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s and Writings/문학작품

[스크랩] 글쓰기의 쾌락

그림자세상 2009. 12. 5. 13:33

 

 

 

[특별부록|글쓰기의 쾌락]

 

 

경계에서 글쓰기

양서류 같은 책, 박쥐 같은 글


글쓰기의 망설임과 두려움 그리고 괴로움은, 의미의 발견과 재발견 그리고 소통을 통해 삶의 즐거움과 기쁨과 보람이 될 수 있다.
이 모든 과정이 글쓰기의 쾌락을 이룬다.

글쓰기에 대한 글을 쓴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우선 글쓰기를 업으로 하는 사람도 평상시 잘 하지 않는 일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더구나 ‘글쓰기의 쾌락’이라니, 나를 비롯해 글쓰기의 고통을 잘 아는 사람들은 온몸에 전율을 느낄 일이다. 그런데도 나는 이 수상한 제목 아래 글을 쓰고 있다.
이 순간, 고통이 있어야 쾌락이 뭔지 만끽할 수 있다는 상투적인 설명이 얼른 떠오른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닌 것 같다. 내게 글쓰기가 즐거움일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것이 세상을 다양하게 사는 방법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일 게다. 좀더 구체적으로는 인간 문화를 다각적으로 의미 있게 향유하는 데 적격이기 때문일 것이다.
방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글을 써도, 세상 한가운데 있다는 걸 느끼는 것은 그리 작은 행복이 아니다. 글쓰기라는 노동은 세상을 가로 세로로 지르며 활보하게 해 준다. 그래서 글쓰기를 성찰하는 눈도 다각적이어야 한다. 다음의 각 항목은 글쓰기를 여러 차원에서 조명한 것이며, 동시에 그것은 세상을 관찰하는 다양한 문화적 코드이기도 하다.


형식 : 학술서에서 칼럼까지


글의 형식이라고 하면 흔히 문학의 여러 장르를 떠올릴지 모른다. 시, 소설, 수필, 희곡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나는 철학을 전공한 인문학자다. 그러면 아마 학술 논문이나 두꺼운 사상서를 떠올릴 것이다. 물론 논문도 썼고 철학서도 썼다. 그러나 몇 년 전부터 글쓰기에 관한 한 내게서 떠나지 않는 물음은 ‘오늘날 이 땅에서 인문학자의 글쓰기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학문적 바탕 위에서 다양한 ‘사람들에게 말걸기’를 시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런 말걸기가 쉽지 않다. 인문학적 글쓰기는 문학 작품이 가진 이점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시처럼 감동적이기 어렵고, 소설처럼 이야기 구조를 지닌 경우는 매우 드물다. 특히 이야기 아닌 서술로서 독자에게 매력적이기를 바라는 것은 과욕처럼 보인다.
더구나 문화 향유의 폭이 넓어진 현대 사회에서 이른바 대중과의 관계는 ‘다가감’만으로 불충분하고, 동시에 ‘끌어당김’을 실현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대중적 글쓰기라는 융통성에 학문적 철저함을 동반한다. 인문학적 글쓰기의 성공 여부는 이 두 가지 요소의 균형에 달려 있다.
그래서 나는 ‘양서류 같은 책’을 시도하기도 했고, ‘박쥐 같은 글’을 쓰려고 항상 노력한다. 그러다 보면 “딱히 어느 지점에 서 있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 내 글에 대한 평이기도 하다. 즉 경계선 위에 서 있다는 말이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것은 큰 ‘리스크’다. 기존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 일단 편하기 때문이다. 경계의 이편인지 저편인지 불분명한 존재는 어느 편으로부터도 배척당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박쥐가 날짐승과 길짐승 사이의 ‘인터페이스’를 형성하는 것이라면, 또한 그 인터페이스 자체가 나름대로의 독립적 세계라면 날짐승과 길짐승의 세계가 부수적인 것이 된다. 그렇다. 우리 시대의 인문학적 글쓰기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세계를 독자들에게 되돌려주는 것이다. 그것은 학술성과 대중성, 무거움과 가벼움, 깊이와 피상, 의연함과 신선함 사이의 인터페이스를 형성해주면서 문화 향유의 질을 높이고 폭을 넓히는 일이다.
이상은 글의 새로운 형식을 개발하기 위한 방법이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사람들에게 말걸기 좋은 기존의 글 형식들을 섭렵하기도 한다. 칼럼, 평론, 서평, 수필 등이 그것이다. 이에 덧붙인다면 ‘북에세이’를 들겠다. 나는 서평을 쓰지만 별로 즐기는 편이 아니다. 작가는 한 권의 책을 쓰기 위해서 피말리는 고통을 감수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 노고에 비판의 칼날을 갖다 대기가 송구스럽다. 그러므로 내 나름대로 서평과 구분하여 북에세이라는 형식의 글을 신문에 연재하기도 했다. 책에 대해 평을 하기보다는 그 책이 갖고 있는 다양한 의미들을 부담 없이 풀어내 보는 것이다.
칼럼을 쓴다면 얼른 일간지나 시사주간지에 기고하는 것을 생각하기 쉽다. 물론 그런 기고도 많이 했지만, 회사의 사보에도 적잖이 기고를 했다. 잡문 쓰기를 절대 거부했던 황순원 선생이라면 꾸지람을 하겠지만, 사보 칼럼은 나름대로 큰 의미가 있다. 사보는 독자의 니즈(needs)를 잘 파악하는 간행물이다. 또한 신문 칼럼처럼 원고량과 논지 전개의 틀이 고정돼 있지 않고, 양과 질에서 다양한 실험을 해볼 수 있는 지면이다.
사보에 기고하는 것을 나는 각별하게 생각한다. 학자들의 논문이 전문 분야에서 엄밀한 이론의 지도를 문자화하는 것이라면, 이런 잡문은 세상의 희로애락을 문자화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사를 다루는 인문학자가 할 일이다. 내 생각으로는 학문적으로 미진한 경우 대중적 글쓰기에서도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리라고 본다.
어쨌든 나는 지금 짧은 칼럼에서 두꺼운 학술서에 이르기까지 글쓰기 능력을 계속 실험하면서, 그 사이에 정말 근사한 인터페이스의 세계를 이루는 ‘박쥐 같은 책’을 탈고할 날을 기다리고 있다.


소재: 수다에서 애니메이션까지


다양한 형식의 글을 쓰다보면 당연히 그 소재도 다양해진다.

다양한 소재에 접하려면

사람들이 흔히 하찮다고 여기는 것들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즉 세상과 속속들이 친해져야 하는 것이다.

그것을 나는 ‘일상의 철학’을 하며 글감을 얻는 일이라고 부른다.
극작가 싱(John M. Synge)은, 대표작 ‘골짜기의 그림자’를 쓰고 있을 때 집필에 도움이 된 것은 다른 어떤 독서보다도 다락방 바닥에 난 구멍이라고 했다. 그것을 통해 부엌 아낙들의 수다를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란다. 나도 마찬가지다. 가끔 노천시장이나 공장지대를 거닐거나, 일부러 지하철을 타고 시내를 한바퀴 돌기도 한다. 서민들의 다양한 삶을 보고 듣기 위해서다. 요즘에는 대학 구내 커피숍에 한참 앉아 있으면서, 학생들의 대화에 귀기울이기도 한다. 사실 엿듣는 것인데, 나쁜 의도로 그러는 게 아니다. 요즘같이 세대차가 두드러지는 때에는 세상의 변화를 감지하는 데 유용하고 그들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이렇게 해서 수집한 자료는 좋은 글쓰기 소재가 된다. 일상의 일들은 잡문의 소재만 되는 게 아니다. 그것은 곧 학술적 연구의 대상이 된다.
오늘날 지식인들은 현실 속에서 살아 숨쉬는 학문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쪽으로 ‘진화’해 가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정작 하루하루의 삶을 유심히 살펴보는 데에는 인색한 것 같다. 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관심 있게 보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모든 인문학자의 일상생활에 일상의 철학을 위한 자리가 있기를 바란다. 그것이 학문의 전문성을 위한 자리를 침해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마당이 넓으면 앉을 자리도 많은 법이며, 그 자리에서 하는 대화의 깊이는 소재를 어디서 가져오는지에 따라 다른 것이 아니라, 대화를 이끄는 능력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이 땅에서 인문학자들의 글쓰기는 이런 대화를 담을 줄 알아야 한다.
일상이 있으면 비일상도 있다. 비일상을 이루는 것에는 상상과 환상이 있다. 이런 것들은 책에서도 접할 수 있지만, 오늘날 다양한 영상 작품에서 많이 접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SF를 비롯한 팬터지 작품을 자주 본다. 무엇보다도 애니메이션의 환상성을 연구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사람들은 나를 보고 우리나라에서 애니메이션에 대한 본격적인 철학 담론을 처음 시도한 사람이라고 한다.
영화와 애니메이션은 분명히 글쓰기 좋은 소재이다. 특히 요즘같이 모든 것을 영상화하려는 때에, 그 반대의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은 의미 있으며 무척 재미있기까지 하다. 사람들은 문자를 영상화하는 데 반해, 나는 영상을 문자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다른 사람들은 글에서 얻은 소재로 그림 그리기를 하고 있는데, 나는 그림에서 얻은 소재로 글쓰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들을 위한 애니메이션 작품을 철학 이야기로 바꾸어놓은 일은 보람 있었다.
그밖에도 나는 여러 가지 남들이 지나치는 소재를 글감으로 삼곤 한다. 한 예로, ‘미운 오리새끼’ ‘피노키오’ ‘피터 팬’ ‘앨리스’ 등 이른바 아동문학의 고전들을 새롭게 해석해서 철학하기를 시도한 것도 내게는 소중한 경험이다. 그렇다고 내가 이들을 경박하게 다루는 것은 아니다. 심각한 철학 사상을 전개하면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칸트, 헤겔 등의 저작을 해석 인용하는 것 이상의 정성과 학자적 철저성을 가지고 대한다. 21세기의 철학자에게 동화, 영화, 만화, 애니메이션 등은 진지한 글쓰기의 동반자이다. 이들은 특히 ‘문화의 세기’라고 부르는 이 시대에 걸맞은 글감들이다.


언어: 한글에서 ‘그레고리아노’까지


나의 글쓰기 편력은 각기 다른 언어 사용의 시기와 병행해왔다. 유학을 가기 전까지 오직 한국어로 글을 썼지만, 유학 기간 중에는 꼼짝 못하고 외국어로 과제를 작성하고 시험을 보고 논문을 쓰는 길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내 학력을 아는 사람은 이탈리아어로 줄곧 모든 작업을 했으리라고 생각할 것이다. 로마 그레고리안대학교에서 학부부터 박사 과정까지 마쳤고 그곳 교수를 지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은 좀 다르다. 로마 그레고리안대 철학과의 강의 가운데 이탈리아어 강의는 3분의 2 정도이고 나머지는 영어, 독일어, 불어, 스페인어 등 다른 언어로 진행된다. 반면 철학과 교수의 3분의 2 정도는 이탈리아 사람이 아니고 바로 이런 언어권의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이들은 자기 모국어로 강의할 때도 있고 이탈리아어로 강의할 때도 있다. 철학사로 유명한 영국 출신 코플스톤(F. Copleston) 교수가 그랬고, 유물론적 변증법 비판의 대가인 오스트리아 출신 베터(G. Wetter) 교수가 그랬다.
대학 내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언어는 이탈리아어다. 하지만 그 이탈리아어라는 것은 사실 여러 언어권 교수들의 어법이 교묘하게 얽히고 설켜서 새로 탄생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학내에서는 그것을 농담 삼아 ‘그레고리아노(gregoriano)’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 우스갯소리는 대학의 언어 사용 현실을 그대로 담고 있다. 그레고리아노의 특징은 철학적 논지를 전개하는 데 기막히게 적합한 언어라는 것이다. 그레고리아노는 오랜 세월 대학의 전통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에 나름대로 어법과 문법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학교에서 발행하는 공식 서류와 출판물에 그레고리아노를 쓰는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대화, 토론, 강의 등에 사용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레고리아노는 일종의 학내 비전(秘傳·esoteric) 언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그레고리아노의 위력을 특별한 데서 더욱 절실히 느꼈는데, 그것은 글쓰기에서였다. 토론과 강의를 그레고리아노로 하는 데 익숙하다 보니까, 철학적 사고를 신나게 글로 옮길 때도 그 언어를 사용하게 된 것이다. 그레고리아노는 철학적 엑스터시를 동반한 글쓰기에 적합한 언어였다. 나는 물론 이탈리아어를 잘했다. 학생들의 리포트와 논문을 수정해주고 이탈리아어로 공식적인 글을 쓰는 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넘치는 사고를 글로 쏟아낼 때는 나도 모르게 그레고리아노를 사용하곤 했다.
그런데 문제는 몇 년 전 귀국해서 발생했다. 사용언어가 바뀌면 글쓰기에 익숙한 사람도 바로 글을 써나가기 어렵게 마련이다. 언어의 생소함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가 어떤 언어로 글을 쓴다는 것은 그 언어로 사고하며 자신을 표현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일단 언어가 바뀌면 생각을 제대로 풀어내지 못하게 된다.
1997년 애니메이션과 인문학 콘텐츠의 관계를 다룬 ‘미녀와 야수 그리고 인간’의 원고를 육필로 쓰기 시작했을 때였다. 거의 20여년 만에 전문적인 글을 한글로 써야 했는데, 도저히 글을 써나갈 수가 없었다. 몇 시간씩 백지만 보며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등 별짓을 다해 보았지만, 몇 쪽 쓰지 못했다. 할 수 없이 다시 그레고리아노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언어를 바꾼 날 밤 A4 용지로 20장 정도를 일사천리로 써나갈 수 있었다. 그 후 달포 만에 약 400장에 달하는 원고를 탈고할 수 있었다.
탈고 3년 뒤 한글 실력이 어느 정도 회복되었을 때 내가 쓴 글을 내 스스로 몇 달 간에 걸쳐 한국어로 번역했는데, 창작을 할 때보다 번역에 더 많은 시간이 들었다. 참 힘들고 우스꽝스럽기도 했지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 소중한 경험이었다.
지금은 그레고리아노나 다른 외국어로 글을 쓰는 일이 많이 줄었다. 하지만 지금도 생각은 넘치는데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를 때는 이제까지 습득한 모든 언어를 동원해서 글을 쓴다. 어떤 때는 같은 내용을 한국어, 영어, 독일어, 그레고리아노 등 여러 가지 다른 언어로 표현해보기도 하고, 한글로 글을 쓸 때도 외국어로 쓴 표현들을 줄 사이에 삽입해 비교해 보기도 하며, 따로 메모하기도 한다. 이런 것들을 최종 추고 작업 때 종합하기도 한다. 글쓰기 언어에 관한 한 나는 하이브리드 인간이다.
도구: 펜에서 ‘하이퍼프로세서’까지
내가 만일 19세기 후반 이전에 살았다면, 컴퓨터와 워드프로세싱은 물론 타자기와 타이핑이 무엇인지 몰랐을 것이다. 육필 작업만이 유일한 글쓰기 방식으로 알고 평생을 살았을 것이다. 반면 지금의 젊은 세대는 글쓰기에 주로 컴퓨터를 사용한다. 육필은 그들의 일상에서 점점 사라지고 있으며, 타자기는 이미 과거의 유물이 되었다.
나는 지금까지 다양한 글쓰기 도구들을 몸소 체험하며 살아왔다. 졸저 ‘깊이와 넓이 4막 16장’에서 글쓰기 도구와 방식을 펜으로 쓰기(writing), 타자기로 치기(typing), 컴퓨터로 처리하기(processing)로 구분하며 문화적 변동의 문제를 다루었는데, 그것은 내 개인적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나는 이 세 단계를 모두 거친 세대에 속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다양한 하이퍼텍스트를 바로 작성할 수 있는 ‘하이퍼프로세서(hyperprocessor)’가 일반화하면 그것 또한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글쓰기 도구가 사람의 의식 구조와 사고 방식에 영향을 끼친다고 보면, 내 생각과 글도 사용 도구에 따라서 변화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다양해졌다고 할 수 있다. 나는 펜, 타자기, 컴퓨터 사용의 ‘단계’를 거치는 데 그친 게 아니라, 지금도 이 세 가지 도구를 ‘동시’에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글쓰기 도구들이 글의 내용에 다양하게 영향을 주도록 내 스스로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우선 세 가지 도구와 그것을 사용한 글쓰기의 특징을 간단히 살펴보자. 고치기의 관점에서 글쓰기를 보면, 육필 창작의 우선적 특징은 쓴 글의 수정과 복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첫째, 육필 작업은 자꾸 고치지 않기 위해서 문장을 종이에 쓰기 전에 작가로 하여금 심사숙고하게 만든다. 어떤 표현을 선택할 것인지 좀더 내면적으로 고민하게 만들 수 있다. 둘째, 그래도 이미 쓴 글을 고치게 될 경우 고친 것들의 ‘보존 가능성’을 어느 정도 보장한다. 종이 위에 잘못된 부분을 직접 고치는 육필의 수정 방식은 원래 글을 다시 읽을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타자기를 본격적 글쓰기 수단으로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유학 시절이었다. 하지만 여기에는 근본적인 장애가 있었다. 그것은 언어의 문제였다. 단순히 언어사용의 문제가 아니라, 사고 자체를 서양 언어로 해야 하는 문제였다. 그것은 외국어를 배우는 차원이 아니라, 그들의 사고 구조와 사고 방식을 마치 내 것처럼 획득하는 문제였다.
혹자는 왜 그것이 굳이 타이핑 작업에서만 문제가 되는지 물을 수도 있다. 즉 외국어로 육필 작업을 할 경우도 마찬가지라는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내 경험으로는 바로 이 점에서 글쓰기로서 타이핑의 본질적 특성이 드러난다고 본다.
물론 육필로 단번에 추고 없이 완벽한 외국어 문장을 쓰기 위해서도 위와 같은 자질이 필요하다. 하지만 타이핑일 경우 그런 자질은 필수불가결하다. 흔히 간과하는 것이지만, 타이핑으로 직접 글을 쓸 때에는 쓰는 과정에서 즉각 수정할 수 없다는 사실이 타이핑하는 사람에게 거의 잠재 의식처럼 깔려 있다. 타이핑은 육필처럼 즉각 줄을 긋고 고쳐 쓸 수 없다는 전제 조건 아래에서 하는 작업이다. 머릿속에서 수정하지 않아도 될 문장을 생각해내어 손가락의 움직임을 거쳐 타이핑으로 전이하고 그것은 기계 작동에 의해 깨끗한 원고로 찍혀 나온다. 즉 사고내용-표현결정-문자입력-인쇄출력이 상호 긴밀하게 돌아간다.
컴퓨터의 워드프로세서는 단순히 글쓰기 도구도, 글쓰는 기계도 아닌 언어처리장치다. 워드프로세싱의 본질적 특징은 마음에 드는 글이 될 때까지 쓴 것을 즉시 수없이 고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무한정한 수정의 가능성과 수정의 즉각성은 라이팅과 타이핑이 가지고 있던 글쓰기 방식과 성격을 본질적으로 바꾸어놓았다. 그러므로 워드프로세싱에는 일단 써놓고 본다는 장점(아니면 단점)이 있다. 이 점에서 라이팅이나 타이핑에서 작가들이 경험하는 ‘백지의 공포’가 줄어들 수도 있다.
나는 지금 핸드라이팅, 타이핑, 프로세싱을 모두 활용하고 있으며, 앞으로 하이퍼프로세서가 나오면 그것까지 글쓰기 도구의 범위에 넣을 것이다. 창작에 대한 도구의 영향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네 가지 글쓰기 방식을 모두 경험할 수 있는 시대를 타고 태어난 것을 행운으로 받아들인다.
도구의 다각적 활용은 다양한 사고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니체(F. Nietzsche)의 말처럼 “도구가 우리의 사고에 가담한다”고 할 수도 있지만, 반면 우리의 사고는 도구의 다양한 가담을 기획하고 조직하며 활용한다.


서락(書樂): 망설임에서 보람까지


나에게 글쓰기는 우선 망설임이다. 그러다가 그것이 두려움으로 변하기도 한다. 망설임의 주된 증상은 하루에 끝낼 수 있는 글을 며칠씩 걸려 쓰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어떤 때는 원고 청탁을 받고 몇 주일씩 잔뜩 뜸을 들이다가, 마감 전날 밤에야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하는 경우도 있다.
뜸을 들인다는 것은 물론 생각이 많다는 뜻이다. 생각하고, 자료 수집하며, 무엇보다도 주제에 대해서 공부한다. 때로는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뜸을 들이며 망설이는 것 자체가 글쓰기를 구성하는 요소이다. 책 한 권을 쓰려면 도서관 전체를 뒤져야 한다는 말이 있다. 에코(Umberto Eco)도 글쓰기는 결국 영감보다는 노력이라는 데 동의한다. 나는 ‘글쓰기는 공부’라고 생각한다.
어떤 때는 잔뜩 뜸을 들이면서 준비해놓은 것을 막상 이용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결국 최종 원고는 전혀 다르게 쓸 경우도 있다. 이런 점에서 글쓰기는 미스터리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많은 공부를 하게 만든다. 마감이 급한 일간지 칼럼을 쓸 때도 글의 내용에 들어갈 사실을 철저히 확인하기 위해 여기저기 자료를 검색한다. 그것도 탐구의 한 방식이다. 그러므로 다양한 글쓰기를 섭렵하는 것은 공부의 방식을 다양하게 경험한다는 뜻일 수 있다.
어떤 때는 청탁 받은 원고를 위해서 공부를 하기 시작했는데, 이런저런 책과 자료를 읽다가 재미있어서 삼천포로 빠지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원고 마감이 이런 이탈을 통제한다. 글 쓰는 사람에게 마감은 독이자 약이다. 마감 때문에 괴로워하고 그 덕에 글을 완성해서 고통으로부터 해방된다. 글쓰기 오르가슴의 한계점에 마감이 있다.
힘들여 공부하고 마감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을 보면 글쓰기는 고통이다. 그러한 고통을 겪어도 글의 실마리를 잡지 못하거나 좋은 글을 써낼 수 없는 경우 글쓰기는 두려움으로 변한다. 그래도 글쓰는 사람은 못 말린다. 이미 2000년 전 로마 시대의 문장가 유베날리스가 간파했듯이 작가에게 아무리 늙어도 고칠 수 없는 병이 있다면 그것은 쓰고자 하는 욕구이다.
어떤 사람은 창작의 기쁨을 글쓰기의 고통과 두려움을 상쇄해주는 것으로 본다. 내 경우는 글을 쓰면서 뭔가 의미를 발견하기 때문에 계속 쓸 수 있는 것 같다. 우선 내게는 ‘생각의 회복’과 ‘일상의 발견’이 각별하다. 사람이 생각하는 동물이라고 항상 심혈을 기울여 생각하는 건 아니다. 글쓰기는 확실히 녹슬었던 생각에 기름을 쳐준다. 그러면 우주의 의미조차 다시금 쑤욱 쑥 솟아난다. 그리고 나처럼 잡문 쓰기를 꺼리지 않는 사람에게는 일상의 의미가 항상 새롭게 다가온다. 그건 큰 기쁨이다.
그리고 이건 아마 모든 작가에게 공통적일 듯싶은데, 소통의 즐거움이 그것이다. 논어에 있는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라는 말은 유명하다. 이 문장에서 불역열호의 ‘열(說)’과 불역락호의 ‘락(樂)’은 모두 기쁨과 즐거움을 뜻한다. 그래서 이 문장을 “배워서 때에 맞추어 익히니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뜻을 같이하는 벗이 먼 곳으로부터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라고 해석한다. 그런데 앞의 ‘열(說)’은 각자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을 뜻하는 말이고, 뒤의 ‘락(樂)’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나오는 즐거움을 표현하는 말이다.
글쓰기는 독자와의 가상적 대화다. 그러므로 소통의 의미와 즐거움이 있다. “사람을 향해 글을 쓰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라는 표현이 이에 어울린다. 말을 만들자면 ‘서락(書樂)’이라고나 할까.

글을 쓴다는 것은

혼자 말하면서 동시에 여러 사람을 향해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동시대의 사람들을 향해서 말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먼 미래의 사람들에게 미리 말하며

통시적(通時的) 의미 공유를 시도하는 것이다.
글쓰기의 망설임과 두려움 그리고 괴로움은, 의미의 발견과 재발견 그리고 소통을 통해, 삶의 즐거움과 기쁨 그리고 보람이 될 수 있다. 이 모든 과정이 글쓰기의 쾌락을 이룬다.
작가를 뜻하는 서양어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 가운데서도 ‘author’는 라틴어 ‘augere’가 그 뿌리인데 ‘증가시키다’는 뜻이 있다. 글쓰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삶의 의미와 즐거움을 증가시키는 일을 한다. 글쓰기의 즐거움은 나의 즐거움이기도 하지만, 타인의 즐거움을 증가시키는 일이기 때문에 내겐 무엇보다도 보람있는 일이다. (끝)


글·김용석 영산대 교수·철학 anemos@ysu.ac.kr
철학자. 문화비평가. 로마 그레고리안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철학 석사 및 박사 학위를 받았다. 같은 대학교 철학과 교수를 역임했으며, 성공회대 사이버강좌(애니메이션과 철학) 외래교수를 거쳐, 현재 영산대학교 교양학부 교수로 있다. 한국어 저서로 ‘문화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 ‘미녀와 야수, 그리고 인간’ ‘깊이와 넓이 4막 16장’ ‘일상의 발견’ ‘상상’(공저), ‘서양과 동양이 127일간 e-mail을 주고받다’(공저) 등이 있다.

 



글 잘 써야 성공한다

내 인생에 글맛을 알기까지


글을 잘못 써서 좌천까지 당한 개인적 체험에 비추어 글쓰기는 내게 곧 공포였다. 그러나 약도 그리듯 간단히 쓰는 테크니컬 라이팅을 알고 난 후 내 인생의 글맛은 꿀맛으로 바뀌었다.
학창시절 내가 제일 싫어하는 과목이 어학이었다. 계산하는 것을 좋아해 수학과 과학은 재미가 있는데 국어는 도무지 적성에 맞지 않았다. 국어를 잘하지 못하니 영어는 더욱 한심해서 자연히 대학은 이공계를 지원했다. 기계를 선택하니 골치 아픈 국어·영어와 기분 좋게 결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세상은 싫은 것을 피해가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1973년 기술고시에 합격하고 과학기술처 원자력국에 발령을 받았다. 출근을 하니 근무 파트너 중에 미국인 1명이 있었는데 국제원자력기구(International Atomic Energy Institute; IAEA)에서 파견한 원자력안전 자문관이었다. 그를 소개받는 자리, 내 입에선 한마디 영어도 나오지 않았다. 이름조차 입에서 나오지 않을 정도였으니 참담한 첫 만남이었다. 당장 카세트를 장만했다. 휴대용 워크맨이라고는 일본제품밖에 없던 시절이라 방송기자나 들고 다닐 정도로 귀했지만 과감하게 봉급의 3배를 투자했다. 또 유명한 영어교재를 구입해서 낮이나 밤이나 6개월을 들었더니 귀가 트였다. 이로써 해외에서 공부하거나 근무하는 데 지장이 없을 정도로 영어문제가 해결됐다.
국어 문제는 조금 뒤에 닥쳤다. 사무관이나 과장으로 근무할 때에는 내가 글을 잘못 써도 상사가 알아서 고쳐 주니 글 때문에 꾸중 듣는 일은 있어도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중앙부처 국장쯤 되면 사정은 달라진다.
문제의 글은 방사성폐기물 처분 부지와 관련된 것이었다. 정부는 1990년 말 안면도를 방사성폐기물 처분 부지로 지정하기 위해 비밀리에 계획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 계획이 사전에 누설되어 안면도에서 격렬한 반대 시위가 일어났다. 계획은 취소됐고 장관, 차관 및 원자력국장이 줄줄이 물러났다. 새로운 장관으로 언론계 출신이 임명됐는데, 이는 과학자 출신 장관이 방사성폐기물 처분 부지 확보와 같은 민감한 사회적 사안을 풀어내기 어렵다고 대통령이 판단했기 때문이다. 나는 후임 원자력국장에 임명돼 1년 안에 폐기물 처분 부지를 확보하는 중책을 맡았다.
안면도에서 교훈을 얻은 정부는 폐기물 부지 선정 방식을 ‘정부 지정’에서 ‘공개 모집’으로 바꾸었다. 공개 모집이 성공하려면, 지방자치 단체와 지역주민들이 그들이 받는 혜택에 비해 방사능으로 인한 위험이 크지 않음을 이해하는 것이 관건이었기 때문에 이 사실을 알리는 신문공고 문안은 매우 중요했다.
실무자였던 나는 공고문안을 유명작가에게 의뢰하고 주요 일간지들의 1면을 잡아 두었다.
그러나 신문에 싣기로 한 날짜는 다가오는데 나오기로 한 원고는 더디기만 했다. 독촉 끝에 받아 본 문안은 실망스럽기 짝이 없었다. 시간이 없어 결국 직접 문안을 작성하기로 했고 밤을 새워 문안을 작성해 새벽녘에 장관에게 보냈다. 그러나 그 문안을 받아 본 장관은 크게 화를 냈고 그날 오전 나는 원자력국장에서 물러나 대전으로 내려갔다.
글을 못 써서 좌천당하다
과학기술처의 젊은 국장이며 원자력 전문가로 승승장구하던 나에게 이 사건은 충격이었다.
그때 나는 조직에서 벗어난 개인이 얼마나 무력한지를 확실히 맛보았다. 권력은 공무원에게 당연한 것이고 주위사람이 받들어 모시니 내가 똑똑해서 그런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그때부터 나의 진정한 경쟁력이 무엇일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기회는 일찍 찾아왔다. 한국이 국제화를 지향하면서 중앙부처 국장급 공무원에게 해외에서 1년간 본인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나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나는 MBA가 하고 싶었다. MBA는 통상 2년이지만 다행히 영국 랭커스트대학에 1년 코스가 있었다. 먼저 학기가 시작되기 전 방학기간에 열리는 테크니컬 라이팅(Technical Writing·이하TW)을 수강했다.
첫 수업에서 눈이 번쩍 뜨였다. 그때까지 내가 배운 글쓰기와는 완전히 달랐다. 사실 워낙 글쓰기에 자신이 없던 터라 나름대로 관심을 가지고 대학작문 교재, 논술 길잡이, 문장론, 보고서 작성법 등을 틈나는 대로 찾아보았으나 결과는 불만스러웠다. 내용이 지루하고 알아야 할 사항이 너무 많아 목차만 보아도 질렸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1년간 미국원자력규제위원회(US Nuclear Regulatory Commission) 파견근무를 하고 다시 빈에 있는 국제원자력기구(IAEA)에서 2년간 일할 때도 점심시간을 이용해 3개월씩 TW를 배웠지만 효과가 없었다. TW교육이 미국 정부나 국제기구가 사용하는 문서 형식에 치우치다보니 글쓰기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영국에서는 첫 수업시간에 글의 구조와 논리 전개 방법을 듣는 순간 ‘바로 이것이다’ 하는 느낌이 왔다.


사무적인 글과 문학적인 글은 하늘과 땅 차이

그러나 글의 구조를 잡고 논리적으로 전개하는 기법을 안다고 해서 글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실전이 필요했다. MBA수업에서 매주 한 번 정도 리포트를 제출해야 했는데 나는 한두 쪽도 채우기 힘들어 쩔쩔 맬 때 영국학생들은 15쪽 내외의 리포트를 잘도 적어냈다. 공부 자체에도 시간이 모자라는 판에 글쓰기에까지 시간을 뺏기는 것이 싫어 나는 대충대충 리포트를 써냈다. 결과는 나쁜 성적으로 이어졌고 급기야 마케팅 과목에서 낙제하여 재시험을 치러야 했다. 재시험이 하나라도 더 나오면 학교를 떠나야 했기에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더 이상 글쓰기를 미룰 수 없었다. 그런데 막상 해보니 그렇게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물론 학교에서 배운 아마추어 글쓰기는 직장에서 요구하는 프로 글쓰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1994년 북한 핵문제가 심각한 국면에 있을 때 나는 오스트리아 주재 한국대사관에 과학관으로 발령을 받았다. 이곳에는 당시 외무부 내에서도 글 잘 쓰기로 소문난 이시영 대사(전 외무부 차관 및 유엔 대사, 현 전주대 총장)가 근무하고 있었다. 이 분은 내가 2장으로 써 올린 문서를 새빨갛게 고쳐 반장 정도로 줄였다. 나는 보고내용을 일어난 시간 순으로 장황하게 적었지만 대사는 중요한 것부터 간결하게 정리해 읽는 사람이 핵심내용을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도록 바꾸어놓았다. 글이 고쳐질 때마다 호된 꾸중이 뒤따른 덕분에 직장에서 글쓰는 요령을 비교적 짧은 시간에 터득할 수 있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전문 작가에게도 어려운 작업이다. 마치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그리기 위해 전국 방방곡곡을 발로 걸어 다닌 것과 같다. 그래서 우리의 글쓰기 교육은 마냥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하라’고 가르친다. 문제는 어디까지 읽고, 쓰고, 생각해야 하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데 있다. 이러니 글쓰기 교육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 특히 글쓰기에 소질도 없고 관심도 없는 이공계 출신 기술자나 과학자에게는 더하다.
우리는 그동안 글쓰기를 할 때 글은 아름다워야 하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고 배웠다. 이 또한 모든 상황에 적용할 수는 없다. 문학적인 글쓰기와 사무적인 글쓰기는 전혀 다른데 아무도 이것을 지적하지 않는다.
문학적인 글쓰기는 재미와 감동을 위한 글로 기-승-전-결이 있다. 영화 ‘디 아더스(The Others)’를 보면 마지막 순간까지 결과를 알 수가 없어 조마조마한 긴장감이 유지된다. 만약 미리 결과를 알려주는 사람이 있다면 화를 낼 정도이다.
그러나 사무적인 글은 한마디로 먹고살자고 쓰는 글이다. 사무실에서 상사한테 보고를 할 때 중요한 결론을 끝까지 숨기다가 마지막에 “짠! 이게 결론입니다. 재미있지요?”라고 했다가는 목이 몇 개라도 남아나지 못할 것이다. 보고서나 논문을 작성할 때는 결론이 먼저 제시되는 TW기법을 적용해야 한다.
글은 아름다워야 하고 읽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글쓰기가 어려워진다. 이런 문학적인 글은 잘 그린 그림처럼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든다. 그러나 그림이 아니라 약도라면 누구나 쉽게 그릴 수 있다. 기술자는 약도 그리듯 글쓰기를 하면 된다.

기술자가 사무적으로 쓰는 글은 감정에 호소하여 느낌을 전달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므로 ‘주요 사실을 알기 쉽고 간결하게’ 기술하면 되는 것이다.

이것이 TW기법의 핵심이다.


 

기술자도 글 잘 써야 대접받는다

얼마 전, ○○건설에서 강의요청이 왔다. 180여명이나 되는 청중은 전국의 건설 현장 소장들이었다. 건설 현장 소장들이 웬 글쓰기를 배우려 하나 궁금했다. 그래서 그 이유를 물었더니 두 가지로 압축됐다.
첫째, 전자결재제도 때문이었다. ○○건설은 본사와 현장 간의 업무효율을 높이기 위해 전자결재 시스템을 구축했으나 막상 ‘글로써 간결하고 정확하게 의사소통을 하는 데 준비가 미흡하다’고 판단해 전자결재를 당분간 보류했다.
둘째, 전자입찰제도 때문이었다. 정부는 대형 토목공사에 2004년부터 전자입찰제도를 도입할 예정이다. 이때 입찰에 참가하는 회사는 기술의 독창성 등을 간결하게 작성해 제출해야 하는데, 그동안 토목현장 기술자들이 글쓰기와 담을 쌓았으니 걱정이 많다고 했다. 이 사례에서 보듯이 이제는 현장 기술자가 쓴 글이 곧 돈과 직결되는 시대다.
또 IT업계에서는 사용설명서인 매뉴얼을 쓸 일이 많다. 기술의 진보 속도가 빨라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기술이 소개되다보니 당연한 결과다. 그런데 이 매뉴얼이 사용자 입장에서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말로 되어 있기 일쑤다.
벤처회사가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면 인증을 받아야 하는데, 그때 제출하는 사용설명서의 내용이 난해해 애써 개발한 소프트웨어를 인증받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고 한다. 기술이 문제가 아니라 글쓰기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IT업계에서도 제법 글을 쓸 줄 아는 직원이 대접을 받는다.
이와 같은 경향은 앞으로 점점 더 심해질 것으로 보인다. 국내에서도 2002년 7월부터 발효된 제조물책임법(Product Liability; PL법)에 따라 소비자가 사용설명서를 잘못 이해해 입은 손해도 제조업자가 책임을 져야 한다.
예를 들어 과거에는 약의 사용설명서에 ‘이 약의 부작용으로 간혹 입안이 마르거나 아주 드물게는 두드러기가 날 수 있습니다’라고 모호하게 표현해도 문제가 없었으나 앞으로는 ‘간혹’은 ‘5% 내외로’, ‘아주 드물게는 ‘0.1% 이내로’로 정확하게 기재하지 않으면 제조업자가 소송을 당할 수도 있다. 이러한 이유로 미국과 일본도 PL법이 발효되자 사용설명서를 전문적으로 쓰는 매뉴얼 제작 업종이 급속히 성장하기 시작했다.


문장력이 진급심사를 좌우하는 이유

지도자는 의사소통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자기가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설득력 있게 표현하는 능력은 경쟁력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미국 하버드대학의 케네디 스쿨(정치·행정대학원)은 첫 시간을 의사소통에 관한 수업으로 시작할 만큼 커뮤니케이션을 중시한다.
이렇게 현대는 의사소통 능력이 경쟁력의 핵심이 되기 때문에 마르크스가 살아 있다면 ‘자본론’ 대신 ‘의사소통론’을 썼을 것이라는 말도 나왔으리라. 다음은 피아니스트에서 ‘탁월한 학교행정 전문가’가 된 이강숙 전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의 말이다.

“행정이 뭔지 아직도 모른다. 다만 학교도 사람이 얽힌 곳이라 얽힌 것을 상식선에서 풀어나간다. 이때 의사소통이 제대로 돼야 한다.
사무직원의 언어와 교수의 언어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이들의 마음을 번역하는 것이 중요하다. ‘정산’이란 어휘만 해도 교수들은 ‘돈을 주면 쓰게 된다’라고 생각한다. 여기엔 ‘인격’을 믿는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러나 사무직원들은 쓰는 돈엔 반드시 영수증이 따라 붙어야 한다는 논리다. 공금이기 때문에 그 용처가 정확해야 한다는 것이다. 같은 한국어를 사용해도 벽이 있으면 외국어가 된다. 소통이 안 되면 동일 언어도 적대언어가 되고 만다. 총장을 하다 보니 ‘절제된 언어’의 필요성도 느꼈다. 짧은 시간에 상대를 설득하지 못하면 될 일도 안 된다.대가 자기 이야기만 하거나 횡설수설하면 그렇게 황당하고 답답할 수가 없다. 말에도 프로와 아마추어가 있다는 것을 절감하였다.”

의사소통 능력은 정치나 행정에서만 경쟁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다. 직장에서의 경쟁력이기도 하다. 우선 미국의 실태를 살펴보기로 한다. 미국에서 실시한 설문조사에 의하면 기술자는 직장에서 보내는 시간 중 적어도 3분의 1을 쓰기, 편집, 프레젠테이션 준비 등 쓰기와 관련된 일에 할애한다. 승진할수록 그 비율은 더욱 늘어나 중간관리자는 40%, 그리고 매니저는 50%를 쓰면서 보낸다. 이렇게 쓰기가 의사소통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높으니 직장에서 쓰기가 경쟁력이 되지 않을 수 없다. <표1>은 성공한 직장인에게 문장력의 중요성을 물은 결과이다.

<표1> 문장력과 성공과의 관계 (성공한 엔지니어 245명 조사)
질문 1 : 본인 업무에서 효과적인 문장력의 필요성은?
응답 : 필수적임 11명(45%)
매우 중요함 124명(50%)
조금 중요함 9명(4%)
질문 2 : 부하의 문장력을 진급심사에서 어느 정도 고려하는가?
응답 : 필수적임 63명(26%)
많이 고려함 153명(63%)
조금 중요함 25명(10%)

이 표에서 보듯이 문장력은 출세에 필수적이거나 매우 중요하다. 특히 매니저의 경우 문장력이 업무에 ‘필수적’이라고 보는 비율이 71%에 달했으며
‘자신의 생각을 명쾌하고 논리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엔지니어는 졸업 후 5년 안에 매니저가 될 수 있다’고 설문지에 써놓기도 했다.

이렇기 때문에 미국의 경우 직장에서 ‘제출하는 보고서가 곧 승진 청원서’가 된다. 따라서 직장의 초급 간부가 되면 TW와 프레젠테이션을 반드시 배워야 한다.
다음 <표2>도 의사소통이 기술자에게 경쟁력이 되고 있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표2> 산업체 근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필요한 학과목

<표2>는 미국에서 성공한 기술자 4000여명을 대상으로 기술자가 직장에서 필요로 하는 학과목을 조사한 결과다. 10위권 안에 든 공대 전공과목은 ‘확률과 통계’ 하나밖에 없다. 10위 마케팅도 반 이상이 의사소통능력을 요구하는 점을 감안하면, 10위 이내 과목의 3분의 2 이상이 의사소통과 관련된 과목인 것이다. 공대 전공과목은 10위권 밖에서나 나타난다. 이 자료는 의사소통능력이 기술자에게도 경쟁력이 된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논리적 글쓰기와 과학은 닮은꼴


과학자가 정부 연구비를 신청할 때 제출하는 연구계획서는 비전문가도 이해할 수 있는 형태와 문장으로 써야 한다. 이는 세금 납부자인 국민이 이해하지 못하는 연구를 국가가 지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연구보고서가 아무리 훌륭한 내용을 담고 있더라도 너무 전문적이어서 내용 전달이 잘 되지 않으면 그 보고서는 실패한 것이 되고 책임도 작성자가 져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은 아예 과학자의 글쓰기 의무(The Code of Ethical Conduct by the Society for Technical Communication)를 규정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새로운 개념의 개발만큼 이의 전달에도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라.
- 읽는 사람의 시간과 노력이 중요함을 인식하라.
- 기술적 사실을 진실하고, 명확하면서 경제적으로 전달할 책임이 있음 을 인식하라.

글은 논리적으로 차근차근 적어 나갈 때 설득력을 가진다는 점에서 사물을 논리적으로 분석하는 과학과 닮은 점이 많다. 그런 점에서 위대한 과학자들 가운데 위대한 작가가 많은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다윈이 5년 동안 남미와 갈라파고스를 둘러보고 쓴 ‘비글호의 항해’는 생생한 묘사로 문학사의 고전이 됐고 진화론을 체계화한 ‘종의 기원’은 출간되자마자 매진된 베스트셀러였다. ‘이기적 유전자’를 쓴 리처드 도킨스나 ‘시간의 역사’를 쓴 스티븐 호킹도 베스트셀러 작가에 오른 인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 MIT대 부근에 있는 서점에서 ‘The Elements of Style’(Strunk & White)이라는 작문책이 지난 40년간 베스트셀러를 기록한 것이다. 본문이 100쪽도 되지 않는 이 책이 강조하는 바는 ‘문장은 간결하고 짧게, 단문으로, 수동형은 피하고, 불필요한 단어는 무조건 빼라’인데 이러한 원칙이 오랜 세월 공대에서 각광을 받고 있다.
기술고시 합격 후 26년간 과학기술부에 근무하면서 나는 기술직 공무원들의 보고서 작성이나 보고요령이 행정직에 비해 뒤떨어진다는 것을 절감했다. 고위직으로 올라갈수록 기술직 공무원의 수가 현저하게 적어지는 현상도 글쓰기나 보고능력 부족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약도 그리듯 써라
현대인은 하루종일 읽고 쓴다. 그러므로 의사소통 능력은 곧 경쟁력이 될 수밖에 없다. 글쓰기를 잘하지 못해 경쟁력이 약한 이공계 출신 기술자나 과학자들을 볼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약도 그리듯 하는 TW기법’의 전파에 나섰다.
원자력연구소 감사로 있으면서 연구원을 위한 강좌를 만들었다. ‘약도 그리듯이 하는 글쓰기’ 방법에 더하여 한국의 기술자와 과학자들이 많이 틀리는 부분을 정리하여 4시간짜리 강의를 시작했다. 성과는 놀라웠다. 단 4시간 수강으로 글쓰기의 두려움에서 벗어난 연구원도 보았다.
이런 반응에 더욱 자신을 얻어 나는 아예 이공계 대학생을 위한 ‘의사소통기술’ 과목을 개설해 영남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학생들의 반응은 예상했던 것 이상이었다. 공대에서 이렇게 재미있고 유익한 강의를 들을 줄은 몰랐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에 힘을 얻어 웹사이트 ‘임재춘의 과학기술자 글쓰기’(www.tec-writing.com)를 개설하는 한편, ‘한국의 이공계는 글쓰기가 두렵다’란 책을 썼다. 책의 반응도 매우 좋아서 주요 인터넷 서점들의 ‘창작론’ 분야에서 높은 순위를 유지하고 있다.
이제 우리 기업과 대학들도 TW교육에 눈을 돌리고 있다. 참고로 미국에는 TW관련 학과를 개설한 대학이 150여 곳이나 되고 TW를 직업으로 하는 프리랜서가 10만명이 넘는다. 이들의 협회격인 ‘The Society for Technical Communication’도 51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한국에서 테크니컬 라이팅은 이제 막 씨를 뿌렸다. (끝)


임재춘 영남대 객원교수·테크니컬 라이팅 tec-writing@hanmail.net
영남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하고 1973년 기술고시를 거쳐 과학기술부 원자력실장, 청와대 과학기술비서관, 오스트리아 주재 과학관, 한국원자력연구소 감사직을 역임했다. 미국 조지아대학 원자력공학 석사, 영국 랭커스터대학에서 MBA를 했다.

 

 

 

생각의 질주, 몰입의 황홀


삶의 모든 것을 기록하라



글쓰기의 백미는 책을 쓰는 일이다. 그곳에 인생의 온갖 희로애락이 숨어 있다. 아이디어가 넘쳐 흘러 쾌속으로 질주할 때가 있는가 하면, 어떤 때는 아이디어가 막혀서 오도가도 못할 때가 있다.
나는 오늘도 새벽에 일어나 이 글을 쓴다. 새벽녘에 글을 쓰다 보면 몰입상태에 빠져들 때가 많다. 그때 세상 천지에는 오로지 자신과 마주한 또 다른 한 인간이 있을 뿐이다. 두뇌 속에 입력된 수많은 정보가 날아갈듯 조합되면서 컴퓨터 화면을 메워나간다. 조용한 새벽녘, 빠른 속도로 컴퓨터 문자판을 두드리면서 나는 곧잘 “나는 쓴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문장을 떠올리곤 한다.
누구에게든 정체성이란 것이 필요하다. 정해진 코스에 따른 공부를 마친 다음, 나 역시 정체성의 위기를 맞았다. 그런 방황을 거쳐 얻은 것은 글쓰는 사람으로서의 ‘나’다. 이제 나에게 글을 쓰는 일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마치 음식을 먹는 일처럼, 옷을 입고 벗는 일처럼, 너무나 자연스러운 습관이 되어버렸다.
지금까지 50여권의 책을 썼다. 1992년 상업용 출판을 처음 시작했으니까 본격적인 글쓰기의 역사는 10년 남짓 된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유년기나 청소년기에 다른 사람들에 비해 책을 많이 읽은 것도 아니고, 따로 글쓰기 훈련을 받은 적도 없다. 시골에서 자란 보통 아이들처럼 독서나 글쓰기보다 바닷가를 뛰어다니거나 고기잡이 배를 타고 남해안 이곳저곳을 다닌 시간이 훨씬 많았다.
나는 전업 전문작가도 아니다. 언젠가 찰스 핸디의 ‘코끼리와 벼룩’을 읽다가 그에겐 글쓰기로 벌어들이는 수입이 보너스 정도라는 표현을 보았다. 직장을 다닐 때나 지금이나 글쓰기는 나의 전부를 걸어야 하는 주업은 아니다. 돌이켜보면 내 고향 경남 통영의 아름다운 풍광이 글쓰기에 필요한 감성을 키워주었는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풍부한 감성은 글쓰기에 도움이 된다. 고기잡이 뱃전에서 바라보는 여명(黎明)이나 노을에 붉게 물드는 통영 항구의 정경은 수십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아직도 내 가슴에 살아 있다.
그러나 내가 타고난 자질로 글을 쓰게 된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스스로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시작했고 그 다음에는 꾸준히 글쓰기 능력을 다듬어 왔다. 이런 경험 때문에 나는 누구나 글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용기가 있어야 한다. ‘나도 쓸 수 있다’는 그런 용기 말이다.
글은 훈련의 산물이다
기초적인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자연스레 자신의 생각이나 믿음 그리고 체험을 타인에게 전달할 능력이 있다. 즉 조금만 훈련하면 누구나 글쓰기를 중요한 도구로 활용할 수 있다. 불과 10여년 전만 해도 글쓰기는 원고지에 만년필로 메워가야 하는 일이었다. 육체적으로도 고된 일이었음에 분명하다. 능률도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지금은 참으로 편리한 세상이다. 컴퓨터는 글쓰기의 혁명을 가져왔다. 언제 어디서나 자신의 생각을 손쉽게 담을 수 있다. 그리고 편집기능이 워낙 뛰어나기 때문에 글쓰기의 심리적 저항감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된다. 여기서 심리적 저항감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새로운 주제로 글을 쓰기 시작할 때 누구나 느끼는 ‘망설임’이다. 그런데 컴퓨터 앞에 앉으면 ‘그냥’ 쓰기 시작하면 된다.
어른이 되어 나의 첫 글쓰기는 보고서였다. 내가 일하던 곳은 연구소였기 때문에 딱딱한 보고서를 1년에 한두 권씩 내야 했다. 그런데 박사과정이라는 훈련을 거치고 연구소에서 수많은 보고서를 쓴 것이 지금 하고 있는 대중적인 글쓰기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그런 과정에서 사물이나 현상을 논리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눈을 키웠기 때문이다. 주위 동료들은 대부분 연구 보고서를 쓰는데 만족하면서 살았다. 그러나 나는 생각이 달랐다. 기승전결이 꽉 짜여진 그런 보고서가 아닌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있는 대중적인 글쓰기를 하고 싶었다.
첫 작품이 ‘한국기업흥망사’였다. 당시만 해도 연구소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 상업용 출판을 한 사례가 거의 없었다. ‘한국기업흥망사’란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상당한 인기를 얻자 문제가 발생했다. 연구소에 근무하면서 상업용 책을 내놓았다는 ‘죄’로 인사위원회에 회부되었던 것이다. 직장에서 쫓겨날 뻔한 그런 해프닝들을 지금 돌이켜보면 우습기 짝이 없다.
연구소 시절 초기, 그러니까 20대 말부터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사람은 모두 언젠가 떠난다. 죽은 후 무엇을 남길 수 있을까?’ 어떤 사람은 재산을 남기고, 어떤 사람은 자식을 남기고, 또 어떤 사람은 책을 남긴다. 내가 글쓰기를 시작하게 된 것은 ‘영원히 사는 일’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었다. 유한한 삶을 뛰어넘어 삶의 자취를 남길 수 있는 방법으로 글쓰기를 택한 것이다. 그런 생각 때문에 나는 30대부터 괜찮은 책을 쓰려고 혼신의 힘을 다했다. 당시 쓴 책 가운데 지금까지 읽힐 만한 책을 나름대로 꼽아본다면 나의 생각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기업가’ ‘시장경제란 무엇인가’ ‘시장경제와 민주주의’ ‘시장경제와 그 적들’ 등이다.


매일 자서전을 써라

자신이 살아온 삶의 자취를 남기는 것은 누구나 하고 싶은 일일 것이다. 글로 써서 남기지 않은 삶은 죽음과 함께 망각의 늪으로 사라져버린다.
스스로 평범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삶도 그 길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들에겐 독특한 이야기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삶의 경험이든 글로 남길 가치가 있다. 그리고 글로써 자신의 경험을 정리하다 보면 부족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부족한 점을 알아야 채우는 일도 가능하다. 예를 들어 세일즈를 열심히 하는 사람이라고 하자. 그가 세일즈를 하면서 경험하게 되는 애환들, 세일즈를 통해서 본 인간과 세상…. 이 모든 것이 훌륭한 글감이다. 그럼에도 자신의 경험이 다른 사람들은 할 수 없는 가치 있는 것임을 깨닫는 사람은 드물다.
‘삶의 모든 경험을 기록으로 남겨라’ 내가 좋아하는 글귀 가운데 하나다. 나는 경험하는 모든 것을 기록으로 남기려 한다. 나의 저작 중에 가장 많이 팔린 책이 ‘공병호의 자기경영노트’다. 이 책은 2001년 12월에 출간되어 2002년 경영경제서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이 책이 심오한 학술적 가치를 지닌 것은 아니다. 내가 20여년 동안 해온 자기경영의 경험들을 차근차근 정리했을 뿐이다. 내가 무(無)에서 자기 자신을 어떻게 만들어 왔는가를 정리한 것인데, 의외로 독자들의 반응이 뜨거웠다.
어찌 보면 이 책도 용감함의 산물이다. 정론이나 이론이 없는 상황에서 ‘이렇게 저렇게 하면 자기경영에 성공할 수 있습니다’라고 이야기하기까지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다. 이런 경험과 지식이 독자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베스트셀러가 됐다고 생각한다. 이 책을 통해 평소 생각해 왔던 바를 글로 분명하게 기록할 수 있다는 소중한 경험을 했다. 사실 그 책을 낼 수 있었던 것은 관찰력 덕분이었다. 조직생활을 하는 동안 젊은 사람들이 직장업무에 매몰되어 정작 ‘자신을 만들어 가는 프로젝트’를 갖고 있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들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을 시간, 지식, 건강, 행복, 인맥이라는 키워드로 요약했다.
자, 내 책을 소개하기 위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다. 글쓰기는 누구에게나 가능하며 자신의 경험이 평범하게 보이지만 차곡차곡 정리해 두면 쓸모가 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내가 지금도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아버지의 삶을 기록해두지 못한 것이다. 70세 이상 어르신들은 일제 식민지, 2차대전, 해방, 6·25전쟁으로 이어지는 한국 근대사의 산증인들이다. 그분들이 험난한 세월 생계를 유지하고 사업을 일으키고 자식을 키운 과정 그 자체가 훌륭한 이야기다. 기록하는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아버지께서 병환으로 누우신 점이 못내 아쉽다.
그러나 막상 우리는 기록하는 일에 무척 인색하다. 산업계에서도 큰 획을 그은 사람들의 진솔한 삶의 기록을 찾기가 어렵다. 평소 자신의 삶을 차근차근 기록으로 남기는 일에 익숙지 않기 때문이리라. 리처드 닉슨이 낙향한 후 집필한 ‘지도자들’이란 책을 보면, 그가 매일 메모형식으로 자신의 삶을 기록해 두었음을 알 수 있다. 훗날 그는 파란만장했던 정치역정을 진솔하게 그려서 적지 않은 인세수입을 얻기도 했다.
지난해 교보생명 창업자인 고 신용호 회장이 쓴 ‘새경영’이란 책을 읽었다. 한문체 문장을 또박또박 읽어가면서 ‘아! 현장을 뛰면서도 이런 경지까지 지식을 끌어올릴 수 있구나’라고 감탄한 적이 있다. 그가 자신의 경험을 글로 남기지 않았다면, 그 지식은 육신의 소멸과 함께 영원히 사장되어버렸을 것이다. 미국에서 페코철강을 일구어낸 백영중 회장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일생을 ‘나는 성실과 정직으로 미국을 정복했다’란 제목으로 묶어놓지 않았다면 누가 그의 일생을 기억할 수 있겠는가. 지금도 ‘나는 내식대로 살아왔다’는 공병우 박사의 글을 읽을 때면 여전히 그가 나와 함께 호흡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처음부터 글쓰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무슨 일이든 처음 시작할 때는 약간의 고통이 따르게 마련이다. 게다가 두려움도 함께한다. 모든 일이 그렇듯 글쓰기도 반복하다 보면 어느 순간 문리를 터득하게 되지 않을까. 수백, 수천 장의 원고지를 채운 다음 이루는 경지라 할 수 있다. 지름길을 찾기란 쉽지 않다. 일단은 많이 써야 한다.


글쓰기의 황홀

글쓰기에는 어떤 기쁨이 있는가. 글쓰기에는 쾌락과 고통이 아주 가는 선으로 연결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창조하는 재미를 들 수 있다. 글쓰기는 멋진 ‘지적 유희(遊戱)’다. 두뇌가 팽팽한 긴장 상태에서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쏟아내는 것은 정말 대단한 경험이다. 세상에는 골프, 테니스, 여행 등 여러 가지 취미 활동이 있지만 글 쓰기는 이들 취미에 결코 뒤지지 않을 만큼 큰 감동과 재미를 제공한다.
짧은 글을 쓸 때는 지적 즐거움의 크기도 그만큼 작다. 하루 동안 여러 편의 짧은 글을 쓰면 공허감이 밀려든다. 그래서 짧은 글과 긴 글을 병행해야 한다. 여기서 긴 글이란 한 권의 책을 쓰는 일이다. 사람들은 흔히 내게 “그렇게 자주 책을 내놓는 비결이 뭐냐? 힘들지 않느냐?”고 묻는다.
글쓰기의 백미는 책을 쓰는 일이다. 그곳에 인생의 온갖 희로애락이 숨어 있다. 아이디어가 넘쳐 흘러 쾌속으로 질주할 때가 있는가 하면, 어떤 때는 아이디어가 막혀서 오도가도 못할 때가 있다. 책을 쓰는 일은 자신을 다스리고 강건하게 만든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다작(多作)을 한다면 그만큼 자기관리에 엄격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긴 글을 쓰는 것은 아이들이 레고 블록을 쌓으며 몰입상태에 들어가는 것처럼 진한 즐거움을 준다. 새로운 주제의 책을 쓰는 일은 정말 무에서 출발한다. 그 상태에서 주춧돌을 놓고 건물을 올려 가는 것처럼 두뇌 속에서 하나하나 작업이 진행된다. 물론 여기서 느끼는 기쁨은 고통의 경계선을 넘나들기도 한다.
강연, 기고, 방송 등과 같은 활동도 나에겐 중요하지만 책을 쓰는 일을 빼놓을 수 없는 이유는 그만큼 지적 쾌락이 크기 때문이다. 무엇인가 꽉 차는 듯한 충만감도 그런 느낌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아무튼 나는 쓰지 않으면 공허감이 밀려온다. 그래서 한 권의 책을 마무리하면 며칠 지나지 않아 또 다른 책을 시작한다. 책을 만들어 가고 있을 때 살아있음을 느낀다.


매의 눈으로 세상을 보라


글쓰기가 주는 즐거움은 그것만이 아니다. 글쓰기를 즐겨 하는 사람은 주변을 대충대충 바라보지 않는다. 그들은 예리하고 섬세한 눈을 갖고 있다. 글쓰기를 하면서 어떤 사물이나 현상이라도 무심코 넘기지 않는 습관이 생겼다. 물론 글쓰기의 소재를 찾는 목적도 있겠지만, 사물을 바라보는 습관이 완전히 변화했음을 알게 된다. 매사를 예리하게 바라보는 사람은 꿈꾸듯 살아가지 않는다. 삶이 주는 많은 기회를 잡을 수 있다는 점에서 글쓰기가 가진 실용적인 혜택을 무시할 수 없다. 글을 쓰기 때문에 안테나를 높이 세우고 무엇인가를 찾아가는 그런 삶을 살 수 있다.
글쓰기가 주는 또 다른 즐거움은 생각을 다듬을 수 있다는 것이다. 경영의 세계를 들여다보더라도 자신의 생각을 직접 다듬을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흔히 부하의 머리를 거쳐 나온 글을 다듬는 경우가 많다. 물론 시간이 없기 때문이라고 이해하지만, 글쓰기가 안겨주는 큰 혜택을 포기하는 셈이다. 머릿속에는 수많은 생각이 오고 간다. 생각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지만 그냥 생각하는 것만으론 충분하지 않다. 자주 자신의 생각으로 정리해 둘 필요가 있다. 글을 쓸 때 비로소 우리는 생각을 차분히 정리해 나갈 수 있다.
내가 즐겨 드는 사례 가운데 하나가 운전이다. 부유하거나 지위가 높아서 따로 운전기사를 둘 형편이라 하더라도, 직접 운전을 할 줄 모른다면 인생에서 누릴 수 있는 큰 기쁨 중 하나를 놓치는 셈이다. 직접 컴퓨터를 이용해 글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다. 타인의 머리와 손을 거치는 글은 자신의 생각을 정리한 것에 도저히 미칠 수가 없다. 반드시 직접 써야 한다.
당신은 왜 사는가. 부, 권력, 명성 등 사람마다 각양각색의 목표가 있을 것이다. 우리의 심성 저변에는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있다. 부를 추구하고, 권력을 추구하는 데도 이 같은 원초적 본능이 강력히 작용한다. 글로써 자신의 생각이나 믿음을 드러내는 일은 ‘인정받고 싶다’는 욕구를 충족시켜 준다.


내면의 소리가 글의 소재다

글쓰기는 자신의 내면세계를 찬찬히 들여다보게 만든다. 일단 쓰기 시작하면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20대 청년에서 30대 젊은이로, 그리고 40대 중년을 향해서 변화해 가는 자신을 지그시 지켜보는 것도 글쓰기의 즐거움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누구나 처음 글을 쓰려면 두려움이 앞선다. 글쓰기란 특별한 사람들의 특별한 일이라는 고정관념 때문에 선뜻 시도하지 못한다. 그러나 생활 속에서 느끼고, 체험하고, 제안하는 내용들을 하나하나 기록으로 남긴다고 생각하면 뜻밖에도 간단하다. 예를 들어 부모라면 아이들의 유년기를 일기형태로 남겨 본다. 또 책을 읽고 자신의 감정이나 의견을 또박또박 정리해 독후감을 쓴다면 글쓰기 입문으로 손색이 없다.
그냥 해야겠다고 생각할 때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시작하는 것이 좋다. 지금 이 글을 읽고 글을 쓰겠다는 결심이 서면 바로 컴퓨터를 켜서 이 글에 대한 여러분의 느낌이나 의견을 쓰는 것으로 시작해 보자. 반드시 꾸준히 써야 한다. 글쓰기에 왕도(王道)란 없다. 얼마나 많은 글을 써보느냐로 좌우된다. 글을 쓰면 쓸수록 두뇌의 한 부분에서 글쓰기와 관련된 도로망이 커져간다는 걸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시작하기엔 너무 늦은 나이란 없다.
일기형식도 좋고 메모형식도 좋다. 자신의 생각이나 경험을 정리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때 가장 좋은 도구가 노트북이다. 틈 날 때마다 파일을 만들어서 그곳에 생활 속에 일어난 일들을 기록해 둔다. 때로는 특정 주제를 두고 수필 형태로 써보기도 한다. 어떤 형식이든 자신의 생각을 글로 정리해두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만일 책을 쓰고 싶다면 한번은 심리적 저항감을 벗어 던져야 한다. 그러니까 첫 번째 책이 중요하다. 한번 성공하면, 여러 권의 책을 쓸 수 있다. 그래서 책을 쓰고자 하면 용기를 가져야 한다. 자신이 전달하려는 메시지를 분명히 한 다음, 그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전체 목차를 정리한다. 그 다음에 각각의 목차에 속한 소제목의 글들을 채워나간다.
책을 쓸 때 내 나름대로의 방법이 있다. 먼저 전체 구성안을 마련하고, 각각의 구성안에 들어갈 소제목을 정한 다음, 소제목 하나하나를 프로젝트로 생각하고 글을 만들어 간다. 세상 만사가 그렇듯 책을 쓰는 일도 처음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지 않는다. 잠정적인 계획안은 항상 변화할 수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 그러면 책을 쓰는 일이 긴 여행처럼 느껴질 것이다. 좀더 프로답게 글을 쓰고 싶다면 먼저 읽는 것을 즐겨야 한다.
좋은 글쓰기는 자신의 경험이나 생각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글쓰기와 글읽기는 거의 동시에 진행돼야 한다. 만약 읽기만 하고 쓰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남의 이야기를 읽기만 하고 자신의 유익함을 위해 사용하지 않는 것, 단순히 독자에 만족하는 것은 사람을 나약하게 만든다. 주변에는 독서를 가까이하지만 정작 실용적으로 이용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남의 글이란 자신의 재창조에 직접 도움을 줄 수 있을 때 가치가 있다. 세상살이에서 관계란 주고받는 것 아닌가. 읽은 만큼 생산해야 한다. 다음 생산을 위해 꼭 필요한 독서라고 하면 독서의 의미도 달라진다.
마지막으로 글쓰기를 즐기는 사람은 내면세계를 기록으로 남겨가는 사람이라고 보면 된다. 위험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누구나 좌절과 실의, 곤경에 빠질 수 있다. 이때 글쓰기를 꾸준히 해왔다면 위기를 쉽게 넘길 것이다. 글쓰기란 지혜롭게 인생을 살아가려는 이들에게 멋진 도구다. (끝)


 

글: 공병호 공병호경영연구소 소장 gong@gong.co.kr
고려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라이스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자유기업센터·자유기업원 초대 소장 및 원장, 코아정보시스템·인티즌 대표이사를 거쳐 현재 공병호경영연구소 소장. 저서로 ‘공병호의 자기경영노트’ ‘공병호의 독서노트’ 등 50여권이 있다.

 



[특별부록|실전에서 활용하기]


업무일기 노하우

나와 동료, 욕망과 창조의 공간


업무일기는 회사의 경영·기획·편집·마케팅·총무 각 영역의 업무 노하우나 정보를 나누고 받는 일상 공간이다. 지난 3년 동안 내가 쓴 업무일기는 원고지 3000장에 달한다. 1년에 책 한 권씩 쓴 셈이다.

인류의 역사에서 특정한 시기까지는 한정된 사람에게만 글쓰기가 가능했다. 그러나 현대의 글쓰기는 글쓰기 방식의 변화에서 출발하여 의식의 변화를 거친 뒤, 이제는 각 세대나 영역별로 나타나는 문화적 변동으로까지 이어지는 하나의 화두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글쓰기는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전하는 여러 방법 중 하나다. 그 형식과 내용도 무척 다양하다. 하나의 낱말일 수도 있고, 한 줄의 짧은 문장일 수도 있다. 그리고 여러 사람을 설득하려는 목적으로 쓴 원고지 10장 분량의 칼럼일 수도 있고, 200∼500장의 산문이나 중편소설일 수도 있다. 더 나아가 원고지 1000장 가량의 글을 책으로 엮어 다양한 현상들을 자기 식으로 구성해 주장하는 방법도 있다.
대다수 사람들은 글쓰기 하면 신문이나 잡지의 칼럼, 발표 논문, 완성된 서사 구조를 갖춘 ‘책’이라는 대상에 생각의 울타리를 친다. 이 순간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머릿속 깊이 내면화되어 있는 관념과 만나게 된다. ‘글쓰기는 아무나 하나!’라는 편견. 이건 편견이다. 내 생각에는 글쓰기는 아무나 하는 것이다.
일상에서 하루도 빼먹지 않고 하는 행위 중 하나가 메모이다. 우리는 전화통화를 하면서도 습관적으로 볼펜을 손에 쥐고 메모지에 낙서를 하면서(동그라미나 스프링 모양의 그림을 계속 그리는데, 각자의 패턴이 있는 듯) 상대방과 이야기를 나눈다. 통화 후 메모를 보면 단어와 패턴이 섞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 회사 사람들의 전화통화 장면을 유심히 살펴보면 나를 비롯해 거의 모두가 그랬다. 또 하나 이메일이다. 요즘 직장인치고 이메일을 쓰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렇듯 글쓰기는 매우 일상화된 행위임에도 그것에 대해 갖는 편견과 스스로 쳐놓은 울타리 때문에 비일상적 행위로 비쳐지는 것 같다.
새로운 글쓰기 공간으로서 업무일기
나는 회사원! 내가 다니는 회사는 출판사다. 쓰는 쾌락보다는 읽는 즐거움에 익숙한 직장이다. 출판사 역시 기업인지라 다양한 역할을 맡은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해야만 한다. 경영, 기획·편집, 마케팅, 총무·인사 등 일반기업과 그 조직이 비슷하다.
나는 기획·편집 그룹에 속한다. 편집자는 저자의 원고를 처음 읽는 최초의 독자라 할 수 있는데, 저자나 작가의 글이 처음의 기획 방향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독자층의 눈높이에 맞는 서술인지, 전체적인 흐름은 괜찮은지를 생각하면서 읽기를 시작한다. 글을 읽은 후에는 저자(작가)가 쓴 글의 매력 포인트가 무엇인가를 찾아내, 그것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출간 기획안’을 작성한다. 아마 이런 과정은 일반 기업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기안·기획안 등을 작성하고 상품을 평가한 뒤 각종 보고서를 작성하여 부서장에게 결재를 올릴 것이다. 그리고 거래처나 외부 파트너들에게 “어떤 안건으로 미팅할 것인지”를 묻는 이메일을 전송하는 등 직장인들은 일상적으로 이른바 ‘페이퍼’를 작성해야 한다. 규모가 큰 기업에서나 작은 기업에서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기획안, 각종 보고서는 어느 순간에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깨알같은 메모나 아이디어들이 모이고 모인 뒤, 그것을 배치하는 과정에서 하나의 완결된 기획안이 나온다. 종이 몇 장이지만 온갖 생각과 감정들이 농축된 ‘페이퍼’이다. 깨알 같은 메모나 아이디어들은 과연 어디에 어떻게 기록해놓아야 할 것인가? 여기까지는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것을 기록하고 저장했다가 필요할 때 끄집어내는 기억의 공간이 필요하다. 그 기억의 공간은 어떤 것인가?
필자가 근무하고 있는 휴머니스트에선 사원 모두가 회사가 태어난 후 지금까지(2001년 5월∼2003년 10월 현재) 꾸준히 업무일기를 써왔다. 앞서 말한 기억의 공간은 바로 업무일기를 쓰고 저장하는 내 컴퓨터의 한 ‘폴더’이다. 나는 별것 아닌 ‘업무일기’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직장인의 글쓰기라는 새로운 생각으로 가볍게 미끄러지려고 한다. 휴머니스트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은 입사와 동시에 업무일기를 쓰게 된다. 휴머니스트의 업무일기는 회사의 경영·기획·편집·마케팅·총무 각 영역의 업무 노하우나 정보를 나누고 받는 일상 공간이다.


‘일하는 나’와 ‘생각하는 나’가 만나는 글쓰기

업무일기는 나의 생각과 나의 행동이 만나는 공간이다. 나는 출퇴근 때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때문에 출근 때마다 “오늘 회사에서 어떤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지?”라는 질문을 습관처럼 떠올리곤 한다. 그러나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컴퓨터를 켜면 나는 기억의 공간으로 들어간다. 이곳에 나의 월 단위, 주 단위 업무 목표가 담겨 있다. 그리고 그 목표를 하나둘 이루어가는 과정이 하루하루 기록된다.

<2003년 9월 미팅 일정>
8일 12:00 ○○○선생, 기획 건- 장소, 휴머니스트
10일 3:00 ○○○선생, 기획 건-연구실(터미널)
17일 5:00∼6:00 ○○○선생, 기획 건(대학교)
21일 12:00∼2:00 ○○○선생, 목차 논의-장소, 휴머니스트

9월 29일(월)- 28일 오후 7:00∼10:00 -‘오만과 편견’의 저자 임지현·사카이 나오키 초청 독자서평회가 무사히 끝났습니다. 감사합니다. 80여 명이 토론회에 참석했는데, 수유연구실 토론회 사상 최대의 대박행사였습니다. …….

업무일기는 말 그대로 업무의 주체인 ‘나’라는 편집자의 일거수일투족이 기록되는 장소다. 여기에 하나를 더 추가한다면 머릿속의 생각이 담겨져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일을 하다보면 순간순간 ‘긍정’과 ‘부정’의 관념이 무수히 교차한다. 이때 그런 생각들을 그냥 흘려버리는 경우가 많은데, 나 역시 이런 공간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냥’ 또는 ‘그저 그렇게’ 흘려보내곤 했다.
하지만 업무일기라는 글쓰기 공간에 진입한 뒤, 나는 순간의 기억 조각들도 붙잡을 수 있게 됐다. ‘지금 여기’ 그리고 ‘그때 그 순간’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그리고 그 생각들이 어떤 경로를 통해 들어왔는지를 적어둠으로써, 그것을 내가 원하는 순간마다 다시 끄집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일하는 나’와 ‘생각하는 나’가 만나 새로운 생각과 행동으로 옮겨가는 매개 역할을 업무일기가 하고 있다.

2003년 9월 22일(월) - 일요일 저녁에 참 많은 생각을 했다. 휴머니스트를 창립하던 희망의 시간들, 책을 한 권 두 권 발간하던 때의 긴장된 기억들, 2002년의 시장 진입기, 그리고 2003년에 진행 중인 여러 우여곡절들. 한순간은 내가 대견스럽기도 했지만, 여전히 스스로를 무한히 긍정하지 못하는 “약한 자의 심성에 둘러싸인” 내 모습에 짜증도 났다. 회사의 역사와 개인의 기억이 항상 같을 수는 없겠지만, 나에게는 역사와 기억을 대동소이하게 만들어보고 싶은 마음이 여전히 굴뚝같다.

덧붙이자면 나의 이런 기록들은 다른 분야에서도 매우 유효하게 이용된다. 휴머니스트에서는 대담집이라는 독특한 장르의 책을 기획해왔다. ‘서양과 동양이 127일간 e-mail을 주고받다’(김용석·이승환 대담) ‘오만과 편견’(임지현·사카이 나오키 대담)이 그것인데, 이들 책의 뒷부분에는 편집자의 기획일지가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되었다. 대담의 기획과정을 재구성해 독자에게 어떻게 시작되고 어떤 과정을 거쳐 마무리되었는지를 비교적 소상하게 알렸는데, 이런 원고는 업무일기에 기초하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글이었다.


나와 동료가 만나는 소통의 공간

휴머니스트의 업무일기 공간은 나와 동료가 만나는 소통의 공간이다. 그래서 나는 이 공간에 담긴 글이 가장 중요한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대개 직장인들은 회사에 출근하자마자 자신의 컴퓨터를 켠 후 ‘오늘 내가 해야 할 일을 점검’하면서 일을 시작한다. 휴머니스트 구성원은 하나의 과정을 더 거친 뒤 업무를 시작하는데, 그게 뭐냐면 다른 동료가 전날 쓴 업무일기를 열람하는 일이다. “일기를 공개한다구요!” 하는 분들도 있을 수 있겠다. 앞의 글에서도 볼 수 있듯이 업무일기에는 회사 업무와 비전에 대한 그 사람의 생각과 마음, 그리고 행동이 담겨 있기에 소중한 것이다. 일기란 어느 누구의 간섭 없이 각자의 가치 판단에 따라 쓰는 것이 아니던가.
나는 다른 이들의 업무일기를 열람하면서 잠깐이나마 생각의 시간을 갖는다. ‘그 사람이 어떤 상황인지’ ‘내가 어떻게 그 사람을 배려해야 할지’ 등을 생각해본다. 반대로 내 업무일기를 열람한 동료나 선후배들은 ‘저 인간을 어떻게 달래나~’ 하고 고민할 것이다.
물론 모두가 매일 배려하고, 고민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10명의 휴머니스트 직원 가운데 한두 명은 어떤 사람을 위로하고, 그와 고민을 나눈다. 동료나 선후배가 나를 배려하기도 하고 내가 그들의 고민을 들어주기도 한다.

2002년 11월 28(월) - 일요일! 즐겁게 운동을 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아침에 일어날 때 자신의 신체 변화를 감지했을 겁니다. 근육이 땅기고 뻑적지근하고……. 아침저녁 스트레칭을 하세요. 취침 전에 더운물로 샤워를 하면 좋습니다. 이번 경기는 모두들 즐거웠을 것 같군요. ‘승리’는 감정의 만족이란 선물을 안겨줍니다. 추운 날씨에도 열심히 응원을 해주신 휴머니스트 가족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2002년 9월 7일(월) - 문화컨텐츠진흥원 기획홍보팀 차장을 만났다. 이곳은 음악, 애니메이션, 출판만화 등 이윤을 창출하는 아이템을 선정하고 지원하는 일을 담당하는 곳이었다. 우리가 눈여겨볼 만한 부분은 만화이다. 휴머니스트 편집장이 꼭 만나야 할 기관인 것 같다.
소통은 펼치고 나누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양한 시각을 하나의 점으로 집중해내기도 한다. 나와 동료가 만나는 공간에서는 집중과 분산을 동시에 이루어낼 수도 있었다. 하나의 사안에 대하여 각자의 다양한 의견을 업무일기에 쓰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안건의 제안자는 별도의 회의 없이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참고하여 하나의 방향을 결정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담당자는 회사의 최고 의사결정권자와 사전 교감을 통해 최종안을 확정하게 된다.
2001년부터 2003년 10월 현재까지 햇수로 3년째 업무일기를 써오다 보니, 업무일기도 ‘진화’의 길을 걷고 있는 듯하다. 왜냐하면 정해진 형식과 내용 없이 각자의 개성대로 자신의 일을 표현하고 있기에 독특한 표현 방법이나 서술방식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진화론자들이 말하는 “진화에는 목적이 없다”는 말이 적용되는 것은 아닐지!
나에게는 업무일기가 ‘글쓰기 행위’라는 구체적이고도 실질적인 ‘체험’의 공간으로 다가왔다. 누군가가 내게 “글쓰기를 두려워 말라”고 충고한다면 나는 “그래요 써보니 정말 그렇네요”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내 경험에 비춰본다면 글쓰기의 관건은 ‘자꾸 써보는 것’이다. 나와 같은 직장인들에게는 ‘업무일기’가 글쓰기 공간으로서 꼭 필요하다.


욕망을 창조하는 생성의 공간


업무일기에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내가 꼭 만나야 할 저자, 연구자, 학자들이다. 그들을 만나고 난 뒤에는 그 사람에 대한 생각과 정보를 쓰고, 내가 앞으로 어떻게 다가서야 할 것인지를 나름대로 정리해 쓴다. 저자(작가)들의 정보가 켜켜이 쌓이면 예상치 못한 ‘조합’이 떠오른다. 다양한 사람들의 생각과 정보가 한곳에서 만나게 되니, 비슷한 주제들이 서로 연결되고, 이질적인 것들이 뒤섞여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들어내는 창조의 과정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이것은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신선한 체험이었다.

2002년 6월 4일(화) - 서점의 ○○○씨를 만났다. 휴머니스트의 ‘동의보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책 내용보다는 가치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서점의 팀장을 만났다. 원칙을 중시하는 듯한 인상이다. 앞으로 서점 마케팅의 중요한 고리역할을 할 것 같다. ‘깊이와 넓이 4막 16장’과 관련하여 인터넷 서점 콘텐츠 담당자와 편집장들 간의 대화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대표의 업무일기를 봤다. 그쪽 사람들과 어떻게 만나야 할지에 대한 의견을 제안해봅시다.

2001년, 2002년, 2003년의 업무일기를 출력했다. 1년 동안 쓴 업무일기를 분량으로 헤아려보니 원고지 1000장에 이른다. 3년을 썼으니 3000장이다. 10년을 쓰면 1만장이 되는 셈이다. 원고지 1000장은 300여쪽 되는 책의 한 권 분량이다. 그 내용을 하나의 고리로 연결시킬 수만 있다면 그것은 기억의 공간, 즉 역사가 될 수 있다. 검색어를 치면서 해당 부분을 복사하면 새로운 분류 체계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비록 하찮게 보이는 업무일기이지만 최근 2∼3년 동안 내 자신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해왔는지를 깊이 성찰하는 시간과 대면한다. 과거의 생각을 담은 글을 보고, 기억해내고, 또 그 기억을 성찰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프로페셔널과 아마추어의 차이를 언급한 어느 선배의 말은 2년이 지난 지금도 나의 가슴에 꽂힌다.

2001년 9월 20일(토) - 프로는 예습에 능하고 아마추어는 복습에 시달린다. 한 번의 실전 연주를 위해 수없이 실전연습을 반복하는 프로 연주자들, 관객들 앞에서 멋진 플레이를 보이는 프로 선수의 끊임없는 실전 연습과정은 프로 자질의 핵심이다. 반면 아마추어는 세심한 생각 없이 늘 일을 저지른 후 반성과 후회, 자책을 일삼는다. 그러나 후회는 늘 반복된다. 관성적 복습은 관성적 행동을 낳는다.

어찌 보면 업무일기는 글쓰기에서 하나의 방식이자, 도구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도구의 다각적 활용은 다양한 사고를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이 도구가 우리의 생각에 가담하고, 우리의 사고는 이러한 도구의 가담을 기획하고 조직하며 활용한다면, 내가 쓰고 있는 업무일기보다 훨씬 진일보한 새로운 형식이나 도구가 생겨날 것이다. (끝)


글: 선완규 휴머니스트 인문편집장 swk2001@hmcv.com

축구를 좋아하는 내가 경기 시작 전에 꼭 떠올리는 말이 있다. ‘욕심을 버려야지.’ 나는 철학도 좋아한다. 철학을 공부하면서 ‘삶의 자세’를 배우고 있다. 출판사 편집자로 생활하면서 꼭 챙기는 말이 있다. ‘사람을 가슴에 담자.’ 저자의 원고를 대할 때마다 떠올리는 말이다. 푸른숲 인문팀장을 거쳐 현재 휴머니스트 인문편집장으로 있다.

 

 

[특별부록|실전에서 활용하기]

감각적인 헤드라인 달기

 


카피는 꼭 카피라이터만 쓰나?글의 첫인상을 좌우하는 헤드라인과 부제목. 압축적이고도 톡톡 튀는 표현으로 독자의 시선을 한번에 사로잡을 순 없을까. 유명 광고인들의 명카피를 통해 배우는 감각적 글쓰기.
광고는 상업적인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이며 가장 대중적인 문화의 텍스트다. 그래서 광고문안, 즉 카피는 대중을 설득하는 가장 보편적인 글로 알려져 있다. 또한 목적이 분명한 가장 경제적인 글이기도 하다. 또 광고 카피는 고통을 쾌락으로 보상해 주는 매력적인 글쓰기 장르다. 카피를 잘 쓰기 위해 카피라이터의 타이틀이 필요한 건 아니다. 감동적인 아이디어와 포기하지 않는 열정만 있다면 광고 글쓰기는 프로와 아마추어를 차별하지 않는다. 다채로운 광고 헤드라인을 눈여겨보는 것은 글쓰기 감각을 익히는 효과적인 전략이 될 수 있다.

“글쓰기를 위해 스스로를 옥죄는 것은 일종의 공포다. 그래서 사람들은 최후의 일각까지 미적거린다. 글쓰기는 끝없는 번잡과 부질없는 뜸들이기의 반복이다. 마치 야구 투수가 팔을 뻗어 실제 공을 던지기 전에 보여주는 무수한 와인드업 동작과도 비슷하다.”

‘애드버타이징 에이지(Advertising Age)’의 사장을 지냈던 번스타인(S.R. Bernstein)의 말이다. 그렇다. 번스타인의 말대로 대다수 사람들에게 있어 글쓰기는 그만큼 외롭고 절망적이고 불유쾌한 체험이다. 그는 또 광고 글쓰기라는 직업의 핵심은 종이 위에 돈이 되는 말귀 한마디를 적는 것이라고도 했다. 그런 영양가 있는 일이 그렇게 호락호락하겠느냐는 엄포다. 똑 같은 얘기를 헬 스테빈즈라는 카피라이터는 더욱 그럴듯하게 표현했다.

“카피는 99%의 싱크(think)와 1%의 잉크(ink)로 쓰여진다.”


메모광과 카피라이터

광고문안, 즉 카피(copy)를 쓰는 것이 단순히 손재주의 영역이 아님을 설파하는 재치 넘치는 명언이다. 글쓰기의 핵심은 결국 아이디어라는 얘기가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아이디어라는 물건은 어디 그렇게 만만한 존재인가. ‘조금만 비겁하면 인생이 즐겁다’라는 책을 쓴 음유시인 개그맨 전유성은 아이디어 짜내기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일인지를 고백한 바 있다. “개그맨 생활 25년째인데 생각나는 것은 아이디어 회의뿐이다. 일주일에 서너 번씩 해대는 아이디어 회의는 정말 공포의 시간이었다. 선배 아이디어라고 무조건 채택되는 것도 아니고 재미있다고 판단되는 것만 채택이 된다. 그러니 아이디어 회의가 있기 전날은 밤잠을 설치는 경우도 흔했다.”
그런 그가 한때 잘나가는 카피라이터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흔치 않다. 비결은 간단했다. 그는 지독한 메모광이었다. 전광석화처럼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그때마다 담뱃갑, 껌종이, 명함 뒷면, 지폐 따위를 가리지 않고 적어 두었다. 그가 ‘컴퓨터, 일주일만 하면 전유성만큼 한다’라는 책을 출판하고 광고문구랍시고 끄적거려 보았다는 내용들을 눈요기해 보자.

까막눈만 아니면 할머니도 배울 수 있다/ 일주일 만에 컴퓨터를 겸손하게 하는 책/ 형광등 하나도 못 갈아 끼워서 후배 불러다 갈아 끼운다는 전유성이 쓴 컴퓨터 이야기/ 25년간 피우던 담배 끊고 잠 못 이루는 밤에 써내려간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컴퓨터 독학기

책의 부록에 30개도 넘게 소개된 카피 중에서 그가 ‘당첨!’이라고 낙점한 것들이다. 무엇에도 집착하지 않는 사람 같아 보이지만 아이디어에 대한 욕심만은 유난한 것 같다. 단 한 개의 카피를 세상에 선보이기 위해 몸살을 앓는 것은 어떤 카피라이터도 피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일화다. 순간을 놓치면 평생을 놓친다는 비장한 자세로 그때그때 붙잡아 두지 않으면 주옥 같은 아이디어는 오래오래 머릿속에 머물지 않는 것이다. 유능한 카피라이터는 ‘걸어다니는 자료실’이라는 사실과 창의성의 출발점은 바로 생활 그 자체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무섭고도 우습고도 슬픈 이야기!


이번에는 소설가 은희경씨의 비유를 들어 카피의 속성을 다른 각도에서 한번 살펴보자.

“할아버지가 아이에게 동화를 들려주실 때, 할아버지는 말한다. 오늘은 무슨 얘기를 해줄까? 무서운 얘기를 해줄까? 아니면 우스운 얘기를 해줄까? 그것도 아니면 슬픈 얘기를 해줄까? 아이들은 입을 모아 대답한다. 무섭고도 우습고도 슬픈 이야기! 그래서 할아버지는 무서운 도깨비가 우습게도 똥간에 빠지는 슬픈 이야기를 해주었다. 소설의 언어는 그럴 수 있다. 소설은 작가와 독자의 소통이다.”
그렇다면 광고언어의 핵, 카피는 어떠해야 할까. 똑같은 논리다. 광고는 카피라이터와 소비자의 소통이다. 그래서 카피라이터는 통역사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광고주 나라의 언어를 소비자 나라의 언어로 바꾸는 전문 커뮤니케이터(communicator)인 것이다. 카피라이터는 소비자를 하루에 열두 번도 넘게 카피라는 마술에 걸려들게 하는 언어의 마술사다. 할아버지가 구수한 입담으로 아이들을 매혹시키듯, 그 현란한 글 솜씨로 단단하게 잠금장치를 한 소비자의 지갑을 열어 젖히는 도둑이다. 그 도둑이 진짜 노리는 것은 몇 푼의 동전이나 지폐가 아니라 마음이다. 전문적으로 말하면 소비자의 심리를 움직이는 마케터, 그가 바로 카피라이터다. 그런 카피라이터가 쓰는 카피는 소비자의 마음을 훔쳐내는 무기이다. 그래서 카피는 설득의 예술이요 과학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아쉽다 대출 ………………………. 아, 쉽다 대출 국민카드 이지론”

현역 카피라이터 시절 지하철 안에서 무심코 발견한 광고 문안이다. 광고화면을 왼쪽과 오른쪽으로 갈라서 자연스럽게 시선이 움직이도록 한 레이아웃도 돋보였지만, 카피 속에서 쉼표 하나가 연출해 내는 오묘한 변화에 나는 진저리를 쳤다. 대출을 쉽게 받지 못해 아쉬움의 한숨을 쉬던 사람이 ‘이지론’이라는 상품을 만나 안도의 한숨을 쉬는 심리를 이렇게 쉽고도 간명하게 묘사해 내다니! 카피라이터의 언어감각에 아낌없는 갈채를 보내고 싶었다.


삶 속에 떠도는 말을 찾아라

예쁜 말, 품위 있는 글, 미사여구만이 꼭 좋은 카피는 아니다. 사람들의 삶 속에 떠도는 살아 있는 말들이 더 제품판매에 먹혀들고 힘을 쓸 수 있다. 그래서 카피라이터들은 때로는 문법파괴도 서슴지 않는다.

방가 _ (포미콘) / 어솨요 속션-한 유닌98 세상입니다(유니텔)
만일 당신이 내가 말을 더-더-더-더듬거리는 것을 보고 기-기-기-기분이 언짢아진다면 당신 생각에 내 기분은 어-어-어-어떨 것 같습니까?(영국 말더듬이연구협회)

그 외에도 광고 카피의 속성이 글이 아니라 말임을 증명해 주는 사례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카피라이터들의 교과서는 꼭 문장대백과사전이나 명문의 소설, 시만이 아니라 시장통이나 PC방, 반상회 등의 장소가 될 수도 있음을 웅변하는 촌철살인의 카피들을 음미해 보자.

남대문 열렸습니다. 보디가드 보입니다/ 樂! 소리나는 채널 m.net/ 그래, 빙그레/ 입 닥치고 보기나 해! (노랑머리)/ 깐깐한 정수기(웅진 코웨이)/ 믿고 탁! (삼성투신증권)/ 빨래 끝 ~ 옥시크린 / 때가 쏙 ~ 비트 / 요만큼~ 한스푼/ 참치 먹고 으샤! 동원참치/ 당신은 철없는 여자 (헤모큐)/ 걸렸구나 생각되면 콘택600/ 맞다, 게보린/ 아차! 컨디션

그렇다고 모국어의 아름다움을 한껏 끌어올린 주옥같은 카피를 애써 외면할 수는 없다. 광고언어의 예술성을 십분 살리면서도 마케팅 효과도 극대화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명카피들도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고 있다.

우리가 정말 아름다운 오드리 헵번을 만난 것은 로마의 휴일에서가 아니라 아프리카에서였습니다 (삼성그룹 광고)/ 우리강산 푸르게 푸르게 (유한 킴벌리) / 자연에 정성만을 더합니다 (청정원)/ 술에 취하면 하루가 가고 道에 취하면 100년이 간다 (소설 토정비결)/ 어느 땐 그 사람 옷의 작은 단추이고 싶다 (영화 <첫사랑>)/ 길이라도 좋다 아니라도 좋다 (록스타)/ 낯선 여자에게서 그의 향기를 느꼈다 (오버클래스 아이디)/ 그녀의 자전거가 내 가슴속으로 들어왔다 (빈폴)

내친김에 이런 카피를 한번 보자.

개같이 살았다. 꽃 같은 사랑 하나 만나기 위해…/ 뒷골목에… 죽어도 못 잊을 사랑이 있다!/ 세상은 날 삼류라 하고 이 여자는 날 사랑이라 한다

카피라이터 윤수정이 쓴 영화 ‘파이란’의 광고 헤드라인들이다. 주인공 최민식과 장백지의 애틋한 사랑이 오롯이 묻어나는 감각적인 글이다. 비속어가 군데군데 들어가면서도 아름다움을 잃지 않는 그림 같은 카피. 질펀한 감정을 몇 마디 단어로 함축해 낸 절제된 언어들이 영화에 대한 호기심을 증폭시키고 있다. 소비자의 심리를 꿰뚫는 카피라이터의 능력은 영화 마케팅의 성패를 좌우하기도 한다.

‘아내는 거짓말쟁이입니다’/ 제 아내입니다. 너무 예쁘죠?/ 그런 그녀가 거짓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무언가 나를 속이고 있습니다/ 그러나…나는 알고 말았습니다/ 아주 오래 전부터 그녀가 아프다는 걸…/ 곧 나를 떠나리라는 걸…/ 내가 그녀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그녀의 거짓말에 속아주는 것뿐입니다/ 그녀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 다시 만나서 오래오래 같이 있자고…
정승혜가 쓴 영화 ‘선물’의 카피다. 잡지광고에 나온 광고문구 끝에는 ‘정연의 편지 중에서’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영화 속 여주인공의 편지를 이 카피라이터가 직접 썼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어쨌든 이 광고는 카피라이터의 작품이라고 불릴 자격이 있다. 좋은 아이디어의 소재를 찾아내는 안목도 카피라이터의 능력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광고장이는 발명가가 아니라 탐험가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기 전에도 이미 아메리카는 거기에 있었다. 위대한 탐험가의 호기심과 열정을 만나 미지의 대륙은 오늘날 미국이라는 나라로 다시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낡은 것들을 새롭게 조합해 내는 능력, 그것이 바로 카피라이터의 언어감각이요 창의력이다. 그런 능력을 기르기 위해 카피라이터는 대중문화의 다른 장르에도 예민한 촉수를 쫑긋 세워야 한다.

잘 말아줘 잘 눌러줘/ 밥알이 김에 달라붙는 것처럼/ 너에게 붙어 있을래/ 날 안아줘 날 안아줘/ 옆구리 터져버린 저 김밥처럼/ 내 가슴 터질 때까지 (더 자두 ‘김밥’ 중에서)

보이지 않아도 닿지는 않아도/ 이렇게 여기에 남아 있어도/ 마음 다해 부르면/ 그 기억만으로도 괜찮을 거야 (윤도현·이소은 ‘마음을 다해 부르면’ 중에서)


콜럼버스 이전에도 신대륙은 있었다

생활 주변의 잡다한 요소들 중에서 아이디어의 재료들을 포착해 김밥을 말듯 잘 조화시켜야 카피가 되고 광고가 된다는 것을 대중가요에서 배울 일이다. 정말 온 마음을 다해 부르면 소비자의 마음이 움직이고 행동이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카피로써 가수들만큼 호소력 있게 주장하고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김용택의 시는 또 어떤가. 말인가 하면 글이고, 글인가 하면 말이다. 이쯤 되면 ‘광고 카피는 글인가, 말인가’를 따지는 것은 쓸데없는 논란일 뿐이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에 말이면 어떻고 글이면 어떻고 몸짓이면 또 어떤가.

콩타작을 하였다/ 콩들이 마당으로 콩콩 뛰어나와/ 또르르또르르 굴러간다/ 콩 잡아라 콩 잡아라/ 굴러가는 저 콩 잡아라/ 콩 잡으러 가는데/ 어, 어, 저 콩 좀 봐라/ 쥐구멍으로 쏙 들어가네/ 콩, 너는 죽었다 (김용택 ‘콩 너는 죽었다’ 전문)

음악메시지를 전하는 ‘700-5425’의 라디오 광고는 ‘제 첫사랑은 감자튀김에 소금만 뿌려먹었어요. 왜 꼭 이런 게 생각나지’로 시작한다. 이어서 나오는 멘트. ‘그런데 오늘 감자튀김을 그렇게 먹는 사람을 봤어요…’ 이쯤 되면 라디오를 듣는 사람들은 ‘내 첫사랑은 이런 모습이었는데’라고 생각하면서 추억에 젖어들게 마련이다. 문득 생각난 첫사랑을 두고 라디오 속 목소리는 ‘그애한테 5425나 보내볼까?’라며 중얼거리듯 독백을 한다. 힘들고 괴로운 시간들이 지나가면 좋은 기억을 골라서 간직할 수 있는 평온한 마음을 갖는 법. 한번쯤 편안하게 음악메시지를 보내면서 안부를 물어보고 싶은 순간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누구나 공감할 만한 첫사랑의 기억을 불러내는 딴청을 부리면서 라디오 광고는 5425 음악메시지를 슬쩍 끼워놓았다. 여기서 우리는 라디오 CM카피의 몇 가지 가이드라인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구어체로 써라. 카피는 글이 아니다. 말이다. 멋있는 문장보다는 살아 있는 말이 귀에 쏙쏙 들어온다.
둘째, 비주얼이 떠오르게 써라. 라디오는 상상력의 매체다. 감성매체다. 귀를 통해서 오감을 자극하라.
셋째, 짧고 명쾌하게 말하라. 지루하면 짜증난다. 집중하기 싫어진다. 짧은 단어, 발음하기 쉬운 단어로 골라 쓰자.
넷째, 핵심 아이디어를 잡아라. 메시지는 아이디어다. CM은 글쓰기가 아니라 생각하기다. 무관심한 청중을 사로잡을 매력있는 아이디어로 시작하라.
다섯째, 음향효과(sound effect)를 살려라. 백 마디 말보다 튀는 사운드 하나가 귀에 걸린다. 사운드 이펙트는 리얼리티를 높인다. 기억을 도와준다.
여섯째, 극적인 반전을 시켜라. 아무도 예상 못한 결말은 찡한 여운을 남긴다. 잔잔하게 설득하다가 강한 펀치로 마무리하라.
일곱째, 중요한 것은 반복하라. 필요하다면, 제품의 장점이나 브랜드명을 몇 번이고 반복하라. 아무리 잘된 CM도 브랜드를 기억시키지 못하면 꽝이다.


내 글의 셀링 포인트를 찾아라

내가 쓴 카피가 잘된 것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체크리스트 같은 것은 없을까. ‘광고 명예의 전당’에 오른 유명한 카피라이터 오길비(David Ogilvy)는 헤드라인을 가장 효과적으로 쓰는 방법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1. 가장 효과적인 헤드라인은 소비자에게 이익을 약속하는 것이다.
2. 뉴스성 헤드라인도 성공할 확률이 높다.
3. 만족시켜 드립니다. 소개합니다. 이제…, 드디어… 로 시작하라.
4. 헤드라인 속에 반드시 브랜드를 넣어라.
5. 특정 계층의 사람들에게 팔 물건이라면 “35세 이상의 여성” 같은 문 구를 넣어라.
6. 열 단어 이상의 헤드라인은 짧은 헤드라인보다 덜 읽힌다. 그러나 긴 헤드라인이 필요할 경우에는 주저하지 말고 길게 써라.
7. 구체적인 수치가 있으면 밝혀라.
8. 헤드라인 속에 인용부호를 넣으면 기억률이 평균 28% 높아진다.
9. 지방 매체일 경우에는 그 지역 명칭을 꼭 넣어라.

광고는 과학이라고 주장한 광고인답게 철저한 조사에 입각한 객관적인 근거를 요구하고 있다. 막연히 멋만 부리는 카피보다는 딱딱하더라도 정확한 판매제안을 하는 마케팅 지향적인 슬로건을 쓰라는 주문이다. “내가 피아노 앞에 앉았을 때 모두 웃었습니다”로 유명한 존 케이플즈(John Caples)가 제시한 카피작성 가이드라인도 광고를 만드는 데 두고두고 참고가 될 것이다.

1. 아나운싱(aunouncing)으로 헤드라인을 시작하라.
2. 알릴 만한 가치를 가진 단어를 사용하라.
3. 새로운, 지금, 드디어 라는 말로 시작하라.
4. 헤드라인에 날짜를 넣어라.
5. 새로운 스타일로 써라.

이제 정리해 보자. 광고의 목적은 무엇인가. 브랜드 이미지의 구축, 기업에 대한 호감 조성, 대중문화에 대한 기여…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광고를 하는 진짜 이유는 제품의 판매다. 그런데 광고주나 카피라이터는 곧잘 이 당연한 명제를 잊어버리곤 한다. 이것저것 욕심을 내서 중언부언하다가 정작 중요한 메시지는 놓치고 마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제품 속에 있는 유일한 장점을 찾아내는 데 실패하고 만다.
‘말보로’ 캠페인으로 유명한 카피라이터 레오 버넷은 이것을 ‘제품 속에 내재된 드라마’라고 했다. 어떤 제품이든 소비자를 설득할 수 있는 강력한 셀링 포인트(selling point)가 있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내 글의 셀링 포인트는 과연 무엇인가. 카피라이터의 감각으로 글쓰기 전략을 세우면 필자의 메시지가 훨씬 강력해진다.

헤드라인 작성 실전연습


칼루아(Kahlua)는 멕시코산 최고급 원두커피와 사탕수수를 원료로 사용한 커피 뤼쿠어로서 현재 국내 시판 뤼쿠어 가운데 판매 1위의 제품이다. 칵테일뿐만 아니라 전세계 특급 요리사들로부터 각종 요리재료로 각광받고 있으며, 아이스크림이나 빵 등을 제조할 때 특정한 맛과 향을 내는 용도로 다채롭게 쓰인다. 다음은 칼루아라는 제품을 위해 만든 20여 종의 헤드라인이다. 제목을 달아야 할 때 이 문장에 대입해서 연습을 해보자.

- 칼루아 커피, 칼루아 밀크, 칼루아 콜라… 어느 것 하나라도 칼루아가 빠지면 재미없다.
- 내가 누구게? 난 뤼쿠어계의 히든카드 칼루아야!
- 매력적인 맛을 더해봐, 새로운 맛을 느껴봐.
- 새로운 칵테일을 원하신다면 칼루아를 선택하세요.
- 칵테일의 매혹적인 변신 칼루아.
- 커피 뤼쿠어의 지존 칼루아.
- 신세대 스타일 칼루아.
- Mix everything with Kahlua!
- 커피보다 매혹적인 음료가 있을까요? 칼루아.
- 칼루아 없이는 파티도 없다.
- 진짜 커피보다 맛있는 건 칼루아뿐이야.
- Mix Kahlua’s drinks = W O W !
- 칵테일 속의 또 다른 만남
- 당신과 사랑에 빠지고 싶습니다. 저 멀리 맥시코해와 아라비아해를 너머…칼루아.
- 악마의 유혹보다 더 진한 커피의 유혹, 커피의 유혹을 넘어선 칼루아의 매혹.
- 칼루아는 커피가 아닙니다. 커피보다 진한 유혹 칼루아.
- 부드러운 맛을 원하세요? 매혹적인 맛을 원하세요? 칼루아.
- 칼루아가 훔치고 싶은 건 당신의 마음입니다.
- 칼루아에게 불가능은 없습니다. 무엇이든 MIX 해 주세요.
- 기대 이상의 유혹적인 느낌, 그 느낌 속에는 칼루아가 있습니다. (끝)


글: 이현우 동의대 교수·광고홍보 hyuncom@unitel.co.kr

 

동의대 광고홍보학과 교수. 제일기획 카피라이터,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지냈다. 저서로 ‘광고, 묘약인가 마약인가?’ ‘광고발상과 전략의 텍스트’, 역서 ‘광고 글쓰기의 아트’ 등이 있다.

 

 


[특별부록|가슴으로 글쓰기]


책벌레의 독서일기

책을 먹어치우는 독후감


독후감 쓰기는 읽는 이를 책의 주인으로 만든다.
그리고 감히 말하거니와, 책의 주인 된 자가 세상의 주인으로 당당히 나설 수 있는 법이다.

살고 있는 집에서 자전거 타고 5분 정도 거리에 공립도서관이 지어졌다. 나 같은 사람에게 이런 일은 하늘이 내려주신 복이다. 책 읽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있으니 집에서 나올 일이 별로 없다. 책상 앞에 앉아 읽다가 힘들면, 누워 읽고, 그러다 지치면 그냥 눈만 감으면 된다. 복 받은 직업이구나 하겠지만,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다.
책만 읽어도 돈을 주는 나라가 있다면, 당장 책 보따리 싸들고 이민이라도 가겠지만, 그런 나라는 눈 씻고 찾아봐도 도통 없다. 책 읽어 돈이 되는 게 아니라, 읽은 책에 대한 내 생각을 주절주절 늘어놓는 글을 써야 입에 풀칠이라도 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책을 읽는 게 직업이 아니라 읽은 책에 대해 글을 쓰는 게 직업이라 할 수 있다. 쓰는 일이 직업이 되면 더욱이 바깥으로 나올 일이 없다. 하루종일 똥마려운 개처럼 끙끙대며 집안을 돌아다니는 꼴이다.
그러니 도서관은 나에게 행운일 수밖에 없다. 더운 날에는 시원한 바람이 나오고, 추운 계절에는 따뜻한 공간을 마련해 줄 터이다. 공짜가 이것만 있는 게 아니다. 책벌레가 가장 좋아하는 먹을거리는 의당 책이다. 읽고 싶은 책은 무진장 많은데, 그걸 일일이 돈 들여 사기란 불가능하다. 책벌레의 서식처가 도서관인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 아니겠는가. 읽고 싶은 책을 마음껏 볼 수 있으니, 그곳은 차라리 성소라 해야 마땅하다.
마침내 게으른 몸을 잘 구슬려, 자전거를 타고 도서관에 갔다. 이만하면 잘 지은 셈이다. 건물도 디자인이 잘 됐다. 휴게실이나 식당 같은 부대시설도 그만하면 만족할 만하다. 1층에 마련된 어린이실도 신경을 많이 쓴 흔적이 묻어 있다. 애비 닮아 책벌레 기질이 있는 딸아이를 데리고 놀러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자전거 타고 도서관에 가다


도서관 담당자가 알면 불쾌할지 모르지만 내 눈은 마치 상급기관에서 감찰이라도 나온 양 도서관 구석구석을 살펴보았고, 이 정도면 만족할 만하다고 평가하고 있었다. 그러나 경험 많은 감찰관은 그렇게 쉽게 점수를 매기지 않는 법인 모양이다. 종합자료실에 들어선 순간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일단 그 크기가 예상보다 작았다. 당장 10년 앞을 내다보더라도 이 정도의 넓이로는 시민들이 원하는 책을 모아놓기란 불가능할 성싶었다.
더 실망스러운 것은 모아놓은 책의 빈약함이었다. 먹다 만 옥수수 형상이라 할 정도로 책이 너무 없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도서관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책이라고 말해왔던가. 나도 옆에서 끼어 들어 기회만 있으면 거들지 않았던가. 실망은 곧바로 분노로 비약했다.
혼자 열 받아봐야 그 사람만 손해다. 내가 아무리 옳더라도 남들이 아니라면 할 수 없는 법이다. 이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며 흥분을 가라앉히려다 나는 뜬금 없는 생각을 하나 하게 되었다. 옳거니, 이 일이 여태 해결되지 않는 것은 사람들이 책을 소프트웨어로 여겨서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도서관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컴퓨터 관련 이야기를 하다니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 싶겠지만, 찬찬히 수긍이 가리라.
백과사전을 찾아보니, 하드웨어에 대해 “원래는 쇠붙이라는 뜻인데, 컴퓨터의 중앙처리장치(CPU;central processing unit)·기억장치(memory unit)·입출력장치와 같은 전자·기계장치의 몸체 그 자체를 가리킬 때에 사용한다”라고 정의했다. 소프트웨어는 “컴퓨터를 활용하기 위한 각종 프로그램 체계(體系)”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정도야 이제는 상식이 된 마당이니 새삼스러울 게 없다. 내가 주목한 것은 다음 구절이다.

“1960년대는 하드웨어만을 중요시하고 소프트웨어는 무료로 공급했으나 이제는 소프트웨어의 중요성과 독립성이 널리 인식되어 소프트웨어의 가격이 하드웨어와 별도로 책정되는 경향이 뚜렷해졌고, 소프트웨어 가격이 하드웨어 가격보다 높은 경우도 많다. 하드웨어 가격이 계속 저렴해지고 또 자주 교체됨에 따라 이제는 컴퓨터시스템을 선택할 때 과거와는 반대로 소프트웨어가 더 중요한 역할을 할 때가 많다. 소프트웨어가 생산성을 얼마나 높여주는가의 여부, 하드웨어가 바뀌더라도 거기에 적응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인가의 여부, 유지보수를 하는 것이 효율적인가의 여부 등이 중요한 요구조건이 되고 있고, 또한 중요한 연구개발 대상이 되고 있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에 대한 백과사전의 정의는 얼마든지 변주될 수 있다. 큰 것, 움직이지 않는 것, 변하지 않는 것, 바꾸기 힘든 것, 더 이상의 이윤창출이 없는 것 등속이 하드웨어다. 이에 반해 소프트웨어는 작은 것, 움직이는 것, 변하는 것, 자주 바꿀 수밖에 없는 것, 그것으로 더 많은 이윤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 등속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다시 내 식으로 종합해보면, 한번에 큰돈이 들지만 더 이상 이득을 내지 못하는 것은 하드웨어, 더 많은 이윤을 만들어내는 것은 소프트웨어라 정의할 수 있다.
이제 논점을 되돌려 도서관에서 책은 하드웨어인가 소프트웨어인가를 고민해보아야 한다. 나는 본디 에둘러 가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다른 것에 빗대어 설명해 보면 이렇다. 쌀은 하드웨어인가 소프트웨어인가를 먼저 생각해보자. 쌀집의 하드웨어는 가게와 저울일 터이다. 앞에서 말한 하드웨어 정의에 얼추 맞는다. 그렇다면 쌀집에서 쌀은 당연히 소프트웨어다. 그러면 고급음식점에서 쌀은 어디에 해당할까. 이것은 상당히 논쟁적인 질문인데, 서둘러 내 견해를 밝힌다면, 나는 음식점에서 쌀은 하드웨어에 들어간다고 본다. 이유인즉, 일단 쌀은 그 자체로 음식점에서는 부가가치가 없다. 음식점에서 쌀은 솜씨 있는 주방장의 손에서 숱한 변화를 거친다. 쌀을 안치면 그것은 비빔밥, 오곡밥, 자장밥, 짬뽕밥, 쌈밥 등등으로 거듭난다. 음식점에서 쌀 자체로는 아무런 소득을 남길 수 없다. 누가 쌀 사러 음식점에 오겠는가. 그러나 쌀을 재료 삼아 요리한 것은 주인에게 이윤을 남겨준다.


책과 쌀이 같은 이유

책으로 다시 돌아와 이야기를 계속해보자. 책을 만드는 출판사나 책을 파는 서점 입장에서 보면 책은 당연히 소프트웨어다. 문화상품이라는 수사학으로 포장되어 있으나, 출판사나 서점에선 문화보다는 상품에 방점이 찍혀 있게 마련이다. 팔리지 않는 책을 내거나 전시해주는 출판사나 서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나, 우리시대에 그것은 희귀한, 예외적인 현상에 해당할 뿐이다. 이들에게 책은 지속적으로 이윤을 남겨야 할 상품이다.
그러면 도서관이나 독자(소비자) 입장에서도 책이 소프트웨어인가를 고민해보아야 한다. 나는 이미 앞에서 이에 대해 답변을 한 꼴이다. 도서관이 책을 소프트웨어로 여기는 것 같다며 시비를 걸었으니 말이다. 내 입장에서 보자면, 책은 쌀과 같은 운명이다. 쌀집에서 소프트웨어였던 쌀이 음식점에 가면 하드웨어로 바뀌듯이, 출판사와 서점에서는 소프트웨어였던 책이 도서관이나 독자 입장에서는 하드웨어가 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책을 구비하거나 샀다고 해서 책이 도서관이나 독자에게 부가이득을 남기지 않는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도서관 책꽂이에 책이 아무리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고 해서 무슨 이득이 있는가.
도서관은 만인에게 열려 있다. 그 사람의 국적이나 계층이나 연령이나 성별을 구별하지 않고, 책을 읽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수용한다.
아니, 좀더 적극적으로 말하면, 돈이 없어 책을 살 수 없거나 사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어려운 형편의 청소년들이나 다른 직업을 찾고 있는 성인들을 위한 평생교육의 한마당이기도 하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찾아와서 자기가 필요로 하는 책을 무상으로 빌려가고, 그것을 읽어서 애초에 의도했던 목적을 이룰 때 비로소 도서관의 책은 의미를 갖는 법이다.
가령, 외국인이 우리의 문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거나, 논술학원에 제돈 내고 다닐 수 없는 청소년이 대출된 책을 읽고 대학에 합격했다거나 실직상태의 고령자가 재취업을 하는 데 도움이 되었거나 할 때 책은 가치를 갖는 것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시구를 연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으리라.
독자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신문에 떠들썩하게 기사가 나거나 연예인들이 나와 소란스럽게 읽을 만하다고 권해 책을 샀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출판사와 서점에 좋은 일을 한 것에 불과하다. 구슬이 서 말이 있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꿰어야 보배라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일. 책장을 열고 읽어나갈 때 비로소 가치 있는 일이 된다.
그렇다고 읽는 것 자체가 책을 소프트웨어로 만드는 건 아니다. 어떤 방식으로 읽느냐에 따라 그것은 다른 결과를 가져온다. 지은이가 그 책에서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 그것을 어떤 식으로 만들어가는지, 주장한 것이 있다면 그것을 뒷받침하는 글은 논리적으로 탄탄한지를 따져가며 읽어야 한다.
여기서 그쳐서도 안 된다. 지은이가 말한 것에 대해 나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것이 나의 삶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다르다면 지은이의 입장을 어떤 근거로 비판할 수 있는지를 깊이 있게 고민해야 한다. 이 과정이 생략되면 읽는 이는 지은이에게 포박당하나 이 점에 충실하면 읽는 이는 하드웨어가 소프트웨어로 바뀌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
나는 지금껏 독후감을 이야기하기 위해 먼길을 걸어왔다. 현명한 독자야 벌써 수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결국 그 말을 할 거면서 허풍을 그리 떨고 있나싶어 혀를 찼으리라. 그러나 너무나 익숙한 것이기에 조금은 다른 시각에서 볼 필요가 있다. 오랫동안 보아온 것일수록 낯설게 보려 노력해야 그것의 새로운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 법이다.
나는 아직도 수학시험을 보는 꿈에 가위눌려 깨어나는 적이 있다. 참으로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학교를 마친 게 언제인데 아직도 그런 꿈을 꾸다니. 더욱이 수학 못해 내가 살아오면서 손해 본 게 하나도 없는데, 그런 점에서는 차라리 영어시험 보는 꿈 때문에 가위눌리면 이해라도 할 터이다. 어쨌든 그런 꿈 때문에 잠을 망치다니 억울하기도 하다.


독후감 쓰는 악몽을 꾸다

그런데 요즘 청소년들한테는 독후감이 꼭 그런 모양이다. 읽기 싫은데 억지로 읽으라 하고, 요리 빼고 저리 피해서 어떻게든 안 읽으려 했더니 그놈의 수행평가라는 전가의 보도를 휘두르며 몰아치니 안 읽을 수도 없다. 그런데 읽는 것만 해도 귀찮아 죽겠는데 거기다 숙제랍시고 독후감을 내주니 이게 꼭 삼장법사가 손오공 머리에 씌운 금테 같아 학생들을 옴짝달싹 못하게 한다.
그러나 어릴 적 우리보다 요즘 아이들은 얼마나 더 되바라졌던가. 아예 정해준 책을 읽지도 않고 독후감 숙제를 해내는 비법을 찾았으니, 그게 바로 인터넷이라더라. 그리하여 지난 8월 인터넷 사이트 최고인기 검색어에 ‘독후감’ 세 글자가 당당히 등재되었다나 어쨌다나.
나이가 들면,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 알았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하는 마음이 들 적이 많다. 독후감도 그런 경우다. 독서지도를 하는 교사들의 입장에서 보면 독후감만큼 책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데 유효한 교육이 없다. 지금 알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학생들은 그것이 단지 숙제로만 다가올 뿐이니 먼 훗날 이것을 그때 알았으면 좋았을 터인데 하며 후회할 터이다.
물론 모든 교사들이 독후감의 가치를 제대로 알고 이를 숙제형식으로 내준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관행이 그래왔으니 평가하기 가장 쉬운 방법이어서 독후감을 활용하는 경우도 없지 않으리라. 하지만 독후감이 여전히 교육현장에서 위력을 발휘하는 데는 그만한 효과가 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방금 말한 나만의 어법에 기대어 표현하건대, 하드웨어를 소프트웨어로 만드는 지름길이다.
하드웨어라는 개념은 투자라는 뜻과 연결되는 면이 있다. 이에 비해 소프트웨어는 소득이라는 뜻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책을 사는 것은 투자하는 것이다. 투자자 입장에서 돈을 지불했다면, 그것 이상의 효과를 기대하는 것은 당연하다. 독서는 물론 일반적인 경제행위와 달리 즉각적인 투자효과를 거둘 수는 없다. 그것은 무척 늦게 나타나기 십상이며, 의약으로 치자면 서양의학보다는 한의학에 가깝다. 대증요법적 효과는 기대하기 어렵더라도(이것은 참고서가 해결해줄 것이다) 병인요법적 치료는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책이 그 어떤 효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두 가지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그 첫 단계는 읽기이고, 두 번째 단계는 그 책의 주제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다. 이것을 위해 책과 대화할 필요가 있다. 비유하자면 배추를 소금에 절여두는 것과 같은 이치다. 뻑뻑한 배추가 영양가 만점의 김치로 바뀌는 데 이바지한 일등공신은 소금이다. 책이라는 하드웨어를 소프트웨어로 바꾸는 연금술사는 방금 말한 두 가지다.
책과 말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저자와의 대화를 들 수 있다. 읽은 이가 저자와 ‘맞짱’ 뜨는 일만큼 흥분되고 즐거운 일은 없다. 그러나 한 독자가 저자를 만나는 것은 현실적으로 너무 어렵다. 두 번째는 대중매체를 통해 저자와 만날 수 있다. 텔레비전의 독서 토론 프로그램에 저자가 나오는 경우 이를 십분 활용할 수 있다. 이 방법은 즉각 활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일방적이라는 단점이 있다. 내가 묻고 싶은 것, 내가 주장하고 싶은 것이 반영되기 어렵다.
세 번째는 주위 사람들과 같은 책을 읽고 토론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권장할 만한 방법이다. 토론이라는 과정을 통해 나와 다른 해석과 가치관을 만난다는 것은 상당히 의미 있는 일이다. 그런데 이도 우리의 환경에서는 쉽지 않다. 책 읽는 사람이 갈수록 줄어든다고 아우성인데다, 짬을 내 같은 책을 읽고 토론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네 번째가 바로 독후감 쓰기다.


저자와 독자의 은밀한 만남

독후감은 일기가 그러하듯 자신과 저자와의 내면적 만남이다. 책에서 지은이가 말하고자 한 것이 무엇인지를 정리하고, 그것을 어떤 형식으로 꾸며냈는지에 대해 글을 쓰면 된다. 그리고 그 주제에 대해 자신의 생각이 어떠한지,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지를 적어 가면 된다.
성인이 되어 쓰는 독후감이라면,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하는 것이 아닌 만큼, 그 형식은 자유롭다. 완성된 문장으로 쓰는 것이 가장 좋지만, 여의치 않으면 요점만 정리해도 된다. 일기형식이어도 좋고 편지형식이어도 좋고 가상 대담형식이어도 좋다. 중요한 것은 책에 대해 쓴다는 것이다. 여기서 유의할 사항은 독후감의 뜻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는 점이다.
독후감은 말 그대로 읽고 나서 느낀 소감을 적는 것이다. 책의 내용이나 얼개만 정리하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그 책을 나의 삶이라는 문맥 속에 넣었을 때 어떤 감흥이나 문제의식이 떠올랐는지가 주제가 돼야 한다. 좋은 독후감이 대체로 1인칭으로 씌어진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돈을 주고 사왔든 도서관에서 빌려왔든 그 책의 주인은 읽는 이다. 책에 담겨 있는 내용이나 주제도 그 책의 주인에 의해 자유롭게 해석되고, 그 의미가 새롭게 조명될 수 있다.
더욱이 지은이가 애초에 의도했던 바와 달리, 철저히 자신의 입장에서 그 책에 반응할 수 있다. 주인이면 그렇게 할 수 있다. 어떤 ‘검열’도 거치지 않고 자유롭게 펼쳐질 수 있는 마당이 바로 독후감이다. 백 마디 말보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이 쓴 독후감을 예로 드는 것이 나을 성싶다. 아랫글은 박혜란의 ‘나이듦에 대하여’를 읽고 내가 쓴 글의 일부다.

‘불의 시대’였던 80년대, 나는 20대였다. 그때 나는, 새로운 세계를 꿈꾸게 하지 못하는 현실에 절망하고 있었다. 아니 이 문장은 바로잡아야 한다. 20대였던 우리 모두가 그러했다라고. 현실의 벽을 뛰어넘지 못한 나는, 그 시절 내내 자살충동에 시달렸다. 젊음이 죄라고 생각했고, 치욕스럽게 질식사하느니 스스로 내 영혼을 자유롭게 하고 싶다고 되뇌었다. 죽음에의 유혹이 강해지면서 나는 가끔 차라리 파파 노인이 되길 소원하기도 했다. 내가 발 딛고 있는 현실에 아무런 책임의식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치매’의 상태를 원했던 것이다. 그만큼 나는 현실 앞에 비겁했다.
…그래도 내가 지금껏 구차한 삶을 꾸려온 데는 이유가 있다. 세월을 약 삼아 견디다 보면, 마치 몸무게가 1kg이 되는 것과 같은 일이 일어나리라 기대했기 때문이다. 부피는 있으나 무게가 없는 사람이라, 이 얼마나 황홀한 상상인가. 바람이 불면, 몸이 가벼우니, 하늘을 날 수 있을 것이고, 비가 오면, 부피는 있으니, 젖어 물과 함께 흐를 수 있을 터이다. 나이를 먹다보면 일상의 덫을 날렵하게 건너뛰고 좀더 넓고 깊게 세상을 바라볼 수 있으리라 믿었다. 나는 여전히 ‘진보사관’을 버리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다. 비록 비유라 하더라도, 몸무게가 1kg이 되는 것은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나이 먹을수록 배만 나오더니, 급기야 저울이 가리키는 숫자가 90을 넘어서려는 순간의 아찔함이라니! 시간이 흐를수록 영혼은 젖은 외투처럼 더 무거워져 갔다. 그러기에 바람이 불어도 좀처럼 흔들리지 않았고, 비가 와도 도대체 흐르지 않았다. 일상이라는 덫에 꼼짝없이 걸려든 것이다. 떨쳐버릴수록 더 깊이 조여오는 덫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없을까. 그래서 집어든 책이 박혜란의 ‘나이듦에 대하여’(웅진닷컴)이다.
아무리 사정이 급하더라도 이 책을 ‘종합감기약’처럼 여겨서는 안 된다. 단박에 나이듦의 의미를 꿰뚫어볼 수 있는 혜안을 담고 있는 것도 아니니까 말이다(두 눈 비비고 찾아도 이 세상에 그런 책은 없다). 이 땅에 여자로 태어나 나이 든다는 것이 무엇인지 곱씹고 있는 이 책에서 나는, 각별히 나이 들며 지은이가 깨달았다는 것에서 감동을 받았다.
요약하자면, 느슨하게 살자는 것이니, 우리 인생이 꼭 무언가를 남겨야만 하는 건 아니라는 것이 그 첫째다. 지나고 나니 인생은 짧은 즐거움과 긴 괴로움의 연속이었다는 것은 두 번째 깨달음이다. 마지막은 남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은 바로 나에게도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불행은 모든 사람 앞에 평등하다. 나이 들어 이 정도만이라도 깨달을 수 있다면, 죽지 않고 살아 남은 것에 깊이 감사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지은이가 이 글을 보았다면 불쾌할 수도 있다. 책 내용을 정확하게 요약한 것도 아니고, 주장의 옳고 그름을 가늠하지도 않았다. 그저 읽은 이의 푸념만 늘어놓았을 뿐이다. 하지만 독후감을 쓰는 사람에게 저자는 하등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늙어감이라는 주제에 외려 나는 20대를 떠올렸고, 나이 들어가면서 그 때의 건강한 꿈이 훼손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위의 글이 독후감의 표본일 수는 없지만, 이런 유의 독후감도 있음을 보여주는 것은 사실이다. 지은이와 책은 사라지고 읽는 이의 감정과 느낌만 오롯이 남는 것, 내가 가장 좋아하는 독후감이다.

책의 살과 뼈를 샅샅이 발라라


이제 우리는 통념을 바꾸어야 할 때가 왔다. 책이라는 것은 신성한 그 무엇이 아니다. 그러니까 오락거리책도 가치 있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책을 누가 쓰고 무엇을 주제로 삼았든, 탐식가인 읽는 이에 의해 그 내용과 형식이라는 살과 뼈가 샅샅이 발라져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읽는 이에 의해 재구성되어 또 다른 무엇인가를 낳는 밑거름이 되어야 한다.
나는 단 한번도 책을 경제적 가치로 재단한 적이 없다. 그러나 나는 늘 책을 통해 무엇인가 얻기를 갈구한다.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싶어하는 것이며, 하드웨어를 소프트웨어로 바꾸고 싶어하는 것이다. 책이 이윤을 낳는 것은 내 것으로 만들었을 때다. 내 것으로 만드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지금껏 말해왔듯 독후감 쓰기다. 독후감 쓰기는 읽는 이를 책의 주인으로 만든다. 그리고 감히 말하거니와, 책의 주인된 자가 세상의 주인으로 당당히 나설 수 있는 법이다.
언제나 인터넷 검색어 인기순위에서 독후감이 빠질 수 있을까. 뒤늦게 깨닫고 후회하지 말고, 지금 그 가치를 제대로 알았으면 하는 바람인데, 바라노니 청소년 흉볼 생각 말고 어른들부터 독후감을 써보길! 변화와 성장이라는 놀라운 경험을 몸소 체험할 수 있으리라. (끝)

 


글: 이권우 도서평론가 lkw1015@hanmail.net

‘출판저널’ 편집장을 지냈으며 책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도서평론가’라는 직업을 스스로 만들고 각종 지면과 방송 등을 통해 좋은 책을 소개하는 것을 업으로 삼아 즐겁게 살고 있다. 저서 ‘각주와 이크의 책읽기’ ‘게으름뱅이의 책읽기’ 등이 있다.

 


[특별부록|가슴으로 글쓰기]


내 글맛의 비결

재미있는 삶, 맛있는 글


나는 재미있는 삶을 위해 ‘웃다 죽다 조영남’이라는 묘비명을 작성했다.
죽기 전까지 악착같이 재미있게 살려고 아인슈타인과 파인만의 물리학 이론까지 그냥 읽어제꼈다.
세상은 무조건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오래 살다 보면 별의 별 꼴을 다 보기 때문이다. 날더러 글쎄, ‘글쓰기’에 대해 써달라니 이게 별꼴이 아니고 무엇이냐. 맛있는 글, 글맛의 비결에 대해 쓰라는 ‘신동아’의 요구에 나는 화들짝 놀라 일단 발뺌부터 했다.
“여보쇼! 나는 세상이 알다시피 일개 가수에 불과하오. 내가 글맛이 뭔지, 맛의 비결이 뭔지 어찌 안단 말이오. 설령 내가 그런 따위에 대해 가타부타 아는 체한다면 사람들이 얼마나 비웃겠소!”
내가 취해야 할 태도는 정확히 취했다. 문제는 저쪽이다. 처절한 반항에 아랑곳없이 “하하 호호” 웃기만 한다. 나는 직업상 청각이 발달해서 예쁜 여자 목소리엔 깜빡 죽는다. 내 최대의 적은 미인계(美人計)고 다음은 미성계(美聲計)다. 그래서 맥없이 “알았어, 알았어” 하며 원고지와 펜을 손에 쥐고 끙끙대기 시작했다. ‘글쓰기의 쾌락’이라니 ‘택’도 없는 소리다. 내 글쓰기는 시종 이런 식으로 떠밀리는 가시밭길이었다. 그렇다면 어쩌다 오늘날 이런 품위 있는 원고청탁을 받기에 이르렀는가. ‘신동아’가 보통잡지인가. 7000만 인구의 남북한 통틀어 월간 잡지 중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신동아’다(2박3일 평양 다녀온 티를 좀 내봤다).
미리 말해두지만 글쓰기의 비결은 없다. 적어도 나한테는 그렇다. 어쩌면 나는 영화감독 임권택의 비법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것저것 오랫동안 자꾸 만들다 보니까 더러 근사해 뵈는 영화가 빠져나오는 식 말이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이 있다. “오래오래 자꾸 쓰기만 하면 좋은 글이 나오는가”라고 섣불리 반문해선 안 된다는 점이다. 오래 자꾸 쓰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그건 신인가수가 히트곡을 연속으로 날리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자꾸 쓰는 게 중요하다.


책을 쓰라는 계시를 받다

자, 그럼 내가 쓴 글이 제법 좋은 평판을 받고 있다 치고,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내 사전에 애당초 글쓰기는 없었고 두 가지, 노래와 그림만 있었다. 그래도 억지로 따져서 말하면 내가 정식으로 글쓰기를 시작한 것은 1978년, 그러니까 정확히 2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 나는 미국 플로리다에 있는 조그만 침례신학대학에 들어가 기독교에 대한 공부를 하고 있었다. 30대 중반이었고 무엇보다 예수라는 인물에 대해 알고 싶었다. 왜 어머니, 아버지, 가족 전체가 대대로 그를 떠받들며 살아야 했는가, 나도 부모의 뒤를 따라야 하는가, 그게 궁금했다. 일단 나는 예수에 관한 자료를 닥치는 대로 수집했다. 그 중에는 우치무라 간조 같은 일본인이 쓴 책도, 와치만 리 같은 중국 신학자가 쓴 책도 있었다. 정작 씨알갱이도 없는 건 놀랍게도 한국인이, 한국 마인드로 쓴 예수에 관한 책이었다.
물론 지금도 없다. 한국은 교회와 교인수만 세계 최다가 아니다. 예수에 대한 광적 신앙심도 단연 세계 최고를 뛰어넘는다. 단지 그런 ‘느닷없는’ 종교적 현상을 한국식으로 정리해낸 글이 없을 뿐이다. 당시 병아리 신학도로 어디다 불만을 토로할 길도 없었다. 그때 나는 이 사실을 무슨 계시로 여겼다. 날더러 그걸 정리해보라는 계시로 받아들인 거다. 하지만 누가 믿겠는가. 그때까지 나는 글쓰기에 대해 아는 게 쥐뿔도 없었다.
‘그렇다면 내가 써야지’ 하는 용기와 배짱이 어디서 생겼는지 지금도 모르겠다. 그렇다. 잘 쓰건 못 쓰건 간에 글을 쓰려면 용기와 배짱이 필요하다. 나는 노래를 잘한다. 그걸 남한테 알리고 좋은 평판을 받기 위해선 우선 타인 앞에서 배짱 좋게 노래를 불러야 한다. 왜냐, 좋은 평판을 얻기 위해서다. 그것이 바로 동기부여다. 선의의 동기가 무적의 용기와 배짱을 부른다. 예수를 한국인의 마음으로 재조명하겠다는 눈물어린 동기가 내 몸 속에 숨어 있던 모든 용기와 배짱을 끄집어냈다.
그렇다면 동기부여가 글쓰기의 전부인가. 아니다. 글쓰기 전에 강력한 자기 주장이 있어야 한다. 예수의 문제에 관한 내 주장은 확고했다. 왜 불교, 유교, 기독교 같은 수입종교만 있고 우리 고유종교는 다 어딜 갔는가. 단군교, 동학교, 증산교, 하다못해 정감록 같은 우리네 토종종교는 다 어디 숨어 있는가. 이 애처로운 현상을 일깨워야 한다는 게 내 주장이었다.
미국생활 막바지 3년 동안 예수에 관한 글에 온 힘을 다 쏟았다. 생전 처음 잡은 글쓰기 테마가 종교철학이었으니 지금 생각해도 터무니없는 용기와 배짱이었다. 그렇게 쓰여진 책이 바로 ‘예수의 샅바를 잡다’였다. 믿거나 말거나 300쪽 이상의 전문적인 문장을 짜깁기해 쓰다 보니 어느덧 기승전결과 높낮이를 요구하는 글쓰기 구조에 제법 익숙해졌다. 긴 글을 쓰고 나니 짧은 글은 훨씬 쉬웠다.
그럼 ‘예수’에 관한 글쓰기는 나에게 무슨 의미였는가. 작게는 글쓰기 기술을 터득케 했고, 크게는 내 삶 자체를 뒤집어놓았다. 나는 종교의 구속으로부터 완전 독립했고 내 방식의 구원과 자유를 동시에 얻었다. 나의 삶이 다른 사람의 시선에 비교적 자유롭게 비친 것은 글쓰기를 통한 자아발견에서 유래했으리라 믿는다.


이맛저맛, 글맛을 섭렵하다

글쓰기의 맛은 김치맛이나 콜라맛처럼 그렇게 구체적인 게 아니다. 내 경우 글쓰기의 맛은 취미생활의 맛과 흡사해서 한 인간의 삶을 확대·확장시켜주었다. ‘예수의 샅바를 잡다’를 쓰면서 내 안에는 나 아닌 또 다른 형체인 신학자 조영남이가 들어앉은 셈이다. 이건 단순한 글쓰기의 맛을 뛰어넘는다. 이런 식으로 나는 신학자에서 닥터 지바고 같은 시인으로 넘어간다.
7년 미국생활에 나는 우연히 시인 마종기를 알게 되었다. 마종기 시인과의 연줄로 황동규, 정현종, 김영태 같은 시인을 줄줄이 만나보게 되었고, 천하의 글쟁이 이제하가 존재한다는 것과 기형도의 위대함까지 눈치채게 되었다. 나의 확장작업은 끝이 없었다. 보들레르, 랭보, 말라르메, 에드가 앨런 포, ‘북회귀선’을 쓴 헨리 밀러와도 꽤 깊은 교우를 트고 급기야는 우리네 요절시인 이상(李箱)이, 위에 거론한 시인뿐 아니라 난다 긴다 하는 동서고금의 현대시인들 맨 꼭대기에 제왕처럼 군림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글쓰기의 이맛저맛을 섭렵한 결과였다.
음식맛이나 글맛이나 매한가지다. 많이 먹어본 사람이 음식맛을 잘 알 듯이 여자도, 음악도, 미술도 마찬가지다. 요컨대 뭘 알아야 면장을 할 수 있다. 클래식 음악을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사람이 바흐의 무반주 첼로 소나타를 알 턱이 없고, 미술에 대해 쥐뿔도 모르는 사람이 온통 파란색만 칠해진 이브 클라인의 추상화를 즐길 턱이 없다. 결론은 이렇다. 아는 것만큼만 즐길 수가 있다. 많이 읽은 만큼 많이 쓸 수 있다는 얘기다.
가령 백남준, 이우환이 그런 사람이다. 많이 먹어보고 많이 사귀었기 때문에 그네들은 미술의 맛 분야에서 단연 일등으로 올라섰다. 우리는 설치미술의 세계적 권위자인 백남준이나, 동양 추상현대미술의 선각자인 이우환이 추종불허의 미술이론가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세상이 알다시피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백남준의 조각작품은 누가 봐도 우스꽝스럽다. 싸구려 TV를 얼기설기 용접해놓고 괴기스러운 영상을 표출해내는 게 전부다. 이우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커다란 백색 캔버스 위에 먹물 적신 굵은 붓으로 단 한 차례 점을 찍거나 위 아래 일직선으로 쭉 그어놓은 게 뭐 그리 대단한 형상이란 말인가. 평범한 돌멩이 몇 개 놓고 그 옆에 넓적한 쇠철판을 기대놓은 게 뭐 그리 대단한 예술작품이란 말인가. 그럼에도 우리는 백남준이나 이우환의 그 싱거운 예술작품 앞에서 괜히 주눅이 든다. 왜냐하면 그네들의 양손에는 그들의 생각을 글자로 조립하는 가공할 이론의 무기가 들려져 있기 때문이다.
나는 오래 살았고 더구나 얼굴 파는 직업의 소유자라서 참으로 많은 사람을 직접 만나는 행운을 누렸다. 박정희부터 노무현까지 대통령을 만났고 부시를 비롯해 클린턴, 옐친, 고르바초프까지 만났다. 그런데 그 중에 백남준보다 더 해박해 보이는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 역사, 문화, 철학, 예술뿐 아니라 영어, 불어, 독어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는데 두 손을 번쩍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이우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일본어로 쓴 이우환의 산문이 일본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두 편이나 실려 있는 걸 내 눈으로 확인했다. 이게 보통 일인가.
물론 글쓰기가 우리 삶의 필수조건은 아니다.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편지 몇 줄도 제대로 쓰지 못하거나, 탁월한 화가가 자기의 그림을 몇 줄의 글로 표현 못하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화가가 그 의미를 글로 표현할 수 있다면 타인으로부터 더 큰 신뢰를 받을 수 있다. 여기서 내가 어쩌다 화투를 그리는 화가로 제법 알려졌는지 털어놓겠다. 글쓰기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나는 음악과 마찬가지로 미술을 병행할 수밖에 없는 숙명을 일찍부터 감지했고, 독창성 차원에서 화투짝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선 여전히 이발사가 이발을 해야지 가위 대신 붓을 들면 가차없이 외면당한다. 당연히 ‘가수가 웬 그림이냐’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1985년경의 일이다.


화가 조영남, 글쓰기를 시작하다

지금은 성곡미술관 학예실장으로 있는 전준엽씨가 ‘문화일보’ 미술기자였을 때 이런 제안을 했다. “그림 자체로는 한국 미술계를 헤쳐나갈 방법이 없다. 특단의 처방을 하자. 당신만의 독특한 필체로 세계 현대미술의 추이를 써라.” 이렇게 해서 월간 ‘미술세계’에 장장 6개월에 걸쳐 ‘세계 속 한국 현대미술의 현주소’를 썼다. 그러자 화랑이나 한국미술계가 나를 달리 대하기 시작했다. 글쓰기의 파워를 그때처럼 실감한 적이 없다. 고맙게도 출판사 ‘문학동네’에서 책으로 내기 위해 그 글을 정리중이다.
재작년 ‘월간미술’ 쪽에서 조영남의 안목으로 본 거리의 미술들을 1년반 가량 연재하자는 제의가 들어와, 전국 방방곡곡 건물 안이나 건물 밖에 놓여 있는 미술품들을 일일이 체크해서 독자들에게 알렸다. 그것이 최근 나온 ‘조영남 거리에서 미술을 만나다’라는 제목의 책이다. 내가 말로 표현할 줄도 모르고 글쓰기로 설명할 줄도 몰랐다면 내가 그린 화투 그림이나 바둑 그림, 바구니 그림, 태극기 그림이 과연 지금처럼 대접을 받을 수 있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작년에는 ‘조선일보’에서 조영남이 만난 사람에 관해 연재를 해보지 않겠냐는 제의가 들어왔다. 나는 내 실력을 몽땅 발휘해서 써댔다. 글이 재미있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내가 오늘날 ‘신동아’로부터 글쓰는 맛이나 비결에 관해서 써달라는 요청을 받은 건 순전히 내 글이 어렵지 않고 재미있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걸 짐작 못할 내가 아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나 같은 아마추어 글쟁이가 재미있게 글을 쓰는 부류에 속하게 됐단 말인가. 그건 상대적으로 나보다 글을 재미있게 쓰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는 뜻이다.
나는 일찍이 이런 사태를 예감했다. 언젠가는 재밌게 쓰는 게 최고가 되리란 걸 말이다. 자랑이 아니라 나는 어떤 방면의 글을 쓰건 뚜렷한 주제, 확고한 테마, 그리고 재미를 추구한다. 모든 글은 무조건 재미있어야 한다. 글쓰기뿐만 아니라 음악·미술도 마찬가지다. 음악·미술은 우선 관람거리 구경거리여야 한다. 거기에 재미가 없으면 무슨 수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 수 있겠는가.
궤변이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철칙처럼 요구되는 독창성이나 독자성은 재미와 직결된다. 늘 듣던 소리, 늘 보던 그림으론 사람의 시선을 끌 수가 없다. 남이 안 낸 소리, 남이 안 그린 그림을 그려내야 한다. 요즘은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다. 들을거리, 볼거리가 넘쳐난다. 웬만한 물건엔 사람들이 시선도 안 준다. 무조건 재미있어야 한다.
이쯤 해서 반론이 나올 것이다. 재미만 추구하면 내용이 부실해지지 않느냐, 말초신경만 건드리는 것 아니냐고. 단언컨대 그 두 가지는 항상 뒤만 따라오는 느린 자들의 합창소리다. 그것은 관객을 모독하는 소리다. 지금 사람들은 다 똑똑하다. 내용의 부실이나 말초신경의 여부쯤은 본능적으로 분간할 줄 안다.
당신은 오늘 재미있게 살았는가


그러나 고백컨대 내 글의 결함은 바로 이 지점에 있다. 지나친 ‘재미’ 추구 때문에 자칫 내용이 허술해 보이는 점이다. 내 삶 자체가 두서없고 번잡스러워서 나는 일찍이 40대 중반에 자서전을 썼다. ‘놀멘 놀멘’이 제목이다. 제목부터가 재미를 밝히는 냄새가 물씬 나지 않는가. 나는 사람들이 ‘야 제목 재밌다’ 하며 수천, 수만 권 사갈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계산착오였다. 재미고 뭐고 간에 사람들은 조영남의 삶에 애당초 관심도 없고 애착도 없었다. 평소에도 잘난 척 까불대는 놈의 책을 돈 주고 사볼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놀멘 놀멘’을 쓰면서 최소한 모든 사물과 사안에는 일정 부분 재미가 있다는 사실을 터득했다. 쉽게 말해 뭐든지 재미있게 쓸 수 있다는 걸 알았다.
말하나마나 모든 사안은 심각과 그 반대로 흥미 있게 쓸 수 있는 구석이 있다. 가령 칫솔에 대해 쓴다고 하자. 심각파는 “아! 몇 개의 칫솔을 더 꺼내 쓰고 나의 생을 마감하게 될까” 하고 비탄조로 쓸 것이다. 반대로 흥미파는 “아! 저 칫솔을 겨우 사백오십두 개 더 쓰고 내가 죽겠구나. 황천엔 지겨운 칫솔질도 소름 끼치는 치과도 없겠지. 그렇다면 빨리 죽어도 원망 말자”처럼 낙관적으로 쓴다. 두 가지를 적절히 혼합하면 글쓰기는 금상첨화다.
글을 재미있게 쓰려면 재미있게 살아야 한다. 생각을 재미있게 구축할 줄 알고 재미의 따뜻한 구조를 이해하는 것이다. 희극을 표현하려면 상대적으로 비극을 터득해야 한다. 극단적인 슬픔을 이해하는 자만이 극단적인 재미와 웃음을 연출해낼 수 있는 법이다. 나는 재미있는 삶을 구사하기 위해 일찍이 ‘웃다 죽다 조영남’이라는 묘비명을 작성해놓고 죽기 전까지는 악착같이 재미있게 살려고 노력한다. 심지어 아인슈타인이나 파인만의 물리학 이론까지 뭔소린지 모르면서 그냥 읽어제꼈다. 재미있게 살기 위해.
이 풍진 한 세상 어떻게 사는 게 잘사는 것인가. 내가 아는 신학, 철학, 문학, 과학을 잘 배합, 인수분해를 시도해 나름대로 해답을 얻어냈다. 역시 그저 재밌게 살다 죽는 것이 해답이다. 오늘 재밌게 살았는가가 오늘 글을 잘 쓸 수 있는가와 직결된다. 어젯밤 나는 평양방문을 마치고 돌아왔다. 나는 평소 신고 다니던 힐리스(바퀴 달린 운동화)를 그냥 신고 갔다. 무대에도 그걸 신고 올라가 노랠 불렀다. 고려호텔 로비에서나 공연장 무대에서나 내가 미끄러지면 북녘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래지면서 웃어대니 나는 누구보다도 그쪽 사람들과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그것이 내 삶의 방식이다. 옆에 있던 후배들이 계속 “형님, 나잇값 좀 하십쇼” 하지만 나는 여기서 글쓰기로 되받겠다. “어차피 죽는 건데 자연사(自然死) 하는 것과 힐리스 타다 뇌진탕으로 죽는 것이 뭐가 다르냐.” 이렇게 힘든 글쓰기에 비해서 원고료는 너무 짜다. (끝)

 


글: 조영남 가수

1944년 황해도 남천에서 태어나 한양대와 서울대 음대, 미국 플로리다 트리니티신학대를 졸업했다. 1968년 ‘딜라일라’로 가수로 데뷔. 1973년 한국화랑에서 첫 미술 전시회를 가진 이래 화가로도 활동중이다. 저서로 ‘조영남 길에서 미술을 만나다’ ‘태극기는 바람에 펄럭인다’ ‘조영남씬 천재예요’ ‘예수의 샅바를 잡다’ ‘놀멘 놀멘’ 등이 있다.

 

 


[특별부록|가슴으로 글쓰기]


잡문 쓰는 즐거움


셰익스피어에서 프로레슬링까지


엄격한 규범과 규칙을 준수하고 일정한 절차와 격식에 따라 쓰는 것이 논문이다. 물샐 틈 없는 논문에 비하면 잡문은 자유비행이다.
장난도 치고 소리도 지르고 간식도 먹을 수 있다.
축구팬의 한 사람으로 나는 1970년 브라질이 월드컵에서 우승한 직후 브라질 의회에 제출됐던 의안 하나를 기억하고 있다. 사상 최초로 월드컵 3회 우승의 신화를 만들고 줄리메컵을 영구 소유하게 됐으니 브라질 국기에 그려져 있는 지구를 축구공 도안으로 대체하자는 안건이었다. 대통령궁 발코니에 나와 대통령이 열정적인 삼바춤을 선보이고, 특별공휴일이 아니라 특별공휴주간이 선포된 가운데 이 의안은 근소한 차로 부결됐다.
그 당시 축구공은 오각형의 검은 가죽을 육각형의 흰 가죽이 감싸고 있는 점박이 무늬. 만약 그 안건이 가결됐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월드컵 공인구의 도안이 바뀔 때마다 브라질 국기의 도안도 변화를 거듭했을까. 행인지 불행인지 이 의안이 부결된 덕분에 인상적인 문구 하나도 살아남았다. 브라질 국기 지구본 아래를 감싸고 있는 띠에 새겨진 ‘질서와 진보’라는 포르투갈어다. 이 문구는 내 글의 지향점이기도 하다.
내가 이해하는 한, 질서는 논리이고 진보는 정보다. 글쓰기에서 질서란 혹시 한 편의 글 안에서 구축하는 이른바 내재적 논리를 넘어서는 논리가 아닐는지. 셰익스피어학이라는 것이 있다. 셰익스피어의 글, 생애, 문화적 의미, 역사적 변용 및 창조적 이용 사례들을 연구하는 학문 분야다. 그런데 초기 셰익스피어 연구자들을 지속적으로 괴롭힌 의문이 하나 있었다. 셰익스피어 집단 창작설. 말하자면 셰익스피어는 일개 자연인이 아니라 일단의 문사들이 연합하여 만든 회사명, 즉 브랜드명이었다는 설이다. 16세기의 정보유통 속도나 방법 등을 감안해볼 때, 셰익스피어가 다루고 있는 정보의 총량이 개인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다는 게 이러한 주장의 근거였다. 일리 있는 얘기여서 한때 셰익스피어가 실존인물이 아니라는 학설을 펼치는 사람마저 있을 정도였다.
셰익스피어는 개인인가? 개인이다. 그 많은 문헌을 전부 다 혼자 썼다고 확언할 수 있는가? 확언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토록 방대한 정보를 다룰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인가? 어떤 비평가들은 셰익스피어를 인류사상 최고의 각색자라고 평가한다. 새로운 이야기를 처음부터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시중에 떠돌던 이야기들을 수집하고 분류한 뒤 자신의 색깔을 입혀 독특한 이야기로 재창조한 작가라는 의미다. 실제로 셰익스피어 극에 나오는 많은 일화들은 당대 최고의 인기 역사책 ‘홀린셰드 연대기’에 상당 부분 빚을 지고 있다.
말을 바꾸면 시중에 떠돌던 당대의 많은 이야기들이 셰익스피어라는 필터를 통해 예술적으로 재창조됐다는 이야기다. 셰익스피어는 이러한 이야기들에 새로운 질서를 부여한 사람이다. ‘서 말의 구슬을 꿰어 보배로 만든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기존 정보들을 정리하는 것만으로는 문명(文名)을 날릴 수 없다. 독창성이 없기 때문이다. 진보는 창조의 다른 이름이다. 때로는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진정한 천재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개는 시점과 관점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을 창조할 수 있다. 시오노 나나미는 “천재란 남들이 무심히 지나치는 곳에서 가능성을 발견하고 이를 현실에서 구현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기존 정보를 분해하고 결합하며 응고하고 해빙하면 이제껏 우리가 모르던 무언가가 틀림없이 얼굴을 내밀고 소리칠 것이라는 발언에 나 역시 기꺼이 한 표를 던진다.


팽팽한 긴장감에서 벗어난 글쓰기

이제부터 본론이다. 잡문(雜文) 쓰는 즐거움. ‘잡’이 갖는 뉘앙스가 다소 부정적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해석하기에 따라서, 그리고 각자의 처지와 사회적 역할에 따라서 ‘잡문’의 정의는 만 갈래로 갈라진다. 글을 써서 먹고 사는 사람으로서 내 스스로 생각하는 정체성은 비교연극 사학자다. 이런 관점에서 나는 논문을 제외한 모든 글을 잡문이라고 통칭한다.
논문은 새로운 사실을 밝히고 드러내는 ‘앎의 보고서’이다. 엄격한 규범과 규칙을 준수하고 일정한 절차와 격식에 따라 글을 쓰는 것이 논문의 묘미다. 물샐 틈을 허락하지 않는 엄정한 세계. 논문에 비하면 잡문은 자유비행이다. 축구장에서 야구를 하거나 잔디밭 한 켠에서 피크닉을 즐길 수도 있다. 심지어 돗자리를 깔고 잠깐 오수를 즐긴다 해도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없다.


누군가의 글이나 말을 인용할 경우, 논문이라면 명확한 출처를 밝혀야 한다. 언제 어디서 출판된 어느 책의 몇 페이지에서 인용했다는 기록을 꼼꼼히 첨부해야 한다. 안 그랬다가는 표절 혐의를 피할 수 없다. 이것이 논문의 규칙이다. 유럽의 경우 남의 책이나 글에서 일곱 단어 이상을 그대로 쓰는 경우 모두 ‘인용’이다. 예외가 없다. 한 번 표절자로 낙인 찍히면 학자로서의 생명은 그 순간 끝난다. 손톱만큼의 ‘지적 절도’도 용납하지 않는 것이 학문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잡문은 이런 팽팽한 긴장감으로부터 한 발짝 떨어진 마음의 정원이다. 장난도 치고 소리도 지르고 간식도 먹을 수 있는 자기만의 공간이다. 그래서 잡문에는 어쩔 수 없이 글쓰는 이의 개인사가 슬쩍 묻어난다. 필자 모르게 그걸 캐두었다가 우연히 만났을 때 창졸간에 기습하는 재미가 여간이 아니라는 걸 적어두기로 하자.
그렇다면 잡문을 잘 쓸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인가. 재미있는 글을 쓰는 방법이 따로 있으랴마는 제목을 그렇게 받았으니 도망갈 길이 없다. 내가 ‘잡문가’로 데뷔한 것은 1994년, 지금은 사라진 ‘리뷰’라는 계간지를 통해서다. ‘스포츠평론가’라는 타이틀을 달고 ‘월드컵을 읽는다’라는 글을 발표했는데 이 글에 대한 반응이 재미있었다. 그래도 칭찬이 더 많았는데, 상찬의 내용인즉 새로운 시각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축구라는 운동을 스포츠 경기로만 해석하지 않고 사회학적·역사적·문화적 사안들과 연계해 독특하게 풀어내려 시도한 점이 좋았다는 얘기였다.
옳거니! 그로부터 나는 여러 분야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말을 건넬 수 있는 잡문의 매력을 마음껏 즐겼다. 짐짓 딴 얘기를 하는 척하다 시침 뚝 따고 들어가는 글로 재미를 보기도 했다. 이를테면 프로레슬링과 아일랜드 문예부흥운동과 공상과학 만화영화를 한데 섞어놓고 버무리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런 식이다.
레슬러 김일은 단순한 스포츠맨이 아니다. 1960년대와 1970년대를 관통하는 문화적 코드다. 과장이 아니다. 그의 존재는 동시대 대다수 사람들에게 지속적으로 광범위하게 영향을 끼쳤다. 그것만이 아니다.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 중 상당수는 김일이라는 레슬러, 혹은 레슬링이라는 스포츠와 잇닿은 개인사적 추억을 적어도 하나 이상은 간직하고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김일은 스포츠라는 영역을 훌쩍 뛰어넘고, 사회적·역사적 맥락 안에서 엄청난 존재의의를 지닌 문화적 코드로서의 지위를 획득하는 것이다.
프로레슬링과 아일랜드 문예부흥의 상관관계
아일랜드 문예부흥운동은 세계 문화운동 사상 가장 성공한 문화운동이요 민족운동으로서, 20세기 초반 식민지배에 시달리던 여러 민족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우리나라도 그 중의 하나다. 유치진 함세덕 등을 비롯, 수많은 연극운동가들이 아일랜드 연극 및 아일랜드 연극운동을 모본으로 삼아 문화운동, 민족운동으로서 연극운동을 치열하게 전개하였으며 신문 잡지 등에 아일랜드에 관한 숱한 글들을 발표한다.
한때 프로레슬링이라는 스포츠는 텔레비전의 황금시간대를 장악하는 최고의 인기 스포츠였다. 전파와 언론을 석권했을 뿐 아니라 어린이 놀이 문화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미래의 레슬러를 꿈꾸는 어린이들이 팬티 바람으로 격전을 벌이고, 상황이 다소 나은 집에서는 두꺼운 요를 여러 겹 깔아 링을 만들기도 했다. 코브라 트위스트나 새우꺾기 같은 기술 외에, 드롭킥이나 보디슬럼 같은 고난도 플라잉 기술을 구사하려면 바닥이 푹신한 편이 절대적으로 유리했기 때문이다. 자체 제작한 가면이나 날개 대용으로 착용하는 보자기도 중요한 소품이었다.
어린이들만 레슬링에 열광했던 것은 아니다. 당시 국내 유일의 실내 체육관이던 장충체육관 주변은 경향 각지에서 몰려온 팬들에 의해 인산인해를 이루곤 했다. 경기를 지켜보던 박정희 대통령이 친히 전화를 걸어 “조국의 명예를 빛내줘서 고맙게 생각합니다, 김일 선수”라고 치하하면, 이를 받아 “아닙니다, 각하! 대한의 남아로서 의당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라고 답하던 김일 선수의 씩씩한 목소리는 근 4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여전히 올드팬들의 귓가에 아련한 추억을 드리우고 있다. 그렇다면 프로레슬링이 이토록 전국민의 열광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까닭은 무엇인가? 레슬링은 드라마였다. 그것이 인기폭발의 알파요 오메가였다.
레슬링은 정교한 사전 콘티에 따라 진행되는 퍼포먼스다. 메인이벤트는 대개 60분 3판 양승제 태그매치로 거행되는 것이 상례였다. 첫째 판, 김일이 등장하여 상대 선수를 기술로 제압하고 반쯤 넋을 빼놓은 상태에서 우리편과 ‘터치’한다. 가벼운 마무리, 원 투 스리. 둘째 판, 실력으로는 도저히 대적할 수 없다고 판단한 상대팀이 암수를 쓰기 시작한다. 반칙을 자행하고, 팬티 속에서 도구를 꺼내 흉기로 사용한다. 로프 밖의 김일은 거칠게 항의하지만, 심판은 언제나 우리 편 반칙에는 지나치리만큼 냉정하고 상대의 반칙은 거의 보지 못한다. 부당한 폭력 앞에 무력하게 당하는 우리 선수의 모습에 관중석은 공분한다. 선혈이 낭자한 가운데 패전, 세트 스코어 1 대 1. 셋째 판, 우리 편 선수는 여전히 초라하게 내몰린다. 몇 번의 시도가 무위로 돌아가고 마침내 필사의 탈출, 무릎걸음으로 기어와 김일과 터치. 김일은 상대를 실력으로 제압하고 마침내 매트에 뉘여 카운트를 헤아린다. 이때, 상대방의 동료가 재빨리 링으로 뛰어들어 김일의 등을 발로 짓누른다. 그리고, 흉기를 꺼낸다.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관중들이 ‘박치기!’를 연호하기 시작한다. 관중석의 신호를 수신한 김일은 분연한 표정으로 상대에게 박치기를 안긴다. 김일의 박치기에 상대방 레슬러들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지고 비굴한 표정을 지으며 도망을 친다. 퇴각하는 적을 붙잡아 어깨 누르기. 적은 다시 등판 밟기라는 고전적 반칙을 시도하지만, 링 밖으로 물러나 있던 김일의 동료가 비호처럼 달려들며 적을 저지하고 적법한 승리를 거두는 데 일조한다. 김일은 그와 더불어 동료애를 확인하며 감격의 함성을 내지르는 관중들의 환호에 답한다.
그렇다면 이토록 인기 절정이었던 프로레슬링이 몰락한 원인은 무엇인가? 항간에 알려진 바와 같이 ‘프로레슬링은 쇼’라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인가? 프로레슬링이 쇼라는 이야기는 어느 정도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만큼 역동적인 기술들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어느 스포츠맨 못지않은 치열한 신체단련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데 프로레슬링의 역설이 있다. 연습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 링 위에서 보여지는 프로레슬링은 쇼라고 할 수 있지만, 링에 오르기까지의 단련과정은 쇼일 수가 없다.
그리고 여기에도 무술 유단자들의 세계처럼 나름대로의 경지와 단계가 있다. 예컨대 흥행을 위해서는 별도의 사전 연습, 즉 리허설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김일이나 이노키 정도의 고수들은 굳이 리허설을 하지 않고도 말로써 모든 상황을 맞춰볼 수 있다고 한다. 진행 상황을 말로 주고받은 뒤 링 위에 올라가고 한치의 오차도 없이 말한 바를 그대로 재연했다. 미리 짜고 치는 경기라는 것이 알만한 사람들에겐 다 알려졌다지만, 이것이 프로레슬링 몰락의 원인은 아니다.


장르를 뒤섞은 칵테일 같은 글

프로레슬링은 처음부터 끝까지 단막극이었다. 선한 사람과 악당의 대결은 늘 당일 저녁에 완결됐고, 다음날이면 거의 똑같은 드라마가 반복됐다. 만약 그럴듯한 악당을 만들고 악당의 득세와 몰락의 과정을 장기간에 걸쳐 기획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단막극 구조를 연속극이나 대하드라마 구조로 가져갈 수 있었다면 프로레슬링은 그토록 허무하게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김일이 연출한 프로레슬링 드라마는 기실 실질적 몰락 훨씬 이전에 수명이 다한 구도였다. 뻔한 이야기가 생명력을 이어갈 수 있었던 건 선한 한국 사람이 일본인 악당을 혼내준다는 구도에 기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차원적 민족주의에 기댄, 어쩌면 맹목적인 감정 말이다. 이 대목에서 프로레슬링은 일제시대 연극운동과 비스듬히 조우한다.
말이 길어졌다. 그런데도 아직 원고 매수가 남아 있다. 그렇다면 방법은… 아아, 여기서 몇 가지 결정적인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인가. 자체 제작한 가면이나 날개 대용으로 보자기를 착용하고 놀았던 건 나의 과거사다. 그리고 잡문 쓰기는 분명 즐거운 작업이지만 여러 주제를 정신없이 뒤섞는 것은, 모르는 대목을 은근슬쩍 넘어가려는 얄팍한 술수라는 따위. 이런 얘기도 잡문이니까 할 수 있다. 잡문만세다. (끝)

 


글: 장원재 숭실대 교수·문예창작 j12@saint.ssu.ac.kr

고려대 국문과 졸업, 영국 런던대 골드스미스 칼리지에서 연극학 석사, 동대학 로열헐러웨이 칼리지에서 비교연극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숭실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있으면서 연극 및 공연관련 강의 및 저술작업 외에 월드컵 기간 축구평론가로 활약했다. 프로레슬링과 만화에도 조예가 깊다. 저서 ‘속을 알면 더 재미있는 축구 이야기’ ‘Again 2002’, 역서 ‘셰익스피어와 영상문화’가 있다.

 



[특별부록|가슴으로 글쓰기]


베스트셀러 저자 되기

무한의 네티즌이 독자다


 

은퇴 전까지 책 20권 쓰기와 같은 멋진 계획을 세워본 적이 있는가.
비서, 사무직, 백화점 숍마스터, 영업사원…. 어떤 일에 종사하든 그 일을 성실하게 하면서 얻은 소중한 경험을 글로 옮기자.

요즘은 말 잘하는 사람도 많고, 글 잘 쓰는 사람도 많다. 전문적인 강사가 아닌데도 맛깔스럽게 감동이 묻어나는 말로 귀와 마음을 즐겁게 해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글쓰는 일을 직업으로 가진 것도 아니고 그런 공부를 위해 책상머리에 앉아본 적도 없지만 글로 사람의 가슴을 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막상 내가 해보려면 어려운 일이 바로 글쓰기다. 무슨 말로 시작해야 좋을지도 모르겠고, 어떻게 해야 내 마음을 그대로 표현할 수 있을까 고민만 하다가 포기하기 일쑤다. 책상 위엔 처리해야 할 서류, 만들어야 할 문서, 띄워야 할 공문이 늘 대기하고 있지만 때마다 그것들과 마주치는 일이 두렵다고 토로하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말, 우리 글을 모르는 것도 아닌데 왜 그 일 앞에서만은 한없이 작아지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일까. 다양한 글쓰기 능력이 요구되는 사회 속에서 내 몸에 잘 맞는 옷을 입듯, 이제 글쓰기가 더 이상 특별하거나 전문적인 일이 아닌 자연스러운 내 생활이 되는 방법을 적극적으로 찾아볼 때다.
학교 다닐 때 나는 대학입학을 위해 국·영·수 세 과목에 목숨을 걸고 살았다. 다른 과목을 아무리 잘해도 점수 비중이 높은 국어, 영어, 수학이 든든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어는 상대적으로 ‘우리말’이라는 안도감 때문에 영어나 수학보다 조금 만만하게 보았던 게 사실이다. 공부를 조금 덜해도 웬만큼 성적을 낼 수 있다는.
그러나 사회에 나와 보니 수학의 방정식이나 미적분을 쓸 일은 없어도 우리 글로 뭔가를 써야 할 일은 꾸준히 생겼다. 문학적 소양이 필요한 글이 아니더라도 공문, 서류 같은 수많은 문서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영어가 꼭 필요한 직장에 있다 해도 우리말이나 글로 자유로이 표현할 능력이 없다면 영어실력에도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때때로 학창시절에 국어나 작문을 좀더 진지하게 공부할 걸 하고 후회해 보지만 내가 받은 입시 위주의 교육은 자유로운 표현력을 길러주기보다 점수를 내기 위한 뚜렷한 목표 아래 주어진 일정한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영어나 수학보다 요긴한 국어

배우 출신 감독 로버트 레드퍼드가 감독한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은 일상에서 진한 삶의 감동을 건져 올린 작품이다.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은 흔히 아름다운 자연이 펼쳐지는 수채화 같은 영상을 떠올리지만 내게 더욱 인상적인 장면은 영화 도입부, 아버지가 아들에게 작문을 가르치는 대목이었다.
낚시를 종교처럼 소중하게 생각하는 목사 매클레인은 몬태나주 강가에서 아내와 두 아들과 산다. 그는 어린 아들이 쓴 작문을 조목조목 지적하며 여러 차례 퇴짜를 놓는다. 마음에 들게 써올 때까지 돌려보내는 아버지. 그러나 어린 아들은 힘겨운 빛이 역력했지만 군소리 한마디 안하고 다시 고쳐서 공책을 들고 아버지의 방을 노크한다. 몇 차례 고친 끝에 결국 아버지에게 합격점을 받은 아들이 홀가분한 표정으로 방문을 나서는 장면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아버지의 노력 덕분인지 장성한 두 아들 중 큰아들은 대학에 들어가 문학을 전공하고, 동생은 고향에서 신문기자가 된다.
처음부터 아버지가 아들들을 소위 ‘글쟁이’로 만들겠다는 욕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살아가는 데 글쓰기의 중요함과 소중함을 잘 아는 사람임엔 틀림없다. 글쓰는 능력이 삶을 풍요롭게 만들고 쓸모 있게 만든다는 사실을 일찍이 깨달은 사람이라 하겠다.
이렇게 어릴 때부터 부모에게 적극적으로 글쓰기를 훈련받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하기야 요즘은 학원에서 글쓰기 지도를 받는 아이들이 많지만 그조차 대학입시를 염두에 둔 근시안적 교육에 불과하다.
제대로 된 글쓰기는 절대 즉흥적일 수 없다. 다시 말하면 글은 ‘생각’이나 ‘사고’가 선행돼야 하는 산물이라는 말이다. 음악듣기나 영화보기, 더 나아가 책읽기까지도 아무 생각 없이 그냥 거기에 몰입할 수 있지만 ‘글쓰기’는 생각을 거치지 않고는 도저히 해낼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생각을 거듭하면서 자기 자신을 바로잡는 인간교육이라는 면에서 글쓰기는 충분히 빛을 발한다. 자기 반성은 물론이고, 사물을 꿰뚫어보는 힘을 기를 수 있으며, 예민한 판단력으로 전체와 부분을 아우르는 능력이 생긴다.


그렇다고 글쓰기를 지나치게 어려운 일로 생각해 처음부터 지레 겁먹을 일은 없다. 우리 교육이 오랜 시간 동안 잘못해왔던 일은 글쓰기를 지나치게 ‘특별한 행위’로 포장해 왔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흔히 글은 특별한 사람만 쓸 수 있는 것, 전문적인 공부를 한 사람만 쓸 수 있는 것, 특별한 문학적 소양을 필요로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우리말과 글을 쓰며 살아왔는데도 짧은 편지 한 장 쓰는 일조차 버거워하는 사람이 많다.
어릴 때부터 자기 생활에 대한 ‘글쓰기’가 아닌 ‘글짓기 지도’를 받아 문학작품을 모방하거나 어쭙잖게 말장난에 빠진 글이 좋은 글이라는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 것도 문제다.
좋은 글은 누구나 읽어서 알기 쉬운 말로 쓴 글이다. 막 글을 깨친 어린이부터 글을 읽으실 줄 아는 노인들까지 이 땅에서 태어나 우리말을 할 줄 알고 우리 글을 쓸 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삶과 밀접해야 한다. 아무리 화려한 수사와 아름다운 표현이 많은 글일지라도 자신의 생활이나 삶과 동떨어진 글은 관념에 머무르기 쉽다. 꾸며 쓰지 않고 느낌대로 쓴 글, 정직하고 솔직한 글이 좋은 글이다. 그런 글이 읽는 사람에게 감동을 주며 글쓴이의 격을 드러낸다.
미국 대학입시를 준비하는 학생들에게 가장 힘든 관문이 에세이 쓰기라고 한다. 국내 대학에 지원하는 학생들도 에세이에 해당되는 자기소개서를 쓰는 데 어려움을 겪기는 마찬가지다. 에세이는 응시자의 원서 가운데 유일하게 지원자의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내 보일 수 있는 서류로, 성적에는 나타나지 않는 지원자의 인격이나 가치관이 대학이 원하는 인재상과 맞아떨어지는지 판단하는 도구다. 미국 대학의 경우 A4용지 1쪽 분량의 에세이를 요구한다. 대학에 따라서는 에세이를 3편 이상 써야 하는 곳도 있다.
에세이는 무엇보다 글쓴이를 얼마만큼 잘 드러내주느냐가 관건이다. 그러니까 에세이는 진솔하게 자신을 드러냈을 때 가장 좋은 평가를 받는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어떤 경험으로 자신이 인간적으로 성숙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효과적이다. 어떻게 쓸 것인가는 글쓰기 연습을 통해 훈련할 수 있지만, 무엇을 쓸 것인가는 경험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내 체험이 책이 된다

이제 좋은 글을 쓰고 싶다면 자신의 생활, 자신의 경험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요즘 서점에 나가면 보통 사람들의 경험이 고스란히 책이 되어 나온 것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전문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닌데도 오랜 시간 한 분야에 집중한 덕분에 소중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가 책으로 펴낸 경우다. 그들의 글은 꾸밈이 없고 오로지 자신이 몸으로, 혹은 손으로 해왔던 일에 대한 사랑과 경륜을 보여준다.
한국 최고의 마이스터라고 할 수 있는 기술 ‘명장’에 오른 김규환씨는 대우종합기계에 사환으로 들어가 마당 쓸고 물 나르며 회사생활을 시작한 사람이다. 선배들을 위해 기계 워밍업을 하느라 새벽 5시에 출근해야 했고, 정밀기계 분야의 최고가 되기 위해 공장 바닥에 모포까지 깔고 자면서까지 연구했던 이 사람이 펴낸 책 ‘어머니 저는 해냈어요’는 전문적인 자기 경험의 소중함을 잘 드러내준 책이다.
또 자기 분야의 일이 아니라도 어떤 일을 애정을 가지고 배워서 그 경험을 자기 것으로 만든 사람들이 있는데, 바로 개그맨 전유성과 탤런트 강남길을 들 수 있다. 전유성은 컴퓨터 공부에 매달려 ‘컴퓨터, 일주일만 하면 전유성만큼 한다’라는 컴퓨터 책을 펴냈다. 그 무렵, 탤런트 강남길은 자판도 못치는 컴맹이었다고 한다. 강남길은 전유성에게 선물받은 책으로 컴퓨터를 열심히 공부했다. 그렇게 해서 케이블TV에서 컴퓨터 프로그램을 진행하기 시작하더니 컴퓨터를 배운 지 3년 만에 강남길은 ‘할 수 있다, 컴퓨터’라는 책을 써서 베스트셀러의 저자가 됐다.

또 농협의 조관일 상무는 지난해말 ‘고객 죽이기’라는 책을 펴냈는데, 그의 15번째 저작인 이 책은 어떻게 하면 손님에게 친절할 수 있을까를 알려주는 실용서다. 그의 첫 번째 저작은 1980년에 낸 ‘고객응대’. 농협 창구에서 일하면서 손님들을 직접 대했던 경험과 틈틈이 모아두었던 자료를 묶어 책으로 낸 것이다.


조씨는 직장에서는 업무에 충실하고 집에 들어가 저녁 9시 뉴스 시작과 함께 펜을 들었다고 한다. 책을 잘 쓰는 비결에 대해서는 “신문과 잡지, 책 등을 읽으면서 관심 있는 분야의 내용이 나오면 무조건 가위로 오려 스크랩하고, 스크랩이 두툼해지면 바로 집필에 들어간다”고 말하고 있다. 조씨는 퇴직할 때까지 20권의 책을 낼 계획이라고 한다. 이미 올해 ‘조관일의 부하죽이기’ ‘나이가 경쟁력이 되게 하라’ ‘여자의 처세술은 따로 있다’를 펴내 20권 목표는 쉽게 달성할 듯하다.
가정 살림을 사업화하여 엄청난 부자가 된 미국의 마사 스튜어트를 보자. 평범한 주부였던 그는 ‘집에서 만든 요리처럼 만들어드립니다!’라는 마케팅 전략으로 주문요리 전문회사를 차려 성공했다. 그후 베스트셀러 요리책을 출간했고 이어 리빙잡지 창간, TV쇼와 라디오 출연 등을 통해 일약 명사가 됐다. 이처럼 자신이 늘 하던 일,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일을 통해서 저자가 되고 나아가 사업가로 거듭날 수 있다.
이렇게 자신의 경험은 충분히 책이 된다. 비서, 사무직, 백화점 숍마스터, 영업사원… 어떤 일에 종사하든 그 일을 성실하게 하면서 얻은 소중한 경험을 그대로 글로 쓰면 되는 것이다. 거기에 자신의 경험과 관련된 분야의 서적, 신문기사를 틈틈이 읽어두고 모아두는 부지런함이 있다면 더욱 알찬 책을 만드는 밑거름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제 와서 갑자기 글쓰기를 따로 배울 수도 없는 노릇이다. 어디 성인을 위한 글쓰기 교실이 없나 하고 기웃거릴 필요도 없다. 가장 실천하기 쉬운 방법은 생활 속에서 하찮은 글쓰기를 계속하는 것이다. 일기를 쓰는 것이 가장 좋은데, 단순히 소녀적 감수성으로 채워넣는 게 아니라 자신의 생활을 기록하면 된다. 조금씩 하다보면 글쓰기 능력을 키울 수 있고, 글쓰기 감각도 되살아난다.
인터넷의 발달로 요즘은 신춘문예나 문예지 추천 등 전통적인 작가 등용문의 의미가 많이 퇴색한 것이 사실이다. 인터넷을 통한 글쓰기가 무분별한 통신용어 사용으로 오염되고 익명성에 기댄 언어 폭력 같은 부작용을 빚은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보통 사람들에게 글쓰기를 조금 더 편안한 일로 받아들이게 한 점에서는 그 공이 크다.
게시판에 의견을 올리는 무형식의 짧은 글에서부터 긴 호흡의 본격 창작물에 이르기까지 인터넷은 남 앞에 내 글을 드러내는 일을 자유롭게, 무한대로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프로 작가가 아니라도, 책 한 권 낸 적이 없어도, 내 글을 읽어주는 독자(네티즌)가 많다는 것은 글쓰기에 한층 더 힘을 실어준다. 더구나 그 글에 대한 느낌과 의견이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상황은 글쓰기를 시작한 ‘작가’를 게으르게 놔두지 않는다.


사이버 공간은 훌륭한 원고지

인터넷에 오른 글이 네티즌들의 큰 호응에 힘입어 오프라인에서 책으로 엮어지는 일도 많아졌다. 얼마 전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던 드라마 ‘옥탑방 고양이’의 원작 역시 무명의 네티즌이 쓴 동거 체험기다. 이것이 인터넷에서 인기를 얻고 책으로 출간된 후 드라마로 만들어졌다. 영화 ‘엽기적인 그녀’ ‘동갑내기 과외하기’ 또한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저자들의 인터넷 소설이 원작이다.
이렇듯 사이버 공간은 훌륭한 원고지다. 포털 사이트마다 1인 미디어라고 할 수 있는 ‘블로그’를 개설하고 있는데, 다음커뮤니케이션만 하더라도 ‘칼럼’이라는 콘텐츠를 통해 수많은 네티즌들이 다양한 소재나 주제로 자격에 구애없이 맘껏 글을 쓴다. 글을 올리는 특별한 도구를 알지 못해도 좋다. 사이트마다 글을 올릴 수 있는 방법이 이미 준비되어 있고 타이핑만 할 줄 알면 얼마든지 ‘작가’가 될 수 있다.
사이버 공간에서는 쓰다가 싫으면 안 쓸 자유도 있고, 바쁜 일이 있으면 한동안 안 쓰다가도 다시 쓸 자유도 있다. 내 글을 읽고자 하는 독자가 늘어나다가 또 줄어들 수도 있다. 그러다 또 새로운 독자의 발걸음이 이어지는 곳이 사이버 공간이다. 익명성이 보장되니 부끄러울 일도 없다. 사이버 공간은 글쓰기에 두려움을 가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한층 용기를 낼 수 있는 곳이다. 재미있고 흥미로운 글쓰기의 훈련장인 것이다.
보통의 상사들은 부하직원이 어떤 일을 문서화해서 보여주는 것을 좋아한다. 또 사람들은 서면으로 만들어진 계약서를 구두약속보다 더 신뢰한다. 사람들이 말보다는 글을 더 신뢰하는 이유는 거기에 ‘심사숙고’가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술은 마실수록 늘고, 잠은 잘수록 늘고, 글쓰기 역시 쓸수록 는다. 어떤 방법으로든 많이 써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선 읽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고 일상생활에 애정을 갖는 게 중요하다. 내 일을 사랑하고 내 일에 관심을 가지다 보면 쓸거리가 생기고 쓸 방법이 생긴다. 글쓰기에 자신감이 생긴다는 것은 자기 삶에 자신감이 생기는 일이기도 하다. 자기 표현 능력이 좋아지면 더욱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사람이 된다. 소극적인 성격일수록 자기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방법으로 글쓰기만한 만병통치약도 없다. (끝)

 


글: 전미옥 전미옥컨설팅 대표 sabopr@hanmail.net

한국사보협회 부회장이며 협회지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의 편집장이다. 사보전문커뮤니티 ‘사보PR닷컴’을 운영하며 각종 강연활동과 여러 매체에 커리어우먼의 성공전략에 대한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저서로 ‘사사쟁이들의 社史로운 이야기’(공저), ‘성공하는 여성의 자기경영노트’가 있다. www.jeonmiok.com



[특별부록|가슴으로 글쓰기]


바른 글이 아름답다

감성 전에 문법, 취향보다 논리

바른 글은 아름다울 수 있어도 바르지 않은 글은 결코 아름다울 수 없다. 바른 글이란 구성이 문법적으로 바르고, 쓰인 어휘와 표현이 바르고, 글의 전개가 논리적으로 바른 글이다.

사람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변함이 없다. 무엇에서나 우리는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얼굴이 아름답고, 옷이 아름답고, 몸매가 아름답고, 집이 아름답고…. 물론 어떤 상태가 아름다움인지는 누구도 완전하게 정의할 수 없지만 아름다움은 우리가 분명히 느낄 수 있고, 그것이 우리의 마음을 기쁘고 즐겁게 만들어 주는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우리는 글에서도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아름다운 글, 아름다운 표현을 끊임없이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난데없이 ‘바른 글이 아름답다’라고 선언했으니 어떤 사람은 ‘글을 바르게 쓰기만 하면 아름답다는 말인가?’ 하고 생각하여 고개를 갸웃거릴지 모르겠다. 미리 말해 두거니와 ‘바른 글이 반드시 아름답다’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글은 반드시 바르다’는 말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렇게 쓴 것이다. 일종의 환위법을 구사한 것인데 약간의 모순이 있더라도 양해해 주기 바란다.
60∼70년대 개발 독재 시절에 도시계획을 하던 공무원들은 으레 근대 도시는 평평한 땅에 바둑판처럼 길을 곧게 내어 건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서울에 있던 야산은 모조리 뭉개어 평평하게 만든 다음에 곧은 길을 내어 시가지를 건설하기에 안간힘을 썼다. 지금 집 값이 천정부지로 올라가고 있는 강남 지역이 그렇게 해서 만들어졌다.
그런데 아무리 곧은 길을 내어 도시를 건설하려 해도 서울은 군데군데 야산이 널려 있고, 사방을 커다란 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어서 한계가 있었다. 그러다 보니 서울은 빙글빙글 도는 곡선 길과 쪽 곧은 직선 길이 아무렇게나 난 어수선한 도시로 개발되고 말았다. 만일 당시 도시 계획을 세웠던 사람들이 서울의 지형을 이용하여 굽은 길과 곧은 길을 잘 조화시키려는 시도를 했다면 지금보다 훨씬 아름다운 서울을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직선과 곡선

우리 것을 끔찍히 사랑했던 고(故) 최순우 선생이 쓴 ‘우리의 미술’이란 글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하늘로 향해 두 귀를 사뿐히 들었지만 뽐냄이 없는 의젓한 추녀의 곡선, 아낙네의 저고리 도련과 붕어밸 지은 긴소매의 맵시 있는 선, 외씨버선 볼의 동탁한 매무새, 초가 지붕과 기와 지붕들이 서로 이마를 마주 비비고 모여선 곳, 여기엔 시새움도 허세도 가식도 그리고 존대도 발을 붙이지 않는다.”

한국 건축의 곡선미를 칭찬한 대목이다. 하늘로 치솟는 추녀의 곡선, 붕어밸처럼 아래로 볼록한 저고리의 도련과 소매의 곡선 등의 아름다움을 최순우 선생은 담담한 멋으로 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직선은 아름답지 않다는 말일까?
굽이치듯 달리는 다랑논들의 곡선을 보다가 바둑판처럼 펼쳐진 호남 평야의 직선을 보면 거기에서는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을까? 한국의 기와 지붕 추녀의 아름다움에 반한 사람은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의 처마 직선에 아무런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추녀의 곡선이 갖는 미와 서양 건축의 직선미는 각기 그 자체의 미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어떤 특정한 형태, 특정한 가치에서만 미를 찾지 않는다. 아름다움은 그것이 갖는 기본적인 상황에 가장 적절히 맞게 모든 것이 갖추어진 상태에서 느껴지는 것이다. 추녀의 곡선이 아름답다고 해서 독립기념관의 콘크리트 추녀가 아름답다고 할 사람은 없을 것이며, 파르테논 신전의 직선이 아름답다고 해서 성냥갑처럼 만들어 세운 아파트의 직선이 아름답다고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모든 사물은 그것 자체가 가장 아름다울 수 있는 조건이 있고, 그 조건은 사물마다 다르다. 글을 쓰는 경우에도 글이 쓰이는 상황과 표현하려는 대상에 따라서 아름다움의 조건이 달라질 수 있다. 따라서 아름다운 글을 일률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아름답게 하는 조건은 자신에게 있다

아름다운 글로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아래의 글을 읽어 보자.

“이지러는 졌으나 보름을 갓 지난 달은 부드러운 빛을 흐뭇이 흘리고 있다. 대화까지는 팔십 리의 밤길, 고개를 둘이나 넘고 개울을 하나 건너고 벌판과 산길을 걸어야 된다. 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붉은 대궁이 향기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길이 좁은 까닭에, 세 사람은 나귀를 타고 외줄로 늘어섰다. 방울소리가 시원스럽게 딸랑딸랑 메밀밭께로 흘러간다.”

익히 읽던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의 한 대목이다. 이 대목이 그렇게 아름답게 여겨지는 이유는 이 글이 속한 상황 속에 매우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만일 누가 이 글을 그대로 자기의 글에 옮겨 놓는다고 해 보자. 여기에서처럼 감동을 일으킬 수 있겠는가? 허생원이 품고 있는 아름다운 추억과 강원도의 조용한 산길, 자정이 넘은 무렵에 산자락에 내리비치는 달빛, 달빛에 반사되어 하얗게 두드러져 보이는 메밀꽃, 그곳을 나귀를 타고 지나가는 장사꾼 세 사나이가 어우러져서 우리에게 진한 아름다움을 선사하는 것이 아닐까? 무엇보다 이 글을 우리가 아름답게 느끼는 데 걸림돌이 되는 것이 없다는 점도 우리가 이 글에서 아름다움을 오래오래 느끼게 되는 이유다.
나는 이 글을 읽을 때면 조그만 불만을 느낀다. 글의 아름다움을 온전히 만끽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 내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대화까지는 팔십 리의 밤길”에서 관형격 조사 ‘의’를 쓴 것이 마음에 걸린다. 이 ‘의’는 주변의 다른 어투와 잘 어울리지 않는다. 만일 ‘대화까지는 팔십 리나 되는 밤길’이라고 했더라면 이 글이 더욱 아름다워지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밖에 이 글을 아름답지 않게 만드는 요소는 없다. 그래서 이 글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것이리라.


“있으나마나한 존재이면서 있었고”

글이 반드시 심미적으로 아름다워야 하는 것은 아니다. 논설문이라면 논증이 정확하고 합리적이어야 할 것이고, 설명문이라면 사실적이고 쉬워야 할 것이다. 여기서 아름다움이란 글의 목적에 맞추어 가장 적절히 적힌 상태를 가리킨다. 다시 말하면 가장 논리적으로 잘 쓴 논설문이 아름다운 글이고, 가장 자세하고 쉽고 정확하게 풀이한 설명문이 아름다운 글이다. 이런 관점에서 ‘바름’이 ‘아름다움’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검토해 보자.
아래 글은 ‘동인문학상’을 받은 성석제의 소설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의 일부이다. 이 글에서 성석제는 상반된 의미를 대비시킴으로써 독자에게 강한 이미지를 심는 기법을 활용하여 재미를 보았는데 아래 글이 그 예가 되는 것들이다.

“그러나 황만근은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모든 사람이 그의 부재를 알게 되었다. 그렇지만 누구도 적극적으로 황만근을 찾아 나서려 하지 않았다. 그는 있으나마나한 존재이면서 있었고,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이면서 지금처럼 없기도 했다. 동네 사람들은 그를 바보라고 했다.”

“황만근의 어머니와 아들, 조손은 입맛이 까다로워 비린 반찬이 없으면 먹지를 않는가 하면 비린 반찬이 있으면 밥상머리에서 돌아앉았다.”

앞의 첫 예문에 적힌 표현 “있으나마나한 존재이면서 있었고,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이면서 지금처럼 없기도 했다”는 황만근의 존재 가치를 표현하는 어법으로서 매우 적절해 보인다. 그래서 독자에게 멋진 표현으로 인상에 남을 만하다.
그러나 같은 어법이지만 둘째 예문은 그렇지 못하다. 그것은 바른 글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글의 주어는 ‘황만근의 어머니와 아들, 곧 조손’이다. 그러니 “비린 반찬이 없으면 먹지를 않는가 하면 비린 반찬이 있으면 밥상머리에서 돌아앉았다”라는 상반된 행위의 주체가 ‘할머니와 손자 곧, 조손’이 되는 셈이다. 어떻게 같은 주체가 상반된 행위를 할 수 있겠는가? 작가는 ‘조손’을 분리하여 ‘조’는 비린 반찬이 없으면 먹지를 않고, ‘손’은 비린 반찬이 있으면 밥상머리에서 돌아앉았다는 표현을 하고 싶었겠지만 독자는 그렇게 이해해 주지 않을 것이다. ‘조손’의 각 글자를 독립시켜 주어로 삼는 것은 문법적으로 바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첫째 예문은 아름다운 글이라고 할 수 있지만 둘째 예문은 아름답다고 할 수 없다. 둘째 예문을 아름답지 못하게 만든 요소가 ‘문법에 맞지 않음’이라면 바름이 글의 아름다움에 분명히 큰 영향을 끼친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바른 글이 되어야 아름다운 글을 논할 수 있다는 것이 이런 이유 때문이다.


멋진 어휘, 고상한 취향보다 중요한 것

그렇다면 바른 글과 아름다운 글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멋진 어휘를 구사하고, 아름다운 문구를 동원하면 아름다운 글이 될까? 다시 말하면 바르지 않은 글이 아름다울 수 있는가? 이에 관한 해답을 아래의 글에서 찾아보자. 아래 글은 최인훈의 출세작이라고 할 수 있는 ‘광장’의 일부이다. 일견 이지적이고 철학적인 듯이 보이는 이 글에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관조(觀照)에서 오는 회의(懷疑)는 그래도 뼈아픈 결단까지는 요구하지 않는다. 관조란 혹독히 반성하면 오히려 달콤하고 새로 발견한 세계를 놀이개 삼아 다루면서 철학적 회의의 가벼운 베일을 씌워보는 셈이다. 허지만 다복한 아가씨가 불란서 인형과 재롱 부리는 것보다는, 약간이나마 덜 유희적인 것은 인정해 주지 않으면 자기가 너무 불쌍하다고 늘 생각했다.”

“헛궁리에서 오는 어수선함은 그래도 뼈아픈 어떤 걸음을 내딛기까지는 다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달콤하고 새로 알게 된 곡절을 노리개 삼아 다루면서, 쉬운 일을 어렵게 짠, 말의 비단 보자기를 씌워 보는 셈이다. 하지만 복도 많은 아가씨가 인형과 재롱 부리는 것보다는 조금이나마 덜 소꿉장난임을 몰라주면 자기가 너무 불쌍하다.”
첫째 글은 1961년에 소설집으로 발간했던 원본에서 따온 것이고, 둘째 글은 작가가 개작하여 재간행한 것에서 따온 것이다. 아마 앞의 글이 작가에게도 썩 마땅치 않게 여겨져서 뒤의 글로 바꾼 것 같은데 첫째 글이나 둘째 글이나 바른 글의 관점에서 보면 조금도 다르지 않다.
“관조란 철학적 회의의 가벼운 베일을 씌워보는 셈이다”나 “그것은 말의 비단 보자기를 씌워 보는 셈이다”는 작가의 독특한 어법으로서 여타 한국인에게는 수수께끼 같은 표현이다. 이를 바른 표현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 “인형과 재롱부리는 것보다”는 “인형으로 재롱부리는 것보다”의 잘못일 것이다. 그리고 “인형과 재롱부리는 것보다 조금이나마 덜 소꿉장난임을 몰라주면”이란 표현에서는 입이 딱 벌어지고 만다. 작가는 그가 말했듯이 ‘쉬운 일을 어렵게 짜는’ 노력을 했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어법에 맞지 않는 문장이 대량 생산된 것 같다.
아래의 글은 여성의 섬세함으로 감성을 자극한 글인데 언뜻 읽기에는 좋아 보이지만 결코 바른 글이라고 할 수 없다. 바른 글이 아니기 때문에 이 글이 아름답다고 적극적으로 옹호하기 어려워지는 것이다. 이주향의 수필집 ‘내 가슴에 달이 들어’의 한 꼭지인 ‘존재는 흔적을 남긴다’에 있는 글을 소개하겠다.

“아프니까 일상이 보입니다. 잃어버렸던 일상이 제 빛깔을 찾아갑니다. 사랑할 존재가 많은데도 자기의 사랑을 받기엔 뭔가 부족하다며 아무 존재도 사랑하지 못해 늘 굳은 얼굴을 하고 사는 사람에겐 그렇게 사는 자체가 벌이듯이 일상이 고마운 건 그 자체가 복입니다.”

‘일상이 고마운 건 그 자체가 복입니다’라는 표현은 누구에게 해당되는 말일까? 늘 굳은 얼굴을 하고 사는 사람일까? 아픈 사람일까? 아니면 늘 고마운 마음을 품고 사는 모든 사람일까? 문장 구성을 바르게 하지 못한 탓에 이런 결과가 나타났다. 조금만 조심했다면 ‘무엇이 누구에게 어떻듯이 무엇이 누구에게 어떻다’라는 문장 흐름을 놓치지 않았을 것이다. 이 글은 ‘일상이 고마운 건 그 자체가 복입니다’라고 하는 대신에 ‘아픈 사람에겐 일상이 고맙게 여겨지는 것 자체가 복입니다’라고 하였다면 바른 문장이 될 수 있었다.
위의 두 예에서 보듯이 아무리 독특한 어법을 개발하고 고상한 어휘를 동원하고 감성을 자극하는 취향을 뽐내려 하더라도 글이 바르지 않으면 아름다운 글이 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곧아야 할 데 곧고, 굽어야 할 때 굽어야

그렇다면 어떤 글을 바른 글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것은 곧은 길이 바른가 굽은 길이 바른가를 논하는 것처럼 정답이 있는 것이 아니다. 곧아야 할 데서 곧고 굽어야 할 곳에서 굽은 길이 아름다운 길이듯이, 한국어 어법과 글의 흐름에 맞추어서, 사용해야 할 어휘를 사용해야 할 곳에서 자연스럽게 사용한 글이 바른 글이다.
한옥은 들보나 서까래 등 가구물(架構物)을 드러내는 것이 멋이라면, 양옥은 철골이나 철근을 속에 감추고 외부를 치장하는 것이 멋이다. 서양식 멋에 탐닉한 나머지 한옥의 서까래를 회칠해 버린다면 한옥의 건축 법칙을 위반한 것이 되어 바른 건축이 될 수 없다. 바른 글이란 글이 처한 상황에 맞게 말의 결을 따라서 자연스럽게 구성한 글이다. 바른 글의 조건을 세 가지 제시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마치려 한다.
첫째, 문법에 맞아야 바른 글이 될 수 있다. 문법에 맞는 글이 되려면 주어와 서술어, 목적어와 보어, 부사어와 관형어 같은 문장 성분이 적절히 배치되어야 한다. 물론 주어로 쓰인 어휘, 서술어로 쓰인 어휘 등이 정확하고 적절해야 한다. 아래 글은 문법적으로 바르지 못한 글이다.

“공무에 짓눌려 생각조차 못했던, 그토록 좋아했던 승마는 일진이 나빴는지 나가던 날로 다리를 삐어 물리 치료를 받았다.”(최일남의 ‘풍경소리’에서)

위의 문장을 주요 성분만으로 요약하면 ‘승마는 (일진이 나빴는지 나가던 날로 다리를 삐어) 물리 치료를 받았다’가 된다. 주어와 서술어가 서로 어울리지 않으니 둘 가운데 하나를 바꿔야 한다.

둘째, 어휘를 정확하게 사용해야 바른 글이 된다. 문법에는 맞지만 어휘의 사용법이 틀리면 의미가 전달되지 않거나 엉뚱한 의미를 나타내게 되기 때문이다. 아래와 같은 글을 바른 글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미장원은 사건이 나던 날 이른 아침 서둘러 문을 열었다. 그 전날 내일 아침 일찍 미용하러 오겠다고 주문한 손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마르시아스 심의 ‘미’에서)

‘주문’은 상대에게 무엇을 해 달라고 요청하는 형식을 나타내는 낱말이지 자기가 무슨 일을 하겠다고 말하는 형식을 나타내지 않는다. ‘미용해 달라고’ 주문할 수는 있지만, ‘미용하러 오겠다고’ 주문할 수는 없다.

“한없이 퍼진 허허 벌판이었다. 현은 잃어버린 총을 찾으려고 애를 태웠다. 다리가 땅에 박혀 떨어지질 않았다.”(선우휘의 ‘불꽃’에서)

벌판이 아무리 드넓게 펼쳐져 있다고 해도 그것을 ‘퍼졌다’라고 표현하지 않는다. ‘퍼지다’는 소리, 기운, 소문 따위가 멀리 미침을 나타낼 때에 쓰는 낱말이다. 땅은 아무리 넓어도 퍼질 수는 없다. ‘다리가 땅에 박혀’는 마치 주인공이 진흙밭에 빠져 있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실제 상황은 주인공이 빨리 그곳을 빠져나가려 해도 발이 움직이지 않을 뿐이다. 또한, 땅에 다리가 박혔으면 빠지지 않는다고 해야지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떨어지다’의 의미를 오해한 탓이리라. ‘다리가 땅에 박혀’를 ‘발이 땅에 붙어’로 바꾸면 틀린 글을 면할 수 있다. 이처럼 어휘를 적절하게 사용하지 않으면 바른 글이 되지 않는다.


독자를 외면한 논리의 비약

셋째, 논리적이어야 바른 글이 된다. 문장 안에서 각 구절이 논리적으로 연결되어야 하고, 문장과 문장이 논리적으로 전개되어야 한다. 글의 앞뒤가 맞지 않으면 바른 글이라고 할 수 없다. 아래 두 문장을 검토해 보자.

“동생은 남매를 낳을 때까지 시부모와 큰동서 밑에서 고된 시집살이를 하다가 큰형이 혼자서 물려받은 시골 땅값이 오르는 바람에 겨우 작은 집을 하나 얻어 가지고 세간을 날 수가 있었다. 동생의 남편은 착하기만 하고 경제적으로는 무능했기 때문에 동생은 그 집을 유일한 남편 덕으로 알고 여간 대견해한 게 아니었다.”(박완서의 ‘그리움을 위하여’에서)

위 문장에는 두 번의 논리 비약이 있다. ‘큰형이 혼자서 물려받은 시골 땅값이 오른 사실’과 ‘동생이 작은 집을 하나 얻어 세간을 난 사실’ 사이에는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없다. 또, ‘동생의 남편이 착하기만 하고 경제적으로 무능한 것’과 ‘동생이 그 집을 유일한 남편의 덕으로 알고 대견해한 것’ 사이에도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없다.
그런데 작가는 이를 직접 인과관계가 있는 것처럼 문장을 구성했다. 이런 글은 바른 글이라고 할 수 없다. 작가는 자신만 아는 사실을 타인도 알 것으로 믿고 논리의 비약을 감행하였을 것이다. 심정적으로는 작가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지만 글에서는 그런 태도가 용납되지 않는다. ‘큰형’이 ‘동생’의 큰형이 아니고 ‘동생’ 남편 곧 제부(弟夫)의 큰형임도 이 문장을 틀린 문장으로 규정하게 만들고 있다.
어떤 이는 연결 어미를 부정확하게 씀으로써 본의 아니게 터무니없는 논리를 펼치게 되는 경우도 있다. 특히 종속적으로 연결하는 어미를 쓸 때에 앞 절과 뒤 절이 이유, 근거, 원인, 목적, 전제 등 어떤 종속적 관계에 따라 연결될 것인지 살피고 그에 맞게 정확한 연결 어미를 사용해야 하는데 감각적으로 아무 것이나 사용함으로써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조선 왕조에서는 왕이 솔선 검약함으로써 국민에게 수범하는 것을 왕도정치의 근본으로 삼았거니와, 따라서 복식에 있어서도 그 평상복은 사대부의 평상복과 그렇게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유희경의 ‘한국 복식사 연구’에서)

위의 글에서 ‘-거니와’는 앞의 사실을 인정하되 그와 다른 사실이 있음을 나타내기 위해서 쓰이는 종속적 연결 어미이다. ‘-는데’의 기능과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위 글의 종속절은 주절의 근거를 제시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 이런 경우에는 ‘-거니와’를 쓰지 않고 ‘-으므로’를 쓰는 것이 옳다. 어미 ‘-으므로’를 쓰면 접속 부사 ‘따라서’를 쓸 필요가 없어진다. 이처럼 어미를 정확하게 쓰지 않으면 논리적으로 앞뒤가 어긋나 바른 글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바른 글이 아름답다. 다시 이를 고쳐 말한다면 바른 글은 아름다울 수 있어도 바르지 않은 글은 결코 아름다울 수 없다. 바른 글이란 구성이 문법적으로 바르고, 쓰인 어휘와 표현이 바르고, 글의 전개가 논리적으로 바른 글이다. 바르고 바르지 않은 기준은 일관되게 정해진 것이 아니고 각 문장이 처한 상황과 담고 있는 의미 내용에 따라서 구체적으로 결정된다.
바른 글이 아름다운 글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덕목은 수없이 많다. 이런 덕목에 관해서는 이 책에서 다른 필자들이 논하였을 줄 안다. 그런 덕목을 배우고 익히기 전에 먼저 바른 글을 적도록 힘쓰자. 바른 글을 적을 수 있는 사람만 아름다운 글을 쓸 자격이 있고, 아름답게 쓰는 노력을 할 자격이 있다. 그래서 바른 글만이 아름다운 글이 될 수 있다고 감히 말하는 것이다. (끝)

 


글: 남영신 국어문화운동본부 회장 nopl@barunmal.com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후 우리말 살리기 운동에 뛰어들어 30여년간 외길을 걸었다. 현재 국어문화운동본부 회장, 한국문장사협회 고문, 국어심의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우리말 분류대사전’ ‘국어용례사전’ ‘국어사전’ ‘나의 한국어 바로 쓰기 노트’ ‘국어천년의 실패와 성공’ ‘문장 비평’ 등이 있다. 

 

 



[특별부록|가슴으로 글쓰기]


많이 읽고 제대로 쓰기


책사냥꾼은 책을 사서 읽고 쓴다

 

당신이 책벌레든 책사냥꾼이든, 열독가든 수집가든, 독서가든 장서가든 책읽기는 글쓰기의 출발점이다.

“작가가 되고 싶다면 무엇보다 두 가지 일을 반드시 해야 한다. 많이 읽고 많이 쓰는 것이다. 이 두 가지를 슬쩍 피해갈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지름길도 없다.”
얼마 전 ‘전미(全美)도서상’ 평생공로상을 받은 미국 작가 스티븐 킹이 ‘유혹하는 글쓰기’(원제 On Writing, 김영사)에서 한 말이다. 스티븐 킹은 지난 30년 동안 ‘캐리’ ‘미저리’ ‘샤이닝’ 등 발표하는 소설마다 베스트셀러로 만든 출판계의 ‘미다스의 손’. 그가 “많은 소설책을 팔아먹은 사람으로서 글쓰기에 대해 ‘뭔가’ 할 말이 있다”며 쓴 책이 ‘유혹하는 글쓰기’다. 싸구려 추리소설이나 쓰는 대중작가가 무슨 ‘창작론’이냐 싶어 실눈 뜨고 보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의 적나라한 글쓰기 이야기를 듣다 보면 머리를 끄덕이게 되는 대목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다음은 ‘쿡’ 하고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읽은 대목이다.

“책을 별로 안 읽는(더러는 전혀 안 읽는) 사람들이 글을 쓰겠다면서 남들이 자기 글을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 터무니없는 일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사람을 많이 보았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작가가 되고 싶지만 ‘독서할 시간이 없다’고 말할 때마다 꼬박꼬박 5센트씩 모았다면 지금쯤 맛있는 스테이크를 즐길 수 있었을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하여 좀더 솔직히 말해도 될까? 책을 읽을 시간이 없는 사람은 글을 쓸 시간도 없는 사람이다.”

스티븐 킹은 심지어 “종종 좋은 책보다 나쁜 책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운다”고 말했다. ‘나도 이것보다는 잘 쓰겠다. 아니, 지금도 이것보다는 훨씬 낫지!’라는 생각이 풋내기 작가에게 얼마나 큰 용기를 주는지 너무나 잘 알기에 할 수 있는 소리다. 그가 말하는 독서의 중요성도 속이 시원할 만큼 실용적이다.

“꾸준히 책을 읽으면 언젠가는 자의식을 느끼지 않으면서 열심히 글을 쓸 수 있는 어떤 지점에 (혹은 마음가짐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이미 남들이 써먹은 것은 무엇이고 아직 쓰지 않은 것은 무엇인지, 진부한 것은 무엇이고 새로운 것은 무엇인지, 여전히 효과적인 것은 무엇이고 지면에서 죽어가는(혹은 죽어버린) 것은 무엇인지 등등에 대하여 점점 더 많은 것들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책을 많이 읽으면 읽을수록 여러분이 펜이나 워드프로세서를 가지고 쓸데없이 바보짓을 할 가능성도 점점 줄어드는 것이다.”
책사냥꾼들의 사냥일지
2년 전 다치바나 다카시가 쓴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청어람미디어)가 화제가 됐다. 그의 독서론 제1 명제가 ‘책을 사는 데 돈을 아끼지 말라’다. 저널리스트인 다치바나는 한 사람을 취재하기 위해 대담료보다 더 많은 책을 사보며, 한 권의 책을 펴낼 때마다 500여 권의 관련서적을 읽고, 급기야 넘쳐나는 책의 분량과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아예 3층짜리 서재(고양이 빌딩)를 짓는 화려한 지적 편력을 갖고 있다. 이런 지적 욕구에 대해 그는 책을 쓰고 싶은 욕구가 아니라 ‘어떻게 해서든 알고 싶다’ ‘좀더 자세히 알고 싶다’는 욕구라고 설명했지만, 엄청난 다독(多讀)이 ‘다작(多作)’으로 연결된 것은 당연하다. 그는 읽으면서 쓰고, 쓰면서 읽었다.
일본의 저명한 한학자 오야나기 시게타(1870~1940)의 생활신조는 ‘책을 사서 읽고 쓴다’였다. 즉 책을 구입하면 반드시 읽고, 읽고 나면 반드시 그 책의 주제에 대한 글을 썼다.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 출판칼럼니스트 표정훈씨는 오야나기를 가리켜 “책사냥꾼으로서 입신의 경지에 이른 인물”이라고 감탄했다.
책사냥꾼 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사냥감을 직접 만들어내고 싶은 법. 자칭 책사냥꾼인 표정훈씨도 자신의 사냥일지를 모아 ‘책은 나름의 운명을 지닌다’(궁리)를 펴냈다. 그 책의 시작이 “나는 책 읽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 80년이라는 세월을 바쳤다. 아직까지도 잘 배웠다고 말할 수 없다”는 괴테의 말인 것이 의미심장하다.
한양대 정민 교수(국문학)의 ‘책 읽는 소리’(마음산책)를 읽다 보면 깊은 밤 선인들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책 읽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예원의 열 가지 즐거움(藝園十趣)’라는 글을 남긴 김창흡은 ‘산 독서’와 ‘죽은 독서’를 이렇게 구분했다. “책을 덮은 뒤에 그 내용이 또렷이 눈앞에 보이면 이것이 산 독서이고, 책을 펴놓았을 때에는 알았다가도 책을 덮은 뒤에 망연하면 죽은 독서다.” 선인들은 이처럼 읽고 또 읽어 완전히 꿸 때까지 읽고 나서 반드시 독서비망록을 남겼다. 송시열의 ‘간서잡록’, 이이의 ‘성학집요’에 실린 ‘독서지법’, 하홍도의 ‘독서설시인’, 성문준의 ‘독서칠결’ 등이 요즘식으로 말하면 ‘독서일기’다.
김현의 ‘행복한 책읽기’(문학과지성사) 이후 독서일기는 글쓰기의 한 장르로 자리잡았다. 1994년 첫선을 보인 ‘장정일의 독서일기’(범우사)는 벌써 5권을 채웠고, 이승하의 ‘헌책방에 얽힌 추억’(모아드림), 이권우의 ‘어느 게으름뱅이의 책읽기’ ‘각주와 이크의 책읽기’(이상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조희봉의 ‘전작주의자의 꿈’(함께읽는책), 전사섭의 ‘장충동 김씨를 위한 이야기’(시공사) 등 일종의 독서에세이 출간이 붐을 이뤘다.


이들은 자타가 공인하는 ‘책벌레’들이다. 그러나 아무거나 먹지 않고, 아무렇게나 뱉지 않는다. 조희봉씨는 ‘열독가’에 견주어 자신을 ‘수집가’(미처 다 읽지는 못하더라도 좋은 책을 모으고 보는 것에 만족하는 사람)라고 낮추지만 ‘전작주의’라는 읽기 방식을 널리 소개했다. 전작주의란 한마디로 특정 작가의 모든 작품을 읽는 것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읽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전작에 흐르는 일관된 흐름을 읽어내고, 그의 작품세계가 당대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찾아낸다. 그는 이런 방식으로 이윤기, 안정효를 읽었고, 나름의 ‘이윤기론’ ‘안정효론’을 썼다. 책과는 그다지 관계 없는 전공(경제학)을 했고, 역시 거리가 먼 일(정보기술회사)을 해왔지만 대학시절부터 10년 넘게 헌책방을 전전한 이력이 책쓰기를 가능케 했다.
이권우씨는 ‘도서평론가’라는 직함 덕분에 한 달에도 100여 권씩 책을 ‘보지만’ 그 가운데 꼼꼼히 ‘읽은’ 책만 모아 두 권의 ‘책읽기 책’을 썼다. 두 번째 독서에세이인 ‘각주와 이크의 책읽기’에는 두 가지 책읽기 방식이 등장한다. 자신의 세계관, 가치관, 감성을 옹호하고 보충하고 지지해주는 책읽기는 ‘각주의 책읽기’, 읽다가 속으로 이크, 하고 소리지를 만큼 지적인 충격을 주는 책을 만날 때는 ‘이크의 책읽기’가 된다. .
당신이 책벌레든 책사냥꾼이든, 열독가든 수집가든, 독서가든 장서가든, 책읽기는 글쓰기의 출발점이다.

작가의 연장통


다시 ‘유혹하는 글쓰기’로 돌아가보자. 스티븐 킹이 무조건 읽기만 강조한 것은 아니다. 그는 목수들이 갖고 다니는 3단 ‘연장통’을 장황하게 설명하면서 글을 쓰겠다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4단 연장통을 갖춰야 한다고 했다. 자주 쓰는 연장을 담는 맨 위층에는 ‘낱말’을 넣어둔다. 그러나 어휘를 늘리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할 필요는 없으며 책을 읽으면 저절로 해결된다는 충고도 덧붙였다. 낱말 옆 칸에는 ‘문법’을 넣고(다만 ‘여러분이 아직도 문법을 모른다면 이미 때가 늦었다’는 킹의 말에 기죽지 말지어다) 나머지 칸들은 형식과 문체, 문단으로 채운다.
물론 각각의 칸을 채워넣을 때 나름의 기준을 갖는 게 좋다. 예를 들어 스티븐 킹은 ‘낱말’ 칸을 소박하고 쉬운 말 대신 화려하게 치장한 말로 채우는 것을 ‘애완동물에게 야회복 입히기’라고 이죽거린다. ‘하던 일을 멈추고 똥을 누었다’라고 하면 될 것을 ‘하던 일을 멈추고 생리현상을 해결했다’고 쓰지는 말란 말이다. 평이하고 직설적인 표현! 낱말 선택의 제1규칙이다. 킹은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 한 구절을 제시하며, 문장구조는 복문이지만 사용된 낱말은 초등학교 1학년 교과서 수준을 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런데도 스타인벡은 이 작품으로 1940년 퓰리처상을 수상했다(스타인벡은 1962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이기도 하다).
그리고 문법이 골치 아프다고 말하지만, 문장에는 이름을 표시하는 명사와 동작을 표시하는 동사만 있으면 된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두통은 사라진다. 아무 명사에 동사만 연결하면 문장이다. 일부러 관계사절, 수식어구, 동격어, 중복문을 끌어들일 필요는 없다. 헤밍웨이는 ‘그는 강으로 갔다. 강은 그곳에 있었다’(헤밍웨이 ‘두 개의 심장을 가진 강’)는 식의 단문을 즐겨 썼다.
문체에서는 ‘해야 하는 것’보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강조했다. 첫째, 수동태는 한사코 피하라. ‘작가가 밧줄을 던졌다’이지 ‘작가에 의해 밧줄이 던져졌다’가 아니다. 둘째, 부사는 여러분의 친구가 아니다. 부사는 동사나 형용사를 수식하는 말로 흔히 ‘…하게(-ly)’로 끝나는데 이것을 많이 쓰는 사람은 대개 자기 생각을 분명하게 표현할 자신이 없기 때문에 ‘사족’에 집착하는 것이다.


알고 보면 스티븐 킹의 지적 가운데 새로운 것은 하나도 없다. ‘유혹하는 글쓰기’ 서문에서도 이 사실을 분명히 했다. 윌리엄 스트렁크 2세와 E. B. 화이트의 ‘문체요강’을 반드시 읽어라. 그 책에 실린 ‘작문의 원칙’ 중 17번 규칙이 ‘불필요한 단어는 생략하라’이다. 문법을 복습하고 싶다면 동네 헌책방에 가서 ‘워리너편 영문법과 작문’을 찾아보라(대부분 고등학교 시절 배운 책).
혹시라도 좋은 글을 쉽게 쓸 ‘묘수’가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유혹하는 글쓰기’를 펼쳤다면 실망스러울 수밖에 없다. 베스트셀러 작가의 글쓰기 비밀이 ‘문체요강’과 문법책이었다니!
교문 밖을 나선 후 우리말 ‘문법’을 잊고 지냈다면 이쯤해서 이오덕의 ‘우리글 바로쓰기(3권)’ ‘우리 문장 쓰기’(이상 한길사)에 눈길을 보낼 필요가 있다. 이수열의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말 바로 쓰기’(현암사)나 남영신의 ‘나의 한국어 바로쓰기 노트’(까치)도 좋다. 처음에는 꼬장꼬장한 선생에게 잘못 걸린 기분이지만, 자신의 글쓰기가 얼마나 너저분한지 깨닫게 해준다.


표현의 기술과 글쓰기

패트릭 G. 라일리의 ‘원 페이지 프로포절-강력하고 간결한 한 장의 기획서’(을유문화사)를 보며 떠오른 생각은 일반 글쓰기에 관해서도 이처럼 ‘콤팩트’한 책이 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스티븐 킹이 마르고 닳도록 칭찬한 ‘문체요강’은 불과 85쪽이었다.
국내 출판 목록을 보면 ‘책읽기에 관한 책’이 날로 종수를 늘려가고 있는 데 비해 ‘글쓰기에 관한 책’은 빈약하기 짝이 없다. 그나마 글쓰기에 대한 괜찮은 책들은 출간된 지 너무 오래돼 낡은 느낌을 주거나 절판됐다(남영신의 ‘문장비평’이나 최성애의 ‘자기표현 시대에 쓸모 있는 글쓰기’ 는 시중에서 구할 수 없다). 그만큼 글쓰기 책은 일반 독자들의 관심 밖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상황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올해초 영남대 임재춘 교수의 ‘한국의 이공계는 글쓰기가 두렵다’(마이넌)가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비록 이공계 출신들을 겨냥해 테크니컬 라이팅이라는 특정 분야를 소개하고 있지만 누구나 글쓰기 훈련을 거치면 쉽게 쓸 수 있다는 사실에 많은 이들이 공감했다.
이어 순천대 김형순 교수(신소재공학)의 ‘논문 10%만 고쳐써라’(야스미디어)가 등장했다. 그 동안 논문을 써야 하는 대학원생들의 필독서는 움베르토 에코의 ‘논문 잘 쓰는 방법’(열린책들)이었다. 이 책은 1977년 초판이 나와 1985년 재판을 냈고, 국내에 처음 소개된 것이 1994년이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두 번의 판갈이를 거쳐 18쇄를 찍었다. ‘졸업논문이란 무엇이며 어디에 필요한가’와 같이 논문을 준비하는 데 필요한 마음가짐부터 주제 선택법, 자료조사법, 카드정리법, 원고작성 등 실제 논문 쓰기 과정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다.
에코의 ‘논문 잘 쓰는 방법’은 국내에서도 10년 가까이 스테디셀러로 자리잡았지만, 국내 현실에 맞지 않는다는 점과 인문과학 분야로 한정된다는 점에서 독자들의 아쉬움도 뒤따랐다. 그래서 더욱 공대 교수가 쓴 ‘논문 10%만 고쳐써라’의 등장이 반가웠는지도 모른다. 김형순 교수는 이 책에 논문의 올바른 작성법과 함께 해외 유명 학술지에 논문 게재하는 법 등 실용정보를 담았다.
앞의 두 책은 논문을 통해 학문 세계에 첫발을 내디디려는 사람들에게 유용하다. 즉 전문 연구자가 되려는 이들을 겨냥한 지침서다. 그러나 대학 새내기라면 도쿄대학 교수들이 펴낸 ‘지(知)의 기법’(경당)으로 충분하다.
원래 이 책은 1994년 도쿄대에서 신입생들에게 갖가지 학문 연구의 기법(문제 제기 방법, 인식 방법, 논문 작성법, 발표법 등)을 가르치기 위해 여러 교수들의 글을 받아 책으로 엮은 뒤 문과계 1학년 1학기 필수과목인 ‘기초연습’의 부교재로 쓰였다. 그러나 독자들의 반응이 뜨겁자 ‘지의 기법’에 이어 ‘지의 논리’ ‘지의 윤리’ ‘지의 현장’ 등 4권짜리 ‘知시리즈’를 완간했다(국내에서도 4권 모두 출간됐다).
1권 ‘지의 기법’ 중 3부 ‘표현의 기술’을 펼치면 조사와 자료수집, 자료의 해석, 참고문헌 작성방법, 인용이나 주(註)를 다는 방법, 리포트에서 박사학위 논문의 집필까지 실제 작성법 등을 압축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재미있는 점은 이 책 각주에서 논문 주제 선택에 관해서는 움베르토 에코의 ‘논문 잘 쓰는 법’이 좋으나 약간 어렵다고 코멘트해 놓은 것이다.
이 책을 펴내는 데 앞장섰던 후나비키 다케오 교수(문화인류학)가 쓴 맺음말은 마치 한국 교육의 현실을 이야기하는 듯해서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다. 제목이 ‘18년 동안 맞장구 치기에서 벗어나자’이다. 논문 쓰기든 구두 발표든 자신의 의견을 만들어내려면, 일단 남의 의견을 경청한 후 ‘동의하지 않는’ 자세가 필요하다. 초·중·고 18년 동안 정답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맞장구 치는 법만 배워온 학생들은 자신의 의견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그래서 대학에 들어와 제일 먼저 배워야 할 것이 남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기술과 배짱이다. 논문이란 결국 어떤 문제에 대해 자기 주장을 밝히고 합리적인 방법으로 그것을 입증하는 글이다. 자신의 의견이 없다면 글쓰기 기술이 무슨 의미가 있겠나.
교수나 연구자들이 ‘논문’만 쓰는 건 아니다. 연구 외의 글을 모두 ‘잡문(雜文)’이라 하면 잡문 쓸 일이 훨씬 많을 수도 있다. 그런데 이 ‘잡문’을 잘 쓰는 전문가가 드물다. 좀더 솔직히 말하면 “잡문은 안 쓴다”고 딱 자르는 사람일수록 글쓰기가 서툴 가능성이 높다. 노스웨스턴대학 하워드 S. 베커 교수가 쓴 ‘사회과학자의 글쓰기’(일신사)는 그런 콧대 높은 전문가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물론 이 책의 주목적은 학술지에 게재할 ‘논문’의 편집과 퇴고 요령을 가르쳐주는 것이지만, 거창하고 난해한 말로 범벅이 된,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글을 써놓고 스스로 ‘고상하다’고 만족하는 학자들에게 일침을 놓는다.


“나는 왜 글을 쓰는가?”

고상함의 허울을 벗고 솔직한 내 이야기를 쓰고 싶다면 잠시 짬을 내 나탈리 골드버그의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한문화)를 펼친다. 누구나 할 수 있는 뻔한 이야기라고 생각하겠지만 미국에서 100만부가 팔렸고, 9개 언어로 번역돼 나왔다면 나름의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중 ‘나는 왜 글을 쓰는가?’의 한 대목을 보자.

“나는 왜 글을 쓰는가?” 아주 좋은 질문이다. 우리는 이따금 자신에게 물어 보아야 한다. 대답을 하지 못하면 글쓰기를 중단하라. 시간이 지나면 그 질문 안에 모든 대답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왜 나는 글을 쓰는가?

-왜냐하면 나는 얼간이니까.
-왜냐하면 나는 어린 소년들에게 영향을 주고 싶으니까.
-글을 쓰는 것이 내 진화와 발전의 시작이므로.
-위대한 소설을 써서 백만장자가 되기 위해서.
-왜냐하면 나는 무언가 할 말이 있으니까.
-왜냐하면 나는 할 말이 전혀 없기 때문에.

나탈리 골드버그는 “나는 왜 글을 쓰는가” 또는 “나는 왜 글을 쓰고 싶어하는가?”를 묻되 깊이 생각하지 말고 당장 펜을 잡고 종이 위에 자신의 대답을 적어보라고 했다. “나는 왜 글을 쓰는가?” (끝)

 


글: 김현미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khmzip@donga.com

1989년 동아일보에 입사해 14년간 ‘잡지’만 만들었다. 그 중에는 패션전문지, 음악전문지, 젊은 여성지, 시사주간지, 시사월간지가 있다. 출판과 교육 분야에 관심이 많다.

 

 


[특별부록|디지털시대의 글쓰기]


광장에서 글쓰기


엽기와 비판으로 무장한 네티즌 시대

 

아고라 광장에서 연설한 논객을 향해 반격하는 청중, 그 반격은 다시 청중들의 논쟁으로 치닫는다. 글로 판을 벌이고 그 놀이판에서 신명나게 놀고 있는 이 시대, 글쓰기의 변화를 절감한다.
일찍이 글판이 이렇게 시끄러워본 일이 있었던가. 필자들이 쓴 글을 독자들은 경건한 침묵 속에서 읽었다. 인쇄, 출판의 제도는 견고했다. 신춘문예나 추천 등을 통한 등단의 절차를 거친 문인들만 글을 쓸 수 있었고 신문이나 잡지사 편집인들의 엄격한 심사를 거쳐야만 식자들은 책을 낼 수 있었고 글을 실을 수 있었다. 이 견고한 절차는 신문이나 잡지에 실린 글에 권위를 부여했고 그 아우라는 독자들의 독서 행위를 더욱 침묵의 경건한 기도와 흡사하게 만들어왔다. 작가(author)는 문자 그대로 권위(authority)가 있었고 독자들은 그에게 함부로 비난의 잣대를 들이대지 못했다. 이때 권위는 일방성을 의미했다. 독자의 비판이 이미 출간된 책을 되돌릴 수 없었다. 책은 수 백년 동안 빛 바래면서도 원형은 변하지 않는 그 모습을 지식의 불변성과 동일시하며 스스로의 자태를 뽐냈다.
그런데 오늘날 신문의 칼럼들을 보라. 각 분야 전문가들의 시사 진단이나 논지는 인터넷 신문에 그대로 옮겨지면서 바로 그 밑에 수많은 답글(reply)이 달린다. 익명이지만 대부분 평범하고 건전한 시민임에 틀림없는 장삼이사들의 아우성…. 입에 담을 수 없는 욕도 있고 수준 낮은 비판도 많지만 네티즌들은 글의 모순점을 요소요소 지적하며 가차없이 비판한다. 하나의 글을 놓고 그 사안에 대해 확장된 논지를 펼치며 갑론을박하는 장관이 연출되기도 한다.
이건 글이 아니다. 아고라 광장에서 연설한 논객을 향해 반격하는 청중의 모습, 그 반격은 다시 청중들의 논쟁으로 치닫는다. 글로 판을 벌이고 그 놀이판에서 신명나게 놀고 있는 이 시대 민주시민의 모습에서 글쓰기의 변화를 절감할 수밖에 없다.


처음에 말이 있었다

처음에 말이 있었다. 사람들은 말을 통해 의사소통을 하고 배우고 생활했다. 몸동작, 억양, 표정 등이 동원되고 상대방의 질문이 허용되기 때문에 대화는 지식전달에 효율적이었다. 그러나 말은 전달성과 보존성에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말은 발화와 동시에 인간의 망각 속으로 사라져버린다. 말소리는 멀리 나아가지 못한다. 망각 속에서 지식은 축적되지 못하고 다음 세대로 전달되지 못하였다.
말의 보존과 전달을 위해 인류가 발명한 것이 글이었다. 문자를 통해 지식은 보존, 축적되고 전달되었으며 인쇄술이 발달하면서 지식의 생산과 전달은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인쇄술은 균일한 활자로 쓰인 지식을 균일한 책에 넣어 수천, 수만 명에게 전달했다. 이제 인류는 다양한 지식을 표준화하는 지식의 대량생산과 전달을 기반으로 한 근대 문화를 이루게 됐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인쇄 텍스트로 지식을 전달, 보존하는 것도 한계에 이르게 되었다. 예를 들어 인터넷은 종이 파일들이 너무 많아 보존과 지식 검색이 한계에 이르른 시점에서 발명됐다. 또 종이책은 선형적이기 때문에 단어를 찾기 힘들다. ‘전자’라는 단어 하나를 사전에서 찾는데 ㅈ, ㅓ, ㄴ…. 이런 식으로 범주를 좁혀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걸렸다. 이런 정보 검색 방식을 개선하기 위해 과학자들은 연상의 원리에 의한 검색체계를 고안했다. 사람들은 평소 생각할 때 책을 읽는 것처럼 순차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다발적으로 머릿속에 생각을 떠올린다. 이 방식을 적용한 것이 인터넷이다. 거대한 데이터베이스의 바다에서 독자는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머릿속에 지식을 떠올리는 것처럼 자유자재로 검색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자료들은 공간과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언제 어디서나 연결된다.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유비퀴터스 컴퓨팅 개념은 마이크로칩이 모든 사물에 침투해 언제 어디서나 컴퓨터와 상호작용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지하철 등에서 휴대전화를 통해 정보를 얻는 것이 그 예이다.
아무튼 이런 체계 내에서 형성되는 언어 공동체는 지금까지와 다른 독특한 언어 문화를 형성한다. 그 첫 번째 현상이 언어 자체에서 일어나는데 말과 글의 경계가 무너지는 현상이다.
흔히 통신언어라고 하는 이 언어는 채팅언어에서 비롯했고 전자우편, 게시판, 휴대전화 문자, 채팅 등에 사용된다. 통신언어는 수신자와 발신자 사이에 의사소통이 동시적으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에 신속함이 생명이다. 또 상호소통이 되기 때문에 일방향적인 글과 달리 친교적 표현을 중시한다.
화상 채팅도 있으나 아직까지는 소통의 매체가 글인 반면 소통의 형식은 말과 닮아 있다. 이런 모순 때문에 통신언어에는 말의 요소와 글의 요소가 혼재된다. 첫째, 표현의 측면에서 소리나는 대로 표기하는 경향이 있다. 손이→소니, 먹다→먹따처럼 말할 때의 방식을 선호하는 것이다. 어서 오십시오→어섭쇼, 핸드폰→핸펀처럼 탈락과 축약 현상이 나타나는 것 또한 구어체와 비슷하다.


근대 국가관의 변모와 외계어의 등장

어휘에서는 은어와 약어, 감정표현 부호(emoticon)가 나타난다. 같은 사이버 공동체로서 유대감을 드러내는 데에 은어만큼 효과적인 것도 없다. 또 채팅을 하다보면 상대방과 마주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감정과 얼굴 표정을 보이려는 경향이 나타난다. 이모티콘은 이렇게 탄생되었다. 전산용어 사전인 http://www.terms.co.kr를 검색해 보면, emoticon(이모티콘)은 인터넷 전자우편이나 채팅 그리고 메시지를 뉴스그룹 등에 올릴 때 글의 내용을 보충하기 위해 키보드 글자나 부호들의 짧은 나열을 이용하여, 보통 얼굴표정을 흉내내거나 느낌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대부분의 emoticon들은 웃음이나 윙크, 옆으로 뒤틀린 입 등 얼굴 표정을 만들기 위해 몇 개의 부호를 사용한다.
emoticon은 emotion(감정)과 icon(기호, 형상)이 결합된 용어이다. 1980년대에 미국 카네기 멜론 대학생인 스코트 펠만이 이메일의 끝에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라는 뜻으로 웃는 얼굴을 덧붙여 보낸 것이 그 시초라고 한다. 초기에는 웃는 표정을 주로 사용하였으므로 스마일리(smiley)라고도 불렸다. 스마일리는 국가에 따라 자주 사용하는 것이 조금씩 다르고 새로운 아이디어도 계속 추가되고 있다. 현재 한국과 미국 등에서 사용 중인 이모티콘은 2000여 개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모티콘에는 사람의 감정이나 표정을 나타낸 것과 사물의 특징을 나타낸 것 두 가지가 있다. 후자는 아스키 아트(ascii art)로 발전하고 있다. 이모티콘은 문자보다 그림에 가깝다. 사람의 표정을 키보드로 타이핑한 것으로 글쓴이의 미묘한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 문장의 끝에 미소짓는 표정 하나만으로 글쓴이의 감정 상태가 드러나기 때문에 글 전체의 뜻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어 가독성을 높인다. 이는 컨텍스트가 공유되는 일대일 대화에서 상대방과의 교류가 원활해지는 장점을 살린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모티콘의 특장은 만국 공용어라는 점이다. 나라마다 쓰이는 언어는 다르지만 그 사람의 표정과 몸짓으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것처럼 이모티콘 또한 구어의 의사소통 방식을 닮아가는 것이다.

a. 흑흑.. 우리 착하고 좋은 친구들을 놔두고 서울로 가요.
b. ㅎㅎ 우리 차카고 조은 친구들 놔두고 설로 가요.
c. 흐흐흐ㄱㄱㄱ☆ㅠ_ㅠ 어 탸콰 뎌응 九들乙 ㉯드 설 家

a는 정상적인 문장이고 b는 통신언어로 어느 정도 뜻을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c로 가면 도저히 그 의미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맞춤법이 파괴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세종대왕이 창제하신 한글에서 파생되었다는 유래담까지 통신공간에 있는 이 외계어는 종래 통신언어가 신속함, 편리함 때문에 연음이나 줄임말을 사용하던 것과는 딴판으로 복잡하고 느린, 불편하기조차 한 조어법을 지니고 있다. 한자, 히라가나, 러시아 문자, 특수 문자들이 섞여 있어 일반 문장을 칠 때보다 2~3배는 느리다.
최근에는 한 네티즌이 외계어 번역기 사이트를 개설해 일반문장으로 번역해 주고 있는 실정이다. 이 프로그램은 외계어를 일반 문장으로 번역해줄 뿐 아니라 일반 문장을 외계어로도 번역할 수 있다. 2002년 한글날 각 방송사에서는 외계어와 한글 파괴를 특집으로 방영하기도 하였고 인터넷상에서 논쟁거리가 되기도 했다. 포털 사이트 다음에서는 통신언어에 대한 찬반토론과 설문 조사를 벌였는데 자제가 필요하다고 대답한 네티즌이 41.1%, 적극 반대한다는 네티즌이 21.4%로 나타나 대체로 언어파괴의 심각성을 인정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외계어는 특히 아직 한글을 완전히 익히지 못한 초등학생들에게 나쁜 영향을 미친다. 이 심각성을 고려하여 인터넷 사이트 ‘아이두넷’에서는 언어파괴를 반대하는 서명 운동을 벌이고 있고 ‘언어파괴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경우는 온라인에서의 언어파괴를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많은 네티즌들이 자기 커뮤니티에서 자유자재로 외계어를 구사하고 있고 심지어 외계어에 강한 애정을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외계어는 간편하게 사용할 수도 없으며 배우기도 힘든 언어이다. 언어의 합리성에 전혀 맞지 않는 이 외계어를 네티즌들은 왜 쓰고 있으며 무엄하게도 세종대왕의 한글에 비견하고 있는 것일까.
자국어에 대한 사랑이 강조되고 맞춤법 등이 제정된 것은 근대 이후의 일이었다는 점을 상기해 보면 외계어의 시대적 의미가 드러난다. 단군 이래 수천 년의 단일 민족 공동체임을 역사적 자부심으로 간직하고 있는 한국으로서는 좀 껄끄러운 주장이겠으나 민족을 이런 원초적 공동체가 아니라 근대 자본주의의 발전 과정에서 생겨난 역사적 구성물로 보는 견해가 사실 더 설득력이 있다. 민족주의가 갖는 이데올로기적 호소력은 근대 이행기에 왕조의 정통성이 끊긴 상실감을 대체해줄 효율적 가치관이었고 이 가치관은 소설이나 신문이 ‘상상의 공동체’로서 민족적 연대감을 만들어가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때 자국어는 소설과 신문의 형식으로서 작동한다. 자국의 언어로 의사소통하는 과정에서 같은 언어를 쓴다는 연대의식은 같은 민족이라는 동질감을 구체적으로 확인시켜 준다.
그런데 자국어가 민족 공동체의 연대감을 확인시켜 주는 존재라면 외계어는 사이버 공간의 연대감을 확인시켜주는 의사소통의 도구라 볼 수 있다. 물론 외계어가 자국어를 대체할 수는 없겠으나 외계어는 은어를 사용함으로써 동질감을 확보하는 동아리 차원에서 훨씬 강화된 언어 개념인 것이다. 다소 극단적으로 논의를 진전시킨다면 네티즌들의 이 자국어 파괴라는 부정적인 특질 속에는 국가 개념으로 사유하던 근대인들과는 달리, 다양한 연대로 지구화 시대에 대처하는 최근 지구인들의 경향을 반영하는 것일 수도 있다


위풍당당한 네티즌들의 비판적 글쓰기

인터넷의 네티즌들은 신문으로 대변되는 문화권력을 향해 난리들이다. 처음엔 공격의 화살을 보수성향의 신문을 향해 쏘았다.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고 그것에 대한 다양한 진단들이 있으나 중요한 원인을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다. 표면적으로 보수성, 독점 언론에 대한 비판이 이렇게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게 된 것은 인터넷 그 자체의 속성에 말미암은 것이다.
인쇄의 복잡한 공정 때문에 한정된 사람만이 ‘권위 있는’ 매체에 글을 쓸 수 있었고 실린 글은 일방적인 전달 방식에 의해 그 권위를 더욱 강화할 수 있었다. 형식적 요건들 때문에 독자는 수동적이고 순종적인, 말없는 독서를 할 수밖에 없었다. 올바른 독서의 관건은 주어진 글을 필자의 의도에 맞게 얼마나 정확하게 해독하느냐에 있었다. 그러나 인터넷의 형식은 글쓰기의 수동성을 일거에 바꾸어버렸다. 누구나 자신의 주장을 게시판에 올릴 수 있고 게시판의 글들에 답하는 글을 올릴 수 있다. 언어의 광장에서 사람들은 말을 주고받듯이 의견을 나눌 수 있었다. 이제 글쓰기는 특정한 사람, 선택된 사람, 전문가의 영역에 한정되지 않는다.
수직적·일방적 관계에서 수평적·양방향의 관계로 변모한 작가와 독자 관계의 첫 시험대는 가장 큰 대중성을 확보하고 있는 신문이었다. 대입논술의 가장 중요한 교과서가 신문이었는데, 고등학교 재학시절 내내 신문을 비판적 자료로 삼아 논술 연습을 해온 네티즌들은 위풍당당하게 신문의 논지를 비판해가면서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기 시작했다. 이런 양상을 최근 신문사에서도 받아들여 인터넷 신문에서는 아예 기사마다 게시판이 있는 형편이다.


아이디 등장과 엽기적 글쓰기

‘글쓰기’의 권위를 약화시킨 것은 인터넷상의 정보들의 유동성 때문도 있다. 하이퍼텍스트에서는 인쇄매체에서와는 달리 편집과 수정이 자유롭다. 끊임없이 업그레이드되는 정보들, 오늘 사이트에 틀림없이 있었던 정보가 내일 가보면 삭제되어 있다. 수백년 동안 보존되는 인쇄매체의 지식과 달리 인터넷의 정보는 마음대로 삭제되고 조작될 수 있다.
내 글과 네 글의 경계도 미약하다. 다른 사람들의 글을 따와 재조립하고 패러디하는 것은 식은죽 먹기다. 좀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하이퍼텍스트에서의 표절은 창조의 시작이다. 상호 텍스트성이 그 형식의 본질과도 같은 이곳에서 글쓰기는 작가와 독자의 공동 창작과 같은 것이다. 다른 사람 글에 대한 비판은 자기 글쓰기의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글이 글을 낳는 이 연쇄의 고리는 글의 중심을 상실하게 하는 것이다.
여기에 익명성도 한몫을 한다. 굳이 추적하지 않으면 아이디만으로 상대방의 정체를 파악할 수 없다. 이런 익명성의 틈새에서 개인의 무의식은 극대화된다. 사이버 공간에서는 이 익명성의 뒤에서 자신의 평소 모습과는 다른 페르소나를 보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다분히 공격적일 수 있는 이 상황은 글쓰기를 흔히 비판적으로 만든다.
최근 개벽이가 죽었다고 한다. 개벽이가 누구인가? 아사이트의 스타 개벽이는 처음 한 네티즌이 벽 틈으로 고개를 내민 개의 모습을 디지털 카메라로 찍어 ‘디시인사이드’에 올린 데서 탄생했다. 디시 폐인들의 표현대로 우는 듯 웃는 듯 고개를 내민 개의 모습이 시공을 초월한 진리를 말하는 듯했다는 것이다. 우연히 고개를 내민 개의 모습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엽기의 대명사로 인구에 회자됐다. 개벽은 이룰 수 없는 일을 이루어내는 존재의 대명사이면서 아무 데서나 불쑥 튀어나오는 사람을 비웃는 용어에까지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개벽이의 동생 개죽이도 등장했다. 대나무에 매달려 있는 개죽이는 개벽이의 동생이자 라이벌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개벽이를 주인이 집을 비운 사이 친척들이 복날 잡아 먹었다는 것이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네티즌들은 개벽이 추모 사이트를 만들어 추모의 글을 올렸다. 노무현 대통령이 분향하며 눈물 흘리는 합성 사진을 비롯하여 개벽이에 대한 애정이 깃든 사진도 많이 등장하고 있다. 피식 웃어 넘기기에는 너무도 엉뚱하고 진지한 이 글쓰기의 원인과 정체는 무엇인가?
먼저 아무 의미 없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신조어 만들기는 엽기 사이트의 전형적인 의사소통 구조다. 우선 유행어는 아주 우연히 탄생한다. 어떤 네티즌이 한 벽보를 디카로 찍는다.


“이곳에 개똥 쌔우지 마세요. 아이들 방이니 개똥 쌔우지 마세요. 개를 키우려면 남에게 피에는 주지 말아야지. 이 양심 업ㅂ는 인간들. 이곳에 개똥 쌔우지 마세요.” 서툰 글씨와 틀린 철자법으로 보아 한글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사람이 자기 집 벽에 붙인 벽보를 찍은 이 사진은 ‘쌔우다”와 ‘업ㅂ는’이란 유행어를 낳았다. 이 사이트의 사람들은 “똥을 싸게 하다”나 “리플 등을 달다” 혹은 “어떤 행동을 취하다” 등의 뜻으로 ‘쌔우다’를 쓰고 ‘없는’ 대신 ‘업ㅂ는’을 쓰기 시작했다.
엽기 사이트의 의사소통 방식은 일면 선문답을 닮았다. 예를 들어 “왜 이렇게 늦게 왔어?”하고 야단치는 말에 “고구마 장사가 힘들어요. 100원만 주세요”라고 답변한다. 이 문장은 할 말이 없을 만큼 궁지에 몰렸을 때 엉뚱한 대답으로 상대방을 어처구니없게 만드는 역공격의 일종이다. 네티즌들은 자신을 ‘자’라고 표현한다. ‘득’을 이루기 위해 ‘수’하는 자로서 ‘귀차니즘’과 ‘게을르니즘’을 기본기로 갖고 있단다. 무의미함이 의미가 되는 도의 경지가 자신들의 세계라는 것이다.


인터넷은 정감의 공동체

딱 ‘시덥지 않은 놈들’로 표현될 만한 이들의 행태는 그러나 결정적인 이슈를 만날 때면 범상치 않은 힘을 발휘한다. 실례로 반미 촛불시위는 한 엽기 사이트에서 네티즌이 촛불시위를 제안함으로써 비롯되었다. 그 엽기 사이트에는 그 이전부터 김동성 선수의 금메달을 가로챈 오노에 대한 비판과 패러디, 한국인의 개고기 식습관을 공격했던 브리지트 바르도를 비판하는 사진들이 상당수 축적되어 있었다. 그 장난기 어린 그림들이 심각한 사안과 마주치면서 네티즌들의 힘을 강하게 결집시킨다. 평소 낄낄거리며 시간이나 죽이던 폐인들이 광화문으로, 시청으로 몰려들면서 역사의 한 방향에 영향을 미친 것이다.
사이버 공간을 부유하다가 엄청난 힘으로 결집되는 이들의 행동을 마페졸리는 인터넷이 기본적으로 ‘정감의 공동체’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사이버 공동체는 현실공간에서처럼 이해관계가 아니라 개인의 취미나 관심사로 형성된다. 이렇게 가슴으로 모인 사람들이 학연, 지연, 혈연의 이해관계 없이 어떤 사안에 대해 공감할 때 무서운 응집력이 생긴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엽기’의 감수성은 ‘비판’의 감수성과 맥을 같이한다 하겠다. 익명성, 양방향성이 허용되고 시공간으로부터 자유로운 사이버 공간에서 개인의 자아는 이성적인 제약으로부터 자유롭다. 할 일, 안 할 일의 구분이 모호해지면서 ‘황당한 일’을 찾아내며 재미있어 하는 감수성이 지배적이 된다. 그러나 특정 이슈를 만나면 강하게 결집하는 것이다. ‘엽기의 글쓰기’는 사이버 민주주의의 담론이라 하겠다.
인류의 의사소통 방식은 매체의 변화에 따라 현저히 다른 양상을 띠어왔다. 구술언어로만 조직된 부족사회에서는 구술언어의 특성상 사용되는 것만이 전승되고 전승된 것만이 사용되기 때문에 변화가 적고 안정되어 있었다. 공동체의 규모 또한 구성원들이 직접 지각할 수 있는 범위로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문자가 발명되고 다시 인쇄술이 보급되면서 지식의 폭발, 균등 분배가 이뤄지고 문화적 민주주의가 정착된다.
이제 전자 매체의 발달로 지식의 생산과 교환, 소비의 양태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전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문자성과 구술성의 통합 및 새로운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고 읽기와 쓰기의 경계 또한 모호해지고 있는 형편이다. 인쇄시대가 지식의 평등한 분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면 디지털 시대의 지식은 공동 생산과 소비의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종래와 다른, 비판적 글쓰기, 엽기적 글쓰기의 단초가 보이고 있고 온라인상의 글쓰기는 오프라인의 현실에 만만치 않은 위력을 과시하고 있다. 글쓰기의 지각 변동은 이제 가시화되고 있다. 그 올바른 방향을 위해 우리 모두가 지혜를 모아야 할 때라고 보여진다. (끝)

 


글: 최혜실 KAIST 교수·인문사회과학부 choi@cais.kaist.ac.kr

서울대 국어교육과 및 국문과 대학원 졸업, 서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과학기술원 인문사회과학부 교수이며 ‘문학사상’으로 데뷔, 문학평론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한국 모더니즘소설 연구’ ‘한국현대소설의 이론’ ‘신여성들은 무엇을 꿈꾸었는가’ ‘디지털시대의 문화예술’ ‘모든 견고한 것들은 하이퍼텍스트 속으로 사라진다’ ‘한국근대문학의 몇 가지 주제’ 등이 있다.

 




[특별부록|디지털시대의 글쓰기]

바다 건너 개인 홈페이지


시간을 압축하고 공간을 뛰어넘는 일기

 

휴대전화 이메일로 아이디어를 날린다. 핸드헬드PC로 거리에서, 지하철에서 틈틈이 글을 쓴다. 디지털 카메라와 카메라폰으로 ‘글감’을 사냥한다. 디지털키드의 멀티미디어 일기 쓰는 법.

웹상에 나만의 공간을 만들겠다고 결심한 것은 통신을 시작한 이래 여기저기 동호회나 모임에 써둔 글들을 한자리에 모아두기 위해서였다. 몇 번 컴퓨터를 바꾸는 과정에서 소중한 글들이 유실됐고, 통신동호회 게시판에 올린 글도 지워져버려 낭패를 보고 나서였다. 그래서 한창 커뮤니티 사이트로 알려지기 시작한 프리챌에 둥지를 틀었고 이곳을 중심으로 여러 사이트를 전전하며 일상의 생각, 사진, 문화리뷰 등을 띄웠다.
일본으로 유학 온 후에도 드림위즈에 ‘일본통신’이라는 칼럼을 연재하는 등 글쓰기를 계속했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나의 홈페이지는 ‘개방된 교류의 장’은 아니었다. 회원제 커뮤니티라는 제약 때문에 회원이 아닌 사람은 내 글을 볼 수 없었다. 좀더 많은 사람들과 글로써 교류하고 싶다는 욕구와 일본에 머물고 있는 나의 근황을 지인들에게 알릴 공간이 필요하다는 판단에 개방된 홈페이지를 제작하기로 결심했다.
먼저 홈페이지의 도메인을 취득할 때 상업적인 인상을 주는 닷컴(.com)대신 짧고 친근한 넷(.net)을 선택했고 나의 애칭을 변형시켜 레아즈 닷넷(Leaz.net)으로 정했다. 호스팅 업체는 ‘cafe24’와 계약했다. 이곳은 매킨토시OSX 환경에서도 잘 돌아가는 ‘제로보드’(홈페이지용 게시판 프로그램)설치환경을 지원한다.
사실 새로운 홈페이지를 제작하는 것은 모험에 가까웠다. ‘커뮤니티 위저드’로 손쉽게 뚝딱뚝딱 게시판을 만들던 것과 달리 익숙지 않은 웹에디터를 열고 생소한 HTML 기호들을 더듬더듬 작성하여 웹사이트를 만드는 데 적지 않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더군다나 내가 사용하는 컴퓨터는 윈도용 PC가 아니라 매킨토시라서 그 어려움이 배가 되었다. 며칠 밤을 고생한 끝에 드디어 http://Leaz.net의 홈페이지가 열렸다.


종이 대신 휴대전화, 핸드헬드PC, 컴퓨터

내 가방 속에는 항상 핸드헬드PC 시그마리온II가 들어 있다. 언제라도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마다 글을 쓰기 위한 도구다. 여러 가지 글쓰기 도구를 사용해 보았지만 휴대성(무게·크기)이나 빠르고 정확한 입력이라는 측면에서 시그마리온으로 결정했다. 시그마리온은 원터치로 가동되는 워드프로세서로 지하철에서나 카페에서나 생각나는 것을 틈틈이 기록할 수 있다. 덕분에 나는 짧은 시간에 꽤 많은 분량의 글을 쓸 수 있었다.
이렇게 작성한 글과 메모는 시그마리온에 도코모(DoCoMo)의 PHS카드를 장착하여 인터넷에 접속한 후 이메일로 송신한다. 시그마리온은 일본 내 사용자를 위해 만든 것으로 웹브라우저에서 한글지원이 안 되기 때문에 한글사이트 게시판에 직접 업로드하지 못하고 일단 자택 컴퓨터로 송신한 후 편집하여 올리고 있다.
집에서 사용하는 컴퓨터는 매킨토시 파워북 G4로 야후ADSL에 연결해 놓았다. 그동안 일본은 휴대전화를 이용한 모바일 통신에 밀려 상대적으로 인터넷 환경이 뒤처져 있었다. 그러나 몇 년 전부터 통신업체가 사용요금을 대폭 낮추고 경쟁체제에 돌입해 이제는 브로드밴드라는 말이 낯설지 않을 만큼 인터넷환경이 좋아졌다. .
내 홈페이지는 기본적으로 ‘글’이 중심이지만 글의 이해를 돕기 위해, 또는 감각적인 표현을 위해 글과 사진, 음악, 동영상을 활용하고 있다. 그래서 이제는 생활 필수품이 되어버린 소니 사이버샷 디지털 카메라를 항상 가지고 다니면서 주위에 흥미로운 글감이 보이면 무조건 찍는다. 최근에는 휴대전화를 카메라폰으로 바꿔 디지털 카메라의 사용빈도가 조금 줄었지만 중요 이벤트나 모임에는 그래도 ‘디카’를 들고 간다.
글을 꾸밀 때는 가능한 한 글 한 꼭지마다 사진 한두 장을 첨부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때로는 거꾸로 사진에서 영감을 얻어 글을 쓰기도 하고, 디지털 카메라의 동영상 촬영기능도 적극 활용한다. 일본에 있어서 친구의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했을 때 짤막한 축하 메시지를 영상에 담아 친구에게 보내고 홈페이지에도 올려놓았다. 가끔 부모님께 보낼 동영상을 찍어, 비디오레터로 업로드하기도 한다. 단순한 글이나 사진과는 또 다른 느낌을 주는 커뮤니케이션 방법이어서 특별한 날 이용하곤 한다.


핸드헬드PC가 없더라도 갑자기 떠오른 아이디어를 놓칠 염려는 없다. 휴대전화의 이메일로 작성해 집 컴퓨터와 연결된 계정으로 송신한다. 집에 돌아가자마자 송신된 아이디어를 꺼내 긴 글을 쓰곤 한다. 일본에서는 휴대전화를 이용한 모바일 접속이 활성화되어 있다. 가장 많이 사용하는 기능은 간단한 생활문화 정보검색, 게임오락, 휴대전화 메일이다. 휴대전화 이메일은 문자 메시지와 달리 휴대전화마다 고유의 이메일 주소를 설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메일 주소를 안다고 전화번호를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메일 주소이기 때문에 물론 PC로도 송신이 가능하며 24시간 이메일을 주고받을 수 있다. 그래서 일본인들의 명함에는 컴퓨터용 이메일 주소가 아닌 휴대전화 이메일 주소가 적혀 있는 경우가 많다.
또 휴대전화에 장착된 34만 화소 카메라 덕분에 언제나 일상의 장면들을 놓치지 않고 찍을 수 있다. 일본 친구들과의 커뮤니케이션에 이용하는 것은 물론, 한국 친구들에게 나의 하루를 보여주기 위해 홈페이지에 올리는 사진을 찍기도 한다.
이렇게 매일매일 내가 실제로 보고 느끼는 것들을 공감각적으로 표현해 냄으로써 내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좀더 생생하게 나의 생활을 알리는 데 멀티미디어를 활용한 글쓰기는 아주 효과적이다.
멀티미디어로 글을 쓰다보면 종이 위의 글쓰기와는 조금 다른 과정을 거치게 된다. 종이에 쓸 때는 머릿속에서 내용을 구성한 후 써내려가지만 컴퓨터에서는 마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생각의 단편들이 사라지기라도 하듯 빠른 속도로 쭉 써내려 간 후, 나중에 다듬는다. 사후 수정의 편리성 때문에 글쓰기가 두렵지 않게 된 점도 분명 있다.

디지털 글쓰기, 아이디어 하나도 놓치지 않는다


휴대전화와 핸드헬드PC, 컴퓨터 세 가지를 연계시키면 스쳐 지나가는 아이디어를 놓치지 않고 자투리 시간을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유용하다. 핸드헬드PC나 휴대전화로 쓴 글들은 이메일로 보내 집에서 편집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모든 글들은 이메일 소프트웨어에 저장된다. 컴퓨터 앞에 있을 때면 언제나 켜두는 이메일 소프트웨어는 글의 구상 메모를 저장하기에도 유용하다. 워드프로세서를 열어 한 줄 메모를 해두고 문서함에 저장했다가 나중에 찾느라 고생하는 것보다, 이메일 제목에 구상메모를 적어 ‘드래프트’로 보존해 두면 언제나 나의 글쓰기 아이디어들을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다.
요즘 문서파일을 디스켓에 담아 가지고 다니는 사람은 없다. 대신 자택 이메일과 외부 웹메일을 함께 사용하면 집에서 쓰던 글을 밖에서도 이어 쓰고, 외출시에 우연히 떠오른 아이디어를 이메일로 보내두었다가 나중에 구체화시킬 수도 있다. 요즘에는 누구나 2개 이상의 이메일 주소를 갖고 있을 테니 이런 환경을 적절히 활용하면 글쓰기는 공간과 시간의 제약으로부터 해방된다.
이렇게 문득 떠오르는 아이디어나 키워드들을 놓치지 않고 기록해 둔 덕분에 나는 하루도 빠짐없이 홈페이지에 글을 올릴 수 있었다. 지금도 나의 이메일 소프트웨어 ‘신규작성 보존함’에는 수십 개의 메모가 있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그 아이디어들이 글이 되어 홈페이지에 오를 날이 있을 것이다.
홈페이지에 올리는 글은 나 혼자 보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를 염두에 두고 편집해야 한다. 소수의 지인들만 찾아왔던 초기와 달리 요즘은 불특정 다수가 방문하기 때문에 더욱 글의 내용에 책임을 느끼고, 읽는 사람의 입장을 고려한 글쓰기를 한다.

공간을 뛰어넘는 만남의 장


웹에서의 글쓰기는 읽는 사람을 시각적·청각적으로 즐겁게 해줄 수 있다는 강점이 있다. 사진을 넣거나 음악을 삽입하고 강조하고 싶은 부분의 서체를 바꾸거나 색깔을 넣는 등 글 내용에 입체적인 강약을 주면 효과적이다. 개인적으로 홈페이지에서 꾸준히 글쓰기를 한 덕분에 표현의 폭이 넓어졌으며 글을 쓰는 이, 읽는 이 양쪽 입장을 다 이해하게 됐다.
게다가 시차 없는 양방향 교류가 이루어지는 홈페이지의 경우, 필자와 독자의 글이 시너지효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글 밑에 달리는 한 줄 답변에 나와는 다른 의견이 제시되기도 하고, 틀린 부분이 지적되기도 한다. 이렇게 필자와 독자가 함께 글의 완성도를 높여간다.
가끔은 이런저런 주제로 글을 써달라는 독자들의 요청도 있다. 덕분에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분야를 공부하고 글을 쓰기도 한다. 나의 홈페이지 독자들 중에는 글을 읽고 답글을 달다가 아예 자신의 공간을 만들어 독립한 분들도 여럿 있다. 답글을 쓰면서 글쓰기에 흥미와 자신감을 갖게 됐다고 한다.
글쓰기를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는 것, 다양한 사람들과의 교류를 통해 완성되는 인터랙티브한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이 홈페이지를 통한 글쓰기의 또 다른 매력이 아닌가 싶다.
홈페이지의 글들은 나의 생활을 시시콜콜히 드러낸다. 내가 본 영화, 책, 음악, 공연 이야기, 나의 생각과 느낌들을 담은 에세이, 잡담에 이르기까지 장예영이라는 인간이 도쿄에서 하루하루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보여주는 일종의 일기다. 이렇게 공개된 일기를 통해 가족, 친구, 지인들은 내가 어디서 무엇을 했으며 요즘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생생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은 나에게도 참으로 든든한 일이다. 공간적으로는 떨어져 있지만 우리는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셈이다.
일본에 온 후 나는 ‘Lea@Tokyo-일본통신’이라는 제목으로 일본생활을 소개하고 있다. 일본에서 유년기를 보냈기에 언어나 생활에 큰 불편함은 느끼지 않지만 한국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고 고등교육을 받은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이질감’ 같은 것이 있다. 오히려 이것이 글쓰기에는 활력이 된다. ‘외국인 유학생’이라는 관점과 ‘평범한 일본의 젊은이’라는 관점을 적절히 조화시키며 일본을 바라보려고 노력한다. 하루하루 새롭게 배우는 일본의 사회, 문화, 생활, 풍물 그리고 일본 속의 한국인의 모습을 게시판에 기록하는 것은 즐거운 작업이다.
홈페이지는 회원제 커뮤니티 사이트와는 달리 언제나 개방되어 있는 곳이기에 예상치 못한 사람들이 종종 방문한다. 가족, 친지뿐 아니라 인터넷동호회 회원들, 게시판 상에서만 아는 익명의 사람들, 그리고 자신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글만 읽고 가는 사람들….
온라인 게시판은 이런 낯선 이들과 친구가 되는 교류의 장이 되기도 한다. 때때로 일본이라는 ‘공간적 특성’ 덕분에 새로운 만남의 기회를 얻는다. 한번은 일본여행 정보를 구하기 위해 우연히 내 홈페이지를 방문했던 분과 실제로 일본에서 만난 적이 있다. 같은 일본에 살고 있지만 만날 기회가 없던 분들과 홈페이지를 통해 인연을 맺기도 한다.
일본에 관한 글쓰기를 하고 있다는 ‘내용적 특성’ 덕분에 얻은 소중한 만남도 있다. 미국, 독일, 프랑스, 중국, 멕시코에서 살고 있는 분들이 ‘일본통신’에 자극받아 ‘밖에서 본 한국’이야기와 자신이 살고 있는 나라를 소개하는 글쓰기를 시작한 것이다. 이를 통해 나 또한 그곳의 생활을 생생하게 접할 수 있었다. 말 그대로 내 홈페이지는 국경을 뛰어넘는 만남의 장이 되고 있다.
요즘은 일본어 버전 홈페이지를 제작 중이다. 그동안 일본친구들이 한일 웹자동번역기를 이용해 엉성하게 번역한 일본어로 내 글을 읽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들은 내가 일본을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느끼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일본친구들로부터 빨리 일본어 버전을 만들어서 ‘일본통신’과 짝을 이루는 ‘한국통신’을 써달라고 요청받을 때 홈페이지 운영의 묘미를 느낀다.


홈페이지는 나만의 공간이 아니다

이미 나의 홈페이지는 나만의 공간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장예영’이라는 인간을 연결고리로 모인 사람들이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오로지 나하고 일대일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장예영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알게 됐지만 이제는 그들끼리 온·오프 라인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접촉한다.
온라인의 만남은 자연스레 오프라인으로 이어진다. 온라인에서 만난 사람이 도쿄로 여행을 왔다고 나를 찾아오기도 하고 방학 때면 내가 한국에 가서 오프 모임을 열기도 한다. 신기하게도 오프라인에서 직접 만나보면 온라인에서 글을 통해 만났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글로만 대화하던 사람과 실제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를 하면서 느끼는 점은, 비록 말과 글이라는 수단의 차이는 있어도 본질에는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것, 느끼는 것을 진솔하게 표현한 글들을 읽고 공감한 사람들이었기에 직접 만나도 편안하게 대화할 수 있었으리라.
자신의 홈페이지를 교류의 장으로 만들려면 ‘꾸준한 글쓰기’와 ‘성의 있는 글쓰기’가 필요하다. 개인 홈페이지라도 언제나 새로운 읽을거리를 제공하고, 리플이나 남의 글에 댓글 한 줄이라도 달아줘서 방문자가 애착을 갖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그 홈페이지는 비로소 양방향 만남의 장이 된다. 가끔 나는 마감에 쫓기는 사람처럼 졸린 눈을 비비며 홈페이지에 글을 쓸 때도 있는데, 오프라인의 만남과 마찬가지로 온라인에서도 성의를 다할수록 인간관계는 끈끈해지게 마련이다. 내가 쓴 글과 내가 단 답글의 수가 느는 만큼 나와 사람들의 온라인상의 관계 또한 깊어진다고 생각한다.
나는 한국에서 비행기로 2시간 정도 떨어진 도쿄에 있다. 그러나 한국의 가족, 친지들은 내가 무엇을 하고 무엇을 생각하는지 시차 없이 알 수 있다. 글과 사진과 음악이라는 멀티미디어와 인터넷이라는 유용한 도구를 통해 한국과 일본이라는 공간적 차이를 극복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디지털 글쓰기를 통한 교류, 그리고 새로운 만남은 기존 아날로그 글쓰기로는 상상하기조차 힘들었던 혁명이다. 디지털 일기장을 펼치며 오늘도 나는 나를 찾는 많은 사람들과 교감한다.

홈페이지 제작에 꼭 필요한 정보


커뮤니티에서 제공하는 툴이 아닌 HTML을 이용해 자신이 원하는 형태의 홈페이지를 만들려면 약간의 공부가 필요하다. 나모나 드림위버 등의 HTML 코딩 도구들을 활용할 줄 알아야 하고 그밖에 유료계정 구매, 게시판 설치, 도메인 획득 등의 몇 가지 수작업을 거쳐야 비로소 자신이 원하는 형태의 홈페이지를 만들 수 있다.

유료계정을 사라 무료계정은 MySQL 등을 지원하지 않기 때문에, 제로보드와 같이 유용한 무료게시판을 설치할 수 없다. 또한 포털에서 사용하는 무료계정은 용량이 작아 이미지나 멀티미디어의 활용에 적합하지 않다. 대다수의 무료계정은 백업을 지원하지 않고, 데이터 유실에 대해서도 책임지지 않는다.

설치 게시판을 이용하라 자신의 목적에 맞는 홈페이지를 제작하려면 다양한 형태의 게시판이 필요한데, 이런 목적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무료 배포형 게시판인 제로보드, 화이트보드, 이지보드를 활용하거나 유료링크 게시판을 이용하는 것이 좋다. 유료링크 게시판을 사용할 경우에는 무료계정에 홈페이지를 만들고 게시판을 링크하는 것이 비용 면에서 효과적이다. 대표적으로 티티보드(ttboard.com)와 슈퍼보드닷컴(www.superboard.com)에서 유료링크 게시판을 서비스하고 있다. 설치게시판의 경우는 자신의 계정에 직접 설치하는 것으로 자신이 쓴 글과 모아놓은 자료들을 직접 자기가 관리하고 백업할 수 있다는 강점이 있다.

이미지 게시판을 만들어라 텍스트만으로 이루어진 홈페이지는 재미가 없다. 디지털 카메라의 활용도가 높아지면서 사람들의 이미지 활용도도 높아지고 있다. 포토게시판뿐 아니라 핸드드로잉이 가능하다면 오에가키를 설치해보라. 오에가키 게시판은 일본에서 제작된 무료배포 게시판으로 현재 싸이월드에서 서비스하고 있는 그림 게시판의 원조격이다. 오에가키 게시판이 있으면 간단하게 마우스나 태블릿으로 그날그날의 일기를 그림으로 그릴 수 있다.

도메인을 마련하라 도메인은 집의 문패와 같아서 기억하기 쉽고 자신의 특징을 잘 드러내주는 것으로 선택해야 한다. .com이나 .net, .pe.kr 등을 유료로 사기 힘들다면 무료로 도메인 서비스를 해주는 곳도 많으니 자신의 홈페이지 컨셉트에 맞는 이름을 만들어보자.

김유진·자유기고가

글: 장예영 일본 유학생 my@Leaz.net


연세대 법학과 졸업, 동 대학원 재학 중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현재 지적재산권법을 전공하고 있다. 문화산업과 저작권 관련활동 공부를 하며 틈틈이 일본 관련 글을 쓴다. 장예영씨의 필수품. 휴대전화, 핸드헬드PC, 노트북, 디지털카메라.

 

 



[특별부록|디지털시대의 글쓰기]


1인 미디어 블로그


세상을 향해 방백하기

 

인터넷 항해일지를 뜻하는 블로그. 해외에서는 이미 유행하고 있다는데…. 국내에서도 포털사이트를 중심으로 급부상하는 블로그 글쓰기의 이모저모.

블로그! 하루가 멀다하고 인터넷 관련 기사에 블로그가 등장하고 있다. 도대체 블로그란 무엇인가. 블로그(blog)는 인터넷을 뜻하는 웹(web)과 항해일지 기록을 뜻하는 로그(log)가 합쳐진 신조어다. ‘웹로그’란 말은 1997년 11월에 존 바거(www.robotwisdom.com)가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블로그라는 단어는 최근 ‘옥스퍼드’ 사전에 ‘인터넷 1인 매체’를 뜻하는 단어로 수록되기도 했다. 그밖에 에반 윌리엄스가 만든 블로거닷컴(bloger.com)에서는 블로그를 ‘일기처럼, 정기적으로 업데이트되는 짧은 글들로 이뤄진 웹페이지’라고 설명했다. 흔히 블로그를 이용해 글을 쓰는 행위를 ‘블로그 한다’고 하며 블로깅하는 사람을 ‘블로거’라 부른다.
그러나 블로거라는 새로운 매체를 명확히 규정하기는 어렵다. 인터넷을 오랫동안 사용했거나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조차 블로그에 대한 명확한 상(像)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형태상으로 보면 블로그는 인터넷 게시판이나 웹페이지와 비슷하다. 최근에 쓴 글을 목록의 가장 위에서 확인할 수 있고 방문자로부터 답글도 받을 수 있다. 텍스트가 주를 이루며 링크를 통해 거미줄처럼 웹상의 다른 콘텐츠들로 옮겨다닐 수 있다. 형태적으로 게시판이나 웹페이지와 그다지 다르지 않기 때문에 블로그만의 특성을 맛보고자 한다면 실제로 블로그를 운영해보는 것이 지름길이다.
인터넷회사에서 홍보와 마케팅 업무를 하고 있는 나는 외국에서 블로그 마케팅이 새롭게 부각되고 있음을 알게 됐다. 그때부터 블로그와의 긴 인연이 시작됐다. 바이러스 마케팅, 토네이도 마케팅 등 다른 마케팅의 기법들은 서적이나 사례를 통해 파악할 수 있었지만 블로그 마케팅은 좀처럼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블로그가 무엇인지도 모르겠고, 이제 막 관심을 얻고 있는 분야라 좀처럼 자료나 사례도 찾기 힘들었다. 여기저기 웹사이트를 전전할수록 블로그의 실체는 점점 더 두루뭉실해졌다.
도대체 블로그의 매력이 무엇이기에 이용자 수가 급격히 늘고 있는가. 블로그를 이용한 마케팅과 비즈니스는 또 무엇인가. 게릴라 언론 매체이기도 하고 심지어 치매치료에까지 이용된다는 블로그. 쉽게 설명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얼굴의 블로그가 점점 더 나를 끌어당겼다. 일단 블로그 겉핥기를 멈추고 ‘블로거 닷컴’을 직접 이용해 보기로 했다.


블로그와의 어색한 첫 만남

흔히 블로그의 장점으로 개설과 이용이 쉽다는 점을 드는데, 실제 블로그 개설은 아주 쉽다. 막상 곤란한 상황은 설치 이후에 부닥뜨렸다. 눈앞에 나타난 블로그는 아무 내용도 없는 백지와 같았다. 시간이 흘러도 좀처럼 블로그의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블로그를 개설하기로 마음먹었다면 이미 블로그 내용의 반은 채운 것이나 다름없다. 주위 사람들에게 블로그를 추천해봤지만 초라한 겉모습과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외면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사실 그리 겁먹을 필요는 없다. 최근에는 한국에도 블로그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이 많기 때문이다. 나는 해외에서 무료로 배포하는 설치형 블로그 프로그램 중 하나를 선택해 블로그를 만들었는데, 앞서 블로거 생활을 시작한 사람들이 모여 블로그와 관련한 정보를 주고받는 위크(weblogs in korea, 줄여서 wik로 불린다. wik.ne.kr)가 큰 도움이 되었다. Rss며 트랙백이며 이름만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블로그의 기능이나 설치 과정에 생기는 문제의 해결법을 위크를 통해 배웠다.
막상 설치까지는 성공했지만 어떻게 운영하는지 헤매고 있을 무렵 다른 블로그들이 특정 주제를 가지고 글을 쓰고 있음을 알게 됐다. 내게도 주제가 필요했다. 검색엔진에서 찾아보니 이미 다양한 주제로 많은 사람들이 블로그를 개설해놓았다. 그중 ‘구글’이라는 검색 사이트를 다룬 블로그는 영어, 일어, 불어로 운영 중이었다. 예전부터 구글 사이트에 관심이 있었기에 이 기회에 한국어 구글 블로그를 개설하기로 마음먹었다. 주제를 정하고 나니 블로그의 성격도 확실해졌고 글쓰기도 한결 수월했다.
블로그 공간도 마련하고 주제도 정했으니 이제 블로그에 첫 글을 남길 차례다. 처음부터 많은 글을 올리기는 힘들기 때문에 예전에 작성해놓았던 내용을 옮겨 콘텐츠를 확보한 후, 차츰 주제와 관련한 뉴스를 스크랩했다. 블로그는 매일 들어와 일기처럼 쓰는 특성이 있기 때문에, 내용을 채우는 데 뉴스만큼 좋은 소재도 없다. 뉴스를 스크랩하다 보니 구글에 대한 관심도 점차 커져갔고 나중에는 자신의 의견이나 느낌을 덧붙일 수도 있게 됐다.



내용이 어느 정도 채워졌을 때 처음 주제 선정에 자극이 된 외국 블로그의 블로거에게 이메일로 ‘한국어 구글 블로그’의 존재를 알렸다. 단 몇 줄의 편지였지만 그는 다음 날 자신의 블로그에 내 블로그를 소개하는 글을 남겨 주었다. 블로그를 통한 외부와의 첫 소통!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지만 블로그를 시작한 보람을 느꼈다.
솔직히 블로그를 개설하고 몇 달이 지나도록 글 한 줄 띄워주는 방문자가 없었다. 실망스럽지만 묵묵히 충실한 내용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구글에 관한 국내뉴스만으로 부족해서 외국의 뉴스 사이트를 뒤져 구글 뉴스를 퍼왔다. 차츰 나의 블로그 메일링 리스트에 가입하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어디선가 나의 블로그를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이 있음을 알게 됐다.
그러던 어느 날 한 통의 메일이 왔다. 프랑스의 구글 블로거가 보낸 것으로 자신의 블로그에 내 블로그를 링크했으니, 자신의 것도 링크해달라는 내용이었다. 금방 링크를 걸고 영어로 간단한 답장을 보냈더니 자신의 블로그에 나에 대한 글을 남겨 주었다. 하지만 불어로 쓰여진 그 글에서 아는 단어라곤 Core′e밖에 없었다. 블로그에 원문을 올려놓았더니 방문자 중 한 사람이 해석을 달아주었다. 이런 일은 네티즌에게 그리 신기한 경험은 아닐 것이다. 네트워크를 통한 정보의 나눔은 블로그만의 매력이라기보다 인터넷의 강점이라 해야 할 것이다.


블로그의 일반적인 쓰임새

나는 여러 각도에서 블로그의 강점을 파악하려는 시도를 계속했다. 한정된 주제로 블로그를 운영해봤으니 이제 다른 것을 시도해볼 차례였다. 이번에는 따로 주제를 정하지 않고 일기를 쓰기로 했다. 블로그 제목도 내 별명을 붙여 ‘이장 di-a-log’로 명명했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그냥 풀어놓는 공간이라는 뜻이다. 맨 처음 남긴 글이 ‘일요일이 다 가는 소리’. 내용은 ‘후다닥~~ 후다닥~~’하는 의태어가 전부였다. 그러나 ‘후다닥 후다닥’으로 시작한 블로그가 벌써 첫돌을 넘겼다.
이처럼 주제를 갖고 블로깅 해보고, 주제 없이도 블로깅 해보며 블로그의 재미에 빠져들 즈음, 이라크전쟁이 일어났다. 언론이 연일 이라크전 소식을 머리기사로 다룰 때 ‘살람팍스’라는 필명의 인물이 블로그를 통해 전장의 상황을 생생히 전한 것이 화제가 됐다. 전쟁 덕분에 블로그가 무엇인지 관심을 갖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외국사례를 들어 블로그를 소개하는 기사들이 늘어나면서 ‘1인 언론’이라는 측면이 강조되는 경향이 있으나 실제와는 조금 거리가 있다. 물론 블로그를 개인이 주체가 되는 하나의 매체로 본다면 블로거는 그 매체의 편집장이 되는 셈이다. 블로거는 웹을 서핑하면서, 신문을 읽으면서, 일상생활을 하면서 수많은 소재를 접하게 된다. 블로거는 그 수많은 소재 중에서 선택하고 기록하면서 자신의 성향을 드러낸다. 개인적으로 관심 있는 글을 모으고, 또 자신의 관점과 차이가 있는 부분들을 숨김없이 쓴다. 편집과 검열에 대한 권한은 블로거 자신에게 주어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1인 언론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매스컴이 소개하듯이 블로거들이 사회성이 강한 이슈와 특정주제를 가진 블로그만 만드는 것은 아니다. 대다수 블로거들은 오히려 일기와 같이 주제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쓰기를 즐긴다.


다르게 이야기하기, 트랙백

블로그는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대하는 태도에서 기존 미디어와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여기서 블로그 고유의 ‘트랙백’ 방식을 살펴보자. 인터넷 게시판에서는 다른 사람의 글에 대한 기타 의견이나 추가 의견이 원래의 글과 한 장소에서 뒤섞인다. 예를 들어 안락사 문제로 토론이 벌어졌을 때 안락사를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의 글이 게시되면 그 밑에 찬성과 반대 의견이 함께 붙는다.
그렇다면 블로그의 ‘트랙백’ 방식을 이용해 의견을 올리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 누군가 자신의 블로그에 안락사에 관한 글을 남긴다. 이에 대해 다른 의견이 있는 사람은 자신의 블로그로 돌아가 안락사에 대한 글을 남긴다. 그리고 처음글과 자신의 글을 연결하는 표시를 해둔다. 이렇게 해서 처음 안락사에 대한 의견을 남긴 사람은 트랙백을 따라 이동하면서 다른 사람의 의견을 읽어볼 수 있다. 의견과 의견을 연결하며 거대한 링크집단을 만들도록 도와주는 프로토콜을 ‘트랙백’이라 한다.
트랙백 방식을 이용하면 모든 글이 자신의 블로그에 차곡차곡 쌓이기 때문에 일일이 글을 남긴 장소(각종 인터넷 게시판)를 기억하거나 다시 퍼서 보관해 두지 않아도 된다. 또 많은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보는 것처럼 답글이나 댓글이 주제에 관계없이 한 장소에 모이는 과정에서 생기는 ‘글 공해’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사실 게시판 글 가운데에는 의견 개진이 아니라 감정의 배설로밖에 볼 수 없는 것들도 많다. 열린 공간이라는 이유로 감춰진 이름 뒤에서 쉽게 배설하고 간 흔적을 보는 일은 결코 즐겁지 않다. 이런 점에서 트랙백은 인터넷의 글쓰기에 새로운 돌파구가 될 수 있다.
트랙백을 통한 의견개진은 이야기를 하는 주체가 확실하기 때문에 무책임한 배설의 흔적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혹시 배설을 했다 해도 블로그는 1인이 사용하는 공간인 만큼 노출의 정도는 미약하다.
블로그를 통해 하는 이야기는 연극의 독백 같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관객을 의식하는 방백에 더 가깝다. 블로그를 처음 만들었을 때는 혼자서 떠드는 기분이겠지만 이내 이야기꾼 주위로 사람들이 모여들고 그들 사이에 느슨하지만 질긴 연대가 형성된다.
여섯 단계만 거치면 블로그는 지구상의 모든 사람과 연결된다고 한다. 일단 블로그를 해보면 그 말이 실감난다. 이제 블로그는 내 삶의 허브다. 블로그는 이미 내가 가지고 있던 네트워크를 한 번에 크게 확장시켜 주었고, 일단 확장된 네트워크에서 새로운 잔가지가 계속 뻗어나왔다.
앞서 밝혔듯이 내가 처음 블로깅한 주제는 ‘구글’이었다. 구글 관련 글들을 모아 게시하는 수준의 블로깅에서 단계를 밟아 비즈니스 검색서비스, 검색엔진 마케팅, 검색엔진 최적화로 관심의 영역이 넓어져 결국 현재 내가 하고 있는 마케팅 홍보 업무와 연결됐다.
개인적으로 블로그의 위력을 실감한 것은 ‘촛불 시위’다. 미군 장갑차로 죽은 두 소녀를 추모하기 위해 사람들이 거리에서 촛불시위를 벌이고 있을 때 한 시민단체가 이 내용을 자세히 소개한 영문편지를 작성했다. 나는 이 글을 입수해 외국의 블로거들에게 띄웠다. 며칠 후 웹마스터라고 밝힌 한 외국 네티즌이 답장을 보내왔다. 자신은 한국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몰랐다며 국가를 대신해 사과한다는 내용이었다. 편지의 마지막 말은 “Thank you for openning my eyes”였다.


블로그, 느슨하지만 질긴 네트워크

또 다른 일화는 내가 그토록 멋지다고 생각해온 구글 로고 디자이너로부터 직접 메일을 받은 것이다. 구글은 관례에 따라 특별한 날을 기념해 구글 메인 페이지에 있는 구글 로고를 바꾸는데, 그 로고를 디자인한 사람이 한국인이라는 사실도 블로깅을 통해 알게 되었다. 한국어 구글 화면에 몇 개의 오자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구글사로 메일을 보냈더니 놀랍게도 구글 로고 디자이너가 직접 답장을 보내왔다. 그는 자신이 한국인 2세를 제외하면 구글에서 근무하는 유일한 한국인이라고 했다. 한글로 메일을 쓰는 것이 익숙지 않은 점에 대해 이해를 구했고 한국에도 구글 블로그가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는 내용이었다.
블로그는 인터넷 게시판에 글을 쓸 수 있는 수준이라면 누구나 만들 수 있다. 요즘에는 한국에서도 블로그 관련 서비스가 다양하게 제공되고 있기 때문에 블로그 개설이 훨씬 쉬워졌다.(상자기사 참조)
처음에는 다른 이들의 블로그를 구경하는 것으로 시작하지만 일단 개설하고 나면 블로그의 용도는 무척 다양하다. 하루를 시작하는 글을 적어보기도 하고 하루를 마감하는 일기를 적기도 한다. 영화평이나 독후감을 올려놓고 같은 영화나 책을 본 사람들로부터 답글을 기대하는 재미도 있다. 블로그의 내용은 부부의 육아일기일 수도 있고, 교사와 학생들이 만드는 학교이야기일 수도 있다. 경영자의 솔직한 목소리를 담는 블로그는 어떤가. 관심분야의 정보를 한곳에 저장해 두는 일종의 ‘창고’로 활용해도 된다.
지금 이 글을 다 읽어가는 시점에서 문득 블로그를 개설하고 싶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면 당장 시작할 것을 권한다. 블로그를 운영하다 보면 자신만이 느끼는 블로그의 매력을 이야기할 날이 올 것이다. 그때쯤 해서 나름대로 블로그의 정의와 매력을 다른 사람에게 설파하는 ‘블로그 바이러스’가 된 자신을 발견할지도 모르겠다. 이 글은 여기서 끝맺지만 남은 이야기는 나의 블로그에서 계속된다.

블로그 개설 도와주는 국내 사이트


블로그는 홈페이지에 비해 텍스트 중심으로 운영하기 좋고, 최근의 글부터 보여주며, 관리하기 쉽다는 점에서, 칼럼·일기 등을 지속적으로 쓰고 싶은 사람들에게 아주 유용한 도구이다. 국내에서도 이제는 블로그를 쉽게 무료로 개설할 수 있다.

포털 사이트인 NATE, HANMIR, YAHOO, NAVER, EMPAS에서 블로그 서비스를 개시했다. NAVER의 경우 blog라는 명칭 대신 paper라는 명칭으로 서비스 중이다.

blogin.com, blog.co.kr는 전문적으로 블로그를 서비스하는 대표적인 사이트이다. 이런 사이트들은 외국의 블로그처럼 간결하면서도 꼭 필요한 요소의 서비스를 중점으로 하고 있다.

그 외 크레이지블로그, 엔토이, 인티즌마이미디어 등에서는 홈페이지와 유사한 형태로 개량되었거나, 사진 업로드를 목적으로 하거나, 팬과 스타를 이어주는 데 사용할 수 있는 개성 있는 블로그를 서비스하고 있다. 설치형 블로그를 이용하는 경우가 아니면 대다수의 블로그 서비스는 서비스 해당 사이트에 회원 가입을 해야 이용가능하다.

김유진·자유기고가 (끝)


글: 양석원 뉴21커뮤니티 홍보 이사 ejang@new21.com


혼잣말도 하고 방백도 하는 이장님의 이야기 ‘이장 di-a-log’(www.ejang.pe.kr)와 구글을 주제로 한 구글로그(www.google.pe.kr)를 만든 블로거. 현재 뉴21커뮤니티(www.new21.com) 홍보·마케팅 이사로 있다.

 




[특별부록|디지털시대의 글쓰기]


온라인 세상에서 살아남기

커뮤니티 세계의 글쓰기 법칙


커뮤니티는 공동의 놀이터다.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몇몇 사람들과는 아주 특별한 관계를 쌓기도 한다. 좋은 커뮤니티는 들어가는 게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

정보를 찾아 인터넷을 돌아다니다 보면 자연스럽게 커뮤니티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고 남의 글을 읽기보다 쓰고 싶어지며, 다른 사람과 좀더 적극적으로 관계를 맺고 싶어진다. 이럴 때 가장 좋은 방법은 커뮤니티 게시판에 자주 글을 띄우는 것이다.
나는 소니 PDA 사용자 커뮤니티인 클리앙넷(clien.net)의 운영진으로 활동하고 있다. 운영진 업무의 절대 시간은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을 관리하는 데 사용된다. 회원수가 1만2000명이 넘는 대형 커뮤니티에서 하루에도 수백 건씩 올라오는 글을 읽다 보면 저절로 온라인 커뮤니티의 글쓰기 문제를 고민하게 된다. 인터넷 글쓰기 중에서도 커뮤니티 글쓰기는 또 어떻게 다른가. 여기서 커뮤니티의 정의부터 차근차근 살펴보기로 하자.
커뮤니티(community)는 보통 인터넷을 사용하는 사람들 중 특정하게 제한된 사람들의 온라인 네트워크를 뜻한다. 기존 인터넷이 ‘정보’를 중심으로 구성된 망이라고 한다면, 커뮤니티는 정보와 함께 ‘인간적 관계’가 존재하는 곳이다. 커뮤니티의 가장 큰 특성은 사용자들의 유기적인 인간관계를 목적으로 만들어졌다는 데 있다. ‘그곳에 사람들이 왜 접속하는가’라고 물어서 ‘같은 취미를 가진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하기 위해’라고 대답한다면 그곳이 바로 커뮤니티다. 이런 이유로 커뮤니티는 흔히 ‘정보공동체’라고 번역한다.
좋은 커뮤니티에서는 인간적인 관계가 형성된다.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일상적인 생활 공간과 마찬가지로 몇몇 사람들과 아주 특별한 관계를 쌓아가기도 한다. 사실 좋은 커뮤니티는 들어가는 게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
내가 클리앙넷에 가입한 동기는 PDA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였다. 한국에서 PDA 사용이 일반화되지 않을 때여서 PDA 사용자 모임을 통해 정보를 얻는 것이 가장 빠르고 편리했다. 가입 후 4개월 동안 PDA를 사용하다 궁금한 점이 생기면 질문/답변 코너에 올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PDA에 관심이 많다 보니 꼭 내 기종에 국한하지 않고 다른 기종에 대해서도 알고 싶었다. 이것저것 기종을 바꿔가며 관련 지식을 익혀나간 덕분에 어느새 새로 가입한 사람들의 질문에 답변을 해줄 수준이 됐다. ‘감사합니다’라는 한 줄 글에 힘이 생겨 더욱 열심히 활동했다. 차츰 커뮤니티와 나는 단순히 정보를 주고받는 단계를 넘어 자유게시판을 통해 개인적인 이야기를 주고받는 관계로 발전했다. 처음 오프라인 모임에 참여한 지 3개월, 가입한 지 8개월쯤 지나 나는 클리앙 운영진에 합류했다.


좋은 글이 되기 위한 필요조건

커뮤니티에서 ‘좋은 글’이란 무엇인가. 커뮤니티를 운영하면서 ‘좋은 글’의 특징을 다음 5가지로 정리해보았다.

1. 자신이 잘 투영된 글 자신의 생각과 입장을 명확히 밝히는 글이 좋다. 커뮤니티는 개인의 글과 자료가 모여서 만들어진다. 따라서 자신이 가진 정보와 자료들이 자신을 투영할 경우, 효과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된다. 꼭 그 커뮤니티의 주제와 내 글의 주제가 일치할 필요는 없다.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게임 이야기를 쓰면서, 자동차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자동차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만들어간다. 자신이 가장 즐겨 하고 잘하는 이야기를 지속적으로 써나간다면 커뮤니티 진입은 일단 성공적이다.

2. 누구나 읽기 쉬운 글 오프라인 모임도 있지만 커뮤니티의 주무대는 온라인이다. 당연히 어떤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은 대부분 ‘그 사람이 쓴 글’의 내용으로 제한될 수밖에 없다. 내가 작성한 글로 평가받기 때문에 적어도 커뮤니티 내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표현을 사용해야 한다. 자신만 이해할 수 있는 표현이나 앞뒤가 맞지 않는 문맥 등 다듬어지지 않은 글은 결국 사람들을 당신의 글로부터 떠나게 만든다. 아무도 읽지 않는 글이 쌓여가다 보면 커뮤니티 안에서 겉돌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3. 나를 대변하는 표현 방식 이모티콘(문자, 기호의 조합을 통해 얼굴을 형상화하여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을 활용할 수도 있고, 자신만의 고유한 말머리, 말꼬리를 이용하기도 한다. 또는 자신의 글에 독특한 형식을 부여하여 그 형식을 유지할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자연스럽게 자신을 드러내는 글쓰기 방식이 효과적이다. ‘이 글은 누구의 것’임이 확실할수록 커뮤니티에서 더 많은 사람이 기억해준다.


4. 게시판 규칙 준수 커뮤니티들은 나름대로 글쓰는 방법에 대한 명문화된 규칙을 가지고 있다. 대부분의 커뮤니티에서 성적 표현, 욕설, 게시판 용도에 맞지 않은 글, 연속적으로 한 사람이 여러 개의 글을 올리는 ‘도배’ 등이 금지되어 있다. 이런 규칙들은 대개 이전 VT통신 커뮤니티에서부터 유래된 것이다. 그 외에도 커뮤니티만의 예절이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커뮤니티에 따라서는 외계어나 하오체가 일상적인 곳이 있지만, 클리앙넷은 이런 어투를 사용하지 않는다. 또 용량이 큰 자료를 업로드하지 않는 것, 사진을 올릴 때 가능하면 한 번에 다 올려주는 것 등을 기본으로 하는 곳도 있다.

5. 성실한 글 수많은 사람들이 드나들고, 하루에도 수백 개의 글이 올라오는 커뮤니티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의 글에 충실한 것이다. 대충 쓴 글은 대충의 관심밖에 끌지 못한다. 최선을 다해 쓰는 것이 기본이다. 또한 커뮤니티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장소라고 볼 수 있으므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소중히 하고, 인사성이 밝고 명랑하게 지내야 한다. 커뮤니티는 실제 사회와는 다르게 공정하다.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베푼 만큼 돌아온다.


소재는 무한대, 그러나 정확함이 생명이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의 좋은 글쓰기는, 커뮤니티가 전면에 내세운 주제에 관한 글을 잘 쓴다는 것을 의미하기보다, 다른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는 글을 쓴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커뮤니티에서 다룰 수 있는 주제는 무한대로 자유롭다. 오히려 문제는 쓰려고 하는 주제를 위한 소재를 어떻게 수집하고 어떤 형식으로 쓰는가다.
나의 가방에는 핸드헬드 PC 계열의 PDA 모디아가 늘 들어 있다. 바로 켜서 사용할 수 있고 키보드가 달려 있기 때문에 뭔가 갑자기 떠올랐을 때 그 내용을 정리하는 데 편리하다. 작은 디지털 카메라도 하나 들어 있는데, 역시 재미있는 것을 보거나 마음에 드는 풍경이 나타나면 즉시 촬영한다.
상황이 여의치 않아 PDA에 적기 어렵거나 마음에 드는 음악을 우연히 들었을 때를 위해 녹음 기능이 부가된 MP3 플레이어도 하나 가지고 다닌다. 일상적인 이야기들은 사실 한번 떠오른다고 해도 쉽게 잊어버리게 되므로 이런 도구들의 도움을 얻는 것이 좋다. 나는 이렇게 틈틈이 기록해두는 것을 ‘시간을 잡아두는 방법’이라고 이름붙였다.
연재 형식으로 길게 써보고 싶은 주제가 있다면, 기본적인 레이아웃부터 한다. 나는 비디오게임이나 음악에 관한 글을 주로 쓰는데, 이때 글의 형식을 미리 정해두고 일정한 기준에 의해 글을 쓴다. 이로써 일관성이 생기고 다음날 이어서 쓰거나 기간을 일정하게 두지 않더라도 글 자체에 통일성이 생긴다. 음악에 관한 글은 감정적인 내용들과 앨범에 대한 분석이 주를 이루게 되기 때문에, 대개 처음에는 내 감상을 적고 이어 앨범의 곡들, 마스터링, 앨범에서 아쉬운 부분들과 장점을 정리하는 방식으로 글을 구성한다. 만화 리뷰도 비슷하게 감상과 구성, 연출과 그림체 순으로 이야기를 펼쳐간다.
누군가의 글을 읽다가 또는 그냥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적을 때도 있다. 이런 글에는 특별한 형식을 두지 않는다. 며칠 동안 바빠서 글을 쓰지 못했다면 근황을 간단히 몇 줄로 적어나가는 경우도 있다. 신변잡기적인 이런 종류의 글에는 많은 내용을 포괄할 수 있는 제목을 붙인다.
온라인 글쓰기의 특징을 흔히 ‘즉흥성’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각종 리뷰나 기획글을 쓸 때 ‘명확하게’ 전달하고 싶은 주제를 뽑아내려면 먼저 소제목을 나열하고 글을 작성한다. 지금 이 글 역시 이런 방식으로 작성됐다. 이 글에 사용된 소주제를 살펴보자. 인터넷과 온라인 커뮤니티, 온라인 커뮤니티에서의 글쓰기를 관찰하는 입장, 자신이 생각하는 온라인 커뮤니티의 글쓰기, 자신에게 맞는 커뮤니티 찾기, 커뮤니티에서 글쓰기, 커뮤니티에서 작성하는 글이 갖춰야 할 요건, 좋은 글을 쓰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 등등.
온라인 글의 생명은 정확성이다. 인터넷의 특성상 정확한 정보를 확인하지 않고 쉽게 글을 작성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쉽게 글을 쓸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정확해야 한다. 만약 얻은 정보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확실하지는 않습니다’라고 명시해주는 것이 좋다. 얻어온 정보는 내용의 정확성뿐 아니라 출처의 정확성에도 신경 써야 한다. 온라인에서는 저작권을 보호하기 힘들기 때문에, 최소한 정보의 출처를 명시하는 것이 예의다. 출처가 다른 온라인 커뮤니티나 홈페이지일 경우 간단히 사이트 링크만 걸어줘도 충분하다.


쓰기보다 관리가 어렵다

온라인에서는 글을 다 썼다고 끝이 아니다. 올린 글에 대한 피드백이 들어오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것이 커뮤니티의 핵심 기능이다. 자신이 쓴 글이지만 가끔 다시 들어가 문제 부분을 수정하고 수정 여부를 명시해주는 것이 좋다. 새롭게 달린 코멘트에는 최대한 성실하게 답하도록 한다. 관심을 가져준 사람들의 글이므로 잘 관리할 필요가 있다. 내 경우 글을 쓴 다음날 꼭 확인한다.
때로는 자신의 글에 달린 답글이 상식적이지 않고 감정을 자극하는 비난일 경우가 있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개인정보를 알리지 않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에, 책임감 없이 상대방의 글에 감정적이거나 비이성적인 답글을 달아놓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커뮤니티가 할 수 있는 조치는 글을 삭제하거나, 문제를 일으키는 이용자의 접근을 막는 것이 고작이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행동은 어떤 커뮤니티에서도 환영받지 못한다. 사람들은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보다는 그 표현 방식에 먼저 기분 나빠할 것이다. 커뮤니티는 공동의 놀이터다. 논리적이고 친절하며 명확한 표현을 하는 것이 좋다. 터무니없는 비난의 글에 대해서는 정중하게 삭제를 요청하거나 운영진에게 신고하도록 한다.
온라인상의 커뮤니케이션은 기본적으로 화면에 있는 글과 그림으로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자신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방향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어떤 글이 다른 사람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면 그런 행동이 반복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대개 실수한 것을 인정하는 사람일수록 커뮤니티에 빨리 적응한다. 명확한 논지를 가진 타당한 비판은 수용하고 자신의 의견을 후술한다. 어떤 비판이나 반론이 내 글과 별로 연관이 없다고 생각되어 논의하고 싶지 않다면 ‘저는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제 글의 목적과는 이러이러하게 어긋납니다’라고 입장을 밝히는 것이 좋다.
댓글을 통한 피드백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다양한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한다. 면대면(face to face)과는 다르게 글로 하는 이런 대화가 서로를 이해하는 데 있어 훨씬 유용할 수도 있다. 어떤 회원들은 마음에 드는 글을 다른 온라인 사이트나 개인 홈페이지에 옮겨놓아도 되느냐고 물어보기도 한다. 내 글이 다른 사람에게 읽힐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즐겁고, 내 글이 나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읽힐까를 생각해 보는 것이 재미있다.
사실 커뮤니티에서 글쓰기는 실질적인 보상과는 관계없다. 가장 기본적이며 가장 큰 보상은 다른 사람의 글을 읽고, 이해하고, 나를 이해시키는 작업 자체의 기쁨이다. 커뮤니티에서 글쓰기는 커뮤니티를 이해하는 과정이자 과정의 결과물이 된다. 자신의 글이 곧 자신의 얼굴이고, 연결고리다. 다른 만남에 비해 단지 글과 말로만 이루어지는 관계맺기이니 오히려 쉬울 수도 있다. 자신이 생각하는 ‘좋은 커뮤니티’를 찾아 편하고 솔직하게 글을 쓰다 보면 새로운 인간관계가 자연스럽게 형성될 것이다.

커뮤니티에서 개성 찾는 몇 가지 방법


고유의 이름 아이콘 갖기 자생적으로 만들어진 커뮤니티에서는 이름 아이콘이나 말머리, 말꼬리 등의 사용을 허용하고 있다. 이름 아이콘은 게시판 작성자의 이름을 이미지로 표현하는 것으로 약 100×50픽셀 정도로 제작된다. 자신이 직접 만들 형편이 아니라면 주위에 부탁한다. 작은 gif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할 경우 움직이거나 색이 변화하는 효과도 줄 수 있다.

아이콘 외에 말머리나 말꼬리로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도 있다. 게시글의 맨 위나 맨 아래에 일정한 문구를 지속적으로 삽입하는 것인데 예를 들어 ‘꿈을 찾는 사람, 자신의 아이디’ 하는 식으로 온라인 명함처럼 사용한다. 홈페이지 배너나 자신의 이메일에 활용하는 명함 이미지 등을 붙여두는 사람도 있고, 간단한 텍스트와 이모티콘 조합으로 심플함을 추구하는 이들도 있다.

커뮤니티 터줏대감 되기 커뮤니티에서는 어떤 사람이 인기 있는가. 커뮤니티에서 특정 역할을 찾아내면 쉽게 터줏대감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커뮤니티 작가’는 카툰, 칼럼, 소설, 유머 등 자신이 취미로 하고 있는 활동을 적극 연재하는 사람이다. 연예, 정보통신, 시사 등 각 분야에서 최신 정보를 퍼오는 사람은 ‘뉴스메이커’, 특정 주제에 대해 백과사전식 지식을 보유하면 ‘전문가’로 통한다. 그 주제에 대해 궁금한 점이 있으면 당연히 ‘전문가’를 찾는다.

새로 가입한 사람을 포함해 최대한 많은 사람들의 글에 답글을 올리는 사람은 ‘마당발’이 될 자격이 있다. 마당발의 기본 자질은 인사성과 명랑함이다. 커뮤니티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앞잡이’가 필요하다. 앞잡이는 말 그대로 커뮤니티 내에서 주관하는 모든 행사에 앞장서는 사람이다. 오프라인 모임에 빠지지 않고 ‘번개’(비정례적인 오프라인 모임)를 주도해서 활성화하고 정모에 나온 사람들을 규합해 논다.

김유진·자유기고가 (끝)

 


글: 김상윤 클리앙넷 운영진 miseryrunsfast@hanmail.net

‘투덜거리는 사람’이라는 뜻의 misery에, ‘달린다’는 뜻의 runsfast를 붙여 만든 miseryrunsfast라는 아이디를 사용하고 있다. 소니 PDA Clie 동호회인 클리앙넷(clien.net) 운영진. 클리앙넷은 2001년 6월부터 활동을 시작한 커뮤니티로 현재 회원수가 1만2000명에 달한다.

 



[특별부록|디지털시대의 글쓰기]


나의 온라인 글쓰기 이력서


부글거리는 욕망의 배출구


글쓰기의 핵심은 ‘불특정 다수’의 ‘낯선 사람들’과 열린 마음으로 대화’를 나눌 만한 ‘인간에 대한 예의’를 갖추고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다.

흔히 ‘디지털 글쓰기’라 함은 곧 ‘온라인 글쓰기’다. 왜냐하면 책이라는 아날로그 매체를 통해 독자들에게 전달될 것이 분명한 이 글조차 나는 워드프로세서라는 디지털 도구를 이용해 디지털 방식으로 쓰고 있으며, 또한 이메일이라는 디지털 매체를 이용하여 편집자에게 전달할 것이고, 나아가 이 글이 종이에 인쇄되기까지 복잡한 출판과정 또한 대부분 디지털 방식에 의해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디지털 방식으로 글을 쓴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렇게 엄밀하게 용어를 정의할 때조차 ‘온라인 글쓰기’는 기본적으로 ‘디지털 글쓰기’를 전제할 수밖에 없으며, ‘온라인 글쓰기’의 중요한 특징으로 지적할 수 있는 내용 중에는 그것이 ‘디지털 글쓰기’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
내가 처음 워드프로세서를 사용해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1990년 봄부터다. 당시 대학 한 학기 등록금을 훨씬 웃돌던 20메가바이트짜리 하드디스크가 달린 AT급 컴퓨터를 구입하려고 결심했을 때, ‘온라인 글쓰기’의 필요성이나 전망 따위는 막연하게라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저 첨삭·수정이 자유로운 타이프라이터가 필요했을 뿐이다. 이미 오래 전 골동품이 되어버린 1200bps짜리 모뎀이 어디에 쓰이는 물건인지도 알지 못했고, 굳이 알 필요도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올 일이지만, 그해 가을 어느 후배가 제 모뎀의 성능을 큰 맘 먹고 2배쯤 향상시키면서 먼저 쓰던 것을 버리는 셈치고 내 컴퓨터에 달아 주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그 후로도 상당기간 ‘온라인 매체’가 존재하는지도 모르고 살았을 것이다. 내 또래의 많은 사람들이 꽤 오래도록 내가 상용통신망을 사용하는 것을 기이한 취미쯤으로 여기며 신기해 했다.
실은 나 역시 텔넷 기반의 ‘온라인 매체’ 환경이 웹 기반의 인터넷으로 눈 깜빡할 사이에 돌변하지만 않았어도 쓸 만한 워드프로세서 프로그램을 작동시킬 수 있는 정도의 기본적인 사양(20메가바이트 저장 용량의 16비트 컴퓨터로도 HWP 1.5버전으로 글을 쓰고 공개 소프트웨어였던 ‘이야기’를 돌려 통신을 하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었다)만 갖춘 컴퓨터도 여전히 만족스러웠을 것이다. 그만큼 나는 문화적으로 ‘보수적’이었다. 좀더 솔직히 말하자면 나의 그 ‘보수성’은, 하루가 다르게 업그레이드되는 매체 환경에 발빠르게 적응할 수 없는 가난한 경제적 능력에 기인했다.


생각의 속도를 따라가는 손가락

‘디지털 매체’를 이용하여 일상적인 글쓰기를 하리라고는 꿈도 못 꾸던 그때도 내게는 첨삭·수정이 자유로운 타이프라이터인 워드프로세서가 필요했고, 다시 말해 ‘디지털 방식’으로 글을 써야 할 이유가 분명히 있었다. 무슨 하고 싶은 말이 그리도 많았는지 머릿속에서 부글거리는 생각들을 문자로 옮겨놓고야 말겠다는 욕망은 수많은 밤 빈 종이와 씨름하게 했다. 그러나 날이 훤히 밝을 무렵 남은 것이라곤 원래 쓰려던 내용의 고작 10분의 1도 안 되는 분량의 정서된 종이 몇 장과 그 10∼20배쯤 되는 쓰다 버린 파지들, 밤새 몇 장 되지도 않는 분량을 최소한 서너 번 이상 정서해서 베껴 쓰느라 뻣뻣하게 굳어버린 오른팔의 묵직한 통증이었다. 그리고 몸이 먼저 지치지만 않았다면 며칠 밤이라도 쏟아내야만 직성이 풀릴 듯 도무지 사그라질 줄 모르고 오히려 감질만 나버린 글쓰기의 욕망들이었다.
게다가 내 오른팔을 더 지치게 만드는 것은 머릿속의 생각이 달려나가는 속도를 손이 따라가지 못하면서 생긴 짜증이었다. 다른 대책이 필요했다. 그리고 컴퓨터를 들여놓은 지 불과 몇 달 만에 어림잡아 200자 원고지 3000장 분량의 글을 써내고는 본전은 뽑은 셈이라고 자족했다. 대부분 당시 활동하던 국어운동학생회와 관련한 ‘정치적’ 내용의 문건이었고 마침 공부하던 영어책을 우리말로 옮겨 정리한 문서와 부업 삼아 선배의 자료정리를 돕기 위해 작성한 문서도 꽤 있었지만, 실은 소설을 써 보고 싶다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이처럼 디지털 방식의 글쓰기가 아날로그 방식의 글쓰기와 근본적으로 다르게 다가왔던 것은, 어느 워드프로세서 프로그램의 편집메뉴에도 빠지지 않고 들어 있는 ‘오려두기’ ‘복사하기’ ‘붙이기’ ‘지우기’ ‘바꾸기’ 따위의 기능 덕분이었다. 첨삭·수정할 부분이 생길 때마다 다시 새 종이에 일일이 베껴서 정서하지 않아도 됐고, 일단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문장이 되든 안 되든 생각이 달려나가는 속도 그대로 화면에 띄워 곧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
‘디지털 글쓰기’는 처음부터 어느 정도 정리된 생각을 웬만큼 정확한 문장으로 만들어내야 한다는 글쓰기의 부담을 한결 덜어 주었다. 생각하고 나서 말하기보다 말을 하면서 생각을 정리하는, 말 그대로의 의미에서 ‘대화’ 방식으로 글을 쓰는 것이 가능했다. 글쓰기가 본질적으로 ‘대화’라고 할 때, 이러한 변화는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는 (타인뿐 아니라 자신과의) ‘대화’의 맥락이 고스란히 글로 옮겨질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글쓰기는 더 이상 정리된 문장으로 자신의 생각을 옮겨놓을 수 있는 훈련을 받은 일부만이 독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대화’의 계기와 맥락에 열려 있는 모든 사람의 일상일 수 있으며, ‘디지털 글쓰기’의 출현으로 글쓰기는 이제 ‘능력’이 아니라 ‘태도’의 문제가 됐다.


채팅, 전자게시판, 그리고 온라인 글쓰기

‘디지털 글쓰기’의 특성이 가장 분명히 드러나는 것이 ‘온라인 글쓰기’다. 디지털 기호를 이용한 통신은 지극히 일상적인 대화까지도 고정된 문자 텍스트의 형태로 존재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예컨대 채팅을 보라. 두 사람만이 주고받는 지극히 사적인 이메일을 쓸 때조차 우리는 편지라는 형태의 격식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고, 정리된 글을 써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보다 더 많은 사람들, 심지어 개인적으로 잘 알지도 못하는 불특정한 사람들 앞에 분명히 ‘글’로 자신을 표현하면서도 우리는 그것을 ‘글쓰기’라고 의식하지 않는다. 설령 채팅 내용이 누군가에 의해 ‘갈무리’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해도 오히려 녹음기 켜놓고 하는 대화보다 훨씬 자유롭다.
나의 첫 ‘온라인 글쓰기’는 채팅이었다. 물론 그때나 지금이나 그것을 본격적인 의미에서 글쓰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글쓰기가 아니었다고 할 만한 근거를 찾을 수도 없다. 그것은 비단 문자 기호의 형태로 나의 사상과 감정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했으며 내가 그것을 따로 보관하지 않았을 따름이지 적어도 어느 순간 문자 텍스트의 형태로 호스트컴퓨터에 분명히 저장되어 있다는 기술적인 측면에서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실은 그것은 지극히 현상적인 일면에 지나지 않는다.
좀더 솔직히 말하면 그동안 이러저러한 전자게시판들에 그때그때 온라인으로 써 올렸던 무수한 쪽글들과 때로는 채팅실에서, 때로는 메신저를 이용해 떠들었던 토막 대화들 사이의 차이를 잘 모르겠다. 다시 말하자면 전자 게시판을 이용한 글쓰기 또한 내게는 (채팅이 그 자체로 글쓰기는 아니었다고 말할 때의 의미에서) ‘본격적인’ 글쓰기는 아니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내가 전자게시판에 썼던 내용을 정리해서 엮은 에세이집 ‘나는 남자의 몸에 갇힌 레즈비언’에 담긴 글들, 최소한 그 글의 원자료가 되었던 단행본 5∼6권 분량의 텍스트들은 ‘글’이 아니고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게다가 나는 전자게시판에 접속하여 온라인 상태에서 쓰는 글들과 출판 지면에 발표하기 위해 워드프로세서 프로그램을 열어 ‘본격적으로’ 쓰는 글 사이에서도 별다른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 따지고 보면 차이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그 차이는 글에 대한 책임성이라든가 또는 글의 무게에 기인한 ‘태도’의 차이는 아닌 것 같다. 1991년 6월 전자 게시판에 처음 글을 쓰기 시작한 이래, 단 한 번도 ‘익명’으로 글을 써 본 적이 없다. 언제나 나의 인격적 정체성을 걸고 글을 썼으며 내 글에 대해서든 또는 내 글을 읽는 독자들에 대해서든 ‘게시판 사용자 똥개’의 책임성이 ‘평론가 변정수’의 책임성보다 더 가벼워야 할 이유는 기실 없다.
‘온라인 글쓰기’ 쪽이 긴장감이 덜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차이는 순전히 출판매체의 특성이 강제하는 분량의 제한에 따른 긴장에서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또는 그것은 양방향적인 피드백이 상당히 제한적인 출판매체의 특성상 텍스트의 ‘자기 완결성’에 대한 강박의 차이인지도 모르며, 글쓰기의 태도나 매체 특성과도 무관한 직업적 거래 관계에서의 신뢰와 관련된 ‘마감’의 존재에 기인한 것일 수도 있다.
그 차이가 분명 ‘사소한’ 것은 아니겠지만, 내가 직업적으로 쓰는 글도 ‘온라인 글쓰기’와 별반 다르지 않은 ‘아마추어리즘’에 기반하고 있다. 또 그러한 의미에서 내게 ‘본격적인’ 글쓰기란 애당초 존재할 수 없다. 굳이 ‘본격적’이라는 수사를 붙이려면 다분히 시간 때우기용 잡담에 지나지 않던 채팅실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전자게시판에 본격적으로 나의 의견을 개진하기 시작한 때가 적당할 것 같다. 나는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성실하게 쓰려고 애쓸 뿐이다.


내 안에 갇힌 욕망을 배설하다

나는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논박하거나 설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불러모으기 위해 글을 쓴다. 다시 말해 내 견해를 밝히고 그럼으로써 ‘지식인 사회’의 동의를 구하거나 ‘대중 사회’를 설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대다수 사람들과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왕따’를 당할까 두려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한마디 항변도 해보지 못한 채 스스로를 질식상태로 몰고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들에게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적어도 한 명은 있구나’라고 숨통을 틔워 주고 싶다는 소박한 소망에서 내게 주어진 발언의 기회와 지면을 활용할 뿐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전자게시판에서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는 ‘온라인 글쓰기’와 제 골방에서 ‘일기장’에나 끄적일 글과 제대로 격식을 갖춰 불특정 다수 앞에 내놓는 ‘본격적인’ 글쓰기를 구별하려는 시도는, 글쓰기를 일상에서 떼어내 특별히 훈련을 받은(실은 그럴 만한 사회경제적 능력을 가지고 있고 문화적 자본을 가지고 있는) 계층이 독점하려는 일종의 역사적 음모로 보인다.
어쨌든 불특정 다수에게 접속을 허용하는 전자게시판의 등장은, ‘발표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기준을 무색케 했다. 애당초 ‘발표할 만한 가치가 없는’ 글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여전히 제한된 자원을 경제적으로 활용해야 하는 출판매체의 입장에서 상품화할 수 있는 글과 그렇지 않은 글이 존재할 뿐이다. 그렇듯 ‘온라인 글쓰기’는 제도화된 상품 논리로부터 글쓰기를 해방시켜 자기 표현 욕망 또는 타인과 소통하고자 하는 욕망의 일상적인 발현이라는 글쓰기의 본원적인 모습을 드러나게 해주었다. ‘이르고자 할 바가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펴지 못할’ 사람은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없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진단은 반은 맞고 반은 그르다. 예컨대 내가 드나드는 ‘온라인 커뮤니티’가 개방적으로 운영되기를 원하는 까닭은 그 공간을 매개로 더 많은 ‘나와 닮은’ 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내가 때때로 그 개방성에 무기력해지는 까닭은, 그 대로를 ‘나와 닮은’ 사람들이 아닌 ‘나와 닮은’ 사람들을 적대시하는 사람들이 차지해버리기 때문이다. 오해하지 말지니, 나는 ‘나와 닮지 않은’ 사람들로부터 ‘나와 닮은’ 사람들이 존중받기를 원하는 만큼 ‘나와 닮지 않은’ 사람들을 존중한다. 내가 그들을 혐오하는 것은 단지 그들이 나와 닮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들이 나를, 혹은 우리를 적대시하고 심지어 우리가 우리를 만나기 위해 운영하는 커뮤니티에서 노골적으로 우리에 대한 혐오감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도대체 누가 그들에게 타인의 존재를 혐오할 ‘자유’를 주었단 말인가. 나는 절망한다.


사이버 폭력과 온라인 디스토피아

이러한 부작용을 ‘온라인 매체’의 특성이나 또는 ‘디지털 글쓰기’의 함정으로 환원시켜, 자유가 방종을 불렀다는 식으로 재단하는 것은 심각한 착오다. 인터넷에서 이런 행위가 벌어지는 이유는 인터넷이 ‘자유로운 의사 표현의 장’이어서가 아니라 이러한 폭력에 대해 뚜렷한 제재 수단이 없이 무방비 상태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일상적으로 접촉할 일이 없는(문제가 생겨도 안 보면 그만인) ‘낯선 사람들’을 상대로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인터넷 게시판에서 행한 발언에 대해 어떠한 형태로든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한다면 게시판에서의 태도는 훨씬 더 신중해질 것이다. 혹은 동창회처럼 ‘대면 관계’를 수반하는 커뮤니티의 게시판이라면 다른 사람이야 어떻게 생각하든 말든 자기주장만 되풀이하는 ‘투정’을 좀처럼 보기 어려워질 것이다. 물론 이런 현상이 인터넷만의 고민은 아니다. 평소 아무리 점잖은 사람도 운전대만 잡았다 하면 ‘입에 걸레를 물게 되는’ 까닭은 길바닥에서 스쳐지나가는 다른 운전자들이 다시 부딪칠 일이 거의 없는 ‘낯선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글쓰기라는 행위의 본질이 자신, 나아가 타인과의 성실한 ‘대화’라면 그것이 원고지나 편지지에 펜으로 꾹꾹 눌러 정서하는 아날로그 방식이든 날아갈 듯 가볍게 자판을 두들기며 손쉽게 첨삭·수정을 되풀이하는 디지털 방식이든 아무런 차이가 없다. 글쓰기의 핵심은 ‘불특정 다수’의 ‘낯선 사람들’과 열린 마음으로 ‘대화’를 나눌 만한 ‘인간에 대한 예의’를 갖추고 있느냐 없느냐, 또는 그 이전에 자신의 내면과 진지하게 마주할 만큼 스스로에게 정직한가일 것이다.
불행히도 우리는 나와 다른 가치관, 다른 삶의 방식을 가진 사람들과 공존하기 위한 대화법을 배우지 못했다. 아니 그냥 배우지 못한 것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기존 질서에서 벗어난 생각이나 삶의 방식을 억압하기만 했다. 인격을 가진 사람으로서 존중받아 본 경험이 없는 사람이, 더구나 일상적으로 대면할 가능성이 없으며 따라서 아무렇게나 대해도 손톱만큼도 뒤탈이 없을 다른 사람의 인격을 존중하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더 이상 글쓰기가 특별한 능력을 훈련받은 일부 계층의 전유물이 아닌 ‘온라인 매체’ 환경에서도 여전히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는, 그저 인격을 가진 사람이라면 당연히 갖추고 있어야 할 태도의 훈련이 필요하다. 그리고 어쩌면 그러한 태도가 몸에 배도록 훈련하는 것은, 글쓰기의 능력을 훈련하는 길보다 훨씬 더 어렵고도 긴 시간을 요구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과정을 건너뛰거나 우회한다면 ‘디지털 글쓰기’의 편리함도, ‘온라인 글쓰기’의 개방성도 한낱 위험한 몽상에 머무르고 말 것이다. 결국 ‘온라인 글쓰기’의 미래는 거기에 참여하는 이들이 그 과정을 통해 얼마나 성숙한 시민으로 거듭나는가에 달려 있다. (끝)

 


글: 변정수 미디어평론가 iamddonggae@hotmail.com

연세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계간 ‘당대비평’ 편집위원으로 있다. 비평집 ‘상식으로 상식에 도전하기’ ‘만장일치는 무효다’, 에세이집 ‘나는 남자의 몸에 갇힌 레즈비언’ 등이 있다. 홈페이지 http://live.shimin.net

 




[특별부록|논술&구술은 하나다]


정보화 시대와 고전 논술


생각하고 말하고 쓰는 인간

“발표문이나 리포트를 인터넷에서 다운받아 그대로 제출하지 마세요. 분량은 적어도 좋으니까 1시간 정도 스스로 생각해 본 다음 자신의 견해를 에세이 쓰듯이 자유롭게 정리해 보세요.”
새 학기가 시작될 때마다 학생들에게 하는 말이다. 요즘 대학생들은 어떤 주제에 대한 과제물을 받으면 우선 컴퓨터 앞에 앉는다. 그리고 인터넷 검색엔진을 가동해 관련된 자료를 찾는다. 그것들을 짜깁기해서 대충 과제물의 형식에 맞춘다. 그 다음 상당한 시간과 정성을 들여 겉표지를 보기 좋게 만든다. 과제물을 완성하기까지 인터넷 자료검색과 리포트의 겉표지를 만드는 일에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것이다. 정작 리포트의 본래 목적인 스스로 생각하고 정리하며 쓰는 일에는 시간을 투자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학생들의 발표문이나 리포트의 내용이 엇비슷한 경우가 많다. 대부분 인터넷 검색순서에 따라 내용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또 발표 내용을 제대로 소화하여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했기 때문에 한두 가지 추가적인 질문을 하면 답변을 하지 못하고 당황해하며 얼굴이 상기된다. 그래서 나는 학생들에게 단 5분이든 10분이든 스스로 생각하여 글로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물론 그렇게 쓴 리포트에는 후한 점수를 주겠다고 약속한다.
인간에게는 생각하고 말하며 쓰는 일이 중요하다. 그래서 인간을 ‘호모 사피엔스’ 또는 ‘호모 로스’라고 부른다. 라틴어로 ‘호모(Homo)’는 ‘인간’이나 ‘사람’을 가리키는 학명이며 ‘사피엔스(sapiens)’는 ‘지혜로운’이나 ‘슬기로운’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지혜로움과 슬기로움을 갖고 있으며, 이것은 인간의 고유한 특성인 이성적 능력과 관련되어 있다.


논술교육은 성숙한 인간을 만든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이러한 사고의 능력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또 있는데 그것은 바로 언어적 능력이다. ‘호모 로스(Homo loquens)’는 ‘언어적 인간’이라는 의미를 지닌 말로 인간의 본질적 측면을 언어사용에서 찾고 있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 우리의 생각과 경험을 타인에게 전달할 뿐만 아니라 문화적 전통을 계승하고 사회적 규칙과 규범을 습득하기도 한다. 언어는 의사소통의 도구인 것이다. 사피어 및 워프와 같은 언어학자들은 여기서 더 나아가 언어가 단지 의사전달 수단에 그치지 않고 우리의 사고방식 자체를 규정하는 힘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언어를 통해서 사고하기 때문에 어떤 언어 체계를 지니고 있는가에 따라서 사고방식도 달라진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주장까지 수용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언어가 인간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기능을 맡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요즘 강조되고 있는 ‘참여 민주주의’나 ‘대화 민주주의’도 이러한 언어의 역할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참여나 대화는 기본적으로 언어를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 시대 최고의 철학자로 간주되고 있는 하버마스는 인간 해방이란 자율적인 판단 능력과 자유로운 행동에 있다고 하면서 이러한 상태는 자유롭고 평등한 대화를 통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즉 민주적인 대화의 과정을 통해서 사람들은 자율성과 자유를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버마스는 이러한 자유롭고 민주적인 의사소통의 과정이 개인과 사회의 합리성을 증진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우리가 ‘호모 사피엔스’와 ‘호모 로스’로 성숙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교육과 훈련, 경험이 필요하지만 그중에서도 논술교육은 큰 도움이 된다. ‘논술’은 말 그대로 자신의 생각이나 주장을 논리적으로 서술하는 것이다. 논술을 위해서는 우선 어떤 문제나 주제에 대해 비판적·논리적으로 생각한 다음에 자신의 입장을 정리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이 주장에는 문제점이 없는가? 이 주장은 어떤 전제를 깔고 있는가? 다른 관점에서 볼 수는 없는가? 더 좋은 대안은 없는가? 우리는 이렇게도 생각해 보고 저렇게도 생각해 보면서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한 여러 근거를 찾아본다. 우리는 이러한 훈련을 통해 좀더 폭넓고 깊이 있게 사고하는 능력을 키운다. 이것이 바로 ‘호모 사피엔스’로 성숙하는 과정이다.
물론 이렇게 정리된 생각이나 주장은 언어로 표현된다. 자신의 주장을 말로 표현하면 구술이고, 글로 표현하면 논술이다. 구술과 논술은 자신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표현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표현방법에서 다르다. 논술이 구술에 비해 좀더 엄격한 논리성이나 체계성을 요구한다고 볼 수 있다.

구술은 말하는 과정에서 추가적인 설명이나 내용의 수정이 가능하지만, 논술은 처음부터 끝까지 체계적인 완결된 형태의 표현을 요구한다. 따라서 자신의 생각이나 주장을 어떻게 하면 좀더 효과적이면서도 체계적으로 전달할 것인지를 고민하게 된다. 어떻게 독자의 관심을 끌 것인가? 주장과 근거를 어떤 순서로 구성할 것인가? 한 문장의 길이를 어느 정도로 할 것인가? 이 문단에서는 어떤 주장을 펼칠 것인가? 문단을 새로 시작할 것인가? 글의 전체적인 전개방향을 어떻게 잡을 것인가? 글을 어떻게 마무리할 것인가? 우리는 이러한 고민을 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기 위한 여러 방안을 모색해 보고 이를 직접 글로 표현한다. 이것이 바로 ‘호모 로스’로 성숙하는 과정이다.
이처럼 논술은 인간의 본질적 기능이라고 할 수 있는 사고하고 표현하는 능력을 키우는 계기가 되며, 이러한 논술 교육을 통해 우리는 ‘호모 사피엔스’와 ‘호모 로스’로 성숙해 나갈 수 있다.


부족한 논술, 결국 대학에서 다시 배운다

어떤 문제에 대해 머리를 싸매고 골똘히 생각해 보면서 그것의 문제점을 비판하거나 더 좋은 대안을 생각해내는 어렵고 힘든 작업 대신에 쉽고 가벼운 것만을 선호하다 보면 지성의 결핍을 낳게 된다. 대학 당국도 이런 문제를 깨달았는지 요즘 여러 대학에서 ‘논술’을 교양과목으로 채택하는 추세다.
‘논술’ 과목은 기존 ‘작문’과 차별성을 지닌 교과과정으로 운영되는데, 이미 숙명여대와 세종대가 ‘논술’을 교양 필수과목으로 지정하여 수업을 진행하고 있으며, 연세대와 이화여대도 논술을 교양과목으로 채택하고 있다. 서울대는 교수학습개발센터에서 ‘글쓰기 교실’을 열어 리포트나 학위 논문과 같은 학생들의 글쓰기를 지도하고 있다. 또 논리, 논술에 관심이 많은 서울대 철학과 김영정 교수를 비롯해 여러 교수들이 ‘논술’을 정식 교과목으로 채택하기 위한 준비작업을 하면서 좀더 체계적이고 효과적인 논술교육을 위한 새로운 형태의 교재개발도 이루어지고 있다.
대학 입시에 논술시험이 부활된 지도 어언 10년이 되어간다. 초기에는 시행착오도 많았지만 이제 논술시험이 제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현재의 교육 여건에서 대입 논술은 학생들의 논술실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주요 대학에서 학생을 선발할 때 논술의 비중이 높아 학생들은 좋든 싫든 간에 논술시험을 준비할 수밖에 없다. 이제 논술시험을 어쩔 수 없이 보아야 하는 귀찮은 시험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이것을 잘 활용해보자.
현재 논술시험 준비는 학교나 학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물론 학교에서 지속적이면서도 체계적으로 논술을 가르친다면 가장 바람직하겠지만 여러 현실적 여건 때문에 그렇게 되기가 어렵다. 학교든 학원이든 논술 경험이 풍부한 강사가 강의를 하면서 직접 꼼꼼히 첨삭지도를 해주는 수업이라면 학생들의 논술실력을 향상시키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대체로 1000자 이상의 논술문을 10회 정도만 열심히 작성해보면 1시간에 1000자 분량의 글을 쓰는 데 자신감을 가질 수 있다. 절대 논술을 포기하지 말라는 말이다.

고전은 지식의 보물 창고


21세기 정보화 시대에도 고전 논술이 필요할까? 인터넷이나 위성 텔레비전과 같은 다양한 첨단 디지털 매체를 통해 수많은 정보와 지식을 손쉽게 얻을 수 있는데, 굳이 고리타분하게 고전을 읽고 이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여 글로 표현하는 힘든 작업을 할 필요가 있을까? 언뜻 보기에 논술은 정보화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인터넷을 하다보면 www라는 알파벳을 자주 보게 된다. 이것은 World Wide Web의 약자로 ‘전세계를 광범위하게 뒤덮고 있는 거미줄’이라는 뜻이다. 인터넷은 전세계의 모든 컴퓨터를 거미줄처럼 연결시킴으로써 거기에 저장된 정보를 무한정으로 이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한다. 누구나 인터넷에 연결된 자신의 컴퓨터를 이용하여 다른 사람의 정보를 이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자신이 정보를 제공할 수도 있다.
따라서 인터넷은 전세계에 걸쳐 있는 하나의 거대한 텍스트라고 하겠다. 이 텍스트는 정보의 제공이나 사용에서 중심이 없다는 의미에서 ‘탈중심적’일 뿐만 아니라, 그 누구라도 자유롭게 정보를 제공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개방적’이다. 따라서 ‘거대한 열린 텍스트’라고 할 수 있는 인터넷은 지식의 독점을 막고, 모든 사람이 지식의 생산과 활용에서 주체로 나설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었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매체다.


그렇지만 인터넷의 이러한 특성은 때로는 단점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인터넷에서는 말 그대로 정보가 ‘홍수’를 이루고 있다. ‘홍수’라는 말은 정보가 많다는 의미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온갖 종류의 정보가 뒤섞여 있다는 의미도 갖고 있다. 정보가 많은 것이 항상 좋은 것은 아니다. 쓰레기와 같은 저질 정보나 왜곡된 정보, 기만적이고 허구적인 정보는 많을수록 오히려 해악이 된다. 정보의 최소 단위인 비트(bit)가 많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다. 정보의 양이 정보의 질을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의미 있는(semantic) 정보, 쓸모 있는(useful) 정보이다.
우리가 정보의 홍수 속에 휩쓸려 떠내려가지 않기 위해서는 정보의 질을 판별할 능력이 필요하다. 인터넷에서 길을 잃고 헤매지 않기 위해서는 주어진 정보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판단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 나는 이러한 토대가 고전을 통해서 마련된다고 본다. 고전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지식의 보고(寶庫)’다.
고전에는 인류의 축적된 지혜와 사상이 담겨 있다. 고전 속에는 시대와 지역을 뛰어넘는 보편적인 삶의 문제들이 녹아 있다. 고전 속에는 단편적인 정보가 아니라 고뇌와 반성을 통해서 얻어진 체계적인 지식이 담겨 있다. 따라서 고전은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삶의 지표를 정하는 데 있어 크게 기여할 수 있다. 우리는 고전을 통해 정보의 홍수 속에서 표류하거나 방황하지 않고 중심을 잡아 헤쳐나갈 수 있는 혜안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고전을 통해서 획득한 지식과 사상을 바탕으로 그것을 뛰어넘을 수 있는 사고력을 키울 수도 있다.

고전 읽기를 통한 사고력 훈련


우선 고전을 읽으면서 핵심적인 주장과 그 근거를 찾아보아야 한다. 예를 들면 밀은 ‘자유론’에서 근대 자유주의의 ‘자유’ 개념을 확립하면서, 개인에게 가급적이면 최대한의 자유를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밀은 육체와 정신의 주인은 자기 자신이며, 또한 자신의 취미나 개성, 기호는 자기 자신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간섭보다는 자유가 대체로 개인에게 더 많은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말한다. 따라서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경우에만 사회가 간섭을 해야 하며,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개인에게 최대한의 자유를 허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밀의 주장과 그 근거를 확인해 보았다면 우리는 이에 대해 다양한 관점에서 비판적 사고를 전개해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타인에게는 피해를 주지 않고 자기 집에서 혼자 마약을 복용한다고 했을 때, 이에 대해 사회가 간섭을 해야 하는가, 아니면 개인의 자유에 내맡겨야 하는가? 만약 간섭을 해야 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만약 간섭을 해야 한다면 이것은 밀의 주장에 어긋나지 않는가? 그렇다면 밀의 주장은 수정되어야 하는가? 다른 경우에는 어떠한가? 예를 들어 성인이 포르노 테이프를 보는 것에 대해 사회가 간섭을 해야 하는가, 아니면 개인의 자유에 내맡겨야 하는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사상의 자유는 어디까지 허용되어야 하는가? 어떤 사람이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사상을 자신의 일기장에 써놓았다면 그에게 제재를 가해야 하는가? 그 사람이 그런 내용을 책을 통해서 주장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만약 그 사람이 그러한 주장을 타인에게 강요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는 이러한 비판적 사고의 과정을 통해서 ‘개인의 자유와 사회적 간섭’이라는 주제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정리할 수 있다.
어떤 책을 고전으로 볼 것인가는 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서울대에서는 논술시험을 준비하는 학생들을 위해 ‘고전 100선’을 선정하기도 했는데, 고전을 공부하는 학생들은 이를 참조하는 것도 좋다. 여기서는 지면상 몇 권의 고전과 이와 연관된 논술 주제를 소개하는 데 그치도록 하겠다.

●로크 ‘시민 정부론’ : 개인의 사유 재산은 어떻게 정당화되는가? 자신의 노동을 통해서 배타적 소유권이 형성된다면 상속은 정당한가? 빌 게이츠나 이건희의 거대한 부는 정당한가? 로크의 소유권 이론은 정보화 시대에도 통용될 수 있는가?
●니부어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 사회’ : 집단간의 사회적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은 무엇인가? 개인이 도덕성을 회복하는 것이 우선인가, 아니면 사회 구조나 제도를 개선하는 것이 우선인가? 사회 구조나 제도는 어떻게 고쳐질 수 있는가? 억압자들의 양심에 호소할 것인가, 아니면 피억압자들의 단결된 힘에 의존할 것인가?
●레비 스트로스 ‘슬픈 열대’ : 문화를 평가할 수 있는 절대적 기준은 존재하는가? 모든 문화가 상대적인 관점에서 존중되어야 한다면, 비인간적인 문화는 존재하지 않는가? 서로 다른 문화가 충돌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피터 싱어 ‘실천 윤리학’ : 모든 불법적인 행동은 처벌되어야 하는가? 불법적인 행동이라도 정당한 행동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는가? 시민 불복종 운동은 어떤 조건을 갖추어야 정당화될 수 있는가? 지난 총선에서 시민 단체가 벌인 낙선 운동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
●제레미 리프킨 ‘엔트로피’ : 엔트로피 이론의 관점에서 물질 문명이나 경제 성장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엔트로피의 증가 속도를 줄이기 위한 합리적인 방안은 무엇인가? 과학 기술의 발전이 엔트로피의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는가?

논술의 고통에서 논술의 즐거움으로


논술에는 왕도가 없다. 단지 많이 읽고(多讀), 많이 쓰고(多作), 많이 생각해 보는(多商量) 것만이 최선의 길이다. 글쓰기는 누구에게나 힘들고 고된 작업이 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고통을 참고 견딜 수 있을 때 우리는 더 큰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 근시안적으로 순간의 편안함만을 추구하다 보면 더 큰 즐거움을 얻을 수 없다.
나는 논술을 비롯한 글쓰기도 이와 같다고 생각한다. 사고를 연마하는 고통을 겪은 다음에 더 좋은 글이 나오고 이를 통해 우리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커다란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 베이컨이 비유적으로 이야기했듯이, 우리는 단지 자료나 정보를 수집하는 ‘개미’나 사변적인 생각만을 전개하는 ‘거미’에 머물러서는 안 되며, 한 발 더 나아가 자료나 정보를 수집하고 이를 나름대로 가공하여 체계화할 수 있는 ‘꿀벌’이 돼야 한다.
논술실력은 직접적으로 대학 입시나 리포트, 대학 시험, 고등 고시 등에서 실제적인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호모 사피엔스’와 ‘호모 로스’로 성숙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준다. 비판적이고 논리적인 사고 능력과 체계적인 표현 능력을 갖춘 성숙한 시민이 많아질 때, 우리사회는 좀더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 참여정부가 내세우는 ‘2만달러 시대’도 이러한 지적 능력과 성숙한 시민 의식이 뒷받침돼야만 가능한 것이다. (끝)

 


글: 손철성 국민대 강의전담교수sonyusu@hanmail.net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국민대 교양학부 강의전담교수로 재직하며 서울대 철학사상연구소 객원연구원, 국립중앙도서관 철학분야 외국자료추천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유토피아, 희망의 원리: 현대 사회에서 유토피아론의 재구성을 위한 철학적 탐구’ ‘디지털 지식 자원 구축을 위한 기초적 연구: 마르크스 독일 이데올로기’ ‘고전과 논리적 글쓰기’ 등이 있다.

 



[특별부록|논술&구술은 하나다]

시사논술, 겹눈으로 세상 보기


열린 사고로 자기 생각을 말해봐

 

시사적 사건일수록 단순한 현상분석과 획일적이거나 주관적인 의미 부여로 흐를 가능성이 높다.
합리적 소통과 토론을 위해 냉철히 성찰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시사논술이라고 해서 기본적인 고전논술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굳이 구별하자면 고전논술이 과거로부터 의미를 밝혀내는 일이라면 시사논술은 최근 생긴 사건에 대한 의미를 읽어내는 일이다. 시사는 그야말로 특정 시기에 생긴 사회적 사건이다. 학생들은 이런 사건을 직접 경험하는 경우가 거의 없고, 대부분 신문·방송 등 언론을 통해 간접적으로 전해 듣는다. 그렇다면 실제 사건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에 대해 각 언론이 나름대로 걸러낸 의미를 읽는 것이다. 우리는 1차로 걸러진 사건의 의미를 다시 읽고 2차적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 결국 시사논술은 사회적 사건에 대해 나름대로의 의미를 부여하는 글쓰기이다.
여기서는 수많은 시사 사건을 정리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시사 사건에 대한 단순 지식을 축적하는 행위이지 글쓰기와 직접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전반적인 사건의 흐름 속에서 의미를 찾으려면 정리가 필요하지만 구체적인 글쓰기 전략에서 꼭 필요한 단계는 아니다. 따라서 이 글에서 하나의 시사적 사건에 대해 어떤 글쓰기가 가능한지를 다각적으로 검토해 보자.
2003년 4월 29일 개혁국민정당 유시민 의원이 캐주얼 복장으로 의원선서를 하러 나왔다가 의원들의 반발로 선서를 하지 못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결국 그 다음날 정장 차림으로 등원해 선서식을 했다. 양쪽 견해를 주요 관점별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찬성쪽 주요 관점
1. 고정관념 깨기이므로 신선하다
2. 권위주의에 대한 도전
3. 자유주의 실천
4. 진보/개혁의 표상


반대쪽주요 관점
1. 의도된 튀기 행동
2. 예의에 어긋남
3. 국회나 국민에 대한 모독
4. 관례를 깨는 것이 진보는 아니다.


국민 모두가 지켜본 똑같은 사건이고 똑같은 복장이지만 부여하는 의미는 각각임을 알 수 있다. 어느 쪽이 옳고 그름을 떠나 어떤 맥락이나 관점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의미가 다르게 구성된다.
하나의 사건을 여러 각도에서 보는 법
먼저 관례와 통념을 깼으므로 고정관념을 깬 행동임은 분명하다. 찬성쪽은 우선 이 자체에 긍정적 가치를 부여한다. 하나의 변화된 형식 자체가 1차적 의미를 지닌 것이라 본다. 그러나 반대쪽은 의도나 결과(영향)가 안 좋은 것이므로 이 자체에 높은 가치를 부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고정관념 깨기라는 말 대신에 돌발행위라고 의미를 부여한다.
그렇다면 다음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왜 의외의 행동을 했느냐이다. 물론 그 의도는 본인이 직접 밝혔다. 하나는 다양성과 관용의 차원이고, 또 하나는 국회는 일터니까 편한 옷을 입었다는 설명이다. 먼저 다양성 차원에서 보면 분명 그의 의도와는 달리 얼마든지 다르게 해석될 수 있고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래서 유의원 자신도 반대쪽 견해를 존중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현실은 그리 만만치 않다. 반대는 하지만 인정할 수 있다는 제3의 견해가 성립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반대하는 순간 인정하기조차 어려워지고 과격한 행동이 나오게 된다. 그래서 한나라당 의원 20여명은 퇴장을 하기도 했다.
당시 ‘경향신문’ 사설은 양측의 이런 행동을 점잖게 꾸짖었다. 유시민 의원의 행동은 반대하지만 “동료 의원의 복장을 문제삼아 의원선서조차 거부한 채 집단퇴장한 의원들의 과잉반응은 더욱 모양이 안 좋다. 막 금배지를 단 초선의원의 돌출성 행동에 유감을 표시하는 정도면 충분할 일이다(2003년 4월30일 사설)”라며 온건 대처 방안을 제시했다.
한나라당 의원이나 경향신문 논설위원이나 똑같이 유의원의 복장을 반대했지만 의미 부여에선 질적으로 크게 다름을 보여준다. 의미 부여가 같다면 같은 반응이 나와야 한다. 왜냐면 진정한 의미는 실천과 효과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 다른 것일까. ‘경향신문’은 예의에 어긋난다는 점과 돌발행위가 개혁은 아니라는 정도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예의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국회에 대한 모독이요 도전이라고 주장했다. 무례와 모독의 의미는 사뭇 다르다.


예의 자체도 인식과 가치 기준에 따라 다르게 설정된다. 어떤 어른은 아이들이 인사할 때 고개를 최소 45도는 숙여야 예절이라 생각하는가 하면, 15도만 굽혀도 괜찮다는 사람도 있고 고개 숙이는 문제에 개의치 않는 어른도 있다. 캐주얼 복장 행위를 찬성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예의에 어긋나지 않다고 본다. 물론 찬성하는 쪽이나 반대하는 쪽이나 국회의원에게는 어긋나지만 국민에게 어긋난 것은 아니라는 쪽도 있고, 반대로 국회의원에게는 어긋난 것이 아니지만 국민에게는 어긋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다만 예의에 어긋난다는 데에 동의하면서도 찬성하는 사람들은 예의보다 더 높은 가치를 든다. 개혁이나 진보 등의 가치를 위해서는 그 정도 ‘예의 깨기’는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다. 어차피 예의라는 것은 관습의 문제인데 관습을 깨지 않고서는 개혁이나 진보가 어렵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누구나 이런 행동을 하면 개혁과 진보의 상징이나 기호가 되는 것일까. 당연히 아니다. 유의원이 살아온 내력이 그런 성향이었기에 그런 의미 부여가 가능하다. 그러한 내력의 맥락을 좀더 확장시키면 다음과 같은 평가도 가능하다. 한 네티즌이 게시판에 띄운 글의 일부다.


인식과 가치 기준에 따라 달라지는 평가


…문제는 바로 이 점, 유시민 자신이 밝혔듯이 그가 ‘일부러’ 캐주얼을 입고 국회에 출석했다는 것이다. ‘일부러’ 입었다는 것… 그건 그만큼 복장 고르는 데 신경을 많이 썼다는 말이다. 그것은 다분히 남에게 보이기 위해 한 행동이었다. 한마디로 그건 하나의 깜짝 이벤트다… 그리고 오버다, 오버… 아마 유시민은 그 캐주얼 깜짝 이벤트를 위한 아이디어를 구상하느라 적잖은 시간을 소비했을 것이고 국회에 입고 나갈 캐주얼 복장을 고르느라 신경 많이 썼을 것이다. 그리고 그날 유시민을 제외한 다른 정장차림의 국회의원들은 아침에 집에서 나올 때 복장에 그리 신경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할 일 많은 이 나라의 국회의원이라면, 적어도 국민이 뽑아주고 국민이 피땀 흘려 낸 피 같은 돈으로 월급을 받는 국회의원이라면, 그런 깜짝쇼 연출하는 데 신경을 써서는 안 된다. 그가 진정한 개혁세력의 대표주자라면, 그딴 옷차림 고르느라 신경 쓸 시간에 어떻게 하면 이 나라를 개혁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구습에서 벗어난 진정한 진보정치를 할 수 있을까에 대해 궁리하고 연구했어야 했다.
진정한 개혁주의자, 진보주의자라면 남에게 보여지는 데 신경을 써서는 안 된다. 그저 누가 뭐라 하든 묵묵히 자기 할 일 해나가면서 그렇게 개혁해나가면 된다. 남에게 보이는 부분에 신경을 쓰게 되면, 그리고 실속보다 이미지메이킹에 치중하게 되면 그건 개혁이나 진보가 아닌 하나의 포퓰리즘으로 전락하고 만다… (wblee71, 인터넷 한겨레, 2003년 5월1일)

위의 글을 쓴 네티즌은 다분히 실용주의적 관점을 갖고 있다. 복장 문제와 같이 ‘쓸데없는’ 고민을 할 시간에 더 중요한 생각을 하라는 충고다. 그러나 쓸데있고 없고는 관점에 따라 또 달라질 수 있다. 찬성쪽에서는 이 행동 자체를 몹시 ‘쓸데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실제 그 파급효과를 생각하면 그런 평가가 섣부르지는 않다. 실용성의 기준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그 평가가 달라지는 셈이다.
앞의 지적처럼 옷 생각할 시간에 딴 생각을 했다면 그 효과는 어떠했을까. 그 시간에 유시민이 엄청난 아이디어를 내 그것이 옷 파문 효과 이상을 거뒀을까.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아이디어라는 것이 양적인 시간보다는 질적인 시간에 의존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가 이렇게 했었다면’이라는 가설이 역사의 가정만큼이나 무의미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중요한 건 현재요 미래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평소 그의 행위의 폭을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정반대 평가가 나올 수도 있다. 즉 위선이나 튀기 위한 행동이라고 보는 사람들은 그가 선거유세 기간 내내 양복을 입었다는 사실을 들고 있다. 국민에게 가까이 가기 위해서라면 진짜 가까이 있을 때는 왜 양복을 입었냐고 따진다.
이 또한 공간과 시간의 맥락으로 보면 반론에 부딪힌다. 선거 전(前)과 선거 후(後)의 행위가 다른 것이 위선일 수도 있지만, 시간과 공간 또는 대상이 다르기 때문에 행위 전략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반론이다. 유세는 의원으로서 일한다는 목표보다는 일하기 위한 당선 과정으로서의 노력이 더 중요하고, 당선된 뒤엔 실제 일하기 위한 자세가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면 이 또한 설득력을 가진다. 물론 일하기 위한 자세를 강조한다 하더라도 등원 첫날에 의미를 부여하면 달리 평가할 수도 있다. 등원 첫날은 그 자체가 일이기도 하지만 새로운 관계 맺기를 위한 통과의례이니까 말이다.

단어가 갖는 양면성을 주목하라

이번에는 국회에서의 캐주얼 차림을 권위에 대한 도전 또는 모독으로 보는 문제를 따져 보자. 이때의 권위는 당연히 국회 또는 국회의원의 권위를 말한다. 문제는 권위라는 말 자체가 양면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억압과 위세라는 부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존경과 전문성이란 긍정적인 측면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다. 양복을 입어야 권위를 존중하는 것인가. 관례를 따라야만 권위를 따르는 것일까. 찬성쪽 사람들은 진정한 권위는 실제 의원으로서 어떻게 행동하느냐는 삶의 내용에 주로 있다고 본다. 그러나 반대쪽 사람들은 권위의 기본 형식과 예의도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찬성쪽 사람들은 반대한 의원들의 삶을 공격한다. 실제 상당수 국회의원이 보여준 삶의 내용은 권위가 있다기보다 추한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국회의 권위를 지키지 않던 의원들이 감히 퇴장까지 하면서 권위 운운할 수 있냐고 따진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선서가 국회에서의 신성한 의식이기에 캐주얼 복장은 더욱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신성하고 엄숙한 의식을 치른 국회의원들이 제구실을 못하고 개판이니, 이례적인 캐주얼 복장은 일종의 풍자 효과를 거둔다.
좋은 의도와 좋은 효과가 있다면 그것이 정교하게 의도된 행위이고 깜짝 이벤트였기에 더 가치가 있으며 의미도 확실해질 수 있다. 결국 형식이냐 내용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형식을 통해 어떤 내용의 가치를 드러내느냐, 아니면 어떤 내용을 통해 형식의 가치를 추구하느냐를 평가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하나의 시사적 사건은 대개 복합적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관찰자의 입장에서 어떤 의미를 더 중시하는가에 따라 서로 다른 평가를 내릴 수 있으며 글쓰기의 방향도 달라진다. 실제 고교생들의 글을 통해 이 문제를 생각해 보자.
국회의원 선서식에서 평상복을 입은 것은 전례 없던 일이다. 그 일이 개혁의 시발점이다, 개인의 다양성의 문제라고 말이 많지만 결국 유시민 의원의 행동을 개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가 말하던 개혁이 그런 깜짝 이벤트라면 그는 오히려 국민을 기만한 것일지도 모른다. 다음은 이 주제를 가지고 두 학생이 쓴 짧은 논술문이다.

어떤 사람은 상식을 깼기 때문에 개혁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상식을 깨는 것만이 개혁은 아니다. 개혁은 상식 속에서 천천히 이루어져야 한다. 급격히 상식을 깨려는 유시민 의원의 행동은 자칫 사회 질서를 무너뜨리는 위험요소로 각인된다.
또한 그가 일부러 평상복을 입고, 평소에 정장을 더 많이 입었다는 점에서 정치적 쇼맨십이라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국민의 시선을 끄는 그의 행위는 자칫 잘못하면 국민을 기만했다고도 볼 수 있다. 그가 평소에 정장을 입다가 유독 국회의원 선서식에서 평상복을 입은 것은 국민의 시선을 끌려는, 혼자 튀려는 소영웅주의라고 볼 수밖에 없다.
유의원의 행동은 예의라는 관점에서도 바람직하지 못하다. 국회 선서식은 국민의 앞에서 엄숙히 선서하는 자리다. 그런데 그가 개인적인 자신의 문화를 주장하며 아집을 부리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것은 물론 사회 질서의 붕괴위험도 다분히 내포하고 있다. 예의는 혼자 만들고 혼자 지키고 하는 그런 개인만의 규칙이 아니다. 예의는 사람들의 의사소통이다. 그것을 자기 혼자 거부한다면 사회의 관습과 질서가 무너질 것이다.
다양성도 좋고, 개개인의 문화도 좋지만 결국 개인도 사회 속에서 산다. 유의원의 혼자 튀는 행동은 개혁이 아니다. 그가 주장한 개혁이 국민의 시선을 확 끄는 의도된 이벤트라면 개혁이라는 말조차 무색할 것이다. 물론 그의 개혁하려는 의지와 가치관은 알고 있다. 그러나 최소한 국민에 대한 정직함과 예의는 지켜야 한다.(최용주)


상식 속의 개혁이냐 고정관념 타파냐

최근 유시민 의원의 대국민 선서 과정에서 그의 옷 차림새 때문에 많은 논란이 일어나고 있다. 예의의 문제라는 둥 소영웅주의라는 둥 많은 비판이 오고가는 가운데 나의 주장을 확실히 할 필요성을 느낀다.
먼저 그의 캐주얼복 차림은 권위주의의 타파라고 볼 수 있다. 국회에서는 국민의 대표로서 국회의원을 권력을 가진 직위로만 생각하고 있다. 권위주의 속에서 의원들은 각자의 이익만을 채우며 고로, 국민의 의사가 전달될 수 없는 발전이 없는 민주주의 사회가 될 것이다. 양복을 입는 것은 권위주의에 테두리선을 그어 집단화시키려는 태도에 불과한 것이다.
다음으로 고정관념의 타파라고 할 수 있다. 국회에서는 꼭 정장차림을 해야 된다? 누가 정한 법칙인가? 법에 명시되어 있는가? 아니다. 그렇다고 정장차림을 함으로써 특별한 이득이 있는 것도 아니다. 정장차림은 단지 그냥 무조건 해야 한다는 의미없는 고정관념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형식적 예의가 아닌 실질적인 예의를 중시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TV에서 정장차림을 하고서 서로의 멱살을 쥐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정장차림이 국민에 대한 예의라지만 진정 국민이 바라는 것은 정장으로 포장된 번듯한 모습이 아닌, 국민의 의사를 받아들이고 이를 수행해 나가는 내면적 예의일 것이다.
이와 같이 유시민 의원의 옷 사건은 권위주의, 고정관념을 타파하고 실질적 예의를 실천하는 것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다. 국민이 국회에, 국회가 국민에게 서로 형식적인 예의나 관습에 치중하기보다는 서로의 역할을 실질적으로 실천해 나간다면 우리는 보다 나은 민주사회를 이룩할 수 있을 것이다. (오병관)


첫 번째 학생은 부정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유의원의 행위를 상식과 예의에 벗어난 정치적 쇼맨십으로 규정하고 개혁이라는 의미를 부여하는 것에 반대한다. 개혁은 상식 속에서 천천히 이루어져야 한다는 관점에서 비판하고 있다. 보수주의 관점에서 차분한 논조로 자신의 주장을 잘 피력한 글이다. 다만 상식과 예의를 지키면서 어느 정도 개혁이 가능한지가 문제다. 개혁은 근본적으로 상식을 깨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유의원의 행위를 정치적 쇼맨십으로 규정했으므로 그런 쇼맨십은 상식을 깨는 진정한 행위가 아님을 설파하는 것이 더 효율적인 글쓰기라 하겠다.
두 번째 학생은 권위주의와 고정관념 타파라는 관점에서 유의원 행위에 찬성하는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예의에 어긋난다는 반대론자 논의에 대한 반증으로 예의를 실질적 예의와 형식적 예의로 나눠보고 있다. 이 정도면 고등학생으로서 찬성 논지를 매우 짜임새 있게 전달하고 있다. 다만 실질적 예의라는 측면과 고정관념, 권위주의 타파라는 측면의 논거가 상호 모순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실질적 예의라는 관점은 형식 위주로 보는 관점을 비판한 것인데, 고정관념 권위주의 타파 논거는 바로 형식 위주의 논거이기 때문이다. 평소 복장 행위와 다른 이벤트성 행위(형식 변화)만으로 내용 변화(개혁)를 단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나의 시사적 사건에 대해 어지러울 만큼 다양한 관점의 교차가 나타난다. 일부러 그래봤다. 시사적 사건일수록 단순한 현상분석과 획일적 의미부여, 또는 주관적 의미 부여로 흐를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보다 냉철한 분석이 필요하다. 우리 사회의 합리적 소통과 토론을 가로막는 편협한 시각에서 벗어나 좀더 깊이 있는 성찰을 요구하는 분야가 바로 시사적 글쓰기다. 고전적 글쓰기가 인간의 보편적 주제에 대한 무거움을 더는 과정이라면, 시사적 글쓰기는 가볍게 흘러가는 사건에 대한 무거움 싣기이다. (끝)

 


글: 김슬옹 또물또 통합교육연구회 회장 tomulto@hanmail.net

목원대 국어교육과 겸임교수로 또물또 통합교육연구회를 이끌고 있다. 한우리독서운동본부, 열린교육 해오름, 서울시 국어교사연수, 전국학원장 연수 등 논술 및 통합교육 강사로 활약. 저서로 ‘한글이름짓기 사전’(공저), ‘우리말 산책’ ‘발가벗은 언어는 눈부시다’ ‘통합교과와 생각하기 논술’(공저), ‘통합교육을 위한 삶쓰기 논술교육’ ‘대중매체 읽고 쓰고 생각하기’(공저) 등이 있다.

 

 



[특별부록|논술&구술은 하나다]


과학논술 고지 넘기


희망과 두려움의 두 얼굴 과학기술


모든 인간에게 천국을 열 수 있는 열쇠가 주어졌다.
그러나 같은 열쇠로 지옥문도 열 수 있다. 과학기술은 천국의 열쇠인가 지옥의 열쇠인가. 그것이 과학논술의 주제다

역사학자 마이클 하워드는 지난 세기를 결산한 역사서 ‘20세기의 역사’의 서문에서 “20세기는 희망과 두려움이 공존하는 역설로 그 막을 열었다”고 규정했다. 그것은 “과학적 발견과 기술의 발전이 빈곤과 질병, 기아, 전쟁과 같은 고통에서 전 인류를 해방시켜주리라는 희망과, 전통적 가치관과 사회구조의 붕괴에서 비롯되는 두려움”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1세기가 지난 지금은 그러한 두려움이 지구 전체로(유럽에서) 확산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21세기는 어떠한가. 새로운 세기 역시 미래에 대한 낙관과 두려움이라는 극단적 전망으로 그 장을 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낙관과 두려움의 근원에는 늘 과학기술이라는 문제가 자리하고 있다. 생명과학의 발전은 유전적 질병이나 불치병으로부터의 해방, 노화 방지와 장수를 약속하는 반면 생명의 창조라는 ‘신의 영역’에 도전함으로써 벌어질 수 있는 심각한 상황에 대한 불안감을 낳는다. 정보기술의 발전은 합리성과 효율성으로 인간에게 생산성 향상이라는 선물을 안겨줬지만, 전체주의적 통제 사회로 갈 수 있다는 우려를 심화시키고 있다. 뿐만 아니라 최신 과학기술은 최신 살상무기로 그 성과를 구체화했다. 환경 파괴의 심각성은 말할 필요도 없다.
게다가 과학기술의 발전은 기존 가치관과 신념, 윤리와 종교 등을 해체시키고 있지만, 거기에 대응해야 할 가치관과 신념, 윤리와 종교 등의 진화는 더디기만 한다. 과학기술 문명이 인간의 삶에 보다 깊고 넓게 파고들고 있지만, 사람들은 기술의 흐름에 대한 이해와 미래에 대한 전망으로부터 멀어져가고 있다.
과학기술, 인간이 선택하기 나름
올해 초 서울에서 주택가에 방범용 CCTV를 설치하느냐 마느냐를 놓고 ‘범죄 예방이냐, 사생활 침해냐’ 논쟁이 뜨거웠다. 그런데 지역주민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주민 85%가 CCTV 설치를 찬성한다고 응답했다. 또 네티즌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도 65%가 CCTV 설치를 찬성했다. CCTV 설치는 주민에 대한 기술적 통제사회로 가는 첫걸음일 수 있다는 지적이 있었지만 정작 주민들은 ‘안전’을 선택했다.
NEIS(교육행정정보시스템) 시행에서는 ‘교육 행정의 효율화냐, 인권 침해냐’가 쟁점이었다. 이 사안은 안타깝게도 교육부와 전교조의 대립이라는, 표면적인 문제로 흘러가버렸지만 정보 선진국을 목표로 앞만 보고 달리던 우리 사회에 인권이라는 본질적 문제를 제기한 사건이었다.
이 두 논란은 과학기술의 문제가 이제 우리의 현재와 미래에 밀접하게 관련돼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 만큼 인간의 신중한 결정과 선택을 요구하고 있다. 우리는 단 한 순간도 과학기술에서 벗어날 수 없고, 과학기술의 발전을 막을 수도 없으며, 과학기술의 성과를 외면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대통령선거나 국회의원선거 때마다 우리는 객관적 자료를 토대로 합리적 판단과 선택을 하려고 노력한다. 한번의 결정이 개인이나 지역 사회, 소속 집단의 이익은 말할 것도 없고 국가의 미래를 좌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과학기술의 문제 역시 정치적 판단과 선택 못지않게 현재의 삶이나 미래 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이 문제와 관련해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리처드 파인만 교수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모든 인간에게 천국을 열 수 있는 열쇠가 주어졌는데, 같은 열쇠로 지옥문도 열 수 있다.”
그렇다면 천국의 열쇠는 어떤 가치를 가질까요? 어떤 것이 천국문이고 어떤 것이 지옥문인가를 결정할 수 있는 명쾌한 지시가 없다면, 이 열쇠는 아주 위험한 물건인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 열쇠는 분명히 가치가 있습니다. 어쨌든 이 열쇠 없이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을 테니까요.
어떤 지시가 있다고 해도 열쇠가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과학이 엄청난 공포를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에도, 과학이 가치가 있다는 것만큼은 분명합니다. 진정 뭔가를 만들어낼 수 있으니까요.(파인만 ‘발견하는 즐거움’에서)


유전자 지도 완성과 생명복제의 성공, 우주 개척과 나노기술의 발전 등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그 열쇠는 끊임없이 준비된다. 하지만 그 열쇠가 있다 해도 도대체 어떤 문이 천국문이고, 어떤 게 지옥문인지 판단하기란 쉽지 않다. 기술의 성과를 범죄 예방에 이용하는 게 현명한 선택인지, 사생활 보호를 위해 기술 활용을 거부하는 게 올바른 결정인지와 같은 비교적 단순한 사안에서도 쉽게 판단을 내릴 수 없다.
바로 이 지점에서 과학논술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이는 수험생뿐만 아니라 이 시대, 즉 과학기술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갖춰야 할 기본 소양이기도 하다. 이러한 시대에 대응하려면, 첫째 과학기술 문명이 야기한, 혹은 초래할 문제를 발견해야 한다. 과학기술이 가져다준 합리성과 인간 소외라는 양면성, 개발과 환경 보전, 정보화와 인권, 분석적 원자론적 세계관과 전체적 유기적 세계관의 대립, 불치병 치료와 생명 윤리, 인터넷 민주주의의 가능성과 파놉티콘의 위험성, 식량 위기 해결과 유전자 조작 식품의 위험성 등 수없이 많은 이슈들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과학기술에서 비롯되는 이러한 문제들을 찾아내는 것이 논술의 1단계라고 흔히 말한다. 문제를 발견해야만 주변 사람들과 그 이슈를 공유하고 해결 방안을 모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를 발견한 다음엔 문제 해결책과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객관적 근거와 합리적 주장, 창의적 제안이 관건인 만큼 이 단계에서는 개성 있는 다양한 주장이 나올 수 있다. 또한 과학기술의 역기능이나 부정적인 점을 최소화하고 순기능을 극대화하는 방안 등도 생각해볼 수 있다. 예컨대 NEIS의 경우 인권 침해의 여지를 없앨 수 있는 방안, 집적된 정보를 교육적으로 활용하는 방안, 기술적·인적(人的) 보안의 성격, 경제성 등 다양한 측면에서 문제 해결 방안을 찾을 수 있다. 다만 모범 답안을 찾으려 해서는 안 된다. 모범답안에 자신의 생각을 꿰맞추려 하다보면 독창적인 생각으로 발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셋째, 자신의 입장과 주장을 명확히 한 다음 그 주장으로 타인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단계에서는 글의 구성 능력, 합리적 근거 제시와 논리적 표현, 어휘력 등이 요구된다.


과학논술은 현대인의 소양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라 제기되는 문제는 너무도 다양하고 복잡하다. 기술발전의 속도가 빠른데다 그 파장이 크고 넓으며, 당초의 목표와는 전혀 다른 결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첫째 문제 발견, 둘째 문제 해결, 셋째 설득이라는 과정이 말처럼 쉽지 않다. 아인슈타인 등 당대 최고의 지성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과학자들이 신념을 갖고 원자탄 개발을 제안했으며, 저명한 과학자들이 개발 프로젝트를 주도했다. 하지만 과학 연구와 개발의 산물로 인해 초토화된 일본 열도를 보면서 그들이 품었을 참담한 심정을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될 수 있는 문제이다.
이에 대한 정답이 될 수는 없겠지만 결국 독서, 그중에서도 인간과 세계에 대한 근원적 통찰을 한 고전 독서를 통해 자신의 인식을 깊게 하고 통찰력을 기르는 방법밖에 없다. 과학기술의 목적도 결국은 생명이란 무엇인가,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삶이란 무엇인가, 행복이란 무엇인가, 이성이란 신뢰할 만한가, 과학적 지식과 가치는 어떤 관계인가라는 문제로 귀착되기 때문이다.


과학논술 최근 출제 경향과 2003년 과학계 이슈

현대 인류문명은 과학기술을 기반으로 이루어졌으며, 현대사회의 문제들은 과학기술과 어떤 형태로든 연결돼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대입 논술시험에서도 과학기술은 인기 있는 주제였다. 특히 현대사회의 합리성과 효율성이 낳은 성과와 문제점 등을 중심으로 과학기술 문명이 초래한 상황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요구한 문제가 많았다.
그동안 대학입시 논술에서 출제된 문제들을 살펴보면 과학기술 문명이 초래한 상황에 대한 비판적 성찰,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른 올바른 가치관 모색, 미래 과학기술 사회에 대한 인간의 대응책 등에 관한 것이 많다. 이에 비추어 올해 과학계 이슈를 살펴보면 미국의 대 이라크전쟁에서 소개된 첨단 병기들, 동물 실험과 환경파괴, 유전자 조작과 생명복제 등을 주목해야 한다. 인류의 희망이자 국가의 미래로서 갈채를 받아왔던 과학이지만, 그 응용의 역기능이 부각되면서 과학연구의 사회적 의미, 과학기술자의 사회적 책임과 윤리 등이 쟁점이 되고 있다.
또한 ‘자연계의 보편적 진리 탐구’라는 과학의 본질적 가치에 대한 의문마저도 제기된다. 즉 새로운 발견의 응용이 인류의 미래를 위협할 수도 있는데, 그 결과에 대해서는 책임지지 않는, 오직 연구를 위한 과학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라는 지적이다. 이는 자본과 결합돼 돈 되는 분야만을 연구하는 과학 활동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과학의 가치중립성이라는 문제도 빠지지 않는 이슈이다. 올해 과학기술 분야의 쟁점들을 정리해본다.
인간 게놈지도 완성의 의미 : 제임스 슨과 프랜시스 크릭이 DNA 이중나선의 구조를 발견한 지 50주년이 되는 올해, 생명과학 분야에서 인간 게놈지도의 완성이라는 성과를 올렸다. 각종 난치병과 유전적 질병 치료 등 의학 분야, 이와 관련된 산업 분야에서 인간 게놈지도의 완성이 갖는 의미를 생각해볼 수 있다.

생명윤리의 문제 : 인간의 체세포 배아복제, 인공장기 생산, 유전자 조작 등의 허용 범위를 놓고 논란이 뜨겁다. 체세포 배아 복제의 경우 인간 생명이란 무엇인가, 어디까지를 인간 생명이라고 하는가라는 문제를 생각해볼 수 있다. 돼지에게서 인공장기를 생산하려는 계획은 인간과 동물,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돌아보게 한다.

과학이란 무엇인가 : 첨단과학전쟁이라는 이라크전쟁, 유전자 조작과 생명복제, 정보기술의 역기능, 나노기술의 발전에 대한 우려, 환경오염 등의 쟁점에서 ‘과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원론적 의문을 제기해볼 수 있다.

과학자의 사회적 책임 : “괴물을 만들려는 악취미에서가 아니라 세포 진화와 복제 방법의 메커니즘을 연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소의 난자에 인간 DNA를 삽입해 잡종 배아를 만들어냈다는 자보스 교수의 주장이다. 여기서 연구 결과와 응용에 대해 책임지지 않고 오직 연구를 위한 과학만을 추구하는 게 과연 올바른 행위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해볼 수 있다. 또한 과학은 가치 중립적일 수 있는가, ‘자연계의 보편적 진리 탐구’는 무한정 허용되어야 하는가 등도 생각해볼 문제이다.

선천이냐, 후천이냐 : 유전자의 비밀이 하나둘 밝혀지고, 이를 통해 인간행동을 설명하면서 ‘선천과 후천’ ‘천성과 교육의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지속가능 에너지 : 에너지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벌이는 이라크전쟁, 핵발전소 건립과 핵 폐기물 매립지 선정을 놓고 빚어진 갈등 등에서 에너지 문제를 다시 생각해볼 수 있다.

‘인간 존재’에 대한 정의 : 인공 장기와 인공 눈, 베리칩과 같은 센서칩 이식, 나노기술과 생명공학의 발전으로 제기된 인간 복제의 가능성 등의 문제는 과연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인간에 대한 정의의 문제까지 제기하는 사안이다. 또한 인간과 비인간의 기준, 어디까지를 인간이라고 하느냐 는 쟁점을 낳는다.

정보란 무엇인가 : 정보의 양이 급증하고 확산 속도가 촌음을 다툰다. 이러한 정보사회에서는 “SARS는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데 그치지만 정보 전염병(information endemic)은 순식간에 사회적·경제적 파국을 가져올 수 있다”라는 한 IT 전문가의 주장처럼, 정보의 영향력이 크다. 정보란 무엇인가라는 원론적인 문제가 다시 제기된다.

기타 : - 파놉티콘과 시놉티콘의 가능성. CCTV, NEIS, 지문 정보, 신용카드 사용정보 집적 등 시민에 대한 기술적 통제의 가능성과 함께 시민들이 인터넷 미디어 등을 활용한 역감시 가능성이 대두된다.
- 이기적 존재가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 살아갈 수 있는가. 올해 한국 사회에서 나타난 두드러진 현상으로 사회 갈등을 빼놓을 수 없다. 그것들은 집단 이기주의와 관련돼 있는 것이 많았다. 이기적 존재들이 어떻게 양보와 협동, 조화를 이룰 것인가.
- 현대사회에서 사적 영역은 어디까지인가. 디지털 카메라, CCTV, 휴대전화 위치추적 서비스, 몰래카메라 등으로 사생활의 위기를 맞고 있다.
- 새만금 간척사업, 인터넷 대란, SARS, 매트릭스, 유비퀴터스 컴퓨팅, 나노기술, 사이버 윤리, 인터넷의 역기능.

과학기술은 이제 인간의 생활은 말할 것도 없고 인간 존재에까지 영향을 끼치게 됐다. 이러한 과학기술 시대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먼저 과학기술 발전의 맥을 짚어야 하고, 그것이 인간과 사회, 자연에 미칠 영향 등을 함께 살펴야 한다.

어떤 책을 읽을 것인가


이공계 지원자뿐 아니라 과학기술시대를 사는 현대인의 필독서를 분야별로 정리해 보았다.

。과학의 가치 리처드 파인만의 ‘발견하는 즐거움’, 칼 세이건의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
리처드 파인만의 ‘발견하는 즐거움’은 과학의 의미와 가치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해준다. “과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 문제를 제기하며, 과학의 가치와 기능, 과학자의 연구 자세, 과학의 즐거움, 과학자의 도덕성과 사회적 책임 등을 중심으로 순수 과학의 길을 제시한 글이다.

。현대 과학기술의 동향 이인식의 ‘21세기 키워드’
과학기술의 발전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과학기술의 흐름을 읽어내야 한다. 과학적 소양을 갖추지 않은 상태라면, 과학기술 시대를 부정적으로 전망하든 긍정적으로 바라보든 공허한 주장에 그칠 수 있기 때문이다. ‘21세기 키워드’는 정보기술, 생명공학, 정보사회, 환경 등 다양한 분야의 최신 발견과 기술적 성과를 정리해 보여주는 책이다. 대중들이 이해할 수 있는 쉬운 언어로 서술된 이 책은 과학 이슈들을 개념, 개발 동향과 응용 분야, 기술적 사회적 쟁점 들과 연결해 설명하고 있어 최신 과학의 맥을 짚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과학자의 사회적 책임 이필렬의 ‘체제 밖의 과학’
이 글은 사회적 맥락 속에서 과학연구 활동을 반성하고 비판하며, 대안을 모색하는 과학자의 길을 소개한다. 무분별한 동물실험, 자연환경 파괴, 원자력이 가져올 수 있는 파괴력 등 연구과정에서 수없이 많은 문제들이 제기된다. 과학자가 만약 ‘새로운 과학적 발견을 위해서 불가피한 것인가’ ‘인류 전체를 위해 당연히 치러야 할 희생인가’ 등 사회적 맥락에서 자신의 활동을 반성한다면 어떻게 될까.
이 글은 이러한 반성적 연구태도를 갖고 대학이나 연구소와 같은 기성 과학연구 체제를 떠나 자립적인, 독립적인(independent) 과학활동을 펼치는 다양한 유형의 과학자들과 그들의 과학관, 대안을 찾는 실천 등을 소개했다. 나머지 분야의 책들은 주제별로 책 목록을 첨부한다.

。기술문명시대의 인간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브루스 매즐리시의 ‘네 번째 불연속’, 이인식의 ‘나노기술이 미래를 바꾼다’

。환경 레이철 카슨의 ‘침묵의 봄’

。과학과 세계관 프란츠 카프라의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

。문학으로 읽는 미래 조지 오웰의 ‘1984’,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필립 딕의 ‘마이너리티 리포트’, 브레히트의 ‘갈릴레이의 생애’ (끝)

 


글: 이연 이연독서논술 원장 peak531@hanmail.net

서강대 사학과 졸업 후 ‘Hello-PC’ 편집주간, 연암 국어학원 원장을 지냈다. 현재 이연독서논술학원 원장. 역서로 ‘오락가락 카오스’가 있다.

 

 



[특별부록|논술&구술은 하나다]


논술, 일생에 가장 쓸모 있는 공부


글 잘 쓰면 말도 잘한다

좋은 논술문엔 옳은 논리와 독창적인 논거가 있다.
나쁜 논술문엔 틀린 논리와 뻔한 논거가 있다.
가장 나쁜 논술문엔 논리 자체가 없다.

10년 넘게 해마다 수학능력평가와 논술·구술 시험을 치러온 남다른 경력 덕분에 대학입시에 대해서는 남보다 할 말이 조금 많다. 물론 구술면접 경력은 10년이 채 안 된다. 내가 처음 구술면접 시험을 치른 것이 1997학년도 입시였다.
그해 입시에서 서울대 법학과에 지원했다. 애초 입학할 생각이 없었으니 단지 ‘응시’해 본 것이라 해야 할 것이다. 면접장에 들어선 순간, 내가 미스코리아 선발 대회에 출전했나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미인대회를 보면 출전자 앞에 심사위원이 50여명쯤 쫙 늘어서 있지 않은가! 그처럼 면접장에 들어서자 7~8명의 교수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구술면접 문제는 실질적인 남녀평등을 이루기 위한 방안을 얘기해 보라는 것이었다. 나는 현재 남녀 불평등의 원인은 누적된 가부장적 의식과 불합리한 제도에 있다고 보고, 제도 개선을 통해 의식까지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즉 여자는 결혼하면 남의 집 사람이 되도록 만드는 제도가, 딸은 남의 집 식구가 될 사람이라는 의식을 만들어내고 이 의식은 딸에 대한 투자를 꺼리도록 만들어서, 사회 전체적으로는 여성의 능력이 남성의 그것에 비해 열등해 보이는 결과로 나타나게 되고, 이것은 다시 그런 편견과 고정 관념을 공고히 해서 부정적 피드백이 확대 재생산된다….
이런 식으로 문제의 원인 분석에 좀더 치중한 답변을 하고, 해결방안으로 ‘호주제 폐지’를 제시했다. 그러자 교수들이 한결같이 호주제 폐지 반대 입장에서, 호주제 폐지가 가져올 문제점을 이야기하며 그에 대한 해결책을 내놓으라고 강도 높은 반박과 추가 질문을 퍼부었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놀라 더듬더듬 적당히 대처했더니 오히려 공격의 강도가 세졌다. 나도 슬슬 부아가 치밀기 시작해 이후로는 거의 싸울 듯한 분위기가 됐다. 좋게 말하면 격렬한 토론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혼자 집중포화를 맞은 셈이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구술면접

법학과 면접을 치르고 나는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면접관의 냉담한 반응에 수험자가 호응해서 똑같이 ‘반응’하면 안 된다는 것과, 감정이 개입되는 순간 논리는 죽는다는 사실이었다. 겉으로 드러나는 면접관의 태도에는 어떤 메시지도 담겨 있지 않다. 냉랭하든 친절하든 그건 개인적인 특성일 뿐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쪽이 수험생에게 유리하다.
이런 경험과 깨달음으로 중무장을 하고 다시 99학년도 서울대 사범대학 자연과학부 구술면접을 치렀다. 당시 사범대 교직적성 구술 면접문제는 “우리 주위에는 평생을 시장판에서 모은 몇십 억의 거금을 선뜻 사회에 환원하는 ‘김밥 할머니’ 같은 미담의 주인공들이 많다. 그렇다면 인간은 이 사례처럼 교육을 받지 않고도 선행을 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였다. 대기실에서 이 문제를 받자마자 머릿속에는 다음과 같은 생각이 흘러갔다.

김밥 할머니의 사례를 거론하며 인간은 교육을 받지 않고도 선행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할 경우, 그 주장을 일반화하면 결국 ‘성선설’이라는 인성론으로까지 연장될 수 있다. 또 성선설이란 인간은 이성과 착한 마음을 선험적으로 타고난다는 주장이고, 교육이 인간의 지성과 함께 인성까지 그 대상으로 삼는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이런 주장은 교육의 효용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거나 적어도 그 효과를 약화시키는 말로 들리지 않을까?
또 성선설과 같은 맥락의 주장을 할 경우, 어떤 반박이 있을 수 있을까? 혹시 교육받지 않은 전형적인 인간상인 갓난아이를 예로 들어 ‘아기에게서 어떤 도덕성을 찾아볼 수 있는가’라는 반론을 제기하지 않을까? 도덕이란 결국 타인에 대한 배려이고, 그런 배려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일단 나와 남, 사회라는 관념이 형성되어야만 하는데 아기에게는 그런 관념조차 없다. 따라서 교육받지 않은 인간의 대표 격인 아기에게서는 어떤 의식적인 선행, 도덕적 행위도 기대할 수 없지 않은가?
그러니 교육을 받아야만 선행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편이 낫다. 그럼, 김밥 할머니의 사례는 어떻게 설명하지? 그래, 넓게 보면 일종의 사회화 과정도, 윤리 의식을 함양해 줄 수 있다는 점에서는 교육에 포함시킬 수 있고, 그런 할머니들은 정규 교육을 받진 못했지만 장사를 하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회화라는 비자발적. 무의식적인 교육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주장해야겠다.
그런데 사회화 과정까지 넓은 의미로 교육에 포함시킬 경우 그 논리를 확장하면 교육의 가치를 너무 약화시키는 주장이 되지 않을까? 굳이 정규학교 교육을 받지 않아도 늑대인간이 아닌 이상 인간은 누구나 사회화의 자장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으니, 그냥 사회화라는 포괄적 교육만 받아도 이성적이고 도덕적인 사회 구성원으로서 충분히 잘 살아갈 수 있다. 이런 식으로 교육의 가치를 스스로 회의하는 셈이 되는 건 아닐까? 어? 그렇다면 앞서의 성선설에서 우려했던 것과 같은 함정에 빠지게 되는데?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조교가 입실시간이 되었음을 알려 주었다. 예상과 달리 여러 명이 아닌 단 한 명의 교수님이 교직적성 면접을 주관했다. 모든 과정이 신기하리만큼 예상대로 맞아떨어졌는데, 다행히도 사회화까지 교육으로 포함시킬 경우의 문제점과 관련한 반박은 나오지 않았다. 면접은 그 앞부분에서 종료됐고, 내 마지막 답변에 대한 면접관의 반응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무릎을 탁 치며) 오케이~. 이제 밥 먹으러 가야겠다.” 내가 오전 면접 마지막 응시자였다.


가장 인상 깊었던 논술

가장 기억에 남는 논술 시험은 98년도에 응시한 경희대 논술이었다. 대면 접촉이 아닌 원고지와의 싸움에서 흥미진진한 추억이 있기 힘들지만 그럼에도 그해 경희대 논술이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제시문의 깊이 때문이었다.
제시문으로 하이젠베르크의 ‘부분과 전체’가 나왔고 논제는 (가)의 입장에서 (나)를 비판하라는 것이었다. 즉 논제 자체가 전혀, 간접적으로도 주어져 있지 않은 상태에서 수험생이 제시문 분석을 통해 스스로 쟁점을 찾아내고 그 쟁점에 자신의 논거를 첨가해 주장을 펼쳐보라는 상당히 까다로운 문제였다.
논술은 독해력이 반이다. 대부분의 대학논술 문제들이 이런 식으로 논제를 직접 주지 않고 제시문 속에 ‘깔아서’ 주기 때문이다. 대신 논제를 잘 찾아내기만 하면, 일단 절반은 성공한 셈이다. 우선 (나)의 주장은, 개혁과 변법보다는 개량을 강조하고, 형식이 바뀌어도 내용 자체는 별로 바뀌지 않는다고 보는 다소 보수적인 견해로 파악했다. 물론 (가)는 그 반대 입장으로 이해했다.
문제는 오직 (가)의 입장에서 (나)를 비판하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의 요구에 충실해야지 공평한 찬반양론이나 어설픈 양비론, 양시론은 금물이다. 상당수 수험생들은 문제지를 받고 20분 정도 경과하자 일사천리로 원고를 써내려가는 분위기였는데, 나는 제시문 독해와 내 생각을 정리하는 데만 40분 정도 투자했고, 10분 동안 개요 작성을 했던 것 같다. 이때 내 의식의 흐름은 다음과 같다.

(나)의 주장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작은 부분에서의 변화가 마침내는 전체의 변화를 이끌어낸다. 이를 일반화하면, 양의 변화가 자연스레 질의 변화를 야기한다는 개량주의와 맞닿게 된다. 둘째, 형식이 변해도 내용 자체는 별로 바뀌지 않기 때문에 옛 형식을 급격하게 바꾸려는 시도는 무의미하다. 이 두 주장을 비판할 참신한 논거가 무엇일까? (제시문이 자연과학적 내용에 치중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오히려 사회과학적 논거를 생각해내는 것이 좀 차별화되어 보일 것이다.)
우선 개량주의는 부분의 합이 전체와 같기 때문에 부분의 변화(양적 변화)의 총합은 결국 전체의 변화(질적 변화)라는, 반대로 말하면 전체를 나누면 부분과 일치하게 된다는 환원주의를 전제로 한다. 그렇다면 숨은 전제, 환원주의 자체가 많은 오류를 내포하고 있다고 반박하자. 개인이 전부 도덕적이어도 그런 개인이 모인 사회는 부도덕할 수 있다는, 라인홀드 니부어의 ‘도덕적 개인, 비도덕적 사회’를 인용해도 좋고, 개인적으로 보면 충분히 양보와 관용의 정신을 실천할 만한 사람이라도 집단이라는 이름으로 묶여질 때는 집단의 이익만 추구하는 배타적 성향을 띠게 된다는 집단이기주의를 사례로 들어도 좋겠다.
또 부분의 변화가 자연스러이 전체의 변화로 귀결되지 않는다는 역사적 사례를 생각해보자. 아하, 춘추전국시대의 공자가 있구나. ‘수신제가치국평천하’에서 알 수 있듯이 공자는 ‘평천하’의 문제도 개인적인 ‘수신’의 문제로, 사회의 혼란을 그 사회 구성원인 개인의 도덕성 타락으로 환원한, 대표적인 환원주의자다. 하지만 춘추전국의 혼란을 실제로 통일한 것은 공자의 ‘유가’사상이 아닌, ‘법가’다. 그리고 법가는 개량보다는 변법을 통한 개혁을 주장한 사상이므로, 진정한 변화는 양의 축적에 의해 자연스럽게 도달되는 것이 아니라 급격한 개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논거로 적절하다.
그 다음, 형식이 변해도 내용 자체는 바뀌지 않는다는 주장을 반박하려면 형식이 내용을 규정한다는 논거를 제시해야 한다. 음, 아무래도 군대가 좋겠군. 군인의 제복이나 제식은 과연 군기의 상징일 뿐인가? 아니면 그러한 외면적 형식이 내면에도 영향을 끼치는가? 형식이 단지 상징에 그친다면, 왜 모든 나라의 군대가 그토록 엄격한 형식을 강요할까? 군대의 ‘형식’은 전투력과 단결심, 전우애, 용맹성이라는 ‘내용’에 실제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보는 게 더 타당할 것이다.


나쁜 논술문과 가장 나쁜 논술문

좋은 논술문엔 옳은 논리와 독창적인 논거가 있다.
나쁜 논술문엔 틀린 논리와 뻔한 논거가 있다.
가장 나쁜 논술문엔 논리 자체가 없다.(그 결과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다)


인간인 이상 어떻게 아무런 논리 없이 생각할 수 있을까. 정확히 말하면 논리가 없는 것이 아니라 논리를 알아볼 수 없는 방식으로 표현했기 때문에 독자의 입장에선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어떤 학생이 논술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대개 위 세 가지 부류 중 마지막 유형에 해당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처방은 간단하다. 자신의 소박한 논리를 독자가 알아들을 수 있게 표현하기만 하면 적어도 최악의 논술문 범주에서는 벗어나 나쁜 논술문 수준으로 상승할 수 있다.
좋은 논술문을 쓰려면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해야 하는데 한국 교육의 상황에서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영어, 수학에 투자한 시간의 12분의 1도 논술에 투자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좋은 논술문을 쓰겠다는 것인가. 이런저런 이유로 대입 수험생들의 논술문은 평균적으로 ‘나쁜 논술문’의 범주에 들어갈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평균그룹에 들어가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평균 수준의 나쁜 논술문을 썼다면 그로 인해 떨어질 사람이 대학에 붙는 일은 없어도 그로 인해 떨어지는 일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생활인의 언쟁 승부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방식으로 결정되는 경향이 있다.

1. 목소리 크면 실제로 이기거나 적어도 이긴 것 같은 느낌은 든다.
2. 말을 더 많이 해 버리면 실제로 이기거나 적어도 이긴 것 같은 느낌은 든다.

최악의 논술문에서 종종 이러한 경향이 나타나곤 한다. 큰 목소리에 대한 선호는 근거를 제시하지 않은 채 주장만 강조하는 악덕으로, 다변에 대한 집착은 같은 내용을 되풀이하여 말하는 악덕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최악의 논술문에서 탈피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이 두 악덕을 범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종류의 악덕이란 나쁜 습관과도 같다. 무의식적인 습관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의식적인 노력밖에 없다. 우선 자신이 하고 싶은 주장을 세 문장 또는 네 문장으로 표현하는 연습을 한다. 왜 3~4 문장인가? 논증의 원형은 다음과 같은 삼단논법이다.

(대전제) 사람은 죽는다.
(소전제)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결론)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보다 훨씬 긴 논증이 필요할 때도 있다. 하지만 그런 복잡한 논리전개 과정도 통합하고 환원하면 결국 위와 같은 세 문장 또는 네 문장으로 정리될 수 있다. 만약 하나의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 자신이 그 이상의 여러 문장을 사용하고 있다면, 십중팔구 군더더기가 있거나 중언부언하고 있거나다. 그리고 이런 의식적인 글쓰기 노력을 하다보면 논술에서 ‘중언부언’과 ‘근거 없음’의 문제를 자연스럽게 치유할 수 있다.

논술의 고전적 쟁점을 파악하라

남들 하는 만큼의 ‘나쁜 논술문’에 만족할 수 없다면 ‘좋은 논술문’에 도전해보자. 좋은 논술문의 조건인 바른 논리와 독창적인 논거 중 전자는 그리 벅찬 목표가 아니다. 대입논술에서는 고도의 엄밀성을 요구하는 복잡한 논증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에 그저 논리적 오류가 보이지 않도록 쓰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풍부한 독서와 깊은 사색의 경험이 부족한 수험생들이 독창적인 논거를 생각해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턱대고 책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라는 뻔한 충고는 도움이 안 된다. 대신 방법을 한 줄로 요약할 수는 있다. “논술의 고전적 쟁점에 관한 지식이 필요하다.”
대입논술의 논제는 매우 다양해 보이지만 무한대로 다양한 것도 아니고 그 안에서 아무런 경향성을 찾을 수 없는 것도 아니다. 그 주제들을 일반화하면 인문 과학이나 사회 과학, 또는 자연 과학에서 이슈가 되어 온, 수십 가지의 고전적인 쟁점들과 마주치게 된다. 따라서 그런 쟁점에 관한 지식을 획득하는 데 보다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는 책들을 선별적으로 읽는 것이 가장 실전적이며 효율적인 방법이다.
그렇다면 상당수 독자들은 논술에 필요한 배경지식만 모아놓은 책이나 자료가 무엇이냐고 되물을 것이 분명한데 뜻밖에도 대답은 ‘교과서’다. 윤리, 일반 사회, 국사, 세계사, 정치, 경제 교과서. 논술에 필요한 배경지식이 가장 압축적으로 제시되어 있는 책의 제목들이다.
더 상세한 내용이 필요하다면 각 시도교육청에서 발간하는 심층면접, 논술대비 자료들을 탐독하라. 그 안에는 배경지식만 따로 모아놓은 읽기 자료도 꽤 많이 있고 웹에서 누구든지 무료로 다운받을 수 있다. 다이제스트로 성이 차지 않는다면 직접 책을 읽으면 된다. (상자기사 참조)


말하기와 글쓰기가 한몸인 이유

글쓰기(논술)와 말하기(구술)는 당연히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글과 말이란 생각을 전달하는 매개체에 불과하고, 같은 생각을 표현하는 다른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말을 잘하는 사람은 글도 잘 쓸까. 그럴 가능성이 높다. 둘 사이에는 어느 정도 상관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럼 글을 잘 쓰는 사람들은 말도 잘할까. 아주 ‘많이’ 그렇다. 그 둘 사이에는 매우 강한, 상관관계가 있다. 즉 글을 잘 쓰면 말도 잘할 수 있지만, 말을 잘한다고 해서 반드시 글을 잘 쓰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아주 어려운 문제 위주로 공부를 해두면 쉬운 문제는 더 쉽게 느껴지지만, 쉬운 문제만 풀어봤다고 해서 저절로 어려운 문제까지 해결되지는 않는 것과 같다. 음성언어는, 문자언어에 비해 더 쉬운 표현 수단이라는 얘기다.
또한 시선, 동작, 표정, 억양, 어조 등등의 외적 요소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어서 말에 의한 의사 전달은 더 용이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글은 기록으로 남기 때문에 반복적·지속적이고, 다른 요소들의 도움을 바랄 수 없어 순수하게 글로만 본인의 의사를 전달해야 한다. 이러한 부담은 글의 필자로 하여금 자신의 글에 대해 보다 엄격한 기준으로 검토하고 반복적으로 퇴고하기를 강요한다.
따라서 더 엄격하고 까다로운 기준의 글쓰기 연습을 하다보면 그보다 헐거운 기준의 말하기는 큰 노력 없이도 수월하게 준비할 수 있는 것이다. 당연히 구술면접을 준비하는 학생이라도 우선 말하는 연습보다는 글쓰는 연습을 하는 편이 낫다. 만약 구술면접만, 또는 논술만 치르겠다고 작정한다면 선택할 수 있는 대학의 폭은 엄청 좁아질 것이다.
수험생들은 왜 이런 시험(논술, 구술)이 생겨서 우리를 괴롭히나 하겠지만, 막상 대학에 진학하고 졸업 후에도 필요한 능력이 논술과 구술이다. 다시 말해 논술과 구술은 평생 도움이 된다. 자신의 머리로 스스로 생각하고 의심하고 비판하는 능력은 글쓰기와 말하기를 통해서만 길러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일단 남의 머리를 거쳐 정제된 말만 받아들여 그들의 사고를 빌려서만 보는 세상은 하나의 상일 뿐, 실체는 아니다. 그래서 별로 재미도 없고 생생하게 느껴지지도 않는다.
세상을 지루하고 따분하게, 저차원적인 재미에 만족하며 사는 가장 쉬운 방법은 ‘더하기 빼기만 알면 됐지…’ 식의 신념을 실천하는 것이다. 반대로 러셀이 말했던 ‘무용한 지식이 주는’ 즐거움을 맛보는 쾌락주의자로 살아갈 수도 있다. 심지어 구술과 논술을 잘하면 언론사 독자투고에서 소정의 고료를 받아볼 수도 있고, 오프라인이나 온라인에서 이성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도 도움이 된다. 이것은 실제 대입면접 기출문제였다. ‘채팅에서 이성의 마음을 사로잡고 싶다. 어떻게 하겠는가?’

계열별 논술 필독서

인문계열 역사란 무엇인가(E.H 카), 그리스-로마신화, 소피의 세계(요슈타인 가이더), 도덕경(노자), 죄와 벌(도스토예프스키), 수상록(몽테뉴), 팡세(파스칼), 정의론(롤스), 국가(플라톤), 페스트(카뮈), 게으름에 대한 찬양(러셀), 멋진 신세계(올더스 헉슬리), 맹자(맹자), 삼국유사(일연)

사회과학계열 예종에의 길(하이에크),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슘페터),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브로델), 제3의 길(앤터니 기든스), 사회계약론(루소), 자유론(밀), 유토피아(토머스 모어), 국화와 칼(루스 베네딕트), 성의 역사(미셸 푸코), 슬픈 열대(레비-스트로스), 택리지(이중환)

경상계열 국부론(애덤 스미스), 인구론(맬서스), 21세기의 지식 경영(피터 드러커), 신문기사는 지식이다(한국경제신문사), 맨큐의 경제학(맨큐),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베버). 마르크스의 자본론과 케인스의 고용이자 및 화폐의 일반 이론은 수험생들에겐 너무 어렵다.

법정계열 정부론(로크), 순수법학(켈젠), 목민심서(정약용), 성과 속(엘리아데), 법의 정신(몽테스키외), 범죄와 형(베카리아), 권리를 위한 투쟁(예링), 군주론(마키아벨리), 한비자(한비자), 실천론(모택동), 역사의 종말(프란시스 후쿠야마), 솔로몬의 선택(sbs TV 프로그램)

사범계열 에밀(루소), 아동지능의 근원(피아제), 격몽요결(이이), 신학문의 원리(비코), 일반언어학 강의(소쉬르), 신논리학(베이컨), 학교와 사회(듀이)

자연과학계열 과학혁명의 구조(쿤), 부분과 전체(하이젠베르크), 두 우주 구조에 대한 대화(갈릴레오), 생명이란 무엇인가(슈뢰딩거), 인간현상(샤르뎅), 파브르곤충기(파브르), 종의 기원(다윈), 프린키피아(뉴턴)

의예계열 이기적 유전자(도킨스), 의약분업 시대 환자 권리장전(공저), 의학철학(울프), 생각하는 생물(헤프너), 의료윤리의 새로운 문제들(제이 홀맨), 생명윤리의 철학(구인회)

공학계열 자연과학적 지식을 응용하는 분야가 공학이므로 현재 수험생 신분의 예비공학도가 교양을 쌓기 위해 읽어야 할 책은 자연과학 계열의 권장 도서와 중첩될 수밖에 없다. 직접적으로 공학에만 관련되는 도서는 너무 전문적이라 수험생이 읽기엔 무리가 있고 또 아직 읽을 필요도 없다. (끝)

 


글: 박원우 웹사이트 ‘우만구만’ 운영자 sogolitna@hanmail.net

1970년 출생한 이래 유소년기 7년, 군복무 3년을 제외한 22년 동안 자기공부를 하거나 남이 공부를 잘하도록 도와주며 살았다. 자기 공부로는 수학, 철학 등을 했고 남의 공부를 도와주기로는 논술·구술, 수학 등을 했다. 01학번으로 다시 대학에 입학, 현재 서울대 수의예과에 적을 두고 있다. 따라서 직업은 학생이자 학원 강사이고, 취미는 대학 수학능력 시험과 논술, 면접 응시하기다. 10년쯤 후에는 병들고 불쌍한 동물들을 도와주며 살 계획. ‘다음’ 카페 안에서 구술면접 분야 최고 회원수를 자랑하는 우만구만(http://cafe.daum.net/urigusul)과 웹사이트 우만구만(www.igusul.net)의 운영자이며 인천에서 구술면접과 논술전문학원도 운영 중이다.

 

 

 

신동아 2003년 11월호 부록

출처 : 어둠 속에 갇힌 불꽃
글쓴이 : 정중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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