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운 오후,
다솜이 핸폰을 교환하러 나갔다 오다 뜻밖의 횡재를 하다.
동네의 책 대여점인 [오렌지북]이 갑자기 문을 닫는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은지가 히가시노 게이노의 책을 열심히 빌려다 읽던 곳이었는데
갑자기 문을 닫게 되어 은지가 몹시 섭섭해하던 것은 물론
불입금이 남아 있어서
환불받아야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다솜이 핸폰을 바꾸고 버스를 타고 내려 걸어들어오는데
오렌지북은 이미 책과 비디오, 디브디 들은 모두 처분된 빈 공간이 되어 있었다.
주인 부부가 마지막 정리를 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몇번 가본 적이 없는 터라 지나쳐 오려는데
내 눈길을 끄는 것이 있었다.
책과 비디오, 디브디를 보관하던 책장이었다.
3겹의 레일 책장들과 붙박이 책장들은 아직 그대로였다.
그렇잖아도 내방 바닥과 책상 위에
위태롭게 쌓여가는 책들을 건드려 떨어뜨릴까
방을 돌아나올 때면 늘 신경이 쓰였던 터라
오래전부터 거실 빈 자리에 책장을 하나 놓았으면 했던 참이었다.
티비와 소파를 없애고 거실 전체를 내방처럼 책장을 짜맞춰 넣은
공간으로 만들고 싶으나 내힘으로는 아직 역부족인 반대^^*~가 심한 터라
늘 마음속으로 아쉬워하였지만, 그것이야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느 정도 포기하고 지내다가 이따끔씩 운은 띄우고 있지만....
그러나 어쨌건 이미 오래전에 포화상태에 이른
내 방의 책은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그 책장이 내 눈을 끄는 건 당연한 일이었을터.
은지 불입금 환불을 얘기할 겸 들어가서 내역을 확인한 다음
큰 기대 없이 주인에게 물어보았다.
"저 책장들, 어떻게 하시나요?
다른 곳에서 쓰나요? 아니면 다른 분이 가져가나요?"
놀랍게도 주인의 말은, 폐기처분할 것이란다!
사용한 것이니 손때가 묻은 것은 당연하지만
언뜻 보기에도 흠없는 새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것을 폐기한다니 좀 놀랐다.
그래서 그냥 바로 물었다.
"그러시면 저 책장 제가 몇 가져가도 될까요?"
그러면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자그마한 키에 배가 나온 선한 눈매의 주인은
예상 외로 친절하게 설명을 하며 선뜻 동의한다.
다만 자신은 이미 가게는 물론 책장의 처분 까지
인테리어 하는 분에게 넘겼으니
사실 그분에게 허락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분도 새 제품이나 다름없는 책장들을 급하게 처분하려다보니
폐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 같아 몹시 아쉬워하더라,
잘 말씀하시면 몇개, 가져가는 것 큰 문제 없을 것이다, 라며
그 인테리어 업자에게 직접 전화까지 걸어 주신다.
그러더니 저녁 때쯤 온다고 오면 연락주겠다고
내 전화번호를 남겨달라고 했다.
번호를 남기고 집에 들어오자 마자 연락이 왔다.
저녁에 오기로 했던 인테리어 하시는 분이 왔다고.
얼른 내려갔다.
이미 내 생각을 주인에게 전해들은 인테리어 하시는 분은
책장을 몇개 가져가도 좋다고 흔쾌히 허락해주었다.
안 그래도 새것 같은 책장을 폐기처분할 수밖에 없어서
자신도 사방에 연락해서
필요한 사람은 가져가라고 연락하는 중이었다면서..
그러나 의외로 그러겠다는 사람이 없어
세 개 정도를 제외하면 거의 그냥 바로 실어다
폐기해야 되는 상황이라고 아쉬워 했다.
레일을 통째로 옮겨 거실에 깔고 싶었으나 애초 불가능.
처음엔 책장 두 개 정도만 가져오려는 생각이었으나
세 개를 가져왔다.
땀을 흘리면 세 번 왔다갔다 책장을 들었다 밀었다 하며 가져왔다.
레일용 책장이었던 터라 바퀴를 해체하고
아래쪽 칸막이용 부분도 떼어내고
깨끗하게 닦고 나니 새 책장이나 다름없었다.
책장을 들여놓고 가게에 가서는 옆집에서 통닭을 시켜
오렌지북 주인과 인테리어 하시는 분과 사이다와 함께 먹었다.
오렌지북 주인과 이야기를 나눠 보니
책에 대한 애정이 많은 분이었다.
그랬으니 이런 사업을 했겠지만.
이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조곤조곤 했고 나는 들었다.
나는 이런 가게의 책들은 단체로 대여를 하는 시스템이 있지 않을까
막연히 그런 생각을 했었다.
직접 주인이 사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다른 곳은 모르겠으나 이 가게의 주인은 모두 직접 샀다고 한다.
10%의 대여료를 받으니까 한 책이 열번은 대여되어야 최소한 본전이고
인건비와 운영비를 생각하면 최소 20번은 대여가 되어야 하는데
책의 경우 보통 대여 비율은 2-3회가 넘지 않았다고 했다.
턱없는 적자가 뻔해보였지만 부부가 직접하는 것으로
인건비를 줄이면서 운영해왔다고 한다.
힘든 일이라 했다.
보기보다 시간도 몸도 그리고 작은 돈을 취급하는 자신과 부인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도 때로 견디기 힘들었다고 했다.
100원 짜리를 만지니
사람들이 자기들을 그렇게 대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적지 않았다고도 했다.
보통 이런 가게들이 가져다 놓는 책의 장르나 종류와는 다르게
다소 무게 있는 책들이나 문학서적들,
또 화제가 되는 신간들도 비교적 규모있게 갖추어놓으려고
애썼다는 주인의 말이 거짓같지는 않았다.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없지는 않았으나
그의 어투와 표정과 책과 영화에 대한 이야기에서
그냥 장사만 하면서 지낸 사람같은 느낌은 나지 않아
아마 다른 일을 하던 분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나중에 부인의 이야기를 통해서 이것이 첫 사업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사람들은 그렇게 다른 세계를 경험하게도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그 다른 영역이 자신의 세계가 되기도 하고....
그는 쉬고 싶어서 그만 둔다고 했다.
물론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고 그 가운데 하나는 쉬고 싶은 것일 것이다.
다행히 권리금으로 큰 손해는 보지 않았다는 말을 부인도 그도 놓치지 않고 했다.
그러시다니 다행이라고 말해 주었다.
치킨 한 두 조각 먹는 그 짧은 시간의 이야기 속에서
뭐 그리 많은 것을 나눌 수 있겠는가만
선한 분들 같았다.
드문드문 선불금을 환불받으려는 손님들이 오거나
지나가다 눈이 동그래져서는 "그만 두세요?" 하면서 들어와 환불금을 찾아 갔다.
내가 통닭을 사 온 한집 건너 옆 치킨 가게는 개업 6일차였다.
내가 기다리는 동안에도 개업인사를 오는 지인들이 있었다.
젊은 부부는 연신 웃고 있었다.
반면 오렌지북 주인 부부는 복잡한 표정이었다.
맞은편 작은 동네 공원에서는 아이들이 연신 웃으며 뛰어다녔고
그늘에 앉은 할머니 할아버지 아빠 엄마는
그런 아이들을 보다가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나누다가
인테리어 업자가 책장을 날라 화물차에 싣는 가게 쪽을
이따끔씩 바라보았다.
일요일 저녁으로 가는 시간,
평화로운 표정과 모습의 사람들이 하나둘씩 편안한 차림으로
아파트 앞 빈터와 공원, 혹은 호프집 앞 파라솔 밑에 모여들었다.
개업 6일차 치킨가게는 연신 분주했고
가게를 정리한 오렌지북 부부는 별로 말이 없었다.
남편은 갑자기 정리할 게 있다면서 인사를 하고
부인은 컴퓨터를 다시 켤까를 고민하는 것 같았다.
치킨 몇 조각을 사이다와 함께 급하게 먹은 인테리어 업자는
담배를 급하게 피우더니
몇 안 남은 책장들을 화물차에 옮겨 싣기 시작했다.
나는 잠시 말 없이 서 있다가,
부부와 인테리어 업자에게
다시 한 번 고맙다는 말을 하고 서둘러 돌아왔다.
........
얻어온 책장을 세우고 내 방바닥의 책들을 옮겨 정리했다.
거실을 다 사용하지는 못했지만
내 방의 책들이 거실 한 귀퉁이를 점령하는 데는 성공했다.
빈 책장들을 가져오겠다 했더니 내켜하지 않던 사람도
정리된 뒤에는 나쁘지 않은 모양이었다.
당당하게 점령지를 차지한 늠름한 모습^^*~
자, 이제 조금씩 조금씩 진군하는게다.
마음이 심란할 때 몸이 분주한 것은 도움이 된다.
분주함 뒤의 개운함이 크다면 더욱.
오렌지북의 부부와 인테리어 하시는 분께 감사.
오렌지북 남편분의 말,
꼭 필요한 곳에서 잘 사용되면 좋지요.
보통 이럴 때 책들을 판매하시기도 하던데, 라는 내 말에
2만권이 넘는 책과 디비디들을 모두 새로 영업을 시작하는 분께 넘겼다며,
손때 묻은 책들로 값을 흥정하기가 싫더라며 한 말.
책이야 물론 그렇겠지만 흔쾌히 주신 책장도
꼭 있어야 할 자리에 온 것이라고 말씀 전한다.
오렌지북은 문을 닫고
내 거실 문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