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손
지하철이 막 도착한 승강장
복잡한 아침 지하철에 꾸역꾸역 접힌 사람들을
잠시 바라보다 돌아서 계단을 올라간다
그녀의 뒷 모습이 기우뚱 한다
가난에 쫓겨 대처로 올라간
언니 오빠의 소식이 끊기고
아버지마저 돌아가시던 해 그녀는
난생 처음 본 남자의 아내가 되었다
어른거리는 호롱불 아래 쪽두리 풀고
날 밝기도 전에 들로 밭으로 다녔다
계절과 자연이 주고 가는 보리순과 벼 사이
쑥과 감자순과 고추와 호박이 지천이었던 그때
조금씩 얼굴이 익어가던 남편과의 그 몇년
그녀의 가장 빛나던 시절
아름다웠다
시간과 함께 두 아이는 먼저 세상을 버리고
남은 두 아들과 두 딸은 차례차례
자신들의 몸을 가눌 빈 터를 찾아 대처로 떠났다
소작이 끊기고 술로 세월을 탓하기 시작하던 남편이
소줏병을 들고 논두렁에 고꾸라진 채 발견된 날
달은 오지게도 밝았다
홀로보는 그 달빛 견딜 수 없어
훌쩍 대처로 올랐다
빈손으로 시작한 아들 딸은 여적
제 몸 제 가솔 하나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뒤뚱거렸다
사지육신 멀쩡한데 짐 될 수는 없었지만
빼곡한 어디 한 곳 그녀 몸 맘대로 뉠 집 하나 없었다
둘째 아들 손주 녀석과 함께 쓰는 방
식전에 훌쩍 나와 어스름에 들어가지만
손주 녀석은 할머니 냄새 난다며 타박한다
가끔씩 손에 쥐어주는 꼬깃꼬깃한 천원 자리도
그 순간뿐 손주 녀석은 언제나 투덜거렸다
넓은 곳이라 대처라도 내 갈 곳이 없었다
아침마다 지하철을 탄다
꼬깃꼬깃한 천원짜리 두어장이라도
내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유일한 소일거리
더 큰 이유는 어디서건 시간은 가야하기 때문
그나마도 재바른 김영감과 엄씨 할망구가 이 노선을 타면서
시간도 천원짜리 한 장도 내 맘대로 잡히지 않는다
오늘처럼 발 디딜 틈조차 없이 붐벼
차 안에 탈 수도 없는 날이면
통로의 의자나 계단 앞 쓰레기통의
몇장이 전부였다
오늘은 그나마도 보이지 않는다
지하철 문이 닫힌다
빈 손으로 계단을 올라가던 그녀의 몸이
한 번 더 기우뚱 한다
사람들에 밀려 나도
기우뚱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