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s and Writings/문학작품

[스크랩]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 - 노회경

그림자세상 2009. 12. 5. 13:17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

                                                                         지은이 노희경
                                                                         펴낸이 김형균
                                                                         펴낸곳 한민사

                                                                          1997, 노회경

 

                     모든 것은 너무 빨리 시들어 버린다.
욕망마저 고갈되어 버리고, 끝내 남는 것은 뼈와 한 줌의 먼지뿐.
      그래도 한 가지 남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영원의 어머니,
    슬프고도 무서운 사랑의 미소를 짓는 영원의 모.버母像)이다.
   세계의 저 끝에서 꿈꾸듯 앉아 한 잎 한 잎 생명의 꽃잎을 따서
                    심연으로 끝없이 던지는 영원한 거인,
                                          어머니!

                         혜르만 혜세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

                         


    양지바른 언덕에 예쁜 집 하나 있다. 낮은 울타리 안으로는 때
깔 고운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멀리서 보아도 그 및이
고운 진달래, 철쭉, 목련 따위들이다. 그 꽃들을 보고 있자면 식
구들은 저마다 나름대로의 그리움에 젖는다.
   어떠니는 이제 여기 살지 않는다. 평생 등이 시린 세월 속에서
눈물밥을 지으셨던 어머니.
   연수는 어머니가 일생의 단 하루 안주인 노릇을 했던 새집 베
란다에 서서 저녁 노을을 바라보고 있다. 새집을 지으며 어머니
가 손수 꾸민 안방 베란다에도 어느덧 진달래, 철쭉이 피었다, 사
월이다. 어머니 없이 처음 맞는 봄이다. 진달래는 웃을 때 유난
히 곱던 어머니의 입술처럼 붉다.
   '진달래를 가만 바라보고 있으면 괜한 걱정거리가 모두 사라지
는 것 같애. 연수야, 언제든 마음이 심란하거든 너도 엄마 방에
와서 진달래를 보렴.'

   해마다 봄이면 진달래를 화분에 옮겨 심으며 쓸쓸하게 웃곤 하
던 어머니. 그 어머니가 아끼던 진달래 화분 하나가 이제 막 이웃
는 노을 빛을 받아 은은한 황금빛을 발하고 있다
   김인희, 그녀 나이 오십칠 세.
   연수는 조용히 어머니가 아닌 한 여자의 일생을 생각해 본다.

    결혼 전엔 한 집안의 딸로서 얼굴도 희미한 어머니의 빈 자리
를 대신해야 했고, 결혼 후엔 신혼 초부터 객지로 떠돌던 손님
같은 남편의 자리를 대신해야 했던 그 여자의 고독. 그 공허한 시
간들을, 오직 가족들을 위해 더할 수 없는 희생과 사랑으로 환원
시키고, 스스로는 봄날 날리는 벚꽃처럼 화르르 산화해 버린 어
머니라는 이름의 여자.
   부질없는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생전에 그토록 소망하시던 한가로운 노후는 끝내 부부가 함께
누릴 복이 못 되었던가. 어머니는 저 아래 호숫가의 한줌 흙으로
누워 있고, 아버지 혼자 밤마다 굽은 등으로 호수를 내려다보곤
하신다. 그새 철 지난 논가의 허수아비처럼 쓸쓸하게 늙어가는
아버지. 한 여자의 빈 자리가 이토록 큰 것이다.
    어머니의 빈 자리는 집안의 웃음을 거둬가 버렸다. 밥을 먹을
때도. 차를 마실 때도 가족들은 늘 허전한 어머니의 빈 자리에
문득 시선을 빼앗기곤 한다. 그리고 누가 뭐라지 않아도 스스로
그늘지는 마음에 목이 메곤 하는 것이다.
    한 사람이 가고 네 사람이 남았다. 그러나 그 한 사람의 빈 자
 리는 네 사람 저마다의 가슴에 들어앉아 원래보다 더 크게 자리
 잡고 있다.
    어머니, 할 수만 있다면 어머니 무덤에 작은 창 하나 만들어
드리고 싶어요, 넋이라도 한가롭게 식구들 사는 모습 구경하시라
고요.

    저녁 노을은 마지막 붉은 한숨을 토하며 서서히 호수를 비껴가
고 있다.
   연수는 문득 지난 겨울의 그 가슴 저린 사연들이 한 폭의 슬픈
그림처럼 저 호수면에 어리는 것을 본다.

    '밥 안 코, 이년! 날 아주 굶겨 죽여라, 이년 이 빌어먹을 년!"
    상주댁은 그날도 아침부터 며느리 인희씨를 향해 앙칼진 욕설
 을 퍼부었다.
    수저를 드는등 마는등하고 이층 방으로 올라와 버린 연수는
반사적으로 귀를 막았다. 요 몇 달 동안 연수는 안 그래도 머릿
속이 헝클어진 실타래처럼 어지러웠다. 회사고 뭐고 다 그만두고
한 며칠 어디 무인도에라도 가서 쉬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오늘 아침처럼 할머니의 노망이 귀에 거슬릴 때면 연수는 그
간절함이 한층 더했다.
    연수가 생각하기에 언제부턴가 집은 휴식과 안주의 공간으로
서 그 따사로운 기능을 잃어가고 있었다 머물러 있으되 기회만
있으면 도피를 꿈꾸는 집이라는 게 과연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
까.
   한때나마 집안에 평화가 존재했었는지를 의심할 정도로, 연수
 의 기억에 남아 있는 집의 이미지는 늘 어둡고 침울하기만 했다.
    어릴 적부터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어온 할머니의 악다구니.
 그리고, 아내의 모진 시집살이를 그저 방관만 하고 지냈던 아버
 지에 대한 분노, 툭하면 트집거리가 되건 말건 머리채를 휘둘리
 면서도 그게 다 팔자려니. 시어머니 모시기를 신주단지 떠받들
 듯했던 어머니의 속없는 맹종에 대한 연민, 혹은 애증의 감정들
 이 쌓여 연수는 갈수록 자신이 황폐해져 가는 걸 느꼈다.
    '이 호랑이가 물어갈 년아! 시에미 굶겨 죽일랴고 환장을 했
 냐!"
    상주댁의 성화는 벌써 한 시간째 이어지고 있다 지금 상주댁
 은 치매에 중풍까지 들어 몸과 마음이 온전치가 못하다.
    8년 전, 아들 정박사가 뜻하지 않은 의료 사고로 집안이 풍비
 박산되면서 시작된 증세였다. 그 사고로 어렵사리 개업한 병원마
 저 남의 손에 넘어가게 되자, 충격으로 쓰러진 상주댁은 집안의
 불운을 모두 며느리 탓이라 믿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저렇게 욕을 해대면서도 정작 상주댁이
 이 세상에서 가장 믿고 의지하는 사람은 며느리밖에 없다는 사실
 이다. 오랜 세월 함께 살아오는 동안에 상주댁의 욕설엔 이골이
난 인희씨도 며느리라기보다는 꼭 딸처럼 굴었다.
    두 사람은 때때로 아웅다웅하면서도 어찌 보면 제일 친한 단짝
친구처럼 매사에 스스럼이 없었다. 이제 잠시 후면 그렇게 욕설
을 퍼붓던 상주댁이 어느덧 인희씨의 작은 아기처럼 천진한 모습
으로 변할 터였다.

    '곧 나간다니까! 오줌도 맘 편히 못 눈다, ...'
    화장실에서 시어머니를 달래는 인희씨의 목소리가 비어져 나
 왔다.
    인희씨는 요즘 오줌소태로 고생을 하고 있다.화장실에 들어간
 지 이십여 분이 지나도록 인희씨는 안에서 감감무소식이다. 나오
 지 않는 소변 때문에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이다.
    '밥 안 줘? 밥 줘!'
    상주댁은 일찌감치 목에 턱받이까지 하고 소파에 앉아 밥을 기
 다리고 있었다. 주방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는 났는데 도무지 며
 느리가 밥 줄 생각을 안 하니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었다. 인희
 씨가 급한 대로 다른 식구들 밥상만 차려 주고 화장실로 향한 것
 이다 전 같으면 주방에 식탁을 차리기가 무섭게 인희씨는 시어
 머니 밥상을 따로 챙겨들고 거실로 가곤 했다. 그런데 요 며칠
계속되는 오줌소태 때문에 차질이 생긴 것이다. 상주댁의 밥투정
은 연수네 세 식구가 식탁에 앉을 때부터 시작됐고, 그 바람에
다들 식욕을 잃고 말았다.
    정박사는 밥그룻을 반도 비우지 못하고 자리를 떠 버렸다. 신
경질적인 정수도 밥 대신 우유 한 잔으로 아침을 때웠다.
   '또 죽 줄 거지, 나쁜 년!'
   화장실에서 나와 서둘러 죽을 데우는 며느리를 향해 상주댁은
몹시 서운한 듯 버럭 소리를 질렀다
   '노친네, 또 억지 부리네. 기껏 밥 싫다고 죽 끓이라며..._'
   인희씨가 웃으며 죽 그룻을 쟁반에 받쳐 내왔다.
   " 이년이!'
   "아이구, 맛나네. 자, 한번 드셔 봐.'
   아직도 화가 안 풀렸는지 연신 눈을 홀기는 시어머니를 달래가
며 인희씨는 호호 불어 식힌 죽을 정성껏 떠넣어 드리고 있었다.
   '저, 가요.
   "그래.'
   연수가 현관에서 신발을 찾아 신는 동안 인희씨는 문득 남편
쪽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아차, 생각났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
섰다. 죽 그릇을 탁자 위에 그대로 놓고 안방으로 향했다.
   한참 맛나게 죽을 삼키던 상주댁이 황당한 표정으로 며느리를
쳐다보았다. 이윽고 그 표정은 분노로 바뀌었다. 상주댁은 얼굴
근육을 부들부들 떨며 며느리의 뒷모습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있
다. 그렇지만 아무도 상주댁의 그런 변화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
었다.
    정박사는 안방에서 거울을 보며 새치를 뽑아내고 있던 참이었
다. 반쯤 벗겨진 숱 없는 머리에 새치가 제법 되었다. 병원에서
 젊은 원장과 사이가 좋지 않아 요 며칠 꽤나 신경을 쓰고 있는
터였다. 그 모습을 보고 안쓰러워진 인희씨가 조심스레 묻는다.
   '오늘, 수술 있어요?'
    정박사는 아내가 장롱에서 꺼내 준 손수건을 묵묵히 받아들었
다. 그는 묻는 말엔 대꾸도 없이 거울만 한 번 더 쳐다보았다. 워
낙 무뚝뚝한 성격이라 좀처럼 한 번 묻는 말엔 입을 열지 않는
 사람이었다.
   '없어__?'
    정박사는 아내가 넥타이를 바로잡아 주는 척하며 재차 묻자 퉁

명스레 대꾸했다
   '왜?
   "나 오늘 겟날이거든. 일 보구 당신하고 같이 들어오면 어떨까
싶은데...."
   '뭐하려?'
   '오줌소태가 영 안 낫네? 가서 윤박사도 좀 보구
   '다른 병원 가.'
   정박사는 대번에 아내의 말꼬리를 자르며 싫은 내색을 보였다.
그는 아내가 병원 애기만 꺼내면 늘 질색을 하곤 했다.
   '윤박사가 편한데....'
   '그런 건 약 먹어두 나아. 뭐 한라구 병원까지 와.'
   '낫질 않으니까 그렇지.'
   정박사는 더 이상 대꾸도 없이 안방 문을 열고 나갔다.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던 연수가 시계를 들여다 보며 짜증을 냈
다.
   '아버지, 늦어요!'
   상주댁은 그때까지 수저를 든 채 며느리가 나오기만을 기다리
고 있었다. 인희씨는 그런 시어머니를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쳐서

현관까지 배?을 나왔다
   '가요, ?'
   한껏 아양까지 떨며 웃는 인희씨 얼굴이 소녀처럼 해맑다.
   연수는 나이 육십이 다 된 아내의 그 귀여운 응석에도 불구하
고 여전히 무뚝뚝한 아버지를 늘 못마땅하게 여겨왔다. 정박사는
말없이 구두 주걱만 받아 신을 신고는 현관을 나섰다
     인희씨가 거실 유리창 너머로 출근하는 남편의 뒷모습을 서운
 한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밥 안 줘, 이년? 시에미를 똥독간의 똥덩어리만도 못하게 여
 기는 이년, 이 못된 년!'
    어느 틈에 다가왔는지 상주댁이 뒤에서 며느리의 머리채를 잡
 아끌며 욕설을 퍼부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상주댁은 순식간에 며느리의 몸뚱이를
 거실 바닥에 자빠뜨렸다. 그리고 어디서 그런 힘이 솟는지 머리
 채를 잡은 채 질질 끌며 마구 휘둘렀다.
    아아구, 머리야. 노친네, 기운도 좋지. 좀 놔요. 머리 다 뜯기
 네.
   "지들만 먹고, 난 밥 안 줘. 이년!"
   '아이고 아퍼라, 노친네야'
    인희씨로선 으레 하루 일과처럼 겪는 일이다.
    대문을 나서려던 연수는 안에서 들려오는 어머니의 귀에 익숙
한 비명에 진저리를 쳤다
   상주댁은 몸집이 작은 편이었지만, 한 번 성이 났다 하면 당할
장사가 없을 정도로 기운이 펄펄 넘친다. 그럴 때마다 온몸이 곤
죽이 되도록 맞으면서도 인희씨는 불쾌한 내색 한번 하지 않았
다. 그것은 상주댁이 정신이 온전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온갖 구

박을 다 받으면서도 늘 사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게 인희씨의 모
습이었다.
   지금도 인희씨의 태도에는 노망든 노인네의 행패를 탓하는 기
색이 전혀 없다. 비명을 지르고는 있지만 그건 차라리 철 모르는

어린아이를 타이르는 호소에 가까웠다.

   적어도 감정을 가진 인간인데, 저렇듯 철저하게 너그러워질 수
있다니.... 연수는 그런 어머니에게서 왼지 늘 비애를 느끼곤 했
다. 아니, 그 슬픈 감정을 넘어서, 연수 자신으로선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그 어떤 것에 대해 전율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가자.'
   말없이 집 쪽을 바라보던 정박사가 앞장서며 대문을 열었다.
   연수는 묵묵히 그 뒤를 따랐다. 아버지 병원까지 들렀다 가려
면 출근 시간에 맞추기도 빡빡한 시간이었다.
   '아버지, 운전 배우고 싶지 않으세요?"
    연수는 운전석 옆자리에 앉아 있는 정박사를 향해 애써 부드럽
게 말을 붙였다. 방금 전의 일로 우울해진 분위기가 부담스러워
서였다. 그러나 역시 정박사는 묵묵부답이다. 마치 어떤 일로 단
단히 화가 난 사람처럼 뚱하게 앉아 있다. 이상하게도 그녀는 아
 버지가 굳은 표정을 짓기만 해도 주눅이 들곤 했다. 어색해진 연
수는 조심스레 라디오 볼륨을 올렸다.

    겉보기엔 아담한 이층집이지만 적적할 때면 황량한 벌판같이
느껴지는 집안.
   식구들의 반 이상이 집을 비운 아침 나절이면 그 황량함이 더
    하다, 정수도 나가고 이제 남은 사람은 며느리와 시어머니 둘뿐
    이었다. 좀 전에 난리를 피우던 상주댁도 곧 양처럼 순해졌다_
       머리칼이 한 움큼은 빠져 버린 것 같다. 인희씨는 온몸이 욱신
    거리는 걸 겨우 참고 설거지를 시작했다.
       죽 한 그릇을 맛나게 다 비운 뒤 상주댁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공을 갖고 놀았다. 투명한 상자 안에 가득 담긴 색색깔의 공을
   가지고 기억력 훈련을 하는 것이다 인희씨는 어디선가 명칭실어
   중(치매의 한 형태로, 뻔히 알려진 사물의 이름을 정확하게 말하지
   못하는 증상)과 실인증(대뇌피질의 장애로 시력 청력 .촉각에 이
   상이 없는데도 대상물을 인지하지 못하는 상태)이 두드러지는 치매
   환자에게 그 공놀이가 좋은 치료법이란 애기를 듣고 틈만 나면
   시어머니와 게임을 했다.
      상주댁은 공이 든 상쟈 을 바무 어코 들꽈다전끄      '빨간 공.'
     인희씨가 손으로 그룻을 헹궈가며 고개만 돌린 채 문제를 냈
  다.
    상주댁은 말 잘 듣는 어린애처럼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상자 안
 을 찬찬히 살피더니 잠시 후 빨간 공을 들어 보였다.
    '아이고, 잘했네. 이번엔 하얀 공.,,
    인희씨가 다시 문제를 냈다. 칭찬을 받고 몹시 기분이 좋아진
 시어머니는 그 많은 공들 가운데 횐 공을 가려내기 위해 부지런
 히 눈망울을 굴렸다. 이번 문제는 너무 어렵다는 표정이다. 상주
댁은 구원을 청하듯 며느리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아무래도 힌
트를 줄 것 같지 않은지 이 공 저 공을 들었다 놓았다 같은 동작

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인희씨가 분주하게 일손을 놀리는 가운데 상주댁이 드디어 답
을 찾았다.
   '흰 공.'

   하지만 상주댁은 전혀 다른 공을 들고 있었다.
   '그건, 노란 공."
   인희씨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 보였다.
   "흰 공!
   "노란 공.'
    틀린 답을 들고 한사코 우겨대던 상주댁은 자존심이 상했는지
금세 토라지고 말았다.
   '미친년, 저번엔 이게 흰 공이라더니....'
   '내가 언제 그랬어요?"

    바짝 약이 오른 상주댁이 냅다 공을 팽개쳐 버렸다
    "안 해.
    "왜, 또?'
    시어머니의 응석이 또 시작된 것이다.
    '... .. 나중에 해."
    '업어?"
    인희씨는 밉지 않게 눈을 홀기며 뾰루퉁하게 쏘아붙인다.
    '안 돼, 나두 이제 늙어서 허리 아퍼 '
    그러나 그건 말뿐이다.
    설거지를 마친 인희씨는 시어머니를 등에 업고 마당으로 나섰
 다 상주댁은 며느리 등에 업혀 잠드는 걸 제일 좋아한다_

     발길을 돌리랴고
     바람 부는 대로 걸어도
     돌아서지 않는 것은
     미련인가 아쉬움인가
     가슴에 이 가슴에
     숨겨진 그 사연이.-.

    가사도 제대로 모르면서 흥얼거리는 노래건만 상주댁은 이 노
 래를 자장가 삼아 꼬박꼬박 졸았다.
    햇살이 곱다.
    인희씨는 아기를 재우듯 살살 몸을 흔들며 열린 장독에 손가락
을 넣어 보기도 하고, 걸레로 단지를 닦아가며 연거푸 같은 노래
를 흥얼거렸다. 약간 중풍기가 있는 시어머니의 왼팔이 무겁게
목을 내리눌렀다. 깡마른 몸집이지만 며느리도 같이 늙어가는 처
지라 오래 업고 있기엔 힘이 부쳤다.
    마침 간병인이 올 시간이었다. 인희씨는 시어머니가 깰 새라
조심스레 대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누가 왔어?"
    서너 발짝이나 떼었을까.
    인희씨의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엄마 등에선 잘도
자던 갓난아기가 잠자리에 눕히려고만 하면 용케 눈을 뜨는 것처
럼 시어머니는 깜빡 잠에서 깨어났다.
   인희씨는 슬쩍 대문을 열어놓고 시어머니를 업은 채 거실로 돌
아왔다. 잠시 후 간병인이 왔다.

    '어디 가냐, 어디. 나 두구 어디 가냐, 이년, 이년!"
     이윽고 또 한바탕 난리가 벌어질 판국이었다.
     인희씨는 시어머니가 잠들 때까지 마냥 기다리고만 있을 수가
  없어서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그 모습을 보고 시어머니가 생떼
 를 쓰는 것이었다.
    '어디 가? 나두 데려가!'
    아무리 떼를 써도 며느리가 외출을 포기하지 않을 것 같았던지
  상주댁은 울상을 하며 매달렸다. 한시라도 곁을 지키지 않으면
  무슨 일을 저지르게 될지 장담을 못하는 시어머니 때문에 인희씨
 도 마음이 바늘방석이었다.
    상주댁은 며느리가 아닌 다른 사람과 같이 있는 걸 몹시 두려
 워했다. 그런 이유로 변변히 외출 한 번 못해 본 인희씨였지만,
 오늘만큼은 불가피한 사정이 있었다. 한겨울이 되기 전에 일산에
 지어 놓은 새집에 입주하려면 오늘 갯돈을 타와야 한다 그렇게
 학수고대하던 겟날이 바로 오늘이다. 또 오후에 병원에도 들러야
 하고.
    일 년 후 남편이 정년퇴직을 하면 일산의 새집에서 부부가 같
 이 노후를 평화롭게 보내는 것, 양지바른 그 집에서 시어머니를
 아무 고통 없이 돌아가시게 해드리는 것.
    인희씨가 평생 소원으로 꼽는 바람이 있다면 그 두 가지뿐이었
 다. 오늘 계를 타서 자재 대금만 갖다 주면 추위가 닥치기 전에
 새집이 완성될 것이고, 곧 입주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대문을 나서면서도 자꾸만 시어머니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귓
 전에 닿아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문 밖에 서서 또 한참 동안

안쪽을 기웃거리던 인희씨는 가까스로 마음을 추슬러 버스 정류
장으로 향했다.

   마침 계모임이 있는 커피셥은 연수가 디스플레이어로 일하는
   회점 건물 안에 있었다.
   이래저래 늦장을 부리다 보니 벌써 약속 시간보다 삼십 분 가

까이 늦은 시각이었다 서둘러 만원버스에서 내려 백화점 안으로
들어선 인희씨는 그 와중에도 매장 일층의 세련된 디스플레이를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 연수가 이걸 다 했나...?'
   인희씨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자기만 알게 속으로 웃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축복을 기대할 수 없는 사랑이란 걸 알면
 서도 아직 그녀는 영석을 떠나 보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실장의 호출을 받고 사무실에 들어서던 순간, 연수는 막연하게
어떤 예감에 사로잡혔다. 결국 이번에도 그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으리라는... 이미 굴종이 예정된 허세와도 같은 자존심과의 쓸
쓸한 타협.
   '정연수 씨, 이번 자재 말야. 대성 쪽으로 하지?'
    사전에 다른 회사 물건을 납품받기로 결재까지 해놓고 이제 와
딴소리를 하는 실장의 속셈을 짐작 못하는 건 아니었다. 회사를
생각한다면 단가가 한 푼이라도 적게 먹히는 거래처를 택하는 게
현명한 처사임에는 분명했다. 하지만 마치 그 동안 아무 일도 없
었다는 듯 태연스레 미소 짓고 있는 영석의 말쑥한 옆모습을 보는
순간, 연수는 자신도 모르게 치미는 분노를 억제할 수가 없었다.
   '그건 곤란한데요, 실장님. 벌써 인화에서 자재가 일부 들어와
 있고, 또 계속 들어오고 있어요.'
   '아,그거야 일단 반품시키고 다음 번에 써 주면 되잖아?"
   '전, 그렇게 못해요, 실장님.'
   '하. 원참. 고집 부릴 게 따로 있지. 이건 위에서도 결정이 난
 거라니까 그러네?"
   소용없는 짓인 줄 뻔히 알면서도 연수는 낯까지 붉혀가며 계속
고집을 부렸다. 영석은 그런 연수와 실장을 번갈아 쳐다보며 그
특유의 다정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쩌다 내가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을까. 황망히 사무실 문을
박차고 나와 연수는 비상계단 쪽으로 내려갔다. 그녀는 다른 무
엇보다도 종잡을 수 없는 자기 자신 때문에 화가 났다.
   '이러지 마, 연수야!'
   어느새 뒤따라왔는지 영석이 등 뒤에 서 있었다
   '누가 뭐래도 그쪽 자재 안 써요. 가세요.'
   벗어날 길 없는 운명의 굴레를 피해 달아나듯 연수는 그 자리
를 모면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완강한 손길을 뿌리칠
만한 의지를 갖고 있지 못했다.
   '일 때문이 아니야.'
   그 선량한 눈빛이 흔들리고 있다.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어.'
   '또 아내가 의심을 하던가요? 그래서 나한테 전화 한 통 없이
그 여잘 삼 개월 동안...... 달랬어요? 그랬어요?'
   매번 이런 식이다.
   상대방은 늘 죄인처럼 용서를 빌고, 그러면 자신은 잔뜩 화가

난 연극배우처럼 묵은 대사를 끄집어내 한바탕 으르렁거리고. 그
 러고 나면 속이 시원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런 자신에 대해
화가 나고, 또한 어처구니없게도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고....
하지만 이제 더 이상은 그런 연극 따위로 서로를 속이고 싶지 않
았다.
    지난 삼 개월 동안 연수는 철저하게 그로부터 방치되어 있었
다. 그 대가로 그에겐 가정의 평화가 주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연수 자신에겐 모멸과 회한의 연속이었다. 어차피 시작부터가 어
긋난 사랑이었다면 이쯤에서 끝내야 한다.
   '이러지 말고, 얘기하자, 우리.'
   '무슨 얘기요?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내가 얼마나 무참했는
지, 그 얘기요?'
   '...욕심 부리지 않기로 했잖니?'
   '그래요, 욕심 부리지 않기로 했어요. 그러니 가요."
   '이러지 마, 연수야'
   우리의 사랑이 단지 조금 늦게 시작됐을 뿐이라고, 하지만 사
랑은 길고 짧은 시간으로 비교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언젠가 그
는 말했었다. 오직 우리의 순수한 사랑만 믿자고, 그리고 다른
건 아무것도 욕심 부리지 말자고 그는 말했었다.
   하지만 그가 말했던 사랑은 도대체 지금 어떤 꼴인가. 자신이
한없는 고통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그는 어디에 있었는
가. 이 따위 사랑으로 두 사람이 결국 무엇을 얻을 것이며, 또 결
국 어디로 흘러가야 한단 말인가.
   그에겐 엄연한 가족이 있다. 더불어 그는 자기 가족에게 성실
해야 할 의무를 갖고 있다.
   그가 자신에게 줄 수 있는 것이라곤 무모한 기다림과 몇 마디
의 달콤한 속삭임뿐.
   입술을 깨물며 돌아서려는데 왈칵 눈물이 솟았다. 그때 난데없
이 등 뒤에서 그가 어깨를 끌어안았다. 어깨를 끌어안은 그의 양
팔이 간헐적으로 떨리고 있었다. 그도 울고 있었던 것이다. 연수
는 잠시 현기증이 일었다. 무엇에 얻어맞은 것처럼 머릿속이 멍
했다. 그 눈물이 기어이 발목을 잡고 말았던 것일까. 연수는 계단
에 무너지듯 주저앉았고, 그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밤늦게 야근을 하고 사무실을 나서던 어느 날, 백화점 벤치에
앉아 푸른 담배 연기를 뿜어내던 이 남자의 옆모습. 라일락 꽃내
가 어찌나 심한지 마치 환각의 어느 거리에 서 있는 듯한 이상스

런 봄밤이었다. 왜 그때 자신은 늦은 밤에 홀로 벤치에 앉아 있
는 남자의 입술에서 푸른 담배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는 생각을
했던 것일까. 그날 그는 그 자리에서 밤새도록 한 여자를 기다릴
작정이었노라고 말했다.
   그때는 입사한 지 오 개월 만에 첫 디스플레이를 맡게 된 연수
가 한창 의욕을 갖고 일하던 시기였다. 그 와중에 백화점 의류
매장 자재건으로 거래처 담당 부장이었던 그와 몇 차례 강도 높
은 마찰이 있었다, 주로 자재의 품질을 놓고 한바탕씩 말씨름을
하곤 했던 것이다. 연수는 그런 그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게
일없이 우스웠다. 마치 그가 수업 시간의 시비를 빌미로 한판 붙
으려고 방과 후 교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학생 같았던 것이다.
   노처녀 히스테리도 아니고 무슨 젊은 여자가 그렇게 꼬장꼬장

  하냐며 그가 말을 붙였다. 그리고 그는 대뜸 연수를 포장마차로
  안내했다. 무엇에 끌렸을까. 연수는 별 생각 없이 그와 동행하여,
  이윽고 포장마차에 앉아 함께 소주를 마셨다. 막상 자리에 앉고
  나니 그는 별 말이 없었고, 연수는 그가 따라 주는 대로 술을 마
  셨다.
    '일 때문이 아니오.'
     어느 한순간 그가 다시금 푸른 담배 연기를 피워 올리며 입을
 열었다. 모락모락 김이 오르는 포장마차의 오렌지및 비닐 천장
 위로 그가 풀어놓은 말들이 흘러다녔다. 연수는 알 수 없는 혼란
 에 사로잡혔다. 그의 눈빛이 자꾸만 깊어지고 있었다
    그때 연수는 라일락 꽃내에 취하듯 술에 취했고, 기어이 그 눈
 빛에마저 취해 버렸다.
    그에게 유치원에 다니는 쌍둥이 형제가 있다는 걸 연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로부터 일 년이라는 무거운 시간들이 흘러갔다.
    어차피 나 스스로 선택한 고통일 뿐, 내겐 이 사람의 가족들을
 질투할 권리가 없어.
    이렇게 영석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고 있으면 그 동안의 자신이
 한없이 옹졸하게 느껴진다.
    연수는, 어쩌면 지난 삼 개월 동안 그는 자신보다 더 힘들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보았다.
    그랬을까, 정말 그랬을까...
    그때 갑자기 비상구 문이 열리고 인철이 나타났다.
    영석은 황급히 담배를 비벼 끄며 몸을 일으켰다. 얼굴 전체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인철은 두 사람의 난감해 하는 모습 따위엔 관심도 없다는 듯
무표정이다
   연수는 인철을 올려다보며 저도 모르게 가슴 한쪽이 아려왔다
   이선배, 그렇게 실망스런 눈으로 날 보지 말아요.

   애써 태연한 척 웃음 지으려 했지만 그녀의 눈은 마치 애원이
라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눈길을 외면하며 인철은 도로 문
을 닫아 버렸다. 연수는 참담한 심정으로 오래도록 문 쪽을 바라
보았다

   '위에서 내린 결정이에요.'
    인철은 풀어놨던 자재들을 다시 포장하고 있었다. 그 싸늘한
표정 때문이었을까.
   황급히 뒤따라 들어간 연수는 공연히 허둥지둥하며 어색한 변
명을 늘어놓고 있었다.
   '단가가 이 할이나 낮게 들어왔어요.'
   '알아.
   "이선배....'
   '가 봐.'
   그는 여전히 일손을 놀리며 연수를 향해선 눈길 한번 주지 않
는다. 문득 비참해진 그녀가 몸을 돌려 나오려는데, 뒤에서 인철
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만나기로 한 거니? 한번 깨진 쪽박을 다시 짜맞춰 보기
로 한 거야?'

    '나두 힘들어요. 그러니 이선배가 좀 잘봐 주세요.'

    하고 싶은 말들이 입 속에서만 맴을 돌았다_ 그녀는 등을 돌린
 채 참담한 심정으로 서 있었다.
   '그렇게 당하고도 모르겠니?"
    인철의 음성은 점점 격앙되어 가고 있다.
   그럴수록 연수는 벼랑 끝으로 내몰린 것처럼 어지러웠다. 불현
듯 그런 상황이 견딜 수 없도록 싫었다. 인철의 그런 태도가 부
당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결국 그를 향해 매몰차게 쏘아붙이고
말았다.
   '내 일이에요.'
   '고작 한순간에 꺾일 걸 그렇게 울고 불고, 그랬니?'
   '식사하세요.'
   연수는 결국 그 뼈아픈 힐난을 뒤로 한 채 허겁지겁 자리를 피
해 나와야만 했다.
   대학 시절 내내 인철은 연수의 보호자로 자임했다. 친구들도
모두 둘 사이를 그만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늘 자연스럽게
연수 곁에 있는 선배였고, 늘 연수를 돌봐 주는 선배였다. 사실
그런 인철이 연수는 싫지 않았다. 그래서 무언가 집안에 고민이
있으면 그와 상의했고, 졸업 후에도 그와 상의하여 같은 직장에
다니게 된 것이었다. 그는 늘 그렇게 연수 곁에 있어서 특별히
찾지 않아도, 그리워하지 않아도 당연히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
연수는 그에게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고마운 벗처럼, 고마운
오빠처럼 늘 그렇게 있으면 족한 그런 사람일 뿐이었다. 인철이
그 이상으로 대해 주려고 하면 연수는 아무래도 부담스러웠다.

    점심을 먹기 위해 영석과 함께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동안에도 인철의 격앙된 음성이 귓전을 떠나지 않았다.
    연수는 못내 우울한 기분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떳떳하지 못
 한 관계란 이런 것일까.
    한 계단에 나란히 서 있으면서도 누가 볼세라 팔짱도 못 끼고
 남남처럼 굴어야 하는 게 잘못된 만남의 현실이다. 밀실에서나
 눈을 맞출 수 있는 관계, 그게 내 사랑의 한계였을까.
    '뭐 먹을래?'
    그가 주변을 의식하며 지나가는 사람처럼 물었다
    '국물 있는 게 낫겠어요.'
    '연수야... 웃어.'
    연수는 시선을 앞으로 향한 채, 무슨 포스터의 배경 인물처럼
 희미하게 웃었다.
    고개를 약간 옆으로 돌리며 그도 웃었다.
   '이제 너 같다.'
    백화점 로비는 점심시간이라 각 매장에서 쏟아져 나온 사람들
로 인해 꽤나 붐볐다.
   '연수야'
   어디선가 귀에 익은 음성이 들려왔다.
   연수는 문득 영석을 의식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머니의 모
습이 눈에 들어왔다.
   인희씨는 마침 현관에서 친구들을 배웅하고 돌아서던 길이었
다. 딸의 모습을 발견하곤 좋아라 이름을 부르며 손을 흔드는 인
희씨 얼굴이 유난히 밝다.

    에스컬레이터가 두 사람을 일층에다 내려다 주었다.
    영석은 웃으며 다가오는 연수의 어머니를 모르는 척 지나쳐 현
관 쪽으로 걸어갔다.
   '내가 딱 맞춰 왔나 보네?'
    무슨 좋은 일이 있었는지 인희씨는 은근히 들떠 있는 표정이었
다.
   '오늘 여기서 계 모임이 있었거든. 너랑 그 선배랑 차 한잔사
줄까 싶어서 왔는데.. .."
    인희씨는 연수 대학 시절부터 보아온 인철에게 호감을 갖고 있
었다, 그녀는 딸이 인철과 연애라도 하는 사이길 바라는 눈치를
보이곤 했다.
   '어떡하지? 엄마, 나 바쁜데... 선배두 지금 바빠요.'
    로비 한쪽 끝에서 영석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때문에 연수는
어머니의 서운한 기분을 배려해 줄 여유도 가질 수 없었다.
   ' ..일 있어?
   "네.'
   '그럼, 할 수 없지, 뭐."
   '미안해요.
   "그래, 가.'
   '집에서 뵈요? 쇼핑하구 가세요.'
   인희씨는 친구들과 점심 한 끼 먹는 돈이 아까워 그냥 헤어진
참이었다. 그 사실을 모를리 없는 연수였다. 그런 어머니를 뒤로
한 채 백화점을 나서는 연수의 발걸음도 가볍지만은 않았다

    찬거리나 좀 사 갈까 하고 백화점 식품 매장을 돌아보던 인희
씨는 웬 허름한 옷차림의 여자가 시식코너에서 젓갈을 집어먹는
모습을 보고는 가슴이 찡하게 저려왔다. 가난한 살림에 유난히도
먹성이 좋은 올케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인희씨의 하나밖에 없는 남동생인 근덕은 툭하면 술에, 노름에
절어 사는 무능하고 모난 인물이었다. 그런 남자한테 시집와 여
지껏 호강은커녕 남의 집 드난살이다 식당 종업원이다 해서 안
해본 고생이 없을 정도로 힘들게 살아온 올케를 인희씨는 늘 고
맙고 안쓰럽게 생각했다.
   그 올케가 요즘은 달동네에 포장마차를 차려 억척스럽게 살림
을 일궈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하지만 그나마도 근덕의 등
쌀에 배겨나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남편이랍시고 하나 있는 위인이 돈을 벌어 주는 건 고사하고
허구한 날 아내가 뼈빠지게 모은 돈마저 탕진해 버리는 까닭이

다. 창란젓은 우직하고 착한 근덕댁이 제일 좋아하는 반찬이었
다.

   그날도 산동네 근덕의 단칸 셋집에서는 한바탕 난리가 벌어지
고 있었다. 얼마 전에 시작한 택시 운전은 아예 뒷전이고 노름꾼
들과 술집 밀실에서 한창 판을 벌이다 온 근덕이 또 행패를 부리
는 것이었다. 근덕댁은 수돗가에 쪼그려 앉아 장사 나갈 준비로
정신이 없었다. 근덕은 그런 아내에게 다짜고짜 돈을 내놓으라고
성화를 부렸다. 하지만 그 속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근덕댁이 돈을
내줄 리 없었다. 그러자 근덕은 신발을 신은 채 방으로 들어가
옷장이며 서랍이며를 쑥밭으로 만들어 놓았다.

   '너, 안 줘!'
   근덕댁으로 말하자면 성미 급하고 우악스러운 남편의 횡포엔
이골이 난 여자였다. 그러나 수돗가에서 꽁치를 다듬는 손이 덜
덜 떨리는 걸 숨기지는 못했다. 그러면서도 근덕댁은 남편의 협
박을 당차게 묵살해 버렸다.
   '없어!"
   애교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데다가 일만 할 줄 알았지 이럴
땐 황소고집인 여편네가 여간 미운 게 아니다. 근덕은 화가 잔뜩
난 얼굴로 제 처를 잡아먹을 듯이 고함을 쳤다.
   '어제, 어제 번 거 어쨌어, 이 쌍년아"

   '어쭈, 이게 인제 아주 배짱이네? 그래, 좋다. 니가 날 서방이
아니라 물 빠진 남방으로 아나 본데, 너 오늘 죽었어. 내놔, 이 씨
 발년아'
    그가 고래고래 욕설을 퍼부으며 눈에 띄는 대로 연탄재를 집어
 들더니 근덕댁을 향해 냅다 내던졌다. 연탄재가 근덕댁의 눈 앞
 에서 박살이 나며 사방으로 튀었다 여지껏 정성 들여 씻어 놓은
 생선이 순식간에 연탄재로 범벅이 되어 날아갔고, 그 참에 그릇
 이 몇 개 뒤집어졌다.
   '없다니까! 저번에 누나한테 가 뜯은 돈 벌써 다 썼어?'
    근덕댁은 졸지에 연탄재 벼락을 맞은 몰골을 하고도 허겁지겹
 생선을 주워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런 아내를 내려다보며 근덕
이 따지듯 물었다.
   '그게 얼마나 돼서, 엉? 얼마나 돼서?"
   '이백이나 뜯었다며?'
   근덕댁은 남편의 말에 기가 막혔다. 이 살림꼴에 돈 이백만 원
을 며칠 새 다 쓰고 또 손을 내미는 그가 과연 인간인가 싶었다.
그녀는 속이 상해 저절로 눈물이 치밀었다.
   좀처럼 돈 나올 기미가 안 보이자 근덕은 거의 미쳐 날뛰기 시
작했다.
   '잔말 말구 내놔! 이번엔 진짜란 말야, 이 개 같은 년아!'
   근덕은 금쪽 같은 장사 밑천들을 마구 짓밟아가며 악을 써댔
다. 남편의 거친 발길질을 온몸으로 막으며 근덕댁은 생선 한 토
막이라도 건지기 위해 발버등을 쳤다.
   '뭐가 진짜야, 뭐가? 땡을 잡고도 지는 노름, 뭐가 진짜냐구?"
   '이거 정말 미치겠네. 돈 내놔, 어서! 안 내놔, 이 쌍년아?'
   '없어.'

   '이러다 나 너 죽인다. 빨리 내놔, 이 썩을년아! 풀하우스
는데 스톱 걸어놓구 왔단 말야, 이 등신아! 너 풀하우스가 뭔지
알아?"
   '몰라!'
   연탄재 범벅이 된 그릇 속에서 생선 한 토막이라도 건지려고
허둥대다 보니 눈물을 흠칠 새도 없다. 근덕은 그런 아내의 어깨
를 거의 죽일 듯이 잡아 흔들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고, 그와 동시에 아내의 허리춤에 달려 있
던 두틈한 전대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것을 놓칠 근덕이 아니
었다. 근덕은 먹이를 낚아채는 날짐승처럼 잽싸게 전대를 잡아쳤
다.
   '안 돼, 그거 장사할 돈이야!"
   '열 배루 갖다 준댔잖아, 내가!'
   빼앗긴 전대를 되찾으려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아내를 냅다 걷
어차고 나서 근덕은 대문을 열었다.
    전화벨은 계속 울렸다. 땅바닥에 쓰러져 울다 악에 받친 근덕
댁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 전화기를 집어던졌다.
   '에라, 이 도둑놈아!"
    전화기는 근덕의 발뒤꿈치에 맞고 떨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근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내뻤다

   백화점 공중전화로 동생 집에 전화를 걸었던 인희씨는 올케의
비명소리가 들려오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근덕아! 올케? 올케?'
    '내 돈 내놔, 이 나쁜 놈아!'
    수화기 저편에서 올케의 악에 받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인희
씨는 애가 탔다.
    "올케, 올케!'
    아무리 불러도 저쪽에선 응답이 없다. 인희씨는 불안한 마음에
자꾸만 올케를 소리쳐 불렀다.
    '그래, 돈 못 따 오기만 해봐라! 고추장에 확 비벼 버릴 테니
까!'
    곧이어 엉엉 우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더 듣지 않아도
사태를 짐작할 수 있었다. 지금쯤 마당에 퍼질러 앉아 서럽게 울
고 있을 올케 얼굴과 돈을 들고 씩씩거리며 노름판으로 향하고
있을 동생의 철딱서니 없는 행동이 눈에 선했다 그 순간 인희씨
는 온몸에 기운이 쏴악 빠지는 것만 같았다.

   오후에 인희씨는 윤박사한테 가서 진찰을 받았다.
   윤박사는 정박사와 같은 병원 산부인과 과장으로 일하고 있는
독신녀이다. 인희씨는 남편의 절친한 후배인 그녀와 친자매처럼
지내는 사이였다.
   간단히 내진만 받고 며칠 약이나 지어 먹으면 해결되는 병인
줄로만 알고 있던 인희씨에게 윤박사는 꽤 여러 가지 검사를 권
유했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증세를 물어오던 윤박사의 표정이
점점 심각해지기 시작한 건 초음파 검사를 하고 나서부터였다.
   '언니, 검진 언제 받았지?'
   '한 삼사 년 됐나? 내가 워낙 건강하잖아. 올 일이 없었지.'
   '언제부터 그랬어요?"
   '꽤 됐지, 아마?'
   '소변 볼 때 오른쪽 아랫배가 눌리는 기분 없어요?'
   '조금.'

                         차트에 뭔가를 적으며 연신 초음파 화면을 들여다보는 윤박
                      사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인희씨는 그녀의 심각한
                      표정을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그날 저녁, 인희씨는 남편 정박사가 퇴근하길 기다렸다가 만원
         전철을 타고 함께 집으로 향했다.
            복잡한 역을 빠져 나와 동네 어귀로 접어들면서 인희씨는 괜히
         기분이 좋았다.
            워낙 무뚝뚝한 성격인 남편과 이렇게 단둘이 귀가하는 것도 정
         말 오랜만이다. 자식을 둘이나 낳고 살면서도 평생 남편과의 오
        붓한 시간은 꿈도 못꿔 보고 살았다. 오늘 같은 날 저녁 한 끼 사
        달라는 말도 입이 떨어지지 않아 결국 아무 말도 못했다. 속으론
        남편이 모처럼 밖에서 만났으니 자장면이라도 한 그릇 먹자고 해
        주길 바랐다. 하지만 인희씨는 여간해선 그런 일에 섭섭한 내색
        조차 하지 않을 정도로 무던한 성격이었다.
           '당신 운전 배우지? 아침엔 연수가 바래다 준다고 해도, 밤엔
        차 타기가 그럴 텐데?'
           '요즘 교통이 어떤데 나까지 한몫 보태? 신경쓸 거 없어.
           만원 전철에 끼여 같이 퇴근하고 보니 새삼 남편 대하기가 안
        쓰럽기만 하다.
           인희씨는 미안한 마음이 들어 자꾸 눈치를 보지만 정작 하고
        싶은 말은 또 있었다.
           '당신 병원, 내후년에 그만두면 안 돼?"
           '왜?'

   '정수 대학이나 보내구 그만두면 여러모로 나을 것 같은데...
집 짓는다구 돈을 너무 써서.'
   성격도 외골수인 데다가 대인관계도 그리 원만치 못한 남편.
그런 사람이 직장 생활을 원만하게 해 나가기란 아마도 쉽지 않
으리라. 하지만 인희씨는 욕심 같아선 남편이 일 년만 더 참아 주
었으면 하고 바라고 있다, 그게 요즘 생활 형편이기도 했다.
   '요즘도 젊은 원장이 따따부따 그래요?'
   '정수 자식은 요즘 어딜 그렇게 싸돌아 다녀?'
   정박사는 심기가 불편할 때면 으레 말을 돌리곤 했다.
   인희씨는 그런 남편의 속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럴 땐
이쪽에서도 같은 방법을 써야 한다는 것까지도.
   '나도 모르지. 어디 보자, 연시가 나왔나?'
   갑자기 인희씨는 딴소리를 하며 과일가게 쪽으로 발길을 돌렸
다. 그런 아내를 정박사는 잠시 못마땅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네롤

    정수는 록카페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진탕 술을 마시고 있었다
대학에 두 번씩이나 실패한 뒤로 정수는 이전과 많이 달라졌다.
그는 늘 입시에 대한 부담감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특히 수능
시험이 끝난 뒤로는 밤늦게 엉망으로 취해 돌아오는 날이 많아졌
다. 그럴 때마다 인희씨는 정박사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쉬쉬하며

혼자서 진땀을 빼야 했다
   이제나 저제나 정수가 들어오기만을 기다리며 거실에서 빨래
를 개고 있던 인희씨가 윤박사의 전화를 받은 건 저녁 여덟 시가
조금 지나서였다.
   윤박사는 인희씨가 전화를 받자 어딘지 모르게 곤혹스러워 하
는 음성으로 정박사를 바꿔 달라고 했다
   수화기를 건네받은 정박사는 또 별다른 말도 없이 대답만 몇
번 하더니 통화가 끝나자 서둘러 외출복으로 갈아입는 것이었다.
   인희씨는 뜨악한 눈빛으로 남편을 바라보며 물었다.
   '사고 났나 보네.... 다 저녁에 이게 무슨 일이래?'
   '먼저 자.
   "모범택시 타고 가요. 힘들어서 어떡해?'
   윤박사의 전화를 받고 일언반구도 없이 대문을 나서는 남편을
배웅하면서 인희씨는 그저 저 양반이 피곤해서 어쩌나, 하는 걱
정뿐이었다.

   급한 환자려니 하고 택시에서 내려 병동으로 향하던 정박사는
뜻밖에도 병원 앞에서 기다리고 섰는 윤박사와 마주쳤다.
   '왔어요?'
   태도로 보아 환자 문제는 아닌 것 같았다.
   정박사는 앞서 걷는 윤박사를 따라 주차장 사이에 있는 작은
공원으로 가서. 자판기에서 뽑아 온 커피를 마시고 한참이 지
난 뒤에도 윤박사는 말이 없었다.
   '무슨 얘긴데 이렇게 뜸을 들여? 다 늙은 처녀가 이제 와 바람

  날 일두 없구. 사고도 아니구....'
     '언니, 검사 자료가 나왔어요.'
     '근데?"
     그때까지만 해도 정박사는 대수롭지 않게 윤박사의 말을 받아
  넘길 수 있었다. 그는 전화로 말해도 될 일을 가지고 구태여 밤
 중에 불러낸 그녀를 다소 의아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녀 입에서 튀어나온 말을 들었을 때, 그는
  망치로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
 다.
     '악성 종양이에요.'
     윤박사는 충격으로 눈이 동그래져 있는 정박사를 애써 외면한
 채 책 읽듯이 담담한 어조로 결과를 알려 주었다. 그녀로서도 검
 진 결과를 앞에 두고 한참을 고민한 끝에 어렵게 꺼내는 말이었
 다.
    '오줌소태가 있다고 했는데, 종양 때문이었어요. 종양이 자궁
 위쪽에서 커져 방광을 누르고 있는 것 같아요. 촉진에서도 이미
 잡힐 정도로 컸어요. 팝스미어(세포 조직 검사), 초음파에서도 조
 직이 보였구요.'
    '무슨 소리야, 지금?"
    윤박사는 떨리는 음성으로 반문하는 정박사를 똑바로 응시하
 며 사뭇 냉정하게 말을 이었다. 어차피 가족에게 통보하기로 한
 이상, 감상은 금물이었다.
    '다른 장기에서도 조직이 보였어요.'
    '...사진 어딨니?'


   윤박사를 노려보는 정박사의 얼굴 근육이 경련을 일으키기 시
작했다. 그는 아무것도 믿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도 윤박사의 눈
빗에선 전혀 다른 기미를 찾을 수 없었다. 정박사는 그게 못 견
디도록 답답했고, 노엽기까지 했다.
   '니 방에 있니?'
   윤박사는 침울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키, 내놔!'
   정박사는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이 눈에 띄게 떨리고 있었다.
   "니 방 키 내놔!'
   그가 전에 없이 흥분해서 버럭 소릴 지르자 윤박사는 한숨을
 몰아쉬며 앞서 걸었다.
    이윽고 그녀의 진찰실까지 따라들어간 정박사는 그곳에서 차
마 확인하고 싶지 않은 현실과 맞닥뜨려야 했다. 그는 윤박사가
아내의 검사 자료를 보여 주는 순간부터 점점 허물어져 가고 있
었다.
   ,저기, 저 위쪽에서 시작됐어요. 그래서 자각 증상이 더 늦었
 던 것 같아__.'
    뷰박스에 빼곡히 걸린 사진들. 이미 꽃처럼 활짝 피어 번진 아
 내의 자궁 속 암세포들.
    정박사는 그 혐오스런 암세포들을 하나하나 꼼꼼히 들여다보
 고 또 들여다보았다.
    내 아내의 몸 속에 저렇듯 불길한 징조가 번지고 있었다니. 기
 막힌 현실을 조롱이라도 하듯 뷰박스에 비춰진 암세포들은 마치
 꽃처럼 선명하게 피어 있었다.

     정박사는 그 혐오스런 것들을 더 보지 못하고 창가 쪽으로 몸
 을 돌렸다. 그는 거푸 거친 숨만을 몰아쉬며 차마 제 감정을 드
 러내지도 못하고 멍하니 서 있다가 그대로 의자에 풀썩 주저앉았
 다. 마치 예리한 쇳조각으로 가슴을 후벼파듯 쓰디쓴 고통이 치
 밀어 올랐다

    그날 밤, 정박사는 거의 몸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술을 퍼
마셨다. 술을 마실수록 몸은 자꾸 무너지는데 의식만은 점점 선
명해지고 있었다. 그는 눈을 멀썽히 뜨고 있는데도 자꾸만 눈 앞
이 캄캄해졌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니에요.'
    벌써 양주 한 병을 맹물 들이키듯 다 비워낸 뒤였다. 정박사가
또 술을 청하자 곁에서 보다 못한 윤박사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
다.
   '그럼? 그럼, 어떡할 때냐?"
   아내에 대한 자책감과 자신을 향한 분노로 일그러진 정박사의
얼굴은 붉게 젖어 있었다.
   윤박사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라
고 해서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그는 자조적으로 같
은 물음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어떡할 때냐구? 니가 말해 봐. 어떡할 땐지?'
   '언니한테 가세요.'
   '가서?'


                           정박사는 끝내 젖는 눈시울을 어쩌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
                       다,
                          '가서, 가서 어떡해? 그 암덩어리 여편네하고 같이 부여잡고
                       울까? 울어?

                        "아프다고 했어. 근데 내가 동네 약국 가서 약이나 사 먹으라
                     그랬어, 명색이 의사라는 놈이 마누라한테 그랬다구 근데 이제
                     와서, 이제 와서 너 암이다. 그렇케 말해?'
                        정박사의 눈가에 이내 굵은 이슬이 맺혔다. 그는 한쪽 입술
                     을 깨물고 잠시 머뭇하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어떤 놈인 줄 알아?의료사고로 사람 죽여 놓고 내 병원
                     말아먹은 놈이야, 내가. 이 나이에 남의 병원에서 초라한 월급쟁
                     이 의사질 하는 게 부끄러워 여편네 아프다는데 병원두 오지 말
                     라고 한 놈이야, 내가.... 그런 개새끼가, 가서 무슨 말을 해."

                 '가서, 죽는다 너 잘 죽어라, 그래?
                 '정선배!"
                 '난 못해..._ 난 못하겠다.'
                  정박사의 자학은 곧 두려움으로, 허탈감으로, 다시 분노로 바
              뀌어 자신을 끝도 없는 절망 속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윤박사는
              정박사가 술을 한잔 털어넣자 자기도 따라서 한잔 털어넣었다.
              그렇게 몇 잔을 더 털어넣었을까. 밤이 깊어가는 속도보다 더 빨
              리 술기운이 온몸에 번져가고 있었다.
                 손등으로 눈가를 쓱 닦아내는 정박사를 마주보다가 윤박사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비틀거리는 정박사를 부축하여 밖으
 로 데리고 나왔다.
    정박사는 밖으로 나오자 아무런 말도 없이 출렁출렁 흔들리며
 어둠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멍하니 선 채 윤박사는 그의 허탈한
 뒷모습을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연수는 차를 몰고 귀가하면서 핸드폰을 통해 들려오는 영석의
 속삭임에 취해 있었다.
    '미안해, 그 동안 정말 괴로웠다."
    '이제 그만해요. 벌써 이해하고 있어요. 거기 기죽어 자꾸 변
 명하는 거 듣기 싫어요. 그 말 말구, 하고 싶은 말 없어요?'
    '사랑해... 보고 싶어.'
    헤어진 지 채 한 시간도 못 돼서 보고 싶다고 말하는 그 마음
 을 연수는 털끝만큼의 의심도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자신 또

 한 당장 차를 돌려 그에게로 다시 돌아가고 싶을 만큼 지금 이
 순간 그 눈빛에 목말라하고 있다.
    길은 어느덧 터널 입구로 향하고 있었다. 연수는 저도 모르게
조바심이 일었다.
   '이제 터널로 들어가야 해요. 통화 끊길 거예요. 집에 가서 전
화할게요.'
   '알았어. 전화 꼭 할 거지?"
   그 말에 대답해 주기도 전에 전화기에서 불규칙한 잡음이 들려
왔다. 연수는 천천히 핸드폰을 닫았다.
   보행자 위험을 알리는 경고판의 붉은 글씨가 문득 눈에 들어왔
다. 항상 집으로 가는 길에 지나치게 되는 터널의 노란 불빛 아
래로 한 여자가 위태롭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젊은 여자였다.
왠지 그 뒷모습이 무척 낮익다. 무척 쓸쓸해 보이는 그 여자의
뒷모습, 그 실루엣.

    집에선 인희씨가 시어머니 때문에 또 한번 호된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밤잠이 없는 시어머니에게 연시를 까 드리며 한동안 말
동무를 하고 놀아 주던 인희씨가 청소를 하느라 잠시 곁을 떠난
사이, 또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 우라질 년. 시에미한테 개똥을 줘? 너 먹어라 이년, 너 먹
어! 이 나쁜 년."
   며느리가 옆에서 노닥거려 줄 때만 해도 응석받이 어린애처럼
연시를 잘 받아먹더니 상주댁은 그 연시가 갑자기 똥으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상주댁은 너무 분해서 눈물까지 그렁그렁 맺힌 모습
으로 그 연시를 방에서 거실로 냅다 집어던졌다. 잘 익은 연시는
걸레질을 하는 며느리 등에 그대로 명중하며 터져 버렸다.
   '뭐야, 이게. 못 살어, 내가."
   '이 개가 물어갈 년아!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고..._'
   '아이고, 증말. 뭐가 어쨌다구 저런대?'
   졸지에 연시로 팔매질을 당한 인희씨는 걸레를 손에 든 채로

울상을 지었다.
   '이게 다 뭐래. 아이고 아까워라.'
   '냄새 나는 개똥을.... 에라, 이 못된 년!'
   시어머니가 그러거나 말거나 인희씨는 바닥에 떨어진 비싼 연
시를 주워 먹기 바쁘다.
   '증말, 왜 이런대.... 이거 아까워서 어째.'
   '드런 년, 그게 맛있냐?'
   어느 틈에 방에서 나온 상주댁은 천하에 상종 못할 것을 대하
듯 혀를 끌끌 찼다. 시어머니보다는 연시 때문에 속이 상한 인희
씨가 짐짓 화난 듯 버럭 소리를 지른다.
   '그럼, 맛나지!'
   '에라. 이 미친년아, 개똥을 먹어? 에라, 이 미친년!'
   '남들 다 자는구만! 그만해요, 어딜 가!'
   상주댁은 남은 연시 바구니를 가지러 도로 방으로 들어갔다.
그 시어머니를 종종걸음 치며 뒤따르는 인희씨의 하얀 블라우스
등짝이 가관이었다. 온통 붉고 지저분한 연시 속살이 덕지덕지
달라붙어 흐르고 있었다.
   '이거 줘요. 무슨 노친네가 이리 힘이 좋아!'
   '개똥이다, 개똥!'
   연시 바구니를 손에 들고 다시 거실로 나온 상주댁은 그걸 하
나하나 야구공 던지듯 집어던졌다
   인희씨의 얼굴이며 옷이며가 이내 연시로 범벅이 돼 버렸다.
그 몰골을 해서는 시어머니 손에서 연시 바구니를 뺏으려 이리
뛰고 저리 뛰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이리 내요, 이리 아이고, 집 다 망가지네.'
   '개똥이다. 개똥!"
    인희씨는 한 손에 걸레를 든 채 시어머니를 따라다니며 혼자서
갖은 씨름을 다하고 있었다. 그럴수록 재미가 붙었던지 상주댁은
마룻바닥을 펄쩍펄쩍 뛰며 좋아라 연시를 집어던지는 것이었다.
    이윽고 또 하나의 연시가 획 날아갔다. 그런데... 하필 그게 술
취해 비틀거리며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던 정박사의 옷에 정통
으로 맞았다. 가슴팍에서 시뻘건 속살이 뚝뚝 떨어지는 연시를
손바닥으로 거칠게 쓸어내던 정박사의 눈에 순간적으로 핏발이
서렸다.
   '왜 이 여잘 못잡아먹어 평생을 그래요, 평생을! 이 노친네야,
말해 봐! 도대체 뭐가 못마땅해 그러냐구, 응? 뭐가 못마땅해?'
   정박사는 다짜고짜 노모가 들고 있던 연시 바구니를 나꿔채 바
닥에 내팽개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상주댁은 그런 아들의 모습에 겁을 내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
고 있었다. 더욱 놀란 건 인희씨였다.
   '왜 그래요?'
   그녀는 겁에 질린 시어머니를 가로막고 서서 두 눈을 휘둥그래
떴다. 정박사는 아내를 외면한 채 마구 노인_를 몰아붙이기 시작
했다
   '말해 봐요. 이 여자가 어머니한테 뭘 잘못했는지, 말해 보라
구!"
   아들이 눈을 부릅뜨며 고함을 치자 정신이 더욱 혼미해진 상주
댁은 온몸을 사시나무 떨 듯 떨고 있었다.

   '아저씨, 내가 잘못했어.'
    상주댁은 아들을 아저씨라 부르며 싹싹 비는 시능을 했다. 그
런 시어머니를 부축해 방으로 데려가며 인희씨는 원망스런 눈길
로 남편을 쳐다보았다.
   정신도 없는 노친네한테 이게 무슨 행패래? 술 먹었음 곱게
잠이나 자지.'
    인희씨는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섰는 시어머니를 방에 눕혔다.
   '아저씨, 잘못했어... 안 그럴게.'
    상주댁은 아직도 겁이 가시지 않은 눈빛으로 자꾸만 문 밖을
힐끔거렸다. 아무래도 여간 놀란 게 아닌 모양이었다. 술이 취해
도 그렇지, 워낙 신경이 예민해서 병까지 얻으신 양반을 그렇게
 닦달할 게 뭐람. 따지고 보면 다 며느리 잘못 얻어 맺힌 한 때문
에 이렇게 되신 걸..._ 인희씨는 시어머니를 애처롭게 바라보며
 가만가만 이불을 토닥여 주었다.

   안에서 그 난리가 이어지는 동안, 집 밖 골목에선 엉망으로 취
한 정수가 여자 친구의 팔에 기댄 채 횡설수설하고 있었다.
   '재영아, 너, 나 좋아해?"
   재영은 혀 꼬부라진 정수의 물음에 아예 대꾸도 하지 않는다.
   '너. 나 의대 못 가도 좋아할 거냐구?'
   '이번엔 자신 있다며?"
   '또 떨어지면 싫어할 거야?"
   재영은 벌써 대학 2년생이다. 정수는 그게 불안했다
   '그런 말이 어디 있어. 이러지 말고 얼른 집에 가.'
    '가기 싫어.
    "정수야.'
    여자 친구가 짜증을 내거나 말거나 정수는 제 감정에 못 이겨
 길바닥에 털쩍 주저앉아 버렸다. 곧이어 그는 벌떡 일어나 기습
 적으로 재영을 끌어안으며 입을 맞췄다.
    '이러지 마, 정수야!'
    당황한 재영이 몸을 빼내려는 순간. 공교롭게도 차를 몰고 오
 던 연수가 그 광경을 보고 말았다. 연수는 저도 모르게 빵빵, 경
 적을 울렸다. 깜짝 놀란 정수와 재영이 후다닥 떨어졌다.
    '너 지금 뭐하는 거야? 잔뜩 취해 가지고...'
    차에서 내린 연수가 웃음이 나는 걸 참고 물었다
   '별 걸 다 참견하고 난리야.'
    정수가 볼멘소리로 항변했다. 재영은 민망해서 어쩔 줄을 모르
고 어색하게 서 있었다
   '정수 친구인 모양이구나. 초면에 실례가 많다. 어쨌든 늦었으
니 내가 저만큼 바래다 줄게.'
    연수는 한사코 집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버티는 정수를 부축하
여 우선 남의 집 계단 요에 앉혀 놓고, 재영을 찻길까지 바래다
주었다.
   다시 돌아와 보니 정수는 여전히 취한 채 그 자리에 쪼그려 앉
아 있었다. 연수는 정수를 간신히 부축해 집으로 향했다.

  '느이들은 뭐한다구 맨날 오밤중이야, 이 자식들아!'
  마침 거실에서 일그러진 표정으로 서 있던 정박사와 맞닥뜨린

게 정수로선 큰 불운이었다.
   평소에도 부자지간은 사이가 썩 좋지 못한 편이었다. 게다가
취중에 느닷없는 꾸중까지 들었으니 정수도 아닌 게 아니라 속이
꼬였다. 정수는 신경질적으로 정박사를 외면해 버렸다.
   ,이 자식이? 애비가 말하는데 등을 돌려?'
   '놔요!"
    뒤에서 어깨를 나꿔채는 정박사를 향해 정수가 거칠게 몸을 돌
렸다. 격분을 못 이긴 정박사가 아들의 따귀를 후려친 것은 순간
적인 일이었다.
   '아버지!'
    연수는 그렇게밖에 자식을 나무라지 못하는 정박사를 차갑게
노려보았다. 평소 그녀는 아버지의 강압적인 성격에 심한 반발감
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술 취한 동생을 이층으로
올려 보내는 게 상책일 듯싶었다
   '정수야, 어서 들어가"
    분해서 아버지를 노려보고 섰는 정수의 눈에도 불이 붙었다
 정박사는 아들의 반항적인 태도에 충격을 받은 듯 부르르 몸을
 떨었다.
    허둥지둥 시어머니 방에서 나온 인희씨가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몰랐다.
    ,미쳤어, 실성했냐구? 왜 이래, 오늘 따라....'
    아내의 말에는 대꾸도 없이, 선 채로 꿈쩍도 않는 아들을 노려
보며 정박사가 큰소리로 쏘아붙였다.
    ,.너 벌써 대학 들어갔어? 이제 시험 끝난 새끼가 진종일 쏘다

 니구, 그것도 모자라 술까지 처먹어!'
   '놔 둬요. 공부하느라 걔두 고생했구먼. 당신이나 들어가요.
빨리.'
   인희씨는 울상이 되어 남편을 뜯어말리느라 곤욕을 치르고 있
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화만 돋우는 격이었다
   정박사가 기어이 못할 말을 쏟아 놓고 말았다.
   '놔! 누굴 가르치려고 들어? 지 몸 하나 간수 못하고, 언제 죽
을지도 모르는 게 누굴 가르치려고 들어, 엉? 이 등신아!'
   등을 떠밀며 분위기를 수습하려는 아내의 손길을 첵 뿌리치며
정박사가 절규하듯 그렇게 내뱉었다. 정박사는 취중에도 아차,
했으나 말은 이미 주워담을 수 없게 허공으로 날아간 뒤였다. 그
러나 다행히도 전혀 영문을 모르는 인희씨와 두 남매는 잠시 멍
한 표정을 지었을 뿐이었다.

   이튿날 아침.
   어젯밤 일로 집안은 무거운 정적에 싸여 있었다
   간밤 늦도록 잠을 못 이룬 정박사는 침울한 표정으로 노모의
방으로 향했다.
   노모는 이불을 반만 덮고 쪼그린 채 아기처럼 곤하게 자고 있
었다. 아무리 술 취한 행동이라지만 팔순 께 분별 없이 처신
했던 일만큼은 밤새 송구스런 죄책감으로 그를 번민하게 했다.
정신도 온전치 않으신 분이 얼마나 놀라셨으랴.
   불안하게 잠드신 모습을 보자 더욱더 처연한 생각이 들어 코끝
이 아릿하다.
   '어머니, 저 철이예요. 많이 놀라셨죠.'
   아들이 이불을 덮어 주려 손을 갖다대자 노모는 잠결에도 흠칫
놀라 몸을 바짝 응크렸다. 젊어 혼자 되어 수절하며 세상의 모진
풍상을 겪어내느라 남달리 마음 고생도 많았을 어머니엿다. 처지
가 그렇다 보니 남들 눈엔 지독하고 괴팍한 성격으로 비쳐졌을지
모르나, 그래도 하나뿐인 아들한테만은 온갖 정성을 다 바친 어
머니였다. 그런 어머니께 언제 한번 살가운 아들 노릇이라도 해
드린 적이 있었던가
   따지고 보면, 심신이 고달프고 적막하기만 했던 당신의 인생을
아들 며느리를 통해 보상받고자 했던 과거 노모의 다소 비뚤어진
삶의 모습들도 그 아들의 자화상과 크게 다르진 않았다.
   어릴 적부터 뼛속 깊은 열등감으로 작용했던 아버지의 부재.
그것은 곧 어머니를 향한. 세상을 향한 고약한 부담감으로 그를
억눌러 왔던 게 사실이었다. 스스로 아비 없는 설움을 극복하기
위해 누구보다 잘난 놈이 되고 싶어했고, 하루빨리 자신이 처한
비루한 환경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 치며 살아왔던 지난 날....
   그 쫓기듯 살아온 삶의 결과가 겨우 이꼴이다. 정박사는 그렇
 게 흘러온 자신의 인생 자체를 모두 부정해 버리고 싶었다. 지나
온 세월들이 모두 꿈만 같았고, 쏜살같이 흘러간 세월 끝에 이렇
 게 치매 환자가 되어 누워 있는 제 어머니조차도 마치 아결한 한
조각의 환상 같았다. 더불어 그 앞에 끓어앉아 있는 자신의 몸뚱
 이도 한낱 신기루만 같았다.

   하루를 시작하는 아침이었지만 식구들 모두 우울하기는 마찬
가지였다.
   ,정말 말 안 할 거야? 치사하게. 차라리 화를 내라, 야.'
   정수는 영 찌푸린 얼굴을 펴지 않는다. 인희씨는 이층 세면장
까지 따라와 아들 눈치를 살피느라 여념이 없었다.

   세면장 문지방에 앉아 자꾸 말을 시키는 인희씨를 정수는 거늘
떠보지도 않았다. 간밤에 아버지한테 따귀를 맞아 틀어진 속이
아직도 안 풀린 것이었다. 인희씨는 행여 정수가 제 아버지를 원
망이라도 하면 어쩌나 조바심을 내면서도 겉으론 친구 달래듯 장
난스럽게 굴었다,
   '됐어요.'
    세수를 마친 정수가 수건을 받아들며 무뚝뚝하게 한마디 했다.
그제서야 얼굴이 밝아진 인희씨가 문지방에서 일어나며 활짝 웃
는다.
   ,정말? 아버지가 속상한 게 있나 보다, 그렇게 생각해. 아팠
 어?
    "비켜요, 나가게.'
    말은 됐다고 했지만 제 엄마를 퉁명스레 밀치며 세면장을 나가
 는 정수 얼굴에선 여전히 찬바람이 일었다.
    인희씨는 그런 아들을 심란하게 바라보다 아래층으로 내려왔
 다. 그때 마침 시어머니 방에서 나오던 남편과 눈이 마주쳤다.
    ,,그럴 걸 뭣 하려 소란을 피워요?노친네,간밤에 어찌 놀랐는
 지, 아침 잠 없는 양반이 내처 눈을 못 뜨네. 왜 나이 들면서 안
 하던 짓을 해. 술을 안 먹나, 애들을 안 패나. 정신 없는 노친네
 한테 미친 사람처럼 성을 안 내나..._ 오늘은 연수도 먼저 가고...
 택시 타요.'
     정박사는 아내의 잔소리를 무시한 채 거실을 가로질러 현관으
  로 향했다
     . "오늘 오후에 장박사 병원으로 좀 와.'
   '뭐한다구요?"
    정박사는 여전히 아내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한 채 신발을 신으
며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검사 한두 가지 더 할 게 있어.'
   '어제 다 했잖아? 종합병원까지 가서 할 검사 뭐 있어? 기껏
오줌소태 가지구. 대충 약이나 주면 되지. 암튼 의사들이란 그저
환자만 보면 난리지,'
   '뭘 그렇게 잘 알아?"
   아침부터 심사가 곱지 않았던 아배가 툴툴거리자 정박사가 버
럭 화를 내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 서슬에 잠시 기가 꺾인 인희
씨는 말투를 조금 누그러뜨렸다.
   '성질만 낼 게 아니라, 오늘 나 일산 간다니까? 돈을 갖다 줘
야 일을 하고, 그래야 춥기 전에 들어가지. 이누무 집 위풍이 세
서, 노인네 겨울만 되면 쿨룩이누만.'
   눈치를 보아가며 말대꾸를 하던 인희씨는 잠깐 뜸을 들였다가
마저 이었다.
   '...근덕이네도 한번 가볼라고 하는데.'
   자기 몸이 어떤 줄도 모르고 오지람 넓게 할 일도 많은 여편네
보기가 답답했던지, 정박사는 나가려다 말고 또 한번 버럭 성을
낸다.
   '잔말 말고 와!"
   '안 가도 될 걸....'
   '당신이 의사야?'
   정박사가 화난 얼굴을 더욱 구기며 마당으로 나갔다.

    간밤 죽을 병 어쩌구 했던 말을 다 취중객설이려니 흘려 넘겼
 던 인희씨로선 남편의 그런 태도가 영 야속하기만 하다.
   '알았어요, 가요.'
    곧이어 남편이 대문을 쾅 소리나게 닫고 모습을 감추자 인희씨
는 분풀이라도 하듯 그 뒤에 대고 눈을 홀겼다.
   '늙어서 빽빽대면 무섭기나 하간? 잘 가라, 이 영감태기야!'
   혼잣말이라도 그렇게 중얼거리고 나니 여간 통쾌한 게 아니었
다. 노망든 시어머니는 그렇다 치고, 어제부터 까닭 없이 심통을
부리는 남편 때문에 속이 잔뜩 상한 데다가 간밤엔 괜히 속 답답
한 잡념이 하도 많아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피붙이라고 하나 있는 게 툭하면 속을 썩이는 남동생 근덕이
다. 근덕은 어릴 때는 심약해 터져서 걱정이더니 나이 들수록 거
꾸로 행실이 사나와져 내처 걱정이었다. 근덕을 생각하면 자다가
도 억장이 다 무너지는 것 같앗다.
   근덕이 어릴 때 친정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남매는 줄곧 아버지
손에서 컸다. 성격이 완고하고 매사에 엄격하셨던 친정 아버지
밑에서 자랄 때만 해도 근덕은 그런 대로 비뚤어질 염려는 없었
다. 그런데 아무래도 달랑 남매 둘이서 홀아비 손에 크다 보니
근덕은 늘 심리적으로는 기가 죽어 있었다. 하지만 본성은 그걷
대로 착한 아이였다. 매사에 끈기가 부족하여 악착같이 생활에
매달리지 못하는 것도 다 그 착하기만 한 성격 탓이기도 했다.
   돌아가신 아버지 사업이 기울기 전까지만 해도 그나마 제 먹고
살 궁리만 해주면 사람 구실은 할 수 있겠다 싶었는데, 그것마저
뜻대롯 안 되는 게 사람의 일인 모양이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험한 꼴까지 보게 되었는지....'
    인희씨는 근덕이 생각만 해도 가슴이 탁 막히는 게 도무지 마
 음을 놓을 수가 없다. 어제 일만 해도 그렇다. 얼마 전에 찾아와
 어떻게 해서든 맘잡고 살아보겠다고 해서 그런가 보다 했더니,
 개 버릇 남 주지 못하고 기어이 일을 저지른 눈치가 뻔했다.
    그 동안 툭하면 손을 벌리는 통에 갖다 준 돈만도 얼만지 모른
 다. 생활비를 아끼고 아껴서 목돈이라도 만들어 주면 며칠 못 가
노름으로 날리고 술값으로 날리는 통에 이제는 제 자형한테도 눈
 밖에 난 처지다. 남편 병원이라도 잘 될 땐 그런 돈도 표가 안 났
 지만 이제는 푼돈 쪼개 주는 것만도 벅찬 형편이 돼 버렸다.
    찾아왔을 때 중고차라도 한 대 산다기에 겨우겨우 돈 이백만
 원을 쥐어줬는데, 그러고 난 지 열홀도 못 돼서 바닥이 난 모양이
었다. 그러니 밑빠진 독에 물 붓기도 정도가 있는 것이고, 누나
로선 눈앞이 캄캄할 따름이었다.
   게다가 일산 집 짓는 데도 가봐야 하고, 할 일이 태산 같은데
병원에선 웬 검사를 그렇게 숱하게 받으라는 건지. 어제 오후 내
내  병원에서 검사받느라 지친 생각을 하면 벌써부터 기운이
다 빠지는데.... 빨리 약이라도 주면 좋으련만 오줌소태는 갈수록
심해져 어제 오늘 소변 한 번 본 기억이 없다.
   " 어째 요즘은 심란한 일투성이래.. .."

   찬거리를 잔뜩 싸들고 봉천동 언덕빼기를 꿍꿍대며 오르는 인
희씨의 이마에 십일월인데도 불구하고 굵은 땀방울이 맺혔다.
   이윽고 슬레이트 지붕의 낡은 가옥 철대문을 열자 어제의 난동
을 증명이라도 하듯 수돗가가 정신없이 어질러져 있다. 깨진 연
탄재며 찌그러진 양은 그릇, 못 쓰게 된 야채와 안줏거리들이 서
로 뭉치고 섞여 엉망이었다.
   '올케.'
   인희씨는 그걸 보자 또 가슴이 철렁해져서 안에 대고 조심스레
근덕댁을 불렀다.
   '누구세요?'
    곧이어 부엌에서 머리를 감다 말고 비누 거품을 잔뜩 묻힌 채
 근덕댁이 뒤쳐나왔다.
    ~어머, 형님! 어쩐 일이세요?'
    호들갑을 떨며 뛰쳐나온 근덕댁은 얼른 머리를 헹구고 나와 난
 장판이 돼 버린 수돗가를 치운다, 방을 정리한다 하며 한동안 수
 선을 피웠다.
    인희씨는 그 동안 마루 끝에 앉아 심란스레 집 안을 둘러보았다
    어젠 장사두 못 나갔겠네."
    전 괜찮아요. 오늘은 나갈 거예요. 얼마 안 들고 나갔으니까, 그

                       형님한테 이런 꼴 안 보

 이도 곧 들어을 거예요. 그 놈의 도박....
   남들처럼 배운 건 없어도 심성 하나만큼은 착하고 너그러운 올
케는 시누이 대하기가 민망한지 몸둘 바를 모르고 있었다. 인희
씨는 그런 올케가 기특하기도 하고, 또 미안하기도 해서 짜안하
게 마음이 저려왔다.
   '올케가 죄송할 게 뭐 있어? 그 자식이 미친놈이지.'
   인희씨는 지갑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 올케한테 내밀었다.
   '얼마 안 돼. 내가 찬값 모은 거야.'
   '괜찮은데....
   "받아 둬. 피붙이라고 이거밖에 못 하네.'
   '많이 도와 주셨어요. 전 염치가 없어 고개도 못 들어요.'
   서로 미안해 하고 안쓰러워 하며 고개를 들지 못하는 두 여자
의 맞잡은 손으로 끈끈한 그 무엇인가가 전해지고 있었다. 어떤
호젓한 인정에서 우러나오는 핏줄 같은 정이 둘 사이를 진하게
당겨 주고 있는 것이다.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근덕댁이 대뜸 고개를 들며 물었다.
   '형님, 점심 하실래요?'
   문득 시장기가 도는 모양이었다. 시계를 보니 벌써 점심 때가
조금 지난 시간이었다.
   '올케 먹어, 난 그냥 먹는 거 보구 갈게.'
   '왜요? 같이 드시지.'
   한사코 밥상을 차리겠다는 걸 병원에 빈 속으로 가야 한다며
사양했더니, 근덕댁은 대충 양푼에 밥을 비벼 마루로 가져왔다.
꼴을 보니 속이 상해서 아침도 굶은 기색이었다,
   고추장을 듬뿍 넣어 비빈 밥을 우걱우걱 퍼넣으며 혼자서도 먹

성 좋게 밥을 먹는 올케를 인희씨는 대견한 듯 바라보았다.
   ,지난 번엔요,조 아래 여관에 로타리카페 레지하고 찰싹 달라
붙어 있는 걸 제가 뛰어들어서, 히히, 그년 젖통을 덥썩 물어 버
렸어요. 그냥 그 인간 거시길 물어 요절을 내려다가, 히히. 나중
에라도 쓸 데가 있겠지 싶어 그건 관두구요.'
   인희씨는 불현듯 젊은 올케의 천연덕스러운 얼굴을 보며 입가
에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저 나이 때 인희씨는 남편이 서울로, 미국으로 유학을 가는 바
 람에 그 팔팔한 강짜 한번 부려 볼 기회를 가져 보지 못했다. 시
집이라고 오자마자 남편은 공부하려 떠나고 홀시어머니와 함께
살아야 했던 그 외롭고 고단한 나날들. 남들이 신혼의 단꿈이라
고 말하는 시기를 인희씨는 다분히 비현실적인 느낌으로 받아들
 이곤 했었다. 단꿈은 고사하고라도 아이들 키우랴, 살림하랴 밤
 마다 허리 한번 제대로 펴고 자 본 기억이 없는 고된 시집살이였
 다. 그렇게 십수 년 세월을 남편과 떨어져 살다 보니 이제 와 추
 억할 만한 애틋한 사연 같은 것도 만들지 못했다.
    그 쓸쓸한 미소 끝에 인희씨가 올케에게 물었다
   '그놈이 가만 있어?'
   '웬걸요. 내 머리챌 잡구 미친개 뛰듯 길길이 뛰드라구요. 그
 래도 거긴 다시 안 가는 거 같아요.'
    인희씨는 또 미안해진다 근덕댁은 마치 남의 이야기처럼 속편
 하게도 말을 이었다.
    '도박한 건 그러구 나서니까, 얼마 안 됐어요.'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바로 그때 근덕이 초췌한 얼굴

  로 대문을 걷어차며 모습을 나타냈다.
     '밥 줘, 기집애야!'
     집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신경질부터 버럭 내는 것도 근덕의 못
  된 버릇 중 하나다. 그는 매사에 그렇듯 우락부락한 성격으로 변
  한 것이다. 그 꼴을 보니 인희씨는 한숨부터 나왔다. 근덕은 마
  침 제 누나가 와 있는 걸 보고는 다짜고짜 시비를 걸었다.
     '뭐하려 왔어, 여길?'
     밥을 입에 퍼넣다 말고 근덕댁이 움찔 놀랐다. 인희씨는 한심
 스런 눈으로 동생을 올려다보았다.
    '의사 사모님이 이 누추한 곳까지 어쩐 일이냐구? 지지리 궁싱
 들 어떻게 사나 보러 왔어?'
    근덕은 제풀에 화가 나서 옷까지 벗어 던지며 이죽거렸다
 보다 못한 인희씨가 한마디 했다.
    '너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니? 일 한다고 돈 가져가 놓구, 뭐, 도
 박을 해?'
    그 말에 찔리는 게 있었던지 근덕은 눈을 부라리며 제 처를 노
 려보았다.
   '그, 그게 아니구....'
    겁에 질린 근덕댁이 울상을 지었다.
   근덕은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이판사판이라는 듯 마구잡이로 나
왔다.
   '그래! 도박했다, 왜? 차 한 대 사달라니까 기껏 돈 이백 주구,
지금 생색내는 거야? 그 돈 갖곤 안 되겠어서 나 도박한다. 왜
떫어?'

   이젠 누나고 뭐고 볼장 다 본 것처럼 근덕은 침까지 훼, 뱉아
가며 대들었다. 당황한 근덕댁이 마루에서 맨발로 뛰어네려왔다.
   '왜 그래요, 누님한테.'
   안 보구 살자며? 의 끊자며? 그래, 동생이 이렇게 사니까 맘
이 꽤나 편해?'
   근덕은 아내의 만류에도 막무가내였다. 그는 마당으로 쫓아내
려와 잡고 매달리는 아내를 거칠게 뿌리치며 옆에 있던 양은 대
야를 힘껏 걷어차 버렸다.
   '맘 편해? 잠이 잘 오냐구?'
   '그래, 이놈아. 마음 편히 잠 잘 잔다, 왜?'
   누나가 하도 속이 상해 버럭 소리를 지르자 근덕은 더더욱 길
길이 뛰기 시작했다
   '그래, 잘 자라! 여긴 내 집이니까 나가! 어서 나가, 어서 안
나가?'
   근덕은 신고 있던 신발까지 벗어 던지며 행패를 부렸다. 결국
인희씨는 남동생한테 쫓겨나다시피 해서 그 집을 나섰다. 봉천동
산꼭대기 그 아득한 골목길을 구비구비 돌아 내려오자니 참으려
해도 자꾸 눈물이 솟았다. 그래도 한 가지에 나서 자란 핏줄인데,
핏줄인데.... 인희씨는 근덕이 야속하여 슬펐고, 자신의 처지가
한심하여 또 슬펐다.
   그러자니 아래쪽에서 전과 다른 심한 통증이 일었다. 인희씨는
걷다가 몇 번이나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식은땀이 흘러 오
한이 나고 현기증이 일었다 그녀는 겨우 버스 정류장 앞에 당도
하여 이를 악물었다. 그렇게 아랫배의 통증을 참고 있었다.


    도무지 일이 손에 잡히질 않는다 환자를 대하면서도 내가 이
게 뭐하는 짓인가, 제 마누라는 그 지경이 되도록 손 한번 못 써
준 주제에 무슨 의사라고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인가...
    생각할수록 나오는 건 쓴웃음뿐이었다. 정박사는 결국 대기하
고 있던 환자들을 모두 돌려보내고 가운을 벗어 던져 버렸다.
   '정박사님 안에 계시지?'
    진료실 밖에서 간호사와 이야기를 나누는 윤박사의 음성이 들
렸다. 곧이어 그녀가 차트를 들고 나타났다.
   '장선배한테 사진 보냈어요.'
    안 그래도 절친한 친구이자 암 치료의 권위자로 알려진 장박사
한테 아내를 보일 생각이었다. 그러면서도 정박사는 짐짓 윤박사
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누가 너한테 그러라 시키든? 왜 시키지도 않는 짓을 해, 넌?'

   윤박사를 탓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자신의 일이라면
때로 친누나도 그렇게 못할 만큼 세심하게 배려해 줄 줄 아는 여
자 후배한테 정박사는 지금 공연한 화를 내고 있었다
   나름대로 기껏 애를 쓰고도 고맙다는 말은커녕 핀잔만 들은 윤
박사는 당황하여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녀를 향해 이내 미
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정박사는 말없이 양복 저고리를 몸에 걸
쳤다.
   '검사 다시 받을 거야, 니 차트 필요 없어.'
   윤박사는 그의 신경질적인 반응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정도
로 속 깊은 여자였다. 아무리 의사라는 직업이 냉철한 이성을 필
요로 하는 것이라지만, 막상 이런 경우를 당하고 보면 어쩔 수
없는 한계에 부닥치게 마련이다. 윤박사가 보기에 정박사는 지금
의사로서가 아닌, 절박한 환자의 가족된 입장으로 극심한 혼란을
겪고 있는 것이다.
   '내가 이 병원에 있지만, 난 이 병원 못 믿어. 지난 번 윤박사
환자도 자궁 종양을 양성인데 악성으로 잘못 짚은 적 있지? 다시
검사할 거야.  M R I 기계는 초창기에 사서 너무 오래됐고. 아무튼
다,싹 다 못 믿=어.'
   정박사는 실내화를 구두로 갈아신으며 다 지난 일을 가지고 트
집을 잡았다. 지금 그가 말한 실수는 윤박사 스스로 곧바로 발견
해서 바로잡은 아주 사소한 것이었다. 그 사실에 대해선 정박사
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 점에 대해선 아무 말도 하
지 않고, 정박사를 그저 처연하게 바라보기만 했다
   그녀도 속으론 자신의 검사 결과가 오진이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나, 간다."
    정박사는 그녀를 뒤로한 채 서둘러 장박사가 원장으로 있는 종
 합병원으로 떠났다.

   종합병원 로비에서 만나기로 한 시간이 한참이나 지났는데도
아내는 나타나지 않는다. 입구를 뚫어져라 살피던 정박사는 이윽
고 저만치서 잰걸음으로 허둥지둥 오고 있는 아내의 모습을 발견
하였다
   '나쁜 놈.'
   그녀는 듣는 사람도 없는데 혼잣말로 연신 군시렁거리며 병원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성난 망아지
한 동생 때문에 아직도 어지간히 속이
                                                            모양으로 날뛰며 폭언을

                                          상한 표정이었다.

   '이 양반이 아직 안 왔나?"
   그녀는 여전히 혼자 중얼거리며
기웃거린다.

                                  고개를 쭉 빼고 로비 안쪽을

   '왜 이렇게 늦어.'
   정박사가 다가와 어깨를 툭 치며 짜증을 냈다. 짜증이 나긴 인
희씨도 마찬가지여서 싫은 소리를 했다.
   '뭐 좋은 일이라구 서둘러요?'
   '가.'
   이럴 때 남편이라도 좀 자상한 데가 있어서 신세 한탄이라도
받아 줄 수 있으면 좋으련만, 하는 짓이 타고난 목석이다.
   인희씨는 눈 한번 마주칠 새 없이 앞서 걷는 남편을 뒤따라가

 며 한껏 눈을 홀겼다

     잠시 후. 정박사는 아내를 진료실에 들여보내고 초조하게 기다
  리고 있었다.
    '잘 안 되겠지만 객관적으로 보려고 노력해라. 얼굴이 그게 뭐
 냐?'

     단둘이 있게 되자 장박사가 침착하게 충고를 해 왔다. 그러나
 지금 정박사에겐 친구의 충고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검사 처음부터 다시 해 줘. 윤박사가 보낸 거 싹 다 잊어버리
고서 말이야.
    장박사가 무슨 말인가를 하려는데 인희씨가 간호사와 함께 진
 찰실 안으로 들어왔다
    '어제 오늘 피를 한 말은 뽑네.=
    '제수씨 힘들죠?'
    인희씨가 기엽게 농을 건네자 장박사는 친절한 웃음으로 받아
 넘겼다. 장박사와는 남편들끼리 워낙 가깝다 보니 안사람들하고
도 서로 친하게 지내는 사이였다
   '그냥 난 약이나 주면 좋겠구만.'
   '이쁘니까 잘 해주려고 그러지.'
   '경환 엄만 잘 있죠?'
   '늙은이가 잘 있어 봤자지, 골골해요.=
   그쪽도 무슨 병이 있나 싶어서 걱정스런 눈길로 반문하는 인희
씨를 향해 장박사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을 이었다
   '그 사람이야 평생을 약으로 사는데, 뭐. 걱정할 거 없어요.


   '검사실이 이층인가?"
    정박사가 지금 잡담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표정으로 장
 박사의 말꼬리를 잘랐다
    사람 좋은 장박사는 정박사의 서두르는 모양이 안쓰러웠지만
 짐짓 부드럽게 웃으며 친구 부인을 바라보았다
   '급하긴... 빈 속이죠?'
   '예.'
   ,어제 검사에서 빠진 거랑, 또 어제 검사했어도 미흡하다고 생
 각되는 부분 다시 할 거예요.'
    인희씨는 장박사의 설명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신중하
 게 듣고 있다. 그런 아내를 보고 있기가 측은해져서 정박사는 고
 개를 한쪽으로 돌렸다. 장박사가 다시 물었다.
    '소변 보기가 많이 불편해요?"
    '...그러네요.
    "얼마나?'
    '오늘은 배만 뒤틀리구, 한 번도 안 나왔어요.'
    정박사와 장박사의 얼굴에 더욱 짙은 그늘이 드리워졌다. 지금
하는 말대로라면 보통 심각한 상황이 아니었다
   한편으로 정박사는 아내가 설마 그 정도 상태가 되도록 고통을
참고 있었을까 믿고 싶지 않은 마음에 자꾸 서두르기만 했다.
   '자. 빨리빨리 검사하자구.'
   곧이어 내시경이며  M R I , 심전도 검사 등 여러 가지 검사가 다
시 시작되었다
   아내가 조금은 겁먹은 얼굴로 이것저것 검사를 받는 동안에 정

  박사는 장박사와 함께 이미 넘어온 자료들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장박사가 먼저 정박사의 안색을 살피며 입을 열었다.
     '수술 못 해.
     "왜?'
     '알잖아...."
     '내가 뭘 알아. 명의라고 소문난 너나 알지. 나 같은 돌팔이 의
  사가 뭘 알아. 난 위염을 위궤양이라고 판정한 적도 있고, 맹장을
   장염이라고 오진한 적도 있어. 난 몰라.'
      정박사는 사태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으면서도 한사코 자조적
  인 심정이 되어 친구 앞에서 화를 내고 있었다. 1도 어쩔 수 없
  는  깨닫고 심기가 진 까닭이었다.
      장박사는 그런 친구의 속사정을 누구보다 훤히 꿰뚫고 있었지
   만 어디까지나 냉철한 태도를 잃지 않으려 했다.
     '너, 그런 행동 도움 안 돼.'
      장박사의 어조에는 안=지만, 어느 정도의 비난과 질책도 담
   겨 있었다. 정박사가 차마 붉어지는 눈자위를 숨기지 못한 채 천
   천히 옳조리듯 말을 이었다.
     '창피한 소리지만, 나 낼 모레면 아랫것들한테 밀려 삼십 년
   의사직도 그만이야. 그때까지 기다릴 것도 없이, 나 지금 그만둔
   다. 나 지금부터 의사 아니야. 그러니까 내가 알아듣게 찬찬히
   설명해.
     "이미 늦었어."
     '그게 의사가 할 소리야, 임마 니들은 남의 시썽 생각두 않구,
 늦었다  그 말 모든 게 끝나? 돈 뜯어먹고  검사 저 검사

다 해놓구 늦었다, 그러니 가라! 그럼 끝나는 거야? 사람 목숨
놓구 가라, 그럼 끝나는 거야, 이 자식아!'
    격분한 정박사의 눈가에 불꽃이 튄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
어나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마구 분개해서는 길길이 뛰었다.
   장박사는 친구의 그 대책 없는 분노 앞에서 씁쓸한 연민을 느
끼고 있었지만, 어쩐 일인지 오히려 화를 내고 말았다
   '수술이 하등의 도움이 안 돼! 임파선이 퉁퉁 붓고, 여기저기
엉망이야. 잘못 수술하다 더 크게 번질 수도 있어. 괜히 이곳저곳
휘저어 병만 키운다구. 진정해, 너 임마!'
   '수술해!
   "안 돼!'
    기어이 눈가에 가득 차오르는 눈물을 어쩌지도 못한 채 정박사
가 장박사를 다그치기 시작했다.
   '수술해. 배 열어 보기 전엔 누구도 어쩌구저쩌구 장담 못 해.
너 왜 그렇게 말이 쉬워? 남편이 의사란 작자가 손 하나 까딱 않
고 저 하나만 보고 산 여자한테 거두절미하고 너 끝장났어, 여편
네야. 그렇게 말하라구? 난 못 해. 배 열구 내 눈으로 보기 전엔
나 그말 못 해. 진행이 예상보다 덜할 수도 있어. 아직은 그 여자
도  안 아프대....'
   정박사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매달리고 있었지만, 장
박사는 조용히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아퍼. 참는 것뿐이야. 분명 아퍼. 그리고 수술하면 인희씨가
더 힘들어. 환자 더디 아무는 거 너도 알잖아?'
   그걸 몰라서가 아니었다. 정박사는 지금 하다못해 천만분의 일

                                                                                        鬪

                                                                                        .

                                                                                        I

이라도 가능성이 있다면 거기에 모든 걸 걸어보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장박사는 그 천만분의 일만큼의 가능성조차 부인하고
있다.
    그는 장박사의 무섭도록 차분한 태도에 할 말을 잃은 듯 잠자
코 뷰박스를 다시 켜 보았다. 푸르스름한 불빛 위에 역시 종양
덩어리가 확실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이내 모든 걸 체념한 듯 맥빠진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래, 나두 의사야. 이게, 이렇게 큰 게 아래를 누르고 있어.
 소변 볼 때마다 죽을 맛일 테구 하루가 다르게 더 심할 거야. 자
 각은 죽는다는 통보니까 곧 죽겠지....'
    잠시 울지 않으려 입을 앙다물고 참던 정박사가 이윽고 필름을
 두드리며 장박사에게 사정조로 말을 이었다.
    ,,죽을 때 죽더라도 이건 떼낼 수 있어. 숨통이나 퇴워 주자구!
 단 일 주일이라도 더.... 그것만이라두 해주자구!"
    아무리 냉철한 이성과 판단력을 지닌 장박사라 할지라도 친구
 의 마지막 기대마저 무너뜨릴 수는 없었다. 결국 그는 더 이상
 친구를 설득하는 것이 부질없는 짓이란 걸 깨닫게 되었다. 장박
 사는 잠시 고민하다. 마침내 가망도 없는 수술에 동의하고 말았
 다.
    정박사는 비로소 마음이 놓이는지 조금 밝아진 표정으로 장박
 사를 바라보았다.
    '내일 3시, 틀림없지?'
    '그래, 내일 당장 입원시켜."
    '갈게.'
   정박사는 장박사의 확답을 받고 난 뒤에도 몇 번씩이나 수술
시간을 확인하고 나서야 진찰실을 나왔다.

    자신의 몸 속에 그렇듯 심각한 병마가 도사리고 있는 줄은 꿈
에도 모른 채 인희씨는 그저 새로 짓고 있는 집 걱정뿐이었다.
    병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정박사와 인희씨는 대판 말씨름을 벌
여야 했다. 집으로 가자는 정박사의 말을 무시하고 인희씨가 한
 사코 일산행을 고집하는 바람에 서로 의견이 엇갈린 것이다.
   '집은 나중에 지어두 돼. 아픈 사람이 어딜 가!'
    설득하다 지친 정박사가 짜증을 내자, 인희씨는 또 나름대로
화가 나서 무작정 앞서 걷기 시작했다.
   '아프긴 누가 아퍼? 하긴 내 나이에 안 아픈 사람이 어디 있기
나 하대?"
   사람이 몰라도 저렇게 모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천하태평인
아내를 어이없이 바라보던 정박사가 성큼성큼 뒤따라가서 그녀
를 자기 쪽으로 돌려 세웠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번만큼은 인희
씨도 막무가내였다.
   '집에 큰돈 두구 잠이 와요? 그리구 몇 번 말해. 노친네 겨울
나기 힘들어, 곧 들어갔으면 싶다구.'
   정박사는 짜증스럽게 팔을 뿌리치며 고집을 피우는 아내를 향
해 분통이 터지려는 걸 간신히 참고 다시 팔을 잡아끌었다.
   '집에 가자구.'
   '진작에 좀 걱정하지?'
   갑자기 인희씨가 팔을 핵 뿌리치며 언성을 높였다. 그녀는 순

간적으로 말이 탁 막혀 버린 남편을 탓하며 푸념을 늘어놓았다.
   '젊어서 애 날 때두 옆에 없던 사람이... 늙어 망령이 나나...
  , 일두 안 하구 월급받으려나.'
   정박사는 매몰차게 쏘아붙인 뒤 정류장 쪽으로 휘적휘적 걸어
가는 아범를 멍하니 쳐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와 무슨 원
망을 듣는다 해도 할 말이 없어서였다. 그러면서도 정박사는 다
시 후다닥 뒤따라가 아내의 팔을 붙잡아 보았다. 그러나 남편 속
도 모르고 인희씨는 한사코 뿌리치기만 했다.
   '내 걱정 그리 되면, 근덕이한테나 한번 가보슈."
   그녀는 갑자기 야속한 듯 덧붙였다
   '그러는 거 아니우. 나한텐 하나밖에 없는 피붙이구, 당신한텐
하나밖에 없는 처남인데....'
   난데없이 골칫덩이 처남을 들먹이며 자신을 탓하는 아내가 못
마땅하긴 했지만 정박사는 더 이상 그녀를 설득할 명분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오늘은 술 먹지 마요."
   이윽고 만류하던 남편이 포기할 기미를 보이자 일산행  좌석버

스에 올라타려던 인희씨가 혼잣말처럼 한마디 덧대었다.
   '어젯밤처럼만 왔단 봐라!"
   버스가 떠났다.
   정박사는 한동안 그 자리에 못박힌 듯 선 채로 일산행 버스가
떠난 쪽만 망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한편, 병원에선 젊은 원장이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져서 펄펄
 뛰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그날 정박사가 일찍 퇴근한 사실을 알
 게 된 것이다.
    이 병원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정박사 친구가 원장
자리에 있던 곳이다. 그 친구가 미국으로 이민을 가면서 경영주
가 바뀌는 바람에 이즈음엔 난데없이 나이든 의사들의 입지가 불
안해졌다. 그렇잖아도 요즘 새파란 신출내기 원장이 전권을 휘두
르며 한창 물갈이가 진행되고 있었다. 정박사는 이전부터 그 젊
은 원장한테 미운털이 박힌 신세였다.
   '정박사님 대체 왜 그러신답니까?'
    퇴근 무렵 윤박사의 진찰실로 찾아온 원장은 잔뜩 찌푸린 얼굴
이었다. 벌써 몇 달 전부터 젊은 원장이 물갈이 리스트를 준비하
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병원 내 몇몇 나이든 의사가 그 리
스트에 올라 있다는 건 이미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는 공공
연한 사실이었다. 정년을 겨우 일 년 남짓 남겨 두고 있는 정박
사가 그 명단의 맨 위칸을 차지하고 있으리란 것쯤은 웬만한 간
호사들도 다 알고 있을 것이었다.
   원장은 윤박사가 정박사와 절친한 선후배 사이라는 걸 알면서
도 노골적으로 험담을 입에 담았다.
   '병원을 말아먹으려고 하는 건지, 예약 환자도 몇 안 되는 양
반이 환자를 다 돌려보내고 자긴 벌써 퇴근을 해 버려? 일 못시
켜 먹겠네, 정말!'
   어차피 병원도 돈 벌려고 하는 사업인 바에야 의사는 예약 환
자를 최대한 많이 확보해야 한다, 똑같은 환자라도 진료비를 되
도록 많이 받아내야 한다는 게 젊은 원장의 한결같은 주장이었

 다. 그게 곧 그의 경영철학이기도 했다. 그 동안, 그런 개나 물어
 갈 개똥 철학 따위로 의사의 능력을 가늠하는 젊은 원장의 뻔한
 장삿속에 정박사는 누구보다도 강한 불만을 표시해 왔다.
    원장의 눈에 그런 정박사의 태도가 곱게 비쳤을 리가 없었다.
 그는 틈만 나면 매상이나 올리라고 독촉하는 포주처럼 정박사를
 닦달하려 들었고, 정박사는 그런 원장을 아예 상대조차 해주지
 않았다. 원장과 정박사는 아예 완전히 서로 다른 색깔의 인생을
 살고 있는 셈이었다 그러니 무엇 하나 눈에 차는 개 있을 리 만
 꾸였나 그러던 차에 갈등의 골은 깊어질 대로 깊어졌고, 이걷
 일까지 있고 보니 원장이 길길이 뛰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이치
 였다.
    원장은 괜하게 윤박사에게 화풀이를 좀더 하고는 문을 거칠게
 닫고 나가 버렸다. 그러자 윤박사는 몹시 심란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가, 이윽고 퇴근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윤박사가 막 퇴근을 하려고 일어설 참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
 정박사가 문을 빼꼼 열었다.
   "윤아,술 한잔할래?'
   윤박사는 잠시 전의 심란한 표정을 거두고 엷게 웃어 보였다.
   '사주실 거예요?'
   '비싼 건 못 사구, 포장마차에서 간단하게 한잔 사지.
   "그러죠, 뭐.'
   윤박사는 그 제의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두 사람은 곧 병원을
빠져 나왔다.
   그렇게 해서 둘이 함께 술을 마시러 간 곳은 다름아닌 근덕댁

의 포장마차였다.

    포장마차는 마침 저녁 시간이라 비교적 붐비는 편이었다. 근덕
 댁은 혼자 부지런히 안줏감을 만들어 내고, 또 한편으론 국수를
 말아내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그녀는 윤박사를 앞세우고 들어
서는 정박사를 보자 몹시 당황한 기색이었다.
    '나, 처남댁한테 부탁 있어 왔어요.'
    한차례 몰렸던 손님들이 우르르 빠져 나가고 처남댁 일손이 조
금 한산해진 참이었다.
    말없이 순잔을 기울이고 있던 정박사가 처남댁을 향해 입을 열
었다
    '저 같은 거한테 무슨..._'
    손위 시누이 남편 대하기가 어려워 몸둘 바를 모르던 근덕댁은
겨우 웃는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정박사가 정중하게 덧붙였다.
   '우리 마누라 수술 들어가는데, 병간호 좀 도와 줘요. 워낙 깔
끔한 사람이라 남의 손 이리는 거 싫어할 것 같아서 그런데...."
    뜻밖에 수술 이야기를 꺼내는 그를 윤박사가 놀란 눈빛으로 쳐
다보았다
    정박사는 의식적으로 그 시선을 묵살하며 빈 술잔을 채워 단숨
에 들이켰다. 그 바람에 더욱 놀란 건 근덕댁이었다
     그녀는 옆으로 쪼그려 앉았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호들
갑스럽게 물었다.
   '형님 어디 아프세요? 어, 오늘 낫 까지만 해두 별일 없었는

   정박사는 말없이 처남댁을 쳐다보았다. 그 눈치를 지레 살피며
 근덕댁은 묻지도 않은 말을 주섬주섬 늘어놓기 시작했다. 공
연히 시누이한테 돈 받은 일이 마음에 걸렸던 탓이다.
   '저, 그러니까 오늘 낮에 김치랑, 아니 젓갈이랑....'
   '알아요. 애기 들었어요.'
   '...네, 그러셨구나. 정말 젓갈밖에 안 주셨어요.'
   없는 주변머리에 변명을 늘어놓느라 곤욕을 치르고 있는 처남
댁이 안쓰러워 정박사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도 아내가 간간이
처남네 옹색한 살림에 돈을 보태 주고 있다는 것쯤은 눈치로 알
고 있었다 그걸 끝까지 모른 척하지 못하고 언젠가 아내한테 싫
은 소리를 좀 한 뒤부터는 아내도 처남댁도 서로 쉬쉬하는 눈치
였다.
   도대체 언제까지 그 망나니 같은 처남 뒤나 돌봐 줄 작정이냐
고 아내를 몰아붙였던 일이 새삼 가슴에 밟혔다. 비록 지난 일일
망정 여린 아내가 어찌 생각했을까 헤아려 보면, 자신이 한없이
치졸하게 생각되는 것이었다
   '무슨 말이에요?
   두 사람의 대화가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자 윤박사가 뜨악한 표
정을 지었다. 정박사는 그런 윤박사를 향해 어색하게 웃어 보였
다.
   그 사이 처남댁이 걱정스럽게 물어왔다.
   '근데... 어디가 많이 아프세요?"

  '어디가요? 형님 요즘 오줌소태 때문에 고생이라시던데, 오줌

보가 문젠가?
   ", 그렇네요. 드럽게 오줌보가 안 좋네요."
    정박사의 말이 끝나자마자 윤박사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저랑 나갓섯 예기 좀 햇요,'
   정박사는 윤박사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짐작을 하고도 남
았다. 그녀는 분명 수술에 기대를 거는 그의 어리석음을 탓하고
싶을 터였다.
   그는 조용히 윤박사의 팔을 잡아 앉히며 처남댁에게 재차 다짐
을 두었다.
   ,해줄 수 있죠? 낼 당장 입원할 건데.'
   '그럼요.'
   처남댁은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선선히 응해 주었다, 그녀는
벌써부터 마음이 급한지 두르고 있던 앞치마부터 벗었다.
   그럼, 지금 당장 포장 접어야겠네요.'
   '처남한테 얘기 안 해도 돼요?'
   그 물음에 처남댁이 어설픈 웃음을 지으며 정박사를 바라보았
다. 남편에겐 아무 기대도 갖지 않기로 한 한 여자의 무심한 표
 정이었다.


   u아마 한동안 안 들어을 거예요. 통장이
구 나갔으니까 달포는 족히 걸릴 걸요?'

   '여전히 속썩여요? ...나쁘네.'
   아네요. 그렇게 안 나뻐요. 애 못 낳는 년, 데리고 사는 것두
고맙죠, 뭐.'

   어쨌거나 남편이라고 도리질까지 해가
며 감싸고 도는 처남 댁.
  의 티없는 마음씨가 안쓰럽기만 하다. 다소 수다스런 구석은 있
  지만 언제 봐도 처남댁에겐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미덕이 있었
  다. 그것은 그녀의 장점이자 약점인 그 무구한 천진성에서 비롯
  된 편안함일 터였다
    '저 그럼, 지금 집에 갔다 오실래요? 짐두 좀 챙기시구, 처남한
 테 메모두 남기고. 여긴 내가 지켜 드릴게.'
    "그러실래요?
    "정선배!'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던 윤박사가 만류하고 싶은 심정으로
 끼여들었지만 소용없었다.

    그는 서둘러 포장마차를 나서는
 묵묵히 또 한 잔의 술을 비웠다.
                                               처남댁을 눈으로 배웅하고는

    옷 보따리라도 챙겨가기 위해 집으로 향하던 근덕댁은 한길가
 에 있는 카페 을 지나다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어쩌면 남편이
 그 안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근덕은 이 카페 여종업원과 죽고 못사는 사이였다.
    그녀는 허름한 카페의 문을 빼꼼히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방
 마다 칸막이가 쳐진 으슥한 모양새가 마치 더러운 매음굴 같았다.
    초저녁인데도 어두컴컴한 실내에 뿌연 담배 연기가 코를 찔렀
다. 천장에 매달린 조잡한 조명이 빙빙 돌아가며 칙칙한 빛을 뿜
어내고 있었다, 커튼으로 가려진 칸막이 룸 안에서 귀에 거슬리
는 껌 씹는 소리가 들려왔다. 카페 안은 음악 소리 하나 없이 조
용하다. 분명 사람이 있는 것 같은 룸에서는 무슨 짓들을 하는지

 말소리조차 새어나오지 않았다.
    '어서 오세요."
    인기척을 듣고 룸 밖으로 나온 여종업원이 근덕댁을 보고는 이
 내 이맛살을 찌푸렸다. 둘은 서로 좋지 못한 사건으로 벌써 안면
 을 익힌 터였다
    근덕댁은 상대방의 얄궂은 옷차림부터가 눈꼴사나왔다. 도대
 체 옷을 입은 건지, 몸에 갖다 붙인 건지 구분이 안 가는 행색을
 하고 여자는 짜증스레 자신을 옳여보고 있었다.
    '뭐하려 왔어?'
    먼저 기가 꺾일세라 야멸찬 기색으로 노려보고 서 있는 근덕댁
을 향해 카페 여자가 이죽거렸다. 그녀는 제 젖가슴을 쓱쓱 문
 질러대며 생각할수록 약이 오른다는 표정으로 신경질을 냈다
   '개 같은 년! 또 물러 왔니, 응? 왜 왔어?'
    별 꼴같지 않은 게 성질을 다 낸다 싶어서 근덕댁은 속이 뒤집
힐 지경이었다. 남편과의 일을 생각하면 상대방이 도리어 화를
내는 게 뻔뻔스럽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은 사람부터 찾아보
자 싶었다.
   '우리 집 인간 안 왔어?'
   '안 왔다.
   "정말
    제딴엔 태연하게 둘러대고 있지만, 아무래도 미심쩍은 데가 있
었다. 전에 그렇게 당하고도 자신을 내쫓지 못하는 상대방의 태
도가 영 자연스럽지가 못한 것이다. 성깔깨나 있는 년이 어째 켐
기는 데가 있어 저러지 싶어 근덕댁은 용기를 내서 칸막이 쪽으


  로 다가갔다. 그러자 카페 여자가 앞을 가로막아서며 일부러 안
  에 들리도록 비아냥거렸다.
    '나 새서방 만났어. 경고하는데, 곱게 가 줄래 불독 아줌마? 나
 아주 조용히 살고 싶거든.'
     그 말에 응원이라도 하듯 안에서 험악한 인상의 사내가 고개를
 내밀었다
    '뭐해? 빨리 들어와!'
     정말 저 남자가 이 여우 같은 것의 새서방인가 싶어 쳐다봤지
 만,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안에서 여러 명이 노름판을 벌이는
  것만은 확실한베, 무작정 커튼을 들춰 볼 만한 배짱도 없다.
    근덕댁은 남편 신발이라도 찾아볼 요량으로 몸을 숙여 안쪽 테
 이블 밑을 흩어보았다. 컴한 불빛 아래라 잘 확인할 순 없었지
 만 느낌은 영 쩜쩜하기만 했다.
    그녀의 자신 없는 태도에 카페 여자가 사믓 의기양양해져서 이
 죽거렸다.
    '어서 꺼지셔. 이번엔 내가 물기 전에.'
    근덕댁은 할 수 없이 뒤돌아 나오면서 카페 여자를 매섭게 노
 려보며 한마디 했다.
    '지조 없는 년!'
    근덕댁은 저런 바람둥이 생날라리 같은 걸 좋다고 따라다닌 남
 편이 한심스럽다기보다는, 이상하게도 그런 남편을 헌신짝 버리
 듯 차 버렸다는 그 카페 여자한테 묘한 배신감을 느꼈다. 그녀는
 거칠게 문을 닫고 나왔다.
    그러는 동안 안에서는 근덕이 의자 위에 쪼그린 자세로 몸을

숨기고 있었다. 그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쥐고 있던 카
드 패를 펼쳤다. 오늘은 운이 좋으려는지 돌리는 판마다 돈이 붙
는다
   . 야, 너 제법이더라!'
    근덕은 무사히 아내를 따돌리고 들어온 카페 여자를 끌어안고
모처럼 쾌재를 불렀다.

   처남댁이 돌`아오길 기다리며 윤박사와 술잔을 주고받던 정박
사는 꽤 많은 양의 술을 마셨다.
   '언니가 힘들지 않을까요?'
   아까부터 할 말을 잔뜩 쌓아 두고 있던 윤박사가 어렵사리 입
을 열었다.
   정박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들고 있던 소주잔을 털어넣었다.
   할 수 없지. 너도 좀 도와라.'

    ',해보는 데까지는 해 봐야지. 그래야 내 맘이 편할 거 같아.'
    '. .네."
    '...남자가 참 그렇다."
     이야기가 다른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윤박사는 정박사를 말없
 이 바라보기만 했다. 잠시 침묵이 흐른 가운데, 그가 뜬금없이 하
 던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생각해 봐라. 남자란 인간이 참 쓸모가 없어. 젊어 일할 때나
 쓸모 있을까, 늙어지면 쓰레기야. 평생 지 한 몸 간수하는 법도
 배우지 못하구 살고. 도대체 하는 게 없어. 밥을 할 줄 아나, 빨


, 애들을 키울 줄 아나...."
   정박사의 자조 섞인 넋두리는 곧 쓸쓸한 농담으로 바뀌었다.
   ,집사람 죽는다고 슬픈 건 없는데, 참 아쉬울 거는 같네.'

   ,난 다음 생엔 여자로 태어날 거다. 된장 담그는 것두 배우고,
김치 담그는 것두 배우고. 우리 집사람 반찬 아니면 어디 가서두
수저를 못 드는데... 아무래도 나두 곧 굶어죽을 것 같다....'
   윤박사가 그 한마디 한마디를 아프게 경청하고 있는 사이 잠시
끊어졌던 정박사의 말이 한숨과 함께 이어졌다.
   ,윤아, 너도 우리 집 된장, 고추장 많이 퍼다 먹었지?'
   '...네."
   '너 이제 그 된장 못 먹게 돼, 어쩌냐? 안됐다.'
   윤박사는 고개를 숙인 채 소주잔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농담
을 하는 양 말하고 있었지만 어느 결에 정박사의 목소리는 바람
앞의 촛불처럼 하르르 떨리고 있었다. 윤박사는 거기다 대고 뭐
라 뒤를 달 수가 없었다 무언가 목구멍에서 말을 막고 있는 듯
하여 윤박사는 괜히 만지작거리던 소주잔을 입 안에 쏟아부었다.

   그 참에 집에서는 간병인이 한바탕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인
희씨가 집을 비운 사이 낮잠에서 깨어난 상주댁이 또 정신이 흐

 려진 것이다.
    대여섯 시간을 곤히 자다 깨어난 상주댁은 주방에 웬 낮선 여
 자가 있는 걸 보고는 다듬이 방망이를 들고 살금살금 다가갔다.
 식구들이 아무도 없는 시간에 낮선 간병인이 전기밥솥을 여는 모
 습을 보고는 필시 도둑인 줄로만 여긴 것이다. 전에 수십 번을
 보아온 간병인이라 해도 한 번 정신이 깜빡 넘어가면 생판 낮선
 남이었다.
    간병인은 그때 마침 밥을 푸며 무선전화기로 인희씨와 통화중
 이었다. 그 참에 살금살금 다가온 상주댁은 방망이를 들어 간병
인을 냅다 후려쳤다.
   '아이쿠!'
   통화를 하다 말고 비명을 지르는 간병인의 목소리가 전화기를
타고 흘러나왔다.
   '도둑이다!'
   이어 시어머니의 외침 소리도 선명히 들려왔다,
   '아줌마?'
   인희씨는 덜컥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수화기에 대고 간병인을
소리쳐 불러 봤지만 들려오는 건 시어머니의 옹골찬 음성뿐이었
다.
   '너, 도둑년이지? 내가 니 년을 반드시 서에 넘길 거야. 콩밥
을 먹일 거야, 이년! 수갑을 채울 거야!'
   '아이구, 그놈의 몽둥이 좀 치워요. 진지 드릴게.'
   '뭐? 내 밥까지 도둑질을 해!'
   간병인이 방에 갇힌 모양이었다. 뭉둥이로 문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시어머니의 고함과 간병인의 비명소리가 간헐적
으로 들려왔다. 그것만으로도 수화기 저편의 상황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아저씨, 빨리 가 주세요.'
   집을 떠나 한시도 마음 편할 리 없던 인희씨는 차 안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지금으로선 당장 집으로, 시어머니 곁으로 가야 한
다는 생각뿐이었다. 제발 아무 일 없어야 할 텐데.
   아침에 집을 나설 때부터 영 마음이 개운치 않더니 결국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인희씨는 집이 가까워져 오는 동안에도 몇 번
씩 가슴을 쓸어내리곤 했다.

   현장 소장이 일산에서 집까지 태워다 준 덕분에 돌아오는 시간
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어머니, 나 왔어.'
   이윽고 숨을 헉헉대며 집 안으로 뒤어들어간 인희씨는 다른 건
볼 것 없이 시어머니 안榛부터 확인하였다. 거실에 들어섰을 땐
간병인이 근 한 시간 가까이 욕실에 갇혀 있던 중이었다.
   '어머니, 이제 괜찮아, 괜찮아.'
   인희씨는 겁먹은 얼굴로 거실에서 밥솥을 끌어안고 있는 시어
머니를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었다. 이어서 곧 욕실로 다가선. 문
을 열어 주자 간병인이 뚱한 얼굴로 밖으로 나왔다.
   어느덧 간병인의 존재조차 까맣게 잊어버린 상주댁은 애처로
운 음성으로 며느리한테 응석을 부린다.
   '어디 갔다 왔어?"

   영락없이 집 나간 엄마를 기다리던 어린아이의 눈매였다.
씨는 그 측은한 눈길을 바라보며 짐짓 밝게 웃어 보였다.
   '집 보구 왔지!'
   상주댁은 입가에 김칫국물이며 밥알 찌꺼기를 잔뜩 묻힌채로 히죽
죽 웃었다. 그 눈가에 그렁그렁 물기가 서렸다.


   퇴근 무렵, 연수는 결국 인철과 크게 언쟁을 벌이고 말았다.
그럴 생각이 아니었는데. 연수는 그것이 인철의 부질없는 집착
탓이라 생각해 버렸다
   연수는 이따금 그가 자신과 영석의 관계를 신문하듯 바라보는
시선을 느낄 때마다 모멸감을 느꼈다. 그로부터 멀리 도망치고
싶었다. 지난 번 영석의 일로 마음 고생이 심할 때 그에게 모든
걸 털어놓은 뒤부터는 더욱 노골적인 비난의 시선을 던지곤 했
다. 지금 와선 그 일이 후회스러울 따름이었다. 하지만 그땐, 인
철의 위안이 큰 힘이 됐던 게 사실이긴 했다.
   어쨌거나 경솔한 행동이었어.... 그가 대학 때부터 자신을 향해
특별한 감정을 가져왔다는 걸 알면서도 때마다 이기적으로 처신
하여 결국 틈을 주고 말았다는 게 연수로선 부정할 수 없는 실수
였다.
   '저녁 같이 하자.'
   '약속 있어요."
   모처럼 인철이 어렵게 제의한 저녁 식사를 한마디로 거절해야
했던 이유는 물론 영석과의 약속 때문이었다. 그러나 연수는 약
속 상대가 차부장이냐고 인철이 물어왔을 때, 굳이 대답하려 하
지 않았다. 일말의 떳떳치 못한 자존심 때문이었다.
   인철은 그 틈을 잔인하게도 비집고 들어왔다.
   '그 사람이 이번엔 널 책임져 준대? 그러더냐구?'
   '책임져 주기 바라지 않아요.'
   '사랑은 책임이야.'
   '선배 생각이에요. 우린 아니에요.'
    연수는 주차장까지 따라와 자신을 설득하려는 인철을 매몰차
게 외면해 버리고 차 문을 닫았다. 그러나 그는 차 문을 도로 열
며 상대의 기분 따위는 아랑곳없이 마구 쏘아붙였다.
   사랑은 책임이야. 적어도 책임지려고 하는 노력이야. 그게 사
 랑인 거야. 책임 없는 사랑은 가벼워서 봄바람에도 날아가 바람
되고, 먼지 돼. 넌 먼지 되고 바람 될 거야. 흔적도 없이, 그렇게
될 거야. 그 사람은 엄청난 책임과 무게가 있는 가정으로 돌아갈
 거구.'
   바람 되고. 먼지 돼도 난 좋아요. 추억은 있으니까.'
    그 어떤 말을 해도 결국 구차한 자기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연수는 아등바등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시키려 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런 자신을 아주 고통스럽게 의식해야만 했다
 하지만 아직은 헤어 나오기 싫은 사랑이라는 이름의 미망이 그
고통을 다소나마 무디게 만들었다.

 

                                                                                                         鬪
                                                                                                         繼
   인철은 그 미망을 깨뜨리기라도 할 듯 더더욱 신랄한 비난을
퍼부었다.
   ,,똑똑히 들어. 차부장한테 넌 추억도 못 돼. 넌, 그냥 스쳐지나
가는... 지나가선 다시 오지 않는... 아무것도 아닌... 그런 존재
야.'
    기어이 그 말이 나오고 말았다.
    연수는 모멸감과 수치심으로 떨리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우리....'
    그녀는 침착하게, 하지만 단호한 어조로 인철의 충고를 묵살해
 버렸다
    ,그렇게 쉽지 않아요.'
    '...무슨 일 있었니?"
     인철의 당황한 눈빛. 연수는 그 불안한 우려가 무얼 뜻하는지
 안다. 그녀는 심한 모욕감에 치를 떨며 인철을 노려보았다.
    무슨 상상해요, 지금?'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은 가지 않는 거야, 이 바보야."
     ,미안해요. 난 그 끝,선배가 말하는 그 끝이라는 거... 관심 엄
 어요.'
     인철의 표정이 점차 고통스럽게 일그러지고 있다.
     연수는 그 모습에 알 수 없는 비애를 느끼면서도 자신의 그런
  감정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잠시 절망적인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인철은 굳은 듯 그 자리
  에 섰고, 연수는 모질게 차 문을 닫아 버렸다. 곧 시동을 걸고 차
  를 출발시켰다. 백미러를 통해 점점 작아지고 있는 인철의 모습

이 왼지 연수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영석을 태우고 그의 아파트 단지 앞에까지 왔을 때, 연수는 저
불빛 어딘가에 섞여 있을 그의 방을 막연하게 그려보았다. 아이
들과 함께 호주 친정집에 다니러 간 영석의 아내는 아직 돌아오
지 않은 채였다.
   혼자 있기 적적할 텐데. 그보다는 여러 가지로 불편할 텐데, 그
를 위해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자신이 조금은 처량하다고 느꼈
을 때 그가 문득 입을 열었다.
   ,우리 집 한번 들어갔다 갈래?'
    순간 연수는 그 말뜻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몰라 잠시 애매
 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가 이내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려 주듯 자연스럽게 덧붙였다
    나 사는 거 보고 싶지 않아?"
    하긴 그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긴 했다. 잠시 머뭇거리다 그
 녀는 가만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그녀가 따라들어간 영석의 아파트 내부는 모든 게 완벽
 하리만큼 깔끔하고 세련된 분위기였다.
    거실 진열대 위에 놓인 그의 가족사진들이 연수를 향해 밝게
 웃고 있었다. 하나같이 화사한 웃음들, 그 어디에도 잠시나마 불
 행했던 그의 흔적 따윈 찾아볼 수 없었다_
    연수는 그 중에서도 손대면 함박웃음이 담뿍 묻어날 것 같은
 모습으로 영석의 품에 안겨 있는 그 아내의 행복한 표정에 오래쌔
 도록 눈길을 주었다.

    잠시 후, 옷을 갈아입기 위해 안방으로 들어갔던 영석이 거실
 로 나왔다. 후드가 달린 흰색 면 소재의 트레이닝복 차림이었다
 그렇게 차려 입으니 한결 앳된 모습이었다. 꼭 소년 같아 보였다,

   '운동복도 잘 어울린다.'
   영석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래? 미안하지만 조금 더 기다려야겠다. 땀 냄새가

                                                        나서 씻

 어야겠어. 냉장고 열면 먹을 게 있을 텐데.... 갖다 먹어. 곧 나올
 게.'
    그가 욕실로 들어간 사이 연수는 주방으로 가 냉장고 문을 열
 어 보았다. 문을 여는 순간, 무언가 눈에 밟히는 느낌이 든다. 그
 녀는 도로 냉장고 문을 닫고 거기 붙어 있는 쪽지를 유심히 들여
 다보았다.
    '아침 밥 꼭 먹을 것!
    그의 아내가 써놓은 메모였다. 꽃무늬가 새겨진 예쁜 색지에
한 필체로 써 내려간 글씨 아래 핑크빛 하트가 그려져 있다.
    연수는 별다른 생각 없이 냉장고 문을 다시 열어 주스병을 꺼
냈다. 그런데 컵을 가지러 씽크대 쪽으로 몸을 움직이던 중 불현듯 묘한 혼란에 빠져드는 걸 느꼈다

    -전기밥솥 사용법 찹 쌀을 씻어 가운뎃손가락 둘째 마디까
지 물을 붓는다.②코드를 꼽는다.②빨간 불이 들어왔나 확인
한다.④ 김이 나고 스위치가 보온으로 가면 밥이 다 됐다는 표
시. 귀찮다고 밥을 한꺼번에 많이 하지 말고 꼭 계량컵으로 두
개씩만 하세요!(그 정도면 한 사람 정도 같이 먹을 수도 있음.)
     -북어국 끓이는 법 : ① 북어를 깨끗한 물에 30분 정도 불린
 다. ② 식용유에 살짝 볶다가 물을 붓고 끓이면 좋지만, 귀찮을
 땐 그냥 끓여도 무방.② 국이 끓으면 조선간장을 한 숟갈 넣고
 파, 계란을 풀어 넣는다. ④조미료 몸에 해로운 것 아시죠?

    싱크대 서랍과 식탁 여기저기, 하다못해 가스레인지에까지 온
 갖 조리법이며 기구 사용법들이 적혀 있는 메모지가 다닥다닥 붙
 어 있다.
    연수는 왼지 그 메모들이 자신을 주방에서 나가라고 소리치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혔다. 어지럽다. 거실 저쪽 사진 속에서 그
아내의 웃는 얼굴이 조롱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구원을 청하는 심정으로 바라본 욕실 쪽에선 요란한 물소리가
새어나오고 있다. 어느 한 군데 연수가 설 자리를 내주지 않으며
사진 속의 그 여자는 철저하게 집 안을 장악하고 있었다.
   연수야, 미안한데 안방 장롱에서 수건 좀 갖다 줄래?"
   욕실의 물소리가 끊기는가 싶더니 영석의 다정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연수는 힘없이 걸음을 옮겨 안방 문을 열었다. 침실, 그들만의
성역. 안주인의 의심할 나위 없는 행복이 새록새록 넘쳐나는 방
안 분위기. 깨끗하게 정돈된 더블 침대. 그 머리맡에 나란히 놓인
베개 두 개. 그곳에도 복병처럼 진을 치고 있는 사진 속의 여자.
   연수는 순간 자신이 절대 와서는 안 될 곳에 와 있는 것 같은
알 수 없는 죄책감으로 몸을 떨었다. 그 죄책감의 한편에는 모멸
감도 있었다.

    '내가 왜 여기에 있지? 맞아, 수건 때문이야. 그는 지금 샤워
 중이고 수건은 안방에 있어.'
    그녀는 애써 합당한 이유를 찾아내며 황망한 손길로 장롱 문을
 열었다. 잘 정돈된 모양으로 양복들이 줄지어 걸려 있었고, 그
 아래 깨끗하게 다림질한 와이셔츠가 차곡차곡 쌓여 있다
    연수는 이어 아래 서랍을 열어 본다. 눈부시도록 희게 손질한
 그의 속옷과 양말들이 손바닥만한 크기로 접혀 빼곡하니 들어차
 있다. 수건은 맨 아랫서랍에 색색깔로 구색을 맞추어 쓰기 쉽도
 록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연수는 그 중 하나를 꺼내 들고 장롱 문을 닫으려다 문득 문
 안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침마다 넥타이를 매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될 만큼 적당히 매듭이 지어진 넥타이가 분위기에 따라
 일곱 개나 걸려 있다.
    사진 속의 여자는 그 보이지 않는 손으로 집 안 곳곳을 빠짐없
이 돌아다니며 여전히 영석의 아내 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기쁜 마음으로.
    내가 그를 위해 할 수 없는 게 바로 이건 거구나.
    아침이면 남편을 위해 찌개를 끓이고 셔츠를 다렸을 그녀의 기
꺼운 표정이 저 사진 속에 있었다. 그를 위해 양말 한 짝, 손수건
한 장 준비해 주지 못하는 자신의 역할이란 게 한낱 보잘것 없는
배경 인물에 불과하리라는 쓸쓸한 자각.
   부인이 없는 동안 연수가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고작
가치 차 마시고, 가치 식당에 가 준 일 정도였다. 그 일은 부인이
아닌 그 어떤 상대라도 해줄 수 있다. 하지만 이 집 안에서 배어

나오는 아기자기한 살림 냄새는 감히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그 여자만의 절대 영역이다.
   연수는 지금 사진 속 여자를 바라보며 질투와는 다른 훨씬 복
잡하고 미묘한 감정에 사로잡혀 있다, 침대맡의 그 여자는 옛날
흑백사진 속의 어떠니처럼 다소곳하게 앉아 혼란에 빠진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연수는 조용히 안방 문을 열고 나왔다. 욕실에선 사뭇 경쾌한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저 휘파람 소리도 내 것은 아닐 테지.
연수는 가만히 욕실 앞으로 다가가 수건을 내려놓은 뒤 현관 문
을 열었다.


    집으로 가는 길은 언제나 마음이 멀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헤
어지기 싫어서 결혼을 한다고 했던가. 그들은. 서로 얼마나 사랑
했기에 결혼을 했던 것일까.
   사랑한다고 말할 때, 청혼을 할 때 영석은 어떤 눈빛으로, 어느
 정도의 절실함으로 그녀를 바라보았을까. 그럴 때 그녀의 표정은
어떴을까. 사진 속의 미소처럼 수줍고, 고운 웃음을 지었을까. 그
들은 여전히 서로를 사랑하고 있을까..
   다른 사람이라면, 상대가 영석이 아닌 누군가의 아내였다면 같
은 여자로서도 기어이 반해 버렸을 그녀의 기품 있는 미소를 떠
올리며 연수는 힘없이 벨을 눌렀다.

   '어떻게 모두 남의 일 같어? 지금이 몇 시야? 일찍 들어오라
구, 내가 몇 번이나 일렀어, 도대체!"
   인희씨는 문을 열어 주며 버럭 짜증을 냈다. 낮에 시어머니가
간병인과 한바탕 난리를 쳐 그렇잖아도 심란한베, 오늘도 서로
약속이나 한 듯이 늦게 들어온 식구들 때문에 쌓였던 감정이 폭
발한 것이다.
   '사람들이 왜 그래, 정말. 정신빠진 노친네 가둬 놓구 맘이 편
해?
   "미안해요.'
   인희씨는 자정이 다 된 늦은 시간에 마룻바닥을 걸레로 박박
문질러대며 딸의 얼굴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다
   술이 떡이 되어 돌아온 정수는 벌써 이층 제 방에서 골아떨어
졌고, 연수가 들어오기 직전에 처남댁을 앞세워 술 냄새를 풍기
며 나타난 정박사는 안방에 있었다.
   연수는 주방에서 그릇들을 정리하고 있는 근덕댁을 홀깃 보며
냉장고에서 물을 따라 마셨다.
   '나 죽어두 눈 하나 꿈쩍 안 할 인간들.'
   근덕댁은 시누이가 화를 내는 게 자기 탓이라도 되는 듯 이래
저래 눈치만 살피는 중이었다. 그때 마침 정박사가 옷을 갈아입
고 방에서 나왔다. 자기가 곧 어찌될 줄도 모르고 그 밤에 걸레
질이나 해대는 아내를 대하자 정박사는 속배가 뒤틀렸다. 늘 당
연한 것으로 보아 오던 아내의 노동이 이제는 아프게 눈에 걸리
는 것이다.
   '청소기 없어?'
   '그걸로 때가 져요?'
   여전히 걸레질을 해대며 짜증을 내는 인희씨를 연수는 아무 생
각 없이 바라보고만 있었다.

     일순 정박사의 눈에 노기가 서렸다.
     '연수 니가 좀 해라!'
     '놔 둬요. 개가 손모가지에 힘이나 있수?~
     연수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인희씨가 입을 열었고,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정박사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연수시켜!'
    순식간의 일이었다.
    정박사는 신경질적으로 아내가 들고 있던 걸레를 나꿔채서는
 연수 앞으로 던져 버렸다
    임마, 니가 좀 해!'
    연수는 기가 막힌지 그대로 선 채 정박사를 차갑게 노려보았
 다. 연수보다 더욱 기가 막힌 건 인희씨였다.
    ' 양반1....'
    정박사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지고 있었다. 인희씨는 그런 남편
을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며 몸둘 바를 몰라 했다.
   '제가 할게요.'
   정박사는 재빨리 달려와 걸레를 집어드는 처남댁을 단호하게
저지하며 계속해서 딸을 몰아붙였다.
   '너 왜 안 해, 임마? 아버지 말이 말 갖지 않아?.'
   잠시 어리둥절해 있던 연수의 표정은 점점 정박사_를 경멸하는
쪽으로 바뀌어갔다 그대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정박사를 향해
짜증스럽게 내뱉었다.
   '어제 오늘 정말 왜 그러세요? 저도 힘들어요."
   연수는 왜 갑자기 아버지가 불 같이 화를 내는지, 그리고 그
화살이 어째서 자신에게로 와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정박사는
그럴수록 격분을 참지 못하고 있었다.
   '이 자식이, 뭐 힘들어? 니가 뭐가 힘들어? 돈 벌어서 힘들어?
너 지금 돈 좀 번다고, 직장 생활한다고 유세해? 벌지 마, 임마!
너 안 벌어두 먹고 살어! 이 자식아! 니가 무슨 공주야? 왜 기집
애가 집안 일 하나 안 거들어, 엉? 니 엄마가 종이냐, 니 눈엔 엄
마가 종으로 , 임마!'
   '누가 그럿대요?'
   '어디서 말대꾸야!'
   연수가 입술을 바르르 떨며 대들자 정박사는 곧 딸을 때리기라
도 할 듯 팔을 번쩍 치켜들었다.
   '왜 그래요, 도대체! 힘들게 일하고 들어온 애한베.... 그리고
아무리 처남이 밉다지만 어떻게 처남댁을 집으로 데려오기까지
해요.'
   황망히 남편을 가로막으며 사태를 수습하려는 인희씨의 눈길
은 원망으로 가득했다.
   눈치 빠른 근덕댁이 마루를 닦다 말고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아니에요, 형님. 그게 아니구요.. .."
   인희씨의 푸념이 계속되었다.
   '어머니, 나랑 당신 아니면 남들은 보지도 못하는데, 당신이
좀 일찍 들어오지, 술 먹지 말고!'
   인희씨는 정작 자신이 화난 이유는 연수 때문이 아니고 바로
당신 때문이라고 둘러치며 애써 딸을 감싸 주려 하고 있었다. 정
박사는 그런 아내를 잠시 처연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제발 좀 그러지 마세요. 소리 좀 그만 지르시라구요!"
   그때 연수가 들고 있던 물컵을 소리나게 식탁에 내려놓으며 신
경질적으로 외쳤다.
   '저도 힘들어 죽겠다구요!'
   그 말이 다시 도화선이 되었다. 찬바람을 썽 일으키며 이층으
로 올라가는 딸의 뒤통수에 대고 정박사가 분통을 터뜨렸다.
   ,뭐? 힘들어 죽겠어? 이 자식이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너!
임마! 니가 니 엄마만큼 힘들어? 니 엄마가 지금 어떤 줄이나 알
아, 임마?'
   어제부터 술에 취해 들어온 아버지는 계속 알 수 없는 말뿐이
다. 왜 자꾸 엄마 얘기를 저렇게 이상하게 하시는 걸까. 밖에서
좋지 않은 일을 당하고 들어와 식구들을 달달 볶는 게 분명하다.
워낙 성격 자체가 그런 분이니까.
   아무튼 지금 연수는 지나치게 과민해진 아버지를 더 이상 상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이층으로 올라
 가 버렸다.
    정박사는 그런 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속상해 하는 아내를 억
 지로 돌려 세웠다.
   '나와, 해줄 얘기가 있어.'
   '이 밤중에 어딜 나가요?'
    당신 아픈 거, 얼마나 안 좋은지 말해 줄게.'
    '그런 걸 뭣하려 밖에 나가서 말해?'
    인희씨는 여전히 이층 계단 쪽으로 가 있던 시선을 거두지 못
 하고 시큰둥하게 내뱉었다.
  '얘기가 길어. 나오라면 좀 나와!'

   마침내 정박사는 싫다는 아내를 반강제로 이끌다시피 해서 마
당으로 나왔다.
   당장 내일이면 입원을 시켜야 하고, 수술도 해야 하는데, 도무
지 어디서부터 말을 시작해야 할지 난감했다. 무엇보다도 곤혹스
러운 건 본인에게 현재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알려야 한
다는 사실이었다.
   '말해요, 어서. 그래, 어디가 그렇게 나쁘대요?'
   '... ..다 나쁘대.'
   '아픈 데가 없는데 어떻게 다 나뻐?'
   막상 밖으로 나오긴 했지만 입을 떼기가 쉽지 않다. 정박사는
차마 아내를 마주보지도 못한 채 담배를 입에 물었다.
   진한 잉크빛 하늘 저편에 눈썹 크기만한 초승달이 뒤로 넘어질
듯 위태롭게 기울어가고 있었다. 여자 나이 쉰일곱이나 되도록
자신은 아내한테 저 초승달만큼도 해준 게 없었다. 늘 애처로웠
던 것도 마음뿐, 고맙다는 말 한마디 해주지 못하고 살아왔다. 어
느 하루 이렇듯 단둘이서 오붓하게 시간을 가져본 적도 없었다.
부부가 삼십 년 만에 이렇게 나란히 앉아 달을 보며 나눌 수 있
는 에기가 고작 사형 선고라니.
   정박사는 담배 끝이 타들어가는 줄도 모르고 멍하니 하늘을 올
려다보았다. 그믐을 며칠 앞둔 밤이라 달은 아까보다 더 창백하
고 야윈 것 같다. 그는 담배 한 개비를 더 뽑아 물었다.
   '암이야.'

  이윽고 정박사는 그 혐오스런 단어를 입에 올려야 했다.
  '암?
  "그래.'
  예상 외로 아내는 전혀 놀라는 기색도,

                                                당황하는 목소리도 아

니었다.
            암?
   "자궁암....'
   이 양반이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가 싶어 어린애처럼 되묻는
아내를 정박사는 한사코 외면하고 있다. 그녀가 짐짓 대수롭지
않다는 듯 태연스레 말을 이었다
   '초기야? 안 아픈 거 보니까 초기가 맞나 보네. 그래요?'
   정박사는 고개를 돌려 아내를 곤혹스럽게 바라보았다.
   '자궁 들어내야 해요?'
   더 이상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정박사는 이내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내의 반웅은 태연하기만 하다,
   '까짓 거 들어내지, 뭐.'
   그 정도로 끝낼 수 있는 일이었다면 정박사도 뭔가 할 말이 있
었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 아내의 병세는 까짓 자궁 하나 들어내
는 수술쯤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더욱 아내를 상대로 진실을 이야기할 수 없는 처지였다. 기껏 말
해야 할 진실이 죽음뿐이라니. 사람의 목숨이 어쩌면 이렇듯 속
수무책일 수 있단 말인가.
   아내한테 세상 사람들이 다 두려워하는 암이라는 애기를, 그것
도 심각하다는 얘기를 해주면서, 명색이 의사라는 작자가 아무런

  대책을 말해 줄 수 없다는 게 도대체 말이나 되는가. 정박사는 그
  야말로 가슴이 답답해 팽창된 심장이 그대로 터져 나갈 것만 같
  았다. 그는 고개를 숙이며 한숨처럼 긴 담배 연기를 토해냈다
     '담배나 좀 꺼요.'
     아내는 자신의 병보다도 남편이 뿜어내는 담배 연기가 더 싫다
  는 듯 짜증을 낸다
     정박사는 굳은 얼굴로 담배를 비벼 껐다. 그런 남편을 곁눈질
 하며 인희씨가 오히려 달래듯 말을 이었다.
    '이제 쓸 데도 없는 자궁 들어내는데 뭐가 어째서 그래요? 구
 파발 선자도, 평창동 계 친구도 들어냈다는데 뭐.... 아이구 차라
 리 잘됐어. 혹시나 싶어 나두 조마조마하두만, 이제 이 나이에 애
 날 일이 있어, 달거릴 할 거야? 아이구 난 그런 거 하나두 겁 안
 나네. 사는 게 무섭지. 그런 게 겁나?~
    다소 과장된 몸짓으로 대범한 척하던 그녀도 마음 한켠으론 개
 운치가 않았던지 옷깃을 여미며 진저리를 쳤다.
    '어서 들어가요, 청승 떨지 말고. 추워... 아픈 데도 없이 그런
 병이 왜 걸렸대?"
   '...안 아퍼?
   "아프면, 뭐 대신 아파 줄래요?'
    정박사는 끝내 조금도 심각하지 않은 표정으로 자리를 털고 일
어나며 반문하는 아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말은 저렇제 해도 이 여자, 속으론 얼마나 무섭고 불안하랴.
순간 무언가 뜨거운 것이 그의 가슴 한복판을 아프게 짓눌렀다.

   어느새 자정이 훨씬 지난 시각이었다.
   영석은 한 시간이 넘도록 누군가와 통화중이다. 이럴 때일수록
그 사람의 목소리가 더욱 절실해지는 건 왜일까. 인사도 없이 영
석의 아파트를 빠져 나올 때만 해도 다시 전화할 마음 같은 건
없었다. 그런데 지금, 아버지로부터 받은 심한 모욕감으로 만신
창이가 돼 버린 연수의 흐트러진 심사를 수습해 줄 수 있는 사람
은 차영석이라는 남자 하나뿐이었다. 그는 결코 아버지와는 다른
않은, 연수가 아는 단 한 사람의 남자였다.
   수화기에선 통화중임을 알리는 신호음만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누굴까. 그 남자의 다감한 목소리를 이토록 오래 누리고 있는 상
대는. 연수는 힘없이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정수두 이제 총각 다 됐네. 술두 마시구, 우습다."
   제 방에서 술에 취해 잠들어 있는 정수를 근덕댁이 대견한 듯
보고 있다. 그녀는 침대맡에 앉아 있다가 연수가 들어오자 얼른

자리를 비켜 주었다
    나이 차이가 십 년이 넘는데도 근덕댁은 연수나 정수를 어려워
하는 편이었다. 좀처럼 남에겐 마음을 열지 못하는 시집 조카들
의 유난한 성격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어릴 때부터 누구보
다도 자신들을 귀여워했다는 사실만은 잘 알고 있었다. 연수도
속으로는 항상 그 점을 고맙게 생각해 왔다.
   '연수야, 너무 속상해 하지 마. 안 그래도 형님 낼 입원하시는
 것 땜에 걱정이 많으신가 봐.'
   근덕댁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처음에 연수는 그 말을 무심코 흘려 들었다. 이해심 많은 외숙
모가 아버지 편을 들며 자신을 위로하는 말로만 여겼던 것이다.
그런데 이어서 얼핏 석연치 않은 느낌이 들었다.
   '누가 뭘... 해요?'
   '누가 뭘 하다니... 형님이 입원하신다잖아. 연수, 너 아직 모
르고 있었나 부네?'
   근덕댁은 금시초문인 얘길 듣고 어리둥절해 하는 연수가 오히
려 이상하다는 듯 되묻고 있었다.
   연수는 순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가 방광이 안 좋아
고생하고 있다는 건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입원까
지 해야 할 정도로 심한 줄은 미처 모르고 있었다.
   '한 며칠 걸릴 모양이야. 수술까지 한다던데?'
    점점 알 수 없는 말뿐이었다. 연수는 심란한 어조로 덧붙이는
근덕댁을 빤히 쳐다보았다.
   '얼마나 심하대요?'

   '심하긴, 조금 그렇대. 사실 나두 잘 몰라. 오줌보가 잘못됐다
고 그러는 거 같던데. 내가 좀 그렇잖아. 뭘 들어두 통 머리에 안
남아 있어. 워낙 내가 닭대가리잖어.'
   이런 식의 대화로는 도무지 궁금증을 풀 길이 없을 것 같았다.
연수는 답답한 마음에 얘길 하다 말고 정수 방을 나와 버렸다.

   연수는 안방을 슬쩍 들여다보았다. 안방에선 어머니가 옷가지
들을 가방에 챙겨 넣으며 혼잣말로 불평을 늘어놓고 있었다.
   '내일 당장 어떻게 수술을 해.... 내년 봄에 수술하면 안 될 게
뭐 있어? 새집에 들어가서 하면 일도 없구, 좀 좋아? 집에 일이
태산이구만, 생전에 안 써 주던 신경을 귀찮게 다 쓰구. 이제 죽
을 때가 됐나 부네. 으이그, 고약한 영감태기 가트니!'
   평생 한번 남편 뜻을 꺾어 본 적이 없는 인희씨는 늘 혼자서
입버릇처럼 푸념을 늘어놓곤 했다. 지금도 그녀는 그저 입으로만
짜증을 부려 보는 것이다
   연수는 말없이 안방 문을 도로 닫고 거실로 나왈다. 유리창 밖
으로 정원 의자에 등을 돌린 채 앉아 있는 정박사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올해 갓 예순을 넘긴 아버지의 뒷모습이 어쩐지 몹시도
초라하고 후줄근해 보였다.
   연수는 비로소 어제 오늘 못마땅하게만 보이던 아버지의 행동
이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그녀는 조용히 현관문을 열고 아버지
가 앉아 있는 정원으로 향했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정박사가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아버
지와 눈이 마주치자 연수는 괜히 움찔 놀라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이리 와 앉아라. 너한테 해줄 말이 있다,"
    정박사가 담배를 비벼 끄며 차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연수는 말없이 다가가 정박사의 앞쪽 의자에 앉았다. 그러나
둘 다 서로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보지는 않은 채였다.
   '느이 엄마, 낼 수술 들어간다.'
    대체 무슨 병인데 수술까지 해야 하느냐고 묻고 싶은 걸 꾹 참
고 연수는 조용히 아버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암이다."
   '예?'
   '자궁암이다.'
   그 순간 연수가 느낀 감정은 충격이라기보다는 아버지에 대한
납득할 수 없는 분노였다. 아버지는 매사에 그런 식이었다. 늘
독선적이고 위압적인 분위기로 식구들을 지배하려 들었다. 무슨
큰일이 생겼어도 식구들에게 제대로 설명해 주는 법이 없었다.
   병원이 남의 손에 넘어갈 지경이 되었을 때도 식구들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러다 나중에야 난데없이 뒤통수를 맞는 격으
로, 모든 상황이 끝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 일뿐만이 아니더
라도, 아버지는 어떤 경우에도 식구들의 의견 같은 건 묻지도 않
고 모든 걸 자기 방식대로 처리했다. 그때마다 다른 식구들은 그
뒷감당을 하느라 꿀먹은 벙어리처럼 곤욕을 치러야 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어머니가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아버지라는
사람이 딸에게 어쩌면 저렇듯 태연하게 말할 수 있는가. 하필 그
것도 수술을 하루 앞둔 상태에서.

    연수는 그 엄청난 사실을 이제 와 일방적으로 통보하듯 담담하
 게 이야기하는 아버지의 태도를 도무지 납득할 수가 없었다. 적
 어도 암이라면, 그 정도야 어떻든 무엇보다 먼저 죽음과 연관지
 어 생각하는 게 보통 사람들의 상식이다 의학적 전문 지식이 없
 는 연수도 그 보통 사람들 가운데 하나다
    연수는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아버지의 독단적인
 사고방식을 경멸하며 야멸차게 따지고 들었다.
   '진작 말씀을 해주셨어야죠?"
    좀 전에 있었던 불유쾌한 언쟁의 뒤끝이 부녀지간에 아직 앙금
으로 남아 있던 터였다. 딸의 추궁에 응하는 정박사의 말투도 곱
 진 못했다.
   '니가 언제부터 니 엄말 그렇게 챙겼냐?'
   그 말엔 연수도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꼭 저런 식으로 상대
방의 기를 꺾어 버리는 아버지의 폭언엔 진저리가 났다.
   연수는 화가 나는 걸 간신히 참고 침착하게 물었다.
   '그럼 수술만 하면 아무 이상 없는 거예요?'
   '...그래."
    정박사의 대답은 왼지 맥살이 풀려 있었다.
   그런 아버지의 말투에 답답해진 연수가 재차 물었다.
   '정말이죠?
   "그렇다잖니!"
   정박사는 의사인 아버지한테 다짐이라도 받아 두겠다는 투로
다그쳐 묻는 딸에게 결국 버럭 짜증을 내고 말았다. 그는 딸의
물음에 속시원히 대답해 줄 수 없는 자신의 처지에 환멸을 느끼

고 있는 것이다.
   '정수한테는 말하지 마세요. 아마 충격받을 거예요. 제가 나중
에 얘기할게요.'
   연수는 그렇게 말한 뒤 먼저 일어나 안으로 들어갔다. 부모한
텐 항상 뻣뻣하기만 한 녀석이 그래도 제 동생은 챙길 줄 아는군.
정박사는 그런 딸이 한편으론 가상해 보였다. 그는 거실로 들어
서는 딸의 축 처진 어깨를 돌아보며 담뱃갑을 열었다. 초저녁에
두 갑째 샀던 담배는 한 개비도 남아 있지 않았다.
   연수는 거실로 들어서자마자 바로 안방으로 향했다. 그러나 인
희씨는 거기 있지 않았다.
   건넌방으로 가 보았다. 어느새 정신 없이 잠에 취해 늘어져 있
는 근덕댁을 내려다보며 상주댁은 혀를 끌끌 차고 있었다
   '이가 소복하네, 드런 년!'
   상주댁은 잠자는 근덕댁의 머릿속을 뒤적여가며 뭔가를 자꾸
먹는 시농을 했다. 그 모습이 마치 원숭이가 이를 잡아먹는 것
같다, 그러거나 말거나 근덕댁은 몹시 곤하게 잠들어 있었다.

   연수는 누가 보는 줄도 모르고 열심히 이 잡는 재미에 빠져 있
는    할머니를 우울한 시선으로 보다 문을 닫았다

   화장실 쪽에서 인희씨의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연수는 손잡이

를 살짝 당겨 보았다. 문은 잠기지 않은 채였다. 그녀는 안에서
들을 수 있게 노크한 다음 천천히 문을 열었다
   '일 보게?
   "아뇨....'
   인희씨는 변기에 앉은 채로 아랫배를 양손으로 꾹꾹 누르고 있

 었다. 매번 화장실에 갈 때마다 소변이 여의치 않아 꿍꿍 앓는
 어머니의 신음소리를 무심하게 흘려 들었던 게 죄스러워, 연수는
 목이 메인다. 그녀는 화장실 문틀에 기대선 채로 묵묵히 고개를
 떨구었다.
    '그럼?'
    인희씨가 볼일을 볼 것도 아니면서 왜 그렇게 서 있느냐는 투
 로 물었다.
    연수는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몰랐어요.'
    인희씨는 그 말에 고통스러워 하던 표정을 애써 감추며 빙그레
 웃었다.
    '별 거 아니야. 초기는 들어내기만 하면 깨끗하대. 혹시라도
 정수 알게 하지 말구. 지레 놀라 펄쩍 뛴다. 물혹 났다구, 아주
 쉬운 수술이라고 해. 너무 걱정 말구_ 우리 나이엔 이런 수술 많
 이 한다."
   .. 아프진 않죠?'
   '안 아퍼. 어여 들어가 자. 늦었구만."
    연수는 아직 초기라는 어머니의 설명에 다소 마음이 놓였다.
그녀는 속으로 어머니가 초기 중에서도 아주 초기인 상태, 암이
라는 병명만 갖다붙였을 뿐, 알고 보면 그 정도야 암이라고 할 수
도 없는 지극히 양호한 상태이기만을 간절히 빌었다
   아버지와의 냉랭한 대화를 통해선 어느 것 하나 어머니의 병세
를 짐작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아버지는 다만 어머니가 암이라는
사실을 말해 줬을 뿐 더 이상의 설명을 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제 어머니의 대수롭지 않아 하는 태도에서나마 나름
대로의 위안을 찾고 있었다.

   이튿날.
   연수는 회사에 결근계를 내고 어머니의 입원 준비를 도왔다.
   가족들이 병원에 가져갈 짐을 트렁크에 싣고 한참을 기다렸는
데도 인희씨는 안에서 나오질 않는다. 간병인만 있는 집에 시어
머니를 두고 나오기가 영 마음에 걸리는 것이다.
   정박사는 대문 앞에 서서 연신 줄담배를 피웠다.
   '엄마 빨리 나오라 그래. 아버지 또 화내시겠다.'
   백미러를 통해 정박사의 초조한 모습을 보던 정수가 짜증을 냈
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정수는 어머니의 수술보다도 아버지의
히스테리가 더 부담스러운 눈치다. 연수는 벌써 세 번째 경적을
울렸다.

   인희씨는 안에서 시어머니 점심 수발을 드는 중이었다. 이날
따라 투정도 안 부리고 얌전히 밥그룻을 비운 시어머니가 스스로
물까지 마시는 모습이 인희씨 보기엔 그렇게 대견할 수가 없다.
   '어서 가세요. 기다리시나 본데."
   경적 소리에 이어 간병인이 채근하는 말을 듣고서야 인희씨는
무겁게 몸을 일으켰다.
   '아줌마, 어디 가?"
   '놀러.'
   며느리가 일어설 기색을 보이자 상주댁은 불안한 듯 눈망울을
굴린다.

     인희씨는 차마 그런 시어머니를 떼놓기가 어려워 몸과 마음이
  다 무겁다. 그렇지만 웃는 낮으로 시어머니를 다독거리며 자리를
  털고 일어서야 했다. 시어머니가 또 응석을 부렸다.
     '나두 데려가.'
     '싫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시어머니가 들고 있던 물잔을 바닥에 내동
  댕이쳐 버렸다
     '나쁜 년, 기어이 날 버릴랴구.'
     상주댁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며느리의 다리를 붙들고
 늘어지며 성화를 부리기 시작했다.
    '나, 데리구 가라, 이년아. 나 데리구 가. 너 혼자는 못 간다
 이년!'
    인희씨는 마구 악을 쓰며 매달리는 시어머니를 뿌리치지도 못
 하고 그저 애만 탬우고 있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밖에선 연신
재촉하느라 경적을 울려댔다.
   '나두 데려가라, 응? 나두 데리구 가'
    상주댁의 성화는 이제 사정조로 바뀌었다. 저러다가 시어머니
의 눈은 곧 뿌옇게 흐려져서 그렁그렁 눈물이 맺힐 것이다. 아니
나 다를까, 주름투성이의 노안이 금방 흥건해지고 있다. 그런 시
어머니의 애처로운 눈동자가 기어이 인희씨의 마음을 후벼 파고
만다.
   당장 입원을 안 하면 무슨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유난을 떠
는 남편만 아니었다면 수술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싶은 게 인
희씨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그 불 같은 성질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인희씨는 할 수 없이 납덩이같이 무거운 마음을 안고 집을 나
서야 했다.
   ,수술을 해도 내년 봄에 하자니까. 뭐 대단한 병이라구. 노친
넬 며칠씩이나 떼어놓구 수술하면 퍽두 맘 편하겠다.'
   사람이 암이라는데 어쩌면 저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인희씨
는 병원에 가는 동안 내내 시어머니 걱정 뿐이었다. ?
   연수는 그런 어머니의 태도에서 일부러 태연을 가장하고 있다
 거나 애써 불안감을 숨기려 하는 기미 같은 건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만큼 그녀의 씩씩함은 자연스러웠다. 그것은 그녀가
워낙 자기 몸에 대해서 무심할 뿐더러 성격적으로 낙천적인 때문
이었다
    정작 인희씨 본인보다 더 불안해 하고 조급해 하는 쪽은 정박
 사였다. 그는 하룻밤 새 부쩍 수척해진 모습으로 병원에 도착할
 때까지 시종 굳은 표정이었다. 다른 때 같으면 아내의 푸념에 뭐
 라고 면박이라도 했을 터였다.
    연수는 얼핏 아버지의 꾹 다문 입술 사이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오는 걸 느꼈다. 아버지의 그런 모습은 다소 낯설었다 무슨
 걱정이 저렇게 많은 걸까. 연수는 문득 저 어두운 심연에서 알 수
 없는 조그만 불안감이 하나 떠오르는 걸 보았다.
    하지만 연수는 곧, 평소에 워낙 건강한 어머니였으니까, 아버
 지도 그래서 충격을 더 심하게 받은 모양이라고, 그렇게 마음을
 다잡아 먹었다.
    이내 저 앞쪽에 종합병원이 보였다

   장박사의 배려로 병실은 미리 잡혀 있었다.
   연수와 근덕댁이 병실을 정리하는 동안 인희씨는 심란한 표정
으로 침대에 걸터앉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병실은 비교적 깨끗한
독방이었다.
   '이게 무슨 호사래? 나 같은 사람한테 박사들이 줄줄이 붙구?'
   잠시 정박사와 정수가 밖으로 나간 사이, 수술을 집도할 장박

사와 윤박사가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인희씨는 그들을 반갑게
맞으며 환하게 웃었다.
   '이따 세 시에 수술 들어갈 건데, 괜찮죠?'
   장박사가 부드럽게 묻자 인희씨는 끄덕이며 윤박사를 향해 물
었다.
   '우리 집 양반은?"
   '차트 보고 계세요, 같이 들어갈 거예요.'
   인희씨는 윤박사의 설명에 더욱 마음이 놓이는 듯 여전히 밝게
웃었다
   '뭐니뭐니 해도 신랑이 좋은가 보네.'
   '그럼, 좋지."
   연수는 어머니가 장박사와 편안히 농담을 주고받는 사이 조용
히 병실 밖으로 나왔다
   회사에 출근하지 않은 일로 걱정이 됐던지 벌써 여러 차례 영
석의 전화번호가 호출기에 찍혀 있었다. 이런 사소한 배려, 다감
한 마음 씀씀이가 늘 가슴 한 자락을 따뜻하게 채워 주곤 했다
   연수는 혹 어젯밤 일로 그가 마음 상하지 않았기를 바라며 병
원을 나와 외따로 떨어진 공중전화 부스로 갔다

   '아무 일 없는 거지? 어젯밤부터 내내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
아?'
   전화를 걸자마자 영석은 걱정스런 음성으로 대뜸 안부부터 물
어왔다. 연수는 새삼 뿌듯한 신뢰감으로 가슴이 벅차 오르는 걸
느꼈다
   '정말 아무 일 없는 거야?"
   ', 괜찮아요.'
   '거긴 어딘데?'
   '병원이에요.
   "뭐, 병원? 병원엔 무슨 일로?"
   '엄마, 수술 들어가요.'
 ..었떡하니? 너 많이 힘들지?"
   '아니에요."
   '정말 괜찮은 거야?"
   그는 자꾸 묻는다. 묻는 한마디 한마디가 온통 걱정과 애정으
로 가득차 있다. 이 사람의 목소리만 듣고 있어도 울적했던 일들
은 모두 먼지처럼 하찮게 날아가 버린다.
   연수는 영석의 달콤한 목소리에 점점 몽롱한 충만감으로 도취
되어가고 있다.
   '나, 보고 싶지 않니?'
   '보고 싶어요.'
   '그럼 내가 그리로 갈까?"
   '아니에요."
   '왜? 근처에서 잠깐이라도 보면 안 될까?'

   '오지 마세요. 제가 상황 봐서 전화 드릴게요.'
    '꼭 전화할 거지?'
   '. 참, 부인 왔어요?'
   '아직.
   "그럼 아직도 먹는 게 그렇겠네.'
   '그렇지 뭐.
   "사서 먹는 밥이라두 잘 챙겨 드세요.'
   '보고 싶다.
   "저도요."
   '사랑해.'
   수천 번을 들어도 가슴이 아린 단어, 보고 싶다는 말과 사랑한
다는 말....
   연수는 전화를 걸 때마다 영석의 그 말을 들으면 어쩐지 눈물
이 날 것만 같았다. 늘 보고 싶어도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은 그
짧은 단어가 주는 여운만큼도 길지 못했다.
   사랑한다는 말이 세상 그 어떤 단어보다 가혹하게 느껴지는 까

닭도 그래서였다. 언제나 몸과 마음이 따로 있어야 하는 이상한,
그런, 내 사랑.
   수화기를 내려놓은 연수의 입가에 쓸쓸한 미소가 번졌다. 그녀
는 힘없이 발길을 돌리려다 문득 병원 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인
철과 눈이 마주쳤다.
   '엄만 좀 어떠시니?'
   '곧 수술 들어가요
   '괜찮으실 거야.'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
   '집에 전화했었어. 너, 밥은 먹었니?'
   '생각 없어요.'
   연수는 인철의 안타까운 눈빛을 의식적으로 피한 채 병원을 향
해 앞서 걸었다. 이상한 일이다. 왜 이 사람의 호의는 늘 당연하
거나 지나친 것으로만 느껴지는 것일까. 그녀는 마치 인철이 영
석이 설 자리를 가로채기라도 한 듯 내심 짜증을 내고 있었다.

   관계자 외 출입 금지를 알리는 수술실 앞 빨간 표지판이 유난
히 낮설고 무섭게 다가왔다.
   연수는 어머니가 수술복으로 갈아입은 모습을 보자 비로소 현
실적인 불안감에 휩싸였다. 불안해 하기는 정수도 마찬가지였다.
정수는 아까부터 화장실로 복도로 왔다갔다하며 초조한 빛을 감
추지 못하고 있었다. 이윽고 남자 간호사들이 끄는 이동 침대에
수술복 차림으로 실려 나오는 어머니를 보자 정수는 약간 겁먹은
듯한 모습이었다.
   엄마, 안 무섭지?'
   '으응, 안 무서워, 하나두.'
   인희씨는 아직도 어리광이 몸에 밴 막내의 물음에 마음이 저려
왔던지 애써 웃음을 지었다.
   연수는 목이 메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곁에 있던 근덕댁이 울상을 지으며 덧붙였다.
   어떡해요, 형님?'
   '괜찮다니까 그러네.'

    인희씨의 눈가에 보일락말락 이슬이 맺혔다,
    연수는 뭔가 한마디라도 위안이 될 말을 찾으려 했지만 좀처럼
 아무 말도 떠오르질 않는다.
    인희씨는 불현듯 그윽한 눈길로 아들 딸을 번갈아 응시하였다
 이윽고 이동 침대를 잠시 멈추고 섰던 간호사들이 수술실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갑니다."
    인희씨의 모습은 곧이어 빨간 표지판이 내걸린 수술실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이제부터는 기다리는 일밖에 남지 않았다. 연수는 시간이 갈수
록 초조하고 불안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수술실 앞 보호자 대기석에 앉아 있는 길지 않은 시간이 그녀
에겐 마치 몇 십 년이나 되는 것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정수는 흡연실과 병원 복도를 오락가락하며 잘 피우지도 못하
는 담배를 줄창 피워버고 있었고, 근덕댁은 화장실에서 혼자 흘
썩훌쩍 울고 있었다.
   연수는 수술실 앞 복도에 쭈그리고 앉아 손가락으로 무수한 동
그라미를 그렸다. 수술의 성공을 뜻하는 의사들의 오케이 사인을
흉내내는 것이다.
   엄마, 아무 일 없을 거예요. 힘내세요. 이제 곧 활짝 웃으며 퇴
원하실 거예요.
   수술 들어가기 전 어머니께 하지 못한 말들이 뒤늦게 하나둘
떠오르고 있었다.
   연수가 앉은 한켠에 씁쓸한 표정의 인철이 물끄러미 그녀의 옆


 모습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는 마치 몇 달 전부터 거기 서 있
 던 사람처럼 미동도 없이 석상인 양 굳어 있었다.
    어느 순간 연수의 눈시울에 고여 있던 눈물이 핑글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인철은 문득 연수로부터 시선을 거두고 가만 고개를
 숙였다. 한 움큼의 슬픔이 철선처럼 날아와 인철의 마음을 헤집
 고 있었던 것이다.

    장박사의 진찰실 안에선 정박사가 아내의 수술을 앞두고 차트
 를 다시 한번 점검하는 중이었다.
    온통 암세포가 번져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할지 판단조차 어렵
 게 된 아내의 사진 앞에서, 그는 이미 난파된 자신의 배를 인정하
 지 않는 어리석은 선장처럼 마지막 돌파구를 찾아 눈빛을 번득이
 고 있었다.
   '이곳저곳 들춰 내서 좋을 거 하나도 없어. 여기 보이는 이것
 만 빼내고 나오자고.'
    사진 속에서 한 가닥 희망의 단서라도 찾아내기 위해 속이 타
들어가는 정박사와는 달리, 정작 수술을 집도해야 할 장박사의
충고는 냉정하기 그지없었다.
    정박사는 그 충고를 무시하며 앞에 놓인 사진을 손으로 짚어
보였다
   '여긴 어때? 떼낼 수 있을 것 같은데.... 다른 덴 몰라두 여기
랑 여긴 어떻게 해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장박사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정박사가 손으로 짚어 보이는
부분도 이미 희망을 가져볼 수 있는 단계는 아니었다.

       정박사도  구원을 청하듯 윤박사를 돌아보았다. 그녀로서도 뻔
 히 보이는 결의를 가지고 이럿다저렇다 말할 입장은 못 돼었다.
   '말해 봐, 이건 어떻게 할 수 있잖아? 니들이 안 하겠다면 내
 가라도 해!
    "좀 침착해. 곧 수술 들어가. 일단 보고 애기하자구.'
   '장선배 말대로 하세요."
    정박사는 자신도 저렇듯 냉정할 때가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의
 사로서의 직업 의식에 투철한 두 사람의 차분한 모습에 일말의
 배신감마저 느꼈다. 사실 속으로는 그도 그들의 충고가 전혀 틀
 리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백만분의 일, 천만분의 일
 이라도 가능성은 있을 수 있다. 그들이 자신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 마지막 일 퍼센트의 가능성에 대해 서로 상반된 입장을 취하
 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 일 퍼센트가 정박사에겐 유일한 희망이었고, 그들에겐 애초
부터 무시하고 넘어가야 할 어거지 수치에 불과했다, 그게 바로
회복 불능의 환자에 대한, 의사와 환자, 혹은 환자 가족의 터무니
없는 수치대조표라는 것이다. 최선을 다한 후에도 수없이 죽어가
는 환자들을 경험한 의사와, 생애 단 한 번 죽음을 맞는 환자와의
이 엄청난 괴리감. 의사들은 자기들의 그러한 소신을 이성적 판
단이라 믿지만, 환자와 환자 가족들은 전혀 생각이 다르다. 그들
은 누가 뭐라든 말든 그 좁쌀 같은 수치에 자신들의 모든 걸 걸
어놓는다. 바보라서가 아니라 그것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
다. 죽음을 선택할 수는 없지 않은가.
   정박사는 지금 환자 가족의 입장에서 의사들을 상대로 그 좁쌀

같은 가능성에 대해, 그것밖에 선택할 수 없는 절박한 자기 처지
에 대해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자네 심정 충분히 알고 있으니 우선 들어가 보기나 하자구.'
   정박사의 굳어진 심기를 의식한 듯 장박사가 설득조로 말을 바
꿨다.
   정박사는 장박사가 이끄는 대로 수술 준비실로 향했다. 그도
더 이상 부질없는 언쟁 따위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는 않았다.
   잠시 후, 정박사가 일행과 함께 수술실로 들어섰을 때, 아내는

이미 마취제를 맞고 의식이 없는 상태였다.
   그는 불빛에 드러난 아내의 마취된 모습을 처연하게 내려다보
았다.
   푸른 형광등 불빛 아래 수술복 차림으로 누워 있는 아내는 얼
핏 보면 그저 평화롭게 잠들어 있는 듯했다.
    생각해 보니 아내가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모습도 그로선 처
음 보는 것이었다. 자식을 둘이나 낳았으면서도 정박사는 아내의
출산을 지켜봐 주지 못했었다. 두 아이 모두 공교롭게도 그가 외
국에 가 있을 때 출산 소식을 들었다.
    아내가 병원에 입원이라고 한 것은 고작 그 두 번뿐이었다. 평
 생 소처럼 일만 하는 아내를 그는 당연히 건강하겠거니 여기며
 살아왔다. 그 동안 아픈 데가 왜 없었겠는가. 그저 평생을 시어머
 니 모시랴, 남편 떠받들랴, 자식 키우랴 해서 자기 몸을 종 부리
 듯 했을 아내의 못난 세월이 이제 와 정박사의 손끝을 저리게 만
 드는 것이다.
    그는 밥 먹듯이 수술실에 드나들며 수술을 집도한 베테랑 의사

 임에도 지금 이 순간 몹시 긴장하고 있었다.
    장박사가 침착하게 장갑 낌 손을 들어 간호사를 불렀다.
    '메스'
    간호사의 손에서 메스를 건네받은 장박사가 마침내 아내의 희
 디흰 속살을 한 줄 획으로 그었다
    정박사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질끈 두 눈을 감았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정박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흉측하게 갈라진 아내의 뱃속을
 들여다보았다. 갈라진 아내의 배 안에 그것들이 있었다. 이 소름
 끼치는 것들을 뱃속에 담아둔 채 아내는 너무도 평화로운 모습으
 로 잠들어 있었다.
    뱃속을 들여다보던 장박사와 윤박사의 표정이 곤혹스럽게 일
 그러졌다. 예상은 했지만 상태가 이토록 심한 줄은 그 누구도 짐
작 못한 일이었다.
    일반적으로 암세포가 형성될 때는 대개 두 가지 형태를 갖는
다. 하나는 종기처럼 엉겨 있는 형태고, 다른 하나는 꽃가루처럼
분산되어 나타나는 형태이다. 웬만큼 상황이 진전된 경우라 할지
라도 암세포가 서로 종기처럼 엉겨 있는 상태에선 눈에 보이는
걸 떼어내는 수술이 가능하다. 그나마 희망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내의 뱃속에 있는 저것들은, 흩뿌려 놓은 꽃가루처럼
사방으로 분산되어 메스를 대는 순간 무서운 속도로 몸뚱어리를
헤집고 다닐 것들이었다.
    정박사는 더 이상 좌측으로도, 우측으로도 키를 돌릴 수 없는
갈 데 없는 난파선의 선장이었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 현실이었

 지만 그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었다.
    장박사와 윤박사가 고통스럽게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수술대 위에 죽은 듯이 누워 있는 아내 모습이 차라리 부럽게
느껴졌다. 정박사는 자는 아내를 깨워서라도, 이 여편네야. 너
 지금 어떡할 거냐고 그래도 수술을 하는 게 좋겠느냐고 그렇게
 라도 해주면 죽어도 덜 서운하겠느냐...고 묻고 싶었다. 아니면,
이 못된 여편네가 왜 나한테 이런 끔찍한 선택을 하게 만드느냐
고 호통이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아내는 모든 게 당신 뜻대로예요, 당신이 죽으라면 죽
고, 살라면 살지요, 꼭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아무 불평 없이 잠
들어 있다. 그러니 어쩌란 말인가....
    정박사는 수술대에서 돌아선 채로 한참을 넋 나간 듯 서 있었
다. 이어 그는 조용히 마스크를 벗어 수술실 한켠에 내려놓고 문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형광등의 푸른 불빛 아래 죽음보
다 무거운 침묵이 켜켜이 쌓이고 있었다.
   어느 한 순간, 그는 문득 할 말을 찾은 사람처럼 걸음을 멈춘
채 고개를 돌렸다.
   '닫어라!"
   사실상 수술 포기를 선언하는 정박사의 아픈 절규였다. 이윽고
수술실 벽에 기대선 그의 어깨가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난파선에서 비겨져 나온 보잘것 없는 한 개 나뭇조각처럼 출렁거
리며 천천히 수술실 밖으로 걸어 나갔다.
   장박사와 윤박사는 금방 나동그라질 듯 휘청거리며 수술실을
나서는 그를 고통스럽게 지켜보았다.


   정박사는 머리카락 한 올만큼의 희망이라도 남아 있다면 아내
의 수술에 모든 걸 걸어 보려고 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실낱 같
은 기대조차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정박사는 그러한 자신의 처
지가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마지막 기대마저 무너진 지금, 그
는 도대체 무얼 어떻게 해야 할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온 세상
이 모두 절망의 늪으로 바뀌어 버린 듯 쓸쓸하고 아득하기만 했
다. 정박사의 절망은 곧 한없는 자기 환멸과 분노를 몰고 왔다.
   그가 절망적인 상태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결국 지독한 자
 기 학대뿐이었다
    얼마 후, 아내는 다시 이동 침대에 실려 병실로 돌아갔다.
    정박사는 곧 항암제 치료가 시작되면서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
 게 될 아내를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제 머리카락이 빠지고 체중이 하루가 다르게 줄어 마른 꽃처
 럼 앙상해질 아내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끊어질

듯 아팠다.
    결국 그는 며칠째 아내의 병실 근처만 맴돌 뿐 안으로는 한 발
짝도 들여놓지 못하고 있었다.

   '애들한테 말하세요.'
   아직 다른 식구들이 자세한 내막을 알고 있지 못하다는 사정을
눈치챈 윤박사가 넌지시 충고를 해왔다. 그녀의 충고는 말 그대
로 아내의 죽음을 기정 사실로 인정하라는 뜻이었다.
   정박사는 들고 있던 담배를 신경질적으로 종이컵 속에 비벼 넣
으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적어도 이 따위 충고나 듣자고 그녀를
 찾은 건 아니었다.
   그는 아내한테 말할 수 없었던 어떤 말, 자식들에게 해줄 수
없었던 어떤 말, 해명, 위로의 말, 합리적인 대책, 암, 죽음, 그런
건 이제 아예 기억 속에서 지워 버리고 싶었다. 마치 그런 걸 생
각하지 않음으로써 아내 일이 모두 없었던 일이기를 바라는 사람
처럼, 그는 한사코 자기 앞의 현실을 부정하려 들었다.
   '정선배 맘 알아요."
    정박사의 사나운 눈초리를 애써 피하지 않은 채 윤박사가 말을
이었다.
   기적도 있을 수 있을 거예요. 나도 그렇게 믿고 싶구요. 하지


                                                                                                 `펑
만 기적이 일어날 때 일어나더라도 현재까지의 상황이 어떤지는
연수, 정수한테, 그리구 언니한테도 말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뭘? 뭘 말해?'
   윤박사는 정박사가 거칠게 따져 묻는 말에 그녀 특유의 부드럽
 고 침착한 어조로 덧붙였다.
   '시간... 없어요.'
   ,,시간 많아. 죽는 데 무슨 시간이 필요해. 저승에 옷가지를 씨
 갈 거야, 집을 지어 나를 거야. 죽는 덴 일 분도 안 걸린다구. 장
 사 치르는 덴 삼 일이면 돼. 아직 시간 많아!'
    결국은 윤박사의 사려 깊은 충고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사
 실이 이럴 땐 더 고통스럽다.
    정박사는 그녀의 충고를 묵살하면서도 속으로는 이미 어쩔 수
 없는 한계에 부닥치고 있었다. 그는 그 한계를 인정하지 않으려
 는 몸부림으로 벌떡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정선배!"
     윤박사가 그를 막아서며 안타까운 호소의 눈길로 바라보았다.
 어느 땐 그녀가 여자 후배라기보다는 친구나 누나처럼 느껴질 때
 가 있다
     요즘 같은 시대에 여자로 태어났다는 게 애석할 정도로 통 크
  고 대범한 그녀의 성격 탓이었을까. 늘 애 꿋 은 정박사의 화풀이
  상대로 곤욕을 치르면서도 매번 화해를 청하는 건 오히려 그녀
  쪽이었다.
     ,,우리 이럴 게 아니라 바깥으로 좀 나가요. 바람이라도 쐬면
  기분이 나아질 거예요.'

   정박사는 윤박사의 제의대로 그녀의 진찰실을 나와 병원 뒤뜰
공원으로 향했다.

   '가끔 죽음을 앞둔 환자들을 보면서 난 그런
들은 행복하다, 저들의 가족은 행복하다."
                                                     생각을 해요. 저

   한동안 말 없던 윤박사가 문득 입을 열었다.
   정박사는 그녀가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자 그 앞에 서서 담배
를 피워 물었다.
   '저도 하나 주세요.'
   정박사는 막 불을 붙인 담배를 그녀에게 건네주고 다시 한 개
비를 붙였다
   담배 연기를 한 모금 깊이 들이마신 그녀가 허공을 응시하며
하던 말을 이었다.

  '난 가끔 집행을 앞둔 사형수한테도 그런

                                                  생각을 가져요. 저

사람은 행복하다.'
   '무슨 소리야?'
   '그들에겐 삶을 정리할 기회가 주어진단 말이에요."
   지금 정박사는 이 여자 후배가 다소 장황하게 늘어놓는 말의
의도를 미처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는 멀뚱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사형 선고가 주어진 환자와 가족들은 엄청난 고통의 대가로
받는 게 있어요. 건강한 사람들은 결코 누리지 못하는 삶의 정리
기간 같은 거죠. 살면서 미안해 했던 사람에겐 미안하다는 말을
해줄 기회를 갖게 되고, 마저 사랑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사랑한
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단 말이에요."


    윤박사는 몇 년 전 불의의 교통사고로 부모를 한꺼번에 잃었
 다. 유언 한마디 남기지 못하고 졸지에 참변을 당한 부모에 대한
 회한 때문이었을까.
    병원 의사들 사이에서도 여장부로 통할 만큼 활달한 노처녀의
 눈시울이 잠깐 붉어지는가 싶었다. 이어 그녀는 재빨리 자신의
 감정을 수습하고 담담한 얼굴로 정박사를 응시하였다,
    '연수와 정수한테 그 말을 할 기회를 주세요. 그리고 언니한테
 도 삶을 정리할 시간을 주세요."
    이론상으로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사람의 감정
 이라는 것도 이론대로 움직일 수 있는 거라면.
    정박사는 곤혹스러운 심경으로 윤박사의 눈길을 외면하고 있
었다.
   '그 기회마저 선배가 빼앗을 순 없어요.... 원망 사실 거예요.
   윤박사의 충고는 부드러운 톤이었으나 예리했다.
   정박사는 그 예리한 충고에 가슴 한 군데가 아프게 찔리는 걸
느끼면서도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상관없어. 맘껏, 맘껏 원망하라고 해! 그까짓 거 하나도 안 무
서워.'
   결국 정박사는 도망치듯 자리를 떠나 버렸다.
   연민에 가득찬 윤박사리 시선이 저편으로 사라지는 정박사의
맥빠진 뒷모습에 한동안 떠물러 있었다.

    입원한 지 사나흘이 지날 때까지만 해도 인희씨는 전과 달라진
 게 별로 없었다.
    연수와 정수가 번갈아 병실을 드나드는 틈틈이 지켜본 인희씨
모습은 암 환자라곤 느껴지지 않을 만큼 밝았다,
   내내 병실을 지켜가며 수발을 돕는 근덕댁도 처음에 울고불고
하던 것과는 달리 인희씨를 휠체어에 태워서 병원 복도를 휘젓고
다니며 전처럼 수다를 떨었다.
    집 걱정만 아니면 한 며칠 휴가라도 나온 사람처럼 인희씨는
모처럼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듯했다.
    연수는 편안한 마음으로 어머니가 다른 환자들과 웃고 떠드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아이구 그만 좀 웃겨. 나 배 터진다 실밥 터져.'
    대부분 휠체어 신세를 지고 있는 비슷한 또래의 여환자들 틈에
끼여 근덕댁의 넉살 좋은 수다에 배를 잡고 웃다 보면 어느새 하
루가 갔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는데도 정박사는 병실에 얼굴 한
번 비치지 않았다. 꿰맨 자리 실밥을 풀 때도 연수가 어머니를
부축해서 데려와야 했다.
    연수는 수술까지 한 어머니를 나 몰라라 방치하는 아버지의 무
심함이 원망스러웠지만, 별 탈이 없어서 그러려니 여기며 그나마
좋은 쪽으로 생각하려 했다. 하지만, 어쨌든 아버지가 좀 지나치
다 싶긴 했다. 어떠니도 크게 네색은 하지 않았지만 속으론 몹시

 서운해 하는 것 같았다.
    며칠 항암 치료가 이어진 후로 인희씨는 밤에 잠을 잘 못 이루
 고 있었다.
    연수도 대강은 항암 치료라는 것이 환자에게 얼마나 힘든 일인
 가를 들어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자식들한테나 올케한
테나 전혀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아마도 때때로 쓸쓸한 표정
으로 병실 창 밖을 내다보기 시작한 게 그 무렵이었을까.
   그날도 물끄러미 창 밖을 내다보는 모습이 몇 번 연수의 눈에
띄었다.
   '아버지 오시라고 할까요?"
   어머니의 어깨를 주무르며 연수가 물었다, 신경이 몰려 돌처럼
딱딱해진 뒷덜미며 양 어깨 근육이 그간 어머니의 조바심 나는
생활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병원 일 바쁠 텐데 뭐하려 오라가라 해, 놔두고 연수 너 일찍
일찍 들어가서 할머니 잘 돌봐 드려야 한다.'
   인희씨는 여전히 창 밖에 나가 있는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한
손으로 딸의 얼굴을 쓰다듬는다. 연수는 등 뒤에서 가만히 어머
니를 안았다.
   '연수야.'
   "너 몇 살이냐?'
   '스물 네 살."
   '우리 딸 시집갈 때 다 됐네?'
   인희씨는 침대에 걸터앉은 자세로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천천


히 몸을 흔든다. 등 뒤에서 어머니를 껴안고 있는 연수도 리듬을
타듯 천천히 몸을 흔들었다.
   이 고즈넉한 평화. 연수가 아직 어릴 때 어머니는 가끔 놀이터
에 데리고 가 그네를 태워 주곤 했다 뭔가 힘든 일이 있을 때면
어린 연수를 무릎에 앉히고 그네를 태워 주는 게 어머니에겐 가
장 쉬운 스트레스 해소법 가운데 하나였다. 그럴 때마다 연수는
까닭 없이 슬프기도 했고, 기분이 좋아지기도 했다. 흥얼흥얼 시
름을 떨쳐 내기 위한 몇 마디 가락에 실려 그네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어린 연수는 어째서 그 똑같은 동작이 어떨 땐 슬픔이 되고 어
떨 땐 평화가 되는지 알 수 없었다. 지금 연수는 어머니의 등에
기대어 어릴 적 그 고요한 평화를 느킨다.
   '연수야, 너 뭐하니?'
   한가롭게 몸을 흔들던 인희씨가 고개를 약간 옆으로 돌렸다.
   연수는 졸음처럼 달콤한 회상에 잠겨 있다가 문득 입을 열었
다.
   '엄마 냄새.'
   '나, 냄새 나니? 벌써?'
   '응, 아주 옛날부터.'
   '뭐? 어디, 무슨 냄새?'
   인희씨는 펄쩍 뛸 듯이 놀라며 연수를 빤히 쳐다보았다.
   연수도 어머니 얼굴을 빤히 응시하였다
   엄마한텐 좋은 냄새가 나요. 어릴 적부터 그 냄새를 얼마나 사
랑했는지 몰라요.

   그 말을 하려다 문득 목이 메었다. 연수는 어머니의 시선을 피
하며 얼버무렸다.
   '화장품 냄새.'
   '기집애! 병원 냄새지, 화장품은 무슨.'
   밉지 않게 딸을 홀겨보는 눈가에 어느덧 골이 깊어진 잔주름이
보인다. 예의 잔주름이 그네를 태워 주던 시절의 어머니를 세월
저편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농담이에요. 엄마, 그런 거 없어요.'
   '기집애, 둘러대기는."
   '정말이라니까.'
   어머니가 벌써 늙었다는 증거일까. 무심코 꺼낸 말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모습이 연수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형님, 뭐가 정말이라는 거예요?'
   마침 식판을 들고 안으로 들어서던 근덕댁이 호들갑스럽게 말
참견을 해왔다.
   '식사하세요. 저 그만 갈게요.'
   연수는 근덕댁이 어머니의 무릎에 식판을 차려 주는 모습을 잠
시 보다 병실을 나섰다. 그녀가 병실을 나서는 것과 거의 때를
같이 해서 간호사가 안으로 들어왔다.
   간호사는 들어오자마자 인희씨의 팔목에 꽂혀 있는 항암 치료
제 주삿바늘을 빼 버렸다.
   인희씨가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자 근덕댁도 놀란 토끼눈으로
간호사를 쳐다보았다.
   '그거 왜 빼요? 치료 다 끝났어요?'

    간호사는 근덕댁이 묻는 말엔 대꾸도 없이 기등에
있는  병을 거둬들이고 있었다,

     '이상하다, 아직 안 끝난 것 같은데.~
     인희씨는 근덕댁이 중얼거리는 소리에 불안한 듯 간호사를 바
  라보았다.
    '오늘은 간밤처럼 어지럽거나 떨리고 그렇지 않으시죠?"
    '네....'
    간호사는 간단히 한마디 묻고는 곧 몸을 돌렸다.
    근덕댁이 황급히 그녀를 가로막아서며 물었다_
    '근데, 우리 형님 어젠 왜 그런 거예요?
    간호사는 그 말엔 대꾸도 없이 뭔지 모를 어색한 미소를 흘렸
 다. 무안해진 근덕댁이 나가는 간호사의 뒤통수에 대고 큰소리로
 이기죽거렸다.
    '병원 사람들은 너무 잘나서 그러나. 어째 묻는 말에 대답을
 안 한대.'
    인희씨는 주삿바늘이 뽑혀 나간 팔목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암
 이라는데 항암 치료제는 왜 빼갈까. 간호사의 태도가 어쩐지 미
 심쩍었다. 어젯밤 몸살이 나는 것처럼 춥고 어지러웠는데, 그렇
다면 약을 더 줘야지 왜 멀쩡한 주사약을 걷어가는 것인지 퉁 납
득할 수가 없었다 이럴 때 의사인 남편이라도 곁에 있으면 뭘
제대로 알 수 있을 텐데,
   '고모부가 오셔야 퇴원을 할 것인지, 상태가 어떤지 속시원히
알 텐데. 바람이 나셨나, 어째 요즘 통 안 오시네요."
   인희씨는 마치 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입바른 소릴 하는


올케한테 그 동안 꾹 참고 있었던 서운함을 그대로 내비쳤다.
   '그새 지겹나 보지. 무심한 인간. 지 여편네가 아픈지 어떤지
궁금하지도 않나? 벌써 며칠을 안 오는 거야.'
   '남자들은 다 그래요. 그저 지들만 알지.'
   근덕댁이 모처럼 말이 통한다 싶었던지 일장 연설을 늘어놓을
기세였다.
   '난 가끔 그런 생각이 들어요. 아마 남자들은 여자처럼 멘스를
했으면 하루 걸러 한 번씩 전쟁이 났을 거예요. 그게 얼마나 아
파요? 그걸 못 참아, 괜히 여기저기 총질만 해댈 거라구요. 으이
구, 징그런 족속들.'
   근덕댁은 자기가 내뱉은 말에 진저리를 치며 식판에 담긴 밥그
룻 뚜껑을 열었다.
   인희씨는 수저를 들 생각도 없이 조용히 창 밖 먼 데를 바라보
고 있었다.
   나무들이 하루가 다르게 헐벗은 꼴로 야위어가고 있다.그광
경을 내다보는 인희씨의 마음도 스산하기만 하다. 문득 저게 인
생이려니. 저렇게 야위어가다 끝내는... 이 세상 횔횔 떠나가는
거겠지. 그런 상념에 빠져 있는 인희씨의 눈가에 문득 푸르스름
한 그늘이 내려앉는다.

 

   '니 선배한테 좀 싹싹하게 굴어라. 네 성질 별난 거 세상이 다
아는데, 아직 그만한 걸 보면 그 사람 그릇도 보통은 넘는다. 엉
뚱한 사람 마음 고생시킬 작정 아니라면 맺든 끊든 깔끔하게 해.'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에 연수는 어머니의 충고를 몇 번이고 되
새겨 보았다.
   인철은 연수가 없는 동안에도 벌써 여러 차례 문병을 다녀간
모양이었다. 어머니의 말을 곰곰이 새겨 보니 어쩌면 자신이 그
동안 인철에게 못할 짓을 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는 순수한 사
람이다. 솔직하고 성실한, 그리고 따뜻한 사람이다. 자신을 이성
으로 대하지만 않는다면 얼마든지 좋은 친구로 남을 수 있는 그
런 선배였다.
   연수는 늘 그에게 부담을 느끼는 한편으론 자신도 모르게 그
부담을 교묘히 이용하고 있었다. 부담을 느끼는 만큼 그에게 얻
어낼 수 있는 건 모조리 얻어내는 교활한 심리. 간섭은 원치 않으

면서도 끊임없는 관심을 이끌어 내는 미묘한 여자의 심리.
   연수는 미처 자신의 이기심에 대해선 헤아려 볼 기회를 갖지
못했다. 외로울 땐 적당히 친구나 애인의 중간쯤으로 그를 대했
고, 그렇지 않을 땐 가차없이 타인의 위치로 그를 밀쳐 내곤 했
던 게 지난 몇 년 간 인철을 향한 연수의 이기적인 태도였다. 어
쩌면 연수는 그 이기적인 줄 위에서 제 기분에 도취되어 줄타기
를 하고 있는 한낱 어릿광대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인철은 백화점 지하 작업장에서 인부들과 섞여 일하고 있었다,
디자이너인 그가 직접 나서서 일하지 않아도 되는데도, 인철은
어떤 부분의 중요한 인테리어에는 꼭 직접 공구를 다루곤 했다.
연수는 요란한 그라인더 소리가 귓전을 때리는 작업장을 가로질
러 가서 인철의 어깨를 툭 첫다.
   '간식대예요.'
   인철은 새삼 환하게 웃으며 작업장까지 찾아온 연수를 반가운
눈길로 쳐다보았다. 이어 그는 잠시 그녀를 향했던 눈길을 거두
고 돈 봉투를 뒷주머니에 찔러넣었다
   '미스 김은 어디 가고, 니가 이런 걸 가져오니?'
   인철이 그라인더 스위치를 다시 누르며 지나가는 말처럼 묻는
다,
   연수는 한껏 명랑한 어조로 대답했다.
   '제가 대신 전해 준다고 하고 왔죠, 뭐.'
   인철은 그라인더 스위치를 도로 꺼 버렸다 그는 조금 멍해진
눈길로 연수를 바라보았다.

   '잠깐 얘기 좀 해요.'
    그가 주변을 둘러보며 안전모를 만지작거렸다. 그는 얼마쯤 긴
장한 표정이었다 이윽고 그가 작업장 뒤편으로 걸음을 옮겼다.
연수는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
   '선배를 잃고 싶지 않아요."
    작업장 한쪽에 쌓아 둔 자재더미에 쪼그려 앉은 채 연수가 중
얼거리듯 말을 꺼냈다.


    그는 이내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다는 투로 우울하게 고개를 꺾
었다.
    연수는 아직 해야 할 말이 많았다
   '하지만.'
   그녀는 잠시 말을 끊고 인철을 정면으로 응시하였다. 그 눈빛
이 무척 곤혹스러웠다

    가장 하기 어렵지만 두 사람 사이에 가장 확실하게 해 둬야 할
말이 남아 있었다
    연수는 그 말을 마저 끝내기 위해 입을 열었다.
   '...사랑하진 않아요.'
   인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선밴 내게 그림자 같은 사람이에요.'
   다시금 무거운 정적이 두 사람 사이에 가로놓였다. 그 정적을
깨고 인철이 읊조리듯 말을 던졌다.
   '...그 사람 만나면 편하니?'
   연수의 대답은 단호하면서도 확신에 차 있었다. 인철은 그런


그녀를 향해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
   ,.밥 먹을 때, 내게 서처럼 편하게 먹을 수 있어? 김치 손으
로 찢어가면서 말이야.'
   그럴 수 없기 때문에 그 사람이 특별한 거라고, 사랑이라는 감
정은 썩 마음이 편친 않지만 뭔가 특별한 감정일 거라고 말하려
다 연수는 문득 입을 다물어 버렸다.
   특별하면서도 익숙한 감정, 그런 게 사랑 아닐까. 하긴 영석에
 겐 어떤 특별함이 느껴지긴 하지만 익숙한 느낌은 들지 않는다.
 늘 불안하고 조심스러운 가운데 그는 자신에게 익숙해져 있는 것
 들마저도 하나씩 낯설게 만들어 가는, 그런 타입의 사람이었다.
    가령, 인철과 함께 있을 때면 자연스럽게 할 수 있었던 행동도
 그 앞에선 왼지 천박하게 보이지나 않을까 몸을 사리게 된다. 그
 래서 별 것 아닌 일로 괜히 어색해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
 러나 그건, 좀더 시간이 흐르면, 좀더 서로 겪다 보면 자연스럽게
 해소될 문제라 여겨졌다
    '.. 올라가 봐라.'
    인철이 연수를 돌아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다소 어색해 보이는
 그의 미소는, 미소가 아니라 너무나 공허한 나머지 오히려 속이
 더 깊어 보이는 그런 빈 우물 같았다.
    저애는 ?내가 심하게 말한 거, 잊어버려 쓸데없는 질투였다.'
     그는 일어서는 연수의 손을 잡아 주며 어렵게 한마디 덧붙였
  다
     . ...다치지 마라.'
     그 말뜻에 담긴 인철의 순수한 배려가 연수의 가슴으로 물결치


듯 건너왔다. 순간 연수는 수천 년 전 어떤 이름 모를 강가에서
한 전생의 남자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은 이상한 착각에 빠
졌다.
    연수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며 작업장을 걸어 나왔다.


   며칠 만에 보는 얼굴인가.
   업무차 들렀던 영석과 차를 마시며 연수는 어쩐지 그가 무척
고독해 보인다는 생각을 했다. 안주인의 손길에서 벗어난 남자들
은 다 저런 얼굴일까.
   연수는 요즘 아침마다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가르쳐 준 대로 손
수건이며 양말, 넥타이, 양복 색깔까지 일일이 챙겨 드린다. 그런
데도 집 밖에서 보는 아버지는 어느 한 가지가 꼭 빠져 있는 듯
굼뜨고 어색해 보였다. 전에 입학식 날, 어머니 없이 혼자 학교에
오는 아이들을 보며 연수가 느꼈던 그 알 수 없는 부족감, 혹은
 결핍의 냄새.
    영석에게선 문득 그런 느낌이 배어 나왔다.
   '엄마 간호한다고 얼굴이 무척 까칠하다. 힘들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그가 조금은 풀죽은 음성으로 묻는다.
   '간호는 무슨 간호, 퇴근하고 가면 얼굴이나 잠깐 보고 오는

게 고작인데.'
   연수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영석을 살피듯 유
심히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근데, 거긴 왜 그래요? 넥타이도 구겨지고.. 부인 언제 외
요?'
   오늘 따라 영석이 달라 보이는 이유를 연수는 부인의 부재 때
문이라고 느킨다. 전엔 그렇지 않았다. 그 얼굴이 수척해져도 연
수는 자신 때문이라 믿었고, 그가 가장 행복한 남자처럼 웃어도
그건 자신에 대한 사랑 때문이라고 믿었다. 그녀 스스로가 그랬
으니까.
   헤어지면 그리움으로 살이 마르고,같이 있으면 빈 하늘만 쳐
다봐도 몸과 마음이 가득해지는 느낌. 단 몇 시간, 단 며칠 만의
헤어짐으로도 연수는 애정 결핍증 환자가 됐다가 그를 만나면 다
시 그가 꾸며 준 왕국의 여주인처럼 근사해졌다. 그도 자신과 같
은 궤도를 걷고 있다고 생각한 건 오산이었을까,
   부인이 언제 돌아올 예정이냐고 묻는 말에 그는 다만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 희미한 미소 끝에 어리는 고독 또한 연수의 몫
은 아닐 것이다.
   '.. .언제 퇴원하셔?'
   '잘 모르겠어요.'
   '무슨 소리야?'
   ,아버지 성격이 원래 그래요. 말씀을 잘 안 하세요."
    그런데 당신은 참 이상해요,난 그게 좋아요...
    연수는 그 말을 해주고 싶었다. 입으로 소리내 말하진 않았지

만, 그 생각을 하니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그녀가 빙그레 웃자
그도 따라 웃었다.
   '담당 의사한테 묻지?'
   '퇴근하고 가면 뵐 수가 있어야죠.'
   '항암 치료가 고통스럽다던데, 어머닌 잘 견뎌내시는 것 같
아?
   "그러신 거 같아요. 심한 차멀미 증상 같은 게 있긴 하신데, 구
토도 없고 머리숱도 여전하세요.'
   '다행이네, 오늘 밤에두 가지?'
   연수는 가만히 눈으로만 대답했다
   '어떠니가 빨리 완쾌되시길 빌어. 우릴 위해서라도 말야. 이러
다 니 얼굴 잊어 먹겠다."
   은근한 감정이 담긴 영석의 두 눈이 연수를 보고 있다.
   헤어지더라도 저 눈빛만은 영원히 못 잊을 거야..
   연수는 짙은 남색 셔츠 깃 아래 매달려 있는 영석의 물결 무늬
넥타이를 보고 있다_ 그 넥타이는 며칠 전 그의 아파트 장롱 안
에서 보았던 일곱 개의 넥타이 중 마지막에 걸려 있던 것이다.
   백화점 커피솝을 나와 이대로 사무실에 들어가야 하나 어쩌나
망설이고 있는데, 영석이 말없이 그녀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는
비상구로 통하는 문을 열고 숨기듯 연수를 그 안으로 밀어넣었
다.
   연수는 잠시 그의 두 팔에 안겨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듣고 있었
다. 심장의 고동 소리가 마치 겨울 바다에서 듣는 파도 소리 같
다. 무겁고 깊은 파도 소리. 연수는 문득 한기를 느꼈다. 그의 품

에 안겨 있는데도 한기가 느껴지다니. 그래, 파도 소리 때문이야.
그 겨울 파도 소리 때문이라구.... 연수는 그렇게 생각하며 스르
르 눈을 감았다,
   그가 손으로 볼을 감싸며 그녀의 입술을 찾고 있다. 그의 손바
닥에서 뜨거운 열기가 쏟아져 나와 연수의 양볼을 후끈 달게 했
다. 연수는 정신이 어찔했다
   '쉿, 이전에 당신에게 할 말이 있어요, 할 말이 있다구요.'
   연수는 갑자기 자신의 양볼을 감싸고 있는 그의 손을 가볍게
내려놓으며 계단 아래로 한 발 물러섰다.
   '...자꾸 욕심이 생겨요. 처음엔 당신을 보는 것만으로도 참 좋
았어요. 아. 저 사람 눈은 저렇게 생겼구나. 아, 저 사람은 저렇게
말하는구나. 그렇게 하나하나 알아가는 게 기뻤어요. 그러다, 당
신을 잡았는데... 그때부터가 문제였던 것 같아요. 당신을 보면,
자꾸 손만 잡고 싶었어요.'
   연수는 계단 옆 벽에 몸을 기댄 채 자신의 발끝을 내려다보며
옛이야기하듯 자꾸 주절거리고 있었다.
   '...그리구, 이젠 자꾸 안고만 싶어요. 그래서 그래요. 입맞추
게 되면 자꾸 입맞추고 싶고, 아마 그 다음엔 자고 싶어질 거예
요. 그러다 혼자 남는 게 싫어지고, 당신 보내는 게 싫어지고..
그러면 당신 힘들어지잖아요.'
   그녀의 쓸쓸한 미소가 건물 꼭대기까지 이어진 비상구 난간 위
쪽으로 공허하게 번져 나갔다. 영석의 얼굴도 얼마쯤 그늘져 있
었다. 그러나 이내 그늘진 그의 얼굴이, 그의 눈빛이 천천히 연
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연수는 그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 물

끄러미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리 밝지 않은 공간이었지만 그녀의
붉어지는 눈매를 읽어내기란 어렵지 않았다. 어쩐 일인지 한 움
큼의 비애가 오히려 연수를 더욱 격정에 빠져들게 하는 것 같았
다. 그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자 연수는 가만 고개를 숙이며
눈을 감았다
   그때 마침 주머니 속의 핸드폰이 울렸다.
   '아주 때맞춰 오네요.'
   연수가 겸연쩍게 웃자 그도 따라 웃었다.
   그녀는 수화기를 열었다. 뜻밖에도 아버지였다.

    노을빛이 유난히 붉은 저녁이다.
    정박사는 딸의 사무실이 있는 백화점 주변 공원에 앉아 행인들
 을 바라보고 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 정박사는 벌써 여러 번
 한숨을 내쉬고 있었지만, 한숨은커녕 자기가 지금 뭘 하려고 하
 는지도 잘 분간이 가지 않았다. 생각할수록 세상은 참 공평하지
 가 못하다. 주위를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은 대부분 더없이 환한
표정을 짓고 있다.
    연말이 가까울 무렵의 백화점 주변이 늘 그렇듯, 각자 쇼핑백
이며 선물 꾸러미들을 한 아름씩 안은 채 어디론가 분주히 가고
있다. 그들은 저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로, 혹은 따뜻한 가정으
로 돌아가 선물을 주고받고 웃으며, 고단한 하루의 피로를 씻고
나름대로 휴식과 재충전의 시간을 즐길 것이다.
   이런 시간에, 공원 벤치에 앉아 사그라드는 저녁 노을이나 바
라보고 있는 늙은 사내의 절망 따위를 누가 알겠는가. 그는 죽어

가는 아내를 병원에 방치해 놓고 아무것도 모르는 딸애한테 와서
는, 곧 너희들은 어미 없는 자식이 돼야 할 운명이라고 말해 주어
야 한다. 그뿐인가. 딸아이의 충격이나 고통을 어떻게 감싸 줘야
할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팔순 노모 대소변이라도 받아 주려면
오늘 귀가 길도 바쁜 것이다.
   그는 더 이상 희망 따위에 속고 살진 않는다. 아침이 와도 희
망 같은 건 없다. 그것도 밥줄이라고 월급이 나오는 한 쫓겨나는
날까지 목을 매야 하는 직장이라는 아수라장이 그나마 이즈음 그
의 유일한 도피처이다. 아니 도피처라고 할 수도 없겠다. 아수라
장에서 아수라장으로의 이동. 더할 것도 덜할 것도 없는 삶의 진
흙탕이 나이 육십 넘도록 일궈 온 정박사의 현실이었다.
   그 동안 그래도 이 진흙탕을 먼지 나는 신작로쯤으로 알고 살
게 해준 고마운 이가 있었기에 그런 대로 살 만한 세상이었다.
아내라는 존재가 없었더라면 그는 반 그릇의 밥그룻도 채우지 못
한 인생의 낙제생으로 생을 마감했을 터였다.
   밥그룻의 비어 있는 절반이 정박사의 실패한 인생이라면, 아내
는 기꺼이 자신의 몸을 던져 나머지 절반을 채워 그의 몫으로 보
태 주었다.
   세상이 왜 이다지도 불공평한가.
   일러 무엇하랴. 속절없이 죽어가는 그 착한 아내만 생각하면
정박사는 제가 쉬고 있는 숨조차 비열하고 역겹게 느껴진다. 무
턱대고 가슴이 콱콱 막힌다. 부끄럽고 창피하다. 바보같이 착하
기만 한 아내가, 평생 한 일이라곤 저 고생시킨 기억밖에 없는 무
책임한 자신에게 아무런 죄의 대가도 물어오지 않는 까닭에 정박

 사는 더더욱 가슴이 아프다.
   '아버지?'
   어느새 붉딘 노을이 사그라지고 하늘이 청회색으로 짙어지고
있었다
   연수가 살그머니 정박사 곁으로 와 앉는다. 어릴 때 같이 지낸
 기억이 별로 없는 부녀지간은 늘 그렇듯 서먹서먹하다.
    정박사는 아비 노릇 한번 제대로 해준 적 없는데 어느덧 이렇
 게 어엿한 숙녀로 성장해 준 딸자식이 새삼 마음에 맺힌다.
   '연수야.'`
   담배를 세 대나 태우도록 입을 열지 못하던 정박사가 조용히
딸의 이름을 부른다. 시선을 어디 먼 고향에라도 걸어둔 듯 허공
을 응시하던 그가 다시 담배를 피워 물었다.
   아무래도 그냥은 말이 나을 것 같지 않다, 그는 양 어깨가 들
썩일 정도로 크게 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니 엄마....'
   연수는 말이 없다.
   '니 엄마 아무래도 오래 못 살 것 같다.'
   그래도 연수는 말이 없다
   정박사는 여전히 허공을 응시한 채 단숨에 말해 버렸다.
   '죽을 것 같애."
   순간, 연수가 벌떡 일어났다.
             말씀이세요?
   "말한 그대로다. 오래 못 살고 죽을 것 같다.'
   연수는 끝내 자신을 외면한 채 한숨처럼 토해내는 정박사의 말

 을 듣다 못해 그의 어깨를 잡아 흔든다.
   '무슨 말씀이냐구요, 그게. 수술했는데... 왜 죽느냐구요?'
   '...수술 못했다.'
    딸이 흔드는 대로 출렁이는 정박사의 양 어깨는 무력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자꾸 붉어지려는 눈시울을 딸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한사코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수술 못했다. 수술 할 수가 없었다.'
    연수는 그 황당한 아버지의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이런 경우를 두고 기가 막히다는 것인지.... 불과 며칠
만에 어머니는 암이었다가 곧 죽을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이다.
    연수는 가까스로 마음을 가라앉히고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아버지 말씀,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그래요, 그렇
다고 해요. 그럼, 얼마나 사실 수 있는 거예요?'
   '한 달... 두 달... 나두 잘 모르겠다.'
   그 말에 연수는 마침내 폭발하고 말았다. 그녀는 원망에 가득
찬 눈으로 아버지를 노려보며 경멸하듯 외쳤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아버지가 의사신데, 어떳게 그 지
경까지 갈 수 있어요? 아버지, 의사잖아요?'
   의사이기 때문에 더 할 말도, 더 어떻게 손써 볼 일도 없다는
걸, 그런 아버지의 답답한 심정을 딸은 알지 못한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연수는 갑자기 그렇게 외치며 후다닥 뛰어가 버렸다.
   정박사는 저만치 멀어져가는 연수의 뒷모습을 조용히 지켜보
고 있었다. 그 성깔하며 고집이 누군가를 많이 닮은 듯 전혀 낯

 설지가 않았다

    그날 밤, 연수는 윤박사를 찾아갔다.
    아버지 말만으로는 도무지 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
 다. 아버지는 모든 일에 독선적이고 신경질적이며, 또 쉽게 비관
 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어쩌면 증세가 다소 과장됐을 수도
 있다. 그게 아니라면 아버지 판단이 틀렸을 수도 있다. 윤박사라
 면 뭔가 확실한 얘기를 해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연수가 윤박사로부터 듣게 된 첫마디는 먼저 아버지를
 신뢰해야 한다는 충고였다.
   '전, 아버지 안 믿어요."
    윤박사는 연수의 당돌한 대꾸에 당황한 나머지 잠시 말을 잊었

   '아버진 의료사고를 내 멀쩡한 사람을 죽인 적도 있어요. 그
때문에 병원이 넘어가고, 할머니가 정신을 놓고, 불 같은 아버지
성질 무서워 가뜩이나 기 못 펴고 살던 엄마랑 우리는 더 힘들어
졌어요. 아버진, 의사로서도 아들로서도 남편으로서도, 또 아버
지로서도 실패한 사람이에요. 그런 사람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덩달아 포기할 순 없어요.'
   '그렇게 말하지 마. 그건 어쩔 수 없는 의료사고였어.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버지한테만 있었던 건 아니에요.'
   윤박사의 단호한 설득에도 연수는 좀처럼 아버지를 향한 불신
의 벽을 허물어뜨리지 못하고 있었다.
   윤박사는 어린 동생 달래듯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그 환자는 급성 위궤양으로 아버질 찾았어. 큰 병원으로 옮기
기엔 이미 늦은 상태였고, 수술은 성공적이었어."
   ,그런데 환자가 깨어나지 못했죠. 간이 나빴다죠? 당시 아버지
는 명의 소리라도 듣고 싶었겠죠. 그 명성에 대한 욕심 때문에
무리하게 수술하셨던 거예요.'
   ,아니, 그 당시엔 간의 상태보다 위의 상태가 더 급하다는 판
단 때문이었어. 그 환잔 아버지가 수술 안 했다면 길거리에서 바
로 객사했을 거야. 단 한 번의 희망도 가져보지 못하고.'
   윤박사의 차분한 설득으로 아버지에 대한 오해는 다소 풀렸지
만, 아직 앙금이 말끔히 가신 건 아니었다. 더구나 정작 그녀에
 게 묻고 싶었던 이야기를 아직 하지 못한 채였다.
   ~전 지금 엄마 얘길 묻고 있어요. 아버지 의견이 아닌 아줌마
의견을 듣고 싶어요."
   '.. .마음의 준비를 해.
   '무슨 근거로 그렇게 단언하세요?"
    지금껏 차분하던 태도와는 달리 윤박사의 표정에도 그늘이 졌

    '수술 전에 뭐라고 하셨어요, 초기라구 했죠? 수술하면 깨끗하

 다고 했죠?"
   '처음 수술에 들어갈 때도 기대는 없었어, 암세포가 이미 임파
 선을 타고 여러 곳으로 전이된 상태였어. 큰 것만이라도 떼내려
고 개복했던 거야.'
   '그런데요?
   "할 수 없었어. 장기에 암세포가 엉겨 도저히 손을 못 댈 지경
이었어.
   "'그래서요?
    연수의 반문은 점점 증오와 경멸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손도 못 댔어. 간을,위를, 허파를 모뚜 도려낼 순 없었어."
   '그래도 해봤어야죠! 박사가 서너 명이나 달라붙었으면서 왜
우리 엄마 한 사람 못 살려냈어요? 살려냈어야죠!'
   어머니가 그 지경이 되도록 수수방관만 하고 있었던 모든 사람
들, 연수는 그들 모두를 향해 절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첫번제
증오의 대상은 고통스럽게도 자기 자신이었다.
   '...믿을 수 없어요. 어떻게 우리가, 우리 엄마가 그렇게 될 때
까지 모를 수가 있어요. 자식인데, 남편인데.'
   '그게 암이야. 발견하기 전엔 모르구, 설사 발견했다 하더라도
그땐 이미 늦구. 그게 암이야.'
   '싫어요. 난 안 믿을래요.'
   연수는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는 눈물로 엉망이 된 얼
굴을 자꾸 흔들어대며 모질게 입술을 깨물었다.
   '아줌마도, 장박사 아저씨도, 아버지도 모두 욕심 없는 분들인
거 알아요. 그래서 더 포기하기가 쉬웠겠죠. 전 안 그래요. 포기

안 할 거예요."
   '포기해야 돼,'
   윤박사의 어조는 단호했다.
   연수는 그에 반발하듯 더욱더 매몰차게 말을 이었다.
   '안 해요. 자식이 어떻게 엄말 포기해요. 아줌마 같으면, 아줌
마 부모라면 포기하겠어요?"
   '...곁에서 포기하지 않으면 엄마가 더 힘들 거야."
   순간 연수의 눈가에 독기가 서렸다.
   "아버지가 포기하자고 아줌말 설득했죠? 부딪혀 싸우기보단
피하는 데 능한 분이니까, 분명 그러셨을 거예요. 전 포기 안 해
요. 엄말 포기한 아버질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아버지를 향한 불신과 증오가 다시금 연수를 모질게 만들고 있
었다.
    늘 착하고 정도 많은 아이였는데
    윤박사는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는 연수를 애
처롭게 바라보았다.
   '내 말 잘 들어. 우린, 장박사님과 나는 아주 오래 전에 포기했
어, 하지만 아버진, 지금 포기하신 거야.'
    윤박사는 '지금'이란 단어에 또박또박 힘을 주었다.
    잠시 분별력을 잃고 증오로 가득차 있던 연수의 표정에 얼핏
 당혹감이 떠올랐다.
    윤박사가 그 기미를 놓치지 않고 부드럽게 덧붙였다.
   '분명히 말하지만, 가능성이 있는데 손을 놓은 게 아니야. 엄
마의 고통을 줄이는 방법으로 포기하는 길을 택한 거야. 이제 우

리가 엄마한테 해줄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어서야.'
   이젠 연수가 포기해야 할 차례였다. 아버지 말대로 집에 와선
손 하나 까딱 않고, 그것도 모자라 늘상 바깥 일 힘들다고 짜증
이나 내던 딸이, 그 종처럼 부려먹던 어머니를 포기해야 하는 것
이다.
   한참의 시간이 흘렀고,또 한참의 침묵이 흘렀다.
   연수는 돌아오는 차 안에서 윤박사를 향해 허탈하게 물었다.
   "전 이제 어떡해야 하죠?'
   "글쎄, 나 같으면 어떻게 했을까.'
   윤박사는 물기 어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연수를 향해 쓸쓸
하게 웃는다
   . "우리 부모님은 차 사고로 한순간에 돌아가셨어. 장사 치를 땐
모르겠더니, 묻고 집에 오니까 그때부터 눈물이 나더라. 그게 꼬
박 일 년을 넘게 갔어. 밥을 먹다가, 일을 하다가, 잠을 자다가,
그렇게 아무데서나 눈물이 났어. 받은 건 태산 같은베 해드린 건
하나 없는 내가 미워 눈물이 나더라구.'
   윤박사의 독백은 장차 연수의 독백이기도 할 터였다. 그녀는
자식이라면 누구나 겪어야만 하는, 부모의 죽음을 먼저 겪은 슬
픔의 선배로서 연수에게 하나씩 하나씩 이별하는 법을 가르쳐 주
고 있었다
   . "연수야, 넌 그러지 마. 네가 받은 만큼, 받은 것의 만분지 일
이라도 돌려 드려. 할 수 있는 건 다 해. 밥두, 빨래두, 세수도 시
켜 드려. 네가 어른이란 걸 알려 드려. 니 걱정 때문에 가시는 길
무겁게 하지 말구."

   '...전요, 아줌마, 전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사람은 다, 한 번은
다 죽는데, 우리 엄마가 죽게 될 줄은 정말 몰랐고, 딸들은 다 도
둑년이라는데 제가 이렇게 나쁜 년인지 전 몰랐어요. 지금 이 순
간두 난 우리 엄마가 얼마나 아플까보다는 엄마가 안 계시면 난
어쩌나, 그 생각밖에 안 들어요. 엄마가 없는데 어떻게 살까. 어
떻게 살까. 그 생각밖에 안 들어요. 나, 어떡해요, 아줌마?'
   연수는 제 설움에 못 이겨 끝내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

   '나 어떡해요, 이제 난 어떡해'
   운전석에 앉아 서럽게 우는 연수의 어깨를 토닥이며 윤박사가
속으로 조용히 되뇌었다.
   '...그래도 넌 행복한 거야, 연수야. 난 후회뿐이지. 너처럼 울
기회도 없었어.'
   단 한 시간이라도 이별을 준비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더라면
나중이 이렇듯 허망하진 않았으리라....
   우는 연수를 바라보며 윤박사 또한 소리 없이 흐느끼고 있었다.


    밤늦은 시각, 정수는 동네 파출소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아버지가 술에 취해 소란을 피우다 잡혀 왔으니 데려가라는 내
용이었다. 정수는 대충 옷을 걸쳐 입고 툴툴거리며 밖으로 나섰

다. 그 나이에 파출소 신세나 지고 다니는 아버지가 한심스러웠
다. 그럴 시간 있으면 어머니한테나 가볼 일이지, 왜 하필 요즘
같은 때 아버지가 자꾸 이상해지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정수는 짜증을 있는 대로 부리며 파출소 문을 벌컥 열었다.
    파출소 바닥에 큰 대자로 뻗어 있는 거지 행색의 취객을 경관
이 발로 툭툭 차서 깨우고 있었다.
    정수는 좀더 안쪽을 두리번거리다 구석진 곳에 등을 보이고
쪼그리고 앉아 있는 아버지를 발견하였다.
   '일어나세요.'
   정박사는 꾸벅꾸벅 졸다가 희미하게 눈을 뜨고 아들을 돌아보
았다

   '너, 누구냐?
   "정수지, 누구예요. 빨리 일어나시라니까요!"
   정수는 아버지의 흐트러진 모습에 기가 막혀 한껏 인상을 찌푸
렸다. 술기운에도 아들의 불쾌한 낮빛에 당황한 정박사는 눈을
번쩍 떴다.
   그는 다소 얼떨떨해진 얼굴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술을 너무
마셨던 탓인지, 자신이 왜 이런 곳에 와 있는지 도대체 기억이 나
지 않았다.
   '네가 여긴 웬일이냐?'
   정박사는 아직 취기가 가시지 않은 음성으로 아들을 향해 물었
다.
   '파출소에서 전화가 왔어요.'
   아들의 대답은 여전히 퉁명스러웠다.
   아무리 술 취한 와중이라지만 정박사는 정수가 꼭 남의 자식
같이 느껴졌다.
   '어서 집으로 가세요.'
   정수가 무뚝뚝하게 팔을 잡아끌었다.
   정박사는 그 손길을 거칠게 뿌리쳤다.
   '놔, 이노무 자식아!'
   의자에서 몸을 벌떡 일으키려 했을 때였다. 정박사는 몸의 중
심을 잃고 바닥에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안 그래도 짜증을 내던
정수가 기어이 분통을 터뜨렸다.
   '왜, 그래요, 챙피하게 정말!'
   '뭐, 챙피해?'
    정박사가 격앙된 어조로 다그치자 정수는 주위를 의식하며 낮
을 들지 못했다. 그는 사람들이 흘깃거리자 태도를 조금 누그러
뜨려 아버지를 부축하였다.
   '가요.
   "애비가 챙피해?'
    정박사는 아들의 등짝을 후려치며 고함을 질렀다.
   '정말 왜 이러세요, 갈수록. 제발 좀 가만히 계세요!'
   '이 자식이 어디서 소릴 질러. 애비한테!'
   ' 에 이 !'
   연이어 뒤통수까지 냅다 얻어맞은 정수는 금세 달려들기라도
할 듯 정박사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곧 그는 아버지를 집으로 데
려가기를 포기하고 혼자서 밖으로 뛰쳐나가 버렸다.
   정박사는 부아가 치미는 걸 참고 서서히 일어나 밖으로 나왔
다. 그는 비틀거리며 담배를 빼물었다.
   ...이런 건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사실은 눈에 넣어도 안 아플
것 가튼 사랑스런 자식인데, 겉으로는 그걸 손톱만큼도 표현하지
못하고 오히려 화를 내고 윽박지르고 때리기까지 하고 있으니.
뻔히 잘못된 길인 줄 알면서 내처 그 길로만 가는 어이없는 행보,
그런 오죽잖은 행보가 모여서 한 사람의 인생을 대변한다면, 도
대체 사람이란 뭐란 말인가, 도대체 삶이란 뭐란 말인가.
   하긴 품 안에 있을 때나 자식이라고, 자식도 머리가 굵어지면
우선 아버지라는 존재부터 달갑지 않은 모양이다. 그렇긴 그렇
지. 유사 이래 어디 아버지와 문제 없는 자식이 있기나 했겠는가.
   정박사는 파출소 앞에 멍하니 선 채 괜히 입맛을 쩝 다셨다.

뭔가 스산한 기운이 등줄기를 흩고 지나가는 것 같아 몸을 푸르
르 떨었다.
   평생 외길이랍시고 병원 밖 세상은 꿈도 못꿔 봤는데,어쩌다
이 지경으로 헛헛한 취객이 되어 여기 서 있는지. 발바닥이 닳도
록 열심히 살아왔건만 무엇 하나 이루어 놓은 것도 없고, 무엇
하나 추억할 만한 것도 없는 답답한 중늙은이가 되어 이젠등신
처럼 아내의 죽음이나 기다리고 있는 이 한심한 꼴이라니....
   정박사는 절름발이처럼 휘청거리며 어두운 골목길을 걸어 집
으로 향했다. 삐져 나온 와이셔츠 자락 밑으로 고추장인지 뭔지
시뻘건 국물이 범벅이다_ 가로등 밑으로 가 확인해 보니 아까 안
주로 먹은 매운탕 찌개 국물이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일이 어렴
풋이 떠오르는 것 같다.
   초저녁에 연수를 만났고, 혼자 술을 마셨다. 돌아오는 길에 동
네 과일가게에 들러 연시랑 사과를 산 것까지는 좋았는데, 골목
에서 비틀거리다 그만 봉지가 찢어져 버렸다. 컴컴한 골목길 아
래로 우르르 쏟아져 내려가는 과일들을 잡는답시고 몇 번 넘어졌
고. 어느 순간 경찰관이 왔다.
   아니 그 전에 오줌을 눈 게 먼저였는지도 모른다. 하여튼 그
경찰관과 시비가 붙었고, 파출소에서 잠이 들었다. 그리고 정수
란 놈이 왔었지...
   다시 정수를 생각하자 정박사는 얼핏 낮이 뜨거워졌다. 녀석도
어느새 장정이 다 되었다. 아까 장소가 파출소 안만 아니었다면
녀석, 아비 하나쯤이야 거뜬히 메다꽂을 수도 있을 기운이었다.
그렇게 든든한 아들이건만 데리고 목욕탕 한번 가지 못했다. 매

 번 대학에 떨어진다고 퉁박은 주었지만, 담임선생 이름 하나 아
 는 게 없었다. 저라고 그런 아비한테 무슨 정이 있었으랴....
    정박사는 조용히 철제 대문을 열었다. 아내가 입원한 뒤로는
 식구들 모두 열쇠를 가지고 다니도록 한 게 정박사 자신이었다.
 아이 둘도 드나들며 병원으로, 집으로, 직장으로 분주하게 옮겨
 다녀야 했으므로, 저녁까지 노모를 돌봐 주는 간병인에게 한 가
 지 일이라도 덜어 주자는 심산에서였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아무리 직업 의식이 투철한 간병인이라도 언제 그만둘지 모르는
게 요즘 인심이었다.
    거실이며 이층 방엔 모두 불이 꺼져 있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
서면 항상 맨 먼저 눈이 가던 곳. 이때쯤이면 아내가 안방에 앉아
빨래를 개거나 다림질을 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아내가 거기 그
러고 앉아 있는 것이 그대로 이 가정의 평화, 행복을 상징한다는
걸 그땐 왜 몰랐을까. 왜 이제서야 깨달아지는 걸까. 이제 안방은
텅 빈 채 어둠에 잠겨 있다.
   아내의 부재, 그것은 이미 이 가정의 와해를 가장 현실감 있게
설명해 주고 있다. 이제 이 가정의 일상은 밤늦게 대문 열쇠를
끼워 넣는 공허한 쇳소리로 전락해 있고, 불 꺼진 안방의 토굴
같은 분위기로 전락해 있다. 누군가가 등불을 켜고 기다려 주지
않는 집. 대문을 열어 줄 사람이 없는 집이라는 게 과연 가정이랄
수 있을까.
   집 안으로 들어선 정박사는 조용히 노모의 방문을 열어 보았
다. 연수가 등을 보인 채 쪼그려 앉아 있는 옆에서 노모는 옷가
지들을 잔뜩 꺼내 놓고 있다.

   '아줌마, 왜 그러고 있어? 아줌만 짐 안 싸?'
   노모는 며느리가 병원에 입원하기 전날 짐을 싸던 흉내를 내는
중이었다
   눈가에 눈물이 말라붙어 얼룩진 탓인지 꺼칠한 얼굴을 하고 연
수는 넋 나간 듯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우리 빨리 가자. 우리 엄마가 보기보다 성질이 드러워서 약속
시간 늦으면 난리다! 아줌마두 빨리 짐 챙겨, 가게.'
   노모가 소풍이라도 가는 사람처럼 신바람이 나서 커다란 가방
에 옷을 꾸겨 넣는 모습을 처량하게 쳐다보며 정박사는 소리나지
않게 문을 닫았다.
   '아줌마, 안 가? 아줌마가 길 아는데, 같이 가야지. 가자, 응?'
   안에선 여전히 노모의 신명난 음성만 들려을 뿐 연수는 아무
반응도 없는 모양이었다

    이튿날 아침.
    정박사는 일찍부터 원장의 호출을 받았다. 그 동안의 분위기로
보아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느낌은 있었지만 상황은 생각보다
몹시 좋지 않았다.
   '정박사님이 그 동안 고생하신 건 잘 아는데, 워낙 환자가 적
어서....'
   아무리 작은 병원의 인사라지만 십 년 가까이 부려먹던 사람을
당장 그날로 그만두라는 원장의 횡포에 정박사는 모멸감마저 느
껴야 했다. 젊은 원장은 말하는 내용과 달리 무척이나 고압적인
자세였다.
   '김원장, 나... 부탁 하나 합시다,"
    정박사는 젊은 원장의 면상이라도 한 대 후려치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고 말을 이었다.
   '여편네가 곧 죽을 것 같은데, 그때까지만 어떻게 안 되겠소?'

   자존심이고 뭐고 다 팽개치고 사정하는 말이었지만 젊은 원장
은 그 고압적인 자세를 조금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대학병원 송박사님이 모레부터 오시기로 했습니다

   그 말에 정박사는 오장이 뒤틀리는 듯했으나 부릅뜬 눈만 감았
다 다시 떴다. 정년을 일 년밖에 남기지 않은 사람을 내쫓으면서
그 정도 배려도 안 해 주려는 이 따위 더러운 직장엔 그도 별 애
착이 없었다. 문제는 죽어가는 아내 앞에서 실직당한 꼴까지 보
여야 하는 난감함이었다.
   원장이 앉은 쪽으론 눈길 한번 주지 않으며 그가 입을 열었다.
   '그럼 수위실 옆에서라도 있게 해 주시오. 한 달만... 그렇게
있게 해 주시오. 더는 바라지 않으리다.'
   결국 그 제의마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정박사로선 할 수 있
는 온갖 구차한 사정을 다한 셈이었다. 그는 처참하게 일그러진
몰골로 원장실을 나왔다.
    진찰실로 돌아온 그는 이를 악다물고 짐을 꾸렸다
    작은 라면 박스에 짐이랄 것도 없는 집기들을 챙겨 넣으면서도
도무지 아귀가 맞지 않는다. 마침 그때 윤박사가 문을 열었다.
혼자서 꿍꿍대며 어쩔 줄을 모르던 그가 문 쪽을 힐끗 바라보았
다.
   윤박사는 소태 씹은 표정으로 어색하게 웃는 정박사를 차마 마
주보지도 못했다
   '무능한 인간은 뭘 해도 티가 나네.'
    박사는 짐짓 씁쓸한 너스레를 떨며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이 짐, 니 방에 좀 놓자. 며칠이면 돼. 그래 줄 수 있지?'
    어느새 눈시울이 젖은 윤박사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도 요즘 부쩍 눈물이 흔해졌다
   '애들하고 마누라 볼 면목이 안 선다.'
    평생 몸 바쳐 일한 흔적이 고작 라면 박스 두 개를 다 못 채웠
다.
    정박사는 짐을 챙기다 말고 윤박사를 외면한 채 입을 열었다.
   '윤아.. .

   "집에 말하지 마라.'
   '...네.'
    윤박사는 이를 악물고 짐을 마저 챙기는 정박사를 몹시 곤혹스
런 낮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직장에서 떨려나고 짐까지 챙겼으니 더 이상 이곳에 머물러 있
을 이유가 없었다. 정박사는 곧 아내가 있는 장박사의 병원으로
향했다. 오늘쯤 아내의 검사 결과가 나올 예정이었다

   '환자가 치료제를 쓰고도 아무런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는 건,
치료제가 환자의 몸 안에서 전혀 도움을 못 주고 있단 얘기야.
평범한 사람들 같으면 머리 안 빠지고 구토도 없으니까 좋아라

 하겠지만, 의사 입장에선 그게 아니지. 너도 알잖아....'
    장박사는 정박사를 만난 자리에서 항암 치료 중단의 당위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아내의 증세로 보아 겉으론 멀쩡한 것
 같지만 항암 치료가 오히려 역효과를 주고 있다는 설명이었다.
    정박사는 점점 아득한 나락으로 떨어져 내리는 심정이었다.
    '검사 결과 나왔니?'
    '백혈구 수가 많이 떨어졌어.'
    '그냥 치료 계속해.'
    '벌써 지시했어. 오늘 저녁부터 치료 중단이야.'
    그 말에 정박사는 매섭게 장박사를 노려보았다.
   '왜 그랬어, ? 니 맘대로 누가 그러래?'
   '어제 연수 엄마 어지럽다고 해서 갔었어. 약 효과가 나나 했
 는데, 아니더군. 경미하긴 했지만 치료제 쇼크였어. 이미 위에도
 전이가 많이 됐어.'
    정박사는 더 이상 고집 피워서 될 일이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말없이 한숨만 몰아쉬었다.
   '괜한 데다 미련 갖지 마. 지금 상태에선 쇼크가 더 무서워.
내일 모레쯤 퇴원하도록 해.'
   정박사는 장박사의 충고를 따르는 수밖에 더 이상의 도리가 없
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껴야만 했다. 그는 침통한 표정으로 장
박사의 진찰실을 나섰다.
   저만치서 딸 연수가 공중전화로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었으나
그는 미처 보지 못했다.

   연수는 회사에다 며칠 특별 휴가를 내고 무작정 어머니의 병실
로 달려갔다. 하지만 막상 어머니가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
을 의식하게 되니 차마 병실 안으로 발을 들여놓을 수가 없었다.
연수는 밤새 울어 눈이 퉁퉁 부어 있었고, 어제 점심 이후 아무
것도 먹지 못해 금세 쓰러질 듯 휘청거렸다.
   연수는 우선 공중전화 부스로 가 수화기를 들었다.
   영석은 자리에 없었다. 그날 하루 결근계를 내고 출근하지 않
았다고 여직원이 일러 주었다.
   그녀는 한참을 망설이다 그의 아파트로 전화를 걸었다.
   '그만해, 그만. 전화받는데 그러면 반칙이야. 저리 가 있어.'
   수화기 저편에서 들려오는 깔깔대는 웃음 소리. 그는 아이들과
한참 신나게 놀아 주던 중이었는지 전화를 받는 동안에도 간지럼
을 타듯 유쾌한 웃음 소리를 냈다.
   '여보세요?
   "저예요.'
   '어, 잠깐만 기다려.'
   갑자기 어색해진 영석의 음성.
   '여보, 나 회사에서 급한 전화 왔거든? 서재 가서 받을게. 부르
지 마.'
   아내한테 둘러대는 영석의 음성에 이어 문 닫히는 소리. 방해
하지 말아야 할 시간이란 걸 알면서도 연수는 지금 간절하게 그
목소리를 듣고 싶다.
   '그 동안 왜 연락 없었니?'
기다렸어요.

    '그럼.'
    `'여기 우리 엄마 병원인데... 잠깐 나을 수 있어요?'
    '..었떡하지. 집사람이 왔어.'
    그는 허둥대고 있다. 그가 전화를 빨리 끊어 주길 바란다는 걸
느끼면서도 연수는 절실하게 매달렸다.
    '잠깐이면 돼요.'
   '미안해, 나갈 수 없어."
   "......나, 지금 아주 힘들어요.'
    서재 밖에서 '여보, 식사하세요.' 하는 아내의 음성이 들려오
자 그는 약간 짜증을 내는 것 같다.
   '집사람 있을 땐 이러지 마. 내가 낼 전화할게.'
    전화는 저쪽에서 일방적으로 끊겨 버렸다.
    연수는 단절음만 들려오는 수화기를 한동안 귀에서 떼지 못했
다. 이윽고 그녀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병원 출입구 쪽으로  향했다. .

   지지리 복도 없는 여편네 같으니....
    정박사는 병실 안에서 들려오는 처남 근덕의 목소리에 아내가
측은한 생각부터 들었다. 처남이 병원에 누워 있는 제 누나한테
또 돈을 뜯으러 온 모양이었다.
   '그래서 안 준다고?'
   '그래. 못 줘.'
   근덕의 험악한 목소리에 이어 아내가 조용히 타이르는 소리가
들리는가 십더니 이내 요란하게 접시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박사는 후다닥 뛰어들어가서 처남의 턱주가리라도 한 방 후려
갈기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왜 안 줘. 내 마누라 종처럼 부려먹고, 단돈 백만 원도 못
줘?"
   '못 줘!"
   '왜 못 줘? 거저 달라는 것도 아니고 개처럼 부린 품삯 달라는

데, 왜 못 줘?'
   '니놈한텐 일 원 한 푼 못 줘.'
   '그러는 거 아냐. 돈푼깨나 만지고 산다고, 동생 알기를 된장
항아리에 박힌 짠지 정도로 아나 본데, 벌받어. 지금 아픈 거,
거 다 벌받는 거야. 알기나 알어?'
   '당신 그러면 안 돼.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넌 가만히 있어, 쌍년아!'
   '내가 무슨 벌을 받어, 이놈아. 내가 뭘 잘못하고 살아서 벌을
받어, 이놈아"
   ,나 어리다구 우리 집 재산 빼돌려, 남편 병원 지었지? 그리구
선 내가 운수업 좀 한다구 했을 때, 두 사람 어쨌어? 단돈 천만
원, 그게 전부였어.'
   이놈이 터진 입이라구... 하늘이 알고 땅이 알어 이놈아. 아버
지 재산 니놈이, 이 사업한다 퍼가고, 저 사업한다고 퍼가고, 밑
바닥 똥창까지 박박 긁어가 퍼 쓰고, 이제 와 누구한테 행패야,
이놈!'
    더 듣지 않아도 뻔한 내용이었다.
   근덕은 오래 전부터 틈만 나면 제 누나를 협박해 왔다. 부모
 재산 다 날리고 누나한테 뜯어간 돈으로도 모자라 평생 피해의식
으로 똘똘 뭉쳐 사는 위인이었다. 그는 자형이란 자가 한때 병원
 이라도 짓고 살았던 걸 처가 재산 덕인 줄로만 믿고 있었다.
    그 생각을 하면 정박사로서도 실소를 금할 수가 없다. 아내가
 시집오자마자 노모한테 구박을 당한 것도 다 그 있지도 않은 처
 가 재산 때문이었다, 맏딸을 출가시키기도 전에 이미 달랑 집 한

 채 남겨 놓고 망해 버린 장인 재산 하나 믿고 노모는 중매를 성
 사시켰다.
    예전에 부자였던 그 한 가지 사실만 믿고 김칫국부터 마신 꼴
 이었다. 노모의 기대와는 달리 신부는 오히려 친정 동생 뒷바라
 지로 평생을 뜯어먹히며 살아왔다. 그나마 집칸이라도 있던 것을
 팔아 없앤 뒤부터는 장인 돌아가실 때 제 나이 어렸다는 이유만
 으로 저렇듯 시도때도 없이 누나를 닦아세우는 것이었다. 그런
 처남을 정박사는 인간 취급도 안 하려 들었다
    '내가 얼마나 써서? 만석지기 쟤산이 그렇케 쉽게 끝나! 좋아!
 나 당신하고 인연 끊은 사람이야. 두말하기 싫어. 내 여편네 데려
 갈 테니까. 그리 알어! 가, 이년아!'
   '형님 아퍼요. 이러지 마! 맨날 신세지다 이제 갚는구만, 당신
 이러면 안 돼'
   '신세는 무슨 개뼉따귀 같은 신세를 졌다고 그래, 너?'
   뭐 한다고 천만 원, 뭐 한다고 오백만 원, 번번이 안 그랬어?
   '주둥아리 닥쳐, 따라와!
   의자 넘어지는 소리에 이어서 처남댁의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일은 그 동안 수도 없이 당한 일이었다.
   정박사는 처남을 타일러 보기도 했고, 우격다짐으로 가르쳐 보
려고도 했지만, 이젠 피차 서로 보지 않는 게 상책이라는 걸 깨
달았다. 그래도 핏줄이라고 아내가 연연해 하는 걸 보면 울화가
치밀곤 했다. 해서 몇 번 큰소리를 낸 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끝
내 아내의 마음을 돌려 놓진 못했다.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지만
남매간의 일을 가지고 남편인 그가 나서서 무조건 다잡아 휘두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내는 그가 근덕에게 냉랭하게 구는 걸 늘 못마땅해 하고 있
 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도 아내는 결코 남편이 끼여들기를 바
 라지 않을 터였다.
    핏줄이란 그런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쳐죽일 악
 인이라 해도 저희들끼리만은 어쩌지 못하고 어르고 보듬어야 할
 생리의 의무가 있다. 저희들끼리만 통하는 원시적 보호 본능이
 있다. 이래저래 아내의 입장을 생각한답시고 밖에서 속만 끓이고
 있던 정박사는 도저히 더 견딜 수가 없어 막 안으로 들어가려 했
 다.
    '이거 갖고, 니 마누라 두고 가.'
    아내의 가라앉은 음성과 함께 뭔가 바닥에 툭 떨어지는 기척이
 들려왔다.
    '안 돼요, 그거. 그 돈이 어떤 돈인데, 형님 병원비 낼 거예요.
 어서 줘요, 어서!'
    처남댁의 울먹이는 소리를 뒤로 한 채 순식간에 근덕이 후다닥
 밖으로 뛰쳐나왔다.
    '또 도박하려 가지, 이 인간아! 손모가지를 잘라 버릴 거야,
내가!
    근덕은 돈 봉투를 뺏기지 않으려 정신 없이 뛰쳐나가느라 문
밖에 서 있던 메형도 알아보지 못한 눈치였다. 그 몸놀림이 어찌
나 날쌘지 정박사는 따라잡을 수도 없었다.
   '누굴 닮아 저렇게 염치가 바닥일까. 어떡해요. 고모부 아시면
또 난리날 텐데....'

   '...설마 그 돈 줬다고 날 죽이겠어, 살리겠어. 으이구, 드런 팔
자. 단돈 몇 백 제 요량대로 쓰지 못해 벌벌 떨고. 으이구, 치사
 스런 내 팔자야,'
    정박사가 안으로 들어갔을 때 아내는 하염없이 창 밖을 내다보
며 한숨을 쉬고 있었다.
   한쪽에선 공연히 죄 없는 처남댁이 코를 훌쩍이며 어질러진 바
닥을 치우던 중이었다. 처남댁은 갑자기 정박사가 들어서자 당황
해서 딸꾹질까지 해대며 수선을 피웠다
   '그래, 병원비를 내줬어?'
   잠시 후 근덕댁이 자리를 비켜 준 사이 정박사가 측은한 눈길
로 아내를 보며 물었다.
   '줬어요. 왜요? 나는 그런 돈도 내 맘대로 못 써요'.'
   아내는 전 같으면 불 같이 화를 내던 남편의 성격을 의식하고
지레 겁을 먹었던지, 아예 딴전을 피웠다.
   '평생 호강은 고사하고라도, 응, 사람이 배를 가르고 누워 있
으면 하루 한 번은 몰라도 이틀에 한 번은 들여다라도 봐야지. 어
떻케 사람들이 그리 무심해! 딸년을 키우면 뭐할 거고, 아들놈을
키우면 뭐할 거고, 서방이 있으면 뭐할 거야. 나를 어떻게 보겠
어, 웅? 집 쫓겨난 성질 사나운 중늙은이로밖에 더 보겠어, 나쁜
사람들... 그저 날 부려먹을 궁리만 하지. 딴 생각은 없는 사람들
이라니까.
   "듣기 싫어!'
   아내의 탄식은 그후로 정박사의 가슴에 와 박히는 비수였다.
그는 무심결에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그러자 이번엔 아내

가 싸움이라도 할 기세로 따지고 들었다
   '소리 더 질러요! 소리 더 질러! 누가 무섭대? 내가 당신한테
이렇게 무심했어 봐. 당신은 아주 멸치 볶듯이 날 볶아댔을 걸.'
    병원에 혼자 있는 동안 무척 속이 상했나 보다
   정박사는 아내한테 미안한 생각이 들어 따지고 말고 할 명분도
잃어버렸다. 그는 새색시처럼 뾰로퉁하게 토라져 있는 아내를 애
 처롭게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 .그만해. 그래, 돈은 있어? 낼 모레 퇴원인데.
   '살림하는 사람이 그만한 돈 없을까 봐."
   아내 음성도 한풀 꺾였다. 그녀는 아마 속으로 근덕에게 돈 뜯

긴 일이 무사히 넘어가서 다행이라고 생각할 터였다. 그래 놓고
도 며칠은 남편 볼 면목도 없는 여자처럼 기죽어 사는 게 아내의
여린 마음이었다.
   '그럼 됐어.'
   정박사는 부드럽게 아내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때 문이 열
리고 간호사가 약 봉지를 가져왔다.
   간호사가 건네준 약을 입에 넣으려던 인희씨가 문득 그 알약들
을 손바닥에 쏟았다. 그녀는 뭐가 이상한지 알약 수를 일일이 혜
아려 보는 것이었다.
   '이상하네. 빨간 약이 두 알 안 보이네?'
   항암제 빠진 걸 아내가 알아차린 것이다.
   '이거 내 약 아닌 것 같네.'
   '어디 보자.'
   정박사는 대충 짚이는 게 있었지만 아내가 손에 들고 있는 알

  약들을 확인해 보았다. 틀림없는 아내 약이다
    '이거 맞아. 당신 거야.'
     남편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믿던 인희씨가 이번만
 큼은 달랐다. 그녀는 도로 의자에 앉으려는 정박사를 밀쳐 내며
 침대에서 내려섰다.
    "바구어  와야 되겠네. 내 약 아니야, 이거."
    '앉아, 어딜 가!"
    '빨간 약이 항암제라며? 그게 안 들었는데 어떻게 내 약이야.
 아침나절까지만 해도 그 약을 먹었는데.,
    '맞아요. 그 약 있었어요.'
    어느 틈에 들어왈는지 근덕댁까지 아내 편을 들고 나섰다.
    정박사는 일순 뭐라고 표현해야 좋을지 모를 난처한 지경에 빠
 졌다. 매사에 까탈스럽지 않은 편인 아내가 유독 약 문제로 신경
 이 예민해져 있는 걸 보니 문득 가슴 한켠이 아렸다
    그는 뒤도 안 돌아보고 밖으로 나가려는 아내를 잡아끌며 부드
 럽게 달랬다
   '그 약 당신 약이야. 그거 먹어. 나 의사야. 내 말 믿구, 먹어."
   '아니라니까. 간호사들이 정신 없어서 약 잘못 줄 때가 얼마나
많은데... 그리구 내가 먹는 약을 내가 제일 잘 알지.~
   '내가 시켰어.'
    결국 정박사는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그는 도무지 영문을 몰
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는 아내를 향해 차분하게 설명했
다.
   '...당신 그 약 먹구 어제 힘들었다며?그래서 내가 주지 말라

 고 했어.'
    '미쳤나, 이 양반이? 그럼 그 주사약도 당신이 빼라 그랬어
    아내는 기가 막혀 말도 안 나온다는 표정이었다. 암 환자가 항
 암 주사 끊기고 치료약까지 빼앗겼으니 이게 무슨 병원인가 싶었
 을 것이다. 그녀는 침통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남편을 짜증스럽게
 흘겨보았다.
    '아무리 힘들어도  아픈 사람이 약을 먹어야 낫지. 의사란 양반
 이 도대체... 저리 가요, 약 타오게.'
    인희씨는 이내 복도로 나가 버렸다.
    환자가 오래되면 절반은 의사가 된다는베, 지금 아내는 의사보
다 더 옳은 말을 하고 있다. 정박사는 뒤통수를 크게 한 대 얻어
맞은 사람처럼 멍하니 아내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
   '저, 아가씨. 나 알지? 장박사님 환잔데... 그 양반이 내가 힘들
다고 여태 먹던 약을 뺏다네.'
   다짜고짜 너스 스테이션으로 달려간 인희씨는 아무나 붙잡고
설득을 시작했다
   간호사들은 서로 영문을 몰라 얼굴만 마주보고 있었다. 그러나
인희씨의 설명은 확신에 차 있었다.

   '왜 그 약 있잖아요? 빨간 캡슐에

                                                  든 거. 항암제. 나 그 약두

알 줘.
   "약이 취소됐는데요.'
   여지껏 한 번도 암이라는 단어를 자기 입에 올리지 않던 인희
씨였다. 그런 그녀가 차트판을 뒤적이고 있는 간호사에게 괜하게

미안한 표정까지 떠올리며 말하고 있었다. 인희씨는 약을 주기
 전에는 물러날 기세가 아니었다
   '알어, 우리 집 양반하구 장박사 그 양반하구 친군데... 나 힘
들다구 뺏대. 근데, 나 힘 안 드니까 그 약 줘, 응? 남자들이 괜하
 게 신경쓴다구 한다는 짓이 다 그렇지 뭐.... 그 중요한 약을 한때
라도 거르면 쓰겠어, 줘, 응?"
   인희씨의 말은 점점 애원투로 바뀌었다. 그런 인희씨를 보며
난감해 하는 간호사 뒤에서 몇몇은 저희들끼리 수군거리기도 했
다.
    정박사는 자신도 모르게 버럭 화를 내고 말았다.
   '그만 가!'
   소리 지르는 정박사보다 더 속이 상한 건 인희씨였다. 그녀는
명색이 원장 친구라는 남편이 역성은 들어 주지 못할망정 간호사
들 앞에서 무안까지 주는 게 야속했던지 팔을 거칠게 뿌리쳤다.
   '놔요! 정말, 왜 그래? 나는 말야, 한시가 급해 죽겠는데, 당신
은 시키지두 않은 괜한 짓을 하구. 정말 늙어갈수록 어째 그렇게
내 속을 썩여요. 하루라도 빨리 나아야 할 거 아냐 집에 가구
싶다구!'
   인희씨는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버럭 화를 냈다. 정작 할 말이
없어진 정박사는 땅이 꺼져라 한숨만 내쉬고 있었다.
   그때 마침 수간호사가 지나다 정박사를 알아보고 인사를 해 왔
다. 그녀는 인사를 했는데도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외면하는 정박
사의 모습에서 왼지 석연치 않은 느낌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무슨 일이세요?'

    수간호사가 정박사와 환자를 번갈아 보며 물었다.
    '어, 수간호사시구나. 우리 집 양반 알지?'
    ', 알죠.
    "그 약 있잖아. 빨간 알약, 나 그거 안 받았거든.
    '아, 네. 이젠 안 아프세요?'
    인희씨는 모처럼 자신을 알아봐 주는 사람이 나타나자 기가 사
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마치 든든한 백이라도 만난 것처럼 열심
 히 주변 사람들의 무지를 설명하고 있었다.
    수간호사가 대충 상황을 파악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
 지 않았다.
   '나 이제 안 아퍼. 그 약... 줄 거지?'
   '. 잠시 기다리세요.'
    수간호사는 선뜻 대답하고는 조제실로 들어갔다. 인희씨는 그
모습을 의기양양하게 쳐다보고  한껏 마음이 놓이는 눈치였다.
    잠시 후 수간호사가 조제실에서 모습을 드러내며 인희씨에게
빨간색 캡슐 두 알을 내밀었다
   '맞죠?
   "맞네. 고마워요.'
    인희씨는 반색을 하며 그 알약들을 소중히 받아들었다. 이어
그녀는 남편을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도도하게 병실로 들어 갔다.
   '영양제예요.'
   아내의 뒷모습을 멍청히 지켜보고 있는 정박사를 향해 수간호
사가 다소 민망해 하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머니의 퇴원을 하루 앞둔 날 저녁.
    연수는 정수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기로 마음먹었다. 지금껏
 숨겨 왔지만 계속 입을 다물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건 윤박사
 말대로 어머니를 위해서나 동생을 위해서나 옳은 일이 아니었다
   '웬일이야, 누나가 나한테 술을 다 사구?'
    약속 시간에 맞춰 호프집에 나타난 정수는 미리 와 기다리고
있던 누나를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하나.
    정수는 여지껏 어머니가 암이라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어머
니의 입원을 그저 간단한 산부인과 수술 때문이라고만 알고 있었
다. 막내라 그런지 그 정도로도 정수는 꽤 불안해 했었다. 그런
동생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얼마나 끔찍한 충격을 받을까. 연수
는 입을 열기도 전에 목이 메었다.
   '정수야,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 침착하게 들어.'

    연수는 빈 잔에 술을 채워 주며 동생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
았다.
   '무슨 말인데, 그래? 사람 긴장되네.'
    맥주 한 컵을 단숨에 비운 뒤 정수가 장난스레 물었다.
    나이 차이가 세 살 터울밖에 안 됐지만 동생은 아직 막내 티가
역력하다.
    연수는 벌써 맥주를 서너 잔 정도 마셨다. 술기운을 빌어서라
도 차분하게 말을 이어보려 했지만 취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다.
   '말해 봐. 누나, 뭐 고민 있어?'
   '그런 게 아니구.'
   '그럼 뭐야? 왜 표정이 그러냐구?'
   '정수야."
   '..엄마 얘기야?'
   '응?"
   정수 얼굴에서 장난기가 싹 가셨다
   '뭐야, 빨리 말해 봐.'
   연수는 잠시 고개를 떨구었다. 굳은 표정으로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동생의 시선을 마주보며 얘기할 엄두가 나지 않아서였
다.
   '대체 왜 그러는 거야, 응?'
   누나가 쉽게 입을 못 열자 정수는 이내 침착성을 잃어버린 모
습이었다. 맥주 두 잔을 거푸 마시며 그는 다소 불안하고 신경질
적인 눈길로 연수를 쳐다보았다.

   마침내 연수는 입을 열어야 했다.
   '잘 들어, 정수야. 엄마... 오래 못 사셔."
   '...그게,무슨 말이야?'
   연수는 놀란 정수의 얼굴을 보지 않은 채 남은 술을 들이켰다.
   '누나!"
   '암이야. 그것도 심한, 말기래.'
   '누가?'
   정수가 술잔을 소리나게 탁자에 내려놓으며 소리쳤다.
   '누가, 엄마가?'
   '응, 엄마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엄마 그거 간단한 수술이라며?
   술잔을 쥔 정수의 손이 부르르 떨리고 있다.
   연수는 정수의 손을 고통스럽게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나도 그런 줄 알았어, 정수야. 아버지가 처음 내게 엄마 얘길
했을 때만 해도 그렇게 심각한 줄은 몰랐어.'

  '그런데?
  "우리들 걱정할까 봐 아버지가 거짓말을 하신 거야."
  그런데?
 "그런데 엄마는 암이었고... 심각하셔.'
  갑자기 안색이 하얗게 질리며 정수가 벌떡 일어섰다
 '누가 그래, 엄마가 왜 죽어!'
 주위 사람들이 두 남매를 힐끗 쳐다보았다.
 정수는 주변의 눈길 따윈 무시한 채 악을 써대기 시작헷다.
 '넌 언제부터 안 거야? 누난 언제부터 안 거냐구!

                                                         나만... 나만
 모른 거야?'
    연수는 말없이 술잔만 응시하고 있었다.
    정수의 음성이 더욱 격렬해졌다.
   '그런 거야?
   "엄마두 몰라,'
    연수는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 무진 애를 써야만 했다. 그녀가
입술을 깨믈며 고개를 돌리는 순간, 정수는 후다닥 밖으로 뛰쳐
나가 버렸다.
   '정수야, 정수야!"
    다급해진 연수는 무작정 뛰어나가는 정수를 뒤따라가 허리를
잡고 매달렸다.
    정수는 주먹을 불끈 쥔 채 몸을 떨고 있었다. 연수는 기어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러면 안 돼. 정수야. 엄마 생각해서라도 이러지 마.'
   '놔!
   "이러라고 너한테 말한 거 아냐, 정수야!'
   정수가 뒤에서 껴안고 있는 누나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는 눈
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누나의 어깨를 잡고` 흔들어댔다.
   '넌 내 맘 몰라. 누난 재수도 안 하구, 일류 대학 나오구, 취직
도 해서 엄마 용돈도 줘 보구, 다 했지? 누난 다 해봤지? 난 뭐
야. 난 아무것도 못했잖아. 아무것도 해준 게 없잖아. 공부한답시
고 별 지랄 같은 유세 다 떨고, 맨날 술 처먹는 꼴만 보여 줬잖
아.'
   울먹이며 겨우겨우 말을 이어가던 정수는 마침내 몸부림을 치
기 시작했다. 그가 누나의 어깨를 뿌리치며 외쳤다.
   '난 이대로 못 보내 누난 보낼 수 있어도, 난 못 보내!'
   '이러지 마, 정수야!'
   연수는 밖으로 뛰쳐나가려는 정수를 붙잡고 늘어지며 애원했
다.
   '놔!'
   누나의 애원도 통하지 않았다. 정수는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
을 한사코 돌리며 몸부림을 쳤다.
   연수는 차라리 동생을 대신해서 통곡이라도 하고 싶었다
   '이러지 말자, 정수야. 이러지 말자."
   '이거 놔!
   "더 이상 엄마를 힘들게 하지 말자, 우리!"
   연수는 정수를 으스러져라 끌어안으며 절규했다.
   이윽고 정수는 길바닥에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왜, 왜 우리 엄마가 죽어야 한대, 왜?'
   연수는 땅바닥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울부짖는 정수를 끌어안
은 채 이를 악물었다. 정수의 어깨 너머로 푸른 가로등이 을씨년
스럽게 빛나고 있었다.
  ,신경쓸 거, 안 쓸 거 분간도 못하면서. 밉살맞은 영감태기, 마

누라 병문안 오면서 그 흔한 주스 한 병 안 사오고... 내 기운만
차려 봐라. 한번 호되게 들었다 놓을 테니까."
   이튿날, 인희씨는 잔뜩 골이 나서 투덜거리며 퇴원을 했다. 비
록 입으론 불평을 했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게 그래도 꽤 흡족한
모양인지 얼마쯤 기가 살아 있었다. 근덕댁과 연수의 차를 타고
집으로 오는 동안 인희씨는 간간이 희미한 미소를 떠올리곤 했
다. 정박사는 지금 집에서 노모를 돌보고 있을 터였다.
   인희씨가 집에 돌아오자 가장 반긴 사람은 다름아닌 상주댁이
었다. 상주댁은 그 동안 며느리가 도망간 줄만 알고 있었다. 그
 런 며느리가 난데없이 돌아오자 상주댁은 괜하게 달뜬 얼굴로 흥
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인희씨는 그런 시어머니와 놀아 줄 기운도 없이 집에
도착하자마자 깊은 잠에 빠져 버렸다.
   '나쁜 년! 이번에 또 도망가면, 내 다리 몽둥이를 분질러 버릴
테다!'
    상주댁은 며느리가 잠들어 있는 안방 문 앞을 단단히 지키고
앉아 눈빛을 번득이고 있었다. 그 동안 보이지 않았던 며느리가
야속하면서도 이렇게 돌아와 준 게 몹시 반가웠던지 성을 내는
눈빛에 얼마쯤 안도의 기색이 서려 있었다.
    정박사는 그런 노모의 모습을 씁쓸하게 바라보며 집을 나섰다.
아내가 그토록 소망하던 일산 새집이 완공되었다는 연락을 받고
 나서는 길이었다. 정박사는 연수의 차를 얻어타고 버스 정류장까
 지 갔다. 연수는 정박사를 내려놓고 곧 회사로 돌아갔다.
    일산행 버스 안에서 정박사는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들었다 바
쁘다는 핑계로 공사현장에도 찾아가 보지 않은 남편을 대신해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했을 아내를 생각하면 미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렇게 공들여 지은 집에서 살아 보지도 못하고 눈을 감
아야 할 운명이란 걸 그녀가 도대체 상상이나 했겠는가. 몇 년만,
딱 몇 년만, 아니 딱 몇 달만이라도 아내와 그 새집에서 살아 볼
수 있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정박사는 그데로 아내와 함께 죽어
도 여한이 없을 것 같았다.
   정박사는 현장 소장의 안내로 새집을 둘러보며 땅이 꺼져라 한
숨을 내쉬었다.
   사모님이 원하시는 대로 잘 나왔습니다. 워낙 찬찬하게 챙기
시는 분이시라 저희가 신경을 안 쓸 수가 없더군요.'
    현장 소장이 입에 발린 공치사를 늘어놓는 것 같진 않았다. 집
안팎 곳곳에 아내의 극성맞은 잔소리가 배어 있는 듯 모든 게 안
주인의 취향 그대로였다.
    집 구조는 말할 것도 없고, 창틀이며 바닥 공사에 이르기까지
허술하게 처리된 곳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었다. 실내는 가구
하나 없이 썰렁했지만 그런 대로 잘 정돈된 모습이었다.
    정박사는 텅 빈 거실을 가로질러 화장실 문을 열어 보았다. 정
 갈하게 깔아놓은 타일 바닥 색깔에 맞춰 욕조며 세면대 색상도
아내가 직접 고른 것이었다. 곧이어 그는 안방 문을 열어 보았다.
    새집 지으면 안방 창 쪽으로 커다란 베란다를 만들 거예요. 그곳
 에 꽃도 심고, 작은 테이블도 하나 들여놓을 거야. 당신이랑 가끔
 차도 마시고 꽃도 볼 겸. 아침 저녁으로 해도 보고, 달도 보고...
    아내 말대로 널따란 베란다가 만들어져 있었다.

    정박사는 그 앞에 가서 한동안 굳은 듯 서 있었다. 시야가 확
트인 베란다 밖으로 커다란 호수가 내려다보였다 모르긴 몰라도
이 창가에 서서 그녀는 몹시 설레이는 마음으로 미래를 설계했을
 것이다. 새로운 날, 새로운 시간들을 꿈꾸며 행복해 했을 것이다.
그녀는 종종 새집 이야기를 했다. 새집으로 이사가면 더 이상 욕
심 부리지 말고 변두리 보통 늙은이로 소박하게 옛이야기나 하며
 살아가자고 말했었다. 그런데, 그런데....
   부부가 나란히 저 호수를 내려다보며 도란도란 지난 애기나 하
며 살길 바랐던 그녀의 소박한 꿈은 이제 가망 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정박사는 문득 그 꿈을 이루지 못하는 아픔이 아내만큼 자신에
게도 절실하다는 것을 느꼈다. 아내는 죽으면 그만이지만 이 방
에 홀로 남아 저 호수를 내려다봐야 할 자신의 신세도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아내가 없으면 그림 같은 새집인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
썰렁한 공간만큼이나 처량해질 자신의 앞날이 눈에 보이는 듯했
다.
    집 바깥 여기저기에 공사가 끝나면서 미처 거둬 내지 못한 자
 재 부스러기와 쓰레기들이 굴러다닌다. 아내가 저 모습을 본다면
분명 눈살을 찌푸릴 터였다.
    정박사는 이내 밖으로 나가 그것들을 하나하나 골라 한쪽에 치
워 놓았다. 얼마 안 돼 보였는데 막상 일을 벌여 놓고 보니 만만
치가 않았다
   어느덧 해는 뉘엿뉘엿 기울어가는데 상레기는 아무리 치워도
끝이 없었다. 그는 웃옷을 벗어붙인 채 열심히 돌덩이, 자재 부
 스러기, 쓰레기들을 치웠다. 땀을 뺄뺄 흘리며 일을 하다 보니 육
체적으론 힘이 들어도 마음이 뿌듯해졌다.
   앞으로 한 달은, 아니 일 주일은, 하루는 이곳에서 살 수 있겠
 지. 쓰레기 더미를 다 치우고 다시 집 안으로 들어선 그는, 이번
엔 비와 걸레를 집어들었다. 아내를 위해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
으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여태껏 여자들이나 하는 일인 줄
알았던 집안 청소를 해주는 일이었다.
   그는 나중에 사람을 시켜도 될 일이라며 만류하는 현장 소장을
돌려보낸 뒤 화장실 청소까지 마저 해치웠다. 늘 화장실 바닥이
며 벽면 여기저기 할 것 없이 비누 거품을 묻힌 솔로 박박 문질
러 닦던 아내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는 평생 안 해보던 일을 있는
성의껏 흉내내고 있었다.
   그렇게 두어 시간이 흘렀다. 이윽고 대충 청소가 끝나자 집 안
이 그만하게 깨끗해졌다. 화장실 타일도 반들반들 윤이 났고, 욕
조며 세면대도 말끔했다. 정박사는 말끔해진 화장실에 선 채 가
만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거기 초로의 한 사내가 어색하게 담겨
있었다. 한동안 거울을 들여다보던 그는 문득 아내의 이름을 불
러보았다.
   '인희야....'
   얼마 만에 불러보는 아내 이름인가.
   거울 속의 사내가. 그리고 울고 있었다.
   '죽지 마, 인희야....
   사내는 거울 속에 담긴 사내를 마주보다 이내 고개를 꺾었다.

 타일 바닥으로 한두 방울 눈물이 떨어졌다

    밤늦게 파김치가 되어 대문을 들어서던 정박사는 마당 한 구석
에 서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아들과 마주쳤다.
   '아버지, 저 술 좀 사주세요.'
    정수는 이미 술이 거나하게 오른 모습이었다. 흐트러진 머리칼
을 쓸어넘기며 아버지를 바라보는 아들의 눈가에 얼핏 물기가 어
 렸다.
   정박사는 그 이유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저 아래 포장마차에 가 있어라. 내 곧 가마.'
    정수는 말없이 대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비틀거리는 아
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정박사의 표정은 착잡하기만 하다.
   '부자가 무슨 비밀 얘기가 있어서 밖에서 만난대?'
    집에 오기 무섭게 또 나갈 채비를 하는 남편을 인희씨는 힘없
이 바라보고 있다.
   정박사는 그녀가 이미 심한 육체적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
을 직감으로 알았다_ 벽에 기댄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얼굴에서도 병색이 완연하게 느껴졌다.
   '...어째, 나 자꾸 아프네. 여보, 다리며 팔이며 온몸에 괜한 멍
    군데군데 퍼렇게 멍이 든 다리를 내보이며 아내가 애처로운 눈
 길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거 봐. 부딪힌 데두 없는데....'
    정박사는 아내가 겁먹을까 두려워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진통제 먹어.'
   '먹어두 그래.'
   아내는 고통을 호소하기가 미안한지 고개를 떨군 채 손으로 방
바닥을 문질러대고 있다
    정박사는 애써 그 모습을 외면하며 달래듯 말을 이었다.
   '이따가 주사 맞자. 먹는 것보단 맞는 게 빨라. 금방 나갔다 올
   그는 아파도 엄살 한번 못해 보고 속으로 꿍꿍 참을 게 뻔한
를 보며 가슴이 미어지는 것만 같았다. 죽을 때 죽더라도 고
통이나 느끼지 못하면 마음이 덜 아플 것 같았다
   불행하게도 암이라는 몹쓸 병은 마지막 순간까지 환자를 쥐어
짜며 죽음에 이르게 한다. 환자가 틀어쥐고 있는 자기 목숨을 순
순히 내놓을 때까지 결코 그 지독한 공격을 늦추지 않는 게 암세
포라는 악마의 실체인 것이다.
   정박사는 극심한 무력감으로 다시 집을 나서야만 했다. 그는
아들이 기다리고 있는 포장마차를 향해 무거운 발길을 옮겼다.
    부자지간에 난생 처음 가져 보는 술자리였다. 정박사가 자리를
잡고 앉은 뒤 얼마쯤 시간이 흘렀다. 부쟈는 그 동안 어색한 모
양새로 서로 술을 따르고 받고 하며 두어 잔씩 마셨다.
   '아버지, 엄마 말이에요....'

   이윽고 정수가 퉁퉁 부은 눈으로 아버지를 바라보며 말문을 열
었다
    정박사는 묵묵히 그 눈을 응시했다.
   '아버지, 엄마가 제 대학 발표날까지만이라도 살게 해주실 순
없어요?'
    대학 합격자 발표가 나려면 아직 달포는 더 기다려야 한다. 정
박사로선 장담할 수 없는 기간이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애원
하는 아들 앞에서 죄인처럼 고개를 꺾고 말았다.
   '아버진 의사시잖아요. 안 되면.. 그래요, 식물인간 상태로라
도... 숨만 끊어지지 않게 해 주세요. 저 아버지 닮아 별루 욕심
없는 거 아시죠. 발표 날까지만, 그때까지만 어떻게 해 주세요.'
   정박사는 아들의 어떤 청에도 딱 부러지게 대답해 줄 수가 없
었다. 그런 아버지가 못마땅한 듯 정수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으
며 말을 이었다.
   '저요, 딱 한 번만이라도 엄말 기쁘게 해드리고 싶어요. 이대
로 돌아가시면요, 저 엄마 땅에 안 묻을 거예요.'
   정박사는 차마 아들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엉뚱한 곳만 바라보
고 있었다.
   '저 이번엔 자신 있어요.'
    정수가 이번에는 단언하듯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대학 들어갈 자신 있어요. 지난 번처럼 거짓말 아니에요. 이
번엔 확실해요. 지난 번 그 대학 커트라인 봤는데, 그것보다 제
 점수가 20점이나 더 나왔어요. 아버진 제 말이라면 콩으로 메주
를 쑨다 해도 안 믿으시지만, 이번엔 진짜예요.'
   '...그래.
   "정말이에요.'
   " 믿는다.
   정박사는 격앙되어 호소하듯 말하는 아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
여 주었다. 곧이어 정수가 고개를 떨구며 말을 이었다.
   '저, 대학 가면 아르바이트 할 거예요.'
   정수는 여전히 고개를 떨군 채 울먹이기 시작했다.
   술도 안 마시구, 공부두 열심히 할 거라구요. 장학금 받아 학
교 다닐 자신 있어요.'
   정박사는 아들의 기특한 결심에 고개를 끄덕이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 정수는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서는 한마디 말도 없이 그
저 고개만 끄덕이는 아버지의 태도가 영 불안하기만 했다. 정수
는 다시 다급한 목소리로 사정하기 시작했다.
   '아버지.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
   '정수야.
   "아버지, 전 엄말 이렇게 보내 드릴 수가 없어요. 너무 미안해
서, 미안해서 ... . 안 돼요. 이렇게는 안 돼요. 미안해서, 죄송해
서 안 돼요.'
    정박사는 서럽게 흐느껴 우는 아들의 머리를 가슴으로 와락 끌
어안았다. 내면 저 깊은 곳에서부터 끝없이 치밀어 오르는 눈물
을 정박사는 애써 삼키고 있었다.

    정박사는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아침 출근 시간에 맞춰 집을
 나섰다. 그는 병원을 그만뒀다는 사실을 누구한테도 말하지 않았
 다. 때맞춰 출근했다 돌아오는 그를 실직자라고 의심할 만큼 정
 신적으로 여유 있는 식구들도 없었다.
    연수는 다시 며칠 휴가를 내어 집안 일을 거들고 있었다. 어머
니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걸 안 이후로는 정수도 가급적 외출을
삼간 채 집에서 지내는 날이 많아졌다.
   아침에 병원으로 출근한 것처럼 나간 정박사는 하루 세 차례씩
꼬박꼬박 전화를 걸어 아내의 상태를 체크하곤 했다.
    겉보기엔 평온한 하루하루가 이어지고 있었다. 한낮이면 상주
댁은 으레 소파에서 고양이처럼 응크리고 낮잠을 자고, 인희씨는
그 옆에 오도카니 앉아 연수가 집안 일 거드는 걸 대견한 듯 바
라보았다. 그럴 때 정수는 주방 식탁이나 거실 창가쯤에서 애처
로운 눈길로 인희씨를 훔쳐보곤 했다. 인희씨는 기력이 떨어지긴
했으나 식구들 앞에서 표 나게 고통을 호소하는 경우가 거의 없
었다. 그래서 그런지 조금은 느슨한 가운데 평온한 집안 분위기
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낮에 장독대로 나갔던 근덕댁이 호들갑을 떨며 안으로 들어왔
다.
    '어머머머, 웃기네, 웃겨!'
    거실에서 다림질을 하고 있던 연수는 외숙모가 워낙 수다스러
워 그러려니 여기며 그대로 하던 일에 열중했다. 어머니가 하던
일을 맡아 하다 보니 연수는 새삼 집안 일에 대해 알아지는 게
있었다. 어머니 혼자서 언제 이 많은 일을 다 했나 싶을 정도로
빨래는 매일매일 쏟아져 나왔다. 잠시만 틈을 두면 설거지 그릇
이 한 가득 생겼고, 한 끼 한 끼 음식 장만하는 일도 보통 성가신
게 아니었다. 오늘 하루 다림질을 해 놓아야 할 옷만 해도 수북
하게 쌓여 있었다.
   '어머머! 안주인이 아프면 장맛부터 변한다더니, 이 한겨울에
 고추장이며 된장이며, 독한 간장까지 옴팡 하얗게 곰팡이가
일구... 말라붙은 구데기가 버글버글한 게 난리두 아니에요, 형
님!"
   그 소리에 인희씨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놀란 얼
굴로 근덕댁이 퍼 온 고추장 그릇을 들여다보았다.
   '무슨 말이야, 그게?'
   '이거 보세요. 내가 골라내구 골라내구 해서 퍼 온 건데, 맛이

완전히 갔어요.'
    인희씨는 근덕댁이 호들갑을 떨며 내미는 고추장을 손가락으
로 찍어 맛을 보았다. 고추장 그릇을 받아든 인희씨의 얼굴이 금
 세 울상이 되었다.
   '세상에, 세상에. 이게 웬일이야! 삼십여 년 동안 장 담그며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병원 가기 전에두 멀쩡했는데.... 뭔
일이래, 이게?'
    인희씨는 속상해서 혀를 끌끌 차며 장독대로 향했다.
    연수는 어머니의 뒷모습만 씁쓸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아픈 사
람 앞에 놓고 주책없이 호들갑을 떠는 외숙모를 탓하기보다는 그
속된 미신을 차라리 무시해 버리지 못하는 어머니가 더 가여웠
다.
    연수는 주방 식탁에 앉아 있다 굳은 표정으로 제 방으로 올라
가는 정수를 의식하며 묵묵히 다림질에 열중하고 있었다.
   '서리처럼 곰팡이가 하얗게 주저앉았어요, 형님. 정말이에요.'
    고추장 그릇을 탁자에 놓고 뒤쫓아온 근덕댁이 조심성 없이 내
뱉는 말엔 대꾸도 않고 인희씨는 먼저 된장독 뚜껑을 열었다. 밀
가루를 뒤집어쓴 것처럼 새하얀 장독 안을 들여다보며 그녀는 대
번에 눈이 휘둥그래졌다. 고추장 독을 열어 보아도 상황은 마찬
가지였다.
   '형님, 혹시 몸이 더 나빠지실 거 아네요? 안주인이 아프면 펄
펄 끓던 장도 순식간에 식는다는데.'
   근덕댁의 속없는 말 한마디에 인희씨는 잠시 멀미를 느킨 듯
아찔한 표정을 지었다.

   연수는 뒤에서 몰래 그 모습을 바라보며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인희씨는 무슨 불길한 징조라도 대하듯 장독 앞에서 한 발 뒤
로 물러서고 있었다
   '정말 희한한 일이죠. 형님?'
   근덕댁의 입방정은 거실에 들어와서도 계속되었다.
   연수는 못 들은 척 빨랫감을 챙겨 들고 안방으로 향했다. 뒤에
서 인희씨가 그녀를 불렀다.
   '연수야, 아버지 건 놔둬. 엄마가 할게.'
   '오늘은 제가 할게요.'
   안방에 들어와 보니 이부자리도 그대로였다 연수는 먼저 이불
부터 개서 장에 넣은 다음 작은 요와 이불을 꺼냈다. 어머니가
눕기 편하도록 한쪽에 이불을 깔아놓은 다음, 그녀는 옷장 문을
열었다.
   처음으로 눈여겨보는 어머니의 옷장.순간 그녀는 아찔한 충격
으로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반듯하게 다려진 형태로 켜켜이 쌓
여 있는 아버지의 와이셔츠, 장롱 옷걸이엔 역시 나름대로 모양
을 내서 걸어둔 옷가지들...
   연수는 천천히 아랫서랍을 열어 보았다. 칸마다 아버지의 속옷
이며 양말, 손수건 등이 눈이 부시도록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었
다. 그 꼼꼼하고 정성스런 모양새. 연수는 완벽하게 정돈되어 있
는 서랍 안이 무척 낯익었다.
   문짝에 나란히 매달려 있는 예닐곱 개의 넥타이 가운데 몇 개
는 매듭이 매어져 있다. 거기까지 보고난 후 그녀는 마침내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어머니의 방에도 그 여자가, 사진 속의 그 여자가 있었던 것이
 다.

   공교롭게도 그날 저녁 또다시 영석의 전화가 걸려왔다.
   그 동안 연수는 적당히 핑계를 대어 그를 피하고 있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그녀가 만나야 할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자 예전에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는 영석이 쉽게 미련을 버리지 못하
고 있었다.
   마침내 그가 집 앞에까지 와서 클랙션을 울렸다. 어쨌거나 연
수는 그를 언젠가는 한 번 만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영석은 말없이 한강변으로 차를 몰았다. 겨울 저녁의 한강은
 무척이나 을씨년스러웠다
   영석의 승용차가 한강변에 멎었을 때에도 두 사람은 한동안 말

이 없었다
   '어머니가 그렇게 안 좋으신지 정말 몰랐다. 알았다면 그날 무
슨 일이 있어도 나갔을 거야.'
   굳은 표정으로 담배를 피우던 영석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제
그의 담배 연기는 더 이상 푸르지 않다,
   '...우리 이제 그만 만나요.'
   영석의 눈빛이 곤혹스럽게 흔들리고 있다.
   연수는 어둠 저편으로 길게 누운 강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
녀는 시선을 거둬 영석을 보며 말을 이었다.
   '매 끼니마다 나랑 같이 밥 먹을 수 있어요? 내가 사준 넥타이

떳떳하게 맬 수 있나요? 컴컴한 비상구 말구 딴 데서 날 안을 수
있어요? 사람 많은 곳에서 두리번거리지 않고 나랑 나란히 서서
갈 수 있어요? 그럴 수 있어요?'
   남몰래 품어 온 욕심. 그 불문율의 금기사항을 그녀가 한 가지
씩 토해내고 있다. 그녀는 별로 떨리지도, 울음이 섞이지도 않은
단조로운 음성으로 덧붙였다.
   '사랑에도 공식이 있다는 걸 오늘 알았어요. 처녀는 총각을 만
날 것, 유부남은 가정만 알 것.'

                                    조용히 그를 바라보는 연수

  영석의 고개가 힘없이 기울어졌다
      연수
의 눈가에 한 방울 이슬이 맺혔다.
   '오늘 내 어머니한테서 당신 부인을 보았어요. ...나, 잘 살게
요. 좋은 남자 만나 우리 엄마처럼, 당신 부인처럼 착하게 살 거
예요. 남들에게 자랑할 수 있는 그런 사랑을 할 거예요. 내 남자
는 잠버릇이 이렇더라, 나 없이는 양말 한 짝 못 찾아 신고. 세수
를 할 때면 옷이 앞섶까지 젖더라, 난 그런 남자가 하루에도 열두
번씩 보고 싶더라....'
   영석은 그녀가 주문처럼 되뇌이는 말을 한마디씩 아프게 새긴
다. 그는 한숨을 내쉬듯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가 다시금 한
숨을 들이쉬듯 담배 연기를 들이마셨다.
   '널 조금만... 더... 일찍 만났더라면... 좋았을 걸...'
   끝내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모습으로 어렵게 입을 여는 영석을
향해 연수는 시린 가슴으로나마 따뜻하게 웃어 주었다. 는
이제 그를 웃으며 보내 줄 수 있다.
   '우리 인연이 이것밖엔 되지 않았어요.'

   십이월. 어디선가 아직 잎이 남아 있는 나무들이 바람에 몸을
뒤채고 있었다.
   연수는 강물을 볼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서로 마주보지 않고
작별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저 어둠처럼 자꾸 가라앉
 으려는 마음을 애써 다독거렸다.
   십 년이나 이십 년쯤 세월이 지나면 두 사람 다 오늘 이 강가
에 오길 잘 했다고, 그게 옳은 일이었다고 생각할 것이리라.
   한때는 우리 서로 사랑했으리. 비록 온전한 이름은 얻지 못했
으되 그 한 조각 사랑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웠을 청춘의 한때를
위하여 연수는 기꺼이 오늘의 아픈 선택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연수는 그렇게 청춘의 한 페이지를 넘기는 중이었다. 스물네
 살, 그 어줍은 첫사랑의....

         예년보다 조금 늦게 첫눈이 내렸고, 인희씨의 본격적인 통증이
      시작되었다.
         초저녁부터 속이 거북하다며 힘들어 하던 인희씨는 한밤중에
      화장실로 기어가다시피 했다. 구토가 시작된 것이다. 그 시간에
      식구들은 모두 잠들어 있었다.
         좌변기에 매달려 처음 헛구역질을 해대던 인희씨는 배 아래쪽
      에서 목구멍으로 치받쳐 오르는 통증과 함께 쓴물을 쏟아냈다.
      수술이 끝났고 항암제도 꾸준히 먹어 이제 별탈 없으리라 믿었던
      인희씨는 헛구역질 끝에 올라오는 노란 토사물을 보고는 와락 겁
     을 먹었다.
        '여보!'
         신음하는 인희씨의 입가에 피가 번지고 있었다. 화장실 바닥에
     주저앉아 힘없이 달싹거리는 입술 사이로 핏물이 뚝뚝 떨어져 목
     덜미를 타고 흘러내렸다_ 인희씨는 아직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

한 채였다.
   구토와 더불어 온몸을 관통하는 한기.그것만으로도 인희씨의
공포는 통증의 고통 이상이었다,
   '여보!'
   안방에서 자고 있던 정박사가 눈을 뜬 것은 새벽 두 시경이었
다. 그는 어디선가 나지막이 들려오는 신음소리에 얼핏 잠에서
깨어났다.
   '여보....'
   숨이 끊어질 듯 잦아드는 아내의 신음소리.
   정박사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사방을 두리번거렸지만 아내는
보이지 않는다. 소리가 나는 쪽은 화장실 방향이었다. 그는 후다
닥 방문을 열고 화장실로 향했다.
   주저앉아 몸을 숙인 채 등을 보이고 있는 아내가 바들바들 떨
고 있었다.
   정박사는 섬짓한 예감으로 잠시 감전된 듯 그 자리에 우뚝 멈
췄다. 이내 그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아내의 몸을 돌려 일으켜 세
웠다. 아내의 몸은 식은땀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괜찮아?'
   정박사가 떨리는 손길로 아내의 뺨을 어루만지려 할 때였다.
   쓰러질 듯 몸을 휘청이던 그녀가 '억' 하는 소리와 함께 핏덩
이를 토했다. 순식간에 사방으로 흰 핏물이 정박사의 손과 옷을
붉게 물들였다.
   '여보!"
   정박사는 마침내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이었다.

    피투성이가 된 얼굴을 남편의 가슴에 묻고 아내가 묻는다.
    '여보, 나 왜 이래, 수술했는데...... 나 왜 이래? 여보. .'
    아내는 사시나무 떨 듯 온몸을 떨고 있다.
    정박사는 아내를 부둥켜안고 하염없이 등을 쓸어 주었다. 이
 여자의 마음이, 몸이 이렇게 떨리는데도 자신이 지금 해줄 수 있
 는 일은 그저 등을 쓰다듬어 주는 일밖엔 없었다. 그러나 이 연
 약한 여자의 몸뚱아리를 갉아먹고 있는 고통은 그가 손바닥으로
 어루만져 준다고 해서 덜어지는 게 결코 아니었다.
   '여보, 나 왜 이래?'
    아내는 발을 동동 구르며 본능적으로 구원을 청하고 있다.
    정박사는 차라리 눈을 감은 채 이를 악물어야 했다. 아내의 눈
 빛에 서린 공포를 차마 볼 수가 없다.
    아내여! 내가 그 아픔을 대신할 수만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
면.... 정박사는 이 여자를 위해서라면 그 고통의 배의 배라도 대
신 감내할 용의가 있었다.
   아내는 바닥에 흥건한 피를 보고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놀라움과 공포로 뒤범벅이 된 아내의 얼굴을 보는
순간 정박사는 아내를 와락 끌어안았다.
   '나 죽나 봐, 그치! 썩, 안 낫나 봐, 그치?'
   인희씨는 한사코 고개를 들어 남편의 눈을 보려 한다. 그런 아
내의 눈을 남편은 또 한사코 외면하고 있다.
   '여보, 나 왜 이러니? 나 아퍼, 여보.'
   헛구역질에 놀라고, 으스스 휘몰아치는 한기에 놀라고, 입술
사이로 꾸역꾸역 쏟아져 내리는 핏덩어리에 놀란 아내가 이번엔

거울을 보고 넋이 나갔다.
   '된장 고추장이 다 썩었던데... 나 죽지? 나 죽는 거지?'
   마침내 그녀는 엉엉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죽어가는 늙은 여
자의 절규가 적막에 싸여 있는 집 안을 친친 감고 울려 퍼졌다.
그 바람에 자고 있던 두 남매가 각자 방에서 뛰쳐나와 아래층으
로 달려왔다.
   '엄마!"
   '정수야!"
   인희씨의 얼굴은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정수는 아버지 품에 안겨 울부짖던 어머니가 고개를 드는 순간
와락 달려들어 그 얼굴을 넋 나간 듯 더듬어 보았다. 손가락 마
디마디 핏물이 묻어나고 있었다.
   정수는 겁에 질린 채 어머니를 부르며 울음을 터뜨렸다.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연수는 어머니를 안은 채 짐승처럼 목울음을 토해내는 아버지
와 넋 나간 듯 울부짖고 있는 정수 뒤에 그저 망연자실한 모습으
로 서 있었다.
   눈물은 이제부터 시작될 고통에 비하면 아주 사소한 것일는지
도 모른다.
   밖에서는 여전히 첫눈이 내리고 있었다.
   첫눈은 영원히 죽지도, 새로 태어나지도 않는다. 내리는 눈은
늘 첫눈이다. 하여 영원히 변치 않는 것은 첫눈뿐이라고 어떤 시
인이 말했던가. 사람의 인생도 이와 같을 수만 있다면...


    인희씨는 서서히 자신의 목을 조여오고 있는 죽음의 그림자를
보았다
   아무도 그녀에게 죽음을 말하지는 않았다. 그녀가 본 죽음의
그림자는, 그녀의 목숨이 본능으로 가지고 있는 어떤 예감과도
같은 것이었다.
   한낮에 정원 의자에 앉아 잠시 잠깐 인색하게 내리쬐는 겨울
햇빛을 쏘이고 있자면, 인희씨는 시시각각 흐려 오는 제 목숨의
그림자가 느껴졌다. 깊은 밤 잠자리에 누워 있을 때에도 먼 데서
끊임없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누군가의 속삭임이 들려오는 듯
했다.
   처음 그것은 징그럽고 불유쾌한 유혹이었다.보지 않으려 해도
눈에 들어오는 손짓. 듣지 않으려 귀를 막아도 그것은 은밀한 속
삭임으로, 역한 기운으로, 혹은 거부할 수 없는 몸짓으로 이미 그
녀 곁에 와 있었다.

    손으로도 그것을 만질 수 있었다. 가만히 앉아 있다가도 컥컥
숨이 막혀 와 정신 없이 화장실로 달려가면 이윽고 목구멍을 타
고 넘어오는 붉은 피! 온몸을 찢어발길 듯 엄습하는 잦은 통증.
 전생을 되짚어 통틀어도 이렇게 심하게 아픈 적은 없었던 것 같
았다. 순간순간 만져지는 모든 것들이 이미 그녀를 이승에서 저
 강 너머로 밀어내고 있었다.
    추적추적 겨울비라도 네리는 밤이면 검은 망토를 걸친 사내가
 창가에 와서 똑똑 문을 두드리는 것만 같았다: 사방에서 죽음은
어서 오라 손짓을 하고 있는데, 그녀는 아직 떠날 준비가 되어 있
지 않다. 그리하여 매일 반복되는 엄청난 통증과 악몽이 밤낮으
로 그녀의 영혼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었다.
   하루 종일 미동도 없이 꼬박 창가에 앉아 정성 들여 가꾼 화분
들을 들여다보고 난 어느 날이었다.
   뿌리가 잘린 꽃처럼 점점 시들어가는 인희씨의 얼굴에 모처럼
단아한 빛이 떠올랐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집 안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오랜
세월 객지를 떠돌다 이제 마악 집에 도착한 여인처럼, 인희씨는
그립고 사무치는 눈빛으로 집 안 구석구석을 오래도록 살펴보았
다. 그러다가 문득 안방으로 향했다. 느릿느릿, 전혀 서두르지도
않는 걸음이었다.
   방 안에서 그녀가 맨 처음 눈여겨본 것은 시집올 때 가져온 자
개장롱이었다. 세월의 더께로 인해 이미 낡고 초라해진 장롱은
그래도 안방에선 가장 귀하고 소중한 물건이었다.
   새집으로 이사가면 바꾸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그냥 가져가는

 게 좋지 싶다. 내가 죽더라도 저 장롱이나마 남아서..-. 그러다 문
 득 그녀는 고개를 젓는다. 이젠 내 몫이 아니다. 산 자의 인생이
 고 산 자의 몫이다, 저 자개장롱이든 무엇이든 남은 사람들이 알
 아서 할 일이다. 새집 안방에 다시 틀고 앉든 말든, 내 죽은 육신
 태울 불쏘시깨가 되든 말든.
    그올는 장롱한테 미안한 생각마저 들어 한참 눈을 떼지 못한
 다.
    서랍 안에는 삼십 년 동안 살 비비며 살아온 남편의 옷가지들.
 살다 보니 그것들이 남편의 체온보다 더 자주 그녀의 손길을 타
곤 했다.
    젊어서는 왼지 손님처럼 어렵고 낮설기만 하던 남편이었기에
속상한 일이 있어도 말도 못하고 야속한 심사를 옷가지에 대고
 넋두리하던 날이 많았다.
    다듬이 방망이로 빨랫감들을 두들겨가며, 조물조물 양말짝들을
주물러가며, 때 킨 와이셔츠를 솔로 박박 문질러가며 속으로 얼
마나 많은 푸념들을 늘어놓았던가.
   그 아슴한 세월의 저편 어딘가 아직도 빨랫줄에 걸려 펄럭이고
있을 젊은 날의 고단한 기억들.
   인희씨는 이제 그 기억들이 하나도 아프지 않다. 흘러간 영화
의 한 장면처럼 슬프고 아름다운, 그래서 그저 한 번쯤은 다시 돌
아가도 좋을 추억만이 그녀를 목 메이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문갑 속에는 힘들었지만 보람도 적지 않았던 살림의
기록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마치 그녀의 보물창고 같은 것이
다. 삼십 년 동안 꼼꼼히 적은 가계부만 해도 수십 권. 어떤 것은

너무 낡아서 귀퉁이가 헤진 것도 있지만, 한 집안의 역사가 빠짐
없이 기록되어 있는 안쪽은 대부분 멀쩡한 상태였다.
   남편한테 첫 월급을 받아본 게 언제였더라. 처음 몇 권을 들춰
보아도 목돈을 받아쓴 기록은 나와 있지 않다. 시댁 식구들 제사
며, 생신, 챙겨야 할 경조사 따위들로만 대부분 채워진 가계부들
이 거의 열 권 남짓이나 되었다.
   며느리가 들어온 지 십 년이 지나도록 시어머니는 경제권을 넘
겨 주지 않았다. 그런 시어머니한테 남편의 월급을 쪼개 받으며
살아야 했던 세월의 흔적이 거기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이다.
   그 외 드문드문 차입금이 적혀 있거나 지불해야 할 이자에 대
한 기록. 알푼달푼 모아 적금 탄 일, 시어머니 환갑 잔치 해드린
일, 시아버지 묘소에 상석 세운 일, 연수 치아 교정해 준 일, 정수
간염 치료한 일, 집들이 음식 장만한 일, 도배 새로 한 일, 남편
양복 맞춰 입히고 연수 입학식 간 일, 은행에서 대출받은 일....
그런 소소한 기록들이 담겨 있는 가계부는 그 전 것들보다 몇 배
더 반들반들 귀가 닳아 있다. 거기서부터가 직접 살림을 맡아 살
아온 세월이었다.
   인희씨는 방바닥에 가계부며 통장, 잡다한 서류들을 다 꺼내
놓고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이윽고 그녀는 그 중 몇 가지를 챙겨
문갑 속에 따로 보관해 놓고 남은 것들을 하나하나 정리해 나가
기 시작했다.
   '형님, 뭘 그렇게 들여다보고 계세요?'
   근덕댁이 문을 빼꼼 열고 들어왔다.
   계속되는 병간호에 지치기도 했으련만 그녀는 항상 다람쥐처

 럼 손발이 빠르고 호기심도 많다.
    인희씨는 요 며칠 그녀가 남몰래 화장실에서 찔찔 짜곤 한다는
 걸 눈치로 알고 있다 천성이 쾌활하다 보니 우거지상으로 지내
 는 날은 거의 없지만, 그래도 요즘 들어 시누이 걱정으로 몹시
 풀이 죽어 있는 건 사실이다. 어디 시누이 걱정뿐이랴. 팔珍출이
 제 남편 때문에 속도 어지간히 썩어 지낼 터였다.
    '마침 잘 왔어. 이리와 앉아.'
    근덕댁은 막상 제 발로 걸어 들어왔으면서도 앉으라는 말에는
쭈뻣거리며 눈치를 본다. 누가 정색을 하는 데에는 영 익숙해지
 지 않는 주변머리가 그녀를 자꾸 어리숙하게 만드는 것이다
    인희씨는 그런 올케를 부드럽게 바라보며 반쯤 접은 노란 봉투
를 하나 건네주었다.
   '이거 가지고 집에 가."
   '왜요? 제가 뭘 잘못했어요?"
    한사코 그 봉투를 받지 않으려 손사래를 치면서 근덕댁은 울상
을 지었다. 시누이가 뭔가 단단히 오해를 해서 자신을 내보내려
는 줄 착각한 것이다.
   인희씨는 근덕댁이 질색을 하는 이유를 훤히 꿰뚫고 타이르듯
입을 열었다.
   '근댁이 놔두구 여기서 살 거야?'
   '요즘은 들어오지두 않아요.'
   "집에 가. 밀린 일이 태산일 텐데....'
   그 말엔 근덕댁도 더 고집을 피우지 않았다. 사실 그녀도 집
걱정으로 심란할 때가 있긴 했던 것이다.

    대신 근덕댁은 시누이가 내민 봉투를 슬그머니 앞쪽으로 밀어
놓았다.
    '간호비라면 싫어요.'
    '나 돈 없어. 돈 아니야. 뭔지는 집에 가서 보구, 어여 가지구
가."
    '제가 있으면 밥이라두 하는데...."
    근덕댁은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듯 코를 훌쩍이기 시작했
다. 워낙 정이 많은 데다 친언니처럼 따르던 시누이를 병석에 두
고 가려니 마음이 아픈 것이다.
    인희씨로서는 그 모든 걸 이해하기 때문에 더더욱 올케를 돌려
보내야만 했다
    '나, 연수가 지어 주는 밥 먹을래."
    '형님 옆에 있고 싶은데...."
    '귀찮어. 내 옆에 사람 많어."
    근덕댁은 자꾸 운다.
    조심성 없이 함부로 지껄이고, 시도때도 없이 눈물도 많고, 거
꾸로 웃기도 잘 하는 푼수데기였지만 속정은 무척 깊은 여자였
다.
    인희씨는 착한 올케를 촉촉한 눈길로 바라보며 마지막 당부의
말을 잊지 않았다.
   '꼭 우리 근덕이 옆에 있어. 그놈이 뭐라고 해도 어디 가지 말
구, 꼭 옆에 있어. 제 놈이 지금 힘이 넘쳐 빽빽대긴 해두 늙어
봐. 올케한테 미안한 거 알구 잘할 걸. 어머니 일찍 돌아가시구
내가 업어 키운 애야. 걔가 부모 일찍 여의고 정을 못 받고 자라

그렇지, 본성은 나쁜 애가 아니야."
   "...아,알아요.'
   "울지 마,다 큰 사람이."
   인희씨는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는 올케 손에 다시 노란 봉투
를 쥐어 주었다
   '그리고 이거, 근덕이하고 올케만 아는 거야. 아무한테도 말하
지 마.'
   근덕댁이 영문을 몰라 두 눈을 꿈벅거렸다
   인희씨는 이제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더 늦기 전에 어여 가. 나 피곤해서 눕고 싶어.'
   인희씨가 손짓을 하자 근덕댁은 석연 찮은 표정으로 자리를 떴
다.
   그녀가 방문을 닫고 나간 뒤에도 한동안 시선을 거두지 못하던
인희씨는 조용히 쓰러지듯 방바닥에 누웠다.
   어디선가 그 알 수 없는 속삭임이 다시 들려오는 것 같았다.
땅속 깊은 곳에선 듯 하늘 밖에선 듯 아련하게 들려오는 그 소리
는 분명 자신의 이름 석 자를 부르고 있었다
   인희씨는 이제 그 소리가 무섭지 않다. 오래된 친구처럼 친밀
하게도 느껴진다 죽음은 이제 피할 수 없는 그녀의 동반자였다.

   모처럼 재수 좋은 날이다.
   근덕은 두둑해진 주머니를 한 번 만져 보고는 입이 째져라 호
탕하게 웃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밤중에 웬 미친놈이 저러나 수상한 눈길로
힐끔거렸다. 그게 뭐 대수냐, 내 기분이 좋으면 장땡이지.
   근덕은 휘파람까지 획획 불어제치며 산동네 가파른 골목길을
한달음에 오르는 중이었다.
   노름판에서 돈을 따보기는 몇 개월 만에 처음이었다.
   그 동안 갖다 바친 돈만 해도 얼마였던가. 까짓 잃은 돈이야
술먹고 없앴다고 생각하면 그만이고, 이제 목돈도 들어왔으니 한
몇 달 마음잡고 착실히 살아 볼까 싶기도 했다.
   한 번 해본 생각이긴 해도 그나마 자신이 기특할 정도로 건전
해졌을 땐 꼭 돈을 손에 쥐었을 때뿐이었다. 돈이 궁할 땐 어떻
게든 빨리 돈을 변통해 노름판으로 달려가야지 하는 생각뿐이었

 고, 목돈이 좀 생기면 잠시 잠깐 이제 좀 사람답게 살아 볼까 하
 고 제법 멀쩡한 생각도 해보는 것이다. 그러나 의지가 약한 사람
 이 죄 그렇듯 쉽게 번 돈이라고 흥청망청 날리다 보면 며칠 못
 가 기어이 노름판을 기웃거리고 마는 게 근덕의 어쩔 수 없는 버
 릇이자 약점이었다.
    어쨌거나 기분이 잔뜩 좋아진 근덕은 호기롭게 대문을 활짝 열
었다.
    방 안에 불이 켜져 있는 걸 보니 아내가 돌아온 모양이었다.
그는 아무렇게나 벗어 던진 아내의 낡은 구두 뒤축을 힐끗 보며
이 참에 옷이라도 한 벌 쫙 뽑아 입혀야겠다 마음먹었다.
    성질이 수다스럽고 종알종알 바가지 긁는 덴 선수였지만. 그래
도 저만큼 무던한 여편네도 없었다.
   근덕은 아내를 놀래 줄 심산으로 소리 없이 마루로 올라가 방
문-을 벌컥 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아내는 무슨 까닭인지 벽에 등을 기댄 채 곡절 많은 여자처럼
징징 울고 있는 게 아닌가.
   '너, 왜 울어? 서방 죽었냐, 왜 울고 지랄이야?'
   근덕은 청승맞게 울고 있는 아내를 내려다보며 웃옷을 아무렇
게나 벗어 던졌다. 기껏 기분이 좋아서 모처럼 잘해 주려고 했더
니 그 꼴을 보자 버럭 짜증이 나 버린 것이다.

   그러다가 또 금세 마음이 풀어진 근덕은 바지춤에서 돈
뭉치를 꺼내 보이며 아내를 웃겨 보려고 했다.

  '야, 너 이만한 돈 봤냐? 못 봤지?'
  그러나 여전히 아내는 눈물을 그치지 않는다. 그녀는 무슨 서


류 하나를 손에 펴 들고 말없이 울고 있었는데, 그 꼴이 꼭 넋 나
간 여편네 같았다.
   근덕은 돈 뭉치를 좀더 확실히 보여 주려고 몸을 굽혀 그녀의
어깨를 자기 쪽으로 돌려 세웠다.
   '야, 이거 돈이라니까... 돈 주는데 싫어?"
   근덕은 순간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넋 나간 듯 눈물을 줄줄 흘리던 아내 눈에서 순간적으로 불길
이 이는 것 같았다, 그것도 찰나였다. 그 불길은 그녀의 눈에서
코로, 양볼로, 입술로, 얼굴 전체로 퍼지더니, 이내 성난 암사자
처럼 변하는 것이었다. 표정만 그런 게 아니었다.
   근덕은 순식간에 맹수로 돌변한 아내가 으르렁거리며 달려드
는 통에 팔뚝을 냅다 물어뜯기고 말았다.
   '아악!'
   다급해진 근덕은 비명을 지르며 아내의 등짝을 세차게 후려갈
겼다.
   그래도 아내는 근덕의 팔뚝에서 얼굴을 띠지 않았다. 어찌나
억세게 물어뜯겼던지 팔뚝이 다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이게 미쳤나. 놔, 아퍼, 이년아!'
   근덕은 소리소리 고함을 치며 아내를 떼어내려고 안간힙을 썼
다.
   워낙에 억세고 근력 좋은 여자라서 여간해선 팔뚝을 놓아 줄
기세가 아니었다.
   근덕은 죽자고 달려드는 아내를 있는 힘을 다해 주먹으로 후려
쳤다. 그제야 아내는 제풀에 지쳐 방구석으로 나동그라지는 것이

었다.
   '너 돌았니? 왜 그래, 엉?'
    근덕의 팔뚝에서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얼마나 세게 물었던지
아직도 정신이 얼얼할 정도로 물린 자리가 욱신거렸다.
    근덕은 물린 팔을 한쪽 손으로 감싸 쥐며 아내를 험악한 눈으
로 노려보았다.
   '그래, 나 미쳤다. 미쳤어, 이 인간아!"
    여자 눈에 핏발이 서렸다
    근덕은 그 앙칼지고 표독스런 눈매에 진저리를 쳤다. 지금까지
 살을 맞대고 살아왔지만 저토록 매서운 눈빛은 처음 보는 것이었
다.
    아무리 남편이 미워도 그렇지 세상에 무슨 원수가 졌다고 이
여자가 저런 눈으로 사람을 볼까 생각하니. 근덕은 아닌 게 아니
라 좀 이상한 생각이 들기는 했다.
    잡아먹을 듯이 남편을 노려보던 아내가 씩씩대며 손에 들고 있
던 종잇조각을 그에게 내던졌다.
    '그게 뭔지나 알어?'
    근덕은 하도 기막힌 꼴을 당한 직후라 어안이 벙벙해진 상태였
다. 그는 꼭 귀신에 흘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여지껏 부부싸움도 숱하게 했었다. 하지만 아내가 지금처럼 길
 길이 날뛰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하다못해 오입질을 하다 들켰
을 때에도 저렇게 악착같이 덤벼들진 않았던 것이다.
    근덕은 멍청하게 서서 아내가 던져 준 서류를 펼쳐 보았다.
    '이게 뭐야?"

   어디서 빚 독촉이라도 온 줄만 알았던 근덕은 또 한번 얼떨떨
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펴 보니 생명보험 증서였던 것이다. 그
것도 가입자가 김인희, 누나 이름으로 된 생명보험 증서였다.
   '니 누나 곧 죽는대....'
   보험증서를 쥔 근덕의 손이 약간 떨리고 있었다. 그는 멍하니
아내가 악을 쓰는 모습만 바라보고 있다.
   '그거, 니 누나가 자기 죽으면 너한테 줄려고 식구들 몰래 들
어놓은 거래! 알어? 이 나쁜 인간아! ...행여, 행여 니가 그 맘 알
겠다, 행여 니가 알겠어? 너 같은 인간이 뭘 알어?'
   근덕은 입을 쩍 벌린 채 꼼짝 않고 서 있기만 했다.
   악에 받친 아내가 빗자루를 들어 사정없이 남편의등짝을 두들
겨팻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그 자리에 못박인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것두 갖다 도박해라! 그것도 갖다 도박하라구, 이 인간아!
그것도 갖다 기집질해, 이 인간아! 너 이제 어떻게 살래! 평생 누
나 등골 빼먹고 살다, 이제 어떻게 살래... 어떻게 살래!'
   근덕은 아내가 엉엉 울며 악담을 퍼붓는 데도 그 소리가 귓가
에 들어오지 않는다.
   남편을 두들겨 패다 지친 그녀가 땅바닥에 퍼질러 앉아 발버둥
을 치는 모습도 그에겐 잘 보이지 않는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처음으로 그는 뜨거운 눈물을 삼키고 있었
다 그 눈물이 눈을 흐리게 하고, 그 눈물이 귀를 멀게 했다.
   누나가 죽을 줄은 몰랐다 설마 그 산처럼 든든하던 누나가 죽
을 줄은 몰랐다. 누나는 평생 그의 어머니였고. 평생 아무때나

대문이 열려 있는 고향 집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런 누나가 죽다니, 죽다니.... 지난 번에 갔을 때 그 악담만
안 했더라도 이렇듯 마음이 쓰리진 않았을 것을. 천하에 불상놈
같이 그 모진 악담만 안 했더라도....
   잊고 있었던 눈물이 한 줄기 그의 가슴을 적시는가 싶더니 이
내 물꼬가 터진 듯 흘러나왔다. 그가 입을 다물지 못하는 건, 그
가 꼼짝도 못하고 선 채로 돌처럼 굳어 있는 건 도저히 주체할
수 없는 그 눈물 탓이었다.


    며칠 이상한 침묵이 집안을 싸고 돌았다.
   인희씨는 여전히 아팠고, 하루에도 몇 번씩 피를 토했다. 어느
땐 좌변기를 붙잡고 죽은 듯 쓰러져 있기도 했다.
   연수는 시체처럼 늘어진 채 아버지 품에 안겨 안방으로 들어가
는 어머니의 창백한 얼굴을 여러 차례 목격하였다. 그럴 때마다
정작 연수가 숨이 막히는 건 어머니를 품에 안고 있는 아버지의
막막한 표정 때문이었다.
   인희씨는 통증이 와도 전처럼 놀라거나 울부짖지는 않았다. 그
저 식구들 모르게 화장실에서 오래 헛구역질을 해대고, 그러다가
쓰러져 잠드는 게 인희씨의 하루 일과였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인
희씨의 사투를 식구들 모두 참담한 침묵으로 지켜보는 동안 여러
날이 지났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연수는 아침 밥을 하려고  아래층으로 내려오다 깜짝 놀랐다.

이 른 시간인데도 거실 커튼이 활짝 열려 있었고 주방에선 귀에 익
 은 도마 소리가 들려왔다. 연수는 황급히 주방으로 향했다
    '놔두세요. 제가 할 테니 쉬세요.'
    연수는 어머니의 손에 들려 있는 칼을 빼앗으려 했다.
    인희씨는 벌써 쌀을 씻어 밥을 안친 뒤 호박이며 감자, 대파
 등속을 가지런히 다듬어 놓고 있는 중이었다.
    '다쳐, 엄마가 할게.'
    인희씨는 연수가 못미더운 듯 칼을 내주지 않았다.
    '제가 할게요.'
    연수는 어머니의 손목을 잡았다. 그러자 인희씨가 버럭 짜증을
내는 것이었다.
   '놔 둬라. 내가 벌써 송장 됐어? 왜 다들 사람 움직이는 걸 못
봐?
   "힘드시잖아요.'
   '이 정도는 할 수 있어.'
    연수는 어머니의 고집에 더 어쩌지 못하고 식탁으로 가 앉았
다.
   인희씨는 그 말씨며 태도가 병 나기 전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솜씨 있게 도마질을 하며 인희씨가 물었다.
   '일 안 나가?"
   '오늘 잠깐 나가 봐야 해요,"
   '일 나가. 일 다 그만두고 나 죽기 기다렸다, 나 죽으면 손가락
빨고 살 거야?'
   연수는 오늘 그 동안의 결근계에 이어 아예 휴직계까지 내려던

참이었다.
   연수는 어머니에게 이렇다 할 대답도 못하고 식탁에 앉아 물컵
만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된장찌개엔 꼭 쌀뜨물 쓰고, 처음 끓일 때부터 호박
넣으라구 몇 번을 말하니? 다 끓은 뒤 넣으면 서걱서걱한 게 그
게 무슨 맛이 있어? 모양 내다 맛 버려. 된장도 하나 제대로 못
찌지구 어떻게 시집을 갈라는지. .."
   예전에 연수가 간혹 주방일을 거들 때마다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듣던 잔소리였다.
   인희씨는 냄비에 재료들을 쓸어넣은 뒤 가스레인지 불을 올렸
다. 그런 다음에 손을 씻고 앞치마를 벗어 있던 자리에 걸어놓은
뒤 안방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안방에선 정박사가 이불을 개고 있었다. 평소 때 같으면 어림
도 없는 서비스였다. 정박사는 이불을 개서 장롱에 넣으려다 문
을 열고 들어서는 아내를 보며 다소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잘 하면서 왜 진작 안 했누?'
   정박사는 별 표정 없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니 의자에 앉자 습관처럼 담배를 꺼내 물었다.

   '빈 속에 그 누무 담배는?'
   아내의 걱정 섞인 잔소리도 요즘 들어선 꽤 오랜만인 것 같다.
   며칠 그녀는 옆에서 누가 담배를 피우거나 말거나 의식도 못하
는 것 같았었다, 그래서 정박사는 모처럼 기운을 차린 듯한 아내
의 잔소리가 외려 반갑게 들렸다.
    정박사는 담배를 들고 밖으로 나가려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인희씨가 퉁명스레 바짓가랑이를 잡아당기며 그를 만류했다
   '그냥 피워요.'
   정박사는 도로 주저앉아 담배를 한쪽으로 밀어놓았다.
   그러는 동안 인희씨는 무릎걸음으로 문갑 쪽으로 다가가 서류
들이 가득 든 상자 하나를 꺼냈다. 그녀는 그것을 들고 다시 무
릎걸음으로 다가와 정박사 쪽으로 밀어놓았다. 그리고는 볼멘소
리로 설명했다.
   '통장이랑 집문서, 땅문서, 보험, 뭐 그런 거예요.'
   정박사는 이마를 찌푸리며 한쪽에 치워 놓았던 담배를 다시 꺼
내 물었다.
   인희씨는 그런 남편을 보지 않고 여전히 볼멘소리를 했다.
   '대충 보니까, 당신 언제 죽을랑가는 몰라도 아껴 쓰면 죽을
때까지는 쓰겠대. 당신은 좋겠수, 부자라."
    거기까지 말하고는 이내 짜증이 나는지 목청을 다소 높였다.
   '거기 노란 통장은 연수 시집 보낼 거고, 흰 통장은 정수 거니
까 애저녁에 손댈 생각 말구요.'
    정박사는 아내가 가리키는 통장도, 아내 얼굴도 보지 않고 한
숨처럼 내뱉었다.
   '당신이 가지고 있어.'
   '그만둬요."
   인희씨는 단호하게 정박사의 말을 묵살하며 옆으로 틀어 앉았
던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리고 남편을 똑바로 응시하며 짜증스
럽게 덧붙였다.
   내가 뭐 당신 이뻐서 주는 줄 알아요? 나 죽고 나서 통장 어

딨나, 울지도 않고 자식 새끼들 앞세워 찾아나설까 봐 주는 거예
요. 그 꼴 보기 싫어서.'
   '안 그럴 테니 넣어 둬.'
   '그럴지 안 그럴지 어떻게 알어.'
   정박사는 이런 식으로 죽음을 준비하는 아내의 모습이 측은한
한편 그만하게 이해가 되기도 했다. 그녀는 일견 짜증을 내고 있
지만 그건 결국 슬픔의 또 다른 표현 방식이란 걸 정박사는 알고
있었다. 그는 무겁게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희씨는 남편을 바라보며 무척 속상한 듯 인상을 찌푸렸다.
   언제 시간 있을 때 나 일산 좀 데리고 가요."
   정박사는 그 말에 선뜻 대답해 줄 수가 없었다. 안 그래도 정
박사는 요즘 매일 일산으로 출퇴근하다시피 하는 중이었다.
그 동안 가구도 들여놓고 집 정리를 하긴 했는데, 도저히 아내를 데
리고 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과거에 그 집은 아내에게 희망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 집은 아
내의 죽을 자리인 것이다.
   '...집이 얼추 다 됐을 텐데.'
   인희씨가 눈치를 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정박사는 말없이 방을 나왔다. 뒤에서 화가 나서 투덜거리는
아내의 음성이 들려왔다.
   '으이구. 저 주변머리. 죽은 사람 소원두 들어 준다는데, 그게
뭐 큰 소원이라구, 말을 안 한대. 으이구, 속 터져!'
   정박사는 거실 소파에 앉아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아내 소원대로 해주자. 직장엔 며칠 휴가계를 냈다고 둘러대고

 내일이라도 당장 일산으로 가자...
    그는 마음속으로 결심을 굳히고 있었다.
    어쩌면 매일 아침 출근하는 척하고 집을 나서는 것도 못할 짓
 이었다. 그에게도 나름대로 소원이 있다면 이 참에 아내와 단둘
 이서 오붓한 시간을 갖고, 변변찮으나마 손수 밥이라도 한 끼 지
 어 아내에게 먹이고 싶었다, 그다지 모양새가 잘 갖춰진 건 아니
 지만, 어쨌든 직장에 갈 일도 없고 시간은 얼마든지 낼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정박사는 그 동안 아내가 걱정할까 봐 사실대로 털어
 놓지 못하고 금쪽 같은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다. 휴가계를 생각
 해 내지 못한 건 아내가 말한 그대로 자신의 주변머리 없는 성격
때문이었다
   '아버지, 식사하세요. 출근하셔야죠.'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정박사는 연수가 부르는 소리에 주방
쪽으로 향했다.
   처남댁이 살림을 해줄 땐 밥 먹을 때마다 미안한 마음이 들어
편치 않더니 연수가 집안 일을 꼼꼼히 처리하는 모습을 보니 기
특하기만 했다.
   정박사가 주방으로 들어가자 아내는 노모에게 가져갈 밥상을
챙기고 있었다.
   '제가 해도 되는데요."
   연수가 머뭇거리며 쟁반을 건네 주었다.
   '넌 밥이나 먹어. 나야 급할 거 하나 없으니까.
   연수는 예사롭게 핀잔하며 주방을 나서는 어머니를 걱정스럽

게 바라보았다

   '아이구 추워라."
   상주댁은 춥다며 이불을 뒤집어쓴 채 마른  식사를 하고 있었
다.
   인희씨는 그 모습이 안쓰럽기만 했다.
   날씨가 더 추워지기 전에 집을 옮겨야 하는데 지금 살고 있는
집이 팔리지 않는 바람에 차질이 생겼다. 그 놈의 병만 안 났으
면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알아라도 볼 텐데, 몸을 움직일 수가 없
으니 애간장만 태울 뿐이었다.
    직장 일로 바쁜 남편한테 부탁하자니 눈치가 보이고, 복덕방에
서 임자를 물색해 주겠다고 전화로 약속은 했지만 영 마음이 놓
이질 않는다.
    집을 제대로 지었나, 일산에도 가보아야 하는데. 인희씨는 이
래저래 속상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에잇, 췌!'
    갑자기 상주댁이 밥알을 뱉어냈다. 밥알 몇 개가 그대로 며느
리 얼굴에 날아와 붙었다. 인희씨는 깜짝 놀랐다. 얌전히 떠먹여
주는 대로 밥을 받아꺽던 시어머니가 또 노망을 부리는 것이었
다.
   '왜 그런데, 또?'

    시어머니가 바닥에 뱉어낸 밥알을 보고 속상한 인희씨가 짜증
을 냈다. 시어머니는 팩 토라져서 된장국에 비빈 밥알들을 가리키며
   '썩었어.
   "썩긴 뭐가 썩어. 아침에 ?한건데 .'
   '이년이!'
   상주댁은 뱉어낸 밥알을 손으로 집어서 며느리 눈 앞으로 바짝
들이댔다.
   '이게 안 썩었어? 누런데, 이게 안 썩어?"
   '되지도 않는 말 어지간히 해요, 정말! 이게 뭐가 썩어, 된장에
비빈 밥이 다 누렇지, 어디가 썩어!'
   인희씨도 화가 나는지 신경질을 부렸다.
   상주댁은 밥그릇을 들어보이며 꼬장꼬장한 목소리로 따지는
며느리를 고까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그러더니 벌떡 일어나 밥그
룻을 확 낚아채어 며느리 머리 위에다 냅다 뒤집어 버리는 것이
었다. 그 바람에 인희씨는 혼비백산을 했다.
   '이 노인네, 미쳤나 봐, 정말!'
   졸지에 밥알을 머리에 뒤집어쓴 며느리가 짜증을 내자 상주댁
은 더욱 노여워하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래, 나 미쳤다. 미쳤다, 이년아!"
   상주댁은 길길이 날뛰며 갑자기 방구석에 있는 요강 단지를 번
쩍 집어들었다.
   인희씨가 말리고 말고 할 틈도 없었다
   와장창, 요강 깨지는 소리가 났고, 뒤이어 인희씨의 비명이 튀
어나왔다.
   '아이구, 못 살어! 징글징글해 정말.'
   주방 식탁에서 밥을 먹고 있던 정박사와 연수, 정수는 갑자기

건넌방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오자 수저를 놓았다 분명 어머니의
비명소리였다.
   식구들은 놀란 얼굴로 뛰어가 건넌방 방문을 열어 보았다.
   누런 밥알 찌꺼기와 오줌으로 범벅이 된 몰골로 인희씨는 방
한가운데 주저앉아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방바닥은 깨진 요
강 단지와 엎어진 그릇들로 난장판이 되어 있었고, 상주댁은 여
전히 씩씩거리며 며느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저 썩은 거 너나 먹어라, 이년. 우리 아들 병원 차려 준다더니
병원두 안 차려 주고, 이 나쁜 년. 죽어, 이년, 죽어!'
   놔, 아퍼.'
   상주댁은 앙칼진 눈으로 며느리를 노려보다 기어이 머리채를
잡고 흔들기 시작했다.
   노망든 시어머니의 힘을 당할 길이 없었던 인희씨는 그저 머리
채를 휘둘린 채로 비명만 지르고 있었다.
   '왜 그러세요?'
   정박사가 눈에 불을 튀기는 사이 연수가 황급히 달려들어 할머
니를 뜯어말렸다. 그러나 혼자 힘으로는 할머니를 어쩔 수가 없
었다.
    보다못한 정수가 할머니를 뜯어말렸다.
   '이 손 놔요, 놔요!'
   ,나쁜 년. 내 집 망친 년. 이년! 시에밀 까다만 콩깍지로 아는
이년, 이년'
    정수까지 합세해 간신히 뜯어말린 뒤에도 상주댁의 노여운 목
소리는 계속되었다

    마침내 인희씨가 두 다리를 버둥거리며 울기 시작했다.
   '못 살어, 내가. 못산다, 내가!'
   울 수도 없고, 화를 낼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한 여자는 지린내가 진동하는 방 한켠에 거지꼴을 하고 앉아
엉엉 울고 있었고, 또 한 여자는 그런 며느리가 고소하다는 표정
으로 팔을 걷어붙인 채 씩씩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정박사는 차마 못볼 꼴을 보고 난 사람처럼 참담한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연수가 운전하는 차는 어느덧 정박사의 병원 앞에 와 멎었다.
   눈이라도 한바탕 퍼부으려는지 하늘은 잔뜩 흐려 있었다.
    정박사는 아까부터 굳은 얼굴로 창 밖을 내다보며 멍한 표정이
었다.
   '아버지, 다 왔어요.'
   연수는 넋 나간 듯 창 밖을 응시하고 있는 정박사를 빤히 쳐다
보았다. 병원 앞에 왔는데도 내릴 생각을 하지 않는 아버지가 어
쩐지 이상하다는 표정이었다.
   '으응, 그래.'
   약간 당황한 몸짓으로 차 문을 열던 정박사가 연수를 돌아보며
물었다
   . 오늘 오후에 시간 있니?"
   '휴직계 내고 조금 있다 들어갈 거예요."
   '그래? 그럼 나 좀 보자."
   '일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데... 무슨 일이세요?'

   후임자에게 업무를 정리해서 넘겨 주려면 시간이 얼마쯤 걸릴
것 같았다. 정박사는 되묻는 연수를 건너다보며 어색하게 뒷머리
를 긁었다.
   '그냥 볼까 싶어서.'
   '제가 전화 드릴게요."
   연수는 지금으로선 약속 시간을 정해 놓기가 애매한 상황이었
다. 해서 적당히 시간을 봐가며 아버지한테 연락을 취할 생각이
었다. 정박사로선 딸의 그 제의가 뜨끔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애써 태연을 가장하려 했지만,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딸에게 말했다.
   ,,아니다. 나도 오늘 진료 안 보고 일찍 휴가계만 내고 나올 거
야. 내가 근처에 가서 전화하마,'
   '.. .그러실래요?"
   '응. 그러자."
    이야기가 다 끝났는데도 차에서 내린 정박사는 이내 몸을 돌리
 지 않는다
    연수는 아버지가 병원으로 들어가길 기다리며 차를 출발시키
 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 아버진 저렇게 서 있기만 하는 걸
 까. 어색하게 차 안에 남아 있던 연수가 또 한번 정박사를 빤히
 쳐다보았다.
    '들어가세요."
    '먼저 가라"
    연수는 그 자리에 어정쩡하게 서 있는 아버지를 뒤로 한 채 차
 를 출발시켰다. 백미러를 통해 그 후로도 한동안 움직이지 않고
 서 있는 아버지 모습이 보였다.
    정밧사는 딸의 자동차가 시야에서 멀어진 다음에야 천천히 발
 길을 옮겨 한길 쪽으로 향했다.
    윤박사와 만나기로 약속한 시간까지는 약 세 시간 정도나 남았
 다. 그 동안 혼자 어디든 가서 시간을 보내야 한다. 이른 아침부
 터 다방에 죽치고 앉아 있는 것도 못할 짓이었다. 그 시간에 제
 일 만만한 곳이라면 서점 아니면 공원이었다.
    실업자 생활도 오래 하다 보면 요령이 생긴다더니 정박사가 그
 격이었다. 그는 일없이 거리를 좀 배회하다 서점이 문을 여는 시
 간에 맞춰 서점으로 들어섰다.
    그는 서점에 가서도 취업이니 창업이니 하는 직업 관련 서적이
 있는 쪽으로는 발도 떼지 않았다. 이른 아침에 그런 책이나 들춰
 보며 남몰래 한숨 짓는 사오십대 사내의 뒷모습을 그 누구라서
 좋게 보아 주겠는가. 아닌 게 아니라 그가 보기에도 그런 사내들
 의 뒷모습이 영 궁상스러워 보였다.
    무슨 쓸데없는 자존심인지 그들 옆에 서 있으면 자신이 더욱
초라해지는 것 같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시간에 쫓기
는 젊은 직장인처럼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전문서적이나 몇 권
뒤적이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다. 그것도 오래 보면 괜스레 뒤
통수가 따끔거려서 그저 길어야 한 시간이 고작이었다
   시간이 또 남는다.
   이번엔 공원으로 가는 길이다. 그는 이번에도 요령을 피운다.
공원에서도 오래 죽치고 앉아 있는 축들은 대개 하릴없는 노인들
이나 실업자들이다.

    몇 번 와 보니 아예 고정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소일하는 부
류들도 적지 않았다. 한결같이 무기력하고 우울한 표정들. 사내
들도 나이가 들수록 여자들처럼 수다스러워지는 모양이다. 몇몇
중늙은이는 공연히 무리 사이를 헤집고 다니며 말참견을 하거나
장기판 같은 데서 눈총을 받아가며 훈수를 두는 것으로 소일하고
있다. 당사자들이 영 마뜩찮아 하는데도 나 몰라라 하고 시시콜
콜 참견이다. 어디든 끼어 함께 참여하고 싶은 모양이다.
   나이가 많이 든 노인들은 저마다 따로 앉아 비둘기에게 팝콘을
던져 주거나 꽁초를 빨며 멍하니 앉아 있다. 이제 그들은 더 이
상 이승에서의 삶에 흥미도 관심도 없어 보인다. 어찌 보면 그들
은 마치 도인 한가지로 세월을 관조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두셋
모여 앉은 노인들도 별 말이 없다 꾹 다문 입술 새로 가끔 담배
연기만 비어져 나올 뿐이다. 이미 할 말은 다 했고, 이제 남은 일
이라곤 손에 묻은 먼지를 털 듯 툭툭 시간을 터는 일만 남았다는
듯이 그렇게 멍하니 앉아 있는 것이다.
   정박사는 자신이 아직 그들만큼 늙지는 않았지만, 또한
= 뭔가를 다시 시작할 만큼 젊지도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
다.
   하긴 환갑이 넘은 나이에 무슨 신명으로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 있으랴, 싶은 아득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제 곧 황혼이지,
황혼이야. 정박사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파고다공원을 빠져 나왔
다. 한 곳에 오래 머물러 있으면 그만큼 더 쓸쓸해진다는 걸 그
는 잘 알고 있다.
   결국 그는 파고다공원에서 삼청공원으로, 다시 효창공원으로
 이어지는 길을 오락가락하며 시간을 보냈다. 중간에 힘이 들면,
 잠시 공원 산책을 나온 사람처럼 느긋한 표정을 짓고 벤치에 앉
 았다가 이내 장소를 옮기는 것이다. 정박사는 끝끝내 나는 아닌
 척, 하는 그런 가식의 자신을 향해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하다
보니 어느덧 정오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점심시간에 맞춰 커피솝에 나타난 윤박사는 작은 상자를 들고
있었다.
   '언니 약이에요.'
   '고맙다.
   "통증이 심하시죠?'
   '그런 모양이야.'
   윤박사는 정박사의 우울한 대답에 잠자코 차를 마시다 이윽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동안 왜 통 안오셨어요?"
   '일산에 새집을 지었거든. 나 요즘 거기 다녀.
거기가면 쓸모업는 나도


   윤박사는 씁쓸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정박사를 내심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그녀가 잠시 주저하며 뜸을 들였다가 말을 꺼냈다.
   '저, 전에 부탁하신 얘긴데요.'
   정박사가 일전에 부탁한 취직 자리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응, 좀 알아봤어?'
   '네. 알아보긴 했는데.'
   윤박사는 왼지 말하기가 어렵다는 표정으로 머뭇거렸다.
   정박사는 들고 있던 찻잔을 네려놓으며 진지하게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보건소 소장 자리예요. 일산 쪽에 새로 생긴...."
   순간. 정박사의 안색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는 비로소 윤박사
가 선뜻 말을 못 꺼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보건소 소장 자리라
는 게 보수면이나 직업 환경으로나 의사 시절보다 못하다는 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죄송해요. 더 좋은 자리가 있었으면 했는데."
   '무슨 말이야, 보건소 일이면 어때, 괜찮아. 고맙다, 윤아!'
   정박사는 그나마 일자리가 생긴 게 얼마나 다행인가 싶었다.
그는 모처럼 활짝 웃는 얼굴로 윤박사에게 물었다.
   '그 자리 틀림없는 거지?"
   그럼요."
   '고맙다. 윤아. 내가 나중에 한턱 쓸게.'
   그는 점심이라도 같이 하자는 윤박사의 제의를 마다하고 커피
솝을 나섰다.
   정박사는 괜하게 휴우 한숨이 나왔다.다름아닌 안도의 한숨이
었다. 그러고 나니 세상이 조금 달라 보이기까지 했다. 아침나절
거리를 배회할 때와는 달리 발걸음도 그렇게 가벼울 수가 없었
다. 정박사는 우선 집으로 향했다.

    오전 내내 인수인계를 끝낸 뒤 사무실을 나서던 연수는 마침
 거래처에 들렀다 오는 인철과 마주쳤다.
    인철은 연수가 다시 출근하는 줄로만 알고 반색을 했다
    '저, 휴직계 냈어요.'

     '괜찮으신 줄 알았는데...'
     '저도 괜찮으실 줄 알았어요.'
     인철은 연수의 뜻밖의 말에 무척 당황한 표정이었다. 괜찮지
  않다면... 그렇다면....
     '...잘 해드려라.'
     인철은 겨우 그렇게 말했다
     그의 곤혹스러워 하는 표정을 외면한 채 연수가 말을 이었다.
     '못해 드린 거, 나중에 한이 될까 두려워 받은 만큼 돌려 드리
 고 싶은데,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아요. 밥도 잘 못 짓구, 빨래도
 내가 하면 때가 잘 안 져요. 청소를 해도 한두 군데는 꼭 빠뜨리
 구.'
    '자식이 부모한테 받은 걸 다 돌려 줄 순 없어.~
    인철이 자동판매기 커피를 뽑아 건네며 제법 인생을 산 듯한
 중늙은이투로 말했다,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어쩔 수 없는 거야. 난 그렇게 생
 각해. 사람들이 결혼하는 건 자기가 부모에게 받은 걸 주체할 수
 없어서 털어놓을 델 찾는 거라구. 그래서 자식을 낳는 거라구"
    '.. .그렇겠네요.'
    연수는 천천히 종이컵을 구겨 쓰레기통에 넣으며 고개를 끄덕
였다.
    '너도, 몸조심해라....'
   '고마워요.'
    연수는 얼마쯤 젖은 시선으로 인철을 바라보았다. 이제 가야
할 시간이었다. 인철이 가만 연수의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올려

 주었다.
    연수는 그 손길을 뿌리치지 않은 채 잠시 그대로 서 있었다
    밖에선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정박사는 아침에 병원 앞에서 헤어질 때와는 딴판의 표정으로
백화점 로비에 서 있었다.
    연수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왼지 모르게 어떤 생기 같은 걸 감
지했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생긴 걸까. 함께 지하 주차장으로 걸
어가며 연수는 자꾸 아버지의 옆모습을 흠쳐보았다.
   이윽고 연수는 아버지를 태우고 거리로 나섰다.
   '집에 일찍 가봐야 할 텐데....'
   벌써 오후 세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연수는 백미러를 통해 아버지를 보며 집 걱정부터 했다. 아침
에 그 험한 꼴을 보고 나왔으니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그녀
는 당장 어머니의 병보다는 할머니가 또 무슨 일을 저지를까 봐
그게 더 걱정이었다.
   '할머니 주무시는 거 보고 나왔으니 괜찮을 거다."
   '집에 들렀다 오셨어요?'

     '그래.'
     한 번 잠들면 한나절 이상은 깨지 않는 할머니를 생각하며 연
  수는 그제서야 조금 마음이 놓였다
     백화점 주변 도로를 빠져 나갈 때 연수가 물었다
    '어디로 가실 거예요?'
    '일산 집으로 가자.'
    ' 일산으로요?"
    정박사는 연수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반문하자 시선을 창 밖
 으로 향한 채 말을 이었다

    '니 엄마, 거기 한번 데려가 달라는데,

                                                집이 어수선해서.... 나

 혼자 정리하자니 어째 시원찮구나."
    그랬었구나....
    연수는 비로소 아버지의 깊은 마음을 조금 알 것 가탓다. 늘
 무뚝뚝하고 냉정한 줄로만 알았던 아버지에게 저렇듯 자상한 면
 도 있었다니. 연수는 괜히 코끝이 찡했다,
    그러나 그 감동은 막상 일산 집에 도착했을 때에 비하면 아주
 하찮은 것이었다.
    새집 문을 여니 포장을 뜯지 않은 가구들이며 살림 등속이 거
실에 가득 쌓여 있었다.
   연수는 한동안 멍하니 거실에 놓인 집기들을 바라보았다. 눈에
 뻔히 보이는 가구들은 제쳐두고, 아직 뜯지도 않은 포장지를 이
 것저것 들춰 보니 벽걸이 장식용 액자며 소품들이 속속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 걸 다 아버지가 준비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색깔이 좀 그렇지? 내가 어제 대충 샀는데.... 내 맘에도 그냥
썩 드는 건 아닌데.. ._"
    어느새 팔을 걷어붙이고 화장실에 들어가 걸레까지 빨아가지
고 나오던 정박사가 겸연쩍은 듯 딸의 눈치를 보았다. 그 큰 덩
치에 걸레를 들고 있는 모습이 우스꽝스러운 한편, 연수에겐 퍽
이나 놀랍고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정작 정박사 자신은
연수가 자기를 어찌 보는지 전혀 감을 못 잡고 있었다
    '아뇨.'
    연수는 아버지가 무색해 하지 않도록 빙긋 웃으며 답했다. 그
리고 얼른 걸레를 뺏어 들었다.
   '좋아요. 걸레질은 제가 할 게요. 아버진 그냥 앉아 계세요."
   '이거 저쪽으로 치우고 바닥도 한 번 닦아야 할 텐데.... 그냥
하면 니 엄마 먼지 냄새난다구 싫어할 텐데....'
    정박사는 어색하게 가구들을 가리켜 보이며 딸에게 이것저것
주의를 주었다.
    연수는 그런 아버지를 향해 짐짓 밝게 웃어 보였다.
   '그러죠, 뭐. 그럼 가구부터 일단 저쪽으로 옮길까요?'
   '그러자.'
    정박사는 딸의 선선한 대꾸에 만족스러워 하며 안도하는 표정
이었다. 이윽고 두 사람은 의기투합해서 가구들을 옮기기 시작했
다.
    언제 이렇게 늙으셨는지 아버지는 작은 소파 하나 옮기는 데도
땀을 뻘뻘 흘리고 있다.
    연수는 정박사와 함께 가구들을 하나씩 옮기면서 문득 가슴이

아렸다.
   아버지는 늙고 힘없는 자신이 민망한지 둘이 해야 될 일도 혼
자 옮기겠다며 고집을 피우기도 했다. 그럴 때면 마음이 아프다
가도 웃음이 나왔다. 아버지는 딸 앞에서 자존심을 세우고 싶으
신 거다.
    연수는 아버지의 반쯤 벗겨진 요이마에 송글송글 맺히는 땀방
울을 간간이 정겨운 눈빛으로 바라보곤 했다.

   둘이서 땀을 뻘뻘 흘려가며 가구들을 옮기고 나니,
바닥 청소가 남아 있었다_ 연수가 공들여 걸레질을 하는
동안 정박사는 벽에 액자들을 걸었다.

   연수야, 이거 여기 걸면 되는 거냐?'
    '네, 아버지. 약간만 왼쪽으로요.'
    '여기?
    ' 아니, 조금 더 왼쪽으로요."
    정박사는 딸이 시키는 대로 액자를 고쳐 걸며 묻는다.
    '됐지?'
    연수는 의자 위에 올라서서 액자를 이리저리 움직이는 아버지
 의 기우뚱한 몸집을 바라보며 고개를 젓는다.
    '이번엔 약간 오른쪽으로요."
    생전 안 해본 일이라 정박사가 하는 일은 하나같이 어설프기
 짝이 없다. 그래도 그는 무척 열심히 액자 거는 일에 몰두해 있
 다. 그러나 이번에도 딸에게 퇴짜를 맞고 말았다.
    '아뇨, 비뚤어졌어요."
    '됐냐?'

    '네, 아버지.'
    겨우겨우 거실 정리가 끝났고, 이번엔 커튼을 달 차례였다.
    연수는 아버지 같은 사람이 어쩌면 이렇게 꼼꼼히 살림살이들
 을 준비했는지 보는 것마다 감탄할 정도였다.
    커튼 색상이며 침대 커버, 바닥에 깐 양탄자까지도 어떠니의
 취향을 그대로 따른 것들이었다.

   이 모든 걸 혼자 준비하며 아버지는 속으로 얼마나

                                                             우셨을까

 하는 생각에 연수는 자꾸만 목이 메어왔다.
    침대 커버를 씌우는 것으로 안방 정리는 모두 끝났다.
    연수는 커버를 씌워 놓은 침대맡에 앉아 보고는 무심코 허탈한
 표정을 짓는 아버지 모습에 와락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그녀는
 잠시 아버지를 '홀로 남겨둔 채 조용히 방문을 열고 나왔다.
    정박사는 연수가 앉았던 침대맡에 가 앉았다.
    나이 들어 이불 개는 것도 힘들다며, 이사 가면 안방에도 침대
 는 꼭 들여놓겠다던 아내 모습이 가슴에 사무친다. 머지않아 아
내는 가고, 그녀가 바라던 것들만 남아 있을 이 집
    정박사는 아무래도 이 집에 온전하게 정 붙이고 살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아버지, 커피 드세요."
    바깥에서 연수의 음성이 들려왔다.
    정박사는 급히 붉어진 눈시울을 꾹꾹 눌러 닦고 거실로 나왔
다.
   '...지난 번에 죄송했어요."
   거실 소파에 앉아 부녀가 차를 마시던 중 연수가 뜬금없이 이

야기를 꺼냈다.
    정밧사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대수롭지 않게 받았다
   '뭘?'
    연수는 일없이 커피잔을 만지작거렸다.
   '아버지한테 화가 난 게 아니었어요. 저한테, 저 자신한테 화
가 났었어요.
   "...그래.'
   '죄송해요.'
    정박사는 딸을 애처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부드럽게 위로해
주었다.
   '아니다. 니 엄마가 불쌍해서 그렇지, 난 괜찮다. 너도 너무 속
상해 하지 마라. 난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니 엄마가 지금 죽는
게 다행이라고.... 남보다 고생을 두 배는 더한 사람, 좀더 일찍
좋은 데로 간다고, 난 그렇게 믿기로 했다.'
   그 말에 연수는 눈시울이 붉어지며 울먹이기 시작했다.
   '...잘 해드리고 싶었어요.'
   '우리 모두 잘 해주고 싶었지... 그 맘 알 거다.'
    정박사는 잠시 하던 말을 멈추고 연수가 들고 있는 찻잔을 눈
으로 가리켰다.
   '그 잔, 이쁘지?'
   '...네 .
   "니 엄마 줄려고 내가 특별히 산 거야. 너 시집가두 그건 못
준다."
    말을 마친 정박사가 희미하게 웃는다.

   연수는 아버지가 어머니를 위해 샀다는 찻잔을 말없이 들여다
보았다. 집안에서 유독 어머니의 취향과는 거리가 있는 물건이길
래 안 그래도 속으로 의아해 하던 참이었다 다소 촌스럽긴 했지
만 그 잔은, 황금색 금박 장식이 휘황찬란한 어머니의 그 잔은,
이 세상에서 하나뿐인 황후를 위해 바치는 아버지의 처음이자 마
지막 사랑의 표시였다.

    저녁 여덟 시
    인희씨는 대문 밖을 서성이며 식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따라 일찍 들어오는 사람이 없다. 인희씨는 요즘 초저녁
부터 식구들이 그립다.

   인희씨는 추위도 잊은 채 아까부터 큰길가를향헤 목을 길개 빼고
 아이들과 남편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때 골목 아래쪽에서 정수가 여자 친구와 함께 걸어오고 있었
다. 정수는 손에 한 아름이나 되는 꽃을 들었다.
   '엄마 꽃 드리면 좋아하실 거야."
   '그래. ..내가 사야 했는데."
   정수가 여자 친구 재영을 미안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재영은 그런 정수를 향해 밝게 웃어 주었다. 그 웃음 끝에 그
녀가 말했다.
   '내가 사드리고 싶었어.'
   정수는 재영에게 고맙다는 말 대신 문득 다른 소리를 했다.
   '난 요즘 니가 참 부럽다.'
   '왜? 대학 다녀서? 엄마한테 너 대학생인 거 보여 주지 못해

 서? 그렇게 생각하지 마. 공부 열심히 하는 모습 보여 드렸잖아.
 발표 때까지 사실 수도 있고.'
   '그게 아냐.'
    재영은 가던 길을 멈추고 정수를 빤히 쳐다보았다.
   '니네 엄만 건강하시잖아? 오래 사실 거구. 난 그게 부러워.
요즘은 엄마가 건강한 사람, 엄마가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제일
부러워.'
    재영은 뭐라 위로할 말을 찾지 못해 말없이 고개를 숙인다.
    정수는 그런 그녀의 등을 툭 치며 짐짓 명랑한 어조로 말을 이
었다.
   '이제 그만 가. 요즘은 만날 때마다 니가 날 바래다 주는구나.
싫겠다?
   "아니, 내가 바래다 주는 것두 나쁘진 않아.'
   '고맙다, 어서 가.'
   '조금만 더 걷지 뭐.'
   그렇게 둘이서 걸음을 옮기려 할 때였다.
   골목을 내려오던 인희씨가 둘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정수야!"
   정수는 어디선지 정답게 자신을 부르는 어머니의 음성을 듣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엄마!'
   집 쪽에서 인희씨가 잰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는 두
사람 앞으로 가까이 와서는 신기한 눈빛으로 재영을 바라보았다.
   '우리 정수 여자 친군가 보네?'

    ', 처음 뵙겠습니다."
    '이쁘게 생겼네.'
    인희씨는 쑥쓰럽게 웃으며 인사하는 아들의 여자 친구를 찬찬
 히 보고 있었다.
    곁에 있던 정수가 시계를 보며 재영에게 눈짓을 했다.
    '가봐.'
    재영이 정수를 향해 알았다는 눈짓을 하고는 인희씨를 바라보

 았다.
    '저, 다음에 또 뵐게요."
    '왜? 집에 들어갔다 가지?'
    인희씨는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돌아서려는
 듯 말을 붙였다. 집에 데려가 차라도 한잔 먹여

    '아니에요. 늦었는 걸요. 가볼게요."
    재영이 웃으며 정수를 향해 손을 흔들고는 몸을 돌렸다.
    인희씨는 재영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저 아이가 어
 쩌면 내 며느리가 될지도 모르는데, 하는 못내 궁금하고 아쉬운
눈길이다.
   '저만큼이나 꽃두 이쁜 걸 샀네.
   멀어져가는 재영의 뒷모습을 그윽한 눈길로 바라보던 인희씨
는 문득 정수가 건네 준 꽃을 받아들고 향기를 맡았다.
   정수는 어머니 등을 감싸안고 걸으며 걱정스레 입을 열었다.
   '추운데 왜 나와 계세요?'
   '웃긴다, 야. 너도 사내라고 기집애를 다 사귀고.~

    인희씨는 하던 말 끝에 뜬금없이 물었다.
    '입은 맞춰 봤어?'
    정수는 어머니의 짓궂은 물음에 얼굴을 붉혔다. 그렇다고 사실
 대로 대답할 수도 없었고, 아니라고 펄쩍 뛰기도 좀 그랬다. 강
 한 부정은 곧 긍정을 뜻하기도 하는 것이므로 정수는 그저 피식
 웃어 보였다.
     장난기=가득한 인희씨의 그 물음에는 장성한 아들에 대한 신기
 하고 대견한 마음이 듬뿍 묻어나 있었다.
    '참하게 생겼드라. 꼭 니 누나 닮은 것 같애. 나 처녀 때 같기
 도 하고.
    "그렁, 재영이가 세상에서 제일 예쁜 여자들은 다 닮았다는 얘
 기네?
    "그럼!'
    모자가 다정하게 농담을 주고받으며 집으로 향하는데, 뒤에서
 자동차 클랙션 소리가 났다. 돌아보니 연수의 차였다.
    인희씨는 남편과 딸이 동시에 내리는 모습을 보고 반색을 했
 다.
    '이게 웬일이야. 오늘은 온 가족이 시간을 맞췄네?'
    '추운데 왜 나왔어?'
    '빨리 들어가요, 엄마. 감기 들겠어요.'
    '괜찮아. 좋은 걸, 뭐.'
    모처럼 네 식구가 나란히 대문을 들어서고 있었다.
    인희씨는 한껏 기분이 좋아서 현관문을 열었다.
    '노친네 안 깨셨나 모르겠네.'

   앞서 가던 인희씨가 중얼거리며 막 현관?을 열었을 때였다.
   '이 나쁜 년! 또 날 버리고 갈라고?'
    갑자기 상주댁이 몽둥이를 들고 덤벼들었다.
    인희씨는 몸을 피할 겨를도 없이 상주댁이 내리친 몽둥이에 그
대로 맞았다. 썩은 고목 넘어지듯 인희씨는 그 자리에 벌렁 나동
그라졌다
   . "어이쿠!'
    갑자기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터져 나온 비명소리에 뒤따라 들
어오던 세 사람은 동시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맨 먼저 안으로 뛰어들어간 연수가 바닥에 쓰러진 어머니를 일
으켜 세웠다.
    '엄마, 엄마, 괜찮아요?'
    인희씨의 이마엔 선홍빛 피가 흐르고 있었다,
    연수는 다급한 시선으로 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인희씨는 벌써부터 정신이 가물가물해져 가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격분한 정수가 순식간에 할머니에게 달려들어 모질
 게 악을 썼다
    이제 그만 좀 하세요! 차라리 돌아가시라구요!'
    할머니의 몽둥이를 뺏어 든 정수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
 다.
    ,이 새끼, 이 나쁜 새끼!'
    상주댁은 정수가 고함을 치자 분해서 입가를 씰룩거리며 팔을
 치켜들었다. 이어 손주의 등짝을 사정 없이 후려치기 시작했다.
    굳은 듯 서 있던 정박사가 획 몸을 돌려 신발장 서랍을 뒤지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그는 완전히 이성을 잃은 모습으로
서랍에서 망치와 못을 꺼내들었다.
   정박사는 한 손에 망치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노모를 번쩍
안아 들은 채 건넌방으로 향헷다 .
   '놔라, 이노무 새끼. 놔, 어서 놔! 에미야!'
   상주댁이 정박사 팔에 안긴 채 발버등을 쳤다.
   그때까지도 두 남매는 얼이 빠진 채 격분한 아버지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상주댁은 정박사의 격분한 태도에 기가 질렸는
지 한풀 꺾인 목소리로 애원하기 시작했다.
   '아저씨, 아저씨 왜 그래? 날 들고 어딜 가!'
   정박사는 노모를 거칠게 방바닥에 내려놓은 뒤 방문 쪽으로 몸
을 돌렸다. 그러자 겁에 질린 노모가 그의 다리를 붙들고 놓지
않았다
   정박사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애원하는 노모를 모질게 때어놓
고 방문을 닫아 버렸다.
   '아저씨, 왜 그래? 에미야, 살려 줘!'
   안에서 계속 상주댁의 겁먹은 비명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때까지 정신을 놓고 있던 인희씨가 비로소 힘없이 눈을 떴다.
   마침 정박사가 입에 물고 있던 못을 고쳐 들고 망치로 문을 때
려 박으려던 참이었다.
   '에미야. 에미야!'
   상주댁이 잠긴 문을 손톱으로 마구 긁으며 울고 있었다.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든 정수가 놀란 얼굴로 아버지를 뜯어말렸
     '아버지, 왜 그러세요? 이러지 마세요!'
     정박사는 아들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며 쾅쾅 못을 때려 박았
  다
     . "왜 그래요, 왜 그래? 연수야 말려. 니 아부지 말려...!~
     인희씨도 질겁을 해서 건넌방 쪽으로 기어가며 소리첫다. 인희
 씨는 거의 죽어가는 목소리로 외치며 힘들게 남편 앞으로 기어가
 고 있었다
    그러나 정박사는 고개 한번 돌리지 않고 계속 못질을 해댔다.
    '진정하세요, 아버지. 진정하세요!'
    '잘못했어요! 그러지 마세요, 아버지!'
    연수와 정수는 엉엉 울어가며 아버지를 끌어안고 애원했다. 그
 래도 정박사는 막무가내였다. 그의 얼굴은 이미 얼음처럼 차갑게
 굳어 있었다. 그나마 인간으로서의 감정이 드러나는 건 그의 눈
 이 붉게 젖은 채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수는 자신의 말이 지나쳤기 때문에 아버지가 화를 낸다고 생
 각한 나머지 무릎을 끓고 빌기까지 했다. 그러나 정박사는 자식
 들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급기야는 인희씨가 남편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지며 신음
 하듯 한마디 했다.
   '그러지 마....'
    정박사의 행동이 조금 누그러진 건 바로 그때였다 그는 이내
망치질을 멈추고 바짓가랑이에 매달린 아내를 내려다보았다. 그
때 정박사의 눈에서 떨어진 한 방울의 굵은 눈물이 아내의 이마
를 적셨다.

   그 참에 정수가 얼른 달려들어 망치를 나꿔쳇다. 그리고는 큰
소리로 울며 마당으로 나가 망치를 내던져 버렸다.
   연수는 아버지가 비통한 표정으로 숨만 헉헉 몰아쉬며 서 있는
모습을 보며 비로소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들어가, 연수야.'
    인희씨가 힙없이 연수에게 손짓을 했다. 정박사가 말없이 마당
으로 나간 뒤였다.
    연수는 어머니를 데려다 방에 눕힌 뒤 마당으로 향했다.
   "아버지.'
    정박사는 마당에 선 채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 고독한 뒷
모습에 연수는 자꾸 눈물이 났다.
   '들어가라.
    "추워요.
    "...괜찮다. 가서 자라.찬바람 들어간다.'
    정박사는 여전히 등을 돌린 채 허공을 응시하며 기인 담배 연
 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연수는 착잡한 심정을 어쩌지 못해 부질없이 가슴만 쓸어내렸
 다. 정수도 마당 구석에 선 채 우는지 어깨를 들썩거리고 있었다.

    칠흑 같이 어두운 밤이었다.
    늦도록 마당에서 담배를 피우며 비탄에 잠겨 있던 정박사는 새
 벽녘이 돼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비록 순간적인 격분을 못 이겨
 한 행동이었지만, 노모를 방에 가두고 못질을 하려 했던 자신에
 대해서 그는 몹시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 새벽녘, 잠결에도 간간이 한숨을 내쉬는 정박사를 누군가가
 안쓰럽제 지켜보고 있었다. 다름아닌 인희씨였다. 그러나 정박사
는 그걸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조금씩 잠의 수렁으로 잠기고 있
었다
    인희씨는 한동안 벽에 기대어 남편의 불규칙한 숨소리를 헤아
렸다. 그녀는 아까부터 구토가 일어 잠을 못 이루고 쪼그려 앉은
 채 불쑥불쑥 치미는 온몸의 통증을 참아가며 겨우 버티고 있었
다. 속이 울렁거릴 땐 화장실에 가 토하는 것보다 이렇게 참고
있는 게 나았다. 이제 더 이상은 피를 토하기가 두려운 것이다.

   남편은 이제 잠이 든 것 같다. 웅크린 채 자고 있는 모습이 왜
이렇게 처량하게 느껴지는 걸까, 인희씨는 어둠 속에 희미하게
드러난 남편의 자는 모습을 벌써 한 시간째 지켜보고 있었다, 그
러다가 또 속이 울렁거려 이를 악물었다. 아무래도 오늘 밤은 영
잠을 이룰 수 없을 것 같았다.
   잠시 후 토기가 약간 가라앉는 걸 느끼며 그녀는 주방으로 나
섰다. 쓰리고 메슥거리는 속을 달랠 겸 냉수를 한 잔 따라 마셨
다. 그런데 속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고 오히려 더 심하게 울렁거
렸다.
   인희씨는 냉장고 앞에서 다시금 울렁거리는 속을 가라앉히려
안간힘을 썼다, 오장육부가 다 아프다. 내장이 서로 엉켜 사투라
도 벌이는지 순간순간 찢어지는 아픔이 전신으로 퍼져 나간다.
 망할 놈의 병은 왜 이다지 아픈 데도 많은가.
   린 채로 몸을 뒤틀며 헛구역질을 꾹꾹 눌러 참던 인희씨는
엉금엉금 기어 주방을 나섰다. 죽음의 사신이 드리우는 어두운
그늘이 바로 저 앞에 긴 휘장을 펼치고 있었다. 인희씨는 손사래
를 치며 겨우 그 그늘을 거둬냈다. 그러면 그 뒤에도 또 한 겹의
그늘이 보란 듯 휘장을 내리고 있는 것이었다.
   '어으....'
    슬픔 때문인지 고통 때문인지 인희씨의 목구멍에서 본능적인
 신음이 흘러나왔다. 등 언저리로 축축한 식은땀이 흘러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푸르르 떨었다.
    그때, 문득 인희씨는 건넌방을 돌아보았다. 가여운 노인네, 초
 저녁엔 또 얼마나 놀랐으랴. 인희씨는 잠시 통증이 지나간 틈을

  비집어 겨우 쪼그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내 시어머니방으로
  다가섰다.
     상주댁은 잠결에서조차 긴장이 풀리지 않았는지 이불을 한 움
 큼 끌어안고 몸을 조그맣게 웅크린 채로 잠들어 있었다.
    인희씨는 그 모습을 잠시 측은하게 내려다보다 이부자리를 바
 로 고쳐 깔고 시어머니를 편하게 눕혔다. 이젠 이 작은 노인네
 하나 눕히는 데도 힘이 부친다.
    인희씨는 가쁜 숨을 헉헉 몰아쉬며 벽에 몸을 기댔다. 쉴새없
 이 식은땀이 흘러나왔고, 속은 여전히 울렁거렸다.
    상주댁은 자면서도 악몽을 꾸는지 간혹 몸을 버둥거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인희씨 눈빛에 말로는 다 못할 어떤 착잡한
상 념이 서렸다.


     젊어서는 사흘들이로 며느리를 잡아대던 시어머니. 그 매운 시
  집살이도 그다지 견디지 못할 컨 아니었다. 미우네 고우네 해도
 두 사람은 평생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아들 하나 바라
 보고 사는 노인네와 세상에 기댈 언덕이라곤 남편밖에 없었던 한
 여자. 그렇케 두 여자가 그 한 남자를 기다리며 살아온 세월만도
 어언 이십오 년이었다.
    미울 땐 여우 같은 며느리랑은 살아도 곰 같은 며느리랑은 못
산다며 수시로 자신을 구박하던 시어머니지만, 그래도 더러 며느
리 좋아하는 호두과자 같은 걸 빈 방에 들여놓아 준 적도 있었다.
그땐 며느리 어디가 그렇게 이쁘셨을까. 남편 없는 시집살이에
아이들마저 학교에 가 없는 날이면 그나마 시어머니 잔소리라도
들어야 사람 사는 것 같은 시절도 있었다.

   그 심란한 세월 다 보내고 늘그막에 미운 정 고운 정 담뿍 든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를 다른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때때
로 서로 아응다웅하면서도 여느 모녀지간 부럽지 않게 깊은 속정
을 나누는 그 별난 관계를 어찌 말로, 모양새로 다 이해할 수 있
겠는가.
   인희씨는 이불을 끌어올려 시어머니의 목까지 덮어 주었다.그
러다, 인희씨는 왼지 한순간 흠칫 숨을 멈추었다.
   목숨이 무엇이건대,사는 게 무엇이건대 죽을 날 가까운 사람이
 아들한테 방문 못질을 당하고, 손주놈한테 모진 소리를 들어
야 하나. 이제 내 한 몸 죽어지면 끈 떨어진 갓 모양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고 구박이나 당하며 사실 텐데.... 나 가고 나도 이 노인
네 투정 부리며 밥 잘 드실까. 근력 좋게 심통 부리며 이년, 저년
욕도 잘 하실까. 아니, 아니지...
    갑자기 인희씨의 눈에서 주르륵 눈물이 흘렀다.
    얼마나 한참을 울었을까. 그녀의 슬픈 눈에 돌연 비장한 및이
떠올랐다. 그녀는 이어 이불 자락을 잡아채 시어머니 머리 끝까
지 덮어 씌웠다.
    잠결에 숨이 막힌 시어머니가 이불 속에서 발버등을 쳤다
    인희씨는 눈을 꾹 감은 채 팔에 힘을 주었다_ 온힘을 다해 이
불을 누르고 있는 그녀의 얼굴에 뭔지 모를 비애와 더불어 독한
 기운이 퍼지고 있었다. 이미 인희씨의 이마와 볼은 눈물과 땀으
 로 범벅이었다.
    어머니, 차라리 죽는 게 나아. 나 살았을 때 어머니가 죽어야
 어머니도 편하고, 그래야 나도 편히 눈을 감지. 이제 금방 만날

 거야, 어머니. 저승에 가서 제가 백 배, 천 배 더 효도할게
    '어...'
    인희씨는 이를 악물었다. 가슴을 후벼파는 듯한 시어머니의 신
 음에 잠시 멈칫 했지만, 그녀는 이내 그 소리를 야멸차게 외면했
 다. 그리고 내처 그 늙은 목숨을 모질게 눌러댔다.
    그 시각에 연수는 늦도록 가족 사진을 들춰 보며 잠을 못 이루
 고 있었다. 낡은 앨범의 곳곳에 온가족의 단란했던 한때가 마치
 거짓말처럼 담겨 있었다. 연수는 그 사진들을 새삼스런 눈으로
보고 또 보았다. 옛 사진을 보니 우리 가족에게도 그런 좋은 때
가 있긴 있었구나 싶었다.
    처음 아버지 병원이 문을 열었을 때쯤이었을 것이다. 그날 모
 처럼 온 가족이 함께 외식을 했고, 그 참에 사진도 몇 장 찍었다.
그때만큼은 할머니도 정신이 온전했고. 아버지 얼굴에도 중년 남
자의 자신감과 활력이 펄펄 넘쳤다.
   할머니를 한가운데 앉히고 부부가 평화스럽게 미소 짓고 있는
모습이 오래도록 연수의 눈길을 끌었다. 그때만 해도 어머니는
밝고 건강한 중년 여성이었다. 이 모습으로 더도 말고 일 년만
더 식구들 곁에 머물러 주었으면.... 그러면 연수는 아무것도 바
랄 게 없을 것 같았다. 목숨도 무슨 물건처럼 내 것을 쪼개 남에
게 나눠 줄 수 있는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 연수는 문득 커피가 마시고 싶어졌다.
   이층에서 내려와 주방으로 향하던 연수는 할머니방에서 이상
한 신음이 나는 것 같아 흠칫 놀라며 걸음을 멈췄다.
   이윽고 할머니방으로 가 가만 방문을 열어 보았다. 처음에 연

수는 웬 도둑이 들어온 줄 알고 덜컥 놀라기부터 했다. 그런데
가만 보니... 어머니가 땀을 뻘뻘 흘리며 이불 속에 든 할머니를
잡아누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순간 연수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 이상한 소리는 바로 할머니의 신음이었던 것이다.
   연수는 황망히 달려들어 어머니의 팔을 잡았다
   '엄마, 엄마, 왜 그래요. 놔요, 이러면 안 돼요.'
   인희씨는 딸의 다급한 외침에도 아랑곳없이 계속해서 이불을
잡아누르고 있었다.
   연수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울부짖었다
   '엄마, 제발 놓으세요! 아버지, 아버지!'
   연수는 있는 힘을 다해 어머니를 뜯어말렸지만, 도저히 어머니
를 당해낼 수가 없어 아버지를 소리쳐 불렀다.
   마치 인희씨는 넋이 나간 사람 같았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는
이상한 기운에 휩싸여, 그렇케 하지 않으면 도저히 안 된다는 듯
시어머니를 마구 잡아누르고만 있었다. 닭똥 같은 눈물이 이불
위로 후두둑 떨어졌다.
   '무슨 짓이야"
   '엄마!'
   그 소동에 잠자리에서 뛰쳐나온 정박사와 정수가 무작정 그녀
를 잡아떼었다
   그러나 숨을 헉헉대면서도 인희씨는 한사코 이불을 놓지 않으
려 안간힘을 썼다.
   정박사와 정수 둘이서 양쪽 팔을 하나씩 잡고 들어내서야 겨우
그녀를 떼어낼 수 있었다.

    연수는 후다닥 달려들어 얼른 이불을 젖혔다. 상주댁은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인희
 씨가 또다시 달려들어 팔을 뻗치는 바람에 상주댁은 다시 사색이
 되었다.
    '죽어!'
    인희씨의 음성은 무척 단호하고 차가웠다
    정박사가 아내를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미쳤어? 왜 그래, 정신 차려! 정신 차려!
    '죽어
    "정신 차려, 이 사람아!'
    '엄마!'
    정수는 완전히 미친 사람처럼 변해 버린 어머니를 끌어안고 엉
엉 울음을 터뜨렸다. 그때 인희씨 입에서 비명 같은 절규가 터져
나왔다.
    '어머니, 어머니! 나랑 같이 죽자! 나 죽으면 어떻게 살래? 나
랑 같이 죽자 애들 고생 그만 시키고, 나랑 같이 죽자! 어머니
    연수는 울컥 눈물이 치밀어 애꿎은 입술만 깨물었다.
    그때까지 정박사의 품에 안겨 있던 상주댁은 고통에 찬 며느리
의 절규를 멍하니 듣고만 있었다. 상주댁은 얼이 빠진 건지, 아니
면 그 와중에 잠시 제정신이 돌아온 건지 얼핏 눈가에 이슬까지
맺혔다. 그 젖은 눈빛도 온전한 사람처럼 멀쩡하게 보였다.

   어느덧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폭풍이 스치고 지나간 바닷가처럼 집안에는 괴괴하고 을씨년
스런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러나 어찌 보면 바로 몇 시간 전에
난리를 치른 집 같지 않게 얼마쯤 평화로워 보이기도 했는데, 그
건 순전히 인희씨 때문이었다. 인희씨는 일찍 깨어 밤새 무슨 일
이 있었냐는 듯 여느 날과 전혀 다름없이 처신했던 것이다.
   뜬 눈으로 밤을 새운 탓에 가족들은 모두 파김치가 되어 있었
지만, 짐짓 겉으론 아무 일도 없는 듯 여느 날과 똑같이 처신했
다. 우선 인희씨가 먼저 나서서 그렇게 했기 때문에 나머지 가족
도 더불어 그녀 하는 양을 따라 그렇게 했던 것이다.
   아침을 먹고 나서 인희씨는 시어머니를 씻긴다며 목욕탕으로
향했다. 상주댁은 순한 양처럼 며느리의 손에 이끌려 목욕탕 안
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목욕탕 문이 딸깍 하고 닫히자 연수가 후다닥 달려갔
다.
   '엄마. 엄마! 저랑 같이 해요, 엄마!'
   연수가 불안스런 목소리로 외치며 문을 두드려댔다. 모두들 불
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가족들은 죄 한마음이 되어 목욕탕 안의
동정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정박사는 아들과 함께 소파에 앉아 연신 줄담배를 피워댔다.
   그러나 안에서는 바깥 분위기에 아랑곳없이 고부간에 두런거

 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인희씨는 시어머니를 속옷 바람으로 좌변
 기 위에 앉혀 놓고 정성껏 비누칠을 해서 온몸을 씻기고 있었다.
 간밤의 일로 어찌나 놀랐던지 상주댁은 옷을 입은 채로 그만 똥
 오줌을 싸고 만 것이었다
    '오늘뿐이야. 나 없으면 아무데나 똥 누고 그러면 안 돼. 안그
 러실 거지?'
    마지막으로 발을 닦아 주며 인희씨가 조금은 퉁명스럽게 말을
 이었다.
   '안 그러실 거지? 오늘은 내가 놀라게 해서 그런 거지? 이제
그러면 안 돼?'
   인희씨는 어린애를 꾸짖듯 짐짓 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이내 마음이 아파서 물기 어린 눈으로 시어머니를 가만히 들여다
보았다.
   '엄마!"
   밖에서는 여전히 연수의 불안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인희씨는 그러거나 말거나 아예 대답도 하지 않고 목욕을 마친
시어머니에게 새옷을 갈아입혔다.
   '...좋아?'
   상주댁은 말없이 며느리를 보고만 있다.
   인희씨가 그 앞에 쪼그려 앉으며 그 눈을 그윽하게 바라보았
다.
   '개운하지?'
   상주댁은 어느덧 맑은 눈으로 며느리를 보고 있다. 어쩌면 정
신이 돌아와 며느리 마음을 이해하는 것 같기도 한 눈빛이었다.

   인희씨는 그런 시어머니를 대견한 듯 바라보았다.
   '이렇게 입으니까 꼭 새색시 같네.'
   인희씨가 눈길을 거두며 시어머니 손목을 잡고 조용히 말을 이
었다.
   '어머니, 나 먼저 가 있을게. 빨리 와.'
   이어 인희씨의 음성은 잔잔한 메아리가 되어 시어머니 가슴속
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싸우다 정든다고 나 어머니랑 정 많이 들었네. 친정 어머니
먼저 가시고, 애비 공부한다고 객지 생활할 때, 애들 없구 외롭고
그럴 때도... 어머닌 내 옆에 있었는데... 나 밉다고 해도 가끔 나
한테 당신 좋아하시는 거 아꼈다가 주곤 하셨는데... 어머니 이제
기억 하나도 안 나지?'
   인희씨는 잠시 말을 멈추고 시어머니를 정겨운 눈빛으로 바라
보았다.
   상주댁의 눈빛에도 참 많은 이야기가 들어 있었다.그런데 바
깥에서 또 마음을 놓지 못하는 연수의 목소리가 고부간의 대화를
끊어 놓았다.
   '엄마?"
   그때였다. 여지껏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상주댁이 연수가 있는
밖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저리 가, 이년아!'
   인희씨는 마침내 시어머니가 말문을 열자 번쩍 고개를 들었다.
   시어머니의 그 눈빛이며 표정이 모두 해맑다. 인희씨는 비로소
시어머니가 제정신으로 돌아왔다는 걸 깨닫고 눈물이 핑 돌았다.

    '어머니. 아까... 미안해. 내 맘 알지?=
    시어머니 눈에도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인희씨는 다시 시어머니 손을 잡고 울음을 터뜨렸다.
   '이런 말 하는 거 아닌데... 어머니 정신 드실 때 혀라도 깨훌
어, 나 따라와. 아범이랑 애들 고생시키지 말고, 나 따라와,

 

    다음날 인희씨는 늦게까지 잠에서 깨어나질 못했다
    지지난 밤의 피곤이 이제사 인희씨를 곤한 잠에 빠뜨린 것이었
다. 몹시 지친 듯 곤하게 자는 인희씨를 깨우지 않고 식구들은
저마다 조심스럽게 나들이 준비를 했다.
    그날은 정박사 부부가 단둘이 일산 새집으로 나들이를 떠나기
로 한 날이었다.
    연수가 주방에서 아침을 준비하는 동안 정수는 어머니의 짐을
챙겼다.
    건넌방에선 정박사가 노모에게 아침 밥을 떠먹여 드리는 중이
었다.
   '아, 하세요.'
    상주댁은 아들이 떠먹여 주는 죽을 가만가만 받아먹었다. 전에
없이 양순해진 눈빛 가득 뭔가 골똘한 생각들이 담겨 있는 듯했
     '우리 어머니 잘 드시네. 다시 아, 하세요.
     정박사는 아내 대신 노모에게 죽을 떠먹이며 자기도 모르게 아
  내를 흉내내고 있었다.
     노모는 얼핏 정신이 딴 데 가 있는 듯 보였지만 그가 시키는
  대로 입을 벌렸다가 죽을 받아넘기며 간간이 뜻 모를 미소를 짓
  기도 했다.
    '자, 이제 물 드시고 편안히 쉬고 계세요.~
     정박사는 노모가 식사를 마치고 물을 마시는 것을 지켜본 다음
 에야 건넌방을 나왔다.
    주방에선 된장찌개 끓는 냄새가 구수하게 났다.
    '나들이 준비는 안 하고, 내가 너무 오래 잤네.,
    얼마 후 기지개를 켜며 인희씨가 주방으로 나왔다. 그녀는 연
 수가 끄리는 된장찌개 냄비를 열어 보고는 방긋 웃어 보였다.
    '쌀뜨물로 끓였니?"
    '네.'
    연수가 쑥쓰러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살림 해두 되겠네.'
    인희씨는 식탁에 놓인 반찬들을 집어먹으며 대견한 듯 딸을 바
라보았다.
   '아이고, 맛나다.'
   '간이 맞아요?'
   '잘 맞네.'
   모처럼 어머니의 밝은 모습을 보니 연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
졌다. 그녀는 찌개를 식탁으로 옮겨 놓고 수저도 보기 좋게 늘어

 놓았다. 그때 난데없이 어머니가 딸의 이름을 불렀다
    '연수야.
    "네.
    "연수야.'
    지극히 다정한 음성이었다.
    연수는 문득 코끝이 찡해져 고개를 떨구었다.
    인희씨는 연수가 대답을 해도 자꾸 이름을 부른다.
    '어째 자꾸 우리 딸 이름이 부르고 싶네, 연수야.'
    연수는 공연히 안 닦아도 될 그룻들을 닦는 척하며

                                                               어머니가

부르는 대로 대답해 주었다.
   '연수야....
   "...네.'
   '난 우리 연수가 참 이쁘다."
   순간 왈칵 목이 메이는 건 연수뿐만이 아니었다.
   인희씨는 숫기 없는 딸의 뒷모습을 애처로운 눈길로 바라보며
굳은 듯 서 있었다.
   불쌍한 것, 저것 시집 보내 놓고 극성맞은 친정 어머니 소리
들어가며 총각김치며 밑반찬이며 열심히 퍼다 줄 생각에 마음이
설레기도 했었는데.... 예전에 친정 엄마한테 못 받았던 것 저 애
시집보내고 다 해주려고 했는데... 딸은 엄마 팔자 닮는다던데,
정말 그러면 어쩌나, 불쌍해서 어쩌나....
   인희씨는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르는 것도 잊고 딸의 뒷모습만을
마냥 아프게 바라보고 있었다.
   '엄마 일어나셨네?'

    어느 틈에 정수가 다가와 뒤에서 인희씨를 껴안았다. 인희씨는
 이내 눈물을 닦고 감정을 수습했다.
    정박사도 식탁에 와 앉았다. 정수는 어머니가 우는 걸 짐짓 모
 르는 체하고 누나를 도와 식탁에 밥을 날랐다.
    이윽고 아침 식사가 시작되었다.
    정수는 인희씨 곁에 앉아서 이것저것 수저에 반찬들을 언저 주
 었다.
   '이번엔 뭘 줄까? 무나물? 버섯?"
    인희씨는 아들이 놓아 주는 대로 가만히 밥술을 입에 넣어 넘
 기고 있었다.
    정박사는 밥을 먹으며 눈으로는 신문을 뒤적거리는 척 그 모습
을 못 본 체하고, 연수는 물을 떠다 놓는다, 찌개를 더 가져온다
하며 괜스레 자리를 뜨곤 했다.
   뭐, 두부? 엄마, 말 해. 엄마 찌개 먹고 싶은데 내가 무나물
주고, 엄마 버섯 먹고 싶은베 내가 두부 줄까 봐 그래?'
   아무 말 없이 수저만 들여다보고 있는 인희씨를 향해 정수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묻는다.
    잠자코 있던 인희씨가 입가에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

   '네가 두부 주면 두부가 먹고 싶었던 것 같고,네가 버섯 주면
꼭 그게 먹고 싶었던 것 같아."
   그랬다. 지금 인희씨는 아들이 수저에 모래를 얹어 준다 해도
꼭 그게 먹고 싶었던 것처럼 목이 메었다.
   아직 어린 아들에게도 한이 많다.

   이 다음엔 정수도 장가를 들고 아빠가 되겠지. 이 녀석 결혼하
면 해보고 싶은 것도 참 많았다. 며느리 앞세워 시장에도 가고,
옷도 사주고, 같이 순대도 먹고 싶었는데....
   어머니는 간혹 일찍 며느리를 본 친구들이 며느리 손잡고 쇼핑
다니는 모습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손주가 생기면 보약도 지어 먹이고, 어르르 까꿍 어르다 품에
안고 낮잠이라도 한번 자보고 싶었는데..._
   며느리가 가끔 제 잘난 맛에 까불면 따끔하게 시에미 매운맛도
보여 주리라....
   이렇게 생각하다가도 이내 생각을 바꾼다. ...아니야, 그랬다가
제 남편한테 화풀이라도 하면 큰일이지, 하며 마음을 고쳐 먹기
도 했었다.
   요즘 세상의 그 이상한 며느리살이라는 것도 인희씨에겐 ??
한 일 가운데 하나였다. 정말 그런 며느리들이 있을까. 내 아들
 색시가 그렇게 나온다면 어째야 하나..
   그러나 지금 이렇게 되고 보니 아들 장가는커녕 대학등록금도
 자기 손으로 못 내주는 아쉬움에 인희씨는 목이 메이는 것이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아침 식사는 그렇게 끝났다.
    인희씨는 시어머니와의 이별을 위하여 건넌방으로 갔돠.
   어머니, 나 아범이 좋은 데 데려간대. 그런데 좀 힘들어, 집에
서 어머니랑 애들하고 그냥 쉬고 싶기도 한데... 쉬엄쉬엄 가보려
구 해. 그냥 이 집이 조금 무섭네. 정 뗄라고 그러는지. 소란 피우
 지 말구 있어요?'
    상주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인희씨는 함초롬히 젖은 눈매로 한동안 시어머니를 응시하다
손목을 꼭 쥐었다.
   '나, 가요.
   "어여... 가.'
   '네, 갈게요.'
   잠시 두 여인의 눈빛이 마주쳤다 찰나에 수많은 이야기가 오
가고 있는 양 상주댁도 인희씨도 쉬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서로
의 눈빛 사이로 시런 세월이 마치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두 여인
이 함께 보낸 그 긴 세월의 길목에 켜켜이 쌓인 아픔이 이제 차
차 물거품처럼 스러지고 있었다.

   집 앞에는 근덕이 택시를 끌고 와 미리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
다. 누나의 사정을 전해들은 그날 이후, 근덕은 택시 운전에만 전
념하며 그런 대로 착실히 일하고 있었다. 오늘 그는 누나가 집을
비운 사이 사돈댁 노인네를 돌봐 드릴 처를 데려다 주려고 온 것
이었다.
   '상종 못할 인간!'
   근덕댁은 바로 코앞에까지 와서 한사코 집 안으로 들어가지 않
으려는 남편에게 화를 내며 차에서 내렸다.
   아내의 볼멘소리에도 근덕은 묵묵히 딴전을 피우고 있었다. 그
는 차마 누나의 마지막 모습을 볼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갖다 줘.'
   그가 뚱한 얼굴로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뭐야?'

   '얼른 받아!'
   근덕은 다짜고짜 쏘아붙이며 봉투를 힐끗 보는 아내를 향해 무
뚝뚝하게 덧붙였다.
   ,놀러 간다며? 갈 때 먹으라고 줘.'
   '뭔데?'
   ,호두과자야. 우리 누나, 그거 좋아해.'
    근덕은 다소 밉지 않은 시선으로 홀겨보는 아내를 짐짓 외면하
며 핸들을 잡았다. 눈가에 어린 슬픔의 흔적을 아내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서였다.
    ,.어제 산 거야. 레인지에 데워 먹으라고 해. 잘난 거 먹다 목메
일라. "
    근덕은 누나가 있는 집 쪽을 한번 돌아보고는 그대로 떠나 버
 렸다.
    근덕댁은 그런 남편을 바라보며 혀를 꿀끌 찼다. 어쩌면 저렇
 게 주변머리가 없을까. 볼수록 한심하다는 생각뿐이었다.
    근덕은 골목을 벗어나자마자 택시를 멈췄다. 더 이상은 도저히
 앞으로 갈 수가 없었다. 그는 양손으로 핸들이 부서져라 내리겼
 다. 그리고 무너지듯 천천히 핸들에 고개를 처박았다. 갑자기 근
 덕의 어깨가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는 마침내 속 안에 감춰
 둔 슬픔의 덩어리를 모조리 끄집어냈다. 지나던 사람들이 보거나
 말거나 꺼이꺼이 큰소리로 울어대는 것이었다.

    출발 시간이 다가왔다,
    인희씨는 창백하고 지친 모습으로 대문을 나섰다. ?募測裏?바

 로 뒤에 따라나섰다.
   '조심해 다녀오세요. 이거 반찬 몇 가지 하고, 이건 호두과자
예요. 그이가 샀어요.'
   '근덕이가...?'
    인희씨는 올케가 건네준 호두과자 봉지를 가슴에 안았다. 갑자
 기 가슴 언저리가 짜안해져 인희씨는 봉지를 다시 한번 내려다보
았다. 못난 남동생의 마음이 그 안에 담겨 있었다.
   '그이 이제 일 해요. 택시 회사 다시 들어갔어요.'
    인희씨는 올케를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올케가 참 고맙네.'
   '뭘요? 저는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인희씨는 호두과자 봉지를 소중히 안은 채 당부했다.
   '노인네 잘 모셔."
   "...네.'
   인희씨는 올케 등을 몇 번 토닥여 준 다음 그 눈을 찬찬히 들
여다보았다.
   근덕댁은 벌써부터 고장난 수도꼭지처럼 고인 눈물을 뚝뚝 떨
어뜨리고 있었다.
   인희씨는 그 눈물을 뒤로 한 채 자동차로 향했다. 이미 정수와
연수는 효좌석에 타고 있었다. 인희씨가 앞좌석 차 문을 두드리
며 정수를 부른다.
   '정수야, 니가 뒤에 타고, 당신은 앞에 타요.'
    정수가 아버지의 서운한 눈길을 의식하며 미적미적 뒷좌석으
로 왔다. 이어 정박사가 앞좌석으로 가 앉은 다음에 차는 천천히

집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손을 흔드는 근덕댁의 모습이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차는 시내를 거쳐 바로 강북 강변도로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얼마를 더 달려 자연스럽게 자유로로 합류했다.
   '식구들끼리 소퐁두 가구, 참 좋다. 근데, 길이 일산 쪽이네?
거긴 러브 호텔 같은 것도 별로 없던데, 어디 좋은 데가 따로 있
나?'
   뒷좌석에서 정수의 손을 꼬옥 잡은 채 눈으로는 운전하는 연수
의 뒷모습을 마냥 응시하며 인희씨가 어린애처럼 천진하게 물었
다.
   정박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마침 그때 차는 일산 보건
소 앞을 지나고 있었다. 그러자 그는 앞으로 자신이 일하게 될
보건소를 바라보며 아내를 향해 속엣말로 중얼거렸다.
   '잘 봐 둬. 당신 죽고 웬 홀애비 하나가 저기 있을 거야. 꽁지
빠진 닭처럼 늙고 초라한 홀애비 보건소장이 말이야...
   그러나 인희씨는 남편의 속엣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벌써
부터 지친 얼굴이다.
   '딴 데 가지. 경치 좋은 데....'
   그 말을 끝으로 인희씨는 가물가물 잠에 빠져들었다
    정수는 그런 어머니를 한사코 외면한 채 굳은 얼굴로 창 밖만
바라보았다.
    잠시 후, 인희씨는 연수가 차를 멈추는 소리에 깜짝 놀라 잠에
서 깨어났다

    "다 왔어요."
    '여긴. 우리 집이잖아?"
    인희씨는 신기한 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연수는 어떠니의 기뻐하는 모습에 미소 지으며 아버지를 돌아
 보았다.
    '내가 연수랑 정리했어. 들어가자.'
    인희씨는 짐 보따리를 들고 내리는 남편을 감격한 눈빛으로 쳐
 다보았다. 이내 눈시울이 젖어들었다. 그녀는 차에서 내릴 생각
도 못하고 그저 새집을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았다
    비로소 인희씨는 오늘 소풍이 자식들과의 마지막 이별 여행이
라는 걸 깨달았다.
   '정수야, 엄마 봐야지?'
   정수는 아까부터 한사코                                     짐을 든 채앞만
문을 열고 있었다.을 응시하는 아빠를 보았다.
정수는 입술을 꽉 다문 채 고개를 떨구었다.


  그녀는 그것을 모른 체하고 짐짓 장난스럽게
  '정수야, 나 누구야?'

   '엄......마.'
    ,,정수야,너... 다 잊어버려두 엄마 얼굴두 웃음두 다 잊어버려
두. 니가 이 엄마 뱃속에서 나온 건 잊으면 안 돼!'

                                                   반지를 빼내어 아들에개
주며
이거 니 섹시에게 주어.


   '이거 나중에... 니 마누라 줘.'
   인희씨는 정수가 그 반지를 받지않자 이네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잊어 먹을까 봐 그래. 아무리 뒤져 봐도 엄마가 이거밖에 줄
 게 없다, 미안해."
    정수는 인희씨 품에 안겨 이를 악물고 억지로 울음을 삼키고
 있다. 그렇게 한동안 아들을 끌어안고 있던 인희씨는 이윽고 정
 수를 몸에서 떼어내며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잠깐 내려 봐. 누나랑 할 얘기 있어.'
    정수가 차에서 내렸다.
    인희씨는 힘겨운 몸짓으로 시트에 등을기댄채  시
 선은 창 밖을 향한.채 말을 이었다,


    '연수야, 엄마가 아무래도 곧 정신을 놓칠 것 같다 자꾸 가물
 가물해.'
    연수는 이미 어머니가 자식들과 마지막 이별 의식을 치르고 있
 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핸들을 부여잡은 채 앞만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뒤에서 인희씨의 낮은 음성이 이어지고 있었다.
    '엄마, 연수 사랑해. 알지?"
    '네, 저도... 엄마... 사랑해요.'
    연수는 고개를 숙인 채 인희씨 몰래 울고 있었다,
   '그래. 사랑해. 아주 많이 사랑해.'
    어머니도 울고 있는가.... 목소리가 점점 흔들리고 있는 게 느
껴졌다.
   '너는... 나야. 엄마는... 연수야.'
   '이제 동생 데리고 가. 엄마 아버지랑 좀 쉬어야겠다.'
   연수는 소리 죽여 울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뒤에서 인희씨
가 목을 끌어안았다.
   '착한 우리 딸....'
   인희씨의 눈물 젖은 입술이 연수의 볼에 닿았다.
   연수의 볼에서도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이들이 가고 있다.
   인희씨는 멀어져가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지켜보며
손을 흔든다. 아이들의 모습이 눈에, 가슴에, 갈비뼈에, 발등에
두루두루 불도장처럼 와서 박히는 것 같다. 저것들이 울며 간다.
먼 발치에서 보아도 인희씨는 눈에 선하다. 봐야 안다지만 그녀
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저것들의 어미인 까닭에 보지 않아도 다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녀는 선 채 질근 입술을 물었다.
   죽는다는 것, 그건 못 보는 것이다. 보고 싶어도 평생 못 보는
것. 만지고 싶은데 못 만지는 것. 평생 보지도 만지지도 목소리도
들을 수 없는 것. 그것이 바로 죽음이라는 이름의 지독한 이별인
것이다
   인희씨는 석상처럼 선 채 점점이 멀어져가는 연수의 차를 끝까
지 바라보고 있었다.

     정박사는 아내의 어깨를 감싸안고 안으로 들어갔다.
     인희씨는 잘 꾸며진 집 안을 보고 몹시 감탄했다. 옷장이며 응
  접 세트, 식탁, 침대까지 모두 눈에 마뜩해  보였다. 커튼. 액자,
  벽시계도 모두 자기 취향에 꼭 맞았다.
    '참 좋다. 언제 이걸 다...?'
    '마음에 들어?그냥 대충 했는데."
    인희씨는 남편의 이러한 배려가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론 못내
 아쉬운 느낌도 들었다. 집 안 곳곳이 동화처럼 잘 꾸며져 있었으
 나, 이런 배경은 가족 삶의 행복한 지속을 보장하는 공간인 동시
 에 자신에겐 영영 이별하는 아쉬운 장소, 그런 일회성의 공간으
 로 존재하고 있다는 자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인희씨는 차로 여기까지 오는데도 힘들었던지
역력했다. 정박사는 아내를 침대에 눕혔다. 이내
잠에 빠져들었다.

    겨울 낮은 노루꼬리처럼 짧았다. 인희씨는 깊은 잠에 빠져 있
느라 그토록 소망하던 석양 무렵의 호수도 보지 못했다. 정박사
는 오히려 다행이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노을 지는 광경이 아내
에게 무슨 별난 감홍을 줄 수 있겠는가, 스스로 노을 지는 아내로
서는 오히려 황혼의 아름다움 속에서 자신의 죽음이나 헤아리고
있을 게 뻔했다.
   아내가 잠들어 있는 동안 정박사는 혼자 이른 만찬을 준비하느
라 부산을 떨었다. 서서히 호수 주변으로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당신, 솜씨 좋네. 새 장가 가도 되겠네.'
    저녁 무렵 잠에서 깨어난 인희씨는 그가 정성껏 끓인 죽을 힘
없이 받아먹으며 배시시 웃었다.
   '이걸 어떻게 만들었대?"
   '연수한테 좀 배웠지, 뭐.'
   인희씨는 입으로보다 눈으로 더 많은 음식을 먹었다.
   정박사는 한 숟갈이라도 더 아내 입에 떠넣어 주려 수저를 들
이대는대 . 그녀는 한사코 보기만 한다. 입이 소태처럼 써서 음식
어 잘 넘어가질 않는 것이다.
   '한 숟갈만 더 먹어 봐.'
   '이제 차 마시자.'
   정박사가 마지막으로 떠넣어 주는 죽을 마지못해 받아넘기고
나서 그녀가 서툴게 응석을 부렸다. 그런 아내를 마주보며 정박
사가 희미하게 웃었다.
   정박사는 곧 차를 끓여 거실로 가져왔다
            찬지 향이 좋네. 무슨 차야?'
   '몰라. 그냥 향이 좋은 차야. 훌훌 불어서 마셔. 뜨거워.'
   '꼭 신혼여행 온 것 같다. 당신 공부한다고 우리 신방도 못 차
리고 산 거 알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방긋 미소 짓는 인희씨를 정박사는 처연
한 시선으로 마주보았다. 이름도 모르고 산 차 한 잔에도 저렇게
행복해 하는 여자를 그 동안 왜 그렇게 못해 줬던가, 하루에 한
시간만이라도, 아니 한 달에 십 분만이라도 아내를 저렇게 기쁘
게 해주었더라면 지금처럼 마음이 헛헛하지는 않았을 것을.

     정박사의 사무치는 회한을 꼬집기라도 하듯 인희씨가 이내 말
  을 이었다.
    '말년에 복이 텄다더니, 이런 날이 올려고 그랬나 보네. 당신
 은 좋겠다. 이런 집에서 앞으로 십 년은 살겠지?
     정박사는 짐짓 아내의 말을 묵살하며 입을 열었다.
    '씻을래?
    "힘들어.'
    '힘드니까 씻어, 씻겨 줄게.'
    '정말?'
    인희씨가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평생 목욕은
 커녕 한여름에도 물 한 바가지 안 끼얹어 주던 남편이었다.
    정박사는 새삼 쑥쓰럽고 미안한 마음으로 아내를 번쩍 안아들
 었다.
    욕조엔 이미 적당히 데워진 물이 가득 담겨 있었다.
    인희씨는 다소 부끄러워하면서도 그의 품에 얌전히 안겼다. 욕
실에 들어선 정박사는 그녀를 욕조에 걸터앉히고 한 가지씩 가만
가만 옷을 벗겨 주었다. 삶은 계란 속살처럼 희고 부드러웠던 살
결이 이제는 나무껍질처럼 마르고 군데군데 멍든 자국이 선명하
다. 그러나 정박사의 눈에는 그런 아내가 전혀 험해 보이지 않는
다. 새색시인 양 여전히 곱다.
   그는 아내의 몸을 조심스럽게 욕조에 누이고 비누칠을 해서 정
성껏 닦아 주었다.
   인희씨는 조금은 어색해 하면서도 간지럼을 타는 아이처럼 어
리광을 부렸다.

    '눈 매워.
    "그러니까 눈을 꼭 감아야지."
    '감아두 매워."
    머리를 감기고 드라이어로 말린 다음 잠옷으로 갈아입혔다, 그
 렇게 하고 나니 발그레한 홍조를 띤 인희씨 얼굴이 소녀처럼 해
 맑다.
    정박사는 수건으로 얼굴에 남은 물기를 마저 닦아 주고 나서
 그 모습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이쁘다, 우리 마누라."
    그 말을 들은 인희씨가 갓 시집 온 색시처럼 수줍게 웃었다.
 이제 저 웃음을 언제 다시 볼 수 있을까. 천 년 뒤 내생의 어느
 이름 모를 마을에서, 아니면 낯선 어느 길모퉁이에서, 그런 데서
 나마 볼 수 있을까.
    곱다... 그 웃음... 슬프도록 곱다

   얼마 후, 부부는 나란히 침대에 누웠다
   '테레비라도 하나 갖다 놓을 걸, 심심하네.'
   멀뚱하게 누워 있던 정박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는 공연히
눈 둘 곳을 몰라하고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부부가 이런 시간
을 가져보기는 생전 처음이라 조금은 낮설고 멋쩍은 것이다.
   이윽고 골똘히 무슨 생각에 잠겨 있던 인희씨가 입을 열었다.
   '여보, 나 소원 있어.'

   '나, 무덤 만들어 줘.'

    정박사는 잠자코 앞만 보며 나지막이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
곁에서 잠시 할 말을 잃은 듯 손가락을 물어뜯고 있던 인희씨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당신은... 나  없서도 _ 괜찮치 ?'
   며칠 전까지 만 해도 인희씨는 차가운 땅속에 묻히기 싫다며 차
라리 화장이 좋다고 했었다. 그땐 왜 쓸데없는 소리를 하냐며 버
럭 화를 냈었는데, 정박사는 지금 그럴 배짱도 없다.
   '언젠 답답해서 싫다구 화장해 달라매?'
   '우리 엄마 화장하니까 별루드라. 남한강에 뿌렸는데, 하두 오
래되니까, 여기다 뿌렸는지, 저기다 뿌렸는지 도통 기억에 없구.
여기 가서 울다, 저기 가서 울다... 꼭 미친 사람처럼.... 당신하
구 애들은 그러지 말라구.'
   정박사는 잠자코 앞만 보며 나지막이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
곁에서 잠시 할 말을 잃은 듯 손가락을 물어뜯고 있던 인희씨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당신은.. 나 없어도 괜찮지?'
   정박사는 말없이 아내 얼굴만 돌아보았다.
   인희씨가 그 눈길을 외면하며 지나가는 말처럼 다시 이었다.
   '잔소리 안 하고 좋지. 뭐.'

  '나, 보고 싶을 거는 같애?'
  정박사는 아내를 더 이상 마주보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여 주었

다.
   인희씨가 또 묻는다.
   '언제? 어느 때?'
   '......다
   "다 언제?'
   '아침에 출근하려고 넥타이 맬 때.'

  '.. 또?'
  '맛없는 된장국 먹을 때."
  '된장국 맛있을 때.'

  '또?'
  묻는 아내도, 대답하는 남편도 점차 목소리가 잦아들고 있었다
  정박사는 아내를 보지 않은 채 마음속에 빗장처럼 걸려 있던

말들을 하나씩 하나씩 뱉어냈다.

   ,,술 먹을 때, , 잠자리 볼 때, 잔소리 듣고 싶을 때, 어
머니 망령 부릴 때, 연수 시집갈 때, 정수 대학 갈 때, 그 놈 졸업
할 때, 설날 지짐이 부칠 때, 추석날 송편 빚을 때, 아플 때, 외로
울 때....'
    정박사의 고백이 이어지는 동안 인희씨는 물기를 가득 머금은
눈으로 괜한 손톱을 물어뜯으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녀도 차마 남편의 얼굴을 마주보지 못할 만큼 감정의 진폭이
커지고 있었다.
    '당신 빨리 와. 나 심심하지 않게."
    기어이 인희씨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정박사는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 그도 아내를 안은 채 꺽꺽 울
음을 토해냈다.
    그러자 인희씨가 젖은 눈을 들어 수줍게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
 다.
    ,여보,나 이쁘면 뽀뽀나 한번 해 주라."

   정박사는 아내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길고 오랜 영혼
의 입맞춤을 나눴다
   너... 정말.. 고마웠다....'

   침실 가득 눈부신 햇살이 밀려들었다. 아침이었다. 햇살은 마
치 무슨 축복인 양 쏟아져 들어와 잠든 인희씨의 하얀 얼굴을 비
춰 주고 있었다.
   정박사는 잠에서 깨자마자 조용히 아내를 불러 보았다.
   '여보.'
   아내는 그의 팔에 안긴 채 미동도 없이 잠들어 있었다.
   그는 깊은 잠에 빠진 아내를 돌아보지 않은 채 다시 한번 조용
히 불렀다.
   '여보....'
   아내를 안고 있는 오른쪽 팔에서는 이미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다. 그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인희야!'
   정박사는 오열하며 아내의 이름을 불렀다. 주체할 수 없는 눈
물이 계속 그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는 서서히 몸을 굽혀 식어 버린 아내의 몸을 부서져라 껴안
아 주었다. 그녀의 입술에 입맞추며 그렇게 언제까지, 언제까지
 끌어안고 있었다
    ...어느 결에 고인 슬픔인지, 깊이 잠든 인희씨의 눈에도 차디
찬 물기가 서려 있었다.

                                                                     저자 후기

                                                                                                            그러나 그 시절, 분명 나는 그녀의 한이었


                                                                                                                                                                              꽈기.275
    그녀가 저 세상으로 간 지 이제 5년. 우리의 이별은 아름답지
도 않았고, 슬프지도 않았다. 나는 그때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며
오직 한 생각뿐이었다. 모든 의식(凰料이 어서 끝나고 잠이나 실
 컷 잤으면, 잠이나 실컷 잤으면... 그 생각뿐이었다.
    나는 어머니를 사랑했다. 지금도 나는 어머니를 사랑한다.
    ,죽은 자를 사랑하지 마라. 죽은 자 맘 아퍼 이승 문턱 못 넘을
 라.'
    내가 매일 어머니를 부여잡고 놓지 않는다는 걸 알고 한 스님
 이 내게 그런 식으로 충고하셨다. 그 충고에 나는 옳다커니 싶었
 다. 그래, 가지 마라. 어머니 저승에 가지 마라. 넋이라도 이승에
 남아 나랑 먹고 놀자. 나랑 먹고 놀자.
    누구는 내 말이 말이 안 된다 할 것이다. 제 어미 죽는 날 그리
 잠만 밝혔다며, 사랑한다는 건 뭐고, 저승까지 가지 말라니 그건
 또 무슨 말인가? 그럿다. 이건 분명 말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정
 말 그랬다.
    나는 술도 안 마시면서 곧잘 했던 말을 또 하고 했던 말을 또
 하는 못된 버릇이 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다음 그 버룻은
 더욱 중증이 되었다. 내 지기들은 모두 열댓 번씩 들은 말을 나는
 지금 또 하려 한다

 우리 집의 수양딸이 된 고아 친구 향이와 성남문화회관에서 하는
 공옥진 여사 공연을 보러 갔었다. 어머니 생전에 처음하는 공연
 구경이었고(참말이다 -물론 동네 약장수 구경은 한 적이 있었지만,
 일금 만 원짜리 공연 구경은 처음이었다), 내 생전에 어머니와 같
 이 본 처음이자 마지막 공연이었다. 우리는 그 공연을 참 즐겁게
 봤다. 분수에 안 맞게 택시를 타고, 분수에 안 맞게 공연 도중 걷
 는 불우이웃돕기 성금을 만 원씩이나 내면서, 분수에 안 맞게 호
 탕하게 웃어젖혔다. 그때가 기억난다. 나는 그냥 옷는데, 내 어머
 니 구경하는 모습이 가관이었다. 아이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남들 웃는 대목에서 괜스레 눈이 붉어지며 박수를 치는베, 그 소
 리가 정말 우렁찼다.
    그때 나는 스스로를 대견하게 생각하면서, 그래도 내가 참 효
녀짓을 했구나 싶었다. 우리는 공연 구경을 다 하고, 오천 원이나
하는 공옥진 목각을 사고 일식집으로 갔다. 부모님을 대접하는
첫 자리였다. 참, 일식집에 가기 전, 내 호의가 과했는지 아버지
는 한사코 집에서 밥 먹지 돈 주고 밥을 왜 사먹느냐 했고, 어머
니는 우리 막내딸이 뭘 사줄까 보자며 선뜻 가자 했다. 속없는 어
머니. 사실, 그 즈음 내 주머니는 허당이었다. 그러나 한번 한 말
을 도로 담아 넣을 수는 없는 일, 나는 일식집 문을 너무도 당당
하게 열어젖혔다. 그리고 주문을 했는데, 알탕에 생선초밥, 그게
전부였다. 음식이 나오고, 빈약한 상차림에 스스로가 멋쩍어 나
는 서둘러 먹자 하고 먼저 수저를 들었다. 그런데, 한참을 아버지

 와 나, 그리고 향이가 수저질을 하는데도 어머니는 도통 가만이
 만 계셨다. 음식이 맘에 안 드시나 싶었다. 다른 걸 시켜 드릴까
 싶었다. 상차림이 민망해 어머니 얼굴을 못 보고, 나는 그리만 생
 각했었다. 그러다 용기를 내어 어머니 얼굴을 봤는데... 그 눈을
 봤는데.. 눈물이 그렁해 울고 계셨다. 눈물이 날 만큼 좋으셨던
 것이다. '내가 언제 이런 사랑 받아나 봤겠니.' 내 어머니는 그럿
 게 싸구려 애/〉?감동하는 그런 분이셨다.
    나는 지금도 그때 일을 두고두고 못 잊는다. 내 얼마나 그녁
 알기를 소홀히 했던가.

    참 묘하다. 살아서는 어머니가 그냥 어머니더니, 그 이상은 아
니더니, 돌아가시고 나니 그녀가 내 인생의 전부였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그녀 없이 세상이 살아지니 참 묘하다.
    지금 이 후기를 제외한 이 소설은 픽션이다. 내 아버진 의사도
아니요, 난 연수처럼 고분고분한 딸도 아니었다. 그러나 난 이 글
을 쓰며 참 많이 울었다. 소설 속의 김인희, 그녀는 내 어머니에
다름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 글을 쓰며 내가 그녀의 못난 한
이었듯, 그녀 역시 이제 와 내겐 다 못한 사랑의 한이 된다는 걸
알았다.
   나는 바란다.
   내세에 다시 그녀를 만난다면, 다시 그녀의 막내딸이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내가 그녀를 사랑했다는 걸, 목숨처럼 사랑했다는 걸 그녀는
알았을까. 초상을 치르면서는 잠만 잤어도 지금까지 하루도 거르

지 않고 그녀로 인해 울음 운다는 걸 그녀는 알까. 제발 몰라라.
제발 몰라라.

   이 글은 내 힘으로만 된 것이 아니다.본래 드라마 극본이었던
이 글을 새로이 소설화 작업을 하는 데 도움을 준 사람이 있다.
그는 내 오랜 문우이며, 피를 나눈 형제 같은, 내 어떠니가 친딸
처럼 여겼던 박숙정 형이다. 엄밀히 말하면, 이 글은 나와 그 형
의 합작이다. 지면을 통해 재차 박숙정 형에게 감사드린다.

                                               1997년 3월
                                                      노희경

 

출처 : 어둠 속에 갇힌 불꽃
글쓴이 : 정중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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