했다.
  오, 하느님!
  모든 것이 시시하고 무상하게만 보이는 이 소녀가 똑똑하옵니까? 아니면 노트 필기를
깨알같이 해 놓고 매일매일 맛있는 음식을 즐기듯이 형광색 줄을 쪽쪽 그으며 달달
외어대는 내 짝꿍 보경이가 더 똑똑하옵니까? 저는 보경이를 경멸하옵고, 보경이는
저를 경멸하옵니다.
  하느님, 설사 하느님도 인간처럼 시시한 심판관은 아니겠지요?

  저녁을 먹고, 텔레비젼을 보고, 모든 것은 어제와 다름없이 정상적으로 진행되는데, 엄마가
느닷없이 채근한다.
  "얘, 너 오늘 방학했지? 한데 성적표는 왜 안 보여 주니?"
  엄마, 좀 잊어버리면 어떻수? 하필이면 아빠 있는 자리에서 그걸 들출 게 뭐유?
  "뭘 우물쭈물하니?"
  할 수 없이 가방 속에 모셔 온 성적표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아니, 이것도 공부라고 했니? 하늘이 두 쪽이 난대두 도장은 못 찍어 준다, 못 찍어 줘.
아니, 네게 못해 준 게 뭐니? 사달라는 거 다 사주고, 해달라는 거 다 해주고. 거기다
독방까지 줬잖니? 그런데 이런 성적표를 보여 줘야 속이 시원하니? 기가 막히다, 기가
막혀."
  예상했던 폭탄이지만, 견디기가 너무너무 힘들다.
  옆에 점잖게 앉은 아빠. 아무 말도 안 하고 점잖게만 앉아 있다. 아무튼 무척 부끄럽고
죄송하고, 어찌 할 바를 모르겠다.
  이윽고 아빠의 목소리가 나온다.
  "여보, 조용히 얘기를 끝내구려."
  "뭐요? 조용히 끝내라구요? 이런 성적표를  들고 온 아이를 그냥 내버려 두라고요?
당신도 기가 막히는구려."
  "성적이야 떨어질 수도 있는 거지. 앞으로 더 노력하라고 타이르면 될 것 아니요?"
  "못 해요. 난 당신처럼 그렇게 흐리멍텅하게는 못 해요."
  이렇게 해서 시작된 부부싸움. 싸움이라야 말다툼이지만, 아무튼 즐거웠던 저녁시간은 나의
그 성적표 때문에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이 죄인. 무릎이 저려오고 고개가 아파오고... 괴물딱지 같은
성적표는 과연 누가 처음 만들기 시작했을까?
  "당신하곤 얘기가 안 되겠군. 난원아, 일어나거라. 코트 걸치고 아빠하고 바람 좀 쐬자."
  난 오버를 걸쳐 입고 아빠를 따라나섰다. 찬바람이 전신으로 몰려왔지만 가슴은 상쾌했다.
  "난원아, 성적이 떨어질 이유라도 있었니?"
  아빠는 은근히 묻는다.
  "아니요. 그냥 공부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고 시시한 것 같아서요."
  "공부가 무의미하고 시시하다고...?하하하, 그거 꽤 발전된 생각이구나! 하지만 난원아,
지금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은 시기적으로 맞지 않아. 그런 회의는 대학에 들어가서 해도
늦지 않아. 그러니 지금은 남들처럼 똑같이 공부를 열심히 해야 돼."
  "네, 아빠."
  "엄마 심정도 이해해라. 그리고 좀더 열심히 공부해. 모두를 위해서..."
  나는 아빠 말씀을 속으로 되새겨 본다. 공부라는 것, 이것이 어찌 나 하나만의 일이겠는가.
우리 가족 모두의 것이다. 그동안 나는 공부가 나 혼자만의 것인 줄로 알았다. 그래, 모두를
위해서, 아니 적어도 엄마, 아빠를 위해서 나는 대학에 들어가야 한다. 아빠 말씀처럼,
모든 것에 대한 회의는 대학에 들어간 후에 하자. 그때 가서 안하게 되면 더욱 좋고.
  까만 하늘에 별이 총총하게 박혀 있다.
  나는 살그머니 아빠의 팔에 내 팔을 걸며 매달렸다. 응석을 부리고 싶었다. 우리는 천천히
골목길을 걸었다. 아빠와 나는 침묵 속에서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반짝이는 별처럼 많은
대화를.
  아빠, 멋져요. 정말 멋있는 아빠예요.

    

오이야, 누명을 벗겨다오

  내게 금식령이 내려졌다. 그것도 두 끼씩이나. 먹기가 취미인 내겐 분명히 푸른 하늘에서
떨어진 날벼락이 아닐 수 없다.
  분명히 성경 구절에는 '먹는 것은 죄가 아니다'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게 무슨 망신인가. 두 끼 굶는 것도 좋고, 이틀 굶는 것도 좋은데, 꼭 해결해야
될 일이 있다. 그건 내가 뒤집어쓴 누명을 벗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누구처럼 희생, 봉사정신이 두툼한 사람은 아니다. 또한 오늘일을 인정해 주는 사람도
없다. 한데 내가 왜 가만히 앉아 날벼락을 맞아야 하는가.
  아, 어찌하여 먹는 것을 좋아하다가 오늘 같은 비운을 맞게 되었는지...?
  오늘 일의 발단은 부엌 구석에 가지런히 놓인 시장 바구니에서 터졌다. 솔직히 나 같은
'걸귀'가 시장을 다녀온 바구니를 무심히 보아 넘길 순 없지 않은가. 오이와 요것조것 꽤
있었다. 우선 오이 한 개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누가 볼까봐 몰래 숨어서 오작오작
해치웠다. 그리고는 점잖게 물러 나왔다.
  한데 이게 무슨 소리인가?
  "아니, 누가 오이를 다 집어갔니? 경자 짓이지? 아무튼 저 애 있는 덴 아무 것도 못
둔다니까. 다 큰 애가 왜 그 모양이냐?"
  꼼짝 못하고 당한 것이다. 분명히 한 개는 내가 먹긴 먹었으니까. 그런데 이상하다. 분명
난 한 개밖에 손대지 않았는데, 나머지는 어디로 행방을 감추었단 말인가. 오이에 다리가
달려서 시장으로 원대복귀한건 아닐 테고...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나는 한 개밖에 안
먹었다고 애걸복걸 실토했다.
  "듣기 싫어, 이것아!"
하고 빽 소리를 질러대는 엄마에게 내 결백은 무참하게 묵살 당하고 말았다.
  이 무슨 꼴이란 말인가. 할 수 없이 몇 푼 안 되는 용돈을 탈탈 털어서 시장으로 발길을
옮기는 수밖에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오이를 사 가지고 돌아오다가 마침 이종오빠를 만나게 됐다. 휴가 중에 우리집으로
인사를 하러 오던 참이었다. 어쨌거나 신나는 일이었다.
  엄마의 꾸중 따위는 까마득하게 잊어먹은 채 크게 소리쳤다.
  "엄마, 오빠 왔어, 오빠!"
  호랑이 같던 엄마가 순간 순한 양으로 바뀌었다. 여자란 역시 웃는 얼굴이어야 할 것 같다.
  아무튼 오빠의 등장으로 나는 금식령에서 풀려나 허기진 배를 채우게 됐다.
  저녁식사 시간에 오늘 발생한 오이 도난사건에 대해 자세한 보고가 있었다.
  "하하하... 우리 꾀순이가 왜 이리 얌전한가 했더니, 거기엔 그런 사정이 있었군 그래."
  오우, 아빠. 아빠마저도 이 소녀의 결백을 전혀 믿지 않으시는 겁니까? 눈물까지 보이며
변명했지만, 아무도 믿어 주는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는 이종오빠까지도 나를 안 믿는 편에
가담했다.
  좋아요, 변명은 그만 두겠어요. 변명이란 비겁한 자가 하는 넋두리니까. 정말 치사가
찬란하다.
  그런데 오늘따라 어떻게 된 셈인지 내 눈물샘은 바닥이 난 모양이다. 다른 때 같으면 이
지경에 이르면 벌써 훌쩍거렸을 터인데... 눈물이 가뭄을 타고 심하게 졸았나? 오늘은 역시
불행의 연속이었다.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집에서 뛰쳐나와 거리를 마구 쏘다녔다. 머리 위에서는 별들이
반짝거렸다. 한참을 거닐다가 다시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나는 언니 셋과 같이 방을 쓴다.
  "어휴, 흉칙해. 그 꼴들이 뭐야? 꿈에 볼까 무섭네."
  내가 방문을 열고 들어서자, 오이 마사지를 하느라 조각조각 오이를 얼굴에 포장한 세
마리, 아니 세 명의 언니들이 질펀하게 누워 있다. 세상에, 그대들은 그토록 비겁한 방법으로
미를 추구해야만 하는가?
  "얘얘, 수고했어. 혼자 십자가를 지느라고 무거웠지? 이리 와서 누워라. 너도 해줄
테니까."
  두 귀가 꽉 막히는 순간이었다.

    

누구를 위한 가을인가?

  에, 이 가을을 맞이해 더욱 심각해질 유귀순의 늘어나는 몸무게 증가율에 대비하여 다음과
같이 긴급하고도 시급한 포고령을 내린다.
  첫째, 에어로빅 운동에 전력투구할 것.
  둘째, 입은 조금만 즐겁도록 할 것.
  만약 이 포고령을 지키지 않을 때, 야기되는 불상사에 대해서는 절대로 책임을 질 수 없음.
1992년 9월 1일 10시

  아닌게 아니라 진짜 내 몸무게는 폭발 직전에 놓여 있다.
  그래서 '구원의 길'을 지키며 독하게 마음 먹고, '하나, 둘, 하나, 둘' 소리도 드높게 그
에어로빅이랄까, 미용체조랄까, 체중 긴축정책이랄까를 열심히 했다. 한데 운동을 하고 난
한밤중이면 뱃속이 출출해서 잠이 안 온다.
  살금살금 부엌으로 침입, 찬장문을 가만히 밀어낸다.
  우와, 먹을 것이 지천이다. 아침 안 먹고, 점심 건너 뛰고, 저녁을 굶었던 미각이 한꺼번에
돋아난다. 손에 잡히는 대로, 보이는 대로 깨끗하게 먹어치울 수밖에.
  그러기를 일주일. 벅찬 기대를 가지고 저울 위에 올라섰다. 1킬로그램, 아니면
0.5킬로그램쯤이라도 긴축이 되었을 거라는 부푼 기대감으로.
  저울눈이 움직움직, 왔다갔다 한다.
  어어어! 이게 뭐야? 예전 내 몸무게를 가리키던 눈금에서 저울눈은 한참 더 가서 서는 게
아닌가? 그것을 내려다보는 내 머리는 어찔어찔 했다.
  아, 가을이여! 원망스러운 천고인비의 계절이여!
  울음을 참으며 애써 인내하는 갸륵한 내 마음이여!
  오, 신이여! 어깨부터 다리까지 원통형인 나는 어찌하오면 좋습니까? 이 가을에는 말이나
살찌울 것이지, 어이하여 이 몸까지 배려하옵니까?
  원망스런 가을이여!

    

절대로 결혼은 해야지요

  '말없이 죽어가서 한 줌의 흙이 될지언정 결코 결혼 따윈 안 하겠노라'고 온 가족 앞에서
선언한 말괄량이, 그 당돌한 계집애가 바로 오도용, 본인입니다.
  실은 이 엄청난 선언은 내 의사가 아니고, 완전히 강요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별놈의 강요도 다 있지요. 이처럼 멀쩡한 처녀, 시집 못 가게 하는 강요도 다 있으니
말입니다.
  우리집엔 딸이 다섯입니다. 그 중에서 이 몸이 막내딸이죠. 위로 언니 넷은 그럭저럭 짝을
찾아 훨훨 날아가 버렸고, 나만 혼자 남아서 밥짓기, 빨래하기, 청소하기... 정말 고되고,
재미없고, 지긋지긋한 나날을 보내고 있지요.
  며칠 전 음력설이라고 언니들 넷이 형부들 넷을 동반하고, 거기에다 조카들까지 합쳐서
모두 열네 명이 세배를 하러 왔었죠. 그야말로 기둥뿌리라도 빼갈 듯이 집 안팎이 시끌벅적
요란스러웠죠. 대식구의 점심이 끝난 후, 우연하게도 내 방에는 딸 다섯에 형부 넷이 모여
앉게 되었습니다.
  나는 슬그머니 약이 올라 심술을 부리고 싶었습니다.
  "큰 언니, 이 방엔 아빠 딸이 다섯 명인데, 아빠 사위는 넷뿐이잖아. 도대체 누가 아빠
사위 하나를 빼버린 거지?"
  순간, 요란한 폭소가 지붕을 들썩거리게 했습니다.
  그러자 중매를 꼭 서두르겠다는 큰 형부, 지금 당장 선보러 가자는 둘째 형부, 눈독
들여놓은 매제감이 있으니 걱정 말라는 셋째 형부, 어떤 사람을 원하느냐고 꼬치꼬치 묻는
넷째 형부. 역시 그 분들은 내 형부 될 자격이 충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뭡니까?
  "쬐그만 계집애가 벌써 시집 갈 생각만 하니?"
  큰 언니의 야속한 반박이 선창을 하자, 나머지 언니의 반박도 잇달아 터진 거죠. 여자 셋이
모이면 쪽박이 깨어진다더니, 정말 굉장하더군요. 당황한 나는 얼떨결에 '말없이 죽어가서 한
줌의 흙이 될지언정 결코 결혼 따위는 하지 않겠노라'고 선언해 버렸지요.
  얄미운 언니들은 메모지를 가져오더니 '1992년 모월 모일, 동생 도영, 결코 시집 가지
않겠다고 선언하다'라고 각서를 쓰게 한 후, 도장을 찍으라고 협박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형부들 앞에서 한입 가지고 두말 하기가 쑥스러워 '울며 겨자 먹기'로 눈 딱
감고 꽝 도장을 찍어 버렸지요.
  조금 전까지 중매를 서겠다고 기고만장하던 형부들의 입에서 '이왕지사 남자가 칼을
뺐으니 호박이라도 찌르겠다거나, 한번 중매를 서겠다고 했으니 막내 처제 시집 가는 걸 꼭
봐야겠다'는 말이 튀어나올 만도 한데, 왜 이렇게 침묵이 길어지는가요?
  정말 쩨쩨하고, 쩨쩨했어요.
  어쨌거나 그날밤은 가슴을 꽁꽁 앓아야만 했죠. 마치 사기 당한 기분이 들어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어요. 생각 끝에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앉아 큰 형부한테 편지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형부, 요즈음 경제사정이 매우 어려운 것 같아 제 마음이 몹시 슬프답니다. 막내동생의
결혼을 한사코 말린 큰 언니의 가슴인들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솔로몬의 지혜를 계승한 나의 계책은 결국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일주일 만에 온 형부의
답신 속에는 시집 안 가겠다고 쓴 내 각서가 동봉 되어 왔지요.
  '오! 신이시여. 이것은 비단 저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저와 평생 동반자가 될 그
사람에게 노총각 신세를 면하게 하려는 저의 사랑 가득한 충정임을 믿어 주소서!'

    

키 큰 남동생은 누나를 괴롭힌다

  누나보다 더 큰 남동생. 있을 수 있는 일인 것도 같고, 있을 수 없는 일인 것도 같다.
  내가 두 살 더 먹은 탓에 어렸을 때는 가끔 업어주기도 한 녀석인데, 이제는 목소리가
우렁우렁거리고, 코 밑에 수염도 거뭇거뭇 돋아나서 나를 여러 면에서 징그럽게 압도하고
있다.
  금년에 고등학교에 갓 입학한 동생은 키가 갑자기 커져 1백 72센티다. 나보다 17센티가 더
큰 셈이다. 거기다 얼굴은 장국영 비슷하고, 아이큐 1백 30에 야구선수이다. 성적도 평균
91점, 노래실력은 플라시도 도밍고를 능가하고, 그림도 수준급이다.
  이쯤 되고 보면 그야말로 이상형의 남성인데, 이 자랑스러운 동생이 가끔 누나를 괴롭히는
데 문제가 있다.
  우선 엄마, 아빠부터 나를 그 남동생과 지극히 차별한다. 슬하에 자식은 우리 남매뿐인데,
그 아들이 주위의 이목을 한 몸에 받는다는 이유 하나로 항상 이렇게 말한다.
  "얘, 네가 양보해라. 걔는 남자잖니?"
  "우리 동균이는 아무 걱정이 없어요. 모든 것을 제가 알아서 처리해 나가니까."
  대상이 없거나 구실이 없어서이지, 그것만 있으면 아마 엄마는 하루 종일 그 녀석
자랑으로 시간 가는 줄 모를 사람이다.
  아무튼 이런 편견으로 평가되는 남동생이기 때문에 누나 노릇하기가 매우 불편하다.
가끔은 시샘이 나고, 가끔은 밉기도 하지만, 나에게는 붙임성이 많은 동생임에 틀림이 없다.
  내가 학교에서 늦게 귀가할 때면 버스 정류장에 턱 버티고 서서 기다려 주는 보디가드도
그 남동생 몫이요, 좋은 만년필이라도 생기면, '이거 누나 가질래?'하고 선선 히 건네주는
선심도 그 남동생 몫이다.
  지난 수요일에는 그 남동생과 함께 종로서적으로 책을 사러 나갔다. 필요한 책을
사고, 동생과 함께 점심 겸해 빵을 먹으려고 고려당에 들렀다. 한데 거기엔 우리 반
수다쟁이들이 떼거리고 앉아 있었다. 그들은 남의 말하는 것을 유일한 즐거움으로 삼 는
친구들이다.
  나는 그들에게 손을 들어 알은 체를 해주고, 앉을 자리를 찾았지만, 빈 자리가 없어 그냥
나오고 말았다.
  그런데 이게 말썽의 씨앗이 될 줄이야 누가 알았는가. 이튿날 교실문을 들어서는 순간이다.
  "얘, 너 끝내주더라. 얌전한 고양이 싱크대 위에 먼저 오른다더니, 너 같은 새침데기에게
그런 멋있는 애인이 있다는 건 정말 빅 뉴스야!"
  "어느 학교 다니니?"
  "야구선수 같던데..."
  부러운 것인지, 야유를 하는 것인지 분간할 수 없는 알쏭달쏭한 질문들이 계속
쏟아진다.
  "응, 그래. 내 애인 멋있디?"
  이렇게 받아주고 말았다. 한데 말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돌고돌아 하루종일 화제가 되었다.
  내가 지나친 새침데기 짓을 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내 동생이 정말 눈에 띄게 멋
있어서일까?
  옆자리 순자까지도 한 말씀 거든다.
  "네가 지독한 새침데기인 줄은 알았지만, 나한테까지 싹 비밀로 할 수 있니?"
  "미안해. 그렇게 섭섭하면 내 남자 친구 너한테 줄까?"
  "어머머! 얘가 왜 이래?"
  "정말이야. 난 별로 걔 관심 없어."
  정말 오빠라면 나는 순자한테 소개해 줄 수도 있었다.
  어쨌거나 오늘 하루 우리 반에서 선망의 대상이 되었던 나.
  집에 오니, 자신이 뭇여학생들 입에서 화제가 된 것도 모른 채, 내 동생은 이젤을 펴놓고
열심히 유화를 그리고 있었다. 동생의 손을 따라 흑장미 세 송이가 연보라색 배경 위에서
우아하게 피어나고 있었다. 나는 붓을 들고 열심히 그림에 몰두하고 있는 동생의 옆 모습을
훔쳐봤다.
  '과연, 그 애들이 반할 만큼 멋있구나! 내게도 너 같은 남자애가 나타난다면 분명 반해
버리고 말 거야.'

    

"언니의 부탁인데, 염려마유"

  "얘, 넌 이 장영이의 사랑스러운 동생이지?"
  책상에서 공부하던 둘째 언니가 아랫목을 차지하고 한가롭게 손장난을 하고 있는 내게로
다가와, 괜스레 내 옷 매무새를 고쳐주며 간드러진 음성을 뱉는다.
  언니가 졸지에 아양을 떠는 데는 필시 이유가 있다. 뭘까? 맞아 그거야, 그거.
  "싫어. 날 심부름하는 강아지로 착각하는 거. 이젠 딱 질색이라구!"
  "아냐, 얘! 그게 아니고..."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랬어. 언니 일은 언니가 해."
  "그게 아니라니까 그러네. 너, 내일 먹고 싶은 게 있으면 이 언니를 따라와."
  오늘은 별난 날인가보다. 언니로부터 이같은 초대를 받아본 것이 얼마만인가.
  "그럴려면 너, 내 말을 잘 들어야 해."
  "무슨 말인데?"
  "내일 내 친구를 소개시켜 줄테니까, 엄마, 아빠한테 그럴 듯하게 잘 피알해 주는 거야."
  "응. 무슨 스토린지 알 만해."
  언니의 친구, 아니 언니의 애인. 나도 무척 만나보고 싶었다.
  매일같이 날아오는 러브레터를 몰래 읽어보고 살짝 붙여 놓기, 부쳐 달라는 언니 편지 살짝
뜯어 보고 다시 붙여 우체통에 넣기, 이렇게 하기를 수십 번도 더한 내가 아닌가! 그런
일에는 이제 도사가 됐다.
  언니에게 보내 오는 러브레터를 읽을 때마다 내 가슴은 두근거렸다. 그 내용이 너무 너무
명문이었기 때문에.
  그는 과연 어떻게 생겼을까?
  다음날 아침. 세수는 화장비누로, 머리는 샴푸, 린스로 감아 빗고, 얼마 전에 새로 산
티셔츠와 스커트를 입고 거리로 나왔다. 언니보다 내가 더 세련돼 보이는 듯했다. 물론 내
느낌이지만.
  최초로 그 주인공을 만났다.
  '아! 저 정도니까 우리 언니가 그토록 오매불망했구나!'
  갸름한 얼굴에 스포티한 머리, 짙은 눈썹에 호소력 있는 눈, 우뚝한 코, 두툼한 입술...,
정말 멋있는 남자였다.
  내 앞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은 정말 축복 받은 한쌍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더블 데이트. 먹고, 마시고, 보고, 또 먹고, 마시고...즐겁고 신나는
하루였다.
  헤어질 무렵, 칼피스를 음미하면서 건네는 그 남자 말씀.
  "나도 연숙이 같은 동생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예쁘고 영리하고 정말 귀여워!"
  아, 그대는 드디어 나에게 아부를 하기 시작했어. 암, 그래야지. 장래 처제에게 잘 보여
손해 볼 것은 절대 없으니까.
  "좋긴 뭐가 좋아요? 남의 편지 몰래 읽고, 언니 알기를 우습게 알고, 남의 옷 모조리 입고
다니고... 아유, 지겨워!"
  아니, 언니 왜 그래? 내 사생활을 이런 공개석상에서 폭 쏟아놓아도 되는 거유?
  집으로 돌아오는 길. 거리는 어둑어둑해지고 시원한 저녁바람이 기분 좋게 분다. 언니는
뭔가 석연치 않은지 넌지시 다짐을 해온다.
  "연숙아! 너, 엄마, 아빠한테 이야기 잘 해야 돼. 뼈대 있는 집안의 아들 셋 중에 막내.
성실하고 착하고, 음 또..."
  "언니, 나 머리 나쁜 거 알지? 너무 많이 얘기하면 다 잊어버려서 한 마디도 못 한다구!"
  내 속에서는 '걱정 마. 나, 언니가 하지 않은 말까지 보태서 잘 말할 자신 있으니 까. 걱정
뚝 하시라구.'

    

변덕쟁이 언니의 눈물

  "남자는 모두 도둑놈이다. 결혼은 인생에 있어 가장 괴로운 지옥이야!"
  시집간 지 한달만에 전쟁을 치루고, 친정으로 피난 온 큰언니가 눈물, 콧물
흘려가며 내게 들려 준 첫마디다.
  형부와 한창 연애할 때는 밤마다 이불 속에서 '사랑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감정이야.
사랑을 하게 되면 세상 빛깔이 달라진단다.' 어쩌구 해가며 사랑 예찬론을 펴던 언니가,
지금은 '사랑은 이 세상에서 가장 시시하고 허무한 감정'이라고 목터진 소리를 한다. 정말
예삿일이 아닌 것 같다.
  그렇다고 언니는 엄마에게 시집 잘못 보내 줬다고 항의할 형편도 못되는 가엾은 처지다.
애당초 엄마는 형부와의 결혼을 적극 반대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이라는
알량한 단어를 내세우며 '로미오와 줄리엣'이나 된 것처럼 결혼을 고집한 언니다. 결국 엄마,
아빠도 두 손 들고 말았다.
  "그래, 할테면 하려무나. 네가 결혼하는 것이지, 우리가 결혼하는 것은 아니니까. 대신,
나중에 우리한테 딴소리 했다가는 그땐 국물도 없다."
  이렇게 해서 산 넘고 물 건너 이루어진 결혼이었다.
  그때 언니는 결코 걱정 말라는 듯이 의기양양한 개선장군처럼 시집을 가버렸다.
  그러니 지금 엄마를 붙들고 0.5초 간격으로 '남자는 도둑놈이다'를 주기도문 외우 듯
중얼댄다.
  하지만 남자에게 손목 한번 안 잡혀 본 내가 그 심정을 어찌 알 수가 있나? 그저 머리만
어질어질할 뿐이었다.
  "언니! 좀 차근차근 얘기해. 도대체 형부가 어쨌길래 이 야단이야?"
  "얘, 내 얘기 좀 들어볼래? 정말 그 사람, 이젠 신물이 난다. 이혼할 거야. 더 이상 같이
살 수가 없어. 세상에 사기꾼이 따로 있는 게 아냐. 바로 그런 사람이 사기꾼이고
날강도야!"
  "어머! 언닌 미쳤어. 그 착한 형부를 날강도라니?"
  "얘, 말도 마. 글쎄 결혼 전에는 뭐랬는지 아니? 결혼만 하면 아침부터 밤까지 손가락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게 해주고, 죽을 때까지 나만을 사랑한다고 찰떡같이 약속하더니..."
  "그래서?"
  "아유, 분해. 글쎄 잠시도 앉아 있을 틈이 없어. 물 떠 와라, 성냥 가져 와라. 재떨이
가져 와라. 그것뿐이니? 하루가 다 가도록 사랑한다는 말은커녕 신경질만 부리 고...
날 식모로 데려 온 줄 아나봐. 지겨워. 정말 지겹다구."
  숨도 안 쉬고 따발총처럼 지껄여대는 언니. 언니의 눈에서는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언니! 언니는 분명히 말했어. 결혼은 인생의 최대의 즐거움이라고."
  "얘얘, 즐거움이 다 뭐니? 결혼은 생지옥이야, 생지옥. 내가 그 사람 때문에 손해 본 건 또
얼만데... 이 골목 저 골목에서 들려 오던 남자들의 그 멋진 휘파람 소리도 내가 그 사람하고
결혼한 후 딱 그쳤잖니? 그렇다면 자기가 횡재한 줄 알아야지. 오히려 한술 더 뜬다니까.
난 그 사람이 내 앞에 와서 무릎을 꿇고 빌기 전에는 절대로
안 갈 거야. 얘, 넌 아예 시집 갈 생각조차 하지 마라."
  그러는 언니 앞에서 나는 심각해질 수밖에 없었다. 정말 결혼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 깊이 생각해 볼 문제라고 여겨졌다.
  그런 지 며칠 후, 그 폭군이 찾아왔다. 형부는 정말 폭군처럼 안 가겠다고 버티는 언니를
막무가내로 끌고가 버렸다. 끌려가는 언니의 애처로운 모습을 보면서도,
우리집 식구 중에는 아무도 용기있게 말리는 사람이 없었다. 역시 남편은 당당한건가.
  그리고 일주일이 흐른 일요일.
  언니가 우리집에 다시 왔다. 그것도 형부와 함께. 한 쌍의 비둘기처럼 다정하게 보이는
언니와 형부.
  언니의 얼굴에는 생글생글 웃음꽃이 피어 있었다. 언니는 내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얘, 역시 처음 생각이 옳았어. 결혼은 틀림없이 인생 최대의 행복이야."
  변덕이 무쌍하다.
  그 소리를 듣고, 난 사랑이라는 것을 한번쯤 진하게 해보고 싶어졌다.

    

가짜 편지소동

  "오빠! 편지 왔어!"
  "어디서 왔니?"
  "잘 모르겠어. 발신인이 숙이라고만 적혀 있는데?"
  "뭐! 숙이라고? 야야, 그 편지 빨리 줘. 빨리!"
  앉은 자리를 박차고 나는 튀어나갔다.
  "오빠, 왜 이리 허둥대는 거지? 이깟 주소도 안 쓴 건방진 편지 가지고..."
  나는 편지를 받으려고 서둘렀지만, 편지가 보이지 않는다.
  "오빠, 좀 이상해. 그렇다고 공짜가 어딨어? 어떻게 할거야? 얼마 줄테야?"
  편지를 감춘 채 빈 손만 내미는 여동생.
  온갖 아부, 능청을 떨어가며 어머니한테 타낸 용돈 중에서 거금 1천원을 여동생의
손바닥에 쥐어 줬다.
  그러나 앙큼한 동생은 도리질만 할 뿐, 돈을 받지 않는다. 목마른 놈이 샘구멍을 판다고,
1천원을 더 얹어 주었다. 그때서야 숙의 편지는 내 손으로 들어왔다.
  아, 떨리는 가슴. 내게도 드디어 행운의 여신이 찾아왔구나.
  한데 숙이라니? 도무지 여자라고는 아는 사람이 없는데, 누굴까? 그래 맞았어. 맞을 거야.
아침마다 만원 버스 안에서 마주치던 그 여학생...?나만 보면 괜히 얼굴
이 빨개지는...?
  떨리는 가슴이 손끝으로 전달되는지, 편지 봉투가 흔들린다. 편지 봉투를 뜯자, 분홍색
편지지가 가지런히 접힌 채 나를 빤히 쳐다본다.

  영선씨.
  가로수 잎이 매일매일 싱그러운 초록색으로 바뀝니다.
  나는 매일 아침 영선 씨를 보는 즐거움으로 만원 버스도 힘든 줄 모르겠어요...

  이렇게 시작해서 깨알같이 씌어진 두 장의 편지. 읽어 내려갈수록 가슴은 흥분으로
채워진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두번째 쪽 중간 부분부터 편지 내용은 망령을 부리기 시작
했다.

  '딱!'
  지구가 박살나는 아픔일 거다.
  자아식!
  한 대만 더 먹어라. 에잇 '딱!'
  어때? 별이 보이고 빙글빙글 어지럽지?
  임마!
  비행기가 하늘만 난다고 생각하면 오해다. 이번엔 이 귀하신 몸께서 연구,
발명하신 펜 글시 비행기에 널 싣고서 잠시 시운전했을 뿐이야, 임마!
  내가 누구냐고? 영철이다, 왜?

  아니 이 자식이!
  이 실망. 이 허무. 정말 지구가 멈추는 것 같다. 영철이 너 어디 두고 보자.

    

어떤 분노

  바람이 너무 차다. 찬바람은 기세 좋게 골목을 휩쓸고, 거리를 휩쓸고, 장바닥을
휩쓸고 돌아다닌다. 김장용 배추가 무더기 무더기 쌓여 있다. 겨울의 문턱에서 그 한겨울을
넘기기 위해 인간은 부산하게 겨우살이 준비를 해야 한다.
  나는 서점에 들러서 "멀리서 본 한국, 옆에서 본 한국인"을 한 권 샀다. 내가
좋아하는 친구 현이한테 보내고 싶었다.
  '루돌프 사슴 코는 매우 반짝이는 코...'
  너무너무 흥겨운 가락이다. 흰 눈이 덮인 넓은 평원을 루돌프 사슴이 끄는 썰매를 타고
달리는 기분이다. 괜히 흥겨워진다.
  나는 캐럴을 같이 흥얼거리며 서점문을 나섰다. 집에 가서 현이한테 아주아주 멋
있는 편지를 써야지. 루돌프 사슴만큼이나 기분 좋은 편지를...
  골목엔 짙은 어둠이 깔렸고, 창문엔 환한 불들이 켜져 있었다. 겨울밤 창문으로 보이는
환한 불빛은 훈훈한 정 같은 것을 느끼게 한다. 나는 조금은 들뜬 기분으로 골목을 들어섰다.
  골목 입구에는 외등이 켜 있는 커다란 전봇대가 있고 그 밑엔 식료품 가게가 하나 있다.
온갖 포장으로 자신을 단장한 식료품들이 환한 불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아늑한 가게 문앞에서 어떤 아이의 앙앙거리는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 아이는 발가벗고 울고 있었다. 정말 발가벗고, 팬티도 입지 않은 채. 나는 너무
놀라서 멍청히 서 있었다.
  국민학교 1학년이나 2학년쯤 되었을 것 같은 사내애는 까만 어둠 속에서 발가벗은
몸뚱이를 움츠리고 앙앙 소리내어 울고 있었다.
  나는 가슴으로 차오르는 분노를 느끼며,
  "세상에 이게 웬일이니?"
하며 그 아이 앞으로 다가갔다.
  그 순간 대문이 화다닥 열리며 젊은 여자가 길다란 막대기, 국기 게양 때 쓰는 대
나무 비슷한 막대기를 들고 쫓아 나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움찔해서 물러섰다.
  그녀는 서슴없이 그 막대를 휘두르며, 온갖 악다구니를 퍼붓어대는 것이었다.
아이는 다시 기겁을 해서 깡충깡충 뛰어 골목으로 달아났다.
  막대기를 들고 쫓던 여인은 뭐라고 입 속으로 중얼중얼 욕을 해대면서 대문을 꽝 닫고
들어갔다. 어둠은 더 짙게, 바람은 더 차게 이 골목으로 한바탕 몰려왔다.
  나는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느꼈다. 이것은 분노,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격렬한
분노였다. 나는 골목으로 그 아이를 찾아갔다. 서너 골목을 지나자 한집 대문 앞에 조그만
물체가 웅크리고 앉아 있는 게 보였다. 나는 그 아이한테로 다가가 내 코트를
벗어 그 아이 몸을 꼭 싸줬다. 앞 단추를 모두 끼워서 자루처럼 만들고 그 아이를
껴안았다.
  양말도 신발도 신지 않은 맨발, 몸은 그야말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다. 나는 아이를 안고 골목을 나왔다.
  흑흑 속으로 흐느낄 뿐 소리를 내어 울지는 않았다. 울음이라는 것도 여유가 있을 때
가능하다는 것을 실감했다. 나는 불이 환하게 켜진 그 식료품가게로 들어가서
따뜻한 우유를 하나 사서 그 아이 입에 대주었다.
  그 아이나 나 자신이 함께 어떤 여유를 찾고 싶었던 것이다. 그 아이는 속으로 계속 흑흑
흐느끼면서도 입에 대준 우유를 빨아먹는다.
  조금 작은 눈이긴 하지만 아주 맑고 깨끗했다. 고집은 좀 있어 보여도 총명해 보이
는 얼굴이었다. 가게집 아주머니가 의아해서 나를 쳐다본다.
  "얘는 옆집 동길인데..."
  "옆집에 사는 아이 맞죠?"
  "네, 바로 우리 가게 옆집 아이예요."
  "이 아이 엄마는 친엄마가 아닌가요?"
  "친엄마가 아닌가요. 얘가 그 집 맏아들인데요."
  "기가 막혀서, 그런데 이럴 수가 있어요? 이 추운 밤에 이렇게 알몸으로 쫓아낼
수가 있어요?"
  나는 흡사 이 가게집 아주머니가 이 아이를 쫓아낸 것처럼 흥분해서 따졌다.
  "그러게 말이에요. 세상에 에미가 돼서 자식을 이렇게 하다니 자기깐에는 아이
버릇 고친다고 그랬겠죠."
  "아이 버릇을 고쳐요? 자기 마음부터 고쳐야죠."
  참았던 분노가 이 아주머니한테로 터져버린다. 세상에 자식을 이 추운 밤에
알몸으로 쫓아낼 수 있는 여자가 무슨 버릇을 고친담.
  나는 동길이란 아이를 안고 그 집 대문 앞에 섰다. 아이는 흡사 강아지 새끼처럼 대문
앞에 서자 공포로 몸을 떨며 전율한다. 나는 아이를 가슴에 꼬옥 안아주며 대문을
두드렸다.
  아이 엄마가 씨근거리며 나타나서 아이를 보자 험악하게 얼굴을 찡그렸다. 나는
아무 말 안하고 아이를 안고 들어가서 마루에다 세워놓고 내 코트 단추를 벗기기  시작
했다.
  조그만 알몸이, 빨갛게 언 알몸이 코트 속에서 나왔다. 나는 그 여자를 쳐다보았다. 그
여자도 나를 쳐다볼 뿐 입을 열려고 하지는 않았다.
  나는 그 여자의 눈길을 마주 노려보다가 증오스러운 감정을 누르며 돌아섰다.
아이는 마루 위에서 울음도 터뜨리지 못한 채 서 있었다. 나는 돌아섰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고 아무 말도 할 필요가 없었다.
  대문 앞에 잠시 멈춰 서 있어도 아이 우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냥 골목을 나왔다. 골목은 더욱 어둡고 더욱 찼다. 살아가고 있는 인간의 얼굴은
가지가지구나, 천사의 얼굴도 있고 아기의 얼굴도 있고.
  내 얼굴은 어떤 것일까? 어디에선가 크리스마스 캐럴이 멀게 들려 온다. 하지만 그 캐럴도
나를 즐겁게 하지는 못했다. 비정한 한 여자로 해서 흥겹게 들떴던 내 마음은 무참하게
짓밟히고 말았다.
  무서운 여자다. 무서운 여자야. 나는 내 얼굴이 그 여자와 같이 아주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는 것 같아 얼굴을 두 손으로 마구 문질러댄다.
  오늘밤 현이한테는 편지를 쓰지 말자. 지금 이 기분으로는 멋있는 편지를 도저히 쓸 수가
없으니까.

    

쌍동이여서 겪어야 하는 일들

  쌍둥이. 세상에 요것처럼 묘한 관계도 있을까?
  다른 사람들은 다 제자리를 턱턱 차지하고 여유자적하게 나오는데, 요건 뭐가 그리 급해서
한자리를 반으로 쪼개면서까지 서둘러 나오지 않으면 안 되었는지. 내가 모르고 동생이
모르니 어머니, 아버지인들 알 수가 있나. 세상에선 적은 것보다는 많은 것을 더 좋아하니
그런 의미에서 '하느님 감사합니다.' 할 수밖에.
  그런데 요 쌍둥이라는 것 때문에 남이 겪지 않는 온갖 수난을 다 겪어야 하니, 이름 붙여
쌍둥이 애환이라 해볼까.
  내가 국민학교 5학년 때, 우리 반에 어느 여학생이 전학을 오면서부터 생긴 일이었지. 그
여학생은 무슨 사정이 있었던지, 다른 아이들보다 3학년이나 늦게 학교에 들어간 탓에 우리
눈에는 마치 어른같이 보였다구.
  붙여진 별명 왈 '늑대'. '늦게'라는 발음이 음성학적 변천을 거듭하면서 '늑대'로 바뀌고
말았거든. 우리는 그 여학생이 학교에 나오기만 하면 "야, 늑대 왔다. 아이구 무서워."
하고는 주위를 뱅뱅 돌며 놀려대니 이 여학생이 참는 것도 한도가 있지.
  어느날 드디어 늑대 아버지 출현. 노기충천한 영감님.
  "어느 놈의 새끼들이야. 내 다리 몽둥이를 분질러 놓고야 말테니, 응?"
  야, 말도 마. 총각인 우리 담임 선생님. 새파랗게 질려서 자수해서 광명 찾자구 외치잖아.
한 놈 두 놈 슬금슬금 기어나가서 다섯 명이 모였는데. 그때 그 늑대가 쏙 나서면서,
  "저기, 쟤가 제일 많이 놀렸어요."
하고 손가락질한 사람은 바로나.
  "동생놈의 누명을 내가 쓰게 된 거지."
  변명을 할까. 그건 내가 아니라 오늘 재수 좋게도 아파서 조퇴를 한 내
동생놈이라고. 믿어 줄까? 어림 없지. 이런 일이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에라 모르겠다. 맞아주자. 이것도 다 쌍둥이 설움인걸.
  요 며칠 전에 아침부터 주룩주룩 청승맞게도 비가 쏟아졌다구. 우산을 받고 점잖게
걸어가는데 내 우산 속으로 쏜살같이 돌진해 온 물체.
  그건 기분 좋게도 여학생이었어. 하얀 얼굴에 까만 눈. 코 옆으로 조그만 점이
인상적인, 아주 귀엽게 생긴 여학생이었어. 나의 심장은 질서를 잃고 제멋대로 뛰기
시작.
  "오빠. 어제 저녁에 잘 갔어? 우리 오빠는 오빠 가구 난 다음에 갈월동으로 심부름 갔는데
거기서 자고 바로 학교에 갈꺼야."
  동생녀석이 어제 저녁에 10시가 넘어서 들어왔지. 맞았어. 요 귀여운 여학생
집에서 놀다가 늦었구먼.
  나는 은근히 이 여학생을 놀려주고 싶은 생각이 발동했지.
  "이봐, 내가 누군지 알아? 나는 살아 있는 귀신이야. 귀신 알지? 여기 모자며 모표 좀
보라구."
  나의 얼굴을 쳐다보던 그 귀염둥이 여학생. 모자며 모표가 틀린 것을 보더니, 아! 말도 마.
끔찍해. 나를 정말 귀신으로 알았다 이거야.
  새파랗게 질린 여학생 "귀신이다. 귀신이야."하고 소리치며 빗속으로 사라졌지.
  하하하...오늘도 역시 쌍둥이 수난이구나.
  그런데 앞으로 내가 결혼했을 때 내 부인께서 동생녀석을 남편이라고 따라가면
어떻게 하지? 다른 건 다 참아 주겠지만 그거야 참을 수 없지. 그러면 어떻게 할까?
  야! 이거야말로 수학 숙제에 앞서 풀어야 할 진짜 숙제감이다.

    

옹달샘가의 밀어

뜨거운 아이스크림

  "얘 얘, 좀 밀지 마."
  "아줌마! 콘 하나 주세요."
  "아줌마, 죠스바 주세요."
  "아줌마, 화선지 세 장만..."
  "아줌마, 켄트지 한 장만 더 줘요."
  "아줌마, 아줌마, 아줌마..."
  와글와글 청개구리 집합장 같은 매점. 거의 뉴키즈 공연장을 방불케 한다. '와와...'
아우성은 수업종이 울리자 더욱 기승을 부린다.
  마음 약한 애들은 포기하고 그냥 교실로 향한다. 하지만, 난 그럴 수 없다. 지금까지 서서
기다리느라 흘린 땀이 얼만데 그냥 호락호락 물러서냐? 나는 끝내 목적을 달성했다. 내
손에는 아이스크림이 두 개 들려 있다.
  선생님들이 출석부를 들고 복도로 지나간다. 나는 그 사이사이를 빠져 잽싸게 층계를
뛰어오른다. 한 번에 두 계단씩. 이럴 땐 내 긴 다리가 꽤 진가를 보이는 편이다. 드디어
4층에 도착. 세 번째 문을 열었다. 우리 교실이 세 번째였으니까. 아직 선생님은 오지
않았다. 하지만, 애들은 이미 영어책을 펴놓고 선생님을 기다리고 앉아 있었다.
  나는 옷자락 속에 숨겨 온 아이스크림을 책상 속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한 개를 내
짝궁한테 슬쩍 넘겼다.
  "아니 이걸?"
  내 짝궁은 금방 울상이 되었다.
  "너 먹어."
  나는 아주 강경하게 명령했다. 사실은 명령하면서까지 줄 마음은 아니었는데, 상황이 하도
급박한지라 이것저것 가릴 정신이 없었다.
  "나 아이스크림 안 먹는 거 알잖아."
  옳지, 이 계집애는 여름에도 아이스크림만 먹으면 감기에 걸린다고 했었지. 깜빡 잊었군.
내가 네게 선심을 안 써도 되는 건데. 그래도 짝궁의 의리를 지키느라고 하나를 더
사왔더니만.
  그건 그렇고, 지금은 감기가 문제가 아니었다. 이제 눈깜짝할 사이에 드르륵 문소리와 함께
루칸이 들어올 판이다.
  난 이 말썽스러운 물건을 어떻게 처치할까 생각했다. 내 머리도 이럴 땐 제법 쓸 만했다.
머리에서는 명령이 즉각 떨어졌다.
  "먹어. 빨리!"
  "빨리? 어떻게?"
  "어떻게는? 한꺼번에 집어 넣어."
  "한꺼번에?"
  어휴, 명령하는 나도 괴로웠다. 이것이 다른 물건이었대도 한시간쯤 슬쩍 책상 속에서 쉬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만은 안 되는 노릇이다. 그랬다가는 봄눈처럼 스르르 녹아 버리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다! 루칸의 발소리가 들린다. 반사적으로 나는 그것을 입속에다 단번에 집어 넣었다.
나는 눈물을 찔금거렸다. 마치 치약을 먹는 것 같았다.
  옆에 앉은 짝궁 숙이도 손이 입으로 갔다. 이 극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감기 걸린다고
절대로 먹지 않을 계집애인데 어쩔 수 없었나 보다. 한데 한꺼번에 입 속으로 쑤셔 넣던 이
계집애가 비명을 지른다.
  "아앗, 뜨거!"
  뜨겁다니? 정말 아이스크림은 뜨거운 건가? 나도 사실 아까 입속에 넣는 순간 뜨겁다는
느낌이 들었다. 입 속이 뜨거운지 차가운지 하여간 정신이 없었다. 나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오물거렸다. 곧 문이 열릴 것같아 죽을 지경이었다. 영어 루칸은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절대로 용서가 없는 위인이다.
  아, 드디어 꿀꺽 삼켰다. 삼킬 것도 없는 얼음물이긴 했지만, 아무튼 삼켰다고 느낀 순간,
내 입 속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입 속이 얼떨떨했다.
  쯧쯧, 주인 잘못 만난 덕에 입아 네가 고생이구나!
  나는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고 영어 루칸을 쳐다봤다.
  '차렷 경례' 그런 순서를 치르고 출석을 부른 루칸. 안경너머로 번뜩이는 눈을 들어 숙이를
쳐다봤다.
  "야, 너 왜 엎드려 있니?"
  나는 시침을 뚝 뗐다. 그리고 이렇게 둘러댔다.
  "배가 아프대요."
  "그러면 양호실에 가 누워 있어야지. 수업시간에 엎드려 있으면 어떡해?"
  숙이의 어깨가 들먹였다. 웃음을 참다가 그것이 눈물로 변하는 중이었다. 이럴 때는 실컷
웃어야 되는데 이건 스트레스 받기가 십중팔구인 상태였다. 그래야 생리적으로도 좋은 거다.
  선생님의 눈을 피해 요렇게 군것질을 하는 재미를 우리 외엔 아무도 모른다.
  그런데 이 계집애 이러다가 감기 걸려 결석하면 어쩌지 아아! 머리 어지러워. 딸꾹. 이게
무슨 소리야?

    

실습생의 하루

  "미스 임, 커피 한 잔 끓여 줄래?"
  "네."
  나는 뜨거운 물로 커피잔을 따뜻하게 데운 다음, 커피, 설탕, 프림을 3:1:2의 비율로 섞어
커피를 제조했다.
  분홍색 장미가 그려진 찻잔에 담긴 커피를 과장님 앞으로 들고 갔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신
과장님.
  "미스 임 커피 끓이는 솜씨는 알아줘야 해. 정말 일품이야!"
  저켠에서 타이프를 치던 고참 미스 강 언니.
  "과장님이 매일 커피 끓이는 일만 시키시니까 발전한 거죠."
  내 솜씨를 칭찬한 과장님 말에 대한 질투인지, 아니면 여성인 내게 하루에도 몇 번씩
커피를 끓이게 하는 과장님 태도에 대한 비난인지, 아무튼 가시가 박힌 듯한 알쏭달쏭한
한마디였다.
  나는 자리로 와서 앉았다. 이럴 때일수록 불쾌하다고 뾰로통하니 입술을 내미는 것은
금물이다. 울만큼 억울한 일을 당해도 여간해선 눈물을 보이지 않는 게 이기는 것이다.
직장이란 원래 그런 속성을 가지고 있다.
  "미스 임! 이 서류 총무과에 갖다 주고 와."
  "네."
  나는 발딱 자리에서 일어나 과장님 앞에 놓인 서류를 공손하게 집어 결재철에 끼워
엘리베이터를 타고 총무과로 갔다. 총무과의 미스터 한은 나를 보자 싱글싱글 웃는다.
  "미스 임. 이젠 숙녀가 다 됐어. 한 달 만에 숙녀가 되다니 대단히 빠른 성장이야!"
  그의 말 속에도 미스 강 언니처럼 알쏭달쏭한 의미가 담겨 있었다. 숙녀가 돼서 좋다는
소린지, 교복을 입고 첫출근을 하던 내가 한 달이 채 못 되어 숙녀티를 낸다는 데 대한
야유인지 도무지 소갈머리를 알 수가 없었다.
  어쨌거나 나는 생긋 웃으며 그가 내주는 서류를 다시 받아들고 우리 방으로 돌아왔다.
서류를 과장님 책상 위에 가지런히 놓고 내 자리에 앉았다.
  "미스 임, 미안하지만, 담배 한 갑만 사다 주겠어?"
  '주겠어?' 이건 동의를 구하는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었다.
  "네."
  나는 다시 상냥한 얼굴로 그가 주는 돈을 받아들고 담배가게로 향했다. 거리로 나오자
눈물이 핑그르 돈다. 하지만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이 모두는 내가 할 일이야."
  자신을 타이르며 담배를 사들고 돌아와 과장님 책상 위에 얌전히 놓았다.
  "수고했어."
  이 말은 누가 들어도 건성으로 하는 인사치레인 것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자리에 채
앉기도 전에 미스터 홍이 또 부탁한다
  "미스 임, 매점에 가서 우유 하나만 갖다 줘. 아침을 안 먹고 나왔더니 속이 쓰려 죽겠어."
  나는 약간 약이 올랐다. 하지만 "네" 하고는 그의 청대로 우유를 사다 줬다. 그리고는
서류를 들치며 일을 익히려고 했다.
  "미스 임, 이 꽃병에 물 좀 갈아 줘야겠어."
  고참 미스 강의 명령이었다.
  "네."
  나는 다시 꽃병을 들고 수돗가에 가서 병을 깨끗이 씻고, 물을 가득 채운 다음, 국화 꽃잎
위에 물을 뿌려 미스 강 책상 위에 갖다 놓았다.
  점심시간, 매점에서 빵을 먹던 미스 최. 나를 보더니 내 옆으로 슬그머니 다가왔다.
  "미스 임, 그렇게 속없이 하라는 대로 고분고분하지 말아요. 그러면 사람을 우습게 보고
자기들 하인처럼 부린단 말야."
  역시 진정한 충고인지, 위로인지 알 수 없는 알쏭달쏭한 말이었다. 나는 미스 최의 말을
들으면서 사회란 정말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강한 사람에게는 무릎을 꿇고, 약한
사람은 짓밟아 버리는...
  하지만, 나는 결코 약한 사람이 아니다. 나는 내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그들의 비난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어떤 작은 것일지라도 그들을 도와주고
싶었다.
  오후 여섯 시, 퇴근하고 거리로 나왔다. 언제나처럼 거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청바지에 티셔츠를 입고, 색을  멘 발랄한 걸음걸이의 여학생들, 에머랄드색 교복에
생머리의 청순한 여학생들... 그들의 모습에서 나는 불과 얼마 전의 내 모습을 떠올려 본다.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나는 저들처럼 교복을 입고 무거운 가방을 들고 다녔는데... 이
회사에 처음 입사하던 날도, 미처 준비된 외출복이 없어 교복을 입고 출근했는데... 그 날은
내 꿈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었는데...
  학교생활이 무척 그리워졌다. 늘 지겹게만 여겨지던 학교생활이 오늘따라 유난히
그리워지는 이유는 뭘까? 선생님들의 얼굴도, 친구들의 얼굴도 눈에 삼삼했다. 보고 싶었다.
  나는 왜 교복을 채 벗기도 전에 실습이랍시고 직장을 선택했는가? 졸업이나 하고 나올
것을, 후회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처음 실습을 나간다고 했을 때 친구들은 모두 나를
부러워했다. 나도 그런 분위기를 타고 약간 으스대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건 바보 같은 착각이었다. 우리에게 가장 좋은 곳은 학교이고, 그 학교를 빨리
그만 두어야 할 이유는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 듯싶었다.
  실습생의 일과를 통해서 얻은 지혜를 후배들에게 꼭 들려 주고 싶었다.

    

재수생에게 누가 돌을 던질 수 있나?

  나는 고입 재수생이다. 정말 소개하고 싶지 않은 이력이다.
  나는 며칠 전 원서를 가지고 근교에 있는 모교를 찾아갔다.
  그 날은 마침 토요일이어서 선생님들은 모두 퇴근했고, 학생들도 거의 없었다.
  교문 앞에서 나는 한참을 망설였다. 3년 동안 다니던 나의 학교. 그런데 오늘 이 학교는
너무 생소하고 냉랭하게 느껴졌다. 도무지 반갑게 뛰어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왜일까? 나는 왜 이렇게 자신이 다니던 학교 앞에서 죄인처럼 움츠러들어야만 할까?
'죄인처럼'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자 내 눈엔 파란 불꽃이 튀었다.
  내가 왜 죄인이냐? 나는 내 자의식을 강하게 표현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선생님들과
친구들은 나를 '문제아'라는 딱지를 붙여서 정말 죄인 취급을 했던 것이다.
  나는 그들이 던지는 모멸의 시선 속에서 살아왔다. 아무 이유도 없이 말이다. 나는 그들이
항상 들먹이는 '이유'라는 것을 정말 경멸했다. 그들은 너무너무 시시한 고정관념에 묶여서
함부로 남을 평가하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을 이길 수가 없었다. 나는 혼자고 약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죄인이 되었던 것이다.
  나는 교문을 들어섰다. 운동장 구석켠에서 여학생 다섯 명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재잘대고
있었다. 그들은 나와 같이 공부하던 중학교 동창생들이었다. 지금은 이 학교의 고등학생들이
되어 있다. 그들은 내게 아는 체를 했다. 나도 그들에게 손을 한 번 흔들어 주고는 교무실
쪽으로 향했다.
  현관 입구에서 신발장이 있고, 복도에는 덧신이 몇 켤레 놓여 있다. 복도는 여전히 반질반질
윤이 나고 깨끗했다. 복도에는 넓은 창문이 이어져 있고, 창문 아래로는 가지각색의 돌들이
제각각 특성을 뽐내며 놓여 있다.
  오른쪽으로는 서무실, 교무실, 교장실, 각 학급의 표시를 알리는 까만 팻말이 촘촘히 걸려
있다. 모두가 낯익은 것들이다. 이 낯익은 물체들은 다시 나를 망설이게 했다.
  이 망설임은 곧바로 나의 불쾌감으로 변한다. 그들과의 시간 속에서 얻었던 불쾌한
기억들이 살아났기 때문이다.
  어떻게 할까? 그냥 돌아가 버릴까? 하지만, 이 갈등은 어차피 거쳐야 할 작은 가시덤불,
참을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내 신세가 왜 이렇게 돼 버렸는가. 나 자신이 밉고
바보스러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때 교무실에서 나의 담임 선생님이 나왔다. 나는 용기를 내어 담임 선생님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를 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원서 쓰러 왔어요."
  "원서?"
  담임 선생님은 갑자기 표정을 찡그린다. 퇴근을 방해하는 내가 귀찮았던 것이다.
  "오늘 써야 되니?"
  "네."
  "그럼 조금 일찍 올 것이지. 퇴근하려는데 오면 어떡해."
  불쾌한 감정을 그대로 내뱉는다. 나는 아무 말도 못한 채 그냥 서 있었다. 담임 선생님은
잠깐 망설이다가 따라오라며 다시 교무실로 들어 갔다. 나는 사형대로 끌려가는 죄수처럼
선생님의 뒤를 따랐다.
  교무실에는 선생님들이 몇 분 더 있었다. 그들은 이제 유쾌하게 돌을 내게 던질 것이다.
자신들은 마치 하늘나라의 사람들처럼 도도해 하면서 말이다. 그들은 항상 그래 왔다. 언제나
어린 시절이 생략된 사람들처럼, 나의 모든 것을 성인의 기준에서 판단했다. 그리고는 서슴지
않고 돌을 던졌다. 아무런 애정도 없이 냉혹하게 던져진 그 돌은 나의 가슴속을 멍들게 했다.
스스로를 죄인으로 느끼게 하는 멍에를 뒤집어써야 했다. 그건 횡포였다. 무서운 횡포였다.
  선생님들은 한가하게 농담들을 나누고 있었다.
  "쟨 누구예요?"
  심심하던 차에 잘 걸렸다는 듯이 가사를 가르치는 선생님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작년 졸업생이에요."
  "원서 쓰러 왔군요. 그런데 넌 머리 꼴이 그게 뭐니?"
  그 선생님은 복장검사가 있는 날이면, 혼자 신이 나 딱딱거리던 위인이다. 죄인을 잡고
신명이 난 형사처럼 말이다.
  "그게 모양 부린 거냐?"
  혼자 중얼거리는 말은 처음에 나를 꼬집더니 이내 화살을 담임을 향했다.
  "원서 쓰러 오는 애들 너무 한심해요. 모교에 올 때는 최소한 복장은 단정하게 하고
와야죠."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분노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내 마음도 선생님들을
조금씩 경멸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담임 선생님은 서무실에서 도장을 찍어서 내게 건네준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교무실을
물러나왔다.
  넓은 운동장은 황량하게 보였고, 건물은 아무 느낌도 주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운동장을
가로질러 걸어나왔다. 그때 저쪽 이순신 장군 동상 밑에 앉아 있던 연화가 뛰어왔다.
  "어머, 너 용희 아니니?"
  "응, 잘 있었니?"
  "더 예뻐졌구나. 원서 쓰러 왔니?"
  "응."
  "반갑다. 오래간만인데 얘기나 좀 하다 가렴."
  "글세"
  나는 별로 내키지 않았다. 모든 것으로부터 저항을 느꼈고, 털을 곤두세우고 대드는
고슴도치처럼 그들과 맞서는 시간이 피곤하게 느껴졌다.
  "무슨 생각하니?"
  연화는 웃으며 다정스럽게 내 손을 잡았다.
  "아니야, 그냥 돌아갈래. 나 피곤해서..."
  "너 많이 우울한 거 같구나! 선생님들이 기분 나쁘게 대하던? 그런거 신경 쓰지마. 너는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자존심 강한 애잖아!"
  "자존심은 무슨 자존심이니? 엉망진창인데."
  "가치기준이란 게 뭔지 모르겠어. 모순투성이고 졸렬하기 그지 없는 것두 대다수가 그게
진리라 믿으면 그게 진리가 되는 거야. 난 중학교 때 너랑 별로 친하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처럼 너를 문제아라고 생각진 않았어. 잘 모르지만, 너도 참 좋은 애였어. 다른
누구보다도 말이야."
  "얘, 무슨 소리하는 거니?"
  "아니, 그냥 내가 생각했던 걸 말한 것뿐이야. 너 언제 또 올 거니?"
  "글세."
  "가서 시험 잘 치고 나한테 편지 한 번 해줄래?"
  "그래."
  연화는 다시 한 번 내 손을 잡고 웃었다.
  "시험 잘 쳐라."
  "응, 고마워."
  나는 돌아섰다. 내 손을 잡았던 그 애의 따뜻한 손. 그 따뜻함이 가슴 가득히 느껴지자, 내
눈에서는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내 가슴만큼 내 손도 얼어 있었다. 그 언 손을 따뜻하게
녹여 준 그 연화의 훈훈한 마음에 고마웠다. 그리고는 내 가슴도 훈훈해졌다.
  껍질을 깨고 나도 이제는 그들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최소한 나를 이해해 주는
사람만이라도.

    

르느와르가 탄생시킨 미인

  아침 등교시간. 이십 분 동안이나 내 발을 동동거리게 만들던 버스가 느릿느릿 굴러온다.
  이십 분. 등교시간 이십 분이 어디 그냥 이십 분인가. 일 분 일 초가 '피'같은 때가 바로
아침 등교시간이다. 일 분 차이로 지각생이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다. 난 정말
2천년이나 지난 것 같은 아득함을 느끼며 버스를 기다렸다.
  한데 그 버스는 염치없이 초만원이 된 채 몸을 뒤뚱거리며 내 앞에 나타난 거다.
  '휴우-- 아무튼 반갑다. 오지 않은 것보다는 백 배 낫구나. 어서어서 손님을 내리고 이
몸을 태워다오.'
  나는 속으로 버스에게 간절히 애원했다.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버스에 올라타려고
버둥거렸다. 이게 어디 사람이 타는 버슨가? 완전히 승객은 짐짝 되어 있었다.
  짐짝! 아유, 이 사람 왜 이렇게 미는 거야? 아야야!
  "자, 그만 타요. 다음 차가 곧 옵니다."
  아니, 다음 차를 타라니? 그럼 난 완전히 지각인데, 그럴 수는 없었다. 난 이 차를 꼭 타야
했다. 천신만고 끝에 겨우 기어오르자, 드디어 버스는 시커먼 연기를 내뿜으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시계를 들여다보며 부지런히 계산했다. 어디까지는 몇 분, 어디까지는 몇 분..., 크게
밀리지만 않는다면... 아슬아슬했다. 이대로의 속력만 유지하면 간신히 지각은 면할 수
있을텐데.
  '오, 주여!'
  이럴 때 주를 찾는 것은 도리에 어긋나는 짓일까?
  '모든 것은 주의 뜻대로입니다. 이 몸을 제발 교분 안까지만 들어갈 수 있도록 보살펴
주옵소서.'
  그러나 이 간절한 기도를 주님은 들어주지 않았다. 첫 번째 신호등에서 무려 칠분이나
기다려야 했다. 나는 버스 바닥이 내려앉을 만큼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이놈의 도로교통
체증, 지겹고 지겨웠다. 이것을 해결해 내겠다고 국회의원 후보가 있다면 꼭 당선시켜 줘야
한다.
  이제 난 거의 체념 상태로 접어들어야 했다. 그런데 사람 마음이란 참 이상한 거다. 지각을
안 하려고 안간힘을 쓸 때는 그렇게도 초조하던 마음이 막상  포기하고 나니 너무 편해졌다.
  '포기'를 한다는 것, 그거야말로 사람을 제일 편하게 하는 것이었다. 난 느긋하니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내가 다니는 학교는 이 버스의 종점에 있다. 그러니 괜히 문앞에 서서 내리는 사람, 타는
사람들에게 툭툭 떼밀리며 시달릴 필요가 없었다.
  한참 비집고 들어가는데 우리 반 '깜시'가 앉아 있었다. '깜시'는 얼굴이 까만 남학생인데,
우리 반 여학생들이 지어준 별명이다. 뭐 그렇다고 '깜둥이'까지는 결코 아니다. 다만 얼굴이
조금 검다 뿐이지, 흠잡을 데라고는 한 군데도 없는 모범생이다. 깜시가 내 가방을 받으면서
한다는 소리.
  "야, 짠물! 좀 살살 걸어."
  깜시가 돌았나?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지껄여대는 건가. 난 정말 기가 막혔다. 사람들이
우리를 힐끔힐끔 쳐다본다.
  '짠물'이라니? 내 비록 인천에 살지만, 바닷속을 헤엄쳐 다니는 인어공주도 아니고, 엄연히
땅 위에서 푸른 하늘을 쳐다보고 사는 나를 짠물이라니? 그것도 이렇게 사람이 많은 차
안에서 공공연히 불러도 된단 말인가?
  화가 안 날 수가 없었다. 노려봤다. 아주 표독스런 표정을 지으며 말이다. 사실 내가
이토록 화가 난 것은 짠물이라는 말보다는 그 다음에 꼬리가 붙는 말 때문이었다. '살살
걸어'라는 말. 듣기에 따라서는 대수롭지 않은 말 같지만, 내겐 그렇지가 않았다. 그것은
정말 나를 화나게 하는 말이었다.
  내가 상당히 날씬하다는 것은 나를 본 사람이면 누구나 느낄 거다. 그런데 내 얼굴은 다른
사람보다 유난히 크다. 사실 난 이 큰 얼굴 때문에 늘 괴로워하고 있다. 아직 아무에게도 이
심각한 고민을 털어놓은 적은 없지만, 거울을 볼 때마다 몰래몰래 한숨짓곤 했다.
  그런데 이 '깜시'가 내 속을 들여다보기나 한 것처럼 나만 보면, '짠물! 살살 걸어'하고는
놀려댔다. 내가 좀 빨리 걷기라도 하면 학교 건물이 금세 무너지기라도 하는지 교실 문틀을
꽉 잡고는 버티는 시늉을 하기도 했다. 내 얼굴이 조금 크기로서니 학교 건물이 설마
무너지겠는가? 그런데 깜시는 나만 보면 이렇게 엄살을 떨었던 거다.
  나는 그 무례한 깜시 때문에 잔뜩 화가 났지만, 그럭저럭 하루를 보냈다. 힘없이 집으로
돌아와서 동생 앞에서 난 한껏 폼을 잡았다.
  "얘얘, 내 스타일 좀 봐 줄래?"
  "응, 언니 스타일? 뒷모습은 양귀빈데 앞모습은 어쩐지 좀 민주적이다."
  '망할 계집애, 너까지 나를...'
  하기야 실망할 필요는 없다. 너희들 눈은 믿을 만한 것이 못 되니까. 너희들 중 심미안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이 몸의 미를 반드시 인정해 줄거다.
  르네상스시대 르느와르가 탄생시킨 미인이 어떤 여인이었는지 아니? 모르면 가서 화집이나
뒤져 봐. 그러고 나면 아름다움에 대한 인식이 달라질테니까. 적어도 이 몸에 대한
인식만이라도 말이야.

    

마지막 날, 마지막 시간

  내일은 학기말 고사의 마지막 날. 그러니까 이 몸이 드디어 자유를 쟁취하는 날이다
이거야.
  쟁취? 쟁취란 말은 이럴 때 쓰는 거 아닌가?
  선생님은 항상 이렇게 말씀했잖아.
  "공부는 인생을 윤택하게 만들기 위해서 필요한 지혜를 얻는 방법이에요."
  그 말씀에 대해서는 나도 유감이 있을 수 없지. 너무도 지당한 말씀이니까. 그런데 한 가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시험'이라는 거야.
  인생을 윤택하게 만들기 위해서 공부를 한다면 그것으로 됐지, 거기에다 시험이라는
걸림돌을 놓고 꼭 그렇게 간담이 서늘하게 따져봐야 되겠느냐구.
  인생이라는 것 자체는 사람마다 천차만별인데 시험문제는 너무 획일적으로 똑같거든.
그러니 이건 이만저만한 모순이 아니라 이거야.
  아예 그럴 거면 '인생을 윤택하게'라는 구호를 빼버리고 지식을 측량하는 계량기쯤으로
봐주는 게 더 타당하지 않을까?
  하하하, 웃기는구나! 내가 무슨 교육평론가라도 된다고 이 바쁜 시간에 그런 거창한 문제를
걸고 넘어지는 거지? 그런 거야 나보다 더 빼어난 인물들이 어련히 알아서 처리할라구.
  어쨌거나 내일이 시험의 마지막 날이지. 지나간 시험이야 흘러간 과거니까 할 수 없고,
내일 시험만이라도 좋게 넘어가야 하는데...
  특히 내일은 화학 시험이 있는 날.
  화학 선생님은 내가 평소에 흠모하는 선생님이니까, 다른 건 몰라도 그 시험만은 하늘이
반쪽이 나도 잘 쳐야 한다구.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오늘밤 밤샘을 해야겠지?
  나는 조그만 상을 펴놓고 그 위에다 물 한 컵, 물수건 하나를 갖다 놓았지. 그리고
공부하다가 출출할지도 모르니까, 그때를 대비해 새우깡 한 봉지, 에이스 한 통, 껌도
준비했지. 잠을 쫓을 땐 껌을 씹는 게 제일이거든. 주머니를 탈탈 털어서 거금 6백 원으로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어.
  이제 공부 시작. 책을 펴놓고 한 시간 삼십 분이나 됐을까? 그런데 벌써 졸음이 오는
거야. 안 돼, 안 외지. 참아야지, 참아야 한다구. 그렇지, 라디오를 들으면서 하자.
  댕댕댕댕... 시계는 열두 번을 치더군. 밤을 지새려면 지금부터가 고비야. 지금이
시작이라구.
  새우깡과 에이스를 만져봤어. 한데 있어야 할 알맹이는 하나도 없고, 빈 봉지만
만지작거리는 거야. 비몽사몽간에 먹는 일만 한 거지. 그랬겠지. 나한테 가장 잘 어울리는
일은 먹는 일이니까.
  새우깡을 다 먹어서 그런가? 내 눈이 새우껍질처럼 바짝바짝 죄어드는 거야. 별로 찬성할
일도 없는데, 내 목은 연신 끄떡끄떡거리며 찬성을 해대더군.
  정신을 차려야 하는데... 이럴 때 정신을 안 차리면...나는 물수건으로  눈을 비볐지.
하지만, 비비면 비빌수록 눈은 점점 더 깊이 들어가 뜰 수조차 없게 되더군.
  옳지, 껌을 씹자. 나는 껌 껍질을 벗겨내고 입에다 넣었어. 그고는 짝짝거리며 씹어댔지.
온 집안에 내 껌 씹는 소리가 쫙 깔리더군. 짝짝짜짜짝. 기세 좋게 한참 씹고 나니, 입이
아프더군.
  죄 없는 입만 잔뜩 혹사시킨 셈이었지. 새우깡에, 에이스에, 껌에... 오냐오냐 수고했어. 주인
잘못 만난 죄지 뭐. 물을 마셨지. 하지만 물은 전혀 맛이 없었어.
  그럭저럭 시간은 흘러 새벽 한 시. 한데 시간만 흘러갔지, 펴놓은 책의 페이지는 한 장도
넘어가지 않았더군.
  아아, 안타까운지고. 또 다시 글씨가 흐릿하게 보이기 시작하더군. 그러더니 책이 조금씩
흔들리는 거야. 나중엔 방안에 있는 모든 것이 다 흔들흔들하더라구.
  어느새 내 머리는 책 속에 묻힌 채 꿈나라로 달려갔어. 그래도 양심은 조금 있는지, 깊은
잠은 못들고 연신 '이래선 안 되는데, 이래서는 안 되는데'하고 중얼댔었지.
  어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어. 머리를 방바닥에 찧었거든.
  아! 내가 깜빡했구나. 그건 깜빡이 아니라 한참이었어. 이미 아침이 되었던 거야.
  "아이구 하느님! 이 시간이 되도록 왜 나를 버려 두셨나요."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학교로 달려갔지. 학교에 가서 '시간치기'가 아니면 '분치기'라도
해봐야지. 그것도 안 되면 '초치기'라도 해야지. 시간이 황금이라고 얘기한 그 사람이 너무
위대하게 생각됐지. 오늘에서야 그것을 절실하게 실감했거든.
  그런데 교실에 들어서자, 철없는 계집애들은 연속극에 나오는 탤런트 이름들을 들먹이며
재잘대고 있는 거야. 그것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탤런트를. 내 귀는 어쩔 수 없이 그 쪽으로
쏠리더군.
  '아, 친애하는 친구들이여! 나를 더 이상 괴롭히지 마라.'
  드디어 종이 울렸어. 누구를 위한 종인지는 몰라도 종은 어김없이 울렸어. 1교시, 2교시
그저 그렇게 자꾸 넘어갔어.
  운명의 3교시. 이 시간은 정말 내게는 운명의 시간이야. 왜냐하면 화학시간이었거든.
어젯밤 그토록 가슴 졸인 것이 무엇 때문인데. 오로지 이 시간을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종은 울리고 시험지는 내 앞에 놓였어. 그런데 문제란 것이 모두 아리송하기만 했어. 나는
커닝이란 대도박을 실천에 옮기기로 했지. 마음을 크게 먹고, 심호흡을 한 번 하고, 그리고
재빨리 눈을 옆으로 돌렸지.
  바로 그 순간, '김은숙'하고 내 이름이 날벼락같이 들리더군.
  '아이구, 이젠 죽었구나!'
  마지막 날의 마지막 시간. 그건 이렇게 비참하게 구겨지고 말았던 거야.

    

웃음을 만드는 아이

  지난 일어시간.
 유난히도 눈이 큰 소영이가 선생님 바로 앞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이를 보다 못한
선생님.
  "네 눈은 참 오래도록 키스를 하고 있구나."
  자는 줄만 알았던 소영이.
  "선생님, 키스는 오래 할수록 좋대요."
  그래도 깊은 잠은 안 들었던 모양이다. 덕분에 지루하게 수업을 받으며 앉아 있던
우리들은 요절복통하며 웃을 수 있었다.
  "어머, 소영이 너 키스철학 한 번 멋있다."
  "설마 경험에 의한 건 아니겠지?"
  "얘들아, 너희들 실천에 옮겨 보고 싶은 생각 없니? 백 번 묻는 것보다 한 번 실천이 훨씬
효과적이지."
  '호호호', '하하하' 이렇게 해서 때가 아닌 키스론이 순진한 우리들에게 흥미진진한 화제가
되었다.
  그런데 오늘 그 소영이가 또 실수를 저지른 거다. 예절교육을 하는 날이어서 모두들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평절, 맞절, 대절을 배우고 있던 중이었다.
  우리들의 모습은 우리가 봐도 너무 아름다웠다. 분홍 치마 저고리, 빨간 치마에 반회장
저고리, 남색 치마에 미색 저고리, 옥색 치마 저고리... 한마디로 아주 화려한 꽃밭이었다.
비록 날아오는 나비는 없었지만, 정말 아름다운 꽃동산 같았다.
  남자 선생님들은 넋을 잃고 우리들을 쳐다보기에 바빴고, 여자 선생님들은 몹시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것 같았다.
교장 선생님을 비롯해서 모든 선생님들이 둥그렇게 둘러앉아 있는 앞에서 우리들은 맞절,
평절, 대절의 실습을 했다.
  바로 그때, 느닷없이 '왁'하는 폭소가 터진 것이다. 선생님들도 허리를 잡고 웃어댔다.
  소영이가 대절, 맞절, 평절을 무사히 끝내고 세 걸음 뒤로 물러나오다가 돗자리에 걸려
벌렁 넘어진 것이다. 넘어진 순간 소영은 두 발을 하늘로 체든 채 발버둥질을 쳤다.
  "호호... 돗자리가 너무 두껍더라."
  "마치 말이 넘어진 것 같애. 말이 넘어지면 공중으로 두 다리를 허우적대잖아!"
  "허허허..."
  선생님들도 웃음을 참지 못했다. 두어 번 허우적대다 간신히 일어난 소영이는 새빨개진
얼굴로 계면쩍어 하더니, 갑자기 여러 선생님들을 향해 무희처럼 빈그르르 한 바퀴 돌며
절을 하였다.
  이렇게 하자, 선생님들은 더욱 배를 움켜잡고 박장대소를 하는 것이었다. 우리들의 긴장된
가슴은 순간적으로 봄날 눈 녹듯 스르르 녹아내리고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바뀌었다.
  일곱째 시간.
  우리들은 자연보호 캠페인 포스터를 그리고 있었다. 포스터는 원래 상당한 아이디어가
필요하기 때문에 우리들은 저마다 머리를 자면서 고심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뚝', '데그르르' 하는 괴음이 들렸다. 우리들은 일제히 소리 나는 족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자리는 바로 소영이가 앉아 있는 맨 앞줄이었다
  소영이는 그때 도시락을 먹고 있었다. 그런데 그만 김치통이 소영이를 버리고 데구르르
달아났다. 한데 그걸 미처 잡지 못했던 것이다.
  "쟤는 무슨 밥을 이제 먹니?"
  "도서관 다니는 도시락 두 개씩 싸 가지고 다니잖아."
  "어머, 어떡해? 김치국물이 내 양말에 튀었어."
  소영이의 작꿍이 울상인 채 자지러진다.
  "아이구, 미안해!"
  소영이의 커다란 두 눈도 금세 울상이 되며 짝궁을 쳐다본다.
  "소영아, 그래서 자연보호가 필요하다는 거야. 자연스럽게 있는 미영이 발을 네가
훼손시켰잖아!"
  '깔깔깔', '와글와글' 선생님도 그 광경을 보더니 어이가 없는지 피식 웃어버린다.
  "You are head 빙빙?"
  "My head 멀쩡."
  소영이는 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생긋 웃으며 귀엽게 대답한다. 또다시 자연보호 포스터고
뭐고 정신없이 웃음바다 위로 우리는 헤엄을 쳤다.  아마 교실 바닥이 조금만 덜 튼튼했어도
모조리 거덜이 났을지 모른다. 우리는 발을 구르고, 책상을 치며 너무너무 웃었다.
  평소 덜렁거리지도 않고, 얄밉게 굴지도 않는 소영이는 우리들에게 이같이 웃음을 주는
아이다. 그래서 우리 반원 모두는 소영이를 향상 소중한 귀염둥이로 여긴다.

    

쓸데 없는 기록 갱신

  때는 5교시, 사회시간. 경험해본 사람이면 다 알 만할 거다. 이 5교시가 얼마나 괴로운
시간인가를.
  네 시간의 정신노동으로 이미 지칠 대로 지친 몸. 거기에 점심 먹은 후의 식곤증까지
겹쳤으니 어찌 안 졸고 배기겠는가. 너도 하품, 나도 하품, 그리고 모두 끄ㄸ끄떡이다.
  우리 반 여우들은 어느새 하나씩 꽃 피고 새 우는 행복한 꿈나라로 찾아간다.
  그런데 이게 어지 된 일이야? 내 짝궁, 누구보다도 그 여행을 먼저 떠나던 내 짝궁이,
90도 각도로 고개를 숙여야 할 지금 이 시간에 정반대로 꼿꼿이 머리를 세우고 있는 게
아닌가?
  정말 이상한 현상이었다.
  얘가 정말 왜 이러지? 누구 말처럼 하루아침에 스타일 바꾸네!
  "너 고개 들고 조오냐?"
  "가만 있어. 오늘 어떡하든지 21 기록을 세워야 해."
  이러면서 백지 위에 바를 정자 첫 획을 쓱 그어놓고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앉아서
선생님의 입만 주시하는 거다.
  아하! 알겠다. 그 얘기라면 나도 흥미가 있지.
  사회 선생님은 설명하실 때마다 항상 안내원을 앞장 세우는 버릇이 있다. 그 안내원의
이름이 뭐냐 하면 '에--그래서'이다.
  "얘, 저 선생님은 왜 소비적이니?"
  "소비적이라니? 오히려 그 반대 아니니?"
  "아니, 그런 얘기가 아니야. 지금이 어느 시댄데 필요 없이 에너지를 소모시키느냐
이거아."
  "응, 알겠다. 무슨 말인지. 하지만 뭐 선생님만 소모하니? 우리도 소모하는 거지."
  "얘, 앉아 있는 우리가 무슨 소모니?"
  "야, 우리가 그냥 앉아 있니? 들으면서 앉아 있잖아. 듣는 데는 에너지가 소모 안 되니?"
  "그런가? 얘, 난 그 물리적인 법칙은 딱 질색이니까, 네 말이 맞다고 해두자."
  이렇게 지난 사회시간에 나는 내 짝궁과 소곤거렸다. 그런데 아까 점심시간에 이 계집애가
옆 반에 갔다오더니 눈을 반짝이며 하는 말.
  "얘, 은숙아! 사회 있지. 2반에서 스무번이나 했데."
  "응, 그거 말이니 스무번이나?"
  "그래, 스무번이래. 그러니 내 오늘은 어떤 일이 있어도 꼭 기록을 깨고 말 거야."
  "웃기지 마라. 넌 그 시간에 그걸 계산할 만큼 맑은 정신이 아닐텐데."
  이건 아까 점심시간에 나눈 짝궁과의 대화.
  그런데 이 계집애가 정말 언행일치의 모범을 보이려는 속셈인지, 응당 졸아야 할
지금인데도,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앉아 있는 것이다.
  나도 조금씩 신이 나기 시작했다. 드디어 졸음은 사라지고, 나도 짝궁처럼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사회 선생님의 입을 노려봤다. 그러다가 '에--그래서'가 나왔다 하면,
  "얘, 또 했어." 하며 짝궁과 쾌재를 불렀다.
  어느새 15개. '정'자 세 개가 그려진 종이를 바라보며 우리는 눈과 눈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곧이어 16개, 17개, 18개, 19개...
  짝궁과 나는 두 귀를 쫑긋 세우고 두 눈을 반짝거리며 더욱 열심히 선생님에게로 시선을
모았다. 일찍이 선생님 말씀을 듣기 위해 이토록 정신을 차렸더라면...
  드디어 20개. 수업 시간은 이제 1분 남았다. 입 속에선 침이 바짝바짝 말랐다.
조마조마했다.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에-- 그래서."
  "와아!"
  함성이 터졌다. 마침내 21개로 기록갱신이 이루어진 순간이다. 이 기쁨, 이 쾌감.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함성을 지른 주인공은 바를 정자를 쓰던 짝궁이 아니라
나였다.
  그와 동시에 '따르릉--, 따르릉--' 수업 끝나는 벨 소리가 울렸다.
  내 운명은 말 안 해도 이미 공개된 상태였다.
  "김은숙! 오늘 중으로 반성문 다섯 통 써 가지고 교무실로 와."
  짝궁 잘못 만난 탓에 이 무슨 날벼락인가?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 그러지 않았으면 졸았을
테니까. 그 대신 반성문 세 통은 짝궁이 써야 하는 것 아닌가.
  만일 네가 안 쓴다면 너는 내 짝궁이 아니다. 알았냐?

    

회수권과 단팥죽

  바람이 몹시 부는 날이었어.
  나는 친구들과 헤어져서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탔지. 버스 안은 대만원이었고, 나는 안쪽으로
비집고 들어가 사람들 틈에 끼여 언 몸을 녹였지. 바깥 날씨가 워낙 추웠거든.
  얼마쯤 지나자 내 눈은 어리둥절해지기 시작했어. 눈 앞에 보이는 풍경이 너무
낯선 거야. 내가 매일 아침, 저녁 보아 오던 그 풍경이 아니였어.
  나는 사람 숲을 뚫고 운전기사에게로 다가가 여기가 어디쯤이냐고 물었지. 이게 웬
일이야? 기사 아저씨 입에서 나온 행선지는 내가 한 번도 다니지 않던 엉뚱한
곳이었었어. 정신이 아찔하더군. 부랴부랴 내렸지. 단 한 개뿐인 토큰을 주고 탄 차였는데...
  거리에는 여전히 찬바람이 불었어. 아까보다 조금 더 어두워져 있었지. 나는
여우한테 홀린 기분이었어. 이런 착각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을까 무척 의아스러웠지만,
이미 엎질러진 사발의 물이었어.
  대체 여기가 어딜까? 꽤 번잡한 삼거리 한가운데에는 백합 모양의 커다란 분수가
을씨년스럽게 웅크리고 있었어. 추위 때문에 물도 못 뿜으면서 그냥 청승맞게 서
있었어. 나는 정말 망망대해에 떠 있는 쪽배처럼 아득해졌어.
  추위 탓인지, 어두워진 탓인지, 내왕하는 사람도 별로 눈에 띄지 않았어.
  일단 나는 엄마한테 전화를 하기로 작성했어. 그런데 주머니를 다 뒤지고, 책가방을 다 뒤져
봐도 십원 짜리 동전 한 개 없는 거야. 십원 짜리 동전의 위력을 비로소 인정하게
되더군.
  이 막막함. 집은 꿈나라처럼 아득하게만 느껴졌어. 이때였어. 한 남학생이 내 앞에
나타났어. 흡사 나를 구해 주기 위해 홀연히 나타난 기사 같았어. 힐끗 아래 위를 살
펴보니 껄렁거리는 학생 같지는 않더군. 나는 먼저 그에게로 다가갔어.
  "저어..."
  "왜 그러세요?"
  "저... 실은요..."
  내가 말을 잇지 못하고 쩔쩔매자, 그 남학생의 눈치가 나를 휘어잡았지.
  "아, 토큰이 떨어졌나 보군요."
  정말 나를 구해 주기 위해 일부러 나타난 기사인가? 어떻게 내 딱한 사정을
들어보지도 않고 알지? 나는 은근히 감격했어. 다행히도 주위가 밝지 않은 편이어서, 그는
홍시처럼 빨갛게 달아오른 내 얼굴을 보지 못했지.
  "네, 차를 잘못 타는 바람에..."
  나는 우거지상을 한 채 중얼거렸다.
  "하하하."
  그는 유쾌하게 웃어댔어. 그의 웃음소리는 차가운 거리를 부드럽게 녹여주는
듯했어. 아마도 그건 그의 웃음소리를 듣는 순간 내 마음의 긴장이 조금 풀렸기
때문이었을 거야.
  "그거야 어렵지 않죠. 하지만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그는 다분히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싱글대는 것이었어. 나는 슬그머니 약이 올랐어.
  "그까짓 토큰 하나 꿔주면서 조건은 무슨 조건이에요?"
  그렇게 쏘아 주었지.
  "그까짓 토큰 하나를 우습게 여길 때가 아닐텐데요."
  그는 계속 싱글댔어.
  아, 그랬어. 그까짓 토큰 하나를 우습게 볼 처지가 아니었어. 지금 내 처지는 토큰 하나
때문에 거리에서 울어야 할 판인데, 자존심을 튕겨서는 안 된다고 자신에게
타일렀지.
  "조건이란 게 뭐예요?"
  협상을 시작했지.
  "지금 저와 같이 단팥죽을 먹는 겁니다."
  "뭐요? 단팥죽을 같이 먹어요?"
  "그렇다고 나를 불량배로 보진 마슈. 단지 난 그쪽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
뿐이니까요."
  나는 잠자코 있었어. 칼자루는 그 남학생이 쥐고 있었으니까. 그보다 그의 느낌이 상당히
순수하게 와 닿았지.
  그의 말대로 결코 불량스러워 보이지는 않았어.
  우리는 조금 걸어서 제과점으로 들어갔지. 밝은 불빛, 훈훈한 공기가 실내에 감돌고
아늑했어. 나는 마치 표류하던 배가 항구에 닿은 것처럼 편안한 휴식 같은 걸 느꼈어.
  그는 따뜻한 단팥죽의 첫 숟갈을 뜨며 나를 쳐다보더니 씩 웃었어. 그대 하얀 치아가
불빛을 받아 깨끗하게 빛났어.
  그는 많은 이야기를 했어. 바다 이야기, 철새 이야기, 소설 이야기, 작가
이야기... 많은 이야기들이 그의 입을 통해서 강물처럼 쏟아졌어.
  그는 무척 아는 게 많았고, 생각도 깊은 아주 좋은 남자아이였어. 그는 누군가를 붙들고
오래 이야기를 하고 싶었나봐. 나는 그의 세계로 깊숙히 빠져들었어.
  얼마 후 나는 그에게서 토큰 하나를 받아들고 그와 작별을 했지. 그는 헤어지는 순간
자기집 전화번호를 적어 줬어.
  "토큰이나 단팥죽을 되갚고 싶거든 연락하세요."
  나는 그의 전화번호를 소중하게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어.
  토큰과 단팥죽. 이건 내 열 일곱 겨울을 따뜻하게 감싸주는 털목도리 마냥 영원히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거야.

    

행복한 단식투쟁

  "언니! 우리도 헌법개정 좀 하자."
  "얘는 뚱딴지같이 무슨 헌법개정이야? 그건 국회의원 같은 사람들이 할 일이지 니가 왜
걱정이니?"
  "아니, 우리집 헌법 말이야!"
  "호호호... 우리집 헌법도 있니?"
  "아이 몰라. '척'하면 '착'이라고, 그렇게 말하면 착 알아들어야지 좁쌀영감처럼 따지기는
뭘 따져!"
  "얘가 왜 신경질이야? 그래, 무슨 헌법을 고치자는 거니?"
  "헌법, 헌법 하니까 어쩐지 이상해. 헌법이란 말 대신, 가법이라고 하자구."
  "그래, 알았어. 너와 나만 알면 되는 말인데 아무려면 어떠니?"
  "언니, 우리집 통행제한 시간 있잖아, 그거 좀 연장할 수 없을까?"
  "너 좀 수상하다. 통행금지 시간이 불편하다 이거지? 혹시 버들바람 불어온 거 아니니?"
  "버들바람이 뭔데?"
  "봄이 되면 제일 먼저 살랑거리는 게 뭐니? 버드나무 가지지!"
  "그러니까 봄바람이 들었다 이 말이지?"
  "그래."
  "언니! 나 고백하지만, 사실 나두 봄바람 불 나이 아냐? 한데 아무리 그래도 통행금지
시간이 일곱 시 삼십 분은 너무해. 이건 정말 말도 안 돼!"
  "호호호... 얘가 웃기네. 정말 웃겨."
  "관둬. 나는 심각하게 제의하는데, 그렇게 무시하고 어린애 취급할거면 관두라구!"
  "알았다, 알았어. 그래 너 심각한 얘기나 더 계속해 봐."
  "아이 김새. 언니하고는 왜 이리 무드가 안 통하지?"
  "너 자구 웃길래? 쬐끄만 게..."
  "쬐끄맣긴? 고3이 쬐그만 거야? 언니도 2때부터 남잘 사귀었잖아?"
  "어머! 너 정말 많이 발전했구나! 그렇다 하구, 본론을 말해 봐."
  "아까도 말했지만, 통행금지 시간이 일곱 시 삼십 분이라는 건 말도 안 돼. 거기다 한 번만
어겨도 한 달 용돈이 날아가 버리니, 이건 정말 살 수가 없다구!"
  "얘, 그 놈의 통행금지 시간 때문에 멍든 건 나야. 장장 5년 동안 날마다 그 통행금지 시간
때문에 공포증에 시달리던 내 심정을 너는 몰라."
  "허면, 지금은 만성증세여서 고치고 자시고 할 필요조차 없다 이거야?"
  "암, 만성이지. 난 만성병 환자야.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생긴 법이 대학 2학년이
되도록 계속되니, 이건 완전히 사람 죽이는 법이지. 이젠 내 남자친구도 여섯 시 삽십 분만
되면 나보다 더 안달을 해. 빨리 들어가라고 지가 먼저 서둘러."
  언니는 허탈하게 깔깔거린다. 참 묘한 일이다. 언니의 남자친구까지 우리집의 웃지 못할
법에 걸려 쩔쩔매다니.
  "언니,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
  "있지, 있어."
  언니와 나는 밀실회담에 들어갔다.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하늘이 두쪽 나도 이 법만은
고쳐야 한다고 결의했다. 그래서 동생녀석을 불렀다. 이 녀석은 고등학교 1학년인데, 우리는
동생에게 은밀히 우리의 결의를 세뇌시켰다. 물론 이 녀석도 대찬성이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 삼남매가 채택한 첫 번째 투쟁방법은 '단식'이었다.
  이 방법은 우리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엄마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데는 가장
효과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엄마는 우리가 먹지 않는다는 것에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다. 우리 셋은 그날 저녁부터 굶기로 작정했다.
  우리들의 방문에는 강한 흘림체로 '통행금지 시간을 아홉 시까지로 연장하라!'라고 씌어진
종이 포스터가 붙여졌다. 우리의 희망시간은 열 시지만, 너무 요구사항이 지나치면 엄마,
아빠가 쇼크를 받아 오히려 일을 그르칠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아홉 시'까지로 양보한
것이다.
  드디어 엄마의 반응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얘들아, 이게 무슨 짓이니? 아버지 들어오시기 전에 얼른 나와. 얘들이 별짓을
다하는구나!"
  최초의 반응은 이 정도였다. 우리는 침을 꼴깍 삼키며 묵비권 행사를 했다.
  "어서 밥 먹어. 매운탕 맛있게 끓여 놨다."
  '밥! 매운탕!' 우리들 입안은 어느새 침이 괴었다. 우리 세 남매가 가장 좋아하는 메뉴가
아닌가. 하지만 이를 악물며 식욕을 눌렀다. 칼을 뽑아 든 이상 쉽게 물러나서는 안 된다고
맹세를 거듭했다.
  드디어 아버지가 귀가했다. 엄마가 중간보고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지금쯤 아빠의 호통이 있어야 할 때인데 아무 반응이 없었다. 집안은
쥐죽은 듯이 고요할 뿐이었다. 죽음 같은 침묵만이 흐를 뿐이었다. 싸움을 걸면 응전을
해와야 할텐데 상대가 지레 겁을 먹고 자지러진 모양인가?
  "누나! 엄마, 아빠가 간디의 무저항주의를 채택하셨나봐. 히히히..."
  그런 상황에서 동생은 넉살 좋게 웃었다. 무저항주의?
  그것은 가장 뼈대 있는 투쟁 방법의 하나인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럼 우리가
판정패했단 말인가?
  이렇게 시간은 자꾸 흘렀다. 마루에 걸린 괘종시계가 '땡땡땡' 열두 번을 울렸다.
  배가 고팠다. 우리 삼총사의 눈 앞에는 밥상만이 어른거릴 뿐이었다. 우리 엄마의 매운탕
솜씨는 정말 일품인데...
  백기를 들고 달려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참아야 했다. 우리는 전쟁 고아처럼 쫄쫄 소리
나는 배를 움켜쥐고 그대로 꼬부라져 잠이 들었다.
  지구는 멸망해도 태양은 다시 뜨듯이 아침은 어김없이 다시 찾아 왔다. 우리는 다음
진로를 어떻게 할까 작전을 짰다.
  이왕 내친 걸음이니 조금 더 반응을 기다리기로 했다. 아무리 '무저항주의'라지만,
삼남매가 두 끼씩이나 굶는다는 데는 엄마도 더 이상 견뎌내지 못할 것이라는 계산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잘못했어. 미리 빵 같은 대용 비상식량을 준비해 놓고 시작하는 건데..."
  이렇게 말하는 언니 말에 맞다고 맞장구를 쳤다. 하지만 이미 지나간 시내버스 아무리
세워본들 무슨 소용이며, 놓친 고기가 아무리 크다고 소리쳐 본들 누가 돌아다나 보겠는가.
  "언니, 방학이기 망정이지 학교 다닐 때 같으면 우리가 깨끗이 판정패였겠지?"
  그때였다. 아버지의 출근 채비 소리가 들렸다. 현관에서 배웅하는 엄마의 웃는 소리도
들렸다. 웃는 소리? 이건 여명의 징조인가? 드디어 엄마가 우리 방을 노크했다.
  "얘들아, 얼굴이나 좀 보자."
  아, 그리운 엄마의 목소리. 엄마의 목소리만 들으면 우리의 마음은 왠지 약해진다.
당장이라도 달려나가 엄마 품에 안겨 실컷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언니! 아빠가 나가셨으니 문이나 열어봐."
  "그래, 알았어."
  우리 방의 문이 열렸다. 문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우리가 붙여둔 포스터는 간 곳이 없고, 그 자리에는 '알았다. 통금시간은 아홉 시다. 그
대신 아빠, 엄마의 마음을 항상 기억하고 다녀라.'라고 쓴 아빠의 글씨가 걸려 있었다.
  우리는 모두 입을 다물었다. 우리는 눈시울을 붉히다가 내가 먼저 엄마 가슴에 안겨
울음을 터뜨리자, 모두 따라 울었다.
  엄마는 밥 차려 놨으니 어서들 가서 밥이나 먹으라고 타이른다. 우리는 한동안 숙연해졌다.
엄마, 아빠의 사랑을 온몸으로 느끼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삼남매이기에.

    

친구와 친구

  마지막 강의를 듣고 교문을 막 나오는데, 뜻밖에도 고교 동창 진호녀석이 그곳에 서
있었다.
  "야, 임마! 얼마만이냐?"
  "너 기다리다가 다리 부러지는 줄 알았다."
  "미리 연락하고 와야지. 미련스럽긴."
  "연락할 틈이 없었어. 지금 막 나오는 길인걸."
  그 녀석은 대한민국의 국군 일등병이다. 녀석의 얼굴은 검게 그을려 있었다. 첫휴가를
나오자마자 내게로 달려온 것이다.
  '암, 그래야지. 이놈이 입대한 뒤 나는 얼마나 쓸쓸했던가.'
  우리는 길가에 늘어선 포장마차로 들어갔다. 삶아 놓은 오징어를 앞에 놓고 소줏잔을
들어 녀석의 첫휴가를 축하했다. 포장마차의 주인도 우리들의 모습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주인 아저씨, 이 사람 뭐같이 보여요?"
  "뭐 같다니? 아주 미남인데."
  "미남이요? 거북이같이 생기지 않았어요?"
  "하하, 그래. 한데 거북이 중에서도 왕거북이 같이 생겼는데."
  주인과 나의 장단을 지켜보고 있던 녀석은 씩 웃으며, '아저씨는 역시 사람 보는 눈이
있습니다.' 하는 흐뭇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
  고교 시절, 체육 시간을 막 끝낸 여름날 오후, 녀석이 러닝 셔츠를 벗어 던진 채 알몸으로
교단에 올라서서 한다는 소리.
  "야, 너희들! 지금부터 내가 물적 증거를 보여줄 테다. 그리고 나한테 잘 보이려면
이 순간부터 알아서들 하라구."
  이러더니 폼을 딱 잡았다. 그런데 그 녀석 가슴에서 배에 이르는 부분에는 놀랍게도
백 년에 한 명 나타날까말까 한다는 임금 왕자가 뚜렷이 새겨져 있었다.
  거북이는 원래 장수나 복을 가져다 주는 영물로 여긴다. 한데 그는 자기가 임금 왕을
복부에 안고 있기 때문에 장차 무엇이 될 것인지는 이미 알 만하지 않느냐고 넉살을 떨었다.
  우리는 그 녀석의 배를 보며 놀람 반 웃음 반으로 농담을 계속했다. 한 차례 법석을 떤 뒤
녀석은 고단했는지 거북이 같은 자세로 러닝 셔츠만 입은 채 너부죽이 책상에 엎드려 잠이
들었다. 그때 짓궂은 친구 한 놈이 아주 가만가만히 매직으로 그 녀석의 임금 왕자 양 옆으로
곧은선을 내리그어 밭 전자를 만들어 놓았다. 한참만에 일어난 녀석에게 짓궂은 그 친구는
놀려대기 시작했다.
  "야, 거북아! 어서 밭을 갈아야지. 그래야 씨를 뿌리지."
  어쨌든 우리들은 그 녀석의 배에 새겨진 임금 왕자를 떠올리며, 오래도록 그를 잊을 수
없어 했다.
  그런 녀석이 하루는 은근한 걸음걸이로 내게 다가와 여자친구가 생겼다고 자랑을 늘어놓는
것이었다.
  "니 주제에 여자가 생겨?"
  "야, 정말이야. 어저께 집 앞 골목을 나오는데, 옆집 그 애가 내게로 오잖아. 그리고
나한테 쪽지를 주는 거야."
  "그렇다 하고, 그 쪽지엔 뭐라고 써 있디?"
  "히히, 놀라지 마. '댁의 팬티가 우리집 앞마당에 떨어져 있으니 주워 가세요'이렇게 적혀
있었어. 히히히..."
  그 소리를 듣고 친구들은 정말 요절복통했다.
  지금 이 녀석 얼굴을 보니, 그 옛날 생각이 갑자기 선명하게 떠오른다.
  "야, 임마! 너 팬티 가져가라던 그 여학생 지금은 뭐하냐?"
  "걔 말이니? 내 팬티 빨아놓고 나 올 때를 기다리고 있겠지 뭐."
  "하하하..."
  우리는 정말 유쾌하게 한바탕 다시 웃었다. 녀석은 군에 가더니 옛날보다 더 늠름해졌고,
그 거북이 같은 표정만은 여전히 버리지 않고 있었다.

    

우정의 감격시대

  '벙글벙글'은 우리 학교 앞 라면집 이름이다.
  이름으로 보면 돈 지닌 어린애 웃는 얼굴 같지만, 여기야말로 젊음을 불사를 수 있는
뜨거운 곳이다.
  '황태자의 첫사랑'에 나오는 뮌헨대학 앞에는 밤새워 술을 마실 수 있는 낭만적인 맥주집이
있다. 하지만, 그건 독일 이야기이고, 여기는 코리아다. 나는 코리아의 사나이니까 함부로
착각을 해서는 안 된다.
  나는 코리아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 '벙글벙글' 라면집을 아주 만족스런 장소로 여긴다.
  우리는 출출할 때마다 이 라면집을 찾는다. 먹성 좋은 나이들이어서 그런지 우리는 먹어도
먹어도 배가 허출하다. 그때마다 우리는 늘 이 '벙글벙글' 라면집으로 직행한다.
  오늘 3교시는 교련시간인데, 선생님이 출장을 가는 바람에 자습을 하게 됐다. 나는 친구 세
명과 함께 교실을 살짝 빠져나와 '벙글벙글'로 갔다.
  '벙글벙글'에서 라면을 기다리고 있는데, 딸딸이(오토바이처럼 딸딸거리며 이야기하는
친구의 별명) 녀석이 느닷없이 손금을 봐 주겠다며 내 손을 덥썩 잡아챘다. 나는 장난 삼아
손바닥을 내밀었다. 딸딸이는 진짜 수상쟁이처럼 내 손바닥을 이리저리 살폈다. 두 눈가지
껌뻑껌뻑거리는 게 관상쟁이와 흡사했다.
   "야, 임마! 대강대강 봐. 니가 무슨 쟁이라고 이렇게 오래도록 주물럭거리니?"
  옆의 친구들은 웃음을 참느라 킥킥거리고, 한참만에 딸딸이는 아주 심각한 표정을 짓는다.
  "야, 넌 나를 왜 이렇게 슬프게 만드니?"
  "무슨 헛소리야?"
 "넌 여자복이 너무 없어. 이 손금으로는 장가 가기는 다 틀렸어, 임마!"
  "야, 임마! 악담하지 마. 정말 나 장가 못가면 네가 책임질 테냐?"
  그러자 기석이가 끼어든다.
  "야야, 그러지 말고 당장 한 번 시험해 보자. 경일이가 정말 여자복이 있는지 없는지,
시험해 보면 될 것 아냐?"
  "어떻게?"
  "저쪽 구석에 여자애 있지. 쟤한테 경일이가 말을 걸어보는 거야. 성공하면 딸딸이
손금점을 틀린 거고, 실패하면 경일이는 노총각 신세를 못 면하는 거지 뭐."
  "이거 어째 심란해진다. 내 운명이 지금 이 순간에 결정이 나버릴 것 같은데..."
  "자신 없니?"
  "아냐. 자신 있어."
  나는 배에 힘을 주고, 그 여학생한테로 접근해 갔다. 실패하면 나는 노총각 신세가 되다.
노총각 신세로 살아야 한다는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저, 실례합니다."
  "...?"
  웬일인가 싶어 그 여학생은 나를 빤히 쳐다봤다.
  "오늘 하늘에 구름이 끼었습니까? 맑게 개었습니까?"
  "...?"
  "그럼 별을 볼 수 있습니까, 별을 볼 수 없습니까?"
  혹시 이 여학생은 귀머거리가 아닌가? 계속 나를 빤히 쳐다만 보고 있었다. 어쩌다가 이런
위기일발의 순간에 놓이게 되었는가? 오로지 이 여학생의 입에서 나오는 한마디 말에 내
평생의 여성운이 결정되다니.
  이때다. 내 수작을 지켜보고 있던 친구들이 '와'하고 폭소를 터뜨리는 거였다. 그리고
딸딸이 녀석은 호기 있게 장담을 했다.
  "경이라! 넌 이제 혼자 살아야 할 팔자야. 내게 잘 보이면 그 처방을 알려 줄 수 있지."
  나는 하는 수 없이 뒤통수를 긁적이며 자리로 돌아왔다. 몽달귀신이 되어야 할 판이니
심각하고 한심스러웠다.
  승패가 판가름 났다고 체념하고 액땜 처방이나 들어볼까 하고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려는
그때, 그 여학생은 우리 쪽으로 다소곳이 걸어왔다. 그녀의 서 있는 모습은 가냘프고, 얼굴은
아주 해맑았다. 우리는 모두 긴장된 얼굴로 그녀를 쳐다봤다. 그 여학생은 입을 달싹이며
이렇게 말했다.
  "하늘은 개었어요. 별도 볼 수 있을 거예요."
  나는 그 순가, 무지개를 탄 듯한 기분이었다.
  "네, 감사합니다. 별을 볼 수 있게 해 주셔서. 그런데 언제 볼 수 있을까요?"
  "오후 네 시 삼십 분, 여기서요."
  나의 친구 녀석들은 모두 어리둥절한 채 나를 바라봤다. 어쩌면 그 여학생은 우리들의
수작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를 구원해 준 건지도
모른다. 구원의 천사처럼 말이다. 아무튼 이것은 내게 있어 분명한 구원이었다. 몽달귀신이
될 뻔한 사람을 구원해 준 것이었다.
  우리는 교실로 다시 돌아왔다. 오늘 하루의 수업도 끝났다. 종례시간 담임 선생님의 말씀은
귓등으로만 들리었다. 나는 연신 시계만 쳐다봤다. 나는 '차렷, 경례'와 동시에 절을 구십도로
하고, 잽싸게 가방을 들고 교실문을 박차고 나오려 했다. 그 순간 칠판에 씌어 있는 하얀
글씨들이 내 덜미를 잡았다.
  "오늘 청소를 16번__20번까지, 오늘은 담임 선생님이 철저히 검사함"
  딸딸이 녀석이 슬그머니 내게로 다가왔다.
  "임마! 내가 뭐랬냐? 넌 여자복이 지지리도 없다고 했잖아?"
  이 운명의 기로에서 도망을 칠 것이냐? 청소를 할 것이냐? 이때 내 어깨로 손이 얹어지며
은근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어서 가봐. 내가 대신 해줄게."
  기석이의 음성이었다.
  우정이라는 것, 이것에 나는 감격하고 또 감격했다.

    

엄마의 방학

  무척 덥다. 방학을 한 지도 열흘이 지났건만, 바다는커녕 수영장 구경도 못하고 이게 뭔가?
내가 무슨 바둑이 새끼인가? 매일같이 집만 지키게 하다니.
  한데 너무너무 이상했다. 엄마는 처음부터 약간 이상했다.
  "얘, 너희 방학 언제부터냐?"
  엄마는 나보다 방학을 더 손꼽아 기다렸다.
  "얘, 이제 여드레 남았니?"
  "엄마는 참 이상해. 엄마가 뭐 학생이유. 맨날 방학타령만 하게."
  "얘는 그런 소리 마라. 내가 왜 방학이 안 기다려지니? 우선 새벽밥 안해도 되고 또..."
  그대 나는 '또'라는 말의 속뜻을 물어보지 않았다. 바보스럽게도 말이다. 한데 나의 방학과
더불어 엄마는 정말 신바람이 나서 바깥 나들이를 했다.
  "얘, 집 잘 지켜. 요즘은 밤손님보다 낮손님이 더 많다더라."
  이러고는 하얀 원피스에, 하늘색 양산을 쓰고, 얼굴 가득히 웃음을 담고 나갔다. 그런
모습의 엄마는 아주 젊어 보였고, 예쁘게 보였다. 얼핏 보기에는 대학생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음, 엄마에게도 볼일이 있으시겠지 뭐."
  처음엔 이렇게 생각하며 빈 짐을 지키고 있었다. 우리집 식구는 엄마, 아빠, 나 이렇게
셋이다.
  그런데 나는 이제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매일 아침마다 밤손님 낮손님을
들먹이다가 미소지으며 사라지는 엄마를 너그럽게 더 이상 봐 줄 수가 없게 됐다.
  아무도 없는 빈 집에서 지독한 더위와 싸우며 혼자 있어야 한다는 것 . 이거야말로 정말
사람 미치게 하는 노릇이다.
  나는 하루종일 별렀다. 엄마가 오기만 하면 나를 뭘로 취급하느냐고 따지기로 작정했다.
저녁때가 되어 엄마는 과일 한 상자를 들고 들어왔다. 아침만큼 생글거리지 않았지만, 그래도
환한 얼굴이었다.
  "엄마! 맨날 어딜 그렇게 다니우?"
  "얘는 별걸 다 물어. 너도 생각 좀 해봐라. 엄마가 얼마나 징역살이를 했는가. 엄마도 이젠
말도 좀 하고, 웃기도 하며 살기로 했다."
  나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엄마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으니까. 엄마는 정말
오늘의 나처럼 맨날 아무도 없는 빈 집에서 말도 못하고, 웃지도 못하며 지내왔다. 나는
너그럽게 마음을 먹기로 했다. 엄마를 해방시켜 드려야 했다. 적어도 방학때만이라도.
  그런데 몇일이 지나자 내 마음은 또 변덕을 부리기 시작했다. 나도 엄마처럼 거리
구경이 하고 싶어서 죽을 지경이었다.
  "영희야! 우리 내일 만나자. 풀장에서 아침 열 시. 알았지?"
  영희한테 전화를 걸어서 약속을 했다. 다음날 아침 나는 일찍 나갈까 하다가 그래도
착한(?) 마음에, 선생님 말씀을 따르기로 했다. 외출 할 때는 반드시 부모님에게 허락을 받고
나가라는 그 거룩한 말씀을 좇아 엄마에게 용건을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엄마는 펄쩍 뛰었다.
  "아니 얘가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밖에 나가봐야 덥기만 해. 그리고 넌 중3이잖니? 큰
시험을 앞두고 여름방학에 공부를 안 하면 언제하니? 집에서 공부나 해. 내 들어올 때 수박
사 갖고 올테니..."
  단숨에 거절의 말을 쫙 하고 난 엄마는 내게 말 한마디 할 여유도 주지 않고 나가버렸다.
  완전한 판정패였다. 나는 마룻바닥에 주저앉았다. 한숨이 푹 쏟아져 나왔다. 책을 펴봤다.
하지만, 찜통 같은 집 안에서 공부가 될 리가 없었다.
  안 돼, 이래서는 정말 안 돼. 나도 말도 하고, 웃기도 하고, 거리구경도 하면서 살테야.
  하루종일 머리를 짜봤다. 별로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엄마보다 먼저 집을
빠져나가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나는 다음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서둘렀다. 머리 감고, 샤워하고, 옷도 챙기고... 칼을
뽑았으면, 연필이라도 깎아야 한다는 결심으로 행동을 민첩하게 하고 있는데, 이게 웬
날벼락인가?
  "승화야! 너 미안하지만, 설거지 좀 해라. 엄마 친구가 미국에 가는데 공할엘
나가봐야겠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지났네, 어휴!"
  엄마는 물방울 무늬 원피스를 쭉 빼입고 핸드백을 들고 부리나케 나갔다.
  울고 싶던 내 마음은 순간적으로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엄마가 아주 귀여운 소녀같이
생각됐기 때문이다. 얼마나 그동안 답답했으면 저토록 나들이하길 좋아할까.
  오늘은 저녁밥까지 일찌감치 내가 만들기로 했다. 그러면 엄마는 깜짝 놀랄 것이고, 또
조금은 미안해 할 거다. 그리고 어쩜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얘, 승화야! 내일은 너도 외출 좀 하려. 친구랑 풀장에도 가고, 이제 개학도 나흘밖에
남지 않았잖니?"
  그럼 난 뭐라고 할까?
  "엄마! 개학이 나흘밖에 안 남았잖아, 그 나흘 동안을 최대한 이용하셔야죠."
  이렇게 말할까?

    

남자가 강해지는 비결 모르시나요?

  아주 추운 겨울날. 따근따근한 아랫목에 배를 깔고 누워서 발장단을 치며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 맛은 정말 고소하다. 가끔 이런 날도 있는 걸 보면 삶이란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 같다.
  난 아주 행복했다. 한데 이 행복에 '안녕'을 고하고 자리에서 잠깐 일어나야만 했다.
왜냐하면 오늘 종로에서 그녀를 만나기로 했기 때문에.
  나는 아랫목의 유혹과 그녀와의 약속을 양손에 들고 저울질했다. 하지만 그녀 쪽으로
무게가 쏠렸다.
  '나가야지, 내가 안 나가면 혹시나...'
  나는 후다닥 일어났다. 세수하고, 죽기보다 싫은 머리도 감고, 온몸 골고루 적당히 멋을
내고서 거리로 나섰다.
  정말 추웠다. 영하 15도, 대단한 날씨였다. 지나는 사람들 입에선 하얀 김이 뿜어져
나왔다. 꼭 황소들 코를 닮은 것 같아 쿡 웃음이 나왔다.
  '가던 날이 장날'이란 말이 있다. 좋은 일이 생겼다는 것인지, 나쁜일이 생겼다는 것인지는
몰라도, 좌우지간 그 말이 지금 절실하게 떠오르고 있다. 이렇게 추운 날 버스가 죽어라 하고
안 오는 거다.
  내가 버스를 타는 곳은 삼거리 정류장인데, 이 삼거리는 모두 벌판으로 통해 있다. 아직
개발지역이라 버스 왕래가 워낙 뜸한 편이긴 하다.
  이십 분을 기다렸는데도 버스는 나타나지 않았다. 정말 허허벌판에서 사시나무 떨 듯하며
이빨이 딱딱 부딪치는 게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쌩쌩 달리는 택시들이 나를 유혹했다.
하지만, 눈 딱 감고 그 유혹을 뿌리쳤다. 그리고 오기로 버스를 기다렸다.
  이렇게 하여 삼십여 분 만에 나타난 버스를 타고 종로 2가에서 내렸다. 그녀와 만나기로
한 아지트에 닿았을 때는 약속시간에서 한찬 지나 있었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잠시
떠올려봤다. 화가 잔뜩 나 있을 그녀를 어떻게 위로해 주나 해서였다. 내 두 손은 바지
주머니에서 나올 생각을 않는다. 그것들도 이렇게 추운데 바깥으로 나오고 싶지 않았을 거다.
할 수 없이 어깨로 문을 밀고 들어갔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화가 나 있어야 할 그녀가 온 얼굴에 웃음을 가득 담고
생글거리고 앉아 있는 것이다. 이상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일은,
그녀의 눈길이 잔뜩 웅크린 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음악실의 DJ 녀석한테로 가 있는
것이었다. DJ란 녀석도 그녀만큼이나 싱글거리고 있었다.
  눈에서 쌍심지가 솟아올랐지만 참아야 했다. 그리고 점잖게 그녀 앞에 앉았다. 그녀는 내가
약속시간에 늦었다는 사실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아주 정신이 빠져 있었다. 무척 약이
올랐다. 영화구경을 시켜 주겠다고 달랬다. 그러지 않고서는 DJ로부터 눈길을 떼어놓을
방법이 없었다.
  밖으로 나오자 나는 화를 냈다. 무슨 여자가 그 모양이냐구.
  그녀는 태연스럽게 지껄였다. DJ 녀석이 탐 크루즈를 닮았다나 어쨌다나? 그리고는 한 술
더 뜬다.
  "넌 왜 그 DJ보다 못 생겼니?"
  느닷없이 내게 이른 거다. 할 말을 잊었다.
  난 약속대로 그녀를 데리고 극장에 갔다. 다정한 척 어깨를 맞대고 우린 영화를 감상했다.
  그런데 영화를 보던 도중 그녀는 느닷없이 내 손을 잡았다. 이건 도대체 무슨 수작인가?
나는 흥분한 탓에 멋대로 생각해 버렸다. 적어도 이 여자는 나를 사랑하고 있나보다고.
영화가 끝날 때까지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영화가 끝나자 나는 그녀에게 은근히 물어봤다.
  "내 손 따뜻했지?"
  어럽쇼, 이 여자의 대답 좀 들어 보구려.
  "아까 그게 의자 손잡이가 아니라, 네 손이었니?"
  하늘이 무너지는 앙큼스런 목소리.
  이럴 때 남자가 강해지는 비결 같은 건 없을까?

    

빛을 모으는 당신이여

  나는 대구에 살고 있는 펜팔 친구 준을 서울역 그릴에서 처음 만났어요.
  서로 교환한 사진에서 본 기억을 떠올려 그릴에 들어서자, 홀 안을 한 바퀴 둘러봤지요.
하지만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어요. 어떻게 하면 좋을까? 궁리 끝에 나는 그릴 안에 설치된
공중전화 부스로 갔어요. 그리고 그 그릴로 전화를 걸었어요. 잠시 후 동전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DJ목소리가 들렸어요.
  "네, 그릴입니다."
  "죄송합니다만, 손님 가운데 대구에서 오신 박준씨 좀 부탁합니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이어 DJ의 목소리가 그릴 안에 퍼지더군요.
  "대구에서 오신 박준씨 전화 받으세요."
  잠시 후였어요.
  "여보세요?"
  대구 사투리가 물씬 밴 목소리가 나왔다.
  "박준씨세요? 저 지금 그릴 안에 있어요. 한데 누군지 찾을 수가 없어요."
  "아, 그라믄 지가 그리로 가겠십니더."
  뮤직 박스 앞으로 한 남자가 의기양양하게 어깨를 흔들며 걸어오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의 모습에서 대학생임을 느끼게 하는 것은 얼굴 표정뿐이었고, 옷은 너무도
남루하고 초라했어요.
  우리는 마주 않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남자와 대면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처음이었지만, 그때 저는 별로 어색함을 느끼지 않고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얘기 도중에 준은
이렇게 말했어요.
  "편지로 생각한 인상은예, 새침하고 깔끔해서 뭐라칼까, 말을 잘 하지 않을 줄 알았서예.
한데 너무 내 말을 잘 받아주니까 좀 어리둥절 하네예."
  그건 내가 생각해 봐도 마찬기자였어요. 나는 평소에 새침하고 깔끔하다는 말을 들어왔고,
또 별로 말을 많이 하는 편이 아니었거든요. 하지만, 처음 만난 준은 내 가슴을 털어놓고
싶은 그런 사람이었어요.
  우리는 역 그릴에서 나와 남대문 쪽으로 걷다가 분식센터로 들어갔어요. 간단히 식사를
끝내고 나오는데, 준은 한 옥타브 높인 음성으로 말했어요.
  "날 만나믄 악수 해준다 안캔나?"
  그때 우리는 벌써 말을 놓고 지내는 사이가 돼 있었죠.
  준은 서울에 오면 처음 만나는 인사로 악수를 해주겠다고 한 내 편지 내용을 기억해
내고서 이렇게 말하는 거였어요. 그 순간, 난 얼굴이 빨개져 웃음으로 그 자리를 때우려
했어요. 그런데 준은 걸어가면서 '자--' 하고는 손을 내밀었어요.
  "이다 헤어질 때 하면 되잖아."
  "이따는 또 이따 하면 안 되나? 지금 안 하믄 짝짝이가 안 되나? 왔을 때 한 번, 갈 때
한 번, 그래야 짝이 맞제."
  그가 내민 손을 보고 있자니 민망스러워 살며시 그의 손 끝을 잡았다가 재빨리 손을 빼서
내 호주머니 속으로 넣었어요. 우리는 처음 만났고, 딱히 갈 곳도 마땅치 않아 다시 다방으로
들어갔어요. 한참만에 준이 묻더군요.
  "어떻게 했으믄 좋겠나?"
  "뭘?"
  "계속 편지 나눌래?"
  "편지 하고 안 하고는 준 마음이지 뭐. 하지만, 편지 하면 답장은 해줄께."
  "우리 오래 사귀어 보는기라. 모든 사람이 부러워 미칠 정도로 말이다."
  우리는 잠시 침묵했어요. 그 침묵은 우리 사이를 어색하게 했지요.
  "준, 나 처음 보고 이상한 거 발견 못 했어?"
  "글쎄? 뭐신데?"
  "내 얼굴을 잘 봐. 대칭이어야 할 것이 비대칭으로 된 곳이 있을 거야."
  "어딘데?"
  "눈."
  내 눈의 왼쪽은 쌍꺼풀이 선명한데 오른쪽은 그렇지 않거든요. 그러자 준은 웃으며
말했어요.
  "니 돈이 없어서 한쪽만 했나? 마, 한쪽은 이 다음에 내가 해 줄끼라."
  우린 이렇게 말하며 함께 배를 잡고 오랫동안 웃었지요. 서로의 눈을 쳐다보면서 말예요.
  그리고 다방에서 나와 다시 서울역으로 향했지요. 준은 다시 대구로 돌아가야 했거든요.
지하도를 걷는데 조금 어색했어요. 어떻게 하는 것이 예의에 벗어나지 않는 방법일까?
옆에서 걸을 때는 왼쪽, 오른쪽 아니면... 바보 같은 생각들이었죠.
  그런데 갑자기 준이 나의 손을 덥석 잡는 것이었어요. 나는 가슴이 마구 뛰었어요. 전혀
생각해 보지 않았던 일이니까요. 준이 그렇게 대담할 줄은 몰랐어요. 글쎄 대담하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것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요.
  나는 그 손을 뿌리치지 않았어요. 아니 어쩌면 준이 나의 손을 잡아 주길 바랬다는 것이
솔직한 표현일 거예요. 그 날은 유난히 추웠어요. 서울역 대합실에 들어서서는 인파 사이로
손을 꼭 잡고 다녔지요. 동대구행 특급표를 한 장 샀어요. 난 물었죠.
  "그게 뭐니?"
  "입장권."
  우린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었던 거예요.
  개찰이 시작되자 준과 나는 플랫홈으로 가는 계단을 아쉬운 마음으로 한 계단 한 계단
내려갔어요. 준은 기차 맨 앞까지 걸어갔다 오자고 했어요. 우리는 어깨를 맞대고 긴 기차
머리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왔어요. 준은 물었어요.
  "니 할 말 없나?"
  "응, 몸조심하고, 가는 대로 편지해. 긴 편지 말이야."
  "그래, 니도 몸조심해라."
  기차가 육중한 몸을 움직이려 할 때 우리는 다시 한 번 손을 꼭 잡았어요. 준은 승강구
계단에 서서 손을 흔들었어요. 나는 손수건을 꺼내 멀리 사라지는 그에게 웃으며 손짓으로
말했어요. 어쩌면 나는 그러면서 흐르는 눈물을 닦으려 했는지도 모르겠어요.
  "이제 들어가래이!"
  소리치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난 기차가 안 보일 때까지 발길을 돌릴 수가
없었어요. 아득히 사라지는 기차 승강구에 그대로 서 있는 준의 모습이 아물아물해졌어요.
  "안녕, 안녕--"
  준의 모습이 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을 때, 기차는 조그만 성냥갑 옆 모습같이
보였어요. 그리고 돌아섰을 때, 내 주위엔 아무도 없었어요. 밤 열 시 삼십 분. 새까만
어둠만이 내 주변을 가득 에워싸더군요.
  며칠 후, 준은 아주 아름다운 그를 보내 줬어요. 나도 긴긴 답장을 써 보냈어요.
  우리는 전처럼 많은 편지를 또 주고 받았어요. 그리고 몇번 더 만났어요.
  "처음 만날 때 입었던 점퍼는 어쨌니?"
  나는 맨 처음 만나던 날 입었던 준의 초라한 점퍼를 생각해 내고는 짓궂게 물었어요.
  "아, 그 옷말이가? 그 옷은 장가들 때 입을라꼬 그냥 놔뒀다, 와?"
  준은 처음 자신의 초라한 외모를 보고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게 알고 싶었던 거예여.
준이 물었어요.
  "니, 내 군대 가면 어찌 할끼고?"
  "뭘 어떻게 해?"
  그 물음이 무엇을 원하는 것인 줄 알면서도 나는 반문했어요. 내 성격은 한 번 하겠다고
생각한 것은 꼭 하는 편이고, 자신이 없는 일에 대해서는 약속 같은 건 하지 않거든요. 그때
사실 나는 모든 게 미지수였고, 또 준이 3년 동안 기다려 달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내가 먼저
기다리겠다고 말하는 것도 자존심이 허락치 않았거든요. 그래서 준의 물음에 대한 나의
대답은 미궁인 채로 끝나 버렸어요.
  그러던 어느날 준은 입대를 한다면서 서울에 왔어요. 마지막으로 저를 보고 가겠다는
것이었어요.
  그 날은 6월이 마지막 가는 날이었어요. 공군 입대는 매월 1일이라고 했어요. 나는
'축입영'이란 글씨를 새긴 볼펜을 준에게 선물로 주었어요. 그리고 준이 들고 있던 책
"사서삼경"을 달라고 했어요. 당장 필요한 책은 아니었지만, 무엇이든 그의 '것'을 간직하고
싶었어요.
  준은 그 날 오후 한 시 삼십 분에 와서 여섯 시 십분 고속버스로 갔어요. 그렇게 준이
떠난 후 전 너무 쓸쓸했어요. 그 뒤 난 준의 편지를 무작정 기다렸어요.
  초조해진 나는 누구에게든 물었어요. 오바 친구나 군에 간 오빠를 둔 친구에게나. 군에
입대한 지 며칠 만에 편지를 할 수 있느냐구요. 각기 대답이 틀렸어요. 어떤 사람은 바로 할
수 있다고 했고, 또 어떤 사람은 1개월이 지나야 자유롭게 할 수 있다고 했어요.
  그런데 갑자기 내 머릿속엔 이상한 예감이 스쳤어요.
  '아니야. 준은 입대하지 않았어. 준은 나를 멀리 하기 위해 그냥 핑계 삼아 한 말이었어.
만약 1일 입대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 전날 무슨 여우로 서울까지 온단 말인가?'
  나는 많은 고민 끝에 대구로 전화를 했어요. 그때는 여름방학 때였어요. 전화를 받은 준의
어머니는 준이 친구들과 캠핑을 갔다고 했어요. 그 순간 나는 까무라칠 것 같은 충격을
받았어요. 나 자신이 너무 미웠어요. 바보 같은 내가 너무너무 싫었어요.
  그때부터 나의 생활은 궤도를 잃었어요. 주위 사람들은 무슨 일이냐고 물었어요. 나는 견딜
수가 없어서 배신당한 감정을 편지에 담아 준에게 보냈어요. 그리고 대구 문화방송국 앞에서
토요일 오후 다섯 시 삼십 분에 만나자고 일방적인 약속을 써 보냈어요.
  나는 그때 국민학교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기 때문에 평일에는 시간을 낼 수가 없었어요.
  토요일, 아이들을 일찍 보내고 열두 시 이십 분 고속버스를 타고 대구로 갔어요. 약속
장소에서 한참을 기다렸는데도 준은 나타나지 않았어요. 그런 준이 너무 야속했어요. 나는
몇번씩 거리의 시계탑을 쳐다보며 서성거렸어요.
  '자기도 양심이 있으면 어떻게든 나오겠지. 서울에서 일부러 왔는데...'
  하지만, 준은 나타나지 않았어요. 세 번씩 준의 집으로 전화를 했죠. 그때마다 준은 집에
없다는 것이었어요.
  여름밤이라 하지만, 여섯 시가 넘고 일곱 시가 접어드니 가로등에는 하나씩 둘씩 불이
켜졌어요. 나는 힘없이 동대구역으로 향했어요. 지금 준이 나타난다면 쳐다보지도 않겠다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횡단보도에서 신호가 떨어지길 기다리는 사람의 뒷모습이 준과 너무
닮았다고 느껴지는 순간, 나의 눈은 화등잔만해졌고 가슴은 마구 뛰었어요. 그러나 준이
아니었어요. 준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어요. 너무 안타까웠어요.
  나는 그런 기분으로는 도저히 서울로 갈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하루 더 있기로 하고
사촌오빠 집으로 향했어요.
  오빠는 몹시 놀라더군요.
  "오빠! 나 지금 너무 피곤해. 아무 말도 묻지 말고 그냥 잠만 좀 재워 줘."
  평소 나를 아껴 주던 오빠는 걱정스러운 얼굴이었지만, 내 청대로 아무 말도 묻지
않았어요. 자리에 드러누운 내게 잠이 올 리가 없었죠. 교회 종소리에 깨어 일어나 보니 새벽
네 시 이십 오 분이었어요.
  나는 살그머니 빠져나와 동대구역으로 나갔어요. 여름날 새벽 아침은 시원했어요.
  나는 역 광장 벤치에 앉아서 무심히 개찰구 쪽으로 시선을 주고 있었어요. 그런데
놀랍게도 거기에 준이 있었어요. 준은 부시시한 얼굴에 양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으며 힘없이
걷고 있었어요. 순간 나는 불러야 할까, 아니면 그냥 지나치게 놔둘가, 하고 망설였어요.
그때의 내 심정은 내 무딘 펜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어요. 나는 망설이다가 준의 뒤를
따랐어요. 준이 역 층계를 다섯칸쯤 내려갔을 때, 나는 뒤에서 소리쳤어요.
  "어디 갔다 이제 나타난 거야?"
  준도 놀란 눈을 한 채, 특유의 웃음을 지었어요.
  "웬일이고?"
  그때처럼 준이 야속하고, 바보 같고, 밉고...정말 경멸해 주고 싶은 심정이었어요.
  준은 내 감정 같은 것은 아랑곳하지도 않고 '너는 바보야, 내 마음도 모르고'하면서
자연스럽게 내 어깨를 감싸려고 했어요.
  "싫어."
  "와 그라노?"
  "몰라서 물어?"
  "닌 바보야. 니가 전화했다고 캐서 서울까지 안 갔나. 한데 니가 없는기라."
  "그럼 내 편지 못 받았어?"
  "무슨 편지?"
  아, 그렇게 된 것이었어요.
  "니 공부 많이 했째?"
  "무슨 공부?"
  "니, 왜 자꾸 딴청을 부릴라카나."
  "난 못 가."
  "니 머리면 충분히 할 수 있데이. 올해는 니 공부하라꼬 내가 안 만날라캤는데, 닌 와 내
맘도 모르나. 꼭 해봐라. 해봐서 안 되는 기야 할 수 없제. 하지만도 해보지도 않고 포기할라
그라믄 우짜노? 행핀이 안 되믄 교육대학이라도 가그라."
  준의 진실한 충고가 너무나 고마웠어요.
  '니 머리라면 된다카이. 행핀이 어려우면 교육대라도 가그라.'
  이건 내 마음을 정확히 꼬집은 말이었어요. 나는 점차 마음이 동요하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어떤 일이 있더라도 꼭 대학에 가기로 결심했어요.
  나는 서울로 올라가 공부를 다시 시작하겠다고 준에게 약속했어요. 그리고 준이 원하는
여자가 되어서 준을 다시는 놓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어요.

 

별이 내리는 뜨락

아빠, 편히 가세요.

  새벽 두시. 아빠 창 밖엔 싸륵싸륵 눈 쌓이는 소리가 들립니다. 모두가 잠든 밤, 며칠 밤을
새운 엄마는 제 곁에서 잠이 드셨습니다. 지금 이 순간 아빠 곁에 저만 혼자 앉아서 아빠의
가시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아빠 얼굴은 죽음의 사신이 내려앉은 듯 생명을 잃고 밀납처럼 하얗게 변해가고 있습니다.
아빠는 힘겹게, 아주 힘겹게 숨을 마지막 몰아 쉬고 계십니다.
  육신에서 호흡이 멎는 순간을 죽음이라 한다면 호흡은 영혼입니까? 육신입니까? 영혼의
작용이 정지된 것이 죽음입니까? 육신의 작용이 정지된 것이 죽음입니까?
  육신과 영혼이 하나라면 아빠의 육신이 있는 이 순간 영혼도 있어야 하며 하늘나라로 가는
영혼이 살아 있다면 육신도 또 그렇게 살아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지금 아빠는 왜 이리도 호흡하시기가 힙겹습니까. 그토록 건강하시고 너그러우시던
아빠의 모습은 어디로 가고, 이 순간 이리도 희미하게 사라져가고 계십니까?
  아빠, 저는 지금 이처럼 안타까운데, 잡고 매달릴 수 없는 안타까움, 이것이 바로
죽음입니까?
  아빠의 목에 손을 대봅니다. 아주 약하게 느껴지는 호흡, 저는 가물가물 사그라지는 불빛을
보듯 아빠 생명이 소멸되는 순간을 지켜볼 뿐입니다.
  마루의 벽시계는 3시를 알립니다. 방 안은 검은 죽음의 그림자가 가득 차 있고 바깥엔
여전히 눈내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주무시던 엄마가 깨어서 당신이 잠시 편안히 잠을 잤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끼며 아빠의 얼굴을 쳐다보십니다.
  그냥 깊은 침묵일 뿐 그 침묵을 헤칠 힘은 이제 우리에겐 없습니다.
  아빠 호흡이 희미해지자 엄마는 제 손을 꼭 잡고,
  "기도 드리자."
이렇게 속삭이셨습니다.
  저는 아빠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느님, 당신의 뜻이라면 아빠를 보내 드리겠습니다. 아빠 영혼을 축복해 주시고
하늘나라에서 편안한 안식을 주옵소서."
  우리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엄마는 아빠의 가슴에 얼굴을
대어보시더니,
  "아빠는 가셨다."
  그 말씀은 죽음이었고, 암흑이었고, 절망이었습니다. 엄마는 그냥 아빠 가슴에 얼굴을 묻고
계셨습니다. 작별의 순간, 이 세상에서 맺은 사랑, 그 사랑하는 아내에게 작별하기 위해
아빠의 가슴은 이 한순간 아직도 따뜻했을 것입니다.
  나는 싸늘하게 굳은 아빠의 손을 꼭 잡고 눈을 감았습니다.
  "아빠, 사랑하는 나의 아빠!"
  저는 가슴으로 이 말만 되풀이하였습니다.
  이건 슬픔이 아닙니다. 슬픔은 느껴지는 감정, 이건 태초의 아득한 공허일 뿐 슬픔일 수
없습니다.
  옆방에서 한 사람 두 사람 친척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들은 오열하면서 엄마와 저를 아빠
몸 위에서 떼어놓고 그 위에 하얀 홑이불을 덮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아빠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고 우리 모녀는 이 세상에서 아빠를 잃어
버렸습니다.
  아빠는 이제 그리운 이름, 엄마와 저는 아빠를 그리워할 뿐 이 세상 어디에서도 그 정답던
얼굴을 다시 볼 수는 없게 되었습니다. 제 가슴속에 남아 있는 정, 인간으로 해서 맺어진
정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에 전율이 느껴집니다.
  저의 아빠는 산부인과 의사였습니다. 프랑스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한 저의
이모가 동생인 엄마를 아빠와 부부의 인연을 맺어 주었습니다.
  그때 엄마는 K여고 생물교사. 아빠와 엄마는 저를 낳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생활력이 강하시던 엄마는 아빠가 박사학위를 받으실 수 있도록 뒤에서 도와주셨고 종합병원
산부인과 과장이 될 때까지 내조를 해드렸습니다.
  아빠는 의사 특유의 깨끗한 모습이었고, 그리고 높은 덕망으로 많은 사람에게 존경을
받았습니다. 엄마는 항상 남편이라기보다는 존경하는 선생님 같은 기분으로 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과 존경으로 맺어진 엄마 아빠는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행복한
부부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행복한 가정에서 아주 다복하게 자랐습니다. 그런데 우리
가정에 머물던 행복의 신은 떠날 차비를 서둘렀습니다. 그것은 아빠의 건강때문이었습니다.
아빠는 자신의 건강에 이상을 느끼고 진찰을 받은 결과 위암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생명의
연장은 1년 6개월. 아빠는 1년 6개월의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것입니다. 그때 아빠의
심정을 제가 지금 어떻게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아빠는 언제나처럼 유쾌하게 저와 놀으셨고 또 그렇게 엄마하고도 태연하게 농담을
나누었습니다. 아빠를 제외한 우리는 전과 다름없이 행복했습니다.
  아빠는 자신의 병을 이모 이외에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본인은
하나하나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시작하셨습니다. 논문도 서둘러 발표하시고 주변의 모든
일도 열심히, 깨끗하게 하나하나 정리하셨습니다.
  이모는 아빠의 이 초인적인 의지에 감탄하면서 가족에게 비밀을 지켜달라는 그의 부탁을
지켜 주셨습니다. 아빠는 인생의 마지막 정리를 외롭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때 아빠의 감정을 생각하면 너무 아빠가 가엾어서 가슴이 꽉 막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어려운 시간은 그대로 지나갔습니다. 그때까지 겉으로는 옛날과 조금도 다름없이
행복한 가정이었습니다. 그러나 불행의 신은 행복의 신이 떠난 자리에 이미 들어앉아 악마의
미소를 띠고 있었고, 우리는 아무도 그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아빠는 자신의 의지로 불행의 신을 가려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아빠가 심한
통증으로 괴로워하는 것을 엄마가 눈치챈 것은 아빠가 임종하시기 한 달 전이었습니다.
엄마는 아빠가 닥터였기 때문에 아빠의 건강에 대해서는 거의 무심하게 지내 오셨던
것입니다. 엄마가 서둘러서 아빠를 입원시켰을 때, 그때 비로소 엄마는 모든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아빠는 자신의 인생을 마무리하는 일에 있어서 어느 한가지도 소홀히 한 것이
없었습니다. 하다 못해 입으시던 양복의 먼지를 털어놓는 일까지도 말입니다. 엄마는 아빠의
외로웠던 그 아픈 시간을 생각해 내시고는 며칠을 통곡하셨습니다.
  아빠가 입원해 계시던 한달은 우리 가족에게는 영원이었습니다. 우리는 아빠의 죽음을
놓고 헤어날 수 없는 절망의 심연에 빠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은 그것대로 법칙이
있는 것. 한달간 입원생활도 종말이 오게 되었습니다. 아빠는 다시 집으로 돌아오셨고 가족을
위해 지켜오던 그 강한 의지도 죽음의 신 앞에선 꺾이고 말았습니다.
  아빠는 이제 가셨습니다. 생명이란 허망하고 그것은 고임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이 막막한
허공 어디에서 아빠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날으리 날으리

  쌀쌀한 바람을 타고 눈발이 날린다. 성글게 내리던 눈발은 질척한 진눈깨비처럼 이내 녹아
버린다.
  검은 리본이 매달린 커다란 사진 주위로 각계에서 보낸 조화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대통령, 국회의원, 신문사 사장... 유명 무명의 얼굴들이 국화 꽃송이 속에서 가신 분에게
작별을 고한다.
  의식은 엄숙하게 진행되었다. 삼귀의 반야심경 독송, 약력소개, 조사, 영결사...
  헌화, 헌향 순서가 되자 큰 스님들이 한분 한분 꽃과 향을 들고 제단 앞으로 나갔다.
바람은 세차게 불고 눈발은 조금 크게 날린다. 바람이 불자 제단 위에 세워 놓은 조화가
넘어져 땅으로 구른다.
  아름드리 느티나무는 마른 열매를 달고 이 의식을 지켜보고 있다. 느티나무는 홍안의
미소년이었던 스님이 법당 뜰을 거닐던 모습을 기억할 것이며, 불교 정화를 위해
동분서주하셨을 그 큰 걸음들도 기억하고 있으리라.
  오늘 스님들의 독경을 들으며, 신도들의 흐느낌을 들으며, 이 나무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가고 오는 것, 태어나고 죽는 것이 다르지 않다 하나, 육신을 가진 인간은 육신밖에 볼 수
없으니 보내는 마음은 어쨌거나 서러운 것이다.
  발이 저려오는 차가움 속에서 신도들은 두 손을 합장하고 '나무아미타불'을 독송한다.
'나무아미타불' 아미타불에게로 돌아가게 해주소서. 아미타불이 정주하고 계신 곳은
극락세계, 오늘 가신 스님은 극락정도에서 아미타불이 보낸 연꽃을 타고 부처님 앞에
가시었을까?
  그곳은 부처님이 법문이 가득한 곳. 꽃향기가 바로 법문이고, 보배나무를 스치는 바람이
바로 법문이고, 천상에서 내리는 꽃비가 바로 법문이고 보면 어찌 정각을 이룰 수 있지
않을까.
  하기야 극락과 지옥이 둘이 아니라 하셨으니 극락과 지옥은 내 마음속에 있는 것. 내
마음이 극락을 느끼면 여기가 바로 극락이 된다고 하나 고뇌의 육신을 지니고 있는 어리석은
내가 그 높은 뜻을 어이 알까?
  바람에 날리던 눈송이는 질척한 진눈깨비로 바뀌고 바람은 조금씩 더 세차진다. 영정은
오색으로 나부끼고 국화꽃으로 장식한 영구차가 서서히 움직인다. 그 뒤로 스님들이 따르고
스님들 뒤로 신도들이 길게 따른다.
  이 긴 행렬은 안국동을 지나 비원으로 향한다. 이생의 인연이란 이리도 절절한 것인가?
생명이란 끝없이 윤회한다 하나 전생을 모르니 내생인들 어찌 알리.
  비원 앞에 이른 행렬은 대기하고 있던 차에 올라 화계사로 향했다. 진눈깨비는 질펀하게
행길을 덮고 움츠린 행인들의 시선도 을씨년스럽다. 산다는 것은 허망한 것. 이 허망한
물결 따라 나고 죽는 윤회를 거듭해야 하다니...
  차 안에서는 천수경, 반야심경, 고항경, 관세음보문품경, 법성계가 테이프에 실려 울려
퍼진다. 신도들도 독경한다.
  어디로 가는 것인가? 지금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가?
  왕생극락하게 하소서, 천지를 덮은 회색구름, 이 무명의 구름을 거두어 주소서. 그래서
푸는 하늘, 진여의 물결 속에 나를 잠그게 하소서. 미아리 고개를 넘어서 수유리를 지나
화계사 입구에서 차는 멎었다. 스님들과 신도들도 다시 나무아미타불을 염송하며 운구 뒤를
따른다.
  하얗게 날리는 눈송이가 오색 영정 위에서 춤춘다. 산은 하얀 눈으로 덮여 잇다. 화계사
입구의 스케이트장에서는 아이들이 무심한 얼굴로 스케이트를 타고 있었다.
  영구차가 속에서 운구가 밖으로 나왔다. 분홍 카네이션과 하얀 후리쟈가 운구 위에 덮여
있었다. 향기를 지닌 어여쁜 생명이여, 꽃잎, 너는 정녕 높고 높은 승화된 영혼이여라.
  다시 운구는 상여에 얹히고 스님들은 상여를 메고 산을 오른다. 호곡사는 소리가 높아진다.
산길은 눈으로 미끄럽고 그 길을 오르는 늙은 보살들은 힘겨워 했다.
  다 이렇게 갈 것을, 지금 가신 스님을 눈물로 보내는 서러운 이 생명들도 멀지 않아
이렇게 떠날 것을 ...그때마다 우리는 서러워 눈물을 흘리고 조금씩 아픈 가슴을 달래곤
한다.
  산에는 큰 소나무들이 청청하게 서 있다. 그 푸른 솔잎은 너무 싱싱하여 위화감을
느끼게 한다. 한참 비탈길을 오르던 운구는 어느 계곡에서 멈추었다. 거기에는 이미 다비식의
준비가 기다리고 있었다.
  다비식? 다비식? 가슴이 짜릿하게 아파온다. 땅에 내려진 운구 위에는 하나 둘 솥가마가
던져졌다.
  눈으로 질척해진 가마니 위에  석유를 뿌리고, 불이 당겨진 두 개의 솜 방망이에 의래
가마니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하얀 구름처럼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중생의 무거운 육신을 털어버리고 님이여! 아미타불 곁으로 돌아가소서, 다시는 고뇌의
육신을 받지 마옵시고 왕생극락하소서.
  서럽다. 마치 무한대의 허공 속으로 나 자신이 던져진 것 같았다. 아,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인가? 나는 지금 어디쯤 와 있는 것인가? 구름처럼 피어오르는 연기 속에서 스님들은
돌처럼 굳어  있었다. 산 위에는 날리는 눈발을 받으며 신처럼 흩어져 있었다. 생명이여,
생명이여, 안타까운 애증이여.
  "보살님, 내려가시지요?"
  "나는 오늘밤 여기에 있겠습니다."
  "그럼 옷을 더 두텁게 입고 오시지 않고요."
  신도들이 하산하기 시작한다. 가고 보내는 것은 이렇게 끝내야 하는 것, 산 사람은 살기
위해 돌아가야 하는 것, 내려오는 스님이나 신도들의 발길은 허전했다. 헛디딘 것처럼
휘청거렸다.
  눈발은 계속 날렸다.
  "다비식은 언제쯤 끝납니까?"
  "내일 정오쯤 돼야 끝나겠지요."
  "밤새 계속되는군요."
  "그렇지요, 산에 남은 분들은 산에서 밤을 샐 겁니다."
  "그런가요."
  빨갛게, 빨갛게 진주홍으로 타오를 숯덩이, 그 속에서 온몸은 녹아 버리는 것이다.
  육신이, 가버린 육신이 진주홍의 불길 속에서 그토록 오래 인고하고 있어야 할까?
오욕칠정의 모든 죄는 육신에서 나오고 이 죄는 다시 번뇌를 낳으니 육신을 사르는 것은
번뇌를 사르는 것. 육신을 사르소서, 죄를 사르소서, 번뇌를 사르소서, 번뇌를 사르소서...
  무거운 짐, 육신을 털어 버리고 하늘을 날으소서, 하늘을 나르소서, 높이 날으시어
극락정토에 이르소서.
  눈은 내 머리 위에, 어깨 위에 수북히 내려앉는다. 억겁을 산 듯 아득하다. 내 시야에
들어온 모든 사물도 아득하다. 나는 지금 집으로 가고 있다. 내 육신은 살아서 움직이고, 그
움직임은 한동안 계속될 것이다.
  아! 나는 한 송이의 연꽃이고 싶다. 물 위에 둥실 떠 있는 한 송이의 연꽃이고 싶다.

    

입원실 풍경

  입원실 안은 비교적 넓고 아늑했다. 넓은 창으로 들어온 가을 햇볕은 하얀 벽과 천장의
싸늘한 촉감을 한결 부드럽고 따뜻하게 해주고 있다.
  별로 역하지 않은 크레졸 냄새, 침대 위의 하얀 시트, 식염수가 방울방울 떨어지는 링게를
병... 이 모든 것들은 병원이 늘상 우리에게 보여주는 풍경이다.
  링게르병에 꽂힌 가늘고 노르스름한 고무관을 타고 투명한 액체가 방울방울 떨어진다.
마치 봄날의 낙수처럼 일정한 간격으로 천천히.
  나는 떨어지는 방울들을 지켜보다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창밖은 눈이 부시도록
풍성한 가을이다. 병원 뜰엔 수 없이 많은 나무들이 크고 작은 모습으로 서 있고, 정문으로
이르는 넓은 길 양옆으로는 코스모스가 물결치고 있었다.
  희고 빨간 꽃잎, 청초한 모습이 너무 순박하고 아름답다. 가을바람에 흔들리는 것이 강물의
물결 같다. 그 코스모스 길너머로 들판이 보인다. 황금색 들판이 햇빛을 받아 반짝인다. 모든
가을의 생명 위에 햇빛이 투명하게 빛나고 있다.
  나는 묘하게 가슴이 저려옴을 느낀다. 나 혼자서는 너무 감당하기 힘든 슬픔이 엄습해
온다. 내가 처음 입원실에 들어섰을 때,
  "언니! 나 정말 죽는 줄 알았어. 언니도 못 보고 말이야."
  하며 웃던 동생의 얼굴은 나를 더 슬프게 했다.
  "죽기는 왜 죽니? 니가 왜 죽어?"
  이 말을 하는 내 목은 마구 쓰려왔고, 떨리는 손 끝에 애써 힘을 주며 침착해지려고
노력했다. 동생의 병명은 뇌막염. 정말 죽음에 이르는 병인지도 모른다.

  내가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하숙집 방바닥에 하얀 편지가 한 장 놓여져 있었다. 나는 순간
불길한 예감을 느끼며 편지봉투를 뜯었다. 그 편지는 동생이 뇌막염으로 입원했다는 난데
없는 소식이 적혀 있었다.
  눈앞이 깜깜해진다는 사실을 그때 비로소 실감했다. 정말 눈앞이 까만 진공으로 뒤덮여
왔다.
  내 귀에는 '우리집에서 내가 제일 못 나고, 밉고, 바보고, 공부도 제일 못하니까 엄마,
아빠는 나만 보면 괜히 야단치고, 내겐 관심도 없고...차라리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항상 종알거리던 동생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윙윙거렸다.
  우리집 식구는 2남 5녀에 올케 언니, 조카, 결혼 안 한 고모까지 합하며 모두 열세 명이다.
모두가 스스로 제몫을 찾지 않으면 밥그릇조차 차례가 안 올 만큼 시끌시끌한 대가족이다.
  거기다 우리 칠남매는 비슷하게 크고 있기 때문에, 공부를 누가 잘한다든가, 엄마, 아빠의
관심이 누구에게 조금 더 쏠린다든가 하는 것은 늘 우리 모두의 비상한 관심사였다.
  그런데 바로 내 밑의 이 동생은 사춘기에다 감정이 남달리 예민한 편이었고 항상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 때문에 그 애는 늘 남을 기피하고, 자신을 내보일까 두려워 좀처럼 다른
사람에게 접근하지 않았다. 또 가끔은 못난짓을 해서 의식적으로 자신을 괴롭히기도 했다.
  그래서 파괴적이고 냉정한 데가 많은 아이였지만, 그 동생의 여린 가슴 밑바닥에는
누구보다도 정이 넘쳐 흘렀고, 아주 맑은 감성이 반짝이고 있었다.
  우리는 겉으로는 냉전상태의 경쟁자였지만, 속으로는 가장 서로를 사랑하는 자매였다. 그런
동생이 입원을 했다. 그것도 뇌막염으로.
  나는 안절부절 어쩔 줄 모른 채 하룻밤을 보내고, 이튿날 일찌감치 학교로 달려가 담임
선생님께 결석사유를 말하고, 한달음에 이렇게 고향으로 달려 온 것이다.

  간호원이 링게를 바늘을 빼려고 병실로 들어왔다. 환자복 소매 속의 가늘고 하얀 동생의
팔에는 정맥이 파랗게 솟아 있었다. 간호원은 익숙하게 바늘을 빼고 탈지면으로 몇번
문지른다.
  "기분 어때요? 많이 좋아졌죠?"
  생긋 웃는 이빨 양옆으로 살짝 삐져나온 두 개의 덧니가 아주 앙징스럽다. 동생도 배시시
웃는다.
  "언니, 이렇게 결석해도 괜찮아?"
  "니가 아파 입원했는데 그까짓 결석이 문제니?"
  "언니는 개근생에다 우등생이잖아. 그런데 결석하면 어떡해?"
  "얘, 그런 것은 아무 소용이 없어. 지금 나한테는 네 병이 빨리 낫는거, 그게 제일
중요해."
  "언니 고마워."
  동생은 눈물을 글썽인다.
  "언니, 나 요번 기회에 참 많은 걸 깨달았어. 엄마, 아빠, 언니, 우리집 식구 모두가 나를
너무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어. 난 너무 행복해. 그리고 미안해. 이제는 죽고 싶지도
않고, 병원에 입원하고 싶지도 않아. 빨리 퇴원해서 심통 부리지 않고 착하게 공부만 하고
싶어."
  그런 동생이 한없이 귀여웠다. 코스모스는 여전히 부는 바람에 이리저리 물결친다.
  동생만큼이나 나의 가슴도 행복감으로 채워진다.
  "얘, 너한테 읽어주려고 별난 이야기 책을 가지고 왔어. 들어볼래. 아주 재미 있다."
  나는 동생에게 "창공을 나는 새는 이념도 행동규범도 없다"는 책을 읽어주기 시작했다. 내
목소리는 가을햇빛처럼 맑고 투명하게 병실에 울려 퍼졌다.

    

슬픈 아이에 대한 기억

  그 애는 언제나 내 곁에 있었다. 눈이 맑고 예쁜 그 애는 항상 눈웃음을 쳤다. 그리고 그
애는 수 없이 재잘댔다. 때로는 눈가에 촉촉히 눈물이 밴 채 웃고 재잘거렸다.
  그러나 내게는 그 애가 왠지 외롭게 보였다. 눈웃음을 치며 재잘거리는 그 애의 모습은
나를 슬프게 했다. 그 애의 웃음소리와 말소리는 내 가슴을 공허하게 했다.
  그래, 그 애는 언제나 그랬다. 작은 사랑의 이야기를 읽으며, 그 이쁜 눈에 눈물을 가득
담기도 했다. 지하도 층계에 앉아서 바이올린을 켜는 장님을 보고, 그 옆에 쪼그리고 않아
주머니를 탈탈 털어 토큰까지 몽땅 동그란 작은 바구니에 넣어 주고는, 별이 총총히 박힌
밤길을 뛰듯이 걸어가곤 했다.
  때로는 교보문고 한켠에 쪼그리고 앉아 공짜 책을 늦도록 읽고는, 그것이 미안해서 쪽지를
써놓고 살그머니 도망 나오기도 하는 그런 아이였다.
  그러면서도 그 애는 항상 재잘거렸다. 슬프지 않은 아이보다 더 재잘거렸고, 외롭지 않은
아이보다도 더 재잘거렸다.
  그 애는 비 온 후의 푸른 하늘을 무척 좋아한다고 했다. 파란 하늘과 흰 뭉게구름이 잘
조화된 푸른 하늘이 좋다고 말하고는 깔깔대며 웃기도 했다.
  그리고 그 애는 초컬릿을 무척 좋아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언제나 초컬릿을 들고
도서실에 와 있었다. 내가 그 애 옆으로 가면 눈가에 눈물이 고인 채 깔깔대며 이렇게
말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참 이상해. 갑자기 루즈를 바르고 싶고, 초컬릿이 먹고 싶어지거든!"
  이처럼 항상 깔깔대고 재잘대며 자신을 추스려 나가는 그런 애였지만, 때때로 초점을 잃은
눈을 창밖 멀리 고정시키고, 오래도록, 정말 오래도록 침묵할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그 애
주위엔 아무도 없다. 그 애는 자기 자신만 있다고 느끼는 순간 본래의 자신으로 돌아가
침묵을 지켰다.
  침묵. 그것은 분명 침묵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건 죽음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침묵은
동굴보다 어둡고, 수렁보다 더 깊었으니까. 그런 때의 그 애는 무서웠다. 내가 알고 있는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가 없었으니까. 그런 때, 그 애는 모든 것으로부터 초월해 있었다.
자기 자신이 아닌 것으로부터 말이다.

  이것이 내가 알고 있는 그 애의 전부다. 어쩌면 내가 표현력이 부족한 건지도 모른다. 사실
나는 지금껏 표현한 것보다 그 애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다. 더 많이 느끼고 더 많이
이해하고 있지만, 어떻게 표현할 수가 없을 뿐이다.
  아무튼 그 애는 내 곁에서 떠나가 버렸다. 이제는 그 재잘거리는 얼굴도, 눈가에 눈물이
고이도록 깔깔거리던 얼굴도 볼 수가 없어졌다. 하지만, 언젠가는 내 앞에 다시 나타날 거다.
  어쩌면 초컬릿이 먹고 싶은 비오는 날에 올지도 모른다. 그 애는 항상 엉뚱했으니까.
  그런데 이제는 내가 오히려 비오는 날이면 그 애가 정말 보고 싶어진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호기심 어린 눈동자를 반짝이며 거리를 걷고 있을 그 애를, 서점의 한켠 구석에서
공짜 책을 열심히 읽고 있을 그 애를, 바이올린 켜는 맹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을 그 애를.
  난 정말 찾고 있다. 꼭 만날 것 같은 기대를 가지고 말이다.

    

위대한 사랑을 가진 선생님

  선생님!
  생명의 가장 높은 뜻은 사랑이고, 그 사랑은 밝은 빛인 것을 일깨워 준 선생님.
  선생님은 내 인생을 밝혀 준 한 가닥 불빛이었습니다. 선생님을 만남으로 해서 나는
생명을 지니고 산다는 것이 아름다운 것임을 알았습니다.
  신문사에서 주최한 음악경연대회에서 내가 바이올린 부문의 수석을 차지하던 날, 선생님과
나는 거리를 함께 헤매었습니다. 기쁜 발걸음으로 헤메이다가 우리는 웃고, 웃다가 다시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이것이 비록 더 큰 관문으로 향하는 작은 발돋움일지라도 이
순간만은 우리의 승리였습니다.

  선생님!
  나는 정말 거리의 악사처럼 언제나 바이올린 하나만 들고 살아왔습니다. 바이올린은 내
몸에 각인된 문장처럼 언제나 나의 일부였습니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재산을 다 날리고, 부모님은 모두 홧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 당시
우리집의 모든 세간은 채권자들의 손으로 몽땅 넘어갔고, 남은 것은 내 몸과 내가 들고 있는
바이올린 하나뿐이었습니다. 나는 그때의 그 아수라장 같은 집안 풍경과 채권자들의 아귀
같던 눈빛을 오래도록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무렵 나는 미친 듯이 바이올린을 켰고, 나를 에워싼 무한한 공간이 바이올린 선율로
가득 차 있는 듯한 환청 속에서 살았습니다. 행복하던 가정은 신기루처럼 사라졌고, 나는
아무도 없는 거리 위에 알몸으로 던져졌던 것입니다.
  이러한 때 나는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나의 담임이던 선생님은 생활기록부를 정리하다가
나를 불렀습니다. 내 가정환경을 자세히 물어보곤 많은 위로를 해줬습니다. 그때 선생님의
음성은 제가 찾고 있던 음률처럼 아주 달콤하게 내 가슴에 젖어들었습니다.
  그때 나는 모든 사물에서 뿐 아니라, 삶의 얼굴에서까지 음률을 느꼈으니까요.
  그런 얼마 후, 학교에서는 교내 사생대회를 위해 전교생이 서오능으로 가게 됐습니다.
동산처럼 봉긋 솟아오른 능 주위에 넓게 깔린 잔디, 나무, 숲, 하늘에 떠 있는 흰구름, 새들의
지저귐... 나는 친구들이 그림을 열심히 그리는 풍경들을 보면서 갑자기 음률로 그것들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내 바이올린으로는 가슴 속에서 반짝이는 비단실 같은 음률의 하모니를 다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내 가슴 속에서 일고 있는 이 빛나는 느낌을 바이올린의 선율로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그때 선생님이 내 곁으로 다가왔습니다. 내가 너무 침통하게 앉아 있으니까 선생님은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넌 왜 그림을 안 그리니?"
  "..."
  "그림을 그리는 것도 좋을 텐데."
  "난 지금 여기에 있는 풍경을 바이올린으로 표현해 보고 싶어요. 그런데 잘 안 돼요."
  "왜?"
  "좀더 좋은 바이올린이 있으면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 후 나는 더 좋은 바이올린을 갖고 싶다는 욕망과 그것을 가질 수 없다는 절망으로
괴로워했습니다. 가슴 속에서 쏟아지는 현란한 음들을 바이올린 선율로 꼭 표현해 보고
싶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의 생명, 나 자신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까요.
  모든 일상적인 생활은 이 욕망 속으로 녹아들었고, 나는 이 욕망 이외에 다른 어느 것도
현실로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학교에 가서는 수업도 제대로 못 했고, 나는 며칠씩 결석을 했습니다. 친구들과
선생님들은,
  "밥도 겨우 먹는 주제에 바이올린은 무슨 놈의 바이올린이야."
하고 빈정댔습니다.
  그 무렵 나는 중학교 학생을 레슨하면서 내 생활을 꾸려 왔습니다. 가정교사로 아예
입주하라는 학부모도 있었지만, 나 혼자 바이올린을 켜는 시간을 갖고 싶었기 때문에 그런
청을 항상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주유소 옆에 창고처럼 붙어 있는 방을 얻어서 자취생활을
하며 살았습니다.
  어느날 밤, 나는 방에 불도 켜지 않은 채 웅크리고 앉아 있었습니다. 그때도 나는 맑고
현란한 음을 환청으로 듣고 있었습니다. 그 음률은 바다가 되고, 나는 그 위에 배처럼 떠
있었습니다.
  그때 선생님은 내가 있는 방의 판자문을 두드리곤,
  "동화 있니?"
하고 불렀습니다. 나는 불을 켜고 선생님을 맞아들였습니다. 기다란 판자가 그대로 벽지 뒤에
드러나 보이는 방, 살림살이라고는 먹고 자는 도구와 바이올린뿐이었습니다. 선생님은 내가
결석한 사유를 알고 있는 듯 거기에 대해서는 일체 말하지 않았습니다.
  "언제부터 바이올린을 했지?"
  "다섯 살 때부터요."
  "그럼, 십 년이 넘었구나! 입상도 했었니?"
  "네, 세 번쯤요. 나를 가르치던 선생님은 내용이 좋지 않은 대회에는 참가시키지
않으셨어요. 그래서 권위 있는 콩쿠르에만 세 번 나갔고, 그때마다 입상했어요."
  "그때 사진 있니?"
  나는 이불 속에서 앨범을 꺼내 선생님 앞에 펴놓았습니다. 행복했던 기억들, 부모님이 나를
축복해 주던 그 행복했던 기억들이 사진 속에서 다시 살아났습니다.
  선생님은 사진과 상장과 트로피를 보고는 한참 생각에 잠겼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청해
왔습니다.
  "나를 위해서 바이올린 한 곡을 들려 줄 수 있겠니?"
  나는 선생님을 위해서 드뷔시의 '갈색머리 소녀'를 연주했습니다.

  꽃이 핏기 시작한 초록빛 언덕
  그 남쪽의 느릿한 경사에 앉아 있는 처녀
  이른 봄날 햇살을 쬐면서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처녀의 가냘퍼 보이는 어깨에는 갈색 머리카락이
  물결치듯 드리워져 있어 반짝이는 듯하다.
  약간 떨어진 나무 그늘에서
  그러한 처녀의 모습을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지켜보고 있는 한 시인

  드뷔시는 젊은 날을 회상하며 이 곡을 작곡했습니다. 선생님은 내 연주가 끝나자,
  "오, 너무 좋구나! 마치 귀부인이 된 것처럼 황홀해. 이 조그만 판자집 안에서 이같은 곡이
흘러나오다니!"
하고 감탄했고, 행복스럽게 말했습니다.
  "네가 사고 싶은 바이올린을 내가 사줄까? 난 부자는 아니지만, 네가 훌륭한 연주자가
된다면 내가 그 돈을 다른 데다 쓴 것보다 훨씬 가치가 있을 것 같애. 이건 꼭 너를
위해서라기보다 나를 위한 것도 되니까 말야."
  나는 의외의 말에 어리둥절해서 한참 동안 선생님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대학교 동창들끼리 모여 친목계를 하나 하는 게 있었어. 오늘 내가 그 계돈을 탔지. 내가
이만한 돈을 모으려면 일 년 동안 월급을 꼬박 저축해도 안 돼. 하지만, 나는 너에게 이 돈을
주기로 결정했어. 이 생각은 오늘 갑자기 한 것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생각해 왔던 일이야.
내일 너를 가르쳤던 그 선생님을 찾아가서 상의 드리고 좋은 바이올린을 하나 사렴."
  나는 선생님 무릎에 엎드려서 엉엉 울었습니다.
  그 후 나는 선생님의 고마우신 뜻을 받아들였고, 내가 사사한 교수님께 가서 말했습니다.
교수님은 직접 담임 선생님께 연락을 했고, 나는 그토록 갖고 싶어하던 바이올린을 사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내 영혼과 생명이 다시 탄생되었습니다. 나는 내 혈관 속에 차오르는 새로운
생명력을 느끼며 바이올린 연주에 몰입했습니다.
  내가 살고 있던 보잘 것 없는 판자집은 바다가 되고, 들이 되고, 숲길이 되고, 꽃이 피고,
나비가 날고, 구름이 흐르고, 때로는 천둥이 치고, 번개가 번쩍이고..., 내 판자집은 모든 것을
포용한 대지가 되었습니다. 나는 그 속에서 고독하지만 행복한 사나이가 되어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선생님은 일요일 오후면 밑반찬을 준비해 가지고 내 판잣집을 방문했습니다. 그때마다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선생님을 위해 바이올린을 연주했고, 선생님은 미소를 지으며,
  "이 방에 오면 나는 언제나 귀부인이 되는구나!"
하고 흐뭇해 했습니다.
  나는 선생님에게서 대지를 느꼈고, 어머니를 느꼈습니다. 선생님은 내게 있어 가장 높고
아름다운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속에서 시간은 흐르고, 나는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습니다. 선생님은 그 긴 시간 동안
언제나 내 곁에서 길을 밝혀주는 빛이었습니다. 내가 신문사에서 주최한 콩쿠르에서
예선통과가 결정되자,
  "동화야! 꼭 본선에서도 좋은 결과를 얻어야 돼."
하고는 나보다 더 초조해 했습니다.

  선생님!
  이제 내가 거쳐야 할 관문은 통과했습니다. 나는 이제 유학의 기회도 얻게 되었습니다.
  내가 세계적인 연주자가 될 때, 나는 선생님이 내 방을 처음 방문했던 날 밤처럼 선생님
무릎에 엎드려 엉엉 울겠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을 위해 내가 바이올린을 연주하면, '동화
방에 오면 나는 언제나 귀부인이 되는구나'하고 행복하게 웃어 주십시오.
  나의 대지이고, 어머니이고, 그리고 나의 영원한 사랑인 선생님!

    

 우리는 공평하게 태어났어요

  "여보세요?"
  "죄송하지만, 은숙이 좀 바꿔 주세요."
  "누구시죠?"
  "친군데요."
  "친구요? 잠깐 기다리세요."
  나는 수화기를 놓고 망설였다. 동생에게 온 남자의 전화를 과연 바꿔 줄 것인가 말
것인가를. 고등학교 1학년밖에 안 된 계집애한테 뻔질나게 남자들로부터 전화가 온다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그러면 야단을 쳐서 끊어 버릴까? 난 언니니까 야단 칠 권리가
있다. 암, 있구말구.
  그렇지만 그건 너무 치사한 짓일 것 같다. 사실 남자에게 인기가 좋은 동생을 난 질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 질투하고 있다는 것이 솔직한 고백이다. 지금도 동생한테 전화를
바꿔 줄까 말까 망설이는 마음도 따지고 보면 그 질투심에서 비롯되었다. 나는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다소 부끄러워졌다. 그래서 얼른 동생을 불렀고, 수화기를 가리켰다.
  "여보세요? 응, 승일이구나! 오늘? 어디서? 웬디스? 그래, 알았어."
  생글생글 웃으며 수화기를 내려놓는 동생. 그걸 본 순간 어쩔 수 없이 심통이 났다. 그와
동시에 배도 조금씩 아파 왔다.
  동생은 수화기를 놓자마자 이방 저방을 들락거리며 수선을 피웠다.
  "언니, 머리빗 좀 줘."
  "언니, 빨아 놓은 스타킹 어디 있지?"
  "언니, 나 손수건 좀 빌려 줄래?"
  '언니, 언니, 언니...' 숨 넘어가게 나만 불러대는 거다. 가뜩이나 마음이 편치 않은 내게
말이다. 조금 후 나들이 차림의 은숙이가 내 앞에 나타났다.
  "언니, 어때? 괜찮지?" 
  "그래."
  괜찮은 정도가 아니었다. 1백 64센티의 날씬한 키에 34, 24, 34의 균형 잡힌 몸, 하얀
피부, 까만 눈, 오똑한 코, 조그만 입, 모두가 예뻤다. 그런데 나를 더욱 황홀하게 한 것은
비취빛 플레어 스커트에 하얀 블라우스를 입고 긴 머리를 어깨 위에 물결치듯 내려뜨린 그
모습이었다. 정말 아름다웠다. 마치 '햄릿'에 나오는 오필리아 같았다.
  "언니, 나 갔다 올게. 엄마한테는 언니가 알지? 부탁해."
  한쪽 손을 살짝 쳐들고 뽀뽀를 던져 주고 내빼는 거였다.
  그 순간 내 팔, 다리에서는 힘이 싹 빠져나갔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거울을 들여다봤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너무도 나를 실망시켰다. 은숙이에 비해 내 모습은 너무 미웠다.
  "엄만 너무 하셨어. 둘밖에 없는 딸을 이렇게 공평하지 못하게 낳아 놓으셨담. 하나는
비비안 리, 하나는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기가 막혀서..."
  "아니야, 우리는 한 형제가 아닌지도 몰라. 한 형제라면 적당히 비슷해야 할 거 아냐?
그런데 이건 너무 차이가 심해. 분명히 수상한 데가 있어."
  나는 상상에 또 상상의 나래를 폈다. 우리 둘 중 누군가가 대문 밖에 버려진 개구멍밭이인
게 틀림없다. 그렇다면 누굴까? 누가 더 부모님을 닮았지?
  아아, 괴롭다. 내가 왜 이런 끔찍한 상상을 하는 걸까? 내 마음은 슬프고, 괴롭고,
울적하고, 짜증나고, 심란하고...그런 복잡한 것이었다. 이럴 때는 레이스라도 떠 볼까.
  나는 책상 위에 놓인 꽃바구니에서 하얀 레이스 실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레이스를
짜 나갔다.
  나는 레이스 뜨기에 열중한 나머지 시간이 가는 걸 잊고 있었다. 그때 대문을
달그락거리면서 동생이 들어왔다. 역시 눈부시게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어머! 언제 이렇게 많이 짰어? 언니는 좋겠다. 어떻게 손으로 이렇게 예쁜 것을 짤 수가
있지?"
  동생은 아주 부러운 듯이 내가 짠 레이스를 보고 또 보는 것이었다. 내 마음은 조금씩
부드러워졌다. 동생이 부러워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랫동안 레이스를 짜면서 나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부드러워진 것이다.
  "너는 그 대신 예쁜 몸을 가졌잖아?"
  "그까짓 게 뭐 대단해? 나는 언니가 더 부러워. 오늘도 승일이는 희랍의 3대 비극이
어쩌구 하는데, 그걸 내가 알게 뭐야? 맨날 무슨 여신이 어쩌구, 무슨 요정이 저쩌구
하지만 난 그런 건 정말 하나도 모르겠어. 그런데 언니는 그런 이야기라면 줄줄이 다 알잖아.
그리구 언니는 머리도 나보다 좋고, 공부도 나보다 더 잘 하고..."
  "얘는 무슨 소리를 하니 거니? 그런 거야 누구든 노력하면 되지만, 예쁜 거야 노력한다구
되니?"
  "아니야, 언니는 내가 보이에 아주 예뻐. 항상 자신 있는 표정이고, 지성미가 있고..."
  "얘, 그만 웃겨. 지성미가 뭔데, 그걸 나한테 끌어대니?"
  동생은 내 손 끝으로 이어지는 곱슬곱슬한 레이스 라인을 신기한 듯이 바라보다가
자기방으로 갔다.
  동생이 진정 부러워하는 표정을 남기고 사라지자, 나는 내 손을 새삼 들여다봤다. 내
조그만 손, 이 손으로 나는 정말 못하는 게 없다. 테이블 클로스, 방석 커버까지 레이스로 뜰
수 있다. 그런가하면 병풍도 수놓을 수 있다. 이집트풍의 벽걸이를 스킬로 수놓을 수도 있다.
거기다 겨울이 되면 벙어리 장갑에 털목도리도 뜰 수 있고, 또 아빠의 조끼도 아주 맵시
있게 떠 드렸다.
  그러고 보니 내가 동생을 부러워할 건 하나도 없다. 동생은 예쁜 몸을 가졌지만, 난 재주
있는 손과 머리를 가졌으니까.
  하느님은 역시 공평하다는 느낌이 든다. 아주 공평하게 분배해 준 것이다. 이 세상 사람들은
모두 하느님으로부터 그렇게 공평한 분배를 받고 태어난 것이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삽시다

  온종일 진통에 시달리던 산모가 아들을 낳았다. 하루에도 몇 명씩 수 없이 보아 온
일이지만, 진통을 겪는 여자의 모습은 너무도 처절하다. 한 생명을 탄생시키기 위해서 죽음에
이르는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생명의 탄생은 그토록 엄숙하다는 의미인가?
  누구든 자신의 생명이 지상에 오기까지 엄마가 치른 희생과 고통을 안다면, 세상을 함부로
살 수는 없을 것 같다. 위대하게는 못살망정, 남의 빈축을 사거나 남에게 피해를 주는 생명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 오랜 진통을 겪고도 아기를 품에 안은 엄마의 표정은 밝고 행복하다. 천하를 얻은 듯한
충만한 행복감. 이건 오직 한 생명을 탄생시킨 엄마만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이다.
  목욕을 한 아기는 작고 빨간 얼굴을 포대기 속에 묻고 깊은 잠에 빠져 있다. 이 세상에서
처음 맺는 엄마와의 인연, 가장 깊고 가장 은혜로운 인연에 몸을 맡기고 포근히, 아주
포근하게 잠들어 있다.
  "아주머니, 힘들지 않으셨어요?"
  "아니요. 이제는 아주 편안해요."
  "아기가 아주 예뻐요. 한데 엄마를 닮지 않은 것 같아요."
  "그래요? 그럼 아빠를 닮았나 보죠."
  산모는 약간 자랑스러운 듯 대답한다.
  "아빠는 아직 안 오시네요?"
  "곧 오실 거예요. 마음은 온통 병원에 와 있을 거예요."
  "그러시겠죠. 특히 첫아기 때는 아빠가 더 흥분들 하잖아요."
  산모는 미소를 짓는다. 그 미소는 편안한 안식이 가득 담겨 있었다. 미소 짓는 아기엄마의
얼굴에서 나는 봄날의 대지를 본다. 축복 받은 땅. 생명을 생성시키는 가장 축복 받은 땅,
여자는 자신의 생명이 봄날의 대지일 때 비로소 가장 빛나는 거다.
  식당에서 첫 국밥을 가져왔다.
  하얀 밥, 김이 오르는 미역국은 이상하게 정을 느끼게 한다. 인간의 가장 훈훈한 정이
그곳에 서려 있는 것 같다.
  "애기 엄마, 국 다 잡수세요. 그래야 젖이 많이 난대요."
  애기 엄마는 둥그스름한 젖무덤을 한 번 눌러보곤 나를 쳐다보며 미소 짓는다.
  "감사해요. 간호사가 오늘처럼 감사하게 느껴진 적은 정말 없었어요."
  나도 미소를 지었다. 어쩐지 내 가슴이 무한히 넓어지는 것 같았다.
  "언니, 전화 왔어요."
  "나한테?"
  "네, 애인인 것 같은데요."
  "애인?"
  나는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나야, 나 오늘 나왔어."
  "어머! 지금 어딘데요?"
  "여기 미아리야."
  "알았어요. 퇴근하고 나갈께요."
  나는 수화기를 통해 들려 오는 그의 음성을 듣는 순간부터 가슴이 뛴다. 입대한 후, 처음
나온 휴가. 이번 휴가만큼은 그에게 좋은 여자가 되어 줘야지.
  입대 전에 데이트를 할 때마다 하찮은 일로 다투고서 나 혼자 토라져 돌아서던 기억이
후회로 와 닿았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그는 이렇게 얘기했다.
  "야, 다른 건 다 참을 수 있지만, 그 택시 타고 내빼는 짓만은 제발 좀 하지 마라. 너
나중에 같이 살다가도 그렇게 택시 타고 친정으로 내빼고 그럴래?"
  볼멘 소리로 전화를 걸어 그렇게 따지곤 했다.
  그가 입대한 후, 단골 카페에서 혼자 앉아 차를 마시며 얼마나 쓸쓸해 했던가. 오늘 그를
만나면 너그러운 여자가 돼 줘야지 얌체 같은 내 못된 성격은 깡그리 버리고 좋은 연인인
것을 보여 줘야지.
  나도 멀지 않아 어른이 되고, 아내가 되고, 엄마가 될 것이다. 봄날의 대지처럼 푸근한
가슴으로 나를 필요로 하는 모든 생명을 내 품에 안을 것이다. 그리고 사랑할 것이다.
  "201호실 산모 어떻습니까?"
  안경을 쓴 깔끔하게 생긴 신사가 초조하게 묻는다.
  "보호자신가요?"
  "네."
  "아, 그러세요, 축하합니다. 아들 낳으셨어요."
  "그렇습니까? 언제쯤에요?"
  "세 시간 정도 됐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는 감사하다는 말을 남기고 급히 회복실로 달려간다. 모든 것에 감사하고 싶은 그런
얼굴이었다. 아기에게, 아내에게, 의사에게, 간호원인 나에게까지, 그리고 하늘에까지
감사하는 표정이었다.
  일곱 시가 되었다.
  나는 수간호사한테 인사를 하고, 거리로 나왔다. 산다는 것에 정말 감사한 마음이 생긴다.
내 마음이 지금 행복하기 때문일까?

     후기

  15년 전쯤으로 기억된다.
  TBC(동양방송) 라디오에 퍽 인기있는 청소년 프로가 있었다. 그 프로는 KBS와 합병한 후
지금까지도 계속 인기 프로로 남아 있는 줄 아는데, 그 프로를 담당하던 PD가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콩트집을 출간하기로 기획, 모방송작가한테 원고를 의뢰했다.
  그런데 그 방송작가는 무엇 때문인지 몹시 바빠 제때 원고를 쓰지 못했고, 그러다가
우연하게 그 원고 쓰는 일이 나한테로 돌아왔다.
  그 무렵 나는 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경험 탓에 청소년들의 감정이 별무리 없이 다가왔다.
그래서 나는 청소년들이 보낸 편지를 소재로 단숨에 책 한 권 분량의 콩트를 만들어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콩트집은 상당량 팔려 나갔고, 판매에 재미를 본 출판사에서는
나한테 같을 일을 또 한 번 시켰다.
  그때 내가 썼던 콩트는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출간이 되었으며, 두 번째 콩트집 교정을
보던 출판사 직원이 "그러지 마시고 소설을 한 번 써보시지 그러세요?"하고 권유를 했다.
  의외의 권유를 받은 나는 "제가 어떻게 소설을 써요."하고 천만부당하다는 뜻으로 거절을
했다. 그로부터 2년 후 '정말 소설을 한 번 써볼까?'하는 유혹이 슬그머니 내 가슴 속으로
일었다.
  그래서 쓴 것이 "솔바람 물결소리"였다.
  그러니까 남의 이름으로 출판되었던 두 권의 콩트집은 나로 하여금 글 쓰는 일을 본업으로 
하게 한 직접적인 동기가 되어 주었다.
  15년 전을 돌이켜보면, 그 일은 내 생애에 있어 우연 같기고 하고 필연 같기도 하다.
  도서출판 이목에서 그 콩트집을 새로 단장, 묶어 출판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망설여졌지만, 막상 출판을 하고 보니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진다.
  팽개쳐 두었던 못난 자신을 거두어들여 호적에 입적시키는 부모 심정 같다고 할까?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주선해 주신 최홍순 사장님께 감사드린다.
  아무쪼록 이 책이 몸도 마음도 모두 지쳐 있는 오늘의 청소년들에게 잠시 활력을 불어넣는
청량제가 되어 주었으면 하고 빌 뿐이다.

 

 

                                                                                                                             1992. 7. 20.             남지심


출처 : 어둠 속에 갇힌 불꽃
글쓴이 : 정중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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