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s and Writings/on everything

다른 나라에서 - 홍상수

그림자세상 2012. 8. 27. 22:51

 

 

 

홍상수. 그의 영화는 소주 한 병 쯤 앞에 놓고 허름한 '난닝구' 후줄근하게 걸친 채 질긴 오징어 다리를 뜯으면서 혼자 볼 때 제 맛이 난다, 고 말하면 어떤 이들에게는 비웃음을 살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게 제맛이라고 본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라는 영화를 보았던 날을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그 영화를 보고 나오다 어스름한 저녁 하늘을 보느낌만은 또렷하다. 원주 시민회관, 그 넓은 자리에서 처음엔 셋이, 그리고 영화가 시작되고 20분도 지나지 않아 혼자 남아 그 넓은 시민회관을 혼자 차지하고 보았던 [강원도의 힘]을 보았던 날은 정말 강원도의 힘을 확인한 날이기도 했다^^;;

 

그리고 보니 맥주라도 한 캔 들고 앉아 본 것은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를 지나 [오! 수정]을 거쳐 [북촌방향]까지 였고, 그리고 [다른 나라에서]가 그랬다. 맥주 대신 커피를 들고 앉아. 그런데 역시 어울리지 않는다, 커피는. 소주다. 돼지껍데기 굽는 냄새가 진동하는 지하 돼지껍데기 집에서 였다면 더 나았을라나. 영화속 남자들의 찌질함이 화면을 삐져나와 내 살갗에 전면적으로 와닿는 비루함을 견뎌내려면 그 편이 더 나았을 것이다. 그러나 말이다, 어쩌면 진짜 맨 정신으로 또렷하게 응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놓치지 않게 하는 그 힘, 그 힘을 제대로 받아안으려면 소주나 돼지껍데기는 사양해야할 지 모른다. 우리 속에 똬리를 틀고 앉은 화면 속의 그 찌질한 남자들의 어떤 파편들을 온전히 부정할 수 있는 남자들이 또 얼마나 될 것인가.

 

뜬금없이 말하자면 나는 픽션보다 다큐멘터리가 좋다. 홍상수의 영화를 보면 어떤 한 파편을 반복적으로 변주해서 보여주는 반복되는 다큐멘터리의 다른 버전들 같다. 소주를 마시지 않고 봐서 그런가, 이번 영화는 그의 다른 영화들보다는 좀 더 밝고 좀 더 유쾌한 것 같다. 여전히 남자들은 찌질하고 여자들은 그 찌질이들을 들볶거나 애타게 하거나 스쳐 지나간다. 영화 이야기는 소주병 앞에 두고 오징어나 돼지 껍데기 오물거리면서 다시 한 번 보고 그때, 다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