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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는 것이 지나가는구나(1)

그림자세상 2010. 7. 21. 01:23

  머무를 곳 있는 자의 칩거는 은전이다. 도연명의 [귀거래사]가 기쁨으로 날뛰는 것은 고향의 풀내음 흙치레가 코끝과 손끝에 매달려 있기 때문이다. 고향이 있어본들 나 같은 자는 달리 수가 없다. 세상만사 포기하지 못하고 밥숟갈에 붙들린 잡배는 칩거는커녕 피신마저 사치스러운 꿈이다. 번민과 고뇌로 밤새 머리칼을 쥐어뜯을 때, 이룰 수없는 칩거는 나의 고통을 속이지 못한다. 시름에 겨운 자는 여행이 고작이다. 시름은 집에 있는 것이 아니고 마음에 있는 것이라 집을 떠나도 시름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나는 안다. 알고도 떠나는 길, 시름은 마음에 얹혀간다.

 

올해 마지막이 될 여행지는 강릉이다. 여기저기 쏘다닐 마음은 애초에 품지 않았다. 선교장 객사의 뜨뜻한 아랫목과 경포 앞바다의 찬 겨울바람, 활어회에 곁들인 소주 한잔이면 세모의 밑씻김으로 족할 터였다. 길동무로 나선 소설 쓰는 선배는 두 가지 주문을 달았다. '주종을 사케로 바꾸고, 굴산 사지에 들를 것.' 그는 사케에 혹애한다. 그 때문에 '친일파'란 소리도 들었다. 사케는 비축해 둔 것이 있어 안심이지만 굴산사는 데퉁맞은 소리였다. 집도 절도 없는 휑한 터를 무슨 요량으로 가자는 걸까. 시큰둥한 나에게 그는 명토를 박았다. "거기 당간지주와 석불좌상이 있잖아. 폐허도 좋고." 그는 노는 자리에서 공부하는 악취미가 있다. 무슨 심산인지 따져볼 양으로 그가 쓴 글 하나를 미리 들춰보았다. 선배가 여주 고달사 옛터를 둘러본 뒤 쓴 글이다. "폐허는 그 위에 세워졌던 모든 웅장하고 강고한 것들에 대한 추억으로서가 아니라 그 잡초더미 속에서 푸드득거리는 풀벌레들의 가벼움으로 사람을 긴장시킨다. 폐허에서는 풀벌레가 영원하고 주춧돌은 덧없어 보인다." 그는 굴산사 터에서 영원한 것을 보려는 걸까, 덧없는 것을 보려는 걸까.....

 

경포의 밤 파도는 늙은이의 요실금처럼 질금거린다. 저물어 힘 빠진 물살이 세밑의 헛헛함과 닮았다. 하지만 뱃속을 달구는 사케는 괄괄하다. 술은 망우물忘憂物이라 했지만 시름을 잊으려 들이켜봐도 허랑했던 한 해의 회환이 목구멍까지 차오른다. 숲 속의 꿩은 사냥개가 쫓아내고 폐부 속의 말은 술이 내몬다. 노회한 술꾼은 쏟아낸 말을 거두지 못해도 물러나야 할 때를 안다. 할 말과 못할 말, 참소리와 헛소리가 뒤섞일 즈음이 잠자리에 들 시간이다. 술은 쓰리고 잠은 달콤했다.

 

이른 아침 초당두부로 속을 달랜 나그네는 논둑 밭둑을 지나 인적 끊어진 굴산사 옛터에 다다랐다. 박토를 일군 너른 경작지에 풀벌레소리는 들리지 않았고 흙더미 사이로 푸석한 먼지가 날렸다. 굴산사는 9세기 신라 문성왕 때 범일 스님이 창건한 대찰이다. 선배는 마음에 녹아들지 못한 나의 공부를 늘 타박한다. 그는 굴산사의 내력을 적은 원고지 일곱장의 '교보재'를 건넸다. 나를 단단히 가르치려 작정한 모양이다. [삼국유사]에서 인용한 글은 개창 당시의 설화가 들어 있다. 당나라에서 유랑하던 범일은 한쪽 귀가 잘려나간 학승을 만나 뒤 귀국해서 강릉 일대를 다니다가 돌부처 하나를 발견한다. 개울가에 스러진 돌부처도 귀가 없었다. 범일은 그곳에 굴산사를 지었다.

 

굴산사의 당우는 남아 있지 않고, 귀 없는 돌부처는 사라졌다. 범일은 열반에 들 때까지 굴산사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않았다. 왕들이 국사로 초청해도 따르지 않았다. 선배가 혼잣말을 했다. "범일은 대처의 땅을 밟지 않았고, 세상잡사를 입에 담지 않았어." 고승의 적멸이 무릇 오리무중이다. 그림자는 산을 벗어나지 않고 자취는 속세에 남지 않는다. 눈을 밟아도 흔적이 없는 도인의 삶은 그렇다 쳐도 범부의 족적은 가지런하기조차 어렵다. 그래서인가? 한 무제의 문인 동방삭은 은둔 아닌 피신의 묘를 넌지시 귀띔한다. 그는 말했다. "육침(현자가 속세에 숨는 것)하며 이 세상을 피한다. 꼭 깊은 산속 쑥대집이어야 하겠는가." 묵언은 어렵고 피신은 힘들며 무흔은 불가하다. 장도 없는 놈이 국을 즐긴다고 나의 허세도 그에 못잖다, 선배에게 들으라는 듯 뇌까렸다. "인간 도처가 청산인데 하필 선산에 묻혀야 하는가." 그는 고개를 돌려버린다. 폐허는 황량하고 나그네의 상념은 황잡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