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s and Writings/문학작품

[스크랩] 나태주시집 - 훔쳐보는 얼굴이 더 아름답다

그림자세상 2009. 12. 5. 13:23

  도서명: 훔쳐보는 얼굴이 더 아름답다
  저자명: 나태주
  출판사명: 일지사


      훔쳐보는 얼굴이 더 아름답다
    책머리에
  이 시집은 내게는 그런 대로 큰 의미가 담긴 시집이다.
  시단에 이름을 내민 지 올해로써 21년째.
  그 동안 나름대로 시집도 열심히 내보았고 동인활동도 게을리하지는 않으면서
  이적지이지만 마음은 결코 평안치가 못하다.
  내게 남은 것은 무엇이고 내가 이룩한 것은 무엇인가.
  또 앞으로 시로써 해 내야 할 문제는 무엇인가. 차근차근 생각해 보고 하나하난 풀어나가리라.
  지난 20년, 한 사람 서정시인으로서 살아 숨쉬기는 꽤나 힘든 나날들이었다.
  작아질 대로 작아진 목소리와 좁아진 입지.
  그러나 일지사의 도움이 나의 숨통을 터 주었다.
  그 동안 일지사에서 내 준 시집이 이번 시집까지 쳐서 여섯 권.
  한 출판사에서 한 개인의 시집을 여섯 권이나 내 준 것은 아마도
  이 땅에서 찾아보기 힘든 예가 되리라.
  그러고 보면 나는 참 염치도 눈치도 없는 녀석이구나.
  이 몰염치를 씻기 위해서라도 좋은 시를 써야 할 텐데...
  하느님이 주신 달란트가 얼마나 남았는지 다시 한번 간절히 머리 조아려 헤아려 보아야
  할 일이다.
  시는 삶에서 우러나온다. 이제 나의 삶은 즐겁지만도 아니하고 고통스럽지만도 아니하다.
  오히려 씁쓰름한 가운데 은은한 향기가 배어나옴을 깨닫는다.
  우리의 삶이 만들어내는 이 씁쓰름한 향기로서의 시를 찾아
  나는 조용한 출발을 서두르지 않으면 아니 되리라.
  일지사에 대한 감사의 마음, 빚진 마음으로 "내가 아는 일지사"란 시 한 편을 써
  따로 뒤딸려 적는다.
  오직 감사에 겨울 따름이다.

  1991년 3월 공주시 금학동에서
  나태주 적음

    내가 아는 일지사

  서울하고서도 중심가
  한국일보사 뒤
  일본대사관 옆,
  돈냄새 기름냄새 사람냄새
  제일 많이 풍기는 곳쯤에서
  아담한 3층빌딩
  세상과 조금은 돌아앉아서
  일지사,
  어느 조강한 시골
  사랑채에라도 들어온 듯
  한적하고 아늑한 집,
  어쩌면 서울에 이렇게
  조용한 곳이 다 있었을까?
  일지사는
  나 같은 시골사람의 시집도
  아무 조건 없이
  인세 제대로 주어가며
  내 주는 집,
  어차피 사람은 자기 나름대로 세상을
  보고가는 거지만
  내가 아는 일지사 김성호 사장은
  깔끔하고 부드럽고 서느롭기
  지조높은 학자 같은 분,
  절간에라도 한 20년
  앉았다 온 것 같은 분,
  게다가 유학종 상무는
  구수하고 텁텁하고 마음결이 고와서
  영락없는 시골사람,
  시골사람이 오히려 부끄러운 서울 촌사람,
  어쩌면 세상에 그렇게
  좋은 사람들이 살고 있을까 싶은 곳
  내가 아는 일지사.

      차 례
    제1부 너는 흐르는 별
  시
  바람이 부오
  노을
  떠나와서
  사람 그리워
  금강가에서, 1
  금강가에서, 2
  희망
  그냥 멍청히
  조화
  깊은 밤에
  비밀
  막동리행
  가을 귀향
  골목길
  선물
  여자
  기념일
  오후
  다락방
  비었다
  강마을을 따라서
  숨은그림 찾기
  모두 떠난 자리에
  가을 밤비
  이유
  유월에
  안개지역
  옆자리
  가을은 쓸쓸한 나에게
  통화
  그립다
  너는 흐르는 별
  사랑은 혼자서
  사랑은 구름너머
  가난한 사랑
  쓸쓸한 사랑
  산 하나
  별 하나
  꽃 하나 노래 하나
  그대 생각 하나
  꽃 하나 강물 하나 산 하나
  하오의 슬픔
  지는 해 좋다
  씁쓸한 삶의 향기

    제2부 자유대한의 땅 위에서
  신호등 앞에서
  겨울나무
  개구리 울음
  편지, 1
  편지, 2
  노을 그림
  어떤 감사, 1
  어떤 감사, 2
  어떤 감사, 3
  어떤 감사, 4
  가을 풀꽃
  가을 흰구름
  청벽
  나는 뭐냐
  나는 거지
  어린이날과 어버이날
  자유대한의 땅 위에서
  차례대로
  껴안는다
  전원도시
  쓰레기
  나라열전
  억지
  사표
  미스 민, 1
  미스 민, 2
  후신
  예진기타학원
  금학동 소식
  동학혁명탑
  오줌통
  중국통신, 1
  중국통신, 2
  중국통신, 3

    제3부 사랑이 이끄는 대로
  예정
  눈
  설야
  서울여자
  봄과원
  병
  사랑이 이끄는 대로, 1
  사랑이 이끄는 대로, 2
  보리밭
  요즘 고등학교
  노을
  권태
  아침
  비오는 금강
  오리
  섭섭한 하느님
  병실
  밤길
  기도
  지훈선생님생각
  영화광고
  퇴근
  좋은 책
  사랑
  거꾸로
  인간
  밤비
  알리바이 혹은
  엽서
  말로는
  봄
  고향, 1
  충무시
  채송화
  전설
  시골 역사
  역사는
  도망
  삶, 1
  다리 위에서
  금강
  제비꽃
  철길,
  가로등
  자운영꽃
  개구리 울음
  고향, 2
  삶, 2
  영산홍
  어떤 얼굴
  안부
  고향길
  잠들기 전 기도
  꽃
  변두리 마을
  대비
  덩달아
  관심
  훔쳐보는 얼굴이 더 아름답다
  빈 집
  그리움
  보름달
  목욕
  가을
  동해의 달
  배꼽
  내 글씨


      제1부 너는 흐르는 별

    시

  마당을 쓸었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깨끗해졌습니다.

  꽃 한 송이 피었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아름다워졌습니다.

  마음 속에 시 하나 싹텄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밝아졌습니다

  나는 지금 그대를 사랑합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더욱 깨끗해지고
  아름다워졌습니다.

  89. 10. 22


    바람이 부오

  바람이 부오
  이제 나뭇잎은 아무렇게나 떨어져
  땅에 딩구오
  나뭇잎을 밟으면
  바스락 소리가 나오
  그대 내 마음을 밟아도
  바스락 소리가 날는지.

  89. 10. 22


    노 을

  방안 가득
  노래로 채우고
  세상 가득
  향기로 채우고
  내가 찾아갔을 때는
  이미 떠나버린 사람아
  그 이름조차 거두어 간 사람아
  서쪽 하늘가에
  피빛으로 뒷모습만
  은은히 보여 줄 줄이야.

  89. 9. 6


    떠나와서

  떠나와서 그리워지는
  한 강물이 있습니다
  헤어지고 나서 보고파지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미루나무 새 잎새 나와
  바람에 손을 흔들던 봄의 강가
  눈물 반짝임으로 저물어가는
  여름날 저녁의 물비늘
  혹은 겨울 안개 속에 해 떠오르고
  서걱대는 갈대숲 기슭에
  벗은 발로 헤엄치는 겨울 철새들
  헤어지고 나서 보고파지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떠나와서 그리워지는
  한 강물이 있습니다.
 
  89. 2. 20


    사람 그리워

  나는 열 번을 죽어 다시 태어나도
  사람으로 태어나리
  사람 중에서도 사람 그리워
  밤잠을 설치고
  두 눈이 진무르는
  이냥 이대로 못난
  사내로 태어나리
  그리하여 다시 그대를 만나고
  그대와 다시 헤어져
  그대 그리워 잠 못 드는 밤을
  혼자 가지리.
 
  89. 9. 3


    금강 가에서, 1
  밤 사이 잘 있었을까
  방 사이 여전할까
  궁금해지고 보고파지는 강물
  사람도 아니데
  강물을 생각하면 가슴이
  울렁거려진다
  가슴이 뜨거워진다
  강물도 나처럼 매일같이
  내가 보고 싶어질까 몰라.
 
  89. 12. 9


    금강 가에서, 2

  강물이 흘러 노래가 되고
  산이 변하여 그림이 될 때까지
  바람은 강물을 떠날 수 없고
  그름은 산을 버릴 수 없는 거야

  그대 눈물이 고여 별이 되고
  나의 한숨이 모여 꽃이 될 때까지
  그대는 그렇게 오래 멀리 있어야 하고
  나는 이렇게 혼자 있어야 하는 거야.
 
  89. 12. 9


    희 망

  그대 만나러 갈 땐
  그대 만날 희망으로
  숨쉬고
  그대 만나고 돌아올 땐
  그대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는
  희망으로 또한
  나는 숨쉽니다.
 
  89. 10. 22


    그냥 멍청히

  그냥 멍청히
  앉아 있어도 좋은 산 하나
  모두 변하는 세상에
  변하지 않아서 좋은
  돌멩이 하나
  모두 흐르는 세상에
  흐르지 않아서 맑은
  샘물 하나
  더러는 시골 담장 밑에 피어 웃음웃는
  일년초처럼
  잊혀진 개울의 낡은 다리처럼.
 
  89. 10. 22


    조 화

  산이 있기에
  강이 있고

  산이 푸르기에
  강도 푸르고

  산이 깊기에
  강도 저러이 깊소

  산에 뛰노는 산짐승
  강에 뛰노는 물고기

  그대 있기에
  나도 있고

  그대 쉼쉬기에
  나도 오늘 숨을 쉬오

  그대 가슴엔
  나의 산짐승

  나의 가슴엔
  그대 물고기
 
  89. 3. 10


    깊은 밤에

  내가 밤에 혼자 깨어
  외로워할 때
  자기도 따라서
  혼자 깨어 외로워하는 사람

  내가 앓으며
  가슴이 엷어져 갈 때
  자기도 따라서
  앓으며 가슴이 엷어져 가는 사람

  세상에 한 사람쯤
  있어 줄까 몰라,
  그것을 재산 삼아
  나는 오늘도 살아가고
  내일도 살아갑니다.
 
  89. 1. 14


    비 밀

  언뜻언뜻 치마를 걷어올리며
  눈부신 무르팍을 보여 주시는 그대여
  허연 허벅지의 속살을 보여 주시는 그대여
  나에게만 보여 주시지 말고
  하늘에게도 보여 주시오
  그대 못 견디게 부풀어오른 가슴의 두 산봉우리
  슬프도록 아름답게 휘어져내린 산등성이
  이윽고 그대 우거진 수풀이며
  향기로운 골짜기
  나에게만 보여 주시지 말고
  바람에게도 보여 주시오
  그대 검은 머리칼에 오래도록 가려 있던
  조그맣고 귀여운 두 개의 귀
  그리고 귀밑에 숨겨져 있어
  그대도 모르는 새까만 점 하나.
 
  90. 1. 17


    막동리 행

  해저문 들길에
  검정염소가 알은 체를 하오
  반갑소
  손을 흔들어 줄까 하오
 
  89. 9. 13.


    가을 귀향

  막걸리 두어 대접이면
  눈물이 나리
  해질녘 서쪽 하늘에
  붉게 물든 구름에
  얼굴 부비며
  막걸리 두어 대접이면 그대
  차마 눈물이 나리.
 

  89. 9. 13


    골목길

  해가 많이 짧아졌소
  문득 떨어지는 나뭇잎 하나가
  나를 놀라게 하오
  혼자 나는 비둘기 한 마리가
  나의 발길을 멈추게 하오
  바라보니
  빈 하늘.
 
  89. 10. 22


    선 물

  받는 것은 될수록 줄여서 받고
  주는 것은 될수록 늘려서 주리라
  그대 내게 주시는 것
  비록 적더라도
  큰 상으로 알고 받겠으니
  내가 주는 것 비록 크더라도
  작은 벌로 바꾸어 받으시라.
 
  89. 10. 22


    여 자

  아무리 고운 여자라도
  사랑해 주지 않으면
  천박한 여자가 되고 맙니다

  이것은 그대가
  그대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90. 1. 17


    기념일

  모름지기 하루 하루를
  기념일로 생각하며
  살아갈 일이다
  오늘은 모처럼
  비가 오신 기념일
  산의 나무와 풀들이 비를 맞고 신이 나서
  새로이 숨을 쉬면서 손을 흔들며
  내게 눈짓을 보내오지 않는가!
  오늘은 비 온 기념으로 퇴근길에
  나나 무수꾸리의 음반이나 하나 사고
  영화나 그럴 듯한 것으로 한 편 보아야겠다.
 
  89. 6. 5


    오 후

  사과 썩는 냄새가
  향기로운
  가을날 오후
  맑은 햇살 얼비치는
  창기에 앉아서
  그대에게 편지를 쓰면서
  그대의 몸매음이 어쩌면
  사과 썩는 냄새와 비슷했고
  그대 눈빛이
  가을 햇빛처럼
  맑지 않았던가 짐작해 보았습니다.
 
  89. 9. 20


    다락방

  아담에 집을 마련한다면
  지붕 위에 다락방 하나 달린 집을
  마련하겠습니다.
  문틈으로 하늘 구름도 잘 보이고
  바람의 옷소매도 잘 보일 뿐더러
  밤이면 별이 하나 둘 돋아나는 것도
  곧잘 볼 수 있는
  그러한 다락방을 하나
  마련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속상하거나 답답한 날은
  다락방에 꽁꽁 숨으렵니다.
  그대도 짐작 못하고
  하느님도 찾지 못하시도록.
 
  89. 9. 18


    비었다

  들판은
  비었다

  마음도
  비었다

  비인 들판과 마음
  사이

  아침 저녁으로
  안개와 연기가
  채워주었다

  갈대꽃은
  죽어서도 하얗게
  손 흔들며 웃고 있었다.
 
  89. 10. 27.


    강마을을 따라서

  억새풀 어우러진
  숲길에서
  꽃 한 송이 꺾어들지
  마시구려
  바람 어지럽게 오가는
  들길에서
  흰구름을 바라보지
  마시구려
  그대 계신 곳은 아침마다
  안개 구름 피어올라
  산을 가리우는
  백리길
  그러나 마음은
  만리길.
 
  89. 10. 6


    숨은그림 찾기

  아름다운 사람이
  꺾어주면
  여뀌풀꽃 그 천한 꽃도
  고귀한 꽃이 됩니다

  아름다운 사람이
  노래 부르면
  유행가 그 흔한 곡조도
  아름다운 노래가 됩니다

  저만큼 빨간 등산복차림
  혼자 서 있는 가을 삽화
  나만 아는
  숨은그림 찾기입니다.
 
  89. 9. 17


    모두 떠난 자리에

  모두 떠난 자리에
  그대 단 하나
  내게는 소중한 행운입니다

  무너져 내린 가을꽃밭
  그대 단 하나
  내게는 빛나는 꽃송입니다

  바람 부는 산성 위에
  오로지 그대
  꺾이지 않는 하나의 나무입니다.
 
  89. 9. 17


    가을 밤비

  실타래에서
  실을 풀어내듯
  내리는 비, 밤비

  쉬었다 쉬었다가
  생각나면 속삭이듯
  내리는 비, 가을비

  감나무 잎새에 내려선
  굵은 비가 되고
  내 가슴에 내려선
  쓸쓸한 비가 되오

  비로 하여 더욱
  깊어지는 밤
  밤으로 하여 더욱
  가까워지는 빗소리.
 
  89. 9. 9.


    이 유

  당신은 왜 내가
  우산을 가졌으면서
  우산을 펼치지 않고 그냥
  길을 가는지 모르시지요?
  두 손에 가방을 들었기 때문이라구요?
  아닙니다
  당신이 받쳐주는 우산속에 나도 들어가
  당신과 함께 걸어보고 싶어서입니다.
 
  89. 6. 5


    유월에

  말없이 바라
  보아주시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합니다

  때때로 옆에 와
  서 주시는 것만으로도 나는
  따뜻합니다

  산에 들에 하이얀 무찔레꽃
  울타리와 덩쿨장미
  어우려져 피어나는 유월에

  그대 눈길에
  스치는 것만으로도 나는
  황홀합니다

  그대 생각 가슴 속에
  안개 되어 피어오름만으로도
  나는 이렇게 가득합니다.
 
  89. 5. 18


    안개지역

  자고 일어나면 어김없이 우리는
  누군가한테 완벽하게 정복당한 뒤였다

  밤새도록 잠을 설친 사람들은 눈을 비비며
  강가로 나와 답답한 가슴으로
  바튼 기침을 했다

  세상 모두 다 변한 뒤에도
  변하지 않는 오직 한 사람
  잔직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건
  헛된 욕심일까

  내가 그런 사람이 되고 싶은 건
  차리리 만용일까

  자고 일어나면 어김없이 우리는
  내가 아닌 또 하나의 내가 되어 있었다

  나날이 여위어 가는 나무들을 바라보며
  한사코 사람들은 강가에 나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고만 했고
  잡히지 않는 것을 잡으려고만 했다.
 
  89. 12. 28.


  옆자리

  옆자리에 계신 것만으로도 나는
  따뜻합니다
  그대 숨소리만으로도 나는
  행복합니다
  굳이 이름을 말씀해 주실 것도 없습니다
  주소를 알려주실 필요도 없습니다
  또한 굳이 나의 이름을
  알려 하지를 마십시오
  이름 없이 주소 없이 이냥
  곁에 앉아계신 따스함만으로도
  그대와 나는 가득합니다
  보이지 않는
  그대와 나의 가슴 울렁임만으로도
  우리는 황홀합니다
  그리하여 인사 없이 눈짓 없이
  헤어지게 됨도
  우리에겐 소중한 만남입니다.
 
  89. 5. 21


    가을은 쓸쓸한 나에게

  가을은 쓸쓸한 나에게
  더욱 쓸쓸해 하라고

  혼자 걸어가는 여자의
  바바리 코트를 보여 주고

  길가에 떨어져 빗방울에 밟히는
  은행잎을 보여 주고

  길게길게 저물어 사라지는
  언덕의 노을을 보여 줍니다

  가을은 쓸쓸한 나에게
  더욱 쓸쓸해 하라고.
 
  89. 10.


    통 화

  자면서도 나는
  그대에게 전화를
  걸고 있습니다

  그대 생각만으로 살았다고
  내일도 그대 생각 가득할 것이라고

  자면서도 나는
  그대로부터 전화를
  받고 있습니다.
 
  89. 9. 19


    그립다

  쓸쓸한 사람 가을에
  더욱 호젓하다

  맑은 눈빛 가을에
  더욱 그윽하다

  그대 안경알 너머
  가을꽃 진 자리
  무더기 무더기

  문득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길
  그립다.
 
  89. 10. 4


    너는 흐르는 별

  너는 흐르는 별
  나도 또한 흐르는 별

  어제 간 곳을 오늘 또
  지나친다 말하지 말자

  어제 만난 것들을 오늘 또
  만난다 생각 말자

  비록 어제 간 길을 가고
  어제 본 산과 들과 나무들을 보며
  어제 만난 너와 내가 다시 만나지만

  어제의 너와 나는 죽고
  어제의 산과 들과 나무는
  더불어 죽고

  오늘의 너는 새로이 태어난 너
  오늘의 나는 새로이 눈을 뜬 나

  오늘 우리는 새로이 만나고
  오늘 우리는 새로이 반짝인다

  너는 흐르는 별
  나도 또한 흐르는 별.
 
  89. 6. 5


    사랑은 혼자서

  사랑은 여럿이가 아니라
  혼자서 쓸쓸한 생각
  저무는 저녁해
  그리고 깜깜한 어둠

  사랑은 둘이 아니라
  혼자서 푸르른 산맥
  흐르는 시내
  그리고 풀벌레 울음

  사랑은 너와 함께가 아니라
  혼자서 이루는 약속
  머나먼 내일
  그리고 이별과 망각.
 
  89. 9. 5


    사랑은 구름 너머

  사랑은 구름 위에
  사랑은 바람 너머

  세상은 언제나 나에게 낯선 곳
  세상은 언제나 나에게 힘겨운 곳

  숨쉬기 위해서 그대를 사랑했다
  외롭지 않기 위해서 그대를 사랑했다
  슬프지 않기 위해서 그대를 사랑했다

  그러나 그대를 사랑할수록
  숨쉬기는 더욱 힘들었고
  외로움은 커졌으며
  슬픔 또한 늘어났다

  아, 그대를 사랑함은 나에게
  형벌의 강물이었다

  사랑은 바람 위에
  사랑은 구름 너머.
 
  89. 6.


    가난한 사랑

  그대가 가난한 사람이라면
  나도 가난한 가슴이 되어
  베옷 입고 찬비 맞으며
  오두막 단칸방에 살겠습니다

  그대가 죄지은 사람이라면
  나도 천둥벌거숭이 죄인이 되어
  그대 들어간 감옥을 따라가든지
  마음 속에 감옥 하나 따로 짓겠습니다

  그대가 병든 사람이라면
  나도 불치병 앓는 환자가 되어
  그대 옆에 자리깔고 누워
  죽음의 나라를 들락거리겠습니다.

  그러나 그대가 왕이시라면
  나는 천하고 낮은 신하가 되어
  그대 발 아래 고요히 무릎 꿇고
  그대 시키는 어떠한 일이라도 따르려 합니다.
 
  90. 12. 10


    쓸쓸한 사랑

  이제 우리에게도 고요한 날
  두 그루의 푸르른 나무가 되어
  그윽한 눈빛 하나만으로 말없이도
  바라보게 하여 주십시오

  이제 우리에게도 햇빛 밝은 날
  두 줄기의 향기론 풀잎이 되어
  부드러운 어깨로 마주
  기대이게 하여 주십시오

  이제 우리에게도 바람 맑은 날
  두 송이의 어여쁜 꽃이 되어
  가여운 모가지를 하늘 호수에
  흔들리게 하여 주십시오

  이제 우리에게도 쓸쓸한 사랑
  쓸쓸한 삶의 뒤안길
  쓸쓸한 대로 투정하지 말게
  하여 주십시오.
 
  90. 1. 17.


    산 하나

  얼마나 오래 기다리고 애를 태우면
  산 하나 가슴 속에
  솟게 할 수 있을까

  구름 고깔로 쓰고
  새와 바람도 찾아와 놀게 하는
  산 하나
  솟아나게 할 수 있을까

  그리하여 발치에
  반짝이는 뱀비늘의
  맑은 강물 하나 또
  흐르게 할 수 있을까

  얼마나 오래 견디고 헤어져 있으면
  그대 내게 와
  아름답고 따뜻한 산이 되고
  서러운 서러운 강물이 되게 할 수 있을까.
 
  89. 6.


    별 하나

  그림자를 지우고
  소문을 버리고
  어두어져가는 산으로 들어갑니다

  맑은 물소리 한 소절
  만날 듯싶어
  깨끗한 개구리 울음소리 한 마당
  들릴 듯 싶어

  아직도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는
  산으로 들어갑니다
  차갑고 향기로운 바람끝에
  반짝 돋아나는
  별 하나,

  저 별은 누구의
  눈물 자국입니까.
 
  90. 4. 15.


    꽃 하나 노래 하나

  꽃 하나
  찾으려고
  세상에 왔다가

  노래 하나
  얻으려고
  세상 헤매이다가

  꽃도 노래도
  찾지 못하고

  나는 여기
  땅바닥에 주저앉아
  발부비며 울고 있습니다

  그대여 나를
  데려가 주세요.
 
  90. 1. 14.


    그대 생각 하나

  맑은 날을 온종일
  유리창 가에
  아무 생각 없이
  아무 하는 일도 없이 그렇게
  앉아만 있으려네

  그리하여 드디어
  날이 저물고
  그대 생각 하나
  떠올리려네

  맑은 눈으로 지켜보는 이마
  하늘끝 금강초롱꽃
  모시옷에 속살 대이듯
  서늘한 눈매여

  끝내 눈물이 나리, 그대
  그러면 나는 혼자
  어둠 속에 더듬더듬
  촛불 밝히리.
 
  89. 2. 13.


    꽃 하나 강물 하나 산 하나

  꽃 하나 가슴 속에
  숨긴 사람은
  남몰래 아름다워서
  세상의 온갖 꽃을 보면서도
  외로워하지 않습니다

  강물 하나 가슴 속에
  흐르게 한 사람은
  저 혼자서도 부드러워서
  세상의 온갖 강물을 보면서도
  함부로 조바심이 없습니다

  산 하나 가슴 속에
  간직한 사람은
  스스로 가득하여서
  세상의 온갖 산을 두고서도
  함부로 흔들림이 없습니다

  이제 내게
  꽃이고 강물이고
  산이신 그대여

  그대 내게 있는 날까지
  나는 가난하지도 외롭지도 않으렵니다
  아무것에도 부끄러움이 없는
  하늘 아래 당당한 한 사람
  사람이려 합니다.
 
  90. 1. 15.


    하오의 슬픔

  세상에 와서 내가
  한 일이라곤 고작
  글 몇 줄 쓴 일밖에 없는데
  공연스레
  하얀 종이만 함부로
  버려 놓고 말았구려

  세상에 와서 내가
  한 일이라곤 고작
  그대 좋아한 일밖에 없는데
  공연스레
  그대 고운 마음만
  아프게 만들고 말았구려

  어느날 찬 물에 손을
  씻다가 본
  손에 묻었던 파아란 잉크빛
  그 번져나가는 슬픔을 보면서.
 
  90. 4. 18


    지는 해 좋다

  지는 해 좋다
  볕바른 창가에 앉은 여자
  눈밑에 가늘은 잔주름을 만들며
  웃고 있다

  이제 서둘지 않으리라
  두 손 맞잡고 밤을 새워
  울지도 않으리라
  그녀 두 눈 속에 내가 있음을
  내가 알고
  나의 마음 속에 그녀가 살고 있음을
  그녀가 안다

  지는 해 좋다
  산그늘이 또다른 산의 아랫도리를
  가린다
  그늘에 덮히고 남은
  산의 정수리가
  더욱 환하게 빛난다.
  
  90. 12. 5.


    씁쓸한 삶의 향기

  비린내나는
  젊은 시절엔
  모르리

  맹물맛 뒤에 숨어나는
  씁쓰름한
  삶의 향기

  혼자라도 좋고
  둘이라면 더욱
  좋으리

  갈 사람 가고
  올 사람 온
  하오의 한때

  마른 입술 적셔주는
  화사한
  고독

  차라리
  색동옷 입혀
  마주 앉히리

  눈보라 스러지는
  봄의 언덕 푸르름 속에
  새로 움트는 안단테 아다지오

  드디어 청산도
  아는 체하고 흰구름도
  같이 와 놀자 하네.
 
  90. 9. 10.


      제2부 자유대한의 땅 위에서

    신호등 앞에서

  무엇이든 나한테는 많이
  달라고 조르고
  준다는 것은 아주 적은
  나의 세상

  나한테는 기다리라고만
  오래 그러고
  때가 되면 빨리 지나가라고 조르는
  나의 세상

  이 봄에 더욱 나는
  섭섭합니다
  야속합니다.
 
  90. 4. 17.


    겨울나무

  분노가 힘이라면
  사랑도 힘이고
  용서는 더욱 큰 힘입니다

  나무여
  겨울나무여

  나뭇가지에 주렁주렁
  얼어서 은은한
  옥구슬 소리를 내는
  별들이 열리는 날

  용서의 칼날을
  빌려주십시오 부디.
 
  90. 11. 18.


    개구리 울음

  갸걀갸걀
  마른 하늘에 소낙비
  쏟아지는 소리

  갸걀갸걀
  갈래머리 국민학교 시절
  계집애들의
  꽈리 깨무는 소리

  예전엔
  대문 밖에만 나서도
  어디서든 들을 수 있던
  개구리 울음소리

  이제는
  일부러 등산복 차려 입고
  계룡산 부근에 와서야
  귀한 약으로
  찾아 듣게 되는
  개구리 울음소리.
 
  90. 4. 15.


    편지, 1

  몇 번이나 그대 없이
  봄이 오고
  강둑에 풀이 푸르렀던가

  그대와 함께 거닐던 때는
  흰구름이 한가롭게 내려와 놀고
  풀꽃 향기 폴폴 바람에
  날리던 길이었는데

  밤이면 개구리 울음소리
  흐린 달빛과 어우러져
  아득하고 꿈결 같은 길이었는데

  뽕밭이 변하여 바다가 된다고
  바다가 변하여 뽕밭이 된다고
  그대여 다시는 이곳에
  돌아오지 마시라.
 
  90. 4. 14.


    편지, 2

  혼자 돌아앉아
  울음 우는 날

  흰구름도
  찾아와 주지 않고

  새소리도 찾아와
  울어 주지 않았습니다

  그대 이제
  너무 멀리 계신 날.
 
  90. 4. 14.


    노을 그림

  하루치의
  품팔이를 마감하고
  지친 몸 마른 입술로
  마시는 소주 한 잔

  주린 창자에
  스미는
  노을빛 황홀

  아닌게 아니라
  서쪽 하늘에
  그럴 듯한
  노을 그림도 한 폭
  걸렸구려

  기우는 유리
  술잔에 지는
  노을빛 꽃 한 송이.
 
  90. 5. 30.


    어떤 감사, 1

  부지런하기도 하시지
  나는 겨우
  겨울 옷 벗고서도 추워
  으스스 떨고 있는데
  어느 사이 꽃을 피워
  씨앗을 맺으셨구려
  냉이풀꽃

  고맙기도 하시지
  사람들이 부동산 투기로 사 놓고
  땅값 오르기를 기다려
  묵혀둔 빈 땅에 무더기로 꽃을 피워
  바람 물결로 쓸리고 계시는구려
  냉이풀꽃.

  90. 4. 17.


    어떤 감사, 2

  고맙기도 하셔라
  내 비록 공들이고 기도드린 바 없으나
  봄님은 저토록 우리나라의 산과 들에
  온갖 꽃을 피워 꽃잔치를 마련하셨구려
  꽃잔치상 위로 향기로운 바람까지
  덤으로 흐르게 하셨구려

  눈물겹기도 하셔라
  내 비록 바라고 꿈꾼 바 없으나
  이 나라에 여전히 어여쁜 쳐녀애들
  골골마다 새로 나와 새옷 입고 외출을 하게 하시는구려

  마을 어귀마다 어린아이들까지
  모여 놀게 하시는구려.
 
  90. 4. 17.


    어떤 감사, 3

  아, 서울에도
  국민학교는 있고
  국민학교 어린이들은 있었구나

  가을이라고 학교마다
  금싸라기 은싸라기 햇빛 쏟아지는
  드넓은 운동장에 모여
  와와 소리지르며
  영차영차 운동회 연습에
  열을 올리고 있는 아이들

  우리나라가 아직도 망하지 않은 것은
  순전히 우리나라에
  국민학교 어린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90. 9. 28.


    어떤 감사, 4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더 재겨 심어넣을 수 없도록
  뻑뻑한 지구
  집 하나 도시 하나
  더 비집고 그려넣을 수 없도록
  꽉 차버린 도화지
  자동차로 물결치고
  사람으로 파도치는 지구 한 모퉁이
  나 같은 것까지 사람이랍시고
  꼽사리붙어 살게 해 주시니
  미안합니다
  감사합니다.
 
  90. 9. 28.


    가을 풀꽃

  짐승보다
  사람이 더 무서운 날
  사람 가운데에서도
  아는 사람이 더
  섬뜩한 날
  사람을 피해서
  차리리 짐승이라도 만나고 싶어
  혼자 찾은 오솔길 풀섶에
  반짝, 덧니를 드러내고 웃는
  아지 못할
  가을 풀꽃 하나.
 
  90. 9. 28.


    가을 흰구름

  친구 없고 사랑 없고
  그리움조차 메말라
  가을 갱년기의 산길을 오르고
  가을 초죽음의 개울가를 서성이노라면
  누군가 이마 위에서
  나를 부르는 손짓
  하늘 바라 고개 들면 거기
  빛바래고 야윈 가을 흰구름
  자네도 나처럼 외로이 떠도는
  이 가을의 뜨내기로군
  가을 흰구름이 내게
  건네주시는 말씀 한 마디
  가슴 속 샘물로 고이네.
 
  90. 9. 28.


    청 벽

  인심은 흐리고
  강물도 흐리고
  언덕에 벌받는
  아이들처럼 옷 벗고
  줄지어 서 있는 나무들
  눈 감았다 떠 보면 철렁
  앞을 막는 아득한 강물
  텀벙,
  빠져 죽어나 보일까
  더러운 물 속에
  거꾸로 비친
  푸른 산 그 속으로나
  들어가 볼까.
 
  90. 11. 18


    나는 뭐냐

  글에서 향기가 나는 사람
  이름에서 향기가 나는 사람
  만나기를 꿈꿨는데

  차라리 내가
  글에서 향기가 나는 사람
  이름에서 향기가 나는 사람
  되기를 꿈꿨는데

  글에서 이름에서
  향기가 나는 사람
  만나지 못하고
  되지도 못하고

  이게 뭐냐!
  이제 머리카락만 다 빠트려먹고
  글에서도 똥내가 나고
  이름에서도 똥내가 나고
  나는 이게 뭐냐!
 
  89. 9. 12.


    나는 거지

  명예에 주리고
  사랑에 주리고
  여자에 주린
  나는 거지
  먹어도 먹어도 배고파서
  길거리를 기웃기웃
  후줄근히 떠도는 행색
  하느님이 보시기에 얼마나
  딱하실까
  이 거지 행색
  벗는 날
  당신 나라에 서리라.
 
  89. 10. 14.


    어린이날과 어버이날

  어린이날입니다
  대학생들이
  학교 건물에 불을 지르고
  교수의 차를 불태우고
  만류하는 교수를 때렸습니다

  어버이날입니다
  대학생들이
  최루탄 연기에 휩싸여
  재채기하다가 콧물 눈물 흘리다가
  붙들려 갔습니다
  사냥터의 꿩이나 토끼처럼 줄줄이
  붙들려 갔습니다.
 
  87. 5. 10.


    자유대한의 땅 위에서

  어느날 술에 곤드레로 취했다 치자
  증명서도 없고 돈도 없었다 치자
  시궁창에 딩굴어 옷을 버린 채 남의 집 담장 밑에
  쪼그리고 있었다 치자
  아니면 술집에서 좀 다투었다 치자
  신고받고 달려온 복지원의 젊은이들
  낚아채어 봉고차에 실었다 치자
  무어라 무어라 말을 해도 막무가내로
  곧이들으로 하지 않았다 치자
  이 자유대한의 하늘 아래서
  별들이 저렇게 새파랗게 눈을 뜨고 내려다보고
  하느님이 아시는데
  이 통금도 없는 자유대한의 땅 위에서
 
  87. 6.


    차례대로

  차례대로 줄을 서서 물을 먹었습니다
  참 아름다운 말입니다
  차례대로 줄을 서서 차를 탔습니다
  더 아름다운 말입니다
  그런데 그 아이들이
  국민학교 문을 나선 지 10년도 되지 못해서
  다섯놈이서 작당해서
  차를 훔쳐타고
  온천에 다녀오는
  아베크 차를 앞질러 세운 뒤
  남자는 손발 묶어 연못물에 빠뜨려 죽이고
  여자에겐 차례대로 폭행을 가했다고 합니다
  이런 때 차례대로란 말은 참
  무서운 말입니다.
 
  87. 3. 31.


    껴안는다

  껴안는다는 말은
  좋은 말입니다
  엄마가 아기를 껴안는다고
  말할 때는 따뜻한 말이 되고
  애인이 애인을 껴안는다고
  말할 때는 빛나는 말이 되고
  친구가 친구를 껴안는다고
  말할 때는 정다운 말이 됩니다
  그러나 고문 경찰관이
  대학생을 껴안는다고
  말할 때는 무서운 말이 됩니다.
 
  87. 5. 22


    전원도시

  오나가나 똥냄새
  가나오나 쓰레기 냄새
  그래도 네온싸인만 켜지면
  환상미로
  그대도 술 한잔만 걸치고 나면
  향수냄새
  똥냄새를 맡으며 쓰레기냄새를 맡으며
  아이들은 나날이 귀업고 사랑스럽게
  자라가는데
  나중에 자라
  어른이 되었을 때
  이이들은 무어라고
  말할 것인가
  그래도 우리들은 아름다운
  전원도시에서 자랐다고
  그래도 그때가 좋았노라고 그립다고
  한숨쉬며 속삭일 것인가
  어느 별에선가 지옥에선가.
 
  90. 11. 18.


    쓰레기

  1.
  쓰레기란 말을 거꾸로 읽으면
  기레쓰가 되고
  제법 우아한 느낌도 듭니다
  예쁜 일본 여배우 이름 같기도 합니다
  세상은 이처럼 가끔
  거꾸로 보며 살아가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

  2.
  기레쓰 기레쓰
  쓰레기의 거꾸로 이름 기레쓰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은
  거꾸로 쓰레기
  쓰레기 치우는 사람은 거꾸로 기레쓰.

  3.
  여기를 가도 쓰레기
  저기를 가도 쓰레기
  지구의 구석구석에
  인간이 버린 쓰레기더미
  도대체 어쩌자는 것인가
  차라리 인간은
  신이 버린 쓰레기.
 
  90. 8. 25.


    나라 열전

  배 고프고 춥던 시절
  우리가 꿈꾸던 건
  밥나라
  옷나라
  그 뒤 살만들 해지자
  우리가 찾았던 건
  집나라
  돈나라
  이제 모두들
  미쳐서 돌아가는 꼴들은
  술나라
  똥나라
  오 살기 좋은 우리나라
  만세,
  만만세!
 
  90. 8. 26.


    억지

  어린이 헌장이 생기면서
  어린이들이 삐뚤어지기 시작하고
  국민교육 헌장이 생기면서
  교육이 엉망이 되기 시작하고
  자연보호 헌장이 생기면서
  자연이 망가지기 시작했을뿐더러
  노인 헌장이 생기면서
  노인들이 천대를 받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헌장 같은 것은
  만들지도 말아야 되고
  이미 만든 헌장도 없애야 된다.
 
  90. 9. 28.


    사 표

  나는 이제 사람인 것이 부끄럽다
  사람이 사람을 팔아먹는 나라의
  사람인 것이 부끄럽다
  사람이 사람을 팔아먹는 것을 듣고 보면서도
  어찌할 수 없는 사람인 것이 부끄럽다
  오히려 아무렇지도 않은 듯
  여전히 숨쉬고 밥먹고 웃고 떠드는
  나라는 인간이 부끄럽다 못해
  불쌍하고 밉다
  나는 이제 사람으로서의 사표를
  낼까 한다

  하늘 아래 어디에
  사람이 사람을
  팔아먹는 나라가 있단 말인가
  나는 이제 이 땅에서
  시인으로서의
  사표도 함께 내려고 한다.
 
  90. 9. 29.


    미스 민, 1

  미스 강 미스 장 미스 진
  그 흔한 술집 성씨 중의 하나인
  미스 민
  아버지 어머니가 물려주고 지어준
  성씨와 이름은 아예 어느 시궁창에다
  버리고 왔는지
  그냥 미스 민
  어느 해 여름날 밤이던가
  미친 바람이 불어 찾아간 부여의
  뒷골목
  이름조차 아리송한 후진 맥주집
  그녀도 한 마리 짐승이 되고
  나도 한 마리 짐승이 되어
  만난 미스 민
  실컷 지꺼리고 웃고
  실컷 술 마시고 그냥 그렇게
  그날 밤 헤어졌는데
  그 뒤로 얼마의 세월이
  흘렀던가 어느날
  공주의 뒷골목 청솔이란
  술집에 찾아갔더니
  아, 거기 미스 민이
  와 있는 게 아닌가
  실은 나는 언제 그녀를 만났는지
  어디서 만났는지
  깡그리 잊어먹고 있었는데
  그녀는 나를 보자 담박 알아보는 게 아닌가
  언제 어디서 누구와 만났는지
  그 모든 것들을 소상하게
  기억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날 밤
  내가 적어 준 시덥잖은 시나부랭이까지
  손지갑에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때의 그 부끄럽던 마음이라니...
  더럽혀질대로 더럽혀진 나의 마음에 비하여
  그녀는 얼마나 깨끗한 순정을 지닌
  이 나라의 아름다운 한 사람
  아낙이던가...
  알아주는 사람 있으나마나
  제멋대로 피었다 제멋대로 지는
  서럽도록 노랗고 파란 우리나라 들꽃인
  달맞이꽃이나 달개비 아니면 꼭두서니 같은
  미스 민
  술을 많이 마시면 피가 더러워져서
  살이 찌고 얼굴빛이 검어져요
  슬프게 웃으며 말하던
  술집 성씨 미스 민.
 
  90. 6. 18.


    미스 민, 2

  몇년 전 케이비에스가 방영한
  광주는 말한다란 프로그램에서
  한 의사가 나와 증언하고 있었다
  그 난리통에 병원은 긴급 환자로
  초만원인데
  연고자 있는 사람은 보호자가 나서서
  간호도 하고 치료비고 대 주고 그러는데
  연고자 없는 환자들
  자진 돈이 없고 간호해 줄 사람도 없어 걱정했더니
  뒷골목 아가씨들 술집 아가씨들
  자진해서 몰려와 돈도 내놓고 더러워진 피일망정
  팔을 걷어붙이고 피도 빼 주고
  자기 고향에 두고온 애인이나 되는 것처럼
  옆에 붙어서 밤새워 간호해 주더라고
  자신은 왜 그녀들이 그러는지 영 그것이 이해 못할
  곡절이더라고
  그 의사선생님 뭘 몰라도 한참 모르시네
  술집 아가씨들 뒷골목의 아가씨들이 얼마나
  마음씨 곱고 정에 약한 사람들이요
  그녀들이야말로 이 나라 백성 가운데 가장 순종에
  가까운 사람들이라는 것을
  돈많고 등뜨신 의사선생님이 아실 턱이 있으시겠나
  그 아리따운 아가씨들 가운데 한 두어 사람은
  끼어 있었을 술집 성씨
  미스 강 미스 장 미스 진
  그리고 미스 민
  우리들 사랑스러운 이 땅의
  누이들이여.
  
  90. 6. 18.


    후 신
  --허영자 시인

  무릇 현철한 여자란
  그가 가진 가슴 속의 살향기와 따스함과 지혜로써
  살맞은 산짐승인양 무잡한 사내들을 길들이나니,
  천천히 천천히 길들이나니,
  호령보다는 낮은 속삭임으로
  교태보다는 맑은 눈빛으로
  세상의 모든 사내들을 홀리나니,
  흘리나니...

  시인이시여
  신라의 한낮 찬란한 함박꽃이었던
  선덕여왕의 후신인 허영자 시인이시여
  내 당신 앞에 지귀 되어 무릎 꿇으리이까!
  당신의 황금팔찌를 탐하리이까!

  오로지 영롱하고 맑은 시로써 당신은
  세상의 모든 사내들의 연인이 됩소서
  술 취해 계집질하고 나오는
  부끄러운 사내들의 이마위에도
  새벽별 되어 뜹소서.
 
  78. 5. 26.


    예진기타학원

  공주라 제민천 가에
  예진기타학원
  허름한 한옥 가게방에
  세를 얻어 클래식 기타를
  가르치는 집

  그 집의 싸부님은 감상돈
  설흔 살이 다 되도록 철이 덜 든 사내
  언제나 더부룩한 머리에
  꿈꾸는 듯한 눈매를 가진 사내

  그 집의 싸부님의 마나님은 정혜실
  국민학교 선생님인데 시 쓰는 걸 더 좋아하는 여자
  호동그란 고양이의 눈에 까르륵까르륵
  웃는 웃음을 가진 여자

  세상이 아무리 재미없이 빡빡한 세상이 된다 해도
  아직도 예진기타학원에 가 보면
  숨겨논 세상 살 재미가 남아 있지
  세상이 아무리 인정이 메마르고 모래밭 같을지라도
  아직도 예진기타학원에 가 보면
  숨어 사는 낭만과 꿈의 새순들을 찾아볼 수 있지.
 
  90. 10. 1.


    금학동 소식

  땜공사로 마을과 전답이 물에 잠기고
  조상의 무덤까지 물에 잠겨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들 얘기,
  도시개발이라는 허울좋은 이름으로
  간척사업이란 사탕발림으로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삶의 터전까지
  잃어버린 사람들 얘기,
  나와는 상관없는 남의 얘긴 줄 알았는데
  어느 날인가 내가 사는 금학동에도
  낯선 외지사람들 몇이서 기웃거리기 시작하더니
  여름이면 개구리 울고 겨울이면 동네 아이들 썰매
  타고 놀던 텃논을 사들여 거기다가
  놀랍기도 해라
  십몇층짜리 아파트를 짓는다 하네
  그러더니 글쎄 이번에는 우리집
  담장을 헐고 벽을 헐어 아파트로 가는 길을
  넓힌다 하네
  졸지에 살던 집에서
  쫓겨나게 생겼으니 이게 웬 날벼락이며
  인심 좋기로 이름난 우리 마을도
  풍지박산이 되게 생겼으니
  이게 무슨 아닌 밤중에 홍두깨란 말인가
  뿐이랴 때때로 나를 찾아와 놀다가던
  금학동의 흰구름이며 바람 그리고
  한밤중의 달님 일부러 나를 찾아와
  나 없는 걸 알면 얼마나 섭섭해할까
  억울하고 분한 생각
  약한 자의 슬픔이여
  가난한 자의 고달픔이여.
 
  90. 10. 1.


    동학혁명탑

  내가 사는 공주시 금학동 우금치에는 동학혁명탑이 있습니다.
  그래 공주를 찾는 뜻있는 사람들이 참배를 하고 가는 곳이기도 하고
  더러는 학생들의 소풍장소로 이용되기도 하는 공주로서는 제법 숨겨진 명소 중의 하나입니다.
  동학혁명탑은 5, 16군사혁명 직후 3공화국 정부의 지원금으로 최덕신 교령이 세운 탑으로
  탑의 제자는 박정희 대통령이 썼는데 탑 아래 비문에도 이러한 사정이 상세히 기록돼 있고
  그 뒷면에는 최덕신 교령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헌데 무슨 까닭으로서인지 최덕신 교령이 미국을 통해 북한으로 넘어가는 사건이 벌어지자
  이 동학혁명탑에도 한 조그만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누구의 손에 의해서인지 모르지만 탑의 뒷면에 새겨진 최덕신이란 이름 위에
  새까만 먹칠이 입혀진 사실입니다.
  그런 뒤 족히 10년의 세월이 흘렀을까.
  6공화국이 들어서고 민주화의 물결이 일자 이번엔 반대의 변화가 탑에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역시 누구의 손에 의해서인지 모르지만 탑의 뒷면 최덕신이란 이름위에 덮여 있던
  검정칠이 깨끗하게 벗겨지고.
  탑의 앞면 비문에 새겨진 박정희란 이름이 날카로운 정과 끌에 의해서 도려내지고
  망가진 사실입니다.
  정말 꼭 그렇게 해야만 분풀이가 가능했던 것일까?
  오욕의 역사든 영광의 역사든 역사적인 사실을 조용히 수용하면서 반성하고
  발전시킬 수는 없었을까?
  이유야 어찌 되었든 돌에 새겨진 이름자까지 검정칠로 가려야만 했던
  눈가림의 속임수와 돌에 새겨진 이름자를 정이나 끌로 도래내어
  어리석은 폭력을 우리는 어떻게 보아 주어야만 할까...
  이러고서도 우리가 정말 문화민족이라 자랑하고 선진 국민이 되겠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나는 10년을 두고 우금치 동학혁명탑을 찾으며 내내 부끄럽고 속으로 은근히
  울화통이 터져 올랐습니다.
 
  90. 4. 22.

   
    오줌통

  용산시외버스 터미날 남자 화장실에서 처음 보기 시작했고
  그 다음 천안과 공주 시외버스 정류장에서 자주 보았던 오줌통.
  녹십자라든가 하는 제약회사에서 받아다가 사람에게 필요한 약품을
  뽑아낼 목적으로 놓아두곤 하던 백색 플라스틱 오줌통.
  언제부터인지 그 오줌통들 보이지 않아 그러려니 무심코 지냈었는데
  어느날, 인삼의 고장인 금삼문화원에서 문학행사를 한다기에 금산에 가 버스터미날에 내려
  오줌이 마려 화장실에 가 보니 그동안 못 보고 지내던 녹십자사의 오줌통들이
  죄다 거기 와 있는 것이었습니다.
  아참! 그렇습니다.
  서울이나 천안이나 공주 사람들의 오줌은 이미 오줌까지 오염되어
  약으로 받아갈 만한 오줌이 못 되어 깨끗한 금산 사람들의 오줌을 받아가는 것인가 봅니다.
  게다가 금산은 천하의 명약 인삼 본고장이고 보니 오줌 속에 분명히 인삼기운까지 섞여 있어
  더 약의 효험이 있을 테니 더욱 그러한가 봅니다.
 
  90. 4. 22.


    중국통신, 1
  -- 현지처

  제발 헛소문이길 바랬지만 들리는 말로는 연변,
  그 압록강 두만강 너머 아직은 때 안 묻은 땅 깨끗한 가슴의 우리 동포들
  옹기종기 고국을 그리면 살아가는 거기,
  그 사람들 가운데 우리나라 관광객들의 현지처가 생겼다니
  다 누구한테 배워먹은 해괴망칙한 짓들인지 짐작컨대는 몇년전 물건너 섬나라 일본인들이
  우리나라를 두고 하던 짓들인 듯싶은데
  우리가 그걸 그대로 배워 써먹다니 그것도 압록강 건너 두만강 건너 때
  안 묻은 가슴의 우리 동포들한테 써먹다니 예끼 이 나쁜 사람들!
  그러구서 벌 안 받을 수 있을까?
 
  90. 10. 11.


    중국통신, 2
  -- 싹쓸이

  동인당인지 무언지 우황청심환이 좋다고 호랑이 기름이란 약이 피부병에 좋고
  또 백일번인가 하는 대머리약이 좋다 해서 만리장성 천안문 자금성 구경 갔다 오는 사람들
  그걸 한두 개씩 들고 오기 시작하더니 바늘도둑 소도둑 된다고 인제는 중국에 갔다 하면
  사람마다 중국약을 보따리로 사온다 하네.
  아예 한국 관광객이 가는 곳마다 중국약이 싹쓸이로 동이 난다 그러네.
  싹쓸이! 어디서 많이 들어보던 말인데,
  이 또한 어디서 누구한테 배워서 우리가 이러는 것일까...
  여하튼 한국관광객들 중국에 가기만 했다 하면 염불보다는 잿밥에만 맘이 있어
  관광보다는 한약 싹쓸이에 앞을 다툰다 하네.
  실은 중국 사람들 어리석은 듯 궁색한 듯 느려터진 듯하면서도 이 미련한 녀석들 잘도 속는군,
  어디 두고 보자, 능글능글 속으로 비웃는 줄도 모르고...
 
  90. 10. 11.


    중국통신, 3
  -- 내가 가보고 싶은 곳

  어려서 국민학교 시절엔
  사회책에서 보고
  내 가보고 싶은 곳
  산 높고 물 맑다는 스위스
  알프스산이었네

  자라서 청소년 시절엔
  꿈이 많고 바람기 많아
  내 가보고 싶은 곳
  햇빛 밝고 바람 깨끗하다는 프랑스
  프로방스 들판이었네

  그러나 이제는 나이 먹고 조금쯤 피가 삭아서
  오직 하나 내가 가서 보고 싶은 곳
  우리나라 동포들이
  서럽게 서럽게 모여 산다는 곳 연변
  만주 벌판 북간도이네

  그러나 내 아직
  스위스 프랑스는 고사하고
  제주도에도 못 가본 촌놈
  연변 만주벌판
  그 북간도 못 가봐도 좋네
  다만 마음 속에
  간직하는 그리움만으로도
  나는 이제 좋네.
 
  90. 10. 22.


      제3부 사랑이 이끄는 대로
 
     애 정

  제게 힘이 있다면
  그대 옆에 서 있어 주는 일뿐이요
  제게 사랑이 있다면
  그대를 위해 눈물을 흘려주는 일뿐입니다.

  90. 5. 6


    눈
 
  하늘나비
  흰나비
  펄펄 날아와
  나는 죽노라
  그대들 슬픈
  청춘의 자국 위에
  어지러운 발걸음 위에
  나는 아낌없이
  죽어 쓰레기가
  되노라.
 
  87. 2. 2.

 
    설 야
  연탄가스 냄새가 샤넬향수처럼
  향기로운 밤이다.
  가로등 밑에 쏟아지는 눈송이가
  분봉하는 벌떼처럼 설렌다
  이런 밤엔 나도 연탄가스를 마시며
  편안히 편안히 잠들고 싶다.
 
  87. 2. 28.


    서울 여자
 
  여우를 닮지 못해 안달인 서울여자
  여우눈과 여우머리칼
  여우입술과 여우가슴
  여우궁둥이 흔들며 아침마다
  어디로 바삐바삐 가시나이까
  아마 나는 서울여자한테 붙잡혀
  먹히고 싶어 안달인가 보오.
 
  87. 2. 25


    봄과원

  바보나무들만 서 있네
  봄인데도 흰눈을 뒤집어쓴 배나무
  지가 무슨 새댁인가
  분홍치마 저고리의 복숭아나무
  쭈삣쭈삣 뒤따라오는 사과나무.
 
  87. 6. 4.


    병
 
  언제든 몸의 한 부분은 아프기 마련
  아픈 부분이 생길 때 몸의 소중함을 안다
  그러므로 병은 좋은 친구.

  90. 5. 6.


    사랑이 이끄는 대로, 1

  나는 눈도 멀고 귀도 먹은 자
  사랑이 이끄는 대로 더듬더듬
  이 세상 살아간다.
  
  90. 5. 6.


    사랑이 이끄는 대로, 2

  사랑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 보면
  어둔 이 세상도 때로는
  빛나는 천당과 극락.
 
  90. 5. 6.


    보리밭

  보리모개가 패어 야들야들
  바람에 날리는 보리밭에는
  오월의 첫처녀 새 머리카락
  새 젖내음새
  순이야, 우리 보리밭에 가 널부러져
  철부지 두 마리 강아지가
  되지 않으련?

  90. 5. 6.


    요즘 고등학교
 
  아침 일찍 무거운 지참물 가지고 가서
  밤 늦게까지 갇혀 있다 돌아오는
  아이들의 감옥
  그런 선생님들은 간수이고
  학생들은 죄수?
  아니면 밤새도록 전등불 켜 놓고
  모이를 먹이는 양계장?
  학생들 또한
  알을 낳는 레그호온?

  90. 5. 6.


    노을

  저녁 하늘을 보라
  저것은 저녁노을이 아니라
  한 사람의 죽음이요
  피로 쓴 그
  유언장이다.

  87. 6. 4.


    권 태

  뱀 한 마리 기어가지 않는
  논두렁길에
  따먹는 아이들도 없는
  뱀딸기만 빨갛게 익어
  가랑비에 목욕하고 있었다.
 
  87. 6. 4.


    아 침

  어디선가 시궁창 썩는 냄새가 납니다
  오늘 아침에도 헛구역이 납니다.
  아, 나는 오늘도 이렇게 겨우 살아남았습니다.

  90. 4. 8.

   
    비오는 금강

  다소곳이 고개 숙인 신부가
  울고 있습니다
  길씀한 살눈썹
  가늘게 떨고 있는 귀밑머리
  옆으로 보는 얼굴이 더욱
  어여쁘구려,
  비오는 금강.

  90. 4. 8.


    오 리

  오리야 오리야 뭐하니?
  개울가 더러운 물에
  하늘에서 내리는 산성비에
  헤엄치며 우리는 재미나게
  놀고 있단다.

  90. 4. 8.


    섭섭한 하느님

  오늘은
  내가 싫어하는 일만 시키시는
  하느님 섭섭한 하느님
  왜 우리 하느님은 날더러
  면구스러운 일만 하라시는 걸까
  하느님 야속한 하느님
  나의 하느님.

  88. 3. 2.


    병 실      

  오늘밤도 별이 떴습니까
  아직도 별이 아름답습니까
  예, 아름답습니다
  여전히 별빛은 그대의 등대입니까
  글쎄올시다.
 
   88. 3. 3.
  

    밤 길

  겨울 잡목림 가지 끝에
  조각달 걸리니
  천길 낭떠러지
  마음 속에 서느런 강물은 흐르고
  그 강물에 또 하나의 달이 잠겨라
  잊은 줄 알았던 그대 얼굴.
 
  88. 3. 30.


    기 도

  기도하는 나의 마음이
  더욱 춥고 가난하게 하소서
  기도하는 나의 마음이
  더욱 보잘것없고 초라하게 하소서.
 
  88. 2. 14.


    지훈 선생님 생각

  꽃이 피는 아침은
  혼자서라도 울고 싶습니다
  지훈 선생님.
 
  90. 4. 8.


    영화광고

  청소년 배우를 주연으로
  청소년 문제를 다룬 영화에
  광고문만은 어쩐 일인지
  청소년 관람 입장 불가!
 
  90. 4. 5.


    퇴근

  오늘도 열심히 죽어서 잘 살았습니다.
 
  90. 4. 13.


    좋은 책

  좋은 책을 많이 읽은 날은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릅니다.
 
  90. 4. 14.


    사 랑

  가슴 속에 사랑하는 한 여자를 간직한 날은
  세상의 어떤 예쁜 여자를 만나서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90. 4. 14.


    거꾸로
 
  나는 국민학교 1학년 선생님
  오늘도 코흘리개 아이들
  가르치는 사람
  그러나 나는 거꾸로
  아이들에게서 배우는 사람
  매일 아이들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로부터 무엇인가를 받는 사람.
 
  88. 4.


    인 간

  지구의 마지막 해충은 인간입니다.
 
  90. 4. 13


    밤 비

  밤소나기 오는 소리에 잠깨어 들으면
  하늘이 슛슛슛슛
  풀밭을 향하여 총알을 던지고 있다
  헌데 풀밭은 사쁜사쁜사쁜
  총알을 받아 품속에 안고 있다
  하늘과 풀밭은 정다운 총잡이
  총알받인가 보오.
 
  87. 7. 6.


    알리바이 혹은

  아니라고 할 것인가
  나는 그 자리에 없었다고만 할 것인가
  끝까지 나는 다른 사람과 다르다고만
  할 것인가.
 
  87. 8. 7.


    엽 서

  낯선 고장에 와서
  생각나는 사람에게
  될수록 예쁜 그림엽서를 사서
  될수록 짧게
  말들을 적음은
  우리가 헤어져 있음이 아니요
  우리가 잊혀졌어도 아주는
  잊혀지지 않은 까닭입니다.
 
  87. 6. 26.


    말로는

  말로는 세상이 살기 좋아졌다고들 하는데
  허우대 멀쩡한 사내들이
  쓰잘데 없는 물건 부스러기 사라고 다니는 걸 보니
  세상살이 그다지 쉽지 않은 모양이야
  게다가 중고 자가용 몰고
  신사복 차려입고 시골 쑤시고 다니니
  세상 돌아가는 형편 뒤숭숭한 모양이야.
 
  87. 6. 27.


    봄

  봄이 되니 더욱 춥다
  마음 속에 숨겨 놓고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기 때문.
 
  90. 5. 8.


    고 향

  아직도 있네
  저수지 물 흐르는 다릿목에서
  시계풀꽃 따서 자운영꽃 따서
  꽃다발 엮어 물 위에 띄우는 아이
  예전엔 내가 그랬었는데.
 
  90. 5. 6.


    충무시

  이충무공이 숨쉬고 있는 도시
  골목마다 꽃이 피어나는 도시
  그러나 거만하지 않아서 마음 편한 도시.
 
  90. 5. 6.


    채송화

  애기야 비맞고 울고 있는 애기야
  우지 마라 방울을 흔들어 줄께.
 
  90. 4. 6.


    전 설

  이 개울에 미꾸라지가 살았단다, 옛날에
  피래미와 참게가 살았단다, 아주 옛날에
  더러는 나무새우도 살았단다, 더 아주 옛날에.
 
  90. 5. 6.


    시골 역사

  이 조그만 소도시에
  변하지 않은 건
  오직 그대뿐이구려.
 
  90. 5. 6.


    역사는

  역사는 언제나 이긴 자의 편이요
  세상은 잘 사는 자의 낙원이다
  정말?
 
  87. 2. 25.


    도 망

  봄바람,
  향기론 꽃내음 풀내음 대신
  구린내가 나는 봄바람,
  도시에서도 시골에서도
  아, 어느 별로 도망가야 할까...
 
  90. 5. 7.


    삶, 1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다
  어느것은 잡고
  어느 것을 놓을 것인가
  오늘도 그것은 나에게
  풀기 힘든 문제였다.
 
  90. 5. 7.


    다리 위에서

  웬 바람이 이리도 부노
  바람결에 섞여서
  귀뺨을 후리는 물새울음.
 
  90. 5. 9.


    금 강

  잠을 설친 날 아침
  눈 비비며 나와 보는 강물
  여전히 잘 있었구나
  반가운 생각.
 
  90. 5. 8.


    제비꽃

  아직도 나를 기다려
  고개 숙인 철부지 소녀
 
  90. 5. 6.


    철 길,

  뽀오옥,
  기차를 타고 서울로 가고 싶다.
 
  서울 가는
  기차를 타면 아직도
  그 아이들을 만날 수 있을까
  검은 단발머리 귀가 새하옇게 눈부신.
 
  우리는 만났다, 힘겹게
  우리는 헤어졌다, 역시 힘겹게.
 
  90. 5. 6.


    가로등

  밤안개는 몸에 해롭대요
  치마 벗고 밤거리에 나선
  누군가의 아낙.
 
  90. 5. 6.


    자운영꽃

  잃어버린 옛날이야기가
  모두 여기 와 꽃으로 피었을 줄이야.
 
  90. 5. 6.


    고 향, 2

  바람이 다르다
  내 코만이 아는 아, 풀비린내.
 
  90. 5. 6.


    삶, 2

  언제든 누구와 만나서든
  나는 손해보고 살지 않는다
  언제 누구에게서든
  배울 것 느낄 것은 많고 많기 때문.
 
  90. 5. 6.


    영산홍

  세상에는 이토록
  고운 사람도 살고 있었구나.
 
  90. 5. 6.


    어떤 얼굴

  별 하나
  이 땅 위에 떨여져 있구나
  그대의 얼굴.
 
  90. 5. 30.


    안 부

  오늘 아침도 여전히 있구나
  흐린 물가에 고기 찍으러 온
  재두루미 한 마리.
 
  90. 5. 30


    고향길

  자랑스릅게 살지 못한 나날
  아는 사람 만날까 두렵다.
 
  90. 5. 6.


    잠들기 전 기도

  하느님
  오늘도 하루
  잘 살고 죽습니다
  내일 아침 잊지 말고
  깨워 주십시오.
 
  90. 5. 27.


    꽃

  꽃은 식물의 성기
  아름답다 말하면서
  사람의 성기는 왜
  아름답다 말하지 않을까
  혹시 풀과 나무에게는
  사람의 성기도 아름답게 보여질지
  모를 일이다.
  꽃으로 보일지 모를 일이다.
  89. 9. ??.


    변두리 마을

  옛날이 좋았는데
  나도 흘러들어와 사는 사람이지만
  요즘 부쩍 모르는 얼굴들 많아지고
  새 집이 들어서고
  밤거리 너무 밝아지고.
 
  그래도 아직은 밤에
  개구리 떼지어 울고
  물먹은 달님이
  골목길 지켜주는 변두리 마을.
 
  90. 6. 9.


    대 비

  어쩌면 이렇게 아름답고 잘 생긴
  소나무들이 다 있을까
  내가 되뇌이며 감탄하자
  어쩌면 저렇게 못생기고 보기 싫은
  사람이 다 있을까
  나무가 나를 보고
  되뇌이며 한숨짓네.
 
  90. 12. 4.


    덩달아

  담장 위에 덩쿨장미
  어우러져 피어나는 유월에
  개망초꽃 지칭개 덩달아 피어난다.
 
  90. 6. 9.


    관 심

  그대 눈밑에 가늘은 주름살
  요즘 부쩍 늘어보이는군요
  이렇게 말하는 것도 하나의
  사랑입니다.
 
  90. 5. 17.


    훔쳐보는 얼굴이 더 아름답다

  눈을 껌벅거리며
  바라봅니다, 그대
  두근거려지는 마음
  그대에게 들키면 어쩌나
  거울 속에 비쳐진 그대 모습
  훔쳐봅니다.
 
  90. 5. 17.


    빈 집

  예서 누가 살다 떠났나?
  선뜻 들어서기 두렵다.
 
  90. 5. 17.


    그리움
  --강신용

  햇빛이 너무 좋아
  혼자 왔다 혼자
  돌아갑니다.
 
  90. 5. 17.


    보름달

  여보, 지금 동해바다 위로 불쑥
  동해 보름달이 떠오르고 있소
  속초에서 건 나의 전화에
  아니 여보, 지금 금학동 산위로도 불끈
  금학동 보름달이 솟아오르고 있는 걸요
  맞장구쳐오는 아내의 대답.
 
  90. 12. 4.


    목 욕

  아무리 씻어도
  내장까지는
  다 씻어낼 수 없잖아요?
 
  90. 12. 4.


    가 을

  이제 나도 쉬고 싶소
  그대도 나를 잊어 주시기
  바라오.
 
  90. 10. 23.


    동해의 달

  하늘 위에 걸어놓은
  수박등
  바람 불어도 꺼지지 않고
  물결쳐도 흔들리지 않는.
 
  90. 12. 4.


    배 꼽

  어릴 적 시냇물
  지줄대는
  소리 들린다
  목이 마르다
  고무 젖꼭지라도 빨고 싶다
  우주로 열린
  조그만 분화구.
 
  90. 5. 10.


    내 글씨

  언제나 한 줄기
  흘러가는 시냇물이길
  꿈꾸었다
  그러나 시냇물이 되기도 전에
  증발하거나 땅속으로
  스며들고 싶었다.
 
  90. 10. 23.

 

출처 : 어둠 속에 갇힌 불꽃
글쓴이 : 정중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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